천친(天親) 지음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권오민 번역
가없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과
평등하고 공하고 부동(不動)인 지혜와
세간을 구제하시는 대비존(大悲尊)께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옵니다.
마득륵가장보살마하살(摩得勒伽藏菩薩摩訶薩)께서 닦고 행하신 대방등(大方等)의 최상의 미묘한 법이 있으니, 이는 말하자면 위없이 높은 보리(菩提)를 닦아 쌓음을 권하고 즐김으로서 중생들로 하여금 능히 깊고 넓은 마음[深廣心]을 일으켜서 서원(誓願)을 세워 장엄을 필정(畢定)하게 하는 것이다. 즉,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탐욕과 인색함을 거두어 조복하며, 오취계(五聚戒)를 닦아 금하는 바를 범하지 않도록 교화하고, 끝까지 인욕(忍辱)을 행하여
진에(瞋恚)를 조복하며, 용맹정진하여 중생을 편안히 쉬게 하고, 온갖 마음[衆心]을 알기 위해 온갖 선정을 닦고 쌓으며, 지혜를 닦고 행하여 무명을 소멸해 없애고, 여실문(如實門)에 들어가 온갖 집착을 여의고, 심오한 공(空)과 무상(無相)의 행(行)을 널리 나타내고, 공덕을 칭찬하여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따위의 헤아릴 수 없는 방편으로 보리법(菩提法)의 청정문(淸淨門)을 도우니, 마땅히 일체의 상상품(上上品)의 선(善:열반)을 위하여 분별하고 현시하여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궁극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불자(佛子)들이여, 만약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고서 중생을 위해 능히 법을 연설하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며 선양해야 할 것이며, 중생들은 그것을 듣고 나서 능히 발심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한다면, 그 발심 때문에 부처님의 종자는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또한 여래를 생각한다면, 그는 보살도를 행할 때 법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아승기겁(阿
僧祇劫) 동안의 온갖 노력과 고통을 감수한다. 또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보살을 위해 법을 설하고 나아가 한 가지 게송이라도 설한다면, 보살은 이러한 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매우 즐겨서 마땅히 선근을 심고 불법을 수습(修習)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시작도 없는 생사의 온갖 고뇌를 끊게 하기 위해 보살마하살(부처님을 말함)께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몸과 마음[身心]을 성취하고자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여 크나큰 서원[大願]을 깊이 일으키셨으며, 대방편을 행하고 대자비를 일으켜 대지혜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을 추구하셨으며, 이와 같은 따위의 온갖 부처님의 대법(大法)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법
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복덕과 과보도 역시 헤아릴 수 없다. 여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의 최초의 발심이 아무리 하열(下劣)할지라도 1찰나의 복덕과 과보는 백천만 겁 동안 설한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하루, 한 달, 일 년 내지 백 년 동안 닦은 온갖 마음의 복덕과 과보를 어찌 다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보살이 행한 바는 다함이 없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1)에 머물게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획득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發菩提心]은 비유하자면 대해(大海)가 처음으로 점차 일어날 때와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곳(대해)은 모두 하품ㆍ중품ㆍ상품의 가치가 있는 보주(寶珠)나 나아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만들어지고 머무는 곳이니, 이러한 보주는 모두 대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발심도 또한 마찬가지다. 즉,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점차 일으킬 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사람과 하늘[人天]ㆍ성문ㆍ연각ㆍ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일체 선법(善法)과 선정과 지혜가 생겨나는 처소가 된다.
또한 다시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삼천대천세계가 처음으로 점차 일어날 때와 같다. 그것(삼천대천세계)은 바로 스물다섯 가지2)의 존재[有]를 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모두 다 짐을 지고서 의지처로 삼기 때문이다. 보살의 발보리심도 역시 또한 마찬가지다. 즉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점차 일으킬 때 그것은 널리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중생들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테면 육취(六趣)와 사생(四生), 정견자(正見者)와 사견자(邪見者), 선을 닦는 자와 악을 익히는 자, 청정한 계율을 지켜 지니는 자와 네 가지 중금(重禁, 혹은 四波羅夷:婬戒ㆍ盜戒ㆍ殺生戒ㆍ大妄語戒)을 범하는 자, 삼보를 존중하여 받드는 자와 정법을 비방하고 훼손하는 온갖 마군ㆍ외도ㆍ사문ㆍ범지(梵志)ㆍ찰리(刹利)ㆍ바라문ㆍ비사(毘舍)ㆍ수다(首陀) 등의 일체의 짐을 진 자의 소의처이다.
또한 다시 보살의 발심은 자비를 으뜸[首]으로 삼으니, 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발심은 결코 제한이 없으며 중생계에 평등하다. 비유하자면 허공이 두루 덮지 않음이 없듯이 보살의 발심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 중생으로서 보살의 발심에 덮이지 않는 자가 없다.
또한 중생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어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발심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어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다. 즉 허공은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계도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으며, 중생계가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의 발심은 그러한 중생계에 대해 평등한 것이다.
중생계란 결코 제한이 없다. 나는 여기서 마땅히 성지(聖旨)를 이어받아 그 중의 일부를 설해 보리라. 동방에는 모두 천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3)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가 있으며, 남방ㆍ북방ㆍ서방과 사유(四維:서북ㆍ서남ㆍ동북ㆍ동남의 네 방향)와 상방ㆍ하방에도 각기 천억 항하사 아승기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가 있지만 끝내 미진(微塵)이 되지 못하는데, 이러한 온갖 미진은 모두 육안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백만억 항하사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중생이 모두 모여 공히 하나의 티끌[塵]을 취하고, 이백만억 항하사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중생은 공히 두 개의 먼지 티끌을 취하며, 이와 같이 계속 나아가 시방 각각의 천억 항하사 아승기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에 존재하는 땅의 종류[地種]와 미진을 전부 다할지라도 이러한 중생계는 오히려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의 터럭을 쪼개어 백 개로 나눈 뒤에 그 하나의 터럭으로 대해의 물을 적시는 것과 같으니, 내가 지금 설한 중생계의 일부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 설할 수 없는 중생계는 대해의 물과 같아서 설령 온갖 부처님들이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아승기겁 동안 널리 비유로써 연설한다 할지라도 역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의 발심은 바로 이와 같은 중생계를 모두 능히 두루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불자들이여, 이러한 보리심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만약 보살로서 이와 같은 설을 듣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침몰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러한 자는 결정코 능히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리라.
어째서 그러한가?
이러한 보리심에는 결코 제한이 없기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의 발심에는 이와 같은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일으켜 널리 수지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널리 설해야 하는 것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리심을 일으키며, 어떠한 인연에 의해 보리를 닦고 쌓는 것인가?
보살은 선지식과 가까이하고,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며, 선근을 닦아 쌓고, 수승한 법[勝法]을 바라고 추구하며, 마음이 항상 유화(柔和)하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능히 참아내며, 자비가 두텁고 깊으며, 마음이 평등하고, 대승을 믿고 즐기며,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하니, 만약 어떤 이가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을 갖추었다면 마침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발심하여 무상(無上)의 보리를 닦고 쌓게 된다.
무엇을 일컬어 네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사유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신체의 허물을 관찰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는 최승의 과보를 희구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사유하는 것에는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방(十方)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처음으로 발심하셨을 때에는 지금의 나와 같이 번뇌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끝내 정각을 성취하여 무상존(無上尊)이 되었다’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용맹을 일으킴으로써 각기 능히 위없이 높은 보리를 증득할 수 있었으니, 만약 이러한 보리가 바로 증득할 수 있는 법이라면 나도 역시 마땅히 증득하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세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크고 밝은 혜(慧)를 일으켜 무명의 알 속에서 뛰어난 마음[勝心]을 건립하고 고행을 쌓음으로써 능히 스스로 삼계(三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도 역시 이와 같이 마땅히 스스로 삼계에서 벗어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네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인간 가운데 위대한 영웅이 됨으로써 모두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넜으니, 나도 역시 대장부가 되면 능히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널 수 있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다섯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정진을 일으켜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하였으니, 나도 역시 지금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따라 배우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신체의 허물을 관찰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의 몸은 오음(五陰)과 사대(四大)로 이루어져서 능히 헤아릴 수 없는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여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의 몸은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부정한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에 대한 염리(厭離)를 낳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나의 몸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헤아릴 수 없는 번뇌가 있어서 선심(善心)을 태워 버린다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소멸하고 제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나의 몸은 물거품과 같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버릴 수 있는 법[可捨法]으로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나의 몸은 무명에 덮여 항상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육취(六趣)를 윤회하여 이로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의 과보를 희구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상호(相好)의 장엄이 빛나고 청정하고 명철해서 만나는 이의 번뇌를 제거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상주하고 청정하여 물듦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ㆍ해탈지견(解脫知見)
ㆍ청정법취(淸淨法聚)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십력(十力)4)ㆍ사무외(四無畏)5)ㆍ대비(大悲)ㆍ삼념처(三念處)6)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모든 여래는 일체지(一切智)로 중생을 가련히 여기고 자비를 두루 펼쳐서 일체의 어리석고 미혹한 이를 능히 올바로 인도할 수 있으니, 이는 닦아서 쌓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4)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옳고 그름을 아는 것)ㆍ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ㆍ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4정려ㆍ8해탈ㆍ온갖 등지와 8등지를 아는 것)ㆍ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중생근기의 상하우열을 아는 것)ㆍ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중생 意樂의 차별을 아는 것)ㆍ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중생 性類의 차별을 아는 것)ㆍ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일체의 제행은 반드시 결과로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임을 아는 것)ㆍ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자신과 타인의 과거 숙주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것)ㆍ사생지력(死生智力:중생이 미래세에 여러 가지 존재로 續生하는 것을 아는 것)ㆍ누진지력(漏盡智力:열반을 아는 것).
5)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번뇌를 영원히 끊었다는 대자각이 있어 다른 이의 비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설법함에 있어 다른 이의 비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염오법은 반드시 성도에 장애가 되는 법임을 설함에 있어 외도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도를 닦으면 반드시 苦에서 출리함을 설함에 있어 외도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게 해명하여 이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6) 여래는 제자들이 공경하고 올바로 수지(受持)하더라도 그것에 환희하지 않고 정념(正念)ㆍ정지(正知)에 안주한다(제1념주). 여래는 제자들이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근심하지 않고 정념ㆍ정지에 안주한다(제2념주). 여래는 제자들 중의 어떤 이는 공경하고, 어떤 이는 공경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정념.정지에 안주한다(제3념주).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여러 가지의 괴로움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불선업(不善業)을 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어리석음과 애욕[愛癡]에 미혹되어 매우 극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인과를 믿지 않고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올바른 믿음[正信]을 버리고 삿된 도를 믿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번뇌의 강에 빠져 네 가지 흐름[四流]에 표류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괴로움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생ㆍ노ㆍ병ㆍ사를 두려워하면서도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또다시 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업을 조작(造作)하며 쉬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방편을 깨닫지 못하고 물들어 집착[染着]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와 만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혐오하고 질투하며 또다시 미워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불선업을 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애욕으로 인해 악업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욕망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즐거움을 욕구하면서도 계(戒)를 구족하지 않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괴로움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괴로움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중계(重戒)를 범하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방일(放逸)하게 지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극악의 오무간업을 짓고 서도 사납고 모질게 스스로 그것을 숨기며 부끄러워[慚愧]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대승의 방등(方等)의 정법을 비방 훼손하고서도 오로지 어리석음에 스스로 집착하여 오히려 교만심을 일으킨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록 총명함을 지녔을지라도 선근을 모두 끊고 도리어 스스로 자만하면서[貢高] 영원히 참회하여 고치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8난처(難處)7)에 태어나 정법을 듣지 못하고 선(善)을 닦을 줄 모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을 때 태어나 정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도 능히 수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외도에 물들거나 외도의 법을 익혀 신체를 괴롭히는 업만을 닦을 뿐 출요(出要:出離의 要道: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깨달음의 도)를 영원히 여의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닦아 증득한 것을 바로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선한 과보가 다하면 다시 3도(塗)8)에 떨어지게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의해 업을 짓고 기나긴 밤의 괴로움을 받으면서 정법을 여의고 출로(出路:해탈도)를 미혹한다고 관찰하니, 이러한 것들 때문에 대자비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향해 추구하는 것은 예컨대 머리가 타는 이[頭燃]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체 중생으로서 고뇌가 있는 자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남김없이 구제해야 하리라.
모든 불자들이여, 나는 지금까지 초행(初行) 보살의 인연과 발심에 대해 간략하게 설하였는데, 만약 널리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끝이 없을 것이다.
7) 부처님을 만나고[見佛] 법을 듣는 데[聞法] 장애가 있는 여덟 처소로서, 지옥ㆍ아귀ㆍ축생ㆍ북구로주(4大洲의 북쪽. 여기서는 즐거움의 과보가 뛰어나 괴로움이 없기 때문임)ㆍ장수천(長壽天:색계ㆍ무색계의 장수 안온처)ㆍ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聾盲瘖瘂]ㆍ세속지만이 뛰어난 자[世智辯聰]ㆍ부처님이 세간이 계시지 않을 때[佛前佛後]를 말한다.
8) 화도(火塗:사나운 불길이 타오르는 지옥취)ㆍ혈도(血塗:축생)ㆍ도도(刀塗:칼로써 서로를 핍박하는 아귀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