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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리심경론(發菩提心經論)

wowinchon 2019. 8. 24. 04:23




    발보리심경론(發菩提心經論)
    발보리심경론 상권

    천친(天親) 지음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권오민 번역

    1. 권발품(勸發品)

    가없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
    평등하고 공하고 부동(不動)인 지혜와
    세간을 구제하시는 대비존(大悲尊)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옵니다.

    마득륵가장보살마하살(摩得勒伽藏菩薩摩訶薩)께서 닦고 행하신 대방등(大方等)의 최상의 미묘한 법이 있으니, 이는 말하자면 위없이 높은 보리(菩提)를 닦아 쌓음을 권하고 즐김으로서 중생들로 하여금 능히 깊고 넓은 마음[深廣心]을 일으켜서 서원(誓願)을 세워 장엄을 필정(畢定)하게 하는 것이다. 즉,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탐욕과 인색함을 거두어 조복하며, 오취계(五聚戒)를 닦아 금하는 바를 범하지 않도록 교화하고, 끝까지 인욕(忍辱)을 행하여
    진에(瞋恚)를 조복하며, 용맹정진하여 중생을 편안히 쉬게 하고, 온갖 마음[衆心]을 알기 위해 온갖 선정을 닦고 쌓으며, 지혜를 닦고 행하여 무명을 소멸해 없애고, 여실문(如實門)에 들어가 온갖 집착을 여의고, 심오한 공(空)과 무상(無相)의 행(行)을 널리 나타내고, 공덕을 칭찬하여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따위의 헤아릴 수 없는 방편으로 보리법(菩提法)의 청정문(淸淨門)을 도우니, 마땅히 일체의 상상품(上上品)의 선(善:열반)을 위하여 분별하고 현시하여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궁극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불자(佛子)들이여, 만약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하고서 중생을 위해 능히 법을 연설하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며 선양해야 할 것이며, 중생들은 그것을 듣고 나서 능히 발심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한다면, 그 발심 때문에 부처님의 종자는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또한 여래를 생각한다면, 그는 보살도를 행할 때 법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아승기겁(阿
    僧祇劫) 동안의 온갖 노력과 고통을 감수한다. 또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보살을 위해 법을 설하고 나아가 한 가지 게송이라도 설한다면, 보살은 이러한 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매우 즐겨서 마땅히 선근을 심고 불법을 수습(修習)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시작도 없는 생사의 온갖 고뇌를 끊게 하기 위해 보살마하살(부처님을 말함)께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몸과 마음[身心]을 성취하고자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여 크나큰 서원[大願]을 깊이 일으키셨으며, 대방편을 행하고 대자비를 일으켜 대지혜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을 추구하셨으며, 이와 같은 따위의 온갖 부처님의 대법(大法)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법
    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복덕과 과보도 역시 헤아릴 수 없다.
    여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의 최초의 발심이 아무리 하열(下劣)할지라도 1찰나의 복덕과 과보는 백천만 겁 동안 설한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하루, 한 달, 일 년 내지 백 년 동안 닦은 온갖 마음의 복덕과 과보를 어찌 다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보살이 행한 바는 다함이 없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1)에 머물게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획득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1) 무생법, 즉 생사를 떠난 진여실상의 이치에 대해 인가하고, 이에 안주하여 동요됨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보살의 초지(初地) 혹은 7지ㆍ8지ㆍ9지에서 획득되는 불퇴전의 깨달음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發菩提心]은 비유하자면 대해(大海)가 처음으로 점차 일어날 때와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곳(대해)은 모두 하품ㆍ중품ㆍ상품의 가치가 있는 보주(寶珠)나 나아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만들어지고 머무는 곳이니, 이러한 보주는 모두 대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발심도 또한 마찬가지다. 즉,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점차 일으킬 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사람과 하늘[人天]ㆍ성문ㆍ연각ㆍ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일체 선법(善法)과 선정과 지혜가 생겨나는 처소가 된다.
    또한 다시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삼천대천세계가 처음으로 점차 일어날 때와 같다. 그것(삼천대천세계)은 바로 스물다섯 가지2)의 존재[有]를 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모두 다 짐을 지고서 의지처로 삼기 때문이다. 보살의 발보리심도 역시 또한 마찬가지다. 즉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점차 일으킬 때 그것은 널리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중생들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테면 육취(六趣)와 사생(四生), 정견자(正見者)와 사견자(邪見者), 선을 닦는 자와 악을 익히는 자, 청정한 계율을 지켜 지니는 자와 네 가지 중금(重禁, 혹은 四波羅夷:婬戒ㆍ盜戒ㆍ殺生戒ㆍ大妄語戒)을 범하는 자, 삼보를 존중하여 받드는 자와 정법을 비방하고 훼손하는 온갖 마군ㆍ외도ㆍ사문ㆍ범지(梵志)ㆍ찰리(刹利)ㆍ바라문ㆍ비사(毘舍)ㆍ수다(首陀) 등의 일체의 짐을 진 자의 소의처이다.
    또한 다시 보살의 발심은 자비를 으뜸[首]으로 삼으니, 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발심은 결코 제한이 없으며 중생계에 평등하다. 비유하자면 허공이 두루 덮지 않음이 없듯이 보살의 발심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일체 중생으로서 보살의 발심에 덮이지 않는 자가 없다.

    2) 중생이 윤회하는 생사의 세계를 스물다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욕계의 4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와 4대주(大州)와 6욕천(欲天), 색계의 4선천(禪天), 그리고 초선의 대범천과 제4선 중의 정거천과 무상천, 무색계의 4천을 말한다.

    또한 중생계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어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발심도 역시 또한 이와 같으니,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어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다. 즉 허공은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계도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으며, 중생계가 끝내 다하여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의 발심은 그러한 중생계에 대해 평등한 것이다.
    중생계란 결코 제한이 없다. 나는 여기서 마땅히 성지(聖旨)를 이어받아 그 중의 일부를 설해 보리라. 동방에는 모두 천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3)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가 있으며, 남방ㆍ북방ㆍ서방과 사유(四維:서북ㆍ서남ㆍ동북ㆍ동남의 네 방향)와 상방ㆍ하방에도 각기 천억 항하사 아승기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가 있지만 끝내 미진(微塵)이 되지 못하는데, 이러한 온갖 미진은 모두 육안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백만억 항하사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중생이 모두 모여 공히 하나의 티끌[塵]을 취하고, 이백만억 항하사 아승기의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중생은 공히 두 개의 먼지 티끌을 취하며, 이와 같이 계속 나아가 시방 각각의 천억 항하사 아승기의 온갖 부처님의 세계에 존재하는 땅의 종류[地種]와 미진을 전부 다할지라도 이러한 중생계는 오히려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의 터럭을 쪼개어 백 개로 나눈 뒤에 그 하나의 터럭으로 대해의 물을 적시는 것과 같으니, 내가 지금 설한 중생계의 일부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 설할 수 없는 중생계는 대해의 물과 같아서 설령 온갖 부처님들이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아승기겁 동안 널리 비유로써 연설한다 할지라도 역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의 발심은 바로 이와 같은 중생계를 모두 능히 두루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불자들이여, 이러한 보리심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만약 보살로서 이와 같은 설을 듣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침몰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러한 자는 결정코 능히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리라.

    3) 항하는 강가(Ganga), 즉 갠지즈 강의 음사로서, 갠지즈 강의 모래만큼 많은 것을 항하사라고 하며, 아승기(혹은 無數)는 asamkhya의 음사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말한다.

    설령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 동안 그의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역시 다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러한 보리심에는 결코 제한이 없기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의 발심에는 이와 같은 등의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일으켜 널리 수지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널리 설해야 하는 것이다.

    2. 발심품(發心品)

    보살은 어떻게 보리심을 일으키며, 어떠한 인연에 의해 보리를 닦고 쌓는 것인가?
    보살은 선지식과 가까이하고,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며, 선근을 닦아 쌓고, 수승한 법[勝法]을 바라고 추구하며, 마음이 항상 유화(柔和)하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능히 참아내며, 자비가 두텁고 깊으며, 마음이 평등하고, 대승을 믿고 즐기며,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하니, 만약 어떤 이가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을 갖추었다면 마침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발심하여 무상(無上)의 보리를 닦고 쌓게 된다.
    무엇을 일컬어 네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사유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신체의 허물을 관찰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는 최승의 과보를 희구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사유하는 것에는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방(十方)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처음으로 발심하셨을 때에는 지금의 나와 같이 번뇌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끝내 정각을 성취하여 무상존(無上尊)이 되었다’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용맹을 일으킴으로써 각기 능히 위없이 높은 보리를 증득할 수 있었으니, 만약 이러한 보리가 바로 증득할 수 있는 법이라면 나도 역시 마땅히 증득하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세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크고 밝은 혜(慧)를 일으켜 무명의 알 속에서 뛰어난 마음[勝心]을 건립하고 고행을 쌓음으로써 능히 스스로 삼계(三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도 역시 이와 같이 마땅히 스스로 삼계에서 벗어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네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인간 가운데 위대한 영웅이 됨으로써 모두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넜으니, 나도 역시 대장부가 되면 능히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널 수 있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다섯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정진을 일으켜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하였으니, 나도 역시 지금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따라 배우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신체의 허물을 관찰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의 몸은 오음(五陰)과 사대(四大)로 이루어져서 능히 헤아릴 수 없는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여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의 몸은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부정한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에 대한 염리(厭離)를 낳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나의 몸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헤아릴 수 없는 번뇌가 있어서 선심(善心)을 태워 버린다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소멸하고 제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나의 몸은 물거품과 같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버릴 수 있는 법[可捨法]으로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나의 몸은 무명에 덮여 항상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육취(六趣)를 윤회하여 이로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의 과보를 희구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상호(相好)의 장엄이 빛나고 청정하고 명철해서 만나는 이의 번뇌를 제거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상주하고 청정하여 물듦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ㆍ해탈지견(解脫知見)
    ㆍ청정법취(淸淨法聚)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십력(十力)4)ㆍ사무외(四無畏)5)ㆍ대비(大悲)ㆍ삼념처(三念處)6)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모든 여래는 일체지(一切智)로 중생을 가련히 여기고 자비를 두루 펼쳐서 일체의 어리석고 미혹한 이를 능히 올바로 인도할 수 있으니, 이는 닦아서 쌓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4)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옳고 그름을 아는 것)ㆍ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ㆍ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4정려ㆍ8해탈ㆍ온갖 등지와 8등지를 아는 것)ㆍ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중생근기의 상하우열을 아는 것)ㆍ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중생 意樂의 차별을 아는 것)ㆍ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중생 性類의 차별을 아는 것)ㆍ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일체의 제행은 반드시 결과로 능히 나아가는 것[能趣]임을 아는 것)ㆍ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자신과 타인의 과거 숙주의 차별을 참답게 아는 것)ㆍ사생지력(死生智力:중생이 미래세에 여러 가지 존재로 續生하는 것을 아는 것)ㆍ누진지력(漏盡智力:열반을 아는 것).
    5)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번뇌를 영원히 끊었다는 대자각이 있어 다른 이의 비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설법함에 있어 다른 이의 비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염오법은 반드시 성도에 장애가 되는 법임을 설함에 있어 외도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ㆍ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도를 닦으면 반드시 苦에서 출리함을 설함에 있어 외도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게 해명하여 이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6) 여래는 제자들이 공경하고 올바로 수지(受持)하더라도 그것에 환희하지 않고 정념(正念)ㆍ정지(正知)에 안주한다(제1념주). 여래는 제자들이 공경하지 않고 올바로 수지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근심하지 않고 정념ㆍ정지에 안주한다(제2념주). 여래는 제자들 중의 어떤 이는 공경하고, 어떤 이는 공경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정념.정지에 안주한다(제3념주).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여러 가지의 괴로움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불선업(不善業)을 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어리석음과 애욕[愛癡]에 미혹되어 매우 극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인과를 믿지 않고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올바른 믿음[正信]을 버리고 삿된 도를 믿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번뇌의 강에 빠져 네 가지 흐름[四流]에 표류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괴로움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생ㆍ노ㆍ병ㆍ사를 두려워하면서도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또다시 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업을 조작(造作)하며 쉬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방편을 깨닫지 못하고 물들어 집착[染着]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
    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와 만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혐오하고 질투하며 또다시 미워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불선업을 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애욕으로 인해 악업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욕망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즐거움을 욕구하면서도 계(戒)를 구족하지 않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괴로움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괴로움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중계(重戒)를 범하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방일(放逸)하게 지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극악의 오무간업을 짓고 서도 사납고 모질게 스스로 그것을 숨기며 부끄러워[慚愧]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대승의 방등(方等)의 정법을 비방 훼손하고서도 오로지 어리석음에 스스로 집착하여 오히려 교만심을 일으킨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록 총명함을 지녔을지라도 선근을 모두 끊고 도리어 스스로 자만하면서[貢高] 영원히 참회하여 고치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8난처(難處)7)에 태어나 정법을 듣지 못하고 선(善)을 닦을 줄 모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을 때 태어나 정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도 능히 수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외도에 물들거나 외도의 법을 익혀 신체를 괴롭히는 업만을 닦을 뿐 출요(出要:出離의 要道: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깨달음의 도)를 영원히 여의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닦아 증득한 것을 바로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선한 과보가 다하면 다시 3도(塗)8)에 떨어지게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의해 업을 짓고 기나긴 밤의 괴로움을 받으면서 정법을 여의고 출로(出路:해탈도)를 미혹한다고 관찰하니, 이러한 것들 때문에 대자비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향해 추구하는 것은 예컨대 머리가 타는 이[頭燃]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체 중생으로서 고뇌가 있는 자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남김없이 구제해야 하리라.
    모든 불자들이여, 나는 지금까지 초행(初行) 보살의 인연과 발심에 대해 간략하게 설하였는데, 만약 널리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끝이 없을 것이다.

    7) 부처님을 만나고[見佛] 법을 듣는 데[聞法] 장애가 있는 여덟 처소로서, 지옥ㆍ아귀ㆍ축생ㆍ북구로주(4大洲의 북쪽. 여기서는 즐거움의 과보가 뛰어나 괴로움이 없기 때문임)ㆍ장수천(長壽天:색계ㆍ무색계의 장수 안온처)ㆍ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聾盲瘖瘂]ㆍ세속지만이 뛰어난 자[世智辯聰]ㆍ부처님이 세간이 계시지 않을 때[佛前佛後]를 말한다.
    8) 화도(火塗:사나운 불길이 타오르는 지옥취)ㆍ혈도(血塗:축생)ㆍ도도(刀塗:칼로써 서로를 핍박하는 아귀취
     

    3.원서품(願誓品)
    보살은 어떻게 보리를 일으키며, 어떠한 업행(業行)으로 보리를 성취하는 것인가?
    발심한 보살은 간혜지(乾慧地)9)에 머물면서 먼저 마땅히 올바른 원을 견고히 일으켜야 하는데, 일체의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섭수(攝受)하면서 ‘나는 위없이 높은 보리를 추구하여 그들을 남김없이 구하여 보호하고 해탈로 인도하며, 그들로 하여금 모두 구경의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발심은 대비(大悲)를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 즉, 대비심 때문에 수승한 열 가지의 크나큰 올바른 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라고 하는가?
    원하건대, 나는 이전 세상에서 심은 선근이나 지금의 몸으로 심은 선근을 가없는 일체의 중생들에게 시여(施與)함으로써 함께 위없이 높은 보리로 회향(廻向)하며, 나의 이러한 원이 생각 생각마다 증장하여 세세생생 태어날 적마다 항상 마음에 남아 있어 끝내 망실되지 않으면서 다라니(陀羅尼)에 의해 수호를 받으리라. 원하건대, 나는 대보리로 회향하고 나서 이러한 선근을 태어나는 모든 곳에서 항상 일체의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양함으로서 반드시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은 국토에는 영원히 태어나지 않게 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온갖 부처님께서 계시는 국토에 태어나서 그림자가 본래의 형상을 따르듯이 항상 좌우로 친근히 모시면서 찰나의 순간이라도 온갖 부처님을 멀리 여의는 일이 없게 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부처님과 친근히 하고 나서 내가 감응하는 바에 따라 나를 위해 설법함으로서 바로 보살의 5통(通)10)을 성취하리라.


    9) 보살 10지의 첫 번째 단계로서, 성문의 5정심위ㆍ4념주ㆍ총상념주의 삼현위(三賢位)에 해당한다. 간은 건조의 뜻으로, 이 단계의 지혜는 아직 법성의 이수(理水)를 증득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간혜지이다.
    10) 다섯 가지 부사의하고 자재한 작용으로,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숙명통(宿命通)ㆍ타심통(他心通)ㆍ신족통(神足通) 등이다.
    원하건대 보살의 5통을 성취하고 나서 바로 능히 세속제(世俗諦)의 가명(假名)을 통달해서 유포하고, 제일의제(第一義諦)야말로 진실의 성품[眞實性]와 같음을 이해해서 정법지(正法智)를 증득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정법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염심(無厭心)을 중생을 위해 설하고 가르침의 이익과 기쁨을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깨달아 이해할[開解] 수 있게 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능히 온갖 중생들을 깨달아 이해하게 하고 나서 부처님의 신력(神力)을 시방의
    세계에 남김없이 두루 이르게 하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정법을 들어 지녀서 중생을 널리 섭수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온갖 부처님들의 처소에서 정법을 수지하고 나면 바로 능히 청정법륜을 따라 굴려서 시방세계의 일체중생으로서 내가 설하는 법을 듣고 나의 이름을 듣는 자는 바로 일체의 번뇌를 버리고 여의어서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게 하리라. 원하건대, 나는 능히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나서 항상 그들과 함께 그것을 수호하며,
    이익이 없는 것을 제거하고,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을 베풀며,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중생을 섭수하여 정법을 짊어지리라. 원하건대, 나는 능히 정법을 지고 나서 비록 정법을 행하였을지라도 마음으로 행한 바가 없게 하리니, 이는 이를테면 모든 보살이 정법을 행하였을지라도 실로 행한 바가 없고 또한 행하지 않은 바도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올바른 원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을 발심한 보살의 열 가지 크나큰 올바른 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열 가지 크나큰 원은 중생계에 두루 편재하면서 일체 항하사의 온갖 원을 두루 섭수하니, ‘만약 중생이 다한다면 나의 원도 다할 것이지만, 그러나 중생계는 실로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나의 크나큰 원도 역시 또한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보시(布施)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일체의 중생을 섭취(攝取)하기 때문이며, 또한 지계(持戒)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온갖 선을 구족하여 본원(本願)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인욕(忍辱)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32상(相) 80수형호(隨形好)를 성취하기 때문이다.11)


    11) 32상 80수형호(혹은 種好)란 전륜성왕이나 전법륜왕(불타)이 갖는 신체상의 수승한 덕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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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정진(精進)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선행을 증장시켜 온갖 중생을 부지런히 교화하도록 하기 때문이며, 또한 선정(禪定)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보살이 스스로를 능히 잘 조복하고 중생의 온갖 마음의 작용[心行]을 능히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지혜도 바로 보리의 원인이니, 구족할 경우 온갖 법의 성상(性相)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6바라밀(波羅蜜)이 바로 보리의 원인이다. 그리고 4무량심(無量心)12)과 37품(品)13)의 온갖 만 가지 선행도 서로 함께 도와 보리를 성취하게 한다.
    즉, 만약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고 쌓으면, 그 행하는 바에 따라서 점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불자들이여, 보리를 추구하는 자는 마땅히 방일(放逸)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방일의 행은 선근을 허물어트린다. 만약 보살로서 6근(根)을 조복하고 방일하지 않은 자라면, 이러한 자는 능히 6바라밀을 닦고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보살의 발심은 먼저 지극한 정성과 결정적인 서원을 세워야 하는 것이니, 서원을 세운 이는 끝내 방일하거나 해태(懈怠)ㆍ완만하지 않게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결정적인 서원을 세울 때에는 다섯 가지 일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니, 첫째는 능히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능히 번뇌를 제압하고 조복하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방일을 막는 것이며,


    12) 자무량심(慈無量心)ㆍ비무량심(悲無量心)ㆍ희무량심(喜無量心)ㆍ사무량심(捨無量心)을 말한다.
    13) 열반의 자량이 되는 서른일곱 가지 도를 말하는 것으로 4념주ㆍ4정근ㆍ4여의족ㆍ5근ㆍ5력ㆍ7각분(覺分)ㆍ8정도의 자량이 되는 37각지 도를 말하는 것으로, 4념주ㆍ4정근ㆍ4여의족ㆍ5근ㆍ5력ㆍ7가지ㆍ8정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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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는 능히 5개(蓋)14)를 깨트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능히 부지런히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바와 같다.

    여래 대지(大智)의 존자께서는
    공덕의 증득을 나타내 설하셨으니,
    인혜(忍慧)와 복업(福業)의 힘과
    서원의 힘이 가장 뛰어나도다.

    보살은 어떻게 서원을 세우는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 가지를 구하여 찾으면, 나는 그 때 구하고 찾는 바에 따라 물건을 베풀 것이며, 나아가 한 찰나라도 인색한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손가락을 튀길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악한 마음을 낳아서 그 베푼 인연으로 청정한 과보를 추구하였다면, 나는 바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아승기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속이는 자가 될 것이며, 미래세에도 역시 마땅히 결정코 아
    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지 못하게 되리라. 혹은 내가 계를 지니다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청정한 마음을 건립하여 바꾸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인욕을 닦을 경우 다른 이가 침해하거나 나아가 끊고 자를지라도 항상 자애로운 마음을 낳아서 미워함의 장애[恚礙]가 없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정진을 닦을 경우 추위나 더위, 왕이나 도적, 수해나 화재, 사자ㆍ호랑이ㆍ승냥이ㆍ사막[無水穀處] 등을 만나더라도 요컨대 반드시
    그 마음을 견고히 하고 강건히 해서 물러나지 않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선(禪)을 닦을 경우 외적인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워져 섭수할 수 없다 해도 요컨대 생각을 붙들어 대상에 매어두고서 점차 법이 아닌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혹은 내가 지혜를 닦고 쌓는 경우 일체법의 여실성(如實性)을 관찰해서 수순하여 수지하더라도 선ㆍ불선, 유위ㆍ무위, 생사ㆍ열반에 대해 두 가지 차별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기를 서원하
    는 것이다.


    14) 선법을 가리어 심성을 장애하는 법으로, 탐욕ㆍ진에ㆍ수면(睡眠)ㆍ도회(掉悔)ㆍ의개(疑蓋)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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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약 손가락을 튀길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나의 마음에 후회와 미워함의 장애와 물러남과 어지러운 생각이 있고, 두 가지 차별된 견해를 일으켜서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로써 청정한 과보를 구한다면, 바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아승기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며, 미래세에도 역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결정코 성취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렇지만 보살이 열 가지 크나큰 서원으로써 정법의 행(行)을 수지하고 여섯 가지의 크나큰 서원으로 방일의 마음을 제압하면, 반드시 능히 육바라밀을 정근(精勤)하여 닦고 쌓음으로서 마침내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4. 단바라밀품(檀波羅蜜品)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보시를 수행한다고 하는가?
    보시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와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이와 같은 보시는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할 수 있다.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
    보시를 수행하는 자는 자기의 재물에 대해 항상 버리려는 마음을 내고, 와서 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는데, 마치 부모와 스승과 선지식의 마음[想]과도 같다. 빈궁하고 하천한 자에 대해서는 독자(獨子)를 생각하듯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고 주는 바에 따라 마음이 기뻐하고 공경하는데,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보시를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또한 보시를 닦기 때문에 선한 이름으로 유포되어 태어나는 곳마다 재물과 보배가 풍요롭게
    넘쳐나니, 이를 일러 ‘자리(自利)’라고 하였다. 또한 능히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교화하고 조복해서 인색하지 않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利他)’라고 하였다. 또한 이미 닦은 무상(無相)의 크나큰 보시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俱利]’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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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보시를 닦음으로 인해 전륜왕(轉輪王:불타)의 지위를 획득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중생을 섭수하고 나아가 마침내 부처님의 다함없는 법장(法藏)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보시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법시(法施)이며, 둘째는 무외시(無畏施)이고, 셋째는 재물시(財物施)이다. 법시란 사람들에게 계(戒)를 수지하게 하고 출가의 마음을 닦도록 권유하며, 사견을 허물어트리기 위해 단(斷)ㆍ상(常)의 네 가지 전도(顚倒)15)와 여러 악과 허물을 설하고, 진제(眞諦)의 뜻을 분별하고 개시(開示)하고 정진의 공덕을 찬탄하며, 방일의 허물과 악에 대해 설하여 주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법시’라
    고 한다. 또한 어떤 중생이 왕이나 사자ㆍ호랑이ㆍ승냥이, 물이나 불, 도적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면 보살은 이를 보고서 능히 구호하니, 이를 일컬어 ‘무외시’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스스로 재물을 베풀어 인색하지 않으니, 위로는 진귀한 보배, 코끼리나 말, 수레, 수가 놓인 비단, 곡물이나 의복, 음식으로부터 아래로는 찐 보릿가루 한 주먹, 한 가닥의 실에 이르기까지 많든 적든 구하는 자가 있으면 필요로 하는 바에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 주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재시’라고 한다.
    재시에는 다시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지심시(至心施)이며, 둘째는 신심시(信心施)이고, 셋째는 수시시(隨時施)이며, 넷째는 자수시(自手施)이고, 다섯째는 여법시(如法施)이다.
    마땅히 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도 역시 다섯 가지가 있다. 즉 비리로써 구한 재물은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부정(不淨)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술이나 독약은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중생들을 어지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나 짐승을 잡는 그물은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중생을 괴롭히고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15) 단ㆍ상의 네 가지 전도란, 무상ㆍ고(苦)ㆍ무아ㆍ부정(不淨)의 생사를 상ㆍ낙ㆍ아ㆍ정이라고 집착하는 것, 혹은 상ㆍ낙ㆍ아ㆍ정의 열반을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전자는 유위의 네 전도이며, 후자는 무위의 네 전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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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이나 몽둥이ㆍ활ㆍ화살은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중생들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나 여색(女色)은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청정한 마음을 허물어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여법(如法)하지 않은 물건은 중생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일체의 물건은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안락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니, 이런 보시를 ‘여법시’라고 이름한다.
    보시를 즐기는 이는 다시 다섯 종류의 명문(名聞)과 선한 이익을 획득하니, 첫째는 항상 일체의 현성(賢聖)과 친근하게 되며, 둘째는 일체 중생이 즐거이 보게 되며, 셋째는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의 으뜸가는 존경을 받는 것이며, 넷째는 좋은 명예가 시방에 널리 퍼지게 되며, 다섯째는 능히 보리를 위해서 최상의 미묘한 인연을 짓는다.
    보살인(菩薩人)이 행하는 보시를 일체시(一切施)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일체시란 많은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施心]을 말한다. 여법하게 재물을 구하여 지니다가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아첨이나 곡해함이 없이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빈궁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재앙이나 고통을 당하는 자를 보고 자비의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
    라고 이름하며, 가난하여 재물이 적으면서도 능히 잘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보물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면서도 마음을 열어 능히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계를 지녔거나 계를 어겼거나 밭16)을 가졌거나 밭을 갖지 않았거나 관계없이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한다.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미묘하고 좋은 즐거움을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위없이 높은 대보리를 희구하여 보시하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하며, 보시하고자 하여 보시했을 때 보시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것을 ‘일체시’라고 이름한다.


    16) 밭[田, ksetra]이란 복전(福田), 즉 공덕을 지닌 이, 혹은 밭을 지키는 이(田主, 혹은 守田者, ksetrapa), 즉 찰리(刹利)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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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보시하면 다라니와 칠각화(七覺華:七覺支 혹은 七覺分)를 구족할 것이기 때문에, 향을 보시하면 계ㆍ정ㆍ혜를 구족하여 자신에게 훈습[熏塗]할 것이기 때문에, 과일을 보시하면 무루의 과보를 구족하고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보시하면 목숨과 변재(辯才)와 색과 힘과 즐거움을 구족할 것이기 때문에, 의복을 보시하면 청정한 색을 구족하여 무참(無慚)ㆍ무괴(無愧)를 제거할 것이기 때문에, 등(燈)을 보시하면 불안(佛眼)을 구족하여 일체 제법의
    성품을 밝게 요별할 것이기 때문에, 코끼리나 말의 수레를 보시하면 무상승(無上乘)을 획득하여 신통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에, 영락(瓔珞)을 보시하면 80수형호(隨形好)를 구족할 것이기 때문에, 진귀한 보배를 보시하면 대인(大人)의 32상(相)을 구족할 것이기 때문에, 힘 있는 하인을 보시하면 부처님의 10력과 4무외를 구족할 것이기 때문에 일체시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나라나 도성, 처자, 머리나 눈ㆍ손발 등의 몸을 보시할 때 마음에 인색함이 없으면 위없이 높은 보리를 증득하고 중생을 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보시를 수행할 때 재물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별을 돌아보지 않으니, 그것은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단바라밀(檀波羅蜜)을 구족하는 것이다.

    5. 시라바라밀품(尸羅波羅蜜品)17)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지계(持戒)를 수행한다고 하는가?
    지계는 자리와 이타와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이와 같은 지계는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계를 지니는 것이다.


    17) 시라바라밀(s´lapramita)의 시라는 계율의 뜻으로, 곧 지계(持戒)를 말한다. 계율에는 출가ㆍ재가, 소승ㆍ대승의 차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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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계를 닦으면 일체의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 모두 청정해져서 불선행(不善行)의 마음을 능히 버리며, 악행과 금계(禁戒)를 훼손한 것을 능히 잘 꾸짖고, 작은 죄에 대해서도 마음은 항상 두려워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지계를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계를 닦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악과 허물을 멀리 여의어서 항상 좋은 곳에 태어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악을 범하지 않게 하
    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바를 보리의 계(戒)로 돌려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계를 닦음으로 인해 욕망을 여의게 되며 나아가 번뇌[漏]가 다하여 최정각(最正覺)을 성취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신계(身戒)이며, 둘째는 구계(口戒)이고, 셋째는 심계(心戒)이다.
    신계를 지니는 것이란 일체의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영원히 여의는 것으로서 물건이나 목숨을 빼앗지 않고 남의 재물을 침해하지 않으며, 외적인 색[外色:자신의 처 이외의 여인]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살생 등의 인연이나 그것의 방편도 행하지 않는 것으로서 몽둥이나 나무ㆍ기와ㆍ돌 따위로 중생을 상해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어떤 물건이 다른 이에게 소속된 것이나 다른 이에 의해 수용된 것이라면 풀 한 포기, 잎사귀 하나라도 주지 않은 것은 취해
    서는 안 된다. 또한 일찍이 섬세한 여색을 곁눈질하는 일이 없으며, 네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고서 공경하여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신계’라고 한다.
    구계를 지니는 것이란 일체의 망어(妄語)ㆍ양설(兩說)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를 끊어 없애고, 항상 남을 속이거나 화합을 이간질하지 않으며, 비방ㆍ훼손하거나 말을 꾸미거나 아울러 방편으로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말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부드럽고 충성스럽고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은 항상 이롭고 교화를 권유하고 선을 닦는 것이어야 하니, 이것을 일컬어 ‘구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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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계(心戒)를 지니는 것이란 탐욕ㆍ진에ㆍ사견을 제거ㆍ소멸하고 항상 유연한 마음을 닦아 허물이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죄업은 악한 과보를 얻는다고 믿는 사유의 힘으로 인해 죄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가벼운 죄에 대해 지극히 무겁다는 생각을 내고, 설혹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후회하면서 중생들에게 진뇌(瞋惱)를 일으키지 않으며, 중생을 보고 애념(愛念)의 마음을 내며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며, 마음에 인
    색함이 없고 즐거이 복덕을 지음으로써 항상 사람들을 교화하며, 항상 인자한 마음[慈心]을 닦아 일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심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10선업계(善業戒)18)에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첫째는 능히 악행을 제압하는 것이며, 둘째는 능히 선심을 조성하는 것이고, 셋째는 능히 번뇌를 막는 것이며, 넷째는 청정한 마음을 성취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능히 계를 증장시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방일의 행을 능히 잘 닦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정념(正念)을 구족하고 선악을 분별하여 결정코 능히 십선업계를 닦게 될 것이다.
    그리고 팔만 사천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계품(戒品)은 모두 다 십선계 중에 포섭되는 것이니, 이러한 십선계는 능히 일체 선계(善戒)의 근본이 된다. 나아가 이는 곧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악을 끊고 능히 일체의 불선법을 제압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계’라고 한 것이다.
    계에는 다시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이며, 둘째는 정공계(定共戒)이고, 셋째는 무루계(無漏戒)이며, 넷째는 섭근계(攝根戒)이고, 다섯째는 무작계(無作戒)이다.
    즉 스승으로부터 백사갈마(白四羯磨)를 받는 것을 ‘바라제목차계’라고 하며,19) 근본사선(四禪:사정려)과 사미도선(四未到禪:사미지정)을 ‘정공계’라고 하고,


    18) 앞서 언급한 신계인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떠나는 것과 구계인 망어(妄語)ㆍ양설(兩說)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를 끊어 제거하는 것과, 심계인 탐욕ㆍ진에ㆍ사견을 제거ㆍ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19) 백사갈마란 수계와 같이 승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승중(僧衆)에 대해 먼저 그 일을 한 번 아뢰고, 다음에 세 번 그 가부를 물어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라제목차(pratimoksa, 戒經)란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 조문(사분율의 경우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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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본사선과 초선의 미도선을 무루계라고 하며, 온갖 감관을 섭수하여 정념(正念)의 마음을 닦아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보고 듣고 각지(覺知)하여도 방일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섭근계’라고 하고, 육신을 버리고서 후세에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무작계’라고 이름한다.
      보살이 닦는 계는 성문이나 벽지불이 닦는 계와는 같지 않으니, 공통되지 않기 때문에 ‘선지계(善持戒)’라고 이름한다. 즉 선계(善戒)를 지녔기 때문에 능히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이 자심계(慈心戒)를 지니고 있음은 중생을 구호하여 안락하게 하기 때문이며, 비심계(悲心戒)를 지니고 있음은 온갖 괴로움을 참고서 위난(危難)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희심계(喜心戒)를 지니고 있음은 기쁘게 선을 닦으며 해태(懈怠)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심계(捨心戒)를 지니고 있음은 원수나 친구를 평등하게 대하여 사랑과 미움[愛恚]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혜시계(惠施戒)를 지니고 있음은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조복하였기 때문이며, 인욕계(忍辱戒)를 지니고 있음은 마음이 항상 유연하여 미워함이나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정진계(精進戒)를 지니고 있음은 선업이 날로 증가해서 물러나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선정계(禪定戒)를 지니고 있음은 욕탐과 불선을 여의고 선의 갈래[禪支]에 오래 머물기 때문이
      며, 지혜계(智慧戒)를 지니고 있음은 다문(多聞)의 선근(善根)은 싫어함이나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며,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계[親近善知識戒]를 지니고 있음은 보리의 위없이 높은 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며, 악지식을 멀리 여의는 계[遠離惡知識戒]를 지니고 있음은 삼악도(三惡道)와 팔난처(八難處)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보살인으로서 청정계(淸淨戒)를 수지하는 자란 이렇다; 욕계에 의지하지 않고 색계에 가까이하지 않으며 무색계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욕망과 번뇌를 버리고 미워하는 장애를 없애서 무명의 장애를 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단(斷)ㆍ상(常)의 두 극단을 여의어서 인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가명(假名)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원인에 계박되
      지 않고 온갖 견(見)20)을 일으키지 않고 의심이나 후회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20) 여기서 견이란 오취온으로서,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유신견(有身見), 이러한 오취온은 단멸하는 것[斷]도 영속적인 것[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단ㆍ상의 두 극단에 집착하는 변집견(邊執見), 단멸론의 입장에서 업도, 업의 상속도, 이숙도 없으며, 해탈도 해탈에 이르는 실천도도 없다고 하는 사견(邪見), 상주론의 입장에서 영속의 실재를 세간의 참된 원인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추
      구하기 위해 몸을 불로 지지는 등의 그릇된 금계를 청정도라고 집착하는 계금취(戒禁取), 이상의 저열한 지식을 뛰어난 지식으로 간주하는 견취(見取)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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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 불선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아만(我慢)ㆍ교만(憍慢)ㆍ증상만(增上慢)ㆍ만만(慢慢)ㆍ대만(大慢)21)에 머물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며 선에 수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이익과 쇠퇴, 훼손과 영예, 칭찬과 꾸짖음, 괴로움과 즐거움에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세제(世諦)와 허망ㆍ가명(假名)에 물들지 않고 진제(眞諦)에 수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청정
      계이다. 번뇌하지 않고 뜨겁지 않아서 상(相)을 여의어 적멸한 것,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무상상(無常想)을 관찰해서 염리(厭離)를 낳고 부지런히 선근을 닦아 용맹정진하는데 까지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청정계이다.
      보살마하살은 지계(持戒)를 수행하면서 이 같은 청정한 마음조차 살피지 않으니, 그 상념[想]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라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6. 찬제22)바라밀품(羼提波羅蜜品)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인욕(忍辱)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인욕이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인욕은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이 고뇌를 여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욕을 닦는 것이다.


      21) 아만ㆍ교만ㆍ증상만ㆍ만만ㆍ대만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의 덕을 차별하는 오만한 마음[慢心]의 다섯 종류로, 일반적으로는 일곱 가지 만, 즉 만(자신보다 열등한 이에 대해 자신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ㆍ과만(過慢:자신과 동등한 이에 대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ㆍ만과만(慢過慢:구역에서는 過過慢, 자신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ㆍ아만(오취온을 아, 아소로 집착하는 것)ㆍ증상만(예류과 등의 과보를 얻지 못하였으면서
      이미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ㆍ비만(卑慢, 구역에서는 下慢,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자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것)ㆍ사만(邪慢, 실제로는 덕이 없으면서 덕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22) 인욕(忍辱)의 뜻으로, 일체 중생의 꾸짖음ㆍ모욕ㆍ타격 등과 추위와 더움ㆍ기근ㆍ갈증 등을 참아내는 대행(大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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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인욕을 닦는 자는 마음이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해 겸손하고, 강압과 교만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며, 추악한 이를 보고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고, 말은 항상 부드럽고 선을 닦을 것을 권유해 교화하며, 분노와 화합하여 참음[和忍]의 과보의 차별을 능히 잘 분별하여 설하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인욕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욕을 닦기 때문에 모든 악을 멀리 여의어서 몸과 마음이 안락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
      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그들을 모두 화순(和順)하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위없이 높은 대인(大忍)으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해서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욕을 닦음으로 인해 단정(端政)을 획득해서 사람들에게 으뜸가는 공경을 받고, 나아가 부처님의 지극히 미묘한 상호를 증득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인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인욕이다.
      무엇을 신인(身忍)이라고 하는가?
      만약 다른 이가 악한 마음으로 침입하여 훼손하고 때리고 나아가 상해를 입히더라도 그것을 모두 참고 감수할 수 있으며, 온갖 중생들이 위험과 핍박을 당해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몸으로 그를 대신하면서도 괴로워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신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구인(口忍)이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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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꾸짖는 자를 보더라도 묵묵히 감수할 뿐 앙갚음하지 않으며, 혹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로 와서 엄하게 꾸짖는 자를 보더라도 마땅히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혹은 어떤 이가 무고로 제멋대로 비방하더라도 그것을 마땅히 모두 참고 감수하는 것, 이것을 일러 ‘구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의인(意忍)이라고 하는가?
      미워하는 이를 보더라도 마음에 한(限)을 품지 않으며, 혹은 번뇌를 촉발시키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음이 산란되지 않고, 혹은 꾸짖고 훼손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음에 역시 두려워함이 없는 것, 이것을 일러 ‘의인’이라고 한다.
      세간에서 때리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제적으로 때리는 것[實打]이며, 둘째는 제멋대로 때리는 것[橫打]이다. 만약 죄과가 있든지 혹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혐의를 받아 맞았다면, 그는 마땅히 감로를 마시듯이 스스로 참고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때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능히 나를 잘 가르치고 조복시켜 나로 하여금 온갖 죄과를 여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악한 마음에서 제멋대로 나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마땅히 ‘나는 지금은 죄가 없지만, 이건 과거의 숙업이 초래한 바이므로 역시 마땅히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마땅히 ‘이 몸은 사대(四大)가 일시 화합된 것이고 오중(五衆:오온)이 인연 화합한 것이니, 누가 맞는 자[受打者]일까?’라고 하거나, 또는 ‘앞에서 때리는 사람이 어리석은
      이처럼 보이고 미치광이처럼 보여서 나는 마땅히 그를 불쌍히 여기거늘 어찌 참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꾸짖는 것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제적으로 꾸짖는 것[實罵]이며, 둘째는 거짓되게 꾸짖는 것[虛罵]이다. 만약 죄과가 있어서 실제적으로 꾸짖었다면 나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죄과가 없는데도 거짓되게 꾸짖었다면, 나는 일찍이 꾸짖음을 들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 같은 꾸짖음은 이를테면 메아리 소리와 같고 바람이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나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그러한 꾸짖음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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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성내는 것[瞋]도 역시 그러하니, 타인이 와서 나에게 성을 내더라도 나는 마땅히 참고 감수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성을 낸다면 미래세에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크나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나의 몸이 설혹 절단되어 떨어져 나가더라도 마땅히 성을 내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오가는 업의 인연을 깊이 관찰해야 할 것이며, 마땅히 자비를 닦아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적은 괴로움을 능히
      참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능히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능히 중생을 조복하여 일체의 악법(惡法)으로부터 해탈시켜서 위없이 높은 과보를 성취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어떤 지인(智人)이 인욕을 즐거이 닦았다면, 이 사람은 늘 얼굴과 모양새가 단정하고 많은 재물과 보배를 획득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보고서 환희하고 공경해 받들며 복종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관찰해야 하나니, 만약 어떤 사람의 형태가 쇠잔하고 안색이 추악하며 온갖 감관이 결여되어 있고 재물이 궁핍하다면, 이는 성냄의 인연 때문에 얻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마땅히 인욕을 깊이 닦아야 하는 것이
      다.
      참음, 즉 인욕을 낳는 인연에는 열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나[我]와 나의 것[我所]의 상(相)을 관찰하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는 종성(種姓)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는 교만을 깨트려 제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악이 닥쳐오더라도 앙갚음하지 않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무상(無常)의 상(想)을 관하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자비를 닦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마음이 방일하지 않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에 대해 괴롭고 즐
      겁다는 등의 느낌을 버리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성냄을 끊고 제거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지혜를 닦아 익히는 것이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열 가지 일을 능히 성취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는 능히 인욕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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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보살마하살이 청정필경인(淸淨畢竟忍)을 닦을 때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작(無作)에 들어가면, 보고 지각하고 원하고 짓는 것과 화합하지 않아서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에도 기대어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온갖 보고 지각하고 원하고 짓는 것은 모두 공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無二相]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혹은 결(結:번뇌)의 다함[盡]에 들거나 적멸(寂滅)에 들어가면, ‘결’
      에 의한 생사와 화합하지 않고 ‘결의 다함’이나 적멸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결에 의한 생사는 공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혹은 인욕의 자성이 스스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라면, 출현함이 있지 않아서 파괴할 수도 없다. 파괴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둘
      없는 모습의 인욕으로서 소위 ‘청정필경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작(無作)ㆍ비작(非作)이라서 의지해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분별도 없고 장엄도 없고 닦아서 다스리거나 발진(發進)하는 일도 없어서 끝내 생(生)을 이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인욕이 바로 무생인(無生忍)이다. 나아가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은 인욕을 수행하여 수기(受記)된 인[忍]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지만 보살마하살은 인욕을 수행하면서도 그것의 성상(性相)이 다 공(空)이라고 여기니, 더 이상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찬제바라
      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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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보리심경론 하권


      천친 지음

      구마라집 한역

      권오민 번역



      7. 비리야1)바라밀품(毘梨耶波羅蜜品)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정진(精進)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정진으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정진은 바로 보리의 도를 능히 장엄할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정진을 닦는 것이다.
      즉 정진을 닦는 자는 일체의 시기에 항상 청정한 범행(梵行)을 부지런히 닦아 모으고 태만을 버려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며, 온갖 어려운 일이나 이롭지 않은 일에서도 마음은 항상 정근(精勤)하여 끝내 물러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정진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진을 닦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의 상품[上]의 미묘한 선법을 능히 증득하니, 이를 일러 ‘자리(自利)’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선을 닦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利他)’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보리의 정인(正因)으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얻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진을 닦음으로 인해 수승하고 청정 미묘한 과보를 증득하고, 온갖 보살의 경지[地]를 초월하고 나아가 정각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되니,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위없이 높은 도를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정진이며, 둘째는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리기를 널리 원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다.


      1) 정진의 뜻으로, 심신을 북돋우어 앞뒤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쉼없이 닦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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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보살은 열 가지 생각[十念]을 성취함으로써 능히 발심하여 정진을 부지런히 실행하게 된다.
      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 생각이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부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생각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법은 부사의(不思議)한 해탈로 이끄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승가는 청정하며 물듦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대자(大慈)를 행하여 중생을 편안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대비(大悲)를 행하여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리려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정정취(正定聚)2)를 더욱 북돋아서 즐거이 선을 닦고자 생각하
      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사정취(邪定聚)를 제거하여 근본으로 되돌아가고자 생각하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온갖 아귀가 겪는 배고프고 목마른 뜨거운 번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온갖 축생들이 오랫동안 받는 온갖 괴로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온갖 지옥에서 받는 태워지고 삶아지는 과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즉, 보살은 이와 같은 열 가지 생각을 사유하면서 ‘삼보(三寶)의 공덕을 나는 마땅히 닦고 쌓으리라’, ‘나는 마땅히 자비와 정정취에 부지런히 힘쓰리라’, ‘사정취의 중생과 삼악도의 괴로움을 나는 마땅히 제거하여 없애버리리라’고 하니, 이러한 사유에 전념해 흐트러지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쉬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능히 올바른 생각[正念]을 일으켜 정진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의 정진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이른바 4정근(正勤)의 도를 수행하는 것이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을 막아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악법을 신속히 제거하여 끊는 것이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은 방편으로써 생겨나게 하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선법은 더욱 닦아 가득하게 증광(增廣)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은 사정근의 도를 닦아 쉬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지런한 정진은 일
      체의 온갖 번뇌의 세계를 능히 파괴해서 위없이 높은 보리의 올바른 인연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2) 삼정취(三定聚, 혹은 三聚正定聚ㆍ邪定聚ㆍ不定聚)의 하나로, 정정취란 항상 정진하여 결국 성불할 종류의 유정을 말하고, 또한 사정취란 타락하여 성불할 수 없는 종류의 유정을 말하며, 부정취는 향상과 타락이 결정되어 있지 않아 인연을 만날 경우에만 성불할 수 있는 종류의 유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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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보살은 몸과 마음의 일체의 크나큰 괴로움을 능히 감수하면서도 온갖 중생들의 안립(安立)을 원하기 때문에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악한 때[惡時]와 아첨이나 곡해, 그릇된 정진을 멀리 여의고서 올바른 정진만을 닦으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선정ㆍ지혜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닦고 믿으며, 짓기를 원하는 것은 이미 지었거나 마땅히 지을 것이며,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정진을
      행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으며, 온갖 선법을 닦거나 온갖 괴로움을 없애 버릴 적에는 마치 머리가 타는 것을 구호(救護)하듯이 하면서도 마음이 물러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이라고 한다.
      보살은 또한 비록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을지라도 온갖 괴로움을 뽑아버리기 위해 정법을 구호할 때에는 마땅히 아껴야 하며, 위의(威儀)를 버리지 않고 항상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법을 닦을 때에는 마음에 나태한 게으름이 없으며, 신명을 상실할 때에도 법다움[如法]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리의 도를 닦는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나태한 자는 일시에 일체의 모든 이에게 능히 보시할 수 없으며, 능히
      계를 지닐 수도 없고, 온갖 괴로움을 참을 수도 없으며, 정진을 부지런히 닦을 수도 없고, 마음을 다잡아 선정을 염(念)할 수도 없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육바라밀은 정진을 말미암아서 증장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보살마하살로서 정진이 탁월한 자라면 능히 신속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용맹함과 강건함을 쌓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온갖 선근을 닦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며, 네 번째는 중생을 교화하려고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는가?
      모든 생사를 마음으로 능히 참고 견딜 뿐 겁수(劫數)를 따지지 않으니, 무량(無量)하고 가없는 백천만억 나유타(那由他)의 항하사(恒河沙) 아승기겁(阿僧祇劫)3) 동안 불도를 성취해도 마음으로 고달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불해장엄정진(不懈莊嚴精進; 나태하지 않은 장엄의 정진)이라고 한다.


      3) 나유타(nayuta)는 수량의 단위로서, 이설이 많으나 구사론 12권에 의하면 10의 12승이라 하며, 항하사는 항하의 모래, 아승기겁(asamkhyeya\kalpa, 혹은 無數劫)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간으로, 구사론에 의하면 10의 60승이라 하며, 여기서 이 모든 술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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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49] 쪽

      보살이 용맹함과 강건함을 쌓아 정진을 일으키는 것이란, 삼천대천세계가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뵙기 위해, 법을 듣기 위해, 중생을 선법에 편안히 머물게 하기 위해, 요컨대 마땅히 이러한 불길로부터 지나가게 하기 위해,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 마음이 능히 대비(大悲) 속에 편안히 잘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용건정진(勇健精進)이라고 한다.
      보살이 선근을 닦아 익혀서 정진을 일으키는 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선근을 일으킨 것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廻向)하듯이 일체지(一切智)의 성취를 원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을 일러 수습선근정진(修習善根精進)이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려고 정진을 일으킨다. 즉 중생의 성품은 가늠하거나 계교할 수 없어서 무량하고 가없는 허공계와도 같다. 따라서 보살은 ‘나는 마땅히 그들을 남김없이 제도하리라’고 서원을 세워서 교화하고 제도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교화정진(敎化精進)이라고 한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보살은 도(道)를 돕는 공덕을 닦아서 위없이 높은 지혜를 돕고, 불법을 닦아 모아서 정진을 일으킨다.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으며, 보살마하살이 대장엄을 발하여 행하는 정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다. 그렇지만 보살마하살은 정진을 수행하면서 욕망을 여의는 마음이 없으니, 온갖 괴로움을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리야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8. 선나바라밀품(禪那波羅蜜品)4)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선정(禪定)을 닦아 익힌다고 하는가?
      선정으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선정은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선정을 닦는 것이다.


      4) 선나바라밀(dhyna\pramita)의 선나는 선정(禪定)의 뜻으로, 사유수(思惟修)라고도 번역하며, 신역에서는 정려(靜慮)로 번역한다. 즉 지혜를 사유함에 있어 마음이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30 / 49] 쪽

        즉 선정을 닦는 자는 그 마음을 능히 잘 다잡아서 일체의 어지러운 생각이 멋대로 간여하지 않게 하고, 가거나 머물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생각을 집중하여 앞(이를테면 코끝)에 두고, 백골ㆍ정수리ㆍ등뼈ㆍ팔뚝ㆍ갈비뼈ㆍ엉덩이 뼈ㆍ정강이ㆍ복사뼈를 역순(逆順)으로 관찰하면서 안반(安般)의 숨을 헤아리니,5)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선정을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정을 닦기 때문에 모든 악을 감수하지 않고
        마음은 항상 기뻐 즐거워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념(正念)을 닦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청정한 삼매로써 악의 각(覺:尋의 구역)과 관(觀:伺의 구역)을 여의며,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선정을 닦음으로 인해 8해탈(解脫)6) 내지 수
        릉엄7)금강삼매(首楞嚴金剛三昧)를 획득하게 되니,8)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정은 세 가지 법에 의해 생겨난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한 것인가?
        첫째는 문혜(聞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둘째는 사혜(思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고, 셋째는 수혜(修慧)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이러한 세 가지 법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일체의 삼매를 낳는 것이다.
        무엇을 문혜라고 하는가?


        5) 이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持息念, 혹은 數息觀)에 대한 설명이다. 부정관은 탐욕이 많은 중생이 그 몸의 부정한 모습을 관찰하여 탐욕심을 정지시키려는 관법으로, 이를테면 요가의 초보자는 자신이 아끼는 신체 한 부위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이 부패하여 백골이 드러나고 점차 몸 전체, 나아가 가족ㆍ마을ㆍ나라ㆍ대지에 가득 찬 백골을 관찰하고, 다시 되돌아 자신의 신체 일부를 관찰한다. 그러나 요가에 익숙한 이는 복숭아 뼈를
        제거하고 점차 나머지 뼈를 제거하고, 마침내 머리 반쪽의 뼈마저 제거한 다음 그 반쪽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사유를 초월한 요가행자는 그 같은 반쪽의 뼈마저 제거하고 오로지 미간에 의식을 집중할 때 부정관은 성취된다. 그리고 지식념(혹은 안반념, na\apnasati, 혹은 阿那阿波那念)이란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산란심을 정지시키려는 관법이다. 즉 호흡의 완급ㆍ잡란이 심신을 산란시키므로 이것의 조절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 것이다.
        6) 8해탈(혹은 背捨)이란 삼계의 번뇌를 버리고 그것의 계박에서 해탈하는 여덟 종류의 선정을 말한다. 첫째,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러한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어혈 등의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둘째,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셋째,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해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탈이 관행자의 몸에 증득되어[身作證] 구족ㆍ원만하게 되는 것. 넷째~일곱째, 각기 하지의 탐에서 해탈한 무색정의 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ㆍ비상비비상처 신작증구족주. 여덟째,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身作證具足住)멸진정으로, 수ㆍ상 등의 마음을 싫어하여 무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수릉엄금강삼매의 수릉엄이란 sramgama(신역은 首楞伽摩로 健相ㆍ健行ㆍ一切事竟으로 번역됨)의 음사로서,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삼매의 명칭이다. 즉 건상이라 함은 부처님의 공덕은 견고하여 온갖 마군이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일체사경이란 부처님 공덕의 구경을 말한다.
        7) 색계 네 정려 중의 첫 단계로서 각(신역의 尋)ㆍ관(신역의 伺)ㆍ희ㆍ낙만이 작용하는 선정이다.
        8) 내등정(심ㆍ사의 동요를 떠난 청정한 믿음)과 희ㆍ낙ㆍ등지를 본질로 하는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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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은 법대로 마음으로 항상 애호하고 즐기면서도 다시 ‘무애해탈(無礙解脫) 등의 모든 부처님의 법은 요컨대 많이 들음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법을 구하는 일체의 시기에 더욱더 정근(精勤)하게 되며, 밤낮으로 항상 즐거이 법을 듣고서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문혜’라고 한다.
        무엇을 사혜라고 하는가?
        일체의 유위법을 실상대로 사념하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른바 유위법은 무상이며, 고(苦)이며, 공(空)이며, 무아이며, 부정(不淨)해서 생각 생각에 생멸하여 오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의 근심과 슬픔과 고뇌는 증오와 애착에 의해 계박된 것이지만, 다만 탐욕과 미워함과 어리석음의 불길로 태워져서 후세에 고뇌의 큰 덩어리를 증장하더라도 실다운 자성이 없어서 마치 환화(幻化)와 같다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고 나서는
        일체 유위법에 대해 바로 염리(厭離)를 낳아 더욱더 정근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나아간다. 그리고 여래의 지혜는 사의(思議)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크나큰 세력이 있고, 그보다 능히 수승한 것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고, 안온한 크나큰 도성[大城:대각의 경지를 말함]에 능히 이르러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고뇌를 겪고 있는 중생을 능히 구제하였다고 사유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알아보고서[知見] 유
        위법이 헤아릴 수 없는 고뇌임을 관찰하면, 그 지향(志向)이 위없이 높은 대승으로 나아가 구하기를 염원하니, 이것을 일러 ‘사혜’라고 한다.
        무엇을 수혜라고 하는가?
        골관(骨觀:백골관 즉 부정관을 말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선정을 모두 ‘수혜’라고 이름한다. 즉 욕계의 불선법을 여의어서 유각유관(有覺有觀)의 이생희락(離生喜樂)만으로도 초선(初禪)9)에 들어간다.
        다시 ‘각’과 ‘관’을 멸해서 청정심 한 곳에 들면, 무각무관(無覺無觀)의 정생희락(定生喜樂)으로 제2선에 들어간다.


        9) 행사(行捨)ㆍ정념(正念)ㆍ정혜(正慧)ㆍ수락(受樂)ㆍ등지를 본질로 하는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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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희(喜)’를 여의었기 때문에 ‘사(捨)’를 행해서 마음은 안락한 지혜의 몸이 낙(樂)을 받는 걸 생각[念]하니, 모든 현성(賢聖)은 ‘능히 버림[能捨]’을 능히 설하여 항상 ‘낙’을 받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제3선에 들어간다. 다시 ‘고’를 끊고 ‘낙’을 끊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우(憂)ㆍ희(喜)를 멸하였기 때문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를 행하여 청정만을 생각함으로써 제4선10)에 들어간다.
        또한 다시 일체의 색상(色相)을 지나 일체의 대상[有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차별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변허공(無邊虛空)을 하니, 즉각 허공무색정처(虛空無色定處, 신역의 空無邊處)에 들어가 일체의 허공의 상을 지나친다. 또한 다시 가없는 식[無邊識]을 아니 즉각 무색식정처(無色識定處, 신역의 識無邊處)에 들어가 일체의 식의 상을 지나치고, 다시 무소유를 아니 즉각 무소유무색정처(無所有無色定處)에 들어가 일체의 무소유처를 지나치고, 비유상비
        무상(非有想非無想)의 안온을 아니 즉각 바로 무색비유상비무상처(비상비비상처)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에서는 다만 제법의 행(行)을 수순하기 때문에 거기에 즐거이 집착하지 않으며, 무상승(無上乘:대승)을 추구하여 가장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수혜’라고 한다.
        즉 보살은 바로 이러한 문혜ㆍ사혜ㆍ수혜에 따라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통명(通明) 삼매인 선나바라밀을 능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이 선정을 닦는 데에는 다시 열 가지의 행이 있으니,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과 공통된 것이 아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여래의 온갖 선정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선정에 탐닉하지 않으니, 물든 마음을 버리고 여의어서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온갖 신통을 갖추게 되니, 중생들의 온갖 마음의 작용을 알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온갖 마음을 알게 되니, 일체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해탈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10) 행사청정(行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비고락수(非苦樂受)ㆍ등지를 본질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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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대비를 행하게 되니, 모든 중생의 번뇌와 결(結)을 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선정과 온갖 삼매를 닦을 때에는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능히 잘 아니,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항상 자재를 획득하니, 일체의 모든 선법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그 마음이 적멸하니, 이승(二乘)의 온갖 선정과 삼매보다 수승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항상 지혜에 들게 되니, 모든 세간을 지나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다. 열 번째, 선정을 닦을 때에는 능히 정법을 흥성시키니, 삼보를 계승하고 융성시켜 단절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보살의 선정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선정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은 일체 중생의 번뇌심을 알기 위해 선정을 닦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정의 법을 닦고 쌓아서 마음이 거기에 머물도록 조성(助成)하는 것이니, 이러한 선정을 평등심에 머물게 하는 것을 일컬어 ‘정(定, sampatti:혹은 等至)’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정’은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작(無作)에서 동등한 것이다. 또한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의 동등함은 바로 중생의 동등함이며, 중생의 동등함은 바로 모든
        법의 동등함이니, 이와 같은 동등함에 들어가는 것을 일컬어 ‘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이 비록 세속의 행을 따를지라도 세속과 뒤섞이지 않으며, 세속의 여덟 가지 법11)을 버리고 일체의 결(結)을 소멸하며, 번잡함을 멀리 떠나 홀로 있는 곳[獨處]을 즐긴다. 즉 보살은 이와 같은 선정을 수행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며 세간에서 짓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또한 다시 그것은 보살이 선정을 닦아 온갖 신통(神通)과 지(智)와 방편과 혜(慧)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11) 세간이 좋아하여 따르고, 싫어하여 배척함으로써 능히 사람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것으로, 이익[利]ㆍ명예[譽]ㆍ칭찬[稱]ㆍ즐거움[樂]과 쇠망[衰]ㆍ훼손[毁]ㆍ나무람[譏]ㆍ괴로움[苦]을 말하며, 혹은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와 색ㆍ향ㆍ미ㆍ촉의 4미(微)를 말한다. 즉 사람의 몸은 4대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4대 역시 4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총칭하여 여덟 가지 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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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49] 쪽

        무엇을 일컬어 ‘신통’이라 하였으며, 무엇을 일컬어 ‘지’라고 한 것인가?
        만약 색상을 보거나, 혹은 음성을 듣거나, 혹은 다른 이의 마음을 알거나, 혹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혹은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능히 두루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신통’이라 한다.12) 혹은 색이 바로 법성(法性)임을 알고 음성이 마음의 작용임을 이해해서 성상(性相)이 적멸하고 삼세가 평등하여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허공의 상(相)과 똑같아서 멸진(滅盡)을 증득하지 못함을 안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방편’이라 하였으며, 무엇을 일컬어 ‘혜’라고 한 것인가?
        선정에 들어갈 때 대자비를 낳아 서원을 버리지 않으며, 마음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관찰하여 보리의 도량(道場)을 장엄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방편’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마음이 영원히 적멸하여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어서 모든 법의 본성이 동란(動亂)하지 않음을 사유하며,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허공과 동일하다고 보아서 장엄되어진 것(보리의 도량)이 적멸과 똑같음을 관찰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혜’라고 한다.
        이상의 행을 일컬어 보살이 선정의 ‘신통’과 ‘지’와 ‘방편’과 ‘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네 가지를 차별하여 함께 행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보살마하살은 선정을 수행할 때 그 밖의 다른 악한 마음이 없으니, 그것은 부동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선나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9.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지혜를 닦아 익힌다고 하는가?
        지혜로서 만약 자리와 이타, 그리고 양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지혜는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그리고 보살은 중생을 조복시켜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지혜를 닦는 것이다.


        12) 순서대로 천안통(멀리 떨어져 있거나 미세한 색상을 보는 것)ㆍ천이통(멀리 떨어져 있거나 미세한 소리를 듣는 것)ㆍ타심통ㆍ숙명통ㆍ누진통(漏盡通:번뇌를 모두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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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49] 쪽

        즉 지혜를 닦는 자는 일체 세간의 일을 모두 배우면서 탐ㆍ진ㆍ치를 버리며,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일체의 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이롭게 하고, 항상 그들을 구제하기를 염원해서 장차 도사(導師)가 되기를 바라며, 정도(正道)와 사도(邪道)와 선악의 과보를 능히 잘 분별하니, 이를 일러 보살이 처음으로 지혜를 닦을 때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를 닦기 때문에 무명을 멀리 여의어서 번뇌장(煩惱障)과 지혜장(智慧障)을 제거하게 되니, 이를
        일러 ‘자리’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번뇌의 조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이타’라고 하였다. 또한 자기가 닦은 위없이 높은 보리로써 온갖 중생을 교화하여 자신이 획득한 이익과 동일한 이익을 획득하게 하니, 이를 일러 ‘양자 모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혜를 닦음으로 인해 초지(初地) 내지 살바야지(薩婆若智)를 획득하게 되니,13) 이를 일러 ‘보리의 도를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는 스무 가지의 마음이 있어 점진적으로 능히 이를 건립한다.
        무엇을 스무 가지라고 한 것인가?
        마땅히 좋은 친구와 가까이하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교만을 버리고 여의어서 불방일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가르침에 수순하여 즐거이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법을 듣고 선(善)한 사유를 싫어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네 가지 범행[四梵行]을 행하여 정지(正智)를 닦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14) 부정(不淨)의 행을 관하여 그것을 싫어하고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13) 초지는 보살10지 중의 첫 번째 단계이며, 살바야지(혹은 薩伐若ㆍ薩婆若那, sarvaj:一切智)는 열 번째 단계이다. 보살의 10지에는 3승에 공통하는 10지(乾慧地ㆍ性地ㆍ八忍地ㆍ見地ㆍ簿地ㆍ離欲地ㆍ已辦地ㆍ支佛地ㆍ菩薩地ㆍ佛地)와 대승보살의 10지(歡喜地ㆍ離垢地ㆍ發光地ㆍ焰慧地ㆍ難勝地ㆍ現前地ㆍ遠行地ㆍ不動地ㆍ善慧地ㆍ法雲地)가 있는데, 여기서의 10지는 본 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볼 때 전자로 생각된다.
        14) 자ㆍ비ㆍ희ㆍ사의 4무량심을 말하며, 이러한 네 마음은 범천에게 생겨나는 행업이기 때문에 범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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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49] 쪽

        네 가지 진제(眞諦)와 열여섯 가지 성도(聖道)를 관찰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15) 12인연을 관하여 명혜(明慧)를 닦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온갖 바라밀을 듣고 그것을 닦고 쌓으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무상ㆍ고ㆍ무아를 관하여 적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을 관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음(陰:蘊의 구역어로서 5온)과 계(界:18계)와 입(入:處의 구역어로서 12처)에 허물과
        우환이 많다고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번뇌를 항복시켜 그것이 반려가 아니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온갖 선법을 지켜 그것을 자신의 반려로 삼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악법을 억제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끊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정법을 수습하여 그것을 늘리고 키우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비록 이승(二乘)을 닦을지라도 항상 그것을 버리고 여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보살장(菩薩藏)을 듣고 그것을 즐거이 봉행하려
        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자리와 이타에 수순하여 온갖 선업을 증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진실행을 수지하여 일체의 불법(佛法)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이 지혜를 수행하는 데에는 다시 열 가지의 선사유(善思惟)의 마음이 있으니, 이는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공통되지 않은 사유이다.
        무엇을 열 가지라고 하는가?
        정혜(定慧)의 근본을 분별함을 사유하며, 단(斷)ㆍ상(常)의 두 변(邊)을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고, 인연에 의해 제법이 생기하는 것을 사유하며, 중생과 아(我)와 인(人)과 수명(壽命)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사유하고,16) 삼세 중 과거ㆍ미래에 걸쳐 지속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며,


        15) 사성제와 사제의 진리성인 고제(苦諦)의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집제(集諦)의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멸제(滅諦)의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 도제(道諦)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16행상을 말하였다.
        16) 중생(sattva)ㆍ아(tman)ㆍ인(pudgala)ㆍ수명(jva)은 바로 금강경에서의 4상(想)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다 같이 경험과 윤회의 형이상학적 주체를 의미한다. 즉 자아를 지닌 중생은 현세에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재하며, 나아가 그것은 윤회의 주체(푸드가라)로서 내세로 전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개념은 유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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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49] 쪽

        발하고 행함[發行]이 없는데도 인과를 끊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법은 공한데도 선을 심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인데도 중생 제도를 그만두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고, 무원(無願)인데도 보리를 구하는 일을 여의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며, 무작(無作)인데도 과보를 받는 몸[受身]을 드러내어 버리지 않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보살에게는 다시 열두 가지의 법문에 잘 들어감[善入法門]이 있다.
        무엇을 일컬어 열두 가지라고 하는가?
        공(空) 등의 삼매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며, 온갖 선의 삼매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선의 생겨남[禪生]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온갖 신통지[通智]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무루법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며, 내관법(內觀法)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결정법(열반)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고, 일체 중생이 공적(空寂)하다고 관(觀)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대자(大慈)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일체 중생은 무아라고 관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대비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온갖 악취(惡趣)에 태어나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비업(非業)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이욕(離欲)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이욕법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고, 욕락하는 바를 버리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법락(法樂)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일체 희론의 온갖 지각[覺]을 버리는 것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방편으로서의 온갖 관찰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유위법에 허물과 우환이 많다는 생각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유위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무위법은 청정하여 멀리 여의었다는 생각에 능히 잘 들어가면서도 무위법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보살은 일체의 법문에 잘 들어감을 닦아서 즉각 삼세가 공이고 무소유임을 능히 잘 이해하니, 이러한 관찰은 삼세가 공임을 관찰하는 지혜의 힘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심으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위없이 높은 보리로 회향하였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삼세의 방편을 능히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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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49] 쪽

        또한 다시 비록 과거의 멸진한 법이나 미래의 이르지 않을 법에 대해 관찰하였을지라도 항상 선한 정진을 닦는데 게으르지 않으며, 또한 미래법이 비록 출생함이 없는 것임을 관찰하였을지라도 정진을 버리지 않고 보리로 향하기를 원하며, 또한 현재법이 비록 생각 생각에 소멸하는 것임을 관찰하였을지라도 그 마음은 망실됨이 없이 보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삼세의 방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 이미 멸했으며 미래에 아직 이르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 않으니, 이와 같이 마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고 산괴(散壞)함을 관찰하였을지라도 항상 선근(善根)을 버리지 않고 쌓아서 보리법을 돕는다.
        또한 다시 보살은 일체의 선과 불선, 아(我)와 무아, 실(實)과 부실(不實), 공(空)과 불공(不空), 세제(世諦)와 진제(眞諦), 정정(正定)과 사정(邪定), 유위와 무위, 유루와 무루, 흑법(黑法; 악법)과 백법(白法; 선법), 생사와 열반을 관찰해서 법계(法界)의 성품이 일상(一相)이자 무상(無相)이라 하듯이 이 중에 무상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법도 없고 또한 무상이라고 여길만한 어떤 법도 없다면, 이를 일컬어 일체법인(一切法印)으로 파괴
        할 수 없는 ‘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 중에는 역시 인상(印相)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진실된 지혜의 방편인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것을 배우고, 마땅히 이와 같은 것을 행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행하는 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보살마하살의 지혜를 수행하는 마음에는 행한 바가 없으니, 이는 바로 법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구족하는 것이다.

        10. 여실법문품(如實法門品)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 육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일곱 가지의 법을 여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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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는 악지식(惡知識)을 여의는 것이니, 여기서 악지식이란 이른바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한 믿음과 크나큰 욕망과 뛰어난 정진을 버리게 하고 온갖 잡행(雜行)을 쌓도록 하는 자를 말한다. 두 번째는 여색과 탐욕, 기호에 대한 욕망, 세상 사람과 익숙해서 함께 집착함을 여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릇된 지각[惡覺]을 여의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 겉모습을 관찰하면서 탐내고 애착하고 아끼고 중시해서 참으로 오래 지닐 만한 것이라고 집착해 수호함을 여
        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진에(瞋恚)와 난폭하고 방자함[暴慢]과 질투ㆍ시기를 여의는 것이니, 이는 쟁론이나 송사를 일으켜 착한 마음을 괴란(壞亂)시키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방일ㆍ교만ㆍ해태를 여의는 것이니, 이는 곧 스스로 사소한 선(善)에 우쭐대며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을 여의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외도의 논서나 세속의 글과 노래, 꾸며낸 언사를 여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가 아니라면 마땅히 찬송(讚誦)해서는 안 되는 것
        이다. 일곱 번째는 마땅히 사견과 악견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의 법은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여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외에 더 이상 불도(佛道)를 깊이 장애하는 다른 어떤 법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설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위없이 높은 보리를 신속히 획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일곱 가지의 법을 닦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의 법인가?
        첫 번째, 보살은 마땅히 선지식(善知識)과 가까이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선지식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 혹은 성문들로서 보살로 하여금 깊은 법장(法藏)인 온갖 바라밀에 능히 머물게 하는 이도 역시 보살의 선지식이다. 두 번째, 보살은 마땅히 출가(出家)와 가까이하고 응당 아란야(阿蘭若, aranya:寂靜)의 법과 가까이해야 하며, 여색이나 온갖 기호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일을 추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보살은 마땅히 ‘겉모습은 마치 분토(糞土)와 같은 것으로 다만 더러움과 냄새만이 치성할 뿐이며, 바람ㆍ추위ㆍ더위ㆍ피로서 탐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관찰해야 할 것이며, 날마다 죽음에 대해 널리 염리(厭離)할 것을 생각하면서 정근ㆍ수도해야 한다. 

          [40 / 49] 쪽

          네 번째, 보살은 마땅히 항상 화합ㆍ인내ㆍ유순ㆍ공경을 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다른 이를 부지런히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욕 중에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보살은 마땅히 정진을 닦아 쌓고 항상 참괴(慚愧)를 내어서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며, 궁핍하고 하열한 이를 불쌍히 여기며, 재앙과 괴로움을 당한 이를 보면 몸으로 그를 대신해야 한다. 여섯 번째, 보살은 마땅히 방등(方等)인 대승의 온갖 보살장[藏]을 닦아 익히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할 것이다. 일곱 번째, 보살은 마땅히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가까이하면서 닦아 익혀야 할 것이니, 그것은 이른바 실상(實相)은 일상(一相)이자 무상(無相)이라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 위없이 높은 보리를 신속하게 증득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법과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시 만약에 어떤 이가 무량의 아승기겁 동안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고 쌓아서 얻은 바가 있기 때문에 보리심을 발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이는 생사를 여의지도 못하고 보리로 향하지도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앋은 바가 있는 마음과 아울러 온갖 취득한 견해[見], 즉 음(陰)ㆍ계(界)ㆍ입(入)의 견해와 아견(我見)ㆍ인견(人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壽命見)과 자ㆍ비ㆍ희ㆍ사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등에 대한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불(佛)ㆍ법(法)ㆍ승(僧)에 대한 견해와 열반에 대한 견해이니, 이와 같은 유소득의 견해[有所得見]는 바로 집착의 마음이며, 집착을 이름하여 사견(邪見)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사견을 갖은 이는 삼계를 윤회하면서 출요(出要열반)를 영원히 여의는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 집착하는 이도 마찬가지라서 출요를 영원히 여의어서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어떤 이가 보리심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 마음이 공상(空相)임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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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것이 바로 이 마음이며, 무엇을 공상이라 하는가?
          마음[心]이란 이름하여 의식이니 바로 식음(識陰)ㆍ의입(意入)ㆍ의계(意界)를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공상이라고 함은 마음에는 마음의 상(相)도 없고 짓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마음의 상은 공(空)해서 짓는 자도 없으며 짓게 하는 자도 없다. 만약 짓는 자가 없다고 한다면 짓는 상[作相]도 없을 것이니,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요해(了解)하였다면 일체법에 대해 집착함이 없을 것이다. 나아가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온갖 선악에 대해 알지라도 과보가 없을 것이며, 수습(修習)한 ‘자(慈)’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아(我)’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수습한 ‘비(悲)’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중생’이 존재하지 않
          을 것이며, 수습한 ‘희(喜)’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수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습한 ‘사(捨)’에 대해 요해하였을지라도 ‘인(人)’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비록 보시를 행하였을지라도 시물(施物)에 대한 견해(집착)가 없을 것이며, 비록 지계를 행하였을지라도 청정한 마음에 대한 견해가 없을 것이며, 비록 인욕을 행하였을지라도 중생에 대한 견해가 없을 것이며, 비록 정진을 행하였을지라도 욕망을 여읜 마음이 없을 것이며, 비록 선정을
          행하였을지라도 악을 제거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비록 지혜를 행하였을지라도 마음에 행한 바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인연에서 모두 지혜를 낳지만, 그렇더라도 지혜에 집착하지 않으며, 지혜를 증득하지 않으며, 지혜에 대한 견해가 없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지혜를 수행하지만 닦은 바도 없고 또한 닦지 않은 바도 없다. 그럼에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6도(6바라밀)를 나타내 행하여서 내적으로 청정하다. 수행자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능히 잘 닦으면 한 찰나에 심은 선근의 복덕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고 가없으니, 백천만 억의 아승기겁으로도 그것을
          다할 수 없어서 자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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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공무상품(空無相品)

          옛날 한때 부처님께서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머물러 계셨는데, 많은 대중들과 헤아릴 수 없는 집회에 함께 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정법을 널리 선포하시면서 모든 대중들에게 이렇게 고하셨다.
          “제법은 성품이 없어서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다[無所有]는 여래의 설법은 일체의 세간이 참으로 믿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색(色)의 속박도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도 없으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속박도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도 없기 때문이다.”
          즉, 색은 무상(無相)으로서 온갖 상을 여읜 것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으로서 온갖 상을 여읜 것이며, 색은 무념(無念)으로서 온갖 생각을 여읜 것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무념으로서 온갖 생각을 여읜 것이며,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도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것을 취하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으며,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향하는 일도 없고 등지는 일도 없으며, 어두움도 없고 밝음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차안(此岸)도 없고 피안(彼岸)도 없으며, 그 중간으로 유전하는 일[中流]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속박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속박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다. 공을 무상이라고도 이름하고 무상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또한 공을 무념이라고도 이름하고 무념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
          어 ‘공’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이라는 생각 역시 공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이라고 한다. 공 속에서는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나아가 공상(空相)도 역시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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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이 만약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이 이와 같다고 안다면 즉시 취착(取著)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법인(法忍)’17)이라고 한다.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은 인(忍) 때문에 수기(授記)의 인(忍)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모든 불자(佛子)들이여, 이는 비유하자면 보살이 허공을 우러러 써서 여래의 십이부경(十二部經)을 모두 서사(書寫)한 것과 같다.18) 헤아릴 수 없는 겁을 지나 불법이 이미 멸해서 법을 구하는 이들도 보고 들은 바가 없었고 중생들은 전도되어 가없는 악을 짓게 되었을 때 다른 지방의 청정한 지혜를 지닌 자가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널리 불법을 구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허공 중에 쓰인 글자를 보고 문자의 획이 분명하여 바로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독송ㆍ수지하고 설한 바대로 행하였고 널리 분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 다시 말해 이같이 허공을 쓴 자는 허공의 글자[空字]를 알아채서 사람들이 사의(思議)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널리 전하여 수습ㆍ수지하게 함으로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계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과거세 시절 보리의 도를 구할 적에 삼십삼억 구만 팔천의 온갖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다 전륜성왕이 되어서 일체의 오락 기구로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 무리에게 공양하였지만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수기를 얻지 못하였다.


          17) 법인의 인은 인허(忍許)의 뜻으로, 즉 지금까지 믿기 어렵던 이치를 잘 받아들여 번뇌가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소승에서는 사제의 이치를 관하여 인가하는 것(苦法忍 내지 道法忍)이지만, 대승 보살도에서는 초지 혹은 7지ㆍ8지ㆍ9지의 단계에서 바로 이 같은 무상ㆍ무념ㆍ무생의 법을 인가하여 신수(信受)하는 것(이를 무생법인이라 함)을 말한다.
          18) 12부경이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성격과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숫타(sutta:契經, 석존의 가르침을 간결하게 정리한 산문체의 경전)ㆍ게야(geyya:應頌 또는 重頌, 숫타의 내용을 시로 반복한 형식)ㆍ베야카라나(veyykarana:記說, 간결한 문답형식)ㆍ가타(gth:시구의 형식)ㆍ우다나(udna:自說 또는 感興語, 감흥적으로 설한 시)ㆍ아티붓타카(itivuttaka:如是語, 게야의 특수한 형식, 혹은 本事, 불제자
          의 과거세 이야기)ㆍ자타카(jtaka:本生, 석존의 전생담)ㆍ베달라(vedalla:方廣, 중층적인 교리문답)ㆍ앗부타담마(abbutadhamma:未曾有法, 희유한 공덕에 관한 이야기)ㆍ니다나(nidna:因緣, 계율 조문의 성립 사정에 관한 이야기)ㆍ아바다나(avadna:譬喩, 인과응보와 관련된 불제자의 과거세 이야기)ㆍ우파데샤(upades´a:論議, 교리의 해석)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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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후 다시 팔만 사천억 구만의 벽지불을 만나서 역시 네 가지 일[四事]19)로 그 형체가 다하도록 공양하였으며, 그렇게 한 그 이후 다시 620만 12601분의 부처님을 만났는데, 그 때에도 모두 전륜성왕이 되어서 일체의 오락 기구를 그 형체가 다하도록 공양하였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에는 칠보(七寶)의 탑을 세워 사리(舍利)를 공양하였고, 그 후 부처님께서 출세하실 적에는 받들어 영접하면서 정법륜(正法
          輪)을 굴릴 것을 권청하였다. 이와 같이 백천만 억의 온갖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이 모든 여래께서는 다 공법(空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셨으나 이미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수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연등불(然燈佛)께서 흥기하심을 만날 수 있었으니,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자 바로 일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였으며, 이 무생법인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수기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등의 여래께서는 공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여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중생을 제도하였지만 결코 설한 바가 없고 또한 제도한 바도 없었다. 또한 모니(牟尼) 세존께서도 세간에 나오시어 공법 중에 문자가 있음을 설해서 가르침의 이익과
          기쁨을 보여 널리 수행(受行)을 얻게 하였지만 가르쳐 보인 바도 없고 수행(受行)도 역시 없었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러한 법성의 상은 다 공이라서 서사(書寫)하는 자도 공이고 알아채는 자도 공이며, 설하는 자도 공이고 이해하는 자도 역시 공이다. 그것들은 본래부터 공으로서 미래도 역시 공이고 현재도 역시 공이다. 그럼에도 모든 보살은 만선(萬善)의 방편력을 쌓았기 때문에 정근할 때 게으르지 않고 공덕의 성취가 원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되었다. 이는 실로 대단히 어렵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즉 무법(無法) 중에서 온갖 법의
          상을 설하였으며, 무득(無得) 중에서 유득(有得)의 법을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일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로서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에 의해서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뿐이지 사량(思量)으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 혹은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태우는 향[燒香], 혹은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ㆍ태우는 향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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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새로 마음을 낸 보살은 지극한 마음으로 보리를 우러러 공경하고 사랑하고 즐기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점차 능히 그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믿음[信]이라고 한 것인가?
          4제(諦)를 믿고 관찰하여 온갖 번뇌와 망견(妄見)의 결박을 제거함으로써 아라한을 증득하는 것이고, 12인연을 믿고 관찰하여 무명에 의해 일어난 온갖 행을 소멸하고 제거함으로써 벽지불을 증득하는 것이며, 4무량심과 육바라밀을 믿고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니, 이것을 신인(信忍)이라고 한다.20)
          그러나 중생은 시작도 없는 생사 중에서 상(相)을 취하는데 집착하여 법성을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먼저 자신의 오음(五陰)이 가명(假名)의 중생이라서 이 가운데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나’가 존재한다면 나는 마땅히 자재(自在)해야 하겠지만, 모든 중생은 항상 생ㆍ노ㆍ병ㆍ사에 의해 침해당하여 자재를 획득하지 못하므로 마땅히 무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아는 바로 짓는 자가 없는 것이고 짓는 자가 없음은 또한 받는 자가 없는 것이라서 법성의 청정이 여실히 상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찰하더라도 아직은 구경에 이를 수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순인(順忍)21)이라고 한다. 즉 보살은 순인을 닦
          아 믿고 나서 오래지 않아 최상의 법인(法忍:무생법인)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0) 6인(信忍ㆍ法忍ㆍ修忍ㆍ正忍ㆍ無垢忍ㆍ一切智忍)의 하나일 경우, 별교(別敎)의 보살이 10주위(住位)에서 공관을 닦아 일체법이 공적하다고 믿어 인가하는 것이며, 혹은 5인(伏忍ㆍ信忍ㆍ順忍ㆍ無生忍ㆍ寂滅忍)의 하나일 경우, 관하는 마음이 진전되어 증득할 법을 믿고 의심치 않는 초지ㆍ2지ㆍ3지의 보살위를 말한다.
          21) 5인의 세 번째 단계로서, 신인에 의해 보다 수승한 지혜를 연마하여 다음의 단계인 무생인(無生忍)의 증과(證果)에 수순하는 4ㆍ5ㆍ6지의 보살을 말하며, 혹은 10인(音響忍ㆍ順忍ㆍ無生忍ㆍ如幻忍ㆍ如焰忍ㆍ如夢忍ㆍ如響忍ㆍ如影忍ㆍ如化忍ㆍ如空忍)의 하나로서 지혜로 온갖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진리에 수순하는 것이고, 혹은 3인(音響忍ㆍ柔順忍ㆍ無生法忍)의 하나이다. 지혜의 마음은 유순하여 능히 진리에 수순하기 때문에 유순인이며, 본 논에서는 신인ㆍ
          수인ㆍ무생법인 등의 3인을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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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공덕지품(功德持品)

          보살은 무상(無相)을 닦는 마음을 구족했을지라도 마음은 일찍이 그러한 지은 업[作業]에 머무는 일이 없으며, 보살은 모든 업의 상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업을 짓는다. 즉, 선근을 닦고 보리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버리지 않으며, 모든 중생들을 위해 대비를 닦고자 하였기 때문에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참되고 미묘한 지혜를 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생사를 버리지 않으며, 가없는 중생을 남김없
          이 제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보살마하살이 깊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불자들이여, 보살은 열 가지의 법을 성취하여 위없이 높은 보리에서 끝내 물러나지 않는다.
          무엇을 일컬어 열 가지 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보살이 위없이 높은 보리의 마음을 깊이 일으켜서 중생도 발심(發心)하도록 교화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항상 즐거이 부처님을 친견하고 자신이 가진 진귀한 것으로써 보시하고 공양하여 선근을 깊이 심는 것이고, 세 번째는 법을 구하기 위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법사(法師)에게 공양하고 법을 듣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며, 네 번째는 만약 비구의 승단이 둘로 깨어져서 서로 쟁송(諍訟)을 일으키고 서로가 서로에게 과오를 범하는 것을 볼 경우
          부지런히 방편을 구하여 그들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만약 국토의 사악함이 두드러져 불법(佛法)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 부처님의 설(說)을 독송하거나 나아가 한 가지 게송이라도 독송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마음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두려워하고 고뇌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을 구호하기 위해 무외(無畏)로써 보시하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부지런히
          수행을 일으킬 때 이와 같은 따위의 방등(方等) 대승의 매우 깊고도 심오한 경법(經法)인 온갖 보살장(菩薩藏)을 구하는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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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번째는 이러한 법을 획득하고 나서 수지ㆍ독송하여 거기서 설한 바대로 행하고 설한 바대로 머무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스스로 법에 머물고 또한 능히 권유하고 인도해서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며, 열 번째는 법 가운데 들어간 후에 능히 해설해서 가르침의 이익과 즐거움을 보여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바로 이러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므로 위없이 높은 보리에서 끝내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이 경전(발보리심경)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전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니, 이른바 일체 대자비의 종자를 능히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경전은 속박되어 있는 중생을 능히 깨달음으로 인도해서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이 경전은 능히 보리로 향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 생인(生因)을 짓는 것이며, 또한 이 경전은 일체 보살의 무동(無動)의 행을 능히 성취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 경
          전은 능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호념(護念)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위없이 높은 보리를 부지런히 닦아 쌓으려는 자라면 마땅히 이와 같은 경전을 널리 유포하여 염부제(閻浮提)에서 단절되지 않게 함으로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 경전을 들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이러한 경을 듣는 자가 있다면, 그러한 모든 이들은 모두 다 커다란 불가사의 대지혜취(大智慧聚)를
          증득할 것인데, 그것의 복덕과 과보는 참으로 칭하여 헤아릴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경전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혜안(慧眼)을 능히 열어 주는 것이며, 부처님의 종자[佛種]를 상속하여 능히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고뇌의 중생을 능히 구제하는 것이며, 일체의 무명의 어리석음[癡闇]을 능히 비추는 것이고, 네 가지 마(魔)22)와 마에 의한 온갖 업[魔業]을 능히 깨뜨리는 것이며, 일체 외도의 사견을 능히 허무는 것이고,


          22) 능탈명(能奪命)ㆍ장애ㆍ요란(擾亂)ㆍ파괴 등으로도 번역된다. 인명을 해치고 좋은 일을 장애하는 것으로, 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자재천마(自在天魔) 등이 그것이다. 즉, 탐 등의 번뇌는 능히 심신을 뇌란하며, 색 등의 오온은 능히 여러 가지의 고뇌를 낳고, 죽음은 능히 사람의 목숨을 끊으며, 자재천의 마왕은 능히 인간의 착한 일을 장애하기 때문에 각각 마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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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체 번뇌의 크나큰 불을 능히 소멸하는 것이며, 인연에 의해 생기한 온갖 행을 능히 소진시키는 것이고, 간탐(慳貪)ㆍ파괴ㆍ진에ㆍ해태ㆍ난의(亂意)ㆍ우치 등의 여섯 가지 극히 위중한 병을 능히 단절하는 것이며, 업장(業障)ㆍ보장(報障)ㆍ법장(法障)ㆍ번뇌장ㆍ제견장(諸見障)ㆍ무명장(無明障)ㆍ지장(智障)ㆍ습장(習障)을 능히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요점을 간추려 말하자면 이 경전은 능히 일체의 악법을 소멸하여 남김이 없게 하는 것이며, 능히 일체의 선
          법을 타오르게 하여 더욱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으로서 이러한 경을 듣고 나서 기뻐하고 사랑하고 즐기면서 희유(稀有)의 마음을 일으키는 이가 있다면, 이러한 이는 이미 일찍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부처님들께 공양하여 깊이 선근을 심은 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경은 바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행하셨던 바이니,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이러한 경을 듣고서 마땅히 스스로 즐거워하며 크나큰 좋은 이익[善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베끼고 독송하는 자가 있다면, 이러한 이가 획득하는 복의 과보는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경의 소연(所緣)이 가없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대서원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일체의 중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위없이 높은 보리를 장엄하기 때문이니, 획득된 복의 과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한량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능히 그 뜻[義趣]을 알아서 설한 대로 수행한다면, 그 복의 과보는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아승기겁 동안 다함없는 지혜로 설한다 해도 역시 능히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법사가 이 경을 설하였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경을 설한 곳에 탑을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진실한 정법이 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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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경이 국토ㆍ성읍(城邑)ㆍ취락ㆍ사묘(寺廟)ㆍ정사(精舍)에 따라 존재하는 경우,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속에 바로 법신이 있으리라. 혹은 어떤 사람이 향화ㆍ기락(伎樂)ㆍ현회(懸繪, 그림을 내거는 것)ㆍ번기[幡]ㆍ일산ㆍ가패(歌唄:노래)로써 공양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공경하였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 사람은 이미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받았을 터인데 하물며 경을 구족하게 수지한 자이겠는가? 이 모든 이들은 공덕과 지혜의 장엄을 성취하여 미래
          세에 마땅히 수기를 획득할 것이며, 결정코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