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1권
석혜교(釋慧皎) 지음
추만호 번역
1. 역경(譯經) ①
1) 섭마등(攝摩騰)
섭마등은 본래 중천축(中天竺)1)국 사람이다. 풍채 있는 거동이 훌륭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경(經)을 잘 알았다. 항상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일을 맡았다. 언제인가 천축국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에 가서 『금광명경(金光明經)』2)을 강의한 적이 있다. 때마침 적국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섭마등이 말하였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 경을 강설하면, 지신(地神)의 보살핌에 힘입어 머무는 곳이 안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싸움이 벌어지려 하니 이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 서원하고 몸소 가서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내 두 나라가 서로 즐거워하고, 섭마등도 이로 말미암아 지위가 높이 올라갔다.
1) 인도를 가리키는 말. 인더스 평원과 강물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를 한 신두(Sindhu, 물·큰 바다라는 뜻)라는 말이 이 강과 이 지방의 이름이 되고, 이것을 중국에서 신두(辛頭) 또는 천두(天頭) 등으로 음역하였다. 이것이 차차 변하여 한나라 때부터 천축(天竺)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2)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신상보살을 위하여 부처님의 수명이 한량없음을, 견뢰지신(堅牢地神)을 위하여 찬탄하는 게송을, 그 밖에 사천왕·대변천신(大辯天神)·공덕천(功德天) 등을 위하여 이 경이 미묘하여 여러 경의 왕인 까닭을 말하고 있다. 옛적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미묘한 경전으로 존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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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영평(永平) 연간(58~75) 어느 날 밤에 명제(明帝)가 금빛 나는 사람[金人]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꿈꾼 바를 풀이하였다. 통인(通人)3) 부의(傅毅)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에 서역에는 부처[佛]라는 신(神)이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꿈꾸신 바는 아마도 필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곧 낭중(郞中) 채음(蔡愔)과 박사 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 등을 보내 천축국으로 가서 불법(佛法)을 찾도록 하였다. 채음 등은 그곳에서 섭마등을 만나보고 한(漢)나라로 갈 것을 요청하였다. 섭마등은 불법을 널리 펼 것을 굳게 마음먹은 터라, 피로함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고비사막 건너기를 무릅써서 낙양에 이르렀다.
명제는 후한 상을 내리고 접대를 잘해 성의 서쪽 문 밖에 정사(精舍)를 세워 거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 땅에 사문(沙門)이 있게 된 시초였다. 그러나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라 아직 믿어 귀의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깊은 깨달음을 쌓아두기만 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펼칠 곳이 없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기(記)에서 말한다.
“섭마등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한 권을 번역하여 처음에는 난대(蘭臺) 석실(石室) 열네 번째 칸 안에 봉하여 두었다. 섭마등이 머무른 곳은 오늘날 낙양성 서쪽 옹문(雍門) 밖에 있는 백마사(白馬寺)이다.”
전하는 말에 이른다.
“일찍이 외국의 국왕이 여러 절들을 훼손하고 무너뜨릴 적에 초제사(招提寺)4)만이 미처 훼손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흰 말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피 울부짖었다. 즉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곧바로 여러 절을 무너
3) 학식(學識)이 깊고 넓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4) 범어로는 Caturdesa라고 한다. 여러 곳에서 모여 오는 스님들이 쉬어가도록 마련한 절이다. 초(招)는 원래 척(拓)이던 것이 쓰는 이의 잘못으로 언제인지 모르게 초(招)로 되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상권에 의하면 인도와 서역에 초제(招提)가 있고, 중국에서는 낙양의 백마사가 초제사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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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리는 일을 멈추었다. 이 일로 인하여 ‘초제’라는 절 이름을 고쳐 ‘백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절들이 이름을 지을 때에 대부분 그것을 본보기로 취한다.”
2) 축법란(竺法蘭)
축법란도 역시 중천축국 사람이다. 경론(經論) 수만 장을 외워 천축국 학자들의 스승이라고 자부하였다. 당시 채음 일행이 그 나라에 도착하고 난 뒤,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돌아다니며 교화[遊化]할 것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서로 따라서 한나라에 왔다. 그 때 축법란에게 배우던 무리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고 막자, 그는 샛길로 빠져나가 이르렀다.
낙양에 도착한 이후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머물렀다. 얼마 지나 중국말을 잘하자, 채음이 서역에서 가져 온 불경에서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불본생경(佛本生經)』·『법해장경(法海藏經)』·『불본행경(佛本行經)』·『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다섯 부(部)를 번역하였다.
도적의 난리통에 도읍을 옮기느라 네 부는 없어져서 강좌(江左)에 전하지 않는다. 오직 『사십이장경』만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이천여 글자 가량이 된다. 중국 땅에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이것을 시초로 삼는다.
또 채음은 서역에서 석가께서 기대어 계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얻었다. 이것은 우전왕(優田王)5)의 전단상사(旃檀像師)가 그린 네 번째 작품이다. 낙양에 이르자 명제(明帝)는 즉시 화공으로 하여금 베껴 그려서 청량대(淸凉臺)와 현절릉(顯節陵)에 걸어 두었다. 원래의 상(像)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예전에 한무제가 곤명지(昆明池)6)를 파다가 바닥에서 검은 재[黑灰]를 얻었다. 이것에 대하여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었더니 동방삭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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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알지 못하니, 서역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축법란이 온 후에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축법란이 말하였다.
“세계가 종말을 맞을 때에 겁화(劫火)7)가 훨훨 불탑니다. 이 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동방삭의 말이 증명되자 믿는 자들이 더욱 늘었다. 후에 축법란이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5) 범어로는 Udayana이다. 옛날 석존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을 하셨는데, 구섬미국(拘睒彌國)의 우전왕이 그 일을 사모하여 석존의 모습을 붉은 전단목(旃檀木)에 새겼다. 그 일은 『서역기(西域記)』에 실려 있다.
6) 한 무제가 신독국(身毒國: 옛 인도의 음역으로 천축국을 말한다)과 교통하고자 하였으나 월휴(越雟)와 곤명(昆明)의 방해를 받았다. 이에 곤명의 전지(滇池)를 본떠서 장안(長安) 근교에 땅을 파서 곤명지를 만들고 수전(水戰)을 준비하였다. 호수의 주위가 40리요, 너비가 332경(頃)이다.
7) 대삼재(大三災)의 하나. 세계가 괴멸하는 괴겁(壞劫) 때에 일어나는 큰 화재로 이 때에 일곱 개의 해가 하늘 위에 나타나 초선천(初禪天)까지는 모두 이 화재로 불탄다고 한다.
3) 안청(安淸)
안청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안식국(安息國)8) 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게다가 총명하고 민첩하게 공부하며 애써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외국의 전적(典籍) 및 칠요(七曜)9)·오행(五行)·의방(醫方)·이술(異術)과 날짐승이나 들짐승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안세고가 길을 가다가 한 떼의 제비를 보고는 문득 같이 가던 이에게 말하였다.
“제비가 ‘반드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지저귑니다.”
조금 있다가 과연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므로 빼어나게 남다르다는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에 퍼졌다.
안세고는 출가하기 전에도 계율을 받드는 것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인생의 괴로움과 헛됨[空]을 깊이 깨닫고, 걸림돌이 되는 육체를 꺼려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상복을 벗은 뒤에 마침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그는 경장(經藏)을 널리 알았다. 특히 아비담학(阿毘曇學)10)에 정통하고
8) 페르시아 지방을 말한다.
9) 일(日)·월(月)·수(水)·금(金)·화(火)·목(木)·토성(土星)의 운행에 대한 학문.
10)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중의 하나인 논장(論藏)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존재의 진실상(眞實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비담(毘曇)·아비달마(阿鼻達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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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禪經)11)을 깨달아 간략하게 그 미묘함의 끝까지 다 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를 폈다. 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이에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옮겼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음지입경(陰持入經)』·대(大)·소(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등이 그것이다.
과거 외국의 삼장(三藏)13)인 중호(衆護)가 경의 요점을 찬술하여 27장(章)을 지었다. 안세고는 여기에서 7장을 뽑아 한문으로 번역해 냈다. 바로 『도지경(道地經)』이 이것이다.
안세고가 앞뒤로 낸 경론(經論)은 모두 39부(部)이다. 이치를 밝게 분석하고 문자를 참으로 올바르게 썼다. 설명을 잘하면서도 화려한 데로 흐르지 않고, 표현이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았다. 이는 무릇 읽는 자들이 부지런히 힘쓰면서도 싫증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안세고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깊이 더듬어 저절로 인연의 업보를 알았다. 세상에서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신령한 자취가 많았다. 어느 때인가 안세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전생에도 이미 출가하였다. 그 때 함께 공부하던 벗 가운데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있었다. 걸식하러 다니다가 마뜩치 않은 시주(施主)를 만나면 그 때마다 번번이 원한을 품었다. 내가 자주 꾸짖고 타일렀지만 끝내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월이 20여 년이 흐른 뒤 벗과 이별을 하며, ‘나는 광주(廣州)
11) 심신을 안정시키고 생각을 정지시켜 진실한 지혜의 움직임을 얻는 것을 설하는 경전을 말한다.
12) 재위 기간은 147년부터 167년에 이른다.
13) 경·율·논에 통달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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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서 전생[宿世]의 인연을 끝마치려 한다. 그대는 경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악한 몸을 받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를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광주에 이르니 도적 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 길에서 마주친 한 소년이 손에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며 말하기를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에게 숙명적인 빚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서 가졌던 생각이다’ 하고는, 목을 늘이고 칼을 받아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끝내 도적은 나를 죽이고 말았다.
길을 가득 메워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은 돌아와 안식국왕의 태자가 된 것이니 이것이 지금의 이 몸인 것이다.”
안세고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면서 경을 널리 펼치는 일을 마쳤다. 영제(靈帝) 말엽에 관락(關洛: 關中·洛陽)이 몹시 어지러웠다. 이에 강남에 법을 전하려고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산(廬山)14)을 지나면서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벗을 제도해야만 한다.”
걸어 공정호(䢼亭湖)15)의 사당에 이르렀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위엄서린 신령[靈威]이 있었다.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사람들이 지체하여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사당 신령의 대나무[神竹]를 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처 허락을 받기 전에 마음대로 가져갔다. 배가 즉시 뒤집혀서 가라앉고 대나무[竹]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꺼려하여, 신령의 그림자만 비쳐도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함께 가던 삼십여 척의 배가 이 사당에 희생을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령이 내려와 축관의 입을 빌려 말하였다.
14)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남쪽에 있다.
15) 여산(廬山) 동쪽에 위치한 파양호나 동북방에 있는 원호 또는 용호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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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에 있는 사문을 어서 모셔 오라.”
선객들이 모두 크게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신령은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내가 전생에 외국에서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웠을 때, 곧잘 보시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성내어 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공정호의 사당신이 되어 주변 천 리를 제가 다스립니다. 예전에 보시한 공덕으로 진귀한 보물이 몹시 풍부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을 내던 성품 때문에 이처럼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벗을 만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수명을 곧 마칩니다만 보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큽니다. 만약 여기에서 죽으면 강호를 더럽히므로 산서(山西)의 못으로 가려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내게 있는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로 불법을 세우고 탑을 만들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제도하러 여기까지 왔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신령이 말하였다.
“몹시 보기 흉한 모습이라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까봐 그렇습니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다지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리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길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이무기였다. 그 꼬리가 안세고의 무릎까지 이르렀다. 안세고가 그를 향해 범어(梵語)로 몇 마디 나누고 몇 수 범패(梵唄)로 찬탄하였다. 이무기는 슬픔의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 비단과 보물을 거두어 이별하고 떠났다.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자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어 산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예장(豫章)에 당도하였다. 곧장 공정호의 사당에서 가지고 온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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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으로 동사(東寺)를 세웠다. 안세고가 떠나간 후에 신령은 바로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랐다. 안세고 앞에서 길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서 주원(呪願)을 받고는 문득 사라졌다.
안세고는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있던 소년이 바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인데, 흉한 모습에서 벗어났구려.”
이로부터 사당의 신령은 사라지고 다시는 영험한 일이 없었다. 뒤에 사람들이 산서(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에 이르렀다. 지금의 심양군(潯陽郡)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는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로 가서 전생[前世]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 때의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안세고는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의 인과에 얽힌 일을 말하였다. 아울러 숙명의 인연을 들려주고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회계(會稽) 땅에 가서 그것을 다하려고 합니다.”
광주의 이 사람은 안세고가 비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이 환히 풀려서 이해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거슬러 올라가 뉘우치고는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시장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장 안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서로 치고 받는 자들이 잘못 주먹을 휘둘러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주 사람은 연거푸 두 가지 보응을 경험하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았다. 아울러 사연을 다 갖추어 이야기하니, 멀거나 가깝거나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비통해 마지않았다. 삼세(三世)에 걸친 인연이 징험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안세고는 왕족이면서 서역에서 온 손님이라서 모두 안후(安侯)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호칭한다.
천축국은 자칭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라 하고 말을 천어(天語)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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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는 아주 달라서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는다. 안세고 전후로 나온 번역들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안세고가 번역한 것만이 여러 번역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도안(道安)은 ‘경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밝은 덕을 지닌 분들께서도 다 같이 이처럼 찬탄하고 사모하신 것이다.
내가 여러 기록을 찾아보니, 안세고의 일을 기재하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고 빠져 있기도 하다. 아마도 권적(權迹)16)을 드러내거나 숨기기도 하고, 응하거나 응하지 않던 것[應廢]의 실마리가 너무 많기[多端] 때문이다. 간혹 전달하는 자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서로 내용이 어긋났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가지 차이를 함께 나열한다면, 그런 대로 논의를 할 만할 것이다.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17)에서는 말한다.
“안세고(安世高)는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서 영제(靈帝) 건녕(建寧) 연간(168~171)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에 30여 부의 경을 번역해 냈다.”
또 『별전(別傳)』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280~289) 말년에 안후(安侯)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다. 상원(桑垣)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여 냈다. 이윽고 함 하나를 봉하여 절에 두며 이르기를, ‘4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열어 보시오’라고 하였다.
오(吳)나라 말기에 양주(楊州)로 가서 사람을 시켜 물건 한 상자를 팔아 노비를 한 사람 샀다. 그리고 복선(福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지식(善知識)18)이다’라고 하였다.
16) 절대적 본체인 본지불(本地佛)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자취를 보인 것.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일부러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화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함.
17) 여기에서의 『경록(經錄)』은 『경록중경(經錄衆經)』의 준말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18)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설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훌륭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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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노비를 데리고 예장(豫章)으로 가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을 제도하고, 신령을 위해 절을 세우는 일을 마쳤다. 복선이 칼로 안후의 늑골을 찌르니,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상원 사람들이 이에 그가 봉한 함을 여니 나뭇결이 저절로 글자를 이루기를, ‘나의 도를 높일 사람은 거사(居士) 진혜(陳慧)요, 『선경(禪經)』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僧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이 바로 4년째 되는 날이다.”
또 유중옹(庾仲雍)의 『형주기(荊州記)』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초에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문이 공정호 사당 신령을 제도하여 재물을 얻었다. 형성(荊城)의 동남쪽 모퉁이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
송나라 임천(臨川) 강왕(康王)의 『선험기(宣驗記)』에서는 말한다.
“이무기[蟒]가 오(吳)나라 말에 죽었다.”
담종(曇宗)의 『탑사기(塔寺記)』에서는 말한다.
“단양(丹陽) 와관사(瓦官寺)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사문 혜력(慧力)이 지은 것이다. 후에 사문 안세고가 공정호(䢼亭湖) 사당의 보물로 수리하였다.”
그러나 도안(道安) 법사는 여러 경을 교열하고 나서 번역한 경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에서부터 진(晋)나라 태강(太康) 말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140여 년이 된다. 만약 안세고가 장수하였다면 혹 이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강승회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주석한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이 경은 안세고가 낸 것이지만,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 남양(南陽)의 한림(韓林)과 영천(穎川)의 문업(文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란 사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현인(賢人)은 독실하고 빈틈없이 도를 믿었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진혜(陳慧)의 뜻으로 미루어 나는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승회는 진(晋)나라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이미 “이 경은 나온 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또 안세고가 봉했던 상자에 나타난 글자에도 “내 도를 높일 사람은 진혜(陳慧)요, 『선경』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이다”라고 하였다.
『안반수의경』에서 분명히 한 바는 선업(禪業)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봉함의 기록이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조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바야흐로 불도(佛道)를 전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안세고가 강승회와 더불어 세상을 함께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또 『별전(別傳)』에서는 스스로 말한다.
“『선경(禪經)』을 전할 이는 비구 승회이다.”
승회는 이미 태강 초에 죽었다. 그러니 어찌 태강 말에 안후 도인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앞뒤의 말이 스스로 모순되거늘, 한 책에서 진(晋)나라 초(初)를 잘못 가리킨 것을 그대로 좇았다. 이로부터 후세의 여러 작자들이, 혹은 태강(太康)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吳)나라 말기라고도 하여 부화뇌동해서 덩달아 다투니,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진(晋)나라 초라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도 『담종기(曇宗記)』에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안세고가 바야흐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잘못된 설이 지나쳐도 너무나 동떨어졌다.
4) 지루가참(支樓迦讖)
지루가참은 바로 지참(支讖)이라고도 한다. 본시 월지(月支)19) 사람이다. 행실이 순수하고 깊이가 있으며, 타고난 성품이 막힘 없이 툭 터지고 민첩하였다. 계율을 받아 지키는데 매우 정성스러워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경들을 암송하고, 불법을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한나라 영제(靈帝, 167~189) 때에 낙양에 노닐다가 광화(光和)20)와 중평
19) 인도 북서방에 있는 나라이다.
20) 후한(後漢) 178~1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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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平)21) 사이에 범문(梵文)을 옮겨 번역하여 『반야도행경(般若道行經)』·『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수능엄경(首楞嚴經)』 세 경을 냈다. 또한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보적경(寶積經)』 등 모두 십여 부의 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기록한 것이 없어졌다.
도안(道安)은 예와 이제의 것을 교정(校定)하고 문체(文體)를 정밀하게 살피고 나서 말하였다.
“지루가참이 낸 것인 듯하다. 그가 번역한 이러한 여러 경들은 모두 본래의 뜻을 깊이 터득하여 쓸데없이 수식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루가참은 불법의 요점을 잘 베풀어 도를 널리 전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축불삭(竺佛朔)
당시에 천축국의 사문(沙門) 축불삭이 있었다. 그도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도행경(道行經)』을 가지고 낙양으로 가서 곧바로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당시에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 뜻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용을 꾸미지 않고 바탕을 보존하여 경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다.
축불삭은 또한 광화(光和) 2년(179)에 낙양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번역했다. 지루가참이 말을 옮기고, 하남(河南)과 낙양의 맹복(孟福)과 장련(張蓮)이 붓으로 받아썼다.
∙안현(安玄)
또한 당시에 우바새(優婆塞) 안현(安玄)이 있었으니 안식국 사람이다. 성품이 곧고 깨끗하며 이치에 깊이 잠겼다. 널리 여러 경들을 외우고, 훤히 익힌 바가 많았다.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말에 낙양에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공(功)이 있기에 기도위(騎都尉)라고 부른다.
그의 성품은 텅 비어 조용하고 온순하고 공손하였다. 항상 불법을 일삼는
21) 후한 184~1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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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점차 중국말을 알자 경전을 펴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항상 사문들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도위(都尉)라고 부른다.
안현은 사문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했다. 안현은 입으로 범문(梵文)을 번역하고, 엄불조가 붓으로 받아썼다. 이치가 맞고 음이 정확하여 경의 미묘한 뜻을 다하여, 그 뛰어난 문학이 아름다워서 후대가 이어받았다.
∙엄불조(嚴佛調)
엄불조는 본래 임회(臨淮) 사람이다. 열두 살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서는 안후(安候)·도위(都尉)·엄불조(嚴佛調) 세 사람이 옮겨 번역한 것을 칭찬하여, 그들의 뒤를 ‘이어받기가 어렵다’는 ‘난계(難繼)’라고 부른다.
엄불조는 또한 「십혜장구(十慧章句)」를 지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도안(道安)은 엄불조가 경을 번역한 것을 극찬하여 말한다.
“책 전체가 분명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교묘하다.”
∙지요(支曜)·강거(康巨)·강맹상(康孟詳)
또한 사문 지요·강거·강맹상 등은 모두 한나라 영제(靈帝, 168~189)와 헌제(獻帝, 190~220) 연간에, 슬기로운 배움이 있다고 이름이 나서 서울 낙양(洛陽)까지 알려졌다. 지요는 『성구정의경(成具定意經)』·『소본기경(小本起經)』 등을 번역하고, 강거는 『문지옥사경(問地獄事經)』을 번역하였다. 모두 말이 올바르고 이치가 있으며 꾸미지 않았다.
강맹상은 『중본기경(中本起經)』과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을 번역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담과(曇果)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자, 강맹상이 축대력(竺大力)과 함께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다. 도안은 말한다.
“강맹상이 번역한 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그윽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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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담가가라(曇柯迦羅)
담가가라는 중국말로 법시(法時)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크게 부유하고 항상 청정한 복[梵福]을 닦았다. 담가가라는 어려서부터 재주 있고 슬기로우며 바탕이 남보다 뛰어났다.
책을 한 번 읽기만 해도 글의 뜻을 환히 깨달았다. 『사위타론(四圍陀論)』을 뛰어나게 배우고, 풍운(風雲)·성수(星宿)·도참(圖讖)·운변(運變)을 두루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 문장의 이치가 다 나의 가슴 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나이 25세에 이르러 어느 승방(僧坊)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법승(法勝)22)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았다. 그것을 가져다 보아도 아득하여 도무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근하게 거듭 살펴보았으나 더욱 어두컴컴하기만 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배움을 쌓은 지 여러 해가 흘렀다. 분전(墳典)23)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경서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였다. 글의 뜻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거듭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불서(佛書)를 보니, 문득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나왔다. 반드시 이치를 깊이 더듬어서 따로 정밀하게 살펴봐야만 하겠다.”
이에 책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어떤 비구에게 대략 해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인과를 깊이 깨닫고, 삼세를 매우 잘 이해하였다. 비로소 부처의 가르침이 넓고도 넓어 세속의 책들이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세상의 영화로움을 버리고 출가하여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대승·소승의 경과 여러 비니(毘尼)를 읽고, 항상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다.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
22) 인도 사람 달마시리(達摩尸利). 2세기의 학승(學僧)으로 유부(有部)의 교의(敎義)를 넓혀 『아비담심론』 4권을 지었다.
23)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전적(典籍)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오래된 옛 고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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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위(魏)나라 가평(嘉平) 연간(249~254)에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위나라에는 불법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릇되게 바뀌어져, 뭇 승려들이 아직도 삼보에게 귀의하는 계[歸戒]를 받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깎은 것이 세속과 다를 뿐이었다. 설령 재참(齋懺)24)을 하더라도, 섬김에 있어서는 유교 의식인 사당에 지내는 제사[祠祀]를 본받았다.
담가가라가 오고 난 뒤부터 부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졌다. 당시 여러 승려들이 담가가라에게 계율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담가가라는 율부의 제도에 대한 자세한 말씀이 번잡하고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이 번창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받들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승기계심(僧祇戒心)」을 번역하여 조석(朝夕)의 의례를 갖추었다. 그리고 다시 인도 승려[梵僧]에게 청하여 갈마법(羯磨法)을 세워 계를 받으니, 중국의 계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후에 담가가라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강승개(康僧鎧)
당시에 또한 외국의 사문으로 강승개가 있었다. 역시 가평(嘉平, 249~254) 말에 낙양에 와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등 4부의 경을 번역했다.
∙담제(曇帝)
또한 안식국의 사문 담제 역시 계율의 학문[律學]을 잘하였다. 위(魏)나라 정원(正元, 254~255) 중에 낙양으로 와서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를 번역했다.
∙백연(帛延)
또 사문 백연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역시 재주 있고 총명하여 깊은 이해가 있었다. 위(魏)나라 감로(甘露, 256~260) 중에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6부의 경을 번역했다. 그 후에 돌아가신 곳은 알지
24) 본 뜻은 신·구·의의 삼업을 경계하여 악업을 짓지 아니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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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한다.
6) 강승회(康僧會)
강승회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으로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교지(交趾)로 옮겨갔다. 강승회가 십여 세 무렵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극한 효자였다. 상복을 벗고서야 출가하여 매우 엄격하게 힘껏 수행하였다.
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뜻을 돈독히 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여 환히 삼장(三藏)을 이해하였다. 널리 육경(六經)을 보고, 천문(天文)과 도위(圖緯)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요점을 잘 분별하여 자못 글을 잘 지었다.
당시 손권이 이미 강남을 지배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아직 행해지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우바새인 지겸(支謙)이 있었다. 자는 공명(恭明)이고, 일명 월(越)이라고 하였다. 본래 월지의 사람으로 한나라에 와서 노닐었다. 과거 한나라 환제(桓帝)에서 영제(靈帝)에 이르는 기간에 지참(支讖)이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또 지량(支亮)이라는 인물은 자(字)가 기명(紀明)으로, 지참에게 배움을 받았다. 지겸은 또한 지량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널리 경서를 읽어 정밀하게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간의 기예(伎藝)를 익힌 것이 많았으며 다른 나라의 글도 두루 배워 여섯 나라의 말에 뛰어났다.
그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몸이 마르고 거무튀튀하였다. 눈은 흰자위가 많고 눈동자는 누런빛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랑(支郞)은 누런 눈동자에 몸이 비록 호리호리하지만 꾀주머니[智囊]이다.”
한나라 헌제(獻帝, 190~220) 말에 난리가 일어나자 오나라로 피하였다. 손권(孫權)이 그가 재주가 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만나보고 기뻐하였다. 벼슬을 주어 박사(博士)로 삼아 동궁(東宮)을 돕고 이끌도록 하였다. 위요(韋曜)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보탬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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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한나라 바깥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지(吳志)』에는 실리지 않았다.
지겸은 불법의 큰 가르침이 행해지고는 있지만, 경들이 대부분 범문이라서 아직 번역이 미진하다고 여겼다. 외국어를 아주 잘하므로 여러 본들을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오나라 황무(黃武) 원년(元年, 222)에서 건흥(建興, 252~253) 중에 이르기까지 『유마경(維摩經)』·『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법구경(法句經)』·『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마흔아홉 가지의 경을 번역해냈다.
곡진하게 성스러운 뜻을 실었으면서도 말의 뜻이 운치가 있고 우아하였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하여, 「보리련구(菩提連句)」와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지었다. 아울러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당시 오나라에 처음으로 불교의 큰 법이 퍼졌으나, 풍속의 교화[風化]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였다. 강승회는 강남[江左]25)에 불도를 떨치어 탑과 사찰[圖寺]을 성하게 일으키고자 하여,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떠돌아다녔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8)에 처음 건업(建鄴)26)에 이르러 띳집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도를 행하였다. 당시 오나라에서는 사문을 처음 보았다. 이 때문에 그 모습만 보고 도(道)는 알지 못하여 이상하게 속이는 짓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담당 관리가 손권(孫權)에게 아뢰었다.
“어떤 오랑캐가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자칭 사문이라 합니다. 얼굴이나 복장이 보통과는 다릅니다. 이 일을 조사해봐야 하겠습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본 신(神)을 부처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섬기는 바가 어찌 옛날의 그것이 아니겠는가?”
즉시 강승회를 불러 꾸짖어 물었다.
25) 강좌(江左)는 양자강의 동쪽 지방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지역을 말한다.
26) 오나라의 수도로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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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영험(靈驗)이 있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느덧 천 년이 흘렀습니다. 유골인 사리는 신비하게 빛을 발하여 사방을 비춥니다. 옛날 아육왕(阿育王)27)은 탑을 세운 것이 팔만 사천 개입니다. 대개 탑과 절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께서 남기신 교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장되고 허황하다고 여겨서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마땅히 탑사를 세우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되고 망령된 것이라면 나라에서 정한 형벌대로 하리라.”
이에 강승회는 이레 동안의 기일을 청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법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는 모두 고요한 방에서 깨끗하게 재계하면서, 구리로 만든 병을 상에 놓고 향을 피워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이레의 기한이 끝났지만 고요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다시 이레 동안의 기간을 더 얻었으나 역시 전과 같았다. 손권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된 일이라 하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로 이레의 기간을 청하였다. 손권은 다시 한 번 특별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는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분이 남기신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는가?’라 하셨다.28) 법의 영험이야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27) B.C. 2세기 인도 마가다국 아쇼카왕의 한자명(漢字名)이다. 불교를 보호하고 융성하게 하였다.
28)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이 내용은 광(匡)땅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陽虎)라는 인물로 착각하여 해치려고 하던 상황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여기서 문(文)은 도(道)가 드러난 것을 뜻하는 것으로 공자가 스스로를 낮추어 도라고 하지 않고 문이라고 한 것이다. 문왕(文王)의 도(道)가 자신에게 전해졌으니, 이는 하늘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은 것이며 하늘이 없애려고 하지 않았으니, 광땅의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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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다면, 왕이 벌을 내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마땅히 죽을 각오로 바라야만 할 것이다.”
21일 저녁 무렵에도 보이는 바가 없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5경(更)29)이 되자 문득 병 속에서 달그랑 달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승회가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사리가 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모두 모여 바라보았다.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사리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어지고 말았다. 손권은 몹시 두려워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상서로다.”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발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손권은 명령을 내려 그것을 시험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맹서하여 말하였다.
“진리의 구름이 사방을 덮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에 우러러 젖게 됩니다. 원하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시어, 널리 위엄 서린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하였다. 쇠로 된 다듬잇돌은 움푹 패이고,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고 즉시 탑사(塔寺)를 세웠다. 처음으로 절을 세웠기 때문에 건초사(建初寺)라고 부른다. 그곳의 땅 이름은 불타리(佛陀里)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강남에서 불법이 마침내 일어났다.
그 후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정사를 맡자 법령이 가혹해졌다. 부정(不正)한 제사를 모두 없애 버렸으며, 절도 아울러 헐어 없애고자 하였다. 손호가 말하였다.
29)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로 곧 날이 밝을 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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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들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그 가르침이 참되고 올곧아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서로 맞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도를 받들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었다.
“부처의 위엄 서린 힘은 여타의 다른 신(神)과는 다릅니다.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께서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가볍게 여겨서 훼손한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손호는 장욱(張昱)을 절로 보내어 강승회를 꾸짖도록 하였다.
장욱은 본래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지라, 종횡무진으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강승회는 임기응변하여 대답을 펼쳐 나갔다. 말의 이치가 창날 솟구치듯 날카롭게 빼어나 막힘이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장욱이 그곳에서 물러나 돌아갈 적에 강승회가 문까지 배웅을 하였다. 마침 절 옆에 부정한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의 신묘한 가르침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어떤 까닭으로 이러한 무리들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치지 못하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뇌성벽력이 산을 부술 정도로 요란하다 할지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치가 통하면 만 리 밖에서도 응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것이 막혀 있다면, 간장과 쓸개처럼 아무리 가까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肝膽楚越]30)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욱은 돌아와 칭찬하였다.
“강승회의 재주와 명석함은 제가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왕께서 친히 살펴보소서.”
손호는 크게 조정의 인재를 모아 놓고, 마차를 보내어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30)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있는 말.
강승회가 자리에 앉자 손호가 물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밝히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이란 무슨 뜻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무릇 훌륭한 임금이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가르치면, 붉은 까마귀가 날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납니다. 어진 덕으로 만물을 기르면, 예천(醴泉)이 솟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선한 행위를 하면 상서로운 일이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면 또한 그와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귀신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드러난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積善餘慶]’라고 합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복을 구하는 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네[求福不回]’31)라고 읊습니다.
비록 유가 경전의 바른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부처의 가르침에서도 나오는 사리 분명한 교훈입니다.”
손호가 다시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주공(周公)이나 공자가 이미 밝히신 것이니, 불교의 쓰임새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주공이나 공자의 말씀은 대략 우리와 가까운 자취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윽함과 미묘함이 몹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행하면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길이 극락세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을 권하고 악함을 막고자 밝혔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31) 『시경』 「대아(大雅)의 한록(旱麓)」편에 있는 시구로 군왕의 복록(福祿)을 축복하는 매우 경사스런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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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는 그 때 그 말을 꺾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호가 불교의 바른 법을 들었다고는 하나, 어리석고 포악한 성질 때문에 그 잔학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숙위병(宿衛兵)들을 후궁(後宮)으로 보내어 정원을 수리하였다. 이 때 땅 속에서 높이가 몇 자[數尺]나 되는 금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고는 손호에게 바쳤다.
손호는 불상의 깨끗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어 더러운 오물을 끼얹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온몸에 큰 종기가 생겼다. 특히 음부(陰部) 부분이 더욱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쳐서 말하였다.
“위대한 신을 범했기 때문이옵니다.”
즉시 여러 사당에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궁녀 중에 이전부터 불법을 받드는 자가 있었다. 궁녀가 손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절에 나아가 복을 빌어 보시지 않을는지요?”
손호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부처라는 신(神)이 그렇게 위대한가?”
그러자 궁녀가 말하였다.
“부처는 위대한 신이십니다.”
드디어 손호는 마음속으로 궁녀가 말한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궁녀는 즉시 불상을 가져다가 전(殿) 위에 모셔 두었다. 향내나는 더운물로 수십 번을 씻고 나서, 향을 사르고 참회하였다. 손호는 정성스럽게 베갯머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상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신을 절로 보내 도인(道人)을 찾아, 그에게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강승회가 그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손호는 예를 갖추어 죄와 복을 얻는 연유에 대하여 물었다. 강승회는 그를 위하여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였다. 그 말이 매우 정밀하고 요점이 있었다.
손호는 원래 뛰어난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서 사문의 계율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율의 내용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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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운 것이라서, 사문(沙門)이 아닌 자에게는 가벼이 알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본업(本業) 백삼십오원(百三十五願)을 취하였다. 그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중생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이백오십사(二百五十事)로 분류하였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크고도 넓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착한 마음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곧장 강승회에게 나아갔다. 5계(戒)32)를 받고 나서 열흘 만에 질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에 강승회가 머무는 절을 더욱 잘 꾸몄다. 종실(宗室)에도 반드시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널리 알렸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불법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손호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서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응보(應報)와 같이 알기 쉬운 일들을 이야기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강승회는 건초사(建初寺)에서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이른바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경면왕경(鏡面王經)』·『찰미왕경(察微王經)』·『범황경(梵皇經)』 등이다. 또한 『소품경(小品經)』·『육도집경(六度集經)』·『잡비유경(雜譬喩經)』 등을 번역했다. 모두 경의 본질을 신묘하게 터득하고 글의 뜻도 참으로 올바르다.
또 니원(泥洹)의 패성(唄聲: 범패소리)33)을 전하였다. 맑으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밝은 분위기여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법경경(法鏡經)』·『도수경(道樹經)』, 이 세 가지 경전에 주석을 달고 아울러 경의 서문을 지었다. 말의 취지가 바르면서 무르익고 뜻이 은근하고 그윽하여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오나라 천기(天紀) 4년(280) 4월 손호가 진(晋)나라에 항복하였다. 9월에는 강승회가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이 때가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이다.
진나라 성제(成帝, 326~335) 함화(咸和) 중에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켜 강승회가 세운 탑이 불탔다. 사공(司空) 하충(何充)이 이를 수리하여 다
32) 재가 신도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
33) 열반성(涅槃聲)과 같은 것으로서 범음(梵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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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지었다. 평서장군(平西將軍) 조유(趙誘)는 대대로 불법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삼보(三寶)를 업신여겼다. 이 절에 들어가서 여러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탑이 자주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헛되고 괴이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믿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직접 보게 된다면 더 따질 일이야 없겠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탑에서 즉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법당과 당간[堂刹]까지 비추었다. 조유는 두려워 털끝이 바짝 곤두섰다. 이로 말미암아 조유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절의 동쪽에 다시 작은 탑을 세웠다. 이는 멀게는 크나큰 성인[大聖]이신 부처님의 신령스런 감응이며, 가까이로는 역시 강승회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지금까지 전한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다.
님께서 남긴 범패 소리
참으로 아름다운 바탕일세
눈앞의 걱정 따위 사라지니
넉넉하고 편안할손
어두운 밤과 같은
허물 떨쳐 물리치시어
초연하게 멀리 나아가고
우뚝 높이 솟았구려.
會公簫瑟 寔惟令質
心無近累 情有餘逸
屬此幽夜 振彼尤黜
超然遠詣 卓矣高出
어떤 기(記)에 이르기를, “손호가 사리(舍利)를 쳐서 시험한 것으로 보아, 손권의 시대는 아니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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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 보건대, 손호가 절을 부수려고 할 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답하기를,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 손권)께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사리의 신통함을 느끼게 된 일은 필시 손권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적은 전기(傳記)에서는 모두 말한다.
“손권이 오나라 궁중에서 사리의 신통함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신의 영험함을 시험한 것은 어쩌면 손호일 수 있다.
7) 유기난(維祇難)
유기난은 본래 천축국 사람이다. 대대로 다른 도를 받들어 불을 섬기는 일[火祠]을 올바른 것으로 알았다. 당시 천축국의 어떤 사문이 소승을 배우고 도술을 많이 행하였다. 먼 길을 다녀오다가 해가 저물자, 사문은 유기난의 집에서 묵으려 하였다. 유기난의 집에서는 다른 도를 섬겼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를 시기하였다. 그래서 문 밖 한데[露地]서 자고 가도록 하였다.
사문은 밤에 몰래 주술을 써서 유기난의 집에서 섬기는 불을 순식간에 타서 없앴다. 이에 온 집안사람이 모두 뛰쳐나왔다. 사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집에 들어가 공양할 것을 청하였다.
사문은 주문으로 불길을 다시 살렸다. 유기난은 사문의 신통한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보고는, 불법에 나아가서 크게 믿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드디어 본래 섬기던 바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다. 이 사문을 의지하여 화상(和尙)34)으로 삼았다.
삼장(三藏)35)을 수학(受學)하고 사함(四含: 四阿含)을 매우 잘하였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교화하니 모두들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34) 사전의 해석에 따르면 본래 수계사(授戒師)를 말하는 것이나, 뒤에는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뜻으로 바뀐다. 수계사로 쓰인 한 번을 제외하고는, 『고승전』전편 내내 화상(和尙)은 자신의 스승 또는 스승에 준하는 덕이 높은 승려를 일컫는다. 여기의 화상 역시 유기난의 스승을 말한다.
35) 불교 전적(典籍)의 총칭으로,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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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황무(黃武) 3년(224), 벗인 축률염(竺律炎)과 함께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담발경(曇鉢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갔다. 담발(曇鉢)은 곧 『법구경(法句經)』이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유기난은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벗인 축률염과 함께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축률염 역시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여,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한 것이 제법 있었다. 뜻은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데 두었으며, 표현은 질박한 편이다.
∙법립(法立)·법거(法巨)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말에 법립이라는 사문이 다시 번역하여 다섯 권으로 만들었다. 사문 법거가 붓으로 적었다. 그의 표현은 조금 화려하다. 또한 법립은 따로 『소경(小經)』을 냈다. 거의 백여 수(首)에 가깝다. 영가(永嘉, 307~313) 말년에 난리를 만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8)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
축담마라찰은 중국말로 법호(法護)라 한다. 그의 선조는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지(支)씨이다.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서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 사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섬겼다.
경을 매일 만 자씩 읽고, 한 번 보기만 하여도 이해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절조 있는 행동은 깨끗하고 엄격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만 리 밖에라도 스승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6경(經)을 널리 보고 마음을 7적(籍)에 노닐었다. 아무리 세상에서 비방하거나 칭송하는 데 힘쓰더라도 일찍이 마음에 꺼린 적이 없었다.
이 때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265~290)의 치세이다. 비록 서울에서 절과 불화와 불상이 존숭되기는 하지만, 심오한 대승의 경전들은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 밖에 모여 있었다. 법호(法護)는 이에 한탄하여 분발하고, 불도를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서역에 가서 여러 나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외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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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모두 서른여섯 가지이다. 글씨도 역시 그와 같다. 법호는 그것을 두루 배웠다. 훈고를 철저히 익히고, 음과 뜻과 글자의 체까지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많은 『범경(梵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돈황(燉煌)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연도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현겁경(賢劫經)』·『정법화경(正法華經)』·『광찬경(光讚經)』 등 165부이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오직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것[弘通]을 일삼았다. 평생토록 베끼고 번역하느라 힘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경법(經法)이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법호의 힘이다.
법호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말년, 깊은 산에 숨어살았다. 산에는 맑은 시내가 있어 항상 깨끗이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다. 후에 장작을 캐는 나무꾼들이 물가를 더럽혔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말라 버렸다. 이에 법호가 배회하며 탄식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마침내 맑은 샘이 그쳤구나.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 당장 옮겨가야겠다.”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올라 시냇물이 넘실댔다. 그의 깊은 정성에 감응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초상화에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님의 맑고 고요함이여,
도덕이 깊고도 아름다워라.
궁벽한 골짝 나직한 읊조림에
마른 샘 물 솟구쳐 응답했다네.
아득하여라, 님이여.
하늘이 내리신 크나큰 아름다움으로
고비 사막 건너
우리들 그윽한 경지로 이끄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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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公澄寂 道德淵美
微吟窮谷 枯泉漱水
邈矣護公 天挺弘懿
濯足流沙 領拔玄致
뒤에 장안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스런 교화가 멀리까지 퍼지고,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뒤덮였다.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사로 섬겼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이르러 서쪽으로 달아났다. 관중(關中) 지방이 어지러워 백성들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법호는 문도들과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민지(澠池)에 이르렀으나,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이 때의 나이가 78세이다.
뒤에 손작(孫綽)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었다. 인도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36)과 빗대었는데, 법호를 산거원(山巨源)과 짝하였다. 『도현론』에서 논(論)하였다.
“법호공의 덕은 만물의 근본에 머물고, 산거원[山濤]의 위치는 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두 분은 덕스런 자태가 높고도 원대하여 비슷한 분들이라 할 만하다.”
그가 후대 사람에게 기려지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섭승원(聶承遠)·섭도진(聶道眞)
당시 청신사(淸信士) 섭승원은 밝게 이해하는 재주가 있었고, 뜻을 돈독히 하여 불법에 힘썼다. 법호공(法護公)이 경전을 번역할 때 대부분 문구(文句)를 바로잡았다. 『초일명경(超日明經)』을 처음 번역할 적에 자못 번다하고 중복되는 것이 많았다. 섭승원이 깎아 내기도 하고 바로잡기도 하여 지금 쓰이는 두 권으로 만들었다. 그가 상정(詳定)한 바가 대부분 이와 같다.
36) 진(晋)나라 초세(初世)에 노장허무(老莊虛無)의 학문을 숭상한 일곱 사람으로, 완적·혜강·산도·향수·유령·왕융·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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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승원에게는 도진(道眞)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역시 범학(梵學)을 잘 하였다. 이들 부자는 말을 엮는 데 아름다우면서도 무리가 없어서 원래의 책 내용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또 축법수(竺法首)·진사륜(陳士倫)·손백호(孫伯虎)·우세아(虞世雅) 등은 모두 법호의 뜻을 이어받아 집필하고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도안(道安)은 말한다.
“법호공이 번역하신 바가 만일 세밀하게 이 분들의 손과 눈을 거쳤다면 강령(綱領)이 반드시 바로잡혔을 것이다. 비록 번역한 경의 말이 미묘하거나 아름답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상이 드넓고 사리에 통달하여 시원하게 펼쳐 냈다. 특히 무생(無生)의 이치를 잘 알아 혜(慧)에 의존하고 수식을 하지 않았다. 그 표현이 질박하여 근본에 가깝다.”
칭찬함이 이와 같았다. 법호의 집안은 대대로 돈황에서 살았다. 그가 사람들을 교화하여 불법으로 두루 적셔주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돈황 보살이라고 일컬었다.
9) 백원(帛遠)
백원의 자는 법조(法祖)이다. 본래의 성(姓)은 만(萬)씨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아버지인 위달(威達)은 유학(儒學)의 바른 의리로 이름이 알려져서, 고을에서 관리로 임명하려고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법조가 어린 나이에 도를 향한 마음을 일으켜서 아버지에게 출가할 것을 여쭈었다. 말하는 이치가 절실하고 지극하여 아버지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드디어 옷을 바꾸어 입고 불도를 따랐다.
법조는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고 민첩하며, 밝은 성격이 무리에서 빼어났다. 날마다 팔구천 글자의 경을 읽고, 대승을 닦아 뛰어나게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세속의 분소(墳素)37)도 대부분 해박하게 꿰뚫었다. 이에 장안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습을 일삼았다. 속인과 승려로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37) 고대 전적(古代典籍)을 범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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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말에 태재(太宰)인 하간(河間) 왕옹(王顒)이 관중(關中)에 주둔할 적에, 마음을 비워 공경하고 중하게 받들면서 사우(師友)의 예로 대하였다.
한가한 시간이나 조용한 밤마다 도덕(道德)에 대해서 맑게 강의하였다. 그 때에 서부(西府)가 처음 지어졌다. 뒤로 갈수록 더욱더 성하였다. 말 깨나 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멀리까지 내다보는 능력에 대하여 탄복하였다.
법조는 군웅(群雄)들이 서로 다투어 바야흐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속으로 농우(隴右)에 숨어 지내며 우아한 지조를 보존하고자 뜻을 두었다. 때마침 장보(張輔)가 진주 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농상(隴上) 근처에 주둔함으로, 법조는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장보는 법조의 이름과 덕이 환하게 드러나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믿고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승려의 옷을 벗겨 자기를 보좌하는 부하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법조는 굳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장보는 이로 말미암아 유감을 품었다.
이보다 앞서 고을사람 관번(管蕃)이 있었다. 법조와 함께 논의를 할 적마다 자주 법조의 의견에 굴복하였다. 그래서 관번은 깊이 부끄러움과 한을 품어 매번 없는 일을 꾸며대어 헐뜯었다. 법조가 길을 가다가 견현(汧縣)에 이르자 갑자기 도인(道人)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며칠 뒤에는 전생의 인연을 갚으리라.”
그리고는 이별의 말을 하면서 유서[素書]를 써서 불경과 불상과 재물을 나누어 베풀었다. 이튿날 새벽에 장보에게 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장보의 뜻을 거슬렀다. 장보는 그를 가두고 벌을 내리니,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법조는 말하였다.
“나는 전생의 갚음을 하러 여기에 왔다. 이는 숙명의 오랜 갚음이다. 오늘의 일 때문만이 아니다.”
이에 부르짖었다.
“시방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시여, 제가 전생에 몸으로 지은 죄업의 인연을 환희심으로 다 갚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다음 생에서는 장보와 함께 선지식이 되어 살인의 죄를 받게 마옵소서.”
드디어 채찍 50대를 맞고 갑작스럽게 목숨이 다하였다. 장보는 나중에 그 일을 모두 듣고는 크게 놀라서 안타깝게 여겼다.
과거에 법조가 도로써 교화하는 명성이 관롱(關隴)38)에 퍼졌다.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 오른쪽 지역에서는 그를 신처럼 받들었다. 그러므로 오랑캐들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통곡하여 장례하러 가는 길에서 눈물을 흘렸다.
농상(隴上)의 강족(羌族)과 호족(胡族)들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법조를 맞이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중간에 그가 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픔을 금할 길이 없어 모두들 분격하여 법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장보가 군대를 상롱(上隴)으로 보내자, 강족과 호족들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당시 천수(天水) 지방의 옛 창하독(涱下督)39) 부정(富整)이 드디어 분발하여 장보를 베었다. 여러 오랑캐들은 원한을 씻고 나서 칭선(稱善)하며 돌아갈 때에, 법조의 주검을 고루 나누어 가서 각기 탑묘(塔廟)를 세웠다.
장보의 자는 세위(世偉)이다. 남양 사람으로 장형(張衡)의 후예이다. 비록 재능과 학식은 있으나 잔혹하여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 천수의 태수 봉상(封尙)을 제멋대로 죽이니, 백성들이 의심하고 놀라서 난을 일으켜 그를 벤 것이다. 관번(管蕃)도 역시 끝내 마음을 쓰는 것이 삿되고 험악하기 때문에 패배를 불러들였다.
그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이통(李通)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말하였다.
“법조 법사(法祖法師)께서 염라대왕의 거처에 계시면서 염라대왕을 위하여 『수능엄경(首楞嚴經)』을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경을 강의하는 일을 마치면 도리천(忉利天)으로 갈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좨주(祭酒: 벼슬 이름) 왕부(王浮)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명 도사(道士) 기공(基公)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온몸을 결박당한 채로 법조에게 참회를
38) 관중(關中)과 감숙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말함.
39) 군중(軍中)·관좌(官佐)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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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예전에 법조가 평소 왕부와 더불어 매번 옳고 그름을 다툴 적에, 왕부가 막히는 일이 많자 성이 나서 스스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불법을 왜곡하고 비방하였다. 그 재앙이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서 참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법조를 혜강(嵆康)40)과 짝하여 논평하였다.
“백조(帛祖)의 허물은 관번(管蕃)에게서 시작하고, 중산(中散)41)의 재앙은 종회(鍾會)에게서 생겨났다. 두 현인 모두 빼어난 기상을 지녔으나 자신의 몸을 도모하는 생각에 어두웠다. 세상 일 밖에 마음을 두느라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므로 화를 불러들인 것이 자못 다르지 않다.”
법조가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다.
법조는 널리 책을 섭렵하고 익힌 것이 많아 범어(梵語)와 한문을 아주 잘하였다. 일찍이 『유체(惟逮)』·『제자본(弟子本)』·『오부승(五部僧)』 세 부(部)의 경을 번역하고, 『수능엄경』의 주(注)를 내었다. 또한 따로 여러 부(部)의 소경(小經)들을 번역하였다. 난리 통에 다 잃어버려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백법조(帛法祚)
법조(法祖)의 아우인 법조(法祚)도 역시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박사(博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깊이 꿰뚫어서 관롱(關隴)에서는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양주 자사(梁州刺史)는 장광(張光)이었다.
법조의 형이 옷을 바꾸어 입으려고 하지 않아서 장보에게 죽임을 당하였
40) 위나라 때 사람으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당시는 위진의 교체기여서 통치 계급의 싸움이 심하였다. 그는 노장을 숭상하였고 강직하며 악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남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뒤에 모함을 받아 끝내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당하였다.
41) 혜강이 중산 대부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중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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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자 장광도 역시 법조(法祚)를 핍박하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렇지만 법조(法祚)는 뜻을 지키며 지조를 굳혀 죽기를 맹세하였다.
드디어 장광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 나이는 57세이다.
법조(法祚)는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주를 내었고, 『현종론(顯宗論)』 등을 지었다. 장광은 자가 경무(景武)이며 강하(江夏) 사람인데 후에 무도(武都)가 되었다. 저양(氐楊)의 난리에 적에게 포위되자 분개하여 죽었다.
∙위사도(衛士度)
당시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우바새 위사도라는 인물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두 권을 번역해 냈다. 위사도는 본래 사주(司州) 급군(汲郡) 사람이다. 한문(寒門)에서 은거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면서 불법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가 죽던 날에는 청정하게 몸을 닦고 천여 마디의 경을 읊었다. 그런 연후에 옷을 단정히 하고 시체처럼 누워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0)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
백시리밀다라는 중국말로 길우(吉友)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당시 사람들이 고좌(高座)42)라고 불렀다. 전(傳)에서는 말한다.
“국왕의 아들로서 마땅히 대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를 아우에게 양보하고 남이 모르게 태백(太伯)43)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하늘의 계시를 마음속으로 깨달아 드디어 사문이 되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타고난 자태가 높고 밝았다. 신령한 풍채가 뛰어나서 직접
42) 강(講)하는 자리를 말하는데, 강을 듣는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43)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큰 아들로서 태백(泰伯)이라고도 한다. 그는 왕위를 사양하고 막내인 공계(公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공자도 『논어』에서 이러한 덕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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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대하면 남들보다 우뚝 빼어났다. 진(晋)나라 영가(永嘉, 307~313) 중에 처음 중국에 왔다. 난리를 만나자 양자강을 건너와서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 번 보자마자 기이하게 여겨서, 어울릴 만한 같은 무리로 생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광록(光錄) 주백인(周伯仁)·태상(太常) 사유여(謝幼與)·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 일대의 명사(名士)이다. 그를 보고 종일토록 여러 번 탄복하여 가슴을 열어 젖히고 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허리띠를 풀고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말을 나누고 정신으로 교감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백시리밀다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얼마 후에 변망지가 왔다. 백시리밀다라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고는,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백시리밀다라는 말하였다.
“왕공(王公)은 풍류의 도로써 대하기를 남에게 기대하고, 변령(卞令)은 법도를 따라 남에게 엄격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입니다.”
뭇 귀족[諸公]들은 그제서야 그의 정신이 시원스러움과 엄격함의 둘 다에서 적당함을 얻었음을 칭찬하였다.
정위 환무륜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위하여 별명을 지으려고 하였다. 오래 지나도록 짓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백시리밀다라는 탁월하고 밝다는 탁랑(卓朗)이라고 하였다. 이에 환정위는 너무나 탄복하여 별명 붙이기의 극치라고 여겼다.
대장군(大將軍) 왕처중(王處仲)이 남하(南夏)에 있었다. 왕도·주백인 등 여러 제후들이 모두 백시리밀다라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일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시리밀다라를 보자 기쁨이 마구 치달려서 한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함을 다 하였다.
주의(周顗)는 복야(僕射)가 되어 사람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부임하러 오다가 백시리밀다라를 방문하였다. 이에 백시리밀다라가 탄식하였다.
“만일 태평한 세상에 이러한 어진 이를 선발한다면,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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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한이 없게 할 것이다.”
조금 지나서 주의가 살해를 당하였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의의 자식을 보살피러 갔다. 이에 마주 앉아 인도의 범패[胡唄] 세 계(契)를 지었다. 범패의 울림이 구름의 기운을 눌러버렸다. 다음으로 수천 글자의 주문(呪文)을 외웠다. 목소리가 높고 화창하면서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었다. 얼마를 지나 눈물을 흘리다가 거두었다. 그러나 신기(神氣)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가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키고 거두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공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에게 말하였다.
“어울릴 만한 외국 사람으로는 그대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백시리밀다라가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내가 그대들과 같았다면, 오늘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
백시리밀다라는 성품이 고상하고 간결하여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제후들이 그와 더불어 말할 때에는, 백시리밀다라가 비록 번역을 통한다고 할지라도,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이해하여 문득 그 의미를 다 알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타고난 빼어남과 깨달음[悟得]이 비상한 것을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술(呪術)을 잘 하여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과거 강남에는 주문을 외우는 법술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가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하여 여러 신주(神呪)를 밝혔다.
또한 제자 멱력(覓歷)에게는 높은 소리의 범패(梵唄)를 가르쳐 주었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한다.
진(晋)나라 함강(咸康, 335~342) 연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0여 세이다. 여러 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환선무(桓宣武)가 매번 말하였다.
“어려서 고좌(高座)를 뵌 적이 있다. 그분의 정신은 당시에도 매우 뛰어나다고 칭송받았다.”
낭야(瑯琊) 왕민(王珉)은 백시리밀다라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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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를 쓰면서 말하였다.
“『춘추(春秋)』 「필법」에는 오(吳)와 초(楚)를 자작(子爵)44)이라고 칭하였다. 『춘추』 3전을 지은 이들이 중국을 앞세우고 사방 오랑캐를 뒤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은주(夏殷周) 3대(代)의 중국인 후예들은 속된 것에서 벗어난 예를 행하지만, 탐욕스런 오랑캐는 어질게 양보하는 성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 우뚝한 빼어난 인물이 때로 저쪽에서도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이 이곳의 인물들과 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늘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줄 때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이후 오직 한나라 때에 김일제(金日磾)45)가 있었다. 김일제의 훌륭함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며, 덕이 있고 미더우며 순수하고 지극하다. 그러나 명석함과 통달함으로써 평가할 만한 인물감은 못된다.
백시리밀다라는 저 높은 마음의 산봉우리 끝까지 나아가신 분이다. 준수한 인걸들과 정신으로 교감을 나누시어, 바람처럼 맑게 번뇌를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셨다. 그래서 김일제와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나 멀다고 하겠다.”
백시리밀다라는 항상 석자강(石子岡)의 동쪽에 있으면서 두타(頭陀)46)를 행하였다. 그리고 삶을 마친 후에는 여기에 묻혔다. 성제(成帝)는 그의 풍모를 그리워하여 탑을 무덤에다 세웠다.
후에 관우(關右)의 어떤 사문이 서울에 와서 머물면서 비로소 무덤이 있는 곳에 절을 일으켰다. 진군(陳郡)의 사곤(謝琨)이 그 일을 도와 완성하고, 지나간 일을 추모하여 기리고자 고좌사(高座寺)라고 하였다.
11) 승가발징(僧伽跋澄)
승가발징은 중국말로 중현(衆現)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의지
44) 다섯 등급의 작위 중에 네 번째 위치로 백작의 아래이며 남작의 위이다.
45) 한나라 무제 때 사람이다.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이다. 무제가 시중 벼슬을 준 뒤로 수십 년 동안에 과실(過失)이 없었다. 사람이 매우 신중하여 황제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46)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열두 종의 행(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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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굳세어 깊고 아름다운 생각이 있었다. 뛰어난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삼장(三藏)을 갖추어 익히며 여러 경전을 널리 보았다.
특히 몇몇 경(經)에는 아주 밝았다.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을 암송하여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뜻을 품고, 풍속을 살펴 널리 교화하였다.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17년(381)에 관중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퍼지지는 못하고, 선수(禪數)의 학문(學問)이 매우 성하였다. 그가 장안에 이르고 나니, 모두 그를 불법의 거장이라고 일컬었다.
부견의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正)은 불법을 높이 우러렀다. 외국에서는 『아비담비바사론』을 익혀야 할 으뜸으로 치는데, 승가발징이 이를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4사(事)47)의 예로써 공양하고, 범문(梵文)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이름난 덕[名德]48)을 지닌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승려들을 모아 번역을 하였다. 승가발징이 불경 원본을 입으로 읊으면, 외국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붓으로 범문을 받아 적었다.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면, 진(秦)의 사문 민지(敏智)가 붓으로 받아 적어 한문본을 만들었다. 위진(僞秦) 건원(建元) 19년(383)에 번역하였다. 초여름에 시작하여 한가위에 끝마쳤다.
과거에 승가발징이 『바수밀경(婆須蜜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왔었다. 다음 해에 조정(趙正)이 다시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승가발징과 담마난제와 승가제바 세 사람이 함께 범본을 잡고, 진(晋)나라 사문 불념(佛念)이 번역하였다. 혜숭(慧嵩)이 받아 적고, 도안(道安)과 법화(法和)는 마주하여 함께 교정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지 경전이 유포되어 전해져서 배움이 오늘에 이른다.
승가발징은 계율과 덕이 바르고 거룩하였다.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승려들이 모범으로 본받았다. 그 후 어디에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47) 네 가지 공양이란 의복·음식·탕약(湯藥)·와구(臥具)를 말한다.
48) 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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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라찰(佛圖羅刹)
불도라찰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덕스런 일에 순수하고 경전을 두루 보았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노닐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의 범문(梵文) 번역본이 부견(苻堅)의 시대에는 귀중하게 여겨졌다.
12) 담마난제(曇摩難提)
담마난제는 중국말로 법희(法喜)라 하며 도거륵(兜佉勒) 사람이다. 7·8 세 무렵에 속세를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를 일찍 이루었다.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심전력으로 업을 닦았다. 두루 삼장(三藏)을 보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암송하였다.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종합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여 감복하였다.
어려서부터 곳곳을 보고, 두루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불법을 크게 펴려면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멀리 고비 사막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부씨(符氏)49)의 건원(建元, 365~384) 중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배움이 이미 넉넉하여 명성이 크게 났다. 그러므로 부견(符堅)이 깊이 예를 갖춰 대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의 여러 불경에는 아직 사함(四含: 四阿含經)이 없었다. 부견의 신하로 무위태수(武威太守)인 조정(趙正)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모용충(慕容冲)이 이미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부견을 공격하니 관중(關中)이 어지러웠다.
조정은 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불도를 위하여 도안(道安) 등에게 청하여 장안성(長安城)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50) 승려들을 모았다. 그리고 담마난제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
49) 부견(符堅)을 말한다. 부견의 자(字)는 영고(永固)인데 문옥(文玉)이라고도 한다. 승평(升平) 원년에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고 칭하였다.
50) 명상(名相)과 훈의(訓義)의 학. 명목을 세우고 수를 정하여 인과 계급을 의논하여 모든 법의 모양을 말하고 문자를 해석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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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아함경(增一阿含經)』의 두 아함(阿含)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비담심론(毘曇心論)』·『삼법도론(三法度論)』 등 모두 106권을 먼저 번역했다. 불념(佛念)이 번역하고, 혜숭(慧嵩)이 붓으로 받아썼다. 여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2년이 걸려 문자가 바야흐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요장(姚萇)이 관내(關內)를 침범하여 쳐들어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담마난제는 이에 그곳에서 작별을 하고 서역(西域)으로 돌아갔다. 그가 삶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조정(趙正)
그 때에 부견(符堅)이 처음으로 패하자 여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요사한 오랑캐들이 멋대로 사납게 굴어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부(大部)』를 번역할 수 있었으니, 이는 대개 조정(趙正)의 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조정의 자는 문업(文業)이다. 낙양(洛陽) 청수(淸水)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음(濟陰) 사람이라고도 한다. 나이 18세에 위진(僞秦)의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무위태수(武威太守)에 올랐다.
그 사람의 모습이 수염이 없고 삐쩍 마르며, 처첩은 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고자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 뜻과 국량이 민첩하고 통달하여, 배움이 불전과 외전(外典)을 겸비하였다. 성품이 나무라고 간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돌리거나 피하는 바가 없었다.
부견(符堅)이 말년에 선비족(鮮卑族)을 사랑하는 데에 빠져서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조정은 노래를 불러 간하였다.
예전에 들었어라. 맹진(孟津)51)의 강물은
한 굽이가 천 리에 이른다고[千里一曲].52)
51) 옛날 황하(黃河)의 나루 이름.
52) 옛날부터 전하기를, 황하는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 나와 9곡(曲)을 이루며 흐르는데, 그 한 굽이[曲]가 천 리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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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은 본래 맑았거늘
누가 어지럽혀 탁하게 했나.
昔聞孟津河 千里作一曲
此水本自淸 是誰攪令濁
부견이 낯빛이 변하여 말하였다.
“바로 짐이다.”
그러자 조정은 또 노래하였다.
북쪽 동산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있네.
잎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웠구나.
대추 겉이 살쪘어도 갈라보면
안에는 붉은 씨앗[赤心]53) 들어 있네.
北園有一棗 布葉垂重陰
外雖饒棘刺 內實有赤心
부견이 웃으며 말하였다.
“조문업, 자네가 아닌가?”
그가 놀리는 말을 하면서도 기지(機智)가 민첩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뒤에 관중(關中) 지방에 불법(佛法)이 성하자 조정은 이에 출가를 하고자 원하였다. 부견은 그를 아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견이 죽은 뒤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뜻을 이루었다. 이름을 고쳐 도정(道整)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송(頌)을 지었다.
부처를 따르는 생이 이리도 늦었건만
53) 대추 씨앗을 가리키면서 한편으로는 임금을 향한 충성된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죽음은 한결같이 이리도 빠를까.
석가모니께 귀명(歸命)54)하여
오늘에야 불도에 몸담았네.
佛生何以晩 泥洹一何早
歸命釋迦文 今來投大道
후에 상락산(商洛山)에 은둔하여 오로지 불경과 계율을 연구하였다. 진(晋)의 옹주자사(雍州刺史) 극회(郄恢)가 그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가까이에서 함께 노닐었다.
양양(襄陽)에서 삶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3) 승가제바(僧伽提婆)
승가제바는 중국말로 중천(衆天), 혹은 제화(提和)라고 한다. 음을 잘못 발음한 때문이다. 본래의 성(姓)은 구담씨(瞿曇氏)로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불도에 입문하여 배움을 닦으면서 멀리까지 훌륭한 스승을 구하였다. 배움은 삼장(三藏)에 뛰어났다. 특히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더욱 잘하여 그 섬세한 뜻까지 꿰뚫었다.
그는 항상 『삼법도론(三法道論)』을 읽으며 밤낮으로 감탄하고 음미하였다. 그것을 도(道)로 들어가는 곳집으로 여겼다.
사람됨은 빼어나고 밝으며, 깊이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서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씨의 건원 연간(365~384)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서 법으로 널리 교화를 펼쳐 나갔다.
과거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을 번역하고,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두 아함(阿含)·비담(毘曇)·광설(廣說)·삼법도(三法
54) 범어로는 namas라고 한다. 나무(南無)라고 음역하는데, 나의 신명을 던져 의탁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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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 등이 모두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모용(慕容)의 난리를 만나 오랑캐들이 어지러이 소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번역하는 사람들도 일이 갑작스러워서 미처 세밀하게 잘하지 못하여, 뜻과 구절의 의미가 왕왕 극진하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서 도안(道安)마저 세상을 뜨니, 미처 바로 고칠 수 없었다.
후에 산동(山東) 지방이 맑게 평정되었다. 승가제바는 이에 기주(冀州)의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낙양으로 가서, 4·5년간 앞서의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날들이 점차 쌓이면서 중국어에 두루 밝아졌다. 바야흐로 앞서 전역(傳譯)한 경들이 그 의미가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이 많음을 알았다. 법화는 미처 바로 잡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다시 승가제바로 하여금 아비담(阿毘曇)과 광설(廣說) 등 여러 경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조금 지나서 요흥(姚興)이 진(秦)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자, 불법과 관련된 일들이 매우 성하였다. 이에 법화가 관중으로 들어가고, 승가제바는 양자강을 건넜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법사가 대승 경전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 널리 경장(經藏)을 모았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산[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376~396) 중에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 등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승가제바는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梵文)을 손수 손에 들고, 입으로는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은 보존하여 그 본뜻을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바는 대체로 그의 문장이다.
융안(隆安) 원년(397)에 이르러 서울로 왔다. 진(晋)나라 조정의 왕들과 귀족들[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위군(衛軍) 동정후(東亭侯)인 낭야(瑯琊)의 왕순(王珣)은 깊이가 있고 아름다우며 깊은 믿음이 있어서 불법을 늘상 지켰다.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널리 공부하는 대중들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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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였다.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니,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가르침이 이미 정밀한데다 뜻을 밝게 풀고 이치를 잘 펼치니, 모든 무리들이 기뻐하며 깨우쳤다. 당시에 왕미(王彌)도 역시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후에 다른 방에서 스스로 공부하였다.
왕순이 법강도인(法綱道人)에게 친애하는 왕미의 터득한 바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승가제바가 대답하였다.
“대략 전체적으로는 옳습니다. 다만 작은 부분에서는 아직 자세하게 핵심을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설명과 분석이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 왕순은 서울의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사문 석혜지(釋慧持) 등 사십여 인을 모았다. 다시 승가제바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을 거듭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승가라차(僧伽羅叉)
계빈국(罽賓國)의 사문 승가라차가 범본(梵本)을 잡고, 승가제바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 그 일을 마쳤다. 그가 양자강과 낙양 근처에서 번역한 여러 경만 해도 백여 만 글자나 되었다.
북쪽과 남쪽을 차례로 돌아다녔다. 풍속(風俗)에 맞추어 조용히 기민하게 깨우치면서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잘 하였다. 그가 불도로써 중생들을 교화시켰다는 명성과 영예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4) 축불념(竺佛念)
축불념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했다. 맑고 굳건하게 뜻을 두었다. 밖으로 드러난 태도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아서 화통하며, 영특하고 민첩한 식견이 있었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거칠게나마 외전(外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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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렵하였다. 창아(蒼雅)55)와 훈고(訓詁)에 더욱 밝게 다다랐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하여 풍속(風俗)을 살펴 잘 맞추었다. 집안 대대로 서하(西河)에 살아, 서역 여러 나라의 말을 밝게 알았다. 중국어와 오랑캐말의 소리와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명예는 비록 없었으나, 들은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365~384) 중에 승가발징(僧伽跋澄)·담마난제(曇摩難提) 등이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조정(趙正)이 그들에게 여러 경들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의 뛰어난 승려들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대하였다.
이에 승가발징이 범문(梵文)을 잡고 축불념이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의심나는 뜻은 판가름하여 고치니, 소리와 글자[音字]56)가 바야흐로 바로잡혔다. 건원 20년(384) 5월에 이르러 다시 담마난제에게 청하여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번역했다.
장안성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승려들을 모아서 축불념에게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부연하며 분석하고 연구하며 밝혀 나간 뒤, 2년 만에야 끝을 맺었다. 두 아함(阿含)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은 축불념이 번역하여 펴낸 공로에 힘입었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로는 축불념을 뛰어넘는 이가 없었다. 부견(符堅)과 요홍(姚泓)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대중승려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뒤이어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출요경(出曜經)』·『포태경(胞胎經)』·『중음경(中陰經)』 등을 냈다. 처음으로 안정되게 바로 잡기는 했으나 뜻에 미진한 곳이 많았다.
마침내 병이 들어 장안에서 삶을 마쳤다. 원근(遠近)의 승려들과 세속인들이 탄식하여 아쉬워 마지않았다.
55) 삼창(三蒼)과 이아(爾雅)를 말한다.
56) 음(音)을 표기하기 위해서 같은 음, 혹은 음이 비슷하여 쓰는 글자로, 뜻은 없고 음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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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담마야사(曇摩耶舍)
담마야사는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열네 살에는 불야다라(弗若多羅)57)가 알아줄 정도였다. 커서는 기운과 재간이 높고 시원하며, 바르고 신령스런 지혜[神慧]가 있었다.
경전과 율장을 두루 보아 환하게 깨달은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8선(禪)을 도야하고 7각(覺)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부두바타(浮頭婆馱)에 비유하였다.
산택(山澤)에서 외롭게 수행하며 늑대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다. 홀로 머물러 생각에 깊이 잠겨 자칫하면 밤낮을 바꾸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며, 매양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니, 어찌 이리도 게으른가?”
이에 여러 날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먹지 않았다. 오로지 고행으로 정진하며 예전에 지은 죄들을 참회하였다. 이에 꿈속에서 박차천왕(博叉天王)을 뵈었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사문이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를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렇거늘, 어찌 쩨쩨한 절개에 얽매여서 홀로 자기만을 착하게 할 뿐인가? 도는 여러 인연을 빌리고 다시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증험이 없으리라.”
곧 깨닫고 스스로 사유(思惟)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름난 곳을 지나고 여러 나라를 거쳤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57) 범어로 Punyatara라고 하며 공덕화(功德華)라고 번역한다. 경·율·논 삼장을 구비하여 통달하였고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요진의 홍시(399~415) 때에 중국에 와서 장안에서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률』 번역에 종사하여 3분의 2쯤 이루고 병으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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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당시 이미 나이가 85세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85인이었다. 그 때 청신녀(淸信女: 優婆夷) 장보명(張普明)이 불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법하였다. 아울러 『차마경(差摩經)』한 권을 번역해 냈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당시에는 요흥(姚興)58)이 참람한 연호를 쓰면서 불법을 매우 존숭하였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갖추었다.
마침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가 관중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이들끼리 서로 만났으므로[同氣相求]59) 완연히 옛 친구 같았다. 이 때문에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60)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고요함을 맛보러 온 나그네 중에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이른 자도 3백여 명이었다. 무릇 선비나 서민들 가운데, 비록 그 전에는 불교를 믿는 마음이 없었던 이라 할지라도, 뵙기만 하면 모두 공경하고 기뻐하였다. 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였다.
“스승 한 사람과 제자 한 사람이 업을 닦아서[修業] 함께 나한(羅漢)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그 정확한 이름은 잊었다.
58) 후진(後秦)의 왕으로서 신분에 넘치는 칭호를 자칭(自稱)하였다.
59)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나오는 말로 천지 사이에 서로 감응(感應)하여 각기 그 기류(氣類)를 좇는 것을 말한다.
60) 요씨의 나라를 정통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저술자의 사관 때문에 위(僞)라는 표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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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찍이 바깥문에서 문을 닫고 좌선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5·6명의 사문이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때로는 사문이 나무 끝에서 날아오는 것을 본 사람도 왕왕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신명(神明)과 교접(交接)하면서도 어리석은 속세 사람들을 굽어보아 함께 하였다. 비록 도의 자취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과(聖果)61)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축법도(竺法度)
담마야사에게는 법도라는 제자가 있다. 범어(梵語)와 중국어를 잘하여 항상 번역을 하였다. 법도는 본시 축바륵(竺婆勒)의 아들이다. 축바륵은 오랫동안 광주(廣州)에서 머무르며, 이득을 구하여 오갔다.
이렇게 오고 가는 도중에 남강(南康)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남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커서는 금가(金迦)라고 불렀다. 불도에 들어온 이후에는 법도(法度)라고 하였다. 법도는 처음에 담마야사의 제자가 되어 경법(經法)을 이어받았다.
담마야사가 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법도는 문득 잘못된 곳을 바로잡는다고 홀로 고집하여 일정한 규칙으로 남들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로지 소승(小乘)을 배워야 한다. 대승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한다. 오직 석가만을 예불하라. 시방불(十方佛)에게는 하지 말라. 먹을 때는 구리 발우를 써라. 따로 응기(應器)62)를 두지 말아라.”
또한 여러 비구니들에게 명하여 서로 잡고 길을 다니게 했다. 죄를 뉘우치는 날에는 단지 땅에 엎드려서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다. 오직 송(宋) 땅의
61) 성자(聖者)가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진정한 과(果).
62) 범어(梵語) patra의 의역(意譯)이며, 음역(音譯)으로는 발다라(鉢多羅)라고 한다. 발우를 의미하는 말로, 비구가 자신이 먹을 양을 헤아려 먹는 걸식기(乞食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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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단양(丹陽) 지사 안원(顔瑗)의 딸 법홍(法弘)비구니, 교주 자사(交州刺史) 장목(張牧)의 딸 보명(普明)비구니가 처음으로 그 법을 받았다. 지금 서울의 선업(宣業)과 홍광(弘光) 같은 여러 비구니들이 그가 남긴 가르침을 익혔다. 동쪽 땅의 비구니들에게도 당시 그러한 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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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2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1. 역경 ②
1) 구마라집(鳩摩羅什)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 동수(童壽)라 하며 천축국(天竺國)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名聲)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에 사양하고 출가(出家)하여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구자국(龜玆國) 왕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다.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鳩摩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구마염을 핍박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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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하는 것을 자각(自覺)하였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王室)의 귀부인들과 덕행(德行)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재(齋)를 청하여 법문(法門)을 들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되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 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리불(舍利佛)이 뱃속에 있을 때의 증험(證驗)을 설법하였다.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모친은 즐거이 출가(出家)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불사제바(弗沙提婆)라고 불렀다.
뒤에 성(城)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다. 무덤 사이에 마른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사유(思惟)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약 머리를 깎지 못한다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엿샛날 밤에 이르자 기력(氣力)이 실낱같이 쇠약해졌다. 자칫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이르지 못할 듯했다. 이에 남편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녀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삭발을 해 주니 그제야 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계(戒)를 받았다. 선법(禪法)을 좋아하여 애오라지 정진하고 나태하지 않아, 초과(初果)를 배워 터득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暗誦)하였다. 한 개의 게송(偈頌)이 32자(字)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비담(毘曇)을 암송한 뒤에,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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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이 그 뜻을 전수하였다. 즉시 통달하여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龜玆國)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를 피하여 구마라집을 이끌고 떠났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다. 이름난 덕을 지닌[名德] 법사(法師)인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왕(罽賓王)의 사촌 아우이다.
깊고 순수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九部)를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偈頌)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은 계빈국에 이르러 곧 그를 스승의 예로써 존숭하였다. 그에게서 『잡장(雜藏)』·『중아함경(中阿含經)』·『장아함경(長阿含經)』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자, 마침내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공격하여 힐난(詰難)하게 하였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外道)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不遜)하였다. 구마라집이 틈을 타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雙),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斗], 소(酥) 여섯 되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外國)에서는 상등(上等) 공양에 해당한다.
구마라집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住持)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沙彌) 열 명을 보냈다. 비로 쓸고 물 뿌리는 일을 맡겨, 구마라집의 제자같이 하게 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龜玆國)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로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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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산(山)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나한은 구마라집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항상 이 사미(沙彌)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이다.”
구마라집이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頂戴].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곧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사륵국에 일년 간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하였다.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品)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하였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沙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하여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龜玆國) 왕은 필시 ‘구마라집이 우리나라 출신(出身)인데, 저들이 구마라집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友好)를 교환할 것입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집을 청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과연 구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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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하여 두터운 우호에 보답하였다.
구마라집은 설법하는 여가에 외도의 경전들을 탐색하였다. 『위타함다론(圍陀含多論, vedasastra)』을 잘 익혀서, 글을 짓고 묻고 답하는 따위의 일에 매우 밝았다. 또 사위타(四圍陀)의 전적들과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널리 읽었다. 음양(陰陽)·성산(星算: 天文曆數)까지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吉凶)에도 미묘하게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으니, 수행자(修行者)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자연스런 마음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사거왕자(莎車王子)와 참군왕자(參軍王子), 형제 두 사람이 나라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형은 자(字)를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자를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라고 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오로지 대승(大乘)으로써 교화하였다. 그의 형과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도 역시 수리야소마를 존숭하고 받들었다. 가까이 하여 좋아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수리야소마는 뒤에 구마라집을 위하여 『아뇩달경(阿耨達經)』을 설해 주었다.
구마라집은 스승에게서 “음(陰)·계(界)·제입(諸入)은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相)하다”는 설법을 들었다. 괴이쩍게 여겨 질문하였다.
“이 경에는 다시 무슨 뜻[義]이 있기에, 모든 현상을 있는 족족 모두 파괴해 버립니까?”
수리야소마는 답하였다.
“안(眼) 등의 모든 현상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마라집은 이미 ‘안근(眼根)이 존재한다’고 집착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인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 실체는 없다’는 데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깊이 궁구하여 밝혀[硏覈], 서로 주고받는 문답이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되었다.
구마라집이 비로소 이치의 돌아감을 알고는 마침내 오로지 대승 경전을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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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공부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옛날에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구나.”
그러고는 대승에서 중요한 것들을 널리 구하여, 『중론(中論)』·『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외웠다.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나아가 온숙국(溫宿國)에 이르렀다. 바로 구자국의 북쪽 경계였다. 당시 온숙국에는 한 도사(道士)가 있었다. 신묘(神妙)한 말솜씨가 빼어나서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쳤다.
그는 제 손으로 왕의 큰 북을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였다.
“논쟁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목을 잘라서 사죄하겠다.”
구마라집이 이른 뒤에 둘이 서로 다른 논쟁을 벌여 따졌다. 도사는 헷갈리고 얼이 빠져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歸依)하였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의 명성이 파미르 고원 동쪽에 가득하였다. 명예가 황하[중국] 밖에서는 널리 퍼졌다.
구자국왕은 몸소 온숙국까지 가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구자국으로 돌아왔다. 널리 여러 경들을 강설하니, 사방의 먼 지방에서 존숭하고 우러러 아무도 그를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당시 한 왕녀(王女)가 비구니가 되었다. 자(字)를 아갈야말제(阿軻耶末帝)라고 한다. 그 비구니는 많은 경전들을 널리 보았다. 특히 선(禪)의 크나큰 요체를 깊이 알았으며, 이미 2과(果: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하였다. 그 비구니는 구마라집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줄 것을 청하였다.
구마라집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다 공하여 내가 없음[皆空無我]을 미루어 변론하였다. 음(陰)이나 계(界)는 임시 빌려 쓴 이름이지 실제가 아님[假名非實]을 분별하였다. 당시 모인 청중들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슬프게 느끼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라마집의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왕궁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天竺國)으로 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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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안 되어 쇠망(衰亡)할 것입니다. 나는 이 곳을 떠납니다. 천축국에 가서 3과(果: 아나함과)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승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하여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하겠니?”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利益)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大化]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신사(新寺)에 거주하였다. 후에 절 곁의 오래된 궁중에서 최초로 『방광경(放光經)』을 얻었다. 즉시 책장을 펼쳐서 읽으려고 할 때에, 마라(魔羅, Mara)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종이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마라의 소행인 줄 알고는,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자 마라가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다. 인하여 『방광경』을 익히고 암송하였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마라이다.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와 같아 굴러가게 할 수 없다.”
구자국의 신사(新寺)에 머물렀다. 머무른 2년 동안 널리 대승의 경론(經論)들을 외우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金師子)의 법좌(法座)를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에 올라 설법하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스승님도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스승님께 교화를 하고자 합니다. 이 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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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스승인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구자국에 이르렀다.
왕이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어찌 이리도 먼 길을 방문하셨습니까?”
반두달다가 대답하였다.
“첫째는 제자 구마라집의 깨달음이 범상(凡常)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대왕께서 불도(佛道)를 널리 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신령스런 나라로 달려온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방문으로 인해 본디부터 품던 회포를 풀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덕녀문경(德女問經)』을 설법하여 모든 현상이 대부분 인연(因緣)·공(空)·가(假) 임을 밝혔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모두 믿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강설한 것이다.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현상을 보았기에 그렇게도 숭상하려고 하는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맑아, 모든 존재하는 현상이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구분하여, 여러 가지 빠뜨려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하였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一切皆空]’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떻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꼭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그 미치광이가 실을 잣는 이에게, 실을 잣되 최대한으로 가늘면서도 보기 좋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실 잣는 이가 정성을 기울여 먼지처럼 가늘게 실을 자았다. 미치광이는 그것도 오히려 굵다고 원망하였다.
실 잣는 이는 크게 노하여 허공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가는 실입니다.’라고 하니, 미치광이는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실 잣는 이는 ‘이 실은 너무 가늘어 우리 중의 솜씨 좋은 장인(匠人)조차 볼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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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치광이는 크게 기뻐하였다. 보이지 않는 그 실로 베를 짜 달라고 베 짜는 이에게 부탁하였다. 베 짜는 이도 역시 실 잣는 이를 그대로 흉내내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상(賞)을 받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너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구마라집은 계속해서 비슷한 것끼리 연관지어[連類] 진술하였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지 한달 남짓 지나자, 스승이 마침내 믿고 받아들였다.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바로 여기에서 증험하는구나.”
이에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화상(和上)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에 엎드려 복종했다. 매년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法座) 옆에 꿇어 엎드렸다.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오르게 하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당시 부견(符堅)이 관중(關中)에서 외람되이 천자라고 일컬었다[僭稱]. 외국(外國)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龜玆王)의 동생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하였다. 부견이 두 왕을 알현하였다.
이 두 왕이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서역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산출됩니다.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가 평정하여 속국이 되기를 요구하십시오.”
부견의 건원(建元) 13년(377)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襄陽)에는 사문 석도안(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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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安)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을 찾았다.
17년 2월에, 선선왕(鄯善王)과 전부왕(前部王) 등이 또다시 부견에게 군사를 청하여 서역을 정벌하자고 달래었다.
건원 18년(382) 9월,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과 능강장군(陵江將軍) 강비(姜飛)를 파견하였다. 전부왕(前部王)과 거사왕(車師王) 등을 거느리고 군사 7만 명을 이끌어서 서쪽으로 갔다. 구자국(龜玆國)과 언기국(焉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을 건장궁(建章宮)에서 전별(餞別)하면서 여광에게 말하였다.
“대저 제왕(帝王)은 천명(天命)에 응하여 다스리고 창생(蒼生)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愛]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도의를 품는 사람[懷道]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 이들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에게 진언했다.
“구자국의 국운은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마침내 여광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동생 백진(白震)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하여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하였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密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집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광은 또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집이 진언하였다.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비밀스럽고 남다르게 여겼다.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진언하였다.
“이 곳은 흉망(凶亡)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運數)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시해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여광의 삼군(三軍)은 상복을 입고 양주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이리하여 여광은 관외(關外)에서 참칭(僭稱)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칭하였다.
태안(太安) 원년(385) 정월, 고장(姑臧)에 큰바람이 불었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바람입니다. 반드시 간특한 반란(叛亂)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갑자기 양겸(梁謙)과 팽황(彭晃)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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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모두 죽어 사라졌다.
여광의 용비(龍飛) 2년(396)에, 장액(張掖) 임송(臨松)의 노수호(盧水湖)에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사촌아우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모반하여, 건강 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서자(庶子)인 진주자사(秦州刺史)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다.
“단업(段業) 등은 까마귀떼처럼 규율이 없고, 여찬에게는 위세와 명망이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여광이 구마라집에게 상의하니,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번 출행을 관찰해 보건대 아직 그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여찬은 합리(合梨)에서 크게 패하였다. 갑자기 또 곽형(郭馨)이 난리를 일으켰다. 여찬은 대군(大軍)을 내버리고 몇몇 군사들만을 데리고 귀환하다가, 다시 곽형에게 패배 당하였다. 겨우 자신의 몸만 벗어날 수 있었다.
여광의 중서감(中書監) 장자(張資)는 문필(文筆)이 있고 온화하며 아담하였다. 여광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장자가 병이 들자, 여광은 널리 병을 낫게 할 훌륭한 의사를 구하였다. 외국의 도인 라차(羅叉)가 말하였다.
“장자(張資)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여광은 기뻐하여 그에게 매우 많은 금품을 하사하였다.
구마라집은 라차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라차의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갓 번거롭게 재물을 낭비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구마라집은 오색실로 새끼를 만들어 매듭을 짓고 태워서 잿가루를 물 속에 던졌다.
“만약 재가 물에 떠올라도 도로 새끼 모양이라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재가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원래의 새끼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라차의 치료는 효험이 없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자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여광도 죽었다[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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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의 아들 여소(呂紹)가 왕위를 이었다. 수일이 지나자 여광의 서자 여찬이 여소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연호를 함녕(咸寧)이라 일컬었다.
함녕 2년(400), 돼지가 머리 셋 달린 새끼를 낳았다. 용이 동쪽 곁채의 우물 속에서 나와 대전(大殿) 앞에 몸을 서렸으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찬은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대전을 용상전(龍翔殿)이라 불렀다. 얼마 후 또 검은 용이 당양(當陽)의 구궁문(九宮門)에서 승천했다. 여찬은 이 구궁문을 용흥문(龍興門)이라 개칭하였다.
구마라집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요즈음 물 속에 잠겨 있는 용[潛龍]이 출몰하고 돼지도 괴이한 일을 보입니다. 용은 음한 생물로서 드나드는 일정한 때가[出入有時]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주 나타나는 것은 재앙이 있을 징조입니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반하는 변괴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사욕을 극복하고[克己]덕을 닦아[修德], 하늘이 보여주는 타이름에 보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찬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찬이 구마라집과 바둑을 두었다. 여찬이 구마라집의 바둑돌을 희롱하며 죽이고 말하였다.
“오랑캐 놈[胡奴]의 머리를 벨 것이다.”
구마라집은 말하였다.
“오랑캐 놈의 머리는 베지 못할 것입니다. 오랑캐 놈이야말로 사람의 머리를 벨 것입니다.”
이 구마라집의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여찬(呂纂)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여광(呂光)의 아우 여보(呂保)에게는 여초(如超)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여초(如超)의 어렸을 적의 이름이 호노(胡奴)였다. 뒤에 과연 여찬(呂纂)의 목을 베고, 자기 형 여륭(呂隆)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구마라집의 예언을 증험하였다.
구마라집이 양주(凉州)에 체류한 지 수 년이 되었다. 여광(呂光) 부자가 도를 널리 펴지 않는 까닭에,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弘道]이 없었다. 부견(苻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구마라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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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요장(姚萇)이 관중(關中)을 참칭하고 소유하였다. 그도 역시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워서 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들을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姚萇)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요청하였다. 요흥(姚興)의 홍시(弘始) 3년(401) 3월, 궁중의 광정(廣庭)에 연리지(連理枝)가 나고, 소요원(逍遙園)의 파가 변하여 난초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슬기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5월에 이르러 요흥(姚興)이 농서공(隴西公) 요석덕(姚碩德)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여륭(呂隆)을 정벌하게 하였다. 여륭(呂隆)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자, 9월에 여륭(呂隆)이 표문을 올리고 항복하였다. 비로소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관중(關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요흥(姚興)이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은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노라면[晤言] 머무르는 것이 오래 걸려 하루 해가 지나갔다.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니,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나는 줄 몰랐다.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文字)에 막혀서, 뜻을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姚興)은 어려서부터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웠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이른 뒤에 요흥(姚興)은 그에게 청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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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을 살펴보니,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이전에 먼저 번역한 경전들이 바른 의미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姚興)은 사문 승략(僧䂮)·승천(僧遷)·법흠(法欽)·도류(道流)·도항(道恒)·도표(道標)·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姚興)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흡족하여 기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姚興)은 불도(佛道)가 깊고 오묘하며, 그 착함을 실천하여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요흥(姚興)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었다.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 모두가 그의 풍모를 흠모하고 찬탄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상산공(常山公) 요현(姚顯)과 좌군장군(左軍將軍) 안성후(安城侯) 요숭(姚嵩) 등은 모두 인연(因緣)과 업(業)을 독실하게 믿었다. 여러 번 구마라집을 장안 대사(長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였다.
계속해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십주경(十住經)』·『법화경(法華經)』·『유마힐경(維摩詰經)』·『사익경(思益經)』·『수능엄경(首楞嚴經)』·『지세경(持世經)』·『불장경(佛藏經)』·『보살장경(菩薩藏經)』·『유교경(遺敎經)』·『보리경(菩提經)』·『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보살가색욕경(菩薩呵色欲經)』·『자재왕경(自在王經)』·『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무량수경(無量壽經)』·『신현겁경(新賢劫經)』·『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선법요해(禪法要解)』·『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십송률(十訟律)』·『십송비구계본(十訟比丘戒本)』·『보살계본(菩薩戒本)』·『대지도론(大智度論)』·『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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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론(成實論)』·『십주론(十住論)』·『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 등 3백 여 권을 번역해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신묘한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발휘하였다. 당시 사방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이[義學之士]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두 다 우러러보는 바이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 놓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과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매양 승예(僧叡)를 위하여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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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까지 퍼지고
오동나무에 외로이 깃든 슬픈 난새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心山育明德 流薰萬由延
哀鸞孤桐上 淸音徹九天
커다란 게송 10게를 지었으니, 게송에서의 글의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집은 평소 대승(大乘)을 좋아하여, 대승(大乘)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維摩經)』에 주를 내었다. 말을 내어 문장을 이룬 것[出言成章]은 깎아 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簡明)하여, 그윽하고 깊숙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透徹)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진나라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의 총명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기녀(妓女)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 이후로부터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모든 것을 풍부함이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양 강설(講說)할 때에는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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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설하였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예전에 구마라집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중국 땅에 지중한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부분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학도들이 저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여 있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또 비구 배도(杯渡)가 팽성(彭城)에 있었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탄식하였다.
“그대와 내가 장난처럼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다. 그렇건만 이 생에서는 아득히 기약이 없구려. 더디지만 내생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라오.”
구마라집이 아직 임종하기 전 어느 날, 약간 온몸이 상쾌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에 곧 입으로 세 번 신주(神呪)를 외웠다. 게다가 외국 제자들에게도 이 주문을 외우게 하여, 병을 나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한층 더 위독해졌음을 알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승려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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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위진(僞秦: 前秦) 홍시(弘始) 11년(409) 8월 20일 장안(長安)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는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熙) 5년(409)이다.
곧바로 소요원(遡遙園)에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焚身之後 舌不燋爛]. 후에 어떤 외국 사문이 와서 말하였다.
“구마라집이 암송한 것 중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과거 구마라집은 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였다. 외국의 이름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었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둘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죽은 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같지 않다. 혹자는 홍시(弘始) 7년(405)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8년, 혹자는 11년이라고도 한다. 고찰해 보건대, 칠(七)자 와 십일(十一)자는 혹 글자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록(譯經錄)』의 전(傳) 속에도 1년으로 된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세 가지 주장의 어느 쪽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할까 두려워 딱히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
2) 불야다라(弗若多羅)
불야다라는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을 잘 지키는 행실로 칭찬 받았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 부(部)1)에 정통하여 외국에서 으뜸가는 스승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1) 책 이름 뒤에 나오는 부(部)는 책 그 자체를 가리킨다. 가령 여기에서의 “『십송률(十誦律)』 부(部)에 정통하여”란 『십송률(十誦律)』이란 책에 정통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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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으뜸가는 손님의 예로 대우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그 계행의 본보기에 절하며 두터이 존경하였다. 이에 앞서 비록 경법(經法)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율장(律藏)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미 불야다라가 이 율부에 빼어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 사모하였다.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병에 걸려 갑작스러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큰 일이 미처 성취되지 않았을 때 뛰어난 분이 돌아가셨으므로, 대중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깊이가 보통의 아픔을 넘어섰다.
3) 담마류지(曇摩流支)
담마류지는 중국말로 법락(法樂)이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율장(律藏)으로 명성을 날렸다.
홍시 7년(405) 가을에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과거 불야다라가 『십송률』을 외워 내다가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산의 석혜원은 달마류지가 비니(毘尼: 율장)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율부를 완성하기를 희망하였다. 곧 그에게 편지를 띄워 교유(交遊)를 통하였다.
“불교가 흥기하여 먼저 그대의 나라에서 행해지다가 갈래가 나뉘어져 흘러들어온 이후로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문의 계율에 있어서는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지난번 서역의 도사 불야다라는 계빈국 사람입니다.
그는 『십송률』의 범본을 외웠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이것을 옮겨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송률』의 글이 막 절반을 넘기 시작할 때 불야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일을 중도에 그쳐서 완성할 수 없자, 개탄스럽고 한스러움이 참으로 깊었습니다.
이제 ‘어진 분께서 이 경을 가지고 몸소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운수가 이른 것입니다. 어찌 사람이 일삼아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도를 널리 펴고자 때에 감응하여 움직이셨으니,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인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계율을 배우는 무리들을 위하여 이 경본을 완성시켜서, 청정한 행을 열어 보여 그들의 눈과 귀를 씻어주시고, 처음 번뇌의 물결을 건너려는 이들로 하여금 위없는 나루를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수승(殊勝)한 업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해와 달보다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은혜가 깊고 덕이 두터운 것이니, 사람이나 신(神)이나 다 함께 감동할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우시어,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뜻을 천에 하나나 만에 둘이라도 어기지 않으셔서, 여러 도인들이 아뢰는 뜻을 살펴 주기를 원합니다.”
담마류지는 혜원의 편지를 받은 데다 요흥(姚泓)의 도타운 요청을 받자,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률』을 함께 번역하여 모두 끝마쳤다.
자세하게 연구하고 엄격하게 고증하여 계율의 조목을 자세히 정했다. 구마라집은 문장이 번잡하여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입적하여, 깎아 내어 다듬을 수 없었다.
담마류지는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혜관(慧觀)이 강남의 서울인 건강(建康)으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담마류지는 말하였다.
“그 땅에는 그럴 만한 사람도 있고, 그럴 만한 법도 있어서, 충분히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계율의 가르침이 없는 곳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이에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다. 그가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혹자는 양주[凉土]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4) 비마라차(卑摩羅叉)
비마라차는 중국말로 무구안(無垢眼)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침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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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용하며 뜻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출가해서 도를 실천하여 괴로움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 힘써 이루었다. 그는 전에 구자국에 있으면서 율장을 널리 선양하였다.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와서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구마라집도 역시 거기에 참여하였다.
구자국이 함락당하자 비마라차는 그 곳을 피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으면서 크게 경장(經藏)을 널리 알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비마라차 자신도 비니(毘尼: 율장)의 수승한 품(品: 가르침의 내용)을 동쪽 나라에 두루 미치게 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지팡이 짚고 고비 사막을 건너 위험을 무릅쓰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위진 홍시 8년(406)에 관중에 도착하였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여 대접하고, 비마라차도 먼 땅에서 제자와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자 비마라차는 관동(關東) 지역으로 떠났다. 수춘(壽春)에 체류하여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율학을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대하게 비니(毘尼)를 떨쳤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률』 본(本)은 58권이다. 그 최후의 한 게송[訟]은 ‘명수계법 급제성선법사(明受戒法 及諸成善法事)’이다. 그 뜻의 요점을 좇아 줄여서 선송(善誦)이라 이름한다. 비마라차는 그것을 석간사에 가지고 갔다. 선송을 더 늘려서 58권을 61권으로 만들고, 최후의 한 게송의 이름을 고쳐서 ‘비니송(毘尼誦)’이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선송과 비니송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그대로 쓰인다.
그 후 남쪽 강릉(江陵)으로 가서 신사(辛寺)에서 하안거를 지내면서 『십송률』을 개강하였다. 비마라차는 이미 중국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할래야 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이 신묘한 판본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다.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구하는 자들이 숲처럼 모여들었다. 계율의 조목에 밝고 금계(禁戒)를 아는 자의 수도 아주 풍성해졌다. 율장이 크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비마라차의 힘이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깊이 종지(宗旨)를 총괄하여, 비마라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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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한 내금(內禁: 계율)의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기록하고 편찬해서, 2권을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 비구와 비구니들이 읽고 익히면서 다투어 서로 옮겨 베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속어로 말하였다.
“비마라차의 촌스러운 말을 혜관이 재치 있게 기록하니, 온 장안 사람들이 베껴 적느라 종이값이 구슬같이 귀해졌다.”
오늘날까지도 세상에 행하여 후학들의 법이 되었다.
비마라차는 덕을 기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시끄러움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 그 해 겨울 다시 수춘의 석간사(石澗寺)로 되돌아가 그 절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7세이다.
비마라차는 눈이 파래서 당시 사람들이 푸른 눈[靑眼]의 율사라고 하였다.
5) 불타야사(佛陀耶舍)
불타야사는 중국말로 각명(覺明)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대대로 외도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에 와 걸식하였다.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람들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였다.
갑자기 아버지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어진 분을 범하는 죄에 걸려서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즉시 이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니, 며칠 후 문득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하여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이다. 항상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하였다. 어느 날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고 하였다. 불타야사는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필시 사람을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것이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15세가 되어 경을 외우자 하루에 2, 3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는 항상 밖으로 탁발(托鉢: 걸식)을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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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였다. 그러자 한 나한이 그의 총명함과 민첩함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빌어다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소승(大小乘) 경전 수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오만하였다. 꽤 지견(知見)이 있다고 자처(自處)하였다.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승려들에게서 존중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어도 계단(戒壇)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向立之歲]에도 여전히 사미(沙彌)였다. 외삼촌에게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다.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을 일삼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였다. 오히려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었구나”라고 말하였다. 그의 애오라지 정진함이 이와 같았다.
뒤에 사륵국(沙勒國)의 국왕 불여(不悆)는 3천 명의 승려들을 청하여 재를 베풀었다. 마침 불타야사도 그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로 중국어로는 법자(法子)라 했다. 불타야사의 용모와 복장이 말끔하고 우아한 것을 보고 불타야사에게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깨끗하여 태자가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궁궐 안으로 청하여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는 대우를 융숭히 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수학하면서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구자국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붕어하여 달마불다 태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구자국을 정벌하였다. 구자왕이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불타야사에게는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뒷일을 맡겼다.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함락되었다. 사륵왕은 귀국하여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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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懷抱)를 다 풀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서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불타야사는 사륵국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뒤에 동쪽으로 구자국에 가서 불법으로 매우 성대하게 교화하였다.
그 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다.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자, 나라 사람들이 만류하여 다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야겠다. 비밀리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한다.”
제자는 말하였다.
“내일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풀었다. 수십 글자의 주문을 외운 뒤 제자와 더불어 그 물로 발을 씻었다.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다.
“오직 몹시 센 바람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입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을 주어 발을 씻기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 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였지만,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했다. 걸어서 고장(姑臧)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이미 장안(長安)으로 들어간 뒤였다.
요홍(姚泓)이 구마라집을 핍박하여 여자를 두어 정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구마라집은 고운 솜과 같은 존재이다. 어찌하여 그를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게 한단 말인가.”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홍(姚泓)에게 권하여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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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이하게 하였다. 요홍이 아직 구마라집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요홍은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아뢰었다.
“대저 불교의 교법(敎法)을 널리 선양하려면, 글 뜻을 두루 통달해야 합니다. 빈도(貧道)는 비록 경전의 글은 외울 수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그윽한 이치를 깊이 통달하였습니다. 지금 고장에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부르십시오. 한 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핀 뒤에 붓을 대어, 교법의 미묘한 말씀을 망실하지 않아, 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홍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초빙하였다. 그러나 불타야사는 모두 다 받지 않고 웃으며 말하였다.
“임금의 밝으신 말씀이 내려져, 수레 가득 싣고 사신이 달려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시주께서 소승을 대우하심이 이미 후하십니다. 다만 현재 구마라집이 처해 있는 것을 보니,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대로 자세히 아뢰었다. 요홍은 그의 기미를 살피고 삼가함에 탄복하여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타일렀다. 바야흐로 장안에 도착하였다. 요홍이 몸소 나가 방문하여 안부를 물었다. 별도로 소요원(逍遙園)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네 가지 공양물[四事]로 공양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탁발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들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였다. 한 달 남짓 동안 의문이 나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느라 미처 붓을 잡지 못하였다. 불타야사가 이르고 나서는 함께 명백하게 따져서 해결하였다. 문장의 조리가 방정하게 바로잡혀서, 승려와 속인 3천여 명이 모두 그 요점에 딱 들어맞는다고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코밑수염이 붉고 『비바사(毘婆沙)』를 능숙하게 해석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코밑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다.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또한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도 호칭하였다.
의발(衣鉢)과 와구(臥具) 등의 네 가지[四事] 공양이 삼칸 집에 가득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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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지만 불타야사는 관심(關心)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홍은 그 공양물들을 팔아서 성 남쪽에 절을 지었다.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므로, 위사례교위(僞司隸校尉) 요상(姚爽)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홍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였다. 불타야사에게 시험 삼아 오랑캐들이 기록한 약방문 5만 글자 가량을 외우게 하였다. 이틀 후 그것을 암송하게 하였는데, 옆에서 책을 잡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그의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 12년(410)에 『사분율(四分律)』 44권과 『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번역하여 내었다. 양주(凉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중국어로 번역하고, 도함(道含)이 붓으로 받아 적었다. 15년(413)에 이르러 역장(譯場: 번역하는 곳)을 해산하였다. 요홍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도함과 축불념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이름난 사문 5백 명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하직하고 외국으로 돌아갔다. 계빈국에 이르러 『허공장경(虛空藏經)』 한 권을 구해서 상인에게 부쳐, 양주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했다. 후에 그가 어느 곳에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한다.
6)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할아버지는 달마제바(達摩提婆)로서 중국에서는 법천(法天)이라 한다. 일찍이 북천축국(北天竺國)에 장사하러 갔다가 그대로 거기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달마수리야(達摩修利耶)로서 중국에서 법일(法日)이라 하며 젊어서 죽었다.
각현은 세 살에 고아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다섯 살에 또 어머니를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종조부(從祖父) 구바리(鳩婆利)는 각현이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어버이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이슬 맞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데려다가 득도시켜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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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여러 사람들과 경전을 익히고 암송하기를 일삼았다. 대중들에게 한 달 걸리는 것을 각현은 하루 만에 암송하여 마쳤다. 그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각현의 하루는 서른 사람의 하루에 필적하는구나.”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수업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대부분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승가달다는 비록 각현의 재주에 감복하지만, 아직 그 사람 됨됨이는 측량하지 못하였다.
뒤에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할 때, 홀연히 각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승가달다는 놀라서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각현이 대답하였다.
“잠깐 도솔천에 가서 미륵보살님께 예경을 드리고 왔다.”
말을 마치자 문득 사라졌다. 이에 승가달다는 각현이 성인(聖人)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 깊고 낮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뒤에 여러 번 각현의 신비한 변화를 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각현이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각현은 항상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고, 두루 각 나라의 풍속을 관찰하기를 원하였다. 마침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서쪽으로 와서 계빈국에 이르렀다. 대중들의 청정하고 수승한 모습을 보고, 이에 탄식하면서 동쪽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리 동료들은 모두 도를 구하려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트이지 못하였습니다.”
곧 계빈국의 대중들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동쪽 땅에 교화를 널리 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였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석씨(釋氏)성을 이어받았고, 대대로 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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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學)을 준수하였습니다. 이갈이 할 무렵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미 경론(經論)을 통달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대선사 불대선(佛大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전부터 계빈국에 있었습니다.”
다시 또 지엄에게 이르기를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불타발타라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엄이 간절히 요청하므로 각현은 마침내 딱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대중들을 떠나 스승에게 하직하고, 양식을 싸 가지고 동쪽으로 갔다. 걷고 달린 지 3년 동안에 추위와 더위를 연이어 겪었다. 이미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다. 여섯 나라의 군주들이 멀리 떠나는 교화자를 기꺼워하며, 마음을 기울여 물자를 바쳤다.
교지국(交趾國)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갔다. 배가 어떤 섬을 지나갈 때 각현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낫겠습니다.”
선장은 말하였다.
“길을 떠난 사람은 하루의 시간이라도 아낍니다. 순조로운 바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2백여 리쯤 나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배가 도로 그 섬으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신통력을 깨닫고 모두 스승으로 섬겼으며, 배의 진퇴를 물었다. 뒤에 순풍을 만났으므로 동행하는 배들은 모두 출발하였다. 그러나 각현은 말하였다.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선장은 곧 멈췄다. 이미 앞에 출발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뒤에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선박들을 모두 출발하게 하였다. 아무도 기꺼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각현은 스스로 일어나서 닻줄을 풀었다. 이 배 한 척만이 출발하였다. 얼마 후 해적들이 쳐들어와,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탈당하였다.
얼마 후 청주(靑州)의 동래군(東萊郡)에 이르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크게 기뻐하며 함께 불법을 논하면서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계발하여, 깨달아 터득한 것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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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래서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의 해석은 보통사람의 뜻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찌 반드시 말이 훌륭해서 칭찬하는 것이겠습니까.”
구마라집은 항상 의심스러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당시 후진(後秦)의 태자 요홍(姚泓)은 각현의 설법을 듣고자, 많은 승려들에게 명하여 동궁에 모여 논의하였다. 구마라집과 각현의 논의가 여러 차례 오갔다.
구마라집이 물었다.
“현상이 어째서 공(空)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극미(極微)가 모여 색(色)이 성립되었으므로 색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비록 색이라고는 하더라도 항상 공입니다.”
구마라집은 다시 물었다.
“이미 극미를 가지고 색을 파하여 공이라 한다면, 어째서 또 극미를 파합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승려들은 하나의 극미를 부셔 쪼개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구마라집은 또 물었다.
“극미는 바로 상(常)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하나의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많은 극미는 공(空)이며, 많은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하나의 극미도 공입니다.”
당시에 보운(寶雲)이 이 대화를 통역하였다. 보운 자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각현이 헤아리는 미진(微塵)은 바로 상(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장안의 학승들은 다시 해석해 주기를 청하였다. 각현이 말하였다.
“무릇 법은 스스로 생하지 않으며, 연(緣)이 모이기 때문에 생하는 것입니다. 일미진(一微塵)에 인연하기 때문에 많은 미진이 있으며, 미진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공입니다. 어찌 일미진을 파하지 않고, 상(常)이어서 공이 아니라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답의 분명한 뜻이었다.
후진(後秦)의 임금 요홍은 오로지 불법에 마음을 써서 3천여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였다. 모든 승려들이 궁궐에 왕래하면서 성대하게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오직 각현만은 고요함을 지켜 대중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젯밤 고향에서 배 다섯 척이 출발하는 것을 보았노라.”
제자는 그것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렸다. 관중(關中)의 기존 승려들은 모두 각현이 괴이한 일을 나타내어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또 각현이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선업(禪業)을 크게 홍포하자, 사방에서 선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이르렀다. 다만 배움에 젖어듦에 깊고 얕음이 있고, 법을 얻음에 짙고 연함이 있었다. 그 중 경박하고 속이는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교활하게 속이는 일도 있었다.
한 제자가 약간 관행(觀行)을 닦고 스스로 말하였다.
“아나함과(阿那含果: 不還果)를 터득했다.”
각현이 아직 가까이하여 조사하고 묻기도 전에, 마침내 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졌다. 대단한 원망과 비방을 받아서,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 듯하였다.
이리하여 각현의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름을 감추고 잠적해 버렸으며, 어떤 이는 야밤에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반나절 사이에 대중들이 거의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각현은 평안을 유지하여 마음에 거리끼지 않았다.
당시 기존 승려인 승략(僧䂮)과 도항(道恒) 등은 각현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자기가 터득한 법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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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당신이 전에 다섯 척의 배가 온다고 예언한 것은 허황하여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문도가 속이고 홀려서 서로 같지 않다고 일을 일으킨 것은 이미 계율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이치상 함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응당 속히 떠나서 여기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각현은 말하였다.
“나 자신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서, 떠나고 머무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다만 회포(懷抱)를 다 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어서, 그것을 개탄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명과 함께 떠났다. 그의 정신과 뜻이 조용하여, 처음과 다른 낯빛이 전혀 없었다.
진실을 아는 대중들은 모두 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전송하였다. 요홍도 각현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탄하며 도항(道恒)에게 말하였다.
“불타발타라 각현 사문은 도(道)와 한마음이 되어, 이곳으로 와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문 입을 벌려 아직 말을 토해내지 못하였다. 참으로 깊이 개탄스럽다. 어찌 한마디 말을 허물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고는 요홍이 칙명을 내려 각현의 뒤를 급히 뒤따르게 했다. 그러나 각현은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진실로 은혜로운 임금의 뜻은 압니다만, 칙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승려들을 이끌고 밤에도 길을 걸어, 남쪽 여산(廬山)으로 향했다.
사문 석혜원(釋慧遠)은 오랫동안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하였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니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았다. 혜원은 각현이 배척당한 것은 그 허물이 문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다섯 척의 배를 예언한 것 같은 것은 단지 그 주장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어서, 계율에 대해서는 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자 담옹(曇邕)을 파견하여, 후진(後秦) 임금인 요홍과 관중(關中)의 대중 승려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배척한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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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각현에게 여러 편의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각현은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거처할 때 안락함을 구하지 않았다. 여산에 일 년 가량 머무르고 다시 서쪽 강릉(江陵)으로 갔다. 마침 외국 선박이 들어왔다. 얼마 있다가 찾아가서 물어 보았다. 과연 천축국에서 온 다섯 척의 배로서, 각현이 미리 내다본 바 그대로였다.
온 나라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다투어 와서, 예를 올리고 받들어 보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각현은 모두 받지 않았다. 발우를 들고 탁발하면서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태위(太尉)로 있던 시절에 장사(長史) 벼슬을 하였다.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의(劉毅)를 토벌할 때, 관청의 부서를 따라 주둔했다.
각현은 제자 혜관과 함께 원표에게 나아가 걸식하였다. 원표는 평소 불교를 신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박하게 대접하였다. 미처 배부르기 전에 물러날 것을 고하자, 원표가 말하였다.
“아직 만족하지 않은 듯하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시주께서 보시하는 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든 음식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원표가 즉시 측근에게 호령하여 음식을 더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과연 다했으므로 원표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은 어떤 사람인가?”
혜관은 말하였다.
“덕행과 기량이 고매하여,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표는 각현의 남다름에 깊이 매우 감탄하여 태위(太尉) 유유(劉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태위가 청하여 만나보고는 매우 높이고 공경하여, 필요한 물자를 공양하여 빠짐없이 올렸다. 얼마 후 태위는 서울로 돌아갔다.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각현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진실하여 중국의 풍속과 달랐다. 그리고 뜻과 운치가 맑고 원대하여 평소 고요한 분위기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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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법사 승필(僧弼)은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투장사(鬪場寺, 즉 도량사)의 선사(禪師)는 크나큰 마음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바로 천축국의 왕필(王弼)이나 하안(河晏)과 같은 풍류인(風流人)입니다.”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闐國)에서 『화엄경(華嚴經)』의 앞부분 3만 6천 게송(偈頌)을 구하였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각현을 초청하여 번역하는 우두머리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쥐고, 사문 법업(法業)·혜엄(慧嚴) 등 1백여 인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한문(漢文)과 범문(梵文)을 회통하여 미묘하게 경전의 뜻을 살렸다. 그러므로 도량사에는 아직까지도 화엄당(華嚴堂)이 남아 있다. 또 사문 법현(法顯)은 서역에서 구한 『승기율(僧祇律)』 범본(梵本)을 다시 각현에게 부탁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내용은 「법현전(法顯傳)」에 실려 있다.
각현이 선후로 번역한 경전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6권, 『니원경(泥洹經)』 및 『수행방편론(修行方便論)』 등 모두 15부 117권이다. 어느 것이나 그윽한 의미를 궁구하여, 미묘하게 문장의 뜻을 극진히 하였다.
각현은 원가(元嘉) 6년(429)에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7) 담무참(曇無讖)
담무참은 담마참(曇摩讖)이나 담무참(曇無懺)이라 하기도 한다. 대개 범음(梵音)을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본시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모직 담요를 짜는 품을 팔아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사문 달마야사는 중국어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승려와 속인들이 숭앙하여 재물로 공양하는 것이 풍부하였다. 담무참의 어머니는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 때문에 담무참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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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같이 공부하는 몇 사람과 함께 주문을 읽었다. 총명함과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하루에 경전을 만여 글자나 암송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우고, 5명(明)의 여러 논들을 두루 보았다. 그의 강설(講說)은 변론이 정밀하여, 응답하여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백두 선사(白頭禪師)가 담무참을 만나 논의를 한 일이 있다. 익힌 공부가 서로 달라 논쟁한 지 백여 일이나 되었다. 아무리 담무참이 공박하고 힐난하여 날카롭게 들고 일어나도, 백두선사는 끝내 수긍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의 정밀한 논리에 굴복하였다. 백두 선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경전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곧 나무껍질에 쓰인 『열반경(涅槃經)』을 주었다. 담무참은 즉시 이 경전을 읽고는 놀라서,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토록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오랫동안 헤매었다.”
이에 대중들을 모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침내 대승에 전념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소승의 경전 2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담무참의 사촌 형은 코끼리를 잘 조련하였다. 그는 왕이 타던, 귀가 흰 큰 코끼리를 타다가 실수로 코끼리를 죽여 버렸다. 왕은 진노하여 사촌형을 주벌하고 명령을 내렸다.
“감히 유해를 돌보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가서 보는 자가 없었으나, 담무참은 곡을 하고 그를 장사지냈다. 왕이 진노하여 담무참을 주벌하려고 하자 담무참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고, 나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어느 쪽이나 대의(大義)를 어기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으나, 담무참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다.
왕은 그의 의지와 기개를 진귀하게 여겨, 마침내 그를 머물게 하고 공양하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에 밝아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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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그를 대주사(大呪師)라고 불렀다.
뒤에 왕을 수행하여 산에 들어갔다. 왕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은밀히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런 후에 찬탄하여 말하였다.
“대왕의 은택에 감응하기 때문에 마른 돌에서 샘물이 솟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덕을 찬탄하였다. 때에 알맞게 내리는 비의 혜택으로 매우 조화로워져서, 백성들은 노래를 불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을 기뻐했으며,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얼마 후 왕의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 그를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졌다.
담무참은 오랫동안 머문 것이 싫증을 부른다고 생각하여 곧 하직하고 계빈국(罽賓國)으로 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앞부분 열 권과 『보살계경(菩薩戒經)』,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휴대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소승만 배우고, 『열반경』을 신봉하지 않았다. 이에 동쪽 구자국으로 갔다.
얼마 후 다시 나아가 고장(姑臧)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쉬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경을 베개삼아 잤다. 누군가 이 경을 끌어당겨 땅 위에 두었다. 담무참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 이것을 도둑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경은 여래의 해탈(解脫)을 담은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
부끄러워 깨우치고 경본을 특별히 높은 곳에 두었다.
그날 밤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다. 몇 번이나 경본을 들어 올리려 하나 끝내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경을 받들면서 조금도 무거워 하지 않았다. 도둑은 이것을 보고, 담무참을 성인이라 여기고 모두 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 당시 하서(河西) 국왕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양(凉) 지방을 참람히 점거하고 스스로 왕이라 참칭하였다. 담무참의 명성을 들었다. 불러서 상면하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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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은 평소 불법을 받들어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청하여 경본을 번역하고자 하였다. 담무참은 아직 중국어를 잘 알지 못했다. 또 그를 도와 줄 전역자(傳譯者)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이치를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즉시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담무참은 중국어를 삼 년 동안 배우고서야 비로소 『열반경』 첫 부분 열 권을 번역하여 필사(筆寫)하였다.
당시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은 하서(河西) 지방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장(經藏)을 펴내자 깊이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다. 범문(梵文)을 옮겨 바꾼 것을 혜숭공이 받아 적었다. 승려와 속인 수백 명이 의문 나는 것을 종횡으로 거침없이 힐난하였다. 그러나 담무참은 그때그때 응하여 막힌 것을 풀어내며 청아한 변론을 물 흐르듯 하였다. 겸하여 문장솜씨도 풍부하여 문장이 화려하고 치밀하였다.
혜승과 도랑 등이 거듭 널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차례로 『방등대집경(方等大集經)』·『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비화경(悲華經)』·『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우바새계(優婆塞戒)』·『금광명경(金光明經)』·『해룡왕경(海龍王經)』·『보살계본(菩薩戒本)』 등 60여만 글자를 번역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 경본의 품수(品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으로 돌아가서 구하여 찾았다. 그 때 그의 모친상을 당했으므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우전국(于闐國)에 가서 경본의 가운데 부분을 구하고, 다시 고장에 돌아와서 번역하였다.
뒤에 또 우전국에 사신을 보내어 뒷부분을 찾았다. 이리하여 계속해서 번역하여 33권이 되었다. 위현시(僞玄始) 3년(414)에 처음 번역을 시작하여, 현시 10년(421) 10월 23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 질(帙)을 끝마쳤다. 바로 송(宋)나라 무제(武帝) 영초(永初) 2년(421)이다.
담무참은 이르기를 “이 『열반경』의 범본(梵本)은 본래 3만 5천 게송(偈頌)이다. 이쪽 지방에서 백만 글자 가량을 덜어내어, 지금 번역한 것은 단지 1만 여 게송(偈頌)뿐이다”라고 하였다.
담무참은 일찍이 저거몽손에게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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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면, 반드시 많은 재앙과 돌림병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거몽손은 믿지 않고 몸소 자신이 귀신을 보고 증험하기를 원하였다. 담무참이 즉시 저거몽손에게 주술을 걸었다. 저거몽손은 귀신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였다.
담무참이 말하였다.
“마땅히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재계(齋戒)하고, 신주(神呪)를 외워 돌림병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에 주문을 외운 지 3일 만에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들이 이미 떠났습니다.”
그 때 변경에서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수백 마리의 돌림병 귀신들이 달려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나라 안이 평안을 얻은 것은 담무참의 힘이다. 저거몽손은 더욱 공경스럽게 섬겼다.
저거몽손의 위승현(僞承玄) 2년(429)에 이르러, 저거몽손은 황하를 건너 포한(抱罕)에서 진(秦)나라 임금 걸복모말(乞伏暮末)을 정벌하려 세자인 흥국(興國)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리어 걸복모말의 군대에게 패배당하여 흥국은 사로잡혔다.
뒤에 걸복모말은 수비에 실패하였다. 걸복모말도 흥국과 함께 혁련정정(赫蓮定定)에게 사로잡혔다.
후에 혁련정정도 토곡혼(吐谷渾)에게 격파당하여, 흥국은 마침내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저거몽손은 크게 성내었다.
“부처를 섬겨도 영험이 없다.”
사문 50여 명을 내쫓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환속시켰다.
예전에 저거몽손이 자기 어머니를 위하여 장륙(丈六)의 석상을 조성하였다. 석상이 눈물을 흘린 데다 담무참도 간하는 말로 바로잡아주니, 이에 저거몽손이 마음을 고치고 뉘우쳤다.
그 때 북위(北魏)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 太武帝, 재위 424~452)가 담무참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맞아들이려 했다. 탁발도는 또 저거몽손에게 고하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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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담무참을 보내지 않으면 즉시 공격하겠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섬긴 지 이미 세월이 오래된지라, 차마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였다.
탁발도는 뒤에 또 위태상(僞太常) 고평공(高平公) 이순(李順)을 파견해서, 책명(策命)으로 저거몽손에게 관작을 수여하였다. 사지절시중도독(使持節侍中都督) 양주서역제군사(涼州西域諸軍事) 태부표기대장군(太傅驃騎大將軍) 양주목(涼州牧) 양왕(涼王)으로 삼고 구석(九錫)의 예를 하사하였다.
또한 저거몽손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내 들으니, 담무참의 박학다식은 구마라집과 같은 정도이고, 비밀스런 주문과 신비한 영험은 불도징과 짝할 만하다고 한다. 짐이 도를 연구하고자 하니 빠른 역말에 태워 그를 보내도록 하라.”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신락문(新樂門)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말하였다.
“서번(西蕃)의 늙은 신하인 이 저거몽손은 조정을 받들어 섬겨, 감히 그 뜻을 거스르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천자께서는 아첨하는 말을 믿고 받아들여, 독촉하고 핍박만 하고 계십니다.
전에는 표문을 내려 담무참이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자를 보내 그를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담무참은 바로 저의 스승님이므로 응당 그분과 죽음을 함께 해야만 합니다. 진실로 저의 남은 여생이야 아깝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 번 죽기 마련이지요. 다만 언제인지를 어찌 깨닫겠습니까?”
이순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남보다 먼저 정성을 나타내시어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 입시(入侍)토록 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왕의 충성스러운 공적을 공경하기 때문에 특별한 예우를 드러내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이 오랑캐 도인 한 사람 때문에 산악(山岳) 같은 공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루아침의 성냄을 참지 못하여 이제까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킨다면,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후하게 대우하는 뜻이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대왕을 위하여 취하지 마시기를 빕니다. 주상(主上)께서 마음을 비우심이 지극함은 홍문(弘文)이 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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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은 저거몽손이 파견하여 위(魏)나라에 보낸 사신이다.
저거몽손이 말하였다.
“태상의 구변이 아름다움은 소진(蘇秦)과 같습니다. 아마도 속마음은 그 말씀과 들어맞지 않는 것 같군요.”
저거몽손은 이미 담무참을 아껴서 보내지 않았으므로, 위나라의 강력함에 더욱 시달렸다.
저거몽손의 의화(義和) 3년(433) 3월에, 담무참은 다시 서역에 가서 『열반경』의 뒷부분을 구하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저거몽손은 그가 떠나기를 원하는 것에 분노하여 비밀리에 담무참을 살해할 것을 꾀하였다. 거짓으로 물자와 양식을 보내고 후하게 보물과 재화를 선사하였다.
출발하는 날에 임하여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작별하였다.
“내 업의 갚음이 장차 이르려 한다. 뭇 성인들께서도 이것을 구제할 수는 없다. 본래 마음에 서원을 새긴 것이라서 도의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저거몽손은 과연 그의 출발에 미쳐 자객을 보내 길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그 때 나이는 49세이다. 이 해는 송나라 원가(元嘉) 10년(433)이다. 멀거나 가깝거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좌우에는 항상 대낮에도 귀신이 나타나 칼로 찌르는 것이 보였다. 4월에 저거몽손은 병으로 죽었다.
과거에 담무참이 고장(姑臧)에 있을 때, 장액(張掖: 감숙성 장액현)의 사문 도진(道進)이 담무참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으려 하였다. 담무참이 말했다.
“우선 허물을 참회하라.”
도진은 7일 낮 7일 밤 동안 정성을 다하고, 8일째 되는 날 담무참에게 나아가 계를 구하였다. 담무참은 갑자기 크게 성을 냈다. 도진은 다시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의 업장이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죽을힘을 다하여 좌선하고 참회하였다.
도진은 곧 선정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보살들과 함께 나타나 자기에게 계법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날 밤 같은 장소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도진이 본 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 도진이 담무참에게 나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하였다. 아직 수십 걸음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담무참이 놀라 일어나 외쳤다.
“훌륭하고도 훌륭하도다. 이미 계를 감득(感得)하였구나. 내 응당 다시 너를 위하여 증명(證明)을 할 것이다.”
그러고는 불상 앞에서 차례로 계율의 차별상을 설하였다.
그 당시 사문 도랑(道朗)은 관서(關西) 지방에서 명예를 떨쳤다. 도진이 계를 감득한 그 날 밤에 도랑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에 도랑은 자신의 계랍(戒臘: 수계 연령)을 낮다고 여겨 도진의 법제자가 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도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 계법이 전수되어 마침내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담무참이 남긴 법도(法度)이다.
별기(別記)에 말하였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반드시 이파륵보살(伊波勒菩薩)이 이 땅에 전래(傳來)할 것이다.”
이 경을 뒤에 과연 담무참이 전하여 번역하니, 아마도 담무참은 어쩌면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안양후(安陽侯)
저거몽손의 사촌 아우로 저거안양후(沮渠安陽侯)가 있다.
사람됨이 의지가 강하고 소탈하며 책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담무참이 하서(河西)지방에 들어와 불법을 널리 폈다. 그러자 안양후는 불경에 뜻을 기울이고 5계[五禁]를 받들어 지녔다. 많은 경전들을 읽자마자 곧 소리 높여 암송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서 생각하였다.
‘배움에 힘써서 많이 들어 아는 것이야말로, 불보살께서 성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어렸을 때 불법을 구하러 고비 사막을 건너 우전국으로 갔다. 구마제대사(瞿摩帝大寺)에서 천축국의 법사 불타사나(佛馱斯那, Buddhasena)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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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사나는 본디 대승을 배웠으며, 천재로서의 빼어남을 드러내었다. 하루에 5천만 글자를 암송하고 선법(禪法)을 밝게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사람 속의 사자[人中師子]’라고 불렀다. 안양후는 그에게 『선비요치병경(禪秘要治病經)』을 배웠다. 또한 그 경의 범본을 소리 내어 외우는 데 뛰어났다.
이윽고 동쪽으로 고창(高昌)에 돌아와서 『관세음경(觀世音經)』과 『관미륵경(觀彌勒經)』을 각각 한 권씩 얻었다. 또한 하서 지방으로 돌아와 즉시 『선요(禪要)』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위위(僞魏)가 서량(西涼)을 병탄(倂呑)하자 남쪽 송(宋)나라로 도망하였다. 뜻을 감추고 몸을 낮추어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항상 탑사(塔寺)에 노닐며 거사의 몸으로 세상을 마쳤다.
과거에 안양후가 『관미륵보살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生兜率天經)』과 『관세음경(觀世音經)』을 번역하였다. 단양 윤(丹陽尹) 맹의(孟顗)가 이것을 보고 훌륭하게 여겨 후한 상을 베풀었다.
뒤에 죽원사(竹園寺)의 비구니 혜준(慧濬)은 다시 그에게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안양후는 이미 오랫동안 익혀서 뛰어나므로 글을 써 나감에 막힘이 없었다. 17일 만에 번역하여 다섯 권을 만들었다. 얼마 후,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서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을 번역했다.
안양후의 거처는 처자식과의 번잡함을 끊었으며, 영예와 이득에 욕심이 없었다. 조용히 불법의 동료들과 소요하며, 불법을 선양하고 유통시켰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뒤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도보(道普)
담무참이 번역한 여러 경전들은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건업(建業)에 전해졌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 법사는 다시 『열반경』의 뒷부분을 찾기를 원하였다.
이에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아뢰어 물자를 공급받았다. 사문 도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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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서리(書吏) 열 명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경을 구하였다. 도보는 장광군(長廣郡)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어 다리를 다치고, 병으로 입적하였다. 도보는 임종에 임하여 탄식하였다.
“『열반경』 뒷부분은 송나라 땅과는 인연이 없구나.”
도보는 원래 고창 사람이다. 그런데 서역을 경유하여 여러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부처님의 존영(尊影)에 공양하고,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 사탑(四塔)·보리수·부처님의 발자취·부처님의 형상(形象) 등을 우러러 뵙지 못한 것이 없었다. 범서(梵書)를 잘 알았다. 여러 나라의 언어에 두루 뛰어나, 특이한 지경을 여행하며 돌아다녔다.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법성(法盛)
당시 고창에는 또 사문 법성(法盛)이 있었다. 역시 외국에 다녀왔다. 모두 네 권의 전기가 있다.
∙축법유(竺法維)·석승표(釋僧表)
또 축법유와 석승표가 있다. 모두 부처의 나라에 다녀왔다고 한다.
고승전 제3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1. 역경 ③
1) 석법현(釋法顯)
석법현의 성(姓)은 공(龔)씨로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의 세 형이 모두 7·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세 살 되던 해에 바로 승적(僧籍)에 올려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몇 년 동안 집에 머무르다가 병이 위독해져 곧 죽을 듯했다. 사찰로 돌려보내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후에 사찰의 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에 비겼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했다.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티끌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불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극한 성품이야 보통사람을 훨씬 넘어섰지만, 장례를 마치고는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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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같이 공부하는 이들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베었다. 그 때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적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이다. 지금 또 남의 것을 빼앗으면, 내세에는 배고픔과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빈도(貧道)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자 즉시 돌아서니, 도적들은 곡식을 버리고 갔다. 수백 명의 대중 승려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지조와 행실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기거의 동작과 범절도 바르고 엄숙하였다. 항상 불경과 율장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동진(東晋) 융안(隆安) 3년(399) 같이 공부하는 혜경(慧景)·도정(道整)·혜응(慧應)·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를 보고 동쪽과 서쪽을 짐작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자주 뜨거운 바람이 불고 악귀가 나타났다. 이것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법현은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원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악룡이 혹독한 바람을 토하여 비바람에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로우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곳이 7백여 군데나 되었다. 그곳을 건넜다. 또 조교(弔橋)를 딛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였다. 이 모두가 한(漢)나라의 장건(張騫)1)이나 감보(甘父)도
1) 전한(前漢)의 하내(河內) 사람. 자(字)는 자문(子文). 무제(武帝) 때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匈奴)한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 10년 13년 만에 대월지국으로부터 돌아왔다. 이로부터 한나라가 서성(西城) 제국(諸國)에 알려져 교통(交通)이 크게 열리니 원삭(元朔) 6년에 그 공으로 박망후(博望侯)로 봉후(封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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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쳐왔다.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시 혼자 힘으로 외로이 나아갔다.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모두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차츰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말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따라온 두 승려는 위태로움으로 무서워하면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만 홀로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상상의 나래를 펴,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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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왔다.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문 외우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 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올 적에는 길이 다하여 으슥하게 막혀 있었다. 다만 하나의 좁은 길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미처 1리 남짓 가지 못했을 때,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이다. 용모와 복장은 누추하고 소박하나, 신령스런 기운이 우뚝하고 높았다.
법현은 비록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고상하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뒤에 또 한 젊은 승려를 만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그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젊은 승려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대제자(大弟子)인 두타(頭陀) 가섭(迦葉)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다시 급히 뒤쫓아 그 장소에 갔다. 그렇지만 가로지른 돌이 굴 입구를 막아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앞으로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매양 대중 승려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그때마다 모두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이 사는 집을 지었다. 아울러 좋은 먹이를 베풀었다.
매번 하안거(夏安居)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한 마리 작은 뱀으로 변하였다. 양쪽 귀가 모두 흰 빛이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구리 쟁반에 낙(酪)을 가득 담아서, 용을 중앙에 두고 상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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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예를 행하면, 곧 용으로 변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국(中天竺國)에 이르렀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波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다.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과 연경(綖經)2)·『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
법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워서, 비로소 직접 글씨를 베껴 쓸 수 있었다. 이에 불경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곳곳에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머리 돌려 바라보아도 자신의 그림자만 비치는, 오직 자기 혼자뿐이어서 늘상 슬픔과 탄식을 품었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 한 상인이 중국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흰 비단 부채를 공양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률(彌沙塞律)』·『장아함경(長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잡장(雜藏)』을 얻었다.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
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온 배 안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2) 선경(線經). 즉 경을 말하는 것으로서 경전의 이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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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문(沙門)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狼狽)를 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시주가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하오.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끼리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먹을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없어졌다. 오직 바람에 실려 바다를 떠내려갈 뿐이었다. 뜻밖에 어떤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명아주 풀[藜藿菜]을 발견하고는 짐짓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을 알았다. 다만 아직 어느 곳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의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었다. 뜻밖에 사문이 멀리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법현이 더 머물러 겨울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하는 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서울로 갔다.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게 나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방등니원경』·『잡아비담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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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阿毘曇心論)』을 번역해 내었다. 거의 백여 만 글자나 된다.
그러고 나서 법현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세상에 내어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어떤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성명(姓名)은 전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으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한 부를 베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집까지 미쳤다. 재물이 죄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오직 『대반니원경』만은 엄연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울에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 나머지 경장과 율장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6세이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2) 석담무갈(釋曇無竭)
석담무갈은 중국말로는 법용(法勇)이라 한다.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곧 고행(苦行)을 닦았다.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여 은사가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법현(法顯) 등이 몸소 부처의 나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슬퍼서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는 서원[忘身之誓]을 세웠다.
마침내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의 무리 25명을 불러모았다. 번개(幡蓋)와 공양(供養) 도구를 갖추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다.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고비 사막으로 진입하여, 내처 들어가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구자국(龜玆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들을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장기(障氣: 毒氣)는 천 겹이고, 층층이 쌓인 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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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만 리요,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굵은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다.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 표지로 삼았다. 뒷사람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아,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설산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대설산(大雪山)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쥐었다.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다. 계속해서 서로 바꿔가며 기어 올라갔다. 하루를 지내고야 가까스로 넘어왔다.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해 보니, 동료 열두 명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에 예배하였다. 1년 남짓 계빈국에 머무르는 동안 범서와 범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한 부를 구했다.
다시 사자의 입[師子口]이라 해석하는 신두나제하(辛頭那提河)에 이르렀다.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월지국(月氏國)에 들어가 부처님의 육계(肉髻)와 불정골(佛頂骨)에 예배하였다. 저절로 물이 끓어오르는 목방(木舫)을 친견하였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로 갔다. 그 곳에서 머무르는 승려 3백여 명은 모두 3승(乘)의 교학을 배웠다. 담무갈은 이 절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국의 선사 불타다라(佛馱多羅)는 중국말로 각구(覺救)라 한다. 그 지방에서는 모두 말하였다.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셨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초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로 삼았다.
이 석류사에서 머물며 석 달 동안 하안거를 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향했다. 길은 텅 비고 광활하였다. 다만 벌꿀만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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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을 삼았다. 동행자 열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이 같이 다녔다. 담무갈은 비록 자주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는 『관세음경(觀世音經)』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차차 사위국(舍衛國)에 이를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山象]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가르침에 귀의하였다.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튀어 나와, 코끼리떼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다. 또 들소 한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다. 담무갈은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윽고 커다란 솔개가 날아오니, 들소들이 놀라 흩어져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위험에 처하여 구제 받은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그가 번역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은 오늘날 서울에 전한다. 후에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3) 불타집(佛馱什)
불타집은 중국말로 각수(覺壽)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의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밀하게 뛰어났다.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빼어났다.
송(宋)나라의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주(楊州)에 이르렀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梵本)을 얻었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여러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러한 학문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34권으로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 일컬었다. 불타집은 범문(梵文)을 잡고, 우전국(于闐國) 사문 지승(智勝)이 번역하였다. 용광사의 도생(道生)과 동안사(東安寺)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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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엄(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송(宋)나라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琊王) 연(練)이 시주가 되었다. 다음해 4월에 비로소 마쳤다. 대부(大部)에서 계(戒)의 핵심과 갈마문(羯磨文) 등을 추려내어 베낀 것이 모두 세상에 유행한다. 뒤에 불타집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4) 부타발마(浮陀跋摩)
부타발마는 중국말로 각개(覺鎧)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品行)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삼장(三藏)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잘했다. 항상 이 부(部)를 수지하고 독송하여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송나라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량(西凉)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널리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범본(梵本) 『비바사(毘婆沙)』 3만여 게송(偈頌)을 얻어 가지고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을 발돋움하고 기다렸다. 부타발마가 이 논을 공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이 재위에 있던 승화(承和) 5년(437) 정축년 4월 8일, 곧 송나라 원가(元嘉) 14년(437)에 양주성(凉州城) 안에 있는 한예궁(閑預宮)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였다. 도태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이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義學僧] 3백여 명과 더불어, 문장의 뜻을 바로잡기를 거듭 두 차례나 하여 비로소 마쳤다. 모두 1백 권이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가 서쪽으로 와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凉)나라가 멸망하는 난리통에 경서와 온갖 도구들이 불타버려서 40권이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60권만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5) 석지엄(釋智嚴)
석지엄은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다. 부지런함과 정성스러움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납의(納衣)만을 입고 좌선하며, 오래도록 나물밥으로 살았다. 늘 자기 나라가 텅 비어 황량하다고 생각하였다. 널리 이름난 스승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많이 구하고자 뜻을 세웠다.
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다. 계빈국(罽賓國)에 도달하여 마천타라정사(摩天陀羅精舍)로 들어갔다. 계빈국에서 불타선(佛馱先) 비구에게 선법(禪法)을 묻고 배웠다. 점차로 깊이를 더하여 3년이 지나자, 그 공은 10년 세월을 넘어섰다.
불타선은 그가 선정(禪定)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세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구나.”
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중국 사람들을 공경히 대접하였다.
그 당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비구 역시 그 나라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하여, 그에게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지극히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겼다.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헤어져서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며, 힘써 정진하여 배움을 닦았다.
동진(東晋)의 의희 13년(417)에 유송(劉宋)의 무제(武帝)가 장안을 공략하여 승리하였다.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를 호종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다. 함께 거주하는 세 사람의 승려가 각기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다가가 한참 동안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손가락을 튀기자 세 사람이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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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그렇지만 잠시 후 도로 눈을 감아버려,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회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여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묻자, 모두들 말하였다.
“이 세 분 승려는 숨어살면서 뜻을 추구하는 고상하고 깨끗한 법사들입니다.”
왕회는 즉각 송 무제(武帝)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올라오기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두 사람이 지엄을 추천하여, 지엄이 무제를 따라갔다.
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김이 매우 성대하였다. 지엄이 도읍에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물렀다. 지엄은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함을 사랑하여, 시끄러운 티끌세상을 피하고 싶어하였다. 왕회는 그를 위하여 동쪽 성문 밖 끝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니, 곧 지원사(枳園寺)이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가져 온 범본(梵本)의 여러 경전들을 미처 번역하지 못했다. 원가 4년(427)에 사문 석보운(釋寶雲)과 함께 『보요경(普曜經)』·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사천왕경(四天王經)』 등을 번역했다.
지엄은 절에 있으면서 별다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상 탁발하여 생활하니, 도력의 교화가 이승과 저승까지 끼쳐서 모두 다 감복하였다. 어떤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서주(西州)의 태사(太社)에서 귀신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엄공(嚴公)이 오면 피하여 숨어야 한다’고 하더라.”
이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정확히 못하였다. 갑자기 지엄이 이르렀다. 그의 성명을 묻자, 과연 지엄이라고 하였다. 묵묵히 그를 알아보고는 남몰래 특별히 예우하였다.
의동(儀同) 난릉(蘭陵) 소사화(蕭思話)의 부인 유씨(劉氏)가 병이 들었다. 늘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지엄을 맞이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지엄이 처음 사랑채에 도착하자마자, 곧 유씨는 떼 귀신들[群鬼]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지엄이 나아가 유씨 부인을 위하여 경을 설하니, 병이 곧 나았다.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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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5계(戒)를 받고, 온 가문이 불법을 소중히 받들었다.
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던 지엄은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었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행각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였다.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에 5계를 받았지만, 계율을 범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였다.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재차 바다를 건넜다. 또 한번 천축국에 가서 지혜가 밝게 통달한 분들에게 여쭈었다.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갖추어 물었다.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곧 지엄을 위해 선정에 들어, 도솔궁에 가서 미륵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대답하였다.
“계를 받았노라.”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 때가 78세이다.
그 나라의 법도는 평범한 승려와 득도한 승려의 화장 장소를 각기 달리 했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했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않았다.
처음에 시신을 평범한 승려의 묘지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신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변경하여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가벼워졌다.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짐짓 서역에서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모두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을 가지고 지엄이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向)3)과 4과(果)4)
3) 소승들이 닦는 네 가지 계위(階位). 증과(證果)를 향하여 수행하되,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 수다원향·사다함향·아나함향·아라한향.
4) 소승 증과(證果)의 네 계위. 과(果)는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지위.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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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서 얼마나 깊고 얕은지를 모를 뿐이다.
6) 석보운(釋寶雲)
석보운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양주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배움의 행실이 있었다. 뜻이 운치 있고 굳세며 깨끗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고 곧으며 순수하고 깨끗함으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였다. 도를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희생해서라도 몸소 부처의 신령스런 자취를 보고, 널리 중요한 불경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두었다.
마침내 동진(東晋) 융안(隆安, 397~401) 초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다. 법현(法顯)·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따랐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闐國)과 천축국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두루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다. 석가모니께서 남긴 자취를 우러러 예배한 것이 많았다. 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서를 배워, 천축국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갖추어 알았다. 뒷날 장안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 선사를 따라 선(禪)을 일삼아 도(道)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불타발타라 선사가 뜻밖에 후진의 승려들에게 축출 당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그 허물을 같이 하여, 석보운도 달아나 흩어졌다. 그 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라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였다. 불타발타라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 도량사에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승려들은 보운의 뜻과 힘이 굳고 단단해서, 죽음의 지경[絶域]인 아주 먼 외국까지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물으면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운은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을 번역해 냈다. 후기에 나온 여러 경전들은 대부분 보운이 바로잡아 정리한 것이다. 중국어와 범어에 모두 뛰어나, 음과 뜻이 알맞고 올곧아서, 보운이 정리한 것은 대중들이 모두 믿고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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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선역(宣譯)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였다. 그런 강북과 상대적으로, 강남에서의 범어 번역은 보운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진(東晋)과 송나라의 시기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다.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보운의 성품은 그윽한데 머물기를 좋아하여, 한적(閑寂)함을 늘 유지하였다. 마침내 육합산(六合山)5)의 절로 가서 『불본행찬경(佛本行贊經)』을 번역해 내었다.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았다. 습속이 좀도둑질을 좋아하였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이끌어 가르쳤다. 그러자 대부분 허물을 고쳐서,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죽음에 임하여,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맡아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물렀다. 다시 육합산으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산사에서 돌아가셨다. 이 때 나이는 74세이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가 있다.
7) 구나발마(求那跋摩)
구나발마는 중국말로 공덕개(功德鎧)라고 한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罽賓國)을 다스렸다. 조부인 가리발타(呵梨跋陀)는 중국말로 사자현(師子賢)이라 한다.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유배를 당하였다. 아버지인 승가아난(僧伽阿難)은 중국말로 중희(衆喜)라 한다. 산림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구나발마의 나이 14세가 되자, 예리한 식견으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깊이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덕을 숭상하며 착함에 힘썼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의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5) 강소성(江蘇省) 육합현(六合縣) 서남쪽 강포현(江浦縣) 경계에 있는 산.
6) 범어 ksatriya의 음역으로 인도의 사성 가운데 바라문 다음가는 왕 및 무사 계급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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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목숨을 요절시키는 일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설령 죄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하겠다.”
구나발마가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저를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소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너의 몸에 있는 고통을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도 오히려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삼도(三塗)7)의 길에서입니까?”
어머니가 이에 잘못을 뉘우쳐 깨달아,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큰 나라에 군림하여 어루만지고 남면(南面)8)하여 제왕의 존귀함으로써 일컬어질 것이다. 만약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인의 과보[聖果]를 얻을 것이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9부를 밝게 꿰뚫고 4아함[含]에 두루 밝았다. 그리고 백여만 글자에 이르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다들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세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다.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재주가 밝고 덕이 높다.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7) 화도(火塗)인 지옥도(地獄道), 도도(刀塗)인 아귀도(餓鬼道), 혈도(血塗)인 축생도(畜生道)를 말한다.
8) 임금이 조정(朝廷)에서 신하에 대하여 남쪽으로 향해 앉는 자리. 전(轉)하여 임금의 지위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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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신하들 수백 명이 두세 차례 간곡하게 청하였다. 그러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였다.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고,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미 초과(初果)를 터득했다.”
몸가짐과 차림새로도 남들을 감화시켜, 그를 본 자들은 마음을 내어 불법에 의지하였다.
후에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었다. 한 도사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飛舶]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구나발마가 와서 이르렀다. 왕의 어머니가 성스러운 예식으로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였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해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까 두렵다.”
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시달려,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차차 감화에 젖어듦이 오래되자, 정신을 전념하여 점점 독실해졌다.
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을 하려 합니다. 만약 상대해서 전투를 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위태로워져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존귀하신 스승님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그 사나움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뿐입니다.”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문득 적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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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흩어졌다. 왕이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의 공경스러운 믿음이 더욱 충만해졌다.
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법문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군신들이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왕께서 만약 나라를 버리신다면, 자식 같은 우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를 의지하여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 같은 자비로움으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감히 죽기로 청하노니, 그 진실한 마음을 펴도록 하옵소서.”
왕이 차마 굳이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어 군신들에게 나아가서 세 가지 바람을 청하였다.
“만약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 바람은 무릇 왕국의 경계 안에서는 똑같이 스승님[和尙]을 받드는 것이다. 두 번째 바람은 다스리는 경내 안에서는 모두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바람은 소유한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다.”
군신들은 기뻐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공경하며 받아들였다. 이에 온 나라가 모두 따라서 계를 받았다. 왕이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몸소 건축에 쓸 재료를 끌고 가다가, 왕이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술로 치료해 주었다.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인도하고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퍼져나갔다.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시에 서울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이 있었다. 멀리에서 훌륭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하였다. 원가(元嘉)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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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곧바로 교주(交州)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이하여 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이 또 사문 법장(法長)·도충(道沖)·도준(道雋)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보살펴 주기를 청하였다. 아울러 구나발마와 사바왕인 파다가(婆多加)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국경에 왕림하여 불도의 가르침을 퍼뜨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마땅히 넓히고자 함에 있어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미 상인 축난제(竺難提)의 배를 타고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드디어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언장[遺文]에서 말하였다.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시산(虎市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파랐다. 구나발마가 그것이 기사(耆闍)9)와 방불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이라고 바꾸었다.
영취산 절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 소리[磬音]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양 건치[椎]소리가 이를 때마다 구나발마가 이미 이르렀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지만 젖지 않았다. 혹은 진흙을 밟고 왔지만 습기가 차지 않았다. 당시에 많은 도인과 속인이 숙연하게 더욱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다. 구나발마가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10)과 정광(定光)11)·유동포발(儒童布髮)12)의 형상을 그렸다. 형
9) Grdhrakuta의 음역으로 마갈타국(摩竭陀國)에 있는 산 이름이며, 영취라고 번역한다.
10) 라후라. 석존의 아들. 사미의 시초.
11) 정광불(錠光佛) 또는 연등불(燃燈佛)이라 번역. 과거 구원(久遠)한 옛적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고 한다.
12) 유동은 범어 마납박가(摩納縛迦)의 번역. 정행(淨行)을 닦는 젊은 보살. 그 보살이 과거 인행시에 부처님께서 진흙을 밟지 않으시도록 자기의 머리카락을 풀어 엎드려서 부처님께서 그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시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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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그려 놓은 뒤로 매일 저녁에 빛을 발하였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한 뒤에야 그치었다.
시흥(始興)의 태수인 채무지(蔡茂之)가 깊이 더욱더 존경하여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장차 죽음에 이르자, 구나발마가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을 하여 편안하게 위로하였다. 후에 채무지의 집사람이 꿈속에서,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와 함께 법을 강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가 이곳에 거주한 이후로는 밤낮으로 오갔다. 그러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나더라도,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를 두드리며 희롱하고 지나갔다. 이에 산길을 가는 나그네와 물길을 가는 객들이 오가는 데 막힘이 없었다. 구나발마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자들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았다. 사미는 한 마리 흰 사자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끝까지 가득히 푸른 연꽃이 널리 퍼지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미가 놀라고 두려워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았으나, 휑하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견줄 것 없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후에 문제(文帝)가 거듭 혜관(慧觀) 등에게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서울로 갔다. 원가(元嘉) 8년(431) 정월에 건업(建鄴)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제자는 항상 재계하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남을 죽이는데 내몰려서 뜻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시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겠습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대저 도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합니다.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을 떨치지 못합니다. 만약 자신을 이겨서 몸으로 애쓰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 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 마디 좋은 말을 하면 선비와 여인네[士女]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한 가지 훌륭한 정치를 펴면 신과 사람[人神]마저 함께 화합합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 형벌을 쓰고, 힘을 지치게 하지 않는 사역을 시키십시오. 그리 하시면 바람과 비로 하여금 때에 맞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절기에 고루 알맞아서, 온갖 곡식이 무성하게 번성하고, 뽕과 삼[桑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지런히 하신다면[持齋] 가지런함 역시 크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 역시 많다 할 것입니다. 어찌 반나절의 음식을 덜어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한 뒤에야, 바야흐로 널리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이에 책상[机]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대저 속인은 고원한 원리에 미혹되고, 사문은 가까운 가르침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이상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를 허탄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가르침에 막힌다는 것은 문장[篇章]에 구애되어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깨우침을 열어 밝게 다다랐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니 천인의 경지를 더불어 말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도록 하여 공양을 융숭하고 후하게 해 주었다. 공경·제후왕과 뛰어난 선비들이 높여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을 여는 날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다.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정신은 자연스럽고 웅변은 빼어났다.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말이 오가는 사이에 깨닫게 하였다.
후에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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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28품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을 내어서 30품을 이루었다. 하지만 미처 옮겨 베끼기 전에 「서품(序品)」과 「계품(戒品)」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히려 두 가지의 판본이 있다. 혹은 『보살계지경(菩薩戒地經)』이라고도 한다.
과거 원가(元嘉) 3년(426)에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팽성(彭城)에서 외국의 이엽바라(伊葉波羅)에게 『잡심(雜心)』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렇지만 품(品)을 선택함에 미쳐서는, 장애로 말미암아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 때에 이르러 구나발마에게 다시 청하여 후품(後品)을 번역하여 13권을 이루었다. 앞서 내었던 『사분갈마(四分羯磨)』·『우바새오계략론(優婆塞五戒略論)』·『우바새이십이계(優婆塞二十二戒)』 등과 아울러 모두 26권이다. 모두 글의 뜻이 자세하고 신실하여 범어와 한어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였다.
“6년 전 여덟 명의 사자국(師子國) 여승이 서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2중(衆)13)을 수계하는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계품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계법(戒法)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있어서 나온 것이다. 설사 그러한 지난날의 사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계를 얻는 데에 문제가 없음은 대애도(大愛道)비구니14)의 인연과 같다.”
여러 승니들이 또 연월이 차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굳이 다시 받으려 하니, 구나발마가 일러 말하였다.
“좋다. 진실로 더욱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크게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돕는 것이다. 다만 서역국 승니의 승랍(僧臘)이 차지 못하고, 또한 열 사람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의 말을 배우게 해야 한다.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
13) 비구. 비구니의 이부 대중.
14) 석존의 이모. 부처님의 교단에서 맨 처음으로 비구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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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승니를 청하여 오게 해서 열 명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 해 여름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하였다. 당시에 신자들이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다.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성스러운 예로 숭배하였다.
하안거를 마치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각(閣)으로 돌아갔다.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갑작스레 이미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을 유언장으로 지어서,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였다.
“이미 제2과(果)를 증득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국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입적한 뒤 곧바로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붙들어 앉혔다. 얼굴 모습이 입정(入定)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달려 온 도인과 속인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향기가 강렬하게 감돌아 풍겨 나오는 것을 맡았다. 뱀이나 용처럼 생긴 한 필쯤 되는 길이의 물체 하나가,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를 수 없었다.
곧 남림(南林)의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법에 의해서 사비(闍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였다. 향과 섶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를 뿌려 시신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왕성하게 타올라 하늘까지 빛났다. 이 때에 하늘은 맑고 환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15)을 세웠다. 거듭해서 계를 받고자 하던 여러 비구니들은 바라던 일이 끊어지자,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이겨낼 수
15) 승려를 화장하여 타고 남은 ‘하얀 재’를 모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재를 모셨다고 하여 회탑(灰塔)이라고도 한다. 후대의 부도(浮圖)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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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과거 구나발마가 서울에 이르자, 문제가 그를 좇아 보살계를 받고자 했다. 때마침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여, 미처 그 일을 물어 명을 받들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구나발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본래의 생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심하여 한스러움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여러 승려에게 명하여 그의 유언장을 번역하였다.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보(三寶)와 청정한 계를 지니신
여러 상좌(上座)께 절 올리나이다.
탁한 세상엔 아첨과 간사함 많아
헛되고 거짓되어 참된 마음 없고
어리석고 미혹되어 참됨을 알지 못하여
시기심으로 덕 있는 사람 질투하니
이 때문에 여러 성현께선
지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시었네.
나 구나발마는
목숨이 다할 때 되어
그 동안 얻은 착한 공덕을
이제 그대로 말해 보리다.
아첨과 간사한 마음으로
명리 구하기 바라지 않고
대중의 게으름 타이르고 권하여
불법을 더욱 자라나게 했네.
크나큰 법력 이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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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들어보오, 어진이여.
옛날 광야에서 나는
처음 죽은 시체를 보았소.
살찐 살벌레 잔뜩 들끓고
악취에다 피고름 흘러 내렸지.
마음 매어 그곳에 정신 모으니
이 몸의 본성도 이와 같아서
항상 이 몸의 모습을 보았네.
나방이 불을 두려워 아니함과 같음을
이같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사시관(死尸觀)을 닦아 익혀서
밖으로 들으려는 생각[聞思] 던져 버리고
나무 수풀 사이에 의지해 머물렀다오.
이 밤 오로지 정진하여
바르게 관할 것을 늘 잊지 않아서
경계가 늘 앞에 있음이
맑은 거울을 대함과 같으니
저와 같이 나 역시 그러하여
이로써 마음 고요하고 편안하여
지극히 맑은 몸이 정토라면
청량한 마음은 극락일세.
큰 환희심이 자라나면
집착 없는 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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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쇄상(骨鎖相)을 이룬다면
백골이 눈앞이라
썩고 무너져서 뼈마디도 흩어지고
백골마저 가루 되지만
티 없는 지혜는 타올라서
사법상(思法相)16)을 굴복시켰어라.
때때로 이 같은 경지 터득하여
몸이 편안하고 매우 유연하여
이 같은 방편의 수행이
훌륭하게 나아지고 더욱 더 늘어나니
미세한 티끌 찰나찰나 소멸하여
색이 무너진 정념(正念)의 법(法)이여,
이것이 바로 마침내 도달할 곳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탐욕 일으키는가.
알아라, 여러 감각에서 생기는 것이
고기가 미끼를 탐하는 것과 같음을.
그 감각이 헤아릴 수 없이 무너지고
찰나찰나 닳아 없어짐 관한다면
알리라, 저 감각이 의지하는 곳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에서 일어남을.
업과 업의 과보란
인연에 의지하여 찰나찰나 사라짐을
마음이 아는 가지가지
16) 사물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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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별상법(別相法)이라 이름하니
별상법은 사(思)와 혜(慧)와 염(念)을
차례로 만족하게 닦는 것이네.
여러 가지 법상 관하면
그 마음 더욱 밝아져서
내가 그 지혜[爾焰]17)속에서
4념처(念處)18)를 분명하게 보니
이로써 율행(律行)이 다해
마음을 거둬 잡아 인연 가운데 머물렀어라.
괴로움은 달구어진 칼 같으니
이는 갈애(渴愛)19)로 구르는 것이네.
갈애 다하여 열반에 들어
두루 저 삼계를 굽어보니
죽음의 불꽃 활활 타올라
형체 쇠약하여 바짝 수척하지만
장난을 멈추고 방편을 좋아하면20)
몸 다시 점점 충만해지고
수승하고 묘한 뭇 상(相) 생하니
정위(頂位)와 인위(忍位)도 이와 같아라.
이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17) Jneya. 이염(爾炎)이라고도 쓴다. 소지(所知)·경계(境界)·지모(智母). 지경(智境)이라 번역. 5명(明) 등의 법이 지혜를 발생케 하는 경계가 되는 것.
18) 소승의 수행자가 3현위(賢位)에서 5정심관(停心觀) 다음에 닦는 관. 신념처(身念處)·수념처(受念處)·심념처(心念處)·법념처(法念處).
19) 목마를 때 물을 사랑하듯 범부가 5욕(欲)을 탐하는 것.
20) 『법화경』 「방편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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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바른 방편으로
점점 경계 약해져
적멸의 낙이 늘어나고
세제일법(世第一法) 얻으면
순일무구한 한 생각 진제를 반연하고
차례로 법인(法忍)이 생하여
무루도(無漏道)라 하나니
망상과 모든 경계와
이름마저 다 멀리 여의어
경계의 진제의(眞諦義)는
번뇌를 없애 버리고 청량함 얻음이어라.
삼매의 과보 성취하면
번뇌 떠난 청량한 연(緣)이어서
솟거나 가라앉지도 않아
맑고 지혜롭기 밝은 달이요
고요히 안주하니
순일무구한 적멸의 상이라
이는 내가 말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부처님께서만 아시는 경지일러라.
나바아비담(那波阿毘曇)에
다섯 인연과(因緣果)를 설했으니
참된 뜻이란 알아 닦고 행함이요
이름이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여러 논마다 각기 이단(異端)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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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에는 두 가지 이치 없으니
치우치게 집착하면 시비가 있되
통달한 자야 어그러지거나 다툼 없도다.
수행의 여러 묘한 상을
내 지금 설하지 않음은
사람들이 망상을 일으켜
세간을 미혹시킬까 두렵기 때문이네.
경지 따라 중생에 이익 되는 법을
내 이미 약간 설했으니
눈 밝은 지혜인은
이 연기를 잘 알 것이오.
마라바국(摩羅婆國) 경내에서
비로소 초성과(初聖果)를 터득했고
정사와 산사에서
수도한 자취는 멀리 여읨을 닦았으며
뒤에 사자국(師子國)의
겁파리(劫波利)라는 마을에서
더욱 닦아 나아가 제2과를 증득하니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이로부터 어려움 많아
이욕도(離欲道)를 닦는 장애되어서
내 멀리 여읨 닦음을 보는 이나
이 곳이 한적함을 알은 이나
모두 희유한 마음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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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利養)하러 다투어 모여들었네.
내 이를 불타는 독같이 여겨
꺼려 여의는 큰마음 내었어라.
난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사바국(闍婆國)과 임읍(林邑)을 지나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에 여러 나라 안에서
힘닿는 대로 불법 일으켰나니
물어야 할 바를 묻지 마시고
진실관을 살펴 닦으소.
지금 이 몸 멸하여 없어짐은
고요히 등불 꺼지는 것과 같다오.
前頂禮三寶 淨戒諸上座
濁世多諂曲 虛僞無誠信
愚惑不識眞 懷嫉輕有德
是以諸賢聖 現世晦其跡
我求那跋摩 命行盡時至
所獲善功德 今當如實說
不以諂曲心 希望求名利
爲勸衆懈怠 增長諸佛法
大法力如是 仁者咸諦聽
我昔曠野中 初觀於死屍
膖脹蟲爛壞 臭穢膿血流
繫心緣彼處 此身性如是
常見此身相 貪蛾不畏火
如是無量種 修習死屍觀
放捨餘聞思 依止林樹間
是夜專精進 正觀常不忘
境界恒在前 猶如對明鏡
如彼我亦然 由是心寂靖
輕身極明淨 淸涼心是樂
增長大歡喜 則生無著心
變成骨鎖相 白骨現在前
朽壞肢節離 白骨悉磨滅
無垢智熾然 調伏思法相
我時得如是 身安極柔軟
如是方便修 勝進轉增長
微塵念念滅 壞色正念法
是則身究竟 何緣起貪欲
知因諸受生 如魚貪鉤餌
彼受無量壞 念念觀磨滅
知彼所依處 從心猨猴起
業及業果報 依緣念念滅
心所知種種 是名別相法
是則思慧念 次第滿足修
觀種種法相 其心轉明了
我於爾焰中 明見四念處
律行從是竟 攝心緣中住
苦如熾然劍 斯由渴愛轉
愛盡般涅槃 普見彼三界
死焰所熾然 形體極消瘦
喜息樂方便 身還漸充滿
勝妙衆生相 頂忍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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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於我心起 眞實正方便
漸漸略境界 寂滅樂增長
得世第一法 一念緣眞諦
次第法忍生 是謂無漏道
妄想及諸境 名字悉遠離
境界眞諦義 除惱獲淸涼
成就三昧果 離垢淸涼緣
不涌亦不沒 淨慧如明月
湛然正安住 純一寂滅相
非我所宣說 唯佛能證知
那波阿毘曇 說五因緣果
實義知修行 名者莫能見
諸論各異端 修行理無二
偏執有是非 達者無違諍
修行衆妙相 今我不宣說
懼人起妄想 誑惑諸世間
於彼修利相 我已說少分
若彼明智者 善知此緣起
摩羅婆國界 始得初聖果
阿蘭若山寺 道跡修遠離
後於師子國 村名劫波利
進修得二果 是名斯陀含
從是多留難 障修離欲道
見我修遠離 知是處空閑
咸生希有心 利養競來集
我見如火毒 心生大厭離
避亂浮于海 闍婆及林邑
業行風所飄 隨緣之宋境
於是諸國中 隨力興佛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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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問所應問 諦實眞實觀
今此身滅盡 寂若燈火滅
8) 승가발마(僧伽跋摩)
승가발마는 중국말로 중개(衆鎧)라 하며 천축국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떠났으며, 맑고 준수하게 계율을 잘 지키는 덕이 있었다. 삼장을 잘 해석했다.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했다.
송 원가(元嘉) 10년(433)에 고비사막을 지나 서울에 이르렀다. 재간이 넓고 인품이 맑아서, 도인과 속인들이 그를 공경하고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사로서 받들어 섬겨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平陸)의 수령인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다.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이 순수하고 치밀하다고 여겼다. 그에게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을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탑을 3층으로 올렸다. 오늘날의 봉성(奉誠)탑이 바로 그것이다.
승가발마는 도를 행하고 경을 암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모여들어 불도의 교화가 널리 퍼졌다.
과거 구나발마(求那跋摩)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밝아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거듭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부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는데, 삼장이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서울로 왔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자취를 이어받도록 하였다.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는 서울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말하였다.
“이상한 것을 바로잡아야 하니, 뜻을 집행하는 것이 같지 않다.”
혜원은 직접 승가발마와 논의를 겨루어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지를 표방하고 법다움을 환하게 드러냈다. 이치로서 증명함이 분명하고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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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하여, 이미 덕에 귀의(歸依)하는 바가 있었다.
혜의는 마침내 완고함과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앙하여 복종하였다. 제자 혜기(慧基) 등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공경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모범적인 계율[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 올리는 공양을 널리 설치하였다. 그러자 사부 대중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서울이 기울어질 정도였다.
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오묘하게 『잡심론』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앞서 구나발마 삼장이 비록 번역했다고는 하나, 아직 책으로 엮지 못했다.
즉시 그 해 9월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승가발마를 청해 번역하게 했다. 보운(寶雲)이 말을 풀고, 혜관(慧觀)이 붓으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고증하고 교감하기를 한 번씩 두루 하여 끝마쳤다.
이어서 『마득륵가경(摩得勒伽經)』·『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및 『청성승속문(請聖僧俗文)』 등을 펴냈다.
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불경 번역하는 일을 끝내고 난 뒤에 작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중들이 모두들 만류했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 없었다.
원가(元嘉) 19년(442)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9) 담마밀다(曇摩蜜多)
담마밀다는 중국말로 법수(法秀)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일곱 살이 되자 정신이 깨끗하고 올곧았다. 불법의 일을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계빈국에서는 많은 성인과 통달한 이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 많은 경을 널리 꿰뚫었다. 특히 선법(禪法)에서 깊이가 있었다. 그가 터득한 경지는 지극히 정미하고 몹시 심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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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으며, 총명하여 사리를 잘 해득하였다. 의식과 규범을 세밀하게 바로잡았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연미(連眉) 선사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교화를 펼칠 뜻을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玆: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렀다.
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왕의 꿈에 신이 말하였다.
“큰 복덕이 있는 분이 내일 입국할 것이다. 그대는 반드시 공양해야만 한다.”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外司]에게 칙령을 내렸다. 만일 이채로운 분이 국경에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담마밀다를 맞이하였다. 궁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마침내 그를 따라 계(戒)를 받고, 네 가지 공양물로 시주하는 예를 다했다.
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으므로, 재물로 봉양 받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자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했다.
“복덕 있는 분이 왕을 버리고 떠난다.”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고비사막을 지나 돈황에 이르렀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벚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정원 백 이랑을 조성하였다. 방각(房閣)과 못[池沼]은 매우 엄숙하고 깨끗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凉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 배우려는 문도(門徒)들도 많이 찾아들어 선업(禪業)이 몹시 성하였다.
항상 강남의 천자 땅에 불법을 전하려고 뜻을 두었다. 송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촉(蜀: 四川省)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렀다.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각(禪閣)을 조성하여 세웠다.
지극히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면서 청하였다. 10여 일이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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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 매를 감응하였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를 내면서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승려와 속인 제자들이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들마다 그 마음을 백 곱절 더하였다.
얼마 후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나중에는 기원사(祇洹寺)에서 휴식을 취했다. 담마밀다의 불도에 대한 명성은 본래부터 드러나서 교화가 여러 나라에 미쳤다. 서울에 이르자, 처음부터 온 도읍이 다 기울어질 만큼 예우하고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송의 문애(文哀)황후로부터 황태자, 공주에 이르기까지 후궁에서 재(齋)를 설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초액(椒掖)21)에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건강을 여쭈는 심부름꾼들이 열흘을 멀다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곧 기원사(祇洹寺)에서는 『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보현관(普賢觀)』·『허공장관(虛空藏觀)』 등을 번역하여 펴냈다. 항상 선도(禪道)를 가르쳐서, 때로는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오기까지 하였다. 멀거나 가까운 곳의 사부 대중들이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회계(會稽: 浙江省) 태수 평창(平昌) 사람 맹의(孟顗)는 깊이 불법을 믿어,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우(浙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니고, 무현(鄮縣)에 있는 산에다가 탑과 절을 건립하였다.
동쪽 나라의 옛 습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는 집집마다 바른 곳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동안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가 10년(433)에 담마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종산(鐘山)의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담마밀다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과 시내를 사랑하였다. 종산(鐘山)이 자리한 산다움의 아름다움은 숭산(嵩山)이나 화산(華山)과 겨룰 만하다 생각하였다. 정림하사의 전체적 틀 잡음이 시
21) 황후(皇后)의 어전(御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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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의 옆으로 낮게 자리한 것을 항상 한탄했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땅을 살펴보고,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 원가 12년(435)에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선비들과 서민들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봉헌한 것이 가득 쌓여, 선방(禪房)과 전우(殿宇)를 빽빽하게 여러 층으로 세웠다. 이에 사문(沙門)의 무리들이 만 리 먼 곳으로부터 몰려들었다. 엄숙하고 온화하게 불경을 암송하면서, 교화를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림(定林)의 달(達) 선사는 달마밀다의 수제자[神足弟子]로, 당신의 가르침을 넓혀서 명성이 도인과 속인들을 진동시켰다. 그 때문에 청정하게 교화가 오래 지속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뛰어난 업적은 높이 받들어져서 바뀌지 않았으니, 이는 담마밀다가 남긴 강렬한 가르침[遺烈]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서역에서 남쪽 나라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닌 곳마다, 선을 닦는 모임[檀會]을 다시 일으켜서 가르침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과거에 담마밀다가 계빈국을 떠날 때에 가비라(迦毘羅)의 신왕(神王)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 구자국에 이르렀을 때, 도중에 돌아가려 하여 이에 신왕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담마밀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대의 신이한 힘은 변통 자재하여 여러 곳들을 돌아다닐 터이니, 앞으로 그대를 따라 남방으로 함께 가지 않겠나 싶소.”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림자를 거두어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따라와 서울에 이르렀다. 곧 상사(上寺)에서 가비라 신왕의 초상화를 벽에 그렸다. 지금까지도 소리하는 그림자의 효험[聲影之驗]이 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다.
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의 나이가 87세이다. 도인과 속인들의 사부 대중이 곡을 하면서 뒤를 따랐다. 이어서 종산(鐘山) 송희사(宋熙寺) 앞에 묻었다.
10) 석지맹(釋智猛)
석지맹은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신풍(新豊)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분명하며, 행실을 닦기를 맑고 깨끗이 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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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경을 암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매양 외국 도인이 천축국 나라에 석가의 남긴 자취 및 대승 경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탄식하여 느낌이 일어나, 마음을 멀리 밖으로 돌려서 생각하였다.
‘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
드디어 위진(僞秦) 홍시(弘始) 6년(404) 갑진년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명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짜기 넘기를 서른여섯 번을 하고, 마침내 양주성(凉州城)에 이르렀다. 양관(陽關)을 떠나 서쪽 고비사막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곳을 넘어갔다. 이전에 전해 들었던 것보다 그 어려움이 배나 지나쳤다.
마침내 선선국(鄯鄯國)·구자국(龜慈國)·우전국(于闐國)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보았다.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파미르 고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과 함께 천 7백 리를 나아가서 파륜국(波倫國)에 이르렀다. 같이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스스로 힘써 나아가, 남은 네 명과 함께, 설산(雪山)을 넘어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오백 나한이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를 왕래하였다. 큰 덕을 갖춘 나한이 있었다.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석지맹이 도인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를 위하여 사천자(四天子)의 일을 말해 주었다. 이것이 자세하게 「석지맹전(釋智猛傳)」에 나와 있다.
석지맹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22)를 보았다. 또한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보았다. 광채 나는 빛깔이 자줏빛을 띈 검푸른 색이었다. 네 곳 가장자리가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발우를 이마로 모시며 발원하였다.
22) 부처님께서 쓰시던 타구(唾具). 법현이 친견했던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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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우가 만약 감응한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윽고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견딜 수 없었다. 상[案]에 내려놓았을 때,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천 3백 리를 가서 가유라위국(迦有羅衛國)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 및 육계골(肉髻骨)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그림자 자취[影迹]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빽빽한 숲과 마구니를 항복시킨 보리수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하루 동안 공양하였다. 아울러 보배 일산[寶蓋]과 대의(大衣)23)로, 부처님께서 악마를 항복시킨 상(像)을 덮었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러운 변이(變異)를 샅샅이 살폈다. 하늘 사다리[天梯]나 용의 못[龍池]을 본 일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후에 화씨국(華氏國)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큰 지혜가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나열가(羅閱家)라고 불렸다. 그는 모든 족속에게 법을 전파하였다.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아, 순은으로 만든 3장(丈) 높이의 탑을 세웠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중국에는 대승(大乘)의 학문이 있는가, 없는가?”
석지맹이 대답하였다.
“모든 것이 대승의 학문입니다.”
나열(羅閱)이 놀라 찬탄하였다.
“드문 일이로다. 드문 일이로다[希有]. 아마 보살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닐런지?”
석지맹은 그에게서 범본(梵本) 『대니원(大泥洹)』 1부를 얻었다. 또 『승기율(僧祇律)』 1부, 여러 경의 범본을 얻었다.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되돌아왔다.
갑자년에 천축국을 출발하여 동행한 세 명의 도반은 길에서 죽었다.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돌아왔다. 양주에서 니원본(泥洹本)을 펴내어 20
23) 삼의의 하나. 승가리라 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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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얻었다.
원가(元嘉) 14년(437) 촉(蜀) 땅에 들어갔다. 16년(439) 7월에는 전기를 지어 돌아다닌 곳을 기록했다. 원가(元嘉, 424~452) 말년에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사문에 대하여 두루 찾아보았다. 행로를 기록하여 열거한 것이 때로는 간혹 서로 같지 않다. 부처님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어긋난다. 아마도 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단지 한 길만이 아니며, 정골과 발우가 신령스럽게 옮겨 다녀 때로 다른 곳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에 서술한 견문을 증거로 삼기에는 어렵다.
11) 강량야사(畺良耶舍)
강량야사는 중국말로 시칭(時稱)이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다. 아비담(阿毘曇)을 잘 외우고, 율장의 책[律部]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대부분 해박하였다. 삼장에도 아울러 밝지만 선문(禪門)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 선정의 관문에 들 때마다, 간혹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항시 삼매정수(三昧正受)로써 교화를 여러 나라에 전하였다.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멀리 고비사막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서울에 다다르니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매우 특이하다고 더욱 찬탄하였다. 처음에 종산(鐘山)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사문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약왕약상관(藥王藥上觀)』과 『무량수관(無量壽觀)』을 번역하였다. 승함이 곧 붓을 들어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번뇌의 장애를 건너는 비밀한 술법[轉障之秘術]이자, 정토를 이루는 크나큰 바탕[淨土之洪因]이었다. 그러므로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평창(平昌) 사람 맹의는 소문을 들었다. 삼가 공경해서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제공하였다. 맹의가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면서,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진정으로 간청하였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가 쉬었다.
원가(元嘉) 19년(442년)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유람하며 곳곳에서 도를 펴니, 선을 배우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가 60세이다.
∙승가달다(僧伽達多)·승가라다(僧伽羅多)
이 때에 또 천축국의 사문 승가달다와 승가라다는 모두 선학(禪學)에 매우 밝았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머물렀다.
승가달다가 일찍이 산중에 있으며 좌선(坐禪)을 하였다. 해가 마침 저물어서 식사를 거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새가 무리를 지어 과일을 물고 날아가다가 내려 주었다. 승가달다가 생각하였다.
‘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지금 날아가는 새가 내려준 음식이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는가.’
그러고는 받아서 먹었다.
원가 18년(441년) 여름에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의 청을 받아들여, 광릉(廣陵)에서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건업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라다는 중국말로 중제(衆濟)라 한다. 송나라 경평(景平, 423~424) 말에 송의 서울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다. 본래의 그윽함과 한가함을 닦으며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원가 10년(433)에 종부(鍾阜)의 양지쪽에 살 곳을 정하였다.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정사를 건립하였다. 곧 송희사(宋熙寺)가 이것이다.
1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구나발타라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 어려서 5명(明)의 여러 논을 익혔다. 천문(天文)·서산(書算)·의방(醫方)·주술(呪術)에도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었다. 깜짝 놀라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봉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沙門)을 끊어 막았다. 이에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에서 스승과 벗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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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비녀를 뽑아버린 뒤 머리를 깎고, 정신을 전념하여 배움에 뜻을 두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무렵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뛰어났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화순하며,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었다. 스승을 섬김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사양하고, 대승에 나아가 배웠다. 대승의 스승이 시험 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자,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다. 스승이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너는 대승과 소중한 인연이 있다.”
이윽고 독송과 강의에서 겨룰 자가 없었으니, 더 나아가 보살계법을 받았다.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띄워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만약 오로지 외도(外道)만을 지키신다면, 비록 제가 돌아간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 됨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삼보를 믿어 귀의하신다면, 길이 서로 뵙겠지요.”
그의 부모는 그의 편지가 온 것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의 여러 나라에 이르니, 모두들 필요한 물건을 전해 보내왔다. 일찍이 동방에 인연이 있음으로 해서, 이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마저 떨어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해 시방불(十方佛)을 염송하고 관세음을 칭한다면, 어디를 가든 감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경(呪經)을 외우고, 간절하게 예참하였다. 조금 있다가 신풍(信風)24)이 갑자기 이르렀다. 짙은 검은 색의 구름이 끼어 비를 내려, 온 배 안의 사람이 구제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자사(刺史)인 차랑(車郞)이 표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송나라 태조는 사신을 보내 영접하였다. 이
24) 동북풍(東北風) 혹은 계절풍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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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고 서울에 이르자, 명승(名僧)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칙령을 내려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그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통역을 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길거리에서 반갑게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傾蓋如故]25)같이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있다가 태조가 청하여 맞이하고, 더욱 깊이 숭배하여 존경하였다. 낭야(瑯琊) 안연지(顔延之)는 뛰어난 재주와 큰 학식을 지닌 석학인데도, 의관을 갖추고 문하에 들어갔다. 이에 이르러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갓과 일산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대장군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인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 뒤에 뭇 승려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기원사에서 불교 교리[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을 모아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여 냈다.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번역하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 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 말이 오가며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
후에 초왕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무량수경(無量壽經)』 1권·『니원경(泥洹經)』·『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
25) 길을 가다가 만나 서로 잠깐 이야기하는 정도의 교분(交分)이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옛날부터 사귄 사이같이 친하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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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왕(譙王)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
원가(元嘉, 424~452) 말기에 이르러 초왕이 자주 괴이한 꿈을 꾸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서울에 장차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적질을 도모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가 간절하게 간언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호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왕은 세상 물정과 소신 때문에 그를 핍박하여 함께 내려갔다.
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큰 배가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강기슭까지 너무 멀어서 온전히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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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이 겨우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의 흐름이 매우 깊고 빨랐다.
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었다.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어지러워하는 사이에 10여 보나 나갔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강기슭으로 올라왔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었다. 어린아이에게 보상코자 둘러보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바야흐로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당시에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세조가 군중에 칙명을 내렸다. 구나발타라를 찾으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의 사자 편에 부쳐 궁궐로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찾아내어, 배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
세조가 곧바로 접견하여 곡진하게 돌아보며 여쭈었다.
“만나기를 고대한 날이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났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 잿가루로 날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접견을 하시니, 거듭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칙명으로 물었다.
“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하여 몰아댔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예기치 못한 전생의 인연으로 인해, 이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세조가 말하였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 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였다.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였다.
이에 앞서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다. 매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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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譙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대가 패하기에 이르러서 서찰을 검사해 보니,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희롱 삼아 물었다.
“승상(丞相)을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공양을 받은 것이 10년입니다. 어찌 덕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좇아 간절히 비나이다.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세조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롭다고 여겨 허락하였다.
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됨에 이르러 칙령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讌會)를 열어,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다.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 때 미쳐 머리를 말끔하게 깎지 못한 터라서 흰머리가 희끗하였다. 세조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자인데, 단지 늙음이 이미 이르렀군. 짐이 시험 삼아 늙음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들의 의도를 꿰뚫어 볼 것이오.”
그리하여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소.
그러나 다만 오직 한 가지 남아있는 일이 있다오.”
곧바로 소리에 응하여 답하였다.
“제가 멀리 황제의 서울에 와서 30년이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을 머금기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어서,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세조가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자신의 자리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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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도록 하여 온 조정의 눈길이 쏠렸다.
후에 말릉(秣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皇樓) 서쪽에 절을 세웠다.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향을 살라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너희들은 묵은 인연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웠으니,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약 머물고자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어라. 만약 머물 수 없다면, 각기 편안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명이 같은 날 저녁에 꿈을 꾸었다. 천여 명의 귀신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절 안의 대중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현재 도후저(陶後渚)에 있는 백탑사(白塔寺)가 바로 그 곳이다.
대명(大明) 6년(462) 천하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효험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였다.
“반드시 감응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우러러 삼보와 폐하의 하늘같은 위엄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입니다.
만약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었다. 다시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다. 조용히 경을 외우며, 마음속으로 비밀스런 주술을 더 하였다.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서북쪽에서 마치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떠 있었다.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지더니, 비가 연이어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였다.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뒤이어 내려 주었다.
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종신토록 거친 음식만을 먹었다.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끝내고 나면 번번이 날아다니는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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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태시(泰始) 4년(468) 정월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지 못함을 느끼고는, 문득 태종과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성스런 모습이 나타났다. 우중(禺中: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태종은 헤어지는 아픔이 몹시 더하여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어, 영예로움과 애도함을 함께 갖추었다.
∙아나마저(阿那摩低: 寶意)
당시에 또 사문 보의(寶意)라는 자가 있었다. 범어(梵語)로는 아나마저라고 한다. 본래의 성은 강(康)씨로 강거(康居) 사람이다.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송(宋)나라 효건(孝建) 연중(454~456)에 서울에 와서 와관선방(瓦官禪房)에 머물렀다.
항시 절 안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였다. 또한 불경과 율장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삼장(三藏)이라고 불렀다. 평소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아, 곧바로 길흉(吉凶)을 알았다. 신령스런 주술을 잘하였다. 손바닥에 향을 칠하여 사람의 지나간 과거의 일도 알아보았다.
송나라 세조가 높이 두 자쯤 되는 동으로 만든 타호(唾壺) 하나를 내려주었다. 항상 탁상 앞에 놓아두었다. 홀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도둑질하였다. 보의가 돗자리 하나를 속이 빈 채로 둘둘 말고는, 위를 향해 여러 차례 주문을 외웠다. 3일 저녁이 지나자 타호가 돗자리 안에 되돌아와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이에 사방 원근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제나라의 문혜왕(文惠王)·문선왕(文宣王)과 양나라 태조(太祖)가 모두 그를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 말년에 머무른 곳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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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나비지(求那毘地)
구나비지는 중국말로 안진(安進)이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도를 좇아 천축국의 대승법사(大乘法師)인 승가사(僧伽斯)를 스승으로 섬겼다.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부지런히 경을 암송하고 대소승(大小乘)을 연구하여, 꿰뚫은 것이 거의 20만 글자나 되었다. 외전(外典)을 겸하여 공부하여 음양(陰陽)을 자세히 터득하였다. 시간을 점치고 일을 시험하여, 조짐을 증명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제(齊)나라 건원(建元, 479~482) 초에 서울에 와서 비야리사(毘耶離寺)에 머물렀다. 지팡이를 짚고 따르는 무리들의 위엄서린 자태가 엄숙하고 단정하여, 왕공(王公)과 귀족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공양을 청하였다.
과거 승가사는 천축국에서 수다라장(修多羅藏) 가운데 긴요하고 절실한 비유들을 뽑아 한 부(部)로 편찬하였다. 무릇 온갖 일의 배움에서 새롭게 가르쳤다. 구나비지는 그것들에 모두 뛰어난데다, 겸하여 뜻과 취지에도 밝았다.
영명(永明) 10년(492) 가을에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모두 10권이다. 『백유경(百喩經)』이라고 이른다. 뒤에 다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과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 각 1권을 내었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이후부터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 거의 끊어졌다. 이것이 세상에 유통되자, 세상에서 모두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구나비지는 사람됨이 매우 도량이 넓고 도타웠기 때문에, 만 리나 되는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남해(南海)의 상인들은 모두 그를 종사로써 섬겼다. 바치는 물건은 모두 받아들여 불법을 영위하는 데 사용하였다. 건업(建業)의 회수(淮水) 옆에 정관사(正觀寺)를 지어 이곳에 거주하였다. 2층 누각과 층문(層門)으로 전당(殿堂)을 정돈하여 꾸몄다.
중흥(中興) 2년(502) 겨울, 머무르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바라(僧伽婆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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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나라 초기에 승가바라라는 자가 있었다. 역시 외국에서 온 불학을 공부한 승려[學僧]이다. 거동과 모양이 신중하고 깨끗하며, 상대하여 담론을 잘 하였다. 서울에 이르러 역시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렀다. 지금의 왕이 매우 예를 갖추어 대우하였다.
정관사와 수광전(壽光殿)·점운관(占雲館)에 칙명을 내려, 『대육왕경(大育王經)』·『해탈도론(解脫道論)』 등을 번역하였다. 석보창(釋寶唱)과 원담윤(袁曇允) 등이 붓을 들고 받아 적었다.
【論】불경을 번역한 공이 드높아서 참으로 무어라 찬양할 말이 없다. 옛날에 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로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과 말전지(末田地) 등이 팔만 법장(八萬法藏)26)을 함께 갖추어 가지고 주지[具足住持]하셨다. 도를 넓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일과 쓰임[功用]이 더욱더 넓었다. 그러니 성스러운 지혜가 해처럼 빛나서, 남은 빛이 아직도 숨겨지지 않는다.
이후로 가전연자(迦旃延子)와 달마다라(達磨多羅)와 달마시리제(達磨尸利帝) 등이 함께 이론(異論)을 널리 찾아서 각각 그 언설(言說)을 지었다. 모두 4아함[含]27)을 근본으로 이어받고, 삼장(三藏)을 종주(宗主)로 삼은 것이다.
용수(龍樹)와 마명(馬鳴)과 바수반두(婆藪盤豆)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대승 경전을 법칙 삼아 그 핵심이 되는 요점을 잘 추슬렀다. 그 근원은 반야(般若)28)에서 나오고, 흐름은 쌍림(雙林)29)을 꿰뚫는다. 비록 낮은 곳이나 높은 곳이나 두루 화합하여 적셨다고 하지만, 또한 그 본성까지 함께 터득했다. 그래서 삼보로 하여금 책에 실려 전하게 하고, 법륜(法輪)으로 하여금
26) 팔만법문(八萬法門)·팔만사천법장(八萬四千法藏)·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일대 교법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생에게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으므로 이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하여 팔만 사천의 법을 말하였다 한다.
27) 4아함경(阿含經). 곧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중아함경(中阿含經)』·『장아함경(長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을 말한다. 『아함경』은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경의 총칭이다.
28)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의 작용. 또는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
29)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신 곳.
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5백 년 동안에 오히려 정법(正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일컫는다.
무릇 신성한 교화가 접하는 곳마다,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여기로 모여든다. 한결같은 소리와 한결같은 빛으로 문득 다른 나라를 진동시키고, 한결같은 대(臺)와 한결같은 일산으로 인도를 뒤덮은 것이다.
중국과 가유(迦維)30)는 왕래하는 길이 파미르고원과 강으로 끊어져서 수만 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聖人)의 신비한 힘을 이용한다면, 반걸음이나 한 걸음의 사이와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보고 듣는 것이 제한되고 막혀 있음은 어찌 시절의 운수[時運]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인연과 운수가 장차 감응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잠기어 젖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도(浮圖)31)의 왕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큰 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조서를 내려 초왕(楚王) 영(英)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미묘한 말을 외우고, 부도(浮圖)의 인자한 제사를 숭상한다.”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난 것을 해몽하기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서역에 보냈다. 그리하여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도를 품고 와서 교화를 하였다.
그들은 책을 옆에 끼고 외로이 길을 떠났다. 어렵고 괴로운 중에도 반드시 도달할 것을 기약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기어올라서는 깊은 연못에 다다랐다. 나르는 듯한 동아줄을 잡고서는 험한 나루를 건넜다. 자신의 몸을 헌신짝처럼 여겨 돌보지 않았으므로, 어려움을 만나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불법을 전하고 불경을 펼쳐, 처음으로 동쪽 나라 중국을 교화하여 후학들이 배우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힘 덕분이다.
안청(安淸)과 지참(支讖)과 강승회(康僧會)와 축법호(竺法護) 등에 이르러서는,
30) 가유라열(迦維羅閱)·가비라위(迦毘羅衛)와 같은 말. 석존(釋尊)의 탄생지.
31)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 또는 돌탑을 말하고, 중국에서는 스님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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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른 왕조에 한 시기씩, 앞사람의 발꿈치를 뒤이어서 크게 도왔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은 말이 매우 다르다. 스스로 훈고에 정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뒤이은 지겸(支謙)과 섭승원(聶承遠)과 축불념(竺佛念)과 석보운(釋寶雲)과 축숙란(竺叔蘭)과 무라차(無羅叉) 등도, 모두 범어(梵語)와 중국말을 매우 잘해서 번역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세 번씩 반복하여 말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우리 중국의 음률을 사용하고 윤색하여 완성하였다.
논(論)에서 일컫는다.
“외국의 세속 말을 따라서 바른 뜻을 보이려 했고, 바른 뜻 속에서도 더욱 뜻이 바른 말을 썼다.”
논의 일컬음은 대개 이런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그 후에 구마라집이 석학(碩學)으로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신묘한 식견으로서 그윽하고 심원한 이치를 알았다. 그리하여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고 외국 여러 나라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다시금 지겸과 축불념 또는 축숙란 등이 번역한 문장이 예스럽고 투박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다시 거듭 범본(梵本)을 대조하여 번역하였다. 그래서 금본(今本)과 고본(古本)의 두 경전이 말은 다르나 뜻에서는 같다.
이 때에 도생(道生)과 도융(道融)과 도영(道影)과 승예(僧叡)와 혜엄(慧嚴)과 혜관(慧觀)과 도항(道恒)과 승조(僧肇) 등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 전에 뜻을 깨닫고 글이 구슬처럼 매끄러웠다. 붓을 잡아 뜻을 이어 글을 다듬는 임무는 바로 이 사람들이 맡았다. 그래서 장안(長安)의 번역이 왕성하여 으뜸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
이 때 요흥(姚興)32)이 천자의 칭호를 쓰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삼보를 사랑하고 숭상하여 불법을 성곽과 참호로 둘러치듯 보호하였다. 그래서 도를 사모하여 찾아와 위의를 갖춘 이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연기가 끼듯 모여들었다. 삼장(三藏) 법문과 인연이 있는 것은 반드시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의
32) 남북조(南北朝) 시대 후진(後秦)의 왕. 유학과 불교를 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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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동쪽 중국으로 옮겨온 이래 여기에서 가장 융성하였다.
불현(佛賢) 비구가 강남에서 번역한 『화엄경(華嚴經)』의 큰 책과 담무참(曇無讖)이 하서(河西)에서 번역한 『열반경』의 오묘한 가르침과 여러 승려들이 번역한 4아함경(阿含經)·5부(部)33)·건도(犍度)34)·『바사(婆沙)』35) 등은 모두 내용이 법의 근본에 부합되고 이치가 3인(印)36)에 맞는다.
그러나 동수(童壽: 구마라집)는 첩을 둔 허물이 있고, 불현(佛賢: 불타발타라)은 물리쳐 내쫓긴 자취가 남아 있다. 실록을 고찰해 보아도 상세히 구명하기가 쉽지 않다. 혹시 시절의 운수[時運]가 경박하여 도를 잃고 사람들은 흩어졌기 때문에, 보고 느끼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만약 본래의 자취에 가깝게 더듬는다면, 아마도 또한 구슬에 생긴 하나의 흠집 정도일 것이다.
또 안세고(安世高)·담무참(曇無讖)·법조(法朝)37)·법조(法祚)38) 등은 생각이 조리에 맞고 박학하여 어진 은택을 안개처럼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하니, 갚아야 할 전생의 업보나 피할 수 없는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러므로 나한(羅漢)은 비록 모든 번뇌가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골이 터지는 액운을 만났다. 비간(比干)39)은 충간(忠諫)하면서 정성
33) 첫째, 오부대론(五部大論): 법상종(法相宗)에서 쓰는 5종의 논(論). 곧 『유가론』·『분별유가론』·『대장엄론』·『변중변론』·『금강반야론』. 둘째,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 첫째는 대장경 중에 있는 대승 경전을 5종으로 분류한 것. 『개원석교록』의 분류는 반야부·보적부·대집부·화엄부·열반부, 『열장지진』의 분류는 화엄부·방등부·반야부·법화부·열반부. 둘째는 천태종에서 『화엄경』·『대집경』·『대품반야경』·『법화경』·『열반경』을 말한다.
34) 같은 종류의 법을 모아서 한몫씩 묶어 놓은 것. 경론(經論) 중의 부문을 가리키는 명칭. 편장(篇章)에 해당.
35)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줄여서 『바사론(婆沙論)』. 5백 대아라한 편저. 659년 현장이 번역. 불멸(佛滅) 후 400년 초에 가니색가왕이 5백 나한을 모아 불경을 결집할 때 『발지론』을 해석하게 한 책이다.
36) 3법인(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셋으로 표시한 것.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인(印)은 인신(印信)·표장(標章)이란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라는 표지.
37) 『고승전』 제1권에 보이는 백원(帛遠)의 자(字)이다.
38) 법조(法祖)의 아우인 백법조(帛法祚)이다.
39) 은(殷)나라의 충신. 주왕(紂王)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기자(箕子)·미자(微子)와 더불어 은나라의 3인(仁)이라고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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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했으나 오히려 칼을 받는 화를 당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도중에 축법도(竺法度)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오직 소승(小乘)을 고집한다고 말하여 삼장과는 어그러졌다. 밥을 먹을 때도 구리로 된 발우를 사용하니 본래 계율이 허락한 바가 아니다. 땅에 엎드려 서로 향해서 절하니, 이 또한 참법(懺法)40)에 없는 것이다.
또 축법도가 태어난 곳은 남강(南康)41)이어서 천축국에 노닌 것은 아니다. 만년에 담마야사(曇摩耶舍)를 만났으나, 그 또한 소승(小乘)을 전공한 스승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대중(大衆)들과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통달한 군자들은 일찍이 돌아서서 가버리지 않았다. 다만 여승의 무리들만 쉽게 따라서 비로소 그 교화를 받았다.
무릇 여인들에 대한 이치의 가르침은 흡족 시키기가 어려워서 일의 자취가 쉽게 뒤집어진다. 인과(因果)를 들으면 소홀히 금방 등져 버리고, 변화하는 술수[變術]를 보면 앞을 다투어 따라간다. ‘따라서 타락한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의 연못은 넓어서 숫자가 8억(億)에 이르지만, 번역하여 얻은 것은 천여 권에 그친다. 모두들 가로막는 사막을 넘어서고, 절벽의 끊긴 길을 넘어 왔다. 혹은 안개를 바라보며 험난한 곳을 건너고, 혹은 말뚝을 붙잡고 몸을 밀어 나오는 고생들을 겪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모여 헤아려 찾아보니, 모두 열 중에 여덟 내지 아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법현(法賢)·지맹(智猛)·지엄(智嚴)·법용(法勇) 등이 출발할 때는 많은 사람을 모아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다만 오직 돌아보는 자신의 그림자만 유일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라 하겠다.
40) 경전을 읽어 죄장(罪障)을 참회하는 법회. 『법화경』으로 하는 것을 법화 참법, 『아미타경』으로 하는 것을 미타 참법이라고 한다.
41) 중국의 지명(地名)으로 같은 이름이 여러 곳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미상(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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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경전이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은, 경전에 다시 수명을 부여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런 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의 배우는 무리[學徒]들은 오직 한 가지 경전만을 연구하여 익히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넓게 읽으면 많이 미혹된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배움을 타락시키는 말이다. 옳은 방법을 총괄한 가르침은 아니다. 어째서인가?
무릇 이치의 참맛을 찾고 법문(法門)을 바르게 판단하고자 한다면, 어찌 억측으로 판단하여 여러 경전을 널리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옮겨 베낀 수고로움이 수포로 돌아가고, 경전이 영원히 상자 속에 감추어진다. 단 이슬과 같은 바른 설법을 끝내 펼쳐서 찾아보지 않아, 더할 나위 없는 보배 구슬을 숨겨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오.
만약 선정(禪定)과 계율을 통괄하여 캐내고,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을 융합하여 배울 수 있다면, 비록 다시 기수(祇樹)의 그늘이 없어지더라도 그윽하고 미묘한[玄妙] 바람은 오히려 불 것이다. 그리고 사라수(娑羅樹)의 잎이 변하더라도 불성(佛性)은 오히려 빛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멀리는 석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까이는 불경을 번역한 이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것이 되리라. 아마도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身命]을 얻을 것이니, 어찌 힘쓰
지 않을손가?
찬(贊)하노라.
빈바(頻婆)42)가 노래를 멈추나
거듭된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5승(乘)43)이 마침내 굴러서
팔만법문(八萬法門) 두루 가득 차네.
42) 빈바사라(頻婆娑羅). 중인도 마갈타국 임금. 석존(釋尊)이 성도(成道)한 뒤에 귀의하여 가란타에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다.
43) 일반 사람으로서 깨달음의 지위, 특히 해탈의 지경에 도달케 하는 부처님의 교법을 승(乘)이라 하는데 이를 다섯 종류로 나눈 것을 5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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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별들 북두성 둘러싼 고요한 밤
한(漢)나라 황제 꿈에 신령이 통하는구나.
섭마등·축법란·지참·구마라집이
도를 위해 목숨 바쳐 모여드네.
자애로운 구름이 그늘을 옮기고
지혜로운 물이 나루를 전하니
저 말세로 하여금
바야흐로 큰 인연을 심는도다.
頻婆揜唱 疊敎攸陳
五乘竟轉 八萬彌綸
周星曜魄 漢夢通神
騰蘭讖什 殉道來臻
慈雲徙蔭 慧水傳津
俾夫季末 方樹洪因
고승전 제4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義解) ①
1) 주사행(朱士行)
주사행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바르고 곧아서 어떤 기쁨이나 어떤 막음으로도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멀리까지 생각을 품고 깨달아, 티끌세상을 벗어나 출가한 후로는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 힘썼다.
예전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축불삭(竺佛朔)이 『도행경(道行經)』을 번역했다. 이는 곧 소품(小品)의 옛 판본으로서 문구가 간략하여 내용의 뜻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사행은 일찍이 낙양에서 『도행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문장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투박하여, 대체로 미진함을 깨닫고는 매양 탄식하였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였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구하여야 하겠다.”
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57)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였다. 서쪽 고비 사막을 지나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렀다. 과연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얻었다. 제자인 불여단(不如檀)을 보내 [불여단은 중국어로 법요(法饒)라는 의미이다.] 범본의 불경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자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곳 왕에게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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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불법을 미혹하여 어지럽힙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불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처럼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임금님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경전을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마침내 경을 태우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이 곧 이를 허락하였다. 사행이 궁전 앞에 장작을 쌓아 불태우며, 불 곁에 나아가 서원하였다.
“만약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할 것이라면, 불경은 곧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가호가 없다면, 이는 운명일 터이니 어찌 하겠는가?”
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은 이내 꺼졌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가죽을 덧댄 책표지[皮牒]도 본래 것과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마침내 경전을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로 보낼 수 있었다.
∙축숙란(竺叔蘭)
이 때 하남 땅에 축숙란이란 거사가 있었다. 본래는 천축국 사람이다. 아버지 대에 피난을 와서 하남 땅에 거주하였다. 숙란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훗날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겪고 나서, 두루 업과 과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 오로지 정성을 다해 힘써서 깊이 불법을 숭상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를 널리 연구하여, 범어와 중국어에 빼어났다.
∙무라차(無羅叉)
또한 무라차란 승려가 있었다. 서역의 도사로서 옛 서적을 참구하고 배운 것이 많았다. 이들이 곧 손에 범본을 잡으면, 축숙란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부른다. 가죽을 덧댄 책 표지[皮牒]로 된, 옛 원본은 지금 예장(豫章)에 남아 있다.
태안(太安) 2년(303)에 이르러 지효룡(支孝龍)이 축숙란을 찾아갔다. 한꺼번에 다섯 부를 베껴 쓰고 교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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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열네 필의 비단에 쓰인 옛 원본은 오늘날의 필사권 20권 분량이다.
사행은 마침내 나이 80세에 우전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서방의 법에 의하여 그를 다비하였다.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졌지만 시신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곧 주문을 외웠다.
“만약 진실로 득도하셨다면, 법으로 보아 마땅히 시신이 썩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응하여 시신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이에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제자인 법익(法益)이 그 나라에서 돌아와 친히 이 일을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사행은 우전국에서 형체를 흩뿌렸다”고 이른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2) 지효룡(支孝龍)
지효룡은 회양(淮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풍모 있는 자태가 있어 무겁게 여겨졌다. 이에 다시 더하여 고상한 풍채가 탁월하고, 높은 이론이 시대에 적합하였다. 항상 소품(小品)을 펴놓고 음미하면서, 이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진류(陳留)의 완첨(阮瞻), 영천(穎川)의 유개(庾凱)와 나란히 지음(知音)1)의 교류를 맺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달(達)이라 불렀다. 당시에 혹자가 그를 조롱했다.
“우리 진나라에서 용 같은 천자가 일어나시어[龍興]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셨네[天下爲家]. 가사와 오랑캐 옷을 벗어버려야 하거늘, 사문은 어찌하여 머리카락과 피부를 온전히 하여 비단을 걸치지 않는 것인가?”
효룡이 말하였다.
“하나(도)를 잡는 것으로써[抱一]2) 소요(逍遙)하고, 오직 적멸로써 정성을
1)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악상(樂想)을 일일이 알아 맞혔다는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자기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
2) 하나를 잡는 것으로써 천하의 기준을 삼는다(抱一爲天下式, 『老子』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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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고자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모습을 허물고 옷을 바꾸어 형상이 변했다고 하여, 저들은 나를 욕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저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귀함에 무심(無心)하면 할수록 더욱더 귀하고, 풍족함에 무심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족한 법입니다.”
그의 때맞춘 임기응변은 모두 이와 같았다.
당시 축숙란이 처음으로 『방광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효용은 이미 평소 무상(無相)을 즐기던 터였다. 이에 이를 얻자마자 곧 10여 일 동안 펴서 읽어보고는, 문득 나아가 강의를 열었다. 그 후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손작(孫綽)이 찬(贊)하였다.
작고 모난 것은 견주어 보기 쉬우나
크나큰 그릇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라.
굳세고 굳센 님이여,
높고 넓은 곳으로 매진하기에
중생들이 다투어 삼가 귀의하고
사람들은 사모하여 본받아 우러르네.
찰랑이는 샘물 가득 구름을 담고
난초는 풍성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구나.
小方易擬 大器難像
桓桓孝龍 剋邁高廣
物競宗歸 人思效仰
雲泉彌漫 蘭風肹嚮
3) 강승연(康僧淵)
강승연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장안에서 태어났다. 모습은 비록 인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중국말을 하였다. 얼굴과 행동이 자상하고 바르며, 뜻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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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넓고 깊었다. 『방광(放光)』·『도행(道行)』 등 두 반야경을 외웠다. 곧 대품과 소품의 두 경전이다.
∙강법창(康法暢)·지민도(支敏度)
진(晋)나라 성제(成帝) 때에 강법창·지민도 등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넜다. 법창도 역시 재주와 생각이 넘쳐 나서 서로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인물론(人物論)』과 『시의론(始義論)』 등을 지었다. 법창은 늘 주미(麈尾: 拂子, 털이개)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다. 이름난 손님을 만날 때마다 청담(淸談)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이에 유원규(庾元規)가 법창에게 말하였다.
“이 털이개를 왜 항상 쥐고 다니는가?”
법창이 말하였다.
“(당신 같이) 청렴한 사람은 갖지 않고, (나 같이) 탐욕스런 사람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된다.”
지민도도 역시 총명하며 명석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역경록(譯經錄)』을 지었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한다.
승연은 비록 덕이 법창과 민도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과 달리 청렴하고 검약하게 자처하여 항상 구걸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처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걸식(乞食)을 하다가 진군(陳郡)의 은호(殷浩)를 만났다. 은호가 처음으로 불경의 심원한 이치에 대해 물었다. 즉각 세속 책의 성정(性情) 같은 내용으로 답하면서,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은호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다시 보았다.
또 낭야(瑯琊)의 왕무홍(王茂弘)이 코가 높고 눈이 깊다 하여 그를 희롱하였다. 승연은 말하였다.
“코가 얼굴의 산이라면, 눈은 얼굴의 못[淵]이랍니다. 산이 높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고, 못이 깊지 않으면 맑지가 않다.”
당시 사람들이 명답이라 여겼다.
그 후 예장산(豫章山)에 절을 세웠다. 읍과의 거리가 수십 리이다. 강물을 두르고 높은 재를 옆에 끼며,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이름난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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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뛰어난 달인들이 메아리가 답하듯 달려와 무리를 이루었다.
항상 『심범천경(心梵天經)』을 수지하여, 공의 논리에 그윽하고 원대하였다. 유달리 강설을 잘 하기에, 배움을 숭상하는 문도들이 오가며 가득 찼다. 그 후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4) 축법아(竺法雅)
법아는 하간(河間: 황하 부근) 사람이다. 올곧고 올바르며 법도와 기량이 있었다. 어려서는 외도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불교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그러자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을 받들었다.
당시 그에게 의지한 제자들 모두 세간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곧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일을 헤아렸다. 이것을 외도의 서적과 짝 맞춰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사례로 삼았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말한다.
∙비부(毘浮)·담상(曇相)
아울러 비부·담상 등도 역시 격의를 말하여 문도들을 가르쳤다. 법아는 풍채가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요점의 해설[樞機]에 뛰어나,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가며 강설하였다. 도안(道安)·법태(法汰) 등과 더불어 늘 불경을 펼쳐 해석하되, 의문 나는 것을 모아서 함께 경의 요점을 연구하였다.
그 후 고읍(高邑)에 절을 세웠다. 대중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가르쳐 이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담습(曇習)
법아의 제자 담습이 스승을 이어받아, 강론하는 말솜씨가 훌륭하였다. 위조(僞趙)의 태자 석선(石宣)의 존경을 받았다.
5) 강법랑(康法朗)
강법랑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절도 있게 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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켰다. 한 번은 경을 읽다가 쌍수(雙樹)·녹원(鹿苑: 鹿野苑)의 부분을 보고는 울적하여 탄식했다.
“내가 과거의 성인이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하여 성인께서 계셨던 곳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맹세코 가이(迦夷: 카필라)로 가서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였다. 곧 같이 공부한 네 사람과 함께 장액(張掖)을 떠나, 서쪽으로 고비 사막을 지났다. 걸어서 사흘이 지나자,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홀연히 한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초목이 사람을 덮어 가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두 칸의 방이 있었다. 방 가운데 각기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한 사람은 이질(痢疾)을 앓았다. 두 사람의 방이 나란히 있으나 서로 돌보지 않았다. 사방에 똥오줌뿐이어서 온 방안이 냄새나고 더러웠다. 법랑이 그의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가는 길이 같아서 불법으로써 친척이 됩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서야 어찌 버려두고 가겠습니까?”
법랑은 이에 6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씻고 세탁하며 공양하였다. 7일째가 되자 이 방안 전체가 향화(香華)로 꾸며졌다. 이를 보고는 이윽고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방은 우리 스승님[和上]의 방입니다. 그 분은 이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법랑이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정성이 들어맞아 모두가 곧 도에 들어갈 것이오. 멀리 여러 나라로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소. 그러한 일은 무익하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수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오. 다만 법랑 그대는 공업(功業)이 작고 정순하지 못하여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나, 중국[眞丹國]으로 돌아가서는 대법사가 될 것이오.”
이에 네 사람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았다. 오직 법랑만은 다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경론을 찾아 연구하였다. 그 후 중산(中山)으로 돌아왔다. 제자 수백 명이 불법의 강설을 이어나갔다. 후에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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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孫綽)이 찬을 지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것과 흠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법랑은 환히 빛났으나
그 빛남을 숨겼다.
끝을 공경히 하되 시작은 신중하며
미세함을 추구하되 빛남을 찾아냈다.
무엇으로써 증명을 삼는가.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 것을 아노라.
人亦有言 瑜瑕弗藏
朗公冏冏 能韜其光
敬終愼始 硏微辯章
何以取證 冰堅履霜
∙영소(令韶)
법랑의 제자 영소는 아버지가 안문(雁門) 사람이다. 성은 여(呂)씨다. 어렸을 때에는 사냥을 즐겼으나, 훗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법랑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과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선 수행에 뛰어나서, 입정(入定)할 때마다 혹은 며칠씩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유천산(柳泉山)으로 거처를 옮겨 동굴을 뚫고 좌선하였다. 법랑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나무로 법랑의 상을 조각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섬겼다.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여소(呂韶)가 중산에서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 것은, 곧 이 사람을 말한 것이다.
6) 축법승(竺法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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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승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슬기로움으로 훌쩍 뛰어났다. 멀리 비추어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축법호(竺法護)에게 의지하여 사미가 되었다. 맑고 진실한 뜻과 기개가 있어, 법호가 매우 아름답게 여겼다.
법호의 도가 관중(關中) 지방을 덮자, 재산까지 성대하게 불어났다. 당시 장안의 으뜸가는 집안 출신으로 불법을 받들고자 하는 누군가가, 법호의 도덕을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법호를 찾아가 거짓으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돈 20만 냥을 요구하였다. 법승이 당시 열세 살의 나이로 스승의 옆에서 모시다가, 법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곧 말하였다.
“스승님[和尙]께서는 마음에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법승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얼굴색을 보아하니 실지로 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도덕이 어떠한지를 관찰하려고 온 것입니다.”
법호가 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그 손님은 종중 사람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법호를 찾아와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한 것을 사과하였다. 이에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졌다.
후에 법승은 서쪽 돈황(燉煌)에 이르러, 절을 세워 배우는 이들을 맞아들였다. 몸을 잊고 도를 위하여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무릇 이리·승냥이 같이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바꾸어,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큰 교화가 서쪽 땅에 행해지게 된 것은 법승의 힘이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은 『도현론(道賢論)』에서 법승을 왕준충(王濬沖)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승과 안풍(安豊)은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예지력으로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러니 비록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논두렁 밭두렁 같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덕이 높은 선비 계옹(季顒)이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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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법행(竺法行)·축법존(竺法存)
법승과 같이 공부한 축법행과 축법존이 있다. 그들도 나란히 산중에 깃들어 지조를 지킨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7) 축법잠(竺法潛)
법잠의 자(字)는 법심(法深)이다. 왕(王)씨로 낭야(瑯琊) 사람이다. 진(晋)나라 승상 무찬군공(武昌郡公) 왕돈(王敦)의 아우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중주(中州) 유원진(劉元眞)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유원진은 일찍부터 재주와 지혜로서 명성이 있기 때문에 손작이 찬탄했다.
삼가하여 마음을 비우고
어슴푸레 한가롭게 머무름을
그 누가 체득했나.
우리 유원진일세,
이야기는 아로새길 만하고
비춤은 어리석은 이를 깨우칠 만하며
가슴 속은 탁 트여
매양 밝아라.
索索虛衿 翳翳閑沖
誰其體之 在我劉公
談能彫飾 照足開矇
懷抱之內 豁爾每融
법잠은 유원진에게 배운 뒤로 경박함과 화려함을 자르고 깎아냈다. 근본을 숭상하고 배움에 힘쓰더니, 미묘한 말로 교화를 일으켜 명성이 서쪽 조정을 적셨다. 그는 풍모와 자태, 용모가 당당하였다.
스물네 살에 이르자 『법화경』과 『대품』을 강의하였다. 이미 깊은 이해를 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강설마저도 훌륭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풍모를 살피고 도를 음미하는 사람이 항상 5백 명을 채웠다.
진(晋) 영가(永嘉) 연간(307~313)의 초기에 난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넜다. 중종(中宗) 원제(元帝)·숙조(肅祖) 명제(明帝)·승상 왕무홍(王茂弘)·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등이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여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건무(建武) 태녕(太寧, 317~325) 연간 중에 법잠은 항상 궁전 안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세상 밖의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덕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중종·숙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무홍·유원규도 죽자, 마침내 자취를 섬산(剡山)에 숨겨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도를 묻는 사람들이 이미 다시 산문에 모여들었다.
법잠은 30여 년 동안 강석을 유유자적하였다. 때로는 대승의 법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노자』와 『장자』를 풀기도 하였다. 투신한 제자 모두가 내전·외전에 두루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애제(哀帝, 562~563)가 불법을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모시기를 청하였다. 법잠은 부름의 뜻이 중하다 하여 잠시 궁궐로 나아갔다. 어전에서 『대품경』을 개강하니, 주상과 조정의 선비들 모두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간문제(簡文帝: 司馬煜)가 재상으로 있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사실상 그를 군주[至德: 至尊을 뜻함]로 여겼다. 법잠은 승려와 속인의 영수로서 선대의 조정에서는 벗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읍 받는 예와 절 받는 예를 늘상 겸하였다. 간문제가 왕이 되자 경건히 하는 예가 더욱 도타워졌다.
법잠은 어느 날 간문제의 처소에서 패국공(沛國公) 유담(劉惔)을 만났다. 유담이 조롱하였다.
“도사가 무엇 때문에 붉은 문이 있는 궁전에서 노니는가?”
법잠이 답하였다.
“당신은 붉은 문이라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오막살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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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司空) 하차도(何次道)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다. 순수하고 소박하여 경전을 독실하게 믿었다. 매양 공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더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예를 따랐다. 그러더니 자주 초청하여 여러 번 법사를 일으켰다. 법잠은 비록 그들을 따라 다시 동서로 움직였지만,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에 아뢰고 섬주(剡州)의 앙산(仰山)으로 돌아와, 그가 먼저 가졌던 뜻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숲과 언덕을 소요하다가 남은 여생을 마쳤다. 이때 지둔(支遁)이 심부름꾼을 보내, 앙산 옆에 있는 옥주(沃州)의 작은 산을 사서 고요히 머물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법잠이 대답하였다.
“오려고만 한다면 곧 주겠습니다. 어찌 소유(巢由: 上古時代의 仙人)가 산을 사서 은둔한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지둔은 뒤에 어떤 고구려(高句麗)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좌(上座) 축법심은 중주(中州) 유원진의 제자입니다. 체득한 덕이 곧고 우뚝하여 도인과 속인을 모두 다스립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불법의 기강을 유지하여, 나라 전체에서 모두 우러르는 도를 넓히신 뛰어난 분입니다.
근자에 도업이 더욱 깨끗해져서 티끌세상의 더러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산 속 물가에 꾸며 덕을 닦으면서 한가로이 지내자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섬현(剡縣)의 앙산에 계십니다. 같이 노니는 이들과 함께 도의를 논설하십니다. 조용히 사는 삶이 하도 깨끗하여,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영탄합니다.”
진의 영강(寧康) 2년(374)에 앙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9세이다.
열종(烈宗) 효무제(孝武帝)가 조서를 내렸다.
“법심 법사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멀리 비우며, 거울 같은 풍모로서 맑고 곧았다. 재상의 영화를 버리고 물들인 옷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인간 세상 밖의 산에 살면서 독실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가 펼친 도에 힘입어 창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돈 10만 냥을 부조한다. 급히 말을 달려 보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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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손작은 법잠을 유백륜(劉伯倫)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잠은 도의 소양이 깊고 무거우며 원대한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령(劉伶, 유백륜)은 방탕하게 뜻을 멋대로 하여 우주를 작다고 여겼다. 비록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일에서는 유령이 미치지 못하지만, 넓고 큰 바탕의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축법우(竺法友)
당시 앙산에는 또한 축법우가 있었다. 의지가 굳세고 행동이 바르며 뭇 경전에 널리 뛰어났다. 어느 날 법잠에게서 아비담(阿毘曇)을 받았다. 하룻밤 만에 곧 이를 외웠다. 이에 법잠이 말하였다.
“한번 눈을 거친 것을 외우다니, 옛날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일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너를 5백 나한의 하나로 삼으리라.”
스물네 살 때 곧 강설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섬현성 남쪽에 대사(臺寺)를 세웠다.
∙축법온(竺法蘊)
축법온은 깨달음과 슬기로운 이해력으로 그윽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더욱 빼어났다.
∙강법식(康法識)
강법식도 역시 의학(義學)의 공부가 있었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로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강흔(康昕)을 만났다. 강흔은 스스로 서예에서는 법식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법식과 강흔은 각기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의 초서를 썼다. 옆 사람이 훔쳐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또 많은 경을 베껴 썼는데,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축법제(竺法濟)
축법제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재주가 있어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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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다. 무릇 이러한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법잠의 제자들이다. 손작은 이들을 위하여 나란히 찬을 지었으나, 다시 갖추어 적지는 않겠다.
8) 지둔(支遁)
지둔의 자는 도림(道林)이다. 관(關)씨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신통한 이치가 있고 총명함이 몹시 빼어났다. 처음 서울에 이르자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말하였다.
“미묘한 경지에 이른 공부는 재상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진군(陳郡)의 은융(殷融)이 일찍이 위개(衛玠)와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위개의 정신의 빼어남은 후진으로서 아무도 그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둔을 만나자 다시 위개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집안 대대로 부처를 섬겼으며, 어려서부터 비상한 이치를 깨달았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여 도행품(道行品)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혜인경(慧印經)』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우뚝하니 홀로 빼어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강의하는 곳에 이를 때마다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문장 구절을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글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거칠다고 평가받았다. 사안(謝安)이 이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것은 곧 구방인(九方堙)이 말의 관상을 보는 일과 같다. 병들어 피로한 말은 버리되, 그 중에서 뛰어나고 빠른 말을 취하는 것이다.”
왕흡(王洽)·유회(劉恢)·은호(殷浩)·허순(許詢)·극초(郄超)·손작(孫綽)·환언표(桓彦表)·왕경인(王敬仁)·하차도(何次道)·왕문도(王文度)·사장하(謝長遐)·원언백(袁彦伯) 등은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허물없는 사귐을 나눈다고 알려졌다.
지둔이 백마사(白馬寺)에 있을 때이다. 유계지(劉系之) 등과 『장자』의 「소요편(逍遙篇)」을 담론하였다. 어느 날 유계지가 말하였다.
“각기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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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桀)과 도척(盜跖)은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성품이었습니다. 만약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라면, 저들 또한 소요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물러나서 「소요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 때에 오랫동안 공부한 유생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오(吳: 江蘇省)로 돌아와 지산사(支山寺)를 세웠다. 만년에 섬현(剡縣)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吳興)의 태수(太守)가 되어 지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 때를 헤아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거늘 섬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신다니 몹시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인생이란 잠시 깃드는 것일 뿐인지라, 근자엔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일조차 거의 다한 듯합니다. 종일토록 근심스럽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실망하여 탄식할 따름입니다.
오직 기다림은 그대가 오시어 툭 터놓고 이야기하여 시름을 푸는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흐르는 것 같군요. 이곳은 대부분 산마을인지라, 한가하고 고요하며 병을 치료할 만한 곳입니다. 일이야 어디라고 섬현과 다르겠습니까만은 의약품에서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런저런 인연을 생각해서, 쌓이고 쌓인 저의 그리는 정을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왕희지는 당시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평소 지둔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한 차례 지나가는 기운이니, 무어 말할게 있겠는가?”
그 후 지둔이 섬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군(于郡)을 경유하였다. 이 때 왕희지는 짐짓 지둔을 찾아가 그의 감화력을 살펴보았다. 지둔에게 이르자 왕희지는 말하였다.
“「소요편」에 대해 들려줄 수 있겠는가?”
지둔은 곧 수천 어구의 글을 지어 새로운 이치를 펴서 드러내었다. 글 짓는 솜씨가 놀랍고 절묘하였다. 왕희지는 마침내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풀었다. 지둔에게 정신이 팔려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이어 영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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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嘉寺)에 주석하기를 청하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였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자취를 섬산으로 돌려 옥주(沃州)의 작은 잿마루에 절을 세워 도를 행하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 승려가 늘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때로 혹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둔은 이에 좌우명을 지어 이들에게 힘쓰도록 하였다.
부지런할지어다, 부지런할지어다.
지극한 도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쉬고 머뭇거리어
신기함을 약하게 하여 잃게 하는가.
아득한 삼계에
오래도록 길이 시달려서
번뇌의 고달픔은 밖에서 모여들건만
어두운 마음은 안으로만 치달린다.
죽을 각오로 내달려 목마르게 흠모하면
아무리 아득해도 피로조차 잊는다.
인간의 한 세상은
떨어지는 이슬방울과 같다.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니
누가 베푼다는 말인가.
덕을 품은 달인은
편안함이 반드시 위태로운 것임을 안다.
고요하게 맑은 거동으로
번뇌를 참선의 연못에서 씻어내라.
삼가하여 밝은 금계를 지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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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계율을 즐겨야 한다.
신묘한 도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며
함이 없는 경지에 뜻을 높이도록 하라.
세 가지 가림을 가라앉혀 맑게 하고
여섯 가지 허물을 무르녹여 단련하라.
다섯 요소를 이룬 우리네 몸은 공한 것으로
우리네 사지도 텅 빈 것이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여 손가락을 비유한 것은 아니니
끊되 떠나지 말아라.
미묘한 깨달음을 이미 베풀었으니
더욱 더 그 앎을 그윽하게 하라.
변화에 따라 그대로 맡겨
남과 더불어 옮겨가라.
앞으로는
생각하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이를 도탑게 한 이가 깨달음의 어버이니
갓난아기처럼 되도록 뜻을 두어라.
勤之勤之 至道非彌
奚爲淹滯 弱喪神奇
茫茫三界 眇眇長羈
煩勞外湊 冥心內馳
殉赴欽渴 緬邈忘疲
人生一世 涓若露垂
我身非我 云云誰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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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人懷德 知安必危
寂寥淸擧 濯累禪池
謹守明禁 雅翫玄規
綏心神道 抗志無爲
寮朗三蔽 融冶六疵
空同五陰 豁虛四支
非指喩指 絶而莫離
妙覺旣陳 又玄其知
婉轉平任 與物推移
過此以往 勿思勿議
敦之覺父 志在嬰兒
당시의 여론은 지둔의 재능이 세상을 경영하는 백성을 구제할 만한데도, 자신을 깨끗이 하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남을 구제하는 일을 겸하는 겸인(兼人)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지둔이 이에 『석몽론(釋矇論)』을 지었다.
만년에는 석성산(石城山)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서광사(棲光寺)를 세웠다. 산문(山門)에서 좌선[宴坐]하여 마음을 선의 뜻에서 노닐고, 나무열매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뜻은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는 경지에서 물결쳤다.
이어 안반(安般: 數息)과 4선(禪)에 관한 여러 경전과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도행지귀(道行旨歸)』·『학도계(學道誡)』 등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마명(馬鳴)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자, 용수(龍樹)의 그림자를 밟아 오른 것이다.
이치가 법의 근본과 호응하여 실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許詢)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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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소상하게 지둔의 종지를 터득했다.”
그러나 돌아가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세 번 하노라면, 도리어 문득 어지러웠다.
진(晋)의 애제(哀帝)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므로 서울로 나갔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조정과 재야에서도 기뻐 감복하였다.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은 일찍부터 정밀한 논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의 재주 넘친 글을 가려내어 수백 어구의 글을 만들고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지둔이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지둔을 찾아갔다. 지둔이 그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제가 당신과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마몽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곧 감탄하였다.
“참으로 승려의 왕이다. 어찌 내가 겨룰 수 있겠는가?”
극초(郄超)가 사안(謝安)에게 물었다.
“지둔의 말솜씨를 혜중산(嵇中散)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혜중산은 노력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뿐이지.”
극초가 다시 물었다.
“은호(殷浩)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변에서는 아마도 은호가 지둔을 누르겠지. 그렇지만 솟구쳐 뛰어넘어 곧 바로 연원에 이르려는 점에서는, 은호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그 후 극초는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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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 법사는 신령한 이치에 뛰어나고 그윽한 경지에 빼어나서 홀로 깨달은 분일세. 참으로 수백 년 이래의 불법을 이어 밝혀,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한 불법의 제왕이라네.”
지둔이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3년을 넘어서려 하자, 이에 동산(東山)으로 돌아갔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하직 인사를 아뢰었다.
“지둔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감히 재능 없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스승이 되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진들을 채찍질하지 못하여, 신령한 다스림에 허물만 남겼습니다.
무릇 사문(沙門)의 길[義]에서의 법이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순수함을 조각하면 질박함에 어긋나므로, 욕망을 끊어 종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텅 비어 그윽한 거리에서 노닐며, 안으로는 성인의 법칙을 지켜서 5계(戒)의 곧음을 가슴에 달고, 밖으로는 임금님의 다스림을 돕습니다. 소리 없는 음악으로 조화롭게 하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화음을 이루어서, 자애로운 효도를 도탑게 하여, 꿈틀거리는 중생들에게 상해가 없게 합니다.
어루만지며 구휼하는 애절한 마음을 머금고, 길이 어질지 못한 일을 슬퍼합니다.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順理)를 잡고, 멀리 숙명(宿命)의 재앙을 막습니다.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경지의 절개를 끌어안고, 항(亢: 極上)의 땅을 밟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3)
이 때문에 어진 임금은 왕의 자리의 무거움에 나아가서 높은 절개를 공경하고, 뛰어난 법도로 편안히 합니다. 순리의 마음을 더듬어서 형식적인 공경을 생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어받은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옵선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모아주신 데다, 우아하고 고상하여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신령한 규범에서 노닐어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것을 잊습니다. 이른바 새벽의 종과 북소리가 지극하듯이, 명성이 천하를 떨치어 맑은 교화의 바람이 이미 높으므로, 몹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역(周易)』 「건괘(乾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역(逆)으로 이항무회(履亢無悔)라 한 것이다.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수명을 하늘땅과 같이 하여 널리 지극한 교화를 떨치십시오. 진부한 믿음의 요망하고 거짓됨을 제거하여, 공자를 위해 기도한 드넓은 논의를 찾으십시오. 좁은 길에서 진흙 묻히는 일을 끊어, 평탄한 길에서 크나큰 말고삐를 떨치소서.
그리하시면 태산은 계씨의 산신 제사로 더렵혀지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신령스러움을 이룹니다. 왕자는 둥근 언덕이 아닌 곳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길이 올곧습니다.4) 만약 올곧음과 신령스러움이 각각 하나(도)로써 사람(왕자)과 신(태산)이 서로를 잊는다면, 임금은 임금다워서 아래로 몸소 거동하는 일이 없으려니와, 신은 신다워서 주술로써 신령스러움을 더하지 않습니다. 왕자와 신의 그윽한 덕이 서로를 덮어주어 백성들이 그윽한 돌봄에 힘입고, 넓고 넓은 우주가 상서로운 집을 이룬다면, 크고도 큰 우리나라가 천도를 이루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늘상 함이 없어야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고,5) 크나큰 형상을 잡아야 천하가 저절로 찾아듭니다.6) 나라 법에는 형벌과 살육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만약 살려주되 그것이 베풂 때문이 아니라면, 상 받는 사람은 스스로 얻습니다. 만약 죽이되 그것이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면, 벌받는 사람은 스스로 받을 것입니다. 관청을 넓혀서 귀신의 생각을 꺼려하고, 인사권을 공개하여 그윽한 도량을 지극히 하십시오.
그러신다면, 공자의 이른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흘러가는구나!(天何言哉 四時行焉)’가 될 것입니다.
빈도는 동산(東山)의 들에 숨어살며 세상의 영화와 달리하여, 긴 언덕의 푸성귀를 먹고 맑게 흐르는 계곡물로 양치질하며 지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려 하여, 황제의 섬돌 엿보기를 끊었사옵니다. 모르는 사이
4) 예로부터 하나(도)를 얻은 것이 있더라.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낳고, 제후나 왕은 하나를 얻어서 올곧게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이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노자』 39장)
5) 도는 늘 하는 것이어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절로 변화하리라. (『노자』 37장)
6) 크나큰 형상을 잡으면 천하가 마음껏 오가리니, 천하가 마음껏 오가더라도 해가 안 되어 크게 평안하다. (『노자』 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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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천자의 빛이 곡진하게 비추어, 외람되이 오막살이집까지 미쳐, 자주 밝으신 조서를 받들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어찌 할 수도 없어 몸둘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궁정에 이른 이래 누차 이끌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빈객의 예로써 넉넉하게 대하시고, 미묘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매양 부끄럽게도 재능이 막힌 곳을 뚫지 못하고, 논리는 새로움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그윽한 계획에 대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거나, 보고 들은 것을 성실하게 거짓 없이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모시면서 조심하고 삼갔으나, 흐르는 땀이 자리를 적셨습니다.
그 옛날 상산의 네 늙은이[商山四皓]는 한 고조 유방에게 나아갔고, 단간목(段干木)은 위문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아감에 알맞은 때가 있었으니, 묵묵히 말하지 않더라도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뜻이 어울렸습니다.
이제 덕은 옛 분들과 다르고 동정도 진심에서 어긋나, 궁궐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황제를 선동합니다. 근거 아닌 것으로 지쳐버리니, 어떻게 할 만한 정치[有爲之治]를 하겠습니까? ‘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하물며 다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 한가롭게 살면서 멀고 넓게 빠짐없이 익히니, 고개를 빼어들어 동쪽을 돌아보며 그리워함에, 누군들 품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우러러 원하옵건대 이제 폐하께옵서 저를 내쳐 놓아주시는 은택을 내려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새답게 새를 기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입은 은혜가 두터울 것입니다. 삼가 봉하지 않은 글로써 아뢰어, 어리석고 좁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양식을 싸서 꾸려 놓고, 길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애하신 조서(詔書)를 기다립니다.”
조서를 내려 곧 이를 허락하여 노자를 지급하고, 사신을 보내서 일마다 풍성한 후대를 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인사를 모두가 떠나는 길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떠나보냈다.
채자숙(蔡子叔)이 먼저 와서 지둔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사안석(謝安石)은 뒤에 이르렀다. 채자숙이 잠깐 일어난 사이에 사안석이 곧 자리를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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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앉았다. 채자숙이 돌아와서는 요와 함께 사안석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나 사안석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현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섬산(剡山)에서 자취를 거두어 숲 우거진 물가에서 목숨을 마쳤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지둔에게 말을 보내 주었다. 지둔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혹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지둔은 말하였다.
“그 뛰어나고 빠름을 사랑하여 잠시 기를 따름이오.”
그 후 어떤 사람이 학을 선물로 보내 왔다. 이 때 지둔이 학에게 말하였다.
“너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물이다. 그렇거늘 어찌 사람들의 귀와 눈의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이를 놓아주었다. 지둔이 어릴 때의 일이다. 스승과 함께 사물의 종류를 논하다가, 계란은 날로 먹어도 살생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스승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어 스승이 죽은 뒤, 홀연히 스승의 형상이 나타나서 달걀을 땅에 집어던졌다.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걸어 나왔다가 잠깐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지둔은 곧 깨닫고, 이로 말미암아 몸을 마치도록 푸성귀만 먹었다.
지둔은 전에 여요(餘姚)의 오산(塢山)을 지나다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오중(塢中)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안(謝安)이 예전에 자주 찾아와 만나면 곧 열흘씩 이곳에서 보냈소. 지금 감정에 부딪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마다 그 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군요.”
그 후 병이 심해지자 오중으로 돌아갔다. 진(晋)의 태화 원년(366) 윤4월 4일에 머물던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3세이다. 곧 오중(塢中)에 묻었다. 아직 그 무덤이 남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섬주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 자세하지 않다.
그를 위하여 극초(郄超)는 서전(序傳)을 지었고, 원굉(袁宏)은 명찬(銘贊)을 지었으며, 주담보(周曇寶)는 조문을 지었다. 손작의 『도현론(道賢論)』에는 지둔을 바로 상자기(向子期)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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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둔과 상수(向秀)는 장자와 노자를 숭상했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다르나 현담을 즐긴 기풍은 같다고 하겠다.”
또한 『유도론(喩道論)』에서 전한다.
“지둔은 의식이 맑고 바탕이 순하여 남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묘한 도가 깊고 성하여 정신과 더불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이것이 유학에 힘쓴 먼 곳의 무리들이 근본에 돌아가게 된 이유이자, 유유자적한 도가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덕이 높은 선비인 대규(戴逵)가 길을 가다가 지둔의 묘 앞을 지나가다가 탄식하였다.
“덕스런 소리가 아직 멀어지지 않았거늘 아름드리 나무가 이미 무성하구나. 바라건대 신통한 이치가 면면히 이어져서, 기운과 함께 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지법건(支法虔)
지둔과 함께 공부한 법건(法虔)은 이론에 정밀하게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둔보다 먼저 죽었다. 지둔이 탄식하였다.
“예전에 장석(匠石)7)은 자귀질을 영인(郢人)에게서 그만두었고, 아생(牙生: 伯牙)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튼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사귄 벗이 이미 사라졌구나. 말을 해도 완상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맺혀 나도 죽을 것이다.”
이에 절오장(切悟章)을 짓다가 죽음에 즈음하여 완성하였다. 붓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마쳤다. 무릇 지둔이 지은 시문은 열 권으로 모아져 세간에 성행된다.
7) 장석운부(匠石運斧)의 고사를 나은 유명한 장인이다. 그는 자귀로 물건을 쪼는 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축법앙(竺法仰)
당시 동쪽 땅에 또 축법앙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해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왕탄(王坦)이 소중히 여겼다. 죽은 뒤에 오히려 형상을 드러내어 왕탄을 찾아가 행실을 도왔다.
9) 우법란(于法蘭)
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하였다. 곧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외웠다. 밤낮으로 법을 구하고 도를 물음에 있어서 반드시 대중보다 앞섰다.
스무 살에 이르자 풍채가 빼어나게 뛰어났다. 도를 3하(河)8)에 떨쳐서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성품이 산천을 좋아하여 대부분 산 동굴에 머물렀다.
어느 겨울철, 산에 있을 때 얼음과 눈보라가 매우 사나웠다. 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법란의 방에 들어왔으나, 법란은 얼굴빛에 거부감이 없었다. 호랑이도 매우 순종하더니, 이튿날 눈이 그치자 곧 떠났다.
또한 산중의 신(神)들도 항상 찾아와 법을 받았다. 그의 덕이 정령(精靈)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 후 강남의 산수(山水)로는 섬현(剡縣)이 가장 기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곧 천천히 동구(東甌)를 걸어서 멀리 우승산(嶀嵊山)이 바라보이는 석성산(石城山) 발치에 머물렀다. 지금의 원화사(元華寺)가 그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감화력을 유원규(庾元規)에 비유하였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그를 완사종(阮嗣宗)9)과 비교하여 논했다.
“법란이 남긴 묘한 자취는 매우 고상하여 거의 지인(至人)10)의 무리이다. 완보병(阮步兵)은 홀로 오만하여 무리 짓지 않았으니, 또한 법란과 짝한다 하
8) 하동·하남·하북의 세 군(郡)이다. 즉 황하 유역을 일컫는다.
9) 완적(阮籍),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벼슬이 보병교위(步兵校尉)였기 때문에 완보병(阮步兵)이라고도 함.
10) 만약 천지 본연의 바름을 타고 대자연의 순리를 부려 무궁한 지경에서 노닌다면, 그런 이가 대체 어디에 기댈 게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자기를 고집함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드러냄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을 떨침이 없다.”(『장자』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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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섬현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상심하여 탄식했다.
“불법이 비록 일어났지만 불경의 도리에 빠진 것이 많구나. 만약 한 번만이라도 원만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
이에 멀리 서역으로 가서 남다른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였다. 교주(交州)에 이르러 병이 들어 상림(象林)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둔(支遁)이 뒤쫓아가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찬(贊)을 지었다.
법란은 세속을 초월하여
현묘한 종지[玄旨]를 빠짐없이 체득하고
아름답게 산택에 숨어
호랑이·외뿔소를 두루 길들였다.
于氏超世 綜體玄旨
嘉遁山澤 馴洽虎兕
별전에 이르기를, “법란도 감응하여 마른 샘에서 물로 양치질하였다. 그 일은 법호(法護)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세하지 않다.
∙축법흥(竺法興)·지법연(支法淵)·우법도(于法道)
이 밖에 또 축법흥·지법연·우법도 등이 법란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덕이 비슷하였다. 법흥은 견문이 넓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법연은 빛나는 재주로 칭송되며, 법도는 논리의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10) 우법개(于法開)
법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우법란을 섬겨 제자가 되었다. 깊은 생각이 외롭게 일어나 고유한 견해를 말로 드러냈다. 『방광반야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또한 기바(耆婆: 醫神)를 이어받아 오묘하게 의술에 뛰어났다.
어느 날 걸식을 하다가 한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의 부인이 자리에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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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위급하였다. 온갖 치료로도 효험이 없어 온 집안이 당황하고 어지러웠다. 법개가 이르기를 “이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바로 양(羊)을 죽여서 잡신(雜神)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
법개가 주인을 시켜 먼저 양고기를 조금 가지고 국을 끓여서 병자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에 그 기운을 타고서 침을 놓았다. 잠깐 사이에 양의 얇은 꺼풀에 아기가 쌓여서 나왔다.
승평 5년(361)에는 효종(孝宗)황제가 병에 걸렸다. 법개가 맥을 짚었다. 그는 황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는 들어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강헌(康獻) 황후가 명령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법개를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만 문에 이르러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온갖 말로 기피하는구나. 마땅히 정위(廷尉)에게 넘겨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갑자기 황제가 죽어서 죄를 면하였다. 섬현(剡縣)의 석성산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원화사(元華寺)를 수축하였다.
그 후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옮겨 늘 지도림(支道林: 支遁)과 색(色)과 공(空)의 의미를 다투었다. 이들의 논쟁에 여강(廬江)의 하묵(何黙)이 법개의 비판을 밝게 펼치고, 고평(高平)의 극초(郄超)가 도림의 해답을 잘 풀었다. 나란히 세간에 전한다.
∙우법위(于法威)
법개의 제자 법위(法威)는 맑고 총명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손작이 그를 찬하였다.
『주역』에서는 한백(翰白)11)을 찬양하고
『시전(詩傳)』에서는 빈조(蘋藻: 문장)를 찬미하네.
희고 날쌘 얼룩말이 마당에 있듯이
큰 비가 멈춘 때의 향기가 나는 듯하구나.
11) 백마한여(白馬翰如). 말이 아주 희고 날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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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위(法威: 于威)의 밝은 깨우침은
견고하여 멀리서도 검토하니
깨끗한 그 명예를
그리워함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易曰翰白 詩美蘋藻
斑如在場 芬若停潦
于威明發 介然遐討
有潔其名 無愧懷抱
법개가 어느 날 법위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지둔이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道行經)』을 강론하는 산음(山陰)을 지나가게 하였다. 법개가 법위에게 일러두었다. “도림의 강의는 네가 그곳에 이를 무렵에 어느 품(品)에 이를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말로 수십 번에 걸쳐 공박하고 논란하여라. 이 품에 있는 것은 예전에도 통하기 어려웠던 대목이다.”
법위가 그 고을에 이르자 바로 지둔의 강의를 만났다. 과연 법개의 말과 같았다.
여러 번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지둔이 굴복하였다. 지둔은 이로 인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는 얼마만큼 반복해야 만족하겠는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인가?”
그러므로 동산(東山)의 속담에 전한다.
“위없는 기량의 법심(法深: 竺法灒), 독창적 생각의 우법개(于法開), 절륜한 말솜씨의 도림(道林: 支遁), 놀라운 기억력의 식스님12).”
애제(哀帝) 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서울로 나가서 『방광반야경』을 강의하였다. 모든 옛 불경 번역[舊學]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그로 인하
12) 『고승전』 전체를 살펴보아도 식으로 끝나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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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풀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산으로 하직하여 돌아왔다. 황제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정중하게 돈과 비단 및 가마와 겨울·여름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 사안(謝安)과 왕문도(王文度) 등도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덕이 높고 밝으며 굳세고 대범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의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십니까?”
법개가 대답하였다.
“6육바라밀을 밝혀 네 가지 마구니의 병을 제거하고, 아홉 가지 조짐을 조리하여 풍한(風寒)의 병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60세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재주 있는 말솜씨로 종횡하고, 몇 가지 술법으로 널리 가르침을 편 것은, 법개공에게 달려 있던 일이어라.”
11) 우도수(于道邃)
도수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가 그를 양육하였다. 도수는 효도와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어머니를 받들듯이 하였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법란(法蘭)을 섬기고 제자가 되었다.
학업이 고명하여 내외의 전적을 해박하게 열람하였다. 의방과 약업[方藥]에 훌륭하며 서찰(書札)을 아름답게 썼다. 다른 풍속들을 훤하게 외우고, 더욱이 담론에 솜씨가 있었다. 법호가 항상 칭송하였다.
“도수는 고상하고 간결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여, 옛 어진 분들[고인]의 기풍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야흐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법란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너니, 사경서(謝慶緖)가 크게 미루어 중히 여겼다.
성품이 산과 시내를 좋아하여 동쪽에 있을 때, 대부분의 이름난 산을 노닐어 밟았다. 사람됨이 비방과 칭송에 개의하지 않으며, 세속과 가까이 할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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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그 후 법란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다가 교지(交趾)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가 31세이다.
극초(郄超)가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지둔이 비명(碑銘)을 지어 찬양하였다.
영명하고 영명한 상인(上人)이시여,
지식은 뛰어나고 이론은 맑아라.
밝은 바탕은 옥같이 아름답고
덕스런 말씀은 난초처럼 향기로워라.
英英上人 識通理淸
朗質玉瑩 德音蘭馨
손작은 도수를 완함(阮咸)과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완함은 여러 번 벼슬을 한 허물이 있고, 도수는 맑고 투명하다는 명성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짝이 됩니까?”
손작이 말하였다.
“비록 자취에서는 우묵한 구덩이와 높은 땅으로 비교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고상한 기풍에서는 같다.”
『유도론(喩道論)』에 전한다.
“근간 낙양에 축법행이 있다. 담론자들은 그를 악령(樂令)에 견준다. 강남에 우도수가 있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뛰어난 부류로 상대한다. 모두가 당시에 함께 보고들은 것으로, 동료들이 사사로이 칭찬한 말이 아니다.”
12) 축법숭(竺法崇)
법숭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들어와 계율로써 절도를 지켜 칭찬을 받았다. 게다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뜻을 경전의 기억에 두텁게 두었다. 더욱이 법화 일승의 가르침[法華一敎]에 뛰어났다.
일찍이 상주(湘州)의 녹산(麓山)을 노닐 때에, 산의 정령[山精]이 부인으로 나타났다. 법숭을 찾아와 수계(受戒)를 청하고는,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절로 사용하게 하였다. 법숭이 머물러 조금 지나자, 교화가 상주 땅을 두루 적셨다.
그 후 섬현(剡縣)의 갈현산(葛峴山)으로 돌아왔다. 초가집 암자에서 개울물을 마시며, 선정(禪定)의 지혜로 기쁨을 취하였다. 동구(東甌)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모여들었다.
노국(魯國)의 은둔하는 선비 공순지(孔淳之)와 만나, 해가 다하도록 즐거이 노닐었다. 문득 이틀 밤을 묵으면 다시 돌아갈 것을 잊었다. 마음을 열어 몰록 들어맞으면 스스로 마음에 꼭 맞는 사귐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법숭은 한탄하였다.
생각을 인간 세상 밖으로 멀리한 지
30여 년이건만
일산을 기울여 머리를 맞댈 벗을 만나다니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緬想人外 三十餘年
傾蓋于茲 不覺老之將至
그 후 공순지와 이별하여 떠돌았다. 법숭이 시를 읊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거늘
산림의 선비는
가더니 돌아오지 않누나.
皓然之氣 猶在心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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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林之士 往而不反
이 시는 이와 같은 사람(공순지)을 일컬은 것이다.
법숭은 후에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화의소(法華義疏)』 네 권을 지었다고 한다.
∙석도보(釋道寶)
당시 섬현의 동쪽 앙산에 석도보가 있었다. 성은 왕(王)씨이며, 낭야 사람이다. 진(晋)의 재상인 왕도(王導)의 아우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을 믿고 깨달아, 세상을 피해서 영화를 마다하였다. 친구들이 충고하며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탕에서 목욕하고, 곧 나아가 머리카락을 깎으려 하였다. 이 때 시를 지어 읊었다.
만 리의 강물이 처음에는 술잔에 넘치는
작은 물에서 시작된 것임을 어찌 알랴?
후에 그는 배움의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다.
安知萬里水 初發濫觴時
後以學行顯焉
13) 축법의(竺法義)
법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열세 살 때 법심(法深)을 만나 문득 물었다.
“어질음과 이로움[仁利]은 군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법심이 말하였다.
“사람으로서 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법심은 그가 어리지만 뛰어나게 총명한 것을 보고 출가하기를 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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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불문에 뜻을 깃들여 법심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법화경』에 뛰어났다.
그 후 법심을 하직하여 서울을 떠나 다시 크게 강석을 열었다. 왕도(王導)와 공부(孔敷) 등도 모두 가르침을 따라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이르러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시영(始寧)의 보산(保山)에서 쉬었다. 수업하는 제자가 항상 백여 명이었다.
함안(咸安) 2년(372)에 이르러 문득 심기(心氣)에 질병을 느끼자, 항상 생각을 관세음보살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씻어주었다. 꿈을 깨니 곧 병이 나았다. 부량(傅亮)은 늘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법의와 교류하시던 곳에서는, 매양 관세음보살의 신령한 이적을 설법하는 것을 들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숙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진(晋)의 영강(寧康) 3년(375) 효무(孝武)황제가 사신을 보내, 오시기를 청하였다. 서울로 나가 강설하였다.
진의 태원(太元) 5년(380) 서울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이에 10만 냥으로 신정강(新亭崗)을 사서 묘지로 삼고, 3층의 탑을 세웠다. 법의의 제자인 담상(曇爽)이 묘소에 절을 세워 신정정사(新亭精舍)라 이름하였다.
그 후 송(宋: 南北朝 때의 前宋) 효무제(孝武帝, 454~465)가 남쪽으로 내려와 간흉을 토벌하였다. 황제의 깃발을 이곳에 멈추고서 이 절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효무제가 제왕의 자리를 선양받아 등극하자, 다시 선당(禪堂)에 행차하여 이곳을 개척하였다. 절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로 고쳤다. 그런 까닭에 원가(元嘉, 424~452) 말엽의 동요에 이르기를, “전당(錢塘)에서 천자가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 선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중흥사의 선방에는 아직도 용비전(龍飛殿)이 있다. 지금의 천안사(天安寺)가 그곳이다.
14) 축승도(竺僧度)
승도의 성은 왕(王)씨로 이름은 희(晞)이다. 자는 현종(玄宗)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비록 어릴 때는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타고난 자태가 빼어났다. 열여섯 살이 되자 정신이 시원하고 빼어나서 남다르게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여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당시에 홀로 어머니와 살면서 효성으로 섬기고 예를 다하였다. 같은 고을의 양덕신(楊德愼)의 딸에게 구혼하였다. 양덕신의 딸 역시 양반집의 규수로 이름은 소화(苕華)라 하였다.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고전공부도 잘하였다. 승도와 나이가 같았으므로 구혼한 날에 곧 서로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미처 예식을 치루기 전에 소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또한 죽고, 승도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이에 승도는 마침내 세상의 무상함을 보고, 문득 느끼어 깨달은 바 있어, 곧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이름을 승도라 바꾸고서, 속세 밖으로 자취를 옮겨 땅을 피해 유학하였다.
이에 소화는 부모상을 마치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여인이 좇는 세 가지 길[三從之義]에서 홀로 서는 도리란 없다.’
곧 승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몸의 터럭이나 피부조차 다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거니와, 종실의 제사를 갑자기 지내지 않아도 안 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세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하고, 먼 뜻을 바꾸어 우뚝이 빛나는 자태를 성대하게 하여, 밝은 세상에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멀게는 조상들의 혼령을 편안히 쉬게 하고, 가깝게는 사람과 신들의 소원을 풀어 위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다섯 수의 시를 그에게 보냈다.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크나큰 도리는 스스로 끝없고
하늘땅은 길고도 오래 가며
거대한 바위는 소멸되기 어렵고
겨자씨 또한 헤아리기 어려워요.
사람이 한 세간에 태어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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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바람이 창문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부귀영화가 어찌 무성하지 않으리오만
아침저녁 사이에 시들고 썩어가지요.
냇가에서 시를 읊조리다
해 저물 녘 술병 두드리는 일 생각만 해도
맑은 소리 귀를 간지럽히고
기름진 맛 입에 달라붙지요.
비단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멋진 갓으로 머리를 꾸밀 수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아
텅 빈 것에 탐닉하여 있는 것을 해치시나요.
저의 구구한 정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후세를 구휼케 하려구요.
大道自無窮 天地長且久
巨石故叵消 芥子亦難數
人生一世間 飄忽若過牖
榮華豈不茂 日夕就彫朽
川上有餘吟 日斜思鼓缶
淸音可娛耳 滋味可適口
羅紈可飾軀 華冠可曜首
安事自剪削 耽空以害有
不道妾區區 但令君恤後
이에 승도는 답서를 보냈다.
“무릇 임금을 섬겨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도를 넓혀서 만방을 제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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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만 같지 못하오. 어버이를 편안히 모셔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은 도를 널리 펴서 삼계를 제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신체발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나 가까이 하는 말일 뿐이라오. 다만 나의 덕이 멀리 미치지 못하여 아직 두루 덮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루는 것처럼, 또한 미약한 것에서부터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오. 이에 가사를 걸치고 석장을 잡고서, 맑은 물을 마시고 반야를 읊는 것이오. 비록 제후의 옷을 입고 여덟 가지 맛있는 반찬을 갖추어 먹으며, 황홀한 악기 소리를 듣고 휘황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며 산다 할지라도, 뜻을 바꾸지는 않겠소.
만약 지난날의 약속에 매달린다면 곧 함께 열반을 기약할 뿐이라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듯이, 그대가 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치 내가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같소.
양씨여, 길이 이별하여 긴긴 전생의 인연을 이제는 끊소! 이 해도 저물어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구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만 하고,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때맞추어 힘써야 하오.
그대는 나이와 덕이 모두 한창 때이니, 마땅히 사모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오.
도사에게 마음을 뺏겨 좋은 시절을 놓쳐서는 안 되오.”
다섯 수의 시를 지어 여자의 시에 회답하였다. 그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기회건 시운이건 멈추어 주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 세월은 지나가며
큰 바위도 다할 때를 만나니
겨자씨도 어찌 많다 하겠소.
참으로 가는 것은 쉬지 않으므로
시냇가에서 탄식하였다오.13)
13) 공자(孔子)가 흐르는 물을 보고 ‘수재수재 서자여사(水哉水哉 逝者如斯)’라고 탄식한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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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못했소, 영계기(榮啓期)가
흰머리가 되어서도 맑은 노래 부른 것을.
무명옷으로 따뜻하거늘
누가 비단 치장을 따지겠소.
금세에는 비록 즐겁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어찌할 것이오.
죄와 복은 참으로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
어찌 남을 구휼한단 말이오.
機運無停住 倏忽歲時過
巨石會當竭 芥子豈云多
良由去不息 故令川上嗟
不聞榮啓期 皓首發淸歌
布衣可暖身 誰論飾綾羅
今世雖云樂 當奈後生何
罪福良由己 寧云己恤他
승도의 품은 뜻이 돌처럼 견고하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화도 느끼고, 역시 깊은 믿음이 일어났다. 이에 승도는 오로지 정성을 불법에 쏟아 많은 경전을 펴서 음미하였다. 『비담지귀(毘曇旨歸)』란 책을 지었으며, 이 또한 세상에 유행한다. 그 후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축혜초(竺慧超)
당시 하내(河內) 지방에 또 축혜초가 있었다. 역시 행실과 지혜를 겸비하여 드러냈다. 덕 높은 선비인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와 좋은 벗으로, 『승만경(勝鬘經)』을 주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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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5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 ②
1) 석도안(釋道安)
도안의 성은 위(衛)씨이다.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이름난 선비집안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사촌형인 공(孔)씨가 도안을 양육하였다. 일곱 살에 책을 읽었으며, 두 번 보면 외울 수 있었다. 고을의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정신과 지혜는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러나 형상과 모습은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도안은 농사짓는 집의 노역으로 불려나가 3년이 되도록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여, 재계(齋戒)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몇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아뢰어 경을 구하였다. 스승은 『변의경(辯意經)』한 권을 주었다. 이 책은 5천 글자 가량의 분량이었다. 도안은 경을 가지고 논에 들어갔다가, 쉬는 틈에 이것을 다 읽었다. 해가 저물어 돌아와서는 경을 스승에게 되돌려주며, 다시 다른 경을 찾았다. 이에 스승이 물었다.
“어제 준 경도 아직 읽지 못하였을 텐데, 지금 또 다른 것을 찾느냐?”
도안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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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암송하였습니다.”
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를 아직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한 권을 주었다. 그것은 일만 글자[一萬言]에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가지고 갔다.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되돌려주었다. 스승이 그를 잡고 이 경을 되풀이하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에 스승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달리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이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대로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업도(鄴都)에 이르렀다. 중사(中寺)에 들어가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 불도징은 만나자 감탄하여, 하루 종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모습이 뛰어나지 않음을 보고, 모두가 함께 그를 가볍게 보아 괴이하게 여기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머나먼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바가 아니다.”
이로 인하여 불도징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불도징이 강론하면 도안이 늘 거듭 강술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아직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가 말하였다.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곧 어려운 질문을 합시다. 그래서 저 곤륜자(崑崙子: 얼굴이 까맣고 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를 죽여 버립시다.”
곧 도안이 뒤에 다시 거듭 강술하였다. 질의와 논란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안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시끄러운 문제를 해소하였다. 그러고도 행동에 남은 힘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얼굴이 새까만 도인[漆道人]이 사방 이웃을 놀래키는구나.”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본 것만을 고수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도안은 탄식하였다.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졌다지만 현묘한 종지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윽한 진리를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 멀리 미묘하고 오묘한 종지를 찾아 생멸 없는 진리를 말세에 선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떠돌아 숨어 다니는 무리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도를 묻고, 경전과 계율을 고루 살펴보았다.
그 후 난을 피하여 확택(濩澤)에 숨어살았다. 태양(太陽)의 축법제(竺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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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와 병주(幷州)의 지담(支曇)이 『음지입경(陰持入經)』을 강의하였다. 도안은 뒤늦게 이들을 따라 수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동학인 축법태(竺法汰)와 함께 비룡산에서 휴식하였다. 승선(僧先)과 도호(道護)가 이미 그 산에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하였다. 곧 함께 글을 펴보고 생각을 기탁하니, 미묘함이 정신[神情]에서 우러나왔다.
그 후 도안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恒山)에 절과 탑을 창립하였다. 옷을 바꾸어 입고 교화를 따르는 사람이 하북(河北) 일대를 반으로 나눌 정도였다.
그 때 무읍(武邑)의 태수 노흠(盧歆)이 도안이 맑고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민견(敏見)을 시켜 간절히 설법을 요청하였다. 도안이 아무리 사양하여도 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여 강의를 열었다. 그 내용이 명실상부하자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며 사모하였다.
45세가 되자 다시 기부(冀部: 河北省)로 돌아와 수도사(受都寺)에 머물렀다. 문도 대중 수백 명에게 늘 법의 교화를 베풀었다.
이 때 석호(石虎)1)가 죽자,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후사를 세웠다. 중사(中使: 궁중의 사신) 축창포(竺昌蒲)를 파견하였다. 도안을 화림원(華林園)에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널리 승방과 요사를 수리하였다.
도안은 석씨들의 말기에 나라 운세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다. 곧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갔다. 염민(冉閔)의 난이 일어나 인정이 어수선하였다. 도안은 이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의 재앙으로 가뭄과 메뚜기떼가 심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들이 종횡한다. 모여도 안 되지만 흩어져서도 안 된다.”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거느리고 왕옥산(王屋山) 여상산(女牀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를 건너 육혼산(陸渾山)으로 들어갔다. 나무열매를 먹으면서 배움을 닦았다.
이윽고 모용준(慕容俊)2)이 육혼 땅을 핍박하였다. 드디어 남쪽 양양(襄陽)
1) 석륵(石勒)의 아들. 후조(後趙)의 초대 제왕.
2) 5호 16국 연(燕)나라의 국주(國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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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투신하였다. 길을 가다가 신야(新野)에 이르렀다.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흉년을 만났으니,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법의 일을 세우기 어렵다.
더욱이 교화의 바탕은 모름지기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모두가 말하였다.
“법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법태(法汰)로 하여금 양주(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곳에는 군자(君子)가 많아 풍류를 좋아하고 숭상한다.”
법화(法和)가 촉(蜀: 泗川省)으로 들어가니, 그곳의 산수가 한가함을 닦을 만하였다. 도안과 제자 혜원 등 4백여 명은 황하를 건넜다. 밤길을 가다 우레와 소낙비를 만나, 번개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먼저 가던 사람이 인가를 발견하였다. 문 안에 두 필의 말이 있으며, 처마 기둥 사이에 한 섬의 곡식이 들어갈 만한 말 덮개가 매달려 있었다.
문득 도안이 불렀다.
“임백승아.”
주인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과연 이름이 임백승(林百升)이었다. 주인은 그를 신인(神人)이라 생각하고 후하게 접대하였다. 이윽고 제자들이 어떻게 주인의 이름을 알았는지를 물었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나무가 둘이면 임(林)자이고, 말 덮개의 용량이 백 되[百升]이다. 그러니 이름이 임백승인 것이다.”
양양에 도달한 뒤에는 다시 불법을 베풀었다. 과거부터 불경을 번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번역이 때로 틀린 것이 있기에, 깊은 뜻이 은몰되어 아직 두루 통하지 못하였다. 매양 강설에 이를 때마다, 오직 그 대략의 뜻을 이야기하고는 읽어 넘길 뿐이었다. 도안은 경전을 읽으면서 궁구하여 깊고 먼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주석한 것으로 『반야도행경』·『밀적경(密跡經)』·『안반경(安般經)』등 여러 경전이 있다. 모두가 본 문장을 찾아 문구를 비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수록하였다. 이어 의심나는 곳을 분석하고 훤하게 풀이하여, 전부 스물두 권의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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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서는 서두에서 깊고 풍부한 내용을 이루어, 미묘하게 깊은 종지를 다하였다. 앞뒤의 조리가 일관되며 문리가 회통하였다. 경전의 내용이 극명해진 것은 도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경전에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러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 환랑자(桓朗子)가 강릉(江陵)에서 주둔하였다. 도안에게 요청하여 잠시 머물렀다. 주서(朱序)가 서쪽으로 가서 주둔하면서 다시 청하였다. 양양으로 돌아가 서로 깊이 인연을 맺고 받아들였다. 주서는 늘 찬탄하였다.
“도안 법사는 도학(道學)의 나루를 건너는 징검다리이자,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주점이다.”
도안은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지자, 다시 절을 세우고 단계사(檀溪寺)라 이름 지었다. 곧 청하(淸河) 장은(張殷)의 집이었다. 큰 부자와 장자들이 모두 찬조를 하였다. 5층탑과 4백 개의 승방을 세웠다.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홍충(楊弘忠)은 만 근의 구리를 보내서 승로반(承露盤)3)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승로반은 이미 태공(汰公)에게 맡겨 만들기를 끝마쳤습니다. 이 구리를 회향하여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양홍충은 기뻐하며 공경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재물을 추려내 희사해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광배가 1장 6척이고, 신령한 상호가 밝게 드러났다. 매일 저녁 빛을 발하여 전당(殿堂)이 환하게 빛났다. 또한 뒤에 불상이 스스로 걸어가서 만산(萬
3) 탑의 꼭대기에 얹는 두터운 바퀴[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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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 이르렀다. 온 고을 사람이 찾아가 우러러 예를 올리고, 옮겨서 절로 돌아왔다.
도안은 이미 큰 서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부견(符堅)이 사신을 보내었다. 외국의 금박(金箔)을 입힌 높이 일곱 자의 기댄 자세의 불상과 금불좌상과 구슬로 꿰어 만든 미륵상, 금실로 수놓은 불상, 직물로 만든 불상을 각기 하나씩 보내왔다.
강회(講會)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존상들을 나열하고,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배치하였다. 구슬과 노리개가 번갈아 가며 빛나고, 장식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문턱을 밟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경의를 다하게 하였다.
외국에서 건너온 구리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 제작의 형식이 예스럽고 기이하였다. 당시 대중들은 그렇게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육계(肉髻)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곧 제자로 하여금 그 육계를 화로에 녹여서 고치게 하였다. 그런데 광명의 불꽃이 빛나게 뻗어 나와 법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육계 속에 한 사리가 보였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 감복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이 이미 신령하고 기이하니 다시 번거롭게 고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에 알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도안은 사리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짐짓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당시 양양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다. 날카로운 말솜씨는 하늘에서 타고난 듯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그가 먼저 도안의 높은 명성을 듣고 일찌감치 편지를 보내 호감을 표하였다.
“듣건대 진실에 응하여 바른 길을 밟아 밝고 환하게 명백하게 안으로 밝으신 분이며, 자비의 가르침을 거듭 비춰주시어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음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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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다 합니다.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4백여 년입니다. 변방의 왕이나 거사들이 때로 받든 사람이 있고, 중국[眞丹]의 숙천(宿川)에서 이보다 더 앞선 시대에 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의 운행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서, 세속에서는 아직 모두들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도업의 융성함에는 모두가 짝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달빛이 나오려 할 때 신령한 발우(鉢盂)가 감응하여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법사의 임무는 홍범(洪範)4)에 해당하며, 그 교화는 그윽이 깊은 곳을 적셔줍니다. 이곳의 모든 승려들에게는 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경사로운 구름[慶雲]이 동쪽으로 흐르듯, 마니주(摩尼珠)의 빛남을 돌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7보의 자리에 오르시어, 잠시 명철한 등불을 밝히시고, 풍성한 초목[豊草: 衆生]에 감로의 비를 내려주십시오. 양자강 기슭에 전단(旃檀)나무를 심으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
늘날 다시 드높아질 것이며, 현오한 물결이 일렁이고 넘쳐서 거듭 한 시대를 휩쓸 것입니다.”
이 편지의 글은 많아서 여기에 모두 싣지 않는다.
그 후 도안이 그곳에 이르러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 습착치는 곧 도안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였다.
“사해(四海) 습착치요.”
도안이 말하였다.
“하늘 가득[彌天] 석도안(釋道安)이요.”
당시 사람들은 명답이라 하였다.
그 후 습착치는 배[梨] 열 개를 선물로 보냈다. 마침 대중들의 식사 때에 전해졌으므로, 도안은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누었다. 배가 다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고평(高平)의 극초(郄超)는 심부름꾼을 시켜 천 섬의 쌀을 보냈다. 여러 장의 편지를 써서 깊이 은근한 마음을 전했다.
4) 중국 우(禹)임금 때 천하(天下)를 다스리던 대법(大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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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회답편지를 보냈다.
“쌀을 희사하시니 기다리는 분께 번뇌를 끼쳤음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습착치는 사안(謝安)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서 석도안을 만났습니다. 멀리까지 뛰어나서 평범한 도사가 아닙니다. 문도 수백 명이 재를 올리고 강의함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기교와 방술로 보통 사람들의 귀와 눈을 미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위세를 중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일 없이도, 군소(群小) 종문들의 천차만별을 정돈하는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문도들이 엄숙하고 숙연하게 각자 서로 존경하여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품은 이론은 간결하면서도 대부분 넓게 섭렵한 것이어서, 내외(內外)의 뭇 서적들을 대략은 두루 보았습니다. 음양·산수(算數)에도 모두 빼어납니다. 불경의 오묘한 이치[妙義]에는 자유자재로 능란하여, 논리의 펼침이 우법란(法蘭)과 법도(法道)와 비슷합니다.
한스러운 일은 그대와 같이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한 번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늘 말합니다.”
당시의 현인들에게 중히 여겨진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번천(樊川)·면천(沔川: 陜西省)에 있던 15년 동안에 해마다 늘 두 번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였다. 한 번도 그만두거나 빠트린 일이 없었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는 그의 도풍을 듣고, 덕을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 문안을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보냈다.
“도안 법사는 기량과 식견이 도리에 통(通)한다. 도풍의 운치가 사물의 말단에도 밝다. 도에 살면서 속인들을 훈도하여 아름다운 공적을 아울러 쌓았다. 그러니 어찌 오직 현재의 세상만을 바로잡아 제도하겠는가? 바야흐로 미래의 세계까지 나루터를 구축한 분이다. 봉급은 모두 왕공(王公)과 같은 대우로 지급하고, 공물은 계신 곳에서 내도록 하라.”
당시 부견은 평소 도안의 명성을 듣고 늘 말하였다.
“양양에 석도안은 참으로 신령한 큰 그릇[神器]이다. 이 분을 모시어 짐을 보좌케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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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부비(符丕)를 파견하여 남쪽 땅 양양을 공략하였다. 도안과 주서(朱序)가 모두 부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부견은 복야(僕射)인 권익(權翼)에게 말하였다.
“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 땅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 반뿐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누구누구입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도안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가 반 사람이다.”
도안은 장안에 이르러 오중사(五重寺)에 머물렀다.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여 크게 법화를 넓혔다.
과거 위(魏)나라와 진나라(晋)의 사문들은 스승에 의거하여 자신의 성명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성씨(姓氏)가 각기 달랐다. 도안은 큰 스승의 근본으로서 석가모니를 따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여겼다. 마침내 승려들의 성을 석(釋)씨로 지었다.
그 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었다. 과연 그곳에서도 일컬었다.
“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이름은 없어진다. 네 개의 성씨가 사문이 되었지만, 모두가 석씨의 종족으로 일컫는다.”
이렇게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되니, 마침내 영원한 법식으로 삼았다.
도안은 밖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와 부(賦: 文體의 하나)를 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붙어서 명성을 이루었다.
당시 남전현(藍田縣)에서 하나의 큰 가마솥을 얻었다. 용량이 곡식 27섬(한 섬은 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전서(篆書)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보였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옛 전서(篆書)로 노(魯)나라 양공(襄公)이 주조한 것이다.”
곧 예문(隸文)으로 베꼈다.
또 어떤 사람이 구리로 된 10말들이 그릇을 가지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 모양이 똑바로 둥근 형이었다. 아래로 향하면 말로 사용하고 가로 놓인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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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은 되로 사용하였다.
낮은 쪽에 있는 것이 홉[合]이고, 다리의 한쪽머리는 피리이다. 피리는 종(鍾)과 같았다. 용량은 반 홉을 담을 만하다. 가장자리에 전서로 글자를 새겼다. 부견이 도안에게 물어보자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왕망(王莽, 9~20)이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순(舜)임금의 황룡(皇龍) 무진(戊辰)년 단위를 개정하였습니다. 양을 같은 비율로 하여 사방에 이를 유포시켜서, 작고 큰 그릇을 고르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공평히 취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많이 듣고 널리 앎이 이와 같았다. 부견은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내외의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도안을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조(京兆)에서 말이 나돌았다.
“배움에 도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는 맞추지 못한다.”
과거 부견은 석씨(石氏)의 난리를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이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호구 수가 풍부해지고 사방을 거의 평정하였다. 동쪽은 동해바다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구자국(龜玆國)을 병합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양을 싸잡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모두 점령하였다. 오직 건업(建業) 한 모퉁이만 아직 항복받지 못하였다.
부견은 매양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늘 강남 지방을 평정하여,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자 한다.”
부견의 아우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원소(原紹) 등이 모두 간절하게 간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이들은 부견이 도안을 믿고 공경함을 알아,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청하였다.
“주상께서 장차 동남 지방에 일을 일으키려 한다. 그렇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창생들을 위하여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가?”
때마침 부견이 동쪽 뜰로 나가면서 도안에게 명하여 가마에 올라 같이 가고자 하였다. 복야 권익이 간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천자의 가마에는 시중이 함께 타 모셔야 합니다. 도안은 사람의 형상을 허문 자입니다. 어떻게 천자 옆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부견은 발끈 성을 내고 얼굴빛을 고쳤다.
“도안의 도와 덕은 존경할 만하다. 짐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겠다. 가마를 함께 타는 영예 정도로는 그의 덕에 걸맞지 않다.”
곧 복야에게 명령하여 도안을 부축해서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이윽고 도안에게 말하였다.
“짐은 장차 그대와 남쪽 오월(吳越) 지방으로 떠돌고자 한다. 군대를 정비하여 순수(巡狩)5)하면서 회계(會稽)를 건너 동해를 바라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에 도안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천명(天命)에 응해서 세상을 거느리십니다. 여덟 고을에서 바치는 부유함이 있고, 중토에 자리 잡아 사해를 제압하셨습니다. 정신을 함이 없는 세계에 깃들이신다면,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나란히 하는 융성한 제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백만의 대군으로 가장 질 떨어지는 토지를 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동남지방의 지형은 땅이 낮고 기운이 사납습니다. 예전에 순임금·우임금도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진시황도 한 번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보건대 저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평양공은 훌륭한 친척이고, 석월은 중신(重臣)입니다. 그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오히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경솔하고 얕은 견해의 말도 결코 윤허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는 까닭에, 참된 충성[丹誠]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에 부견이 말하였다.
“땅이 넓지 않다거나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장차 천심을 가려내서 나라 운수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이다. 시운에 순응하여 순수(巡狩)하는 것은 전대의 전적에도 드러나 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제왕이 지방을 성찰한다는 글은 없는가?”
5) 천자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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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만약 천자의 가마를 반드시 움직이고자 한다면, 먼저 낙양(洛陽)으로 행차해 위세를 높이어 정예로움을 비축하십시오. 격문(檄文)을 강남땅으로 전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그 때 토벌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부견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평양공 부융 등 정예군 25만 명을 파견하여 선봉[前鋒]으로 삼았다. 부견이 몸소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렸다.
이즈음 진(晋)나라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부견의 선봉대가 팔공산(八公山) 서쪽에서 크게 무너졌다. 진나라 군사가 패배를 뒤쫓아 30리를 쫓아왔다. 죽은 사람이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다. 부융은 말이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부견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니, 도안이 간언한 말과 같았다.
도안은 항상 여러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혹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서원하였다.
“만약 말한 것이 이치로부터 그다지 멀어지지 않는다면, 상서로움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곧 꿈에 머리는 하얗고 눈썹이 긴 오랑캐 도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그대가 주석을 단 경전은 매우 이치에 합당하오. 나는 열반에 들 수 없어서 서역에 머물고 있오. 마땅히 서로 도와 불법을 널리 전하여야 하므로, 때때로 식사나 마련해 주셨으면 하오.”
그 후 『십송률(十誦律)』이 이르렀다. 원공(遠公: 慧遠)이 이에 스승님[和尙]께서 꿈꾸신 분이 빈두로(賓頭盧: 佛弟子)임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마련하고 공양을 올리자 곳곳에서 법칙이 되었다.
도안은 이미 도덕에서 대중의 종사가 되었다. 배움에서 삼장(三藏)을 겸하였다. 승니(僧尼)들의 의궤와 규범과 불법의 헌장(憲章)을 조목 별로 나누어, 세 가지 사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행향(行香)·정좌(定座)·상경(上經)에 대한 법이고, 둘째는 평일의 육시행도(六時行道)와 음식(飮食)·창시(唱時)에 대한 법이며, 셋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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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살(布薩)에 사람을 보내서 참회하고 허물을 뉘우치게 하는 따위의 법이다.
천하의 사찰에서 마침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따랐다.
도안은 늘 제자인 법우(法遇) 등과 미륵불 앞에서 서원을 세워,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그 후 진(晋)의 건원 21년(364) 1월 27일에 갑자기 기이한 승려가 나타났다. 형상은 실로 평범하고 누추하였다. 그가 절을 찾아와 기숙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절의 승방은 이미 가득 차 잘 곳이 없으므로 강당에서 거처하였다.
당시 유나(維那)가 불전에서 숙직을 하였다. 밤에 이 승려가 창문 틈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급히 이 사실을 도안에게 아뢰었다. 도안이 놀라 일어나서 예를 갖추어 문안을 드렸다. 그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서로를 위해서 왔노라.”
도안이 말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죄가 깊습니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참으로 제도할 만하군. 그러나 잠간 성승(聖僧: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면, 원하는 대로 반드시 결과가 있으리라.”
그리고는 자세히 목욕시키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에 도안은 다음 세상에 왕생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가 하늘의 서북쪽 허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구름이 열리면서 도솔천의 미묘하고 뛰어난 세계가 보였다. 이 날 저녁 대중 수십 명이 모두 같이 이 광경을 보았다.
그 후 도안은 목욕도구를 마련하였다. 비상한 어린아이가 수십 명의 벗들과 나타났다. 절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잠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과연 이것은 성스러운 응보라 하겠다.
그 해 2월 8일에 갑자기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는 떠날 것이다.”
이 날 식사를 마친 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성 안쪽 오급사(五級寺)에서 장사지냈다. 진(晋)의 태원(太元) 10년(382)의 일이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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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王嘉)
세상을 마치기 전에 은둔하는 선비인 왕가가 그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도안이 말하였다.
“세상일이란 이와 같은가 봅니다. 떠나려 함에 그대와 같은 분이 오셨습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떠나시겠습니까?”
왕가가 답하였다.
“참으로 그 말씀과 같지만은 먼저 떠나시구려. 나는 해결하지 못한 약간의 빚이 남아 있어서, 함께 떠날 수가 없구려.”
요장(姚萇: 後秦의 王, 384~417)이 장안을 점거했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안에 남았다.
그 때 요장은 부등(符登)과 매우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요장이 왕가에게 물었다.
“짐이 곧 부등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왕가가 대답하였다.
“거의 그럴 것이외다.”
요장이 진노하였다.
“그러면 그렇다 하면 될 것이지, 거의 그럴 것이란 다 뭐냐?”
마침내 왕가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왕가가 말한 빚이다.
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마침내 부등을 죽였다. 요흥의 자(字)가 자략(子略)이다. 이것이 곧 왕가가 말한 ‘거의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왕가의 자(字)는 자년(子年)이며 낙양 사람이다. 형상과 모습이 비루하여 마치 모자라는 사람 같았다. 본래 익살스러워 남 웃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며, 맑게 텅 비어 기(氣)를 마시고 살았다.
사람들은 모두 종사[宗]로 그를 섬겨, ‘운수가 좋을까, 나쁠까’를 찾아와 묻곤 하였다. 왕가는 사람에 따라 응답하였다. 그의 말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모습은 광대[調戱]와 같았다. 말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 비슷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지나가고 나면 대부분 증명되었다.
처음에는 가미산(加眉山)에서 문도를 양성하였다. 부견(符堅)이 대홍려(大鴻臚: 禮接官)를 파견해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견이 남방을 정벌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 길흉을 물었으나 말해주지 않았다. 이어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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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을 타고 거짓으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갔다. 신발과 모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옷을 벗어 버리면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이것으로써 수춘(壽春)에서 있을 부견의 패배를 암시하였다. 그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요장이 왕가를 살해하던 날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언덕 위에서 왕가를 보았다는 글을 요장에게 보냈다. 도안의 왕가 같은 신인(神人)과의 은근한 계합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앞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쪽 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강론하고 분석하기를 염원하였다. 늘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기를 권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멀리서 도안의 풍모를 듣고, ‘이 사람은 동방의 성인이다’라고 생각하여, 항상 멀리서 그에게 예배하였다.
과거 도안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도안이 세상을 마친 16년 후에야 구마라집이 비로소 중국에 이르렀다. 도안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한탄이 끝이 없었다.
도안은 일찍부터 경전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뜻한 바가 법을 베푸는 데 있었다. 초청한 외국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담마난제(曇摩難提)·승가발징(僧伽跋澄) 등이 수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법화(法和)와 더불어 소리와 글자를 가려내서 정하고, 글 뜻을 상세하게 파헤쳤다. 새로 나온 수많은 경전들이 이 때에 바로잡혔다.
손작이 쓴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 전한다.
“석도안은 사물에 너르고 재주가 있으며, 빼어나게 경전의 이치에 뛰어났다.”
또한 그를 위한 찬(贊)에 전한다.
만물이 넓고 넉넉하다면
사람은 본래 많은 것을 주재하는 법
깊고 깊은 석도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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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이를 겸하여 갑절로 더할 수 있어서
명성을 연과 농[汧隴: 陜西]지방에 드날렸고
이름은 회수와 동해까지 치달렸으니
그의 형체는 비록 풀로 변하였으나
아직도 항상 살아 있는 것 같아라.
物有廣贍 人固多宰
淵淵釋安 專能兼倍
飛聲汧隴 馳名淮海
形雖草化 猶若常在
또 다른 기록에 전한다.
“하북지방에 따로 축도안(竺道安)이 있어 석도안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습착치가 편지를 축도안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안은 본래 스승을 따른 축(竺)이란 성을 후에 석(釋)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세간에서는 그의 두 가지 성을 보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다.
2) 석법화(釋法和)
법화는 영양(榮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안과 같이 공부하여 공손과 겸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논리의 벼리를 훌륭하게 표명하고, 의문 나고 막힌 점은 슬기롭게 풀이할 수 있었다.
석씨(石氏)의 난으로 인하여 문도들을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덕을 사모하는 파한(巴漢)의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양양(襄陽)이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양평사(陽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금여곡(金輿谷)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도안과 더불어 산마루에 올라가, 눈길이 닿는 끝까지 두루 바라보다가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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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높이 솟아, 노닐며 바라보는 사람이 많네. 세월이 흘러 한 번 변화하면, 마침내 누가 이 산임을 헤아리겠나?”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마음에 지닌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뒷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만약 지혜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후 도안과 함께 새로 나온 경전을 자세히 정리하고 글 뜻을 참작하여 바로잡았다.
이 무렵 위진(僞晋)의 왕 요서(姚緖)가 초청하여, 포판(蒲坂)에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 제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세속 안에서의 번뇌와 고루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곧 의복을 바로 하고 불상을 빙 돌아 예배하였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0세이다.
3) 축승랑(竺僧朗)
승랑은 경조(京兆)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떠돌면서 도를 물었다. 오랫동안 관중(關中)으로 돌아가 오로지 강설만을 맡았다.
어느 날 몇 사람과 함께 초청 받은 곳을 갔다. 도중에 문득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절 안에 옷과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라 곧 절로 돌아와 보니, 과연 도적이 있었다. 그의 전갈로 말미암아 잃은 것은 없었다.
승랑은 항상 푸성귀를 먹고 무명옷을 입었다. 뜻은 인간 세상 밖에서 즐겼다. 위진(僞秦)의 황시(皇始) 원년(384)에 태산(泰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사(隱士) 장충(張忠)과 숲 속에서 은둔하자는 기약을 맺고, 늘 함께 그곳에서 노닐었다. 후에 장충은 부견(符堅)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로 가다가 화음산(華陰山)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이에 승랑은 금여곡(金輿谷) 곤륜산에 따로 정사를 세웠다. 아직도 이곳은 태산의 서북에 있는 하나의 암곡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험준하며 수석(水石)이 굉장하다. 승랑은 처음 이곳에 승방을 축조할 때, 산의 아름다움을 다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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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설계하여 절 안팎에 집 수십여 채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랑은 쉬지 않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힘들어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진(秦)의 임금인 부견은 그의 덕을 평소에 흠모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랑은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부름을 중지시켰다. 그러자 달마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다. 부견이 후에 대중 승려를 숙청할 때, 곧 별도로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였다.
“승랑 법사는 지계와 도덕이 얼음이나 서리 같다. 배우는 무리들은 맑고 빼어나다. 곤륜산 한 곳만은 관례대로 수색하지 말라.”
그 후 후진(後秦)의 요흥(姚興)도 찬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연(燕)나라의 임금 모용덕(慕容德)도 승랑의 명성과 행실을 흠모하였다. 임시로 동제왕(東齊王)이라 부르게 하고, 두 고을의 조세(租稅)를 공급하였다. 승랑은 왕의 지위는 사양하고, 조세만을 취하여 복업을 일으켰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 373~396)는 편지를 보냈다. 북위(北魏)의 척발규(拓跋珪, 武帝, 386~409)도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공경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 골짜기 안에는 예전부터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많아, 항상 지팡이를 짚고 무리지어 다녔다. 승랑이 이곳에 자리 잡자 맹수들이 귀의하여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도, 중도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었다. 백성들이 감탄하여 끝없이 칭송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금여곡을 낭공곡(朗公谷)이라 부른다.
무릇 승랑을 찾아올 사람이 있으면, 몇 명이건 간에 손님이 당도하기 하루 전에 미리 알아, 제자들을 시켜 음식을 준비토록 하였다. 반드시 그의 말과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의 미리 내다보는 밝은 지혜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그는 나이 85세로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승돈(支僧敦)
당시 태산에는 또 지승돈이 있었다. 본래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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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롱(汧隴) 지방을 떠돌았다. 오랫동안 형주(荊州)와 옹주(雍州)에서 지냈다. 대승에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났다.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을 지었는데, 역시 세상에 전한다.
4) 축법태(竺法汰)
법태는 동완(東莞) 사람이다. 어려서 도안과 같이 배웠다. 비록 재능과 말솜씨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태와 풍모는 도안을 넘어섰다.
도안과 함께 난을 피하여 신야(新野)로 갔다. 도안이 무리를 나누어 법태에게 서울로 내려갈 것을 명하였다. 헤어질 때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서북 지방에서 의식과 궤범으로써 펼치시오. 나는 동남쪽에서 교화를 넓히겠소. 그렇게 한다면 강호의 도술이 서로 바라보게 될 것이오. 청정한 인연으로 높은 모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곧 제자 담일(曇一)·담이(曇二) 등 40여 명과 함께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질병에 걸려 양구(陽口)에서 멈추었다.
당시 환온(桓溫)이 형주에 주둔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지나가는지를 묻고는 탕약을 공급하였다. 도안도 또한 제자인 혜원(慧遠)을 형주로 내려보내어 문병하였다.
법태는 병이 조금 치유되자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법태와 함께 오래 이야기하고자 하여, 먼저 다른 여러 손님을 상대하였다. 그래서 아직 법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법태는 병세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곧 가마를 타고서 곁방[廂]을 거쳐 돌아 나오며, 환온에게 알렸다.
“풍담(風痰)이 갑자기 발작하여 오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환온이 총총히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법태를 접대하고 돌아갔다.
법태는 키가 8척으로 풍모와 자태가 볼 만하였다. 뱉어내는 말과 쌓은 학식으로, 문장이 난초의 향기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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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문인 도항(道恒)도 자못 재주와 힘이 있었다. 항상 마음이 없다는 논리[心無義]에 집착하여 그 논리가 크게 형주 땅에 행하였다. 이에 법태가 말하였다.
“이는 삿된 주장이다. 반드시 이를 타파해야만 한다.”
곧 크게 이름난 승려들을 모으고, 제자인 담일을 시켜 이를 비판하게 하였다. 경전에 근거하여 이끌고 어지럽게 분석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도항은 그의 말솜씨에 힘입어 굴복하지 않았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모였다.
혜원이 자리에 나아가 수 차례 비판하자, 관련된 문책[關責]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항은 스스로 논리의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면서 털이개로 책상을 두드릴 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빨라야 할 때 빠르지 않은 베틀의 북[杼軸]이라니,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
좌석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에 마음이 없다는 논리가 여기에서 멎었다.
법태는 서울로 내려와 와관사(瓦官寺: 在南京)에 머물렀다. 이에 진(晋)의 태종 간문제(簡文帝)가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방광반야경』을 강의하기를 청하였다. 대회를 연 날에 황제가 몸소 납시니, 왕후와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이지 않음이 없었다.
법태는 모습이나 이해력에서 보통 사람을 넘어섰기에,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개강하는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구경하고, 법문을 들으려는 선비와 아녀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도들은 차례대로 줄지어 앉았다. 삼오(三吳: 지금의 江蘇省·浙江省 일대) 지방에서 보따리를 싸매고 찾아온 사람도 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 와관사란 절은 본래 하내(河內)의 산완공(山玩公)의 묘 근처에서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사문 혜력(慧力)이 나라에 요청하여 절로 삼았다.
오직 법당과 탑만이 있었다. 법태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승방과 전우(殿宇)를 개척하였다. 뭇 일을 닦고 세웠다. 또한 중문(重門)을 세워서 땅의 형세에 어울리게 하였다.
여남왕(汝南王)의 세자인 사마종(司馬綜)의 저택이 절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침 그가 절 옆으로 굴을 뚫어서 중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법태는 개의치 않았다. 사마종이 깨달아 몸소 찾아와서 참회하고 사과하였다. 법태는 누워서 그를 맞으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였다.
영군(領軍)인 왕흡(王洽)과 동정왕(東亭王) 사마순(司馬珣), 태부(太傅) 사안(謝安)도 모두 끝없이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였다.
죽음에 이르기 며칠 전에 문득 몸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떠난다.”
진(晋)의 태원(太元) 12년(387)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나이는 68세이다.
열종(列宗)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조서를 내렸다.
“법태는 도를 팔방에 퍼뜨렸고, 은택(恩澤)이 후예들에게 흘러 넘쳤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픔이 가슴을 꿰뚫는다. 부의(賻儀)로 돈 십만 냥을 보낸다. 장사에 필요한 물자를 수요에 따라 갖추어 마련하라.”
손작은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들고
거문고 울음소리는 계곡에 아련하다.
시원하고 밝으신 법태여,
덕을 비교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凄風拂林 鳴絃映壑
爽爽法汰 校德無怍
∙담일(曇壹)·담이(曇二)
법태의 제자인 담일과 담이도 모두 경전의 논리를 널리 익혔다. 또 『노자(老子)』와 『주역』에도 빼어났다. 풍류를 좋아하여 혜원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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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법태가 통곡하였다.
“하늘이 안회(顔回: 孔子의 首弟子)를 데려갔구나.”
법태가 지은 의소(義疏)와 극초(郄超)에게 보낸, 본래 없음의 뜻을 논한[論本無義] 편지는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혹 세상에서는 말한다.
“법태는 도안의 제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5) 석승선(釋僧先)
승선은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상산(常山)의 승연(僧淵)의 제자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소박하며 곧은 지조가 있었다. 사미 때 도안과 여관(旅館)에서 서로 만났다. 도안도 당시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았을 때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일들을 피력하였다. 그 정신과 기개가 강개(慷慨)하였다. 헤어질 때 서로 말하였다.
“만약 서로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함께 노닌 일을 잊지 말자.”
승선은 계를 받은 이후 정성껏 수행에 힘쓰고, 배움은 경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석(石)씨의 난을 만나 비룡산(飛龍山)에 숨어살았다. 생각은 바위와 골짜기에 노닐고, 뜻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얻는 데 두었다. 도안도 그 후 다시 그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 흐뭇해하고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예전의 맹서를 비로소 따랐구나.’
이로써 함께 글을 펴놓고 생각을 모으니, 새로운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이 때 도안이 말하였다.
“선인들이 예전에 불경을 번역할 때에 도가 경전을 빌린 논리[先舊格義]는 이치에 대부분 어긋나네.”
승선이 말하였다.
“다시 분석하고 소요(逍遙)해야 마땅하지. 하지만 어찌 옛 선배들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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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이 말하였다.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려면, 마땅히 진리와 올바르게 일치되도록 하여야 하네. 진리의 북을 다투어 울림에 있어서, 어찌 앞서고 뒤서고 할 게 있겠는가?”
승선은 이에 법태 등과 함께 남쪽으로 갔다. 진평(晋平) 지방을 떠돌면서 도를 강의하고, 교화를 넓혔다. 그 후 양양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호(道護)
도호도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곧은 절개가 있고 지혜와 이해력이 있었다. 역시 비룡산에 숨어살았다. 도안 등을 만나자 함께 말하였다.
“조용한 곳에 살면서 속세를 떠나 늘 불법을 바로잡고 싶기는 하네. 하지만 어찌 산문에서 홀로 걸어 다니며 법륜의 수레바퀴를 그치게 해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각자 힘에 미치는 대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세.”
대중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기 교화를 행하였다. 그 후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6) 축승보(竺僧輔)
승보는 업군(鄴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행을 지키고 집념과 의지가 곧았다. 배움은 여러 논(論)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아울러 경전과 불법에 밝았다. 도가 이락(伊洛: 伊水·洛水로 지금의 洛陽 지방) 지방에 떨쳤으며, 온 서울이 종사로서 그를 섬겼다.
서진(西晋)의 기근과 난리를 만나자, 승보는 석도안 등과 함께 확택(濩澤)에 은거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윽하고 은미한 진리를 모두 훤하게 알았다.
그 후 형주의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간단한 푸성귀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높은 정성으로 예참을 수행하여,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불을 우러러 뵙기를 서원하였다.
당시 낭야왕(瑯琊王) 사마침(司馬忱)이 형주자사가 되었다. 승보의 곧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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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정신에 의지하여 계사(戒師)가 되어달라고 청하여, 온 가문이 으뜸으로 받들었다.
그 후 죽기 이틀 전에 문득 말하였다.
“내일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묘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게 감돌고, 범패소리가 울리며 어우러졌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달려오니, 찾아온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
이 날 오후가 되자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절 안에서 장사지내고, 승려들이 그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7) 축승부(竺僧敷)
승부의 씨족은 아직 자세하지 않다. 배움은 뭇 경전에 뛰어나고, 특히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에 빼어났다.
서진(西晋) 말기의 난리에 강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성대하게 강석을 여니, 건업(建鄴)의 옛 승려들 치고 추대하고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같은 절에 있던 사문 도숭 역시 재능과 이해력이 버금갔다.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의 그윽함을 더듬어서 빼어나게 드러내는 능력에는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네.”
당시 외도의 학문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가 생각하였다.
‘마음과 정신에는 형상이 있으며[心神有形], 한낱 만물보다 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빼어난 말솜씨로 상대방을 꺾어 제압하였다. 이에 승부는 곧 『신무형론(神無形論)』을 지어 주장하였다.
“형상이 있으면 작용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다함이 있다. 그러나 정신은 일찍이 다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말재간에 기대는 무리들은 서로 어지럽게 논쟁하였다. 그러다가 이치가 돌아갈 곳을 찾자 흡족하게 그를 믿고 복종하였다.
그 후 다시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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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축법태가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 상인(上人)을 추억할 때마다 돌아다니던 일이 어제 같군. 그런데도 세상을 떠난 지 문득 여러 해가 되었네. 그와 맑게 이야기 나눈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그대와 함께 그의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 그렇건만 어찌 하루아침에 영원히 세상을 달리할 줄 알았겠나? 깊은 통한의 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서 터득한 것과 경서를 펴서 찾아낸 공부는 참으로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네.”
법태가 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주 승부의 논리를 진술하곤 하였다. 지금 미루어 찾건대, 그가 지은 글이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슬픈 일이라 하겠다.
8) 석담익(釋曇翼)
담익의 성은 요(姚)씨이다. 강(羌: 서쪽 오랑캐. 지금의 티베트) 지역 사람이다. 혹 기주(冀州) 사람이라고도 한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어려서는 계율 있는 행실로 칭찬을 받았다. 배움은 삼장에 뛰어나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촉군(蜀郡: 지금의 成都)을 경유(經遊)하자, 자사(刺史) 모거(毛璩)가 깊이 그를 중히 여겼다. 점심 공양을 마련하고 몸소 우러러 받들었다.
이 때 담익이 밥 속에 한 톨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그것을 취하여 먹었다. 그러자 모거가 마음속으로 몰래 존경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반드시 신심으로 바치는 보시를 저버릴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 천 섬의 쌀을 선물하였다. 담익은 이를 받아 나누어 보시하였다.
담익은 일찍이 도안을 따라 단계사(檀溪寺)에 있었다. 진(晋)의 장사태수(長沙太守) 등함(騰含)이 강릉에서 자기 집을 희사하였다. 절로 만들기 위해 도안에게 강령(綱領)이 될 승려를 구하였다. 도안이 담익에게 말하였다.
“형주(荊州)와 초나라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교화를 이룩할 사람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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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익은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절을 만들어 세웠다. 곧 장사사(長沙寺)가 그것이다.
그 후 도적들이 번갈아 날뛰면서 한남(漢南) 땅을 침략하였다. 강릉 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상명(上明)으로 피난하였다. 담익은 그곳에 절을 다시 세웠다. 도적 무리들이 소탕되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장사사를 수리하고, 참된 정성으로 기원하고 청하였다.
드디어 감응이 일어나서 사리가 나타났다. 금병에 담아 재(齋) 올리는 자리에 안치하였다. 담익은 곧 그 앞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며 서원하였다.
“만약 이것이 금강(金剛)이 남긴 음덕[餘蔭]이라면, 원하옵나니 광명이 빛나게 하여주십시오.”
한밤중에 이르렀다. 오색의 광채가 병 속에서 점차 밖으로 나와 온 법당을 가득히 비추었다. 모든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여, 담익의 신령한 감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시 비록 부란(富蘭) 등의 이교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서를 본다면 역시 거짓됨을 되돌려 진실함에 귀의했을 것이다.
그 후 파릉(巴陵)의 군산(君山)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었다. 이곳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이른바 동정산(洞庭山)이라 하는 곳이다. 산 위에는 구멍이 있어서 오(吳)나라의 포산(苞山)과 통한다. 산이 일찍이 영묘하고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몹시 그곳을 꺼려하였다.
담익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길에 수십 마리의 흰 뱀이 누워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담익은 물러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 멀리 산신령을 청하여 예참을 올리면서 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절을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는 것입니다.
원컨대 공덕을 함께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날 밤 곧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담익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삼보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면, 특별한 도움을 드리는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튿날 다시 산을 찾아가니, 길이 매우 깨끗하고 평탄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서 강의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 가운데 벌목하는 사람이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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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훔쳐가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돌아와 절 위에 이르니, 담익의 재목은 이미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몰래 훔쳐 사유물로 취한 것은 모두 관가에서 거두어갔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담익은 항상 한탄하였다.
“절을 세워 승려들은 충족되었으나 부처님의 형상이 아직도 적다.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부처님 모습의 신비한 상서로움은 여러 지방에 두루 깔려 있다. 그렇거늘 어찌 그런 감응이 없어 그 불상들을 모셔올 수 없단 말인가?”
이에 오로지 간절하고 측은하게 정성스러운 감응을 빌었다. 진(晋)의 태원(太元) 19년(394) 갑오해 2월 8일에 문득 한 불상이 성의 북쪽에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하늘에 충천하였다. 당시 백마사(白馬寺)의 승려들이 먼저 그곳에 가서 영접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담익이 그곳에 가서 공경하게 예불하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아마도 아육왕의 이 불상은 우리 장사사(長沙寺)에 내려주신 것이리라.”
곧 세 사람의 제자를 시켜 받들어 영접하였다.
그러자 가볍게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일어나서 본사로 맞아 돌아왔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와 말의 굉음이 거리를 메웠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禪師)인 승가난타(僧伽難陀)가 촉(蜀)에서 내려와, 절에 들어와서 예배하였다. 불상의 광배 위에 범어로 새겨진 글자가 있음을 보고 곧 말하였다.
“이것은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입니다. 언제 이곳에 왔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담익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날, 불상의 둥근 광배가 갑자기 신령스럽게 변화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담익과 감응이 통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승위(僧衛)
당시 장사사(長沙寺)에는 또한 승위(僧衛)란 사문이 있었다. 학업이 매우 뛰어나 은중감(殷仲堪)6)이 소중히 여겼다. 특히 『십주론(十住論)』에 뛰어나
6) 동진(東晋)의 무장(武將)으로 청렴하고 청담(淸談)을 잘 하였으며 효무제(孝武帝)가 중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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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 논의 주해(注解)를 달았다.
9) 석법우(釋法遇)
법우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여 뜻이 고전문헌에 두터웠다. 그러나 성품이 멋대로 자랑하고 큰 소리를 쳐서,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도안을 만나자 문득 믿고 굴복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깎고 도에 들어,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윽한 교화에 씻기어 슬기로운 이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본래의 마음을 꺾고서 겸허하게 덕을 이루었다. 의양태수(義陽太守) 완보(阮保)가 이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멀리서 좋은 벗의 의리를 맺고자 하였다. 편지로 서로의 사귐을 나누고, 보시를 보내는 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양양(襄陽)이 침략을 당하자, 법우는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니, 수업하는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당시 어떤 승려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향공양을 올리는[燒香] 소임을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법우는 다만 그에게 벌만 내리고 내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도안이 멀리서 들었다. 대나무 통에 곤장 하나를 담아 손수 봉함을 하고, 글을 써서 법우에게 보냈다. 법우가 봉한 것을 열었더니, 그 속에 곤장이 있음을 보았다. 곧 말하였다.
“이는 술을 마신 승려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나의 주의를 일깨우는 명령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먼 곳에 계시는 스승께서 근심을 담은 선물을 보내신 것이다.”
곧 유나에게 명하여 건추(犍槌)를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는, 곤장이 든 통을 향등(香橙) 위에 안치하였다. 행향(行香: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친 다음, 법우는 곧 일어났다. 대중 앞에 나가서 통(筒)을 향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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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땅에 엎드려 유나(維那: 절의 사물을 맡아 지휘하는 소임을 맡은 승려)에게 명하여 곤장을 세 번 내리치게 하였다. 곤장을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시 경내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일에 힘쓰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조금 지나 혜원(慧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사람됨이 미미하여 어둡고 모자라서 대중들을 잘 거느리지 못하였네. 스승님[和尙]께서 비록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계시지만, 오히려 먼 곳까지 근심과 염려를 드렸으니 나의 죄가 깊다네.”
그 후 그는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10) 석담휘(釋曇徽)
담휘는 하내(河內) 사람이다. 12세에 도안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도안이 그의 고상한 풍채를 가상히 생각하였다. 우선 책을 읽게 하니, 2·3년 안에 배움이 경전과 역사를 겸하였다. 열여섯 살에 비로소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오로지 불교의 논리에 힘썼다. 그윽이 엉킨 진리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헤아려서,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설할 수 있었다. 뜻하는 일이 높고 깨끗하였다. 또한 공손함과 양보함으로써 존중을 받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양양에 있었다. 부비(符丕)가 경내를 침범하였다. 곧 동쪽 형주로 내려가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늘 근본이 있음을 뒤돌아보았다. 마침내 도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에 강릉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印手)보살7)에게 공경을 드렸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의 도에 의한 교화를 그대 스승[和上: 道安]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7) 과거 도안(道安)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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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휘가 말하였다.
“스승님의 내부 행실이야 그 깊고 얕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 인연에 미친 바는 대부분 모두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한 방울의 물로 어찌 강이나 바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晋)의 태원(太元) 20년(395)에 세상을 마쳤다. 죽음을 맞이한 날에도 몸에 별다른 병이 없었다. 당(堂)에 올라가 대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어 고별을 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오른편 겨드랑이를 대고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입본론(立本論)』 아홉 권과 「육식지귀(六識旨歸)」 12수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1) 석도립(釋道立)
도립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려서 출가하여 도안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방광반야경』에 뛰어났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삼현학8)이 불교의 이론과 약간 상응한다 하여, 그것의 뜻을 자못 귀속시켰다. 성품이 맑고 텅 비어 세상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복주산(覆舟山: 當陽 東南 玉泉寺의 뒷산)에 은거하였다. 홀로 바위굴에 거처하며 공양을 받지 않았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선정에 들어가면, 곧 7일 동안을 일어서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그 후 초여름에 담휘는 문득 산에서 내려왔다. 대중 승려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강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가을까지만 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품던 생각을 거칠게나마 끝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자일(自恣日: 陰 7월 16일) 뒤 며칠이 지나서, 과연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명을 아신 분이라고 일컬었다.
8) 삼현학(三玄學)은 『노자』·『장자』·『주역』의 총칭이다.
12) 석담계(釋曇戒)
담계는 일명 혜정(慧精)이라고도 한다. 성은 탁(卓)씨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진(晋)의 외병부(外兵部) 극양(棘陽) 수령 잠(潛)의 동생이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배움에 힘써서 마음을 고전 서적에서 노닐었다.
후에 법도(法道)가 『방광반야경』을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다. 옷을 빌려 입고 가서 한 번 들었다. 마침내 불교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속인 생활을 그만두었다. 도를 따라 도안에게 엎드려 스승으로 섬겼다. 삼장에 해박하게 뛰어나며, 5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평일에도 하루 5백 배로 예불하였다.
진(晋)의 임천왕(臨川王)이 몹시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후에 병이 위독해지자 항상 미륵불의 명호를 외웠다. 입에서 미륵불이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자인 지생(智生)이 간호하다가 물었다.
“왜 안양정토(安養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담계가 말하였다.
“나는 스승님[和尙: 道安]등 여덟 사람과 다 같이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스승님과 도원(道願) 등은 이미 모두 그곳에 왕생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가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오직 염원할 뿐이다.”
말이 끝나자 광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다. 얼굴에 더욱 기쁨이 넘쳐흘렀다. 드디어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그를 도안의 묘지 오른편에 장사지냈다.
13) 축법광(竺法曠)
법광의 성은 역(睪)씨이며 하비(下邳) 사람이다. 오흥(吳興)에 살았다. 일찍 부모를 잃고 양어머니를 섬겼다.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집이 가난하고 비축한 재산이 없어서 늘 몸소 밭을 갈아, 그것으로 어머니를 보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을 치를 때 예절을 다하였다. 그리고 복을 마치자 출가하였다.
축담인(竺曇印)을 스승으로 섬겼다. 담인은 밝고 슬기로우며 도의 행실이 있었다. 법광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머금은 기풍과 세운 지조가 우뚝하여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검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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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실천하고 일을 편안히 여겨, 뜻과 행실이 깊고도 깊었다.
한 번은 담인의 병이 위독하였다. 법광이 곧 7일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며 예참하였다.
그러더니 7일째 되던 날, 문득 오색의 광명이 나타나 담인이 거처하는 방문을 비추었다.
담인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로써 괴롭던 병이 마침내 나았다.
그 후 스승 곁을 떠나 먼 곳으로 떠돌면서, 널리 경전의 요점을 찾았다. 돌아와 잠청산(潛靑山)의 석실에 머물렀다. 매양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뜻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정토의 인연으로써 늘 이 두 부의 경을 읽으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암송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을 다스리자, 짐짓 그를 찾아와 공경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중이 그윽이 깊고 막혀서 수레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마를 산초(山椒) 나무 밑에 풀어놓고 봉우리를 넘어 걸어서 찾아왔다.
진(晋)의 간문황제(簡文皇帝)는 당읍태수(堂邑太守) 곡안원(曲安遠)을 파견하여 조서를 보내 일상생활을 위문하였다. 아울러 요상한 별이 나타난 일을 여쭈어, 법광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법광은 조서에 답신을 보냈다.
“예전에 송(宋: 前宋)의 경제(景帝)가 복덕을 닦았더니, 요사한 기운의 별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정치와 형벌을 참으로 잘 닦으시고, 천하의 무거운 임무를 맡아 모든 일을 풍부하게 잘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털끝만큼만 잘못하여도 결과는 천 리의 차질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덕(德)으로 다스림을 닦으시어, 하늘의 견책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빈도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주상에게 보답하여야 하오나, 실로 마음은 있어도 힘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곧 제자들과 더불어 재(齋)를 올리고 예참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재난이 소멸되었다.
진(晋)의 흥녕 연간(363~365)에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로 노닐며 산수를 관람하였다. 비로소 약야(若耶)의 고담(孤潭)에 머물렀다. 고개 옆 잿마루를 의지하여, 한적함에 깃들어 뜻을 기르고자 하였다. 극초(郄超)·사경서(謝慶緖) 등과 모두 세속 밖의 사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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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쪽 나라 대부분에 돌림병이 휩쓸었다. 법광은 이미 어려서부터 자비를 익힌 데다, 아울러 신령한 주문[呪]에도 뛰어났다.
마침내 산촌 마을을 유행하면서 위급한 환자들을 구제하고, 곧 고을로 나와 창원사(昌原寺)에 머물렀다. 백성들 가운데 병이 있는 사람은 자주 이곳에서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다.
이 때 귀신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법광이 걸어가고 머무는 곳에는 항상 수십 명의 귀신이 그의 앞뒤를 호위한다.”
당시 축도린(竺道隣)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 阿彌陀佛像)을 조성하였다. 법광은 곧 그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큰 불전을 세웠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나무를 베다가 가뭄을 만났다. 법광이 주문을 외워 물이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진(晋)의 효무(孝武)황제가 바람결에 전하는 소문을 들었다. 흠모하여 서울로 나오라고 요청하였다. 스승의 예로 섬기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흥(元興) 원년(40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산기상시(散騎常侍) 고개지(顧愷之)가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고 한다.
14) 축도일(竺道壹)
도일의 성은 육(陸)씨이며 오(吳: 江蘇省)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고 바르며 학업의 소양이 있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오래 거처하여야만 그가 신과 같이 빼어남을 알았다.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 형제도 깊이 공경을 더하여 섬겼다.
진(晋)의 태화(太和) 연간(366~370)에 서울로 나가서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태에게 수학하였다. 몇 년 사이에 생각이 깊고도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그러므로 강론할 때면 서울이 기울도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법태의 제자 담일(曇一)도 우아한 도풍과 지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담일을 대일(大一)이라 부르고, 도일을 소일(小壹)이라 불렀다.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서 당시에 강론의 종사가 되었다. 진의 간문(簡文)황제도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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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황제가 붕어할 무렵 법태도 죽었다. 그러자 도일은 곧 동쪽으로 돌아와 호구산(虎丘山: 左蘇州)에 머물렀다. 학도들이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에 단양(丹陽)의 윤이(尹移)로 하여금 도일을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도일이 회답하였다.
“무릇 제가 듣기로, 크나큰 도의 행실은 은둔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그 뜻을 마음대로 펼치는 것이라 합니다. 요순의 태평성대에도 은둔자들에게서 그 본성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방편을 넓히는 일이야 바깥에 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먼 곳까지 이른 것에서는 세속을 밟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대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진(晋)나라의 광명이 밝아져서 덕의 가피는 소외된 곳이 없습니다. 불법에 높이 경례하여, 이를 넓히고 자라나게 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장삼을 걸치고 석장을 흔들면서 달려와 천자의 도읍에 가득합니다.
모두가 애욕을 자르고 욕망을 버려, 맑고 그윽하게 마음을 씻고서, 멀리 텅 빈 세상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가 깊으면 항상 숨어살면서 뜻을 자비구제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행하되 한 지방에 머물지 않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되 오직 도에만 힘쓸 따름입니다. 비록 만물이 날짜 헤아림으로 유혹하여도 식자들은 해마다의 공적을 깨닫습니다.
지금 만약 그 속한 승적(僧籍)을 옮겨서 편호(編戶: 가난한 백성의 호적)에 들어가게 한다면, 아마도 사방을 떠도는 사람들이 성인의 세상에서 절벽을 바라보듯 할 것입니다. 거동을 가볍게 하는 무리들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성대하고 밝은 기풍을 훼손하고 주상의 뜻을 잘못되게 할 것입니다.
또한 황복(荒服: 邊方)의 손님은 궁궐[天臺]과 무관하며, 그윽한 풀숲 속에 사는 사람은 왕부(王府)에 글을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다행히 시절을 살피시어 날아오르게 하시면, 훗날 모일 것입니다.”
도일은 이에 그윽한 언덕에 한가하게 머물러서 궁벽한 골짜기에 그림자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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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유(帛道猷)
당시 약야산(若耶山)에 백도유(帛道猷)란 사람이 있었다. 본래의 성은 풍(馮)씨이며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알려졌다. 성품이 진솔하고 소박하여 은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읊고 짓는 시편(詩篇)마다 호상(濠上: 세상을 벗어난 仙人)의 풍모가 있었다. 도일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도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비로소 느긋하게 산림 아래에서 노닐면서 공자·석가의 글에 마음을 풀었습니다. 흥취에 부딪치면 시가 되고, 봉우리를 넘어가 약을 캐서 복용하면 오래된 병이 덜해집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대와 날을 함께 하지 못하여 한이 될 뿐입니다.”
이어 시를 지어 보냈다.
이어진 봉우리 수천 리
빼어난 숲은 평평하게 나루터를 휘감네.
지나가는 구름에 먼 산 그늘지고
바람이 다가오니 황량한 잡목 숲이 시끄럽구나.
초가집은 가려져 보이지 않고
닭이 울어야 사람 있음을 아네.
그 좁은 길 한가로이 걸어가면
곳곳에 버려진 땔감이 보이네.
비로소 알았노라. 백 대 뒤에도
짐짓 상황(上皇: 요순)의 백성이 있음을.
連峰數千里 修林帶平津
雲過遠山翳 風至梗荒榛
茅茨隱不見 雞鳴知有人
閑步踐其逕 處處見遺薪
始知百代下 故有上皇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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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이 편지를 받고는 자신의 포부에 들어맞는 바가 있었다. 곧 동쪽 야계(耶溪)로 가서 도유와 서로 만났다. 숲 아래에 자리를 정하였다. 이에 티끌세상 밖으로 정신을 마음대로 하면서 경서(經書)로 스스로를 즐겼다.
이 무렵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사마회(司馬薈)가 고을 서쪽에 가상사(嘉祥寺)를 일으켰다. 도일의 기풍과 덕이 드높다 하여 초청해서 승려의 우두머리로 앉혔다.
이에 도일은 곧 6물(物: 三衣와 鉢盂·坐具·甁)을 거둬 절로 보냈다. 그것을 팔아 금첩천상(金牒千像)을 조성하였다.
도일은 이미 내외의 고전에 해박하게 뛰어났다. 또한 계율의 행실이 깨끗하고 엄정하기에 사방 먼 곳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였다. 묻고 명을 받드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주도유나(九州都維那)라 불렀다.
그 후 잠시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곧 산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문장을 달리고 말씀을 설한
그 인연 헛되지 않아
유독 우리 도일만은
여유로운 남음이 있노라.
비유하면 봄날의 뜰과 같아서
향기 높고 명예로워
줄기와 잎새 아름답고 무성하며
가지의 기둥들은 빽빽하면서도 성글도다.
馳詞說言 因緣不虛
惟茲壹公 綽然有餘
譬若春圃 載芬載譽
條被猗蔚 枝森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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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道寶)
그의 제자인 도보는 성이 장(張)씨이며 역시 오나라 사람이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더욱이 강석 위에서 능란하였다. 장팽조(張彭祖)·왕수담(王秀琰) 등으로부터 모두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거슬림이 없는 사귐으로 알려졌다.
15) 석혜건(釋慧虔)
혜건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계율 있는 행실을 받들어 지켜서 지조가 확고하였다. 여산(廬山)에 십여 년 가량 머물렀다. 도인과 속인들 중에 수승한 도리에 뜻을 둔 자들은 모두 그의 풍채에 의탁하여 사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여러 경전을 새로이 번역하여 내놓았다. 혜건은 그것을 부연하고 밝히는 것에 뜻을 두어 덕 높은 가르침을 선양하였다. 혜원(慧遠)이 산자락에서 그윽한 교화의 바람을 크게 떨쳤다. 그러자 혜건은 곧 동쪽 오월(吳越) 땅으로 유행하다가 그 지역에 몸을 맡기고,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祥寺)로 들어와 자기 욕망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을 인도하고 몸으로 고행하면서 대중들을 거느렸다. 모든 새로 나오는 경전은 다 베껴 써서 강설하기를 거의 5년 가까이 하였다. 문득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얼마 후 스스로 반드시 목숨이 다할 것을 알았다. 생각을 안양정토에 두고 성심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였다.
산음의 이웃 절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다. 오래도록 쌓은 덕망과 계행이 있었다. 밤에 꿈을 꾸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서쪽 성곽의 문[西郭門]으로 들어왔다. 맑고 빛나는 묘한 형상으로 광명이 해와 달처럼 비추었다. 당기·번기와 꽃으로 만든 일산[蓋]은 모두 7보로 장엄했다. 관세음보살을 보자 곧 예배를 드리고 물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대답하셨다.
“혜건을 영접하려고 가상사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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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병은 비록 오래도록 위독하긴 했지만, 얼굴빛은 평안하여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자들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으며, 한참 후에야 멎었다. 혜건 스스로 반드시 세상 끝날 날을 헤아리고, 또한 상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듣고 본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찬탄하고 그리워하였다.
고승전 제6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 ③
1) 석혜원(釋慧遠)
혜원의 성은 가(賈)씨이며 안문(雁門)의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주옥같은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열세 살에 외삼촌인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락(許洛: 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여러 서생들을 위하여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노자』와 『장자』에도 빼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넓으며 기풍과 조감(照鑑)이 밝고 빼어났다. 비록 오래 공부한 선비로서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물한 살에 강남을 건너 범선자(范宣子)에게 나아가, 함께 세상을 피해 숨자고 약속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石虎)는 이미 죽었고 중원은 난리가 일어나, 남쪽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에 사문 도안(道安)이 태행산맥의 항산(恒山)에 절을 세웠다. 불법을 널리 찬양하여 명성이 매우 뚜렷하게 알려졌다. 혜원은 마침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한번 만나자마자 공경을 다하여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툭 트이면서 깨달아 곧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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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나 도가 등의 구류(九流)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
곧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비녀[簪: 선비의 상투에 꽂는 비녀]를 팽개치고, 머리를 깎고서 목숨을 바쳐 수업하였다. 이미 불도의 문에 들어와서는 우뚝 드러나 무리에서 벗어났다. 항상 불법의 벼리를 모두 거둬들이고자 대법(大法: 대승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외우며 간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었다.
가난한 나그네라 자본이 없어 늘 따뜻한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원과 혜지, 두 형제가 삼가하고 공손하여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불과 촛불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다. 도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담익도사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이다.”
혜원은 지혜가 전생의 인연에 바탕을 두었고, 수승한 마음을 오랜 세월[曠劫]토록 일으켰다. 그러므로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넘고, 근기의 조감(照鑑)은 멀고도 깊었다.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하였다.
“우리 동쪽 중국에 도를 유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혜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나이 스물네 살에 곧 강설의 자리에 나아갔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實相)의 뜻을 질의하여, 혜원과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손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 나고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혜원이 곧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슷하게 연계시켰다. 이에 의혹을 품던 이가 환하게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덮어두지 않았으면 하는 혜원의 바람을 특별히 들어주었다.
도안의 제자에 법우(法遇)·담휘(曇徽)가 있었다. 모두 풍채와 재주가 환하게 빛나고, 지조와 업이 맑고 민첩하였다. 둘 다 혜원을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 번면(樊沔)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위진(僞秦, 符堅이 세운 나라)의 건원(建元) 9년(373)에 진(秦)의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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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가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이에 마침내 대중을 나누어 각기 갈 곳을 따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임하여 모든 장로대덕[長德]들은 도안으로부터 가르침과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혜원은 한 마디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저에게만 홀로 훈계와 도움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저는 사람의 예가 아닌 성싶어 두렵습니다.”
도안은 말하였다.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어찌 다시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다.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마음을 쉴 만하다 싶어서,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 이 곳은 물과의 거리가 크게 멀었다. 혜원이 곧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만약 이 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곧 썩은 땅에서라도 샘물을 뽑아 주십시오.”
말이 끝나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금방 개울을 이루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가 멀리 못 옆으로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큰 비가 내렸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거처하던 곳의 호로 삼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하였다.
당시 사문 혜영(慧永)이 서림(西林)에 자리 잡았다.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이때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말하였다.
“혜원은 바야흐로 불도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의 권속들이 이미 광범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바야흐로 많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깃들어 있는 곳은 비좁아서 서로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환이는 곧 혜원을 위하여 다시 여산(廬山)의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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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하였다. 동림사(東林寺: 여산의 東南方에 있는 大刹·淨土宗의 本據地)가 그 곳이다.
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훤히 다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구렁을 끼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기단을 쌓고, 소나무로 집을 마름하고 얽었다. 맑은 개울물이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에 가득하였다.
다시 절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설치하였다. 빽빽한 숲에는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보고 밟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엄숙해졌다.
혜원이 듣기에 천축국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예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영상이다. 북천축국(北天竺國)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으며, 지나는 길은 고비 사막에서 서쪽 15,850리에 있다. 매양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여, 뜻을 세워 우러러 그 영상을 늘 한번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역의 도사가 있어 그 빛나는 모습을 말해 주었다.
혜원은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지었다. 미묘한 솜씨를 지닌 그림쟁이를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고, 바라보면 연가나 안개와도 같았다.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하나]
넓고도 크도다. 부처님이여,
진리는 현묘하나 이름이 없어라.
신이 되어 변화하시어
그림자 떨어져 몸을 떠났네.
층층바위에 빛으로 돌아와
빈 정자에 그림자로 엉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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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졌어도 어둡지 않고
어둘수록 더욱 밝아져
하늘하늘 허물 벗은
모든 신령의 조종이라
감응 같지 않아
자취 아득하게 끊어졌네.
廓矣大像 理玄無名
體神入化 落影離形
廻暉層巖 凝映虛亭
在陰不昧 處闇逾明
婉步蟬蛻 朝宗百靈
應不同方 迹絶杳冥
[둘]
아득하게 빈 우주에
권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아
맑고 빈 듯한 모습 그려내어
허공을 쓸어 모습을 전하네.
상호 갖추어지고 몸은 미묘하여
치솟는 자태 스스로 밝다.
흰 터럭은 빛을 토해
어두운 밤중에도 상쾌하다.
정성이 사무치면 곧 응하고
정성으로 두드리면 메아리 일으키네.
남기신 음성 산굴에 머물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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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나루에서 남몰래 완상하네.
만남의 기약이야 있다지만
전생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공덕이런가.
茫茫荒宇 靡勸靡獎
淡虛寫容 拂空傳像
相具體微 冲姿自朗
白毫吐曜 昏夜中爽
感徹乃應 扣誠發響
留音停岫 津悟冥賞
撫之有會 功不由曩
[셋]
발꿈치 돌려 공경함을 잊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
해와 달과 별은 빛을 감추어
온갖 모습들 한 빛깔이라네.
뜰과 집에는 어둠이 자욱하여
돌아갈 길 헤아릴 수 없어라.
텅 비움으로 이를 깨닫고
힘으로 이를 열어
지혜의 바람 비록 멀어도
티끌 번뇌 쉬게 하니
성인의 그윽한 살핌이
누가 그 극치로 부채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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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 606] 쪽
旋踵忘敬 罔慮罔識
三光掩暉 萬像一色
庭宇幽藹 歸途莫測
悟之以靖 開之以力
慧風雖遠 維塵攸息
匪聖玄覽 孰扇其極
[넷]
희유한 음성 멀리 흘러와
마침내 동방을 돌아보시니
기풍을 기뻐하고 도를 사모하여
우러러 현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붓끝의 오묘함 다하여
흰 비단에 미묘하게 운용하고
텅 비운 경지 기탁하니
하늘의 안개처럼 어리어리.
자취는 참모습을 본떴으니
진리는 그럴수록 깊어간다.
기묘한 흥취에 옷깃을 열고
상서로운 바람 길을 인도하네.
맑은 기운 마루처마를 돌고
어둠이 교차한 아직 먼 새벽
흡사 신묘한 용모를 빼닮으니
공경한 만남을 방불케 하네.
希音遠流 乃眷東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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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 606] 쪽
欣風慕道 仰規玄度
妙盡毫端 運微輕素
託綵虛凝 殆映霄霧
迹以像眞 理深其趣
奇興開衿 祥風引路
淸氣廻軒 昏交未曙
髣髴神容 依稀欽遇
[다섯]
이에 명하고 이를 그려서
무얼 영위하고 무얼 구하겠냐만
신께서 들어주시어
그대 닦음 비추어
이 티끌세상의 자욱에다
저 그윽한 흐름 비추기를 바라노라.
맑고 신령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화기를 마셔 부드러움에 이르리.
허공을 비추고 가려 감응하여
지혜 내리시어 마침내 두루하리.
깊은 그리움 남몰래 전하며
신의 노님 그윽이 상상하여
목숨 다하도록 뵐 수만 있다면
온갖 근심 길이 떠날 터인데.
銘之圖之 曷營曷求
神之聽之 鑒爾所修
庶玆塵軌 映彼玄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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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 606] 쪽
漱淸靈沼 飮和至柔
照虛應簡 智落乃周
深懷冥託 宵想神遊
畢命一對 長謝百憂
또한 예전에 심양의 도간(陶侃: 東晋의 名將)이 광주(廣州)에 주둔하러 지나갈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불상에서 일어나는 광명이었다.
이에 그는 이 불상을 영접해 돌아와서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인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하였다.
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어 노래가 불려졌다.
도간은 오직 검의 영웅
불상은 신령함을 드러내네.
구름이 진흙땅 위로 날아가니
아득함이 어찌 그리도 멀고 멀까?
정성으로는 이룰 수 있어도
힘으로 부르기는 어렵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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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 606] 쪽
陶惟劍雄 像以神標)
雲翔泥宿 邈何遙遙
可以誠致 難以力招
그 후 혜원이 절을 창건하여 이미 이루어지자, 마음으로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하였다.
곧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윽고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티끌세상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손님들이 모두 기약 없이 찾아왔다. 멀리서도 도풍을 바라보고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남양(南陽)의 종병(宗炳)·장래민(張萊民)·장계석(張季碩) 등도 모두 세속과 영화를 버리고, 혜원에 귀의하여 노닐었다.
이에 혜원은 곧 정사의 아미타불앞에 재(齋)를 건립하였다. 서원을 세워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었다. 그리고는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글을 짓게 하였다.
“유세(維歲) 섭제격(攝提格: 古甲子의 寅年) 칠월(七月) 무진삭(戊辰朔: 초하루날의 日辰)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곧은 감흥이 그윽하고 멀게, 묵은 심회가 특별히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목숨을 이으려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한, 곧은 신심의 선비 123명과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다 함께 향화를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오직 이 한 모임의 대중들이 무릇 시주하는 이치가 밝다면, 삼세(三世)의 이어짐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운수와 부합한다면, 선악의 보응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공경히 손을 잡고 숨겨져 가라앉은 이치를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보(三報)의 서로 무너짐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몸을 뽑아내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이곳의 여러 뜻을 같이하는 현인들은 그런 까닭에 저녁에는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히 하여, 우러러 제도할 것을 생각하나이다.
무릇 신(神)이라는 것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으면 어두운 길도 지척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를 찾더라도 주체가 없다면, 멀고 아득한 황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두드리고 믿음을 열어서, 밝은 마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기연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에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 배나 더 합니다.
이에 신령한 그림은 빛을 드러내고, 그림자는 신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이 운용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의 기원은 같았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가는 곳은 현격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돌아보아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니, 이 때문에 강개함에 젖습니다.
운명을 기다리며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같이 한 마음을 베풉니다. 그윽함의 극치에 회포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이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옵니다.
놀랍게도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와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거룩하여, 그윽한 골짜기에서 함께 보전하자는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이라면, 뒤에 오는 이들과 더불어 힘써 채찍질하여 나아가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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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미묘하게 부처님의 자태를 관하여,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다면 깨달음으로 알음알이가 새로워지고, 교화로 말미암아 몸이 바뀔 것입니다. 연꽃을 흐르는 물 속에 깔개로 삼거나, 옥구슬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미칠 것입니다.
몸은 편안함을 잊되 더욱 편안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되 저절로 기쁠 것입니다. 3도(途)에 다다르더라도 멀리 그곳을 떠나고, 하늘 궁전에서 오만하게 속세와는 길이 이별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 태식(太息: 궁극의 休息)을 지향하기를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혜원은 고상한 풍모에다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바라보는 이들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려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 講說에 쓰는 僧具)를 가지고, 그것을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혜의(慧義)란 법사는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서 두려워하는 일이 적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인 혜보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범용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추대하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산에 이르러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때를 만나, 늘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렸다.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산에서 나와 혜보에게 말하였다.
“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그가 남들을 굴복하고 대중을 덮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은중감(殷仲堪)이 형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주역』의 바탕을 논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찬탄하였다.
“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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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黙)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내었다. 왕밀은 편지를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혜원이 회답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방 한자나 되는 구슬을 아끼지 않고, 극히 짧은 순간 순간을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품고 계신 바를 살피건대, 나이 들도록 살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군요. 시주께서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거나, 부처의 이법을 타고 마음을 부려서, 이와 같이 하기를 미루어 간다면, 다시 어찌 나이가 더하기를 부러워하겠소이까? 애오라지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노라면, 어느새 깨달음을 터득할 것입니다. 부쳐 오신 소식에 답장 드릴 뿐입니다.”
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노순은 나라의 외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후 송의 무제(宋武帝, 420~422)가 노수를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측근들이 말하였다.
“혜원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송의 무제가 말하였다.
“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이다. 반드시 나와 남이란 차별은 없는 이이다.”
곧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그의 밝은 견해에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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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전이 강동 지방에 전해질 때에는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다.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 율장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불교의 도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인 법정(法淨)·법령(法領) 등을 시켜 멀리 여러 경전을 찾았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예전에 도안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말에 빼어나지 못하여 자못 의심나고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하였는데, 진(晋)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潯陽)을 찾아왔다. 혜원은 그를 초청하여 다시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였다. 이에 두 가지 배움이 곧 일어났다. 아울러 서
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어 학자들에게 남겼다.
부지런히 도를 위하고 불법을 펴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보내 인사[通好]하였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자세히 덕스런 분의 물음에 받들어 봅니다. 어진 분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계선을 넘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통역[音譯]을 주고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강호가 어렵고 어두워 형세가 어그러진 것을 한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요즘 크게 막힌 것을 회통하려는 모임을 이르시려, 보배를 품고 이곳에 오시어 머물고 계신 것을 압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간다 하니, 문도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맛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가 찾아갈 길이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저는 늘 불법이 베풀어지고 유포되어, 3방(方)이 함께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종취는 옛날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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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지로 고르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직 깨달음의 나루터를 미묘한 문에서 두드려,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함과 사무치게 교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기약을 남기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도 그 생각을 품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무릇 전단(旃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몸에 배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남을 토해내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여집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라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응험은 정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불법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에 법륜이 8정도(正道)에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만원(滿願: 부루나존자)이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전시대의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거룩하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해서 마름한 옷을 보내니,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이를 입기 원합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은 이미 법물(法物)입니다. 이것으로 애오라지 나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구마라집은 공경하게 절하옵니다. 아직 만나서 말한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글과 문장도 지나치게 막혀서 인도하는 마음을 통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무너져 끊겼습니다. 역마(驛馬)로 전해온 정황으로, 거칠게나마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빛나도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훌륭히 그 일을 넓히셨습니다.
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戒·博聞·辯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이라야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으로 막힙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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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분이시여, 그대는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탁하여 우호를 교통하고, 통역을 통해[因譯]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거칠게나마 보내오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짐작하여 마름하신 옷을, 조금 손보아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澡灌: 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만약 치달려 흩어지지 않음을 얻는다면
깊이 진실한 모습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경공의 상 가운데서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만약 선의 지혜 즐긴다면
이는 법성이라서 비출 곳조차 없으려니
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라서
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닐러라.
어진 분께서 터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란다오.
旣已捨染樂 心得善攝不
若得不馳散 深入實相不
畢竟空相中 其心無所樂
若悅禪智慧 是法性無照
虛誑等無實 亦非停心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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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者所得法 幸願示其要
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날이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조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하였다.
근본과 말단은 필경 무엇으로부터
일어남과 스러짐이 있음과 없음의 즈음이라
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를 건넌다면
이것은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미혹된 생각이 거듭 서로를 탄다면
부딪치는 이치마다 절로 막힘이 생겨나리.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길을 여는 것은 한 세간만으로는 안 되어라.
때마다 깨달은 종사 없다면
누가 장차 그윽한 만남을 쥘 수 있으리.
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남은 생을 서로 더불길 기약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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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端竟何從 起滅有無際
一微涉動境 成此頹山勢
惑想更相乘 觸理自生滯
因緣雖無主 開途非一世
時無悟宗匠 誰將握玄契
來問尙悠悠 相與期暮歲
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3분의 2를 마쳤다. 바로 그 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와, 다시 이 부(部)를 훌륭히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으로 하여금 요청하여, 관중(關中)에서 다시 남은 부분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의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빼어나게 번역하여, 남쪽
의 이 땅까지 오게 된 것은, 혜원의 힘 덕분이다.
외국의 승려들이 모두 중국 땅에 대승 도사가 있다 칭송하였다. 매양 향 피워 예배할 때마다, 곧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의 묏부리에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령한 이법의 자취는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중국 땅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의 학설이 없었다. 다만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부처란 지극함이다. 지극하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법에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지극함은 변함 없음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구마라집이 논을 보고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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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나라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을 지니지도 못했거늘
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 법과 합치하니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邊國人未有經 便闇與理合
豈不妙哉
후진(後秦)의 주인인 요흥(姚興)은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치 있는 생각을 찬탄하였다.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믿음의 선물이 연이어졌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을 섞어 짠 변상(變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 요숭(姚嵩)을 시켜 구슬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석론(釋論)』을 처음 번역하자, 요흥은 이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새로운 번역을 마쳤다. 이는 이미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며, 또한 대승 경전의 지귀(旨歸)이다. 그러니 한편의 서문을 지어서 지은이의 뜻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여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법사가 이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
이에 혜원은 회답편지를 썼다.
“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지은이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품으려면 작은 솜옷으로는 싸안기조차 할 수 없고, 깊은 샘물을 길으려면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은 명령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어,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려 보내 알리시는 인연의 중함으로, 대략 품은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연구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면, 마땅히 다시 여러 눈 밝은 대덕들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명성이 높고도 멀리 알려진 것이 본래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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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은 항상 『대지도론』이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 요점만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다.
차례대로 드러낸 이치는 깊고 청아하여, 무릇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들이는 일을 절반이 넘게 쉴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였다. 군사가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환현이 스스로 산에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공은 그를 공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현이 대답하였다.
“어찌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은중감은 근본부터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공경을 표시하였다. 환현이 물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는가?”
혜원이 대답하였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환현이 훌륭하게 여겨, 품었던 어려운 질문을 감히 다시 묻지 못하였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물었다.
“어떡하기를 바라십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시주께서도 안온하시고 그[은중감]도 다른 탈이 없는 것입니다.”
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
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써 모시려고 애썼다.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어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은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붙이들에게 명령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펴서 진술하고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계율의 행실[禁行: 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의 베풂에 기여할 수 있는 사문들이 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자들은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만은 도덕이 있는 사문이 머무르는 곳이다. 수사 간택의 예에 두지 말라.”
혜원은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럽게 뒤섞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하나 찾아질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항상 뜻하지 않은 운수가 나타나서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면, 맑은 물과 탁한 물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 명령이 행해지면 반드시 한결같은 이치를 여기서 얻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거짓으로 꾸민 사람에게서는 거짓으로 통하던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져, 도인과 세속이 번갈아 일어나서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널리 승단의 조례와 규제를 세우자, 환현은 그의 말에 따랐다.
예전에 진(晋)나라 성제(成帝, 326~334)가 어렸을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는 ‘사문들이 마땅히 왕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褚昱)·제갈회(諸葛恢) 등이 아뢰어, ‘사문은 왕자에 경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논의도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하충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받들어 반박하였다. 같거나 다른 의견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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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姑熟)에 있을 때 공경을 다하고자, 곧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문이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치에 있어서도 밝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 대사란 그 바탕을 진실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간 여덟 사문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부친다. 그대는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 입장에 대해 진술하도록 하라.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낱낱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반드시 그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혜원이 답장을 썼다.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나라의 큰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진실로 이미 넓어질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티끌세상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왕자에게 공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현은 비록 구차하게 앞서의 자기 뜻을 고집하고,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지만, 혜원의 말뜻을 직접 보고는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곧 교서를 내렸다.
“불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마음을 미루어 받들었으므로 공경심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이미 내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하는 빛을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자에게 예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
혜원은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었다. 모두 다섯 편이다.
첫 번째 편은 재가(在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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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은 임금의 교화에 순종하는 백성이다. 그들의 심정은 아직 속인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들의 자취는 사방테두리 안의 사람들과 같다. 그런 까닭에 천륜에 대한 애정[天屬之愛]과 주상을 받드는 예절[奉主之禮]이 있어야 한다. 이 예법과 공경에는 근본이 있기에, 마침내 이것에 인연하여 가르침을 이룬다.’
두 번째 편은 출가(出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출가라 하는 것은 세속을 등짐으로써 자기 뜻을 구하고, 속인에서 변하여 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풍속이 변하면 복장도 세상의 전례(典禮)와 같은 예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면 마땅히 그 자취를 고상하게 하여야 한다. 대덕은 그런 까닭에 번뇌 빠진 속인들을 번뇌의 흐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으며, 거듭되는 겁(劫)에서 어두운 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다. 멀리는 삼승의 나루와 통하고 가깝게는 인천세계의 길을 열어준다.
그의 도가 육친(六親)에 젖어들고, 그 은택이 천하에 흐른다. 비록 왕후(王侯)의 자리에 처하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이미 천자의 도리와 일치하여 생민을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륜(天倫)의 무거운 의리와 어긋나지만, 그 효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는 임금을 받드는 공손함이 없지만, 그 공경심을 잃은 것이 아니다.’
세 번째 편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근본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이는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 속세의 경계를 초월한 이는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삶을 멸할 수 있다.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면 그 정신이 명합할 수 있다.
정신과 명합하면 경계가 끊어지는 까닭에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문은 비록 만승(萬乘) 천자에게 절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왕후(王侯)의 벼슬을 하지 않지만 그 혜택에 젖는다.’
네 번째 편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처님과 주공(周公)·공자는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처(出處: 세상에 나가는 것이 出이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處이다.)는 모두 다르나, 마지막 기필코 하려 한 곳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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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비록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불겸응(不兼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겸하여 받아드릴 수 없음을 말한다.’
다섯 번째 편은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이다. 그 내용은 ‘인식작용과 정신작용이 치달리면, 이를 따라 우리 몸도 동이니 서로 치달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논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때부터 사문들은 세상 밖에서의 자취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환현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진(晋)의 안제(安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국대부(輔國大夫) 하무기(何無忌)는 이때 혜원에게 권유하여 황제를 뵈옵고, 문후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혜원은 편지를 썼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陽月和暖], 수라가 입맛에 잘 맞기를 비옵니다. 빈도는 전에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자 쇠약해져 병이 심해졌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자비하신 조서(詔書)를 받아보았습니다. 곡진하게 영광스러운 위문을 드리우셔서, 온갖 두려움의 깊음이 실로 가슴에 백 배나 더합니다. 요행히 경사스러운 모임을 만났으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과 감개를 자못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제는 조서로 회답하였다.
“봄기운을 느끼면서도[陽中感懷] 그대가 앓는 병이 아직 좋아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마음에 어리어서 잊을 수가 없다. 지난달에 강릉을 떠났지만, 도중에 온갖 좋지 않은 일이 많아 더디기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遲兼常]. 본래는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그대가 이미 산림에서 원기를 보양하는 터이고, 게다가 앓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득히 다시는 인연이 없을 듯하여 한탄함만 더할 뿐이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은 재주를 믿고 세상에서 멋대로 굴어서,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번 만나자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혜원은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뛰어나고, 밖으로는 뭇 서적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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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그의 문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의지하고 모방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혜원은 『상복경(喪服經)』을 강의하였다. 뇌차종(雷次宗)·종병(宗炳) 등이 모두 책을 잡고 그의 취지를 이었다. 그 후 뇌차종은 따로 『상복경의소(喪服經義疏)』를 지어 책머리에서 뇌씨(雷氏)를 일컬었다. 이에 종병이 이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다.
“예전에 그대와 함께 스님 스승[釋和尙: 혜원을 가리킴] 사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여 이 내용의 강의를 받았었지. 그렇거늘 어찌하여 지금 곧 책머리에다 뇌씨(雷氏)를 일컫는다 말인가?”
그의 교화가 도인과 속인에 아울러 행해진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혜원이 여산의 언덕에 자리잡고부터, 3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을 세속으로 들여 밀지 않았다. 매양 손님을 보내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호계(虎溪)로 한계를 삼았다.
진(晋) 의희(義熙) 12년(416) 8월초에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6일째가 되자 괴로움이 더욱 심했다. 이에 대덕과 나이 많은 노승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된장을 넣은 술을 마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쌀즙이라도 마시기를 청하였으나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꿀물을 타서 장(漿)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곧 율사(律師)에게 명해 책을 펼쳐 글에서 마셔도 되는지를 찾게 하였다. 책의 절반도 넘기지 않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83세이다.
문도들이 통곡하니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바퀴가 이어져서, 어깨와 어깨가 서로를 뒤따랐다.
혜원은 범부들의 정을 자르기 어렵다고 여겨 7일장으로 치르게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소나무 밑에 드러내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제자들이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심양태수(潯陽太守) 완보(阮保)는 여산의 서쪽 마루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묘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사령운(謝靈運)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어, 남긴 덕을 새겼다. 남양(南陽)의 종병(宗炳)도 절 산문에 비를 세웠다.
본래 혜원은 문장을 잘 지어 글 분위기가 맑고 우아하였다. 법석에서의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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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잘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채가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지은 논·서(序)·명(銘)·찬(贊)·시(詩)·편지 등을 모아서, 열 권 오십여 편의 문집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2) 석혜지(釋慧持)
혜지는 혜원의 아우다. 성품이 텅 비어 조용하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열네 살 때 책 읽기를 배웠다. 하루에 얻은 것이 다른 사람이 열흘에 얻은 것과 맞먹었다. 문장과 역사에 빼어나고, 재치 있게 글을 짓는 솜씨가 있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형과 함께 도안 법사를 섬겼다.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워 삼장의 분석을 마음대로 구사하였다.
도안이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혜원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할 때 혜지도 함께 갔다. 처음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에서 쉬었다. 후에 여산으로 가서 모두 혜원을 따라 함께 머물렀다.
혜지는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채가 빼어나고 시원하였다. 항상 가죽신을 신고 정강이 절반쯤 오는 옷을 입었다. 여산의 문도 권속들은 영명하고 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드나드는 3천 명이 혜지를 우두머리로 쳤다.
혜지에게는 고모가 있었다. 비구니가 되어 도의(道儀)라 이름하였다. 강하(江夏)에 머물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로 내려가 교화를 구경하고자 하였다.
이에 혜지는 곧 고모를 전송하여, 서울에 이르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진(晋)의 위군(衛軍)인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과 깊이 서로의 기량을 존중하였다.
당시 서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훌륭히 네 부의 『아함경』을 외웠다. 사마순이 요청해서 『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했다. 혜지는 곧 그 글과 말을 교열하고 다듬어서, 소상하게 경문을 정하였다.
그 후 여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예장(豫章) 태수 범영(范寧)이 초청해서 『법화경』과 『아비담(阿毘曇)』을 강론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구름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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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여들고, 천리 밖 멀리에서도 찾아와 모였다.
낭야왕 사마순이 범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과 혜지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범영이 회답하였다.
“참으로 현명한 형제입니다.”
사마순은 거듭 편지를 보냈다.
“다만 형과 같은 이만 하더라도 참으로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아우까지 현명할 수 있는가?”
연주자사(兗州刺史) 낭야왕 사마공(司馬恭)은 사문 승검(僧檢)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혜지 형제의 지극한 덕은 어떠한가?”
승검이 회답하였다.
“혜원·혜지 형제는 여유작작하여 참으로 도풍이 있습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 멀리서 서로 흠모하고 존경하여, 편지를 보내 좋은 관계를 맺어 훌륭한 벗이 되었다.
그 후 혜지는 성도(成都)가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서 교화할 뜻을 세웠다. 아울러 아미산(峨嵋山)을 구경하려고, 지팡이를 떨치며 민수(岷岫: 蜀山)로 가려 하였다. 이에 진(晋) 융안(隆安) 3년(399)에 혜원의 곁을 떠나 촉(蜀)으로 들어갔다.
혜원이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니 혜원이 탄식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모이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너는 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구나. 어찌된 일인가?”
혜지도 역시 슬퍼하였다.
“만약 정에 막혀 모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본래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욕망을 잘라버리고 도를 구하고자 하니, 바로 서방으로 가는 것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에 형제는 눈물을 거두고 말없이 안타까워하며 이별하였다.
길을 떠나 형주(荊州)에 도달하였다. 형주자사 은중감(殷仲堪)이 기뻐하고 존중하며 예우하였다. 당시 환현(桓玄)도 그곳에 있었다. 환현은 비록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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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관련된 공부는 소홀하였지만, 그런 한편으로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었다. 혜지를 만나보니, 거의 인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홀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금에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더욱 감탄하여, 크게 기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혜지는 이미 그 사람됨을 의심하였다. 그러기에 마침내 그의 요청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중감과 환현 두 사람은 간절히 그를 만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혜지는 더욱 그곳에 머물 뜻이 없었다. 형주를 떠날 즈음하여 환현에게 글을 보내었다.
“본래 병든 몸을 아미산 묏부리에 깃들여, 고비 사막 밖의 교화를 구경하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떠날 때의 생각을 버릴 수 없어, 곧 행장을 꾸려 그쪽으로 머리를 돌립니다.”
환현은 이 편지를 받고 슬퍼하며,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혜지는 마침내 촉(蜀)에 이르러 용연정사(龍淵精舍)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다. 정낙(井絡: 四川省)의 사방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자사(刺史)·모거(毛璩)가 평소 덕을 숭상하여 공경했다.
∙혜암(慧巖)·승공(僧恭)
당시에 사문 혜암과 승공이 먼저 촉나라에 와서 사람들과 서로 정답게 지내고 있었다. 혜지가 그곳에 와서 머물자, 둘 다 멀리서 그의 풍모를 듣고는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러니 모두들 혜지의 승당에 오른 이들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불렀다.
승공은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었다. 촉군(蜀郡: 成都)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혜암은 내외의 경전에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평소부터 모거가 존중하였다.
그 후 촉나라 사람 초종(譙縱)이 전쟁의 기회를 틈타 모거를 공격하여 죽였다. 촉나라 땅을 나누어 갖고서, 스스로 성도왕(成都王)이라 이름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법회를 마련하고, 혜암을 핍박하여 요청하였다. 혜암은 마지못해 그곳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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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전부터의 시주인 모거가 하루아침에 상하고 파멸되었기에, 이 일을 눈으로 보자 더욱 슬퍼하여 가슴아파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마침내 초종이 그를 싫어하여 살해하였다. 그러자 온 고을이 어지러워져서, 도인과 속인들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혜지는 난을 피하여, 비현(陴縣) 가운데 있는 어느 절에 머물렀다.
초종의 조카 도복(道福)은 흉악함과 사나움이 매우 심하였다. 군병들을 거느리고 비현으로 가서 토벌하여 살육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다가 절에 들어왔다. 사람과 말들이 피로 목욕한 것 같았다. 대중승려들이 크게 무서워하여 한꺼번에 놀라 달아났다.
혜지는 승방 앞에서 세수를 하면서도, 얼굴빛에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도복이 곧바로 혜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혜지는 손가락을 튀기며 물을 걸러내면서, 담담히 태연자약하였다. 도복이 부끄러워 후회하면서 땀을 흘리며 절문을 나왔다. 측근에게 말하였다.
“대인(大人)이라. 대중과는 다르더라.”
그 후 촉나라 경내가 맑고 편안해졌다. 다시 용연사로 돌아와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재(齋)를 지내며 예참(禮懺)하였다.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그는 진(晋)·의희(義熙) 8년(412)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임종에 명을 남겨, 계율 있는 거동을 힘쓰도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경에 이르기를 ‘계율은 평평한 땅과 같아서, 모든 착한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일상생활에 마땅히 삼가야 하느니라.”
∙도홍(道泓)·담란(曇蘭)
우리 동방 중국에서 발간된 경전들은 제자인 도홍에게 부촉하고, 중국 서쪽나라에 있던 경전들은 제자인 담란에게 부촉하였다.
도홍은 일하는 행실이 맑고 민첩하였다. 담란은 정신의 깨달음이 천성적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스승의 발자취를 이어받아, 그것을 법도로 삼았다.
3) 석혜영(釋慧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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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의 성은 반(潘)씨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여 사문 축담현(竺曇現)을 섬겼다. 후에 다시 도안(道安) 법사를 엎드려 받들었다.
평소 혜원과 함께 나부산(羅浮山) 굴에 집을 지어 살기를 기약하였다. 혜원이 도안의 만류를 받자, 혜영은 먼저 오령(五嶺)을 넘으려 하였다. 길을 떠나 심양(潯陽)을 지날 때에, 고을사람 도범(陶範)이 간절하게 그곳에 머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잠시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렀다. 그곳의 문도들이 조금씩 많아졌다. 게다가 혜원이 같은 산에 절을 짓자,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혜영은 곧고 검소하며 자연스러워, 마음이 맑아 욕망을 잘 이겨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다. 경전을 매우 좋아하여 경전에 푹 빠지고, 강설을 잘하였다. 푸성귀와 거친 베옷으로 거의 일생을 마쳤다.
또 따로 한간의 초가집을 산마루 위에 세웠다. 선정(禪定)에 들고자 생각할 때마다, 문득 그곳에 가서 지냈다. 당시 그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특수한 향내를 맡았다.
혜영의 집안에는 항상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혹 두려워하면, 곧 몰아내어 산에 올라가게 하였다. 사람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되돌아와서, 길들인 것 같이 조아렸다.
어느 날 혜영이 고을로 나갔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 산으로 돌아와 오교(烏橋)에 이르렀다. 오교의 영주(營主: 軍營의 首領)가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길을 막아서, 혜영의 갈 길을 가로막고 보내주지 않았다. 날이 이미 너무 늦어져서 혜영이 지팡이로 멀리 말을 가리켰다. 말이 놀라 달아나서 영주는 땅에 넘어졌다. 혜영은 그를 두 손으로 일으켜서 위로하고 영으로 돌려보내니, 이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절을 찾아가 뉘우치고 사과하였
다. 혜영이 말하였다.
“빈도가 본래 뜻한 것이 아니었소. 그러니 아마도 경계하라고 신께서 하셨을 것이오.”
이 일을 도인과 속인들이 들어 알고는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그 후 진남장군(鎭南將軍) 하무기(何無忌)가 심양에 주둔하였다. 호계(虎溪)에 모여서 혜영과 혜원을 초청하였다. 당시 혜원은 이미 오랫동안 명망을 떨쳤다. 또한 평소부터 재주와 능력도 풍족하였다. 그리하여 따르는 사람 백여 명이 모두 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모에 질서가 있었다.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논리를 펼치면, 거동들이 볼 만하였다.
혜영은 조용히 홀로 가서 갑작스레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발우(鉢盂)를 지녔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은 자연스러워, 맑은 기운을 흩뿌리며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대중이 모두 그의 곧고 검소함을 존중하여, 도리어 다시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혜원은 어려서부터 그를 선배로 추앙하였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혜영의 뛰어난 행실에 고개 숙이고, 낮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그의 은근한 복을 빌었다. 혜영은 정밀하고 엄격하게 고행하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10년(414)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위독했다. 오로지 계율로 몸을 삼가하여, 지조를 지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비록 병상에 누워 고통을 품었으나, 얼굴빛은 느긋하고 기뻐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옷을 여미고 합장하며, 신발을 찾아 일어나려 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서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부처님이 오셨다.”
말을 마치자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산에 있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다. 7일이 되어서야 향기가 멎었다.
∙승융(僧融)
당시 여산의 승융 역시 굳은 절개로 신령함과 통하여 귀신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한다.
4) 석승제(釋僧濟)
승제는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여산에 들어와서 혜원에게 수학하였다.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과 세속의 경전·수학·서법에 모두 마음으로 연마하고 노닐며, 그 깊은 요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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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었다. 30세가 넘자, 비로소 고을에 나가 개강하여 으뜸가는 강사의 자리를 맡았다.
혜원은 늘 그를 보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불법을 크게 퍼뜨릴 사람은 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그 후 잠시 여산에 머물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함을 느꼈다. 이에 서방 정토에 정성을 다하여 아미타불을 상상하였다. 이때 혜원은 하나의 촛불을 보내서 말하였다.
“너는 안양정토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투도록 하여라.”
승제는 촛불을 잡고 책상에 기대어, 생각을 멈추고 어지럽지 않게 하였다. 다시 대중 승려들이 밤에 모여, 그를 위하여 『무량수경』을 돌려 읽게 청하였다. 5경(更)에 이르자 승제는 촛불을 동학에게 주어, 승려들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고는 잠시 누웠다.
꿈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을 타고 갔다. 무량수불을 직접 만나 손바닥 위에 영접하여 얹어놓고, 두루 시방세계에 이르렀다가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깨어났다. 이 사실을 모두 자세히 병을 간호하는 사람에게 설명하고는, 한편 슬퍼하고 한편으로 위안 받았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몸[四大]에는 아무런 병의 고통이 없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갑자기 신발을 찾아 일어났다. 눈으로 허공을 거슬러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잠시 후 다시 누웠다. 얼굴은 더욱 즐거운 빛이었다. 이어 옆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이에 몸을 돌려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굽히고는 말과 기력이 다하였다. 그 때 나이는 45세이다.
5) 석법안(釋法安)
법안은 일명 자흠(慈欽)이라 한다.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혜원의 제자로서 계율을 훌륭히 수행하고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아울러 선업(禪業)을 닦았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개도(開導)하여, 사악한 것을 뽑아내어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7) 신양현(新陽縣)에 호랑이로 인한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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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었다. 현에 큰 사당 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신묘(神廟)가 있었다. 그 좌우에 사는 백성이 백 명을 헤아렸다. 호랑이를 만나 죽는 사람이 하루저녁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법안은 일찍이 그 현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 묵었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두려워 일찍 문을 닫아버렸다. 법안은 곧바로 나무 아래로 가서 밤새도록 좌선을 하였다.
새벽 무렵 호랑이가 사람을 업고 와서, 나무의 북쪽에 집어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법안을 보더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펄쩍 뛰어 법안 앞에 엎드렸다. 법안은 호랑이를 위하여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호랑이는 땅에 꿇어앉아 움직이지 않다가 얼마 후에 떠났다.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호랑이를 뒤쫓아 나무 밑에 이르렀다. 법안을 보고 크게 놀라고는 신인(神人)이라 생각하였다.
드디어 이 말이 온 현에 전해지니, 선비와 서민들이 종사로 받들었다. 호랑이의 재앙은 이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묘를 고쳐 절을 세워 법안을 머물게 하였다.
좌우의 발과 정원을 모두 희사하여 대중의 복전으로 삼았다.
그 후 탱화와 불상을 만들고자 하여 구리의 녹[銅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살림이 힘들어서 얻을 수가 없었다.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탁상 앞을 빙 돌면서 말하였다.
“이 밑에 동종(銅鍾)이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곧 그곳을 파보았다. 과연 두 구의 동종을 얻어, 그 동종의 녹으로 불상을 이루었다. 그 후 구리는 혜원이 불상을 주조할 때에 도움을 주고, 나머지 하나의 종은 무창태수(武昌太守) 웅무환(熊無患)이 빌려 보다가,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두었다. 그 후 법안이 세상을 마친 곳은 모른다.
6) 석담옹(釋曇邕)
담옹의 성은 양(楊)씨이며 관중(關中) 사람이다. 젊어서 위진(僞秦)에서 벼슬하여 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다. 키가 8척이고 씩씩함과 강함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었다. 태원(太元) 8년(383) 부견(符堅)을 따라 남방을 정벌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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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진(晋)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서, 도안을 좇아 출가하였다.
도안이 저 세상으로 가자, 마침내 남쪽 여산에 몸을 던져, 혜원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내외의 경서를 대부분 두루 섭렵하였다. 뜻이 법을 펴기를 숭상하여,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 후 혜원을 위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혜원의 편지를 드렸다. 심부름을 한 것이 거의 십여 년이다. 풍류를 고양시켜 격발하여 산봉우리를 흔들 만큼[搖動峰岫] 강하고 굳세며 과감하였다. 구마라집과 단독으로 마주하여서도 스승인 혜원을 욕보이지 않았다[專對不辱].
서울 도량사(道場寺)의 승감(僧鑒)이 그의 덕과 이해력에 고개 숙여, 양주(楊州)로 돌아오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혜원의 나이보다 많다 하여 마침내 과감하게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혜원의 문하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 편하게 자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혹 훗날 추대하여 사양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작은 인연을 빙자해서 담옹을 문하에서 쫓아냈다. 담옹은 명을 받들고 산에서 나왔으나, 얼굴에서 원망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곧 산의 서남쪽에 초가집을 세워 제자인 담과(曇果)와 맑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였다.
어느 날 담과의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5계(戒)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담과가 말하였다.
“스승께서 이곳에 계시니 가서 물어보고 계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오.”
얼마 뒤 담옹은 단의(單衣)를 입고 모자를 쓴 어떤 사람을 보았다. 풍채와 모습이 단아하였다. 종자(從者)는 스무 사람 가량 되었다. 그가 5계 받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담과가 앞서 꿈꾼 일로 해서, 이 사람이 산신령임을 알고는 곧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산신은 외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물로 주었다. 예배를 드리고는 인사하고 헤어지자마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혜원이 죽던 날, 달려가 발을 동동거리며 통곡하여 그 아픔이 부자 사이보다 더 깊었다.
그 후 형주(荊州)로 가서 죽림사(竹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도조(釋道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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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는 오(吳)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사(臺寺)의 지법재(支法濟)의 제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어 정성껏 부지런히 배움에 힘썼다. 후에 동지인 승천(僧遷)·도류(道流) 등과 함께 여산에 들어갔다. 7년 만에 모두 산중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각기 익힌 것에 따라 날로 새로움이 있었다. 혜원은 늘 말하였다.
“도조 등은 쉽게 깨닫는다. 모두가 이들 같다면, 다시는 윤회하여 뒷날 다시 태어날 것을 근심하지 않으리라.”
승천과 도류는 모두 나이 스물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혜원이 한탄하였다.
“이들은 모두 재주와 의리가 빼어나게 무성하여, 맑은 깨달음이 날로 새로웠다. 이러한 재능을 품고서도 길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하나같이 어쩌면 이다지도 가슴 아프단 말인가?”
도류는 모든 경전의 목록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어, 도조가 완성하였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그 후 도조는 서울의 와관사(瓦官寺)로 돌아가 강설에 종사하였다. 환현이 늘 그의 강설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도조는 늦게 발심했지만 혜원보다 더 낫다. 다만 유교(儒敎)에 대한 해박함이 혜원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그 후 환현(桓玄)이 정사를 돕는 자리에 올라, 사문(沙門)들로 하여금 왕자를 공경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조는 곧 그곳을 떠나 오나라의 대사(臺寺)로 돌아갔다.
얼마 뒤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고을에 명령하여 도조를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도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인간세계의 일에서 자취를 끊고 하루 종일 도를 강론하였다. 진(晋)의 원희(元熙) 1년(41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혜요(慧要)
혜원의 제자인 혜요도 경전과 율법을 터득하였다. 교묘한 사고력은 더욱 뛰어났다. 산중에는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刻漏]가 없었다. 이에 개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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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잎의 연꽃을 세워, 흐르는 물결의 바뀜에 따라 열두 시각을 정하도록 하였다. 해시계[晷景]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나무로 만든 연[木鳶]을 만들었다. 수백 걸음의 거리를 날아갔다.
∙담순(曇順)·담선(曇詵)
혜원에게는 또 담순·담선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모두 교리 이해[義學]로 명성을 날렸다.
담순은 본래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구마라집에게서 수업하였다. 후에 돌아와 혜원에게 사사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덕스런 행실이 있었다. 남만교위(南蠻校尉)·유준(劉遵)이 강릉에 죽림사(竹林寺)를 세우려고 일을 시작해 주기를 청하였다. 혜원은 담순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담선은 또한 맑고 고상하며 모범적인 풍모가 있었다. 『유마경』에 주석을 달았다. 또한 『궁통론(窮通論)』 등을 지었다.
∙법유(法幽)·도항(道恒)·도수(道授)
이밖에 법유·도항·도수 등 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혹은 논리 이해에 깊고 밝으며, 혹은 중생의 일을 바로잡고 구제한 사람도 있고, 혹은 계행이 청정하여 드높은 사람도 있고, 혹은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간 사람도 있다. 모두가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쳐서, 지금까지 그 일이 전한다.
8) 석승략(釋僧䂮)
승략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땅 이양(泥陽) 사람이다. 진(晋)나라 때 하간(河間)의 낭중령(郞中令)을 지낸 부하(傅遐)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홍각 법사(弘覺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홍각 법사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사문이다. 승략은 처음 그를 따라 수업하다가, 후에 청사(靑司)·번(樊)·면(沔) 지방으로 노닐었다. 육경과 삼장에 통달하였다. 율행을 맑게 삼가하여 불법을 바로잡고 떨칠 수 있었다.
요장(姚萇)·요흥(姚興)은 일찍부터 그의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여 평소 알고 존중하였다.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여 관중을 소유하자, 깊이 서로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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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여 공경하였다. 요흥이 삼보를 받들어 드높게 믿자, 불법의 교화가 널리 성대하였다.
그 후 동수(童壽, 鳩摩羅什)가 관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먼 곳의 승려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많아지자 허물과 과실이 간혹 있었다. 요흥이 말하였다.
“범부가 승가를 배우더라도 괴로움을 참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느냐? 허물이 있어도 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마침내 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마땅히 승려의 우두머리[僧主]를 세워, 불법의 크나큰 바람을 맑게 하리라.”
이어 조서를 내렸다.
“불법이 동방으로 옮겨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해져 비구와 비구니가 너무 많아졌다. 마땅히 여기에는 기강이 필요하다. 원대한 규칙을 내려 무너진 실마리를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승략 법사는 젊을 때부터 배움이 넉넉하였다. 늙어서는 덕이 꽃다우니 나라 안의 승주(僧主)로 삼을 만하다. 승천(僧遷) 법사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아울러 닦아서 곧 대중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니 법흠(法欽)과 혜빈(慧斌)과 함께 승록(僧錄)을 관장하라.”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공급하였다. 승략은 시중(侍中)의 자리에 준하여 조서를 전해 받아, 양이 모는 수레에다 각각 두 사람을 거느렸다. 승천 등에게도 모두 후하게 공급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하면서 순수하고 검소하여, 넉넉히 당시의 여망에 들어맞았다. 오부대중이 엄숙하고 맑아져서 어느 때 할 것 없이 게으름이 없었다.
홍시(弘始) 7년(405)에 이르러 칙명으로 친히 믿음을 더하여, 몸을 부축하고 말씀을 알리는 종자(從者)를 각각 30명씩 두게 하였다.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것은 승략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승략은 몸소 걸어 다니고, 수레와 가마는 늙고 병든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다. 얻은 공양과 구휼품은 대중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비록 늙은 나이였지만, 경전과 계율을 강설하여 대중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홍시(弘始, 399~416) 말년에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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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도용(釋道融)
도융은 급군(汲郡) 임려(林慮)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다. 그의 스승은 그의 정신과 풍채를 사랑하여, 먼저 불전 밖의 전적을 배우게 하였다. 마을에 가서 『논어』를 빌렸다. 끝내 가지고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이미 다 외어버렸다. 스승이 다시 책을 빌려와서 다시 외우게 하였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외우니, 감탄하면서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그의 마음대로 유학하게 하였다.
나이 서른 살에 이르러서는, 재주와 슬기로운 이해력이 뛰어나 내외의 경서를 마음속에서 노닐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짐짓 그를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요흥(姚興)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도융을 만났습니다. 기특하고도 총명한 승려입니다.”
요흥이 불러서 보고는 감탄하고 중히 여겼다. 칙명으로 소요원(消遙園)에 들어가 경전을 바로잡고 상세하게 번역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구마라집에게 보살계의 원본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행한다.
그 후 『중론(中論)』을 번역하여 비로소 두 권을 얻었다. 도융은 곧 강원에 나아가 경문의 글과 말을 분석하여, 맨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뜻을 꿰뚫었다. 구마라집은 다시 도융에게 명하여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직접 이 강의를 듣고 곧 찬탄하였다.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도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갑자기 사자국(師子國)의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다. 총명하고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서, 서역의 속서(俗書) 치고 펼쳐 외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외도의 종사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석씨(釋氏)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해, 우리들의 바른 교화가 동쪽나라에 젖어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지고 장안에 들어왔다. 요흥이 그를 만나보았다. 입과 눈으로 비위를 맞춰 알랑거려[口眼偏僻] 자못 매혹되었다. 바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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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곧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至道無方]. 각각 자신들이 일삼는 것을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중국 땅이 승려들과 변론을 겨루어 보기를 청합니다.
우월함이 드러나는 바를 따라서 교화를 전하게 해주십시오.”
요흥은 곧 허락하였다.
당시 관중의 대중승려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쳐다보기만 하고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말씨름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위없이 큰 도가 우리 승도들에게 있건만,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약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법륜의 바퀴축이 꺾어진다. 어찌 그래서야 되겠느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외도의 책을 다 펴서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곧 비밀히 사람을 시켜 바라문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오게 하였다. 한번 펴보고서 곧바로 외웠다.
그 후 날을 정하여 논리를 토론하였다.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오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모두 대궐 아래에 모였다. 관중의 대중 승려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견주어 항변을 주고받았다.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리니, 그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이미 꺾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곧 그가 읽은 책과 중국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이름과 제목을 나열하였다. 그 책의 권수와 부수가 바라문보다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이 그를 조롱하였다.
“그대는 중국의 넓은 학문[大秦廣學]을 듣지 못하였는가?
어찌하여 홀연히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바라문교도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도융의 발 아래에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였다. 며칠 안에 얼마 안 되어 떠났다. 불법의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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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난 것은 도융의 힘 덕분이다.
그 후 도융은 팽성(彭城)으로 돌아와 항상 강설을 이어갔다. 도를 묻고자 찾아온 사람이 천여 명에 달하였다. 의지하여 따르는 문도들의 수도 3백 명이 꽉 찼다.
성품이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항상 다락에 올라가 경전을 펴놓고 완상하였다.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이끌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법을 폈다. 그 후 팽성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법화경』·『대품경』·『금광명경』·『십지론』·『유마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서 행한다.
10) 석담영(釋曇影)
담영은 혹 북쪽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여 교유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을 편히 여기고, 배움에 뜻을 두었다. 행동거지를 자세하게 살펴 지나침을 미치지 못함과 같이 여겼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이 재빨라서 뜻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을 잘 강의하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천 명을 헤아렸다. 그 후 관중으로 들어가니 요흥이 크게 예의바른 접대를 더 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이르자, 담영은 그를 찾아가 따랐다. 구마라집이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담영을 만났습니다. 그 역시 이 나라 풍류의 드높은 기준이 될 만한 승려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구마라집의 역경을 돕게 하였다.
처음 『성실론(成實論)』의 번역본이 나올 때, 쟁론하는 문답이 차례대로 거듭 왕복하였다. 담영은 그 지리함을 한탄하였다. 곧 이를 줄여 다섯 번으로 묶어서, 마침내 구마라집에 바쳤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너무나 훌륭하다. 깊이 나의 뜻에 잘 맞는다.”
구마라집은 그 후 『묘법화경(妙法華經)』을 번역하였다. 담영은 이미 예전부터 이 경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래서 더욱더 심사숙고하여 곧 『법화의소(法華義疏)』 4권을 지었다.
아울러 『중론(中論)』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 속 깊이 숨어살면서 티끌세상 밖에서 절조를 지켰다. 공덕을 닦고 선행을 세워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11) 석승예(釋僧叡)
승예는 위군(魏郡)·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렇지만 나이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따를 수 있었다. 승현(僧賢) 법사에게 몸을 맡겨 제자가 되었다. 성품이 겸허하고 속내가 민첩하여, 배울수록 때마다 나아졌다. 나이 스물두 살에 이르자 경론에 두루 뛰어났다.
어느 날 승랑(僧朗) 법사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강의를 들었다. 듣다가 여러 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였다. 승랑 법사는 승현 법사와는 호상(濠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토론한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같이 가까운 사이였다[濠上之契].
승현 법사에게 말하였다.
“요즘 승예의 질문을 받아보았어. 그렇지만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해도 통할 수가 없었어.
뛰어난 스승의 뛰어난 제자라고 일컬을 만하더군.”
스물네 살이 되자 , 이름난 나라를 두루 떠돌면서 곳곳에서 강설하였다. 그를 알아주는 이들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따라와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항상 한탄하였다.
“경법은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과를 알 만큼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선법(禪法)은 아직 전수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에 이르렀다. 그에게 청하여 『선법요(禪法要)』 3권을 번역했다. 첫 권은 구마라타(鳩摩羅陀)가 지은 것이고, 마지막 권은 마명(馬鳴)이 설법한 것이다. 중간 권은 외국의 여러 성인들이 함께 지은 것이어서, 역시 『보살선(菩薩禪)』이라 일컬었다.
승예는 이 책을 얻고는 밤낮으로 이를 닦고 익혔다. 마침내 색·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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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촉의 다섯 경계를 정밀하게 단련하고, 훌륭히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뿌리를 맑게 하는 경지에 들어갔다. 위사도공(僞司徒公) 요숭(姚嵩)이 깊이 예로써 귀하게 대우했다.
요흥(姚興)이 요숭에게 물었다.
“승예는 어떠한 사람인가?”
요숭이 대답하였다.
“실로 업(鄴)과 위(衛)의 소나무와 잣나무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그를 만났다.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그의 재능과 기량을 구경하였다. 승예는 고상한 인품이 깊고 높으며, 머금고 토해내는 말이 빛나고 빈틈이 없었다. 요흥이 크게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곧 칙명으로 봉록과 관리와 사람과 가마를 공급하였다.
그 후 요흥은 요숭에게 말하였다.
“승예는 곧 사해의 영수[四海標領]이다. 어찌 한낱 업과 위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그치겠는가?”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멀리 퍼져나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의 덕에 귀의하였다.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경은 모두 승예가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의 「수결품(受決品)」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보고 사람은 하늘을 본다[天見人 人見天]’고 하였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이 말은 서역의 말뜻과 같다.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따름이다.”
승예가 말하였다.
“하늘과 사람이 교접하여 둘이 서로 마땅함을 만나는 것[人天交接 兩得相見]이 아니겠습니까?”
구마라집이 기뻐하여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그의 빼어난 깨달음의 두드러져 나옴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 후 『성실론』의 번역본이 나오자, 승예를 시켜 이를 강의하였다. 구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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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승예에게 말하였다.
“이 쟁론(諍論) 가운데는 일곱 개의 변화된 곳이 있다. 그 글이 아비담의 이론을 논파한다. 그러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적고 숨겨져 있기에, 만약 물어보지 않고 터득한다면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승예가 그윽하고 은미한 뜻을 열고 밝히면서, 끝내 구마라집에게 자문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참뜻에 맞게 아득한 이치를 이해하였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경론을 번역하면서 그대와 만났으니 참으로 한탄할 바가 없구나.”
『대지론(大智論)』·『십이문론(十二門論)』·『중론(中論)』 등의 서문을 지었다. 아울러 『대품경(大品經)』·『소품경(小品經)』·『법화경』·『유마경』·『사익경(思益經)』·『자재왕선경(自在王禪經)』 등의 서문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과거 승예가 훌륭히 위의를 가다듬어 경법을 널리 편찬하면서부터, 항상 이 모든 업적을 회향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늘 일상생활의 어느 때라도 감히 서쪽으로 똑바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명이 다함을 알고, 문득 승려들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평소에 서원하여 서방세계에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보는 바대로라면 어쩌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으나, 결정코 벗어나리니 여우처럼 의심하지 말거라. 다만 몸·입·생각으로 지은 업보는 혹 서로 어긋나고 범하기도 하였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오랜 겁토록 불법의 벗들이 되길 바란다.”
이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목욕하고, 향 피우고 예배드렸다. 침상으로 돌아와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날 같은 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오색의 향기가 감도는 연기가 승예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나이는 67세이다.
∙승해(僧楷)
당시에 사문 승해도 승예와 동학으로 역시 높은 명성이 있다고 한다.
12) 석도항(釋道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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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항은 남전(藍田) 사람이다. 아홉 살 때 길에서 놀 때에 은둔하는 선비인 장충(張忠)이 그를 보고 찬탄하였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상(相)이 있다. 속세에 있으면 재상이 되어 반드시 정치를 보좌하는 공이 있을 것이다. 도에 처하면 반드시 불법을 빛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늙어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도항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계모를 섬기면서 효자로 알려졌다. 집이 가난하여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항상 손수 그림을 그리고 비단을 짜서 계모를 받들어 모시는 데 썼다.
몹시 경전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배움에 힘썼다.
나이가 스무 살에 이르러 계모도 죽자, 장사 지냄에 예를 다하였다. 상복을 다 입고 나서는 출가하였다. 불교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아울러 뛰어난 것이 많아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해박하였다. 재치 있는 생각은 맑고 민첩하였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 곧 그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닦으니, 구마라집이 크게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경전을 번역하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자세하게 바로잡는 일을 도왔다.
∙도표(道標)
당시 도항의 동학으로 도표가 있었다. 그도 자못 재능과 힘이 있어 당시 명성을 독차지하여 도항과 버금갔다. 위진(僞秦)의 왕 요흥(姚興)은 도항·도표 두 사람을 신령한 기운이 걸출하고 밝아서, 나라를 다스릴 도량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곧 위상서령(僞尙書令) 요현(姚顯)에게 명령하여, 도항·도표 두 사람을 끈질기게 핍박하였다.
“도를 그만두고 왕업을 도와 떨치게 하라.”
다시 도항 도표에게 글을 내렸다.
“경들의 밝은 지조는 실로 가상스러운 점이 있다. 다만 나는 사해에 군림하여 정치에 재능 있는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 지금 상서령 요현에게 명령하여, 경들의 법복을 빼앗게 하여 이 시대의 세상을 돕게 하였다. 진실로 마음을 도를 맛봄에 둔다면, 어찌 도인·속인의 차별에 얽매이겠는가? 바라건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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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 생각을 알아주어서 절조를 지키겠다며 사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도항·도표은 회답하였다.
“지난달 20일에 조서를 받들어보았습니다. 저희들의 법복을 빼앗으신다는 명을 받고는, 슬픈 마음에 젖어 속된 정[五情]을 지키는 것조차 잃었습니다. 저희들은 재질이 어둡고 짧으며 불법에 물든 지도 아직 깊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승복 아래에서 신명을 다하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아울러 불법을 익히느라 세속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질없이 비상한 업적만 폐지하여, 끝내 특수하게 남다른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오히려 엄릉(嚴陵)의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위(魏)의 문제(文帝)도 관영(管寧)의 지조를 받아 들였습니다. 지존의 높은 마음을 억누르고 필부의 미미한 뜻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불도로써 중생을 다스리고 아울러 삼보를 널리 퍼뜨리고 계십니다. 원컨대 인민의 심정을 비추어보시고, 중생에 통달한 이치를 널리 드리우시기 바랍니다.”
요흥은 다시 구마라집과 승략(僧䂮) 두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헤어진 지 이미 몇십 일이 되어 매양 그리움이 더해간다. 차츰 따뜻해지면 크게 쉬겠거니 할 따름이다. 별 볼일 없는 몸이 위대한 거동을 하려다 보니, 더욱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길이 없어, 딱히 마음만 산란스러울 뿐이다.
요즘 온갖 일의 정성스러움을 재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근간에 도항·도표 두 사람에게 조서를 내려, 아라한의 옷을 벗고 큰 선비의 자취를 찾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으니, 원컨대 두 법사가 나를 돕도록 이들을 타이르기 바란다.”
구마라집과 승략이 회답하는 편지를 보냈다.
“무릇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가장 뛰어난 이는 도로써 백성들을 길러 만물이 스스로를 옳게 여기며, 그 다음가는 이는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1) 그런 까닭에 예전의 밝은 임금은 성품이 어긋난 사람은 다스리
1) 가장 뛰어난 사람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 다음은 가까이하고 기리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업신여긴다. (『노자』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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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어렵다는 사실을 살피어, 남에게 맡기는 데에는 인연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堯) 임금은 허유(許由)를 기산에 놓아두었습니다. 위문왕(魏文王)은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에서 인사하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한고조(漢高祖)는 상산사호(商山四皓)2)를 종남산(終南山)에 놓아 주었습니다. 숙도(叔度)는 한악(漢岳)에게 부드러운 수레를 사양하였습니다. 이는 무릇 현인의 성품에 맞추어 현명함을 터득한 조치였습니다.
지금 도항·도표 등은 덕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분수도 절조를 지키는 정도입니다. 그윽한 교화를 익힌 것도 아주 자잘하여, 불도를 가슴에 새겨 따르는 수준입니다. 심오한 경전을 펼쳐 분석하거나,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를 연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린 동자들을 깨우쳐 교화의 공덕을 도울 정도의 수준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기왕의 은덕을 베푸시어, 그들의 미약한 지조를 지키도록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도 요흥은 자주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온 경내가 이를 구제하여 위태로움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도항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옛사람의 말처럼, 나의 재화를 더해주는 것은 나의 정신을 손상시킨다. 나의 명성을 생기게 하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로다.”
이에 그림자를 바위 골짜기에 숨기었다. 어두운 수풀더미 속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정을 맛보아, 인간세계 밖에서 자취를 멀리하였다.
진(晋)의 의희 13년(417)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도항은 『석박론(釋駁論)』과 『백항잠(百行簪)』을 짓고, 도표는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의 서문과 「조왕교문(吊王喬文)」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3) 석승조(釋僧肇)
2) 진시황 때 국란(國亂)을 피해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들어 숨은 네 사람의 은사(隱士)를 말함. 호(皓)는 희다는 뜻으로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이렇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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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3)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파야무지론(波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나, 송(宋)·원(元)·명(明) 세 본과 궁(宮)본에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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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 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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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
4) 요장(姚萇)의 아들 요흥(姚興)이다. 서쪽으로 여륭의 군대를 깨뜨리고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요흥은 사문 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 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구역경전을 재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여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았다.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어서,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5)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이다.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대선사(大禪師)에게 수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추천받아, 함께 중국에 왔다.
6) 불야다라(弗若多羅) 삼장(三藏)이다.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는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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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郢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
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7) 담마야사(曇摩耶舍)이다.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
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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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말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논(論)에서는 말한다.
“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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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
8) 『노자』 39장.
9) 그러므로 도가 크나큰 어떤 것이라면 하늘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우리가 사는 지경 중에 네 가지 크나큰 어떤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로 머무른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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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승전 제7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 ④
1) 축도생(竺道生)
도생의 본래 성은 위(魏)씨이다. 거록(鉅鹿) 사람으로 팽성(彭城)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이었다. 고을에서 선량한 사람이라 칭송했다.
도생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하고 명철함이 신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사문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마침내 속가를 벗어나 불법에 귀의하였다. 법태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수업하였다.
이미 법문(法門)을 밟게 되자, 영준한 사고가 기발하였다. 문구의 뜻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곧 스스로 슬기로운 이해력을 열었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의 나이에 곧 강좌에 올랐다. 토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말하는 것이 주옥과 같이 맑았다. 비록 오랜 덕망이 있는 학승이나 당세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서 감히 대항하여 응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다. 성품과 도량이 기민하고 삼가며, 정신과 기개가 맑고 꿋꿋하였다.
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자신이 일삼는 뜻을 구하였다.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써 슬기로운 이해력을 근본으로 삼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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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잡론(雜論)을 참작하였다. 그러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라, 피곤함과 괴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 후 혜예(慧叡)·혜엄(慧嚴) 등과 함께 장안에 노닐었다. 구마라집을 따라 수업하니, 관중의 대중승려들이 모두 신과 같이 깨닫는다고 일컬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진(晋)의 공사황후(恭思皇后) 저씨(褚氏)가 세운 절이다. 본래 푸른 나무를 심은 곳이기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도생은 이미 당시의 불법의 장인이었으므로 초청되어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태조(太祖)와 문제(文帝)가 깊이 감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그 후 태조황제가 법회를 마련하여, 황제가 친히 대중과 함께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식사를 하사하고 한참이 지나자, 대중들은 모두 이러다가 해가 저물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이 때 황제가 말하였다.
“비로소 일중(日中)이 되었다.”
도생이 말하였다.
“밝은 해가 하늘에 빛나고 천자의 말씀이 비로소 일중이라 하시니, 어찌 일중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발우(鉢盂)를 취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에 온 대중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며, 그가 황제의 속마음을 얻은 일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홍(王弘)·범태(范泰)·안연지(顔延之)도 모두 그의 덕스런 풍모를 공경하여, 그를 좇아 그에게 도를 물었다.
도생은 이미 사유에 잠긴 지 오래되어 언어 밖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다. 마침내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무릇 형상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형상은 잊는 것이다. 말로써 이치를 추구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번역하는 사람이 거듭 막히고, 막힌 문구만을 많은 사람이 지키니, 원만한 참뜻은 보기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말할 만하다.”
이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고 사유하였다. 비로소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고, 몰록 깨우치면 성불한다는 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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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하였다. 또한 『이제론(二諦論)』·『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다.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게 깊은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 사이에는 혐오와 질투심이 많이 생겨나, 주거나 빼앗는 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또한 여섯 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생은 경의 이치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당시 『열반경』의 대본(大本)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학(舊學)들은 그의 말이 삿된 주장이라고 비난하며 분개함이 매우 심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빛을 바로하고 서원하였다.
“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컨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소서. 만약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師子座)에 앉게 하소서.”
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떠돌아다녔다.
처음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갔다. 열흘 사이에 배우는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 해 여름에 청원사의 불전에 우레가 진동하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서쪽 벽에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로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용이 이미 떠났으니, 도생도 반드시 떠날 것이다.”
갑자기 여산으로 자취를 옮겨 바위 산 깊숙이 그림자를 숨기니, 산중의 대중 승려들이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그 후 『열반경』의 대본이 남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과연 “천제(闡提: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서,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약속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도생은 이 경을 얻자 곧 이 경을 강설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1년(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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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리고, 덕스런 음성은 빼어나게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함에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이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털이개[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얼굴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 책상에 기대어 돌아가셨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하였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이에 서울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병폐를 부끄러워하면서, 추모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신같이 내다보는 지극함이 상서롭게 증명됨이 이와 같았다. 이어 여산의 언덕에 묻었다.
과거 도생은 혜예(慧叡)·혜엄(慧嚴)·혜관(慧觀)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천진함이 나타나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고, 혜의(慧義)는 교만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구연(寇淵)은 조용히 지켰다.”
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을 만큼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빼어났다.
과거 관중(關中)에서 승조(僧肇)가 비로소 『유마경』을 주석하였다. 이 때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음미하였다. 도생은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여러 경전의 의소(義疏)도 지었다.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삼았다.
왕징(王徵)은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비유하였다.
그를 위해 전기를 써서 그가 남긴 덕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도생이 추리한 ‘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근거가 있다고 여겼으며, ‘돈오(頓悟)하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등등의 주장도 역시 법의 문장으로 삼았다.
전송의 태조가 언젠가 도생의 돈오의 의미를 진술하였다.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만약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생)을 다시 일어나게 한다면, 어찌 여러분에게 굴복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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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寶林)
그 후 용광사 사문 보림이 처음에는 장안을 거쳐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도생의 여러 논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윽함에 노니는 도생’이라는 유현생(遊玄生)으로 불렀다. 『열반기(涅槃記)』·『이종론(異宗論)』·「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다.
∙법보(法寶)·혜생(慧生)
보림의 제자인 법보도 역시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한 사람이다.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지어 역시 도생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근대에는 또 석혜생(釋慧生)이 역시 용광사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많은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초서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같은 절에서 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그들을 대소이생(大小二生: 道生·慧生)이라 불렀다.
2) 석혜예(釋慧叡)
혜예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절조를 지키고, 엄하게 정진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사방을 떠돌며 배웠다. 어느 때 그는 촉(蜀)의 서쪽 경계를 지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서 양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 때 나그네 장사꾼 가운데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이 사람은 사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초청하여 경전의 뜻을 물어보았다.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었으므로, 상인이 곧 그의 몸값을 주고 그를 풀어주었다.
돌아와서 다시 승복을 입었다. 배움에 도탑게 힘씀이 더욱 지극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마침내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이르렀다. 발음과 뜻의 훈고라든가, 여러 나라의 다른 뜻을 반드시 깨우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후 돌아와 여산에서 잠시 쉬었다. 갑자기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을 따라 자문을 받았다. 그 후 서울로 가서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모든 사유는 말의 테두리 밖까지 뛰어나고, 논리는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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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자재하게 들어맞았다.
전송(前宋)의 대장군(大將軍)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두 번 세 번 초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왕이 자신의 저택에서 계를 받고자 하였다.
혜예가 말하였다.
“예(禮)에서 갖추고 찾아와 배운다는 말은 들었으나, 찾아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곧 절에 들어가 경건하게 절하고 공손히 계법을 받들었다. 뒤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바쳤다. 승예가 입지 않고 늘상 깔고 앉았다. 왕은 몰래 측근에게 30만 냥을 지불하여 사도록 시켰다. 혜예는 말하였다.
“비록 내가 입지는 않더라도, 이미 대왕께서 보시한 것이라서 애오라지 편의에 따라 썼을 뿐이오.”
진군의 사령운(謝靈運)도 독실하게 불교 논리를 좋아하였다. 풍속이 다른 언어를 통달하여 잘 이해하였다. 곧 혜예에게 경전 가운데의 여러 문자와 아울러 많은 발음의 다른 뜻을 물어보았다. 이에 혜예는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지었다. 조목별로 범어와 중국어를 나열하여 밝게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문자들이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다.
혜예는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3) 석혜엄(釋慧嚴)
혜엄의 성은 범(范)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열두 살에 학생이 되어 시(詩)와 서(書)에 두루 밝았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다시 불교 논리를 상세히 연구하였다. 서른 살에 이르자 뭇 서적을 훤하게 모두 익혀, 소문과 명성이 사방 먼 곳까지 퍼졌다. 더욱이 다른 나라까지 교화로 흠뻑 적셨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소리와 뜻을 찾아 바로잡는 등 남달리 들은 바가 많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고조황제는 평소 그를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그 후 고조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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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장안을 정벌하고자 하여 그와 함께 가기를 요구하였다. 혜엄이 말하였다.
“시주의 이번 행차가 비록 죄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빈도는 그 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간절히 요구하므로 마침내 함께 떠났다. 문제(文帝)가 자리에 오르자, 좋아하는 정이 더욱 진해져서 만날 때마다 크게 찬양하고 불법을 물었다.
이에 앞서 황제가 아직 그다지 불법을 숭상하여 믿지 않을 때인 원가(元嘉) 12년(435)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경윤(京尹) 소모지(蕭摹之)가 계문(啓文)을 올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제도를 주청하였다. 황제는 시중(侍中) 하상지(何尙之)와 이부랑중(吏部郞中) 양현보(羊玄保) 등과 이 일을 논의하면서 하상지에게 말하였다.
“짐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경전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요즘에 와서는 더욱 여가가 없어서 삼세(三世)의 인과(因果)에 관해서 아직 마음에 두어야 할지 어떨지 가려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감히 이 일에 대해서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다. 바로 경들이 이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대부분 불법을 공경하여 믿기 때문이다.
범태와 사령운(謝靈運)은 항상 말하였다.
‘6경(經)의 글은 본래 세속을 구제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 반드시 신령한 본성의 진실로 오묘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불경으로 나침반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안영지(顔迎之)의 『추달성론(推達性論)』과 종병(宗炳)의 『난백흑론(難白黑論)』을 보았다. 넓고 깊게 불법을 밝혀 더욱 이름난 이론이었다. 모두가 사람의 생각을 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만약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두 이 교화로 두텁게 할 수 있다면, 짐은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근간에 소모지가 청한 제도는 아직 완전히 경전에 통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곧 서로 살펴보아라. 경들에게 더함과 줄임을 맡기노라. 반드시 천박하고 경솔하며 음란한 일을 경계하고 막아서, 불법을 널리 펴는 데 손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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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게 하라. 곧 마땅히 명령대로 이 일에 착수할지어다.”
이에 하상지가 대답하였다.
“한가한 무리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하여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 가리는 인물로서 홀로 어리석은 정성만을 지켜왔습니다. 모자라고 엷은 덕으로 불법의 큰 가르침에 오점을 남길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포상하여 떨치라는 지시를 받으니, 제가 감히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전(前) 시대의 뭇 영명한 인물들과 같았다면, 밝은 조서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간의 왕조 시대도 이미 먼 옛날이라 다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양자강을 건너온 이래로 왕도(王導)·주의(周顗)·유량(庾亮)·왕몽(王濛)·사상(謝尙)·극초(郄超)·왕탄(王坦)·왕공(王恭)·왕밀(王謐)·곽문(郭文)·사부(謝敷)·대규(戴逵)·허순(許詢) 및 죽은 고조황제의 형제인 왕원림(王元琳)·곤계인 범왕(范汪)과 손작(孫綽)·장현(張玄)·은의(殷顗)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혹은 재상으로서 권좌를 보필한 우두머리였고, 혹은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며, 혹은 뜻을 하늘과 사람 사이에 두었고, 혹은 안개와 노을 밖의 신선의 세계에 높이 자취를 두었습니다. 모두가 불법에 귀의하는 뜻을 품거나, 마음으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이 대비할 만한 인물로는 축법란, 우법개, 축법잠, 강승연, 지둔, 축법숭, 우도수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취가 부처님에 버금가서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근세의 도인과 속인들을 펼쳐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장 두루 오랑캐와 중국[夷夏]의 인물들을 모두 거론하라 하신다면, 멀리는 한(漢)·위(魏)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재(奇才)와 이덕(異德)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혜원(慧遠) 법사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석(釋)씨의 교화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도(道)를 향해 가는 것은 본래 교(敎)의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속세를 구제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임무이다.’
가만히 이 말뜻을 찾아보니 진리의 깊은 곳과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집집마다 계율을 지키게 한다면, 온 나라에 형벌이 종식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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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도징(佛圖澄)이 조나라로 가자 두 석씨[石勒 父子]의 사나움이 줄어들고, 신령한 탑에서 광명이 뻗치자 부건(符健)의 포악함이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도리로서 왕의 교화를 도운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모지가 아뢴 바도 모두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도인과 속인을 좀먹고 손상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행이 잘못된 비구와 비구니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과 모습은 분별하기 어려워서, 버리고 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금·동·토목공사가 비록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커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업을 기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갑자기 단숨에 단절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요즘 이리저리 짐작해 보느라,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편안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 친히 덕스런 말씀을 받드니, 참으로 깊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양현보(羊玄保)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 이야기는 하늘과 인간세계의 즈음을 오가는 것이라 어찌 제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진(秦)·초(楚)는 강병(强兵)의 술책을 논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는 다른 나라를 평정하여 자신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계책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장차 여기에서 취할 것은 없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불교는 전국(戰國)시대의 도구는 아니라서, 자못 경의 말과 같다.”
이에 하상지가 말하였다.
“무릇 숨어사는 도인을 예우하면 싸우는 병사는 태만해집니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군병의 사기가 쇠퇴합니다. 만약 손자·오자의 뜻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다른 나라를 삼키는 일이 있게 된다면, 또한 요순의 도에서는 취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오직 불교에서만 취할 것이 없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였다.
“불문에 경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마치 공자에게 자로(子路)가 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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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다. 이른바 ‘악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惡言不入於耳]’ 함이 이것이구나.”
황제는 이 때부터 신심이 일어나 비로소 생각을 불경에 두었다. 그 후 혜엄·혜관 두 승려를 만나자 곧 도의 뜻을 논하였다.
당시 안연지(顔延之)는 『이식관(離識觀)』과 『논검(論檢)』을 지었다. 황제는 혜엄에게 명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가려내게 하여서, 하루 종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 때 황제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의 오늘은 예전 지둔(支遁)과 허순(許詢)의 논쟁1)에 부끄럼이 없구나.”
혜엄은 그 후 『무생멸론(無生滅論)』 및 『노자약주(老子略注)』 등을 지었다. 당시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은 모든 것에 박식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혜엄에게 물었다.
“부처의 나라에서는 무슨 달력을 사용하는가?”
혜엄이 말하였다.
“천축국에서는 하지(夏至)날 방중(方中) 때가 되면 그림자가 없어진다. 이른바 천중(天中)이 이것이다. 오행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하고, 색은 황색을 숭상하며, 숫자로는 5를 숭상한다. 여덟 치가 한 자에 해당하고, 열 냥은 이 땅의 열두 냥에 해당한다. 월건(月建)이 진월(辰月)이 되는 달(음력 3월)을 세워서 한 해의 첫 달로 삼는다.”
춘분·하지·추분·동지를 찾아 파헤쳤다. 달의 엷어짐과 월식을 미루어 살피는 데 이르기까지, 빛과 그림자의 옮겨감을 헤아리는 법이 매우 자세하였다. 또한 별자리로 해마다의 연기(年紀)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모두 조목마다 예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승천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 후 바리국(婆利國)의 사람이 중국에 왔다. 과연 혜엄의 말과 같았다.
1) 지둔이 말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황제는 임예(任豫)에게 명령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대열반경』이 처음 송나라 땅에 도착하였을 때 글과 말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품목의 수가 빠지고 간략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웠다.
이에 혜엄은 혜관·사령운 등과 함께 『니원경』 원본에 근거하여 품목을 추가하였다. 글도 원본의 바탕보다 지나친 것은 고쳐 바로잡으니, 비로소 몇 개의 판본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혜엄은 곧 꿈에 형상이 극히 우람한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성난 목소리로 혜엄에게 말하였다.
“존귀한 『열반경(涅槃經)』에 무엇 때문에 경솔하게 그대의 짐작을 가하였는가?”
혜엄은 꿈을 깬 뒤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앞서 출간한 책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당시 알 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는 아마도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고 격려하고자 할 따름일 것이오. 만약 반드시 응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책이 나온 즉시로 꿈에 나타났겠소?”
혜엄도 그렇게 여겼다. 얼마 후 다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그대가 경전을 널리 펴낸 힘으로 인해 반드시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혜엄은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동안사(東安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전하였다.
“혜엄 법사는 그릇이 크고 학식이 깊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종사이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고 슬프구나. 돈 5만 냥과 베 50필을 공급하라.”
∙법지(法智)
법지는 혜엄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이해력이 있었다. 스물네 살 때 강릉에 갔다가, 법아(法雅)의 강론을 들었다. 곧 몇 차례 논의를 거듭하니, 법아가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었다. 법아는 사부대중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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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 사람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룰 사람이다.”
법지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그의 명성은 초(楚)와 영(郢) 지방에 퍼지고, 칭송의 소리는 서울과 오나라를 적셨다. 그는 『성실론(成實論)』과 『대품경(大品經)』·『소품경』에 빼어났다.
4) 석혜관(釋慧觀)
혜관의 성은 최(崔)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박식한 견해로 이름을 날렸다. 스무 살에 출가하여 사방을 떠돌면서 수업하였다. 만년에는 여산으로 가서, 다시 혜원(慧遠)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남쪽에서 북방으로 가서, 새 경과 옛 경의 같고 다른 점을 찾아 그 차이를 상세히 가려냈다. 그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청아하며,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정취를 통하기로는 도생(道生)과 도융(道融)이 가장 으뜸이며, 힐난을 정밀하게 하기로는 혜관과 승조(僧肇)가 제일이다.”
이어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짓고, 구마라집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선남자야, 그대가 논한 내용은 매우 통쾌하다. 그대가 조금 물러나 있으면 곧 남쪽 양자강와 한 수 사이로 노닐 것이다. 잘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힘쓰도록 하라.”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곧 남쪽 형주(荊州)로 갔다. 고을의 장군인 사마휴지(司馬休之)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그곳에 고리사(高悝寺)란 절을 세웠다. 무릇 형(荊)과 초(楚)의 백성들로 하여금, 삿됨을 돌이켜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십 중 다섯이나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남방의 사마휴지를 정벌하면서 강릉에 이르자, 혜관과 서로 만났다. 무제가 마음을 기울여 대접하기를 이전과 다름없이 하니 마치 친구와 같았다. 이어 칙명으로 서중랑(西中郞)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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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곧 훗날의 문제(文帝)이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혜관은 이미 미묘하게 불교 논리에 빼어나고, 다시 『노자』와 『장자』를 탐구하였다.
또한 『십송률(十誦律)』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여러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캐내었다. 그런 까닭에 법을 찾고 도를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루도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원가(元嘉) 3년(426)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巳日)에 황제의 수레가 곡수의 연회[曲水宴: 3월 3일에 베푸는 잔치]에 임하였다. 혜관과 조정의 선비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혜관이 곧 앉은 자리에서 먼저 지어 바쳤다. 글 뜻이 맑고 은근하며 사리가 당시의 사정과 일치하였다. 이 때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여강(廬江)의 하상지도 모두 맑고 우아한 말로 기쁨을 이루어, 티끌세상 밖의 감상을 나누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및 「십유서찬(十喩序贊)」과 여러 경전의 서문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승복(僧馥)
당시 도량사의 승복은 본래 풍천(灃泉) 사람이다. 오로지 교리 이해[義學]에 정진하여 『승만경(勝鬘經)』에 주석을 달았다.
∙법업(法業)
또 법업도 본래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품경』·『소품경』과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몸을 절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릉공주(晋陵公主)가 그를 위하여 남림사(南林寺)를 지었다. 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5) 석혜의(釋慧義)
혜의의 성은 양(梁)씨며 북쪽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격조 있는 풍모가 빼어나게 드러나고, 뜻한 바 일에서 굳세고 올곧았다. 처음 팽성(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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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송나라 사이에서 유학하고, 두루 경전의 논리에 뛰어났다. 그 후 경사로 나와서 곧 말하였다.
“기주(冀州)에 법칭도인(法稱道人)이 있었다. 임종 때 제자인 보엄(普嚴)에게 전하기를, ‘숭고산의 영험한 신이 말하기를 강동에 유장군(劉將軍)이 있다. 아마도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될 것이다. 나는 서른두 개의 큰 보석과 병 하나를 가득 메운 금으로 신표를 삼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송왕(宋王)에게 알려지자 송왕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비상한 상서로움 역시 비상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법사가 스스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보물을 얻을 길이 없을 것이다.”
혜의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월에 숭고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극한 마음으로 향을 사르고 도를 행하였다. 7일째 되는 날 밤, 꿈에 수염이 긴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혜의를 데리고 보배구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바위 밑이다.”
혜의가 다음날 곧 산중을 두루 다니다가 한 곳을 보니, 환하게 꿈에서 본 곳과 같았다.
산신령 사당의 돌 제단 아래에서 과연 크고 작은 구슬 서른두 개와 황금 한 병을 얻었다. 이 상서로움은 『송사(宋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후 혜의는 서울로 돌아왔다. 송의 무제(武帝)는 접대에 존중을 더욱 더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우가 더욱 깊어졌다.
송의 영초(永初) 원년(420) 거기장군(車騎將軍) 범태(范泰)가 기원사(祇洹寺)를 세우고자 하였다. 혜의의 덕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종사가 될 만하다 여겼다. 절 공사를 시작해주기를 굳게 요청하였다. 혜의는 범태의 맑은 믿음이 지극하다 하여, 의궤와 규칙을 지시하여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혜의를 사리불(舍利弗)에 비교하고, 범태를 수달(須達)장자에 비유하였다. 그런 까닭에 기원사라는 호칭이 그 일컬음에 잘 어울렸다.
그 후 서역의 많은 명승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혹 경전을 번역하거나,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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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禪法)을 가르쳐 전수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서선지(徐羨之)·단도제(檀道濟) 등이 조정의 정치에 전권을 행사하였다. 범태는 불평하는 기색을 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을 마음껏 하여 이들을 꾸짖으니, 서선지 등이 깊은 유감을 품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범태가 추측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고 모두들 근심하였다. 범태도 역시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다. 곧 자기 몸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혜의에게 물었다. 혜의가 대답하였다.
“충성과 순종을 잃지 않음으로써 그 윗사람을 섬기는 까닭에, 위아래가 서로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니, 무슨 근심할 만한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어 범태에게 권유하여 과죽원(果竹園) 60무(畝)를 절에 시주하여,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을 받으라 하였다. 범태가 이에 따랐으므로 끝까지 그의 복을 누렸다.
범태가 죽자 셋째 아들 범안(范晏)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저의 아버님이 위험함을 틈타 설득하여, 과죽원의 땅을 요구한 일은 두고두고 유감스럽습니다.”
마침내 이 땅을 빼앗고 주지 않았다. 혜의는 범태의 유소(遺疏)를 증거로 삼아 분규를 일으켜 시끄러워지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났다.
이에 혜의는 마침내 자리를 옮겨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혜예(慧叡)와 함께 머물렀다.
전송의 원가 21년(444) 오의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그 후 범안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범안의 아우 범엽(范曄)은 공희선(孔熙先)의 역적 모의에 가담해 그 일족이 함께 괴멸되었다.
∙석승예(釋僧叡)
그 후 기원사에 석승예가 있었다. 삼론(三論)에 빼어나 송 문제(文帝)의 존중을 받았다.
6) 석도연(釋道淵)
도연의 성은 구(寇)씨며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출가하여 서울의 동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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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계율을 지키고 오랫동안 교학을 익혀,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빛을 숨기고 덕을 숨겨, 세상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동안사에서 개강하였다. 그윽하고 미묘한 논리를 해부 분석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진리를 모두 훤하게 밝혔다. 예전부터 적체되어 온 문제점들을 빛나게 얼음 녹듯 풀이하였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그를 다시 보고, 성대하게 그의 덕에 의지하였다.
그 후 팽성사(彭城寺)로 자리를 옮겨 머물렀다. 전송의 문제(文帝)는 도연의 행실이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된다 하여, 칙명을 내려 절의 주지로 머물렀다.
그 후 주지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혜림(慧琳)
도연의 제자인 혜림은 성이 유(劉)씨며, 진군(秦郡) 사람이다. 여러 경전과 『노자』와 『장자』에 빼어나고, 해학과 농담을 좋아하였다. 글을 짓는데 뛰어나기 때문에 열 권의 문집을 지었다.
그러나 성품이 오만하고 방종하여 자못 스스로의 자긍심으로 남을 얕보았다. 어느 날 도연이 부량(傅亮)을 찾아갔다. 혜림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연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도연이 얼굴빛에 노함을 나타내었다. 부량이 마침내 그 벌로 혜림에게 곤장 20대를 때렸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도 자못 혜림을 존중하여 불러들여 만나곤 하였다. 그 때마다 항상 홀로 앉는 걸상에 올라앉았다. 안연지(顔延之)가 늘 이를 비난하니, 황제도 곧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백흑론(白黑論)』을 지었지만, 불교의 도리에 어긋났다. 형양태수(衡陽太守) 하승천(何承天)이 혜림과 가까이 친교를 맺어 평소 서로를 격양시켰다. 그는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막히고 치우쳐 불교를 꾸짖고 나무랐다. 안연지와 종병(宗炳)이 이 두 논설을 따져 반박하기를, 각기 만여 글자로 하였다.
혜림은 이미 스스로 그의 법을 허물었기에, 교주(交州)로 배척당하여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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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도연이 마성(麻星)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7) 석승필(釋僧弼)
승필은 본래 오(郡)나라 사람이다. 텅 비운 성품과 간결한 도량에다,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어려서 용광사의 담간(曇幹)과 함께 장안에 노닐어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날을 아끼고 힘을 아껴 자못 깊은 생각이 있었다. 구마라집의 칭찬이 더해져서 그를 경전의 번역에 참여시켰다.
그 후 이름난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풍속과 교화를 두루 구경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승필에게 절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승필이 그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至道]를 널리 펴지 않으면, 순박한 기풍이 날로 멀어집니다. 스스로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구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도풍을 세워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땅히 인연 따라 이익을 가져와야 하거늘, 어찌 홀로 한 절만을 좋게 할 수 있습니까?”
그 후 남쪽 초(楚)나라 영읍(郢邑)에 자리잡았다. 10여 년 동안 경전과 계율을 가르치고 권유하여, 크게 강남 지방을 교화하였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멀리서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였다. 사람을 보내어 공경하는 마음을 전하여, 보내오는 보시가 줄을 이었다.
그 후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에 머물렀다. 문제(文帝)가 그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늘 초청해서 강설하게 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9년(44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8)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왕(王)씨며 동아(東阿) 사람이다. 어렸을 때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주(徐州)와 연주(袞州)를 유력하였다. 얼굴은 매우 검으나, 빼어난 식견이 맑고 멀리까지 미쳤다.
당시 낙양 안의 도경(道經)도 슬기로운 이해력이 당세(當世)에 높아, 혜정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귀가 매우 크고 길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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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였다.
“낙수에는 귀가 크고 긴 인물이 있고, 동아에는 먹처럼 검은 얼굴의 인물이 있다네.
묻는 말에 응수 못하는 것이 없고, 응수하면 막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혜정은 지극하게 성품이 허통하고 맑으며, 소상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었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나라 안의 학문을 일삼는 이들이 반드시 모여들지 않음이 없었다.
『법화경』과 『소품경』을 외우고, 『유마경(維摩經)』과 『사익경(思益經)』에 주석을 달았다. 『열반약기(涅槃略記)』·『대품지귀(大品旨歸)』·『달명론(達命論)』을 지었다. 아울러 여러 법사들의 뇌문(誄文: 弔文)을 지어 대부분 북쪽 땅에 유전되었다. 그러나 양자강을 넘어 전해진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9) 석승포(釋僧苞)
승포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관중(關中)의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송의 영초 연간(420~422)에 북서(北徐) 지방을 유행하였다. 황산정사(黃山精舍)에 들어가 다시 정(靜)·정(定) 두 스승을 찾아가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어 그곳에서 21일간의 보현재참(普賢齋懺)을 행하였다. 7일째 되던 날 흰 고니들이 날아와, 보현보살의 자리 앞에 모여들었다. 중간에 이르러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치자 고니들이 떠났다. 21일째 되던 날 해가 저물 무렵에, 또 노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탑을 몇 바퀴 돌더니 문득 사라졌다.
승포는 어려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더욱이 상서로운 일까지 감응한 까닭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더욱 굳세졌다. 날마다 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우고, 항상 수백 배씩 절을 올렸다.
그 후 동쪽 서울로 내려갔다. 때마침 기원사(祇洹寺)에서 강론을 여는 시기를 만났다. 법도들이 운집하고 선비와 서민들이 강석으로 달려왔다. 승포는 처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이라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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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강론을 보았다. 의복은 더럽고 해어지며, 용모는 바람과 먼지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법당 안은 이미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의 안장에 앉아 문 밖에서 강론을 들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가 강론을 끝내자, 승포가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하려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객승의 이름은 무엇인가?”
“포(苞)라 하오이다.”
“무엇을 모두 꾸러미에 쌌는가[苞]?”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도 꾸러미에 쌀 수 있소이다.”
이어 몇 차례 다른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앞서 다다른 뛰어난 이의 생각과 힘인지라, 법사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는 그의 말에 대항할 길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났다.
당시 왕홍(王弘)과 범태(范泰)가 승포가 논의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재치 있는 생각에 감탄하여 더불어 말을 나누기를 청하였다. 이에 기원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의 강론을 열고, 불법의 교화를 이어나갔다.
이에 진군(陳郡)의 사령운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승포를 만났다. 그의 정신과 기개를 보고 더욱 깊이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포에게 물었다.
“사령운은 어떤 사람인가?”
“사령운은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식견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몸에 닥치는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승포는 길을 가다가 여섯 명의 도적들이 관리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 승포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를 권유하였다. 여러 도적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하자, 간절히 염불하고 또 염불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송치하던 관리가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도적들은 족쇄를 풀고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법화(法和)
당시 와관사(瓦官寺)의 법화도 논리를 따지는데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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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명성을 이루어, 전송 고조(高祖)황제의 존중을 받아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10) 석승전(釋僧詮)
승전의 성은 장(張)씨며 요서(遼西) 해양(海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연(燕)·제(齊) 지방에 떠돌면서 두루 불전 이외의 경전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비로소 출가하였다. 다시 삼장을 정밀하게 닦아, 북쪽 땅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그 후 양자강을 넘어 서울에 머물렀다.
자리를 깔고 크게 강론을 펴니 교화가 강남 땅을 적셨다.
오군(吳郡)의 장공(張恭)이 오군으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고소(姑蘇) 일대의 선비들은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처음 한거사(閑居寺)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호구산(虎丘山)에서 쉬었다. 이에 앞서 승전은 황룡국(黃龍國)에서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오군으로 들어가자 다시 금불상을 조성하여, 호구산의 동사(東寺)에 안치하였다.
승전은 성품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도왔다. 맑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서, 거처하는 곳에 비단이나 돈이 없었다.
그 후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여항(餘杭)에 방현사(方顯寺)를 세웠다. 승전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대중을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좌선과 예불을 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보살피느라 지나치게 애쓰다 보니, 급기야는 앞을 못 보았다. 그러나 더욱 정성을 다해 책려하고,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장부(張敷)와 초국(譙國)의 대옹(戴顒)·대발(戴勃)도 모두 덕을 사모하였다. 사귐을 맺고 숭배하여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그 후 승전은 잠시 임안현(臨安縣)으로 떠돌다가 동공조(董功曺)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는 청신한 불제자였다. 승전이 그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에 걸려 몹시 위독하였다. 항상 그가 조성한 불상이 와서 서쪽 벽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모두 와서 간병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법랑(法朗)은 꿈에 몇 사람이 받드는 어떤 높은 대(臺)를 보고 물었다.
“어디로 떠나십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승전 법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오.”
이튿날 아침 과연 승전이 세상을 떠났다. 현령(縣令) 완상지(阮尙之)가 백토산(白土山)에 있는 곽문거(郭文擧) 묘지의 바른 편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양홍(梁鴻)을 요리(要離)의 묘 옆에 부장(附葬)한 고사를 본받은 것이다.
특진관(特進官) 왕유(王裕)와 덕이 높은 선비 대옹이 승전의 묘소에 이르렀다.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당사현(唐思賢)이 비문을 지었으며, 장부가 조문을 지었다.
11) 석담감(釋曇鑒)
담감의 성은 조(趙)씨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축도조(竺道祖)를 스승으로 섬겼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율행에 간절한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배워 연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빼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그를 따라 배웠다. 구마라집은 항상 말하였다.
“담감은 한 번 들으면, 들은 것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 후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두루 교화를 베풀었다. 형주(荊州)에서 강릉에 도달하여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나이가 60에 들어서자, 힘껏 수행하기를 더욱 맑게 하였다. 항상 안양(安養)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여 아미타불을 우러러보았다.
그 후 제자인 승제(僧濟)가 그의 곁을 떠나 상명사(上明寺)로 가자, 담감이 말하였다.
“네가 떠나는 일이야 아름답기는 하다만, 아마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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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간곡하게 조목조목 들어 법을 부촉하였다. 밤이 되자 모든 연로한 승려들과 함께 무상(無常)을 서술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감은 홀로 낭하(廊下)를 서성거렸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사미인 승원(僧願)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담감이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 자거라. 다시 오지 말아라.”
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제자인 혜엄(慧嚴)이 평상시처럼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담감이 합장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사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신체는 부드럽고, 깨끗한 향기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이를 알리고 시신을 염하였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전기(傳記)와 찬을 지었다. 그는 찬한다.
여지(荔枝) 풀 향기 뿜듯
근옥(瑾玉) 구슬 맑게 드러나듯
심오하신 님이여,
물들지도 물들이지도 않네.
어려선 찬란한 빛이
늙어선 가지마다 울창함이
신의 세계 노닌다고
어찌 참된 헤어짐일까.
披荔逞芬 握瑾表潔
渾渾法師 弗淄弗涅
暐曄初辰 條蔚暮節
神遊智往 豈伊實訣
도해(道海)·혜감(慧龕)·혜공(慧恭)·담홍(曇泓)·도광(道廣)·도광(道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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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릉의 도해·북주(北州)의 혜감·동주(東州)의 혜공·회남(淮南)의 담홍·동원산(東轅山)의 도광·홍농(弘農)의 도광 등이 있었다. 모두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간절한 정성을 기울여 배움이 경전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아울러 설법을 잘하였다. 또한 오로지 계율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40여 만 글자의 경전을 암송하였다. 여산(廬山)의 능운사(陵雲寺)에 머물렀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따랐다.
항상 지팡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승려가 보시한 지팡이다.”
지팡이의 빛과 색깔은 현란하였다. 또한 자못 향기도 감돌았다. 지팡이 위쪽에 범어로 된 글[梵書]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글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관중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찾아뵈었다. 쥐던 지팡이도 스스로 그를 따라왔다. 구마라집이 그 지팡이를 보고 놀랐다.
“이 지팡이가 여기에 있었나?”
이어 그 범어 글자를 번역하였다.
“본래 천축국의 사라림(娑羅林)에서 태어났다. 남방이 어지러워지면 초야에 의지하여 일어나리라. 후에 구마라집을 만나면 도의 가르침이 융성해질 것이다.”
혜안은 그 후 지팡이를 외국 승려 바사나(波沙那)에게 선물하였다. 바사나는 이것을 가지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혜안은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산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13) 석담무성(釋曇無成)
담무성의 성은 마(馬)씨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집안 어느 대[家世]인가에 피난하여 황룡(黃龍)으로 옮겨 살았다.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실천하는 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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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바르며, 빼어난 영특함에 짝이 없었다.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곧 문답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구마라집을 만나니, 구마라집이 물었다.
“사미가 어떻게 먼 곳에서 올 수 있었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도를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구마라집이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길 떠나길 멈추고 배움에 힘쓰니, 지혜와 학업이 더욱 깊어졌다. 요흥(姚興)이 담무성에게 말하였다.
“마계장(馬季長)은 고명한 석학이었으나, 당시 세상에서 교만하였네. 법사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가 대답하였다.
“도로써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흥은 그를 매우 남다르게 생각하여 공급하는 것이 크게 두터웠다. 요흥의 운수가 장차 기울려 하자, 관중은 위태하고 어지러워졌다. 담무성은 곧 회남(淮南)의 중사(中寺)에서 휴식하면서, 『열반경』과 『대품경』을 항상 바꾸어가며 강설하였다. 그러자 수업하는 사람이 2백여 명이었다.
안연지(顔延之)·하상지(何尙之)와 함께 실상을 논하면서 새벽까지 토론을 계속하였다. 담무성은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담경(曇冏)
당시 중사에는 또한 담경이 있었다. 담무성과 동학(同學)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여, 전송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의경(義慶)의 존중하는 인물이 되었다.
14) 석승함(釋僧含)
승함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와 천문과 산수에 뜻을 두텁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불교 논리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밝았다. 더욱이 『대열반경』에 빼어나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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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강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원가(元嘉) 7년(430) 신흥태수(新興太守) 도중조(陶仲祖)가 영미사(靈味寺)를 세웠다. 승함의 도풍과 규범을 흠모하였다. 그를 초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승함은 대중을 도우며 맑고 삼가하여, 3업(業)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후 서쪽 역양(歷陽)에 떠돌며 불법을 널리 알렸다. 그러자 강남의 도인과 속인들이 소문을 듣고는, 따르는 사람들이 숲을 이루었다.
당시 임성(任城)의 팽승(彭承)이 『무삼세론(無三世論)』을 지었다. 이에 승함은 곧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지어 대항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치고, 곧 땅에 떨어지려 하는 불법을 다시 일으켰노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또 『성지원감론(聖智圓鑑論)』과 『무생론(無生論)』·『법신론(法身論)』·『업보론(業報論)』 및 『법화종론(法花宗論)』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얼마 후 남쪽 구강(九江)에 노닐면서 크게 경법을 떨쳤다.
낭야의 안준(顔峻)이 당시 남중랑(南中郞)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따라서 심양(潯陽)에 주둔하였다. 승함과 서로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만나면 반드시 종일토록 지냈다.
어느 날 승함은 가만히 안준에게 말하였다.
“만약 예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서울에 곧 재앙과 난리가 있을 것이오. 진인(眞人)의 부신[符]은 응당히 전하에게 속해 있으니, 시주께서는 이 일에 입을 다물어야 하오.”
그런데 갑자기 원흉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세조(世祖)가 황제가 되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 후 평안하고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문득 대중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알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명(天命)을 아는 이라 하였다.
∙석도함(釋道含)
당시 석도함도 학문과 깨우침에 공부가 있어 『석이십론(釋異十論)』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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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승철(釋僧徹)
승철의 성은 왕(王)씨며, 본래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제 두 사람이 양양에서 임시로 살았다. 승철은 열여섯 살에 여산으로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그를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여 물었다.
“차라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번뇌를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일은 원래 저의 본심입니다. 먹줄을 놓는다거나 쇠를 달구는 일에서는 종장의 뜻대로 하소서.”
혜원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에 입문한다면, 곧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는 법문을 얻을 것이다.”
이에 관에 꽂는 비녀를 벗어버렸다. 몸을 맡겨 혜원을 따라 수업하여,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웠다. 더욱이 『반야경』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또한 그는 도를 묻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마음을 문장과 시를 짓는 일에 두었다. 한 편의 문장이나 한 수의 시를 짓는데, 바로 붓을 대자마자 문장을 완성하였다[落筆成章].
어느 날 여산의 남쪽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모여들고, 뭇 새들이 이에 화답하며 울었다. 이처럼 그에게는 세속을 벗어난 빼어난 기운이 있었다. 물러나 절에 돌아와서 혜원에게 물었다.
“율법에는 음악을 규제하고, 계율에는 노래와 춤을 끊으라 하였습니다. 노래를 한 번 부르고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은 해도 괜찮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산란해지는 점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위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곧 중지하였다. 스물네 살이 되자 혜원은 그에게 『소품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당시 같은 동년배들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 오르자 글 뜻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그의 칼날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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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를 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혜원이 그에게 말하였다.
“전에 너와 겨루며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남은 힘이 없어졌다. 너의 방어벽은 엄중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던 사람들이 군병을 잃고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못 쉬운 일은 아니다.”
이로써 문인들이 그를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혜원이 죽은 뒤에는 남쪽 형주로 떠돌다, 강릉성 안의 오층사(五層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비파사(琵琶寺)로 자리를 옮겼다.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의동(儀同) 소사화(蕭思話) 등도 모두 그에게서 계법을 받기 위해, 그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몸소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전송의 원가 29년(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자사(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이 그를 위하여 분묘를 조성하였다.
∙승장(僧莊)
당시 형주의 상명사에 있는 승장도 『열반경』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전송의 효무황제 초기에 칙명으로 서울에 내려오라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6) 석담제(釋曇諦)
담제의 성은 강(康)씨이다. 선조들은 강거(康居) 사람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자리를 옮겨 중국에 가까이하였다. 헌제(獻帝) 말기의 난리로 인해 오흥(吳興)에 머물렀다. 담제의 아버지 강융(康肜)은 일찍이 기주(冀州)의 별가(別駕: 벼슬이름)가 되었다.
담제의 어머니 황(黃)씨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하나의 털이개와 철루(鐵鏤: 무쇠에 조각한 것)로 된 서진(書鎭: 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털이개 등을 그에게 보여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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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秦王)이 선물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나, 깨달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다.
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䂮) 도인을 만났다. 문득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동자가 어떻게 이 늙은이의 이름을 부르시나?”
담제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불쑥 부른 것은, 그대가 전에 이 담제의 사미였기 때문입니다. 대중 승려를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승략은 전에 홍각(弘覺) 법사의 제자로서, 승려들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날 때의 시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털이개와 서진 등을 보여주니, 승략이 이에 깨닫고 울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 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萇)을 위하여 『법화경』을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요장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홍각 법사께서 돌아가신 날을 계산해보니, 바로 이 물건을 맡기신 날이었습니다. 다시 나물 캐던 일까지 기억이 나니, 더욱 슬픔이 북받칩니다.”
그 후 담제는 경전을 두루 편람하면서, 눈에 지나가는 것은 곧 기억하였다.
만년에는 오군(吳郡)의 호구사(虎丘寺)로 들어갔다. 『예기(禮記)』와 『주역(周易)』·『춘추(春秋)』를 각기 일곱 번씩 강의하였다. 『법화경』·『대품경』·『유마경』을 각기 열다섯 번씩 강의하였다. 또한 글을 잘 지어, 여섯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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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집이 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성품이 숲과 개울을 사랑하여, 후에 오흥(吳興)으로 돌아갔다. 고장(故章)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시며 한가롭게 살았다.
전송 원가 연간(424~452)의 말기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7) 석승도(釋僧導)
승도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열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업하였다. 스승이 『관세음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다 읽고는,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 경은 모두 몇 권이 있습니까?”
스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말하였다.
“오직 이 한 권뿐이다.”
승도가 말하였다.
“처음에 ‘그 때 다 하지 못한 뜻’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상응하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크게 기뻐하여 『법화경』 한 부를 주었다. 이에 밤낮으로 그것을 보고, 뜻을 찾아 거칠게나마 의미를 해득하였다. 가난하여 기름과 촛불이 없었으므로, 항상 땔감을 주워서 책을 비춰보곤 하였다[採薪自照].
열여덟 살이 되자 다방면에 읽은 것이 더욱 많아졌다. 원기의 바탕이 씩씩하고 용감하며, 영묘한 작용이 빼어나게 드러났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고상하며, 거동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승예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이 되고자 원하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법사가 되어 도강(都講)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에 승예가 말하였다.
“그대는 바야흐로 곧 만인의 불법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다. 어찌 자잘한 승려들을 상대로 하여 부양시키는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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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계를 받음에 이르러 식견이 더욱 깊어져서, 선(禪)·율·경론이 저절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만큼 통달하였다.
요흥(姚興)이 그의 덕업을 흠모하여 벗으로서 사랑하였다. 절에 들어오면 찾아가서, 가마를 타고 함께 궁전으로 돌아갔다. 구마라집이 경론을 번역해 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도 함께 하여, 참조하고 의논하며 자세하게 내용을 바로잡았다.
승도는 이미 본래부터 풍채가 좋은데다 관중(關中)의 성대한 모임을 만났다. 이에 많은 경전을 계획하고, 널리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캐내었다. 곧 『성실(成實)』과 삼론(三論)의 의소(義疏)와 『공유이제론(空有二諦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전송의 고조(高祖) 황제가 서쪽 장안을 토벌하였다. 군주 노릇하던 자[僞主]를 사로잡아 관내(關內)를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였다. 그는 이미 평소 자자하게 승도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곧 요청하여 상견하더니, 승도에게 말하였다.
“서로 멀리서 바라본 지 오래인데, 어쩌면 그리도 풍속이 다른 곳에서 지체하였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명공께서 천하를 소탕하여 말발굽소리가 황하와 낙수에 울렸습니다. 이 때에 서로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조황제가 깃발을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계양공(桂陽公) 의진(義眞)을 그곳에 남겨두어, 관중 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헤어질 때 고조가 승도에게 부탁하였다.
“나이 어린 것을 이곳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다. 원컨대 법사가 때때로 돌아보고 마음에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 후 의진은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에게 핍박당하였다. 관남(關南)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어지럽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추한 오랑캐들이 흉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기병이 곧 그의 몸 가까이 당도하였다. 승도는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오랑캐들을 가로막았다. 의진을 추격하는 기병들에게 말하였다.
“유공(劉公)이 아들을 부탁한 일이 있소. 빈도는 지금 곧 죽음으로써 그를 전송하려 하오. 반드시 잡지도 못할 것이니, 번거롭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뭇 오랑캐들은 그의 신비한 기운에 놀라, 마침내 칼날을 되돌려 돌아갔다.
의진은 달아나 풀밭에 숨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중병(中兵) 단굉(段宏)을 만나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릇 승도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조황제는 이 일에 감격하여, 아들과 조카 내외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그 후 수춘(壽春)에 절을 세웠다. 곧 동산사(東山寺)가 그곳이다. 항상 경론을 강설할 때마다 수업하는 문도들이 천여 명이었다. 그 당시 오랑캐들이 갑자기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니 사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투신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향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생각을 돌이키어 조서에 응하여 서울의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황제의 가마가 이곳을 찾아오자, 몸소 나가서 영접하고 안부를 물었다.
승도는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3강(綱)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일에 감격하고 가슴에 품어,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도 역시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곧 와관사에 칙명을 내려 『유마경』의 강론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가 친히 그곳으로 거동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다 모여들었다. 승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왕궁에 탄생하시고 쌍수(雙樹)에서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그 때의 순후한 근원은 영원히 떠나갔어도, 경박한 풍속은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급고독원은 폐허가 되고, 녹야원은 허물어진 풀밭이 되었습니다.
아흔 다섯 종류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들은 아래로 나아가는 길을 높은 곳으로 오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삼계의 중생들은 불이 난 집을 청정한 불국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주상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보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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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부대중들이 이 일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다시 황제에게 말하였다.
“법을 보호하는 일과 도를 널리 펴는 일을 제왕보다 더 앞서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네 가지 평등심(平等心)을 움직이시어, 위태로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고 착한 일을 권유하실 수 있다면, 모래밭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이 세계가 곧 자재천궁(自在天宮)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그 후 하직하여 수춘으로 돌아와 석간사(石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6세이다.
∙승인(僧因)
당시 승인도 당시 세상에 이름난 이로 승도와 버금갔다. 어떤 사람이 승인에게 물었다.
“법사와 승도 가운데서 누가 더 훌륭한가?”
그는 대답하였다.
“나와 승도는 같이 구마라집에게 사사받았습니다. 공자의 문인에 기준해서 말한다면, 승도는 입실(入室) 제자에 해당하고 나는 승당(升堂) 제자라 할 만합니다.”
∙승위(僧威)·승음(僧音)
승도의 제자에 승위와 승음 등이 있었다. 모두 『성실론(成實論)』에 빼어났다.
18) 석도왕(釋道汪)
도왕의 성은 반(潘)씨며 장락(長樂) 사람이다. 어릴 때 숙부를 따라 서울에 있었다. 열세 살에 여산의 혜원(慧遠)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경전과 계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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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음식으로 일관하였다.
한번은 양주(梁州)로 갔다. 길에서 강(羌)족 오랑캐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의복과 발우를 빼앗겼다. 도왕(道汪)과 제자 몇 사람이 마음으로 서원하며,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잠시 후 구름과 안개 같은 것이 도왕 등의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이에 도적 무리들이 쫓아오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재난을 면하였다.
그 후 하간(河間)의 현고(玄高) 법사가 선(禪)과 지혜가 깊고 넓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곳에 가서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토곡혼(吐谷渾)의 난을 만나, 그곳에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부른 적이 있는 학덕이 높은 선비[徵士] 비문연(費文淵)이 처음으로 그를 따라 수업하였다. 곧 고을 성의 서북쪽에 절을 세워 기원사(祇洹寺)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파촉(巴蜀) 지방에 교화를 행하여 명성이 조정과 재야를 적셨다.
양주(梁州)자사 신탄(申坦)은 도왕과 구면이었다. 그 후 신탄이 사고를 당하자, 도왕은 그곳에 가서 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신탄이 그곳에 도왕을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문연이 자사(刺史) 장열(張悅)에게 글을 올렸다.
“도왕 법사는 학식과 수행이 청백하고, 뜻과 기개[風霜]가 매우 준엄합니다. 탁연히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뽑아내기 어려운 지조가 있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양주에서 그를 맞아들이려고 교지를 보내자, 그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온 경내의 여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 고을은 변방의 황량한 고을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수효가 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禪)과 계율에 힘입는 바는 그 한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어찌 강물이 갖은 진주를 잃게 하고, 산이 갖은 옥을 잃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도인과 속인들의 정성을 비추어 보시고, 사부대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기댈 곳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장열이 곧 정중하게 만류하였다. 마침내 양주로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열이 서울로 돌아가, 전송의 효무황제에게 자세히 도왕의 덕행을 진술하였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그를 영접하여 중흥사(中興寺)의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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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主)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도왕은 장열에게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그곳으로 가는 일을 면하였다. 이로써 병을 사칭하여 휘장을 내리고, 인간세계를 엿보는 일을 끊었다.
그 후 유사고(劉思考)가 고을에 다다라 크게 불법의 제사를 마련하였다. 도왕에게 강설을 청하니, 곧 그의 청에 응낙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기로 맹서하였소. 무엇 때문에 절개를 훼손시키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유공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바야흐로 불법이 이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작은 노고를 마다하겠습니까?”
이에 앞서 3협(峽) 안의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바위 언덕 옆에서 신비한 광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유사고는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도왕에게 청해서 광명이 일어나는 곳에 절을 세우게 하였다. 즉각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험한 지점에 방[室]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우러러 바라보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왕경무(王景茂)가 초청하여, 무담사(武擔寺)에 머물러 승주(僧主)가 되었다. 대중을 도와 맑고도 삼가하니,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원년(465)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에 따라 화장하였다. 유사고는 그를 위하여, 무담사의 절 문 오른쪽에 탑을 세웠다.
경화(景和) 원년(465)에 소혜개(蕭慧開)가 서쪽으로 나아가 성도에 주둔하였다. 도왕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함께 도를 강론할 생각으로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탄식하였다.
“애석하구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니 곽문거(郭文擧)가 강성(康成)을 뒤쫓아 간 일 따위야, 어찌 말할 만한 꺼리나 되겠는가?”
당시 현인들이 애석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보명(普明)·도은(道誾)
당시 촉(蜀)의 강양사(江陽寺)의 보명과 장락사(長樂寺)의 도은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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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과 덕망이 높고 밝았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감통(感通)을 얻었다. 도은은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더욱 담론과 토론에 빼어났다. 오(吳)나라의 장유가 초청하여 계를 내리는 스승으로 삼았다.
19)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소(邵)씨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抗)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 지조를 지키고, 힘써 수행함에 정성이 간절하였다. 풍모 있는 자태가 수려하고 반듯하여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처음 여산(廬山)에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지혜롭게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하상지(何尙之) 등이 모두 덕스런 풍모를 흠모하였다. 안연지는 늘 찬탄하였다.
“형산(荊山)의 구슬이라면 오직 혜정, 그 사람뿐이다.”
아들 안준(顔竣)이 나가 동주(東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동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사(天柱山寺)에 깃들어 살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섬주(剡州) 법화대(法花臺)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동앙산(東仰山)에서 쉬었다. 곳곳에서 소요하며 노닐었다. 아울러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힘썼다. 나이가 50세를 넘자, 뜻과 절개가 더욱 굳건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지은 문한(文翰)과 문집(文集) 열 권이 있다.
20) 석법민(釋法愍)
법민은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여 뜻을 경전에 도탑게 가졌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였다. 곧 고을과 나라들을 밟아보고, 풍속을 구경하며 도를 음미하였다. 그는 『반야경』과 논리를 따지는 것과 경장과 율장을 모두 마음껏 요리하였다.
그 후 강하군(江夏郡)의 오층사(五層寺)에서 쉬었다. 당시 사문 승창(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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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이 강릉 성 안에 탑을 세웠다.
자사인 사회(謝晦)가 이를 허물고자 하였다. 법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사회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법민은 이에 장사(長沙)의 녹산(麓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회는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에 이르러, 후하게 술과 고기를 두텁게 내려주었다. 엄중하게 북을 치고 위엄을 떨치면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부셔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과 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사회는 놀라고 무서워 달아났다.
그 후 그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무리였던 정법성(丁法成)과 사승쌍(史僧雙)은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법을 범해 죽었다.
이에 법민은 『현험론(顯驗論)』을 지어서 인과를 밝히고, 아울러 『대도지경(大道地經)』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제자 승도(僧道)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승종(僧宗)
당시 시흥군(始興郡) 영화사(靈化寺)의 승종이라는 비구도 경론을 널리 섭렵하였다. 『법성론(法性論)』과 『각성론(覺性論)』이라는 두 논을 지었다.
21) 석도량(釋道亮)
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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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정림(靜林)·혜륭(慧隆)
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말릉령(秣陵令)이 보낸 것이다.”
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
22) 석범민(釋梵敏)
범민의 성은 이(李)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릴 때 관중·농서(壟西)지방에서 유학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팽성(彭城)과 사수(泗水) 지방을 두루 다녔다. 내외의 경서 모두를 마음의 구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만년에는 단양(丹陽)에서 쉬면서 자주 강설하는 법회를 세웠다. 사장(謝莊)·장영(張永)·유규(劉虯)·여도혜(呂道慧)가 모두 그의 도풍을 이어받았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서로 칭탄하며 존중하였다.
여러 번 『법화경』과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요의백과(要義百科)』에 서문을 써서, 간략하게 불교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은 이 한 권에 그친다. 구사한 내용에서 생략된 점이 보이지만 당시에 존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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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단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승약(僧籥)
당시 승약은 본래 상당(上黨) 사람이다. 『열반경』에 빼어나 장창(張暢)의 존중을 받았다.
23) 석도온(釋道溫)
도온의 성은 황보(皇甫)씨며,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이다.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알려졌다.
열여섯 살 때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여 수학하였다. 그 후 장안에 노닐어 다시 동수(童壽: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돌아와 양양의 단계사(檀溪寺)에 머물렀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번주(樊州)와 등주(鄧州)의 학도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오(吳)나라의 장소(張邵)가 양양에 주둔하자, 그의 아들 장부(張敷)도 따라왔다. 장부가 도온의 강론을 듣고서 돌아오자, 장소가 그에게 물었다.
“도온은 어떻더냐?”
장부가 대답하였다.
“논리의 해석은 세세한 것까지 분석하는구나 느꼈지만, 도에 깃든 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장소가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매우 빼어남에 고개 숙였다.
그 후 조용히 도온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만일 환속할 수만 있다면, 곧 별가(別駕) 벼슬로 대우하겠소.”
도온이 말하였다.
“시주께서는 형틀과 수갑으로 사람을 유인하시려 합니까?”
그 날로 그곳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 장소가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한탄하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내려왔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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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칙명으로 서울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노소(路昭) 황태후가 대명(大明) 4년(460) 10월 8일에 보현보살의 상을 조성하였다. 상이 완성되자 중흥사의 선방에 재를 마련하였다. 초청한 승려가 모두 2백 명이다. 이름을 열거해서 함께 모이게 하여, 사람의 수효를 일찍이 정해놓았다.
그 당시 절은 새로 지어 호위가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늦게 와서 자리에 앉았다. 풍채와 용모가 모두 청아하였기에, 온 법당의 승려들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재주(齋主)와 함께 백여 마디의 말을 나누고는 문득 사라졌다. 문을 지키는 이들을 샅샅이 검문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출입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신인(神人)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도온은 이미 승주였으므로 말릉(秣陵)의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 아뢰었다.
“황태후께서는 슬기롭게 비추어 보는 기운이 높고 밝으시어, 성스러운 상서로움이 그윽하게 적셨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생각을 씻어내고, 지극한 경계에서 옷깃을 가다듬으셨습니다. 본래부터 궁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시고, 일마다 부처님의 경계 밖에 허통하십니다[事虛梵表]. 마침내 처음으로 쇠를 녹이고 자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곧 신비하고 화려한 모습을 묘사하여, 보현보살이 오시는 모습의 성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주의 진귀한 보배를 기울여, 그 묘함은 하늘의 장식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련하신 재와 강론은 이 달 8일로 끝났습니다. 보시하신 모임에는 제한이 있고 명부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어서, 차례대로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니, 수효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돌아가며 경을 읽는 것이 절반 가량 진행되려 할 즈음에, 시각은 사시(巳時)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좌석 안에 참여하였습니다. 얼굴과 행동거지가 단엄하고 기개와 모습이 빼어나게 드러나, 온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재주(齋主)가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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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혜명(慧明)이라 합니다.’
‘어느 절에 주석합니까?’
‘천안사(天安寺)에서 왔습니다.’
말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송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생각을 숙연히 하였습니다. 이는 밝은 상서로움의 드러남이며, 보이지 않는 감응이 펼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붉은 묏부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화려한 누마루도 멀지 않습니다만, 대저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해[景]를 되돌려 놓고 달[緯]을 움직이며,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적은 바위를 일으키고 샘을 열게 한다.’
하물며 황제의 덕은 천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공은 온 백성을 흡족하게 적셔줍니다.
어진 정치로 먼 하늘 끝까지 밝히고, 이치로서 어둠의 세계 밖까지 뻗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상왕 때의 번성하던 선비들은 크게 밝은 조정을 보여줄 수 있었고, 신께서는 발심을 권유하는 오묘한 몸으로 황제의 방으로 나투었습니다.
만약 때맞추어 폐하가 바다 구석까지 지혜로 비추신다면, 그 빛남이 일월보다도 밝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을 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천복을 일으켜 끝없는 곳까지 드리우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천안사(天安寺)라 칭하였습니다. 신(神)의 기반이 더욱 멀리 이어지고 도의 정치가 바야흐로 응결되어, 온 천하가 태평하고 만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삼가 소속된 고을에 이 사실을 줄지어 이야기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서상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에서는 이 사실을 군(郡)에 말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의 공령부(孔靈符)는 이 사실을 표를 지어 나라에 아뢰었다. 이어 조서가 내려와, 선방을 고쳐서 천안사(天安寺)라 하여 상서로움을 기렸다.
그 후 도온은 여러 번 강의를 맡았다. 듣고 음미하는 손님이 강당을 메우고, 서로 마음을 기울였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하게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자주 신비한 이적(異跡)에 감응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뻐하여 돈 50만 냥을 하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제왕은 재물을 하사하고 도온은 법칙을 이끌어서, 저 위의 하늘에서 감동을 느껴 신령(神靈)한 덕을 내리셨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승경(僧慶)·혜정(慧定)·승숭(僧嵩)
당시 중흥사에 승경·혜정·승숭이 있었다. 모두 교리의 이해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승경은 3론(論)에 빼어나 당시 학도들의 종사가 되었다. 혜정(慧定)은 『열반경』과 아비담에 뛰어나서 역시 여러 번 으뜸가는 자리를 맡았다. 승숭도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그러나 말년에 편벽된 고집이 생겨 주장하였다.
“부처는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임종하던 날 혀의 뿌리가 먼저 썩었다.
24) 석담빈(釋曇斌)
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승만경』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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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 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담제(曇濟)·담종(曇宗)
당시 장엄사에는 담제·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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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
25) 석혜량(釋慧亮)
혜량의 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현량(顯亮)이다. 동아(東阿)의 도정(道靖)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맑은 명성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
“도정은 큰 스승이고, 혜량은 작은 스승이다.”
비록 나이와 명망에서는 도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풍과 규범은 그를 이어받았다.
그 후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과 『대품경』·『소품경』·『십지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니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했다.
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도안(道安)과 법태(法汰)는
전 시대에 주옥같은 말씀을 토해내고
담빈과 혜량은
후세에 금 같은 소리를 떨치니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
끊어지려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라.
安汰吐珠玉於前 斌亮振金聲於後
淸言妙緖將絶復興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장엄사(莊嚴寺)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 천 명을 가려내어 교열하였다. 황제의 칙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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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혜량과 담빈을 바꾸어가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당시의 종사로서 이들과 더불어 경합할 사람은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현통론(玄通論)』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26) 석승경(釋僧鏡)
승경의 성은 초(焦)씨이다. 본래는 농서(隴西) 사람으로, 오군(吳郡) 땅에 옮겨 살았다. 지극한 효도는 보통 사람을 넘었다.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죽자, 태수(太守)가 돈 5천 냥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간곡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스스로 흙을 지고 와서 소나무·잣나무를 심었다. 묘소에서 움막살이를 하면서 3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3년 상을 마치고 출가하여 오현(吳縣)의 화산(華山)에 머물렀다. 후에 관중·농서 지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법을 전수 받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경론을 펼쳤다.
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동해의 서담지(徐湛之)는 그의 소박한 풍모를 존중하여, 온 문중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 후 동쪽 고소(姑蘇)로 돌아가 다시 전념하여 종사의 자리를 맡았다.
대사(臺寺)의 사문(沙門)과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요청해서 1년 가량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동쪽 상우(上虞)의 서산(徐山)으로 가니, 따라간 학도들이 백여 명이었다.
교화가 삼오(三吳) 지방을 적셔 명성이 나라[上國]에까지 퍼졌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과도 편지로써 친교를 나누었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는 그의 소박한 도풍에 의지하였다. 칙명으로 서울로 나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자주 법회를 열자, 덕망 있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법화경』·『유마경』·「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와 아울러 『아비담현론(阿毘曇玄論)』을 지었다. 교리의 종류를 구별하여 일관된 조리가 있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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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륭(曇隆)
이에 앞서 상우의 서산(徐山)에 담륭 도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법석을 잘하였다. 만년에는 문득 고결한 절개가 보통을 넘었다. 역시 사령운의 존중을 받았다. 항상 함께 우승산(嶀嵊山)을 노닐었고, 죽은 후에는 사령운이 조문[誄]을 지었다.
27) 석승근(釋僧瑾)
승근의 성은 주(朱)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숨어사는 선비 주건(朱建)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노자』·『장자』와 『시경』·『예기(禮記)』를 잘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광릉(廣陵)에 이르러 담인(曇因) 법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도(道)를 위하여 조아려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두루 돌아다니며 내전(內典)을 배우고,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다.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 법사를 만났다. 다시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효무(孝武)황제가 칙명을 내려 상동왕(湘東王)의 스승이 되었다. 승근은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그를 따라 5계(戒)를 받기를 청하고, 매우 넉넉한 예우를 더하였다.
이에 앞서 지빈(智斌)이 초대 승정(僧正)인 담악(曇岳)과 교대하여 승정이 되었다. 지빈도 덕이 대중의 종사가 될 만 하였다. 삼론(三論)과 『유마경』·『사익경』·『모시』·『노자』와 『장자』 등에 빼어났다.
후에 의가(義嘉)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빈을 참소하여 말하였다.
“지빈은 의가를 위하여 도를 행했다.”
마침내 교주(交州)로 쫓아냈다.
이 때 상동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명제(明帝)이다. 승근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천하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법기(法伎) 일부와 친신자(親信者) 20명을 공급하고, 한 달에 돈 3만 냥씩을 지급하였다. 겨울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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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 등 사계절에 하사품을 내렸다. 아울러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하사하였다. 모든 외진(外鎭)에 명령하여 모두들 공여하라고 하니 승근은 사양하였다. 사방에서 받들어 헌납하면서 모두들 말했다.
“승정의 마음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그가 존중받았음이 이와 같았다.
승근은 돈을 감추어 두지 않는 성품이었다. 모두를 복 짓는 일에 채워 영근사(靈根寺)와 영기사(靈基寺) 두 절을 세워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명제의 말년에 이르러 황제가 자못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열반이나 멸도와 같은 번역은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모든 사망·환란·쇠약하고 머리가 희게 쇠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황제와 상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법을 범하여서 황제의 마음을 거슬려 살육을 당한 사람이 열에 일곱·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승근이 늘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니, 은혜와 예우도 엷어졌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황제의 장막에서 모셨다.
어느 날 승근은 주옹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요즘 행하시는 일은 절대로 임금다운 거동이 아닙니다. 속가의 일로써 풍자하고 간언하여도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오묘한 진리의 깊은 이야기야 더욱 멀기만 합니다. 오직 삼세(三世)의 괴로운 과보만이 가장 인정에 가깝고 절실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시주께서 혹 기회를 엿볼 인연이 있으시면, 바로 이것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후 황제가 중풍을 앓아 자주 침과 뜸을 더하였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이에 곧 주옹과 은홍(殷洪) 등을 불러 귀신과 잡스런 일에 관한 것 등을 말하게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고자 하였다.
주옹은 곧 『법구경(法句經)』과 『현우경(賢愚經)』 등 두 경을 익숙하도록 읽었다.
매양 알현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곧 말에 앞서 이 경들의 내용을 말하였다.
황제는 왕왕 놀라며 말하였다.
“응보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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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황제의 뜻에 거슬렸던 무리들이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이는 대개 승근이 인연이 되어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승근은 송(宋)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담도(曇度)
다시 담도가 승근의 뒤를 이어 승주가 되었다. 담도는 본래 낭야 사람으로 삼장과 『춘추』·『노자』·『장자』·『주역』에 빼어났다. 전송의 세조(世祖)·태종(太宗) 황제가 모두 흠모와 칭송을 더하였다.
그 후 젊은 황제가 예에 어긋나자, 담도도 행함과 감춤에 마땅한 바를 얻어, 거동이 황제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현운(玄運)
같은 절에 또 현운이 있었다. 그도 대·소승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장영(張永)과 장융(張融)이 모두 승당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28) 석도맹(釋道猛)
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소승·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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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도견(道堅)·혜란(慧鸞)·혜부(慧敷)·혜훈(慧訓)·도명(導明)
그 후 도견·혜란·혜부·혜훈·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
29) 석초진(釋超進)
초진의 성은 전욱(顓頊)씨며, 장안 사람이다. 확고한 지조가 있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돈독하여,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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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를 더하였다. 정신과 성품이 온화하고 기민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명성을 관중 지방에 떨쳤다.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하고 어지러워져서 불법의 일도 피폐해졌다.
이 때 초진은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더욱 경문의 뜻을 정밀하게 찾아보고 강설을 열었다. 얼마 후 초진은 고소(姑蘇)로 가서 다시 불법을 널리 폈다.
당시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그의 고상한 풍모에 깊이 의지하고자, 곧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여 산음(山陰)의 영가사(靈嘉寺)로 편안하게 모셨다. 이에 절동(浙東)에 머물면서 강론을 이어갔다. 그러니 고을과 외곽의 비구·비구니 및 청신도의 남녀들이 모두 보살의 인연을 맺고, 계율의 모범에 조아려 가슴에 새겼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부름을 받고 서울로 나아갔다. 『대법고경(大法鼓經)』을 강의하였다. 잠시 뒤 다시 회계로 돌아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해 나아갔다.
『대열반경』이 궁극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생각에 남겨 두어 머뭇거리다가, 여러 번 강설을 더하였다.
무릇 재(齋) 모임을 결성하는 사람치고 반드시 초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다른 곳에 먼저 가기로 허락한 경우가 있으면, 곧 날짜를 옮겨서 재를 열었다. 그 후 노쇠하여 다리에 병이 생겼다. 외부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음식을 방으로 보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기를 바랐다.
초진은 성품 됨됨이가 경전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다. 보고 찾는 데 지극히 간절하였다. 늙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제자를 시켜 열흘에 한 번씩 『열반경』을 소리 높여 읽게 하였다. 그가 경전을 탐독하고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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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기(曇機)
당시에 또 담기 법사가 있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며, 역시 장안 사람이다. 관중에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자, 그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회계 고을에 이르렀다. 『법화경』과 아비담에 빼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종사로 받들어서 초진과 서로 버금갔다.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유곤(劉琨)이 초청하여, 고을 서쪽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본래 유곤의 조부인 유회(劉薈)가 창건한 절이다.
∙도빙(道憑)
당시에 도빙도 세상에서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집착하는 성품이 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그를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0) 석법요(釋法瑤)
법요의 성은 양(楊)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만 리 밖이라도 찾아가 물었다.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에 연주(袞州)와 예주(豫州) 지방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끝까지 꿰뚫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외의 다른 경전[異部]에도 뛰어났다.
그 후 동아(東阿)의 도정(道靜)이 그의 강론을 들었다. 대중들이 여러 번 다시 강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정은 한탄하였다.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 후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오흥(吳興)의 심연지(沈演之)가 특별히 깊이 그릇이라고 존중하였다. 초청해서 오흥(吳興)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로 돌아왔다.
시종 19년 동안 기원하기를 요청하는 법사가 아니면,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강산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강론을 열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삼오(三吳)의 학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에 『열반경』·『법화경』·『대품경』·『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대명(大明) 6년(462)에는 황제가 오흥군(吳興郡)에 칙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서울로 오르게 하였다.
도유(道猷)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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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각기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르자마자 곧 강석에 나아갔다. 황제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다.
법요는 나이가 비록 노년이 되어서도 거친 음식과 고난 속에서 굳건한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계율을 지키는 절도가 청백하였기에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담요(曇瑤)
당시 전송 희제(熙帝) 때에 담요가 있었다. 『유마경』·『십주론(十住論)』및 『노자』와 『장자』에 빼어났다. 또한 초서·예서에 솜씨가 있어, 전송의 건평(建平)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의 존중을 받았다.
31) 석도유(釋道猷)
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혜관이 대답하였다.
“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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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生公孤情絶照 猷公直轡獨上
可謂克明師 匠無忝徽音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도자(道慈)
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혜정(慧整)·각세(覺世)
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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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32) 석혜통(釋慧通)
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원찬(袁粲)이 『거안론(蘧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그는 『대품경』·『승만경』·『잡심론』·『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駮夷夏論)』·『현증론(顯證論)』·『법성론(法性論)』·『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고승전 제8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 ⑤
1) 석승연(釋僧淵)
승연의 본래 성은 조(趙)씨이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위(魏)나라 사공(司空) 조엄(趙儼)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불교 교리만을 공부하였다.
처음 서주(徐州)에서 노닐다가 백탑사(白塔寺)에 머물렀다. 승숭(僧崇)으로부터 『성실론』과 아비담을 전수받았다. 배운 지 3년이 안되었으나, 그 공업은 10년 배운 사람을 뛰어넘어 슬기로운 이해력의 명성이 멀고 가까운 지방에 치달렸다.
승연은 고상한 자태가 크고 우람하여 허리띠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정신과 기개가 맑고 넉넉하며, 자유자재하여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은둔하는 선비 유인지(劉因之)가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승연에게 주어 정사로 삼았다.
∙혜기(慧記)·도등(道登)
담도(曇度)·혜기·도등도 모두 승연으로부터 수업 받았다. 혜기는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고, 도등은 『열반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모두 위왕(魏王)·원굉(元宏)의 존중을 받으면서 위나라에 명성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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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은 위조(僞朝)의 태화(太和) 5년(481)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8세이다. 이때는 바로 제(齊)나라의 건원(建元) 3년(481)이다.
2) 석담도(釋曇度)
담도의 본래 성은 채(蔡)씨이며, 강릉(江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건하여 행동거지를 삼가고, 평소 계율의 모범으로 칭송을 받았다. 마음이 민첩하고 슬기로워 꿰뚫어 보는 안목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그 후 서울에 유학하여 두루 많은 경전을 꿰뚫었다. 『열반경』·『법화경』·『대품경』·『유마경』에 대하여 모두 미세하게 숨어있는 뜻을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일어났다.
이어 각기병 때문에 서쪽으로 노닐다가, 마침내 서주(徐州)에 이르러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다시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끝내 이 논에 정통한 당시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위(魏)의 임금인 원굉(元宏)이 그의 도풍을 듣고, 멀리서 머리 숙여 사신을 보내 모시기를 청하였다. 평성(平城)에 이르자마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원굉이 공경을 표하여 아랫자리에 앉아 몸소 진리의 맛을 관장하였다.
이에 위나라의 서울에 머물며 불법 교화를 이어나갔다. 배우는 무리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위위(僞魏) 태화(太和) 13년(489)에 위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곧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성실론대의소(大義疏)』 8권을 지었는데 북쪽 나라에서 성대히 전한다.
3)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왕(王)씨이며, 여요(餘姚) 사람이다. 건업(建鄴)에 머물러 살았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고,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열네 살이 되어 여산 혜원(慧遠)의 문집을 읽었다. 마침내 안타깝게 탄식하면서,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하였다. 마침내 친구인 지순(智順)과 함께 천 리 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혜원의 유적을 구경하였다. 이에 여산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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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西寺)에 머물면서 3년 동안 두로 섭렵하였다. 이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에 왕혹(王或)이 3상(相)의 뜻을 말하면서 크게 학승을 모았다. 도혜는 그 때 17세였다. 그러나 몇 번 질문하는 말이 현미하며, 따지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대중들이 모두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도맹(道猛)·도빈(道斌) 두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어느 날 도맹이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장융(張融)이 어려운 질문을 몇 겹으로 겹치게 하자, 도맹은 병을 핑계로 그 많은 질문을 받을 수 없다 하였다. 곧 도혜로 하여금 이것에 대답하게 하였다. 장융은 이 때 도혜의 나이가 적으므로 자못 가볍게 보는 마음을 품었다. 도혜는 기회를 틈타 날카로움을 꺾었으며, 말하는 것마다 반드시 이치에 닿았다. 이렇게 말을 주고받음이 거듭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났고,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계속되는 강설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황을 이뤘다. 그는 내용의 종류를 구별하여 처음으로 단(段)·장(章)을 만들었다.
저징(褚澄)·사초종(謝超宗)은 당시 명망이 두터운 인물들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모두 추대하고 예우하였다.
도혜는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봉양할 밑천을 남겨드리고자 마침내 자리를 장엄사(莊嚴寺)로 옮겨가 쉬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을 어여삐 생각해 다시 출가하여 도를 위했다. 집을 희사하여 복전으로 삼았다. 이곳은 도혜의 정사와 멀지 않았다.
도혜는 제의 건원 3년(481)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31세이다. 임종에 사람을 불러 털이개를 가지고 오게 하여 친구인 지순(智順)에게 물려주었다. 지순이 통곡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 40세에도 이르지 못하다니 가슴 아픈 일이로다.”
그러고는 털이개를 관(棺) 속에 넣어 염하고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진군(陳郡)의 사초종은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었다.
∙현취(玄趣)·승달(僧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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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엄사의 현취·승달도 모두 경학의 이해로 칭송을 받았다. 현취는 많은 경전에 두루 빼어나고, 아울러 내외의 학문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게다가 석상의 토론에 빼어나 그 도풍과 법도는 기뻐할 만한 것이었다. 승달은 어려서부터 머리털이 하얗게 희어, 당시 사람들이 백두달(白頭達)이라 불렀다. 그 역시 많은 경전을 널리 해득하였다.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데 더욱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에 거슬려 장사(長沙)로 쫓겨났다.
4) 석승종(釋僧鍾)
승종의 성은 손(孫)씨이며, 노군(魯郡)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가난하게 살면서 도를 실천하였다. 어느 날 수춘(壽春)에 이르렀다. 승도(僧導) 법사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초군(譙郡)의 왕업(王鄴)이 그의 지조를 존중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고, 후에 초청하여 『백론(百論)』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도 법사가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는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후생이 두렵다는 말이 진실로 빈 말이 아니군요.”
승종은 미묘하게 『성실론』·3론·『열반경』·『십지론』 등에 빼어났다. 그 후 남쪽 서울로 노닐다가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의 초기에 위(魏)나라에서 이도고(李道固)를 사신으로 보내서 그를 초빙하였다. 때마침 절 안에서 있었다. 승종이 공덕과 명성이 있다 하여, 황제가 칙명으로 이도고와 응대하게 하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흘러가도 말에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해 그림자가 조금씩 기우는데도 승종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이도고가 물었다.
“왜 먹지 않는가?”
“예전 불도의 법에는 오시(午時)가 지나면 먹지 않았습니다.”
이도고가 말하였다.
“어떻게 소리로 들은 것[聲聞]만 갖고 일삼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소리로 들어 득도(得度)한 사람은 짐짓 성문승(聲聞僧)으로 나타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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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명답(名答)이라 하였다.
그 후 그곳에서 소요하며 강설하니, 묻고 듣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제의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자주 청하여 남쪽으로 얼굴을 두어 앉았다.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담참(曇懺)·담천(曇遷)·승표(僧表)·승최(僧最)·민달(敏達)·승보(僧寶)
당시 승종과 명성을 나란히 하며 덕도 비슷한 이로 담참·담천·승표·승최·민달·승보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문선(文宣)왕이 존경하여 번갈아가며 강석을 일으켰다.
5) 석도성(釋道盛)
도성의 성은 주(朱)씨이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배움에 힘써서 『열반경』·『유마경』에 빼어나며, 아울러 『주역』에도 뛰어났다. 처음에 상주(湘州)에 주석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가 그의 도풍을 듣고는 칙명을 내렸다.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사초종(謝超宗)은 그를 한 번 만나보고는 마침내 스승의 예로 존경하였다. 이어 『술교론(述交論)』 및 『생사본무원론(生死本無源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에서 쉴 때 제(齊)의 고제(高帝)가 칙명을 내려, 담도(曇度)와 교대하여 승주(僧主)로 삼았다.
단양윤(丹陽尹) 심문계(沈文季)는 평소 도교(道敎)를 받들고, 부처님을 배격하고 질시(嫉視)하였다. 마침내 부승국(符僧局)에 건의하여 승려의 승적(僧籍)을 책문하여, 비구와 비구니를 가려내서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성이 기강있게 이끌어 공적이 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이 건의는 잠잠해져 편안해졌다.
그 후 문계(文季)가 천보사에 모임을 마련하여, 육수정(陸修靜)으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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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도성과 논의하게 하였다. 도성은 이미 이론에서 그보다 앞서 있었다. 게다가 말과 기개가 우뚝 드러나, 조롱과 해학을 주고받아 말하면서도 잠시도 어지러운 기색이 없었다. 육수정은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어 부끄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도성은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6) 석홍충(釋弘充)
홍충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지조와 힘이 있었다. 『노자』와『장자』에 뛰어나며 경전과 율법을 해득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의 말기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처음에는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어려운 질문에 빼어나 고승들이 대부분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그가 법석을 열면서부터 날카로운 공격들이 번갈아 일어났다. 홍충은 이미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말주변은 하늘에서 내려준 뛰어난 솜씨였다. 그런 까닭에 의문을 통하게 해주고, 막힌 것을 풀어주어 빈틈이 없었다. 매양 『법화경』과 『십지론』을 강의할 때마다 청중이 강당을 메웠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江夏)의 문헌왕(文獻王) 의공(義恭)도 평소 그를 존중하였다.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상궁사(湘宮寺)를 세워 홍충을 초청하여 강령으로 삼았다. 이에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법선(法鮮)
당시 상궁사의 법선도 총명하고 비상한 사고력이 있었다. 홍충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홍충은 제(齊)의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문수문보리경(文殊問菩提徑)』과 『수능엄경(首楞嚴徑)』에 주석을 달았다.
7) 석지림(釋智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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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림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도량(道亮)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숭상하고 배움을 좋아하여, 책 보따리를 걸머지고 장안으로 나갔다. 강주(江州)·예주(豫州) 지방에 지팡이를 떨치면서, 뭇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캤다. 특히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그 후 도량이 배척당하자, 제자 열두 사람이 모두 그를 따라 영외(嶺外)로 나갔다. 이에 지림은 곧 발걸음을 번우(番禺)에 멈추어, 바닷가 마을을 맑게 교화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가 있던 곳에 칙명을 내려, 노자를 지급하였다. 서울로 내려와 영기사(靈基寺)에 머물렀다.
강설을 이어가니, 묻고 감복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2제(諦)의 내용에 3종(宗)의 다른 점이 있음을 밝혔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도 또한 『삼종론(三宗論)』을 지었다. 이미 그것은 지림의 생각과 서로 부합되어, 깊이 흐뭇한 위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곧 주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근간에 시주께서 2제의 새로운 뜻을 서술하고, 3종에서 취하고 버릴 점을 진술하여, 그 명성이 보통 음률과 다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남을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는 빠르지 않다 해도, 그 내용은 빈도가 품었던 생각과 같습니다. 천하의 이치라 할 만한 것은 오직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속히 이것을 종이와 붓으로써 짓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요즘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을 만나 지은 논문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두루 충만하여, 특별히 비상하게 중히 여겼습니다.
또 들었습니다. 시주께서는 혹 현세의 이론과 다른 이론을 내세울 경우, 학인·대중들의 생각을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비록 논문을 짓는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결코 반드시 세상에 내놓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누웠다 안절부절합니다.
이 논의 취지는 처음 개진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미묘한 가르침이 도중에 단절된 지 67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론이 보통 운치보다 높아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 스무 살 때 분수에 넘치게 이 논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의지하여 미미하게라도 깨달으면, 득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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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하였습니다. 가만히 매양 환희에 젖어 있지만, 이 기쁨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장안의 나이 드신 승려들을 만나면, 흔히 관중의 도가 높고 뛰어난 승려 가운데, 옛날에는 이러한 논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불법이 결집되는 성대할 때를 맞아, 이 취지를 깊이 터득한 사람은 본래부터 많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심정을 뛰어넘는 이론인지라, 후진들 중에도 이를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매우 적었습니다. 이를 전하여 강남 지방으로 넘어가게 한 사람은 아예 없었습니다.
빈도는 털이개를 손에 잡은 이래로 지금까지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동이니 서니 이쪽저쪽에서 강설하여, 한 시대의 존중을 그릇되게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 이외의 계통들은 자못 이런저런 가르침이나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길만은 도인과 속인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그 취지를 터득한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가 들면서 마침내 이것 때문에 병이 생겼습니다. 이미 병들고 노쇠한 말년의 목숨인데다, 또 아침저녁 사이에 서쪽으로 돌아가야 할 몸입니다. 다만 이 도를 되돌아볼 때마다, 지금부터는 영원히 단절되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시주께서 기연을 일으키어, 유래 없이 홀로 세상의 테두리 밖에서 이 논리를 제창하셨습니다. 뜻밖에도 이 소식이 찾아와, 외람되게 저의 귀까지 들어왔습니다. 한편 기쁘고 한편 위안이 되어, 실로 무어라고 정황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논리를 세워 밝힌다면, 전법의 등불에 유종의 미가 있을 것입니다. 비로소 이것은 진실한 도의 실천으로 제일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부처님과 승단에 보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얻는 복덕과 이익은 이 공덕으로 얻는 복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다행스럽게도 생각을 궁극적으로 가려내어 기술하셨으니, 마땅히 널리 베풀어 말씀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셔야 합니다. 법의 이론을 논하고 밝혔으니, 어진 일을 만나기를 사양하지 마십시오. 어찌 대중들의 마음을 돌아보고 아낌으로써, 기특한 취지를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이 논을 이미 이루었으면서도 마침내 다시 중간에서 잠재운다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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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장래에 혹시 이 일 때문에 커다란 장애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제가 앞에서 한 말들은 간절한 말이며,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생각건대 곧 한 권을 베껴 쓰게 하여 이 빈도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다면, 이것을 갖고 서쪽으로 돌아가 곳곳에 널리 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조금 몸을 끌고 다닐 만하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 서술하여 깊이 이를 부탁드리고자 꾀했습니다.”
주옹(周顒)은 이로 인하여 논을 출판하였다. 그런 까닭에 3종의 취지가 전술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지림은 키가 8척이나 되고, 타고난 자태가 아름답고 우아하였다. 법좌에 오르면 부르짖는 소리가 법당을 쩌렁쩌렁 울렸고, 토해내는 이야기는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그 후 서울을 떠나 고창(高昌)으로 돌아갔다. 제(齊)의 영명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이제론(二諦論)』과 『비담잡심기(毘曇雜心記)』를 지었다. 아울러 『십이문론(十二門論)』과 『중론(中論)』 등에 주석을 달았다.
8) 석법원(釋法援)
법원의 성은 신(辛)씨이고, 농서(隴西) 사람이다. 신비(辛毘)의 후예이다. 맏형인 신원명(辛源明)은 위위(僞魏)에 벼슬하여 대상서(大尙書)가 되었다. 둘째 형인 법애(法愛)도 사문이 되어 경론을 해석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예예국(芮芮國)의 국사가 되어 3천 호의 봉록을 받았다.
법원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우뚝 뛰어나 뭇 아이들과 달랐다. 길에서 가난하여 추워 떠는 사람을 만나면, 곧 옷을 벗어 베풀어 주었다.
처음 출가하여 양주(梁州)의 사문 축혜개(竺慧開)를 섬겼다. 혜개는 아름다운 덕이 신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가 초과(初果: 須陀洹果)를 터득했다고 일컬었다.
혜개가 법원에게 말하였다.
“네 마음의 슬기로움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말세 교화의 강령이 되고 총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힘을 아끼지 말고 널리 견문을 넓혀, 홀로 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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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만을 힘써서는 안 된다.”
이에 그는 혜계에게서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연(燕)·조(趙)를 거쳐 업성(鄴城)과 낙양(洛陽)을 오가면서 수행하였다. 마침 오랑캐들이 종횡무진 날뛰어, 관중과 농서지방이 가마솥에 물 끓듯 시끄러운 때를 만났다. 법원은 험난함을 무릅쓰고 위태로운 길을 밟아가며, 학업에 게으름이 없었다.
원가(元嘉) 15년(438) 양주로 돌아왔다가, 곧 성도(成都)로 나아갔다.
그 후 동쪽 건업(建鄴)으로 갔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을 의지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뜻을 대승의 경전에 도탑게 하고, 한편으로 논리를 따지는 것을 탐구하였다. 또한 불경 외의 고전들도 자못 펼쳐 보았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들어가 고요함을 지켰다. 선(禪)을 맛보면서 생각을 5문(門)에서 맑게 하고, 마음을 3관(觀)에서 노닐었다. 얼마 후 자사(刺史) 유등지(庾登之)가 초청하여 산을 나가 강설하였다.
그 후 문제(文帝)가 도생(道生)의 돈오(頓悟)의 논리를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칙명으로 서울로 내려가니, 돈오의 취지가 송대(宋代)에 거듭 밝혀졌다.
하상지(何尙之)가 그의 강의를 듣고 감탄하였다.
“도생이 죽은 후에는 미묘한 말씀이 영원히 끊어졌다고 늘 생각하였다. 오늘 다시 생각 밖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하늘이 아직 불교를 없애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황제는 칙명으로 남평목왕(南平穆王) 유삭(劉鑠)을 위해 5계를 내려주는 스승이 되도록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칙명으로 서양왕(西陽王) 자상(子尙)의 벗이 되었다.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감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이를 면할 수 있었다. 이어 방산(方山)에 집을 마련하여 『승만경(勝鬘徑)』과 『미밀지경(微密持徑)』에 주석을 달았다. 논의하다 틈이 나면, 때때로『효경(孝經)』과 상복(喪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의 구조를 고치고, 법원을 초청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산을 떠나 고을로 나와서, 절의 기강을 맡는 강유(綱維)가 되었다. 자사(刺史) 왕경문이 찾아가서 문안을 드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바로 법원이 상복제도를 강의하는 시간을 만나서, 몇 번 묻고 토론하고는 훌륭하다고 하면서 물러갔다.
명제(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지어 새로 절이 이룩되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미묘하게 영준한 승려를 가려내고, 칙명으로 법원을 초청하여 법주(法主) 자리를 맡겼다. 이어 황제가 법석에 참석하고, 공경대부들도 자리에 모였다. 한 시대의 성대한 일인지라 보는 이들마다 영화롭게 여겼다.
그 후 제(齊)의 문혜왕(文惠王)이 또 초청해서 영근사(靈根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절로 자리를 옮겼다.
태위(太尉)인 왕검(王儉)은 번잡한 교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법원에 대한 대우만은 스승과 같이 하여, 글과 말에 공경을 다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법상(法常)·지흥(智興)
당시 영근사에 또 법상과 지흥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두루 뛰어나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법상은 극렬하게 담판 짓기에 몹시 빼어나서, 당시 이름난 이들마저 꺼려했다. 게다가 성품까지 매우 강경하여 사람들의 풍속과 어울리지 못했다.
9) 석현창(釋玄暢)
현창의 성은 조(趙)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가문이 오랑캐들에게 멸문당하여, 화가 곧 현창에게까지 미쳤다. 오랑캐의 장수가 현창을 보고는 제지시켰다.
“이 아이는 눈빛이 밖까지 쏘아보는구나.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이어 곧 양주(凉州)로 가서 출가하였다. 본명은 혜지(慧智)이다. 그 후 현고(玄高) 법사를 만나서 섬겨 제자가 되었다. 현고는 늘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반드시 함께 상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현창이라 고쳤으며, 이것으로 현고가 부촉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 후 잔악한 오랑캐들이 불법을 잘라 멸망하게 하고 모든 사문들을 해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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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오직 현창만은 달아날 수 있었다. 원가(元嘉) 22년(445) 윤 5월 17일 평성에서 출발하였다. 도중에 대군(垈郡)·상곡(上谷)을 경유하여, 동쪽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었다. 도중에 유주(幽州)·기주(冀州)를 거쳐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곧 맹진(孟津)에 이르렀다.
오직 손에는 한 다발의 버들가지와 한 움큼의 파 잎사귀를 쥐었을 뿐이다. 오랑캐의 기병들이 추격하여 뒤쫓아 와서, 곧 그의 몸까지 이르렀다. 곧 그가 버들가지로 모래를 쳤다. 모래가 일어나면서 하늘이 어두워져, 사람과 말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얼마 후 모래가 가라앉고 기병들이 다시 그의 가까이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오직 파 잎사귀를 콧구멍 속에 넣어 공기를 통하게 하고 강물을 건넜다. 8월 1일에 양주(楊州)에 도
달하였다.
경전과 율법을 환하게 깨우치고, 깊이 선(禪)의 요체에 들어갔다. 길흉을 점쳐서 예언하면, 참으로 영험하여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그 밖에 많은 고전들과 제자백가(諸子百家)도 대부분 해박하게 섭렵하였다. 심지어 세간의 기술과 잡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과거 『화엄경』의 대부(大部)가 글 뜻이 넓고 멀어서, 아주 먼 옛날부터 해석을 제대로 베푼 것이 없었다. 이에 현창은 곧 생각을 다하여 연구하고 탐색하며, 장구를 들고 비교하였다. 강설로 전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는 현창이 그 시초가 된다. 또한 그는 3론(論)에 빼어나 학자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전송의 문제가 깊이 찬탄과 존중을 더하여 초청해서 태자의 스승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가 두 번 세 번 굳게 사양하니,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는 도를 넓히고 중생을 제도하여 불교를 널리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지금 제왕이 자기 마음을 비우고 초청하였습니다. 황태자도 예를 갖추어 공경하기를 생각합니다. 만약 도로써 성스러운 임금을 드높인다면, 사해가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지금 우뚝이 높이 앉아 사양만 하신다면, 장차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현창은 말하였다.
“이 일은 지혜 있는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속인들과는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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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어려운 일이니라.”
태초(太初)의 사고가 일어나자, 비로소 그가 먼저 알고서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였음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옮겨 형주에서 쉬다가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공덕직(功德直)이 『염불삼매경(念佛三昧徑)』 등을 번역하였다. 현창이 그 문자를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글 뜻이 매끄럽고 절묘하였다.
또한 그는 손을 펴면 향기가 감돌고, 손바닥 안에 물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말년에 이르자 곧 배를 띄워 멀리 거동하여 서쪽 성도(成都)로 갔다. 처음에는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곧 손수 그림을 그려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장상(神將像)을 만들었다.
승명(昇明) 3년(479)에 이르자 다시 서쪽 경계로 노닐었다. 민령(岷嶺)을 멀리서 구경하고, 이어 민산군(岷山郡)의 북부 광양현(廣陽縣)의 경계에서 제후산(齊后山)을 보았다.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이어 바위를 의지하여 골짜기를 옆에 둔 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다. 제자인 법기(法期)가 신인(神人)이 말을 타고 푸른 홑옷을 입고, 산을 한 바퀴 돈 다음 돌아와 탑을 조성할 자리를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제(齊)의 건원(建元) 1년(479) 4월 23일에 사찰을 건립하고 이름을 제흥사(齊興寺)라 지었다. 바로 이 날이 제의 태조황제가 천명(天命)을 내려 받던 날이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만 리 떨어진 먼 곳에서 일치한 것이다.
당시 부염(傅琰)이 서쪽 성도에서 주둔하였다. 현창의 도풍과 법도를 흠모하여 스승으로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현창은 절을 세운 뒤에 곧 부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빈도가 형주(荊州)에 깃든 것이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노쇠하고 병은 오래되었으며, 독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싫었습니다. 그 까닭에 멀리 민산의 경계에 몸을 의탁하여, 이 언덕을 집터로 삼았습니다.
이곳은 광양현의 동쪽에 있으며, 성과의 거리가 천 걸음입니다. 구불구불한 길이 길게 뻗어 중첩한 잿마루와 이어진 곳으로, 잿마루는 네 곳의 개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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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을 이루었습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뻗어서 고을과 성곽을 품속에 안고, 세 방면을 돌아가며 바라볼 수 있습니다. 높은 산봉우리를 등에 얹어, 멀리 아홉 갈래 물줄기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지난해 4월 23일에 처음으로 준공하여 삼태기를 엎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이곳에 이른 방문객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이 바로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날이라 하였습니다.
무릇 들었습니다.
‘도가 태극과 배합하면 아름다운 상서[嘉瑞]가 저절로 나타나고, 덕이 양의(兩儀)와 같으면 신의 감응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하도낙서(河圖洛書)1)에는 주(周)나라가 천하를 가질 조짐이 있었고, 영석(靈石)에는 대진(大晋)의 징조가 표시되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이 산이 징험에 부합되는 것도 어찌 제나라 황제의 신령한 감응이 아니겠습니까?
시주께서 나라를 받드는 정이 깊으시어, 천운이 속하는 시대라는 징조가 있게끔 이르게 한 것을 마음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이 일을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문득 산찬(山贊) 한 편을 지어 어리석은 회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산찬에서 찬한다.
우뚝한 제나라며 이곳의 산이여,
숨겨진 상서로움은 그 어느 옛날인가.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탄생하였네.
황제의 호칭으로 밝아졌어라.
묏부리 성스런 공간을 실어
1) 하도란 중국 복희(伏羲)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점의 그림을 말한다. 낙서란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점의 글씨를 말한다. 하도와 낙서는 『주역(周易)』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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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복된 조짐 드러낸 아름다운 이름
묏부리 구름은 평탄하고
뫼에 서린 노을은 화평하다.
바위 다듬어 절을 지으려고
재고 묶고 하였더니
처음 일 시작하는 날
자미궁(紫微宮)의 용 날랐어라.
도는 천지와 짝 이루어
사해가 고루 맑아졌으니
하늘과 함께 할 왕조의 운세
묏부리 신령함을 드러내었네.
峨峨齊山 誕自幽冥
潛瑞幾昔 帝號仍明
岑載聖宇 兆祚休名
巒根雲坦 峰岳霞平
規巖擬刹 度嶺締經
創工之日 龍飛紫庭
道侔二儀 四海均淸
終天之祚 岳德表靈
부염이 곧 자세히 표를 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100호의 조세를 줄여, 현창의 봉록으로 공급하였다.
제의 표기장군(驃騎將軍)인 예장왕(豫章王) 의(嶷)가 형주(荊州) 삼협(三峽)에 주둔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하남(河南) 토곡혼(吐谷渾)의 임금도 멀리서 마음으로 경모하다가, 마침내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 제산(齊山)에서 영접하려 하였다. 이미 동쪽으로 간 후라서 서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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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였다.
제의 무제(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사도(司徒)인 문선왕 유계(劉啓)가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문혜(文惠)태자도 사람을 파견하여 불러 영접하였다. 이렇게 이미 칙령이 중첩하자 사양했으나, 이를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병이 나서 병을 지닌 채 서울에 이르니, 성이 기울 만큼 대중이 길을 막고 바라보았다.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이 해는 제의 영명(永明) 2년(484) 11월 16일이다. 곧 종부(鍾阜) 독룡산(獨龍山) 앞에 묻었다. 임천(臨川)의 헌왕(獻王)이 비를 세우고,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비문을 지었다.
10) 석승원(釋僧遠)
승원의 성은 황(皇)씨이며, 발해(渤海)의 중합(合)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북쪽 나라의 황보(皇甫)씨이다. 바다 모퉁이로 피난 온 까닭에, ‘보(甫)’자는 없애고 황(皇)자만 남겨 성씨로 삼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겨 나이 열여섯에 출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푸성귀를 먹으며, 새벽에서 밤까지 참회와 독송을 그치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 비로소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당시 사문 도혜(道慧)가 높은 재주와 빼어난 덕으로 명성이 높아, 바다와 태산을 덮을 정도였다. 승원은 그를 따라 수학하였다.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게 밝고, 대승과 소승을 꿰뚫었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양자강을 건너서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승명(昇明) 연간(477~479)에는 소단양(小丹陽)의 우락산(牛落山)에 정사를 세워, 용연정사(龍淵精舍)라 이름 지었다.
승원은 나이 서른한 살 때 비로소 청주(靑州)의 손태사(孫泰寺)에서 남쪽에 얼굴을 두어 강설하였다. 말과 논리가 맑고 유창하며, 풍채와 용모가 빼어나게 반듯하였다. 앉아서 강설을 듣는 4백여 명의 사람이 기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은 재능이 당세에 희귀한 인물이었다. 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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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평소의 도풍을 듣고는 초청해서 중조사(衆造寺)에 머물렀다.
승원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자기 몸을 위해 남겨두는 재물이 없었다. 현소(玄紹)라는 비구가 늘 돈과 패물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승원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한번은 청원(靑園)으로 가다가, 마을 안에 당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들을 찾아갔다.
시체와 함께 병을 앓은 사람도 몇 사람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승원은 깊이 가슴이 아프고 슬픈 생각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인하여 마을에서 구걸하며 죽은 사람들을 염하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니, 참으로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전송의 신안(新安) 효경왕(孝敬王) 유자란(劉子鸞)이 자기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인, 은귀비(殷貴妃)를 위하여 신안사(新安寺)란 절을 지었다. 세 고을에서 영명하고 현철한 이들을 선발하여 초청하도록 명하였다.
승원은 소산사(小山寺)의 법요(法瑤)와 남간사(南澗寺)의 현량(顯亮)과 함께 부름을 받았다. 모두가 승원을 추천하여 우두머리로 삼게 하였다.
대명(大明) 6년(462) 9월에 담당 관리가 나라에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는 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웅크리는 사람에게, 크게 빼어난 공덕을 기대할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먹 쥐고 꿇어앉아 땅에 납작 엎드린다고, 어찌 그것만이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장차 사방을 밝게 열어 펼치고, 팔방을 묶어 제어하여야 합니다. 그 까닭으로 비록 유교와 법가의 지파라든가, 명가나 묵가의 조류라 할지라도, 어버이를 숭상하고 윗사람에게 엄숙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 실마리에 어김이 없습니다.
오직 불교만이 그 가르침의 유래가 임금의 아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종지가 아득히 멀고 미묘한 말씀이 깊은지라, 글에 구애되면 도를 가리므로, 말세가 되어서는 더욱 이런 현상을 부채질합니다. 마침내 나라의 모범적인 제도를 능멸하고 뛰어넘어, 존귀한 왕족에 대해서도 누워서 대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방편을 따르는 묘한 자취를 잃고, 제도와 교화의 깊은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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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헛갈리게 합니다.
무릇 불법이란 겸손함과 검약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은혜로움과 경건한 마음으로 도를 위합니다. 불경비구(不輕比丘)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절하고, 목련(目連) 사문도 어른을 만나면 예를 올렸습니다. 어찌 사부대중에게는 무릎을 꿇으면서 양친에게 절을 생략하거나, 나이 많은 승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만승천자에게는 곧바로 마주 꼿꼿하게 서 있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까닭에 함강(咸康) 연간에 처음 논의를 제기하고, 원흥(元興) 연간에 이를 이어받았으나, 편파적인 무리들에게 굴복당하여 남아 있던 도마저 좌절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원천의 물이 먼 곳까지 씻어내어 뭇 흐름이 거울처럼 우러러보며, 아홉 신선이 보물을 선사하고 온갖 신이 직분을 따릅니다. 그런데도 궁성 가까이 있는 곳에서마저 신하의 예를 거부하는 백성이 포함되어 있고, 제왕의 섬돌과 자리 사이에도 예법에 항거하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범되는 위엄을 투명하게 하나로 통일하여, 큰 법칙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두렵습니다. 저희들은 논의하여 승려들이 접견할 때도 모두 마땅히 경건한 예의와 공경하는 모습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본래 풍속에 의하면 아침 예불에도 차례가 있거니와, 대승의 방편에서는 불교에서 먼 곳까지도 아울러 겸한다고 합니다.”
황제는 비록 자못 불법을 믿기는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스스로 교만하고 방종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주문이 올라가던 날, 곧 조서를 내려 재가[可]하였다.
승원은 이때 탄식하였다.
“내가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된 것은, 본래 출가하여 도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제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날로 병을 핑계대고 사퇴하였다. 이어 자취를 상정림산(上定林山)에 숨겼다.
경화(景和) 연간(465)이 되어 이 제도가 점점 가라앉자, 옛 법[舊章]으로 되돌려 따랐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승원을 초청하여 스승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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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룰 수 없었다. 그 후 산에 살면서 자취를 감춘 손님들과, 세간에 오만하여 구름 밖에 사는 선비들이, 그의 산문을 찾아와 우러르고, 그의 선실에 공경함을 펼쳐 마지않았다.
여산의 하점(何點)·여남(汝南)의 주옹(周顒)·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복양(濮陽)의 오포(吳苞)·오국(吳國)의 장융(張融) 등도 모두 몸을 던지고 발길을 이어, 그에게 불경을 자문 받았다.
그 후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가 생각하였다.
“서현사(栖玄寺)는 선왕이 시작해서 지은 절이지만, 이 절은 인간세계 밖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승원을 그곳에 거처하게 하고자, 정중하게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제(齊)의 태조(太祖)황제가 제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산에 들어와 승원을 찾았다. 그러나 승원은 늙고 병들어, 발을 걸상 아래로 드리울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태조황제는 몸소 스스로 예를 낮추어 방문하여, 소상하게 자문 받았다.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기에 이르자, 다시 제왕의 가마가 행차하여 곧 승원의 방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승원의 방과 불전이 협소하여 큰 가마 덮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조황제가 승원을 만나고자 하였다. 승원은 지조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태조는 사람을 보내 눕고 일어나는 근황을 물어본 다음에야, 발길을 돌려 절을 떠났다. 그렇지만 승원은 일찍이 한번도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병으로 눕자 문혜왕(文惠王)·문선왕(文宣王)이 스승의 예를 갖추어 받들며, 자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당시의 귀족 공경대부와 선비들도 찾아가고 돌아오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승원은 50여 년을 푸성귀를 먹으며, 일관하여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셨다. 마음은 법의 뜨락에서 노닐고, 멀리 인간 세계 밖을 생각하였다. 높이 산문을 걸어 다니면서,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았다.
제의 영명(永明) 2년(484) 정월에 정림상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황제는 사문 법헌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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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원 스승[和尙]이 세상을 떠난 것을, 나는 밤중에 이미 나름대로 알았다. 승원 스승이 이번 간 곳은 매우 좋은 곳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다시 더 슬퍼할 일이 없다. 늦게나마 한두 번 법사를 만나서, 비로소 상서로운 꿈을 막 펼치려 하였다.
지금은 바로 그를 위하여 공덕을 지어야 할 때이다. 필요한 물건은 자세히 상소문에 갖추어 보내는 것이 좋겠다.”
또 경릉(竟陵)의 문선왕(文宣王)도 편지를 보냈다.
“승원 법사는 일대의 명덕으로 뜻과 절개가 맑고 높았다. 산에 숨어 아름다움을 심어 사해가 그의 도풍을 맛보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람되게 스승으로 모시는 은혜를 입었다. 바야흐로 우러러 어진 교화를 물어보고, 번뇌의 생각을 씻어내고자 하였다. 뜻밖에 이번 병으로 갑자기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셨으니, 비통한 마음을 너무나 참을 수가 없구나.
승원 스승[和尙]은 일과 행실이 원만히 통하여, 오랜 겁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드문 분이다. 나는 그 분이 남긴 형체와 그림자의 자취를, 대중 승려의 묘 가운데 섞어 안치하고 싶지 않다. 따로 다른 땅을 점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바야흐로 사찰을 세워 그 기이함을 표시하고, 돌에 새겨 공덕을 빛내야 마땅하다.”
이에 곧 산의 남쪽에 분묘를 경영해 조성하고,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태위(太尉) 낭야왕(瑯琊王) 유검(劉儉)이 비문을 지었다.
∙법령(法令)·혜태(慧泰)
당시 정림상사의 법령·혜태가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승원의 명성을 이어갔다.
11)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다. 본래는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으로,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가 피난 와서 양양(襄陽)에 깃들어 살면서, 대대로 으뜸가는 족속이 되었다. 승혜는 어려서 출가하여 형주(荊州)의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담순(曇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담순은 여산 혜원(慧遠)의 제자로서 본래부터 높은 명성이 있었다. 승혜는 그를 받든 이후로 교리의 이해에 마음을 오로지했다. 나이 25세에 이르자 『열반경』·『법화경』·『십주론(十住論)』·『유마경』·『잡심론(雜心論)』 등을 강의할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뛰어나며, 도강(都講)의 자리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문구를 가려내 분석하여, 펼쳐내는 말은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또한 『노자』와 『장자』를 잘하여 불교를 위한 스승으로 삼았다. 덕이 높은 선비인 남양(南陽)의 종병(宗炳)·유규(劉虯) 등과도 친구로서 좋은 사귐이 있었다. 종병은 늘 찬탄하였다.
“서하(西夏)에 법륜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아마도 승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도 서쪽 나라를 지나며 노닐었다. 곧 승혜를 찾아가 사귀기를 청하였다.
제(齊)나라 초기에 칙령으로 형주(荊州)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고상한 풍모가 빼어났다. 또한 도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데 협조하여 도운 공 때문에, 멀고 가까운 곳에 명망이 있었다. 노쇠하자 항상 가마를 타고 강석을 찾아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그를 대머리 관리[禿頭官家]라 불렀다. 현창(玄暢) 법사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들을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 말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혜창(慧敞)
그 후 혜창도 지조가 본래 곧고 반듯하였다. 승혜를 대신하여 승주(僧主)가 되어, 계속 공덕의 효능이 있었다.
∙승수(僧岫)
승혜의 제자 승수도 역시 배움으로 드러났다. 정진에 힘쓰다가, 피와 관련한 질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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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승유(釋僧柔)
승유의 성은 도(陶)씨이며, 단양(丹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고결하여 티끌세상을 벗어날 지조가 있었다. 아홉 살에 숙부를 따라 유학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나물밥·콩국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두터운 뜻은 더욱 견고하여, 곤궁함 속에 살아도 뜻을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출가하여 홍칭(弘稱)의 제자가 되었다. 홍칭은 성이 여(呂)씨이며, 낙양 임위(臨渭) 사람이다. 그의 배움은 경론에 뛰어나,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났다. 승유는 그를 받든 이후로 곧 계율에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선정과 지혜도 자세히 힘썼다. 대승의 많은 경전과 대승·소승의 모든 책의 그윽한 근원을 철저히 비추어 보고, 가르침의 요체를 다 꿰뚫었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자 곧 강석에 올랐다. 한 시대의 이름난 유생들이 모두 몸을 던져 북쪽으로 얼굴을 두어 바라봤다. 그 후 동쪽 우혈(禹穴: 會稽)로 노닐다가 혜기(慧基) 법사를 만났다. 그의 초청으로 성방사(城傍寺)에 머물면서 하안거 내내 강론하였다.
그 후 섬주(剡州)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들어갔다. 그가 아직 그곳에 이르지 않은 날 밤에, 승서(僧緖)라는 사문이 꿈에 신인(神人)을 만났다. 붉은 깃발과 흰 갑옷을 입은 신장이 산에 가득히 나왔다. 이에 승서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신인이 대답했다.
“법사가 곧 이곳에 들어오기 때문에, 나와서 받들어 맞이하는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승유가 그곳에 이르렀다.
이윽고 그는 그곳의 산문을 쓸고 꾸며, 거기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경전을 부양하고 학문을 따르려는 선비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이 모였다.
제(齊)의 태조황제가 창업한 첫날과 세조(世祖)황제가 황제자리를 이어받던 날, 모두 사찰을 건립하고, 한편으로 교리를 전공한 승려를 구하였다. 승유가 나이가 많고 평소 세상에 알려져 있으므로, 부르는 편지가 해마다 이르렀다.
문선왕(文宣王) 등 여러 왕족들도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마침내 다시 서울로 나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몸소 우두머리가 되자, 사방 먼 곳에서도 흠모하고 감복하며 사람과 신마저 찬미하였다. 문혜왕(文慧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그를 받들어 입실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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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유는 덕을 지니고 종사의 자리에 올라, 이를 맡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안양정토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매양 퇴임관리들이 죽었다는 소식[西次]을 접할 때마다, 곧 얼굴을 찡그리고 합장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몸에 병이 없었다.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하였다.
“나는 아마도 떠날 것이다.”
이어 땅에 자리를 깔고, 서쪽을 향해서 경건하게 절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제(齊)의 연흥 1년(494)이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곧 산의 남쪽에 묻었다.
사문 승우(僧祐)는 승유와 어릴 때 산에서 자라, 함께 긴 세월을 머물렀다. 자주 도가 깃든 마음에 고개 숙이고 미리 불법의 맛에 참여한 이이다. 그가 승유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세웠다. 동완(東莞)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승유의 제자 승소(僧紹)도 역시 곧고 바르며 학업이 있었다.
∙승발(僧拔)·혜의(慧熙)
당시 종산(鍾山)의 산자정사(山茨精舍)에는 승발과 혜의가 있었다. 모두 어린 나이에 빼어나게 나아가서, 어려서부터 높은 명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에 나아가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승발은 『칠현론(七玄論)』을 지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13) 석혜기(釋慧基)
혜기의 성은 우(偶)씨이며, 오(吳)나라 전당(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빼어나고, 기민한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을 넘어섰다. 처음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 법사에게 의지하여 따랐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혜의 법사는 그의 정신과 풍채를 아름답게 여겼다. 전송의 문제(文帝)에게 계(啓)를 올려 도첩(度牒)을 구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문제가 그를 불러 보고 좌우에 물어 보고는 좋다고 여겼다. 곧 기원사에 명령하여 그를 위한 법회를 열어 출가하게 하였다. 황제의 가마가 친히 행차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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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기는 이미 뜻을 법문에 두었으므로, 수행에 힘쓰는 것이 정성되고 간절하였다. 새벽에서 밤까지 아울러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경전을 환히 해득하였다.
그 후 서역의 법사인 승가발마(僧伽跋摩)가 선(禪)과 율(律)을 널리 돕고자 송나라 경내에 찾아왔다. 이에 혜의 법사가 혜기에게 명령하여, 그의 입실제자가 되어 공양하고 섬기게 하였다.
나이 만 20세가 되자 채주(蔡州)로 건너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때 승가발마가 혜기에게 말하였다.
“너는 곧 강남 지방의 도의 왕[道王]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서울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에 4·5년간을 강석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법사들을 두루 방문하였다. 『소품경』·『법화경』·『사익경』·『유마경』·『금강반야경』·『승만경』 등에 빼어났다. 그 현묘한 진리를 생각하고 탐구하여, 그윽하게 엉킨 진리를 투철하게 비춰 보았다. 문장을 제시하고 문구를 비교함에, 그 아름다움이 옛날을 뛰어넘었다.
혜기의 스승인 혜의는 이미 덕이 있어, 사람들의 종사 자리에 있었다. 형주(荊州) 땅의 도의 왕[道王]이라서, 선비와 서민들이 귀의하였다. 이롭게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분분히 모여들었다. 그는 혜기의 아름다운 덕이 칭찬할 만하다 하여, 곧 손잡고 함께 생활하였다.
혜의 법사가 죽은 뒤에 이르러, 생활을 뒷받침하는 여러 물건들이 거의 백만 냥에 가까웠다. 혜기는 법으로 보아 마땅히 그 절반을 얻었지만, 모두 복을 위하여 희사하였다. 오직 더럽고 낡은 옷과 그릇만을 취하여,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전당(錢塘)의 현명사(顯明寺)에 머물다가,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산음(山陰)의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학문을 숭상하는 학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와서 도를 물었다. 이에 삼오(三吳)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 그러니 학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영접하려고 초청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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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휘(元徽) 연간(473~477)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비로소 길을 떠나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다시 병이 도져서 돌아왔다.
이어 회계(會稽) 구산(龜山)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웠다. 손수 벽돌을 포개고 자신이 공사를 지휘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나무를 걸쳐서 험한 지세를 타고 지으니, 산의 형상을 더욱 지극하게 하였다. 처음에 3층으로 세웠다. 그러나 장인의 솜씨가 조금 서툴러서 뒤에 하늘의 벼락을 맞아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곳에 다시 보수를 가하고 꾸며서, 마침내 그 곱고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혜기는 일찍이 꿈에 보현보살을 만나, 보현보살에게 스승[和上]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절이 준공된 뒤에 이르러, 보현보살상과 아울러 여섯 이빨 난 하얀 코끼리의 형상을 조성하였다. 곧 보림정사에서 21일간의 참회하는 재를 마련하였다. 선비와 서민이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이 모여들어, 헌납하고 봉양하는 것이 뒤를 이었다.
그 후 주옹(周顒)이 섬주(剡州)를 다스리자, 혜기를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주옹은 본래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불교 교리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혜기를 만나 찾고 파헤치자, 날로 새롭고 남다름이 있었다.
유헌(劉瓛)·장융(張融)도 나란히 스승의 예로 섬기고, 교리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도 그의 도풍을 흠모하고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정중한 편지를 보내, 『법화경』의 근본 되는 가르침을 물었다.
이에 혜기는 곧 세 권의 『법화의소(法華義疏)』를 지었다. 『문훈의서(門訓義序)』 33과(科)를 짓는데 이르러서는, 간략하게 방편의 가르침을 펼쳐 서술하였다. 공(空)·유(有)라는 두 말을 회통하였다. 그리고 『유교경(遺敎徑)』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혜기의 덕이 이미 삼오(三吳) 지방을 덮고, 명성이 나라 안에 치달렸다. 그러자 곧 황제의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어 10성(城)을 맡았다. 이것이 곧 우리 동쪽 나라에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시초였다.
이에 그는 조용히 강의하고 이끌면서, 선정과 지혜를 가르쳐 힘쓰게 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에서도 그의 도풍을 따랐다. 오부대중이 귀의하고 복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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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기는 성품이 매서우면서도 따뜻하고, 기개는 맑으면서도 온화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인으로 참여한 사람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齊)의 건무(建武) 3년(496) 11월에 성방사(城傍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처음 혜기가 병으로 눕자, 제자의 꿈에 몇 사람의 범승(梵僧)이 섬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대승국(大乘國)에서 혜기 스승[和尙]을 받들어 맞이하기 위해서 왔다.”
그 후 며칠 만에 혜기가 죽었다. 법화산 남쪽에 묻었다. 특진관(特進官)인 여산(廬山)의 하윤(何胤)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보림사에서 지어, 그의 남긴 덕을 새겼다.
∙승행(僧行)·혜욱(慧旭)·도회(道恢)
혜기의 제자인 승행·혜욱·도회 등도 모두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다. 차례로 강론을 부양하여 각기 문도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법도가 남긴 앞 자취를 이어갔다.
∙혜영(慧永)
그 후 사문 혜량(慧諒)이 승정의 임무를 이어받아 관장하였다. 혜량이 죽은 후에는 사문 혜영이 이었다. 혜영은 고상한 풍모가 아름답고 청아하였다. 또한 덕스런 행실이 맑고 엄숙했다. 그리하여 많은 경전을 마음대로 요리하여, 당시 강설의 임무를 맡았다.
∙혜심(慧深)·법홍(法洪)
혜영의 뒤로는 사문 혜심이 승정이 되었다. 그 역시 혜기의 제자이다. 혜심은 동학인 법홍(法洪)과 더불어 모두 맑게 계율을 지킨다고 존중받았다. 혜심의 뒤로는 사문 담흥(曇興)이 승정이 되었다. 그도 침착하게 살피는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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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석혜차(釋慧次)
혜차의 성은 윤(尹)씨이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지흠(志欽)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서주(徐州)의 법천(法遷)을 만났다. 법천은 당시 세상에서 이해력으로 꿰뚫었다. 지흠이 곧 혜차를 그에게 부탁하여, 법천을 따라가 남쪽 경구(京口)에 이르러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법천을 따라 팽성으로 돌아왔다. 비록 사미(沙彌)의 나이에 불과하였지만 배움을 다스림에 게으름이 없었다. 맑게 보는 것이 무리를 통하여 홀로 우뚝 빼어났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경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 이름이 서주 땅에 자자하였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자, 일과 지조가 더욱 깊어졌다. 자주 『성실론(成實論)』 및 3론을 강의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나와,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말기와 제나라의 초기(478~479)에 이르자, 덕에 귀의하는 이들이 점차 넓어졌다. 강석을 한 번 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갔다.
사문 지장(智藏)·승민(僧旻)·법운(法雲) 등은 모두 어린 나이에 준수하고 명랑하여, 지혜의 슬기로움이 천연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다. 모두 혜차를 찾아가 수업을 청하였다. 문혜왕(文慧王)·문선왕(文宣王)도 모두 스승의 예로 그를 공경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였다.
영명 8년(490)에 『백론(百論)』을 강의하다, 「파진품(破塵品)」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7세이다.
∙승보(僧寶)·승지(僧智)·법진(法珍)·승향(僧嚮)·승맹(僧猛)·법보(法寶)·혜연(慧淵)
당시 사사(謝寺)에는 또 승보·승지가 있고, 장락사(長樂寺)에는 법진·승향·승맹·법보·혜연 등이 있었다. 모두가 한 시대의 영명하고 현철한 인물들로, 당시 논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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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석혜륭(釋慧隆)
혜륭의 성은 성(成)씨이며, 양평(陽平)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 배움에 스승과 벗이 없었지만, 우뚝하게 스스로 깨달았다. 나이 스물세 살에 비로소 출가하였다. 십여 년 동안 마음을 불법에 집중시켜 수많은 경전을 뛰어나게 꿰뚫었다. 전송의 태시 연간(465~471)에 서울로 나와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혜륭은 이미 생각이 말의 테두리 밖에 사무쳤다. 맑은 논의를 잘해, 기회를 타서 대항하고 견주었다. 한 번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의 경계를 꺾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초청하여 상궁사(湘宮寺)에서 『성실론』을 개강하니, 책을 걸머지고 도를 묻는 사람이 8백여 명이었다.
그 후에도 왕후(王候) 귀족들이 여러 번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옛날의 여러 논리에서 그 자리를 맴돌며 막혀 있던 곳을, 혜륭은 다시 밝혀내서 열고 펼쳐, 환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그는 참다운 법으로 번뇌를 끊는 이해[實法斷結義] 등을 세웠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은 그를 지목하여 말하였다.
“혜륭은 조용하고 한가하여 오싹하고 성근 것이, 마치 서리 아래에 서 있는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2세이다.
∙지탄(智誕)
당시 강서(江西)에 지탄이 있었다. 역시 경론에 빼어나 혜륭과 덕이 비등하고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각기 이름을 양자강의 두 언덕에서 날렸다.
∙승변(僧辯)·승현(僧賢)·도혜(道慧)·법도(法度)
당시 하원사에는 또 승변·승현·도혜·법도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공업이 칭찬할 만하였다.
16) 석승종(釋僧宗)
승종의 성은 엄(嚴)씨이며, 본래 옹주(雍州)·빙익(憑翌) 사람이다. 진(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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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고 어지러워지자, 그의 4대 조부가 진군(秦郡)으로 옮겨 살았다. 아홉 살 때 도원(道瑗)의 제자가 되어, 지혜의 일을 묻고 들었다. 나중에 다시 도빈(道斌)·승제(僧濟) 두 법사에게서 도를 전수받았다.
『대열반경』 및 『승만경』·『유마경』 등에 빼어났다. 강설을 베풀 때마다, 듣는 사람이 거의 천여 명에 가까웠다. 미묘한 말솜씨는 다함이 없고, 임기응변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에 맡겨 방탕하여, 자주 의식 법규를 뛰어넘어 마음에 들면 곧 행하는 등 구애받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고 절조를 오로지 지키는 사람들 모두가 옳고 그르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문혜태자는 곧 죄를 물어 쫓아내서 다른 곳으로 추방하려 하였다. 그러나 꿈을 통하여 감응이 있어, 이에 생각을 고쳐 그에게 귀의하였다.
북위(北魏)의 황제 원굉(元宏, 471~499)은 멀리서 그의 덕스런 풍모에 고개 숙였다. 여러 번 편지를 보내고는 초청하여 개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齊)의 태조(太祖)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승종은 『열반경』·『유마경』·『승만경』 등의 강론을 거의 백 번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그를 따라 찾아오는 신도들의 보시로 태창사(太昌寺)를 지어 그곳에 머물렀다.
건무(建武) 3년(496) 머무르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9세이다.
∙담준(曇准)·법신(法身)·법진(法眞)
이에 앞서 북쪽 나라의 담준 법사가 승종이 특히 『열반경』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곧 남쪽으로 노닐어 그의 강론을 보고 들었다. 그러나 이미 남쪽과 북쪽은 사정이 다르고,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곧 따로 다시 강의하여 많은 북쪽 선비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 후 담준은 상궁사(湘宮寺)에 거처하면서, 같은 절의 법신·법진과 더불어 당시의 종사가 되었다.
∙혜령(慧令)·법선(法仙)·법최(法最)·승경(僧敬)·도문(道文)·승현(僧賢)
당시 안락사(安樂寺)에는 혜령·법선·법최 등이 있고, 중흥사(中興寺)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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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승경·도문이 있으며, 천축사(天竺寺)에는 승현이 있었다. 모두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나, 나라[上國]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17) 석법안(釋法安)
법안의 성은 필(畢)씨이며, 동평(東平) 사람이다. 위(魏)의 사예(司隸) 교위(校尉) 필궤(畢軌)의 후예이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의 혜광(慧光)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혜광은 어려서부터 시원하게 빼어나고, 내외의 학문에 두루 뛰어나, 이치를 참구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법안은 사미의 나이에 있었으나, 곧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났다. 당시 장영(張永)이 도빈(道斌) 법사를 초청하여 강설을 청하였다. 아울러 몸을 굽혀 이름난 학자를 불렀다. 이 때 장영이 도빈에게 물었다.
“서울에 다시 탁월한 젊은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도빈이 대답하였다
“사미인 도혜(道慧)·법안(法安)·승발(僧拔)·혜희(慧熙)가 있습니다.”
장영은 곧 요청하여 도혜에게 『열반경』 강의를 되뇌게 하고, 법안에게 『불성론(佛性論)』을 진술하게 하였다. 신색이 여유로워 서두부터 쏟아 내림에 남김이 없었다. 장영이 물어보았다.
“나이가 몇 살이냐?”
도혜는 열아홉 살이라고 대답하고, 법안은 열여덟 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장영은 이에 감탄하였다.
“예전에 부풍(扶風)의 주발(朱勃)이 열두 살에 책을 읽고 시를 읊어, 당시 사람들이 재간둥이라고 불렀다. 오늘 이 두 도인은 이해력이 뛰어난 소년들인, 의소(義少)라 할 만하다.”
이에 그들의 명성이 서울 조정에 밝혀져,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흘러갔다. 그 후 서른 살에 이르자, 전문적으로 법을 강의하는 자리를 맡았다.
왕승건(王僧虔)이 외지로 나가 상주(湘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함께 동행하였다.
그 후 남쪽 번우(番禹)로 옮겼다. 바로 승유(僧攸)의 『열반경』 강의를 만났다. 법안이 그와 몇 번 묻고 논의하니, 승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여 법석을 양보하였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 법사를 서로 이어갔다. 그러다가 영명 연간(483~493)에 서울로 돌아와,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열반경』·『유마경』·『십지론』·『성실론』 등을 강의하여, 끊임없이 강설을 이어갔다. 사도(司徒) 문선왕(文宣王)과 장융(張融)·하윤(何胤)·유회(劉繪)·유헌(劉瓛) 등이 모두 그의 글과 논리에 마음으로 복종하여 함께 법의 친구가 되었다.
영태 1년(498) 중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45세이다. 그는 『유마경』과 『십지론』의 의소(義疏)를 짓고, 아울러 『승전(僧傳)』 다섯 권을 지었다.
∙경도(敬道)·광찬(光贊)·혜도(慧韜)·도종(道宗)
당시 영기사(靈基寺)에는 경도·광찬·혜도가 있고, 와관사(瓦官寺)에는 도종이 있었다. 이들 역시 당시의 이름난 인물들로 배우는 이들이 사모하였다.
18) 석승인(釋僧印)
승인의 성은 주(朱)씨이며, 수춘(壽春)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음이 침착하고 소상하여, 고행을 편안히 여기며 배움에 힘썼다. 처음 팽성(彭城)에 노닐며, 담도(曇度)로부터 3론을 전수받았다. 담도는 이미 한 시대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사방 먼 곳에서 그에게 의지하여 모여들었다. 승인은 그의 가르침을 받고 맛보며 닦아서, 그윽이 깊은 뜻을 궁구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나아가서 혜룡(慧龍)으로부터 『법화경』을 묻고 전수받았다. 혜룡도 역시 당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 『법화경』의 종지를 전파하였다. 승인은 유달리 공부를 구축함에 철저하여, 홀로 새롭고 특이한 것을 표출하였다. 이에 동쪽 서울로 가서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이에 다시 『열반경』과 그 밖의 경전에 관하여 생각을 다져나갔다.
전송의 대명 연간(457~464)에 징군(徵君) 하점(何點)이 승려들을 초대하였다. 큰 집회를 열고 승인을 초청하여 강사로 삼았다. 강설을 듣는 사람이 7백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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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과 동해의 서효사(徐孝嗣)도 나란히 그의 고상한 풍모에 고개 숙여 공경하며, 여러 번 불러서 강설을 요청하였다. 승인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엄격하며, 품성이 화목하였다. 용서하는 마음을 머금고 인욕에 안주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당시 기백을 뽐내는 무리들이 질문하고 논의하는 도중에, 혹 멋대로 비웃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승인은 정신과 풍채가 평안하여, 한 번도 생각이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었다. 비록 배움에서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지만, 특히 『법화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화경』의 강의를 모두 252차례나 두루 강의하였다.
제(齊)의 영원(永元) 1년(49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19) 석법도(釋法度)
법도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쪽 나라에 유학하면서, 두루 많은 경전을 종합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간절한 절조를 이루기를 힘썼다.
전송의 말기에는 서울을 노닐었다. 덕이 높은 선비인 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는 인간 세상 밖에 자취를 드높여, 낭야(瑯琊)의 섭산(聶山)에 은거하였다. 법도의 맑고 아름다운 정신에 고개 숙여, 스승과 벗으로 공경하는 대접을 하였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산을 희사하여 서하정사(栖霞精舍)라 하고, 법도를 초청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사들이 절 땅을 도관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물던 사람은 곧 죽어 버렸다. 그 후 절이 되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무서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법도가 그곳에 머무른 후로는 뭇 요망한 일들이 모두 멎었다.
그곳에 머문 지 일년 가량 지났을 무렵이다. 갑자기 사람과 말과 나팔과 북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명함을 적은 종이를 건네어 법도에게 성명을 통하면서, 자기는 근상(靳尙)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법도가 앞으로 나아갔다. 근상은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보좌하는 사람들도 매우 엄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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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는 공경을 표시한 다음 이어 말하였다.
“제자는 이 산의 왕으로 산을 소유한 지 7백여 년입니다. 신의 길에도 법이 있어, 남들이 함부로 간여하여서는 안 됩니다. 전에 이곳에 기탁하여 깃들던 여러 사람들은, 혹 참되고 올바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과 병이 이어졌으니, 그것 역시 그들의 운명입니다. 법사께서는 귀의할 만한 도와 덕을 갖추신 분입니다. 삼가 이 산을 희사하여 받들어 공급하겠습니다. 아울러 5계를 받기를 원하오니, 길이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이에 법도가 말하였다.
“사람과 신은 길이 다르니, 서로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시주께서는 피 흘리는 음식으로 세간의 제사를 받는 몸입니다. 이것은 5계에서 가장 금지하는 일입니다.”
근상이 말하였다.
“만약 문도들을 정비하면, 곧 먼저 살생을 없애겠습니다.”
이에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튿날 아침 법도가 보니, 어떤 사람이 돈 1만 냥과 향·초·작은 칼 등을 보내왔다. 설명서에 쓰여 있었다.
“제자 근상이 받들어 공양드립니다.”
그 달 보름날에 이르러, 법도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근상이 다시 찾아왔다.
대중들과 함께 예배하고 행도하면서 계를 받고는 떠났다.
섭산의 사당을 지키는 무당의 꿈에 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이미 법도 법사에게서 계를 받았으니, 나의 제사에는 생명을 죽인 희생물을 올리지 말아라.”
이로 말미암아 이 사당에서 신에게 음식을 올릴 때는, 오직 채소와 말린 포만을 쓰는 데 그쳤다.
어느 날 법도는 움직임이 흐트러지면서, 땅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근상이 밖에서 찾아와서, 손으로 머리와 발을 쓰다듬어 주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다시 유리 병 하나를 지니고 왔다. 병 속에는 물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것을 법도에게 바쳤다. 그 물은 맛이 달고 차가웠다. 이것을 마시니 법도의 괴롭던 곳이 사라졌다. 신이 감응해 보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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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소(法紹)
당시 사문 법소(法紹)가 일이 맑고 고행하여, 명성을 법도와 가지런히 하였다. 그러면서 배움과 이해는 법도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북산이성(北山二聖)이라고 불렀다.
법소는 본래 파서(巴西) 사람이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성도를 떠나자, 함께 내려와 산자정사(山茨精舍)에 머물렀다.
법도는 법소와 더불어 제(齊)의 경릉왕(竟陵王) 자양(子良)과 시안왕(始安王) 요광(遙光)으로부터 공손히 스승의 예로 모시는 대우를 받았고, 네 가지 공양물을 자급 받았다. 법도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 까닭에, 유달리 『무량수불경(無量壽佛徑)』을 강의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산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승랑(僧朗)
법도의 제자 승랑이 돌아가신 스승의 발길을 이어, 다시 산사(山寺)의 기강을 세웠다. 승랑은 본래 요동(遼東)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생각하는 힘이 두루 해박하였다. 모든 경전과 율장을 강설하는 데 뛰어났다. 『화엄경』과 3론에서는 가장 대가(大家)의 자리에 있었다. 금상폐하(今上陛下)께서 깊이 그릇이라 보고 존중하여, 모든 불교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에게 명령하여 그 산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혜개(慧開)
당시 팽성사(彭城寺)의 혜개는 어려서부터 정신과 기개가 높고 밝으며, 지조와 배움이 매우 깊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명예로운 이름이 드러나고, 서른 살이 되자 곧 강설하였다.
∙법개(法開)·승소(僧紹)
또 여항현(杭縣)의 법개도 맑고 시원한 성품이 빼어나며, 담론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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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나와 선강사(禪岡寺)에 머물렀다. 같은 절의 승소와 더불어 당시 세상에 알려졌다.
20) 석지수(釋智秀)
지수의 성은 구(裘)씨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깃들어 살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찌감치 출가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양친이 사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비밀리에 혼인할 곳을 구하였다. 곧 결혼할 날이 다가오자, 지수는 마침내 샛길로 피하여 달아났다. 장산(蔣山)의 영요사(靈耀寺)에 몸을 던져,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차자, 일과 지조가 더욱 굳어졌다. 많은 스승을 찾아가 묻고 배우며, 새롭고 특이한 것을 찾아 점검하였다. 이에 대승·소승에 아울러 밝고 논리를 따지는데도 정밀하고 익숙하였다. 게다가 『대반열반경』·『소열반경』·『유마경』·『반야경』에 빼어났다. 한번 강설의 자리를 건립하면, 곧 왕후와 귀족들의 가마들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책 보따리를 진 사람들도 어깨를 밀치며 찾아왔다.
사람됨이 정신과 풍채가 세밀하고, 생각은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문구의 그윽이 숨겨진 것을 모두 보고 펼쳐 해석하였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의 초기에 치성사(治城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장례를 치르던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와, 거리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선비와 서민들은 슬픔을 머금어 영예와 애도로써 예를 갖추었다.
∙승약(僧若)·도승(道乘)·승선(僧璿)
당시 치성사에 또 승약·도승이 있었다. 도승은 당시에 높은 명성이 알려졌다. 승약은 그의 형인 승선(僧璿)과 더불어, 나란히 모든 경전과 경전 외의 다른 고전에도 빼어났다. 승약은 『법화경』을 외웠으며, 초서·예서에도 솜씨가 있었다. 후에 오(吳)나라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도승도 역시 뜻한 바 일에 밝고 민첩하였다. 그리고 특히 아비담에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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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석혜구(釋慧球)
혜구의 본래 성은 마(馬)씨이며, 부풍군(扶風郡) 사람이다. 대대로 높은 족속이었다. 열여섯 살 때 출가하여 형주(荊州)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도형(道馨)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스승의 훈계를 받아 이어서, 실천 수행함이 맑고도 맑았다.
그 후 상주(湘州)의 녹산사(麓山寺)로 들어가 선도(禪道)에 전업하였다. 얼마 후 동학인 혜도(慧度)와 함께 서울로 가서 경전을 묻고 찾았다. 그 후 다시 팽성사(彭城寺)로 가서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서른두 살에 이르자 다시 형주 땅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강사의 자리를 맡아, 강의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배우려는 승려들이 무리를 이루었으며, 형주·초(楚) 사이에서는 예전을 통틀어 최고라 일컬었다. 서하(西夏)의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서울의 승려들과 겨루어 형평을 이루게 한 것은 혜구의 힘이다.
중흥(中興) 원년(501)에 칙명으로 형주 땅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도운 공으로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천감(天監) 3년(50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유명에 따라 시체를 소나무 아래에 뼈를 노출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차마 행하지 못하였다.
22) 석승성(釋僧盛)
승성의 본래 성은 하(何)씨이며, 건업(建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에 더하여 뜻한 학문에 발돋움하며 노력하였다. 마침내 크게 논리를 따지는 데 밝고, 아울러 많은 경전에 빼어났다. 강설에서는 당시의 으뜸가는 강사가 되었다.
또한 특히 불경 외의 고전에 정밀하게 뛰어나, 뭇 선비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학관의 모든 유생들이 항상 승성과 서로 몸을 맞대고 다녔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에 영요사(靈曜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0여 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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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흔(法欣)·지창(智敞)·법경(法冏)·승호(僧護)·승소(僧韶)
당시 송희사(宋熙寺)에는 법흔이 있고, 연현사(延賢寺)에는 지창·법경이 있으며, 건원사(建元寺)에는 승호·승소가 있었다. 모두 덕이 비등하여 명성을 함께 하였다. 법흔과 지창은 모두 경론에 빼어나고, 법경은 율부에 정밀하게 뛰어나며, 승소·승호는 아비담으로 저명하였다.
23) 석지순(釋智順)
지순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낭야(瑯琊)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종산(鍾山) 연현사(延賢寺)의 지도(智度)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두터운 지조가 보통 사람을 넘었다. 비록 사미의 나이에 있었지만, 배움의 공덕은 이미 쌓여 있었다. 구족계를 받자 금하는 계율을 따름에 흠집이 없었다. 뭇 경전을 도야하고 연마하면서, 『열반경』과 『성실론』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강설할 때는 문도 대중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한번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자못 좌절을 이룬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곧고 결백함이 확연하여 그의 아름다움에는 오점이 없었다.
제(齊)나라의 경릉(竟陵) 문선왕은 특히 깊이 남다른 예우를 하였다. 그를 위하여 치성사(治城寺)를 수축하여서 머물렀다.
사공(司空)인 서효사(徐孝嗣)도 역시 그의 행실과 깨우침을 숭배하였다. 스승으로 받들어 공경하였다.
동혼왕(東昏王)이 덕망을 잃으면서 서효사는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서곤(徐緄)은 도망쳐서 화를 피하였다. 지순이 몸소 그를 보호하여 끝내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서곤은 거듭 자품과 녹봉을 더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밤에 도적이 지순의 물건을 훔친 일이 있었다. 청소부가 뒤쫓아 가서 이를 사로잡았다. 지순은 도적을 자기 방안에 유숙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돈과 비단을 주며 타일러서 보냈다.
그의 어진 마음의 흡족함과 용서하는 마음의 두터움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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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에 노닐다가, 운문정사(雲門精舍)에서 머물렀다. 그러니 법륜의 성대함을 다시 강남 지방에서 보게 되었다.
지순은 사람됨이 겸허하고 공손하며 삼갔다. 겉모습은 신과 같았으며, 법다운 풍모가 엄격하여 움직임에 조금도 일에 실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선비와 서민들이 우러러보고 절하며,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천감(天監) 6년(507)에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1세이다.
처음 지순의 병이 심하여 여러 날 음식을 먹지 않다가 어느 때 중간에 끝나면서, 갑자기 재에 올린 음식을 찾았다. 제자인 담화(曇和)가 지순이 곡식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하여, 비밀히 반 홉의 쌀을 섞어 끓여서 이것을 지순에게 바쳤다. 지순은 목구멍으로 삼키다가 다시 토해냈다. 물을 찾아 말끔히 양치질을 하고는, 담화에게 말하였다.
“너는 영원히 운문정사를 떠나거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의 절조를 지키는 마음의 맑고 애씀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안에서 자못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또한 하늘을 가리는 닫집을 본 사람도 있었다.
유명에 따라 시신을 공지에 뼈를 드러내게 하여,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인들이 차마 이를 행하지 못하였다. 곧 절 옆에 묻고 제자 등이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앙(袁昻)이 비문을 짓고, 법화사의 혜거(慧擧)가 다시 묘지(墓誌)를 지었다. 지순이 지은 『법사찬(法事贊)』과 『수계홍법기(受戒弘法記)』 등의 기록은 모두 세상에 전한다.
24) 석보량(釋寶亮)
보량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선조는 동완(東莞)의 귀족이다. 진(晋)나라가 패배하자 동래(東萊)의 현현(弦縣)으로 피해왔다. 보량은 열두 살 때 출가하였다. 청주(靑州)의 도명(道明) 법사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도명도 역시 교리를 공부한 승려로 이름이 당세에 높았다. 보량은 학업에 나아가 오로지 정성을 모아,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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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문득 사방을 구경하며 널리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늘 가르치고 기름[訓育]에는 근본이 있어, 아직 인연에 얽매인 허물을 멀리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도명 법사가 말하였다.
“사문이 되어 속가를 떠나면, 널리 펼치는 일을 도리로 삼아야 한다. 어찌 이러한 사랑의 그물에 구애받아, 우리의 도가 동쪽나라에 행해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보량은 느껴 깨달아, 이로 인하여 나그네가 되어 떠돌았다. 스물한 살 때 서울에 이르러 중흥사에 머물렀다. 원찬(袁粲)이 한 번 만나보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명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주 보량을 만나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요즘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던 것을 들으니, 이 해가 저물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진주는 합포(合浦)에서 생산되었지만, 위(魏)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취하여 수레를 비추어 보았다. 구슬[和氏璧]은 한단(邯鄲)에서 있었지만, 진(秦)나라 임금이 청하여 나라를 빛나게 했다.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하여야 한다. 상인이 머무는 고을에서만 오로지 소유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학문의 명성이 조금씩 번성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맞았으나, 길이 막혀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하여 문을 닫고 홀로 거처하여, 선(禪)의 생각에 잠기며 강설을 그만두고 인사를 단절하였다.
경릉(竟陵)의 문선왕이 몸소 그가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초청해서 강사로 삼으려 하였다. 보량이 마지못하여 찾아갔다. 문선왕(文宣王)은 그의 발에 머리를 대고 공손히 절하고, 깨달음을 위한 사부대중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영미사(靈味寺)로 자리를 옮겨 쉬면서 많은 경전의 강설을 계속하니, 서울보다 더 성대하였다. 『대열반경』을 모두 여든네 차례, 『성실론』을 열네 차례, 『승만경(勝鬘徑)』을 마흔두 차례, 『유마경』을 스무 차례, 그 밖에 『대품경』·『소품경』을 열 차례, 『법화경』·『십지론』·『우바새계경(優婆塞戒徑)』·『무량수불경』·『수능엄경』·『유교경』·『미륵하생경』 등도 역시 열 차례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3천여 명이고, 묻고 배우는 문도들만도 항상 수백 명이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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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량은 마음이 시원하고 높으며, 우뚝한 기개가 씩씩하고 빼어났다. 경전의 장구를 열고 명하면[開章命句], 날카로운 언변이 종행하였다. 혹 질문과 논의가 있을 때나, 혹 미리 겹친 관문을 쌓아 두었다가도, 보량이 해석을 펴면 곧 종지를 깨달았다. 마치 얼음 녹듯이 풀려서 본래 쌓였던 의문을 잊었다.
금상폐하2)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자 정도를 높이고 숭앙하시어, 보량의 덕망이 시대의 여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자주 초청하여 담론하였다. 보량은 성품에 맡겨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늘 빈도(貧道)라고 자기를 호칭하였다. 주상께서는 비록 마음에 무언가 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신의 뛰어남에 고개를 숙이셨다.
천감(天監) 8년(509)에 처음으로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 10여 만 글자를 짓게 하였다. 주상께서 서문을 지어 말씀하셨다.
“말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말에 기여할 길이 없다. 말이란 곧 말의 허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말에 허물이 있으면, 말을 멈추는 것이 좋다. 말이 멎으면, 여러 가지 견해가 다투어 가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본분의 서원을 타고, 태어남에 의탁하시어, 자비의 힘을 나타내고 교화에 응하셨다.
문자를 떠나서 가르침을 마련하셨고, 심상(心相)을 잊음으로써 도에 통하셨다. 민옥(珉玉)으로 하여금 값을 다르게 하고, 경수(經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을 나누듯이, 여섯 외도들의 주장[六師]을 제어하고, 네 가지 거꾸로 된 것[四倒]을 멎게 하셨다. 여덟 가지 삿됨[八邪]을 되돌려, 하나의 맛[一味]으로 귀결시켰다.
세속 알음알이의 뿔을 꺾고 이상한 사람의 입을 막아, 진주를 구하려는 마음을 인도하고 코끼리를 살펴보는 눈을 열게 하였다[開觀象之目]. 불난 집[火宅]에서 불에 타죽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물결치는 바다[浪海]에서 물에 빠진
2) 금상폐하란 지은이가 책을 지은 때의 황제인 양무제(梁武帝, 502년부터 549년까지 재위)를 가리킨다. 이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무제는 연호(年號)로 천감(天監, 502~519), 보통(普通, 520~526), 대통(大通, 527~528), 중대통(529~534), 대동(大同, 535~545), 중대동(中大同, 546), 대청(大淸, 547~549)을 쓴다.
사람을 건져 올렸다. 그런 까닭에 법의 비가 내리면서, 타죽어 가던 씨앗[燋種]이 꽃피는 일을 당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긴긴 밤이 새벽을 맞았으며, 가섭(迦葉) 존자의 울분을 일으키게 하여 진실로 정성스런 말을 토해내게 하였다. 비록 두 가지 보시[二施]가 앞에서 평등하고 5대(大)가 뒤에서 베풀어져서, 서른네 가지 질문이 들쑥날쑥 다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권유하고 인도하여 각기 그 사람의 뜻에 따라 대답하였다.
경론의 요점을 들어 올리면, 두 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불성론』은 그 본유의 근원을 열었고, 『열반경』은 그 극치로 돌아가는 종지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인연도 아니고 과보도 아니며,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교리는 온갖 착함보다도 높고, 일은 온갖 그릇됨을 단절하였다. 공하고도 공하여 그 진실한 끝을 헤아릴 수 없고, 그윽하고도 그윽하여 그 미묘한 출입구를 궁구할 수 없다. 스스로 덕이 고르고 평등하며, 마음이 더 이상 날 것이 없는 경지에 합치된 사람[心合無生]이 아니라면, 금으로 된 담장과 옥으로 된 방[金牆玉室]에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청주(靑州) 사문 석보량은 조화로운 기운이 상쾌하게 뛰어나고, 정신의 움직임은 우뚝 빼어나다. 어려서는 곧고 간절한 절조를 지키고, 장성해서는 불법의 진리에 안주하고, 늙어서는 더욱 독실하다. 늙은 나이에 다시 난 이빨은 쇠하지 않듯, 선각자의 글을 유통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니, 후배들과 뒤늦게 공부한 이들이 우러러 귀의하지 않음이 없다.
천감 8년(509) 5월 8일에 곧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대열반경의소』를 짓게 하여 9월 20일에 끝마쳤다. 이 책은 현미한 말을 빛나게 표현하고 정도를 찬양하였다. 이어진 고리가 이미 풀렸고 의심의 그물이 제거되었다. 조목의 흐름이 밝고 소상하여 요약된 말을 얻을 수 있다.
짐은 조용히 여가 있는 날에 곧 이 책을 보고자 한다. 잠시 몇 줄의 글을 써서, 이것으로 의소에 대한 기억[記莂]으로 삼으려 한다.”
보량은 그의 복덕으로 감응을 불러, 공양과 보시가 누적되었다. 그러나 돈을 저축하지 않는 성품이라서 모든 복업을 경영하였다. 몸이 죽은 뒤에, 그의 방에 남겨진 재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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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감 8년(509) 10월 4일에 영미사(靈味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6세이다. 종산(鍾山) 남쪽에 묻고, 묘소에 비를 세웠다. 진군(陳郡)의 주흥사(周興嗣)와 광릉의 고상(高爽)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또 제자 법운(法雲) 등이 절 안에 비를 세우고, 문선왕(文宣王)이 보홍사(普弘寺)에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승성(僧成)·승보(僧寶)
당시 고좌사(高座寺)의 승성과 광야사(曠野寺)의 승보도 또한 모두 제(齊)나라의 강사이다. 승보는 또한 삼현(三玄)에 뛰어나 귀족들이 존중하였다.
25) 석법통(釋法通)
법통의 본래 성은 저(褚)씨이며, 하남(河南) 양적(陽翟) 사람이다. 진(晋)의 안동장군(安東將軍)이자 양주도독(楊州都督)이었던 저략(褚䂮)의 8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의관과 예의를 이어받았다.
법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슬기로워 무리에서 빼어났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떠돌아 다녔다. 삼장을 배우고 대승의 경전에 오로지 정성을 모았다. 『대품경』과 『법화경』에 더욱 깊은 연구가 있었다.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사가 되었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반드시 찾아왔다.
그 후 그의 발길로 서울의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다가, 그 후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쉬었다. 한가롭게 살면서 숨은 것을 찾고, 도의 실천에만 오직 노력하였다. 그의 도풍을 바라고 그의 그림자에 붙으려는 사람들이, 다시 산의 방에 가득하였다.
제(齊)의 경릉(竟陵) 문선왕과 승상 문헌왕(文獻王)은 모두 자신의 귀한 신분을 굽혀, 그의 덕을 사모하여 친히 이마를 조아려 예를 받들었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오국(吳國)의 육고(陸杲)·심양(潯陽)의 장효수(張孝秀) 등도 모두 걸음을 산문에 채찍질하여, 그에게서 계법(戒法)을 받았다.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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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속인의 제자가 7천여 명이었다.
그가 종산(鍾山)의 언덕에 자취를 숨긴 지, 30여 년 동안 좌선(坐禪)과 염송으로 예참에 간절한 정성을 쏟았다. 천감(天監) 11년(512) 6월 10일 문득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바로 9월 20일까지만 살 따름이다.”
9월 14일에 이르자 두 사람의 거사(居士)가 나타났다. 모두 흰 털이개[白拂]3)를 잡고 책상 앞으로 나아가다가, 문득 차례로 밖으로 나갔다. 9월 17일에 이르자 문득 헛소리를 하였다.
“시주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디서 왔습니까?”
제자인 담지(曇智)가 그 말의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주홍빛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두건을 머리에 쓰고 나무상자를 받쳐 들고 걸상 앞에 엎드려 있구나.”
9월 20일에 이르자 불상이 두 줄을 지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법통은 한참 동안 합장을 하였다. 간병하는 사람들은 다만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을 뿐, 끝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에 법통은 비밀리 뜻을 같이하는 혜미(慧彌)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
21일에 이르자 향탕(香湯)을 찾아서 목욕을 마쳤다. 이어 예불을 하고 돌아와 누워서,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에 얹고 정오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절 남쪽에 장사지내고, 제자인 정심(靜深) 등이 비를 묘 옆에 세웠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와 난릉(蘭陵)의 소자운(蕭子雲)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지진(智進)
당시 정림상사(定林上寺)에는 또 사미인 지진이 있었다. 본래 환관(宦官: 宮刑을 당한 사람)이었다. 맑은 믿음이 독실하여 마침내 출가하여 간절하게 절조를 지켰다. 어느 날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동산(東山)에 이르러 나무
3) 흰 불자(拂子). 번뇌망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정한 보리심을 나타나게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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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자려 하였다. 호랑이가 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진이 단정하게 앉아 동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가 떠나갔다. 그 후로도 늘 홀로 걸어가거나 홀로 앉아 있을 때마다, 항상 푸른 말 한 필이 나타나 그의 좌우를 호위하였다.
26) 석혜집(釋慧集)
혜집의 본래 성은 전(錢)씨이며, 오흥(吳興)의 어잠(於潛) 사람이다. 18세 때 회계(會稽) 낙림산(樂林山)에서 출가하였다. 혜기(慧基) 법사를 따라다니며 수업하였다. 성품됨이 의젓하고 진실하여 화려한 비단처럼 수식하는 말이 없었다. 새벽에서 밤까지 배움에 부지런하여, 한 번도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그 후 서울로 나와서 초제사(招提寺)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다시 많은 스승들을 두루 찾아다녀, 다른 논설들을 융화하고 다스렸다. 삼장과 대승의 경전들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였다.
널리 대비바사(大毘婆沙) 및 『잡심론(雜心論)』·건도(揵度)4) 등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교정했다. 그런 까닭에 아비담(阿毘曇) 한 부에 있어서는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어려운 문제와 굳은 의문점은 모두 펼쳐 풀이하였다. 나라 안의 학문하는 손님들이 반드시 찾아오지 않음이 없었다. 한 번 개강할 때마다, 책을 걸머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사문 승민(僧旻)·법운(法雲) 등도 모두 명성이 한 시대에 높은 이들이다. 그들도 역시 책을 손에 잡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칭찬하고 접견하였다.
천감 14년(515)에 오정(吳程)에 돌아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아비담대의소(阿毘曇大義疏)』 10여 만 글자를 지었다. 세상에서 성행한다.
27) 석담비(釋曇斐)
4) 경전을 종류별로 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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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의 본래 성은 왕(王)씨이며, 회계의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혜기(慧基)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찍부터 잘 깨우친다는 일컬음으로 알려졌다. 대승의 깊은 경전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고, 노자와 장자·유교·묵자도 자못 많이 펴 보았다. 그 후 이쪽저쪽 찾아다니며 경론의 종지를 두루 궁구하였다. 고향 고을의 법화사(法華寺)에 자리 잡고 강설을 이어가니, 배우는 무리들이 줄을 이루었다.
담비는 마음이 상쾌하게 트였으며, 뜻으로 품은 것도 맑고 그윽하였다. 그런 까닭에 『소품경』과 『유마경』에서 더욱 독보적인 존재를 이루었다. 게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와 쌓아온 조예로 문장과 말재주가 높고 빛나서, 강석에서의 풍모로 당대의 존중을 받았다.
양(梁)나라 형양(衡陽)의 효왕(孝王)인 소원간(蕭元簡)과 은사(隱士)인 여강(廬江)의 하윤(何胤)도 모두 멀리서 그의 아름다운 계책에 고개 숙이고, 초청해서 강설하였다.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여남(汝南)의 주옹(周顒), 주옹의 아들 주사(周捨) 등도 모두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교를 맺었다.
천감(天監) 17년(518)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그가 지은 글과 문장은 자못 세상에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담비가 강남 지방에서 명성이 있다 하여, 칙명을 받아 10성(城)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임명장과 교지를 갖고 간 것을 엎드려 받기도 전에,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땅의 비구와 비구니들은 가슴 속에서 그의 덕을 그리워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법장(法藏)
담비와 같은 고을의 남암사(南巖寺)에 법장이 있었다. 그도 계율을 잘 지키고, 소박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왕성하게 생명을 놓아 살려주고 구조하였다. 또한 불화와 불상을 일으켜 세웠다.
∙명경(明慶)
당시 여요현(餘姚縣)에는 명경이 있었다. 담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명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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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의 본래 성은 정(鄭)씨이다.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정결하며, 학업이 맑고 아름다웠다. 본래 승염(僧炎)에게 사사하다가, 다시 홍실(弘實)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스승과 제자 세 명 모두 동남 지방에서 존중을 받았다.
【論】이상을 통틀어 논하면 무릇 지극한 이치란 말이 없고, 그윽한 귀결점이란 아득하고 고요하다. 아득하고 고요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지고, 말이 없는 까닭에 말하는 길이 끊어진다. 말하는 길이 끊어질 때 말을 하면 그 참뜻을 다치고,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질 때 생각을 일으키면 그 참됨을 잃는다. 그런 까닭에 유마거사는 방장실(方丈室)에서 입을 다물고, 석가모니는 쌍수에서 침묵하셨다. 바야흐로 이치의 깊고 고요함을 아는 까닭에 성인들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만 멀고 먼 꿈의 경계는 진리와의 거리가 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꿈틀거리는 무리들[蠢蠢之徒]에게 가르침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길을 열어주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신령하고 미묘함을 빌려서 중생들에게 응하시고, 어둡고 고요함을 체득하여 신과 통하신다. 미묘한 말을 빌려 도로 가는 나루터로 삼고, 형상에 의지하여 진실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신다.
“병법이란 상서롭지 않은 도구이지만 어쩔 수 없어 이를 쓴다.5) 말이란 참된 물건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어 이를 베푼다.”
그러므로 처음 녹야원(鹿野苑)에서 4제(諦)로써 말의 시초로 삼기 시작하여, 마지막 곡림(鵠林)에서 3점(點: 伊字三點)으로 원(圓)의 극치로 삼기에 이르신 것이다.
그 사이에 말과 문장을 펴신 수효는 8억을 넘어, 코끼리와 낙타가 업고 가도 다 하지 못하며, 용궁의 물이 넘치더라도 다하지 못한다. 장차 올가미를 빌려서 토끼를 잡고자 하고, 손가락에 기대서 달을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달을 알면 손가락은 치워야 하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야 한다.
5) 병법이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여서 군자가 쓸 만한 도구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야만 쓰는 것이며,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노자』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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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진리에 근거하고 말에 근거하지 말라[依義莫依語]’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교에 막혀 있는 사람들은 지극한 도란 경전의 편장(篇章)에서 극에 달한다 생각한다. 형상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법신을 장륙(丈六)의 불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모름지기 그윽하고 은미한 종지를 끝까지 통달하려면, 묘한 이치를 말의 테두리 밖에서 터득해야 한다[妙得言外]. 4무애변(無礙辯)으로 장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여,
이익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보이는 것은 법사에게 달려 있는 것이리라[示敎利熹 其在法師乎].
그러므로 주사행(朱士行)은 경전을 우전국(于闐國)에서 찾아 서원하였다. 경이 불타지 않게 하여, 끝내 『반야경』으로 하여금 동쪽 낙수에서 성행케 하여, 생각조차 잊음[忘想]을 말세에 전하였다. 이어 차례로 축잠(竺潛)·지둔(支遁)·우란(于蘭)·법개(法開) 등은 모두 고상한 기개가 높고 빛나며 도의 풍모가 맑고 넉넉하여, 교화를 전한 아름다운 공덕 또한 버금갔다.
중간에 석도안(釋道安)이 제자로서 성스러운 스승 축불도징(竺佛圖澄)에게서 배움을 받았다. 도안도 학업을 제자 혜원(慧遠)에게 전수하였다. 오직 이 3대의 세상에서만은 현인이 결핍되지 않았다. 아울러 계율과 절조도 엄숙하고 밝으며, 지혜의 보배도 불꽃같이 성대하였다. 저 햇빛 같은 지혜의 남은 광휘로 하여금, 거듭 천 년 뒤에 빛나게 하였다. 저 향기 높은 땅의 남은 향기로 하여금, 거푸 염부제주(閻浮提州)의 땅을 물씬 향기가 감돌게 하였다. 솟
아오르는 진리의 샘물이 여전히 흘러들어 오는 것은, 참으로 이 세 분에게 힘입은 결과이다.
혜원은 거주지를 호계(虎溪)에 국한하였다. 거꾸로 스승인 도안은 마침내 제왕과 가마를 같이 탔으니, 저 고상한 도에 비해 마치 의혹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말하고 입 다물고 움직이고 머무는 것은 오직 시대에 따라 마땅함이 있는 것이다. 네 사람의 노인이 한(漢)나라 궁실을 찾아간 것은 그들을 등용하여 간 것이다. 삼려대부(三閭大夫: 屈原)가 초(楚)나라를 떠난 것은 그를 버리므로 몸을 숨긴 것이다. 불경에서는 말한다.
“만약 정법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임금과 지팡이를 지닌 늙은이의 말을 친근하게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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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비록 한때 제왕과 함께 가마를 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백성들을 위하여 간언(諫言)하였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에는 아라한과에 감응하여 구름이 열리며 보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 후 형주(荊州)·삼협(三峽) 일대에서 이름이 드러난 이로는 도익(道翼)·도우(道遇)를 첫 번째로 말하며, 여산(廬山)에서 맑고 검소하게 산 이로는 혜지(慧持)·혜영(慧永)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도융(道融)·도항(道恒)·승영(僧影)·승조(僧肇)는 덕이 관중에서 무겁고, 도생(道生)·승예(僧叡)·법창(法暢)·법원(法遠)은 종사로서 건업을 이끌었다. 담도(曇度)와 승연(僧淵)은 홀로 강서의 보물을 독차지하였다. 초진(超進)과 혜기(慧基)는 곧 절동(浙東)의 성대함을 드날렸다.
비록 세대와 사람이 바꾸어 가며 융성하였지만, 모두가 도술에 있어서는 멀리 시대를 초월하여 일치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 운세의 나머지를 일으킨 것이 햇수로 따지면 거의 5백 년이 된다. 공덕의 효능의 아름다움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이를 찬양하여 말하노라.
남은 기풍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법의 물결 머뭇거렸으니
저 밝은이들 아니시면
무너지는 불법 뉘 떨쳤으랴.
축잠(竺潛)과 도안(道安)이 구슬이라면
혜원(慧遠)과 승예(僧叡)는 구슬을 꿰었다네.
굽고 뒤틀린 것 도끼로 깎고
빗긴 먼지 털고 씻어내듯
흰 실 이미 물들었어도
앞으로는 길이 변하리라.
遺風眇漫 法浪邅迴
匪伊釋哲 孰振將頹
潛安比玉 遠叡聯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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鐇斧曲戾 彈沐斜埃
素絲旣染 承變方來
고승전 제9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3. 신이(神異) ①
1) 축불도징(竺佛圖澄)
축불도징은 서역(西域) 사람이며, 본래 성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고 진실하게 배움에 힘썼다. 그리하여 경전 수백 만 글자를 외우고, 의미 또한 잘 이해하였다.
비록 이 땅의 유교와 역사책을 아직 읽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사들과 의심나고 막히는 곳을 따르고 논할 때면, 마치 증거 조각이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스스로 말하였다.
“두 번 계빈국(罽賓國)에 가서 이름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니, 서역에서는 모두 득도하였다고 말하였다.”
진(晋)의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 중국에 와서 낙양(洛陽)으로 갔다. 불법을 널리 펴는 데 뜻을 두었다. 또한 신비한 주문[神呪]도 잘 외워서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삼씨로 짠 기름[麻油]을 연지(胭脂)에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손바닥에 있는 그대로 환히 드러났다.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것 같았다. 깨끗하게 목욕재계한 사람도 역시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말하면,
효험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낙양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유요(劉曜)의 군대가 낙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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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들어왔다. 그러므로 제왕의 서울이 어지러워져서, 절을 세우려는 불도징의 뜻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가의 초야에 숨어서, 세상의 변화를 관망하였다.
당시 석륵(石勒)1)이 갈파(葛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로지 살육으로 위엄을 삼았다.
사문으로서 그에게 살해된 자도 매우 많았다. 불도징은 창생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지팡이를 짚고 군문에 도달하였다.
석륵의 휘하에 있던 대장군 곽흑략(郭黑略)은 평소에 불법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불도징은 곧 곽흑략의 집에 몸을 숨겨 그곳에 머물렀다. 곽흑략이 불도징에게서 5계를 받고 제자의 예로 숭배하였다. 그 후 곽흑략은 석륵을 따라 정벌에 나섰다. 그때마다 미리 승부를 알았다. 석륵이 의아하여 물었다.
“경에게 출중한 지모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런데도 매양 행군할 때의 길흉을 아는 것은 어째서인가?”
“장군은 하늘이 내리신 우뚝 뛰어난 무예를 지닌 분으로 보이지 않는 신령이 돕니다. 도술과 지혜가 비상한 한 승려가 계십니다. 그분이 ‘장군이 중국 땅을 차지하고 싶다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후해서 아뢴 말씀은 모두 그의 말입니다.”
석륵은 기뻐하였다.
“하늘이 내려주었도다.”
불도징을 불러 물었다.
“불도에는 어떤 영험(靈驗)이 있는가?”
불도징은 석륵이 깊은 이치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바로 도술로써 징험해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비록 멀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가까운 일로도 역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곧 적당한 그릇을 가져와,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푸른 연꽃이 피어나, 빛나는 색이 눈부시게 하였다. 석륵은 이로
1) 유요(劉曜)를 죽이고 후조(後趙)의 제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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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암아 불법을 믿고 감복하였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간언하였다.
“무릇 왕자란 덕에 의한 교화가 지경 안을 촉촉이 적셔주면, 네 가지 신령한 영물이 상서로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정치가 피폐하고 도가 사라지면, 불길한 혜성(彗星)과 발성(孛星)이 하늘에 나타납니다. 변치 않는 물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대로 길흉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예나 이제나 항상 하는 증거로서, 하늘이 사람에게 내리는 밝은 훈계입니다.”
석륵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마땅히 주살 당할 남은 사람 가운데, 그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 열에 아홉은 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오랑캐와 중국 사람들 거의가 모두 부처님을 받들었다.
당시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서 아무도 이를 치료하지 못하였다. 불도징이 이들을 의술로 치료하여 때에 맞추어 병이 줄어들었다. 남몰래 베풀어 말없이 도움 받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석륵이 갈파에서 하북(河北)으로 돌아갔다. 방두(坊頭)를 지나가자, 방두 사람들이 밤에 병영을 기습하려 하였다. 불도징이 곽흑략에게 말하였다.
“잠시 후 도적들이 올 것이니, 공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소.”
과연 그의 말과 같았는데 대비하였으므로 패하지 않았다.
석륵이 불도징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밤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칼을 손에 잡고 앉아서 불도징에게 사람을 보내 전하게 하였다.
“밤사이 대장군의 소재를 모릅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불도징에게 가서 아직 말하기도 전에 불도징이 거꾸로 물었다.
“평안한 거처에 침범하는 적도 없다. 무엇 때문에 밤 경계를 엄중히 하는가?”
석륵은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석륵이 그 후 화가 나서 모든 도사들을 살해하고, 아울러 불도징도 괴롭히려 하였다. 불도징은 곧 피하여 곽흑략의 집에 이르러, 제자에게 말하였다.
“만약 장군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나의 소재를 묻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보고하여라.”
심부름꾼이 곧 뒤이어 이르렀으나 불도징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서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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륵에게 보고하니, 그가 놀랐다.
“내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성인을 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불도징을 만날 생각만 하였다. 불도징은 석륵이 잘못을 뉘우쳤음을 알았다. 이튿날 새벽 찾아가니 그가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어디를 갔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공에게 성난 마음이 있기에 어젯밤에는 짐짓 일부러 피했습니다. 지금은 공께서 잘못을 뉘우치므로 감히 찾아온 것입니다.”
석륵은 크게 웃었다.
“도인이 틀렸네.”
양(襄)나라 성을 둘러싼, 해자로 흘러드는 물의 근원은 성의 서북쪽 5리 되는 지점의 단환사(團丸祠) 아래에 있었다. 그 물이 갑자기 메말랐다. 석륵이 불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물을 얻겠나?”
불도징이 말하였다.
“지금 곧 용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석륵은 자(字)가 세룡(世龍)이라서, 불도징이 자기를 조롱하는 줄 알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 용으로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보았네.”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는 성심으로 한 말이지 농담이 아닙니다. 샘물의 원천에는 반드시 신룡(神龍)이 삽니다. 지금 그곳에 가서 칙명을 내리시면, 물을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제자인 법수(法首) 등 몇 사람과 함께 샘물의 상류원에 이르렀다. 그 원천의 옛 곳은 이미 오래 전에 건조하게 말라, 갈라진 것이 수레바퀴 자국 같았다. 따라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며, 물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불도징은 새끼를 맨 의자[繩床]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사르고 수백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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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의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물이 솟아나 미세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 때 길이가 대여섯 치 가량 되는 한 작은 용이 물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여러 도사들이 다투어 그곳에 가서 이것을 보려 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용에게는 독이 있으니, 그 옆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잠시 후에 물이 크게 솟아나 성의 해자가 가득 찼다. 불도징은 한가롭게 앉아 탄식하였다.
“이틀 후에는 아마도 한 소인배가 이 성 아래를 놀랍게 동요시킬 것이다.”
양나라의 설합(薛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인배이면서 교만하여 선비족(鮮卑族) 노복을 얕보고 희롱하였다. 노복이 분해서 칼을 뽑아 그 아우를 찔러 죽였다. 방으로 들어가, 그의 형을 잡고 칼로 심장을 겨누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곧 손을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설합에게 말하였다.
“나를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면, 당신의 아이를 살려주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함께 죽겠다.”
집 안팎이 깜짝 놀라, 가서 구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석륵도 스스로 그곳에 갔다. 이 광경을 보고 설합에게 말하였다.
“노복을 보내서 경의 아들을 보전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오. 이런 일이 일단 일어나면 바야흐로 훗날에 해가 될 것이니, 경은 잠시 너그러운 심정을 가지시오. 나라에는 변치 않는 법이 있소.”
그러나 설합이 사람들에게 노복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다. 노복이 마침내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선비족의 단파(段波)가 석륵을 공격하였다. 그 무리의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석륵은 두려워서 불도징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어제 절의 방울이 울리면서 이르기를, ‘내일 아침밥을 먹을 때면 단파를 사로잡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륵이 성에 올라 단파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앞뒤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백해져 말하였다.
“적군의 행렬이 땅을 기울게 할 정도이다. 어찌 단파를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공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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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안(夔安)을 보내서 불도징에게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미 단파를 사로잡았소.”
당시 성의 북쪽으로 복병이 나갔다가, 우연히 단파를 만나 사로잡은 것이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단파를 용서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라 권유하였다. 석륵이 이에 따르니, 마침내 선비족의 쓰임을 얻었다.
당시 유재(劉載)는 이미 죽었다. 유재의 사촌동생 유요(劉曜)가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연호를 광초(光初)라 칭하였다. 광초 8년에 유요는 사촌동생인 위중산왕(僞中山王) 유악(劉岳)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석륵을 공격하였다. 석륵은 석호(石虎)를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이에 항거하였다. 낙양의 서쪽에서 크게 싸웠다. 유악이 패배하여 석량오(石梁塢)만 보전하였다. 석호도 울타리를 단단히 하고 수비하였다. 불도징이 제자들과 관사(
官寺)에서 중사(中寺)로 가다가, 절문을 들어서면서 탄식하였다.
“유악이 불쌍하구나.”
제자인 법조가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어제 해시(亥時)에 유악은 이미 사로잡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광초(光初) 11년에 유요는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몸소 낙양으로 가서 유요에게 항거하려고 하였다. 내외의 보좌하는 관료들로서 반드시 말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륵이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탑 상륜(相輪)부의 방울이 이르기를, ‘수지(秀支)·체려강(替戾岡)·복곡(僕谷)·구독(劬禿)’이라 하니, 이는 갈족(羯族)의 말입니다. 수지는 군대라는 뜻이고, 체려강은 나간다는 뜻이고, 복곡은 유요가 오랑캐에 있을 때의 벼슬 이름이며, 구독은 사로잡는다는 뜻에 해당합니다.
이 말은 군대가 나가면,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서광(徐光)이 불도징의 말을 듣고 간절하게 석륵의 출병을 권유하였다. 석륵은 마침내 맏아들 석홍(石弘)으로 하여금 남아서 불도징과 함께 양(襄)나라를 진정케 하였다. 그리고는 몸소 중군(中軍)의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낙양성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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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이 교전하자마자 유요의 군대는 크게 허물어졌다. 유요의 말이 물 속에 빠져서, 석감(石堪)이 그를 사로잡아 석륵에게 보냈다. 불도징이 당시 어떤 물건을 손바닥에 바르고 이를 보니, 큰 무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포박당해 있고 목에 붉은 끈이 감겨 있었다. 그 때 이런 일을 갖고 석홍에게 알렸다.
“그때쯤 되어서 바로 유요를 사로잡았습니다.”
유요를 평정한 후에, 석륵은 조천왕(趙天王)이라 외람되이 일컬었다.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바꾸어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이 해는 동진(東晋) 성제(成帝)의 함화 5년(330)에 해당한다.
석륵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 불도징을 더욱 독실하게 섬겼다. 당시 석총(石葱)이 모반을 꾀하였다. 그 해 불도징이 석륵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올해에는 파[葱: 석총을 말한 것] 속에 벌레가 있어 먹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파를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륵은 지경 안에 나누어 알려서, 파를 삼가하고 먹지 말게 하였다. 8월에 이르러 과연 석총이 달아나니, 석륵은 불도징에게 더욱 존중을 더하였다. 반드시 일이 있으면, 자문 받은 후에 행하였다. 큰 스승[大和上]이라 불렀다.
석호(石虎)에게 빈(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뒤에 석륵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문득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이미 이틀이 지났을 때, 석륵이 말하였다.
“예전에 괵(虢)나라의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그를 살렸다고 짐은 들었다. 큰 스승[大和上]은 우리나라의 신인(神人)이니, 급히 찾아가서 알리는 것이 좋겠다. 반드시 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불도징이 곧 버들가지를 갖고 와서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죽은 아이가 일어났다.
얼마 후에는 예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석륵의 모든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절 안에서 길러졌다. 4월 초파일마다 석륵은 몸소 절을 찾아 불상을 씻으며, 아이들을 위하여 발원하였다.
건평(建平) 4년 4월에 하늘은 고요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데, 탑 위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렸다. 불도징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방울이 알려주는 구나. ‘나라에 초상이 나며, 그 시기는 올해를 지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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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고.”
이 해 7월에 석륵이 죽고, 아들 석홍(石弘)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도읍지를 업성(鄴城)으로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칭하였다. 석호는 마음을 기울여 불도징을 섬기기를 석륵보다도 더 존중함이 있었다. 글을 내려 전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이 나라의 큰 보배인데도, 영예로운 작위를 더하지 않았다. 높은 봉록(俸祿)도 받지 않았다. 영화와 봉록이 미치지 않으니 무엇으로 그 덕을 기리겠는가?
지금부터는 옷을 비단으로 만들어 드리고, 타실 것은 그림을 조각한 큰 가마로 마련하여 드리도록 하라.
조회(朝會)가 있는 날에 스승께서 궁전에 오르실 때, 상시(常侍) 이하 모든 사람들이 가마를 들어올리고, 태자와 여러 공자(公子)들이 양쪽을 부축해서 오르게 하라. 주도하는 사람들이 ‘큰 스승[大和上]께서 오셨다’고 외치면, 모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 존귀하심을 나타내도록 하라.”
또한 위사공(僞司空) 이농(李農)에게 명령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을 드려라. 태자와 모든 공자들은 5일에 한 번 찾아가서, 짐의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거라.”
불도징은 당시 업성 안의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제자인 법상(法常)을 북쪽으로 보내 양(襄)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제자인 법좌(法佐)는 양나라에서 업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양기성(梁基城) 아래에서 서로 만나 함께 유숙하였다. 수레를 마주 대고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승[和尙]의 일을 언급하였다. 아침 무렵에 각기 길을 떠났다. 법좌가 업성에 이르러 절에 들어가서 불도징에게 문안을 드리니, 불도징은 웃음으로 맞이하였다.
“어젯밤에 너와 법상이 수레를 맞대고 함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구나. 선대 사람들 말씀에, ‘공경하라고 하지 않더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마음을 고쳐먹지 말라. 삼가라고 하지 않더냐? 홀로 있어도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는 자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근본이다. 그것을 너는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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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좌가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이에 나라 안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마다 말하였다.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스승[和上]께서 너의 마음을 아신다.”
불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감히 울거나, 침을 뱉거나, 똥이나 오줌을 누지 않았다.
당시 태자 석수(石邃)의 두 아들이 양나라에 살았다. 불도징이 석수에게 말하였다.
“소아미(小阿彌: 남의 아들에 대한 존칭)께서 요즘 아마도 병에 걸렸을 터이니, 가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수가 곧 심부름꾼을 보내 가보게 하였다. 과연 이미 병을 앓았다. 궁전의 대의인 은등(殷騰)과 외국의 도사들이 고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불도징은 제자인 법아(法雅)에게 말하였다.
“바로 성인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신다 하더라도, 이 병은 고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들 무리들이 고칠 수 있겠느냐?”
그 후 사흘 만에 과연 그 아이는 죽었다. 석수는 주색에 빠져 장차 역모를 꾀하였다.
어느 날 환관에게 말하였다.
“스승[和上]은 신통력이 있다. 어쩌면 도모하는 일이 발각될 수 있다. 내일 그가 오면, 곧 먼저 그를 제거하거라.”
불도징은 보름날이 되자 곧 궁중에 들어갔다. 석호를 뵈려 하면서, 제자인 승혜(僧慧)에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천신(天神)이 나를 불러 이르기를 ‘내일 궁중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사람들 앞을 지나쳐 오지 말아라’고 하였다. 내가 만일 사람 앞을 지나쳐 오는 곳이 있거든, 네가 곧 이를 멈추게 하여라.”
불도징은 항상 궁중에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석수의 앞을 지나갔다. 석수는 불도징이 궁중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애타게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
불도징이 곧 남대(南臺)에 오르려 하자, 승혜가 옷을 잡아당겼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사정상 멈출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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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지만 편안하지가 않아 곧 일어났다. 석수가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아서 석수가 꾀한 일은 마침내 어그러졌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 탄식하였다.
“태자가 난리를 꾸며 그 형세가 곧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고자 하여도 말하기 어렵고, 참으려 하여도 참기 어렵구나.”
곧 어떤 일에 인연하여 조용히 석호에게 경계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끝내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 후 곽흑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 북쪽 산의 강(羌)족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오랑캐들이 매복시킨 복병(伏兵)들 속에 떨어졌다. 당시 불도징은 법당 위에 앉아 있고, 제자인 법상(法常)이 그의 옆에 있었다.
불도징이 참연히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였다.
“곽공이 지금 곤경에 빠졌구나.”
그리고는 소리 높이 외쳤다.
“대중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라.”
불도징도 또한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다가, 잠시 후 다시 말하였다.
“만약 동남쪽으로 나간다면 살 수 있으나, 다른 방향은 곤란하다.”
다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얼마 후 말하였다.
“탈출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곽흑략이 돌아와 스스로 설명하였다.
“강족 오랑캐의 포위망 속에 떨어졌습니다. 동남쪽을 향해서 말을 달리던 중에, 바로 장막 아래에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을 내주면서, ‘공은 이 말을 타시오. 소인이 공의 말을 타겠소. 구제될지 구제되지 못할지는 천명에 맡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곽흑략은 그의 말을 빌려 타서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날짜와 시간을 미루어 따져보니, 바로 불도징이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던 때였다.
위대사마(僞大司馬)인 연공(燕公) 석빈(石斌)을 석호가 유주(幽州)의 목사로 임명하여 계(薊)에 주둔케 하였다. 이 때 뭇 흉악한 무리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마음껏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어제 밤에 천신(天神)이 말하기를, ‘빨리 거두어들여 말을 돌아오게 하여라. 가을이 되면 제(齊)가 아마도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호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곧 모든 곳에 명령하여 말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어떤 사람이 석호에게 거짓으로 석빈을 모함하였다. 석호는 석빈을 불러 3백 대의 채찍질을 하고, 그의 소생모인 제씨(齊氏)를 죽였다.
석호는 활을 휘어 화살을 집고서는, 스스로 석빈에게 행한 형벌이 가볍다고 생각하고, 곧 손수 5백 명을 죽이려 하였다. 불도징이 간언하였다.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며, 죽으면 다시는 살릴 수 없습니다. 예법에도 ‘친히 사람을 죽여서 은혜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천자가 손수 행하는 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석호는 이윽고 중지하였다. 그 후 진(晋)나라 군대가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지방으로 진출하니, 농북(隴北) 일대의 모든 성이 침략당하여 핍박받았다. 세 방면에서 다급함을 알려와 인정이 위태하고 어지러웠다. 이에 석호는 성을 내었다.
“나는 부처를 받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했다. 하지만 다시 외부의 침략을 당하니, 부처에게는 신통이 없다.”
불도징이 이튿날 새벽에 일찍 궁중에 들어가니, 석호가 이 일로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도징은 이로 인하여 석호에게 간언하였다.
“왕은 전생에 큰 장사꾼이 되어, 계빈사(罽賓寺)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큰 모임에 공양을 올릴 때에 그 가운데는 60나한(羅漢)이 있었습니다. 저의 이 미미한 몸도 그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득도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공양주는 명이 다하면 아마도 닭으로 태어났다가, 그 후에는 진(晋)나라 땅의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님께서는 임금이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국경 지대에 군대가 침범하는 것은 나라에 보통 있는 일인데, 어떻게 삼보를 원망하고 비방할 수 있으며, 한밤중에 독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까?”
석호는 이에 믿고 깨달아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다. 늘상 석호가 불도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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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물었다.
“불법이란 어떤 것인가?”
불도징이 대답하였다.
“불법이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호가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형벌과 죽이는 일이 아니면, 난리를 평정하여 세상을 깨끗이 할 수가 없다. 이미 계율을 어기고 살생을 하였다. 그러니 비록 다시 부처님을 섬긴다 하더라도, 어떻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제왕이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마땅히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을 수순하여 삼보를 크게 드러내어, 포학한 짓을 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흉악하고 어리석은 무뢰한(無賴漢)들은 교화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악한 일이 있으면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이고, 형벌을 내려야 할 사람만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포학하고 마음대로 날뛰는 무리를 살해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다시 재산을 기울여 불법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재앙과 화를 풀 길은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죽이고 자비심을 일으켜 널리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신다면, 불교는 영구히 융성해지고, 나라의 복된 운수도 바야흐로 먼 훗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석호는 비록 다 따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익된 것이 적지 않았다. 석호 아래에서 상서(尙書)로 있던,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안의 부유함으로 부처님을 섬겨서 각기 큰 탑을 세웠다. 불도징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청정하고 욕심 없이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시주들은 의례적으로는 대법을 받들면서도 탐욕과 인색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사냥을 즐기기에 한도가 없고, 재물을 모아 쌓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현세에서 그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미래의 복된 과보를 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장리와 장량 등은 모두 살육 당하고 멸족되었다. 당시에 또한 가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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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계속되어 정월에서 유월까지 이르렀다. 석호는 태자를 임장(臨漳)의 서부구(西釜口)로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오래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석호는 불도징에게 스스로 기우제를 행하게 하였다. 곧 두 마리의 흰 용이 나타나, 제사 드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 날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렸다. 그 해 농사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융맥(戎貊: 북쪽 오랑캐)의 무리들이 전에는 불법을 몰랐었다. 불도징의 신비한 영험을 듣자, 모두 멀리 불도징을 향하여 예배드렸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된 것이다.
불도징은 늘상 제자를 서역으로 보내서 향을 사오게 하였다. 제자가 길을 떠나자, 불도징이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을 사러 간 제자가 손바닥에 보인다. 어느 곳에선가 처음으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으려 하는구나.”
그러고는 향을 사르고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여, 멀리 있는 그를 구제하여 보호하였다.
그 후 제자가 돌아와서 말하였다.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문득 향냄새를 맡자, 도적들이 까닭 없이 스스로 놀라 말하기를 ‘구원병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며, 저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석호는 임장(臨漳)에서 옛 탑을 수리하였다. 승로반(承露盤)이 모자랐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임치성(臨淄城) 안에는 옛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탑이 있고, 땅 속에는 승로반과 불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위에는 숲과 나무들이 무성하나, 그곳을 파면 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곧 그림을 그려 심부름꾼에게 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을 파니, 과연 승로반과 불상을 얻었다.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불도징이 충고하여 말했다.
“연나라의 운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내 그것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석호가 여러 번 연나라를 토벌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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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를 믿었다.
불도징의 도에 의한 교화가 행해지자, 백성들이 대부분 부처님을 받들었다. 모두 절[寺廟]을 영조하며, 서로 다투어 출가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허물과 과오가 많이 생겨났다. 석호는 글을 내려 중서성(中書省)에 물어보았다.
“부처님을 세상에서는 세존이라 부르며 국가에서는 받드는 분이다. 동네의 소인으로 벼슬과 직위가 없는 사람들도, 부처님을 섬겨도 마땅한 것인가? 또한 사문이란 모두가 마땅히 고결하고 곧고 바른 사람으로, 정진을 행한 연후에야 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문의 수효는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는 혹 간사하고 악독한 자가 부역을 피한 경우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러니 이를 가려내 자세히 의론하는 것이 좋겠다.”
중서저작랑(中書著作郞)인 왕도(王度)가 상주하여 아뢰었다.
“무릇 ‘왕자란 천지에 교사(郊祀)의 제사를 올리고, 모든 신을 제사로 받들어야 한다’고 제사의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 예법은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는 서역에서 태어났고, 외국의 신이라 공덕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제사 드리며 받들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한(漢)나라의 명제(明帝)가 꿈에 부처에 감응하여 처음으로 그 도가 전해졌습니다.
오직 서역 사람에게만 도읍지에 절을 세워, 그 신을 받드는 일을 허용하였을 뿐입니다.
한나라 사람은 모두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위(魏)나라에서 그 제도를 이어받아 역시 전대의 법도를 닦아왔습니다. 지금 우리 위대한 조(趙)나라가 천명을 받아서는, 거의 옛 법도로 말미암고 있습니다.
중국과 오랑캐는 제도가 다르고, 사람과 신에 있어서도 부류가 다릅니다. 외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고,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 또한 예법이 다릅니다. 중국의 의복과 제사를 뒤섞이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조나라 사람은 모두 절을 찾아가 향을 사르거나 예배드리는 일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단절시켜 전례(典禮)를 따르도록 해야만 합니다.
모든 관료와 공경대부에서부터 아래로는 많은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예에 따라 모두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도에 어긋나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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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지내는 사람과 같은 죄로 처벌하십시오. 조나라 사람으로서 사문이 된 자는 다시 4민(民)의 복장으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위중서령(僞中書令) 왕파(王波)도 왕도와 같은 내용을 상주하였다. 석호는 글을 내려 전하였다.
“왕도의 논의에 의하면, 부처는 외국의 신이라서 이 나라의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받들 만한 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짐은 변방에서 태어나, 분수에 넘치게 한 시기의 천운을 만나 중국 땅에 군림하였다.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제사에다 마땅히 본래의 풍속을 겸하여 따라야 할 것이다. 부처는 바로 오랑캐 나라의 신이니 마땅히 받들어야 할 존재다.
무릇 제도라는 것은 윗사람으로 말미암아 행해져서 영원히 세상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그렇거늘 진실로 일에 이지러진 점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전시대의 법에 구애받겠는가?
오랑캐든 조나라 사람이든 기타 모든 만족(蠻族)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버리고 부처님을 섬기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도를 위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이에 계율에 태만하던 무리들도 이로 인하여 계율 지키기에 힘썼다.
황하(黃河) 안에서는 예전에는 자라가 생겨나지 않았다. 문득 자라 한 마리를 얻어, 석호에게 바쳤다.
불도징이 이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환온(桓溫)2), 그 사람이 강물 속에 들어갈 날도 멀지 않겠구나?”
환온의 자는 원자(元子: 黿)이다. 그 후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당시 위현(魏縣)에 한 떠돌이 백성이 있었다. 그의 씨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상 위현의 한 가운데서 구걸을 하고 다녔다. 삼베로 된 속옷과 무명으로 된 치마를 입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유(麻襦: 삼베 속옷)라고 불렀다. 말솜씨는 탁월하고 모습은 정신병자와 같았다.
쌀이나 곡식을 구걸해서 얻으면 먹지 않았다. 곧 큰길에 흩어두고 일컬었다.
2) 동진(東晋)의 정치가. 대사마(大司馬)로서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시키고 간문제(簡文帝, 371~372)를 옹립하고 찬탈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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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天馬)의 먹이다.”
초흥(超興) 태수가 호적에서 빼내고 거두어, 석호에게 보내서 그를 만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나라 동쪽 2백 리에서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마도 한 비상한 사람을 보내올 것입니다. 그를 죽이지 마옵소서.”
과연 그가 말한 날짜대로 이 사람이 이르렀다. 이에 석호는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한 말은 없었다. 오직 이렇게만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아마도 기둥 하나짜리 궁전 아래에서 세상을 마칠 것입니다.”
석호는 이 말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그를 보내서 불도징을 찾아가게 하였다. 이 때 마유가 불도징에게 말하였다.
“예전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만나고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구나. 서쪽 오랑캐가 하늘의 명[玄命]을 받았으나, 운수가 끊어지는 것은 끝내 정해진 기일이 있다. 금을 비록 떨어뜨려 땅에서 녹인다 하더라도, 변방의 황무지 사람을 따를 수는 없다. 신령한 기약[靈期]의 자국을 몰아내서 제거하니,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나타내지 말거라. 후세 자손들의 잎새가 번성하면 내세의 복도 비로소 쌓이리라. 아름다운 시기를 어디에서 기약하겠는
가? 길이 이를 한탄하노라.”
불도징이 말하였다.
“하늘은 돌고 돌아 운이 다하면 운수가 나빠져서 지탱하지 못한다. 아홉 나무의 물이 어려워지면 도술로서도 안녕할 수가 없다. 어질고 밝은 이가 비록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기초가 반드시 무너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래도록 노닐어 염부제를 이롭게 했지만, 어지럽고도 어지러워 이런 근심만 많다. 걸어 구름을 넘나드는 집에 올라, 신령이 노니는 곳에서 만나자.”
불도징과 마유는 하루 종일 강론을 나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몰래 엿들은 사람이 있으나, 오직 이 몇 마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미루어 헤아려보면, 수백 년에 걸친 미래의 일을 논한 듯하다.
석호가 역마(驛馬)를 보내서 본래의 고을로 되돌려 보냈다. 이미 성밖을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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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자, 말을 사양하고 걸어갈 수 있다면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방문해야 할 곳이 있소. 그렇지만 출발하기에는 아직 편안한 시간이 아니오. 합구교(合口橋)에 이르면 머무르시오. 거기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소.”
심부름꾼은 그의 말대로 말을 달려 떠났다. 미처 합구교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마유는 다리 위에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行步]를 생각해보니, 나는 것과 같은 도술이 있는 듯하였다.
∙도진(道進)
불도징에게는 도진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뛰어나, 석호의 존중을 받았다.
어느 날 이야기가 은사(隱士)의 일에 대하여 미치자, 석호는 도진에게 말하였다.
“양가(楊軻)라는 사람은 짐의 백성이다. 10여 년 동안 그를 불렀으나, 짐의 명령에 공손하지 않았다. 짐짓 몸소 그를 찾아가 보았는데도 오만하게 누워 있었다. 짐이 비록 덕이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만방에 군림하고 있다. 내가 탄 가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끓고 땅도 용솟음친다. 비록 나무나 돌을 무릎 꿇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필부로서 길이 오만할 수 있는가? 예전에 태공(太公)이 제(齊)나라로 갈 때 먼저 화사(華士)를 주살하
였다. 태공은 현철한 인물이니, 어찌 그가 그릇된 일을 했겠는가?”
도진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순(舜)임금은 부들 옷[蒲衣]을 입은 사람을 넉넉히 대하였고, 우(禹)임금은 백성(伯成)을 찾아갔습니다. 위문후(魏文侯)는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 위에서 인사했고, 한(漢)나라는 주당(周黨)을 찬미하였습니다. 관녕(管寧)은 조조(曺操)의 부름에 불응하였고, 황보(皇甫)씨는 진(晋)나라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분의 성인과 네 사람의 임금은 함께 그들의 절조를 더했습니다.
장차 탐욕하고 다투는 무리들을 무찌르고, 맑은 풍조를 우뚝하게 하고자 한다면, 폐하께서는 순(舜)·우(禹)의 덕을 따르시고, 태공의 형벌 씀을 본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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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글로 쓰여집니다. 어찌 조(趙)나라의 역사에 은둔한 사람들의 전기가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석호는 그의 말에 기뻐하였다. 곧 양가를 그가 머물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고, 열 집의 조세(租稅)를 그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도진이 돌아와서, 자세히 이 이야기를 불도징에게 아뢰었다. 그러니 불도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말은 착했으나, 다만 양가의 명이 매달린 곳이 있구나.”
그 후 진주(秦州)에 병란(兵亂)이 일어났다. 양가의 제자는 양가를 소에 태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융(戎)족 군대에게 사로잡혀 모두 살해되었다.
어느 날 석호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양(羊)떼들이 물고기[魚]를 업고, 무리를 지어 동북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꿈입니다. 선비족(鮮卑族)이 중원 땅을 가질 것입니다.”
그 후 과연 모용씨(慕容氏: 5호 16국 때 燕나라를 세운 선비족)가 거기에 도읍하였다. 또 어느 날 불도징은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올랐다. 불도징이 문득 놀라서 말하였다.
“변(變)이다, 변이다. 유주(幽州)에서 화재를 만났구나.”
그리고는 이어 술을 갖다가 그쪽 방향에 뿌렸다. 오래 있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불은 꺼졌다.”
이에 석호는 사람을 보내서 유주에 가서 증험해 보게 했더니, 그곳에서 전하였다.
“그 날 불이 사방의 문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소낙비를 퍼부어 불을 껐습니다. 그 비에는 또한 자못 술기운이 있었습니다.”
석호의 건무(建武) 14년(348) 7월에 이르러, 석선(石宣)과 석도(石韜)가 장차 서로 죽이기를 꾀하였다. 당시 석선은 절에 이르러 불도징과 함께 앉아 있었다. 탑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리니, 불도징이 석선에게 말하였다.
“방울소리를 이해하십니까? 방울이 호자낙도(胡子落度)라고 말합니다.”
석선의 얼굴빛이 변하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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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슨 말인가?”
불도징은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늙은 오랑캐가 도를 위한다면서 산에 살지 않으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두터운 왕골방석에 앉아서 아름다운 옷을 입으니, 어찌 이것이 낙도(落度: 법도가 떨어진 것)가 아니겠습니까?”
그 후 석도가 그곳에 이르렀다. 불도징이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석도가 두려워하며 불도징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괴이하게 공에게서 피냄새가 나기 때문에 쳐다보았을 따름이오.”
8월에 이르러 불도징은 열 사람의 제자들에게 별실에서 재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은 잠시 동각(東閣)에 들어갔다. 석호와 황후인 두(杜)씨가 안부를 물었다. 이 때 불도징이 말하였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으니, 열흘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불도각(佛圖閣)에서부터 서쪽까지, 이 법전에서 동쪽까지 유혈사태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하여 동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두황후가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노망이 나셨나? 어디에 도적이 있다는 것인가?”
불도징은 곧 말을 바꾸었다.
“6정(情)으로 받은 것이 모두 다 도적입니다. 늙으면 저절로 노망이 들겠지만, 다만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미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입니다.”
곧 빗댄 말로 바꾸어 다시는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이틀이 지나자, 과연 석선이 사람을 파견하여 절 안에서 석도를 살해하였다. 이어 석호가 초상에 임하는 기회를 틈타서 대역(大逆)을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이에 앞선 불도징의 훈계 때문에 면할 수 있었다.
석선은 일이 발각되어 수감 당하였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간하였다.
“기왕 이 사람도 폐하의 아들입니다. 어떻게 거듭 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노여운 마음을 참고 자비를 더하신다면, 그는 아직도 60여 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주살하고자 하신다면, 혜성(彗星)이 내려와 업궁사(鄴宮寺)를 쓸어낼 때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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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는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뚫어 끌고 가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더구나 그의 관속 3백여 명을 거두어, 모두 말이 모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장하(漳河)에 던졌다.
불도징은 곧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별실에서 재 올리기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한 필의 요괴한 말이 나타났다. 갈기와 꼬리에 모두 불에 탄 형상이 있었다. 이 말이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서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갔다. 동쪽으로 머리는 동궁(東宮)을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달아나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불도징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재앙이 미치겠구나.”
그 해 11월이 되자, 석호는 뭇 신하들에게 태무전전(太武前殿)에서 크게 향응을 베풀었다. 불도징은 읊조렸다.
“궁전이여, 궁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루네. 장차 사람들의 옷을 허물겠구나.”
석호는 궁전의 돌 밑을 파서 보게 하니, 돋아나는 가시나무가 있었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서 불상을 보면서 말하였다.
“장엄할 수 없는 것이 슬프고 한이 됩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일컬었다.
“3년 더 살 수 있을까?”
스스로 말하였다.
“안 돼, 안 돼.”
또 말하였다.
“2년, 1년, 백 일, 한 달, ……”
스스로 대답하였다.
“안 돼.”
곧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 제자인 법조(法祚)에게 말하였다.
“무신년(348)에 화란의 조짐이 싹트고, 기유년(349)에 석씨가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 난리가 미치기 전에 앞서, 죽음의 길을 따르려 한다.”
곧 사람을 보내서 석호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옮겨지는 법이라, 목숨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빈도의 허깨비와 불꽃같은 몸에 죽음의 기약이 이미 이르렀습니다. 이미 은혜를 입은 것이 남다르게 무거웠던 까닭에, 거꾸로 우러러 이 일을 알려드립니다.”
석호는 한탄하더니 말하였다.
“스승[和上]에게 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건만, 문득 그렇게 임종을 알립니까.”
곧 몸소 궁전을 나와 절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달랬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태어나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은 변치 않는 도리입니다. 명의 길고 짧음은 분수대로 정해져 있으므로, 사람이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는 행실이 온전한 것을 존중합니다.
덕은 게으름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진실로 일과 지조에 이지러진 것이 없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명을 어겨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의 뜻에 미진한 것이 있다면, 국가가 마음으로 불교의 진리를 존속시켜서 불법을 받드는 데 인색함이 없이 하며, 절[寺廟]을 흥기시켜서 높고 뚜렷하게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공덕을 칭송한다면, 마땅히 아름다운 복을 향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펴는 것이 맹렬하고, 도에 지나친 형벌[淫刑]이 가혹하게 넘치며, 뚜렷이 성전의 말씀을 어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법의 훈계에 등을 돌려서 스스로 징계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복된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바꾸어 아래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면, 나라의 운수가 연장되고 도인과 속인이 기뻐하며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목숨이 끝나는 지경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여한[遺恨]이 없겠습니다.”
석호는 비통해 하여 오열을 터트렸다. 불도징이 반드시 갈 것임을 알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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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를 위하여 땅속을 뚫어 분묘를 영조하였다.
12월 8일에 이르러 업궁사(鄴宮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해는 진(晋)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4년(348)이다. 그 때 나이는 117세이다. 선비와 서민들이 슬퍼하여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니,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였다. 이어 임장(臨漳)의 서쪽 시맥(柴陌)에 묻었다. 곧 석호가 만든 무덤이다.
갑자기 양독(梁犢)이 난을 일으켰다. 다음해에 석호가 죽었다. 염민(冉閔)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석씨 종족을 모두 다 죽였다.
염민의 어릴 때 자(字)가 극노(棘奴)였다. 앞서 불도징이 이른바 “가시가 숲을 이룬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불도징의 왼편 젖무덤 옆에 둘레가 네다섯 치 가량 되는 구멍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배 안까지 관통하였다. 때로는 창자를 뱃속에서 꺼내거나, 혹은 솜으로 구멍을 막기도 하였다. 밤에 책을 읽고자 하여 곧 솜을 뽑으면,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또한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곧 물가로 가서 창자를 꺼내어 씻고, 다시 안에 넣었다.
불도징은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모와 자태가 청아하였다. 오묘하게 깊은 경전을 해득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속의 논리에도 뛰어났다. 강설하는 날에는 오직 종문의 취지를 표방하고, 시작과 끝의 말을 밝게 깨닫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또한 자비로움으로 창생을 적셔, 위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건져 구제하였다.
흉악하고 강포한 두 석씨[石勒·石虎]의 정도에 비켜선 학살과 해침이, 만약 불도징과 날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 참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이익을 힘입었지만, 그것이 날마다 작용하는데도 몰랐을 뿐이다.
불조(佛調)·수보리(須菩提) 등 수십 명의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천축국의 강거(康居)에서 나와서, 수만 리 길을 멀다 않고, 발로 고비 사막을 건너 불도징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번면(樊沔: 樊川과 沔水)의 석도안(釋道安), 중산(中山)의 축법아(竺法雅)도 나란히 함곡관과 황하를 넘어 불도징의 강설을 들었다. 모두 정밀한 교리에 오묘하게 뛰어나, 그윽하고도 미묘한 진리를 헤아려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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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징은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업성(鄴城)과의 거리가 9만여 리나 된다. 집을 버리고 도문에 들어온 지는 109년이나 되었다. 술은 이빨의 문턱을 넘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계율이 아닌 것은 하지 않았고, 욕망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다.”
수업 받고 따라 노니는 이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전후해서 문도의 수효만도 거의 1만 명이었다. 거쳐간 주(州)·군(郡)에 절을 세운 것만도 893곳에 이르렀다. 그러니 불법을 널리 펴는 성대함에서 그보다 앞설 사람은 없었다.
과거 석호가 불도징의 시신을 염하면서, 살아 있을 때의 지팡이와 발우를 관 속에 넣었다. 그 후 염민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관을 열어보았다. 오직 발우와 지팡이만 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불도징이 죽던 달, 그가 고비 사막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석호는 불도징이 죽지 않았다고 의심했으므로,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없었다.
그 후 모용준(慕容俊)이 업성에 도읍을 정하고, 석호(石虎)의 궁전에서 거처하였다. 늘 꿈에 호랑이가 그의 팔뚝을 무는 것을 꾸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석호의 귀신이 재앙을 내려서 그런 것이다.’
곧 석호의 시체를 찾았다. 동명관(東明館)에서 이를 파내었다. 당시 시신은 강시(殭屍: 미이라)가 되어 허물어지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 시신을 발로 밟고 욕을 하였다.
“죽은 것이 어찌 감히 살아 있는 천자를 무섭게 하는가? 네가 궁전을 지어 완성시켰지만, 너의 자식의 도모하는 대상이 되었거늘, 하물며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가?”
매질을 하여 훼손시키고 욕을 하면서, 장하(漳河)에 던져버렸다. 시체는 다리기둥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장군인 왕맹(王猛)이 곧 이를 거두어 장례 지냈다. 마유(麻襦)의 이른바 ‘기둥 하나짜리 궁전’이 이것이다.
그 후 부견(符堅)이 업성을 정벌하자, 모용준의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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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 군대의 대장인 곽신호(郭神虎)에게 사로잡혔다. 실로 이는 모용준이 먼저 꿈에 본 일의 영험인 것이다. (곽신호의 끝 이름이 호랑이 ‘虎’이다.)
전융(田融)의 『조기(趙記)』에 일컬었다.
“불도징이 죽기 몇 해 전에 스스로 무덤을 영조하였다.”
불도징은 이미 반드시 무덤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시신도 그 속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 무덤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전융이 잘못 알고 썼을 것이다.
불도징은 혹 불도등(佛圖磴)이라고도 하고, 혹 불도등(佛圖橙)이라고도 하며, 또 혹 불도징(佛圖澄)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범어에서 취한 발음이 같지 않아서일 따름이다.
2) 단도개(單道開)
단도개의 성은 맹(孟)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숨어살 마음을 품었다. 경전 40만여 글자를 외우며, 곡식을 끊고 잣 열매를 먹고살았다. 잣 열매를 얻기 어려우면 다시 송진을 먹었다. 나중에는 미세한 돌가루를 복용하였다. 한 번에 몇 매(枚)씩 삼키기를 며칠에 한 번 하였다. 혹 어떤 때는 일정 분량의 생강과 후추를 먹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7년 동안 계속하니, 그 이후로는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몸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낮이나 밤이나 눕지 않았다. 동학(同學) 열 사람과 함께 이러한 것을 먹고 복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물러나서, 오직 도개만이 뜻을 온전히 하였다.
부릉(阜陵) 태수가 말을 보내서 도개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자 도개는 걸어가도 된다 하여 사양하였다. 3백 리 길을 말 탄 사람보다 하루 일찍 이르렀다.
산의 나무 신[樹神]이 간혹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시험하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석호의 건무(建武) 12년(346)에 서평(西平)에서 올 때는, 하루에 7백 리를 걸어서 남안(南安)에 이르렀다. 한 동자(童子)를 제도하여 사미(沙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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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았다.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그가 교법을 품수 받자, 걸음이 도개에 미칠 수 있었다.
당시 태사(太史)가 석호에게 상주하였다.
“선인의 별자리[仙人星]가 보였으니, 아마도 덕이 높은 선비가 경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석호는 두루 주(州)·군(郡)에 명령하였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상계(上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그해 겨울 11월에 진주(秦州) 자사가 표를 올려 도개를 보냈다.
처음에 업성(鄴城) 서쪽의 법림사(法綝祠)에 머물렀다. 그 후 임장(臨漳)의 소덕사(昭德寺)로 자리를 옮겼다. 방안에 높이 8척 내지 9척 가량의 이중 다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왕골로 엮어 선실(禪室)을 만들었다. 광주리 열 섬들이 크기만 하여, 항상 그 안에서 좌선하였다.
석호가 공급하는 물자는 매우 후하였다. 도개는 모두 이것으로 보시를 베풀었다.
당시 신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도개는 도무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게송을 설하였다.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이 가여워서
출가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려 했소.
이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학문에 밝아야 하니
학문이 밝으면 악을 끊을 수 있다오.
산이 멀어 양식 구하기 어려워
단식하는 계책을 만들었을 뿐
신선의 짝이 되려는 것이 아니니
전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
我矜一切苦 出家爲利世
利世須學明 學明能斷惡
山遠糧粒難 作斯斷食計
非是求仙侶 幸勿相傳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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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개는 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당시 진공(秦公)이었던 석도(石韜)가 도개를 찾아가 눈병을 치료하였다. 약을 넣으니, 조금 아파서 석도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결국은 그 효과를 얻었다. 불도징(佛圖澄)이 말하였다.
“이 도사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비추어 본다. 만약 떠난다면 아마도 큰 재앙이 있으리라.”
석호의 태녕(太寧) 원년(359)에 이르자, 도개는 제자와 더불어 남쪽 허창(許昌)으로 건너갔다. 석호의 아들과 조카들이 서로 살상을 자행하여 업도(鄴都)가 크게 어지러웠다.
진(晋)의 승평(昇平) 3년(359)에 다시 건업으로 왔다가 갑자기 남해(南海)로 갔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홀로 띳집에서 거처하였다.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다가, 백여 세에 이르러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제자에게 명령하여 시신을 동굴 속에 버려 두게 하였다. 제자가 곧 시신을 석실로 옮겼다.
강홍(康泓)은 예전에 북간(北間)에서 머물 때, ‘도개가 예전에 산중에 있을 때는 늘 신선과 왕래가 있음’을 도개의 제자가 서술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멀리서도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고개 숙였다. 후에 남해에 신역을 살러 와서는 친히 만나자, 바로 옆에서 우러르고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 두루 지극하였다. 이에 그를 위하여 전기를 쓰고 찬양의 글을 지었다.
쓸쓸하구나, 이 어른이여.
바람 나부끼듯 번뇌를 끊어
밖으로는 소승을 본받으나
안으로는 몸의 공함을 트이셨네.
현묘한 모습이 휘황하게 빛나니
높은 선비들이 여기에 찾아들었네.
연한 풀뿌리 자시며
바위와 나루터를 떠도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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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哉若人 飄然絶塵
外軌小乘 內暢空身
玄象暉曜 高步是臻
餐茹芝英 流浪巖津
진(晋)의 흥녕(興寧) 원년(363)에 진군(陳郡)의 원굉(袁宏)이 남해의 태수가 되었다. 아우인 영숙(穎叔)과 사문 지법방(支法防)과 함께 나부산에 올랐다. 석실 입구에 이르러 도개의 해골과 향화·질그릇 등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았다. 이에 원굉이 말하였다.
“법사의 일과 행실은 일반 무리와 달랐으니, 바로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나셨구나.”
곧 찬탄의 글을 지었다.
기이함을 부르신 빼어난 님이여,
외롭지 않은 덕을 세우셨어라.
멀고 먼 그윽한 님이여,
바위를 바라보던 화락한 님이여,
살랑 살랑이던 신령한 신선들
여기서 노닐고 모였어라.
남긴 신발 숲에 있으니
천 년에 한 사람 그 뒤이을는지.
物俊招奇 德不孤立
遼遼幽人 望巖凱入
飄飄靈仙 茲焉遊集
遺屣在林 千載一襲
그 후 사문 승경(僧景)과 도점(道漸)이 함께 나부산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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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끝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3) 축불조(竺佛調)
축불조는 씨족이 확실하지 않다. 혹 천축국 사람이라고도 한다. 불도징(佛圖澄)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상산사(常山寺)에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그는 일이 순박한 것을 숭상하여, 말을 수식해서 표현하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상산(常山)에 법을 받드는 두 형제가 있었다. 절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형수의 병이 위독하자, 절 옆으로 모시고 와서 의약과 가까이하게 하였다. 형이 불조를 받들어 스승으로 삼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항상 절 안에 있으면서, 묻고 자문 받으며 도를 행하였다. 어느 날 불조가 문득 아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자세히 형수의 괴로워하는 바와 아울러 형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불조가 말하였다.
“병자는 조금 좋아졌고, 자네의 형은 평상시와 같네.”
불조가 떠난 뒤에 아우도 역시 말을 채찍질해서 그의 뒤를 따라 절로 갔다. 불조가 아침에 자기 집에 온 일을 언급하자, 형은 놀라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침에 한 번도 절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분의 얼굴을 보았단 말이냐?”
형제가 다투다가 이를 불조에게 물어보았다. 불조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형제는 함께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불조는 간혹 홀로 산에 들어가, 1년이나 반년을 지내곤 하였다. 언제나 마른 밥 몇 되를 갖고 갔다. 돌아올 때는 항상 남은 밥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불조를 따라 산길을 수십 리 걸어갔다. 날은 저물고 큰 눈이 내렸다. 불조가 바위에 있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호랑이가 돌아와서는 굴 앞에 함께 누웠다. 불조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거처를 빼앗았다. 부끄럽지만 어쩌겠느냐?”
호랑이는 곧 귀를 늘어뜨리며 산을 내려갔다. 따라간 사람은 놀랍고 두려웠다. 불조가 후에 스스로 죽을 날을 잡아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왔다. 불조는 모두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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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는 장구하지만, 그래도 붕괴될 때가 있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영구히 존재하기를 구하겠느냐? 만약 3업의 때[三垢]를 완전히 씻어내고 청정한 진여[眞淨]에 전념할 수 있다면, 형체의 작용은 비록 어긋나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들어맞을 것이다.”
대중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말기를 굳게 요청하니, 불조는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그것을 요청한다고 되겠느냐?”
곧 방으로 돌아가서 단정하게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불조의 속가제자[白衣弟子] 여덟 사람이 서산(西山)에 들어갔다.
나무를 베다가, 문득 보니 불조가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의복은 선명하고 자태와 거동이 화창하며 즐거운 모습이었다. 모두가 놀라 기뻐하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셨습니까?”
불조가 말하였다.
“나는 항상 살아 있다.”
아는 친구들의 안부를 자세히 물어보고, 한참 후에 떠나갔다. 여덟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법을 함께 받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함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어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옷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어떤 기록에 전해진다.
“이 축불조가 『법경경(法鏡經)』과 『십혜(十慧)』 등을 번역해 출간하였다.”
그러나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을 고찰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사문 엄불조(嚴佛調)가 안현도위(安玄都尉)와 함께 『법경경』과 『십혜』 등을 번역해서 출간하였다는 말이 「역경전(譯經傳)」에 실려 있다.”
이 이야기 속의 불조는 곧 동진(東晋) 시대의 사람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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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자가 같은 것을 보고 동일인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이는 잘못이다.
4) 기역(耆域)
기역은 천축국 사람이다. 중국과 오랑캐 나라를 두루 떠돌아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신기(神奇)하였다. 천성이 풍속을 소홀히 여겼다. 자취와 행방이 일정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추측할 수 없었다. 천축국을 떠나서부터 부남(扶南)에 이르기까지 여러 바닷가를 지났다. 이어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에 이르기까지 두루 신령하고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미 양양에 도달하자, 배를 타고 양자강을 넘고자 하였다. 뱃사공이 그를 보니, 인도 사문이고 의복이 낡아 누추하였다. 그러므로 가볍게 여겨 태워주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북쪽 둑에 도달해보니, 기역도 역시 이미 강을 건너와 있었다. 앞서서 걸어갈 때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역이 손으로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 호랑이는 길에서 내려가 그곳을 떠났다. 양쪽 강둑에서 이를 본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무리를 이루었다.
진(晋)의 혜제(惠帝, 290~306) 말기에 낙양(洛陽)에 이르니, 모든 도인들이 절을 하였다. 기역은 편안히 꿇어앉아, 얼굴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때로는 혹 사람들에게 전생의 몸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지법연(支法淵)은 소[牛]로 살다가 이승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축법흥(竺法興)은 사람 가운데 살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대중 승려들의 의복이 화려한 것을 꾸짖으며, 본래의 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낙양의 궁성을 보고 말하였다.
“도리천(忉利天)의 궁성과 비슷한데, 다만 자연과 사람이 한 일이 같지 않을 뿐이다.”
기역이 사문 기사밀(耆闍蜜)에게 말하였다.
“이 궁성을 지은 목수는 도리천에서 온 사람이다. 그런데 궁성이 낙성되자, 곧 천상 세계로 돌아갔다. 집의 용마루 기와 밑은 아마도 1천5백 개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당시 모두가 말하였다.
“예전에 이 궁성을 지은 장인(匠人)은 참으로 그릇을 만들어 기와 밑에 붙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궁전이 낙성된 후 바로 살해당하였다.”
당시 형양(衡陽)태수인 남양(南陽)의 등영문(滕永文)이 낙양에 있었다. 그러면서 만수사(滿水寺)에 몸을 의지하여 머물다가 병을 얻었다. 한 해가 지나도 낫지 않았다. 두 다리가 굽고 휘어져, 일어나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기역이 그곳에 가서 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병을 낫게 하고 싶은가요?”
그러고는 맑은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갖고 왔다. 곧 버들가지로 물을 뿌리고, 손을 들어올려, 등영문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반복하였다. 이어 손으로 등영문의 두 무릎을 끌어당겨 일어서게 하였다. 그러자 곧 일어나서 걷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 절 안에 수십 그루의 사유수(思惟樹) 나무가 있었지만, 모두 말라죽었다. 기역이 등영문에게 물었다.
“이 나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요?”
등영문이 대답하였다.
“여러 해 되었소.”
기역은 곧 나무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앞서 등영문을 향해서 외운 주문의 방법과 같았다. 곧 나무에 싹이 돋아나고, 성긴 가지를 부추겨 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예전에 한참 더위가 기승부릴 때에, 어떤 사람이 오래된 체증[病癥]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기역은 물을 받아내는 그릇을 병자의 배 위에 올려놓고, 흰 천으로 배를 덮었다. 수천 마디의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곧 고약한 냄새가 풍겨나며, 온 집안에 깊이 배어들었다.
이 때 병든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살아났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천을 걷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그릇 속에 진흙 앙금 같은 것이 몇 되나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병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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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살아났다.
낙양에 전쟁으로 난리가 일어나자, 낙양을 떠나 천축국으로 돌아갔다.
낙양의 사문 축법행(竺法行)은 뛰어난 분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악령(樂令)과 견주었다.
그가 기역에게 요청하였다.
“상인(上人)께서는 이미 득도하신 스님이시니, 한마디 말씀을 남기시어 영원한 훈계로 삼게 해주소서.”
기역이 말하였다.
“두루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대중들이 모이자 기역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말하였다.
“입을 지키고 몸과 생각을 거두며, 삼가 여러 악한 일을 범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닦고 행하라. 이와 같이 하면 세상에서 득도하느니라.”
말을 마치자 곧 선정의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법행이 거듭 요청하였다.
“상인께서는 우리가 듣지 못한 법문을 내려주시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게송의 뜻은 여덟 살 난 동자라도 이미 암송하니, 득도하신 분께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덟 살에 비록 외웠다 하더라도, 백 살이 되어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외운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八歲雖誦 百歲不行 訟之何益] 사람들은 모두 득도한 사람을 공경할 줄은 알면서도, 이를 행하면 자신도 득도한다는 것을 모른다. 나의 말은 비록 적으나 행하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많도다.”
이에 작별하여 떠났다. 이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각 기역을 점심 식사에 초청하였다.
기역은 이들 모두에게 가겠다고 허락하였다. 이튿날 아침 5백 집에 모두 한 사람의 기역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자기에게만 홀로 방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뒤에 서로 물어보고는 비로소 분신(分身)이 내려온 것임을 알았다.
길을 떠나자 여러 도인들이 송별하여 하남성에 이르렀다. 기역이 천천히 걸어가도 뒤따라오는 사람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기역은 곧 지팡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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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금을 긋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헤어집시다.”
그 날 장안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기역이 그곳 절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장사꾼 호습등(胡濕登)은 곧 이날 날이 저물 무렵에 기역을 고비 사막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계산해보니 이미 9천여 리나 걸은 것이다. 그가 서역으로 돌아간 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모른다.
고승전 제10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3. 신이 ②
1) 건타륵(犍陀勒)
건타륵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낙양(洛陽)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대중들은 비록 그의 지조 있는 풍모를 공경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헤아리지는 못하였다. 훗날 대중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낙양의 동남쪽에 반치산(槃鵄山)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예전의 절터가 있어 기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 함께 수축하여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중들은 아직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시험 삼아 뒤쫓아가서 조사해 보았다. 산에 들어가 한 곳에 이르니, 사면이 평탄하였다. 건타륵은 이를 보여주었다.
“이곳이 곧 절터입니다.”
곧 그곳을 파보니, 과연 절의 기초석[石基]이 발견되었다. 다음에 강당과 승방이 있던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대로 모두 증명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경탄하면서, 이내 함께 수축하여 절을 세웠다. 건타륵을 절의 주지로 모셨다.
절은 낙양성에서 1백여 리 거리에 있다. 그는 이른 아침마다 낙양에 이르렀다. 여러 절을 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름을 한 발우 구걸하여, 절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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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등불을 밝혔다. 이것으로 일과를 삼아 한 번도 어기거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걸음을 잘 걷는 어떤 사람이 건타륵을 따르며, 그의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자 하였다. 달리고 치달리면서 땀을 흘렸으나, 고생만 하고 미치지 못하였다. 건타륵은 그에게 가사 끝자락을 잡고 따라오게 하였다. 오직 매운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는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잠깐 사이에 절에 이르렀다. 건타륵이 후에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2) 가라갈(訶羅竭)
가라갈은 본래 번양(樊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2백만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성품이 텅 비어 그윽하고, 계율과 절조를 지켰다. 거동이 착하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두타행(頭陀行)을 많이 하여 홀로 산과 들에서 잠잤다.
진(晋) 무제(武帝)의 태강(太康) 9년(288)에 잠시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낙양에는 돌림병이 매우 유행하여 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가라갈은 이들을 위하여 주문을 외워 치료하였다. 열 사람 가운데 여덟, 아홉 사람을 고쳤다.
진(晋) 혜제(惠帝)의 원강(元康) 원년(291)에 이르러, 곧 서쪽으로 들어갔다. 누지산(婁至山)의 석실 안에 머물면서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다. 이 석실은 물과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시냇물을 끌어대고자 하였다. 가라갈은 말하였다.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곧 스스로 일어서서, 왼발로 석실의 서쪽 석벽을 밟아 눌렀다. 그러자 벽이 손가락 길이만큼 무너져 내렸다. 발을 들어내자 물이 그 속에서 나왔다.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깨끗하였다. 일년 내내 끊어지지 않았다. 와서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멎고, 질병이 제거되었다.
원강 8년(298)에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서쪽 나라의 법에 의하여 화장하였다. 여러 날 불이 타올랐건만, 시신은 아직도 불길 속에 앉아 있었다. 길이 재가 되지 않기에, 이에 다시 석실 안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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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정(竺定)
후에 서역 사람인 축정은 자(字)가 안세(安世)였다. 동진(東晋)의 함화(咸和) 연간(326~334)에 그 나라로 가서 직접 보았다. 근엄하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그 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축정은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이 사실을 도인과 속인들에게 전하였다.
3) 축법혜(竺法慧)
법혜는 본래 관중(關中) 사람이다.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숭고산(嵩高山)에 들어가 부도밀(浮圖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진(晋) 강제(康帝)의 건원(建元) 원년(343)에 양양(襄陽)에 이르렀다. 양숙자사(羊叔子寺)에 머물면서, 따로 공양을 받지 않았다.
걸식할 때마다 새끼로 맨 걸상을 갖고 다니면서, 마음가는 대로 한적하고 넓은 길에서 이를 펼치고 앉았다. 때로 혹 비를 만나면 기름을 먹인 배자[油帔]로 자신을 덮었다. 비가 그치면 오직 새끼로 맨 걸상만이 보이고, 법혜가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묻고 찾는 와중에, 법혜는 이미 승상에 앉아 있었다.
늘 제자인 법조(法照)에게 말하였다.
“너는 과거 시절에 닭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이 있다. 그에 대한 재앙이 곧 이르리라.”
갑자기 법조는 어떤 사람에게 발길로 차여서, 마침내 영구히 다리를 못 썼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신야(新野)에 한 늙은이가 있다. 막 숨이 넘어가려 하여, 내가 그를 제도하고자 한다.”
곧 밭두렁 사이를 걸어갔다. 과연 한 늙은이가 소를 끌어 밭을 가는 것이 보였다. 법혜가 그 늙은이에게 소를 달라고 구걸하였다. 늙은이가 주지 않자, 법혜는 앞으로 나아가 소의 고삐를 잡았다. 이에 늙은이는 그의 범상치 않음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소를 시주하였다. 법혜는 소를 끌고 와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그런 후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는, 다시 되돌아와서 소를 늙은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안 되어 노인은 죽었다.
그 후 정서장군(征西將軍) 유치공(庾稚恭)이 양양에 주둔하였다. 그는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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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법을 받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다 법혜에게 비상한 자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몹시 질투하였다. 법혜는 미리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전생의 빚을 갚을 자가 곧 이곳에 이를 것이다. 그대들에게 권유하고 경계하노니, 정성껏 복과 선행을 닦도록 하라.”
이틀 뒤에 과연 그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죽음에 즈음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은 후 사흘이 지나면,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질 것이다.”
그 날이 되자 과연 한 길 가까이 성문이 잠길 정도로 홍수가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주민들이 많았다.
∙범재(范材)
당시 범재가 있었다. 파서(巴西) 낭중(閬中)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사문이 되어 하동(河東)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쳤다. 맨발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낡은 옷 한 벌만으로 지냈다. 말하는 것이 때로는 제법 영험이 있었다. 후에 마침내 도에서 물러나서, 세속에 물들어 장릉(張陵)1)의 가르침을 익혔다고 한다.
4) 안혜칙(安慧則)
안혜칙은 성씨와 족속이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늘 하는 성격이 없었고, 탁월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또한 바른 글씨[正書]를 쓰는 데 솜씨가 있고 이야기를 잘하였다.
진(晋)의 영가(永嘉) 연간(307~313)에 천하에 돌림병이 유행하였다. 그러
1) 장릉은 장도릉(張道陵)의 본래 이름이다. 장도릉은 도교의 한 파인 부록파(符籙派)의 창시자로서,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5경(經)에 통달하고, 만년에는 계명산(鷄鳴山)에 입산하여 장생(長生)의 도를 닦았다. 그의 도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쌀 닷 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오두미교(五斗米敎)라고 부른다.
그는 부적과 정화수로 병을 고쳤다. 병자에게 부적과 정화수를 마시게 하거나, 병자의 이름을 적어 3관(官)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후 그의 아들 장형(張衡)과 손자 장로(張魯)가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장도릉을 천사(天師)로 추대해서 이 호칭을 자손대대로 세습했다. 훗날 장각(張角)은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황건당(黃巾黨)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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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주야로 정성껏 기도하였다. 천신(天神)에게 약을 내려서 만민을 치유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어느 날 절문을 나서다가 항아리처럼 생긴 두 개의 돌을 보았다. 기이한 물건이라 의아해하여 집어서 이를 보았다. 과연 신비한 물이 그 안에 있었다. 음복한 병자들이 모두들 치유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낙양의 대시사(大市寺)에 머물렀다. 손수 가는 글씨로 노란 비단에『대품경(大品經)』 한 부를 베껴 썼다. 그것을 합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글자는 작은 콩알과 같았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모두 10여 본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본을 여남(汝南)의 주중지(周仲智)의 처인 호모(胡母)씨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
호모씨는 양자강을 넘어올 때 경을 갖고 따라왔다. 그 후 재화로 불길이 번져감에 따라, 창졸간에 경을 취할 여가가 없었다. 슬피 울면서 오뇌에 싸여 있었다. 불길이 잡힌 후에 잿더미 속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첫머리 축(軸)부터 모습에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었다. 이 때 이를 보고 들은 사람들은 삿됨을 돌려서 믿음을 고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경은 지금 서울의 간정사(簡靖寺)의 수니(首尼)의 처소에 있다.
∙강혜지(康慧持)
당시 낙양에는 또 강혜지가 있었다. 그도 신이하게 영적으로 통한 사람이라 한다.
5) 섭공(涉公)
섭공은 서역 사람이다. 텅 비어 기를 마시고, 오곡을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5백 리를 갈 수 있고, 미래의 일을 손바닥 가리키듯 영험 있게 예언하였다.
부견(符堅)의 건원(建元) 12년(376)에 장안에 이르렀다. 비밀주문을 외워 신룡(神龍)을 내려오게 할 수 있었다. 가뭄이 들 때마다 부견이 항상 그를 초청하여, 용이 내려오는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그러면 갑자기 용이 발우 속으로 내려왔고, 하늘에서는 곧 큰 비가 쏟아졌다. 부견과 뭇 신하들이 직접 발우를 들여다보고, 모두 그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이에 부견은 그를 받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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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신(神)으로 삼았다. 선비와 서민들도 모두 엎드려 그의 발에 예를 올렸다. 이 때부터 다시는 심한 가뭄으로 인한 근심이 없었다.
건원 16년(380) 12월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견은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죽은 후 7일이 되어, 부견이 그의 신이(神異)함 때문에 시험 삼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염할 때 덮은 것[殮被]만이 남아 있었다.
건원 17년(381)에 이르자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6월까지 이르렀다. 부견은 반찬을 줄이고 현판을 거둬들여 조화로운 기운을 맞아들였다. 그러자 7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부견이 중서령(中書令) 주융(朱肜)에게 말하였다.
“섭공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짐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늘에 대하여 마음을 태웠겠느냐? 그 분은 큰 성인이시다.”
주융이 말하였다.
“그 술법은 그윽하고 아득하여, 실로 예전에 없었던 기이한 술법이었습니다.”
6) 석담곽(釋曇霍)
담곽이 어디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항상 무덤 사이나 나무 밑에 거처하면서, 오로지 신력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당시 하서(河西)의 선비족(鮮卑族)인 투발리록고(偸髮利鹿孤)가 악한 마음을 품고, 서평(西平)에 자리 잡고서 스스로 왕이라 자칭하였다. 그리고는 연호를 건화(建和)라 하였다.
건화 2년(401) 11월에 담곽은 하남(河南)으로부터 서평에 이르렀다. 지팡이 하나를 짚었다. 사람들을 그 앞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지혜의 눈을 지닌 지팡이다. 이것을 받들면 득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옷과 물건을 보냈다. 그러면 받아서는 땅에 팽개치거나 혹 강물 속에 버렸다. 얼마 후에 옷 등은 저절로 본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조금도 더러워진 곳이 없었다.
바람과 같이 빠르게 걸었다. 힘있는 사람이 뒤쫓아가도, 항상 고단하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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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미치지는 못하였다.
어떤 사람의 생사와 부귀함과 천해짐을 말하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그의 지팡이를 숨겨놓으면, 담곽은 잠시 눈을 감아 그 자리에서 그것이 있는 곳을 알았다. 모두가 그의 신이함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추측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투발리록고의 아우 중에 누단(耨檀)이 있었다. 거기(車騎)장군에 임명되었다. 그 권력이 나라를 기울어뜨릴 만하였다. 천성적으로 시기심이 많아, 도적질하고 남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담곽은 늘 누단에게 말하였다.
“마땅히 선한 업을 닦아, 도를 행하여 후세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누단이 말하였다.
“나는 선대 이래로 천지와 명산대천을 공경하고 섬겨왔다. 이제 하루아침에 부처를 받든다면, 선인들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 그대가 만약 7일 동안 먹지 않아도 얼굴빛이 여느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이는 불도의 신명(神明)함 때문이니, 나도 마땅히 이를 받들겠다.”
곧 사람을 시켜 보이지 않게 7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담곽은 배고프고 목마른 기색이 없었다. 누단은 사문 지행(智行)을 시켜, 몰래 떡을 지니고 가서 담곽에게 주게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누구를 속였던가? 나라의 임금을 속이라는 것이냐?”
누단은 이를 깊이 기특하게 생각하여, 두텁게 우러러 공경하기를 더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을 돌이키고, 살생을 절제하며 자비심을 일으켰다. 나라 안 사람들이 이렇게 그의 도움을 입자, 모두가 그를 큰 스승님[大師]이라 불렀다. 거리나 마을에 출입할 때면 백성들이 모두 영접하여 그에게 예를 올렸다.
누단에게 딸이 있었다. 병이 매우 위독하여 담곽을 초청하여, 목숨을 구해 달라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습니다. 성인도 바꿀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를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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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단이 굳게 요청하였다. 그 때 궁전의 뒷문이 닫혀 있었다. 담곽이 말하였다.
“급히 뒷문을 여십시오. 때맞추어 열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누단이 명하여 이를 열게 하였다. 그러나 미치지 못하여 죽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3년(407)에 누단이 발발(勃勃)에게 격파되었다. 서량(西凉)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난리가 일어나자,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다.
7) 사종(史宗)
사종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항상 삼베옷을 입었고, 혹 이를 겹쳐서 납의(納衣)로 삼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그를 마의도사(麻衣道士)라 불렀다.
몸에 부스럼이 많았고, 성격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항상 광릉(廣陵)의 백토(白土) 광산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노래를 부르고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스스로 흐뭇하고 화창하게 생각하였다. 품삯을 받으면 받는 대로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깃들고 쉬는 것은 정해진 장소가 없었다. 어느 때에는 숨었다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 고평(高平)의 단기(檀祇)가 강도(江都)의 수령이 되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불러 응대하니, 기연에 민첩하여 구애되고 막히는 것이 없었다. 학문에 널리 통달하여, 예전 일을 상고하였다. 또한 변설이 깊은 선비였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욕심 있으면 부족한 것이 괴로우나
욕심 없으면 근심 또한 없어라.
아직 맑게 마음 비운 것이 아니라서
새끼 띠 두르고 검은 갖옷 입었네.
한 세상 떠돌며 흐르기를
매어 두지 않은 배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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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다할 때를 맞아
산 구릉에 깃들이리라.
有欲苦不足 無欲亦無憂
未若淸虛者 帶索被玄裘
浮遊一世間 汎若不繫舟
方當畢塵累 栖志且山丘
단기는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면서, 무명 서른 필을 보냈다. 사종은 이를 모두 걸인들에게 주었다.
후에 성명을 알지 못하는 어떤 한 도인이 있었다. 항상 지팡이 하나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에 해염령(海鹽令)을 찾아와 말하였다.
“며칠 동안 길을 가고자 하여, 잠깐 사람 하나를 쓸까 합니다. 줄 수 있습니까?”
해염령이 마음대로 취해 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거위와 오리를 지키는 어린아이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복장이 남루한 아이를 골라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산 위에 이르니, 그곳에는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세 사람의 도인이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 함께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점심 때가 되자 시장해져 도인은 어린아이를 위하여 주인에게 나아가 먹을 것을 빌었다. 작은 사발에 음식을 얻어 왔다. 모양이 익힌 쑥과 같았다. 이것을 먹으니, 배고픈 것이 멎었다. 어둠이 서리자 도인은 그곳을 떠나 돌아가려고 하였다. 집 안 사람의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사종이 있는 곳을 아는가? 그의 유배생활은 언제쯤이나 끝나는가?”
그러자 도인이 말하였다.
“서주(徐州) 강북의 광릉 백토 광산에 있으며, 그의 유배기간을 헤아려보니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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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의 사람은 곧 편지를 썼다.
“부탁하노니 그대가 전해주게나.”
도인은 편지를 어린아이에게 부탁하였다. 새벽 무렵에 곧 현(縣)에 이르러 해염령과 만나서 말하였다.
“며칠 이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러자 현령은 매우 좋다고 하면서 물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도인이 대답하였다.
“책과 소(疏)뿐입니다.”
도인은 꼭 관청 일을 보는 청사에서 잠을 잤다. 상자와 지팡이는 침상머리에 붙여 두고 지녔다. 현령이 때를 노려, 사람을 시켜 이것을 훔쳐서 보고자 하였다. 도인은 미리 그것을 알고 해가 저물자마자, 상자와 지팡이를 높이 매달아놓고 바로 그 아래에 누웠다. 그러므로 영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후 현령 곁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제가 잠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남의 물건을 훔치려 하므로, 바로 그것 때문에 곧 떠나는 것입니다.”
현령은 앞서 따라갔던 어린아이를 불렀다. 그간에 경유한 곳을 물어보니, 어린아이가 말하였다.
“도인은 나에게 지팡이를 잡게 하고 바람처럼 떠나자, 혹 발 밑에 파도와 물결소리가 들려왔을 뿐입니다.”
아울러 산 속의 사람이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자신의 옷 허리띠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현령은 그 편지를 열게 하여 이를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 편지를 베껴 써서 취하고, 본래의 편지는 봉하여 사람을 시켜 어린아이를 전송하였다. 백토 광산에 이르러, 사종에게 편지를 보내주게 하였다. 사종은 편지를 열어보고 크게 놀랐다.
“네가 어떻게 봉래(蓬萊) 도인의 편지를 얻었느냐?”
그 후 사종은 남쪽 오(吳)나라 회계(會稽) 지방을 노닐었다. 어느 날 어량(漁梁)을 지나다가, 고기잡이들이 마구잡이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다. 사종이 곧 상류(上流)에서 목욕을 하니, 고기 떼가 모두 흩어졌다. 몰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 후 상우(上虞)의 용산(龍山) 대사(大寺)에서 쉬었다. 『장자』와 『노자』이야기를 잘하고,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탐구하여 밝혔다. 그러면서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기에, 세상에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
회계의 사소(謝邵)·위매지(魏邁之)·위방지(魏放之) 등은 모두 그의 돈독한 논리가 깊고 넓다 하여,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하였다.
그 후 함께 머물던 사문이, 사종이 밤에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못 봉래의 일을 말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사종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도연명(陶淵明)의 기록에 “백토 광산에서 세 사람의 색다른 법사를 만났다”고 하였는데, 그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어떤 장사꾼이 바다를 건너 가다가, 외따로 떨어진 섬 위에서 한 사문을 만났다. 편지를 맡기면서 사종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편지를 배 안에 두었다. 동료가 그 편지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편지가 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배가 백토 광산에 이르자 편지가 날아서 사종에게로 나아가니, 사종이 갖고 떠났다.”
8) 배도(杯度)
배도는 성명을 알지 못한다. 항상 나무 술잔을 타고 강물을 건너 다녔으므로[木杯度水], 이로 인하여 배도라 일컬었다. 처음 나타난 곳은 기주(冀州)였다. 세밀한 행은 닦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한 힘이 탁월하여, 세상에서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느 날 북방에서 한 집에 기숙하였다. 그 집에는 한 구의 금불상이 있었다. 배도가 훔쳐서 떠나자, 집주인이 알아차리고 뒤쫓았다. 배도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말을 달려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맹진강[孟津河]에 이르렀다. 나무 술잔을 물 위에 띄우고, 여기에 올라 타 강을 건너갔다. 바람과 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볍고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둑을 건너서 서울에 도달하였다. 겉보기에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 정도였다. 새끼로 띠를 두르고, 남루한 차림으로서 겨우 몸을 가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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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지경이었다. 말도 또한 들쭉날쭉하며, 기쁨과 노여움이 고르지 않았다.
때로는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그 속에서 목욕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신발을 신고 침상에 오르기도 하며, 때로는 맨발로 걸어서 저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오직 꼴망태 하나만을 멜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잠시 연현사(延賢寺)의 법의(法意) 도인의 거처를 찾아가니, 법의는 특별한 방을 주어 접대하였다.
그 후 연보강(延步江)을 건너고자 하여 강가에서 배를 찾았다. 그러나 사공은 배도를 실어줄 수 없다고 알려왔다. 다시 발을 술잔 속에 포개서 사방을 돌아보며 시를 읊조렸다. 그러자 술잔이 저절로 흘러가, 곧바로 강을 건너 북쪽 둑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광릉(廣陵)을 향하여 갔다.
마을의 이(李)씨 집안에서 행하는 팔관재(八關齋)를 만났다. 전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곧바로 재당(齋堂)에 들어가 앉으면서, 꼴망태는 뜰 가운데 놓아두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누추하므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씨는 꼴망태가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담장 밑으로 옮겨 놓으려고 하였다. 몇 사람을 시켜 들어올리려 하였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배도는 식사를 마치고, 이를 집어 들고 떠나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사천왕(四天王)이니라. 이가야!.”
이 때 심부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가 망태 속을 엿보았더니, 네 명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모두 키가 몇 치 가량 되었다. 얼굴 생김이 단정하고, 옷이 선명하고 깨끗하였다.
이에 뒤쫓아가며 찾았으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나서, 서쪽 경계의 몽롱(蒙籠)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씨는 꿇어 엎드려 절하였다. 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공양드렸으나, 배도는 재계를 지키는 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었다. 심지어 매운 생선회에 이르기까지 먹어, 속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바치는 것이 있으면,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였다.
패국(沛國)의 유흥백(劉興伯)이 연주(袞州) 자사가 되어, 사신을 보내 맞아들였다. 망태를 걸머지고 왔다. 유흥백이 사람들에게 들어올려 보라 했다. 그러나 10여 명이 이겨내지 못하였다. 유흥백이 직접 망태 속을 보니,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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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떨어진 납의 한 벌과 나무 술잔 하나만이 보였다.
그 후 이씨 집으로 돌아와 다시 30여 일을 있었다. 날이 맑은 어느 날 새벽 문득 말하였다.
“가사 한 벌을 얻고 싶은데, 점심때까지 마련해 놓게.”
곧 일을 시작하였으나, 점심때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배도가 말하였다.
“잠시 나갔다가 오겠네.”
집을 나가 날이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온 경내에 이상한 향기가 감돌아 깔려 있었다. 이를 의아해하며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곳곳으로 배도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북쪽 바위 밑에서 다 떨어진 가사를 땅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죽은 것을 발견하였다. 머리의 앞부분과 다리의 뒤편에는 모두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은 극히 선명하고 향기로웠다. 하루 저녁이 지나자 시들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함께 시신을 장례 치렀다.
며칠이 지났다. 어떤 사람이 북쪽에서 이곳에 와서 말하였다.
“배도가 망태를 지고, 팽성(彭城)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곧 함께 관을 열어보니, 오직 미투리 신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팽성에 이른 다음 속인인 황흔(黃欣)이란 사람을 만났다. 황흔은 깊이 불법을 믿었다. 배도를 만나자 예배드리고 초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몹시 가난하여 다만 보리밥만이 있을 뿐이었다. 배도는 이를 달게 먹고, 느긋해하였다. 반년을 그 집에 머무르다가, 어느 날 문득 황흔에게 말하였다.
“꼴망태 서른여섯 장을 찾았으면 좋겠네. 내가 꼭 써야 하겠다.”
황흔이 대답하였다.
“이곳에 바로 열 장 가량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살 수가 없으니, 아마도 다 마련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배도가 말하였다.
“자네는 다만 집안을 조사해서 찾아 보라. 아마도 있을 것이야.”
황흔이 곧 샅샅이 찾아보니, 과연 서른여섯 장을 얻었다. 이것을 뜰 가운데 줄지어 놓았다. 비록 그 수는 갖췄지만, 역시 대부분이 찢어지고 떨어졌다. 황흔이 물건을 차례로 자세히 볼 즈음, 모두가 이미 새 것으로 완전했다. 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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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것을 밀봉하고, 이어 황흔에게 봉한 것을 열게 하였다. 곧 돈과 비단이 모두 그 속에 가득하였다. 거의 백만 냥쯤 되었다. 알 만한 이들은 이것을 배도의 분신이 다른 땅에서 얻은 선물과 보시를 회향하여서, 황흔에게 보시한 것이라 말하였다. 황흔은 이것을 받아 모두 공덕을 위하여 썼다.
1년 가량 지나, 배도는 이 집을 떠났다. 황흔이 양식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튿날 아침 양식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만 보이고, 배도의 소재는 알지 못하였다.
한 달 가량 지나서, 다시 그는 서울에 이르렀다. 당시 조구(潮溝)의 주문수(朱文殊)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배도는 자주 그 집에 찾아왔다. 주문수가 배도에게 말하였다.
“제자가 만약 죽어서 고통에 빠지거든, 원컨대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죽어서 좋은 곳에 있게 된다면, 불법을 같이 닦는 벗[法侶]이 되기를 원합니다.”
배도가 대답하지 않자, 주문수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불법에서 묵연히 말이 없는 것은 이미 허락한 것입니다.”
그 후 동쪽 지방을 노닐어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길에서 낚시꾼을 만났다. 그에게 나아가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그러니 낚시꾼이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보시하였다. 배도가 손으로 반복해서 그것을 갖고 놀다가 도로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물고기는 헤엄치며 떠나갔다.
또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만났다. 다시 그에게도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투망꾼[網師]은 성을 내고, 욕을 하며 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두 개의 돌멩이를 주워서 물 속에 던졌다. 그러니 갑자기 두 마리의 물소가 나타나 그의 그물 속에서 싸웠다. 그물이 찢어지고 망가지자, 물소도 보이지 않았고, 배도도 이미 사라졌다.
걸어 송강(松江)에 이르렀다. 곧 물 위에 삿갓을 뒤집어놓고[仰蓋], 올라타서 강둑으로 건너갔다. 도중에 회계(會稽)의 섬현(剡縣)을 지나서 천태산에 올라갔다. 몇 달이 지나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승가타(僧佉吒)라는 외국 도인이 서울 아랫녘의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객승인 승오(僧悟)가 거타와 같은 방에 묵었다. 어느 날 창문 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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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았다. 가타가 사찰을 취하여 이를 받쳐들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내려오려 하였다. 승오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깊이 공경하고 우러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 또 성이 장(張)씨이며, 이름은 노(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으면서도, 항상 스스로 살이 찌는 것을 흐뭇해하였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단벌의 무명옷만을 입었다. 승가타가 길을 가다가 장노를 만나자, 기뻐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저는 동쪽에서 채돈(蔡扽)을 보았고, 남쪽에서는 마생(馬生)에게 안부를 물었으며, 북쪽에서는 왕년(王年)을 만났습니다. 이제 배도를 찾아가려 합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노는 곧 회화나무[槐樹]를 제목으로 노래를 지었다.
어둡디 어두운 큰 우주 안에
빛 비춤 실로 뚜렷이 나타나건만
무슨 일이 그대 혼미케 하여
멋대로 재앙을 부르시는가?
즐거운 곳 찾는 이 없고
주머니 뒤집듯 변하는 인정의 쓰디쓴 길에
소나무 잣나무의 지조 없다면
무엇으로 바람서리 이겨내리오.
한가로이 붉은 노을 밖에 깃들어
길이 파란 하늘 벗어나 노래 불러라.
맑디맑은 영혼 무색계 밖에서
인연 있는 고을을 만나리.
빛나는 세월 한후(漢后)를 돕고
아름다운 시대 은왕(殷王)을 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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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방에 자취를 감추었던
그대와 나는 두 신선 아니랴.
세속을 떠도는 그대 만남에
보는 족족 시리고 상한 일일세.
간략히 품은 생각 노래했으나
어찌 삼가는 글 다했다 하리.
濛濛大象內 照曜實顯彰
何事迷昏子 縱惑自招殃
樂所少人往 苦道若翻囊
不有松柏操 何用擬風霜
閑預紫煙表 長歌出昊蒼
澄靈無色外 應見有緣鄕
歲曜毘漢后 辰麗輔殷王
伊余非二仙 晦跡於九方
亦見流俗子 觸眼致酸傷
略謠觀有念 寧曰盡矜章
승가타가 말하였다.
“이전에 선생님을 뵈었을 적에는, 선의 사유가 그윽이 높아 한 번 앉으면 백 년을 앉으셨습니다. 큰 자비로움이 제 마음에 배어드니, 마음을 텅 비워 마른 해골을 생각하겠습니다.”
역시 같은 제목의 게송을 지었다.
흐르고 흐르는 세상사
손해와 이익도 넘쳐나
정신에 먼지 끼려 하고
멋대로 흐뭇하고 기쁜 마음 생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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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우리 밝은 님만은
깊은 깨달음과 선견지명 있어
형상을 뜬 거품으로 생각하고
그림자를 빠른 번개처럼 보네.
번번이 화려한 소리를 넘어뜨리고
문장과 언변 멸시하고 추하게 보며
색을 보고 공함을 깨달아
중생을 어루만지며 변화함을 가슴 아파 하네.
분분한 일 버리고 유(有)를 끊으며
습기는 자르고 연모도 없애
푸른 가지 구비진 그늘에서
깨끗한 띠풀로 자리 삼았네.
밭두둑에 의지하며 마즙을 마시고
절벽을 이웃하여 흘러드는 물 마시네.
지혜와 선정으로 헤아려 비추어 보아
미묘한 진여로 권속을 삼네.
자비심 증장하여
깊이 생각함에 게으름 없어라.
悠悠世事 或滋損益
使欲塵神 橫生悅懌
惟此哲人 淵覺先見
思形浮沫 矚影遄電
累躓聲華 蔑醜章弁
視色悟空 翫物傷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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捨紛絶有 斷習除戀
靑條曲蔭 白茅以薦
依畦啜麻 鄰崖飮洊
慧定計照 妙眞曰眷
慈悲有增 深想無倦
말을 마치자 각기 떠났다. 그 후의 세월 속에서 다시는 이 두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말한다.
“승오를 데리고 함께 남악(南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노와 배도가 서로 만났다. 그들이 나눈 말은 매우 많았으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배도는 여전히 도읍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떠돌아다녀서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초청하면, 혹 가기도 하고 혹 가지 않기도 하였다.
이 때 남주(南州)에 진(陳)씨 일가가 있었다. 자못 의식이 넉넉한 집안이었다. 배도가 그 집에 가자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서울의 아랫녘에 또 한 사람의 배도가 있다고 하였지만, 진씨 집의 부자 다섯 사람은 모두 믿지 않았다. 짐짓 서울의 아랫녘으로 내려가 그를 보았다. 과연 그의 집에 있는 배도와 형체나 모습이 같았다.
진씨는 그를 위하여, 한 홉의 꿀에 잰 생강과 작은 장도칼·훈륙향(熏陸香)·수건 등을 마련하였다. 배도는 곧 꿀에 잰 생강을 다 먹어 치우고, 나머지 물건은 그대로 무릎 앞에 두었다. 그들 부자 다섯 사람은 혹 그가 그의 집에 있는 배도가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곧 두 아우는 그곳에 남아 머물면서 지켜보게 하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의 배도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무릎 앞에도 역시 향과 작은 칼 등이 있었다. 다만 꿀에
잰 생강을 먹지 않은 것만이 다를 따름이었다. 이어 그는 진씨에게 말하였다.
“칼이 무디니, 갈아놓는 것이 좋겠소.”
두 아우가 도읍지에서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곳의 배도는 이미 영취사(靈鷲寺)로 떠났습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가 문득 두 폭의 노란 종이를 구하여 글을 썼다.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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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문자는 아니었다. 두 폭의 종이를 합쳐보니, 그 뒤쪽도 같았다. 진씨가 물었다.
“상인(上人)께서는 무슨 문권(文券)을 만드십니까?”
배도가 대답하지 않아, 끝내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오군(吳郡)의 백성으로 주영기(朱靈期)란 사람이 고려(高驪)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바람을 만나 배가 표류하였다.
9일이 지나서야 한 섬에 이르렀다. 그 섬에는 산이 있었다. 매우 높고 큰산이었다. 산에 들어가 땔감을 채집하다가, 사람 다니는 길을 발견하였다. 주영기는 곧 몇 사람을 시켜 길을 따라가 구걸하게 하였다. 10리 남짓 가니, 경쇠소리가 들려오고 향을 사르는 냄새가 났다.
이에 그들이 함께 부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한 절이 나타났다. 매우 빛나고 화려하여 대부분 7보(寶)로 장엄되어 있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돌로 만든 사람으로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조금 걷자니 창도(唱導)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돌아가 다시 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은 돌로 만든 사람이었다. 이에 주영기 등은 서로 생각하였다.
‘이 분들은 성승(聖僧)이며, 우리들은 죄인이어서 만나볼 수 없는 분들이다.’
그래서 함께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고, 다시 가서 보았다. 그랬더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주영기 등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여 놓았다. 음식은 채소였으나, 향과 맛이 세속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함께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속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그 중 한 승려가 말하였다.
“여기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0여 만 리나 됩니다. 그렇지만 지극한 마음만 있다면,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어 주영기에게 물었다.
“배도도인을 아십니까?”
“매우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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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북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바랑이 있고 석장과 발우가 걸려 있었다. 그 승려가 말하였다.
“이것이 배도의 물건입니다. 이제 그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발우를 그에게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편지를 써서 함 속에 넣었다. 따로 푸른 대나무 지팡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뱃전 앞 물 속에 던져 놓고, 뱃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십시오.
힘들이지 않고도 반드시 속히 고향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헤어졌다. 한 사미를 시켜 산문까지 전송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 길로 7리를 가면 곧 배 있는 곳에 이를 것입니다.
먼저 온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7리 가량을 가자 배 있는 곳에 닿았다. 곧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하였다. 오직 배가 산꼭대기 나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 석두회(石頭淮)에 이르러 머물렀다. 또한 다시는 대나무 지팡이가 있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회수(淮水)로 들어가서 주작문(朱雀門)에 이르렀다. 곧 그곳에서 배도를 만났다.
그는 큰 배의 난간에 올라타고, 지팡이로 뱃전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말아, 말아, 어째서 가지 않니.”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주영기 등이 배 멀리에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배도는 곧 스스로 배에서 내려왔다. 편지와 발우를 취하여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무도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배도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를 돌아오게 하려는구나.”
발우를 집어 구름 속으로 던졌다가, 도로 이를 거두어들이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4천 년이나 되었군.”
배도는 연현사(延賢寺) 법의(法意)의 처소에 있을 때가 많았다. 당시 세상에서는 이 발우가 기이한 물건이라 하여, 다투어 찾아가서 이를 구경하였다. 일설에는 말한다.
“주영기의 배가 표류하다가 한 궁벽한 산에 이르렀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상수 제자로서 예전에 스승의 발우를 지닌 채 치성사(治城寺)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그대에게 부탁하여 발우를 스승님께 돌려드립니다. 다만 한 사람이 이 발우를 뱃전에서 받쳐 들고, 한 사람은 배의 키를 바로잡기만 하면, 저절로 편안히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영기가 가르치는 대로 하니, 과연 온전하게 건너올 수 있었다.”
당시 남주의 배도는, 배의 난간에 올라탔던 그 날, 일찍 집을 나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진씨가 이튿날 아침에 보니 문짝[門扇] 위에, 푸른 글씨로 여섯 자가 씌어 있었다.
‘복과 덕의 출입구이니, 신령한 분께서 내려오시네[福德門 靈人降].’
글자는 서툴렀으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는 마침내 자취가 끊어졌다.
그리고 서울의 배도는 여전히 산과 고을을 오갔다. 그는 신비한 주문을 많이 행하였다.
당시 유상(庾常)의 노비가 물건을 훔치고, 주인을 배반하였다. 사방으로 추적하였으나, 사로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배도에게 물었더니, 배도가 말하였다.
“이미 죽어서 금성(金城)의 강변, 빈 무덤 속에 있다.”
가서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공녕자(孔寧子)가 당시 황문시랑(黃門侍郞: 宦官)으로 있었다. 관청에서 설사병을 앓다가, 심부름꾼을 보내서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는 주문 외우기를 마치고 말하였다.
“고치기 어렵습니다. 귀신 넷이 보입니다. 모두 다치거나 절단되었군요.”
공녕자가 울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손은(孫恩)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집이 군인들에게 파괴당하고, 양친과 숙부가 모두 참혹한 고통을 당했다네.”
공녕자가 과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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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제해(齊諧)의 처 호모(胡母)씨가 병이 들었다. 갖가지 치료를 해도 고치지 못하였다. 그 후 승려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였다. 재를 올리는 자리에는 승총(僧聰)도인이란 사람이 있어, 주인에게 권하여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가 그곳에 이르러, 한 번 주문을 외우자 병자가 즉각 나았다. 제해가 엎드려 섬기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배도를 위하여 그의 전기를 만들었다. 그 전기에 나오는 신이(神異)한 일은 대략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원가(元嘉) 3년(426) 9월에 이르러, 제해의 집을 떠나 서울로 들어갔다. 1만 냥의 돈과 물건을 남기며, 제해에게 맡겨서 재(齋)를 열라고 시켰다. 이에 작별하고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적산호(赤山湖)에 이르자, 이질(痢疾)을 앓아 죽었다. 제해가 곧 재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와서, 건업(建業)의 복주산(覆舟山)에 묻었다.
원가 4년(427)에 이르러 오흥(吳興)에 소신(邵信)이란 사람이 있었다. 불법을 매우 받드는 사람이었다. 상한병(傷寒病)에 걸렸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간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슬피 울면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나타나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제자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라. 스승께서 곧 오셔서 보실 것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이미 죽었거늘, 어떻게 올 수 있습니까?”
배도 도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오는 것에 다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곧 옷의 허리띠 머리에서 한 홉 가량의 가루를 꺼내, 그에게 주어 복용하게 하였다. 곧 병에 차도가 있었다.
또 두승애(杜僧哀)란 사람이 남강(南岡) 아랫녘에 살았다. 그는 예전에 배도 앞에 엎드려 섬긴 일이 있었다. 아이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곧 배도에게 신비한 주문을 익히는 일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한탄하였다. 다음날 문득 배도가 오는 것이 보였다. 말도 보통 때와 같았다. 그가 주문을 외우니, 아이의 병이 곧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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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5년(428) 3월 8일에 이르자, 배도는 다시 제해의 집으로 왔다. 여도혜(呂道慧)·제자 달지(怛之)·두천기(杜天期)·수구희(水丘熙) 등도 모두 함께 보았다. 크게 놀라 곧 일어나서 예배를 드렸다. 배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올해는 아마도 큰 흉년이 들 것이야. 정성되게 복업을 닦아야 하네. 법의(法意)도인은 매우 덕이 있는 승려이지. 그를 찾아가 옛 절을 수리하여 세워서, 재앙과 화를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잠깐 사이에 위에서 한 승려가 배도를 불렀다. 배도는 곧 그곳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빈도는 곧 교주(交州)·광주(廣州) 사이로 향할 것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
제해 등은 정중하게 절하며 그를 전송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자취는 끊어졌다. 요즘에 이르러서도 때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 일은 정확한 일이 아닌 까닭에, 전할 만한 것이 아니다.
9) 석담시(釋曇始)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이다. 출가한 이래로 많은 기이한 자취를 남겼다.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경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갔다. 교화를 베풀면서, 뚜렷하게 3승을 전수하여 계에 귀의하는 길을 세웠다. 무릇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도를 듣게 된 시초이다.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왔다. 조정의 세 대신을 깨우쳐서 이끌었다.
담시의 발은 얼굴보다 더 희다. 비록 맨발로 진흙탕 물을 건너가더라도, 전혀 흙물이 발에 달라붙거나 물에 젖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발이 흰 스승[白足和上]이라 부른다.
당시 장안에 왕호(王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삼촌이 죽은 지 몇 해 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 돌아왔다. 왕호를 데리고 두루 지옥을 유람하면서, 여러 가지 과보를 보여주었다. 왕호가 지옥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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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인과를 알았을 것이니, 다만 백족화상의 암자에서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왕호는 두루 많은 승려들을 찾아갔다. 오로지 담시만이 발이 얼굴보다 더 흰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기에 삭방의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발흥하였다. 관중 땅을 파괴하고 휘저어,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당시 담시도 역시 살해될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칼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혁련발발이 감탄하여 두루 사문들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산속 못가에 깊이 은둔하여 두타행을 닦았다.
그 후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차지하여,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당시 박릉후(博陵侯) 최호(崔皓)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그가 나라의 재상이라는 벼슬자리를 잡자, 척발도가 믿고 기대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寇)씨2)와 더불어 척발도를 설득하였다. 불교는 이로움이란 없고,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폐지하기를 권고하였다.
척발도는 그의 말에 미혹되어, 태평(太平) 7년(446)에 마침내 불교를 훼멸(毁滅)시켰다.
그리고 군병을 곳곳에 파견하여, 절집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통치권 안의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모두 도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가운데 도망가고 숨은 사람은 모두 군사를 내어 뒤쫓아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잡으
2) 천사 구씨는 도교 부록파(符籙派)의 공고한 기초를 세운 구겸지(寇謙之)를 가리킨다. 숭산(崇山)에서 10년간 수도하고, 자신은 일찍이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친히 하사한 천사(天師)의 직위와 『운중수송신과계(雲中首誦新科誡)』 12권을 하사받았다고 속여, 장씨(張氏)들의 천사직위를 탈취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선인(仙人) 성공흥(成公興)을 만났다고 말했으며, 이보문(李普文)으로부터 『도록진경(圖錄眞經)』 60권을 받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진상했다. 재상인 최호(最浩)는 그것을 깊이 믿고 천사도량(天師道場)을 건립해 120명의 도사를 모아 매일 기도를 했다. 구겸지는 자신이 직접 태무제에게 부록(符籙)을 주었는데, 이것이 크게 유행하자 자신은 이 부록으로 귀신을 부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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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반드시 목을 자르는 참형에 처하였다.
온 경내에 다시는 사문이 없었다. 담시는 오직 그윽이 깊은 곳에서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이 이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태평 연간(440~451) 말기에 이르러, 담시는 척발도의 죽을 날이 곧 미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정월 초하루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담당 관리가 상주하였다.
“한 도인이 있는데, 발이 얼굴보다도 더 흰 사람으로, 문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척발도가 영을 내렸다. 군법에 의하여, 여러 번 칼로 담시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상하지 않았다. 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노하여, 스스로 차던 검(劒)으로 담시의 몸을 베었다. 그러나 몸에 다른 이상이 없었다. 오직 검이 닿은 곳에, 천의 실과 같은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척발도의 궁전, 북원(北園)의 우리 속에서 호랑이를 길렀다. 척발도는 명령하여 담시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 호랑이들이 모두 숨고 엎드려, 끝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천사(天師: 寇謙之)를 호랑이 우리에 가까이 가게 하였다. 호랑이는 곧 표효하며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존귀하고도 높아, 황로(黃老: 道敎)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곧 담시를 초청하여 궁전에 오르게 하고,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쳤다. 담시가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인과를 밝게 말하였다. 그러자 척발도는 대단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마침내 문둥병에 감염되었다.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자신의 허물이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여겼다. 이에 두 사람의 집안을 모두 다 주살하고, 그들의 문중 족속도 다 쓸어버렸다. 나라 안에 선포하여, 다시 정교를 부흥하게 하였다. 갑자기 척발도가 죽자, 그의 손자인 척발준(拓跋濬)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로소 크게 불법을 홍교하여 그 성대함이 지금까지 이른다. 담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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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법랑(釋法朗)
법랑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을 잘 잡고 정진하고 고행하여,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험이 많았다. 빛을 감추고 덕을 쌓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이른 단계를 추측하지 못하였다.
법랑의 스승인 석법진(釋法進)도 행이 높은 사문이었다. 어느 날 법진이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있었다. 문득 법랑이 나타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왔는가?”
“문의 자물쇠 구멍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먼 곳의 승려들과 함께 왔습니다. 해가 곧 점심때가 되려 합니다. 원컨대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법진은 곧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였다. 오직 숟가락과 발우의 소리만 들릴 뿐, 끝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산(廬山)의 혜원이 가사 한 벌을 법진에게 보냈었다. 법진은 곧 이것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법랑이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은 이미 떠났습니다. 다른 날 아마도 이것을 취할 것입니다.”
그 후 부뚜막을 맡은 사람[執爨者]이 법진에게 나아가 옷을 취하려 하였다. 법진은 곧 가사를 그에게 주었다. 늘 부뚜막을 맡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모두가 자기들은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로소 이것은 앞서 온 성인께서 방편으로 자취를 나타내어 취한 것임을 알았다.
북위(北魏)의 군대가 불법을 훼멸하기에 이르렀다. 법랑은 서쪽 구자국(龜玆國)으로 갔다. 구자국의 왕은 자기 나라 대선사 결약(結約)에게 말하였다.
“만약 득도한 사람이 이르면, 곧 나를 위하여 말해 달라. 마땅히 공양을 드려야 한다.”
법랑이 그곳에 이르자, 곧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은 성인에 대한 예우로 접대하였다. 그 후 그는 구자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을 불태우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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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썹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중들이 있기 드문 일이라고 찬탄하며,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서역 사람이 북쪽 나라에 와서, 자세히 이 일을 전하였다.
∙지정(智整)
당시 양주(凉州)에 또 사문 지정이 있었다. 역시 마음이 곧고 굳었다. 기이한 행이 있어서 요주(么主) 양난당(楊難當)이 섬겼다. 그 후 그는 한협산(寒峽山)의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11) 소석(邵碩)
소석의 본래 성은 소(邵)씨고 이름은 석(碩)이며, 시강(始康) 사람이다. 일정한 장소에 거처하지 않았다. 황홀하여 미친 사람과 같았다. 사람이 입이 크고, 눈썹과 눈이 추하고 못났다. 어린아이들이 좋아라 따라다니면서 그를 희롱하였다.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사람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불법을 좋아하여, 부처님의 형상을 볼 때마다 예배하고 찬탄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소석에게는 본래 아들 셋, 딸 둘이 있었다. 큰아들 혜생(惠生)도 출가하였다. 소석은 전송(前宋) 초기에 역시 출가하여 도에 들어, 자칭 석공(碩公)이라 하였다. 드나들고 오고 감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익부(益部)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녔다.
만중(蠻中) 땅에 가자 모두 일에 인연하여 우스갯소리를 하며, 착한 일을 권유하여 화합시켰다. 사람들 집에 이르러, 맨땅에서 잠자면 집에 반드시 죽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을 찾아가, 가는 돗자리[細席]를 구걸하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이라 여겼다.
4월 초파일이 되었다. 그러자 성도(成都)에서 불상을 모시고 걸어가는 행사를 하였다.
소석은 대중 가운데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사자의 모습을 지어보였다. 그 날 비현(郫縣)에서도 소석이 사자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을 보았다고들 하였다. 그러니 곧 그것이 그의 분신(分身)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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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刺史) 소혜개(蕭惠開)와 유맹명(劉孟明) 등이 모두 고개 숙여 그를 섬겼다. 유맹명은 남자 옷을 두 첩에게 입히고 소석을 시험하였다.
“이 두 사람을 공급하여 그대의 측근으로 두고 싶은데 괜찮겠나?”
소석은 사람됨이 운자(韻字)를 달아 말하기를 좋아했다. 곧 유맹명에게 말하였다.
“차라리 스스로 술을 구걸하여 술독에 잠겨 술을 마실지언정[지연-漬嚥], 기둥서방이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칠 수는 없습니다[잔연-殘年].”
그 후 어느 날 아침 문득 베로 만든 모자를 쓰고, 유맹명을 찾아갔다. 잠깐 뒤에 유맹명이 죽었다.
이에 앞서 유맹명 휘하에서 장사(長史) 벼슬에 있는 심중옥(沈仲玉)이 죄인을 매질하고, 곤장을 때리는 격식을 고쳤다. 그리고는 일상적인 규정보다 엄중하게 하였다. 소석이 심중옥에게 말하였다.
“천지가 시끄러워질 일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매질하는 격식을 없앤다면, 자사가 될 것입니다.”
심중옥이 그 말을 믿고 격식을 제거하였다. 유맹명이 죽자, 과연 심중옥이 그 고을의 일을 맡아 행하였다.
전송(前宋)의 원휘(元徽) 1년(473) 9월 1일 민산(岷山)의 통운사(通雲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죽음에 즈음하여 도인 법진(法進)에게 말하였다.
“나의 해골을 맨땅에 버리되, 서둘러 신발을 단단히 발에 신겨 두어라.”
얼마 지나서 유언대로 시신을 절 뒤에 버렸다. 이틀이 지나자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비현(郫縣)에서 와서, 법진을 방문하여 말하였다.
“어제 석공이 저자 가운데서 한쪽 발에만 신발을 신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난말로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나의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네’라고 하였습니다.”
법진이 놀라서 사미에게 따져 물으니, 사미가 대답하였다.
“근간 시신을 낼 때 무섭고 두려워서, 오른발 한쪽 신발은 제대로 신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자취의 괴이함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 후 마침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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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 포로가 되어 형주(荊州)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맡아 하는 일이 빈틈없고 부지런하였다. 그러기에 주인이 몹시 그를 사랑하였다. 나이 열여덟 살에 출가하는 것을 들어주어, 강릉(江陵)의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렀다. 풍모가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없어 자못 모두 그를 가벼이 여겼다.
당시 사미로서, 대중 승려들이 줄지어 앉으면, 곧 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혜안이 항상 빈 병을 손에 잡고, 윗자리부터 아랫자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물은 항상 마르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구족계를 받자 조금씩 신령한 자취가 나타났다. 한번은 그믐날 저녁에 동학인 혜제(慧濟)와 함께 법당에 올라가 포살(布薩)을 하였다. 법당 문이 채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혜안은 곧 혜제의 손을 잡아 벽 틈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도 그렇게 하였다. 혜제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후 혜제와 더불어 탑 아래에 앉아서는, 문득 혜제에게 말하였다.
“나는 먼 길을 떠나니,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겠네.”
잠깐 사이 문득 보니, 천인(天人)의 악기 연주 소리와 향기로운 꽃이 공중에 가득히 깔렸다. 혜제는 오직 놀라고 두렵기만 하여 끝내 말할 수가 없었다. 혜안은 다시 말하였다.
“나의 전후의 일들일랑 삼가하여 함부로 발설하지 말게. 말하면 반드시 허물이 있을 것이야. 오직 서남쪽에 속인 한 사람이 있네. 이 사람은 새로 발심한 보살이니, 그에게는 자세히 말하여도 되네.”
이에 헤어져 떠났다. 곧 장사꾼의 행렬에 섞여 상천(湘川)으로 들어가다가, 도중에 이질(痢疾)병을 앓아 매우 위독하였다. 그는 배의 주인에게 말하였다.
“나의 명이 다 되었소. 다만 들어내서 강둑 가에 놓아두시오. 관이나 나무는 필요 없소.
숨이 끊어진 후에는 곧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할 터이니.”
장사꾼은 그의 말대로 들어내서, 강둑 옆에 눕혀 놓았다. 밤에 불꽃이 그의 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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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것을 보고, 괴이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가서 살펴보니, 이미 숨이 끊어졌다.
장사꾼들이 길을 떠나 상동(湘東)에 이르렀다. 혜안도 이미 먼저 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했다.
혜제가 그 후 척기사(陟屺寺)에 이르렀다. 은사(隱士)인 유규(劉虯)를 찾아가, 자세히 그 일을 말하였다. 그러니 유규는 곧 일어나 멀리 그(혜안)에게 예배드리며, 혜제에게 말하였다.
“이는 득도한 분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든 분이십니다.”
∙승람(僧覽)·법위(法衛)
당시 촉중(蜀中)에도 또 승람과 법위가 모두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역시 성과(聖果)를 얻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13) 석법궤(釋法匱)
법궤의 본래 성은 완(阮)씨이며, 오흥(吳興) 어잠(於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서울 지원사(枳園寺) 법해(法楷)의 제자가 되었다. 법해는 본래 배움에 힘쓴 이로 특히 경전과 역사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과 왕숙(王肅)이 나란히 함께 스승으로 섬겼다.
법궤는 성품이 공손하고 말이 적고 순박하였다. 스스로를 지키며, 세상 사람들의 일에 넘나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절의 상좌인 진승(塵勝) 법사가 늙고 병이 들었다. 그러나 법궤는 그를 따라 의지하여 매우 지극하게 보살피고 간호하였다. 진승 법사가 죽자 장례를 법답게 치렀다. 재(齋)를 할 때마다 대가를 얻은 것을 모아, 전단(旃檀)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이 조성되자 스스로 큰 모임을 마련하였다.
그의 본집은 서울의 대시(大市)에 임시로 붙어살았다. 이 날 아침에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고, 다시 지원사로 돌아왔다. 그 후 세 곳을 다시 조사해보니, 법궤가 와서 점심을 먹는 것을 모두 보았다고 한다. 실로 동시에 세 곳을 찾아간 것이다.
그 날 늦게 방으로 돌아와 누워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매우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두 손가락을 굽혔다. 대중들은 모두 그가 2과(果: 斯陀含果)를 터득했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는 아직도 사미로 있었다.
신령한 자취가 특별하고 기이해, 마침내 이를 무제(武帝)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황제께서 친히 납시어, 그를 위하여 승려들을 모아 공양을 마련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방에 이르렀다. 이마가 닿게 예를 올리고, 그를 위하여 장례와 염을 경영하여 관리하였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찾아와 선물과 보시가 겹겹이 쌓였다. 여기서 얻은 공양물로 지원사에 탑을 세웠다. 이 해는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14)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유(劉)씨이며,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형주(荊州)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남양(南陽)의 규(虯)가 척기사(陟屺寺)를 세워 초청해서, 거기에 거처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본 것이 이미 5, 60년이 지났는데도, 끝내 늙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가볍고 빠르며, 대단히 위엄 있는 거동을 하였다. 병든 사람의 집에 이르러, 그가 노여워하는 이는 반드시 죽었다.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이는 반드시 나았다. 당시 사람들 모두 이것을 예언으로 여겼다. 그가 아직 서로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라도, 모두 자신의 친근함을 다하여 사느냐, 죽느냐를 드러내었다.
어느 날 승혜는 강변에 이르렀다. 나루터의 관리에게 건너가기를 청하였다. 관리를 재촉하였으나, 배가 작아 미처 그를 건네주지 못하였다. 잠깐 사이에 승혜가 이미 건너편 둑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양쪽 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신이(神異)함에 감탄하였다.
중산(中山)의 견염(甄恬)과 남평(南平)의 차담(車曇)이 같은 날 승혜를 초청하였다. 승혜는 두 사람의 집으로 다 갔다. 후에 두 집에서 조사해서 따져보고, 비로소 그것이 분신임을 알았다.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문혜왕(文慧王)이 요청하여 서울로 내려갔다. 가다가 보지(保誌)를 방문했다. 보지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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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용의 새끼로다[赤龍子].”
다른 말은 없었다. 승혜는 그 후 형주로 돌아왔다.
우연히 진서 장사(鎭西長史) 유경유(劉景蕤)를 만났다. 문득 슬피 통곡하면서 그의 집에 투숙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유경유가 자사(刺史)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에 상주성(湘州城)의 남쪽에 이르러 문득 말하였다.
“땅 속에 비석이 있다.”
여러 사람이 시험 삼아 파보니, 과연 두 장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승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영원(永元) 연간(499~500)에 강릉에서 죽었다고 한다.
∙혜원(慧遠)
당시 강릉에 있는 장사사(長沙寺)의 혜원은 본래 사문 혜인(慧印)의 종이다. 혜인이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출가시켰다. 이어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수행하였다. 몇 해를 부지런히 고행하였다. 마침내 신이한 능력을 가져 분신하여, 초청하는 집에 갈 수도 있었다. 또한 미리 흥망을 점치기도 했다.
15) 석혜통(釋慧通)
혜통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수춘(壽春)에 있었다. 의복이 추레하고, 자는 곳도 일정한 곳이 없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실 것이라면 마시고 먹을 것이라면 먹어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늘 자기가 정나라의 산기장군[鄭散騎]이라고 하였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여 자못 그때마다 영험이 있었다.
강릉의 변두리에 사는 승귀(僧歸)라는 자가 수춘을 떠돌며 장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길에서 혜통을 만났는데, 이름을 부르면서 물건을 맡기려고 하였다. 승귀는 이 때 자신이 지는 짐도 무거운 까닭에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마침내 억지로 짐 위에 얹어놓았다. 그런데도 조금도 무거운 줄 몰랐다. 몇 리쯤 가다가 곧 헤어져 떠나면서, 승귀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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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누님이 강릉에 계시오. 비구니로서 이름은 혜서(惠緖)이며, 삼층사(三層寺)에 머물러 있소이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소식을 알려줄 수 있다면, 곧 찾아간다고 말해주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짐 위에 얹은 것을 돌아보니, 맡겼던 물건 역시 없었다. 승귀는 강릉에 돌아와 곧 혜서를 찾을 수 있었다. 자세히 그 내용을 말해 주었지만, 혜서에게는 그런 아우가 없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스스로 수춘을 왕래하면서 그를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혜통이 스스로 강릉으로 갔으나, 혜서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방안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세히 물어보고는, 잠깐 동안 강릉에 머물렀다.
길을 가다가 무덤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씨족과 사망한 연·월·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를 전하여서 물어 보면, 모두가 그의 말과 같았다. 때로는 먼 옛날의 겁탈하고 훔친 일을 지적하여, 그의 죄상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뭇 도적들이 멀리서 혜통을 보기만 하면, 곧 샛길로 피해 달아났다.
또 강진(江津)으로 가다가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문득 지팡이로 그를 때리며 말하였다.
“빨리 말을 달려 돌아가, 너의 집이 어찌 되었는지 보아라.”
이 사람이 집에 이르러 보니, 과연 화재가 번져 집과 재물이 다 타버렸다. 제(齊)의 영원(永元) 초년(499)에 문득 서로 아는 임양(任漾)이란 사람을 찾아가 술을 구하며, 매우 다급하게 말하였다.
“지금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네. 여러 아는 분들에게 이별을 알리시게. 모두들 정성껏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네.”
술을 다 마시고, 담장 가에 이르러 땅에 누웠다. 살펴보니 이미 죽었다.
수십 일이 지나서, 다시 어떤 사람이 저자 가운데에서 그를 만났다. 뒤따라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후에 사라졌다.
16) 석보지(釋保誌)
보지의 본래 성은 주(朱)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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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도림사(道林寺)에 머물렀다. 사문 승검(僧儉)에게 사사하였다. 그를 스승[和上]으로 모시며, 선업(禪業)을 닦고 익혔다.
전송(前宋)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초기에 이르자, 문득 괴벽스럽고 기이해졌다. 거처하고 머무는 것에 일정한 곳이 없었다. 또한 먹고 마시는 것에도 일정한 때가 없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치나 자라나고, 마을의 거리를 늘 맨발로 걸어 다녔다. 지팡이 하나를 손에 잡았다. 그 꼭대기에는 수염을 자르는 칼과 거울을 걸어 놓았다. 때로는 한두 필의 비단을 걸어 놓기도 하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조금씩 기이한 자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며칠씩 음식을 먹지 않고도 얼굴에 배고픈 기색이 없었다. 또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 처음에는 깨닫기 어려운 것 같았지만 후에는 모두 효험이 나타났다.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말이 예언하는 기별과 같았다. 서울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함께 그를 섬겼다.
제(齊)의 무제(武帝)는 그가 대중을 미혹시킨다 생각하여 수감하여, 건강(建康)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보니, 그가 저자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와 감옥 안을 조사해 보았다. 보지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보지는 감옥의 관리에게 말하였다.
“문 밖에 두 개의 가마에서 음식을 갖고 오리라. 금 발우에 밥을 담았을 것이니, 네가 그것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이윽고 제(齊)의 문혜(文慧)태자와 경릉왕(竟陵王) 소량(蕭良)이 나란히 음식을 보지에게 보내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건강(建康)의 수령인 여문현(呂文顯)이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곧 그를 맞아들여 뒤채[後堂]에 머물게 하였다.
같은 시각에 병제(屛除)의 안에서 연회(宴會)를 거행하게 하였다. 보지 또한 대중을 따라나갔다.
얼마 뒤 경양산(景陽山) 위에, 또 한 사람의 보지가 일곱 승려들과 함께 있었다. 이에 황제는 노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자 있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궁궐 문을 지키는 관리가 상계하여 말하였다.
“보지는 오래 전에 성(省)에 나가 있었으며, 지금 막 먹물을 몸에 바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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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승정(僧正) 법헌(法獻)이 옷 한 벌을 보지에게 보내주고자 하였다. 심부름꾼을 용광사(龍光寺)와 계빈사(罽賓寺) 두 절에 보내서 그를 찾았다. 그랬더니 모두 말하였다.
“어제 이곳에서 묵고는 아침에 떠났소.”
다시 그가 늘 찾아가는 여후백(厲侯伯)의 집에 이르러 그를 찾았다. 여후백이 말하였다.
“보지는 어제 여기에서 도를 수행하다가, 아침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법헌에게 알리니, 비로소 분신이 세 곳에서 묵었음을 알았다.
엄동에도 늘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걸어 다녔다. 사문 보량(寶亮)이 납의(衲衣)를 주고자 하였다. 채 말도 하기 전에, 보지가 문득 와서 납의를 끌어넣고 떠났다.
또한 때때로 사람들을 찾아가 살아 있는 물고기의 회를 구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찾아 마련해주면, 배부르게 먹고서야 떠났다. 문득 그릇 안을 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살아서 놀았다.
그 후 보지는 무제에게 신통력을 빌려주어, 고제(高帝)를 땅 아래에서 만나게 하였다. 저승에서 고제는 항상 송곳으로 찔리고 칼로 목 잘리는 고통을 받았다. 무제는 이 때부터 길이 송곳과 칼을 폐하였다.
제의 위위(衛尉) 호해(胡諧)가 병을 앓았다. 보지를 초청하였다. 보지는 소(疏)에 주석을 달다가 말하였다.
“내일은 굽히겠소[明屈].”
다음날이 되어도 끝내 가지 않았다. 이 날 호해가 죽어 시신을 싣고 집에 돌아오니, 보지는 말하였다.
“명굴(明屈)이란 내일[明日]이면 시신이 나간다[屍出]는 뜻이라오.”
제의 태위(太尉)이며 사마벼슬에 있던 은제지(殷齊之)가 진현달(陳顯達)을 따라 강주(江州)에 주둔하였다. 보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니, 보지는 종이에 나무 한 그루를 그려 주었다.
그런데 그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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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말하였다.
“급할 때는 이 나무에 오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후 진현달이 반역을 일으켜 강주의 주둔지에 은제지를 남겼다. 진현달이 패배함에 이르러 은제지도 반역자로 몰려 여산(廬山)에 들어갔다. 추격하는 기병이 곧 그에게 이르렀다. 은제지가 보니 숲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보지가 그려준 그림과 같았다. 이에 깨닫고 나무에 올라갔더니, 까마귀는 끝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추격하던 사람들이 까마귀를 보고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되돌아가서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제의 둔기장군(屯騎將軍) 상언(桑偃)이 반역을 꾀하려 하여 보지를 찾아갔다.
보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는 달아나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대성(臺城)을 포위해서 반역하고자 하지만,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질 것이오.”
열흘이 되지 않아서 사실이 발각되었다. 상언은 반역자로 몰려 주방(朱方)으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다. 과연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졌다.
양(梁)나라 때 파양(鄱陽)의 충렬왕이 어느 날 보지에게 예를 굽혀, 집의 모임에 오게 했다. 그를 만나자 문득 매우 다급하게 곤장을 찾았다. 얻고 나서는 그것을 문 위에 놓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충렬왕은 곧 외지로 나가서 형주자사(荊州刺史: 荊은 곤장)가 되었다. 그의 미리 비추어보는 밝음으로서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지는 대부분 흥황사(興皇寺)와 정명사 두 절을 오갔다. 금상폐하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더욱 높은 예우를 받았다.
이에 앞서 제나라 때는 보지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금상폐하가 즉위하자, 곧 조서를 내려 말씀하셨다.
“보지의 자취는 티끌세상의 더러움에 구속받으나, 그 정신은 어둡고 고요한 세계에서 노닌다. 물과 불도 태우거나 적실 수 없고, 뱀과 호랑이도 덮쳐 두렵게 할 수 없다. 불교의 이치로 말한다면 성문(聲聞) 이상의 경지에 있다. 숨겨둔 경륜으로 이야기한다면 은둔한 신선보다 높은 경지에 있다. 어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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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비의 보통 심정으로 헛되이 구속하고 제재할 수 있는가? 어찌 비루하고 편협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지금부터 행도하고 내왕하는 일은 뜻에 따라 출입하게 하고, 다시는 금지시키지 말도록 하라.”
보지는 이 때부터 궁중에도 자주 출입하였다. 천감(天監) 5년(506) 겨울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두루 갖추어 지냈다. 그러나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보지가 문득 황제에게 상계하였다.
“저의 병이 낫지 않아, 관에 나아가 치료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상계하지 않으면, 백관(百官)이 아마도 매질과 곤장을 맞을 것입니다. 원컨대 화광전(華光殿)에서 『승만경』을 강의하여, 비를 청하게 하소서.”
주상은 곧 사문 법운(法雲)을 시켜 『승만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밤에 곧 큰 눈이 내렸다. 이에 보지는 또 말하였다.
“한 쟁반의 물을 가져다, 그 위에 칼을 얹어 놓으소서.”
갑자기 비가 크게 내려,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모두 만족하였다.
어느 날 주상께서 보지에게 물었다.
“제자는 번뇌와 헷갈림을 아직 제거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열둘[十二]로 다스려야 합니다.”
알 만한 이들이 ‘12인연이 헷갈림을 다스리는 약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또 열둘이란 말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그 뜻은 글자를 쓸 때의 시절과 시각 가운데 있습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글 서(書)’ 자의 획수 가운데 있는 12를 말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물었다.
“제자는 어느 때면 고요한 마음으로 닦고 익힐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안락금(安樂禁)입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금(禁)’이란 것은 멈춘다[止]는 뜻이니, 안락정토에 이르면 마침내 멈추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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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법운이 화림사(華林寺)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가사흑풍(假使黑風)’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보지가 문득 물었다.
“바람이 있는가, 없는가?”
법운이 대답하였다.
“세간의 이치[世諦]로 보자면 짐짓 있다고 하겠지만, 최상의 진리[第一義]로 따지자면 없는 것입니다.”
보지는 세 번 네 번 주고받다가, 이내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이 가유(假有)의 경지를 체득한 경지에서 본다면, 이것은 또한 해득할 수도 없거니와 해득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의 말뜻이 깊이 숨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진어로(陳御虜)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온 집안이 보지를 섬기기를 매우 도탑게 하였다.
어느 날 보지는 그를 위하여 진실한 형상을 나타냈다. 그런데 빛나는 모습[光相]이 보살상과 같았다. 보지의 이름이 알려지고 기적을 나타낸 지 40여 년 동안에, 공손히 섬긴 선비와 여자들의 수는 이루 다 일컬을 수 없다.
천감 13년(514) 겨울에 이르러 대(臺)의 뒤채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떠나려 한다.”
열흘이 되지 않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형체와 모습은 밝고 기쁜 모습이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촛불 하나를 불태워서, 후원 전각에 있던 사인(舍人) 오경(吳慶)에게 넘겨주었다. 오경이 곧 나라에 상계하여 알렸다. 주상은 탄식하였다.
“대사께서는 더 이상 머무시지 않을 것이다. 촛불이라는 것은 훗날의 일을 나에게 부탁하시는 뜻일 것이다.”
그러고는 후하게 장례 전송하기를 더하여, 종산(鍾山)의 독룡(獨龍) 언덕에 묻었다. 이어 묘소에 개선정사(開善精舍)를 세웠다. 육수(陸倕)에게 명령하여 무덤 안에 기리는 글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왕균(王筠)이 비문을 절문에 새겼다. 그 돌아가실 때의 형상[遺像]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곳곳에 그것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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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지가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는 나이가 5, 60세 가량이었다. 세상을 마칠 때에도 역시 늙지 않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나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서첩도(徐捷道)라는 사람이 서울의 구일대(九日臺) 북쪽에서 살았다.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보지의 처삼촌으로 보지보다 나이가 네 살 적다. 그러므로 보지가 죽을 때의 나이를 따져보면 97세일 것이다.”
∙도향(道香)·승랑(僧朗)
당시 양(梁)나라 초기에 촉중(蜀中)에는 또한 도향·승랑이 있었다. 그들 역시 모두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論】신묘한 도의 조화[神道之爲化也]란 뽐내고 강한 것을 억누르고, 모멸하고 오만한 것을 꺾으며, 흉악하고 날카로운 것을 분질러서, 티끌세상의 어지러움을 푸는 데 있다.3)
수레바퀴를 날려 보물을 실어 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착한 믿음을 지닌 자들도 귀의하여 엎드리게 한다. 험한 절벽에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도 숨어 엎드리게 한다. 마땅히 알라. 지극한 다스림은 작위적이지 않은 무심함으로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조화시키는 데 있음을.
진(晋)나라 혜제(惠帝)가 정사를 제대로 베풀지 못하면서부터 회제(懷帝)가 서울을 옮겼고, 중국은 오랑캐가 짓밟으며 뭇 갈족(羯族)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사마연(司馬淵)과 사마요(司馬曜)는 앞에서 포악하게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는 뒤에서 흉악한 마음을 숨겨왔다. 고을과 나라가 나누어지고 무너져, 백성들은 죽거나 하얀 재를 뒤집어썼다.
3) 그러므로 존재는 앞서다가 뒤따르기도 하고, 움츠리다가 으쓱거리기도 하며, 굳세다가 비실거리기도 하고, 꺾이다가 꺾어버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거나 사치하거나 큰 것은 버린다. (『노자』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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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징(佛圖澄)은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 가엾고, 형벌과 살해가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이 가슴 아파, 마침내 신의 조화를 갈파(葛陂)에서 나타내었다. 까마득한 미래의 예언을 양양(襄陽)과 업도(鄴都)에서 드러내었다. 비밀스런 주문의 힘에 기대어 곧 다하려는 운명을 구제하고, 향기로운 기운에 의지해 위태함을 만난 이를 건져내었다. 방울을 올려다보거나 손바닥에 비추어보아, 앉은 자리에서 길흉을 정하여, 끝내 두 석(石)씨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 황량한 오랑캐의 자식으로 왔지만, 창생들을 윤택하게 함에서는 참으로 더 비교할 것이 없다.
그 후 불조(佛調)와 기역(耆域)과 섭공(涉公)과 배도(杯度) 등은 혹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며, 머리를 숙여서, 헷갈린 속인들과 함께 하였다. 때로는 신기한 일을 뚜렷이 나타내거나, 먼 훗날의 징조를 예언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묘지에 묻힌 후에 관 안이 텅 빈 일도 있었다. 신령한 자취는 괴상하고 기이하여, 그 연유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의 법칙이 같지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 또한 달랐을 따름이다.
심지어 유안(劉安)4)·이탈(李脫)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역사에서는
4)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아들인 유안(劉安, B.C.179~122)을 말한다. 곧 한(漢)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이다. 유안은 날 때부터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할머니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고, 그 자신도 나중에 모반을 꾀하다가 자살했다.
유안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비파 타기를 좋아하고 문재(文才)를 타고났다. 수렵이나 승마와 같은 무협적인 것을 싫어했다. 남에게 음덕(陰德)을 베풀고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 하였다. 다만 아버지 유장이 죽은 데 대하여 원망을 품고, 기회가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유안은 『회남자(淮南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회남자』는 형이상학적인 도(道)를 말하여 세속을 초월한 관념적 경지를 강조한 도가의 저작물이자, 도가 외에도 유가나 법가 등의 제가(諸家)의 설을 총망라한 잡가(雜家)의 저작물이기도 하다.
유안은 빈객과 방술지사(方術之士) 수천 명을 동원하여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은 한나라 건국 70년 무렵의 한나라에 존재한 모든 방면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서이다. 동시에 그 이전과 이후의 사상계를 가르는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을 예고한 책이기도 하다.
그들을 모반(謀叛)하고 질서를 어지럽힌, 요망하고 방탕한 인물이라 하였다. 신선의 기록에는 그들을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구름 위를 날아다닌 인물이라 하였다. 무릇 진리의 세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와 합치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방편이란 영구불변한 진리에는 반대되더라도, 도와 합치하는 것이자 쓰임을 이롭게 하여 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 시대의 전기들에 기록된 것만으로는 그 상세한 내용을 끝까지 규명할 길이 없다. 혹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감응한 경우도 있고, 혹 은둔한 신선의 드높이 빼어난 경지인 경우도 있다. 다만 한 가지라도 남까지 아우른다면 충분한 것이다.
혜칙(慧則)은 향기로운 항아리에 감응하여 고질병을 고치고, 사종(史宗)은 어량(漁梁)을 지나면서 곧 물 속에 노닐던 물고기의 목숨을 구하였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칼날 아래에서도 몸이 상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다. 보지(保誌)가 분신으로 집집마다의 욕구를 원만히 충족시켜, 황제가 이것으로 믿음을 더하게 된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광명이 비록 조화를 이루지만 그 바탕이 더럽혀지지 않고, 먼지와 비록 함께 하더라도 그 참다움은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선대의 글과 기록[文紀]이 모두 불가의 기록[宗錄]에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방술과 작은 재주[方伎]를 자랑하여 그것에 도취된 사람들이라면, 이는 좌도(左道: 道敎)로 시대를 어지럽히거나, 신비한 약에 인연하여 높이 하늘을 날거나, 향기로운 지초[芳芝: 靈芝]에 기대서 오래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릇 닭이 구름 속에서 울고, 개가 하늘 위에서 짖으며, 뱀과 고니가 죽지 않고, 거북과 신령이 천 년을 산다고 해서, 일찍이 이것을 신이한 일이라 하였던가?
찬(贊)하노라.
땅은 물의 도움 받아 못이 되고
쇠는 불로 말미암아 달구어지듯
힘 센 이 따라 교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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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나마 위엄과 권세 드러내었지.
양양 땅 비추신 불도징(佛図澄)
불법의 시내로 인도하신 단도개(單道開)
이 두 분의 은혜로움으로
저 사방 끝까지 평안하였네.
만약 이에 힘입지 않았더라면
백성들 목숨 어찌 보전했겠나.
土資水澤 金由火煎
强梁扈化 假見威權
澄照襄土 開導蓄川
惠茲兩葉 綏彼四邊
如不繄賴 民命何全
고승전 제11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4. 습선(習禪)
1) 축승현(竺僧顯)
승현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그는 올곧은 고행으로 계율과 절조를 훌륭히 지켰다. 푸성귀만을 먹으면서 경을 외우고, 선(禪)을 일삼아 힘썼다. 항상 산림에 혼자 거처하였다. 그리고 인간 세계 밖에서 두타행을 닦았다. 혹 때로는 며칠씩 선정(禪定)에 들었어도, 또한 주린 기색이 없었다.
당시 유요(劉曜)가 서경(西京: 長安)을 침략하여 쓸어버렸다. 조정과 재야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졌다. 승현은 진(晋)의 태흥(太興) 연간(318~321) 말기에 남쪽 강남에 머물렀다. 다시 이름난 산들을 다니면서, 자신이 항상 닦던 선의 일을 닦았다.
그 후 병이 들어 오래도록 위중하였다. 마침내 서방 세계에 생각을 두고, 마음으로 간절히 희구하였다. 그러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참 모습을 나투어 빛을 비추었다. 그의 몸의 고통 받던 곳이 모두 나았다. 이 날 저녁 일어나 목욕을 하였다. 함께 머물던 이들과 시병하는 이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해주었다. 아울러 인과에 관한 훈계를 하였다. 매우 정밀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이튿날 맑은 새벽에 편안히 앉아서 돌아가셨다. 방안에 특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10여 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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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승광(帛僧光)
백승광은 혹 담광(曇光)이라고도 하였다.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禪)을 익혔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초기에 강동 지방에 노닐어, 섬주(剡州)의 석성산(石城山)에 머물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 산 속에는 예전부터 맹수로 인한 재난과 산신의 횡포가 심해,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승광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람을 고용하여 풀을 베어 길을 열고,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걸어 몇 리를 들어가니, 갑자기 크게 비바람이 치면서 호랑이 떼가 포효하고 울부짖었다. 승광은 산 남쪽에 한 석실(石室)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 머물러 합장하고, 선(禪)에 안주하여 정신을 깃들이는 처소로 삼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비가 멎었다. 마을로 내려가 음식을 구걸하고, 저녁에는 다시 굴 속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혹 호랑이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혹 뱀의 몸이 되기도 하면서, 다투어 찾아와 승광을 위협하였다. 승광은 한결같이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시 사흘이 지나자 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저는 자리를 옮겨 장안현(章安縣)의 한석산(寒石山)으로 가서 머물고,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합니다.”
그 후로는 나무 베고 나물 캐러 오는 길이 통하였다. 도인과 속인들이 종사로 섬겼다. 선을 좋아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석실 옆에 띠풀로 집을 세웠다. 그것이 점차로 절을 이루어, 은악사(隱岳寺)라 이름하였다.
승광은 선정에 들 때마다, 곧 7일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산에서 거처하기 53년, 나이 110세가 된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옷으로 머리를 덮고 편안히 앉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 때 대중 승려들은 모두 보통 때와 같이 선정에 든 것이라 생각하였다. 7일이 지난 후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곧 함께 가서 보았다. 얼굴빛은 여느 때와 같으나, 오직 코만 숨기운이 없었다. 정신이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해골이 썩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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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에 곽홍(郭鴻)이 섬주 태수에 임명되었다. 이 산에 와서 예배를 올리고, 시험 삼아 뜻한 대로 짐짓 가슴을 헤쳐 보았다. 그랬더니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면서 의복이 삭아 흩어지고, 오직 백골만이 남았다. 곽홍은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렵게 여겼다. 백골을 석실에서 거두어, 벽돌을 바깥에 쌓아 흙을 발랐다. 그러고는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다.
3) 축담유(竺曇猷)
담유는 혹 법유(法猷)라고도 하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고행하여 선정을 익혔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섬주(剡州)의 석성산에 머물렀다. 음식을 구걸하고 좌선을 하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남을 해치는 술법을 행하는 어떤 집에 이르러 음식을 구걸하였다. 담유의 축원하는 주문이 끝나자, 문득 지네가 밥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담유는 유쾌하게 먹고, 별 탈이 없었다.
후에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선을 하였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경을 듣지 않느냐?”
이윽고 호랑이 무리가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굵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것들이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담유를 향하다가,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떠났다.
그 후 어느 날 산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담유를 찾아왔다.
“법사의 위엄과 덕이 이미 무겁습니다. 이 산에 오셔서 머무시니, 제자는 문득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하겠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산을 찾아온 것은 서로 만날 수 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오. 왜 함께 머물지 않으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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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하 권속들이 아직 법화에 젖지 못하여, 갑자기 제지하는 말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 곳의 사람이 오가면, 혹 서로 침범하고 부딪칩니다. 사람과 신의 길은 다르기도 하여, 그런 까닭에 떠날 따름입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본래 어떤 신이오?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을 터인데, 어디로 옮겨가려 하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제자는 하(夏)임금의 아들로서, 이 산에 자리 잡은 지 2천여 년입니다. 한석산은 집안의 외삼촌께서 다스리는 산이니, 그곳에 가서 머물 것입니다.”
곧 산 음지쪽의 산신묘로 돌아갔다. 헤어짐에 즈음하여 손을 잡고는, 담유에게 향 세 상자를 주었다.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구름을 뛰어넘어 떠나갔다.
산에는 외로운 바위가 구름에 닿을 만큼 빼어나게 홀로 서 있었다. 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가 소문을 듣고 짐짓 찾아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다하고 돌아갔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그 위에는 아름다운 정사(精舍)가 있어 득도한 이가 산다. 비록 돌다리가 개울에 걸쳐 있지만, 바위가 가로막아 사람의 접근을 끊는다. 또한 이끼가 푸르고 매끄러워,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이른 사람은 없다.”
담유는 걸어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자,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의 정성이 도타운 것은 알지만, 아직은 득도하지 못하였으니 물러가라. 10년 후가 되면 스스로 이곳에 오리라.”
담유는 마음으로 한탄하여, 그 날 저녁 그 산 속에서 잠잤다. 밤에 주위를 돌며 보살을 창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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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과 눈썹이 하얀 사람이 나타났다. 담유가 가려는 곳을 물었다. 담유가 자세히 대답하니, 그 노인이 말하였다.
“그대는 생사를 윤회하는 몸인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이곳 산신인 까닭에 알려줄 따름이다.”
담유는 마침내 그곳에서 물러났다. 길을 가다 한 석실을 지나갔다. 점심때가 지나 그곳에서 쉬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깔리면서, 석실 안이 온통 울렸다. 그러나 담유는 정신과 안색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홑옷을 입고 머리싸개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곳은 제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어제는 나가서 집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시끄러운 움직임이 이르렀으니, 크게 깊이 부끄럽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만약 이것이 그대의 집이라면, 청컨대 되돌려 드리지요.”
신이 말하였다.
“저는 주거지를 이미 옮겼으니, 청컨대 머물러 사시기 바랍니다.”
담유는 얼마 동안 머물렀다. 담유는 늘 돌다리를 건너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후에 여러 날 정결하게 재계를 다한 다음 다시 그곳에 가고자 하였다. 가서 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환하게 열려 있었다. 다리를 건너서 조금 갔다. 정사(精舍)와 신이한 승려가 보이는 것이 과연 종전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리하여 함께 향을 사르고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신승이 그에게 말하였다.
“물러가게. 10년 후면 저절로 이곳에 올 것이야. 지금은 아직 머물 수 없네.”
이에 돌아왔다. 돌아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다시 처음과 같이 합쳐졌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요사스런 별이 나타났다. 황제는 널리 나라 안의 모든 덕 있는 사문들에게, 재를 올리고 참회하여, 재앙을 물리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담유가 곧 정성으로 기도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응이 일어났다. 6일째 되는 날 아침에, 푸른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나타나 지나간 일을 뉘우쳤다.
“잘못하여 법사를 고단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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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저녁, 요사스런 별이 물러갔다.
또 다른 설에서는 말한다.
“별을 물리친 것은 백승광(帛僧光)이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담유는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산의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가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짐짓 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았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구름과 안개에 헷갈려서 엿볼 수가 없었다.
∙혜개(慧開)·혜진(慧眞)
당시 또 혜개·혜진 등도 선(禪)의 일을 닦기를 잘하였다. 여요(餘姚)의 영비산(靈祕山)에 들어가, 각기 방장(方丈)과 선 수행하는 감실을 조성하였다.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다.
4) 석혜외(釋慧嵬)
혜외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였다. 대부분 산골짜기에 깃들어 머물면서, 선정(禪定)의 일을 닦았다. 어느 머리 없는 귀신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는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고, 곧 귀신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미 머리가 없으니, 곧 두통을 앓을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귀신이 곧 모습을 숨겼다. 다시 배가 없는 귀신이 되어 찾아왔다. 다만 손과 발만이 있었다. 혜외는 또 말하였다.
“너는 이미 배가 없으니, 곧 오장육부의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잠시 후 다시 다른 형상이 되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가 모두 형상에 따라 말하여, 모두 이를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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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느 때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내리는데, 어떤 여자가 기숙할 곳을 찾았다.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고 의복도 선명하였다. 자태가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하였다. 자칭 하늘에서 온 여인네[天女]라 말하였다.
“상인께서 덕이 있기에, 하늘이 나를 보내어 서로 위로하여 달래게 하였습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말로 꾀어내 권유하여 그의 뜻을 흔들었다. 그러나 혜외의 지조는 곧고 확고하여, 하나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곧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내 마음은 불 꺼진 재[灰]와 같다. 가죽주머니[革囊]로 시험해 보고자 하지 말아라.”
여자는 마침내 구름을 뚫고 떠나면서 되돌아보며 찬탄하였다.
“바닷물은 마를 수 있고 수미산도 기울 수 있으나, 저 상인(上人)의 지조는 굳고도 곧구나.”
그 후 진(晋)의 융안(隆安) 3년(399)에 법현(法顯)과 함께 서역에서 노닐었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5) 석현호(釋賢護)
현호의 성은 손(孫)씨이며, 양주(凉州) 사람이다. 중국에 와서 광한(廣漢)의 염흥사(閻興寺)에 머물렀다. 항상 선정을 익히는 것을 일삼았다. 또한 계율의 행실도 훌륭하여 실오라기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었다.
진(晋)의 융안(隆安) 5년(401)에 죽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입에서 오색의 광명이 나와 절 안을 가득히 비추었다. 유언을 남겨 몸을 불사르게 하였다. 제자가 이를 행하였다. 이윽고 사지의 관절이 다 불탔고, 오직 손가락 하나만은 불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것을 탑 밑에 묻었다.
6) 지담란(支曇蘭)
지담란은 청주(靑州) 사람이다. 푸성귀를 먹고 선을 즐기며,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진의 태원 연간(376~396)에 섬주(剡州)에 노닐다가, 그 후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에서 쉬었다. 한 곳의 자연 풍광이 깨끗하고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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틔어 넓은 것을 보고 그곳에 머물렀다.
며칠이 지나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신체가 길고 컸으며, 여러 번 꾸짖어 담란을 떠나게끔 하려 하였다. 또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짐승들이 나타나 자주 담란을 위협하였다. 담란이 느긋하게 편안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주기왕(珠欺王)이 저의 외삼촌입니다. 이제 위경산(韋卿山)으로 가서 그곳에 자리 잡을 터이니, 이곳을 바쳐 봉양합니다.”
3년이 지나서 문득 수레와 말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따라온 사람이 봉우리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두건을 쓴 사람이 주기왕이라 하면서, 이름을 밝힌 다음 앞으로 나왔다. 따라온 처자와 남녀 등 23인도 모두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여, 세속 사람을 넘는 풍모가 있었다. 이들은 담란의 처소에 이르러, 요즘 날씨에 지내기가 어떤가 안부를 물었다. 인사를 마치자 담란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낙안현(樂安縣)의 위경산에 삽니다. 오래도록 풍문으로만 듣고 감복하였습니다. 이제야 가족들과 함께 우러러 투신하오니, 귀의하는 계를 받고자 합니다.”
담란이 곧 계를 내려주었다. 법을 받은 다음 돈 1만 냥과 꿀 두 단지를 선물하고, 하직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문득 피리소리가 울리고 나팔소리가 나면서, 메아리쳐 산골짜기가 진동하였다. 이것은 담란과 같이 선을 닦는 무리 10여 명도 함께 보고 들은 일이다.
진(晋)의 원희(元熙) 연간(419~420)에 산에서 죽었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7) 석법서(釋法緖)
법서의 성은 혼(混)씨이며, 고창(高昌) 사람이다. 덕스런 행실이 맑고 부지런하였다.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을 닦았다. 후에 촉(蜀)나라에 들어가, 유사총(劉師塚) 사이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두타행을 하였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1)
『법화경』·『유마경』·『금광명경』을 외웠다. 항상 석실 안에 거처하면서,
1) 듣건대, “삶을 잘 기르는 이는 육지에서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외뿔소가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찍을 곳이 없고, 무기가 그 칼날을 들이밀 곳이 없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 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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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닦기도 하다가 독송하기도 하였다. 무더위가 극심할 때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7일 동안 냄새도 나지 않았고, 시신의 왼편에서는 향기가 감돌았다. 열흘이 지난 뒤에야 멎었다. 저녁마다 시신에서 방광하며 몇 리까지 밝게 비추어, 마을 사람들이 곧 시신 위에 무덤 탑을 세웠다.
8) 석현고(釋玄高)
현고의 성은 위(魏)씨이고, 본명은 영육(靈育)이다. 풍익(馮翊)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머니 구(寇)씨는 본래 외도를 믿었다. 위씨 가문에 시집와서 처음 딸 하나를 낳았다.
곧 현고의 큰 누님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곧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면서, 가문에 다른 견해가 없이 불법을 받들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년(401)에 꿈속에서, 인도 승려가 꽃을 뿌려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깨어났다. 곧 임신하여 홍시 4년(402) 2월 8일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문득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더욱이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멎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영육(靈育)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존중하여 다시 세고(世高)라 일컬었다.
나이 열두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어떤 서생(書生)이 현고의 집에 잠시 와서 잠자고는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에 들어가 숨어살고자 한다.”
부모는 곧 현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 날 저녁 마을사람들이 함께 이들을 전송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와서, 현고의 안부를 물었다.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다들 같이 전송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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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미 전송했다는 말인가?”
부모는 비로소 어제 맞이하고 보낸 사람이 신이한 분임을 깨달았다. 현고는 처음 산에 이르자 곧 출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을 깨달을[得度] 수 없다.”
이에 현고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에게 입도(入道)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앞서 세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세속에 등을 돌리고 세상과 어긋나자, 이름을 현고라고 고쳤다.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라, 배움에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산승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선정과 계율에 정진하였다. 관중에 부타발타(浮馱跋陀) 선사(禪師)가 석양사(石羊寺)에 있으면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고가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긴 지 열흘 사이에, 선법에 미묘하게 뛰어났다. 부타발타가 감탄하였다.
“훌륭하구나! 불자여. 너의 깊은 깨달음이 이와 같구나.”
이에 얼굴을 낮추고 겸손히 양보하여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현고는 곧 지팡이를 짚고, 서진(西秦)으로 갔다. 맥적산(麥積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이 산에는 백여 명의 학인이 있었다. 그의 교리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그에게서 선의 도를 품수 받았다.
당시 장안에 사문 석담홍(釋曇弘)이 있었다. 진(秦)나라의 고승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면서, 현고와 서로 만나 같은 선의 일을 닦으며 우의 좋게 지냈다. 당시 걸불치반(乞佛熾槃)은 농서(隴西)를 점령하였다. 서쪽으로는 양(凉)나라와 접하였다. 외국 선사 담무비(曇無毘)가 그 나라로 들어왔다. 문도를 거느리고 무리를 이루어 선의 도를 가르쳤다. 삼매를 바르게 닦아, 이미 깊고도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우(隴右)의 승려들 가운데 그에게 품
수 받아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현고는 곧 자기가 대중을 거느리고, 담무비로부터 법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안 되어, 담무비가 도리어 그러한 뜻을 현고에게 아뢰었다.
당시 하남(河南)에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다. 비록 형상은 사문이었으나, 권세가 거짓 재상[僞相]과 짝하여 감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계율과 어긋나서 자못 학승들을 꺼려하였다.
담무비가 이미 서쪽 사이국(舍夷國)으로 돌아갔다. 두 승려는 곧 하남 왕세자 사마만(司馬曼)에게 현고를 헐뜯는 말을 꾸며 말하였다.
“대중을 모아 축적하여 모으니, 장차 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마만은 그 헐뜯는 말을 믿고 곧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고를 하북(河北)의 임양(林楊) 당산(堂山)으로 내쫓았다. 그 산의 나이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뭇 신선들이 이곳을 집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 때 현고의 제자들 3백 명이 산의 집에 가서 살았다.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선정과 지혜가 더욱 새로워졌다. 충정과 정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응하여, 신령한 이적이 많았다. 경쇠는 치지 않아도 울리며, 향기도 저절로 풍겨났다. 또한 아라한과 신선들도 이따금 찾아와 노닐었다. 맹수도 길들인 듯 복종하며, 벌레와 독물의 피해도 없었다.
현고의 학도 가운데는 6문(門: 六根)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현소(玄紹)는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배움은 모든 선(禪)을 궁구하였다. 신통력이 자유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이 나와, 그것으로 현고가 씻고 양치질하도록 바쳤다. 그 물의 향기롭고 청정함이 보통 물보다 두 배나 달랐다. 또 늘 세간의 것이 아닌 향과 꽃을 얻어서 삼보에 바쳤다. 신령하고 기이함이 현소와 같은 이가 열한 명이었다. 현소는 후에 당술산(
堂術山)에 들어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났다.
예전에 장안의 담홍(曇弘) 법사가 좌천되었다. 민촉(岷蜀: 泗川省)에 유배당하자, 도가 성도(成都)를 흠뻑 적셨다. 하남왕(河南王)이 그의 높은 명성에 기대고자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였다. 담홍은 이미 현고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다. 맹세코 그의 청백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곧 산골짜기에 놓인 구름다리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따랐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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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에 도달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를 마치고는, 곧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이미 깊이 비추어보고 멀리 아시는 터에, 어찌하여 헐뜯는 말을 믿고 어진 이를 버리셨습니까? 빈도가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를 아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태자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곧 사신을 보내 현고를 찾아갔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하게 사과하고, 현고에게 고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현고는 이미 널리 중생들을 구제할 마음을 품었다. 그런 까닭에 분한 생각을 잊고 명에 따라 하남으로 가기로 하였다. 처음 산을 나오려 하였다. 그러자 산중의 초목들이 꺾이고 부러지며, 바위가 무너져 길을 막았다. 현고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는 맹세코 도를 넓히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거늘 어찌 한 곳에만 매일 수 있겠는가?”
곧 바람이 멎고 길이 열렸다. 차츰차츰 나아가 나라에 이르렀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길 가까이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였다.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어, 그를 높여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하남에서 교화를 마치자, 양(凉)나라로 나아가 노닐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여 섬겼다. 영준한 손님들의 집회에서 현고의 뛰어난 해설을 펼치게 하였다.
당시 서해의 번승인(樊僧印)도 현고에게서 수학하였다. 뜻이 좁고 도량이 편벽하여,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터득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선의 관문을 완전히 다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에 현고는 비밀히 신통력으로써 선정에 든 승인(僧印)으로 하여금, 두루 시방 끝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이 같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승인은 한 철 하안거 내내 그가 본 바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영영 다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바닥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당시 북위(北魏)의 오랑캐 척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거하였다. 그 군대가 양(凉)나라 경계를 침범하였다. 척발도의 외삼촌인 양평왕 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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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超)가 현고에게 같이, 거짓 나라의 서울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평성에 도달하자, 현고는 크게 선에 의한 교화를 펼쳤다.
위태자(僞太子)인 척발황(拓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한때 거짓 무고를 받아, 그의 부친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에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무고를 겪는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간절히 참회하였다.
곧 척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타났다. 모두 검을 손에 잡고 매서운 위엄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멋대로 의심하느냐?”
척발도는 놀라 꿈에서 깨어나, 크게 뭇 신하들을 모아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태자에게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황제의 영령들이 내려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척발도는 다시는 태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현고의 정성스런 감응에 힘입은 것이다.
척발도는 이로 인하여 글을 내렸다.
“짐은 조종의 거듭 빛나는 계통을 이어, 큰 기반을 열어 널리 만대에 융성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공(武功)에는 비록 밝으나, 문교(文敎)에는 아직 유창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것은 태평한 정치를 높이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국내는 편안하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창성하니, 마땅히 제도를 정해서 만세의 법으로 삼아야 한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옴이 있고, 사계절도 돌아가는 순서가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인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의 안전에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피로한 몸을 쉬게 하여, 장구한 계책을 굳히는 것이 고금의 바뀌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다. 짐과 여러 공신들은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이제는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집으로 물러나, 얼굴을 화락하게 하고 작위를 높이며,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기르면서 도를 논하여 꾀를 진술할 뿐, 다시 담당관리로서의 고통스럽고 힘든 직무를 친히 맡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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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천하의 정사를 대신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게 한다. 다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서 여러 자리를 갖추고, 사람을 가려 뽑아 임무를 수여하여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들일 사람은 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셨다. 미래가 지금만 같지 못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조정의 관료와 백성들은 태자에게 모두 신(臣)이라 칭하였다.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황제에게 올리는 표(表)와 같이 하였다. 다만 흰 종이를 사용해서 구별하였다.
당시 최호(崔皓)와 구천사(寇天師)가 이전부터 척발도에게서 총애를 얻었다. 척발황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날이면, 그들의 위세의 칼자루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짓으로 무고하였다.
“태자가 전에 사실은 모반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과 인연을 맺은 까닭에, 돌아가신 황제폐하를 꿈에 내려오게 하였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여론과 일의 자취가 차차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만약 죽여서 제거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척발도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발끈하여 크게 노하였다. 곧 칙명으로 현고를 수감하게 하였다. 현고는 이에 앞서 어느 날 비밀히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아마도 쇠할 것이다. 나와 혜숭(慧崇)이 맨 먼저 그 화를 당할 것이다.”
이 때 이 말을 듣고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혜숭(慧崇)
당시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위위(僞魏: 北魏)의 상서(尙書)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이다. 이미 현고 다음으로 덕이 높았다. 그도 역시 의심과 저지를 받았다.
북위의 태평(太平) 5년(444) 9월에 현고와 혜숭은 함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입어, 평성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43세이다. 이 해는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21년(44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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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이 되도록 문도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날 밤 3경(更)에 문득 광명이 나타났다. 현고가 앞서 머물던 곳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다시 선을 닦던 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명 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갔다.”
제자들은 비로소 이미 돌아가셨음을 알고, 끊어지는 아픔으로 슬피 통곡하였다. 이윽고 시신을 성 남쪽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목욕시켰다. 아울러 혜숭의 시신도 따로 다른 곳에 수습하였다. 이에 온 도읍의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서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제자 현창(玄暢)은 당시 운중(雲中)에 있었다. 북위의 도읍에서 6백 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이어 6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서울에 이르렀다. 스승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비통하여 숨이 막혔다. 이어 동학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불법은 이제 멸하였다. 자못 부흥되겠는가? 만일 다시 부흥될 수 있다면, 스승님[和上]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보자. 스승님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이를 비추어보실 것이다.”
말이 끝나자 현고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빛에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온몸에서 땀이 나왔다. 그 땀은 매우 향기로웠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교화는 인연을 따라 성하거나 쇠한다. 인연의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깊고도 고요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너희들이 머지않아 다시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오직 현창(玄暢)만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잘 스스로 마음을 닦아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끝마치자 곧 누워 숨이 끊어졌다. 이튿날 관을 옮겨 화장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무덤을 만들어 곧 묻었다. 도인과 속인들은 슬프고 애통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가슴 에며 바라보았다.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으면서 현고를 흠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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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미처 수업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현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울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젠 다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러 날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고, 항상 현고의 이름을 불렀다.
“현고 상인은 성인이시라 자유자재하실 터인데, 왜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응하여 현고가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이르는 것이 보였다. 법달은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며, 애절하게 구호하여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 때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는 업보가 무거워 구해주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 이후라도 대승의 경전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참회하면, 업보를 가볍게 받을 수 있으리라.”
법달이 말하였다.
“만약 고통스런 업보를 받게 된다면, 어여삐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현고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 홀로 그대에게만 그러겠는가?”
법달이 다시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은 모두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 중생들을 구하여 보호하기를 원하여, 이미 염부제주에 환생하였다. 혜숭은 늘상 안양정토를 기원하여 이미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
다시 법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셨는지요?”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들이 저절로 그것을 아느니라.”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법달이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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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보살[得忍菩薩]입니다.”
∙담요(曇曜)
북위(北魏)의 태평(太平) 7년(446)에 이르자, 척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하였다.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았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 치하에 사문 담요가 있었다. 역시 선 수행의 일로 칭송을 받았다. 위태부(僞太傅) 장담(張潭)이 그에게 엎드려 스승의 예로 모셨다.
9) 석승주(釋僧周)
승주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굳세며, 기이한 뜻과 절개가 있었다. 빚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아무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숭고산(嵩高山)에서 두타행과 좌선을 하였다.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려 하자, 승주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큰 어려움이 닥쳐올 것이다.”
곧 권속 수십 명과 함께 한산(寒山)으로 들어갔다. 이 산은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4백 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계곡이 험하게 막아 군병이 이를 수 없는 곳이기에, 마침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윽고 북위 오랑캐는 멋대로 횡포를 부려, 장안에 머물던 승려들은 모두 죽었다. 그 후 곧이어 참회하여 최씨(崔氏: 崔皓)를 죽이고, 다시 불법을 일으켰다.
영창왕(永昌王)이 장안을 다스렸다. 이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사찰을 수리하고 건립하려 사문들을 찾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한산에 한 승려가 있는데, 덕스런 일에서 비범합니다.”
왕은 곧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주는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거절하였다. 제자인 승량(僧亮)에게 명에 응하여 산에서 나가도록 하였다.
그 후 승주는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알렸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날 저녁 불길이 새끼로 맨 걸상 뒤에서 솟아 몸을 태우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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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지나자 비로소 불길이 다하였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나 방은 불타지 않았다. 제자들이 남은 재를 거두어 흙벽돌 탑을 세웠다.
∙승량(僧亮)
제자 승량은 성이 이(李)씨이며, 장안 사람이다. 승주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 영창왕이 승려를 구해 초청하였을 때 아무도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불법이 처음 부흥되었다고는 하나, 예기치 못할 불상사가 있을까 의심하였다. 승량이 말하였다.
“불법의 운수[像運]가 사람에게 깃대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만약 주살되어 목이 잘리는 일을 당한다면, 나 자신이 그것을 당하겠다. 그러나 만약 온전할 수 있다면, 도를 다시 떨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승주의 권고도 있어, 이에 사신을 따라 장안에 이르렀다. 아직 장안에 채 이르지 않았을 무렵, 왕과 백성들은 거리와 마을을 쓸고 물 뿌리며, 집집이 잇대어 기다리며 영접하였다. 왕이 친히 자신을 굽혀 맞으니, 발이 서로 닿을 정도로 몰려나와 공경을 다하였다.
승량은 그들을 위하여 화와 복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과를 가르쳐 보였다. 말은 간단하나 이치는 궁극으로 나아갔다. 온화하면서도 간절하여, 듣는 사람이 슬픔과 기쁨으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옛 절을 수리하고 복구하였다. 그리하여 사문들을 초청해서 맞아들이니, 관중(關中)에서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승량의 힘이다.
10) 석혜통(釋慧通)
혜통은 관중(關中) 사람이다. 어릴 때 장안의 태후사(太后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지니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외웠다. 처음 양주(凉州)의 혜소(慧詔) 선사를 좇아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불법의 문에서 관하여 닦기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바가 많았다.
항상 마음으로 안양정토를 기원하며, 정신은 그 국토에 깃들고자 하였다. 작은 병이 생기자, 선정(禪定)에 든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습이 매우 깔끔하고 엄숙하였다. 그가 혜통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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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때가 이르렀다.”
잠시 후에 아미타불이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밝게 빛났다. 혜통은 선정에서 깨어나, 동학들에게 본 것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말을 마치자 곧 세상을 떠났다.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감돌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 때 나이는 59세이다.
11) 석정도(釋淨度)
정도는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새끼 밴 사슴을 쏘았다. 그러자 어미 사슴이 낙태(落胎)하고는 아픔을 참으며, 죽은 새끼에게 다가가 혀로 핥아주었다. 이것을 보고 정도는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즉시 활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꺾고는, 출가하여 푸성귀만을 먹었다.
30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항상 홀로 산과 늪에 거처하며, 좌선을 익히고 경을 외웠다. 만약 고을에 재(齋)모임이 있으면, 곧 몸소 아홉 개의 등에 불을 켜고, 날이 새도록 깔끔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써 공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탕(香湯)을 마련하라.”
목욕을 한 다음 수천 장구의 설법을 하였다. 삶과 죽음의 인과를 훈계하고, 말을 마치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퉁소와 북이 울리고 향 연기가 허공으로부터 그곳에 이르렀다. 같은 때에 권속 수십 명이 모두 함께 듣고 본 일이다.
12) 석승종(釋僧從)
승종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타고난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였다. 시풍(始豊)의 폭포산(瀑布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비하고, 5문(門)을 정밀하게 닦았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대추와 밤만을 먹었다. 나이가 거의 백 세가 되어서도, 기력은 아름답고 강하여 예송(禮誦)을 그치지 않았다.
은둔하는 선비 저백옥(褚伯玉)과 은둔하는 숲 속의 사귐을 맺었다. 늘 도를 논하고 교리를 설하였다. 문득 연이어 이틀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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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법성(釋法成)
법성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송진만을 먹으면서 바위동굴에 은거하였다. 선(禪)을 익히는 것을 임무로 일삼았다.
전송(前宋)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동해왕 유회소(劉懷素)가 외지로 나와 파서(巴西) 지방을 지켰다.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맞이하여, 부성(涪城)에서 만났다. 하안거(夏安居) 동안 율장을 강의하고, 일을 마치자 하직하여 돌아왔다. 그러고는 광한(廣漢)에 머물면서 다시 선법(禪法)을 널리 펼쳤다.
작은 병이 생기자 곧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 법성은 항상 『보적경(寶積經)』을 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외웠다. 반 권까지는 외울 수 있었으나, 기운이 모자라 감당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이를 읽게 하여, 한 차례 두루 끝나자마자 합장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병하던 10여 명이 모두 공중에 감색 말이, 금으로 된 관을 등에 싣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14) 석혜람(釋慧覽)
혜람의 성은 성(成)씨며, 주천(酒泉) 사람이다. 어릴 때 현고(玄高)와 더불어 고요하게 관하는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혜람은 일찍이 서역에 노닐었다. 부처님의 발우를 머리 위에 받들었다. 이어 계빈국(罽賓國)에서 달마(達摩) 비구로부터 선의 요체를 물어 전수 받았다. 달마는 일찍이 선정에 들었다가, 도솔천에 가서 미륵불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후에 그 계법을 혜람에게 전수하였다. 혜람은 돌아오다 우전국(于塡國)에 이르렀다. 다시 그 계법을 그곳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수하였다. 그 후 곧 돌아오다가, 도중에 하남(河南) 땅을 경유하였다. 하남의 토곡혼(吐谷渾)의 모연(慕延)과 세자 경(瓊) 등이 혜람의 덕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에 공경하여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재물의 도움을 주어, 촉(蜀)에 좌군사(左軍寺)를 세우게 하였다. 혜람은 곧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 천궁사(天宮寺)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초청하여 서울로 내려와,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우자, 다시 칙명을 내려 그곳에 옮겨 살았다. 이에 서울의 선을 닦는 승려들이 모두 그의 발꿈치를 따라 수업하였다.
오흥의 심연(沈演)과 평창(平昌)의 맹의(孟顗)도 모두 도덕을 흠모하였다. 그를 위하여 절에 선실을 조성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5) 석법기(釋法期)
법기의 성은 향(向)씨며, 촉군(蜀郡) 비현(陴縣) 사람이다. 일찍 양친을 잃고,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열네 살 때 출가하여 지맹(智猛)에게서 선의 일을 물어 전수 받았다. 영기사(靈期寺)의 법림(法林)과 함께 관(觀)을 익혔다. 지맹이 익숙히 아는 것은 모두 증득(證得)하였다.
그 후 현창(玄暢)을 만나 다시 그를 따라 공부해 나아갔다. 그러다가 현창이 강릉(江陵)으로 내려가자, 그도 따라갔다. 십주관문(十住觀門) 가운데서 그가 터득한 것은 이미 9관문이었다. 그리고 오직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만을 아직 다 익히지 못하였다. 현창이 감탄하였다.
“나는 서쪽 고비 사막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사막을 밟았다. 동쪽으로는 우혈(禹穴: 會稽山)을 찾으며, 남쪽으로는 형산(衡山)과 나부산(羅浮山)을 다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오직 여기 자네 한 사람만이 특히 선과의 연분이 있구나.”
그 후 장사사(長沙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2세이다. 신비스런 광명이 시신을 비추고, 몸은 더욱 향기롭고 깨끗하였다.
∙석도과(釋道果)
당시 또 용화사(龍華寺)에 소속된 석도과도 역시 선의 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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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석도법(釋道法)
도법의 성은 조(曺)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선의 일에만 정진하였다. 때로는 신비한 주문도 행하였다. 그 후 노닐다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왕휴지(王休之)와 비갱지(費鏗之)의 초청으로, 흥락사(興樂寺)와 향적사(香積寺) 두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대중을 가르치는 데 법이 있었다. 항상 음식을 구걸하여, 따로 초청하는 일이나 승려들의 음식을 받지 않았다. 걸식해서 얻은 음식은 그 몫을 줄여서,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였다. 저녁마다 옷을 벗고 알몸으로 앉아서, 모기의 먹이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다가 후에 선정에 들었다. 미륵불이 재(齋)모임 가운데서 방광하여, 3도(途)의 과보를 비추어주는 것을 보았다. 이에 깊이 자신을 도탑게 힘써서,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았다.
원휘(元徽) 2년(474)에 선정에 든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새끼로 맨 걸상에 편안하게 앉아, 기뻐하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하였다.
17) 석보항(釋普恒)
보항의 성은 곽(郭)씨며, 촉군(蜀郡)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아이 때 늘 햇빛 속에서 성스런 승려가 공중에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집안사람들을 향해 이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 후 간절하게 출가하기를 구하여, 성도 치하의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방에 홀로 머물고 권속을 세우지 않았다. 고요함을 익히며 선을 일삼았다. 선정에 들고 나오며 머무는 일을 훌륭히 하여, 촉의 도(韜) 율사와 뜻을 같이하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였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면, 광명이 눈썹에서 곧바로 내려가 금강제(金剛際)에 이른다. 화광 가운데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는데, 전생의 업보도 자못 밝게 알게 된다.”
전송의 승명(昇明) 3년(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그가 아직 죽기 전에 문득 친지들과 이별을 고하였다. 말을 마치고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어, 당시 사람들은 농담이라 생각하였다. 세상을 마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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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미미하게 병든 모습이 있었다. 오직 속가의 한 노복만이 이를 보았다. 이튿날 아침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노복은 이를 알지 못하고 억지로 이를 눕히려 하였다. 그러나 시신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와서 보고 그대로 앉히게 하였다. 손에는 세 손가락을 굽혔고, 나머지는 모두 펴 있었다. 대중 승려들이 시험 삼아 이를 잡아당겼다. 역시 손 따라서 곧 펴졌다. 그러나 곧 다시 구부러졌다. 살아 있을 때는 몸이 검었는데, 죽고 나서는 오히려 몸이 깨끗하고 희어졌다.
이에 득도한 사람의 법에 근거하여 시신을 화장하였다. 섶을 쌓고 처음 불길이 타오르자, 곧 오색의 연기가 일어났다. 특이한 향기가 자욱하게 감돌았다. 이에 고을의 장군인 왕현재(王玄載)가 그를 위하여 찬탄의 글을 지었다.
큰 깨달음은 아득히 형상이 없고
높은 응험은 잊어 텅 비움을 귀히 여기네.
한결같은 생각으로 도량에서 만났던들
헛되이 만 겁의 긴 세월 보냈을까.
신심은 동쪽 나라에 생각을 비워서
성인을 만나 서쪽 나라에 그림자 꾸미노라.
미묘한 다다름은 삼계를 맑게 하고
정신은 4선(禪)의 경지를 전하였다.
속물이야 짐짓 들쑥날쑥 하지만
참된 본성이야 진리라 항상 빛나도다.
빛을 숨겨 뜬 세상에 깃드셨으나
남긴 공덕 바야흐로 먼 곳까지 교화하노라.
大覺眇無像 懸應貴忘靖
一念會道場 空過萬劫永
信心虛東想 遇聖藻西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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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趣澄三界 傳神四禪境
俗物故參差 眞性理恒炳
韜光寄浮世 遺德方化逈
18) 석법오(釋法晤)
법오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집안은 농사와 양잠을 일삼았다.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루 모두 성장하였다. 법오는 나이 50세에 상처를 하였다. 온 집안이 울적하였다. 도를 사모하여 부자 일곱 사람이 모두 함께 출가하였다.
남쪽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다가 번산(樊山)의 양지바른 곳을 보았다. 그윽이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였다. 이곳은 본래 은둔하는 선비인 곽장상(郭長翔)이 머물던 곳이었다. 이에 이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갖다.
당시 무창(武昌) 태수 진유(陳留)의 완회(阮晦)가 소문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길을 내고 산을 열어, 승방과 선실을 세웠다.
법오는 멥쌀을 먹지 않고, 항상 보리밥으로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따름이었다. 『대품경』·『소품경』·『법화경』을 외웠다. 항상 하루 여섯 때마다 도를 수행하였다. 산과 못에서 산림에서 두타행을 할 때는, 호랑이와 외뿔소도 피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무 밑에서 좌선하면서, 혹 하루가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기도 하였다.
∙도제(道濟)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산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그 후 사문 도제가 그의 높은 업을 이어갔다. 지금 무창에서는 그가 머물던 곳을 두타사(頭陀寺)라 한다.
19) 석승심(釋僧審)
승심의 성은 왕(王)씨며, 태원(太原)의 기현(祁縣) 사람이다. 진(晋)의 표기장군(驃騎將軍) 왕침(王沈)의 후예인데, 할아버지 대에 초군(譙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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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머물렀다.
승심은 어려서 출가하여 수춘(壽春)의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법화경』과 『수능엄경』을 외웠다. 늘 말하였다.
“선이 아니면 지혜롭지 못하다.”
오로지 뜻을 선에 두었다. 담마밀다(曇摩蜜多)가 서울의 도의 왕이라는 말을 들었다. 곧 옷을 털고 강을 건넜다.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묻고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심오한 이치를 곡진하게 터득하였다.
어느 때인가 도둑 떼들이 산에 들어왔다. 그러나 승심은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적들이 마침내 옷을 벗어 그에게 시주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불법의 가르침을 설하여, 도적 떼들을 도왔다. 도적들이 부끄러워하고 땀을 흘리며, 예를 올리고 떠났다.
영취사(靈鷲寺)의 혜고(慧高)도 그를 따라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승심에게 절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따로 선방을 세웠다. 청하(淸河)의 장진후(張振後)도 그를 초청하여 서현사(栖玄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공경을 더하여 그를 섬겼다. 부담(傅琰)과 소적부(蕭赤斧)도 모두 경계의 가르침을 자문 받았다. 왕경칙(王敬則)이 선방에 들어가서 승심을 찾았다. 이에 선정에 든 것을 바로 보고 손가락을 튀기면서 밖으로 나와 말하였다.
“성스러운 도인[聖道人]이시다.”
그러고는 곧 쌀 1천 섬을 바치고, 삼귀(三歸)의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승겸(僧謙)·초지(超志)·법달(法達)·혜승(慧勝)
승겸·초지·법달·혜승도 모두 선을 일삼았다. 역시 각기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20) 석담초(釋曇超)
담초의 성은 장(張)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키가 8척이고 얼굴과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베옷을 입었다.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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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따름이었다. 처음 상도(上都)의 용화사(龍華寺)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원가(元嘉) 연간(424~453) 말기에 남쪽 시흥(始興)에 노닐었다. 두루 산수를 구경하며, 홀로 나무 밑에서 잠잤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돌아왔다. 북제(北齊)의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칙명을 받고 요동(遼東)에 가서 선의 도를 도와 널리 폈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에 크게 불법의 교화를 행하였다. 건원(建元) 연간(479~482) 말기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또 전당(錢塘)의 영원산(靈苑山)으로 갔다. 선정에 들 때마다 여러 날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때 문득 바람과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홀(笏)을 손에 잡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자기는 엄진동(嚴鎭東)이라고 밝히면서, 성명을 통하였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모습이 매우 단정하며 호위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깃발이 펄럭였다.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절하며 존경을 표하고, 자칭 제자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제자는 7리 밖에 거주하며, 두루 이 땅을 맡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짐짓 찾아와 예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가 말하였다.
“부양현(富陽縣) 사람들이 일부러 겨울에 산자락 밑을 파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땅의 용집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용들이 분개하여 3백 일 동안 비를 내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1백여 일이 지나, 우물과 못이 고갈되어 밭에 씨 뿌리는 일이 영 어렵습니다. 법사께서는 이미 도덕이 신과 통한 분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몸을 굽혀 앞으로 나가신다면, 반드시 감응이 일어나 창생들을 윤택하게 하여,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담초가 말하였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시주의 힘인데, 빈도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제자가 맡은 것은 다만 구름을 일으킬 수만 있지,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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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를 허락하니 신은 문득 떠나갔다. 이에 담초는 곧 남쪽으로 갔다. 닷새가 지나 적정산(赤亭山)에 이르렀다. 멀리 용을 위하여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고 설법하였다.
밤이 되자 뭇 용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화하여 담초를 찾아와서 예배를 올렸다. 이에 담초가 다시 설법하였다. 그러자 용들은 삼귀(三歸)의 계를 내려달라고 빌면서, 자신들은 용이라고 말하였다. 담초는 그들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니, 그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그 날 밤 또 담초의 꿈에 용이 나타났다.
“본래 분노로 인하여 맹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법사께서 착함으로 이끄시니, 감히 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내일 해질 무렵이면 곧 비가 내릴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담초는 곧 임천사(臨泉寺)로 갔다. 사람을 보내 현령(縣令)에게 알려서, 강 가운데에 배를 마련하였다. 그곳에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현령은 곧 승려들을 초청하고, 배를 바위 머리에 띄웠다. 그런 후에 경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읽는 것이 막 끝나자마자, 드디어 큰비가 내렸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모두 만족하였다. 그 해에는 풍년 농사를 수확할 수 있었다.
담초는 영명 10년(49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21) 석혜명(釋慧明)
혜명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조부의 대에 동오(東吳)로 피난하였다. 혜명은 어릴 때 출가하여 장안(章安) 동사(東寺)에 머물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사문들과 함께 적성산(赤城山)에 올라 석실을 보았다. 담유(曇猷)의 시신이 아직 썩지 않았다. 선실은 황폐하여 드높은 발자취를 이어가지 않는 것을 보았다. 곧 사람을 고용하여 나무를 자르고, 길을 열어 다시 법당과 선실을 세웠다. 와불(臥佛)과 담유의 상(像)을 만들었다. 이에 마음을 선과 독송에 두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른 고목나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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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선정 중에 한 여신(女神)이 나타났다. 자칭 여노(呂姥)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항상 보호하고 지켜주겠습니다.”
혹 때로는 흰 원숭이·흰 사슴·흰 뱀·흰 호랑이 등이 섬돌 앞에서 노는 일도 있었다.
길들인 듯 엎드려서 굴러다니며, 사람을 두렵게 하지 않았다.
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이 소식을 들었다. 공경하여 고개 숙여 자주 세 명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중하고 돈독하게 초청하여, 마침내 잠시 서울로 나가 왕의 집에 이르렀다. 문선왕이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잠시 그곳에 있다가 하직하고 산으로 돌아왔다.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았다. 문선왕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출발할 때 보내 주었다.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산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論】‘선(禪)’이란 만물을 미묘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인연하지 않는 법이란 없고, 살피지 못하는 경계란 없다. 그러나 법에 인연하고 경계를 살피자면, 오직 고요함으로써만 밝힐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못에 물결이 멎으면, 물고기와 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마음의 물이 이미 맑아지면, 뚫어지게 비추어서 숨겨지는 것이란 없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고, 고요한 것은 시끄러운 것의 임금이 된다. 그런 까닭에 가벼운 것은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근본을 삼고, 시끄러운 것은 반드시 고요한 것으로 터전을 삼는다.”2)
『대지론(大智論)』에서는 말한다.
“비유하면 약을 복용해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집안 일을 쉬다가 기력이 평상시처럼 건강해지면, 다시 돌아와 집안 일을 닦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정(禪定)의 힘으로 지혜라는 약을 복용해서 그 힘을 얻으면, 다시 돌아와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2) 『노자(老子)』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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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4평등심(平等心)·6신통력(神通力)도 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며, 8제(除)·10입(入)도 선정의 힘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의 작용이란 크나큰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이 동방으로 옮겨온 이래로 선의 도도 역시 전수되었다. 이에 앞서 안세고(安世高)·법호(法護)선사가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승광(僧光)과 담유(曇猷) 등도 모두 가르침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아 끝내 거룩한 일을 이룩하였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기쁨과 즐거움을 넘어설 수 있고, 밖으로는 요사함과 상서로움을 꺾을 수 있어서, 겹겹의 암벽에서 귀신과 도깨비를 쫓아내고, 절벽 바위에서 신이한 승려를 만난 것이다.
사문 지암(智巖)에 이르러서는 몸소 서역 땅을 밟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초청하여, 다시 선의 일을 동쪽 땅에 전하였다. 현고(玄高)과 현소(玄紹) 등도 모두 친히 선 수행시 지켜야 할 법칙을 전수받아, 숨을 들이쉬고 내쉼에서 수(數)와 수(隨)3)를 다하였다. 정신을 보내고 되돌아옴에서 환(還)과 정(淨)을 다하였다. 그 후에 승주(僧周)·정도(淨度)·법기(法期)·혜명(慧明) 등도 기러기가 날 듯이 나란하여 버금갔다.
그러나 선의 작용이 뚜렷해지는 것은 신통력에 속해 있다. 그런 까닭에 삼천대천세계를 털구멍 속에 집 짓게 하고, 사해를 묶어 한 방울의 소락(穌酪)으로 할 수 있으며, 석벽을 통과하더라도 막히는 것이 없으니, 대중이 높이 떠받들면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릇 아득히 먼 세속의 도나 용렬하기 만한 선술(仙術)에 이르러서는, 고작 파도를 멈추게 하고 비를 그치게 하며, 주문(呪文)의 불로 나라를 불태우게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바로 현고(玄高)가 저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일어나고, 도법(道法)이 앉아서 돌아가신 것과 비교한다면, 어찌 기이하다고 하겠는가?
3) 육묘법문(六妙法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식선(數息禪)의 수(數)·수(隨)·지(止)·관(觀)·환(還)·정(淨)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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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울두람불(鬱頭藍弗)이 마침내 짐승들 때문에 골탕 먹었고, 독각선인(獨角仙人)이 끝내 선타(扇陀) 여인 때문에 어지러워진 것과 같은 것은, 모두가 마음의 도는 비록 거두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편견과 서로 상응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이는 반딧불이나 부싯돌의 불을 해나 달에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찍이 이것에 짝할 수 있겠는가?
이에 찬하노라.
선은 아득하고 고요하며
삼매의 못은 깊고도 깊도다.
생각을 거두는 방법을 빌려야
비로소 두루 그윽한 곳을 찾으리.
악을 물리친 다섯 분
숲에 깃든 아홉 분
번뇌의 산과 바다를 마르고 녹이며
모으고 흩으며 올라가고 가라앉혔네.
이야말로 덕의 넉넉함이로다.
어찌 마음에 힘쓰지 않을손가.
禪那杳寂 正受淵深
假夫輟慮 方備幽尋
五門棄惡 九次叢林
枯鑠山海 聚散昇沈
茲德裕矣 如不勵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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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률(明律)
1) 석혜유(釋慧猷)
혜유는 강남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면서 지조를 실천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곧고 방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행에만 정진하였다.
당시 서쪽나라의 율사 비마라차(卑摩羅叉)가 강릉에 와서 크게 율장을 널리 폈다. 혜유는 그를 따라 수업하면서, 생각을 깊이 하여 그때마다 쌓았다. 마침내 『십송률(十誦律)』을 크게 밝혀 강설을 이어갔다. 그러자 섬서(陝西)의 율사들은 그를 종사로 삼았다. 그 후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십송의소(十誦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2) 석승업(釋僧業)
승업의 성은 왕(王)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 널리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후에 장안에 노닐며 구마라집(鳩摩羅什)으로부터 수업하였다.
그 후 새로 번역한 『십송률』을 보았다. 마침내 이 책을 오로지 공부하였다. 하늘이 내린 뛰어남으로 심오한 경지를 훤하게 다 깨달았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후세의 우바리(優波離)로다.”
관중 지방이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만나 서울로 피하였다. 오(吳)나라의 장소(張邵)는 그의 곧고 검소함에 고개 숙여 곧 초청하였다. 고소(姑蘇)로 돌아가서, 그를 위하여 한거사(閑居寺)를 지었다. 지세가 맑고 넓으며 큰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승업은 이곳에서 종사의 자리에 앉아 교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3오(吳)의 학사들이 바퀴살 모여들듯 몰려들었다. 어깨에 어깨를 이었다.
또한 그는 강의하는 여가에 틈만 나면 선문(禪門)에 뜻을 두었다. 한 번 단정하게 앉을 때마다, 기이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히 감돌았다. 승업의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 향기를 맡아, 그 신이함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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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예전에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는 아직 『십송률』이 출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곧 먼저 계본(戒本)을 번역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대부(大部)를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계본과 『대부』가 그 뜻에서는 같지만, 말의 표현에 있어서는 혹 다른 것이 있었다. 이에 승업은 이를 개정하여, 한결같이 『대부』에 근거하게 하였다. 지금도 전송되어 두 책이 나란히 행한다.
승업은 원가(元嘉) 18년(441)에 오중(吳中)에서 죽었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혜광(慧光)
승업의 제자인 혜광이 승업의 도풍과 법규를 이어받아, 역시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3) 석혜순(釋慧詢)
혜순의 성은 조(趙)씨며, 조군(趙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장안을 노닐며 지나다가, 구마라집에게 수업하여 경론을 정밀하게 연찬하였다. 특히 『십송률』과 『승기율(僧祇律)』을 잘하였다. 곧 다시 조장(條章)을 만드니, 그 논리가 오랜 옛날까지 꿰뚫었다.
전송의 영초(永初) 연간(420~422)에 돌아왔다. 광릉(廣陵)에 머물면서 계율의 자리[律席]를 크게 열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울에 이르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그 절의 승려인 혜관(慧觀)도 『십송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는 혜순의 덕이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곧 다시 다른 절에서도 위덕을 떨치게 하였다.
이에 자리를 옮겨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2년(458)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4세이다.
4) 석승거(釋僧璩)
승거의 성은 주(朱)씨며, 오(吳)나라 사람이다. 출가하여 승업의 제자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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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많은 경전을 모두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더욱이 『십송률』에 밝았다. 아울러 역사와 문헌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자못 문장도 지을 줄 알았다.
처음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그에 대한 풍문을 듣고 흠모하였다. 칙명을 내려 서울로 나와, 승정(僧正)이 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승정(僧定)이 자칭 불환과(不還果: 阿那含果)를 터득했다고 하였다. 승거는 승려들을 모아 상세하고 단호하게, 그로 하여금 신족통(神足通)을 나타내게 하였다. 승정이 말하였다.
“혹 계율을 범할까 두려워,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승거는 율문을 고찰해보았다. 네 가지 인연이 있으면 신족통을 나타낼 수 있었다. 네 가지 인연이란 첫째는 의혹의 그물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삿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이며, 셋째는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 넷째는 공덕을 이루는 것이다.
승정은 이미 헛된 거짓말이 폭로되자, 곧 날이 밝는 대로 쫓겨났다. 승거는 곧 『계중론(誡衆論)』을 지어서, 찾아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보였다.
승거는 이미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하였다. 또한 율행에 하자가 없었기에, 도인과 속인들이 귀의하여 수레 자국이 서로서로 이어졌다.
전송(前宋)의 소제(少帝: 劉又符)도 그를 따라 5계를 받았다. 예장왕(豫章王)의 아들 유자상(劉子尙)도 불법의 벗이 되었다. 원찬(袁粲)과 장부(張敷)도 한 번 만나자, 일산을 기울여 이야기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장엄사(莊嚴寺)로 옮겨 머물다가, 주석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승만경』의 글 뜻을 서술하였다. 아울러 『승니요사(僧尼要事)』 두 권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행한다.
∙도표(道表)
당시 또 도표율사가 있었다. 사람됨이 진솔하고 높은 행실이 있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진희왕(晋熙王) 유섭(劉燮)에게 명령하여, 계를 청하여 좇게 하였다.
5) 석도엄(釋道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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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엄은 옹립(雍立) 소황(小黃)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비니(毘尼)에 뛰어나 4부(部)의 율전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뭇 대가의 주의와 주장을 융합하였다.
또한 율부가 동방으로 전해오면서 범어와 한문의 음이 달랐다. 그러므로 글이 자못 음에 좌우되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묻고 찾으려 해도 어찌 할 바를 모를까 걱정하였다. 곧 글 뜻의 결론을 모아, 『결정사부비니론(決正四部毘尼論)』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팽성(彭城)에 노닐며 율장을 널리 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혜요(慧曜)
당시 서현사(栖玄寺)의 혜요도 역시 『십송률』에 뛰어났다.
6) 석승은(釋僧隱)
승은의 성은 이(李)씨며,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믿음이 올곧았다. 승은은 여덟 살 때 출가하였다. 곧 긴 시간 동안 행하는 재(齋)도 올릴 수 있었다. 열두 살에 이르러 푸성귀를 먹었다. 구족계를 받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굳었다.
항상 마음을 계율의 뜨락에 노닐었다. 또한 『십송률』에 미묘하게 뛰어나고, 『법화경』과 『유마경』을 외웠다.
서량주(西凉州)에서 현고(玄高) 법사가 선과 지혜를 아울러 드높인다는 말을 들었다. 곧 책 보따리를 지고 그를 따랐다. 이에 배움은 선의 관문을 다하고, 계율의 요체를 깊이 해득하였다.
현고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서쪽 파촉(巴蜀) 땅에 노닐었다. 오로지 불교를 널리 펴는 일을 맡았다. 얼마 후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면서 혜철(慧徹)에게서 공부하였다. 혜철은 명성이 당시에 드높고, 도를 세상 밖에서 떨쳤다.
승은은 도를 갈고 추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루 경과 율을 궁구하였다. 선과 지혜의 바람으로 형(荊)과 초(楚) 지방을 덮었다. 고을의 장군인 산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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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陽王) 유휴우(劉休祐)와 장사(長史) 장대(張岱)도 나란히 계법을 묻고 받았다. 후에 자사(刺史)인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과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도 모두 가마를 선방으로 몰고 왔다. 이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하였다.
그 후 병으로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되었느냐?”
“이미 점심때입니다.”
그러자 물을 찾아 입을 헹구었다. 얼굴 모습을 느긋한 채로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0세이다.
∙성구(成具)
당시 강릉의 상명사(上明寺) 성구율사도 『십송률』·『잡심론』·『아비담』 등에 뛰어났다.
7) 석도방(釋道房)
도방의 성은 장(張)씨며, 광한(廣漢)의 오성(五城) 사람이다. 도의 행실이 맑고 곧았다. 어려서부터 율학에 뛰어났다. 광한의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예불하여 향을 사를 때마다, 향의 연기가 곧바로 불상의 정수리로 올라갔다. 또 부지런히 문인들을 가르쳐, 악을 고쳐 선을 행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120세이다.
8) 석도영(釋道營)
도영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처음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선을 익혔다. 만년에 혜관(慧觀)과 혜순(慧詢) 두 율사로부터 비니(毘尼)를 묻고 전수받았다. 특히 『승기율』 1부에 뛰어났다. 『법화경』·『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게 절조를 지켰다. 장엄사(莊嚴寺)의 도혜(道慧)와 치성사(治城寺)의 지수(智秀)도 모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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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범적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았다.
장영(張永)이 초청하여 오군(吳郡)으로 돌아갔다. 채흥종(蔡興宗)이 다시 맞아들여 상우(上虞)에 머물렀다. 그 후 장영이 서울의 누호원(婁胡苑)에 한심사(閑心寺)를 세웠다. 다시 초청하여, 돌아가 머물면서 강석을 자주 이어갔다. 그러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하였다.
승명(昇明) 2년(478)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혜우(慧祐)
당시에 혜우는 본래 단도(丹徒) 사람이었다. 나이 30세에 출가하였다. 몸을 굳은 절개로 힘써서, 정밀하게 계율의 가르침을 찾았다.
북제의 초기(479~480)에 동산(東山)에 들어가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를 강의하였다. 제의 경릉왕(竟陵王)의 소자량(蕭子良)이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였다. 이에 서울로 나와 한심사(閑心寺)에 머물렀다.
9) 석지도(釋志道)
지도의 성은 임(任)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신중하였다. 열일곱 살에 출가하여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고 욕심이 적었다. 여섯 가지 필수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울러 비축하는 물건이 없었다. 배움이 삼장에 뛰어났다. 더욱이 율품을 잘 하였다. 하상지(何尙之)가 덕을 흠모하여 예를 갖춰 초청하였다. 자신이 지은 법륜사(法輪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나 후에 세자가 황제가 되어 다시 불교를 일으켰다. 계를 내려주는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지도는 이미 불법의 홍통을 서원하였다. 그래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마침내 함께 약속한 10여 명과 길을 떠나 호뇌(虎牢)에 이르렀다.
낙양·진주(秦州)·옹주(雍州)·회주(淮州)·예주(豫州) 등 다섯 고을의 도사를 인수사(引水寺)에 불러모았다. 율을 강의하고 계를 밝혀 다시 법을 받도록 펼쳤다. 거짓 나라[僞國: 北魏]에서 승려의 계율이 온전할 수 있던 것은 지도의 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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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왕환(王奐)이 상주(湘州)로 나가 주둔하자, 손잡고 더불어 노닐었다.
영명(永明) 2년(484) 상주 땅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초도(超度)
당시 서울 와관사(瓦官寺)의 초도도 『십송률』과 『사분율(四分律)』에 뛰어났다. 『율례(律例)』 일곱 권을 지었다고 한다.
10) 석법영(釋法穎)
법영의 성은 삭(索)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열세 살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었다. 양주(凉州)의 공부사(公府寺)에 머물렀다. 동학인 법력(法力)과 더불어 모두 율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영은 스승에게 배운 이후, 배움을 두 번 청하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기억하였다. 율부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내려가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절을 고쳐 수리하였다. 법영은 학업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남까지 밝게 함을 겸했다. 그러므로 칙명을 내려 도읍의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후에 직책을 내놓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왔다. 한적한 방에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때로 계율의 법석도 열었다.
북제의 고조(高祖)황제가 즉위하였다. 다시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일마다 내리는 공양물이 보통 규정된 것의 갑절이나 되었다.
법영은 들어온 보시물로 경전과 불상 및 약장(藥藏)을 만들어 장간사(長干寺)를 채웠다.
북제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십송계본(十誦戒本)』과 『갈마(羯磨)』를 지었다.
∙혜문(慧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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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천보사(天寶寺)의 혜문율사도 여러 부(部)의 율법에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이 섬기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
11) 석법림(釋法琳)
법림의 성은 악(樂)씨며, 진원(晋原)의 임공(臨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촉군(蜀郡)의 배사(裵寺)에 머물렀다. 오로지 계품을 좋아하여, 『십송률』로 마음을 갈았다. 항상 촉 땅에는 좋은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불현듯 승은(僧隱)이 촉에 이르자, 법림은 곧 송곳으로 찌르며 자기를 이겨내기를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승은이 섬서(陝西)로 돌아갔다. 다시 몇 해 동안 그를 따르며 공부하였다. 모든 부의 율장을 마음 속 깊이 훤하게 다하였다.
그 후 촉으로 돌아와서 영건사(靈建寺)에 머물렀다. 그러자 익주(益州) 고을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종사로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늘 『무량수경』 및 『관음경(觀音經)』을 독송할 때마다, 문득 한 사문이 나타났다.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컸다. 항상 법림 앞에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에 이르러 병으로 누웠는데 낫지 않았다. 생각을 서방정토에 쏟아 쉬지 않고 예참하였다. 모든 현인과 성인이 다 눈앞에 모이는 것이 보였다. 곧 제자들을 향해서 그가 본 것을 말하였다.
“죽은 후에는 몸을 불사르라.”
말을 마치자 합장한 채로 세상을 마쳤다. 곧 신번로(新繁路) 입구에 나무를 쌓아 시신을 태웠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러, 사흘 후에야 다하였다. 유골을 거두어 곧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12) 석지칭(釋智稱)
지칭의 성은 배(裵)씨이고, 본래 하동(河東)의 문희(聞憙) 사람이다. 위(魏)의 기주(冀州)자사 배휘(裵徽)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대에 난을 피해서 경구(京口)에 임시 머물렀다.
지칭은 어릴 때부터 강개(慷慨)하여, 자못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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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열일곱 살 때 왕현모(王玄謨)와 신탄(申坦)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험윤(獫狁)을 토벌하였다. 매양 전투가 벌어져 칼에 피가 묻을 때마다, 마음에 측은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아픔을 자기 몸의 아픔보다 더 깊이 느꼈다. 이에 문득 탄식하였다.
“남을 해쳐서 자신을 구제함은 어진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일이 안정되자 갑옷을 벗었다. 우연히 『서응경(瑞應經)』을 읽고는 곧 깊이 느끼고 깨달았다.
‘사람의 백 년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며, 나라와 성(城)이 중한 것이 아니로구나.’
곧 남간사(南澗寺) 선방에 있는 승종(僧宗)에게 투신하여, 5계 받기를 청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한때 익주(益州)의 앙(仰)선사가 서울로 내려온 것을 맞이하여 공양한 적이 있다. 지칭은 곧 뜻을 모아 그에게 귀의하였다. 앙선사도 도탑게 그를 상대하고 대접하였다. 앙선사가 문강(汶江)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 노닐며 거슬러 올라갔다. 촉(蜀)의 배사(裵寺)에서 출가하고, 앙선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나이는 36세이다.
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여 『십송률』을 크게 밝혔다. 또한 『소품경』 1부를 외웠다. 그 후 동쪽 강릉으로 내려가, 은(隱)·구(具) 두 스승으로부터 다시 선과 율을 전수받았다.
의가(義嘉)가 난리를 일으킨 때를 만나, 곧 자리를 옮겨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흥황사(興皇寺)에서 율을 강의하는 법영(法穎)을 만났다. 지칭은 겉에 나타나지 않거나,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것에 대해, 의견을 물어 결정 할 때면, 말하는 것마다 중심을 찔렀다. 그러니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림사(定林寺)의 법헌(法獻)과는 강석에서 서로 만났다. 법헌은 그의 문답이 맑고 깊이 있음을 들었다. 곧 손잡고 산사에 머물렀다. 이에 『소품경』을 복습하여 외우고, 율을 닦아 구축하였다.
그 후 여항(餘杭) 보안사(寶安寺) 의 석승지(釋僧志)가 초청하였다. 그러자 지칭은 고향으로 돌아와 『십송률』 강석을 열었다. 운서사(雲栖寺)에서 다시 허리를 굽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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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寺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지칭은 마침내 그 소임을 받아들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의 기준들을 들어올려 법으로 내보였다.
얼마 후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왕이 보홍사(普弘寺)로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모두들 책을 잡고서 뜻을 이어받았다.
지칭은 집을 떠나 도에 들어와서는, 번다하게 쌓이는 일을 버리려 애썼다. 항상 경조사(慶弔事)와의 인연을 끊고서 인간관계를 두절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흉한 부고[凶故]가 있을 때마다, 계율을 지키고 슬픔을 절제하였다. 오직 도 닦기를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그로써 일년 상[朞功之制]을 마쳤다. 주방(朱方)의 사문 혜시(慧始)가 지칭을 초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강설하였다. 그러니 친척과 마을의 옛 친구들이 모두 와서 문안하였다. 모두에게 정중하게 훈육하여, 효도와 자애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안락사(安樂寺)에서 쉬었다. 항상 법륜을 굴려서, 율장의 대본을 30여 차례 두루 강의하였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십송의기(十誦義記)』 여덟 권을 지었다. 세상에 성행한다. 그의 제자 승변(僧辯) 등이 안락사에 비를 세웠다.
∙총(聰)·초(超)
지칭의 제자 가운데, 총·초 두 사람이 가장 율장에 뛰어나, 문도들이 손을 모아 읍하였다.
13) 석승우(釋僧祐)
승우의 본래 성은 유(兪)씨며, 그의 선조는 팽성(彭城)의 하비(下邳) 사람이다. 그런데 부친의 대에 건업(建業)에 거주하였다. 승우의 나이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건초사(建初寺)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는 펄쩍 뛰면서, 도를 즐거워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의 뜻을 가엽게 생각하여, 잠시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승범(僧範) 도인을 스승으로 섬겼다.
나이 열네 살 때 집안사람들이 비밀리에 혼인처를 구했다. 승우가 이를 알고 피해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법달(法達) 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법달도 계율과 덕이 정밀하고 엄숙하여 법문의 기둥이 된 이로, 승우는 스승으로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가 차서 구족계를 받자, 잡은 지조가 굳고 밝았다.
처음 사문 법영(法穎)에게서 수업하였다. 법영은 한 시대의 이름난 이로 율학(律學)의 종사였다. 이에 승우는 생각을 다하여 뚫고 구하며, 새벽에서 밤까지 게으름이 없었다. 마침내 율부에 크게 정밀하게 뛰어나, 선배들을 더욱 힘쓰게 하였다. 북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늘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듣는 대중들이 항상 7,8백 명이었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시험 삼아 오부대중을 고르고, 아울러 『십송률』 강의를 베풀어, 다시 계를 받는 법을 폈다. 여기서 얻은 보시로 정림사(定林寺)와 건초사(建初寺)를 경영하여, 여러 사찰을 수선하였다. 아울러 차별을 두지 않는 큰 모임[無遮大集]과 사신재(捨身齋) 등을 세웠다.
경장(經藏)을 조성하자, 두루마리 책들을 찾아 비교하였다. 무릇 절을 널리 열고, 진리와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의 힘이다.
승우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교묘한 데가 있었다. 능히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장인들이 와서 표준치[標準]에 근거해서 비교해 보면, 한 자 한 치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광택사(光宅寺)와 섭산사(攝山寺)의 큰 불상과 섬현(剡縣)의 석불상 등은 모두 승우를 초청하여, 그의 의례 법칙에 기준하여 계획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예우하였다. 모든 승려의 일에 관한 큰 의문은, 모두 칙명으로 그를 찾아가 심의하여 결정토록 하였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다리에 병이 생기자, 칙명으로 가마를 타고 내전에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였다. 여섯 후궁에게도 계를 받게 하니, 그가 조정에서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개선사(開善寺)의 지장(智藏)과 법음사(法音寺)의 혜곽(慧廓)도 모두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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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덕을 숭배하여, 초청하여 스승의 예로 섬겼다. 양의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과 남평왕(南平王) 소위(蘇偉), 의동(儀同) 진군(陳郡)의 원앙(袁昻), 영강(永康) 정공주(定公主), 귀빈(貴嬪) 정씨(丁氏) 등도 모두 그 모범적인 계율을 숭배하여, 제자로서 예를 다하였다. 무릇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1만 1천여 명이었다.
천감(天監) 17년(518) 5월 26일에 건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그리하여 개선로(開善路)의 서쪽 정림사의 옛 묘지에 묻혔다. 제자 정도(正度)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동완(東莞)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처음 승우가 경장을 모았다. 그것이 이룩되자, 사람을 시켜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일들을 뽑았다. 이에 「삼장기(三藏記)」·「법원기(法苑記)」·「세계기(世界記)」·『석가보(釋迦譜)』 및 『홍명집(弘明集)』 등으로 엮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論】예의란 성실함과 믿음이 엷어진 데서 나오고,4) 계율도 그릇됨을 막으려 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범하는 연유에 따라서 편목(篇目)을 만들었다. 쌍수(雙樹)에서 호흡이 끝날 때까지가 부처님 생존시의 일대기이다. 금하(金河)에서 그림자가 멸한 이래, 가섭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계율을 잘 지킨 존자인 우바리(優波離) 비구에게 명하여, 율장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에 우바리 비구는 손에 상아(象牙) 부채를 잡고, 입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기를 80번 되풀이하여, 그 글이 마침내 끝났다. 이에 이를 나뭇잎에 써서 『팔십송률(八十誦律)』이라 이름하였다.
이후로 가섭·아난·말전지(末田地)·사나바사(舍那波斯)·우바굴다(優波掘多), 이 다섯 분의 아라한이 차례로 불법을 주지하였다. 우바굴다의 시대
4) 저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성실과 믿음의 얄팍한 상태이자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처음이며, 미리부터 아는 것은 도의 꽃이자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도타운데 머물러서 얄팍함에 뜻을 두지 않고, 열매에 머물러서 꽃에 뜻을 두지 않는다. (『노자』 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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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아육왕(阿育王)이 파타리불다성(波吒梨弗多城)에 있었다.
지난 옛날에 부처님과 만난 인연으로, 드디어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나 시기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하며, 경서를 불태우고 여러 득도한 사람을 해쳤다.
그 후 마음을 바꾸어 불도에 귀의하고,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여 멀리 아라한을 모아 다시 삼장을 결집하였다. 이 때에는 서로 보고 들은 것에 집착하였다. 각기 스승의 설을 인용하여 의지한 근거가 같지 않아, 마침내 5부의 경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제약하는 가볍고 무거움이 때때로 혹 같지 않다. 허락하고 차단하며 폐하고 건립하는 면에서도 작은 차이가 없지 않다. 이는 모두 부처님께서 지난 옛날에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응하셨음에서 연유한다.
혹 사람에 따라, 혹 근기에 따라, 혹 시절에 따라, 혹 나라에 따라 이곳에서는 허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지방에서는 제지하시고, 혹 이쪽 사람에게는 제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셨다.
다섯 분의 승려가 비록 다 같이 부처님의 율을 취하였지만, 각기 한 귀퉁이만을 근거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족계마다, 때로 가볍고 무거움이 죄목을 다룸에 있어서, 넉넉하거나 낮추거나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에 근거하여 수학하면 모두 득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인연의 중첩함을 꿈꾸신 일이 있었다. 이미 경과 율이 5부로 나뉠 것임을 예언하였다.
『대집경(大集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죽은 뒤 남겨진 법이 나뉘어져 5부가 될 것이다. 교리 이해가 거꾸로 뒤집혀지고, 법장이 숨겨 가려진 것을 담무국다(曇無鞠多)라 하리라.”
곧 담무덕(曇無德)이 그것이다.
“외도의 책을 읽어 암기하고, 삼세를 있다고 받아들이며, 문답에 뛰어나며, 일체 중생이 모두 계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을 살바야제바(薩婆若帝婆)라 하리라.”
곧 살바다(薩婆多)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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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다고 설하며 모든 번뇌를 얽어매는 것을 가섭비(迦葉毘)라 하고, 나는 있다고 말하면서 공(空)을 설하지 않는 것을 바차부라(婆蹉富羅)라 하며, 넓고 해박하게 두루 5부를 열람하는 것을 마하승기(摩訶僧祇)라 하리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5부가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여러 부처님의 법계 및 대열반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니라.”
또한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든 후 백 년이 되면 아마도 두 부(部)가 일어나리라. 첫 번째는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이다. 대중부(大衆部)라고도 하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같이 모여 율장을 내놓을 것이다. 이로부터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7부가 생겨날 것이다. 두 번째는 체비리부(体毘履部)이다. 순전히 불도의 수행을 마친 승려들이 함께 모여 율법을 내놓을 것이다. 이 부로부터는 다시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11부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경의 게송에서 칭송한다.
18부와 그 근원이 되는 두 부는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리라.
옳지도 않지만 그르지도 않아서
나는 미래에 일어나리라 말하노라.
十八及二本 悉從大乘出
無是亦無非 我說未來起
또한 주장하는 견해가 같지 않아, 전하는 가운데 역시 18부가 있는데, 언어 표현에서 조금 다르다. 그런 까닭에 5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4부가 생겨났고,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1부가 생겨났으며, 가섭비부(迦葉毘部)에서 2부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2백 년 안에 생긴 것이다. 승기부(僧祇部)에서 생긴 6부는, 흐르는 물 같이 끊임없이 전한 4백 년 동안, 담무덕부(曇無德部)에게서 생겨난 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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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가운데 혹 다만 다섯 승려만을 말하는 것은 그 우두머리를 들어 말한 것이다. 혹 때로는 18이나 20의 율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통틀어 줄지어 말한 것이다.
불교가 동방에 전해지면서 5부의 율장도 모두 건너왔다. 처음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내자, 구마라집이 이를 번역해서 한문으로 바꾸었다. 다 끝내지 못하고 불야다라가 죽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다시 나머지를 외워내서,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모두 끝냈다.
담무덕부(曇無德部)는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것으로, 곧 『사분율』이 그것이다. 마하승기부와 미사색부는 모두 법현(法顯)이 범본을 얻은 것이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승기율』을 번역해 냈으며, 불타집(佛馱什)이 번역해 낸 미사색본은 곧 『오분율』이다.
가섭비부(迦葉毘部)에 대해서는 혹 말한다.
“이미 범본이 건너왔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번역하지는 못하였다.”
거기에 실려 있는 선견(善見)·마득륵가(摩得勒伽)·계인연(戒因緣) 등도 역시 율에 속한 갈래이다.
이처럼 모든 율부가 다 전래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십송률』 한 본이 동쪽 중국에서는 가장 성행하였다.
예전에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는 본래 서역 나라의 으뜸가는 종사였다. 관중 땅에 들어와 형주와 섬서로 갔다. 그곳에서 모두 『십송률』을 베풀어 유통시켰음이 송(宋)나라의 역사에 나타나 있다. 담유(曇猷)가 친히 소리와 뜻을 이어받고, 승업(僧業)이 발꿈치를 이어 넓게 교화하였다.
승거(僧璩)·도엄(道儼)·승은(僧隱)·도영(道榮) 등은 모두 담유·승업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아, 줄지어 송나라를 장식하였다. 글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정도이므로, 그렇게 깊이 있게 뚫고 연마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지칭(智稱) 율사는 깊이 생각하기를 다하여, 펼쳐서 해석한 것마다 모두 문호를 개척하여 다시 과목(科目)을 세웠다. 북제(北齊)와 양(梁)시대에, 천명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명세(命世)’라 불렸다. 그에게서 배운 무리들이 기록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상한다.
무릇 지혜는 선정에 힘입고, 선정은 지계에 힘입는다. 그런 까닭에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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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는 불교의 교리를 크게 분류한 것이자 차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도문에 들어서면, 곧 계율로 근본을 삼고, 속가에 살면 예의를 우선으로 삼음을.
『예기(禮記)』에 이른다.
“도덕·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룩되지 않으며, 교훈으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한다.
“계는 평탄한 땅이라 하겠다. 모든 거룩함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삼세의 불도도 계에 의지하여 비로소 머문다.”
그런 까닭에 율에서 해석하는 다섯 가지 법은, 제어함을 먼저 알게 한다. 물적현상 위에 있는 모양[三相]을 풀 베듯 해야 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에야 선정과 지혜의 법문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수학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잘못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서로 다른 논의들을 일으킨다.
율에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계율이 모든 것을 지휘하며, 논리를 따지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구족계의 제목이나 이름 정도만 얄팍하게 알면, 이내 말한다.
“해득함이 우바리 비구의 경지에 미친다.”
고작 물을 걸러내고 물주머니를 뒤집을 줄만 알아도 이미 일컫는다.
“행이 아라한과 나란하다. 오직 나만이 승려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눈으로 불법을 보아 상상으로만 이른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으로, 공덕을 쌓더라도 허물을 속죄할 수 없다.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과 자기가 높다는 긍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릇 이러한 것을 일컫는다.
한편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율부는 하나의 치우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를 따지는 것은 사방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 따르기를 등지고, 5음(陰)과 12입(入)만을 오로지 중히 여긴다. 뜻에만 맞으면, 곧 행하여 한 번도 구애받는 일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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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 지혜로운 사람을 불사르지 못하고, 끓는 가마솥도 반야를 삶지는 못한다.”
이것은 모두 행동을 단속하는 자루를 잃어서, 도로 자신을 상하는 것이다.“쥐를 점쳐 양(羊)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찬하노라.
소반과 사발에 마련한 경계나
안석과 지팡이에 베푼 새김글이나
만약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으리요.
누더기 옷 깁고 입으면
구족계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입과 생각을 다물고 지키면서
마음과 몸을 마른 고목나무처럼 하라.
기쁨과 슬픔이 거울의 양면이라면
들뜸과 근심은 병의 앞뒤라네.
盤杅設戒 几杖施銘
人如不勗 奚用剋成
納衣旣補 篇聚由生
緘持口意 枯槁心形
怡慼兩鏡 欣憂二甁
고승전 제12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6. 망신(亡身)
1) 석승군(釋僧群)
승군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맑고 깨끗하여 가난함으로 절개를 지키고, 푸성귀를 먹으며 경을 외웠다. 후에 나강현(羅江縣)의 곽산(霍山)에 자리 잡아, 띳집을 얽어 살았다. 이 산은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있다. 정상에는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지름이 몇 길 가량 되었으며, 고인 물의 깊이가 6, 7척이나 되었다. 고을의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뭇 신선이 살던 곳으로, 신선들은 물만 먹고도 주리지 않았기에 곡식을
끊었다”고 한다.
그 후 진수(晋守)의 태수(太守) 도기(陶夔)가 그 소문을 듣고 물을 찾았다. 승군이 물을 도기에게 보냈으나, 산만 벗어나면 곧 구린 냄새가 났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서너 번 거듭하자, 도기는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 이 날 날씨는 매우 맑게 개였다. 산에 이르자 비바람이 치면서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며칠을 그곳에 머물렀으나, 끝내 그곳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마침내 탄식하였다.
“속세 안의 범부라서, 마침내 현인과 성인들께서 막으시는구나.”
개탄하고 한탄하면서 돌아갔다. 승군의 초막집은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과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었다. 항상 외나무로 다리를 삼고, 이 다리를 따라 물을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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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문득 날개가 부러진 오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날개를 펴며 다리를 가로막고, 주둥이로 나아가 승군을 쪼았다. 승군은 지팡이를 들어올려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오리가 손상을 입을까 두려웠다. 이로 인하여 암자로 되돌아와서 물을 끊고 마시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140세이다. 임종 때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이가 어렸을 때, 오리의 날개를 꺾은 일이 있다. 이것이 현세의 과보로서 증명하는구나.”
2) 석담칭(釋曇稱)
담칭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사랑이 넘쳐 은혜를 베풂이 곤충까지 미쳤다.
진(晋)의 말기에 팽성(彭城)에 이르렀다. 80세 가량의 노인 부부가 궁핍하고 쇠약한 것을 보았다. 곧 계율을 버리고 그들의 노복(奴僕)이 되어 여러 해를 일하였다. 안으로는 도덕을 닦아, 한 번도 버린 일이 없었다. 그러자 이에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 후 두 노인이 죽자, 품을 팔아 얻은 삯을 모두 두 노인의 복을 짓는 데 썼다. 그것으로 스스로 속죄하는 일에 견주었다. 장례를 마친 뒤, 다시 도문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할 때에 필요한 물건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전송(前宋)의 초기에 팽성의 가산(駕山) 아래에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해를 입는 사람이 하루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이에 담칭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호랑이가 만약 나를 잡아먹는다면, 재앙은 당장 해소될 것이오.”
마을 사람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곧 그날 밤에 혼자 풀 속에 앉아 있으면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의 이 몸으로 너의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채우거라. 네가 지금부터 원한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이 멎는다면, 미래세계에는 아마도 위없는 승려들의 식사를 얻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생각이 바른 것을 알았다. 각기 울면서 절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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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4경(更)에 이르러, 호랑이가 담칭을 잡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남산에 이르러 보니, 몸은 다 먹어치우고 오직 머리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장례를 치르고 탑을 세웠다. 그 후로는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멎었다.
3) 석법진(釋法進)
법진은 혹 도진(道進), 혹 법영(法迎)이라고도 한다. 성은 당(唐)씨이며 양주(凉州) 장액(張掖)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고행을 정밀히 하였다. 독송을 익히면서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덕이 있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존중하였다. 저거몽손이 죽고 나서, 아들인 저거경환(沮渠景環)이 호(胡) 오랑캐에게 격파당하자, 법진에게 물었다.
“지금 방향을 바꿔 고창(高昌)을 침략하려 한다. 이길 수 있겠는가?”
법진이 말하였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다만 굶주리는 재난이 있을까 근심입니다.”
군병을 돌려 곧 평정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저거경환이 죽었다. 아우인 저거주(沮渠周)가 뒤를 이어 제왕이 되었다. 이 해 흉년이 들어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저거주는 이미 법진을 섬겼다.
법진은 여러 번 저거주에게 구걸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나라에 비축한 식량이 조금씩 고갈되었다. 그러자 법진은 더 이상 나라에 구걸하지 않았다.
곧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다. 칼과 소금을 가지고, 깊고도 궁벽한 굴속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다. 차례로 그들에게 삼귀의의 계를 내려주었다. 곧 옷과 발우를 나무에 걸어 놓고, 굶주린 사람들의 앞에 몸을 던지며 말하였다.
“그대들에게 보시하니 함께 먹으시오.”
여러 사람들은 비록 굶주려 고단하였지만, 아직도 의리로 보아 차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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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일 수 없었다. 이에 법진은 곧 스스로 살을 잘라, 소금을 쳐서 이를 먹게 하였다. 그러자 두 넓적다리의 살이 다 없어졌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려 더 이상은 스스로 잘라낼 수 없었다. 이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나의 가죽과 살을 취하면, 아직도 며칠은 견딜 것이오. 만약 왕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곧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니, 오직 취할 수 있을 때 이를 갈무리하시오.”
굶주린 사람들은 슬피 울면서 취할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제자들이 찾아오고, 왕이 보낸 사람이 다시 와 보았다. 온 나라 사람이 달려와, 소리 높이 울부짖음이 서로 이어졌다. 곧 가마에 태워 궁전으로 돌아왔다.
저거주는 칙명으로 삼백 섬의 보리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따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법진의 숨이 끊어졌다. 성 북쪽으로 나가서 다비하였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렀고 7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시신과 뼈는 모두 다 타버렸지만, 오직 혀만은 타지 않았다. 이에 곧 그 자리에 삼층탑을 세우고, 오른편에 비를 세웠다.
∙승준(僧遵)
법진의 제자인 승준은 성이 조(趙)씨로 고창 사람이다. 『십송률』에 뛰어나고 푸성귀를 먹으며, 행실이 절도가 있었다. 『법화경』·『승만경』·『금강경』·『반야경』을 외웠다. 또한 제자들을 열심히 격려하고 항상 참회를 일삼았다.
4) 석승부(釋僧富)
승부의 성은 산(山)씨이며,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 산패(山覇)는 남전(藍田)의 수령이었다.
승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배움을 돈독히 익혀 싫어함이 없었다. 땔감을 모아, 그것을 촛불로 삼아 비추어서 책을 읽었다.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경전과 역사를 두루 다 읽었다.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웠고 담론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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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위진(僞秦) 위장군(衛將軍)인 양옹(楊邕)을 만나자, 그가 승부의 옷과 식량을 도와주었다. 습착치(習鑿齒)와 손잡고, 함께 배움에 뜻을 두었다.
그 후 도안(道安)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강의를 들었다. 마침내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에 머리를 깎고, 도안에게 의지하여 수업하였다. 도안이 죽은 후에는 위군(魏郡)의 정위사(廷尉寺)로 돌아왔다. 휘장을 내리고 생각에 잠겨 속세의 일을 끊었다.
당시 마을에는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들이 있었다. 한 어린아이를 약탈하여, 그 심장과 간을 취해 정신의 긴장을 풀고자 하였다. 승부는 길거리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우연히 강도들을 만났다. 자세히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내 옷을 벗고 자기와 어린아이를 바꾸자고 하였다. 그러나 강도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승부가 말하였다.
“어른의 오장도 역시 쓸 수 있는가?”
강도들은 승부가 자기 몸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거짓말로 말하였다.
“좋다.”
이에 승부는 생각하였다.
‘나의 허깨비나 불꽃같은 몸은 언젠가는 한 번 죽음을 만날 터이다. 죽음으로 사람을 구제한다면,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으리라.’
곧 스스로 강도들의 칼을 취하여, 가슴에서 배꼽까지 내려 그었다. 강도들은 다시 서로 허물하고 책망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곧 어린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길거리에서 당시 길 가던 한 사람이 승부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았다. 곧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승부는 비록 갑자기 숨이 답답한 상태였으나, 아직도 입으로 말은 할 수는 있었다. 곧 자세히 사건에 대해 대답해주었다. 이 사람은 슬퍼하고 애도하며 상심하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바늘을 갖고 왔다. 그의 뱃가죽을 꿰매 주고, 효험 있는 약을 발라 주었다. 가마에 태워 절로 돌아가 쉬게 하였다. 얼마 후 상처가 나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
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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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석법우(釋法羽)
법우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혜시(慧始)의 제자가 되었다. 혜시는 행실이 바로 서고, 고행을 정밀히 하여 두타행을 닦은 이였다. 법우는 마음을 삼가는 데 용맹하여, 깊이 그 도에 통달하였다. 항상 약왕(藥王)보살의 자취를 우러러 본받아, 몸을 불태워 공양하고자 하였다.
당시 위진(僞晋)의 왕인 요서(姚緖)가 포판(蒲坂)에 주둔하였다. 법우는 이 일을 요서에게 아뢰니, 요서가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는 길은 방법이 많은데, 하필 왜 몸을 불태우는가? 감히 굳게 어길 수는 없지만, 세 번 더 생각하기를 바란다.”
법우는 맹서한 뜻이 이미 무거웠으므로, 곧 향유를 마시고 베로 몸을 둘둘 말았다. 「사신품(捨身品)」을 외우기를 마치자, 불로 스스로를 태웠다. 도인과 속인들이 바라보면서, 슬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나이는 45세이다.
6) 석혜소(釋慧紹)
혜소의 씨족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 때 어머니가 물고기나 고기를 먹이면 곧 토해냈다. 그러나 채소를 먹이면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곧 푸성귀를 먹었다. 여덟 살에 이르러 출가하여, 승요(僧要)의 제자가 되었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늠름하게 힘써서, 고행으로 절개를 드러내었다.
그 후 승요를 따라 임천(臨川)의 초제사(招提寺)에 머물렀다. 마침내 몰래 몸을 불태울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항시적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장작을 쪼개서 동산(東山)의 석실에 몇 길의 높이로 쌓아 놓았다. 중앙에 감실을 하나 열어 놓아 자기 몸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곧 절로 돌아와 승요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승요가 간곡하게 충고하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분신하는 날에 이르자, 동산에서 대중들의 팔관재(八關齋)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알고 지낸 이들에게 고별인사를 하였다. 그 날 온 경내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수레와 말 탄 사람도 많았다. 또한 금은보화를 갖고 온 사람도 이루 다 일컬을 수 없었다.
초저녁에 부처님 주위를 돌면서 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승소는 스스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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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주기를 마치자, 촛불을 손에 잡고 섶에 불을 붙이고는, 그 가운데 들어가 앉았다. 『약왕경(藥王經)』 「본사품(本事品)」을 외웠다.
대중들은 승소가 보이지 않자, 그가 이미 떠난 것을 깨달았다. 예배도 끝나지 않았지만, 모두 장작을 쌓은 곳에 모여들었다. 장작더미에서 크게 슬퍼하는데, 송경하는 소리가 아직 멎지 않았다. 불길이 이마 있는 곳에 이르자, ‘일심(一心)’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끝나자, 갑자기 송경소리가 끊어졌다.
대중들은 모두 한 말 가웃한 크기의 큰 별 하나가, 곧바로 연기 속을 내려왔다가 돌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를 본 사람은 모두 천궁(天宮)에서 승소를 영접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장작더미도 마침내 타버렸다.
승소는 임종 때 동학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몸을 불사른 곳에 아마도 오동나무가 돋아날 것이니, 삼가하여 베지 말게나.”
그 후 사흘이 지나자, 과연 오동나무가 돋아났다.
승소가 몸을 불사른 것은 원가(元嘉) 28년(451)의 일이다. 그 때 나이는 28세이다.
∙승요(僧要)
승소의 스승인 승요도 맑고 삼가하여, 아름다운 덕이 있었다. 나이 160세에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승유(釋僧瑜)
승유의 성은 주(周)씨이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스무 살의 나이로 출가하여 소박하게 일삼고 순수하였다.
원가(元嘉) 15년(438)에 동학인 담온(曇溫)·혜광(慧光) 등과 더불어, 여산(廬山)의 남령(南嶺)에 함께 정사를 세웠다. 초은사(招隱寺)라 이름 지었다. 승유는 항상 생각하였다.
‘허물을 삼도(三途)에 맺는 것은 사람의 정(情)과 형체 때문이다. 정이 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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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면, 형체도 역시 마땅히 소진할 것이다. 약왕보살의 발자취를 어찌 홀로 멀다고 말하겠는가?’
이에 여러 번 자신의 맹서를 발원하다가, 비로소 몸을 불태울 결심을 하였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 6월 3일에 섶을 모아 감실을 만들었다. 아울러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이날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섞이면서, 빈틈없이 비가 쏟아졌다.
이에 승유는 곧 서원하였다.
“만약 나의 뜻하는 일을 밝힐 수 있다면, 아마 하늘도 맑게 밝아질 것이다. 만약 감응이 없다면, 마땅히 큰비가 쏟아질 것이다. 이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신의 감응이 어둡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
말이 끝나자 구름 낀 날씨가 밝게 개였다.
초저녁이 되자 대소변을 끝내고, 장작더미 감실 속에 들어가 합장하고 편안히 앉았다. 「약왕품」을 외웠다. 화염이 교차하여 몸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합장한 자세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도인과 속인들로서 아는 사람들이 달려와 산에 가득하였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면서 인연 맺기를 원하였다. 그 때 모두가 자줏빛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랜 후에야 그치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이는 44세이다.
그 후 14일이 지나서 승유의 방 한가운데에서 쌍 오동이 돋아났다. 뿌리와 가지가 풍성하고 무성하였다. 크고 가는 모습이 비슷하여, 땅을 꿰뚫고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침내 서로 이어진 나무 결[連樹理]을 이루었다. 알 만한 이들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라보수(娑羅寶樹)가 열반의 세계를 밝힌 것처럼, 승유도 거의 이에 거의 가까우므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난 것이리라.’
이로 인하여 그를 쌍동사문(雙桐沙門)이라 불렀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평남장사(平南長史)로 있었다. 친히 그 일을 목도하고, 자세히 그를 위해 전기와 찬(贊)을 지었다.
찬하노라.
멀고 먼 그윽한 기연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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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지극의 도리로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드는 것을
누가 묘한 보배라 하였던가
예전 약왕보살께서
남다른 교화 절륜하다고
지난날 그 말 들었는데
지금 이 사람을 보았어라.
영명하고 영명하신 님이여,
지혜와 선정으로 마음 굳혀
신령이 응결된 자줏빛 기운에다
그 자취 한 쌍의 나무로 드러내셨네.
그 덕 좋아할 만하고
그 지조 귀중하도다.
이 글 지어서
그 모습 어렴풋이 기리노라.
悠悠玄機 茫茫至道
出生入死 孰爲妙寶(其一)
自昔藥王 殊化絶倫
往聞其說 今睹斯人(其二)
英英沙門 慧定心固
凝神紫氣 表跡雙樹(其三)
其德可樂 其操可貴
文之作矣 式飄彷彿(其四)
8) 석혜익(釋慧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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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익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서울로 나와 죽림사(竹林寺)에서 쉬었다.
그는 부지런히 고행하여 정진하면서, 서원하여 몸을 불사르고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혹 비방하기도 하고, 혹 찬양하기도 하였다. 대명(大明) 4년(460)에 이르러 비로소 곡식을 물리치고, 오직 삼과 보리[麻麥]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대명 6년(462)에 이르자 다시 삼과 보리도 끊었다. 다만 소유(蘇油)만을 먹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소유마저도 끊고, 오직 향환(香丸)만을 복용하였다. 그 결과 비록 몸은 약하고 쇠잔해도, 마음은 경계하여 올곧았다.
효무(孝武)황제는 깊이 경이로움을 더하여 정성스런 문안을 드렸다.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을 파견하여 절을 찾아가 혜익에게 충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혜익이 맹서한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대명 7년(463) 4월 8일에 이르자, 곧 불태우는 곳으로 나아갔다. 종산(鍾山)의 남쪽에 가마솥을 설치하여 기름을 마련하였다. 그 날 아침 소가 모는 수레를 사람으로 하여금 끌게 하여, 절에서 산으로 갔다. 제왕은 억조 백성들이 기대는 존재며, 또한 삼보가 기탁하는 바라 하여, 곧 자기 힘으로 궁성에 들어가 운룡문(雲龍門)에 이르렀다. 그러나 걸어서 내려갈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아뢰었다.
“혜익 도인이 지금 몸을 버리려고, 문에 이르러 고별을 아룁니다. 깊이 불법으로 우러러 누를 끼쳤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달라져, 곧 몸소 운룡문으로 나갔다. 혜익은 황제를 만나자 거듭 불법을 부탁하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황제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어 여러 왕비와 도인·속인·선비·서민들이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옷을 던지고 보배를 버리는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마솥에 들어가 한 작은 상에 기대었다. 옷가지로 스스로 몸을 감고, 머리에는 하나의 긴 모자를 쓰고는 기름을 쏟아 부었다. 곧 나아가 불을 붙이려 하였다. 황제는 태재(太宰)를 시켜 가마솥 있는 곳에 이르러, 요청하고 타일렀다.
“도행의 방법은 많은데, 하필이면 목숨을 버리는가? 원컨대 세 번 생각하여, 다시 다른 길로 나아갔으면 다행이겠다.”
혜익의 슬기로운 지조는 확연하여,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었다. 곧 대답하였다.
“이 미미한 몸, 천한 목숨이, 어찌 위에 계신 천자의 마음에 남을 만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성상의 자애로움이 망극하오이다. 원컨대 스무 사람을 제도하여 출가시켜 주십시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허가하였다. 이에 혜익은 곧 손수 촛불을 손에 잡고, 모자를 태웠다. 모자가 타오르자 곧 촛불을 버리고, 합장하여 「약왕품」을 외웠다. 불길이 눈썹에 이르기까지, 외우는 소리가 분명하다가, 눈에 미치자 마침내 희미해졌다.
귀족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애처롭고 안타까워하는 메아리 소리가 그윽한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가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부르고 슬퍼하였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불길은 이튿날 아침에 이르러 마침내 다하였다. 황제는 그 때 공중에서 피리와 나팔소리가 들리며, 기이한 향기가 물씬 풍겨 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해가 다하도록 그곳에 있다가, 비로소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 꿈에 혜익이 석장을 흔들며 황제 앞에 이르렀다. 다시 불법을 부탁하였다.
이튿날 황제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사람들을 제도하며, 재주(齋主)에게 창백(唱白)하게 하여, 나타난 조짐과 상서로움을 자세히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몸을 불사른 곳을 약왕사(藥王寺)라 일컬었다. 이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견준 이름이다.
9) 석승경(釋僧慶)
승경의 성은 진(陳)씨이며, 파서(巴西) 안한(安漢)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 도교의 일파)를 섬겼다. 승경은 홀로 깨우쳐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의흥사(義興寺)에 머물면서 청정한 행실을 맑게 닦았다. 원을 세워 부처님을 만나기를 구하였다. 먼저 세 개의 손가락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몸을 불사르기를 맹세하였다. 점차로 곡식을 끊고, 오직 향유(香油)만을 복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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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3년(459) 2월 8일에 이르러, 촉성(蜀城)의 무담사(武擔寺) 서쪽에서, 그가 조성한 유마거사의 상 앞에서 몸을 살라 공양하였다.
자사(刺史) 장열(張悅)이 몸소 나가 그곳에 임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도인·속인·나그네·거주민 등 구경하는 사람으로 고을이 기울어질 지경이었다. 가던 구름도 뭉쳐, 괴로운 비가 슬피 떨어졌다. 갑자기 날이 개고 밝게 열려, 하늘색이 투명하고 청정해졌다. 그러더니 용과 같은 물체 하나가 나타나, 장작더미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나이는 23세이다.
천수(天水) 태수 배방명(裵方明)이 그를 위하여 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10) 석법광(釋法光)
법광은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스물아홉 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하였다. 고행으로 두타행을 닦아 솜옷을 입지 않았다. 오곡을 끊고 오직 솔잎만을 먹었다.
그 후 맹세하여 몸을 불사르기에 뜻을 두었다. 곧 송진을 복용하고 기름을 마시면서, 반년을 보냈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 10월 20일에 이르러, 농서의 기성사(記城寺) 안에서 땔감을 모아놓았다. 이에 곧 몸을 태움으로써, 앞서 뜻한 것을 만족시켰다. 불길이 눈에 이르도록 외우는 소리가 또렷또렷 하다가, 코에 이르자 가물가물거리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41세이다.
∙법존(法存)
영명 연간(483~493) 말기에 시풍현(始豊縣)의 비구 법존도 몸을 불살라 공양하였다. 군수(郡守) 소면(蕭緬)이 사문 혜심을 파견하여, 그를 위하여 재탑[灰塔]을 세웠다.
11) 석담홍(釋曇弘)
담홍은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을 닦아,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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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부에 정진하였다.
전송(前宋)의 영초(永初) 연간(420~422) 남쪽 번우(番禺)에 노닐다가, 대사(臺寺)에 머물렀다. 만년에 다시 교지(交趾)의 선산사(仙山寺)로 가서 『무량수경』 및 『관음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마음에 서원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희구하였다.
효건(孝建) 2년(455)에 산 위에 섶을 모아놓고, 비밀히 장작더미 속에 가서 스스로를 불태웠다. 제자들이 뒤쫓아가서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반신은 이미 문드러졌다. 한 달이 지나자 조금 차도가 생겼다.
그 후 가까운 마을에서 모임을 마련하여, 온 절의 승려가 모두 그곳을 찾아갔다. 담홍은 이 날 다시 골짜기에 들어가 몸을 불태웠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찾아보니, 목숨이 이미 끊어졌다. 이에 땔감을 더하여 불길을 지피니, 이튿날에야 불길이 다하였다.
그 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담홍의 몸이 황금빛을 내면서 금빛 나는 한 마리 사슴을 타고 서쪽으로 매우 빠르게 가는 것을.’
안부를 여쭐 겨를도 없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비로소 그의 신이함을 깨달았다. 함께 재와 뼈를 거두어서 탑을 세웠다.
【論】무릇 형상이 있는 존재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몸이며, 감정이 있는 존재가 보배로 삼는 것은 목숨이다. 그런 까닭에 기름기를 먹고, 피를 마시고,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는 것은, 느긋하고 기쁜 마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삽주[朮: 蒼朮]를 먹고, 단사[丹]를 머금어 생명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오래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털 하나를 꺾어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아껴서 하지 않는다거나, 한 끼의 밥을 거두어서 남은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하여도 아까워 주지 않거나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 가운데는 나름대로 굉장한 지식과 달관한 견해를 지닌 사람이 있어서, 자기 몸을 버려 다른 사람을 아름답게 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삼계가 긴 어둠 속의 세계임을 체득하고, 사생(四生)이 꿈과 허깨비의 경계임을 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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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정신을 나는 짐승보다 더 한가로이 하고, 겉 몸뚱이를 알곡을 담는 단지보다 더 단단히 한,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정수리를 쓰다듬어 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몸에 개의한 일이 없고,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지푸라기와 같이 버린다. 지금 여기서 논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다.
승군(僧群)의 마음은 한 마리의 오리를 위하여, 물 마시기를 끊고 그것으로써 몸을 버렸다. 승부(僧富)는 오직 한 아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배를 갈라 아이의 목숨을 보전하였다. 법진(法進)은 살을 도려내어, 사람들에게 먹였다. 담칭(曇稱)은 스스로 호랑이 먹이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나와 함께 남을 아울러 구제하는 길[兼濟之道]을 숭상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중생들을 이롭게 한 이들이다.
예전에 임금의 아들이 몸을 던져 호랑이 먹이가 된 공덕은, 9겁(劫)의 세월 동안 쌓은 공덕을 넘어선 것이다. 살갗을 도려내서 새와 바꾼 것은, 삼천세계를 진동시킬 만큼 놀라운 일이다. 생각건대 무릇 이런 사람은, 참으로 인품이 보통보다 아주 높이 뛰어나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법우(法羽)에서 담홍(曇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몸을 불살라 재가 되게 함으로써, 보배와 같이 사랑하던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혹 심정으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도한 사람도 있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서원한 사람도 있다. 그런 까닭에 한 쌍의 오동나무가 방 한가운데서 표출하기도 하고, 한 도관(道館)이 저절로 공중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아름답고 빛나게 상서로움과 부합한 일이, 시대와 더불어 간간이 나온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은 같지 않아, 허용하고 차단하는 것 역시 다르다. 만약 큰 방편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시절에 알맞게 행동한다면, 그 이익은 1만 가지 실마리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가르침으로 제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말한다.
“하나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태우는 것이 나라와 성으로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
출가한 모든 승려가 이와 같이 한다면 본래 위엄 서린 거동으로써 중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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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섭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잔혹하게 몸뚱어리를 허물거나, 복전(福田)의 모습을 파괴하는 것을 헤아려서 이야기한다면,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다. 얻음은 몸을 잊은 것에 있다. 잃음은 계를 어긴 것에 있다.
그런 까닭에 용수(龍樹)보살은 말한다.
“새로 수행하는 보살은 일시에 모든 것을 두루 다 행할 수 없다. 혹 보시는 만족시켜도, 효도에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임금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몸을 던진 경우가 그것이다. 혹 지혜는 만족시켜도 자비와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단속하기 위해 단식하는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행이 아직 완전히 아름답지 못하여, 차고 기우는 것이 없지 않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몸에는 8만 벌레가 사람과 더불어 같이 숨쉰다.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벌레들도 함께 저 세상으로 간다.”
그런 까닭에 아라한이 죽은 후에, 부처님께서는 몸을 불사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몸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불태우면, 혹 벌레의 목숨도 잃게 된다.
이를 설명하는 사람은 혹 말한다.
“아라한조차 불빛[火光]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무엇이 이상하리요?”
여기서 불빛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먼저 이미 목숨을 버렸으나, 신통한 지혜의 힘을 써서 나중에 곧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바탕이 보살인 사람도, 역시 아직 과보로 얻는 몸을 면하지 못한다. 혹 때로는 몸을 불더미 속에 던지기도 하고, 혹 때로는 몸을 쪼개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벌레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는, 그 마지막까지 소상하게 밝힐 줄을 알아야 한다.
무릇 3독(毒)과 4전도(顚倒)는 생사윤회의 뿌리를 심는 것이다. 7각지(覺支)와 8정도(正道)는 실로 열반의 요체로 가는 길이다. 어찌 반드시 몸과 뼈를 불에 사르고 구운 다음에야, 고난에서 벗어나리요?
만약 그의 위계가 인위(忍位)를 터득한 이웃에 자리하여, 세상의 자취를 굽어 살펴 범부와 같이한다면, 혹 때로는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버릴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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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의 논란이 미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만약 범부의 무리가 비추어보고 살핀 것이 넓지 않아, 마침내 수명이 다하도록 도를 행할 줄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몸과 목숨을 버리겠는가? 혹 한 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나, 혹 이름을 만대에 유포시키기 위하다가도, 막상 불에 다다라 장작더미에 자리 잡으면, 후회와 무서움이 교차하여 파고든다. 하지만 드러내서 말한 것이 이미 널리 퍼져, 그 지조를 잃는 것이 치욕스러워진다. 이에 애써 일삼으려다, 헛되이 일만 가지 고통에 걸려드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말한 바를 그르치는 것이다.
찬하노라.
만약 사람 뜻이 우뚝하다면
쇠나 돌도 뛰어난 것 아니니
이 소중한 몸 불태워서
저 보배성 태어나길 기원한다네.
향기 높은 오동나무 울창하고
자줏빛 도관 가볍게 공중에 뜨며
치솟은 연기 아롱지게 빛나니
상서로움을 토하고 길조를 머금네.
천추에 아름다움 숭상하여
만대에 그 향기를 전하리라.
若人挺志 金石非英
鑠茲所重 祈彼寶城
芬梧蓊蔚 紫館浮輕
騰煙曜彩 吐瑞含禎
千秋尙美 萬代傳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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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경(誦經)
1) 석담수(釋曇邃)
담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하음(河陰)의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정법화경(正法華經)』을 항상 하루에 한 차례 두루 외웠다. 또한 경의 취지에 정밀하게 통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도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문을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법사를 초청하여, 90일 동안 설법하고자 합니다.”
담수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굳게 청하여 마침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자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잠이 깰 무렵이 되자, 이미 그의 몸은 백마 제방[白馬塢]의 신사(神祠) 속에서, 한 제자와 함께 있었다.
그 때부터 날마다 몰래 다녔으므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 후 그 절의 승려가 신사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두 개의 높은 자리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담수는 북쪽에 있고, 제자는 남쪽에 있으며, 마치 강설하는 소리가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좌선하는 사람이로다.”
이어 좌우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다만 계신 곳을 알려 주었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문득 법사를 번거롭게 하였는가?”
곧 예배를 하고 손을 잡고 헤어졌다. 사람을 시켜 도경을 전송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문을 두드리다가 한참만에 비로소 문이 열려 절 안에 들어갔다. 방을 보니 아직도 닫혀 있었다. 대중들은 아무도 그 연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임천(臨川)의 강왕(康王) 유의경(劉義慶)이 그와 손잡고 광릉(廣陵)으로 갔다.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혜경(釋慧慶)
혜경은 광릉(廣陵) 사람인데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몸가짐이 맑고 깨끗하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법화경』·『십지론』·『사익경』·『유마경』을 외워, 밤마다 읊조렸다. 항상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찬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소뢰(小雷)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곧 전복하려 하였다. 혜경은 오직 쉬지 않고 송경을 하였다. 그러자 배가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어떤 사람이 끌어주는 듯하여 순식간에 건너편 강둑에 이르렀다.
이에 더욱 부지런히 독실하게 수행에 힘썼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2세이다.
8) 석보명(釋普明)
보명의 성은 장(張)씨이며, 임치(臨淄)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품성이 맑고 순하며, 예참과 독송을 일삼았다. 『법화경』과 『유마경』 두 경전을 외웠다. 외울 때가 되면 별도의 옷과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여, 한 번도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았다.
매양 외워서 「권발품(勸發品)」에 이르면, 곧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타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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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또 『유마경』을 외울 때에도, 공중에서 노래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구제하려는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고을 사람 가운데 왕도진(王道眞)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처가 병이 생겨 보명에게 와서 주문을 외워주기를 요청하였다. 보명이 문에 들어서자, 부인은 곧 가슴이 막혀 기절하였다. 갑자기 몇 자쯤 되는, 너구리 같이 생긴 어떤 물체가 나타나 개구멍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부인의 병도 나았다.
어느 날 보명이 수방사(水傍祠)에 갔다. 그러니 무당들이 ‘신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모두 달아났다.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9) 석법장(釋法莊)
법장의 성은 신(申)씨이며, 회남(淮南)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고행하는 절개로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 관중(關中)을 노닐며 승예(僧叡)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초기에 서울로 나와서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솔직하고 소박하였다. 오직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먹을 따름이었다.
『대열반경』·『법화경』·『유마경』을 외워, 첫새벽마다 이를 읊조렸다. 옆방에서 듣기에, 항상 그의 문 앞에서 마치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호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는 사실 천신들이 와서 들은 것이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10) 석혜과(釋慧果)
혜과는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스스로 일삼았다. 전송의 초기에 서울에 노닐다가,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화경』·『십지경』을 독송하였다. 어느 날 그는 뒷간에서 한 작은 귀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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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났다. 귀신이 혜과에게 공경을 표시하였다.
“예전에 대중 승려의 유나(維那)로 있었습니다. 법답지 못한 사소한 일을 저질러, 똥을 먹는 귀신[噉糞鬼中]으로 떨어졌습니다. 법사님은 평소 덕이 높으며 밝고 또한 자비심이 많으시니, 원컨대 도와주셔서 이곳에서 건져내 구제하여 주십시오.”
또한 말하였다.
“예전에 돈 3천 냥을 감나무 밑 둥지에 묻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취하시어 복전으로 삼아주시기 원합니다.”
혜과는 곧 대중들에게 알려 감나무 밑을 파보니, 과연 3천 냥의 돈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 『법화경』 한 부를 조성하고, 아울러 모임을 마련하였다.
그 후 꿈에 이 귀신이 나타났다.
“이미 몸을 바꾸어 태어났으며, 옛날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혜과는 전송의 태시(太始) 6년(47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11) 석법공(釋法恭)
법공의 성은 관(關)씨이며, 옹주(雍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강릉의 안양사(安養寺)에 머물렀다. 후에 서울로 나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고행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 거친 베옷을 입고, 콩과 보리만 먹었다. 그러면서 30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밤에 그것을 읊조릴 때마다, 특이한 향기와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법공의 방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가 함께 이 향기를 맡았다. 또한 낡은 누더기 옷에 벼룩과 이를 모아 가지고, 항상 그것을 몸에 걸쳐 스스로 그 먹이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문제(文帝)·명제(明帝) 등 세 사람의 황제와 형양(衡陽)의 문왕 유의계(劉義季) 등이 모두 그의 덕과 소박함을 숭상하였다.
신도들로부터 얻은 보시를 항상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번도 개인적으로 비축하지 않았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서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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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공(僧恭)
당시 오의사(烏衣寺)에 또 승공이 있었다. 덕스런 일이 높고 밝아, 절의 모든 직분을 총괄하여 맡았다. 또한 쌀밥을 먹지 않고, 오직 콩과 보리만을 먹었다.
12) 석승부(釋僧覆)
승부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하인(下人)에게서 양육되었다. 일곱 살 때 출가하여 담량(曇亮)의 제자가 되었다.
배움이 모든 경전에 뛰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외워 지녔다. 『대품경』과 『법화경』을 외웠다.
전송의 명제는 그를 그릇감이라 하여, 깊이 존중을 더하였다. 칙명으로 팽성사(彭城寺)의 주지가 되었다. 대중을 거느리는 데 공로가 있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말기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6세이다.
13) 석혜진(釋慧進)
혜진의 성은 요(姚)씨이며, 오흥(吳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용맹하여, 천성대로 호협하게 놀았다. 그러다가 나이 40세에 문득 슬기로운 마음이 저절로 열려, 드디어 속가를 떠났다. 서울의 고좌사(高座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한 옷을 입었다. 맹세코 『법화경』을 외우기로 하고, 마음을 써서 노고를 다하였다. 그러나 책만 손에 잡으면 곧 병이 생겼다.
이에 발원하기를 『법화경』 백 부를 조성함으로써, 전생의 장애를 참회하기를 빌었다.
처음으로 모아 얻은 돈이 1,600냥이었다. 이 때 강도들이 찾아와 혜진에게 물었다.
“가진 물건이 있느냐?”
혜진은 대답하였다.
“오직 경을 만들 돈만이 부처님을 모신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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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들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면서 떠났다. 이에 신도들의 보시를 모아서, 경을 이룰 수 있어 백 부를 가득 채웠다.
경이 완성된 후에는 병도 조금 차도가 생겼다. 『법화경』 한 부를 모두 외워 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으로 원하던 일이 채워지자, 굳센 지조는 더욱 단단해졌다. 항상 모든 복업을 회향시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죽기 직전에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서방 정토에 태어나리라.”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승념(僧念)
당시 서울 용화사(龍華寺)의 승념은 『법화경』과 『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세상을 피해 살았다.
14) 석홍명(釋弘明)
홍명의 본래 성은 영(嬴)씨이며,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마음이 바르고 굳세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산음의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렀다.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禪定)을 익혔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육시예참(六時禮懺)을 그치지 않자, 아침마다 물병이 저절로 가득했다. 이는 실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한 것이다.
어느 날 홍명이 운문사에서 좌선하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홍명의 방안에 들어와 상 앞에 엎드렸다. 홍명이 단정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오래 오래 있다가 떠나갔다. 또 어느 때는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홍명의 송경하는 소리를 들었다. 홍명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는 답하였다.
“예전에 이 절의 사미였습니다. 휘장 밑에 숨겨둔 음식을 먹고, 지금은 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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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속[圊中]에 떨어져 있습니다. 상인(上人)의 도업을 듣고 짐짓 찾아와 송경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원컨대 방편을 써서, 저를 도와 이 허물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홍명이 곧 법을 설하여 불법에 들도록 하였다. 받아들여 해득한 후 비로소 사라졌다.
그 후 영흥(永興)의 석모암(石姥巖)에서 입정(入定)하였다. 다시 그곳 산의 요정[山精]이 찾아와 홍명을 괴롭혔다. 홍명이 이를 붙잡아서, 허리에 찬 새끼줄에 붙들어 매었다. 그러자 귀신은 겸손하게 사과하며 풀어주기를 구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감히 이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놓아주자 이에 귀신은 자취를 끊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군수인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그의 진실하고 소박함을 존중하여, 산에서 나오기를 요청하였다. 그를 맞이하여 도수정사(道樹精舍)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였다. 그 후 제양강(濟陽江)의 영흥(永興) 고을에 소현사(昭玄寺)를 세웠다. 다시 홍명을 초청하여 그곳에 가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에 도리(陶里)의 동(董)씨가, 또한 홍명을 위하여 마을에 백림사(栢林寺)를 세웠다. 홍명을 청하여 돌아와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선(禪)과 계율로 가르치고 도우니,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북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백림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4세이다.
15) 석혜예(釋慧豫)
혜예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서울에 와서 노닐다가,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서, 두루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다. 담론을 잘하며 법다운 풍모가 아름다웠다.
매양 어떤 인물의 착하거나 악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곧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 때로는 다른 말로 중간에 중지시켰다. 물병과 옷으로 단출하고 소박하게 지내며, 하루 점심 한 끼로써 스스로 식사를 끝냈다. 부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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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진으로 절조를 드러내고, 고난 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열반경』과 『법화경』과 『십지경』을 외웠다. 또한 선업을 익혀, 다섯 종문의 선법[五門禪]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어느 날 잠을 잘 때에, 세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의관이 선명하고 정결하였다. 꽃가마를 함께 받쳐 들었다. 혜예가 물었다.
“누구를 찾습니까?”
대답하였다.
“법사께서 곧 죽게 되었기에, 짐짓 찾아와 받들어 맞이하는 것입니다.”
혜예가 말하였다.
“작은 일들을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니, 1년만 목숨을 더 늘릴 수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다음해에 이르러, 만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북제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그 때 나이는 57세이다.
∙법음(法音)
혜예와 같은 절에 법보가 있었다. 그도 역시 평소 송경을 행하였다.
16) 석도숭(釋道嵩)
도숭의 성은 하(夏)씨이며, 고밀(高密) 사람이다. 나이 열 살 때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은밀하게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학을 좋아하고,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아래 윗사람과 교류하면서, 한 번도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천성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이로운 공양을 얻는 대로 모두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물병과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울러 지닌 물건이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서울에 와서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고요히 한적한 방을 지키며, 끊임없이 예참과 독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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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가르치고 장려함으로써, 식사 대접을 대신하였다. 그에게 계를 받기를 청한 사람은 매우 많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49세이다.
17) 석초변(釋超辯)
초변의 성은 장(張)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깨달음이 홀로 일어났다.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이 깊고 침착하였다.
『법화경』·『금강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하(西河)에서 넘어왔다. 도중에 파초(巴楚)를 경유하여, 건업(建業)에 도달하였다. 얼마 후 동쪽 오(吳)·월(越)로 가서 산수를 구경하였다. 산음(山陰)의 성방사(城傍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한적하게 살면서 소박함을 기르고, 산문에서 목숨을 다하기로 하였다. 『법화경』을 하루에 한 차례로 한정하여 두루 외웠다. 마음이 민첩하니 입도 따라가서, 항상 남은 힘이 있었다. 천 불에 예배드리기를, 모두 150만 번의 절을 올렸다. 산문 밖에 나가지 않기를 3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북제의 영명(永明) 10년(492)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절 남쪽에서 장례를 치뤘다. 사문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만들었다. 동현(東莧)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법명(法明)·승지(僧志)·법정(法定)
당시 또 영근사(靈根寺)의 법명, 기원사(祇洹寺)의 승지, 익주(益州)의 법정 등이 있었다.
모두 십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하였다. 지극한 덕이 있었다.
18) 석법혜(釋法慧)
법혜의 본래 성은 하후(夏候)씨이다. 어려서부터 지닌 지조가 고행에 정밀하고, 율행이 얼음처럼 엄숙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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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에 노닐었다. 그러다가 천주산사(天柱山寺)에 은거하였다.
『법화경』 한 부를 외우면서,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뜻이 인간세계 밖에 깊이 젖어들어 누각 위에 자리 잡고, 30여 년을 내려오지 않았다. 왕후들이 가마를 타고 와도, 오직 방에 예배만 드리고 돌아갔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만은 믿음과 이해력이 아울러 깊다 하여, 특별히 더불어 만났다.
당시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배드리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혹 주옹의 소개를 받아 때로 한 번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담유(曇遊)
당시 약야(若耶) 현류산(懸溜山)의 담유도 푸성귀를 먹으며 송경하였다. 고행의 절개를 일삼았다.
19) 석승후(釋僧候)
승후의 성은 공(龔)씨이며,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 살 때 곧 푸성귀를 먹으며, 예참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사방을 떠돌며, 교화를 관찰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서울에 와서 머물렀다. 항상 『법화경』·『유마경』·『금광명경』을 이틀에 한 차례씩 두루 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60여 년간 계속하였다.
소혜개(蕭惠開)가 촉(蜀)으로 들어가면서 초청하였다. 그러자 함께 그곳에 노닐었다. 그 후 소혜개가 유의가(劉義嘉)와 함께 협동하여, 죄를 지어 궁궐로 돌아왔다. 승후도 곧 서울로 돌아왔다.
후강(後岡)에 돌집을 짓고, 안선(安禪)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미 때부터 목숨을 버릴 때까지, 생선·고기·마늘·매운 것은 한 번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발그림자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식사도 거른 채 지나갔다[午後不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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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의 영명(永明) 2년(484)에 약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점심때가 되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곧 물을 찾아 입을 헹구고는, 합장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9세이다.
∙혜온(慧溫)
당시 보홍사(普弘寺)의 혜온도 『법화경』·『유마경』·『수능엄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으로, 나란히 높은 절개가 있었다.
20) 석혜미(釋慧彌)
혜미의 성은 양(楊)씨이며, 홍농(弘農)의 화음(華陰) 사람이다. 한(漢)나라 때 태위(太尉) 벼슬을 한 양진(楊震)의 후예이다. 나이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후에 집착과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遠離]을 수행하기로 뜻을 세웠다.
곧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바위 계곡이 지극히 험하여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였다. 혜미는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나운 호랑이나 억센 외뿔소가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대품경』을 외우고, 정밀하게 삼매를 닦았다.
이에 띳풀을 베어내 집을 지어, 정신이 깃들 곳으로 삼았다. 때가 되면, 발우를 지니고 마을에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좌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8년을 계속하였다.
그 후 강남지방에 불법이 성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곧 서울로 와 풍습과 교화를 관찰하였다.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예전처럼 과업을 익혔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겸양하였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계율의 모범됨이 정밀하고 밝았다. 권장하고 교화함에 고된 것을 잊으며, 현명한 이에게 묻고, 착한 이를 찾기를 항상 모자라는 듯하였다. 무릇 산을 찾아와 예배하는 도인과 속인들에게 모두 그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그러면서 타일러 이끌음으로써 좋은 음식 대접을 대신하였다.
이에 출가할 때부터 늙어 노쇠해지기에 이르기까지, 마늘·술·생선·고기 등은 하나같이 모두 길이 끊었다. 한 발자국도 문 밖을 출입하지 않기를 30여 년 동안 하였다. 새벽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선정(禪定)을 익히면서, 항상 『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육시예참에는 반드시 대중 앞에 섰다.
양(梁)의 천감(天監) 17년(518) 윤달 8월 15일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절 남쪽에 장례하고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법선(法仙)
당시 정림사의 법선도 송경하며 질박하게 수행하였다. 후에 오군(吳郡)으로 돌아가 승정(僧正)이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1) 석도림(釋道琳)
도림은 본래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열반경』과 『법화경』에 뛰어나며 『유마경』을 외웠다. 오국(吳國)의 장서(張緖)가 예를 갖추어 그를 섬겼다. 그 후 부양현(富陽縣)의 천림사(泉林寺)에 자리 잡았다. 이 절에는 항상 귀신과 괴물이 들끓었다. 그러나 도림이 자리 잡자 모두 사라졌다.
도림의 제자 혜소(慧韶)가 집에 눌려[爲屋所壓], 머리가 어깨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도림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청하였다. 그러자 밤에 두 사람의 인도 도인(道人)이 혜소에게 나타나서, 그의 머리를 뽑아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
도림은 이에 성승재(聖僧齋)를 마련하고, 새 비단을 상 위에 깔았다. 재가 끝나서 보니, 비단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모두 석 자 남짓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그 징험 있는 감응[徵感]에 탄복하였다. 이 때부터 부양(富陽) 사람들은 집집마다 성승(聖僧)의 자리를 마련하고 밥을 공양하였다.
양(梁)나라 초엽에 도림은 그곳에서 나왔다. 제희사(齊熙寺)에 머물다가, 천감(天監) 18년(51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論】경전을 소리 높여 읽는 이익은 크다. 그러나 그 공을 이룬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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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다. 이는 자못 훌륭한 법인 다라니는 얻기 어려우며, 마음이 흐려지기는 쉽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오직 한 구절 하나의 게송을 다시 외운다 하더라도, 역시 성인께서 아름답다고 칭송하신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담수(曇邃)는 바위 제방[石塢]에서 신에 통하고, 승생(僧生)은 공중에서 호위하는 감응이 있으며, 도경(道冏)은 위태한 지경에 임하여 구제될 수 있었다. 혜경(慧慶)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몸을 보전함을 힘입었다.
이는 모두 참된 덕이 안에서 충만하였기 때문에, 외부에서 징험 있는 감응이 열린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현보살이 방으로 내려오시고 사천왕이 자리를 호위한다”고 한 것이, 어찌 허튼 소리이겠는가?
만약 얼음이 언 추운 날의 고요한 밤이나 밝은 달이 뜬 긴긴 밤에, 홀로 한적한 방에 머무르며, 경전을 소리 높여 읽으면서 토하는 소리가 밝고 글자가 분명하다면, 이는 유령(幽靈)이 기뻐서 뛰게 할 만 하고 정신이 시원하게 트여 기쁘게 할 만하다. 이른바 ‘노래로 법다운 말씀을 읊조려서 이것으로 음악을 삼는다’는 것이다.
찬하노라.
법신은 이미 멀어졌고
기탁한 것은 말씀뿐이라
반복하여 나직이 읊조리니
혜택이나 이익 생각하기 어렵구나.
삼업에 게으르지 말고
육시에 정진함이 있어야
변화로 나타난 이가 곧 호위하고
변화로 나타난 대중이 줄지어 오누나.
이것이 진실한 공덕이니
무엇을 이와 비교하겠나.
法身旣遠 所寄者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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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吟反復 惠利難思
無怠三業 有競六時
化人乃衛 變衆來比
此焉實德 誰與較之
고승전 제13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8. 흥복(興福)
1) 석혜달(釋慧達)
혜달의 성은 유(劉)씨며, 본래 이름은 살하(薩河)이다. 병주(幷州) 서하(西河)의 이석(離石)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나이 서른한 살 때 문득 잠시 죽었다가, 하루가 지나서 다시 소생하였다. 지옥의 고통스런 과보를 두루 보았다. 그 때 한 도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전생의 스승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훈화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단양(丹陽)과 회계(會稽)와 오군(吳郡)에 가서 아육왕(阿育王) 탑과 불상을 찾았다. 예배하고 허물을 뉘우쳐서, 전생에 지은 죄를 참회하게 하였다. 깨어나자 곧 출가하였다.
도를 배우며 이름을 혜달이라 고쳤다. 부지런히 복업을 짓기에 정진하면서, 오직 예참만을 우선으로 삼았다.
진(晋)의 영강(寧康) 연간(373~375)에 서울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간문황제(簡文皇帝)가 장간사(長干寺)에 삼층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진 후로 저녁마다 방광하였다. 혜달은 월성(越城)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 당간 끝에 홀로 이상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곧 그곳을 찾아가 예배드리며 공경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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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렸다. 밤에 당간 아랫녘을 보니, 이 때 광명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이에 곧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그곳을 팠다. 한 길 가량 파내려 가니, 세 개의 돌 비석을 발견하였다.
중앙의 비석은 가운데가 덮여 있었다. 그곳에 쇠 상자가 있었다. 쇠 상자 속에 다시 은상자가 있고, 은상자 속에 금상자가 있었다. 금상자 속에는 세 과의 사리가 있었다. 또한 하나의 손톱과 하나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펴니 길이가 몇 자 가량 되었다. 그러나 말면 소라모양이 되었고, 눈부시게 빛이 났다.
이는 곧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기원전 541~498) 아육왕(阿育王)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은 신비함을 찬탄하였다. 옛 탑의 서쪽에 다시 당간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진(晋)의 태원(太元) 16년(391) 효무황제(孝武皇帝)가 다시 3층의 탑을 더하였다.
또한 예전에 단양(丹陽) 수령 고회(高悝)가 장후교(張候橋) 갯벌 안에서, 하나의 금불상을 캐냈다. 빛나는 받침대가 없었으나, 제작 상태는 매우 뛰어났다. 앞에는 범어로 쓰여있었다.
“이는 아육왕의 넷째 딸이 조성한 것이다.”
고회가 이것을 싣고 장간사 골목 입구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가 다시 더 걸어가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몰 수 없었다. 이에 소가 가는 데로 맡기니, 곧바로 장간사로 달려갔다.
그 후 1년 가량 지나서 임해(臨海)의 고기잡이 장계세(張係世)가 바다 입구에서, 구리로 만든 연꽃 받침대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이를 건져서 고을로 보냈다. 고을에서는 표를 대각(臺閣)에 올렸고, 칙명으로 그것을 불상의 발 밑에 안치하였다. 그러자 맞추기나 한 듯이 서로 어울렸다.
그 후 서역의 다섯 승려가 고회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예전에 천축국에서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을 가져왔습니다. 업도(鄴都)에 이르러 난리를 만나 강가에 숨겨 두었습니다. 조정의 길이 다시 열리면서 찾아보아도 그 소재를 잃었던 차에, 근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알려주었습니다. ‘불상은 이미 강남에서 나와 고회가 얻었다’고 하기에, 짐짓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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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를 넘고 건너왔습니다. 한 번 보고 예배드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고회는 곧 그들을 인도하여 장간사에 이르렀다. 다섯 승려는 불상을 보고 흑흑 흐느끼며 울었다. 그러자 불상에서는 곧 빛이 발하여, 법당 안을 비추었다.
다섯 승려가 말하였다.
“본래는 둥근 빛이 나는 광배가 있습니다. 지금은 먼 곳에 있으나, 역시 곧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진(晋)의 함안(咸安) 원년(371)에 교주(交州) 합포현(合蒲縣)에서, 진주를 캐는 동종지(董宗之)가 바다 밑에서 불상의 광배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곳 자사(刺史)가 표를 올렸다. 진(晋)의 간문제(簡文帝)가 칙명으로 이 불상에 베풀게 하였다. 구멍이 꼭 같고, 빛의 색깔도 똑같이 겹쳤다. 무릇 40여 년에 걸쳐 동서에서 상서로운 감응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빛나는 받침대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혜달은 당간의 성스런 불상이 신령하고 기이하기에, 발돋움하며 힘쓰기를 두 배나 더하였다. 그 후 동쪽 오(吳)현에 노닐며 돌 불상에 예배드렸다. 이 석상은 서진(西晋)이 끝날 무렵, 건흥(建興) 원년(313) 계유년(癸酉年)에 오송강(吳松江)의 호독(滬瀆) 입구에 떠다니던 것이었다. 고기잡이가 바다의 신이 아닌가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이를 영접하려 하였다.
이에 바람과 파도가 함께 성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돌아갔다. 당시 도교(道敎)를 받드는 사람이 천사(天師)의 신이라 생각하였다. 다시 함께 가서 영접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처음의 경우와 같았다.
그 후 불법을 받드는 거사로 있는, 오현(吳縣)의 백성 주응(朱應)이 이 소문을 들었다. 이에 찬탄하였다.
“혹 부처님께서 감응을 드리우신 것이 아니겠는가?”
곧 깨끗이 목욕재계하였다. 동운사(東雲寺)의 백(帛)비구니와 신자 몇 사람과 함께 호독의 입구에 이르렀다.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을 다하여, 범패로 지극한 덕을 노래하였다. 바람과 조수가 가라앉았다. 멀리 두 사람이 나타나, 강물 위에 떠서 그곳에 이르렀다. 곧 그것은 돌 불상으로, 등에 새김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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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유위(惟衛)’라 이름하였다. 두 번째는 ‘가섭(迦葉)’이라 이름하였다. 곧 영접하여 통현사(通玄寺)에 안치하였다. 오현 안의 선비와 서민들이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여,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혜달은 통현사에 머문, 전후 3년 동안 낮밤으로 경건하게 예배드렸다. 그러기를 잠시도 그만둔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등현(鄧縣)의 탑에 예배드렸다. 이 탑도 역시 아육왕이 조성한 탑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황량하게 거칠어져, 기단자리만 남은 것을 보았다.
혜달이 마음을 발돋움하고 생각을 한 곳에 모았다. 그러자 곧 신비한 광명의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인연하여 감실과 섬돌을 수축해서 세웠다. 뭇 새들이 감히 깃들어 둥지를 치지 않았으며, 절 근처에 사는 모든 사냥꾼이나 고기 잡는 사람들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도인과 속인들이 감응을 전해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군수인 맹의(孟顗)가 다시 개척을 더하였다. 혜달은 동서로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여러 번 징험이 나타났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독실하게 힘써서,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2) 석혜원(釋慧元)
혜원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사람 됨됨이가 성품이 착하였다. 기쁨과 불만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선(禪)을 익히면서 경을 외웠다. 복된 일을 권유하고 교화하는 것으로 늘상 일삼았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초기에 무릉(武陵)의 평산(平山)에 절을 세웠다. 20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거친 음식을 먹고 깊이 숨어서 오랫동안 속세와 길이 끊었다.
태원 14년(389)에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 어떤 사람이 무당산(武當山)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 정신과 얼굴빛이 매우 화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에게 말을 전하였다.
“절의 일을 폐지하지 않게 해달라.”
이 때부터 절 안에는 항상 때를 맞춰, 공중에서 경쇠[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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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에 의거하여 대중을 모으면, 한 번도 차질이 없었다.
∙축혜직(竺慧直)
사문 축혜직이 그곳에 살았다. 혜직은 고행 정진하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후에는 곡식을 끊고,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 열매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산에 올라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화하였다.
3) 석혜력(釋慧力)
혜력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항상 걸식하며 푸성귀를 먹고, 고행을 하며 두타행으로 복을 닦았다. 진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도자기 굽던 터를 빌어 와관사(瓦官寺)를 열었다.
처음 탑의 터를 표시한 곳은 지금의 탑 서쪽이었다. 저녁마다 표시한 것이 동쪽으로 10여 걸음 옮겨졌다. 아침에 뽑아다 되돌려 놓아도 다시 옮겨졌다. 그러자 몰래 함께 이를 엿보았다. 붉은 옷을 입고 무인의 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서 표시를 뽑아 동쪽에 설치하였다. 이에 곧 그곳에 탑을 세웠다. 지금 탑이 있는 곳이 그 곳이다.
예언에 의하면, ‘절이 건립된 후 30년이 지나면, 하늘이 내린 불로 불탈 것’이라 하였다. 진(晋)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21년(396)에 7월 밤에 이르러, 저절로 불이 났다. 절의 승려 수십 명이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탑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이는 나라에 상서롭지 않은 징조이다.”
곧 양법상(楊法尙)·이서(李緖) 등에게 명령하여, 속히 수복하게 하였다. 9월에 이르러 황제가 죽었다.
그곳에는 대안도(戴安道)가 제작한 다섯 구의 불상과, 대옹(戴顒)이 주조(鑄造)한 1장 6척의 금불상이 있었다.
예전에 주조한 불상이 처음 이룩되자, 얼굴과 머리가 너무 여위게 보였다. 여러 장인들이 어찌할 수 없어서, 이에 대옹을 맞아 이를 보게 하였다. 대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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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하였다.
“얼굴이 여윈 것이 아니라, 팔뚝과 어깻죽지가 살찐 것이다.”
줄로 갈아 팔뚝과 어깻죽지를 줄였더니, 얼굴상이 스스로 원만해졌다. 여러 장인들로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이곳에는 사자국(師子國)에 있던, 4척 2촌의 옥으로 된 불상도 나란히 있었다. 예전에 사자국 왕이, ‘진의 효무제가 불법을 받드는 데 정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짐짓 사문 담마억(曇摩抑)을 멀리서 파견하여 헌납한 것이다. 이 불상은 전해지는 데 10여 년이 걸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진나라에 도달하였다.
사도(司徒)인 왕밀(王謐)이 어느 날 대부(臺府)로 들어갔다. 동액문(東掖門)의 입구에 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윷을 던져 윷놀이를 하였다. 그 윷가지가 닿는 곳에서 곧 광명이 비쳤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파보게 하니, 금불상 하나가 발견되었다. 빛나는 받침대와 합치면, 길이가 7척 2촌이나 되었다. 왕밀은 곧 전송의 고조(高祖)황제에게 알려, 이를 영접하여 대부로 들어가 공양하게 하였다.
그 후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 말기에 와관사(瓦官寺)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지금은 용광사(龍光寺)로 옮겼다.
4) 석혜수(釋慧受)
혜수는 안락(安樂) 사람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하여, 항상 복업을 닦았다. 어느 날 왕탄지(王坦之)의 장원을 지나다, 방문하였다.
꿈에 문득 장원 안에 절을 세우는 꿈을 꾸었다.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혜수는 왕탄지를 찾아가, 한 칸의 집을 지을 땅을 빌리려 하였다. 그러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전에 장원을 지키던 장원지기인 송기(松期)를 찾아가, 이를 말하였다. 송기가 말하였다.
“왕씨 집안의 장원은 아마도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혜수가 말하였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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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왕탄지를 찾아가 그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러자 왕탄지는 크게 기뻐하여 곧 허가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집을 한 채 세웠다. 저녁마다 다시 꿈에 푸른 용이 나타나, 남쪽에서 와서 당간으로 화하였다. 이에 혜수는 사미를 거느리고 시험 삼아 신정강(新亭江)에 이르러 찾아보았다. 그러니 긴 나무 하나가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혜수는 말하였다.
“반드시 내가 꿈에 본 나무일 것이다.”
이에 사람을 고용해서 끌어올려 바로 세워서, 당간으로 삼아 한 층으로 꾸몄다. 도인과 속인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왕탄지는 곧 장원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혜수의 본고향 이름을 따서, 안락사(安樂寺)라 불렀다.
이 절의 동쪽에는 단양(丹陽) 수령 왕아(王雅)의 저택이 있고, 서쪽에는 동연(東燕) 태수 유투(劉鬪)의 저택이 있으며, 남쪽에는 예장(豫章) 태수 범영의 저택이 있었다. 모두 보시하여, 절을 이루었다. 그 후 사문 도정(道靖)과 도경(道敬) 등이 다시 보수하고 꾸미기를 더하여, 지금까지도 크게 아름답다.
5) 석승혜(釋僧慧)
승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복업을 닦기를 좋아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 사람 행장생(行長生)과 함께, 서울의 파오촌(破塢村) 안에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그 지역보다 먼 곳에 거처를 잡아, 초가 몇 칸을 세웠다. 곧 승려들을 모아 재(齋)를 마련하였다. 밤중에 이르자, 법당 안의 두 등불이 문득 자연적으로 앞으로 수십 걸음을 나아갔다. 기름종지가 전과 같아서, 기울어지고 엎질러지는 일은 없었다. 대중들은 놀라고 감탄하였다. 여러 나이 든 승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였다.
“등불이 옮겨간 곳은, 예전에 외국의 도인이 탑을 세운 곳이다.”
이에 함께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 등불이 옮겨간 상서로움을 표시하여, 숭명사(崇明寺)라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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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승익(釋僧翼)
승익은 본래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과 슬기가 있어, 일찍이 티끌세상과 인연을 끊을 지조가 있었다. 처음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며, 혜원(慧遠)에게서 수학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검소하게 고행의 절개를 지켜, 문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만년에는 관중(關中)으로 갔다. 다시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여, 경장·율장·논리를 따지는 것을 나란히 모두 섭렵하였다. 또한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에 도반인 담학(曇學)과 더불어 회계(會稽)에 노닐었다. 산천을 밟고 찾다가, 진망(秦望)의 서북쪽에 다섯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것을 보았다. 거기에 기사(耆闍: 耆闍崛山)의 기상이 어려 있었다. 이에 풀을 이어 암자를 짓고 법화정사(法華精舍)라 일컬었다.
태수(太守) 맹의(孟顗)와 부자인 진재(陳載)가 나란히 마음을 기울여, 덕에 머리 숙이고 찬조하여 준공을 이루었다.
승익은 푸성귀를 먹고 개울물을 마시길, 30여 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元嘉) 27년(45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산사에 비를 세워서, 그가 남긴 덕을 기렸다. 회계의 공관(孔逭)이 비문을 지었다.
승익과 함께 노닌 사문 담학은 후에 진망령(秦望嶺)의 북쪽으로 옮겨 터를 잡아, 낙림정사(樂林精舍)라 이름 지었다. 소상(韶相)·관천(灌蒨) 모두가 동악(東岳)의 명망 있는 승려들로서, 다 함께 이곳에서 머물렀다.
∙도경(道敬)
당시 도경은 본래 낭야(瑯琊)의 으뜸가는 족속이다. 진(晋)나라 때 우장군(右將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증손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피해 출가하였다. 심정이 산골짜기를 사랑하여, 약야산(若耶山)에 깃들어 현류정사(縣溜精舍)를 지었다. 도경은 그 후에 대중승려를 공양하기 위하여, 마침내 구족계를 버렸다. 오로지 10계(戒)에만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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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승홍(釋僧洪)
승홍은 예주(豫州) 사람이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반듯하고 깨끗하였다. 후에 교화에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녹여서 상을 주조하는 일은 비로소 마쳤지만, 아직 미처 모형을 열어보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진(晋)나라의 말기라, 구리의 사용을 매우 엄하게 금지하였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당시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다. 승홍이 죄에 연루되어, 재상의 관부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염송하며, 한마음으로 불상에 귀의하였다. 밤 꿈에 자신이 주조한 불상이 찾아와, 손으로 승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섭느냐?”
승홍이 말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상이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아라.”
불상의 가슴을 보니, 사방 한 자 가량 구리 빛이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곧 형을 집행할 때가 되었다. 재상 관부의 참군(參軍)이 죽이는 일을 감독하였다. 죄인을 실은 소가 달려 나가 수레가 허물어져, 이로 인하여 다시 하루를 연기하였다. 그 후 이어 명령이 내려, 팽성(彭城)에서 사자가 와서 말하였다.
“승홍이라는 사람을 아직 죽이지 않았다면, 놓아주어라.”
마침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돌아와 모형을 열어 불상을 보았다. 가슴 앞에 과연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그 후 승홍은 고행으로 세상을 마쳤다.
8) 석승량(釋僧亮)
승량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다.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용되는 구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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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았다. 미흡하기만 한 구걸로는 마련할 길이 없었다. 상주(湘州)와 경계를 접한 동계(銅溪)에 있는,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에 구리로 만든 기물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당은 매우 위엄이 있어,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승량은 이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자사(刺史)인 장소(張邵)에게 고하여, 건장한 사람 백 명과 큰 배 열 척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장소가 말하였다.
“그 사당은 영험한 곳이어서,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또한 오랑캐들이 수호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승량이 말하였다.
“복덕의 과보가 있다면 시주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면 제가 몸소 당하겠습니다.”
장소는 곧 사람과 배를 공급하였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가서, 사당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승량은 수하의 힘깨나 쓰는 이들과 더불어, 일시에 함께 나아갔다.
사당에서 20걸음 가량 되는 곳에, 두 개의 구리로 만든 가마솥이 있었다. 용량이 백 섬의 곡식을 담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거대한 뱀이, 길이가 10여 길이나 되는 것이 나와,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승량이 곧 위의를 바로 잡고,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는 수십 자의 주문을 외워 발원하니, 뱀이 문득 숨어버렸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손에 대나무 홀을 잡고 말하였다.
“듣건대 법사께서는 도를 일삼음이 비범하시고 복을 경영하시는 일이 중하다 하오니, 지금 특히 기쁨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수레에 구리를 취하였다. 사당의 구리는 많아서, 열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건만 배가 이미 가득했다. 신상(神床)의 머리에 하나의 타호(唾壺: 침·가래를 뱉는 그릇)가 있었다. 그 속에는 길이 두 자 가량의 도마뱀이 있어 나갔다간 들어오곤 하였다. 모두가 말하였다.
“신(神)이 이 물건을 가장 사랑한다.”
승량은 마침내 그것을 취하지 않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때마침 바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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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이 매우 이로울 때를 만났다. 가까이에 사는 뭇 오랑캐들이 서로 알려, 뒤따라 쫓아왔다. 그러나 배에 미칠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 불상을 주조하여 이루었다. 그러나 오직 빛나는 불꽃 광배만은 미비하였다. 전송의 문제(文帝)가 이를 위하여, 금박의 둥근 빛 광배를 조성하여 팽성사에 안치하였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이르렀다. 명제가 불상을 상궁사(湘宮寺)로 옮겨, 지금도 그곳에 있다.
9) 석법의(釋法意)
법의는 강남 사람이다. 복된 일을 경영하기 좋아하여, 53개의 절을 세웠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종산(鍾山)의 좨주(祭酒)는 주응(朱應)의 아들이었다. 이에 앞서 손은(孫恩)이 법의를 따르는 무리를 만들어, 이 산에 숨어살았다. 그 바깥의 땅을 조금 나누어주어, 법의에게 주고 절을 짓게 하여 연현사(延賢寺)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배도(杯度)가 이 절에 오가며, 말하였다.
“이곳에는 곧 여러 가지 변고가 있을 것이나, 나중에는 좋아질 것이다. 천당(天堂)과 마주보는 땅이어서, 복된 일을 하기 쉬우리라.”
갑자기 이 절이 들불 때문에 불타버렸다. 그 후 제해(齊諧)와 장인(張寅) 등이 배도의 말에 의지하니, 배도의 전기에 이 말이 실려 있다. 마침내 법의와 더불어 산의 땅으로 가서, 다시 수리하여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에 법의는 배도의 말을 생각하였다. 곧 정성을 다하여 예참하면서, 서방의 못물을 빌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간절하고 측은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그러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무엇인가가 때리는 듯 땅에 떨어졌다. 법의는 혹 그것이 금이나 비단이 아닌가 하여, 사람을 시켜 두 자 가량 파내려 갔다. 맑은 물 흐름이 솟아나와, 마침내 개울을 이루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곳에 절을 세웠다. 그 후 법의가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0) 석혜경(釋慧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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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은 남해 사람이다. 어려서 형초(荊楚)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또한 경론에 널리 뛰어나고, 항상 복된 일을 짓기를 힘썼다. 그런 까닭에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완전할 수 없었다. 무릇 가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탑과 불상을 일으켜 세워서 대중의 일을 도와 이루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시 운봉사(雲峯寺)·영안사(永安寺) 등 여러 절을 수리하였다. 혜경은 이미 계율 있는 절개에 정밀하고, 지조가 엄숙하고 밝았다. 이 때문에 영외(嶺外)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여, 자문 받고 품수 받았다.
그 후 칙명을 받아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이끄는 데 공이 있었다. 혜경의 노비 하나가 사미가 되었을 때, 문득 귀신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산의 요정이 모습을 나타내서 혜경을 찾아왔다. 자세히 허물과 실수를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부하 권속들이 알지 못하여, 엉뚱하게 법사의 권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얼마 후 모두가 평상대로 회복되었다. 모든 일으켜 세우는 복된 일을 모두 서방정토에 회향하였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쳤다.
11) 석법헌(釋法獻)
법헌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처음 북사(北寺)에 머물렀다. 절이 오래되어 조락하고 쇠해졌다. 그러자 법헌은 인연 있는 시주들을 거느리고, 다시 수리하고 지붕을 고쳤다. 이어 절 이름을 연상사(延祥寺)라 하였다.
그 후 장미산(藏薇山)에 들어가 절을 창건하였다. 절이 이룩된 후, 두 동자가 손을 잡고 찾아와 노래하였다.
장미산에 도와 덕이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바야흐로 다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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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온 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경탄하였다. 법헌이 그 후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경쇠줄이 끊어지려 하는데, 왜 고치지 않는가?”
법헌이 놀라 일어나서 가서 보니, 드리워진 줄이 곧 땅에 닿으려 하였다. 그가 손을 대어, 경쇠가 부러지고 손상된 것이 없었다.
법헌은 출가한 이래로 항상 복된 일로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마음을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절개를 이지러뜨린 일이 없었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2) 석법헌(釋法獻)
법헌의 성은 서(徐)씨며, 서해(西海)의 연수(延水) 사람이다. 아버지가 외삼촌을 따라 양주에 이르자 곧 출가하였다. 원가(元嘉) 16년(439)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로 내려와 정림상사(定林上寺)에 머물렀다. 경·율에 널리 뛰어났다. 뜻하는 일에 굳세고 날래서, 훌륭히 중생들을 구제하고, 절들을 수리하고 다듬었다.
앞서 도맹(道猛)이 서쪽에 노닐며, 두루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몸을 버릴 각오로 서원하여, 그곳에 가서 성인의 자취를 보려 하였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금릉(金陵)을 출발하여, 서쪽 파촉(巴蜀) 지방에 노닐었다. 길은 하남(河南)에서 출발하여 예예(芮芮)를 경유하였다. 우전국(于闐國)에 도달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벼랑에 가로놓인 다리가 끊어졌다. 마침내 우전국에서 되돌아왔다.
그 사이에 불치아[佛牙]한때, 사리 열다섯 과와 아울러 「관세음멸죄주(觀世音滅罪呪)」및 「조달품(調達品)」을 얻었다. 또 구자국(龜玆國)의 금퇴첩상(金槌鐷像)을 얻었다. 이에 돌아왔다. 그가 경유한 길은 위험하고 막혔음이 그의 별기(別記)에 보인다.
불치아는 본래 오전국(烏纏國)에 있었다. 오전국에서 예예(芮芮)로 왔고, 예예에서 다시 양(粱)나라 땅으로 왔다. 법헌을 불치아를 모시고 서울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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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왔다. 15년 동안 비밀히 예배하고 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의 꿈에 감응하여, 비로소 도인과 속인들에게 이 사실이 전해졌다.
법헌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순수하며, 덕이 남들의 모범이 되었다. 낭야(瑯琊)의 왕숙(王肅)과 왕융(王融),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장권(張綣), 사문 혜령(慧令)과 지장(智藏) 등이 모두 몸을 맡겨, 발을 이어 그의 훈계를 숭상하였다.
∙현창(玄暢)
법헌은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장간사(長干寺)의 현창과 더불어 승주(僧主)가 되었다. 양자강의 남북 양쪽 기슭을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
현창은 본래 진주(秦州) 사람이다. 역시 계율을 지킴이 맑고 깨끗하였다. 문혜(文惠)태자가 받들어,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법헌은 칙명을 받고, 삼오(三吳)에서 이부대중[二衆]을 가려내었다. 현창도 역시 동쪽으로 가서, 거듭 수계(受戒)의 법을 폈다.당시 법헌과 현창 두 승려는 모두 어려서부터 계율의 금제를 익혀, 당세에 경합할 사람이 없었다. 전송(前宋)의 무제와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매번 이름을 일컬으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 후 중흥사(中興寺)의 승종(僧鍾)이 건화전(乾和殿)에서 황제와 만났다. 황제가 승종에게 안부를 물었다. 승종이 대답하였다.
“빈도는 요즘 괴로운 기(氣)가 있습니다.”
황제가 빈도라는 말을 싫어하였다. 마침내 상서(尙書)인 왕검(王儉)에게 물었다.
“선배 사문들이 제왕과 이야기할 때, 무엇이라 자신을 칭했는가? 정전에 앉았는가? 앉지 않았는가?”
왕검이 대답하였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는 불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라서, 그에 관한 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국(僞國: 北魏) 때부터 불법이 조금씩 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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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모두가 빈도(貧道)라고 자신을 칭하고, 또한 앉기도 했습니다.
진(晋)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시대가 중간에 이르러 유빙(庾氷)과 환현(桓玄) 등이, 사문도 모두 제왕에게 공경을 다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일이 모두 그냥 가라앉았습니다. 전송의 중엽에도 역시 자못 예법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자리에 앉으며, 빈도라 칭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현창과 법헌은 도의 일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스스로 이름을 칭하였다. 하물며 다른 승려에 있어서랴? 읍배(挹拜)는 너무 심하나, 이름을 쓰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 때부터 사문(沙門)은 모두 제왕에게 이름을 칭하였다. 이것은 현창과 법헌에게서 비롯되었다.
현창은 건무(建武) 초엽(49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법헌은 건무 말엽(497)에 세상을 떠났다. 현창과 더불어,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법헌의 제자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 옆에 비를 조성하였다. 단양(丹陽) 수령인 오흥(吳興)의 심약(沈約)이 비문을 지었다.
법헌이 서역에서 얻은 불치아와 불상은 모두 정림상사(定林上寺)에 있었다. 불치아는 보통(普通) 3년(522) 정월에, 문득 병장기를 잡은 몇 사람이 초저녁에 문을 두드리며 칭하였다.
“임천 전하의 노복이 반역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알렸다.
“불아각(不牙閣) 위에 있습니다.”
누각을 열어 검사해볼 것을 요청하였다. 절의 담당자가 곧 그들의 말에 따라 누각을 열어 주었다. 임천왕의 장수가 불아좌(不牙座) 앞에 이르러, 상자를 열고 불치아를 취하였다.
삼배(三拜)를 올리고, 비단수건에 불치아를 담아 산 동쪽을 돌아 떠났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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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승호(釋僧護)
승호는 본래 회계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 고행의 절개로 의지를 극복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숙하고 맑았다.
그 후 석성산(石城山)의 은악사(隱嶽寺)에 거주하였다. 절 북쪽에 푸른 절벽이 있어, 곧바로 수십여 길이나 솟았다. 그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부처님의 불꽃 광배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 위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어, 굽은 나무줄기가 그늘을 드리웠다. 승호가 경행(經行) 때마다 절벽이 있는 곳에 이르면, 곧 빛나는 광명이 보였다.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향로를 받쳐 들고 서원을 일으켰다. 널리 산에서 열 길의 돌부처를 새겨 조성함으로써, 미륵불의 천 자에 이르는 모습을 공경하는 것에 견주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용화회상[三會]에서 만나고자 하였다.
북제(北齊)의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도인과 속인들을 불러 결속하였다. 처음 조각하기 시작하여, 대충 바위를 뚫는 데 한 해를 보냈다. 겨우 대략의 얼굴 모습이 이룩되자, 얼마 후 승호가 병을 만나 죽었다. 임종 때 서원하였다.
“내가 조성하는 석상이 본래 한 생에 완성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두 번째 태어나서, 그 서원한 결과를 이루리라.”
그 후 사문 승숙이 그가 남긴 공사를 모아 이어갔다. 그러나 재원[資力]을 마련할 길이 없어 성취하지 못하였다.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이르러 시풍(始豊) 현령인 오군(吳郡)의 육함(陸咸)이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에 섬계(剡溪)에서 유숙하던 중, 비바람을 만나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위태하고 두려워하다가 잠깐 눈을 부친 상태에 빠졌다. 문득 꿈에 세 도인들이 나타나서, 알려 주었다.
“그대는 앎과 믿음이 굳고 바르기 때문에, 자연히 안온해질 것이다. 건안(建安) 전하께서 환후가 아직 낫지 않으셨다. 그대가 만약 섬현을 다스리거든, 승호가 조성하던 돌부처를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을 얻는다면, 반드시 전하의 병이 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라고 하여 허망한 것은 아니니, 잘 개발함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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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함은 서울로 돌아가서, 1년이 지나도록 전에 꿈꾼 일을 거의 잊었다. 후에 문을 나서다가 곧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강론을 듣기 위해 기숙한다.”
이어 말하였다.
“지난해 섬현에서 부탁한, 건안왕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육함이 당시 두려운 생각이 들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떠나갔다. 육함은 그가 비범함을 깨달았다. 곧 신발을 거꾸로 신고, 묻고 찾고자 뒤따랐다. 백 걸음 거리까지 미쳤으나,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육함은 탁 트이면서 그 뜻을 해득하였다. 전에 꾼 꿈을 모두 기억해보니, 그는 곧 섬계에서 꿈에 본 세 번째 승려였다.
육함은 곧 상계[啓]를 올려 건안왕에게 알렸다. 왕은 곧 이것을 주상에게 알려 칙명으로 승우(僧祐) 율사를 파견하여, 석상 조성의 일을 전임하였다. 왕은 곧 깊은 믿음이 더욱 더해, 뛸 듯한 기쁨이 두루 충만해졌다. 금패물을 뽑아 희사하여, 성스런 불상이 성취되기를 맹서하였다.
처음 승우 율사가 채 그곳에 이르지 못한 어느 날이다. 그 절의 승려인 혜정(慧逞)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큰 신(神)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따라온 시종의 행렬이 매우 웅장하였다. 그 신이 감실이 있는 곳에 서서 분수를 상략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승우율사가 그곳에 이르렀으니, 그 신이한 응험이 이와 같았다.
승호가 과거에 뚫은 감실은 지나치게 얕았다. 곧 다섯 길을 깎아 들어가, 다시 정수리와 육계(肉髻)를 시공하였다. 몸 모습이 이루어져서, 아름답게 닦는 일이 끝나려 하였다. 밤중에 문득 만자가 있는 곳에서 빛깔이 붉게 솟아나왔다. 지금 불상의 가슴 부분의 만자처(萬字處)는, 아직도 금박을 씌우지 않아서 붉은 빛깔이 남아 있다.
돌부처는 천감(天監) 12년(513) 봄에 착공하여 천감 15년(516) 봄에 끝났다. 앉은 분의 높이가 5장이고, 서 있는 분의 모습은 10장이다. 감실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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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3층의 대를 가설하였다. 또한 문각과 전당을 조성하였다. 아울러 대중의 기업을 세워서 공양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향과 꽃을 들고, 만 리 밖에서 찾아와 모여, 공양하고 시주하노라 오갔다. 그들의 발자취가 골짜기를 메웠다.
돌부처가 조성된 후로, 건안왕이 고통 받던 병도 조금씩 치유되었다. 마침내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후 건안왕은 다시 봉작을 받았다. 지금의 남평왕(南平王)이 그 사람이다.
14) 석법열(釋法悅)
법열은 계율을 지키는 깨끗한 사문이다. 북제(北齊)의 말엽에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서울의 정각사(正覺寺)에 머물렀다. 돈독히 복된 일을 닦아 사부대중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법열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 1장 8척의 금불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곧 전송의 거기(車騎)장군인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조성한 것이다. 빛나는 광배의 모습이 빼어나, 강남에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었다.
고을 경내에 혹 재난과 이변이 있거나, 승려나 비구니에게 허물이나 뒤틀린 일이 있을 경우, 불상에서는 곧 땀이 흘러내렸다. 그 땀의 많고 적은 것이, 곧 재앙이나 근심의 심하고 옅은 정도를 표시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 초기에 괭성의 북쪽 부족인 뭇 오랑캐들이 함께 불상을 옮겨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만 명이 끌어당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북제의 초기에 연주(兗州)의 몇몇 고을에서 의거를 일으켜, 남방에 붙고자 하였다. 대중 승려들을 핍박하고 몰아세워, 그들을 도와 군영과 참호를 지키게 하였다. 당시 오랑캐의 장수 난릉공(蘭陵公)이 이 군영을 공격 함락시켜, 여러 승려들을 노획하였다. 이에 두 고을의 도인을 모두 잡아 포위망 속에 가두어두었다. 표(表)를 위대(僞臺: 北魏의 朝延)에 보내어, 난을 도운 사람들이라 무고하였다. 이 때 불상에서 땀이 흘러내려 온 불전이 모두 젖었다.
당시 위양왕(僞梁王: 北魏의 梁王) 원량(元諒)이 팽성에 주둔하였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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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불교를 믿었기에, 친히 불상이 있는 곳에 가서 사람을 시켜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닦아내면 또 따라 나와서, 끝내 그칠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은 곧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지심으로 서약하였다.
“대중 승려들은 무죄입니다. 제자가 스스로 그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아, 화를 입지 않게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보이지 않는 정성에 감응이 있다면, 땀을 닦거든 곧 멈춰 주십시오.”
이에 손수 땀을 닦아내니 곧 건조해졌다. 이에 왕이 표를 갖추어 그 일을 나라에 알리니, 모든 승려들이 다 사면되어 풀려났다.
법열은 이와 같은 불상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기뻐서, 우러러 예배드리기를 서원하였다. 그러나 관문의 금지로 길이 막히고 격리되어, 소원을 이룰 길이 없었다.
또한 예전에 전송의 명제(明帝)가 1장 8척의 금불상 조성을 경영하였다. 네 번 주조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계획을 바꾸어 1장 4척의 금불상으로 조성하였다. 법열은 마침내 백마사(白馬寺)의 사문인 지정(智靖)과 더불어, 인연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모았다. 이를 1장 8척의 아미타불로 개조하고자, 그 뜻을 알리고 비로소 금동을 모았다.
당시 시대가 북제의 말기에 속하여, 세상의 도의가 짓밟히고 쇠약해졌다. 또다시 밀려 배척당하였다. 양(梁)나라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 일을 나라에 상계하였다. 그러자 칙명이 내려 이를 허가하였다. 아울러 빛나는 받침대의 조성을 돕게 하였다. 관에서 보내는 재료와 솜씨 있는 장인에게 필요한 대로 비용을 자급하여서, 양(梁)의 천감(天監) 8년(509) 5월 3일에 소장엄사(小莊嚴寺)에서 주조에 착수하였다.
장인(匠人)이 본래 헤아리기는, 부처의 몸에 4만 근의 구리가 필요하다고 계산하였다. 녹여서 쏟아 부은 것이 이미 다하였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백성들이 보내오는 구리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구리를 용광로 안에 던져도, 모형 안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저절로 앞서의 상태와 같았다. 이에 다시 말을 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공덕으로 쓸 구리 3천 근을 공급하였다.
이 때 조정안에서 비로소 양을 헤아려 보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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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주조하는 곳에 이미 양이 모는 수레로 조서가 전달되었다. 또한 구리를 실은 수레가 용광로 옆에 이르렀다. 이에 풀무를 날려 구리를 녹이니, 한 번 주조함에 곧 불상 안이 가득해졌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사람과 수레가 함께 없어졌다. 조정안에서 구리를 내온 시간과 비교해보니, 비로소 방금 보내온 구리는 참으로 신령한 감응의 소치임을 알았다. 장인들은 이에 뛸 듯이 기뻐하고, 도인과 속인들은 이를 칭찬하였다.
그 후 모형을 열어 측량하니, 예상보다 뛰어올라 1장 9척의 상이 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광배의 모습에는 차이가 없었다. 또 거기에는 큰 엽전(葉錢) 두 개가 아직도 옷주름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끝가지 불에 녹지 않은 그 연유를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어 예전에 헤아린 구리 4만 근은 쓰임에 기준해 볼 때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3천 근을 더하여도, 계산이 빠져 가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서로운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비밀히 저절로 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의 이치로 그윽이 통하는 일은, 거의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처음 불상의 바탕이 이룩되자, 비구 도소(道昭)는 항상 밤중에 예참을 하였다. 문득 불상이 있는 곳을 보니 환하게 밝았다. 이 상서로움을 오래 보다가, 곧 그것이 신령스런 빛의 기이함임을 알았다.
주조한 지 사흘이 지나, 이직 미처 모형을 열지 않았다. 도도(道度) 선사는 자신의 칠조 가사를 희사하여, 비용에 보탰던 고결한 승려였다. 그런데 불상의 정수리 부분을 열자, 갑자기 멀리 두 승려가 무릎 꿇고는 불상의 육계를 여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려 하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당시 법열과 지정 두 승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칙명으로 불상 조성의 일을 정림사(定林寺)의 승우(僧祐)에게 맡겼다. 그 해 9월 26일에 불상을 광택사(光宅寺)로 옮겼다.
이 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자못 먼지가 일었다. 내일이면 불상을 옮길 때의 밤에, 가벼운 구름이 생겨 위에 두루 퍼지더니, 가랑비가 촉촉이 적셨다. 승우는 불상이 있는 곳을 경행하면서, 날씨를 염두에 두었다.
멀리 불상 언저리에 빛나는 불꽃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등불과 같고 촛불과도 같았다. 아울러 추참(搥懺: 망치 따위를 치며 참회하는 것)하고 예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안에 들어가 자세히 보니, 가려진 듯 모두 없어졌다. 절을 방비하는 장효손(藏孝孫)도 역시 같은 것을 보았다.
이 날 밤 회하(淮河) 가운데서 장사꾼들이, 큰 배가 내려오면서 ‘다리를 고치라’고 독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배 안에는 몇 백 명의 사람이 있는 듯하였다. 곧 신령한 법기의 무거움을 알게 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소치겠는가?
그 후 다시 빛나는 받침대를 주조하였다. 모두 꽃향기가 나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총하(葱河)의 왼편 지역에서, 금불상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오직 이 한 구가 있을 따름이다.
【論】예전에 우전국(優塡國)이 처음으로 전단(栴檀)으로 조각하거나, 파사(波斯: 페르시아)에서 처음으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거나 할 때에는, 모두 현실적으로 부처의 얼굴을 묘사하였다. 솜씨 있게 미묘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 까닭에 광명이 흘러 상서로움이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건함을 펼 수 있었다. 여기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봉안한 두 탑과, 옷과 그림자를 안치한 두 대(臺)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그 법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강가에서 자취를 거두어들이시어 숲 밖에서 화장하자, 여덟 임금이 청해서 사리를 나누어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물병과 재의 두 곳에 탑을 세웠다. 이에 열 곳에서 사찰이 일어났다. 태어난 곳, 득도한 곳, 설법한 곳, 열반한 곳과 육계(肉髻)·이마뼈·네 어금니·발자국·발우와 지팡이·타호(唾壺)·니원승(泥洹僧) 등을 모신 곳에도, 모두 탑을 세우고 새김글을 새겨, 그 신령하고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서 아육왕(阿育王)이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에 띄웠다. 모든 탑을 허물고 철거하여 사리를 나누어 가지고 돌아오다가, 바다에서 바람과 조수를 만나 자못 잃고 떨어뜨린 것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바닷물로 살아나가는 종족 가운데는 이를 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후 8만 4천의 탑을 이로부터 인연하여 세웠다. 아육왕의 딸들도 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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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란히 돌에 새기고 금을 녹여 신비한 모습을 그리고 묘사하여, 강에 띄우고 바다에 띄우니, 그 그림자가 동쪽 중국을 교화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비록 신령한 자취는 몰래 통하나, 아직도 보고 들을 만큼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후 채음(菜愔)과 진경(秦景)이 서역에서 돌아오자, 비로소 모직물에 그린 석가모니 상을 전하였다. 이에 양대(凉臺)와 수릉(壽陵)에서 나란히 그 형상을 그렸다. 이 때부터 형상과 탑묘가 시대와 더불어 다투어 줄을 이었으며, 우리 큰 양(梁)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남긴 빛이 더욱 성해졌다.
무릇 법신은 형상이 없으나, 감응에 인연하기 때문에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응이 나타나는 것은 들쑥날쑥 같지 않기 때문에, 형상 또한 당연히 다른 구별이 있다. 만약 마음의 길이 아득하다면, 창된 모습을 대하더라도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심정과 지조가 간절하다면, 나무나 돌덩어리라도 마음을 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은(劉殷)의 지극한 정성으로 감응이 일어나 곡식그릇에 새김글이 생겨났으며, 정란(丁蘭)은 온화하고 맑아 정성을 다함으로써 매화나무가 색이 변했다. 노양(魯陽)은 창날을 돌림으로써 해가 바뀌었고, 기부(杞婦)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성이 무너졌다.
이는 모두가 숨겨진 측은한 마음이 그들의 본성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서로운 징험이 사람들의 이목을 비춘 것이다. 혜달(慧達)이 광명을 당간 끝에 불러들이고, 혜력(慧力)이 탑의 기단에서 상서로움에 감응하며, 혜수(慧受)가 물에 뜬 나무에 정성을 펴고, 승혜(僧慧)는 옮겨가는 등불에서 증명을 드러냈다. 승홍(僧洪)과 승량(僧亮)은 나란히 불상을 주조하느라 자기 몸을 잊었고, 법의(法意)와 법헌(法獻)도 모두 가람을 위해 명이 다하였다. 법헌이 부처의 어금니 뼈에 뜻을 오로지하니, 경릉(竟陵) 문선왕의 꿈에 감응이 나타나고, 승호(僧護)가 석성산에서 포부를 비축하여 남평(南平) 건안왕이 감응을 얻었다.
근간 광택사(光宅寺)의 1장 9척의 금불상이 경기 지방에 뚜렷이 빛나게 된 것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전송의 황제가 네 번 녹여도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 양(梁)나라 황제는 한 번 녹여 형상이 갖추었다. 미묘한 형상이 뛰어나서 훼손된 곳이 없고, 상서로운 구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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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었는데도 다시 충족되었다. 그런 까닭에 도는 사람의 힘을 빌려 넓어지고, 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감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어찌 허탄하다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신에게 제사드릴 때에 신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하면, 신의 도와 교접하는 것이다. 불상을 공경하기를 부처님을 대하듯 하면, 법신이 감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문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지혜는 반드시 복덕으로 기초를 삼아야 한다. 비유하면, 새가 두 날개를 갖추어야만 훌쩍 천 길 하늘 위로 올라가고, 수레는 두 수레바퀴가 충족되어야만 한 번에 천 리를 달리는 것과 같다. 어찌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으리요? 찬하노라.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 사라졌으나
쇠와 돌이 빛남을 전하도다.
여기 탑과 불상 있으니
그리워하는 이들 의지하네.
기적이자 지극함으로
상서로움이자 위신력으로
바위에 숨거나 땅에서 솟거나
물 위에 뜨거나 공중을 날도다.
도탑도다, 마음의 길이여.
반드시 들어맞아 어김없으리.
眞儀揜曜 金石傳暉
爰有塔像 懷戀者依
現奇表極 顯瑞旍威
巖藏地踊 水泛空飛
篤矣心路 必契無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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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사편(經師篇)
1) 백법교(帛法橋)
백법교는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을 돌려 읽기를 즐겼다. 그러나 소리가 모자라서 늘 유창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곡식 먹기를 끊고 7일을 밤낮으로 참회하면서, 관세음보살에게 과보가 일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동학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서원하여 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7일째가 되자 목구멍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생겼다. 곧 물을 찾아 씻고 양치질하고 나서 말하였다.
“나에게 감응이 있었다.”
이에 게송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마을 가까이까지 사무쳤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놀라고 감탄하여, 모두 찾아와 보고 들었다.
그 후 수십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밤낮으로 소리 높여 읊조렸다. 그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다워 신과 통하였다. 나이가 90에 이르러서도 소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진(晋)의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하북(河北)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는 곧 석호(石虎)의 말기였다.
∙승부(僧扶)
제자인 승부도 계행이 맑고 높았다.
2) 지담약(支曇籥)
지담약은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은 고행으로 푸성귀를 먹었다.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렀다. 진(晋)나라 효무황제(孝武皇帝)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나왔다.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효무황제가 그로부터 5계를 받고, 스승의 예로 공경하였다.
담약은 특히 묘한 목소리를 타고났으며, 경을 돌려 읽기를 잘하였다.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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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그에게 소리법을 전수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자 새로운 목소리가 만들어졌다. 범패(梵唄)의 울림은 맑고 길게 늘어지며,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다가 문득 되돌려 꺾어지면서, 목구멍 안에서 다시 합쳐지면서 거듭 굴렀다.
비록 동아(東阿: 친근한 목소리)의 소리로 먼저 변하는 경우에도, 그 뒤에 강회(康會: 크게 찬미하는 소리)의 소리가 찾아왔다. 시종 순환하는 것이 이제껏 담약과 같이 묘한 목소리는 없었다. 후진들이 전수받아 흉내내는 소리는 그 법 아닌 것이 없었다. 그가 지은 육언범패(六言梵唄)는 그 울림이 지금까지 전한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3) 석법평(釋法平)
법평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아우인 법등(法等)과 함께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담약(曇籥)의 제자가 되어 함께 스승의 일을 전수받았다. 울리는 여운이 맑고 우아하며, 굴러 움직임에서 모난 곳이 없었다.
그 후 형제가 함께 기원사(祇洹寺)로 옮겼다. 아우는 모습이 작고 못생겼으나, 소리는 형을 넘어섰다. 전송(前宋)의 대장군이 동부(東府)에서 재를 마련하였다. 일단 그의 모습만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다가 책을 펴고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곧 팔을 걷어 부치고 그 신비함에 탄복하였다. 이어 탄식하였다.
“공자께서 ‘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다가 제자 자우(子羽)를 잘못 보았다[以貌取人 失之子羽]’고 하신 말씀이 참말이구나.”
그 후 동안사(東安寺)에서 도엄(道嚴)이 강론을 열었다. 법등은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기를 마쳤다. 그러자 도엄 법사가 천천히 털이개를 움직이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경을 읽는다면, 또한 강론을 일으키는 것만 못하지 않구나.”
마침내 강석을 해산하고, 이튿날 다시 범패를 열기로 하였다. 이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루어주는 도[相成之道]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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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모두 원가(元嘉) 연간(424~452)의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4) 석승요(釋僧饒)
승요는 건강(健康) 사람인데, 출가하여 백마사에 머물렀다. 편지를 잘 쓰고 잡기(雜技)에 빼어났다. 특히 음성으로 알려져서, 전송의 무제(武帝)·문제(文帝) 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메아리 가락은 넉넉하며 느긋하고, 우아한 화음[和雅]은 슬프고도 막힘이 없어[哀亮], 도종(道綜)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도종은 세 가지 본기(本起)와 대나(大拏)에 빼어났다. 한 번 맑은 범패를 들어올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였다.
이 절에는 반야대(般若臺)가 있었다. 승요는 항상 이 대를 돌면서 범패를 굴려, 이것으로 공양에 견주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가마를 멈추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칭송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2년(458)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6세이다.
∙초명(超明)·명혜(明慧)
당시 같은 절의 초명과 명혜도 어려서부터 함께 범패를 하였다. 긴 재를 지낼 때에는 경을 돌려가며 읽어서, 역시 당시 세상에 유명하였다.
5)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장(張)씨며, 심양(尋陽)의 시상(柴桑) 사람이다. 나이 스물네 살 때 출가하여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평소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널리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천연의 소리를 타고났다. 그런 까닭에 특히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어나는 음향에 기이함이 담겼다. 그러면서 소리를 짓는 데 일정한 기준이 없으면서도, 문장을 조목조목 나누었다. 구절을 꺾어, 소리가 곱고 아름다우며 분명하였다. 그 후 서울로 나가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경을 돌려가며 읽는 명성으로 크게 서울에서 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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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는 주방(朱方)의 죽림사(竹林寺)로 옮겼다. 수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저녁마다 소리 내어 읊조렸다. 문득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보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송의 대명 2년(458)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1세이다.
6) 석지종(釋智宗)
지종의 성은 주(周)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널리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았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더욱 뛰어나, 소리가 지극히 맑고 상쾌하였다. 팔관재(八關齋)를 올리는 긴긴 밤이면, 흔히 사부대중들이 꾸벅거리며 졸음[睡蛇]이 수시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지종이 법석에 올라가 범패를 울려 구름까지 이르도록 하면, 모두 정신이 열리고 몸이 풀려 툭 트였다. 게다가 졸음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명(大明) 3년(45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31세이다.
∙혜보(慧寶)·도전(道詮)
당시 혜보와 도전(道詮)도 비록 같은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 내는 법이 비슷하였다. 매우 성량이 풍부하고 가락이 높았으며, 짓고 부름에 더 취할 것이 없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문득 도전을 칭찬하니, 논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때를 만났다[逢時]고 하였다.
7) 석담천(釋曇遷)
담천의 성은 지(支)씨며,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강(建康)에 임시 머물렀다. 독실하게 도교와 유교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불교의 이치에 노닐었다. 『장자』와 『노자』의 이야기를 잘하였다. 아울러 『십지론(十地論)』에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바르게 쓰는 글씨 쓰기에 솜씨가 있어, 항상 경전의 제목을 써서 보시하였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도 뛰어나, 소리의 운율이 끝이 없었다. 또한 범패를 짓는 것이 신기하기가 특히 고금에 뛰어났다. 팽성(彭城)의 왕의강(王義康)·범엽(范曄)·왕담수(王曇首)가 나란히 모두 친숙하게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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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천은 처음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다가, 후에 오의사(烏依寺)로 옮겼다. 범엽이 주살(誅殺)되자, 그의 문중에서 열두 사람의 상례를 치렀다. 그런데도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담천은 돈과 옷, 물건들을 거두어서 그들 여러 사람의 장례를 치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이 소식을 듣고 감탄하여 칭찬[歎賞]하면서, 서원(徐爰)에게 말하였다.
“경이 송나라 역사를 지을 때, 이 사람을 빼지 말라.”
왕승건(王僧虔)이 상주(湘州) 및 삼오(三吳)의 태수가 되었을 때, 손잡고 함께 노닐었다.
북제(北齊)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99세이다.
∙법창(法暢)·도염(道琰)
당시 도량사(道場寺)에 법창, 와관사(瓦官寺)에 도염도 모두 소리가 풍부하고 애절하여 아름다웠다. 비록 담천과는 다툴 수 없었지만, 그 다음은 될 수 있었다.
8) 석담지(釋曇智)
담지의 성은 왕(王)씨며, 건강(健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풍류를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착하였다. 『노자』·『장자』의 담론에 뛰어나고, 대부분의 경론과 역사를 두루 섭렵하였다. 높고 밝은 목소리를 갖자,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비록 전대의 종사들에 의거하여 모방하기는 하였지만, 홀로 빼어나게 새롭고 특이한 것이 있었다. 높은 가락은 맑게 사무쳐서 모방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와 소사화(蕭思話)·왕승건(王僧虔) 등이 모두 깊이 그를 알고 존중하였다.
왕승건이 상주(湘州) 태수로 부임할 때, 손잡고 함께 갔다. 소사화가 오군(吳郡)의 태수가 되자, 다시 불러 함께 들어갔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에 오(吳)나라에서 죽었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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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道郞)·법인(法忍)·지흔(智欣)·혜광(慧光)
당시 또 도랑·법인·지흔·혜광이 모두가 달리 해득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약간 뛰어났다. 도랑이 잡은 가락은 조금 느리고[小緩], 법인은 부딪쳐 끊어지는[擊切] 소리를 지니며, 지흔은 낮은 가락[側調]에 아주 뛰어나고, 혜광은 날아가는 소리[飛聲]를 좋아하였다.
9) 석승변(釋僧辯)
승변의 성은 오(吳)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하여, 담천(曇遷)과 법창(法暢) 두 스승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그들의 기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다시 생각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짐작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애절하고 아름다운[哀婉] 소리를 절충하니, 북제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신정(新亭)의 유소(劉紹)의 집에 재(齋)가 있었다. 승변이 초저녁의 경 읽기에서 처음으로 한 번 가락을 바꾸자, 문득 무리를 이룬 학들이 내려왔다. 섬돌 아래에 모여들었다가, 승변이 책 한 권을 마치자 일시에 날라 떠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은 천하에 진동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 이름이 알려져, 후에 찾아온 배우는 이들이 그를 종사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명 7년(489) 7월 29일에 사도(司徒)인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꿈에 부처님 앞에서 『유마경』 한 가락을 읊조리다가,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이에 곧 일어나 불당 안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문득 꿈속에서 본 법과 같기에, 다시 옛 『유마경』을 한 가락 읊조렸다. 문득 소리 운율의 흐름이 좋게 느껴지면서, 여느 때보다 솜씨가 났다.
이에 이튿날 아침에 곧 서울에서 좋은 소리를 지닌 사문들을 모았다. 용광사(龍光寺)의 보지(普智)·신안사(新安寺)의 도흥(道興)·다보사(多寶寺)의 혜인(慧忍)·천보사(天保寺)의 초승(超勝)과 승변 등이었다. 그들을 저택에 모아 소리를 짓게 하였다. 승변이 전한 옛 『유마경』 한 가락과 『서응경(瑞應經)』의 7언(言) 게송(偈頌) 한 가락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혹 때로 전하는 말은 모두 와전된 것으로, 그 큰 바탕을 잃은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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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변은 복제의 영명(永明) 11년(493)에 세상을 떠났다.
∙승공(僧恭)
당시 중흥사(中興寺)의 승공이 승변과 명성을 나란히 하다가, 후에 도에서 물러났다[退道].
10) 석담빙(釋曇憑)
담빙의 성은 양(楊)씨며, 건위(揵爲) 남안(南安) 사람이다. 어려서 서울에 노닐었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배우면서,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음성의 가락이 매우 공교로웠다. 아침이 지나도록 스스로 일을 맡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아직 그를 추대하지 않았다. 이에 오로지 규범과 법도에 정성을 쏟았다. 갈고 익히는 공부를 더하여, 만년에는 드디어 무리에서 빼어나니, 모두들 달리 보았다. 『삼본기경(三本起經)』을 외울 때는 그 소리가 더욱 좋았다.
그 후 촉(蜀)으로 돌아가서 용연사(龍淵寺)에 머물렀다. 파한(巴漢: 蜀)에서 소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가 그의 소리를 모범으로 숭상하였다. 범패 소리를 한 번 토해낼 때마다 새와 말이 슬피 울고, 길 가던 사람이 발길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동종(銅鍾)을 제조하여, 미래 세상에 항상 8음(音)1)과 4변(辯: 四無碍辯)이 있기를 원하였다. 용(庸)과 촉(蜀)에 구리로 만든 종이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도광(道光)
당시 촉 중에는 승령(僧令)인 도광도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약간 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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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석혜인(釋慧忍)
혜인의 성은 궤(蕢)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다보사(北多寶寺)에 머물렀다. 다른 행실이나 이해력은 없고, 오직 음성을 애호하였다. 처음 안락사의 승변(僧辯)에게서 수업하여, 그의 법을 갖추어 터득하였다. 그러나 구슬프고 아름다우며, 가늘고 미묘한 소리에서 특히 승변의 경지를 넘어서려 하였다.
북제의 문선왕이 꿈에 감응한 후에, 여러 경 잘 읽는 승려들을 모았다. 이에 혜인도 함께 옛 소리를 헤아리고 가려내었다. 새롭고 다른 소리를 품평하여, 『서응경(瑞應經)』에 42박자를 만들었다. 혜인이 터득한 소리가 가장 뛰어나고 미묘하였다.
이에 혜만(慧滿)·승업(僧業)·승상(僧尙)·초랑(超朗)·승기(僧期)·초유(超猷)·혜욱(慧旭)·법률(法律)·담혜(曇慧)·승윤(僧胤)·혜단(慧彖)·법자(法慈) 등 40명에게 명령하여, 모두 혜인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하였다. 드디어 그 법이 지금까지 전한다.
혜인은 융창(隆昌) 1년(494)에 죽었다. 그 때 나이는 40여 세이다.
∙석법린(釋法隣)·석담변(釋曇辯)·석혜념(釋慧念)·석담간(釋曇幹)·석담진(釋曇進)·석혜초(釋慧超)·석도수(釋道首)·석담조(釋曇調)
석법린은 평조(平調)와 첩구(牒句)에서 궁(宮)·상(商) 음에 특이하였다. 석담변은 얼핏 보면 기특한 것이 없지만, 오래갈수록 더욱 뛰어났다. 석혜념은 기운찬 가락이 적으나,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가 특이하였다. 석담간은 상쾌한 소리가 잘게 부서지면서 부딪치고[爽快碎磕], 옮겨 베끼는 듯한 법도가 있었다. 석담진도 뛰어난 부류에 들어가며, 특히 「환국품(還國品)」을 잘 읽었다. 석혜초는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데 뛰어나지만, 후에는
일컬어지지 않았다. 석도수는 한 번 짧게 읽는 것은 겁을 내지만, 길게 말할 때는 볼 만하였다. 석담조는 있는 그대로 보내는 것이 맑고 우아하지만, 공부가 부족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북제시대에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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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좌(浙左)·강서(江西)·형주(荊州)·섬주(陜州)·용(庸)과 촉(蜀)에도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당시에만 노래로 읊조려졌을 뿐, 높은 명성은 없었던 까닭에 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論】무릇 책이나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슴에 품은 회포를 유창하게 펴, 감정과 뜻을 드높여 진술하는 데 있다.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은 말의 맛을 막히지 않고 흐르게 하여, 말의 운치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시전(詩傳)』의 서문에 말하였다.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여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情動於中而形於言], 말로는 모자라는 까닭에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이다[言之不足故詠歌之也].”
그러나 동쪽 나라의 노래는 운율을 맺어서 읊조림을 이루고, 서방의 찬(贊)은 게송을 지어서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비록 노래와 찬의 게송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음[鍾律]과 일치하고 음계[宮商]와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오묘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쇠와 돌로 노래를 연주하면 이것을 악이라 하고, 관악기와 현악기로 찬탄을 마련하면 이것을 범패(梵唄)라 한다.
무릇 성인이 악을 만든 것에 그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천지와 감응하고, 신명과 통하며, 만 백성을 인정시키고, 만물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범패를 들었을 경우 이로움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신체가 피로하지 않고, 기억한 것을 잊지 않으며, 마음이 귀찮거나 게으르지 않고, 음성이 허물어지지 않으며, 모든 천신(天神)들이 환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반차(般遮: 28 대야차의 하나)는 석실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여, 감로법의 첫 문을 열어 주기를 청하였다. 정거천신[淨居]은 쌍림에서 춤추며 찬송하여, 일대 교화의 은덕을 받들어 갚으려 하였다.
그 사이에 때에 따라 찬탄하고 읊조린 것도 역시 곳곳에서 음악을 이루었다. 억이(億耳)가 깊은 밤중에 가늘게 소리 내고, 제바(提婆)가 범천의 궁전에서 소리를 드높인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혹 형상하려야 형상할 수 없는 가르침을 퉁소와 피리로써 천상에서 연주한 것이거니와, 혹 근본 행법의 소리를 거문고와 비파로써 하늘 아래에서 어울린 것이다.
모두가 음조의 억양으로 감응과 통하여 부처님께서도 칭찬하신 일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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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까닭에 함지(咸池)의 소무(韶武)도 그 솜씨가 짝이 될 수가 없고, 격초(激楚)의 양진(梁塵)도 그 미묘함에 비교할 수가 없다.
부처님의 교법이 동방으로 들어온 후 글을 번역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소리를 전한 사람은 적었다. 범패의 소리는 중복된 것이고, 중국어는 단순하지만 기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범패를 사용하여서 중국어를 읊는다면, 소리는 번거롭고 게송은 급박해질 것이다. 만약 중국의 곡조를 사용해서 범패의 글을 읊는다면, 운율은 짧고 말은 길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한 것은 있으나, 범패의 소리는 전수되지 않은 것이다.
처음으로 위(魏)의 진사왕(陳思王) 조식(曺植)이 깊이 소리와 운율을 사랑하여 경의 소리에 뜻을 두었다. 이미 반차(般遮)의 상서로운 음향에 통한 다음, 다시 어산(魚山)의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였다. 이에 『서응경(瑞應經)』의 본기(本起)를 줄이고 다듬어 배우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 안에는 소리를 전한 것이 3천여 가지가 있고, 가락의 변조에 있어서는 마흔두 종류가 있다.
그 후 백법교(帛法橋)·지담약(支曇籥)도 이 진사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음률을 애호해서 신령에 통하고 따로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여 옛 소리를 마름질하여 변화시켰으나, 남겨진 것은 오직 열 가운데 한 가지에서 그칠 뿐이다.
석륵(石勒)이 집권한 건평(建平) 연간(330~333)에 천신(天神)이 안읍(安邑)의 청사(廳事)에 내려와, 불경을 크게 소리 내어 읊으면서 7일이 되어서야 끝냈다고 한다. 때로 이 일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나, 모두가 와전되고 버려진 소리다. 전송(前宋)·북제(北齊)시대 사이에 이르러, 담천(曇遷)·승변(僧辯)·태부(太傅) 문선왕(文宣王) 등도 모두 은근히 감탄하여 읊조렸다. 음률에 대한 뜻이 곡진하여 같고 다른 점을 모아, 엮고 분류하는 예를 짐작하여 예전 법을 본따서 보존한 것이, 바로 3백여 소리 가량 되었다. 이 때 이 후로는 소리가 많이 흩어지고 떨어져서 사람마다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보충하고 엮은 것이 같지 않다. 그런 까닭에 스승마다 법이 다르고 문중마다 지음이 각각이다. 모두가 소리의 취지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를 마름질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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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음악에 의한 감동은 예전부터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그윽한 승려의 범패 소리에 붉은 기러기가 사랑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고, 비구에게서 흐르는 소리에 푸른 새가 기뻐서 날아 치솟는 일을 잊었다. 담빙(曇憑)의 운율이 움직이자 새와 말이 몸을 움츠렸고, 승변(僧辯)이 가락을 꺾으니 기러기와 학조차도 날기를 멈추었다.
사람을 헤아리면 비록 얕고 깊은 차이가 있지만, 그 감응을 헤아리면 또한 버금가는 바가 있다. 그런 까닭에 기(夔)라는 짐승이 돌을 치면, 돌을 치는 대로 모든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었다. 소소(簫韶: 文王 南巡 때의 음악)의 구성곡(九成曲)에는 봉황이 찾아와 춤추었다. 새와 짐승조차도 또한 감응을 이루거늘, 하물며 사람과 신(神)에 있어서랴?
다만 경을 돌려가며 읽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귀함이 소리와 글 두 가지를 모두 터득한 데 있다. 만약 오직 소리가 아름답고 글이 아름답지 않으면, 도의 마음이 생겨날 길이 없다. 만약 글만 오로지 아름답고 소리는 아름답지 않으면, 세속적 감정이 들어갈 길이 없어진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말한다.
“미묘한 음성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고 찬탄한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의 배우는 자들은 겨우 시작과 끝의 나머지 소리라도 얻기만 할라치면 말한다.
“당세에 이름을 날리노라.”
경문의 일어나서 다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다. 혹 구절을 허물어 소리에 합치시키기도 하고, 혹 글을 나누어 운율을 충족시키기도 하니, 이것이 어찌 오직 소리만 부족한 것이겠는가? 또한 곧 글이 표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는 오직 황홀한 기분만 불어날 뿐이어서, 듣노라면 다만 졸음만 더해진다.
무릇 이는 8진명주(珍明珠)로 하여금 가리지 않았는데도 빛남을 감추게 하고, 백 가지 맛을 갖춘 순유(淳乳)로 하여금 엷게 희석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맛을 엷게 하는 것이다. 슬프다. 만약 경의 본뜻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음률도 훤하게 밝다면, 세 자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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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의 일곱 가지 소리가 차례로 순서가 있어 어지러운 일이 없고,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게송이 일치하여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일으키고 던지며 휩쓸고 들어올리며, 평탄하고 꺾으며 내치고 줄이며, 노닐고 날며 물러서고 회전하며, 되돌리고 포개며 교태롭고 희롱한다. 운율이 움직이면 흐르고 쓸리는 것이 다함이 없고, 목구멍을 벌리면 변하는 흐름이 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찬란히 8음을 펴고 빛나게 7선을 드날린다. 웅장하면서도 사납지 않으며, 엉키면서도 막히지 않고, 약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굳세면서도 날카롭지 않으며, 맑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흐리면서도 가려지지 않는다. 참으로 미묘한 말씀을 자못 유창하게 일으키고, 정신과 본성을 느긋하게 길러낼 만하다. 그런 까닭에 소리를 들으면 귀가 즐거워질 수 있고, 말을 들으면 흉금을 열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범패 소리의 깊고도 미묘한 소리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하다.
천축국의 풍속은 불법의 말씀을 노래하고 읊조리면, 이것을 모두 범패(梵唄)라 한다. 그러나 이 땅에 이르러서는 경을 읊조리면 전독(轉讀)이라 하고, 노래하고 찬탄하면 범패라 부른다. 예전에 모든 천신(天神)들이 찬탄한 범패는 모두가 운율을 거문고 가락에 맞춘 것이다.
오부대중은 이미 속인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소리와 곡조로써 미묘함을 삼아야 한다.
근원적으로 말하면, 무릇 범패가 일어난 것도 진사왕(陳思王)에게서 조짐이 비롯하였다. 처음 태자송(太子頌)과 섬송(睒頌) 등을 지어서, 이것을 위하여 소리를 만든 것이다. 뱉고 마시며 누르고 올림은 모두 신(神)이 전수한 것을 법삼았다. 지금의 ‘황황고유(皇皇顧惟)’는 아마도 그 기풍이 강하게 남은 것이리라. 그 후 거사(居士) 지겸(支謙)도 역시 범패 3계(契)를 전하였다. 그러나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세간에 있는 ‘공의(共議)’라는 1장(章)이 혹 지겸이 남긴 법칙인지 모른다. 오직 강승회(康僧會)가 만든 ‘열반범패(涅槃梵唄)’만은 지금까지도 전한다. 곧 경알(敬謁)이라는 한 계문(契文)이 두 권의 『열반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열반범패라 한다.
진(晋)나라 시대에 이르러 도생(道生) 법사가 처음으로 그 자취를 찾아 전수하였다. 지금의 ‘행지인문(行地印文)’이 곧 그 법이다. 담약(曇籥)이 만든 육언(六言)범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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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대자애민일계(大慈哀愍一契)’며, 지금도 때로 이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근간 서량주(西凉州)의 범패는 근원이 관우(關右)지방에서 나와 진양(晋陽)지방에 흘러 들어온 것으로, 지금의 ‘면여만월(面如滿月)’이 그것이다. 무릇 이 모든 가락은 모두가 이름난 스승들이 제작하여 나온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이어 부름에 대부분 와전되고 누락되었다. 때로는 사미나 어린아이들끼리 서로 전수하는 경우도 있어서, 예전에 이룩된 규칙은 거의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아쉽다. 이는 이미 다 같이 소리의 예로서 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끄트머리의 말미에 갖추어 둔다.
10. 창도편(唱導篇)
1) 석도조(釋道照)
도조의 성은 국(麴)씨며, 평서(平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편지를 잘 썼다. 아울러 경전과 역사에 널리 뛰어났다.
열여덟 살 때 출가하여 서울의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뭇 경전을 열어 보았으며, 선창(宣唱)을 일삼았다. 토하는 음성은 맑고 밝아,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을 씻어 깨닫게 하였다. 일을 맡으면 때맞추어 하고 말만 앞세우지 않았다. 전송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어느 날 내전에서 재(齋)를 마련하였다. 도조는 초저녁에 간략히 말하였다.
“사람의 한평생, 백 년이란 세월은 빠르게 흘러 죽음은 갑자기 닥쳐오고, 그 사이 괴로움과 즐거움은 들쑥날쑥 고르지 않으나, 반드시 인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육도중생에 응하시듯, 폐하는 모든 백성을 쓰다듬어 어여삐 여기소서.”
황제는 말하였다.
“좋다.”
오랜 후에 재가 끝나자, 따로 3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임천왕(臨川王) 유도규(劉道規)는 그에게서 5계를 받고는, 받들어 가문의 스승으로 모셨다.
원가(元嘉) 30년(45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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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慧明)
도조의 제자인 혜명은 성이 초(焦)씨며, 위군(魏郡) 사람이다. 마음이 뛰어나게 걸출하였다. 스승의 도풍을 그대로 이어 익혀서, 역시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2) 석담영(釋曇穎)
담영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에 삼갔다. 1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으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오직 좋게 권유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짐짓 뜻을 선창(宣唱)에 두었다. 목소리가 천연적으로 유독 빼어났기 때문이다.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찾아갔다. 또한 빈부를 막론하고 같은 법에 따랐다. 장창(張暢)이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토해내는 말이 흐르듯 하여, 곧 머나먼 이치를 치솟게 할 만하다.”
담영은 어느 날 부스럼병[癬瘡]을 앓아 오래도록 치료하였다. 그러나 제거되지 않았다.
방안에서 항상 관세음보살상에 공양드리며,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면서 이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다.
훗날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관음상 뒤에서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쥐 한 마리가 지붕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뱀이 묻힌 침으로 목욕한 것 같았으며, 모습은 이미 죽은 듯하였다.
담영이 살펴보니, 아직은 살릴 수 있을 듯하였다. 이에 곧 대나무를 갖고 와서 침을 제거하였다. 뱀이 삼킨 쥐는 부스럼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곧 뱀이 묻힌 침을 닦아내어 부스럼 부위에 발랐다. 바른 것이 두루 퍼지자 쥐도 다시 살아났다. 이틀 밤 사이에 부스럼이 완전히 없어졌다. 비로소 뱀과 쥐가 모두 관세음보살께 기원하여 요청한 덕분에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교화하였다. 창도하여 굳센 절조가 더욱 굳어졌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이 가장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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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혜거(釋慧璩)
혜거는 단양(丹陽) 사람이며, 출가하여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읽고 열람하면서 역사를 섭렵하였다. 여러 잡기에도 대부분 능숙하였다. 하지만 더욱 창도(唱導)를 잘하여, 말이 나오면 문장을 이루고, 말이 움직이면 작품이 되었다. 시절에 맞게 다다르고 너르게 채택하였다. 그러니 모두 다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전송의 태조와 문제(文帝)·거기(車騎)장군 장질(藏質)이 나란히 손잡고, 좋은 벗으로서 서로 숭상하고 사랑하였다. 그 후 초왕(譙王)이 형주(荊州)에 주둔하자, 요청하여 더불어 동행하였다. 그 후 초왕은 반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다, 양산(梁山)에서 법회를 마련하였다. 얼마 후 초왕이 패배하자, 혜거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재를 마련하였을 때, 혜거가 창도의 역을 맡았다. 황제가 혜거에게 물었다.
“오늘의 모임을 양산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혜거가 대답하였다.
“하늘의 도는 순리를 돕는 것인데, 하물며 반역을 위하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여 이튿날 아침 따로 1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그 후 칙명으로 서울의 도유나(都維那)직을 맡았다.
대명(大明) 말년(464)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4) 석담종(釋曇宗)
담종의 성은 괵(虢)씨며, 말릉(秣陵) 사람이다. 출가하여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많은 경전에 두루 뛰어났다. 창설(唱說)의 공교함은 당시 세상에서 독보적이었다. 그의 구변은 시절에 알맞아, 변화에 응하는 재능이 끝이 없었다.
어느 날 효무제(孝武帝)를 위하여 창도의 소임을 맡아, 보살의 다섯 가지 법의 예를 행하여 마쳤다. 황제가 웃으면서 담종에게 말하였다.
“짐은 무슨 죄가 있기에, 참회를 해야 하는가?”
담종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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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虞)·순(舜)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오히려 ‘나는 그대를 보필하는 공을 어겼다’고 하였습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도 역시 ‘만백성에게 죄가 있으면 그것은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왕이 허물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은, 무릇 세상을 자신이 본받을 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덕은 지난 시대보다 뛰어나며, 성인인 우(虞)·은(殷)과 나란하십니다. 도를 실천하여 텅 비움을 생각함에서만, 어찌 홀로 예전의 성군과 다르겠습니까?”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 후 은숙의(殷叔儀)가 죽었을 때와 21일 동안 재 모임을 마련하였을 때에, 모두 담종을 초청하였다.
담종은 바야흐로 세상의 도는 부초와 같고 거짓되어, 은혜롭고 사랑스런 이와 반드시 헤어지게 됨을 탄식하였다. 은(殷)씨의 맑은 덕을 찬탄하고, 그 영화로움과 행복함을 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당년에 맺을 열매가 스러지고, 꽃다움을 오늘날 거두어들인 것을 아쉬워하였다.
하는 말이 지극히 처량하여, 황제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남다른 포상이 더욱 깊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경사탑사기(京師塔寺記)』 두 권을 지었다.
∙승의(僧意)
당시 영미사(靈味寺)의 승의도 창설을 잘하였다. 「섬경신성(晱經新聲)」을 지었다. 애달프고도 밝은 소리가 차례가 있었다[哀亮有序].
5) 석담광(釋曇光)
담광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성품과 생각이 5경(經)과 시부(詩賦)를 좋아하였다. 아울러 산수(算數)와 복서(卜筮)도 꿰뚫어,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곧 30세가 되려 하자,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종래에 익힌 것은 모두가 세속의 일이다. 불법의 깊은 진리에는 아직 털끝만치도 물들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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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예전에 일삼은 것과는 담을 쌓고, 여러 경론의 강의를 들었다. 식견과 깨달음이 보통 사람을 넘어서서, 한 번 들으면 곧 통달하였다.
전송[宋]형양(衡陽)의 문왕(文王) 유의계(劉義季)가 형주(荊州)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뜻과 논리에 뛰어난 사문을 찾아 함께 불법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경계 내에 알리니, 모두가 담광을 추천하여,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고 하였다. 담광이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몸소 그의 방을 찾아가 돈독하게 청하자, 마침내 명에 따랐다. 수레와 의복·인력을 공급하고 한 달에 1만 냥의 돈을 제공하였다. 당시 재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경을 먼저 읽어주는 승려가 없었다. 왕이 담광에게 말하였다.
“중생들을 인도하려면 오직 덕이 근본이 되어야 하거늘, 상인께서 어찌 이 일을 사양하여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하시기 바라네.”
담광은 마침내 마음을 돌려 소리를 익히고, 「예참문(禮懺文)」을 지었다. 향로를 손에 잡고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여 우러러보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의양왕(義陽王) 유욱(劉旭)이 외지로 나가 북쪽 서주(徐州)에 주둔하자, 담광과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유경화(劉景和)가 덕을 잃자, 의양왕이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담광이 앞일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곧 7요(曜: 日·月과 水火金木土의 다섯 별)로써 담광에게 결택을 하게 하였다. 담광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일이 편안해져서 재난을 면하였다.
전송의 명제(明帝)는 상궁사(湘宮寺)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담광이 창도하는 소리를 듣고는 칭송하였다. 곧 칙명으로 옷 세 벌과 물병·발우를 하사하였다. 그 후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6) 석혜분(釋慧芬)
혜분의 성은 이(李)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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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었다. 나이 열두 살 때 출가하여, 곡숙현(穀熟縣)의 상산사(常山寺)에 머물렀다.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으며, 고행이 정밀하고 뛰어났다. 재 모임에 갈 때마다, 항상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양(梁)·초(楚) 사이에서는 모두가 그의 교화를 받들었다.
북위(北魏)가 불법을 훼멸하자, 곧 남쪽 서울로 돌아왔다. 오강(烏江)에 이르자, 추격하는 말이 곧 그에게 미쳤다. 강기슭에는 건네주는 배가 없었다. 혜분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갑자기 배 한 척이 문득 흘러와 이르렀다. 그것을 타고 재난을 면하였다. 서울에 이르러서는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당시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던 원민손(袁愍孫)이 항상 생각하였다.
‘도인은 편벽하고 고집이 있어, 더불어 논의할 만한 대상이 못된다.’
마침내 측근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찾기를 기다려, 한 번 이야기해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혜분이 그곳에 이르렀기에, 원민손이 먼저 삼승사제(三乘四諦)의 논리를 물었다. 문득 노자·장자와 공자·묵자의 요점을 말하였다. 혜분은 평소에 이미 경서에 빼어났다. 또한 토해내는 음성이 물 흐르듯 편하여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도록 원민손이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이에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자제들 모두가 그에게서 계를 받게 하였다.
혜분은 또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그가 다스리는 병은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 후 병이 위독하여 환약을 복용할 적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혜분이 말하였다.
“오랜 세월 계율을 지켜왔거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절개를 허물겠느냐?”
그리고는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 흥복사(興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임종 때, 훈계를 내린 유언장이 있다고 한다.
7) 석도유(釋道儒)
도유의 성은 석(石)씨며, 발해(渤海) 사람이다. 광릉(廣陵)에 임시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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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 어려서부터 맑은 믿음을 품고, 출가하기를 그리워하며 즐겨하였다. 전송의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이 남쪽 연주(袞州)에 주둔하는 때를 만나, 도유가 이 일을 알렸다. 왕이 그의 뜻에 찬성하여, 출가의 길을 열어 도첩(度牒)을 내렸다.
출가한 후에는 푸성귀를 먹으면서 경을 읽고 외웠다. 가는 곳마다 모두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악한 마음을 고쳐 선한 길을 닦게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를 종사로 받들어, 마침내 창도하는 승려가 되었다. 말할 때 미리 준비하는 일이 없고, 소리를 내면 그것이 문장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나와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장사왕(長沙王)이 청해서,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삼았다. 노승상(盧丞相)·백중손(伯仲孫) 등이 함께 장경아(張敬兒)의 옛 사당을 사서, 도유를 위하여 절을 세웠다. 지금의 제복사(齊福寺)가 그것이다.
도유는 복제의 영명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승희(僧憙)
당시 한심사(閑心寺)의 승희(僧憙)도 창설을 잘하였다. 전송 말기와 북제 초기에 명성을 떨쳤다.
8) 석혜중(釋慧重)
혜중의 성은 민(閔)씨며, 노국(魯國) 사람이다. 금릉(金陵)에 임시 머물렀다. 일찍부터 슬기로운 믿음을 품고 도를 따를 뜻이 있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래도록 재(齋)를 열고 채식을 하였다. 대중을 거느리고 재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항상 스스로 창도를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니, 마침내 위로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에게 알려졌다.
대명(大明) 6년(462)에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에서 출가하였다. 이에 오로지 창도의 일을 담당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민첩하였다. 식견과 깨달음이 깊고 침착하여, 말을 미리 꾸미지 않았다. 때에 응하여 쏟아 붓는 듯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곳에 머물러, 이틀 밤을 자면서 더욱더 간곡히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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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자리를 옮겨 와관사(瓦官寺)의 선방에 머물다가, 영명(永明)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법각(法覺)
당시 와관사의 법각도 혜중의 일을 도탑게 하였다. 역시 북제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9) 석법원(釋法願)
법원의 본래 성은 종(鍾)씨며, 이름은 무려(武慮)이다. 선조는 영천(穎川)의 장사(長社) 사람이다. 조부 대에 난을 피하여 오흥(吳興)의 장성(長城)에 옮겨 살았다. 법원은 항상 매근치감(梅根治監)이 되었는데, 시신민(施愼民)이 와서 교대하였다. 이에 앞서 문서를 교열하지 않아, 시신민이 마침내 홀로 그 책임을 졌다. 법원은 곧 소를 올려 죄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 교지가 내려, 시신민은 죽음을 면하고, 법원은 신도(新道)의 수령이 되었다.
집에서 본래 신(神)을 섬겼기에, 몸소 북치고 춤추는 것을 익혔다. 세간의 잡기와 노장들이 하는 점치고 관상 보는 일[耆父占相]들을 모두 갖추어, 그 묘를 다하였다. 어느 날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보고 말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아마도 천자(天子)를 만날 것이다.”
이에 서울로 나가 침교(沈橋)에 머물면서, 관상 보는 품을 팔아 일삼았다[庸相自業]. 종각(宗殼)과 심경(沈慶)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 지나다가, 법원에게 상을 보아달라고 청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종군(宗君)은 세 고을의 자사(刺史)가 될 것이고, 심군은 벼슬이 3공(公)까지 다할 것이오.”
이와 같이 돌아가며 많은 사람의 상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다. 징험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침내 전송의 태조(太祖)황제에게 알려져 태조가 그를 알현하였다. 동쪽 감옥에 있는 죄수와 얼굴이 아름다운 한 노비를 데려 와서, 의관으로 몸을 장식하게 하였다. 법원에게 관상을 보게 하였다. 법원은 죄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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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위태하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계단만 내려서면 아마도 곧 쇠사슬을 찰 것이다.”
노비에게는 말하였다.
“너는 하천(下賤)한 사람이다. 이에 잠시 면하였구나.”
황제는 경이롭게 생각하였다. 곧 칙명을 내려 후당(後堂)에 머물면서,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맡게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 상계하여 출가하기를 구하였다. 세 번 상계하여 비로소 바람을 이루어, 상정림사(上定林寺)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등극하자, 종각(宗殼)이 지방으로 나가서 광주(廣州)에 주둔하였다. 법원과 손잡고 함께 갔으며, 받들어 5계(戒)의 스승으로 삼았다.
때마침 초왕(譙王)이 역모를 꾸며 영남 땅에 격문을 날려 보냈다. 종각이 이 일로 법원에게 물어보니, 법원이 말하였다.
“그대를 따라 왔다가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겠다. 지금 태백성(太白星)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니, 법으로 미루건대 아마도 대신을 죽일 것이다. 속히 계획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공훈을 얻을 것이다.”
과연 법원의 예언과 같았다. 종각이 예주(豫州)자사로 자리를 옮길 때도, 다시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거사하려 할 때 법원이 간언(諫言)을 진술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 후 법원은 자사와 함께 승려들의 걸상 다리의 높이를 줄여서, 여덟 손가락 정도로 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문 승도(僧導)는 강서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법원이 함부로 승려들을 바로잡으려 한다고 생각하여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던 터이다. 마침내 이 사실을 효무제에게 알렸다. 효무제는 곧 칙명을 내려 법원을 서울로 돌아오게 하고, 법원에게 물었다.
“왜 거짓으로 채식을 하는가?”
법원이 대답하였다.
“채식한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직합(直閤) 심유지(沈攸之)를 시켜 강제로 핍박하여, 고기를 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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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나, 그의 지조를 돌리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칙명을 내렸다. 도를 그만두고 광무(廣武)장군이 되어 화림불전(華林佛殿)을 지키게 하였다.
법원은 비록 겉모습은 속인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훼절한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황제가 죽자 소태후(昭太后)가 명령하여, 도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용되었다.
태시(太始) 6년(470)에 교장생(佼長生)이 자기의 저택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정승사(正勝寺)라 이름지어, 법원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북제(北齊)의 고조(高祖)황제가 황제 되기 전에 친히 어린 임금을 섬겼다. 그러면서 항상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있을까 근심하여, 늘 법원에게 자문 받았다. 법원이 말하였다.
“일곱 달 뒤가 되면, 결정이 날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북제의 고조황제는 즉위하자 스승의 예로 섬겼다. 무제(武帝)가 이어받아 일어나서도, 역시 스승으로 공경을 다하였다.
영명(永明) 2년(484)에 형의 상(喪)을 만나, 나라에 상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고향에 이르러 얼마 되지 않았건만, 칙지(勅旨)가 중첩하였다.
그 후 법원은 서울로 나와 상궁사(湘宮寺)에서 쉬었다. 황제가 가마로 친히 납시어, 절로 내려와 문안하고 위로하려 하니, 법원이 말하였다.
“다리의 병이 없어지지 않아서, 만나는 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마침내 말머리를 되돌려 절을 떠났다. 어느 날 문혜(文惠)태자가 절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법원이 앉으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혜태자는 절을 하고 서서, 법원에게 말하였다.
“나팔을 성대하게 불며 바라를 맑게 쳐서 공양한다면, 그 복이 어떻습니까?”
법원이 말하였다.
“예전에 보살이 8만의 기악(伎樂)으로 부처님께 공양드려도, 오히려 지극한 마음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나무 관(管)을 불며 죽은 소가죽을 치는 것이야, 여기에서 어찌 말할 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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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덕을 지키고 시대에 초연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후·비·공주 및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그에게서 계를 받고, 모두가 스승의 예를 따랐다. 법원은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속인들과 사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하루에 수만 명씩 가득했다.
법원은 얻는 것에 따라 복업을 닦았다. 한 번도 저축하거나 모으는 일이 없었다. 혹 사람을 고용해서 예불하거나, 혹 사람을 빌려 재를 유지하거나, 혹 쌀과 곡식이 들어오면 물고기와 새들에게 흩어 먹거나, 혹 음식을 사들여와 죄수들의 무리에 베풀어 주었다. 공을 일으키고 덕을 세운 수효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법원은 또한 창도를 잘하고, 경에 근거하여 설법을 잘하였다. 마음 속 폐부로부터 우러나온 솔직한 음성으로 음률을 일삼지 않았다. 말은 잘못되고 뒤섞여도, 오직 기연에 맞는 것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니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其智可及],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 없구나[其愚不可及]”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 후 사흘 동안 입정(入定)하다가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밥 소쿠리를 잃는구나.”
갑자기 병으로 누웠다. 이 때 절 가까이에서 화재가 났다. 절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연기와 화염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법원을 가마에 태워 절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불타게 된다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느냐?”
곧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이에 삼면이 모두 불탔으나, 오직 절만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나이 87세로 세상을 마쳤다.
10) 석법경(釋法鏡)
법경의 성은 장(張)씨며, 오흥(吳興)의 오정(烏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겼다. 그러나 아직 도를 따르지는 못하였다.
혜익(慧益)이 몸을 불사르면서 황제에게 스무 사람에게 도첩을 내려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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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달라고 아뢰는 일을 만났다. 법경이 곧 그 중 한 사람에 들어서, 법원(法願)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미 도에 들어서자, 그가 밟는 지조는 얼음과 서릿발 같았다. 어진 마음으로 베풀 생각을 품고, 널리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에 창도를 갈고 익히니 과거보다 뛰어남이 있었다. 북제의 경릉(竟陵) 문선왕이 후하게 예로 대접하였다.
법경은 도를 널리 펴기로 마음에 맹서하였다. 귀천을 가리지 않아, 초청하면 반드시 그 곳에 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항상 복된 일을 일으켰다. 건무(建武) 연간(494~497) 초기에 신도의 보시로 제륭사(齊隆寺)를 세워, 그곳에 머물렀다.
법경은 성품이 도탑고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접대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도인과 속인들이 서로 알고,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얕았으나, 하지만 빼어난 깨달음이 자연스러웠다. 그를 비웃고 힐난하는 순간에도,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수작이 있었다.
그는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도친(道親)·보흥(寶興)·도등(道登)
후에 와관사(瓦官寺)의 도친·팽성사(彭城寺)의 보흥·기사사(耆闍寺)의 도등이 나란히 모두 선창하는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상한 운율과 화려한 말솜씨가, 이전의 예에다 덧붙여질 정도는 아니었다[非添前例]. 그러나 대중을 기울게 하고 남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는, 전대에 뒤진다고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말하였다[論者後之].
금상폐하께서는 장사(長沙)의 선무왕(宣武王)을 위해서, 법경이 머물던 절을 수리하였다. 이름을 바꾸어 선무사(宣武寺)라 하였다.
【論】창도(唱導)란 대개 불법의 논리를 먼저 읽어줌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열어 이끄는 일을 말한다. 예전에 불법이 처음 전래되자, 함께 모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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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다만 부처님의 이름을 먼저 읽으면서 글에 의거하여 예를 드리다가, 밤중이 되면 극도로 피곤해져서 몽매함을 깨우쳐 이끌어 주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로 노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초청하여 법좌에 올라가 설법을 하게 하였다. 혹 인연을 뒤섞어서 서술하기도 하고, 혹 한편으로 비유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도업이 곧고 빛나며 재주 있는 풍모가 우뚝 빼어났다. 재(齋)모임에 이를 때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 몸소 도수(導首: 唱導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먼저 3세의 인과를 밝히고, 문득 재 모임의 큰 뜻을 말하였다. 후대가 전수받아 마침내 영원한 법칙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도조(道照)와 담영(曇穎) 등 10여 명이 모두 나란히 차례대로 스승이 되어, 각기 당세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무릇 창도에서 귀중히 여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다. 즉 목소리와 말솜씨와 재능과 박식함이다[聲辯才博]. 목소리가 아니면 대중을 깨우칠 길이 없고, 말솜씨가 아니면 시절에 맞게 할 길이 없으며, 재능이 아니면 채택할 만한 말이 없고, 박식하지 않으면 말에 근거가 없다.
만약 울리는 운율이 종이나 북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 사부대중의 마음을 놀라게 한다면, 이것은 목소리의 작용이다. 토해낸 말이 나가서 시절에 적합하여 차질이 없다면, 말솜씨의 작용이다. 아름답게 만들고 빛나게 아로새겨 문장이 자유자재로 빼어나다면, 재능의 작용이다. 경론을 정확히 헤아리고 역사에서 요점을 채택한다면, 박식함의 작용이다. 만약 이 네 가지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면, 사람과 시대에 적절히 부합시킬 수 있다.
가령 출가한 오부대중을 위해서는, 모름지기 절실하게 덧없음을 말해 주어서, 간곡하게 참회를 베풀어야 한다. 만약 군왕과 장자(長者)들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세속의 고전까지 아울러 인용하여, 아름답게 말을 모아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 아득히 먼 범부와 서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사물을 지적하고 형태를 만들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만약 산중의 백성과 들판에 처한 농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그에 해당하는 말로써 피부에 닿게 설하여, 죄를 배척하게 하여야 한다.
무릇 이러한 변화는 일과 더불어 일으켜야만, 시절을 알고 대중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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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훌륭하게 설법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짐짓 말이 간절함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정성을 기울여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장 상등급에 속한다.
예전 초창기의 고승들은 본래 여덟 개로 나누어 전기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이내 경사(經師)와 창도의 두 기능을 더 경영하였다. 비록 이것이 도에 있어서는 끝자리에 속하지만, 속인을 깨닫게 하는 데서는 숭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두 조항을 더하여 열 가지로 전기를 충족시킨 것이다.
왜 그런가? 가령 팔관재(八關齋)의 첫날 저녁에 이르러, 선요(旋繞: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일)하여 두루 도는 것이 끝나고, 안개가 덮이며 분위기가 가라앉아 등불만이 홀로 고요히 빛나면, 사부대중이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다물어 말이 없어진다.
그 때 창도하는 이는 향로를 받쳐 들고, 강개한 목소리로 머금고 토하며 누르고 드러낸다. 말솜씨가 궁하지 않아야, 말이 마땅히 끝없이 나아간다. 그리하여 덧없음을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한다. 지옥을 말하면, 공포와 눈물이 바꾸어가며 떨어진다. 전생의 인연을 따지면, 마치 지난날의 일을 보듯 한다. 다가올 과보를 파헤치면, 이미 미래의 과보가 보인다. 느긋하고 즐거운 일을 이야기하면, 정과 포부가 화창하고 흐뭇해진다. 애처롭고 슬픈 일을 서술하면, 눈물을 뿌리며 시린 감정을 머금는다.
이에 모든 대중이 마음을 기울이고 온 법당 안이 측은한 슬픔에 잠기리라. 오체를 자리에다 던지면서 머리가 부서져라 슬픔을 말하고, 각각 손가락을 튀기며 사람마다 부처님을 부르리라.
그리하여 한밤중에서 새벽에 이르러 종루(鍾漏)가 곧 파하면, 별자리와 은하수가 바꾸어 회전하여 거룩한 모임도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하여서, 더욱더 사람들로 하여금 절박한 회포로 가득하여 연모의 정을 싣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를 담당하는 것이 도사의 작용이다.
그 사이에 경사(經師)의 전독(轉讀)에 관한 일은 앞장에서 이미 보였다. 모두가 깨달음을 칭송하고, 시절에 때맞추어 사악한 마음을 뽑아내며, 믿음을 세워서 한 푼이라도 칭송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고승전』의 말미에 편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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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모아 익힌 것이 아직 넓지 못하고, 외우고 연구한 시간이 길지 않아, 때에 다다라 민첩한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땅히 옛 것을 따라서 써야 한다.
그러나 재능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제작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음률을 붙여서 토하고 들이쉬는 소리에 걸핏하면 허물과 잘못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는 전해서 베껴 쓰는 과정에서 와전되고 틀린 것도 모두 그것에 의거하여 부르고 익히게 된다. 마침내 어(魚) 글자와 노(魯) 글자처럼 잘못 읽어서 뒤섞여 어지러우니, 서박(鼠璞: 無用之物)이라 의심하게 만든다.
혹 때로는 예배드리는 중간에 예참하라는 소(疏)가 문득 이르면, 미리 준비하여 저축한 것이 없으므로, 부끄럽게 머리를 숙인다. 임시로 뽑아내 만든 말은 더듬거리고 껄끄러워 말하기 어렵다. 뜻과 생각이 거칠고 멍해져서,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고 뒤틀린다. 앞에서 한 말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뒤에 이을 말은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한다. 옷을 추스르고 기침을 하면서 때를 연장시키려는 태도를 보여, 자리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이 한심해서 보는 도중에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시주는 시절에 응한 복을 잃고, 대중승려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어, 착함이 생기는 싹이 끊어진다. 오직 부질없는 의론의 의혹만이 불어나고, 비로소 함부로 나불거린다는 비난을 사므로, 끝내는 종사를 교대시키는 허물을 이루고야 만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고승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고승전 제14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서록(序錄)
원래 지극한 도는 어렴풋하여 방편[蹄筌]의 힘을 빌린 뒤에야 드러난다. 그윽한 이치는 깊이 엉켜서 스승에게 기대야만 쓰임을 이룬다. 이로 말미암아 성인의 자취가 번갈아 일어나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들이 의탁한 곳을 달리한다. 그러면서도 효성과 자비를 말하여서 임금을 공경하는 도리를 정하고, 시(詩)·서(書)·예(禮)·악(樂)을 밝혀서 풍속의 가르침을 이룬다.
혹 공을 잊고 일을 버려 저 텅 비움을 숭상하기도 한다. 혹 몸을 영고성쇠(榮枯盛衰)에 맡겨 이 세상에서 영달함을 무겁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가르침은 다만 한정된 영역 안에 국한된다. 그 공로도 오직 가까운 이익에만 둔다. 이는 무릇 점차로 물들게 하는 방법이며, 아직 그 깊고 신비한 본성을 다한 것은 아니다.
가령 부처님의 훈계에 이르러서는, 그 일과 과보의 그윽하고 미묘함을 헤아린다면, 3세를 순환한다. 그 지극한 이치의 높고 미묘함을 말한다면, 온갖 신령함을 다 꿰뚫는다. 만약 무릇 10지(地)의 경지를 열어 지혜의 근원을 말하여, 3제(諦)를 밝힘으로써 지혜의 곳집을 가려낸다면, 정신을 다하고 본성을 다한 가르침은 한결같이 중추적이고 극치를 이루는 이치를 맡는다.
불교 밖의 나머지 가르침을 이에 견준다면, 마치 수많은 흐름이 거대한 구렁으로 돌아가고,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 주위를 받드는 것과 같다. 그러니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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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아득하도다. 참으로 말로는 아직도 그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워라.
마침내 그 가르침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고, 그 형상이 육도에 두루한 데 이르러서는, 모두가 그윽이 어두운 곳의 중생들을 이끌어내어, 큰 이익이 되고자 한 까닭에서이다.
그러나 깨끗함과 더러움은 듣는 것에 따라 달라지고, 위로 오름과 아래로 떨어져 내림은 보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까닭에 서방에서는 소리와 형태의 근본을 앞세우지만, 동쪽 나라에서는 보고 듣는 이익을 뒤로 돌린다. 구름 속의 용이 동터오르는 새벽에 나타나듯, 바람을 몰아오는 호랑이가 밤중의 꿈에 나타나듯, 큰 바람을 부채질하자 불법의 큰 교화가 이에 무르녹는다.
그 때부터 서역의 이름 높은 승려가 때때로 이 땅에 이르렀다. 혹 경법을 전도하기도 하고, 혹 선도(禪道)를 교수하기도 하며, 혹 기적을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하고, 혹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한(漢)나라에서 우리 양(梁)나라까지는 시간과 연대가 더욱 멀다. 세상으로는 6대(代)를 건너오고 햇수로는 5백 년에 가깝다. 이 땅의 사문(沙門)들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재질을 머금고 빼어나게 일어선 이가, 무리를 이룬 영준한 승려들 사이에서 간혹 나온다. 시대를 번갈아 가며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의 기록에 따라, 서술하고 기재한 내용이 각기 다르다. 사문 법제(法濟)는 치우쳐 고일(高逸)한 한 가지 자취만을 서술하였다. 사문 법안(法安)은 다만 지조와 절개의 지절(志節)한 행실만을 나열하였다. 사문 승보(僧寶)는 오직 유방(遊方)한 한 과목만을 지었다. 사문 법진(法進)은 곧 전론(傳論)을 통틀어 모아썼지만, 말과 일에 빠지고 줄인 곳이 있었다. 모두 나란히 서로 번거롭고 간결한 차이가 있으며, 나오거나 빠진 것이 달라서, 행한 일을 살펴보아도 아직 그 귀결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유의경(劉義慶)의 「선험기(宣驗記)」와 「유명록(幽明錄)」, 태원왕(太原王) 유염(劉琰)의 「명상기(冥祥記)」, 팽성(彭城) 유준(劉俊)이 쓴 「익부사기(益部寺記)」, 사문 담종(曇宗)이 쓴 「경사사기(京師寺記)」, 태원왕(太原王) 유연수(劉延秀)의 「감응전(感應傳)」, 주군태(朱君台)의 「징응전(徵應傳)」, 도연명(陶淵明)의 「수신록(搜神錄)」등에도, 모두 한편으로는 여러 승려들의 전기가 나와 있어 그 평소의 풍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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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덧붙여 본 것이어서, 성글고 빠진 것이 많다. 제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의 『삼보기전(三寶記傳)』은 혹 불교의 역사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승록(僧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럴 만큼 이미 삼보를 함께 서술한 것이어서, 말뜻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뒤섞이고 넘쳐서 진실을 구하기 어렵고, 또한 거칠고 어둡다.
낭야(瑯琊)의 왕건(王巾)이 지은 『승사(僧史)』는 내용이 종합적으로 모은 듯하지만, 문체(文體)가 아직 부족하다. 사문 승우(僧祐)가 지은 『삼장기(三藏記)』에는 오직 30여 명의 승려만이 실려 있을 뿐,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중서랑(中書郞) 극경흥(郄景興)의 「동산승전(東山僧傳)」과 치중(治中) 장효수(張孝秀)의 「여산승전(廬山僧傳)」, 중서(中書) 육명하(陸明霞)의 「사문전(沙門傳)」은 각기 다투듯 한 지방만을 거론하였다. 고금의 일에 통하지 않고, 한 가지 뛰어남만을 보존하기에 힘썼으므로, 나머지 행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해서 작자는 있다. 그러나 혹 사람을 칭송하고 찬양하는 글 아래에는 지나치게 서로 추켜올리기도 한다. 혹 일을 서술하는 가운데, 공연히 많은 말을 허비하여 나열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진실한 이치를 구하려 하면, 딱 부러지게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혹 그 내용이 번거롭고 광범위한 것이 싫다 하여, 그 일을 잘라내고 줄인다. 그러니 드높은 자취의 기이함이 대부분 버려지고 깎인다.
이를테면 출가한 사람이 나라에 처하여 왕의 손님이 되면, 마땅히 스스로를 멀리하기에 힘써, 높이 뛰어나서 홀로 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어 영화를 떠나고 사랑을 버려, 본래 세속과 다른 것을 어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논하지 않고, 끝내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나는 일찍이 한가한 날에 우연히 많은 작품을 열람하였다. 곧 잡록(雜錄) 수십여 가(家)의 기록과 진(晋)·송(宋)·제(齊)·양(梁)의 『춘추서사(春秋書史)』와 진(秦)·조(趙)·연(燕)·양(凉)의 황조(荒朝)의 『위력(僞曆)』과 「지리잡편(地理雜篇)」·고문(孤文)·편기(片記)를 찾았다. 아울러 널리 권위자[古老]들에게 자문 받고, 널리 선달들을 방문하여, 그 유무를 비교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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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67)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우리 양(梁)의 천감(天監) 18년(519)에 이르른다. 모두 453년 257사람과 또 곁들여 나온 2백여 명이다. 그들의 덕과 일을 개진하여, 크게 열 가지 예(例)로 나눈다.
첫 번째는 역경(譯經), 두 번째는 의해(義解), 세 번째는 신이(神異), 네 번째는 습선(習禪), 다섯 번째는 명률(明律), 여섯 번째는 유신(遺身)1), 일곱 번째는 송경(誦經), 여덟 번째는 흥복(興福), 아홉 번째는 경사(經師), 열 번째는 창도(唱導)이다.
그러나 불법이 동쪽 나라에 유입된 것은 무릇 전역한 사람들의 공훈에 말미암은 결과이다. 혹 사막과 험한 산을 넘어오기도 하였다. 혹 배를 드넓은 파도 위에 띄우기도 하였다. 모두 자기 몸을 잊고 도에 순직하여 목숨을 맡기고, 불법을 널리 퍼뜨린 분들이다. 중국 땅이 밝게 열린 것은 오로지 이에 힘입은 결과이다. 이 공덕은 숭상할 만한 일인 까닭에 책 첫머리에 적는다.
가령 지혜와 이해력으로 정신을 열면, 도가 만억 사람을 아우른다. 감응에 통하여 교화로 나아가면, 강폭한 사람을 복되게 한다. 생각을 편안하게 하여 선정(禪定)에 안주하면, 공덕이 무성하다. 율법으로 널리 도우면,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다. 형체를 잊고 몸을 버리면, 자랑하고 인색하던 사람이 마음을 고친다. 불법의 말씀을 노래하고 외우면, 귀신과 사람이 경사로움을 머금는다. 복되고 착한 일을 심고 일으키면, 부처님이 남긴 모습을 전할 수 있다.
무릇 이 8과(科)는 모두가 그 자취가 같지 않고, 교화로서 젖어듦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공덕을 사부대중이 본받아서, 공훈이 3업(業)에 자리 잡는다. 그런 까닭에 뭇 경전이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뭇 성인이 기려 서술하는 것이다.
무릇 원류를 찾아 파헤쳐서, 취하거나 버릴 것을 헤아려 다지는 일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여러 찬(贊)과 논(論)으로 차례대로 적어, 이를 각 과(科)의 뒷글로서 갖춘다.
그러나 논에 지은 글은 보통의 문체(文體)와는 조금 다르다. 처음 대의(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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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를 표시한 것은 대체로 앞의 서문과 비슷하다. 요즘 시대의 사람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내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서 말할 것 같아서다[事同後議].
만약 그 사이에 앞뒤의 순서를 베풀 경우에는 번잡하다고 생각하므로, 짐짓 모두를 한 과목의 말미에 모두 배치시켜 통틀어 칭하여 논으로 삼는다. 또한 전독(轉讀)과 선창(宣唱)의 경우에는 비록 근원의 출처가 먼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기연에 응하여 속인을 깨우쳐서 참으로 유별난 공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북제와 전송의 인물을 섞어서 기록하되, 모두 빼어난 사람을 조목조목 줄 세운다.
지금 여기서 취하는 바는, 반드시 전독과 선창의 지음과 쓰임에 월등히 뛰어나거나, 1푼이라도 감응에 통함이 있으면, 이에 전기의 말미에 엮는다. 만약 이와 다를 경우에는 여기에 남겨두지 않는다.
무릇 10과(科)에서 서술한 내용은 모두 많은 기록에 산재해 있는 내용이다. 지금 여기서는 다만 잘라내서 한 곳에 모은 것뿐이다. 그런 까닭에 옛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 더 보태서 짓지는 않은 것이다. 무릇 한 책 안에서 펼쳐 열람하여, 여러 요점을 아울러 알게 한 것이다.
번거로운 말이나 허망한 찬사나, 혹 덕이 칭송할 만한 데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일률적으로 모두 생략하였다. 그런 까닭에 6대에 걸친 현인과 이인을 기술한 것이, 다만 열세 권의 책이 되었을 뿐이다. 서록과 아울러 합쳐서 두루마기 14축으로 만들어 『고승전』이라 이름짓는다.
전 시대에 지은 전기들은 대부분 명승(名僧)이라 하였다. 그러나 ‘명(名)’이라는 것은 본래 실상의 손님일 뿐이다. 만약 실질적으로 행하더라도 광채를 숨기면, 경지는 높아도[高] 이름난[名] 것은 아니다. 공덕이 적어도 시대에 어울리면, 이름은 나도 경지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름만 알려지고 경지가 높지 않으면, 본래 여기에 적지 않는다. 경지가 높으면서 이름나지 않았으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 싣는다. 그런 까닭에 ‘명(名)’이란 소리를 지우고
, 대신 ‘고(高)’란 글자로서 대신한다.
그 사이 원고의 초고에는 혹 버리고 잃은 부분이 있었다. 이제 이 열네 권에 찬(贊)과 논(論)까지 갖춘 것은 이것으로 결정판을 삼을 생각에서이다. 만약 아직 숨어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열람하는 사람이 소상히 지적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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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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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譯經) 상 15인
한(漢)나라 낙양(雒陽) 백마사(白馬寺) 섭마등(攝摩騰)
한나라 낙양 백마사 축법란(竺法蘭)
한나라 낙양 안청(安淸)
한나라 낙양 지루가참(支樓迦讖)[축불삭(竺佛朔)·안현(安玄)·엄불조(嚴佛調)·지요(支曜)·강거(康巨)·강맹상(康孟詳)]
위(魏)나라 낙양 담가가라(曇柯迦羅)[강승개(康僧鎧)·담제(曇帝)·백연(帛延)]
위오(魏吳) 건업(建業) 건초사(建初寺) 강승회(康僧會)
위오 무창(武昌) 유기난(維祇難)[법립(法立)·법거(法巨)]
진(晋)나라 장안(長安)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섭승원(聶承遠)·섭도진(聶道眞)]
진나라 장안 백원(帛遠)[백법조(帛法祚)·위사도(衛士度)]
진나라 건강(建康) 건초사(建初寺) 백시리밀(帛尸梨蜜)
진나라 장안 승가발징(僧伽跋澄)[불도라찰(佛圖羅刹)]
진나라 장안 담마난제(曇摩難提)[조정(趙政)]
진나라 여산(廬山) 승가제바(僧伽提婆)[승가라차(僧伽羅叉)]
진나라 장안 축불념(竺佛念)
진나라 강릉(江陵) 신사(辛寺) 담마야사(曇摩耶舍)[축법도(竺法度)]
고승전 제2권
역경 중 7인
진나라 장안 구마라집(鳩摩羅什)
진나라 장안 불야다라(弗若多羅)
진나라 장안 담마류지(曇摩流支)
진나라 수춘(壽春) 석간사(石磵寺) 비마라차(卑摩羅叉)
진나라 장안 불타야사(佛陀耶舍)
진나라 경사(京師) 도량사(道場寺)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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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하서(河西) 담무참(曇無讖)[안양후(安陽侯)·도보(道普)·법성(法盛)·법유(法維)·승표(僧表)]
고승전 제3권
역경 하 13인
송(宋)나라 강릉 신사 석법현(釋法顯)
송나라 황룡(黃龍) 석담무갈(釋曇無竭)
송나라 건강 용광사(龍光寺) 불타집(佛馱什)
송나라 하서 부타발마(浮陀跋摩)
송나라 경사 지원사(枳園寺) 석지엄(釋智嚴)
송나라 육합산(六合山) 석보운(釋寶雲)
송나라 경사 기원사(祇洹寺) 구나발마(求那跋摩)
송나라 경사 봉성사(奉誠寺) 승가발마(僧伽跋摩)
송나라 상정림사(上定林寺) 담마밀다(曇摩蜜多)
송나라 경조(京兆) 석지맹(釋智猛)
송나라 경사 도림사(道林寺) 강량야사(畺良耶舍)[승가달다(僧伽達多)·승가라다치(僧伽羅多哆)]
송나라 경사 중흥사(中興寺)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아나마저(阿那摩低)]
제(齊)나라 건강 정관사(正觀寺) 구나비지(求那毘地)[승가바라(僧伽婆羅)]
고승전 제4권
의해(義解) ① 14인
진나라 낙양(洛陽) 주사행(朱士行)[축숙란(竺叔蘭)·무라차(無羅叉)]
진나라 회양(淮陽) 지효룡(支孝龍)
진나라 예장산(豫章山) 강승연(康僧淵)[강법창(康法暢)·지민도(支敏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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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고읍(高邑) 축법아(竺法雅)[비부(毘浮)·담상(曇相)·담습(曇習)]
진나라 중산(中山) 강법랑(康法朗)[영소(令韶)]
진나라 돈황(燉煌) 축법승(竺法乘)[축법행(竺法行)·축법존(竺法存)]
진나라 섬동앙산(剡東仰山) 축법잠(竺法潛)[축법우(竺法友)·축법온(竺法蘊)·축법제(竺法濟)·강법참(康法讖)]
진나라 섬옥주산(剡沃洲山) 지둔(支遁)[지법도(支法度) 축법앙(竺法仰)]
진나라 섬산(剡山) 우법란(于法蘭)[축법흥(竺法興) 지법연(支法淵) 우법도(于法道)]
진나라 섬백산(剡白山) 우법개(于法開)[우법위(于法威)]
진나라 돈황 우도수(于道邃)
진나라 섬갈현산(剡葛峴山) 축법숭(竺法崇)[도보(道寶)]
진나라 시녕산(始寧山) 축법의(竺法義)
진나라 동완(東莞) 축승도(竺僧度)[축혜초(竺慧超)]
고승전 제5권
의해 ② 15인
진나라 장안 오급사(五級寺) 석도안(釋道安)[왕가(王嘉)]
진나라 포판(蒲坂) 석법화(釋法和)
진나라 태산(泰山) 곤륜암(崑崙巖) 축승랑(竺僧朗)[지승돈(支僧敦)]
진나라 경사 와관사(瓦官寺) 축법태(竺法汰)[담일(曇壹)·담이(曇貳)]
진나라 비룡산(飛龍山) 석승선(釋僧先)[도호(道護)]
진나라 형주(荊州) 상명(上明) 축승보(竺僧輔)
진나라 경사 와관사 축승부(竺僧敷)
진나라 형주 장사사(長沙寺) 석담익(釋曇翼)[승위(僧衛)]
진나라 형주 장사사 석법우(釋法遇)
진나라 형주 상명(上明) 석담휘(釋曇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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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장안 복주산(覆舟山) 석도립(釋道立)[승상(僧常)·법준(法濬)]
진나라 장사사 석담계(釋曇誡)
진나라 어체청산(於替靑山) 축법광(竺法曠)
진나라 오호구(吳虎丘) 동사(東寺) 축도일(竺道壹)[백도유(帛道猷)·도보(道寶)·도시(道施)]
진나라 산음(山陰) 가상사(嘉祥寺) 석혜건(釋慧虔)[담계(曇誡)·지명(智明)]
고승전 제6권
의해 ③ 13인
진나라 여산(廬山) 석혜원(釋慧遠)
진촉(晋蜀) 용연사(龍淵寺) 석혜지(釋慧持)[혜암(慧巖) 승공(僧恭) 도홍(道泓) 담란(曇蘭)]
진나라 여산 석혜영(釋慧永)[승융(僧融)]
진나라 여산 석승제(釋僧濟)
진나라 신양(新陽) 석법안(釋法安)
진나라 여산 석담옹(釋曇邕)
진나라 오대사(吳臺寺) 석도조(釋道祖)[혜요(慧要)·담순(曇順)·담설(曇說)·법유(法幽)·도항(道恒)·도수(道授)]
진나라 장안 대사(大寺) 석승략(釋僧䂮)[홍각(弘覺)]
진나라 팽성군(彭城郡) 석도융(釋道融)
진나라 장안 석담영(釋曇影)
진나라 장안 석승예(釋僧叡)[승개(僧揩)]
진나라 장안 석도항(釋道恒)[도표(道標)]
진나라 장안 석승조(釋僧肇)
고승전 제7권
의해 ④ 32인
송나라 경사 용광사(龍光寺) 축도생(竺道生)[보림(寶林) 법보(法寶) 혜생(慧生)]
송나라 경사 오의사(烏衣寺) 석혜예(釋慧叡)
송나라 경사 동안사(東安寺) 석혜엄(釋慧嚴)[법지(法智)]
송나라 경사 도량사(道場寺) 석혜관(釋慧觀)[승복(僧馥) 법업(法業)]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혜의(釋慧義)[승예(僧睿)]
송나라 경사 팽성사(彭城寺) 석도연(釋道淵)[혜림(慧琳)]
송나라 경사 팽성사 석승필(釋僧弼)
송나라 동아(東阿) 석혜정(釋慧靜)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승포(釋僧苞)[법화(法和)]
송나라 여항(餘杭) 방현사(方顯寺) 석승전(釋僧詮)
송나라 강릉 신사 석담감(釋曇鑒)[도해(道海)·혜감(慧龕)·혜공(慧恭)·담홍(曇泓)·도광(道廣)]
송나라 여산 능운사(凌雲寺) 석혜안(釋慧安)
송나라 회남(淮南) 중사(中寺) 석담무성(釋曇無成)[담경(曇冏)]
송나라 경사 영미사(靈味寺) 석승함(釋僧含)[도함(道含)]
송나라 강릉 슬파사(瑟琶寺) 석승철(釋僧徹)[승장(僧莊)]
송오(宋吳) 호구산(虎丘山) 석담제(釋曇諦)
송나라 수춘 석간사 석승도(釋僧導)[승인(僧因)·승음(僧音)·승성(僧成)]
송촉(宋蜀) 무담사(武擔寺) 석도왕(釋道汪)[보명(普明) 도은(道誾)]
송나라 산음(山陰) 천주산(天柱山) 석혜정(釋慧靜)
송나라 장사(長沙) 녹산(麓山) 석법민(釋法愍)[승종(僧宗)]
송나라 경사 북다보사(北多寶寺) 석도량(釋道亮)[정림(靜林)·혜륭(慧隆)]
송나라 단양(丹陽) 석범민(釋梵敏)[승약(僧籥)]
송나라 경사 중흥사 석도온(釋道溫)[승경(僧慶)·혜정(慧定)·혜숭(慧嵩)]
송나라 경사 중흥사 석담빈(釋曇斌)[담제(曇濟)·담종(曇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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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경사 하원사(何園寺) 석혜량(釋慧亮)
송나라 하정림사(下定林寺) 석승경(釋僧鏡)[담륭(曇隆)]
송나라 경사 영근사(靈根寺) 석승근(釋僧瑾)[담도(曇度)·현운(玄運)]
송나라 경사 흥황사(興皇寺) 석도맹(釋道猛)[도견(道堅)·혜란(慧鸞)·혜부(慧敷)·혜훈(慧訓)·도명(道明)]
송나라 산음 영가사(靈嘉寺) 석초진(釋超進)[담기(曇機)·도빙(道憑)]
송오(宋吳) 흥소산(興小山) 석법요(釋法瑤)[담요(曇瑤)]
송나라 경사 신안사(新安寺) 석도유(釋道猷)[도자(道慈)·혜정(慧整)·각세(覺世)]
송나라 경사 야성사(冶城寺) 석혜통(釋慧通)
고승전 제8권
의해 ⑤ 27인
제위위(齊僞魏) 제주(濟州) 석승연(釋僧淵)[혜기(慧記)·도등(道登)]
제위위 석담도(釋曇度)
제(齊)나라 경사 장엄사(莊嚴寺) 석도혜(釋道慧)[현취(玄趣)·승달(僧達)]
제나라 경사 중흥사 석승종(釋僧鍾)[담섬(曇纖)·담천(曇遷)·승표(僧表)·승최(僧最)·민달(敏達)·승보(僧寶)]
제나라 경사 천보사(天保寺) 석승성(釋僧盛)
제나라 경사 상관사(湘官寺) 석홍충(釋弘充)[법선(法鮮)]
제나라 고창군(高昌郡) 석지림(釋智林)
제나라 경사 영근사(靈根寺) 석법원(釋法瑗)[법애(法愛)·법상(法常)·지흥(智興)]
제촉(齊蜀) 제후산(齊后山) 석현창(釋玄暢)
제나라 상정림사 석승원(釋僧遠)[도빙(道憑)·법령(法令)·혜태(慧泰)]
제나라 형주 죽림사(竹林寺) 석승혜(釋僧慧)[담신(曇愼)·혜창(慧敞)·승수(僧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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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상정림사 석승유(釋僧柔)[홍칭(弘稱)·승발(僧拔)·혜희(慧熙)]
제나라 산음 법화산(法花山) 석혜기(釋慧基)[승행(僧行)·혜회(慧恢)·도욱(道旭)·혜구(慧求)·혜심(慧深)·법홍(法洪)]
제나라 경사 사사(謝寺) 석혜차(釋慧次)[승보(僧寶)·승지(僧智)·법진(法珍)·승향(僧嚮)·승맹(僧猛)·법보(法寶)·혜조(慧調)]
제나라 경사 하원사(何園寺) 석혜륭(釋慧隆)[지탄(智誕)·승변(僧辯)·승현(僧賢)·통혜(通慧)·법도(法度)]
제나라 경사 태창사(太昌寺) 석승종(釋僧宗)[담준(曇准)·법신(法身)·법진(法眞)·혜령(慧令)·승현(僧賢)·법선(法仙)·법최(法最)·승경(僧敬)·도문(道文)]
제나라 경사 중흥사 석법안(釋法安)[혜광(慧光)·경유(敬遺)·광찬(光贊)·혜복(慧福)·도종(道宗)]
제나라 경사 중흥사 석승인(釋僧印)[혜룡(慧龍)]
제나라 낭야섭산(瑯琊山) 석법도(釋法度)[법소(法紹)·승랑(僧朗)·혜개(慧開)·법개(法開)·승소(僧紹)] (山+聶)
양(梁)나라 경사 치성사(治城寺) 석지수(釋智秀)[법정(法整)·승약(僧若)·승선(僧璿)·도승(道乘)]
양나라 형주 석혜림(釋慧琳)
양나라 경사 영요사(靈曜寺) 석승성(釋僧盛)[법흔(法欣)·지창(智敞)·법경(法冏)·승호(僧護)·승소(僧韶)]
양나라 산음 운문산사(雲門山寺) 석지순(釋智順)
양나라 경사 영미사(靈味寺) 석보량(釋寶亮)[도명(道明)·승성(僧成)·승보(僧寶)]
양나라 상정림사 석법통(釋法通)[성진(聖進)]
양나라 경사 초제사(招提寺) 석혜집(釋慧集)
양나라 섬법화대(剡法華臺) 석담비(釋曇斐)[법장(法藏)·명도(明度)]
고승전 제9권
신이(神異) 상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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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업중(鄴中) 축불도징(竺佛圖澄)[도진(道進)]
진나라 나부산(羅浮山) 단도개(單道開)
진나라 상산(常山) 축불조(竺佛調)
진나라 낙양 기역(耆域)
고승전 제10권
신이 하 16인
진나라 낙양 반치산(盤鵄山) 건타륵(揵陀勒)
진나라 낙양 누지산(婁至山) 가라갈(呵羅竭)
진나라 양양(襄陽) 축법혜(竺法慧)[범재(范材)]
진나라 낙양 대시사(大市寺) 안혜칙(安慧則)[혜지(慧持)]
진나라 장안 섭공(涉公)
진나라 서평(西平) 석담곽(釋曇霍)
진나라 상우룡산(上虞龍山) 사종(史宗)
송나라 경사 배도(杯度)
송위위(宋僞魏) 장안 석담시(釋曇始)
송나라 고창(高昌) 석법랑(釋法朗)[법정(法整)]
송나라 민산(岷山) 통운사(通雲寺) 소석(邵碩)
송나라 강릉 비파사(琵琶寺) 석혜안(釋慧安)[승람(僧覽)·법위(法衛)]
제나라 경사 지원사 사미(沙彌) 석법궤(釋法匱)[법개(法揩)]
제나라 형주 석승혜(釋僧慧)[혜원(慧遠)]
제나라 수춘 석혜통(釋慧通)
양나라 경사 석보지(釋保誌)[도향(道香)·승랑(僧朗)]
고승전 제11권
[습선(習禪)·명률(明律)]습선(習禪) 21인
진나라 강좌(江左) 축승현(竺僧顯)
진나라 섬은악산(剡隱岳山) 백승광(帛僧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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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 / 606] 쪽
진나라 시풍(始豊) 적성산(赤城山) 축담유(竺曇猷)[혜개(慧開)·혜진(慧眞)]
진나라 장안 석혜외(釋慧嵬)
진나라 광한(廣漢) 염흥사(閻興寺) 석현호(釋賢護)
진나라 시풍 적성산 지담란(支曇蘭)
진촉(晋蜀) 석실산(石室山) 석법서(釋法緖)
진위위(晋僞魏) 평성(平城) 석현고(釋玄高)[혜숭(慧崇)]
송나라 장안 한산(寒山) 석승주(釋僧周)[승량(僧亮)]
송나라 장안 태후사(太后寺) 석혜통(釋慧通)
송나라 여항(餘杭) 석정도(釋淨度)
송나라 시풍 폭포산(瀑布山) 석승종(釋僧從)
송나라 광한(廣漢) 석법성(釋法成)
송나라 경사 중흥사 석혜람(釋慧覽)
송나라 형주 장사사(長沙寺) 석법기(釋法期)[도과(道果)]
송나라 성도(成都) 석도법(釋道法)
송촉 안락사(安樂寺) 석보항(釋普恒)
제나라 경사 영취사(靈鷲寺) 석승심(釋僧審)[승겸(僧謙)·법은(法隱)·초지(超志)·법달(法達)·혜승(慧勝)]
제나라 무창(武昌) 번산(樊山) 석법오(釋法悟)[도제(道濟)]
제나라 전당(錢塘) 영원산(靈苑山) 석담초(釋曇超)
제나라 시풍 적성산 석혜명(釋慧明)
명률(明律) 13인
송나라 강릉 석혜유(釋慧猷)
송오(宋吳) 한거사(閑居寺) 석승업(釋僧業)[혜광(慧光)]
송나라 경사 장락사(長樂寺) 석혜순(釋慧詢)
송나라 경사 장엄사(莊嚴寺) 석승거(釋僧璩)[도원(道遠)]
송나라 팽성군 석도엄(釋道儼)[혜요(慧曜)]
송나라 강릉 석승은(釋僧隱)[성구(成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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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606] 쪽
송나라 광한 석도방(釋道房)
송나라 경사 한심사(閑心寺) 석도영(釋道營)[혜우(慧祐)]
제나라 종산(鍾山) 영요사(靈曜寺) 석지도(釋志道)[초도(超度)]
제나라 경사 다보사(多寶寺) 석법영(釋法穎)[혜문(慧文)]
제촉(齊蜀) 영건사(靈建寺) 석법림(釋法琳)
제나라 경사 안락사 석지칭(釋智稱)[총초(聰超)]
양나라 경사 건초사(建初寺) 석승우(釋僧祐)
고승전 제12권
[망신(亡身) 송경(誦經)]
망신(亡身) 11인
진나라 곽산(霍山) 석승군(釋僧群)
송나라 팽성 가산(駕山) 석담칭(釋曇稱)
송나라 고창(高昌) 석법진(釋法進)[승도(僧導)]
송나라 위군(魏郡) 정위사(廷尉寺) 석승부(釋僧富)
송위진(宋僞秦) 포판(蒱坂) 석법우(釋法羽)[혜시(慧始)]
송나라 임천(臨川) 초체사(招提寺) 석혜소(釋慧紹)[승요(僧要)]
송나라 여산 초은사(招隱寺) 석승유(釋僧瑜)
송나라 경사 죽림사(竹林寺) 석혜익(釋慧益)
송촉(宋蜀) 무담사(武擔寺) 석승경(釋僧慶)
제나라 농서(隴西) 석법광(釋法光)
제나라 교지(交阯) 선산(仙山) 석담홍(釋曇弘)
송경(誦經) 21인
진나라 하음(河陰) 백마사(白馬寺) 석담수(釋曇邃)
진나라 월성사(越城寺) 석법상(釋法相)[담개(曇蓋)·승법(僧法)]
진나라 산음 현의사(顯義寺) 축법순(竺法純)
진촉(晋蜀) 삼현사(三賢寺) 석승생(釋僧生)
송나라 섬(剡) 법화대(法華臺) 석법종(釋法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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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경사 남간사(南澗寺) 석도경(釋道冏)
송나라 여산 석혜경(釋慧慶)
송나라 임위(臨渭) 석보명(釋普明)
송나라 경사 도량사 석법장(釋法莊)
송나라 경사 와관사(瓦官寺) 석혜과(釋慧果)
송나라 경사 동안사(東安寺) 석법공(釋法恭)[승공(僧恭)]
송나라 경사 팽성사(彭城寺) 석승복(釋僧覆)[혜림(慧琳)]
제나라 경사 고좌사(高座寺) 석혜진(釋慧進)[승념(僧念)]
제나라 영흥(永興) 백림사(栢林寺) 석홍명(釋弘明)
제나라 경사 영근사(靈根寺) 석혜예(釋慧豫)[법음(法音)]
제나라 상정림사 석도숭(釋道崇)
제나라 상정림사 석초변(釋超辯)[법명(法明)·승지(僧志)·법정(法定)]
제나라 산음 천주산(天柱山) 석법혜(釋法慧)[담유(曇遊)]
제나라 경사 후강(後岡) 석승후(釋僧侯)[혜온(慧溫)]
양나라 상정림사 석혜미(釋慧彌)[법선(法仙)]
양나라 부양(富陽) 제견사(齊堅寺) 석도림(釋道琳)
고승전 제13권
[흥복(興福)·경사(經師)·도사(導師)]
흥복(興福) 14인
진나라 병주(幷州) 축혜달(竺慧達)
진나라 무릉평산(武陵平山) 석혜원(釋慧元)[축혜직(竺慧直)]
진나라 경사 와관사 석혜력(釋慧力)
진나라 경사 안락사 석혜수(釋慧受)
송나라 경사 숭명사(崇明寺) 석승혜(釋僧慧)
송나라 산음 법화산 석승익(釋僧翼)
송나라 예주(豫州) 석승홍(釋僧洪)
송나라 경사 석승량(釋僧亮)
송나라 경사 연현사(延賢寺) 석법의(釋法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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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남해(南海) 운봉사(雲峯寺) 석혜경(釋慧敬)
제나라 남해 장미산(藏薇山) 석법헌(釋法獻)
제나라 상정림사 석법헌(釋法獻)[현창(玄暢)]
양나라 섬석성산 석승호(釋僧護)
양나라 경사 정각사(正覺寺) 석법열(釋法悅)
경사(經師) 11인
진나라 중산 백법교(帛法橋)
진나라 경사 건초사(建初寺) 지담약(支曇籥)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법평(釋法平)
송나라 경사 백마사 석승요(釋僧饒)
송나라 안락사 석도혜(釋道慧)
송나라 사사(謝寺) 석지종(釋智宗)
제나라 오의사 석담천(釋曇遷)
제나라 동안사 석담지(釋曇智)
제나라 안락사 석승변(釋僧辯)
제나라 백마사 석담빙(釋曇憑)
제나라 북다보사(北多寶寺) 석혜인(釋慧忍)
창도(唱導) 10인
송나라 경사 기원사 석도조(釋道照)
송나라 장간사(長干寺) 석담영(釋曇穎)
송나라 와관사 석혜거(釋慧璩)
송나라 영미사 석담종(釋曇宗)
송나라 중사 석담광(釋曇光)
제나라 흥복사 석혜분(釋慧芬)
제나라 흥복사 석도유(釋道儒)
제나라 와관사 석혜중(釋慧重)
제나라 정승사(正勝寺) 석법원(釋法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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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제륭사(濟隆寺) 석법경(釋法鏡)
이상 13권(卷) 10과(科) 257인이다.
아버지를 여윈 고자(孤子) 만영(曼穎)은 머리 조아려 공경히 예를 올리나이다.
어느 날 지으신 『고승전』을 보여 주심을 받고, 아울러 하나하나 주워 올리게 시키셨습니다. 그 처음부터 끝까지를 힘써 찾았으나, 다만 보이는 것은 위대하신 재능이었습니다.
종이는 낡고 먹물은 바래지도록, 아직까지도 다 일을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저 지극한 불법에 힘입어 이름난 대덕 승려께서 이미 일어난 일은, 세월이 거의 5백 년에 달하고 시대가 6대를 지났습니다. 마등(摩騰)과 법란(法蘭)이 서역에서 여행을 떠나고, 안후(安侯)와 지참(支讖)이 동도(東都)에 지팡이를 메고 온 이래, 비록 남긴 자취의 표시는 들쑥날쑥하고, 행실에는 얕고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두가 배가 되고 교량이 되어, 큰 이익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승려와 속인들이 그 아름다움을 전하
고 문필로 글을 정하여, 후손들에게 밝게 보여서 지난날의 빼어난 업적을 부추겨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안(道安)과 구마라집이 간간이 진나라 역사서인 『진서(秦書)』에 드러나고, 불징(佛澄)과 도진(道進)이 조나라 역사서인 『조책(趙冊)』에 섞여 알려졌을 뿐입니다. 진나라 역사책인 『진사(晋史)』에서는 버림받아, 한스럽게도 당시의 사람에 국한되었습니다. 송나라 역사책인 『송전(宋典)』에 남아 있는 것도, 자못 그 때 모은 것에 기초하였을 뿐입니다.
또한 아울러 군대(君台)의 기록이 허를 찔러 세상에 나오고, 원량(元亮)의 설이 뒤섞여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감응을 혹 헤아려 정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음과 나타남의 대강의 줄거리만 남아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광범하게 곁가지 글을 드러내었다 하더라도, 아직 빛나게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간간이 여러 전기들이 있으나, 또한 숨은 것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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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景興)은 잠시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을 채택하였습니다. 승보(僧寶)는 치우치게 사방을 노닌 사람만을 엮었습니다. 법제(法濟)는 오직 높이 뛰어난 분의 예만을 벌려 놓았습니다. 법안(法安)은 오직 지조와 절개의 과목만을 이름지었습니다. 강홍(康泓)은 오로지 단도개(單道開)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왕수(王秀)는 다만 높은 자리에 앉은 승려만을 칭송하였습니다. 승유(僧瑜)는 우뚝이 홀로 높은 이들만을 실었습니다. 현창(玄暢)은 초연히 외로운 이만 기
록하였습니다.
오직 법진(法進)이 지은 것과 왕건(王巾)이 저작한 내용만이 종합적으로 해박하게 모은 것이어서, 일가(一家)로서 명성을 떨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진은 이름을 널리 모았으나 내용이 광범위하지 못합니다. 왕건은 바탕은 세웠으나, 자리 잡지는 못하였습니다.
양(梁)시대 이래로, 전기를 지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여러 가지 병폐가 있습니다. 승우(僧祐)가 이룬 책은 이미 법제(法濟)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효수(孝秀)가 물 묻힌 붓도 다시 경흥(景興)의 비난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보창(寶唱) 공께서 찬집한 전기가 사실과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요구한다면, 다시 번거롭고 쓸데없다는 것이 한이 됩니다.
법사의 이 제작이야말로, 비로소 이른바 끊어지지 않는 대문장이십니다. 면면히 예와 이제를 잇고 안팎을 포괄하였습니다. 말을 지은 것이 일과 나란하여, 문채가 나지도 않고, 질박(質朴)하지도 않습니다. 번잡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략하고, 너무 요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덧붙였습니다.
덕이 높은 것으로서 이름을 지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예(例)를 개진하여 광범한 내용을 이루어, 착함이 있는 사람에게 권유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몇몇 사람들이 전후해서 찬술한 것과, 어찌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하고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해를 같이하고 날을 함께 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제자는 끝까지 한마디의 말도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저잣거리의 가게에 공연히 천금의 상품을 마련한 셈입니다. 바야흐로 용함(龍函)에 버금가는 자리에 들어가고, 위로 기린의 누각에 올라가서, 그 안에서 구슬 같은책 보따리를 꺼내, 옥상자[玉笥]에서 폈다 말았다 할 만한 책입니다.
제자는 비록 참으로 민첩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병든 나머지 부딪치는 곳마다 어두운 것이 많습니다. 또한 보내오신 책을 펴보니, 우리 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찬앙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토론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진실로 뛰어난 선생님의 근원이 되고 법칙이 되는 논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도문에 처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글을 알아, 부끄럽기만 합니다. 부질없이 사안(謝安)이 축광(竺曠)의 풍류를 사모하고, 은호(殷浩)가 지둔(支遁)의 재능이 뛰어남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깊어질 따름입니다.
만나지 못한 지 열흘이 지나니, 궁한 정이 이미 고단합니다. 힘을 부추겨 이것을 아룀으로써, 모든 것을 하소연하는 것에 대신합니다. 아버지를 여윈 제자 왕만영(王曼穎)은 머리 조아려 공경히 예를 올리나이다.
아무개는 아룁니다[君白].
제가 어느 날 지었던 『고승전』을 가려내 본 것은, 생각을 마음에 교훈이 되어 다스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보내주신 여러 장의 편지로 의문을 씻어내기를 거듭 더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도는 사람에 기대서 넓혀지고, 진리는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를 널리 퍼뜨리는 일에서는 고승보다 더 숭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에 점차로 물들게 된 이래로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밝혔습니다. 남다른 공덕과 남다른 행실이 여러 시대에 이어져 일어나서, 후생들을 도탑게 힘쓰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이것을 모아 엮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빈도는 어려서부터 책을 품거나 대나무쪽 같은 책을 안고, 스스로 독려하는 부지런함이 모자랐습니다. 장년이 되어서야, 문필로서 착함을 부추기는 아름다움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듣고 보는 여가의 한가한 때에 전기의 기록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1푼이라도 칭송할 만한 전기를 볼 때마다, 곧 가슴 깊이 날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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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를 반성해 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만 많은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번다함과 요약됨에서 같지 않았습니다. 혹 얼기설기 엮어서 들쭉날쭉한 것과, 혹 행한 일이 들락날락한 것은, 이미 따로 서문에서 소상히 밝혔습니다. 아울러 보내오신 글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짧은 붓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문득 10과(科)를 세워 가닥과 흐름을 헤아려서 정하고, 뜻과 말을 대략 들어올렸습니다. 그렇지만 글 솜씨는 어둡기만 하고, 글투는 더럽고 졸렬하기만 합니다. 본래 스스로 갖춘 것이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어찌 함부로 분수에 넘치게 높으신 분의 귀까지 들리겠습니까?
시주께서는 이미 학문이 공자와 석가를 겸하고, 이해력이 도가와 유가를 꿰뚫었습니다. 그러므로 뽑아내서 엮은 문장은 안팎이 한 곳에 머물러 돕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펴서 보시는 여가에, 혹 소상히 열람하실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고 비속한 신분을 잊고서, 용문(龍門)에 간택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높고 글은 거칠어서, 오래도록 가슴에 품기에는 부끄러운 생각이 많습니다. 보내신 말씀은 거짓 부풀려 말씀하신 것이어서, 더욱 답답함만 더합니다. 지금 지은 바의 찬과 논(論)과 10과를 거듭 가려냈습니다. 만약 잘못된 오류가 있다면, 청컨대 갖추어 짐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려 아무개[釋君白]가 아룁니다.
이 전기는 회계(會稽) 가상사(嘉祥寺) 혜교(慧皎) 법사가 지은 것이다. 법사는 배움이 내·외전에 뛰어나고, 경과 율 모두 강의를 잘하였다. 「열반소(涅槃疏)」10권과 「범망계(梵網戒)」 등에 대한 의소(義疏)를 지어, 모두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이 『고승전』 13권을 지었다.
양(梁)나라 말엽 승성(承聖) 2년(553) 계유년에 후경(侯景)의 난을 피하여 분성(湓城)에 왔다. 잠시 강설하다가 갑술년(554) 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강주(江州) 승정(僧正) 혜공(慧恭)이 장례를 경영하여, 여산의 선각사(禪閣寺) 묘지에 묻었다. 용광사(龍光寺)의 승과(僧果)가 함께 피난하여 산에 있었다. 우연히 당시의 일을 보고 잠시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각주)-----------------
1) 여덟 가지의 악기. 곧 금(金: 鍾)·석(石: 磬)·사(絲: 絃)·죽(竹: 管)·포(匏: 笙)·토(土: 壎)·혁(革: 鼓)·목(木: 祝敔) 등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