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권
오백 아라한(阿羅漢) 지음
현장(玄奘) 한역
송성수 번역
아비달마발지대비바사론서(阿毘達磨發智大毘婆娑論序)
[문] 누가 이 논(論)1)을 지었는가?
[답] 불세존(佛世尊)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法性)은 심히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분이 아니면 누가 끝까지[究竟] 평등하게 깨달아서[等覺] 열어 보이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가 묻고 누가 대답했는가?
어떤 이는 “사리자(舍利子) 존자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5백 아라한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모든 천신(天神)들이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다른 논사(論師)는 “세존께서 변화로 만들어낸 비구가 묻고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으레 알아야 하는 법성을 모든 세간에 반드시 열어 보이셔야 하는데 묻는 이가 없으면 그때 세존께서는 변화로
1) 총서(總序)의 처음으로서 먼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연원과 그 정리자(整理者)가 누구인가 논구하는 부분이다. 대개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은 다 같이 불설(佛說)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불설아비달마론』의 전래에 관해서 아비달마 논사(論師)의 의제(議題)가 된다. 이 논이 귀결(歸結)되는 아비달마의 내용은 물론 불설이나 이 아비달마를 정리한 부처님의 제자인 논사들 중에 『발지론(發智論)』의 저자인 가다연니자(迦多衍尼
子)는 가장 우수한 정리자이며 거기에 정리된 『발지론』은 참으로 불설의 진의(眞意)를 대표한 것이라고 논단(論斷)하는 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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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를 만드시되 생김새가 단정하여 여러 대중들이 보기 좋아하며, 수염과 머리를 깎아 없애고, 승가지(僧伽胝)2)를 입혀 그로 하여금 묻게 하고 세존께서는 대답하시기 때문이니, 마치 『의품경(義品經)』의 인연을 물은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논은 무엇 때문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3) 존자가 지었다고 전해오는가?
[답] 그 존자가 기억하여 연설해서 널리 유포했기 때문에 이 논의 지은이의 이름을 그에게 돌렸으나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또 어떤 이는 “이 논은 바로 저 가다연니자 존자가 지었다”고 말한다.
[문] 어찌 앞에서 “모든 종류의 알아야 하는 법성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니, 불세존같이 일체지를 지닌 이가 아니시면 누가 끝까지 평등하게 깨달아서 열어 보이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존자가 이 논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답] 그 존자도 미묘하고 매우 깊으며 날래고 날카로우며 교묘한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있어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잘 알고, 글의 뜻과 전제(前際)․후제(後際)를 통달했으며, 삼장(三藏)을 잘 이해하고 삼계(三界)의 오염[染]을 여의었으며, 3명(明)을 성취했고, 6신통(神通)과 8해탈(解脫)을 갖추었으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고 묘원지(妙願智)를 얻었으며, 일찍이 과거 5백의 부처님 처소에서 범행(梵行)을 쌓고 닦으면서
‘나는 미래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비달마(阿毘達磨)를 지으리라’고 큰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
모든 여래․응공․정등각의 제자들 중에는 으레 모두 두 분의 큰 논사[二大論師]가 있어 정법(正法)을 맡아 지니니,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라면 사리자 존자와 같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라면 가다연니자 존자와 같다. 그러므로 저 존자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법에 이익될 것을 관찰하여 이
2) 범어 saṁghāṭī의 음역어이다. 세 개의 승려 옷 중에 대의(大衣)이고, 승가리(僧伽梨) 또는 가사(袈裟)라고도 한다.
3) 범어 Kātyāyanīputra의 음역어이다. 가전연자(迦栴延子) 또는 가전연니자(迦氈延尼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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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을 지은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는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 곳곳의 방읍(方邑)에서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갖가지 논의 길[論道]로써 아비달마를 분별하고 연설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나 세간에 계실 때에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이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경을 모아 편찬하여 따로따로 부류(部類)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다연니자 존자는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역시 묘한 서원과 지혜로써 순서에 따라 편찬하여 『발지론(發智論)』을 지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논의 길 가운데서 장문(章門)4)을 세워 간략한 게송을 제시하고 따로따로 납식(納息)을 짓고 통틀어 온(蘊)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른바 갖가지 이상(異相)의 논의 길을 모아 잡온(雜蘊)을 만들었고, 결(結)의 논의 길을 모아 결온(結蘊)을 만들었으며, 지(智)의
논의 길을 모아 지온(智蘊)을 만들었고, 업(業)의 논의 길을 모아 업온(業蘊)을 만들었으며, 대종(大種)의 논의 길을 모아 대종온(大種蘊)을 만들었고, 근(根)의 논의 길을 모아 근온(根蘊)을 만들었으며, 정(定)의 논의 길을 모아 정온(定蘊)을 만들었고, 견(見)의 논의 길을 모아 견온(見蘊)을 만든 것이다.
모든 오타남송(鄔拖南頌)5)은 모두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불세존께서 곳곳의 방읍에서 갖가지 유정들을 위하여 형편에 맞게 말씀하셨
4) 여기서는 발지 본론(發智本論)의 조직(組織)을 밝힌 것으로서 『발지론』은 통틀어 8온(蘊)으로 성립되고 각 온은 다시 여러 납식(納息:varga 品)으로 나누어져 있다. 온은 편(篇)에 해당하고 납식은 장(章)에 해당한다. 8온이라 함은, 첫째는 잡온(雜蘊:8納息이 있다)이요, 둘째는 결온(結蘊:4納息이 있다)이며, 셋째는 지온(智蘊:5納息이 있다)이요, 넷째는 업온(業蘊:5納息이 있다)이며, 다섯째는 대종온(大種蘊:4納息이 있다)이요,
여섯째는 근온(根蘊:7納息이 있다)이며, 일곱째는 정온(定蘊:5納息이 있다)이요, 여덟째는 견온(見蘊:6納息이 있다)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은 실로 이 8편 44품(品)에 걸쳐서 이를 글자에 따라 해석하고 그 사이에 갖가지 의론(議論)을 곁들인 것이므로 적어도 이 8온의 순서를 늘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본론의 진전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리라 믿는다.
5) 범어 udāna의 음역어이다. 섭송(攝頌)이라 한역하는데, 경․율․논을 말한 후 또는 말하는 데 있어서 뜻 또는 제목을 하나로 정리하여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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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 대덕(大德) 법구(法救)가 차츰차츰 들었던 것을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하여 품명(品名)을 붙였으니, 무상(無常)에 대한 게송을 모아 「무상품(無常品)」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나아가 범지(梵志)에 대한 게송을 모아 「범지품(梵志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아비달마는 본시 부처님의 말씀인데 역시 존자가 순서에 따라 모아 편찬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이거나 제자의 말에 관계없이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세존께서는 모두 비구들이 받아 지니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저 존자는 하나하나 들었던 것을 때로는 서원과 지혜의 힘으로써 관찰하여 그것을 모아 편찬하여 정법이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게 하려고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또 모든 부처님은 세간에 나오시면 모두 삼장(三藏6))을 말씀하시니, 소달람(素怛纜)7)과 비나야(毘那耶)8)와 아비달마(阿毘達磨)이다.
이와 같은 삼장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지혜의 바다[一智海]에서 생겼기 때문이요, 하나의 깨달음의 연못[一覺池]을 따라 나왔기 때문이며, 평등한 힘[等力]과 두려움 없음[無畏]에 섭수되기 때문이요, 동일한 대비(大悲)에서 똑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또한 차별이 있다. 우선 이름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소달람이라 하고, 이것은 비나야라 하며, 이것은 아비달마라 한다. 또 의지하는 곳[依處]이 서로 다르다. 만일 증상의 마음[增上心]에 의지하여 논한 길[論道]이면 소달람이요, 만일 증상의 계율[增上戒]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며, 만일 증상의 지혜[增上慧]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라고 말한다.
[문] 모든 것 가운데서는 모두를 얻을 수 있다. 소달람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고,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6) 경․율․논의 내용을 밝혀서 삼자(三者)의 관계를 논하고 특히 아비달마 논장(論藏)이 뛰어난 까닭을 밝히려 하는 문단(文段)이다.
7) 범어 sūtra의 음역어로써 경(經)을 말한다.
8) 범어 vinaya의 음역어로써 율(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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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마음과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삼장에는 당연히 차별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답] 더욱 뛰어나다는 설[增勝說]에 의거한 것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고, 비나야 가운데서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며, 아비달마 가운데서는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 더욱 뛰어나다.
어떤 이는 “소달람 가운데서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요,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비나야 가운데서도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 가운데서도 증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아비달마요, 증상의 마음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소달람이며, 증상의 계율에 의지하여 논한 길이면 비나야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곳에 따라 역시 차별이 있다.
또 드러내는 것[所顯]에서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차례[次第]를 드러내니, 소달람 가운데서는 마땅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 품(品) 다음에 곧장 저 품을 말씀하셨을까?’라고 차례를 구해야 한다. 만일 비나야라면 연기(緣起)를 드러내니, 비나야 가운데서는 마땅히 ‘세존께서 어떤 연기법을 의지해서 저와 같은 학처(學處)를 세우셨는가?’라고 연기를 구해야 한다. 만일 아비달마라면 성품과 모양[性相]을 드러내니, 아비달마 중에서는 모든 법의 진실
한 성품과 모양을 구해야만 하고 저 차례와 연기를 구하여 혹은 앞인지 혹은 뒤인지 혹은 연기가 없는지 모두 과실은 없는지 구해서는 안 된다.
또 등류(等流)9)에도 차별이 있다. 소달람은 힘[力]의 등류요, 비나야는 대비(大悲)의 등류이며, 아비달마는 무외(無畏)의 등류이다.
9) 인(因)으로부터 과(果)를 유출할 때에 원인과 결과[因果]가 서로 닮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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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씀한 것[所說]에도 차별이 있다. 갖가지를 뒤섞어 말씀하신 것은 소달람이요, 모든 학처를 말씀하신 것은 비나야이며,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한 것은 아비달마이다.
또 하는 일[所爲]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면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선근을 심은 이면 상속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상속한 뒤에 성숙한 이면 바른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또 분위(分位)에도 차별이 있다. 업을 시작한 자리[始業位]에 의거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익숙히 익힌 자리[已串習位]에 의거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뛰어나게 작의하는 자리[超作意位]에 의거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또 나아감[進趣]에도 차별이 있다. 아직 바른 법[正法]에 들지 못했으면 바른 법에 들게 하기 위하여 소달람을 말하고, 이미 바른 법에 들었으면 학처(學處)를 받아 지니게 하기 위하여 비나야를 말하며, 이미 학처를 받아 지녔으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통달하게 하기 위하여 아비달마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장에는 역시 차별이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이 논을 지었는가?
[답] 다른 이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다. 저 존자는 ‘어떻게 하면 모든 유정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해 뒤바뀜 없이 받아 지니면서 정진하고 사유(思惟)하고 헤아리고 관찰하여 한량없는 번뇌와 나쁜 행이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곧장 매우 깊은 법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게 할까?’라고 생각하여 이 논을 지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어둡고 캄캄한 곳에 크고 밝은 등불을 켜 놓아 눈 있는 이들이 갖가지 색깔을 보게 하는 것처럼, 존자도 그러하여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이 논을 지어서 지혜 있는 이들이 깊은 법성(法性)에 들 수 있게 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分敎)를 열어 보이고 연설하신 것과 같으니, 첫째는 계경(契經)10)이요, 둘째는 응송
10) 경문(經文)은 사람들의 소질에 들어맞고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계경(契經)이라 한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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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頌)이며, 셋째는 기별(記別)이요, 넷째는 풍송(諷頌)이며, 다섯째는 자설(自說)이요, 여섯째는 연기(緣起)이며, 일곱째는 비유(譬喩)요, 여덟째는 본사(本事)이며, 아홉째는 본생(本生)이요, 열째는 방광(方廣)이며, 열한째는 희법(希法)이요, 열두째는 논의(論議)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에게 비록 인(因)의 힘은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깨달음을 일으킬 자도 끝내 뛰어난 곳을 향해 나아가는 행을 닦을 수 없으니 반드시 연의 힘을 만나야 수행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못 가운데에 비록 갖가지 온발라(蘊鉢羅)11) 등 여러 묘한 연꽃이 있으나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지 않으면 꽃이 피어서 갖가지 향기를 내지 못하니 반드시 해와 달의 광명이 비춰주어야 종류에 따라 꽃을 피워 향기를
내는 것과 같다.
또 어둠 속에 갖가지 물건이 있으나 등불이 비춰줌이 없으면 끝내 볼 수 없으니 반드시 등불의 비춤을 빌려야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비록 인(因)의 힘이 있으나 연(緣)의 힘이 없으면,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처럼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어두운 방 안에
갖가지 물건이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어둠에 가려져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네.
이처럼 지혜가 있더라도
다른 이에게 법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은 마침내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네.
비유하면 눈 있는 이가
등불로 인하여 여러 빛깔을 보는 것처럼
11) 범어 utpala의 음역어로써 청연화(靑蓮花)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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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이도 많이 들음에 의하여야
선악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네.
많이 들음[多聞]은 법을 알 수 있게 하고
많이 들음은 불선(不善)을 여의게 하며
많이 들음은 무의(無義)를 버리게 하고
많이 들음은 열반을 얻게 한다네.
또 경에서 “두 가지 인연(因緣)이 있어야 바른 견해[正見]을 내게 되니, 첫째는 밖으로 다른 이의 법음(法音)을 듣는 것이고 둘째는 안으로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如理作意]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서 “네 가지 법의 사람[四法人]이 있어서 많이 짓게 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착한 벗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이치대로 사유하는 것이요, 넷째는 법에 따라 법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경에서 “만일 나의 제자가 한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바른 법을 들으면 5개(蓋)를 끊게 되고 7각분(覺分)을 수행하여 원만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12분교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존자도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지었다.
또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등불이 어둠을 깨뜨리는 광명을 내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무명의 어둠을 깨뜨리고 지혜의 광명을 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무아(無我)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비유하면 거울의 표면을 잘 닦아 빛나게 하면 갖가지 색상(色像)이 모두 그 안에 나타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분별하여 무아의 형상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생사(生死)의 강을 건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견고한 배나 뗏목을 탄 백천의 중생들이 그것에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강의 이 언덕에서 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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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건너가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수없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유정들이 이것에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계경 등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다. 마치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모든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여러 빛깔을 볼 수 있고 미혹함이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아비달마로써 계경을 비추면 미혹함이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선(善) 등의 모든 법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보물을 감별하는 사람이 금강 등의 보물을 잘 관찰하는 것처럼 아비달마도 이와 같아서 선 등의 모든 법을 잘 분별하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또 아비달마의 대논사(大論師)들이 기울거나 동요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마치 묘고산(妙高山)12)이 금륜(金輪) 위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온갖 사나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아비달마의 대논사도 이와 같아서 청정한 시라(尸羅)13)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모든 나쁜 소견을 지닌 이의 업신여김과 헐뜯음과 삿된 이론으로써는 꺾거나 조복할 수 없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
을 지었다.
또 존자는 세 가지의 인연으로 이 논을 지었으니, 첫째는 지혜를 더욱 늘려 주기 위해서요, 둘째는 깨달음의 뜻[覺意]을 열어주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나[我]를 헤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지혜를 더욱 늘려 준다 함은 안팎의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서 지혜를 더욱 늘리게 하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깨달음의 뜻을 연다 함은 모든 유정은 무명에 휩싸여 마치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이 변행(遍行)인가, 어느 것이 변행이 아닌가[非遍行], 어느 것이 자기 경계의 연[自界緣]인가, 어느 것이 다른 경계의 연[他界緣]인가, 어느 것이 유루의 연[有漏緣]인가, 어느 것이 무루의 연[無漏緣]인가, 어느 것이 유위의 연[有爲緣]인가, 어느 것이 무위의 연[無爲緣]인가, 어떤 것이 섭수[攝]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상응(
相應)하
12) 묘고산왕(妙高山王)이라고도 하는데, 수미산(須彌山:Sumeru)을 말한다.
13) 범어 śila의 음역어로써 계(戒)를 말한다.
는 것인가, 어떤 것이 인(因)인가, 어떤 것이 연(緣)인가, 누가 성취하고 누가 성취하지 못하는가, 어느 것이 순전구(順前句)인가, 어느 것이 순후구(順後句)인가, 어느 것이 4구(句)인가, 어느 것이 여시구(如是句)인가, 어느 것이 불여시구(不如是句)인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알아야 할 경계 가운데서 모든 유정들에게 깨달음의 뜻을 열어주는 것은 이 아비달마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나를 헤아리지 않게 한다 함은 존자가 지은 아비달마는 보특가라14)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항상 모든 행(行)은 공(空)하고 나[我]가 없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저 존자가 이 논을 지었다.
[문] 아비달마의 자성(自性)은 어떤 것인가?
[답] 무루(無漏)의 혜근(慧根)으로써 자성을 삼으니, 1계(界)․1처(處)․1온(蘊)에 속한다.15) 1계란 법계(法界)를 말하고, 1처란 법처(法處)를 말하며, 1온이란 행온(行蘊)을 말한다.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2처․5온에 속한다. 3계란 의계(意界)․법계(法界)․의식계(意識界)를 말하고 2처란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를 말하며 5온이란 색온(色蘊)에서 식온(識蘊)까지를 말한다.
계경에서 “이 야차천[藥叉天]은 오랜 세월 동안에 그 마음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나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계경에서 “이 벌차씨(筏蹉氏)16)와 선현(先賢) 외도와 범수(梵壽) 바
14) 범어 pudgala의 음역어이고 실체로써 상정된 아(我)를 말한다.
15) 아비달마는 이런 형식 위에서 된 것이므로 삼장 성전(聖典)의 일종이지만 그 임무로 하는 요점[要]은 진지(眞智)의 개발(開發)에 있다. 따라서 아바달마의 내용은 진지[淨慧]에 있으므로 무루(無漏)의 진지를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이 『대비바사론』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지 즉 무루의 혜근(慧根)을 5온(蘊)․12처(處)․18계(界)의 분류에서 보면 5온 중에서는 행온(行蘊)의 일부분이고 12처에서는 법처(法處)의 일부분이며
18계의 설(說)에서 보면 법계(法界)의 일부분이 점(占)하고 있다. 여기서 1계․1처․1온이 속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지칭한다.
16) 범어 Vatsagotra의 음역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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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문은 모두 오랜 세월 동안 그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아첨이 없고 속임수가 없어서 묻는 것은 모두 분명히 알기 위해서이고 어지럽히기 위해서가 아니므로 나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로써 그가 뜻하는 물음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무루의 혜근이다.
또 부처님께서 서이가(西儞迦)17)에게 “나에게는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는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가 아니다.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며, 너의 천박한 지혜로써는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오랜 세월 동안에 달리 보았고 달리 참았고 달리 바랐고 달리 즐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공과 무아와 여
실한 깨달음[如實覺]이다. 왜냐하면 저 외도는 항상 망령되이 나를 헤아렸으므로 공과 무아의 성품은 그가 미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께서 오타이(鄔陀夷)18)에게 “너는 어리석은 범부요 소경이어서 지혜의 눈이 없거늘 어떻게 상좌 비구와 함께 매우 깊은 아비달마를 논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멸정의 물러남[滅定退]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모든 연기(緣起)이니라.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연성(緣性)과 연기이다. 이것은 매우 깊어서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경계도 아니어서 오직 미묘한 총명과 예지가 있는 이만이 비로소 알 수가 있다.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의지[一切依]를 모두 영
17) 범어 Śreṇika의 음역어이다.
18) 범어 Udayī의 음역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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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히 버리고 여의며 애욕이 다하고 물들지 않으며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다. 이것은 가장 깊으며 매우 보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인연의 성품과 저 적멸(寂減)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또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남음이 있는 법[有餘法]은 서로 비슷하여[相似] 매우 깊은 것이로되 나는 그 가운데서 스스로가 깨달아서 바르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모든 견해의 갈래[見趣]와 여실한 깨달음이다.
또 계경에서 “나에게 매우 깊은 아비달마가 있으니, 온갖 법[一切法]은 매우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깊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이 매우 깊은 아비달마인가? 온갖 법의 성품과 여실한 깨달음이다.
비록 이들 경에서 따로따로의 뜻[意趣]에 따라 갖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셨으나 아비달마의 으뜸가는 이치[勝義]의 자성은 오직 무루의 혜근일 뿐이다.
곧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니,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4성제(聖諦)를 따로따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니,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관(持息念觀) 등이다. 모든 온(蘊)을 따로따로[別] 또는 한꺼번에[總] 관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뛰어난 문소성혜(聞所成慧)를 일으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건립하며 실물(實物)의 어리석음과 소연(所緣)의 어리석음을 해치고 모든 법에 대하여 더하거나 덜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수승하게 생(生)․처(處)․득(得)․혜(慧)를 일으키고 삼장(三藏)․12분교(分敎)를 받고 지니고 헤아리고 관찰하면서 잘못 굴리지 않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또 이와 같은 자량(資糧)을 말미암아 무루의 혜근을 껴잡고 지니어 한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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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밝고 왕성함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도 한다.
[문] 만일 아비달마가 무루의 혜근만을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면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다시 아비달마라고 하는가?
[답] 아비달마가 밑바탕[具]이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부른다. 경의 곳곳에서 저 여러 가지 바탕에 대하여 그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과 같다. 이것도 이와 같아서 즐겁게 하는 바탕[樂具]에 대하여 즐겁다[樂]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가타(伽陀)의 말과 같다.
구걸한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옷은 얻는 대로 입으면 즐거우며
산과 숲을 거닐면 즐겁고
바위굴에 숨어 살면 즐겁네.
음식이나 의복 등의 바탕[體]은 실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즐거움이란 모든 즐거운 느낌[樂受]이다. 어떤 이는 “또한 가쁜함[輕安]도 즐겁다”라고 말했으나 의복과 음식 등은 즐겁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가타에서도 역시 즐겁다고 말한 것이다.
또 더럽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때[垢]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또한 가타의 말과 같다.
여인은 범행(梵行)의 때이니
여인은 중생을 손상하고 해치네.
고행으로 범행을 깨끗이 할 뿐
물로 씻을 수는 없는 것이네.
여인은 실로 더러운 때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더러운 때는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다. 그런데도 가타에서 여인을 더러운 때라 말함은 이것이 더럽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새는 바탕에 대하여 샌다[漏]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7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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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漏)19)는 손해를 끼치는 것이고 불에 타는 것이며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감관[根] 등은 실로 새는 것이 아니나 이는 새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에 샌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새는 것은 셋일 뿐이니,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또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수면(隨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빛깔[色]은 수면이요․수증(隨增)이요․수사(隨死)이다. 만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하면 따라다니며 죽게(隨死) 하는 것이고, 만일 따라다니며 죽게 하면 따라다니며 취하게[隨取] 하는 것이며, 만일 따라다니며 취하게 하면 따라다니며 속박되게[隨縛]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빛깔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수면은 일곱 가지20)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경에서 빛깔이 수면이라 말함은 따라다니며 잠자듯 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맛의 바탕에 대하여 맛[味]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눈[眼]의 맛은 묘한 빛깔[色]이며 빛깔은 악마의 갈고리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눈은 실로 맛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맛이란 삶에 대한 애착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눈의 맛은 빛깔이라 말함은 이것이 맛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욕심의 바탕에 대하여 욕심[欲]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욕심이란 무엇인가? 5묘욕(妙欲)21)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또 게송의 말씀과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은
사랑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며
19) 견루(見漏)․수루(修漏)․근루(根漏)․악루(惡漏)․친근루(親近漏)․수루(受漏)․염루(念漏)이다.
20) 수면(隨眠)은 번뇌가 표면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잠재적인 상태를 말한다. 7수면은 욕탐(欲貪)․유탐(有貪)․진(瞋)․만(慢)․무명(無明)․견(見)․의(疑)이다.
21)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5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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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에 맞는 것이어서 욕심을 끌어당겨
마음을 물들이고 집착하게 한다.
빛깔 등은 욕심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욕심은 저 애욕[愛]이다. 그런데도 경의 게송에서 빛깔 등을 욕심이라 함은 욕심을 내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물러나게 되는 바탕에 대하여 물러난다[退]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다섯 가지 인연 때문에 시해탈(時解脫)의 아라한이 물러나게 되니, 첫째는 사업을 경영하는 것이고, 둘째는 희론(戱論)을 즐기는 것이며, 셋째는 다툼[諍訟]에 어울리는 것이고, 넷째는 멀리 다니기[遠行]를 좋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오래도록 병을 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은 물러나게 하는 자체는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물
러난다 함은 온갖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법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이 물러나게 한다 함은 물러나게 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또 업을 짓게 하는 바탕에 대하여 업(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계경에서 “세 가지 뜻[意]이 있기 때문에 나쁜 업을 생각한다. 만일 지으면 더욱 자라게 하고 좋지 않은[非愛] 이숙(異熟)을 받게 되니, 탐욕과 진에(瞋恚)와 사견(邪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욕 등은 실로 의업(意業)이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 의업은 뜻과 함께 조작[思]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경에서 의업이라 함은 불선의 의업을 짓게 하는 바탕이기 때
문이다.
또 이숙인(異熟因)의 바탕에 대하여 이숙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 저 무멸(無滅) 존자22)가 “나는 한 끼 밥의 이숙인을 말미암아 일곱 번 천상(天上)에 나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맨 마지막 몸[最後身]으로는 모든 번뇌[漏]를 다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한 끼의 밥이 이숙
22) 무멸(無滅) 존자는 구역(舊譯)에 아니로두(阿泥盧頭)라고 하는 분이며 부처님 제자 Aniruddha를 한역(漢譯)으로 음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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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은 아니다. 으뜸가는 이치에서의 이숙인은 모든 불선(不善)과 선(善)과 유루(有漏)의 법이다. 그런데도 저 존자가 한 끼 밥을 이숙인이라 말씀한 것은 그것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경의 여기저기에서 여러 이름으로 여러 바탕을 말씀한 것처럼 이 논도 그러하여 이것이 아비달마의 바탕이기 때문에 또한 아비달마라 한 것이다.
이와 같아서 으뜸가는 이치[勝義]에서 아비달마의 성품은 무루의 혜근일 뿐이어서 1계․1처․1온에 속하며 만일 상응(相應)을 겸하고 수전(隨轉)을 취하면 3계․2처․5온에 속한다.
그 밖의 자량(資糧) 등은 모두가 세속의 아비달마이다. 이것을 아비달마의 성품이라 한다. 자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나와 물건[物]의 자체와 상분(相分)과 본성(本性)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자성을 해설하였으므로 무슨 뜻에서 아비달마23)라고 이름하는지 그 까닭을 이제 해설하겠다. 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이 말하였다.
“모든 법의 모양[法相]에 대하여 잘 결택(決擇)하고 극히 잘 결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의 성품[法性]에 대하여 잘 깨달아 살피고 잘 통달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현관(現觀)으로 증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법 성품은 매우 깊은데도 그 근원의 밑까지 다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성스러운 혜안(慧眼)은 이를 말미암아 청정해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깊숙이 숨은 법 성품을 잘 드러내 일으키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하며 알아야 할 법 성품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깊숙이 숨어 있으므로 이것을 여의고는 드러내거나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23)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rma)는 아비(abhi)라 하는 접두사(接頭辭)와 달마(dharma)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성어(成語)로 불교 특유의 술어(述語)이다. 구역에서는 무비법(無比法)이라 하고 신역(新譯)에서는 대법(對法)이라 한다. 다 같이 진실을 말하나 그 글자 뜻은 갖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아비달마의 논사들 사이에는 갖가지 이론(異論)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서는 그 일을 밝히려 하는 문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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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한 법 성품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만일 아비달마의 자상과 공상에 대하여 지극히 잘 익히고 있다면 아무리 법답게 어려운 것을 물어도 법 성품에서는 반드시 조그마한 어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온갖 외도와 다른 이론[他論]을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큰 논사에게는 삿된 무리[邪徒]와 이학(異學)이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우(世友) 존자24)는 “언제나 계경 가운데서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12연기(緣起)의 법 성품에 대하여 잘 깨달아 알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4성제(聖諦)의 법을 잘 현관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8성도법(聖道法)을 잘 말하고 닦아 익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또 모든 법에 대하여 한량없는 문(門)으로써
자주자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25)은 “잡염(雜染)․청정(淸淨)․계박(繫縛)․해탈(解脫)․유전(流轉)․환멸(還滅)의 법에 대하여 명신(名身)․문신(文身)․구신(句身)의 차례로 결집(結集)하여 순서를 정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협 존자(脇尊者)는 “이것은 마지막의 지혜[究意慧]요, 이것은 결단의 지혜[決斷慧]이며, 이것은 으뜸가는 이치의 지혜[勝義慧]요, 이것은 잘못되지
24) 대비바사론 중에 갖가지 문제를 논구(論究)하면서 이름으로 직접 불리는 논사가 적지 않으니 역자가 헤아려 본 숫자만 해도 약 20여 인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는 협(脅, Pārśva)과 세우(世友, Vasumitra)와 각천(覺天, Buddhadeva)과 법구(法救, Dharmatrāta)와 묘음(妙音, Ghoṣa)이며 특히 이 네 사람은 유부(有部)의 사대 논사라고 한다. 다만 이 분들이 『비바사론』을 편집한 장소에 실제
로 입회했는지의 여부는 많은 의문이 있다.
25) 대덕(大德, Bhadanta)는 번역하면 존자(尊者)라는 뜻이다. 『비바사론』 중에서는 자주자주 이 사람의 의견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가 누구인가는 확연하지 않다. 구역(舊譯)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는 바단다(婆檀多, Bhadanta)라고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이 불타제바(佛陀提婆) 곧 각천(覺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덕이 각천 존자의 이명(異名)인가는 단정하기 어렵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하나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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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지혜[不謬慧]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해탈을 구하는 이가 바른 행을 닦을 때에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 이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괴로움[苦]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因]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滅]이요, 이것은 사라짐으로 나아가는 길[道]이며, 이것은 가행도(加行道)요, 이것은 무간도(無間道)며, 이것은 해탈도(解脫道)요, 이것은 도를 향한[向道] 것이며, 이것은 과를 얻는[得果]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 때
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법밀부(法密部)의 학설에 “이 법은 증상(增上)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어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혜[慧]는 세간에서 높아서
나아갈 방향[趣向]을 결택하며
바르고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노사(老死)가 다하고 남음이 없네.
화지부(化地部)의 학설에 “지혜는 법을 비춰주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으니, 계경에서 “온갖 비춤[照] 가운데서 내가 지혜의 비춤[慧照]을 말한 것이 가장 으뜸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유자(譬喩者)26)의 학설에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이 맨 위이며, 이 법은 그것에 버금가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했다.
성론자(聲論者)는 “아(阿)는 버린다[除棄]는 말이고 비(毘)는 결택(決擇)한다는 말이니, 이 법은 버리고 결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 무엇을 버리게 되는가? 결(結)․박(縛)․수면(隨眠)․수번뇌(隨煩惱)․전(纏)이다. 무엇을 결택하게 되는가? 온(蘊)․계(界)․처(處)․연기(緣起)․제(諦)․식(食)․사문과(沙門果)․보리분(菩提分) 등이다”라고 말했다.
26) 경부(經部)의 일파(一派)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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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호(佛護) 존자는 “아비(阿毘)는 도와주는 말[助言]이어서 눈앞에 나타나 있는 뜻을 드러나게 한다. 이 법은 온갖 착한 법, 즉 모든 각분(覺分)을 이끌어서 모두 눈앞에 나타나 있게 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아비(阿毘)란 도와주는 말이어서 증상(增上)의 뜻을 드러낸다. 마치 증상의 만[增上慢]을 아비만(阿毘慢)이라 하고, 증상의 각[增上覺]을 아비각(阿毘覺)이라 하며, 증상의 노[增上老]를 아비노(阿毘老)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증상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노수(老受) 존자는 “아비는 도와주는 말로 공경하는 뜻을 드러낸다. 마치 공경하면서 머리 조아리는 것을 아비계수(阿毘稽首)라 하고, 공경히 공양하는 것을 아비공양(阿毘供養)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이 법은 높고 중하며 공경할 만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발지(發智)라고 하는가?
[답] 모든 승의(勝義)의 지혜[智]는 모두가 이로부터 일어나며[發] 이것이 첫 기초[基]가 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이 논은 마땅히 지혜의 안족처(安足處)라 하여야 한다. 모든 으뜸가는 지혜는 이것이 근본이 되고 이것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지혜의 안족처라 한다.
또 모든 용감하고 씩씩한 지혜는 여기에서 으뜸가게 일으킬 수 있으며 용감한 지혜의 연(緣)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또 모든 지혜의 저 언덕[彼岸]은 이것에 의지하여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발지라 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개발(開發)하는 것은 이 논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또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는 모두가 이 발지의 묘한 문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지라 한다.
[문] 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勝利]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답] 해탈을 수순(隨順)해서 얽매임을 끊어 없애고, 공․무아를 따라서 나[我]와 내 것[我所]을 등지며, 무아의 도리를 드러내어 삭취취(數取趣)를 차단하고, 각의(覺意)를 열어 혼미(昏迷)를 쉬며, 어리석음을 보내어 지혜를 내고, 의심의 그물을 끊어 결정(決定)해주며, 잡염(雜染)을 등져 청정한 곳으로 향하고, 유전(流轉)을 꾸짖어서 환멸(還滅)을 찬탄하며, 생사를 버려 열반을 얻고, 온갖 외도의 삿된 이론을 꺾어 부수어 온갖 불법의 바른 이론을 성립시킨다. 이 논의 매우 뛰어난 이익은 그 모양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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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잡온(雜蘊)
1) 세제일법납식(世第一法納息) ①
[論] 어떤 것이 세제일법(世第一法)1)인가?2)
1)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법상(法相)에 의하면 수행의 진전(進展)에는 먼저 5정심(停心)․별상념주(別相念住)․총상념주(總相念住)의 3위(位)가 있는데 이것을 3현위(賢位) 또는 외범위(外凡位)라고 한다. 이로부터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으로 나아가는데 이것을 4선근위(善根位) 또는 내범위(內凡位)라고 한다. 다 같이 위의 7위(位)는 참 성도(聖道)를 일으키는 방편위(方便位)로 아직은 범부 또는 이생(異生)의 영역[域
]을 면하지 못한 지위이다. 여기에서 다시 나아가 무루의 성도를 일으키는 것이 곧 성도인데 여기서는 견도위(見道位)․수도위(修道位)․무학위(無學位)로 분류하게 된다. 그런데 발지본론에서는 그 논단(論端)을 일으킴에 있어서 이상하게도 3현위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하지도 않았고 또 무학도의 나한위(羅漢位)에서 역(逆)으로 나아가는 방법도 취하지 않으면서 그 중도 반단(半端)의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러
한 체재(體裁)를 취했는가의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을 일으키게 된 까닭을 논하는 문단이다.
2) 『발지론』을 인용한 부분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먼저 『발지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여기에다 주석을 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하 『발지론』에서 인용한 부분은
論
이라고 표시하고 앞뒤로 한 줄씩을 띄우고 글씨체를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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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장(章)과 장의 뜻을 풀이한 것은 이미 이해가 되었을 것이니, 다음으로 본문을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論)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고자 함이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行) 가운데서 이치대로[如理] 사유(思惟)하지 못하면서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세제일법을 일으키지 못하면서 정성이생(正性離生)3)에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일 정성이생에 들지 못하면서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과(果)를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 가운데서 이치대로 사유하여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세제일법의 이름을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세제일법의 뜻을 자세히는 밝히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이 의거한 곳[依處]이므로 거기서는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자세히 분별함이 마땅하다. 이런 인연으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논을 지을 때 계경에 의거하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지은 이가 원했던 것이 그렇기 때문이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법성(法性)에 어긋나지 않았거늘 어째서 번거롭게 묻고 따지는가?
또 온갖 아비달마는 모두가 계경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니, 모든 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때문에 비로소 아비달마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 존자는 모든 경전 가운데서 갖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뜻을 찬집(纂集)하여 분별하고 해석하여 잡온(雜蘊)이란 이름을 붙였고 나아가 갖가지 견해 갈래[見趣]를 찬집하여 분별하고 해석하여 견온(見蘊)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 붙인 여덟 가지의 온[八蘊]들은 모두가 온갖 법상(法相)
을 자세히 분별하고 있다.
3) 정성이생(正性離生, samyaktva nyāma)은 정성결정(正性決定, samyaktva niyāna)이라고도 하는데 견도위(見道位)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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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논의 첫머리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했는가? 차례에 따라서4) 모든 공덕을 말하기 위해서인가,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하기 위해서인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하기 위해서인가?
가령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만일 차례에 따라서 모든 공덕을 말한다고 하면 먼저 부정관(不淨觀)이나 지식념(持息念)5) 등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염주(念住)를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3의관(義觀)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7처선(處善)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난(煖)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정(頂)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인(忍)을 말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
가?
만일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한다고 하면 먼저 아라한과를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불환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일래를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예류를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견도(見道)를 말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순결택분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한다고 하면 마땅히 먼저 난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정을 그 다음에는 인을 말해야 하며,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묘음(妙音) 존자는 『생지론(生智論)』에서 “어떤 것이 난인가? 어떤 것이 정인가? 어떤 것이 인인가? 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라고 말씀한 것처럼,
4) 차례에 따른다고 함은 5정심(停心)에서 시작하여 무학위(無學位)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차례를 거스른다고 함은 무학에서 5정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후 차례라 함은 특히 난․정․인․세제일법의 4선근 중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 3현위를 순해탈분(順解脫分)이라 하고 4선근위를 순결택분이라고 하는 데에 의거한 것이다.
5)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止息念)이라 함은 5정심위(停心位)를 의미하며 염주(念住)라 함은 별상(別相)․총상염주위(總相念住位)를 가리킨다. 3의관(義觀)이라 함은 온(蘊)․처(處)․계(界)를 관찰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하고 7처선(處善)이라 함은 고(苦)․집(集)․멸(滅)․도(道)․애미(愛味)․과환(過患)․출리(出離) 등 이 일곱 가지 관법(觀法)을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5온으로 각각 따로따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7처선에 대하여는 본론 제83권과 『구사론(俱舍論)』 제33권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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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세 가지의 차례에 의하지 않는다면 지은 논은 뒤섞여서 어지러운 과실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6) 존자 같은 이는 그지없이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여 한량없는 법의 자상(自相)․공상(共相)에 대하여 장애 없는 지혜[無障礙智]가 바라는 대로 눈앞에 나타났고 용맹스럽게 정진함이 항상 끊임이 없었으며, 이미 아비달마의 글과 뜻의 큰 바다에 잘 들어가서 끝없는 각혜(覺慧)가 기울어지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묘고산(妙高山) 같았고, 대론왕(大論王)이 되어 다른 이의 이론을 조복
하면서 스스로가 세운 이론에는 당할 이가 없었다.
지금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존자도 그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논을 지으면서 먼저 세제일법을 말하였는가?
[답] 모든 논사들은 이것에 대하여 갖가지로 설명을 달리한다. 어떤 이는 “지금 여기에서는 차례에 따라서 모든 공덕을 말한 것도 아니고,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한 것도 아니며, 또한 순결택분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한 것도 아니다. 다만 논을 지은 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이 논을 지은 것이고 법상에 어긋나지 않는데 어째서 번거롭게 묻고 따지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비달마는 성품과 모양[性相]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계경과는 같은 것이 아니거늘 어찌 차례를 구하는가? 아비달마는 광대한 논의 도[論道]로써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과 모양을 결택하는 것이어서 이미 번잡한데, 여기에서 그 차례를 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차례를 구한다면 글은 번잡함이 더할 뿐이고 뜻에는 이익이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논을 지은 이의 뜻을 힐문(詰問)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경에서 먼저 세제일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과 같다.) 지금 이 논사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기 때문에 역시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6)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 Mahākātyāyana 또는 kaccāyana)는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제자이다. 『발지론』의 저자와는 혼동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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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논을 지은 이는 그만 두고 무엇 때문에 경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씀하셨는가?
[답] 교화 받는 이의 정도[分齊]를 관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부처님은 교화 받을 이를 관찰하여 이미 하품(下品)7)과 중품(中品)의 인(忍)을 얻고서도 아직 상품(上品)의 인과 세제일법을 얻지 못했으면 그것을 얻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 가운데서 이치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에서 이치대로 사유한다는 것은 상품의 인(忍)을 드러내는 것이니, 세제일법이 지금 막 제 이름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교화 받을 이의 수행의 정도를 관찰하시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에 대한 많은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니, 다른 이들이 이 세제일법에 대하여 많은 비방을 일으키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비방이란 자성(自性)에 대해서 그리고 이름[名]과 세계[界]와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現前]과 물러나는 것[退]에 대해서 모두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성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신근(信根) 등 5근(根)으로써 자성을 삼는다”고 말한다. 이름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것은 종성지(種性地)의 법이라 해야 하고 세제일법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것은 바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매인 것[繫]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색계와 무색계(無色界)에 매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三界)에 매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에 매인 것이
7) 4선근(善根)의 인위(忍位)를 분류하여 하인위(下忍位)․중인위(中忍位)․상인위(上忍位)로 하며 세제일법은 상인위의 직후에 일어나는 지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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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매이지 않은 것[不繫]이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에 매인 것도 매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 법은 여러 생각[多念]이 이어지면서 눈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하고, 물러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 법은 물러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모든 유루(有漏)의 법은 모두가 견고하지 않아 똥을 닦은 헝겊[糞掃]이나 흙탕[淤泥]과 같다. 무엇이 여기에서 견고하고 가장 수승하기가 제호(醍醐)와 같으냐고 한다면 세제일법이라고 하리니, 이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무아(無我)에 수순하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이 논 가운데서 벗어남[出離]․해탈․열반을 찬탄하고 무아에 수순한 것이 외전(外典)에서 모든 욕심과 쾌락의 바탕[樂具]을 찬탄하고 수용하면서 아집(我執)에 수순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세제일법은 법(法)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미 무아에 수순하는 이 논과는 동일하지만 난(煖) 등은 법이라는 말이 없어서 이 논이 무아에 수순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세간의 법 가운데서 수승한 것8)이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모든 논 가운데서 이 논이 가장 뛰어나며 세제일법이 세간의 법 가운데서 뛰어난 것이 이 논과 동일하므로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부처님께서 세간에 오셔서 진실한 이익을 주신 것이라 한다. 그는 그때에 장애를 받지 않고 뛰어난 뜻[勝義]의 성스러운 법재(法財)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8) 세간에서 첫째가는 법[世間第一法]이라는 뜻이며 유루도(有漏道) 가운데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면서 이 『발지론(發智論)』은 세간에서 제일가는 논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세간에서 제일가는 법을 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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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세간에 오시면 중생이 법에 들어가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첫째는 세속(世俗)이요, 둘째는 승의(勝義)이다. 세속이란 수염과 머리칼을 깎아 없애고 법복(法服)을 입고서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는 것을 말하며, 승의란 세제일법에서 곧장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세속에서 들어가는 법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파계(破戒)요, 둘째는 세속으로 돌아가는[歸俗] 것이다. 승의에서 법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허물이 없다. 그의 종성(種性)9)에 따라 자유자재로 자기의 승[自乘]의 공덕을 증득하면서 물러나거나 상실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성도의 문[聖道門]이 닫혀져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열리고, 일찍이 버리지 못했던 이생의 성품[異生性]을 버리게 되며, 아직 얻지 못했던 모든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10)”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異生)의 이름을 버리면서 성자(聖者)의 이름을 얻고, 이생의 수(數)를 버리고 성자의 수를 얻으며, 이생의 위치[分齊]를 버리고 성자의 위치를 얻으며, 이생의 종성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심(心)은 얻고 심의 인(因)은 얻지 못하며, 명(明)은 얻고 명의 인은 얻지 못하며, 수(受)는 얻고 수의 인은 얻지 못하나니, 그 밖의 심소(心所)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일찍이 익힌 연[曾習緣]을 버리고 일찍이 익히지 못했던 연[未曾習緣]을 얻고11), 공통한[共] 것을
9) 기근(機根)의 종류를 말한다. 또 성문(聲聞)․독각(獨覺)․불승(佛乘)의 3종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0)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견도(見道)에서 첫 무루의 마음[無漏心]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1) 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서 비로소 무루의 성도(聖道)를 얻으면서 종래의 범부이생(凡夫異生)으로서의 유루적(有漏的) 경험을 온전히 버리는 것을 일찍이 익힌 연[曾習緣]을 버리고 아직 일찍이 얻지 못했던 연[未曾習緣]을 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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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공통하지 않은[不共] 것을 얻으며, 세간(世間)을 버리고 출세간(出世間)을 얻고, 유애미(有愛味)를 버리고 무애미(無愛味)를 얻으며, 탐기의(耽嗜依)를 버리고 출리의(出離依)를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하는 이생의 성품을 끊기 위한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의심이 있는 이 이생의 성품은 이미 시작도 없었고 역시 종말도 없어야 하거니와 지금 그의 종말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곧 세제일법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으로서의 허물[過患]과 이생으로서의 변이하고 달라짐[變異]과 이생으로서의 거짓[虛誑]과 이생으로서의 억셈[剛强]이 모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난․정․인위에서는 혹 일어나는 것이 있기도 하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생이 이 법을 일으키면 반드시 이생이 아닌 지위[非異生位]에 이르러서 비로소 목숨을 마치게 된다.
이생과 이생이 아닌 성품에서처럼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것[未見諦]과 이미 진리를 본 것[已見諦]․아직 과를 얻지 못한 것[未得果]과 이미 과를 얻은 것[已得果]․아직 정성이생에 들지 못한 것[未入正性離生]과 이미 정성이생에 든 것[已入正性離生]․아직 현관을 일으키지 못한 것[未起現觀]과 이미 현관을 일으킨 것[已起現觀]․부정취에 머무른 것[住不定聚]과 정정취에 머무른 것[住正定聚]․성도가 없는 것[無聖道]과 성도가 있는 것[有聖道]․증정이 없
는 것[無證淨]과 증정이 있는 것[有證淨]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고 난․정․인위 등은 곧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선근을 일으키면 한 찰나(刹那) 동안이라도 반드시 정체(停滯)함이 없고, 난(煖) 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의 몸으로 있는 동안에 염주(念住) 등의 행이 닦여서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고, 난 등에서는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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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최초에 유루의 마음이 끊어지면 무루의 마음이 이어진다고 하고 그 밖의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이생으로 하여금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있는 몸인데도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먼저 설명한 것이다. 마치 묘고산이 금륜(金輪) 위에 걸쳐 있으나 사방의 맹렬한 바람이 기울어지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러한 이생도 이 법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 네 가지 전도된 나쁜 견해로는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밖의 다른 이생의 자리에서는 곧 그와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마치 밝은 모양[明相:해]이 처음과 끝을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밝은 모양은 낮의 시작과 밤의 끝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성자의 길[聖道]의 시작과 이생으로서의 마지막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작과 마지막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지금 제도되는[正度] 것과 이미 제도된[已度] 것과 나아가 드는[趣入] 것과 이미 벗어난[已出] 것과 가행(加行)과 구경(究竟)을 나타내는 것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밖의 자리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는 동일한 법[同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다른 모양[異相]이 있을 수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세제일법은 고제(苦諦)에 속한다 하더라도 곧장 처음부터 괴로움을 없애는 도[滅苦道]를 이끌어내며, 세간의 유전(流轉)과 노사(老死)와 살가야(薩迦耶)12)에 속한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것을 없애는 도를 이끌어내지만, 난 등은 그렇지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간의 연(緣)이라 해도 곧장 처음부터 출세간의 연을 이끌어냄을 드러내고 그 밖의 지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
12) 범어 sat-kāya의 음역어이다. sat는 유(有, 있다)는 뜻이고 kāya는 신(身, 몸)이라는 뜻으로 합하여 유신견(有身見) 또는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연에서처럼 이와 같이 때가 있는[有垢] 것과 때가 없는 것[無垢], 허물이 있는[有過] 것과 허물이 없는[無過] 것, 독이 있는[有毒] 것과 독이 없는[無毒] 것, 흐림이 있는[有濁] 것과 흐림이 없는[無濁] 것, 신견이 있는 일[有身見事]과 신견이 없는 일[無身見事], 뒤바뀜이 있는 일[有顚倒事]과 뒤바뀜이 없는 일[無顚倒事], 탐애가 있는 일[有愛事]과 탐애가 없는 일[無愛事], 수면이 있는 일[有隨眠事]과 수면이 없는 일[
無隨眠事] 등의 연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기세가 있고 힘이 있어서 하는 일이 있게 됨이 건장한 장부와 같다. 그때에는 곧장 성스러운 첫 지관(止觀)을 이끌어내고 성스러운 견해를 일으키며 지혜의 머리에 비로소 그 밖의 각지(覺支)의 꽃다발을 쓰게 되나 그 밖의 다른 자리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그 작용이 가장 수승하여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성자의 성품을 얻으며, 삿된 성품을 버리고 바른 성품을 얻으며, 곧장 정성이생에 들어가고 그 밖의 다른 법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가벼이 움직임이 투라솜[妬羅綿]과 유첩솜[柳疊絮] 등보다 더하고 모든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성인의 교법에 편히 머무르며 동요하지 않는 것이 제석천[天帝]의 당기[幢]와 같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심(心)․심소(心所)로 하여금 질박 정직하지 않음을 이루게 한 번뇌와 나쁜 견해를 버리고 아직 얻지 못한 심․심소로 하여금 질박 정직한 성품을 이루게 하며 무루의 성도(聖道)를 얻게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5무간(無間)이란 다섯 가지의 보특가라의 동분(同分)을 버리고 4향(向)․4과(果)라는 여덟 가지 보특가라 동분을 얻는 것이니13),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
13) 이미 인위(忍位)를 얻으면 악취(惡趣)에도 떨어지지 않게 되거든 하물며 세제일법을 얻은 것이겠는가. 악취는 물론이요 여기에 이르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5역죄(逆罪)를 짓게 가능성(可能性)조차 잃게 된다. 이것을 다섯 가지 보특가라의 동분(同分)을 버린다고 한다. 보특가라(pudgala)는 사람[人]이라는 뜻이요 동분이란 작용태(作用態)라는 뜻이다. 이렇게 5무간의 가능성을 잃음과 동시에 4향(向)․4과(果)에 이르게 되는 가능
성을 얻는 것을 여덟 가지 보특가라의 동분을 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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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제일법은 세 가지 일을 말미암은 까닭에 논에서 먼저 이것을 말씀한 것이니, 첫째는 경의 말씀에 수순하고, 둘째는 많은 비방을 그치게 하며, 셋째는 이 찰나 동안에 첫 성인의 과[初聖果]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경에 따르고 비방을 그치게 한다 함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곧 이 찰나 동안에 첫 성인의 과를 얻는 것은 그것이 세제일법과 함께 곧장 사용과(士用果)가 되는 것이니,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이 논에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존자는 여기에서 거꾸로 된 차례에 의거하여 모든 법을 널리 펴 설명했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논은 곧 마땅히 먼저 아라한과를 말하고 그 다음에 불환을 말하며 그 다음에 일래를 말하고 그 다음에 예류를 말하며 그 다음에 견도(見道)를 말해야 한다.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부터 말했는가?
[답] 여기에서는 이생의 몸으로 있는 동안의 청정(淸淨)과 잡염(雜染)의 모든 법을 거꾸로 말했지만 온갖 것을 다 거꾸로 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어떤 것이 난(煖)인가?”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에 청정품(淸淨品)의 법을 거꾸로 말한 것이다.
다음에 “이 20구(句)의 살가야견(薩迦耶見)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만일 견해가 없다면” 하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의 잡염품(雜染品)의 법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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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품(二品)의 법을 분명히 아는 것은 무아의 지[無我智]이다. 이 때문에 제2 지납식(智納息) 중에서 “혹시 하나의 지혜[一智]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무아의 지는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연기(緣起)를 깨닫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3 납식에서는 “어느 한 보특가라에게서 이 생(生)에서의 12지연기(支緣起)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연기를 깨닫는 것은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사랑[愛]과 공경[敬]이다. 이 때문에 제4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사랑인가? 어떤 것이 공경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사랑과 공경은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참(慚)과 괴(愧)이다. 이 때문에 제5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참인가? 어떤 것이 괴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참․괴는 어떤 연유로 있게 되는가? 법상(法相)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6 납식에서는 “색법(色法)․생로(生老)․무상(無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법상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연유로 얻게 되는가? 이치 없는[無義] 것을 버리고 이치 있는[有義]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7 납식에서는 “모든 하열(下劣)한 고행(苦行)을 닦는 것은 이치 없는 것과 함께 함인 줄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무엇을 이치 없는 것은 버리고 이치 있는 것은 닦는다 하는가? 바른 생각[正思]과 바른 사유[正思惟]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8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사(思)인가? 어떤 것이 사유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던 것이다.
잡온의 법을 깨달으면 무엇을 말미암아 맑고 깨끗하게 되는가? 결(結)이 끊어짐을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다음에는 제2 결온(結蘊)을 말한다.
이와 같이 결이 끊어지면 무엇을 말미암아 증득(證)하는가? 모든 지혜를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 제3 지온(智蘊)을 말한다.
누가 결을 끊고 모든 지혜를 일으키는가? 업장(業障)이 없는 보특가라이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4 업온(業蘊)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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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업의 대부분은 무엇에 의거하여 생기는가? 4대종(大種)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제5 대종온(大種蘊)을 말한다.
대종으로 만들어진 것 중에 뛰어난 것은 무엇인가? 안근(眼根) 등의 감관이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6 근온(根蘊)을 말한다.
모든 감관이 청정하게 되는 것은 어떤 세력을 말미암는가? 모든 선정[定]을 얻는 것을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7 정온(定蘊)을 말한다.
선정을 얻고 나서도 삿된 추구(推求)를 일으키면 다시 모든 나쁜 견해 갈래[見趣]를 이끌어 내므로 식상(識相)으로 하여금 빨리 끊어 없애게 하기 위하여 맨 나중에 제8 견온(見蘊)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낱낱 온(蘊) 가운데서 모든 법을 빠짐없이 포섭한다 해도 더욱 나은 것에 따라 온의 이름을 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된 차례를 말미암아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의 청정․잡염의 모든 법을 말하면서도 온갖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論]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
[答] 만일 심(心)․심소(心所)의 법(法)이 등무간(等無間)이 되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가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만일 5근(根)14)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누가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가?
[답] 그것은 구(舊) 아비달마자(阿毘達磨者)의 학설이다.
[문]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가?
[답] 그 밖의 다른 부(部)를 차단하기 위하여 그런 학설을 주장하나 반드시 5근을 성품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분별론자(分別論者)15)는 신근(信根) 등의 5근은 무루(無漏)일 뿐이므로 모든 이생으로서는 모두가 성취
14)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을 말한다.
15) 화지부(化地部)의 일파(一派)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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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문] 그 부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런 집착을 하는가?
[답] 그들은 계경 때문에 그런 집착을 하는 것이다. 계경에서 “만일 5근이 있어서 왕성하여 맹렬하고 날카로우면서 평등하고 원만하게 많이 닦아 익히는 까닭에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 이로부터 덜하면 아래로 불환을 이루고, 다시 더 덜하면 그 아래로 일래를 이루며, 다시 더 덜하면 그 아래로 예류를 이룬다.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그를 밖의 이생품[外異生品]에 머무는 이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경의 말씀 때문에 그들은 5근은 무루일 뿐이라고 집착한다. 그들의 뜻을 차단하기 위하여 구 아비달마자는 “세제일법은 5근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세제일법은 이생의 몸에 있으므로 5근은 역시 유루(有漏)의 이생에 통하고 결코 유위(有爲) 무루를 이루지 못하는 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5근의 바탕[體]이 무루일 뿐이라고 집착한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답] 곧 계경에 어긋난다. 계경에 “나는 만일 이 신근 등 5근에 대해서 ‘이것은 모임[集]이다, 이것은 소멸[沒]이다, 이것은 맛[味]이다, 이것은 과환(過患)이다, 이것은 벗어남[出離]이다’라고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이 천상과 인간의 세간과 악마[魔]와 범(梵) 등을 초월하지 못하며 나아가 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무루의 법은 이와 같은 품류(品類)의 관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별론자는 “세존께서는 여기에서 자상관(自相觀)을 말씀하신 것이니, ‘나는 이 신근 등 5근에 대하여 모임 등의 자상(自相)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이 천상과 인간의 세간과 악마와 범 등을 초월하지 못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모임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이것은 반드시 착한 사람[善士]을 친근하고 바른 법을 들으며 이치대로 사유하고 법답게 따르면서 법답게 행함을 말미암아 모아[集] 일으키기 때문이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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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은 소멸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반드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16)이 없어지면서[沒] 이지근(已知根)이 일어나고 이지근이 없어지면서 구지근(具知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은 맛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이것 역시 탐애[愛]의 소연(所緣)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무루는 탐애에 매이게 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렇지는 않다. 그대가 무루의 법은 번뇌의 경계이면서도 매이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우리 종(宗)에서도 탐애는 무루를 반연하면서도 얽맬 수는 없는 것이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과환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무루는 무상(無常)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벗어남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열반할 때에는 반드시 버리기 때문이다. 계경의 말씀에 ‘열반할 때에 온갖 유위를 모두 다 버린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도리에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경에 “나는 만일 이 신근 등의 5근에 대해서 ‘이것은 모임이다, 소멸이다, 맛이다, 과환이다, 벗어남이다’고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다하여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자상관은 모든 번뇌를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의 말은 결국 도리에 옳지 못하다.
이를 말미암아 5근은 무루만은 아니다. 또 5근이 무루만이라고 집착한다면 경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계경에 “세존께서는 법요(法要)를 연설하여 주소서. 왜냐하면 모든 유정들이 세간에 처해 있으면서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는데 이근(利根)인 자도 있고 중근(中根)인 자도 있으며 연근(軟根)인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16) 미리(迷理)의 혹(惑)을 끊는 견도위(見道位)의 무루지(無漏智)를 말하고 이지근(已知根)이란 미사(迷事)의 혹을 끊는 수도위(修道位)의 무루지를 말하며 구지근(具知根)이란 온갖 번뇌를 끊는 무학위(無學位)의 무루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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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계경에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옛날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기 이전에 일찍이 불안(佛眼)으로 보니 모든 유정들이 세간에 처해 있으면서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는 것을 관했더니 이근․중근․연근의 모든 근기의 차별이 있었다. 용모가 잘 생기고 잘 조복하며 티끌과 때[塵垢]가 엷은 이라도 만일 법을 듣지 못하면 수승한 이익을 잃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신근 등의 5근이 만일 무루만이라면 이근인 자는 아라한이요 중근인 자는 불환이며 연근인 자는 일래나 예류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세존께서 아직 법륜을 굴리기 이전에도 마땅히 법륜이 이미 굴려졌다고 해야 하리니 온갖 성자(聖者)들이 모든 세간에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법륜을 굴린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분별론자는 “여기에서 근기[根]라는 것은 소의처(所依處)를 말한 것이지 근기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닌데 내가 어찌 어겼다고 하는가?”라고 말하니, 그들의 이러한 말도 도리에 맞지 않다. 그 밖의 다른 경을 어겼기 때문이다.
다른 경에서 “생문(生聞) 범지(梵志)가 세존에게 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교답마존(喬答摩尊)께서는 근(根)에 몇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22근(根)17)을 말하니, 안근(眼根)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그 경에서 어찌 근의 소의(所依)를 말씀하셨겠는가? 저 경과 이 경에서 근이라는 말은 다르지 않다. 하나는 근의 바탕을 말씀하셨고, 하나는 소의를 말씀하셨다면 제일 잘 성취한 것은 아니며 스스로의 허망한 고집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정코 신근 등의 5근도 유루에 통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문] 만일 유루에 통한다고 하면 그들이 인용한 경은 어떻게 해석해야 마땅하겠는가?
[답] 신근 등 5근은 실로 유루에 통하는데도 그 경에서 한결같이 무루라고
17)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6근(根)과 남근(男根)․여근(女根)의 2근과 명근(命根)과 우(憂)․희(喜)․고(苦)․락(樂)․사(捨)의 5수근(受根)과 신(信)․근(勤)․염(念)․정(定)․혜(慧)의 5근과 미지근(未知根)․이지근(已知根)․구지근(具知根)의 3무루근(無漏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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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까닭은 무루의 근에 의하여 이룩된 성자(聖者)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경에서는 오직 성자의 도[聖道]를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자로서의 차별은 성자의 도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요, 세속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그 경에 또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그를 밖의 이생품에 머문다고 말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시 어떻게 통한다고 말하는가?
[답] 선근이 끊어진 이[斷善根者]를 밖의 이생품이라고 한다. 모든 이생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內]이요, 둘째는 밖[外]이다. 선근이 끊어지지 않은[不斷善根] 것을 안이라 하고, 선근이 끊어진 것을 밖이라 한다. 그 경의 뜻은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선근이 끊어진 사람이라 말하리라”고 하신 까닭에 나는 인용한 경전이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여긴다.
혹 어떤 이는 “이것은 경부(經部)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경부의 논사들도 분별론자의 앞과 같은 집착을 막고 없애기 위한 까닭으로 세제일법은 5근으로 성품을 삼으면서도 오직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독자부(犢子部)의 종(宗)이다. 그 부의 논사들은 세제일법은 신근 등 5근으로 자성을 삼는다. 오직 이 5근만이 바로 자성선(自性善)이나 그 밖의 것은 이것이 섞였기 때문에 역시 선(善)이라 이름한다. 이 5근 때문에 이룩된 온갖 현성(賢聖)의 차별도 다른 근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계경에 “만일 5근이 더 늘어가고 맹렬하고 날카로우면서 평등하고 원만하도록 많이 닦고 익히면 구해탈(俱解脫) ='18)을 이루게
18) 구해탈(俱解脫) 이하로 수신행(隨信行)까지는 무학위(無學位)․수도위(修道位)․견도위(見道位)에 걸쳐서 수행자의 근기에 의거한 공덕의 구별이다. 구해탈이란 무학위에서 지혜와 선정에 의하여 해탈장(解脫障)을 여읜 성자(聖者)를 말하고 혜해탈(慧解脫)이란 단순히 지혜에 의하여 번뇌장(煩惱障)을 끊은 성자를 말하며 신증(身證)이란 불환과(不還果)의 성자로서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얻은 이를 말하고 견지(見至)란 수도위에서 지혜가 뛰어난 기[勝機]
의 성자를 말하며 신해(信解)란 지혜보다도 신앙의 힘[信仰力]이 강한 열기(劣機)의 성자를 말한다. 수법행(隨法行)과 수신행(隨信行)이란 견도위에서의 구별이어서 수법행은 견지보다 얕은 이요 수신행은 신해보다 얕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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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이보다 덜하면 아래로 혜해탈(慧解脫)을 이루고, 다시 덜하면 아래로 신증(身證)을 이루며,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견지(見至)를 이루고,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신해(信解)를 이루며,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수법행(隨法行)을 이루고, 또다시 덜하면 그 아래로 수신행(隨信行)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문] 지금 이 논의 종(宗)과 독자부와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어서 그의 설명을 서술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과 여기서 세운 뜻의 종과는 비록 대부분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조금의 차이는 있다.
그의 부(部)에서는 “세제일법은 오직 신(信) 등의 5근으로만 성품을 삼는다. 모든 이생의 성품은 한결같이 오염되었으니, 욕계(欲界)에 매인 고제(苦諦)를 보는 것에 의해 끊어질 수 있는 10종의 수면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면의 체성은 바로 불상응행(不相應行)이다. 열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학(學)․무학(無學)․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을 말한다. 아소락(阿素洛)을 세워서 제육취(第六趣)로 삼는다. 보특가라의 본체(體)는 실로 존재[實有
]한다”라고 고집한다. 그들의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또는 일곱 가지는 이것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그 밖의 대부분은 서로 비슷하다. 그것과 이것은 모두가 동일하다고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짐짓 그 종을 서술하면서 차단하고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그에게 물어야겠다. 만일 오직 5근만이 자성선이라면 그 밖의 선한 법의 자성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은 불선(不善)이요 무기(無記)인데도 5근이 섞였기 때문에 역시 선(善)이라 한다면 이와 같은 5근은 그것과 서로 섞여 있거늘 무엇 때문에 불선 또는 무기라고는 하지 않는가?
그리고 신근 등의 다섯 가지와 그 밖의 법과는 동일한 소의(所依)요 동일한 행상(行相)이며 동일한 소연(所緣)이며 동일하게 생기고[起]․동일하게 머무르고[住]․동일하게 소멸하고[滅]․동일한 결과[果]이고․동일한 등류(等流)이고․동일한 이숙(異熟)인데도 5근이 자성선이요 그 밖의 것은 서로가 섞였기 때문에 임시로 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면 다만 망정(妄情)을 좇고 있을 뿐이니 바른 도리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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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허물이 없게 하기 위하여 “세제일법은 근(根)이면서 근이 아닌[非根]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법구(法救) 존자는 “모든 심(心)․심소(心所)는 사(思)의 차별이다. 그러므로 세제일법도 사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모든 심․심소의 본체는 심(心)이다. 그러므로 세제일법도 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저 두 존자는 “신(信) 등의 사(思)와 심(心)은 앞뒤가 저마다 다르며 한꺼번에 작용함이 없다. 신 등의 5근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見道)에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이 견도에 든다’는 말을 한 것이고, ‘혹은 신의 사와 신의 심으로써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도 하고, ‘혹은 혜(慧)의 사와 혜의 심으로써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도 한다”고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상응하지 않는 법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 해야 한다.
그들은 “인정한다 해도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그대의 종(宗)에서 ‘마음 자체의 전후가 비록 상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연(所緣)이 있으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종도 역시 그러하여 신 등의 사와 심이 비록 자체에는 상응하는 뜻이 없어도 소연이 있으면 무간(無間)이 되어 견도에 든다는 것이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評
큰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신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서 견도에 든다고 하면 이미 정진(精進)과 염(念)․정(定)․혜(慧)는 없으므로 마땅히 해태(懈怠)․망념(妄念)․산란(散亂)․악혜(惡慧)를 가지고 견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만일 혜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든다 하면 이미 신․정진․염․정이 없으므로 불신(不信)․해태․망념․산란을 가지고 견도에 들게 된다. 이와 같거늘 어찌 큰 허물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갖가지 달리하는 집착을 막기 위하여 “이 이치 안에서는 만일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고 말한 것이다.
이 이치 안에서라 함은 ‘뒤바뀌지 않은 이 종(宗)․이 론(論)․이 온(蘊)․이 납식(納息)․이 품류(品類)와 이 계경에 수순하고 나와 모든 그 밖의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가 인정하는 이치 가운데에서’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가다연니자 존자는 자기 종[自宗]의 세제일법이 근(根)과 근이 아닌[非根]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와 심․심소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문] 세제일법은 고법지인(苦法智忍)19)과 등무간의 연이 되어 견도에 든다고 한다면 이것이 소멸하게 된 뒤에야 든다[入]고 하는가, 이것이 머무르는 자리[住位]를 곧 든다고 하는가? 만일 이것이 소멸한 뒤에야 든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미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만일 머무르는 자리를 곧 든다고 한다면 이생과 성자가 뒤섞여서 어지럽게 되지 않겠는가?
[답] 어떤 이는 “소멸한 뒤에야 든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글에서는 마땅히 ‘이미 들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때에 견도라는 이름이 이미 생겼기 때문인가?
[답] ‘이미 들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든다’고 말한 것은 구경(究竟)에 가행(加行)의 말을 말한 것이다. 마치 지금 ‘온다’는 말은 이미 와버린 사실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대왕은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가 비록 이미 왔다고 해도 ‘지금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이미 끊었는데도 ‘지금 끊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계경에 “즐거움이 끊어졌고 괴로움이 끊어졌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욕염(欲染)을 여의었을 때에 고근(苦根)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 제3 정려(靜慮)의 욕염을 여의고 낙근(樂根)이 끊어진 때에 비로소 끊어졌다고 한 것이므로 어찌 이미 끊어졌는데도 ‘지금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9) 견도(見道) 15심(心) 중의 맨 처음이어서 욕계의 고제(苦諦)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최초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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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미 해탈하였는데도 ‘지금 해탈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계경에 “마음은 욕루(欲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를 해탈한다”고 한 것과 같다. 욕염을 여의었을 때에 마음은 욕루에서 이미 해탈하게 되었는데도 지금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染)을 여의어 마음이 유루와 무명루에서 해탈할 때에야 비로소 ‘해탈한다’고 하며 또한 이미 해탈했는데도 ‘지금 해탈한다’고 한다.
또 이미 느꼈는데도 ‘지금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치 계경에 “즐거운 느낌[樂受]을 느낄 때에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줄 사실대로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한 것과 같다. 그는 또한 이미 느꼈는데도 ‘지금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니, 느끼는 때에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이미 들었다 하더라도 ‘지금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곧장 정성이생에 든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니,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등무간(等無間)으로 드는 것과 곧장 든다는 것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말하는 이는 세제일법에 머무른 때를 ‘든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생은 곧 성자이어야 하리니, 성자의 도에 들었기 때문이다.
[답] 그와 같은 허물은 없다. 세제일법이 머무르는 지위에 이르렀을 때에는 고법지인은 막 생기는 지위[正生位]에 있는 것이므로 아직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고법지인은 비록 아직 생기지는 못했다 해도 지금 막 생기는 중에 있으므로 등무간이라 한다. 세제일법은 그때에 그 등무간연이 되었기 때문에 ‘든다’라고 한다.
이를 말미암아 ‘만일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만일 심․심소의 법이 이미 정생이생에 들었거나 혹은 장차 들게 될 것이면 역시 그것은 세제일법인가?
[답]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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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만일 지금 막 들어간 것을 말하면 이미 들어간 것이고 장차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줄 알 것이다. 만일 현재를 말하면 과거와 미래도 말하는 줄 알 것이니, 그 모양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思)와 심(心)의 차별을 논하는 이는 “만일 신(信)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면 오직 신의 사와 심만이 동일한 종류의 등무간연이 될 뿐이다. 이렇게 하여 만일 혜(慧)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면 오직 혜의 사와 심만이 동일 종류의 등무간연이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서로 비슷하게 상속(相續)한다고 논하는 이는 “심․심소의 법은 다만 동일 종류만으로 등무간연이 된다. 심과 심은 심소가 아니요, 심소(心所)와 심소는 심이 아니다. 모든 심소 가운데서 수(受)는 수와 함께하는 것이요 그 밖의 것이 아니며 상(想) 등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심소는 항상 상응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연[別緣]을 만나면 일어나는 것이니, 만일 앞의 대경을 기뻐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만일 앞의 대경을 싫어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며 또는 대경의 중용(中庸)을 만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일어난다.
만일 받아들인 바를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수(受)가 생기고, 만일 형상을 취하고 싶어하면 상(想)이 생기며, 만일 짓는 바를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사(思)가 생기고, 나아가 만일 결택한 것을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혜(慧)가 생긴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가 항상 상응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심․심소의 법이 일어났다 해도 마땅히 모두가 등무간연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그는 “모두가 등무간연이 될 수 있으나 무간(無間)은 아니다. 마치 그대의 종(宗)에서는 무상(無想)에서 나올 때에 비록 5백 겁(劫) 동안 심․심소가 없었다 하더라도 드는 지위[入位]의 심․심소 법으로써 지금 나오는 지위[出位]에서 등무간연이 된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나의 종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같은 종류의 법이 오랜 시간 동안 끊어졌다 하더라도 앞의 것이 뒤에 것의 등무간연이 된다.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고[有心] 마음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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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는 저마다 구별되기 때문이요, 또 상응하는 법에 과(果)를 주는 것이 있고 아직 과를 주지 않는 것이 있어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또 아직 생기지 못한 마음 등은 등무간이 아닌데 미리 그의 연(緣)이 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저 『품류족론(品類足論)』과도 어긋난다. 거기서 “어떤 것이 마음의 등무간법인가?. 마음의 사이가 틈이 없으면서[無間]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이 이미 생겼거나 혹은 지금 막 생기는 것과 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이 이미 생겼거나 혹은 지금 막 생긴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또 다른 허물이 있게 된다. 만일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의 심․심소 법이 무간(無間)한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나 혹은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의 심․심소 법의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앞의 자리에서 이미 일어났던 심․심소의 법은 마땅히 뒷자리의 등무간연이 아니어야 하리니, 서로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무심무사지의 심․심소의 법이 무간한 무심유사지나 혹은 유심유사지의 심․심소 법의 앞에 나타나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그와 같다. 선(善)․불선(不善)․무기(無記) 등의 심․심소 법이 차츰차츰 무간이 되어도 그 허물은 역시 그러하다. 앞의 것이 만일 뒤의 것의 등무간연이 아니라면 뒤의 것은 이미 연이 없으므로 마땅히 일어날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앞의 ‘멀리 떨어졌던[隔越] 것과 같은 종류의 모든 법의 등무간연을
말미암는다’고 하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유심위(有心位)에 있으면서 멀리 떨어졌던 것이 연이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최초의 무루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일어나지 못했던 뛰어난 유루는 이미 앞에서 일어난 같은 종류의 등무간연이 없으므로 마땅히 일어날 수 없다.
또 그가 한 말에는 큰 허물이 있다. 탐냄[貪]의 무간에는 언제나 탐냄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탐냄을 조복하거나 부정관(不淨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하고, 만일 성냄[瞋]의 무간이면 언제나 성냄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성냄을 조복하거나 자비관(慈悲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하며, 만일 어리석음[癡]의 무간이면 언제나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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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석음을 조복하거나, 인연관(因緣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한다.
아견(我見) 등이 일어나는데도 그 이치는 같은 줄 알 것이니, 다른 종류[異類]를 잡아 일으키는 가까운 연[近緣]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수승한 선[勝善]은 아직 일어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착한 마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해탈을 얻게 되는 이치가 없으리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허물은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생긴 마음 무더기[心聚]는 뒤에 생긴 무더기의 등무간연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평등[等]하거나 평등하지 않거나 간에 앞의 것은 뒤의 것에 대하여 열어주면서 피하는 힘[開避力]을 내는 것이 동일함이 마치 곡식의 무더기[穀豆聚]와 같기 때문이다.
[문] 세제일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닦을 미래의 심․심소의 법도 세제일법인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서 ‘만일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 미래의 것은 이미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또 그것이 만일 세제일법이라면 세제일법에는 여러 마음[多心]이 있어야 되므로 곧 뒤의 글[後文]에서 ‘세제일법은 한마음[一心]이요 여러 마음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데에도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如是說者]20)도 있다. 즉 “저 법도 세제일법이라 한다. 만일 그 법이 세제일법이 아니라면 지온(智蘊)에서 말한 것과는 어긋나게 된다. 지온에 ‘만일 아직 얻지 못했던 도(道)가 목전에 나타나 있다면 그 밖의 미래의 그 종류의 도를 닦는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세제일법이 아니라고 집착하면 어떻게 그 종류의 도라고 이름하겠는가”
[문] 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세제일법이라 할 수 있겠는
20) 이 대비바사론의 편에 서 있는 정의가(正義家)의 뜻이다. 아비달마 논사(論師)라 하기도 하고 응리론자(應理論者)라고 하니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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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답] 그것이 비록 등무간연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잘 수순하여 득(得)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비구가 승가에게 위임하는 욕(欲)의 법21)과 같으니, 마치 승가 대중이 포쇄타(布灑他)를 할 때에 어떤 여러 비구가 비록 대중과 함께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욕을 위임[與欲]함을 말미암아 포쇄타를 얻고 모든 그 밖의 승사(僧事)에 있어서도 역시 성립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미래에 닦아야 할 종류가 비록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득을 일으켜 드러나는 모양에 수순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드러나는 모양에 수순하면서 득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연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수순하는 힘 때문이니, 성자의 도에서 장애하지 않는 힘[不礙力]을 일으킴이 강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것도 세제일법이라면 이 안의 본론(本論)에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남겨진 뜻이 있는[有餘]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등무간연이 될 수 있는 것이면 이 가운데에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세간에 행해지는 것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과위를 취하거나22) 과위를 주는 것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과위를 취하거나 과위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장양(長養)을 인하여 얻으면서 또한 몸에 있는 것이면 이 가운데
21) 포살(布薩)․설계(說戒)․수계(受戒) 등을 행할 때 동일한 구역에 속한 비구는 모두 참석하는 것이 규칙이지만 일이 있어 출석할 수 없는 경우, 출석의 희망이 있으면 이것을 욕(欲)이라 하고, 그 희망을 다른 출석하는 비구에게 위탁하는 경우를 여욕(與欲), 그 비구가 위탁을 받으면 수욕(受欲), 또한 이를 석상(席上)에서 대중에게 설하는 것을 설욕(說欲)이라 한다.
22) 결과를 취한다[取果] 함은 원인이 미래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을 말하며, 결과를 준다[與果]고 함은 원인이 힘을 주어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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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비록 장양을 인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몸에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세력이 있어서 미래를 닦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닦을 힘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마음이 그것의 원인이요 그 마음은 이것의 결과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법으로 원인에 보답하고 또한 결과를 취하며 몸에 있으면서 경계를 반연하며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두 가지 닦음[二修]을 갖추었으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오직 득수(得修)일 뿐이고 행수(行修)의 뜻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작용(作用)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뒤의 글[後文]에서 세제일법은 여러 마음[多心]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답] 그것이 현재 세상에서 작용이 있는 것이면 오직 한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온갖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만일 온갖 것을 다 말하면 실로 여러 마음이 있을 것이니, 미래 세상 가운데는 많은 품류가 있고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닦을 것이 아니라 해도 오히려 세제일법이란 이름을 얻거늘 하물며 닦아야 할 것인데도 이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이가 “혹시 상응하는 세제일법이면서 고법지인과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하리니, 이른바 미래에 닦아야 할 종류이다.
[문] 세제일법의 수전색(隨轉色)23)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세제일법인가?
23) 수전색(隨轉色)이라 함은 정구계(定俱戒)의 무표(無表)를 말하고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라 함은 생(生)․주(住)․이(異)․멸(滅) 등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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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 ‘만일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연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의 저 법도 세제일법이다.
[문] 그것은 이미 등무간연이 되지 않거늘 어떻게 세제일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답] 그것이 비록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수순하면 그것은 이 심․심소의 법과 동일하게 일어나고[一起]․동일하게 머무르고[一住]․동일하게 소멸[一滅]하며, 동일한 결과[一果]요, 동일한 등류[一等流]며, 동일한 이숙[一異熟]이어서 극히 친근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남어 있는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 될 수 있다면 이 가운데서 곧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법이 장양(長養)으로 인하여 얻는데 소연(所緣)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법과 상응하면서 소의(所依)가 있고 행상(行相)이 있고 소연이 있고 일깨움[警覺]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혹시 현재 세제일법에서 고법지인의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하리니, 이것은 수전색(隨轉色)과 심불상응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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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②
[문] 이미 세제일법에 부수해서 일어나는 생(生)․주(住)․노(老)․무상(無常)도 세제일법임을 알았다.
저 득(得)1)도 세제일법인가?
가령 그렇다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모두 무슨 허물이 있는가?
만일 저 득도 세제일법이라 하면 성자의 과위를 얻은 뒤에 순결택분(順決擇分)2)이 거듭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며, 만일 저 득이 세제일법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사문과(沙門果)의 득은 사문과이나 세제일법의 득은
1) 득(得, Prāti)은 성취(成就) 또는 획(獲)이라고도 한다. 선(善)․악(惡)․무기(無記)의 색심(色心)에나 유위무루(有爲無漏) 등의 모든 법을 색심의 조직에 매달리게 하여 잃지 않게 하는 힘이어서 유부(有部)에서는 이것을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일종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 그리고 그 득을 법전득(法前得)․법구득(法俱得)․법후득(法後得)․비전후구득(非前後俱得)의 4종으로 나눈다. 법전득이란 법이 아직 나타나거나 일어나기 전에 그것
을 먼저 나타내거나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말하자면 가능태(可能態)로서의 힘을 말하고, 법구득이란 아주 변하여 현실(現實)로 되게 하는 힘을 말하며, 법후득이란 거기에 남어 있는 습기[餘習]의 힘을 말하고, 비전후구득이란 상주(常住) 열반을 얻을 때에 얻을 열반과 능히 얻는(能得) 지혜와의 사이에 앞뒤에 다 같이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4종의 득 가운데서 세제일법과 함께 일어나면서 동반(同伴)하는 득은 다만 법구득 뿐이며 다른 세 가지 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4상(相) 등과 같아서 그것은 세제일법의 필연적인 속류(屬類)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득은 세제일법이 아니라고 한다. 대비바사론의 법[法義]이다.
2)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하는 4선근위(善根位)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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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이 아닌가?
[답] 저 득은 결코 세제일법이 아니니, 성자의 과위를 얻은 뒤에 순결택분이 거듭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사문과의 득은 사문과이나 세제일법의 득은 세제일법이 아닌가?
[답] 사문과는 성취한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사문과의 득은 사문과이지만 세제일법은 등무간연으로 드러나게 되는지라 저 득은 벌써 등무간연이 아니다.
또한 수순하지 않는 것이 마치 저 생(生) 등과 같기 때문에 저 득은 세제일법이 아니며, 난․정․인의 득도 난 등이 아니니, 성자가 된 뒤에 거듭 앞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저 득도 세제일법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성자의 과위를 얻은 뒤에 순결택분이 거듭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
[답] 그것의 일부분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역시 허물은 없다. 상응하는 것은 거듭 앞에 나타나게 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은 거듭 앞에 나타나게 된다.
난․정․인의 득도 그와 같다.
어떤 다른 논사는 “저 함께 일어나는 득[法俱得]도 세제일법이지만 뒤에 일어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앞의 허물이 없다. 난 등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評] 그것과 함께 일어나거나 뒤에 일어나거나 득은 모두가 세제일법이 아니니,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난 등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처음의 말이 도리에 있어서 옳다고 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의 생․주․노․무상도 세제일법이면서 득은 그렇지 않은가?
[답] 생 등은 그것과 동일한 과(果)이므로 서로가 따라 행하면서 서로 여의지도 않고 언제나 어울리면서 앞도 뒤도 없으며 상(相)과 소상(所相)이 일찍이 서로 여의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역시 세제일법이지만 득은 그의 법
과는 동일한 과가 되지도 않은 것이어서 서로가 따라 행하지도 않고 성품과 모양(性相)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서 혹은 앞이 되기도 하고 혹은 뒤가 되기도 하며, 득(得)과 소득(所得)은 어떤 때에는 서로가 여의는 것이 나무의 껍질이 어떤 때에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득은 세제일법이 아니며 난․정․인의 득도 그와 같다.
[문] 세제일법은 몇 가지의 염주(念住)인가?
[답] 현재는 하나의 섞인 연[一雜緣]의 법념주(法念住)이며 미래에는 네 가지를 갖추어서 견도(見道)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 세제일법은 몇 가지의 연(緣)으로 되었는가?
[답] 네 가지의 연[四緣]이니,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이다.
인연이 된다 함은 저 상응(相應)․구유(俱有)․동류(同類) 등의 법과 인연이 됨을 말하고, 등무간연이 된다 함은 고법지인과 등무간연이 됨을 말하며, 소연연이 된다 함은 능연(能緣)의 이 심․심소법과 소연연이 됨을 말하고, 증상연이 된다 함은 자성(自性)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유위의 법과 증상연이 됨을 말한다.
[문] 세제일법에는 몇 가지의 연(緣)이 있는가?
[답] 네 가지의 연이 있다.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상응․구유․동류 등의 법이 있는 것을 말한다. 등무간연이 있다 함은 이미 생긴 증상의 인[增上忍]을 말하고, 소연연이 있다 함은 욕계의 5온(蘊)을 말하며, 증상연이 있다 함은 자성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을 말한다.
[문] 글[文]에서는 비록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뜻으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출세제일법(出世第一法)인가?
[답] 고법지인이 그것이니, 이것이 온갖 성자의 도[聖道]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금강유정(金剛喩定)3)이 그것이니, 이것이 온갖 번뇌
3)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의 제9품(品)이 수혹(修惑)을 끊은 무간도(無間道)를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 한다. 이것에 의하여 그 다음에는 해탈도(解脫道)를 얻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출세제일법(出世第一法)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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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를 다하고 두루 아는 과[遍知果]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처음의 진지(盡智)가 그것이니, 이것이 온갖 무학의 법[無學法]을 지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그것이니, 온갖 유위법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열반의 경계가 그것이니, 온갖 유위와 무위의 법 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라한의 맨 마지막 성스러운 찰나(刹那)가 그것이니, 이생 자리[異生位]의 맨 마지막 찰나의 마음을 세제일법이라 하는 것처럼 아라한의 맨 마지막 찰나의 무루의 마음을 출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이 그것이니, 이생 자리의 최후의 마음이 세제일법인 것처럼 그와 같아서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이 출세제일법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아야 되니,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은 출세(出世)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설 가운데 맨 처음의 설이 옳다고 하겠다. 이것을 말미암아 모든 성자의 도를 맡아 지니기 때문이다.
[論]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세제일법의 자성을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그 이름을 붙인 인연을 말하지 않아서 지금 말하고 싶어서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일컫게 되면 도리로 보아서 그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족성(族性) 때문인가, 생긴 모습[色] 때문인가, 아니면 세력․부귀․권속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가의 인연을 당연히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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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이와 같은 심․심소의 법은 그 밖의 세간의 법보다 으뜸가고[最]․뛰어나고[勝]․어른이고[長]․높고[尊]․위이고[上]․미묘한[妙] 것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한다.
이 심․심소는 그 밖의 다른 세간의 법보다 모두가 뛰어나기[都勝] 때문에 제일이라 하는 것인가, 일부분이 뛰어나기[分勝] 때문에 제일이라 하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모두가 뛰어나기 때문에 제일이라 한다면 이것이 어찌 현관변세속지(現觀邊世俗智)보다 뛰어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현관변에서 닦는 세속지는 견도위의 권속이어서 견도위에 딸리고 지혜의 힘이 뛰어나거니와 이 법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이것이 어찌 잡수졍려(雜修靜慮)4)보다 뛰어나겠는가? 그리고 저 등지(等至)와 받게 되는 생(生)은 이생과는 공통되지 않으나 이 법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이것이 어찌 첫 진지(盡智) 때에 닦는 선근(善根)보다 뛰어나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닦을 때에는 온갖 장애를 여의고 소의(所依)가 청정해지나 이 법은 그렇지 못하다.
또 이것이 어찌 공공(公公)․무원무원(無願無願)․무상무상(無相無相)5)의 세 가지 삼마지(三摩地)보다 뛰어나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성자의 도조차도 싫어하고 미워하거늘 하물며 유루이겠는가? 이 법은 그렇지 못하다.
4) 아라한 혹은 불환(不還)의 성자(聖者)가 제4선(禪)에 들어가 먼저 여러 생각[多念]의 무루심(無漏心)을 일으키고 이것에 의하여 여러 생각의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키며 차례로 시간을 단축하면서 한 생각[一念]의 유루에 의하여 다음에는 한 생각의 무루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이렇게 해 그의 힘에 의하여 아래의 3정려를 뒤섞어 닦는 것[雜修]이 잡수정려의 활용(活用)이다.
5) 공(公)․무상(無相)․무원(無願)을 세 가지의 등지(等持)라 하며 이에 대하여 공공(空空)․무원무원(無願無願)․무상무상(無相無相)을 중등지(重等持)라 한다. 이것은 앞의 공․무상․무원을 다시금 부정하는 삼매(三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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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일부분이 뛰어나기 때문에 제일이라 한다면 난․정․인 등도 제일이라고 해야 하니, 각각 그 여러 아래 지위[下位]의 선근보다는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법은 모두가 뛰어나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자의 도의 문[聖道門]을 여는 데에 기준하여 말한 것이지 온갖 것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현관변세속지(現觀邊世俗智)6) 등은 비록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뛰어난 것이 있다해도 모두 성자의 도의 문을 열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이 법만은 유독 열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뛰어나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법은 다른 온갖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제일이라 한다. 이를테면 현관변세속지 등에 있는 모든 뛰어난 일은 모두 이것을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저 모든 뛰어난 일은 만일 이 법이 성자의 도의 문을 열어 줌이 없다면 본체[體]조차도 닦지 못하거늘 하물며 뛰어난 작용[用]이 있겠는가? 반드시 이 법을 말미암아 성스런 도의 문을 열어 주어야 그의 본체를 닦고 비로소 뛰어난 작용이 있게 된다. 저 모든 뛰어난 일들
이 이미 이를 말미암아 이룩되었기 때문에 그 밖의 온갖 일보다 뛰어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법은 일부분이 수승하기 때문에 제일이라 한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난(煖) 등도 제일이라 해야 하니 각각 하위(下位)의 선근보다는 뛰어나기 때문이다.
[답] 저 난 등은 두 부분[二分] 가운데서 다 같이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간의 선한 법에는 통틀어 두 부분이 있나니, 첫째는 이생(異生)에 의한 것이요, 둘째는 성자(聖者)에 의한 것이다.
세제일법은 비록 성자의 세속지 등에서는 가장 뛰어나지 않다 하더라도
6) 위 두 세계[上二界]의 고제․집제․멸제의 세 가지 진리를 관하는 무루지(無漏智)로서의 유지(類智)의 후변(後邊)에서 일어나는 유루지(有漏智)를 말한다. 그 중에서 고제․집제의 두 진리에 관한 속지(俗智)는 4념주(念住) 전체에 다 통하고 멸제에 관한 속지는 법념주(法念住)에만 한한다. 현관변의 세속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무루지보다도 더 행상(行相)이 예민하여 관할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것을 매우 뛰어난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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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이 얻은 정려(靜慮)7)․무량(無量)․해탈(解脫)․승처(勝處)․변처(邊處) 나아가 얻는 제일의 유사(有思)와 부정관(不靜觀)․지식념(持息念)․모든 염주[諸念住]․3의관(義觀)․7선처(善處)․난․정․인의 것보다는 가장 뛰어나다. 난 등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유독 세제일법이라고 일컫는다.
[문] 이것을 어떤 뜻 때문에 제일이라 하는가?
[답] 이것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요, 첫째가는 것을 잘 이끌기 때문이며, 제일의 과(果)를 얻기 때문이요, 제일의 성품[性]에 나아가기 때문에 이것이 제일이라 일컫는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제일유(第一有)8)를 꺾고 조복하기 때문에 이것이 제일이라 일컫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이 이생에서는 최후의 마음이기 때문이니 마치 높은 깃대의 꼭대기와 같아서 더는 그 위가 없다. 이것이 바로 제일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 가운데서 말한 으뜸가고․뛰어나고․어른이고․높고․위이고․미묘하다 함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혹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모두가 이것은 제일이라는 뜻을 찬양하려고 서술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역시 차별이 있다. 우선 이름[名]에 차별이 있다. 이를테면 이것을 으뜸간다 하거나 미묘하다고 한다.
또 모든 선근(善根)에 대해서도 차별이 있다. 듣고 이루는 것[聞所成]에 대하여 으뜸간다고 하고, 고찰하여 이루는 것[思所成]에 대하여 뛰어나다고 하며, 부정관․지식념․염주(念住) 등에 대하여 어른이라 하고, 난(煖)에 대하여 높다 하며, 정(頂)에 대하여 위라고 하고, 인(忍)에 대하여 미묘하다고 한다.
7) 정려(靜慮)란 초선(初禪)․2선․3선․4선을 말하고 무량(無量)이란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을 말하며, 해탈(解脫)이란 8해탈을 말하고 승처(勝處)란 8승처의 뜻이며 변처(邊處)란 10변처를 뜻하는 것이다.
8)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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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의 자리[所依地]에 기준하여도 차별이 있다. 이것은 미지정(未至定)9)에 의지한 것을 으뜸간다고 하고, 초정려(初靜慮)에 의지하는 것을 뛰어나다고 하며, 정려 중간에 의지한 것을 어른이라 하고, 제2 정려에 의지하는 것을 높다 하며, 제3 정려에 의지하는 것을 위이다 하고, 제4 정려에 의지하는 것을 미묘하다고 한다.
뜻[義]이 동일하지 않음에 의거하여도 차별이 있다. 이것은 맨 꼭대기[邊頂]에 이르기 때문에 으뜸간다 하고, 상품(上品)에 속하기 때문에 뛰어나다 하며, 길상(吉祥)을 짓기 때문에 어른이라 하고, 몸이 승진(昇進)하기 때문에 높다 하며, 성품이 견고하기 때문에 위이다 하며, 소원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미묘하다고 한다.
또 본체[體]와 작용[用]이 다름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다. 이것은 고법지인의 등무간연이 되기 때문에 으뜸간다 하고, 온갖 이생의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하며, 온갖 세속의 선근을 압도하기 때문에 어른이라 하고, 뛰어난 덕[勝德]에 미치기 때문에 높다 하며, 두 부분[二分]이 없기 때문에 위이다 하고, 무루(無漏)와 비슷하기 때문에 미묘하다고 한다.
또 모양과 작용[相用]이 다름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다. 이것은 이생으로서의 최후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의 끝과 같으므로 으뜸간다 하고, 성스런 도의 문을 열기 때문에 뛰어나다 하며, 근기[根]가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어른이라 하고, 온갖 순결택분(順決擇分)에서 맨 위이기 때문에 높다 하며, 온갖 번뇌의 원수를 꺾어 조복하기 때문에 위이다 하고, 사랑스런 과보[愛果]를 이끌기 때문에 미묘하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와 같은 육구(六句)는 뒤의 것으로서 앞의 것을 해석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이것이 으뜸가기 때문에 제일이라 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으뜸간다 하며, 어른이기 때문에 뛰어나다 하고, 높기 때문에 어른이라 하며, 위이기 때문에 높다 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위이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9) 정려(靜慮)에는 4근분(近分:緣備定)과 4근본(根本)이 있다. 이 중에서 초선(初禪)의 근분을 특히 미지정(未至定)이라 하고 또 초선과 2선의 중간에 무심유사(無尋有伺)의 1단(段)이 있는 것을 정려중간정(靜慮中間定)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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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또 이와 같은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서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성스런 성품을 얻으며, 삿된 성품[邪性]을 버리고 바른 성품[正性]을 얻어 정성이생에 들어가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한다.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 함은 이 심․심소의 법이 이생의 성품을 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이 이생의 성품을 버리는 것인가? 세제일법인가, 고법지인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세제일법이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 하면 어떻게 그것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는가? 만일 고법지인이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 하면 이것은 어느 지위에 있는 것인가? 생기는 때[生時]에 버리는 것인가, 소멸하는 때에 버리는 것인가? 만일 생기는 때에 버린다 하면 어떻게 미래에 짓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만일 소멸한 때에 버린다 하면 그 성품을 이미 버렸거늘 다시 무엇을 다시 버릴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세제일법이 바로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라고 말한다.
[문] 이것은 이미 이생의 법이거늘 어떻게 그것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는가?
[답] 그것에 머무르면서 그것을 버린다 해도 역시 허물은 없다. 마치 그것을 다루는 이[調御者]가 코끼리를 타고는 코끼리를 길들이고, 말을 타고는 말을 길들이며, 배를 타고는 배를 부리고, 수레를 타고는 수레를 부리는 것과 같으며, 마치 원수에게 이기는 이가 원수 위에 올라타고 원수를 살해하는 것과 같고, 마치 나무를 베는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이생의 성품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다.
어떤 이는 “고법지인이 바로 이생의 성품을 버릴 수 있다. 막 생기는 때에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막 소멸하는 지위에서 욕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열 가지 수면[十種隨眠]을 끊는 것이 마치 등불이 켜질 때에 광명을 내면서 어둠을 깨뜨리고 꺼질 때에는 심지가 타고 그을음이 나면서 기름이 다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미래의 것을 지으면서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작용[用]이라 하는가, 도리로 보아 어찌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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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뜻에 어김이 없으면 인정한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온갖 법 중에서 미래에 대하여 작용할 수 있는 것으로 통틀어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안의 법[內法]으로 마치 고법지인과 같고, 둘째는 바깥 법[外法]으로 마치 햇빛 등의 광명과 같으며, 셋째는 안팎의 법[內外法]으로 마치 생겨나는 모든 모양[生相]과 같으니 하나의 등불로 여러 등에 불을 붙일 수 있음은 세상이 다 함께 아는 것이요, 고법지인에 두 작용이 있다 한들 무슨 잘못인가?
어느 다른 논사는 “세제일법과 고법지인은 서로서로가 도우면서 이생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다. 세제일법은 이생의 성품과 서로가 비록 항상 어기지만 힘이 하열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버릴 수 없어서 이 때문에 고법지인을 끌어내어 서로가 함께 힘을 도와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 비유하면 연약한 사람이 건장한 이를 의지하여 서로가 도와 원수를 굴복하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세제일법은 무간도(無間道)10)와 같고, 고법지인은 해탈도(解脫道)와 같이 이생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은 이생의 성품과 함께 성취하며 같이 소멸하게 되고, 고법지인은 이생의 성품과는 함께 성취하지 않으면서 같이 생기게 된다.
성자의 성품을 얻는다 함은 이 심․심소의 법이 고법지인을 얻고 온갖 성자의 법을 맡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말하여 성자의 성품이라 한다. 또 그 밖의 성자의 도가 비록 성자의 성품에 속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는 “견도는 모두 성자의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온갖 성자의 도는 모두 성자의 성품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 가운데서 성자의 성품을 성취하지 못함이 마땅하니, 이것을 성자라고 이름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10) 무간도(無間道)는 번뇌를 끊는 지위요, 해탈도(解脫道)는 그 결과로서 이계득(離繫得)을 얻는 지위이다. 세제일법은 실제로 무간도가 아니요 견도(見道)의 모든 무루의 마음[苦法智忍]은 해탈도는 아니로되 양자(兩者)의 관계는 그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같다[如]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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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세제일법은 오직 고법지인만을 이끌어 얻는 것이면서도 고법지(苦法智)에 대하여는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밖의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여야 이것이 성자의 성품을 얻는다 하겠는가?
[답] 온갖 성자의 도는 성자를 이루게 하므로 모두 성자의 성품이라 하니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세제일법은 그 일부분만 얻어도 역시 얻었다고 하니 마치 불에 탄 옷[燒衣]을 말하는 것과 같다.
삿된 성품[邪性]을 버린다 함은 이 심․심소의 법이 세 가지의 삿된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 첫째는 업(業)의 삿된 성품이요, 둘째는 갈래[趣]의 삿된 성품이며, 셋째는 견해[見]의 삿된 성품이다.
업의 삿된 성품이란 5무간업(無間業)11)을 말하고, 갈래의 삿된 성품이란 3악취(惡趣)를 말하며, 견해의 삿된 성품이란 5전도견(顚倒見)을 말한다.
[문] 이 지위 안에서 업과 갈래의 삿된 성품은 성취하지 못하며 도류지(道類智)일 때에 견해의 삿된 성품을 버려야 비로소 구경(究竟)을 얻거늘 어떻게 이 지위에서 세 가지의 삿된 성품을 버릴 수 있겠는가?
[답] 세 가지의 연(緣)을 말미암아 이 지위에서 버린다고 한다. 첫째는 짓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버린다고 하니, 업의 삿된 성품이다. 둘째는 가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버린다고 하니, 갈래의 삿된 성품이다. 셋째는 지어가지[行]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버린다고 하니, 견해의 삿된 갈래이다.
[문] 증상인(增上忍)일 때에 세 가지의 연은 이미 갖추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지위에서 비로소 버린다고 하는가?
[답] 지금 그의 의지[依]를 깨뜨리는 까닭에 그것을 버린다고 말한다.
[문] 무엇을 그의 의지라 하는가?
[답] 무부무기(無覆無記)한 이생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번뇌는 이생의 성품에 의지하여 모든 유정을 해치고 생사에 있어서 모든 고통을 받게
11) 5무간업(無間業)은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될 무거운 죄업을 말하는 것이니, 곧 부(父)․모(母)․아라한(阿羅漢)을 살해하고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며 화합승(和合僧)을 파괴하는 다섯 가지 업이다. 3악취(惡趣)란 지옥(地獄)․아귀(餓鬼)․방생(傍生)을 말하며, 5전도견(顚倒見)이란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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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마치 사자왕(師子王)이 무부무기의 굴혈(窟穴)에 의지하여 갖가지의 짐승들을 해치는 것과 같다. 세제일법은 그의 의지인 이생의 성품을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고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고법지인은 그것의 대치(對治)이다. 세제일법은 그것을 이끌어서 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린다”라고 말한다.
[문] 업과 갈래의 삿된 성품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이거늘 고법지인이 어떻게 대치할 수 있는가?
[답] 고법지인은 다섯 가지를 대치하게 된다. 버림[捨]과 끊음[斷]과 지님[持]과 짓지 않음[不作]과 가지 않음[不往]의 대치이다.
버림의 대치라 함은 이것이 이생의 성품을 버리기 때문이요, 끊음의 대치라 함은 욕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열 가지 수면을 끊기 때문이며, 지님의 대치라 함은 이것이 온갖 뒤의 지위의 모든 성자의 도를 지니기 때문이요, 짓지 않는 다스림이라 함은 이것이 마침내 5무간(無間)을 짓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가지 않는 대치라 함은 이것이 마침내 3악취(惡趣)에 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바른 성품[正性]을 얻는다 함은 이 심․심소의 법은 고법지인을 얻어 바른 법[正法]을 맡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말하여 바른 성품이라 한다. 또 그 밖에 성자의 도는 비록 바른 성품에 속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견도(見道)는 모두가 바른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온갖 성자의 도는 모두가 바른 성품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에서 바른 성품이 성취되지 않아야 하고 이것은 곧 성자의 도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세제일법은 오직 고법지인만을 끌어 얻으면서도 고법지(苦法智)는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이 바른 성품을 얻는다 하겠는가?
[답] 온갖 성자의 도는 뒤바뀜[顚倒]을 여의기 때문에 모두 바른 성품이며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세제일법은 그것의 일부분만 얻어도 역시 얻는다고 하나니, 마치 불에 탄 옷[燒衣]을 말하는 것과 같다.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든다 함은 이 심․심소의 법이 견도에 든다는 것이다.
[문] 온갖 성자의 도는 모두가 정성이요 또한 이생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 유독 견도만을 말하는가?
[답] 온갖 번뇌나 모든 탐애는 모든 선근으로 하여금 성숙할 수 없게 하고 모든 유(有)로 하여금 윤택하게 합하면서 허물을 일으키므로 비록 모두가 생긴다[生] 하더라도 견도에서 끊어야 할[見所斷] 것이 여기서 설하는 생긴다는 뜻보다 뛰어나므로 견도에서 마침내 다스리게 된다. 이 때문에 견도에서 유독 생김을 여읜다[離生]는 것이다.
모든 바르지 않은 견해[不正見]는 반드시 견도를 말미암아야 마침내 끊을 수 있기 때문에 바른 성품[正性]이라 하며, 세제일법이 곧장 끌어 일으키기 때문에 정성이생에 든다고 말한다.
또 온갖 번뇌나 모든 탐애는 선근으로 하여금 성숙할 수 없게 하고 모든 유로 하여금 윤택하게 합하면서 허물을 일으키므로 모두 생(生)이라 하되 견도가 일어난 뒤에는 그의 세력을 꺾어 다시는 더 늘려 허물을 내지 않나니 이를 말미암아 견도를 유독 이생이라 한다.
정성이생에 들었다고 말한 뜻은 앞에서 한 말과 같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묘음(妙音) 존자는 “모든 유정들은 선근이 성숙되면 견도에 들게 된다. 이 때문에 견도를 이생이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혹(惑)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악취에 떨어져서 모든 극심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생 것[生]을 먹으면 오랫동안 몸속에 있으면서 갖가지의 몹시 괴로운 일 들을 주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이 혹(惑)은 생이라 하며 견도에서 그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정성에 든다는 말은 역시 앞의 말과 같다.
또 유신견(有身見) 등은 억세고 강해서 조복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짐승이 사납게 날뛰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생이라 한다. 견도에서는 그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정성에 든다는 말은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 이 가운데서 생이라는 이름은 이생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니, 포악한 모든 혹업(惑業)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견도에서는 그것을 버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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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이라 말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또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모든 번뇌 더미는 차츰차츰 서로가 도우면서 끝없는 생을 이끄는데 견도가 일어난 뒤에는 그 세력을 꺾어 끝없는 생의 허물을 초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견도를 유독 이생이라고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또 이생의 몸 안에 있는 번뇌의 나쁜 업은 극히 조순(調順)하지 않기 때문에 생이라 한다. 모든 유가사(瑜伽師)12)가 이것에 빠지면 견도는 거기서 건져내어 성자의 지위에 놓아두기 때문에 이생이라고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또 견도에서 끊을 혹(惑)은 마치 뿌리가 심어진 것 같아서 끝없는 허물을 내는 것인데 견도에서 영원히 뽑아주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든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에 부정취(不定趣)로부터 나와서 정정취(正定趣)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수행하는 이는 그때에 사정취(邪正趣)의 소의(所依)인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정정취의 소의인 견도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정성결정에 든다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그때에 다섯 가지의 동분(同分)을 버리고 여덟 가지의 동분에 들어간다. 다섯 가지 동분이라 함은 모든 이생에게 있는 동분을 말하나니, 그것에 의하여 5무간업을 짓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동분이라 함은 모든 성자에게 있는 동분을 말하나니, 그것에 의하여 4향(向) 4과(果)를 얻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에 사정분(邪定分)을 버리고 정정분(正定分)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정성결정에 든다고 한다.
또 들어가게 되는 견도는 사정취가 아니기 때문에 정성이라 하며 부정취가 아니기 때문에 결정이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12) 유가사(瑜伽師, yogācāya)는 선정을 닦는 이(禪定者), 또는 관행을 닦는 이[觀行者]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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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소리는 정성임지(正性任持)에 드는 것을 드러내니, 이 니야마(尼耶摩)13)라는 말은 또한 맡아 지닌다[任持]는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마소 등을 가두고 먹이는 곳은 그들을 맡아 지니면서 방일하지 않게 하는 것처럼 모든 유가사들도 그와 같아서 견도에 머무른 뒤에는 끝내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세제일법을 정성임지에 든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비유부(譬喩部)의 논사는 “이 말은 정성이계(正性離繫)에 드는 것을 드러낸다. 야마(夜摩)라는 말은 또한 매임[繫]이라는 뜻을 드러내고, 니(尼)는 막고 중지시킨다[遮止]는 말이어서 또한 여읨[離]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온갖 성자의 도는 영원히 계박(繫縛)을 여읨으로 니야마라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성론자(聲論者)는 “이 소리는 정성불왕(正性不往)에 드는 것을 나타낸다. 야마라는 말은 또한 간다[往]는 뜻을 드러내고, 니(尼)는 막고 중지킨다는 말이어서 역시 않는다[不]는 뜻을 나타낸다. 모든 유가사는 성자의 도를 얻은 뒤에는 마침내 착하지 않은 이[不善士]들의 세계[趣]에 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자의 도를 니야마라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정성여리(正性如理)에 든다고 해야 한다. 온갖 성자의 도는 도리와 상응하기 때문에 ‘여리’라고 해야 한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평등의 지위[平等位]로부터 정성에 든다고 말해야 한다. 평등의 지위는 바로 세제일법인의 때[時]이다. 정성이란 말은 고법지인 등을 드러내 보인 것이니, 세제일법은 자기 지위[自位]로부터 견도에 들어가기 때문에 든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문] 모든 평등은 역시 정성인가?
[답] 이것은 순후구(順後句)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정성은 평등하다. 평등하면서도 정성이 아닌 것이 있으니, 이 본체가 바로 세제일법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평등하면서도 정성이 아닌가?
13) 범어 niyāma의 음역이다. 니야마는 임지(任持)라고 한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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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끝없는 때로부터 심․심소의 법은 모든 번뇌와 악행과 뒤바뀐 견해로 말미암아 시달리고 어지러웠기 때문에 정직(正直)하지 않음을 이루게 되었다. 세제일법은 그것을 조복하고 제거하여 심․심소로 하여금 정직한 데로 옮아가게 하므로 평등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루이어서 수면이 있기 때문에 정성이라 하지는 않는 것이다.
또 부처님과 독각(獨覺)과 성문(聲聞)의 종성은 똑같이 이 지위에서는 상상품(上上品)에 머무르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그 밖은 앞의 설명과 같다.
또 현행(現行)이 똑같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모든 행(行)은 이 지위 가운데서 모두가 한 찰나(刹那)에 현행하기 때문이다.
또 세제일법은 중간 지위[中位]에 처해 있는 것이 마치 저울추에 끈을 걸어 놓은 것과 같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마치 저울에 물건을 달면서 저울추 끈을 맞춰 걸 때에 만일 가볍거나 무거워서 치우치게 되면 내리락 오르락 하면서 같아지지 않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성자와 이생의 중간에 처하면서 만일 고법지인이 이미 생기면 성자의 품[聖者品]에 치우치게 머무르는 것이요, 만일 증상인(增上忍)이 지금 막 소멸하면 이생의 품[異生品]에 치우치
게 머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오직 이것이 평등한 지위이다.
[문] 세제일법은 그때에 오히려 이생의 지위에 속하거늘 무엇 때문에 평등의 지위에 머무른다 하는가?
[답] 그때에 비록 이생의 지위 가운데 있어서도 이생을 등지고 성자의 지위를 향하여 구하기 때문에 평등이라 하며 그 밖의 것은 그렇지 못하다.
또 세제일법은 고법지인과 네 가지 일[四事]에 똑같음이 있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 첫째는 지(地)가 같은 것이니, 이 지에 의하여 고법지인을 일으키면 이 지에 의한 세제일법이다. 둘째는 근(根)이 같은 것이니, 만일 고법지인이 이 근과 상응하면 세제일법이 상응함도 역시 그러하다. 셋째는 행상(行相)이 같은 것이니, 만일 이 행상이 고법지인이면 이 행상은 세제일법이다. 넷째는 소연(所緣)이 같은 것이니, 만일 이 경계를 반연하여 고법지인을 일으
키면 역시 곧 이 경계를 반연하여 세제일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어떤 게송에서는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든다고 하였는데, 모든 성자의 도는 영원히 뒤바뀜을 없애기 때문에 정성(正性)이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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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생을 여의고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다시 이생(離生)이라 한 것이다.
끝없는 때로부터 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두 부분의 번뇌는 차츰차츰 화합해 모든 악한 일을 짓는 성품이 강하고 억세기 때문에 생(生)이라 하고, 견도가 일어난 뒤에는 그의 한 부분을 끊어 그것이 점차로 영영 서로 등지며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이(離)라 한다. 세제일법은 이 한 부분의 등무간연이 되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한 것이다.
어떤 게송에서는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든다고 하였는데, 견도의 지위는 무루(無漏)가 상속하면서 반드시 다른 막음[隔]이 없기 때문에 결정(決定)이라 하거니와 뒤의 지위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밖의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세제일법은 욕계계(慾界繫)라 말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비록 그 이름을 붙인 인연을 이미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어느 세계의 매임[繫]에 있는가를 분별하지는 않았으므로 지금 분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말하고서 이미 저와 같이 훌륭한 인연을 말했으면서도 아직 그가 살고 있는 나라나 읍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 다른 종파[他宗]의 서로 다른 집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대중부(大衆部)는 ‘세제일법은 욕계와 색계에 매인 것[色界繫]에 다 통한다’고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일 지(地)에 현관(現觀)변의 모든 세속지(世俗智)가 있으면 이 지에 곧 세속지가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독자부(犢子部)는 ‘세제일법은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것[無色界繫]에 다 통한다’라고 집착한다. 왜냐하면 “만일 지에 모든 성자의 도가 있으면 이 지에는 곧 세제일법이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화지부(化地部)는 ‘세제일법은 삼계계(三界繫)에 다 통한다’고 집착한다. 그 까닭은 “만일 지가 진지(盡智)일 때에 닦는 선근이 있으면 이 지에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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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이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법밀부(法密部)는 ‘세제일법은 삼계계와 불계(不繫)에도 통한다’라고 집착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세제일법은 이미 세(世)라고 하기 때문에 삼계계에 통하며 제일(第一)이라 하기 때문에 또한 불계에도 통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곧 그 부(部) 안에서도 다시 달리 ‘세제일법은 삼계계도 아니며 또한 불계도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세제일법을 제일이라 하기 때문에 삼계계도 아니며 세(世)라고 하기 때문에 또한 불계도 아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른 종파의 서로 다른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종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논을 지은 것이다.
[論] 세제일법은 욕계계라 말해야 하는가, 색계계라 말해야 하는가, 무색계계라 말해야 하는가?
[答] 색계계라고 함이 마땅하다.
이것은 바로 세제일법이 오직 색계계일 뿐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록 이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까닭을 말해야 된다.
[論] 무엇 때문에 이 법을 욕계계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
[答] 욕계의 도(道)로써는 개(蓋)를 끊고 전(纏)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纏)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고, 바로 색계의 도로써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욕계의 도로써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세제일법은 마땅히 욕계계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욕계의 도로써는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색계의 도로써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으로 하여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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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제일법은 욕계계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끊고[斷] 제압[制]하여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不現起]는 말은 마침내 끊어지고 제압되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욕계의 도로써는 마침내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제일법이 없다. 색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색계에는 세제일법이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에는 마침내 끊어지고 제압되어 일어나지 않는 도가 없으면서 색계에는 있는 것인가?
[답] 욕계는 선정의 자리[定地]가 아니고 닦는 자리[修地]가 아니며 염을 여읜 자리[離染地]가 아니기 때문에 마침내 끊어지고 제압되어 일어나지 않는 도가 없지만 색계는 선정의 자리이고 닦는 자리이며 염을 여읜 자리이기 때문에 이 도가 있는 것이다.
또 욕계는 불선근(不善根)이 강하고 선근이 약하기 때문에 이 도가 없지만 색계는 선근이 강하고 불선근이 없기 때문에 이 도가 있는 것이다.
또 욕계는 불선(不善)의 뛰어난 인[勝因]이 자라면서도 선(善)은 그렇지 않고 색계는 선한 법의 뛰어난 인이 자라면서도 불선은 없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불선이 마치 주인에게 세력이 있는 것 같고 선한 법은 마치 객(客)과 같아서 세력이 없지만 색계는 선한 법이 마치 주인에게 세력이 있는 것 같고 불선은 없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불선이 선근을 끊으면서도 선은 그렇지 않지만 색계는 선한 법이 불선근을 끊으면서 불선이 없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위의(威儀)가 서로가 공경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는 것이 마치 부부(夫婦)간과 같지만 색계는 위의가 마치 함께 서로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모자(母子)간과 같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위의가 꺼림[忌憚]이 없는 것이 마치 왕자와 장자와 아들이 함께 옥살이를 같이하는 것과 같지만 색계는 위의가 꺼림이 있는 것이 마치 왕자와 집악(執惡)의 아들이 함께 옥살이를 같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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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욕계의 선근과 욕계의 미혹함[惑]은 반드시 함께 묶여 있어서 그것을 끊을 힘이 없는 것은 마치 사람이 포박되어 있을 때에 자기 자신을 풀 수조차 없는데 하물며 남을 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욕계도 이와 같다. 색계의 선근과 색계의 미혹은 함께 묶여 있지 않아 지위에 구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의 경계도 끊을 수 있거늘 하물며 아래의 것을 끊을 수 없겠는가?
또 욕계는 선근이 반드시 욕계의 애욕에 염착(染着)하게 되어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의 친한 벗이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지만 색계는 선근이 색계의 애욕에 염착하는 것도 아니어서 지위 구별이 있기 때문에 자기 경계의 애욕에서조차도 오히려 영원히 끊을 수 있거늘 하물며 아래 지위의 모든 애욕을 끊을 수 없겠는가?
또 유루의 도[有漏道]로써 번뇌를 끊을 때에는 자기 자리를 기꺼이 닦으면서 아래의 것도 싫어하며 끊는 것인데, 욕계에는 아래를 싫어하며 끊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침내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도가 없지만 색계에는 아래를 싫어하며 끊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침내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도가 있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서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잠시 동안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욕계의 도로써는 오히려 잠시 동안조차도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마지막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세제일법이 없다.
색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제일법이 있다. 마치 잠시 동안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은 마침내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처럼 조각이 있는 것[有片]과 조각이 없는 것[無片]․그림자 있는 것[有影]과 그림자 없는 것[無影]․따라 구름이 있는 것[有隨轉]과 따라 구름이 없는 것[無隨轉]․가지와 줄기[枝幹]를 꺾는 것과 밑둥치 뿌리를 뽑아내는 것․전의 때[纏垢]를 조복하는 것과 수면(隨眠)을 해친다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욕계에는 마침내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도가 없을 수 있지만 어찌 또한 잠시만이라도 끊고 제압하여 일어나지 않는 도가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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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비록 이 도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견고하지 않고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흘러들지도 않으며 증상(增上)이 아니고 서로 이어지지도 않고 오래 따라 구르지도 않으면서 마음이 소연(所緣)에 대하여 빨리 취하고 빨리 버리며 뛰어난 세력의 모든 번뇌를 조복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마치 못 위의 부평초 등에 개구리나 작은 돌이 그 속에 뛰어 들면 비록 처음에는 잠시 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뒤에 곧 따라 합쳐지는 것처럼 욕계도 비록 잠시 동안은 개를 끊는 등의 도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없으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색계 가운데에서는 오직 그것의 마지막 끊고 제압하여 나타내거나 일어나지 않는 도가 있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그것이 잠시 동안 끊고 제압하여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도가 깊어서 보존하거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까닭은 그 도는 견고하여 오래 머무르고 흘러들고 더욱 뛰어나고 서로가 연속하면서 오래오래 따라 구르는 까닭에 마음이 소연에 대하여 속히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으며 뛰어난 세력이 있어서 모든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에 나아가 정성이생에
들 수 있다.
마치 못 위의 부평초 등에 큰 코끼리나 큰 돌이 그 속에 뛰어 들면 오래오래 지나도 떨어지거나 흩어져서 도로 합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이와 같아서 색계도 잠시 동안 개를 끊는 등의 도가 있으면서도 보존하거나 믿을 수 있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개를 끊는 등의 도가 없고 색계는 그렇지 않은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말미암아 마땅히 세제일법은 오직 색계계일 뿐이요 욕계계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문] 세제일법은 결(結)을 끊을 수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만일 욕계의 도로써 개를 끊고 전을 제압하여 욕계의 전으로 하여금 다시는 나타나거나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세제일법은 마땅히 욕계계 등이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는가?
[답] 세제일법은 비록 결(結)을 끊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선근은 뛰어나고 묘하여 제일이면서 깊고 먼 곳[深遠處]에 있으므로 마땅히 그 결을 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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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도(道)와는 똑같이 한 자리[一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도로써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또 세제일법은 견도를 이끌어 내는 것이므로 결국 견도와 같은 한 자리에 있으며 견도가 이미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결을 끊는 도는 이것으로 증명된다.
또 세제일법은 이미 욕계에 대하여 극히 싫증을 내는 것이어서 욕계의 의혹을 다스리는 도와는 똑같이 한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용하면서 이 법이 있음이 증명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세제일법은 오직 미지지(未至地)에 있어야 한다. 오직 미지지만이 욕계의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위의 지(地)에서는 없어야 한다.
[답] 대치(對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끊음[斷]의 대치요, 둘째는 싫어하고 파괴하는[厭壞] 대치이다. 미지지는 욕계에 대하여 두 가지 대치를 갖추었지만 위의 5지(地)는 욕계에 대하여 비록 끊음의 대치는 없다 하더라도 싫어하고 파괴하는 대치는 있기 때문에 거기에도 역시 세제일법이 있다.
묘음(妙音) 존자는 “색계의 6지(地)14)에는 욕계의 의혹에 대하여 모두가 두 가지의 대치를 갖추게 되며 위의 5지(地)의 도에서도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미지지를 말미암아 이미 끊었기 때문에 비록 끊을 힘이 있다고 해도 끊을 만한 것이 없다.
비유하면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의 원수를 같이하여 함께 의논하기를 어디에서나 붙잡는 이가 살해하도록 하자고 하고 그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붙잡아 살해하면 그 밖의 다섯 사람은 비록 살해할 힘이 있어도 살해할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여섯 사람이 저마다 한 개씩의 등불을 가지고 서로가 함께 차례로 하나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갈 적에 첫 번째 등불이 들어갈 때에 모든 어둠이
14) 6지(地)라 함은 미지(未至)와 그 중간(中間)과 4근본(根本) 정려(靜慮)를 말한다. 위의 5지도(地道)라 함은 미지정을 제외한 5지의 선정이다.
깨뜨려졌으므로 그 나머지는 비록 힘은 있다 하도라도 어둠을 없앨만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햇빛은 초분(初分) 중분(中分) 후분(後分)에 모두 밤의 깜깜한 것과는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으나 해가 처음 돋아날 때에 어둠을 깨뜨려서 다 밝힌지라 그 밖의 것은 비록 세력은 있다해도 깨뜨릴 만한 어둠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6지에서는 욕계의 혹에 대하여 비록 모두가 끊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어떻게 색계의 6지에서는 욕계의 미혹에 대하여 두 가지의 대치를 갖추고 있는 줄 알 수 있는가? 그는 “위의 5지에 의하여 견도에 들어간 이는 욕계의 끊음에 대하여 분별하고 증명[證]하여서 따로 무루의 이계득(離繫得)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일 위의 5지에 욕계의 혹에 대한 끊음의 대치가 없다면 이 일도 없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評]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彼]15)는 욕계의 번뇌에 대하여 반드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누가 “그 지(地)에는 무루의 득(得)이 있어서 욕계의 끊음에 대하여 분별하고 증명한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그것을 인용하여 이 뜻을 증명하겠는가? 이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것이 도리로서 보아 옳다고 하겠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세제일법은 무엇 때문에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는가?
[답] 세제일법은 그것이 그때에 선근이 미미하고 작아서 법신(法身)16)은 아직 자라지 못했으면서도 위세(威勢)는 있다. 선근이 미미하고 작아서 법신이 아직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미혹을 끊을 수는 없지만 위세가 있기 때문에 번뇌에 꺾이거나 조복되지 않는다.
마치 사자의 새끼가 몸은 작고 아직 자라지 못했으면서도 위세는 있는 것과 같으니, 몸이 작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짐승을 해칠 수는 없되 위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짐승의 침해는 받지 않는다.
15) 위의 5지[地:中間定과 四根本定]에 의하여 견도(見道)에 들어간 이이다.
16) 계(戒)․정(定)․혜(惠)․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智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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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세제일법은 오직 한 찰나[一刹那]일 뿐이기 때문에 끊을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문] 고법지인도 역시 한 찰나이거늘 어찌하여 끊을 수 있는가?
[답] 고법지인은 비록 한 찰나라 하더라도 서로 잇달으면서 일으키기 때문에 혹을 끊을 수 있거니와 세제일법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에 끊을 수는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세제일법은 가행도(加行道)에 속하기 때문에 끊을 수가 없으며 반드시 무간도(無間道)라야 비로소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뜻 가운데서는 다시 분별이 있다.
[문] 무슨 인연으로 세제일법은 오직 색계계에만 있을 뿐인가?
[답] 색계는 3도(道)17)․3지(地)․3근(根)의 등무간연이 되기 때문이다. 또 처음에 법지품(法智品) 다음에 유지품(類智品)을 이끌어 내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세제일법은 오직 색계계일 뿐이다.
[문] 세제일법은 무슨 인연으로 결코 욕계계는 아닌가?
[답] 욕계는 선정의 세계[定界]가 아니고 닦음의 세계[修界]가 아니며 염을 여읜 세계[離染界]가 아니다. 반드시 선정의 세계요, 닦음의 세계며, 염을 여읜 세계이어야 비로소 세제일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비천한 세계[卑賤界]요, 거칠고 무거운 세계[麤重界]며, 하열한 세계[下劣界]이다. 반드시 높고 뛰어난 세계[尊勝界]요, 미세하고 가뿐한 세계[細輕界]며, 뛰어나게 묘한 세계[勝妙界]라야 비로소 세제일법이 있는 것이다.
또 만일 세제일법이 욕계계이면 자성(自性)을 반연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일 욕계계이면 자성을 반연하는 것인가, 반연하지 못하는 것인가? 만일 자성을 반연한다 하면 도리에 어긋나는 허물이 있으니, 자성은 자성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반연하지 못한다 하면 본론(本論)에도 어긋나니, 뒤의 글[後文]에서
17) 3도(道)는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를 말하고 3지(地)는 학지(學地)․무학지(無學地)․비학비무학지(非學非無學地)를 말하며 3근(根)은 희근(喜根)․낙근(樂根)․사근(捨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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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것과 같다. 만일 이 법을 반연하여 고법지인을 일으킨다면 이 법을 반연하여 세제일법을 일으킨다. 고법지인은 욕계의 5온(蘊)을 두루 반연하여 경계를 삼는 것이므로 이 세제일법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은 결코 욕계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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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권
오백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③
[論] 무엇 때문에 이 법을 무색계에 매여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가?
[答] 정성이생에 들어가는 데는 먼저 욕계의 괴로움[苦]을 현관(現觀)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을 삼는 것이요, 성자의 도[聖道]가 일어나면 먼저 욕계의 일을 이루어 마치고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일을 이루어 마친다.
만일 정성이생에 들어가 먼저 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그 뒤에 합하여 욕계․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으로 삼는다면 성자의 도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무색계의 일을 이루어 마치고 그 뒤에 합하여 욕계․색계의 일을 이루어 마쳐야 하리니, 이와 같이 한다면 세제일법은 마땅히 무색계에 매여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먼저 욕계의 괴로움으로 현관하여 괴로움을 삼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을 삼는 것이며, 성자의 도에 들어가면 먼저 욕계의 일을 이루어 마치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일을 이루어 마치니, 이 때문에 세제일법은 무색계에 매여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서 정성이생에 들어가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을 삼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여 괴로움을 삼는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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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견도에서 먼저 따로 욕계의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현관하여 괴로움의 행상(行相)으로 삼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의 진리를 현관하여 괴로움의 행상으로 삼는 것이다.
[문] 견도위(見道位)에서는 네 가지 진리[四諦]를 갖추어 관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진리만을 관한다고 말하는가?
[답] 견도위에서 먼저 괴로움의 진리를 관하는 것은 모양이 거칠게 드러나기[麤顯] 때문이니, 그러므로 치우쳐 말한다.
[문] 네 가지 행상[四種行相]1)은 모두가 괴로움을 현관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행상만을 말하는가?
[답] 이치로 보아서는 갖추어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안에는 그 밖의 말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다만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현관하고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한다’고만 말해야 하며 ‘괴로움으로 삼는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다시 ‘괴로움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네 가지 행상 가운데 괴로움을 맨 첫머리에 두었기 때문에 우선 괴로움을 말하고 그 밖의 세 가지를 같이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괴로움의 행상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온 것이다. 과거의 여래(如來)․응공[應]․정등각(正等覺)께서도 모두가 진리[諦]의 첫머리에 괴로움이라는 이름을 표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괴로움의 행상은 오직 괴로움의 진리에만 속하기 때문에 치우치게 그것을 설하거니와 비상(非常)의 행상은 세 가지 진리에 공통하게 속하고 공(空)과 비아(非我)의 행상은 온갖 법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1) 고제(苦諦)를 관찰할 때에 비상(非常)․고(苦)․공(空)․비아(非我)의 행상(行相)을 고제의 4행상이라 한다. 그리고 뒤의 세 가지 진리[三諦]에 대한 각각의 4행상을 말해 보면 집제(集諦)에는 인(因)․집(集)․생(生)․연(緣)의 네 가지가 있고, 멸제(滅諦)에는 멸(滅)․정(靜)․묘(妙)․리(離)의 네 가지가 있으며 도제(道諦)에는 도(道)․여(如)․행(行)․출(出)의 네 가지가 있다. 전체를 합하여 4제(諦)의 16행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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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괴로움의 행상은 모든 유(有)에 어기고 생사(生死)를 버리는 것이 그 밖의 다른 행상보다 수승하고 싫증내는 마음을 좇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비록 갖가지 훌륭한 음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막 먹으려 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이 음식은 쓴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내 버려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치우치게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괴로움의 행상을 쓰면 믿고 받기가 쉬운 것이다. 안팎의 도[內外道]와 늙고 젊음[老少]과 어리석고 지혜로움[愚智]에서도 모두가 괴로움이 있다고 믿는 것이니, 이 때문에 치우치게 설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괴로움의 모양은 거칠게 드러나서 지혜로써 알기가 쉬우므로 약간만 말해도 이내 분명히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치우치게 말했다. 마치 지혜로 알 바[所知]와 이 깨달음이 깨달을 바[所覺]와 행상이 행상이 될 바[所行相]와 근(根)이 근의 뜻에서와 능연(能緣)이 소연(所緣)에 있어서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수행하는 이[行者]는 견도위 가운데서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현관하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관하는가?
[답] 거칠음과 미세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욕계의 괴로움은 거친 것이어서 관찰하기가 쉽기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미세하여서 관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뒤에 현관하는 것이다. 마치 활쏘기를 익히는 사람이 처음에는 큰 물건을 쏘다가 뒤에는 터럭 끝[毛端]을 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색계의 괴로움은 거칠고 무색계의 괴로움은 미세하거늘 무엇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한꺼번에 현관하는가?
[답] 관행하는 이[觀行者]는 선정[定]과 선정이 아닌[不定] 두 세계의 차별된 것에서 현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욕계의 괴로움은 선정이 아닌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따로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같은 선정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합하여 현관하는 것이다.
선정과 선정이 아닌 세계에서처럼 닦음과 닦음이 아닌 세계와 염을 여읨과 염을 여의지 않은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은 관행하는 이에게 현재 핍박하고 괴롭게 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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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마치 무거운 짐과 같기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은 관행하는 이에게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에 뒤에 현관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은 관행하는 이가 현재 집수(執受)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에 나중에 현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은 관행하는 이에게 현재 고통과 번뇌를 나게 하기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현관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은 수행하는 이가 현재 보기[現見]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현관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현재 보지 않는다[不現見] 하면 수행하는 이는 어떻게 그것을 현관하는가?
[답] 현재 보는 것[現見]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수현견(執受現見)2)이요, 둘째는 이염현견(離染現見)이다. 저 관행을 닦는 이가 욕계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현견을 다 갖추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다만 이염현견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장사꾼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재물의 짐과 같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짊어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남으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였을 때에 자신이 짊어진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현견을 갖추니, 가볍고 무거운 것에 대한 현견과 재물에 대한 현견이다. 다른 이가 짊어진 것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재물에 대한 현견만이 있을 뿐이니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은 가깝기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은 멀기 때문에 나중에 현관한다. 가까운 것과 먼 것에서처럼 몸과 함께하는 것과 몸과는 함께하지 않는 것․자기의 몸에 있는 것과 다른 이의 몸에 있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2) 실제로 보면서 느끼는 것을 말하고 이염현견(離染現見)이라 함은 그것에 대하여 집착(執着)이 없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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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선(善)․불선(不善)․무기(無記)이니 그 때문에 먼저 현관하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은 다만 두 가지만이 있으니 선과 무기이니 이 때문에 나중에 관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관행을 닦는 이가 장차 성자에 드는 때에는 반드시 욕계의 이생의 성품[異生性]을 성취하지만 색계․무색계의 이생의 성품은 성취하지 않는 것이니, 현관의 법도 으레 그러하여 성취한 것에 대하여는 먼저 일으키고 성취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뒤에 일으킨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괴로움을 볼 때에는 두 가지의 맺힘[結]을 끊는 것이니, 불선과 무기이다. 이 때문에 먼저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볼 때에는 오직 무기의 맺힘만을 끊기 때문에 나중에 현관한다. 불선과 무기에서처럼 이숙이 있는 것[有異熟]과 이숙이 없는 것[無異熟]․두 과를 내는 것[生二果]과 한 과를 내는 것[生一果]․무참 무괴(無慚無愧)에 상응하는 것과 무참무괴에 상응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
한다.
어떤 이는 “마치 이생의 지위에서 괴로움의 진리를 비방할 때에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비방하고 그 뒤에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비방하는 것처럼 지금 성자의 지위에 들어가 괴로움의 진리를 믿을 때에도 역시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믿고 그 뒤에 색계․무색계의 괴로움을 믿는다. 비방과 믿음에서처럼 헷갈림[迷]과 깨침[悟]․의심[疑]과 결단[決]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욕계의 괴로움에 대하여 먼저 따로 현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에 대하여는 그 뒤에 합하여 현관한다.
성자의 도[聖道]가 일어나면 먼저 욕계의 일을 이루어 마치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의 일을 이루어 마친다 함은 견도 가운데서 먼저 따로 욕계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그 뒤에 합하여 색계․무색계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는 것이다.
[문] 현관과 일을 변별함[辦事]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이것에는 차별이 없으니, 현관이 곧 일을 변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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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어떤 이는 “역시 차별이 있다. 우선 이름[名]에 차별이 있으니, 이것은 현관이라 하고 이것은 일을 변별한다고 한다. 또 소연(所緣)을 통달하는 것이 바로 현관이며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 바로 일을 변별하는 것이다.
또 현관이란 지현관(智現觀)을 말하고 일을 변별하는 것이란 사현관(事現觀)을 말한다. 또 현관이란 지변지(智遍知)를 말하고 일을 변별하는 것이란 단변지(斷遍知)를 말한다.
지변지와 단변지에서처럼 지작증(智作證)․득작증(得作證)․명해탈(明解脫)․도과(道果)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현관이란 무간도(無間道)에서 짓는 것이요 일을 변별한다는 것은 해탈도(解脫道)에서 짓는 것을 말한다.
무간도와 해탈도에서 짓는 것처럼 단계득(斷繫得)과 증이계득(證離繫得)과 과실을 제거하는 것과 공덕을 닦는 것과 하천(下賤)한 데서 벗어나는 것과 승묘(勝妙)한 데에 드는 것과 무의(無義)를 버리는 것과 유의(有義)를 얻는 것과 탐애의 기름을 다하는 것과 열(熱)이 없는 즐거움을 받는 것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찰나(刹那)는 현관이요 상속(相續)은 일을 변별하는 것이다. 찰나와 상속에서처럼 드는 것[入]과 자주자주 드는 것[數入]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만일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도리어 그릇된 도리[非理]를 들어서 옳은 뜻[是義]을 좇고 이룬다.
[문] 마치 색계의 괴로움을 먼저 현관하는 것이 아니면서 세제일법이 색계에 매인 것처럼 무색계의 괴로움에 대하여 비록 먼저 현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세제일법이 무색계에 매임을 방해하겠는가?
[답] 색계에는 두루 반연하는 지혜[遍緣智]3)가 있어서 자기 자리[自地]를 반연하고 그리고 위와 아래를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색계의 괴로움에 대하여는 비록 먼저 현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제일법은 색계에 매인 것
3) 두루 반연하는 지혜[遍緣智]라 함은 일정한 자지(自地) 외에 선정의 힘[定力]이 이르는 데까지 상지(上地)와 하지(下地)를 반연하는 지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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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수 있고 무색계에는 두루 반연하는 지혜가 없으므로 비록 자기 위를 반연한다 하더라도 아래는 반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제일법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 아니다.
[論] 또 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 색에 대한 생각[色想]을 제거한다.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면 욕계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법을 반연하여 고법지인을 일으키면 이 법을 반연하여 세제일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 여기서의 ‘또[復次]’는 도리로 보아서 말하지 않아야 하며 다만 ‘무색정에 들어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만 말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것은 하나의 문[一門]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여기에서 뜻으로써 글을 바로 잡으면 ‘무엇 때문에 이 법은 무색계에 매인 것이라 하지 않아야 하는가? 무색정에 들어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것은 묻는 바의 뜻에 대하여 근본이 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답] 대저 언론을 펴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이요, 둘째는 근본이다. 먼저 말한 것은 방편의 언론이고 지금 말한 것은 근본의 언론이니, 근본은 방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라는 말은 방편의 법이 앞에 있기 때문에 마땅히 글에서와 같이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논의 길[論道]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열어 부추기는[開縱] 것이고 둘째는 막아 빼앗는[遮奪] 것이다. 이 안에서 전문(前門)은 바로 열어 부추기는 논의 길이고 후문(後門)은 바로 막아 빼앗는 논의 길이다. 이를 말미암아 본문(本文)은 뜻에 있어서 잘못이 없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안의 전문은 고법지인이 다만 욕계만을 반연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후문은 세제일법과 고법지인과는 동일한 소연(所緣)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무색계계가 아니며 무색정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함이 있는지라 반드시 아래 유루의 색[有漏色]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는 선정은 4무색(無色)과 그 위의 3근분(近分)의 자리[地]에 속해 있다”라고 말한다.
문
여러 곳에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색정에 들어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고 대종온(大種蘊)의 말에서는 “어떻게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는가? 어떤 비구는 이와 같은 뛰어난 견해[勝解]를 일으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며 바라연나(波羅衍拏)에도 역시 이렇게 설한다.
모든 유(有)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면
능히 온갖 몸에서도 제거되나니
안팎의 법 가운데서
보지 못할 것이 없다.
「중의품(衆義品)」 가운데서도 역시 이렇게 설한다.
생각[想]과 생각 있는[有想] 것에 대하여는 즉(卽)과 이(離)도 아니고
생각 없는[無想] 것도 아니며 생각을 제거하는[除想] 것도 아니니
이와 같이 평등하게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하면
그것에 염착(染著)하는 인연이 없다.
이와 같은 모든 설의 뜻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답] 이 온(蘊) 중의 말에 “아래 자리[下地]에서 유전(流轉)하는 모든 색을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는 것이고, 대종온에서 “쌓여 모인[積集] 색을 보내어 목전에 나타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는 것이며, 바라연나와 「중의품」에서 “색계의 탐애를 끊는다”는 것은 색에 대한 생각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곳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은 4념주(念住)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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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고 대종온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말은 오직 신념주(身念住)일 뿐이며 바라연나와 「중의품」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말은 오직 법념주(法念住)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곳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은 7지(地)에 속해 있는 4무색과 위의 3근분을 말하고 대종온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말은 제4 정려(靜慮)에 있을 때에 속하며, 바라연나와 「중의품」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말은 또 7지에 속해 있는 미지(未至)와 중간(中間)과 4정려와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近分)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대종온에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말은 공통하지 않은[不共] 것이어서 오직 내도(內道)에만 있기 때문이고 그 밖의 세 가지는 결국 공통된[共]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온에서 말한 색에 대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은 공통된 것이어서 안팎의 도[內外道]에 다 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는 바로 공통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모든 말의 뜻의 차이라 한다. 이러한 뜻 가운데서도 또 분별이 있다.
[문] 무슨 인연으로 세제일법은 무색계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가?
[답] 밭[田] 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색계는 세제일법에 대하여 밭도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며 지위[地]도 아니어서 세제일법이 생장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없다.
또 만일 지위 그 밖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이 있다면 그 지위에는 세제일법이 있을 수 있거니와 무색계에는 그 밖의 순결택분이 없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이 없다.
또 만일 선정[定]에 삼계(三界)의 네 가지 진리[四諦]를 두루 관하는 선근이 있다면 그 선정에는 세제일법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정에는 이런 선근이 없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이 없다.
또 만일 선정에 온갖 법이 무아(無我)라는 행상을 반연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지위는 세제일법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정 중에는 이런 행상이 없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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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이 지위에서 현관(現觀)변의 세속지(世俗智)를 닦을 수 있다면 그 지위에는 세제일법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지(無色地) 중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세제일법이 없다.
또 만일 지위에 견도(見道)가 있다면 세제일법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계 중에는 견도가 없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이 없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무색계에는 견도가 없는가?
[답] 앞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세제일법의 인(因)이 없다는 것도 역시 이것의 증거이다.
또 다른 뜻이 있다. 무색계에서는 사마타(奢摩他)가 더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비발사나(毘鉢舍那)가 더 한 지위라야 견도가 있게 된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 두 세계[二界]를 함께 막는[雙遮] 것이 있으니, 욕계는 지극히 거칠기[麤] 때문이요, 무색계는 지극히 미세하기[細] 때문에 똑같이 세제일법은 없다.
또 욕계의 선근은 너무나 파리하고 하열하기 때문이요, 무색계의 선근은 지극히 침체되고 어둡기 때문에 똑같이 세제일법이 없다.
또 욕계는 지극히 시끄럽고 동요하고 무색계는 지극히 고요하기 때문에 똑같이 세제일법이 없다.
또 만일 그 지위에 두루 반연하는 지혜[遍緣智]와 맺힘을 끊는 도[斷結道]가 있다면 그 지위에는 세제일법이 있어야 되는데 욕계에는 비록 두루 반연하는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맺힘을 끊는 도가 없으며 무색계에는 비록 맺힘을 끊는 도는 있어도 두루 반연하는 지혜가 없다. 이 때문에 다 같이 세제일법이 없다.
[문] 혹시 두 분의 성자(聖者)가 같이 한 곳에 태어났다면 세제일법에 대하여 한 분은 성취하고 한 분은 성취하지 않은 일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한 분은 초정려(初靜慮)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었고, 한 분은 제2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다가 그 분들이 다 같이 목숨을 마치고는 제2 정려에 태어났다면 초정려에 의한 이는 세제일법을 성취하지 못하나 지위를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이요, 제2 정려에 의한 이는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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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을 성취하나니 자기의 지위[自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 혹시 두 분 아라한이 다 같이 욕계에 있을 때에 세제일법에 대하여 한 분은 성취하고 한 분은 성취하지 않는 일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한 분은 초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었고 한 분은 제2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다가 그 분들이 다 같이 목숨을 마친 뒤에 제2 정려에 태어나 아직 욕계를 여의지 못하고 있다가 다 같이 아라한의 과를 얻었으면 초정려에 의한 이는 세제일법을 성취하지 못하나니 지위를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이요, 제2 정려에 의한 이는 세제일법을 성취하나니 자기의 지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論] 세제일법은 유심유사(有尋有伺)라 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비록 그것이 이미 색계에 매여 있다고 말했다 해도 아직 그것이 어느 지위에 있다는 것을 분별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분별하려고 그런 것이다. 마치 이미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와 고을은 알았으나 아직 그가 살고 있는 집 등은 모르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으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일찍이 “세제일법은 오직 색계에 매여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나 색계 중에는 세 가지 자리[三地]가 있다. 첫째는 유심유사의 자리요, 둘째는 무심유사(無尋有伺)의 자리며, 셋째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자리이다. 그런데도 아직 세제일법은 결코 어느 자리에 있는가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선근은 오직 유심유사의 자리에만 있으니, 마치 사무애해(詞無碍解)와 같다. 어떤 선근은 오직 무심무사의 자리에만 있으니, 마치 정해탈(淨解脫)과 뒤의 4승처(勝處)와 앞의 8변처(遍處)와 같다. 모든 선근은 유심유사의 자리와 무심무사의 자리에 있는 것이니, 마치 희무량(喜無量)과 같다.
어떤 이는 “또한 마치 처음의 두 해탈[二解脫]과 같고 앞의 4승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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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다.
세제일법은 오직 한 지위[一地]에만 있다고 하거나 혹은 두 지위[二地]에만 있다고 하거나 하는 의심을 내지 말 것이다. 지금 그것은 결정코 세 지위[三地]에 있다는 것이 성립된 까닭에 이렇게 논하는 것이다.
[論] 세제일법은 유심유사라 해야 하는가, 무심유사라 해야 하는가, 무심무사라 해야 하는가?
[答] 혹은 유심유사이기도 하고 혹은 무심유사이기도 하며 혹은 무심무사이기도 하다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세 지위[三地]에 있다고 드러내 보이는가?
[답] 다른 부(部)에서는 이 선근이 오직 한 지위[一地]에만 있다고 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들은 “세제일법은 오직 유심유사일 뿐이어서 모양[相]이 있고 일깨움[警覺]이 있으며 등인(等引)이 아니고 이생에 속하며 모든 행(行)을 반연한다.
오직 유심유사일 뿐이라 함은 4구(思構)로 구르기 때문이고, 모양이 있다 함은 이름을 반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일깨움이 있다 함은 공용(功用)이 있기 때문이고, 등인이 아니라 함은 서로 이어지면서 구르기 때문이며, 이생에 속한다 함은 이생의 득(得)이기 때문이고, 모든 행을 반연한다 함은 유위(有爲)를 반연하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들의 고집을 중지시키면서 이 선근은 세 지위에 다 통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論] 어떤 것이 유심유사인가?
[答] 만일 유심유사 삼마지(三摩地)에 의거하여[依]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은 것이 세제일법이다.
미지(未至)와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드는 이가 얻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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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임을 말한 것이다.
[문] 여기에서 ‘의거한다[依]’는 말은 어떤 법을 나타내고 싶어서인가?
어떤 이는 “구생의 선정[俱生定]을 말하여 의거한다고 한다. 세제일법에 상응하는 선정[相應定]을 의거한다는 말[依聲]로써 설명하는 것이니, 이것은 구생의 의거[俱生依]에 성문(成文)의 증거가 있다. 마치 지온(智蘊)에서 ‘만일 공삼마지(空三摩地)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든다 함은 고법지인에 대하여 상응하는 선정을 의거한다는 소리로써 말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고,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등무간연의 선정을 말하여 의거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증상인(增上忍)이 상응하는 선정을 의거한다는 소리로써 말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세 지위를 말하여 의거한다고 하는 것이니, 뒤에서 말한 의거한다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論] 어떤 것이 무심유사인가?
[答] 만일 무심유사 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
정려(靜慮) 중간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드는 이가 얻는 것이 세제일법임을 말한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무심무사인가?
[答] 만일 무심무사 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
제2․제3․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가 얻는 것이 세제일법임을 말한 것이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그것은 한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두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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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그것은 두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세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만일 정려 중간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그것은 세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네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만일 제2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은 네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다섯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만일 제3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은 다섯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여섯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만일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은 여섯 자리의 견도와 한 자리의 세제일법과 일곱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은 두 자리의 견도와 두 자리의 세제일법과 세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만일 정려 중간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은 세 자리의 견도와 세 자리의 세제일법과 네 자리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세 자리는 모두가 한 자리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수면(隨眠)이기 때문이며, 이 안의 선한 법[善法]은 서로서로가 인(因)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지위에 의거하는 것도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이런 말을 한다면 정려 중간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는 마땅히 두 자리의 세제일법을 얻기 때문이니, 유심유사와 무심유사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글에서 ‘어떤 것이 유심유사인가? 만일 유심유사 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 어떤 것이 무심유사인가? 만일 무심유사 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라고 한 것과는 어긋난다. 이런 허물은 두지 말 것이니, 이 때문에 앞에서의 말[說]이 도리로 보아서 옳다고 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견도는 자기와 남[自他]의 자리[地]를 다 닦으면서 세제일법은 오직 자기 자리만을 닦는가?
[답] 견도는 무루이어서 해탈이고 얽매임을 여의었으나 세제일법은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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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견도는 비록 자리가 있어도 세계[界]에 떨어지지 않지만 세제일법은 자리에도 있고 세계에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견도는 세 가지 연[三緣]을 말미암아 닦는 것이니, 첫째는 인(因)이 자라기 때문이요, 둘째는 똑같이 일을 갖추기[辦事] 때문이요, 셋째는 똑같이 다스리기[對治] 때문이다.
인(因)이 자란다 함은 여섯 자리[六地]의 견도가 차츰차츰 인이 된다는 말이고, 똑같이 일을 갖춘다 함은 윗 자리[上地]의 견도에서 해야 할 일을 아래 자리[下地]의 견도에서도 갖춘다는 말이며, 똑같이 다스린다 함은 윗자리의 견도에서 다스려야 할 의혹[惑]을 아래 자리의 견도에서도 다스린다는 말이다.
수도(修道)에서도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연과 같기 때문에 자기 자리와 다른 자리를 다 닦는다. 인이 자란다 함은 구지(九地)의 수도 차츰차츰 인이 된다는 말이며, 또 마치 법지(法智)로 욕계의 물듦[染]을 여의는 것처럼 또한 유지(類智)를 닦되 이것은 다만 한 가지 연[一緣]만을 말미암을 뿐이니, 인이 자라기 때문이다. 똑같이 일을 갖춘다 함은 윗 자리의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을 아래 자리의 수도에서도 역시 갖춘다는 말이며, 또 마치 고지(苦智)
에서 해야 할 일과 같아서 이에 도지(道智)에 이르기까지 역시 모두 갖춘다는 말이다.
똑같이 다스린다 함은 윗자리의 수도에서 다스릴 의혹을 아래 자리의 수도에서도 역시 다스린다는 말이며, 또 마치 한 생각의 이 지혜가 목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미래에 있어서도 한량없는 생각을 닦는다는 말이다.
세제일법은 인이 자라는 것이 아니니 모든 자리는 서로가 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이 일을 갖추는 것도 아니니 번뇌의 끊음[煩惱斷]에 대해서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이 다스리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세제일법은 매여 있어서 서로 이어지나 견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세제일법은 이숙(異熟)을 갖출 수 있으나 견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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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제일법은 탐애에 매임을 당하나 견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세제일법은 때[垢]가 있고 허물이 있고 독(毒)이 있고 가시[刺]가 있고 물듦이 있고 흐림이 있으나 견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세제일법은 이생의 몸을 의지하고 이생의 몸의 법은 다른 자리를 닦지 못하나 견도는 오직 성자의 몸만을 의지하고 성자의 몸의 법은 자기와 다른 자리를 닦기 때문이다.
[문] 세제일법과 현관변의 모든 세속지는 똑같은 유루인데 무엇 때문에 그 지혜는 자기와 다른 자리를 닦고 세제일법은 오직 자기 자리만을 닦을 뿐인가?
[답] 현관변의 세속지는 견도의 권속이어서 견도에 의거하여 닦는다. 마치 견도가 자기와 다른 자리를 닦는 것처럼 그 지혜도 그러하나 세제일법은 그와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또 현관변의 세속지는 성자의 몸을 의지하며 성자는 자기 자리와 다른 자리를 닦을 수 있으나 세제일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현관변의 세속지는 수신행(隨信行)․수법행(隨法行)의 몸을 의지하며 그들은 자기 자리와 다른 자리를 갖춰 닦을 수 있으나 세제일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현관변의 세속지는 원수와 적은 있지만 세력은 없다. 원수와 적이 있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자리를 닦고, 세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의 힘을 의지해서 닦는다. 세제일법은 원수와 적은 없고 세력이 있다. 원수와 적이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 자리만을 닦고 세력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힘에 의지하여 닦는다.
또 현관변의 세속지는 공력을 써서 얻지 않고 견도의 힘에 따라 자기와 다른 자리를 닦으나 세제일법은 공력을 쓰면서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오직 자기의 지리만 닦을 수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여섯 자리[六地]에서 일어나는 견도는 위가 아래를 닦을 수 있고 아래가 위를 닦지는 못하는가?
[답] 윗자리[上地]의 법은 수승하므로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아래를 닦을 수 있지만 아래 자리[下地]의 법은 하열하므로 눈앞에 나타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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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도 위를 닦을 수 없다.
마치 하열한 이가 뛰어난 이를 뵙는 것이요 뛰어난 이가 하열한 이를 뵙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아래 자리의 힘은 하열하므로 위에 의지해서 닦는 것이 마치 힘이 하열한 사람이 강한 이에게 의지하고 붙는 것과 같으며, 윗자리의 힘은 뛰어나므로 아래에 의지하여 닦지 않는 것이 마치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이에게 의지하거나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아래 자리는 위에 속하기 때문에 위는 아래를 닦을 수 있으며 윗자리는 아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는 위를 닦을 수 없으니, 마치 사람이 다른 이에 속하면 다른 이에게 부림을 받지만 다른 이에 속하지 않으면 다른 이가 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만일 윗자리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는 아래 자리에 대하여 이미 더러움을 여의[離染]었기 때문에 아래를 닦을 수 있으나, 만일 아래 자리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는 윗자리에 대하여 아직 더러움을 여의지 못했고 설령 이미 더러움을 여의었다 해도 자재하지 못하니, 그것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아래 자리는 위를 닦을 수 없다.
또 만일 윗자리에서 정성이생에 들었으면 그는 아래 자리를 이미 얻었기 때문에 닦을 수 있으나, 만일 아래 자리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면 그는 윗자리를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닦지 못한다. 설령 이미 얻은 이라 해도 자재하지 못하니, 그것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아래 자리는 위를 구하기 때문에 위는 아래를 닦았지만 윗자리는 아래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는 위를 닦지 못한다.
또 아래 자리는 윗자리와 끊겼기 때문에 윗자리는 아래를 닦을 수 있지만 윗자리는 아래와 끊기지 않기 때문에 아래는 위를 닦지 못한다.
또 아래는 위의 일을 변별해야 하기 때문에 위는 아래를 닦아야 하지만 위는 아래 일을 변별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는 위를 닦지 않는다.
또 마치 여섯 가지로 수호하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아수라[阿素洛]를 두려워하여 여섯 가지 군사를 벌여놓고 스스로 수호하
되 첫째는 의해주용(依海住龍)이요, 둘째는 견수천(堅手天)이며, 셋째는 지만천(持鬘天)이요, 넷째는 항교천(恒憍天)이며, 다섯째는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이요, 여섯째는 삼십삼천이다. 만일 아수라가 자기 궁전에서 나와 모든 하늘들과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에는 의해주용이 먼저 맞붙어 싸운다. 만일 용이 아수라에게 이기면 그 밖의 다른 다섯 무리의 하늘 군사들은 일 없이 머물러 있겠지만, 만일 이기지 못하면 견수천의 군사들이 곧 그들의 힘을 써서 도
와준다. 만일 두 번째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밖의 네 무리의 하늘 군사들은 일 없이 머물러 있겠지만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지만천의 군사들이 다시 그들의 힘을 써서 싸운다. 만일 세 번째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밖의 세 무리의 하늘 군사들은 일 없이 머물러 있겠지만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항교천의 군사들이 다시 그들의 힘을 써서 싸운다. 만일 네 번째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밖의 두 무리의 하늘 군사들은 일없이 머물러 있겠지만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사
(四)대왕의 군사들이 다시 그들의 힘을 써서 싸운다. 만일 다섯 번째에서 승리하게 되면 삼십삼천은 일 없이 머물러 있겠지만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삼십삼천이 앞의 다섯 무리의 군사들과 서로 도와 싸워서 아수라를 물리쳐 도망가게 한다.
이와 같아서 견도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見所斷] 의혹[惑]을 다스리기 위하여 여섯 자리[六地]에 펴 놓으니 첫째는 미지정(未至定)이요, 나아가 여섯째는 제4 정려이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오직 한 자리의 견도만을 닦아서 곧 견도에서 끊을 의혹을 영원히 끊으므로 그 밖의 다섯 자리는 일 없이 머무른다. 만일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곧 두 자리의 견도를 닦아서 서로가 도우며 견도에서 끊을 의혹
을 영원히 끊으므로 그 밖의 네 자리는 일 없이 머무른다.
만일 중간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곧 세 자리의 견도를 닦아서 서로가 도우며 견도에서 끊어야 할 의혹을 영원히 끊으므로 그 밖의 세 자리는 일 없이 머무른다. 만일 제2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곧 네 자리의 견도를 닦아서 서로가 도우며 견도에서 끊어야 될 의혹을 영원히 끊으므로 그 밖의 두 자리는 일 없이 머무른다.
만일 제3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곧 다섯 자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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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도를 닦아서 서로가 도우며 견도에서 끊어야 될 의혹을 영원히 끊으므로 제4 정려는 일 없이 머무른다.
만일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미래에는 곧 여섯 자리의 견도를 닦아 서로가 도우며 견도에서 끊어야 될 의혹을 영원히 끊는 것이다. 그러므로 윗자리에 의거하여 아래 자리를 닦을 수 있지만 저 아래 자리에 의거하여 윗자리는 닦을 수가 없다.
또 마치 산에 의지하여 여섯 겹으로 된 못과 같기 때문이니,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여섯의 못물이 계속하여 차례로 흘러 내려올 때에 그 맨 위의 물은 여섯 개의 못에 흘러들어서 두루하고, 두 번째 것은 다섯 개의 못에 흘러들어서 두루하며, 세 번째의 것은 네 개에 흘러들어서 두루하고 나아가 여섯 번째의 것은 오직 그 한 못에만 두루할 뿐이다. 그와 같아서 여섯 자리에서 일어나는 견도는 위는 아래를 닦을 수 있으나 아래는 위를 닦지 못
한다.
[문] 세제일법이 심(尋)과 상응하면서 사(伺)가 아니거나 혹은 사와 상응하면서 심이 아니거나 혹은 심․사와 다 같이 상응하거나 혹은 심․사와 다 같이 상응하지 않은 것이 있기도 하는가?
[답] 심과 상응하면서 사가 아니라 함은 미지정과 초정려의 사이니, 사는 자성(自性)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와 상응하면서 심이 아니라 함은 심과 정려 중간의 사를 제외한 그 밖의 심[心]․심소의 법[心所法]이다.
심․사가 다 같이 상응한다 함은 미지정과 초정려 중의 심․사를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이다. 심․사가 다 같이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정려 중간의 사와 위의 셋의 정려의 심․심소의 법과 아울러 온갖 마음을 따라 구르는[隨心轉] 색(色)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유심유사(有尋有伺)도 아니고 무심유사(無尋有伺)도 아니며 무심무사(無尋無伺)도 아닌 것이 있기도 한가?
[답] 있다. 미지정과 초정려의 사이면 그것은 유심유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품류족(品類足)』에서 “어떤 것이 유심유사의 법인가? 법이 심․심사와 상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저 사는 비록 심과 상응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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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무심유사도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품류족』에서 “어떤 것이 무심유사의 법인가? 법이 사와는 상응하면서 심이 아닌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저 사는 오직 심하고만 상응하여 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무심무사도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품류족』에서 “어떤 것이 무심무사의 법인가? 법이 심․사와는 상응하지 않은 것이다”고 한 것처럼 저 사는 사와도 상응하지 않을 뿐더러 심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심․사와 상응하지 않으면서 사가 아닌 것도 아닌[非非伺] 것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정려 중간의 사이다. 그것은 비록 심․사와는 상응하지 않으면서도 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의 자성이기 때문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유심유사의 자리에 있고 사와는 상응하면서도 심이 아닌 것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심이다. 그것은 오직 사와 상응할 뿐이기 때문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무심유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것과는 상응하는 법이면서도 사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정려 중간의 사이니, 그것은 자성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유심유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 가지 즉 유심유사와 무심유사와 무심무사가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유심유사라 함은 미지정과 초정려의 심․사를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고, 무심유사라 함은 심을 말하며, 무심무사라 함은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色)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을 말한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무심유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두 가지 즉 무심유사와 무심무사가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무심유사라 함은 정려 중간의 사를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며, 무심무사라 함은 그 자리의 사와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論] 세제일법4)은 낙근(樂根)과 상응한다고 말해야 하는가?……(이하 자세
4) 세제일법에는 5수근(受根) 가운데서 우근(憂根)․고근(苦根)의 두 근은 없지만 뒤의 세 근과는 상응한다. 이 문단에서는 어떠한 지(地)에서 세제일법은 어떠한 수근과 상응하는가를 밝히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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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비록 이미 그것의 의지[依]와 자리[地]의 차별을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무엇과 상응하는가의 분별을 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분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이미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 등은 알았으면서도 아직 그의 벗이나 친구들은 모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비록 이미 세제일법은 공통하게 세 자리[三地]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것이 여섯 자리[六地]에 공통하게 있다는 것은 말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그것이 세 가지의 근[三根]과 상응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공통하게 여섯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리어 분명히 실제로 보는 것이 마치 손바닥 안의 과일과 같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렇게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論] 세제일법은 낙근과 상응한다고 해야 하는가, 희근(喜根)과 상응한다고 해야 하는가, 사근(捨根)과 상응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答] 혹은 낙근과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희근과 상응하기도 하며 혹은 사근과 상응하기도 한다고 말해야 한다.
먼저 이미 욕계에 매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므로 곧 우근(憂根)과 고근(苦根)과는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이 때문에 오직 세 가지 근에만 의하여 논하게 된다.
비록 통틀어 그 세 가지 근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해도 아직은 상응하는 차별은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다시 그 차별된 모양을 설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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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낙근과 상응하는가?
[答] 만일 제3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세제일법이다.
그러나 제3 정려5)의 세제일법은 혹은 낙근과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한다. 낙근과 상응한다 함은 낙근을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며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낙근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지금은 우선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는 까닭에 그것과 낙근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論] 어떤 것이 희근과 상응하는가?
[答] 만일 초(初)와 제2와의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세제일법이다.
그러나 초와 제2의 정려의 세제일법은 혹은 희근과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한다. 희근과 상응한다 함은 희근을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며,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희근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여기서는 우선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는 까닭에 그것과 희근과 상응하는 것을 설한다.
[論] 어떤 것이 사근과 상응하는가?
5) 제3선[第三禪]의 내용을 심리적(心理的)으로 분석하면 사(捨)와 염(念)과 혜(慧)와 낙(樂)과 정(定)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염․혜․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들은 낙근(樂根)과는 상응하지만 낙근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상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4선(禪) 전체의 심리적 요소(要素)를 말해 보면 초선(初禪)에서는 심(尋)․사(伺)․희(喜)․낙(樂)․정(定)의 다섯 갈래[五支]가 있고 제2선에서는 내정(內淨)․희(喜)․낙(樂)․정(
定)에 네 갈래[四支]가 있으며 제3선에서는 앞의 설명과 같고 제4선에서는 사(捨)․염(念)․중수(中受)․정(定) 등 네 갈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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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만일 미지(未至)와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세제일법이다.
[문]무엇 때문에 정려 중간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 글에서는 마땅히 “만일 미지와 정려 중간과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거기서 얻는 세제일법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답] 이미 미지를 말했으므로 역시 정려 중간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지(未至)라는 말로써 역시 그것도 드러냈기 때문이니, 이것은 다 같이 미지의 근본지(根本地)인 까닭이다.
마치 대종온(大種蘊)에서 “대종은 어떤 정(定)에 의거하여 소멸하는가? 사 혹은 미지에 의거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자리[三地]의 세제일법은 혹은 사근과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상응하지 않기도 한다. 사근과 상응한다 함은 사근을 제외한 그 밖의 심․심소의 법을 말하며,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사근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지금은 우선 그것과는 다른 심․심소의 법을 설하는 까닭에 그것과 사근과 상응하는 것을 설한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낙근․희근․사근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그것의 마음을 따라 구르는 색과 심불상응행이다.
[문] 혹시 세제일법이 이것과 상응하는 법이면서 낙근․희근․사근과는 상응하지 않은 것이 있기도 하는가?
[답] 있다. 곧 세 가지의 근이다. 그것은 자성(自性)의 근(根)이거나 타성(他性)의 근이거나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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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5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④
[論] 세제일법은 한마음[一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여러 마음[多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비록 그것과 상응하는 차별을 이미 말했다 해도 아직 눈앞에 나타나 있는 많고 적음은 드러내 보이지 못했으므로 이제 오직 한 찰나[一刹那]뿐임을 드러내 보이려고 이것을 논한다. 또는 다른 종[他宗]의 뜻을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분별론자(分別論者)는 “세제일법은 상속(相續)하면서 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고집한다.
그들은 상속은 통틀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때의 상속[時相續]이요, 둘째는 태어남의 상속[生相續]이며 셋째는 서로 같은 상속[相似相續]이다. 세제일법에는 비록 앞의 두 가지는 없어도 뒤의 한 가지는 있다. 이제 그런 집착을 차단하여 세제일법은 오직 한 생각[一念]만 앞에 나타나 있음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먼저 이미 “만일 심․심소의 법이 등무간연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
것이 세제일법이다”라고 말했으므로 “마치 심소의 법에는 이미 여러 가지가 있는 것처럼 마음 역시 그러해야 한다”라고 의심을 내지 말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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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니,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심소의 법은 비록 많은 종류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라고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렇게 논한다.
[論] 세제일법은 한마음이라고 해야 하는가, 여러 마음이라고 해야 하는가?
[答] 한마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미래에 닦는 것도 세제일법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렇다면 이 법은 마땅히 여러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도 한마음이라고 말하는 데는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답] 이 가운데서는 다만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한마음이라고 한다.
[문] 지금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미래에 닦을 것은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남음이 있는[有餘]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에는 다시 많은 것이 있어서 또 해석해야 되나 전에 이미 말했기 때문에 지금 말하지 않는 것이며, 비록 ‘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해도 아직 그 뜻은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論] 무엇 때문에 이 법은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하는가?
말만 있을 뿐 뜻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가?
[論] 이 심․심소의 법으로부터 곧장 그 밖의 세간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세간 밖의 마음[出世心]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세간의 마음[世間心]이란 유루의 유(有)에 떨어지는 마음1)이어서 곧
1) 유루(有漏)의 유(有)에 떨어지는 마음이란 삼계(三界)의 모든 유(有)에 속한 유루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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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념(二念) 등을 차단하고 그치게 하는 세제일법이다. 세간 밖의 마음이란 무루의 유를 끊는 마음이어서 곧 고법지인을 끌어 일으키는 것과 상응한 마음이다.
[論] 만일 그 밖의 세간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하열한[劣] 것인가, 같은[等] 것인가, 뛰어난[勝] 것인가?
어느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분별하기 위하여 가정으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하열․같음․뛰어남이라 함은 앞의 찰나에 대하여는 다만 세 가지만 있기 때문이다.
[論] 만일 하열하다면 마땅히 정성이생에 들 수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물러나는 도[退道]로써는 정성이생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쇠퇴(衰退)․위췌(萎悴)․추락(墜落)․파괴(破壞)의 도로써는 정성이생에 들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승진(勝進)․증성(增盛)․용맹(勇猛)․견고(堅固)의 도로써만 정성이생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論] 만일 평등하다면 역시 정성이생에 들 수 없으니, 왜냐하면 먼저 이런 종류의 도로써는 정성이생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과 나중의 품류가 서로 비슷한 것이 마치 처음의 찰나와 같아서 장애가 있고 방해가 있는데도 세력이 없기 때문에 정성이생에 들 수 없으며, 뒤의 모든 찰나도 그와 같은 것이 마치 처음의 찰나와 같아서 끊임없이 성자의 도를 끌어 일으킬 수 없으므로 뒤의 모든 찰나도 역시 그러해야 됨은 품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니, 마침내 정성이생을 증하여 들어갈 수가 없고 이렇게 되면 당연히 해탈하여 생사에서 벗어남이 없다.
[論] 만일 뛰어나다면 먼저는 마땅히 세제일법이 아니고 나중에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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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일법이어야 한다.
세제일법이라는 말로 가장 뛰어나다는 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문] 먼저 것이 이미 세제일법이 아니라면 이것은 어떤 법인가?
[답] 이것은 증상인(增上忍)이다.
[문] 무엇 때문에 견도에서는 오직 뛰어난 가행(加行)만을 곧장 이끌어 낼 뿐인데 수도(修道) 가운데서는 성자의 도를 이끌어 내는 데에 하열․같음․뛰어난 것이 통하게 되는가?
[답] 견도는 일찍이 얻지 못했던 도(道)로써 반드시 공용(功用)이 많으면서 가행의 뜻을 지어야 비로소 앞에 나타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오직 뛰어난 가행만으로 끌어 일으키고 수도에서는 이미 본래 일찍이 얻었던 도이므로 많은 공용과 가행의 뜻을 짓지 않아도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에 하열․같음․뛰어난 것으로 모두 끌어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세제일법은 세제일법을 위하여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이 된다. 인연에는 세 가지의 인[三因]이 있으니, 상응인(相應因)과 구유인(俱有因)과 동류인(同類因)이다. 이것은 통틀어서 하는 설명[總說]이다.
만일 따로따로 설명[別說]한다면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상응인과 구유인의 두 가지 인이 되고 미래를 위해서는 동류인의 한 가지 인이 된다. 미래는 미래를 위하여 상응인과 구유인의 두 가지 인이 된다. 현재는 현재를 위하여 상응인과 구유인의 두 가지 인이 되고 미래를 위해서는 동류인의 한 가지 인이 된다.
증상연이라 함은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것[不障]을 말한다.
[論] 세제일법은 물러난다[退]고 말해야 하는가, 물러나지 않는다[不退]고 말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비록 이미 그것은 한마음이요, 여러 마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물러난다거나 물러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분별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분별하려고 이것을 논한다.
또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어떤 이는 ‘세제일법도 물러나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므로 그런 이의 뜻을 중지시키고 이 법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이것을 논한다.
[論] 세제일법은 물러난다고 말해야 하는가, 물러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答] 물러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비록 이런 말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다시 물러나지 않는 인연을 나타내 보여야 하니, 말만이 있다 하여 그 뜻이 환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論] 무엇 때문에 이 법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 것인가?
[答] 세제일법은 진리[諦]에 수순하고[隨順]․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趣向]․진리에 임하여 들어가면서[臨入]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 서로 비슷하지 않은 마음[不相似心]을 일으키어 성제현관(聖諦現觀)2)에 들 수 없게 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을 진리에 수순하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 진리에 임하여 들어간다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현관(現觀)을 말하여 진리라 한다. 세제일법은 현관에 수순하고, 현관을 향하여 나아가며, 현관에 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2) 성제현관(聖諦現觀)은 견도위(見道位)이다. 여기에서 현관(現觀)이란 현등각(現等覺) 즉 현전의 경계[境界對象]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지혜에 의하여 눈앞의 4제(諦) 16행상(行相)의 이치를 관한다는 뜻이다. 16심(心)을 통틀어 성제현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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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도의 진리[道諦]를 말하여 진리라 한다. 세제일법은 도의 진리에 수순하고, 도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 도의 진리에 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견도(見道)를 말하여 진리라 한다. 세제일법은 견도에 수순하고, 견도를 향하여 나아가며, 견도에 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말하여 진리라 한다. 세제일법은 괴로움의 진리에 수순하고, 괴로움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 괴로움의 진리에 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말하여 진리라 한다. 세제일법은 고법지인에 수순하고, 고법지인을 향하여 나아가며, 고법지인에 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수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향하여 나아가면서[趣向] 수순하는 것이요, 둘째는 임하여 들어가면서[臨入] 수순하는 것이다. 세제일법은 고법지인에 대하여 두 가지의 수순함을 갖추면서 등무간연이 되어 그것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서 서로 비슷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킴은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 세제일법과 저 고법지인의 중간은 유루로 유(有)에 떨어져 서로 비슷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킴은 용납하지 않음을 말한다.
성제현관에 들 수 없게 한다 함은 고법지인으로 하여금 앞에 나타나 있을 수 없게 한다는 말이다.
[문] 세제일법은 이미 유루이므로 무루의 마음과는 서로 비슷하지 않아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유루이어서 유에 떨어지는 마음과 서로 비슷하지 않다고 하고 무루이어서 유를 끊는 마음을 서로 비슷[相似]하다고 하는 것인가?
[답] 세제일법은 유루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무루를 향하여 나아가기 때문에 유루를 말하여 서로 비슷하지 않다 하고 무루를 서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등지고 저것에 향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고향의 친척[親里]이 괴롭히므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붙어서 구호를 받으며 자신의 고향 친척에 대하여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고향 친척이라는 생각을 하듯이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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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다.
또 어떤 이는 “세제일법은 고법지인과 똑같이 하나의 일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생의 성품 등을 버리기 때문에 유루를 말하여 서로 비슷하지 않다 하며 무루를 서로 비슷하다 함은 똑같이 하나의 일을 갖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앞의 뜻에 대하여 어리석은 범부까지도 분명히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실제의 비유[現喩]를 들어 말한다.
[論] 비유하면 장사(壯士)가 강물을 건너고 골짜기를 지나며 산을 넘고 벼랑을 건널 때에 그 중간에 그의 몸을 돌리어 도로 본래 있던 데로 가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없으면서 먼저 일으켰던 뛰어난 몸의 행으로 아직 나아갈 데에 이르기 전이면 반드시 그만두거나 쉬지 않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진리에 수순하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 진리에 임하여 들어가면서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 상사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켜 성제현관에 들 수 없
게 됨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강물을 건넌다 함은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골짜기를 지난다 함은 이 끝에서부터 저 끝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며, 산을 넘는다 함은 이 봉우리로부터 저 봉우리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벼랑을 건넌다 함은 높은 데서부터 낮은 데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혹 어떤 사람이 용마루로부터 떨어지되 아직 땅에 닿기 전에 마음먹기를 ‘나는 뛰어올라서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에 그의 뜻대로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라고 한다면 이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가령 그 사람이 혹은 신력(神力)으로써 혹은 주술(呪術)로써 혹은 약물(藥物)로써는 도로 본래 있던 데로 이른다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세제일법으로부터 아직 고법지인에 이르기 전의 그 중간에 상사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어 성제현관에 들 수 없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뜻을 한층 더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지금 다시 두 번째로 실제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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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마치 섬부주(贍部洲)에 다섯의 큰 강[五大河]이 있는 것과 같다. 첫째는 긍가(兢伽)라 하고, 둘째는 염모나(閻母那)라 하며, 셋째는 살락유(薩洛瑜)라 하고, 넷째는 아씨라벌지(阿氏羅筏底)라 하며, 다섯째는 막혜(莫醯)라 한다.
이와 같은 다섯의 강물은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큰 바다로 향하여 나아가며 큰 바다에 이르러 들어가되 그 중간에 그의 흐름을 돌리어 도로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가거나 혹은 다른 데로 가는 일이 없으며 그것은 결정코 큰 바다에 흘러드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진리에 수순하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며, 진리에 이르러 들면서 저것과 이것의 중간에 상사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어 성제현관에 들 수 없게 함을 용납함이 없다.
[문] 앞의 비유와 지금의 비유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또 앞의 뜻에서 무슨 다하지 못한 것이 있기에 다시 두 번째의 비유로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두 비유는 뜻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 앞의 비유에서 드러냈던 이치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지금의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두 비유에서는 역시 차별이 있다. 앞의 비유는 이치답지 않은[不如理]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요, 뒤의 비유는 이치다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앞의 것은 내분(內分)이 두루 갖춘 것을 비유로 삼고, 뒤의 것은 외분(外分)이 두루 갖춘 것을 비유로 삼는다. 또 앞의 비유는 내분에서의 방해를 중지시키기 위해서요, 뒤의 비유는 외분에서의 방해를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다섯의 큰 강물이 큰 바다에 흘러 들 때에 그 흐름을 돌려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은 도로 무열뇌지(無熱惱池)3)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말이며, 그 흐름을 돌려 다른 데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혹은 왼쪽으로나 혹은 오른쪽으로나 곁으로 흘러가게 한다는 말이다.
앞의 비유의 돌린다[廻轉]는 것도 이것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
3) 무열뇌지(無熱惱池:阿耨達池, Anavatapta)는 향산(香山)의 남쪽 설산(雪山)의 북쪽에 있으며 둘레가 8백여 리이고 네 개의 입구가 있어서 4하(河)를 흘러나오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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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섯의 큰 강물이 아직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혹시 바다에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한가, 없는가 할 적에 이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혹은 신력으로써 혹은 주술로써 혹은 약물로써 본래 있던 데로 이르게 한다는 일은 있을 수 있다 해도, 세제일법은 아직 고법지인에 이르기 전의 그 중간에는 상사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어 성제현관에 들 수 없게 한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존자는 이 『발지론(發智論)』을 지을 때에 동방(東方)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동방에서 다 같이 실제로 보게 되는 일을 인용하여 5하(河)의 비유를 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 섬부주 안에는 4대하(大河)가 있으며 그의 권속에 각각 넷씩이 있는데 그 방면을 따라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 섬부주 안에는 하나의 큰 못이 있는데 무열뇌(無熱惱)라 한다. 처음에는 거기서부터 네 개의 큰 강[四大河]이 흘러나오는데 첫째 긍가하(殑伽河)라 하고, 둘째는 신도하(信度河)라 하며, 셋째는 박추하(縛芻河)라 하고, 넷째는 사다하(私多河)라 한다.
처음의 긍가강은 못 동쪽의 금 코끼리[金象]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오른편으로 못을 한 바퀴 돌고는 동해(東海)로 흘러 들어간다.
다음 신도강은 못 남쪽의 은 소[銀牛]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오른편으로 못을 한 바퀴 돌고는 남해(南海)로 흘러 들어간다.
다음 박추강은 못 서쪽의 폐유리 말[吠琉璃馬]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오른편으로 못을 한 바퀴 돌고는 서해(西海)로 흘러 들어간다.
다음 사다강은 못 북쪽의 파지가 사자[頗胝迦師子]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오른편으로 못을 한 바퀴 돌고는 북해(北海)로 흘러 들어간다.
긍가의 큰 강에는 네 개의 권속이 있다. 첫째는 염모나(閻母那)라 하고, 둘째는 살락유(薩落瑜)라 하며, 셋째는 아씨라벌지(阿氏羅筏底)라 하고, 넷째는 막혜(莫醯)라 한다.
신도의 큰 강에도 넷의 권속이 있다. 첫째는 비파사(毘簸奢)라 하고, 둘째는 애라벌지(藹羅筏底)라 하며, 셋째는 설저도로(設咀茶盧)라 하고, 넷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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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저바다(毘咀婆多)라 한다.
박추의 큰 강에도 네 개의 권속이 있다. 첫째는 벌랄노(筏剌弩)라 하고, 둘째는 폐저랄니(吠咀剌尼)라 하며, 셋째는 방사(防奢)라 하고, 넷째는 굴준바(屈惷婆)라 한다.
사다의 큰 강에도 네 개의 권속이 있다. 첫째는 살리(薩梨)라 하고, 둘째는 피마(避魔)라 하며, 셋째는 날지(捺地)라 하고, 넷째는 전광(電光)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선 큰 이름이 있는 것만을 설명하였지만 사대강의 하나하나에는 각각 5백씩의 권속이 있어서 아울러 본래의 강과 합하면 2천 네 개의 강이 있으며 그의 방면에 따라 큰 바다로 흘러 나아간다.
이와 같이 말한 바의 2천 네 개의 강물이 아직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혹시 바다에 들지 않게 되는 물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러한 일이란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혹은 신력으로써 혹은 주술로써……(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성제현관에 들 수 없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論] 또 세제일법은 고법지인을 위하여 등무간연이 되되 어느 한 법도 빨리 회전하는 것이 마음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그 때에 방해하면서 성제현관에 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이 법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또[復次]’에 대하여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앞에서와 같다. 이 앞의 글에서는 다만 방편이요 열어 부추기는[開縱] 논의 길[論道]뿐이었는데, 지금 설한 것은 바로 근본(根本)이요 막아 빼앗는[遮奪] 논의 길이기 때문이니, 마땅히 또[復次]와 본문(本文)의 해설과 같다고 말해야 한다.
이 안에서 설명하는 뜻은 “세제일법은 고법지인을 위하여 등무간연이 되며 이것이 막 소멸하는 자리[正滅位]에서 결과를 취하고[取果] 결과를 부여[與果]하므로 그 고법지인은 다음에 반드시 앞에 나타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법이 그 법을 위하여 등무간연이 되면서 막 소멸하는 자리에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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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취하고 결과를 부여하는데 어떠한 법이거나 유정이거나 주술이거나 약물이거나 부처님이거나 독각이거나 또는 저 언덕[波岸]에 이른 모든 성문 등이거나 방해를 하면서 제이념(二念)으로 하여금 앞에 나타나 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한 “어느 한 법도 빨리 회전하는 것이 마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함은 그것이 고법지인과 상응하는 마음인 줄 알 것이니, 이 마음이 결정코 빨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은 그 밖의 다른 법은 이것보다 빨리 회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세존께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나는 어느 한 법도 마음보다 빨리 회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계경의 글은 뒤의 정온(定蘊)에서 자세히 분별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빨리 회전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법보다 더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세제일법은 순간적인 찰나 동안에 고법지인을 반드시 앞에 나타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이 법은 결정코 물러나지 않는다.
이 뜻 가운데서는 또 분별이 있다.
[문] 어떤 인연으로 세제일법은 결정코 물러나지 않는가?
[답] 가행(加行)이 광대하기 때문이요, 안정하게 발을 디딤[安定]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가행이 광대하다 함은 거기서 익히는 보시[施]․계율[戒]과 듣고[聞]․생각하고[思]․닦아서[修] 이룬 선(善)은 모두가 해탈과 열반에 회향해서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시란 장엄한 마음[莊嚴心]의 보시4)요, 계율이란 별해탈계(別解脫戒)이며, 들어서 이룬 것[聞所成]이란 성자의 가르침에 대하여 글의 뜻을 결택(決擇)하는 것이요, 고찰하여 이룬 것[思所成]이란 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염주(念住)․3의관(義觀)․7처선(處善) 등을 말하며,
4) 장엄한 마음[莊嚴心]의 보시라는 것은 신통(神通)을 얻기 위하여 8성도지(聖道支)의 마음을 돕기 위하여, 선정(禪定)을 닦기 위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기 위하여 하는 보시(布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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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아서 이룬 것[修所成]이란 난(煖)․정(頂)과 하인(下忍)․중인(中忍)을 말한다.
안정하게 발을 디딤이 견고하다 함은 증상인(增上忍)을 말하는 것이니, 세제일법은 가행이 광대하고 안정하게 발을 디딤이 견고하기 때문에 결정코 물러나지 않는다.
또 이 법에서는 나중에 삼계(三界)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의 끊음[斷]을 통틀어 증득[證]한다. 삼계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끊음에서는 도로 물러난다[還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이 법에서는 나중에 비상비비상지(非想非非想地)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끊음을 통틀어 증득한다. 비상비비상지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끊음에서는 도로 물러난다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이 법으로써 나중에 반드시 인(忍)과 지(智)를 일으키는 것이니, 인과 지에서는 도로 물러난다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물러나지 않는다.
또 이 법으로써 나중에 반드시 견도를 일으켜 중진(重鎭)을 삼으므로 결정코 물러남이 없으니, 도를 본 이[見道者]는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료. 어떠한 인연으로 견도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가?
[답] 그 견도는 곧 빠르게 이룬 도[速疾道]5)요 방해가 없는 도[無留難道]이어서 중간에 일어나지 않는 도[非中起道]이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그 수행자는 견도에 떨어져 있으므로 큰 법의 빠른 흐름에서 그 흐름 때문에 떠밀려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나 그 마음이 완만해지면 비로소 물러나게 된다. 이 때문에 마치 사람이 산골짜기의 폭류(暴流)에 떨어져서 그 흐름 때문에 떠내려가면서 잠시도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다.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5) 유부(有部)의 법상(法相)에 따르면 처음 고법지인(苦法智忍)을 일으켜서부터 제15의 도류지인(道類智忍)을 일으키기까지를 견도(見道)라 하며, 그 사이에 다른 생각이 섞임이 없이 다만 15심(心)만이 연속할 뿐이므로 이것을 빠르게 이룬 도[速疾道]라 하고 방해가 없는 도[無留難道]라 하며 중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도[非中起道]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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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물러나는 이는 번뇌가 많이 일어나서 앞에 나타나 있지만 견도에 머무를 때에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유루의 착한 마음조차도 오히려 일어날 수 없거늘 하물며 번뇌의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견도에 머무름으로써 통틀어 삼계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끊음을 증득한다. 삼계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끊음에 있어서는 도로 물러나는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견도에 머무름으로써 통틀어 비상비비상지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의 끊음을 증득한다. 비상비비상지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의 끊음에서는 도로 물러나는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또 만일 견도로부터 도로 물러남이 있는 이라면 마땅히 진리를 본[見諦] 뒤에는 도로 진리를 보지 않아야 하고, 과를 얻은[得果] 뒤에는 도로 과를 얻지 않아야 하며, 현관(現觀)한 뒤에는 도로 현관하지 않아야 하고, 정성이생에 든 뒤에는 도로 정성이생에 들지 않아야 하며, 성자(聖者)가 된 뒤에는 도로 이생(異生)이 되어야 하고, 정취(定趣)6)에 머무른 뒤에는 도로 부정취(不定趣)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
러 가지 허물은 없다. 이 때문에 견도는 결정코 물러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 선근을 오직 찰나이거나 반 찰나 동안도 물러남이 없으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선근은 무간도(無間道)와 같다. 무간도에 머무르면 물러나는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선근은 바로 순승분(順勝分)이며 순승분에 머무르면 물러나는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 가지 순결택분(順決擇分)이 있다. 첫째는 순퇴분(順退分)이요, 둘째는 순주분(順住分)이며, 셋째는 순승분이다. 물러나는 이를 순퇴분이라
6) 온갖 중생을 수행과 그 운명의 입장에서 세 가지 성질로 나눈 것이니 정성정취(正性定聚)와 사성정취(邪性定聚)와 부정성정취(不定性定聚)가 그것이다. 여기서 정취라 함은 그 정성정취를 말하고 부정취라 함은 부정성정취를 말한다. 이 중에서 정성정취란 항상 진전하여 결코 성불할 종성이요, 사성정취란 성불할 만한 소질이 없어 더욱 타락하여 가는 종성이며, 부정성정취란 연(緣)이 있으면 성불할 수 있고 연이 없으면 미혹할 이로서 향상과 타락에 결정이
없는 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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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머무르는 이를 순주분이라 하며, 뛰어나게 나아가는 이를 순승분이라 한다. 난(煖)에도 세 가지를 갖추며 정(頂)에도 역시 세 가지를 갖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순주분이 제외되며 정위는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의 사이이기 때문이다. 인위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어서 순퇴분이 제외되며 세제일법에는 오직 순승분 뿐이니, 이 때문에 이 지위에서는 결정코 물러나는 이치가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 안의 세 가지 분(分)은 모두 다 순결택분의 선근에 속하는 것이라면 뒤의 정온(定蘊)에서 말하는 네 가지 분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소의가 각각 다르다. 이것은 다만 견도를 수순함에 근거하여 통틀어 한 종류의 순결택분을 세워 그 가운데서 뜻의 차별에 따라 다시 세 가지를 열어 보였고 뒤의 정온 가운데서는 통틀어 유루에서 닦아서 이룬 선(善)에 의하여 네 가지 분을 건립한 것이다.
만일 물러나는 이면 순퇴분이라 하고, 만일 머무르는 이면 순주분이라 하며, 만일 뛰어나게 나아가는 이면 순승진분이라 하고, 만일 성자의 도에 수순하는 이[順聖道者]면 순결택분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그것과 이것의 소의가 각각 다르다.
[문] 세제일법은 반연할 것이 있는 법[有所緣人法]7)을 반연하는가?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하는가?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도 반연하는가?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하는 것도 아닐 수 있는가?
[답] 있다.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한다 함은 세제일법이 심․심소의 법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고,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한다 함은 세제일법이 색(色)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며, 반연할 것이
7) 소연(所緣) 즉 대상(對象)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어서 5위(位)의 분과(分科)에서 말하면 심(心)․심소(心所)를 통틀어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이라 하여 능관(能觀)의 작용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 그에 대하여 반연할 것이 없는 법[無所緣法]이라 함은 반연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닌 즉 색법(色法)과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있는 법을 반연하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도 반연한다 함은 세제일법이 심․심소의 법을 반연하고 색과 심불상응행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고,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마음을 따라 구르는[隨心轉] 색과 마음을 따라 구르는 심불상응행의 세제일법을 말한다.
[문] 혹시 한 찰나 동안에 머무르면서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게 되어야 하는 세제일법이 있는가?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하게 되어야 하는 세제일법이 있는가?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도 반연하게 되어야 하는 세제일법이 있는가? 반연할 것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반연할 것이 없는 법을 반연한 것이 아닌 세제일법이 있는가?
[답] 있다. 증상인(增上忍)에 머무를 때에 위에서 말한 4구(句)의 세제일법이다.
[문] 혹시 한 찰나를 머무는 동안에 당연히 세제일법을 얻어야 하는데 그 반연할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그 반연할 것을 얻으면서 세제일법이 아닌 것이 있는가? 세제일법과 그 반연할 것을 얻어야 할 것이 있는가? 세제일법과 그 반연할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증상인에 머무를 때에 마땅히 네 구를 만들어야 한다. 우선 미지정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어 증상인에 머무를 때에 세제일법을 얻어야 한다. 그의 반연할 것이 아니라 함은 미지정에 속한 세제일법 중에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소의(所依)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경계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이다.
그의 반연할 것을 얻어야 하면서 세제일법이 아니라 함은 위의 5지(地)에 속한 세제일법 중에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소의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이다.
세제일법과 그의 반연할 것을 얻어야 한다 함은 미지정에 속한 세제일법 중에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소의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이다.
세제일법과 그의 반연할 것을 얻지 못한다 함은 위의 5지에 속한 세제일법 중에서 앞에 나타나 있어야 하는 소의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을 제외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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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그 밖의 경계를 반연하는 세제일법이다.
마치 미지정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가 증상인에 머무를 때에 이와 같은 4구를 만드는 것처럼 위의 5지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가 증상인에 머무를 때에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혹시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그것의 이계득(離繫得)8)을 성취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네 구를 만들어야 한다.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이 자리[地]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면서도 그는 아직 이 자리의 잡염(雜染)을 여의지 못한 이다.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면서 세제일법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이 자리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면서도 그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위의 자리[上地]에 태어나는 이다.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또한 그것의 이계득도 성취한다 함은 이 자리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어서 그는 이미 이 자리의 잡염을 여의었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위의 자리에 태어나지 않는 이이다.
세제일법을 성취하지 못했고 또한 그것의 이계득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아직 정성이생의 자리에 들지 못한 이이다.
어느 다른 이는 그 유루(有漏)의 이계득에 의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문] 혹시 성자가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답] 네 구를 만들어야 한다.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이 자리[地]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나 그는 아직 이 자리의 잡염을 여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면서 세제일법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이 자리에
8) 택멸무위(擇滅無爲)의 득(得)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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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고 그가 목숨을 마치고 다음의 위의 자리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다.
세제일법을 성취하고 또한 그것의 이계득도 성취한다 함은 이 자리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어서 그는 이미 이 자리의 잡염을 여의었고 목숨을 마치고 위의 자리에 태어나지 않는 이이다.
세제일법도 성취하지 않고 또한 그것의 이계득도 성취하지 않는다 함은 이 자리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로서 그가 목숨을 마치고 다음 자리를 초월하여 그 밖의 자리에 태어나는 이이다.
어느 다른 이는 온갖 세제일법과 그것의 온갖 이계득에 의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한다.
[문] 혹시 세제일법을 성취하면서 그것의 이계득을 성취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답]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제1구(句)는 미지정이거나 혹은 초정려이거나 혹은 정려 중간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면서 그는 아직 초정려의 잡염을 여의지 아니한 이이다.
제2구는 이 지위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으나 그가 목숨을 마친 뒤에 위의 자리에 가서 태어나는 이와 또는 아직 세제일법을 얻지 못한 이가 욕계에 태어난 뒤에 초정려의 잡염을 여의고 그리고 공무변처(空無邊處)에 태어나는 이이다.
제3구는 이 지위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든 뒤에 초정려의 잡염을 여의고 목숨이 끝난 뒤에 위의 자리에 태어나지 않는 이이다.
제4구는 앞에서의 모양에서 제외된 이이다.
존자는 여기에서 7문(門)으로 세제일법을 분별했다. 첫째는 “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 하고 나아가 일곱째는 “세제일법은 물러난다고 해야 하는가,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중간부터 앞의 3문은 근본의 논[根本論]이요, 뒤의 4문은 논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因生論] 것이다. 세제일법은 이 7문을 말미암아 분별하고 드러내 보였으므로 지극히 명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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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정(頂)인가?9)……(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먼저 난(煖)을 말하고 그 뒤에 정을 말해야 되는데 어째서 여기서는 먼저 정을 말하는가?
[답]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는 이생의 몸 안의 청정[淨]과 잠염[染]의 모든 법을 역으로 말[逆說]하기 때문에 먼저 정을 말하고 그 뒤에 난을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먼저 인(忍)을 말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것을 뛰어넘어 정을 말하는가?
[답] 먼저 이미 인을 말했으나 뚜렷하게 드러나지[彰顯] 않았다. 이미 “만일 뛰어나[勝]야 한다면 먼저 세제일법이 아니고 나중에 세제일법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먼저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증상인이다. 이미 인을 말했기 때문에 이제 정을 말하는 것이다.
[문] 존자는 무엇 때문에 모양을 감추어[覆相] 인을 말하면서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인을 널리 말하지 않는 것인가?
[답] 역시 뚜렷이 드러나도록 인의 모양을 자세히 말해야 된다. “어떤 것이 인인가? 무엇 때문에 인이라 하는가? 인은 어느 세계의 매인 것[繁]인가?”라고 말해야 하고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 것까지 모두 자세히 말해야 된다.
[문] 그런데도 말하지 않는 데는 무슨 뜻이 있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가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논을 지은 이가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혹은 드러내기도 하고 혹은 숨기기도 하며 혹은 자세하게 혹은 간략하게 이 논을 지은 것이므로 묻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
존자는 여기에서 뚜렷이 드러나도록 자세하게 세제일법을 말하였고 숨기고 줄이며 인을 말하였으며 정과 난에 대하여는 드러나게 또는 줄여서 말하고 있다.
9) 4선근(善根) 중에 세제일법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정(頂)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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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계경 가운데서 드러내어 명확히 말한 것은 존자도 여기에서 뚜렷이 드러나게 말했으나 인은 경 가운데서 환히 드러나게 명확히 말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모양을 감추며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찌 경 가운데서 드러나게 명확히 인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어느 한 무리가 여섯 가지의 법을 성취하면 현재 법 가운데서 반드시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며[遠塵離垢] 모든 법 가운데서 청정한 법안(法眼)이 생길 수가 없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 법인가? 첫째는 법 듣기를 좋아하지 않고, 둘째는 비록 설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셋째는 비록 귀를 기울여 들어도 가르치는 이의 마음을 받들어 행함에 편안히 머물지 않고, 넷째는 아직 증득하지 못한 착한 법에 대하여 증득하기를 힘써 구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이미 증득한 좋은 법에 대하여 힘써 수호하지 않고, 여섯째는 순인(順忍)을 성취하지 않는 것이니, 백품(白品)은 이것과는 서로 반대인 줄 알아야 한다
.”
인은 이 경에서 이미 뚜렷이 드러나도록 말하셨는데도 존자는 무엇 때문에 모양을 감추면서 말한 것인가?
[답] 그는 “경 가운데서 비록 순인을 말하셨다 해도 순제인(順諦忍)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러나게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순인과 순제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뜻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앞의 말[說]이 좋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논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이 인을 유독 순제(順諦)라 하며 난․정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 역시 순제난(順諦煖)․순제정(順諦頂)이라고 말해야 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는 그 밖의 다른 학설이 있는 줄 알아야 하리니, 뜻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또 순제라 함은 지극하게 성제현관(聖諦現觀)을 ‘따른다’는 말이므로 인은 지극하게 성제현관을 따르지만 난․정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인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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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인은 견도에 이웃해서 가깝거니와 난․정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인과 견도는 비슷하나 난․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도위에는 오직 법념주(法念住)만 항상 앞에 나타나 있고 인위(忍位) 역시 그러하나 난․정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의 초위(初位)에서는 비록 법념주만을 일으키지만 증진위(增進位)에서는 그 밖의 세 가지 염주[三念住]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인위에서는 반드시 의요(意樂)를 내지 않으면서 성자의 도에 들어가나 난․정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관행(觀行)을 닦는 이가 인위 가운데서는 진리[四諦]를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하고, 정위(頂位) 가운데서는 보배[三寶]를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하며, 난위 가운데서는 5온(蘊)을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緣諦)의 하우(下愚)를 그치게 하고, 정은 연제의 중우(中愚)를 그치게 하며, 인은 연제의 상우(上愚)를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의 추우(麤愚)를 그치게 하고, 정은 연제의 중우(中愚)를 그치게 하며, 인은 연제의 세우(細愚)를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의 하명(下明)을 일으키고, 정은 연제의 중명(中明)을 일으키며, 인은 연제의 상명(上明)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의 추명(麤明)을 일으키고, 정은 연제의 중명(中明)을 일으키며, 인은 연제의 세명(細明)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의 하신(下信)을 얻고, 정은 연제의 중신(中信)을 얻으며, 인은 연제의 상신(上信)을 얻기 때문이다.
또 난은 연제의 추신(麤信)을 얻고, 정은 연제의 중신(中信)을 얻고, 인은 연제의 세신(細信)을 얻기 때문이다.
또 인위 가운데서는 어떤 때에는 16행상(行相)으로써 성제(聖諦)를 관찰하고, 어떤 때에는 12행상으로써 성제를 관찰하고, 어떤 때에는 8행상으로써 성제를 관찰하고, 어떤 때에는 4행상으로써 성제를 관찰하나, 난․정위의 가운데서는 다만 16행상만으로써 성제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또 인위 가운데는 뒤섞인[雜] 작의(作意)가 없으나 난․정위 가운데서는 뒤섞인 작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난․정위에서는 자주자주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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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의 선심(善心)을 일으키어 욕계의 괴로움[苦]을 관하면서 사이사이에 뒤섞인 뒤에 다시 이 선근이 앞에 나타나도록 이끌게 되나 인위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 인위 가운데서는 오직 갖가지의 작의가 모든 진리를 갖가지로 관하나 난․정위 중에서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난․정위에서 비록 갖가지의 작의로 갖가지 모든 진리를 관한다 하더라도 그 중간에 통틀어 행상을 닦으면서 통틀어 모든 진리를 관한다. 이를테면 온갖 유루는 모두가 괴롭다고 관하고 온갖 행(行)은 모두 무상하다고 관하며 온갖 법은 모두가 공이요 무아(無我)라고 관하고 오직 열반만이 진실한 적정(寂靜)이라고 관한다.
또 인위 가운데는 어떤 때는 상속하면서 어떤 때는 한 찰나 동안에 성제를 관찰하나 난․정위 중에서는 오직 상속만으로서 성제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또 인위 가운데는 점차로 줄이면서 진리를 관찰하므로 지극히 잘 수순하면서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마치 다른 지방에 갈 때에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바꾸어서 가지고 가는 것과 같으나 난․정위 가운데서는 그와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인을 순제라 하나 난․정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문] 세제일법은 무엇 때문에 순제라는 이름을 세우지 않는가?
[답] 비록 이 지위는 모두가 다 뛰어나다 해도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하여 두루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순제라는 이름을 세우지 않는다.
[문] 인은 몇 가지의 염주(念住)가 되는가?
[답] 현재는 하나뿐인 뒤섞인 연[雜緣]의 법념주(法念住)이며 미래는 네 가지를 다 갖추니, 견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 인은 몇 가지의 연(緣)이 되는가?
[답] 네 가지의 연이 되니,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이다.
인연이 된다 함은 그것이 상응(相應)․구유(俱有)․동류(同類) 등의 법과 인연이 되는 것을 말하고, 등무간연이 된다 함은 세제일법과 등무간연이 되는 것을 말하며, 소연연이 된다 함은 능연(能緣)의 심․심소의 법과 소연연이 되는 것을 말하고, 증상연이 된다 함은 자성(自性)을 제외한 그 밖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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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유위의 법[有爲法]과 증상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문] 인은 몇 가지의 연(緣)이 있는가?
[답] 네 가지의 연이 있다. 인연이 있다 함은 이것이 상응․구유․동류의 법임을 말하고, 등무간연이 있다 함은 이미 생긴 정(頂)을 말하며, 소연연이 있다 함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말하고, 증상연이 있다 함은 자성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을 말한다.
[문] 인은 어느 세계에 매인 것[繫]이라 해야 하는가?
[답] 오직 색계[色界]에 매인 것일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인은 유심유사(有尋有伺)라고 말해야 하는가, 무심유사(無尋有伺)라고 말해야 하는가, 무심무사(無尋無伺)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 세 가지 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인은 낙근(樂根)과 상응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희근(喜根)과 상응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사근(捨根)과 상응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답] 세 가지 근[三根]과 다 상응하다고 말해야 한다.
[문] 인은 한마음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여러 마음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 혹은 여러 마음이기도 하고 혹은 한마음이라고 말해야 하니, 증상인은 한 찰나이기 때문이다.
[문] 인은 물러난다고 말해야 하는가, 물러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답] 물러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여러 뜻은 위에서 말한 세제일법에 의하여 그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 어느 진리의 인을 반연한 뒤에 정성이생에 드는가?
[답] 어떤 이는 “도제[道諦]의 인을 반연한 뒤에 정성이생에 든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소연(所緣)과 행상이 도착(倒錯)되지 않는가, 만일 도착되었다면 정성이생에 드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는 것인가?
[답] 이것은 소연과 행상이 비록 도착이 된다 하더라도 정성이생에 드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익숙하게 익혔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는 이 익숙하게 익힌 것에 대하여 이미 지름길을 이루었고 자유자재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 마치 견도 가운데 욕계를 반연하는 인지(忍智)의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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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有頂)을 반연하는 인지가 앞에 나타나 있고, 유정을 반연하는 인지의 뒤에 욕계를 반연하는 인지가 앞에 나타나 있으며, 괴로움에 대한 진리[苦諦]를 반연하는 행상 뒤에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諦]를 반연하는 행상이 앞에 나타나 있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를 반연하는 행상 뒤에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滅諦]를 반연하는 행상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들의 소연과 행상에 비록 도착된다 하더라도 현관에 대하여 방해가 되지 않는 것
은 이미 익숙하게 익힌 까닭으로 이 인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도제의 인을 반연하고 뒤에 정성이생에 든 이는 세 가지의 마음[三心]이 있어서 동일한 소연이요 동일한 행상이다. 세제일법은 고법지인과 고법지가 상응하는 것이다.
두 가지 마음[二心]이 동일한 행상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소연은 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와 상응하는 것이요, 두 가지 마음이 동일한 소연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행상은 집법지인(集法智忍)과 집법지(集法智)와 상응하는 것이며, 그 밖의 마음은 동일하지 않은 소연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행상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는 고제의 인을 반연한 뒤에 정성이생에 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견도는 무루의 선근이어서 큰 세력이 있으므로 비록 소연과 행상에 도착됐다고 해도 현관에 있어서 방해가 되지 않으나 인은 유루의 선근이어서 큰 세력이 없으므로 만일 소연과 행상에 도착이 있으면 정성이생에 드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가 인위(忍位) 안에 머무르면 소연과 행상을 앞에는 넓히고 뒤에는 줄이어 이를 말미암아 정성이생에 들게 된다. 그는 먼저 4행상으로써 욕계의 괴로움[苦]을 관하고, 다음에 4행상으로써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그 다음에 4행상으로써 욕계의 모든 행(行)의 원인[因]을 관하고, 다음에 4행상으로써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원인을 관하며, 그 다음에 4행상으로써 욕계의 모든 행이 사라짐[滅]을 관하고, 다음에 4행상으로써 색계
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사라짐을 관하며, 그 다음에 4행상으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도(道)를 관하고, 그 뒤에 4행상으로써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도를 관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하인(下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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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이후에는 그것을 점점 줄이는[略] 것이니,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다음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나아가 맨 나중에는 욕계의 모든 행의 도를 관하고 점차로 색계와 무색계의 행의 도를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다음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나아가 맨 나중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사라짐을 관하고 점차로 온갖 모든 행의 도를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그 다음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나아가 맨 나중에는 욕계의 모든 행의 사라짐을 관하고 점차로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사라짐을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다음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나아가 맨 나중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원인을 관하고 점차로 온갖 모든 행의 사라짐을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그 다음에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그 다음에는 욕계의 모든 행의 원인을 관하고 점차로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행의 원인을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그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관하며, 점차로 온갖 모든 행의 원인을 줄여가는 것이다.
다시 4행상으로써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점차로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줄여가는 것이다.
그는 욕계의 괴로움에 대하여 4행상으로써 서로 이어 관찰하고 다시 점차로 그것을 줄여가면서 하나의 행상과 두 찰나[二刹那]에 이르기까지 관찰하는 것이 마치 고법지인과 고법에서와 같다. 이와 같은 것을 중인(中忍)이라 한다.
그는 다시 욕계의 괴로움에 대하여 한 찰나 동안에 관찰하는 것은 마치 고법지인과 같다. 이것을 상인(上忍)이라 한다.
이로부터 곧장 다시 한 찰나 동안에 욕계의 괴로움을 관찰하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하며 이로부터 곧장 고법지인을 내고 차츰차츰 더하여 도류지(道類智)를 내는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나라로부터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할 적에 재산이 많이 있어도 가져갈 수 없으므로 마침내 돈[錢]으로 바꾸고도 그것도 많은 것이 싫어서 다시 금으로 바꾸며, 오히려 금도 무거운 것이 싫어서 다시 아주 큰 값나가는 보주(寶珠)로 바꾸어서 이 보주를 가지고 마음대로 가게 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그러하여 먼저 널리 위아래의 모든 진리를 관찰하고 그 뒤에 점차로 그것을 줄이면서 나아가 오직 한 찰나만의 마음으로써 욕계의 괴로움을 관하고 그 다음에 세제일법을 내며 그 다음에 고법지인을 내고 차츰차츰 나아가 도류지까지 내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고제의 인(忍)을 반연한 뒤에 정성이생에 든다고 하면 네 가지 마음[四心]이 동일한 소연이면서 동일한 행상이 있는 것이다. 증상인과 세제일법과 고법지인과 고법지와 상응하는 것이다.
두 가지 마음[二心]이 동일한 행상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소연은 고류지인과 고류지와 상응하는 것이요, 두 가지 마음이 동일한 소연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행상은 집법지인과 집법지와 상응하는 것이며, 그 밖의 마음은 동일하지 않은 소연이면서 동일하지 않은 행상이다.
[문] 세제일법에도 인과 같은 삼품(三品)이 있는가?
[답] 한 상속(相續) 가운데에는 없지만 여러 상속 가운데에는 있다. 부처님의 종성(種性)은 상품(上品)이요, 독각의 종성은 중품(中品)이며, 성문의 종성은 하품(下品)이다. 6종성에 의한 3근(根)의 학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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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6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⑤
[論] 어떤 것이 정(頂)인가?
[答] 불(佛)․법(法)․승(僧)에 대하여 조그마한 양[小量]의 믿음[信]을 내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정이라 하는가?
[답] 산꼭대기와 같기 때문이니, 산꼭대기에는 사람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으면 이 산을 지나서 다시 다른 산으로 가게 되고, 만일 어려움이 있으면 도로 물러나 내려오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이 정위(頂位)에 이르면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만일 모든 어려움이 없으면 나아가 인(忍)에 이르고, 만일 많은 어려움이 있으면 도로 물러나 난(煖)에 머무르게 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마땅히 하위[下]라고 말해야 한다. 정위는 최하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인 난법(煖法)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정은 중위[中]라 해야 한다. 아래의 난위와 위의 인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묘음(妙音) 존자는 “순결택분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계계(欲界繫)요, 둘째는 색계계(色界繫)이다. 욕계계 가운데 아래의 위를 난위라 하고 위의 위를 정위라 하며, 색계계 가운데서는 아래의 위를 인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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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위의 위를 세제일법이라 한다. 이것은 욕계의 순결택분 가운데서 뛰어나기 때문에 정위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선정의 자리[定地]와 닦음의 자리[修地]로써 성자의 행상(行相)을 행하는 색계의 법이기 때문이다.
“순결택분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러날 수 있는 것[可退]과 물러날 수 없는 것[不可退]이다. 물러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아래의 위를 난위라 하고 위의 위를 정위라 하며, 물러날 수 없는 것 가운데서 아래의 위를 인위라 하고 위의 위를 세제일법이라 한다. 이것은 물러날 수 있는 순결택분 가운데서 뛰어나기 때문에 정위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믿음을 조그마한 양이라 하는가?
[답] 묘음 존자는 “욕계는 작다[小]고 하니, 질이 낮고 못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계에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양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이 믿음은 다른 양[異量]이라 해야 한다. 양(量)이란 결정(決定)․신순(信順)․인가(認可)이므로 양이라 한다. 난위는 첫 번째요, 정위는 두 번째이니, 이것은 앞의 것과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양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믿음은 적은 양[少量]이라고 해야 한다. 정위 가운데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슬이 나뭇가지에 달려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이 정위는 다만 조그마한 양의 믿음이라 해야 한다. 물러날 수 있는 지위[可退位]에 있으면서 보(寶)를 관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불․승에 대하여 조그마한 양의 믿음을 낸다 함은 도제(道諦)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하며, 법에 대하여 조그마한 양의 믿음을 낸다 함은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 정의 선근은 갖춰진 16행상으로써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반연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멸제․도제를 반연하는 것만을 말하고 고제․집제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가?
[답] 뛰어난[勝] 것에 의하여 말하기 때문이니, 네 가지의 진리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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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제․도제는 뛰어난 것으로 생사(生死)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 멸제․도제 두 가지 진리는 청정하고 때[垢]가 없으며 허물을 여의었고 미묘하여 믿을 만한 일이고 믿음을 낼만한 곳이고 귀의할 만한 것이므로 이것만을 말한다.
또 멸제․도제 두 가지 진리는 믿을 만할 뿐 아니라 또한 이것은 구해야 되며 증득하기 어려워 지극히 기뻐해야 하기 때문이고 고제․집제는 그렇지가 않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교화를 받는 이가 믿고 좋아함을 내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고제․집제 두 가지 진리를 말씀하시면 ‘나는 끝없는 때로부터 이 비열한 번뇌의 악행과 얻게 되는 과보 때문에 요란과 핍박을 받는데 어찌 믿고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하며, 만일 멸제․도제를 말하면 깊이 믿고 좋아하면서 버리고 여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멸제․도제만을 말한다.
어떤 이는 “불타와 승가에 대하여 조그마한 믿음을 낸다고 함은 도제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하며, 법에 대하여 조그마한 양의 믿음을 낸다 함은 세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반연하는 것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멸제․도제를 반연한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것은 믿을 만한 일이요, 이것은 믿음을 내는 곳이며, 이것은 귀의 할 곳이므로 마땅히 믿고 좋아해야 하기 때문이고, 고제․집제를 반연하는 데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번뇌의 악행과 얻게 되는 과보는 똥 찌꺼기와 같아서 깊이 싫어하고 근심할 만하므로 그 안에서는 믿음과 좋아함을 내지 않아야 한다.
[답]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으며 옳게 여기는 것[信可]이요, 둘째는 믿으며 좋아하는 것[信樂]이다. 멸제․도제에서는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고 고제․집제에 있어서는 믿으며 좋아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믿으며 옳게 여기는 것은 있기 때문에 고제․집제를 반연하는 것도 믿음을 내는 것이다.
사람이 땅을 파면서 물의 보배[水寶]를 구할 때에 두 가지 믿음을 다 갖추는 것과 같다. 첫째는 믿으며 옳게 여기는 것이니, 땅 속에는 물의 보배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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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믿으며 좋아하는 것이니, 물은 기뻐하고 좋아할 만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협 존자(脇尊者)는 “고제․집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멸제․도제를 칭찬하는 것이다. 이 멸제․도제는 고요하고 미묘하여 하열하고 비루한 고제․집제를 그쳐 쉬게 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비바람에 핍박받고 시달리기 때문에 집[舍宅]을 칭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네 가지의 진리에 대하여 모두가 믿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도제는 또한 두 가지의 믿음을 모두 갖추지 않는다. 수신행(隨信行)인 사람은 수법행(隨法行)의 도(道)에 대하여 두 가지의 믿음을 갖추는 것이니 그것을 믿으며 옳게 여기고 그것을 믿으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법행인 이는 수신행의 도에 대하여 한 가지의 믿음만이 있는 것이니 비록 그것을 믿으며 옳게는 여긴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으며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승해(信勝解)인 사람은 견지(見至)의 도에 대하여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었으나 견지인 사람은 신승해의 도에 대하여 한 가지의 믿음만을 갖추었을 뿐이다.
시해탈(時解脫)인 이는 불시해탈(不時解脫)의 도에 대하여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었으나 불시해탈인 사람은 시해탈의 도에 대하여 한 가지의 믿음만을 갖추었을 뿐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도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었으나 이승[二乘]의 도에 대하여는 한 가지의 믿음만을 갖추었을 뿐이다.
독각은 두 가지 도[二道]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었으나 성문의 도[聲聞道]에 대하여는 한 가지의 믿음만을 갖추었을 뿐이며, 성문은 세 가지의 도[三道]에 대하여 모두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춘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존자는 앞의 뜻을 성립시키려고 다시 계경을 인용하셨으니, 세존께서 바라연나마납바(婆羅衍拏摩納婆)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불․법․승에 대하여
조그마한 믿음을 내고 일으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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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儒童)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는 이미 정법(頂法)을 얻었다 한다.
[문] 이 정의 선근은 16행상으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하거늘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마납바를 위하여 삼보(三寶)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그는 삼보에 대하여 어리석고 미혹하여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삼보는 희유(希有)하여 만나기 어려우므로 믿고 이해하게 하려고 그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저 마납바는 괴로움에 핍박 받고 있으면서 벗어남[出要]을 구하려고 부처님의 처소에 와서 이런 게송을 아뢰었다.
괴로움에 핍박 받는 모든 중생
벗어남을 몰라 부처님께 왔사오니
많은 환난 없애는 길 말씀해주소서
더위에 시달리다 서늘한 못에 든 것처럼.
고통에서 벗어나는 요점은 삼보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삼보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부처님 법 가운데서 깊은 믿음과 존중함을 내게 하려고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불․법․승에 대하여 조그마한 믿음이라도 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씀하시면 교화 받는 유정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번뇌의 악행과 뒤바뀐 견해의 갈래와 얻게 되는 과보인 고제와 집제를 믿고 중히 여길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이냐’라고 생각할 것이나 만일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불․법․승 보를 말씀하시면 그는 좋아 뛰놀면서 깊이 믿고 중히 여길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에 따라 따로따로 관하기[別觀]를 좋아하기 때문이니, 수행하는 이가 난위(煖位) 가운데서는 5온(蘊)을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하고, 정위(頂位) 가운데서는 삼보(三寶)를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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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인위(忍位) 가운데서는 4제(諦)를 따로따로 관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정위에서 삼보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존께서 아난타에게 ‘나는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정(頂)과 정타(頂墮)를 말하리라. 이를테면 성스러운 제자들이 5취온(取蘊)으로 일으키고 짓는 유위의 연생법(緣生法) 가운데서 이것은 무상하다, 괴롭다, 공하다, 나 없다라고 헤아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가 곧 이와 같이 헤아리고 관찰할 때에 인(忍)이 있고 견(見)이 있으며 욕락(欲樂)이 있고 행해(行解)가 있으며 견심려인(見審慮忍)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정이라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바라연나를 위하여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고, 모든 새로 배우는 비구들을 위하여 지혜[慧]를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는가?
[답] 부처님은 법상(法相)을 잘 아시고 근기(根器)를 잘 아셔서 마땅히 말씀하실 것이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나머지[信․慧]는 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묻지 않아야 한다.
또 바라연나는 처음 업을 닦는 자리[初業地]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아직 할 일을 익숙하게 익히지 못했고 아직 사마타(奢摩他)를 얻지 못했으며 아직 성자의 가르침에 들지 못했고 아직 점차(漸次)도 닦지 못했다.1) 모든 할 일이 있는 것은 다른 인연을 빌었고 다른 천신(天神)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고서야 부처님에 대하여 믿음을 내며 부처님께로 온 것이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정의 등류(等流)에 의하여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으므로 새로 배우는 비구들은 그와는 서로 틀리다. 이 때문에 그를 위하여 정의 자성(自性)을 설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없는[闕] 것에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니, 바라연나는 지혜는 있으나 믿음은 없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했지만 새로 배우는 비구는 믿음은 있으나 지혜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
1) 점차(漸次)를 닦지 못했다 함은 5정심(停心)과 총별념주(總別念住) 등의 수행의 차례를 겪지 않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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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지혜를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다.
또 첨곡(諂曲)과 우치(愚痴)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니, 바라연나는 바라문의 종족이어서 지혜는 있지만 청정한 믿음은 없었다. 믿음이 없는 지혜는 첨곡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므로 그 첨곡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다. 새로 배우는 비구는 석가의 종족이어서 깨끗한 믿음은 있었으나 지혜는 없었다. 지혜 없는 믿음은 어리석음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므로 그 어리석음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지혜를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다.
또 세존의 교화를 받는 사람 가운데에는 근기가 영리한 이[利根者]도 있고 근기가 무딘 이[鈍根者]도 있었다. 근기가 영리한 이를 위하여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고, 근기가 무딘 이를 위하여 지혜를 말씀하시면서 정이라 하셨다.
영리한 근기와 무딘 근기에서처럼 인의 힘[因力]과 연의 힘[緣力], 내분의 힘[內分力]과 외분의 힘[外分力], 안에서 이치대로 뜻을 짓는 힘[內如理作意力]과 밖에서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들은 힘[外從他聞法力], 어리석음이 없으면서 더하는 상속의 힘[無癡增相續力]과 탐욕이 없으면서 더하는 상속의 힘[無貪增相續力]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論] 어떤 것이 정타(頂墮)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정타만을 말하고 난타(煖墮)는 말하지 않는가?
[답]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나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뛰어난 것에서 떨어진다고[墮] 말하는 것은 이미 열(劣)을 나타냈기 때문이니, 정의 선근은 뛰어난데도 오히려 물러나거늘 하물며 난의 선근은 하열한데도 물러남이 없겠는가?
어떤 이는 “존자가 난의 물러나는 인연을 말하지 않은 것을 힐문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계경에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니, 계경 가운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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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타만을 말씀하시면서 난타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존자는 경에 의거하여 이 논을 지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정으로부터 물러 날 때에는 큰 근심과 괴로움[大憂惱]이 생기지만 난에서 물러날 때에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보물이 묻힌 곳[伏藏]을 발견하여 그 속에 진기한 보물이 가득 찬 것을 본 뒤에는 기뻐하면서 ‘나는 이제 영원히 빈궁의 근본을 끊었구나’라 생각하고 마침 가지려고 할 때 홀연히 도로 사라져버리면 그 사람은 그때에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정위 중에 머무르면서 스스로 ‘오래지 않아서 인위에 들면 영원히 악취(惡趣)를 버리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크게 기뻐하다가 뒤에 이 정에서 물러나 도로 난위에 머무르게
되면 그때에는 크게 근심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니, 뛰어난 이익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령 난위로부터 나아가 정을 얻을 때에는 그는 아직도 악취를 영원히 버리기 전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물러나도 크게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정위에 머무를 때에는 모든 장애가 많으나 난위에 머무를 때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세 때[三時] 동안에 모든 업의 번뇌가 수행하는 이에게 지극히 장애가 된다. 첫째는 정으로부터 인으로 들어갈 때에는 악취를 받게 할 모든 업의 번뇌가 지극히 장애가 된다. 그 뜻을 말하자면 수행하는 이가 만일 인위에 들어가면 결정코 다시는 모든 악취의 생(生)을 받지 아니할 터인데 ‘나는 누구의 몸에서 이숙과(異熟果)를 받는단 말이냐’라고 말한다.
둘째는 성자가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는 욕계를 받게 할 모든 업의 번뇌가 지극히 장애가 된다. 그 뜻을 말하자면 수행하는 이가 만일 욕염을 여의면 욕계의 생을 결코 다시는 받지 아니할 터인데 ‘나는 누구의 몸에서 이숙과를 받는단 말이냐’고 말한다.
셋째는 아라한의 과를 얻을 때에는 후유(後有)를 받을 모든 업의 번뇌가 지극히 장애가 된다. 그 뜻을 말하자면 수행하는 이가 만일 아라한이 되면 결정코 다시는 온갖 생사를 받지 아니할 터인데 ‘나는 누구의 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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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과를 받는다는 말이냐’고 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정위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은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의 사이이기 때문이다. 난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난타를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정위에 머무를 때에 장차 큰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은 성자가 떨어지지 않는 법[不墮法]을 얻고 인위를 얻은 것과 같다. 이생도 그와 같으니, 실로나이십구지(室路拏二十俱胝)가 91겁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다가 정으로부터 물러날 때에 이런 큰 이익을 잃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정타는 말하거니와 난에서 물러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정타인가?
[答] 어느 한 무리가 착한 사람[善士]을 친근히 하고 바른 법[正法]을 들으며 이치대로 사유하고 부처님과 보리[菩提]와 법을 믿으면서 이것을 잘 말하고 미묘한 행을 더욱 닦으며 물질[色]은 무상하고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도 무상하다 하면서 고제(苦諦)를 잘 시설(施設)하고 집제․멸제․도제[集滅道諦]를 잘 시설하다가, 그는 다른 때에 착한 사람을 친근히 하지 않고 바른 법도 듣지 않으며 이치대로 사유하지 않아 이미 얻은 세
속의 믿음으로부터 물러나고 파괴하고 옮아가고 잃게 되기 때문에 정타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정의 자성(自性)을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정은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버리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한다.
착한 사람을 친근히 한다 함은 착한 벗[善友]을 친근히 한다는 말이요, 바른 법을 듣는다 함은 귀를 기울여 이치대로 이끄는 것을 듣고서 유전(流轉)을 꾸짖고 환멸(還滅)을 찬탄하며 유가(瑜伽)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치대로 사유한다[如理作意] 함은 스스로가 속으로 바르게 이해한다는 말이요, 부처님과 보리와 법을 믿으면서 이것을 잘 말하고 미묘한 행을 더욱
닦는다 함은 삼보를 믿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며,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은 무상하다 함은 5온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요, 고제를 잘 시설하고 집제․멸제․도제를 잘 시설한다 함은 네 가지의 진리를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과 보리를 믿고 나아가 도제를 잘 시설하는 것을 믿는다 함은 모두가 다 같이 법대로 따르고 법대로 행하는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것과 앞의 세 가지는 네 가지의 예류지[四預流支]를 드러내 보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을 얻는다[得頂]고 한다.
[문] 부처님은 어떠한 교화하실 유정을 위하여 정위 가운데서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또 어떠한 이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시며, 또 어떠한 이를 위하여 4제를 드러내 보이셨는가?
[답] 삼보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5온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시며, 4제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 4제를 나타내 보이셨다.
또 처음 업을 닦는 이를 위하여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이미 익숙하게 익힌 이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시며, 이미 뛰어나게 사유하는 이를 위하여 4제를 드러내 보이셨다.
또 근기가 무딘 이를 위하여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근기가 중간인 이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시며, 근기가 영리한 이를 위하여 4제를 드러내 보이셨다.
의심이 있는 수행자를 위하여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아만(我慢)이 있는 수행자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시며, 모든 사견(邪見)으로 각혜(覺慧)를 손상하는 이를 위하여 4제를 드러내 보이셨다.
어떤 이는 “자세한 것[廣]을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 삼보를 드러내 보이시고, 간략한 것[略]을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 4제를 드러내 보이시며, 자세한 것과 간략한 것을 다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 5온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말한다.
이것을 세 종류로 차별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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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정이 얻어진 것을 말하였다. 어떤 것이 정을 버리는 것인가?
그가 다른 때라 함은 그가 산란(散亂)할 때를 말하고, 착한 사람을 친근히 하지 않는다 함은 나쁜 벗을 친근히 한다는 말이며, 바로 법을 듣지 않는다 함은 뜻을 지어 이치에 맞지 않게 이끌어 주는 말을 듣고서 유전을 찬탄하고 환멸을 헐뜯으며 유가의 법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이치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함은 스스로가 속으로 삿되게 이해한다는 말이요, 이미 얻은 세속의 믿음에서 물러나고 파괴하고 옮아가고 잃게 된다 함은 이미 얻은 정위 가운데서 정의 등류인 세속의 믿음에서 물러나고 파괴하고 옮아가고 잃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존자는 정타의 뜻이 성립되게 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論] 부처님께서 바라연나마납바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사람이 이와 같은
세 가지 법[三法]에서 물러나면
나는 그런 무리들을 말하여
정타라 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문] 어떤 것을 정타의 자성(自性)이라 하는가?
[답] 정타의 자성은 성취하지 않은 것이어서 무부무기(無覆無記)와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心不相應] 행온(行蘊)에 속한다.
어떤 이는 “믿는 때에 득정(得頂)이라 하고 믿지 않을 때를 정타라 한다. 그와 같다면 믿지 않음으로 정타의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번뇌와 전(纏)은 정(頂)으로 하여금 떨어지게[墮] 한다. 이와 같다면 모든 염오(染汚)의 법을 말하여 정타의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법이 물러남[退]을 따를 때 그 법을 정타라 한다. 이와 같다면 온갖 법을 말하여 정타의 자성을 삼는다. 정에서 물러날 때에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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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정에서 물러나게 하는 증상연(增上緣)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비유자(譬喩者)는 “이것은 다만 가설(假說)이어서 실제로는 자성이 없다. 이를테면 상속하는 동안에 먼저 정을 성취하였으나 지금은 물러나 잃게 된 것을 정타라 하거늘 어떻게 정타의 자성을 구하며 찾겠는가?
어떤 사람이 재물이 있으면 부자라 하고 만일 도둑에게 빼앗겨버리면 가난한 사람이라 하는 것처럼, 다른 이가 ‘그대의 가난은 무엇으로 성품을 삼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나는 옛날 값진 재물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은 빼앗겨버려서 가난한 이라고 할 뿐인데 무슨 성품이 있다 하겠는가’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먼저는 옷을 입고 있다가 그 뒤에 도둑에게 빼앗겨버리고는 벌거숭이로 있는데 다른 이가 ‘그대는 지금 벌거숭이니 무엇으로 성품을 삼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나는 먼저 옷을 입고 있었으나 도둑이 빼앗아 가서 지금은 벌거숭이로 머물러 있을 뿐인데 무슨 성품이 있다 하겠는가’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의 옷이 해어졌을 때에 다른 이가 ‘그대의 옷은 해어졌는데 무엇으로 성품을 삼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나의 옷은 본래는 완전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해어졌으므로 옷이 해졌다고 할 뿐인데 무슨 성품이 있다 하겠는가’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먼저는 정을 성취하였으나 지금 물러나 잃게 된 것을 정타라 하므로 따로 자성이 없다”라고 말한다.
[評] 처음의 설명[說]이 옳다고 하겠으며 여기에 곧 속한다. 다시 그 밖의 이와 같은 종류의 법은 상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 가운데에 있으니, 상응하지 않는 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난(煖)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난이라 하는가?
[답] 지혜가 경계에 대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뛰어난 지혜[勝智]가 있고 따뜻한 것[煖]이 생기면서 모든 번뇌의 땔나무를 태우기 때문에 난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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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무를 뚫어 불을 낼[鑽火] 때에 위아래를 서로 비비면 불이 일어날 수 있고 따뜻한 기운이 생기어서 땔나무 등을 태우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모든 존재[有]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타(墮)가 있고 지혜[智]가 있어 난(煖)이 생기고 모든 존재가 모두 다 시들어빠지게 되기 때문에 난이라 한다. 마치 여름철에 꽃이 모여 노적가리가 되었을 때에 꽃에 따뜻한 기운이 생기면 저절로 시들어빠지는 것과 같다. 또 여름철에 똥 더미가 쌓여 있을 때에 그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생기면 도리어 저절로 썩어 문드러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온(蘊)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타(墮)와 온지(蘊智)가 있어서 따뜻한 기운이 생기어 온의 숲[蘊林]을 태우면서 그것을 영원히 소멸되게 하기 때문에 난이라 한다. 마치 대와 갈대 등을 서로 비비어 따뜻한 기운이 생기면서 그 숲을 태우며 재와 불탄 끄트머리만 남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묘음(妙音) 존자는 “해탈을 구함에 의하여 선근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성자의 도[聖道]의 해[日]보다 앞서가는[前行] 앞의 모양[前相]이다. 그러므로 난이라 한다. 마치 해가 돋으려 할 때에는 밝아지는 조짐[明相]이 먼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 해탈을 구함에 의하여 선근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은 성자의 도의 불[火]보다 앞서 가는 앞의 상이기 때문에 난이라 한다. 마치 불이 타려 할 때에 연기가 먼저 일어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어떤 것이 난인가?
[答] 바른 법[正法]과 비나야(毘那耶) 가운데 조그마한 믿음과 사랑[信愛]이 있는 것이다.
곧 믿음을 사랑이라 하기 때문에 믿음과 사랑이라 한다.
바른 법 가운데에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함은 도제(道諦)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하며, 비나야 가운데에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함은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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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난의 선근은 16행상(行相)을 갖춤으로써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반연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만 반연한다고 말하고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말하지 않는가?
[답] 뛰어난 것[勝]에 의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진리 가운데에 멸제와 도제는 뛰어난 것으로 생사를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정(頂)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바른 법 가운데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함은 세 가지의 진리[三諦]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하고, 비나야 가운데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함은 멸제를 반연하는 믿음을 말한다. 난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갖추어 반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멸제와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것은 믿을 만한 일이요, 이것은 믿음을 내는 곳이며, 이것은 귀의할 데여서 마땅히 믿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나 고제와 집제를 반연한다는 것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번뇌의 악행과 얻게 되는 과보는 똥 찌꺼기를 몹시 싫어하는 것과 같으니, 그 안에서는 믿음과 사랑을 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답]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믿으며 옳게 여기는 것[信可]이요, 둘째는 믿으며 사랑하는 것[信愛]이다. 멸제와 도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믿음을 다 갖추며, 고제와 집제에 있어서는 믿으며 사랑하는 것은 없어도 믿으며 옳게 여기는 것은 있기 때문에 고제와 집제를 반연하는 데에도 역시 믿음을 내는 것이다. 그 밖의 자세한 설명은 정(頂)에서와 같다.
[문] 모든 바른 법과 비나야 가운데서 조그마한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함은 그 모두가 난위를 얻는 것인가?
[답]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난위는 색계의 정지(定地)요 수지(修地)2)이어서 16행상에 속한 선근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사랑이 있다고 말하되 그 밖의 다른 믿음과 사랑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2) 수행지(修行地)․견지(見地)․수지(修地)․무학지(無學地)의 4지(地) 중에 하나이며 7처선(處善)에서 말하면 색미(色味)․색환(色患)․색출(色出)을 관하는 자리[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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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존자는 경을 인용하여 증거를 삼았다.
[論] 세존께서 마사(馬師)와 정숙(井宿)의 두 비구3)에게 “이 두 어리석은 사람이 나의 바른 법과 비나야를 여읜 것은 비유하자면 대지(大地)가 허공과 멀리 떨어져 먼 것과 같다. 이 두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바른 법과 비나야 가운데 조그마한 난(煖)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경의 문구는 이미 없어졌다 해도 논을 지은 이는 원지(願智)의 힘으로써 그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문] 이 난위의 선근은 뛰어나고 미묘하며 고요한 자리[寂靜地]에 머무르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少分]’이라 하셨는가?
[답] 이것은 그 밖의 순결택분보다 가장 미미하고 작기 때문에 ‘조그마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이는 “이것은 바른 법과 비나야 가운데서 관하는 일이 같지 않으며 미소(徵小)한 선근의 뒤끝에서 생기기 때문에 ‘조그마한’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모두가 아직 난위의 선근을 얻지 못한 이면 다 이 둘과 같이 꾸지람과 내쫓음을 당하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교화하시는 데 통틀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바람[意樂]이 있는 이요, 둘째는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바람을 쉰 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바람이 없는 이이다.
이 두 비구는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전혀 바람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꾸짖고 내쫓은 것이다. 모두가 이와 같은 이들이면 역시 꾸지람과 내쫓김을 당할 것이나 그 밖의 아직 난위의 선근을 얻지 못한 이라 하여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3) 마사(馬師)와 정숙(井宿)은 육군비구(六群比丘) 중의 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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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두 비구는 어버이의 사랑을 버리고 떠나서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했다. 그런데도 바른 법과 비나야 가운데서 전혀 믿음과 사랑으로 섭수(攝受)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꾸짖고 내쫓은 것이요, 그 밖의 아직 난위의 선근을 얻지 못한 이라 하여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곧 경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먼저 마사와 정숙 두 비구에게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4구(句)의 법을 말하리니 너희는 알고 싶으냐? 너희들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
로 하라’고 말씀 하시자 두 비구는 ‘저희가 이제 높으신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 가운데서 어느 것이 4구의 법인가?
[답] 어떤 이는 “4성제(聖諦)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념주(念住)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뒤바뀜[顚倒]을 말미암아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정단(正斷)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신족(神足)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뛰어난 덕이 없어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성종(聖種)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익[利養]을 탐하면서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사문과(沙門果)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로 아직 사문의 과위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얻었다’라고 말하면서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무량(無量)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탐냄[貪]과 성냄(瞋)과 질투(嫉妬)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정려(靜慮)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욕계의 번뇌가 증상함으로 말미암아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선교(善巧)가 바로 그것이니, 계선교(界善巧)․처선교(處善巧)․연기선교(緣起善巧)․처비처선교(處非處善巧)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과(因果)에 어리석어서 나쁜 행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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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곧 네 가지 종류의 순결택분의 선근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은 난위에서 얻어야 할 믿음과 사랑은 조그마한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곧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의 네 가지 법의 자취[四法迹]가 그것이다. 첫째는 탐냄이 없는 법의 자취[無貪法迹]요, 둘째는 성냄이 없는 법의 자취[無瞋法迹]며, 셋째는 바른 기억의 법의 자취[正念法迹]요, 넷째는 바른 선정법의 자취[正定法迹]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곧 잡아급마(雜阿笈摩)의 4구법이 그것이다. 마치 아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성현의 법 가운데에 착한 말[善言]이 으뜸이요,
두 번째는 언제나 사랑스런 말[愛言]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멀리하며
세 번째는 언제나 진실한 말[實言]은 거짓을 멀리하고
네 번째는 언제나 법다운 말[法言]은 법 아닌 것을 멀리한다.”
어떤 이는 “4성제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의 도리에 어리석어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저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부처님은 그들이 법을 받아 감당할만하지 않음을 깊이 아시면서 어찌하여 법으로써 그들에게 마음대로 하라 하셨는가?
[답] 부처님께서 자신에게는 허물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저들을 교화하신 것이 없으셨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면서 스스로를 헐뜯고 무너뜨린다고 말하지 말라” 하셨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손을 들고 “나는 모든 교화하는 일이면 모두 다했는데도 너희는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삿된 행을 행하면서 자신을 손상하고 파괴한 것이니 나의 허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석씨 종족[釋種]의 믿지 않는 마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니, 만일 법으로써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지 않으면 한량없는 석씨 종족들이 믿지 않는 마음을 내면서 ‘어떻게 의성(義成)4)께서는 자기의 친족에
4) 의성(義成:悉達 Siddnartha)은 부처님의 어릴 적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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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여 마음에 간탐과 질투를 품고 교화하려 하시지 않는가? 저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하게 될까 두려워서인가’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은 법으로써 그들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심을 말미암아 이런 모든 석씨 종족의 믿음 없는 마음을 쉬게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외도의 비방하는 업(業)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법으로써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지 않으면 한량없는 외도들이 비방하면서 ‘어떻게 이름을 대비(大悲)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만일 모든 제자들이 수순하고 공경하면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만일 제자들이 거역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모두 교화하지 않으니 말이다’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은 법으로써 그들이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외도들의 비방이 쉬게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허물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알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부드러운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들은 본래나 지금이나 항상 나쁜 행을 짓고 있구나. 나는 언제나 교화하는데도 도무지 믿고 받지 않으니 말이다. 이제 다시 너희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말하려 하는데도 너희들은 ‘높은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너희들의 허물을 너희 자신이 증명한 것이다’고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뒷날에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그 두 사람이 지금은 비록 나의 바른 법을 받을 수 없다 해도 목숨을 마친 뒤에 용의 세계에 태어나면 스스로 옛날의 대비(大悲)한 이를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바른 법에 대하여 마음대로 하라 하셨는데도 우리가 받지 않다가 이제 악취에 태어나서 모든 고뇌를 받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이로써 곧 뉘우침과 함께 선근을 일으킬 것이고 이런 인연으로서 속히 악취에서 벗어날 줄 알고 계
셨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불법을 보호하며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그 두 사람이 이로부터 목숨을 마친 뒤에는 장차 용의 세계에 태어나서 극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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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받게 되면 ‘나는 어디서 죽어서 여기에 태어났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이 인간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고 다시 ‘옛날에 무슨 업을 지었을까?’고 생각하다가 곧 자신이 일찍이 출가했으나 바른 행을 짓지 못하여 이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살피어 알게 된다.
그 다음에는 ‘부처님이 우리들을 교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악취에 나게 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곧 성을 내고 원망하면서 인간 세계로 와서 솔도파(率堵波)를 깨뜨리고 승가람(僧伽藍)을 무너뜨리며 모든 비구와 비구니 등을 살해하면서 여래의 법을 모조리 없애버리어 남음이 없게 하려고 한다.
마침 그러하려 할 때에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여래의 상(像)이 그들 앞에 서 있으면서 그들에게 ‘마사와 정숙아,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네 구의 법을 말하려 하는데 너희들은 알고자 하느냐? 너희들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하시면 그때에 두 독룡은 곧 스스로 ‘옛날의 부처님도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들이 그때에 받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요 여래의 허물이 아니구나’라고 기억한다. 이 인연을 말미암
아 성냄의 번뇌[瞋種]가 드디어 쉬면서 크게 부끄러워하여[大慚愧]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은 바른 법으로써 그들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그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높은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가?
[답] 그들 둘은 스스로 모든 나쁜 행을 지어서 바른 법의 그릇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천론(生天論)에도 우리는 오히려 그릇이 아니거든 하물며 지극히 미세한 해탈론(解脫論)이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그들 둘은 자주자주 금계(禁戒)를 범하고 나쁜 행과 번뇌와 손상과 파괴를 계속하고 있으므로 불에 탄 벽돌과 기와 등에서 싹이 나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들이 법을 듣고 해탈의 싹을 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고 자신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높으신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들 둘은 스스로가 악취의 정업(定業)을 지으면서 더욱 자라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들 둘은 몸속에 나쁜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니, 그들 스스로가 열 개의 손가락 끝에 열 개의 길로 된 물이 있어 흘러나오려 하는 것을 보고는 ‘우리들은 결코 장차 용궁에 나겠구나. 이와 같은 때에 다시 세존의 바른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 때문에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께서는 그들 둘은 이미 독각 보리(獨覺菩提)의 선근을 심었으므로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독각을 이룰 것이다라는 수기[記]를 하였지만 그들은 ‘우리들은 현재의 세상에서 끝내 정성이생에 들어 과위를 얻고 번뇌가 다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우리가 지금 세존의 법을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존께서는 ‘이 두 어리석은 사람이 나의 바른 법과 비나야를 여읜 것은 비유하자면 대지가 허공에서 떨어져 먼 것과 같다. 이 두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바른 법과 비나야 가운데에 조그마한 난(煖)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모든 제자들이 재물과 음식으로써 그의 스승에게 공급하면서 함께 사는 이라도 오히려 거친 말로써 거역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그들은 여기에 같이 살 수도 없는데 이렇게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문] 여러 가지의 비나야가 있으니, 시(時) 비나야․방(方) 비나야․종성(種性) 비나야․가(家) 비나야․명(明) 비나야․벌죄(罰罪) 비나야․범(犯) 비나야․성(聖) 비나야․탐(貪) 비나야․진(瞋) 비나야․치(癡) 비나야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비나야를 말하는가?
[답]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벌죄 비나야를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범 비나야를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성 비나야를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탐․진․치의 비나야를 말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7문(門)으로 세제일법을 분별하였고 정은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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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二門)으로 분별했고 인과 난에서는 자성만을 말하는 것인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 싶어함에 따라 이 논을 지으면서 혹은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자세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묻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
또 7문으로써 세제일법을 분별하는 것처럼 역시 7문으로써 그 밖의 세 가지도 분별해야 한다. 서방(西方) 존자 같은 이는 17문으로써 네 가지의 순결택분을 통틀어 분별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7문으로써 네 가지를 통틀어 분별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여기에는 또 다른 설명도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세제일법은 미세하여서 보기가 어렵고 깨달아 알기도 어려우며 분명하지도 않고 나타나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7문으로 분별하나 그 밖의 세 가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간략하게 말하는 것이다.
또 세제일법에는 여러 비방이 많기 때문에 7문으로 분별해서 막고 그치게 하는 것이나 그 밖의 세 가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간략하게 분별한다.
또 세제일법은 한 찰나만이어서 그 모양을 분명히 알기 어려우므로 자세히 분별해야 되나 그 밖의 세 가지는 상속(相續)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순결택분은 난․정․인․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다.
[문]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자성(自性)은 무엇인가?
[답] 모두가 5온(蘊)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묘음(妙音) 존자는 “순결택분에는 욕계계가 있고 색계계가 있다. 욕계계 가운데서 하(下)의 것을 난위라 하고 상(上)의 것을 정위라 하는데 이 두 가지의 자성은 오직 4온이 있을 뿐이니, 욕계 안에는 따라 구르는 물질[隨轉色]이 없기 때문이다.
색계계 가운데서 하의 것을 인위라 하고 상의 것을 세제일법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의 자성은 5온을 모두 갖추는 것이니, 색계 안에는 따라 구르는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이 네 가지 선근은 모두 그것이 색계의 선정 자리[定地]․닦는 자리[修地]이어서 성자의 행의 법[聖行法]을 행하기 때문에 네 가지의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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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두 5온을 갖춘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이 네 가지가 모두 색계계라면 어찌하여 네 가지의 차별을 세우는가?
[답] 이 네 가지 선근은 비록 같은 색계계라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可動]이 있고 움직일 수 없는 것[不可動]이 있으며, 장애 되는 것[留難]이 있고 장애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며, 끊을 수 있는 것[可斷]이 있고 끊을 수 없는 것[不可斷]이 있으며, 사려할 수 있는 것[可慮]이 있고 사려할 수 없는 것[不可慮]이 있으며, 물러날 수 있는 것[可退]이 있고 물러날 수 없는 것[不可退]이 있다.
모든 움직일 수 있고 장애 되고 끊을 수 있고 사려할 수 있고 물러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하의 것을 난위라 하고 상의 것을 정위라 하며, 모든 움직일 수 없고 장애 되지 않고 끊을 수 없고 사려할 수 없고 물러날 수 없는 것 가운데서 하의 것을 인위라 하고 상의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는 비록 같은 색계계이어서 5온으로 자성을 삼는다 하더라도 차별이 있다. 자성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물(我物)의 자체(自體)와 상분(相分)의 본성(本性)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앞으로는 그 까닭[所以]을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순결택분이라 하는가?
[답] 결택(決擇)이란 성자의 도[聖道]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그 분(分)에 따르며 그의 분에 따르는 것 가운데서 이 네 가지가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순결택분이라 한다.
또한 이 네 가지를 행제(行諦)라 하기도 하고 또한 수치(修治)라 하기도 하며 또한 선근(善根)이라 하기도 한다.
행제라 함은 무상(無常) 등의 16행상(行相)으로 네 가지 진리를 두루 거치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수치라 함은 성자의 도를 구하기 위하여 몸 그릇[身器]을 닦아 다스리고 더럽거나 나쁜 것을 제거하면서 성자의 도를 끌어 일으키기 때문이니, 농부가 종자의 열매를 구하기 위하여 농토를 가꾸면서 더러운 풀을 제거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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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이라 함은 성자의 도인 열반은 진실한 선(善)이다. 이 네 가지는 저것의 처음 기본[初基本]이 되고 안정하게 발을 딛는 곳[安定處]이기 때문에 근(根)이라 한다.
[문] 이 네 가지 선근에는 몇 품(品)이 있는가?
[답] 통틀어 세 가지 품[三品]이 있으니, 하(下)․중(中)․상(上)이다. 난위는 하품(下品)이요, 정위는 중품(中品)이며, 인과와 세제일법은 상품(上品)이다.
어떤 이는 “난위에는 두 가지의 품이 있으니, 하의 하[下下]와 하의 중[下中]이다. 정위에는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하의 상[下上]과 중의 하[中下]와 중의 중[中中]이다. 인위에도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중의 상[中上]과 상의 하[上下]와 상의 중[上中]이다. 세제일법은 오직 하나의 품일 뿐이니, 상의 상[上上]이다
만일 세 가지의 품으로써 그것을 포섭하면 난위는 하품일 뿐이고, 정위는 하중품(下中品)이며, 인위는 중상품(中上品)이요, 세제일법은 상품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묘음(妙音) 존자는 “난위에는 세 가지의 품이 있고, 정위에는 여섯 가지의 품이 있으며, 인위에는 여덟 가지의 품이 있고, 세제일법은 상상품(上上品)일 뿐이다. 만일 세 가지 품으로써 이것을 포섭하면 난위는 하품일 뿐이요, 정위는 하중품이며, 인위는 세 가지의 품에 다 통하고, 세제일법은 상품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난위에는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하의 하와 하의 중과 하의 상이다. 정위에도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중의 하와 중의 중과 중의 상이다. 인위에는 두 가지의 품이 있으니, 상의 하와 상의 중이다. 세제일법은 한 가지 품일 뿐이니, 상의 상이다. 만일 세 가지 품으로써 이것을 포섭하면 첫 번째의 설(說)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世友) 존자는 “난위에는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하의 하와 하의 중과 하의 상이다. 정위에는 두 가지의 품이 있으니, 중의 하와 중의 중이다. 인위에는 세 가지의 품이 있으니, 중의 상과 상의 하와 상의 중이다. 세제일법은 한 가지의 품일 뿐이니, 상의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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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세 가지의 품으로써 그것을 포섭하면 난위는 하품일 뿐이요, 정위는 중품일 뿐이며, 인위는 중상품이요, 세제일법은 상품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 네 가지의 선근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말한 품(品)이 다르니, 곧 그것이 차별이다. 또 이름[名]에도 차별이 있으니, 이것을 난위라 하고 나아가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또 염주(念住)에서 등무간(等無間)이 되는 것을 난위라 하고, 난위가 등무간이 되는 것을 정위라 하며, 정위가 등무간이 되는 것을 인위라 하고, 인위가 등무간이 되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등무간처럼 무간(無間)․취입(趣入)․가행(加行)도 그러하다.
또 온(蘊)을 따로따로 관[別觀]하기 좋아하는 것을 난위라 하고, 보(寶)를 따로따로 관하기 좋아하는 것을 정위라 하며, 진리[諦]를 따로따로 관하기 좋아하는 것을 인위라 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제일법이 발생하게 된다.
또 난위는 연제(緣諦)의 하우(下愚)를 그치게 하고, 정위는 연제의 중우(中愚)를 그치게 하며, 인위는 연제의 상우(上愚)를 그치게 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제일법이 발생하게 된다.
또 난위는 연제의 추우(麤愚)를 그치게 하고, 정위는 연제의 중우(中愚)를 그치게 하며, 인위는 연제의 세우(細愚)를 그치게 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제일법이 발생하게 된다.
또 난위는 연제의 하명(下明)을 내고, 정위는 연제의 중명(中明)을 내며, 인위는 연제의 상명(上明)을 낸다. 이를 말미암아 세제일법이 발생하게 된다.
또 난위는 연제의 추명(麤明)을 내고, 정위는 연제의 중명(中明)을 내며, 인위는 연제의 세명(細明)을 낸다. 이를 말미암아 세제일법이 발생하게 된다.
명을 내는 것처럼 신(信)을 내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런 것이 차별이다.
순결택분의 선근 가운데서 난위는 역시 얻게[得]도 되고 버리게[捨]도 된다. 얻는다 함은 가행(加行)을 말미암기 때문이며, 버린다 함은 혹은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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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혹은 경계의 지위[界地]를 초월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혹은 중동분(衆同分)을 버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난위를 버린 뒤에는 역시 무간업(無間業)을 짓기도 하고 혹은 선근을 끊기도 하며 혹은 악취에 떨어지기도 한다.
어떤 뛰어난 이익이 있어서 열반을 위하여 결정적인 인(因)을 짓느냐 하면 난위를 얻은 이는 낚시를 삼킨 고기와 같아서 벌써 반드시 열반의 법을 얻기 때문이다.
정위에 있어서도 역시 얻게도 되고 버리게도 된다. 얻는다 함은 가행(加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버린다 함은 혹은 물러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혹은 경계의 지위를 초월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혹은 중동분을 버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정위를 버린 뒤에는 역시 무간업을 짓게도 되고 악취에 떨어지게도 된다.
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냐 하면 끝까지 선근을 끊지 않게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천수(天授)5)는 아직 정위를 얻지 못했어야 한다. 그는 사견(邪見)을 일으켰고 선근을 끊었기 때문이다.
가타(伽陀)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소통하여야 하는가? 다음처럼 말하였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아는 것은
이익을 잃었다[失利] 하는 것이니
백법(白法)이 다 소멸하고 파괴되었다면
정위로부터 떨어진[頂墮] 줄 알아야 한다.
이 게송은 세존께서 천수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천수가 정위에서 물러난 뒤에 선근을 끊었는데 어떻게 이 정위를 버린 뒤에도 반드시 선근을 끊지 않는다 하는가?
답
아직 물러나지 않았을 때에 의하여 정타를 말씀한 것이다. 제바달타
5) 제바달다(提婆達多, Devadatta)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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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婆達多)는 이미 난위를 닦아 얻었고 오래지 않아서 정위를 얻을 터인데 이름과 이익[名利]에 집착한 까닭에 도리어 난위에서도 물러나고 다시 선근을 끊었고 정위를 얻어야 되었는데도 얻지 못한 까닭에 정타라 말한 것이요, 이미 얻었다가 물러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세존은 정(頂)과 같으시다. 부처님에게 악을 지으면 악취에 떨어지기 때문에 정타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부처님 법은 정과 같다. 저가 부처님 법을 파괴하면 스스로 물러나고 떨어지기 때문에 정타라 한다”라고 말한다.
인위에 있어서도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얻는다[得]함은 가행(加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버린다[捨]함은 혹은 경계의 지위를 뛰어넘음[越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혹은 중동분(衆同分)을 버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물러남으로 말미암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냐 하면 끝까지 물러나지 않으면서 무간업을 짓지도 않고 악취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세제일법에 있어서도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얻는다 함은 가행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버린다 함은 경계의 지위를 뛰어넘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물러남으로 말미암기 때문도 아니고 또한 중동분을 버림을 말미암기 때문도 아니다.
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냐 하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드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난위는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함은 역시 앞의 말과 같다. 이 난위를 버린 뒤에는 무간업을 짓기도 하고 악취에도 떨어진다.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냐 하면 열반을 위하여 결정적인 인(因)을 짓고 끝까지 선근을 끊지 않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천수는 아직 난위를 얻지 못한 이어야 하니, 그는 사견을 일으키면서 선근을 끊었기 때문이다. 정위에 있어서도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함은 앞의 설명과 같으며 이 정위를 버린 뒤에는 역시 악취에 떨어진다. 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냐 하면 무간업을 짓지 않는다.
인위 있어서도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떠한 뛰어난 이익이 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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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 하면 끝가지 물러나지 않으면서 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며 나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문] 만일 그렇다면 오파리(鄔波離)와 실리국다(室利鞠多)와 지만(指鬘)과 제어(諦語) 등은 마땅히 아직 인위를 얻지 못했었어야 하리니, 그들은 나[我]가 있다고 집착하면서 부처님께 항거했기 때문이다.
[답] 그들은 논의(論義)를 하려고 가정하여 나가 있다 한 것이요 실은 집착하지 않았다.
세제일법에 있어서도 얻고 버리는 등의 일은 모두가 앞의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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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7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⑥
서방(西方) 존자는 열일곱 가지의 부문으로써 이 네 가지를 분별하니, 저 게송의 말과 같다.
의취(意趣)․의거[依]․인(因)․소연(所緣)․과(果)
등류(等流)․이숙(異熟)․뛰어난 이익[勝利]
행상(行相)․두 가지 연[二緣]․지혜[慧]․세계[界]․선정[定]
심(尋) 등․근(根)․마음[心]과 물러남[退]은 맨 뒤이다.
[문] 난위에는 어떠한 의취(意趣)가 있는가?
[답] 먼저 닦고 쌓은 온갖 선근이니, 보시(布施)1)로부터 7처선(處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탈에 회향하게 되므로 이것이 그 의취이다.
[문] 난위는 무엇에 의거[依]하여 일어나는가?
[답] 그 지위(난위)의 선정에 의거한다.
[문] 난위는 무엇으로써 인(因)을 삼는가?
[답] 전생(前生)의 자기 지위와 같은 종류의 선근이다.
1) 보시(布施)로부터 7처선(處善)까지라 함은 유부(有部)에 의하면 보시의 류[施類]․계율의 류[戒類]․수행의 류[修類]를 위시하여 5정심(停心)과 별상념주(別相念住)와 총상념주(總相念住)와 3의관(義觀)과 7처선(處善) 등에 이르기까지의 유루․무루의 온갖 착한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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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난위는 무엇을 소연(所緣)으로 삼는가?
[답]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다.
[문] 난위는 무엇으로써 과(果)를 삼는가?
[답] 정(頂)위로써 가까운 사용과(士用果)를 삼는다.
[문] 난위는 무엇을 등류(等流)로 삼는가?
[답] 후생(後生)의 자기 지위와 같은 종류의 선근이다.
[문] 난위는 무엇을 이숙(異熟)으로 삼는가?
[답] 색계의 5온(蘊)이다.
[문] 순결택분도 중동분을 끌어당기는가?
[답] 어떤 이는 “끌어당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有)를 싫어하고 등지기 때문이다. 이 선근은 모든 유를 싫어하고 등지는지라 중동분을 원만하게 할 수 있을 뿐이요 끌어당기지는 못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또한 끌어당길 수 있다. 이 선근은 유를 싫어하고 등진다고 해도 성스러운 도의 중동분의 과보를 따라 끌어당긴다. 여기서 불러들이는 중동분의 과보는 더 늘어가고 몹시 성하며 미묘하고 뛰어나서 재앙이나 횡액[災橫]이 없이 승선품(勝善品)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난위에는 어떤 뛰어난 이익[勝利]이 있는가?
[답] 열반을 위한 결정적인 인(因)을 짓는다. 어떤 이는 “난위를 얻으면 결정코 선(善)을 끊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난위에는 몇 가지의 행상(行相)이 있는가?
[답] 열여섯 가지 행상이 있다.
[문] 난위는 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
[답] 이름과 뜻을 다 반연한다.
[문] 난위는 들어서 이룬 것인가[聞所成], 생각하여 이룬 것인가[思所成], 닦아서 이룬 것인가[修所成]?
[답] 오직 닦아서 이루었을 뿐이다.
[문] 난위는 욕계계인가, 색계계인가, 무색계계인가?
[답] 오직 색계계일 뿐이다.
[문] 난위는 선정[定]에 있는가, 선정에 있지 않는가?
[답] 오직 선정에 있을 뿐이다.
[문] 난위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인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인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
[답] 세 가지를 다 갖춘다.
[답] 난위는 낙근(樂根)과 상응하는 것인가, 희근(喜根)과 상응하는 것인가, 사근(捨根)과 상응하는 것인가?
[답] 세 가지 근[三根]과 다 상응한다.
[문] 난위는 한마음[一心]인가, 여러 마음[多心]인가?
답
여러 마음이다.
문
난위는 물러날 수 있는[可退]가, 물러날 수 없는[不可退]가?
답
물러날 수 있다.
정위의 의취는 보시로부터 나아가 난위까지다. 과는 인위로써 가까운 사용과를 삼으며, 뛰어난 이익은 선근을 끊지 않는다. 어떤 이는 “또한 무간업도 짓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난위의 설명과 같다.
인위의 의취는 보시로부터 나아가 정위까지이다. 과라 함은 세제일법을 가까운 사용과로 삼으며, 뛰어난 이익은 물러나지 않으면서 무간업을 짓지도 않고 악취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또한 나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정위의 설명과 같다.
세제일법의 의취는 보시로부터 나아가 인위까지다. 소연은 고제(苦諦)일 뿐이요, 과는 고법지인(苦法智忍)을 가까운 사용과로 삼으며, 뛰어난 이익은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드는 것이요, 행상은 고제의 4행상이며, 한마음과 여러 마음에 대하여는 당연히 한마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인위의 설명과 같다.
처음의 난위에서는 세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면서 법념주(法念住)2)를
2) 이 4선근(善根)의 수행에서 4념주(念住)와 4제(諦), 16행상(行相)에 관하여 현재수(現在修)와 미래수(未來修)와의 관계를 밝히려고 하는 문단이다. 수행에는 현재수(現在修:行修)와 미래수(未來修:得修)의 두 종류가 있다. 현재수는 현재에 있어서의 의식적(意識的) 수행을 말하며, 미래수는 그 현재수가 연이 되어서 지금은 무의식적(無意識的)이지만 장래에는 의식화(意識化)하는 수행력을 가리킨다. 이 논에서의 현재수와 미래수의 뜻은 언제나 이
렇게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구사론(俱舍論)』 「현성품(賢聖品)」 제2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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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念住)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행상을 닦는 것이니, 같은 종류를 함께 닦음이요 같지 않은 종류는 닦지 않는다.
멸제(滅諦)를 반연할 때는 법념주를 현재에 닦고 미래에도 오직 법념주를 닦을 뿐이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행상을 닦는 것이니, 또한 같은 종류를 닦는 것이요 같지 않은 종류는 닦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 온(蘊)의 소멸을 관할 때에 온을 반연하는 도를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자라난 난위에서는 세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면서 4념주의 어느 하나를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다 닦는 것이니, 이것은 같은 종류를 닦음이요 또한 같지 않은 종류도 닦음이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16행상을 닦는다.
멸제를 반연해서 법념주를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16행상을 닦는다.
[문] 무엇 때문에 처음의 난위에서는 같은 종류만 닦고 같지 않은 종류는 닦지 아니하며, 더 자라난 난위에서는 같은 종류와 같지 않은 종류를 닦는가?
[답] 처음 난위에서는 아직 종성(種性)을 얻지 못하였고 처음에 진리를 관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에 같은 종류만을 닦는 것이고, 더 자라난 난위에서는 이미 종성을 얻었고 진리를 관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같은 종류도 수행하면서 같지 않은 종류도 수행한다.
처음의 정위에서는 네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면서 법념주는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 16행상을 닦는 것이다.
더 자라난 정위에서는 세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면서 4념주의 어느 하나를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16행상을 닦는 것이다.
멸제를 반연해서 법념주는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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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16행상을 닦는 것이다.
처음과 더 자라난 인위[忍]는 네 가지의 진리를 반연하면서 법념주를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16행상을 닦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인위의 처음과 더 자람에 모두가 법념주만을 현재에 닦는데 난위와 정위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 인위는 견도(見道)와 가까우며 서로 비슷하다. 견도에서는 법념주만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위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묘음(妙音) 존자는 “처음의 인위와 더 자라난 인위는 처음의 난위와 더 자라난 난위에서의 설명과 같고 색계의 선근에서는 아직 종성을 얻지 못했으며 이미 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이런 학설을 주장하지 않았어야 한다. 이 네 가지의 선근은 모두가 색계에서 닦아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고, 인은 견도에 가까워 마치 견도와 같아서 법념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문] 더 자라난 인위는 언제나 16행상을 닦는 것인가?
[답] 그렇지 않다. 어떤 때에는 16행상을 닦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12행상을 닦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12행상을 닦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8행상을 닦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4행상을 닦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여(如如)하게 점차로 소연의 진리를 줄이며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행상 닦는 것을 줄인다. 이로 말미암아 점점 견도에 가까워져서 견도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세제일법은 법념주는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념주를 닦으며 하나의 행상을 현재에 닦고 미래에는 4행상을 닦는 것이니, 같은 종류만 닦고 같지 않은 종류는 닦지 않는다.
[문] 세제일법은 이미 종성을 얻었고 익숙하게 진리를 관하기를 익혔거늘 무엇 때문에 같은 종류만 닦고 다른 종류[異類]는 닦지 않는가?
[답] 세제일법은 오직 그러한 것의 행상만 닦을 수 있을 뿐이요, 그 밖의 다른 행상이 없다. 사람이 오직 한 벌의 옷만 있다가 빼앗긴 뒤에는 다시 빼앗을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묻지 말아야 한다.
또 세제일법은 견도에 가까이 이웃하여 견도와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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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 세제일법은 견도의 문을 열어 놓고 견도를 인도하여 내나니 마치 견도와 같기 때문이다.
[문] 처음의 난위․정위․인위는 네 가지의 진리를 상속하면서 관하는 것인가, 상속하지 않으면서 관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상속하면서 관한다. 마치 견도 가운데의 15심(心)이 나는 동안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상속하여 현관(現觀)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상속하지 않는다. 욕계의 고성제(苦聖諦)를 관한 뒤에 바로 그치고 머물러 그 다음에 가행을 일으켜 색계와 무색계의 고성제를 관한 뒤에 다시 바로 그치고 머무르는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진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결정되지 않아서 혹은 상속하여 관하기도 하고 혹은 상속하여 관하지 않기도 하니, 그의 가행에 따라 세력이 바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떠한 마음의 작용으로 곧장 난위를 끌어 일으키는가?
[답] 색계의 선정을 닦아서 이루는 행상에 속한 것과 싫증내어 여읨[厭離]이 있고, 간절히 우러름[渴仰]이 있고, 미워하면서 천하게 여김[惡賤]이 있고, 마음에 두고 몹시 그리워 함[思慕]이 있는 작의로 곧장 난위를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난위는 곧장 정위를 끌어 일으키고 정위는 곧장 인위를 끌어 일으키며 인위는 곧장 세제일법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문] 이미 욕염(欲染)을 여읜 이는 그러해야 하지만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이는 어떻게 하는가?
[답] 욕계에도 그와 같은 마음의 작용이 있어 고찰하여 이룬 행상에 속한 것이라 싫증내어 여읨이 있고, 간절히 우러름이 있고, 미워하면서 천하게 여김이 있고, 마음에 두고 몹시 그리워함이 있을 것이니,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이는 이런 마음의 작용으로 곧장 난위를 끌어 일으킨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난위를 닦아서 원만하게 된 뒤에 장차 정위를 일으키려 하다가 드디어 목숨이 마쳐지면 그는 다른 생(生) 가운데서 곧 정위를 일으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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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밝은 스승을 만나 그가 일으켜야 할 분제(分齊)에 따라 설명하면 곧 정위를 일으키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근본부터 일으킬 것이나 속히 일으킬 수 있어서 처음에 닦는 것과 같지 않다.
[문] 만일 다른 생 동안에 곧 정위를 일으키는 이는 어떠한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곧장 일으키는가?
[답] 난위를 일으킬 때의 모든 마음의 작용과 같으며 난위로부터 정위를 일으킬 때의 설명과 같아서 정으로부터 인위를 일으키는 것도 그러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난위는 곧장 정위를 일으키고 정위는 곧장 인위를 일으킨다고 말하는가?
[답] 하나의 몸으로 상속하여 일으킨다는 것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문] 만일 난위에서 물러난 뒤에 도로 난위가 생길 때에는 먼저 얻었던 때의 난위를 얻는 것인가?
[답] 반드시 얻지는 못한다고 말해야 하나 지난 세상에서 일으킨 정도에 따라 물러난 뒤에 돌아와서 그러한 정도를 더욱 새롭게 얻는다. 왜냐하면 극히 얻기 어렵기 때문이요 아직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며 공력을 써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별해탈계(別解脫戒)에서 그만큼의 도에 따라 버린 뒤에 다시 받을 적에는 곧 그만큼의 도로 더욱 새롭게 얻게 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난위에서의 말과 같고 정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근본정려에 의지하여 일으키게 된 난위와 정위도 또한 필연코 물러나지 않음은 의거한 선정이 자재하고 견고하기 때문이고 미지정(未至定)과 정려 중간에 의거하여 일으키게 된 난위와 정위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 물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난위․정위․인위는 하(下)에 의거하여 중(中)을 내고 중에 의거하여 상(上)을 낸다. 중․상 품의 뒤에 하․중을 일으키기도 하는가?
[답] 결정코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진위(勝進位)에 있으면 먼저 얻었던 바를 기뻐하거나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난위를 일으킨 이후에 염(染)을 여의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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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염을 여의기[離染]3)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차라리 정위를 일으킬지언정 제일의 유사(有思)4)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니 하물며 아래 자리[下地]의 정(定)이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만일 그 수행하는 이가 스스로 힘이 있어 정위를 낸다는 것을 아는 이면 정위를 일으키지만, 만일 세력이 없어서 정위를 낼 수 없음을 알면 염을 여의기를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염을 여의게 되면 장차 뛰어난 곳에 나게 되고 아래 세계를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난위․정위 등의 종류와 차별에는 73종에 있다.5) 그 일은 어떤 것이냐 하면 욕계의 염을 갖추고[具] 여읨[離]에 있어서는 열 가지의 구박(具縛)을 하나로 삼고 한 품[一品]의 여읨에서부터 이에 아홉 가지 품을 여읨에 이르기까지 앞의 것을 합쳐 열 가지가 된다.
초정려(初靜慮)의 염에는 하나를 여읨에서부터 아홉 가지를 여읨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가 되며 따로 구박이 없는 것은 욕계6)의 제10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뒤의 자리[後位]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하여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에 이르기까지 하나를 여의고 나
3) 여기서 염(染)을 여읜다 함은 하지(下地)의 염을 여의고 상지(上地)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4) 제일의 유사(有思)라 함은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5) 난(煖)․정(頂)․인(忍) 등의 종류와 차별에는 73종이 있다고 함은 잠시 난법(煖法)의 73종류를 세어 보면 이생(異生)에는 구박(具縛)과 이염(離染)의 두 가지가 있다. 욕계 수혹(修惑)의 일품(一品)도 끊지 못한 이를 구박의 이생이라 하여 여기서 구(具)라 하고 일품을 여읜 이를 일품단(一品斷) 또는 이염이라 하여 여기서는 이(離)라고 한다. 그런데 수혹 81품(品)을 끊는다는 것은 욕계의 5취(趣)를 1지(地)로 보고 그 위의 4선
정지(禪定地)와 4무색정지(無色定地)의 8지(地)를 더하여 9지로 하며 그 9지에서 각각 9품을 끊는다는 것이니, 이것은 일반론(一般論)이지만 이생의 경우는 끝내 유정(有頂)의 염을 여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까지의 8지에는 72종(89․72)의 이염이 있는데 여기에 욕계의 구(具) 하나를 더하기 때문에 73종의 이생의 차별이 있게 된다.
6) 욕계(欲界)의 제10이라 함은 곧 구박(具縛)을 말한다. 욕계 9품(品)의 수혹(修惑) 중 9품을 온전히 끊은 이를 제일로 하고 오직 1품만이 끊은 이를 제9라고 헤아리기 때문에 구박의 유정을 바로 제10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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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아홉 가지를 여의는 것이니, 이 모든 자리에서 일으키게 되는 난위 등에는 일흔세 가지의 종류와 차별이 있다.
[문] 어느 하나를 일으키는 것과 그 밖의 것을 일으킬 때에는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답] 어떤 이는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일흔세 종류의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바탕[體]은 하나라 해도 자리[位]는 다름이 있다. 자리의 차별에 의거하는 까닭에 그러하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각각 다르다”라고 말하니, 구박자(具縛者)가 일으키는 것이 다르고 일품(一品)을 여의는 이가 일으키는 것이 다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무소유처의 제구의 염을 여의는 이가 일으키게 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박이라 함은 구박자가 일으킨 난위 등에서는 얻기도 하고 몸에 있기도 하며 성취하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나 속박을 여읜 이[離縛者]가 일으키는 난위 등에서는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않고 눈앞에 나타나 있지도 않는 것이다.
욕계의 일품의 염을 여읜다 함은 욕계의 일품의 염을 여읜 이가 일으킨 난위 등에서는 얻기도 하고 몸에 있기도 하며 성취하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나 구박자가 일으키는 난위 등에서는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지도 않으며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그 밖의 다른 데서 일으킨 것에서는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않고 눈앞에 나타나 있지도 않은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무소유처에서 제9품의 염을 여의는 이는 자신이 일으키는 난위 등에서는 얻기도 하고 몸에 있기도 하며 성취하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밖의 다른데서 일으키는 난위 등에서는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지 않으며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이다.
근본정려에 의거하여 난위 등을 일으키는 이는 현재의 몸에서 반드시 정성이생에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자의 도를 말미암아 난위 등을 이끌기 때문이거니와 미지정과 정려 중간에 의거하여 난위 등을 일으킨 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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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난위 등을 말미암아 성자의 도를 이끌기 때문이다.
[문] 만일 이 자리[地]에 의거하여 순결택분으로 일으키면 이 자리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드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만일 이 자리에 의거하여 순결택분을 일으키면 이 자리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든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혹은 이 자리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자리에 의거하기도 한다.
혹은 이 자리에 의거한다 함은 성문(聲聞)의 종성이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이 지위에 의거하여 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면서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만일 제4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이 지위에 의거하여 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면서 정성이생에 든다.
혹은 그 밖의 다른 지위에 의거한다 함은 성문의 종성이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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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면 그는 초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문] 순결택분은 중․상 품(品)의 뒤에 하․중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가?
[답] 같은 지위에서는 일으키지 않으나 다른 지위라면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은 성문 종성을 말한다.
[문] 보살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보살이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초정려와 나아가 제3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고 제4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를 일으키면 초정려와 나아가 제3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고 제4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며 정성이생에 든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면 초정려와 나아가 제3 정려에 의거하여 역시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고 제4 정려에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며 정성이생에 든다”라고 말한다
[문] 순결택분은 중․상 품의 뒤에 하․중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지금 그렇게 말하는가?
[답] 같은 지위에서는 일으키지 않아도 다른 자리에서는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이는 “성문은 일으키지 않아도 보살은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와 같은 허물을 여의기 위하여 “보살이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난위를 일으키면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만일 미지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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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하여 정위를 일으키면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인위를 일으키면 나아가 제4 정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곧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보살은 제4 정려에만 의거하여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일으키고 정성이생에 든다. 왜냐하면 보살의 온갖 뛰어난 공덕은 제4 정려에서만 의거하여 끌어 일으키기 때문이니, 부정관(不靜觀)에서 무생지(無生智)까지이다”라고 말한다.
[문] 독각은 어떠한가?
[답] 인각유(麟角喩) 독각7)은 보살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행(部行) 독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마치 성문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문] 보살은 옛날 다른 생(生) 가운데서 순결택분의 선근을 일으킨 적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무엇이 허물인가? 만일 일으킨 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의 모든 뛰어난 선근은 부정관으로부터 무생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얻는다”고 하며, 만일 일으키지 않았다면 보살이 91겁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의 위력인가?
[답] 어떤 이는 “보살이 옛날 다른 생 가운데서 순결택분을 일으킨 적이 있어서 인위의 힘을 말미암아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의 선근은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얻는다”라고 말하는가?
[답] 옛날에 일으킨 것은 다른 종성[他種性]8)으로 자기의 종성[自種性]이
7) 독각(獨覺, pratyeka buddha)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각유(麟角喩) 독각과 부행(部行) 독각이다. 인각유 독각이란 반드시 백 대겁(百大劫) 동안 보리(菩提)의 자량(資糧)을 닦은 이라야 비로소 이루게 되는데 독신으로 동무가 없는 것이 마치 기린의 뿔과 같다 하여 이렇게 이름하며, 부행 독각이란 먼저 성문(聲聞)으로서 앞의 3과(果)를 이루고 제4과(果)를 얻을 때에 독각으로 된 이인데 동일하게 혼자 깨쳤지만 동무들이 있었기 때
문에 부행이라 한다. 다 같이 부처님 없는 세상에 나서 남의 교화를 받지 않은 것은 같다.
8) 성문(聲聞) 또는 독각(獨覺)의 종성을 말하며 자기 종성(自種性)이라 함은 불종성(佛種性)을 말한다.
아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얻는다 함은 자기 종성에서의 설명이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의 선근은 세상을 지내거나 겪지 않고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한 자리에 앉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보살이 91겁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어떤 힘에 의해서인가?
[답] 악취를 막는 것은 반드시 순결택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시이거나 계율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난위[煖]이거나 정위[頂]이거나 간에 악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면 인위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하나 모든 보살은 한 번의 보시를 행할 때에도 계율과 지혜를 포섭하고, 하나의 계율을 행할 때에도 보시와 지혜를 포섭하며, 하나의 지혜를 행할 때에도 보시와 계율을 포섭하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나유타(那庾他)의 악취도 막을 수 있는데 하물며 세 가지의 악취를 막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는 “보살의 모든 뛰어난 선근, 즉 부정관에서 나아가 무생지는 모두가 이 생[此生] 동안에 제4 정려에 의거하여 한 자리에 앉아 끌어 일으키는 것이어서 오히려 이 생에서 그 밖의 다른 지위[餘位]도 아니거늘 하물며 전생에서이겠는가? 인각유 독각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부행 독각의 선근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마치 성문에서 한 말과 같다”라고 말한다.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에는 각각 여섯 가지씩의 종성의 차별이 있으니, 퇴법 종성(退法種性)․사법(思法)․호법(護法)․주법(住法)․감달(堪達)․부동법(不動法) 종성이다.9)
9) 성문(聲聞)의 6종성(種性) 중의 퇴법(退法)이란 조그마한 연(緣)이라도 만나면 곧 얻었던 법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고, 사법(思法)이란 물러나고 상실한 뒤에 안주하지 못하는 지위[不安住位]를 말하며, 호법(護法)이란 얻게 된 법에 기쁨을 느끼면서 스스로가 방호(防護)하는 것을 말하고, 주법(住法)이란 뛰어나게 퇴실(退失)할 인연을 만나지 않는 한 스스로가 방호하여 퇴실하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가행(加行)을 하지 않으므로 역시 증진하지 못하
는 것을 말하며, 감달(堪達)이란 그 성품이 감당해 내어 수행하기를 좋아하고 연근(鍊根)하여 속히 부동성(不動性)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며, 최후의 부동법(不動法)이란 결코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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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에는 퇴법 종성의 난위[煖]를 바꾸어 사법 종성의 난위를 일으키고, 나아가 감달 종성의 난위를 바꾸어 부동법 종성의 난위를 일으키며, 성문 종성의 난위를 바꾸어 독각 혹은 부처님 종성의 난위를 일으키고, 독각 종성의 난위를 바꾸어 부처님 혹은 성문 종성의 난위를 일으키며, 부처님 종성의 난위는 결정코 바꾸어질 수 없다.
난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위를 말하는 것도 그러하다.
성문 종성의 인위[忍]를 바꾸어 독각 종성의 인위를 일으키기는 하되 성문이나 독각종성의 인위를 바꾸어도 부처님 종성의 인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위는 악취를 어기는 것이로되 보살은 원을 세워서 악한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독각 종성의 인위를 바꾸어도 성문 종성의 인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위는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성문 종성의 난위․정위․인위를 바꾸어서 독각 종성의 난위․정위․인위는 일으킬 수 있으나 만일 독각 종성의 난위․정위․인위를 일으키면 그 밖에 이승(二乘)의 난위․정위는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독각의 선근은 처음 부정관에서 무생지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에 앉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각유 독각 종성의 선근은 비록 한 자리에 앉아 얻는다 하더라도 부행 독각의 종성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마치 성문의 말과 같기 때문이다.
세제일법의 여섯 가지 종성과 3승(乘)의 종성은 모두 바꿀 수 없으니, 한 찰나이기 때문이다.
[문] 순결택분은 어느 곳에서 일으키는 것인가?
[답] 욕계에서는 일으킬 수 있으나 색계․무색계에서는 일으키지 못하며, 욕계 중에서도 사람[人]과 하늘[天]은 일으킬 수 있되 3악취에서는 그렇지 못하나니, 뛰어난 선근이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서 3주(洲)에서는 일으킬 수 있으나 북구로주(北俱盧洲)에서는 그렇지 못하며, 하늘 안에서는 비록 일으킬 수 있어도 나중에 일으키는 것이고 처음부터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먼저 인간 세계에서 일으키고 나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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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물러나 욕천(欲天) 안에 태어나면 먼저 익혔던 세력으로 말미암아 계속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하늘 안에서 처음부터 일으키지 못하는가?
[답] 그곳에서는 뛰어나게 싫증내며 여의는[勝厭離] 등 마음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문] 악취 가운데 지나치게 싫증내며 여의는 등의 마음의 작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 선근을 일으키지 못하는가?
[답] 악취 가운데는 지나치게 의지하는 몸[勝依身]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지나치게 싫증내며 여의는 등의 작의가 있고 또한 지나치게 의지하는 몸이 있으면 처음부터 이런 종류의 선근을 일으킬 수 있다.
욕천 중에는 지나치게 의지하는 몸은 있어도 지나치게 싫증내며 여의는 등의 마음 작용이 없으며, 악취 중에는 지나치게 싫증내며 여의는 등의 마음 작용은 있어도 지나치게 의지하는 몸이 없다. 인간 세계에는 두 가지를 다 갖추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으킬 수 있다.
[문]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선근을 일으키지 않는가?
[답] 만일 어떤 곳에서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는 일으킬 수 있으나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이미 정성이생에 들 수 없기 때문에 일으킬 수 없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정성이생에 들 수 없는가?
[답] 밭[田]도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만일 어떤 곳에서 인위[忍]의 지(智)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곳에서는 정성이생에 들지만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지혜는 일으킬 수 있어도 인위는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정성이생에 들 수가 없다.
또 만일 어떤 곳에서 법지(法智)와 유지(類智)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곳에서는 정성이생에 들 수 있으나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유지는 일으킬 수 있으나 법지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정성이생에 들 수가 없다.
또 만일 어떤 곳에서 뛰어나게 의지하는 몸[勝依身]이 있고 괴로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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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受]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정성이생에 들 수 있으나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뛰어나게 의지하는 몸은 있어도 괴로운 느낌이 없기 때문에 정성이생에 들 수가 없다.
[문] 이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은 어떤 몸에 의지하여 일으키는가?
[답] 남자와 여인의 몸에 의지한다.
[문] 여인의 몸에 의지해서 여인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도 얻고 또한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도 얻는가?
[답] 얻는다. 난위를 얻는 것처럼 정위와 인위를 얻는 것도 그러하다.
[문] 남자의 몸에 의지해서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도 얻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도 얻는가?
[답] 얻는다. 난위를 얻는 것처럼 정위와 인위를 얻는 것도 그러하다.
여자의 몸은 여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에 대하여 얻기도 하고 몸에 있기도 하며 성취하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에 대하여는 얻어도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눈앞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난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위․인위를 말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남자의 몸은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에 대하여 얻기도 하고 몸에 있기도 하며 성취하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에 대하여는 얻어도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눈앞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난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위․인위를 말함에도 그러하다.
여인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는 여인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와 함께 인(因)이 되며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도 인이 된다.
난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위․인위를 말함에도 그러하다.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는 남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와 함께 인(因)이 되나 여자의 몸으로 일으킨 난위와는 인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뛰어남은 하열함의 인이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난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위․인위를 말함에도 그러하다.
[문] 남자의 몸에 의지하여 순결택분의 선근을 일으킨 뒤에 다시 여인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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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을 수 있는가?
[답] 다시 받을 수 있다. 오직 앞의 세 가지에서만 있을 뿐이요 세제일법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한 찰나이기 때문이다.
[문] 순결택분의 선근을 일으킨 뒤에 다시 선체(扇搋)․반석가(半釋迦)․무형(無形)․이형(二形)의 몸을 받을 수 있는가?10)
[답] 다시 받을 수 있다. 오직 난위와 정위에서 뿐이요 그 밖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인위를 얻으면 악취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저 선체 등의 몸의 형상은 비루한 것이어서 인간 세계의 악취이나 만일 인위 등의 뛰어난 선근을 얻으면 반드시 그런 무리의 몸을 다시는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문] 인위를 얻은 이생(異生)이 목숨을 마치는 자리[命終位]에서는 이미 중동분(衆同分)을 버리고 또한 인위도 버리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버린 이는 마땅히 나쁜 세계에 떨어져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만일 인위를 얻은 이면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또 만일 버린 이는 무엇 때문에 이생이 목숨을 마칠 때에는 버리고 성자(聖者)는 그렇지 않은가?
또 만일 버리지 않는 이는 무엇 때문에 업온(業蘊)과 대종온(大種蘊)에서 다 같이 설명하지 아니하는가? 마치 “이생이 태장(胎藏) 등에 머무를 때에는 다만 몸만을 성취하며 몸의 업[身業]은 성취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이것은 마땅히 “버린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버리기도 하고 버리지 않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이 가운데에서 낱낱이 자세하게 그의 까닭을 해석한 것은 뒤의 업온(業蘊)의 해생납식(害生納息)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이생이 목숨을 마치면 반드시 인위를 버리니, 선근이 하열하기 때문이다. 이생은 이 자리에 의거하여 이런 유의 선근을 일으켰다가 만일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이 자리에 나는 일이 있어도 동분(同分)을 버리기 때문에
10) 선체(扇搋)는 무근(無根)이라 하여 남녀근(男女根)을 갖추지 못한 이요, 반석가(半釋迦)는 황문(黃門)의 뜻이며, 2형자(形者)는 2근(根)이 있는 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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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결정코 버리게 되거늘 하물며 이 선근은 색계의 법이거늘 욕계의 생(生)을 지내면서 버리지 않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난위를 닦는 가행(加行)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 요점을 들어 말하건대 세 가지 지혜[三慧]로써 행(行)을 삼으니, 문소성혜(聞所成慧)와 사소성혜(思所成慧)와 수소성혜(修所成慧)이다.
[문] 어떻게 문소성혜를 닦아 익히는가?
[답] 관행(觀行)을 닦는 이가 어떤 밝은 스승을 만나 그에게 모든 법요(法要)로서 18계(界)와 12처(處)와 5온(蘊)만이 있다 함을 간략히 말하거나 혹은 스스로가 소달람장(素怛纜藏)과 비나야장(毘奈耶藏)과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독송하여 잘 성숙하게 된 뒤에 ‘삼장(三藏)의 글의 뜻은 심히 넓고도 넓다. 만일 항상 기억하고 지니다가 마음에 싫증이나 고달픔이 나게 되면 삼장에서 말한 요목은 18계와 12처와 5온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
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는 먼저 18계를 관찰한다. 그는 관찰할 때에 삼분(三分)을 세우니, 이름[名]에 관한 일이요, 자상(自相)에 관한 일이며, 공상(共相)에 관한 일이다.
이름이라 함은 “이것을 안계(眼界)라 하고 나아가 이것을 의식계(意識界)라 한다”라고 하는 것이요, 자상이라 함은 “이것은 안계의 자상이요, 이것은 의식계의 자상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공상이라 함은 16행상(行相)으로서 관찰할 18계에는 16종의 공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계(界)를 반연하여 지혜[智]를 닦고 그침[止]을 닦는다.
18계에서 지혜와 그침을 닦은 뒤에는 다시 싫증과 고달픔을 내며 ‘이 18계는 12처이므로 마땅히 그를 줄여서 12처에 들어가야겠다’라고 생각한다.
10색계(色界)는 10색처(色處)요 7심계(心界)는 의처(意處)이며 법계(法界)는 법처(法處)이다. 그는 이 12처를 관찰할 때에 삼분을 세우니, 이름에 관한 일이요, 자상에 관한 일이며, 공상에 관한 일이다.
이름이라 함은 “이것을 안처(眼處)라 하고 나아가 이것을 법처(法處)라 한다”라고 하는 것이요, 자상이라 함은 “이것은 안처의 자상이며 나아가 이것은 법처의 자상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공상이라 함은 16행상으로써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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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12처에는 16종의 공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처(處)를 반연하여 지혜를 닦고 그침을 닦는다.
12처에 있어서 지혜와 그침을 닦은 뒤에 다시 싫증과 고달픔을 내면서 ‘이 12처는 무위(無爲)를 제외하면 5온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줄여서 5온에 들어가야겠다’라고 생각한다.
10색처와 법처에 속한 색은 곧 색온(色蘊)이요, 의처는 곧 식온(識蘊)이며, 법처 중의 느낌[受]은 곧 수온(修蘊)이요, 생각[想]은 곧 상온(想蘊)이며, 그 밖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곧 행온(行蘊)이다. 그는 이 5온을 관찰할 때에 삼분을 세우게 되니, 이름에 관한 일이요, 자상에 관한 일이며, 공상에 관한 일이다.
이름이라 함은 “이것을 색온이라 하며 나아가 이것을 식온이라 한다”고 이르는 것이요, 자상이라 함은 “이것이 색온의 자상이며 나아가 이것이 식온의 자상이다”라고 이르는 것이며, 공상이라 함은 12행상으로써 관찰할 5온에는 12종의 공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온(蘊)을 반연하여 지혜를 닦고 그침을 닦는다.
5온에 있어서 지혜와 그침을 닦은 뒤에는 다시 싫증과 고달픔을 내면서 ‘이 5온과 무위는 곧 4념주(念住)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를 줄여서 4념주에 들어가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색온은 곧 신념주(身念住)요, 수온은 곧 수념주(修念住)며, 식온은 곧 심념주(心念住)요, 상온․행온과 무위는 곧 법념주(法念住)이다. 그는 이 4념주를 관찰할 때에 삼분을 세우게 되니, 이름에 관한 일이요, 자상에 관한 일이며, 공상에 관한 일이다.
이름이라 함은 “이것을 신념주라 하며 나아가 이것을 법념주라 한다”고 이르는 것이요, 자상이라 함은 “이것이 신념주의 자상이요 나아가 이것이 법념주의 자상이다”라고 이르는 것이며, 공상이라 함은 16행상으로써 관찰할 4념주에는 16종의 공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염주를 반연하여 지혜를 닦고 그침을 닦는다.
4념주에 있어서 지혜와 그침을 닦은 뒤에는 다시 싫증과 고달픔을 내면서 ‘이 4념주는 허공(虛空)과 비택멸(非擇滅)을 제외하면 곧 4성제(聖諦)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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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줄여서 4성제에 들어가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유루의 법[有漏法]의 결과분[果分]은 곧 고제(苦諦)요, 원인 분[因分]은 곧 집제(集諦)이며, 택멸(擇滅)은 곧 멸제(滅諦)요, 대치(對治)는 곧 도제(道諦)이다. 그는 이 네 가지의 진리를 관찰할 때에 삼분을 세우게 되니, 이름에 관한 일이요, 자상에 관한 일이며, 공상에 관한 일이다.
이름이라 함은 “이것을 고제라 하며 나아가 이것을 도제라 한다”라고 이르는 것이요, 자상이라 함은 “이것이 고제의 자상이며 나아가 이것이 도제의 자상이다”라고 이르는 것이며, 공상이라 함은 4행상으로써 관찰할 고제에는 4종의 공상이 있는 것이니, 첫째는 고(苦)요, 둘째 비상(非常)이며, 셋째는 공(空)이요, 넷째는 무아[非我]이다. 4행상으로써 관찰할 집제에는 4종의 공상이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요, 둘째는 집(集)이며, 셋째는 생(生)이
요, 넷째는 연(緣)이다. 4행상으로써 관찰할 멸제에는 4종의 공상이 있으니, 첫째는 멸(滅)이요, 둘째 정(靜)이며, 셋째는 묘(妙)요, 넷째는 이(離)이다. 4행상으로써 관찰할 도제에는 4종의 공상이 있으니, 첫째는 도(道)요, 둘째는 여(如)며, 셋째는 행이요, 넷째는 출(出)이다. 그는 이 진리를 반연하여 지혜를 닦고 그침을 닦는다.
4성제에 있어서 지혜와 그침을 닦을 때에 견도(見道) 안에서처럼 점차로 진리를 관한다. 이를테면 먼저 욕계의 괴로움을 따로따로 관하고 그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합하여 관하며, 먼저 욕계의 원인을 따로따로 관하고 그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원인을 합하여 관하며, 먼저 욕계의 사라짐을 따로따로 관하고 그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사라짐을 합하여 관하며, 먼저 욕계의 도를 따로따로 관하고 그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도를 합하여 관한다.
이와 같이 4성제를 관찰할 때에는 마치 명주를 쳐 놓고 모든 색상(色像)을 관하듯이 이와 같이 하면서 문소성혜를 닦아 익혀야 비로소 원만하게 된다.
이것에 의하여 사소성혜를 발생하며 닦아서 원만하게 된 뒤에는 다시 수소성혜를 발생하는 것을 곧 난위라 한다. 난위 다음에 정위를 내고 정위 다음에는 인위를 내며 인위 다음에는 세제일법을 내고 세제일법 다음에는 견도를 내며 견도 다음에는 수도(修道)를 내고 수도 다음에는 무학[無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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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내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서 차례로 선근이 만족하게 된다.
선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순복분(順福分)이요, 둘째는 순해탈분(順解脫分)11)이며, 셋째는 순결택분(順決擇分)이다.
순복분의 선근이란 인간에 나고 하늘에 태어나는 종자를 심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 나는 종자라 함은 이 종자로 인간 안의 높은 종족[高族]과 크게 귀한[大貴]이로 나서 재보가 넉넉하고 권속이 원만하며 얼굴 모습이 단정하면서 몸이 부드러우며 혹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것이다. 천상에 나는 종자라 함은 이 종자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에 태어나서 뛰어나고 묘한 과를 받으며 혹은 제석(帝釋)․마왕(魔王)․범왕(梵王)이 되어서 큰 위세가 있고 일체를 통할하며 거느린 것이 많은 것이다.
순해탈분의 선근이란 결정코 해탈하는 종자를 심는 것이어서 이로 인하여 결정코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을 말하며, 순결택분의 선근이란 난위․정위․인위․세제일법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는 순해탈분의 선근을 자세히 분별하겠다.
[문] 이 선근은 무엇으로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신업(身業)․어업(語業)․의업(意業)으로써 자성을 삼는데, 의업은 더욱 뛰어나다.
[문] 이 선근은 의지(意地)에 있게 되는가, 다섯 가지의 식신[五識身]이 되는가?
[답] 의지에 있으며 다섯 가지의 식신은 아니다.
[문] 이 선근은 가행으로 얻는[加行得] 것인가, 이염으로 얻는[離染得] 것인가, 날 적부터 얻은[生得] 것인가?
[답] 오직 가행으로 얻을 뿐이다. 어떤 이는 “역시 이것은 날 적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앞의 말[說]을 좋다고 하리니, 가행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1) 순해탈분(順解脫分)이란 해탈에 수순하는 선근(善根)을 말한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이를 5정심(停心)․별상념주(別相念住)․총상념주(總相念住)의 세 가지 뜻으로 말하지만, 이 『비바사론』에서는 더 광범위한 수행까지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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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선근은 듣고 이루어지는가, 생각하여 이루어지는가, 닦아서 이루어지는가?
[답] 듣고 생각해서 이루어지고, 닦아서 이루지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또한 닦아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評] 앞의 말을 좋다고 하리니, 오직 욕계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 이 선근은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가?
[답] 욕계에서 일어나며 색계․무색계는 아니다. 욕계 가운데서도 사람 세계[人趣]에서 일어나고 다른 세계[餘趣]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사람의 세계 가운데서도 3주(洲)에서 일어나고 북구로주(北俱盧洲)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문] 이 선근은 어느 때에 심는가?
[답]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이니, 반드시 부처님의 법이 있어야 비로소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비록 부처님의 법이 없다 해도 만일 독각을 만나면 역시 이 선근을 심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문] 이 선근은 어느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가?
[답] 남자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기도 하고 여자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문] 무슨 일로 인하여 이 선근을 심게 되는가?
[답] 혹은 보시를 인하기도 하고, 혹은 계율을 인하기도 하며, 혹은 들음을 인하기도 하지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람[意樂]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덩어리의 음식과 한 개의 깨끗한 이쑤시개를 보시하고서도 해탈의 종자를 잘 심는 이가 있으니, 마치 전달라(戰達羅) 등과 같다. 그는 보시할 적마다 언제나 “나는 이것으로 인하여 반드시 해탈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비록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푼다 해도 해탈의 종자를 심지 못한 이가 있으니, 마치 무포악(無暴惡)12) 등과 같다. 그는 보시하는 것마다 모두 세간의 부귀와 명칭을 구하면서 해탈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아사세(阿闍世)를 말한다.
어떤 이는 하루 낮 하룻밤 동안 팔분재계(八分齋戒)를 받아 지니며 곧 해탈의 종자를 잘 심는 이도 있으나 어떤 이는 중동분을 다하는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아 지니면서도 해탈의 종자를 심지 못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4구(句)의 가타(伽陀)를 독송하여 곧 해탈의 종자를 잘 심는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삼장(三藏)의 뜻을 잘 통하면서도 해탈의 종자를 심지 못하는 이도 있다.
[문] 누가 결정코 이 순해탈분의 선근을 심을 수 있는가?
[답] 만일 증상(增上)의 바람이 있어서 열반을 기꺼이 구하고 생사를 싫어하고 등지는 이면 적은 보시․계율․들음의 선을 일으켜도 곧 결정코 이 선근을 심을 수 있으나, 만일 증상의 바람이 없으면서 열반을 기꺼이 구하고 생사를 싫어하고 등지는 이면 비록 많은 보시․계율․들음의 선을 일으켜도 이 선근을 심지 못한다.
[문] 만일 이 선근을 심은 뒤에 얼마를 지나야 해탈할 수 있는가?
[답] 극히 빠른 이라도 반드시 3생(生)은 지나야 되니, 첫 번째 생 동안은 이 종자를 심고, 두 번째 생 동안은 그로 하여금 성숙되게 하며, 세 번째 생 동안은 곧 해탈하게 된다.
그 밖의 것은 일정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은 순해탈분의 선근을 심은 뒤에 혹은 일 겁 동안을 지나기도 하고 혹은 백 겁 동안을 지나기도 하며 혹은 천 겁 동안을 지나면서 생사에 헤매면서도 순결택분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순결택분의 선근을 일으킨 뒤에도 혹은 일생을 지내고 혹은 백생을 지내며 혹은 천생을 지내면서 생사에 헤매면서도 정성이생에 들지 못하는 이가 있다.
순해탈분에도 여섯 가지가 있으니, 퇴법 종성(退法種性)에서 부동법(不動法) 종성까지다. 퇴법 종성의 순해탈분을 바꾸어 사법(思法) 종성의 순해탈분을 일으키고 나아가 감달(堪達) 종성의 순해탈분을 바꾸어 부동법 종성의 순해탈분을 일으키며, 성문 종성의 순해탈분을 바꾸어 독각과 부처 종성의 순해탈분을 일으키고, 독각 종성의 순해탈분을 바꾸어 성문과 부처 종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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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해탈분을 일으킨다. 만일 부처종성의 순해탈분을 일으킨 뒤면 바꿀 수가 없으니, 극히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문] 난위[煖]의 가행 중에는 생멸관(生滅觀)이 있는데 이 생멸관의 가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모든 유가사(瑜伽師)는 생(生)과 멸(滅)을 관하려 할 때에 먼저 안팎의 흥(興)하고 쇠(衰)하는 모양을 취한 뒤에 머물러 있는 곳으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알맞게 조절하면서 일기(一期) 몸 앞의 생과 뒤의 멸을 관하며 다음에는 분위(分位)를 관하고 다음에는 연(年)․다음에는 시(時)․다음에는 월(月)․다음에는 반월(半月)․다음에는 하루 동안의 낮과 밤․다음에는 모호율다(牟呼栗多)13)․다음에는 납박(臘縛)․다음에는
달찰나(怛刹那)․다음에는 점차로 줄여서 더 나아가 온갖 유위의 법에서 두 찰나[二刹那] 동안 생과 두 찰나 동안의 멸을 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가행이 원만하게 이뤄진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유위의 법에서 한 찰나 동안의 생과 한 찰나 동안의 멸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을 생멸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 이 생멸관에서 생과 멸을 관할 때에 한마음[一心]으로 관하는 것인가, 두 마음[二心]으로 관하는 것인가?
만일 한마음으로 관한다면 하나의 이해[一解]를 짓는 것인가, 두 개의 이해[二解]를 짓는 것인가?
만일 하나의 이해를 짓는다면 마치 생을 관하여 생이라 하는 것처럼 역시 멸도 생이라고 관해야 하니, 생을 관하여 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관[正觀]이라 이름할 수 있으나 멸도 생이라고 관하는 것을 바로 삿된 관[邪觀]이라고 해야 한다. 마치 멸을 관하여 멸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시 생을 관하여 멸이라고 해야 하리니, 멸을 멸이라고 관하는 것을 바른 관이라 이름할 수 있으나 생을 관하여 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삿된 관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
나의 이해에서 바르기도 하고 또한 삿되기도 한가?
13) 1주야(晝夜)에는 30모호율다(牟呼栗多)가 있고 1모호율다에는 30납박(臘縛)이 있으며 1납박에는 60달찰나(怛刹那)가 있고 1달찰나에는 120찰나(刹那)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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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두 개의 이해를 짓는다면 두 개의 바탕[體]이 있어야 되리니, 한마음에 두 개의 바탕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두 마음으로 관한다 하면 하나의 마음은 생을 관하고 하나의 마음은 멸을 관하리니, 마땅히 생멸관이 없어야 되거늘 어떻게 생멸관이라고 이름하겠는가?
[답] 두 찰나 동안에 한마음은 생을 관하고 한마음은 멸을 관하는 것이어서 상속(相續)에 의거하여 생멸관이라 말하는 것이니, 찰나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어떤 이는 “한 마음에서 생과 멸을 함께 관하므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허물이 없는 것이니, 생을 볼 때에 멸이 있다 함을 견주어 아는 것은 생의 법이 있으면 반드시 멸이 있기 때문이며, 만일 멸을 볼 때에 생이 있다 함을 견주어 아는 것은 멸의 법이 있으면 반드시 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어떻게 한마음에서 두 개의 이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두 가지의 헤아림은 그 바탕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앞의 말[說]이 옳다고 하겠다.
[문] 이 생멸관은 승해의 작의[勝解作意]가 되는가, 진실의 작의[眞實作意]14)가 되는가?
[답] 어떤 이는 “진실의 작의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모든 행(行)은 실로 오고 감이 없는데도 오고 감이 있다고 보는 것을 어떻게 진실이라 하겠는가?
[답] 이 관을 아직 성취하지 못하면 오감이 있다고 보지만 성취할 때에는 다만 생하고 멸하는 것만 볼 뿐이요, 오가는 모양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마치 춤추면서 혼자 즐기는 것[舞獨樂]과 같아서 느릿느릿하면 오고 감을 볼 수 있으나 급히 하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횃불을 돌리면시 바퀴 모양을 만들 때의 비유[旋火輪喩]나 옹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들 때에 돌리는 바퀴의 비유[陶家喩]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
14) 승해의 작의[勝解作意]란 가정적(假定的)으로 물(物)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고, 진실의 작의[眞實作意]란 걸맞은 사실대로의 모양[如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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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어떤 이는 “승해의 작의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가타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만일 지견(知見)이 있으면 번뇌를 다할 수 있으나
지견이 없으면 어떻게 다하겠는가.
만일 온(蘊)의 생과 멸을 관하게 되면
이것이 곧 번뇌의 뜻에서 해탈한 것이리.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승해의 작의는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답] 전하는 인[傳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마치 자손의 법[子孫法]과 같다. 이를테면 승의의 작의가 진실의 작의를 이끌어내면 진실의 작의로 인해서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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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8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⑦
[論] 이 20구(句)의 살가야견(薩迦耶見)1)은 몇 가지가 아견(我見)이며 몇 가지가 아소견(我所見)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려는 까닭이다. 모든 경에서 부처님은 “20구의 살가야견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리자(舍利子) 존자는 『지유경(池喩經)』에서 간략하게나마 이 20구의 살가야견을 분별했으나 모두 몇 가지가 아견이고 몇 가지가 아소견이라는 것을 말씀하지 않았다. 그 경은 이 논[此論]의 소의(所依)가 되는 근본이다. 거기서 말씀하시지 아니한 것을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한다.
또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비유자(譬喩者)는 “살가야견에는 진실한 소연(所緣)이 없다”라고 말하고, 그들은 “살가야견에서는 나[我]와 내 것[我所]을 헤아리나 승의(勝義)에서는 나와 내 것이 없다. 마치 사람이 새끼줄을 보면서 ‘이것은 뱀이다’고 여기고 나무 등걸을 보면서 ‘이것은 사람들이다’고 여기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소연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중지시키면서 이 소견에서는 실로 소연이 있다는 것을 드러
1) 범어 Satkāyadṛṣṭi를 음역한 것으로 유신견(有身見) 혹은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5온으로써 가(假)로 화합한 것을 실(實)의 자아(自我)가 있다고 집착하며, 내 몸에 부속한 모든 물건은 일정한 소유주가 없는 것인데, 아(我)의 소유물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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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
[문] 뛰어난 뜻[勝義]에서는 나와 내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 소견에서는 실로 소연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살가야견은 5취온(取蘊)을 반연하면서 나와 내 것이라고 헤아리니, 새끼줄과 나무 등걸을 반연하여 ‘이것은 뱀이다,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행상(行相)이 뒤바뀐 것이나 소연이 없는 것은 아니니, 5취온은 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論] 이 20구의 살가야견은 몇 가지가 아견이고 몇 가지가 아소견인가?
[答] 다섯 가지가 아견이다. ‘물질[色]이 나다.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이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等隨觀]2) 것이다. 열다섯 가지가 아소견이다. ‘나는 물질을 가졌다. 물질은 내 것이다. 나는 물질 가운데에 있다. 나는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가졌다.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은 내 것이다. 나는 느낌․생각․지어감․의식 가운데에 있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等隨觀] 것이다.
[문] 아견의 행상이 5취온을 반연해서 다섯 가지가 있는 것처럼 아소견의 행상도 5취온을 반연하므로 역시 다섯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열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가?
[답] 아견의 행상은 5취온을 반연하면서도 차별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만이 있을 뿐이나 아소견의 행상은 5취온을 반연하면서도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다섯 가지가 있는 것이니, 나의 중구(衆具)3)가 낱낱의 온에 모두 세 가지씩의 차별된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살가야견은 혹은 1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5견(見)4) 안의 살가야견이기 때문이다.
2)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等隨觀]고 함은 남기는 것이 없이 두루 관(觀)한다는 뜻이다.
3) 나의 중구[我衆具]라 함은 예를 들면 물질[色]이 곧 나라고 하는 아견(我見)에 대한 중구이니 첫째 나는 물질을 가졌다, 둘째 물질은 바로 내 것[我所]이다, 셋째 나는 물질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것 등을 말한다.
4) 5견(見)이란 다섯 가지의 소견이니 첫째는 유신견(有身見:薩迦耶見)이요, 둘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셋째는 사견(邪見)이요, 넷째는 견취견(見取見)이며,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다.(자세한 것은 『구사(俱舍)』 19 「수면품(隨眠品)」 제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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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2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나와 내 것의 행상이 차별되어 아견과 아소견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3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욕계․색계․무색계의 세 가지 세계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혹은 5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5온을 반연하면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6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삼계(三界)에 각각 아견과 아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9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욕계에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이르기까지 9지(地)가 구별되기 때문이다.
혹은 10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5온을 반연하면서 각각 아견과 아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12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12처(處)를 반연하면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18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9지에 각각 아견과 아소견이 있기 때문이며 또 18계(界)를 반연해 차별을 두기 때문이다.
혹은 20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온(蘊)을 반연하는 아구(我具)의 행상 차별은 분별하면서 일으키게 되는 곳[所起處]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 나다, 나는 물질을 가졌다, 물질은 내 것이다, 나는 물질 가운데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처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5온에 각각 4종씩이 있기 때문에 20종이 된다.
혹은 24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12처를 반연하면서 각각 아견과 아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36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18계를 반연하면서 각각 아견과 아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48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처(處)를 반연하는 아구의 행상에 대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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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분별하나 일으키게 되는 곳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처(眼處)는 나다, 나는 안처를 가졌다, 안처는 내 것이다, 나는 안처 가운데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처럼 그 밖의 나머지 11처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12처에 각각 4종이 있기 때문에 48종이 된다.
혹은 65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온(蘊)을 반연하는 아구(我具)의 행상 차별을 분별하고 또한 일으키게 되는 곳도 분별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처럼 ‘느낌은 나의 영락(瓔珞)이다, 나의 아이 종[童僕]이다, 나의 그릇[器]이다’라고 한다. 느낌에 3종이 있는 것처럼 생각․지어감․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므로 4온에 3종을 곱하면 12종이며 아울러 ‘물질이 나다’라고 관하는 것을 합치면 총 13종이 있게 된다. ‘물질
이 나다’라고 관하는 것에 총 13종이 있는 것처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므로 5온에 13종씩이면 65종이 된다.
혹은 72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계(界)를 반연하는 아구의 행상 차별을 분별하나 일으키게 되는 곳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계(眼界)는 나다, 나는 안계를 가졌다, 안계는 내 것이다, 나는 안계 가운데에 있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처럼 그 밖의 나머지 17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므로 18계에 각각 4종씩이기 때문에 72종이 된다.
혹은 408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처(處)를 반연하는 아구의 행상 차별을 분별하고 또한 일으키게 되는 곳도 분별하기 때문이다. ‘안처는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분별하는 것처럼 ‘색처(色處)는 나의 영락이다, 나의 아이 종이다, 나의 그릇이다’라고 한다. 색처에 3종이 있는 것처럼 그 밖의 10처도 그러하여 11처에 3종씩이 있으므로 33종이며, ‘안처는 나다’라고 관하는 것을 합치면 총 34종이 있다. ‘안처는 나다’라고 관하는 것에 34종이
있는 것처럼 나머지의 11처에도 그러하므로 12처에 34종씩이면 408종이 된다.
혹은 936종이라고 말해야 하니, 계(界)를 반연하는 아구의 행상 차별을 분별하고 또한 일으키게 되는 곳도 분별하기 때문이다. ‘안계가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처럼 ‘색계(色界)는 나의 영락이다, 나의 아이 종이다, 나의 그릇이다’라고 한다. 색계에 3종이 있는 것처럼 나머지의 16계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17처에 3종씩이면 51종이 되고 ‘안계가 나다’라고 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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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합치면 총 52종이 있게 되므로 18계에 52종씩이면 936종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은 온(蘊)을 반연하는 행상의 계지(界地) 분별이요 처(處)를 반연하는 행상의 계지 분별이며 계(界)를 반연하는 행상의 계지 분별이니, 만일 상속(相續)으로써 또는 세상[世]으로써 또는 찰나(刹那)로써 분별하게 되면 한량없는 살가야견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우선 온(蘊)을 반연하는 아구의 행상 차별은 분별하나 일으키게 되는 곳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20구의 살가야견이 있다고 할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온을 반연하는 것에만 의거하여 20구의 살가야견이 있다고 말하고 계(界)․처(處)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계․처에도 의거하여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온은 처음에 있기 때문에 우선 온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고 계와 처는 그렇지 않아서이다.
또 이 가운데서는 논을 지은 이에게 묻지 말아야 한다. 논을 지은 이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니, 부처님께서 경에서 온에만 의거하여 “살가야견에는 20구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논을 지은 이는 그것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논을 지은 이는 그만두고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온에만 의거하여 “살가야견에는 20구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계와 처에 대하여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답] 교화할 중생을 관찰하셨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 교화할 유정에게 만일 온에 의거하여 “살가야견에는 20구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면 분명히 이해하게 되고 할 일을 마칠 수 있으나 계․처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으로 관찰하신 것이다. 가령 계․처에 의거하여도 그는 분명히 이해하게 되고 할 일을 마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역시 말씀하셨을 것이다. 다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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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살가야견은 많은 온을 반연하나 계와 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한쪽만 말씀하신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살가야견만 20구가 있다고 말하고 그 밖의 다른 견해를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이 가운데는 그 밖의 다른 학설도 있는 줄 알아야 하니, “변집견(邊執見)5)에는 20종이 있고 사견(邪見)에는 80종이 있으며 견취(見取)에도 그러하고 계금취(戒禁取)에는 40종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살가야견은 5견(見)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또 살가야견은 10종의 공으로 가까이 다스릴 것이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10종의 공이란 내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산괴공(散壞空)․본성공(本性空)․무제공(無際空)․승의공(勝義空)․공공(空空)이다.
[문] 20구(句)라 함에서 구(句)란 무슨 뜻인가?
[답] 이것은 자성(自性)이라는 뜻이니, 이 견해에는 20종의 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 ‘물질은 나다.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은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 하는데 어떻게 ‘물질은 나다.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은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가?
[답] 모든 물질이거나 4대종(大種)이거나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나 ‘온갖 것은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에서 식에 이르기까지 그 알맞은 것에 따라 말한 것이다.
[문] 살가야견은 오직 유루의 연[有漏緣]일 뿐이요6) 무루가 아니며, 자기 세
5)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오직 유루의 연[有漏緣]일 뿐이라 함은 5견(見) 등의 염법(染法:隨眠)이 유루의 연인가, 무루의 연[無漏緣]인가고 분별한 데 있어서 우루의 연이란 유루의 법[有漏法:성도의 진리(聖道諦)와 3무위(無爲)를 제외한 온갖 법]을 대상으로 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고 무루의 연이란 무루의 법[無漏法:성도의 진리와 3무위]를 대상으로 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살가야견은 도제(道諦)와 또는 3무위를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유루의 연이라는 것이다.
6)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오직 유루의 연[有漏緣]일 뿐이라 함은 5견(見) 등의 염법(染法:隨眠)이 유루의 연인가, 무루의 연[無漏緣]인가고 분별한 데 있어서 우루의 연이란 유루의 법[有漏法:성도의 진리(聖道諦)와 3무위(無爲)를 제외한 온갖 법]을 대상으로 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고 무루의 연이란 무루의 법[無漏法:성도의 진리와 3무위]를 대상으로 하여 생기는 것을 말하는데 살가야견은 도제(道諦)와 또는 3무위를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유루의 연이라는 것이다.
계 자리[自界地]7)의 연이요 다른 세계 자리[他界地]가 아니며, 자기 세계의 자리 안에서도 온갖 것을 일시에 반연하는 것이 아는데 무엇 때문에 그 온갖 것을 ‘이것은 나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고 하는가?
[답] 여기서 ‘온갖 것’이란 말은 바로 조그마한 부분[少分]의 온갖 것이지 모든 것의 온갖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은 없다.
또 여기서의 ‘온갖 것’이란 말은 스스로 행할 경계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은 없다.
[문] 혹시 하나의 온[一蘊]에 대하여 나와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이를테면 색온(色蘊)과 행온(行蘊)에 각기 많은 법이 있지만 하나[一]를 고집하면서 나라 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내 것이라 하며, 수온(受蘊)․상온(想蘊)․식온(識蘊)에 비록 많은 종류는 없어도 갖가지 차별된 자성이 있기 때문에 역시 하나를 헤아려 나라 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내 것이라고 하게 된다.
[문] ‘나는 물질을 가졌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는데 어떻게 ‘나는 물질을 가졌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가?
[답] 나머지의 네 가지 온[四蘊]에 대하여 차츰차츰 따르면서 하나[一]를 ‘이것은 나다’라고 고집하고 그런 뒤에 물질에 대하여 고집하면서 ‘나는 가졌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재물도 가졌고 영락 등도 가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7) 자기 세계 자리[有界地]의 연(緣)이요 다른 세계 자리[他界地]가 아니라 함은 자기 세계[自界]와 자기 자리[自地], 곧 가령 색계(色界) 초선지(初禪地)의 살가야견(薩迦耶見)이면 색계 초선지의 법만을 반연해서 생기는 것이요, 다른 세계 자리의 연(他界地緣), 곧 다른 세계[欲界․無色界]와 다른 자리(他地:他의 8地)의 법을 반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니, 살가야견은 바로 5온(蘊:自己身分)을 대상으로 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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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떻게 ‘물질은 내 것이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가?
[답] 나머지 네 가지 온에 대하여 차츰차츰 따르면서 하나를 고집하여 ‘이것은 나다’라 하고 그런 뒤에 물질에 대하여 ‘내 것이다’라고 고집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에게 시자(侍者)도 있고 아이 종 등도 있는 것과 같다.
[문] 어떻게 ‘나는 물질 가운데에 있다’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가?
[답] 나머지 네 가지의 온에 대하여 차츰차츰 따르면서 하나를 고집하여 ‘이것은 나다’라 하고 그런 뒤에 물질에 대하여 ‘나의 그릇이다. 나의 처소(處)다’라고 고집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에는 마치 기름이 깨 속에 있고 비계가 살갗 안에 있으며 뱀이 상자 속에 있고 칼이 칼집 안에 있으며 소(酥)가 타락[酪] 속에 있고 피가 몸 안에 있다는 것과 같다.
물질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나아가 의식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는 것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느낌 등이 ‘이것은 나’이어서 ‘물질 가운데에 있다’고 고집하는 이 일은 그럴 수 있으니, 물질은 거칠고[麤] 느낌 등은 미세[細]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나요 느낌 등의 가운데 있다’고 고집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거친 법은 미세한 것 가운데 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답] 협 존자(脇尊者)는 “도리로 보아서 총명이 없는 이와 어리석어 눈먼 이가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어느 논사는 “만일 물질은 나이어서 느낌 등의 가운데에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물질은 미세한 것이요 느낌 등은 거친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우(世友) 존자는 “두루 4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물질인 몸 가운데에는 접촉[觸]과 합함을 따라 모두 느낌을 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이것은 몸 안에서는 두루 접촉을 일으킬 수도 있고 두루 느낌도 낸다는 뜻이다. 그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이미 두루 느낌이 있기 때문에 물질인 나는 느낌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대덕(大德)은 “온갖 몸 부분에서 모든 느낌을 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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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느낌은 두루 몸에 있으며 몸의 일부분이 나인 것이어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느낌 가운데에는 물질인 나를 용납하게 된다. 느낌에서처럼 나아가 의식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라고 생각한다.
[문] 하나의 극미(極微)를 반연해서 살가야견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이것은 바른 소견[正見]이요 살가야견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반드시 진실로 행하는 지혜라야 비로소 극미를 보기 때문이다.
만일 없다면 6법론(法論)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예컨대 그 논에서 “극미는 항상해서[常] 저마다 따로따로 머무르기 때문에 이 저마다 따로따로 머물러 있는 것은 무상(無常)의 인(因)이 아니다. 그러므로 극미는 결정코 항상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그 학설에서는 “어떻게 이 견해에서 극미를 반연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가? 그것은 변집견(邊執見)에서 극미를 반연하여 경계를 삼고 유신견(有身見)에서도 극미를 반연한다는 것이 증명되니, 신견․변견의 두 소견의 소연(所緣)이 하나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답] 하나의 극미를 반연하면서 살가야견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6법론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답] 그 논에서 말한 것은 바른 도리[正理]를 좇고 있지 않아서 이것이 극미를 반연하는 것이라고 인증(引證)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그 논 가운데에는 다시 여러 가지의 도리를 좇지 않는 인(因)을 말했으므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하나의 극미를 반연하여 살가야견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바른 견해이요 살가야견이 아니다.
[답] 이것은 소연(所緣)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한 것이요, 실제로 일으키는 것[現起]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評]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여 이 견해가 소연에 머무르면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앞의 학설[說]이 도리로 보아 뛰어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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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한꺼번에 통틀어 5온을 반연하면서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6법론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예컨대 그 논에서 “나의 체성은 하나일 뿐이며 5종이란 없다”고 하였다. 만일 한꺼번에 통틀어 5온을 반연해서 나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다섯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온의 자성은 5종이 저마다 따로따로이다. 거기서 집착하게 되는 나의 모양에는 차별이 없고 집착하는 나는 미세하게 나누는 것도 없어서 차별된 모양이 없으므로 항상 머무르면서 변
하지 않고 나고․늙고․병들고․죽는 것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없다 한다면 『제어경(諦語經)』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예컨대 그 경에서 “제어(諦語)외도가 부처님께 ‘교답마(喬答摩)시여, 나는 물질이 나요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이 나이다’라고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한꺼번에 통틀어 5온을 반연하면서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6법론의 말은 곧 잘 회통한다 하겠지만 『제어경』의 말은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답] 그는 교만 때문에 도리 아닌 말을 한 것이요 실은 이런 고집이 없었다.
또 그는 부처님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이러한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부처님께서는 뛰어난 지견(智見)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는 결정코 믿지 않으면서 ‘나는 이제 이런 일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리라’고 하고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또 그는 마음이 놀라고 두려웠기 때문에 이러한 도리에 맞지 않은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여러 가지의 방편을 시설하여 부처님께 가서 논의(論議)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세존의 몸에는 뛰어난 대논사(大論師)의 상(相)이 있었음을 보았으니, 턱은 사자와 같고 눈썹은 소와 같았으며 그 어금니는 가늘고 날카로우면서 40개의 이를 갖추었고, 범음(梵音)은 깊고 묘하여 사람들이 듣고 좋아하게 하였었다. 그는 이런 것을 보고 패배할 것을 크게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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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이 그의 마음을 비추어 가렸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이다. 그 외도는 논리적으로 따지기 위하여 부처님께로 왔다가 이미 세존의 위덕이 왕성하여 범석(梵釋)과 호세(護世)8)조차도 오히려 보지 못한 것을 보았으므로 놀라고 황송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또 하늘․용․야차의 위신력 때문에 이와 같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을 믿는 하늘․용․야차들이 있다가 ‘이 나쁜 외도가 언사를 짜 맞추어 부처님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려 하니 마땅히 세력으로써 그의 마음을 요란하게 해서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여 속히 패배하게 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니, 마치 오파리(鄔波梨)가 와서 부처님께 욕을 하려 하다가 천신이 위력으로 그의 마음을 요란시켜 도리어 찬탄을 하고 만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어떤 이는 “한때에 통틀어 5온을 반연하면서 나라는 고집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제어경』의 말은 잘 회통한다 하겠지만 6법론의 말은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답] 그는 5온에 대하여 하나로 합하는 생각[一合想]을 일으키면서 하나의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므로 잘못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고집하여 내 것[我所]으로 삼는가?
[답] 만일 안의 온[內蘊]을 고집하여 나라고 한다면 그는 밖의 온[外蘊]을 고집하여 내 것으로 삼으며, 만일 밖의 온을 고집하여 나라고 한다면 그는 안의 온을 고집하여 내 것으로 삼기 때문에 역시 허물은 없다.
[문] 5온 외에 나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고 하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예컨대 계경에서 “모든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이 나가 있다고 시설하는 것은 모두가 5취온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것
8) 범석(梵釋)이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이며, 호세(護世)는 사천왕(四天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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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없다 한다면 어찌하여 제6의 아견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5온 이외에 나가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제6의 아견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사(思)의 행온(行蘊)에서 일으킨 아견과 그 밖의 행온에서 일으킨 아견을 각각 따로따로 세우는 까닭에 6종이 있다는 것이다.
[문] 『법망경(梵網經)』에 “62견취(見趣)의 모두는 유신견(有身見)으로써 근본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고, 『사자후경(師子吼經)』에 “모든 어떤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에게는 여러 가지의 다른 견해가 있되 모두가 두 가지의 견해에 의거하니,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有見]에 의거한다”고 하셨는데 이 두 경전의 말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등기(等起)에 의거하는 까닭에 모든 견해의 갈래는 유신견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말하고 추구(推求)에 의거하는 까닭에 모든 다른 견해는 있다․없다는 견해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살가야견은 모든 견해의 갈래를 이끌어 내고, 있다․없다는 견해는 모든 다른 견해를 수호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경에서 말씀하신 차별이다.
[論] 항상하지 않은 것[非常]을 항상하다[常]고 하는 견해는 5견(見)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어야 할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이 모든 견해의 갈래는 생사(生死)에서 모든 유정들을 크게 속박(繫縛)하고 크게 쇠환(衰患)을 끼치며 크게 손복(損伏)을 짓는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수(數)로 하여금 욕계․색계․무색계에서 많은 고뇌를 받고 생사에 윤회하며 지혜의 광명을 멀리 여의고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 생장(生藏) 숙장(熟藏)9)의 중간에 끼어서 모든 옥죄임을 받
9) 생장(生藏)이란 위(胃)요, 숙장(熟藏)이란 장(腸)에 해당한 것이니 자궁(子宮)은 그 중간에 끼어 있다고 여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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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니, 중한 죄인이 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유정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견해의 갈래의 허물을 깨닫게 하고 힘써 해탈을 구하게 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세간의 속박과 쇠환과 손복이 있는 곳을 사람들이 만일 알지 못하면 멀리 피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만일 그것을 알면 멀리 피하게 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이다.
이 논의 잡온(雜蘊)과 지온(智蘊)과 견온(見蘊)에서는 모두가 두 가지의 일(二事)로써 견해의 갈래를 심구(尋求)하는 것이니, 첫째는 자성(自性)으로써 하고, 둘째는 대치(對治)로써 한다.
자성으로써 한다 함은 이와 같은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는가를 말하며, 대치로써 한다 함은 이와 같은 견해는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를 말한다.
『생지론(生智論)』에도 이 두 가지의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심구한다. 예컨대 그 논에서 “외도가 부처님을 비방하여 사문 교답마는 큰 요술쟁이어서 세간을 속이고 미혹되게 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존의 도(道)는 이미 요술[幻]에서 뛰어났다”고 말하였다.
그가 말한 ‘큰 요술쟁이’란 도를 비방하는 사견[謗道邪見]이어서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道所斷]이다. 도를 비방하는 사견이란 그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는 세존이 요술의 도를 초월했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라 함은 그의 대치되는 도를 드러내는 것이니, 인위의 지혜가 생기어 그것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또 그 논에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세존은 무엇 때문에 아라한에 인색하신가? 그렇기는 하나 세존의 도는 이미 인색에서 뛰어났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인색하다’ 함은 도를 비방하는 삿된 견해이어서 견도에서 끊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의 두 가지 일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문론(問論)과 『범망경』에서는 다시 한 가지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하니, 이와 같은 견해는 무엇을 말미암아 일어나는가이다.
이와 같은 것을 통틀어 말하면 세 가지의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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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니, 첫째는 자성으로써요, 둘째는 대치로써 이며, 셋째는 등기(等起)로써다.
협 존자(脇尊者)는 “이와 같이 하면서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하지 않아야 하니, 마치 총명이 없는 이나 어리석어 눈먼 이가 구덩이에 떨어진 것을 책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마땅히 세 가지의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세 가지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하면 구박(具縛)의 이생(異生)도 마침내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성자의 도[聖道]로써 영원히 끊고 두루 아는[遍知]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법사(實法師)의 인연을 자세히 말해야겠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한 아련야[阿鍊若]에 모든 유가사(瑜伽師)들이 함께 한 자리에 모여서 모든 견해를 논설하여 “성자는 한량없는 과환이 있는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에서 영원히 현행(現行)하지 않는 것이 심히 희유(希有)하다”라고 말했다.
그 때에 그 대중 안에 달랍바(達臘婆)라는 한 법사가 있다가 대중들에게 “성자는 이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를 이미 끊었고 두루 앎으로 영원히 앞에 나타나지 않는데 무엇이 희유함이 있겠소. 나와 같은 자는 지금 구박의 이생으로 이 세 가지의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아 구하고 있는데 가령 내가 미래에 생사에 유전하면서 과거에 지내 온 겁수(劫數)만큼 이 견해의 갈래에서 다시는 현행하지 않아야 비로소 희유하다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때에 대중 가운데에 어느 아라한이 ‘구박의 이생으로서 이 성현들 가운데서 사자후를 외치니 심히 희유하구나. 나는 뒷날에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를 시험해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은 재물은 반드시 다함에 돌아가고 온갖 고귀한 이도 반드시 떨어지며 온갖 만나는 이도 반드시 이별하고 온갖 목숨도 반드시 죽음에 돌아가는 법이라 이 실법사도 뒤에 목숨을 마치고는 도로 본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났다.
그 아라한은 천안(天眼)으로 그를 보고는 자주자주 그의 집으로 가서 안부를 물었으며 이렇게 하면서 세월은 자꾸 지나가 그 나이 장대하기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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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
이때에 아라한은 그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의 꾸미개를 가져오면서 그에게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가 잠자코 대답하지 않고 있자 그의 어머니가 “애야, 지금 무엇 때문에 스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느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머니에게 “스님께서 물으신 것은 세간에는 없는 것인데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라고 말하므로 그의 어머니가 “세간에 어떤 물건이 없단 말이냐?”라고 하자 그는 말하기를 “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행(行)에는 모두 나가 없으며 유정(有情)도 없고 명자(命者)도 없으며 보특가라(補特伽羅)도 없고 생자(生者)도 없으며 양육자(養育者)도 없고 작자(作者)도 없으며 수자(受者)도 없고 오직 공한 행의 무더기[空行聚]일 뿐이기 때문에 대
답하지 않아야 됩니다”라고 했다.
이때에 아라한은 듣고 나서 찬탄하며 “심히 희유하도다. 비록 생사를 겪는다 하더라도 모든 견해의 갈래가 오히려 현행하지 않는구나. 그대는 전세에 성현들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치면서 ‘구박이생으로 만일 세 가지의 일로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하면 설령 오랜 겁을 지난다 해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에 진실이 있었구나”라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마땅히 말한 세 가지 일로써 견해의 갈래를 찾고 구해야 크게 이익됨이 있는 것이다.
[論] 항상하지 않은 것[非常]을 항상하다[常]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
[答] 변집견(邊執見)의 상견(常見)에 속하며 견고(見苦)에서 끊는다.
[문] 무엇을 항상하지 않은 것이라 하는가?
[답] 모든 유위의 법(有爲法)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그것을 헤아리면서 항상하다고 하는가?
[답] 두 가지의 연(緣)을 말미암는다. 첫째는 모든 물질의 법[色法]은 서로 비슷하게 상속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소의 법은 본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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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의 법은 서로 비슷하게 상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 함은 그 외도는 늙었을 때의 물질이 젊었을 때의 물질과 같다고 보며 오늘의 물질이 어제의 물질과 같다고 보면서 ‘젊었을 때의 물질이 옮아와서 늙을 때에 이르고 어제의 물질이 옮아와서 오늘에 이르는구나’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심소의 법은 본래의 일을 기억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함은 그 외도는 젊었을 때에 짓고 익히고 받은 것을 늙었을 때에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어저께 짓고 익히고 받은 것을 오늘에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서 ‘늙었을 때의 심․심소의 법은 젊었을 때의 심․심소의 법이요, 오늘의 심․심소의 법은 어제의 심․심소의 법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연으로 말미암아 그 외도는 5취온(取蘊)에 대하여 망령되이 헤아리면서 항상하다고 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저 모든 외도는 5취온이 서로 비슷하게 상속하는 데에 가려지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은 것[非常]을 모르고, 위의(威儀)로 거느림에[將攝] 가려지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운 것[苦]인 줄을 모르며, 얇은 가죽으로 장식한 데 가려지기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 줄[不淨] 모르고, 작용하는 나라고 고집하는 데에 가려지기 때문에 나가 없는[無我] 줄 모른다. 이로 말미암아 외도는 항상하다는 등의 견해를 일으킨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서 변집견의 상견에 속한다 함은 그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은 항상하다[常]․아주 없다[斷]는 등의 두 가지 치우친 고집[邊執] 가운데서 항상하다는 고집[常執]에 속하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바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고제(苦諦)를 볼 때에 그것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제에서 인지(忍智)가 만일 생기면 이와 같은 종류의 바르지 않은[不正] 심사(尋思)와 바르지 못한 분별(分別)과 뒤바뀐 견해[顚倒見]와 평등하지 않은 취[不平等取]는 영원히 끊기고 쉬는 것이 풀끝에 달린 이슬이 햇빛이 비치면 증발되는 것처럼 그것도 그와 같아서 헷갈림에서 괴로움이 생긴 것이라 괴로움을 보고서 곧 끊는다.
[문] 잘 설법(說法)하는 이도 “모든 법은 항상 있는 것이어서 실체(實體)와
성상(性想)과 아사(我事)가 있다”라고 말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의 견해는 악(惡)이라 하지 않으면서 외도도 그러하다 하여 유독 나쁜 견해[惡見]라고 일컫는 것인가?
[답] 잘 설법하는 이는 비록 “모든 법에 실체 등이 있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작용이 없으나 외도가 말한 것은 겸하여 작용이 있다.
어떤 이는 “잘 설법하는 이는 ‘오직 모든 법은 잠시 동안만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하나 외도들은 ‘모든 법은 자주자주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잘 설법하는 이는 ‘모든 나게 될 법은 나게 되고 늙게 될 법은 늙게 되며 멸하게 될 법은 멸하게 된다’라고 널리 말하나 외도들은 ‘모든 법은 나는 것이 아닌데도 나게 되고 늙는 것이 아닌데도 늙게 되며 멸하는 것이 아닌데도 멸하게 된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잘 설법하는 이는 ‘모든 법은 3세(世)에 유전(流轉)한다’라고 널리 말하나 외도들은 ‘모든 법은 세상을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잘 설법하는 이는 ‘모든 법은 인(因)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탁하여 화합하면서 생긴다’고 널리 말하나 외도들은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잘 설법하는 이는 ‘모든 법은 생(生)과 멸(滅)과 상응하여 인이 있고 연이 있으면서 유위의 모양과 합한다’고 널리 말하나 외도들의 말은 그렇지가 않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잘 설법하는 이의 견해는 악이 아니나 외도가 일으킨 것은 유독 나쁜 견해라 일컬을 뿐이다.
[문] 만일 항상하지 않는 것에 항상하다는 견해를 일으키면 결정코 무상하다는 인연을 비방하는 것인데 그의 견해를 어떻게 사견(邪見)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행상(行相)의 구름[轉]이 없어야 사견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인데 그 견해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사견이 아니다.
어떤 이는 “실제의 일[實事]을 파괴하는 것을 사견이라고 이름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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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것은 더욱더 늘려[增益]주기 때문에 사견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견해를 변집견이라고 하는가?
[답] 항상하다고 하는 치우침[常邊]을 고집[執]하기 때문이다. ‘아주 없다’와 ‘항상하다’는 것은 중용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다 같이 치우침[邊]이라 하며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고집하므로 변집견이라 한다.
세존께서 가다연나(迦多衍那)에게 “만일 바른 지혜[正智]로써 ‘세간은 원인[集]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인데 ‘아무 것도 없다[無所有]’라고 하면 다시는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단견(斷見)이다.
만일 바른 지혜로써 ‘세간은 소멸[滅]한다’라고 해야 하는데 ‘있는 것을 있다[有所有]’고 하면 다시는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상견(常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유정은 미래에 온(蘊)이 일어난다’라고 관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없는[斷] 것이 아니며 현재의 온은 소멸되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한 것[常]이 아니다.
또 아견을 일으키는 이는 오히려 품위가 없고 천하여 세간에서도 꾸짖고 책망하게 되거늘 하물며 다시 나에 대하여 아주 없다,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이겠는가. 이런 고집은 품위가 없고 천하여 극히 꾸짖을 만하기 때문에 변집견이라 한다.
[論] 항상한 것[常]을 항상한 것이 아니다[非常]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어야 하는가?
[答] 사견에 속하며 견멸(見滅)에서 끊어야 한다.
[문] 무엇을 항상하다고 하는가?
[답] 고요히 사라진[寂滅] 열반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그것을 항상한 것이 아니라고 헤아리는가?
[답] 외도는 네 가지의 해탈이 있다고 집착한다. 첫째는 몸이 없다[無身]고 하고, 둘째는 끝없는 뜻[無邊意]이라고 하며, 셋째는 깨끗한 무더기다[淨聚]라고 하고, 넷째는 세간의 솔도파[世間率堵波]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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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없다 함은 공무변처(空無邊處)를 말하고 뜻이 끝이 없다 함은 식무변처(識無邊處)를 말하며 깨끗한 무더기라 함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말하고 세간의 솔도파라 함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그리고 4무색(無色)은 비록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도로 물러나게[還退] 되므로 그들은 ‘우리들의 해탈에는 이미 물러나 떨어짐[退墮]이 있으므로 석종(釋種)이 말한 열반에도 물러나 떨어짐이 있는 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반에 대하여 항상하지 않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여기에서 사견에 속한다 함은 그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것은 언제나 열반은 없다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견멸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멸제(滅諦)를 볼 때에 그것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어떤 사견이 고요히 사라진 열반에 대하여 항상함이 아니라는 행상(行想)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한다면 『품류족(品類足)』의 설명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사견인가? 원인[因]을 비방하고 결과[果]를 비방하며 작용(作用)을 비방하고 실사(實事)를 파괴하는 모든 인(忍)과 낙(樂)과 혜(慧)와 관(觀)과 견(見)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없다 한다면 여기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예컨대 “만일 항상한 것을 항상한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견해는 사견에 속하며 견멸에서 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답] 마땅히 “이런 사견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문] 『품류족론』의 설명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답] 거기서는 사견의 행상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다하지는 않았으니, 그 밖에 번뇌의 행상이 있는데도 그것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거기서 말한 것 가운데 포섭되어 있다. 원인을 비방한다 함은 집제(集諦)를 비방하는 것이요, 결과를 비방한다 함은 고제를 비방하는 것이며, 작용을 비방한다 함은 도제(道諦)를 비방하는 것이요, 실사를 파괴한다는 것은 멸제를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원인을 비방하고 결과를 비방하며 작용을 비방한다는 것은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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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세 가지의 진리를 비방하는 것이며, 실사를 파괴한다는 것은 오직 멸제만을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런 사견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 가운데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답] 열반 가운데는 항상한 모양[常相]이 있다. 만일 열반이 없다고 비방하면 항상한 모양도 비방하는 것이다. 마치 손가락 가운데는 네 곳[四處]이 있는데 만일 손가락이 없다고 부정하면 역시 네 곳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뜻을 준(准)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외도는 오직 온(蘊)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항상 머무르는 법[常住法]이라고 집착하면서도 열반은 온이 아니라고 하니, 이 때문에 뜻에 준하면 그것은 결정코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항상한 것을 항상하지 않다’라고 하는 견해를 말한다. 그리고 사견은 고요히 사라진 열반에 대하여 실로 무상(無常)의 행상을 일으키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論]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
[답] 하열[劣]한 법을 취하여 뛰어나다[勝]고 하는 견취(見取)에 속하며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괴로운 것이라 하는가?
[답] 모든 유루의 법[有漏法]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그것을 헤아려 즐겁다고 하는가?
[답] 젊었을 적에 뜻에 맞았던 일에 대하여 어리석기 때문이다. 마치 고달프면 잠시 동안 쉬고 추우면 잠시 동안 따뜻한 것을 얻으며 더우면 잠시 동안 시원한 것을 얻고 배고프면 잠시 동안 먹을 것을 얻으며 목마르면 잠시 동안 마실 것을 얻으면서 ‘나는 지금 즐거움을 받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모든 온(蘊) 가운데는 조그마한 부분은 즐거움이 있으므로 그 분량대로 취한다면 역시 뒤바뀐 것은 아니나 외도는 그 가운데서 더욱더 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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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구경의 즐거움[究竟樂]과 같이하기 때문에 뒤바뀜이 성립되는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하열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으로 삼는다.
견취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괴로움과 여러 괴로움 등을 취하여 묘락(妙樂)으로 삼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바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고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취하여 즐거움을 삼는 것을 견취라 하면서 무상한 것을 취하여 항상한 것으로 삼는 것은 견취가 아니라 하는가?
[답] 괴로움을 취하여 즐거움으로 삼는다 함은 한결같이 하열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으로 삼기 때문에 견취라 하나 무상한 것을 취하여 항상 하다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하열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취는 아니다.
항상한 법[常法] 가운데서 뛰어나고 뛰어나지 않은 법으로써 같은 하나의 무더기로 삼는 것이니, 마치 허공(虛空)과 비택멸(非擇滅)과 같아서 이것은 무기이기 때문에 뛰어난 법이라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모든 온(蘊) 가운데서 조그마한 부분의 즐거움이 있는데 그것을 관함을 말미암아 괴로움을 취하여 즐거움을 삼는 것을 견취라 하며, 모든 온 가운데서 조그마한 부분의 항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한 것을 취하여 항상한 것으로 삼는 것도 견취라 한다. 왜냐하면 물질 등의 5온은 찰나의 성품이기 때문이요, 체성이 허환(虛幻)하기 때문이며, 잠시 동안 머무르기 때문이요, 소멸과 파괴에 임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것이 소멸할 때의 법[滅時法]인가? 현재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을 취하여 항상 머무는[常住] 것으로 삼는 것은 변집견이라고는 해도 견취라고는 하지 않는다.
[論] 즐거움을 괴로움이라는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
[답] 사견에 속하며 견멸(見滅)에서 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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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는가?
[답] 승의(勝義)에서의 즐거운 것은 오직 열반일 뿐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열반을 괴로움이라 하는가?
[답] 그들은 “하나의 감관[根]이 파괴될 때조차도 오히려 괴로움이 생기거늘 하물며 열반하는 중에 모든 감관이 다 파괴됨이랴. 그러므로 열반은 반드시 극히 괴로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에 대하여 세우(世友) 존자는 “감관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오히려 하나의 감관이 있는 것조차도 괴로움을 내거늘 하물며 많은 감관이 있는 것이랴. 오직 열반하는 중에는 모든 감관은 모두 소멸하면서도 괴로움의 인(因)이 없기 때문에 이야말로 지극한 쾌락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삿된 견해에 속한다 함은 그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열반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견멸에서 끊을 바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멸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도제(道諦)도 즐거운 것이다. 계경에서 “도는 자량(資糧)에 의거하고 열반은 도에 의거하나니, 도의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오직 견멸에서 끊을 것만을 말하는가?
[답] 이 가운데는 그 밖의 다른 학설도 있는 줄 알아야 하니, 마땅히 “만일 즐거움을 괴로움이라고 보면 이것은 사견에 속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사라짐[滅]을 괴로운 것이라 하면 견멸에서 끊을 것이고, 만일 도(道)가 괴로움이라 하면 견도에서 끊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따로 의취(意趣)가 있어서이다.
이를테면 무루의 도[無漏道]는 비록 또한 즐겁다 하더라도 두 부분[二分]에 속하니 즐거움의 부분에 속한 것은 열반을 얻기 때문이요, 괴로움의 부분에 속한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도제는 즐거운 것이 아니지만 열반을 얻기 때문에 가설(假說)로 즐거운 것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마치 “즐거움을 말미암아 즐거운 열반에 이른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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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때문에 이것을 오직 견멸에서 끊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문] 사견으로서 열반에 대하여 괴로움의 행상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이 가운데에서 문난[難]과 회통[通]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앞의 비상(非常)에서의 해설과 같다.
[論] 청정하지 않은 것[不淨]을 청정하다[淨]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
[答] 하열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견취(見取)에 속하며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청정하지 않다고 하는가?
[답] 모든 유루의 법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그것을 헤아려 청정하다고 하는가?
[답] 젊었을 때의 산뜻하고 깨끗하던 일에 어리석게 얽매이기 때문이다. 마치 머리칼․손톱․입․이․피부 등을 단장하여 형색이 잠시 동안이나마 산뜻하고 깨끗하게 되면 ‘나의 몸은 청정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모든 온(蘊)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부분의 깨끗함이 있어서 양(量)대로 취하면 역시 뒤바뀐 것은 아니지만 외도는 그 가운데에서 더욱더 취하여 구경의 청정[究竟淨]과 같이하기 때문에 뒤바뀌게 된다.
이 가운데서 하열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견취에 속한다 함은 그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똥 찌꺼기 등을 취하여 진실하고 깨끗함으로 삼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고제를 볼 때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나타나 보이는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부정(不淨)한 것이 언제나 흐르고 있거늘 어떻게 외도는 몸이 청정한 것이라고 집착하는가?
[답] 그들은 ‘이미 흘러나온 것은 부정하다 하더라도 아직 흘러나오지 않은 것은 반드시 청정해야 된다’라고 생각한다.
견숙가나무[堅叔迦樹]의 꽃이 붉어서 살코기와 같았으므로 야간(野干)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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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 틀림없이 고기를 먹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잠깐 뒤에 그 꽃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있어 곧 달려가 그것을 맡아보고 비로소 고기가 아닌 것을 알았다.
다시 ‘이미 땅에 떨어진 것은 고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밖의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고기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외도도 그러하여 무명(無明)으로 혼미해졌기 때문에 이런 집착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유루의 법은 두 가지의 뜻을 말미암아 청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첫째는 번뇌를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경계(境界)를 말미암아서이다. 모든 오염된 법[染汚法]은 갖춰진 두 가지 뜻을 말미암거니와 오염되지 않은 법[不染汚法]은 경계만을 말미암을 뿐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유루의 선한 법[善法]도 역시 청정하다 하는가?
[답] 조그마한 부분은 청정하기 때문이니, 그것은 때[垢]가 있고, 허물[過]이 있고, 독[毒]이 있고, 흐림[濁]이 있다고 해도 번뇌와는 어긋나고 번뇌에 섞이지 않았으며 번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무루의 법은 바로 뛰어난 뜻[勝義]에서 청정한 것이다. 유루의 선한 법은 그것을 끌어당기고 좇기 때문에 역시 청정하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문] 잘 설법하는 이는 “유류의 법에도 청정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세 가지 청정한 업[三淨業]과 같은 것은 악(惡)이라 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외도가 그것을 청정하다고 말한다 하여 나쁜 소견[惡見]이라 하는가?
[답] 잘 설법하는 이는 묘행(妙行)만을 말하여 청정하다 하지만 외도는 통틀어 묘행과 악행(惡行)을 다 청정하다고 한다.
또 잘 설법하는 이는 선근(善根)만을 말하여 청정하다 하지만 외도는 선근과 불선근(不善根)을 통틀어 청정하다고 한다.
또 잘 설법하는 이는 결(結)과 박(縛)과 수면(隨眠)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을 다스리는 모든 법만을 말하여 청정하다 하지만 외도는 역시 결 등을 말하여 청정하다고 한다.
또 잘 설법하는 이는 유루의 법에 소분의 청정[少分淨]이 있다고 말하지만 외도는 그것을 말하여 구경의 청정[究竟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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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외도가 말한 것은 악이다라고 할 수 있고, 잘 설법하는 이에게는 악견(惡見)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論] 청정한 것을 청정하지 않다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答] 사견에 속하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사라짐[滅]을 말하여 청정하지 않다 하면 견멸(見滅)에서 끊을 것이요, 만일 도(道)를 말하여 청정하지 않다 하면 견도(見道)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청정하다고 하는가?
[답] 멸제와 도제 두 가지의 진리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멸제와 도제를 청정하지 않다고 헤아리는가?
그들은 번뇌는 참으로 청정하지 않은 것인데 성자의 도가 그것을 끊으므로 곧 청정하지 않은 것이 되며 도(道)로 얻는 사라짐도 청정하지 않은 것이 된다.
칼이나 물로써 더러운 물건을 베거나 씻으면 깨끗하지 않게 되며 이 칼과 물로써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베거나 씻어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사라짐과 도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청정하지 않아야 된다.
이 가운데서 삿된 견해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사라짐과 도도 청정하지 않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 견멸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멸제와 도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어떤 견해가 멸제와 도제의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청정하지 않은 행상(行相)을 일으키는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이 가운데서의 문난[難]과 회통[通]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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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9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세제일법납식 ⑧
[論] 내가 아닌[非我] 것을 나[我]라고 하는 견해는 5견(見)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見)에서 끊을 것인가?
[答] 유신견(有身見)에 속하며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내가 아니라고 하는가?
[답] 온갖 법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에 그것을 나라고 헤아리는가?
[답] 가고 오는 등의 작용하는 일에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일 내가 없다면 누가 가고 누가 오며, 누가 서고 누가 앉으며, 누가 구부리고 누가 펴며, 누가 일어나고 누가 누우며, 누가 보고․듣고․냄새 맡고․맛보고․닿고․기억하고 색별하겠는가? 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외도는 그것에 대하여 나라고 헤아린다.
여기에서 유신견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5취온(取蘊)에 대하여 나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고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살가야견에는 두 가지의 행상이 있으니, 나[我]라는 행상과 내 것[我所]이라는 행상이다. 이것은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에 속하거늘 무엇 때
문에 여기에서는 아견만을 말하고 아소견은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의 뜻이 그렇게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역시 그것도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가운데에는 그 밖의 다른 학설[說]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 이미 아견을 말했으므로 아소견도 말한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이 있게 되고, 아견이 있기 때문에 아소견이 있게 되며, 이미 본 것이 있기 때문에 이미 보았던 것이 있게 되고, 다섯 가지의 아견이 있기 때문에 열다섯 가지의 아소견이 있게 되며, 나에 대한 탐애[愛]가 있기 때문에 내 것에 대한 탐애가 있게 되고, 나에 대한 어리석음[愚]이 있기 때문에 내 것에 대한 어리석음이 있게 된다”라고 말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아견은 근본이며 뒤바뀐 성품[顚倒性]1)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한쪽만 말하고 아소견은 근본이 아니며 뒤바뀐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설법을 잘 하는 이도 모든 법은 항상 존재하고 실체(實體)와 성상(性相)과 아사(我事)를 말하는데도 나쁜 견해가 아니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외도는 실아(實我)가 있다고 말하면 나쁜 견해인가?
[답] 나에게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아(法我)요, 둘째는 보특가라아(補特伽羅我)이다.
잘 설법하는 이는 오직 실제 존재하는 법아(法我)2)만을 말한다. 법성(法性)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 사실대로 보기 때문에 나쁜 견해라고 하지 않으나 외도는 보특가라아가 실로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보특가라아는 실로 존재하는 성품이 아니요 허망한 견해이기 때문에 나쁜 견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나를 나가 아니라 하는 견해는 말하지 않는가?
1) 뒤바뀐 성품[顚倒性]이기 때문이라 함은 법의 실체(實體)가 없는데도 아견(我見)으로 추찰(推察)과 계탁(計度)에 의하여 실로 있다고 여기는 성품이다.
2) 유부(有部)는 아공법유론(我空法有論)에서 법성(法性)의 삼세실유(三世實有)를 논하면서 그 법성에는 각각 일정한 특질(特質)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여기에서 법아(法我)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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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나는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나가 아니라고 본다면 바른 견해[正見]가 된다. 여기에서는 오직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見趣]만 말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나를 나가 아니라 하는 견해는 말하지 않는다.
[論] 인이 아닌[非因] 것을 인(因)이라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答]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면 계금취(戒禁取)3)에 속하며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인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자재천(自在天) 등의 평등하지 않은 인[不平等因]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는가?
[답] 나쁜 벗을 친근히 하면서 ‘자재(自在)․자성(自性)․사부(士夫)․시(時)․방(方)․공(空) 등으로부터 모든 법을 낸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하면 “사다(私多)와 미도(未度) 등의 천신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만일 아들․딸을 낳으면 또 “난타(難陀) 등의 천신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재천을 믿는 이가 만일 아들․딸을 낳으면 “비슬나천(毘瑟拏天)과 구폐라(矩陛羅) 등의 천신이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종류들은 인이 아닌데도 인이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그리고 유정의 수[有情數]는 저마다 따로따로의 업(業)으로, 유정이 아닌 수는 공업(共業)으로 나게 되는4)것이요 자재천 등의 삿된 인[邪因]으로 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면 계금취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
3) 계금취(戒禁取)라 함은 본래 외도(外道)가 고행(苦行) 등의 금계(禁戒)를 가지면서 내는 그릇된 견해인데 여기서는 삿된 인[邪因]을 바른 인[正因]이라고 고집하는 견해도 포함시키는 것이 본문(本文)의 논지(論旨)이다.
4) 불교에서는 온갖 생물[生物:有情數]이나 물기세계[物器世界:非有情數)가 다 같이 업(業)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다고 하며 그 중에서 유정의 수는 별업(別業)으로 나게 되고 유정이 아닌 세계는 공업(共業)으로 나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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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드러내는 것이니, 친정인(親正因)이 아닌 것을 집착하면서 친정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금취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헤아리는[非因計因] 것이요, 둘째는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헤아리는[非道計道] 것이니, 이 가운데서는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헤아리는 것만을 말하였다.
견고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고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견해는 견집(見集)에서 끊을 것이 아닌가?
[답] 과위[果]의 곳이 옮아갔기 때문이다.
[문]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면 역시 모든 법의 인도 비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 견해는 사견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는가?
[답] 행상(行相)에서까지 구름[轉]이 없다5) 하는 것을 사견이라 하는데 이것에는 행상의 구름이 있기 때문에 사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실제의 일을 파괴하면서 구르는 것을 사견이라 하는데 이것은 더욱더 불리면서 구르기 때문에 사견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만일 인이 없다고 부정하면 사견이라 하는데 이것은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헤아리기 때문에 사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바른 인이 아닌 것을 바른 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인을 인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答] 사견에 속하며 견집(見集)에서 끊어야 할 것이다.
[문] 무엇을 인이라 하는가?
[답] 업(業)과 번뇌 등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안팎의 일에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이라고 집착하
5) 사견(邪見)은 발무인과(撥無因果)이어서 처음부터 완전히 인과를 부정하면서 인(因)에 대한 행상(行相)조차도 없는 것을 행상조차 구름[轉]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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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답] 안팎의 연기의 법[緣起法]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외도는 ‘누가 하천과 바다를 팠고 누가 산과 언덕을 쌓은 것이며, 누가 가시나무 가시를 뾰족하게 했고, 누가 날짐승․길짐승을 구분해 놓았느냐? 이에 준하면 온갖 것은 모두가 인이 없으면서 생긴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게송으로 말한다.
누가 하천과 바다를 팠고 산과 언덕을 쌓았으며
누가 가시는 뾰족하게 했고 짐승을 구분한 것이냐?
세간에는 자재하게 짓는 이[能作者]가 없나니
그러므로 온갖 것은 인이 없는 줄 알라.
여기에서 사견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모든 법이 나게 된 원인[所從因]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견집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집제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인을 비방한[謗因] 사견은 견집에서 끊을 것이라 하면서 견온(見蘊)에서는 인을 비방한 사견을 견집과 견도에서 끊는다고 하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그러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여기서는 요의(了義)의 말이 아니지만 거기서는 요의의 말이요, 여기서는 그 밖의 다른 의취(意趣)가 있지만 거기서는 그 밖의 다른 의취가 없으며, 여기서의 말은 그 밖의 다른 연(緣)이 있지만 거기서의 말은 그 밖의 다른 연이 없고, 여기의 말은 세속(世俗)에 의하지만 거기의 말은 승의(勝義)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는 조그마한 부분의 인(因)을 말하지만 거기서는 온갖 것의 인을 말하고, 여기서는 오직 괴로움의 인만을 말하지만 거기서는 괴로움과 괴로움이 아닌 것의 인을 말하며, 여기서는 오직 뒤바뀐 인만을 말하지만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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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뒤바뀜과 뒤바뀐 것이 아닌 인을 말하며, 여기서는 오직 결과를 내는 인만을 말하지만 거기서는 결과를 내고 결과를 내지 않은 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원인[集]을 비방하는 사견은 인의 본체[體]가 없다고 부정하면서 또한 인의 뜻[義]도 부정하거니와 도(道)를 비방하는 사견은 오직 인의 본체만을 부정하면서 인의 뜻은 부정하지 않는다.
열반에는 인이 없다는 말은 바른 것이요 삿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직 인을 비방하는 사견만을 말하기 때문에 견집에서는 끊을 것이요 견도에서 끊을 것은 아니다.
[論] 있음[有]을 없다[無]라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答] 사견에 속한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만일 괴로움이 없다고 말하면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요, 만일 원인이 없다고 말하면 견집(見集)에서 끊을 것이며, 만일 사라짐이 없다고 말하면 견멸(見滅)에서 끊을 것이요, 만일 도가 없다고 말하면 견도(見道)에서 끊을 것이다.
[문] 무엇을 있다고 하는가?
[답]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이다.
[문] 무슨 연유로 외도는 네 가지의 진리를 없다고 부정하는가?
[답] 그들은 나가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네 가지의 진리를 없다고 부정한다. 그들은 “물질 등의 5온이 나이어서 괴로움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고제를 부정하고,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집제를 부정하며, “나는 항상 있는 것이어서 멸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멸제를 부정하고, “나에게는 대치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도제를 부정한다.
그러나 잘 설법하는 이는 “물질 등의 5온은 괴로운 것이어서 나가 아니다”라고 알면서 고제를 믿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하면서 집제를 믿으며, “이 괴로움은 멸할 수 있다” 하면서 멸제를 믿고, “괴로움에는 대치할 것이 있다” 하면서 도제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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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삿된 소견에 속한다 함은 그것의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실제를 존재하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없다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만일 도가 없다고 말하면 견도에서 끊을 것이라 함은 그것의 대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네 가지의 진리를 볼 때에 영원히 그것을 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은 줄 알 것이다.
이 가운데서 고제를 비방하는 것에는 두 가지의 비방이 있다. 첫째는 물질의 자체[物體]를 비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결과의 뜻[果義]을 비방하는 것이다. 집제를 비방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의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의 뜻[因義]을 비방하는 것이다. 멸제를 비방하는 것에는 오직 물질의 자체만을 비방하면서 결과의 뜻은 비방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역시 결과의 뜻도 비방한다”라고 말한다.
도제를 비방하는 것에는 오직 물질의 자체만을 비방하면서 원인의 뜻을 비방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역시 원인의 뜻도 비방한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역시 원인의 뜻도 비방한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또한 원인과 결과를 비방한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도제를 비방한다 함은 오직 작용만을 비방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사견은 허공(虛空)과 비택멸(非擇滅)을 반연하지 않는가?
[답] 만일 그 법이 온(蘊)이고 온의 원인[因]이며 온의 사라짐[滅]이고 온의 다스림[對治]이라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온도 아니고 온의 원인도 아니며 온의 사라짐도 아니고 온의 다스림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그 법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의 원인이며 괴로움의 사라짐이고 괴로움의 다스림이라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괴로움도 아니고 괴로움의 원인도 아니며 괴로움의 사라짐도 아니고 괴로움의 다스림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등처럼 질병[病]․종기[癰]․화살[箭]․번민[惱]․무거운 짐[重擔]과 그것의 원인 등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그 법이 잡염(雜染)이거나 청정(淸淨)한 일이라면 사견은 반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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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잡염이나 청정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그 법이 무루의 바른 견해의 소연(所緣)이라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무루의 바른 견해의 소연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무루의 바른 견해로 사견을 다스리는 것처럼 무루지(無漏智)․명(明)․결정(決定)․신(信) 등으로 지혜가 아닌[非智] 것 등을 다스리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그 법이 마치 이 언덕[彼岸]과 저 언덕[彼岸]과의 중류(中流)에 있는 배나 뗏목과 같다면 사견은 반연하겠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의 중류에 있는 배나 뗏목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그 법이 원인과 결과의 뜻이 있다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에는 원인․결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그 법이 기뻐하거나 싫증내는 일이라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기뻐하거나 싫증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그 법이 손해나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사견은 반연하지만 허공과 비택멸은 손해거나 이익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문] 허공과 비택멸을 없다고 부정하는 이는 어느 법을 반연하는가?
[답] 바로 허공과 비택멸의 이름을 반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고 부정하는 이는 깊고 중한 마음[深重心]이 없음이 잡염이나 청정한 일을 비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문] 이것은 어떤 지혜[智]인가?
[답] 이것은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修所斷]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삿된 행상[邪行相]의 지혜이다.
그리고 모든 있다[有]고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물(實物)로 있는 것[有]이니, 온(蘊)․계(界) 등이다. 둘째는 시설(施設)로서 있는 것이니, 남자․여자 등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상대(相待)로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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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것에 상대하기 때문에 있고 저것에 상대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화합(和合)으로서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일은 이곳에 있으면 있고 저곳에 있으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시분(時分)으로 있는 것이니, 이 시분에서는 있고 저 시분에서 없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만이 있는 것[名有]이니, 거북의 털․토끼의 뿔․허공의 꽃다발 등이다. 둘째는 실제로 있는 것[實有]이니, 온갖 법으로서 각각 자성(自性)에 머무른다. 셋째는 임시로 있는 것[假有]이니, 병의 옷[甁衣]․탈 것[車乘]․군사의 숲집[軍林舍] 등이다. 넷째는 화합하여 있는 것[和合有]이니, 모든 온(蘊)이 화합에서 보특가라를 시설한다. 다섯은 상대하여 있는 것[相待有]이니, 이 언덕과 저 언덕․길고 짧은
일 등이다”라고 말한다.
[論] 없는 것[無]을 있다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答] 이것은 견해가 아니며 바로 삿된 지혜[邪智]이다.
[문] 이것이 만일 견해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만일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견해라고 말하는가?
[답]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견해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유신견(有身見)에 속하며 견고에서 끊을 것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지혜[慧]는 5견에서 어느 견해에 속하며 어느 견에서 끊을 것인가? 이것은 견해가 아니며 바로 삿된 지혜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견해는 견해가 아니니, 5견에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어떤 이는 “마땅히 본문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답(問答)을 위해서요, 문답이 성립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이런 도리가 없다고 해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십문품(十門品)」에서 “3무루근(無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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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과 모든 무위의 법[無爲法]은 몇 가지의 수면(隨眠)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가?”라고 묻자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은 없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으니,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문] 이 삿된 지혜란 무엇인가?
[답] 이것은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것 중에서 무부무기의 삿된 행상의 지혜이다. 마치 나무 등걸에 대하여 사람이라는 생각을 일으킴과 사람에 대하여 나무 등걸이라는 생각을 일으킴과 같고, 도가 아닌 것[非道]에 대하여 도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도에 대하여 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러한 것들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삿된 지혜에는 역시 오염(汚染)이 있어서 만(慢)의 종류를 일으키는 것이니, 범왕(梵王)이 여기에 머무르면서 ‘나는 대범(大梵)이어서 모든 범(梵)들 가운데서 높은 이이며 나는 세간을 잘 조화(造化)하고 잘 내며 세간의 아버지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이런 말은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견(見)에서 끊어야 될 마음에는 신업(身業)․어업(語業)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앞의 말[前說]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이것은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 가운데 무부무기의 삿된 행상의 지혜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지온(智蘊)에서 말한 것은 어떻게 회통해야 되겠는가? 예컨대 지온에서 “어떤 것이 삿된 지혜인가? 오염된 지혜[汚染慧]이다”라고 말하였다.
[답] 삿된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염된 것[汚染]이요, 둘째는 오염되지 않은 것[不汚染]이다. 오염된 것이라 함은 무명(無明)과 상응하는 것이며, 오염되지 않은 것이라 함은 무명과 상응하지 않은 것이니, 마치 나무 등걸에 대하여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은 것 등이다.
오염된 것은 성문이나 독각이 다 같이 끊어 다하면서 또한 현행(現行)하지도 않고, 오염되지 않은 것은 성문이나 독각이 비록 끊어 다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현행한다. 오직 여래만이 마침내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번뇌와 습기(習氣)를 다 같이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유독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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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평등하게 깨달은 분[正等覺者]이라 일컫는다.
오염되어 삿된 지혜는 승의(勝義)를 말미암는 까닭으로 삿된 지혜라 한다. 오염되지 않은 것은 세속(世俗)을 말미암는 까닭으로 삿된 지혜라고 이름할 수가 있으나 승의를 말미암아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번뇌의 삿된 법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의 지온(智蘊)에서 말한 삿된 지혜는 바로 승의의 것이고 지금은 세속으로 말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2) 지납식(智納息)①
[論] 혹시 한 지혜[一智]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한 뜻은 이미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은 자성(自性)을 분명히 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지혜[智] 등을 확실히 아는 것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와 남[自他]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마치 등불이 잘 비추는[能照] 것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비출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심․심소의 법은 상응(相應)을 분명히 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법밀부(法密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지혜[慧] 등은 상응한 느낌[受] 등을 분명히 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심․심소의 법은 구유(俱有)를 분명히 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화지부(化地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한꺼번에 생긴다. 첫째는 상응한 것[相應]이요, 둘째는 상응하지 않은 것[不相應]이다. 상응한 지혜는 상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상응하지 않는 지혜는 상응하는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보특가라는 모든 법을 분명히 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
자부(犢子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보특가라가 아는[能知] 것이요 지혜가 아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다른 종의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신이 말한 “모든 심․심소는 자성과 상응과 구유를 알지 못하며 보특가라는 성품을 얻을 수 없다” 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
또 다른 이를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도 모든 법상(法相)은 도리로 보아서 마땅히 분별하여 유정들을 이롭게 해야 되므로 이것을 논한다.
[論] 혹시 한 지혜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
[答] 없다.
[문] 만일 이 지혜가 온갖 법은 나가 아님[非我]을 낸다 하면 이 지혜는 무엇을 모르는가?
[답] 자성 그리고 이것과 상응하고 구유하는 모든 법을 모른다.
여기에서 자성을 모른다 함은 대중부의 집착을 중지시키는 것이고, 상응하는 모든 법을 모른다 함은 법밀부의 집착을 중지시키는 것이며, 구유의 모든 법을 모른다 함은 화지부의 집착을 중지시키는 것이고, 지혜는 능히 아는 것이라는 말은 독자부의 집착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또 이 가운데서는 질문[問]이 있고 대답[答]이 있으며 문난[難]이 있고 허통[通]이 있다. “혹시 한 지혜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라고 한 것은 질문이요, “없다”고 하는 것은 대답이며, “만일 이 지혜가 온갖 법은 나가 아님을 내면 이 지혜는 무엇을 모르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은 문난이요, “자성 그리고 이것과 상응하고 구유하는 모든 법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은 회통이다.
[문] 여기에서 누가 묻고 누가 대답하며 누가 문난하고 누가 회통하는가?
[답] 분별론자(分別論者)가 묻고 응리론자(應理論者)가 대답하며 분별론자가 문난하고 응리론자가 회통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제자가 묻고 스승이 대답하며 제자가 문난하고 스승이 회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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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따로 문난한 이를 나타낸 것이 없고 다만 본론사(本論師)가 법상을 분별하기 위하여 가설로 빈객[賓]과 주인[主]을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한 지혜[一智]라 함은 한 찰나 동안의 지혜이니, 이로 말미암아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의 모든 법을 모르는 것이다.
만일 이런 질문을 10지(智)에서 “혹시 한 지혜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마땅히 “있다”고 대답해야 하리니, 세속지(世俗智)이다.
이와 같은 질문을 9․8․7․6․5․4․3․2 지(智)에서 “혹시 한 지혜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고 한다면 “있다”고 대답해야 하리니, 세속지이다.
만일 이 세속지에서 “혹시 두 찰나[二刹那] 동안에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고 한다면 “있다”고 대답하리니, 이 지혜의 첫 찰나 동안에 그의 자성․상응․구유를 제외한 그 밖의 모두는 알 수 있으며, 제이의 찰나에도 앞의 자성․상응․구유의 법을 알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것이나 지금 여기서는 오직 한 찰나 동안의 지혜만을 물었기 때문에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문] 무슨 연유로 자성은 자성을 모르는가?
[답] 인(因)과 과(果)․능작(能作)과 소작(所作)․능성(能成)과 소성(所成)․능인(能引)과 소인(所引)․능생(能生)과 소생(所生)․능속(能屬)과 소속(所屬)․능전(能轉)과 소전(所轉)․능상(能相)과 소상(所相)․능각(能覺)과 소각(所覺)에서 차별이 없는 허물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자성은 자성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보탬도 없고 덞도 없으며 기름[養]도 없고 해침도 없으며 성립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증가도 없고 감소도 없으며 모임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인(因)도 없고 등무간(等無間)도 없으며 소연(所緣)도 없고 증상(增上)도 없어서 모든 법의 자성은 자성을 관하지 않으며 다만 타성(他性)에 대해서만이 모든 연(緣)을 지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자성은 자성을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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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세간에서 현실을 보면 손가락 끝은 스스로를 닿지 못하고 칼날은 스스로를 베지 못하며 눈동자는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장사는 스스로를 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은 자성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무엇 때문에 자성은 자성을 알지 못하는가? 자성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세존께서는 두 가지의 반연[緣]으로 6식(識)을 내는 이를테면 “눈[眼]과 빛깔[色]이 반연이 되어 안식(眼識)을 내고 나아가 뜻[意]과 법(法)이 반연이 되어 의식(意識)을 낸다”고 하는 것을 벌여 세우지 않으셨어야 한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세존께서는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觸]이 있다 하는 이를테면 “눈과 빛깔이 반연이 되어 안식을 내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는 것을 벌여 세우지 않으셨어야 한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면 세존께서는 사견을 벌여 세우지 않으셨어야 하리니, 이를테면 그 사견이 만일 스스로 ‘나는 사견이다’라는 것을 알면 바른 소견이 될 것이다. 마치 “사견이 만일 스스로가 사견이라고 관한다면 바른 소견이라고 해야 되며 사견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나쁜 마음이 몸에 두루하여 이것은 모두 착하지 않다” 함을 세우지 않으셨어야 하리니, 자체를 분명히 알면 삿된 데에 치우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능지(能智)와 소지(所智)․능각(能覺)과 소각(所覺)․경(境)과 유경(有境)․행상(行相)과 소연(所緣)․근(根)과 근의 뜻[根義] 등을 건립하지 않으셨어야 한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4념주(念住)에 차별이 없어야 하니 신념주(身念住)가 법념주(法念住)요 나아가 심념주(心念住)가 법념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4성제(聖諦)의 지혜에 차별이 없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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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니, 고지(苦智)가 도지(道智)요, 나아가 멸지(滅智)가 도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숙주수념지(宿住隨念智)는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야 하리니, 그것은 현재 세상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 하면 타심지(他心智)는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야 하리니, 그것도 자기의 심소(心所)를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이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안다면 타성(他性)은 알지 못해야 하리, 자성에 옮아갔기 때문이다. 만일 자성이 타성을 안다면 마땅히 자성은 알지 못해야 하리니 타성에 옮아갔기 때문이다.
만일 자성과 타성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 아는 것인가? 마치 자성이 자성을 아는 것처럼 타성을 아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 마치 타성이 타성을 아는 것처럼 자성을 아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
만일 자성이 자성을 아는 것처럼 타성을 아는 것도 그렇다면 자성이 자성을 아는 것은 바른 것[正]이어야 하고 타성이 자성을 아는 것은 삿된 것[邪]이어야 한다.
만일 타성이 타성을 아는 것처럼 자성을 아는 것도 그렇다면 타성이 타성을 아는 것은 바른 것이어야 하고 자성이 타성을 아는 것은 마땅히 삿된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삿되고 바른 두 지혜의 체(體)와 상(相)의 차별은 없어야 한다.
만일 일시에 자성이 자성인 줄 알거나 타성이 타성인 줄 안다면 하나의 지혜에 두 개를 이해[解]하는 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해하는 작용이 따로따로이기 때문에 본체도 구별되어야 한다. 본체가 이미 저마다 다르다면 하나의 지혜가 아니어야 하니, 한 유정의 몸에 두 지혜가 나란히 일어난다는 것은 바른 도리가 아니다.
이러한 허물은 가지지 말 것이니, 이 때문에 자성은 자성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그렇다면 대중부(大衆部)에서 말한 비유는 어떻게 회통해야 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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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답] 반드시 회통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소달람․비나야․아비달마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세속에서 나타난 비유로써 성현의 법을 따질 수는 없다. 성현의 법이 다르고 세속의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반드시 회통해야 하겠다면 비유의 잘못을 말해야 한다. 비유에 이미 잘못이 있다면 비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등불에는 감관[根]도 없고 연려(緣慮)도 없으며 유정의 수(數)가 아닌 것처럼 지혜도 그러해야 한다. 마치 등불은 물질의 극미(極微)로 이루어진 것처럼 지혜도 그러해야 되는데 이미 그와 같지 않거늘 어떻게 비유가 되겠는가.
또 그는 등불이 비춤의 성품[照性]임을 인정하는가? 만일 그것이 비춤의 성품이라면 다시 무엇을 비추어야 하며 만일 비춤의 성품이 아니라면 자체는 어두워야 하고 등불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을 깨뜨리는 것은 등불이라 하거늘 어찌 비춤의 성품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등불은 자신을 비춘다고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말미암아 그 비유한 것은 역시 성립될 수 없다.
[문] 어떤 연유로 상응(相應)의 모든 법을 알지 못하는가?
[답] 동일한 소연(所緣)이 때를 같이하면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유정의 심․심소의 법은 한 경계에 대하여 때를 같이하면서 구르기는 하되 이치로 보아서 차츰차츰 서로가 반연한다는 뜻은 없다.
비유하면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혹은 똑같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혹은 함께 허공을 쳐다보되 이치로 보아서 반드시 서로서로가 얼굴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심․심소의 법도 그와 같다.
만일 지혜가 상응하는 느낌을 알 수 있다면 그 느낌은 자체를 반연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자체를 반연한다 하면 앞에서 말한 자성을 반연한다는 허물이 있게 되며, 만일 반연하지 않는다면 심․심소는 때를 같이하여 일어나면서도 소연을 같이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런 허물은 가지지 말 것이니, 그러므로 상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문] 어떤 연유로 구유(俱有)한 모든 법을 알지 못하는가?
[답] 서로 극히 가깝기 때문이다. 마치 산가지로 안선나약(安繕那藥)6)을 찍
6) 일종의 안약(眼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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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눈 속에다 넣으면 서로 너무 가깝기 때문에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어떤 것을 구유한 모든 법이라 하는가?
[답] 이것에 따라 구르는[隨轉] 색(色)과 이것에 따라 구르는 불상응행(不相應行)이다.
서방(西方)의 여러 논사들은 “혜(慧)와 함께 생기는 모든 온(蘊)의 상속으로서 자기 몸에 속하는 것이 구유의 법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설은 도리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안식(眼識)은 자기 몸의 모든 물질을 취할 수 없어야 하며 그 밖의 식(識)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섯 가지 식[五識]은 자기 몸 안의 경계를 취할 수 있지만 의식(意識)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은 온갖 경계를 취할 수 없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또 그 밖의 다른 허물이 있다. 고법지인(苦法智忍)은 자기 몸과 함께 생긴 모든 온의 상속을 현관(現觀)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스스로의 진리[自諦]의 경계에 대하여 조그마한 부분만이 현관하게 된다.
그들은 “고법지인이 스스로의 진리의 경계에 대하여 조그마한 부분의 현관을 한다 하여 역시 잘못은 없으니, 왜냐하면 고법지(苦法智)가 생기면서 모조리 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도법지인(道法智忍)이 스스로의 진리의 경계에 대하여 비록 조그마한 부분만을 현관한다 하더라도 잘못이 없는 것과 같으니, 도법지(道法智)가 생기면서 모조리 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고(苦)와 도(道)에서의 현관의 뜻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계의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낱낱의 사견은 통틀어 온갖 법지품의 도[一切法智品道]를 비방하는데 도법지인은 가령 오직 하나의 법지품의 도에서만 현관을 얻는다 해도 통틀어 비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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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견을 끊을 수 있거늘 하물며 자성과 상응과 구유를 제외한 그 밖의 살가야견이 5취온에 대하여 나와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혹은 통틀어 혹은 따로따로 아울러 현관하겠는가?
고법지인이 만일 스스로의 진리에 대하여 모조리 현관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따로 반연하는 살가야견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그 집착하는 경계를 끊지도 않고 현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살가야견을 만일 끊거나 다하지 못하면 그것을 우두머리로 삼는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모든 그 밖의 번뇌도 끊지 못해야 되니, 만일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진리에 대하여 참으로 현관을 얻었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괴로움의 진리에서 현관을 얻지 못하면 원인․사라짐․도에 있어서도 얻지 못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의 해탈이 없게 된다. 이런 허물은 가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고법지인은 자신과 함께 생긴 모든 법을 관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 만일 그렇다면 앞 본론(本論)의 말과도 서로 어긋난다. 예컨대 “만일 이 법을 반연하면서 고법지인을 일으킨다면 이 법을 반연하면서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라고 말하였다.
세제일법이 이미 통틀어 욕계의 5온을 반연하게 되거늘 고법지인으로 어찌하여 할 수 없겠는가? 이 때문에 앞의 설[前說]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보특가라는 어떤 연유로 알지 못하는가?
[답] 그것은 토끼 뿔과 같아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온갖 법은 나[我]와 유정(有情)과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명자(命者)․생자(生者)․능양육자(能養育者)․작자(作者)․수자(受者)가 없으며 오직 공행의 무더기[空行聚]일 뿐이기 때문에 보특가라는 모든 법을 모른다.
[論] 혹시 한 식[一識]이면서 온갖 법을 명확히 아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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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식(識)은 곧 지(智)여서 오직 한 글자인 비(毘)자를 길게 할 뿐이다”7)라고 집착한다. 그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식과 지는 그 체성이 각각 다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지와 상응한 식”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여섯 가지 식에는 따로따로의 소연(所緣)이 있다.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의 소연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의식은 다만 법처(法處)만을 반연할 뿐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의식은 12처(處)를 다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모든 것은 의식의 소연이다”고 하였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온갖 법을 반연하나 식은 그럴 수가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식과 지는 다 같이 온갖 법을 통틀어 따로따로 다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반연하나 식은 오직 자상만을 반연한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두 개의 모양을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동분(同分)과 부동분(不同分)의 경계8)를 반연하나 식은 오직 동분의 경계만을 반연한다’라고 고집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두 개의 분을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3세(世)의 경계와 세상 아닌 경계[非世境]9)까지 반연하나 식은 오직 현재의 경계만을 반연한다”라고 고집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3세와 세상의 경계가 아닌 것까지 반연한다
7) 식(識)은 범어로 Vijnāna라 하고 지(智)는 범어로 Jnāna라고 비(毘:Vi)자만이 다를 뿐이다.
8) 동분(同分)이란 많은 것 가운데서 공동한 부분이란 뜻이어서 서로 비슷하고 서로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분의 경계[境]라 함은 주관(主觀)과 그 성질을 같이하는 예를 들면 주관이 유루(有漏)이면 객관(客觀)도 유루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리키며, 부동분(不同分)의 경계라 함은 주관과 그의 성질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9) 세상 아닌 경계[非世境]와 온이 아니라[非蘊] 함은 무위의 법[無爲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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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혜는 5온과 온(蘊)의 경계가 아닌 것까지 공통하게 반연하나 식은 오직 색온만을 반연한다”라고 고집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5온과 온의 경계가 아닌 것까지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스스로의 상속[自相續]과 다른 상속[他相續]을 반연하나 식은 오직 스스로의 상속만을 반연한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자타(自他)를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내처(內處)와 외처(外處)를 반연하나 식은 오직 외처만을 반연한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다 같이 안팎을 반연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유루와 무루를 반연하나 식은 오직 유루만을 반연한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두 가지를 다 같이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유위와 무위를 반연하나 식은 오직 유위만을 반연한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두 가지를 다 같이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는 오직 도지(道支)10)일 뿐이요 식은 오직 유지(有支)일 뿐이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독자부(犢子部)에서 “계경에서는 ‘정견(正見)은 도지이니 행(行)은 식(識)에 반연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두 가지 갈래[二支]에 다 같이 통하지만 다만 강한 것에 따라 말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와 식은 함께하지 않는다”라고 집착하니, 마치 비유자(譬喩者)에서와 같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지와 식은 때를 같이하며 생김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10) 도지(道支)는 8성도지(聖道支)며 유지(有支)는 12유지이니, 곧 12인연법(因緣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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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지(智)의 뒤에 식(識)을 말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이것은 경론(經論)의 구법(舊法)이니, 계경에 ‘마하구슬치라(摩訶俱瑟恥羅) 존자가 사리자(舍利子) 존자에게로 가서 먼저 지(智)는 무엇 때문에 지라 합니까?’라고 묻고는 그 뒤에 식(識)은 무엇 때문에 식이라 합니까?라고 묻자, 사리자는 능히 알기[能知] 때문에 지라 하고, 명확히 알기[能了] 때문에 식이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도 먼저 아는 것[所知]을 말했고 뒤에 식별하는 것[所識]을 말했으며 먼저 지의 문[智門]을 말했고 뒤에 식의 문[識門]을 말했다.
달마난제(達磨難提)도 “만일 이곳에 대하여 지와 식을 굴리면 반드시 뛰어난 일이 이룩됨이 있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지의 뒤에 식을 말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들은 다 같이 근본의 법이기 때문이니, 온갖 청정품(淸淨品) 안에서 지를 근본으로 삼고 온갖 잡염품(雜念品) 안에서 식을 근본으로 삼는다. 청정품이 보다 뛰어난 것이므로 지를 먼저 말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들은 다 같이 우두머리의 법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 ‘명(明)이 우두머리가 되어 한량없는 착한 법이 모두 생장하게 되고 식(識)이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잡염의 법이 모두 생장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모든 착한 법이 보다 뛰어난 것이므로 지를 먼저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들은 다 같이 의지하며 나아갈[依趣]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 ‘마땅히 지에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요 식에 의지하며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의근은 다섯 감관[五根]이 저마다 따로따로 행할 것[所行]과 저마다 따로따로의 경계를 행할 것의 경계에서 다 함께 받아들인다. 의근은 모두가 그것에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지만 지에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보다 뛰어난 것이므로 먼저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들은 다 같이 소연이 있기 때문이다. 12처(處) 가운데에는 두 가지의 소연이 있으니,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다. 이 가운데에서는 지를 말하여 곧 통틀어 소연이 있는 법처를 드러내고 식을 말하여 곧 의처와 법처의 법이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에서 심․심소의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일 지를 말하면 모든 심소의 법을 통틀어 드러내는 것이요, 만일 식을 말하면 심․심소의 법이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다”라고 말한다.
[論] 혹시 한 식이면서 온갖 법을 명확히 아는 것이 있는가?
[答] 없다.
[문] 만일 이 식이 온갖 법이 나 아님[非我]을 내면 이 식은 무엇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가?
[답] 자성(自性)과 이것에 상응(相應)․구유(俱有)하는 식법(識法)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타파[破]와 고집[執]․질문[問]과 대답[答]․문난[難]과 회통[通]․본문(本文)의 해석 등은 앞의 것에 준하여 말해야 된다.
[문] 여기에서 말한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은 어느 계경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 있는 것을 아는가?
[답] 예컨대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어느 때에 지혜[慧]로써
온갖 법은 나 아님을 관하면
그때에 괴로움을 싫어하게 되니
이 도(道)는 청정하게 되느니라.
이 계경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 있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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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경은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신 것인가? 고제(苦諦)를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신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다시 그때에 괴로움을 싫어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만일 고제를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온갖 법은 나 아님을 관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어떤 이는 “이 경 가운데에서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또 그때에 괴로움을 싫어한다고 말하는가?
[답] 이 게송에서 앞의 반[前半]은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셨고 뒤의 반[後半]은 고제를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앞의 반은 수관일 때[修觀時]를 말씀하셨고 뒤의 반은 현관일 때[現觀時]11)를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의 반은 문소성혜(聞所成慧)․사소성혜(思所成慧)․수소성혜(修所成慧)를 말씀하셨고 뒤의 반은 수소성혜만을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의 반은 유루(有漏)의 지혜를 말씀하셨고 뒤의 반은 무루의 지혜를 말씀하셨다. 유루와 무루에서처럼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유미(有味)와 무미(無味)․탐기의(耽嗜依)와 출리의(出離依)․타계(墮界)와 불타계(不墮界)․순취(順取)와 불순취(不順取)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의 반은 같은 모양의 작의[同相作意]를 말씀하셨고 뒤의 반은 다른 모양의 작의[別相作意]를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경은 다만 고제를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만을 말씀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온갖 법은 나가 아님을 관한다고 말하는가?
11) 수관(修觀)이라 함은 수도(修道)에서의 4제관(諦觀)을 말하고, 현관(現觀)이라 함은 견도(見道)에서의 4제의 현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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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온갖 것[一切]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온갖 것 중의 온갖 것과 조그마한 부분[少分]의 온갖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조그마한 부분의 온갖 것만을 말한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조그마한 부분의 온갖 것을 말한다. 예컨대 세존께서 “온갖 것은 치연(熾然)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무루의 법에는 치연하다는 뜻은 없다. 여기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에서는 비록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을 말하지 않았어도 그 밖의 다른 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니, 예컨대 세존께서는 “온갖 행(行)은 무상(無常)하고 온갖 법은 무아(無我)이며 열반은 고요하다[寂靜]”라고 말씀하셨다.
[評] 경에 증거가 있거나 경에 증거가 없거나 간에 결정코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은 있다. 유가사(瑜伽師)는 관을 닦는 자리[修觀位]에서 이런 행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말한 것이다.
[문] 또한 공한 행상[空行相]도 있어서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거늘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나 아님의 행상은 그 뜻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공의 행상의 뜻은 결정되지 않았으니, 온갖 법은 있다[有]는 뜻 때문이요, 공은 타성(他性)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요,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요, 불공(不空)은 자성(自性)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나 아님의 행상은 결정되지 않음이 없으니, 자타(自他)를 기준으로 하여도 다 같이 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를 말미암아 세우(世友) 존자는 “나는 결정코 모든 법이 공하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결정코 온갖 법은 무아(無我)라고는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나 아님의 행상과 공의 행상이 다 같이 온갖 법을 반연한다고 하면 이 두 가지 행상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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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나 아님의 행상은 아견(我見)을 다스리고 공의 행상은 아소견(我所見)을 다스린다. 아견과 아소견을 다스리는 것처럼 이미 봄[已見]과 이미 보았던 것[已所見]․다섯 가지의 아견[五我見]과 열다섯 가지의 아소견[十五我所見]12)․나의 행상과 내 것의 행상․나라는 집착[我執]과 내 것이라는 집착[我所執]․나라는 욕망[我愛]과 내 것이라는 욕망[我所愛]․나라는 어리석음[我愚]과 내 것이라는 어리석음[我所愚]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온(蘊)이 나 아님을 관하는 것은 나 아님의 행상이며 온 가운데[蘊中]에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은 공의 행상이다. 온이 나 아님과 온 가운데에 나가 없음을 관한 것처럼 계(界)와 계 가운데[界中]를 관하고 처(處)와 처 가운데[處中]를 관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있는 것이 아닌 것[非有]에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것은 나 아님의 행상이며 있는 것[有]에 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것은 공의 행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없는 것[無]에 대하여 없다고 관하는 것은 나 아님의 행상이며 있는 것[有]에 대하여 없다고 관하는 것은 공의 행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자성(自性)의 공을 관하는 것은 나 아님의 행상이며 행할 공을 관하는 것은 공의 행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자체[體]가 자재하지 않음[不自在]을 관하는 것은 나 아님의 행상이요 안[內]에는 사부가 없다[無士夫]고 관하는 것은 공의 행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두 가지 행상의 차별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非我行相]은 온갖 법을 반연하고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13)은 오직 고제만을 반연하는가?
12) 다섯 가지의 아견[五我見]이라 함은 5온(蘊)의 하나하나에 나[我]를 고집하는 것이며 열다섯 가지의 아소견[十五我所見]이라 함은 ‘물질[色]이 나요, 나는 물질 안에 있으며 물질은 나 안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세 가지의 소견[三見]을 5온의 모두에 적용하는 것이므로 열다섯 가지의 아소견이라 한다.
13) 유루(有漏)의 나 아님의 행상[非我行相]이란 5정심(停心) 나아가 4종 결택분(決擇分)에서의 나 아님의 행상이요, 무루(無漏)의 나 아님의 행상이란 견도(見道)의 고제관(苦諦觀)에서의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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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번뇌를 다스리는[對治]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만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번뇌를 다스리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 온갖 법은 번뇌의 성품을 좇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뒤바뀜[顚倒]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나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뒤바뀜을 다스리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 온갖 법은 뒤바뀜의 성품을 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분제가 없는 연[無分齊緣]이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나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분제가 있는 연[有分齊緣]14)이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는다. 아견(我見)의 경계를 반연하면서 나가 아님을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관(觀)을 닦을 때에 승(勝)하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게 되나니, 관을 닦을 때에 온갖 법을 반연하면서 나가 아님을 삼기 때문이다.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현관(現觀)할 때에 뛰어나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지 않는 것이니 현관할 때에는 다만 고제만을 반연하며 나가 아님을 삼기 때문이다. 현관하는 자리에서는 진리를 따로따로 관하기[別觀]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온갖 법을 반연하지만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다만 고제만을 반연할 뿐이다.
[문]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도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없는 것은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와의 모든 법을 반연할 수 없기 때문이거늘 어찌하여 무루에서는 온갖 법을 반연한다고 말하는가?
[답] 많은 부분[多分]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이를테면 반
14) 분제가 없는 연[無分齊緣]이라 함은 보편적인 온갖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요, 분제가 있는 연[有分齊緣]이라 함은 한두 가지의 대경(對境)을 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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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는 것은 마치 대지(大地)와 4대해(大海)의 물과 소미로산(蘇迷盧山)과 큰 허공같은 분량이지만 반연하지 않는 것은 마치 겨자씨나 큰 바다의 한 방울 물이나 묘고산(妙高山)의 한 티끌이나 허공의 모기만한 것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어떤 이는 “이 유루의 나 아닌 행상은 두 찰나[二刹那] 동안에 온갖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만 무루의 나 아닌 행상은 비록 많은 찰나 동안이라도 온갖 법을 모조리 반연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루의 나 아닌 행상은 한 찰나 동안에 역시 온갖 해야 할 것을 반연하면서 법의 자성과 상응과 구유의 모든 법을 반연하는 데는 소연(所緣)이 아니기 때문에 책망하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비록 온갖 법은 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도 뒤바뀐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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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②
[문]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非我行相]의 자체(自體)는 무엇인가?
[답] 지혜[慧]를 자체로 삼는다. 자체에서처럼 아물(我物)과 상분(相分)과 자성(自性)도 그와 같다. 이미 자체를 말하였으므로 이제는 그 까닭을 말해야겠다.
[문]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라 하는가?
[답] 이 지혜의 행(行)은 온갖 법에서 나 아님의 모양[相]을 일으키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라 한다.
세계[界]의 편에서 보면 이 행상은 오직 욕계와 색계에서 뿐이다. 무색계 가운데에도 이런 행상은 역시 있으나 온갖 법을 반연할 수가 없다. 뒤에서 자세히 해설할 것이다.
자리[地]의 편에서 보면 이 행상은 일곱 자리[七地]에 있다. 이를테면 욕계와 미지정(未至定)과 정려 중간과 근본(根本) 4정려(靜慮)이다. 이것은 통틀어 말한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 말한다면 문소성혜(問所成慧)는 오직 다섯 자리[五地]에만 있을 뿐이니, 욕계와 4정려이다. 사소성혜(思所成慧)는 욕계에만 있으며 수소성혜(修所成慧)는 오직 여섯 자리[六地]에만 있을 뿐이니, 앞에서 말한 일곱 자리 가운데서 욕계가 제외된다.
4무색지(無色地)에도 이 행상은 있으나 온갖 법을 반연하지 못한다.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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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면 공무변처(空無邊處)의 나 아님의 행상은 4무색과 그것의 원인[因]과 그것의 사라짐[滅]과 온갖 유지품의 도[類智品道]와 4무색의 비택멸(非擇滅)과 온갖 유지품의 도의 비택멸과 아울러 온갖 허공무위(虛空無爲)를 반연하되, 혹은 이것이 한 물건[一物]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고 혹은 이것이 여러 물건[多物]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면서 이 행상은 모조리 그것을 반연한다.
식무변처(識無邊處)의 나 아님의 행상은 위의 3무색과 그것의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온갖 유지품의 도와 위의 3무색의 비택멸과 온갖 유지품의 도와 비택멸과 아울러 온갖 허공무위를 반연하되 혹은 이것이 한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고 혹은 이것이 여러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면서 이 행상은 모조리 그것을 반연한다.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나 아님의 행상은 위의 2무색과 그것의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온갖 유지품의 도와 위의 2무색의 비택멸과 온갖 유지품의 도의 비택멸과 아울러 온갖 허공무위를 반연하되 혹은 이것이 한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고 혹은 이것이 여러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면서 이 행상은 모조리 그것을 반연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나 아님의 행상은 비상비비상처와 그것의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온갖 유지품의 도와 비상비비상처의 비택멸과 온갖 유지품의 도의 비택멸과 아울러 온갖 허공무위를 반연하되 혹은 이것이 한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고 혹은 이것이 여러 물건이 되게 하려 하기도 하면서 이 행상은 모조리 그것을 반연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공무변처의 나 아님의 행상은 다섯 자리[五地]의 비택멸을 반연한다. 이를테면 4무색과 제4 정려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비상비비상처의 나 아님의 행상은 두 자리[二地]의 비택멸을 반연한다. 그 자기 자리[自地]와 무소유처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한다.
[評] 여기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이 좋은 줄 알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색지(無色地)에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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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그 자리[地] 안에 순결택분(順決擇分)과 그 가행(加行)과 비슷한 선근이 있으면 그 자리에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지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없다.
어떤 이는 “만일 그 자리 안에 행제(行諦)의 선근1)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는 이와 같은 행상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지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그 자리 안에 현관(現觀) 변(邊)의 세속지(世俗智)2)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는 이와 같은 행상이 있을 수 있으나 무색지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그 자리 안에 견도(見道)와 견도 가행이 있다면 이와 같은 행상이 있으나 무색지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그 자리에 관(觀)이 뛰어나면 이런 행상이 있으나 무색지에서는 지(止)가 수승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없다”고 말한다.
소의(所依)의 쪽에서 보면 이 나 아님의 행상3)은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며, 처음 일어나는 것은 욕계의 몸에 의지한다.
행상(行相) 쪽에서 보면 나 아님의 행상을 짓는 것이요, 소연(所緣) 쪽에서 보면 온갖 법을 반연하는 것이며, 염주(念住) 쪽에서 보면 뒤섞여 반연하는 법념주요, 지(智) 쪽에서 보면 바로 세속지(世俗智)이며, 삼마지(三摩地)와 함께하는 쪽에서 보면 삼마지와는 함께하는 것이 아니요, 근(根)과 상응한 쪽에서 보면 세 가지의 근과 상응한 것이니, 낙근(樂根)․희근(喜根)․사근(捨根)이다.
1) 행제(行諦)의 선근(善根)이라 함은 4제(諦)를 행관(行觀)하는 선근의 뜻이다.
2) 현관(現觀) 변(邊)의 세속지(世俗智)라 함은 고(苦)․집(集)․멸(滅)의 삼유지(三類智)를 닦을 때에 미래수(未來修)로서 그 각각의 제현관(諦現觀)의 후변(後邊)에 대하여 겸하여 닦는 세속지를 말한다. 곧 무루지(無漏智)의 뒤에 유루의 6행관(行觀)에 의하여 세 가지 진리를 관찰함으로써 그 관지(觀智)를 깊고 강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속지를 닦는 것이다.(도류지(道類智)의 후변에서는 세속지를 닦지 않는다. 『구사론(俱舍論)』 제26권 참
조)
3) 온갖 법의 비아(非我)의 행상(行相)은 관(觀)에 속하며 지(止)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삼마지(三摩地)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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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역시 선(善)의 우근(憂根)도 있어 온갖 법을 반연하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이 행상은 그것과 상응한 것이 아닌가?
[답] 서로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니, 여기서 기쁨[歡]의 행상이 구르면 저기서는 근심[慼]의 행상이 구르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세상[世]에서 보면 이 행상은 3세(世)에 떨어지며 3세와 세상 여읨[離世]을 반연한다.
선(善)․불선(不善)․무기(無記)에서 보면 선이면서 세 가지를 반연하는 것이요, 삼계계(三界繫)와 불계(不繫)에서 보면 욕계계와 색계계이면서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학(學)․무학(無學)․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서 보면 비학비무학이면서 세 가지를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지 않을 것[不斷]에서 보면 수도에서 끊을 것으로 세 가지를 반연하는 것이요, 이름[名]을 반연하고 뜻[義]을 반연하는 것에서 보면 이름과 뜻을 다 함께 반연하는 것이며, 자상속(自相續)과 타상속(他相續)과 상속이 아닌 것[非相續]에 반연한 것에서 보면 세 가지를 다 함께 반연한다.
문(聞)․사(思)․수소성(修所成)에서 보면 세 가지에 다 통하는 것이며, 가행득(加行得)․이염득(離染得)․생득(生得)에서 보면 세 가지에 다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통틀어 말하는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 말하면 욕계는 문소성․사소성의 나 아님의 행상이면서 오직 가행득일 뿐이요, 색계는 문소성의 나 아님의 행상이면서 가행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생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찌하여 가행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 세간에서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하여 잘 닦아 익힌 이는 거기에 나면서 곧 얻지만 만일 그렇지 못한 이는 거기에 나도 얻지 못한다.
어찌하여 생득이라 말할 수 있는가? 비록 이 세간에서 잘 닦아 익힌 뒤라 할지라도 만일 아직 그곳에 나지 못하면 끝내 얻을 수 없으며 그곳에 나야 비로소 얻게 된다. 그 문소성의 나 아님의 행상은 반드시 이 세간에서 닦은 가행에 의지하여 그곳에 나면서 얻게 되기 때문이다.
색계의 수소성의 나 아님의 행상은 가행득과 이염득이면서 또한 그것은
생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 만일 욕계에서 죽어 제2 정려에 나고 제2 정려에서 죽어 초정려에 나면 그는 초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얻는 것인가?
[답] 만일 먼저 잘 닦은 이면 얻게 되나 그렇지 않은 이면 얻지 못한다. 나아가 제4 정려에 나는 것도 그러하다.
[문] 만일 욕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나고 무색계에서 죽어 초정려에 나면 그는 초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얻는 것인가?
어떤 이는 “얻지 못하니, 극히 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먼저 잘 닦아 익힌 이면 얻게 되나 그렇지 않은 이면 얻지 못한다. 나아가 제4 정려에 나는 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문]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 제2 정려에 나고 제2 정려에서 죽어 초정려에 나면 그는 초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얻는 것인가?
[답] 만일 먼저 잘 닦아 익힌 이면 얻게 되나 그렇지 않은 이면 얻지 못한다. 그 밖의 다른 자리에 나는 것도 그러하다.
[문] 어떠한 보특가라가 이 행상을 얻는 것인가? 다만 성자만이 얻는가, 이생들도 공통하게 얻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오직 성자만이 얻는 것이요 모든 이생은 얻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생도 얻는다”고 말한다.
[문] 이생에게도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안의 법[內法]과 밖의 법[外法]이라 하겠다. 어떠한 이생이 이 행상을 얻는 것인가?
어떤 이는 “안의 법을 지닌 이가 얻는 것이요 밖의 법을 지닌 이는 얻지 못한다. 그는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과 무아의 견해를 닦아 익힐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밖의 법을 지닌 이생도 이 행상을 얻기는 하나 안[內]과는 구별된다. 안의 법을 지닌 이는 역시 가행득과 생득으로 또한 얻고 몸에 있기도 하며 또한 성취하고 눈앞에 나타나 있기도 하거니와 밖의 법의 이생은 오직 생득뿐이어서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니,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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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떻게 하여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가?
[답] 만일 욕계에 나면 욕계․색계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면서 다 같이 온갖 법을 반연하게 되며, 만일 초정려에 나서 초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 이로서 선정에 있지 않은 이[不定者]면 역시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고 선정에 있는 이[定者]면 오직 초정려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만 반연하게 된다. 위의 세 정려[三靜慮]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 이도 역시 초정려로부터 유정천까지만 반연하게 된다.
제2 정려에 나서 제2 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 이로서 선정에 있지 않은 이면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으며 선정에 있는 이면 오직 제2 정려로부터 유정천까지만을 반연할 뿐이요, 제3․제4 정려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 이도 역시 제2 정려로부터 유정천까지만을 반연할 뿐이다. 만일 제3․제4 정려에 나는 이면 이런 이치와 같이 말해야 한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에 나서 무색계의 나 아님의 행상을 일으키는 이의 법을 반연하는 분제(分齊)는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문] 욕계와 색계의 두 세계의 나 아님의 행상에는 어느 것이 법을 반연함이 많은가?
[답] 색계의 나 아님의 행상으로서 만일 선정에 있지 않은 이면 반연하는 법이 욕계와 같으나 만일 선정에 있는 이면 반연하는 법이 욕계보다는 적다. 스스로가 따라 구르는 색[隨轉色]을 반연할 수 없기 때문이니, 욕계의 나 아님의 행상은 따라 구르는 색이 없기 때문이요 온갖 색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신념주(身念住)에 있어서는 온갖 색을 반연하나 수념주(受念住)․심념주(心念住)․법념주(法念住)에 있어서는 온갖 수념주․심념주․법념주를 반연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 온갖 법을 반연하는 나 아님의 행상은 유루(有漏)인가 무루(無漏)인가?
[답] 이것은 유루요 무루가 아니다. 그 까닭은 세속(世俗)의 나 아님의 행상도 오히려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순결택분과 같거늘 하물며 무루의 나 아님의 행상이 온갖 법을 반연할 수 있겠는가? 이 행상은 따로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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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의 진리를 반연하기 때문에 마치 사견에서와 같다. 오히려 한 때에 두 진리를 반연하는 것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많은 진리를 반연하겠는가? 마치 다스릴 것[所對治]처럼 능히 다스리는 것[能對治]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문] 유루의 나 아님의 행상은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답] 끊을 수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성자는 무엇 때문에 일으키는 것인가?
[답] 근기[根]로 하여금 한층 더 날카로워져 성자의 도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 네 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성자는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니, 첫째는 현법락주(現法樂住) 때문이요, 둘째는 본래부터 짓던 것[所作]을 관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공덕에 유희(遊戱)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성재(聖財)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문] 이 나 아님의 행상은 기뻐하는 작의[歡作意]와 함께하게 되는가, 싫어하는 작의[厭作意]와 함께하게 되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기뻐하는 작의와 함께한다면 어떻게 싫어할 만한 법을 반연하는 것이며 만일 싫어하는 작의와 함께한다면 어떻게 기뻐할 만한 법을 반연하는 것인가?
[답] 마땅히 “기뻐하는 작의와 함께한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싫어할 만한 법을 반연하는가?
[답] 저 유가사(瑜伽師)는 기뻐할 만한 법에 대하여는 기쁨을 더욱 내기 때문이다. 가령 한량없이 싫어할 만한 무더기 가운데에 하나라도 기뻐할 만한 것이 있으면 기쁨과 즐거움을 내거늘 하물며 많은 것이겠는가? 마치 동전 더미 위에 하나의 금으로 된 돈이 놓여 있으면 이 무더기에 대하여 싸잡아 기쁨과 즐거움을 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論] 혹시 두 마음[二心]이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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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어떤 이는 “인연(因緣)의 체성(體性)은 없다”라고 집착하므로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인연에는 체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한 보특가라에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이 있다”라고 집착하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한 보특가라에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느 외도는 세간의 실제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뒤의 것은 앞의 것의 인(因)이 된다고 집착한다. 그는 “실제로 샘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떠밀어서 솟아오르게 한다. 이 가운데서 뒤의 물은 앞의 물의 인이 된다. 이처럼 모든 법이 3세(世)에 행해질 때에 미래의 세상이 떠밀어서 현재에로 들게 하고 현재 세상이 떠밀어서 과거에로 들게 하기 때문에 미래의 세상은 현재의 인이 되고 현재는 다시 과거를 위한 인이 된다”라고 말
하므로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뒤의 법은 앞의 법의 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것이 인이라면 안팎의 연기(緣起)의 모든 법에 어긋난다. 안의 법[內法]의 연기에 어긋난다 함은 행(行)은 무명(無明)에 연(緣)이 되고 나아가 노사(老死)는 생(生)에 연이 되며 부모는 자식에 인(因)이 되고 눈과 빛깔은 안식(眼識)에 인이 되며 나아가 뜻과 법은 의식(意識)에 인이 되어야 한다. 또 마땅히 갈라람(羯邏藍)은 알부담(頞部曇)에 인이 되고 나아가 장년(壯年)은 노년(老年)에 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밖의 법의 연기에 어긋난다 함은 종자는 마땅히 싹의 인이 되고 나아가 꽃은 열매의 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또 큰 허물이 있으니, 아직 업을 짓지 않았는데도 과보를 받으며 과보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업을 지어야 한다. 그런 일은 어떤 것인가? 마땅히 먼저 괴롭거나 즐거운 이숙(異熟)을 받고서야 그 뒤에 선과 악의 업을 지어야 되고, 먼저 율의(律儀)와 불률의(不律儀)의 과(果)를 얻고서야 그 뒤에 율의의 계(戒)와 불률의의 계를 받아야 되며, 먼저 지옥에 떨어지고서야 그 뒤에 무간업을 지어야 되고, 먼저 전륜왕(轉輪王)이 되고서야 그 뒤에 그의 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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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야 되며, 먼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를 얻고서야 그런 뒤에 비로소 여섯 가지 도피안(到彼岸)4)을 닦아야 된다.
만일 아직 업을 짓지 않았는데도 먼저 그 과를 받는다면 마땅히 이미 지었던 업은 곧 없어지고 무너져야 하리니, 이렇게 되면 해탈은 마땅히 없어야 된다. 이 때문에 뒤의 것은 앞의 것의 인이 될 수 없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것을 논한다.
[論] 혹시 두 마음이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 있는가?
[答] 없다. 왜냐하면 한 보특가라에게는 앞도 아니고[非前] 뒤도 아닌[非後]5)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이 없으며 또 뒤의 마음은 앞의 마음의 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없다”고 함은 곧 인연의 실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두 마음이 서로 인이 되는 것은 없지만 그 밖의 다른 법에서는 서로 인이 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한 보특가라 등에게 없다는 것은 대중부가 “한 보특가라에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집착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한 보특가라라 함은 많은 보특가라라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요, 앞도 아니라 함은 과거를 차단하고, 뒤가 아니라 함은 미래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보특가라에게 현재의 한 찰나 동안에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어느 다른 게송에서 “한 보특가라에게 두 마음이 함께 난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고 장차도 없으며 현재에도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한 보특가라에 3세의 한 찰나 동안에 모두가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또 뒤의 마음은 앞의 마음의 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함은 이것은 외도가 집착한 뒤의 것은 앞의 것의 인이 된다는 것을 중지시키면서 뒤의 법은 앞의
4) 도피안(到彼岸)은 바라밀(波羅蜜, pāramitā)의 뜻 번역이다. 여섯 가지 도피안은 곧 6바라밀을 뜻한다.
5) 앞도 아니고[非前] 뒤도 아니다[非後] 함은 동시(同時)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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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인이 아니라는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다섯 가지 인[五因]에만 의거하여 논을 지었기 때문에 “없다”고 대답한 것이요, 만일 여섯 가지 인[六因]에 의거하였다면 마땅히 “있다”고 대답했어야 하니, 능작인(能作因)은 모두에 두루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 보특가라 등에게 없다 함은 상응인(相應因)과 구유인(俱有因)의 뜻을 차단한 것이요, 또 뒤의 마음은 앞의 마음의 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과 이숙인(異熟因)의 뜻을 차단하는 것이니, 모든 차단하지 않은 것은 능작인이다.
“두 마음은 서로 인이 되는 뜻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둘의 수[二受]․둘의 상[二想]․둘의 사[二思]․둘의 촉[二觸]․둘의 작의[二作意]․둘의 승해[二勝解]․둘의 욕[二欲]․둘의 염[二念]․둘의 정[二定]․둘의 혜[二慧] 등의 모든 심소의 법[心所法]과 둘의 눈[二眼]에서 나아가 둘의 몸[二身] 등의 모든 색법[色法]과 둘의 명근[二命根]․둘의 중동분[二衆同分] 등의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의 같은 종류에서는 모두가 서로 인이 되는 뜻이
없는 것이다.
[論] 혹시 두 마음이 서로 연(緣)이 되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여기에서는 먼저 이렇게 논하지 않아야 하고 마땅히 먼저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없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먼저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그의 인연은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에는 마땅히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없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해야 할 터인데도 먼저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에는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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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모든 법의 성상(性相)을 드러내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그의 차례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법상(法相)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먼저거나 뒤이거나 다 같이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논(論)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론(根本論)이요, 둘째는 방생론(傍生論)이다. 여기에서 ‘혹시 두 마음이 서로 인이 되고 서로 연이 되는 것이 있는가?’ 등은 바로 근본론이며,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없는가?’ 등은 방생론이다. 두 가지의 근본론은 도리로 보아 마땅히 먼저 말해야 하고 한 가지의 방생론은 도리로 보아 마땅히 뒤에 말해야 되므로 여기에서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論] 혹시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앞에서 “두 마음이 서로 인이 되는 것이 없다”고 말했으므로 역시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도 없다”고 말하지 말게 한 것이다. 이런 의심을 제거하고 “두 마음은 서로 연이 되는 것이 있다”고 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소연연(所緣緣)의 체성은 없다고 부정하는 이의 뜻을 중지시키고 소연연의 체성은 실로 존재한다 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라고 말한다.
[論] 혹시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이 있는가?
[答] 있다. 어떤 마음에 미래가 없다6)는 마음을 일으키며 곧 이것을 사유(思惟)하면서 제2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6) 미래는 없다는 마음이란 바로 인과(因果)가 없다고 부정하는 사견(邪見)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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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기에서는 다만 통틀어 “있다”고만 대답해야 하며, 다시 “어떤……등”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치 “만일 법과 그 법이 소연(所緣)이 되면 이 법은 그 법을 위하여 때로는 소연이 아닌 것이 있는가?”라고 말하면 “어느 때라도 소연이 아닌 것은 없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답] 비록 통틀어 “있다”고 말하면 뜻에서는 이미 만족하다 해도 넉넉히 모든 제자들을 이익되게 하고 분명히 알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다시 거듭 “어떤……등”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마음에 미래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키며 곧 이것을 사유하면서 제2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함은 먼저 한 찰나 동안에 사견을 일으키면서 혹은 오직 미래의 사견 무더기만을 비방하기도 하고 혹은 통틀어 미래의 유루의 모든 온(蘊)을 비방하기도 하고는 그 뒤에 제2의 찰나 동안에 사견을 일으키면서 혹은 오직 과거의 사견 무더기만을 비방하기도 하고 혹은 통틀어 과거의 모든 온을 비방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 두 가지의 사견과 상응하는
마음은 서로 연이 되는 것이다.
사견이 뒤에 사견을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없다”고 비방하는 것처럼 사견이 뒤에 유신견(有身見)을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하고, 변집견(邊執見)은 아주 없다[斷] 항상한다[常]라고 헤아리며, 견취(見取)는 제일이라고 고집하고, 계금취(戒禁取)는 청정하게 한다고 고집하며, 의심[疑]은 망설이고 탐냄[貪]은 염착하며 성냄[恚]은 미워하고 만(慢)은 스스로가 뽐내며 무명(無明)은 명확하게 모르는 것이다.
또 사견의 뒤에 혹은 바른 견해[正見]를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항상한 것이 아니고[非常] 괴롭고[苦] 공(空)하고 나가 아니며[非我], 인(因)이며 집(集)이며 생(生)이며 연(緣)이다. 이것은 존재한다[有], 이것은 진실이다[實], 이것은 성품[性]이다. 이것은 분제[分]이다. 원인이 있고[有因]․일으킴이 있고[有起]․처소가 있고[有處]․일이 있다[有事]’는 행상(行相)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을 내면서 그것에 대하
여 이치대로의 것이 아니거나 이치대로가 아닌 것도 아닌 행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을 사견과 상응한 마음이 모든 유루의 마음과 서로 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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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한다. 사견의 마음에서처럼 그 밖의 오염된 마음[染汚心]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사견을 말하면서 문(門)을 삼은 것이니, 같이 물들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論] 어떤 마음에 미래가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며 곧 이것을 사유하면서 제2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는 사견의 마음과 유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했으므로 지금은 바른 견해의 마음과 유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여 이것을 논한다.
이를테면 먼저 한 찰나 동안에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혹은 미래의 바른 견해의 무더기에 대해서만 혹은 통틀어 미래의 유루의 모든 온(蘊)에 대하여 있다[有]7)는 행상을 일으키고는 그 뒤에 제2 찰나 동안의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혹은 오직 과거의 바른 견해의 무더기에 대해서만 혹은 통틀어 과거의 유루의 모든 온에 대하여 “항상하지 않다[非常]”는 등의 행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른 견해의 뒤에 바른 견해를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항상하지 않다”는 등의 행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바른 견해의 뒤에 혹은 사견을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없다”고 비방하고 유신견은 나와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무명은 분명하게 모르는 것이다.
또 바른 견해의 뒤에 혹은 무부무기의 마음을 내면서 그것에 대하여 이치대로가 아니며 이치대로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행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른 견해와 상응한 마음이 모든 유루의 마음을 위하여 서로 연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7) 사견(邪見)은 없다고 부정하면서 없다[無]는 행상(行相)을 일으킴에 대하여 정견(正見)은 있다[有]는 행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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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견해의 마음에서처럼 무부무기의 마음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나니, 같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論] 어떤 마음에 미래의 도(道)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키며 곧 이것을 사유하면서 제2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사견의 마음과 유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고 말했으므로 지금 사견의 마음과 무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이것을 논한다.
먼저 한 찰나 동안 사견을 일으켜 미래의 도를 비방하고 그 뒤에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가 고인(苦忍)․고지(苦智)나 혹은 집인(集忍)․집지(集智)를 일으키면서 그 과거의 사견 무더기에 대하여 “항상한 것이 아니고․괴롭고․공하고․나가 아니며 인(因)이며 집(集)이며 생(生)이며 연(緣)이다”라는 행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찰나를 차단하고 유주(流注)8)을 차단하나 시분(時分)을 차단하지 않고 중동분(衆同分)을 차단하지 않으며 무시이래(無始以來)를 차단하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찰나를 차단한다 함은 앞의 찰나 동안에 사견을 일으키어 성자의 도[聖道]를 비방하고서 제2 찰나 동안에 곧 정성이생에 반드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주를 차단한다 함은 한 유주 동안에 먼저 사견을 일으키어 성자의 도를 비방하고서 그 뒤에 곧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는 결코 없다는 말이다.
시분을 차단하지 않는다 함은 초일분(初日分) 때에 사견을 일으켜 성자의 도를 비방하다가 중일분(中日分) 때에 곧 정성이생에 들어가고 중일분 때에 사견을 일으켜 성자의 도를 비방하다가 후일분(後日分) 때에 곧 정성이생에 들어가는 것이니, 밤의 3분(分)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8) 유주(流注)란 어떤 하나의 생각이 끊임없이 상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晝)․야(夜)․반월(半月)․월(月)․시(時)․년(年)의 모든 자리에서 모두 다 차단하지 않거늘 하물며 중동분과 무시이래이겠는가?
사견에서처럼 의(疑)와 무명(無明)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리니, 도(道)를 반연함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論] 어떤 마음에 미래의 도가 있다는 마음을 일으키며 곧 이것을 사유하면서 제2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바른 견해의 마음과 유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했으므로 지금 바른 견해의 마음과 무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
먼저 한 찰나 동안에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혹은 오직 무루의 마음만에 대해서나 혹은 통틀어 미래 무루의 모든 온(蘊)에 대하여 있다[有]는 행상을 일으키고, 그 뒤에 성자의 도를 일으키어 혹은 오직 과거의 바른 견해의 무더기에만 통틀어 과거 유루의 모든 온에 대하여 “항상한 것이 아니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아니며, 인(因)이며 집(集)이며 생(生)이며 연(緣)이다”라는 행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이로서 오직 공상(共相)의 작의(作意)로 끊임없이 성자의 도를 일으키게 하려 하면 그는 찰나를 차단하면서 유주(流注) 등은 차단하지 않아야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찰나를 차단한다 함은 이것은 미래의 도가 있다는 마음의 행상이 바로 자상(自相)의 작의이기 때문이니, 모든 이들이 두 가지 작의로 끊임없이 성자의 도를 일으키게 하면 그는 역시 찰나조차도 차단하지 않은 것이다.
[論] 어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知他心者] 그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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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앞에서는 자상속의 마음[自相續心]과 자상속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고 말했으므로 지금은 자상속의 마음과 타상속의 마음[他相續心]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것을 논한다.
[문] 여기에서는 어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두 마음이 서로서로 연이 된다고 말하는가?
[답] 여기에서는 근기[根]가 같은 이와 자리[地]가 같은 이와 도(道)가 같은 이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그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근기가 같은 이라 함은 똑같이 이근(利根)이거나 중근(中根)이거나 연근(軟根)이인 이를 말하고, 자리가 같은 이라 함은 똑같이 초정려에 의거하거나 나아가 똑같이 제4 정려에 의거하는 이를 말하며, 도가 같은 이라 함은 똑같이 유루이거나 똑같이 무루이거나 똑같이 법지품(法智品)이거나 똑같이 유지품(類智品)이거나 똑같이 학(學)이거나 똑같이 무학(無學)인 이를 말한다.
[문] 그의 두 마음이 어떻게 서로 연이 되는가?
[답] 다만 그 마음을 반연할 뿐이요, 그 마음의 소연(所緣)과 능연(能緣)의 행상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 마음의 소연과 능연의 행상을 반연하게 되면 스스로 연이 된다는 허물이 있게 된다.
[문] 또한 그 밖의 지혜[智]와 함께하는 마음이 서로가 연이 되는 것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타심지(他心智)만이 함께한다고 말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다만 분명하고 명확히 알면서 뒤섞이지 않고 쉽게 알 수 있는 것만을 말한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문] 여러 가지의 타심지가 있는데 이 가운데서는 어느 것을 말하는가?
[답] 가행득(加行得)과 이염득(離染得)9)의 것을 말한다.
9) 가행득(加行得)이란 뛰어난 용맹심을 일으켜 그것을 얻는 것을 말하고, 이염득(離染得)이란 욕계의 염(染), 나아가 유정(有頂)의 염을 여읨에 의하여 저절로 그의 힘이 갖추어져오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다만 이염에 의하여 얻을 뿐이요, 이생(異生)은 가행과 이염이 다 같이 통하되 이염은 6행관(行觀)에 의하여 혹(惑)을 끊는 것이다.(『구사론(俱舍論)』 제27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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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도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다만 이름[名]과 뜻[義]이 뛰어난 것만을 말할 뿐이니, 가행득과 이염득은 닦아서 이룬 것이며 통혜(通慧)10)에 속한 것이어서 4지(支)11) 5지(支)의 뛰어난 정려의 과(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지혜는 경계에 대하여 그릇됨이 없으나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다.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지금 이 글로 인하여 이염(爾焰)의 바다가 동요한 것이다. 두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수(受) 등의 모든 심소의 법도 서로 연이 되는 것이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또 부(部)․계(界)․선(善) 등의 모든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는 것도 말해야 한다.
부(部)라 함은 견고(見苦)에서 끊을 마음과 견고․견집(見集)․수도에서 끊을 마음이 서로 연이 되고, 견집에서 끊을 마음과 견고․견집․수도에서 끊을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 견멸(見滅)에서 끊을 유루연(有漏緣)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되고, 견도(見道)에서 끊을 유루연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되며, 견도에서 끊을 무루연(無漏緣)의 마음과 무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되는 것
10) 지혜 중에서 특히 신통(神通)과 또 6통(通)에 관계되는 지혜를 말한다.
11) 통틀어 신통(神通)이며 따라서 이 타심지(他心智)도 역시 4정려(靜慮)에 의하여 얻는다. 여기서 4지(支) 5지(支)라 함은 4정려의 내용을 가리킨 것이어서 곧 초선(初禪)에서 심(尋)․사(伺)․희(喜)․락(樂)․정(定)의 5지가 있고 제2선(禪)에 정(淨)․희(喜)․락(樂)․정(定)의 4지가 있으며 제3선에는 사(捨)․염(念)․혜(慧)․락(樂)․정(定)의 5지가 있고 제4선에는 사(捨)․염(念)․중수(中受)․정(定)의 4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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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무루의 마음도 서로 연이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수도에서 끊을 마음이 서로 연이 되며 수도에서 끊을 마음과 무루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
수도에서 끊을 마음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 함은 선(善)을 말하며 무부무기와 무루의 마음이 연이 된다 함은 오직 선만인 줄 알아야 한다.
계(界)라 함은 욕계의 마음과 욕계․색계와 불계(不繫)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되고, 색계의 마음과 색계․무색계와 불계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되며, 무색계의 마음과 무색계와 불계의 마음이 연이 되는 것이다. 무색계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이 서로 연이 된다 함은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近分)인 줄 알아야 한다. 선(善) 등이라 함은 선․불선(不善)․무기(無記)의 마음이니, 각각 세 가지의 마음과 함께 서로 연이 된다. 다만 불선의 이숙(異熟) NUM='12)만은 제외되는데 그것은 오직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무부무기의 마음에도 서로 반연하는 뜻이 있다.
또 이 가운데서 말한 사견이 원인을 비방하고 결과를 비방하는 것에는 4구(句)의 차별이 있다. 혹은 원인에 의거하여 결과를 비방하기도 하고 혹은 결과에 의거하여 원인을 비방하기도 하며 혹은 원인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비방하기도 하고 혹은 결과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원인을 비방하기도 한다.
원인에 의거하여 결과를 비방한다 함은 “묘행(妙行)과 악행(惡行)은 결과의 이숙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과에 의거하여 원인을 비방한다 함은 “온갖 사부(士夫) 보특가라가 받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원인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비방한다 함은 “화생(化生)의 유정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과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원인을 비방한다 함은 “묘행이거나 악행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2) 불선(不善)의 이숙(異熟)이란 자체(自體)는 무기(無記)이면서도 귀머거리나 소경 등과 같이 불완전한 것을 불선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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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연(緣)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인(因)과 소연(所緣)만을 말하면서 나머지 두 가지는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설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의 뜻에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두 가지도 여기서 말한 것에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인연(因緣)을 말하면 마땅히 이미 등무간연(等無間緣)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하리니, 두 마음이 서로 인이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역시 두 마음이 서로 등무간이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소연연(所緣緣)을 말하면 마땅히 이미 증상연(增上緣)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하리니, 두 마음이 서로 소연이 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역시 두 마음이 서로 증상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論]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게 없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등무간연의 체성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 하므로 그런 뜻을 차단하고 등무간연은 실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한 보특가라에는 두 마음이 함께 생긴다”라고 집착하므로 거듭 그것을 차단하고 오직 한마음일 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은 방생론(傍生論)이다. 앞에서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아직 그 까닭을 말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라고 말한다.
[論]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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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것이 없는가?
[答] 제2의 등무간연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소의 법이 생기는 데에는 반드시 등무간연에 의지하게 된다. 이미 제2의 등무간연은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생기는 일은 없다.
여기서 다시 “무엇 때문에 제2의 등무간연이 없는가?”13)라고 물으므로 다시 다음처럼 대답한다.
[論] 유정에게는 하나하나의 마음이 서로 이어지면서 변하기 때문이다.
유정의 마음은 법이 으레 그러하여 하나하나가 서로 이어지면서 변하여 둘도 없고 여럿도 없다. 이것이 점차로 다시금 대답하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거듭하여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먼저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나는 것이 없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거듭하여 ‘유정에게는 하나하나의 마음이 서로 이어지면서 변한다’고 한 것이니, 낱낱의 유정에게는 법이 으레 그러하는 힘을 말미암아 다만 한마음만이 서로 이어지면서 변한다.
왜냐하면 미래의 마음의 무더기는 반드시 현재의 화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요 화합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으며, 현재는 다만 하나의 화합만이 있기 때문에 미래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씩 하나씩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 사람이 좁은 길을 지날 때 오직 한 사람씩만 지나 갈 수 있을 뿐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는데 하물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갈 수가 있겠는가? 또 마소의 외양간 문은 좁고 작아서 한 마리 한 마리씩 나오게 될 뿐이요, 두 마리나 여러 마리가 나란히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유정의 미래의 마음 무더기도 현재의 화합에 의거하여 하나씩 하나씩 생기는 것이다. 가령 현재 세상에서 많은 화합이 있어서 차례로 열리게
13) 『발지론』을 인용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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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면 마땅히 일시에 여러 마음이 일어남이 있어야 되나 이런 일은 없기 때문에 하나씩 하나씩 생길 뿐이다.
또 화합에 선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먼저 수도(修道)의 화합이 있고 그 뒤에 견도(見道)가 있다면 마땅히 수도가 먼저이면서 견도가 생겨야 되겠지만 다만 이런 일은 없기 때문에 먼저 견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생기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 뜻에는 다시 분별이 있다. “무엇 때문에 한 보특가라에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두 마음이 함께 생기는 것이 없는가?”에 대하여 세우(世友) 존자는 “한 찰나의 마음에는 오직 한마음이 있을 뿐이니, 그것에 의거하여 변하기 때문에 둘이란 없다.
또 한 찰나의 명근(命根)에는 오직 한마음일 뿐이니, 그것에 의거하여 변하기 때문에 둘이란 없다.
또 한 찰나에는 오직 한 종류의 중동분(衆同分)의 마음이 있을 뿐이니, 그것에 의거하여 변하기 때문에 둘이란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대덕(大德)은 “법이 생길 때의 화합은 오직 하나일 뿐이요, 둘이란 없다. 하나의 화합에는 두 결과가 생기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 찰나의 마음에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두 마음이 함께 생기는 일이 있다면 조복할 수 없어야 된다. 지금의 한마음조차도 억세고 사납게 날뛰므로 오히려 조복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두 마음이겠는가? 만일 마음을 조복할 수 없다면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가 서로 이어지면서 두 마음이 함께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만일 하나가 서로 이어지면서 두 마음이 함께 생긴다 하면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허물이 있게 된다. 한마음은 잡염이면서 한마음은 청정하다면 해탈을 얻는다는 이치가 없게 된다.
또 마땅히 일시에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 나야 된다.
또 하나의 상속하는 마음에 두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어째서 셋이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만일 세 마음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일시에 삼계(三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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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異熟)을 받아야 되리니, 이렇게 되면 세계도 파괴되고 또한 해탈도 없게 된다.
또 만일 하나의 상속에 세 개의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어째서 넷이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만일 네 마음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일시에 4생(生)14)의 이숙을 받아야 되리니, 이렇게 되면 나는 일[生]도 파괴되고 또한 해탈도 없게 된다.
또 만일 하나의 상속에 네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다섯이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만일 다섯의 마음이 있으면 일시에 5취(趣)의 이숙을 받아야 되리니, 이렇게 되면 갈래[趣]도 파괴되고 또한 해탈도 없게 된다.
또 만일 하나의 상속에 다섯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어찌 여섯이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곧 일시에 6식(識)이 함께 일어나야 하고 일시에 온갖 경계를 취해야 된다.
또 만일 하나의 상속에 여섯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어찌 백이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만일 백이 있게 되면 어찌 천이 있는 것을 방해하며 나아가 어찌 수없이 함께 생기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모든 법은 미래 세상으로부터 일시에 생기고 현재 세상에서는 일시에 소멸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땅히 미래도 현재도 없어야 한다. 미래와 현재를 관찰하는 까닭에 과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미래와 현재가 없기 때문에 과거도 없는 것이니, 만일 3세가 없다면 유위도 없으며 만일 유위가 없다면 무위도 없다. 이와 같이 되면 온갖 법은 없게 되리니, 이것이야말로 큰 허물이 된다. 이 때문에 두 마음이 함께 생기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
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하나의 상속에 두 마음이 함께 생긴다면 느낌[受] 등의 모든 심소의 법도 둘이 함께 생겨야 하며 곧 한 찰나 동안에 마땅히 열 가지 온[十蘊]15)이 있게 되므로 유정은 파괴된다. 유정이 파괴되기 때문에 소의(所依)의 몸도 파괴되고, 소의의 몸이 파괴되기 때문에 5부(部)16)가
14)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이다.
15) 둘의 수(受)가 있다면 둘의 상(想)과 둘의 행(行)과 둘의 식(識)이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5온(蘊)은 10온(蘊)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16) 5부(部)는 견도(見道)의 4와 수도(修道)의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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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되며, 5부가 파괴되기 때문에 대치(對治)가 파괴되고, 대치가 파괴되기 때문에 변지(遍知)가 파괴되며, 변지가 파괴되기 때문에 사문의 과위[沙門果] 등의 모두가 파괴되고 만다. 이런 허물은 있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상속에는 두 마음이 함께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한 찰나에 여러 심소가 있으면서도 앞의 허물이 없는 것처럼 마음도 그러해야 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심소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마음과 동일한 등무간연을 끌어 일으키게 된다.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낌도 하나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마음과 느낌 등은 하나로 화합하여 생긴다.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낌도 하나이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마음과 느낌 등은 하나의 작의(作意)로 생긴다.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낌 등도 하나이다. 비록 모두가 심소라 하더라도 체성의 종류가 저마다 다르므로 허물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등무간연의 자체(自體)는 무엇인가?
[답] 아라한의 최후의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와 현재의 심․심소의 법을 등무간연의 자체라 한다.
[문] 왜 아라한의 최후의 심․심소의 법은 등무간연이 아니라 하는가?
[답] 그 심․심소의 법이 만일 등무간연이라면 그것 뒤에 심․심소의 법이 생기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만일 그렇다면 구경의 해탈이 없게 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것도 등무간연이기는 하나 그것 뒤에 심․심소의 법이 생기지 않은 것은 그 밖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생겨야 한다 하면 역시 인연이 되어 주는 것은 마치 의근(意根)․의계(意界)․의처(意處)와 같다”라고 말한다.
그는 마땅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등무간연은 작용(作用)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다. 만일 법과 그 법이 등무간연이 된다면 방해를 하면서 그것을 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법도 없고 유정도 없고 주술(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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術)도 없고 약물 등도 없다.
의근과 의계와 의처는 감관 모양에 의지하여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뒤의 식(識)이 생기지 않더라도 감관 등의 모양만은 있기 때문에 감관 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문] 무엇 때문에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은 의근 등의 모양은 있는데도 등무간연의 모양은 없는 것인가?
[답] 의근․의계․의처는 반드시 뒤의 법을 관하려고 붙여진 것은 아니요, 심소 등을 관하는 데도 이름은 또한 붙여지기 때문이나 등무간연은 뒤의 법을 관하려고 붙여진 것이라 뒤에는 생기지 않기 때문에 연(緣)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 생기지 않은 법[不生法] 가운데에도 의식(意識)의 모양은 있기 때문에 최후의 마음은 의근(意根) 등이나 생기지 않은 법 가운데에 등무간(等無間)의 모양이 없고 뒤섞이어 어지러이 머무르기[雜亂住] 때문에 이로써 최후의 마음 등은 등무간연이 성립되지 않는다.
[문] 등무간연은 무엇으로써 모양[相]을 삼는가?
[답] 체성[體]이 곧 모양이며 모양이 곧 체성이다. 체성을 여의고서 따로 그의 모양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길을 열어 주며 피하는[開避]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요, 또 차례(次第)를 부여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며, 또 작용(作用)을 부여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요, 또 마음을 내게 하는[能生心]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며, 또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引發]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요, 또 마음을 일깨우는[警覺]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며, 또 마음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게 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은 “곧장 마음을 이끌어 내어 생기게 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말라(婆末羅) 존자는 “아직 생기지 아니한 마음으로 하여금 이미 생긴 마음에 잇게[續]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달마자(阿毘達磨者)는 “저마다 달리하는 자상(自相)의 법으로 하여금 곧장 생기게 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저마다 달리하는 자상의 법이란 느낌[受]․생각[想] 등의 심소와 마음의 자상은 저마다 달리하면서 때를 같이하며 생기지만 둘이 있게 됨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논사는 “서로 비슷한 법으로 하여금 곧장 생기게 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체성과 모양을 말했으니 그 까닭을 지금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등무간연이라 하는가?
[답] 이 연(緣)은 등무간(等無間)의 법을 이끌어내니 이 때문에 등무간연이라 한다.
[문] 앞뒤의 찰나에 모든 심소의 법은 혹은 많기도 하고 혹은 적기도 한데 어찌하여 평등하다[等] 하는가? 욕계의 심소는 많지만 색계는 그보다는 적고, 색계의 심소는 많지만 무색계는 그보다는 적으며, 선(善)의 심소는 많지만 불선(不善)의 심소는 그보다는 적고, 불선의 심소는 많지만 무기(無記)의 심소는 그보다는 적으며, 유루(有漏)의 심소는 많지만 무루(無漏)의 심소는 그보다는 적거늘 어떻게 이 연으로 등무간의 법을 이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답] 일[事] 등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수(數) 등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만일 한마음[一心] 속에 한 생각[一想]이나 두 느낌[二受] 등이 있다면 평등하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한마음 속에 느낌 등의 심소는 응한 것에 따라 생기되 저마다 오직 하나일 뿐이니, 이 때문에 평등하다고 한다.
[문] 마음은 다만 마음만을 위해서며 느낌 등은 다만 느낌 등만을 위해서 등무간연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상사상속(相似相續) 사문은 “마음은 다만 마음만을 위하여 등무간이 되고 느낌 등도 그러하니, 각각 자기의 종류[自類]를 위해서 등무간이 된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반드시 그렇다 하면 마땅히 선의 마음[善心]은 도로 선의 마음을 내고 불선의 마음[不善心]은 도로 불선의 마음을 내며 무기의 마음[無記心]은 무기의 마음을 내고 탐내는 마음[貪心]은 도로 탐내는 마음을 내며 성내는 마음[恚心]은 도로 성내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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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내고 어리석은 마음[癡心]은 도로 어리석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와 같다면 마지막의 해탈이 없을 것이다.
또 모든 심소는 혹은 적기도 하고 혹은 많기도 하지만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낼 때에는 연(緣)이 없어야 하고 많은 것이 적은 것을 낼 때에는 결과[果]가 줄어져야 한다. 그와 같다면 한마음 안에는 연(緣)을 따라 생기는 것이 있고 연을 따라 생기지 않는 것도 있어서 연을 짓는 것이 있고 연을 짓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또 무루의 마음은 마땅히 연이 없이 생겨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마음은 마음과 함께하면서 또한 느낌 등과도 함께하고 느낌은 느낌과 함께하면서 또한 등무간연이 되니, 그 밖의 심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마음은 마음과 함께 가까운[近] 등무간연이 되지만 느낌 등과는 그런 것이 아니며, 느낌 등은 느낌 등과 함께 가까운 등무간연이 되지만 마음 등과는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지도 않은 것인가?
[답] 상사상속 사문은 “마음은 마음과 함께 가까운 등무간연이 되고 느낌 등과는 그런 것이 아니며, 느낌 등은 느낌 등과 함께 가까운 등무간연이 되고 마음 등과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길을 열어 주며 피하는 뜻이 등무간연의 모양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길을 열어 주면서 피하는 뜻 안에는 멀고 가까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앞에서 생긴 마음은 뒤에서 생기는 마음을 위하여 등무간연이 되어 차별이 없는 것은 마치 콩[豆] 등의 무더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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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1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③
[문] 미래 세상에는 등무간연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미래의 모든 법은 마땅히 차례대로 머물러야 하고 바른 가행[正加行]을 닦는다 해도 소용없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법이 여기에서 곧장 머무르면 저 법은 여기서부터 곧장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니, 바른 가행으로 닦는다 해도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모든 번뇌를 조복하면서 대치(對治)를 낸다는 뜻도 없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마지막의 해탈이 없을 것이다.
견온(見蘊)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만일 법이 저 법과 등무간이 된다면 혹 때로는 저 법과 등무간연이 되지 않기도 하는가? 그 때에는 이 법이 아직 생김에 이르기 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없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곧장 고법지인만을 내면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내지 않는가? 『팔분경(八分經)』의 학설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팔분경』에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이 업(業)을 지은 뒤에 혹은 13겁(劫) 혹은 14겁 혹은 나아가 20겁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떻게 순현법수(順現法受)와 순차생수(順次生受)와 순후차수(順後次受)의 세 가지 업을 세우게 되는가?
[답] 미래에는 등무간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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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곧장 오직 고법지인만을 내고 진지와 무생지는 내지 않는가?
[답] 이것은 수(數)로 정했고 일의 모양[事相]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법지인은 여섯 자리에[六地]1) 있으면서도 아직 어느 자리의 것을 내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세 가지 근[三根]2)과 상응하는 데에도 아직 어느 근과 상응하는 것을 내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며, 네 가지 행상[四行相]이 있을 때도 아직 어느 행상을 내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한량없는 찰나에서도 아직 어느 찰나에서
내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증상인(增上忍)에 머무를 때의 고법지인은 오직 세 가지 일에서만 정해질 뿐이다. 이를테면 자리[地]가 정해지고 근(根)이 정해지고 모양[相]이 정해지지만 두 가지 일에서는 오히려 정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찰나가 정해지지 않고 등무간연이 정해지지 않는다. 만일 세제일법에 머무를 때면 다섯 가지 일은 모두가 정해진다.
또 반드시 등무간연이 있는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모든 법은 차례로 상속하면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만일 법이 그 법에 의지해 소속되어 그 법을 따른 뒤에는 곧장 생기게 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바깥 물건[外物]과 같다. 비록 등무간연이 없다고 해도 서로가 의지하고 소속되면 앞뒤가 차례대로 생기는 것은 마치 씨와 싹과 줄기와 가지와 꽃과 열매의 관계와 같다. 그것에 의지하고 소속된 것은 그것이 곧장 생기나 그
밖의 것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아서 안의 법[內法]이 미래 세상에 있어서 비록 등무간연이 없다고 해도 그것에 의지하고 소속되면 그것은 곧장 생기게 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고법지인은 세제일법에 의지하고 소속되지만 고법지(苦法智)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은 곧장 오직 고법지인만 내고 나아가 진지와 무생지는 내지 않는다.
또 미래의 법이 생기는 것은 현재의 법에 의거하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1) 여섯의 자리[六地]란 미지(未至)와 중간(中間)과 4근본(根本)이다.
2) 희(喜)․락(樂)․사(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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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화합하면 그것은 생기게 되지만 만일 화합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기지 않는다.
비록 옳은 것은 아니지만 분별하기 위하여 말해 보겠다. 가령 수도(修道)가 생길 연(緣)이 먼저 화합하면 역시 먼저 생기지만 이런 일은 없다. 오직 고법지인만이 세제일법에 의거하여 화합하면서 생기는 것이요, 고법지 등은 그 밖의 다른 것에 의거하여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세제일법은 곧장 오직 고법지인만 낼 뿐이요, 진지와 무생지는 내지 않는다.
[문] 『팔분경』 등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는가?
[답] 어떤 이는 “세존께서는 과거와 현재에 의거하여 미래를 견주어 아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세존께서는 과거와 현재의 이와 같은 종류의 보특가라는 이와 같은 업을 짓고서 그러한 만큼의 겁 동안은 악취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종류의 보특가라는 이와 같은 업을 지어 현재 세상에서 과(果)를 받고 이와 같은 업을 지어 바로 다음 생[次生]에서 과를 받으며 이와 같은 업을 지어 그 뒤의 생에서 과를 받는 것을 관찰하셨다. 이런 현견(現見)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종류의 보특가라가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장차 오는 세상
에 그 만큼의 겁 동안은 악취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은 보특가라가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당면한 현세에서 과를 받고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당면한 생에서 과를 받으며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당면한 후생에서 과를 받는다’라고 견주어 알게 된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정의 몸 안에 이와 같은 상(相)이 있는 것은 불상응(不相應)의 행온(行蘊)에 속한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관찰하시고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미래의 세상에 그만큼의 겁 동안은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함을 아시며, 또한 ‘이와 같은 보특가라가 지은 업으로는 혹은 당면한 현세에서 받기도 하고 혹은 당면한 생에서 받기도 하며 혹은 당면한 후생에서 받기도 한다’고 함을 아신다”라고 말한다.
[評]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런 말을 한다면 세존께서는 미래의 일에 대하여 오직 비량(比量)의 지혜만이 있고 현량(現量)의 지혜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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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마땅히 “부처님께서 미래를 아신 것은 현량이요 비량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의 지견(智見)은 분명하고 청정하시고 맹렬하고 날카로운 것이므로 미래의 모든 법이 비록 뒤섞이고 어지러이 머무르면서 차례가 없다고 해도 실제대로 아시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보특가라가 이와 같은 업을 지어 미래 세상에서 그 만큼의 겁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은 종류의 보특가라가 이와 같은 업을 지으면 혹은 당면한 현재 세상에서 받고
혹은 당면한 생에서 받으며 혹은 당면한 후생에서 받는다”고 분명하게 아시었고 잘못됨이 없으셨다.
[문] 어느 다른 논사는 “미래에도 등무간연이 있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미래의 모든 법은 마땅히 차례대로 머물러야 하며 바른 가행을 닦는다 해도 마땅히 소용이 없게 되어야 한다. 또 마땅히 모든 번뇌를 조복하면서 대치(對治)를 낸다는 뜻도 없어야 한다. 이와 같다면 곧 마지막의 해탈은 없을 것이다.
[답] 미래의 모든 법에 비록 등무간연의 성품[性]과 모양[相]의 정해짐이 있다고 해도 앞뒤의 차례가 정해짐이 없다. 이를테면 심․심소가 아직 생기지 못한 자리[未已生位]에서는 그것에서 곧장 법을 내어야 함이 있으면서도 앞뒤의 차례와 벌려 선 줄[行列]이 없으며 이미 생긴 자리[已生位]에 이르러서는 그것에서 곧장 법을 내어야 하는 것도 있고 또한 앞뒤의 차례와 벌려 선 줄도 있다.
마치 많은 사문들이 만일 뒤섞여 어지러이 머무르면 비록 대소(大小)는 이미 정해졌다 하더라도 벌려 선 줄은 아직 정해져 있지 못하나 만일 차례대로 머무르면 대소도 또한 정해지고 벌려 선 줄도 정해지듯이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바른 가행을 닦으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一心]이 곧장 두 마음이 되기 때문이니, 미래 세상의 한마음이 곧장 두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 첫째는 선(善)이요, 둘째는 오염[染]이다. 만일 현재의 세상에서 바른 가행을 닦으면 선한 마음이 생기고 오염된 마음은 생기지 않으나 만일 현재 세상에서 삿된 가행[邪加行]은 일으키면 오염된 마음이 생기고 선한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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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나의 씨를 심은 뒤에는 두 가지의 일이 마땅히 생겨야 되나니, 첫째는 싹이요, 둘째는 재[灰]인 것과 같다. 만일 싹의 연(緣)이 화합하면 싹이 생기고 재는 생기지 않으나 만일 재의 연이 화합하면 재가 생기고 싹은 생기지 않는다. 이것도 그와 같다. 이를 말미암아 역시 모든 번뇌를 조복하면서 대치를 내는 뜻도 있으며 점차로 마지막의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다.
[문] 견온(見蘊)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만일 법이 저 법과 등무간이 된다면 혹 때로는 저 법과 등무간연이 되지 않기도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저 법이 아직 생기기 이전의 때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것은 앞뒤와 차례가 정해진 학설에 의거한 것이요 연(緣)의 성품과 모양이 정해진 학설에 의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난 것은 아니다.
[評] 마땅히 “미래에는 등무간연이 없다. 왜냐하면 등무간연은 뒤섞이어 어지러이 머무르지 않지만 미래 세상의 법은 뒤섞이어 어지러이 머무르기 때문이요, 등무간연은 차례대로 머무르지만 미래 세상의 법은 차례가 없기 때문이며, 등무간연은 길을 열어 주며 피한다는 뜻에 의거하나 미래 세상의 법은 길을 열어 주며 피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미래에 등무간연이 있으면 선을 닦으려고 한 이는 항상 선만을 지어야 하고 악을 지으려고 한 이는 항상 악만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현세에서 보면 선을 닦으려 한 이도 뒤에는 악을 짓는 것이 마치 천수(天授)3) 등과 같으며 악을 지으려 하는 이도 뒤에는 선을 짓는 것이 마치 지만(指鬘)4) 등과 같기 때문에 미래 세상에는 결정코 등무간연이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색법(色法)은 등무간연이 아닌가?
[답] 만일 법과 꼭 들어맞는 것으로서 소의(所依)가 있고 행상(行相)이 있고 경각(警覺)이 있고 소연(所緣)이 있는 것이면 그 법은 등무간연이 성립될 수 있지만 색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
어떤 이는 “등무간연이 앞에 나타나면 어지러움이 없지만 색법은 어지러움이 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 찰나 동안에5) 욕계의 색
3) 제바달다(提婆達多)를 말한다.
4) 앙굴마라(央崛魔羅)를 말한다.
5) 여기서는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아 다시 유루정(有漏定)에 들 때에는 그 선정 안에서 욕계의 별해탈계의 무표색(無表色)과 색계의 정공(定共)의 무표색,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나며 무루정(無漏定)에 들 때에는 욕계와 무루[道共戒]와의 두 가지 무표색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관계를 말한다.(『구사론(俱舍論)』 제7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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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색계의 색을 일으키고 혹은 한 찰나 동안에 욕계의 색과 불계(不繫)의 색을 일으키며 혹은 한 찰나 동안에 색계의 색과 불계의 색을 일으키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한 이숙(異熟)의 색6)이 상속하면서 아직 소멸하기도 전에 장양(長養)의 색과 등류(等流)의 색이 있으며 다시 상속하여 생기되 여러 종류가 함께 생기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모든 비법은 적은 것이 곧장 많은 것을 내고 많은 것이 곧장 적은 것을 내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
적은 것이 곧장 많은 것을 낸다 함은 마치 여름철에 비가 올 때에 적은 구름이 곧장 한량없는 구름을 일으켜 허공을 두루 덮는 것과 같고 작은 나무의 씨에서 극히 높고 큰 낙구타나무[諾瞿陀樹]가 나는 것과 같으며 작은 갈라람(羯刺藍)에서 큰 육체가 생기는 것과 같다.
많은 것이 곧장 적은 것을 낸다 함은 마치 큰 풀 무더기가 타서 적은 재로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심소의 법도 많은 것이 곧장 적은 것을 내고 적은 것이 곧장 많은 것을 내므로 마땅히 등무간연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많은 것이 곧장 적은 것을 낸다고 함은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7)에서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적은 것이 곧장 많은 것을 낸다 함은 무심무사지에서 유심유사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답] 이것은 같은 자리[同地]의 앞뒤의 수(數) 등에 의거한 학설이요, 다른 자리[異地]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6) 이숙의 색[異熟色]이란 전생에 지은 선업(善業)․악업(惡業)의 과보로서의 색(色)을 말하고 장양의 색[長養色]이란 후천적(後天的)으로 음식 등에 양육되어 더욱 자라게 된 색을 말하며 등류의 색[等流色]이란 무표색(無表色)과 같은 것을 말한다.
7)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라 함은 초선(初禪)을 말하고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라 함은 2선(禪) 이상 4선까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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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것은 같은 종류의 앞뒤의 수 등에 의거한 말이고 다른 종류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이를테면 한마음 속에서 만일 한 느낌[受]의 등무간에 두 느낌이 평등하게[等] 나거나 두 느낌의 등무간에 한 느낌이 평등하게 난다면 이것은 허물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없기 때문에 색과는 구별된다.
모든 색법으로서 같은 종류의 극미(極微)는 하나의 무더기 안에서 여러 많은 것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성립될 수 없으나 심․심소의 법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불상응행(不相應行)은 등무간연이 아닌가?
[답] 만일 법과 꼭 들어맞는 것으로서 소의가 있고 행상이 있고 경각(警覺)이 있고 소연이 있으면 그 법은 등무간연이 성립될 수 있지만 불상응행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
어떤 이는 “등무간연은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어지러움이 없지만 불상응행은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어지러움이 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 찰나 동안에 삼계(三界)와 불계(不繫)의 불상응행을 일으킴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꼭 들어맞는 것에 따르는 것은 마치 앞의 자세한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마음의 등무간 법인가? 만일 마음의 등무간에 그 밖의 다른 심․심소의 법이 이미 생겼거나 지금 막 생긴 것과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 이미 생겼거나 지금 막 생기면 이것을 마음의 등무간 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거기서는 무엇 때문에 무상(無想)의 이숙을 말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에는 가행(加行)이 있고 공용(功用)이 있어서 수고로이 힘쓰면서 얻기 때문에 거기서 말한 것이지만 무상의 이숙은 이것과는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거기서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두 무심정은 선(善)이기 때문에 말하지만 무상의 이숙은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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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만일 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곧장 끌어 일으키면서 뒤섞이어 어지럽지 않으면 마음의 등무간법이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무상의 이숙은 이숙인(異熟因)의 힘으로 끌어 일으킨 것이요, 저절로 변화하면서 그 마음의 세력이 이끈 것에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법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숙의 심․심소의 법도 역시 이숙인의 힘으로 끌어 일으키게 되고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마음의 등무간법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답] 같은 종류의 모양[自類相]으로 이끌고 뛰어난 세력이 있으며 그것과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은 다 같이 서로 꼭 들어맞고 소의(所依) 등이 있으므로 같은 종류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무심정은 마음의 등무간 법이면서도 마음의 등무간연이 아닌가?
[답] 그것은 마음의 가행과 공용을 말미암아 수고로이 힘쓰고 이끌어서 얻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의 법이라 하지만 마음과는 서로 어긋나고 마음을 차단하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연은 아니다.
어떤 이는 “그것은 마음의 세력으로 끌어 일으킴을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의 법이라 하지만 상응하지 않고 의거할 것도 없고 행상도 없고 경각도 없고 소연도 없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연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마음의 세력을 말미암아 더욱 자람을 얻고 작용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의 법이라 하지만 마음을 손감(損減)시키고 작용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때문에 마음의 등무간연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무심정은 앞뒤가 서로 비슷하고 어지러이 이어 나는 것이 없는데도 앞은 뒤의 등무간연이 아닌가?
[답] 선정[定]에 드는 마음의 세력이 이끄는 것으로 말미암았고 앞의 생각하는 힘[念力]이 이끄는 것을 말미암아 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의 등무간연이 아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숙의 심․심소의 법은 이숙인의 세력이 이끈 것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앞의 것은 뒤의 등무간연이 아니어야
한다.
[답] 심․심소의 법은 상응하고 소의(所依)가 있고 행상(行相)이 있으며 일깨움[警覺]이 있고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에 앞의 생각[念]은 뒤의 것보다 뛰어난 세력이 있으면서 끌어 일으키고 열어 주며 피한다. 때문에 모두가 이것은 뒤의 등무간연이나 불상응행은 이것과는 서로 반대이므로 예(例)가 될 수 가 없다.
[문] 무상정과 멸진정에 들고 나고 하는 마음의 중간에는 혹은 반 겁 또는 한 겁을 지나기도 하거늘 어떻게 등무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답] 그 중간에는 다른 마음으로 사이를 뜨게 함이 없기 때문이다. 들고 날 적의 마음이 서로 떨어져서 비록 멀다 해도 그 중간에는 다시 그 밖의 다른 마음이 그 사이에 끼임이 없기 때문에 뒤의 것은 앞의 것에 대하여 등무간이라 한다.
마치 두 사람이 같이 먼 길을 갈 적에 한 사람은 앞에 가고 한 사람은 뒤에 가면서 서로가 멀리 떨어져서 가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은 동무가 있습니까?”라고 할 적에 그는 “있습니다. 이 뒤에 오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그 두 사람의 중간에 비록 날짐승․길짐승은 있다고 해도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뒤에 옵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마음의 사이에 끼어든 것이 없으므로 등무간이라 한다.
[문] 만일 법이 마음의 등무간이면 역시 이것은 마음의 무간(無間)인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마음의 등무간이나 마음의 무간이 아니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二無心定]과 유심위(有心位)의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상속하는 두 무심정과 정에서 나온[出定] 심․심소의 법이다.
어떤 법은 마음의 무간이나 마음의 등무간이 아니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의 나고[生]․늙고[老]․머무르고[住]․무상[無常]한 것이다.
어떤 법은 마음의 등무간이면서 마음의 무간이기도 하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이다.
어떤 법은 마음의 등무간도 아니고 마음의 무간도 아니다. 첫 찰나 동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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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상속하는 두 무심정과 정에서 나온 심․심소의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 무상한 것이다.
[문] 만일 법이 마음의 등무간이면 또한 무심정의 무간인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마음의 등무간이나 무심정의 무간은 아니다. 처음의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이다.
어떤 법은 무심정의 무간이나 마음의 등무간은 아니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상속하는 두 무심정과 정에서 나온 심․심소의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이다.
어떤 법은 마음의 등무간이면서 무심정의 무간이기도 하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상속하는 두 무심정과 정에서 나온 심․심소의 법이다.
어떤 법은 마음도 등무간도 아니고 무심정의 무간도 아니다. 처음 찰나 동안의 두 무심정과 유심위의 심․심소의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이다.
세 가지 작의(作意)가 있으니, 자상(自相)의 작의와 공상(共相)의 작의와 승해(勝解)의 작의8)이다.
자상의 작의라 함은 ‘물질[色]은 변하고 거리끼는 모양[變礙相]이요, 느낌[受]은 받아들이는 모양[領納相]이며, 생각[想]은 형상을 취하는 모양[取像相]이요, 지어감[行]은 조작하는 모양[造作相]이며, 의식[識]은 명확히 알아서 분별하는 모양[了別相]이다. 땅[地]은 단단한 모양[堅相]이요, 물[水]은 축축한 모양[濕相]이며, 불은 따뜻한 모양[煖相]이요, 바람[風]은
8) 자상(自相)의 작의(作意)란 자상관(自相觀)과 상응하는 작의를 말하고, 공상(共相)의 작의란 고(苦)․공(空)․무상(無常)․무아(無我) 등과 같은 16행상(行相)은 색법(色法)에도 심법(心法)에도 다 통하는 법의 모양으로서 곧 공상(共相)인데 이 공상의 관지(觀智)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하며, 승해(勝解)의 작의라 함은 경계에 대하여 혹은 관지를 설정하는 부정관(不淨觀) 등의 작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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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모양[動相]이다’라고 사유(思惟)하는 이러한 것 등이다.
공상의 작의라 함은 16행상(行相) 등과 같은 것이며, 승해의 작의라 함은 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무량(無量)․해탈(解脫)․승처(勝處)․변처(遍處) 등과 같다.
[문] 이 세 가지의 작의는 몇 가지의 무간(無間)에 성도(聖道)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도9)의 무간에는 몇 가지의 작의가 앞에 나타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세 가지의 무간에는 성도가 앞에 나타나 있으며 성도의 무간에는 세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은 계경에서 “부정관과 함께 행하는 염등각지(念等覺支)를 닦으면서 싫증[厭]에 의지하고 여읨[離]에 의지하며 사라짐[滅]에 의지하고 버림[捨]에 회향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잘 통한다. 이 가운데서 함께[俱]라는 소리는 무간(無間)의 뜻을 드러낸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무간에는 성도가 앞에 나타나 있으며 자상의 작의를 제외한 성도의 무간에는 세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오직 공상의 작의의 무간에서만 성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도의 무간에는 세 가지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다.
[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계경에서 “부정관과 함께 행하는 염등각지를 닦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답] 순차적인 인[展轉因]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마치 자손의 법[子孫法]에서처럼 전(轉)하며 서로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뛰어나게 아는 작의는 공상의 작의를 끌어 일으키고 공상의 작의는 성자의 도를 끌어 일으킨다.
어떤 이는 “공상의 작의의 무간에는 성자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자의 도의 무간에는 공상의 작의가 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미지정(未至定)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간 이가 성자의 도를 낼 때에는 욕계의 공상의 작의를 일으킬 수 있지만 만일 윗자리[上
9) 여기서의 성도(聖道)는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의 세 가지 도를 통틀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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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어간 이가 성자의 도를 낼 때에는 그 욕계의 마음은 이미 일으킬 수 없으니, 극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또 아직 색계의 공상의 작의를 얻지 아니했으면 그가 비록 이미 순결택분(順決擇分)을 얻었다 해도 성자의 도의 뒤에는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그는 어떠한 공상의 작의로써 성자의 도를 내는 것인가?
[답] 그는 순결택분의 중간에서 이미 이와 같은 행상을 닦아 얻었으니, “온갖 행은 항상 하지 아니하고 온갖 법은 나가 아니며[非我] 열반은 고요하다”는 등이다. 이제 성자의 도를 내면서 그런 작의를 일으킨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앞의 말과 같은 것이 좋다 하겠다. 세 가지의 무간에는 성자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자의 도의 무간에는 세 가지의 앞에 나타나 있다.
또 욕계에는 세 가지의 작의(作意)가 있으니, 문소성(聞所成)10)의 작의와 사소성(思所成)의 작의와 생득(生得)의 작의이다.
색계에도 세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문소성의 작의와 수소성(修所成)의 작의와 생득의 작의이다.
무색계에는 두 가지의 작의가 있으니, 수소성의 작의와 생득의 작의이다. 무루(無漏)에는 한 가지 작의가 있으니, 수소성의 작의이다.
이 가운데서 욕계에서는 오직 사소성의 작의의 무간에서만 성자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자의 도의 무간에는 세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다.
색계에서는 오직 수소성의 무간에서만 성자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자의 도의 무간에는 생득을 제외한 두 가지 앞에 나타나 있다.
무색계에서는 오직 수소성의 무간에서만 성자의 도가 앞에 나타나 있고 성자의 도의 무간에서도 수소성만이 앞에 나타나 있다.
10) 문소성(聞所成)의 작의(作意)는 문혜(聞慧)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하고 사소성(思所成)의 작의는 사혜(思慧)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하며 수소성(修所成)의 작의는 선정적(禪定的) 수양의 결과로 되는 작의를 말하고 생득(生得)의 작의는 생득혜(生得慧)와 상응하는 작의이다. 이 중에서 욕계는 산지(散地)이기 때문에 수소성의 작의가 없고 색계는 정지(定地)이므로 산혜(散慧)에 의한 사유(思惟)가 없기 때문에 사소성의 작의가 없으며 무색계는 정지(定
地)이면서 또 소리가 없기 때문에 사소성의 작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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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성자의 도의 무간에서 욕계의 생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색계와 무색계의 생득은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인가?
[답] 욕계의 생득은 맹렬하고 날카롭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생득은 맹렬하거나 날카롭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미지정에 의거하여 아라한과를 얻으면 그는 혹은 욕계의 마음으로써 성자의 도를 내기도 하고 혹은 미지정의 마음으로써 성자의 도를 내기도 한다. 만일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의거하여 아라한과를 얻으면 그는 혹은 무소유처의 마음으로써 성자의 도를 내기도 하고 혹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마음으로써 성자의 도를 낸다. 만일 그 밖의 자리[地]에 의거하여 아라한과를 얻으면 그는 오직 자기 자리[自地]의 마음으로써 성자의 도를 낸다.
또 초정려(初靜慮)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미상응(味相應)11)과 정(淨)과 무루(無漏)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이에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가지가 있으며 비상비비상처에는 무루를 제외한 두 가지만이 있다.
이 가운데서 미상응의 무간에는 무루를 제외한 두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고 정의 무간에는 세 가지 앞에 나타나 있으며 무루의 무간에는 미상응을 제외한 두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다.
초정려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순퇴분정(順退分定)과 순주분정(順住分定)과 순승진분정(順勝進分定)과 순결택분정(順決擇分定)이다.
이와 같이 하여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 가지가 있으며 비상비비상처에는 순승진분을 제외한 세 가지만이 있다.
이 가운데서 순퇴분의 무간에는 두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으니 순퇴분과 순주분이고, 순주분의 무간에는 세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으니 순결택분이
11) 4선(禪) 4무색정(無色定) 중에서 유정(有頂)을 제외하고 7정(定)을 그 성질상 3종으로 나눈다. 곧 미등지(味等至)와 정등지(淨等至)와 무루등지(無漏等至)이다. 미등지라 함은 탐번뇌(貪煩惱)와 상응하는 선정이어서 앞 생각[前念]의 선정에 애착하는 것을 말하고 정등지라 함은 유루선(有漏善)의 선정이어서 무탐(無貪) 등의 모든 백정(白淨)의 법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무루등지라 함은 출세정(出世定)을 말한다.(『구사론』 제28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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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외되며, 순응진분의 무간에는 세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으니 순퇴분이 제외되고, 순결택분의 무간에는 두 가지가 앞에 나타나 있으니 순결택분과 순승진분이다.
[문] 만일 제2․제3․제4의 정려에 나서 초정려의 모든 식신(識身)을 일으킬 때에는 몇 가지의 마음이 곧장 들어가며 몇 가지의 마음이 나오는가?
[답] 나게 되는 자리[地]에 따른다. 만일 아직 염(染)을 여의지 못한 이면 세 가지 마음의 무간에는 그 모든 식신이 앞에 나타나 있고 그 모든 식신의 무간에는 세 가지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으니, 선(善)과 염오[染汚]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만일 이미 염을 여읜 이면 두 가지의 마음은 무간에서 그 모든 식신이 앞에 나타나 있고 그 모든 식신의 무간에는 두 가지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염오가 제외된다.
열두 가지 마음12)이 있다. 욕계에는 선(善)․불선(不善)․유부무기(有覆無記)․무부무기(無覆無記)의 네 가지요, 색계․무색계에는 각각 앞의 네 가지 가운데에서 불선은 제외된다. 무루에 학(學)과 무학(無學)의 두 가지가 있다.
[문] 열두 가지의 마음은 하나하나의 무간에서 몇 가지의 마음을 내며 다시 몇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기는가?
[답] 욕계 선심(善心)의 무간은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낸다. 욕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한 가지 즉 유부무기와 그리고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여덟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긴다. 욕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불선한 마음의 무간은 네 가지의 마음을 낸다. 욕계의 네 가지 마음이다.
12) 열두 가지의 마음이란 선(善)․악(惡)․유부무기(有覆無記)․무부무기(無覆無記)의 4종 마음을 널리 3계(三界)에 배속(配屬)하여 총 10종의 마음으로 하고 거기에 학(學)과 무학(無學)의 2종의 불계심(不繫心)을 더하여 12종의 마음으로 한 것이어서 이 문단에서는 그것들의 하나하나가 얼마의 마음을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하여 스스로 생기고 또 스스로가 등무간연이 되어서 뒤에 얼마의 마음을 내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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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은 다시 열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긴다. 욕계의 네 가지와 색계․무색계의 각각 세 가지씩의 마음이다.
불선의 마음에서처럼 욕계의 유부무기의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욕계의 무부무기한 마음의 무간에는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낸다. 욕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한 가지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다섯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긴다. 욕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 즉 선의 마음이다.
색계의 선한 마음의 무간에는 열한 가지의 마음을 낸다. 열두 가지의 마음 가운데에서 무색계의 무부무기의 마음이 제외된다. 이 마음은 다시 아홉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긴다. 이를테면 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선과 무부무기와 무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색계 유부무기의 마음의 무간은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낸다. 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세 가지 즉 무부무기는 제외된다. 이 마음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색계와 무색계의 각각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선과 무부무기의 마음이다.
색계의 무부무기한 마음의 무간은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낸다. 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한 가지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세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긴다. 색계 세 가지의 마음이다.
무색계의 선한 마음의 무간은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낸다. 무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여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 즉 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무색계의 유부무기한 마음의 무간은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낸다. 무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두 가지 즉 선과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와 색계의 각각 두 가지씩 즉 선과 무부무기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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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계의 무부무기한 마음의 무간은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낸다. 무색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한 가지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세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의 세 가지 마음이다.
학의 마음[學心]의 무간은 다섯 가지의 마음을 낸다. 삼계(三界)의 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네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삼계의 선과 학의 마음이다.
무학의 마음[無學心]의 무간은 네 가지의 마음을 낸다. 삼계의 선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삼계의 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스무 가지의 마음13)이 있다. 욕계에서는 여덟 가지이니, 가행선(加行善)․생득선(生得善)․불선(不善)․유부무기(有覆無記)․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이숙생(異熟生)과 통과(通果)의 마음이다.
색계에서는 여섯 가지이니, 앞의 여덟 가지 마음 가운데에서 불선과 공교처는 제외된다. 무색계에서는 네 가지이니 가행선․생득선․유부무기 및 이숙생의 마음이다. 무루에서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학(學)과 무학(無學)의 마음이다.
[문] 이 스무 가지 마음의 낱낱의 무간은 몇 가지의 마음을 내는가? 또 몇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서 생기는 것인가?
13) 20심(心)은 앞의 12심을 다시 세분(細分)하여 얻는 수(數)이어서 선심(善心)을 선천성(先天性:生得性)과 후천성(後天性:加行得)으로 나누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을 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이숙생(異熟生)․통과심(通果心)으로 나누어 이들을 삼계(三界)에서 구하여 다시 학(學)․무학심(無學心)을 더하여 20심으로 한 것이다. 이중에서 무부무기의 4심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①위의로의 마음은 위의(威儀) 즉, 행(行)․주(住)․좌
(坐)․와(臥)의 상태(狀態:路)에 관계하는 마음이어서 이 마음은 선악으로 인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요 따로 어떠한 번뇌에도 관계하지 않는 점에서 무부무기라 한 것이다. ②공교처의 마음은 조각(彫刻)․회화(繪畵)․음악(音樂) 등에 관한 마음이다. ③이숙생의 마음은 전생이 업력(業力)에 이끌려서 저절로 12처(處)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다. ④통과의 마음은 능히 변화할 수 있는 마음[能變化心]과 천안(天眼)․천이(天耳) 등의 신통의 과보로 일어
나는 때의 마음을 말한다. 어느 것도 선악이나 번뇌에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부무기의 마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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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욕계 가행선의 마음은 무간에서 열 가지의 마음을 낸다. 욕계에서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일곱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욕계에서 무부무기의 네 가지를 제외한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즉 가행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마음은 다시 열한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앞의 여덟 가지와 욕계의 위의로와 공교처와 이숙생의 마음이다. 왜냐하면 가행선의 마음을 익숙하게 닦아 익힌 이는 자기 경계의 위의로와 공교처와 이숙생의 마음의 무간에서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욕계에 나면서 얻는 착한 마음은 무간에서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낸다. 욕계에서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일곱 가지와 색계․무색계의 각각 한 가지씩의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열한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열한 가지는 욕계에서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일곱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즉 가행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착하지 못한 마음은 무간에서 일곱 가지 마음을 낸다. 일곱 가지는 욕계의 여덟 가지에서 통과(通果)를 제외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열네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욕계에서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일곱 가지와 색계에서 가행선과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네 가지와 무색계에서 가행선을 제외한 세 가지의 마음이다.
불선의 마음처럼 욕계 유부무기의 마음도 그러하다.
욕계 위의로(威儀路)의 마음은 무간에서 여덟 가지 마음을 낸다. 여덟 가지는 욕계의 가행선과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여섯 가지와 색계․무색계의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마음은 무간에서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낸다. 아홉 가지는 앞의 여덟 가지와 욕계의 가행선의 마음이니 익숙하게 닦아 익히는 이의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마음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일곱 가지는 욕계의 여덟 가지 중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일곱 가지다.
욕계 위의로의 마음처럼 욕계 이숙생의 마음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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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처의 마음은 무간에서 여섯 가지 마음을 낸다. 여섯 가지는 욕계의 여덟 가지 마음에서 가행선과 통과심을 제외한 여섯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마음은 무간에서 일곱 가지 마음을 낸다. 일곱 가지는 앞의 여섯 가지와 욕계 가행선의 마음이니, 익숙하게 닦아 익힌 이의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마음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일곱 가지는 욕계 여덟 중에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것이다.
욕계 통과의 마음은 무간에서 두 가지 마음을 낸다. 두 가지는 욕계의 통과와 색계 가행선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두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두 가지는 욕계의 통과심과 색계의 가행선의 마음이다.
색계 가행선의 마음은 무간에서 열두 가지의 마음을 낸다. 열두 가지는 색계의 여섯과 욕계의 셋 즉, 열두 가지는 가행선과 생득선과 통과와 무색계의 하나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열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열 가지는 색계의 위의로와 이숙생의 마음을 제외한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가행선과 통과의 마음과 무색계의 두 가지 즉 가행선과 유부무기와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색계에 나면서 얻는 착한 마음은 무간에서 여덟 가지 마음을 낸다. 여덟 가지는 색계에서 통과를 제외한 다섯과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하나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색계에서 통과를 제외한 다섯 가지의 마음이다.
색계의 유부무기한 마음은 무간에서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낸다. 아홉은 색계에서 통과를 제외한 다섯과 욕계의 넷 즉 가행선과 생득선과 불선과 유부무기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열한 가지의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색계에서 통과를 제외한 다섯과 욕계의 셋 즉 생득선과 위의로와 이숙생과 무색계에서 가행선을 제외한 세 가지의 마음이다.
색계 위의로의 마음은 무간에서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낸다. 일곱은 색계에서 가행선의 마음과 통과의 마음을 제외한 네 가지와 욕계의 둘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하나 즉 유부무기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다섯은 색계에서 통과를 제외한 다섯 가지의 마
음이다.
색계 위의로의 마음처럼 색계 이숙생의 마음도 그러하다.
색계 통과의 마음은 무간에서 두 가지 마음을 낸다. 두 가지는 색계의 가행선과 통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두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색계의 가행선과 통과의 마음이다.
무색계 가행선의 마음은 무간에서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낸다. 일곱 가지는 무색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여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에서 이숙생을 제외한 세 가지와 색계의 한 가지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무색계 생득선의 마음은 무간에서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낸다. 일곱 가지의 마음은 무색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한 가지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네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의 네 가지 마음이다.
무색계의 유부무기한 마음은 무간에서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낸다. 여덟은 무색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둘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둘 즉 가행선과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열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열은 무색계의 넷과 욕계․색계에서 각각 셋씩 즉 생득선과 위의로와 이숙생의 마음이다.
무색계 이숙생의 마음은 무간에서 여섯의 마음을 낸다. 여섯은 무색계에서 가행선을 제외한 셋과 욕계의 둘 즉 불선과 유부무기와 색계의 하나 즉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네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무색계의 네 가지 마음이다.
학의 마음은 무간에서 여섯 가지 마음을 낸다. 여섯은 욕계의 둘 즉 가행선과 생득선과 색계․무색계에서 각각 하나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네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네 가지는 삼계에서 각각 하나씩 즉 가행선과 학의 마음이다.
무학의 마음은 무간에서 다섯 가지 마음을 낸다. 다섯은 욕계의 둘 즉 가행선과 생득선과 색계․무색계에서 각각 하나씩 즉 가행선과 무학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의 무간에서 생긴다. 다섯은 삼계에서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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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하나씩 즉 가행선과 학과 무학의 마음이다.
[論]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으며 또 앞 마음이 뒤의 마음에게로 간다는 이치가 없거늘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보특가라의 자체(自體)는 실로 존재한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자부(犢子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나에게 나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먼저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제 스스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가 없다면 무슨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물건의 성품은 서로가 숨긴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모든 법은 서로가 숨긴다[諸法相隱]는 외도가 말한 것과 같다. 그들은 “모든 유위의 법은 밤과 낮의 분류가 있어서 서로서로 감추고 숨긴다. 밤에는 낮은 들어가서 밤 가운데에는 낮의 성품이 비록 있다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낮에는 밤은 들어가서 낮 가운데에 밤의 성품이 비록 있다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낮과 밤 가운데에는 밤과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이나 낮에 지었던 일을 낮과 밤 동안에 기억하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물건의 성품은 서로가 변한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모든 법은 서로가 변한다[諸法相變]는 외도가 말한 것과 같다. 그들은 “갈라람(羯刺藍)의 자리가 변하여 알부담(頞部曇)의 자리가 되며 나아가 견고한 자리[堅固位]는 변하여 노쇠의 자리[衰老位]가 되는 것은 마치 푸른 잎이 변하여 노란 잎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앞과 뒤의 자리의 체성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앞자리에서 지었던 것을 뒷자리에서
기억하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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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물건의 성품은 서로가 나아간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모든 법은 서로가 간다[諸法相往]는 외도가 말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갈라람이 가서 알부담의 자리 안으로 들어가고 나아가 견고한 것이 가서 노쇠한 자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뒤의 자리 안에는 앞의 법이 있기 때문에 앞의 자리에서 지었던 것을 뒤의 자리에서 기억하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물건의 성품이 서로가 변하고[相變] 서로가 간다는[相往] 외도들의 두 집착은 무엇이 다른가?
[답] 서로가 변한다는 외도의 집착은 ‘앞의 자리는 변하여 뒤의 자리가 되지만 뒤의 자리 안에는 앞의 자리가 없다’라는 것이요, 서로가 간다는 외도의 집착은 ‘앞의 자리는 뒤의 자리로 가지만 이미 뒤의 자리에 가서는 그 모양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곧 뒤의 자리와 함께 때를 같이하며 더욱 자란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서로가 변한다는 외도는 ‘뒤의 것과 앞의 것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집착하는 것이요, 서로가 나아간다는 외도는 ‘뒤의 것과 앞의 것은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라고 집착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깨닫는 성품[覺性]은 하나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앞뒤가 하나의 깨달음[前後一覺]이라고 말하는 논자(論者)와 같다. 그들은 “앞의 것은 지은 일을 깨닫고 뒤의 것은 기억하는 것을 깨닫는다. 상용(相用)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의 성품은 하나이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앞과 뒷자리의 깨닫는 체성의 하나이기 때문에 앞자리에서 지은 것을 뒷자리에서 기억하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
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의계(意界)는 항상한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데 마치 의계는 항상하다[意界是常]고 집착하는 논자(論者)와 같다. 그들은 “6식(識)은 비록 나고 없어지고 한다 하더라도 의계는 항상한 것이다. 이 때문에 본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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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6식이 지었던 일을 의계가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온(蘊)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온(根本蘊)이요, 둘째는 작용온(作用蘊)이다. 앞의 온은 항상한 것이지만 뒤의 온은 항상한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들은 “근본과 작용의 두 온이 비록 다르다고 해도 함께 화합하여 하나의 유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작용의 온이 지었던 일을 근본의 온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앞의 마음이 가서 뒤의 마음에게 ‘나는 일을 지었으니 너는 기억하고 지녀야 한다’라고 알린다”라고 집착한다. 그들은 “마음은 미세하고 그윽하게 통하는데 앞에서 지었던 일이 있으면 반드시 뒤에게 고하여 알린다. 이 때문에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긍가(殑伽)의 모래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비록 보특가라가 있다고 설하지 않았고 또한 물건의 성품이 서로가 숨긴다[相隱]거나 서로가 변한다[相變]거나 서로가 간다[相往]거나 하나의 깨닫는 성품[一覺性]이라거나 의계가 항상한 것이다[意界常]거나 근본온이 다르고 작용온이 다르다[根本蘊異作用蘊異]거나 앞 마음이 가서 뒷 마음에 고한다[前心往告後心]고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뜻은 결정적이요 미세하고 매우 깊은 것이어서 분명히 깨달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결정적이요 미세하고 매우 깊어서 분명히 깨달아 알기 어려운 모든 법의 성상(性相)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른 종의 도리답지 않은 말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이 가운데 마땅히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고 또한 물건의 성품은 서로 숨기거나 서로 변하거나 서로 가거나 하나의 깨닫는 성품이거나 의계가 항상하다거나 근본온이 다르고 작용온이 다르다거나 앞 마음이 가서 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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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게 고하는 이치가 없다면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는가?”라고 자세하게 말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으며 또 앞 마음이 뒷 마음에게로 간다는 도리도 없다”고만 말하는 것인가?
[답] 이 가운데에서 “보특가라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별도로 처음 하나의 보특가라라는 논(論)을 차단하는 것이요, “또 앞 마음이 뒷 마음에게로 간다는 도리도 없다”는 것은 통틀어 뒤의 일곱 가지의 논[七論]을 차단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제일의 보특가라론(補特伽羅論)을 차단하는 것이며, 또 앞 마음이 뒷 마음에게로 간다는 도리도 없다고 하는 것은 여덟 번째의 앞 마음이 가서 뒷 마음에게 고한다는 논[前心往告後心論]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미 처음의 것과 맨 나중의 것을 차단한 것이므로 이미 그 중간에 있는 여섯 가지의 논[六論]도 차단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본론사(本論師)가 간략하게 처음과 나중의 것을 들어서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받아 지니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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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 ④
[論]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으며 또 앞 마음이 뒤의 마음에게로 간다는 이치가 없거늘 어떠한 연유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答] 유정은 법에 대하여 익숙하게 익힌 힘[串習力]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同分智]를 얻어서 겪었던 일에 따라 그와 같이 알게 된다.
[문] 앞에서는 “보특가라는 없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서는 어째서 또 “유정은 법에 대하여”라고 말하는가?
[답] 앞에서는 성자[聖]의 생각과 이름에 의하여 말했고 여기서는 세간[世]의 생각과 이름에 의하여 말하며, 앞에서는 성자의 말씀에 의하여 나타내 보였고 여기서는 세간의 말에 의하여 나타내 보이며, 앞에서는 승의(勝義)에 의거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세속(世俗)에 의거한 것이다.
어떤 이는 “글[文]에 수순하기 위해서다. ‘만일 법은 법에 대하여’라고 말하면 뜻에서는 비록 수순하나 글에 있어서는 수순하지 않고 ‘만일 유정은 법에 대하여’라고 말하면 글과 뜻에 있어서 다 같이 수순한다. 세속의 이치에 의거하면 유정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해를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법은 법에 대하여’라고 말하면 제자들은 누가 무엇을 기억하는가를 분명히 모르지만 ‘만일 유정은 법에 대하여’라고 말하면 제자들은 유정이 법을 기억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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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라고 말한다.
유정은 법에 대하여 익숙하게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는다 함은 유정의 지혜는 알아야 할 법에 대하여 결정코 익숙하게 익혀 하고자 하는 대로 자재하고 앞뒤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동분이라 한다.
겪었던 일에 따라 이와 같이 알게 된다고 함은 본래 본 것과 본래 느낀 것에 따라 그와 같이 기억하게 된다.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있는 일에 따라 그와 같이 알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본래에 있는 체성과 있는 형상과 있는 나[我]와 있는 물건과 있는 성품과 있는 분한에 따라 그와 같이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머무르는 일에 따라 그와 같이 알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본래 머무른 현색[顯色]과 본래 머무른 형색(形色) 등에 따라서 그와 같이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뜻을 분명히 얻게 하기 위하여 세간에 나타나는 비유를 인용한다.
[論] 어느 두 도장을 만드는 이[造印者]가 자기와 남이 만든 도장의 글자를 환히 아는 것과 같다. 비록 그 두 사람이 가서 “그대는 어떻게 이 글자를 만들었는가?”라고 서로 묻지도 않고 또한 “나는 이와 같이 이 글자를 만들었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해도 그 두 사람은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어서 자기와 남이 만든 도장의 글자를 분명히 안다. 유정도 그러하여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서다.……(이하 자세한 내용
은 생략함)…….
여기에서 글을 쓰는 이면 모두 도장을 만든 이라 한다. 그 두 사람은 서로가 묻지도 않고 또한 서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해도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어서 자기와 남이 만든 도장의 글자를 분명히 알며 나아가 해외(海外)의 글이 와도 역시 읽고 아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비록 진실한 보특가라도 없고 또한 앞 마음이 뒤의 마음에 간다는 이치가 없다고 해도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어서
겪었던 일에 따라 그와 같이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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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런 뜻을 거듭 분명히 하기 위하여 두 번째의 비유를 인용한다.
[論] 또 어느 두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이가 서로서로 마음을 아는 것과 같다. 비록 그 두 사람이 가서 서로 “그대는 어떻게 나의 마음을 아는가?”라고 묻지도 않고 또한 “나는 이렇게 그대의 마음을 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해도 그 두 사람은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어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안다. 유정도 그러하여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서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에서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 함은 타심통(他心通)을 얻은 이를 말한다. 그 두 사람은 비록 서로 묻지도 않고 서로 대답하지 않는다 해도 익숙하게 익힌 힘을 말미암아 이와 같은 동분의 지혜를 얻어서 서로가 마음을 알며 나아가 백 유선나(踰繕那) 밖에서도 마음을 아는 것처럼, 유정도 비록 진실한 보특가라는 없다고 해도 그러하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만일 다른 마음[異心]이 겪었던 것을 다른 마음이 기억할 수 있다면 어찌하여 천수(天授)1)가 겪었던 것을 사수(祠授)2)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수가 겪었던 것을 천수는 기억하는가?
[답] 그것은 서로 이어짐[相續]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 마음과 뒤의 마음이 서로 이어짐에 다름이 없다면 따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그들의 마음을 서로 바라볼 적에 인(因)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앞 마음이 뒤의 마음과 인이 될 수 있다면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둘의 몸과 마음이 서로 속(屬)하지 않기 때문이나 앞뒤의 몸과 마음이 이미 서로 계속되기 때문에 먼저 겪었던 것을 뒤에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마음이 서로 속하여 기억할 수 있다면 어찌하여 다른 소[牛]를 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앞의 소라고 기억하는가?
1) 데바달다(Devadatta)를 말한다.
2) 야즈냐달다(Yajñadatta)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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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일찍이 느낀 것에 대하여 지금 서로 비슷한 것을 보면 기억하게 되나 만일 비록 일찍이 느꼈다 하더라도 지금 서로가 비슷하지 않은 것을 보면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아침나절에 겪었던 것을 저녁나절에도 기억하게 되고 저녁나절에 겪었던 것을 다음 아침나절에도 기억하는 것은 앞뒤로 보았던 몸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論] 또 온갖 심․심소의 법은 소연(所緣)에서 정해지고 소연에 편안히 머무른다.
이것은 묻는 것에 대한 뛰어난 뜻[勝義]의 근본이 되는 대답이다. 왜냐하면 견온(見蘊)에서 “만일 법이 그 법과 소연이 된다면 때로는 그 법과 소연이 되지 않기도 하는가? 어떤 때라 해도 소연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심․심소는 소연에서 정해지고 소연에 편히 머무르고 옮아가고 변하지 아니하므로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의 소연에서 한량없는 심․심소의 무더기가 있으면서 이 하나의 소연에서 변하는 것이다. 이 이치로써 이 성품의 종류로써 이 법식으로써 하나의 심․심소의 무더기와 소연의 일을 짓는 것처럼 그 밖에 한량없는 심․심소의 무더기와 소연의 일을 짓는 것도 그러하다.
하나의 심․심소의 무더기가 이 이치와 이 성품의 종류와 이 법식으로 이 소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 밖의 한량없는 심․심소의 무더기가 이 소연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하다.
비유하면 어느 한 사람이 백의 아들을 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하나의 아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아들들에게도 그러하며,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들로서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아들들도 그러한다.
이 가운데에서 안식(眼識)과 상응하는 법은 빛깔에서 소연이 정해지고 나아가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법은 온갖 법에서 소연이 정해진다.
이 빛깔이 안식과 상응하는 법과 소연이 된다면 어느 때에도 소연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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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으며 나아가 이 법이 의식과 상응하는 법과 소연이 된다면 어느 때에도 소연이 아님이 없다. 온갖 심․심소의 법은 저마다 스스로 소연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를 말미암아 그 다른 마음 무더기로 겪었던 것을 그와 다른 마음 무더기가 기억하게 되는 것은 없다.
[문] 심․심소의 법은 소연에서 어떻게 정해지는가? 처(處)에서 정해지는가, 푸른 것 등에서 정해지는가, 찰나에서 정해지는가?
[답]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오직 처에서만이 정해진다. 왜냐하면 한량없는 심․심소의 법은 생기지 않은 법[不生法] 안에 머무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처에서 정해지는가?
[답] 안식과 상응하는 법은 색처(色處)에서 정해지고 나아가 신식(身識)과 상응하는 법은 촉처(觸處)에서 정해지며 의식과 상응하는 법은 법처(法處) 등에서 정해진다.
하나의 안식이 만일 청색(靑色)을 만나 화합해서 앞에 나타나면 청색을 반연하여 일어나고, 만일 황색(黃色)을 만나 화합해서 앞에 나타나면 황색 등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그 밖의 다른 식도 자기의 소연한 처에서만 정해진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하나의 깨달음에 명확하게 아는 성품[了性]이 많이 있고 하나의 법은 여러 체성이어야 하므로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식신론(識身論)』의 설명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과거의 안식은 오직 과거의 빛깔만을 반연하고 미래와 현재는 반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다른 이는 이러한 허물을 피하려고 “심․심소의 법은 소연과 처에서 정해지며 또한 청색 등에서도 정해지지만 찰나에서는 정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량없는 심․심소의 법은 생기지 않는 법 안에 머무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찌하여 또한 청색 등에서도 정해지는가?
[답] 청색 등을 반연하는 심․심소의 그 자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청색을 만나 화합하여 앞에 나타나면 청색을 반연하는 심․심소의 법이 생기고, 만일 황색 등을 만나 화합하여 앞에 나타나면 황색 등을 반연하는 심․심소의 법을 낸다.
[評] 그도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청색은 여러 종류이기 때문이다. 푸른 뿌리․푸른 줄기․푸른 가지․푸른 잎․푸른 꽃․푸른 열매이며 황색 등도 그러하다. 뿌리 등을 반연하는 깨달음이 줄기 등을 반연하는 깨달음이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의 깨달음이 여러 아는 성품이 있고 하나의 법에 많은 체성이 있어야 되므로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식신론』의 학설과도 서로 어긋남은 앞의 설명과 같다.
어떤 이는 “심․심소의 법은 세 가지 일[三事]에서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한량없는 심․심소의 법은 생기지 않은 법 안에 머물러야 되는가?
[답]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미래의 세상은 넓고 끝이 없어서 용납할 곳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본래 이미 머무른 곳이 있기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한다.
[문] 심․심소의 법은 소연에서 정해진 것처럼 소의(所依)에 있어서도 정해지는가?
가령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는가? 만일 소의에서도 정해진다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소연에서만 정해진다고 하고 소의에서는 정해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어떤 것이 구유(俱有)의 법인가? 온갖 유루의 법과 유루의 법과 함께 생기는 무루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소의에서 정해지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소연에서 정해지고 소의에서는 정해지지 않는가?
[답] 소의에서도 정해진다. 그러나 심․심소의 법은 미래세에 있으면 소의와는 멀고 현재이면 함께하되 과거도 또 먼 것이다.
어떤 이는 “미래 세상에 있으면 소의와는 멀지만 현재와 과거는 소의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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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한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3세(世)는 모두가 소의와 함께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가?
[답] 여기에서는 다만 본래 지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 것이니 기억한다는 것은 소연이요 소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문] 『품류족론』의 설명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답] 그 글에서는 “어떤 것이 구유의 법인가? 온갖 유위의 법이다”라고 말해야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 글에서는 성자의 도에 소용 있는 것만을 드러내 보인 것이요, 소용이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그 글은 성자의 도를 다른 힘[他力]에 의지하여 얻고 다른 힘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다만 유루의 법과 함께 생기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심․심소의 법이 소연에서도 정해지고 소의에서도 정해진다면 그것은 어느 자리에서 소연을 취하는 것인가? 생기는 때[生時]에 취하는가 소멸하는 때[滅時]에 취하는가?
가령 그렇다면 무엇이 허물인가? 만일 생기는 때라면 생기는 때는 미래에 있거늘 어떻게 미래의 법에서 짓는 것이 있겠는가? 만일 소멸하는 때라면 소멸하는 때에는 모든 법이 쇠퇴하고 흩어지고 무너지거늘 어떻게 이 자리에서 소연을 취하겠는가?
[답] 소멸하는 때라고 말해야 한다.
[문] 어떻게 쇠퇴하고 흩어지고 무너지는 법에서 소연을 취할 수가 있는가?
[답] 모든 유위의 법의 성품은 미약하고 하열하여 자기에게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다른 것에 의지하여 변하기 때문이요, 작용이 없기 때문이요, 자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서나 만일 소의와 소연이 화합함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소연을 취할 수 있는데 오직 소멸하는 때에만은 이런 화합이 있음을 따른다.
어떤 이는 “생기는 때는 미래 세상이다. 미래의 모든 법은 작용이 없기 때문에 소연을 취할 수 없다. 소멸하는 때는 바로 현재의 세상이요 현재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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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법은 작용이 있기 때문에 소연을 취할 수 있다. 만일 소멸하는 때에 소연을 취하지 못한다면 심․심소의 법은 마침내 소연을 취할 수 없으니, 이런 허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소멸하는 때에 소연을 취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論] 또 받는 뜻[受意]이 인(因)이 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기억[念]을 잊지 않는다.
여기에서 앞에서 생긴 마음 무더기를 뜻[意]이라는 말로써 말하고 뒤에 생기는 마음 무더기를 기억[念]이라는 말로써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받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행상(行相)을 받는 뜻이요, 둘째는 소연(所緣)을 받는 뜻이다.
또 증상인(增上忍)3)에서와 같다. 두 마음[二心]이 있어서 그것의 행상을 받으면서도 그것의 소연을 받지 않는 것이다. 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가 상응하는 것이다.
두 마음이 있어서 그 소연을 받으면서도 그것의 행상을 받지 않는 것이니, 집법지인(集法智忍)과 집법지(集法智)가 상응하는 것이다.
세 마음[三心]이 있어서 그것의 행상도 받고 또한 그것의 소연도 받는 것이니, 세제일법과 고법지인과 고법지가 상응하는 것이다.
그 밖의 마음은 그것의 행상도 받지 않고 또한 그것의 소연도 받지 않는 것이니, 그 밖의 인지(忍智)와 상응하는 것이다.
증상인에서처럼 그 밖의 마음에 있어서도 그 알맞은 것에 따른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 행상을 받아 겪은 것은 소연을 받아 기억하고 소연을 받아 겪은 것은 행상을 받아 기억한다.
다시 두 가지의 뜻[意]이 있다. 첫째는 오염(汚染)된 것이요, 둘째는 오염되지 않은 것이니, 낱낱 겪었던 것은 두 가지가 잘 기억한다. 다시 세 가지의
3) 증상인(增上忍)에서와 같다고 함은 제5권 끝에서 증상인(增上忍)을 말한 경우의 동일소연(同一所緣)과 동일행상(同一行相)의 것으로써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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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다.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이다. 낱낱이 겪었던 것은 세 가지가 잘 기억한다.
다시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선과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이다. 낱낱이 겪었던 것은 네 가지가 잘 기억한다. 다시 네 가지의 뜻이 있다. 그것의 인(因)과 그것의 등무간연(等無間緣)과 그것의 소연(所緣)과 그것의 증상(增上)이니, 낱낱이 겪었던 것은 네 가지가 잘 기억한다.
다시 다섯 가지의 뜻이 있다.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과 나아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다. 이 가운데서 견고에서 끊을 것이 겪었던 것은 다섯 가지가 잘 기억하고, 견집(見集)과 수도에서 끊을 것이 겪었던 것도 그러하며, 견멸(見滅)에서 끊을 것이 겪었던 것은 견도(見道)에서 끊을 것을 제외한 네 가지가 잘 기억하고, 견도에서 끊을 것이 겪었던 것은 견멸에서 끊을 것을 제외한 네 가지가 잘 기억한다.
다시 다섯 가지의 뜻이 있다. 선과 불선과 유부무기와 이치대로 이끈 것[如理所引]의 무부무기와 이치대로 이끈 것이 아닌[不如理所引] 무부무기이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선이 겪었던 것은 두 가지가 기억하는데 선과 이치대로 이끈 무부무기이다. 이치대로 이끈 무부무기가 겪었던 것도 그러하다. 불선이 겪었던 것은 세 가지가 기억하나니, 불선과 유부무기와 이치대로 이끌지 않는 것은 무부무기이다. 유부무기와 이치대로 이끌지 않는 것이 무부무기가 겪었던 것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낱낱이 겪었던 것을 다섯 가지는 잘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여섯 가지의 뜻이 있다. 안식과 나아가 의식이다. 다섯 가지의 식[五識]이 겪었던 것은 의식이 기억하고 의식이 겪었던 것은 여섯 가지의 식이 기억한다.
다시 열두 가지의 뜻이 있다. 욕계에 네 가지가 있으니, 선과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이며, 색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앞의 네 가지 중에서 불선이 제외된다. 무색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무루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학(學)과 무학(無學)이다.
욕계의 선이 겪었던 것은 열두 가지가 기억하고 불선과 색계의 선이 겪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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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도 그러하다. 욕계의 유부무기가 겪었던 것은 색계의 유부무기와 무색계의 세 가지를 제외한 여덟 가지가 기억한다. 욕계의 무부무기가 겪었던 것도 그러하다. 색계의 유부무기가 겪었던 것은 욕계의 두 가지 무기를 제외한 열 가지가 기억하고 무색계의 선이 겪었던 것도 그러하다.
색계의 무부무기가 겪었던 것은 무색계의 두 가지 무기를 제외한 열 가지가 기억한다.
무색계의 유부무기가 겪었던 것은 욕계의 두 가지 무기와 색계의 무부무기를 제외한 아홉 가지가 기억하며 무색계의 무부무기가 겪었던 것도 그러하다.
학이 겪은 것은 욕계의 유부무기를 제외한 열한 가지가 기억하며, 무학이 겪었던 것은 만일 법에서 물러난 이[退法者]면 학에서의 설명과 같고 만일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이[不退法者]면 학과 네 가지의 오염된 것을 제외한 일곱 가지가 기억한다.
앞의 받는 뜻이 인이 되는 힘이 강함을 말미암아 그것의 소연에 대하여 뒤의 기억을 끌어 일으키며, 잊지 않는다 함은 마음이 미쳐 어지럽지 않고 괴로움에 핍박 받지 않는 것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세 가지의 인연을 말미암아 본래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첫째는 앞의 모양[前相]을 잘 취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동분(同分)이 상속하면서 현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기억을 상실[失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말미암아 비록 보특가라가 없고 또한 앞 마음이 뒷 마음에 간다는 이치가 없다 해도 본래 지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論] 무슨 인연으로 유정은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는 것인가?
[答] 유정의 동분이 상속하면서 변할 때에 법에 대하여 서로 속하는[相屬] 지견(知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잊는다[忘]고 함은 기억을 상실한다는 뜻이며 기억하지 못한다[不念]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법이라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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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없기 때문이다.
동분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행(加行)의 동분과 소연(所緣)의 동분과 수순(隨順)의 동분이다.
가행의 동분이라 함은 먼저 소달람장(素怛纜藏)을 외웠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뒤에 앞에 지었던 것과 같은 가행으로 인하여 도로 기억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먼저 비나야(毘奈耶)와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외웠던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아서 먼저 부정관(不淨觀)을 일으켰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뒤에 앞에서 지었던 것과 같은 가행으로써 도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니, 먼저 지식념(持息念)과 계방편(界方便)을 일으키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일찍이 듣건대 한 바라문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먼저 사폐타서(四吠陀書)4)을 외웠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그 뒤에 다시 복습하며 외우려 하였으나 그의 방편을 다하였는데도 외울 수가 없었으므로 곧 스승에게로 가서 자세히 그 인연을 말하였더니, 스승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먼저 외울 때에 어떤 가행을 썼었느냐?” 그는 “본래 그때에는 손으로 짚어 가며 입으로 외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너는 본래의 가행대로 해야 한다
”라고 말하였으므로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했더니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한다.
소연의 동분이라 함은 먼저 이와 같은 동산․숲․샘물․못․산골짜기와 거닐던 곳[經行處] 등을 보았는데 중간에 잊어 버렸다가 그 뒤에 서로 비슷한 동산․숲 등을 보았을 적에 모두를 다 기억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순의 동분이라 함은 수순하는 음식․의복․침구․방사며 설법한 사람들을 얻게 되면 먼저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일찍이 듣건대 어느 한 비구가 있었다. 먼저 4아급마(阿笈摩)5)를 외었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그 뒤에 다시 복습하며 외우려 했으나 그의 방편을 다 했는데도 외우지를 못했으므로 곧 아난타(阿難陀) 존자에게로 가서 그의 인연을 물었다. 존자는 “그대는 지금 가서 향유를 몸에 바르고 온실에서 목
4) 리구폐타(梨俱吠陀)와 사마폐타(娑磨吠陀)와 야유폐타(夜柔吠陀)와 아달바폐타(阿達婆吠陀)이다.
5) 아급마(阿笈摩 Āgama)는아함경(阿含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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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한 뒤에 모든 수순하는 의복․음식․침구․방사며 설법하는 사람 등을 구해야 한다”고 대답했고 비구가 그 가르침에 의거하였더니 모두 다 도로 환히 외웠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분이 상속하며 변할 때에 법에 대하여 서로 속하는 지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 누가 서로 속하는 것을 일으키는가?
[답] 세 가지의 동분에는 차이가 있다. 어느 송(誦)에서 “법에 대하여 끊이지 않고 잇는 지견(智見)을 일으킨다”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오랜 동안에 흘러들며[流注] 서로 잇는 지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또 어느 송에서는 “법에 대하여 차례대로의 지견을 일으킨다”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저마다에 대해 두루 벌려 줄서서 가는[行列] 지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또 어느 송에서는 “법에 대하여 걸림이 없는 지견을 일으킨다”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지체가 없고[無滯]․집착이 없고(無着)․끊임이 없는[無斷] 지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또 어느 송에서는 “법에 대하여 막힘이 없는 지견을 일으킨다”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장애를 여의고 다스릴 것이 뛰어난 원적(怨敵)을 조복하는 지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論] 또 받는 뜻[受意]이 인(因)이 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기억을 잊지 않는다.
여기에서 앞에서 생긴 마음 무더기는 뜻[意]이라는 소리로써 말하고 뒤에서 생긴 마음 무더기는 기억[念]이라는 소리로써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받는 뜻[受意]이라는 말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앞에 받는 뜻이 인이 되는 힘이 강함을 말미암아 그것의 소연에 대하여 뒤의 기억을 끌어내며 중간에 비록 잊는다 하더라도 뒤에는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는다[不忘]는 말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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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무슨 연유로 유정은 기억했었다가 다시 잊어버리는가?
[答] 유정의 이분(異分)이 상속하며 변할 때에 법에 대하여 서로 속하는 지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잊는다[忘]고 함은 기억을 상실[失念]한다는 뜻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이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가행(加行)의 이분과 소연(所緣)의 이분과 수순(隨順)의 이분이다.
가행의 이분이라 함은 먼저 소달람장을 외웠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그것을 버리고 다시 비나야나 혹은 아비달마장을 외웠는데도 뒤에는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비나야나 아비달마장을 외우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처럼 먼저 부정관을 일으켰다가 중간에 잊어버리고는 그것을 버리고 다시 지식념이나 혹은 계방편(界方便)을 일으켰지만 뒤에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지식념이나 혹은 계방편을 일으키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소연의 이분이라 함은 먼저 이와 같은 동산․숲․샘물․못․산골짜기며 거니는 곳을 보았었다가 중간에는 잊어버리고 그 뒤에 다시 그와 비슷한 모양을 보지 못하면 앞에서 겪었던 것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수순의 이분이라 함은 수순하는 음식․의복 등을 얻지 못하면 앞에서 겪었던 바를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분이 서로 계속하며 변하는 때에는 법에 대하여 상속(相續)하는 지견을 일으키지 못한다.
[문] 누가 서로 속하는 것을 일으키지 못하는가?
[답] 세 가지의 동분이다. 여기에서도 네 가지의 다른 송(誦)이 있는데 앞의 것과는 서로 반대이므로 마땅히 자세히 말해야 한다.
[論] 또 받는 뜻이 인이 되는 힘이 하열하기 때문에 기억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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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앞에서 생긴 마음의 무더기를 뜻[意]이라는 소리로써 말하고 뒤에 생기는 마음 무더기를 기억[念]이라는 소리로써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받는 뜻이라는 말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앞에서 받는 뜻이 인이 되는 힘이 하열함을 말미암아 그것의 소연에 대하여 뒤의 기억을 내지 못하며 중간에 비록 기억한다고 해도 뒤에 다시 잊어버린다. 잊는다 함은 마음이 미쳐 어지럽고 괴로운 느낌[苦受]에 핍박 받는 것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세 가지의 인연을 말미암아 기억을 잊어버린다. 첫째는 앞의 모양을 잘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이분(異分)이 상속하면서 현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기억을 상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그는 “여덟 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기억을 잊어버린다. 첫째는 태어나는 때에 나는 고통으로 핍박 받기 때문에 기억을 잊어버린다. 둘째는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에 핍박 받기 때문이요, 셋째는 그 밖의 다른 말이 많이 현행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근기가 무디어서 그 밖의 다른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좋아하지 않는 세계[非愛趣]에 태어나서 괴로운 느낌에 핍박 받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다섯 가지 감관[五根]이 경계에 내달으며 쉬지 않고
방일(放逸)함이 많기 때문이요, 일곱째는 중한 번뇌의 장애가 자주자주 현행하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자주자주 선정을 닦지 않아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기억을 잊어버린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어떠한 지혜[智]로 겪게 된 기억을 잊게 되는가? 문소성(聞所成)인가, 사소성(思所成)인가, 수소성(修所成)인가, 생득(生得) 등인가?
[답] 어떤 이는 “문소성․사소성․생득 등으로 겪게 된 기억은 잊게 되나 수소성은 그런 것이 아니니, 선정의 힘으로 지니는 것이라 잊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소성으로 겪게 된 것에도 역시 잊음이 있으니, 몸이 파리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선정을 얻음이 있으면서도 몸이 파리하고 연약하면 마음 또한 파리하고 약해지기 때문에 거기서 겪게 된 것을 역시 잊어버리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어느 곳에서 잊음이 있는가?
[답] 욕계에 있을 때요 색계나 무색계에서는 아니며, 다섯 갈래[五趣]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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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모두가 잊어버림이 있다.
어떤 이는 “지옥에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없으니, 항상 잊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떠한 보특가라에게 잊음[忘念]이 있는가?
[답] 이생도 성자도 모두 잊음이 있다. 성자 중에서는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독각(獨覺)에도 모두 잊음이 있고 오직 세존만이 그렇지 않으시다. 부처님은 잊음이 없는 법[無忘失法]을 성취하신 까닭이다.
[문]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답] 경(經)을 추량(推量)으로 삼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리자(舍利子)야, 가령 모든 비구들이 평상 자리[床座]에 나를 앉혀 마주 들고 백 년 동안 돌면서 여래의 위없는 슬기로운 변재[慧辯]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물러나거나 잃게 하려 한다 해도 그리 될 수는 없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잊음이 없는 법을 갖추신 줄 알 수 있다.
『상적유(象跡喩)』 계경 중에 “사리자가 말하였다. ‘만일 안의 의처(意處)가 파괴되지 않고 밖의 법처(法處)가 앞에 나타나며 작의(作意)를 내어 막 일어나면 그때에 의식(意識)이 생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 뜻[意]은 어떻게 하여 파괴되는가?
[답] 세 가지의 파괴가 있다. 첫째는 잠시의 파괴[暫時壞]요, 둘째는 중동분이 다한 파괴[盡衆同分壞]이며, 셋째는 마지막의 파괴[究竟壞]이다.
잠시의 파괴라 함은 선한 마음(善心)의 무간(無間)에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이 그 앞에 나타나 있는 때를 선의 마음이 잠시 파괴된다고 하며 나아가 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선과 불선의 마음이 그 앞에 나타나 있는 때를 무기의 마음이 잠시 파괴된다고 한다.
이처럼 욕계의 마음의 무간에 색계와 불계(不繫)의 마음이 그 앞에 나타나 있으면 그때를 바로 욕계의 마음이 잠시 파괴된다고 하며 나아가 불계의 마음의 무간에 삼계(三界)의 마음이 그 앞에 나타나 있으면 그때를 바로 불괴의 마음이 잠시 파괴된다고 한다. 만일 무상(無想)․멸진(滅盡)의 등지(等至)에 들어가면 그때를 바로 온갖 마음이 잠시 파괴된다고 한다.
중동분이 다한 파괴라 함은 선근을 끊은 이[斷善根者]는 선한 마음의 중동분이 다한 파괴가 있으며 욕염(欲染)을 여읜 이생은 불선의 마음의 중동분이 다한 파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것 등이다.
마지막의 파괴라 함은 고지(苦智)가 이미 생기고 집지(集智)가 아직 생기기 전이면 삼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을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요, 나아가 멸지(滅智)가 이미 생기고 도지(道智)가 아직 생기기 전이면 삼계의 견고(見苦)․견집(見集)․견멸(見滅)에서 끊을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다.
예류자(預流者)는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요, 법에서 물러나지 않는[不退法] 일래자(一來者)는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修所斷] 6품(品)의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며, 법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환자(不還者)는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오염된 마음[汚染心]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요, 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는 아라한은 삼계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오염된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다.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이생으로서 욕염을 여읜 이는 욕계의 오염된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며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無所有處染]을 여읜 이는 8지(地)의 오염된 마음이 마지막으로 파괴된 것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뜻[意]이 만일 화합한 연[和合緣]을 만나면 파괴 된다[壞]고 하지 않으나 만일 화합한 연을 만나지 못하면 파괴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뜻이 만일 상위인(相違因)에 장애를 받지 않으면 파괴된다고 하지 않으며 만일 상위인에 장애를 받게 되면 파괴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어떤 연유로 제사를 지낼 적에 아귀(餓鬼)는 이르는데 그 밖의 다른 세계[趣]에서는 이르지 않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경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계경에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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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문(生門) 바라문이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교답마(喬答摩)여, 저의 고향 친척[親里]으로서 목숨을 다한 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음식을 베풀고자 하는데 그는 저의 음식을 받게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일은 일정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들에게는 다섯 가지 세계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너의 고향 친척이 지옥에 태어나 있으면 지옥의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갈 것이므로 그는 너의 음식을 받지 못할 것
이다. 방생(傍生)의 세계와 하늘[天] 세계와 사람[人] 세계에 태어난 이도 그와 같다. 만일 너의 고향 친척으로서 아귀 세계에 태어나 있으면 네가 보시하는 음식을 받을 수 있으리라.’ 바라문이 말하였다. ‘만일 저의 고향 친척으로서 아귀 세계에 태어나지 않으면 베푼 바의 음식을 그 누가 받게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귀의 세계 안에 너의 고향 친척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라고 한 것과 같다.
그 경에서 비록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도 “무슨 연유로 제사를 지내면 아귀는 이르는데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르지 않는가?”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 경은 이 논(論)의 소의(所依)의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서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그 바라문은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 “무슨 연유로 제사를 지내면 아귀는 이르는데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르지 않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는가?
[답] 두 가지의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근기가 영리한[利根] 이었거나 근기가 둔한(鈍根) 이었거나 했을 것이다. 만일 근기가 영리한 이라면 자신이 환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부처님께 물을 필요가 없으며 만일 근기가 둔한 이라면 의심조차도 낼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 묻지 않을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를 위하여 ‘오직 보시하면 아귀만이 오게 된다’는 인연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역시 두 가지의 인연 때문이다. 그가 근기가 영리한 이었거나 근기가 둔한 이었거나 했을 것이다. 만일 근기가 영리한 이라면 자신이 환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부처님께 물을 필요가 없으며 만일 근기가 둔한 이면 법 그릇[法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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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論] 어떤 연유로 제사를 지낼 적에 아귀는 이르는데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이르지 않는가?
[答] 그 세계에서는 본래 그와 같은 처소[處]와 일[事]과 생[生]과 아분(我分)을 얻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 이르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물은 뜻은 ‘이 세계에서는 하천(下賤)하기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냐, 고귀(高貴)하기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냐?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하천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면 제사지낼 때에 지옥과 방생에 태어난 이들도 이르러야 하며, 만일 고귀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면 제사지낼 적에 사람과 하늘에 태어난 이들도 마땅히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답한 뜻은 ‘하천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요 또한 고귀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두 가지의 인연을 말미암아서이니, 첫째는 그 세계에서는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업의 이숙을 말미암아서이다. 그 가운데서도 먼저 그 세계에서는 본래 그렇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그 아귀 세계에서는 본래 그와 같은 처소․일․생․아분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 그 자리에 이르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뜻을 분명히 얻게 하기 위하여 세간의 현실적인 비유를 인용한다.
[論] 거위․기러기․공작․앵무․사리․명명조(命命鳥) 등이 마음대로 자유로이 허공을 날아다니지만 신력(神力)과 위덕(威德)은 사람보다는 크지 않으며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본래 그와 같은 처소․일․생․아분을 얻게 되므로 허공을 날아다닐 수 있는 것과 같다. 아귀 세계도 본래의 힘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이르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방생 세계의 거위․기러기․공작과 같은 새는 본래의 힘을 말미암아 허공을 날아다니며 오래 머무르고 유희할 수 있으나 사람으로서 신족(神足)이나 주술(呪術)과 약초(藥草)를 쓴 이가 아니면 허공에 머무르려 해도 기껏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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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손가락 높이만큼 밖에는 오르지 못하며 그것도 잠시 동안이요 잘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신력과 위덕이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한 것처럼 아귀도 그러하여 그 세계의 본래의 힘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오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앞의 뜻을 거듭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두 번째의 비유를 인용한다.
[論] 또 한 무리의 나락가(那落迦)가 전생의 일을 기억하고 또한 다른 이의 마음도 알며 한 무리의 방생과 한 무리의 아귀도 전생 일을 기억하고 또한 다른 이의 마음을 알며 연기나 불길을 뿜고 구름을 일으켜 비가 오게 하며 추위나 더위 등을 조정하여 비록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신력과 위덕은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본래 그와 같은 처소와 일과 생과 아분을 얻는 것이므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아귀 세계에서도 그러하여
본래의 힘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오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서 한 무리의 나락가가 전생 일[宿住]을 기억한다 함은 계경에서 “지옥의 중생은 이런 생각을 한다. ‘대덕 사문 바라문들은 욕심은 장래에 허물과 환난을 지으니 이것이야말로 몹시 두려워할 일이다라고 관찰하여 항상 우리들을 위하여 욕심 끊는 법을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비록 듣기는 하면서도 끊지를 못하다가 이제는 그 욕심으로 인하여 큰 고뇌를 받게 되는구나.’ 또 ‘우리들은 옛날 행이 청정한 사문과 바라문들에 대하여 사악(邪惡)한 행을 지었다.
그것을 말미암아 인이 되어서 이제 이런 고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그들은 어느 때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가?
[답] 처음 나는 때에 하는 것이요 중간이나 나중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 막 태어날 때에는 아직 고통을 받기 전이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만일 고통을 받게 되면 금생에 받는 것도 오히려 기억할 수 없거늘 하물며 먼저 받은 것이겠는가?
[문] 그는 어느 마음에 머무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선(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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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오염(汚染)에서인가, 무부무기(無覆無記)에서인가?
[답] 세 가지 모두에서 가능하다.
[문] 어느 무부무기에서인가?
[답] 위의로(威儀路)에서요 공교처(工巧處)가 아니니 그에게는 공교한 일이 없기 때문이요, 이숙생(異熟生)이 아니니 그 이숙의 마음은 다섯 가지의 식[五識]이기 때문이다.
[문]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의지(意地)에 있는가,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에 있는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신은 아니니, 다섯 가지의 식신 가운데에는 이런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문] 이와 같은 생각을 그는 몇 생(生)을 기억하는가?
[답] 그는 오직 한 생[一生]만을 기억할 뿐이니, 저기에서 죽어서 여기에 태어난 동안이다.
어떤 이는 “여러 생[多生] 더 나아가 5백 생까지를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知他心]는 것은 지옥 안에는 그곳에 나면서 얻는 지혜[生處得智]가 있으므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 그러나 드러낼 수 있는 일은 없다.
[문] 그는 어느 때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알게 되는가?
[답] 오직 처음 날 때일 뿐이다. 왜냐하면 만일 고통을 받게 되면 마음은 답답해지고 어지럽게 되기 때문이다.
[문] 그는 어느 마음에 머무르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답] 삼성(三性)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모두 아는 것이다.
[문] 어느 무부무기인가?
[답] 위의로에서요 공교처도 이숙생도 아니니 앞의 설명과 같다.
[문] 의지에 있는 것인가, 다섯 가지 식신에 있는 것인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신은 아니니 다섯 가지의 식신은 색법(色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방생이 전생 일을 기억한다 함은 계경에 “바라문이 향거 개[餉佉狗]에게 ‘만일 나의 아버님 도제야(刀提耶)라면 이 자리에 오르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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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자 그 개는 올라가 앉았다. 다시 그에게 ‘만일 나의 아버님 도제야라면 이 밥을 잡수셔야 한다’고 하자 그 개는 곧 밥을 먹었다. 또다시 ‘만일 나의 아버님 도제야라면 당신은 목숨을 마치실 때에 감추어 두신 재보(財寶)를 이제 저에게 가리켜 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는 곧 그것을 가리켜 주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어느 때에 전생 일을 기억하는 것인가?
[답] 처음이나 중간이나 나중이나 다 기억하게 된다.
[문] 어느 마음에 머무르면서 기억하는 것인가?
[답] 삼성의 마음에 머물러서다.
[문] 어느 무부무기인가?
[답] 위의로와 공교처와 이숙생에서 모두 다 기억한다.
[문] 이것은 어느 식(識)에 있는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신은 아니다.
[문] 몇 생(生)을 기억하는가?
[답] 어떤 이는 “오직 일생만을 기억하니, 거기서 죽어서 여기에 태어난 동안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여러 생 더 나아가 5백 생을 기억한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아는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한 여인이 아이를 어느 한군데 놓아두고 일이 있어 다른 데로 갔었다. 잠깐 사이에 이리가 와서 그 아이를 메고 달아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잡으려고 쫓아가면서 이리에게 ‘너는 지금 어떤 연유로 남의 아이를 메고 가는 것이냐?’고 하자 이리가 ‘이 여인은 5백 생 동안 언제나 나의 새끼를 죽이고 있으므로 나도 5백
생 동안에 늘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있다. 만일 그가 옛 원혐(怨嫌)의 마음을 버린다면 나도 그것을 버리겠다’고 했다. 여인이 ‘이미 버렸다’고 했지만 이리는 이 여인이 입으로는 비록 버렸다고 말을 하나 마음속으로는 버리지 않은 것을 관하고 곧 그 아이의 목숨을 끊고서 가버렸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 함은 방생 세계에서도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니, 곧 그 이리가 여인의 일을 아는 것과 같다.
[문] 어느 때에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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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세 때[三時]에 모두 안다.
[문] 어느 마음에 머무르면서 아는 것인가?
[답] 삼성의 마음에 머물러서 안다.
[문] 어느 무부무기인가?
[답] 위의로와 공교처와 이숙생에서 모두 다 안다.
[문] 이것은 어느 식에 있는 것인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이 아니다.
한 무리의 아귀가 전생 일을 기억한다 함은 다음 가타(伽陀)의 말과 같다.
나는 옛날에 자재(資財)를 모으면서
법대로 혹은 그릇된 법으로 모았더니
다른 이는 지금 부(富)와 낙(樂)을 받고 있는데
나만 홀로 빈궁의 고통을 받는구나.
[문] 어느 때에 기억하는 것인가?
[답] 세 때에 모두 기억한다.
[문] 어느 마음에 머물러서 기억하는가?
[답] 삼성의 마음에 머물러서 기억한다.
[문] 어느 무부무기인가?
[답] 세 가지이니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이것은 어느 식에 있는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신은 아니다.
[문] 몇 생을 기억하는가?
[답] 5백 생까지다. 어떻게 그러한 줄 아는가? 전해 오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한 여인이 귀신에게 붙잡혀 몹시 곤란을 당하며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주사(呪師)가 귀신에게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을 괴롭히는 것이냐?”고 하자 귀신이 “이 여인은 5백 생 동안 살아오면서 언제나 나의 목숨을 살해했으므로 나도 5백 생 동안에 언제나 그의 목숨을 살해하고 있다. 그가 만일 옛 원혐(怨嫌)의 마음을 버린다면 나도 그것을 버리겠다”라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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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이미 버렸다”라고 말하자 귀신은 이 여인이 입으로는 비록 버렸다고 하면서도 마음에서는 버리지 않은 것을 관하고 곧 살해하고는 떠나갔다고 한다.
역시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그 귀신이 여인의 마음속을 아는 것과 같다.
[문] 어느 때에 아는가?
[답] 세 때에 다 안다.
[문] 어느 마음에 머물러서 아는가?
[답] 삼성의 마음에 머물러서 안다.
[문] 어느 무부무기인가?
[답] 세 가지이니,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이것은 어느 식에 있는가?
[답] 의지에 있는 것이요, 다섯 가지의 식은 아니다.
그리고 연기와 불길을 뿜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오게 하며 추위나 더위를 짓는다 함은 오직 방생 세계에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요, 그 밖의 종류에서는 할 수 없으며, 방생류 안에서도 오직 용(龍)만이 할 수 있고 그 밖의 종류로서는 할 수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하늘[天] 사람으로 구름을 일으키는 이도 있고 하늘[天] 사람으로 추위나 더위를 짓는 이도 있고 하늘 사람으로 바람과 우레를 일으키는 이도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가?
[답] 그 경에서는 용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이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보았느냐?’”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서도 용을 하늘이라는 말로써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연기와 불길 등을 뿜는다 함은 여러 마리의 용이 뿜는다는 것인가, 한 마리의 용이 뿜는다는 말인가?
[답] 한 마리의 용이 할 수 있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경에서 “하늘로서 구름을 일으키는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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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하늘로서 비를 오게 하는 이도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신 것인가?
[답] 따로따로 좋아하는 것에 따라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니, 어느 용은 구름만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용은 비만 오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밖의 다른 용도 그와 같다.
여기에서 연기․불길․구름․비 등의 일은 용이 가행(加行)으로 끌어 일으키는 것이므로 이것은 그 용의 가까운 사용과(士用果)일 뿐이며 용궁(龍宮)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그의 가행으로 끌어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온갖 유정의 공통된 증상과(增上果)이다.
지옥 등과 같은 곳에서도 그 세계의 본래 힘으로 말미암아 비록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이 있다고 해도 신력과 위덕은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 귀신 세계에서도 그러하여 그 세계의 본래 힘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오게 되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다시 어떤 이는 “다섯 세계[五趣]에는 모두가 본래 뛰어난 일이 있다. 지옥 세계6)에서는 이숙색(異熟色) 등을 끊은 뒤에도 계속되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방생 세계에서는 허공을 날고 구름과 비 등을 일으키며, 아귀 세계에서는 제사를 지내면 이르고, 사람 세계에서는 선계(善戒)․악계(惡戒)를 받아 뛰어난 품류[勝品]의 선(善)을 닦되 용맹하고 오래도록 잘 기억하면서 지혜의 힘이 매우 깊으며, 하늘 세계의 욕
천(欲天)은 그 바라는 것에 따라 생각하면 이르게 되고,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에는 좋은 곳에 나게 하는 뛰어난 선정이 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모든 지방에서도 본래 수승한 일이 있다. 지나(支那)에서는 비록 남종․여종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명주나 비단옷을 입지만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는 비록 귀하고 훌륭한 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입지 못하며, 인도(印度) 등의 나라에서는 빈궁하고 천한 이도 모두가 모직물로 된 옷을 입지
6) 지옥취(地獄趣)에서는 이숙색(異熟色) 등을 끊은 뒤에도 도로 계속된다고 함은 등활지옥(等活地獄)에서는 죄인이 벌을 받아 죽으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도로 살아나게 되며 혹은 옥졸이 쇠갈고리로 땅을 두드리면서 살아나라고 외치거나 혹은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살아나서 전과 같이 되어 다시 벌을 받는다는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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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는 귀인조차도 그렇게 입지 못하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서는 가을철에 소의 목에다 울금(鬱金)의 꽃다발을 걸어주지만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하며, 북방(北方)의 가난한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지만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는 부자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모든 지방에는 본래 뛰어난 일이 있는 것처럼 아귀도 그러하여 제사를 지내면 이른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세계에는 본래 차이가 있으니, 네 세계[四趣] 안에서는 낱낱이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生處得智]가 있지만 오직 사람의 세계에서만은 없으며 3악취에 있는 것은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다.
하늘 세계[天趣]에서도 전생 일을 기억함이 있는 것은 다음 가타에서의 말과 같다.
내가 서다림(誓多林)7)을 보시했는데
대법왕(大法王)께서 머무르시고
성현의 스님네가 수용하고 계시니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은 기쁘구나.
그도 다른 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현재의 일로서 말할 만한 것은 없다. 어느 때에 기억하는가 등은 방생과 아귀에서와 같으므로 알맞은 것에 따라 자세히 말할 것이다.
[문] 이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生處得智]는 몇 세계를 기억하며 아는가?
[답] 어떤 이는 “저마다 자기 세계만을 기억하며 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옥은 오직 지옥만을 기억하여 알고 방생은 두 세계를 기억하여 알며 아귀는 세 세계를 기억하여 알고 하늘은 다섯 세계를 기억하여 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방생이 하늘을 알지 못하면 『시설론(施設論)』의 설명을 어떻게
7) 서다림(誓多林 Jetavana)은기원정사(祈園精舍)를 말한다.
회통해야 되는가? “선주 용왕(善住龍王) 등이 제석(帝釋)의 생각을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다.
[답] 이것은 비량(比量)으로 아는 것이요 현량(現量)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허물은 없다.
어떤 이는 “이 일은 일정하지가 않다. 마치 이리와 귀신이 사람을 기억하며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사람의 세계[人趣]에서는 이런 지혜가 없는가?
[답] 밭[田]이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사람 세계에는 첨상지(瞻相智)와 도언상지(覩言相智)와 본성염생지(本性念生智)와 묘원지(妙願智) 등이 있지만 그것이 가려지고 덮여졌기 때문에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가 다른 세계에는 모두가 있는데도 오직 사람의 세계에서만 없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아서 제사를 지내면 오직 귀신 세계만 오고 다른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이처럼 이미 그 세계의 본래 힘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아귀는 이르지만 그 밖의 다른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으니, 이제는 업이숙(業異熟)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다.
[論] 또 어떤 사람이 온밤 내내 이러한 욕심[欲]과 이러한 애요[愛樂]를 일으켰다. ‘나는 앞으로 장가를 들어야겠다. 아들과 손자를 얻기 위해 아내를 맞아들여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후사(後嗣)가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 내가 목숨을 마친 뒤에 만일 귀신 세계에 나면 그들은 나를 생각하면서 당연히 나에게 제사를 지내리라.’ 그는 온밤 내내 이러한 욕락(欲樂)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 이르나 그 밖의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그는 이러한 욕락을 내어 모든 업을 끌어 일으켜 아귀 세계에 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 이르나 그 밖의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모든 마을이나 성읍(城邑) 안 사람들이 혹은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재산을 더욱 많이 불리기 위해서나 혹은 부자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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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기 위하여 법과 법이 아닌 것으로써 모든 재보와 소․양 등의 물건을 쌓으면서 자기의 친 권속에게조차 오히려 주려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베풀겠는가?
그는 간탐(慳貪)하는 전(纏)․박(縛)의 마음을 말미암아 사람의 동분(同分)을 버리고 귀신 세계에 나서 자기의 집이나 도랑이나 뒷간이나 깨끗하지 않은 곳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에 어느 친속(親屬)이 그를 못 잊어 괴로워하면서 ‘그는 재산을 모으느라 자기 자신도 수용하지 않았고 또한 남에게 보시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디에 태어나셨을까?’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고향 친척들을 모아놓고 모든 사문과 바라문 등을 청하여 큰 보시의 모임[大施會]을 베풀면서 ‘이 자연(資緣)으로 그는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받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때에 아귀는 자기가 머무르는 곳에서 이러한 일을 보고 자신의 친척들에 대하여 권속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그 재물에 대하여 자기의 소유라는 생각을 내며 즉시 기뻐하면서 복전(福田)에 대하여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내면 무거운 고통을 여의게 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오게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이가 지은 업을 그와 다른 이가 과(果)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답] 그렇지 않다. 그는 그때에 공경과 믿음과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보시하는 공덕과 간탐하는 허물을 보고는 여기에서 버림[捨]과 상응하는 사(思)를 더욱 자라게 함으로 말미암아 순현수업(順現受業)을 이루어 현재 법의 과[現法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지금 받는 과는 먼저 지은 업[先業]이 이끈 것이다. 먼저 지었던 업에 장애가 있었던 것이 지금의 업으로써 그것을 제거했기 때문에 다른 이가 지은 업을 그와 다른 이가 그 과를 받는다는 허물은 없다. 그 아귀는 전생에 이미 음식을 받을 업을 지었으면서도 다만 간탐을 말미암아 마음이 가려지고 덮였기 때문에 음식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의 견해를 일으켜 수용할 수 없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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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아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둘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을 좋아하는 것이다. 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자는 간탐 때문에 하천을 하천이 아니라고 보고 물을 피라고 보며 모든 음식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깨끗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자는 하천이 바짝 말랐다고 보고 물에서는 물이 없다고 보며 음식이 그릇에 가득 차 있는데도 모두 텅 비어 있다고 본다.
만일 그의 친척들이 그를 위하여 보시회[施會]를 베풀면 그는 믿음과 공경으로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서 보시의 공덕과 간탐의 허물을 보고는 버림과 상응하는 사(思)가 더욱 자라게 되기 때문에 생각과 견해의 뒤바뀜이 제거된다.
그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자는 하천을 바로 하천이라고 보고 물을 맑고 깨끗하다고 보며 모든 음식에 대해서는 정묘(淨妙)하다고 본다. 깨끗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자는 하천이 가득 차 넘친다고 보고 물은 바로 물이라고 보며 음식이 그릇에 가득 차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 친속들이 제사를 지내면 그곳으로 온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는 전생에 역시 음식을 받을 업이 있었는데도 다만 간탐으로 말미암아 가려졌기 때문에 지금은 겁먹은 몸과 마음을 느낄 뿐이며 모든 음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큰 힘을 지닌 귀신이 수호하고 있는지라 그는 겁을 내어 가지 못하는 것이며 설령 또 가게 된다 해도 역시 감히 먹지도 못하는데, 만일 그의 친속이 그를 위해 보시회를 베풀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버림과 상응하는 사(思)가 더욱 자라게 되기 때문에 그의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한층 더 강하고 뛰어나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음식 있는 곳에 가서 음식을 먹게 하며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제사를 지내면 이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른 이가 지은 업을 그와 다른 이가 그 과보를 받는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이 “그는 먼저 비록 음식을 받을 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미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아직 과를 나타나게[與果] 할 수 없었으나 그의 친속이 그를 위하여 보시회를 베풀어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버림과 상응하는 사(思)가 더욱 자랐기 때문에 먼저 지었던 업의 과가 나타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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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친속이 제사를 지내면 오게 되며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다른 이가 지은 업으로써 그와 다른 이가 과를 받는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버림[捨]과 상응하는 사(思)가 더욱 자라고 나면 다만 자구(資具)만을 얻게 되는 것인가? 또한 뛰어난 몸과 마음[勝身心]도 얻게 되는 것인가?
[답] 두 가지를 다 같이 얻는다. 뛰어난 몸과 마음이란 하열한 빛깔(色)․냄새[香]․맛[味]․감촉[觸]을 버리고 매우 뛰어난 빛깔․냄새․맛․감촉을 버리며 위덕이 없는 것을 버리고 위덕이 있는 것을 얻는다는 말이며 자구(資具)를 얻는다 함은 음식․의복․동산 숲․집 등에 대한 일을 얻는다는 말이다.
[문] 만일 다른 세계에 났을 때에도 친속이 그를 위하여 복된 업[福業]을 닦으면 거기서도 얻게 되는가?
[답] 만일 그가 역시 믿음과 공경으로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서 버림과 함께하는 사(思)가 더욱 자라게 된다면 역시 그 복을 얻게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에서는 많은 부분에 따라 말한 것이다. 아귀 가운데서는 이런 일이 많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귀 세계에서는 이러한 업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업을 지은 이는 아귀 세계에 대부분 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귀 세계에서는 사람에게 항상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귀 세계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어 온갖 곳에서 늘 희망함이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마땅히 다섯 세계[五趣]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것은 마치 정온(定蘊)에서 자세히 분별해야 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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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3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 ⑤
[論] 한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하는가,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안식(眼識)이 빛깔을 본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법구(法救) 존자의 말씀과 같다.
또 어떤 이는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慧]가 빛깔을 본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묘음(妙音) 존자의 말씀과 같다.
또 어떤 이는 “화합(和合)하여 빛깔을 보는 것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또 어떤 이는 “하나의 눈으로 빛깔을 본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자부(犢子部)와 같다.
이와 같은 다른 종들의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기 종의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안식이 빛깔을 본다면 식(識)에는 마땅히 보는 모양[見相]이 있어야 될 터인데 식에는 보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빛깔을 본다 하면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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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있어서도 소리를 들어야 될 터인데 지혜에는 듣는 모양[聞相]이 없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화합하여 빛깔을 본다면 당연히 모든 때에 빛깔을 보아야 하리니 화합하지 않는 때란 없기 때문에 역시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한 눈으로 빛깔을 보며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면 몸의 모든 부분도 동시에 감촉[觸]을 깨닫지 않아야 한다. 신근(身根)과 같은 것은 두 팔이 서로 떨어져 있음이 비록 멀다 하더라도 동시에 접촉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의 신식(身識)을 내는 것이니, 두 눈도 그러하여 서로 떨어짐이 비록 멀어도 어찌 동시에 빛깔을 보면서 하나의 안식이 나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문] 만일 눈이 빛깔을 본다면 그 밖의 다른 식(識)도 동시에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는가? 또 식이 없을 때에도 빛깔을 보아야 한다.
[답]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식이 합하는[合] 것이요, 둘째는 식이 텅 빈[空] 것이다. 식과 합하는 것은 볼 수 있으나 식이 텅 비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또 이런 논(論)을 짓게 된 까닭은 의심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니, 모든 유정은 두 눈이 서로 떨어짐이 혹은 반(半) 마(麻)1)나 일 마․반 맥(麥)이나 일 맥․반 지(指)나 일 지․반 걸수(榤手)나 일 걸수․반 궁(弓)이나 일 궁․반 구로사(俱盧舍)나 일 구로사․반 유선나(踰繕那)나 일 유선나 또 나아가 백 유선나이어서 마치 큰 바다 안의 큰 몸을 지닌 중생 같거나 크기가 백 유선나요 나아가 크기
가 이천백 유선나나 되는 갈라호(曷羅呼) 아소락왕의 키가 몹시 큼과 같고 또 마치 색구경천(色究竟天)의 키가 일만육천 유선나 같은 이거나 이들의 두 눈은 서로 떨어져 있음이 매우 멀다.
1) 유부(有部)의 계산(計算)에 따르면 7극미(極微)를 1미(微)로 하고 7미를 1금진(金塵)으로 하며 이렇게 하여 순차적으로 그 7배량(倍量)을 수진(水塵)․토모진(兎毛塵)․양모진(羊毛塵)․우모진(牛毛塵)․극유진(隙遊塵)․의(蟻)․슬(蝨)․굉맥(䵃麥)․지절(指節)로 하고 다시 3절(節)을 1지(指)로 하며 24지를 주(肘:尋)로 하고 4주를 궁(弓)으로 하며 5백 궁을 1구로사(俱盧舍)로 하고 8구로사를 1유선나(踰繕那)로 한다. 이런 계산
에 의하면 마(麻)는 아마 슬[蝨]에 해당하고 걸수(榤手)는 주(肘)에 해당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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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어떤 이는 “어떻게 안식은 그것에 의거하여 전개되는 것일까? 두 개의 안식이 동시에 각각 하나씩의 눈에 의거하여 생기는 것일까? 하나의 안식이 하나의 눈에 의거하여 생긴 뒤에 다시 둘째의 눈에 의거하여 전개되는 것일까? 하나의 안식이 나누어져 두 개의 부분이 되어 두 개의 안처(眼處)에서 각각 반씩 생기는 것일까? 하나의 안식이 마치 하나의 물건에 가로놓이듯이 두 눈에 다 통하는 것일까?
만일 두 개의 안식이 동시에 각각 하나씩의 눈에 의거하여 생긴다면 한 유정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동시에 전개되야 하리니,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하나의 안식이 한 눈에 의거하여 생긴 뒤에 다시 둘째의 눈에 의거하여 전개된다면 하나의 법은 두 찰나(刹那)에 머물러야 하나 이런 일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안식이 나누어져 두 부분이 되어서 두 개의 안처(眼處)에서 각각 반씩 생긴다고 하면 하나의 법의 체성에 두 부분이 있어야 된다. 그러나 온갖 법의 체성은 세분(細分)할 수 없다.
만일 하나의 안식이 마치 하나의 물건에 가로놓이듯이 두 눈에 다 통한다면 하나의 식은 그것이 안식도 되고 또한 신식도 되니, 두 눈의 중간은 신근(身根)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의 소의(所依)는 저마다 다르고 소연(所緣)도 저마다 다른 것이므로 하나의 식에는 두 가지의 소의나 두 가지의 소연이 없다”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비록 두 개의 안식은 함께함이 없고 나아가 하나의 식이 가로놓여 두 개와 통함도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두 눈에 의거하여 하나의 안식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고 두 눈이 비록 백 유선나를 떨어졌다 하더라도 허물이 없다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는 미세하고 심히 깊어서 환히 깨닫기 어려운 것이므로 이제 이런 매우 깊은 이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한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하는가,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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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한다.
[문] 어떻게 두 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하나의 식에 의거하여 함께 빛깔을 보게 되는가?
[답] 이것은 다 같이 안식의 소의인 근본이기 때문이다. 설령 백 개의 눈이 있고 낱낱이 떨어짐이 백 유선나가 된다 해도 그것에 의거하여 하나의 식을 내고 동시에 보게 하는 것이다.
마치 가차기(迦遮器)의 백 개의 작은 바퀴가 있는 데에 한 얼굴을 그것에 대하면 백 얼굴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의 식도 여러 눈에 의거하여 생기고 동시에 보게 된다는 그 뜻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눈으로 빛깔을 본다는 것은 법구(法救) 등의 세 가지 다른 집착을 차단하고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독자부(犢子部)의 한 눈으로 빛깔을 본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論] 왜냐하면 만일 한 눈을 감으면 부정식(不淨識)을 일으키고 두 눈을 뜰 때에는 정식(淨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2) 가령 한 눈을 감아도 이와 같은 식을 일으키고 두 눈을 떠도 이 식을 일으킨다면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한 눈을 감으면 부정식을 일으키고 두 눈을 떴을 적에는 곧 정식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마땅히 두 눈으로 빛깔을 본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종을 세우면서 뜻이 곧 성립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묻고 답하면서 이 인(因)으로 정식을 일으킨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많은 경계에서 명백하게 깨달았으므로 이것과 서로 어긋나면 부정식이라 한다.
[論] 감는[合] 것처럼 가리고[覆]․손상하고[損]․깨지고[破]․무너지는[壞] 것
2) 여기의 정식(淨識)은 명료(明了)한 인식(認識)을 말하고 부정식(不淨識)은 명료하지 않은 인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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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가린다는 것은 손으로나 옷으로나 잎사귀로나 그 밖의 다른 물건으로써 덮는 것을 말하고, 손상한다는 것은 때가 끼거나 연기가 끼거나 먼지 등으로 손상되는 것을 말하며, 깨진다는 것은 모든 막(膜)이나 모든 가리움[瞖] 등으로 파괴된 것을 말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마르고 문드러지거나 후벼 내거나 저절로 빠지거나 벌레가 파먹은 것 등을 무너진다고 말한다.
가린다는 등은 감는 것과 같아 부정식을 일으키고 이것과 반대의 것이면 정식을 일으킨다.
이 소의(所依)에 따라 정(淨)과 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은 세속(世俗)의 도리에 의거함이다. 만일 뛰어난 뜻[勝義]에 의거하면 선(善)의 식은 정(淨)3)이라 하고 염(染)은 부정(不淨)이라고 한다.
이를 말미암아 눈에 대해서는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눈은 정하나 식은 부정하기도 하니, 완전한 눈[具眼]에 의거하여 염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식은 정하나 눈은 부정하기도 하니, 불구(不具)의 눈에 의거하여 선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눈과 식이 다 같이 정하기도 하니, 완전한 눈에 의거하여 선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눈과 식이 다 같이 부정하기도 하니, 불구의 눈에 의거하여 염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論] 눈으로 빛깔을 보는 것처럼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그러하다.
다 같이 두 곳[二處]이 있는 것은 눈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 여기의 정식(淨識)은 도덕적인 청정한 마음을 말하고 청정하지 않으면서 더러워진 것을 부정식(不淨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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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눈․귀․코는 저마다 두 곳이 있는데도 혀와 몸은 오직 하나뿐인가?
[답] 모든 물질로 된 감관은 몸을 장엄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두 개의 혀가 있다면 비루(鄙陋)한 것이어서 세간에서는 빈정거리고 비웃으면서 “어떻게 하여 이 사람에게는 두 개의 혀가 있을까? 마치 독사와 비슷하구나”라고 할 것이며, 만일 두 개의 몸이 있으면 역시 비루한 것이라 세간에서는 빈정거리고 비웃으면서 “어떻게 하여 한 사람에게 두 개의 몸이 있을까? 마치 두 손가락이 나란히 있는 것 같구나”고 할 것이다.
[문] 눈․귀․코 무엇 때문에 오직 두 개 뿐이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가?
[답] 협 존자(脅尊者)는 “온갖 것에 의심을 낸다 하여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더하고 덜하는 것에도 의심을 내면서 ‘어떻게 이 세 가지는 저마다 그러한 것인가?’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두 곳이라도 법성(法性)에는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감관의 장소는 몸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덜하거나 더하거나 하면 몸은 지저분하고 더러워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세 가지의 물질로 된 감관은 정식(淨識)을 내기 때문이다. 만일 세 가지의 식이 두 곳에 의거하여 생기면 분명하고 어지럽지 않다. 더하면 식이 어지러워지고 덜하면 분명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물질로 된 감관은 자기의 경계를 취하기 위함이니 저마다 두 개만 있어도 경계를 취하는 일은 만족한데 그보다 덜하면 분명하지 않게 되고 더하면 소용이 없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콧구멍은 합하여 1계(界)와 1처(處)와 1근(根)을 세우는가?
[답]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두 개의 곳이 있다고 해도 함께 하나의 식을 일으키고 같이 하나의 경계를 취하는 것이니, 마치 몸의 여러 부분의 처소가 비록 많다고 해도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다만 1계와 1처와 1근을 세우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장양(長養)과 이숙생(異熟生)4)이다. 따로 등류
4) 이숙(異熟)의 눈은 선천적(先天的)인 눈을 말하고 장양(長養)의 눈은 후천적(後天的)으로 보양(保養)한 눈을 말한다.
(等流)가 없는 것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 혹시 장양의 눈만이 있고 이숙의 눈은 없을 수 있는가? 혹 이숙의 눈은 있고 장양의 눈은 없을 수 있는가?
[답] 이숙생의 눈이 장양의 눈을 여읜다는 것은 없다. 마치 사람에게 사람이 겹쳐 있는 것과 같고 마치 담장에 담장을 겹쳐 쌓는 것과 같아서 장양이 이숙을 보호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나 장양의 눈이 이숙생의 눈을 여의는 것은 있으니, 마치 눈이 없으면서 천안(天眼)을 얻는 것과 같다.
[문] 빛깔을 보는 것은 장양의 눈이 많은가, 이숙생의 눈이 많은가?
[답] 빛깔을 보는 것은 장양의 눈이 많으며 이숙생은 그렇지 않다. 천안의 감관이 바로 장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분(時分)을 기준으로 하여 두 눈의 뛰어나고[勝] 하열함[劣]에 대해 4구를 만듦이 마땅하다.
어떤 장양의 눈은 뛰어나면서 이숙생은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마치 어린아이일 때와 같다. 그때에는 이숙의 상속이 작기 때문이다.
어떤 이숙생의 눈은 뛰어나면서 장양의 눈은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마치 늙고 병들어 있을 때와 같다. 그때에는 장양의 상속이 작기 때문이다.
어떤 두 눈은 다 같이 뛰어나기도 하니, 마치 한창의 나이일 때와 같다.
어떤 두 눈은 다 같이 뛰어나지 않기도 하나니, 앞의 지위에서 제외된 것이다.
유정의 상속(相續)을 기준으로 하여 두 눈의 뛰어나고 하열한 것에서도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장양의 눈은 뛰어나면서 이숙생은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마치 어떤 부자이면서 귀한 이와 같아서 이숙생의 눈은 하열한데도 돕는 연[資緣]이 많기 때문에 장양의 눈이 뛰어나다.
어떤 이숙생의 눈은 뛰어나면서 장양의 눈은 그렇지 않기도 하니, 마치 어떤 빈궁하고 천한 이와 같아서 이숙생의 눈은 뛰어난 데도 돕는 연이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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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장양의 눈이 하열하다.
어떤 두 눈은 다 같이 뛰어나기도 하니, 마치 부자와 귀한 이처럼 이숙생의 눈이 뛰어난 데다 돕는 연이 많기 때문에 장양의 눈도 뛰어나다.
어떤 두 눈은 다 같이 뛰어나지 않기도 하니, 마치 어떤 가난하고 천한 이처럼 이숙생의 눈도 하열한 데다 돕는 연이 모자라기 때문에 장양의 눈도 하열하다.
또 장양의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선(善)의 법5)으로 장양한 것과 불선(不善)의 법으로 장양한 것이다.
[문] 선의 법으로 장양한 눈이 빛깔을 보는 것이 뛰어난가, 불선의 법으로 장양한 눈이 뛰어난가?
[답] 선의 법으로 장양한 눈으로 빛깔을 보는 것이 뛰어나다. 마치 닦아서 얻은 천안(天眼)과 같으니, 이것은 선의 법으로 장양한 눈이기 때문이다.
이숙생의 눈에도 두 가지가 있다. 선업(善業)의 이숙과 불선업(不善業)의 이숙이다.
[문] 선업으로 된 이숙의 눈이 빛깔을 보는 것이 뛰어난가, 불선업으로 된 이숙의 눈으로 빛깔을 보는 것이 뛰어난가?
[답] 선업으로 된 이숙의 눈으로 빛깔을 보는 것이 뛰어나다. 마치 보살과 전륜성왕 등의 눈처럼 이것은 선업의 이숙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속(相續)을 기준으로 하면 불선업의 이숙의 눈으로 빛깔을 봄이 뛰어나고 선업의 이숙의 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용왕 등의 눈이 빛깔을 보는 것이 사람보다 뛰어난 것과 같다.
눈과 같이 귀․코․혀․몸ㆍ뜻도 그러하다.
뜻[意]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숙생(異熟生)과 등류(等流)와 찰나(刹那)이다. 찰나라 함은 고법지인(苦法智認)과 상응하는 것이다.
빛깔[色]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이숙생(異熟生)과 장양(長養)과 등류(等
5) 선의 법으로 장양한[善法所長養] 것이라 함은 성자(聖者)가 수행에 의하여 천안(天眼)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불선의 법으로 장양한[不善法所長養] 것이라 함은 마치 도적이 숙련(熟練)에 의하여 캄캄한 밤에도 물건들을 잘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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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이다.
빛깔과 같이 냄새[香]․맛[味]․접촉[觸]도 그러하다.
소리[聲]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장양과 등류이다. 이숙생이 없는 것은 간단(間斷)이 있기 때문이다.
법(法)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숙생과 등류와 찰나와 실사(實事)이다. 실사는 모든 무위(無爲)이다.
[문] 안근(眼根)의 극미(極微)는 어떻게 머무르는가? 곁으로 퍼져서[傍布] 머무르는 것인가, 앞과 뒤로[前後] 머무르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곁으로 퍼져서 머무르면 어떻게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는가? 만일 앞과 뒤에 머무르면 어찌하여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장애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검은 눈동자 위에 곁으로 퍼져 머무르면서 바깥 물질의 경계를 대하는 것이 마치 호유화(胡荽花)와 같으며 그릇에 가득 찬 물 위에 보릿가루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로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는가?
[답] 깨끗한 물질[淨色]로 덮어서 유지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는다.
어느 다른 논사는 “검은 눈동자 안에 앞과 뒤로 하여 머무른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앞은 뒤의 것을 장애하지 않는가?
[답] 자체가 청정하기 때문에 서로가 장애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로 만들어진 깨끗한 물질은 비록 많이 쌓이고 모인다 하더라도 서로가 장애되지 않는 것이 마치 가을의 못물이 맑고 깨끗하므로 가는 바늘이 그 속에 떨어져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근(耳根)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머무르며 비근(鼻根)의 극미는 콧구멍 속에 머무른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감관은 머리를 빙 둘러 머무른 것이 마치 꽃다발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설근(舌根)의 극미는 혀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마치 반달과 같으나 그 안에는 털끝만큼의 설근도 없다.6)
6) 이 설근(舌根)이 없는 곳을 말마(末摩, Marman)라 하는데 여기에 접촉되면 죽는다고 한다.(『구사론(俱舍論)』 제10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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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근(身根)의 극미는 몸의 안팎으로 따라 차례로 머무른다.
또 어느 다른 논사는 비유로써 모든 감관의 극미가 차례로 머무르는 모양을 드러내 보인다. “안근의 극미는 검은 눈동자 위에 있어 약공이 끝[藥杵頭]과 같고,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머물러 마치 등잔[燈器]과 같으며, 비근의 극미는 콧구멍 속에 머물러 마치 사람의 손톱과 같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머물러 마치 면도칼과 같고 신근의 극미는 몸을 따라 머물러 미륵창[戟矟]과 같으며, 여근(女根)의 극미는 여인의 형상 속에 머물러 마치 북[鼓]
의 이마와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남자의 형상 위에 머물러 마치 반지와 같다”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경에서 역시 비유로써 모든 감관의 모양을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 동분(同分)7)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모두 피동분(彼同分)이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일부분은 동분이고 일부분은 피동분이다.
안근의 극미처럼 이근․비근․설근의 극미도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는 어떤 때는 모두 피동분이고 어떤 때는 그 일부분이 동분이며 그 일부분이 피동분이다. 반드시 모두 동분일 때는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온 몸이 찬 못물 속이나 펄펄 끓는 물 안에 들어가거나 또는 지옥에 있어 산의 날카로운 바위에 갈리어 몸이 문드러진 나뭇잎과 같거나 십삼종의 맹렬한 불길이 몸을 에워싼다면 그때에는 어찌 모두가 동분이 아니겠는가?
[답] 그때에도 역시 피동분이 있는 것이다. 가령 온갖 신근의 극미가 모두 신식(身識)을 낸다면 몸은 흩어지고 무너지리니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은 모두가 쌓인 무더기(積聚)에 의거하여 쌓인 무더기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7) 동분(同分)이란 예를 들면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반연하고 색경은 안식에 반연한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주관(主觀)은 주관으로서 객관(客觀)은 객관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反)해서 주관성이거나 객관성의 가능성(可能性)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능성에 그칠 뿐 그 작용을 실현하지 못한 것을 피동분(彼同分)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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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근 등의 6근(根)은 몇 가지가 지경(至境)8)을 취하고 몇 가지는 부지경(不至境)을 취하는가?
[답] 지[至]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경지(爲境至)9)요, 둘째는 무간지(無間至)이다. 만일 위경지에 의거해 말하면 6근은 모두가 지경을 취하나 만일 무간지에 의거하여 말하면 코와 혀와 몸의 세 가지는 지경을 취하고 눈과 귀와 뜻의 세 가지는 부지경을 취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귀는 가까운 소리를 듣는 것이 마치 귓전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데 눈은 가까운 빛깔을 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약공이 빛깔과 같은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비록 다 같이 부지경을 취한다 해도 감관의 법은 본래 가까운 경계를 취하는 것도 있고 가까운 경계를 취하지 못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만일 소리가 귀에 바싹 닿아 너무도 가까우면 마치 약공이 눈에 바짝 닿은 것과 같아서 역시 들을 수 없다. 귓전의 소리는 귀에서 떨어짐이 오히려 멀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니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눈은 광명[明]을 인하기 때문에 빛깔을 볼 수 있는데 빛깔에 만일 너무도 가까우면 그 광명을 장애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귀는 허공[空]을 인하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비록 소리가 너무 가깝다 하더라도 허공을 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눈은 광명을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빛깔을 보고, 귀는 허공
8) 6근(根)이 그 대상으로서의 6경(境)을 인식할 때에 감관과 경계가 접촉하면서 비로소 인식(認識)이 생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분별하는 문단이다. 앞의 경우는 코․혀․몸 세 감관과 그 각자의 대경과의 관계(그때를 경계와 닿는다[至]고 하여 지경(至境)이라 한다)이며 뒤 경우는 눈․귀․뜻 세 감관과 그 각자의 대경과의 관계(이때의 경계는 감관과 닿지 않는다[不至]고 하여 부지경(不至境)이라고 한다)이다. 또 이것을 합중지(合
中知)․이중지(離中知)라고도 한다.(『구사론』 제2권 참조)
9) 위경지(爲境至)는 공간적(空間的)으로 접촉하고 접촉하지 않는 것은 상관하지 않고 단순히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지(至)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며 무간지(無間至)는 공간적으로 접촉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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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코는 바람[風]으로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냄새를 맡고, 혀는 물[水]로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맛을 보며, 몸은 땅[地]을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감촉을 깨닫고, 뜻은 작의(作意)로 인하여 더하기 때문에 법을 요별(了別)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세 가지 감관은 지경을 취할 수 있고 세 가지 감관은 지경을 취할 수 없는가?
[답] 안식은 자기 경계[自界]에 의거하여 자기 경계와 남의 경계[他界]를 반연하며 이식도 그러하다. 의식은 자기 경계와 남의 경계에 의거하여 자기 경계와 남의 경계를 반연하며,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 식[三識]은 자기 경계에 의거하여 자기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 안식은 동분(同分)에 의거하여 동분과 피동분(彼同分)을 반연하며 이식도 그러하다. 나머지 네 가지 식[四識]은 동분에 의거하여 동분을 반연한다. 이것은 현재의 식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다.
또 안식은 자기 자리[自地]와 남의 자리[他地]에 의거하여 자기 자리와 남의 자리를 반연하며 이식․신식․의식도 그러하다. 나머지 두 가지 식은 자기 자리에 의거하여 자기 자리를 반연한다.
또 안식은 무기(無記)에 의거하여 세 가지를 다 반연하며 이식도 그러하다. 의식은 세 가지에 의거하여 세 가지를 반연하며, 나머지 세 가지 식은 무기에 의거하여 무기를 반연한다.
또 안식은 가까운 것에 의거하여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반연하며 이식도 그러하다. 의식은 가까운 것과 먼 것에 의거하여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반연하며, 나머지 세 가지 식은 가까운 것에 의거하여 가까운 것을 반연한다. 왜냐하면 세 가지 근은 경계와 떨어짐이 없이[無間] 머무르면 세 가지 식은 반드시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안식은 작은 것에 의거하여 큰 것을 반연하기도 하니 마치 큰 산을 보는 것과 같고, 큰 것에 의거하여 작은 것을 반연하기도 하니 마치 터럭 끝을 보는 것과 같으며, 혹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 같기도 하니 마치 포도의 열매를 보는 것과 같다. 이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의식의 소의는 비록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없으나 소연은 작기도 하고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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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다. 나머지의 세 가지 식은 소의와 소연이 같으며 따라서 그러한 만큼의 코․혀․몸의 극미에 의거하여 곧 그러한 만큼의 냄새․맛․감촉의 극미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 안식․이식․의식의 세 가지 식은 업이 아닌 것[非業]에 의거하여 업과 업이 아닌 것을 반연하며 나머지의 세 가지 식은 업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업이 아닌 것을 반연한다.
또 안식․이식․의식의 세 가지 식은 묘행(妙行)이나 악행(惡行)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묘행과 악행과 둘 다 같이 아닌 것[俱非]을 반연하며 나머지의 세 가지 식은 묘행이나 악행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묘행이나 악행이 아닌 것을 반연한다.
묘행과 악행처럼 선계(善戒)와 악계(惡戒)․율의(律儀)와 불률의(不律儀)․표(表)와 비표(非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혹시 일 극미가 소의가 되고 일 극미가 소연이 되어서 안식 등 다섯 가지 식[五識] 등을 내는 것이 있는가?
[답] 없다. 왜냐하면 안식 등의 다섯 가지 식은 쌓인 무더기[積聚]에 의거하여 쌓인 무더기를 반연하고 대할 수 있는 것[有對]에 의거하여 대할 수 있는 것을 반연하며 화합한[和合] 것에 의거하여 화합한 것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 만큼의 법이 합하여 함께 생기면 그 만큼의 법이 함께 소멸하면서 찰나의 뒤에는 반드시 머무르지 않는데 어떻게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보며 몸은 감촉을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답] 만일 그 법을 반연하여 비식․설식․신식이 생기면 그 법을 비식․설식․신식이 요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곧 비근․설근․신근이 맡고 맛보며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문] 눈 등의 다섯 감관[五根處]에는 힘줄․뼈․피․살이 있는가?
[답] 없다. 모든 물질로 된 감관은 청정한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에서 “물질로 된 감관에는 힘줄․뼈․피․살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감관의 중간에는 빛깔․냄새․맛․접촉의 감관에서 가깝기 때문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은 감관에는 힘줄과 뼈 등이 없다.
색처(色處)에는 20종이 있다. 푸르고[靑]․누르고[黃]․붉고[赤]․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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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 것과 길고[長]․짧고[短]․모나고[方]․둥근[圓] 것과 높고[高]․낮고[下]․바르고[正]․바르지 않은[不正] 것과 구름[雲]․연기[烟]․먼지[塵]․안개[霧]와 그림자[影]․빛[光]․밝음[明]․어둠[闇]이다.
어떤 이는 “색처에는 21종이 있다. 앞의 20종과 공(空)의 한 가지 현색(顯色)이다. 이와 같은 모든 빛깔은 혹은 드러남[顯]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요, 형상[形]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니 푸르고․누르고․붉고․흰 것과 그림자․빛․밝음․어둠과 공의 한 가지 현색이다.
혹은 형상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요, 드러나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니 신표업(身表業)이다. 나타나는 것과 형상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그 밖의 나머지 12종의 색이다. 만일 드러나거나 형상 때문이 아니라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하나의 빛깔을 반연하여 안식을 내는 것인가, 여러 빛깔을 반연하여 안식을 내는 것인가?
만일 하나의 빛깔을 반연하여 안식을 낸다면 이것은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예컨대 “안식은 5색(色)의 실[縷]을 반연한다”라고 말하였다. 만일 여러 색을 반연하여 안식이 난다 하면 하나의 안식에는 요별하는 성품이 많이 있을 것이요, 요별하는 성품이 많기 때문에 여러 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법에 여러 체성이 있다 하면 도리에도 서로 어긋난다.
[답] 어떤 이는 “다만 하나의 빛깔만을 반연하여 안식을 낸다”라고 말한다.
[문] 이 “안식은 오색의 실을 반연한다”는 말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답] 여러 빛깔이 화합하여 함께 하나의 빛깔을 내는 것이며 하나의 빛깔을 볼 때에 여러 빛깔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우(世友) 존자는 “하나의 안식은 단번에 여러 빛깔을 취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며 빠르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도 아닌 것을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증상만(增上慢)이다. 마치 불을 돌려 불바퀴를 만들면서[旋火輪] 바퀴가 아닌데도 바퀴라고 말하는 것이 증상만인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역시 여러 빛깔을 반연하면서 하나의 안식을 낸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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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하나의 안식은 여러 요별하는 성품이 있다고 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면 하나의 빛깔을 반연하여 하나의 안식을 내겠지만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지 않으면 여러 빛깔을 반연하면서 하나의 안식을 내는 것이다.
대덕(大德)은 “만일 명료하게 빛깔의 차별을 취하지 않는다면 여러 빛깔을 반연하면서도 하나의 식을 낸다. 마치 나무숲을 살펴보면서 잎사귀 등을 통틀어 취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하나의 푸른 빛깔에도 극미가 있는가?
[답] 있다. 다만 안식으로 취할 것이 아닐 뿐이다. 만일 하나의 극미가 푸른 것이 아니라면 여러 극미가 쌓이고 모여도 역시 푸른 것이 아니어야 한다. 누른 것 등도 그러하다.
[문] 긴 것[長] 등의 형상에 극미가 있는가?
[답] 있다. 다만 안식으로 취할 것이 아닐 뿐이다. 만일 하나의 극미가 긴 것 등의 형상이 아니라면 여러 극미가 쌓이고 모여도 긴 것 등의 형상이 아니어야 한다.
또 어떤 빛깔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니, 마치 7미(微)보다 적은 색처(色處)와 같다. 어떤 빛깔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극히 미세하기 때문은 아니니, 마치 색처를 제외한 그 밖의 쌓이고 모인 빛깔과 같다.
어떤 빛깔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면서 또한 경계도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색처를 제외한 그 밖의 극미의 빛깔이다. 어떤 빛깔은 극히 미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면서 또한 경계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니, 마치 약공의 끝이 눈동자에 바싹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또 어떤 빛깔은 극히 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니, 마치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 등이 자기의 궁전에 머무를 때에는 그것이 비록 사람의 눈의 경계라 하더라도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빛깔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극히 멀기 때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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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니, 마치 범중천(梵衆天) 등이 인간에 와 있을 때에 비록 가까이 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빛깔은 극히 멀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또한 경계도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범중천 등이 자기 궁전에 머물러 있을 때에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빛깔은 극히 멀기 때문도 아니면서 보이지 않고 또한 경계가 아니기 때문도 아니니, 마치 약공의 끝이 눈동자에 바싹 붙은 것과 같다.
세우(世友) 존자는 “네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빛깔은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첫째는 지극히 가깝기 때문이니 마치 눈동자에 바싹 닿어 있는 약공이 끝의 빛깔과 같다. 둘째는 지극히 멀기 때문이니 마치 이 세간에 머물러 있는 파타리(波吒梨)의 빛깔과 같다. 셋째는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니 마치 7미(微)보다 적은 빛깔과 같다. 넷째는 장애가 있기 때문이니 마치 벽(壁) 밖에 있는 빛깔 등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수론자(數論者)는 “여덟 가지의 인연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비록 빛깔이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지극히 멀기 때문이요, 지극히 가깝기 때문이며, 감관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요, 뜻이 산란하기 때문이며, 극히 미세하기 때문이요, 막혀 있기 때문이며, 뛰어난 것에 압도당하기 때문이요, 비슷한 것에 착란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성처(聖處)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집수(執受)의 대종(大種)10)을 인(因)으로 삼는 소리와 집수 아닌[非執受] 대종을 인으로 삼는 소리이다. 이것에는 각각 두 가지씩이 있다. 유정(有情)이란 이름[名]의 소리와 유정이 아닌[非有情] 이름의 소리이다. 이것에서도 다시 각각 뜻에 맞고[可意] 뜻에 맞지 않는[不可意] 것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가 된다.
어떤 이는 “집수의 대종을 인으로 삼는 소리와 집수 아닌 대종을 인으로
10) 집수대종(執受大種)을 인(因)으로 삼는 소리라 함은 유정(有情)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요, 집수 아닌 대종[非執受大種]을 인으로 삼는 소리라 함은 그런 것이 아닌 소리이다. 또 여기에 유정이란 이름[有情名]이라 함은 뜻과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요 유정이 아닌 이름[非有情名]이라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하며 뜻에 맞는 소리[可意聲]라 함은 마음속이 좋아지는 소리요 뜻에 맞지 않는 소리[不可意聲]라 함은 그렇지 않는 경우의 소리이다.
삼는 소리에 각각 뜻에 맞고 뜻에 맞지 않는 것의 구별이 있으며 유정수(有情數)의 대종을 인으로 삼는 소리와 유정수가 아닌[非有情數] 대종을 인으로 삼는 소리에도 역시 각각 뜻에 맞고 뜻에 맞지 않은 것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가 된다”라고 말한다.
[문] 하나의 소리를 반연하여 이식을 내는가, 많은 소리를 반연하여 이식을 내는 것인가?
만일 하나의 소리를 반연하여 이식을 낸다 하면 어떻게 일시에 5악(樂)의 소리를 들으며 일시에 여러 사람들이 독송(讀誦)하는 소리를 듣는가? 만일 여러 소리를 들으면서 이식을 낸다 하면 하나의 이식에 많은 요별하는 성품이 있을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어떤 이는 “다만 하나의 소리만을 반연하여 이식을 낼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일시에 다섯 종류 음악을 듣고 여러 사람이 독송하는 소리를 듣는가?
[답] 여러 소리가 화합하여 함께 하나의 소리가 나며 하나의 소리를 들을 때에 여러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하나의 이식이 단번에 여러 소리를 취하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빠르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 아닌데도 함께한다고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역시 많은 소리를 반연해도 하나의 이식이 생긴다”라고 말한다.
[문] 하나의 이식에는 마땅히 여러 요별하는 성품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만일 따로따로 분별한다면 하나의 소리를 반연하면서 하나의 이식을 내는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여러 소리를 반연하면서 하나의 이식을 낸다.
대덕(大德)은 “만일 명료하게 소리의 차별을 취하지 아니하면 여러 소리를 반연해도 하나의 식을 내는 것이 마치 군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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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처(香處)에는 네 가지가 있다. 좋은 냄새[好香]와 나쁜 냄새[惡香]와 평등한 냄새[平等香]와 평등하지 않은 냄새[不平等香]이다.
[문] 하나의 냄새를 반연하여 비식을 내는가, 여러 냄새를 반연하여 비식을 내는가?
만일 하나의 냄새를 반연하여 비식을 낸다면 어떻게 일시에 백화향(百和香)을 맡는가? 만일 여러 냄새를 반연하여 비식을 낸다면 하나의 비식에는 여러 요별하는 성품이 있을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어떤 이는 “다만 하나의 냄새만을 반연하여 비식을 낸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일시에 백화향을 맡는가?
[답] 여러 냄새가 화합하여 함께 하나의 냄새를 내며 하나의 냄새를 맡을 때에 여러 냄새를 맡는다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가 말씀한 것은 앞에서와 같다.
어떤 이는 “역시 여러 냄새를 반연하여 하나의 비식을 낸다”라고 말한다.
[문] 마땅히 하나의 비식에는 여러 요별하는 성품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면 하나의 냄새를 반연하여 하나의 비식을 내는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지 않으면 여러 냄새를 반연하여 하나의 비식을 낸다.
대덕(大德)이 말씀한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미처(味處)에 여섯 가지가 있다. 달고[甘]․시고[酢]․짜고[醎]․맵고[辛]․쓰고[苦]․싱거운[淡] 것이다.
[문] 하나의 맛을 반연하여서 설식을 내는 것인가, 여러 맛을 반연하여 설식을 내는 것인가?
만일 하나의 맛을 반연하여 설식을 낸다 하면 어떻게 일시에 백미환(百味丸)을 맛보는가? 만일 여러 맛을 반연하여 설식을 낸다면 하나의 설식에는 여러 요별하는 성품이 있을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어떤 이는 “다만 하나의 맛만을 반연하여 설식을 낼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하여 일시에 백미환을 맛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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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여러 맛이 화합하여 함께 하나의 맛을 내고 하나의 맛을 볼 때에 여러 맛을 맛본다고 말을 한다.
세우(世友) 존자가 말씀하신 것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어떤 이는 “역시 여러 맛을 반연하여 하나의 식을 낸다”라고 말한다.
[문] 마땅히 하나의 설식에는 많은 요별하는 성품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답]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면 하나의 맛을 반연하여 하나의 설식을 내는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 분별하지 않으면 여러 맛을 반연하여 하나의 식을 내는 것이다.
대덕(大德)이 말씀한 것도 앞의 설명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맛볼 때에는 설식이 먼저 일어나는 것인가, 신식이 먼저 일어나는 것인가?
[답] 그 경계의 더함에 따라 그 식이 먼저 일어날 것이요, 만일 두 경계가 같으면 설식이 먼저 생길 것이니 모든 유정은 맛을 탐냄이 더하기 때문이다.
촉처(觸處)에는 11종이 있다. 4대종(大種)과 매끄러운 성품[滑性]과 껄끄러운 성품[澁性]과 가벼운 성품[輕性]과 무거운 성품[重性]과 찬 성품[冷性]과 배고픈 성품[飢性]과 목마른 성품[渴性]이다.
[문] 하나의 감촉을 반연하여 신식을 내는 것인가? 여러 감촉을 반연하여 신식을 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다만 하나의 감촉만을 반연하여 신식을 낼 뿐이니, 단단한 성품[堅性]만을 반연하기도 하고 목마른 성품만을 반연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다섯 가지 감촉을 반연하여 하나의 신식을 내는 것이니, 매끄러운 성품과 4대종 나아가 목마른 성품과 4대종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11종의 감촉을 반연하여 하나의 신식을 내는 것이 있음은 마치 20종의 빛깔을 반연하여 하나의 안식을 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신식은 공상(共相)의 경계를 반연하는가? 다섯 가지 식신[五識身]은 자상(自相)을 반연하기 때문인가?
[답] 자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事]의 자상이요, 둘째는 처소[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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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상이다. 만일 일의 자상에 의거하여 말하면 다섯 가지 식신은 역시 공상을 반연하지만 만일 처소의 자상에 의거하여 말하면 다섯 가지의 식은 오직 자상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문] 냄새와 맛과 감촉을 맡고 맛보고 깨달을 때에 집수(執受)11)의 냄새 등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인가? 집수 아님[非執受]의 냄새 등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인가?
만일 집수의 냄새 등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다 하면 어떻게 시주가 베푼 것을 수용한다 하는가? 또 온갖 때에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만일 집수 아님의 냄새 등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다 하면 바깥[外]의 냄새와 맛과 감촉은 안[內]의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도무지 인(因)이 없거늘 어떻게 수용하겠는가?
[답] 어떤 이는 “집수의 냄새와 맛과 감촉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떻게 시주(施主)가 보시한 것을 수용하는가? 또 마땅히 모든 때에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이 있는가?
[답] 바깥의 냄새와 맛과 감촉은 안의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이것은 깨닫고 일으키는 인(因)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어떤 이는 “집수 아님의 냄새와 맛과 감촉을 맡고 맛보고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바깥의 냄새와 맛과 감촉은 안의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도무지 인이 없거늘 어떻게 수용하는가?
[답] 마치 소리(聲)와 같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어떤 이는 “집수와 집수 아님의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다 같이 맡고 맛보고 깨달으나 일시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안의 냄새와 맛과 감촉은 이미 더하거나 덜함이 없거늘 어떻게 맡고 맛보고 깨닫는가?
11) 집수(執受)의 냄새[香]란 자기 신체에 조성(組成)된 냄새요, 집수 아닌[非執受] 냄새 등이란 외계(外界)에 딸린 물(物)의 냄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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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바깥의 연[外緣]을 말미암아 역시 더하거나 덜함이 있다.
법처(法處)에는 7종이 있다. 앞의 네 가지 온[四蘊]12)과 세 가지 무위[三無爲]이다.
색온(色蘊) 중에는 무표색(無表色)을 취한다. 세 가지의 무위란 허공(虛空)과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을 말한다.
[문] 하나의 법을 반연하여 의식을 내는 것인가, 여러 법을 반연하여 의식을 내는 것인가?
[답] 하나를 반연하든지 여럿을 반연하든지 다 같이 의식을 낸다. 또 소연(所緣)의 법은 7종만은 아니며 앞의 7종과 그 밖의 법을 모두가 단번에 반연하게 된다. 오직 자성(自性)․상응(相應)․구유(俱有)13)만은 제외된다.
[문] 일찍이 “보살은 6근(根)이 날래고 날카롭다[猛利]”라고 들었다. 어떻게 경계에 대하여 날래고 날카롭다는 것을 아는가?
[답] 보살의 궁전 변두리에는 무멸사(無滅舍)가 있으며 그 집 안에는 5백 개의 등불이 켜져 있다. 보살은 그때에 자기 궁전 안에 머무르면서 등불의 불꽃을 보지 않으며 다만 그 광명만을 보면서도 곧 그 등불 수가 5백 개가 있는 줄 알며 그 가운데에서 만일 한 등이라도 꺼지면[涅槃] 곧 기억하면서 “한 개의 등불이 벌써 꺼졌다”라고 하니, 이것을 보살의 안근(眼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무멸사 안에는 5백의 기녀(妓女)들이 있으면서 일시에 풍악을 연주한다. 보살은 그때에 그 기녀들을 보지도 않으면서 다만 풍악 소리만을 듣고서도 곧 그 안에는 5백의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을 알며 만일 하나의 줄이 떨어지거나 어느 한 사람이 잠을 자거나 하면 곧 그것을 기억하면서 “지금 그 만큼이 줄어졌다”라고 하니, 이것을 보살의 이근(耳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보살의 궁전 안에서 백화향(百和香)을 사르는데 보살은 그것을 맡고서 백
12) 앞의 네 가지 온[前四蘊]은 색(色)․수(受)․상(想)․행(行)을 말한다.
13) 자성(自性)․상응(相應)․구유(俱有)는 한 무더기로서의 심(心)․심소(心所)를 가리킨다. 자체(自體)는 자체를 반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제외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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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있는 줄 안다. 그 향을 섞는 이가 보살을 시험해 보려고 백 가지 가운데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면 보살은 맡고 나서 곧 그것을 기억하면서 “이것은 먼저의 향에서 얼마만큼 더하고 또는 덜했다”라고 하니, 이것을 보살의 비근(鼻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보살은 식사 때에 시자(侍者)가 언제나 백미환(百味丸)을 올리는데 보살은 그것을 맛보고서 이내 그 안에는 백 가지 맛이 갖추었다는 것을 안다. 어느 때에 음식을 만드는 이가 보살을 시험해 보려고 백 가지 맛 가운데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면 보살은 맛보고 나서 이내 그 안에는 얼마만큼 더하고 또는 덜했는지 아니, 이것을 보살의 설근(舌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보살은 목욕을 할 때에 시자가 욕실에서 입는 옷을 올리면 보살은 그것을 만지면서 바로 그 옷을 짠 이와 혹은 옷을 올린 이가 이러한 질병이 있다는 것을 아니, 이것을 보살의 신근(身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보살은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잘 알아 거리낌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의근(意根)이 날래고 날카롭다고 한다.
[論] 모든 과거(過去)의 그 온갖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실체(實體)의 성품이 없으며 현재는 비록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무위(無爲)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뜻을 중지시키고 “과거와 미래는 있고 현재는 유위(有爲)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과거의 그 온갖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答]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世]14)의 과거요, 둘째는 유가(瑜
14) 세간의 과거[世過去]는 과거․현재․미래의 3세(世)의 과거를 말하고 유가(瑜伽 yoga)의 과거는 부지런히 노력하여 번뇌를 끊고 다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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伽)의 과거이다. 나타나지 않는[不現]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世]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덮고 막혀서[覆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의거하여 논(論)을 짓는데 과거와 나타나지 않는 것에는 서로가 넓고[廣] 좁음[狹]이 있기 때문에 4구를 만든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구수(具壽) 오타이(鄔陀夷)의 말과 같다.
온갖 결(結)은 과거요
숲[林]에서 숲을 여의고 오셨으며
모든 욕심[欲] 벗어나기를 좋아하심이
금(金)이 산꼭대기에서 나옴과 같나이다.
『오타이경(鄔陀夷經)』은 이것의 근본이다.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께서 실라벌(室羅筏) 녹모당(鹿母堂) 안에 계실 때였다. 저녁나절에 고요한 선정으로부터 나오셔서 오타이를 데리고 동쪽 못으로 가셔서 속옷만을 입으시고 못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셨다. 그때에 그 존자는 부처님을 위하여 몸을 씻어 드렸다. 그리고 오타이는 부처님께서 옛날 보살로 계실 때에 늘 따라다니면서 공양하며 모셨다. 지금 부처님 몸의 광명이 번쩍번쩍 빛나시는 것이 보살일 때 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공경하고 좋아하며 합장하고 부
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제 용(龍)의 비유의 게송으로써 세존을 찬탄하며 받들고 싶나이다.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하고 싶거든 마음대로 말하라’고 하셨다”
그때에 오타이가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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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결(結)은 과거라 함은 부처님께서 온갖 번뇌를 해탈하셨다는 말이요, 숲에서 숲을 여의고 오셨다 함에서 숲이란 살고 있는 집[居家]이어서 세존은 집에서 집의 법[家法]을 버리고 집이 아닌 데[非家]로 나아가 오셨다는 말이다.
모든 욕심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함은 욕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의 욕심[煩惱欲]이요, 둘째는 뭇 살림거리의 욕심[衆具欲]이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에서 몸과 마음에 물이 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벗어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니, 그 안에서 좋아하며 머무르신다는 것이다.
금이 산꼭대기에서 나옴과 같다고 함은 해[日]를 말하여 금이라 하며 산꼭대기[山頂]는 곧 해가 돋아 나오는 곳이다. 해가 처음 산꼭대기에서 돋아나올 때에는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번뇌와 수번뇌(隨煩惱)로부터 벗어나 계신 것이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산꼭대기란 산꼭대기에 떠 있는 구름이며 해가 이 구름에서 나올 때에는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으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산꼭대기란 산꼭대기에 있는 흑사(黑砂)요, 금이란 금사(金砂)를 말하는 것이니, 금사가 흑사로부터 나올 때에는 광명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번뇌로부터 나오셔서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의 광명이 번쩍거리신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과거이면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한다. 과거란 두 번째의 과거이며,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니라 함은 두 가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부처님은 현재 계시면서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은 나타나지 않으면서 과거가 아니기도 하다. 마치 어느 한 사람이 혹은 신통(神通)으로써 혹은 주술(呪術)로써 혹은 약물(藥物)로써 혹은 이와 같은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生處得智]로써 숨어버리면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혹은 신통으로써라 함은 신통의 힘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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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왕(梵王)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몸을 숨기려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자 그때에 그 대범(大梵)은 땅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부처님은 곧 그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어찌 네가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범왕은 ‘이것은 가깝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곧 큰 바다를 건너 묘고산(妙高山)으로 들어가 중턱에 숨었다. 세존은 다시 가리키면서 ‘네가 여기에 머물러 있구나’고 하셨다.
범왕은 다시 ‘이것은 크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곧 변화로 극히 미세한 몸이 되어 부처님의 백호(白毫)가 감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부처님은 벌써 아시고 터럭(毫)을 펴시며 그를 나타나게 하시자 그때에 대범왕은 몹시 부끄러워했으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몸을 숨기겠으니 너의 능력을 다하여 나를 알아내도록 하라’고 하시자 범왕은 공경히 응낙했다.
그때에 부처님은 곧 이와 같은 등지(等持)에 드셔서 큰 광명을 놓아 범궁(梵宮)의 처소를 두루 비추셨고 또한 범세(梵世)로 하여금 큰 음성을 듣게 하셨다. 모든 범천이나 범왕은 부처님이 계신 곳을 알 수 없었으므로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기에 저희들로 하여금 모르게 하시옵니까?’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범왕의 상투 속에 계셨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극미(極微)의 묘한 몸으로 변화하셨다’고 하며, 어떤 이는 ‘몸을 변화하시어 나타나지 않게 하셨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변화로 막는 물질을 만드셔서 막으셨다’고 하며, 어떤 이는 ‘정려(靜慮)와 정려의 경계[境]와 부처님과 부처님의 경계는 모두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부처님 몸이 계신 곳을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또 대목건련(大目乾連) 존자는 이와 같은 등지에 들어가 곧 앉은 자리에서 숨어버리면서 제바달다(提婆達多)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종류이다.
혹은 주술(呪術)로써라 함은 주술의 힘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모든 선인(仙人)들이 맺는 바의 주술을 어떤 이가 받아 지니면 어디서나 숨어서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혹은 약물(藥物)로써라 함은 약물의 힘으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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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물이 큰 신령한 작용을 갖추고 있을 적에 만일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가 어디서나 숨어 버리면 역시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과 같고 필사차(畢舍遮)나 궁반도(宮畔茶) 등과 같다.
혹은 이와 같이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生處得智]라 함은 그의 지혜의 힘으로 숨어버리면서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지옥에는 비록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몸으로 하여금 나타나지 않게 할 수가 없다. 그가 만일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면 마침내 잠시 동안도 그곳에 머무르면서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그는 비록 옥졸 곁에서는 몸을 나타나지 않게 할 수는 없어도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몸을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 방생과 아귀와 하늘 들도 이런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가 있어서 몸을 나타나지 않게 하지만 오직 사람 세계에서만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 신통 등의 네 가지 힘 가운데서 누가 누구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신통은 온갖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으니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문] 누구의 신통이 누구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부처님은 모두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독각(獨覺)은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모두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사리자(舍利子)는 부처님과 독각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이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목건련(目乾連)은 부처님과 독각과 사리자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이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 나아가 근기가 둔한 이는 근기가 영리한 이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이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주술은 신통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것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어느 주술이 어느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원만(圓滿)한 주술이 있고 원만하지 않은[不圓滿] 주술이 있으며 뛰어난[殊勝] 주술이 있고 뛰어나지 않은[不殊勝] 주술이 있다. 원만하고 뛰어난 것은 온갖 것에 대하여 모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으나 원만하지 않고 뛰
어나지 않은 것은 원만하고 뛰어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약물은 신통과 주술을 제외한 그 밖의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술의 힘을 말미암아 약물에 이르게 할 수는 있으나 약물의 힘은 주술에 이르게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 어느 약이 무엇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뛰어난 약은 하열한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
나는 곳에서 얻는 지혜는 앞의 세 가지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가장 하열하기 때문이다.
[문]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지옥은 지옥에 대해서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나아가 하늘은 하늘에 대해서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옥은 오직 지옥에서만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방생은 두 가지 것에 대하여 아귀는 세 가지 것에 대하여 하늘은 다섯 세계[五趣]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옥은 다섯 세계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고 나아가 하늘도 다섯 세계에 대하여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나타나지 않으면서 과거가 아니라고 한다. 나타나지 않는다 함은 두 번째의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과거라 함은 두 가지의 과거가 아닌 것이니, 숨어 없어졌다 해도 현재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또한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모든 행(行)이 이미 일어났고[已起], 함께 일어났고[等起], 이미 생겼고[已生], 함께 생겼고, 이미 옮아갔고[已轉], 현재 옮가가고[現轉], 이미 쌓였고[已集], 이미 나타났고[已現], 이미 지나갔고[已過去], 이미 다하여 없어졌고[已盡滅], 이미 여의고 변한[已離變] 것이니, 이것은 과거이면서 과거의 분한[分]이며 과거의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구절[句]는 모두 함께 과거의 모든 행[諸行]을 드러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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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것이다. 과거란 세간의 과거요 나타나지 않는다 함은 세간의 나타나지 않는[世不現] 것이다.
[論] 어떤 것은 과거도 아니면서 또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도 하니, 앞의 모양[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양이란 말은 이름[名]한 것에서 전개된 것이다. 만일 법이 이 앞의 세 구절이면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므로 모두 다 그것을 제외하고 그 밖의 아직 나타내지 않은 것으로 제4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온갖 과거 세상의 법과 현재 부처님의 몸과 숨어 없어지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현재와 온갖 미래와 그리고 무위의 법을 취한 것이다.
[문] 뒤에서의 다한다[盡]는 것과 사라진다[滅]는 것에서처럼 역시 결이 끊어진다[結斷]를 기준으로 하여 4구를 만들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결이 끊어진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4구를 만들지 않는 것인가?
[답] 어떤 곳에서는 결이 끊어진 것을 말하여 다한다 하고 사라진다고 하지만 결이 끊어진 것을 말하면서 나타나지 않는다[不現]고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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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 ⑥
[論] 모든 과거의 그 온갖 것은 다한[盡] 것인가?
[答]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앞의 설명과 같고, 다한 것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과거의 설명에서와 같다. 여기에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다. 과거와 다한 것과는 서로가 넓고[廣] 좁음[狹]이 있기 때문에 4구를 만드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다한 것이 아니다. 구수 오타이(鄔陀夷)가 “온갖 결(結)은 과거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과거란 두 번째 과거이며 다한 것이 아니라[非盡] 함은 처음의 다한[初盡] 것이 아니니, 부처님의 몸은 현재 이미 끊어 다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은 다한 것이면서 과거가 아니다. 부처님께서 “이 성스러운 제자는 이미 지옥을 다하였고 이미 방생을 다하였고 이미 아귀를 다하였고 이미 모든 험한 데[險]와 악취(惡趣)와 구덩이[坑]를 다하였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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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기에서 이미 지옥을 다했다고 함은 이 성스러운 제자는 이미 지옥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이미 방생을 다했다고 함은 그가 이미 방생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이미 아귀를 다했다고 함은 그가 이미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이미 모든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를 다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다시 무엇을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는가?
[답] 곧 위의 세 가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는 자세한[廣] 것이요 뒤에서는 요약한[略] 것이며, 앞에서는 따로따로[別]의 것이요 뒤에서는 통틀은[總] 것이며, 앞에서는 점차[漸]의 것이요 뒤에서는 단번[頓]의 것이며, 앞에서는 분별(分別)하는 것이요 뒤에서는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미 지옥․방생․악귀를 다했다고 함은 그가 이미 3악취의 자성(自性)이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미 모든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를 다했다고 함은 그가 이미 그 중유(中有)를 다했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미 지옥 등을 다했다고 함은 이미 지옥 등을 다했다는 것을 나타나며, 이미 모든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를 다했다고 함은 이미 사람 안의 선체(扇搋)․반택가(半擇伽)․무형(無形)․이형(二形)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 가운데서 험한 데요 악취며 구덩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앞에서 이미 지옥과 방생과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뒤에서는 이미 불률의(不律儀)에 머무르는 일을 다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것은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에 떨어져야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옥과 방생과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뒤에서는 이미 5무간업(無間業)을 짓는 일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것은 곧장 지옥에 나고 떨어지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옥과 방생과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뒤에서는 이미 선근을 끊는[斷善根] 것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냈다. 선(善)을 끊는 것은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와 같기 때문이니 만일 선근이 계속되지 않으면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옥 등의 과(果)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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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이미 지옥 등의 인(因)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냈다. 계경에 ‘너희들 비구로서 만일 몸과 말과 뜻의 악행(惡行)을 행하는 이를 보면 이미 지옥이나 혹은 그 밖의 악취를 보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옥과 방생과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냈다. 뒤에서 다시 이미 모든 험한 데를 다했다고 함은 거듭 이미 지옥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지옥 안에는 선과(善果)가 없기 때문이다. 악취라 함은 거듭 이미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거기에는 항상 빈궁하면서 자연(資緣)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구덩이라 함은 거듭 이미 방생을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몸과 마음이 그곳에 떨어지면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
요, 성겁(成劫) 때에 가 나면 그는 괴겁(壞劫) 때에야 비로소 목숨을 마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앞에서 이미 지옥과 방생과 아귀를 다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뒤에서 다시 이미 모든 험한 데와 악취와 구덩이를 다했다고 함은 모두 거듭하여 3악취의 과(果)를 이미 다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3악취는 모두가 극히 험하면서 많은 악(惡)이 나아가는 데며 떨어지게 되는 구덩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지금의 지옥 안에서 오히려 갖가지의 펄펄 끓는 가마솥[鑊湯]과 이글거리는 숯불 화로[爐炭]와 옥졸 등의 한량없는 고통을 주는 기구들이 있는데 어찌하여 다했다고 하는가?
[답] 가지도 않고 나지도 않기 때문에 다했다고 말한다. 성스러운 제자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도 않으며 다시는 그 온(蘊)․계(界)․처(處)에 나지 않기 때문이니, 그가 이미 그것의 비택멸(非擇滅)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 역시 이생(異生)도 지옥 등의 비택멸을 얻은 이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성스러운 제자만을 말하는가?
[답] 모든 성스러운 제자는 모두가 이미 다했기 때문이다. 이생 품류 중에는 아직 다하지 못한 이가 있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문] 모든 성스러운 제자는 역시 인간․천상도 다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지옥 등만을 다했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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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여기에서는 다만 온갖 것이 다한 것만을 말할 뿐이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는 사람 세계[人趣]에서나 하늘 세계[天趣]에 대해 아직 다하지 못한 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다한 것이면서 과거가 아니라고 한다. 다한 것이라 함은 두 번째의 다한 것이요, 과거가 아니라 함은 처음의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또한 다한 것이다. 모든 행(行)이 이미 일어났고[已起] 함께 일어났으며[等起]……(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서는 모두가 과거의 모든 행을 나타내 보인다. 과거라 함은 세간의 과거[世過去]이며 다한다는 것도 그러하다.
[論] 어떤 것은 과거도 아니면서 또한 다한 것도 아니니,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양[相]이란 말의 뜻은 앞의 해석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온갖 과거 세상의 법과 현재의 부처님 몸과 미래의 성스러운 제자의 지옥 등의 온․계․처를 제외한 그 밖의 현재와 온갖 미래와 무위의 법을 취하여 제4구를 만든 것이다.
[論] 또 만일 결이 끊어짐[結斷]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여기에서 의거한다[依]는 말은 의뢰할 바[所憑]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앞의 4구 중에 세간의 다함[世盡]과 나지 않는 다함[不生盡]에 의거하여 다한다는 말을 했으나 여기서의 4구 중에서는 번뇌를 끊는 것과 택멸(擇滅)을 얻는다는 것의 다함에 의거하여 다한다[盡]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論] 어떤 결(結)은 과거이면서 다한 것이 아니다. 결의 과거를 아직 끊지[斷] 못했고 아직 두루 알지[遍知] 못했으며 아직 사라지게[滅] 하지 못했고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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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여 뱉지[變吐] 못한 것을 말한다.
아직 끊지 못했다 함은 아직 단변지(斷遍知)1)을 세우지 못한 것이요, 아직 두루 알지 못했다 함은 아직 지변지(智遍知)를 세우지 못한 것이며, 아직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 함은 아직 택멸을 얻지 못한 것이요, 아직 변하여 뱉지 못했다 함은 아직 그것의 득(得)2)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아직 끊지 못했다 함은 아직 무간도(無間道)로써 끊지 못한 것이요, 아직 두루 알지 못했다 함은 아직 해탈도(解脫道)로써 두루 알지 못한 것이며, 아직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 함은 아직 그것의 이계득(離繫得)을 증득하지 못한 것이요, 아직 변하여 뱉지 못했다 함은 아직 그것의 계박[繫]의 득(得)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4구는 모두가 아직 버리지 못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이생이면서 만일 구박자(具縛者)이면 과거의 삼계(三界)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 끊을 결(結)이요, 이미 욕염(欲染)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초정려의 염(染)을 여의지 못한 이면 과거 8지(地)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을 여읜 이면 과거 1지(地)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
만일 성자(聖者)인 구박(具縛)으로서 정성이생에 들어간 이면 고법지인(苦法智忍)일 때에는 과거 삼계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나, 고법지(苦法智)가 이미 생기고 고류지(苦類智)가 아직 생기기 전이면 과거의 색계와 무색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과 나아가 삼계의 견집(見集)․견멸(見滅)․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며, 나아가 도법지(道法智)가 이미 생기고 도류지(道類智)가 아직 생기기 전이면 과거의 색계와 무색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삼계의 수
도에서 끊을 결이다.
예류자(預流者)는 과거 삼계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요, 일래자(一來者)는
1) 변지(遍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변지(知遍知)요, 둘째는 단변지(斷遍知)이다. 지변지라 함은 무루지(無漏智)를 말하고 단변지라 함은 무루지의 결과인 택멸(擇滅)을 의미한다.(『구사론』 제21권 참조)
2) 그것의 득(得)이라 함은 과거 결(結)의 득(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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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3품(品)과 색계․무색계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며, 불환자(不還者)로서 만일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과거 8지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요, 나아가 만일 이미 수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과거 1지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결은 과거이면서 다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論] 어떤 결은 다한 것이면서 과거가 아니다. 결의 미래를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며 이미 사라지게 하였고 이미 변하여 뱉은 것이다.
이미 끊었다 함은 이미 단변지(斷遍知)를 세운 것이요, 이미 두루 알았다 함은 이미 지변지(智遍知)를 세운 것이며, 이미 사라지게 하였다고 함은 이미 택멸을 얻은 것이요, 이미 변하여 뱉었다 함은 이미 그것의 득(得)을 버린 것이다.
어떤 이는 “이미 끊었다 함은 이미 무간도(無間道)3)로써 끊었다는 것이요, 이미 두루 알았다 함은 이미 해탈도(解脫道)로써 두루 알았다는 것이며, 이미 사라지게 했다고 함은 이미 그것의 이계득(離繫得)을 증득했다는 것이요, 이미 변하여 뱉는다 함은 이미 그것의 계박[繫]의 득(得)을 버렸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4구는 모두가 이미 버렸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아라한이면 미래 삼계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며, 만일 불환자(不還者)로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미래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8지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요,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미래의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일지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
만일 일래자(一來者)이면 미래의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과 욕계 6품
3) 무간도(無間道)라 함은 다시 노력 정진한 공이 현저하여 진지(眞智)를 일으키고 한창 번뇌를 끊는 자리이니 곧 단혹(斷惑)의 진행 상태를 가리키며, 해탈도(解脫道)라 함은 무간도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수승한 도로써 한창 진리를 증오(證悟)하는 자리이며 여기서 비로소 택멸(擇滅)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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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의 수도에서 끊을 결이요, 만일 예류자(預流者)이면 미래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결이며, 만일 수신행(隨信行)․수법행(隨法行)으로서 도법지(道法智)가 이미 생기고 도류지(道類智)가 아직 생기지 못한 이면 미래의 삼계의 견고․견집․견멸에서 끊을 것과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결이요, 나아가 고법지가 이미 생기고 고류지가 아직 생기지 못한 이면 미래 욕계의 견고에서 끊을 결이다.
만일 모든 이생으로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라면 미래 8지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며, 나아가 이미 욕염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미래 1지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결은 다한 것이면서 과거는 아니라고 한다.
[論] 어떤 결은 과거이면서 또한 다한 것이다. 결의 과거를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며 이미 사라지게 하였고 이미 변하여 뱉은 것을 말한다.
이미 끊었다는 등의 말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아라한의 과거 삼계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만일 이생으로서 이미 욕염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의 과거의 1지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다.
이것을 결이 과거이면서 또한 다한 것이라 한다.
[論] 어떤 결은 과거도 아니면서 또한 다한 것도 아니다. 결의 미래를 아직 끊지 못했고 아직 두루 알지 못했으며 아직 사라지게 하지 못했고 아직 변하여 뱉지 못했으며 결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아직 끊지 못했다는 등의 말은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이생으로서 만일 구박자(具縛者)이면 미래 삼계의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결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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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불환자(不還者)로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미래의 일지의 수도에서 끊을 결과 온갖 나타나 있는 결이다.
이것을 결은 과거도 아니면서 또한 다한 것도 아니라 한다.
[論] 모든 과거는 그 온갖 것이 사라지는가?
[答]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앞의 설명과 같다. 사라진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사라지는[世滅] 것이요, 둘째는 숨어 없어져 사라지는[隱沒滅]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의거하여 논을 짓는다.
과거와 사라진 것에는 서로가 넓고[廣] 좁음[狹]이 있기 때문에 4구를 만든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구수 오타이(鄔陀夷)가 말한 “온갖 결(結)은 과거요”라고 한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과거라 함은 두 번째의 과거이며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함은 두 가지의 사라짐이 아니다. 부처님은 현재 계시며 숨어 없어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은 사라진 것이면서 과거는 아니다. 세속(世俗)에 의거하면 작아진 길[小街]이나 작아진 집[小舍]이나 작아진 그릇[小器]이나 작아진 눈[小眼]은 사라진 거리[滅街] 나아가 사라진 눈[滅眼]이라고 한다.
동방(東方) 사람들은 작아진 거리 등을 보면서 “이것은 사라졌다”고 말한다. 곧 이런 뜻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혹시 눈이 사라져도 빛깔을 볼 수 있는가?”라고 하면 “있다. 현재 세상의 동분(同分)의 작은 눈[小眼]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사라진 것이면서 과거는 아니라고 한다. 사라진 것이란 두 번째의
사라진 것이요, 과거는 아니라 함은 첫 번째의 과거가 아닌 것을 말한다.
[論] 어떤 것은 과거이면서 또한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모든 행(行)이 이미 일어났고[已起], 함께 일어났으며[等起]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것은 모두가 과거의 모든 행을 드러내 보인다. 과거라 함은 이것은 세간의 과거이며 사라진 것에서도 그러하다.
[論] 어떤 것은 과거도 아니고 또한 사라진 것도 아니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모양[相]이란 말은 역시 앞의 설명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온갖 과거 세상의 법과 현재의 부처님 몸과 작아진 거리 등을 제외한 그 밖의 현재와 온갖 미래와 무위의 법을 취하면서 제4구를 만든다.
[論] 또 만약 결이 끊어짐[結斷]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여기에서 의거한다[依]는 말의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앞의 4구 중에는 세간의 사라짐[世滅]과 숨어 없어지면서 사라짐[隱沒滅]의 것에 의거하여 사라진다는 말을 하며 지금의 4구 중에서는 번뇌를 끊고[斷煩惱] 택멸을 얻는[得擇滅] 사라짐의 것에 의거하여 사라진다는 이름을 붙인다.
[論] 어떤 결(結)은 과거이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결의 과거를 아직 끊지 못했고 아직 두루 알지 못했으며 아직 사라지게 하지 못했고 아직 변하여 뱉지 못한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어떤 결은 과거도 아니면서 또한 사라진 것도 아니다. 결의 미래를 아직 끊지 못했고 아직 두루 알지 못했으며 아직 사라지게 하지 못했고 아직 변하여 뱉지 못했고 결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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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온갖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렇게 말한 다섯의 4구 중에서 앞 셋의 4구는 세간[世]의 시설(施設)과 성자(聖者)의 시설에 의거하여 설명했고 세간의 언어(言語)와 성자의 언어에 의거하여 설명했으며 세속(世俗)과 뛰어난 뜻[勝義]에 의거하여 설명했고 계경(契經)과 현실에 보이는 것[現見]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이다. 뒤의 두 개의 4구는 성자의 시설과 성자의 언어와 뛰어난 뜻과 계경에 의하여 설명한 것이다.
[문] 뒤의 두 개의 4구에서 무엇 때문에 다만 결(結)만을 설명하면서 결의 법[結法]4)은 설명하지 않았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데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미 결을 설명하면 또한 이미 결의 법도 설명한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결에 의거하여 결의 법을 세우기 때문이며 또 동일하게 다스리기[對治]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결은 자성(自性)이 끊어졌고 끊어지고 나면 성취하지 못하므로 설명하지만 결의 법은 일정하지 않으므로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결은 모든 허물이 많고 견고하여 끊기도 어렵고 깨뜨리기도 어렵고 뛰어나기도 어려운 것이므로 이 때문에 설명하나 결의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결(結)과 성자의 도[聖道]는 서로가 어긋나지만 결의 법은 그렇지 않아서 선(善)의 유루(有漏)로써 성자의 도와 함께 서로 들고 나고
4) 결(結)이란 번뇌를 말하고 결의 법[結法]이란 그 번뇌에 의하여 속박 당하는 심(心)․심소(心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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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때문이며 무부무기(無覆無記)는 성자의 도와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結)과는 서로 뒤섞이기 때문에 역시 성자의 도로 끊을 것이니, 마치 등불이 어둠을 깨뜨릴 때에는 역시 심지 등을 손상하고 왕이 다른 군사를 격파할 때는 역시 자기 군사들도 손상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모든 결은 결이면서 또한 결의 법이므로 이 때문에 설명하지만 결의 법은 결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결과 결의 법에서처럼 박(縛)과 박의 법[縛法]․수면(隨眠)과 수면의 법[隨眠法]․수번뇌(隨煩惱)와 수번뇌의 법[隨煩惱法]․전(纏)과 전의 법[纏法]․구(垢)와 구의 법[垢法]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論] 만일 괴로움[苦]에 대하여 의심을 내면서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닌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계경에 “인론(因論) 바라문이 부처님께 가서 ‘사문 교답마(喬答摩)여, 의심[疑]은 심히 희유하여서 해결하기 어렵고 해결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의심이란 심히 희유하여서 헤아리기 어렵고 해결하기 쉬운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옛날에 바라문이 있었는데 명론(明論)을 짓고 주술(呪術)을 지은 이로서 그 우두머리에 열 사람이 있었다. 첫째는 알슬타가
(頞瑟搩迦)요, 둘째는 파막가(波莫迦)며, 셋째는 바막제바(婆莫提婆)요, 넷째는 비습박밀다(毘濕縛蜜多)며, 다섯째는 사막탁기니(闍莫鐸耆尼)요, 여섯째는 앙기라(鴦耆羅)며, 일곱째는 발라타사(跋羅墮闍)요, 여덟째는 바사슬체(婆死瑟搋)며, 아홉째는 가섭파(迦葉波)요, 열째는 발율구(勃栗瞿)였느니라. 이와 같은 등의 모든 바라문은 세간에서 비록 존경을 받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고서 죽었느니라. 그러므로 의심은 심히 해결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지니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경에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자세히 분별하지 않았으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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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이 논(論)의 소의(所依)의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서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만일 괴로움에 대하여 의심을 내면서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耶],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닌가[耶]?’라고 하면 마땅히 한마음[一心]이라고 해야 하는가, 여러 마음[多心]이라고 해야 하는가?
[答] 여러 마음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라고 하면 이것은 한마음이며,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 이것은 두 번째의 마음이다. 원인[集]․소멸[滅]․도(道)에 대하여 의심을 내는 것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야(耶)라는 말은 의심한다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다만 ‘이것이 괴롭다’고만 하면 바른 견해가 되고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다”고 하면 삿된 견해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도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야(耶)라는 말을 말미암아 의심한다는 뜻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괴로움에 대해서와 나아가 도에 대해서는 각각 두 마음씩이 있으므로 통틀어 여덟 마음[八心]이 성립된다. 이것은 지극히 빠르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4성제(聖諦)에 있어서 차례대로 의심하면 이런 여덟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니, 마치 현관(現觀)할 때에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부터 도류지(道類智)에 이르기까지의 16의 찰나(刹那)가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이 8은 8의 찰나가 아니다. 낱낱의 마음의 나고 없어지는[生滅] 것은 빠르기 때문에 만일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그 중간에는 벌써 백천의 생멸하는 마음이 지나가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다만 본 논사(論師)는 제자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찰나를 한마음[一心]으로 삼은 것이니 행상(行相)이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論] 혹시 한마음이면서 의심이 있고[有疑] 의심이 없는[無疑]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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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가 결정함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비달마자(阿毘達磨者)는 “한 마음 무더기[心聚]에는 여러 법이 있으며 함께 생긴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망설임[猶豫]을 의심이라 한다”라 하고 어떤 이는 “이 결정을 지혜라 한다”라 하며 어떤 이는 “망설임도 아니고 결정도 아닌 것을 그 밖의 다른 심소(心所)라 한다”라고 한다.
곧 의심이 있는 것은 의심이 없다 하고 곧 의심이 없는 것은 의심이 있다 하는 이런 의심을 내지 말 것이니, 이런 의심을 내는 이가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면서 의심이 있는 마음이 다르고 의심이 없는 마음도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혹시 한마음에 의심이 있기도 하고 의심이 없기도 할 수 있는가?
[答] 없다.
[문] 이 말은 마음의 무더기를 기준으로 한 것인가, 소연(所緣)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만일 마음의 무더기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하나의 마음 무더기에는 옳은 의심[是疑]도 있고 그른 의심[非疑]도 있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거늘 무엇 때문에 ‘없다’고 설명하는 것인가? 만일 소연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한 부처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의심이 있다 하는 이생(異生)이 있고 의심이 없다 하는 성자(聖者)가 있으므로 역시 없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없다’고 대답하는가?
[답] 이것은 마음의 무더기를 기준으로 하여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모든 마음의 무더기에는 만일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다 하고 만일 의심이 없으면 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의심이 있는 마음이 다르고 의심이 없는 마음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의심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은 4성제에 대하여 혹은 이것은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혹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거나 간에 다만 의심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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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왜냐하면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대하여 만일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라고 하면 이 마음은 의심이 있는 것이요, 만일 ‘이것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하면 이 마음은 의심이 없는 것이며, 만일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 이 마음은 의심이 있는 것이요, 만일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다’고 하면 이 마음은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원인[集]과 소멸[滅]과 도(道)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열여섯 가지 마음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4성제에는 각각 네 가지씩이 있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는 의심이요, 네 가지는 바른 견해요, 네 가지는 삿된 견해이다. 앞의 네 가지 의심은 네 가지의 바른 견해를 이끌고 뒤의 네 가지 의심은 네 가지의 삿된 견해를 이끄는 것이니, ‘이것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하는 등은 바른 견해이며 ‘이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등은 삿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문] 어떠한 보특가라의 의심이 바른 견해를 이끌어 내고 어떠한 보특가라의 의심이 삿된 견해를 이끌어 내는가?
[답] 만일 좋아하면서 이 법과 함께 머무르는 이면 그의 의심은 바른 견해를 이끌어 내며, 만일 좋아하면서 외도와 함께 머무르는 이면 그의 의심은 삿된 견해를 이끌어 낸다.
또 만일 내론(內論)을 익히기 좋아하는 이면 그의 의심은 바른 견해를 이끌어 내며 만일 외론(外論)을 익히기 좋아하는 이면 그의 의심은 삿된 견해를 이끌어 낸다.
또 만일 착한 선비[善士]를 친근히 하면서 바른 법을 듣기 좋아하는 이면 그의 의심은 바른 견해를 이끌어 내며 만일 착하지 않은 선비[不善士]를 친근히 하면서 바르지 않은 법을 듣기 좋아하는 이면 그의 의심은 삿된 견해를 이끌어 낸다. 또 인의 힘[因力]과 가행의 힘[加行力]과 방일하지 않는 힘[不放逸力]을 더욱 늘리는 이면 그의 의심은 바른 견해를 이끌어 내며 만일 인의 힘과 가행의 힘과 방일하지 않는 힘을 더욱 자라게 하지 않는 이면 그의
의심은 삿된 견해를 이끌어 낸다.
계경에서 “세 가지의 어둔 몸[冥身]이 있으니 3세(世)에 대하여 의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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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문] 어두운 몸의 자성(自性)은 마땅히 그것은 무명(無明)이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의심[疑]을 설명하는가?
[답] 그것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니 모든 번뇌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행상(行相)으로서 무명과 비슷한 것은 의심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어두운 몸의 자성은 실로 무명이며 의심은 무명이 의지하는 곳이면서 집[舍室]이기 때문에 의심을 설명한다.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의심은 무지(無知)가 의지하는 곳이면서 집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은 무명과 친근하게 머무르기 때문이다. 만일 의심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무명이 있는 것은 세간에서 친한 이에 대하여 ‘그 이가 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은 무명과 모양과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에 대하여 다 같이 결정하지 않고 두 개로 나누어서 전개되기 때문에 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경에서 이루지 못한 법을 이루기 위해서다. 무명은 어두운 몸의 자성이므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나 의심에도 어두운 몸이라는 뜻이 있는데도 분명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한쪽만 설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세간으로 반연하는 의심만을 어두운 몸이라 말씀하시면서 무위(無爲)를 반연하는 의심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마땅히 말씀하셨어야 하시는데도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그 경은 많은 부분[多分]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세간을 반연해서 어두운 몸을 일으키는 것은 많지만 무위를 반연하는 것은 적다. 이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위는 거칠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의심을 내면 성인께서 나무라면서 어두운 이[冥者]라고 말하는 것이요, 무위는 미세하여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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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 알기가 어려우므로 그 안에서 의심을 낸다 해도 성인은 꾸짖지 않으신다.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대낮에 넘어지면 세간에서 꾸짖으면서 ‘소경이다’라고 말하겠지만 밤에 넘어지면 세간 사람이 꾸짖지 않는 것처럼 그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외도는 세간에 대하여 뛰어난 어리석음[增上愚]을 일으켜 의혹하고 망설이므로 이 때문에 한쪽만 설명한 것이다. 마치 계경에서 ‘나는 과거에 일찍이 있었던가, 일찍이 있지 않았던가? 어느 곳에서 일찍이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서 일찍이 있었을까? 나는 미래에 있게 될 것인가, 있지 않게 될 것인가? 어디에 가 있게 될까? 어떻게 하면서 있게 될까? 속으로 망설이면서 이 물건은 바로 무엇일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유정은 어디서
나서 왔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한 것과 같다.
외도는 세간에 대하여 자주자주 이와 같은 왕성한 망설임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어리석은 이거나 지혜로운 이거나 내도(內道)이거나 외도이거나 세간의 논자(論者)거나 나아가 어린아이거나 모두가 세간이 있는 줄은 안다. 그들 모두는 과거와 미래와 지금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그 가운데서 의심한다면 심히 눈먼 이요 어두운 이이기 때문에 어두운 몸[冥身]이라고 말하나 열반은 형상을 여읜지라 깨달아 알기가 극히 어려워서 비록 날래고 날카로운 지혜라 하더라도 오히려 궁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심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은 미래에 어떤 제자들이 과거와 미래가 없다고 부정할 것을 관찰하셨기 때문에 세간에 대하여 의혹을 일으키는 이를 어두운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계경에 “다섯 가지의 심재(心栽)5)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을 의심하고, 둘째는 교법을 의심하며, 셋째는 계율을 의심하고, 넷째는 가르침을 의심하며, 다섯째는 스님[僧]에게 성을 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 경에 “다섯 가지의 심재가 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대사(大師)
5) 심재(心栽)란 마음의 폐악[心幣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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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법(法)과 계율[戒]과 가르침[敎]에 대하여 의혹하고 망설이면서 깨쳐 들어가지 않고 신해(信解)하지 않으면 심재를 해치지 못하며 부처님의 찬탄을 받고 지혜 있는 이로서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에 대하여 성을 내고 헐뜯고 업신여기고 괴롭히면 심재를 해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 다섯 가지의 심재는 무엇으로써 체성[體]을 삼는가?
[답] 의심[疑]과 성냄[瞋]을 체성으로 삼는다. 앞의 네 가지는 의심이요, 다섯 번째는 성내는 것이다.
[문] 성내는 것이란 그럴 수 있다. 의심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계경에서 “심재에는 세 가지가 있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도 “성을 낸다고 함은 어떤 것인가?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고 재얼(栽蘖)을 짓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어느 곳에도 의심을 설명하면서 심재의 자성이라고 한 데는 없는데 이 가운데서는 어째서 설명하는가?
[답] 그것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 가운데서 심재의 자성이 아니면서도 심재의 일을 짓는 것은 의심만한 것이 없다. 『시설론(施設論)』에서 “의심은 마음을 가리고 마음을 억세게 만들면서 재얼의 일을 짓는 것이라 오히려 마음으로 하여금 삿된 결정조차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바른 결정이겠는가? 비유하자면 좋은 밭이라도 만일 갈아 일구지 않으면 곧 딱딱해지고 여러 나무뿌리나 등걸들이 많아서 더러운 풀조차도 심지 못하거늘 하물며 좋은
모종이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은 성내는 것과 행상(行相)이나 대하는 것[所對]에서도 다 같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심재라고 한다. 행상이 서로 비슷하다고 함은 다 같이 근심[慼]하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요, 대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다 함은 다 같이 기뻐하는[歡] 행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을 의심하는 것을 심재라 하면서 스님을 의심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답] 내지 않아야 할 데에 망령되이 내는 것을 심재라 한다. 부처님은 온갖 악행이나 허물이 없는데도 시기나 의심을 내므로 이것을 그릇된 것[非處]이라 한다. 법과 계율과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스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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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小分] 악행이나 과실이 있어서 시기나 의심을 내면 이것은 그러해야 될 곳에 일으키는 것이므로 심재라고 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스님에게 성을 내는 것은 심재라 하면서 부처님께 성을 내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답] 스님에게는 조그마한 악행과 과실이 있어서 그것을 반연하여 성을 내므로 성품이 더욱 중하기 때문에 심재라 하나 부처님에게는 온갖 악생이나 과실이 없고 성을 낸다 해도 경한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법과 계율과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중한 허물이 아닌 것에 대하여 심재를 시설하는데 스님에 대하여 의심을 내는 것은 그 허물이 중하며 마땅히 일으켜야 되는 곳에서는 끊기가 어렵기 때문에 심재라 하지 않으며 부처님께는 모든 허물이 없는데도 그것을 반연하여 성을 내면 그 성품은 반드시 더욱 중하고 끊기도 어려운 것이므로 역시 심재가 아니다. 법과 계율과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여러[多] 명신(名身)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자 곧 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이 세간에 나타났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록 이런 말씀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명신․구신․문신인가를 분별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분별하기 위하여 이런 논을 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論) 안에서 갖가지의 매우 깊고 묘한 이치를 분별하였는데도 어떤 이는 의심을 내면서 ‘논한 이가 뜻(義)에서는 비록 선교(善巧)를 얻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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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文]에 있어서는 혹은 선교하지 않기도 하다’고 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요, 글이나 뜻에 있어서도 다 같이 선교를 얻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명신․구신․문신은 실재 존재하는 법이 아니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으며, 어떤 이는 또 명신․구신․문신은 소리를 자성(自性)으로 삼는다고 집착하는데 성론자(聲論者)와 같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명신 등은 실재 존재하는 법이어서 이것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는 3무수겁(無數劫) 동안 시설하신 노고에 큰 과[大果]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과거의 한량없는 겁 전에 마땅히 멸도(滅度)를 얻었어야 하시는데 3무수겁 동안을 지나면서 백천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행하신 까닭은 다만 다른 이들을 이롭게[利他]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한다 함은 반드시 명신․구신․문신에 대하여 모두 좋은 솜씨[善巧]를 얻고 선교로써 다른 이들을 위하여 온․처
․계 등을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열반의 마지막 이익을 얻게 한 것이니, 이것을 큰 과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 가지 보리(菩提)의 증상연(增上緣)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상품(上品)이 각혜(覺慧)로써 명신․구신․문신을 깨닫는 것을 부처님의 보리라 하고, 중품(中品)의 각혜로써 명신․구신․문신을 깨닫는 것을 독각(獨覺)의 보리라 하며, 하품(下品)의 각혜로써 명신․구신․문신을 깨닫는 것을 성문(聲聞)의 보리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설법자(說法者)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은 명신․구신․문신을 잘 통달하시어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것이 그지없으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는 독각과는 다르다 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부처님과 독각은 모두가 스승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가 깨달았지만 명신 등에 대하여는 오직 부처님만이 잘 아시며 독각은 그렇지가 못하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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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두 가지 법의 성상(性相)을 비추어 환히 알고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명신 등은 잡염과 청정의 근본을 비추어 환히 아는 것이니, 만일 명신 등이 없으면 잡염과 청정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명신 등에 대하여 관찰하고 관찰하지 않는 것에 따라 큰 의리[大義利]와 큰 쇠손[大衰損]을 이끌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명신․구신․문신을 관찰하면 마치 쌓인 산과 같은 번뇌와 악행을 제어하여 항복받고 비록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견디고 참아 내기 때문이나 만일 명신․구신․문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번뇌와 악행은 마치 강물이 흐르듯 끊어지지 않는다.
마치 비로석가(毘盧釋迦)6) 태자에게 욕설을 하면서 ‘여종의 자식이 어째서 우리 석종(釋種)의 당(堂)으로 오르는 것이냐’라고 한 것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은 너더댓의 글자[四五字]를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량없는 백천 중생을 끌어당겨 큰 지옥에 떨어지게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그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로부터 욕설[罵]을 들었을 때에는 어떻게 관찰하여야 성을 내지 않겠는가?
[답] 말한 것이 아구로사만(阿俱盧舍縵)이라 하면 이것은 ‘나에게 욕을 한다’는 것이지만 만일 아(阿) 자(字)를 제거하면 다만 이것은 ‘나를 부른다’는 말 뿐이요, 만일 만(縵)자를 제거하면 다만 이것은 ‘욕하는 소리’가 될 뿐이며 만일 두 글자를 다 같이 없애면 다만 ‘부른다[喚]’는 말이 될 뿐이다.
그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 이 모든 글자 가운데서 ‘만일 아자가 없으면 이것은 나를 부르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느냐?’라고 하고 ‘만일 만자가 없으면 다만 이것은 욕하는 소리만이 있을 뿐인
6) 비로석가(毘盧釋迦)는 통례 유리왕(瑜璃王)이라고 번역하며 바사닉왕(波斯匿王)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석가 종족의 여종이었다 한다. 이 유리왕이 어릴 적에 석가족을 방문하여 새로 건설해 놓은 강당(講堂)에 제일 먼저 들어 갔었으므로 석가족의 사람들이 노하여 본문과 같이 욕을 한 것이다. 뒷날 유리왕이 석가족을 멸망시킨 원인이라고 전한다.
데 나와는 상관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성을 내겠느냐?’고 하며 ‘만일 두 글자가 다 같이 없으면 다만 부른다는 말인데 나에게 무슨 고통을 준다고 성을 내겠느냐?’라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는 곧 ‘이와 같은 모든 글자는 이 지방에서는 욕설이 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찬탄하는 말인데, 내가 만일 여기에서는 성을 내거나 근심을 내고 또는 다른 지방에서는 탐을 내고 기쁨을 낸다면 언제나 근심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언제나 성을 내고 언제나 탐을 내어야 할 터이니, 그 누가 고달프다 한들 나에게 견줄 이가 있겠느냐’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니 이 관찰을 말미암아 성을 내지 않게 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는 곧 ‘나를 칭찬하는 이가 있다 해도 다시는 따로의 글자가 없고 다만 나에게 욕하는 모든 글자 가운데서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이 칭찬과 욕설이 이미 결정되지 않았다면 그 가운데서 근심을 내거나 기쁨을 내지 않아야 한다’라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욕설에 대하여 성을 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었을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은 어업(語業)은 그 누가 성취하는 것이냐? 이것은 욕하는 이의 것이냐, 내 몸의 것이냐?’고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곧 이것은 욕하는 이가 성취하는 것인 줄 알고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욕을 하고 있거늘 어째서 내가 상관할 일이냐’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성을 내지 않게 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는 곧 욕설하는 이의 몸속에 있는 모든 법은 나에게 욕하는 법7)이 많은가, 욕하지 않는 법이 많은가를 관찰하면 욕을 하는 법은 오직 1계(界)와 1처(處)와 1온(蘊)의 일부분[少分]만이 속하고 욕하지 않는 법은 17계와 1계의 일부분과 11처와 1처의 일부분과 4온과 1온의 일부분이 속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므로 ‘그는 나에게 욕을 하지만 나에게 욕을 하는 법은 적고 욕을
하지 않는 법은 많거늘 무엇
7) 나에게 욕하는 법은 이것을 언어[名句文]로써 분석할 적에 18계(界)에서 보면 법계(法界)의 일부분이요, 12처(處)에서 보면 법처(法處)의 일부분이며 5온(五蘊)에서 보면 행온(行蘊)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여기서 1계와 1처와 1온의 일부분[少分]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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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적은 것에 대하여 성을 내겠느냐?’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 한 글자와 한 찰나 동안을 관하면 반드시 마땅히 욕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글자와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생기는 것도 없으며 앞 글자가 생길 때에는 뒤의 글자는 아직 생기지 않았고 뒷 글자가 만일 생기면 앞 글자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므로 도무지 욕설이라는 이치가 없다. 다만 망령되이 분별하면서 그것을 욕설이라고 할 뿐이니 성을 내지 않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나의 몸과 욕하는 이를 관해야 한다. 모두가 생각마다 사라지는 것이므로 그때그때에 욕하는 이와 나를 분별하려 하여도 모두가 이미 사라져버려서 없거늘 누가 다시 누구에게 성을 내고 한탄(恨歎) 하겠는가? 이런 관찰을 말미암아 성을 내지 않게 된다.
또 수행하는 이가 다른 이에게서 욕설을 들을 때에는 ‘모든 행[諸行]은 나[我]와 내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작자(作者)도 수자(受者)도 모두가 얻을 수 없고 오직 공행(空行)의 무더기일 뿐이거늘 어째서 성을 내게 되겠느냐?’고 관해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논하는 까닭은 이 논의 글과 뜻이 완전히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 논 가운데서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는 것을 뜻이 갖추어졌다고 하며 이 가운데서 명신․구신․문신을 분별하는 것을 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명신․구신․문신에는 큰 작용이 있다 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명(名) 등에 의거하여 온․처․계 등의 한량없는 뜻의 문[義門]을 분별하며 그리고 불보․법보․승보의 그지없는 공덕을 찬술(讚述)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여러 명신[多名身]인가?
[答] 여러 명호(名號)․달리하는 말[異語]․불리어 하는 말[增語]․생각[想]․평등한 생각[等想]․임시의 시설[假施設]이니 이것을 여러 명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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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논자(論者)는 문(文)에서 솜씨가 훌륭하므로 여러 문구(文句)로써 함께 하나의 명(名)을 드러내는 것이니 모두가 이름의 차별되는 명이기 때문이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여러 명신을 물으면서도 명(名)과 명신(名身)은 묻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마땅히 물어야 하는데도 묻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명과 명신의 두 가지는 다 같이 여러 명신 가운데 포섭되어 있으므로 여러 명신을 물으면 모두를 물은 것이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논을 지은 이에게 묻지 말 것이다. 계경에서 다만 여러 명신만을 물었기 때문에 논자는 그 가운데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러 명신을 물었는데 명(名)으로써 대답하는가?
[답] 명은 근본이다. 명은 명신을 만족하게 하고 명신은 다시 여러 명신을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전전인(展轉因)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니 마치 자손의 법[子孫法]과 같다. 명에 의거하여 명신이 있고 명신에 의거하여 여러 명신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명의 체성[體]은 무엇인가?
[답] 이것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포섭된다. 문(文)․구(句)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무엇 때문에 명(名)이라 하는가?
[답] 명이라 함은 따른다[隨]고도 하고 부른다[召]고도 하며 합한다[合]고도 한다. 따른다 함은 마치 그 하는 일대로 가서 상응하는 것이요, 부른다 함은 이 뜻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구하는 대로 곧 응하는 것이며, 합한다 함은 게송을 짓는 데에 따라 전개되면서 뜻과 함께 알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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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명(名)은 세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명이라 한다.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에는 따름[隨]이 있고 부름[召]은 있으면서도 합함[合]의 뜻이 없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고 그 밖의 불상응(不相應)과 색(色)과 무위(無爲)의 법에는 따름이 있고 합함은 있으면서도 부름의 뜻이 없기 때문에 역시 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문] 명신(名身)이란 무슨 뜻인가?
[답] 이것은 두 개의 명이 모였다[聚集]는 뜻이니 이 때문에 하나의 명은 명신이라 하지 않는다.
[문] 여러 명신[多名身]이란 무슨 뜻인가?
[답] 이것은 여러 개의 명이 모였다는 뜻이다. 마치 한 마리의 코끼리나 두 마리의 코끼리는 여러 마리의 코끼리 몸[多衆身]이라고 하지 않으며 반드시 여러 마리의 코끼리여야 여러 코끼리 몸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馬] 등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구신(句身)과 여러 구신[多句身]과 문신(文身)과 여러 문신[多文身]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 가운데에는 명이 있고 명신이 있으며 여러 명신이 있다. 한 글자[一字]로 생기게 되는 명이 있고 두 글자[二字]로 생기게 되는 명이 있으며, 여러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이 있다. 한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 가운데에는 한 글자에 대해서는 다만 명만이 있고 두 글자에 대해서는 명신이 있으며 여러 명신은 세 글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고 네 글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다.
두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 가운데에는 두 글자에 대해서는 다만 명만이 있고 네 글자에 대해서는 명신이 있으며 여러 명신은 여섯 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고 여덟 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다.
세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 가운데에는 세 글자에 대해서는 다만 명만이 있고 여섯 자에 대해서는 명신이 있으며 여러 명신은 아홉 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고 열두 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다.
네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 가운데에는 네 글자에 대해서는 다만 명만이 있고 여덟 자에 대해서는 명신이 있으며 여러 명신은 열 두 자에 의거하려하는 것이 있고 열여섯 자에 의거하려 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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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문(門)을 삼아 그 밖의 여러 글자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글자로 생기게 되는 명 가운데에는 한 글자에 대하여 한번 부르게 되면 다만 명만이 있고 이 글자에 대하여 재차 부르게 되면 명신이 있으며 이 글자에 대하여 혹은 세 번 부르기도 하고 혹은 네 번 부르기도 하면 여러 명신이 있다. 두 글자에 대하여 생기게 되는 명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여러 구신[多句身]인가?
[答] 모든 글구[句]로서 아직 만족되지 못한 뜻을 만족시킨다. 그 가운데서 연이어 합해지는[連合] 것을 여러 구신이라 한다.
이 뜻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경을 인용하여 증거를 삼는다.
[論]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악(惡)은 짓지 말고
모든 선(善)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가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4구(句)는 저마다 만족하지 못한 뜻을 만족시키는 것이니, 이 가운데서 연이어 합해지는 것을 여러 구신이라 한다.
이와 같은 4구의 하나하나는 저마다 자기 구절 가운데서는 아직 만족되지 못한 뜻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연이어 합해진다 함은 4구 가운데서 하나하나는 저마다 달라 여러 글자가 연이어 합치지만 아직 만족되지 못한 뜻을 나타내며 혹은 다시 모든 구절이 연이어 합해지면 게송의 뜻을 이루게 되면서 여러 구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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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나타낸다.
낱낱 구절 가운데는 표격[標]이 있고 풀이[釋]가 있다. ‘모든 악은’이라 함은 표격이요, ‘짓지 말고’라 함은 풀이이다. 나아가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라 함은 표격이요, ‘가르침이다’라고 함은 풀이이다.
그러므로 이 게송 가운데는 네 가지 일의 만족[四事滿]이 있다. 첫째는 표격이요, 둘째는 풀이이며, 셋째는 구절[句]이요, 넷째는 게송[頌]이다.
만일 ‘모든 악은’이라고 말하면 표격에서는 만족하다 하겠지만 풀이에서나 구절에서나 게송으로서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 다시 ‘짓지 말고’라 말하면 표격과 풀이와 구절의 세 가지에 있어서는 만족하다 하겠지만 게송으로서는 아직 만족하지 못하다.
다시 ‘모든 선을’ 하고 말하면 총 게송으로서는 표격이나 풀이나 구절이 만족하다 하겠지만 만일 따로따로의 구절에서는 표격은 만족하면서도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나아가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라고 말하면 만일 총 게송으로서는 표격이나 풀이나 구절이 만족하다 하겠지만 만일 따로따로의 구절에서는 표격을 만족하면서도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하며, 다시 ‘가르침이다’라고 말하면 온갖 모두가 만족하게 된다.
이런 게송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여덟자[八字]로 구절이 되고 서른 두자로 게송의 된다. 모든 경․논의 게송은 거의 이 법에 의거하며 쓰고 베끼는 수[書寫數]를 계산하는 것도 이 법에 의거한다.
또 여섯 자로부터 나아가 스물여섯 자를 모두 구절로 삼게 된다. 그리고 여섯 자를 첫 구절[初句]이라 하고 스물여섯 자를 뒤의 구절[後句]이라 한다. 여섯 자보다 더 줄어진 것을 짧은 구절[短句]이라 하고 스물여섯 자를 더 지나가면 긴 구절[長句]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여러 문신[多文身]인가?
[答] 모든 글자의 모임[衆]이니 이것을 여러 문신이라 한다.
이 뜻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경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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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하려 함[欲]은 게송의 근본이 되고
글[文]은 곧 글자[字]이며
게송[頌]은 이름[名]과 그리고
게송을 짓는 이[造頌者]에 의거한다.
여기에서 하려 함[欲]이라고 함은 이 게송을 지으려 하면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요, 게송의 근본이 된다고 함은 이 하려 함이 게송의 인(因)․집(集)․생(生)․연(緣)이며, 글은 곧 글자라 함은 좋은 솜씨의 방편[巧便]이 환히 나타났기 때문에 글이라 하고 이것이 곧 글자이면서 옮아감이 없이 다하기 때문에 게송을 드러낸 글은 글자로써 체성을 삼는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게송은 이름에 의거한다 함은 게송은 가유(假有)이니 이름에 의거하여 성립되고 또한 글과 구절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우선 이름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거한다[依]는 말은 마치 숲이 나무에 의거하는 것과 같으며 그리고 게송을 짓는 이라 함은 사유(思惟)하고 관찰하면서 모든 가타(伽陀)를 짓는 이를 게송을 짓는 이라 한다. 게송이 짓는 이에 의거하는 것은 마치 뱀이 굴에 의거하고 물이 샘에 의거하며 젖이 유방(乳房)에 의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의지한다 하는 이름과는 다르다.
여기에서는 이름[名]이 있고 명신(名身)이 있고 여러 명신[多名身]이 있으며, 구절[句]이 있고 구신[句身]이 있고 여러 구신[多句身]이 있으며, 글[文]이 있고 문신(文身)이 있고 여러 문신[多文身]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한 글자[一字]에 대해서는 이름은 있으면서도 명신은 없고 여러 명신도 없으며 구절도 없고 구신도 없고 여러 구신도 없으며 글은 있으면서도 문신은 없고 여러 문신도 없다.
두 글자[二字]에 대해서는 이름이 있고 명신이 있으면서도 여러 명신은 없으며 구절이 없고 구신도 없고 여러 구신도 없으며 글이 있고 문신이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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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도 여러 문신은 없다.
네 글자[四字]에 대해서는 이름이 있고 명신이 있고 여러 명신이 있으나 구절이 없고 구신도 없고 여러 구신도 없으며 글이 있고 문신도 있으며 여러 문신도 있다.
여덟 글자[八字]에 대해서는 이름이 있고 명신도 있고 여러 명신도 있으며 구절은 있으나 구신도 없고 여러 구신도 없으며 글이 있고 문신도 있으나 여러 문신은 없다.
열여섯 글자[十六字]에 대해서는 이름이 있고 명신도 있고 여러 명신도 있으며 구절이 있고 구신이 있으나 여러 구신은 없으며 글이 있고 문신도 있으며 여러 문신도 있다.
서른 두 글자[三十二字]에 대해서는 이름이 있고 명신도 있고 여러 명신도 있으며 구절이 있고 구신도 있고 여러 구신도 있으며 글이 있고 문신도 있고 여러 문신도 있다.
이것이 문(門)이 됨을 말미암아 모든 글자들에 대하여 말한 많고 적음은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5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⑦
[문] 이름[名]은 언어[語]의 지계(地繫)에 따르는 것인가, 보특가라의 지계에 따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름은 언어의 지계에 따른다’라고 말한다. 그는 “욕계(欲界)에 태어난 이가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욕계의 몸[身]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욕계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義]은 삼계계(三界繫)이기도 하고 혹은 불계(不繫)이기도 하다. 만일 초정려(初靜慮)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욕계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초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초정려에 태어난 이가 만일 초정려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초정려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초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초정려의 몸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욕계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제2․제3․제4 정려(靜慮)에 태어난 이가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제2․제3․제4 정려의 몸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욕계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초정려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제2․제3․제4 정려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초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위의 3정려에는 이름이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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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없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있기는 하나 말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評] 그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차라리 ‘없다’고 말할 것이요, ‘있기는 하나 말할 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름은 보특가라의 지계(地繫)에 따른다”라고 말한다. 그는 “욕계에 태어난 이가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쓰면, 그는 욕계의 몸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욕계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義]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초정려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욕계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욕계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초정려에 태어난 이가 만일 초정려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초정려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초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초정려의 몸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초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제2․제3․제4의 정려에 태어난 이가 만일 욕계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제2․제3․제4 정려의 몸이요 욕계의 언어이며 제2․제3․제4 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초정려의 언어를 쓴다면, 그는 제2․제3․제4 정려의 몸이요 초정려의 언어이며 제2․제3․제4 정려의 이름이면서 말한 것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색계(無色界)에는 이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없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있지만 말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評] 그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없다”고 할 것이요 “있지만 말할 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하니,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글[文]과 구절[句]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이름 등은 유정의 수[有情數]인가, 유정이 아닌 수[非有情數]인가?
[답] 유정의 수이다.
[문] 이름 등은 유집수(有執受)인가, 무집수(無執受)인가?
[답] 무집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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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름 등은 장양(長養)1)인가, 등류(等流)인가, 이숙생(異熟生)인가?
[답] 이것은 등류요, 장양도 아니고 이숙생도 아니다.
[문] 만일 이름 등이 이숙생이 아니라면 계경을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나도 이름은 업(業)으로부터 생기며 이것은 업의 과(果)이다’라고 말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답] 이름도 업의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좋은 업을 지으면 역시 좋은 이름을 얻으나 이숙은 아니다.
[문] 이름 등은 선(善)인가, 불선(不善)인가, 무기(無記)인가?
[답] 무기이다. 업을 짓는 이가 고의[故思]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4대종(大種)과 같다.
[문] 누가 이름 등을 성취하는가? 능히 말하는 이[能說者]인가, 말할 바[所說]의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게 되는가? 만일 능히 말하는 이면 아라한(阿羅漢)도 오염된 법[染汚法]을 성취해야 하고 욕염(欲染)을 여읜 이도 불선의 법[不善法]을 성취해야 하며, 이생도 성자의 법을 성취해야 하고 선근을 끊은 이[斷善根者]도 선의 법[善法]을 성취해야 할 것이니, 아라한 등도 오염된 법 등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말할 것이라면 바깥의 일[外事]과 무위 등도 이름 등을 성취해야 하리니, 그것도 말할 법이기 때문이다.
[답] 오직 능히 말하는 이만이 이름 등을 성취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뒤의 물음[詰難]은 환히 잘 알게 하겠지만, 앞의 물음은 어떻게 환히 알게 하겠는가?
[답] 아라한 등은 비록 오염된 것 등의 이름은 성취한다 하더라도 오염된 것 등의 법은 성취하지 않는 것이니, 오염된 것 등의 이름은 모두가 무부무기의 법이기 때문이다.
[문] 한 찰나[一刹那]의 마음은 한 마디 말[一語]을 일으킬 수 있으며 한 찰
1) 장양(長養)이란 후천적(後天的)으로 배양(培養)한 것이요, 이숙생(異熟生)은 전세에 지은 업의 보(報)인 선천성(先天性)의 것이며, 이것에 대하여 등류(等流)는 위의 둘의 중간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이숙생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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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一刹那語]은 한 글자[一字]를 말할 수 있는가?
[답] 부처님은 한 찰나의 마음에서 한 마디 말씀을 일으킬 수 있고 한 찰나의 말씀에서 한 글자를 말씀하실 수 있으나, 성문이나 독각은 한 찰나의 마음에서 한 마디의 말은 일으킬 수 있어도 한 찰나의 말에서 한 글자를 말할 수는 없으니, 그는 애(哀)2)를 말할 때에 반드시 많은 찰나를 지나야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오직 부처님만이 그 말씀이 날쌔고 성(聲)과 운(韻)에 허물이 없으셔서 사변(詞辯)이 제일이시다.
[문] 3세(世)의 모든 법의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3세에서의 이름이 있는가?
[답] 있다. 과거의 모든 법에 과거의 이름이 있다 함은 마치 과거의 부처님께서 그와 같은 이름으로써 과거의 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고, 과거의 모든 법에 미래의 이름이 있다 함은 마치 미래의 부처님께서 그와 같은 이름으로써 과거의 법을 말씀하실 것과 같으며, 과거의 모든 법에 현재의 이름이 있다 함은 마치 현재의 부처님께서 그와 같은 이름으로써 과거의 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미래와 현재의 법에 있어서도 그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
[문] 온갖 이름은 모두 뜻[義]을 나타내는가?
[답] 온갖 이름은 모두 뜻을 나타낸다.
[문] 만일 이 이름으로써 단(斷)과 상(常)이나 두 번째 머리[二頭]나 세 번째 손[三手]이나 여섯 번째 온[六蘊]이나 열세 번째 처[十三處]나 열아홉 번째 계[十九界] 등을 나타낸다면 이 이름은 어느 것을 나타내는가?
[답] 이 이름은 곧 단과 상 등의 생각[想]을 나타낸다.
[문] 만일 이 이름으로써 모든 법[諸法]의 무아(無我)를 나타낸다면 이 이름은 어느 것을 나타내지 않게 되는가?
[답] 어떤 이는 “그의 자성(自性)3)과 그리고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나타낼 수 있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오직 자성만을 제외하고 그 밖의 모두를 나타낼 수 있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오직 네
2) 범어 아(A)자를 말한다.
3)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자체(自體)와 그리고 이것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법을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모두를 ‘제법은 무아다’라고 설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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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四字]4) 만을 제외하면 그 밖의 나머지를 모두 나타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온갖5) 모두를 타나낸다. 여기에서 살(薩)은 바(婆)를 나타내고 바는 살을 나타내며, 달(達)은 마(磨)를 나타내고 마는 달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서 비록 온갖 것을 나타낸다 해도 자성이 자성을 나타낸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름과 뜻은 어느 것이 많은가?
[답] 뜻이 많으며 이름은 적다. 왜냐하면 뜻은 17계(界)와 1계의 일부분과 11처(處)와 1처의 일부분과 4온(蘊)과 1온의 일부분을 포섭하지만, 이름은 1계와 1처와 1온의 일부분만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름은 많으며 뜻은 적다. 왜냐하면 낱낱의 뜻에는 많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옛날에 만들어진 니건다서(尼健茶書)6)와 같아서 하나하나의 뜻에 천 개씩의 이름이 있었던 것을 그 뒤에 그것을 요약하여 하나하나의 뜻에 오직 백 개씩의 이름만을 남겨 두었고, 지금은 하나하나의 뜻에 오직 열 개씩의 이름만을 남겨 두었다. 또 설법을 하는 이는 한량없는 이름으로써 하나의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뜻은 많으면서 이름은 적다. 왜냐하면 이름도 뜻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름은 뜻이 아니라 해도 뜻은 오히려 많은 것이니, 17계(界)와 1계의 일부분을 포섭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하물며 이름도 뜻이 되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그 밖의 이름도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다고 하면 뜻은 18계와 12처와 5온을 포섭하나, 이름은 다만 1계․1처․1온의 일부분만을 포섭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이름도 그것이 뜻이라면 이름과 뜻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드러내는[能顯] 것은 이름이요 드러낼 것[所顯]은 뜻이다.
4) 네 글자[四字]라 함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네 글자를 말한다.
5) 제법(諸法)이라는 원어(原語)는 살바달마(薩婆達磨 Sarvadharmāḥ)이며 살바(薩婆)는 모든[諸]이요, 또 온갖[一切]이라는 뜻이며 달마(達磨)는 법(法)이라는 뜻이다.
6) 사전(辭典)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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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름은 물질이 아니지만[非色], 뜻은 물질에도 물질이 아닌 것에도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볼 수 없는[無見] 것뿐이지만 뜻은 볼 수 있는 것에도 볼 수 없는 것에도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대할 수 없는[無對] 것뿐이지만 뜻은 대할 수 있는 것에도 대할 수 없는 것에도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유루(有漏)일 뿐이지만 뜻은 유루에도 무루(無漏)에도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유위(有爲)일 뿐이지만 뜻은 유위와 무위에 다 통한다.
또 이름은 오직 무기일 뿐이지만 뜻은 선과 불선과 무기에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3세(世)에 떨어질 뿐이지만 뜻은 3세에 떨어지는 것과 세상을 여의는[離世] 것에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욕계계(欲界繫)․색계계(色界繫)일 뿐이지만 뜻은 삼계계(三界繫)와 불계(不繫)에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일 뿐이지만 뜻은 학(學)과 무학(無學)과 비학비무학에 다 통하며, 이름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일 뿐이지만 뜻은 견도[見
]와 수도에서 끊을 것과 끊을 것이 아닌[不斷] 것에도 다 통한다.
또 이름은 오직 오염되지 않은 것이지만 뜻은 오염되었든 오염되지 않았든 다 통한다.
오염된 것과 오염되지 않은 것에서처럼 죄가 있는 것[有罪]․죄가 없는 것[無罪]과 유부(有覆)․무부(無覆)와 물러나는 것[退]․물러나지 않는 것[非退]과 흑법(黑法)․백법(白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이름은 이숙이 없지만 뜻은 이숙이 있든 이숙이 없든 어느 것에도 다 통하며, 이름은 이숙이 아니지만 뜻은 이숙이든 이숙이 아니든 다 통하며, 이름은 불상응이지만 뜻은 상응이든 불상응이든 다 통한다. 상응과 불상응에서처럼 소의가 있고[有所依]․소의가 없는[無所依] 것과 소연이 있고[有所緣]․소연이 없는[無所緣] 것과 행상이 있고[有行相]․행상이 없는[無行相] 것과 경각이 있고[有警覺]․경각이 없는[無警覺]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이름은 오직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 국한되지만 뜻은 4제(諦)와 진리 아닌[非諦] 것까지 포섭하고 통한다.
이와 같은 것 등을 말미암아 이름과 뜻이 차별된다.
[문] 뜻은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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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말을 할 수 있다면 불을 말할 때는 혀가 타야하고, 칼을 말할 때는 혀가 베어져야 하며, 부정(不淨)한 것을 말할 때는 혀가 더러워져야 하고, 마실 것을 말할 때는 목마름이 없어져야 하며, 밥을 말할 때는 배고픔이 없어져야 하는 이러한 것 등이다.
만일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찾는 것이 뒤바뀌지 않겠는가? 마치 코끼리를 찾는데 말을 얻어야 하고 말을 찾는데 코끼리를 얻어야 하는 이러한 것 등이다.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내가 말한 법은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좋으며 글과 뜻이 교묘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뜻은 말할 수는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의 물음은 잘 회통하겠지만 어떻게 찾는 것이 뒤바뀌지 않겠는가?
[답] 겁초(劫初) 때에 사람들이 함께 코끼리 등에 대하여 이름과 생각을 가정하여 붙인 것이 차츰차츰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찾는 것이 뒤바뀌지 않게 된다.
어떤 이는 “언어는 이름을 일으키고 이름은 뜻을 나타낸다. 언어는 비록 직접 말하여 뜻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차츰차츰 의거하는 것이 마치 자손의 법[子孫法]과 같다. 때문에 코끼리 등의 찾는 것에 있어서도 뒤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 계경에서 말한 것은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내가 말한 법은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좋으며 글과 뜻이 교묘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세우(世友) 존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말은 글을 일으키고 글은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외도(外道)와 다름을 보이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외도가 말한 법은 혹은 뜻이 적기도 하고 혹은 뜻이 없기도 하나 세존께서 말씀하신 법은 뜻이 있고 뜻이 많다. 이 때문에 ‘내가 말한 법은 글과 뜻이 교묘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외도가 말한 것은 글과 뜻이 서로 어긋나지만 세존께서 말씀하신 글과 뜻은 서로 따르므로 그것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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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씀하셨다.
[문] 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속하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4온(蘊)을 이름이라 하셨는가?
[답] 부처님은 유위(有爲)에 대하여 통틀어 두 부분[二分]을 세우셨으니, 물질[色]과 물질 아닌 것[非色]이다. 물질은 색온(色蘊)이요 물질 아닌 것은 느낌[受] 등의 네 가지 온이다. 물질이 아닌 무더기 안에서는 온갖 법을 밝혀 아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물질 아닌 무더기를 통틀어 이름이라 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색법(色法)은 거칠게 드러나는 것이므로 물질이라 하였으며, 물질 아닌 것은 미미하고 숨은 것이어서 이름을 말미암아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실로 이름 등은 오직 불상응행온에만 속한다’라고 말한다.
이름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덕(功德)의 이름이요, 둘째는 생류(生類)의 이름이며, 셋째는 시분(時分)의 이름이요, 넷째는 수욕(隨欲)의 이름이며, 다섯째는 업생(業生)의 이름이요, 여섯째는 표상(標相)의 이름이다.
공덕의 이름이란 공덕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마치 소달람(素怛纜)을 이해하거나 혹은 외우는 이를 경사(經師)라 하고, 비나야(毘奈耶)를 이해하거나 혹은 외우는 이는 율사(律師)라 하며, 아비달마(阿毘達磨)를 이해하거나 혹은 외우는 이를 논사(論師)라 하고, 예류(預流)의 과위를 얻은 이를 예류라 하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은 이를 아라한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이다.
생류의 이름이라 함은 태어난 종류[生類]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치 도시[城市]에서 태어난 이를 도시 사람이라 하고 시골[村野]에서 태어난 이를 시골 사람이라 하며, 찰제리(刹帝利)의 종족 안에서 태어난 이를 찰제리라 하고 나아가 술달라(戌達羅)의 종족 안에서 태어난 이를 술달라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시분의 이름이라 함은 시분(時分)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일 때를 동자(童子)라 하고 나아가 쇠하여 늙은 때를 노인(老人)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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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욕의 이름이라 함은 좋아하는[樂欲] 것을 따라[隨] 이름을 붙인 것이다. 처음 태어날 때에 혹은 부모 등이나 혹은 사문 등이 그를 위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업생의 이름이라 함은 짓는 업(業)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마치 그림을 잘 그리는 이를 화사(畵師)라 하고 금과 쇠붙이를 단련하는 이를 금철사(金鐵師)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표상의 이름이라 함은 나타나는 형상[標相]에 의거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마치 지팡이를 짚고 있는 이를 지팡이를 짚은 사람[執杖人]이라 하고 일산을 가지고 있는 이를 일산을 가진 사람[執蓋人]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또 이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상의 이름[假想名]이요, 둘째는 수용의 이름[隨用名]이며, 셋째는 피익의 이름[彼益名]이요, 넷째는 종략의 이름[從略名]이다.
가상의 이름이라 함은 마치 가난하고 천한 이를 부자요 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수용의 이름이라 함은 마치 기어다니는 것을 기어다니는 벌레라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것 등이며, 피익의 이름이라 함은 마치 천신(天神) 곁에서 얻기를 구하는 이를 천수(天授)라 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냄으로 인하여 얻고 있는 이를 사수(祠授)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것 등이요, 종략의 이름이라 함은 마치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춘 이를 오덕(五德)이라
하고 왕에게 매여 딸린 이를 왕인(王人)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것 등이다.
또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태생의 이름[生名]이요, 둘째는 지어 준 이름[作名]이다.
태생의 이름이라 함은 찰제리(刹帝利)나 바라문(婆羅門) 등과 같으며, 지어준 이름이라 함은 부모 등이 그를 위하여 지어 준 이름이다.
어떤 이는 “태생의 이름이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부모 등이 붙여 준 이름이요, 지어 준 이름이란 뒷날에 친한 벗이나 아는 이들이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라고 말한다.
또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상(有相)의 이름이요, 둘째는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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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相)의 이름이다. 유상의 이름이란 마치 무상(無常)하고․괴롭고[苦]․공(空)하고․나 없다[無我]는 등과 같은 것이요, 무상의 이름이란 마치 나[我]․사람[人]․유정(有情)․의생(意生) 등과 같은 것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면 유상의 이름은 많게 되고 무상의 이름은 적게 되지만, 만일 세상에 나오시지 않으면 무상의 이름은 많게 되고 유상의 이름은 적게 된다.
[문] 불[火]의 이름은 유상인가, 무상인가?
[답] 만일 시기(尸棄)라 하면 유상의 이름이나, 만일 아기니(阿耆尼)라 하면 무상의 이름이다.
또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통된 이름[共名]이요, 둘째는 공통되지 않은 이름[不共名]이다. 공통되지 않은 이름이란 마치 불(佛)․법(法)․승(僧)․온(蘊)․계(界)․처(處) 등과 같다. 공통된 이름이란 그 밖의 세간에서 공통하게 붙인 이름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공통되지 않은 이름은 없다. 하나의 법으로써 온갖 이름을 붙일 수도 있고 온갖 법은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도 있으므로 이름은 모두가 공통하다. 공통하고 공통하지 않은 이름에서처럼 일찍 있고[曾] 일찍 있지 않은[未曾] 이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또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해진 이름[定名]이요, 둘째는 정해지지 않은 이름[不定名]이다. 정해진 이름이란 마치 소미로(蘇迷盧)․대해(大海)․주저(洲渚) 등과 같으며, 정해지지 않은 이름이란 그 밖의 세간에서 공통한 것에 따라 붙이는 이름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결정된 이름이란 없다. 왜냐하면 소미로 등에 대해 변방(邊方)에서도 갖가지의 이름을 짓게 되며 이 지방에서의 글이나 게송에서도 다른 이름을 짓고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소미로 등에 결정된 이름이 있는 것은 겁(劫)이 처음 성립될 때에 소미로 등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문] 앞의 겁이 파괴될 때에 온갖 것은 상실하고 파괴됐을 터인데 지금의 겁이 성립한 뒤에는 그 누가 그것의 이름을 전한 것인가?
[답] 모든 선인(仙人)으로서 전생 일을 아는 지혜[宿住智]를 얻은 이가 앞의
겁의 일을 기억하면서 다시 그것의 이름을 전한 것이며, 혹은 겁초(劫初)의 사람이 본래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갑자기 그의 이름이 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문] 모든 있는 것의 이름은 모두가 먼저 있었던 것이 차츰차츰 전해 내려온 것인가, 새로 지은 것인가?
[답] 소미로 등의 모든 이름은 먼저부터 있었고 그 밖의 다른 이름은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새로 지은 것이 있기도 하다.
또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성을 해설한[詮體] 것이요, 둘째는 작용을 해설한[詮用] 것이다. 체성을 해설한 이름은 마치 동이 속에 있는 과일과 집 안에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요, 작용을 해설한 이름이란 마치 풀을 베는 이와 글을 외우는 이[誦者] 등과 같다.
어떤 이는 “체성을 해설한 이름이란 마치 습하고[濕]․따습고[煖]․움직이는[動] 등과 같은 것이요, 작용을 해설한 이름이란 마치 유지하고[持]․거두어 주고[攝]․성숙하고[熟]․자라고[長] 하는 등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체성을 해설한 이름이란 ‘모든 악(惡)은’ 등을 말하고 작용을 해설한 이름이란 ‘짓지 말라’는 등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문] 이름은 끝[邊際]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름은 끝이 없으니, 법이 끝이 없기 때문이요 낱낱의 법에는 많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름은 끝이 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아실뿐이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아는 이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름의 끝을 아시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신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과 독각은 이름의 끝을 아시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부처님과 독각과 저 언덕에 이른[到彼岸] 성문은 이름의 끝을 알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評] 처음 설[初說]이 옳다고 하겠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름의 맨 끝을 아시며, 그 밖의 다른 이는 모두 일체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세간에는 언제나 명(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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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句)․문신(文身)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경에서는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시자 곧 갖가지 여러 명신[多名身] 등이 세간에 출현했다”고 말씀하는가?
[답] 공통하지 않은 이름[不共名]에 의거한 까닭에 이런 말씀을 한다. 마치 불․법․승․온․계․처 등은 오직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고서야 비로소 이런 이름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오직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고서야 비로소 순해탈(順解脫)이 있고, 공(空)․무아(無我)에 따르며, 생사의 괴로움을 어기고, 나와 내 것[我所]을 저버리며, 모든 견해를 끊고 각의(覺意)를 내며, 번뇌를 등지고 벗어나는 데(出要)를 향하며, 어리석음을 그치고 지혜를 내며, 망설임을 끊고 결정을 내며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바라며, 외도를 헐고 정법(正法)을 찬탄하게 된 것이니, 모든 이와 같은 등의 명신․구신․문신이 세간에 출현하였
고 그 밖의 다른 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계경에서 말한 것처럼 세 가지의 언의(言依)가 있으며 제4의 것도 제5의 것도 없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과거에 의거하여 일찍이 모든 법을 말했고 미래에 의거하여 장차 모든 법을 말할 것이며 현재에 의거하여 지금의 모든 법을 말하는 것이다.
[문] 언의는 무엇을 자성(自性)으로 삼는가?
[답]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언의는 18계(界)와 12처(處)와 5온(蘊)에 포섭된다”라고 말한다.
[문] 언(言)이라 함은 곧 말[語]이고 그것의 의지[依]는 이름[名]이므로 다만 1계와 1처와 1온에 포섭되어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18계와 12처와 5온에 포섭된다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논(論)에서 마땅히 1계와 1처와 1온에 포섭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18계와 12처와 5온에 포섭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전인(展轉因)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말[語]은 이름[名]에 의거하여 전개되고 이름은 뜻[義]에 의지하여 전개되며 뜻은 말의 전전의(展轉依)이다.
뜻 가운데에는 18계와 12처와 5온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가 뜻을 위했다. 이 때문에 그 논은 전전인에 의거하여 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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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성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언의[言依]라 함은 이름과 말한 것의 뜻이다. 이 때문에 18계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말[言]은 이름과 뜻에 의거[依]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3세(世)의 법에만 의거하여 세 가지의 언의를 말하면서 무위의 법[無爲法]에 의해서는 언의를 말하지 않는 것인가?
[답] 역시 무위의 법도 언의라고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무위는 현재품(現在品) 안에 포섭되어 있으니, 현재의 법으로써 무위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말[言]의 대부분은 유위의 법[有爲法]에 의거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무위의 법은 언의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정의 더욱 왕성한[增上] 어리석음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언의를 말하는 것이니, 유위의 법에서 일으키는 무명(無明)은 더욱 왕성함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정은 3세에 대하여 많이 망설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세 가지의 언의를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외도들의 나[我]가 있다 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의 언의를 말한 것이다. 외도들은 ‘만일 나가 없다면 나라 하는 말은 무엇에 의거한 것인가?’라고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세 가지의 언의를 말씀하신 것이니, 나라는 말은 다만 3세에만 의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의 두 세상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중지시키고서 아울러 현재는 무위라고 하는 고집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세 가지의 언어를 말씀하신 것이다. 의지[依]는 체성이 있고 작용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니, 없다 하면 반드시 체성이 없을 것이요, 무위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언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위의 법은 거친[麤] 것이라 이것을 있다고 믿는 이가 많아서 언설(言說)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언의를 세우지만 무위의 법은 미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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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 것이라 이것을 있다고 믿는 이가 적어서 언설을 일으키기 어렵기 때문에 언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유위와 무위는 두 무더기[二聚]로 구분되는데 만일 그 무더기 가운데서 말[語]과 이름[名]과 뜻[義]의 세 가지 일을 얻을 수 있다면 세워 언의라 하겠으나, 무위의 무더기 안에는 비록 뜻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나머지의 둘은 없기 때문에 언의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만일 법에 작용이 있어서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부여[與果]한다면 언의를 세울 수 있으나 무위에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했다.
협 존자(脅尊者)는 “유(有)의 모든 법은 말[言]과 때를 같이하면서 전개된다는 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언의를 세우지만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과거에 의거하여 미래와 현재의 법을 말하고 미래에 의거하여 과거와 현재의 법을 말하며 현재에 의거하여 과거와 미래의 법을 말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언의에 속하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세 가지 언의 가운데 포섭되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만일 과거에 의거하여 미래와 현재의 법을 말한다면 과거 안에 포섭되어 있으며, 나아가 만일 현재에 의거하여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면 현재 안에 포섭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과거에 의거하여 미래와 현재를 말한다면 미래는 미래에 포섭되어 있고 현재는 현재에 포섭되어 있으며, 나아가 만일 현재에 의거하여 과거와 미래를 말하면 과거는 과거에 포섭되어 있고 미래는 미래에 포섭되어 있으니, 앞의 언의는 뜻[義]을 체성으로 삼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일시에 두 세상 또는 세 세상을 말한다면 어느 언의에 속하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세 가지 언의 안에는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능히 드러내는[能顯] 이름을 따르면서 어느 세상에 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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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라고 하면, 곧 그 세상의 언의에 속해 있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드러낼 것[所顯]의 뜻을 따르면서 어느 세상에 속해 있는가라고 하면, 곧 그 세상의 언의에 속해 있다고 말할 것이니, 앞에서 언의는 뜻을 체성으로 삼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계경에서 다만 “세 가지의 언의가 있다”고만 말씀하셔도 뜻에 있어서는 이미 만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또 “제4의 것도 제5의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제4의 것이 없다 함은 제4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차단하여 제4의 세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이가 있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제5의 것이 없다고 함은 무위의 법을 차단하는 것이어서 무위도 언어라고 집착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말은 정중하게 차단하고 중지시키는[遮止] 것이니, 말한 뜻으로 하여금 결정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계경에서는 세상에 의거하여 언의를 건립하기 때문에 3은 있으나 제4는 없고 제5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치와 같은 뜻을 냄[如理作意]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1은 있지만 제2도 제3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제2가 없다 함은 제2의 이치와 같은 뜻을 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차단하며, 제3이 없다고 함은 이치와 같은 뜻을 냄에 속하지 않은 법을 차단하는 것이다.
만일 지(止)와 관(觀)에 의거하여 언의를 건립한다면 2는 있고 제3과 제4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까닭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3해탈문(解脫門)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3은 있지만 제4․제5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4성제(聖諦)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4는 있으나 제5․제6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5온(蘊)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5는 있으나 제6․제7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6수념(隨念)7)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6은 있으나 제7․제8은
7) 6수념(隨念)이라 함은 염불(念佛)과 염법(念法)과 염승(念僧)과 염계(念戒)와 염시(念施)와 염천(念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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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7등각지(等覺支)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7은 있으나 제8․제9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8성도지(聖道支)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8은 있으나 제9․제10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9차제정(次第定)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9는 있으나 제10․제11은 없다고 설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만일 여래의 10력(力)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다면 10은 있으나 제11․제12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와 같이 만일 그 밖의 다른 법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우는 것도 이런 이치로 말함이 마땅하다. 이 경은 세상에 의거하여 언의를 세운 까닭에 다만 세 가지일 뿐이요 네 가지와 다섯 가지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곧 이 경에서 “네 가지의 일[四事]로써 보특가라를 관찰하여 그 구수(具壽)가 함께 말을 할 수 있는지 함께 말을 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처(處)와 비처(非處)요, 둘째는 지론(智論)이며, 셋째는 분별(分別)이요, 넷째는 도적(道跡)이다. 만일 이 네 가지에 잘 안주(安住)한 이면 그와는 함께 말을 할 수 있지만, 이와 반대이면 함께 말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도리에 계합한가[處], 도리에 계합하지 아니한가[非處]를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지(智)와 이염(爾焰)8)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세속(世俗)과 승의(勝義)를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요, 도적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괴로움의 원인에 나아가는 행[趣苦集行]과 괴로움의 소멸에 나아가는 행[
趣苦滅行]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다.
8) 이염(爾焰)이란 소지(所知)의 뜻이어서 지(智)에 대한 대상(對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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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눈과 빛깔이 반연하여 안식을 내고, 나아가 뜻과 법이 반연하여 의식을 낸다는 것은 도리에 계합한 것이요, 귀 등이 반연하여 안식을 내거나 나아가 눈 등이 반연하여 의식을 낸다는 것은 도리에 계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다.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10지(智)의 차별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요,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요의경(了義經)과 불요의경(不了義經)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며, 도적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네 가지의 행적[四種行跡]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도리가 있는 것[有理]과 도리가 없는 것[無理]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성자(聖者)의 바른 이론[正論]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가설(假說)의 언론(言論)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른 이의 말[言]과 구절[句]과 뜻[義]의 앞과 중간과 뒤의 차별을 사실대로 알면
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세울 종(宗)을 사실대로 세우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른 이가 문난(問難)하는 것을 받아 낼 수 없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속임수[詭詭]와 진실(眞實)을 잘 알지 못하는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뛰어난 각혜(覺慧)을 이룩하지 못한 이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자기의 종[自宗]과 다른 이의 종[他宗]에 잘 안주하지 못하면서 말한 것이 있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른 이가 헤아림[量]을 우선으로 삼아 힐난(詰難)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른 이의 앞뒤와 차례에 상응하는 언론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구한 것이 뛰어난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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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현량(現量)과 비현량(非現量)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먼저 들었던 것을 굳이 집착하면서 버리지 않고 앞뒤의 득실(得失)을 관찰하려 하지 않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른 이의 올바른 말에 대하여 마음에 망설임을 품는 것이 마치 밥[飯]인지 소(酥)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현(現
)․비(比)․지교(至敎)를 우선으로 삼아 문난(問難)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한다.
협 존자(脅尊者)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안 것[所知]의 경계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능히 아는[能知] 지혜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사교(邪敎)와 정교(正敎)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삿된 행[邪行]과 바른 행[正行]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승가벌소(僧伽筏蘇) 존자는 “처․비처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다계경(多界經)』에서 말한 처․비처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요, 지론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44지(智)와 77지(智)의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한 이이며, 분별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요, 도의 자취에 잘 안주하지 못한 이라 함은 물질의 소멸에 나아가는 행[趣色滅行]과 식의 소멸에 나아가는 행
[趣識滅行]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위의 것들과 서로 어긋나면 잘 안주한다[善安住]고 한다.
곧 이 경에서 다시 “네 가지의 일[四事]로써 보특가라를 관찰하여 그 구수(具壽)가 함께 말을 할 수 있는지 함께 말을 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일향기(一向記)로 응(應)할 질문이요, 둘째는 분별기(分別記)로 응할 질문이며, 셋째는 반힐기(反詰記)로 응할 질문이요, 넷째는 사치기(捨置記)로 응할 질문이다. 만일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알맞게 대답하는 이면 그와는 함께 말을 할 수 있고 이와 상반된 것이면 함께 말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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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일향기로 응답해야 할 질문인가? 이 질문은 일향기로써 응답하기 때문이다. “여래는 응(應)․정등각(正等覺)인가? 법은 착한 말씀인가? 스님은 행이 묘한가? 온갖 행(行)은 무상한가? 온갖 법은 무아(無我)인가? 열반은 적정(寂靜)한가?”라고 하는 질문이 있으면 한결같이[一向] 이 모두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은 일향기로 대답하는 것인가?
[답] 이런 질문은 의리(義利)를 이끌고 선법(善法)을 이끌며 범행(梵行)을 따르고 각혜(覺慧)를 일으키며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런 질문은 일향기로 응답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별기로 응답해야 할 질문인가? 이 질문은 분별기로써 응답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를 위해서 법을 말해 주시오”하면 마땅히 그에게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고 현재가 있으며, 선(善)이 있고 불선(不善)이 있고 무기(無記)가 있으며, 욕계계(欲界繫)가 있고 색계계(色界繫)가 있고 무색계계(無色界繫)가 있으며, 학(學)이 있고 무학(無學)이 있고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 있으며,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
이 있고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 있고 끊지 못할 것[不斷]이 있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인가?”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반힐기로 응답해야 할 질문인가? 이 질문은 되받아 힐문[反詰]함이 응답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를 위해서 법을 말해 주시오”라고 하면 되받아 힐문하여 “법에는 여러 가지 많은 것이 있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 것인가?”라고 한다. 여러 가지 많은 법[衆多法]이라 함은 과거 등이니, 앞의 자세한 설명과 같다.
[문] 분별기로 응답하는 이론[論]과 반힐기로 응답하는 이론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답하는 뜻[意]에는 비록 차별이 없다고 해도 묻는 뜻에는 차이가 있다. 그 묻는 이 중에 어떤 이는 이해하기 위하여 묻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괴롭히기 위하여 묻는 이가 있다.
만일 이해하기 위하여 묻는 이라면 마땅히 그에게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고 현재가 있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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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나아가 견도에서 끊을 것이 있고 수도에서 끊을 것이 있고 끊지 않을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해야 하며, 만일 “나에게 과거의 법을 말해 주시오”하면 마땅히 그에게 “과거의 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선이 있고 불선이 있고 무기가 있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해야 한다.
만일 “나에게 선의 법[善法]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그에게 “선의 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물질[色]이 있고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이 있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나에게 물질의 법[色法]을 말해주시오” 하면 마땅히 그에게 “물질의 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살생(殺生)을 여의는 것이 있고 나아가 번잡스러운 말[雜穢語]을 여의는 것이 있다.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나에게 살생을 여의는 것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그에게 “살생을 여의는 데도 세 가지가 있다. 탐냄이 없는[無貪] 데서부터 내기도 하고 성냄이 없는[無瞋] 데서부터 내기도 하며 어리석음이 없는[無癡] 데서부터 내기도 하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나에게 탐냄이 없는 데서부터 내는 것을 말해 주시오”라고 하면 마땅히 그에게 “탐냄이 없는 데서 내는 것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표시할 수 있는[表
] 것과 표시할 수 없는[無表]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을 말해주기를 바라는가?”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이해하기 위하여 말을 하는 질문이면 이와 같이 분별하면서 대답해야 한다.
만일 괴롭히기 위하여 하는 질문이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법에는 여러 가지 많은 것이 있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라고 말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과거가 있고 나아가 끊지 않을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과거의 법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과거의 법은 많거늘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라고 말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선과 불선과 무기를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선의 법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선의 법도
많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라고 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물질 나아가 의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물질의 법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물질의 법도 많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라고 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살생을 여의는 것이 있고 나아가 번잡스런 말을 여의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살생을 여의는 것을 말해 주시오” 하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살생을 여의는 것도 많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라고 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탐냄이 없는 데서부터 내고 어리석음이 없는 데서 어리석음을 낸다”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탐냄이 없는 데서부터 탐내는 것까지를 말해 주시오”하면 마땅히 반힐하면서 “탐냄이 없는 데서 내는 것에도 많다. 그대는 어느 것을 묻는가?”고 말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표시할 수 있는 것과 표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괴롭히기 위하여 하는 질문이면 이와 같은 전체의 모양[總相]으로 반힐하면서 그의 질문으로 하여금 다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가 대답하게 한다.
이해하기 위하여 묻는 것이 있고 괴롭히기 위하여 묻는 것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이는 선(善)을 구하기 위하여 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다른 이의 각혜(覺慧)가 얕은가 깊은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묻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뜻[義]을 구하기 위하여 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다른 이를 꺾기 위하여 묻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질직(質直)하기 때문에 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첨곡(諂曲)하기 때문에 묻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유화(柔和)하기
때문에 묻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교만하기 때문에 묻는 이도 있으니,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분별과 반힐과의 두 이론의 차별이라 한다.
어떤 것이 사치기로 응답해야 할 질문인가? 이 질문은 내버려 두고[捨置]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외도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교답마(喬答磨)여, 세간은 항상한 것[常]인가?(이하 3句는 생략함). 세간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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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邊]이 있는 것인가?(이하 3구는 생략함)”고 할 적에 세존께서는 “모두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그 모든 외도는 ‘실아(實我)가 있어서 세간이라 한다’고 집착하면서 부처님께로 와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실아는 결정코 없는 것인데 만일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나는 있고 없고 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고 할 것이며, 만일 항상하다거나 혹은 무상하다는 등으로 대답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실아는 본래부터 없거늘 어떻게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으로 말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셨다.
마치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이 석녀(石女)의 아이는 공경하고 효순(孝順)하며 그리고 사랑스런 말을 하는가?”고 할 적에 그는 ‘석녀에게는 아이가 없는 것인데 만일 없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나는 있고 없고 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라고 할 것이며, 만일 내가 공경하고 효순하며 그리고 사랑스런 말을 한다라고 대답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석녀에게는 아이가 없거늘 어떻게 공경 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묻는 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한 것도 아니며 실제의 것도 아니요 도리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외도가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께 “교답마여, 목숨[命]은 몸인가 몸과는 다른 것인가?”라고 하면 세존께서 “다 같이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답] 저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어서 명자(命者)라 한다’라고 집착하면서 부처님께로 와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실아는 결정코 없는 것인데 만일 없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나는 있고 없고 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라고 할 것이며, 만일 내가 몸과 같다거나 혹은 다르다라고 대답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실아는 본래부터 없거늘 어떻게 몸과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셨다.
마치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토끼의 뿔과 소의 뿔은 서로가 비슷한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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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물었을 때에 그는 ‘토끼의 뿔은 본래부터 없는 것인데 만일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나는 있고 없고 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고 할 것이며, 만일 내가 서로가 비슷하다거나 혹은 서로가 비슷하지 않다고 대답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토끼의 뿔은 본래부터 없거늘 어떻게 소의 뿔과 서로 비슷하다거나 비슷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도 그와 같아서 묻는 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한 것도 아니며 실제의 것도 아니요 도리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또 어떤 외도가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께 “교답마여, 여래가 돌아가신 뒤에는 계시는 것인가 계시지 않는 것인가?(이하 3구는 생략함)”라고 할 적에 세존께서는 “모두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답] 그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어서 여래라 한다’고 집착하고 그는 ‘이것의 나는 본래부터 없다’고 집착하면서 “부처님은 돌아가신 뒤에 계시는 것인가 계시지 않는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묻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것은 본래는 없는데 지금 있는 것이요, 실아는 마침내 자체가 없는 것이라 만일 이 나는 지금에도 오히려 없는 것이다고 대답하면 그는 나는 지금 있고 없고 하는 것을 묻지 않았다고 할 것이며, 만일
내가 죽은 뒤에는 있다는 등으로 대답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이와 같이 실아는 지금조차도 오히려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죽은 뒤에 있다는 등을 말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셨다.
묻는 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한 것도 아니며 실제의 것도 아니요 도리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다시 어떤 외도가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교답마여, 스스로가 짓고 스스로가 받는 것인가?”라고 할 적에 세존께서 “여기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답] 그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어서 스스로가 짓고 스스로가 받는다’고 집착하는 것이요 부처님은 무아(無我)를 말씀하시는 까닭이니, 대답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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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는 뜻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
그가 또 “다른 이가 지어서 다른 이가 받는가?”라고 할 적에도 세존께서는 “여기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그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어서 자재천(自在天)이라 한다’는 등을 집착하면서 “그들은 능히 짓고 나는 과(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요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시는 까닭이니, 대답하지 않아야 하는 뜻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
그가 다시 “자기와 남이 지어서 나 자신이 받는 것인가?”라고 물을 때에도 세존께서 “여기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런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그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어서 자타(自他)라 한다’고 집착하는 것이요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신 까닭이니, 대답하시지 않아야 하는 뜻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
그들은 다시 “자기와 남이 지은 것이 아니라면 원인이 없으면서 생기는 것이라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는가?”라고 물을 때에도 세존께서는 “여기에는 대답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답] 세존께서는 언제나 “결과[果]는 원인[因]으로부터 생기며 스스로가 지어서 스스로가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문] 무엇 때문에 그 외도의 모든 질문은 내버려 두고 대답하지 않아야 하는가?
[답] 그의 질문은 의리(義利)를 이끌지 못하고 선법(善法)을 이끌지 못하며, 범행(梵行)을 따르지 않고 각혜(覺慧)를 일으키지 못하며,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런 질문은 내버려 두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문] 앞의 세 가지는 대답이 있는 것이므로 기(記)라 할 수 있으나, 넷째 것은 대답이 없거늘 어떻게 기라 하는가?
[답] 부처님께서 비록 “이것은 대답[記]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실은 이미 대답한 도리와 상응하고 이것은 근본이 되는 대답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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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역시 기라고 하며, 그 묻는 이로 하여금 바른 이해[正解]를 얻게 하기 위하여 혹은 잠자코 있는 것조차도 도리에 대하여 뛰어난 것을 얻게 하거늘 하물며 그의 물음에 응수(應酬)했으니 기(記)가 아니겠는가?
옛날에 선질략(扇帙略)이라는 외도가 있었는데, 총명하고 학문이 넓었다. 이 대논사(大論師)는 논의(論議)를 위하여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으로 들어왔다. 그때에 이 나라에는 벌소라(筏素羅)라는 아라한이 있었다. 그는 3명(明)과 6통(通)과 8해탈(解脫)을 두루 갖추었고 학문은 안팎을 다했으며 항상 파리질달라(波利質呾羅)라는 숲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에 선질략은 이론을 겨루기 위하여 그 곳으로 와서 함께 서로 문안하고 갖가지로 위로한 뒤에 한쪽에 가 앉아서 아뢰었다.
“비구여, 서로 이론을 겨루고 싶습니다. 존자와 나는 누가 먼저 종(宗)을 세우면 되겠습니까?”고 하자 벌소라가 “내가 여기 오래 살았으니 먼저 종을 세워야겠지만 그대는 멀리서 와서 조금 피로하실 터이니 마음대로 먼저 세우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때에 선질략은 곧 종을 세우면서 “온갖 이론을 세우면[立論] 모두 보답이 있을 것이요. 각혜(覺慧)가 만일 다하면 그제야 끝날 것입니다”고 했다. 그때에 벌소라는 잠자코 있기만 했으므로 그 선질략은 모든 제자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일어나 부르짖으면서 “이제 이 비구는 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때에 벌소라는 그의 제자에게 “그대들의 스승 선질략은 오래지 않아서 누가 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말씀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은 비웃으면서 그의 스승을 따라 숲에서 나갔다.
그때에 선질략은 이윽고 ‘무엇 때문에 사문이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생각하다가 비로소 스스로가 깨치고서 “내가 이론을 세우면서 ‘온갖 이론을 세우면 모두가 보답이 있을 것이다’고 했는데도 비구는 잠자코 있었다. 이것은 내가 진 것이로구나” 하고 곧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세운 이론이 이제 이미 지고 말았다. 너희들과 함께 달려가서 사과해야 되겠다”고 하자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지셨다고 하십니까?”라고 말했다. 그때에 선질략은 자세히 그들에게 말해 주자, 제자들은 “이미 대중 앞에서 이겼다고 하고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다시 가서 사과하며 욕(辱)을 취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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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스승은 “나는 차라리 지혜로운 이[智者] 곁에서 못났음을 스스로 인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자들 곁에서 이겼다고 뽐내지는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곧 제자들과 함께 도로 숲 속으로 들어가서 존자에게 이르러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는 “존자께서 이기셨으며 저는 이미 졌습니다. 존자는 스승이시며 저는 제자입니다. 지금부터는 언제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잠자코 있었는데도 도리에서 이기게 되었거늘 하물며 그의 질문에 응수하는데 대답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네 가지는 모두 기(記)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6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⑧
[論] 불세존께서 모든 제자들을 꾸짖으며 ‘어리석은 사람[癡人]들아’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존은 탐애[愛]와 성냄[恚]을 영원히 끊으셨고 어김[違]과 순종[順]이 평등하시며 다투는 이론[諍論]의 뿌리를 뽑으셨고 교만의 근본을 없애시었으며 모든 값진 보배를 마치 깨어진 기와 조각같이 보셨다.
온갖 법에 대하여 깨달아 비추면서[覺照] 빠뜨림이 없으셨고 탐애나 성냄․교만한 듯한 것이 없으신 것은 모든 번뇌의 습기[習]를 이미 영원히 끊으셨기 때문이다. 독각과 모든 성문들이 비록 번뇌를 끊었으나 습기가 남어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탐애(貪愛)의 습기라 함은 아난(阿難) 존자1)가 모든 석씨 종족[釋種]을 불쌍히 여긴 것과 같으며, 성냄[瞋恚]의 습기라 함은 필릉가벌차(畢陵伽筏蹉)2) 존자가 긍가(殑伽)의 신(神)에게 “작은 여종[小婢]아, 물을 흐르게 하
1) 석씨 종족[釋種]이 유리왕(瑠璃王)의 군사에 멸망당할 적에 아난(阿難)이 슬퍼하면서 부처님께 구제를 청한 전설을 가리킨다.
2) 필릉가벌차(畢陵伽筏蹉)는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라고도 한다. 부처님 때에 있던 비구의 이름이며 여습(餘習)이라 번역한다. 고만(高慢)의 습기(習氣)가 강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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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말라. 내가 이제 건너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교만(憍慢)의 습기라 함은 사리자(舍利子) 존자가 의약(醫藥)을 던져 버린 것과 같고, 어리석음[愚癡]의 습기라 함은 급방발저(笈房鉢底) 존자3)가 식전의 기침 하는 기운이 있으면 음식이 아직 소화되지 아니한 것임을 알면서도 뒤의 괴로움을 몰라서 다시 더 먹었다. 이와 같은 등의 일은 그 종류들이 아주 많다.
세존께서는 비록 번뇌와 남은 습기가 없으시나 간혹 사랑하는 듯한 말씀이 있으시었다. 사랑하는 듯한 말씀이라 함은 세존께서 “잘 왔구나, 비구들아. 잘 출가(出家)했고 더욱더 금계(禁戒)도 갖추었구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성내는 듯한 말씀이라 함은 세존께서 “너는 석씨 종족의 여종의 아들이라 석씨 종족은 너의 상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교만한 듯한 말씀이라 함은 세존께서 “나는 여래(如來)․응(應)․정등각(正等覺)이어서 10력(力)을 성취하고 4무외(無畏)를 얻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어리석은 듯한 말씀이라 함은 세존께서 “대왕(大王)이여, 지금 어디서 오시오”라고 말씀하시고 아난에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가 보아라. 동산 안에서 무엇 때문에
저리도 떠드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는 이미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으셨는데 어떻게 다시 이런 등의 번뇌와 비슷한 말씀이 계신가?”라고 의심을 내므로 그들의 의심을 끊고 결정된 이해를 얻게 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며, 그 인연을 풀이한 것은 이런 어리석은 말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사랑하는 듯한 등의 말씀을 하셨는가?
[답] 교화할 밭[田]을 수호하고 그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존께서 사랑하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은 천수(天授)가 깨뜨린 비구들의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하고 의심을 없애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이름과 이익을 탐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승가[僧]
3) 급방발저(笈房鉢底)는 교범바제(憍梵波提)라고도 하며 부처님의 제자이다. 우상(牛相)이라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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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파괴하자 사리자 존자와 대목건련 존자가 그들을 교화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나 그 모든 비구들은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몸과 마음을 부들부들 떨었고 다시 의혹을 내면서 “우리는 천수를 따르다가 계(戒)를 잃지나 않았을까?”라고 하자 세존께서 “잘 왔구나, 비구들아. 잘 출가했고 더욱더 금계도 갖추었구나”고 하신 말씀을 듣고 떨던 것과 의혹의 두 가지 일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그때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부끄러움과 번
민 때문에 피를 토하면서 죽었으리라.
또 세존께서 성을 내는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은 저 범지(梵志)의 교만한 당기[幢]를 꺾기 위해서였다. 그 암바슬타(菴婆瑟吒) 범지는 그의 어머니가 비천한 이인 줄도 헤아리지 않고 교만을 품고서 다른 이의 출가를 막았으므로 당연히 악취에 떨어져야 될 것을 부처님께서 그의 오만과 사나운 마음을 꺾음으로 말미암아 다음의 두 번째 몸은 천상에 태어났고 4성제를 보게 된 것이며, 또 저 보색갈라사리(補色羯羅娑利)라는 범지를 꾸짖었기에 그는 부처님의 법에
들어오게 되었고 뛰어난 과위[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세존께서 교만한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모르는 이로 하여금 알게 한 뒤에 귀의하여 뛰어난 행을 닦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세존께서 어리석은 듯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왕(王)과 담론(談論)의 도(道)를 열기 위해서였고 아난의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으며 또 그가 고요함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런 등의 번뇌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은 모두가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고 꾸짖으신 말씀도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니 뒤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문] 무슨 연유로 독각과 모든 성문은 비록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남은 습기가 있는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으신가?
[답] 성문과 독각의 지혜는 날래거나 날카롭지 않아 비록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남은 습기가 있는 것은 세간에서 항상 쓰는 불은 비록 탄다 하더라도 재와 불탄 끄트머리가 남는 것과 같으나 부처님의 지혜는 날래고 날카로워 모든 번뇌를 끊고 남은 습기가 없게 하는 것은 겁이 다할 때[劫盡]의 불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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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물건마다 재나 불탄 끄트머리조차도 없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불세존께서 모든 제자들을 꾸짖으며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기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答] 이것은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불세존께서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신 것은 지금의 친교사(親敎師)나 궤범사(軌範師)가 만일 근주(近住)나 의지하는 제자로서 모든 허물을 일으키는 이가 있으면 ‘너는 어리석어 밝지도 못하고 착하지도 못하구나’라고 꾸짖는 말을 하는 것처럼 세존께서도 그러하여 모든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논하는 글에는 통틀어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은 뜻을 풀이하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그들을 꾸짖는 인연을 풀이한다. 앞에서 들었던 글은 곧 초분(初分)이다.
지금의 친교사나 궤범사가 제자들이 일으킨 허물을 막거나 부모가 아들의 잘못을 막기 위한 것과 같은 것이니, 책망함이 있는 것은 모두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요 나쁜 마음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으시다.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이들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땅히 찬탄해야 할 이요, 둘째는 마땅히 꾸짖어야 할 이며, 셋째는 마땅히 내버려 두어야 할 이요, 넷째는 마땅히 다른 이로 인해야 할 이다.
마땅히 찬탄해야 할 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구지이(俱胝耳) 등을 찬탄하신 것과 같은 것이요, 마땅히 꾸짖어야 할 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오타이(鄔陀夷) 등을 책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마땅히 내버려 두어야 할 이라 함은 무의가섭파(無衣迦葉波) 등을 내버려 두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께서 그 바라문에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므로 아직 너에게 대답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마땅히 다른 이로 인해야 할 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들을 위하여 바른 법륜[正法輪]을 굴리시는 그 때에 8만의 여러 하늘 사람[天人]들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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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성자의 도[聖道]를 얻었고, 부처님께서 빈비사라왕(頻毘婆羅王)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그때에도 8만의 여러 하늘 사람들과 마갈타(摩揭陀)의 9만 2천 사람이 모두 성자의 도를 얻었으며, 부처님께서 제석(帝釋)을 위하여 설법을 하시는 그때에도 8만의 여러 하늘 사람이 성자의 도에 들었고, 부처님께서 라호라(羅怙羅)를 위하여 설법하시는 그때에도 6만의 모든 하늘 사람들이 일시에 도를 얻은 것과 같다.
모든 이와 같은 등의 종류는 매우 많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마땅히 책망함으로써 도에 들어야 할 사람이면 반드시 그를 책망하셨다.
어떤 이는 “세존은 대비(大悲)가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에 언제나 남을 이롭게 하는 방편을 찾으셨다. 만일 제바달다에게 ‘너는 어리석어서 눈물이나 침을 먹을 자이다’라고 책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한량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이끌어 모든 나쁜 일을 했을 것이며 또 자주자주 세존에게 괴롭게 굴었을 것이다.
만일 무비(無比) 여인에게 ‘너의 몸은 더럽고 나빠서 부정(不淨)한 것이 가득 차 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면 곧 그의 음욕심을 그쳐 쉬게 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 모든 제자들을 꾸짖으신 까닭은 아직 선근(善根)을 심지 못한 이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고, 이미 선근을 심은 이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면 속히 성숙하게 하며, 만일 이미 성취했으면서도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면 속히 해탈을 얻게 하려고 하신 것이니, 만일 꾸짖지 않으면 이런 좋은 이익을 잃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을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리석은 사람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어리석음에서 생겼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셨는가? 현행(現行)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셨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어리석음에서 생겼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면 역시 탐냄․성냄․교만․견해 등에서도 생긴 것인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만 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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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현행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셨으면 계경에서 아라한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야 한다. 계경에서 “멀리 비켜라, 어리석은 사람아. 내 앞에서 있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또 세존께서 오타이(鄔陀夷)를 “어리석은 사람아, 안목이 없거늘 어떻게 상좌(上座) 비구와 심히 깊은 이치를 다투겠느냐?”라고 꾸짖으셨다.
또 그 밖의 번뇌도 현행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만 하시면서 다른 것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어떤 이는 “어리석음에서 생겼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역시 탐냄․성냄․교만․견해 등에서 생겼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오직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만 하는가?
[답] 어리석음[癡]4)은 변행(遍行)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아라한 등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꾸짖으면 다른 물(物)에 대하여 이익이 있을 것을 아시고서 역시 그들을 꾸짖은 것이니 아라한의 몸에도 어리석음은 생기기 때문이다.
계경에 “무명(無明)에 가리고 애결(愛結)에 매이어 어리석은 법부는 식(識)이 있는 몸을 얻는 것이니 지혜로운 이[智者]도 그러하다. 아라한 등을 지혜로운 이라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다른 논사는 “현행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계경에서 “아라한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라고 말하지 않으셨어야 한다.
[답] 우선 계경에 “멀리 비켜라, 어리석은 사람아. 내 앞에 서 있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집할 때 외운 이가 잘못 외운 것이다. 마땅히 “멀리 비켜라, 비구야. 내 앞에 서 있지 말라”라고 말해야 된다.
세존께서 열반하시려 할 때에 백정(白淨) 존자가 부처님 앞에 서서 부채
4) 무명(無明)은 4제(諦)와 수도(修道)의 5부(部)에 걸쳐 변행혹(遍行惑)의 일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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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부처님께 부쳐드리고 있었다. 이때에 한량없는 장수천(長壽天)의 하늘들이 부처님께로 와서 “저 존자가 부처님 앞에 서 있어 우리들은 가리어 세존을 뵙지 못하게 하니 우리들에게 최후의 이익을 잃게 하는구나”라고 싫어하며 미워했으므로 부처님은 그들의 뜻을 아시고 곧 “멀리 비켜라, 비구야. 나의 앞에 서 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세존께서 오타이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안목이 없거늘 어떻게 상좌 비구와 심히 깊은 이치를 다투겠느냐?”라고 책망하신 말씀도 어긋나지는 않는다. 오타이는 그때에 아직 아라한의 과위를 얻지 못했는지라 어떤 이는 이생(異生)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유학(有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아라한 등도 현행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불염무치(不染無癡)5)를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모든 그 밖의 다른 번뇌도 현행함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만 말씀하시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앞에 이미 “어리석음은 변행(遍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었다. 따라서 어떤 자리[地]라도 무명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게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름은 그것에 의거하여 붙여진다. 이런 뜻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셨다.
[論]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셨는가?
[答] 그들이 세존의 가르쳐 경계함[敎誡]과 가르쳐 주신[敎授] 것에 대하여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으며 상속(相續)하지 않아서이다.
이 아래 논의 글은 곧 두 번째 부분으로 부처님께서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꾸짖는 인연을 풀이한다.
가르쳐 경계하고 가르쳐 준다 함은 통틀어 부처님의 말씀[佛語]을 드러낸
5) 무치(無癡)에는 염오무치(染汚無癡)와 불염오무치(不染汚無癡)가 있다. 염오무치라 함은 번뇌에 의하여 이치와 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불염오무치라 함은 번뇌는 없지만 지혜가 하열하므로 오히려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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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른 행[正行]을 행하는 이를 뜻을 따라 행한다[隨義行]고 하는 것이니 그 모든 제자들은 바른 행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응하는 대로[如應]행하는 이를 뜻을 따라 행한다고 하는데 그 모든 제자들이 응하는 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따르지 않는다 함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하여 따르면서 공덕을 닦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상속하지 않는다 함은 오랜 동안 흘러들어 상속하면서 공덕을 닦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문] 가르쳐 경계함과 가르쳐 줌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이익이 없는 것을 막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이익이 있는 것을 주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 정념(正念)에 머물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정지(正知)에 머물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 유표(有表)를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무표(無表)를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 사마타(奢摩他)를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 성자의 도[聖道]를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성자의 과위(聖果)를 얻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 세간(世間)의 착한 법을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경계한다’ 하고 세간 밖[出世]의 착한 법을 닦게 하기 때문에 ‘가르쳐 준다’고 한다. 이런 것이 가르쳐 경계하는 것과 가르쳐 주는 것의 차별이다.
[論] 또 그들은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에 대하여 어리석은 일을 짓고 텅 비어서[空] 결과[果]가 없으며 나옴[出]도 없고 맛[味]도 없으며 뛰어난 이익[勝利]도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며 모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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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이란 뜻은 성자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문] 그들은 어떻게 해서 성자의 도에 어리석은 일을 짓는가?
[답] 그들은 성자의 도로 하여금 어리석은 일을 이루어지게는 아니하지만 다만 그들은 상속해서 어리석음을 더 자라게 하고 성자의 도를 가로막을 뿐이다.
어떤 이는 “역시 성자의 도로 하여금 어리석은 일을 이루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먼 것[遠]을 이루어서 자재하지 않게 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을 현행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어리석음을 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성스런 가르침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성스런 가르침을 듣고도 어리석음을 끊지 않을 뿐더러 한층 더 자라게 하므로 부처님은 ‘그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하여 어리석은 일을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텅 비었다[空]고 함은 그들에게는 성스러운 도의 태[胎]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인으로 몸속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이면 텅 비고 자식이 없기 때문에 석녀(石女)라 하는 것과 같다. 그들도 그와 같아서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도 성스러운 도의 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들의 몸에는 사용과(士用果)가 없고, 공용(功用)을 헛되이 버리기 때문에 텅 비었다고 하신 것이다.
결과가 없다고 함은 등류과(等流果)와 해탈과(解脫果)가 없다는 것이요, 나옴이 없다 함은 사용과가 없다는 것이다.
또 나온다[出] 함은 그가 부처님 법에 대하여 얻을 것이 없음[無所得]을 얻었기 때문에 나옴이 없다고 하는 것이요, 맛[味]이 없다고 함은 그가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출가(出家)의 맛이 없고 적정(寂靜)의 맛이 없으며 성도(聖道)의 맛이 없고 적멸(寂滅)의 맛이 없기 때문에 맛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뛰어난 이익[勝利]이 없다고 함은 과위[果]를 뛰어난 이익이라 하는데 그는 과위를 얻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이익이 없다고 한다.
또 두 가지의 허물이 있으므로 뛰어난 이익이 없다고 한다. 비유하면 용한 의사가 여러 병든 이들을 가엾이 여겨 사방에서 약을 구하여 얻은 뒤에 그들에게 주었는데도 병자들은 가벼이 여기면서 똥 더미에 던져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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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다. 첫째는 자기의 질병을 낫게 하지 못하고, 둘째는 용한 의사의 공을 헛되이 버린 것이다.
세존께서도 그러하여 3무수겁(無數劫) 동안 백천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닦아 익히어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성스러운 법의 약을 구하여 얻은 뒤에 그들을 위하여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듣고도 가벼이 여기어 스스로가 먹거나 행하지 않고 이름과 이익을 구하는 데에 쓴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다. 첫째는 스스로가 번뇌의 병을 제거하지 못하고, 둘째는 부처님으로 하여금 그 공을 헛되이 버리게 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긴다 함은 세존의 성스러운 가르침의 이치를 어기는 것이며, 모든 학처(學處)에서 받아 배우지 못한다 함은 법수(法隨)와 법행(法行)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이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하여 어리석은 일을 짓는다 함은 그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끊고 상속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위없는 법을 말씀하여 주시고 만일 듣고 바르게 행하면서 옮겨 다른 이에게 말하면 그 다른 이는 다시 바르게 행하면서 다시 다른 이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 차츰차츰 이롭게 함이 다함이 없어야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들었으면서도 바르게 행하지도 못하고 또한 다시 옮겨 다른 이를 위해 말하지도 못하면 스스로가 이미 이익이 없고 다시 다른 이에게도 이익되지 않게 하므로 성스러운 가르침을 끊고 상속하게 하지 못하니, 이를 말미암아 어리석은 일을 짓는다고 한다.
텅 비었다고 함은 자기 몸이 법 그릇[法器]이 아니기 때문이요, 결과가 없다고 함은 부처님께서 바라는 마음[期心]으로 하여금 결과가 없게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으로 하여금 법을 듣고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인데 그는 법을 듣고 나서는 고통을 여의는 방편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바라는 마음으로 하여금 결과가 없게 한다.
나옴이 없다 함은 그는 본래 출가할 때에 구한 뛰어난 일인 청정하게 지니는 계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맛이 없다함은 정려(靜慮)의 맛이 없다는 것이요, 뛰어난 이익이 없다 함은 뒤바뀜이 없는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긴다 함은 열반을 얻지 못한 것을 말하며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하여 바른 법의 가르침을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증득[證]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어긴다고 한다.
모든 학처에서 받아 배우지 못한다 함은 부처님께서 차려 놓으신 갖가지의 학처를 받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니 어떤 이는 비록 받아 배운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수행하지 못했다. 마치 바타리(婆柁梨)가 비오는 넉 달[四月]을 지나면서 비로소 한 자리에 앉아 먹는 법[一坐食法]을 받아 배우게 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비록 한결같이 닦는다 하더라도 원만하지 못하므로 다 같이 학처를 받아 배우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아”라고 꾸짖으셨다.
[論] 여섯 가지의 인[六因]6)이 있다. 상응인(相應因)에서 능작인(能作因)까지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무인(無因)과 악인(惡因)의 논리를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모든 외도 중에서 어떤 이는 ‘모든 법은 인이 없이[無因] 생긴다’고 집착하고 어떤 이는 또 ‘평등하지 않은 인[不平等因]이 있다’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뜻을 중지시키고 모든 법이 생기는 데는 결정코 인(因)이 있으며 평등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어떤 이는 “인연(因緣)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實有物]이 아니라고 집착하는 이가 있으니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뜻을 중지시키고 인연은 성품[性]과 모양[相]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6) 이로부터 이하 제21권까지는 6인(因)․4연론(緣論)․5과론(果論)을 밝히고 있다. 6인은 능작인(能作因)․구유인(俱有因)․동류인(同類因)․상응인(相應因)․변행인(遍行因)․이숙인(異熟因)이며 『발지론(發智論)』에서 처음 제창한 신설(新說)이다.(6인과 4연과 5과에 대해서는 『구사론』 제6권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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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떤 이는 “여섯 가지 인으로써 네 가지의 과[四果]를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분명하고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이 손바닥 안의 아마락가(阿摩洛迦)를 보듯 하게 하려는 것이다. 상응인(相應因)과 구유인(俱有因)의 두 가지 인은 사용과(士用果)를 드러내고,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은 등류과(等類果)를 드러내며, 이숙인(異熟因)은 이숙과(異熟果)를 드러내고, 능작인(能作因)은 증상과(增上果)를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나 이 여섯 가지 인은 계경의 말씀이 아니다. 계경에서는 다만 네 가지 연[四緣]7)의 성품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인연(因緣)의 성품 이하 증상연(增上緣)의 성품이다.
지금은 인(因)으로써 연(緣)을 분별하기 위하여 이 여섯 가지의 인을 말한다.
[문] 인이 연을 포섭하는가, 연이 인을 포섭하는가?
[답] 서로가 포섭하는 것은 그의 일에 따른다. 앞의 다섯 가지 인[五因]은 인연이요, 능작인은 나머지의 세 가지 연[三緣]이다.
어떤 이는 “연은 인을 포섭하지만 인은 연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 앞의 다섯 가지 인은 인연이요, 능작인은 증상연․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이지만 인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여섯 가지의 인도 계경에서 말씀하셨다.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의 증(增)6에서 말씀하신 것인데 오랜 동안 지내면서 그 글이 없어져버렸다.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존자 등이 원지(願智)의 힘으로써 계경 가운데 여섯 가지 인을 말씀하신 것을 관찰하여 아비달마(阿毘達磨)를 찬집(撰集)하고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여섯 가지의 인을 분별한다.
『증일아급마경』은 1법에서 증가하여 100법까지 이르렀는데 오직 1법에서 10법까지만 남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없어져 버렸으며 또 증1에서 나아가 증10에 이른 중에도 대부분이 없어지고 남어 있는 것은 극히 적다고 들은 적이 있다.
7) 4연(緣)이라 함은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의 네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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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가의(商諾迦衣) 존자 대아라한은 아난타 존자와 같이 머무른 제자이고 그는 대덕 시박가(時縛迦)의 친교수사(親敎授師)였다. 그 아라한이 열반한 그날에 7만 7천의 본생경(本生經)과 1만의 아비달마론이 없어져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한 논사(論師)가 입멸(入滅)할 때조차도 오히려 그러한 많은 경론이 없어져 버렸거늘 하물며 그로부터 지금까지 백 또는 천의 논사가 입멸했으니 경론이 따라 없어진 그 수를 어찌 알 수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여섯 가지의 인은 계경의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인은 비록 한 경에서 차례로 갖추어 말씀하신 것은 없다고 해도 모든 경의 여기저기에서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이 견(見)을 근(根)으로 삼는 신(信)은 증한 지혜[證智]와 상응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상응인(相應因)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경에 ‘눈과 빛깔이 반연하여 안식을 내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있으면서 다 같이 수(受)․상(想)․사(思)를 일으킨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구유인(俱有因)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경에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선의 법[善法]과 불선의 법[不善法]을 성취한다. 선의 법이 숨어 없어지면 악의 법[惡法]이 출현하되 따라 함께 행해지는 선근(善根)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것이 있고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근이 오히려 그 밖의 다른 선근을 일으키는 뜻이 있으므로 그는 장차 오는 세상에서 청정한 법이 있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동류인(同類因)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경에 ‘모든 사견(邪見)을 지닌 이의 모든 신업(身業)․어업(語業)․의업(意業)과 모든 원하고 구하는 것도 모두가 소견(所見)과 같고 온갖 모든 행(行)도 모두 그런 종류이므로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다 좋지 않고[非欣愛樂] 뜻에 맞지 않는[不可意] 과(果)를 초래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변행인(遍行因)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경에 ‘몸과 말과 뜻의 악행(惡行)으로는 사랑할 만한 이숙을 받을 어떤 이유도 없고 담을 데도 없으나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이숙을 받는 것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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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도 있고 담을 데도 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이숙인(異熟因)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경에 ‘두 가지 인[二因]과 두 가지 연[二緣]은 바른 견해를 낸다. 다른 이의 음성(音聲)과 안[內]의 이치대로의 작의[如理作意]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등의 경은 능작인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섯 가지의 인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존자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상응인(相應因)8)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마음[心]과 심소(心所)법은 앞과 뒤로 생기며 일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마음과 심소법은 모든 인연(因緣)을 인하여 앞과 뒤로 하여 생긴다. 비유하면 장사꾼들이 험하고 좁은 길을 건널 적에 한 사람 한 사람씩 건너고 둘이 나란히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과 심소법도 그와 같다. 뭇 연[衆緣]이 화합하여 하나씩 하나씩 생기는 것이니 상대되는 많은 연에는 각각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阿毘達摩)의 모든 논사들은 “마음과 심소법은 따로따로의 인(因)이 있기 때문에 뭇 연의 화합에는 다름이 있다고 말해야 하고, 따로따로
8) 이로부터 이하는 6인(因)을 각각 설명하는데 먼저 상응인(相應因)을 말한다. 상응인이란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5의(義) 평등에 의하여 평등하게 화합하는 것을 뜻한다. 5의 평등을 설명하면 ①소의평등(所依平等)이니 안식(眼識) 등 6식(識)의 심왕이 안근(眼根) 등 6근(根)의 하나를 소의(所依)로 할 때에 심소도 심왕과 똑같은 소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②소연평등(所緣平等)이니 심소는 심왕과 동일한 대상[所緣]을 취하는 것이다
. ③행상평등(行相平等)이니 심왕과 심소가 똑같은 심상(心象)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④시평등(時平等)이니 심왕과 심소의 작용이 동시인 것이다. ⑤사평등(事平等)이니 심왕과 심소가 상응하는 한 심상(心象) 중에 심왕의 체(體)가 하나인 것처럼 심소의 체도 각각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심왕과 심소가 동시에 상응 화합하는 것을 상응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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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이 있기 때문에 뭇 연의 화합에는 다름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마음과 심소는 각각 따로따로 나고[生]․머무르고[住]․달라지고[異]․사라짐[滅]의 화합이 있으면서 생기는 것이니 이 때문에 화합에는 다름이 있다고 말해야 하며, 같은 하나의 감관[根]에 의거하여 같은 하나의 경계[境]를 반연하면서 생기게 되므로 온갖 화합에는 다름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온갖 마음과 심소법은 그 겪는 것에 따라 같은 때에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또 “모든 법은 저마다 자성(自性)과는 상응하되 타성(他性)과는 그렇지 않다”라고 집착한다.
그는 “서로 기뻐하고 좋아하는[喜樂] 뜻[義]은 상응한다[相應]는 뜻이다. 법과 법은 함께 서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 없으니 마치 자성과 자성의 관계와 같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논사들은 “두 가지의 일[二事]이 화합하는 것을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하나의 물건에서는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 또한 자체(自體)가 자체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 없는 것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혹 또 어떤 이는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상응하는 것도 아니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는 “반드시 다른 것과 합해야 상응이라 하는데 제 것은 제 것의 성품에 있어서 다른 것이라는 뜻이 없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하지 않으며, 서로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상응한다는 뜻이므로 제 것은 제 성품에 대하여 깊이 기뻐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의 논사는 “자성이 자성을 기뻐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힘을 보전한다[力任持]는 뜻은 상응한다는 뜻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는 “만일 법이 그 법의 힘을 보전하는 것을 말미암아 생긴다면 이 법은 그 법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은 마음의 힘이 마음을 지니어서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심소법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은 마음의 힘이 그것을 지녀서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심소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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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하지 않는 것은 그의 힘으로 지녀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심소법이 심소법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서로서로 지니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논사는 “마음이 심소와 심소가 마음․심소와 모두가 차츰차츰 힘을 지니면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서로서로 상응하지만 한 몸에는 두 마음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는 뜻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갖가지 다른 집착을 차단하고 바른 이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상응인인가?
[答] 수(受)는 수와 상응하는 법과 상응인이 되고, 수와 상응하는 법은 수와 상응인이 된다. 상(想)․사(思)․촉(觸)․작의(作意)․욕(欲)․승해(勝解)․염(念)․삼마지(三摩地)․혜(慧)는 혜 등과 상응하는 법과 상응인이 되고, 혜 등과 상응하는 법은 혜 등과 상응인이 된다. 이것을 상응인이라 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마음[心王]9)은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혹 어떤 이는 “또한 마음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여기에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는 줄 알아야 하니 여섯 가지 인[六因]의 뜻을 말하면 모두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치를 다하여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면 당연히 ‘어떤 것이 상응인가? 온갖 심․심소의 법이다. 어떤 것이 구유인(俱有因)인가? 온갖 유위의 법이다. 어떤 것이 동류인(同類因)인가? 온갖 과거와 현재의 법이다. 어떤 것이 변행인(遍行因)인가? 온갖 과거와 현재 변행(遍行)의 수면(隨眠)과 그것의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의 법이다. 어떤 것이 이숙인(異熟因)인
9) 마음[心:心王]이라 함은 6식(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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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온갖 불선(不善)과 선(善)의 유루의 법이다. 어떤 것이 능작인(能作因)인가? 온갖 법이다’라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설령 이렇게 말한다 해도 이치를 다하지는 못한 것이니 어느 자리[位]에서 누가 누구와 인(因)이 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에는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다[有餘]’고 한다면 이치에서는 보다 낫다[勝] 하겠다. 모든 논을 짓는 이는 간략하게 적은 법[少法]을 제시하는 것을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마음은 이미 여기서 말한 것의 안에 있다. 수(受)와 상응하고 혜(慧)와 상응하는 법은 역시 마음을 포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마음의 자상(自相)을 말하지 않는가?
[답] 평등(平等)하고 서로가 비슷하다[相似]는 뜻은 상응한다는 뜻인데 마음이 뛰어난 것이 왕(王)과 같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마치 가타(伽陀)의 말씀과 같다.
제6의식은 보다 뛰어난 왕이어서
물들[染] 때는 물듦을 스스로 취하고
물들지 않을[不染] 때도 물듦이 있나니
물듦이란 어리석은 범부[愚夫]를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삼마지(三摩地)로써 곧 마음을 말하는 이도 있다. 삼마지를 말하면 이미 마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10대지법(六地法)만을 상응인이라 하고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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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만일 법이 온갖 세계[界]와 온갖 자리[地]와 온갖 갈래[趣]와 온갖 태어남[生]과 온갖 종류[種]와 온갖 마음[心]을 얻을 수 있다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했겠지만 그 밖의 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문] 대지법(大地法)이란 무슨 뜻인가?
[답] 대(大)라 함은 마음[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법[十法]은 마음이 일어나는 곳이요, 대의 땅[地]이기 때문에 대지(大地)라고 하며 대지는 곧 법(法)이므로 대지법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마음을 대(大)라 하는 것은 체성[體]과 작용[用]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곧 대는 땅이기 때문에 대지라 한다. 이것은 모든 심소의 소의처(所依處)이기 때문이다. 수(受) 등의 열 가지 법은 모든 대지에서 두루 얻게 되기 때문에 대지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 등의 열 가지 법은 모든 심품(心品)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라 하고 마음은 그것의 땅이기 때문에 대지라 하며, 수 등은 곧 이 대지의 소유(所有)이므로 대지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심소(心所)라 하는가?
[답] 이것은 마음의 소유(所有)이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마음과 심소법은 차츰차츰 상응인이 인이 되는가?
[답] 차츰차츰 인(因)이 되기 때문이요, 차츰차츰 힘[力]이 생기기 때문이며, 차츰차츰 서로 이끌기 때문이요, 차츰차츰 서로 기르기[養] 때문이며, 차츰차츰 서로 더하기[增] 때문이요, 차츰차츰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하면 서고, 많은 노끈이 서로 합해서 큰 나무를 끌어당기며, 많은 사람이 손을 붙잡고 큰 강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유위의 모든 법은 성품이 연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차츰차츰 서로가 의지하여야 비로소 일[事業]을 이룩하게 된다. 의[義]10)가 수(受)에게 “너는 만일 생각[想]을 여의고도 경계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라고 물으면,
10) 의(義)라 함은 여기서는 심리 활동(心理活動)의 법칙을 말하며 이 법칙을 잠깐 의인화(擬人化)하여 수(受)의 심소(心所)의 작용을 수(受)와의 문답에 의하여 밝히려고 하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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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대답하리니, 그 밖의 다른 마음과 심소에 묻는 것도 그러하다.
[문] 상응인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온갖 심․심소의 법이어서 3온(蘊)11)과 1온의 일부분과 1처(處)와 1처의 일부분과 7계(界)와 1계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상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똑같다[等]’는 뜻이니 이것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모든 심소의 법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선의 마음은 많으면서 불선의 마음은 적고 불선의 마음은 많으면서 유부무기의 마음은 적으며 유부무기의 마음은 많으면서 무부무기의 마음은 적고 욕계의 마음은 많으면서 색계의 마음은 적으며 색계의 마음은 많으면서 무색계의 마음은 적고 유루의 마음은 많으면서 무류의 마음은 적기도 하는데 어떻게 똑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라 하는가?
[답] 체성[體]이 똑같다는 뜻에 의거하여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마음속에 두 개의 느낌[受]이나 하나의 생각[想]이라면 똑같다고 할 수 없으나 하나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느낌이나 하나의 생각인 것이며 그 밖의 나머지도 그와 같기 때문에 똑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또 똑같으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 상응한다는 뜻이요, 또 똑같으면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상응한다는 뜻이며, 또 똑같으면서 옮겨간다[運轉]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수레가 굴러갈 때에는 여러 부분이 모두 움직이면서 함께 하나의 일을 이룩하는 것처럼 마음의 수레도 경계에 대하여 활동할 때에 심소도 활동하면서 함께 하나의 일을 이루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한다.
또 똑같으면서 일을 한다[所作]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가을에 비둘
11) 온갖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은 5온설(蘊說)에 의하면 수온(受蘊)․상온(想蘊)․식온(識蘊)․행온(行蘊)의 일부분에 포섭되고, 12처설(處說)에 의하면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의 일부분에 포섭되며, 16계(界)에서 보면 6식계(識界)와 의근계(意根界)와 법계(法界)의 일부분에 포섭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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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들이 똑같이 일시에 마당에 내려 앉아 일시에 주워 먹다가 일시에 날아가는 것이 앞도 뒤도 아닌[非前非後] 것처럼 심․심소법도 그와 같아서 일시에 경계에 나아가 일시에 경계를 받아들이고 일시에 경계를 버리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한다.
또 똑같으면서 서로가 따른다[相順]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서로가 좇는 것을 상응한다고 하는 것처럼 심․심소법이 서로 좇는 것도 그러하다.
또 똑같으면서 화합(和合)한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물과 우유가 합하는 것을 상응한다고 하는 것처럼 심․심소가 화합하는 것도 그러하다.
무(霧) 존자는 “네 가지의 일[四事]이 똑같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한다. 첫째는 시분(時分)이 똑같은 것이니 심․심소는 같은 한 찰나[一刹那]에 현행(現行)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의(所依)가 똑같은 것이니 심․심소는 같은 하나의 감관[一根]에 의거하여 현행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소연(所緣)이 똑같은 것이니 심․심소는 하나의 경계[一境]를 반연하여 현행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행상(行相)이 똑같은 것이니 심․심소는 같은 하나의 행상이면서 현행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다섯 가지 일[五事]이 똑같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한다. 곧 앞의 네 가지의 일과 물체(物體)가 똑같은 것이니 심․심소는 각각 한 물건만이 화합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한다고 한다.
또 묶은 갈대[束蘆]와 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하나하나의 갈대는 혼자 설 수가 없고 반드시 많이 함께 묶어야 비로소 설 수 있는 것처럼 심․심소법도 그와 같아서 반드시 많은 형상이 의지하여야 비로소 세간에 행하면서 결과를 취하고[取果] 결과를 부여하며[與果] 그리고 소연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 노끈이 합한[合索] 것과 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하나하나의 실은 재목을 끌어당길 수 없고 많은 실이 서로 합쳐져야 비로소 끌어당길 수 있는 것처럼 심․심소법도 그와 같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말과 같다.
또 손을 붙잡는[連手] 것과 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하천 물이 세차게 흐를 적에 혼자는 건널 수가 없고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아야
비로소 그곳을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심․심소법도 그와 같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말과 같다.
또 장사꾼[商侶]과 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많은 장사꾼들이 함께 반려(伴侶)가 되어 험한 길을 지나가는 것처럼 심․심소법도 그와 같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말과 같다.
세우(世友) 존자는 “서로 이끌어낸다[引生]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안식(眼識)이나 의식(意識) 또한 서로가 이끄는 것인데 그것도 상응하는 것인가?
[답] 그것은 소의(所依)가 다르다. 만일 소의가 같으면서 서로가 이끈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서로가 여의지 않는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4대종(大種)도 서로가 여의지 않는데 그것도 상응하는 것인가?
[답] 그것에는 소의가 없다. 만일 소의가 있으면서 역시 서로가 여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소연(所緣)이 있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6식(識)은 모두가 소연이 있는데 그것도 상응하는 것인가?
[답] 그것은 소의가 다르다. 만일 소의를 같이하면서 소연이 있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소연을 같이한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5식(識)은 저마다 의식과는 동일한 소연인데 마땅히 상응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또 많은 안식도 상응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치 많은 유정들이 함께 초승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인가?
[답] 그것은 소의가 다르다. 만일 소의를 같이하면서 소연을 같이한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항상 화합한다[和合]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수명[壽]․따뜻함[煖]․의식[識]의 세 가지도 언제나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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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한 것인데 그것도 상응하는가?
[답] 그렇지 않다. 수명과 따뜻함의 두 가지 법은 소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소의가 있으면서 또한 언제나 화합한 것이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한결같이 구생(俱生)한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4대종(大種)은 한결같이 구생하는데 그것도 상응하는가?
[답] 그것에는 소의가 없다. 만일 소의가 있으면서 한결같은 구생이라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나고․머무르고․사라짐을 함께하는 것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마음을 따라 구르는[隨心轉]12) 색(色)과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도 나고․머무르고․사라짐을 함께하는데 그것도 상응하는가?
[답] 그것에는 소의가 없다. 만일 소의가 있으면서 나고․머무르고․사라짐을 함께한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또 동일한 소의와 동일한 소연과 동일한 행상으로 전개된다[轉]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답] 어찌 그렇지 않은 줄을 알겠는가?
또 같은 하나의 일[一事]을 한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인(忍)과 지(智)는 같은 하나의 일을 하는데 그것도 상응하는가?
[답] 그것은 함께 생기지 않는다. 만일 같은 때에 생기면서 같은 하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상응한다.
대덕(大德)은 “같은 반려(伴侶)라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식(識)과 심소는 서로서로 받아들이면서 같은 때에 생기고 같은 하나의 경계를 취하므로 이것은 상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12) 수심전(隨心轉)의 색(色)이라 함은 도구계(道俱戒)와 정구계(定俱戒)의 무표색(無表色)을 말하며 이것에 수반하는 4상(相)을 수심전의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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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음(妙音) 존자는 “소의․소연․행상․소작의 모두가 같다는 뜻이 상응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위의 법은 성품이 연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차츰차츰 힘으로 지녀야 비로소 일으켜 지을 수 있으며 일찍이 어느 하나의 대지법(大地法)도 혼자 일으켜 짓는 일이 있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했다.
이 상응인은 반드시 3세(世)에 다 통하며 사용과(士用果)가 있다.
[論] 어떤 것이 구유인(俱有因)13)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상응인과 구유인 두 가지는 어떻게 다른가?
[답] 어떤 이는 “다른 것이 없다. 한 찰나 동안의 수(受)와 상(想) 등의 법은 두 가지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하여는 마땅히 ‘상응인은 곧 구유인이지만 구유인은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다. 불상응구유인이 그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인에는 차이가 있으니, 비록 하나의 법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뜻이 구별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두 가지의 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이름에 곧 차별이 있는 것이니 상응인이라 하고 구유인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 반려라는 뜻은 상응인이고 동일한 과(果)라는 뜻은 구유인이다.
또 동일한 소의(所依)와 동일한 행상(行相)과 동일한 소연(所緣)이라는 뜻은 상응인이며, 동일하게 나고[生]․동일하게 늙고[老]․동일하게 머무르고[住]․동일하게 사라짐[滅]과 동일한 과(果)와 동일한 등류(等流)와 동일
13) 구유인(俱有因)이란 앞의 상응인(相應因)과는 극히 상사한 인이어서 두 물건이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어 도와주는 것이며 또 혹은 하나의 일을 취하는 작용이다. 다만 상응인과 다른 점은 상응인은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에 한정하는 규정임에 대하여 구유인은 물질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등에도 미치는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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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숙(異熟)이라는 뜻은 구유인이다.
또 지팡이를 짚었다[執杖]는 것과 같은 뜻은 상응인이며 지팡이를 짚은 뒤에 하는 일[所作]이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은 구유인이다.
또 손을 줄줄이 붙잡는다[連手]는 것과 같은 뜻은 상응인이며 손을 줄줄이 붙잡은 뒤에 몹시 세게 흐르는 하천을 건넜다는 것과 같은 뜻은 구유인이다.
또 서로가 수순(隨順)한다는 뜻은 상응인이며 서로가 여의지 않는다는 뜻은 구유인이다.
[論] 어떤 것이 구유인인가?
[答] 마음[心王]은 심소법과 구유인이 되고 심소법은 마음과 구유인이 된다.
[문] 무엇 때문에 앞의 상응인에서는 마음을 말하지 않고 지금의 구유인에서는 마음을 말하는가?
[답] 평등(平等)하다는 뜻은 상응한다는 뜻이므로 심왕(心王)은 뛰어나서[勝] 심소법과 평등하다는 뜻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일을 이룩한다는 뜻이 구유인이고 마음과 심소법은 일을 이룩한다는 뜻이 같기 때문에 지금은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온갖 마음[一切心]이요, 심소법도 온갖 심소법[一切心所法]이니 그 알맞은 것으로 차츰차츰 구유인이 된다.
[論] 마음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身業)과 어업(語業)과 구유인이 된다.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이라 함은 정려율의(靜慮律儀)와 무루율의(無漏律儀)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과 어업은 마음과 구유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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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앞의 말은 이 안에 말한 것의 인(因)의 뜻이 모두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처음과 나중은 자세한 설명이요, 중간은 간략한 설명이므로 그 뜻은 준(准)하여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마음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에 대하여 인(因)이 되지만 그의 일을 따르면서 전개되지 않음은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은 마음에 대하여 그의 일에 따라 전개되면서도 인이 될 수 없음은 그것이 하열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신하에 대하여 작록(爵祿)은 주면서도 그의 일을 따라 활동하지 않으며 신하는 왕에 대하여 그의 일에 따라 활동하면서도 작록은 줄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
고 말한다.
[評] 마음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과 활동하면서 구유인이 된다. 왜냐하면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이요, 하나의 일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인[三因]을 말미암아서다.
[論] 마음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불상응행(不相應行)과 구유인이 되고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불상응행은 마음과 구유인이 된다.
[문] 어떠한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불상응행이 마음과 차츰차츰 인(因)이 되는가?
[답] 심․심소법과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과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이 마음과 차츰차츰 인이 된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마음은 스스로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과 구유인이 되지만 오직 스스로 나고․머무르는 것만이 마음과 구유인이 될 뿐이요 늙고 무상한 것은 그렇지 않다. 더욱 늘게[增益] 함으로써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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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늙는 것과 무상한 것은 쇠멸(衰滅)하는 법이기 때문에 인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마음은 스스로 나고․늙고․머무르고 무상한 것과 구유인이 되고 스스로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도 마음과 구유인이 된다. 모두가 서로서로 도우면서 하나의 일을 이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마음은 심․심소법과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과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과 구유인이 되지만 오직 마음의 나고․늙고 머무르고 무상한 것만이 마음과 구유인이 될 뿐이요 그 밖의 나는 것[生] 등은 그렇지 아니하다”라고 말한다.
[評] “마음은 심․심소법과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과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과 차츰차츰 구유인이 된다”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아는가?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마음의 구유인의 법인가? 온갖 심소법과 도구유계(道俱有戒)와 정구유계(定俱有戒)와 마음과 그 모든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이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품류족론』의 설명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마치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인(因)으로 삼으면서도 유신견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현재의 견고(見苦)에서 끊을 수면과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하고 과거․현재의 견집(見集)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과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도 제외하고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도 제외하고 미래의 유신견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오염된
[染汚] 고제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품류족론』에서는 “과거․현재의 견고에서 끊을 수면과 그것의 상응(相應)․구유(俱有) 등의 고제를 제외하고 과거․현재의 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 등의 고제도 제외하고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도 제외하고 미래의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법의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오염된 고제이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것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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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알아야 한다.
[論] 또 구생(俱生)의 4대종(大種)은 차츰차츰 구유인이 된다. 이것을 구유인이라 한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4대종의 체(體)로 하여금 치우치게 더함[偏增]이 없게 하려 하는 이가 있다. 그는 “지(地)대종은 다른 세 가지 대종과 구유인이 되고 세 가지의 대종은 지대종과 구유인이 되며 나아가 풍(風)대종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또 4대종의 체로 하여금 치우치게 더함이 있게 하려 하는 이가 있다. 그는 “지대종은 4대종과 구유인이 되고 4대종은 지대종과 구유인이 된다. 왜냐하면 지대종에는 많은 체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럿과 구유인이 되고 여럿은 하나와 구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풍대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評] “4대종의 체에는 치우치게 더함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지(地)는 세 가지의 구유인이 되고 세 가지는 지의 구유인이 된다. 왜냐하면 지는 지를 관하지 않아도 만들어지는 물질[所造色]을 내는 것이니 온갖 법은 자성(自性)과 같은 종류[同類]의 체를 관하지 않아도 다른 것의 인[他因]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풍대종도 그러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아직 생기지 않은 4대종도 역시 구유인가?
[답] 역시 그것도 구유인이다. 인(因)이라는 뜻에 떨어지기 때문이요 인의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것은 구유인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구생(俱生)의 4대종만이 차츰차츰 구유인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미 생겼든 아직 생기지 않았든 관계없이 4대종은 모두가 차츰차츰 구유인이 된다”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겼다는 말은 생길 수 있다는 뜻과 혹은 생긴 모양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품류족론』에 “어떤 것이 인(因)으로 생기는 법인가? 온갖 유위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거기서 생긴다는 말은 생겼거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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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생기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처럼 여기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문] 만들어지는 물질에는 구유인이 있는가?
[답] 있다. 온갖 유위의 법에는 모두가 생기는 등의 모양이 있고 구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만들어지는 물질은 만들어지는 물질과 구유인이 되는가?
[답] 된다. 구유인이 되는 것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면서 만들어지는 물질과 같다.
[문] 대할 수 있는[有對] 만들어진 물질은 대할 수 없는 만들어진 물질과 구유인이 되는가?
[답]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역시 된다. 마치 안근(眼根) 등을 많은 극미(極微)가 선천적으로 갖추어져[俱生] 차츰차츰 구유인이 되는 것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앞의 말[前說]과 같은 것이 좋다 하겠다. 왜냐하면 동일한 과[同一果]라는 뜻이 구유인의 뜻인데 그것은 동일한 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마음에는 모두가 따라 전개되는[隨轉] 모든 심소법과 생 등의 모양(生相)은 있지만 온갖 마음14)에는 모두가 따라 전개되는 신업․어업의 색(色)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따라 전개된다[隨心轉]는 뜻에는 통틀어 열 가지가 있다. 하나로 일어나고[一起]․하나로 머무르고[一住]․하나로 소멸하며[一滅] 하나의 과[一果]와 하나의 등류[一等流]와 하나의 이숙[一異熟]이며, 선(善)이면 선이고 불선(不善)이면 불선이며, 무기(無記)면 무기이고 하나의 세간[一世] 안에 떨어지는 그것이다.
하나의 과라 함은 이계과(離繫果)를 말하고 하나의 등류라 함은 등류과(等流果)를 말하며 하나의 이숙이라 함은 이숙과(異熟果)를 말한다.
법에 따라 이 열 가지의 많고 적음[多少]의 따로따로의 설명은 근온(根蘊)에서 앞으로 말할 것이다.
14) 마음에는 반드시 심소(心所)와 4상(相) 등이 있으나 온갖 마음에는 반드시 도구(道俱)와 정구(定俱)의 무표색(無表色)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심전(隨心轉)의 무표색은 수행에 의하여 얻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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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따라 전개되는 것의 자성(自性)은 무엇인가?
[답] 네 가지의 온[四蘊]과 다섯 가지의 온[五蘊]이다. 욕계와 무색계에서는 네 가지의 온인데 따라 전개되는 색(色)이 없기 때문이며 색계에서는 다섯 가지 온인데 따라 전개되는 색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따라 전개된다고 하는가?
[답] 서로가 수순하다[隨順]는 뜻이 따라 전개된다는 뜻이요 서로가 거두어서 더하게[攝益]한다는 뜻이 따라 전개된다는 뜻이며 하나의 일[一事]을 이룩한다는 뜻이 따라 전개된다는 뜻이다.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법[隨心轉法]의 뜻이 마음[心]에게 “네가 하는 일을 나도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심소법으로 차츰차츰 서로가 바라보면 다섯 가지 일[五事]을 말미암아 따라 전개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소의(所依) 때문이요, 소연(所緣) 때문이며 행상(行相) 때문이요, 과(果) 때문이며 이숙(異熟) 때문이다.
마음이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색(色)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함께 차츰차츰 서로가 바라보면 두 가지 일[二事]을 말미암아 따라 전개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과(果) 때문이며 이숙(異熟)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7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⑨
[문]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의 어떤 것들이 마음을 따라 전개되고[隨心轉] 어떤 것들이 마음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가[不隨心轉]?
[답] 색계의 계[色界戒]와 무루의 계[無漏戒]는 마음을 따라 전개되고 욕계의 계[欲界戒]와 그 밖의 신업․어업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계는 마음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가?
[답] 욕계는 그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 계에 대한 밭[田]이 아니고 그릇[器]이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욕계는 선정의 세계[定界]도 아니고 수행의 자리[修地]도 아니고 물듦을 여읜 자리[離染地]도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의 계[道戒]는 따라 전개될 수 없으나 색계는 선정의 세계요 수행의 자리이며 물듦을 여읜 자리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도의 계가 따라 전개될 수 있다.
또 욕계의 계의 뜻[義]이 욕계의 마음[心]에게 “너는 나를 위하여 파계(破戒)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끊어 줄 수 있겠느냐? 만일 끊어 준다면 나는 너를 따라 전개되겠다”고 말할 적에 욕계의 마음의 뜻[義]은 욕계의 계에게 “나는 못하겠다”고 대답하면 계의 뜻[義]은 “만일 못하겠다면 내가 무엇하러 너를 따라 전개되겠느냐”고 말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두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대는 나를 위하여 구호자(救護者)가 되어 주겠는가? 만일 되어 준다면 그대를 의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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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따라 움직이리라”고 말할 적에 또 다른 이가 “못하겠다”고 하면 그는 곧 “만일 그대가 되어 주지 못한다면 내가 무엇하러 그대에게 의지하면서 그대를 따라 움직이겠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색계의 선심(善心)은 온갖 것에 모두 수전계(隨轉戒)가 있는가?
[답] 온갖 것에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초정려(初靜慮)에 여섯 가지 선심이 있지만 수전계는 없다. 첫째는 선안식(善眼識)이요, 둘째는 선이식(善耳識)이며, 셋째는 선신식(善身識)이요, 넷째는 사시선심(死時善心)이며, 다섯째는 기표선심(起表善心)이요, 여섯째는 문소성혜상응선심(聞所成慧相應善心)이다.
제2․제3․제4 정려에는 두 가지의 선심이 있지만 수전계는 없다. 사시선심(死時善心)과 문소성심(聞所成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색계에는 수전계가 없는가?
[답] 그 세계는 계에 대하여 밭이 아니고 그릇이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계(戒)는 형상[色]의 일부에 속한 것인데 그 세계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계도 없으며, 또 계는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지는데 거기에는 대종이 없기 때문에 계도 없다.
[문] 비록 무루(無漏)의 대종은 없다 하더라도 무루의 계가 있는 것처럼 그 세계에도 비록 대종은 없다 하더라도 어찌 계가 있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답] 무루의 계는 대종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무루를 이룬다. 다만 마음의 힘을 말미암을 뿐이어서 그 무루의 마음에 따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나 유루의 계[有漏戒]는 대종의 힘을 말미암아 세계의 자리[界地]에 매였기 때문에 비슷하지가 않다.
또 계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대치(對治)하는 것인데 무색계의 도(道)에서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대치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계가 없다.
[문] 논(論)을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무색계의 도에서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대치할 수 없다 하는가?
[답] 그것은 오직 욕계에 한정된다. 무색계는 욕계에 대한 네 가지 일의 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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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事遠]이 있기 때문에 대치는 없다. 네 가지 일의 멂이란 첫째는 세계의 자리[界地]가 멀고, 둘째는 소의(所依)가 멀며, 셋째는 소연(所緣)이 멀고, 넷째는 대치(對治)가 멀다.
[문] 만일 그렇다면 제2․제3․제4 정려에서도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의 대치가 없으므로 거기에도 마땅히 계가 없어야 한다.
[답] 대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단대치(斷對治)요, 둘째는 염괴대치(厭壞對治)이다. 위의 3정려에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 비록 단대치는 없어도 염괴대치는 있다.
세존께서 “성스러운 제자들은 부동심(不動心)으로 해탈(解脫)에 들어가 불선(不善)을 끊고 선법(善法)을 닦아 익힌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 몸속에는 오히려 불선으로 끊어야 할 것은 있지 않으나 과환대치(過患對治)에 의지한 까닭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무색계에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 대하여 단대치도 없고 염괴대치도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계가 없다.
수심전계(隨心轉戒)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도구유계(道俱有戒)요, 둘째는 정구유계(定俱有戒)이다.
도구유계라 함은 무루의 계를 말하고 정구유계라 함은 색계의 계를 말한다. 만일 이것이 도구유계이면 그것은 정구유계가 아니요, 만일 이것이 정구유계이면 그것은 도구유계가 아니다.
어떤 이는 “도구유계는 무루의 계를 말하고, 정구유계는 온갖 유루와 무루의 수심전계를 말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온갖 도구유계는 모두 정구유계이나 가끔 그것은 정구유계이면서 도구유계는 아니기도 하다. 말한다면 유루의 수심전계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도구유계는 무루의 계를 말하며 정구유계는 근본정려의 유루와 무루의 계를 말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말에 의거하여 4구(句)를 짓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것은 도구유계요 정구유계가 아니니, 근분지(近分地)의 모든 무루의 계를 말한다.
어떤 것은 정구유계요 도구유계가 아니니, 근본지(根本地)의 모든 유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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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말한다.
어떤 것은 도구유계요 또한 정구유계도 되니, 근본지의 모든 무루의 계를 말한다.
어떤 것은 도구유계도 아니고 정구유계도 아니니, 근분지의 모든 유루의 계를 말한다.
그 논사는 얻는 것[得]에 의해서도 다시 4구를 짓는다.
“어떤 이는 도구유계는 얻었으나 정구유계는 얻지 못한 이가 있다. 아직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하고 정성이생에 든 이로서 16심(心)을 일으킬 동안을 말한다. 이미 욕염을 여의고 미지정(未至定)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로서 견도(見道) 15심(心)을 일으킬 동안을 말한다. 모든 성자(聖者)로서 욕염을 여의기 위하여 가행도(加行道)와 9무간도(無間道)와 8해탈도(解脫道)를 일으킬 때이다. 또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신승해(信勝解)의 연근(練根
)으로서 견지(見至)의 모든 가행도와 무간도와 해탈도를 짓는 때이다. 또 모든 성자로서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하고 미지정에 의하여 무량(無量)․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 및 염주(念住) 등을 일으키는 때이다. 이와 같은 때는 도구유계는 얻었으나 정구유계는 얻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정구유계는 얻었으나 도구유계는 얻지 못한 이가 있다. 모든 이생(異生)이 욕염을 여읜 온갖 최후의 해탈도를 말한다. 즉 그가 초정려의 염(染)을 여의고 초정려에 의지하여 가행도와 온갖 최후의 해탈도를 일으킨다. 곧 그가 제2정려의 염을 여의고 제2 정려에 의지하여 가행도와 온갖 최후의 해탈도를 일으킨다. 곧 그가 제3 정려의 염을 여의고 제3 정려에 의지하여 가행도와 최후의 해탈도를 일으킨다. 곧 그가 제4 정려의 염을 여의고 제4
정려에 의하여 가행도를 일으킨다.
만약 모든 이생이 근본정려를 의거하면 모든 신통을 끌어내고 가행도와 5무간도와 3해탈도를 일으킨다. 만약 무량한 부정관․지식념․염주․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을 일으키면 처음의 3해탈과 8승처(勝處)와 앞의 8변처(遍處)와 무색계에서 죽어서 색계에 나는 때이다. 색계의 상지(上地)에서 죽어 하지(下地)에 나는 때이다. 이와 같은 때에는 정구유계는 얻었으나 도구유계는 얻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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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도구유계도 얻고 또 정구유계도 얻은 이가 있다. 이미 욕염을 여의고 미지정에 의하여 정성이생과 도류지(道類智)에 들 때이다. 만약 상지(上地)에 의지하면 정성이생과 16심에 들어간 동안이다. 만약 모든 성자라면 욕염을 여읜 최후의 해탈도이다. 즉 그는 초정려에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을 여의고 모든 가행도와 9무간도와 9해탈도를 위해서 이미 욕염을 여의었다. 신승해의 연근이 견지가 있으면 가행도와 무간도와 해탈도를 지을 때이
다. 해탈한 아라한의 연근이 움직이지 않는 모든 가행도와 9무간도와 9해탈도를 지을 때이다. 만약 뒤섞으면 초정려에서 제4 정려를 닦을 때이다.
만약 모든 성자가 모든 신통을 끌어내면 가행도와 5무간도와 3해탈도를 일으킨다. 만약 모든 성자가 이미 욕염을 여의면 미지정 등에 의지하여 무량․해탈․승처․변처․부정관․지식념 및 모든 염주 등을 일으킨다. 만약 무애해(無礙解)․변제정(邊際定)․무쟁(無諍)․원지(願智)․공공(空空)․무원무원(無願無願)․무상무상(無相無相)과 생각[想]의 미세한 마음을 일으키면 이와 같은 등의 때 도구유계와 정구유계를 얻는다.
어떤 이는 도구유계도 얻지 못하고 또한 정구유계도 얻지 못한 이가 있다. 모든 이생이 욕염을 여의기 위하여 가행도와 9무간도와 8해탈도를 일으킨다. 미지정과 정려 중간에 의하여 난․정․인․세제일법을 일으킨다. 만약 모든 이생이 제2․제3․제4 정려의 근분(近分)을 의지하면 초정려와 제2․제3 정려의 염을 여의게 되어 가행도와 9무간도와 8해탈도를 일으킨다. 만약 모든 이생이 공무변처(空無邊處)와 비상비비상처의 근분을 의지하면 제4 정려로부터 무
소유처(無所有處)의 물듦을 여의게 되어 가행도와 9무간도와 9해탈도를 일으키게 된다.
만약 모든 이생이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했거나 이미 욕염을 여의고 미지 등의 모든 근분정(近分定)과 무색정(無色定)에 의지하면 무량․해탈․승처․변처와 부정관․지식념이며 아울러 염주 등의 모든 공덕을 일으키는 때이다. 만약 모든 성자가 미지 등의 모든 근분정에 의지하면 유루․무루의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때이다. 무색정에 의지하여 유루․무루를 일으켜 모든 공덕을 성취할 때로 온갖 부정위(不定位)와 무심위(無心位) 등의 이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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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이니 도구유계도 얻지 못하고 또한 정구유계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 논사는 버리는 것[捨]에 의해서도 다시 4구를 짓는다.
“또 도구유계는 버렸으나 정구유계는 버리지 않은 이가 있다. 예류과(預流果)나 일래과(一來果)를 얻은 이나 점차자(漸次者)로서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이나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신승해(信勝解)의 연근이 견지(見至)를 얻은 이나 일래과․일래승과(一來勝果)와 도(道)와 예류과․예류승과의 도로부터 물러난 때이다.
예류과에서 물러난 때라 함은 연근(練根)으로 얻게 된 과(果)로부터 물러난 때를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때에는 도구유계는 버려도 정구유계는 버리지 않았음을 말한다.
또 정구유계는 버렸으나 도구유계는 버리지 않은 이가 있다. 모든 이생이 욕염을 여읜 데로부터 제3 정려의 염을 여읜 데로부터 물러남을 말한다. 만약 모든 이생과 모든 성자라면 욕계․색계에서 죽어 무색계에 태어난다. 색계에서 죽으면 욕계에 태어나며 만약 모든 이생이 근본지(根本地)를 따르면 공덕에서 물러난다.
이와 같은 때에는 정구유계는 버리나 도구유계는 버리지 않는다.
또 도구유계도 버리고 또한 정구유계도 버린 이가 있다. 모든 성자가 욕염을 여읨에서 비상비비상처의 염까지 여의고 물러남을 말한다. 만약 4정려와 정려 중간을 의지하면 불환과를 얻는다. 만약 아라한과를 얻었으면 이미 욕염을 여의고 신승해의 연근이 견지를 얻은 때이다.
해탈한 아라한이 연근해서 부동(不動)을 얻으며 불환과와 불환승과도와 아라한과와 아라한승과도에서 물러난 때이니 이와 같은 등의 때에는 도구유계도 버리고 또한 정구유계도 버린다.
또 도구유계도 버리지 않고 또한 정구유계도 버리지 않은 이가 있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모든 그 밖의 지위이다”고 한다.
그는 성취한 것에 의해서도 다시 4구를 짓는다.
“어떤 이는 도구유계는 성취했으나 정구유계는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다.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성자1)이다.
어떤 이는 정구유계는 성취했으나 도구유계는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다.
1) 아직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한 성자(聖者)라 함은 초(初)․이과(二果)를 말한다. 아직 욕계의 수혹(修惑)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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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생이 욕계에 나서 이미 욕염을 여읜 이와 또 모든 이생으로서 색계에 난 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를 다 성취한 이가 있다. 모든 성자로서 욕계에 나서 이미 욕염을 여읜 이와 또 모든 성자로서 색계와 무색계에 난 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다 성취하지 못한 이가 있다. 모든 이생으로서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이와 또 모든 이생으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이다”고 한다.
성취하지 않은 것에 의해서도 4구를 짓는다.
“차전(次前)의 제2구를 지금의 제1구로 하고 차전의 제1구를 지금의 제2구로 하며 차전의 제4구를 지금의 제3구로 하고 차전의 제3구를 지금의 제4구로 하면 된다”고 한다.
온갖 율의(律儀)는 통틀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요, 둘째는 정려율의(靜慮律儀)며, 셋째는 무루율의(無漏律儀)요, 넷째는 단율의(斷律儀)이다.
별해탈율의라 함은 욕계의 계(戒)를 말하고 정려율의라 함은 색계의 계를 말하며, 무루율의라 함은 무루의 계를 말하고 단율의라 함은 욕계의 염을 여읜 9무간도 안의 모든 정려와 무루의 계이다.
이 네 가지 율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업온(業蘊)의 해생납식(害生納息)에서와 같다.
난(煖)의 수전계(隨轉戒)는 파계에 대하여 사대치(捨對治)와 원분대치(遠分對治)가 되고, 정․인․세제일법과 견도와 수도의 도류지(道類智)의 수전계는 파계에 대하여 다만 지대치와 원분대치가 된다.
욕계의 염을 여읜 가행도(加行道)의 수전계는 파계에 대하여 사대치․지대치․원분대치가 되고, 처음 무간도(無間道)의 수전계는 파계에 대하여 다만 지대치와 원분대치만 되며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 대하여는 다만 단대치와 사대치만 된다.
7무간도(無間道)의 수전계는 파계에 대하여 다만 지대치와 원분대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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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 대하여는 단대치(斷對治)․사대치․지대치․원분대치가 된다.
제9무간도의 수전계는 파계에 대하여 단대치와 지대치와 원분대치가 되고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는 단대치․사대치․지대치․원분대치가 된다.
9해탈도의 수전계와 그 밖의 뒷날의 진지(盡智)․무생지(無生智)와 무학정견(無學正見)의 수전계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에 대하여는 다만 지대치와 원분대치만 된다.
[문] 법지품도(法智品道)는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끊게 되므로 수전계가 있을 수 있으나 유지품도(類智品道)에는 이런 공능(功能)이 없는데 어떻게 또한 수전계가 있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유지품도는 그것에 대해 비록 단대치와 사대치는 없으나 지대치와 원분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법지품도는 유지품도와 차츰차츰 인(因)이 되고 차츰차츰 상속(相續)하며 차츰차츰 서로 속하고[相屬] 차츰차츰 서로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지품도에서도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끊을 수 있지만 법지품도가 먼저 그것을 끊어버렸으므로 지금은 끊을 것이 없기 때문에 역시 수전계는 있다. 비유하면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원수로 삼았을 때에 어느 한 사람이 벌써 원수를 갚아 버렸으면 그 밖의 다른 이들은 원수를 갚을 대상이 없어서요 원수 갚을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만일 법지품에 수전계가 있고 유지품도에 수전계가 없다면 율의는 오직 할 수 있는 곳[能處]2)에서만 활동할 뿐이요, 할 수 없는 곳[不能處]에서는 활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율의는 할 수 있는 곳과 할 수 없는 곳에 관계없이 공통하게 활동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법지품도나 유지품도는 다 같이 수전계가 있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2) 할 수 있는 곳[能處]이란 계(戒)가 적극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곳[不能處]이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거나 또는 발휘할 필요가 없는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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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욕계와 색계 중에 어디에 계(戒)가 더 많은가?
[답] 어떤 이는 “욕계의 계가 많다. 왜냐하면 욕계의 계는 근본업도(根本業道)3)와 가행(加行)과 후기(後起)의 곳에서 얻게 되지만 색계의 계는 오직 근본업도의 곳에서만 얻으며 욕계의 계는 성죄(性罪)를 여의고 차죄(遮罪)도 여의기 때문에 얻지만 색계의 계는 오직 성죄만 여의는 까닭으로 얻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색계의 계가 많다. 왜냐하면 우선 미지정(未至定)에 속한 계조차도 욕계보다 많고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면서 그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시 더 상지(上地)의 그 밖의 계가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유루와 무루에는 어느 것에 계가 더 많은가?
[답] 어떤 이는 “유루의 계가 더 많다. 왜냐하면 유루의 계는 두 가지 율의와 한 가지 율의의 일부분[少分]을 포섭하지만 무루의 계는 한 가지 율의와 한 가지 율의의 일부분만 포섭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루의 계가 더 많다. 왜냐하면 우선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수전계조차도 유루보다 많으며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면서 그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시 더 상위(上位)의 그 밖의 계가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고법지인은 고법지(苦法智) 나아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무학의 정견의 모든 수전계와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답] 어떤 이는 “고법지의 수전계는 고법지인의 수전계보다 일배(一倍)가 더 많으며 이와 같이 차츰차츰하여 나아가 무학의 정견의 수전계는 무생지의 수전계보다 일배 더 많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고법지인의 수전계처럼 이러한 고법지의 수전계와 나아가 도류지(道類智)의 수전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욕계의 염(染)을 여읜 모든 가행도와 9무간도와 9해탈도와의 모든 수전계는 뒤로 갈수록 더욱더 많다. 왜냐하면 여여(如如)하게 파계와 파계를 일으키는 번뇌를 점차로 끊
3) 어떤 행위를 일으킴에 있어서 그 준비가 되는 것을 가행도(加行道)라 하고 바르게 그 행위를 실현한 곳을 근본업도(根本業道)라 하며 그 뒤의 끝막음을 후기(後起)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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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이러이러한 계도 점차로 더욱더 많아지는 것은 위의 모든 지위의 계는 앞뒤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고법지인의 수전계는 고법지 나아가 무학정견의 수전계와 똑 같아서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몸[身]과 말[語]의 일곱 갈래[七支]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고법지는 고법지인보다 뛰어나고 나아가 진지(盡智)는 금강유정(金剛喩定)보다도 뛰어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인(因)의 장양(長養)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한다. 고법지인은 한 찰나의 인에 장양된 것이요, 고법지는 두 찰나의 인에 장양된 것이며 나아가 진지는 한량없는 찰나의 인에 장양된 것이다.
거기서는 품(品)의 뛰어난 것만을 말하면서 계의 많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문] 성문(聲聞)과 부처님은 어느 분에 계가 더 많은가?
[답] 어떤 이는 “성문의 계가 많다. 왜냐하면 성문의 계는 두 세계[二界]의 몸에 의하지만 부처님의 계는 다만 욕계의 몸에만 의거하기 때문이다. 또 성문의 계는 두 갈래[二趣]의 몸에 의하지만 부처님 몸은 다만 인취(人趣)에만 의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처님의 계가 더 많다. 왜냐하면 우선 10력(力)과 4무외(無畏)의 수전계에서조차 온갖 성문과 독각(獨覺)보다도 더 많은데 하물며 다시 한량없고 그지없이 뛰어난 공덕의 모든 수전계가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모든 세존은 어떤 분은 백 년의 자리[位]에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나아가 8만 세(歲)의 자리에서 증득하시기도 한다. 만일 백 년의 자리에서 보리를 증득하시는 이도 8만의 몸 안의 계도 얻으시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얻는다 하면 어떻게 이 몸으로 다른 몸의 계를 얻으며, 만일 얻지 못한다면 『시설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온갖 여래․응․정등각은 모두 다 평등하시다”라고 말씀하신 것
과 같다.
[답] 또한 얻으신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몸으로 다른 몸의 계를 얻으시는 것인가?
[답] 설령 이 몸에 의거하여 다른 몸의 계를 얻으신다 해도 또한 허물은 없으니 상속(相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년의 자리에서 보리를 증득한 분은 백 년의 자리에 대한 수심전의 계(隨心轉戒)를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성취하고 또한 목전에 나타나 있지만 8만 세의 자리에서의 수심전의 계는 얻으면서도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목전에 나타나 있지는 않다.
8만 세의 자리에서 보리를 증득하신 분은 8만 세에서의 수심전의 계를 얻고 몸에 있으며 성취하고 목전에 나타나 있지만 백 년의 자리에서의 수심전의 계는 얻으면서도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목전에 나타나 있지는 않다.
어떤 이는 “얻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세 가지의 일[三事]이 똑같기 때문에 평등하다 한다. 첫째는 수행(修行)이 똑같으시다. 한 부처님이 삼 무수겁 동안에 6바라밀다(波羅蜜多)를 닦아 원만하게 되신 까닭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신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부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한다.
둘째는 이익이 똑같으시다. 한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면 한량없는 백천 나유다(那庾多)의 중생을 제도하여 반열반(般涅槃)하게 하시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부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한다.
셋째는 법신(法身)이 똑같으시다. 한 부처님께서 10력․4무소외(無所畏)․대비(大悲)․3념주(念住)․18불공법(不共法) 등의 그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부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한다.
또 근기[根]가 똑같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모두 상품(上品)의 근기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또 계(戒)가 똑같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모두 상품의 계를 얻으시기 때문이다.
또 지(地)가 똑같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니 한 부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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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정려에 의거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시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부처님도 그러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한다.
[문] 아라한과를 얻는 때에는 몇 지(地)의 몸으로 수심전계를 얻는가?
[답] 서방(西方)의 모든 논사4)는 “26처(處)의 몸으로 수심전계를 얻는 것이니 욕계의 9와 색계의 17이다”라고 말한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는 “25처의 몸으로 수심전계를 얻는다. 대범천(大梵天)은 따로 처[別處]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수(未來修)이어서 모두가 현재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욕계나 색계의 어느 지의 몸에 따라 무학과(無學果)를 얻는다. 곧 그 지의 몸의 수심전계는 또한 미래수이나 현재에 일어나게도 된다. 그 밖의 지의 몸의 수심전계는 비록 미래수라 해도 현재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이숙의 소의(所依)의 몸이 없기 때문이
다. 무색계에 나서 무학과를 얻는 이는 비록 그의 계는 얻는다 하더라도 나타나 일어나지 않는다. 위에 태어나면 아래 자리의 선정[定]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자기 자리[自地]의 몸에 의거하여 자기 자리의 온갖 계를 일으키는가?
[답] 모두 다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쁜 법도 오히려 모두 다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모든 공덕이겠는가. 가행(加行)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성자(聖者)는 무색계에 태어나 도구유계는 성취하면서 정구유계는 성취하지 않는가?
[답] 유루의 법은 그 세계의 자리[界地]에 매여 속하고 그 위의 세계에는 속하지 아니하므로 위에 나면 잃게 되나 무루는 그렇지 아니하다.
또 유루의 법의 낫고[勝] 못함[劣]은 그 자리에 따르는 것이라 위에 나면 아래는 싫고 소용이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성취하지 못하지만 무루는 그렇지 않다. 이 때문에 성자가 무색계에 나면 오직 도구유계만을 성취하게 된다.
방론(傍論)은 이미 마쳤으므로 마땅히 정론(正論)으로 되돌아가겠다.
4) 서방(西方:健馱羅)의 논사(論師)는 범보천(梵輔天) 외에 따로 대범천(大梵天)의 처소가 있다고 보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논사들은 대범천의 처소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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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구유인(俱有因)은 무엇을 자성(自性)으로 삼는가?
[답]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슨 까닭을 구유인이라 하며, 구유(俱有)라 하는 뜻은 무엇인가?
[답] 서로 여의지 않는다[不相離]는 뜻이 구유의 뜻이요, 동일한 과[同一果]라는 뜻이 구유의 뜻이며, 서로 수순한다[相隨順]는 뜻이 구유의 뜻이다. 이 구유인은 반드시 3세(世)에 다 통하며 사용과(士用果)가 있다.
[論] 어떤 것이 동류인(同類因)5)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正理]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는 체(體)가 없다”라고 집착하고 어떤 이는 “현재는 무위의 법[無爲法]이다”라고 집착하며, 어떤 이는 “자기 종류[自類]가 동류인이 된다. 마음은 오직 마음과만 함께하고 느낌[受]은 오직 느낌과만 함께하니 그 밖의 다른 법도 그러하다”라고 집착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며 현재는 유위의 법이라는 것과 아울러 자기 종류나 다른 종류[他類]가 다 동류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동류인인가?
5) 동류인(同類因)이란 동일한 성질의 것이 인(因)이 되어서 동일한 결과[等流果]를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상응인(相應因)과 구유인(俱有因)과는 달라서 반드시 앞뒤의 때가 다른 동안에 행해지는 관계이지만 이것을 3세(世)에 걸쳐 논구(論究)하게 된다면 유부(有部)의 법상(法相)에서 보아 꽤 번잡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특히 미래 세상에 동류인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같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지(意志)의 자유 또는 결정론(決定論)에
도 미치는 문제이어서 극히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 문단에서는 이들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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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앞에 생긴 선근(善根)은 뒤에 생긴 자기 세계[自界]의 선근과 상응한 법[相應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과거의 선근은 미래와 현재의 자기 세계의 선근과 상응한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현재의 선근은 미래의 자기 세계의 선근과 상응한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라는 말에 벌써 그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 무슨 연유로 ‘과거’라는 자기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가?
[답] 뒤의 법은 앞 것의 인(因)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면 어떤 이는 “과거의 뒤의 법도 그 앞의 법의 인이 되는가?”라고 의심을 내는 이도 있을 것이나 만일 앞에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런 의심은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은 과거에는 앞과 뒤가 있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면 어떤 이는 ‘과거의 모든 법은 동시에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는가?’라고 의심을 내는 이가 있겠지만 만일 앞에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러한 의심은 곧 쉬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앞에 생긴 것들은 오직 선근만 말하고 뒤에 생긴 것들은 상응하는 법을 겸하여 말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앞에 생긴 것들에도 상응하는 법을 말해야 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說]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글은 비슷하게 상속하는 사문의 뜻을 막기 위한 까닭이다. 그는 ‘선근은 오직 선근만을 위하여 인이 되며 선근과 상응하는 법은 오직 선근과 상응하는 법만을 위하여 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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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뜻을 차단시키면서 ‘선근은 선근을 위해서도 인이 되고 또한 상응하는 법을 위해서도 인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오직 선근과 상응하는 법만을 말하면서 그 밖의 법은 말하지 않는가?
[답] 뛰어[勝]난 것에 나아가 말하기 때문이다. 착한 법 가운데서 선근은 가장 뛰어난 것이며 그것과 상응하는 법은 극히 서로 가깝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자기 세계[自界]라 함은 욕계는 오직 욕계만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색계와 무색계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세계에서처럼 자기 자리[自地]에 대한 것도 그러하니 계박(繫縛)이 다르기 때문이다. 초정려는 오직 초정려만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자기 세계와 자기 자리의 설명에서처럼 자기 처소[自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나락가(那落迦)는 오직 나락가를 위해서만 동류인이 되고 나아가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5정거처(淨居處)6)에서 첫 찰나에 일어날 때는 마땅히 동류인이 없어야 한다. 비롯함이 없는 때에서부터 아직 그곳에는 태어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든지 다른 처소든지 관계없이 일으키는 번뇌는 차츰차츰 서로가 속박하고 종류에 따라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부(部)는 제외되는 것이니 5부(部)의 수면계박(隨眠繫縛) 분제(分劑)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 등을 말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자체는 진실로 존재하며, 현재는 유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6) 5정거처(淨居處)라 함은 제사선천(四禪天) 안의 불환과(不還果)의 성자(聖者)가 나는 곳이어서 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善見天)․ 색구경천(色究竟天)의 5천(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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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선근에서처럼 불선의 근[不善根]과 무기의 근[無記根]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차별되는 것은 불선 가운데서는 자기 세계라는 것이 제외된다. 이것을 동류인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불선에서는 자기 세계가 제외되는가?
[답] 불선근에는 달리 세계[界]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세계를 말하면 간별(簡別)할 것이 없다.
어떤 이는 “불선 중에서도 자기 세계를 말해야 한다. 자기 세계라는 말은 또한 자기 부[自部]를 말하는 것이니,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은 오직 견고에서 끊을 것만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나아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다만 “선근에서처럼 불선근과 무기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만 말해야 하며 다시 ‘차별되는 것은’의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답] 만일 다만 그와 같이만 말하면 어떤 이는 “무기근이 삼계(三界)에 다 통하는 것처럼 불선근도 그러한가?”라고 의심을 낼 것이기 때문에 다시 ‘차별되는 것은’ 등의 말을 해야 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앞에 생기는 등의 불선근은 뒤에 생기는 등의 무기근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앞에 생기는 등의 무기근은 뒤에 생기는 등의 불선근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그렇게 말하면 의심을 내면서 ‘불선근도 삼계에 다 통하는가? 혹은 무기근은 오직 욕계에만 있는가?’라고 하는 이가 있기도 하며 또 ‘원인은 적은데도 결과는 많기도 하는가? 원인은 많은데도 결과는 적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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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라고 의심하는 이가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글에서는 비록 설명하지 않았다 해도 뜻에서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니 자기 부[自部]는 서로가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미래 세상 안에는 동류인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한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여기에서는 다만 “앞에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과거는 미래와 현재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만 말하면서 “미래는 미래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있다고 하면 두 개의 마음[二心]은 차츰차츰 인(因)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하므로 곧 앞의 말에 대해서는 어긋난다.
만일 없다 한다면 이 논에서의 견온(見蘊)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견온에서 “만일 법이 그 법을 위하여 인이 된다면 혹시 이 법이 그것을 위하여 인이 아닐 적도 있는가? 어떤 때도 인이 아닌 것은 없다”고 한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이미 생겨 그것이 동류인이 되거나 또는 아직 생기지 않아서 동류인이 아니라 한다면 이것은 만일 법이 그 법을 위하여 인이 되면서도 때로는 이 법은 그 법을 위하여 인이 아닌 때도 있거늘 어째서 “어느 때도 인이 아닌 것은 없다”고 대답하는가?
또 만일 없다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어떤 것이 마음을 인(因)으로 삼는 법이 아닌가? 이미 정성이생(正性離生)에든 보특가라의 첫 무루의 마음[無漏心]과 그 밖의 이생(異生)으로서 반드시 정성이생에 들어가야 될 이의 첫 무루의 마음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이생으로서 미래에 있을 무루의 마음은 모두 마음이 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다만 그 첫 무루의 마음만을 말하는가?
또 만일 없다 하면 『품류족론』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혹은 고제(苦諦)가 유신견(有身見)으로써 인을 삼으면서도 유신견의 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미래의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오염된[染汚] 고제이다. 고제가 유신견으로써 인을 삼기도 하고 또한 유신견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도 있으니 곧 앞의 것에서 제외된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미래의 유신견이 미래의 유신견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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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미래의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또 만일 없다 하면 『식신족론(識身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과거의 오염된 안식(眼識)에 있는 수면(隨眠)은 이 마음에 인(因)이 되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혹은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면서도 인이 되지 못하기도 하며 혹은 인이 되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인도 되지 못하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우선 인이 되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모든 수면이 이 마음의 앞에 있으면서 동류(同類)와 변행(遍行)이 되는 것으로서 곧 그 수면이 이것을 반연하지 않았거나 설령 반연했다 해도 이미 끊었고 이것과 상응하는 수면을 이미 끊었거나 한 것이다.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면서도 인이 되지 못한다 함은 모든 수면이 이 마음의 뒤에 있으면서 동류와 변행이 되는 것으로서 곧 그 수면은 이것을 반연하면서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인이 되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도 더하게 한다 함은 모든 수면이 이 마음의 앞에 있으면서 동류와 변행이 되는 것으로서 곧 그 수면이 이것을 반연하면서 아직 끊지 못했고 이것과 상응하는 수면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인이 되지 않으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모든 수면이 이 마음의 뒤에 있으면서 동류와 변행이 되는 것으로서 곧 그 수면이 이것을 반연하지 않았거나 설령 반연했다 해도 이미 끊었거나 또는 그 밖의 것으로 반연했거나 또는 다른 수면이거나 또는 같은 경계의 변행 수면이 아니거나 한 것이다. 그 과거의 오염된 안식에서처럼 미래의 오염된 안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과거의 4구(句)는 그 도리가 그러할 수 있으나 미래의 것은 어째서 4구를 만들어야 하는가? 만일 앞과 뒤가 있다면 어떻게 인이 없겠는가?
또 만일 없다 한다면 『시설족론(施設足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모든 법은 네 가지 일[四事]로 결정된다. 원인[因]과 결과[果]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미래 세상에 동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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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닌 것이 생기고 나면 그때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또 만일 없다 하면 원인이 없었는데도 원인이 있어야 되고 또한 결과가 없는 것인데도 결과가 있어야 하니 곧 종(宗)으로 삼은 것이 파괴될 것이다.
[답] “미래 세상에는 동류인이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두 개의 마음이 서로서로 인이 된다는 허물도 없다.
[문] 이 논의 견온(見蘊)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견온에서 “만일 법이 그 법을 위하여 인이 된다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과 같다.
[답] 어떤 이는 “그것은 구유인(俱有因)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구유인은 유위의 법에 두루하면서 친히 과(果)를 갖추고 3세(世)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상응인(相應因)․구유인의 두 가지 인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은 다 같이 삼성(三性)에 두루하면서 친히 과를 갖추고 3세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상응인․구유인․이숙인(異熟因)의 세 가지 인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인은 친히 과를 갖추고 3세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상응인․구유인․이숙인․능작인(能作因)의 네 가지 인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이 네 가지의 인은 3세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것은 다섯 가지의 인[五因]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다. 능작인이 제외되는 것이니 온갖 법에 두루하면서 모두가 막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변행인(遍行因)이 제외되는 것이니 체성[體]과 작용[用]이 좁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것은 여섯 가지의 인[六因]에 의거하여 논을 지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은 나타나는[表] 것이라 하겠고 여섯 가지의 인에 통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법이 이미 생기면 동류인이기도 하고 변행인이기도 하며 만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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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생기지 않았으면 동류인이 아니기도 하고 변행인이 아니기도 하다. 이렇다면 곧 만일 법이 그 법을 위하여 인이 된다면 혹시 이 법은 그것을 위하여 인이 아니기도 하는데 어떻게 “어느 때도 인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대답하는가?
[답] 최후의 지위[最後位]에 의거하여 은밀히 이런 답을 하는 것이니 만일 법이 이 지위에서 반드시 동류인이나 혹은 변행인이 된다면 이로부터는 어떤 때도 인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견온(見蘊)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견온에서 “만일 법이 그 법을 위하여 등무간(等無間)이 된다면 간혹 이 법은 그것을 위하여 등무간이 아닐 때도 있는가? 있다. 그때는 이 법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최후의 지위에 의거하여 은밀히 대답해야 한다면 어느 때도 등무간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만일 법이 이 지위에서 반드시 등무간이 되며 “이로부터는 어떤 때도 등무간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답] 역시 그와 같이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따로의 의취(意趣)가 있어서요, 다른 모양(異相)과 다른 글[異文]의 설명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만일 다른 모양과 다른 글로써 그 뜻을 설명하면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의 문[二門]․두 가지의 길[二路]․두 가지의 등불[二燈]․두 가지의 밝음[二明]․두 가지의 횃불[二炬]․두 가지의 광명[二光]․두 가지의 빛남[二曜]과 두 가지의 그림자[二影]의 글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동류인을 최후의 지위에 의거하여 은밀히 “어떤 때도 인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등무간연(等無間緣)에 있어서도 이 지위에 의거하여 은밀히 “어떤 때도 등무간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해야 하며, 등무간연이 온갖 지위[一切位] 에 의거하여 “그때는 이 법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동류인에서도 온갖 지위에 의거하여 그와 같이 말해야 되니 두 가지의 글은 서로가 영향(影響)을 주면서 다 같이 두 가지의 뜻에 통하기 때문이
다.
[문] 『품류족론(品類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어
떤 것이 마음을 인으로 삼는 법이 아닌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과 같다.
[답] 거기서는 오직 끝에 마음을 인으로 삼는 법이 아닌 것을 말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아직 정성이생에 들지 못한 이면 모든 무루의 마음은 모두가 마음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 그가 만일 정성이생에 들면 오직 첫 무루의 마음만은 마음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지만 그 밖의 마음은 마음으로써 인을 삼지 않는 것이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 글은 동류인의 뜻이 어느 것인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오직 두 가지의 이생(異生)을 분별했을 뿐이니 반열반이 있는 법[有般涅槃法]과 반열반이 없는 법[無般涅槃法]이다. 그 글에는 비록 열반이 없는 법을 들지 않았다 해도 뜻은 이문(理門)으로 나타내 보인 것에 준하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어느 다른 이생은 결정코 정성이생에 들 것이다’라고 말했으므로 이 뜻을 말미암아 준하면 또한 ‘어떤 이생은 결정코 정성이생에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을 곧 열반이 없는 법이라 한다. 곧 이 열반이 없는 법을 “마음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품류족론(品類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 “혹은 고제(苦諦)가 유신견(有身見)으로써 인을 삼는 것이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논에서는 다만 미래의 유신견과 상응하는 고제를 제외한다는 것만 말했다. 그것에 미치는 말은 없다. 설령 그렇게 말했다 해도 이것은 외운 이[誦者]의 잘못일 것이다.
[문] 『식신족론(識身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 “과거의 오염된 안식(眼識)에서 있는 수면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것은 미래에 대하여 3구(句)의 말을 지어야 하며 곧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하면서 인(因)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제외된다. 그것은 뒤[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를 과거와 같이 말한 것은 따로 의취(意趣)가 있기 때문이니 바로 생기는 때[正生時]는 반드시 현재에 들면서 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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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변행이건 관계없이 정해진 것이며 그 밖의 아직 생기지 못한 것을 바라보면서 ‘앞’이라고 말해야 되고 이것에 대하여 그 밖의 것을 ‘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는 미래에도 4구(句)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미래에는 마음의 앞뒤가 있는 것이 과거와 동일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선 인(因)이 되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 함은 이것과 상응하는 수면이 이미 끊어진 것이다.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면서도 인이 되지는 못한다 함은 어느 동류(同類)와 변행(遍行)의 수면이 미래 세상에 있을 때에 미래 세상의 오염된 안식으로 반연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그의 인이 되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함은 이것과 상응하는 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것이다.
인이 되지 못하면서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어느 동류와 변행의 수면이 미래 세상에 있을 적에 이것을 반연하지 않거나 설령 반연한다 해도 이미 끊거나 또는 그 밖의 것을 반연하거나 또는 다른 수면이거나 또는 같은 세계의 변행 수면이 아니거나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시설족론(施設足論)』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는가? 그 논에서 “모든 법은 네 가지 일[四事]로써 결정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인(因)이라 함은 네 가지의 인이어서 상응인․구유인․이숙인․능작인을 말하고, 과(果)라 함은 세 가지의 과이어서 사용과(士用果)․이숙과(異熟果)․증상과(增上果)를 말하며, 소의(所依)라 함은 여섯 가지의 소의로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을 말하고, 소연(所緣)이라 함은 여섯 가지의 소연으로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법[法]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3세(世)에 결정되어 있기 때문
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문] 만일 미래 세상에 동류인과 변행인이 없고 과거와 현재에만 있다 하면 마땅히 인(因)이 없으면서 인이 있어야 하고 또한 마땅히 과(果)가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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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가 있어야 하리니 이렇게 되면 곧 3세7)가 있다는 종(宗)이 파괴될 것이다.
[답] 인정한다 해도 잘못은 없으니, 지위[位]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요, 체성[體]에서가 아니며 화합(和合)과 작용(作用)에서의 지위의 과(果)요 체성에서의 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위와 체성은 붙은 것도 아니고 여읜[離] 것도 아니어서 체성은 비록 한결같이 있다 해도 지위는 한결같은 것이 아니다. 때문에 동류인과 변행인은 본래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이므로 또한 허물은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미래 세상 동안에도 동류인이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뒤에서 말하는 6난(難)8)은 잘 통하겠지만 여기의 논의 글[論文]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하니 말한 여섯 가지 인[六因]은 모두가 그 밖의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동류인에 세력이 있어서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부여할 수[與果] 있다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했을 것이나 미래의 동류인은 세력이 없어서 과를 취하거나 과를 부여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동류인이 이미 나타나 있고 이미 화합하고 이미 작용이 있고 떠맡은 것이면 여기에서 말했을 것이나 미래의 동류인에는 이런 일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동류인으로서 이미 세간에서 행하는 모양이 환히 드러났다면 여기에서 말했을 것이나 미래의 동류인은 아직 세간에서 행하는 모양도 아니
7)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이 없다는 것은 그 작용이 없다는 뜻이요, 따로 동류인과 변행인 체(體)까지 없다는 뜻이 아니므로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답변이다.
8) 뒤에서 설하는[後說] 6난(難)이란, ①견온(見蘊)에서 어떤 때도 인(因)이 아님이 없다는 설(說). ②견온(見蘊)에서 그때에는 이 법이 이미 생긴[已生] 것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설. ③『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마음을 인(因)으로 삼는 것이 아닌 법에 관하여 말한 것. ④『품류족론』에서 미래의 유신견(有身見)과 그것과의 상응한 고제(苦諦)를 제외한다는 설. ⑤『식신족론(識身足論)』에서 미래의 염오(染汚)의 안식(眼識)도 그러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 ⑥『시설론(施設論)』에서의 4사결정설(事決定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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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분명하게 나타나지도 못한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문] 만일 미래의 세상에 동류인이 있다면 마땅히 두 개의 마음이 서로가 인이 된다는 허물이 있어야 한다.
[답] 네 가지의 행상[四行相]에 저마다 매여 속함[繫屬]이 있는 것처럼 그 밖의 법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허물은 없다. 미래 세상의 무상(無常)의 행상에는 네 가지의 행상이 있으면서 마땅히 간단없이 생겨야 하고 그것은 곧이어 닦을 것이면서 이것에 매여 속한 것이며 무상의 행상은 그것을 위하여 인이 되면서도 그것은 이것의 인이 아니니 이것에 매여 속하기 때문이다. 무상의 행상이 일어남에는 반드시 앞에 있게 되는 것이니 고(苦)․공(空)․무아(
無我)의 행상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 밖의 유위의 법은 이것에 유추(類推)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개의 마음이 서로가 인이 된다는 허물은 없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이는 미래 구지(九地)의 무루를 닦으며 닦는 무루는 모두가 이것에 매이고 속하는 것이며 뒤에 일어나는 그 밖의 지(地)의 성자의 도[聖道]가 앞에 나타나 있어도 다시는 미래의 무루를 닦을 수 없다. 그 밖의 성자의 도는 이것에 속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과거와 현재가 있어도 동류인이 아니어야 하리니 이것은 곧 여기에서 말한 “앞에서 생긴 선근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는 것을 어기고 해친다. 이런 허물은 있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미래의 세상에는 동류인이 없다”고 하는 것이 도리에 있어서 옳다 하겠다.
[문] 색법(色法)에는 동류인이 있는가?
[답] 외국(外國)의 모든 논사는 “온갖 색법에는 동류인이 없지만 다만 그 밖의 다른 연(緣)을 빌려서 화합하는 힘으로 일어난다. 현실에서 보면 땅을 파되 깊이 백 주(百肘)를 넘으면 그로부터 진흙이 나오는데 햇빛을 쬐고 바람이 불며 뒷날 비를 맞게 되면 거기서 곧 풀이 나게 된다. 또 현실에서 보면 지붕이나 산봉우리에는 먼저 씨를 뿌린 일이 없는데도 풀이나 나무가 생기기 때문에 색법에는 동류인이 없는 것인 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논의 대종온(大種蘊)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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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거기서 “과거의 대종(大種)과 만들어진 물질[造色]은 미래 등의 대종과 만들어진 물질을 위하여 인이 되고 증상(增上)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내가 다른 논[他論]에 대하여 무슨 일로 회통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반드시 회통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증상연(增上緣)의 힘에는 가까운 것이 있고 먼 것이 있으며 이 몸에 있는 것이 있고 다른 몸에 있는 것이 있다. 만일 가까우면서 이 몸에 있는 것이면 인이 된다고 말할 것이요 만일 멀면서 다른 몸에 있는 것이면 증상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는 “색법에도 동류인이 있으며 오직 첫 무루만이 제외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비록 대종온의 말에는 통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이끈 일은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답] 파놓은 진흙 안에는 먼저 종자가 있었으나 그 밖의 다른 연(緣)이 빠졌기 때문에 풀이 아직 나지 못했었으나 뒤에 여러 연을 만나고 나서야 곧 풀이 나게 된 것이다. 또 저 진흙더미나 지붕이나 산봉우리에서 풀이 난 것은 바람이 불어서거나 새가 물고 왔거나 하여 종자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8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⑩
어떤 다른 논사는 “색법(色法)에 비록 동류인(同類因)이 있으나 이 몸에 있고 다른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비슷하면 인(因)이 되고 비슷하지 않으면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謁羅藍位)1)는 이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位)를 위해서 연(緣)은 되지만 인(因)은 아니며, 나아가 이 몸의 노위(老位)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해서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위와 위[位位]의 안의 처음의 색[初色]에는 원인이 없고 나중의 색[後色]에는 결과가 없게 된다.
1) 태내오위(胎內五位)가 있다. 어머니 태에 들어서부터 출생할 때까지의 266일 간을 5위(位)로 나눈 것이다. ①갈라람위(羯羅藍位, Kalalaṃ)이니 응활(凝滑)․화합(和合)이라 번역하며 태에 들어간 지 첫 7일 간이다. ②알부담위(額部曇位, Arbudaṃ)이니 포결(皰結)․포(泡)라 번역하며 둘째 7일 간이다. ③폐시위(閉尸位, Peśī)이니 육단(肉團)․혈육(血肉)이라 번역하며 셋째 7일 간이다. ④건남위(鍵南位, Ghanaḥ)이니 견
육(堅肉)이라 번역하며 넷째의 7일 간이다. ⑤발라사카위(鉢羅奢佉位, Praśākhā)이니 지절(支節)이라 번역하며 다섯째의 7일부터 출생할 때까지이다. 다시 태외오위(胎外五位)가 있다. 사람의 일생을 5위로 나눈 것이다. ①영해위(嬰孩位)이니 출생에서부터 6세까지이다. ②동자위(童子位)이니 7세로부터 I5세까지이다. ③소년위(少年位)이니 16세로부터 30세까지이다. ④성년위(盛年位)이니 31세로부터 40세까지이다. ⑤노년위(老年位)이니 41세
이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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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 있고 다른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된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 몸의 알부담위(頞部曇位)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니며, 나아가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앞의 모든 위(位)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갈라람위에서 처음의 색에는 원인이 없고 노위에서 나중의 색에는 결과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하면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으면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과 다른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으며, 이 몸의 노위는 이 몸과 다른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그 밖의 다른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되지만 앞의 위[前位]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이 몸의 알부담위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알부담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은 아니며,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앞의 모든 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이 아닌 것과 같다”
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색법에 비록 동류인이 있으나 이 몸에도 있고 다른 몸에도 있다. 서로 비슷해도 인이 되고 비슷하지 않아도 인이 되지만 이 몸의 앞의 위[前位]를 위하여 인이 되지 않는다.
이 몸의 갈라람위는 이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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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이 몸의 알부담위는 이 몸의 알부담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이 몸의 갈라람위를 위하여 연은 되지만 인은 아니다. 나아가 이 몸의 노위는 이 몸의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다른 몸의 갈라람위와 나아가 노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이 몸의 앞의 모든 위를 위하여 연은 되나 인은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다른 몸의 10위(位)의 하나하나는 모두 다른 몸의 10위와 이 몸의 10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 몸의 10위의 하나하나는 모두 이 몸의 10위와 다른 몸의 10위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니, 나중 위[後位]에 이미 생긴 법은 앞의 위[前位]에 생기지 않은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바깥 부분[外分]의 모든 색을 서로 바라보면서 동류인이 되는 것도 이런 도리대로 말해야 한다.
또 선(善)의 5온(蘊)2)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고 오염된[汚染] 5온도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며 무부무기(無覆無記)의 5온도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는 것이니 성품의 종류가 똑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色蘊)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무부무기의 색온은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못하니 세력이 하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색온은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나니 뛰어난 법은 하열한 법의 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부무기의 4온은 무부무기의 색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고 무부무기의 색온도 무부무기의 4온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나니 세용(勢用)도 하열하고 종류도 각각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부무기의 4
2) 5온(蘊) 중의 색온(色蘊)에도 선(善)․악(惡)․무기(無記)의 3성(性)이 있되 무표색(無表色)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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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무부무기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숙생(異熟生)이요, 둘째는 위의로(威儀路)며, 셋째는 공교처(工巧處)요, 넷째는 통과품(通果品)이다. 차례대로 4․3․2․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네 가지는 차츰차츰 동류인이 되는 것이니 동일한 계박(繫縛)이요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행선(加行善)은 서로가 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앞의 설명[前說]을 옳다고 하겠다.
오염된 법[汚染法]에는 9품(品)이 있다. 하하(下下)․하중(下中)․하상(下上)․중하(中下)․중중(中中)․중상(中上)․상하(上下)․상중(上中)․상상(上上)이다. 이 9품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것에 9품이 있는가?
[답] 대치(對治)에 9품이 있기 때문에 오염된 법에도 9품이 있다. 하하의 도(道)를 닦아서 상상의 번뇌를 대치하며 나아가 상상의 도를 닦아서 하하의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다. 또 현행(現行) 때문에 역시 9품이 있다. 모든 번뇌가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 그것은 하하품이기도 하고 혹은 그것이 상상품이기도 하다.
모든 불선(不善)도 이숙(異熟)을 말미암아 9품이 있는 까닭으로 9품을 건립한다.
선법(善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득선(生得善)이요, 둘째는 가행선(加行善)이다. 생득선은 생득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또한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가행선은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만 생득선을 위하여 동류인은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 선법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동일한 계박이면서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가행(加行)을 닦으면서 하열한 법에 물러나지 말라. 이 때문에 앞의 설명[前說]은 도리로 보아 옳다 하겠다.
어떤 이는 “선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선(加行善)이요, 둘째는 이염선(離染善)이며, 셋째는 생득선(生得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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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생득선은 세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이염선은 두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생득선은 동류인이 아니니 이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가행선은 가행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그 밖의 나머지 두 가지는 동류인이 아니니 이것은 다 같이 하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생득선의 법에는 다시 9품(品)이 있으니 하하(下下)에서 상상(上上)까지이다. 이 9품은 차츰차츰 동류인이 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9품이 있는가?
[답] 현행(現行)에 9품이 있기 때문이며 또 이숙(異熟)에도 9품이 있기 때문이다.
이염선과 가행선에도 다 같이 9품이 있으니 하하에서 상상까지이다. 이 가운데서 하하는 9품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하중은 8품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며 나아가 상상은 오직 상상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等]과 더 뛰어난 것[勝]을 위하여 인이 될 뿐이며 하열한 법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가행선의 법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소성(聞所成)이요, 둘째는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는 수소성(修所成)이다. 문소성의 선(善)3)은 세 가지를 위하여 동류인이 되고, 사소성의 선은 오직 사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문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열하기 때문이며 수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세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선은 오직 수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면서 문소성을 위하
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하열하기 때문이요, 사소성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 또한 하열하기 때문이며 세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선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난(緩)․정(頂)․인(忍)․세제일범(世第一法)이다. 차례대로 4․3․2․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는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욕계의 통과심(通果心)에 네 가지가 있으니 초정려의 과(果)에서 제4 정
3) 문․사소성(開思所成)의 선(善)은 욕계수(欲界修)이지만 수소성(修所成)의 선은 색계수(色界修)이므로 세계를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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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의 과까지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차례대로 4․3․2․1을 위하여 동류인이 된다.
어떤 이는 “이 네 가지가 서로 인이 되는 것이 아니니 정려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네 가지는 차츰차츰 인이 된다. 동일한 계박이면서 동일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처음 설명[初說]이 옳다고 하겠다. 동일한 자리[地]이기 때문이요 가행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초정려 등의 모든 통과심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초정려에는 모든 식신(識身)이 있고 변화심(變化心)이 있는데 서로가 인이 되는가?
[답] 모든 식신은 변화심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나 변화심은 식신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앞의 모든 뜻에 의거하여 마땅히 문답(問答)을 만들어야 한다.
[문] 혹시 앞에 생긴 법[前生法]이 뒤에 생긴 법[後生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세계[界]가 같지 않은 것이다.
[문] 혹시 같은 세계에서 앞에 생긴 법이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자리[地]가 같지 않은 것이다.
[문] 혹시 같은 자리에서 앞에 생긴 법이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유루(有漏)는 무루(無漏)에 대해서요, 무루는 유루에 대해서다.
[문] 혹시 유루의 앞에 생긴 법이 유루의 뒤에 생긴 법을 위하여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부(部)가 같지 않거나 혹은 성품이 같지 않거나 혹은 뛰어난 것이 하열한 것에 대해서이니 앞에 생긴 무루가 뒤에 생긴 무루에 동류인이 되지 않는 것은 뛰어나고 하열한 것에 대한 관계이다.
[문] 모든 동류인이 만일 과를 주는[與果] 것이면 역시 과를 취하는[取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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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가?
[답] 만일 과를 주는 것이면 반드시 과도 취하는 것이다. 만일 과를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과를 주겠는가? 어떤 것은 과를 취해도 과를 주지 않는 것이 있다. 아라한의 최후의 모든 온(蘊)이니 이것은 총체적인 설명[總說]이다. 만일 따로따로 설명[別說]하면 선(善)과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에 의거하여 많은 4구(句)가 있다.
[문] 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마다 역시 과를 주는가?
[답]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선근을 끊을[斷善根] 때의 최후에 버리게 되는 득(得)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근이 계속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선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선근을 끊지 않는 그 밖의 지위[位]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것에서 제외한 것들이다.
[문] 불선의 동류인은 만일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최후에 버리게 되는 득(得)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욕염을 여읜 데서부터 물러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불선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그 밖의 지위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유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비상비비상처의 염(染)을 여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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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최후에 버리게 된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읜 데서부터 물러날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버리게 된 유부무기의 득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아직 비상비비상처의 여의지 못한 때의 그 밖의 지위에서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무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 과를 줄 때 반드시 과를 취하지만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기도 한다. 아라한의 최후의 모든 온이다.4)
이미 성취(成就)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였으므로 이제는 현행(現行)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또 이미 상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차별을 분별했으므로 이제는 상응하는 법[相應法]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문] 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5) 선한 마음의 무간(無間)에 불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불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의
4)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은 착한 마음에도 나쁜 마음에도 성인의 마음에도 모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과(果)를 주면 반드시 과를 취하나 다만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의 마음에서만은 모든 온(蘊)이 소멸하기 때문에 과를 취하는 것만이 있을 뿐 과를 주는 일은 없다.
5) 선심(善心)은 전위(前位)의 선심의 결과인 점에서는 취과(取果)하나 후위(後位)에 있어서 스스로가 성질을 달리하는 불선(不善)이나 무기(無記)의 마음을 내는 점에서는 여과(與果)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에 반하여 불선 또는 무기의 마음에 이어 일어나는 선심은 과거의 선심으로부터 등류(等流)인 점에서 과거의 선심의 여과이지만 과거의 선심은 과거에 이미 취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취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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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에 선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間]하는 선의 마음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선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問斷)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불선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불선의 마음의 무간에 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의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불선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던 불선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불선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유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또한 과를 주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유부무기의 마음의 무간(無間)에 선이나 불선이나 무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이나 불선이나 무부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유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던 유부무기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유부무기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무부무기의 동류인은 과를 취할 때 역시 과를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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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나 과를 주지 않는다. 무부무기의 마음의 무간에 선이나 염오[染汚]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주나 과를 취하지 않는다. 선이나 염오의 무간에 무부무기의 마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곧 과거에 머무르면서 간여하는 무부무기의 마음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기도 하고 과를 주기도 한다. 무부무기의 마음이 상속하면서 간단이 없는 지위이다.
어떤 때에는 과를 취하지도 않고 과를 주지도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이미 상속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였으므로 이제는 찰나(刹那)에 의거하여 과를 취하는 것과 과를 주는 것의 차별을 분별하겠다.
1찰나의 마음의 뒤에는 20찰나의 마음이 있으면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가운데서는 4구를 만들 수 있다.
우선 선의 동류인의 제1구(句)는 상수(上首) 찰나의 선심(善心)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첫 찰나의 선심의 찰나를 제외한 그 뒤의 19찰나의 선심이다.
제2구는 뒤의 19찰나의 선심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곧 과거에 머무르는 상수의 선심이다.
제3구는 곧 상수의 선심이 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첫 찰나의 선심이다.
제4구는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선의 동류인의 4구처럼 불선과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의 동류인에 머무는 것에 따른 4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혹시 한 찰나 동안에 동류인을 얻으나 그의 인(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그의 인을 얻으나 동류인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얻고 그의 인도 얻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얻지 못하고 그의 인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위의 사문과(沙門果)에서 물러나 예류과(預流果)에 머무를 때에
이런 4구가 있다.
동류인을 얻으나 그의 인을 얻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첫 찰나의 도류지(道類智)를 얻으나 그의 인을 얻지 못한 것이니 견도(見道)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을 얻으나 동류인을 얻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예류과를 얻으나 과거의 예류의 승과도(勝果道)는 얻지 못한 것이니 예류의 승과도는 예류과로써 인을 삼아 위의 사문과를 위하여 동류인을 짓기 때문이다.
동류인도 얻고 그의 인도 얻는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첫 찰나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찰나에 상속하는 예류과를 얻은 것이다.
동류인도 얻지 못하고 그의 인도 얻지 못한다 함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혹시 한 찰나 동안에 동류인을 아나 그의 소연(所緣)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그의 소연을 아나 동류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알고 그의 소연도 아는 것이 있는가? 혹은 동류인도 알지 못하고 그의 소연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견도의 도법지(道法智)에 머무를 때에 이런 4구가 있다.
동류인을 아나 그의 소연을 알지 못한다 함은 그때에 과거의 고(苦)․집(集)․멸(減)을 반연하는 삼법지품(三法智品)을 아는 것이다.
그의 소연을 아나 그의 동류인을 알지 못한다 함은 미래의 사법지품을 아는 것이다.
동류인도 알고 그의 소연도 안다 함은 과거의 도법인품(道法忍品)을 아는 것이다.
동류인도 알지 못하고 그의 소연도 알지 못한다 함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들이다.
[문] 동류인의 힘[力]에는 더하거나[增] 덜함[減]이 있는가?
[답] 있다. 만일 오래도록 닦아 익히면 인의 힘이 곧 더하는 것이요, 만일 오래도록 닦아 익히지 않으면 혹은 손해(損害)를 만날 때에 인의 힘은 곧 줄어진다.
우선 불선(不善) 가운데서 인의 힘이 더한 것은 마치 구수(具壽) 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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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迷祗迦)가 일찍이 숲 속에 있으면서 정려를 닦아 익힐 때에 한 나무 아래에 앉았더니 욕심(欲尋)이 나타나 일어나므로 마음에 싫증을 내면서 곧 그곳을 버리고 다른 나무 아래에 가 앉았더니 에심(恚尋)이 다시 일어나므로 마음에 싫증을 내면서 다시 그곳을 버리고 다시 다른 나무 아래에 가 앉았더니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났다고 한 것과 같다.
그 구수는 일찍이 이 땅에서 큰 나라의 왕이었을 적에 이곳에서 5락(樂)을 스스로 즐기며 모든 욕락(欲樂)을 받았던 곳이라 이제 그곳에 앉자마자 욕심을 일으킨 것이요, 또 이곳에서 중생들의 머리․귀․손․발을 베고 잘랐으므로 이제 그곳에 이르자마자 에심을 일으킨 것이며, 또 이곳에서 중생들을 마구 부리면서 모든 일을 시켰고 속박하고 매를 쳤었음으로 이제 그곳에 이르자마자 해심을 일으킨 것이다.
아난(阿難) 존자가 성(城)에 들어가 걸식할 적에 마등가(厚登伽) 여인이 보고 벌써 탐(貪)을 내면서 따라다니며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이 여인은 과거 오백생(五百生) 동안에 아난의 아내로 있었기 때문이니 이제 잠시 보고서도 욕심(欲尋)을 일으켜 쫓아다니며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과거의 인의 힘의 증상(增上)을 말미암아서요, 혹은 현제 익힌 모든 번뇌의 인의 힘의 증상으로 같은 종류나 다른 종류가 차츰차츰 서로 생기는 것이 있다.
불선의 법에서처럼 선․무기의 법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시발라(尸拔羅)가 오래도록 보시[施]를 익혔기 때문에 갓 태어나자마자 그의 부모에게 “지금 이 집 안에는 어떠한 재보(財寶)들이 있습니까? 저는 가져다 온갖 빈궁한 이들에게 보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이와 같은 것들의 자세한 것은 경에서의 말씀과 같다.
[문] 동류인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과거․현재의 온갖 유위의 법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동류인이라 하는가? 동류(同類)란 무슨 뜻인가?
[답] 종류(種類)가 같다[等]는 뜻이 동류의 뜻이요, 계지[界地]가 같다는 뜻이 동류의 뜻이며, 부류(部類)가 같다는 뜻이 동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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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류인을 오직 과거와 현재의 두 세상에만 통할 뿐이며 등류과(等流果)가 있다.
[論] 어떤 것이 변행인(遍行因)6)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正理]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온갖 번뇌는 모두 변행(遍行)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번뇌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非遍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5부(部)의 번뇌에는 모두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오직 견고(見苦)와 견집(見執)에서 끊을 번뇌에만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견고와 견집에서 끊을 온갖 번뇌는 모두가 변행이요, 견멸(見滅)과 견도(見道)에서 끊을 온갖 번뇌는 모두가 무루의 연[無漏緣]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견고․견집에서 끊을 번뇌
6) 변행인(遍行因)은 오로지 번뇌의 등기(等起)관계를 밝힌 것이어서 견혹(見惑) 중 특히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하의 11종을 변행혹(遍行惑)이라 한다. 곧 욕계에 나아가서 말하면 고제를 반연하는 번뇌에 10종[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 있고 집제를 반연하는 번뇌에 7종(탐․진․치․만․의․사견․견취견]이 있는 중에서 특히 7견(見)[고제 하의 오
견과 집제 하의 2견]과 3의[고제․집제 하의 의(疑)]와 두 무명[고제․집제 하의 치(癡)]의 11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위의 두 세계[上二界]에도 있는 것이므로 삼계의 것을 합하면 33종이 된다. 이들 11종의 번뇌는 유독 자부(自部)의 번뇌만이 아니고 4제(諦)․수도(修道)의 5부(部)에도 미치어 온갖 번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을 변행이라 한다. 또 이 11종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遍執見)을 제외한 나머지 9종은
상계(上界)에도 반연하는 것이어서 9상연(上緣)의 혹(惑)이라고 일컫는다. 이 문단에서는 먼저 이 변행혹에 관한 일반적인 의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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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견멸․견도에서 끊을 번뇌에도 유루의 연[有漏緣]7)이 있고 무루의 연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모든 번뇌가 삼계(三界)에 통하는 것이면 모두 변행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번뇌가 삼계에 통하는 것에도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또 어떤 이는 “변행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명(無明)이요, 둘째는 유애(有愛)이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연기(緣起)의 근본을 변행이라 한다. 무명은 전제(前際)의 연기의 근본이요, 유애는 후제(後際)의 연기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것이 변행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유애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모든 번뇌로서 5부(部)에 통하는 것을 변행이라 한다. 이것은 무명과 탐(貪)․진(瞋)․만(慢)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지만 탐․진․만에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닐 뿐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다섯 가지 법은 변행이다. 무명과 애(愛)와 견(見)과 만과 심(心)이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게송으로 말한다.
다섯 가지의 변행 법이 있어서
7) 5부(部)의 수면(隨眠)의 대부분은 유루(有漏)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나 그 중에는 무루(無漏)의 법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을 무루연(無漏緣)의 혹(惑)이라 한다. 곧 멸제(滅諦)를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邪見)․의(疑)․무명(無明)과 도제(道諦)를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의․무명이 이 6종이다. 대개 이것들은 멸․도에 관한 미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6무루연의 혹 또는 친미(親迷)의 혹이라고도 한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비록 견멸(見滅)․견도(見道)에서 끊을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으로 멸․도를 반연한 것이 아니면서 위의 무루연의 혹을 반연하는 것이면 이것을 유루연(有漏緣)의 혹 또는 중미(重迷)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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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괴로움을 널리 내나니
이를테면 무명과 애와 견과
만과 심 이 다섯 가지이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명과 견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한결같이 변행이 아닐 뿐이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등의 갖가지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변행인인가?
[答] 앞에서 생긴[前生]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뒤에 생긴[後生] 자기 세계[自界]의 견집(見集)․견멸(見滅)․견도(見道)․수도에서 끊어야 할[修所斷] 수면과 상응하는 법[相應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고, 과거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미래와 현재의 자기 세계의 견집․견멸․견도․수도에서 끊어야 할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현재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변행의 수면은 미래의 자기 세계의 견집․견멸․견
도․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 견고에서 끊을 것처럼 견집에서 끊을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것을 변행인이라 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서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라는 말에 이미 그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 무슨 연유로 ‘과거’라는 자기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가?
[답] 뒤의 법은 앞의 인(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어떤 이는 ‘과거의 뒤의 법도 앞의 법의 인이 되는가?’라고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이므로 만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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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런 의심은 곧 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은 과거에 앞뒤의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과거는 과거를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혹은 ‘과거의 모든 법은 동시에 차츰차츰 변행인이 되는가?’라고 의심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나 만일 ‘앞에서 생긴 것은 뒤에 생긴 것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고 말하면 이런 의심은 쉬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자기 부[自部]는 자기 부에 대하여 변행인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한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만일 없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부[他部]에 대해서는 있는데 자기 부에서는 없는가?
[답] 역시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역시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따로의 의취(意趣)가 있어서이며 이루어지지 않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서 변행인이 있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해야 할 필요가 없고 만일 다른 부에서 변행인이 있다 하면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뒤섞임이 없는[無雜] 변행인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인이 있다. 변행인과 동류인이다. 그 뜻이 뒤섞여 어지럽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나 다른 부의 변행인은 오직 하나만이라 뜻이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또 뒤섞임이 없는 증장의 문[增長門]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자기 부에서는 두 개의 문의 증장이 있다. 동류인의 문과 변행인의 문이다. 그 뜻이 뒤섞이고 어지럽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나 다른 부는 오직 변행인의 하나의 증장의 문만이라 뜻에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다.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앞에 생긴 것[前生] 등은 수면만을 말하면서 뒤에 생긴 것[後生] 등은 겸하여 상응하는 법까지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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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앞에서 생긴 것 등에서도 상응하는 법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상사상속(相似相續) 사문의 뜻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는 “변행의 수면은 오직 수면을 위해서만 변행인이 되고 그것의 상응하는 법은 오직 수면의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그의 뜻을 막고 변행의 수면은 수면과 상응하는 법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그의 상응하는 법은 수면의 상응하는 법과 수면을 위하여 변행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문] 변행의 수면은 모든 수면과 구유법(俱有法) 등에서도 변행인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역시 변행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지 않는가? 만일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상응법에서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구유법 등에서는 그렇지 않는가?
[답] 역시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온갖 오염된 법[汚染法]을 위해서 모두가 변행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그의 상응법은 그의 수면과 동일한 소연(所緣)이요 동일한 행상(行相)이어서 극히 서로 가깝다. 이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만 생기는 것[生] 등은 그렇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자기 세계[自界]라 함은 욕계는 오직 욕계를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색계와 무색계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세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자리[自利]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니 계박(繫縛)이 따로이기 때문이다. 초정려는 오직 초정려만을 위하여 변행인이 되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리 안에서는 처(處)도 따로요, 부(部)도 따로이면서 역시 차츰차츰 변행이 될 수 있음은 계박이 같기 때문이다.
또 ‘과거’ 등을 말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체(體)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요, 현재는 바로 유위(有爲)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을 말하는 것처럼 견집에서 끊을 것도 그러하니 체의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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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변행의 수면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욕계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견고에서 끊어야 할 다섯 가지 견해[五見]8)와 의(疑)와 무명(無明)과 견집에서 끊을 사견(邪見)과 견취(見趣)와 의와 무명이다. 색계와 무색계에 있어서도 각각 열한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무명이라 함은 다섯 가지 견해와 의와 상응하는 것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98수면9) 중의 33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문] 견고․견집에서 끊어야 할 무명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거기서는 33은 변행이고 65는 변행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답] 서방(西方) 존자가 외고 있는 책[本]에 “98의 수면 중에서 27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며 6은 분별해야 한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무명에는 변행도 있고 변행이 아닌 것도 있다. 어떤 것이 변행인가?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지 않는 무명이다. 어떤 것이 변행이 아닌가?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뜻에서는 좋다 하겠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어떤 것이 변행인가?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과 상응하는 수면이어서 곧
8) 견고(見苦)에서 끊을 다섯 가지 견해[五見]라 함은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 다섯 가지 견해이다.
9) 98수면(隋眠)은 98사(使)라고도 하며 삼계(三界)에 걸쳐 사제(諦)․수도(修道)의 5부(部)에 관한 번뇌의 총칭이다. 98이라 함은 온갖 번뇌의 근본인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신견(身見)․변견(遍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 10수면을 삼계(三界) 5부(部)에 배당한 것이다. 곧 욕계의 고제(苦諦) 아래 10종과 집제(集諦)․멸제(滅諦) 아래 각기 7종[10수면에서 신견․변견․계금취견을 제
함]과 도제 아래 8종[10수면에서 신견 변견을 제함]과 욕계의 수도 아래 4종[탐․진․만․의]을 합하여 욕계에 36종이 있고 색계․무색계에는 진(瞋)이 없으므로 5부에서 이를 제하면 각 31종이 있다. 그러므로 욕계 36종과 색계 31종과 무색계 31종을 합하면 98종이 된다. 이 98수면은 곧 견혹(見惑) 88종과 수혹(修惑) 10종을 합한 것이다. 이 중에서 삼계에 각각 10종의 변행(遍行)이 있으므로 변행혹(遍行惑)은 33종이며 나머지
65종은 비변행혹(非遍行惑)이라는 것이 『품류족론(品類足論)』의 설(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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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무명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 말을 뜻에서는 좋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가습미라국(迦濕漏羅國)의 모든 논사는 이렇게 외고 있지 않는가?
[답] 역시 이렇게 외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따로의 의취가 있어서이니 그의 대부분은 변행이기 때문이다.
견고에서 끊을 것에는 열 가지 무명이 있다. 일곱 가지는 변행이니 곧 다섯 가지 견해와 의(疑)와 상응하는 것과 불공무명이요, 세 가지는 변행이 아니니 곧 탐(貪)․진(瞋)․만(慢)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견집에서 끊을 것에는 일곱 가지의 무명이 있다. 네 가지는 변행이니 곧 두 가지의 견해[二見]와 의에 상응하는 것과 그리고 불공무명이요, 세 가지는 변행이 아닌 것이니 곧 탐․진․만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또 이 나라에서 외우고 있는 33은 변행이요, 65는 변행이 아니란 것에서의 무명은 모두가 불공무명이어서 오직 변행이냐 변행이 아니냐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自力]으로 일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상응무명(相應無明)에는 73이 있다. 27의 변행과 56의 변행이 아닌 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의 힘[他力]에 따라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곧 또한 그 성품은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변행의 수면[遍行隨眠]이라 하는가? 변행이란 무슨 뜻인가?
[답] 온갖 것을 반연한다[一切緣]는 뜻이 변행의 뜻이요, 반연하는 힘을 지닌다[緣力持]는 뜻이 변행의 뜻이다. 반연하는 힘을 지닌다고 함은 널리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본래의 온갖 것[一切]이 온갖 것[一切]에 온갖 것[一切]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처음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갖추어진 9품(品)을 일으킨 것을 말하고, 중간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온갖 유정들은 모두 일으키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나중의 ‘온갖 것’은 끝없는 때로부터 온갖 유루(有漏)의 일을 두루 반연하면서 일으켰기 때문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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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론(施設論)』에서 “어떤 이생(異生)도 오랜 세상으로부터 유루의 법에 대하여 나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내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단(斷)․상(常)을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없다고 부정하기도 하며 혹은 청정[淨]하고 해탈(解說)하며 벗어난다[出雜]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높고 뛰어나며 제일이라고 고집하기도 하며 혹은 의혹과 망설임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어리석음과 어두움과 무지(無知)를 일으키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본래의 온갖 것이 온갖 것에 온갖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또 법이 한 찰나 동안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5부(部)를 반연하고 5부의 인(因)이 되면서 5부의 법으로 하여금 소연(所緣)에 대하여 어리석게 하므로 변행이라 한다.
[문] 변행의 수면은 어떻게 하여 그 무루의 연[無漏緣]의 법으로 하여금 소연에 대하여 어리석게 하는가?
[답] 만일 나 등을 집착하면 법이 으레 그러하여 곧 나의 멸(滅)과 대치(對治)를 비방하면서 먼저 그 안에서 어리석어지며 그런 뒤에는 그것에 대하여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 법이 한 찰나 동안에 앞에 나타나 있을 적에 5부를 반연하고 5부의 인이 되면서 5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므로 변행이라고 한다.
[문] 변행 수면의 상응하는 법[相應法]과 구유의 법[俱有法]도 변행인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역시 변행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만 33만이 변행이라 하는가? 만일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상응과 구유의 법에는 변행인도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도 있다 하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변행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상응과 구유의 법에는 변행인도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도 있다 하는가?
[답]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에는 수면(隆眠)이 있고 수면 아닌 것이 있는 것처럼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에 변행인이 있고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다하여 다시 허물이 있겠는가?
[評] “그것도 변행인이니 인(因)이라는 뜻이 통하기 때문이며 상응(相應)과 구유(俱有)는 동일한 과(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33만이 변행이라고 말하는가?
[답] 그 말[說]은 다만 98수면 중에는 몇 가지가 변행이고 몇 가지가 변행이 아닌가의 것만을 분별하려고 할 뿐이어서 통틀어 변행인의 뜻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난 것은 아니다.
또 변행의 수면은 세 가지의 일[三事]을 갖추었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첫째는 5부(部)의 법에 대하여 두루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5부의 법에 대하여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5부의 법에 대하여 두루 인(因)이 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저 상응하는 법에서는 다만 두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이니 두루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것은 제외된다. 저 구유의 법에서는 다만 한 가지 일인 두루 인이 된다는 것만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문] 변행의 수면 등의 득(得)도 변행인인가?
[답] 승가벌소(僧伽筏蘇) 존자가 “만일 변행의 득이 변행이 아니라면 변행이 아닌 것의 득은 마땅히 변행이어야 하리니, 때문에 변행의 득도 변행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힐난[難]은 도리가 아니다. 물질[色]의 득이 물질이 아닌 것처럼 물질이 아닌 것[非色]의 득이 어찌 물질이겠는가? 그러므로 ‘변행의 득은 변행인이 아니다’라는 것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 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변행의 생김[生] 등의 모든 모양은 변행인이면서 그의 득(得)은 아닌 것인가?
[답] 생김 등의 모든 모양은 변행의 법과는 동일한 결과이어서 언제나 서로가 따르고 서로 여의지 않으며 앞뒤도 없으면서 극히 친근하기 때문에 또한 그것은 변행인이지만 득과 변행은 동일한 결과도 아니요 언제나 서로가 따르지도 않으며 서로가 여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앞이 되기도 하고 혹은 뒤가 되기도 하면서 극히 친근하지 않은 것은 마치 껍질이 나무에 대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그 득은 변행인이 아니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견고(見苦)․견집(見集)에서 끊을 법에서만 변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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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이 있다고 세우면서 견멸(見滅)․견도(見道)에서 끊을 법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은가?
[답] 구(舊) 아비달마 논사가 “이것은 그 족류(族類)이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모든 법은 변행 수면의 족성(族姓)이요, 근본(根本)이며 태어난 땅이요, 집이지만 견멸․견도에서 끊을 모든 법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 수면은 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모두가 동일한 뜻[意]이요, 동일한 일을 하고[所作] 있기 때문에 지극히 견고하며 견고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만 견멸․견도에서 끊을 법은 동일한 뜻도 아니요,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하열하며 지극히 하열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
마치 성읍(城邑)의 사람들이 만일 동일한 뜻으로 동일한 일을 하면 성읍의 주(主)나 그 밖의 다른 원수나 적이 감히 항복시킬 수 없지만 만일 그 여러 사람들이 동일한 뜻이 되지 못하고 하는 일도 각각 다르다면 항복하게 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 아견(我見)을 멋대로 가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일 아견이 있으면 유루의 법이 상속하면서 치성하므로 변행을 세워야 한다. 견집에서 끊을 것은 비록 아견은 없다 하더라도 아견의 모든 법을 자라게 하는 것이 있으나 견멸․견도에서 끊을 법 안에는 이러한 일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유루의 인과(因果)의 일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다 같이 유루의 인과의 일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에 변행을 세우게 되나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소연(所緣)에 대하여 반드시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모두 유루를 반연하며 유루를 반연함에 따라 점차로 더욱 자라게 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달을 볼 적에 눈[眼根]을 더욱 더 뜨면서 보는 것과 같다.
또 견멸․견도에서 끊을 수면은 혹은 유루를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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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반연하기도 하되 무루를 반연할 때 어떤 소연에 따라 점차로 줄어지게[損滅] 되는 것은 마치 사람이 해를 볼 적에 눈을 덜 뜨면서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는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두 가지의 수면[二種隨眠]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은 다 같이 두 가지 문을 말미암아 수면의 일을 짓는다. 첫째는 소연(所緣)을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상응(相應)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견멸과 견도에서 끊을 수면은 두 가지 문을 말미암아 수면의 일을 짓기도 하고 상응만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변행의 수면을 건립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안에서는 결정되어 두 발[二足]을 안정하게 디디기 때문이니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부(部)에는 모두 두 가지의 도[二種道]가 있기 때문이다. 견고․견집에서 끊을 부(部) 안에는 변행이 있고 변행이 아닌 것이 있으며 견멸․견도에서 끊을 부 안에는 유루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이 있기 때문에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온갖 수면은 모두가 이 둘[二]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면의 온갖 것은 모두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가 속한 곳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오직 여기서만이 변행의 수면이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견고․견집이면 유루의 과[有漏果]의 인(因)이지만 견멸․견도에서 끊을 모든 법의 근본은 연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그것에는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책망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변행 수면은 반드시 두루 반연할 수 있으나 견멸․견도에서 끊을 법 안에서는 두루 반연하는 것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견고․견집에서 끊을 탐(貪)․진(瞋)․만(慢)은 변행이 아닌가?
[답] 그것에는 모두 변행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변행이란 온갖 것을 반연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세 가지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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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세 가지는 자상(自相)의 번뇌에 속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공상(共相)의 번뇌에 속한 것이라야 변행을 세울 수 있다. 어떻게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자상의 번뇌에 속하는가? 탐(貪)을 일으킨 이는 혹은 저 몸에 대해서 하면 이 몸에 대해서는 하지 못하고 이 몸에 대해서 하면 저 몸에 대해서는 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모든 몸의 부분에서도 저마다 다른 것이니, 진․만을 일으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상이다.
유신견(有身見) 등은 한 찰나 동안에 통틀어 한 세계[一界]나 한 갈래[一趣]에 나는 것[生] 등에 대하여 나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내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또 나아가 어리석고 어둡고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그것은 공상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주 왕성하기[識盛]가 어렵기 때문이다. 탐․진․만은 아주 왕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니 반드시 아내나 재물이나 원수나 낮은 이나 적(敵)에 의거하여야 비로소 왕성하게 되기 때문이며, 변행 수면은 아주 왕성하기 쉬워서 저절로 상속하는 것이 강물이 흐르듯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견(見)․의(疑)․무명(無明)은 네 가지 진리[四諦]를 반연하게 되어 그 안에서는 변행 수면을 세울 수 있으나 탐․진․만의 세 가지는 이러한 일이 없다. 이 때문에 변행의 수면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견멸․견도에서 끊을 탐․진․만․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는 무루의 연이 아닌가?
[답] 책망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요, 원만하고 해치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기 때문이요,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며, 청정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탐 등은 무루의 연이 아니다.
욕계에는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다. 아홉은 다른 세계[他界]의 반연에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세계[自界]의 반연일 뿐이니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두 견해는 다른 세계를 반연하지 않는가?
[답] 오직 그러한 경계를 반연할 힘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견해는 오직 거친 법[麤法]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두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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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오직 거칠게 나타나서 실제로 보이는 모든 온(蘊)에 대해서만 나와 내 것을 집착하며 단(斷)과 상(常)을 헤아리거니와 만일 욕계에 태어나면 색계와 무색계의 미세한 모든 온에 대하여는 실제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색계에 나는 이는 욕계의 거칠게 나타나는 모든 온을 실제로 보면서도 어째서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가?
[답] 이미 염(染)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색계에 나는 이는 욕계의 온에 대하여 이미 염을 여의었기 때문에 비록 실제로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내 것 등을 집착하지 않는다.
또 상지(上地)의 번뇌는 하지(下地)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하지를 반연하지 않는가?
[답] 이미 그곳의 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미 하지의 염을 여읜 이라야 비로소 상지의 번뇌가 앞에 나타나는데 하지의 법에 대하여 이미 염을 여의었거늘 상지의 번뇌가 어찌 다시 그것을 반연하겠는가.
[문] 어떻게 반드시 하지의 염을 여의어야 상지의 번뇌가 비로소 앞에 나타나는 줄을 아는가?
[답] 『시설론(施設論)』에서 “6종의 비율의(非律儀)가 있다. 삼계계(三界繫)에 각각 두 가지씩이 있으니, 첫째는 상응하는 것[相應]이요, 둘째는 상응하지 않는 것[不相應]이다.
욕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여섯 가지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네 가지의 비율의도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욕계의 두 가지와 색계․무색계에서 각각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색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네 가지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세 가지의 비율의도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색계의 두 가지와 무색계의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무색계에서 상응하는 비율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두 가지의 비율의가 성취되면서 역시 앞에도 나타나는 것이니, 무색계의 두 가지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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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염의 법[染法]을 비율의라 한다. 이를 말미암아 반드시 하지의 염을 여읜 상지의 번뇌라야 비로소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번뇌는 색계․무색계는 반연하게 되는데 그 두 세계의 번뇌는 욕계를 반연하지 못하는 것인가?
[답] 욕계는 정계(定界)가 되지 못하고 수지(修地)도 아니며 이염지(離染地)도 아니어서 자기 세계의 수면을 조복할 수 없기 때문에 초월하여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수 없으나 색계와 무색계는 정계요 수지요 이염지이므로 자기 세계의 번뇌를 잘 조복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초월하여 하지를 반연할 수가 있다. 마치 사람이 처첩(妻妾)을 조복하지 못하면 곧 다른 이와 함께 비법(非法)의 일을 저지를 수 있으나 만일 잘 조복하면 나아가 눈으로 뒤도
돌아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비법을 저지르겠는가?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욕계에 나는 이는 위의 두 세계의 모든 온(蘊)에 대하여 망설이면서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이 아닌가? 그것은 쌓임[集]인가? 쌓임이 아닌가? 그것은 제일인가? 제일이 아닌가? 그것은 청정한가? 청정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욕계의 번뇌는 위의 세계를 반연하게 된다. 만일 상지에 태어나면 하지의 모든 온에 대하여 이미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망설이는 일이 없는 것이니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하지를 반연하지
않는다. 또 만일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가 욕계를 반연하게 된다면 마땅히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해야 하며 만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면 세계는 뒤섞이고 어지럽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니 거기의 번뇌는 욕계를 반연하지 않는다.
[문] 욕계의 번뇌가 비록 상계(上界)를 반연한다 하더라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상계의 번뇌는 무엇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가?
[답] 상계의 온(蘊)은 뛰어나므로 욕계의 번뇌가 비록 그것을 반연하며 일으킨다 하더라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욕계의 온은 하열하므로 상계의 번뇌가 만일 이것을 반연하여 일으킨다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할 것이다. 하천하고 못난 사람은 높고 훌륭한 이를 비록 실제로 보게 된다 하더라도 손해를 끼칠 수 없지만 만일 높고 뛰어난 이가 하천하고 못난 사람을 보면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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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어서 아홉은 다른 세계의 반연에도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세계에서만이 반연할 뿐이다. 무색계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세계에만 반연하고 다른 세계에 반연함이 없음은 상계가 없기 때문이요, 하계(下界)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시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능히 반연한다[能緣]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 일으킨다[現起]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상계(上界)로서 반연해야 한다는 것이 없거늘 어떻게 능히 반연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고 하겠다.
초정려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는 모두가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어서 아홉은 다른 자리[他地]의 반연에도 통하고 둘은 오직 자기 자리[自地]에만 반연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도 열한 가지의 변행 수면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자리만을 반연할 뿐이니 상지가 없기 때문이요, 하지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시 다른 자리를 반연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능히 반연한다는 것은 정해 있지만 실제로 일으킨다는 것은 정해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상지로서 반연해야 한다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능히 반연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없다’고 말한 것이 도리로 보아 옳다고 하겠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19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⑪
욕계의 견고(見苦)와 견집(見集)에서 끊을 사견(邪見)은 삼계(三界)의 고(苦)․집(集)을 반연할 수 있으나 일시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찰나에 욕계를 반연하고 또 다른 찰나에 색계․무색계를 반연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한 찰나 동안에 단번에 삼계의 고와 집을 반연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욕계를 반연할 때는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나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그것은 무엇 때문에 욕계를 반연한 때는 또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면서도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인가?
[답] 욕계는 그것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처소이나 색계와 무색계는 그것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처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욕계는 그것이 살고 있는 집이나 색계와 무색계는 그것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욕계에는 그것의 등류과(等流果)와 이숙과(異熟果)가 있으나 색계와 무색계에는 그것의 등류과와 이숙과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욕계에는 그것의 5부(部)의 변행과(遍行果)가 있으나 색계와 무색계에는 그것의 5부의 변행과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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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욕계에는 그것의 필경의 대치[畢竟對治]가 없으나 색계와 무색계에는 그것의 필경의 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 또 만일 그것이 한 찰나 동안에 단번에 삼계의 고와 집을 반연한다 하면 어떻게 하면서 반연하는가? 욕계를 반연할 때에 곧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처럼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도 그러한가?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욕계를 반연할 때도 그러한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욕계를 반연할 때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처럼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도 그러하다면 세계가 뒤섞이고 어지러울 것이며, 만일 색계와 무색계를 반연할 때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욕계를 반연할 때도 그러하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답] 번뇌는 자기 세계의 법을 반연하면서 소연(所緣)과 상응(相應)의 두 가지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자기 자리의 법[自地法]을 반연할 때는 반드시 소연과 상응과의 속박[縛]을 갖추기 때문이다.
만일 한 찰나 동안에 단번에 삼계의 고와 집을 반연할 때에 소연의 경계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도 있고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도 있다면 역시 상응하는 법에 있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 있고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도 있어야 한다.
이렇다면 이것은 인(因)의 도리에도 어긋나고 또한 상응하는 법도 파괴하는 것이니 이런 허물이 있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시기에 자기 세계와 다른 세계를 반연한다는 도리가 잘 성립된다.
이처럼 초정려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은 8지(地)의 고․집을 반연하면서도 일시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찰나에 초정려를 반연하고 다른 찰나에 위[上] 7지(地)를 반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무소유처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은 2지(地)의 고․집을 반연하면서도 일시에 하는 것이 아니니 다른 찰나에 자기 자리를 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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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비상비비상처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자기 자리의 고․집만을 반연한다.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욕계의 모든 행[諸行]의 멸(減)만을 반연한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은 상계의 고․집을 반연하는데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욕계의 모든 행의 멸만을 반연하는가?
[답] 협(脅) 존자는 “만일 법이 욕계의 탐애[愛]에 탐착(耽着)하여 신견(身見)으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이 모든 법의 멸은 마땅히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사견의 소연이 되어야 하며 그 번뇌는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하셨다.
어떤 이는 “고(苦)와 집(集)은 유위의 법이어서 자기 자리[自地]와 다른 자리[他地]와는 차츰차츰 서로가 이끌기 때문에 그것의 사견은 다른 자리를 반연할 수 있으나 멸제(滅諦)는 무위(無爲)이어서 자기 자리와 다른 자리는 서로가 이끈다는 뜻이 없기 때문에 그것의 사견은 다른 자리를 반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초정려의 견멸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초정려의 모든 행의 멸만을 반연하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견멸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만을 반연하는 것이다.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욕계의 모든 행의 대치(對治)만을 반연한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은 삼계의 고․집을 반연하는데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욕계의 모든 행의 대치만을 반연하는가?
[답] 협 존자는 “만일 법이 욕계의 탐애[愛]에 탐착하여 신견(身見)으로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이 법의 대치는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의 소연이 되어야 하며 그 번뇌는 다른 세계를 반연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욕계의 견고․견집에서 끊을 사견의 소연은 대치가 아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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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다른 자리를 반연할 수 있으나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의 소연은 대치이기 때문에 다른 자리의 대치를 반연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욕계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미지정(未至定)에 법지품의 도[法智品道]만을 만연할 뿐이니 오직 그것은 단대치(斷對治)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6지(地)의 법지품의 도를 반연할 수 있음은 종류가 같기 때문이요, 모두가 욕계의 괴대치(壞對治)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처럼 초정려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9지(地)의 유지품의 도[類智品道]를 반연할 수 있으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도 9지의 유지품의 도를 반연하게 된다.
[문] 무엇 때문에 견멸에서 끊을 사견은 오직 자기 자리의 모든 행의 멸(減)만을 반연하는데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6지의 법지품의 도를 반연하고 혹은 9지의 유지품의 도를 반연하는가?
[답] 자기 자리와 다른 자리의 멸은 차츰차츰의 인(因)이 아니지만 여러 자리[多地]의 성도(聖道)는 서로가 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법류품(法類品)의 도(道)도 서로가 인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견도에서 끊을 사견은 통틀어 반연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견도에서 끊을 사견도 통틀어 법류품의 도를 반연할 수 있나니 서로가 인이 되기 때문이요 법지품(法智品)의 도도 위의 두 세계를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유지품의 도는 욕계의 법에 대한 대치가 아니기 때문이며, 법지품의 도는 위의 두 세계에 대하여 비록 대치하게 된다 하더라도 첫째[初]가 아니요 전체[全]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법류품의 종류는 품종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9지(地)의 유지품의 도는 위 8지의 단대치(斷對治)이므로 곧 그 자리[地]의 견도에서 끊을 사견의 소연이며 그 밖의 자리[地]의 도(道)의 소연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능히 대치하는[能對治]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며 또 유지품은 서로가 인이 되며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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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한 찰나의 수면은 온갖 것을 두루 반연할 수도 없고 또한 따라다니며 두루 허물을 더한다는 이치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변행이라 하는가?
[답] 그의 종류의 상속(相續)에 의거하여 말한 까닭에 허물은 없다. 그리고 변행의 수면은 변행인에 대하여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변행의 수면이면서 변행인이 아니다. 미래의 변행의 수면이다.
어떤 것은 변행인이면서 변행의 수면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상응하는 법[相應法]과 구유한 법[俱有法]이다.
어떤 것은 변행의 수면이면서 또한 변행인이다. 과거와 현재의 변행의 수면이다.
어떤 것은 변행의 수면도 아니면서 또한 변행인도 아니다. 만일 그의 종류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곧 그 종류에 의하여 말한다면 “미래의 변행 수면의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온갖 염오의 법[染汚法]은 모두가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법으로써 인(因)을 삼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온갖 염오의 법이 모두가 견도에서 끊을 법으로써 인을 삼는다면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인이 되고 이미 끊은 것도 인이 되리니 아직 끊지 못한 것과 이미 끊은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성자(聖者)의 수도에서 끊을[修所斷] 염오의 법에 일으키는 것도 있고 일으키지 않는 것도 있는가? 일으키지 않는 것이란 무유애(無有愛)와 모든 만(慢)의 종류와 극한 진의 전[瞋纏]을 말하며 일으키는 것이란 그 밖의 탐(貪)․진(瞋)․만(慢)과 무명(無明)을 말한다.
또 만일 그렇다면 『식신론(識身論)』의 말을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혹시 불선의 법[不善法]은 오직 불선만으로써 인(因)을 삼는 것이 있는가? 있다. 성자가 욕염(欲染)을 여읜 데서부터 물러날 때에 첫 염오의 사(思)가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온갖 염오의 법이 모두가 견도에서 끊을 법으로써 인을 삼는 것이 아니라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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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도에서 끊을 법을 인으로 삼는 법인가? 온갖 염오의 법과 견도에서 끊을 법의 이숙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다시 그 말도 어긋나니, “어떤 것이 무기(無記)의 인이 되는 법인가? 무기의 유위법과 온갖 불선의 법이다”라고 한다.
또 만일 그렇다면 다시 그 말에도 어긋나니, “혹 어떤 고제(苦諦)는 유신견(有身見)을 인으로 삼으면서도 유신견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의 견고에서 끊을 것을 제외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미래의 유신견과 그것에 상응하는 법과 나고[生]․늙고[老]․머무르고[住]․무상(無常)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염오의 고제 등이다”라고 한다.
또 만일 그렇다면 『식신론(識身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 “불선(不善)의 안식과 나아가 불선의 의식은 모두가 불선과 무기로써 인을 삼는다”라고 했다.
[답] “온갖 염오의 법은 모두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법으로써 인을 삼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아직 끊지 못한[未斷] 것도 이미 끊은[已斷] 것도 다 같이 인이 될 터인데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이름에 곧 차별이 있다. 앞에서 아직 끊지 못한 지위[位]를 아직 끊지 못한 인[未斷因]이라 하고 나중에 이미 끊어진 지위를 이미 끊은 인[已斷因]이라 한다.
또 앞의 지위[前位]에서는 아직 대치(對治)로 파괴되지 아니하여 뒤의 지위[後位]에서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이미 대치로 파괴된 것이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自身] 가운데서 성도(聖道)를 장애하나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성도를 장애하지 않는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은 마치 연기가 불길에서 얻어진 것 같으나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연기가 불길에서 얻어지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싫증낼 만한 일과 더러울 만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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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지만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싫증낼 만한 일과 더러울 만한 일을 다시는 짓지 않는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해야 할 일을 이룩하지만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다시는 해야 할 일을 이룩하지 않는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의 일을 이룩하지만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다시는 동류인과 변행인의 일을 이룩하지 않는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등류과(等類果)와 이숙과(異熟果)를 이룩하지만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다시는 등류과와 이숙과를 이룩하지 않는다.
또 앞의 지위에서는 자기 몸 가운데서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주지만[與果] 뒤의 지위에서는 비록 인이 된다 해도 자기 몸 가운데서 다시는 과를 취하거나 과를 주지 않는다.
이것을 아직 끊지 못한 것과 이미 끊은 것과의 차별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성자의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에는 일으키는[起] 것이 있고 일으키지 않는[不起] 것도 있는가?
[답]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법은 그것과 간혹 상속되는 가까운 인[近因]이 되기도 하고 간혹 상속하지 않는 먼 인[遠因]이 되기도 한다. 만일 그것과 상속하는 가까운 인이 되면 성자는 일으키지 않으나 만일 그것과 상속하지 않는 먼 인이 되면 성자는 오히려 일으킨다.
또 만일 그가 이미 비택멸(非擇滅)을 얻었으면 성자는 일으키지 않으나 만일 아직 그가 비택멸을 얻지 못했으면 성자는 오히려 일으킨다.
또 그가 일으킬 때 결정코 이생(異生)의 성품에 의한 것이면 성자는 일으키지 않으나 만일 결정되지 않으면 성자는 오히려 일으킨다.
또 그가 일으킬 때에 반드시 성자의 성품을 장애한 것이면 성자는 일으키지 않으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성자는 오히려 일으킨다.
[문] 무엇 때문에 성자는 무유애(無有愛)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그것은 단견(斷見)에 장양(長養)되는 것이므로 단견 뒤에는 앞에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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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게 되기 때문이나 온갖 성자는 단견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성자는 모든 만의 종류[慢類]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그것은 신견(身見)에 장양되는 것이므로 신견 뒤에는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이나 온갖 성자는 신견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성자는 지극히 진의 전[瞋纏]을 일으키지 않는가?
[답] 그것은 사견(邪見)에 장양되는 것이므로 사견 뒤에는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이나 온갖 성자는 사견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식신론(識身論)』의 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혹시 불선의 법은 오직 불선만으로써 인을 삼는 것이 있는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인[未斷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일어나는 불선의 사(思)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이미 끊어진[已斷] 것이요, 둘째는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未斷] 것이다. 그 논(論)은 다만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인에만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그것은 불선의 인[不善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일어나는 불선의 사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불선이요, 둘째는 무기이다. 그 논은 다만 불선의 인에만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그것은 자부의 인[自部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일어나는 불선의 사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자부(自部)요, 둘째는 타부(他部)이다. 그 논은 다만 자부의 인에만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그것은 변행인이 아닌[非遍行因] 것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일어나는 불선의 사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변행(遍行)이요, 둘째는 변행이 아닌[非遍行] 것이다. 그 논은 다만 변행인이 아닌 것에만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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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것은 공통하지 않은 인[不共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이 처음 일어나는 불선의 사에는 두 가지의 인이 있으니 첫째는 공통한[共] 것이요, 둘째는 공통하지 않은[不共] 것이다. 그 논은 다만 공통하지 않은 인에만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문] 성자로서 먼저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했을 때에도 그 염오의 사(思)는 역시 불선으로써 인을 삼는데 무엇 때문에 그 논(論)에서는 뒤에 물러나는 때를 말하는가?
[답] 그때에 그 사(思)는 먼저는 성취하지 않았다가 지금에야 성취하게 되고 먼저는 속박이 없었다가 지금에야 속박이 있으며 먼저는 죽었다가 지금에야 생긴 것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문] 뒤에 일어난 염오의 사에서도 또한 불선으로써 인을 삼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 논에서는 다만 처음 일어난[初起] 것만을 말하는가?
[답] 그때에 그것의 득(得)은 먼저는 끊어졌다가 지금은 이어지고 먼저는 작용이 없었다가 지금은 작용이 있으며 먼저는 죽었었다가 지금은 생긴 것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어떤 이는 “온갖 염오의 법은 모두 견도에서 끊을 법으로써 인을 삼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품류족론』과 『식신족론』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그것은 총괄한 모양[總相]에서 설명한 것이요, 만일 따로따로[別] 설명한다면 “어떤 염오의 색(色)은 견도에서 끊을 법으로써 인을 삼으면서도 온갖 염오의 색을 삼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어떤 염오의 식(識)은 견도에서 끊을 법으로써 인을 삼으면서도 온갖 염오의 식을 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評] 그는 마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 논에 “온갖 염오의 법은 견도로써 인을 삼기 때문이요, 온갖 불선의 법은 무기로써 인을 삼기 때문이며, 그 밖의 염오의 고제(苦諦) 등은 모두 유신견(有身見)으로써 인을 삼기 때문이요, 불선의 6식(識)은 모두 불선과 무기로써 인을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니 앞의 설명[前說]이 옳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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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 1338] 쪽
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염의 법[染法]에는 차이가 있다고 분별한다. 그는 “어떤 견고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고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고, 어떤 견고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을 뿐 둘로써 다 인을 삼는 것은 없다. 견집에서 끊을 것에 있어서도 그렇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분별하기 위하여 말하겠다. 가령 성자(聖者)가 고(苦)는 현관(現觀)하였으나 아직 집(集)을 현관하기 전에 성도(聖道)에서 일으키나 견집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現前] 일으킬 수 있다. 견집에서 끊을 법은 견고에서 끊을 것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니 인(因)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견멸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멸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고, 어떤 견멸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고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으며, 어떤 견멸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고, 어떤 견멸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고․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으나 셋으로 다 인을 삼을 수는 없다. 견도(見道)와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에서도 그러하다.
진실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지만 분별하기 위하여 말하겠다. 가령 성자가 멸(滅)은 현관하였으나 아직 도(道)를 현관하기 전에 성도에서 일으키나 견도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도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 일으킬 수 있으나 견도에서 끊을 법은 오직 견고․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인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자는 수도(修道) 중에서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 일으킬 수 있으나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은 오직 견고․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앞에 나타나도록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니 인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성자가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는다. 또는 오직 견고․견집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는 것을 합쳐 하나의 무더기로 삼아 9품(品)을 점차로 끊는다. 그가 뒤로 물러나는 때에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되돌려 성취한다. 오직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만으로써 인을 삼으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인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또 그때에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만으로써 인을 삼아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법 중에서 미래의 것은 되돌려 성취하나 과거의 것은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앞뒤해서 나타나도록 일으키게 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동일한 대치(對治)로 끊을 번뇌를 그가 뒤에 물러날 때에 되돌려 성취할 수 있고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있겠는가? 또 『품류족론』과 『식신론』의 설명[說]을 회통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을 옳다고 하겠다.
[문] 애(愛)는 모든 세계[界]․모든 자리[地]․모든 부(部)에서 모두 똑같이 막아 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변행의 수면[遍行隨眠]은 다른 부[他部]에 따라 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고 다른 세계나 자리에서는 그렇지 아니 하는가?
[답] 변행 수면은 다른 부의 법에 대하여 등류과(等流果)나 혹은 이숙과(異熟果)가 있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만 다른 세계나 자리에서는 등류과와 이숙과가 없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다.
또 자기 자리나 다른 부는 거칠고[麤] 미세함[細]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만 상지(上地)는 미세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못한다.
[문] 변행(遍行)과 이숙(異熟)은 불변행(不遍行)과 이숙을 위하여 서로 인(因)이 되는가?
[답] 어떤 이는 “변행과 이숙은 불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되나 불변행과 이숙은 모두가 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변행수면이 불변행수면을 위하여 인이 되면서도 다른 부의 불변행수면은 변행수면을 위하여 인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수면의 법이 다르고 이숙의 법이 다르다. 수면에는 5부(部)가 있고 이숙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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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변행과 이숙은 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불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되며, 불변행과 이숙은 불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변행과 이숙을 위하여 인이 된다. 같은 자리[同地]요 같은 부[同部]로서 성품의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변행인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온갖 과거와 현재의 변행수면과 그것의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의 모든 법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변행인이라 하며 변행이란 무슨 뜻인가?
[답] 두루[遍] 인(因)이 된다는 뜻이 변행의 뜻이요, 또 두루[遍] 반연한다[緣]는 뜻이 변행의 뜻이며, 또 두루[遍]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隨增]는 뜻이 변행의 뜻이다.
이 변행인은 오직 과거와 현재의 두 세상에만 통하며 등류과(等流果)가 있다.
[論] 어떤 것이 이숙인(異熟因)1)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他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사(思)를 여의고는 이숙인이 없고 수(受)를 여의고는 이숙과(異熟果)가 없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이숙인과 이숙과는 다 같이 5온(蘊)에 통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오직 심(心)과 심소(心所)에만 이숙인․이숙과가 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
1) 이숙인(異熟因)이란 이숙과(異熟果)를 불러 오는 인(因)이라는 뜻이어서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가리킨다. 이 문단은 먼저 이숙인의 일반에 관하여 논구(論究)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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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고 이 인(因)과 과(果)는 또한 모든 색(色)과 불상응행(不相應行)에도 통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오직 심․심소와 모든 색법(色法)에만 이숙인과 이숙과가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이것은 역시 불상응행에도 통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모든 이숙인은 반드시 그 자체(自體)를 버려야 비로소 그 과(果)가 성숙한다”라고 집착하며 그는 “모든 이숙인은 반드시 과거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과를 준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자체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이숙인은 과가 성숙한 지위에 이르러도 오히려 실체(實體)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모든 이숙인은 과가 만일 아직 성숙하지 못한 때에는 그 자체가 한결같이 있으나 그 과가 성숙한 뒤면 그 자체는 곧 파괴된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음광부(飮光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종자가 싹이 아직 생기지 못할 때에는 그 자체가 한결같이 있지만 싹이 생기고 나면 파괴되는 것처럼 모든 이숙인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들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이숙인은 과가 비록 이미 성숙했다 해도 그 자체는 오히려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은 선(善)․악(惡)에는 고(苦)․락(樂)의 과가 없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모든 외도들과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선업․악업에는 고와 낙의 과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이숙인인가?
[答] 모든 심․심소법은 이숙의 색(色)과 심․심소법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을 받는다. 이 심․심소법은 그의 이숙을 위하여 이숙인이 된다.
여기에서 모든 심․심소법이라 함은 온갖 불선과 선의 유루(有漏)의 심․심소법이다. 이 말은 또한 그것의 수전(隨轉)의 색과 불상응행도 포섭하는 것이니 심․심소와는 동일한 과(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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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의 색이란 색온(色蘊)이니 곧 눈 등 5근(根)과 빛깔[色]․냄새[香]․맛[味]․감촉[觸]이다.
심이란 식온(識蘊)이니 곧 안식 등 6식(識)이며, 심소법이란 3온이니 곧 수(受)․상(想)․사(思) 등이다.
심불상응행이란 행온(行蘊)이니 곧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 등이다.
이것은 이숙인과 이숙과가 다 같이 5온에 통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論] 또 모든 신(身)․어업(語業)은 이숙의 색과 심․심소법과 심불상응행을 받는다. 이 신․어업은 그의 이숙을 위하여 이숙인이 된다.
[문]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隨心轉] 신업(身業)과 어업이 마음과 동일한 과(果)가 되는 까닭은 앞에 이미 말한 것과 같은데 여기에서 다시 신업․어업을 말하는 것은 어느 법을 말하는가?
[답] 선(善)과 불선(不善)의 표(表)와 표업(表業)2)에 의하여 생기는 무표(無表)의 마음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不隨心轉] 몸과 말의 두 가지 업[二業]이니 이것은 반드시 이숙과를 부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몸과 말의 표(表)와 이것이 찰나(刹那)에 생기는 무표(無表)를 말하는 것이니 동일한 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말은 도리가 아니다. 몸과 말의 표업과 그것과 함께 생기는 몸과 말의 무표는 동일한 과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서로 구유인(俱有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표업과 표에 의하여 생기는 몸과 말의 무표는 비록 동일한 과가 아니라 해도 반드시 같은 때에 이숙과를 받으니 한마음에서 일어나기 때
2) 표업(表業)이란 몸과 입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어서 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남에게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작용이므로 표업이라 하며, 이에 반하여 몸과 입의 두 가지 업을 일으킬 때에 다음에 그 업의 과보를 받을 원인을 동시에 자기 몸 안에 훈발(熏發)하는데 이 훈발한 원인은 볼 수도 들을 수도 감촉할 수도 없는 무형무상(無形無象)의 사물로서 다른 이에게 표시할 수 없으므로 무표업(無表業)이라 한다. 불수심전(不隨心轉)의 무표색(無表色)
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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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 구유인이 아닌데 어떻게 반드시 동일한 찰나에 이숙과를 받는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표와 무표는 서로 구유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숙과는 따로따로이다.
표업 중에서 일곱 갈래[七支]3) 등은 다르며 그 하나하나는 저마다 따로따로 이숙과를 초래한다. 하나하나의 갈래 등에는 많은 극미(極微)가 있고 하나하나의 극미에는 3세(世)의 구별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세상에는 많은 찰나가 있고 하나하나의 찰나에서의 이숙과는 따로따로이니 구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표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앞에서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隨心轉] 일곱 갈래[七支]의 무표4)는 서로가 구유인이 되기 때문에 이숙과와 같다.
여기에서 말한 표업과 무표업은 또한 그것의 수전(隨轉)으로 생기는[生]것 등을 포섭하며 동일한 과이기 때문에 받는 이숙은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 또 모든 심불상응행은 이숙의 색과 심․심소법과 심불상응행을 받는다. 이 심불상응행은 그의 이숙과를 위하여 이숙인이 되니, 이것을 이숙인이라 한다.
[문] 모든 심․심소와 표업과 무표업과 수전으로 생기는 것 등은 앞에 이미 말한 것처럼 동일한 과이기 때문인데 이제 다시 무슨 불상응행을 말하는가?
[답] 지금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5)과 온갖 불선과 선(善)한
3) 일곱 갈래[七支]는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의 세 가지 신업(身業)과 양설(兩舌)․망어(妄語)․악구(惡口)․기어(綺語)의 네 가지 어업(語業)이다.
4) 마음을 따라 전개되는[隨心轉] 일곱 갈래[七支]의 무표(無表)라 함은 도구계(道俱戒)와 정구계(定俱戒)에 의하여 몸과 말의 일곱 가지 나쁜 행[惡行]을 억제하는 율의(律儀)의 힘을 말한다.
5) 무상정(無想定)은 제4선(禪)에 속하며 이생(異生)이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로써 닦는 선정이어서 그의 결과로 8만 겁(劫) 동안 생각 없는[無想] 상태에 든다고 한다. 멸진정(滅盡定)은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성자(聖者)가 지식상(止息想)의 작의로써 닦는 선정이어서 느낌[受]과 생각[想]을 없앰으로써 온전히 무심(無心)이 된다. 이 선정도 여러 겁 동안 그런 상태를 계속한다 하며 유정(有頂)의 상위(上位)에 처하는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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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루의 득(得)과 그의 수전으로 생기는 것 등의 모든 모양을 말하는 것이니 앞에서 아직 말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문] 무상정은 어떤 이숙과를 받는 것인가?
어떤 이는 “무상정은 생각이 없는[無想] 것과 색(色)의 이숙과를 받는다. 그것의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의 이숙은 제4 정려의 유심업(有心業)의 과이며 그 밖의 나머지 온(蘊)의 이숙은 공통된 과[共果]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정은 생각이 없는 것과 색의 이숙과를 받는다. 그 밖에 나머지 온의 이숙은 공통된 과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정은 오직 생각이 없는 이숙과만을 받으며 그 밖에 나머지 온의 이숙은 바로 공통된 과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명근도 업의 이숙과가 아니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하나의 법은 업의 이숙이고 업이 아니니 명근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온갖 명근은 오직 이숙일 뿐이며 온갖 이숙은 업을 말미암아 드러난다. 이것은 비밀한 뜻[密意]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하지만 실로 명근도 업감(業感)은 아니다.
또 그 논(論)은 세속(世俗)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뛰어난 뜻[勝義]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니 모든 세간의 수명이 짧은[短壽] 이를 보면 곧 “이 사람은 명이 짧은 업을 지었다”라고 말하며 오래 사는[長壽] 이를 보면 곧 “이 사람은 오래 사는 업을 지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천(無想天)의 처소는 마음이 없을[無心] 때에도 제4 정려의 마음이 있는 업[有心業]의 과를 받고 마음이 있을 때에도 무상정의 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마음이 없을 때에도 마음이 있는 과를 받고 마음이 있을 때에도 마음이 없는 과를 받는다고 하면 어떻게 인과(因果)가 뒤바뀌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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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형상이 있는 업[有色業]도 형상이 없는 과[無色果]를 받고 형상이 없는 업[無色業]도 형상이 있는 과[有色果]를 받으면서도 인과가 뒤바뀌었다는 허물이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설마달다(設拏達多) 존자는 “무상정은 생각이 없는 것과 중동분(衆同分)과 이숙과를 받는다. 그의 명근과 형상[色]의 이숙은 제4 정려의 마음 있는 업의 과이다. 그의 심․심소와 그 밖의 심불상응행은 모두가 이숙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숙의 중동분은 업의 과이기 때문이요, 그의 심․심소와 그 밖의 심불상응행도 이 이숙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무상정은 생각 없는 이숙과를 받으며 그의 명근과 중동분은 제4 정려의 마음 있는 업의 과이면서 그 밖에 나머지 온의 이숙은 공통된 과[共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눈 등의 다섯 감관[五根]은 업의 과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는 이숙은 오직 무상정의 과일 뿐이며 그의 명근과 중동분과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의 이숙은 오직 제4 정려의 마음 있는 업의 과이고 그 밖의 나머지 온의 이숙은 공통된 과일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멸진정은 어떠한 이숙과를 받는가?
[답] 비상비비상처의 4온(蘊)의 이숙과를 받으며 명근과 중동분은 제외된다. 그것은 오직 업의 과[業果]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 모든 득(得)은 어떠한 이숙과를 받는가?
[답] 모든 득은 색과 심․심소법과 심불상응행의 이숙과를 받는다. 색이라 함은 빛깔․냄새․맛․감촉이이서 다섯 가지의 색근[五色根]은 아니니 그것은 업의 과이기 때문이다. 심․심소법이란 고수(苦受)와 낙수(樂受)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그것과 상응하는 법이다. 심불상응행이란 모든 득과 나고․늙고․머무르고․무상한 것이다.
승가벌소(憎伽筏蘇) 존자는 “득(得)도 눈 등의 다섯 감관과 명근과 중동분의 이숙과를 받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비록 하나하나의 득은 중동분 등을 이끌 수 있는 힘이 없으나 여러 득이 모이면 그것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어리석고 둔한 몸만을 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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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니 마치 지렁이 등과 같다. 득으로 느낀 색(色)은 구처(九處)인데 소리[聲]는 제외된다. 심․심소법은 3수(受)의 무더기에 통하며 불상응행은 중동분과 명근과 모든 득과 나고 늙고 달라지고 소멸하는[生住異滅]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득은 서로 바라보아도 구유인(俱有因)이 아니므로 설령 구지(俱胝)가 모인다 해도 더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나의 과(果)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중동분 등을 이끌지 못한다.
묘음(妙音) 존자는 “득은 중동분 등을 이끌 수는 없지만 모든 업(業)이 득과 중동분을 이끌 때에 눈 등의 근(根)과 처(處)에 대하여 다만 빛깔․냄새․맛․감촉만을 감득(感得)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무색계의 득에는 이숙과가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처음의 말[初說]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문]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이숙인인가? 온갖 불선(不善)과 선(善)의 유루의 법[有漏法]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논에서 말한 것의 이숙인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여기서는 불요의(不了義)요, 거기서는 요의(了義)이며, 여기서는 그 밖의 다른 뜻이 있으나 거기서는 다른 뜻이 없으며, 여기서는 그 밖의 다른 인(因)이 있으나 거기서는 다른 인이 없으며, 여기서는 세속(世俗)에 의거하나 거기서는 승의(勝義)에 의거하며, 여기서는 영현(影顯)이 있으나 거기서는 영현이 없다.
또 여기서는 이미 생긴 이숙인을 말하나 거기서는 이미 생긴 것과 아직 생기지 않은 이숙인을 말하며, 여기서는 과를 주는[與果] 이숙인을 말하나 거기서는 과를 준 것과 아직 과를 주지 않은 이숙인을 말한다.
또 여기서는 새로운 업의 과를 말하나 거기서는 새로운 것과 옛 것의 업의 과를 말한다.
또 여기서는 과거의 이숙인을 말하나 거기서는 3세(世)의 이숙인을 말하며, 또 여기서는 지금 바로 과를 준 이숙인을 말하나 거기서는 이미[已] 지금과 앞으로[當]의 과를 주는 이숙인을 말한다. 이것을 여기의 말과 거기의 말의 차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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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지금 바로 과를 주는 이숙인만을 말하는가?
[답] 지금 바로 과를 주는 것은 그 모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그 과가 앞에 나타나면서 5취(趣)의 모든 유정을 시설하기 때문이다.
또 그때에 이 인(因)의 작용이 끝이기 때문에 지금 과를 줌으로써 앞으로 줄 것과 이미 준 과의 인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뜻에서 간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지금 바로 과를 주는 인만을 말한다.
또 욕계 안에서는 4온(蘊)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果)를 얻는 것이 있는데 선․불선의 심․심소법과 그것에서 생긴 것[彼生] 등이요, 또 2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선․불선의 신업(身業)․어업(語業)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며, 또 1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득(得)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다.
색계 안에서는 5온(蘊)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수전(隨轉)이 있는 색과 심․심소법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요, 또 4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수전이 없는 색과 선(善)의 심․심소법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며, 또 2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선의 몸․말의 표(表)와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요, 또 1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득과 무상정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다.
무색계 안에서는 4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선의 심․심소법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요, 또 1온의 이숙인이 동일한 과를 얻는 것이 있는데 득(得)과 멸진정(滅盡定)과 그것에서 생긴 것 등이다.
또 어떤 업(業)은 오직 1처(處)의 이숙만을 받는데 명근과 중동분을 얻는 업으로 그 업은 오직 법처(法處)만의 이숙을 받는다.
어떤 업은 오직 2처만의 이숙을 받는데 의처(意處)를 얻는 업으로 그 업은 오직 의처와 법처(法處)만의 이숙을 받는다. 촉처(觸處)에서 얻는 업도 2처의 이숙을 받는데 촉처와 법처이다.
신처(身處)를 얻는 업은 3처의 이숙을 받는데 신처․촉처․법처이다. 색처(色處)․향처(香處)․미처(味處)를 얻는 업도 그러하여 각각 자기의 처[自處]․촉처․법처의 이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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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眼處)를 얻는 업은 4처의 이숙을 받는데 안처․신처․촉처․법처이다. 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處)를 얻는 업도 그러하며 각각 자기의 처․신처․촉처․법처의 이숙을 받는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온갖 대종(大種)은 모두 빛깔[色]과 소리[聲]를 내며 욕계의 모든 빛깔은 냄새[香]와 맛[味]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안처를 얻는 업은 7처(處)의 이숙을 받는데 안처․신처․색처․향처․비처․촉처․법처의 이숙이다. 이처․비처․설처를 얻는 업도 그러하여 각각 자기의 처․신처․색처․향처․미처․촉처․법처의 이숙을 받는다.
신처를 얻는 업은 6처의 이숙을 받는데 신처․색처․향처․미처․촉처․법처의 이숙이다. 색처에서 얻는 업은 5처의 이숙을 받는데 색처․향처․미처․촉처․법처의 이숙이다. 향처․미처․촉처를 얻는 업도 그러하여 각각 색처․향처․미처․촉처․법처의 이숙을 받는다.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일정하게 얻는 것이며, 일정하게 얻지 못하는 것은 그 수(數)가 정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업은 8처의 이숙을 받기도 하고, 어떤 업은 9처의 이숙을 받기도 하며, 어떤 업은 10처의 이숙을 받기도 하고, 어떤 업은 11처의 이숙을 받기도 하는데 모두가 성처(聲處)만은 제외된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어떤 업은 여러 처[多處]의 이숙을 받는데 어떤 업은 적은 처[少處]의 이숙을 받는가?
[답] 만일 업으로서 갖가지의 공능(功能)이 있어서 갖가지의 과(果)를 얻는 것이면 여러 처의 이숙을 받지만 만일 갖가지의 공능이 없어서 갖가지의 과를 얻지 못할 것이면 적은 처의 이숙을 받는 것이니 마치 바깥 종자와 같다.
갖가지의 공능이 있어서 갖가지의 열매를 얻는 것은 마치 벼나 사탕수수나 포도나 연뿌리 등과 같고 갖가지의 공능이 없어서 갖가지의 열매를 얻지 못한 것은 마치 소작가(素酌迦)나 다라자(多羅子) 등과 같다. 진펄 속에 소작가라는 풀이 있는데 하나의 종자에 하나의 줄기로 되어 높이는 수척(數尺)이요 위에는 적은 잎사귀가 있고 그 모양은 마치 일산과 같다. 다라수(多羅樹)는 높이가 백 주(肘)를 넘으며 위에는 역시 적은 잎사귀가 있고 그 모양은 일산과
같으며 줄기는 비록 길다 하더라도 열매는 아주 적다.
업도 그와 같다. 그리고 한 세상[一世]의 업이 세 세상[三世]의 과를 얻으면서도 세 세상의 업은 한 세상의 과를 얻는 것이 없으며, 한 찰나(刹那)의 업이 여러 찰나의 과를 얻으면서도 여러 찰나의 업은 한 찰나의 과를 얻는 것이 없다. 업은 선과 불선이요, 과는 무기이기 때문이니 마치 생긴 과의 인(因)은 줄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모든 업을 짓는 이는 먼저 중동분을 이끌어내는[引] 업을 짓는가, 먼저 중동분을 원만하게 하는[滿] 업을 짓는가?
[답] 어떤 이는 “먼저 인업(引業)을 짓고 나중에 만업(滿業)을 짓는다. 만일 먼저 이끌어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원만하게 할 것이 없다. 마치 그림 그리는 이가 먼저 본[模位]을 떠 놓고 그 뒤에 여러 색깔을 칠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먼저 만업(滿業)을 짓고 뒤에 인업(引業)을 짓는다. 마치 보살이 먼저 삼무수겁(三無數劫) 동안 만업을 짓고 나서 뒤의 백 대겁(大劫) 동안에 비로소 인업을 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혹은 먼저 인업을 짓고 나서 뒤에 만업을 짓는 이도 있고 혹은 먼저 만업을 짓고 나서 뒤에 인업을 짓는 이가 있기도 하다. 업을 짓는 이의 의요(意樂)에 따라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세 가지의 이숙을 받는 업이 있다. 첫째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이요, 둘째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이며, 셋째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이다.
순현법수업이란 업을 이 생(生)에서 지어 더욱 자라게 하고 곧 이 생에서 이숙과를 받으며 다른 생에서는 받지 않는 것이다. 순차생수업이란 업을 이 생에서 지어 더욱 자라게 하다가 바로 다음 생에서 이숙과를 받으며 다른 생에서는 받지 않는 것이다. 순후차수업이라 함은 업을 이 생에 지어서 더욱 자라게 하다가 제3생(生)이나 혹은 제4생 이후에 차례대로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숙(異熟)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의 뜻으로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등류(等流)를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마치 “수(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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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애(愛) 갈래[支]의 이숙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장양(長養)을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마치 “음식과 모든 의약(醫藥) 등은 쾌락의 이숙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꿈에 있는 일[夢事]을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마치 “꿈에서 이러이러한 종류의 이숙을 보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풍년[豊]과 흉년[儉]을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마치 “별자리[星宿]가 이 길로 다니면 장차 이렇게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드는 이숙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범왕(梵王)을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마치 “대선(大仙)이여, 저는 잠시도 떠나지 않고 이 광명에는 어떤 이숙이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이숙을 이숙이라고 말한 곳도 있는데 여기에서 색(色) 등의 이숙과를 말하여 이숙이라 한 것과 같다.
성숙하는[熟]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같은 종류[同類]요, 둘째는 다른 종류[異類]이다. 같은 종류로서 성숙한다[同類熟]고 함은 등류과(等流果)이니 선은 선을 내고 불선은 불선을 내며 무기는 무기를 내는 것이다. 다른 종류로서 성숙한다[異類熟]고 함은 이숙과(異熱果)이니 선과 불선이 무기의 과를 내는 것이다. 이 무기의 과는 선과 불선의 다른 종류의 인(因)에서 생기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한다.
[문] 만일 다른 종류로서 성숙하는 것을 이숙과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악취(惡趣)를 비숙(非熟)이라 하는가?
[답] 그것도 이숙이나 낮고 천하기[下賤] 때문에 비숙이라고 한다. 마치 어떤 낮고 천한 마을이나 성(城)의 물건을 비촌(非村)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지나치게 성숙한 까닭에 비숙이라고 한다. 마치 익숙하지 못한 옹기장이가 여러 질그릇을 만들면서 나무를 너무도 많이 태워 그릇이 모두 타고 녹아서 쓸 수가 없게 되는 것도 비숙이라고 하는 것처럼 악취도 그러하여 고통의 과보가 너무도 지나치기 때문에 비숙이라고 한다.
또 거기에는 선(善)의 이숙이 없기 때문에 비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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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방생(傍生)이나 귀취(鬼趣)도 선의 과보[善果]를 받는데 어찌하여 악취를 모두 비숙이라 하는가?
[답] 거기에는 선의 과보가 적기 때문에 역시 없다[無]고 한다. 마치 물이 적은 하천을 물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그 세계[越]에 비록 선의 과보가 있으나 그 밖의 다른 뛰어난 선법(善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에 비숙이라 한다. 비유컨대 농부가 수확한 것이 적으면 또한 비숙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나 실은 악취에도 이숙과는 있다.
[문] 무엇 때문에 불선과 선의 유루법에는 이숙과가 있는데 무기와 무루의 법에는 이숙과가 없는가?
[답] 자성(自性)과 뭇 연[衆緣]에 갖춘 것이 있고 없는[闕] 것이 있어서 세 가지가 같지 않은 것이 마치 바깥 종자와 같기 때문이다. 마치 견실(堅實)한 종자를 좋은 밭 안에 뿌려 놓고 물을 대 주고 덮어 주고 거름을 하게 되면 인(因)과 연(緣)의 힘이 갖추어져서 곧 싹이 나오는 것처럼 불선․선의 유루법의 자성이 견실한 것을 유(有)의 밭 안에 뿌려 놓고 탐애의 물을 대 주며 다른 결(結)로써 덮어 주면 인과 연의 힘이 갖추어지면서 곧 유
의 싹이 나게 된다.
마치 견실한 종자라도 창고 속에 쌓아 놓으면 물과 거름의 연(緣)이 없으므로 싹이 나지 못하는 것처럼 무루선의 유위법의 체성이 비록 견실하다 하더라도 탐애의 물과 다른 결이 적셔주거니 덮어 주지 않아 유의 싹은 생기지 않는다.
마치 썩어버린 종자를 비록 좋은 밭에 뿌려 놓고 물을 대 주고 거름을 한다 해도 인의 힘이 없어 싹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무기의 모든 유위법을 비록 탐애의 물과 다른 결로써 적셔 주고 덮어 준다하더라도 체성이 열악하여 유의 싹은 생기지 않는다.
[문] 다시 무슨 연유로 모든 무루의 법에는 이숙과가 없는가?
[답] 밭[田]이 아니요 그릇[器]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만일 법이 모든 유(有)와 모든 갈래[趣]의 생(生)․노(老)․병(病)․사(死)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속하게 하면 이숙과가 있겠지만 무루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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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와 모든 갈래의 생․노․병․사로 하여금 마침내 끊어지게 하기 때문에 이숙과가 없다.
또 만일 법이 모든 유와 모든 갈래로 하여금 점차로 더욱 자라게 한다면 이숙과가 있으나 무루는 모든 유와 모든 갈래로 하여금 점차로 줄어지게 하기 때문에 이숙과는 없다.
또 만일 법이 괴로움[苦]이고 모든 유가 세간의 생․노․병․사의 원인[集]에 나아가는 행위라면 이숙과가 있으나 무루는 괴로움과 모든 유가 세간의 생․노․병․사의 사라짐[滅]에 나아가는 행이기 때문에 이숙과가 없다.
또 만일 법이 신견(身見)의 일이요, 뒤바뀐[顚倒] 일이며, 탐애(貪愛)의 일이요, 수면(隨眠)의 일이어서 더러움[垢]이 있고 독이 있고 찌꺼기가 있고 혼탁함이 있으며 고제(苦諦)․집제(集諦)에 떨어지고 3유(有)에 떨어진다면 이숙과가 있으나 모든 무루의 법은 그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이숙과가 없다.
또 만일 무루의 법에 이숙이 있다면 뛰어난 인[勝因]이 하열한 과[劣果]를 얻게 되는 것이니 인은 무루의 선(善)의 유위법인데 과는 유루의 무기법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무루의 법에 이숙이 있다면 성도(聖道)는 유(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니 성도가 유를 상속하게 한다는 것은 도리에도 서로 어긋난다.
또 만일 무루의 법에 이숙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 받아야 하는가? 만일 욕계에서 받는다면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무루의 법이 욕계계(欲界繫)가 아닌 까닭은 색계와 무색계의 업과 같다.
만일 색계에 있으면서 받는다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무루의 법이 색계계(色界繫)가 아닌 까닭은 욕계와 무색계의 업과 같다.
만일 무색계에 있으면서 받는다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무루의 법이 무색계계(無色界繫)가 아닌 까닭은 욕계와 색계의 업과 같다.
만일 삼계(三界) 밖에 있으면서 받는다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삼계 밖에는 따로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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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루의 성도는 이숙과 이숙인을 대치(對治)하는 것인데 만일 다시 이숙과를 얻는다 하면 다시 대치해야 한다. 대치하는 것이 무루이기 때문에 다시 이숙을 얻게 되며 그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다시 성도를 닦는다면 그 성도는 다시 이숙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서로 끝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다면 마땅히 해탈이나 벗어남[出離]이 없을 것이니 이런 허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무루의 법에는 이숙과가 없다.
또 만일 무루의 법이 이숙을 얻는다면 마침내 열반을 증득하지 못해야 되므로 성자는 부지런히 힘쓰면서 닦아 익히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생사(生死)가 바퀴 돌 듯하는 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무루에는 이숙과가 없다.
[문] 다시 무슨 인연 때문에 모든 무기의 법에는 이숙과가 없는가?
[답] 밭[田]이 아니요, 그릇[器]이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만일 무기의 법에 이숙과가 있다면 이 이숙과는 무기인가 선․불선인가? 만일 무기라면 무엇 때문에 이숙이라 하는가? 다른 종류[異類]로서 성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선․불선이라면 역시 이숙이 아니니 이숙과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무기의 법에 이숙이 있다면 이 이숙과는 무기이기 때문에 마땅히 이숙이 있어야 되며 곧 그 이숙은 다시 그 밖의 이숙과를 얻어야 하리니 이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끝이 없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해탈이나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이런 허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기의 법에는 이숙과가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오직 모든 불선과 선의 유루법만이 바로 이숙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⑫
[문] 한 찰나(刹那)의 업은 다만 한 중동분(衆同分)만 이끄는가, 또한 여러 중동분을 이끄는가?1)
설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한 찰나의 업이 다만 한 중동분만 이끈다 하면 『시설론(施設論)』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그 논에 “모든 중생으로서 일찍이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혹은 국왕이 되기도 하고 혹은 대신이 되기도 하여 큰 세력을 갖추고 부정한 방법으로써 한량없는 중생에게 손해를 끼치고 재산을 빼앗아서 자신과 모든 권속에게 공급한 이도 있다. 그는 이런 나쁜 업[惡業]을 말미암아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동안
큰 고통을 받았고 거기에서 죽어도 다시 그 남은 업[殘業]으로 말미암아 큰 바다 안에 태어나서 나쁜 짐승의 몸을 받는데 그 형상은 길고도 크며 한량없는 물과 뭍의 중생을 잡아먹고 또한 한량없는 중생에게 쪼아 먹히면서 두루 그 몸을 나타냄은 마치 구집모(拘執毛)와 같다. 이미 받는 고통을 참고 견디지 못하여 몸을 파지가산(頗胝迦山)에 부딪힘으로 그의 몸에 붙어 있는 벌레들이 함께 잔혹하게 죽어 드디어 바닷물이 넓게 백천 유선나(踰繕那)에 걸쳐서
온통 피로 변하게 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1) 이 문단은 앞에서 말한 일반론(一般論)에 이어서 어떠한 종류의 이숙인(異熱因)이 어떠한 종류의 이숙과(異熱果)를 불러오게 하는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구사론』의 「업품(業品)」과 「세간품(世間品)」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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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그렇다면 무멸(無滅) 존자가 말씀한 본사(本事)를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구수(具壽)여, 나는 한 끼의 음식을 복전(福田)에게 베풀었기 때문에 일곱 번 천상에 태어나서 대천왕(大天王)이 되었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 대국의 임금이 되었었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대가섭파(大迦葉波)가 말한 본사(本事)를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구수여, 나는 피[稗]로 지은 밥을 복전에게 베풀었기 때문에 천 번이나 저 북구로주(北俱盧洲)에 태어나서 옷과 밥이 저절로 충족했고 천 번을 저 삼십삼천에 태어나서 큰 쾌락을 받았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염유경(鹽喩經)』의 말씀을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어느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짓고 자라게 한 만큼의 나쁜 업으로 마땅히 지옥에서 받아야 할 것을 혹 현재의 법[現法]에서 받는 일도 있고 마땅히 현재의 법에서 받아야 할 것을 지옥에 가서 받는 일도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한 찰나의 업이 역시 많은 중동분을 이끈다면 『시설론(施設論)』의 학설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업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갈래[趣]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하고, 갈래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생(生)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하며, 생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이숙(異熟)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하고, 이숙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근(根)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하며, 근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보특가라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통달경(通達經)』의 말씀을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어떻게 모든 업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별업(別業)은 지옥에 태어나고 별업은 방생에 태어나며 별업은 아귀에 태어나고 별업은 천상에 태어나며 별업은 인간에 태어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순현법수(順現法受) 등의 세 가지 업의 차별을 건립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의 말을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상(上)의 살생하는 업을 지어 더욱 자라게 하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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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중(中)은 그 밖의 다른 곳에 태어나며, 하(下)는 다시 그 밖의 다른 곳에 태어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한 찰나 동안의 업은 오직 하나의 중동분만을 이끈다”라고 말해야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모든 중생으로서 일찍이 인간 세상에 있으면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남은 업[殘業]을 말미암아서라 함은 따로 나아갈 업[別趣業]을 말미암아서라는 것이니 그는 인간 세상에서 지옥과 방생 두 악취(惡趣)의 업을 짓고 더욱 자라게 했으므로 지옥에서 지옥의 업을 받은 뒤에 남은 방생의 업으로 큰 바다에 태어난 것이니 이 때문에 남은 업은 한 업만 바라지 않는다.
[문] 무멸(無滅) 존자가 말씀한 본사(本事)는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구수여, 나는 한 끼의 밥을 복전에 베풀었기 때문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그것은 처음의 인(因)을 드러내려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는 먼저 한 끼의 밥을 보시한 까닭에 부하고 귀한 집에 태어나 재보가 많고 넉넉했으며 전생에 낸 생각과 혹은 본래 서원한 힘을 말미암아 다시 백천의 재물과 음식으로 보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차츰차츰 여러 생[多生]을 겪으면서 언제나 보시하기를 좋아했고 큰 부자로서 쾌락을 받았다. 그는 이런 처음의 인에 의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농부가 적은 종자를 여러 해 동안 심고 심어서 차츰 불어나 백천 섬[斛]이 되자 “나는 적은 종자를 심어서 이제는 백천 섬을 수확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장사꾼이 일 전의 돈으로 오랫동안 사고팔고 하여 천만 전에 이르자 “나는 일 전의 밑천으로 장사한 것이 붇고 불어나서 이제는 천만 전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들도 모두가 최초의 인에 의거한 까닭에 이렇게 말한 것이니 존자도 그러하다.
또 저 존자는 한 생(生) 동안에 먼저 한 끼의 밥을 보시하고 그 뒤에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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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주 보시하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많은 인간과 천상의 인(因)을 끌어낸 것이다. 그는 최초의 인에 의거한 까닭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 저 존자는 한 끼의 밥을 보시할 때에 많은 서원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천상과 인간에서 많은 이숙과(異熟果)를 이끌어 얻은 것이다.
또 저 존자는 한 끼의 밥을 보시함으로 인하여 하품(下品)․중품(中品)․상품(上品)의 세 가지 착한 업[善業]을 일으킨 것이다. 하품의 업을 말미암아 인간에 태어나 인간의 임금이 될 수 있었고, 중품의 업을 말미암아 천상에 태어나서 다시 천왕(天王)이 되었으며, 상품의 업을 말미암아 최후의 몸[最後身]으로 석씨(釋氏)의 집안에 태어나 재보가 넉넉했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런 뜻을 말미암으면 이미 대가섭파가 말씀한 본사가 해
석되고 통하게 될 것이다.
[문] 『염유경(鹽喩經)』의 말씀은 다시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거기서 “어느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어떤 이는 “그것은 두 사람이 두 가지의 업을 짓고 두 가지의 이숙을 얻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다 같이 생명을 해치고는 한 사람은 몸의 계율[身戒]과 마음의 지혜[心慧]를 부지런히 닦지 않아 복이 적기 때문에 지옥에 나서 이런 업의 이숙과를 받는 것이며, 한 사람은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 복이 많기 때문에 곧 인간세상에서 이런 업의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염유경』에서 말씀한 “그만큼[爾許]이란 무슨 뜻을 말씀하신 것인가?”
[답] 적거나 또는 같거나 또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만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업을 짓고 두 가지 이숙을 받는 것을 말한다. 어떤 한 사람이 둘의 생명을 해치고서 하나의 업은 지옥의 이숙을 이끌고 하나의 업은 인간세상의 이숙을 이끌게 될 때에 그가 만일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닦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서 별업(別業)의 이숙과를 받게 되는 것이요, 만일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부지런히 닦으면 인간 세상에서 별업의 이숙을 받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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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그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업을 짓고 두 가지의 이숙인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어느 한 사람이 하나의 생명을 해치면 이 업은 지옥의 이숙도 이끌고 겸하여 다시 인간 세상의 이숙도 이끌어낸다. 그가 만일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닦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서 그 이숙과를 받고 인간 세상의 이숙과는 생기지 않는 법[不生法]에 머문다. 만일 몸의 계율과 마음의 지혜를 부지런히 닦으면 인간 세상에서 이숙과를 받으며 지옥의 이숙과는 생기
지 않는 법에 머무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마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업이 파괴[業壞]되고 갈래가 파괴[趣壞]되는 허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업의 파괴란 하나의 업[一業]이 지옥의 업도 되고 인간의 업도 됨을 말한다. 갈래의 파괴란 하나의 이숙[一異熟]이 지옥취(地獄趣)도 되고 인취도 됨을 말함이니 결과가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업을 짓고 하나의 이숙을 받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이 하나의 생명을 해치면 이 업은 지옥의 이숙을 이끈다. 그가 만일 부지런히 힘써 도를 닦아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서 이 업과(業果)를 받을 것이요, 그 사람이 만일 부지런히 힘써 도를 닦아 아라한이 되면 지옥에서 받을 괴로운 일을 미리 이끌어 와서 사람의 몸에서 받게 된다. 이 업은 중동분을 이끌지 못하는 것이니 중
동분2)을 이끄는 업은 받는 것을 맡겨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세유(世有) 존자는 “혹시 지옥에서 받을 괴로운 일을 이끌어 와서 사람의 몸으로 받는 일이 있는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아라한이 과위를 증득하면 뛰어난 선정과 지혜가 몸에 훈수(薰修)된 까닭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유학(有學)이나 모든 이생(異生)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부엌일을 하는 사람[厨人]이 손을 물에 담갔다가 더운 밥을 뒤적거려도 데지 않지만 만일 손을 물에 담그지 않았다면 데는 것처
2) 아라한은 후유(後有)를 업이라 해도 지옥에 나게 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 만큼의 보상으로 현재의 세상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하며 받지 않고 그대로 넘기지는 못한다. 여기서의 기수(奇受)는 받을 것을 받지 않고 맡겨 둔다는 뜻이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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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이것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오직 무학(無學)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했다.
어느 다른 논사는 “한 찰나의 업도 많은 중동분을 이끌 수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의 힐난(詰難)에는 잘 통하겠지만 뒤의 힐난은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유정으로서 지은 업의 여러 가지 종류는 일정하지 않아 지은 업이 뒤섞이고 어지러워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있고, 지은 업이 뒤섞이거나 어지럽지 않아서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일 뒤섞이고 어지러워서 바뀔 수 있으면 앞에서 인용한 것과 같지만, 만일 뒤섞이거나 어지럽지 않아 바뀔 수 없는 것이면 뒤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앞뒤의 두 힐문에 다 같이 통한다.
[評] 그는 마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업이 파괴되고 갈래가 파괴되는 허물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찰나의 업은 오직 한 중동분만을 이끌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다만 착하지 않은 것[不善]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에 날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의 색(色)과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불상응행(不相應行)만을 받는다. 색이라 함은 9처(處)가 있으니 성처(聲處)는 제외되고, 심․심소법이란 고수(苦受)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명근(命根)․중동분(衆同分)․득(得)․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이다.
다만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방생취(傍生趣)와 귀취(鬼趣)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의 색과 심․심소법과 불상응행을 받는다.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의 색이란 9처로서 성처는 제외되고, 심․심소법이란 고수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명근․중동분․득․생․주․노․무상이다. 착한 법의 이숙의 색이란 4처(處)로서 색처․향처․미처․촉처를 말하고, 심․심소법이란 낙수(樂受)․희수(喜受)․사수(捨受)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득․생․노․주․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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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다른 논사는 “착한 법은 방생취와 귀취에서는 이숙의 색이 없고 오직 이숙의 심․심소법과 불상응행만이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방생취․귀취 안에는 형색이 예쁜 것이 있고 혹은 누추한 것이 있는 것을 현실에서 보는가?
[답] 그것의 착하지 않은 업이 혹은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는 것이 있고 혹은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는 것이 있다. 만일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으면 그 형색이 예쁜 것이니 착한 것은 착하지 않은 것의 폐악(弊惡)의 힘을 굴복하기 때문이다. 만일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으면 형색이 누추한 것이니 착하지 않은 것은 그 폐악의 힘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評] 착한 업은 그 방생취․귀취에서도 이숙의 색을 받는 것이니 도리에 있어서 어긋남이 없다. 이 때문에 처음의 말[初說]이 옳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다만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등분의 업을 이끌어 욕계의 인간․천상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의 색과 심․심소법과 불상응행을 받는다.
착한 법의 이숙의 색이란 9처로 성처가 제외되고, 심․심소법이란 낙수․희수․사수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명근․중동분․득․생․노․주․무상이다.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의 색이란 4처로 색처․향처․미처․촉처이고, 심․심소법이란 고수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득․생․노․주․무상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착하지 않은 법은 인취․천취(天趣)에서는 이숙의 색이 없으며 오직 이숙의 심․심소법과 불상응행만이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인취와 천취 중에는 형색이 누추한 이가 있고 혹은 예쁜 이가 있는 것을 현실에서 보는가?
[답] 그것의 착한 업은 혹은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기도 하고 혹은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기도 한다. 만일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으면 형색이 누추한 것이니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한 것의 미려(美麗)한 힘을 굴복시키기 때문이며, 만일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으면 형색이 예쁜 것이니 착한 업은 그 미려한 힘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評] 여기에서는 처음의 말[初說]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도리에 어긋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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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기 때문이다.
[문] 현실에서 볼진대 사람 중에는 두 형상[二形]을 가진 이가 있는데 그것은 착한 업의 이숙인가 착하지 않은 업의 이숙인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착하지 않은 업의 이숙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장소와 시간을 같이해서 한 형상이 생긴 것은 착한 업의 이숙이고 장소와 시간을 같이하지 아니하고 제2의 형상이 생긴 것은 착하지 않은 업의 이숙이다”라고 말한다.
[評] “저 두 형상이라 함은 남녀추니인 것이니 몸은 착한 업의 이숙이지만 그 장소에 있어서의 색(色)․향(香)․미(味)․촉(觸)은 착하지 않은 업의 이숙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다만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색계(色界)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착한 법의 이숙의 색과 심․심소법과 불상응행만을 받는다. 색이란 7처(處)이어서 성처․향처․미처가 제외되고, 심․심소법은 낙수․희수․사수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은 명근․중동분․무상사․득․생․노․주․무상이다.
다만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색계(無色界)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착한 법의 이숙과 심․심소법과 불상응행만을 받는다. 심․심소법이란 사수(捨受)와 상응하는 법이며, 불상응행이란 명근․중동분․득․생․노․주․무상이다.
또 어떤 이는 “다만 상품(上品)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그 상품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
다만 중품(中品)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방생취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그 중품의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 다만 하품(下品)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귀취 중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하품의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다만 상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의 상품․중품의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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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방생취와 귀취에 있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다만 상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三品]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방생취에 날 뿐이며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중품․하품의 두 가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귀취에 있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다만 상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착하지 않은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방생취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하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귀취 안에 날 뿐이며 거기에 난 뒤에는 그 하품․중품 두 가지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다만 상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지옥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방생취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하품의 착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귀취 안에 날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
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評] “세 가지 품[三品]의 착하지 않은 것은 지옥취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를 따라 지옥 안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에 따라 세 가지 품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이숙과를 받는 것이요, 세 가지 품의 착하지 않은 것은 방생취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를 따라 방생취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 것이며, 세 가지 품의 착하지 않은 것은
귀취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를 따라 귀취 안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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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다만 욕계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그 상품의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 다만 욕계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아래의 다섯 하늘[五天]3)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그 중품의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 다만 욕계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인취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
에 난 뒤에는 오직 그 하품의 법의 이숙과만 받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하품의 착한 업을 말미암아 인취(人趣)에 나서 하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면 보살(菩薩)의 착한 업도 인간 안에 몸을 받는데 어떻게 상품이라 하겠는가?
또 보살의 착한 업은 타화자재천의 착한 업과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욕계 하품의 착한 업으로 인간 안에서 받는다”라고 말함은 보살의 업은 제외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요, 모두를 다 말한 것은 아니다. 그 밖의 다른 연(緣)이 있기 때문에 보살의 업(業)은 뛰어난 것이니 보살의 몸은 역(力)과 무외(無畏) 등의 그지없는 공덕에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거니와 타화자재천의 몸에는 이러한 일이 없다. 그 밖의 다른 연이 있기 때문에 타화자재천의 업은 뛰어난 것이니 그 하늘의 몸은 청정하고 미묘하기가 마치 등불의 불
꽃과 같기 때문이다. 보살의 생신(生身)은 오히려 갖가지 대소변의 부정(不淨)한 것이 있다.
어느 다른 논사는 “다만 욕계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타화자재천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상품․중품의 두 가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아래의 다섯 하늘과 인취에 대하여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다만 욕계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
3) 아래의 다섯 하늘[五天]은 낙변화천(榮樂化天)․도사다천(覩史多天)․야마천(夜摩天)․도리천(忉利天:三十三天)․사천왕중천(四天王衆天)을 말한다. 여기에 타화자재천(他化自存天)을 더하면 욕계 여섯 하늘[六欲天]이다.
어 타화자재천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三品]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욕계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아래의 다섯 하늘에 날 뿐이며 거기서는 하품․중품의 두 가지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인취에 대하여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다만 욕계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타화자재천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욕계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아래의 다섯 하늘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욕계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인취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하품․중품의 두 가지 법
의 이숙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다만 욕계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타화자재천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욕계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아래의 다섯 하늘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욕계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인취 안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
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評]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타화자재천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품[一品]을 따라 타화자재천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응하는 것에 따라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아래 다섯 하늘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품에 따라 아래의 다섯 하늘에 나며 이미 거기에 태어난 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인취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품을 따라 인취 안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초정려(初靜慮)4)의 구별이 없는[無別異] 중
4) 초선(初禪)에도 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세 가지 구별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삼품업(三品業)에 상응한 이숙과(異熟果)이므로 이 삼천(三天)은 이선천(二禪天) 이상의 모든 하늘들과 같아 그 사이에 확연한 구별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무별이(無別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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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품을 따라 초정려에 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다름이 없는 착한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다만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2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소광천(少光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하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2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량광천(無量光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중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2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극광정천(極光淨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3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소정천(少淨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하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3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량정천(無量淨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중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3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변정천(遍淨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하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운천(無雲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하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중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복생천(福生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중품의 착한 법의 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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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품의 착한 것을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광과천(廣果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하품의 잡수정려(雜受靜慮)5)를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번천(無煩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하품의 잡수정려의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중품의 잡수정려를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무열천(無熱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중품의 잡수정려의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품의 잡수정려를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선현천(善現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품의 잡수정려의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상품(上上品)의 잡수정려를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선견천(善見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상품의 잡수정려의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다만 상극품(上極品)의 잡수정려를 말미암아 제4 정려의 중동분의 업을 이끌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날 뿐이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오직 상극품의 잡수정려의 법의 이숙과만을 받는다.
세 가지 품[三品]의 착한 것은 공무변처(空無邊處)의 다름이 없는[無別異]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 품[一品]을 따라서 공무변처에
5) 잡수정려(雜修淨慮)라 함은 제3과(果)와 제4과(果)의 성자(聖者)가 닦는 선정의 법이다. 먼저 제4정려에 의하여 유루와 무루의 마음을 서로 어긋나게 일으키되 여러 생각을 차례로 축소시키다가 최후에는 한 생각의 무루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제4정잡수(定雜受)의 원성(圓成)이라 한다. 이로부터 다시 그 힘으로써 같은 방법으로 아래의 세 선정에도 응용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잡수정려라 한다. 잡수정려의 목적은 혹은 5정거천(淨居天)에 나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不還果의 경우] 혹은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위해서이기도 하며 혹은 관지(觀智)를 예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구사론』 제24권 참조) 여기의 잡수정려는 5정거천에 나는 인(因)을 밝힌 것이니 곧 무번천(無煩天)으로부터 색구경천(色究竟天)까지를 5정거천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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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에 응하는 것을 따라 세 가지 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식무변처(識無邊處)의 다름이 없는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 품을 따라 식무변처에 태어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을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다름이 없는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의 품을 따라 무소유처에 태어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거기에 응하는 것을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세 가지 품의 착한 것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다름이 없는 중동분의 업을 이끌고 그 어느 한 가지의 품을 따라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며 이미 거기에 난 뒤에는 그의 응하는 것에 따라 그 세 가지 품의 착한 법의 이숙과를 받는다.
[문] 무엇 때문에 초정려의 세 가지 품의 착한 업은 다름이 없는 이숙과를 받고 위의 세 정려[上三靜慮]의 세 가지 품의 착한 업은 다름이 있는[有別異] 이숙과를 받는 것인가?
[답] 초정려에는 대중[衆]이 있고 임금[主]이 있어서 뒤섞여 어지럽게 머무르지만 위의 세 정려에는 이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초정려에는 심(尋)이 있고 사(伺)가 있어서 모든 식신(識身)이 있고 아울러 자기 자리[自地]의 몸과 말의 표업(表業)을 일으키지만 위의 세 정려에는 이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에는 1겁(劫) 동안의 이숙과가 있으나 착한 업에는 그렇지 않으며,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업에는 5취(趣)의 이숙과가 있으나 착한 업에는 그렇지 않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업에는 1겁 동안의 이숙과가 있으나 착한 업에는 그렇지 않은가?
[답] 욕계는 부정계(不定界)이므로 수지(修地)도 아니고 이염지(離染地)도 아니어서 착하지 않은 업은 가장 뛰어나고 착한 업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또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법은 끊기도 어렵고 깨뜨리기도 어렵고 뛰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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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어렵지만 착한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욕계 안에는 불선근(不善根)이 강하고 선근은 약하기 때문이며, 또 욕계안의 착하지 않은 것은 마치 주인과 같고 착한 것은 마치 손님과 같기 때문이다.
또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법의 인(因)은 언제나 더욱더 자라지만 착한 법의 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또 욕계 안의 불선근은 선근을 끊지만 선근은 불선근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욕계 안의 위의(威儀)는 뒤섞이고 어지러워 마치 남편과 아내와 같아서 착하지 않은 법은 더욱 자라고 착한 법은 줄어지기 때문이다.
또 욕계 안의 위의는 뒤섞임이 없는 것이 마치 전다라(旃茶羅)의 아들과 도둑의 아들이 같이 옥살이를 하는 것과 같아서 착하지 않은 법은 더욱 더하고 착한 법은 줄어지기 때문이다.
또 욕계 안에는 착한 업으로서 겁 동안 이숙을 받을 만한 그릇[器]이 없기 때문이다.
[문] 왜 주저(洲渚)6)나 묘고산왕(妙高山王)이나 칠금산(七金山) 등 1겁 동안의 그릇이 없는가?
[답] 그것은 증상과(增上果)이며 이숙과(異熟果)는 아니다. 지금은 이숙과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 욕계의 착한 업에서 지극히 증상(增上)인 것은 역시 1겁 동안의 이숙을 받을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착한 업은 반드시 비상비비상처의 제9품의 득(得)을 여의어야 하며 이미 염의 업[染業]을 여의어도 결정코 중동분의 과(果)는 이끌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욕계에는 착한 것으로서 1겁 동안의 이숙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모든 착한 법 가운데서 최상품(最上品)의 것은 무루의 선[無漏善]인데
6) 주저(洲渚)는 사주(四洲)를 말하고 묘고산(抄高山)은 수미산(須彌山)의 번역이며 칠금산(七金山)이라 함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일곱 겹으로 둘러있는 높은 산들이며 모두가 진금(眞金)으로 되었다 하는데 유건타라(由乾陀羅:지쌍산)․이사다라(伊沙陀羅:지축산)․카제라가(佉提羅迦:담목산)․소달리사나(蘇達梨舍那:선견산)․아사간나(阿沙干那:마이산)․비나달가(毘那但迦:상비산)․니민다라(尼民陀羅:지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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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이숙이 없으며 유루의 선[有漏善] 안의 최상품의 것은 유정의 선[有頂善]인데 그것은 욕계가 아니다. 이 때문에 욕계의 착한 업에는 1겁 동안의 이숙이 없다. 착하지 않은 업 안의 최상품의 것은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중동분을 이끄는 업이니 이 때문에 거기에는 1겁 동안의 이숙이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착한 업에서 지극히 증상(增上)인 것은 유정(有頂)의 팔만대겁(八萬大劫)을 받을 수 있는데 착하지 않은 것은 1중겁(中劫)만 받는가?
[답] 착한 업7)은 여러 세계[界]와 여러 자리[地]에서 닦아 익히지만 모든 착하지 않은 업은 그와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 안의 착하지 않은 업은 다섯 갈래[趣]의 이숙과가 있는데 착한 업은 그렇지 못한가?
[답]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가 이것의 인(因)이니 욕계안의 착하지 않은 업은 매우 뛰어난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다시 하나의 불공인(不共因)이 있다. 욕계는 착하지 않은 밭[不善田]이기 때문이니 마치 나쁜 밭에 좋은 모종을 심기 어렵고 더러운 풀은 나기 쉬운 것처럼 욕계도 그러하여 착한 업은 무성하기 어려우며 착하지 않은 것은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착하지 않은 업은 한 갈래의 전부와 네 갈래의 일부분에서8) 이숙과를 받지만 착한 업은 오직 네 갈래의 일부분에서만 이숙과를 받을 뿐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은 서로가 매우 뛰어나 일이 있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착하지 않은 법은 다섯 갈래에서 과(果)를 받으면서도 삼계(三界)에는 두루하지 않으나 착한 업은 삼계에는 두루하면서도 과를 받는 것은 다섯 갈래에 두루하지 않는다.
다 함께 매우 뛰어난 일이란 착한 업과 나쁜 업은 다 같이 4생(生)에서 두루 이숙과를 받으며 또 다 같이 5온(蘊)의 이숙을 받게 되는 것이다.
7) 선업(善業)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三界) 9지(地)에 의하지만 불선업(不善業)은 욕계의 1지(地)에만 의할 뿐이기 때문이다.
8) 한 갈래[一趣]의 전부란 지옥을 말하고 네 갈래[四趣]의 일부분이란 귀취․방생취․인취․천취의 일부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선과(善果)도 있고 악과(惡果)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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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계경에 “업(業)은 눈[眼]의 인(因)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아비달마(阿毘達磨)에 “대종(大種)은 눈의 인이다”라고 설명했으며, 또 거기서는 다시 “눈은 눈의 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말은 어찌 서로 어긋나지 않는가?
[답] 서로 어긋나는 허물은 없다. 이숙인(異熟因)에 의거한 까닭에 계경 가운데서 “업은 눈의 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생인(生因)․의인(依因)․주인(住因)․지인(持因)․양인(養因)에 의거한 까닭에 아비달마에서 “대종은 눈의 인이다”라고 말한 것이며, 동류인(同類因)에 의거한 까닭에 곧 거기서 다시 “눈은 눈의 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일 대종과 눈도 눈의 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계경에서 오직 “업은 눈의 인이다”라고만 말씀했는가?
[답] 업은 근본(根本)이기 때문이다. 마치 “업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갈래[趣]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하고 나아가 감관[根]의 갖가지 차별된 세력을 말미암아 보특가라의 갖가지 차별을 시설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업은 유정의 차별된 인이기 때문이다. 업을 말미암아 유정은 곱고 추한 것과 귀한 이와 천한 이의 차별이 있다.
또 업은 7중(衆)의 차별된 인이기 때문이다. 업을 말미암아 비구[苾芻] 등의 궤범(軌範)도 차별이 있다.
또 업은 좋고[愛] 좋지 않은[非愛] 과(果)에 차별이 있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또 업은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을 잘 표시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또 업은 중생을 인상(印象)하면서 차별되게 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감관의 차별은 업의 차별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마치 싹의 차별은 종자의 차별로 인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모든 유정들이 수량(數量)이 더하고 덜함[增減]과 나아가고 물러남[進退]과 흥하고 쇠함[興衰]은 모두가 업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또 모든 세계[界]와 모든 갈래[趣]와 모든 남[生]의 차별은 다 업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계경에서는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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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은 눈의 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계경에 “살생하는 죄를 자주자주 익히고 널리 퍼뜨리면 지옥․방생․귀신의 세계에 떨어지며 뒤에 사람 세계에 나서도 수명이 짧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 업을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지고 곧 이 업을 말미암아 수명이 짧다고 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 악업을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지며 곧 이 업을 말미암아 인간 세계에 또다시 태어나도 수명이 짧은 것이다. 그 경에서는 다른 인연이 있어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살생의 가행(加行)을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지며 살생의 근본(根本)을 말미암아 뒤에 사람 세계에 나서도 수명이 짧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모든 악취에 떨어지는 것은 살생의 이숙과이며 뒤에 인간 안에 태어나서 수명이 짧은 것은 살생의 등류과(等流果)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생명을 해침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지며 그의 고기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뒤에 인간 세계에 나서도 수명이 짧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생명을 살해하는 것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다. 첫째는 그에게 좋지 않은 괴로운 느낌[苦受]을 들게 하며, 둘째는 그의 사랑하는 수명을 끊는 것이다. 그에게 좋지 않은 괴로운 느낌을 나게 함을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지며 그가 사랑하는 수명을 끊게 함으로 말미암아 뒷날 인간에 태어나면 수명이 짧게 된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인간 세계에서 수명이 짧은 것은 살생한 업의 이숙과가 아니며 인취․천취의 명근(命根) 등과 8근(根)이 이숙이라 함은 오직 이것이 착한 업의 이숙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을 지은 이는 옛날 인간 세상에 있을 때에 먼저 사람의 수명의 양을 이끄는 업을 지었으나 그 뒤에 다시 생명을 살해하는 업을 지은 것이다. 이 업은 앞의 것을 위하여 손해되는 일을 지은 것이니 앞의 업으로 20년의 수명을 받는 것이 마땅한 데 뒤의
손해시킴을 말미암아 10년만 받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명이 짧은 것은 그것의 이숙과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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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경에서 “사람의 수명이 10세(歲) 때의 사람이 착한 업도[善業道]를 받아 행한 까닭에 그가 낳은 아들․딸의 수명은 20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다른 이가 지은 업을 다른 이가 그 과보를 받는다는 도리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10세 때의 부모가 닦은 선행으로 낳게 된 자식의 수명이 20세가 된다고 하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곧 10세 때의 사람이 함께 선행을 닦았기 때문에 목숨을 마치고는 바뀌어 20세의 자식이 되기 때문이니 다른 이가 지어서 다른 이가 받는다 해도 허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업의 이숙과는 저마다 따로따로 결정된다. 20세의 업은 20세의 과를 받으며 나아가 8만 세의 업은 8만 세의 과를 받는다. 그리고 부모가 닦은 착한 업을 말미암아 그 아들이 짓는 업으로 하여금 능히 과를 주게[與果] 한다. 비록 남이 지은 업으로 남이 과를 받는 일은 없다고 해도 서로가 연(緣)이 되는 업으로 과를 준다는 뜻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10세 때의 사람의 불살생(不殺生)은 업도(業道)를 이루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업도가 아니며 다만 함께 생명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제도를 세워서 증상심(增上心)의 결의(決意)가 없이 불살생을 받아 지닐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역시 그것도 업도이다. 그는 역시 오로지 한마음으로 차츰차츰 상대하면서 멀리 여임[遠離]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시설론(施設論)』에 “네 가지 죽음[死]이 있다. 첫째는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요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수명이 짧은 업[短壽業]과 재물이 많은 업[多財業]이 있을 때에 그는 뒷날에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요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둘째는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요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재물이 적은 업[少財業]과 수명이 긴 업[長壽業]이 있을 때에 그는 뒷날에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은 것이요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은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셋째는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고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다. 마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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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가 수명이 짧은 업과 재물이 적은 업이 있을 때에 그는 뒷날에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고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과 같다.
넷째는 수명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도 아니요 또한 재물이 다한 까닭에 죽는 것도 아니다.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수명이 긴 업과 재물이 많은 업이 있을 때에 그는 뒷날에 비록 재물과 수명이 다 같이 아직은 다하지 않았다 해도 나쁜 인연을 만날 때 아닐 때에 죽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 논(論)을 지은 이는 횡사(橫死)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비록 재물과 수명이 모두 아직 다하지 않았으나 반열반(般涅槃)하신 것이다.9) 그러나 횡사가 아니니 변제정(邊際定)의 힘을 이룩하셨기 때문이요, 공덕의 위세(威勢)가 아직 다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모든 그 밖의 유정들은 목숨을 마치는 자리에서는 위세가 다하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으시었다.
[문] 또 『시설론』에서 “혹시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을 받지 않으면서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과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의 이숙을 받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순현법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날 때이다.
[문] 혹시 순차생수업의 이숙을 받지 않으면서 순현법수업과 순후차수업의 이숙을 받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순차생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순현법수업과 순후차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날 때이다.
[문] 혹시 순후차수업의 이숙을 받지 않으면서 순현법수업과 순차생수업의 이숙을 받는 것이 있는가?
9) 부처님은 백 살을 사실 수 있는 수명을 지니고 계셨는데도 일부러 80세에 열반에 드신 것이니 이것을 사수행(捨壽行)이라 하며, 또 부처님은 80세에 열반하시면서 특히 3개월 동만의 수명을 연장하셨는데 이것을 유수행(留壽行)이라 한다. 이 유수행이나 사수행은 다 같이 변제정(邊際定) 즉 제4 정려에서 특수적 행법(行法)의 힘에 의하여 얻으신 것이라 한다.[이 변제정과 유수행․무쟁(無諍)․원지(願智)․삼무애해(三無礙解) 등에 관해서는 『구사론
』 제27권 참조]
[답] 있다. 순후차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순현법수업과 순차생수업의 이숙이 앞에 나타날 때이다. 이것은 반드시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해야 비로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증득하지 못한 이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문] 유학(有學)과 이생(異生)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 논에서는 다만 아라한만을 말하는가?
[답] 오직 아라한만이 매우 뛰어난 선정과 지혜가 있어서 몸을 훈수(薰修)한 까닭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고 유학이나 이생에게는 이러한 일이 없다.
또 오직 아라한만이 자기의 업이 가까이 있고 멀리 있으며 바꿀 수가 있고 바꿀 수가 없는 것이 있음을 잘 알 뿐이다. 바꿀 수가 있는 것이면 모두 수행의 힘으로써 그것을 바꾸고 만일 바꿀 수 없는 것이면 현재 앞에서 받도록 이끌어 오면서 후유(後有)가 없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로 가려 할 때에 모든 채권자들이 와서 앞에 나타나면 그 사람은 곧 수레를 돌리고 빚을 다 갚는 것과 같다. 이것은 만업(滿業)을 말하는 것이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중동분의 업은 한꺼번에 받지는 않기 때문이요, 또 한 번만의 상속(相續)이라 상속을 끊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어떤 업이 있을 때에 전생(前生)에 비록 이숙을 받았으나 남은 것이 있으면 지금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고서 매우 뛰어난 수행의 힘과 결택(決擇)하는 힘으로써 이끌어 내어 받는다. 오직 아라한만이 이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쪽만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숙인은 무엇을 자성(自性)으로 삼는가?
[답] 온갖 착하지 않은 것과 착한 것의 유루법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숙인이라 하며 이숙이란 무슨 뜻인가?
[답] 다른 종류[異類]로서 성숙[熟]하게 되는 것이 이숙의 뜻이다.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은 무기(無記)로써 과(果)를 삼는다. 과는 성숙한 것이라는 뜻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이 이숙인은 반드시 3세(世)에 다 통하며 이숙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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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능작인(能作因)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인(因)이 없이 생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모든 외도들과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법이 생기는 데는 결정코 인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비록 인을 말미암아 생긴다 해도 모든 법이 멸할 때에는 인을 말미암아 멸하지 않는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법이 생기고 멸함에는 인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오직 유위의 법[有爲法]만이 능작인이요, 무위의 법[無爲法]은 그렇지 않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무위의 법도 능작인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모든 능작인은 모두가 작용(作用)이 있어서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준다[與果]”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능작인에도 과를 취하거나 과를 주거나 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다만 장애가 되지 않는 것만을 역시 세워서 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자성(自性)은 자성에 대해서도 능작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모든 무위의 법에도 능작인이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유위의 법에는 능작인이 있지만 무위의 법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뒤의 법은 앞의 것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능작인은 앞의 것과 뒤의 것과 함께하는 모든 법에 대해서도 모두가 인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런 등의 갖가지의 달리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바른 인[正因]을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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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능작인인가?10)
[답] 눈[眼]과 빛깔[色]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이 안식은 그 눈과 빛깔과 그것의 상응하는 법[相應法]과 그것의 구유의 법[俱有法]과 귀[耳]와 소리[聲]와 이식(耳識)과 코[鼻]와 냄새[香]와 비식(鼻識)과 혀[舌]와 맛[味]과 설식(舌識)과 몸[身]과 감촉[觸]과 신식(身識)과 뜻[意]과 법(法)과 의식(意識)과 형상이 있는 것[有色]과 형상이 없는 것[無色]과 볼 수 있는 것[有見]과 볼 수 없는 것[無見]과 대할 수 있는
것[有對]과 대할 수 없는 것[無對]과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등의 온갖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으니 그 자성(自性)만 제외된다. 안식에서처럼 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것을 능작인이라 한다. 여기에서 “그것의 상응하는 법과 그것의 구유의 법”이라 함은 안식과 상응하거나 함께 존재하는[俱有] 모든 법을 말한다.
[문] 앞의 눈과 빛깔 등의 여섯 가지의 이문법(二門法)11)과 혹은 여섯 가지의 삼문법은 온갖 법의 본체가 능작인이 된다는 것을 잘 표시하고 잘 해석하며 베풀어 갖추고 드러내 보여서 그 뜻이 이미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다시 형상이 있고 형상이 없는 등의 다섯 가지의 두 가지 법[二法]을 말하는 것인가?
[답] 앞의 것은 자세한 설명이요, 뒤의 것은 간략한 설명이며, 앞의 것은 따로따로의 설명[別說]이요, 뒤의 것은 총괄적인 설명[總說]이며, 앞의 것은 분
10) 이 능작인(能作因)은 소극적인 인(因)이어서 다른 물건이 생기는 데에 힘을 주고 또는 그것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그 범위도 넓고 작용도 극히 막연하지만 또 보기에 따라서는 인(因)으로서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는 점에서 이 논에서는 다른 인들과 똑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문단은 먼저 그의 일반론(一般論)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11) 이문법(二門法)이란 안식(眼論)에 대한 안근(眼根)과 색경(色境)을 말하며 삼문법이란 안근과 색경 이외에 그것의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俱有法) 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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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하는 설명[分別說]이요, 뒤의 것은 분별하지 않는 설명[不分明說]이며, 앞에 것은 점차적인 설명[漸說]이요, 뒤의 것은 단번의 설명[頓說]이다. 이와 같이 하면서 그의 뜻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인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어떤 능작인인가?”라고 묻고 “온갖 법이다”라고만 대답하지 않는가?
[답] 만일 그렇게만 말하면 마땅히 자성은 자성을 위하여 능작이 되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능작인인가?”라고 묻고 “온갖 법이나 그의 자성만은 제외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만일 그렇게만 말하면 무위에도 능작인이 있어야 하리니 간별(簡別)이 없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능작인인가?”라고 묻고 “온갖 유위의 법이나 그의 자성만은 제외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만일 그렇게만 말한다면 마땅히 무위의 법은 능작인이 아니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6식(識)만을 말하여 그 밖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는다고 하면서 그와 다른 유위의 법은 말하지 않는가?
[답] 식(識)은 모든 법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6인(因)은 모두 뛰어난 것에 나아가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도리를 다하지는 않은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안식의 그 자성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은 능작인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먼저 눈과 빛깔을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의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을 말하며 맨 뒤에 귀 등의 온갖 법을 말하는 것인가?
[답] 눈과 빛깔은 안식을 위하여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이 되어 능작인의 뜻과 세력과 작용이 강하기 때문이요, 상응하는 법과 구유의 법은 안식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는 데에 세력과 작용이 친하기 때문이나 귀 등은 그렇지 못하다. 이 때문에 뒤에서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닌가?
[답] 만일 자성이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된다면 원인[因]과 결과[果], 능작(能作)과 소작(所作), 능생(能生)과 소생(所生), 능인(能引)과 소인(所引),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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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能相)과 소상(所相), 능전(能轉)과 소전(所轉), 능속(能續)과 소속(所續) 등의 모두가 차별이 없어야 된다. 원인과 결과 두 가지에는 이미 차별이 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자성에 대하여는 능작인이 아니다.
또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이익도 없고 손해도 없으며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며 성립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진보도 없고 퇴보도 없기 때문에 능작인이 아니다.
또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인(因)이 아니고 등무간(等無間)도 아니며 소연(所緣)도 아니고 증상(增上)도 아니기 때문에 능작인이 아니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된다면 세간의 모든 현실에서 보는 일과는 어긋난다. 손가락 끝은 자기 손가락 끝을 대지 못하고 눈은 자기 눈을 보지 못하며 칼은 자기 몸을 베지 못하고 모든 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지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모든 것이 이와 같다.
또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자재(自在)함이 없고 관대(觀待)함이 없기 때문에 능작인이 아니다.
또 자성은 자성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능작인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하면 일어날 수 있으나 지팡이를 버리면 넘어지는 것처럼 자성이 자성에 대하여는 이러한 뜻이 없다.
또 장애하는 부분이 없어야 능작인인데 모든 법의 자성은 자성을 장애하기 때문에 능작인이 아니다.
장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속(世俗)으로 마치 사람이 평상[床]에 있으면 다른 이를 막고 가리는 것과 같다. 둘째는 승의(勝義)로서 마치 자성이 자성을 장애하여 자재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또 만일 자성이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된다면 “무명(無名)은 무명 등에 반연한다”고 말해야 하고 “무명은 행(行) 등에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며, “안식을 반연하여 안식 등을 낸다”고 말해야 하고 “눈과 빛깔을 반연하여 안식 등을 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리니 이 때문에 자성은 자성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니라는 그 뜻은 결정적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1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⑬
능작인(能作因)1)의 체(體)는 곧 증상연(增上緣)이니 다 같이 온갖 법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義]에서는 다름이 있다. 뛰어남이 많다[多勝]는 뜻이 증상연의 뜻이요 장애하지 않는다[不障礙]는 뜻이 능작인의 뜻이다.
[문] 만일 뛰어남이 많다는 뜻이 증상연의 뜻이면 소연연도 증상이라 해야 하리니 그의 체도 온갖 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마치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말한 것처럼 이 두 가지의 연은 다 같이 온갖 법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답] 만일 상속(相續)하는 것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연의 넓고 좁음은 서로 비슷하지만 만일 찰나(刹那)에 의거하면 증상연의 체의 뜻인 뛰어남이 많다. 온갖 법을 반연해서 비아(非我)의 행상(行相)이 앞에 나타날 때에 온갖 법 가운데서 소연연이 아닌 것은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이지만 증상연이 아닌 것은 오직 자성일 뿐이다. 이 상응과 구유의 모든 법은 이것이 증상이지 소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 만일 장애하지 않는 뜻이 능작인의 뜻이면 능작인의 체는 온갖 법을 포섭하지 못함이 마땅하다. 한 유정이 만일 한 갈래[趣]의 온(蘊)․계(界)․처
1) 능작인(能作因)을 4연설(緣說)에 배치하면 이것은 증상연(增上緣)에 해당하지만 관념상(觀念上) 그 사이에는 다소(多少)와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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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를 일으킴이 있다면 이 유정은 다시는 제2의 온․계․처가 생김이 없을 것이요, 만일 하나의 눈에 의하여 하나의 안식이 생기면 그 안에서는 다시는 제2의 식이 일어남이 없을 것이다.
한 장소에 만일 한 그루의 나무가 있으면 제2의 나무는 없을 것이요, 만일 한 채의 집이 있으면 제2의 집은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서로서로가 장애가 되거늘 어떻게 이 인(因)이 온갖 법을 포섭하겠는가?
[답] 비록 이런 일이 있다 해도 도리에는 어긋남이 없다. 한 유정이 만일 한 갈래의 온․계․처를 일으킴이 있다는 뜻은 그 밖의 모든 온․계․처에게 “내가 그대들에게 장애하지 않으면 그대들 마음대로 생기게 되나 가령 내가 그대들을 장애하면 그대들은 그것을 생기게 하지 못하리라”하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눈에 의하여 안식이 앞에 나타난다면 이 안식의 뜻은 다른 안식에게 “내가 그대들에게 장애하지 않으면 그대들 마음대로 생기게 되나 가령 내가 그대들을 장애하면 그대들은 그것을 앞에 나타나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무와 집의 비유도 이것에 준(準)하여 말함이 마땅하다.
또 곧 그것에 장애가 된다 하면 그것이 만일 생길 때에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하나의 법이 생기려 할 때에는 그 밖의 온갖 법도 모두가 장애가 되지 않는다. 가령 어느 한 법이 그것을 장애함이 있다면 그 법은 그때에 마땅히 생길 수 없어야 하기 때문에 장애하지 않는다는 뜻이 능작인의 뜻이며 능작인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문]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기고 인과 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인데 인과 연이 화합하지 않는 때가 없거늘 모든 법은 어찌하여 항상 생기고 멸하고 하지 않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하나의 생(生)이 화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기고 하나의 멸(滅)이 화합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소멸한다. 생멸(生滅)의 화합에는 둘은 없고 여럿도 없거늘 모든 법이 어떻게 항상 생기고 항상 멸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인과 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긴 뒤에는 그 다음부터 서로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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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되 한량없는 찰나에 연이어 모이면서 덮고 누르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마치 사람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다시 그 위에 흙이 계속 무너지면서 덮고 누르는 것처럼 그 사람은 그때에 오히려 움직일 수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대덕은 “화합하는 인과 연은 이미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거늘 어떻게 모든 법이 항상 생기고 멸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각천(覺天) 존자는 “모든 법이 생기고 멸하는 것은 각각 오직 한 때의 작용만 있어야 한다. 생긴 뒤에는 다시 생기고 멸한 뒤에 다시 멸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기고 멸하는 것은 항상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인과 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인과 연의 공능(功能)은 여럿인가 하나인가? 만일 하나라면 어떻게 많은 것에 의거하며 만일 여럿이면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가?
[답]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고 여럿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일을 이룩하기 때문이요 여러 체(體)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또 인과 연의 공능은 서로가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고 여러 법을 내기 때문에 여럿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인과 연의 공능은 똑같이 모든 법으로 하여금 작용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고 물질[色]과 느낌[受] 등의 작용을 따로따로 일으키기 때문에 여럿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의 공능이 여러 가지가 없다면 일으키는 작용의 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 등에는 차별이 없어야 하리니 이 때문에 모든 법의 인과 연의 공능은 여럿이다 하나다라고 일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문] 인과 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이 생기게 되는 것처럼 또한 인과 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도 멸하는가?
[답] 비유(譬喩) 존자는 “생기는 것은 인과 연을 기다리되 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마치 사람이 활을 쏠 때에 활을 발사할 때는 힘이 필요하나 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는 것과 같으며, 옹기장이가 바퀴를 굴릴 때는 힘이 필요하나 그칠 때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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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阿毘達磨) 논사는 “모든 법이 생기고 멸하는 것은 다 같이 인과 연을 기다리는 것이니 멸하고 생기는 것은 모두가 작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앞에서 말한 비유는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반드시 회통할 필요는 없으니 삼장(三藏)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부와 성인의 법은 달라서 예(例)도 동일할 수는 없다.
또 화살과 바퀴는 역시 인(因)을 말미암아 떨어지고 그친다. 화살이 떨어지는 인이란 방패[排楯]와 과녁[的] 등이다. 가령 그 밖의 다른 인이 없다면 활을 당기는 것도 그의 인이니 만일 먼저 쏘지 않았다면 무슨 연유로 떨어지겠는가?
바퀴가 그치는 인이란 손과 막대기이다. 가령 그 밖의 다른 인이 없다면 옹기장이[能轉者]도 그의 인이니 만일 먼저 굴리지 않았다면 지금 무슨 연유로 그치겠는가?
[문] 만일 방패나 손 등이 화살이나 바퀴를 장애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떨어지고 그치게 했었다면 어떻게 그것과 함께 능작인이 되는가?
[답] 방패나 손 등의 물건은 그것이 가고 구르는 것을 장애하는 것이요 떨어지고 그치는 것을 장애한 것이 아니므로 능작인이 되는 데에 도리로 보아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문] 만일 법이 생기고 멸하는 데에 다 같이 인과 연을 기다린다면 생기고 멸하는 인과 연은 온갖 때에 다 있거늘 어찌하여 생기는 때에는 역시 멸하고 멸하는 때에는 역시 생기지 않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생기고 멸하는 두 때의 화합은 저마다 다르다. 이 때문에 생기는 때에는 멸함이 없고 멸하는 때에는 생김이 없는 것이니 하나의 원인에 두 개의 결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생길 때의 인과 연은 그 법을 수순하며 멸할 때의 인과 연은 그 법을 어기는 것이다. 비록 그 인과 연의 앞뒤의 체성은 하나라 해도 작용을 더하고 덜하는 시분(時分)이 같지 않아서다.
마치 어떤 비구가 안거(安居)를 마친 뒤에 옷과 발우를 가지고 여러 절을 돌아다닐 때에 어떤 도적이 그를 보고 먼저 예배하면서 공경하고는 공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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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다니다가 뒤에 넓은 들판에 이르자 그의 옷과 발우를 빼앗고 욕을 보이고는 가버린 것처럼 생기고 멸하는 인과 연도 그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생기고 멸하는 두 가지 일은 이미 서로가 어긋난 것이거늘 어떻게 함께 존재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모든 법이 생길 때에는 아직 작용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멸해야 하며 모든 법이 멸할 때에는 이미 작용이 있거늘 다시 어느 곳에서 생기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문] 하나의 법은 이미 여러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여러 법도 하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된다.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될 때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인(因)이 되는 것과 같은가, 여러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가?
여러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될 때에는 여러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가, 하나의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될 때 만일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면 어찌하여 원인이 하나인데 결과 또한 하나가 되지 않는가? 만일 여러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면 어찌하여 결과가 많은데 원인 또한 많은 것이 되지 않는가?
여러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될 때 만일 여러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면 어찌하여 원인은 많은데 결과 또한 많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만일 하나의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면 어찌하여 결과가 하나인데 원인 또한 하나가 되지 않는가?
[답]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능작인 될 때에 또한 여러 법이 한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으며 여러 법이 하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될 때 또한 하나의 법이 여러 법을 위하여 인이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하나는 마땅히 여럿을 이루어야 하고 여럿은 마땅히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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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나는 “하나는 또한 여럿을 이루고 여럿은 또한 하나를 이룬다”고 말할 것이니, 이것은 작용에 의거한 것이요 실체(實體)에 의거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원인은 작용으로써 결과를 삼으며 실체로써 결과를 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모든 결과는 작용으로써 원인을 삼으며 실체로써 원인을 삼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의 실체는 한결같아서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과(因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위의 법을 능작인이라고 함은 다만 장애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며 결과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또 유의의 법은 유위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增上果)를 삼거니와 유위의 법은 무위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지도 않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지도 않는다.
무의의 법은 무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지도 않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지도 않으며, 무위의 법은 유위의 법을 위하여 비록 능작인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지도 않는 것이니 취과와 여과(與果)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유위의 법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데 무위의 법은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가?
[답] 유위의 법은 세간에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마치 먼 길을 가는 이는 반드시 양식을 갖추어야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가지 않는 이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유위의 법은 작용을 소유하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마치 일을 경영하는 이는 반드시 작업의 도구를 갖추어야 그 일을 이룩할 수 있지만 경영하지 않는 이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유위의 법은 생김과 멸함이 있기 때문에 원이 있고 결과가 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또 유위의 법은 화합함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결과도 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또 유위의 법은 세 가지의 모양[三相]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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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또 유위의 법은 성품이 이열(羸劣)하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작용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은 마치 이열한 이는 다른 이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용건(勇健)한 이는 그렇지 않는 것과 같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또 유위의 법은 마치 왕과 같고 왕의 권속과도 같으며 부귀한 이와 같고 부귀한 이의 권속과도 같으며 인다라(因陀羅)와 같고 인다라의 권속과도 같기 때문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나 무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
[문] 유위의 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유위의 법이 장애가 되어 생기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무위의 법이 장애가 되어 생기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답] 유위의 법이 장애가 되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요, 무위의 법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무위는 그를 위하여 능작인은 되지만 언제나 장애하지는 않기 때문이니 마치 물이 흘러드는 도랑에 물이 흐르지 않으면 스스로 다른 원인 때문이요 도랑이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문] 무위의 법이 유위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과 증상연(增上緣)이 될 때에 어느 것이 더 뛰어난[勝]가? 그것을 반연하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법인가?
[답] 똑같아서 차별이 없는 것은 마치 양쪽의 콩 무더기[豆聚]와 같다. 만일 무위의 법이 유위의 법을 위하여 소연연(所緣緣)이 된다면 그런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또 과거의 법은 과거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과거의 법은 미래와 현재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는다.
뜻[義]은 “내가 만일 그대를 위하여 가까운[近] 능작인이 되지 않으면 그대는 인(因)이 없다”는 것이나 유위의 법에는 인이 없지 않다.
미래의 법은 미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미래의 법은 과거와 현재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은 되나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결과는 원인과 함께하는 것이며 혹은 그 뒤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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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은 “내가 만일 그대를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지 않으며 그대는 과(果)가 없다”는 것이나 유위의 법에는 과가 없는 것이 없다.
현재의 법은 현재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현재의 법은 미래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는다.
뜻은 “내가 만일 그대를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지 않으면 그대는 곧 인이 없다”는 것이나 유위의 법에는 인이 없는 것이 없다.
현재의 법은 과거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지 않는 것이니 결과는 원인과 함께하며 혹은 그 뒤에 있기 때문이다.
뜻은 “내가 만일 그대를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지 않으면 그대는 과가 없다”는 것이나 유위의 법에는 과가 없는 것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뒤의 법은 앞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면서도 앞의 법은 뒤의 법에 증상과가 아닌가?
[답] 장애하지 않는다[不障礙]는 뜻은 능작인의 뜻이니 뒤의 법은 앞의 법에 대하여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능작인은 될 수 있으나 과(果)는 반드시 원인의 힘[因力]으로 취(取)하고 주는[與] 것이다.2)
뒤의 법은 앞의 법에 대하여 취하고 주고 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앞의 법은 뒷법의 과가 아니니, 마치 유위의 법이 무위의 법으로써 능작인을 삼으나 그의 과는 아닌 것과 같다. 그것은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또 착한 법[善法]은 착한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착한 법은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과 무기의 법[無記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는다.
착하지 않은 법은 착하지 않은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착하지 않은 법은 착한 법과 무기의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는다. 무기의 법은 무기의 법을 위하
2) 취(取)하고 준다[與]함은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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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으며, 무기의 법은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고 또한 그것으로써 증상과를 삼는다.
착한 법․착하지 않은 법․무기의 법이 서로가 능작인과 증상과가 되는 것처럼 삼계계(三界繫)․불계(不繫)의 법과 학(學)․무학(無學)․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의 법과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지 않을 것[不斷]의 법과 형상이 있는[有色] 법․형상이 없는[無色] 법과 볼 수 있는[有見] 법․볼 수 없는[無見] 법과 대할 수 있는[有對] 법․대할 수 없는[無對] 법과 유루(有漏)의 법․무루(無漏)의 법과 상응하는[相應
] 법 상응하지 않은[不相應] 법 등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착한 법이 착한 법을 위하여 가까운[近] 능작인이 되는 것은 착한 업을 말미암아 선행을 좋아하는 집에 태어나고 태어난 뒤에는 다시 많은 묘행(妙行)을 닦는 것과 같다.
착한 법이 착하지 않은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착한 업을 말미암아 부자요 귀한 집에 태어나며 태어난 뒤에는 방일(放逸)하면서 많은 악행을 짓는 것과 같다. 착하지 않은 법이 착하지 않은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착하지 않은 업을 말미암아 불률의(不律儀) 집에 태어나며 태어난 뒤에는 다시 많은 악행을 짓는 것과 같다.
착하지 않은 법이 착한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착하지 않은 업을 말미암아 몸이 병든 괴로움을 만나고 혹은 재물과 지위를 잃기도 하여 마음에 싫증과 뉘우침을 내면서 여러 가지 묘행을 닦는 것과 같다.
안의 법[內法]이 안의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어느 한 유정이 많은 사람을 공양하는 것과 같으며, 안의 법이 바깥 법[外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모든 농부들이 씨를 심고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바깥 법이 바깥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물과 거름 등으로 곡식 모종을 생장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바깥 법이 안의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음식 등으로 유정을 자라도록 기르는 것과 같다.
한 갈래[一趣]의 법이 다섯 갈래[五趣]의 법을 위하여 가까운 능작인이 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한 마리의 양(羊) 고기를 먹고 몸이 강해진 뒤에 착한 업을 짓는 이도 있고 나쁜 업을 짓는 이도 있어서 착한 업을 짓는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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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천상에 나게 되고 나쁜 업을 짓는 이는 3악취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문] 만일 어느 한 유정이 생명을 해칠 때에 온갖 유정들이 그를 장애하지 않으면 그것을 위하여 능작인이 되지 않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같이 살생죄를 얻지 않는가?
[답] 그 살해하는 이는 살생의 가행(加行)을 일으키고 또한 결과를 만족하게 하기 때문에 그는 살생죄를 얻게 되나 그 밖의 다른 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살생죄를 얻지 않는다.
또 그는 나쁜 마음을 일으키고 또한 다른 이의 생명을 끊었기 때문에 살생죄를 얻으나 그 밖의 다른 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살생죄를 얻지 않는다.
그 밖의 다른 업도(業道) 등에서도 이것에 준(準)하여 알아야 한다.
[문] 모든 바깥의 재물은 온갖 유정의 공업(共業)으로 생긴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도둑은 재물의 주인에게만 죄를 얻고 그 밖의 다른 이에게는 얻지 않는가?
[답] 재물의 주인은 그 재물을 섭수(攝受)하여 수호하고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이는 그렇지가 않다. 이 때문에 도둑은 오직 재물의 주인에게만 죄를 얻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이에게서는 얻지 않는다.
또 재물의 주인은 그 재물에 대하여 자기의 소유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도둑은 그에 대하여 재물의 주인이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그에게만 죄를 얻지만 그 밖의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다.
또 만일 재물이 그에게는 사용과(士用果)요 증상과(增上果)이면 그에 대하여 죄를 얻지만 재물이 그 밖의 다른 유정에게는 증상과이기는 하되 사용과는 아니니 이 때문에 그들한테는 도둑의 죄를 얻지 않는다.
[문] 사용과와 증상과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공력(功力)을 지어서 얻은 것은 사용과요 장해하지 않음[不障礙]에서 얻는 것은 증상과이다.
또 재물은 짓는 이에게는 사용과이나 수용하는 이에게는 증상과이다. 마치 모든 과일을 심어 가꾼 이에게는 사용과이면서 증상과이기도 하지만 식용(食用)하는 이에게는 오직 증상과일 뿐인 것과 같고 마치 모든 재물을 경영하고 구하는 이에게는 사용과이면서 증상과이기도 하지만 수용하는 이에
게는 오직 증상과일 뿐인 것과 같다.
[문] 이 기세계(器世界)의 소미로산(蘇迷盧山)․주(洲)․저(渚) 등의 물건은 모든 유정들의 공업(共業)으로 생긴 것이다. 그 중에서는 열반에 든 이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 물건들이 줄어들지 않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만일 물건이 그의 사용과요 가까운[近] 증상과라면 또한 줄며 적어짐이 있겠으나 소미로산 등은 다만 그의 먼[遠] 증상과일 뿐이므로 줄어지거나 적어짐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소미로산 등은 온갖 유정들의 공업으로 생긴 것이라 가령 이 중에서 한 유정만이라도 있으면 그의 업력(業力)이 지닌 것을 말미암아 역시 줄어지거나 적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유정들이 아직 멸도(滅度)하지 않고 존재함이겠는가? 마치 부귀한 이가 비록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그의 궁전과 동산 숲과 코끼리며 말 등이 따라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유정의 업력으로 유지되기 때문인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이 안에서 비록 한량없는 유정이 열반에 들었고 다른 곳에 난 이들이 있다고 해도 다시 한량없는 유정들이 이 세계에 태어나고 있으므로 그들의 업력을 말미암아 줄어지거나 적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이것은 과거의 업력으로 지탱하기 때문에 줄어지거나 적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마치 전륜왕(轉輪王)이 사주(四洲)의 섬에서 모두 자유자재한 것은 어떠한 과(果)인가?
[답] 자기 몸의 위엄과 세력은 이숙과요 통솔 받는 만물은 바로 증상과이다. 그는 과거에 자신의 뭇 도구를 증상(增上)하는 모든 착한 업을 닦고 익혔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두 가지의 뛰어난 과를 얻은 것이다.
또 세 가지의 증상이 있다. 첫째는 자증상(自增上)이요, 둘째는 세증상(世增上)이며, 셋째는 법증상(法增上)이다.
자증상이라 함은 어느 한 무리가 번뇌는 아직 끊지 못해도 나쁜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스스로를 보호하여 나쁜 업을 일으키지 않고 “나는 이를 말미암아 모든 악취에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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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증상이라 함은 어느 한 무리가 번뇌는 아직 끊지 못해도 나쁜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세간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쁜 업을 일으키지 않고 “나는 이를 말미암아 세간의 비방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나를 말미암아 세간의 유정들이 모든 나쁜 업을 짓지 않게 하리라” 하고 말한다.
법증상이라 함은 어느 한 무리가 번뇌는 아직 끊지 못해도 나쁜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법을 보호하는 까닭을 나쁜 업을 일으키지 않고 “나를 말미암아 모든 세간으로 하여금 바른 법을 가벼이 여기거나 헐뜯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는 곧 가까운 능작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말하여 증상이라 하는가?
[답] 착한 법에 대하여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잘 친근하는 증상연이기 때문이다.
[문] 능작인의 힘에는 더하거나 덜함이 있는가?
[답] 있다. 여러 사람들이 큰 나무를 끌어당길 때에 그 중에는 힘을 다하는 이도 있고 힘을 다하지 않는 이도 있다. 힘을 다하는 이는 능작인이 더하게 되는 것이고 힘을 다하지 않는 이는 능작인이 덜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 나무를 끄는 것처럼 찰간(刹竿)을 세우고 배를 끌며 돌을 굴리는 등과 같은 때에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안[內]이 바깥[外]에 대해서나 또는 바깥이 안에 대해서와 같아서 안과 바깥을 스스로 바라보는 것도 그와 같다.
[문] 능작인과 증상과는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답] 능작인은 많고 증상과는 적다. 능작인은 온갖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을 포섭하나 증상과는 오직 유위의 법만 포섭하기 때문이다.
[문] 이를 말미암아 말하자면 혹시 법이 법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닌 것도 있는가?
[답] 있다. 자성(自性)이 자성에 대한 것이다.
[문] 혹시 법이 타성(他性)에 대하여 능작인이 아닌 것도 있는가?
[답] 있다. 유위가 무위에 대해서와 무위가 무위에 대해서다.
[문] 능작인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온갖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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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능작인이라 하며 능작인이란 무슨 뜻인가?
[답] 장애하지 않는다[不障礙]는 뜻이 능작의 뜻이며 이룩한 것이 있다[有所辦]는 뜻이 능작의 뜻이다. 이 능작인은 반드시 3세(世)와 이세(離世)의 법에다 통하며 증상과가 있다.
이와 같이 이미 6인(因)의 자성을 드러냈으므로 이제는 당연히 다시 6인3)이 서로 섞이고[相雜] 서로가 섞이지 않는[不相雜] 뜻을 드러내겠다.
[문] 만일 법이 상응인(相應因)이면 그것은 또한 구유인(俱有因)인가?
[답]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도 역시 구유인이나 어떤 법은 구유인이나 그것은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유위의 불상응법(不相應法)4)이다.
[문]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은 또한 동류인(同類因)인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 한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나 동류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미래의 상응법(相應法)이다.
어떤 법은 동류인이나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불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고 동류인이기도 하니 과거와 현재의 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도 아니고 동류인도 아니니 미래의 불상응법과 무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은 또한 변행인(遍行因)인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나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遍行隨眠]과 그것의 상응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상응법이다.
3) 앞의 수단(數段)에 걸쳐서 6인(因) 각자의 성질을 밝힌 뒤에 이 문단에서는 하나로 종합하여 갖가지의 방면으로부터 그의 동이점(同異點)을 밝히고 있다. 그 중에서는 6인 상호간의 관계를 논한 곳도 있고 그것을 모든 문(門)으로 분별하는 곳도 있으며 4연(緣)과의 관계를 논하는 곳도 있다. 언뜻 보면 법상(法相)이 극히 복잡한 듯하나 앞의 수단에서 말한 것을 축소한 것에 불과하다.
4) 생(生) 등의 불상응법(不相應法)은 심(心)․심소(心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과 상응하는 관계로는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구유인(俱有因)이지 상응인(相應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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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법은 변행인이나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변행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과 생(生)․주(住)․노(老)․무상(無常)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고 변행인이기도 하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도 아니고 변행인도 아니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그것과 상응하는 법과 생․노․주․무상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불상응법이다.
[문]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은 또한 이숙인(異熟因)인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나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기(無記)와 무루(無漏)5)의 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이숙인이나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착하지 않은[不善] 유루와 착한[善] 유루6)의 불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이고 이숙인이기도 하니 착하지 않은 유루와 착한 유루의 상응법이다.
어떤 법은 상응인도 아니고 이숙인도 아니니 무기와 무루의 불상응법이다.
[문]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能作因)인가?
[답] 만일 법이 상응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이지만 어떤 법은 능작인이나 상응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불상응법이다.
[문] 만일 법이 구유인이면 그것은 또한 동류인인가?
[답] 만일 법이 동류인이면 그것은 또한 구유인이지만 어떤 법은 구유인이나 동류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미래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구유인이면 그것은 또한 변행인인가?
[답] 만일 법이 변행인이면 그것은 또한 구유인이지만 어떤 법은 구유인이
5) 무기(無記)의 마음과 그리고 무루(無漏)의 마음은 이숙과(異熟果)를 불러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상응인이지 이숙인(異熟因)은 아니다.
6) 착한 유루는 유루선(有漏善)의 뜻이며 무루선(無漏善)이 이숙과(異熟果)를 불러오지 않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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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과 구유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유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구유인이면 그것은 또한 이숙인인가?
[답] 만일 법이 이숙인이면 그것은 또한 구유인이지만 어떤 법은 구유인이나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기와 무루와 유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구유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인가?
[답] 만일 법이 구유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이지만 어떤 법은 능작인이나 구유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동류인이면 그것은 또한 변행인인가?
[답] 만일 법이 변행인이면 그것은 또한 동류인이지만 어떤 법은 동류인이나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구유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과거․현재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동류인이면 그것은 또한 이숙인인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동류인이나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와 현재의 무기와 무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이숙인이나 동류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미래의 착하지 않은 유루의 법과 착한 유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동류인이면서 이숙인이기도 하니 과거․현재의 착하지 않은 유루의 법과 착한 유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동류인도 아니면서 이숙인도 아니니 미래의 무기와 무루의 법과 무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동류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인가?
[답] 만일 법이 동류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이지만 어떤 법은 능작인이나 동류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미래의 법과 무의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변행인이면 그것은 또한 이숙인인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변행인이나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무기와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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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법은 이숙인이나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착하지 않은 것과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착하지 않은 유루의 법과 착한 유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변행인이면서 이숙인이기도 하니 과거․현재의 착하지 않은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의 법이다.
어떤 법은 변행인도 아니고 이숙인도 아니니 과거․현재의 무기와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기와 무루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변행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인가?
[답] 만일 법이 변행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이지만 어떤 법은 능작인이나 변행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현재의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구유의 법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온갖 법이다.
[문] 만일 법이 이숙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인가?
[답] 만일 법이 이숙인이면 그것은 또한 능작인이지만 어떤 법은 능작인이나 이숙인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기와 무루의 법이다.
[문] 이 6인(因)은 몇 가지가 색(色)7)이고 몇 가지가 색이 아닌[非色]가?
[답] 상응인과 변행인 두 가지만이 색이 아니다. 그 밖의 나머지는 색과 색이 아닌 것에 다 통한다.
색과 색 아닌 것처럼 볼 수 있는 것[有見]․볼 수 없는 것[無見]․대할 수 있는 것[有對]․대할 수 없는 것[無對]․유집수(有執受)․무집수(無執受)․장양인 것[長養]․장양이 아닌 것[非長養]․대종인 것[大種]․대종이 아닌 것[非大種]․만들어진 물질[造色]․만들어진 물질이 아닌 것[非造色]도 그러하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유루(有漏)이고 몇 가지가 무루(無漏)인가?
7) 색(色)이란 색법(色法)에 관계가 있다는 뜻이요, 색이 아닌 것[非色]이란 색법에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6인(因) 중에 상응인(相應因)과 변행인(遍行因)은 순수한 심리적(心理的)인 관계이므로 색법에는 관계가 없고 다른 4인(因)은 양자(兩者)에 다 걸친다. 예를 들면 구유인(俱有因)과 같은 것은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함께 있는 점에서 보면 색이 아니지만 무표색(無表色)과의 관계에서 보면 색에도 걸쳐지는 것과 같다. 그 밖의 인
(因)도 여기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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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행인과 이숙인 두 가지가 오직 유루요, 그 밖의 나머지는 유루와 무루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유위(有爲)이고 몇 가지가 무위(無爲)인가?
[답] 다섯 가지는 오직 유위뿐이요 능작인 한 가지는 유위와 무위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과거(過去)이고 몇 가지가 미래(未來)이며 몇 가지가 현재(現在)인가?
[답] 상응인과 구유인과 이숙인 세 가지는 3세에 다 통하고, 동류인과 변행인 두 가지는 오직 과거와 현재에 통하며, 능작인 한 가지는 3세와 또한 이세(離世)에도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선(善)이고 몇 가지가 불선(不善)이며 몇 가지가 무기(無記)인가?
[답] 변행인 한 가지는 오직 불선과 무기뿐이요, 이숙인 한 가지는 오직 선과 불선뿐이요, 그 밖의 나머지는 세 가지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욕계계(欲界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계(色界繫)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계(無色界繫)인가?
[답] 변행인과 이숙인 두 가지는 오직 삼계계(三界繫)요, 그 밖의 나머지는 삼계계와 불계(不繫)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학(學)이고 몇 가지가 무학(無學)이며 몇 가지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인가?
[답] 변행인과 이숙인 두 가지는 오직 비학비무학이요, 그 밖의 나머지는 세 가지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며 몇 가지가 끊을 것이 아닌가[不斷]?
[답] 변행인 한 가지는 오직 견도에서 끊을 것이요, 이숙인 한 가지는 오직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세 가지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염오(染汚)되고 몇 가지가 염오되지 않는가?
[답] 변행인 한 가지는 오직 염오되고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에 다 통한다.
염오와 불염오에서처럼 유죄(有罪)․무죄(無罪)․흑(黑)․백(白)․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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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覆)․무부(無覆)․퇴(退)․비퇴(非退)도 그러하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이숙(異熟)이 있고 몇 가지가 이숙이 없는가?
[답] 이숙인 한 가지는 이숙이 있고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이숙이고 몇 가지가 이숙이 아닌가?
[답] 변행인과 이숙인 두 가지는 이숙이 아니고[非異熟]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상응(相應)하고 몇 가지가 상응하지 않는가?
[답] 상응인 한 가지는 오직 상응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처럼 소의가 있고[有所依]․소의가 없고[無所依]․소연이 있고[有所緣]․소연이 없고[無所緣]․행상이 있고[有行相]․행상이 없고[無行相]․경각이 있고[有警覺]․경각이 없고[無警覺]․등무간이 있고[有等無間]․등무간이 없는 것[無等無間]도 그러하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4제(諦)하고 속하고 몇 가지가 4제에 속하지 않는가?
[답] 변행인과 이숙인 두 가지는 오직 고제와 집제에 속하고, 상응인과 구유인과 동류인 세 가지는 고제․집제․도제에 속하며, 능작인 한 가지는 4제와 진리 아닌 것[非諦]8)에 다 속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5온(蘊)에 속하고 몇 가지가 5온에 속하지 않는가?
[답] 상응인과 변행인 두 가지는 오직 색온을 제외한 4온에 속하고, 구유인과 동류인과 이숙인 세 가지는 5온에 다 통하고 속하며, 능작인 한 가지는 5온과 온에 속한 것이 아닌 것에 다 통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어느 처(處)에 속하는가?
[답] 상응인과 변행인 두 가지는 오직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에 속하고, 이숙인 한 가지는 오직 색처(色處)와 성처(聲處)와 의처와 법처에 속하며, 구유인과 동류인과 능작인 세 가지는 12처에 모두 속한다.
[문] 이 6인은 몇 가지가 어느 계(界)에 속하는가?
8) 진리 아닌 것[非諦]에도 속한다 함은 무위(無爲)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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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행인 한 가지는 오직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意識界)에 속 하고, 상응인 한 가지는 오직 7심계(心界)9)와 법계에 속하며, 이숙인 한 가지는 오직 색계(色界)와 성계(聲界)와 7심계와 법계에 속하고, 구유인과 동류인과 능작인 세 가지는 18계에 모두 속한다.
[문] 이와 같은 6인은 어느 것이 어떤 과를 가지는가?
[답] 상응인과 구유인은 사용과를 가지고, 동류인과 변행인은 동류과를 가지며, 이숙인은 이숙과를 가지고 능작인은 증상과를 가진다. 그 해탈과(解脫果)10)의 도로써 증득할 것이요 인(因)으로 얻을 것이 아니다.
[문] 이와 같은 6인은 어느 때에 과(果)를 취하고 과를 주는가?
[답] 상응인과 구유인은 현재에 과를 취하고 현재에 과를 주는데, 한 찰나에 과를 취하고 한 찰나에 과를 주며 한 찰나의 과를 취하고 한 찰나의 과를 준다.
동류인과 변행인은 현재에 과를 취하고 과거와 현재에 과를 주는데, 한 찰나에 과를 취하고 여러[多] 찰나에 과를 주며 여러 찰나의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의 과를 준다.
이숙인은 현재에 과를 취하고 과거에 과를 주는데, 한 찰나에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에 과를 주며 여러 찰나의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의 과를 준다.
능작인에 대해 어떤 이는 “현재에 과를 취하고 과거와 현재에 과를 주는데, 한 찰나에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에 과를 주며 여러 찰나의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의 과를 준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능작인은 과거와 현재에 과를 취하고 과거와 현재에 과를 주는데, 여러 찰나에 과를 취하고 여러 찰나에 과를 주며 또는 과를 취할 때에 곧 과를 주는 것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만일 이와 같은 6인을 분명히 깨달아 알면 4과(果)에 대하여 분명하게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 마치 손바닥 안의 여감자(餘甘子)11) 등을 보는 것과 같다.
9) 7심계(心界)란 6식계(識界)와 의근계(意根界)이다.
10) 해탈과(解脫果) 즉 이계과(離繫果)는 성도(聖道)에 의하여 얻는 것이요 6인(因)의 과(果)가 아니라는 뜻이다.
11) 과일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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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법의 작용은 반드시 인연(因緣)을 빌리는 것이니 인(因)은 이미 자세히 분별하였으므로 다음은 연(緣)을 설명하겠다.
연12)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 『시설론(施設論)』과 견온(見蘊)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그리고 『시설론』에 “어떤 법은 인연(因緣)이면서 그것은 또한 등무간연(等無間緣)이기도 하고 또한 소연연(所緣緣)이기도 하며 또한 증상연(增上緣)이기도 하다. 나아가 어떤 법은 증상연이면서 그것은 또한 인연이기도 하고 또한 등무간연이기도 하며 또한 소연연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문] 온갖 법 안에 네 가지의 연[四緣]을 짓는 것이 있어서 마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같고 세 가지의 연[三緣]을 짓는 것이 있어서 마치 색(色)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과 같으며 두 가지의 연[二緣]을 짓는 것이 있어서 마치 무위(無爲)의 법과 같거늘 무엇 때문에 거기서는 “어떤 법은 인연이면서 그것은 또한 등무간연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있을 수 있는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법 안에서 어떤 심․심소는 네 가지 연의 성품을 갖추고 있지만 온갖 모두가 다 네 가지 연을 짓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 도리를 다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문] 만일 법이 인연이면 그것은 또한 등무간연인가?
[답]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면 그것은 또한 인연이지만 어떤 법은 인연이나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와 현재와 최후가 아닌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유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인연이면 그것은 또한 소연연인가?
[답] 만일 법이 인연이라면 그것은 또한 소연연이지만 어떤 법은 소연연이나 인연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인연이면 그것은 또한 증상연인가?
12) 6인설(因說)에 있어서 4연설(緣說)을 논술한다.
[답] 만일 법이 인연이라면 그것은 또한 증상연이지만 어떤 법은 증상연이나 인연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위의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면 그것은 또한 소연연인가?
[답]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면 그것은 또한 소연연이지만 어떤 법은 소연연이나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와 현재와 최후가 아닌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이다.
[문]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면 그것은 또한 증상연인가?
[답]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면 그것은 또한 증상연이지만 어떤 법은 증상연이나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와 현재와 최후가 아닌 심․심소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이다.
[문] 만일 법이 소연연이면 그것은 또한 증상연인가?
[답] 그렇다.
[문] 만일 하나의 법에 대하여 네 가지 연을 완전히 갖추면 마땅히 하나의 연[一緣]뿐인데 어찌하여 네 가지를 세우는가?
[답] 작용(作用)에 의하여 세운 것이요 물체(物體)에 의한 것이 아니니 하나의 물체 안에는 네 가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한 찰나의 심․심소의 법은 그 다음 찰나의 같은 종류의 심․심소를 끌어 일으키기 때문에 세워 인연이라 한다. 곧 이것은 길을 열어 주어 피하면서 그 뒤 다음 찰나의 심․심소의 법이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세워 등무간연이라 한다. 곧 이것은 그 다음 찰나의 심․심소의 법이 취할 경계[境]가 되기 때문에 세워 소연연이라 한다. 곧 이것은 장애하지 않으면서 그 다음 찰나의 심․심소의 법이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세워 증상연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인연은 종자의 법[種子法]과 같고 등무간연은 개도의 법[開導法]과 같으며 소연연은 임장의 법[任杖法]과 같고 증상연은 부장의 법[不障法]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과거와 현재와 최후가 아닌 심․심소의 법은 네 가지 연의 성품[四緣性]을 갖추지만 그 밖의 유위의 법은 세 가지 연의 성품[三緣性]을 가지며 3무위(無爲)의 법은 두 가지 연의 성품[二緣性]을 가진다. 모두가 뜻[義]에 의하여 말한 것이요 물체에 의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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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물체 안에는 여러 뜻[多義]이 있기 때문에 마치 모든 법 가운데 여섯 가지 인[六因]을 짓는 것과 같다. 과거․현재의 불선(不善)과 변행의 수면[遍行隨眠]과 그것의 상응법(相應法)이다.
다섯 가지 인[五因]을 짓는 것도 있다. 과거․현재의 무기(無記)와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이기도 하고 혹은 과거․현재의 불선과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과 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이기도 하며 혹은 과거․현재의 변행이 아닌 것[非遍行]과 불선과 선(善)의 유루의 심․심소의 법이기도 하다.
네 가지 인[四因]을 짓는 것도 있다. 과거․현재의 무기와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과 생․노․주․무상이기도 하고 혹은 과거․현재의 변행이 아닌 것과 불선과 선의 유루와 색과 심불상응행이기도 하며 혹은 과거․현재의 무루의 심․심소의 법이기도 하고 혹은 과거․현재의 변행이 아닌 것과 무기의 심․심소의 법이기도 하며 혹은 미래의 불선과 선의 유루의 심․심소의 법이기도 하다.
세 가지 인[三因]을 짓는 것도 있다. 과거․현재의 변행이 아닌 것과 무기와 색과 심불상응행이기도 하고 혹은 과거․현재의 무루와 색과 심불상응행이기도 하면 혹은 미래의 불선과 선의 유루와 색과 심불상응행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의 무기와 무루의 심․심소의 법이기도 하다.
두 가지 인[二因]을 짓는 것도 있다. 미래의 무기와 무루와 색과 심불상응행이다.
한 가지 인[一因]을 짓는 것도 있다. 무위의 법이다.
하나의 유위가 여러 인[多因]의 뜻이 있으면서 서로서로 어기지 않는 것처럼 연도 그러하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인(因)과 연(緣)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세우(世友) 존자는 “차별이 없다. 인이 곧 연이요 연이 곧 인이다. 마치 계경에 ‘두 가지 인[二因]과 두 가지 연[二緣]으로 정견(正見)을 내는 것이니 다른 이의 말소리[言音]와 안[內]의 이치대로 생각[如理作意]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대인연경』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노사의 갈래[老死支]에는 이러한 연유[由]가 있고 이러한 인(因)이 있고 이러한 모임[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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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이러한 생김[生]이 있고 이러한 연(緣)이 있는 것이니 생의 갈래[生支]가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과 연에는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만일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은 그것의 인이고 또한 그것의 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병(甁)이 있음을 말미암아 병이라는 생각[甁覺]이 있게 되지만 어찌 이 병이라는 생각이 오직 병만 인이 되는가?
[답] 다만 병이 있어서 병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요 병이 없을 때에도 병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니 비록 병이 있을 때라 해도 병이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화합이 있기 때문에 병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이 때문에 화합(和合)은 병이라는 생각의 인과 연이다.
어떤 이는 “화합은 인이니 이 화합의 인을 말하여 연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하나하나가 따로따로라면 인이라 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일이 화합한다 해도 역시 인이 아니어야 한다.
[답] 마치 하나하나가 따로따로라면 화합이라 하지 않고 갖가지 일이 모인 것을 화합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때문에 하나하나가 따로따로라면 인이라 하지 않고 갖가지 일이 화합해야 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어떤 이는 “같은 종류[同類]는 인이요 다른 종류[異類]는 연이다. 마치 불[火]은 불에 대해서 보리[麥]는 보리에 대해서 같은 종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보리가 보리 싹에 대해서 어찌 같은 종류라 할 수 있는가? 만약 같다고 생각하여 보리라 이름하고 동류라 일컫는다면 마땅히 밭이나 물 등의 대종(大種)도 같기 때문에 또한 같은 종류라 해야 하며 그렇다면 밭이나 물 등은 마땅히 보리의 인이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가까운[近] 것은 인이요 먼[遠] 것은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인과 등무간연에는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또 선한 마음의 무간(無間)이 불선한 마음이나 혹은 무기의 마음을 일으켜도 마땅히 인이요 연이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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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공통하지 않은 것[不共]이 인이요 공통한 것[共]은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눈은 안식(眼識)에 대하여 인이고 연은 아니어야 하리니 공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보리는 싹에 대하여 연이고 인은 아니니 이것은 공통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능히 내는 것[能生者]이 인이요 능히 내는 것을 따르는 것이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생의 갈래[生支]는 노사(老死)에 대하여 연이 아니고 생의 갈래를 수순하는 유(有) 등은 노사에 대하여 인이 아니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의 상속[自相續]을 자라게 하고 기르는 것이 인이요 남의 상속[他相續]을 자라게 하고 기르는 것은 연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자기의 상속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착한 마음은 오직 자기의 상속만을 자라게 하고 기르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것은 인이고 연은 아니다.
대덕(大德)은 “구르는 것[轉]은 인이요 따라 구르는 것[隨轉]은 연이며 가까운 것은 인이요 먼 것은 연이다.
가까운 것과 먼 것처럼 여기에 있는 것과 저기에 있는 것과 화합한 것과 화합하지 않는 것과 이 몸에 있는 것과 딴 몸에 있는 것 등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같은 종류로서 따라 구르는 것은 마땅히 연이고 인은 아니어야 한다. 무명(無明)은 행(行)을 반연한다는 것은 마땅히 인이고 연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과 연의 자체에는 비록 차별이 없으나 뜻에 있어서는 차별이 있는 것이니 인의 뜻은 친한 것[親]이요 연의 뜻은 성기는 것[疎]이다. 이런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인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며 연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름[名]도 수(數)도 마땅히 같아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⑭
[論] 모든 마음은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有隨眠心]이라 하는데 그 수면은 이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1)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正理]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다만 한마음[一心]만 있을 뿐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일심상속론자(一心相續論者)2)의 학설과 같다.
그들은 “수면이 있는 마음이나 수면이 없는 마음[無隨眠心]은 그의 성품이 다르지 않다. 성도(聖道)가 앞에 나타나면 번뇌와는 상반(相反)되지만
1) 번뇌의 수증(隨增)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연수증(所緣隨增)이요 또 하나는 상응수증(相應隨增)이다. 소연수증이라 함은 능연(能緣)의 번뇌와 이것에 의하여 반연하는 대경[對境]이 서로가 지지(支持)하고 합쳐져서 더욱더 그 번뇌를 왕성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상응수증이라 함은 번뇌와 그것에 상응하는 심(心)․심소(心所)가 다 같이 서로 지지하고 합쳐져서 그 번뇌를 왕성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수증이라 함은 수순 증장[隨順增長]한다는 뜻으
로 따라다니며[隨] 허물을 더욱 더하게[增] 한다는 것이다. 번뇌 활동의 특질을 밝히는 것에서 아주 중요한 관념이다. 이 문단에서는 수증의 뜻을 갖가지의 방면에서 밝히고 있다.(『구사론(俱舍論)』 제17권 수증의 항목 참조)
2) 일심상속론자(一心相續論者)라 함은 대중부(大衆部)에서 심성본정론자(心性本正論者)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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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心性)과는 상반된 것이 아니니 번뇌를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요 심성을 대치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옷을 빨고 거울을 닦으며 금을 단련하는 물건 등은 때[垢]와는 상반되지만 옷 등과는 상반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도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또 이 몸 안에서 만일 성도가 아직 앞에 나타나기 전이면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에는 수면이 있으나 성도가 앞에 나타나면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마음에는 수면이 없다. 이 마음이 비록 수면이 있을 때와 수면이 없을 때가 다르다 해도 성품은 하나이다.
옷과 거울과 금 등을 아직 빨고 닦고 단련하지 못했을 때에는 때가 있는 옷 등이라 하고 만일 빨고 닦고 단련한 뒤이면 때가 없는 옷이라고 하는 것처럼 때[垢]가 있고 없는 등 시기적으로 비록 다름이 있다 해도 성품에는 차별이 없듯이 마음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수면이 있는 마음과 수면이 없는 마음은 그 성품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수면은 소연(所緣)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한 법[相應法]에 대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지도 않다”라고 집착하는데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만일 수면이 소연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면 다른 세계[他界]의 자리[地]와 무루의 법에 대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해야 하리니 그것은 소연이기 때문이다.
자기 세계의 자리[自界地]에서처럼 만일 상응하는 법에 대해서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면 마땅히 아직 끊어지기 전이나 이미 끊어진 뒤나 관계없이 온갖 것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해야 한다. 상응한다[相應]는 것은 끝내 서로가 떨어지지 않기[不相應] 때문이니 마치 자성(自性)과도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모든 수면은 소연과 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 같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자기 세계의 자리의 유루의 법과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나아가 아직 끊어지기 전이면 항상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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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수면은 오직 보특가라(補特伽羅)만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자부(犢子部)의 학설과 같다.
그들은 “보특가라는 ‘수면이 있다, 수면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마음 등의 법에서는 그렇지 않다. 보특가라는 속박이나 해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오직 마음 등에서만이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는 것을 수면이 있다거나 수면이 없다거나 할 뿐이며 삭취취(數取趣)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마침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등의 다른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뒤바뀜이 없는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마음은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데 그 수면은 이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가?
[答] 혹은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기도 한다. 어떤 것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하는가? 그 수면은 이 마음과 상응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못하고 이 마음을 반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 수면과 이 마음과의 상응함이 이미 끊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마음에는 5부(部)의 마음이 있다. 견고에서 끊을 마음[見苦所斷心]과 나아가 수도에서 끊을 마음[修所斷心]이다.
수면에도 5부의 수면이 있다. 견고의 수면과 나아가 수도에서 끊을 수면이다.
두 가지의 일[二事]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有隨眼心]이라 한다. 첫째는 수면을 말미암아 이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성품[隨增性]이 있고, 둘째는 수면을 말미암아 이 마음에 대해 함께 짝하는 성품[同伴性]이 있다.
견고(見苦)에서 끊을 마음은 견고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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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집(見集)에서 끊을 수면에 대해서 한 가지 일[一事]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隨增性]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집(見集)에서 끊을 마음은 견집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에서 끊을 수면에 대해서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멸(見滅)에서 끊을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도(見道)에서 끊을 마음은 견도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수도(修道)에서 끊을 마음은 수도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또 견고에서 끊을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변행수면(遍行隨眠)과 상응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변행이 아닌[非遍行]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견집에서 끊을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견멸(見滅)에서 끊을 마음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루의 연[有漏緣]3)의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무루연(無漏緣)의 수면과 상응
3) 견멸(見滅)․견도(見道)에서 끊을 번뇌 중 사견(邪見)․의(義)․무명(無明) 두 진리의 것을 합하여 6을 무루의 연이라 하고 그 밖의 것은 유루의 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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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마음이다. 견도(見道)에서 끊을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수도에서 끊을 마음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오의 마음[染汚心]4)이요, 둘째는 불염오의 마음[不染汚心]이다.
견고에서 끊을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고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隨增性]이다. 그 밖의 나머지의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고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고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집에서 끊을 비변행수면과 견고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멸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유루
4) 염오의 마음[染汚心]이란 불선(不善)의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마음을 가리키고 불염오의 마음[不染汚心]이란 선(善)과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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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연의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와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의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멸에서 끊을 무루의 연의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무루의 연의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멸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의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도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도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마음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없는 마음이다.
견도에서 끊을 무루의 연의 수면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도에서 끊을 무루의 연의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도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수도에서 끊을 염오의 마음[染汚心]은 수도에서 끊을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는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수도에서 끊을 불염오의 마음[不染汚心]은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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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또 욕계(欲界)의 견고(見苦)에서 끊을 마음에 열 가지가 있다. 다섯 가지 견해[五見]와 의(疑)․애(愛)․에(恚)․만(慢)․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견집(見集)에서 끊을 마음에 일곱 가지가 있다. 두 가지의 견해[二見:邪見․見取]와 의․애․에․만․불공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견멸(見滅)에서 끊을 마음도 그러하다.
견도(見道)에서 끊을 마음에 여덟 가지가 있다. 세 가지 견해[三見:邪見․見取․戒禁取]와 의․애․에․만․불공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수도(修道)에서 끊을 마음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애(愛)․에(恚)․만(慢)․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마음과 불염오의 마음[不染汚心]이니 선의 유루[善有漏]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유신견(有身見)과 상응하는 마음은 유신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二事]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 밖의 견고에서 끊을 수면과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一事]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이처럼 나아가 견고에서 끊을 만(慢)과 상응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견고에서 끊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고에서 끊을 불공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 밖의 견고에서 끊을 수면과 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집에서 끊을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견멸에서 끊을 사견(邪見)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사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멸에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의 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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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멸에서 끊을 의(疑)와 상응하는 마음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견멸에서 끊을 견취(見取)와 상응하는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견취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밖에 견멸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멸에서 끊을 애(愛)․에(恚) 만(慢)과 상응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견멸에서 끊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마음은 견멸에서 끊을 불공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견멸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견도에서 끊을 마음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수도에서 끊을 애(愛)와 상응하는 마음은 수도에서 끊을 애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 밖에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수도에서 끊을 에(恚)․만(慢)과 상응하는 마음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수도에서 끊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마음은 수도에서 끊을 불공무명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 밖에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해서 한 가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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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마음이다. 그 밖에 수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수도에서 끊을 불염오(不染汚)의 마음은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수면에 대하여 한 가지 일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수증의 성품이다. 그 밖에 나머지 수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이 있는 마음이 아니다.
욕계를 말한 것처럼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이곳의 약비바사(略毘婆沙)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한 삼계(三界) 5부(部)의 수면은 이 삼계 5부의 수면이 있는 마음[有隨眠心]에 대하여 만일 아직도 끊지 못했으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 것이니 서로서로가 수순(隨順)하면서 더욱 자라게[增長] 하기 때문이요, 수면(隨眠)은 마음에 대하여 속박하는 일을 더하게[增]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미 끊어졌다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것이니 서로가 수순하지도 않고 더욱 자라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요 수면은 마음에 대하여 속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끊지 못한 자리[未斷位]의 마음은 상응(相應)과 소연(所緣)의 수면에 대하여 다 같이 수면이 있다[有隨眠]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니 상응하는 것은 두 가지 일[二事]을 갖추기 때문이요 소연에 속박된 마음[緣縛心]은 다만 따라다니며 허물만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미 끊은 자리[已斷位]면 이 마음은 오직 상응하는 수면에 대해서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요, 먼저부터의 소연에 속박된 마음은 아니다.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함이 없는 까닭으로 상응하는 수면은 마음에 대하여 오히려 동반의 성품[同伴性]이 있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마음은 상응하는 수면에 대하여 이미 끊고 아직 끊지 못한 것에 관계없이 다 같이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도 소연의 수면에 대해서는 오직 끊지 못한 자리에서만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고 이미 끊은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 앞에서 이미 마음은 수면에 대하여 두 가지 일[二事]을 말미암아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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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수증의 성품[隨增性]이요, 둘째는 동반의 성품[同伴性]이다.
상응하는 수면은 만일 아직 끊지 못한 자리면 두 가지 일을 말미암아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고 만일 이미 끊은 자리면 그것은 이 마음에 대하여 비록 수증의 성품이 없다 해도 동반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인다.
소연의 수면은 만일 아직 끊지 못한 자리면 마음에 대하여 오직 수증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나 만일 이미 끊은 자리면 두 가지 일이 다 같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다시는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문] 만일 상응하는 수면이 상응하는 마음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한 자리면 수증의 성품과 동반의 성품이 있고 이미 끊은 자리면 비록 수증의 성품이 없어도 동반의 성품이 있으므로 마음은 항상 그것에 대하여 수면이 있다고 하게 되며 소연의 수면은 소연의 마음에 대하여 만일 아직 끊지 못한 자리면 수증의 성품과 소연의 성품[所緣性]이 있고 만일 이미 끊은 자리면 비록 수증의 성품이 없다 해도 소연의 성품은 있거늘 무엇 때문에 마음은 그것에 대하여 한
결같이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가?
[답] 상응하는 수면은 상응하는 마음에 대하여 지극히 서로 친근(親近)하고 여러 일들이 평등하면서 서로가 여의지 않는 것은 마치 양(羊)과 그 가죽과 같기 때문에 끊고 끊지 못함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서로가 존재한다[相有]고 하게 되거니와 소연의 수면과 소연의 마음은 극히 친근하지도 않고 여러 일들이 평등하지 않으며 아직 일찍이 화합하는 일도 없으며 만일 아직 끊지 못한 때면 수증의 성품을 말미암아 서로가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만일 이미 끊은 자리
면 극히 소원(疏遠)하기 때문에 서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한다[有]는 이름은 친함이 강한[親强] 것에 의하여 붙인 것이지만 소연에 존재한다는 이름은 붙일만한 것이 아니다.
세우(世友) 존자는 “상응하는 수면은 염오의 마음[染汚心]이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응하는 수면은 마음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응하는
수면은 마음을 덮고 가리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응하는 수면은 마음을 따라 전개되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응하는 수면은 마음을 요란(搖亂)하게 하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상응하는 수면은 상응하는 마음과는 동일한 소의(所依)요 동일한 소연(所緣)이며 동일한 행상(行相)이요 동일한 과(果)며 동일한 등류(等類)요 동일한 이숙(異熟)이며 함께 생기고[俱生] 함께 소멸하면서[俱滅] 극히 친근하기 때문이나 소연의 수면은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상응하는 수면은 상응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억세고 거칠게 굴므로 지혜로운 이가 꾸짖고 싫어하며 벗어나기[出離]가 어려우나 소연의 수면은 소연의 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상응하는 수면은 상응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염오(染汚)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마치 연기에서 불꽃을 얻는 것처럼 성자의 과위[聖果]에 장애되나 소연의 수면은 소연의 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상응하는 수면은 상응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소연의 경계에 대하여 헷갈리어 분명히 알지 못하게 하나 소연의 수면은 소연의 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했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상응하는 수면은 끊고 끊지 못하고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마음으로 하여금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얻게 하며 소연의 수면은 오직 아직 끊지 못한 자리에서만 마음으로 하여금 수면이 있다는 이름을 얻게 하고 만일 이미 끓어진 자리면 수면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論] 가령 수면이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면 이 마음은 다만 그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有隨眠] 마음이라 하는가?
[答] 그를 말미암아서요 다른 것이 아니며, 혹은 그것과 다른 것을 말미암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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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그를 말미암아서요 다른 것이 아니라 함인가? 이 마음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이다. 어떤 것이 그것과 다른 것을 말미암아서인가? 고지(苦智)는 이미 생겼지만 집지(集智)가 아직 생기지 못한 때와 또 마음은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과 견집(見集)에서 끊을 수면의 소연(所緣)이다.
여기에서 “그를 말미암아서요 다른 것이 아니다” 함은 수면이 있는 마음은 다만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 수면으로 말미암아서만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할 뿐이요 마음에 대하여 따라 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수면으로 말미암아서는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이다” 함은 만일 마음이 아직 끊어지지 못하면 반드시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수면으로 말미암아서만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수면으로 말미암아서는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은 마땅히 ‘구박자(具縛者)의 모든 염오의 마음[染汚心]이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구박자와 구박자가 아닌 이와 염오가 있는 마음과 염오가 없는 마음은 모두가 그러할 수 있기 때문이니 다만 “이 마음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모든 아직 끊어지지 못한 마음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함은 다만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수면만 말미암아서요 그 밖의 다른 것을 말미암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과 다른 것으로 말미암아서다”고 함은 수면이 있는 마음은 그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수면을 말미암아서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는 것이니, 고지(苦智)는 이미 생겼지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견고(見苦)에서 끊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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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견집에서 끊을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변행(遍行)의 수면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고 그 밖의 견고에서 끊을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상응하는 수면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곧 견고에서 끊을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리[位]에서는 그 다른 부[他部:集諦]의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수면을 말미암음과 그 밖의 자기 부[自部:苦諦]의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수면을 말미암아서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 다른 부의 수면을 그것[彼]이라 하고 자기 부의 수면을 다른 것[餘]이라고 하는가?
[답] “먼저 가령 수면이 마음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면 이 마음은 다만 그 수면을 말미암아서만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에 지금 “견고에서는 다만 견집에서 끊을 마음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변행의 수면을 말미암아서만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할 뿐만이 아니고 또한 견고에서 끊을 이 마음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는 상응하는 수면을 말미암아서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곧 바른 질문의 것은 그것[彼]이라 하고 바른 질문이 아닌 것을 다른 것[餘]이라 하였으므로 다른 부의 수면은 그때에 아직 끊지 못한지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함을 말미암아 이것은 바른 질문의 것이나 자기 부의 수면은 그때에 이미 끊었는지라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질문의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자기 부의 수면은 그때에 전개되어 앞의 자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여 다른 것[餘]이라 하니 앞에서는 아직 끊지 못했으나 지금은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자기 부의 수면은 먼저는 자유자재하여 하고 싶은 대로 지었으나 지금은 이미 끊었기 때문에 자재하지도 못하며 능숙하게 지을 것도 없기 때문에 다른 것[餘]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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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자기 부의 수면은 본래 성취하였지만 지금은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자기 부의 수면은 지금 성도(聖道)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끊어 없애서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여 다른 것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자기 부의 수면은 이미 성스러운 도를 위하여 간별(簡別)하여 단번에 끊고 옛날에 그 밖의 다른[餘] 사부(四部)와 같은 때에 점차로 끊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餘]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수도에서 끊을 마음[修所斷心]에도 이런 뜻은 있다. 1품(品)에서 8품에 이르기까지를 끊어서 이미 염심(染心)을 끊었을 때에도 그것을 아직 끊지 못했거나 나머지가 이미 끊어졌거나 수면이 있다고 하거늘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論)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마땅히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에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다른 부[異部]를 그것[彼]이라 하거나 다른 부를 다른 것[餘]이라 한다면 이 가운데서 그것을 말하여도 수도에서 끊을 마음에는 비록 이런 뜻이 있기는 하나 자기의 부에서 그것[彼]이 되고 자기 부에서 다른 것[餘]이 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이 가운데서는 다만 끊고 나서 마침내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것만을 말하나 수도에서 끊을 마음에는 비록 이런 뜻이 있다 해도 그것이 끊어진 뒤에 혹은 다시 물러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문] 모든 수면은 어떤 것이 소연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며 어떤 것이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는가?
[답] 서방(西方)의 모든 논사는 “계박의 성품[繫縛性]이 되기 때문에 소연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며 동반의 성품[同伴性]이 되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는 “소연의 경계에 대하여 저마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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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따로의 행상(行相)으로 고집함에 따라 더욱 더하기 때문에 소연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한다고 하며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같은 자신의 허물을 수순하면서 더욱 더하기 때문에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모든 수면은 소연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함이 마치 상응하는 것에서와 같으며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함은 마치 소연에서와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떻게 욕탐(欲貪)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가? 사랑할 만하고[可愛], 좋아할 만하며[可樂], 기뻐할 만하고[可喜], 뜻에 맞는[可意]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것에는 상응하는 것에 대하여 능히 반연한다[能緣]는 뜻이 없는데 어떻게 또한 사랑할 만한 것 등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탐하는 모양[貪相]을 드러낸 것이다. 욕탐 수면에는 사랑할 것 등의 모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요 소연과 상응하는 것이 다르다는 모양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세우(世友) 존자는 “네 가지의 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수면에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나쁜 뜻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대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이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나쁜 뜻에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하나의 상응하는 품[相應品] 가운데서 하나의 수면을 일으키면 곧 이 품(品)의 심․심소의 법으로 하여금 모두가 나쁜 뜻에 떨어지게 한다.
둘째는 마치 불이 더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이글거리는 쇠를 작은 물그릇 안에 놓으면 그 그릇과 물이 모두 더워지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하나의 심품의 법[心品法] 가운데서 하나의 번뇌를 일으키며 곧 온갖 심․심소의 법으로 하여금 모두 뜨겁게 고뇌하게 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마치 연기 등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연기나 먼지의 때가 묻게 된 의복은 모두가 더러워진 것처럼 심품(心品)에 하나의 수면이 있으면 모두가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넷째는 헐뜯고 싫어할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승가 대중[僧衆]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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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범죄가 있으면 대중 모두가 책망을 받는 것처럼 심품에 하나의 수면이 있으면 모두가 헐뜯고 싫어할 만하기 때문이다.
상응하는 것에서 이러한 네 가지의 일이 있어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고 하는 것처럼 소연의 경계도 이 네 가지를 더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만일 소연에 이 네 가지가 더욱 자라게 되면 번뇌는 그것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 과거와 미래의 수면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가?
[답] 그것도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만일 그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지 않으면 불염오의 마음[不染汚心]이 앞에 나타나있을 때에는 마땅히 수면이 없어야 하리니, 곧 경의 말씀과는 어긋난다.
경에 “부처님께서 결만(結鬘)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젖먹이나 어린아이는 배를 맞대고 누워도 오히려 음욕의 경계[欲境]가 뛰어난지 하열한지 알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욕탐전(欲貪纏)의 마음을 일으키겠느냐? 그러나 욕탐 수면의 계박(繫縛)을 당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과거와 미래에는 이미 작용이 없거늘 어떻게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답] 그것은 능히 일어나면서 앞에 나타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연기를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묘음(妙音) 존자는 “그것에는 비록 경계를 취하는 작용은 없다 해도 소연과 상응하는 법에 대하여 마치 현재와 같은 속박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그 수면에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다섯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과거와 미래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의 인(因)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것의 득(得)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것의 소의(所依)5)를 아직 굴리지 못했기 때문이요, 넷째는 그것의 소연(所緣)을 아직 환히 모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그것의 대치(對治)를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5) 소의(所依)라 함은 5근(根)과 신체(身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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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모든 마음은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데 그 수면은 이 마음에서 끊어야 하는가?6)
[答] 혹은 끊어야 하기도 하고 혹은 끊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것을 끊어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을 반연한 것이다. 어떤 것을 끊지 않아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면은 소연의 경계에 대해서는 끊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상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소연에서는 번뇌를 제지하여 모든 허물이 일어나거나 짓지 않게 할 수 있으나 상응하는 것에서는 번뇌를 제지하여 다시는 마음 등과 상응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연에 있어서는 끊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상응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이는 “이 글은 마땅히 ‘어떤 것을 끊어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을 반연하여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어떤 것을 끊지 않아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을 반연하여 이미 끊은 것과 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앞의 물음에서는 “모든 마음은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데 그 수면은 이 마음에서 끊어야 하는가?”라고 했으므로 지금은 다만 “어떤 것을 끊어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을 반연한 것이다”라고만 말해도 뜻에 있어서는 이미 만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가 이미 끊었다면 마음은 그를 말미암아 수면이 있다고 하지 못할
것이요 곧 물을 것도 아니니 이 때문에 다시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6) 전단(前段)의 소연수증(所緣隨增)과 상응수증(相應隨增)에 관한 설명에 이어서 이 문단(文段)에서는 그 수면을 끊는 모든 원인을 밝히고 있다. 수면은 소연의 경계에서 끊어야 하고 상응에서 끊는 것이 아니라는 유명한 설명도 이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구사론』 제21권 ‘번뇌의 멸(減)과 단혹(斷惑) 4인(因)’의 항(項)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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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마음을 반연하여 이미 끊은 것과”라고 한 말도 이치로 보아 마땅히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반연한 수면을 만일 이미 끊었다면 곧 물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다만 “어떤 것을 끊지 않아야 하는가? 그 수면이 이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다”라고만 말하여도 그 뜻에는 이미 만족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수면은 소연에 대하여 끊을 수 있지만 상응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 것은 마음에 의거하여 수면이 있다는 뜻을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에 의거하여 말하지 않은 것이니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은 다 같이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論] 모든 수면은 무엇으로 인하여 끊어야 하는가?
[答] 소연(所緣)으로 인해서다.
앞에 드러낸 뜻을 이제는 그 글로써 나타낸 것이다. 모든 수면은 대치(對治)하는 힘을 말미암아 그로 하여금 경계에 대하여 다시는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을 “끊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아들을 제지하여 다시는 술집[酒舍]이나 음녀의 집[婬舍]이나 노름하는 집[博戲舍] 등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수면으로 하여금 상응하는 법을 여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 때문에 그 상응하는 법에 대해서는 끊는다는 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論] 그대는 수면은 소연을 인하여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答] 그렇다.
[문] 만일 그렇다면 모든 수면으로서 견멸(見滅)․견도(見道)에서 끊을 유루연(有漏緣)의 수면은 무엇을 인하여 끊어야 하는가? 만일 이것으로 끊는다[此斷]거나 저것으로 끊는다[彼斷]거나 하면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다.
[답] 견멸과 견도에서 끊을 무루연(無漏緣)의 수면은 소연으로 인하여 끊는 것이니 이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저것도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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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뜻[意]은 “반드시 지혜[慧]가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 인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치를 이루기 위하여 질문하고[問] 대답하고[答] 힐난하고[難] 회통한다[通].
“그대는 수면은 소연으로 인하여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가?”고 하는 것은 질문[問]이다. 앞에서 비록 간략하게 말했어도 아직 자세히는 결정하지 않았으니 만일 다른 이의 종(宗)에서 인정한 것을 자세히 결정하지 않고서 다른 이의 허물을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대답[答]이다. 반드시 지혜는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 인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지니 그 도리는 결정된 것이요 다시 다른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수면으로서 견멸과 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은 무엇을 인하여 끊어야 하는가? 만일 이것으로 끊는다거나 저것으로 끊는다 하면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힐난(難)이다. 그가 묻는 뜻은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은 무엇으로 인하여 끊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데 만일 지혜가 이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을 봄으로 인하여 끊어지게 된다고 하면 그 이치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니 괴로움․괴로움의 원인
을 보는 때에도 이것은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지혜가 그 괴로움의 소멸[滅]과 도(道)를 봄으로 인하여 끊게 된다고 해도 역시 이치가 옳지 못하다. 괴로움의 소멸과 도는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견멸․견도에서 끓을 무루연의 수면은 소연으로 인하여 끊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도 끊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회통[通]이다.
이 회통의 뜻[意]은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은 무루연의 수면에 의지(依止)하는 까닭에 생장하게 되므로 괴로움의 소멸과 도를 보는 때에 이 무루연의 수면은 끊어지기 때문에 그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도 따라서 끊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연약하고 병든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섰다가 지팡이를 버리면 넘어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문] 앞에서 종(宗)을 정하면서 “반드시 지혜가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써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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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진다”라고 말하였고 지금은 회통하면서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능연(能緣)도 따라서 끊어진다”라고 말하는데 어찌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답] 서로 어긋나는 허물은 없다. 지혜가 소연을 보면 수면까지 오히려 끊어지거늘 하물며 소연이 끊어지는데 수면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마치 열매가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아서 나무를 움직여도 오히려 떨어지거늘 하물며 나무가 넘어지는데 열매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앞에서 말한 “반드시 지혜가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 인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진다”라고 말함은 “반드시 지혜가 끊을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 인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반드시 지혜가 모든 번뇌의 소연을 봄으로 인하여 수면은 비로소 끊어진다”라고 말한 까닭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지혜가 무루연의 번뇌의 소연인 괴로움의 소멸[滅]과 도(道)를 봄으로 인하여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도 끊어진다. 이런 이치를 말미암아 고․집법인(苦集法忍)은 위의 것[上]을 반연하는 변행 수면을 끊고 수도위(修道位) 중의 멸지(滅智)․도지(道智)의 두 지혜는 9지(地)의 수도에서 끊을 혹(感)을 끊는다.
어느 다른 논사는 “소연을 말미암아 수면이 끊어진다는 뜻[意]은 번뇌의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수면이 비로소 끊어짐을 드러낸다. 이런 이치를 이루기 위하여 질문하고 대답하고 힐난하고 회통한다.
‘그대는 수면은 소연을 인하여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가?’고 하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수면으로서 견멸․견도에서 끊을 무루연의 그 수면은 무엇을 인하여 끊어야 하는가? 만일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진다면 그 이치가 옳지 않다. 앞에서 수면은 상응하는 것에서는 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진다고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다. 소연인 괴로움의 소멸
․도에는 모든 허물이 없으며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 하자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도 따라서 끊어진다’라고 말한다.
‘앞에서 종(宗)을 정하면서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수면이 비로소 끊어진다고 하고 지금은 능연의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수면이 비로소 끊어진다고 하니 어찌 서로가 어긋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없다. 무루연의 수면은 유루연의 수면에 의하여 생장하게 되며 그 임지(任持)를 말미암아 이것이 상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끊어질 때에 이것도 따라서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나무의 줄기 등이 뿌리에 의지하여 서 있는 것인데 만일 그 뿌
리를 끊으면 줄기 등이 따라서 넘어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說]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앞의 종(宗)에 어긋나기 때문이요 이 본론(本論)의 글의 힐난[難]과 회통[通]에 다르기 때문이며 소연이 끊어질 때에 능연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요 능연이 끊어질 때에 소연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또 어떤 이는 “소연을 인하여 수면이 끊어진다고 하는 뜻은 ‘반드시 소연의 도(道)가 있음을 인하여 수면이 비로소 끊어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도 도리가 아니다. 세존께서는 “팔지성도(八支聖道)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여러 괴로움을 끊고 버리며 변하여 내뱉고 다하여 여의며 염(染)이 사라지게 하는 고요한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때문에 마땅히 “소연의 도가 있거나 소연의 도가 없거나 다 같이 혹(惑)을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뒤의 설[後說]에서는 물음과 회통에 다 같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도리가 아니다.
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네 가지의 일을 말미암아 모든 수면은 끊어진다. 첫째는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견멸․견도에서 끓을 유루연의 수면과 같다. 둘째는 능연이 끊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다른 세계의 연[他界緣]의 수면과 같다. 셋째는 두 연[俱緣]이 다 같이 끊어지기 때문이니 마치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非遍行] 수면과 같다. 넷째는 대치(對治)를 얻기 때문이니 마치 그 밖의 수면이 대치를 얻게 됨에 따라 그것도 따라서 끊어지
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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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世友) 존자는 “다섯 가지 일7)을 말미암아 모든 수면은 끊어진다. 첫째는 소연을 보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무루연의 수면과 자기 세계[自界]를 반연하는 변행의 수면과 같다. 둘째는 소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과 같다. 셋째는 능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다른 세계[他界]를 반연하는 변행의 수면과 같다. 넷째는 두 연[俱緣]이 다 같이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견고․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같다. 다섯째 대치를 얻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니 마치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가령 수면을 마음에서 끊어야 한다면 이 마음은 다만 그 수면만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가?
[答] 혹은 그것[彼]을 말미암아서요 그 밖의 다른 것[餘]이 아니며, 혹은 그것과 그 밖의 다른 것을 말미암기도 한다. 어떤 것을 그것을 말미암아서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마음이 염오(染汚)하지 않는 것으로서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 어떤 것을 그것과 그 밖의 다른 것을 말미암는다 하는가? 마음이 염오한 것이다.
여기에서 염오하지 않는 것[不染汚]이라 함은 염오와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라 함은 무루와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한 것이니, 유루의 선(善)의 마음과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그것을 말미암아서”라 함은 이 마음을 반연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 함은 상응하는 수면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 것이 아니니 이 마음의 상응에는 수면이 없기 때문이다.
7)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이것을 네 가지 일[四事]로 종합한다. 첫째는 소연(所緣)을 두루 알기[辨知] 때문이요, 둘째는 그것의 능연(能緣)을 끊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것의 소연(所緣)을 끊기 때문이요, 넷째는 대치(對治)가 일어나기 때문에 끊어진다.(『구사론』 제21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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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오의 마음에 ‘그것을 말미암는다’라고 함은 이 마음을 반연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는 것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이라 함은 그 밖의 상응하는 수면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한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소연(所緣)의 수면을 그것[彼]이라 하고 상응(相應)하는 수면을 그 밖의 다른 것[餘]이라고 말하는가?
[답] 먼저 “가령 수면을 마음에서 끊어야 한다면 이 마음은 다만 그 수면만으로 말미암아서 수면이 있는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한 것에 대하여 앞에서는 “수면은 오직 소연에서만 끊어야 한다는 뜻이 있고 상응에서는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그것’이란 말은 오직 끊어야 하는 소연의 수면만을 말한다. 곧 이 수면이 바른 질문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상응하는 수면은 바른 질문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와 같이 묻고 대답하는 것인가?
[답] 의심이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오직 끊어야 한다면 마음이 그것만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다고 할 뿐이므로 상응하는 수면은 끊어야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염오의 마음도 그것을 말미암아 수면이 있다고 하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상응하는 수면도 끊어야 한다”라고 의심한다. 때문에 이제는 다시 상응하는 수면은 끊어야 한다는 뜻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는 “마음을 수면에 대하여 ‘있다’고 이름하는 것은 다만 수증의 성품[隨增性]에만 의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므로 이제는 다시 동반의 성품[同伴性]에도 의거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염오가 없는 마음은 다만 수증의 성품에만 의거하여 수면이 있다고 하나 만일 염오의 마음이면 다 같이 두 가지의 성품에 다 의거하게 된다.
[문] 혹시 수면은 끊어졌으나 지혜[慧]는 그의 소연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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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수면은 끊어졌으나 지혜는 그의 소연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모든 이생(異生)으로서 욕계에서부터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르기까지의 염(染)을 여읠 때에 상지의 연[上地緣]과 무루의 연[無漏緣]의 수면이 끊어진 것이요, 또 모든 성자(聖者)로서 욕계의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현관(現觀)할 때에 타계의 연[他界緣]의 수면이 끊어진 것과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현관할 때에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有漏緣)의 수면이 끊어진 것과
멸지(滅智)와 도지(道智)로써 수도에서 끊을 온갖 수면을 여읜 것이다.
지혜는 그의 소연을 보면서도 수면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모든 이생으로서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을 여읠 때에 전품(前品)과 후품(後品)의 모든 품에서 끊을 수면이요, 초정려(初靜慮)에서 무소유처까지의 염을 여읠 때에 욕계와 나아가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있는 모든 타지연(他地緣)의 수면이며, 또 모든 성자로서 색계․무색계의 고제․집제를 현관할 때에 욕계에 있는 모든 타계의 연의 수면이요, 고제를 현관할 때에 견집에서 끊을 자계연(自界緣
)의 수면이며,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의 연의 수면이요, 수도에서 끊을 온갖 수면이며, 집제를 현관할 때에 견고에서 끊을 자계연의 수면과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과 수도에서 끊을 온갖 수면이요, 고지(苦智)․집지(集智)와 세속지(世俗智)로써 수도에서 끊을 염을 여읠 때에 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과 전품․후품의 수도에서 끊을 수면이며, 멸지(滅智)와 도지(道智)로써 수도에서 끊을 염을 여읠 때에 무루연의 수면과 그 밖의 온갖 이생과
성자로서 번뇌를 끊지 않으면서도 번뇌의 소연인 경계를 보는 때의 온갖 수면이다.
수면도 끊어지고 지혜도 그의 소연을 보는 것이 있다. 모든 이생으로서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을 여월 때에 있는 모든 자지연(自地緣)의 자품(自品)의 수면이며, 만약 모든 성자로서 고제․집제를 현관할 때에 견고․견집에서 끊을 자계연의 수면과 멸제․도제를 현관할 때에 견멸․견도에서 끊을 무루연의 수면과 고지․집지와 세속지로써 수도에서 끊을 염을 여읠 때에 자지(自地)․자품의 수도에서 끊을 수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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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도 끊어지지 않으면서 지혜도 그의 소연을 보지 않는 것이 있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들이다.
[문] 혹시 한 찰나 동안에 수면은 끊어지면서 지혜는 그의 소연을 보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하며 그리고 많은 지위[多位]가 있다. 고․집법지인(苦集法智忍)과 멸․도법류지인위(滅道法類智忍位)에는 모두 4구가 있다.
고법지인위(苦法智忍位)의 4구라 함은 제1구(句)는 욕계의 견고에서 끊을 타계연(他界緣)의 수면이요, 제2구는 욕계의 견집에서 끊을 자계연(自界緣)의 수면과 견멸․견도에서 끊을 유루연의 수면과 수도에서 끊을 수면이며, 제3구는 욕계의 견고에서 끊을 자계연의 수면이요, 제4구는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집법지인위(集法智忍位)에 있어서도 그의 알맞은 것에 따라 4구도 그러하다.
멸․도법류지인위(滅道法類智忍位)는 만일 먼저의 이생위(異生位) 가운데서 욕계의 염(染)을 부분[分]으로 여의거나 위의 7지(地)에 대하여 혹은 부분 또는 전부를 여의게 되면 4구를 지을 수 있다.
우선 멸법지인위(滅法智忍位)의 4구라 함은 제1구는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것에서 먼저 아직 여의지 못한 유루연의 수면이요, 제2구는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것에서 먼저 이미 여의게 된 무루연의 수면이며, 제3구는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것에서 먼저 아직 여의지 못한 무루연의 수면이요, 제4구는 욕계의 견멸에서 끊을 것에서 먼저 이미 여의게 된 유루의 연의 수면이며 혹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멸류지인(滅類智忍)과 도법류지인위(道法類智忍位)도 그의 알맞은 것에 따라 4구도 그러하다.
만일 모든 이생으로서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을 여월 때면 낱낱의 무간도(無間道)에서 모두 4구를 지을 수 있다. 제1구는 자품(自品)의 타지연(他地緣)의 수면이요, 제2구는 전품․후품의 자지연의 수면이며, 제3구는 자품의 자지연(自地緣)의 수면이요, 제4구는 전품․후품의 타지연의 수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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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혹은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문] 혹시 번뇌의 끊음[煩惱斷]에 대하여 얻으면서 버리지 않고 버리면서 얻지 않으며 또한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얻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얻으면서 버리지 않는다 함은 모든 이생으로서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을 여의는 때와 또 모든 성인으로서 번뇌를 끊는 때이니 다만 과를 얻는 지위[得果位]는 제외된다.
버리면서 얻지 않는다 함은 모든 이생으로서 이염(離染)에서부터 물러나고 하지(下地)에서 죽어서 이정(二定) 이상에 나며 위의 두 세계[二界]에서 죽어서 욕계에 나는 때와 또 모든 성자로서 향(向) 가운데서 물러나 끊는 때이다.
또한 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함은 모든 이생으로서 상지(上地)에서 죽어서 초정(初定) 이상에 나는 때와 또 모든 성자로서 연근(練根)과 득과(得果)와 퇴과(退果)의 때이다. 얻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함은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3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지납식⑮
[문] 혹시 수면의 소멸[滅]에 있어서 몸소 증득하면서도 지혜[慧]는 그의 소멸을 보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하면서도 지혜는 그의 소멸을 보지 않는 것이 있다. 모든 이생으로서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染)을 여읠 때에 있는 모든 자지(自地)․자품(自品)의 모든 수면의 소멸이며, 또 모든 성자로서 괴로움[苦]을 현관할 때에 견고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과 괴로움의 원인[集]을 현관할 때에 견집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과 도(道)를 현관할 때에 견도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과 수도위(修道位) 중에서 고지․집지․도지
와 세속지로써 그 알맞은 것에 따라 욕계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을 여읠 때에 있게 되는 자지․자품의 수도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과 또 고지․집지․도지와 세속지로써 그 알맞은 것에 따라 득과(得果)와 연근(練根)을 이루는 때에 증득하게 되는 이미 끊은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지혜는 그의 소멸을 보면서도 몸소 증득하지 않은 것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滅]을 현관할 때에 견고․견집․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이요, 수도위 중에서 멸지로써 욕계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의는 때에 득과위(得果位)를 제외하고 현재 관(觀)한 것에 따라 이미 끊어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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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끊어지지 못한 모든 수면의 소멸이며, 그 밖의 온갖 이생과 성자로서 택멸(擇滅)을 증득하지 않으면서 괴로움의 소멸[滅]을 볼 때에 곧 그 보는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하고 지혜도 그의 소멸을 보는 것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을 현관할 때에 견멸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이요, 수도위 중에서 멸지로써 욕계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의는 때에 증득하고 관한 모든 수면의 소멸이며, 또 멸지로써 연근(練根)을 이루는 때에 증득하고 관한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하지도 않고 지혜도 그의 소멸을 보지 않는 것이 있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문] 혹시 한 찰나 동안에 수면이 소멸하고 몸소 증득했으나 지혜는 수면의 소멸을 보지 못할 수 있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멸법지(滅法智)로써 일래과(一來果)를 얻을 때에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했으나 지혜는 그의 소멸을 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때에 색계와 무색계의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지혜는 그의 소멸을 보면서도 몸소 증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뒤의 3품(品)의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도 하고 지혜도 그의 소멸을 볼 수 있다. 욕계의 온갖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앞의 6품(品)의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수면의 소멸에 있어서 몸소 증득하지도 않고 지혜도 그의 소멸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색계와 무색계의 수도에서 끊을 모든 수면의 소멸이다.
멸법지(滅法智)로써 일래과를 얻을 때에 한 찰나에 4구가 있는 것처럼 멸지(滅智)로써 예류(預流)와 일래(一來)와 혹은 불환자(不還者)로 전근(轉根)할 때의 한 찰나 동안에도 모두 4구를 지을 수 있다.
[論] 어떤 것이 인경단(因境斷)의 식(識)인가?
[答] 고지(苦智)는 이미 생겼으나 집지(集智)가 아직 생기지 아니했고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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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것을 인경단의 식이라 한다.
여기에서 식(識)의 인(因)이 끊어지고 경계[境]가 끊어졌으나 자체(自體)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을 인경단의 식이라 한다.
모든 이들이 변행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俱有法)의 모든 법으로 하여금 자기 부[自部]에 대하여 변행인(遍行因)이 아니라고 하는 그들에게 이런 설명을 하게 된다.
고지(苦智)는 이미 생겼으나 집지(集智)가 아직 생기기 전에 마음을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의 인(因)은 온전히 끊어지고 경계[境]도 온전히 끊어졌으나 자체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라 한다.
그때에 만일 마음이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 견집․견멸․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의 인은 비록 온전히 끊었다 해도 경계는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 아니다. 그때에 만일 마음이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 견고․견집․견멸․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의 인은 온전히 끊어졌으나 경계에서는 끊어진 것도 있고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변행의 수면과 그것의 상응법과 구유법의 모든 법으로 하여금 역시 자기 부에서 변행인이라고 하는 그들에게 이런 설명을 하게 된다. 고지는 이미 생겼으면서 집지가 아직 생기기 전에 만일 마음을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이 자기 부의 인은 비록 아직 끊어지지 못했으나 다른 부[他部]의 인은 온전히 끊어지고 경계도 온전히 끊어지되 자체가 아직 끊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라 한다.
그때에 만일 마음이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집․견멸․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의 인은 끊어진 것도 있고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것도 있되 경계는 아직 끊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 아니다. 그때에 만일 마음은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견집․견멸․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마음의 인과 경계는 다 같이 끊어진 것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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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아직 끊어지지 아니한 것도 있기 때문에 인경단의 식이 아니다.
이미 인경단식의 자성(自性)을 드러냈으므로 다음에는 그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하는 것을 드러내겠다.
[論] 이 식에는 몇 가지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가?
[답] 열아홉 가지1)이다.
[문] 하나의 마음[一心]인가?
[답] 그렇지 않다.
그의 일은 어떤 것들인가?
[論] 아직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한 이로서 고법지(苦法智)는 이미 생겼으면서도 집법지(集法智)가 아직 생기기 전에 만일 마음은 욕계의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인경단의 식에는 욕계의 견집에서 끊을 일곱 가지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네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상응(相應)과 소연(所緣)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사견(邪見)․견취(見取)․의(疑)․무명(無明)이다.
세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오직 소연의 수면만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애(愛)․에(恚)․만(慢)이다.
[論] 이미 욕염을 여의었으나 아직 색염(色染)을 여의지는 못한 이로서 고류지(苦類智)는 이미 생겼으면서도 집류지(集類智)가 아직 생기기 전에 만일 마음은 색계의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인경단의 식에는 색계의 견집에서 끊을 여섯 가지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1) 삼계(三界)의 인경단(因境斷)의 식(識)에서는 7과 6과 6이 있어서 합하여 19라는 것은 이하에서 논술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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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게 한다.
네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상응과 소연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니 마치 욕계에서의 설명과 같다. 두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오직 소연의 수면만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할 뿐이니 애(愛)와 만(慢)이다.
[문]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이도 그러해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이미 욕염을 여의었다고 말하는가?
[답] 여기에서는 현행(現行)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반드시 하지(下地)의 염(染)을 여의어야 상지(上地)의 번뇌가 비로소 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論] 이미 색염을 여읜 이가 고류지는 이미 생겼으나 집류지가 아직 생기기 전에 만일 마음은 무색계의 견집에서 끊을 것인데도 견고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면 이 인경단의 식에는 무색계의 견집에서 끊을 여섯 가지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네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상응과 소연의 수면이 따라 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며 두 가지는 이 식에 대하여 오직 소연의 수면만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색계에서의 설명과 같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이미 색염을 여의고 아직 무색염(無色染)을 여의지 못한 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집류지가 아직 생기기 전이라 하면 아직 무색염을 여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 수도에서 끊을 것 가운데에도 인경단식을 건립할 수 있다. 이미 상상품(上上品)에서 하중품(下中品)까지를 끊은 이라도 아직 끊지 못한 8품(品)에서 1품까지의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은 앞에서 이미 끊은 1품에서 8품까지를 반연할 때에 앞의 1품에서 8품까지의 인(因)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역시 인경단의 식이라 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역시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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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다른 부[異部]의 식(識)이면서 다른 부의 인으로 삼거나 다른 부를 경계로 삼아 인과 경계가 끊어졌으면서 자체가 아직 끊어지지 아니했으면 이 안에서 말했겠지만 수도에서 끊을 마음은 자기 부[自部]를 인으로 삼고 자기 부를 경계로 삼는지라 비록 인과 경계가 끊어졌다 해도 인경단의 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여기에서의 인(因)이란 변행인(遍行因)을 말하는 것이니 오직 염오(染汚)일 뿐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인[餘因]은 일정하지 않다. 여기에서의 식(識)이란 오직 수면과 상응하는 모든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니 오직 염오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말한 것의 인경단식은 오직 삼계(三界)의 견집에서 끊을 것에만 있을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인(因)의 뒤에 수면(隨眠)을 설하는가?
[답]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의 뜻으로서는 마땅히 열네 가지의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6인(因)과 4연(緣)과 섭(攝)과 상응(相應)과 성취(成就)와 불성취(不成就)이다. 만일 이와 같은 열네 가지의 일로써 아비달마를 깨닫고 알아서 착오가 없으면 아비달마사(阿毘達磨師)라고 하는 것이요 다만 글[文]만을 외워서 지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일곱 가지의 일로써 아비달마장의 뜻을 깨닫고 알아야 한다. 인선교(因善巧)․연선교(緣善巧)․자상선교(自相善巧)․공상선교(共相善巧)․섭불섭선교(攝不攝善巧)․상응불상응선교(相應不相應善巧)․성취불성취선교(成就不成就善巧)이다. 만일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일로써 아비달마를 깨닫고 알아서 착오가 없으면 아비달마사라고 하는 것이요, 다만 글만을 외워 지니는 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인의 뒤에 모든 수면을 말했다 해도 뜻에는 허물이 없다.
3) 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①
[論] 한 보특가라[一補特伽羅]의 이생[此生]의 12지연기(支緣起)2)에는 몇 가지가 과거이고 몇 가지가 미래이며 몇 가지가 현재인가?
2) 유정(有情)의 윤회(輸廻)를 밝히기 위하여 먼저 12인연(因緣)을 설명하는 단락(段落)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는 갖가지 연기설(緣起說)을 들고 또한 12연기(緣起) 각지(各支)의 하나하나를 상세히 논한다는 점에서 학술상(學術上) 지극히 중요한 지위를 점한 대문장(大文章)이다.(『구사론』 제9권․제 10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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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 뜻은 이미 이해했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에 대한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의 체(體)는 실유(實有)가 아니며 현재는 비록 존재한다[有] 하더라도 무위(無爲)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과거와 미래의 체는 실로 존재하는 것이며 현재는 유위(存爲)의 세간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연기(緣起)는 무위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문] 그들은 무엇을 인하여 그러한 집착을 하는가?
[답] 그들은 경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계경(契經)에 “여래(加來)가 세간에 나오시거나 나오시지 않거나 법(法)은 법성(法性)에 머무른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이를 평등하게 깨달으시어 다른 이를 위하여 열어 보이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연기는 무위의 법임을 알 수 있다고 집착한다.
그런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연기는 유위의 법이어서 3세(世)에 떨어지기 때문이요, 무위의 법은 3세에 떨어져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문] 만일 연기의 법이 무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인용한 경전을 회통하고 풀이하겠는가?
[답] 경에 인과(因果)의 결정된 뜻을 말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거나 출현하시지 않거나 무명(無明)은 결정코 모든 행(行)의 인(因)이요, 모든 행은 결정코 무명의 과(果)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생(生)은 결정코 노사(老死)의 인이요, 노사는 결정코 생의 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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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법성에 머무른다는 것은 결정된 것이라는 뜻이요 무위의 뜻이 아니니 경의 뜻[意]은 이러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계경에 “여래가 세간에 나오시거나 나오시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법은 법성에 머물러서 물질[色]은 언제나 물질의 모양[色相]이요, 나아가 의식[識]은 언제나 의식의 모양[識]이며 땅[地]은 언제나 단단한 모양[堅相]이요, 나아가 바람[風]은 언제나 움직이는 모양[動相]이며 갈리덕계(喝梨德鷄)는 언제나 쓴 맛[苦味]이요, 갈죽가
로희니(羯竹迦盧呬尼)는 언제나 매운 맛[辛味]이다”라고 말씀하였거늘 어찌 5온(蘊) 등도 무위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이미 유위이다.
연기도 그러하다. 5온 등의 자상(自相)은 결정된 것이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요, 연기도 인과에 의거하여 결정된 것이어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종(宗)의 다른 집착을 중지시키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자(論者)가 일으키는 논단(論端)에는 마땅히 다섯 가지의 일[五事]을 분별해야 한다. 첫째는 무엇 때문에 오직 한 보특가라만을 말하는가? 둘째는 어떠한 한 보특가라를 말하는가? 셋째는 무엇 때문에 오직 이생[此生]만을 말하는가? 넷째는 어떠한 이생을 말하는가? 다섯째는 어떠한 현재를 말하는가?
무엇 때문에 오직 한 보특가라만 말하는가? 논의 글이 번거롭고 너무 자세하다는 허물을 피하기 위해서다. 만일 온갖[一切] 보특가라를 말한다면 논의 글이 너무 번거롭고 자세할 뿐더러 또한 소용도 없다. 하나를 말하면 그 밖의 다른 것도 그렇다 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한 보특가라를 말하는가? 만일 이 12지(支)를 편력(遍歷)함이 마치 사다리 층계를 오르는 것과 같은 이가 있다면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이다. 과거3)에 무명(無明)과 행(行)을 일으켜 현재의 식(識)과 명색(名色)과
3) 12인연(因緣)을 요연하게 3세(世) 양중(兩重)에 걸쳐 해석한 것은 『발지론(發智論)』에서 시작한 것과 같다. 곧 식(識)으로부터 수(受)까지의 다섯 가지를 현재의 5과(果)라 하고 무명(無明)․행(行)을 현재의 과보를 받게 한 과거의 2인(因)이라[過現一重因果]한다. 애(愛)․취(取)는 과거의 무명과 같은 혹(惑)이요 유(有)는 과거의 행과 같은 업(業)이니 이 현재의 3인(因)에 의하여 미래의 생(生)․노사(老死)의 과(果)를 받는다
[現未一重因果]고 한다. 도표(圖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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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처(處)와 촉(觸)과 수(受)를 이끌어 내고 다시 현재에서는 애(愛)와 취(取)와 유(有)를 일으키어 미래의 생(生)과 노사(老死)를 이끌어내는 이이니 이것이 바로 여기서 설명하는 한 보특가라다.
만일 과거에 무명과 행을 일으켜 현재의 식과 나아가 수를 이끌어 내고 현재에서 다시 애․취․유를 일으켜 미래의 생․노사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가 있다면 여기서의 설명이 아니다. 지온(智蘊)에서의 설명과 같다. 8지(支)를 성취하면 학행자(學行者)라 하는데 어떠한 것들이 학(學)인가라고 하면 거기의 설명이다. 만일 삼마발지(三摩鉢底)를 편력함이 있어 마치 사다리 층계를 오르는 것과 같다면 이것은 거기의 설명이다.
먼저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선정[定]에 들고 그 다음에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선정에 들며 그 다음에 무색정(無色定)에 들고 그 다음에 멸진정(滅盡定)에 들었다가 멸진정에서 나와 유루(有漏)의 마음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하는 것은 거기의 설명인데, 만일 먼저 유심유사의 선정에 들고 그 다음에 무심무사의 선정에 들며 그 다음에 무색정에 들고 그 다음에 멸진정에 들었다가 멸진정에서 나와 무루(無漏)의 마음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한다면 그것
은 거기서의 설명이 아니다.
또 마치 경에 “먼저 여자의 형용이 단정하고 젊었을 때는 살찌고 예쁜 모습을 보았고 그 다음에 다시 그녀가 노쇠하여 야윈 것을 보았으며 그 다음에 다시 그녀가 중병이 들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고 그 다음에 다시 그녀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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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하루 나아가 칠 일이 지난 것을 보았으며 그 다음에 다시 그녀가 띵띵 부풀어 고름이 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그녀의 뼈마디가 이리저리 떨어져 나가면서 피나 살 등이 없는 것을 보았으며 뒤에는 다시 그 해골이 썩어 문드러져서 마치 비둘기의 빛깔같이 된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여인이 위에서 말한 모든 처지를 두루 겪게 한 것이면 그 경에서의 설명이나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면 거기서의 설명이 아니다. 여기서도 그러하여 다만 12지(支)를 편력하는 이만을 말했을 뿐이요, 그 밖의 다른 이를 말하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에 오직 이생[此生]만을 말하는가? 현재의 생(生)을 말하면 과거나 미래도 그렇다 함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어떠한 이생을 말하는가? 한 중동분[一衆同分]을 이생이라 한다.
어떠한 현재를 말하는가? 중동분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요, 찰나(刹那)의 현재나 분위(分位)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論] 한 보특가라의 이생의 12지연기에는 몇 가지가 과거이고 몇 가지가 미래이며 몇 가지가 현재인가?
[答] 두 가지는 과거이니 무명(無明)과 행(行)을 말하고, 두 가지는 미래이니 생(生)과 노사(老死)를 말하며, 여덟 가지는 현재이니 식(識)․명색(名色)․6처(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를 말한다.
[문] 이 12지에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과거와 미래에는 각각 2지(支)만이 있고 현재에는 8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혜안(慧眼)이 없는 이는 현재의 인(因)으로써 미래의 과(果)를 미루어 알고[推知] 현재의 과로써 과거의 인을 미루어 역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인으로써라 함은 애․취․유요, 미래의 과를 미루어 안다함은 생
과 노사이며, 현재의 과로써라 함은 식․명색․6처․촉․수요, 과거의 인을 미루어 안다함은 무명과 행이다.
세존께서는 혜안이 없는 이로 하여금 현재의 인․과로써 과거․미래가 있다는 것을 미루어 알게 하셨고 이를 말미암아 할 일을 갖출 수 있게 하려 하셨다. 과거 세상의 과도 미래 세상의 인도 이를 말미암아 문을 삼으면 또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자(論者)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또 과거에는 2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곧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가 지금만이 있다”는 집착을 차단시키고, 미래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났다가 죽음이 있는 뒤에는 도로 없다”고 하는 집착을 차단시키며, 현재에는 8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생사의 인과가 상속한다”는 것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서 여래의 교화하시는 일을 다 만족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과거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상견(常見)을 차단시키고 미래에는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단견(斷見)을 차단시키며 현재에 8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중도(中道)를 드러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의 교화하시는 일을 다 만족시키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과거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생사에는 인(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미래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생사에는 과(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현재에 8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인과가 상속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유정이 할 일을 잘 갖추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과거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제(前際)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미래에 2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후제(後際)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며 현재에 8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제(中際)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유정은 할 일을 잘 갖추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가운데서 다만 일생(一生)의 인과만을 말할 뿐이요 그 밖의 생[餘生]의 인과는 이에 준(准)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연기의 법[緣起法]인가? 온갖 유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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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다”라고 말했다.
[문] 이 논(此論)과 그 논[彼論]에서 말한 것에는 어떻게 다른가?
[답] 여기의 말은 불요의(不了義)요 거기의 말은 요의(了義)이며, 여기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지만 거기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없으며, 여기의 말은 비밀한 뜻[密意]이 있지만 거기의 말은 비밀한 뜻이 없으며, 여기의 말은 따로의 인[別因]이 있지만 거기의 말은 따로의 인이 없으며, 여기의 말은 세속(世俗)이지만 거기의 말은 승의(勝義)이며, 여기는 오직 유정의 수(有情數)의 연기의 법만 말하지만 거기는 유정이 수와 유정이 아닌 수[非有情數
]의 연기의 법을 함께 말하며, 여기는 오직 감관이 있는[有根] 것의 연기의 법만 말하지만 거기는 감관이 있는 것과 감관이 없는 연기의 법을 함께 말하며, 여기는 오직 마음이 있는 연기의 법만 말하지만 거기는 마음이 있는 것과 마음이 없는 것의 연기의 법을 함께 말하며, 여기는 오직 집수(執受)의 연기의 법만을 말하지만 거기는 집수와 집수아닌[非執受] 연기의 법을 다 함께 말한다.
또 연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찰나(刹那)4)요, 둘째는 연박(連縛)이며, 셋째는 분위(分位)요, 넷째는 원속(遠續)이다. 여기는 분위와 원속을 말하지만 거기는 찰나의 연박을 말하고 있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論)에서는 오직 유정의 수의 연기의 법만 말하는가?
[답] 그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이 논을 짓는 이의 뜻을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논을 짓는 이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짓기 때문이니 계경에서는 오직 유정의 수의 연기의 법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러했을 뿐이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려.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오직 유정의 수의 연기법만 말씀하셨는가?
4) 찰나(刹那)라 함은 동일찰나(同一刹那)에 12지(支)가 있다.[뒤의 설마달다(設摩達多)의 설(說)] 연박(連縛)이라 함은 12의 각지(各支)가 반드시 3세(世)에 걸치지 않고 서로가 차례로 제약을 받으면서 이어지는 관계를 말하며, 분위(分位)라 함은 과거․현재․미래의 세 지위로 분류[分位]되는 관계를 말하고, 원속(遠續)이라 함은 12지가 반드시 순서를 따르지 않고 앞과 뒤의 때[時]를 격(隔)하면서 상속하는 관계를 말한다.(『구사론』 제
9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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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교화할 것[所化]을 관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 교화할 유정이 오직 유정의 수의 연기법만 듣게 되면 분명히 이해하면서 할 일을 잘 갖출 것으로 관찰하신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유지(有支)에 수순하기 때문이니 유정의 수는 유지의 그 뜻에 수순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다. 유정의 수의 법은 끝없는 때로부터 3유(有)에 바퀴돌 듯하여 계속 끊이지 않아 유의 뜻이 가장 뛰어나므로 유라 한다. 유정의 수의 법은 이 유에 수순하기 때문에 유지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오직 유정의 수의 연기법만 말씀하신 것이요 이 논에서도 이것에 의거하여 역시 유정의 수의 연기법만 말할 뿐이다.
또 모든 유정들은 끝없는 때로부터 생사에 윤전(輪轉)하며 큰 고뇌를 받는 것은 모두가 유정의 수의 법을 잘못 집착한 까닭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유정의 수의 연기법만 열어 보이셨을 뿐이며 이 논도 그것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 이와 같은 연기의 자성(自性)은 무엇인가?
[답] 5온(蘊)과 4온(蘊)이 여기서 말한 연기의 자성이다. 욕계와 색계에는 5온을 자성으로 삼고 무색계에는 4온을 자성으로 삼는다.
자성에의 설명처럼 아물(我物)과 상분(相分)과 본성(本性)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연기라 하며 연기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답] 연(緣)을 기다려서 일어나기[起] 때문에 연기라 한다. 어떠한 연을 기다리는가? 인연(因緣) 등이다.
어떤 이는 “연이 있어야 일어나기 때문에 연기라 한다. 성상(性相)이 있으면 연을 좇아 생길 수 있으며 성상이 없으면 생길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연이 있는 것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연기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연이 있어야 이것이 비로소 일어나게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따로따로의 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연기라 한다. 따로따로의 물건은 따로따로 연을 좇아 화합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똑같이[等] 연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연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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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다.
[문] 어떤 법은 4연(緣)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심(心)․심소(心所)요, 어떤 법은 3연5)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멸진정(滅盡定)과 무상정(無想定)이며, 어떤 법은 2연6)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온갖 색(色)과 그 밖의 불상응행(不相應行)이다. 어떻게 똑같이 연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연기라 한다고 하는가?
[답] 곧 이런 일 때문에 똑같다고 한다. 마땅히 4연에서 생겨야 하는 것은 모두가 4연에서 생기고 3연도 아니고 2연도 아니며, 마땅히 3연에서 생겨야 하는 것은 모두가 3연으로 생기는 것이어서 4연도 아니고 2연도 아니며, 마땅히 2연에서 생겨야 하는 것은 모두가 2연으로 생기는 것이어서 3연도 아니고 4연도 아니다. 이 때문에 똑같다고 한다.
또 증상연(增上緣)에 의거하는 까닭에 똑같다고 하는 것이니 하나하나의 법이 지금 생기는 때에는 각각 자성(自性)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온갖 법은 모두가 그것의 증상연이 되기 때문이다.
또 모두가 동시(同時)에 생기기 때문에 똑같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온갖 유정의 마음은 똑같이 생기고[等生] 똑같이 머무르며[等住] 똑같이 소멸한다[等滅]”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 모두가 한 찰나[一刹那]이기 때문에 똑같다고 말한다.
또 온갖 모두에게는 이 12지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무학(無學)의 과위(果位)에 이르기까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다고 말한다.
[문] 모든 유정들은 혹 앞에 열반하는 이도 있고 혹 뒤에 열반하는 이도 있거늘 어떻게 연기의 법이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답] 모두가 열두 가지[十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똑같다고 한다.
또 모두가 열반을 증득해야 비로소 연기를 버리게 되기 때문에 똑같다고 하며 또 연기의 전체적인 모양[總相]은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이 온갖 유정
5) 4연(緣)에서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제외된다. 등무간연은 심(心)․심소(心所)로 하여금 후념(後念)이 계속 생기게 하는 연(緣)인데 멸진정(滅盡定)과 무상정(無想定)은 마음의 후념이 생기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 연은 빠진다.
6) 2연(緣)이라 함은 인연(因緣)과 증상연(增上緣)이다. 색법(色法)과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심법(心法)이 아니기 때문에 소연연(所緣緣)이 빠지고 또 앞의 심․심소의 법으로부터 계속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等無間緣)도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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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동일하게 이 법을 소유하기 때문에 똑같다고 한다.
또 앞에 열반하는 이는 연기의 법에 대하여 앞은 적지만 뒤가 많고 뒤에 열반하는 이는 연기의 법에 대하여 앞은 많지만 뒤가 적기 때문에 똑같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유정은 모두가 한량없는 과거․미래의 모든 연기의 법을 소유하면서 비록 세간에서 행하는 것은 적은 일이 있고 많은 일이 있다고 해도 그 체의 수[體數]는 모두가 똑같다.
계경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연기법(緣起法)과 연이생법(緣已生法)을 말하리라’ ”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연기법과 연이생법은 그 차별이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어떤 것이 연기법인가?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을 말한다. 어떤 것이 연이생법인가? 온갖 유위의 법을 말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역시 차별이 있다. 이름[名]이 곧 서로 틀리다. 이것은 연기법이라 하고 저것은 연이생법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 인(因)을 연기법이라 하고 과(果)를 연이생법이라 한다. 인과와 같이 능작(能作)․소작(所作)과 능성(能成)․소성(所成)과 능생(能生)․소생(所生)과 능전(能轉)․소전(所轉)과 능기(能起)․소기(所起)와 능인(能引)․소인(所引)과 능속(能續)․소속(所續)과 능상(能相)․소상(所相)과 능취(能取)․소취(所取)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먼저 생긴 것을 연기법이라 하고 뒤에 생기는 것은 연이생법이라 하며 또 과거를 연기법이라 하고 미래와 현재를 연이생법이라 한다.
또 과거와 현재를 연기법이라 하고 미래를 연이생법이라 하며 또 무명(無明)을 연기법이라 하고 행(行)을 연이생법이라 하며 나아가 생(生)을 연기법이라 하고 노사(老死)를 연이생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협 존자(脅尊者)는 “무명을 오직 연기법이라 하고 노사를 오직 연이생법이라 하며 중간의 10지(支)는 연기법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연이생법이라고도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과거의 2지(支)를 오직 연기법이라 하고 미래의 2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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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오직 연이생법이라 하며 현재의 8지는 연기법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연이생법이라고도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망만(望滿) 존자는 “4구(句)가 있다. 어떤 것은 연기법이면서 연이생법이 아니기도 하니 미래의 법이다. 어떤 것은 연이생법이면서 연기법이 아니기도 하니 과거와 현재 아라한의 최후의 5온(蘊)이다. 어떤 것은 연기법이면서 연이생법이기도 하니 과거․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5온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과거․현재의 법이다. 어떤 것은 연기법도 아니면서 연이생법이 아니기도 하니 무위의 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집이문론(集異門論)』과 『법온론(法蘊論)』에서는 다 같이 “만일 무명(無明)이 행(行)을 내면서 결정되고 안주(安住)하여 뒤섞이거나 어지럽지 않으면 이를 연기법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연이생법이라 하기도 하거니와 만일 무명이 행을 내면서도 결정되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면서 뒤섞이거나 어지러우면 이를 연이생법이라고는 하나 연기법은 아니니 나아가 생(生)이 노사(老死)를 내는 데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우(世友) 존자는 “만일 법이 인(因)이면 연기법이라 하고 만일 법에 인이 있는[有因] 것이면 연이생법이라 한다. 또 만일 법이 화합(和合)하면 연기법이라 하고 만일 법에 화합이 있는 것이면 연이생법이라 한다.
또 만일 법이 생기면[生] 연기법이라 하고 만일 법에 생김이 있는 것이면 연이생법이라 한다. 또 만일 법이 일어나면[起] 연기법이라 하고 만일 법에 일어남이 있는 것이면 연이생법이라 한다. 또 만일 법이 능히 지으면[能作] 연기법이라 하고 만일 법이 능히 짓는 것이 있으면 연이생법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구르는 것[轉]을 연기법이라 하고 따라 구르는 것[隨轉]을 연이생법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모든 법이 생기는 때를 연기법이라 하고 모든 법이 생긴 뒤면 연이생법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 말씀하신 연기법과 연이생법은 이와 같이 차별된다.
여기에서는 다만 시분(時分)의 연기만을 말하는 것이니 12위(位)에 12지(支)를 세우고 그 낱낱 갈래[支] 안에서는 저마다 5온(蘊)을 갖추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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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한 찰나 동안에도 12지가 있으니 마치 탐심(貪心)을 일으켜 중생의 생명을 살해하는 것과 같다. 이것과 상응하는 어리석음은 무명이요, 이것과 상응하는 마음의 조작[思]은 행이며, 이것과 상응하는 마음은 식이요, 유표업(有表業)을 일으키면 반드시 때를 같이하는 명색이 있으며, 모든 감관이 함께 서로 돕는 것은 곧 명색과 6처요, 이것과 상응하는 감촉은 촉이다.
이것과 상응하는 느낌은 수요, 탐냄은 애이며 곧 이것과 상응하는 모든 전(纏)은 취요, 신업(身業)과 어업(語業) 두 업을 일으키는 것은 유이며, 이와 같이 하면서 모든 법이 일어나는 것은 곧 생이요, 성숙하여 변하는 것은 노(老)이며 소멸하고 파괴되는 것은 사(死)이다. 다만 성을 내면서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해하는 데는 12지가 있을 뿐이니 애지(愛支)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런 도리가 있다 해도 여기는 시분(時分)의 연기를 말하면서 12위(位)에 의거하여 12지(支)를 세우고 그 낱낱 갈래[支] 안에는 각각 5온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찰나 동안에 12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신론(識身論)』에 “사랑할 만한 경계에 대해서 무지(無知)를 말미암아 탐착을 일으킬 때에 이 가운데서 무지는 무명이요 탐착이 있는 것은 행이며 경계를 분별하여 아는 것은 식이요 식과 함께하는 모든 온(蘊)은 명색이며 명색의 소의(所依)인 모든 감관은 6처요 6처의 화합은 촉이며 촉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요, 느낀 바를 기뻐하는 것은 애며, 애가 더욱 광대한 것은 취요, 후유(後有)의 업을 이끄는 것은 유며, 모든 온이 생기는 것은 생이
요, 모든 온이 성숙하여 변한 것은 노(老)며 모든 온이 파괴하고 소멸하는 것은 사(死)요, 속에서 뜨거운 것은 수(愁)며, 슬피 우는 것은 비(悲)요, 5식(識)과 상응하여 평등하지 않은 느낌은 고(苦)며, 의식(意識)과 상응하여 평등하지 않은 느낌은 우(憂)요, 마음에서 애달파 하는 것은 뇌(惱)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문] 앞의 말[前說:設摩達多說]과 뒤의 말[後說:識身論說]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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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앞7)에는 한마음[一心]을 설명하고 뒤에는 여러 마음[多心]을 말하며 앞에는 찰나(刹那)를 설명하고 뒤에는 상속(相續)을 설명한 것이니 이것이 차별이다.
그 논(論)에서 비록 여러 마음과 상속하는 12지를 말했다 해도 여기와는 같지 않다. 거기서 말한 12유지는 대부분이 따로따로의 법이라 혹은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 논에서 말한 12유지는 모두가 5온을 갖춘 시분(時分)이라 저마다 다르다.
『시설론(施設論)』에 “어떤 것이 무명인가? 과거의 온갖 번뇌이다”라고 말했으나 거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자상(自相)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과거의 번뇌의 지위[煩惱位]이다.
어떤 것이 행(行)인가? 과거의 업의 지위[業位]이다.
어떤 것이 식(識)인가? 속생(續生)8)의 마음과 그 돕는 벗[助伴]이다.
어떤 것이 명색(名色)인가? 결생(結生)한 뒤에 아직 눈 등의 네 가지[四種:眠․耳․鼻․舌]의 감관[色根]이 생기기 전이며 6처(處)가 아직 다 차지 못한 그 중간의 5위(位)로 갈라람(羯剌藍)․알부담(頞部曇)․폐시(閉尸)․건남(鍵南)․발라사카(鉢羅奢佉)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명색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6처인가? 이미 네 가지의 감관은 생기고 6처도 이미 다 완성된 발라사카의 지위이나 눈 등의 모든 감관이 아직 감촉을 위하여 의지할 것이 될 수 없는 시기이니 이것이 6처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촉(觸)인가? 눈 등의 감관이 비록 감촉을 위하여 의지할 것은 될 수 있다 해도 아직 고락(苦樂)의 차별은 분명히 알지 못하며 또한 아직 모든 손해되는 연(緣)을 피하지도 못하여 불에도 접촉하고 칼에도 접촉하며 독 있는 것도 먹고 똥도 집어먹는 등이며 음식이나 음행이나 살림에 대한 사
7) 설마달다(設摩達多)는 찰나연기(刹那緣起)라 했고, 『식신론(識身論)』에서는 연박연기(連縛緣起)라 했다.
8) 속생의 마음[續生心]이라 함은 탁태시(托胎時)의 식(識)을 말하고 돕는 벗[助伴]이라 함은 색(色)․수(受)․상(想)․행(行) 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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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 아직 현행(現行)하지 못한 시기이니 이것이 바로 촉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수(受)인가? 고락도 구별할 수 있고 또한 손해되는 연도 피할 줄 알아서 불에 접촉하거나 칼에 접촉하지도 않고 독을 먹거나 똥을 먹거나 하지도 않으며 비록 이미 음식에 대한 욕망은 일으켜도 아직 음행이나 살림에 대한 욕망은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수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애(愛)인가? 비록 이미 음식에 대한 욕망과 음행에 대한 욕망과 살림에 대한 욕망을 일으켜도 아직 이것을 위하여 사방으로 추구(追求)하면서 고달픔을 불사(不辭)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애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취(取)인가? 세 가지 욕망[三愛]을 말미암아 사방으로 추구하면서 비록 많은 위험을 겪어도 고달픔을 사양하지 않으나 아직은 후유(後有)를 위하여 선악의 업(業)은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취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유(有)인가? 추구하는 때에 역시 후유를 위한 선악의 업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이 유의 지위이다.
어떤 것이 생(生)인가? 곧 현재의 식의 지위[識位]가 미래의 시기에 있게 되는 것을 생의 지위라 한다.
어떤 것이 노사(老死)인가? 곧 현재의 명색․6처․촉․수의 지위가 미래의 시기에 있게 되는 것을 노사의 지위라 한다”라고 설명했다.
또 어떤 이는 “무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사(雜事)9)요, 둘째는 부잡사(不雜事)이며,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사(顯事)요, 둘째는 불현사(不顯事)이다.
무명이 행의 연(緣)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업(思業)이요, 둘째는 사이업(思已業)이다.
행10)이 식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뉘우침[悔]과
9) 잡사(雜事)와 현사(顯事)는 공무명(共無明)에 해당하고 부잡사(不雜事)와 불현사(不顯事)는 불공무명(不共無明)에 해당한다.
10) 사랑할 만하지 못한[不可愛] 이숙식(異熟識)은 나쁜 행의 결과이므로 이것은 뉘우침[悔]과 함께하는 것이라 하며 사랑할 만한[可愛] 이숙식은 뉘우침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함은 착한 행과 부동행(不動行:禪定)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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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것이요, 둘째는 뉘우침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식이 명색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랑할 만한 갈래[可愛趣]에 속한 것이요, 둘째는 사랑할 만하지 못한 갈래[不愛趣]에 속한 것이다.
명색이 6처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장양(長養)이요, 둘째는 이숙(異熟)이다.
6처가 촉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대촉(有對觸)11)이요, 둘째는 증어촉(增語觸)이다.
촉이 수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신수(身受)12)요, 둘째는 심수(心受)이다.
수가 애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음욕애(淫欲愛)요, 둘째는 자구애(資具愛)이다.
애가 취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견문전(見門轉)13)이요, 둘째는 애문전(愛門轉)이다.
취가 유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문전(內門轉)14)이요, 둘째는 외문전(外門轉)이다.
유가 생에 연이 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찰나생(刹那生)15)이요, 둘째는 중동분생(衆同分生)이다.
생이 노사에 연이 되는 데에는 노(老)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소견로(眼所見老)요, 둘째는 혜소견로(慧所見老)이다. 사(死)에도 두 가지가
11) 유대촉(有對觸)은 앞의 5근(根)에 의한 촉(觸)을 말하고 증어촉(增語觸)은 제6근에 의한 촉을 말한다.
12) 신수(身受)라 함은 고(苦)와 낙(樂)을 말하고 심수(心受)라 함은 우(憂)와 희(喜)를 말한다.
13) 견문전(見門轉)이라 함은 지적(知的)인 취착(取著)을 말하고 애문전(愛門轉)이라 함은 정의적(情意的)인 취착을 말한다.
14) 내문전(內門轉)이라 함은 업유(業有) 즉 후세(後世)의 신분(身分)을 결정하는 업을 가리키고 외문전(外門轉)이라 함은 그 업으로 인하여 탁태(托胎)하는 첫 몸 즉 생유(生有)를 말한다.
15) 찰나생(利那生)이라 함은 찰나찰나마다 생멸(生減)하는 동안의 생(生)을 말하고 중동분생(衆同分生)이라 함은 이러저러 넘기는 일생(一生)을 말한다. 찰나사(刹那死)와 중동분사(衆同分死)도 이에 준(准)하여 생각된다.
있으니 첫째는 찰나사(刹那死)요, 둘째는 중동분사(衆同分死)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옛날에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이르러 풀을 깔고 앉아서[結跏趺坐] 순(順)과 역(逆)으로 12연기(緣起)를 관찰하였더니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겼다. 무명은 행에 연(緣)이 되고 나아가 생은 노사에 연이 되며 노사는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에 연이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떻게 보살(菩薩)은 순과 역으로 12연기를 관찰하셨는가?
[답] 만일 인(因)으로써 과(果)를 추구(推求)하면 순의 관찰[順觀察]이라 하고 만일 과로써 인을 추구하면 역의 관찰[逆觀察]이라 한다.
또 만일 미세한[細] 것에서 거친(麁) 것에 들어가면 순의 관찰이라 하고 만일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에 들어가면 이것을 역의 관찰이라 한다.
거친 것과 미세한 것처럼 볼 수 있는 것[可見]․볼 수 없는 것[不可見]과 나타나 보이는 것[現見]․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非現見]과 분명하게 아는 것[顯了]․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不顯了]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가까운 것을 인하여 먼 것을 관찰하면 순의 관찰이라 하며 만일 먼 것을 인하여 가까운 것을 관찰하면 역의 관찰이라 한다.
가까운 것과 먼 것처럼 여기에 있는 것[在此]․저기에 있는 것[在波]과 앞에 나타나는 것[現前]․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不現前]과 이런 중동분[此衆同分]․저런 중동분[彼衆同分]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이 경 가운데서는 무명(無明)이 행(行)에 연(緣)이 된다고는 말씀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무명이 행에 인(因)이 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그 밖의 다른 경에는 역시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대인연법문경(大因緣法門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노사(老死)에는 이와 같은 인(因)이 있고 이와 같은 연(緣)이 있으며 이와 같은 실마리[緖]가 있나니 생(生)이니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생이 노사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아가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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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셨다.
[문] 하나의 경에 비록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여러 경에는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이 있어서인가?
[답] 만일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면 다만 염오(染汚)의 행만 말씀하신 것이고 만일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면 염오와 불염오(不染汚)의 행을 다 함께 말씀하신 것이다.
또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면 다만 죄행(罪行)16)만을 말씀하신 것이고 만일 무명이 행에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면 복행(福行)․부동행(不動行)을 다 함께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만일 무명이 행의 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면 다만 인연(因緣)만을 말씀하신 것이고 만일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면 4연(緣)을 다 함께 말씀하신 것이니 때문에 여러 경에서는 무명은 행의 연이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무명이 행의 연이라고만 말씀하시고 행은 무명의 연이 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답] 역시 행도 무명에 인이 된다고 말씀하셔야 하는데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씀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무명이 행의 연이 되는 데에는 세력(勢力)이 수순하고 친근(親近)함이 강하고 뛰어나지만 행이 무명의 연이 되는 데에는 그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무명이 행의 연이 되는 데에는 그의 뜻이 결정적이지만 행이 무명의 연이 되는 데에는 그렇지 못하나니 아라한의 유루의 업[有漏業]은 무명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행이 무명의 연이 되는 데에는 무명의 힘을 말미암는다는 것은 마치 계경에 “비리의 작의[非理作意]는 어리석음[癡]을 말미암아 생기기 때문에 무명을 이끈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무명이 행의 연이 된
16) 죄행(罪行)이란 착하지 않은 행[不善行]이며 부동행(不動行)이란 선정을 닦는 것[修禪]을 말한다. 다 같이 이것에 의하여 현재 또는 미래 세상의 쾌락을 얻으려고 하는 행(行)인 점에서 무명이 행의 연(緣)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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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만 말할 뿐이다.
또 행은 무명에 대하여 다만 연(緣)의 뜻만 있을 뿐이나 무명은 행에 대해 인(因)의 뜻도 있고 연의 뜻도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경에 시분의 연기[時分緣起]를 말씀하시면서 전위(前位)의 모든 온(蘊)을 무명이라 말씀하시고 후위(後位)의 모든 온을 행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앞의 인[前因]과 뒤의 과[後果]로 차츰차츰 서로 이끄는 것이다. 이 때문에 행은 무명의 연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 무명이 연이 되면서 12지(支)를 다 함께 나게 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만 말하는가?
[답] 역시 그 밖의 나머지도 말씀하여야 했는데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씀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무명이 행의 연이 되는 데에는 세력과 작용이 수순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다.
또 무명이 행의 연이 되는 데에는 세력과 작용이 강하고 뛰어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다.
또 무명은 행의 가까운 연[近緣]이 되는 것이므로 한쪽만 말하지만 식(識) 등이 열 갈래에 대해서는 다만 먼 연[遠緣]이 될 뿐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가까운 것과 먼 것처럼 여기에 있는 것․저기에 있는 것과 앞에 나타나는 것․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과 이런 중동분․그 밖의 중동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무명은 행을 위하여 불공연(不共緣)이 되는 것이므로 한쪽만 말하지만 식 등의 열 갈래를 위하여 다만 공연(共緣)이 될 뿐이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이 경 안에서는 시분의 연기의 앞뒤의 차례로 차츰차츰 서로가 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만일 무명은 무명의 연이 된다고 말하면 앞뒤가 없을 것이요, 만일 무명이 식 등의 연이 된다고 말하면 차례대로가 아닌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고만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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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경 안에서는 행(行)이 식(識)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어떤 다른 곳에서는 명색(名色)이 식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다른 곳에서는 다시 두 가지 연[二緣]이 식을 낸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세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행은 식의 연이라는 것은 업(業)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요,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식주(識住)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또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처음에 이끄는[引] 때를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이끈 뒤에 수호하는 때를 말하며, 두 가지 연으로 식이 생긴다는 것은 수호한 뒤에 더욱 자라게 하는 때를 말한다.
또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속생(續生)의 때를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속생한 뒤에 편히 머무르는[安住] 때를 말하며 두 가지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편히 머무른 뒤에 대경[境]을 받아들이는 때를 말한다.
또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업(業)의 명색(名色)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이숙(異熟)의 명색을 말하며 두 가지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소의와 소연의 명색을 말한다.
또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악취(惡趣)의 식(識)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욕계 인천(人天)의 식을 말하며 두 가지의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색계․무색계의 식을 말한다.
협(協) 존자는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증유(中有)의 식(識)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생유(生有)의 식을 말하며 두 가지의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본유(本有)의 식을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다른 논사는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염오의 식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과 두 가지의 연이 식을 낸다는 것은 염오․불염오의 식을 말한다.
염오․불염오처럼 유부(有覆)․무부(無覆)와 유죄(有罪)․무죄(無罪)와 퇴(退)․불퇴(不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다시 어떤 이는 “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식지의 위[識支位]를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명색지위(名色支位)17)의 식을 말하며 두 가지의
17) 명색위(名色位)의 식(識)이라 함은 시분연기(時分緣起) 중 제4위(位) 명색위에 대한 5온(蘊) 중의 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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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식을 낸다고 함은 6처지(處支)와 후위(後位)의 식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문] 이 경에서는 식이 명색의 연이 된다고 말하는데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명색이 식의 연이 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식이 명색의 연이라는 것은 식의 작용(作用)을 드러내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명색의 작용을 드러낸다.
또 식과 명색이 서로서로 연이 되는 것은 마치 두 다발의 갈대가 서로 의지해 서는 것과 같으며 마치 코끼리․말․배와 그것을 타고 부리는 이가 차츰차츰 서로 의지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됨이 있듯이 식과 명색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식이 연이 되기 때문에 명색이 속생(續生)하고 명색이 연이 되면서 식이 안주(安住)하게 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가 연이 된다고 말한다.
또 식이 명색의 연이 된다는 것은 처음 속생할 때를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 된다는 것은 속생의 후위(後位)를 말하는 것이다.
또 식이 명색의 연이라는 것은 속생할 때에 식이 명색을 낸다는 것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속생한 뒤에는 식이 명색에 의지하여 머무른다는 것을 말한다.
또 식이 명색의 연이라는 것은 소생(所生)의 명색을 말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능생(能生)의 명색을 말한다.
또 식이 명색의 연이라는 것은 전후의 설[前後說]에 의거하고 명색이 식의 연이라는 것은 동시의 설[同時說]에 의거한다.
[문] 이 경에서는 명색이 6처(處)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마땅히 4생(生)의 유정에 이르기까지 두루 말하지 않아야 한다.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에는 모든 감관이 점차로 생기는지라 명색이 6처의 연이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화생(化生)의 유정에 있어서는 모든 감관이 단번에 일어나 어떻게 명색이 6처의 연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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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다만 식이 연이 되어 6처를 낸다고만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이 경은 다만 욕계의 3생(生)만 말씀하셨을 뿐이요 상계(上界)의 화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므로 역시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마땅히 “이 경도 삼계의 4생을 다 함께 말씀하셨다”라고 말해야 한다. 화생한 이는 처음 생을 받을 때[受生時]에 비록 모든 감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아직 맹리(猛利)하지 못하고 뒤에 점차로 자라야 비로소 맹리하게 된다. 이 아직 맹리하지 못한 때의 처음 찰나 동안을 식지(識支)라 하고 제2찰나 동안을 명색지(名色支)라 하며 맹리한 자리에 이르면 6처지(處支)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두루 말해도 잘못은 없다.
[문] 6처는 곧 명색 중에 속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명색이 6처에 연이 된다고 말하는가?
[답] 이것은 앞에서 말했다. 아직 눈 등의 네 가지 감관[色根]이 생기지 못한 때를 명색위(名色位)라 하고 네 가지 감관이 생기고 나면 6처를 갖추기 때문에 6처위(處位)라 한다.
화생은 비록 또 6근(根)이 단번에 생긴다 하더라도 아직 맹리하지 못하여 명색위라 하며 맹리한 이후를 6처위라 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문] 이 경 안에는 6처가 촉(觸)의 연이 된다고 말하나 어떤 다른 데서는 명색이 촉의 연이라고 말하며 그 밖의 다른 데서는 다시 두 가지 연[二緣]18)이 촉을 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6처가 촉의 연이 된다는 것은 촉의 소의(所依)를 나타내는 것이니 온갖 바깥 물[外物]의 화합은 반드시 안[內]에 인(因)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안의 법[內法]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니 다만 소의만을 말하는 까닭에 이 경은 6처가 촉의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명색이 촉의 연이 된다는 것은 촉의 자성(自性)을 나타내는 것이며 두 가지의 연이 촉을 낸다는 것은 촉의 소의와 소연(所緣)의 구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6처가 촉의 연이 된다고 함은 악취(惡趣)의 촉을 말하는 것이요, 명색
18) 두 가지 연[二緣]이라 함은 뒤에서의 설명과 같이 근(根)․경(境)을 가리키지만 통례(通例)는 근․경․식(識)의 세 가지의 화합에 의하여 촉(觸)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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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 / 1338] 쪽
이 촉의 연이 된다 함은 욕계의 인천(人天)의 촉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의 연이 촉을 낸다고 함은 색계와 무색계의 촉을 말하는 것이다.
또 6처가 촉의 연이 된다고 함은 분위(分位)의 촉을 말하는 것이요, 명색이 촉의 연이 된다 함은 현재(現在)의 촉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의 연이 촉을 낸다고 함은 삼화(三和)의 촉을 말하는 것이다.
또 6처가 촉의 연이 된다고 함은 촉위(觸位)의 촉을 말하는 것이요, 명색이 촉의 연이 된다고 함은 전위(前位)의 촉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의 연이 촉을 낸다고 함은 후위(後位)의 촉을 말하는 것이다.
[문] 촉과 수(受)는 함께 일어나는데 무엇 때문에 촉이 수의 연이 된다고만 말하면서 수가 촉의 연이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두 가지가 비록 함께 일어난다 해도 촉은 수의 연이 될 뿐이요, 수가 촉의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니 수순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촉은 수에 대하여 수순하는 힘이 뛰어나지만 수가 촉에 대하여는 그렇지가 못하다. 마치 등불과 광명은 비록 함께 일어난다 하더라도 광명은 등불로 인하여 있는 것이요, 등불은 광명으로 인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이것도 그러하다.
또 이 경에서는 분위의 연기[分位緣起]를 말하면서 전위(前位)를 수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전위의 모든 온(蘊)을 촉이라 하고 후위의 모든 온을 수라 하는가?
[답] 전위는 아직 괴로움과 즐거움의 경계의 차별을 분별할 수는 없고 다만 즐거움만의 접촉으로 갖가지 경계를 대(對)하기 때문에 촉이라고 말하며 후위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경계를 분명히 알면서 위험을 피하여 편안한 데로 나아가기 때문에 수라고 한다.
또 앞에 “촉과 수는 비록 함께 일어난다 하더라도 촉은 수보다 수순하는 힘이 뛰어나다”라고 말한 까닭에 촉은 수의 인(因)이 되나 수는 촉의 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은 앞이요 과는 뒤라는 것은 그 도리가 필연적인 것이니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촉은 수에 힘이 뛰어나고 수는 촉에 힘이 뛰어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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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 / 1338] 쪽
[답] 반드시 접촉[觸]하는 경계를 인하여야 위(違)와 순(順)을 느끼게 되나 느낌[受]의 위와 순은 경계를 접촉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촉은 수보다 뛰어난 것이요 수는 촉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연기(緣起)의 뜻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상응인과 구유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보특가라납식②
[문] 낙수(樂受)1)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애(愛)를 위하여 연(緣)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이 수(受)에 애착하여 사방으로 뜻에 맞는 일[可意事]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고수(苦受) 역시 애를 위하여 연이 되겠는가? 어찌 이 경에서는 통틀어 ‘수가 애의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괴로움(苦)이 애의 연이 되는 것은 그 밖의 두 느낌[二受]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고수의 핍박으로 곧 쾌락의 바탕[樂具]을 사랑하는[愛] 것이요 쾌락의 바탕을 사랑하기 때문에 곧 낙수에 대하여 탐의 수면[貪隨眠]을 일으켜 상속하고 더욱 자라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어느 다른 논사는 “3수(受)는 애(愛)를 위하여 모두가 뛰어난 연[勝緣]이 된다. 낙수의 뜻[義]은 ‘나는 능히 애를 일으키어 유(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 그 밖의 2수보다 더 뛰어나다. 유정들은 나[我]에 탐착하기 때문에 사방으로 추구(追求)하면서 선악(善惡)의 행을 짓는 것이요 이를 말미암아 모든 유는 상속하면서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고수의 뜻은 ‘나는 능히 애를 일으켜 유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 그
1) 전절(前節)에 계속하여 특히 수(受)로부터 생(生)․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의 연기지(緣起支) 각자의 성질과 그 연관(聯關)의 차례를 설명하는 단락이다. 이 가운데서 무명연기(無明緣起)와 유애연기(有愛緣起)와의 동이점(同異點)을 밝힌 것은 특히 주의(注意)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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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2수보다 더 뛰어나다. 모든 유정들은 나의 핍박으로 낙수를 탐애하여 사방으로 추구하면서 선악의 행을 짓는 것이요 이를 말미암아 모든 유는 상속하면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고불락수의 뜻은 ‘나는 능히 애를 일으켜 유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 그 밖의 2수보다 더 뛰어나다. 욕계와 아래의 세 정려[三靜慮]에 대해서도 나는 오히려 애를 일으켜 선악의 행을 지으면서 유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거늘 하물며 상지(上地)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는 데에서 하지 못하겠는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는 “3수는 모두가 연이 되어서 애를 일으킨다. 『식신론(識身論)』에서는 ‘3수가 있는데 아직 끊지도 못하고 아직 알지도 못하면 모든 애를 일으키면서 뭇 괴로움의 과보를 이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3수는 모두 애의 연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했다.
[문] 어떻게 3수가 모두 애를 일으키는가?
[답] 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합하는 애[和合愛]요, 둘째는 화합하지 않는 애[不和合愛]이며, 셋째는 따로 떨어지는 애[別離愛]요, 넷째는 따로 떨어지지 않는 애[不別離愛]이며, 다섯째는 어리석은 애[愚愛]이다.
낙수(樂受)가 아직 생기기 전에는 화합하는 애를 일으키고 낙수가 이미 생긴 뒤에는 따로 떨어지지 않는 애를 일으키며, 고수(苦受)가 아직 생기기 전에는 화합하지 않는 애를 일으키고 고수가 이미 생긴 뒤에는 따로 떨어지는 애를 일으키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아직 생기기 전에는 화합하는 애를 일으키고 불고불락수가 이미 생긴 뒤에는 따로 떨어지지 않는 애를 일으킨다. 그 가운데서는 대부분이 어리석은 애가 생장하게 된다.
[문] 애는 곧 취(取)에 포섭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 경에서는 애는 취의 연이 된다고 말하는가?
[답] 처음에 생기는 애의 지위는 애라는 말[愛聲]로써 말하고 더욱 넓은 애의 지위는 취라는 말[取聲]로써 말하는 것이며 또 하품(下品)을 애라 하고 상품(上品)을 취라고 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문] 수는 애의 연이 된다는 것과 애는 취의 연이 된다는 이 두 가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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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애가 수로써 인(因)을 삼으면 수는 애의 연이고 만일 애가 애로써 인을 삼으면 애는 취의 연이다.
또 만일 애가 수의 과(果)이면 수는 애의 연이고 만일 애가 애의 과이면 애는 취의 연이다.
인과 과에서처럼 생기고[生]․생길 것[所生]과 기르고[養]․기를 것[所養]과 더하고[增]․더할 것[所增]과 이끌고[引]․이끌 것[所引]과 구르고[轉]․구를 것[所轉]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애가 애의 인이면 수는 애의 연이 되고 만일 애가 업(業)의 인이면 애는 취의 연이 된다.
또 만일 애가 애로써 과(果)를 삼으면 수는 애의 연이 되고 만일 애가 업으로써 과를 삼으면 애는 취의 연이다. 인과 과에서처럼 생기고․생길 것과 기르고․기를 것과 더하고․더할 것과 이끌고․이끌 것과 구르고․구를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전제(前際)의 연기(緣起)는 무명으로 처음을 삼고 후제(後際)의 연기는 애로써 처음을 삼는가?
[답] 이 두 가지 번뇌는 다 함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무명은 전제의 근본이요, 유애(有愛)는 후제의 근본이다.
또 전제의 번뇌 자리는 이미 멸하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알기 어려우므로 무명이라 말하고 후제의 번뇌 자리는 지금 바로 앞에 나타나 있어서 장차의 유(有)를 구하기 때문에 애라고 말한다.
또 무명에는 일곱 가지의 일[七事]이 있기 때문에 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5부(部)를 모두 갖추고, 둘째는 6식(識)에 두루하며, 셋째는 삼계(三界)에 다 통하고, 넷째는 수면(隨眠)의 성품이며, 다섯째는 중한 신업(身業)․어업(語業)을 일으키며, 여섯째는 단선근(斷善根)으로 뛰어난 가행(加行)을 짓고, 일곱째는 변행(遍行)2)의 성품이다.
2) 무명(無明)은 7견(見)․2의(疑)․2무명의 11변행혹(遍行惑)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고제(苦諦)에 미(迷)한 5견(見)과 집제(集諦)에 미한 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을 7견이라 하고 고제․집제에 미한 의(疑)․치(癡)를 합하여 2의․2무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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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오직 여섯 가지의 일[六事]만 있기 때문에 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앞의 일곱 가지 일 가운데서 변행의 성품만이 제유된다.
또 무명에는 세 가지의 일[三事]이 있기 때문에 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언제나 으뜸가는 우두머리요, 둘째는 온갖 번뇌와 상응하며, 셋째는 변행의 성품이다. 애는 후유(後有)를 이끄는 데에 뛰어나기 때문에 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무명에는 네 가지의 일[四事]이 있기 때문에 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유루의 연[有漏緣]과 무루의 연[無漏緣]이요, 둘째는 유위의 연[有爲緣]과 무위의 연[無爲緣]이며, 셋째는 변행(遍行)인 것과 변행이 아닌[非遍行] 것이요, 넷째는 자계의 연[自界緣]과 타계의 연[他界緣]이다. 애는 오직 유루의 연과 유위의 연과 변행이 아닌 것과 자계의 연이기 때문에 후제 연기의 처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그 밖의 뜻은 뒤
에서 자세히 말할 것이다.
취는 유(有)의 연이 된다 함은 만일 번뇌가 있으면 다시 업을 일으키고 후유의 과[後有果]를 이끄나 번뇌가 없으면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유는 생의 연이 된다 함을 만일 유가 후유의 모든 업을 이끌면 후유가 당연히 생기나 이끄는 업이 없으면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생(生)은 노사(老死)의 연이 된다 함은 만일 남이 있으면 늙고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유위의 모양[三有爲相]3)안에서는 생만을 유독 하나의 갈래[支]로 세우고 노와 사는 함께하여 하나의 갈래로 세우는가?
[답] 협(脅) 존자는 “세존께서는 법의 공능(功能)이나 차별에 대하여 분명히 잘 아셨고 그 밖의 다른 이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법이 생길 때
3) 세 가지 유위의 모양[三有爲相]이란 생(生)․이(異)․멸(滅)을 말한다.[여기에 주(住)를 더하면 이른바 4상(相)이어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와서 확정된 것이다.] 여기서의 논난(論難)은 세 가지 유위의 모양 안의 처음 생(生)은 독립의 한 갈래로 삼으면서 무엇 때문에 노사(老死) 곧 이․멸(異滅)은 합하여 한 갈래로 삼은 것이냐의 힐문(詰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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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생(生)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홀로 갈래[支]를 세웠고 모든 법이 멸할 때에 노(老)나 사(死)나 무상(無常)은 다 같은 작용이 있기 때문에 합하여 갈래를 세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생은 모든 법으로 하여금 상속하고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에 홀로 갈래를 세웠고 노사는 모든 법으로 하여금 상속하지도 않고 더욱 자라게 하지도 않기 때문에 합하여 갈래를 세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생은 모든 법이 화합하여 작용하게 하기 때문에 홀로 갈래를 세웠고 노사는 모든 법이 흩어져 작용이 없게 되기 때문에 합하여 갈래를 세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생은 모든 법으로 하여금 미래로부터 현재에 들게 하기 때문에 홀로 갈래를 세웠고 노사는 모든 법으로 하여금 현재로부터 과거에 들게 하기 때문에 합하여 갈래를 세웠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생은 작용이 뛰어나 혼자서 하나의 일을 갖추기 때문에 홀로 갈래를 세웠고 노사는 작용이 하열하여 함께 하나의 일을 갖추기 때문에 합하여 갈래를 세운 것이니 마치 힘이 센 사람은 혼자서도 하나의 일을 완료하지만 열약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병(病)은 무엇 때문에 유지(有支)를 세우지 않는가?
[답] 갈래[支]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법이 모든 때[一切時]와 모든 처소[一切處]와 모두가 있는[一切有] 것이면 유지를 세우게 되나 병은 모든 때도 아니고 모든 처소도 아니며 모두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지를 세우지 않는다.
마치 박구라(薄矩羅) 존자가 “나는 부처님 법에 출가하여 나이 80을 지나도록 오히려 조금의 두통(頭痛)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몸의 병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 존자는 욕계의 섬부주(贍部洲)에 나서도 오히려 조그마한 질병도 없었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세계에서나 다른 처소이겠는가? 병은 두루하지가 않기 때문에 유지를 세우지 않는다.
[문] 이 계경의 말씀은 노사(老死)는 수(愁)․비(悲)․고(苦)․우(憂)․뇌(惱)의 연이 된다 하시고 무엇 때문에 수(愁) 등은 유지로 세우지 않으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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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답] 갈래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수 등의 다섯은 유지(有支)를 흩고 무너뜨림이 마치 서리나 우박 등이 모든 곡식의 모종을 해치는 것과 같다.
또 수 등은 모든 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모든 처소가 아니며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님은 마치 질병에서와 같다. 이 때문에 수 등은 유지를 세우지 않았다.
[문] 이 수 등의 다섯은 다만 ‘노사의 연이 된다’고만 말하지는 않아야 하니 무명 등의 12유지(有支)에 연이 되면서 생기기 때문이다.
[답] 이 경에서도 당연히 “무명은 행과 수 등 다섯의 연이 되며 나아가 생은 노사와 수 등의 다섯의 연이 된다”고 말해야 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말도 있어서이다.
또 이 경에서는 마침으로써 시작을 나타낸 줄 알 것이니 노사가 연이 되어 이미 수 등을 생기게 했으니 무명에 이르기까지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노사의 지위 안에서 수 등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요 또 노사의 지위 안에서 일으키게 되는 수 등은 거의가 상품(上品)이기 때문에 치우치게 말한 것이며 또 나쁜 업을 짓는 이나 청정한 계율을 범하는 이가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많은 수 등을 내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 것이다.
마치 계경에 “남자나 여자가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나쁜 행을 짓든지 혹은 시라(尸羅)를 깨뜨리면 목숨을 마치려 할 때에 악취(惡趣)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은 마치 해가 질 때에 큰 산봉우리 그림자가 와서 그의 몸을 가리는 것과 같다. 그러할 때에 몸과 마음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크게 괴로워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다만 노사만이 연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
[문] 무명4)은 인(因)이 있는가? 늙고 죽음은 과(果)가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4) 모든 경(經)에는 1연기지(緣起支)로부터 12연기지에 이르는 갖가지의 연기를 말하지만 12지연기관(十二支緣起觀)을 완전설(完全說)로 한다. 이 단락은 이 12연기지설을 표준으로 하여 이것과 모든 연기지설의 관계를 기술하고 또한 연기지는 12로써 완전하고 충분한 이유를 밝히면서 겸하여 12지를 2단락 또는 3단락으로 나누게 되는 것을 설명하는 단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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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연기의 갈래는 마땅히 13이나 14가 있어야 한다. 만일 없다면 무명에는 인이 없고 노사에는 과(果)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무위(無爲)이어야 한다.
[답] 마땅히 “무명과 노사에 비록 인과가 있다 하더라도 유지(有支)는 아니다. 그 때문에 13이나 14갈래라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무명의 인이라 함은 이치대로가 아닌 작의[不如理作意]를 말하며 노사의 과라 함은 수․비․고․우․뇌를 말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무명에 인이 있다는 것은 앞의 무명을 말하고 노사에 과가 있다는 것은 뒤의 노사를 말한다. 과거와 미래의 무명과 노사에는 많은 찰나가 있기 때문에 13갈래․14갈래라 해도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무명에 인이 있다는 것은 앞의 노사를 말하고 노사에 과가 있다는 것은 뒤의 무명을 말한다. 현재의 애(愛)와 취(取)는 곧 과거의 무명이요, 현재의 명색(名色)․6처(處)․촉(觸)․수(受)는 곧 미래의 노사이다. 만일 수가 애의 연이 된다면 노사는 무명의 연이 된다는 설명이다. 마치 수레바퀴가 위아래로 회전하여 마치고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이러한 유지(有支)도 비롯함이 없이 상속하면서 비록 인과가 있다 해도 13갈래․14갈래
라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또 세존께서는 교화 받는 이를 위하여 연기(緣起)를 시설하시면서 적고 많은 것에는 일정하지 않으셨으니 혹 어떤 곳에서는 하나의 연기[一緣起]를 말씀하셨다. 온갖 유위의 법을 통틀어 연기라고 하신 것이니 마치 “어떤 것이 연기인가? 온갖 유위의 법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연기[二緣起]를 말씀하셨다. 인(因)과 과(果)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연기[三緣起]를 말씀하셨다. 3세(世)의 구별이며 혹은 번뇌와 업과 사(事)가 세 가지가 된다. 무명․애․취를 번뇌라 하고 행․유를 업이라 하며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일이다.
또 어떤 곳에서는 네 가지 연기[四緣起]를 말씀하셨다. 무명․행과 생․노사로 현재의 8지(支)는 이 네 가지에 포섭되어 들어간다. 애와 취는 무명에 들어가고 유는 행에 들어가며 식은 생에 들어가고 명색․6처․촉․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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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에 들어간다.
또 어떤 곳에서는 다섯 가지 연기[五緣起]를 말씀하셨다. 애․취․유와 생․노사를 말하는데 전제(前際)의 7지(支)는 이 5지에 포섭되어 들어간다. 무명은 애와 취에 들어가고 행은 유에 들어가며 식은 생에 들어가고 명색․6처․촉․수는 노사에 들어간다.
또 어떤 곳에서는 여섯 가지 연기[六緣起]를 말씀하셨다. 3세(世) 가운데에 각각 인(因)과 과(果)가 있는 것을 말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일곱 가지 연기[七緣起]를 말씀하셨다. 무명․행․식․명색․6처․촉․수를 말하는데 후제(後際)의 5지(支)는 이 7지에 포섭되어 들어간다. 애와 취는 무명에 들어가고 유는 행에 들어가며 생은 식에 들어가고 노사는 명색․6처․촉․수에 들어간다.
또 어떤 곳에서는 여덟 가지 연기[八緣起]를 말씀하셨다. 현재의 8지를 말하는데 과거와 미래의 4지는 이 8지에 포섭되어 들어간다. 무명은 애와 취에 들어가고 행은 유에 들어가며 생은 식에 들어가고 노사는 명색․6처․촉․수에 들어간다.
또 어떤 곳에서는 아홉 가지 연기[九緣起]를 말씀하셨으니 『대인연법문경(大因緣法門經)』의 말씀과 같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열 가지 연기[十緣起]를 말씀하셨으니 『성유경(城喩經)』의 말씀과 같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열한 가지 연기[十一緣起]를 말씀하셨으니 지사(智事) 중에서의 말과 같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열두 가지 연기[十二緣起]를 말씀하셨으니 그 밖의 한량없는 계경 중의 말씀과 같다.
또 이 12지(支)의 연기법은 곧 번뇌와 업과 고(苦)가 차츰차츰 연이 된다. 번뇌는 업을 내고 업은 고를 내며 고는 고를 내고 고는 번뇌를 내며 번뇌는 번뇌를 내고 번뇌는 업을 내며 업은 고를 내고 고는 고를 낸다.
번뇌가 업을 낸다는 것은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는 말이요, 업이 고를 낸다는 것은 행은 식의 연이 된다는 말이며, 고가 고를 낸다는 것은 식은 명색의 연이 되고 나아가 촉은 수의 연이 된다는 말이요, 고가 번뇌를 낸다는 것은 수는 애의 연이 된다는 말이며, 번뇌가 번뇌를 낸다는 것은 애는 취의 연이 된다는 말이요, 번뇌가 업을 낸다는 것은 취는 유의 연이 된다는 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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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 고를 낸다는 것은 유는 생의 연이 된다는 말이요, 고가 고를 낸다는 것은 생은 노사의 연이 된다는 말이다.
또 이 12지의 연기법에는 2속(續)과 3분(分)이 있다. 2속이라 함은 식과 생을 말하는 것이니 생을 계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3분이라 함은 번뇌와 업과 일을 말하는 것이니 무명과 애와 취는 번뇌요, 행과 유는 업이며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일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2속이란 행과 유를 말하는 것이니 후유(後有)를 있게 하기 때문이다. 3분이란 3세(世)를 말하며 또 12지를 거두어서 3취(聚)를 삼는 것이니 번뇌와 업과 고(苦)를 말한다. 마치 3취라고 하는 것처럼 또한 3집(集)이요 3유(有)이며 3도(到)라고 하는 것도 그 모양[相]에 따라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이 12지의 연기법에는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으며 가지가 있고 잎이 있으며 꽃이 있고 열매가 있는 것이니 마치 큰 나무와 같다. 여기서 뿌리는 무명과 행을 말하고 줄기는 실과 명색을 말하며 가지는 6처를 말하고 잎은 촉과 수를 말하며 꽃은 애와 취와 유를 말하고 열매는 생과 노사를 말한다.
이 12지의 연기법의 나무에는 혹은 꽃과 열매가 있기도 하고 혹은 꽃과 열매가 없기도 하다. 꽃과 열매가 있다 함은 이생(異生)과 학(學)을 말하며 꽃과 열매가 없다 함은 아라한을 말한다.
[문] 이 12지의 연기법은 몇 가지가 찰나(刹那)이고 몇 가지가 상속(相續)인가?
[답] 두 가지가 찰나인데 식과 생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가 상속이다.
[문] 이 12지의 연기법은 몇 가지가 염오(染汚)이고 몇 가지가 불염오(不染汚)인가?
[답] 어떤 이는 “다섯 가지는 염오5)인데 무명․식․애․취와 생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염오와 불염오에 다 통한다”라고 말한다.
5) 염오(染汚)란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를 말하고, 불염오(不染汚)란 선(善)과 무부무기(無覆無記)를 말한다. 무명(無明)․애(愛)․취(取)의 셋은 번뇌위(煩惱位)요, 식(識)과 생(生)은 탁태(托胎) 때의 염오식(染汚識)이므로 오직 염오일 뿐이지만 그 밖의 다른 갈래[他支]는 염오인 경우와 불염오의 경우가 있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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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는 분위의 연기[分位緣起]를 말하는 까닭에 마땅히 “모두가 염오와 불염오에 다 통한다. 앞에서 말한 5지(支) 중의 심․심소의 법은 오직 염오이고 나머지는 염오와 불염오에 다 통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식과 생의 2지의 심․심소의 법은 결정코 염오이고 나머지 모두는 일정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문] 이 12지의 연기법은 몇 가지가 이숙(異熟)이고 몇 가지가 이숙이 아닌가?
[답] 어떤 이는 “다섯 가지6)는 이숙이 아니며 일곱 가지는 이숙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가운데는 분위의 연기를 말하는 까닭에 마땅히 “모두는 이숙과 이숙이 아닌 데에 다 통한다. 그러나 무명과 식과 애와 취와 생일 때의 심․심소의 법은 결정코 이숙이 아니고 나머지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식과 생의 2지의 심․심소의 법은 결정코 이숙이 아니고 나머지는 모두가 일정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문] 이 12지의 연기법은 몇 가지가 이숙7)이 있고 몇 가지가 이숙이 없는가?
[답] 어떤 이는 “행과 유의 2지는 결정코 이숙이 있고 나머지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가운데는 분위의 연기를 말하는 까닭에 마땅히 “모두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 12지의 연기법은 몇 가지가 욕계(欲界)이고 몇 가지가 색계(色界)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無色界)인가?
6) 다섯 가지라 함은 앞에서 든 수(受)․취(取)․유(有)․식(識)․생(生)이다. 이것은 이숙(異熟)이 아니라고 본 이유는 앞의 어느 다른 논사[有餘師]와 동일하다.
7) 이숙(異熟)이 있다고 함은 그 자신이 번뇌요 또는 업(業)이어서 그 결과로서의 이숙과(異熟果)를 내야 하는 성질의 것을 말하며, 이숙이 없다고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한다.
[답] 어떤 이는 “‘욕계에는 12지를 모두 갖추고 색계에는 명색을 제외한 11지가 있으며 무색계에는 명색과 6처를 제외한 10지가 있다’라고 말했으나 색계에 대하여는 마땅히 ‘식은 6처의 연이 되나 그것은 아직 4근(根)이 일어나기 전에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무색계에 대하여는 마땅히 ‘식은 촉의 연이 되나 그것은 색(色)과 5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마땅히 “삼계에서는 모두 12유지(有支)를 완전히 갖춘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색계에 날 때에는 모든 감관이 단번에 생기는데 어떻게 명색의 지위[名色位]가 있다는 것인가? 또 무색계에는 색도 없고 5근도 없는데 어떻게 명색과 6처의 지위가 있다는 것인가?
[답] 색계의 5근은 비록 정해져서 단번에 생긴다 하더라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으면 그 감관은 날카롭지 못하므로 그때에는 다만 이것은 명색지에 속할 뿐이다. 무색계에는 비록 색과 5근은 없어도 명(名)과 의근(意根)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식은 명의 연이 되고 명은 의처(意處)의 연이 되며 의처는 촉의 연이 된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삼계는 모두 12지를 다 갖춘다.
또 서로 비슷한 유지(有支)는 또다시 서로 비슷한 유지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니 욕계의 유지는 또다시 욕계의 유지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며 색계와 무색계의 유지에 있어서도 그러하나 오직 수의 지위[受位]만은 제외된다. 이 지위는 혹은 서로 비슷하지 않은 유지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욕계에 나서 만일 아직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하여 욕계의 애․취․유를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하거나 미래의 생․노사를 이끌게 되면 거기에는 현재의 1애․1취․1유와 미래의 1생․1노사가 있게 되는 것이요, 만일 이미 욕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초정려(初靜慮)의 염(染)을 여의지 못하여 초정려의 애․취를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하거나 미래의 생․노사를 이끌게 되면 거기에는 현재의 2애․2취․2유와 미래의 2생․2노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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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하여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을 여의지 못하여 비상비비상처의 애․취․유를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하거나 미래의 생․노사를 이끌게 되면 거기에는 현재의 9애․9취․9유와 미래의 9생․9노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욕계에서 죽어 비상비비상처에 나면 옛날 비비상처에서의 현재의 애․취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무명이 되고 현재의 유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행이 되며 미래의 생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식이 되고 미래의 노사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명(名)․의(意)․촉․수가 된다.
옛날 그 밖의 다른 자리[地]에서는 현재나 미래의 모든 갈래[支]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因果)를 차츰차츰 서로 견준다 하면 있다고 말하겠으나 그 자리의 인과는 다 같이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그가 비상비비상처에서 죽어 무소유처에 나면 옛날 무소유처에서 현재의 애․취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무명이 되고 현재의 유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행이 되며 미래의 생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식이 되고 미래의 노사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명․의․촉․수가 된다.
옛날 그 밖의 다른 자리에서는 현재나 미래의 모든 갈래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를 차츰차츰 서로 견주면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 자리의 인과는 다 같이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그가 무소유처에서 죽어 차츰차츰 또다시 욕계에 와서 태어나면 그 옛날의 욕계에서 현재의 애․취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의 무명이 되고 현재의 유이었던 것이 지금에는 과거의 행이 되며 미래의 생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식이 되고 미래의 노사이었던 것이 지금은 현재의 명색․6처․촉․수가 된다.
옛날 그 밖의 다른 자리에서 현재나 미래의 모든 갈래이었던 것이 지금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를 차츰차츰 서로 견주면 있다고 말하겠으나 그 자리의 인과는 다 같이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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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욕계에 나서 모든 감관이 성취하고 후유(後有)를 이끄는 업을 지어서 거기에 무명의 지위[無明位]가 앞에 나타날 때면 한 갈래[一支]는 현재이니 무명이요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미래이다.
무명의 지위에서 행의 지위[行位]에 이를 때면 두 갈래[二支]는 현재이니 무명과 행이며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미래이다.
행의 지위에서 식의 지위[識位]에 이를 때면 두 갈래는 과거이니 무명과 행이요 한 갈래는 현재이니 식이며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미래이다.
식의 지위에서 명색의 지위[名色位]에 이를 때면 두 갈래는 과거이니 무명과 행이요 두 갈래는 현재이니 식과 명색이며 그 밖의 나머지 갈래는 미래이다.
이와 같이 취의 지위[取位]에서 유의 지위[有位]에 이를 때면 두 갈래는 과거이니 무명과 행이요, 여덟 갈래[八支]는 현재이니 식 나아가 유이며, 두 갈래는 미래이니 생․노사이다.
유의 지위에서 생의 지위[生位]에 이를 때면 열 갈래[十支]는 과거이니 무명에서 유까지이고 한 갈래는 현재이니 생이며 한 갈래는 미래이니 노사이다.
생의 지위에서 노사의 지위[老死位]에 이를 때면 열 갈래는 과거이니 무명에서 유에 이르기까지며 두 갈래는 현재이니 생․노사이다.
망만(望滿) 존자는 “무명과 행의 지위가 앞에 나타날 때면 두 갈래는 현재이니 무명과 행이며 열 갈래는 미래이다. 식과 나아가 유의 여덟 갈래까지는 차후생(次後生)에 있고 생과 노사의 두 갈래는 제3생(生)에 있다.
생과 노사의 지위가 앞에 나타날 때면 두 갈래는 현재이니 생과 노사며 열 갈래는 과거이고 식과 나아가 유의 여덟 갈래까지는 차전생(次前生)에 있고 무명과 행의 두 갈래는 제3생에 있다.
식 등의 여덟 지위가 앞에 나타날 때면 여덟 갈래는 현재이니 식과 나아가 유이고 두 갈래는 과거이니 무명과 행이며 두 갈래는 미래이니 생과 노사이다.
욕계에 날 때를 말하는 것처럼 색계와 무색계에 날 때의 설명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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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계경 가운데서는 부처님께서 교화할 중생을 위하여 연기법을 말씀하실 때는 혹은 인(因)을 문(門)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과(果)를 문으로 삼기도 하며 혹은 둘을 다 함께 문으로 삼기도 하셨다.
[문] 어떤 교화할 중생을 위하여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나아가 어떤 교화할 중생을 위하여 둘을 다 함께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는가?
[답] 인(因)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는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과(果)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으며 인과에 어리석은 이를 위하여 두 가지를 함께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처음 업을 닦는 이[初修業者]를 위하여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작의가 뛰어난 이[超作意者]를 위하여는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으며 이미 익힌 이[已串習者]를 위하여는 두 가지를 함께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간략함[略]을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는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자세함[廣]을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으며 자세함과 간략함을 다 좋아하는 이를 위하여는 둘을 다 함께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근기가 영리한 이[利根者]를 위하여는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고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를 위하여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으며 근기가 중간인 이[中根者]을 위하여는 두 가지를 함께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만일 근기가 둔한 이를 위하여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시어 그가 곧 이해하게 된다면 최후의 몸의 보살은 모든 유정들보다 근기가 가장 뛰어나거늘 무슨 인연 때문에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觀)하는 것인가?
[답] 과거의 항하[殑伽] 모래 수보다 더 많은 보살들도 모두가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하였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보살로서 최후의 몸에 머무른 이도 이렇게 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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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살의 지위에 있는 이도 무명은 행의 연이 되고 차츰차츰 하여 나아가 생은 노사의 연이 된다고 관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순관(順觀)은 2승(乘)보다 많으며 혹은 또 어떤 때에는 역관(逆觀)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오직 과로써만 문을 삼는다고 말할 수 없기도 한다.
또 보살은 노(老)․병(病)․사(死)의 고(苦)를 실제로 보시고서 ‘이 노․병․사는 어떤 인연으로 있은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생(生)을 말미암아 있다는 것을 아셨고 다시 ‘생은 어떤 인연으로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유(有)를 말미암아 있다는 것을 아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먼저 과를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런 관찰을 하신 것이다.
또 어떤 정거천(淨居天)은 보살에게 유를 싫어하는 마음[厭有心]을 내게 하기 위하여 노․병․사를 나타낸 것이니 보살은 그것을 보시고 나서 유를 싫어하여 출가하셨고 이미 출가한 뒤에는 먼저 보았던 것에 따라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신 것이다.
또 현관(現觀)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뒤에 성제(聖諦)를 현관할 때에 먼저 고제(苦諦)를 관한 것인데 지금은 현관을 배우기 때문에 먼저 과를 관찰한 것이다.
또 먼저 “처음 업을 닦는 이를 위하여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말씀하셨다”고 말했는데 보살도 처음 업을 닦는 이이기 때문에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신 것이다. 보살은 또 한량없는 겁 동안 연기관(緣起觀)을 닦았다. 그러나 최후의 몸에서는 처음 이것을 일으켰기 때문에 처음 업을 닦는 이라 한다.
또 보살은 지나간 겁 동안 처음 업을 닦을 때에는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했으므로 지금은 비록 철저히 익힌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 닦았던 때와 같이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나무에 비록 자주 올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 다시 오를 때에는 또다시 뿌리 있는 데서부터 오르는 것과 같다.
또 실제로 생사의 나무[生死樹]를 불태우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나무를 태우려면 먼저 잎과 가지를 태운 뒤에 그 뿌리를 태우는 것처럼 보살도 그러하여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면서 그 관찰한 곳에 따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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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히 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협(脇) 존자는 “보살은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한다 하여 곧 근기가 둔한 이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행하는 이[觀行者]에게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애행(隨愛行)8)이요, 둘은 수견행(隨見行)이다.
수애행이란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면서 무원삼마지(無願三摩地)에 의거하여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드는 이요, 수견행이란 인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하면서 공삼마지(空三摩地)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드는 이이나 오직 보살만은 제외된다.
보살은 비록 수애행자이어서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찰한다 하지만 공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혹시 수애행을 행하는 이가 과로써 문을 삼아 연기법을 관해도 공삼마지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드는 이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 마치 모든 보살과 같다’라고 대답한다’ ”고 말씀하셨다.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삼보리(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에 혼자 고요한 데에 있으면서 세간의 중생은 한결같이 생(生)․노(老)․사(死)의 고통에 박해(迫害)를 받고 있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무엇이 있기에 노사가 있으며 이 노사는 무엇의 연이 되는가라고 생각한 뒤에 곧 현관하였더니 생이 있기 때문에 노사가 있고 이 노사는 생의 연이었다. 다시 무엇이 있기에
생이 있으며 이 생은 무엇의 연이 되는가라고 생각한 뒤에 곧 현관하였더니 유(有)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고 이 생은 유의 연이었다.
이와 같이 하면서 나아가 다시 무엇이 있기에 명색(名色)이 있으며 이 명색은 무엇의 연이 되는가라고 생각한 뒤에 곧 현관하였더니 식(識)이 있기 때문에 명색이 있고 이 명색은 그 식의 연이었다. 다시 무엇이 있기에 식이 있으며 이 식은 무엇의 연이 되는가라고 생각한 뒤에 곧 현관하였더니 명색이 있기 때문에 식이 있고 이 식은 그 명색의 연이었다.
8) 수애행(隨愛行)이란 실행(實行)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을 말하고 수견행(隨見行)이란 사유 관찰(思惟觀察)에 더 무게를 둔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자(前者)는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요, 후자(後者)는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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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는 이 식을 다스려 마음을 전환(轉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명색은 식의 연이 되고 식은 명색의 연이 되며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보살은 이 연기법을 관할 때에 아직 견도(見道)의 참된 무루의 지혜[無漏慧]를 얻지 못했으니 어떻게 현관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 그때에 아직 진실한 현관은 얻지 못하나 세속지(世俗智)를 말미암아 연기를 현전에서 보는 것이니 이것이 현관과 유사하기 때문에 현관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연기를 역관(逆觀)하다가 오직 식에 이르러서 마음을 곧 전환한 것인가? 지력(智力)이 다해서인가 이염(爾焰)9)이 다해서인가? 가령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는가? 만일 지력이 다해서라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보살의 지견(智見)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염이 다해서라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행과 무명은 아직도 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답] “지력이 다해서도 아니요, 이염이 다해서도 아니다. 다만 보살이 행과 무명에 대하여 먼저 이미 관했을 뿐이기 때문이니 먼저 유(有)를 관한 것은 곧 이미 행(行)을 관한 것이요, 먼저 애(愛)․취(取)를 관한 것도 이미 무명을 관한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먼저 노사를 관한 것은 이미 명색․6처․촉․수를 관한 것이요, 먼저 생을 관한 것이 이미 식을 관한 것이면 명색 등에 대해서는 마땅히 거듭하여 관하지 않아야 하는가?
[답] 먼저는 간략하고 뒤에는 자세하며 먼저는 총괄하고 뒤에는 따로따로여서 거듭 관한다는 허물은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생(生)과 식(識)에는 자세함과 간략함이란 차이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거듭 관하는 것인가?
[답] 생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재차 관한다 해도 허물은 없다. 우리
9) 이염(爾焰)은 알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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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는 먼저 보살의 지위에 계실 때에 노․병․사를 싫어하여 성(城)을 넘어 출가하셔서 ‘이 노사의 괴로움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속생(續生)의 마음을 말미암는다는 것을 현전에서 보셨고 또 ‘이 마음은 무엇을 말미암아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업(業)을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셨다.
또 ‘이 법은 무엇으로부터 생긴 것일까?’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번뇌로부터라는 것을 아셨고 또 ‘번뇌는 무엇에 의거하여 생기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일[事]에 의거한다는 것을 아셨으며 또 ‘이 일은 누구를 말미암아 구르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시다가 곧 이것이 구르는 것은 결생(結生)의 마음을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보살은 그때에 곧 ‘온갖 과환(過患)은 모두가 이 마음을 말미암아서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때문에 이 마음에 대하여 깊이 싫어하고 이상히 여긴 것이니 비록 자세함과 간략함은 없다 하더라도 다시 거듭하여 관한 것이다. ‘식에 이르러서 전환한다’는 뜻은 여기에 속한다.
[문] 무명은 이미 간략한데 어찌하여 관하지 않는가?
[답] 행지(行支)가 중간에 막고 있기 때문이니 연기를 관할 때는 반드시 차례에 의거해야 하는데 행을 뛰어넘어 무명을 관할 수가 없어서이다.
어떤 이는 “먼저 유는 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이미 업의 명색을 관한 것이요, 뒤에 명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곧 이숙(異熟)의 명색을 관한 것이다. 만일 다시 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한다면 또한 업의 명색을 관하는 것이어서 앞과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듭하여 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먼저 유는 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이미 먼 연[遠緣]을 관한 것이요, 뒤에 명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곧 가까운 연[近緣]을 관한 것이다. 만일 다시 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한다면 또한 먼 연을 관하는 것이어서 앞과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듭하여 관하지 않는다.
가까운 것․먼 것처럼 여기에 있는 것․저기에 있는 것과 앞에 나타나는 것․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과 이 중동분․다른 중동분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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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어떤 이는 “먼저 유는 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이미 전생의 연[前生緣]을 관한 것이요, 뒤에 명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곧 구생의 연[俱生緣]을 관한 것이다. 만일 다시 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한다면 또한 전생의 연을 관하는 것이어서 앞과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듭하여 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먼저 유는 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이미 전연(轉緣)10)을 관한 것이요, 뒤에 명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곧 수전연(隨轉緣)을 관한 것이다. 만일 다시 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한다면 또한 전연을 관하는 것이어서 앞과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듭하여 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끝없는 허물을 피하기 위하여 거듭 관하지 않는 것이니 먼저 노사를 관하는 것은 곧 이 생[此生]의 명색․6처․촉․수를 관하는 것이요, 먼저 생을 관하는 것은 곧 이생의 식을 관하는 것이며, 뒤에 명색․6처․촉․수를 관하는 것은 곧 전제2생[前第二生]의 노사를 관하는 것이요, 뒤에 식을 관하는 것은 곧 전제2생의 생을 관하는 것이다. 만일 다시 무명과 행을 관하면 마땅히 전제3생[前第三生]을 관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역시 제4
생도 관해야 하리니 이와 같이 연속하여 곧 끝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명과 행을 거듭하여 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무엇 때문에 식(識)에 이르러서 마음이 곧 전환(轉還)하는가? 식은 식주(識住) 안에 즐거이 머무르고[樂住] 있기 때문이니 식은 식주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식주란 곧 명색이기 때문이니 식을 관한 뒤에는 또다시 명색을 관하게 됨에서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식과 명색은 서로서로 연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다시 “이 두 가지는 연속하여 인과(因果)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무엇 때문에 식에 이르러서 마음은 곧 전환하는가? 식지(識支)를 지나면 소연(所緣)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자벌레가 가다가 풀끝
10) 전연(轉緣)이란 능전연(能轉緣)의 뜻이어서 유(有)가 능동적(能動的)으로 생(生)을 낸다는 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여기에 대하여 수전연(隨轉緣)이란 서로 의지하여 생기게 되는 연(緣)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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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면 그 위는 소연이 없는지라 곧 물러나며 내려오는 것처럼 마음을 관함도 그러하여 오직 식까지는 이르고 그 밖은 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곧 또다시 물러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는 “무엇 때문에 식에 이르러서 마음은 곧 전환하는가? 연(緣)이 바뀌기 때문이다. 전에 이미 식은 명색의 연이 된다고 말하고 이제 다시 명색은 식의 연이 된다 하면 앞의 인이었던 것이 지금은 바뀌어 과가 되면서 경계가 바뀌기 때문에 마음도 바뀌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무엇 때문에 식에 이르러서 마음은 곧 전환하는가? 식은 나고 죽는 모든 고통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우리 보살은 나고 죽는 고통을 싫어하여 성(城)을 넘어 출가하셔서 ‘세간의 늙고․병들고 죽는 고통은 무엇이 근본이 되는가?’라고 캐고 들다가 결생(結生)의 마음임을 아셨고, 또 ‘이 마음은 무엇을 말미암아 이끄는 것인가?’라고 캐고 들다가 업(業)임을 아셨으며, 또 ‘이 업은 무엇을 말미암아 일으키는가?’라고 캐고 들다가 번뇌임을 아
셨고, 또 ‘번뇌는 무엇에 의거하여 일어나는가?’라고 캐고 들다가 일[事]임을 아셨으며, ‘이 일은 무엇이 근본이 되는가?’라고 캐고 들다가 결생의 마음임을 아시고서 곧 ‘이 결생의 마음이 한결같이 나고 죽는 모든 고통의 근본이구나. 깊이 싫어하고 근심해야 하겠으며 이것을 한계로 여겨 마땅히 참된 대치[眞對治]를 닦아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무엇 때문에 식에 이르러서 마음은 곧 전환하는가? 미래의 생(生)을 견주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유는 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현재의 생은 모든 고통의 근본임을 알게 되고, 뒤에 다시 명색은 식의 연이라고 관할 때에는 과거의 생도 모든 고통의 근본이었음을 알고서 곧 ‘현재와 과거의 나고 죽고 하는 모든 고통은 이미 생이 그 근본이므로 미래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 밖의 경계는 관할 필요가 없다’라
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식에 이르러서 마음은 곧 전환하는 것이니 모든 유지(有支)에는 모두 3세(世)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망만(望滿)11) 존자가 말한 뜻이 성립된다. 마치 “무명과 행의 지위가
11) 망만(望滿)의 말이라 함은 ‘무명(無明)과 행(行)의 지위[位]가 앞에 나타날 적에 그 밖의 다른 10지(支)는 미래에 속한다’고 한 앞에서 든 설명을 지적한 것이다.
앞에 나타날 적에 두 갈래[二支]는 현재이어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마치 계경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에 무엇이 있지 않으면 노사가 있지 않으며 무엇이 소멸하면 노사가 소멸할까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곧 현관을 일으켰더니 생이 있지 않으면 노사가 있지 않고 생이 소멸하면 노사가 소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면서 나아가 다시 무엇이 있지 않으면 행이 있지 않고 무엇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할까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곧 현관을 일으켰더니 무명이 있지 않으면 행이 있지 않고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며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는 것이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무슨 연유로 보살은 유전분(流轉分) 중에서는 다만 10지(支)만을 관하고 환멸분(還滅分) 중에서는 12지를 갖추어 다 관하셨는가?
[답] 보살은 유전을 증오(憎惡)하기 때문에 다만 10지만을 관하고 환멸을 좋아하기 때문에 12지를 갖추어 다 관하신 것이다.
또 유전분 중에는 모든 과환이 많고 이끄는 마음[牽心]이 하열하기 때문에 다만 10지만을 관하며, 환멸분 중에는 모든 공덕이 많고 이끄는 마음이 뛰어나기 때문에 12지를 갖추어 다 관하는 것이다. 모든 계경 중에 혹은 “연기(緣起)는 마치 등불[燈]과 같다”고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연기는 마치 불 무더기[火聚]와 같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연기는 마치 성(城)과 같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연기법을 말씀하시면서 “마치 등불과 같다, 불 무더기와 같다, 성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눈앞에 보이는 것을 따라 그것으로 비유를 삼으신 것이다. 교화할 중생의 눈앞에 등불이 보이면 등불로써 비유를 삼아 연기법을 나타내신 것이요, 만일 교화할 중생의 눈앞에 불무더기가 보이면 불무더기로써 비유를 삼아 연기법을 나타내신 것이며, 만일 교화할 중생의 눈앞에 성이 보이면 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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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비유를 삼아 연기법을 나타내신 것이다. 또 만일 교화할 중생이 등불에 비유하는 설법을 들어서 연기를 이해할 이면 부처님은 “마치 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만일 교화할 중생이 불무더기와 같다는 설법을 들어서 연기를 이해할 이면 “마치 불 무더기와 같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만일 교화할 중생이 성과 같다는 설법을 들어서 이해할 이면 부처님은 “마치 성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만일 교화할 중생이 하품(下品)의 애․취가 있는 이면 부처님은 그에게는 “연기는 마치 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만일 교화할 중생이 중품(中品)의 애․취가 있는 이면 부처님은 그에게는 “연기는 마치 불무더기와 같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만일 교화할 중생이 상품(上品)의 애․취가 있는 이면 부처님은 그에게는 “연기는 마치 성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품(品)의 애․취처럼 3근(根)과 3락(樂)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論] 세존께서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취(取)는 유(有)의 연이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계경에서 “무명은 행의 연이 되고 취는 유의 연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자세히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의 소의(所依)의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시지 않으신 것을 이제 분별해야 된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행과 유는 그 체(體)가 다 같이 업(業)이므로 혹 “그 체에 차별이 없는가?”라고 의심하는 이에게 그 차별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무명은 행의 연이 되고 어떤 것이 취는 유의 연이 되는가?
[答] 무명은 행의 연이 된다 함은 먼저 다른 생(生) 동안에 조작(造作)하고 증장(增長)한 업으로 지금 있는 이숙과 이미 받은 이숙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며, 취는 유의 연이 된다 함은 현재 생 동안에 조작하고 증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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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으로 장차 있을 이숙을 얻게 되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업을 드러내 보인다 함은 이것은 부처님․세존께서 이미 지었고 지금 짓는 온갖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과 착한 유루[善有漏]의 업을 분명히 드러내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먼저의 다른 생 동안이라 함은 이 업은 전생의 다른 중동분(衆同分) 안에 있던 것이어서 이미 다했고 이미 없어졌으며 이미 여의었고 이미 변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조작하고 증장한다 함은 이 업을 일으키고 원만하게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번뇌에서 생겨 그 결과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이숙을 얻는다 함은 이 업으로서 이 생에서 모든 과(果)의 이숙으로 된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며, 이미 받은 이숙이라 함은 이 업으로서 이미 받아 버린 전생의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나타내 보인다.
전생에 지었고[造作] 더욱 자라게 한[增長] 착한 업[善業]과 착하지 않은 업과 그 이숙과는 지금 성숙시켰거나 또는 이미 성숙된 것은 모두가 행지분(行支分) 안에 있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현재 생 동안이라 함은 이 업은 오직 이생의 중동분 안에만 있으면서 조작하고 증장한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생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인다.
장차 있을 이숙을 얻게 된다 함은 이 업이 미래 생 동안에 모든 과의 이숙이 되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모든 금생에 지었고 더욱 자라게 한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이 그의 이숙과로서 이생 동안에 과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은 모두가 유지분(有支分) 안에 있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과거생에 지었던 업의 과가 이미 성숙된 것을 행이라 하고 현재생에 지은 업이 이생 동안에 과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을 유라 하는가?
[답] 과거의 생에 지었던 업의 과가 이미 성숙된 것은 이미 쇠후(衰朽)하였고 이미 수용(受用)하였으며 이미 과를 주었고[與果] 이미 일을 마쳤으며 세력이 없어서 다시는 후유(後有)의 이숙을 이끌 수 없는 것이며 그리고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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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고 이미 변천했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며, 현재생 동안에 지은 업이 이생 동안에 과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이면 그것은 상반되는 것이므로 유라고 한다.
어떤 이는 “과거생에 지었던 업의 과가 이미 성숙된 것은 옛 업[故業]이기 때문에 행이라 하며 현재 생에 지은 업이 이생 동안에 과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은 새로운 업[新業]이기 때문에 유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과거생에 지었던 업이 과가 이미 성숙된 것은 이미 과를 주었기 때문에 행이라 하고 현재 생에 지은 업이 이생 동안에 과가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은 아직 과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유라고 한다”라고 한다.
[문] 조작(造作)과 증장(增長)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이 두 가지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니 나타나는 업의 체(體)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에는 역시 차별이 있다. 이름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니 조작이라 하고 증장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 뜻에도 차별이 있다. 어떤 이는 하나의 선행(善行)․악행(惡行)으로 말미암아 선취(善趣)․악취(惡趣)에 나며, 어떤 이는 셋의 선행․악행을 말미암아 선취와 악취에 난다. 하나를 말미암아서라 함은 가행(加行) 때에는 오직 조작일 뿐이나 성만(成滿) 때에는 두 가지[二種]를 다 갖추는 것이며, 셋을 말미암아서라 함은 하나와 둘을 지을 때는 오직 조작일 뿐이나 만일 셋을 지으면 두 가지를 다 갖추게 된다.
또 어떤 이는 하나의 무간업(無間業)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지고, 어떤 이는 다섯 가지 무간업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떨어진다. 하나를 말미암아서라 함은 가행 때에는 오직 조작일 뿐이나 성만 때에는 두 가지를 다 갖추며, 다섯 가지를 말미암아서라 함은 네 가지를 짓기까지는 오직 조작일 뿐이나 만일 다섯 가지를 지으면 두 가지를 다 갖추게 된다. 10선업도(善業道)와 10불선업도(不善業道)도 그러하다.
또 많은 업을 말미암아 일생(一生)의 과를 받기도 하는 것이니 마치 모든 보살이 삼십이 백복업(三十二百福業)을 말미암아 최후의 몸을 받는 것과 같다. 삼십일 백복업을 짓는 동안은 오직 조작일 뿐이나 삽십이 백복업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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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게 되면 두 가지를 다 갖추게 된다.
또 일부러[故思] 짓는 업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일부러 짓지 않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사(思)를 우선으로 하여 짓는 업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경솔하게[率爾] 짓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가행(加行)이 있는 업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가행이 없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세 가지 시기가 정해진 업[時定業]12)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時不定業]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정해진 처소에서 받을 업[處定受業]13)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처소가 정해지지 않은 업[處不定業]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반드시 과를 받을 업[定受果業]14)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과를 받음이 정해지지 않은 업[不定受]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착하지 않은 업으로서 악취를 받을 것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인간과 천상을 받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며, 착한 업으로서 인간과 천상을 받을 것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악취를 받을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착하지 않은 업이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는 것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며 착한 업이 착한 업으로써 권속을 삼는 것은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착하지 않은 업으로써 권속을 삼
는 것은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착하지 않은 업으로서 사견(邪見)으로 인과(因果)에 어리석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정견(正見)으로 인과에 어리석지 않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착한 업은 위와는 서로가 반
12) 세 가지 시기가 정해진 업[時定業]이라 함은 현세(現世)에 업을 지어서 현세에 그 과(果)를 받거나 바로 다음 세상[次世]에 받거나 제3세(世) 이후에 받는다거나 하는 그 과보를 받을 때가 정해진 업을 말하며 그렇지 않은 것을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時不定業]이라 한다.
13) 정해진 처소에서 받을 업[處定受業]이라 함은 그 업의 과보로 일정한 처소에 생(生)을 받을 것이 정해진 것을 말하며 그렇지 않은 업을 처소가 정해지지 않은 업[處不定業]이라 한다.
14) 반드시 그 과보를 불러올 업을 정수과업(定受果業)이라 하고 받을 것이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수업(不定受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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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이다.
또 착하지 않은 업으로서 파계(破戒)과 파견(破見)15)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파계이면서 파견하지 않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며 착한 업으로서 구계(具戒)와 구견(具見)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구계도 구견도 아님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착하지 않은 업으로서 파괴의 가행[壞加行]과 파괴의 의요[壞意樂]가 몸 안에 있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파괴의 가행이면서 파괴하지 않는 의요가 몸 안에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며 착한 업으로서 가행을 갖추고 의요를 갖춤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의요는 갖추면서 가행을 갖추지 않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지은 뒤에 버리지도 않고 뱉지도 않고 대치(對治)에 의하지 않은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만일 업을 지은 뒤에 능히 버리고 능히 뱉고 대치에 의한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세 때[三時]에 한결같이 깨달아 아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지은 뒤에 변하거나 후회가 없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만일 업을 지은 뒤에 변하거나 후회가 있는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지은 뒤에 한결같이 기억하는 것이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만일 업을 지은 뒤에 한결같이 기억하지 않은 것이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으로서 할 일을 마쳤으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만일 마치지 않았으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자주자주 지으면 두 가지 일을 다 갖추지만 만일 자주자주 짓지 않으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만일 업을 지은 뒤에 기뻐하고 찬탄하면서 과(果)에 회향하면 두 가지
15) 파계(破戒)라 함은 계율(戒律)을 깨뜨린 행위를 말하고, 파견(破見)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견(正見)을 깨뜨린 것이며, 이와 반대의 것을 구계(具戒)와 구견(具見)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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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 갖추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또 명료한 마음에서 지으면 두 가지를 다 갖추지만 명료하지 않으면 오직 조작일 뿐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바로 차별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5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보특가라납식③
[論] 무명(無明)1)이 행(行)의 연(緣)이 되고 취(取)가 유(有)의 연이 되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는 것은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은데 이것을 업연(業緣)이라 한다. 세존께서는 ‘하나의 번뇌’를 무명이라 하셨다. 취가 유의 연이 된다는 것은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은데 이것도 업연이라 한다. 세존께서는 ‘온갖 번뇌’를 모든 취라 하셨다. 이것이 차별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일어나는 업의 자성차별을 말했으니 앞의 업[前業]은 과거의 생에 있고 뒤의 업[後業]은 현재의 생에 있으며, 앞의 업은 이미 과를 주었고[與果] 뒤의 업은 아직 과를 주지 않았으며, 앞의 업은 옛 것[故]이고 뒤의 업은 새 것[新]이다. 그러나 아직 능히 일으키는[能發] 연(緣)의 자성의 차별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과거업의 연(緣)에는 다만 무명만을 말하면서 현재의 업
1) 여기는 전절(前節)의 계속이며 오로지 무명(無明)․행(行)과의 관계와 취(取)․유(有)와의 관계의 동이점(同異点)에 주력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단락이다.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무명이라 하는가’의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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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연에는 온갖 번뇌를 말하는가?
[답] 과거의 업을 지을 때 여러 가지의 일이 나타나 보이지 아니한 까닭으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무명이 연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 계(界)․취(趣)․생(生)․주(洲)․분위(分位)2)․의처(依處)․가행(加行)․등기(等起)․상속(相續)․소연(所緣) 등에 대하여 모두가 알 수 없다.
계(界)라 함은 삼계(三界)인데 과거 어느 세계에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취(趣)라 함은 5취(趣)인데 과거 어느 갈래에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며, 생(生)이라 함은 4생(生)인데 과거 무엇으로 태어나 있으면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주(洲)라 함은 4주(洲)인데 과거 어느 주에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며, 분위(分位)라 함은 갈라람(羯刺籃) 등의 열 가지의 분위인데 과거 어느 분위에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의처(依處)3)라 함은 열 가지 선업도(善業道)와 불선업도(不善業道)의 의처인데 과거 어느 의처에서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며, 가행(加行)4)이라 함은 유정수(有情數)와 비유정수(非有情數)가 일으키게 되는 가행인데 과거 어느 가행을 말미암아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등기(等起)라 함은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인데 과거 어느 등기를 말미암아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며,
상속(相續)이라 함은 남자․여자 등인데 과거 어느 상속에 의하여 이 업을 지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소연(所緣)이라 함은 과거․미래․현재거나 혹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인데 과거의 마음이 어떤 것을 반연하여 이 업을 지었는가를
2) 계(界)라 함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를 말하고, 취(趣)라 함은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인(人)․천(天)의 5취를 말하며, 생(生)이라 함은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의 4생을 말하고, 주(洲)라 함은 남섬부주(南贍部洲)․동승신주(東勝神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로주(北俱盧洲)의 4주를 말하며, 분위(分位)라 함은 태내(胎內)의 5위(位)와 태외(胎外)의 5위를 말한다.
3) 의처(依處)라 함은 신삼(身三)․구사(口四)․의삼(意三)의 10선업도(善業道)와 10불선업도(不善業道)의 의처이다.
4) 가행(加行)이라 함은 손발 등과 같은 지각(知覺)이 있는 것에 의하여 발동한 유정수(有情數)가 일으킨 가행과 지각이 없는 기계적(機械的) 시설(施設)에 의한 행동인 비유정수(非有情數)가 일으킨 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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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현전에서 보지도 않고 또한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업을 일으킨 지위[發業位]에서는 모두가 무명이 있었기 때문에 통틀어 그것을 ‘무명이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업을 지을 때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현실에서 보기 때문이요 모두 알 수도 있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연이 된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다.
또 과거의 업은 이미 쇠하여 없어졌고 이미 받아썼으며 이미 과를 주었었고 이것은 옛 업으로 세력이나 작용도 없고 명료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만 ‘무명이 연이 된다’고 말할 뿐이지만 현재의 업은 아직 쇠하거나 없어지지도 않았고 아직 받아쓰지도 않았으며 아직 과를 주지도 않았고 이것은 새로운 업으로 세력과 작용이 있고 극히 명료하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과거의 업은 미세하여 깨닫기도 어렵고 제 것이나 다른 것이나 다 같이 나타나 보이지도 않고 어떤 번뇌로 일으키게 되었는가도 알지 못하나 번뇌가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무명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무명이 연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 현재의 업은 거칠게 드러나서 깨닫기도 쉽고 제 것이나 다른 것이나 다 같이 나타나 보여서 이것은 그 여러 번뇌로 일으킨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연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과거의 업은 성품이 사납거나 날카롭지도 않고 그 모양이 어두워 무명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무명이 연이 된다’고 말할 뿐이다. 현재의 업은 성품이 사납고 날카로우며 그 모양이 밝게 드러나서 모든 취(取)를 따르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연이 된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다.
[문] 아라한이 지은 업은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 해야 하는가, 취가 유의 연이 된다고 해야 하는가?
[답] 무명이 행의 연이 된다고도 하지 않고 또한 취가 유의 연이 된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무명도 없고 또한 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업으로서 이미 과를 준[與果] 것은 행지분(行支分) 중에 포섭되어 있는 줄 알아야 하고 아직 과를 주지 않은 것은 유지분(有支分) 중에 포섭되어 있는 줄 알아야 하니, 그것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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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支)에 속한 것은 아니다.
[論] 혹시 행(行)이 무명5)의 연(緣)이 되나 명(明)의 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명과 무명을 함께 들어서 논하고 있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근본 되는 법이기 때문이니 「잡염품(雜染品)」의 법에서는 무명이 근본이 되고 「청정품(淸淨品)」의 법에서는 명이 근본이 된다.
또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우두머리[上首] 법이기 때문이니 무명이 우두머리가 되고 무명이 앞 모양[前相]이 되어 한량없는 종류의 나쁜 법과 불선법을 내고 이런 종류의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를 일으키는 것이며, 명이 우두머리가 되고 명이 앞 모양이 되어 한량없는 종류의 청정한 착한 법을 내고 이런 종류의 왕성한 참괴(慚愧)를 일으킨다.
또 명과 무명은 가까이 서로 다스리기 때문이니 무명은 이 명의 가까운 대치[近對治]이고 명은 이 무명의 가까운 대치이다.
또 명과 무명은 서로가 반대이기 때문이니 무명은 명을 어기고 명은 무명을 어긴다.
또 명과 무명은 서로가 포섭하지 않으면서도 소연의 경계에서는 서로가 포섭하기 때문이니 다 같이 4성제(聖諦)를 반연하고 다 같이 유루와 무루를
5) 여기서의 무명(無明)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고 명(明)이라 함은 무루지(無漏智)를 말하며 행(行)이라 함은 본문(本文)에서와 같이 갖가지의 용례(用例)가 있으나 여기서는 온갖 유위법[一切有爲法]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열한 가지로 나눈다. 이 절(節)은 위의 11행(行)에 대한 명․무명의 연기관계(緣起關係)를 6인(因)․4연설(緣說)에 대조하면서 논구(論究)하고 다음에는 방도사견(謗道邪見)으로부터 차츰차츰 갖가지의 복업(福業)을 일으키는 과정을
밝히며 다시 전심(前心)․후심(後心)의 4연(緣) 관계를 논하고 있다. 요는 온갖 행(行)은 어떠한 형태에서 명과 그리고 무명을 반연하면서 생기는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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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연하며 다 같이 유위와 무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행(行)의 이름과 뜻에는 넓음[寬]과 좁음[狹]이 있다.
‘무명은 행의 연이다’고 말한 것에서 아비달마의 모든 논사들은 “이 안에서 뜻(意)은 분위연기(分位緣起)를 말하는 까닭에 이 행(行)이라는 말[聲]은 5취온(取蘊)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묘음 존자는 “이 행이라는 말은 오직 모든 업(業)만을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손해 있는 행[有損害行]을 짓는다’고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말하며, ‘손해 없는 행을[無損害行] 짓는다’고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착한 업[善業]을 말한다.
‘모든 유위의 행[有爲行]을 짓는다’고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오직 사(思)를 말할 뿐이며, ‘색(色)․심(心)․심소법(心所法)․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무위(無爲)’를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을 말한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온(蘊)’을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통틀어 상응행(相應行)과 불상응행의 온(蘊)을 말하며, ‘색․수․상․행․식 취온(取蘊)’을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오직 유루(有漏)의 상응행과 불상응행의 온만을 말한다.
‘몸의 행[身行]․말의 행[語行]․뜻의 행[意行]’을 말한 것에서 몸의 행이라는 말은 들숨․날숨[入出息]을 말하고, 말의 행이라는 말은 심(尋)과 사(伺)를 말하며, 뜻의 행이라는 말은 상(想)과 사(思)를 말하기 때문에 그 행이라는 말은 1온(蘊)의 전부와 2온(蘊)의 일부분[少分]을 말한다.
‘죄행(罪行)․복의 행[福行]․부동의 행[不動行]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유루의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을 말한다.
‘모든 행 안에는 다섯 가지의 과환(過患)이 있는데 무서움이 있고[有怖]․두려움이 있고[有畏]․괴로운 접촉이 있고[有苦觸]․나가 없고[無我]․내 것이 없다[無我所]. 모든 지혜가 있는 이는 이런 행을 보지 않으면서 모든 행을 잘 여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이는 “거기서의 행이라는 말은 착하지 않은 법을 말하는 것이니 그 행은 무서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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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거기서 행이라는 말은 5취온을 말한다. 그 행에는 나와 내 것이 없으며 모든 지혜가 있는 이는 이 행을 보지도 않고 모든 행을 잘 여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행은 무상(無常)하며 생멸(生滅)이 있는 법이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이는 “거기서 행이라는 말은 온갖 유위의 법을 말하는 것이니 제3구(第三句)6)에 생멸을 말미암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거기서의 행이라는 말은 다만 5취온만을 말하는 것이니 제4구에 그것은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고 한다. 적멸로 즐겁다함은 오직 택멸(擇滅)만을 드러낼 뿐이니 무루의 법에는 택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죄가 있는 행[有罪行]과 죄가 없는 행[無罪行]’을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을 말하며, ‘세 가지 묘한 행[三妙行]과 세 가지 나쁜 행[三惡行]’7)을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과 탐(貪)․진(瞋)․사견(邪見)․무탐(無貪)․무진(無瞋)․정견(正見)을 말한다.
‘온갖 행은 무상하고 온갖 법은 나가 없으며 열반은 고요하다’라고 말한 것에서 행이라는 말은 온갖 유위의 법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행이라는 말도 온갖 유위의 법을 말하는 것이니 명과 무명으로써 다 같이 연(緣)을 삼기 때문이다.
[論] 혹시 행이 무명의 연이 되나 명의 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은 오직 무명에서만 연이 되고 연이 되는 것은 명
6) 제3구(句)와 제4구라 함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란 게송의 제3구와 제4구를 가리킨다.
7) 3악행(惡行)이라 함은 몸(身)․말(語)․뜻(意)의 나쁜 행을 말한다. 온갖 착하지 않은 신업(身業)․어업(語業)을 몸과 말의 나쁜 행이라고 하는 데 반하여 뜻의 나쁜 행[意惡行]은 온갖 착하지 않은 의업(意業) 외에 탐(貪)․진(瞋)․사견(邪見)도 포함된다. 3묘행(妙行)은 3악행의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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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論] 혹시 행이 명의 연이 되나 무명의 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은 오직 명으로써 연이 되고 무명이 연이 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論] 혹시 행이 무명의 연도 되고 명의 연도 되는 것이 있는가?
[答] 있다.
왜냐하면 모든 행의 종류에는 열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욕계에 네 가지가 있으니 선(善)․불선(不善)․유부무기(有覆無記)․무부무기(無覆無記)요, 색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선․유부무기․무부무기이며, 무색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색계와 같고, 무루행(無漏行)을 합하여 열한 가지이다.
이 가운데 욕계(欲界)의 선의 행[善行]에서 명(明)과 무명(無明)은 다 같이 그의 인(因)이 아니며 다만 3연(緣)만 될 뿐이니 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이다.
불선행(不善行)에서 무명으로 4인을 삼는데 상응인(相應因)․구유인(俱有因)․동류인(同類因)․변행인(遍行因)이요 또한 4연도 된다. 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2연(緣)만 될 뿐이니 소연연과 증상연이다.
욕계의 유부무기행(有覆無記行)에서 무명으로 4인을 삼는 것은 앞의 설명과 같고 또한 4연도 된다. 명은 그의 인이 아니며 다만 일연만 될 뿐이니 증상연이다.
욕계의 무부무기행(無覆無記行)에서 무명이숙(無明異熟)8)을 제외하면
8) 무명이숙(無明異熟)이라 함은 욕계에 속한 불선번뇌(不善煩惱:三十四隨眠)에 의하여 야기되는 이숙과(異熟果)이다. 무명을 주인(主因)으로 하여 순전한 사업(思業)만으로 받게 되는 이숙과라는 데서 이것을 무명이숙이라 하는 것이다.[34수면과 무명이숙의 자세한 설명은 다음 절(節)에서 나온다.] 무명이숙과를 6인(因)에서 보면 무명을 이숙인(異熟因)으로 하며 4연(緣)에서 보면 인연(因緣) 외에 무명을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증상연(增上緣)으로 하
는 점에서 3연(緣)과 관계가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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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인연(因緣)을 제외한 3연이 될 뿐이며 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1연이 될 뿐이니 증상연이다.
무명의 이숙은 무명으로써 1인을 삼는데 이숙인(異熟因)이요 다만 소연연을 제외한 3연이 될 뿐이니 무명의 이숙은 의지(意地)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은 그의 인이 아니며 다만 증상연의 1연이 될 뿐이다.
색계(色界)의 선의 행에서 명과 무명이 다 같이 그의 인이 아니면서도 다만 인연만을 제외한 3연이 된다.
색계의 유부무기의 행은 무명으로써 4인을 삼는데 상응인․구유인․동류인․변행인이며 또한 4연도 된다. 명은 그의 인이 아니며 다만 2연이 될 뿐이니 소연연과 증상연이다.
색계의 무부무기의 행에서 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인연만을 제외한 3연이 되며 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증상연의 1연만 될 뿐이다.
색계의 세 가지 행[三行]9)을 말한 것처럼 무색계의 세 가지 행도 그러하다.
무루행(無漏行)에서 초명(初明:苦法智忍)과 그것과 함께 얻는 것을 제외하면 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소연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만 되며, 명으로써는 3인을 삼는데 상응인․구유인․동류인이요 또한 4연도 된다.
초명(初明)에서 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요 다만 소연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만 되며 명도 그의 인은 아니면서 다만 증상연의 하나의 연만 된다.
초명과 함께하는 득(得)에서 명과 무명은 다 같이 그의 인이 아니며 다만 증상연의 하나의 연만 된다.
이것을 이곳에서는 약비바사(略毘婆沙)라 한다. 그러므로 온갖 행(行)은 명과 무명으로써 연을 삼는 이치가 잘 성립되는 것이니 증상연은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9) 선(善)과 유부(有覆)와 무부(無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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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혹시 행이 무명의 연도 되지 않고 명의 연도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答]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한 유정도 오랜 옛날부터 성도(聖道)를 도가 아니라[非道]고 비방하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먼저 도를 비방하고 나서 그는 뒷날에 대지(大地)를 받게 될(感) 업을 지어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뒷날에 소왕(小王)이 될 업을 지어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며, 혹은 뒷날에 대왕(大王)이 될 업을 지어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전류왕(轉輪王)의 업을 지어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한다.
이런 인(因)으로 말미암고 이런 연(緣)을 말미암고 그 성도를 말미암아서 차츰차츰 대지에 있는 모든 성읍(城邑)과 마을[聚落]과 사람[人]과 비인(非人)과 짐승과 곡식과 약초와 수목과 우거진 숲들이 더욱 자라고 무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앞 마음[前心]의 4연(緣)은 뒷 마음[後心]에 대하여 다만 하나의 증상연만 될 뿐이다.
여기에서 무루의 성도[無漏聖道]와 도를 비방하는 사견[謗道邪見]은 모든 유루의 착한 업과 과(果)에 대하여 모두가 연(緣)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은 온갖 행은 명과 무명을 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증상연은 연속하여 서로 바라보아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대지(大地)를 받게 될 업이라 함은 대지와 산과 숲[山林]과 하천과 바다[河海]와 동산[園苑]이며 약초(藥草) 등의 물건을 얻게 되어 그것을 자유로이 통할하여 거느리면서 수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소왕(小王)이 될 업이라 함은 작은 성[堡塢]에 웅거하게 될 왕위(王位)를 받는 것을 말하고, 대왕(大王)이 될 업이라 함은 천원(川原)에 웅거하게 될 왕위를 받는 것을 말하며, 전륜왕(轉輪王)의 업이라 함은 한군데를 맡아 지배할 땅[一主地]에 웅거하는 역륜(力輪) 등과 같은 지위를 받는 것이니 마치 굴하나(屈厦拏)․몰로다(沒魯茶)․지나천자(至那天子) 등과 같은 이를 말한다.
또 소왕이 될 업이라 함은 천원에 웅거하게 될 왕위를 받는 것을 말하고, 대왕이 될 업이라 함은 한군데를 맡아 지배할 땅에 웅거하는 지위를 받는 것이 마치 굴하나․몰로다 등과 같은 이를 말하며, 전륜왕의 업이라 함은 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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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洲) 등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를 말한다.
또 소왕이 될 업이라 함은 한군데를 맡아 지배할 땅에 웅거하게 되는 지위를 받는 것을 말하고, 대왕이 될 업이라 함은 일주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를 받는 것을 말하며, 전륜왕의 업이라 함은 이주 등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를 받는 것을 말한다.
또 소왕이 될 업이라 함은 일주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 받는 것을 말하고, 대왕이 될 업이라 함은 이․삼주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 받는 것을 말하며, 전륜왕의 업이라 함은 사주에 웅거하게 되는 왕위 받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소왕이 될 업이란 전륜성왕에 의거하여 부림을 받는 왕위를 말하고, 대왕이 될 업이란 전륜왕의 태자위(太子位)를 받는 것을 말하며, 전륜왕의 업이란 전륜왕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소왕이 될 업이란 전륜왕의 태자로서 아직 관정을 받지 못한 지위[未灌頂位]를 얻은 것을 말하고, 대왕이 될 업이란 전륜왕의 태자로서 이미 관정을 받은 지위[已灌頂位]를 얻은 이를 말하며, 전륜왕의 업이란 전륜왕의 왕위를 얻은 이를 말한다”고 말한다.
이런 인(因)을 말미암는다 함은 여기서 짓는 착한 업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요 이런 연(緣)으로 말미암는다 함은 여기서 도를 비방하는 사견[謗道邪見]을 말미암는다는 말이며 성도(聖道)를 말미암는다 함은 그가 비방하는 성도를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이런 인연(因緣)과 그 성도를 말미암아 차츰차츰 대지에 있는 모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며 안팎의 이숙과 증상과(增上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니 그런 일이란 어떤 것인가?
마치 모든 외도(外道)들이 세간의 증감(增減)을 싫어하고 다시 세간의 원수끼리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을 싫어하며 집에 살면서 옥죄이는 것이 마치 감옥과 같으므로 곧 집을 떠나게 되며 집을 떠난 뒤에는 해탈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도리 아닌[非理] 고행(苦行)을 받아 지니면서 그것에 고집하여 청정하게 되고 해탈할 수 있다 하며 이렇게 고행하는 삿된 도[邪見]에 의지하므로 그러한 만큼 성도와는 더욱더 멀어진
다.
성도와 멀어지기 때문에 해탈을 증(證)하지 못하게 되면 ‘비록 해탈은 있으나 성도는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어째서 얻지 못하는가? 나는 이와 같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은 지가 오래인데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성도는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를 비방한 뒤에 받아 지녔던 것을 버리고는 ‘복업(福業)을 닦는 것조차도 오히려 생사(生死)에 대하여 뜻대로 쾌락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복을 닦지 않는 것이랴’라고 생각하고 그런 뒤에는 갖가지의 방편으로 모든 재보(財寶)를 구하여 큰 보시의 모임으로 베푼다. 그리고 ‘원컨대 저는 이 복으로써 대지의 안팎의 물(物) 등을 얻게 되어 소왕(小王)이 되고 혹은 대왕(大王)이 되고 혹은 전륜왕이 되어서 통할하여 다스림이 자재하게 하소서’라고
원을 세운다. 그 소원에 따라 모두 과(果)를 이루게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내도(內道)에서는 세간의 수명이나 재보나 지위가 혹은 더하기도 하고 혹은 덜하기도 한 것을 싫어하고 또 세간에서는 원수끼리 만나는 괴로움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이 있으며 집에 살면서 옥죄이는 것이 마치 옥살이와 같고 생사에 헤매며 갖은 고통을 받는 것에 싫증을 내어 곧 출가하게 된다.
출가한 뒤에는 욕심이 적으면서 만족할 줄 알고 부지런히 힘쓰면서 고행하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자는 일이 없고 산 속 바위에 의지하여 소․대(小大) 7일 동안10) 가부로 앉아 단정한 몸으로 정려(靜慮)에 들며 해질녘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해돋이까지 마음을 오로지 한군데에 쏟아 사유(思惟)하고 받은 선정[定]에 힘써 나가면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지낸다.
그러는데도 두 가지의 인연으로 성도를 얻지 못한다. 하나는 선근(善根)이 아직 성숙되지 못해서요 둘은 삿된 가행[邪加行]을 일으킴에서다.
선근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 함은 불법에 의지하여 극히 빨라도 3생(生)을 겪어야 비로소 해탈하게 될 이면 제1생 동안에는 해탈분(解脫分)을 심고 제2생 동안에는 닦아서 성숙되게 하며 제3생 동안에는 이미 성숙하고 나면
10) 소(小)․대(大) 7일 동안이라 함은 일칠 일 내지 이칠 일이라는 말이어서 1주(週) 내지 7주(週)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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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끌어 일으켜 해탈을 증득하는 것인데 그는 먼저 아직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했기 때문에 이생 동안에는 아직 선근이 성숙되지 못하는 것이다.
삿된 가행을 일으킨다 함은 그는 뒤바뀐 대치(對治)를 받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 때문에 성도를 얻지 못하면 ‘비록 해탈은 있으나 성도는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어째서 얻지 못하는가? 나는 이와 같은 정진으로 고행을 닦은 지가 오래인데도 얻지 못하고 있으므로 도(道)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도를 비방한 뒤에는 받아 지니던 것을 버리고 ‘복업(福業)을 닦는 것조차도 오히려 생사에 대하여 마음대로 쾌락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복을 닦지 않는 것이랴’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는 갖가지 방편으로 모든 재보를 구해서 큰 보시의 모임으로 베풀고 병든 이를 돌보며 덕 있는 이를 공양하고 자신이 지은 것을 남에게 가르치며 다른 이가 하는 일을 보고 따라 기뻐하며 모든 복업을 왕성하게 닦으면서 게으름이 없다.
이로 인하여 원을 세우되 ‘원컨대 저는 이 복으로 대지(大地) 안팎의 물(物) 등을 얻게 되고 소왕이 되게 하며 혹은 대왕이 되고 혹은 전륜왕이 되어서 통할하여 다스림이 자재하게 하소서’라고 한다. 그 소원대로 모두가 과를 이루게 되며 왕위에 있을 적에는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안팎의 만물로 하여금 모두 다 무성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성도가 없다면 도를 비방하는 사견조차도 생기게 되는 이유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그 성도는 이 사견과 가까운[近] 증상연이 된다.
만일 사견이 없다면 보시와 함께하는 선심(善心)조차도 일어나게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염오의 법[染汚法]은 불염오(不染汚)의 가까운 증상연이 된다.
만일 보시의 복이 없다면 왕위를 얻지 못할 것이요 만일 왕위가 없다면 모든 안팎의 만물이 무성하게 자랄 이유가 없으니 그러므로 유정의 수[有情數]는 모든 바깥 만물의 가까운 증상연이 된다.
이와 같이 앞 마음의 4연(緣)은 사견(邪見)과 함께하는 마음이 갖추어 4연을 소유하게 된다. 그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俱有法) 등은 그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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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의심[疑] 등은 그의 등무간연이며 성도는 그의 소연연이요, 그의 자체(自體)를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은 모두가 그의 증상연이다.
뒷 마음에 다만 하나의 증상연만이 된다 함은 앞 마음의 4연은 뒤의 보시와 함께하는 마음을 위하여 다만 하나의 증상연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문] 뒤의 보시와 함께하는 마음 또한 4연이 있다. 곧 인연이란 그것의 상응법과 구유법 등을 말하고 등무간연이란 그것의 앞 심․심소법을 말하며 소연연이란 버리는 물건과 보시를 받는 이를 말하고 증상연이란 그의 자체를 제외한 온갖 법을 말한다. 이와 같이 뒷 마음의 4연은 앞 마음의 또 다른 하나의 증상연이 되거늘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또한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앞의 종류로써 뒤의 그 뜻을 알 수 있는 까닭으로 다시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앞 마음이 뒤의 것에 연이 된다는 뜻은 따를만 하나 뒤의 것이 앞의 것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뒷 마음의 4연은 모두가 앞 마음의 4연 중에 들고 포섭되니 증상연은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온갖 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슨 연유로 앞 마음의 4연과 뒷 마음은 하나의 증상연을 짓는다고 하는가?
[답] 이 가운데서 마땅히 앞 마음의 4연은 또한 뒷 마음과 갖추어 4연을 짓는다고 말해야 하나 다만 하나의 증상연만 짓는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가까운[近] 증상연만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앞의 사견과 가까운 증상연은 뒤의 마음에 들지 못하고 앞의 3연(緣)에 포섭되며 윗 마음에 있는 가까운 증상연은 앞 마음에 들지 못하고 앞의 3연에 포섭된다.
마치 다른 곳에서 “안식(眼識)에 4연이 있으니 그것과 상응(相應)하고 구유(俱有)하는 모든 법은 그의 인연이요, 다음 그것 앞에서 소멸되는 심․심소법은 그의 등무간연이고 빛깔은 그의 소연연이요, 눈은 그의 증상연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그것은 오직 가까운 증상연만 말한 것처럼 이것도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어떤 이는 “앞 사견의 마음은 증상연 안의 이치로 보아 실은 뒷 마음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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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갖춰져 있지만 증상연은 그 뜻이 넓어서 온갖 곳에 두루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치우쳐 말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뒷 마음도 또한 앞 마음의 증상연에 포섭되어서 이미 앞 마음의 4연은 뒤에 증상연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체(自體)는 마땅히 자체의 증상연이 되리니 곧 종(宗)의 뜻에 어긋날 것이다.
[답] 이 안에서 마땅히 앞 마음의 4연은 뒤에 다만 하나의 증상연만 되고 그의 자성(自性)은 제외된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먼저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전품(前品)11) 중에서 이미 “모든 식(識)은 그 자성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법에 능작인(能作因)이 된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논(論)에서 다른 온(蘊)으로 다른 날[日]에 말한 말까지 오히려 증명이 될 수 있거늘 하물며 이 논에서 이 온으로 이 날에서 차전품(次前品)의 말[說]인데도 증명이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이 안에서 가까운 증상연을 말했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라고 말한다.
[論] 또 만일 인연(因緣)12)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여기에서 ‘의거하여[依]’라는 말은 기준한다는 뜻을 드러낸다. 인연(因緣)을 기준으로 하여 논을 지으면 3구(句)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앞에서는 4연을 기준으로 하여 논을 지었기 때문에 다만 구구(俱句)만이 있을 뿐이다.
11) 전품(前品)이라 함은 지납식(智納息)을 지적한다. 곧 제20권에 능작인(能作因)을 논하는 『발지론(發智論)』 본문을 참조할 것이다.
12) 앞에서는 명(明)․무명(無明)과 행(行)과의 관계를 6인(因) 4연(緣)에 대조하면서 널리 논했으나 여기서는 6인에서 능작인(能作因)을 제거하고 4연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의 3연을 제거하고서 오로지 인연(因緣)과 5인(因)의 입장에서 삼자(三者)의 연기(緣起) 관계를 논하고 있다. 따라서 그 관계는 앞의 설명에서보다 협소하고 동시에 밀접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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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혹시 행(行)이 무명의 연이 되나 명의 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무명이숙(無明異熟)과 염오의 행[染汚行]을 말한다.
여기에서 무명이숙은 무명으로써 1인(因)을 삼으니 이숙인(異熟因)을 말한다. 명은 그의 인이 아니다.
염오의 행은 무명으로써 4온을 삼으니 상응인과 구유인과 동류인과 변행인이며 명은 그의 인이 아니다.
[論] 혹시 행이 명의 연이 되나 무명의 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초명(初明)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루의 행[無漏行]이다.
그 밖의 무루의 행은 명으로써 3인을 삼으니 상응인과 구유인과 동류인이며 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다.
[論] 혹시 행이 무명의 연도 되고 명의 연도 되는 것도 있는가?
[答] 없다.
왜냐하면 명과 무명은 서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니 반드시 어느 한 행(行)도 두 가지를 인으로 삼는 것은 없다. 게송의 말과 같다.
허공과 대지(大地)는 서로 떨어져 멀고
바다의 저 언덕과 이 언덕도 또한 다시 멀며
해가 돋고 지는 곳 이것 또한 멀되
정법(正法)과 사법(邪法)은 먼 것 중에서도 멀다.
[論] 혹시 행이 무명의 연도 되지 않고 명의 연도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答] 있다. 무명이숙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무부무기행과 초명과 선유루(善有漏)의 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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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기에서 제외된 무명이숙이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의 34수면(隨眠)13)과 그것의 상응과 구유의 생(生) 등으로 받게 된 이숙이니 이와 같은 것을 무명이숙이라 한다.
어떤 이는 “욕계의 34불선(不善)한 수면의 득(得)으로 받게 된 이숙도 무명이숙이라 한다. 능득(能得)과 소득(所得)은 동일한 과(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불선한 신업․어업으로 받게 된 이숙도 무명이숙이라 한다. 능기(能起)와 소기(所起)는 동일한 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두 가지는 다 같이 도리가 아니다. 능득․소득이나 능기․소기는 차츰차츰 서로 견주면 구유인이 아니기 때문이요 동일한 과가 되지 않기 때문에 수면의 득과 신업․어업으로 받게 된 이숙은 무명이숙이 아니다. 이 때문에 처음의 말[初說]이 도리에 옳다 하겠다.
그 밖의 모든 무부무기의 행이라 함은 온갖 착한 법의 이숙과 온갖 착하지 않은 신업․어업과 그것의 생(生) 등의 이숙과 온갖 불선의 득과 그것의 생 등의 이숙과 온갖 장양색(長養色)과 그것의 모든 득과 온갖 등류법(等流法)과 그것의 모든 득과 생 등과 온갖 위의로(威儀路)․공교처(工巧處)․통과심(通果心)과 상응법․구유법과 일으킨 신업․어업의 모든 득과 생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행에 대하여 명과 무명은 다 같이 그의 인이 아니나 인이 없는 것은 아니니 혹은 4인이 있기도 하고 혹은 3인이 있기도 하며 혹은 2인이 있기도 하므로 도리대로 마땅히 말해야 한다.
초명이라 함은 현행(現行)의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말한다. 무명은 그의 인이 아니니 무루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명도 그의 인이 아니니 함께하거나 앞이거나 다 같이 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이 없는 것은 아니니 거기
13) 34수면(隨眠)이란 욕계에 속한 견도(見道)의 4제(諦)와 수도(修道)의 5부(部)의 번뇌 중 특히 좋지 않은 것을 말한다. 곧 고제(苦諦)에서 탐(貪)․진(瞋)․무명(無明)․만(慢)․의(疑)․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戒禁取)의 8과 집제(集諦)와 멸제(滅諦)에서 위의 계금취를 제외한 각각 7과 도제(道諦)에서 계금취를 더한 8과 수도(修道)의 탐(貪)․진(瞋)․만(慢)․무명(無明)의 4이다.[본론의 49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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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상응인과 구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문] 초명과 함께하는 득(得)에서도 명과 무명은 다 같이 그의 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이 없는 것은 아니니 그것과 함께하는 생(生) 등은 그것과 구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차례에서는 왜 4구(句)를 말하지 않고 앞의 제3구는 무엇 때문에 제거하지 않는가?
[답] 이것도 마땅히 말해야 하고 앞의 것도 제거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말이 있어서이다.
어떤 이는 “이것은 이미 제2구 중에 포섭되어 있으며 이 고법인(苦法忍)은 함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능득과 소득(所得)이 구유인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니 앞의 말[前說]이 옳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 문답한 말이 있다. “혹시 한 찰나 동안에 24득(得)과 고법지인이 함께 나고 고법지인의 종류로 고법지인과 함께 서로 인이 되는 뜻이 없을 수 있는가?”
“있다. 제4 정려에 의거하여 정성이생에 든 이는 고법지인이 앞에 나타났을 때 6지(地)에 각각의 4행상(行相)에는 고법지인의 득이 있으며 같은 때에 앞에 나타나 있되 그것은 고법지인과 서로가 인이 된다는 뜻은 없다”라고 말한다.
선한 유루의 행이라 함은 온갖 선한 유루의 5온(蘊)을 말한다. 명과 무명은 다 같이 그의 인은 아니다. 그러나 인이 없는 것은 아니니 혹은 3인도 있고 혹은 2인도 있으므로 마땅히 도리대로 말해야 한다.
이를 말미암아 “만일 인연에 의거하면 명과 무명이 인이 되는 행에는 3구가 있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이란 무슨 뜻인가?
[답] 통달하지 못하고[不達] 이해하지 못하고[不解] 환히 알지 못하는[不了] 것이 무명의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법에도 통달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환히 알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무명이라 하지 않는가?
[답] 만일 통달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환히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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癡]으로써 자상(自相)을 삼으면 무명이지만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다.
[문] 무엇 때문에 명(明)이라 하며 명이란 무슨 뜻인가?
[답] 잘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아는 것이 명의 뜻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유루의 지혜[有漏慧]도 잘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아는데 무엇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가?
[답]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4성제(聖諦)에 진실로 통달하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안다 해도 4성제에 진실로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마치 난(煖) 등의 4순결택분(順決擇分)이 비록 맹렬하고 날카롭게 4성제를 추구(推求)한다 해도 아직은 진실로 4성제를 통달하지 못했으므로 명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만일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4성제에 마지막까지 통달하면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4성제에 마지막까지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4성제에 결정적으로 통달하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4성제에 결정적으로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4성제에 대하여 깨달은 뒤에 다시는 보지 않는 것이 아니요, 안[知] 뒤에 다시 아는 것이 아니며 현관(現觀)한 뒤에 무지(無知)와 망설임[猶豫]과 삿된 지혜[邪智]에 굴복되지 않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4성제에 이와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끊을 법을 끊고 그로 하여금 끝까지 더 자랄 힘이 없게 하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이런 힘이 없기 때문에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모든 유(有)를 파괴하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유를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에 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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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유(有)를 계속시키고 노사(老死)를 계속시키는 법을 끊고 생사로 하여금 끝까지 끊어 없어지게 하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행[苦滅行]에 나아가고 모든 존재하는 세간의 생사와 노사가 소멸하는 행에 나아가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괴로움의 원인의 행[苦集行]에 나아가고 모든 존재하는 세간의 생사와 노사의 원인의 행에 나아가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신견(身見)의 일도 아니요 수면(隨眠)의 일도 아니며 뒤바뀐[顚倒] 일도 아니요 탐(貪)․진(瞋)․치(癡)․만(慢)이 안정하게 발을 디딜 곳도 아니며 때와 찌끼와 흐림도 없고 모든 유(有)의 고제(苦諦)․집제(集諦)에 속한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위의 것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면서 무명(無明)이 없는 것을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비록 통달하고 이해하고 환히 알아도 무명이 있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주문[呪]을 명이라 한다. 세간 사람이 귀매(鬼魅)에 홀리면 명주(明呪)로 치료하듯이 성도(聖道)는 중생들의 모든 번뇌 병을 치료하기 때문에 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마침내 번뇌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모든 유루의 지혜는 2품(品)14)에 수순하고 2품에서는 다 같이 3연(緣)이 되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무명도 아니니 마치 사람이 다른 이의 원수나 친한 벗에게 다 같이 따라 순종하는 것과도 같다. 그 사람
14) 2품(品)은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말한다. 유루의 지혜(有漏慧)가 유루에 수순함은 물론이나 또 그 결택력(決擇力)은 무루에도 순응하며 2품에서는 인연(因緣)을 제외한 그 밖의 3연(緣)이 된다는 뜻이다. 인연을 제외하는 이유는 유루지(有漏智)의 직접의 인(因)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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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른 이에 대하여 친한 것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유루의 혜품(慧品)은 명을 비방하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유루의 착한 지혜는 비록 명에 순종하나 도를 비방하는 사견[謗道邪見]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 마치 반역한 신하[叛臣]와 같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또 모든 무루의 지혜는 4성제에 환히 비추어 밝고 깨끗하게 함이 마치 대낮에 눈으로 모든 색상(色像)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명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유루의 지혜는 4성제에 보는 것이 밝지도 않고 깨끗하지 않음이 마치 밤에 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명이라 하지 않는다.
[문] 명을 인(因)으로 삼는 법과 명을 인으로 삼지 않는 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은 몇 가지의 계(界)와 몇 가지 처(處)와 몇 가지의 온(蘊)이 속하는가?
[답] 1계와 1처와 1온이 속한다.
이 가운데서 명을 인으로 삼는 법은 제외한다 함은 초명(初明)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루의 지혜를 말하고 명을 인으로 삼지 않는 법이라 함은 온갖 유루의 법과 무루의 지혜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루의 법을 말하며 그 밖의 법이라 함은 초명을 말한다.
그 1계와 1처와 1온이 속한다 함은 법계(法界)와 법처(法處)와 행온(行蘊)이 속한 것을 말한다.
[문] 마음을 인으로 삼는 법과 마음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닌 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은 몇 가지의 계와 몇 가지의 처와 몇 가지의 온이 속하는가?
[답] 2계와 1처와 1온이 속한다.
이 가운데서 마음을 인으로 삼는 법을 제외한다 함은 현행(現行)의 고법지인(苦法智因)과 상응하는 마음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루의 마음[無漏心]을 말하고 마음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닌 법이라 함은 12처(處)를 말하며 그 밖의 법이라 함은 현행의 고법지인과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 2계와 1처와 1온이 속한다 함은 의계(意界)와 의식계(意識界)와 의처(意處)와 식온(識蘊)이 속한 것을 말한다.
[문] 만일 법이 명(明)이라면 그 법은 명의 인(因)인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명이나 명의 인이 아니니 미래의 명이다.
어떤 법은 명의 인이나 명이 아니니 과거와 현재의 무루의 지혜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무루행과 미래의 명에 대한 상응법과 구유법이다.
어떤 법은 명이기도 하고 명의 인이기도 하니 과거와 현재의 모든 무루의 지혜이다.
어떤 법은 명도 아니고 명의 인도 아니다. 만일 그런 종류를 말한다면 미래의 무루의 득(得)과 그것의 생(生) 등을 말하며, 만일 그런 종류를 말하지 않는다면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을 말한다.
[문] 만일 법이 명이라면 그 법은 명이 인이 되는가?
[답]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법은 명이나 명을 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초명을 말한다.
어떤 법은 명을 인으로 삼으나 명은 아니다. 명의 상응법․구유법과 첫 무루의 득과 아울러 그것의 생(生) 등이 제외된 모든 그 밖의 무루의 득과 아울러 그것의 생 등이다.
어떤 법은 명이기도 하고 명을 인으로 삼기도 한다. 초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무루의 지혜이다.
어떤 법은 명도 아니며 명을 인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 종류를 말한다면 첫 무루의 득과 그것의 생 등을 말하며, 만일 그 종류를 말하지 않는다면 앞 모양에서 제외된 것을 말한다.
또 수신행의 도[隨信行道]15)와 수법행의 도[隨法行道]가 있다. 이 가운데 수신행의 도는 수신행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수법행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된다. 그러나 수법행의 도는 오직 수법행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나 수신행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지 않으니 그것은 하열[劣]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수신행의 도는 오직 수신행 도를 위하여 인이 되나 수법행의 도를 위해서는 아니다. 견도(見道) 중의 수신행자(隨信行者)는 반드시 바꾸
15) 수신행의 도[隨信行道]라 함은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가 부처님과 스승을 믿고 그 믿음의 힘에 의하여 견도(見道)에 드는 것을 가리키며 수법행의 도[隨法行道]라 함은 스스로가 법을 이해하며 법대로 행하여 견도에 드는 것을 말한다. 근기[根機]의 둔함과 예리함[鈍利]에 의한 구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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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수법행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동일한 상속(相續)에서 얻게 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니 또 그것은 뛰어난 도[勝道]이거늘 어찌하여 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앞의 말을 도리에서 보아 옳다 하겠다.
또 신해의 도[信解道]16)와 견지의 도[見至道]가 있다. 이 가운데서 신해의 도는 신해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견지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지만 견지의 도는 오직 견지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신해의 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또 시해탈의 도[時解脫道]와 불시해탈의 도[不時解脫道]17)가 있다. 이 가운데서 시해탈의 도는 시해탈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불시해탈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지만 불시해탈의 도는 오직 불시해탈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시해탈의 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또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의 도[無學道]가 있다. 이 가운데서 견도는 견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수도와 무학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며, 수도는 수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무학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되지만 견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무학의 도는 오직 무학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견도와 수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또 성문의 도[聖聞道]와 독각의 도[獨覺道]와 부처님의 도[佛道]가 있다. 이 가운데서 성문의 도는 오직 성문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그 밖의 다른 이도(二道)를 위해서는 아니니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독각의 도는 오직 독각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성문의 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요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의
16) 견도위(見道位)에서 수신행의 도[修信行道]는 수도위(修道位)에 이르러서 신해의 도[信解道]가 되고 또 앞의 수법행의 도[修法行道]는 견지의 도[見至道]가 된다. 똑같이 행자(行者)의 이둔(利鈍)에 의한 한 행도(行道)의 구별이다.
17) 시해탈의 도[時解脫道]라 함은 근기가 둔한 무학(無學)이 승연(勝緣)의 시기를 기다려서 정(定)에 들고 그리고 번뇌의 속박을 해탈하게 되는 도를 말하고 불시해탈의 도[不時解脫道]라 함은 근기가 예리한 무학이 시기에 관계없이 정에 들고 그리고 번뇌의 속박을 해탈하게 되는 도를 말한다.(『구사론』 25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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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위하여 인이 되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도는 오직 부처님의 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그 밖의 다른 이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요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또 성도(聖道)는 남자의 몸에도 의지[依]하고 여자의 몸에도 의지한다. 이 가운데서 여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여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를 위하여 인이 되고 또한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를 위하여 인이 된다. 그러나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오직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를 위하여 인이 될 뿐이요 여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를 위해서는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두 가지의 성도가 차츰차츰 인이 되는 것은 그 예리함[利]과 둔함[鈍]에 따른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說]은 도리가 아니다. 남녀의 두 몸에는 낫고[勝] 못함[劣]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하는 성도의 낫고 못함도 정해져 있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 두 가지의 성도는 차츰차츰 인이 아니니 종류의 차별에 의지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도 도리가 아니다. 먼저 여인의 몸으로서 성도에 들어간 뒤에 뒷날 남자로 전환하여 일으키게 되는 성도에는 마땅히 인이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이 가운데서는 앞의 말이 옳다고 하겠다.
또 한 도[一道]18)라고 말하는 이가 있고 여러 도[多道]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 도라고 말하는 이도 “견도는 곧 수도와 무학의 도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견도․수도․무학의 도의 세 가지 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성도가 남녀의 몸에 의지하는 데는 이 두 몸 안의 성도는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도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두 몸 안의 성도는 각각 다르니 종류의 다름에 의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18) 한 도라고 말하는 이[說一道者]란 남녀(男女)․삼주(三洲)․인천(人天) 등에 있어서 성도(聖道)를 일으키는 몸은 다르나 그 얻게 되는 도(道)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설명이며, 여러 도라고 말하는 이[說多道者]란 그 신분에 의하여 성도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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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많다고 말하는 이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여인의 몸에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여인의 몸으로 얻으나 몸에 있지 않고 성취했으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남자의 몸으로 또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여인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남자의 몸으로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못하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니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를 얻은 뒤에 반드시 다시 여자의 몸을 받게 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며, 또 그의 소의(所依)는 결정코 비열(鄙劣)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둘째는 “여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여자의 몸으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남자의 몸에 의지하는 성도는 여자의 몸으로서는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못하고 앞에 나타나 있지도 않는 것이니 종류의 차별에 의한 까닭이다. 남자의 몸 안에서의 두 가지 성도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먼저 여자의 몸에 의하여 성도를 얻고 나서 뒤에 남자로 전환하게 되면 다시 도를 얻어야 할 것이니 이 때문에 그 앞에[前] 설한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견도(見道)는 9처(處)의 몸에 의거한다. 인간의 북구로주(北俱盧洲)를 제외한 3주(洲)19)와 6욕천(欲天)이다. 이 9처에서는 모두가 견도에 들 수 있다.
도가 하나라는 이는 “9처에 의지한 몸의 견도는 하나이다. 종류의 같은 것에 의거하기 때문이니 거기에 의지하고 있는 남녀는 같은 종류이다”라고 말한다.
도가 많다고 말하는 이는 “9처에 의지한 몸의 견도는 저마다 다르다. 의지
19) 인간의 3주(洲)라 함은 동승신주(東勝身洲)․서우화주(西牛貨洲)․남섬부주(南贍部洲)를 가리키며 6욕천(欲天)이라 함은 사천왕천(四天王天)․도리천(忉利天:三十三天)․야마천(耶摩天)․도사다천(都史多天)․낙변화천(樂變化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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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도가 많다고 말하는 이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섬부주(贍部洲) 몸에 의지하는 견도는 섬부주 몸의 안에서는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8처(處)의 몸에 의지하는 견도는 섬부주 몸의 안에서는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둘째는 “섬부주 몸에 의지하는 견도는 섬부주 몸을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8처에 의지하는 견도는 섬부주 몸으로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못하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섬부주 몸에 의지하여 예류과(豫流果)를 얻고 나서 뒤에 다른 곳에 가나면 다시 과(果)를 얻어야 되나 이러한 뜻은 없다. 이 때문에 그 앞에 말한 것이 옳다고 하겠다. 그 밖의 8처의 몸에서 두 가지의 견도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아서 수도(修道)에서도 삼계(三界)의 몸에 의지하는 것을 도가 하나다[一道]라고 말하는 이는 “삼계의 몸의 수도는 하나다”라고 하며 도가 많다[多道]라고 말하는 이는 “삼계의 몸의 수도는 저마다 다르다”고 한다.
도가 많다고 말하는 이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계의 몸에 의지하는 수도는 욕계 몸으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위의 두 세계[上二界]의 몸에 의지하는 수도는 욕계 몸으로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둘째는 “욕계의 몸에 의지하는 수도는 욕계 몸으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몸에 의지하는 수도는 욕계 몸으로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못하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이가 뒤에 위의 세계에 나면 마땅히 다시 그 과를 얻어야 되나 이러한 뜻은 없다. 이 때문에 그 앞에 말한 것이 옳다고 하겠다. 상계(上界)의 몸에서 두 수도를 말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2승(乘)과 무학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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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어서도 이것에 준(准)하여 알아야 한다.
이처럼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가 섬부주의 백 살 때[百年位]의 몸에 의지하거나 나아가 여기의 8만 살 때[八萬歲]의 몸에 의지할 때에 도가 하나라고 말하는 이는 “백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곧 8만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이다”라고 하며 도가 많다라고 말하는 이는 “백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와 8만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그 체(體)가 저마다 다르다”라고 말한다.
도가 많다고 말하는 이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백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백 살 때 몸으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백 살 때 몸으로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둘째는 “백 살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백 살 때 몸으로 얻고 또한 몸에 있으며 또한 성취하고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때의 몸에 의지하는 무상보리는 백 살 때 몸의 안에서는 얻지도 못하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성취하지도 못하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시설론(施設論)』에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모두가 평등하다”라고 말했는가?
[답] 세 가지 일20)을 말미암아서다. 하나는 수행(修行)이 평등하신 것이니 온갖 부처님은 모두 삼대겁(三大劫) 아승기야(阿僧企耶) 동안 4바라밀다(波羅蜜多)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무상보리를 얻으셨기 때문이다.
둘째는 법신(法身)이 평등하신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10력(力)․4무외(無畏) 등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매우 뛰어난 공덕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익(利益)이 평등하신 것이니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은 모두가 한량없고 그지없는 유정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20)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 일[三事]에서 평등하다. 수행이 평등[修行等]하고 법신이 평등[法身等]하며 이익이 평등[利益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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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근기(根)가 평등하신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상상(上上)의 근기에 머무시기 때문이다.
또 계율(戒)이 평등하신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상상의 계율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또 도(道)가 평등하신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상상의 도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評] 이 가운데서는 그 앞에[次前] 말한 것이 옳다고 하겠으니 같은 종류[同類]에 의거했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6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잡온(雜蘊)
3) 보특가라납식 ④
[論] 들숨[入息]과 날숨[出息]은 몸에 의하여 쉰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음에 의하여 쉰다고 말해야 하는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계경(契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장자(長者)에게 ‘이 들숨ㆍ날숨은 몸의 법이니 몸으로 근본을 삼고 몸에 속하며 몸에 의하여 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하셨으며, 『시설론(施設論)』에서는 “무슨 이유로 죽은 이[死者]는 들숨과 날숨을 쉬지 않는가? 들숨과 날숨은 마음의 힘[心力]으로 쉬는 것인데 죽은 이는 마음은 없고 다만 몸만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들숨과 날숨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몸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므로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설명은 모두 불요의(不了義)인가?’라고 의심하고 어떤 이는 ‘모두 요의(了義)인
1) 유정의 기식(氣息)은 몸에 의존하는가, 마음에 의존하는가의 문제를 논하면서 양쪽에 의존한다는 것을 밝히며, 또한 들숨ㆍ날숨을 쉬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조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 여기서의 주된 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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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진실한 이치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들숨과 날숨은 몸에 의하여 쉰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음에 의하여 쉰다고 말해야 하는가?
[答] 몸에 의해서도 쉬고 마음에 의해서도 쉬며 그 응한 것[所應]과 같다고 말해야 한다.
[문] 어떤 것을 ‘그 응한 것과 같다’고 하는가?
[답] 어떤 이는 “하(下)ㆍ중(中)ㆍ상(上)에 대하여 그 응한 것과 같은 것이니 들숨ㆍ날숨이 어릴 때[小時]를 하품(下品)이라 하고, 장년일 때[壯時]를 중품(中品)이라 하며, 노년일 때[老時]를 상품(上品)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네 가지 일[四事]로 말미암아 응한 것과 같다고 한다. 들숨과 날숨은 네 가지 일로 말미암아 쉬게 된다. 첫째는 숨[息]의 소의(所依)인 몸이 있는 것이요, 둘째는 바람 길[風道]이 통하는 것이며, 셋째는 털구멍[毛孔]이 열리는 것이요, 넷째는 들숨ㆍ날숨 자리[地]에 거친 마음[麤心]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이 네 가지를 갖추어야 들숨ㆍ날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응한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이렇게 말한다.
[論] 만일 들숨ㆍ날숨이 다만 몸에 의해서만 쉬고 마음에 의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면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의 지위[位]에 있을 때에도 들숨ㆍ날숨을 쉬어야 한다.
거기에는 들숨ㆍ날숨의 소의(所依)인 몸도 있고 바람 길도 통하며 털구멍도 열리지만 오직 들숨ㆍ날숨 자리에 거친 마음이 앞에 나타남이 없으니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세 가지 일은 있다고 해도 한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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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들숨ㆍ날숨이 다만 마음에 의해서만 쉬고 몸에 의하여 쉬지 않는다면 무색계(無色界)의 유정도 들숨ㆍ날숨을 쉬어야 한다.
그 세계에는 네 가지 일 모두가 없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論] 만일 들숨ㆍ날숨이 다만 몸과 마음에 의해서만 쉬고 응한 것과 같지 않다면 알 껍질 속이나 어머니 태(胎) 안의 갈라람(羯剌藍)ㆍ알부담(頞部曇)ㆍ폐시(閉尸)ㆍ건남(鍵南)의 모든 감관[根]이 다 차지 않고 성숙하지 못한 지위[位]에 있을 때나 제4 정려(靜慮)에 있을 때에도 들숨과 날숨을 쉬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갈라람의 지위에서는 숨을 쉬지 않는가?
[답] 그것은 희박(稀薄)하기 때문이다. 만일 숨을 쉬게 된다면 그것은 유동(流動)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알부담ㆍ폐시ㆍ건남의 모든 감관이 다 차지 않고 성숙하지 못한 지위에서는 숨을 쉬지 못하는가?
[답] 그 몸은 그때에 바람 길이 통하지도 않고 털구멍도 열리지 않아서이다. 만일 숨을 쉬게 된다면 몸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나 알 껍질 속이나 어머니 태 안에서 갈라람으로부터 모든 감관이 다 차지 않고 성숙하지 못한 그때에는 숨이 의지할 몸이 있지도 않고 바람 길도 통하지 않으며 털구멍도 열리지 않으면서 오직 숨 자리에 거친 마음만이 앞에 나타나 있을 뿐이니 비록 한 가지 일이 있다고 해도 세 가지 일이 없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제4 정려에 있을 때는 숨을 쉬지 않는가?
[답] 그 마음이 미세하기[細] 때문이다. 들숨ㆍ날숨은 거친 마음[麤心]에 의하여 쉬는 것인데 제4 정려 이상 모든 자리[地]의 마음은 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또 안 문[內門]으로 쉬기 때문이다.2) 숨은 반드시 바깥 문[外門]의 마음
2) 제4선 이상의 심리(心理) 활동은 극히 미세하면서 벌써 생리(生理) 활동과는 교섭이 없다. 이를테면 심리 생활의 독립적인 것을 안 문으로 쉰다고 하며 이에 대(對)하여 바깥 문의 마음이라 함은 생리 활동과 교섭이 있는 것을 말한다.[제3선에서 몸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바깥 문의 마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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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여 쉬는 것인데 제4 정려 이상의 모든 자리의 마음은 안 문으로 쉬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또 안 일[內事]로 쉬기 때문이다. 숨은 반드시 바깥 일[外事]의 마음에 의하여 쉬는 것인데 제4 정려 이상의 모든 자리의 마음은 안 일로 쉬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또 극히 고요하기 때문이다. 숨은 반드시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마음[躁動心]에 의하여 쉬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길을 갈 때에 빨리 걸으면 먼지가 이는 것처럼 마음이 만일 떠들썩하게 움직이면 들숨ㆍ날숨을 일으키지만 제4 정려 이상의 모든 자리의 마음은 극히 고요하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세우(世友) 존자는 “제4 정려에 들면 전의(轉依)3)를 얻는다. 의지하는 몸에 제4 정려의 미묘한 대종(大種)이 있으면 모든 털구멍으로 하여금 모두 밀폐되어 틈이 없게 하기 때문에 숨이 의지할 바가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때에는 숨을 다시는 쉬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제4 정려에 들면 마음은 곧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몸도 움직이지 않고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숨도 쉬지 않는 것이니 그 정(定)에 들 때에는 온갖 움직이는 법은 모두가 쉬고 소멸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妙音) 존자는 “제4 정려에 들면 온갖 번뇌[麤重]가 모두 쉬고 사라지기 때문에 숨도 쉬지 않게 된다. 욕계 안에서는 거친 욕탐(欲貪)이 있고, 초정려의 자리[初靜慮地]에는 심(尋)이 있고 사(伺)가 있으며, 제2 정려에는 희(喜)가 있고, 제3 정려에는 낙(樂)이 있다. 이로 인하여 몸과 마음에 번뇌가 발생하고 이 번뇌로 인하여 들숨ㆍ날숨을 쉬게 되지만 제4 정려에는 온갖 것이 모두 없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하지(下地)에 있다가 제4 정려에 들면 오직 숨이 의지할 몸과 바람 길만 통하나 털구멍은 열리지 않고 또한 숨 자리에 거친 마음이 앞
3) 여기서의 전의는 소의(所依)의 몸의 전화(轉化)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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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비록 두 가지 일은 있으나 두 가지 일은 없기 때문에 숨을 쉬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제4 정려에서는 숨을 쉬지 않는다고만 하고 제4 정려에 나는 것[生]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의 뜻[意欲]이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제4 정려에 나면 숨을 쉬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미 그 선정에 들었다고 하면 역시 거기에 나는 것도 말한 줄 알아야 한다. 마치 계경에서 “먼저 이 세간에 있을 때에 그 정려에 들면 그 뒤에는 거기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제4 정려에도 풍계(風界)가 있으니 4대종(大種)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거기에 태어난 이는 숨을 쉬지 않는가?
[답] 제4 정려에 비록 풍계가 있다고 해도 들숨ㆍ날숨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 몸에서는 들이쉬거나 내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거기에 나면 비록 풍계는 있다 해도 앞에서 설명한 네 가지의 일이 없기 때문에 숨을 쉰다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論] 들숨과 날숨은 몸에 의해서도 쉬고 마음에 의해서도 쉬며 그 응한 것과 같기 때문에 아래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부터 위로는 변정천(遍淨天)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유정으로서 모든 감관이 다 차고 성숙한 이면 들숨과 날숨은 몸과 마음에 의하여 쉬게 된다.
여기에서 모든 감관이 다 차고 성숙했다는 말은 앞의 네 가지 일이 완전히 갖추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요, 눈[眼] 등의 감관이 다 차고 성숙했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앞의 네 가지 일은 숨을 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감관[根]이라 말한다. 갖추었기 때문에 다 찼다[滿]고 하고 성숙했다는 것은 작용(作用), 즉 앞의 네 가지 일에 완전한 작용이 있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모든 감관이 다 차고 성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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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모든 감관이 다 차고 성숙했다는 말은 태(胎)와 알[卵] 속에 있는 감관이 아직 다 차지도 않고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과는 달라서 바람 길이 통하고 털구멍이 열렸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몸과 마음에 관한 두 가지 일은 이후에 차차 설명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들이쉬는 숨[入息]이 있고 내쉬는 숨[出息]이 있으며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地]와 들숨ㆍ날숨이 없는 자리가 있다.4)
들이쉬는 숨이라 함은 숨의 바람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고 내쉬는 숨이라 함은 숨의 바람이 몸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며,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라 함은 욕계와 아래 세 가지 정려를 말하고 들숨ㆍ날숨이 없는 자리라 함은 제4 정려와 4무색(無色)을 말한다.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에 나서 들숨ㆍ날숨이 없는 자리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숨을 쉬지 않으며, 들숨ㆍ날숨이 없는 자리에 나서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숨을 또한 쉬지 않는다.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에 나고 들숨ㆍ날숨이 있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어도 만일 응한 것[所應]과 같지 않으면 숨을 또한 쉬지 않는다. 반드시 들숨ㆍ날숨이 있는 자리에 나고 들숨ㆍ날숨이 있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서 그 응한 것과 같이 되어야 숨을 비로소 쉴 수 있는 것이다.
[문] 들숨과 날숨은 어느 자리의 매임[繫]인가? 몸을 따르는 매임[隨身繫]인가, 마음을 따르는 매임[隨心繫]5)인가?
[답] 어떤 이는 “몸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隨身地繫]이다”라고 말하니 들숨ㆍ날숨으로 하여금 몸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욕계에 난 이에게 만일 욕계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욕계의 몸에 욕
4) 들숨ㆍ날숨이 있는 것은 욕계와 아래의 세 가지 정려에만 있고 제4선 이상에는 없다. 그리고 이 들숨ㆍ날숨이 신체에 속해 있는가, 정신에 속해 있는가에 있어서는 논사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있다. 여기서는 그 점을 밝히려는 문단(文段)이어서 처음에는 수신설(隨身說)을 들고, 다음에는 수심설(隨心說)을 서술하고, 최후에는 수신설의 뜻이 옳다고 판정한다.
5) 수신계(隨身繫)라고 함은 신체가 소속한 지(地)에 속한 것을 말하고, 수심계라고 함은 마음이 소속한 지를 말한다. 예를 들면 욕계의 몸으로 있으면서 초선의 마음을 일으켰다면 수신계란 욕계계의 뜻이요, 수심계란 색계의 초선계(初禪繫)라는 뜻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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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觀)할 것이며, 곧 그에게 만일 초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욕계의 몸에 욕계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욕계의 들숨ㆍ날숨은 욕계의 염(染)을 여읜 때 최후의 무간도(無間道)에서 소멸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욕계의 들숨ㆍ날숨은 어떤 이는 욕계의 마음에 따라 쉬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쉬는 이도 있다. 욕계의 마음에 따라 쉬는 이면 그때에 소멸하지만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쉬는 이면 그때에 앞에 나타나 있다.
또 그것은 택멸(擇滅)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잘못이 없다. 곧 그에게 만일 제2ㆍ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욕계의 몸에 욕계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2ㆍ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초정려에 난 이에게 만일 초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만일 욕계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 아니며, 곧 그에게 만일 제2ㆍ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2ㆍ제3 정려
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제2 정려에 난 이에게 만일 제2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2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만일 욕계와 초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와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은 아니며, 곧 그에게 만일 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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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제3 정려에 나는 이에게 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3 정려의 몸에 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만일 욕계와 초정려와 제2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3 정려의 몸에 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와 초정려와 제2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은 아니다.
들숨ㆍ날숨으로 하여금 몸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는 욕계의 들숨ㆍ날숨은 4지(地)의 마음으로 관할 것이고, 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은 3지의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은 2지의 마음으로 관할 것이고, 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은 오직 제3 정려의 마음만으로 관할 것이다는 말이다.
[문] 만일 들숨ㆍ날숨이 몸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무슨 연유로 죽은 이는 들숨과 날숨을 쉬지 않는가? 들숨ㆍ날숨은 마음의 힘[心力]으로 쉬는 것인데 죽은 이는 마음이 없고 다만 몸만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들숨ㆍ날숨은 마음에 따라 쉬는 것이어서 반드시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지 이 숨이 마음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隨心地繫]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마음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다”고 말하니 들숨과 날숨으로 하여금 마음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 되게 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욕계에 난 이에게 만일 욕계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욕계의 몸에 욕계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만일 초ㆍ제2ㆍ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욕계의 몸에 초ㆍ제2ㆍ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초ㆍ제2ㆍ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초정려에 난 이에게 만일 초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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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만일 욕계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욕계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만일 제2ㆍ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초정려의 몸에 제2ㆍ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2ㆍ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제2 정려에 난 이에게 제2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2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욕계와 초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욕계ㆍ초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 또는 초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2 정려의 몸에 제3 정려의 들
숨ㆍ날숨이어서 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
제3 정려에 난 이에게 제3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3 정려의 몸에 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제3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며, 곧 그에게 욕계와 초ㆍ제2 정려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그는 제3 정려의 몸에 욕계와 초ㆍ제2 정려의 들숨ㆍ날숨이어서 욕계와 초ㆍ제2 정려의 마음에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니 곧 이 마음으로 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이들의 들숨ㆍ날숨으로 하여금 마음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는 욕계의 들숨ㆍ날숨은 오직 욕계의 마음만을 관할 것이요, 나아가 제3 정려의 들숨ㆍ날숨은 오직 제3 정려의 마음으로만 관할 것이다는 말이다.
[문] 만일 들숨ㆍ날숨이 마음의 자리를 따르는 매임이라면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경에서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들숨ㆍ날숨은 몸의 법이어서 몸으로 근본을 삼고 몸에 속하며 몸에 의하여 쉬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들숨ㆍ날숨은 몸의 힘으로 말미암아 쉬는 것이어서 반드시 몸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이 숨이 몸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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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는 매임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評] 이 들숨과 날숨은 몸 자리를 따르는 매임[隨身地繫]이요, 이것은 몸의 부분이기 때문에 앞의 말이 옳다고 하겠다.
[문] 들숨ㆍ날숨의 바람은 먼저 들이쉬는 것인가, 먼저 내쉬는 것인가?
[답] 먼저 들이쉰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 숨 바람은 먼저 입과 코로 들어가 목구멍에 흘러들어가고 다시 목구멍으로부터 가슴에 흘러들어가며 다시 가슴에서 배꼽[臍輪]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배꼽에서 점차로 흩어지면서 모든 뼈마디까지 두루 퍼진다.
어떤 이는 “먼저 내쉬는 것이다. 배꼽에서 숨 바람이 일어나 위와 아래로 흘러 흩어지면서 모든 털구멍을 열어 주어야 비로소 내쉬면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숨 바람은 털구멍을 열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업으로 내는 바람이 있어 모든 털구멍을 열어 주며 털구멍이 열린 뒤에야 비로소 숨 바람이 그 안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태(胎)와 알 속에서는 어느 분위(分位)에 이르러서 들숨과 날숨을 쉬는가?
[답] 물질 감관[色根]인 6처(處)가 완전히 찬 지위[滿位]에 이르러야 숨 바람을 쉰다. 태어나려고 할 때는 숨 바람을 먼저 들이쉬는데 숨 바람을 들이쉰 다음을 태어났다고 하며, 죽으려고 할 때는 숨 바람을 내쉬는데 뒤에 다시는 들이쉬지 않는 것을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고 죽는 분제(分齊)를 관할 수 있다.
어느 다른 논사는 “태어나려 할 때는 숨 바람을 먼저 내쉬고 숨 바람을 내쉰 뒤를 이미 태어났다고 하며 죽으려고 할 때는 숨 바람을 마지막으로 들이쉬고는 다시는 내쉬지 않는 것을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어떻게 나로 하여금 언제나 살아 있게 하며 나로 하여금 숨을 들이쉬고는 한결같이 내쉴 수 있게 하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제4 정려에 들고자 하여 숨 바람을 내쉰 뒤 다시는 들이쉬지 않는 것을 이미 선정에 들었다고 하며, 선정에서 나오려 할 때는 숨 바람을 먼저 들이쉬
니 숨 바람이 들어간 것을 이미 선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제4 정려에 들고자 하여 숨 바람을 들이쉰 뒤 다시는 내쉬지 않는 것을 선정에 들었다고 하며, 선정에서 나오려 할 때는 숨 바람을 먼저 내쉬니 숨 바람을 내쉰 것을 이미 선정에서 나왔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評] 여기서는 앞의 말이 옳다고 하겠다.
[문] 이 들숨과 날숨은 유정수(有情數)인가, 유정수가 아닌[非有情數] 것인가?
[답] 이것은 유정수이다.
[문] 이 들숨과 날숨은 유집수(有執受)인가, 무집수(無執受)인가?
[답] 이것은 무집수이다. 몸속에 비록 유집수의 바람이 있으나 들숨과 날숨은 무집수이다.
[문] 이 들숨과 날숨은 장양(長養)인가, 이숙(異熟)인가, 등류(等流)인가?6)
[답] 오직 등류일 뿐이다. 몸 안에는 비록 이숙생(異熟生)의 바람과 장양의 바람이 있으나 들숨과 날숨은 오직 등류일 뿐이다.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화살을 쏠 때에 오늬와 오늬가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여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을 대단히 좋은 음식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들숨ㆍ날숨을 음식이라 하셨는가?
[답] 손해되거나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음식이 몸을 이롭게 하는 것 중에 방편으로 들숨ㆍ날숨을 고르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추악한 음식이 몸을 해롭게 하는 것 중에 방편으로 들숨ㆍ날숨을 고르게 함이 없는 것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음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화살을 쏠 때에 오늬와 오늬가 서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함은 무슨 뜻
6) 이숙은 전생에 지었던 업의 과보요, 장양이란 후천적으로 양성하여 얻은 것이며, 등류란 맨 처음의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면서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들숨ㆍ날숨은 처음 태어날 때에 쉰 숨으로부터의 등류의 것이요 업의 과보도 아니며 또 후천적으로 배양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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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답] 뒤 화살로 앞 화살을 쏘면 뒤의 화살이 앞 화살의 오늬에 닿은 것과 같다는 것이 그 뜻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다만 앞과 뒤가 끊임이 없다는 뜻을 드러낼 뿐이며 뒤의 화살이 앞의 화살에 닿는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반드시 뒤의 화살로 앞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뜻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계경에서 “가져오는 것[持來]이 있고 가져가는 것[持去]이 있으며, 가져오고 가져가는 염[持來持去念]이 있고 가져오고 가져가는 것을 닦는 염[修持來持去念]이 있다”7)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기에서 가져온다고 함은 들이쉬는 숨을 말하고 가져간다고 함은 내쉬는 숨을 말한다. 『시설론(施設論)』에서 “바람을 빨아들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가져온다고 하고, 바람을 끌어당겨 밖으로 내뿜는 것을 가져간다고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치 대장장이의 풀무가 열렸다 닫혔다 할 때에 바람이 그것을 따라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어떤 이는 “내쉬는 숨을 가져온다고 하고 들이쉬는 숨을 가져간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따뜻한 숨[煖息]을 가져온다고 하고 찬 숨[冷息]을 가져간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위의 숨[上息]을 가져온다고 하고 아래의 숨[下息]을 가져간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評] 여기에서 처음의 말[初說]이 옳다.
그것을 반연하는 염[念]을 가져오고 가져가는 염이라 하며, 곧 이 염과 이것의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俱有法)의 모든 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짓는 것이 많은 것을 가져오고 가져가는 것을 닦는 염이라 한다.
[문] 이 지식념(持息念)의 자성(自性)은 무엇인가?
7) 가져오는 것[持來]이란 아나(阿那, āna:入息)의 번역이요, 가져가는 것[持去]이란 아반나(阿般那, apāna:出息)의 번역이며, 가져오고 가져가는 염(念)이란 이른바 아나반나(阿那般那)의 사유(思惟)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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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지혜[慧]8)를 자성으로 삼으나 이 무더기 안[聚中]에서는 염의 힘[念力]이 뛰어나기 때문에 염이라 한다. 마치 4념주(念住)와 숙주념(宿住念)의 본 성품에서 내는 염은 지혜로 자성을 삼으나 그 무더기 안에서는 염의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염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마치 색상(色想)9)을 제거하는 것은 지혜로 자성을 삼으나 그 무더기 안에서는 상의 힘[想力]이 뛰어나기 때문에 상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도 그와 같다.
만일 그의 권속을 합치면 4온(蘊)과 5온10)으로 그의 자성을 삼는다. 이 지식념의 세계[界]라는 것은 욕계와 색계를 말하며 무색계는 아니다. 지(地)라는 것은 5지(地)이니 욕계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아래의 3정려의 근분(近分)을 말한다. 아래 셋[下三]의 근본정려지(根本靜慮地)에도 사근(捨根)이 있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면 그들은 “이 염(念)은 8지(地)에 통한다”라고 하니 앞의 오(五)와 아래 셋의 정려를 말한다.
소의(所依)라는 것은 오직 욕계만 의지할 뿐 색계와 무색계는 아니다. 어느 다른 논사는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며 무색계는 아니나 처음 일어날 때는 반드시 욕계에 의지한다”라고 말한다.
행상(行相)이란 성자[聖]의 행상이 아니다.11)
소연(所緣)이란 숨 바람[息風]을 반연한다.
염주(念住)라는 것은 신념주(身念住)의 가행(加行)이요 근본 염주가 아니다.12) 만일 종합적인 4념주에 의하면 이것을 신념주라고 말하는 것이니
8) 지식념, 즉 수식관(數息觀)의 본성은 지혜의 심소에 있으므로 지혜로써 들숨ㆍ날숨을 갖가지로 관찰함에 의하여 이 관(觀)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을 지식념이라 하며 이 염(念) 자를 붙인 까닭은 그 관에서는 지혜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기억하는[憶念] 힘이 강한 것이니 이런 점에서 특히 염이란 글자를 붙인 것이다.
9) 색상을 제거한다는 것은 내유색상외색다(內有色想外色多) 등의 이른바 8승처(勝處)를 가리킨다.
10) 지식념은 행온(行蘊) 중의 지혜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 지혜와 상응(相應)하면서 구유(俱有)한 법을 들어 보면 욕계에 의하여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의 4온이요, 색계에 의하여 여기에 정구(定俱)의 무표색(無表色)을 보태서 5온 전체가 된다.
11) 성자의 행상이 아니라 함은 지식념은 아래의 범부위(凡夫位)인 5정심위(停心位)에서 수행하는 것이므로 아직은 유루의 행[有漏行]이라는 뜻이다.
12) 지식념은 몸에 의거하여 기식(氣息)을 관하는 것이므로 신념주의 일부요, 또는 그 전정(前程)으로서의 관이지만 신념주의 본체인 부정관은 아니므로 근본의 염주도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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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법(色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계경에서 지식념은 4념주에 통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이것은 4념주를 끌어 일으키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문] 부정관(不淨觀)도 4념주를 끌어 일으키는데 무엇 때문에 4념주를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역시 어떤 경에는 이 부정관도 4념주에 통한다고 하였다. 그 경에서 “만일 푸른 어혈이나 고름이 나면서 문드러진 것이나 벌레가 파먹는 것 등의 일을 관하면 신념주(身念住)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이 가운데서 느낌[受]이 있으면서 정탐(淨貪)을 끌어 일으키고 또한 그쳐 쉬게 하는 것을 관하면 수념주(受念住)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해치려는 뜻이 없고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면서 모든 방역(方域)을 두루 관하면 심념주(心念住)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탐(貪)ㆍ진(瞋)ㆍ치(癡)가 끊어지고 염(染)을 여의며 명(明)을 일으키고 뭇 괴로움[衆苦]이 다하게 되는 것을 관하면 법념주(法念住)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비록 이 경에서 부정관은 4념주에 통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수많은 경전은 지식념을 4념주와 통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부정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
[답] 지식념이 의지하는 곳[依處]은 익히 익히고 견고하여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억을 잃고 번뇌가 현행(現行)하면 재빨리 그것을 의지하여 모든 번뇌를 조복하고 4념주를 이끌 수 있는 것은 마치 사람이 도둑을 두려워하여 빨리 달려서 성(城)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대종(大種)의 모양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곳이 아니어서[非處] 익히 익힌 성품이 견고하지 못해 어떤 때에 기억을 잃고 번뇌가 현행하면 그에 의하여
재빨리 번뇌를 조복하고 4념주를 이끌 수도 없다. 곳이 아니라 함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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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색을 만든 모양[造色相]이 결정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여러 경에서는 지식념은 4념주에 통한다고 말씀하셨으나 부정관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또 지식념은 법상(法想)을13) 더욱 늘리고 공관(空觀)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있으므로 이것만 말씀하셨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유정(有情)이란 생각을 더하면서 “이 뼈는 여인의 것인가, 남자의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공관을 장애하고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없으므로 말씀하지 않았다.
또 지식념의 소연(所緣)은 가까워 갖가지의 모양이 없고 정해진 차례도 없으며 유정에 의하지도 않고 저절로 구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속히 4념주를 이끌 수 있으므로 이것만 말씀하셨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이것과는 서로가 반대이므로 말씀하지 않았다.
또 지식념은 오직 내도(內道)에서만 일으킬 뿐이요 외도(外道)와는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속히 4념주를 이끌 수 있으므로 이것만 말씀하셨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외도도 일으키며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없으므로 말씀하지 않았다.
이 지식념의 지혜[智]라는 것은 하나의 세속지(世俗智)이다.
삼마지(三摩地)14)라는 것은 삼마지와는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근(根)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근(捨根)과 상응한다.
세상[世]이라는 것은 3세(世)에 다 통하며 세상을 반연한다는 것은 과거는 과거를 반연하고 현재는 현재를 반연하며, 미래는 만일 생기는 법[生法]이라면 미래를 반연하지만 만일 생기지 않는 법[不生法]이면 3세를 반연한다.
13) 법상을 더욱 늘린다는 것의 이 법(法)은 사람에 상대되는 법이라는 뜻이어서 지식념은 풍대(風大)를 대상으로 하는지라 사람이란 생각[人想]을 떠나게 하면서 법에 대한 생각을 돕고 늘리어 마침내는 무아관(無我觀)이 중심이 되는 공관(空觀)의 전정(前程)이 된다는 뜻이다.
14) 여기의 삼마지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가지 삼매를 가리키는데 지식념은 그 어느 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삼마지와는 함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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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란 오직 선일 뿐이며 선ㆍ불선ㆍ무기를 반연한다는 것은 오직 무기만을 반연할 뿐이다.
계(繫)ㆍ불계(不繫)라는 것은 욕계계(欲界繫)와 색계계(色界繫)이며 계ㆍ불계계를 반연한다는 것은 욕계계와 색계계를 반연한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라는 것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요,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을 반연한다는 것은 오직 비학비무학을 반연할 뿐이다.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을 것이 아니다[不斷]라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요,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것과 끊을 것이 아님을 반연한다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할 뿐이다.
이름[名]을 반연하고 뜻[義]을 반연하는 것이란 오직 뜻만을 반연할 뿐이며,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을 반연하는 것이란 오직 자상속을 반연할 뿐이다.
또 이 지식념은 여섯 가지 인[六因]을 말미암으므로 그 모양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세는 것[數]이요, 둘째는 따르는 것[隨]이며, 셋째는 그치는 것[止]이요, 넷째는 관하는 것[觀]이며, 다섯째는 옮기는 것[轉]이요, 여섯째는 청정한 것[淨]이다.
세는 것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득 차게 세는 것[滿數]이요, 둘째는 줄여서 세는 것[減數]이며, 셋째는 더하여 세는 것[增數]이요, 넷째는 어지럽게 세는 것[亂數]이며, 다섯째는 깨끗하게 세는 것[淨數]이다.
가득 차게 센다고 함은 하나로부터 열까지 세는 것을 말하고, 줄여서 센다고 함은 둘 등을 하나 등으로 세는 것을 말하며, 더하여 센다고 함은 하나 등을 둘 등으로 세는 것을 말하고, 어지럽게 센다고 함은 열을 지나도록 세는 것을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들이쉬면서 내쉰다고 여기고 내쉬면서 들이쉰다고 여기는 것을 어지럽게 센다고 한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세는 수에 차례가 없기 때문에 어지럽게 센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센다고 함은 다섯 번 들이쉰 숨에 대하여는 다섯 번 들이쉰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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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세고 다섯 번 내쉰 숨에 대하여는 다섯 번 내쉰 것으로 세는 것을 말한다.
[문] 들이쉬는 숨을 먼저 세는가, 내쉬는 숨을 먼저 세는가?
[답] 먼저 들이쉬는 숨을 세고 뒤에 내쉬는 숨을 센다. 태어날 때의 숨은 들이쉬고 죽을 때의 숨은 내쉬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이 관하면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면서 뒤바뀌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이와 같이 관하면 태어나고 죽을 적에는 먼저 들이쉬고 그 뒤에 내쉰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뒤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따른다[隨]고 함은 마음을 매어 숨을 따르면서 밖에서 안으로 들이쉬는 것이니 입과 코로부터 목구멍에 흘러들어가고 다시 목구멍에서 가슴에 흘러들어가며 다시 가슴으로부터 배꼽에 흘러들어간다. 이와 같이 연속하여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모두 따라가는 것이다. 그 마음은 다시 숨을 따르면서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되 반(半) 마(麻) 일 마ㆍ반 맥(麥) 일 맥ㆍ반 지절(指節) 일 지절ㆍ반 지(指) 일 지ㆍ반 걸수(榤手) 일 걸수ㆍ반 주(肘) 일 주ㆍ
반 심(尋) 일 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감관의 세력을 따라 숨이 가는 대로 가깝고 먼 데를 마음이 모두 따라가는 것이다.
그친다[止]고 함은 숨 바람을 먼저 입과 코에 멈추고 그 다음에는 목구멍에 멈추며 그 다음에는 가슴에 멈추고 그 다음에는 배꼽에 멈추며 이렇게 연속하여 나중에는 발가락에 멈추는 것을 관하며 숨이 멈추는 곳을 따라 마음도 멈추며 그것을 관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친다 함은 마음을 멈추어 숨을 관하되 몸 안에 두루 머무르는 것이 마치 구슬 속의 실과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관(觀)한다 함은 이 숨 바람이 입과 코에 이르면 자세히 관찰하고 목구멍에 이르면 역시 자세히 관찰하며 이와 같이 하면서 연속하여 발가락까지 이르면 역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다. 숨 바람을 관한 뒤에는 다시 ‘이 바람 더미 안에는 4대종(大種)이 있으며 이 4대종은 모든 물질[色]을 만들고 이것으로 만들어진 물질은 심(心)ㆍ심소(心所)가 의지할 처소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숨을 관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 연속하여 두루 5취온(取
蘊)을 관하는 것이다.
옮긴다[轉]고 함은 이 들숨과 날숨의 관을 옮기어 신념주(身念住)를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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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것이다.
청정하다[淨] 함은 난(煖)에서 무학(無學)에 이르기까지이다. 어떤 이는 “네 가지의 순결택분(順決擇分)도 옮기는[轉] 데에 속한다. 청정하다 함은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부터 시작하여 무학까지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4념주위(念住位)로부터 금강유정(金剛喩定)은 모두 옮기는 데에 속한다. 번뇌가 있기 때문에 아직 청정하다고 하지 못하나 진지(盡智)가 일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청정하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또 여기에서 세는 것[數]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세는 것이요, 둘째는 탐기의(耽嗜依)의 심(尋)을 버리는 것이다.
따르는 것[隨]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따르는 것이요, 둘째는 출리의(出離依)의 심(尋)을 버리는 것이다.
그치는 것[止]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숨을 그치면서 멈추는 것이요, 둘째는 등지(等持)에 머무르는 것이다.
관하는 것[觀]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심ㆍ심소의 법상(法相)을 취하면서 빠뜨림이 없는 것이다.
옮기는 것[轉]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식관(息觀)을 옮기는 것이요, 둘째는 제관(諦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옮기는 것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이생성(異生性)을 버리고 둘째는 성성(聖性)을 얻는 것이다”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옮기는 것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번뇌를 버리고, 둘째는 지견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옮기는 것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성제(聖諦)를 관하고, 둘째는 성도(聖道)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청정한 것[淨]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번뇌를 버리고, 둘째는 지견(智見)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어떤 이는 “청정한 것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의 경계를 증득[證]하고, 둘째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의 경계를 증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어느 다른 논사는 “청정한 것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고, 둘째는 두 가지 열반의 경계를 증득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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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여섯 가지 식념[六息念]은 몇 가지가 사마타품(奢摩他品)15)이며 몇 가지가 비발사나품(毘鉢舍那品)인가?
[답] 어떤 이는 “앞의 세 가지는 사마타품이고 뒤의 세 가지는 비발사나품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앞의 세 가지는 비발사나품이고 뒤의 세 가지는 사마타품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이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혹은 모두가 사마타품일수도 있고, 혹은 모두가 비발사나품일 수도 있다.”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가운데서 교화할 중생을 위하여 가타(伽陀)로 말씀하셨다.
잘 닦아 식념(息念)이 원만해지고
점점 익혀 부처님 가르침 따른다면
그가 세간을 밝게 비추는 것이
해가 두터운 구름 속에서 나온 듯하리.
[문] 이 게송 가운데서 식념이 원만함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누구를 원만한 이라 하며 누구를 원만하지 않은 이라 하셨는가?
[답] 어떤 이는 “부처님을 원만하신 이라 하고 독각과 성문은 모두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부처님과 독각은 다 같이 원만하시나 성문은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성문승(聲聞乘) 중에서 저 언덕에 이른[到彼岸] 이면 역시 원만하다고 하며 모든 그 밖의 다른 성문은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3승(乘)의 무학(無學)은 모두 원만하나 유학(有學)은 모두
15) 여섯 가지 식념 중에서 오로지 마음의 동요를 그치게 하는 뜻 쪽의 것만을 사마타에 속한다고 하고 오로지 관지(觀智)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쪽만을 비발사나에 속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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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혹은 또 어떤 이는 “성자(聖者)는 원만하나 이생(異生)은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모든 위에서 말한 여섯 가지 인(因)을 갖춘 사람이면 원만하나 만일 갖추지 못한 사람이면 원만하지 않다.”
계경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달 동안 연좌(宴坐)16)하려 하니 너희들은 참배하거나 문안하지 말라. 오직 밥을 보낼 때와 포살 때만은 제외되느니라.’ 그러시고는 세존께서 방에 들어가셔서 연좌하셨다”라고 하였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연좌하셨는가?
[답] 과거와 미래의 항하 모래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본래 모두가 이와 같이 연좌하신다.
세우 존자는 “모든 하늘[天]들을 위하여 비밀한 법[密法]을 말씀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완만(緩慢)한 비구의 방일(放逸)한 마음을 끊어 주시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병든 비구를 보살피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다른 세계의 유정들을 위하여 묘한 법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두타(杜多)의 행에서 물러난 모든 비구들을 경책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미래에 교화할 모든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미래 세상의 교화할 유정이 이런 일을 듣고 나면 ‘여래께서도 오랫동안 연좌하셨거늘 하물며 우리들이 어찌 연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외도의 비방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든 외도들은 부처님을 비방하여 ‘이 교답마(喬答摩)는 시끄러운 데 있기를 좋아하고 언론이 많은 것을 사랑하여 한적한 곳과 고요함의 쾌락을 버리고 여읜다’라고 한다. 이런 갖가
16) 연좌는 정좌(靜坐)에서 물러나 잠자코 앉아서[默坐] 좌선하는 것을 말한다.
지 비방들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연좌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보리분법(菩提分法)의 공덕을 맡아 지니기 위해서였다. 마치 나무를 심은 뒤에는 다시 가꾸고 손보아야 하는 것처럼 보리분의 나무도 그와 같다. 비록 이미 원만하셨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연좌하시면서 맡아 지녀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묘한 법락(法樂)을 받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증득하신 미묘한 모든 부처님 법을 관하시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으로 고달프신 몸을 맡아 지니시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비록 오래전에 최고의 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셨다 해도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마치 이제 처음 증득하신 것과 같이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두 가지 인연으로 여래께서는 두 달 동안 연좌하신 것이다. 첫째는 스스로 큰 법락을 받기 위하심이고, 둘째는 모든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다른 이들이 법에 대하여 간절히 우러르게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경에서 “두 달이 지난 뒤에 세존께서는 연좌로부터 일어나 먼 곳으로 가셔서 자리를 펴고 앉으시고는 이러한 형상을 나타내시며 모든 비구들로 하여금 부처님께로 오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세존께서 그때에 어떠한 형상을 나타내셨는가?
[답] 어떤 이는 “땅을 미약하게 진동시키셨다”고 하고 어느 다른 논사는 “훌륭한 광명을 놓으셨다”고 하며, 혹 어떤 이는 “범음성(梵音聲)을 내셨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비구를 변화로 만드셔서 앞뒤로 에워싸고 문안하며 공손히 모시게 하셨다”라고 말한다.
이때 모든 비구들은 이 일을 보고 나서 부처님께서 연좌에서 일어나신 것을 알고 같이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우리들은 무엇 하느라 일찍 부처님께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고 서로서로 알리고는 함께 부처님께로 나아가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 안부를 드린 뒤에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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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 “만일 어떤 외도가 와서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큰 스승[大師]은 두 달 동안 연좌하면서 어떠한 정(定)에 들었는가?’라고 하면 그들에게 ‘지식념(持息念)에 들으셨다’고 말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문] 모든 외도들은 오히려 지식념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자성(自性)을 알겠는가?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답] 모든 외도들과 교화할 유정을 인도하고 거두어서 부처님 법에 들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외도와 그 법을 믿는 이로서 교화할 유정들이 세존께서 두 달 동안 연좌하시면서 지식념에 드셨다는 말을 들으면 희유한 마음을 내면서 부처님께로 올 것이요,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법을 말씀하시면 그들은 믿고 받들어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새로 배우는 비구를 수호하여 부처님 법을 등지거나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구가 처음 부처님 법에 들어와 지식념을 배우면서도 마음에 공경하거나 중히 여기지 않고 외도로 돌아가 다시 다른 도를 구하려고 하는 이가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외도들이 부처님께 와서 공경히 법을 받는 것을 보면 이 모든 비구들의 마음은 곧 물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 연좌하신 동안에는 온갖 정려(靜慮)ㆍ해탈(解脫)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에 두루 드셨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지식념에 드신 것만을 말씀하는가?
[답] 비록 온갖 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에 드셨다 해도 지식념은 그것의 으뜸이기 때문에 한쪽만 말씀하셨다.
또 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는 모두가 이 식념(息念)의 앞뒤 권속이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지식념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들숨ㆍ날숨을 염[念]하였고 나는 이미 들숨ㆍ날숨을 염한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짧은[短] 들숨ㆍ날숨을 염하였고 나는 이미 짧은 들숨ㆍ날숨을 염한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긴[長] 들숨ㆍ날숨을 염하였고 나는 이미 긴 들숨ㆍ날숨을 염한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온몸에 두루한 들숨ㆍ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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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온몸에 두루한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몸의 행[身行]의 들숨ㆍ날숨을 그치게 하였고 나는 이미 몸의 행의 들숨ㆍ날숨을 그치게 했다는 것을 환히 알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7)
[문] 들숨과 날숨은 먼저 짧게 쉬다가 뒤에는 길게 쉬는 것인가, 먼저 길게 쉬다가 뒤에는 짧게 쉬는 것인가?
[답] 먼저는 짧게 쉬고 뒤에는 길게 쉰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아는가?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보살이 처음 정(定)에 들었을 때에는 그의 숨이 빨랐으나 오래 정에 든 뒤에는 숨이 곧 편안히 머무른 것은 마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험난한 곳을 지날 때는 그 숨이 몹시 빠르다가 뒤에 평탄한 길에 이르러서는 숨이 곧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은 먼저는 짧게 쉬다가 뒤에는 길게 쉬는 것이다.
[문] 이 숨 바람을 관찰하면 코로부터 들어갔다가 도로 코에서 나오는데 무엇 때문에 “나는 온몸에 두루한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고 하셨는가?
[답] 지식념을 아직 성취하지 못하면 들숨ㆍ날숨이 코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보이나 지식념을 성취하고 나면 몸의 털구멍은 마치 연뿌리와 같아서 숨 바람은 두루 그 속으로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정에서 나온[出定] 것이 아니겠는가?
[답] 의요(意樂)도 가행(加行)도 다 같이 아직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살일 때에 비록 이 관(觀)을 하더라도 정에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역시 의요와 가행이 아직 쉬지 않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17) 앞에서는 성도한 뒤의 지식념을 논하였고 여기서는 성도하기 전에 즉, 고행할 때에 엄한 조식법(調息法)을 행하면서 거의 절식(絶食) 상태까지 되었던 일을 뒤에 부처님께서 회고하며 술회한 것에 기초를 두어 그 법상적(法相的) 의의를 밝히려는 문단이다. 대체로 7단(段)으로 분류한다. ① 들숨ㆍ날숨의 장단(長短)에 관하여, ② 들숨ㆍ날숨의 희(喜)ㆍ낙(樂)과 심행(心行)에 관하여, ③ 들숨ㆍ날숨의 심(心)ㆍ심환희(心歡喜)ㆍ심섭지(心攝持)ㆍ심해
탈(心解脫)에 관하여, ④ 들숨ㆍ날숨의 무상(無常)ㆍ단(斷)ㆍ이(離)ㆍ멸(滅)에 관하여, ⑤ 다시 그 밖의 깊고 미세한 선정에 나아가려는 뜻에 관하여, ⑥ 보살이 외견으로 보아 절식 상태에 드셨을 때에 삼천자의 관찰과 그의 이견(異見)에 관하여, ⑦ 지식념을 성주(聖住) 내지 무학주(無學住)라고 하는 소이(所以)에 관하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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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 존자는 “온갖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몸은 모두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나 없는[無我] 것이어서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화살과 같고 부정(不淨)하다고 보면서도 버리거나 여의지 않은 것처럼 숨 바람을 깨닫는 것을 반연하면서 정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는 이것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몸의 행[身行]을 그치게 하였다 함은 숨 바람이 점차로 미세해져서 생기지 않은 데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들숨ㆍ날숨을 염하였다고 함은 총(總)이요 짧게 들숨ㆍ날숨을 염하였다는 등은 별(別)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들숨ㆍ날숨을 염하였다 함은 욕계의 지식념이요, 짧은 숨[短息]을 염하였다 함은 초정려이며, 긴 숨[長息]을 염하였다 함은 제2 정려요, 몸에 두루함을 깨달았다 함은 제3 정려이며, 몸의 행을 그치게 하였다 함은 제4 정려를 말한다.
또 그 경에서 “나는 이미 기쁨[喜]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기쁨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즐거움[樂]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즐거움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마음의 행[心行]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마음의 행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마음의 행의 들숨ㆍ날숨을 그치게 하였고 나는 이미 마음의 행의 들숨ㆍ날숨을 그치게
하였다는 것을 환히 깨달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기쁨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고 함은 초(初)ㆍ2정려지(靜慮地)의 기쁨을 관했다는 것을 말하고, 즐거움을 깨달았다고 함은 제3 정려지의 즐거움을 관했다는 것을 말하며, 마음의 행을 깨달았다고 함은 상(想)과 사(思)를 관했다는 것을 말하고, 마음의 행을 그치게 하였다고 함은 마음의 행이 점점 미세해지다가 이에 생기지 않기까지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경에서 “나는 이미 마음[心]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고 나는 이미 마음의 들숨ㆍ날숨을 깨달았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마음이 기뻐지는 들숨ㆍ날숨이 되게 하였고 나는 이미 마음이 기뻐지는 들숨ㆍ날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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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마음이 거두어 지니는 들숨ㆍ날숨이 되게 하였고 나는 이미 마음이 거두어 지니는 들숨ㆍ날숨이 되게 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았으며, 나는 이미 마음이 해탈하는 들숨ㆍ날숨이 되게 하였고 나는 이미 마음이 해탈하는 들숨ㆍ날숨이 되게 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마음을 깨달았다 함은 식체(識體)를 관하였다는 것을 말하며,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였다는 등은 부처님은 비록 마음이 기뻐지거나 거두어 지니거나 해탈하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살일 때에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거듭하여 관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경에서 “나는 이미 무상(無常)하고 끊어지고[斷] 여의고[離] 소멸하는[滅] 들숨ㆍ날숨을 따라 관하였고 나는 이미 무상하고 끊어지고 여의고 소멸하는 들숨ㆍ날숨을 따라 관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무상한 들숨ㆍ날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숨 바람이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요, 끊는 들숨ㆍ날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8결(結)18)의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며, 여의는 들숨ㆍ날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애결(愛結)의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요, 소멸하는 들숨ㆍ날숨을 관하셨다 함은 결의 법[結法]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무상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4대종(大種)이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요, 끊어짐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무명결(無明結)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며, 여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애결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요, 소멸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그 밖의 나머지 결(結)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색신(色身)이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끊어짐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과거의 결(結)이 끊어지
18) 9결(結) 중에서 애결(愛結)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의 결이다. 8결은 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치결(癡結)ㆍ의결(疑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간결(慳結)ㆍ질결(嫉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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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며, 여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현재의 결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소멸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미래의 결이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물질 등은 모두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끊어짐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고수(苦受)가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며, 여윔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낙수가 끊어지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소멸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끊어진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무상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5취온(取蘊)이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끊어짐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5취온은 공하고 내가 없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며, 여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5취온은 괴롭다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요, 소멸함을 따라 관하셨다 함은 5취온은 유전하지 않는[不轉] 적멸(寂滅)이라는 것을 관하셨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 경에서 “지금 나의 이 선정은 오히려 거칠고 얕은 것이므로 나는 다시 그 밖의 깊고 미세한 선정에 들어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여기에서 어느 것이 깊고 미세한 선정인가?
[답] 어떤 이는 “제4 정려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색(無色)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멸정(滅定)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 경에서 “단정 엄숙하고 훌륭하고 묘한 세 하늘[天]이 밤중을 지나 나에게 와서 첫 번째 하늘이 ‘이 분은 이미 목숨을 마치셨구나’라고 말하였고, 두 번째 하늘이 ‘이 분은 장차 목숨을 마치겠구나’라고 말하였으며, 세 번째 하늘이 ‘이 분은 이미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또한 장차 돌아가실 이도 아니라 가장 훌륭한 선정에 머물러 계시기에 고요함이 이와 같다’라고 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문] 그들은 어떤 하늘들이기에 서로 다른 말을 하였는가?
[답] 그들은 욕계의 하늘사람으로 근품(根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근기가 둔한 이는 ‘이 큰 사문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도 없고 몸도 동요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짓는 업[思作業]도 없으므로 틀림없이 이미 목숨을 마친 이로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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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근기가 중간인 이는 ‘이 큰 사문은 아직도 따뜻한 기운이 있고 몸은 문드러지지 않았다. 비록 이미 돌아가시지는 않았다 해도 장차 목숨을 마치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근기가 예리한 이는 일찍이 모든 부처님과 성스런 제자들이 이와 같은 선정에 들어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다가 뒷날에는 도로 나오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 분은 이미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이다.
또 그 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이가 어떤 것이 성주(聖住)이고 어떤 것이 천주(天住)이며, 어떤 것이 범주(梵住)이고 어떤 것이 불주(佛住)이며, 어떤 것이 학주(學住)이고 어떤 것이 무학주(無學住)인가라고 묻거든 바르게 지식념(持息念)이라고 대답하라. 왜냐하면 이 지식념은 배울 것이 있는 이[學者]로 하여금 아직 증득[證]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게 하고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者]로 하여금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얻게 하기 때문이니라.
이 지식념은 번뇌에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성주라 하고, 자성(自性)이 빛나고 깨끗하기 때문에 천주라 하며, 자성이 고요하기 때문에 범주라 하고, 모든 부처님이 많이 머무르기 때문에 불주라 하며, 배울 것 있는 이가 얻게 되기 때문에 학주라 하고, 배울 것 없는 이가 얻기 때문에 무학주라 하느니라.
배울 것 있는 이는 이로 인하여 훌륭한 현관(現觀)을 얻고 번뇌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한다고 하며, 배울 것 없는 이는 이로 인하여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을 얻기 때문에 현법락주를 얻는다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이 지식념은 성자의 소유(所有)이어서 성자의 성품[聖性]을 이끌기 때문에 성주라 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무학의 소유이어서 무학의 성품을 이끌기 때문에 무학주라 한다. 배울 것이 있는 이는 이로 인하여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기 때문에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한다고 하며, 배울 것이 없는 이는 이로 인하여 네 가지의 즐거움[四種樂]에 머무르기 때문에 현법락주를 얻는다고 한다. 네 가지의 즐거움이란 첫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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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즐거움[出家樂]이요, 둘째는 멀리 여읜 즐거움[遠離樂]이며, 셋째는 고요한 즐거움[寂靜樂]이요, 넷째는 삼보리의 즐거움[三菩提樂]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 지식념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인데 무엇 때문에 학주ㆍ무학주라 하는가?
[답] 학자(學者)와 무학자(無學者)의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7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보특가라납식 ⑤
[論] 형상 있는[有色] 유정의 마음 상속[心相續]은 몸에 의지하여 전개되지만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욕계와 색계에는 형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상속은 물질[色]에 의하여 전개되지만 무색계에는 이미 형상이 없으므로 마음의 상속은 의지함[依]이 없이 전개된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므로 이런 의심을 지닌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무색계의 마음 등의 상속도 의지함이 있으면서 전개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형상이 있는 유정의 마음 상속은 몸에 의지하여 전개되지만 형상 없는[無色] 유정의 마음 상속은 무엇에 의지하여 전개되는가?
[答]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과 그 밖의 이러한 종류의 심불상응행(心不
1) 무색계의 심리 활동은 명근(命根)과 중동분(衆同分)에 의지한다는 것을 밝히고 이어서 첫째 의(依)와 소의(所依)의 구별과 둘째 명근론(命根論)과 셋째 중동분(衆同分)에 걸쳐 논하는 것이 여기서의 주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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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應行)에 의지한다.
어느 것을 그 밖의 불상응행이라 하는가? 득(得)ㆍ생(生)ㆍ노(老)ㆍ주(住)ㆍ무상(無常) 등이다.
[문] 욕계와 색계의 두 세계에서 마음 상속이 전개되는 것도 명근과 중동분에 의지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몸에 의지한다고만 말하는가?
[답] 역시 그것에 의지하여 전개된다고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말이 있어서이다.
어떤 이는 “뜻[義]은 많은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욕계와 색계의 마음 상속은 몸에 의지하여 전개된다는 뜻은 많지만 명근 등이 의지가 된다는 뜻은 많은 것이 아니다. 안근(眼根) 등의 한량없는 색법(色法)이 안식(眼識) 등을 위하여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몸은 거칠기[麤] 때문에 다만 몸에 의지한다고 말할 뿐이고 명근 등은 미세하여 나타내 보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욕계에 나서 안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안근과 무간멸(無間滅)의 뜻[意]으로 의(依)와 소의(所依)를 삼지만 안근의 소의인 대종(大種)과 신근(身根)과 신근의 소의인 대종과 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依)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안식에서처럼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신식(身識)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몸과 무간멸의 뜻으로써 의와 소의를 삼지만 신근의 소의인 대종과 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의식(意識)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무간멸의 뜻으로써 의와 소의를 삼지만 신근과 신근의 소의인 대종과 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욕계에 나는 이처럼 색계에 나는 이에 있어서도 그러하나 차별된 것은 거기에는 비식ㆍ설식이 없는 것이다.
만일 무색계에 나서 의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무간멸의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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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소의를 삼지만 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써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욕계에 나서 안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눈과 무간멸의 뜻[意]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신근과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안식에서처럼 이식ㆍ비식ㆍ설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신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몸과 무간멸의 뜻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색ㆍ향ㆍ미ㆍ촉ㆍ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의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무간멸의 뜻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신근과 색ㆍ향ㆍ미ㆍ촉ㆍ명근ㆍ중동분ㆍ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 등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욕계에 나는 이처럼 색계에 나는 이도 그러하나 차별된 것은 거기에는 비식ㆍ설식과 향ㆍ미 등이 없는 것이다. 무색계에 나는 이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욕계에 나서 안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안근과 무간멸의 뜻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구생(俱生)의 4온(蘊)으로써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안식에서처럼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의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무간멸의 뜻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구생(俱生)의 4온으로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은 아니다.
욕계에 나는 이처럼 색계에 나는 이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나 차별된 것은 거기에는 비식과 설식이 없는 것이다.
무색계에 나서 의식이 앞에 나타나 있으면 이 식은 무간멸의 뜻으로 의와 소의를 삼지만 구생의 3온(蘊)2)으로써는 의를 삼으면서도 소의를 삼는 것
2) 무색계에는 색(色)이 없으므로 식(識)과 구생(俱生)의 것은 수온ㆍ상온ㆍ행온의 3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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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명근(命根)의 체(體)는 하나의 물건[一物]인가, 여러 물건[多物]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하나의 물건이라면 무엇 때문에 손 등을 끊었는데도 죽지 않으며 머리와 허리를 끊으면 곧 죽는 것인가? 만일 여러 물건이라면 무엇 때문에 손 등을 잘라 몸을 떠났는데도 명근은 없는 것인가?
[답] 명근의 체는 하나의 물건이라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손과 발 등을 끊어버렸는데도 죽지 않는가?
[답] 명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완전한 몸[具足身]에 의한 것이요, 둘째는 완전하지 않은 몸[不具足身]에 의한 것이다. 손발 등이 끊어져 몸을 떠나게 될 때에는 완전한 몸에 의한 명근은 소멸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몸에 의한 명근이 생기는 것이다.
명근이 의지하고 있는[所依] 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아직 손 등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완전한 몸이라 하고, 손 등이 끊어졌을 때를 완전하지 않은 몸이라 한다. 손 등이 끊어진 뒤에는 완전한 몸은 소멸하고 완전하지 못한 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근은 몸과 서로 의지하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머리와 허리를 끊으면 곧 죽으면서도 손과 발 등을 끊으면 죽지 않는가?
[답] 머리와 허리의 두 곳은 아주 죽는 마디[大死節]이기 때문에 끊으면 곧 죽지만 손은 그렇지 않다.
또 욕계의 유정은 단식(段食)에 의존하여 사는 것인데 목구멍은 단식을 통하게 하고 배는 음식의 의지가 되기 때문에 이 두 곳을 끊으면 명근은 곧 끊어지게 된다.
또 머리는 눈 등 많은 감관이 의지하는 곳이므로 이것을 끊으면 곧 눈 등의 감관을 파괴하게 되고 배는 숨 바람이 의지한 데이므로 허리나 배를 끊게 되면 숨은 파괴되어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을 끊으면 명근은 곧 끊어지지만 손 등은 그렇지 않으므로 따질 필요가 없다.
어떤 이는 “명근의 체는 여러 물건이다. 손발 등 안의 명근은 저마다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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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이니 소의(所依)와 능의(能依)의 수량은 균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손발 등이 끊어져 몸에서 떨어지게 될 때에도 명근은 없는 것인가?
[답] 손발 등은 몸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설령 몸을 떠나도 명근은 곧 발생하지 않는다. 마치 손발 등이 아직 몸을 여의지 않을 때에는 이것은 신근(身根)의 의(依)이어서 유정수(有情數)라 하지만 몸에서 떠나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명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몸에서 떠난다 해도 명근은 곧 발생하지 않는다.
[評] 명근의 체는 하나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의 목숨이기 때문에 목숨이 있는 이[有命者]라 한다. 마치 하나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는 이라 하고 하나의 마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마음이 없는 이라 하는 것처럼 하나의 수[一受]ㆍ하나의 상[一想]ㆍ하나의 사[一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유정은 하나의 목숨이 있기 때문에 목숨이 있는 이라 하며 그리고 이 명근은 오직 이숙(異熟)이요 불상응행(不相應行)일 뿐이어서 마치 마음과 느낌 등에서와 같이 한 유정의 몸의 한 찰나 동안에는 하나만이 있고 둘이 없다.
어떤 것이 중동분(衆同分)3)인가? 유정의 동분[有情同分]은 마치 명근에서와 같이 체(體)는 하나의 물건이요, 두루 온갖 신분(身分)을 위하여 의[依]가 된다. 이것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속하면서 오직 무부무기의 성품일 뿐이며 오직 유루(有漏)일 뿐이라 삼계(三界)에 다 통한다.
[문] 이 중동분은 장양(長養)인가, 등류(等流)인가, 이숙(異熟)인가?
3) 중생들이 똑같이 비슷한 과보를 얻게 되는 인(因)을 말한다. 『구사(俱舍)』 중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작용 있는 실법(實法)으로 인정하여 이것이 있어서 동등 유사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유정동분(有情同分)과 법동분(法同分)이 있다. 유정동분이란 각 유정들 사이에서 사람은 사람끼리, 원숭이는 원숭이끼리 저절로 서로 비슷하고 같게 하는 것으로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작용을 말하며 법동분이란 비정계(非情界)의 여러 물체를 서로서로 비슷하고
같게 하는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존재물이니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돌은 돌끼리 서로 같은 것은 다 법동분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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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것은 이숙이요 등류이나 장양은 아니니 색법(色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숙이라 함은 갈래의 동분[趣同分]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지옥취(地獄趣)의 유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고 또 천취(天趣) 등의 유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등류라 함은 세계의 동분[界同分]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욕계의 유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고 나아가 무색계 등의 유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이숙이라 함은 처음 태어날 때에 얻는 것을 말하는데 마치 부모와 차츰차츰 서로 유사하게 되는 것과 같다. 등류라 함은 뒷날에야 비로소 얻는 것을 말하는데 마치 사문ㆍ바라문 등과 차츰차츰 서로 유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주저(洲渚)와 방토(方土)와 족성(族姓) 등에 의한 유정의 동분에 있어서도 이런 도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정의 동분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성품에 다 통한다. 4향(向) 4과(果)의 유정의 동분은 선의 성품에 속하고 5무간업(無間業)을 지은 유정의 동분은 불선의 성품에 속하며 모든 그 밖의 동분은 무기의 성품에 속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법에는 비록 세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유정의 동분은 오직 무기에만 속할 뿐이니 이로 말미암아 앞의 말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중동분을 얻으면 그는 중동분을 버리는 것인가?
[답] 마땅히 순전구(順前句)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새로운 중동분을 얻으면 그는 반드시 앞의 중동분을 버리는 것인데도 어떤 이는 앞의 중동분은 버리면서도 뒤의 중동분을 얻지 않기도 한다. 아라한이 반열반(般涅槃)할 때이다.
[문] 만일 여기에서 죽어서 저기에 날 때에는 반드시 중동분을 버리고 중동분을 얻는 것인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죽어서 저기에 나면서도 중동분을 버리지도 않고 중동분을 얻지 않기도 한다. 마치 지옥에서 죽어서 다시 지옥에 나는 이와 나아가 하늘에서 죽어서 다시 하늘에 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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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중동분을 버리고 중동분을 얻으면서도 여기에서 죽거나 저기에 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정성이생(正性離生) 등의 지위에 드는 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죽어서 저기에 나며 또한 중동분을 버리고 또한 중동분을 얻기도 한다. 지옥에서 죽어서 다른 갈래[趣]에 나는 이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나지도 않으며 또한 중동분을 버리지도 않고 중동분을 얻지 않는 이도 있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이이다.
[論] 무유애(無有愛)4)는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이라 해야 하는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라 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애(愛)5)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애(欲愛)요, 둘째는 유애(有愛)이며, 셋째는 무유애(無有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자세히 분별하지 않았으며 또한 무유애는 견도에서 끊을 것인가 수도에서 끊을 것인가에 대하여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또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고 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계경에서 말씀하신 무유애는 견도와 수도에서 다 끊을 것이다”고 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경에서 말씀하신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만이 끊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무유애는 견도에서 끊을 것이라 해야 하는가,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 해
4) 무유애는 단견(斷見)에 수반하는 번뇌로 미래의 존재의 절멸(絶滅)을 희구하는 것을 특질로 삼는다. 대개 현세에서 쾌락을 맛보면서 미래에는 나쁜 과보가 있지 않기를 원하는 미혹된 고집이다.
5) 통례(通例)의 해석에 따르면 욕애는 욕계에 대한 애착이요, 유애는 위의 두 세계에 대한 애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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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는가?
[答]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 말해야 한다.
무유(無有)라 함은 중동분의 무상(無常)을 말하며 이 애(愛)를 반연하는 것을 무유애라 한다. 이 때문에 이 애는 수도에서 끊는 것이니 중동분은 수도에서 끊을 것이기 때문이다.
[論] 어떤 이는 “무유애는 혹은 견도에서 끊을 것이기도 하고, 혹은 수도에서 끊을 것이기도 하다. 어찌하여 견도에서 끊을 것인가 하면 견도에서 끊을 법의 무유(無有)에 대한 탐(貪)에서요, 어찌하여 수도에서 끊을 것인가 하면 수도에서 끊을 법의 무유에 대한 탐에서이다”라고 말한다.
[문] 누가 이러한 설명을 하는가?
[답] 분별론자(分別論者)이다. 그가 설명하는 뜻[意]은 삼계의 무상을 말하여 무유라 하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애[貪]를 무유애라 하므로 무상은 이미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과 통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애도 두 가지에 다 통한다.
[論] 이 뜻에서 무유애는 다만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만 말해야 한다.
이 논이 따르고 있는 계경의 뒤바뀜 없는 뜻[無倒義] 가운데서는 무유애는 다만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가운데서 어떤 이는 “만일 경의 뜻에 따르면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만일 실제의 뜻[實義]에 따르면 무유애는 두 가지 끊을 것에 다 통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계경에서 ‘마치 어느 한 무리가 고수(苦受)로 인한 핍박을 두려워하여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끊어지고 무너져서 없게 되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이 경 안에서는 그의 중동분의 뒷날의 무상6
)을 무유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요 무유애는 견도에서
6) 중동분의 뒷날의 무상이라 함은 죽음[死]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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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논주(論主)의 설명은 경의 뜻에 수순하여 분별론자와 다투면서 경의 뜻을 해석하기 때문에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하지만 만일 실제의 뜻에 따른다면 뒤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삼계의 무상을 말하여 무유라 하고 삼계의 무상은 두 가지의 끊을 것에 다 통하는 것이므로 무유애도 두 가지에 다 통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무유애는 실제의 뜻에 따르거나 경의 뜻에 따르거나 간에 다 같이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삼계의 무상은 비록 두 가지에 다 통한다 해도 탐애[愛]를 일으키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유애는 괴로움을 싫어함[厭苦]에 의하여 생기고 다만 장차 오는 세상에 괴로움의 그릇[苦器]이 없을 것[無有]만을 탐애하는 것이어서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 이것은 뭇 괴로움[衆苦]의 그릇이기 때문에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단견(斷見)은 비록 5부(部)의 무유를 반연한다 해도 무유애는 다 공통하게 반연하지 못하고 다만 장차 오는 세상의 중동분이 아주 없는 것[斷]만을 반연할 뿐이니 이 때문에 묘음 존자는 “무유애를 일으키는 보특가라는 오직 집수(執受)의 온(蘊)ㆍ계(界)ㆍ처(處)7)만을 반연하여 일으킬 뿐이며 그것에 핍박 받아 그의 장차 오는 세상의 단괴(斷壞)를 반연하여 탐애를 일으키면서도 견도에서 끊을 것에 핍박 받는 유정이 그것의 단괴를
탐애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임을 간략하게 해설하였다. 이 뒤에서는 응리론자(應理論者)가 분별론자(分別論者)8)와 상대하여 묻고[問]
7) 집수의 온ㆍ계ㆍ처라 함은 특히 고락(苦樂)의 입장에서 본 5온ㆍ12처ㆍ18계를 말한다.
8) 여기서 응리론자(應理論者:育多婆提)라 함은 본론(本論)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표하는 쪽을 말하고 분별론자(分別論者:毘婆闍婆提)란 통례로 말하면 자유론자(自由論者)의 의미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본 논에서 오직 수도에서만 끊는다는 설[唯修斷說]에 대하여 역시 견도에서도 끊는다는 주장을 대표하는 쪽이어서 대개 유부(有部) 중의 자유파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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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고[答] 문난하고[難] 회통하는 것[通]에 의하여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임을 자세히 나타낸다.
[論] 그대는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 하는데 모든 예류자(預流者)는 아직 이 탐애[愛]를 끊지 못한 것인가?
이것은 분별론자의 물음이니 거듭 앞의 주장을 확정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허물만을 말하면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答] 그렇다.
이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계경의 뒤바뀜이 없는 뜻에 따라 결정을 세웠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예류자가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단절하고 파괴되어 아주 없다면 어찌 안락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인가?
이것은 분별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주장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른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그가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예류자는 이런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법성(法性)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류자는 모든 법성의 인과(因果)가 상속함을 보았기 때문에 단멸[斷]을 탐애하지 않는다.
또 업과(業果)을 믿기 때문이다. 예류자는 업과가 앞뒤에 상속함을 깊이 믿기 때문에 단멸을 탐애하지 않는다.
또 공(空)을 환히 통달했기 때문이다. 예류자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얻고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는 줄 알며 지금은 있다가 뒤에는 아주 없어지기 때문에 뒤의 단멸에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이 무유애는 단견(斷見)으로 기르고 자란 것이어서 반드시 단견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앞에 나타나는 것인데 모든 예류자는 이미 단견을 끊었기 때문에 이런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모든 예류자는 무유애의 비택멸(非擇滅)을 얻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다.
[論]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 만일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는 아직 이 탐애를 끊지 못했다면 예류자는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단절하고 파괴되어 아주 없다면 어찌 안락하지 않겠는가?’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예류자가 ‘만일 내가 죽은 뒤에 단절하고 파괴되어 아주 없다면 어찌 안락하지 않겠는가?’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유애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는 아직 이 탐애를 끊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분별론자가 앞뒤의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다. 전관(前關)은 당신의 주장을 따르면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고 후관(後關)은 뜻을 따르면 당신의 주장에 어긋남을 나타낸다. 두 가지가 다 함께 불가(不可)하기 때문에 통틀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끝맺었다.
응리론자가 뒤에서 회통하는 뜻은 ‘나의 주장은 아직 끊지 못한 모든 것이 모두가 반드시 앞에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하고, 혹은 이미 끊었으면서 앞에 나타나는 것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끊지 못한 것이 모두가 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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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앞에 나타난다 하면 이야말로 해탈하고 벗어날 기약이 없어야 하며, 아직 끊지 못한 법은 끝이 없기 때문에 가령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것을 일으키어 다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 뒤는 도리어 분별론자를 논파(論破)하면서 앞의 힐난을 회통한다.
『인명론(因明論)』에는 “다른 이를 깨뜨리는 뜻에는 세 가지의 길[路]이 있다. 첫째는 유예파(猶豫破)요, 둘째는 설과파(說過破)며, 셋째는 제견파(除遣破)이다”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도 계경에서 “다른 이를 깨뜨리는 학설에는 역시 세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는 승피파(勝彼破)요, 둘째는 등피파(等彼破)며, 셋째는 위종파(違宗破)9)이다”라고 밝히셨다.
승피파라 함은 마치 장조 범지(長爪梵志)가 부처님께 “저는 온갖 것을 참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그대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도 참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저절로 굴복한 것과 같다.
등피파라 함은 마치 파타리(波咤梨) 외도가 부처님께 “교답마(喬答摩)께서도 요술[幻]을 아십니까? 만일 모르신다면 일체지(一切智)가 아니며 만일 아신다면 요술로 미혹시키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부처님은 그에게 “구다읍(俱茶邑)에 람바주다(藍婆鑄茶)라는 악인(惡人)이 계율을 깨뜨리고 악을 행하는데 그대는 그를 아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그대도 계율을 깨뜨리는 악인이로다”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저절로 굴복한 것과 같다.
위종파라 함은 마치 오파리(鄔波離) 장자가 부처님께 “신업(身業)의 죄는 크지만 의업(意業)은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자 부처님께서 그에게 “탄택가림(彈宅迦林)과 갈릉가림(羯凌迦林) 등은 누가 만들었는가? 어쩌면 선인(仙人)이 나쁜 뜻[惡意]에서 만든 것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
9) 승피파라 함은 적자(敵者)보다 수승한 논법을 세워서 타파하는 방법이요, 등피파라 함은 대등한 논법을 세워서 그와 다른 결론을 도출하여 어느 것으로도 결정하기 어려운 논법이어서 인명(因明)의 33과(過) 중의 상위결정(相違決定)과 같은 것을 가리키며, 위종파라 함은 적자 자신이 세운 종(宗)의 뜻에 어긋나는 뜻을 밝히면서 그를 논파하는 방법이니 진나(陳那)의 자교상위(自敎相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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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 “신업으로 그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그는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그대는 지금 어찌 앞에서 말한 것과는 틀리는가?”고 하시자 그가 곧 저절로 굴복한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응리론자는 등피파에 의하여 앞의 힐난을 회통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10)가 있는데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論] 그대들은 또한 “지옥ㆍ방생ㆍ귀취(鬼趣)의 이숙애(異熟愛)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는 아직 이 탐애[愛]를 끊지 못했다”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응리론자의 질문이니 다른 이의 주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인하지 않고 다른 이의 허물만을 말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서다.
[答]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묻는 도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예류자가 ‘나는 장차 애라벌나(哀羅筏拏) 용왕(龍王)이나 선주(善住) 용왕이나 염마귀왕(琰魔鬼王)이 되어서 귀계(鬼界)의 모든 유정을 통솔해야겠다’라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당신이 주장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른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10) 이숙애(異熟愛)의 예(例)와 살전(殺纏)의 예와 선근단(善根斷)의 예 등 세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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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분별론자가 그가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예류자는 이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그 갈래[趣]는 어리석지만 성자(聖者)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요, 그 갈래는 이생(異生)이지만 성자는 이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갈래는 의요(意樂)가 나쁘지만 성자는 의요가 착하기 때문이요, 그 갈래는 파계(破戒)와 악업(惡業)이 많이 있지만 성자는 청정한 계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 온갖 성자는 모든 갈래의 비택멸(非擇滅)을 얻기 때문에 거기에 나기를 탐애하지 않는다.
[문] 성자는 악취(惡趣)에 대하여 모두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비록 거기에 나려 하는 탐애는 없다 하더라도 자구애(資具愛)는 있다. 마치 하늘 제석[天帝釋]도 설지청의 야차[設支靑衣藥叉]와 애라벌나 용왕과 선주 용왕 등을 탐애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예류(預流)들은 부모들이 악취 안에 떨어져 있는 것을 들으면 역시 탐애하는 생각을 내면서도 지금은 가서 난다[生]는 탐애를 차단하므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論]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 만일 지옥ㆍ방생ㆍ귀계의 이숙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가 아직 이 탐애를 끊지 못했다면 예류자는 ‘나는 장차 애라벌나 용왕이 되어야겠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예류자가 ‘나는 장차 애라벌라 용왕이 되어야겠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면 “지옥ㆍ방생ㆍ귀계의 이숙애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는 아직 이 탐애를 끊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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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 1338] 쪽
이것은 응리론자가 앞뒤의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다. 전관(前關)은 당신의 주장을 따르면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고 후관(後關)은 뜻[義]을 따르면 당신의 주장에 어긋남을 나타낸다. 두 가지가 다 같이 불가(不可)하기 때문에 통틀어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끝맺었다.
응리론자의 이 처음의 뜻[初意]은 ‘악취에 대한 탐애는 성자로서도 아직 끊지는 못했으면서도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무유애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힐난한 것은 바른 도리에 수순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論] 그대들은 또한 “모든 전(纏)에 얽혔기 때문에 부모의 목숨을 살해하는데 이 전(纏)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도 아직 이 전(纏)을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의 질문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答]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예류자도 이와 같은 전(纏)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모의 목숨을 살해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당신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바른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答]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분별론자가 그가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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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 1338] 쪽
[문] 무엇 때문에 예류자는 이 전(纏)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답] 만일 으뜸가는 나쁜 의요(意樂)가 있는 이면 이런 전을 일으키게 되지만 모든 예류자의 의요는 착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으뜸가는 무참(無慚) 무괴(無愧)가 있는 이면 이런 전을 일으키게 되지만 모든 예류자에게는 참괴(慚愧)가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전은 사견(邪見)으로 기르고 자라는 것이어서 사견의 뒤에 일어나지만 모든 예류자는 사견을 끊었기 때문에 이 전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 모든 예류자는 이미 이 전의 비택멸(非擇滅)을 얻었기 때문이며 이 업의 부작계(不作戒)를 얻었기 때문에 마침내 일으키지 않는다.
[論]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 만일 전에 얽혔기 때문에 부모의 목숨을 살해하고 이 전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도 아직 이 전을 끊지 못했다면 “예류자도 이와 같은 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모의 목숨을 살해한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예류자가 이와 같은 전을 일으켜 부모의 목숨을 살해하지 않는다면 “전에 얽혔기 때문에 부모의 생명을 살해하고 이 전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는 아직 이 전을 끊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앞뒤의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응리론자의 여기서의 뜻[意]은 ‘마치 이 살생의 전(纏)을 성자는 아직 끊지는 못했으면서도 앞에 나타나지는 않는 것처럼 무유애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힐난한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論] 그대들은 또한 “수도에서 끊을 법의 무유(無有)에 대하여 탐(貪)하는 이 탐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도 아직 이 탐을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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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 / 1338] 쪽
이것은 응리론자의 물음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答]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여기에서 수도에서 끊을 법이란 유루(有漏)의 선법(善法)을 말하며 무유(無有)란 그의 선근(善根)이 끊어짐을 말하는데 만일 이에 대하여 탐을 일으키면 무유탐(無有貪)이라 한다. 이 선근이 끊어진 것은 수도에서 끊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탐도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예류자가 이것을 반연하여 탐애를 일으킨다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당신이 주장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른 뜻에 어긋남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분별론자가 그가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예류자는 이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가?
[답] 성자(聖者)는 선법에 대하여 한결같이 성취하기를 좋아하고 멀리 여의려고 하지 않는데 이 선근이 끊어지면 선법을 성취하지 못하고 선(善)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성자는 그를 반연하는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성자는 선법에 대하여 한결같이 더욱 나아가기를 좋아하는데 이 선근이 끊어지면 선법을 감소시키고 쇠퇴하게 하므로 성자는 그를 반연하는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이 선법의 무유애는 사견(邪見)으로 기르고 자라게 하는 것이어서 사견의 뒤에 일어나는데 모든 예류자는 이미 사견을 끊었기 때문에 이 탐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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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이다.
또 성자는 이것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었기 때문에 반드시 일으키지 않는다.
[論]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라. 만일 수도에서 끊을 법의 무유에 대하여 탐하는 이 탐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가 아직 이 탐을 끊지 못했다면 “예류자도 이를 반연하여 탐애를 일으킨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예류자가 이를 반연하여 탐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수도에서 끊을 법의 무유에 대하여 탐하는 이 탐은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어서 모든 예류자도 아직 이 탐을 끊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전후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응리론자의 이 뒤의 뜻[意]은 ‘마치 선법의 무유애는 성자가 비록 아직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앞에 나타나지는 않는 것처럼 무유애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힐난한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論] 그 점이 이미 이치에 맞는다면 이것도 그러해야 한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총괄적으로 그 세 가지를 들어 자기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그가 말한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세 가지가 이미 바른 도리에 맞는다면 내가 앞에서 설명한 도리도 그러해야 되므로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論] 무유(無有)란 어떤 법을 말하는가?
[答] 삼계(三界)의 무상(無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 것인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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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論)을 지은 이는 오직 경의 뜻에만 따라 이해하면서 실제의 뜻을 따라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에서 나타낸 것은 앞에서 계경을 따라 뜻을 성립시키면서 무유애는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실제의 뜻에 따라 무유애는 두 가지의 끊을 것에 다 통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삼계의 무상은 두 가지의 끊을 것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
또 분별론자가 응리론자에게 “그대는 앞에서 비록 언변(言辯)으로 나를 굴복시켰다 해도 실제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아직 자세히 결정하지 못했으므로 이제는 결정적으로 무유는 무엇이기에 ‘이 탐애를 오직 수도에서만 끊는다’고 말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묻는다.
응리론자는 분별론자에게 “나는 앞에서 비록 언변으로 그대를 굴복시키어 경을 따라 뜻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실제의 뜻에 따라 이 무유애는 두 가지 끊을 것에 다 통한다”고 대답하니 삼계의 무상은 두 가지 끊을 것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앞에서는 애(愛)를 설명하였고 지금은 무유를 설명하면서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수도에서 끊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한다. 여기에서 말한 삼계의 무상이란 다만 삼계의 중동분(衆同分)의 소멸만을 말하는 것일 뿐이요 온갖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評] 앞에서 말한 것이 옳다 하겠으니 삼계의 무상이란 말에는 가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법(善法)의 끊어짐을 반연하는 것조차도 탐애를 일으킴이 있거늘 견도에서 끊을 모든 법의 무상을 반연하면서 어찌 탐애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단견(斷見)을 가진 이는 통틀어 5부(部)를 나와 내 것으로 삼아 장차 오는 세상의 단멸(斷滅)을 헤아리고 그 뒤에 그에 따라 탐애를 일으키므로 비록 통틀어 반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하나를 반연하면서 따로따로 탐애를 일으키는데 도리에서 보아 무엇을 허물하겠는가?
[문] 모든 무루의 법에도 무상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오직 삼계만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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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무상의 모양이 탐애의 소연(所緣)이라면 여기에서도 그것을 말하겠지만 무루의 무상은 탐애의 소연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무상의 모양에 탐애가 따라 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 것이면 여기에서도 그것을 말하겠지만 무루의 무상에는 탐애가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論] 마치 세존께서 “마음이 탐(貪)ㆍ진(瞋)ㆍ치(癡)로부터 해탈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마음이 탐ㆍ진ㆍ치로부터 해탈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지 탐ㆍ진ㆍ치가 있는 마음11)이 해탈하는지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이 해탈하는지를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해야 한다.
또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심성(心性)은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하는 집착하는 이가 있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는 “마음의 본성(本性)은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客塵煩惱)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그의 그런 집착을 중지시키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만일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하면 어째서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는 것인가?
11) 탐ㆍ진ㆍ치가 있는 마음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면 탐ㆍ진ㆍ치의 심소와 상응하고 또는 그것들에 의하여 계박된 마음이란 뜻이며,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이란 그것들의 심소와 상응하지도 않고 계박되지도 않은 마음을 가리킨다.
만일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비록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한다 하더라도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다면 역시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은 객진번뇌의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지 않을 것이니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은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긴 것인가 같은 때에 생긴 것인가? 만일 먼저 생겼다면 마음은 생긴 뒤에 머물러서 번뇌를 기다려야 하리니 만일 그렇다면 두 찰나[二刹那]를 지나며 머물러야 하므로 종(宗)을 어긴다는 허물이 있다.
만일 같은 때에 생겼다 하면 어떻게 마음의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종(宗)은 미래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다른 종(宗)의 바르지 못한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기 종의 올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마치 세존께서 “마음이 탐ㆍ진ㆍ치로부터 해탈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탐ㆍ진ㆍ치가 있는 마음인가,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인가?
[答]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
[문]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은 본래부터 해탈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비록 번뇌를 기준으로 하면 본래부터 해탈했다 하더라도 행세(行世)에 의하고 상속(相續)에 있어서는 지금에야 해탈을 얻는 것이다. 만일 몸 안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했으면 마음은 아직 행세하지 못하고 상속에 있지도 않다. 마음이 자유로이 행세하거나 상속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자기 몸 안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면 그때에 이 마음은 자유로이 행세하고 상속에 있게 되기 때문에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論] 어떤 이는 “탐ㆍ진ㆍ치와 상응한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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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답] 분별론자(分別論者)이다. 그는 “염오(染汚)와 불염오(不染汚)의 마음은 그 체(體)에 차이가 없다. 만일 상응한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못하면 염오의 마음이라 하고 만일 어느 때에 상응한 번뇌가 이미 끊어졌으면 불염오의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구리 그릇에 때[垢]가 아직 제거되지 못할 때를 때가 있는 그릇이라 하고 만일 때를 제거한 뒤에는 때 없는 그릇이라고 하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다”고 한다.
[論]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도리에는 어긋날 것이다.
[論] 왜냐하면 이 마음은 탐ㆍ진ㆍ치와 서로 합하거나 서로 응하거나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탐ㆍ진ㆍ치를 아직 끊지 못하면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탐ㆍ진ㆍ치를 끊으면 해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뜻[意]은 ‘마음이 번뇌와 만일 상응한다면 해탈한다는 뜻이 없는 것이니 대치(對治)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직 끊지 못할 때에는 아직 끊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해탈이라 하지 않으며 만일 끊어진 뒤에도 다 같이 성취하지 않으면 해탈이라고 하지 않는다.
상응한 모든 법은 그로 하여금 수반하는 성품[伴性]을 멀리 여의게 할 수 없는 것조차도 오히려 끊는다고 하지 않거늘 하물며 해탈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해탈한 마음은 반드시 번뇌와 본래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한다.
[論] 세존께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이 해와 달은 다섯 가지 가리는 것[五翳]에 의하여 가려지면 밝지도 않고 비추지도 않으며 넓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느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 가리는 것인가? 첫째는 구름이요, 둘째는 연기이며, 셋째는 먼지요, 넷째는 안개이며, 다섯째는 갈라호 아수라[曷邏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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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修洛]의 손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구름이라 함은 한창 더운 여름철에 적은 구름이 일어나다가 잠깐 만에 더욱 불어나 허공을 온통 덮으면서 해와 달을 가리어 다 같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연기라 함은 숲이나 들판 가운데서 풀이나 나무를 불태우면 갑자기 연기가 일어나 온통 허공을 덮으면서 해와 달을 가리어 다 같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먼지라 함은 대단히 가물 때에 큰 회오리바람이 치면서 요란한 먼지가 갑자기 일어나 온통 허공을 덮으면서 해와 달을 가리어 다 같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안개라 함은 가을이나 겨울철에 산하(山河)에 안개가 일어나고 또 듣건대 외국에서는 비가 온 뒤에 처음 날이 갤 때에 햇빛이 천원(川原)을 비추면 땅 기운이 솟아오르면서 안개가 피어 흩어지며 온통 허공을 덮으면서 해와 달을 가리어 다 같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갈라호 아수라의 손이라 함은 아수라가 하늘들과 싸울 적에 하늘들은 해와 달로써 기치(旗幟)를 삼고 해와 달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언제나 그들에게 이기므로 그때에 갈라호 아수라는 늘 마음에 해와 달에 대하여 분(忿)을 내면서 그를 꺾어 없애려고 하지만 모든 유정들의 업(業)의 증상의 힘[增上力]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혜와 기술을 다해도 꺾어 부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손으로 그를 가리어 잠시 동안이나마 숨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큰 몸의 형상으로 단엄 수묘한 것은 갈라호 아수라만한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는 그의 변화를 말한 것이요 실제의 몸을 말한 것은 아니다.
[論] 해와 달은 다섯 가지 가리는 것과 서로 합하거나 서로 응하거나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리는 것을 아직 여의치 못하면 이 해와 달은 밝지도 않고 비추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깨끗하지 않으며 그 가리는 것을 만일 여의면 이 해와 달은 밝고 비추고 넓고 깨끗해진다. 이처럼 이 마음도 탐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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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ㆍ치와 서로가 합하거나 서로 응하거나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지만 탐ㆍ진ㆍ치를 아직 끊지 못하면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탐ㆍ진ㆍ치를 끊으면 마음은 곧 해탈한다.
여기에서의 뜻[意]은 ‘해와 달은 다섯 가지 가리는 것과 본래부터 서로 응하거나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뒤에 그것을 여의면 밝게 비추고 넓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끝없는 때로부터 탐ㆍ진ㆍ치와 서로가 응하거나 서로 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뒷날 그것을 여의면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반드시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 뒤에 그것이 끊어진 때라야 비로소 해탈을 얻는다는 그 도리가 결정적이다’는 것이다.
[論]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이의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3세(世)에 대하여 분명히 구별하여 알지 못한 이는 과거ㆍ미래의 모든 법은 없다고 부정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과거ㆍ미래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막 생기는 때[正生時]와 막 멸하는 때[正滅時]12)는 없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시분(時分)에는 다만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첫째는 이미 생긴 것[已生]과 둘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것[未生]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니 첫째는 이미 소멸한 것[已滅]과 둘째는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것[未滅]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막 생기는 것이나 막 소멸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12) 막 생기는 때라 함은 생기려고 하면서도 아직 다 생기지는 못한 지위를 말하고, 막 멸하는 때라 함은 소멸하면서도 아직은 다 소멸하지는 못한 지위이다. 그러므로 막 멸하는 때는 미래에 속하고 막 생기는 때는 과거에 속한다는 것이 『구사론』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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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시키고 실로 막 생기는 것[正生]과 막 소멸하는 것[正滅]의 지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앞에서 탐ㆍ진ㆍ치를 여읜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어떤 마음이 어느 세상에 있으면서 무엇을 해탈하는가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그것을 설명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떠한 마음이 해탈하는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答] 미래에 무학의 마음[無學心]이 생길 때에 온갖 장애[一切障]를 해탈하게 된다.
미래라는 말은 곧 과거ㆍ미래에 실제 존재하는 법을 없다고 부정하는 집착을 차단하는 것이요, 무학의 마음이라 함은 배울 것 없는 이[無學]의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생길 때라 함은 막 생기고 막 소멸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비유자의 집착을 차단하는 것이요, 온갖 장애를 해탈하게 된다고 함은 온갖 장애에서 모두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수도에서 끊을 하하품(下下品)의 번뇌를
여읠 때에 삼계(三界) 5부(部)의 장애에서 모두 해탈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변지(遍知)를 쌓았기 때문이요 그때에는 통틀어 모든 무위(無爲)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 그때에는 미래의 마음이 모두 해탈을 얻는데 무엇 때문에 미래에 생길 때[生時]만을 말하는가?
[답] 우선 미래에 생길 때를 들어 문을 삼아 온갖 모두가 해탈을 얻는다는 것을 같이 나타낸 것이니, 그때에는 모두가 몸에 있고[在身] 세간에 행하는[行世] 것에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또 생길 때의 마음은 해탈도(解脫道)이므로 이것을 우두머리로 삼아 온갖 장애를 여의며 이로 말미암아 미래에 모두가 해탈하게 되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또 해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행세해탈(行世解脫)이요, 둘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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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해탈(相續解脫)13)이다. 막 생기는 때에는 마음이 두 가지의 해탈을 갖추기 때문에 한쪽만 말하지만 그 밖의 미래의 마음은 비록 상속해탈은 있다 하더라도 행세의 해탈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문] 그때 5온(蘊)은 모두 해탈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마음의 해탈만을 말하는 것인가?
[답] 마음을 들어 문으로 삼아서 온갖 미래의 5온은 모두가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같이 나타낸다.
또 뛰어난 것[勝]에 나아가 말하기 때문이다. 5온 중에서 마음이 가장 뛰어난 것이 되므로 마음의 해탈을 말하게 되면 온갖 것을 말한 것이 된다. 마치 왕이 온다고 말하면 곧 그의 신첩(臣妾)까지 다 말한 것이 되는 것과 같다.
또 그때에 비록 심소법(心所法) 등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마음[心王]에 의지하기 때문에 다만 그 마음만을 말할 뿐이다. 마음은 크기[大] 때문에 심소를 대지(大地)의 소유(所有)라 하고 심소로 말미암아 수전색(隨轉色)14)을 일으키며 불상응행은 마음 등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마음만을 말하고 그 밖의 온(蘊)은 말하지 않는다.
또 마음은 주인[主]이기 때문에 만일 마음이 청정하면 그 밖의 온도 그렇게 되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또 타심통(他心通)을 닦는 무간도(無間道)일 때에는 다만 마음만은 반연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한쪽만 말한다. 이것은 마치 초품(初品)에서 이미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문] 학(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의 마음도 해탈을 얻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무학의 마음만을 말하는가?
[답] 뛰어난 것에 나아가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뛰어난 법을 말하면 무학의 법[無學法]이 뛰어나고 학법 등은 그렇지 않으며, 만일 뛰어난 유정을 말하면
13) 행세해탈이라 함은 현재의 세상에서 행해지는 해탈이며, 상속해탈이라 함은 그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미래에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14) 수전색이라 함은 수심전(隨心轉)의 무표색(無表色)이니 곧 도구(道俱)와 정구(定俱)의 무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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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의 유정이 뛰어나고 학의 유정 등은 그렇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무학만을 말할 뿐이다.
또 무학에는 마음의 해탈이 많기 때문이요, 뛰어난 덕[勝德]이 있기 때문이며, 모든 허물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때문에 묘음 존자는 “많기 때문이요 뛰어나기 때문이며 모든 허물이 없기 때문에 오직 무학의 마음만을 해탈이라 한다”라 말씀하셨다.
또 무학의 마음에는 두 가지 해탈을 갖추기 때문이다. 곧 자성해탈(自性解脫)과 상속해탈(相續解脫)15)이기 때문에 그것만을 말하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마음은 자성해탈이나 상속해탈이 아니다. 학(學)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이다.
어떤 마음은 상속해탈이나 자성해탈이 아니다. 무학의 유루의 마음[有漏心]이다.
어떤 마음은 자성해탈이면서 상속해탈이기도 하다. 무학의 무루의 마음이다.
어떤 마음은 자성해탈도 아니고 상속해탈도 아니다. 학의 유루의 마음과 이생(異生)의 마음이다.
또 만일 마음의 전부분이 해탈한다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겠지만 학의 마음은 오직 일부분의 해탈만이 있으며 비학비무학의 마음은 혹은 전부분이 해탈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일부분이 해탈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마음이 오직 해탈뿐이거나 오직 속박이 없을 뿐이거나 오직 지혜가 있을 뿐이거나 무지(無智)가 없다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마음이 5부(部)의 번뇌와 5부의 법을 해탈하면 여기에서 말하겠
15) 자성해탈은 무루의 마음을 가리키고 상속해탈은 해탈한 마음이 생활적으로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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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마음에 바른 해탈만이 있고 삿된 해탈이 없으며 바른 지혜만이 있고 삿된 지혜가 없으며 원수거나 적이 없으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또 만일 마음이 8사(邪)16)에 조복되지 않으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며 학의 마음은 비록 8사를 멀리 여읜다 하더라도 오히려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시 조복된다고 한다.
또 만일 마음이 마침내 후유(後有)를 끊고 온갖 유(有)의 비택멸(非擇滅)을 얻었다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또 만일 마음이 해탈하여 구경원만(究竟圓滿)하다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또 만일 마음이 이미 해탈한 왕위(王位)를 얻었고 해탈의 비단으로 정수리를 맸다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또 만일 마음이 해탈에만 있는 것이 마치 마로다애(摩魯多愛)17)가 서로 잇닿는 것과 같다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그 밖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또 만일 마음이 마침내 삼계의 수염과 머리칼과 같은 모든 번뇌를 깎아 뽑아버리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마음이 이미 제일유(第一有)에 의한 번뇌의 정수리를 끊었다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마음과 상응하여 가뿐한[輕安] 즐거움이 있고 광대하면서 미묘하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의 마음은 비록 다시 가뿐한 즐거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오히려 번뇌가 있고 원수를 아직 영원히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광대하면서 미묘하다고는 하지 못한다.
비유하면 국왕이 원수나 적을 아직 다 없애지 못했거나 비록 이미 다 없앴다 하더라도 모든 주변 나라에서 아직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그때에는 아직 큰 쾌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학의 마음도 아직 번뇌를 다하지
16) 8사는 8정도(正道)의 반대이니 곧 사견(邪見)ㆍ사사유(邪思惟)ㆍ사어(邪語)ㆍ사업(邪業)ㆍ사명(邪命)ㆍ사정진(邪精進)ㆍ사념(邪念)ㆍ사정(邪定)이다.
17) 마로다애는 풀의 이름이며 덩굴이 몹시 뒤얽혀서 어지러운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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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기 때문이요 삼계의 선근을 아직 모조리 닦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뿐한 즐거움을 광대하면서 미묘하다고 하지 못한다.
또 만일 마음과 상응하여 가뿐한 즐거움이 있고 이미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번뇌에 뜻과 말[意言]이 조복되지 않아서 모니(牟尼)라고 하게 된다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마음이 열뇌(熱惱)하는 곳을 버리고 청량(淸凉)한 곳을 얻으며 번뇌의 의(依)를 버리고 선근의 의를 얻으며 잡염의 온[雜染蘊]을 버리고 청정한 온[淸淨蘊]을 얻으며 염(染)의 유정 무더기를 버리고 정(淨)의 유정 무더기를 얻으며 뜻과 말[意言]을 영원히 고요하게 하고 모니(牟尼)가 원만하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승의(勝義)의 복전(福田) 수(數)에 드는 이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하겠지만 학은 번뇌가 있어서 아직 승의의 복전 수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치 가타(伽他)에서 말한 것과 같다.
탐욕(貪欲)이 중생을 무너뜨림은
마치 밭에 잡초가 있는 것 같아
탐욕이 없는 이에게 보시하면
틀림없이 수승한 과[勝果] 얻으리라.
또 만일 그의 목숨을 살해하여 무간죄(無間罪)를 얻으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공덕과 과실을 서로 섞어 행하지 않는 이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모든 집착[著]을 끊고 모든 둑[堤塘]을 깨뜨리며 모든 장애가 제거된 이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 만일 4식(食)을 끊고 4마원(魔怨)을 깨뜨리며 4식주(識住)를 여의고 마침내는 9유정거(有情居)를 뛰어나며 모든 나는 길[生路]이 다하고 세계[界]와 갈래[趣]의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를 끊은 이면 여기에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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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기에서 논을 지은 이[造論者]를 책망하지 않아야 하니 논을 지은 이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경에서 “무학의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였지만 유학(有學) 등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 말한 것이다.
[문] 진지(盡智)일 때에 삼계의 선근을 닦는 것도 해탈을 얻는가?
[답] 역시 해탈을 얻는 것이니 영원히 장애를 여의기 때문이다.
[문] 아라한과에서 물러난 뒤에 도로 다시 얻는 그때에는 어느 마음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가? 과거의 것인가, 미래의 것인가?
[답] 오직 미래의 것만이 해탈을 얻는다고 하며 과거의 것이 아닌 것은 다시 몸에 있거나[在身] 세간에 행하지[行世] 않기 때문이다. 이미 해탈했었기 때문에 이제 비록 거듭 얻는다 하더라도 해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8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보특가라납식 ⑥
[論] 그 일은 어떠한 것인가?
[答] 무간도(無間道)의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소멸하려 하고 해탈도(解脫道)의 진지(盡智)가 생기려고 하는 것과 같다. 만일 무간도의 금강유정이 막 소멸하면서[正滅] 해탈도의 진지가 막 생기려[正生] 하면 그때를 “미래에 무학의 마음이 생길 때에 온갖 장애를 해탈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금강유정이 소멸하려 한다 함은 생기려는 모양이 작용하는 때이며, 진지가 생기려 한다 함은 생기는 것에 임하여 이른[臨至] 모양이다. 그때에는 아직은 해탈을 얻었다고 하지 않은 것이니 아직은 결정적으로 세간에 행하거나 상속(相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금강유정이 막 소멸한다 함은 소멸하는 모양이 작용하는 때를 말하고, 진지가 막 생긴다고 함은 생기는 모양이 이제 막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를 비로소 이제 해탈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니 결정적으로 세간에 행하고 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금강유정이 이미 소멸하였고 진지가 이미 생겼다면 그때는 이미 해탈을 얻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해탈하려 하는 지위를 들어서 지금 막 해탈하는 것을 드러낸다.
[문] 무엇 때문에 금강유정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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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번뇌를 끊지 못하거나 깨뜨리지 못하거나 뚫지 못하거나 부수지 못하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이 비유하면 금강(金剛)이 쇠나 어금니나 패물이나 구슬 또는 돌 등을 끊지 못하거나 깨뜨리지 못하거나 뚫지 못하거나 부수지 못하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 정(定)을 금강유(金剛喩)라 한다.
가령 구박(具縛)의 유정이라 해도 몸 안에서 이 정을 일으키게 되면 그때에 곧 단번에 삼계의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금강유정이 목전에 나타나 있을 때는 단번에 삼계의 견도ㆍ수도[見修]에서 끊을 번뇌가 끊어지는 것을 증득[證]하기 때문이다.
[문] 이 무간도는 4온(蘊) 또는 5온으로 자성(自性)을 삼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선정[定]만을 말하는가?
[답] 정이 우세하기[偏增] 때문이다. 마치 견도(見道)는 5온으로 자성을 삼으면서도 견(見)이 우세하기 때문에 다만 견도라고만 하는 것과 같고,1)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世俗智)는 4온 또는 5온으로 자성을 삼으면서도 지(智)가 우세하기 때문에 다만 지라고만 하는 것과 같으며, 4통행(通行)은 4온 또는 5온으로 자성을 삼으면서도 통혜(通慧)가 우세하기 때문에 다만 통행이라고만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이 도(道)는
비록 4온과 5온으로 자성을 삼는다 해도 정이 우세하기 때문에 다만 금강유정이라 할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도에는 정이 우세한가?
[답]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하하(下下)의 번뇌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려우면서 극히 뛰어넘기 어려우므로 견고한 선정으로 의지할 것을 삼아 크게 정진하여야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있어서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향상(香象)을 살해하려고 하면 먼저 그 발을 편안히 딛고 그 뒤에 무용(武勇)을 일으켜야 그 살해하는 일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이 도에는 정의 작용이 우세하다.
또 비상비비상처의 하하의 번뇌를 가장 극히 미세하여 밝지도 않고 드러
1) 현관변의 세속지라 함은 견도의 무루한 마음의 뒤에 일어나는 뛰어난 유루지(有漏智)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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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도 않아서 깨달아 알기 어려우므로 뛰어난 정에 의거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맑게 하고 미세하게 하여야 끊어 없앨 수 있어서이다. 마치 활을 잘 쏘는 이가 터럭 끝을 쏘려고 하면 교묘한 방편의 법에 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미세하게 하여 화살을 쏘아야 맞힐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이 도에는 정의 작용이 우세하다.
[문] 이 금강유정에는 몇 가지 지(智)가 있는가?
[답] 여섯 가지 지[六智]가 있다. 네 가지 유지[四類智]와 멸법지(滅法智)ㆍ도법지(道法智)이다.
이 가운데서 혹은 고류지(苦類智)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諸行]을 사유(思惟)하되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의 행상(行相)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果)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集類智)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멸법지(滅法智)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멸(滅)ㆍ정(靜)ㆍ묘(妙)ㆍ리(離)의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도법지(道法智)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멸류지(滅類智)로써 혹은 초정려(初靜慮)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멸ㆍ정ㆍ묘ㆍ리의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도류지(道類智)로써 9지(地)2)의 유지품(類智品)의 도(道)를 사유하되 도ㆍ여ㆍ행ㆍ출의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금강유정이라 하며 이것을 이곳에서 약비바사(略毘婆沙)라고 말한다.
[문] 이 금강유정은 어느 지(地)에 몇 가지가 있는가?
2) 9지는 미지(未地)와 중간(中間)과 4근본지(根本地)와 아래의 3무색(無色)이다. 유정의 제9품의 혹[下下品의 修惑]을 끊음에는 위의 9지 무루정(無漏定)의 어느 것이라도 의지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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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미지정(未至定)에 의하여 쉰두 가지가 있다. 미지정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行相)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集類智)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멸법지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도법지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行相)이 있다.
혹은 멸류지(滅類智)로써 혹은 초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지[八智]에는 32행상이 있으며 앞의 16행상을 보태면 마흔여덟 가지가 된다.
혹은 도류지(道類智)로써 9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한 가지 지[一智]에는 4행상이 있으며 앞의 마흔여덟 가지를 보태면 쉰 두 가지의 금강유정이 된다.
미지정에 의하는 것처럼 나아가 제4 정려에 의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공무변처(空無邊處)에 의하면 스물여덟 가지가 있다. 공무변처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二智]에는 8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로써 혹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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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이 있으며 앞의 여덟 가지를 보태면 스물네 가지가 된다.
혹은 도류지로써 9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한 가지의 지[一智]에는 4행상이 있으며 앞의 스물네 가지를 보태면 스물여덟 가지의 금강유정이 된다.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의하면 스물네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는 4행상이 제외되며 그 밖의 나머지는 공무변처에 의한 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의하면 스무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는 4행상이 제외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식무변처에 의한 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미지정에 의하여 여든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미지정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멸법지(滅法智)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도법지(道法智)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滅類智)로써 혹은 초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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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여덟 가지 지[八智]에는 32행상이 있으며 앞의 열여섯 가지를 보태면 마흔여덟 가지가 된다.
혹은 도류지(道類智)로써 혹은 초정려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지[八智]에는 32행상이 있으며 앞의 마흔여덟 가지를 보태면 여든 가지의 금강유정이 된다.
미지정에 의하는 것처럼 나아가 제4 정려에 의하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공무변처에 의하면 마흔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공무변처에 의하는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지[二智]에는 8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로써 혹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이 있으며 앞의 여덟 가지를 보태면 스물네 가지가 된다.
혹은 도류지로써 혹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이 있으며 앞의 스물네 가지를 보태면 마흔 가지의 금강유정이 된다.
식무변처에 의하면 서른두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ㆍ도(道)를 사유하는 8행상을 제외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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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변처에 의하는 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무소유처에 의하면 스물네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ㆍ도를 사유하는 8행상을 제외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식무변처에 의하는 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3) “미지정에 의하면 열세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다. 견도(見道) 중에 4유지인(類智忍)이 있고 수도(修道) 중에 비상비비상처의 수도에서 끊을 염(染)을 여의는 9무간도(無間道)가 있으므로 이것을 열세 가지의 금강유정이라 한다.
미지정에 의하는 것처럼 나아가 제3 정려에 의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공무변처 나아가 무소유처에 의하면 모두 아홉 가지의 금강유정이 있을 뿐이니 4유지인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는 미지정에 의한 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미지정에 의하면 164의 금강유정이 있다. 미지정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멸법지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도법지로써 욕계의 모든 행의 도(道)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四智]에는 16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로써 혹은 초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
3) 묘음은 금강유정을 오로지 무간도라고 하는 입장에서 관찰하면서도 그것을 견도와 수도로 나누어서 상계(上界)를 대상으로 하는 견도의 4무간도[四類智忍]와 유정지 9품의 번뇌단(煩惱斷)에 대한 9무간도로써 금강유정의 종류 차별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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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8은 32가 되며 앞의 16을 보태면 48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초(初)와 제2 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혹은 제2ㆍ제3 정려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제3ㆍ제4 정려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제4 정려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
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7은 28이 되고 앞의 48을 보태면 76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초(初)와 제3 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혹은 제2ㆍ제3ㆍ제4 정려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제3ㆍ제4 정려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제4 정려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
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6은 24가 되며 앞의 76을 보태면 100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제4 정려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혹은 제2 정려와 나아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제3 정려와 나아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제4 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공무변처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5는 20이 되며 앞의 100을 보태면 120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제4 정려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혹은 제2 정려와 나아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제3 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제4 정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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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4는 16이 되며 앞의 120을 보태면 136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초정려와 나아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제2 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제3 정려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3ㆍ4는 12가 되며 앞의 136을 보태면 148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초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고, 혹은 제2 정려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2ㆍ4는 8이 되며 앞의 148을 보태면 156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초정려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위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156에 보태면 160이 된다.
혹은 도류지로써 9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道)를 사유하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160에 보태면 164의 금강유정이 된다.
미지정에 의하는 것처럼 나아가 제4 정려에 의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공무변처에 의하면 52의 금강유정이 있다. 공무변처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苦類智)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集類智)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가지의 지[二智]에는 8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滅類智)로써 혹은 공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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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4ㆍ4는 16이 되며 앞의 8을 보태면 24가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며, 혹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3ㆍ4는 12가 되며 앞의 24를 보태면 36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공무변처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2ㆍ4는 8이 되며 앞의 36을 보태면 44가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공무변처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44에 보태면 48이 된다.
혹은 도류지(道類智)로써 9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48에 보태면 52의 금강유정이 된다.
식무변처에 의하면 36의 금강유정이 있다. 식무변처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가지의 지[二智]에는 8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로써 혹은 식무변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으며, 나아가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3ㆍ4는 12가 되며 앞의 8을 보태면 20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식무변처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고, 혹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각각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2ㆍ4는 8이 되며 앞의 20을 보태면 28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혹은 식무변처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28에 보태면 32가 된다.
혹은 도류지로써 9지(地)의 유지품(類智品)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32에 보태면 36의 금강유정이 된다.
무소유처에 의하면 24의 금강유정이 있다. 무소유처에 의한 것으로서는 혹은 고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집류지로써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인(因)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지[二智]에는 8행상이 있다.
혹은 멸류지로써 혹은 무소유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혹은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행의 멸(滅)을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면 3ㆍ4는 12가 되며 앞의 8을 보태면 20이 된다.
혹은 도류지로써 9지의 유지품의 도를 사유하되 4행상 중의 어느 한 행상을 지어서 아라한의 과를 얻는 이가 있다.
이 4를 앞의 20에 보태면 24의 금강유정이 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서 무색정(無色定)에 의해서는 법지(法智)를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하지(下地)의 고(苦)와 집(集)과 멸(滅)을 반연하지도 않는다. 무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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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오직 자기 지[自地]와 상지(上地)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욕계에 나는 이의 금강유정과 위의 두 세계의 나는 이의 그것은 일으키게 되는 많고 적음에 따라 알맞게 알아야 한다.
위의 두 세계에 나는 이는 반드시 법지를 일으키지 않고 그 아래의 고제(苦諦)ㆍ집제(集諦)를 싫어하기 때문에 거듭 관(觀)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미 아래의 고ㆍ집을 관하지 않는지라 또한 아래의 멸ㆍ도도 관하지 않으니 멸ㆍ도의 지혜의 작용은 고ㆍ집의 지혜로 우두머리를 삼기 때문이다.
만일 상지(上地)에 나면 하지(下地)에 의하여 그 밖의 번뇌를 여의지 않는 것이니 상지에는 스스로 하지의 선정보다 수승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비상비비상처에 나는 것만은 제외된다. 거기에는 자기 지[自地]의 무루정(無漏定)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래의 무소유처에 의하여 무루정을 일으켜 그 밖의 번뇌를 여의어야 한다.
만일 위의 정려지(靜慮地)에 나면 반드시 아래의 정려지의 고ㆍ집과 멸을 반연하지 않는 것은 거기의 고ㆍ집을 싫어하기 때문이니 법지(法地)에서의 설명과 같다.
[論] 아직 해탈하지 못한 마음[未解脫心]을 해탈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미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答] 이미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다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마음이 탐ㆍ진ㆍ치를 해탈한다”고 하고 또 “미래에 무학의 마음이 생길 때에 온갖 장애를 해탈한다”고 말했으나 “아직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미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다고 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아직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어째서 이 마음을 이미 해탈했다고 하는 것인가?
[답] 본 성품[本性]이 탐ㆍ진ㆍ치를 해탈했기 때문이다.
[문] 만일 이미 탐ㆍ진ㆍ치를 해탈했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지금 해탈을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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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고 말하는가?
[답] 번뇌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미 해탈했다고 하지만 만일 세간에 행하고[行世] 상속에 있는 것에 의거하기 때문이라면 지금 해탈한다고 한다.
지금 이 지위 안에서 비로소 세간에 행하고 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 대하여 아직 통달하지 못하면 이런 문난하는 말을 하게 된다.
[論] 만일 이미 해탈했다면 해탈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고 만일 해탈한다면 이미 해탈했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해탈한 마음이면서도 해탈한다는 말을 하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는다.
비록 앞의 뜻에 의하여 이런 문난은 이미 버리게 되었다 해도 지금 다시 그 밖의 다른 일을 인용하여 이것을 해석한다. 마치 계경에서 “대왕이여, 지금 어디서 오셨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가 비록 이미 왔다 하더라도 “지금 오셨소?”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도 그러하므로 문난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시 그 밖의 경을 인용하여 문난한 이를 도리어 힐난한다.
[論] 이제 그대에게 묻겠다. 세존께서는 다음처럼 말씀하셨다.
만일 탐애[愛]를 끊어 남음이 없으면
마치 연꽃이 물에 있는 것과 같으며
비구가 이것과 저것을 버리게 되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도다.
그대는 이 말씀을 잘하신 말씀이라 인정하는가?
[答] 그렇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버린 것을 버린다고 하는가?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을 버린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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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이미 버린 것을 버린다.
[論] 내가 말한 것을 들으라. 만일 이미 버렸다면 버린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만일 버린다면 이미 버렸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버렸으면서도 버린다고 하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아서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문난하는 이에게 도리어 힐난하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니 이것도 그의 해석과 같아서 그가 아는 것대로 하면서 통석(通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게송 가운데의 앞 2구(句)는 이미 버렸다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미 번뇌를 끊었으면 세간에 처해 있으면서도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은 마치 연꽃과 같기 때문이다. 뒤의 2구는 지금 버린다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과 저것인 6근(根)ㆍ6진(塵)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날 일에 대하여 지금이라는 말로 말한다 해도 허물이 없는 것이니 이것도 그러해야 한다. 비록 이미 해탈한 것을 지금 해탈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허물은 없는 것이니 이런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그 밖의 다른 경을 인용하여 문난하는 이를 도리어 힐난한다.
[論]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慢)을 끊고 스스로 잘 안정하면
착한 마음은 온갖 것을 해탈하며
혼자 고요한 데 있으면서 방일하지 않으면
죽음[死]을 건너 저 언덕[彼岸]에 도달한다.
그대는 이 말씀을 잘하신 말씀이라 인정하는가?
[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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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도달한 것을 도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答] 이미 도달한 것을 도달한다고 말한다.
[論] 내가 말한 것을 들으라. 만일 이미 도달했다면 도달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고 만일 도달한다면 이미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도달했으면서도 도달한다는 말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아서다.
이 해석과 문난하는 뜻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게송 가운데 앞의 2구는 이미 도달했다는 뜻을 나타내고 뒤의 2구는 지금 도달한다는 뜻을 드러낸다. 그것은 옛날 일에 대하여 지금이라는 말로 말하여도 허물은 없는 것이니 이것도 그러해야 되므로 통틀어 말을 끝맺으면서 말한다.
[論] 그것이 이미 도리에 맞지 않다면 이것도 그러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그의 해석은 그 문난한 이에게 “모든 계경에 대하여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권하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이러한 말을 한다.
[論] 그러므로 계경에 대하여 뜻을 분별해야 하리니 마치 세존께서 하신 말씀과 같다.
짐승은 수풀에 돌아가고
새는 허공에 돌아가며
성자(聖者)는 열반에 돌아가고
법은 분별에 돌아간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돌아갈 처소로 돌아가야 비로소 안락을 얻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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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계경에 대하여 뜻을 잘 분별해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를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말씀하신 그대로를 이해한다면 성인의 가르침은 앞뒤가 서로 어긋나게 되고 또한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뒤바뀐 고집을 일으키게 한다.
[論] 마치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싫어하는 것[厭]에 의하여 염(染)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離染]에 의하여 해탈(解脫)하며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涅槃)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런 말씀을 하셨으나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는 것이며, 나아가 어떤 것이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하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에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분별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마치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하며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한마음의 무더기[聚] 안에는 곧 싫어하는 것과 염을 여의는 것과 해탈하는 것이 갖추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싫어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는가?
[답] 내는 것[生]이 뛰어난 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법은 비록 함께 생긴다 하더라도 싫어하는 것이 염을 여의는 것을 낸다고 하면 뛰어난 데에 따르는 것이요 염을 여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을 낸다고 하면 하열[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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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데에 따르는 것이며, 염을 여의는 것이 해탈하는 것을 낸다고 하면 뛰어난 데에 따르는 것이요 해탈하는 것이 염을 여의는 것을 낸다고 하면 하열한 데에 따르는 것이다.
마치 촉(觸)은 수(受)와 함께 생긴다 하더라도 촉은 수에 연(緣)이 된다고 말하고 수는 촉에 연이 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하다.
여기에서 의한다[依]4)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내는 것[能生]이요, 둘째는 능히 얻는 것[能得]이다. 능히 낸다고 함은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하는 것을 말하며, 능히 얻는다 함은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는 순후구(順後句)5)를 만든다.
[문] 만일 의지한 것[依]이면 역시 그것은 연(緣)인가?
[답] 만일 연이면 그것도 의지한 것이다. 혹은 의지한 것이면서 연이 아닌 것이 있다.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 것이다.
또 의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서로 좇는 것[相順]6)이요, 둘째는 서로 비슷한 것[相似]이다. 서로 좇는다 함은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고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하는 것을 말하며, 서로 비슷하다 함은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厭]인가?
4) 염(厭)에 의하여 이염(離厭)한다는 등의 의(依)의 해석이다. 여기서 능히 낸다는 것은 염에 의하여 이염을 낸다는 것이요, 능히 얻는다는 것은 해탈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니 열반은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순후구라 함은 넓은 일로써 좁은 일을 묻는 것에 대하여 좁은 일로써 넓은 일을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은 서울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서울 사람은 한국 사람이기는 하나 한국 사람이 반드시 서울 사람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지금의 경우에는 의(依)의 범위는 넓고 연(緣)은 오로지 능생(能生) 관계만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보아 좁으므로 연은 의의 범위 안에 있지만 의는 반드시 연의 범위 안에 있는 것
은 아니라는 대답이다.
6) 서로 좇는다는 것은 수순한다는 뜻으로 염(厭)에 의하여 이염(離厭)이 있다는 것은 염은 이염에 수순한다는 관계를 말하고, 상사하다[相似]는 것은 능의(能依)와 소의(所依)는 유사하여 번뇌의 현행과 그리고 득(得)을 여의는 것[解脫]에 의하여 택멸무위[涅槃]를 얻는 관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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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만일 모든 행[諸行]7)에 대하여 무학(無學)이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거역하면 이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문] 싫어하는 것은 학(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게도 다 통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무학만을 말하는가?
[답] 학과 비학비무학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여기에서는 보다 뛰어난 데에 나아가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뛰어난 법으로 말한다면 무학의 법이 뛰어난 것이요, 만일 뛰어난 유정으로 말한다면 무학의 유정이 뛰어나기 때문에 무학을 말하는 것이다.
또 만일 마지막 경지[究竟]를 말하면 처음과 중간의 것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하므로 두 가지는 말하지 않는다.
또 무학의 법은 모든 선(善)의 근본이므로 한쪽만 말한다. 모든 선한 법은 모두가 무학에 의하여 생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서 기뻐하는 것이 없고 염을 여의는 것이 있으면서 염착(染著)이 없으며 해탈이 있으면서 계박(繫縛)이 없고 지혜가 있으면서 무지(無知)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다.
또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서 다시는 싫어하지 않고 염을 여의는 것이 있으면서 다시는 염을 여의지 않으며 해탈이 있으면서 다시는 해탈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다.
또 만일 싫어하는 것 등을 닦아 원만해지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다.
묘음 존자는 “무학의 법은 뛰어난 것이 많고 허물이 없기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만일 세계[界]와 갈래[趣]의 생(生)과 노(老)ㆍ병(病)ㆍ사(死)의 온갖 것이 다하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學) 등은 그렇지 못하므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싫어하는 것은 무엇으로 자성(自性)을 삼는가? 지혜[慧]인가? 탐이 없
7) 모든 행이란 고(苦)ㆍ집(集)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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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無貪]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지혜라면 이 뒤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染)을 여의는 것인가? 만일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탐이 없고 등탐이 없는 것[無等貪]8)과 진이 없고[無瞋] 등진이 없는 것[無等瞋]과 치가 없고[無癡] 등치가 없는 것[無等癡]의 선근(善根)을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읜다고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탐이 없고 진이 없는 것은 그러할 수 있지만 치가 없는 것은 어떻게 그러한가? 치가 없으면 지혜인데 어찌 지혜가 지혜와 상응한다는 뜻이 있으며 그러면서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것이 치가 없는 선근이라 하는가?
만일 탐이 없는 것이라면 이 뒤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는 것인가? 만일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탐이 없고 등탐이 없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진이 없고 치가 없는 것은 그럴 수 있으나 탐이 없는 것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만일 싫어하는 것이 탐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탐이 없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상응한다 하는가? 자성과 자성은
상응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견온(見蘊)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견온에서 “어떤 일은 능히 싫어하면서도 능히 여의는 것[能離]이 아니기도 하는데 고(苦)ㆍ집(集)의 인지(忍智)가 모든 번뇌를 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일은 능히 싫어하면서 또한 능히 여의기도 하는데 고ㆍ집의 인지가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인지는 지혜이면서 탐이 없는 성품이 아닌데 어떻게 싫어하는 것이 탐이 없는 것을 체(體)를 삼는다고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싫어하는 것은 지혜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뒤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서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는 것인가? 만일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탐이 없고 등탐이 없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8) 무등탐과 무등진에서 등(等)자를 붙인 것은 강도(强度)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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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것과 같다.
[답] 이 글[文]에서는 다만 탐이 없는 것[無貪]과 진이 없는 것[無瞋]만을 말해야 하고 치가 없는 것[無癡]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독송하던 이가 말에 편승(便乘)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싫어하는 것은 탐이 없는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뒤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의는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이 글에서는 다만 진이 없는 것과 치가 없는 것만을 말해야 하고 탐이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탐이 없는 것을 말한 것은 의지하는 곳[依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혹은 어떤 것은 탐(貪)이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탐을 해탈하게 되기도 하고, 혹 어떤 것은 진(瞋)이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진을 해탈하게 되기도 하며, 혹 어떤 것은 치(癡)가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치를 해탈하게 되기도 한다.
혹 어떤 것은 탐이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를 해탈하게 되기도 하고, 나아가 혹은 어떤 것은 치가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를 해탈하게 되기도 한다. 혹은 어떤 것은 탐이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세 가지를 해탈하게 되기도 하고, 나아가 혹은 어떤 것은 치가 없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세 가지를 해탈하게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탐이 없는 것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세 가지를 해탈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때문에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탐이 없고 등탐이 없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는 것이요, 따로 “탐이 없는 선근과 싫어하는 것과 상응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 견온(見蘊)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싫어하는 것은 인지(忍智)가 아니다. 인지와 상응하기 때문에 인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며 그것이 서로 섞인 것에 의하여 능히 싫어하는 성품[能厭性]을 말한 것이다.
[評] 따로의 법이 있어서 싫어한다고 한 것이다. 지혜도 아니요 탐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은 심소의 법[心所法]이 마음[心王]과 상응한 것이니, 이에 대한 설명은 뒤에 있다.
다시 그 밖의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심소의 법이 마음과 상응한 것이 있으나 견온에서 “고ㆍ집의 인지를 능히 싫어하는 것[能厭]이라 한다”고 말한 것은 그 인지가 싫어하는 것과 상응하는 것을 말미암아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 싫어하는 자성(自性)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한 것은 무루로서 싫어하는 것이다. 유루로서 싫어하는 것9)이란 부정관(不淨觀)ㆍ지식념(持息念)ㆍ염주(念住)ㆍ3의관(義觀)ㆍ7처선(處善)ㆍ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에 상응한 것과 그것의 상응(相應)에 따르는 것과 현관(現觀)변의 세속지(世俗智)에 상응한 것과 그것의 상응에 따르는 것과 아울러 그 밖의 유루로서의 정려(靜慮)ㆍ무색(無色)ㆍ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에 상응한
것과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화살과 같은 등의 그것의 상응에 따르는 한량없는 행상(行相)과 상응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는 거친 것[麤]에 따라 작은 부분을 나타내 보였지만 만일 자세히 나타내 보인다면 사대해(四大海)보다 더할 것이다.
[문] 만일 어떤 일이 능히 싫어하는 것[能厭]이면 그 일은 싫어할 것[所厭]인가?
[답]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일은 능히 싫어하는 것이면서도 싫어할 것이 아니기도 하는데 무루로서의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일은 싫어할 것이면서도 능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는데 유루로서의 싫어하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루의 법이다.
어떤 일은 능히 싫어하면서 또한 싫어할 것이기도 하는데 유루로서의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9) 유루의 염(厭)이란 유루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염관(厭觀)할 적에 수반하는 싫어하는 심소(心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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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은 능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싫어할 것이 아니기도 하는데 무루로서의 싫어하는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무루의 법을 말한다.
온갖 법을 반연하는 비아(非我)의 행상은 비록 또한 싫어할 일을 반연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기뻐하는[欣] 행상이어서 싫어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論] 어떤 것이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染)을 여의는 것인가?
[答] 만일 싫어하는 것과 상응하면서 탐이 없고 등탐(等貪)이 없는 것과 진이 없고 등진(等瞋)이 없는 것과 치가 없고 등치(等癡)가 없는 선근(善根)이면 이것을 싫어하는 것에 의하여 염을 여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등(等)이라는 말은 으뜸가는 세력이 두루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등이라 한다.
또 만일 응하는 것에 따라 경계를 두루 반연한 것이면 등이라고 한다.
또 탐ㆍ진ㆍ치는 유정수(有情數)만을 반연하지만 등탐 등은 유정이 아닌 수[非有情數]에도 반연하는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등이라 한다.
어떤 이는 “여기서는 다만 탐이 없는 선근만을 말하니 이 선근은 탐염(貪染)을 가까이 다스리기 때문에 염을 여읜다고 한다. 진이 없고 치가 없다는 것은 이를 독송하는 이가 말에 편승하여 외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진이 없고 치가 없다는 것은 비록 염을 정작 여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염을 여의는 것을 돕기 때문에 역시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염(染)이란 말은 온갖 번뇌에 다 통한 말이기 때문에 염을 여읜다[離染]는 말은 온갖 유위의 염법(染法)을 다 포섭한다. 지금은 그 강한 것[强]에 따르기 때문에 다만 탐이 없고 등탐이 없다는 등으로 말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하는 것인가?
[答] 만일 염을 여의는 것에 상응한 마음으로서 이미 뛰어나게 이해하고[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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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解] 지금 뛰어나게 이해하며[今勝解] 장차 뛰어나게 이해할 것[當勝解]이면 이것을 염을 여의는 것에 의하여 해탈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해탈이라 함은 대지(大地)의 소유한 심소법(心所法) 중의 승해(勝解)로 자성을 삼는 것이다. 그리고 온갖 법 중에는 두 가지 해탈10)이 있다. 첫째는 무위(無爲)이니 택멸(擇滅)을 말하며, 둘째는 유위(有爲)이니 승해를 말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오(染汚)이니 삿된 승해[邪勝解]를 말하고,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이니 바른 승해[正勝解]를 말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루(有漏)이니 부정관ㆍ지식념 등과 상응한 것을 말하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니 고법지인(苦法智忍) 등과 상응한 것을 말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학(有學)이니 4향(向) 3과(果)의 일곱 보특가라가 상속(相續)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둘째 무학(無學)이니 아라한과가 상속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심해탈(時心解脫)이니 앞의 다섯 종성[五種性]이 상속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둘째 불시심해탈(不時心解脫)이니 부동종성(不動種性)이 상속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무학의 해탈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심해탈(心解脫)이니 탐을 여의기 때문이요, 둘째는 혜해탈(慧解脫)이니 무명(無明)을 여의기 때문이다.
[문] 만일 이 해탈이 승해로 체(體)를 삼는다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어떤 것이 탐을 여의기 때문에 심해탈이
10) 해탈의 체에는 유위해탈과 무위해탈 두 가지가 있다. 유위해탈이란 무학의 마음속 승해(勝解)의 심소를 가리키고, 무위해탈이란 온갖 혹(惑)의 멸(滅)을 말한다.(『구사론』 제25권) 대개 택멸의 체는 불변(不變) 부동(不動)하다는 데서 무위를 말하고 이 택멸을 얻게 하는 것의 승해는 움직이기 때문에 이것은 유위라고 한다.(有爲解脫을 無學支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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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는가? 탐이 없는 선근이 탐욕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무명을 여의기 때문에 혜해탈이라 하는가? 치가 없는[無癡] 선근이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승해는 세 가지의 선근에 속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심해탈ㆍ혜해탈이 두 선근이라 하는가?
[답] 거기서의 글[文]은 “어떤 것이 탐을 여의기 때문에 심해탈이라 하는가? 탐이 없는 선근과 상응한 해탈을 말한다. 어떤 것이 무명을 여의기 때문에 혜해탈이라 하는가? 치가 없는 선근과 상응한 해탈을 말한다”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은 것은 그 글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심해탈과 혜해탈은 실로 선근은 아니나 선근과 상응하기 때문에 선근이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또 여기서는 해탈이 의지하는 곳[依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심해탈은 탐이 없는 선근에 의지하여 생장(生長)하게 되는 것이니 탐이 없는 선근으로써 탐욕을 다스리는 것이 심해탈이기 때문이다. 혜해탈은 치가 없는 선근에 의지하여 생장하게 되는 것이니 치가 없는 선근으로써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것이 혜해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의(所依)에서 능의(能依)의 체(體)를 말하는 까닭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 것인가?
[答] 만일 탐(貪)이 영원히 끊어지고 진(瞋)이 영원히 끊어지고 치(癡)가 영원히 끊어지며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면 이것을 해탈하는 것에 의하여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
[문] 유신견(有身見) 등의 어느 하나의 법이 끊어져도 모두 그것은 열반인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탐이 영원히 끊어지고 나아가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비록 하나하나의 법이 끊어져도 모두 그것이 열반이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다만 원만한 열반을 말할 뿐이므로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열반이라는 이름은 오직 무학(無學)에만 있을 뿐이요 학(學)의 지위에서는 아직 원만하지 않으므로 열반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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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문] 어떠한 뜻으로 열반이라 하는가?
[답]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고, 또 세 가지 불[三火]이 꺼지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하며, 또 세 가지 모양[三相]11)이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고, 또 더러운 악취를 여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며, 또 모든 갈래[趣]를 여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槃)이란 빽빽한 숲[稠林]을 말하고 열(涅)이란 벗어난다[出]는 말이므로 5온(蘊)의 빽빽한 숲을 벗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을 짠다[織]고 하고 열을 않는다[不]고 하므로 짜지 않기[不織]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마치 실[縷]이 있으면 짜는 것이 있지만 없으면 짜지 않는 것처럼 만일 업을 짓는 번뇌가 있으면 생사(生死)의 베를 짜겠지만 무학은 업을 짓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생사의 베를 짜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이란 후유(後有)를 말하고 열이란 없다[無]는 말이므로 후유가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이란 계박(繫縛)이라 하고 열이란 여읜다[離]는 말이므로 계박을 여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이란 온갖 생사의 고난(苦難)을 말하고 열이란 뛰어난다[超度]는 말이므로 온갖 생사의 고난을 뛰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문] 싫어한다[厭]는 것과 염을 여윈다[離染]는 것과 해탈한다[解脫]는 것과 열반한다[涅槃]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싫어하고 거스르는 것을 싫어한다 하고,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없는 것을 염을 여읜다 하며, 마음에 더러운 때[垢穢]가 없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영원히 무거운 짐을 버리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또 번뇌를 헐뜯는 것을 싫어한다 하고, 나쁜 행을 헐뜯는 것을 염을 여읜다고 하며, 연(緣)에 대하여 계박을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모든 온(蘊)이 영원히 고요해지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11) 세 가지의 모양이란 생(生)ㆍ주(住)ㆍ멸(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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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욕계(欲界)를 꾸짖고 헐뜯는 것을 싫어한다 하고, 색계(色界)를 여의는 것을 염을 여읜다 하며, 무색계(無色界)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한다 하고, 영원한 적정(寂靜)을 증득[證]하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을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고,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을 여의는 것을 염을 여읜다 하며, 무학의 과[無學果]에 이르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영원한 적멸(寂滅)을 증득하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묘음 존자는 “싫어한다는 것은 박지(薄地)를 말하고, 염을 여읜다는 것은 이욕지(離欲地)를 말하며, 해탈한다는 것은 무학지(無學地)를 말하고, 열반한다는 것은 모든 지[諸地]의 과(果)를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존자는 경의 뜻을 따라 “근율의(根律儀)ㆍ계율의(戒律儀)ㆍ무회(無悔)ㆍ환희(歡喜)ㆍ안락(安樂)ㆍ등지(等持)는 수행지(修行地)12)요, 여실한 지견[如實智見]은 견지(見地)이며 싫어하는 것은 박지(薄地)요, 염을 여의는 것은 이욕지(離欲地)이며 해탈은 무학지(無學地)요 열반은 모든 지의 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싫어한다는 것과 염을 여읜다는 것과 해탈한다는 것과 열반이라는 것의 네 가지의 차별이다.
12) 수행지 이하 무학지까지의 5지(地)는 삼승공십지(三乘共十地)와 관계가 있다. 이 10지의 일은 첫째는 간혜지(乾慧地:外凡位)요, 둘째는 성지(性地:內凡位)이며, 셋째는 팔인지(八人地:見道位)요, 넷째는 견지(見地:初果)이며, 다섯째는 박지(薄地:一來果)요, 여섯째는 이욕지(離欲地:不還果)이며, 일곱째는 이판지(已辨地:阿羅漢果)요, 여덟째는 벽지불지(辟支佛地:緣覺)이며, 아홉째는 보살지(菩薩地)요, 열째는 불지(佛地)를 말한다. 곧 이곳에
서의 5지는 위의 10지 중의 이판지까지를 포함한 것이 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9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보특가라납식 ⑦
[論] 세존께서 “세 가지 계[三界]1)가 있으니 단계(斷界)와 이계(離界)와 멸계(滅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구수(具壽) 아난(阿難)이 명상좌(名上座) 존자에게 나아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아난은 그에게 갔는가?
[답] 아난 존자는 법을 좋아하는 이요, 바른 법의 장수[將]이며, 성인의 가르침[聖敎]을 섭수하여 성인의 가르침의 배[船]를 다루는 이이다. 항상 사중(四衆)에 돌아다니면서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며 자주자주 모든 비구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게으르고 희론(戱論)에 탐착하거나 혹은 경계에 대한 뒤바뀐 사유(思惟)로 인하여 그들이 일생 동안 헛되이 보내면서 추락하는 일이
1) 단계ㆍ이계ㆍ멸계의 3계는 앞에서 서술한 무위해탈을 세 가지의 방향에서 본 것이다. 그 중에서 단계는 9결(結) 중 애결(愛結)을 제외한 나머지 8결을 끊는 것을 말하고, 이계는 특히 애결을 여의는 것을 말하며, 멸계는 9결 이외의 것이면서 9결에 수순하는 유루의 법을 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의 계(界)는 승해(勝解)의 뜻이어서 이 승해에 의지하여 9결 등을 끊는 것을 3계라 한다. 이 문단에서는 3계를 설명하는 인연으로부터 설명하면서 처
음에 단계ㆍ이계ㆍ멸계와 지관(止觀)의 관계에 미치며 앞뒤에서 단ㆍ이ㆍ멸의 동이점(同異點)을 여러 방면으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구사론』 제25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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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게 하기 위하여 그곳에 간 것이다.
또 아난은 ‘저 명상좌는 한결같이 적정(寂靜)을 즐기고 아련야(阿練若)에 있으며 용맹 정진하면서 어떠한 묘한 덕[妙德]을 증득했을까? 나는 가서 물어보아야겠다. 만일 나에게 증득한 덕을 말해 주면 나는 합장하고 따라 기뻐하면서 찬탄하리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방편으로 은근히 그 가행(加行)을 보여서 속히 증득하게 하겠으며 그가 오랫동안 아련야에 있으면서 공연히 얻은 것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로 간 것이다.
마치 그 경에서 “구수 아난은 거기에 도달한 뒤에 동분언론(同分言論)2)을 시설했고 부동분(不同分)언론을 시설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 어떠한 것을 동분언론이라 하는가?
[답] 만일 아련야에 있는 이라면 아련야의 법을 묻고, 만일 비나야(毘奈耶)를 지니는 이라면 비나야를 물으며, 만일 소달람(素怛纜)을 외우는 이면 소달람을 묻고, 만일 아비달마(阿毘達磨)를 배우는 이면 아비달마를 묻는 것을 동분언론이라 한다. 이것과 반대의 것을 부동분언론이라 하니, 아련야에 있는 이에게는 3장(臧)으로써 묻고, 비나야를 지니는 이에게는 아련야와 그 밖의 2장(臧)으로써 물으며, 소달람을 외우는 이에게는 아련야와 그 밖의 2장으
로써 묻고, 아비달마를 배우는 이에게는 아련야와 그 밖의 2장으로써 묻거나 혹은 다시 그 밖의 다른 일을 묻는 것을 모두 부동분언론이라 한다.
아난 존자가 오직 동분언론만을 지은 까닭은 만일 부동분언론을 지으면 그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대답하지 못할 것이며, 이미 대답하지 못하면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싸우면서 거역하게 될 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허물을 일으키게 하지 않게 하려고 오직 동분언론만을 지어 다만 그에게 아련야법만을 물었을 뿐이다.
마치 그 경에서 “그때에 아난이 명상좌에게 물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아련야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있거나 혹은 조용한 방에 있거나 혹은 무덤 사이에 있거나 할 때는 어떠한 행법(行法)을 자주자주 사유(思惟)해야 합니
2) 동분언론이란 다른 사람이 오로지 그 일만을 닦거나 또는 제공하는 제목에 나아가 논의하는 것을 말하고 이와 반대의 것을 부동분언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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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명상좌는 아난에게 ‘만일 어떤 비구가 아련야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있거나 혹은 고요한 방에 있거나 혹은 무덤 사이에 있거나 하면 자주 두 가지의 행법을 사유해야 되니,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마타로써 그 마음을 훈수(熏修)한 이면 비발사나에 의하여 해탈을 얻게 되고, 만일 비발사나로써 마음을 훈수한 이면 사마타에 의하여 해탈을 얻게 되며, 만일 사마타와 비발사나로써 마음을 훈수한 이면 세 가지 계
(界)에 의하여 해탈을 얻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세 가지 계인가 하면 단계(斷界)ㆍ이계(離界)ㆍ멸계(滅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 대법(對法)의 뜻에 의하면 하나의 마음속에 사마타와 비발사나가 있는데 어떻게 이와 같은 두 가지 행자(行者)의 차별을 세우는가?
[답] 가행(加行)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차별이 있다. 가행할 때에는 혹은 사마타의 자량(資糧)을 많이 닦아 익히기도 하고, 혹은 비발사나의 자량을 많이 닦아 익히기도 한다.
사마타의 자량을 많이 닦아 익힌다 함은 가행할 때에 항상 혼자 조용한 데에 있기를 좋아하고 시끄러운 곳이나 견해의 소란스러움이나 번잡스러운 허물을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고요한 방에 있으면서 성도(聖道)에 들어가는 때를 사마타를 행하는 이라 하며, 비발사나의 행을 많이 닦아 익힌다 함은 가행할 때에 항상 3장(臧)을 독송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고 온갖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하여 자주자주 관찰하면서 성도에 들어가는 때를 비발사나를 행하는
이라 한다.
또 혹은 마음을 하나의 연[一緣]에 매어 두어 법상(法相)을 분별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법상을 분별하면서 마음을 하나의 연에 매어 두지 않기도 한다. 만일 마음을 하나의 연에 매어 두어 법상을 분별하지 않는 이가 성도에 들어가는 때를 사마타를 행하는 이라 하며, 만일 법상을 분별하면서 마음을 하나의 연에 매어 두지 않는 이가 성도에 들어가는 때를 비발사나를 행하는 이라 한다.
또 만일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면 비발사나를 행하는 이라 하며, 만일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라면 사마타를 행하는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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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가 예리하고 근기가 둔한 것처럼 인의 힘[因力]과 연의 힘[緣力]ㆍ내분의 힘[內分力]과 외분의 힘[外分力]ㆍ안으로 바르게 사유하는 힘[內正思惟力]과 밖으로 남의 소리를 듣는 힘[外聲他音力]3)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단계ㆍ이계ㆍ멸계의 체(體)는 무위(無爲)요 무인(無因)이며 무과(無果)인데 어떻게 만일 사마타와 비발사나를 마음에 훈수한 이면 세 가지 계(界)에 의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는가?
[답] 그 계경에서 열반을 반연하는 승해(勝解)에 대하여 계(界)라는 말로써 말한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비록 가행할 때에 정진이 용맹하면서 지(止)와 관(觀)의 두 가지 자량을 닦아 익힌다 하더라도 만일 열반에 대하여 승해를 일으켜 결정코 증득[證]에 나아가지 않으면 마침내 모든 번뇌를 끊고서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을 반연하는 승해를 계라 하며 이 계에 의하는 까닭에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 경에서 “그때 아난이 명상좌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어떤 것을 여의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어떤 것을 없애기 때문에 멸계라 합니까?’ 명상좌가 말하였다. ‘온갖 행[一切行]을 끊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온갖 행을 여의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온갖 행을 없애기 때문에 멸계라 합니다.’ 아난 존자가 듣고 나서는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찬탄하며 하직하고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죽림도량(竹林道場)에 나아가 이
일로써 5백 비구에게 물었으나 그들도 모두 명상좌와 같이 대답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그 모든 비구들은 어떻게 대답한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젊은이로부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대답한 것이니 마치 법으로 모일 때에는 젊은이에게 먼저 묻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늙은이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대답한 것이니 마치 보시의 물건을 돌릴 때에는 늙은이로부터 젊은이에 이르는 것과
3) 인력(因力)ㆍ연력(緣力)에서 나아가 외문타음력(外聞他音力)까지란 스스로 발동[自發]하는 것과 남이 발동하는 것의 구별을 보이는 것이어서 앞의 것을 관행자(觀行者)라 하고, 뒤의 것을 지행자(止行者)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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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한 비구가 대답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가 따라 기뻐하였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먼저 백(白)을 지은 뒤에 다음에는 산가지[籌]를 돌리고 산가지를 받은 이가 대답하였다”4)라고 말씀하셨다.
그 경에 “그때에 아난이 듣고 나서는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찬탄하며 물러나와 부처님께 나아가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이 글의 뜻으로써 세존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도 그 상좌 등의 대답과 같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아난 존자는 그 상좌와 5백 비구들이 말씀한 뜻을 인가(忍可)한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인가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세존께 물었으며, 만일 인가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찬탄한 것인가?
[답] 아난은 그들이 설명한 뜻을 인가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세존께 물은 것인가?
[답] 세존께서는 아시면서도 짐짓 물으시는 것처럼 아난 존자도 그와 같았다. 왜냐하면 아난은 잘 설명한 법 가운데서 견해를 같이하고 욕망을 같이하는 글[文]과 뜻[義]이 결정되면 대사(大師)5)의 말씀처럼 도중(徒衆)의 말도 그러하고, 친교(親敎)의 말씀처럼 제자의 말도 그러하며, 궤범(軌範)의 말씀처럼 배움을 받는 이의 말도 그러하여 이와 같이 글과 뜻이 미묘하게 결정된 그것에 의거하여 닦고 배우면 나아가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기 때문이요, 외도가 말한 글과 뜻은 스승과 도중들이 차츰차츰 서로가 어긋나므로 그것에 의거하여 닦고 배워도 헛되어서 증득한 것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아난은 부처님의 묘한 말씀의 도장[印]으로써 그들이 말한 뜻을 인가하려고 거듭 부처님께 물은 것이다. 만일 부처님의 묘한 말씀으로 그것을
4) 백을 짓는다 함은 제안(提案)하는 것이요, 산가지를 돌린다고 함은 오늘날로 말하면 투표하는 것에 해당된다.
5) 대사는 부처님ㆍ세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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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하지 않으면 말한 뜻이 오히려 기울거나 동요될 수 있어서 장차 오는 세상의 사중(四衆)들이 공경하면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세간의 문부(文符)에 만일 왕의 도장이 없으면 시행하는 곳의 사람들이 공경하면서 받지 않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거듭 부처님께 물은 것이다.
마치 그 경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그 상좌와 5백 비구들에게 어떠한 공덕이 있는 줄 아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 명상좌와 5백 비구들은 모두 아라한이어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이미 무거운 짐을 버렸으며 모든 유결(有結)을 다하고 자기 이익을 얻었으며 성스러운 뜻[聖旨]을 잘 이룩하고 마음이 잘 해탈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말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들의 공덕을 물으셨는가?
[답] 욕심이 적고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여기며 덮여진 진실한 공덕의 보배 광[寶臧]을 열어 내어 모든 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한 뒤에 공경하고 공양하게 하여 뛰어난 과보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세간에 묻힌 광[伏臧]이 비록 진기한 보배가 많으면서도 모래나 흙에 파묻혀서 나타나지 못하다가 만일 열어 내는 이가 있으면 한량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채취하여 수용하면서 세간의 부(富)와 낙(樂)을 얻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것을
물으신 것이다.
또 시주(施主)의 뛰어난 염원[思願]을 열어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시주가 항상 의복 등의 네 가지 공양 거리를 그 상좌와 5백 비구들에게 보시했으면서도 그들에게 뛰어난 공덕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면 기뻐 훌륭한 염원을 일으키어 “우리들은 이와 같은 복전(福田)을 만나게 되어 이미 선근의 종자를 심었으므로 반드시 오는 세상에서는 큰 쾌락을 받으리라”고 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세존께서 그들의 공덕을 물으신 것이다.
또 세간에서 비방하는 일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그 상좌는 어머니의 태(胎) 안에서 60년을 지난 뒤에 태에서 나왔으므로 형용이 노쇠하고 위덕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태어나면서 상좌(上座)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뒤에 비록 출가는 했었지만 “젊은 나이의 한창 때에 밤낮으로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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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도 오히려 과(果)를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 노쇠하고 기력이 허약한 이가 과를 얻겠느냐”라고 조롱을 당하였다.
또 그 상좌에게 제도된 5백의 새로 배운 비구들은 먼저 천수(天授:提婆達多)를 따랐던 이들이었다. 여러 사람들은 “이러한 늙은이가 이름과 이익에 탐착하여 5백 인을 제도한답시고 자신이 부리고 공양하는 시중에 충당하고 가르쳐 경계하지도 못하면서 삿된 법을 따르게 하고 있다”라고 헐뜯었다. 5백 비구들은 먼저 삿된 교화를 받다가 뒤에 비록 바른 데로 돌아와 무학의 과[無學果]를 얻었다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먼저 이익을 탐하여
부처님을 버리고 삿된 이를 좇다가 비록 뒤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얻은 것은 없다”고 비방하였다. 이러한 모든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공덕을 물어 세간으로 하여금 다 같이 알게 하여 비방하는 죄를 버리고 부지런히 공경과 공양을 닦아 오는 세상에서는 천상에 태어나고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경에서는 비록 단계(斷界) 등의 세 가지 계를 말했다 하더라도 세 가지 계의 차별을 자세히 분별하지 않았다. 그 경은 이 논의 소의(所依)의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설명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단계인가?
[答] 애결(愛結)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결(結)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한다.
[論] 어떤 것이 이계(離界)인가?
[答] 애결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멸계(滅界)인가?
[答] 모든 그 밖의 결에 따른 법[順結法]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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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먼저 아비달마(阿毘達磨)를 기준으로 하면서 세속의 도리[世俗理]에 의거하여 세 가지 계의 구별을 설명하는 것이니 근대치(近對治)의 도(道)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나머지 결이 끊어진다 함은 나머지 8결(結)이 끊어진 것이요, 결에 따른 법이 끊어진다 함은 9결(結)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유루의 법[有漏法]이니 이것을 일종(一種)의 세 가지 계의 차별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8결과 이에 상응한 것과 아울러 생기는 것 등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한다. 애결과 이것과 상응한 것과 아울러 생기는 것 등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한다. 모든 그 밖의 결에 따른 법과 이것과 상응한 것과 아울러 생기는 것 등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하는 것이니 곧 유루의 선[有漏善]과 모든 유위의 무부무기를 결을 따른 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6)
또 어떤 이는 “무명결(無明結)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애결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하며, 모든 그 밖의 결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속박하는 것[能縛]이면서 능히 물드는 것[能染]이 아닌 것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속박하면서도 또한 능히 물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하며,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속박하는 것도 아니고 능히 물드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은 속박할 것[所縛]이요 그것은 물들 것[所染]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계박하는 것[能繫]이면서 능히 물드는 것[能染]이 아닌 것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계박하는 것이면서 능히 물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하며, 혹은 모든 법으로서 능히 계박하는 것도 아니고 능히 물드는 것이 아니면서 그것은 계박할 것[所繫]이요 물들 것[所染]이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오직 모든 수면만이 자성(自性)이 끊어진다”라고 말한다.
6) 이 설명은 앞의 설명에 다시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俱有法:生住滅)도 가(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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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계경에 말씀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온갖 행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온갖 행이 여의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온갖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멸계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 “어떤 것이 끊을[所斷] 법인가? 온갖 유루의 법이다. 어떤 것이 두루 아는[遍知] 법인가? 온갖 유루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만일 모든 수면이 8결(結)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만일 모든 수면이 애결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하며, 만일 모든 수면이 그 밖의 법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유루의 법은 먼저 계박(繫縛) 당하지만 계박을 여의는 때에는 모두가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오직 애수면(愛隨眠)만이 자성(自性)이 끊어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하신 계경과 논(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만일 애수면이 8결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만일 애수면이 애결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이계라 하며, 만일 애수면이 그 밖의 법을 반연하여 일어나면 그것이 끊어진 것을 멸계라 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유루의 법은 먼저 계박당하지만 계박을 여의는 때에는 모두가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묘음 존자는 “번뇌의 체(體)가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경계[境]에서 계박을 여의는 것을 이계라 하며,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는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계박이 없고 계박이 그치는 것을 단계라 하고, 염오(染汚)가 없고 염오가 그치는 것을 이계라 하며, 그의 결과[果]도 없고 그의 결과가 그치는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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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달다(設摩達多) 존자는 “모든 번뇌가 끊어진 것을 단계라 하고, 탐(貪)이 없으면서 탐을 다스린 것을 이계라 하며, 결과의 상속(相續)이 소멸한 것을 멸계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좌취(左取) 존자는 “상속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연(緣)에 대한 계박을 여의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집수(執受)를 여의기 때문에 멸계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과거의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현재의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미래의 번뇌가 끊어지기 때문에 멸계라 한다. 번뇌가 끊어지는 것처럼 온(蘊)이 끊어지는 것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고수(苦受)가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하고, 낙수(樂受)가 끊어지기 때문에 이계라 하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끊어지기 때문에 멸계라 한다. 3수(受)가 끊어지는 것처럼 3수에 따른 법이 끊어지는 것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일 고고(苦苦)가 끊어지면 단계라 하고, 만일 괴고(壞苦)가 끊어지면 이계라 하며, 만일 행고(行苦)가 끊어지면 멸계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일 욕계(欲界)가 끊어지면 단계라 하고, 만일 색계(色界)가 끊어지면 이계라 하며, 만일 무색계(無色界)가 끊어지면 멸계라 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설명은 모두 세속에 의거하여 그 어느 하나의 문(門)에 나아가 세 가지 계(界)의 차별을 분별한 것이요 모두가 승의(勝義)로 분별한 것은 아니다.
[論] 모든 단계는 이계인가?
[答] 그렇다.
[論] 가령 이계라면 그것은 단계인가?
答] 그렇다.
[論] 모든 단계는 멸계인가?
[答] 그렇다.
[論] 가령 멸계라면 그것은 단계인가?
[答] 그렇다.
[論] 모든 이계는 멸계인가?
[答] 그렇다.
[論] 가령 멸계라면 그것은 이계인가?
[答] 그렇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는 아비달마를 기준으로 하면서 세속의 도리에 의거하여 근대치(近對治)에 나아가 세 가지 계의 차별을 분별했지만 지금은 계경에 따라 이 세 가지 계의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유루의 법이 낱낱이 끊어질 때에는 모두 하나씩이 끊어지게 되므로 이 하나하나가 끊어지는 것을 차별되는 뜻에 기준하여 세 가지 계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계의 뜻에 비록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체에는 차이가 없다.
[論] 세존께서 “세 가지 상[三想]이 있으니 단상(斷想)과 이상(離想)과 멸상(滅想)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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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세 가지 상이 있으니 단(斷)ㆍ이(離)ㆍ멸(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의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단상인가?
[答] 애결(愛結)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결(結)을 끊는 모든 생각의 알음알이[解]를 단상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이상인가?
[答] 애결을 끊는 모든 생각의 알음알이를 이상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멸상인가?
[答] 모든 그 밖의 결을 따르는 법[順結法]을 끊는 모든 생각의 알음알이를 멸상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자세한 해석은 계(界)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의 세 가지 상(想)은 앞의 세 가지 계에서와 같이 차츰차츰 상즉(相卽)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여기에서는 다른 모양[異相]과 다른 글[異文]을 나타내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니 만일 다른 모양과 다른 글의 설명을 하면 받아 지니기 쉽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는 두 개의 문[二門]ㆍ두 개의 섬돌[二階]ㆍ두 개의 계층[二蹬]ㆍ 두 개의 빛[二光]ㆍ두 개의 횃불[二炬]ㆍ두 개의 광명[二明]ㆍ두 개의 비춤[二照]ㆍ두 개의 무늬[二文]가 서로 영향(影響)을 미치는 것을 나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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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한 것이다. 계(界)가 상즉하는 것처럼 상(想)도 그러해야 하고, 상이 상즉하지 않는 것처럼 계도 그러해야 하므로 서로 영향이 미치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 16행상(行相) 외에 무루의 혜[無漏慧]가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 한다면 『식신론(識身論)』과 지온(智蘊) 중에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만일 없다면 이 글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떤 것이 단상인가? 애결을 제외한 그 밖의 결을 끊는 모든 생각의 알음알이를 단상이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단(斷) 등의 상(想)은 어느 행상의 성스러운 지혜와 상응하는가? 『품류족론(品類足論)』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어떤 것이 진지(盡智)인가?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이미 집(集)을 끊었으며 이미 멸(滅)을 증득하였고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 무생지(無生智)인가?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알 것이 없고 나아가 나는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다시 더 닦을 것이 없다’
는 것을 사실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 같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二智]는 어느 행상에 속한 것인가?
『집이문론(集異門論)』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서 “나는 이미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를 다했다는 것을 사실대로 분명히 아는 것이 진지이며 다시는 더 다할 것이 없다는 것이 무생지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는 어느 행상에 속한 것인가?
이 논에서의 견온(見蘊)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 “낙수(樂受)를 느낄 때는 낙수를 사실대로 느낀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어느 행상인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 “나의 생(生)이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이 이미 섰으며 할 일[所作]을 다 마쳤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대로 분명히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은 어느 행상인가?
[답] 어떤 이는 “16행상 외에는 따로 무루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식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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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나 이 논의 지온(智蘊)에서도 다 같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문] 여기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떤 것이 단상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단상 등의 상(想)은 어느 행상의 성스러운 지혜와 상응하는가?
[답] 이것은 소연(所緣)7)을 기준으로 하여 세 가지의 상을 건립한 것이요, 행상에 의거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의 상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멸(滅)을 반연하는 4행상을 지었기 때문이다. 끊는 것[斷]을 반연한 까닭에 단상이라 하지만 이 끊는 것에서는 끊는다는 행상을 짓지 않는 것이며 나머지의 두 가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이 세 가지의 상은 앞의 세 가지 계[三界]가 차츰차츰 상즉(相卽)하는 것과 같
다.
[문] 『품류족론』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진지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二智]는 어느 행상에 속하는가?
[답]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므로 다시 더 알 것이 없다는 것을 사실대로 분명히 안다”고 함은 고를 반연하는 두 행상에 속하는 것이니 고(苦)와 비상(非常)이다.
“나는 이미 집을 끊었으므로 다시 끊을 것이 없다”라고 함은 집을 반연하는 4행상에 속하고 “나는 이미 멸을 증득했으므로 다시 증득할 것이 없다”라고 함은 멸을 반연하는 4행상에 속하며 “나는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다시는 닦을 것이 없다”고 함은 도를 반연하는 4행상에 속한다.
[문] 『집이문론(集異門論)』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나는 이미 욕루(欲漏)를 다했다는 것을 사실대로 분명히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지는 어느 행상에 속하는가?
[답] 6행상에 속한다. 고와 비상과 집(集)을 반연하는 네 가지이다.
7) 소연이란 애(愛)와 나머지의 8결(結)과 순결법(順結法)이다. 그것을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어느 것도 단(斷), 즉 멸(滅)을 반연하는 멸(滅)ㆍ정(靜)ㆍ묘(妙)ㆍ이(離)의 4행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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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견온(見蘊)에서 말한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낙수(樂受)를 느낄 때에는 낙수에 대한 느낌을 사실대로 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어느 행상인가?
[답] 거기서는 성도(聖道)를 낙수라는 말[聲]로 설명한 것이니 이것은 도(道)를 반연하는 4행상에 속한다.
[문] 계경에서 말한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계경에서 “나의 생(生)이 이미 다한 것을 사실대로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어느 행상인가?
[답] “나의 생이 이미 다한 것을 사실대로 분명히 안다”라고 함은 집(集)을 반연하는 4행상이요, “범행이 이미 섰다”고 함은 도를 반연하는 4행상이며 “할 일을 이미 마쳤다”고 함은 멸을 반연하는 4행상이요,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함은 고를 반연하는 행상이니 고와 비상을 말한다.
또 다섯 가지 연[五緣]을 말미암아 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요, 행상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연인가?
첫째는 의요(意樂)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가행(加行) 때에 “어떻게 하면 나의 생(生)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게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게 될까?”라고 의요를 일으킨다.
둘째는 대치(對治)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승한 대치를 닦아 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게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게 한다.
셋째는 소작(所作)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뛰어난 할 일[所作]로 말미암아 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게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게 한다.
넷째는 상속(相續) 때문이다. 이와 같은 뛰어난 상속을 얻어서 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게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게 한다.
다섯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를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보특가라로 온갖 생이 다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쉽고 시설하기도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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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섯 가지 연을 말미암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요, 따로 이러한 행상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어느 다른 논사는 “16행상 외에 따로 무루의 지혜가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뒤에서 말한 모든 글은 잘 통하겠지만 『식신론』과 이 논의 지온(智蘊)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어떤 행상이 현재 화합하고 할 일을 이룩하며 작용이 있는 것이면 『식신론』에서나 견온에서도 명료하게 말하였겠지만 그것은 미래수(未來修)이어서 마침내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어떤 행상이 견도(見道)에 들어가 과(果)를 얻고 염(染)을 여의며 모든 번뇌를 다하는 것이면 『식신론』에서나 견온에서도 명료하게 말하였겠지만 그것에는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그 행상은 무학과(無學果)의 뒤에야 비로소 일어나고 앞에 나타나서 현법의 즐거움[現法樂]을 받고 신통에 유희하며 본래 지었던 것을 관하면서 수용(受用)하는 성재(聖財)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행상으로서 가행(加行)ㆍ무간(無間)ㆍ해탈(解脫)ㆍ승진(勝進)의 4도(道)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면 『식신론』에서나 견온에서도 명료하게 나타내 보였겠지만 그 모든 행상은 오직 원가행(遠加行)과 원승진도(遠勝進道)에서만이 비로소 나타나고 생기게 되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16행상 외에 무루의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설명은 이 가운데서 행상에 의하여 따로 세 가지 상[三想]을 건립한 것이니 끊는[斷] 행상과 상응한 생각[想]을 단상이라 하고 여의는[離] 행상과 상응한 생각을 이상이라 하며 소멸하는[滅] 행상과 상응한 생각을 멸상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세 가지 상은 행상에 의하여 따로 세 가지를 건립한 것이요 소연(所緣)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니, 하나하나의 택멸무위(擇滅無爲)에서 이 세 가지 상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하나의 과녁에 세 개의 화살이 꽂힐 때에 그 모양이 각각 다른 것과 같다.
이 설명에 의하면 단상 등의 세 가지 상은 서로가 상즉하지 않은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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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상은 이상인가? 그렇지 않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가령 멸상이면 그것은 이상인가? 그렇지 않다”라고 해야 한다.
[評] “16행상 외에는 따로 무루의 지혜는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도리에서 보아 옳다 하겠으나 여기에서 단상 등의 세 가지 상을 설명하면서 만일 무루라면 서로가 상즉할 것이요 만일 유루라면 단상 등의 세 가지 행상은 서로가 상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결정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4) 애경납식(愛敬納息) ①
[論] 어떤 것이 사랑[愛]인가? 어떤 것이 공경[敬]인가?8)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한 뜻은 이미 이해를 했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만일 참괴(慚愧)를 닦아 익혀 원만함이 있으면 사랑과 공경도 원만하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이 공경인가는 분별하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에서 분별하지 않은 것은 이제 모조리 분별해야 한다.
또 선사(善士)의 법이 아닌 것을 꾸짖고 헐뜯으면서 버리게 하기 위해서요, 모든 선사(善士)의 법을 찬탄하면서 닦아 익히기 위해서이며, 5탁(濁)이 더할 때에 광대한 유정[廣大有情]9)은 심히 얻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법이 아니다 함은 어느 한 무리가 사랑은 있는데 공경에는 거리끼고, 공경은 있는데 사랑에는 거리끼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있는데
8) 애경을 비롯하여 공양(供養)ㆍ공경(恭敬)ㆍ신력(身力)ㆍ심력(心力)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삼종의 열반(涅槃)ㆍ이편지(二編知)ㆍ삼귀(三歸)의 의의 등에 관하여 논구하는 것이 이 장(章)의 목적이다. 제34권까지 이른다. 애경납식이라고 한 것은 처음의 제목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9) 광대한 유정이라 함은 대인(大人), 즉 애와 경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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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에는 거리낀다 함은 마치 어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는 사랑이 지극한데 그 자식은 부모에게 사랑은 있으면서도 공경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스승이 제자에 대한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것 등을 사랑은 있는데 공경에는 거리낀다고 한다. 공경은 있는데 사랑에는 거리낀다고 함은 마치 어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는 엄격한데 그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공경은 있으면서도 사랑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스승이 제자에 대한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
다. 이런 것 등을 공경은 있는데 사랑에는 거리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다 선사의 법이 아니라 한다.
선사의 법이라 함은 어느 한 무리가 사랑하면서 공경을 더하고 공경하면서 사랑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과 공경을 다 함께 행하는 것을 선사의 법이라 한다.
만일 이런 법이 뛰어나게 원만한 이가 있으면 그런 이를 광대한 유정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유정은 심히 얻기 어려운 것이니 세간에 만일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이런 이들은 만나기 어려우며 설령 있다고 한다면 대보살(大菩薩)이니 모든 대보살은 사랑과 공경을 반드시 갖추기 때문이다. 이 일과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인연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사랑인가?
[答] 모든 사랑하고[愛] 평등하게 사랑하며[等愛]10) 기쁘게 하고[喜] 평등하게 기쁘게 하며[等熹] 즐겁게 하고[樂] 평등하게 즐겁게 하는 것[等樂]을 사랑이라고 한다.
이 본론(本論)을 지은 이는 글을 달리하는[異文]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의 글로써 이 사랑을 나타내 보였으나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10) 등애(等愛)ㆍ등락(等樂)의 등(等)은 앞의 등탐(等貪)에서와 같이 강도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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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사랑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오(染汚)11)이니 탐함[貪]을 말하며,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이니 믿음[信]을 말한다.
[문] 모든 탐은 모두가 사랑인가?
[답] 순전구(順前句)를 만들어야 한다. 탐하는 것은 모두가 사랑이면서도 어떤 사랑은 탐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바로 믿음을 말한다.
[문] 모든 믿음은 모두가 사랑인가?
[답] 어떤 이는 “모든 믿음은 모두가 사랑이면서도 어떤 사랑은 믿음이 아니니 염오의 사랑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경계[境]에 대하여 오직 믿기만 하면서 구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경계에 대하여 믿기고 하고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는 마땅히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믿음이면서도 사랑이 아닌 것이 있다. 믿기만 하면서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은 사랑이면서도 믿음이 아닌 것이 있다. 염오의 사랑을 말한다.
어떤 것은 믿음이면서 사랑인 것이 있다. 믿으면서 또한 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은 믿음도 아니면서 사랑도 아닌 것이 있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을 말한다.”
[論] 어떤 것이 공경인가?
[答] 모든 공경함[敬]이 있고 공경하는 성품[敬性]이 있으며 자재함[自在]이 있고 자재한 성품[自在性]이 있으며 자재한 이[自在者]에 대하여 어려워하는[畏怖] 행동이 있는 것을 공경이라 한다.
11) 염오의 사랑은 남녀 간의 애욕과 같은 것을 말하고, 불염오의 사랑은 신애(信愛)와 같은 도덕적 종교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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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론을 지은 이는 글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의 글로써 이 공경을 나타내 보였으나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문] 공경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공경은 참(慚)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論] 어떤 것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愛敬]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 것인가?
[답] 앞에서는 비록 따로따로 사랑과 공경의 자성을 말했으나 아직 통틀어 하나의 경계[一境]에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 못했으므로 지금은 사랑과 공경 두 가지가 하나의 경계에서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불(佛)ㆍ법(法)ㆍ승(僧)ㆍ친교(親敎)ㆍ궤범(軌範)과 그 밖의 어느 한 지혜 있고 존중할 만한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런 이에 대하여 사랑하고 공경이 있으면 이것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어느 한 무리[一類]라 함은 이생(異生)이나 성자(聖者)를 말한다. 이생으로서 부처님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그는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우리들은 재앙과 나라의 역사[王役]며 갖가지의 괴로운 일에서 해탈하고 세간의 모든 살림 도구들을 얻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성자로서 부처님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그는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우리들은 영원히 모든 악취(惡趣)의 인(因)을 버리고 20종의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끊으며 바른 결정(決定)을 얻고
4성제(聖諦)를 보며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모든 괴로운 일 가운데서 이미 분한(分限)12)을 지었다’라고 생각한다.
또 그 둘[二]로서 부처님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다 같이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우리들은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의 성품과 그 밖의 이익과 안락의 자량(資糧)을 얻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타이(鄔陀夷) 존자는 “세존은 우리에게 큰 은덕(恩德)이 있으시다. 우리의 한량없는 괴로움을 건져 주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즐거움을 주시며 우리의 한량없는 악(惡)을 없애 주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선(
善)을 내게 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세존께서는 우리들의 혜안(慧眼)을 열고 내어 주시기 때문에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리자 존자는 “만일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들 모두는 소경으로 나서 소경으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부처님은 법왕(法王)이 되셔서 맨 처음 위없는 바른 법을 열어 보여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뒤바뀜이 없이 잡염(雜染)과 청정(淸淨)ㆍ계박(繫縛)과 해탈(解脫)ㆍ유전(流轉)과 환멸(還滅)ㆍ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분명히 통달하게 하셨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세존께서는 맨 처음에 무명의 알에서 나오셔서 바른 법을 널리 펴 말씀하시고 또한 한량없고 그지없는 유정으로 하여금 무명의 알에서 나오게 하셨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아주 먼 옛날부터 7의(依)의 뛰어난 선정13)은 숨고 가려서 나타나지 않았는데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뒤바뀜 없이 열어 보여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에 의하여 대열반궁(大涅槃宮)에 들게 하셨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12) 분한이란 한계(限界), 즉 생사윤회의 마지막 점에 달한다는 뜻이다.
13) 7의의 뛰어난 선정이란 대개 이하에서 기술한 4념주(念住)로부터 8정도(正道)에 이르기까지의 37도품(道品)의 7과(科)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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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한량없고 그지없는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선법(善法)을 닦게 한 것이니 부정관(不淨觀)으로부터 나아가 무생지(無生智)까지이다. 그 밖의 다른 이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심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해탈하게 하셨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또 그 둘은 부처님에 대하여 다 같이 ‘부처님의 위력 때문에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지(正道支)의 37종의 보리분(菩提分) 등 공덕의 보배 광이 세간에 출현하여 그지없는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 둘로서 법(法)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다 같이 ‘나는 이 법에 의하여 온갖 몸과 마음의 고뇌를 해탈하고 마지막에는 안락하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그 둘로서 승가[僧]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다 같이 ‘승가의 위력 때문에 나는 바른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한 믿음이 청정하여 출가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의 성품을 얻었으며 바르게 백일갈마(百一羯磨)를 받아 지니어 헐거나 범한 것이 없고 안락하게 머무르며 이로 말미암아 빨리 열반을 증득하게 되었다’라고 생각한다.
그의 둘로서 다 같이 친교(親敎)와 궤범(軌範)과 그 밖의 어느 한 지혜 있고 존중할 만하며 범행을 같이하는 이에 대하여 좋아하고 마음에 기뻐하며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면 ‘이 모든 스승과 벗은 나의 반려(伴侶)가 되어 나로 하여금 법에 대하여 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게 하며 빨리 이룩할 수 있게 한다’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삼보(三寶)와 사우(師友)의 뛰어난 경계 안에서는 사랑하고 공경함을 갖춰 일으켜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이에게는 일정하지 않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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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4구를 만들어야 한다.
혹 어떤 경계에서는 사랑은 일으키면서도 공경은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부모가 아들에 대해서와 스승이 제자에 대해서와 같은 것 등이다.
혹은 또 어떤 경계에서는 공경은 일으키면서도 사랑은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유덕(有德)한 이에 대하여 자기 사장(師長)과 같이 대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또 어떤 경계에서는 사랑과 공경을 일으킨다. 마치 어느 한 무리의 아들이 부모에 대해서와 제자가 스승에 대해서와 같은 것 등이다.
혹은 또 어떤 경계에서는 사랑과 공경을 일으키지 않는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다.
[문] 이와 같은 사랑과 공경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답] 삼계(三界)와 5취(趣)에 비록 모두 있을 수는 있으나 여기에서는 뛰어난 사랑과 공경은 오직 욕계의 인취(人趣)에만 있을 뿐이며 그 밖의 다른 데는 있지 않으며 오직 불법 안에서만이 이런 사랑과 공경이 있다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공양(供養)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ㆍ법ㆍ승가와
가르쳐 주는 이에게
공양하고 공경하여야
지혜로운 이[智者].
방일(放逸)하지 않고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에
공양하고 공경하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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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지 않고 열반에 가까워지리.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공양이고 어떤 것이 공경하는 것인가를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해야 한다.
또 선사의 법[善士法]이 아닌 것을 꾸짖고 버리게 하기 위해서요, 모든 선사의 법을 찬탄하면서 닦아 익히기 위해서이며, 5탁(濁)이 더할 때에 광대한 유정은 심히 얻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법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한 무리가 공양은 있는데 공경에는 거리끼고, 또는 공경은 있는데 공양에는 거리끼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공양은 있는데 공경에는 거리낀다고 하는가? 마치 집에서 사는 이[在衆者]나 어떤 남녀가 비록 세력을 갖추고서 갖가지 살림과 진귀한 음식으로 부모에게 공양한다 해도 이 힘을 믿고서 무시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마치 출가한 이나 어떤 제자가 복덕과 견문이 많아서[多聞] 비록 그의 스승에게 갖가지 재물[財]ㆍ법(法)의 공양을 베푼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믿고서 마침내 스승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들은 공양은 있는데 공경에는 거리낀다고 한다.
어떤 것을 공경은 있는데 공양에는 거리낀다고 하는가? 마치 어느 한 무리가 다른 이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비록 그를 공경은 해도 공양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다 같이 선사의 법이 아니라 한다.
선사의 법[善士法]이라 함은 어느 한 무리가 그를 공양하면서도 공경을 더하고 또는 공경하면서도 공양을 더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일을 다 함께 행하는 것을 선사의 법이라 한다.
만일 이런 법에 뛰어나게 원만한 이가 있으면 이런 이를 광대한 유정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유정은 심히 얻기 어렵기 때문에 세간에 만일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런 이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설령 있다면 그는 대보살이니 모든 대보살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갖추기 때문이다.
이 일과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인연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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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공양인가?
[答]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물 공양[財供養]이요, 둘째는 법 공양(法供養)이다.
재물 공양에 대하여 말하겠다.
[문] 재물 공양이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어떤 이는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재물을 버릴 적에 그 버리는 재물이 이것의 자성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공양하는 이[能供養子]의 몸[身]과 말[語]의 두 가지 업(業)이 이것의 자성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심(心)ㆍ심소(心所)의 법을 일으키는 것이 이것의 자성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받는 이가 받은 뒤에 모든 감관[根]의 대종(大種)과 그 밖의 만들어진 물질이 모두 더욱 자라게 되는 것이 이것의 자성이다”라고 말한다.
[評] “버리는 재물이나 버리는 이의 몸과 말의 두 가지 업이나 그 심ㆍ심소의 법을 일으키는 것이나 받는 이가 받은 뒤에 모든 감관의 대종과 만들어진 물질이 더욱 자라게 되는 모두가 이것의 자성이다. 이와 같은 재물의 공양은 통틀어 5온(蘊)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재물 공양이라 하며 재물 공양이란 무슨 뜻인가?
[답] 능히 연(緣)이 된다는 뜻이 공양의 뜻이다. 이것은 재물로써 시초를 삼기 때문에 재물 공양이라 한다.
만일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재물을 버리고 받는 이는 받은 뒤에 몸과 마음이 더욱 이익되면 이와 같은 것을 보시[施]라 하고 또한 공양이라 한다.
만일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재물을 버리고 받는 이가 받은 뒤에 몸과 마음이 손해되면 이와 같은 것은 보시라고는 하되 공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마땅하지 않은 물건[匪宜物]을 버리고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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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받은 뒤에 신통이나 주약(呪藥)이나 복력(福力)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더욱 왕성해지면 이것은 비록 보시는 아니라 해도 공양이라고는 한다.
만일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마땅하지 않은 물건을 버리고 받는 이가 받은 뒤에 몸과 마음이 손해되면 이것은 보시도 아니고 공양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문] 이 재물 공양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답] 오직 욕계에만 있고 색계에나 무색계에는 없으며 오직 4취(趣)에만 있고 나락가(㮈落迦)에는 없다.
[문] 이 재물 공양은 누가 베풀고 누가 받는가?
[답] 어떤 이는 “방생취(傍生趣)에서 베풀면 오직 방생취만이 받고 나아가 천취(天趣)에서 베풀면 오직 천취만이 받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방생취에서 베풀면 오직 방생취만이 받지만 귀취(鬼趣)에서 베풀면 두 가지 취[二趣]14)에서 받고, 인취(人趣)에서 베풀면 세 가지 취[三趣]에서 받으며 천취(天趣)에서 베풀면 네 가지 취[四趣]에서 받는다. 아래서는 위에 미치지 않지만 위에서는 아래에 미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네 가지 취에서는 모두 서로가 공양할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시설론(施設論)』에서 “하늘이 음식을 먹으려 할 때는 빈 보배 그릇을 가져다 옷으로 위를 덮고 자리 앞에 놓아두면 잠깐 만에 그의 복력에 따라 거칠거나 미묘한 음식이 저절로 가득 찬다”라고 하였다. 이미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이의 공양을 받는다는 것인가?
[답] 비록 다른 이의 음식 공양은 받지 않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향과 꽃과 자구(資具)는 받는 것이 있다.
법 공양(法供養)에 대하여 말하겠다.
[문] 법 공양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어떤 이는 “설법하는 이의 말[語]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14) 두 가지 취는 귀취와 방생취이니, 이하의 세 가지 취ㆍ네 가지 취에도 이에 준하여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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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다른 논사는 “말이 일어나는 데를 자성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말을 일으키는 심ㆍ심소의 법을 자상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받는 이가 들은 뒤에 일찍이 없던 선교(善巧)한 각혜(覺慧)를 내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評] “설법하는 이의 말이나 말을 일으키는 심ㆍ심소의 법이나 받는 이가 들은 뒤에 전에 없던 선교한 각혜를 내는 것은 모두가 이것의 자성이어서 이와 같은 법 공양은 통틀어 5온(蘊)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법 공양이라 하며, 법 공양이란 무슨 뜻인가?
[답] 능히 연(緣)이 된다는 뜻이 공양의 뜻이다. 이것은 법으로써 시초를 삼기 때문에 법 공양이라 한다.
만일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법을 말하고 다른 이가 그 법을 듣고 나서 전에 없던 선교한 각혜를 내면 이와 같은 것을 보시라 하고 또한 공양이라 한다.
만일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다른 이를 위하여 법을 말하고 다른 이가 그 법을 들은 뒤에 전에 없던 선교한 각혜가 생기지 않으면 이는 보시라고는 하나 공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다른 이를 비방하는 법을 말하고 다른 이가 그것을 들은 뒤에 바르게 기억하면서 기뻐하며 참고 받아 그런 허물을 되풀이 하지 않고 전에 없던 선교한 각혜가 생기면 이것은 비록 보시는 아니나 공양이라고는 한다.
만일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다른 이를 헐뜯는 법을 말하고 다른 이는 이것을 들은 뒤에 성내는 마음을 내고 전에 없던 선교한 각혜가 생기지 않으면 이것은 보시도 아니고 또한 공양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문] 이 법 공양은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답] 이 법 공양은 욕계와 색계에 있는 것이요 무색계에는 있지 않으며 5취(趣)에는 모두가 있다.
지옥에 있다 함은 마치 자수자(慈授子)가 지옥 안에 나서 이것은 욕실(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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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이라 하면서 모든 고통 주는 도구[苦具]를 보고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듣건대 세간에서 고락(苦樂)을 받는 것은
나도 아니요 남이 짓는 것이 아니며
모든 고락 받는 것은 모두 몸을 반연하니
몸이 사라져 없어지면 누가 다시 받겠는가.
그때 그 지옥의 한량없는 중생들은 이 게송을 들은 뒤에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거기서 목숨을 마치고는 천상에 나서 쾌락을 받았다.
방생(傍生)에 있다 함은 마치 가빈절라조(迦賓折羅鳥)가 스스로 범행(梵行)을 닦아 다른 이를 위하여 설법한 것과 같다.
귀취(鬼趣)에 있다 함은 마치 발애귀모(發愛鬼母)가 모든 귀자(鬼子)들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잠자코 있어라, 너 상승(上勝)아
잠자코 있어라, 너 정숙(井宿)아
내가 견제(見諦)를 얻었을 때에
역시 너희들도 보게 하리라.
인취(人趣)에 있다 함은 마치 지금 현실에서 보는 것과 같다.
천취(天趣)에 있다 함은 욕계천(欲界天) 안에서 마치 보처(補處) 자존(慈尊)께서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것과 같다.
색계천(色界天) 안에서는 마치 수천자(手天子)가 와서 부처님께 “여기 세존께서 에워싸고 있는 사중(四衆)을 위하여 바른 법을 말씀하시고 그들은 듣고 나서 받들어 행하듯이 저도 법을 들은 뒤에 무열천(無熱天)에 돌아가서 그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법을 말하여 역시 그렇게 하리이다”라고 아뢴 것과 같다.
[문] 이 법 공양은 누가 베풀고 누가 받는가?
[답] 어떤 이는 “지옥취에서 베풀면 오직 지옥취만이 받고 나아가 천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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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면 오직 천취만이 받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지옥취에서 베풀면 오직 지옥취만 받고, 방생취에서 베풀면 두 가지 취[二趣]에서 받으며, 귀취에서 베풀면 세 가지 취[三趣]에서 받고, 인취에서 베풀면 네 가지 취[四趣]에서 받으며, 천취에서 베풀면 다섯 가지 취[五趣]에 다 받는다”라고 말한다.
[評] “다섯 가지 취에서 모두 서로가 공양할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論] 어떤 것이 공경(恭敬)하는 것인가?
[答] 모든 공경함이 있고 공경하는 성품[恭敬性]이 있으며 자재함[自在]이 있고 자재하는 성품[自在性]이 있으며 자재한 이[自在者]에게 어려워하는 행동이 있는 것을 공경한다고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글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의 글로써 공경함을 드러내 보였으나 그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공경도 참(慚)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4) 애경납식 ②
[論] 어떤 것이 공양(供養)하고 공경(恭敬)하는 것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따로따로 공양과 공경의 자성을 말했다 해도 아직 통틀어 하나의 경계[一境]에서 움직이는 것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이 두 가지가 하나의 경계에서 움직이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공양하고 공경하는 것인가?
[답] 마치 어느 한 무리가 불(佛)ㆍ법(法)ㆍ승(僧)ㆍ친교(親敎)ㆍ궤범(軌範)과 그 밖의 다른 어느 한 지혜가 있고 존중할 만한 범행을 같이하는 이에 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른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런 이에 대
1) 앞에서 애와 경을 따로따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합하여 애경을 한 군데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공양과 공경을 한 군데 합쳐서 설명하기 위하여 공양ㆍ공경이라는 제목으로 논하고 있다. 공양ㆍ공경을 받는 대상과 공양하는 처소 등에 관한 설명은 대체로 앞의 애경의 경우와 같다. 그리고 여기서는 부처님은 다른 이로부터 법의 공양을 받는 것이 없지만 다른 이를 장려하기 위하여 제자 등으로 하여금 설법하게 하고 독경하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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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공양하고 공경함이 있는 것을 공양하고 공경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한 무리[一類]라는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이 이생(異生)이나 성자(聖者)를 말한다.
부처님에 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른 이는 오직 재물 공양만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를 뿐이며 법 공양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이미 마지막 경지[究竟]를 증득하셨으므로 다른 이로부터 법을 받아 배우지 않기 때문이며 또 어떤 이도 세존을 위하여 설법하여 미증유(未曾有)의 선교한 각혜(覺慧)를 내게 할 수 있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법에 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른다는 것에 대하여 어떤 책[本]에서는 “법을 공경하고 공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열반에 대하여 연(緣)이 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공양을 말하면서 연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열반에는 연이 없으므로 이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책에서 말한 것은 비록 열반에는 생장(生長)한다는 뜻이 없다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히 나타나게 하는 뜻이 있다. 재물[財]과 법(法)으로써 열반에 공양하여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공경하면서 증득[證]을 구하게 하면 이로 말미암아 차츰차츰 장애를 끊고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속(世俗)2)이니 명신(名身) 등의 법을 말하며, 둘째는 승의(勝義)이니 구경(究竟)의 열반을 말한다.
비록 뛰어난 법에서는 생장한다는 뜻이 없다 해도 세속의 법에서는 생장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법에 대해서도 공경하고 공양한다는 것이 있다.
[문] 모든 법에 베푼 물건은 누가 그것을 받아야 하는가?
2) 여기의 세속법은 설법과 경론 등 무루지(無漏智)를 발생하게 하는 데 조연(助緣)이 되는 것을 가리키며, 승의법은 그 무루지에 의하여 일으키고 얻게 되는 열반을 가리킨다. 전자에 공경한다는 것은 설법을 들으며 경론을 독송하는 일에 대하여 따라 기뻐하고 공경하면서 공양물을 바치는 것을 말하며, 후자에 공양한다는 것은 대개 법신(法身)으로서의 불타에게 공양한다는 뜻이지만 역시 부처님의 사리(舍利)에도 이에 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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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세속의 법에 베푼 물건은 법을 말씀한 법사가 받아야 하고 혹은 이로써 바른 법을 쓰거나 베끼는 데에 써야 할 것이며, 뛰어난 법에 베푼 물건은 힘써 더욱 수호해야 함은 마치 솔도파(窣堵波)의 물건을 수호하듯 해야 한다.
승가[僧]에 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른 것에는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이 다 통한다.
재물 공양이라 함은 향과 꽃과 옷과 음식 등의 물건을 승가 대중들에게 공양하고, 혹은 오년대회(五年大會)3) 등을 베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재물로써 승가에게 공양[財供養僧]한다고 한다.
법 공양이라 함은 삼계성(三契聲)4) 등으로써 대중을 위하여 바른 법을 널리 펴 말씀하고, 혹은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논의(論議)하여 결택(決擇)하며 혹은 또 대중에 있으면서 찬미하고 소원을 진실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는 것이니 모든 이러한 것 등을 법으로써 승가에게 공양한다[法供養僧]고 한다.
친교사와 궤범사와 그 밖의 어느 한 지혜 있고 존중할 만한 범행을 같이하는 이에 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공경하면서 머무른 것에는 역시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이 다 통한다.
재물 공양이라 함은 옷ㆍ바리ㆍ음식ㆍ탕약(湯藥)과 그 밖의 어느 하나의 사문(沙門)이 쓰는 살림으로써 공양하는 것을 말하며 법 공양이라 함은 삼장(三臧)을 받아 지니기를 권하고, 혹은 그들을 위하여 해석해 주어 의심이나 걸림이 없게 하며 혹은 또 권하고 청하면서 바른 행을 닦게 하는 모든 이와 같은 것 등을 법 공양이라 한다.
위에서 설명한 삼보(三寶)와 사우(師友)와 뛰어난 경계 안에서는 응함에 따라 공양하고 공경하면서 머무를 것이며 그 밖의 나머지 경계 안에서는 결정되어 있지 않는 것이므로 앞의 것에 준(準)하여 설명해야 한다.
[문] 공양하고 공경하는 것은 어느 곳에 갖추어져 있는 것인가?
3) 오년대회는 오년마다 사방의 스님을 청하여 큰 재회(齋會)를 베푸는 것이니 무차대회(無遮大會)라는 것이 이것이다.
4) 삼계성이라 함은 곡조를 삼단(三段)으로 변하면서 게송을 읊는 것인데 역시 이러한 게문(偈文)을 삼계경(三契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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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욕계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요 색계와 무색계에는 그렇지 않다. 욕계 안에서도 4취(趣)에는 갖추어져 있지만 나락가(㮈洛迦)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니 지옥 안에는 재물 공양은 없고 오직 법 공양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문] 이 재물과 법 공양은 누가 베풀고 누가 받는 것인가?
[답] 부처님은 온갖 유정들에 대하여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을 베풀고 그들은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지만 온갖 유정은 부처님에 대하여 응함에 따라 재물의 공양을 베풀 수 있되 법 공양은 베풀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부처님을 위하여 법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없기 때문이요, 부처님께 미증유의 선교한 각혜를 낼 수 있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독각(獨覺)은 부처님을 제외한 온갖 유정에게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을 베풀 수 있고 그들은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지만 온갖 유정은 독각에게 응한 것에 따라 재물의 공양은 베풀 수 있되 법 공양은 베풀지 못한다.
사리자(舍利子)는 부처님과 독각을 제외한 온갖 유정에 대하여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을 베풀 수 있고 그들은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지만 온갖 유정은 사리자에게 응한 것에 따라 재물의 공양은 베풀 수 있되 법 공양은 베풀지 못한다.
대목건련(大目乾連)은 부처님과 독각과 사리자를 제외한 온갖 유정에게는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을 베풀 수 있고 그들은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지만 온갖 유정은 대목건련에게 응한 것에 따라 재물의 공양은 베풀 수 있되 법 공양은 베풀지 못한다.
나아가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는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에게 응함에 따라 재물과 법의 두 가지 공양을 베풀 수 있고 그는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지만 근기가 둔한 이는 근기가 예리한 이에게 응함에 따라 재물의 공양은 베풀 수 있되 법 공양은 베풀지 못하며 그는 응한 것에 따라 받을 수 있다.
[문] 만일 법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는 이가 없다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비구여, 잘하고 잘했도다. 너는 온화하면서도 곱고 맑으면서도 오묘하며 명료하면서도 알기 쉽게 아름다운 음성으로써 바른 법을 읊고 외워서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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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답] 세존께서는 문구지이(聞俱胝耳)로 하여금 무외(無畏)를 얻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요, 부처님께서 그에게 법 공양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친교(親敎) 가다연나(迦多衍那)가 그를 부처님께로 보내어 변방 나라 추운 땅에 사는 비구들을 위하여 다섯 가지 일[五事]을 청구하게 한 것이니, 첫째는 언제나 목욕을 하는 것이요, 둘째는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깔개를 만드는 것이요, 셋째는 항상 발을 다 덮는 가죽신을 신게 하는 것이요, 넷
째는 계율을 지니는 이가 다섯 사람만 되면 구계(具戒)를 받을 수 있는 것5)이요, 다섯째는 만일 어떤 비구가 옷을 가져다가 다른 비구에게 주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그 비구가 만일 받지 않으면 저희들은 그 옷을 어떻게 처분해야 되는가를 청하게 한 것이다.
문구지이는 친교의 명을 받아 부처님께로 갔었으나 세존의 위엄과 중후함은 제석(帝釋)ㆍ범왕(梵王)ㆍ호세(護世)조차도 오히려 가까이서 똑바로 뵐 수 없거늘 하물며 그가 감히 신청할 수 있었겠는가.
부처님은 그 일을 아시고 아난에게 “너는 그를 나의 침실(寢室)로 데리고 가서 침구를 펴 주고 편히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난은 분부대로 하였다.
부처님은 같이 머무르게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 그의 피로가 풀린 것을 아시고 그에게 “너는 나를 위하여 알고 있는 법을 외워 보도록 하라”고 하시어 문구지이가 삼계성으로써 알고 있던 법을 외우자 세존께서는 기뻐하시면서 그로 하여금 두려움이 없는 것[無所畏]을 얻고서 청할 것을 말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찬탄하면서 “잘하고 잘 했도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는 그가 과거에 닦았던 업도(業道)가 청정하여 이런 아름다운 음성을 얻게 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듣기 좋게 하는 것을 찬탄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요, 그에게서 법 공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
5) 중국에서는 스님 10인이 입회하면 구족계를 받는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변방 나라에서는 스님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수계자(授戒者)까지 합쳐서 5인만 되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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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세존께서는 그가 『바라연나견제경(波羅衍拏見諦經)』 등을 잘 외우고 지니어 있는 것을 찬탄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요, 그에게서 법 공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그 비구는 풍마국(豊馬國)에 있으면서 모든 불사(佛事)를 지었으므로 세존께서는 그것을 찬탄하셨고, 다시 그 나라의 한량없는 유정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정중하게 법을 받들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요 그에게서 법 공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께서 제자를 찬탄하시는 데는 많은 인연이 있어서요 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은 그에게 두려움이 없는 마음[無畏心]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하는데 지금 문구지이를 찬탄하는 것과 같으며, 혹은 그의 비방하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는데 마치 무멸(無滅) 비구에게 ‘나는 지금 등이 아프다. 너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가깝고 견고한 법을 널리 설하도록 하라. 오직 너만이 그러한 훌륭한 일을 말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은 그의 말에 위력과 엄숙함이 있게 하시기도 하는데 마치 목련에게 ‘오직 너만이 겁비라성(劫比羅城)의 모든 석종(釋種)들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하신 것과 같으며, 혹은 그의 공덕이 큰 것을 나타내려고 하시기도 하는데 마치 부처님께서 사리자의 말을 찬탄하시면서 ‘네가 설법을 잘 하는 것이 마치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며 네가 말한 것은 결정된 설[決定說]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문] 그 밖의 다른 계경의 말씀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장하고 장하도다. 네가 말한 것과 같아서 정진하면 빨리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나는 너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한다’라고 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답] 부처님께서는 경희(慶喜)가 말한 것이 때에 알맞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요 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박가범(薄伽梵)께서 유정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일찍이 먼 길을 걸으셨으므로 피로하여 등이 아프시자 한 나무 아래로 가셔서 7조(條)를 네 겹으로 개켜 침구로 삼고 5조(條)로써는 몸을 덮으시고 승가지(僧伽胝)로는 베개를 삼아 마치 사자왕처럼 오른 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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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를 대고 누우시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해 주어라. 헛되이 지내서는 안 되느니라.”
그때에 아난은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비구들을 위하여 7각지(覺支)를 말하였다.
“그대들이여, 염등각지(念等覺支)는 우리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염(厭)ㆍ이(離)ㆍ멸(滅)에 의하여 사(捨)에 회향하고 이처럼 나아가 사등각지(捨等覺支)의 자세한 설명도 그러합니다.”
세존께서는 그가 정진(精進)을 말하는 것을 들으셨을 때에 곧 과거의 기억과 지견(智見)을 일으키면서 ‘나는 과거 3무수겁(無數劫) 동안 정진한 힘으로 말미암아 닦은 가행(加行)이 속히 원만하게 되어서 빨리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신 뒤에 뛰어난 기쁨을 내셨으며 이 기쁨의 힘을 말미암아 등의 고통이 이내 나았으므로 이윽고 일어나셔서 옷을 매만지고 가부하시고 앉아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대중을 위하여 정진을 말하였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그를 찬탄하시면서 “장하고 장하구나. 나는 정진을 말미암아 속히 보리를 증득한 것인데 네가 이제 그것을 말한 까닭에 나는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때에 맞는 설법을 찬탄한 것이요 공양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문] 비나야(毘奈耶)의 설명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아난아, 나는 지금 벗어남[出離]의 선법(善法)이 더욱 더한지라 지극히 기뻐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다른 이의 법 공양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벗어남의 선법이 더욱 자랐겠는가?
[답] 부처님은 다른 이의 일을 당신의 일로 여기셨기 때문에 다른 이의 선법이 더하자 곧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유정들은 대부분이 부처님 법에 의하여 청정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3장(臧)을 외워 지니며 아련야에 있으면서 고요히 사유(思惟)하고 정결정(正決定)6)에 들어가
6) 정결정에 들어간다고 함은 정성이생위(正性離生位:見道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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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위를 얻고 욕심을 여의며 나아가 번뇌가 다하는 것이며 혹은 천상에 태어나고 해탈의 종자를 심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일을 아시면서 몹시 크게 기뻐하며 ‘한량없는 유정들은 나의 위력으로써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선법이 더욱 자라게 된다. 그들이 한 일은 곧 나의 일이므로 몹시 경사스럽고 기쁘구나’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요, 세존께서는 결정코 다른 이에게 법 공양을 받지는 않는다. 법신(法身)의 공덕은 지극히 원만하기 때문이거니와 생신(生身)은 반드시 의복ㆍ음식 등의 도움을 기다리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서 재물의 공양을 받는
것이 있다.
[論] 어떤 것이 몸의 기력[身力]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이의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身劣]에는 따로 자체(自體)가 없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들은 “마음에 힘이 있을 때를 몸의 기력이라 하고, 마음에 힘이 없을 때를 몸의 열약이라 하기 때문에 몸의 기력과 열약에는 따로 자체가 없다”라고 말하므로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몸의 기력과 열약에는 따로 자체가 있으며 촉처(觸處)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또 어떤 이는 “몸의 기력 자체는 곧 정진(精進)이요 몸의 열약의 자체는 곧 해태(懈怠)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법밀부(法密部)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중지시키고 따로따로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이 있으며 정진 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에는 결정된 자체가 없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코끼리의 힘은 말보다 세고 말의 힘은 소보다 세기 때문에 힘이 세고 열약한 것에는 정해진 자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이의 집착을 차단시키고 몸의 기력과 열약에는 정해진 자체가 있으며 촉처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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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법의 자성(自性)은 일정하기 때문에 모든 유위의 법[有爲法]에는 모두가 승함[勝]과 열함[劣]의 자체가 결정되어 있다. 마치 눈이 빛깔을 보면서 명료하면 잘 본다[勝見]고 하고 명료하지 않으면 잘 못 본다[劣見]고 하는 것처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뜻[意]이 모든 법을 아는 것에 있어서도 그와 같아서 그 안에는 각각 승열(勝劣)의 정해진 성품이 있는 것이니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만일 몸의 기력과 열약에 정해진 성품이 있다 한다면 비유자의 문난(問難)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비록 코끼리와 말 등에 상대되는 승열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정해진 자체는 있다. 말은 코끼리에 대하면 하열한 대종(大種)이 많고 힘을 쓰는 대종은 적지만 말을 만일 소에 대하면 하열한 대종은 적으면서도 힘을 쓰는 대종은 많다. 말에서처럼 그 밖의 종류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기력이 있고 열약한 것의 대종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상대하는 때에 이름은 비록 일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자체는 항상 구별된다.
이와 같이 다른 종(宗)의 달리하는 집착을 중지시키기고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에는 실로 따로 자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몸의 기력인가?
[答] 모든 몸의 용감하고[勇] 사납고[猛] 강하고[强] 씩씩하고[健] 가뿐하고[輕] 민첩하면서[捷] 이룩한 것이 있는 것을 몸의 기력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글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의 글로써 몸의 기력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나 그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論] 어떤 것이 몸의 열약[身劣]인가?
[答] 모든 몸의 용감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고 씩씩하지도 않고 가뿐하지도 않고 민첩하지도 않으면서 이룩한 것도 없는 것을 몸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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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글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의 글로써 몸의 열약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나 그 체에는 차별이 없다.
[論]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은 몇 가지 처(處)에 속하고 몇 가지 식(識)으로 아는 것인가?
[答] 한 가지 처에 속하니 촉처(觸處)이고, 두 가지 식으로 아니 신식(身識)과 의식(意識)이다.
여기에서 신식은 오직 그의 자상(自相)만을 알며 의식은 그의 자상과 공상(共相)까지 안다. 이 말은 곧 분별론자(分別論者)의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에는 따로 자체가 없다”고 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이 두 가지에는 따로 자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만일 자체가 없다면 촉처에 속하거나 두 가지 식으로 알 것이 아니어야 하니 마음에 힘이 있고 없는 것은 촉처에 속하거나 두 가지 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마치 두 역사(力士)가 서로 씨름할 때에 손목이 겨우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강약(强弱)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현실적인 일을 비유로 인용하여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로 하여금 다 함께 환히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니 이를 말미암아 곧 법밀부(法密部)의 ‘몸의 기력은 바로 정진이요, 몸의 열약은 바로 해태이다’라고 하는 집착을 차단하고 몸의 기력과 열약한 것은 정진 등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손목이 겨우 스치기만 해도 어찌 그의 강약을 겨우 알 수 있겠는가? 정진과 해태는 손의 접촉으로써 곧 알 수 있는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또 마치 강자(强者)가 약자(弱者)를 잡을 때에 힘의 우열을 서로 아는
것도 그와 같다.
여기에서 논주는 두 번째 비유를 인용하여 이 뜻을 거듭 나타내어 알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곧 비유자의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은 결정된 자체가 없다’라고 하는 집착을 차단하고, 이 두 가지에는 결정된 자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잡자마자 우열을 알지 못해야 하니 상대한 가법(假法)은 결정코 신식(身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어떤 이는 “대종(大種)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문] 어느 대종이 더하면 몸의 기력이라 하고 어느 대종이 더하면 몸의 열약이라 하는가?
[답] 어떤 이는 “대종이 치우치게 더하는 것은 없어도 4대종으로서 강하고 뛰어난 것이 있으면 몸의 기력이 있다 하고 파리하고 약한 것이 있으면 몸의 열약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계(地界)가 더하기 때문에 몸의 기력이라 하고, 수계(水界)가 더하기 때문에 몸이 열약이라고 한다. 바깥의 물건도 그러하여 담산목(擔山木)7) 등은 지계가 더하기 때문에 그 바탕은 견고하고 강하지만 버들[柳]ㆍ줄[苽]ㆍ박[瓠] 등은 수대(水大)가 더하기 때문에 그 바탕은 허약하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은 4대종은 아니며 이것으로 만들어진 촉[所造觸]이다”라고 말한다.
[문] 7소조촉(所造觸)8) 중에서 어느 것이 더하기 때문에 몸의 기력이라 하고 어느 것이 더하기 때문에 몸의 열약이라 하는가?
7) 담산목을 구역(舊譯)에서는 타바수(陀婆樹)ㆍ가타라수(佉陀羅樹)ㆍ비바수(毘婆樹)ㆍ바타라수(婆陀羅樹) 등이라고 역한다.(舊譯 第16卷)
8) 7소조촉이라 함은 신식(身識)으로 받아들이는 일곱 가지 감각이니 활성(滑性)ㆍ삽성(澁性)ㆍ중성(重性)ㆍ경성(輕性)ㆍ냉(冷)ㆍ기(飢)ㆍ갈(渴)을 말한다. 여기에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의 네 가지를 가하여 11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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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무거운 것[重]이 더하기 때문에 몸의 기력이라 하고, 가벼운 것[輕]이 더하기 때문에 몸의 열약이라 한다. 바깥의 물건도 그러하여 무거운 것은 바탕이 강하고 가벼운 것은 바탕이 약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만들어진 촉이지만 그 일곱 가지에는 속한 것이 아니다. 일곱 가지 외에 따로 만들어진 촉이 있어서 몸의 기력이요 몸의 열약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評] “4대종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촉은 다 같이 몸의 기력과 몸의 열약의 자성이다. 만일 조화(調和)와 함께하면 몸의 기력이라 하고, 만일 조화되지 않은 것[不調和]과 함께하면 몸의 열약이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마치 계경에서 “보살의 몸에는 나라연(那羅延)의 힘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힘은 그 양(量)이 얼마 만큼인가?
어떤 이는 “열 마리 보통 소[凡牛]의 힘은 한 마리 뛰어난 소[一豪牛]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뛰어난 소의 힘은 한 마리 푸른 소[靑牛]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푸른 소의 힘은 한 마리 보통 코끼리[凡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보통 코끼리의 힘은 한 마리 향상(香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향상의 힘은 한 명의 대낙건나(大諾健那)9)의 힘과 똑같고, 열 명의 대낙건나의 힘은 한 명의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의
힘과 똑같으며, 열 명의 발라색건제의 힘은 반 명의 나라연(那羅延)의 힘과 똑같고, 둘 반[二半] 명의 나라연의 힘은 한 명의 나라연의 힘과 똑같은데 보살의 몸의 힘은 이 힘과 똑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양은 너무도 적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열 마리 보통 소의 힘은 한 마리 뛰어난 소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뛰어난 소의 힘은 한 마리 푸른 소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푸른 소의 힘은 한 마리 보통 코끼리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보통 코끼리의 힘은 한 마리 야상(野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야상의 힘은 한 마리 갈나로하상(羯拏魯訶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갈나로하상의 힘은 한 마리 아라택가상(阿羅擇迦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아라택가상의 힘은 한 마리 긍기락가상(殑耆洛迦象)
9) 대낙건나ㆍ발라색선제ㆍ나라연 등은 모두가 신(神)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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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긍기락가상의 힘은 한 마리 설산상(雪山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설산상의 힘은 한 마리 향산상(香山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향산상의 힘은 한 마리 청산상(靑山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청산상의 힘은 한 마리 황산상(黃山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황산상의 힘은 한 마리 적산상(赤山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적산상의 힘은 한 마리 백산상(白山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백산상의 힘은 한 마리
온발라상(嗢鉢羅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온발라상의 힘은 한 마리 구모타상(拘牟陀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구모타상의 힘은 한 마리 발특마상(鉢特摩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발특마상의 힘은 한 마리 분다리가상(奔茶利迦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분다리가상의 힘은 한 마리 발특막가상(鉢特莫迦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발특막가상의 힘은 한 마리 대발특막가상(大鉢特莫迦象)의 힘과 똑같으며, 열 마리 대발특막가상의 힘은 한 마리 대
향상(大香象)의 힘과 똑같고, 열 마리 대향상의 힘은 한 명의 대낙건나(大諾健那)의 힘과 똑같고 열 명의 대낙건나의 힘은 한 명의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의 힘과 똑같으며, 열 명의 발라색건제의 힘은 한 명의 사랑가(娑浪伽)의 힘과 똑같고, 열 명의 사랑가의 힘은 한 명의 벌랑가(伐浪伽)의 힘과 똑같으며, 열 명의 벌랑가의 힘은 한 명의 차노라(遮怒羅)의 힘과 똑같고, 열 명의 차노라의 힘은 한 명의 벌라차노라(伐羅遮拏羅)의 힘과 똑같으며, 열
명의 벌라차노라의 힘은 반 명의 나라연(那羅延)의 힘과 똑같고, 두 반 명의 나라연의 힘은 한 명의 나라연(那羅延)의 힘과 똑같은데 보살의 몸의 힘은 이 힘과 똑같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양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 안에는 열여덟 개의 큰 뼈마디[大節]가 있는데 이 낱낱의 큰 뼈마디에는 모두 한 명의 나라연의 힘이 있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양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 안에는 열여덟 개의 큰 뼈마디가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큰 뼈마디에는 열여덟 명의 나라연의 힘이 있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양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 안에는 크고 작은 것을 통틀어 320개의 뼈마디가 있는데 그 가장 작은 뼈마디에는 한 명의 나라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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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있고 그 다음의 큰 뼈마디에는 두 명의 나라연의 힘이 있으며 점차로 그 큰 것은 힘도 갑절의 갑절을 더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이는 또 “이 양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의 힘은 천 마리 애라벌나(藹羅伐拏) 용상왕(龍象王)의 힘과 똑같다고 해야 한다.
이 상왕의 힘은 그 양이 어떠한가? 이 상왕의 온몸은 산뜻하면서 흰 것이 마치 구모타(拘牟陀)의 흰 연꽃 빛깔과 같고 일곱 개의 팔다리로 버티어 서며 여섯 개의 어금니가 갖추어져 있고 그 머리는 붉은 것이 마치 인달라구박가(因達羅瞿博迦)의 빛깔과 같으며 왼쪽ㆍ오른쪽의 겨드랑은 각각 두 유선나(踰繕那) 반이요, 몸의 앞뒤 부분은 각각 한 유선나이며 둘레의 몸의 분량은 일곱 유선나요, 높낮이는 오직 한 유선나 반일 뿐이다. 이것은 보통 때의 몸이요
변화한 몸은 일정하지 않다.
이 상왕에는 8천 용상의 권속이 있는데 몸은 모두가 산뜻하면서 흰 것이 마치 구모타와 같고, 여섯 개의 어금니가 갖춰져 있으며 일곱 개의 팔다리로 버티어 서고 그 머리는 붉어서 마치 으뜸가는 연지(烟脂)와 같다. 만일 전륜왕(轉輪王)이 세간에 출현하면 이 여러 코끼리 가운데서 어느 한 마리가 와서 응(應)한다.
삼십삼천(三十三天)이 장차 동산에 가서 재미있게 놀려고 하면 하늘의 복력(福力) 때문에 그런 마음을 내자마자 대상왕(大象王)의 어금니에 기이한 빛깔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하늘 제석[天帝釋] 등이 지금 나를 타고 동산에 들어가 재미있게 놀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이 섬부주(贍部洲)에서 없어져 하늘 제석의 궁전 앞에 가서 나타난다.
그리고는 몸 위에 서른두 개의 머리를 변화로 내는데 모두 여섯 개의 어금니를 갖추고 본래의 머리 빛깔과 같이 되며 이 머리와 본래 있던 것과 합쳐서 서른세 개가 있게 된다. 하나하나의 어금니 위에는 일곱 개의 못을 변화로 만들고 그 낱낱의 못 안에는 일곱 송이의 연꽃이 있게 하며 그 낱낱의 꽃 위에는 7보(寶)로 된 저택[院]이 있게 하고 그 낱낱의 저택 안에는 7보로 된 대(臺)가 있게 하며 그 낱낱의 대 안에는 7보로 된 장막[帳]이 있게
하고 그 낱낱의 장막 안에는 일곱 명의 천녀(天女)가 있게 하며 그 낱낱의 천녀에게는 일곱 명의 시자(侍子)가 있게 하고 그 낱낱의 시녀에게는 일곱 명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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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伎女)가 있게 하여 모든 음악을 연주하게 한다.
이런 변화를 짓고 나면 그때에 하늘 제석과 모든 권속들은 그의 본래의 머리에 올라타며 삼십이천(三十二天)과 모든 권속들은 변화로 된 서른두 개의 머리에 올라타고 그 밖의 십천(十千) 성(城)의 모든 하늘의 가족들은 그의 등 위에 올라타는데 그의 몸이 가벼이 날아 올라가는 것은 회오리바람이 연꽃 송이에 불고 혹은 자작나무 껍질이 나부끼듯 공중을 타고 재미있게 놀 동산으로 나아간다.
그때에 모든 하늘들은 도무지 자기의 앞뒤에 있는 이들을 보지 못하며 도달한 뒤에야 다 같이 내려서 저마다 놀 숲으로 나아가 즐거워하면서 쾌락을 받는다.
그 용상도 자신의 몸을 변화하여 천자(天子)의 형상과 같이 되어서 재미있게 놀며 쾌락을 받는다. 이 애라벌나는 그 힘이 이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힘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 안에는 열여덟 개의 큰 뼈마디가 있는데 그 낱낱의 큰 뼈마디에는 모두가 천 마리 애라벌나 용상왕의 힘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이는 또 “이 힘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몸 안에는 크고 작고를 통틀어서 320개의 뼈마디가 있는데 그 가장 작은 뼈마디에는 천 배의 애라벌나 용상왕의 힘과 같은 것이 있으며 점차로 큰 것의 힘은 그 갑절의 갑절씩 증가한다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이 힘도 오히려 적다. 보살의 뜻의 힘[意力]은 끝이 없으며 몸의 힘[身力]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옛날 보살이 길상인(吉祥人)의 곁에서 길상초(吉祥草)를 받아 보리수(菩提樹)에 나아가 스스로 깔아 자리를 삼고 가부하고 앉아 이런 견고한 원을 세우셨다.
‘만일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다하지 못하고 무상보리를 증득하지 못하면 나는 끝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무상보리가 미래 세상에서 현재로 들어오려 하는 그때에 삼천대천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지만 보살은 머리털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보살의 몸의 힘은 마치 뜻의 힘과 같아서 그 양은 끝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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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계경에서 보살의 몸에는 나라연(那羅延)의 힘이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이 힘은 세간이 다 함께 공경하고 중히 여기기 때문에 비유로 삼은 것이지 실은 그렇지가 않다.
[문] 보살은 무슨 연유로 이런 몸의 힘을 쌓으셨는가?
[답] 소유하신 모든 것이 뛰어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색력(色力)ㆍ족성(族姓)ㆍ자재(自在)ㆍ권속(眷屬)ㆍ재위(財位)ㆍ공덕(功德)ㆍ명문(名聞)ㆍ지견(智見)ㆍ위맹(威猛)이 모두 수승하기 때문에 어떤 교만한 유정도 굴복하여 돌아와 법을 받게 된다.
또 무상정등보리를 위한 소의(所依)를 지으시려고 이런 몸의 힘을 쌓은 것이다.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는 반드시 이 몸에 의하여야 비로소 안주(安住)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가령 무상정등보리를 묘고(妙高)의 큰 산왕(山王)의 꼭대기에 놓아두면 그 산이 부셔져 무너지는 것이 마치 작은 티끌같이 되는 것이니 힘[力]과 무외(無畏) 등이 심히 귀하고 무겁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삼천대천세계 안의 섬부주(贍部洲)에는 금강좌(金剛座)가 있어서 그 위로는 땅의 끝을 다하고 아래로는 금륜(金輪)에 의거하는데 보살은 거기에 앉아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루신 것이니 이것을 제외하고는 견고하게 의지할 곳[依處]이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이 처음 성불하셨을 때에 비로소 거니시려고[經行] 천천히 발을 땅에 대시면서 곧 대지(大地)로 하여금 여섯 가지로 진동하게 하시고 곧 승해(勝解)를 일으키시고서야 거니실 수 있었다.
또 교화할 유정을 인도하고 거두어 주시는 것이 마치 사신을 보내는[遣使] 것과 같기 때문에 이런 힘을 쌓은 것이다. 무상정각은 이 힘이라는 사신을 보내어 그의 오만을 꺾고 난 뒤에야 그를 제도하게 한다. 그러므로 집에 계실 때에는 모든 석종(釋種)들과 갖가지 힘을 겨루어 이기지 않음이 없으셨고 열반하려 하실 때에도 몸의 힘으로써 모든 역사(力士)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제도하신 것이다.
세존께서 교화의 인연[化緣]이 다하여 적멸(寂滅)에 들려고 구시성(拘尸城)의 파파읍(波波邑)에 가실 때였다. 5백의 역사들은 그 일을 듣고서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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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위하여 길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그 길 위에 길이는 60주(肘)에 넓이는 30주가 되는 하나의 큰 돌이 있었으므로 그 모든 역사들은 그것을 옮겨 놓으려고 그들의 몸의 힘을 다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세존께서 그곳에 이르시어 그것을 보시고는 “너희 여러 동자(童子)들아,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우리들의 힘은 섬부주에서 첫째간다 하겠는데 어째서 세존께서는 동자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고는 다 같이 부처님께 “저희들은 세존을 위하여 길을 닦으면서 이 돌을 같이 옮기려 하고 있으나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가엾이 여기셔서 이 돌을 치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내가 치울 터이니 너희들은 멀리 피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발가락으로 퉁겨서 손바닥 안에 놓으셨다가 허공을 향해 위로 던지고는 내려올 때 도로 받아 가지고 입으로 훅 불어 마치 작은 티끌처럼 흩어지게 하셨다가 도로 본래대로 되게 하신 뒤에 길 곁에다 버리셨다.
역사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 경탄하면서 경례하고 합장하고 다시 부처님께 “이것은 여래(如來)의 어떤 신력(神力)입니까?”라고 하자 세존께서 “돌을 들어 손바닥에다 놓고 다시 허공에 던졌다가 도로 받아서 길 곁에다 버린 것은 모두가 나의 부모가 낳아 주신 생신(生身)의 힘이요, 입으로 불어서 마치 작은 티끌처럼 산산이 흩어지게 하는 것은 신통의 힘이며, 도로 합쳐서 본래대로 한 것은 승해의 힘[勝解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역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 뛰며 다시 부처님께 “혹시 그 밖의 어떤 다른 이의 힘으로써 세존의 이러한 힘을 이길 수 있는 이가 있습니까?”라고 여쭙자 부처님은 “있느니라. 그것은 무상(無常)의 힘이니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역사들에게 “나의 부모가 낳아 주신 육신의 힘이나 신통의 힘이나 승해의 힘은 오늘 밤중에 모두가 무상의 힘에 소멸되고 파괴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모든 역사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모두가 세간에 대하여 깊이 싫증을 내었으며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알맞게 법요(法要)를 말씀하시어 모든 역사와 그 밖의 한량없는 거기에 있던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게 하고 영원히 악취와 제8유(有)10) 등을 여의게 하셨다.
10) 제8유라 함은 범부위(凡夫位)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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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화할 유정을 인도하고 거두어 주는 것이 마치 사신을 보내는 것과 같게 하기 위하여 이런 몸의 힘을 쌓으신 것이다.
[문] 보살은 언제 몸의 기력이 원만해지는가?
[답] 나이 25세로부터 이후의 나이 만 50세에 이르기까지는 그 힘에 감퇴는 없었으나 이를 지난 뒤부터는 세존의 몸의 기력도 점차로 쇠퇴하신다.
어떤 이는 “세존의 몸의 기력은 감퇴함이 없으니 마치 뜻의 힘은 쇠퇴함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여래의 법신(法身)은 비록 쇠퇴함이 없다고 해도 육신[生身]의 힘에는 반드시 감퇴함이 있는 것이니 모든 이숙과(異熟果)에는 쇠퇴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타이(鄔陀夷) 존자는 “지금 세존의 색력(色力)은 쇠퇴하시고 모든 감관[根]이 변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 모든 그 밖의 다른 유정에게도 이런 힘이 있는가?
[답] 이런 힘은 온갖 유정으로서는 공통하게 지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최후의 몸의 보살에게만 있게 된다. 맨 처음에 말한 보살의 힘의 양은 극히 적은 것인데도 오히려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두 번째 말한 것과 세 번째 말한 것 등이 그 밖의 다른 유정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현겁(賢劫)에 세계가 처음 성립될 때에는 모든 유정들이 나라연(那羅延)의 힘을 갖춘 이도 있었고, 혹은 반(半) 나라연(那羅延)의 힘을 갖춘 이도 있었으며, 혹은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의 힘을 갖춘 이도 있었고, 혹은 마하낙건나(摩訶諾健那)의 힘을 갖춘 이도 있었다. 이런 모든 역사(力士)들이 세간에 가득 찼었지만 그 뒤부터는 점차로 감소하였고 나아가 오늘날에는 전혀 그런 힘을 지닌 이가 없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석종에서 세 분이 발라색건제의 힘을 갖추었는데, 아난타(阿難陀)와 설마석자(設摩釋子)와 구파석녀(瞿波釋女)이다. 그때에 또한 마하낙건나의 힘ㆍ코끼리의 힘ㆍ말의 힘ㆍ소의 힘 등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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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인각유(麟角喩)의 독각도 나라연의 힘이 있다. 부행유(部行喩)의 독각은 그 힘을 일정하게 말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부분 성문(聲聞)의 종성이나 뒤에 다른 인연을 만나 무학(無學)의 과위를 얻기 때문이다. 비록 적정(寂靜)을 즐긴다 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있으니 마치 5백의 신선(神仙)11)이 한 곳에서 과위를 얻은 것과 같다.
인각유의 독각은 근기가 극히 뛰어나 혼자 나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반드시 두 분이 함께 세간에 나오는 일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사리자(舍利子)와 같은 이조차 오히려 함께 나오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여러 갑절 뛰어난 인각유이겠는가? 모든 성문의 사람은 그 힘이 일정하지 않으니 마치 부행유의 독각인의 설명에서와 같다.
모든 전륜왕(轉輪王)의 힘도 일정하지 않다. 4주(洲)에 왕이 된 이는 나라연의 힘이 있고, 3주에 왕이 된 이는 벌랑가(伐浪伽)의 힘이 있으며, 2주에 왕이 된 이는 발라색건제의 힘이 있고, 1주에 왕이 된 이는 마하낙건나의 힘이 있다.
이 네 개의 윤보(輪寶)에도 차별이 있다. 4주에 왕이 된 이는 금륜보(金輪寶)를 소유하는데 그 양(量)은 4구로사(俱盧舍)와 꼭 같고, 3주에 왕이 된 이는 은륜보(銀輪寶)를 소유하는데 그 양은 3구로사와 꼭 같으며, 2주에 왕이 된 이는 동륜보(銅輪寶)를 소유하는데 그 양은 2구로사와 꼭 같고, 1주에 왕이 된 이는 철륜보(鐵輪寶)를 소유하는데 그 양은 1구로사와 꼭 같다.
네 개의 윤보에 이런 차별이 있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보배에도 훌륭하고 못함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4주에 왕이 된 이의 그 밖의 보배는 가장 훌륭하며 나아가 일주에 왕이 된 이의 그 밖의 보배들은 가장 하열한 것이다.
[문] 모든 유정들의 몸의 힘에 차별이 있다면 그 뼈마디가 이루어지는 것에도 차별이 있는가?
[답] 역시 차별이 있다. 보통 힘을 가진 이는 뼈마디가 서로 멀리 있고 코끼
11) 본사(本事)에 의하면 5백의 고행자가 있었는데 한 마리 원숭이가 독각의 형상을 하여 나타난 것을 보고 다 함께 경모(敬慕)하는 생각을 내었으므로 일시에 모두 독각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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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말의 힘을 가진 이는 뼈마디가 서로 가까우며, 대낙건나(大諾健那)의 힘을 가진 이는 뼈마디가 서로 잇닿아 있는 것이 판자 등을 맞대 놓은 것과 같고 발라색건제(鉢羅塞建提)의 힘을 가진 이는 뼈마디가 서로 갈고리처럼 끌어당기고 있으며, 나라연의 힘을 가진 이는 뼈마디가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고 보살의 뼈마디는 차츰차츰 서로 엇걸려 있는 것이 용이 서린 것[蟠結]과 같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
부처님의 몸의 기력을 말했으므로 뜻의 힘[意力]12)을 이제 말하겠다. 세존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대비(大悲)와 3념주(念住) 등의 불가사의한 그지없는 공덕을 성취하셨는데 그 작용의 차별에 따라 갖가지 이름을 붙이고 있다.
우선 열 가지를 뜻의 힘이라 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13)인가? 첫째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요, 둘째는 업법집지력(業法集智力)이며, 셋째는 정려(靜慮)ㆍ해탈(解脫)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로 일으키는 잡염청정지력(雜染淸淨智力)이요, 넷째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며, 다섯째는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요, 여섯째는 근승열지력(根勝劣智力)이며, 일곱째는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이요, 여덟째는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
12) 부처님의 신력론(身力論)으로부터 나아가 심력론(心力論)에 들어가는 문단이다. 부처님께는 갖가지 공덕이 있되 다른 2승과는 공통하지 않고 부처님만 특수하게 지닌 것으로서 통례로 18종이 있는데 이것을 18불공법(不共法)이라 한다. 이른바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대비(大悲)ㆍ3념주(念住)이다. 그 중에서 먼저 이 10력을 들어서 분별하는 것이 여기서의 내용이다.
13) ① 처비처지력은 일의 도리에 계합하는가 계합하지 않은가를 틀림이 없이 판정하는 지력(智力)이다. ② 업법집지력은 『구사론』에서는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이라고도 했는데 낱낱의 업과 그 이숙과를 아는 지력이다. ③ 정려ㆍ해탈ㆍ등지ㆍ등지지력은 4정려와 8해탈 등을 사실대로 아는 지력이다. ④ 종종계지력은 18계(界) 등의 갖가지 요소를 아는 지력이다. ⑤ 종종승해지력은 온갖 유정들의 의요(意樂)의 차별된 모양을 아는 지력이다. ⑥ 근승열지력은
『구사론』에서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라고도 했는데 중생의 근기와 성품의 상하가 같지 않은 것과 득과(得果)의 크고 작은 것을 분명히 아는 지력이다. ⑦ 변취행지력은 바른 수행은 반드시 과(果)에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아는 지력이다. ⑧ 숙주수념지력은 전생의 일을 아는 지력이다. ⑨ 사생지력은 미래의 죽고 나는 처소와 갈래를 아는 지력이다. ⑩ 누진지력에는 모든 번뇌를 끊고 여실한 이치를 아는 지력이다.
力)이며, 아홉째는 사생지력(死生智力)이요, 열째는 누진지력(漏盡智力)이다.
[문] 이와 같은 10력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지혜[智]로써 자성을 삼는다. 부처님의 뜻의 힘은 지혜로 이루어진 것이니 지혜로써 체(體)를 삼고 지혜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처(處)와 비처(非處)를 사실대로 분명히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힘[力]이라 하며, 힘이란 무슨 뜻인가?
[답] 굴복시킬 수 없다는 뜻이 힘의 뜻이다. 조복할 수 없다는 뜻이요 꺾을 수 없다는 뜻이며, 해칠 수 없다는 뜻이요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며, 덮을 수 없다는 뜻이요 두루 깨닫는다[遍覺]는 뜻이며, 짐을 질 수 있다[荷擔]는 뜻이요 견고하다는 뜻이며, 가장 뛰어나다는 뜻이요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이니 이것이 힘의 뜻이다.
계(界)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색계계(色界繫)이다. 그 밖의 지력(智力)은 유루인 것은 삼계계(三界繫)요 무루인 것은 불계(不繫)이다.
지(地)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4근본정려(根本靜慮)에 있으니 공통으로 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며 근분(近分)과 무색(無色)과 부정지(不定地)14)는 소의(所依)에 공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두 지력에는 없다. 그 밖의 지력은 유루인 것은 11지(地)에 있으니 욕계와 4정려와 4무색과 미지정(未至定)과 정려중간(靜慮中間)이고 무루인 것은 9지(地)에 있다.
소의(所依)로 말하면 모두가 욕계 사람으로서 섬부주(贍部洲)의 대장부의 몸에 의지하니 오직 이런 몸에 의해서만이 성불하기 때문이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처비처지력과 변취행지력은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며, 업법집지력은 고(苦)ㆍ집(集)의 8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15)이기도 하며, 제3ㆍ제4ㆍ제5ㆍ제6의 지력은
14) 부정지는 욕계를 말한다.
15) 그 밖의 행상이라 함은 4제(諦) 16행상 이외의 행상으로 하지(下地)는 조(粗)ㆍ고(苦)ㆍ장(障)이며 상지(上地)는 정(淨)ㆍ묘(妙)ㆍ이(離)라고 관하는 유루의 6행관(行觀) 같은 것을 가리킨다. 10력 중에서 혹은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12행상이기도 하며 혹은 8행상이기도 한 것은 4제에 대한 각 지력과의 관계에 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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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苦)ㆍ집(集)ㆍ도(道)의 12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며,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그 밖의 다른 행상이어서 16행상이 아니고, 누진지력은 제유(諸有)가 누진의 경계[漏盡境]를 반연하기 때문에 누진지력이라고 하려면 그것은 멸(滅)의 4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며, 제유(諸有)가 누진의 몸[漏盡身]에 의하기 때문에 누진지력이라고 하려면 그것은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한다.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처비처지력은 온갖 법을 반연하고, 업법집지력은 오직 고(苦)ㆍ집(集)만을 반연하며, 제3ㆍ제4ㆍ제5ㆍ제6의 지력은 멸제(滅諦)를 제외한 세 가지 진리를 반연하고, 변취행지력은 네 가지 진리를 다 반연하며, 숙수수념지력은 욕계ㆍ색계의 과거의 5온(蘊)을 반연하고, 사생지력은 색처(色處)를 반연하며,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멸제를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온갖 법을 반연한다.
염주(念住)로 말하면 종종승해지력과 숙주수념지력은 오직 법념주일 뿐이고, 사생지력은 오직 신념주일 뿐이며,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법념주이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4념주이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4념주이다.
지(智)로 말하면 처비처지력과 변취행지력은 10지(智)에 다 통하고, 업법집지력은 멸지(滅智)와 도지(道智)를 제외한 8지일 뿐이며, 제3ㆍ제4ㆍ제5ㆍ제6의 지력은 멸지만을 제외한 9지이고,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세속지(世俗智)일 뿐이며,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6지 즉 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멸지(滅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ㆍ세속지이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10지에 다 통한다.
삼마지(三摩地)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하면 처비처지력과 변취행지력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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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마지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업법집지력은 고(苦)ㆍ집(集)을 반연하는 공(空)ㆍ무원(無願)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제3ㆍ제4ㆍ제5ㆍ제6의 지력은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공ㆍ무원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삼마지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무상(無相)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3삼마지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근(根)과 상응한 것으로 말하면 통틀어 모두 3근과 상응하니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로 말하면 이 10력은 모두 3세(世)에 통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처비처지력과 변취행지력은 3세와 이세(離世)16)를 반연하고, 제2ㆍ제3ㆍ제4ㆍ제5ㆍ제6의 지력은 3세를 반연하며, 숙주수념지력은 과거와 현재인 것은 과거를 반연하고 미래인 것은 3세를 반연하며, 사생지력은 과거인 것은 과거를 반연하고 현재인 것은 현재를 반연하며 미래에 생기는 법[生法]이면 미래를 반연하고 생기
지 않는 법[不生法]이면 3세를 반연한다.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이세(離世)를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3세(世)와 이세를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이 10력은 모두 선이다. 선ㆍ불선ㆍ무기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선만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 지력은 모두 세 가지를 반연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제3의 지력은 다만 선과 무기만을 반연할 뿐이다”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지력은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유위의 법을 공통으로 반연하기 때문이니 잡염의 법 안에는 불선이 있기
16) 이세(離世)라 함은 택멸 열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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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계(繫)ㆍ불계(不繫)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색계계(色界繫)일 뿐이다. 그 나머지 여덟 가지 지력은 유루인 것은 삼계계(三界繫)요 무루인 것은 불계이다.
계ㆍ불계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욕계계ㆍ색계계를 반연하고, 업법집지력은 삼계계를 반연하며,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불계를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한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다. 그 밖의 나머지 여덟 가지 지력은 무루인 것은 무학이고 유루인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업법집지력과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비학비무학만을 반연하고,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오직 비학비무학만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세 가지를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을 것이 아닌 것[不斷]으로 말하면 숙주수념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 여덟 가지 지력은 유루인 것은 수도에서 끊을 것이고 무루인 것인 끊을 것이 아니다.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것과 끊을 것이 아닌 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업법집지력과 숙주수념지력은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고, 사생지력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며,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끊지 않을 것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세 가지를 반연한다.
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 하는 것으로 말하면 종종승해지력과 근승열지력과 사생지력은 오직 뜻만을 반연하며, 누진지력은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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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다만 뜻만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이름과 뜻을 공통으로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이름과 뜻을 공통으로 반연한다.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17)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처비처지력과 변취행지력은 세 가지를 반연하고, 누진지력은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비상속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지력은 모두 자상속과 타상속을 반연한다.
가행득(加行得)인가, 이염득(離染得)18)인가로 말하면 이 10력은 모두 가행득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3무수겁(無數劫) 동안 쌓고 모은 뛰어난 가행으로 얻기 때문이며 또 모두 이염득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유정의 염[有頂染]을 여의고 진지(盡智)를 얻을 때에 모든 지력을 얻기 때문이다.
[문] 이와 같은 10력의 가행(加行)은 어떤 것인가?
[답] 이 가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近] 가행이니 순결택분(順決擇分) 등을 말한다. 둘째는 먼[遠] 가행이니 처음의 물러나지 않는 보리심(菩提心) 등을 말한다.
[문] 업법집지력과 사생지력은 다 같이 업을 반연할 수 있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원인[因]에서 결과[果]로 들어가는 것은 업법집지력이고, 결과에서 원인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생지력이다. 원인과 결과에서처럼 미세한 것[細]과 거친 것[麤]ㆍ직접 지각할 수 없는 것[不現見]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現見]ㆍ먼 것[遠]과 가까운 것[近]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무표업(無表業)은 어떻게 아는가?
[답] 결과에서 원인으로 들어가고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들어가며,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에서 직접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 들어가고, 가까운 것
17) 자상속은 자기의 몸이요, 타상속은 다른 것의 몸이며, 비상속은 열반을 말한다.
18) 가행득이라 함은 특히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획득한 것을 말하고, 이염득이라 함은 염(染)을 여읜 그 자리에서 스스로 생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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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먼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안다.
[문] 숙주수념지(宿主隨念智)와 사생지(死生智)는 2승(乘)에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부처님에서만 힘이라고 건립하는가?
[답] 앞에서 굴복시킬 수 없다는 뜻 등이 힘의 뜻이라고 말했다. 2승에서 비록 있다고 해도 이러한 뜻은 없기 때문에 힘이라 하지 못한다. 마치 사리자(舍利子)가 비록 제4 정려(靜慮)에 들었다 해도 남들이 태어날 곳과 어디에서 왔는지 등의 일을 모르는 것과 같다.
[문] 2승에도 번뇌[漏]가 영원히 다하는[盡] 지혜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지력(智力)이 아닌 것인가?
[답] 부처님의 지혜는 아주 예리하여 속히 번뇌와 번뇌의 남은 습기[餘習]를 끊지만 2승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의 지혜는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의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는 때[時分]를 착오 없이 알지만 성문이나 독각은 이런 능력이 없다.
또 자신의 모든 번뇌가 다함을 알기 때문에 누진의 지력이라 하지 않고, 다른 그지없는 세계의 모든 유정들의 번뇌가 다한 차별을 알며, 그들을 위하여 번뇌가 다하는 방편을 명료하면서 그릇되지 않게 말하는 것을 누진의 지력이라 하니 성문이나 독각에게는 이러한 뜻이 없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1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4) 애경납식 ③
부처님의 10력(力)1)을 말했으니 이제 4무외(無畏)를 말하겠다.
어떤 것이 4무외인가? 첫째는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이다. 마치 계경에서 “나는 모든 법을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正等覺者]다. 만일 어떤 세간의 사문(沙門)ㆍ범지(梵志)ㆍ하늘[天]ㆍ악마[魔]ㆍ범(梵) 등이 법에 의하여 힐난[難]을 세우거나 혹은 이와 같은 법에 대하여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다. 설령 있을 것이라고 해도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이유가 없음을 바르게 보기 때문에 편안히 두려워함도 없
고 겁냄도 없이 스스로 ‘나는 대선(大仙)의 높은 지위에 처하여 대중 가운데서 바른 사자후(師子吼)로 대범륜(大梵輪)을 굴리지만 온갖 세간의 사문ㆍ범지ㆍ하늘ㆍ악마ㆍ범 등은 굴릴 수 없다’라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1) 앞의 10력론(力論)에 이어서 18불공법 중 나머지 4무외ㆍ대비ㆍ3념주의 성질을 밝히는 문단이다. 그 중에서 4무외는 자각(自覺)ㆍ각타(覺他)에 대한 부처님의 부동적 확신을 네 가지로 든 것이어서 그 체성을 말하면 앞의 10력의 어느 것을 오로지 이타(利他)의 입장에서 관찰한 것에 불과하지만 작용이 다르다는 것에서 독립의 덕목(德目)으로 세운 것이다. 대비는 2승의 소비(小悲)에 상대되는 것이어서 부처님에서만 있는 무연(無緣)의 자비심을
든 것이다. 3념주는 앞의 4무외와 대비에서 온 자연적인 결론으로서 부처님이 설법하고 교화할 즈음에 듣는 이가 그것을 환영하거나 환영하지 않거나 조금도 집착하는 것이 없이 언제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머물러서 그 본무를 수행하는 덕목이다. 낱낱의 설명은 본문대로이다.(『구사론』 제27권 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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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다.
둘째는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이다. 마치 계경에서 “나는 모든 번뇌[漏]를 이미 영원히 다했다. 만일 어떤 세간의 사문ㆍ범지ㆍ하늘ㆍ악마ㆍ범 등이 법에 의하여 힐난을 세우거나 혹은 이러한 번뇌를 아직 영원히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다. 설령 있을 것이라고 해도……(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셋째는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이다. 마치 계경에서 “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능히 장애하는 법[能障法]을 말하면서 염(染)은 반드시 장애가 된다고 한다. 만일 어떤 세간의 사문ㆍ범지ㆍ하늘ㆍ악마ㆍ범 등이 법에 의하여 힐난을 세우거나 혹은 이 장애하는 법이 있지만 염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면 옳지 못한 일이다. 설령 있을 것이라고 해도……(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넷째는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이다. 마치 계경에서 “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능히 벗어나는 도[能出道]를 말하면서 닦으면 반드시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만일 어떤 세간의 사문ㆍ범지ㆍ하늘ㆍ악마ㆍ범 등이 법에 의하여 힐난을 세우거나 혹은 이와 같은 도를 닦아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면 옳지 못한 일이다. 설령 있을 것이라고 해도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이유가 없음을 바르게 보기 때문에 편안히 두려워함도 없고 겁냄도 없으면서 스스
로 ‘나는 대선의 높은 지위에 처하여 대중 가운데서 바른 사자후로 큰 법륜을 굴리지만 온갖 세간의 사문ㆍ범지ㆍ하늘ㆍ악마ㆍ범 등은 굴릴 수 없다’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 4무외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역시 지(智)로써 자성을 삼는다. 왜냐하면 첫 번째 무외2)는 제1 지력(智力)이고, 두 번째 무외는 제10 지력이며, 세 번째 무외는 제2 지력이고, 네 번째 무외는 제7 지력이 되기 때문이다.
자성을 말했으니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2) 정등각(正等覺)무외는 10지(智)의 제1의 처비처지력에 상당하고, 제2 누영진(漏永盡)무외는 10력 중 제10의 누진지력에 상당하며, 제3 설장법(說障法)무외는 제2의 업법집지력에 상당하고, 제4 설출도(說出道)무외는 제7의 변취행지력에 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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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무외라 하며 무외란 무슨 뜻인가?
[답] 겁내거나 마음이 약하지[怯弱] 않다는 뜻이 무외의 뜻이다. 기울거나 동요하지[傾動] 않는다는 뜻과 날래고 사납다[勇猛]는 뜻과 조용하고 편안하다[安隱]는 뜻과 맑고 깨끗하다[淸淨]는 뜻과 산뜻하고 희다[鮮白]는 뜻과 놀라거나 두려워하지[驚怖] 않는다는 뜻이 무외의 뜻이다.
계(界)로 말하면 이 4무외는 유루인 것은 삼계계(三界繫)요 무루인 것은 불계(不繫)이다.3)
지(地)로 말하면 이 4무외는 유루인 것은 11지(地)에 있고 무루인 것은 9지에 있다.
소의(所依)로 말하면 이 4무외는 모두 욕계의 사람으로서 섬부주의 대장부의 몸에 의하니 오직 이 몸에 의해서만 성불하기 때문이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첫 번째 무외는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며, 두 번째 무외는 제유(諸有)가 누진의 경계[漏盡境]를 반연하기 때문에 누진무외(漏盡無畏)라고 하려면 그것은 멸(滅)의 4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며 제유가 누진의 몸[漏盡身]에 의하기 때문에 누진무외라고 하려면 그것은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다. 세 번째 무외는 고ㆍ집(苦集)의 8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
이기도 하며, 네 번째 무외는 16행상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행상이기도 하다.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첫 번째 무외는 온갖 법을 반연하고,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멸제(滅諦)를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온갖 법을 반연하며, 세 번째 무외는 고ㆍ집제를 반연하고, 네 번째 무외는 다만 네 가지 진리를 반연할 뿐이다.
염주(念住)로서 말하면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법념주이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4념주이다.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 무외는 모두 4념주이다.
3) 4무외 중에서 세속지에 의한 것은 삼계계요, 그와 다른 법지(法智)ㆍ유지(類智) 등의 무루지에 의한 것은 불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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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智)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모두 10지(智)에 다 통하고,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멸지(滅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ㆍ세속지(世俗智)의 6지일 뿐이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10지에 다 통한다. 세 번째 무외는 멸지와 도지(道智)를 제외한 8지만 있다.
삼마지(三摩地)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3삼마지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무상(無相)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하며,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3삼마지와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세 번째 무외는 고(苦)ㆍ집(集)을 반연하는 공(空)과 무원(無願)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근(根)과 상응한 것으로 말하면 통틀어 모두 3근과 상응하니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로 말하면 이 4무외는 모두 3세(世)에 다 통한다.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3세와 이세(離世)를 반연하고,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이세를 반연하며,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3세와 이세를 반연한다. 세 번째 무외는 다만 3세만을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이 4무외는 모두가 선이다.
선ㆍ불선ㆍ무기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선만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 무외는 세 가지를 다 반연한다.
계(繫)ㆍ불계(不繫)로 말하면 이 4무외는 유루인 것은 삼계계(三界繫)요 무루인 것은 불계이다.
계ㆍ불계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하고,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불계를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한다. 세 번째 무외는 다만 삼계계만을 반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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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이 4무외는 무루인 것은 무학이고 유루인 것은 비학비무학이다.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세 가지를 다 반연하고,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비학비무학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다 반연한다. 세 번째 무외는 다만 비학비무학만을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을 것이 아닌 것[不斷]으로 말하면 이 4무외는 유루인 것은 수도에서 끊을 것이고, 무루인 것은 끊을 것이 아니다.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것과 끊을 것이 아님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세 가지를 다 반연하며,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끊을 것이 아닌 것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다 반연한다. 세 번째 무외는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한다.
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로 말하면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뜻만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이름과 뜻을 다 반연한다.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 무외는 모두 이름과 뜻을 반연한다.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첫 번째와 네 번째 무외는 세 가지를 다 반연하며, 두 번째 무외는 만일 누진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면 비상속을 반연하고, 만일 누진의 몸에 의하기 때문이면 세 가지를 다 반연한다. 세 번째 무외는 자상속과 타상속을 반연한다.
가행득(加行得)인가, 이염득(離染得)인가로 말하면 이 4무외는 모두 가행득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3무수겁(無數劫) 동안 쌓고 모은 뛰어난 가행으로 얻기 때문이며 또 모두 이염득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유정(有頂)의 염(染)을 여의고 진지(盡智)를 얻을 때에 무외를 얻기 때문이다.
[문] 이 4무외의 가행은 어떠한가?
[답] 이 가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近] 가행이니 순결택분(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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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擇分) 등을 말한다. 둘째는 먼[遠] 가행이니 처음에 물러나지 않는 보리심(菩提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설명한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에서 하나하나의 힘에는 4무외를 포섭하고 하나하나의 4무외에는 10력을 포섭하기 때문에 40지력(智力)과 40무외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첫 번째 무외[正等覺無畏]는 제1 지력[處非處智力]이요, 두 번째 무외[漏永盡無畏]는 제10 지력[漏盡智力]이며, 세 번째 무외[說障法無畏]는 제2 지력[業法集智力]이요, 네 번째 무외[說出道無畏]는 제7 지력[遍趣行智力]이라고 말한 것은 서로 드러난 것에 의한
것이다. 도리에 입각하여 진실하게 말하면 세존께서는 40지력과 40무외를 성취한 것이나 근본에 의거하여 말하면 다만 10력과 4무소외를 성취하셨다고 말할 뿐이다.
[문] 만일 10력이 4무외를 포섭하고 4무외가 10력을 포섭한다 하면 지력과 무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 두 가지에는 차별이 없으니 서로서로 포섭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에도 차별이 있다. 우선 그 이름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니 지력(智力)이라 하고, 무외(無畏)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 견고하고 강한 것은 지력이고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은 무외이다.
또 편안히 머무르는[安住] 것은 지력이고, 기울이거나 움직일[傾動] 수 없는 것은 무외이다.
또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은 지력이고, 겁내거나 마음이 약하지 않은 것은 무외이다.
또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은 지력이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은 무외이다.
또 자기 자신을 거두며 두호하는[攝受] 것은 지력이고 다른 이를 거두며 두호하는 것은 무외이다.
또 다른 이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지력이고, 다른 이를 이기는 것은 무외이다.
또 다른 이가 항복시키지 못하는 것은 지력이고, 다른 이를 항복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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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무외이다.
또 자상의 지혜[自相智]는 지력이고, 공상의 지혜[共相智]는 무외이다.
또 지혜[智]는 지력이고, 언변[辯]은 무외이다.
또 원인[因]은 지력이고, 결과[果]는 무외이다.
또 스스로가 통달하는 것은 지력이고, 다른 이를 위하여 설명하는 것은 무외이다.
또 뜻[義]에 통달하는 것은 지력이고, 글[文:法]에 통달하는 것은 무외이다.4)
또 법(法)과 뜻[義]에 걸림 없이 아는 것[無礙解]은 지력이고, 말[詞]과 변재[辯]에 걸림 없이 아는 것은 무외이다.
또 법과 뜻을 걸림 없이 이해하여 철저하게 분명히 아는 것은 지력이고, 말과 변재를 걸림 없이 이해하여 철저하게 분명히 아는 것은 무외이다.
또 쌓고 모으는 것[積集]은 지력이고, 받아쓰는 것[受用]은 무외이다.
또 스스로 재보(財寶)가 풍성한 것과 같은 것은 지력이고, 남에게 나누어 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은 무외이다.
또 의사의 처방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지력이고,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은 무외이다.
또 지혜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지력이고, 남의 힐난에 겁내지 않는 것은 무외이다.
지력과 무외에서는 이런 것을 차별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무외를 말했으니 대비(大悲)를 말하겠다.
[문] 대비는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지(智)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대비에는 따로 자성이 있으며 지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
4) 의(義)ㆍ법(法)ㆍ사(詞)ㆍ변(辯) 등에 통달하고 또 무애해(無礙解)라 하는 것은 4무애해를 표준으로 하여 10력과 4무외와의 구별을 밝히려는 것이다. 4무애해라 함은 첫째는 법무애요, 둘째는 의무애며, 셋째는 사무애요, 넷째는 변무애이다. 법무애는 교법의 명(名), 구(句), 문(文)에 자재한 것이요, 의무애는 그 내용을 자재하게 이해하는 것이며, 사무애는 갖가지의 언사에 자유자재한 것이요, 변무애는 재치 있는 말솜씨로 자유자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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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아래처럼 말하는 이도 있다.
“대비는 지(智)여서 따로 체(體)가 없다. 약과 병 등을 알면서 치료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자성을 말했으니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대비라 하고 대비란 무슨 뜻인가?
[답] 유정의 증상(增上)의 고난을 뽑아버리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지옥ㆍ방생ㆍ귀취 등의 큰 고난 중에서 뽑아내어 인간과 천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 안전하게 놓아둔다.
또 중생을 구제하여 증상의 흙탕에서 나오게 하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유정들이 번뇌의 큰 흙탕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바른 법의 손을 드리워 그들을 건져 내어 성도(聖道)와 도과(道果) 안에 안전하게 잘 둔다.
또 모든 유정에게 뛰어난 이익[義利]을 주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세 가지 악행[三惡行]을 끊고 세 가지 묘행[三妙行]을 닦게 하며, 존귀(尊貴)하고 부락(富樂)의 종자를 심어 존귀하고 큰 부와 낙의 과보를 받게 하며, 형색이 아름다워 대중들이 보기를 좋아하고 피부가 부드러우면서 빛이 나고 깨끗하게 하며, 혹은 윤왕(輪王)이 되게도 하고 혹은 제석(帝釋)이 되게도 하며 혹은 악마 왕이 되게도 하고 혹은 범왕이 되게도 하며, 차츰
차츰 하여 나아가 혹은 유정(有頂)에 나게 하며 혹은 또 3승(乘)의 종자를 심어 3승의 보리와 열반을 끌어 얻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가 대비의 위력으로 말미암는다.
또 큰 값어치를 얻게 하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보살은 모든 때와 모든 처소에서 온갖 사랑하는 몸과 재물과 처자 등을 보시하면서 모든 중생들의 모자라는 고난을 구제하셨고, 청정한 금계(禁戒)를 완전하게 받아 지니면서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리는 일이 있어도 끝내 헐거나 범한 일이 없었으며, 때리고 욕하고 업신여기면서 몸뚱이를 갈갈이 찢고 나아가 목숨을 끊어도 성내는 일이 없었으며, 정진하고 고행(苦行)하면서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고, 한결같이
고요한 데에 계시면서 정려(靜慮)를 오로지 닦았으며, 뛰어난 지혜를 위하여 법을 구하면서 게으름이 없으셨다. 이와 같은 복덕과 지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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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량(資糧)의 큰 값어치가 원만하셨기에 비로소 이와 같은 뭇 고난을 구제하는 청정한 대비를 얻으신 것이요, 2승(乘)이 혹은 한 그릇의 밥을 보시하고 하루 동안 계[一宿戒]를 지니며 나아가 네 글귀로 된 한 게송[一四句偈]을 사유하여 그런 과(果)를 얻은 것과는 같지 않다.
또 큰 가행[大加行]으로 얻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반드시 3무수(無數)의 대겁(大劫)을 지나면서 백천(百千)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고 익혀야 비로소 이와 같은 한없는 대비를 얻는 것이요, 성문(聲聞)으로서 근기가 극히 예리한 이가 60겁을 지나면서 모든 가행을 닦아 곧 보리를 얻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독각으로서 근기가 극히 예리한 이가 오직 백 겁을 지나면서 모든 가행을 닦아 곧 보리를 얻는 것과는 같지 않다.
또 거룩한 몸[大身]에 의거하여 일으키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이 대비는 결정코 32종의 대장부상(大丈夫相)으로 장엄한 몸과 80수호(隨好)로 사이사이 장식된 지체(支體)에 의지하는 것이니 몸은 황금빛으로 항상 한 길[尋]의 빛을 내며 정수리는 볼 수 없는 등 중생으로서 만나는 이면 이익을 얻지 않는 이가 없다. 대비는 이러한 뛰어난 몸에 의지하는 것이요, 2승이 얻는 공덕으로서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기며 팔다리가 불구(不具)요 모든 감관에 흠
결이 있는 위덕이 없는 몸에 의지하여 드러내거나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또 큰 안락을 버리면서 큰 고난을 구제하기 때문에 대비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가장 뛰어나고 왕성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불공불법(不共佛法)의 큰 안락한 일들을 버리고 백천 구지(俱胝)의 큰 바다와 윤위산(輪圍山) 등의 모든 험난한 곳을 넘으시면서 시방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생의 고난을 구제하는 것으로써 안락한 일을 삼으셨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대비의 위력으로 말미암음이다.
또 교화하기 어려운 한량없는 유정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하기 어려운 큰 수고로운 일들을 하기 때문에 대비라고 한다. 부처님은 비록 극히 존귀한 지위에 계신다 하더라도 중생들을 위하여 옹기장이가 되기도 하고 장사꾼이 되기도 하며, 역사(力士)가 되기도 하고 사냥꾼이 되기도 하며, 배우(俳優)가 되기도 하고 꽃다발을 팔기도 하며, 배와 뗏목에서 품팔이를 하기도 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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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와 같은 등의 여러 난잡한 무리가 되어 갖가지 교화할 유정들을 구제하신다.
혹은 아난을 데리고 5취(趣)를 돌아다니시며 밤낮으로 끊임없이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시기도 하고, 혹은 지만(指鬘)을 제도하기 위하여 땅[地界]을 늘렸다 줄였다 하셨으며, 때로는 멀리 있게 하고 때로는 가까이 있게 하여 그를 조복한 연후에야 제도하기도 하신 것이다.5)
비록 또 뛰어난 참괴(慚愧)를 성취하셨다 해도 유정들을 위하여 음장(陰臧)6)의 몸매[相]를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신 뒤에 비방을 중지시키셨는데 한량없는 유정들은 그것을 듣고 모두가 교화를 따랐었다.
비록 또 오랫동안 경솔하고 실없는 일을 끊으셨다 하더라도 유정들을 위하여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머리끝까지 내시어 온 얼굴을 다 덮으시면서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그로 인하여 교화를 받게 하시기도 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한량없고 그지없는데 온갖 모두가 대비의 위력으로 말미암음이다.
또 대사(大捨)를 기울여 행동하시므로 대비라 한다. 부처님은 두 가지 큰 법을 성취하셨으니 첫째는 대사(大捨)요, 둘째는 대비(大悲)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대사의 법에 안주하실 때에 가령 시방의 모든 유정들이 일시에 큰 뿔피리[大角]와 큰 북을 불고 치고 하거나 혹은 우레가 진동하고 번갯불이며 벼락을 치면서 모든 산과 대지가 기울고 엎어지고 동요한다 해도 부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내어 보시거나 듣게 할 수가 없다. 만일 부처님께서 대비의 법을
일으켜 드러내실 때에는 대사의 산[大捨山]을 쳐서 그로 하여금 진동하게 하고 또한 한량없는 나라연(那羅延)의 힘으로 합쳐서 되신 몸이 마치 몹시 사나운 바람이 작은 풀잎에 불어서 이리저리 나부껴 움직이듯 모든 유정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뛰어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등의
5) 앙굴마(鴦堀魔)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으나 그 위신력에 의하여 부처님께서 땅 위를 걸어가시는데도 따라잡지 못하고 드디어 굴복했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6) 부처님은 한 물건이 모자란다는 비방이 있었으므로 아난을 시켜 그 음마장(陰馬臧)으로부터 한 물건을 내어서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음마장이라 함은 부처님의 한 물건은 말의 것과 같이 평소에 숨어 오므라져 있으면서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32상(相)의 한 가지이다.
뜻으로 말미암아 대비7)라 한다.
이와 같은 대비를 계(界)로 말하면 오직 색계(色界)에만 있고 지(地)로 말하면 오직 제4 정려(靜慮)에만 있으며, 소의(所依)로 말하면 오직 욕계의 사람으로 섬부주의 대장부의 몸에 의지하는 것이니 오직 이 몸에 의해서만 대비를 얻기 때문이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16행상이 아니며8) 그 밖의 다른 행상이고,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삼계(三界)의 모든 유정의 모든 법을 다 반연하며, 염주(念住)로 말하면 오직 법념주(法念住)일 뿐이다.
지(智)로 말하면 오직 세속지(世俗智)일 뿐이고 삼마지(三摩地)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하면 삼마지와는 함께하지 않으며, 근(根)과 상응한 것으로 말하면 사근(捨根)과 상응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로 말하면 3세(世)이며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3세를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오직 선일 뿐이고 선ㆍ불선ㆍ무기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세 가지를 다 반연하며, 계(繫)ㆍ불계(不繫)로 말하면 오직 색계계일 뿐이고 계ㆍ불계를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삼계계를 다 반연한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고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다만 비학비무학만 반연하며,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을 것이 아닌[不斷] 것으로 말하면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며,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것과 끊을 것이 아닌 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견도와 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한다.
7) 『구사론』에서는 이 대비의 대(大)라고 일컫는 까닭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자량의 대[資糧大]이니 대복덕ㆍ대지혜를 이룩하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행상의 대[行相大]이니 고고(苦苦)ㆍ괴고(壞苦)ㆍ행고(行苦)의 세 가지 행상을 지으면서 그것을 구제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소연의 대[所緣大]이니 삼계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평등의 대[平等大]이니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평등한 자비를 베풀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상품
의 대[上品大]이니 비(悲) 중에서도 대상품이기 때문이다.(『俱舍論』 제27권)
8) 대비는 온갖 유정들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것이므로 다만 속지(俗智)만을 성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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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로 말하면 이름과 뜻을 다 반연하고, 자상속(自相續)과 타상속(他相續)과 비상속(非相續)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자상속과 타상속을 다 반연한다 해도 타상속을 많이 반연하며, 가행득(加行得)인가 이염득(離染得)인가로 말하면 가행득이라 말할 수 있으니 3무수겁 동안 쌓고 모은 뛰어난 가행으로 얻기 때문이요 또한 이염득이라 말할 수 있으니 유정(有頂)의 염(染)을 여의고 진지(盡智)를 얻을 때에 대비
를 얻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을 대비의 가행이라 하는가?
[답] 이 가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近] 가행이니 순결택분(順決擇分) 등을 말한다. 둘째는 먼[遠] 가행이니 처음의 물러나지 않는 보리심(菩提心) 등을 말한다.
[문] 이 대비는 어떠한 지력에 속하는가?
[답]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에 속하니 세존의 불공(不共)의 공덕은 대부분 처비처지력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문] 비(悲)와 대비(大悲)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대략 여덟 가지 차별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自性)의 차별이다. 비는 성냄이 없는[無瞋] 선근을 자성으로 삼지만 대비는 어리석음이 없는[無癡] 선근을 자성으로 삼는다. 둘째는 행상(行相)의 차별이다. 비는 고고(苦苦)의 행상을 짓지만 대비는 3고(苦)의 행상을 짓는다. 셋째는 소연(所緣)의 차별이다. 비는 오직 욕계만을 반연하지만 대비는 삼계(三界) 전체를 다 반연한다. 넷째는 의지(依地)의 차별이다. 비는 10지(地) 전
체 즉 4정려(靜慮)와 4근분(近分)과 정려중간(靜慮中間)과 욕계(欲界)의 지에 의지하지만 대비는 오직 제4 정려에만 있을 뿐이다. 다섯째는 소의(所依)의 차별이다. 비는 3승(乘)과 이생(異生)의 몸의 전체에 의지하지만 대비는 오직 부처님의 몸에만 의지한다.
여섯째는 증득(證得)의 차별이다. 비는 욕계와 나아가 제3 정려의 염(染)을 여읠 때에 얻지만 대비는 오직 유정(有頂)의 염을 여읠 때만이 얻을 뿐이다. 일곱째는 구제(救濟)의 차별이다. 비는 오직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지만 대비는 구제하는 일을 이룩한다. 여덟째는 애민(哀愍)의 차별이다. 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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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이 여기는 데에 평등하지 않지만 대비는 가엾이 여기는 데에 평등하다. 이것이 비와 대비의 차별이다.
부처님의 대비를 말했으니 이제는 3념주(念住)를 말하겠다.
어떤 것이 3념주인가? 첫째는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공경히 듣고 받들어 가르침대로 행하여도 여래는 그것에 대하여 기뻐하지도 않을 뿐더러 마음이 방탕하지도 않으며 다만 대사(大捨)만을 일으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에 머무르면서 마땅함에 따라 가르칠 뿐이다.
둘째는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 모든 제자들이 공경히 듣고 받들지 않고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아도 여래는 그것에 대하여 성을 내지도 않을 뿐더러 마음에 한탄하지도 않고 보임(保任)을 버리지도 않으며 다만 대사만을 일으켜 정념과 정지에 머무르면서 마땅함에 따라 가르칠 뿐이다.
셋째는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 일부의 제자들은 공경히 듣고 받들어 가르침대로 행하고 일부의 제자들은 공경하며 듣지도 받들지도 않고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아도 여래는 그것에 대하여 기뻐하지도 않을 뿐더러 성내거나 한탄하지도 않으며 다만 대사만을 일으켜 정념과 정지에 머무를 뿐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불공(不共)의 염주는 역시 처비처지력에 포섭되어 있는 줄 알아야 하며 널리 뜻을 분별하는 것은 그 이치대로 생각해야 한다.
[문] 이 18종의 불공불법(不共佛法)은 얼마나 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갈래[勝支]가 될 수 있는가?
[답] 3념주를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15종은 모두가 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갈래가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10력(力)을 말미암아 자신의 이론[論]을 세우시고 4무외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이론을 타파하며 대비로 말미암아 설법의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이 세 가지로 말미암아 설법하는 일이 이룩된다.
3념주에는 이와 같은 힘은 없지만 다만 설법하실 때에 제자들에 대하여 근심이나 기쁨을 내지 않으면서 대사만을 일으켜 정념과 정지에 머무르므로 불공법(不共法)이라 한다.
마치 계경에서 “여래는 일곱 가지 미묘한 법을 성취하셨다. 어떤 것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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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 가지인가?9) 첫째는 법(法)을 아시고, 둘째는 뜻[義]을 아시며, 셋째는 때[時]를 아시고, 넷째는 양(量)을 아시며, 다섯째는 스스로[自] 아시고, 여섯째는 대중[衆]을 아시며, 일곱째는 보특가라의 낫고 못한[勝劣] 차별을 아신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 일곱 가지 묘한 법은 어느 것이 몇 지(智)의 성품인가?
[답] 이 일곱 가지는 모두가 세속지(世俗智)의 성품이다.
어떤 이는 “법을 알고 양을 알고 대중을 아는 이 세 가지는 오직 세속지일 뿐이요, 뜻을 아는 한 가지는 모든 이로서 오직 열반이 있는 것만으로 승의(勝義)가 되게 하고자 하는 이면 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멸지(滅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와 세속지의 6지(智)로 성품을 삼지만 모든 이로서 온갖 법으로 하여금 모두 승의가 되게 하고자 하는 이면 10지로 성품을 삼으며, 때를 알고 스스로 아는 것은 멸지와 타심지(他心智)를 제외한 8지로
성품을 삼고 보특가라의 낫고 못한 차별을 아는 것은 멸지를 제외한 9지로 성품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때를 아는 것도 멸지를 제외한 9지로써 성품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評] 이와 같이 말한 것이 비록 또한 일리는 있다고 해도 계경에 “이 일곱 가지 모두는 세속지의 성품이니, 모두가 일(事)과 법(法)을 아는 데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 일곱 가지 묘한 법은 어떤 지력에 포섭되어 있는가?
[답] 모두가 처비처지력에 포섭되어 있다.
마치 계경에서 “여래는 다섯 가지 성스러운 지혜[五聖智]의 삼마지(三摩地)를 성취하셨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어떤 안으로 증득한 지혜[內證智]가 생기면 이 삼마지는 성스러운 이염(離染)인 것을 안다. 둘째는 어떤 안으로 증득한 지혜가 생기면 이 삼마지는 어리석은 이가 가까이 할
9) 법이라 함은 교법(敎法)이요, 뜻이라 함은 그것의 내용이며, 때라 함은 설해야 하는 시기요, 양이라 함은 설법의 장ㆍ단ㆍ천ㆍ심이며, 스스로라 함은 부처님 자신이요, 대중이라 함은 상대하는 대중들이며, 보특가라의 낫고 못하다 함은 듣는 이들의 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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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이[智者]가 칭찬할 것임을 안다. 셋째는 어떤 안으로 증득한 지혜가 생기면 이 삼마지는 현재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것임을 안다.
넷째는 어떤 안으로 증득한 지혜가 생기면 이 삼마지는 고요하고 미묘하여 그쳐 쉬는 도[止息道]이고 마음을 한 군데로 나아가게 하여 증득함이 있게 한다는 것을 안다. 다섯째는 어떤 안으로 증득한 지혜가 생기면 이 삼마지는 바르게 기억하기[正念] 때문에 들어가고 바르게 기억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 다섯 가지 성스러운 지혜의 삼마지는 어느 것이 몇 지(智)의 성품인가?
[답] 이 다섯 가지는 모두가 세속지의 성품이다.
어떤 이는 “모두가 멸지와 타심지를 제외한 8지(智)의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모두가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타심지(他心智)를 제외한 6지의 성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도 있다.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비록 또한 일리가 있으나 계경에서 ‘이 다섯 가지는 모두가 세속지의 성품이니 모두가 선정[定]과 일[事]을 아는 데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 다섯 가지 성스러운 지혜의 삼마지는 어느 지력에 포섭되는가?
[답] 모두가 처비처지력에 포섭된다.
몸의 기력[身力]을 해석함으로 인한 그 방론(傍論)을 다 마쳤다.
[論] 어떤 것이 택멸(擇滅)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어떤 이는 “택멸과 비택멸(非擇滅)과 무상멸(無常滅)은 실제로 존재하는[實有] 체(體)가 아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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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시키고 세 가지 멸(滅)에는 모두가 실체(實體)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이 세 가지 멸은 모두가 무위(無爲)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시키고 두 가지 멸[二滅]은 무위이지만 무상멸은 유위(有爲)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택멸인가?
[答] 모든 멸(滅)이 계박을 여읜 것[離繫]이다. 모든 법이 소멸하고 또한 계박을 여위는 것[離繫]도 얻고 이계득(離繫得)도 얻는 것을 택멸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비택멸인가?
[答] 모든 멸이 계박을 여읜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소멸해도 계박을 여의지 않은 것[不離繫]은 얻으면서도 이계득은 얻지 못하는 것을 비택멸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무상멸(無常滅)10)인가?
[答] 모든 행[諸行]이 흩어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없어지고 망하고 물러나는 것을 무상멸이라 한다.
여기에서 흩어지고[散] 무너지고[壞] 깨지고[破] 없어지고[沒] 망하고[亡] 물러난다[退]는 문자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고 해도 똑같이 무상멸을 나타낸다.
또 모든 행이 흩어진다는 등의 말은 곡식이나 콩 따위가 흩어지면서 다른
10) 무상멸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이멸(異滅)에 의하여 변천하고 쇠멸하는 것을 말하며 앞의 두 가지 멸에 대하여 이것은 유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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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으로 가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무상멸을 말미암아 다시는 작용(作用)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또 흩어진다는 등의 말은 모든 행의 자성(自性)이 소멸하고 파괴되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모든 행이 무상멸을 말미암아 다시는 작용이 없는 것만을 나타낼 뿐이다. 유위법의 자성은 항상 생기는 모양[生相]을 말미암아 작용을 일으키고 멸하는 모양[滅相]을 말미암아 다시는 작용이 없는 것을 흩어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없어지고 망하고 물러난다고
한다.
[論] 비택멸과 무상멸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答] 비택별이란 간택(簡擇)하는 힘을 말미암지 않으면서 역병(疫病)ㆍ재앙[災橫]ㆍ근심과 고뇌[愁惱]ㆍ갖가지 악마의 일[種種魔事]과 행세(行世)의 괴로운 법[苦法]을 해탈하나 탐욕(貪慾)을 조복하거나 끊어서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멸이란 모든 행이 흩어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없어지고 망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두 가지 멸[二滅]의 차별이라 한다.
여기에서 역병ㆍ재앙ㆍ근심과 고뇌ㆍ갖가지 악마의 일의 괴로운 법을 해탈한다 함은 유루법(有漏法)의 비택멸을 나타내고 행세(行世)의 법을 해탈한다 함은 무루법(無漏法)의 비택멸을 나타내며 탐욕을 조복하거나 끊어서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 함은 택멸과는 다름을 나타낸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비택멸과 무상멸의 차별만을 말하면서 택멸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여기에서는 “택멸과 비택멸과 무상멸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택멸이란 간택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유루법이 멸(滅)하는 것이고 비택멸이란 간택하는 힘을 말미암지 않으면서 역병……(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을 해탈하는 것이며 무상멸이란 모든 행이 흩어지고 무너지고 깨지고 없어지고 망하고 물러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택멸은 해탈(解脫)이요 계박(繫縛)을 여의는 모양이며, 비택멸은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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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서도 계박을 여의는 모양이 아니며, 무상멸은 해탈도 아니요 계박을 여의는 모양도 아니다.
또 택멸은 3세(世)의 유루법에서 얻고 비택멸은 미래의 생기지 않는 유위법에서 얻으며 무상멸은 현재의 온갖 법에서 구르는 것이다.
또 택멸은 선(善)이면서 그의 득(得)도 선이요, 비택멸은 무기(無記)이면서 그의 득도 무기이며, 무상멸은 세 가지[三種]에 다 통하며 그의 득도 세 가지에 통한다.
또 택멸은 무루이면서 그의 득은 유루와 무루에 다 통하고 비택멸은 무루이면서 그의 득은 오직 유루일 뿐이며 무상멸은 두 가지에 다 통하고 그의 득도 두 가지에 통한다.
또 택멸은 불계(不繫)이면서 그의 득은 혹은 색계계이기도 하고 혹은 무색계계이기도 하며 혹은 불계이기도 하다. 비택멸은 불계이면서 그의 득은 오직 삼계계(三界繫)일 뿐이며, 무상멸은 삼계계이기도 하고 혹은 불계이기도 하며 그의 득도 삼계계이기도 하고 혹은 불계이기도 하다.
또 택멸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11)이면서 그의 득은 혹은 학(學)이기도 하고 혹은 무학(無學)이기도 하며 혹은 비학비무학이기도 하다. 비택멸은 비학비무학이고 그의 득도 비학비무학일 뿐이며 무상멸은 세 가지에 다 통하고 그의 득도 세 가지에 통한다.
또 택멸은 끊을 것이 아니고[不斷] 그의 득은 혹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이기도 하고 혹은 끊을 것이 아니기도 하며, 비택멸은 끊을 것이 아니면서 그의 득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며, 무상멸은 세 가지에 다 통하며 그의 득도 세 가지에 다 통한다.
또 택멸과 비택멸은 다 같이 불염오(不染汚)이며 그의 득도 다 같이 불염오이다. 무상멸은 염오(染汚)와 불염오에 다 통하며 그의 득도 두 가지에 다 통한다.
염오와 불염오처럼 유죄(有罪)와 무죄(無罪)ㆍ퇴(退)와 불퇴(不退)에 있
11) 이때의 비학비무학은 무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의 득(得)은 만일 학지에서 얻은 택멸이면 학지에 속하고 만일 무학지에서 얻은 택멸이면 무학지에 속하며, 유루도에 의한 범부지에서 얻은 택멸이면 범부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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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도 그러하다.
또 택멸은 이숙(異熟)이 없으면서 그의 득은 혹은 이숙이 있기도 하고 혹은 이숙이 없기도 하며, 비택멸은 이숙이 없으면서 그의 득도 이숙이 없으며, 무상멸은 두 가지에 다 통하면서 그의 득도 두 가지에 다 통한다.
또 택멸은 도과(道果)이며 그의 득은 혹은 도(道)이기도 하고 혹은 도과이기도 하며, 비택멸은 도도 아니고 도과도 아니면서 그의 득도 도도 아니고 도과도 아니며, 무상멸은 혹은 도이면서 도과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도이면서 또한 도과이기도 하며 혹은 도가 아니면서 도과도 아니기도 하다. 그의 득도 그러하다.
또한 택멸은 멸제(滅諦)에 속하면서 그의 득은 멸제를 제외한 세 가지 진리[三諦]에 속하고, 비택멸은 진리에 속한 것이 아니면서 그의 득은 고제(苦諦)ㆍ집제(集諦)의 두 가지 진리에 속하며, 무상멸은 멸제를 제외한 세 가지 진리에 속하면서 그의 득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자세히 그 차별을 분별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이미 “택멸은 계박을 여읜 것이요, 비택멸과 무상멸은 계박을 여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 같이 계박을 여읜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그 차별을 분별해야 한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멸은 다 같이 공력을 써서 얻은 것이 아니므로 그 차별을 분별해야 되거니와 택멸은 공력을 써서 얻은 것이라 두 가지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미 택멸은 계박을 여의는 것[離繫]으로 체(體)를 삼음을 알았으나 무엇 때문에 택멸이라고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답] 택(擇)이란 지혜[慧]를 말하고 멸(滅)은 그의 결과[果]를 말하는 것이니 택으로 얻게 된 멸이기 때문에 택멸이라 한다.
또 한결같이 수고하고 한결같이 가행하며 한결같이 공력을 들여 모든 법을 간택(簡擇)하여야 비로소 이런 멸을 얻기 때문에 택멸이라 한다.
또 자주자주 고(苦) 등을 결택(決擇)하여서 멸을 얻기 때문에 택멸이라 하는 것이니 고인(苦忍)ㆍ고지(苦智)는 고제(苦諦)를 결택하여 견고(見苦)에서 끊을 법에서 멸을 얻고, 집인(集忍)ㆍ집지(集智)는 집제(集諦)를 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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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견집(見集)에서 끊을 법에서 멸을 얻으며, 멸인(滅忍)ㆍ멸지(滅智)는 멸제(滅諦)를 결택하여 견멸(見滅)에서 끊을 법에서 멸을 얻고, 도인(道忍)ㆍ도지(道智)는 도제(道諦)를 결택하여 견도(見道)에서 끊을 법에서 멸을 얻으며, 고지 등의 지(智)로써 자주자주 고성제(苦聖諦) 등을 결택하여 수도에서 끊을 법[修所斷]에서 멸을 얻기 때문에 택멸이라 한다.
[문] 택멸의 자성(自性)은 한 물건[一物]인가, 여러 물건[多物]인가?
[답] 어떤 이는 “하나의 물건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법의 택멸을 증득할[證] 때에도 수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을 증득하는가?
만일 또한 증득한다 하면 뒤의 대치(對治)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어야 하며 만일 증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 물건의 작은 부분은 증득하면서 다른 작은 부분은 증득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두 가지 물건이다. 첫째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이요, 둘째는 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견고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을 증득할 때에도 견집ㆍ견멸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을 증득하는가?
만일 역시 증득한다 하면 뒤의 대치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어야 하며, 만일 증득하지 않는다 하면 어떻게 한 물건의 작은 부분은 증득하면서 다른 작은 부분은 증득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다섯 가지 물건이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에 네 가지12)가 있고 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에 한 가지가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을 증득할 때에도 색계ㆍ무색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을 증득하는가?
만일 역시 증득한다 하면 뒤의 대치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어야 하며, 만일 증득하지 않는다 하면 어떻게 한 물건의 작은 부분은 증득하면서 다른 작은 부분은 증득하지 않는가?
12) 네 가지란 4제 하에 있어서의 견혹(見惑)에 대한 것을 말한다.
[답] 어떤 이는 “택멸에는 열한 가지 물건이 있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에 여덟 가지가 있고, 수도에서 끊어야 할 법의 택멸에 세 가지가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상상품(上上品)의 법의 택멸을 증득할 때에도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인 뒤의 8품법(品法)의 택멸을 증득하는가?
만일 역시 증득한다 하면 뒤의 대치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어야 하며, 만일 증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 물건의 작은 부분은 증득하면서 다른 작은 부분은 증득하지 않는가?
색계와 무색계의 수도에서 끊을 9품법(品法)의 택멸에 관한 질문도 그러하다.
[답] 어떤 이는 “택멸에는 서른다섯 가지가 있다. 견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에 여덟 가지가 있고, 수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에는 삼계(三界)에 각각 아홉 가지씩이 있어서 스물일곱 가지가 되므로 앞의 여덟 가지를 보태면 서른다섯 가지가 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초정려(初靜慮)의 수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을 증득할 때도 뒤의 세 가지 정려[三靜慮]의 수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을 증득하는가?
만일 역시 증득한다 하면 뒤의 대치를 닦는 것은 소용이 없어야 하고, 만일 증득하지 않는다 하면 어떻게 한 물건의 작은 부분은 증득하면서 다른 작은 부분은 증득하지 않는가?
4무색지(無色地)의 수도에서 끊을 법에 관한 질문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답] 어떤 이는 “택멸에는 여든아홉 가지가 있다. 견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에 여덟 가지가 수도에서 끊을 법의 택멸에는 9지(地)에 각각 아홉 가지씩이 있어서 여든한 가지가 되므로 앞의 여덟 가지를 보태면 여든아홉 가지가 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견도에서 끊을 법의 삼계(三界) 9지(地)에 각각 4부(部) 9품(品)의 차별이 있는데 어떻게 택멸에는 다만 여덟 가지만이 있는가? 또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법은 하나하나의 지(地)와 하나하나의 부(部)와 하나하나의 품(品)에는 각각 많은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다만 한 가지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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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유루의 법에는 그만큼의 체(體)가 있음에 따라 택멸도 그러하며 계박되는 일에 따라 체에는 그만큼의 이계(離繫)가 있고 또한 그만큼의 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미 택멸은 계박되는 일에 따라 그만큼의 양(量)이 있음을 알았다. 모든 유정들이 택멸을 증득할 때에는 같이 하나[一]를 증득하는 것인가 저마다 따로따로 증득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두 가지에 다 같이 허물이 있다. 만일 같이 하나를 증득한다 하면 어떻게 열반을 불공법(不共法)이라 하는가? 또 만일 그렇다면 만일 한 유정이 열반을 얻을 때에 온갖 유정도 모두가 얻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해탈하여야 한다.
만일 저마다 따로따로 증득한다 하면 어떻게 열반을 부동류(不同類)라 하는가? 또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여래의 해탈과 그 밖의 아라한의 해탈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모든 유정들이 택멸을 증득할 때에는 모두가 같이 하나를 증득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열반을 불공법이라 하는가?
[답] 열반의 체성은 실로 한 가지라 하더라도 득(得)을 기준으로 하여 공통하지 않다[不共]고 말한 것이니 이계득(離繫得)은 낱낱의 유정의 자상속(自相續) 중에 저마다 따로따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 만일 한 유정이 열반을 얻을 때에 모든 그 밖의 유정은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하는가?
[답] 만일 몸속에 열반의 득(得)이 있으면 열반을 얻었다고 하겠지만 없다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일시에 온갖 유정이 열반을 얻는다는 허물은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모든 유정들이 택멸을 증득할 때에는 저마다 따로따로 증득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열반을 부동류(不同類)라 하는가?
[답] 동류인(同類因)을 차단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든 택멸에는 동류인이 없다는 것을 부동류라 한 것이요, 모든 유정에게 따로 택멸에는 차츰차츰 서로 유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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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고법지인(苦法智因)에도 동류인이 없으므로 역시 부동류의 법이라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유위는 모두 동류라 하면서 다만 열반만을 부동류라 하는가?
[답] 고법지인에 비록 동류인은 없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위하여 동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동류라 하지만 열반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유위법은 동일하게 온(蘊)ㆍ계(界)ㆍ처(處)의 세 가지 문[三門]에 포섭되어서 동일하게 3세(世)에 떨어지고 동일하게 생멸(生滅)이 있으며 동일하게 하ㆍ중ㆍ상이 있고 동일하게 선후(先後)가 있으며 동일하게 원인으로부터 생기고 동일하게 결과를 내게 되기 때문에 동류라 하지만 열반은 그렇지 못하므로 부동류라 한다.
또 온갖 법 가운데서 오직 열반만이 선(善)이고 항상한 것[常]이지만 그 밖의 것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부동류라 한다. 그 밖의 법은 어떤 것은 선이나 항상한 것은 아니고 어떤 것은 항상한 것이나 선이 아니며 어떤 것은 두 가지가 다 같이 아니지만 열반만은 유독 선과 항상하다는 두 가지 뜻이 갖추어 있으므로 유독 부동류의 법이라 한다.
[문] 계경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여래의 해탈과 그 밖의 아라한 등의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3승(乘)의 몸 안의 해탈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선과 항상함은 동일하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말은 하나의 상속(相續)에 3승의 도가 있어 동일하게 해탈을 증득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이 몸에서 증득한 해탈에서 보면 비록 저마다 차이는 있다 해도 하나의 몸 안에 3승의 성품이 있어 동일하게 해탈을 증득하는 것은 어느 승(乘)을 따르고 의지하여 성도(聖道)를 불러 오거나 모두가 이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評]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유정들은 두루 낱낱의 유루법에서 모두가 함께 동일한 택멸의 체성을 증득한다”라고 말해야 하니 앞에서 “택멸은 계박된 일의 많고 적은 양(量)에 따른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앞의 설명이 이치상 옳다 하겠다.
[문] 바깥 물건[外物]에서도 택멸의 체성을 증득하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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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역시 택멸의 체성을 증득한다 하면 이미 바깥 법[外法]에서는 성취한다는 뜻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의 택멸을 성취하는가? 또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사리자(舍利子) 존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탐애를 끊고 안의 해탈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바깥 물건에서 택멸을 증득하지 못한다 하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경에서 “온갖 행[一切行]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斷界)라 하고 온갖 행이 여의기 때문에 이계(離界)라 하며 온갖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멸계(滅界)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바깥 물건에서도 택멸을 증득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미 바깥 물건에서는 성취한다는 뜻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에서 택멸을 얻는다는 것인가?
[답] 비록 바깥 물건에서는 성취하는 것이 없다고 해도 그것에서 택멸을 얻는 것이 있다. 마치 과거ㆍ미래의 명근(命根)13) 등 8근(根)을 성취하지 못해도 그것에서 택멸을 증득함이 있는 것처럼 바깥 물건에서도 그러하거늘 어찌 서로가 어긋난다 하겠는가?
[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겠는가? 경에서 “사리자 존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탐애를 끊고 안의 해탈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안의 온[內蘊]에서 해탈14)을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바깥에서도 해탈을 얻은 줄 알아야 한다.
또 바깥 물건의 해탈은 안에 의거하여 얻게 되기 때문에 역시 안[內]이라고 하는 것이니 안 몸[內身]에서 도를 닦아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또 바깥 물건의 해탈은 이 안에서 얻는 것이므로 역시 안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것을 얻은 득(得)은 안의 온에 속하기 때문이다.
13) 명근 등의 8근이란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의 5근과 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이다.
14) 안의 해탈이란 제 몸 안에서의 해탈이므로 이것에 준하면 바깥의 해탈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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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안의 번뇌를 끊으면서 그것의 멸(滅)을 얻는 것이므로 역시 안이라 하는 것이니 바깥 물건에 있는 택멸은 안에서 능히 계박하는[能繫] 번뇌를 끊어야 비로소 얻게 되기 때문에 경에서 “안의 해탈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바깥 물건에서는 얻을 만한 택멸이 없으니 오직 능히 얽매는 모든 번뇌의 속박만을 끊음으로써 택멸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경에서 “온갖 행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斷界)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그 경에서는 “모든 행[諸行]이 끊어지기 때문에 단계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해야 하며, “온갖[一切]”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온갖”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작은 부분의 온갖[少分一切]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온갖 것[一切]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작은 부분의 온갖 것15)이요, 둘째는 전 부분[全分]의 온갖 것이다. 그 경에서는 다만 작은 부분의 온갖 것만을 말
하셨을 뿐이다.
어떤 이는 “모든 바깥 물건에 비록 택멸이 있다 해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없다고 할 것이지 있으면서 얻을 수 없다고는 말하지 말 것이다.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은 소용없는 멸(滅)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있기도 하고 얻을 수도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유루의 법은 끝없는 옛날부터 번뇌에 얽매어 있어서 해탈을 얻지 못했지만 만일 번뇌가 끊어지면 그것은 계박을 여의기 때문에 곧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포승줄에 묶였다가 뒤에 풀려날 때는 사람이 풀려났다고 하는 것이지 노끈 등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계박된 데서 해탈을 증득하기
15) 소부분의 온갖 것이란 안[內]의 전부를 의미하고 전부분의 온갖 것이란 안팎[內外]을 다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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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바깥 물건에도 해탈을 얻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말한 것과는 서로가 어긋난다. 거기서 “어떤 것이 작증(作證)하는 법을 얻는 것인가? 온갖 선법(善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바깥 물건에 비록 택멸이 있다고 해도 얻을 수 없다면 선법이 있는데도 작증을 얻는 것이 아니어야 하니 곧 거기의 설명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바깥에도 얻을 수 있는 택멸이 있다.
[문] 택멸의 자성(自性)은 바로 이것이 온(蘊)인 것인가, 다만 온에는 없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바로 온이라면 유정은 본래부터 해탈을 얻었어야 하니 모두가 본래부터 온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다만 온에는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없는 것을 위하여 성도(聖道)를 부지런히 닦겠는가?
[답] “택멸은 바로 이것이 온도 아니요 또한 온에 없는 것도 아니며 다만 유루의 모든 온 가운데서 따로 있는 자성을 얻을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4) 애경납식 ④
이와 같은 택멸(擇滅)1)은 또한 열반(涅槃)이라 하고 또한 동류가 아니라고[不同類] 하며, 또한 무더기가 아니라고[非聚] 하고 또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非顯] 하며, 또한 가장 뛰어나다[最勝]고 하고 또한 통달(通達)한다고 하며, 또한 아라한(阿羅漢)이라 하고 또한 친근하지 않는다[不親近]고 하며, 또한 닦아 익히지 않는다[不修習]고 하고 또한 좋아할 만하다[可愛樂]고 하며, 또한 가깝다[近]고 하고 또한 미묘하다[妙
]고 하며, 또한 벗어난다[出離]고도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열반이라 하는가?
[답] 반(槃)을 갈래[趣]라 하고 열(涅)은 벗어난다[出]는 말이니 영원히 모든 갈래[諸趣]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
또 반을 모든 더러운 냄새[臭]라 하고 열은 없다[無]는 말이니 영원히 더러운 냄새 나는 모든 번뇌의 업(業)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또 반을 빽빽한 숲[稠林]이라 하고 열은 영원히 여읜다[永離]는 말이니 온갖 세 가지 불[三火]과 세 가지 모양[三相]의 모든 온(蘊)의 빽빽한 숲을 여의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
1) 여기는 특히 택멸의 이명(異名)으로서 관용되고 있는 갖가지의 명칭을 해석하면서 간접으로 택멸의 성질을 밝히는 문단이다. 선택된 술어(術語)는 열반 이하 출리에 이르기까지 본문과 같으며 기타 택멸의 이명에는 법단(法斷) 등의 술어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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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반을 짠다[織]고 하고 열은 하지 않는다[不]는 말이니 이 가운데서는 영원히 번뇌의 업의 실[縷]이 없고 나고 죽는 이숙과(異熟果)의 직물을 짜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동류가 아니라고[不同類] 하는가?
[답] 동류인(同類因)이 없기 때문이요 또한 동류인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무더기가 아니라고[非聚] 하는가?
[답] 모든 무더기를 여의기 때문이다. “유위2)에는 머무르는 모양[住相]이 없다”라고 말하는 이면 그는 “유위의 법은 반드시 네 가지 종류[四類]가 함께하는 무더기이니 자체(自體)와 세 가지 모양[三相]이다”라고 말할 것이며, “유위에는 머무르는 모양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면 그는 “유위의 법은 반드시 다섯 가지 종류[五類]가 함께하는 무더기이니 자체와 네 가지 모양[四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또 모든 세계[界]ㆍ모든 갈래[趣]ㆍ모든 생(生)ㆍ모든 온(蘊)ㆍ모든 세간[世]ㆍ모든 고통[苦] 등을 모두 무더기라 하는데 택멸은 그런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무더기가 아니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非顯] 하는가?
[답] 드러낸다는 것은 칭찬한다[稱讚]는 말이다. 열반의 공덕을 지혜 있는 이[智者]는 극진하게 이루면서도 칭찬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열반의 공덕은 끝이 없기 때문에 칭찬할 수가 없는 것이니 마치 “이 사람의 재주는 끝이 없어서 칭찬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드러낸다는 것은 헐뜯는다[毁呰]는 말이니 열반의 공덕이 마침내 원만하여 마치 말니주(末尼珠)가 둥글고 빛나면서 깨끗하여 헐뜯을 수 없는 것
2)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4상(相)을 세운 것은 바사(婆沙)에 와서의 일이거니와 그 이전은 생ㆍ이ㆍ멸의 3상으로 유위의 특질을 삼으면서도 바사의 회중(會中)에는 역시 3상론(相論)을 주장한 이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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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열반의 공덕은 마침내 편안히 머물러서 마치 말니주의 바탕에는 더하거나 덜함이 없고 놓이는 곳에 따라 곧 편안히 머물러서 헐뜯을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드러낸다는 것은 드러내어 말한다[顯說]는 것이니 열반은 성자의 현량(現量)으로 증득하는 것이라 드러내어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모든 유위의 법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서 원인으로써 그의 결과를 드러내어 설명할 수 있고 또한 결과로써 그의 원인을 드러내어 설명할 수도 있으나 열반은 작위도 없고[無爲]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것이라 드러내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다.
또 드러낸다는 것은 드러내 보인다[顯示]는 말이니 열반은 적정(寂靜)한 것이라 바라문(婆羅門)이나 찰제리(刹帝利) 등의 종성의 차별로 드러내 보일 수도 없고, 또한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 등의 모양으로 드러내 보일 수도 없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드러낸다는 것은 나타낸다[顯現]는 말이니 모든 유위의 법은 혹은 바탕이 색(色)으로서 그 모양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색이 아니라 하더라도 색에 의거하여 구르면서 또한 나타낼 수 있지만 열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가장 뛰어나다[最勝]고 하는가?
[답] 으뜸가고 미묘하기[上妙] 때문이다. 마치 세간에서 으뜸가고 미묘한 의복ㆍ음식ㆍ장엄구(莊嚴具) 등을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것처럼 열반도 그러하다.
묘음 존자는 “택멸인 열반은 모든 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법이요, 모든 뜻[義]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뜻이며, 모든 일[事]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일이요, 모든 도리[理]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도리이며, 모든 결과[果]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통달(通達)이라 하는가?
[답] 통달한다는 것은 지혜[慧]를 말한다. 열반은 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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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9변지(遍知)3)는 지(智)의 결과이기 때문에 또한 변지라고 하는 것과 같고 또한 6처(處)는 업의 결과이기 때문에 고업(故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택멸인 열반은 통달한 결과이기 때문에 통달한다고 한다. 마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는 신통의 과보[通果]이기 때문에 또한 통(通)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아라한(阿羅漢)이라 하는가?
[답]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통틀어 응(應)이라는 뜻으로 일컫는 것이니 세간에 으뜸가고 묘한 공양 거리로 택멸인 열반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나한(羅漢)을 응(應)이라 하고 아(阿)는 불(不)이라는 말이니 택멸인 열반은 모든 세계와 갈래에 유전(流轉)하지 않아야[不應] 하기 때문에 불응이라 한다.
또 나한을 적(賊)이라 하고 또한 원(怨)이라 하며 아(阿)는 없다는 말이어서 열반 가운데는 번뇌의 원적(怨賊)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택멸을 아라한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친근하지 않는다[不親近]고 하는가?
[답] 친근함을 여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법에 친근함이 있는 이는 그 결과를 탐내기 때문이니 마치 서늘한 그늘ㆍ꽃ㆍ잎ㆍ열매 등을 탐내어 나무에 친근한 것과 같거니와 열반에는 그로 하여금 탐내게 할 만한 과보가 없기 때문에 친근하지 않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열반을 친근해야 한다”라고 말하는가?
3) 변지(遍知)는 4제(諦)의 경계에 대하여 두루 안다는 뜻이니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4제의 이치를 두루 다 아는 무루지이니 이를 지변지(知遍知)라 하며, 둘째는 무루지에 의하여 번뇌를 끊는 것이니 이를 단변지(斷遍知)라 한다. 보통으로 말하는 변지는 둘째 것을 가리키며 아홉 가지가 있으므로 9변지라 한다. 욕계의 견집(見集)에서 끊는 일변지(一遍知)와 욕계의 멸(滅)ㆍ도(道)에서 끊는 이변지와 상계(上界)의 견집에서 끊는 일변지와 상계의
멸ㆍ도에서 끊는 이변지와 욕계의 수도(修道)에서 끊는 일변지와 색계의 수도에서 끊는 일변지와 무색계의 수도에서 끊는 일변지이다.(『구사론』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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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지혜로운 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말하는데 그 분들은 분명히 이해하고 증득을 일으켜 얻어야 하기 때문에 친근하다고 하겠지만 그 과보를 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친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닦아 익히지 않는다[不修習]고 하는가?
[답] 상속(相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상속에 있으면 자주자주 앞에 드러내어 점차로 더욱 나아가므로 닦아 익혀야 한다고 하지만 열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역시 닦아 익히지 않는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게송에서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교답마(喬答摩)는 나무 아래서
정려(靜慮)하며 방일(放逸)하지 않으시므로
오래지 않아 도의 자취[道迹]를 밟아
열반이 그 마음속에 있으리라.
[답] 열반은 마음에 의거하여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마음속[心中]에 있다고 한 것이요, 열반에 닦아 익힌다는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좋아 할만하다[可愛樂]고 하는 것인가?
[답] 성자(聖者)로서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성자는 뭇 고통을 두려워하는데 열반은 고통을 여읜 것이므로 성자가 좋아하는 것이다.
또 성자는 생사를 싫어하는데 거기에는 생사가 없기 때문에 성인은 좋아하는 것이니 열반 안에는 온갖 유전하는 일을 영원히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성자는 파계(破戒)를 싫어하는데 거기에는 파계가 없기 때문에 성자는 좋아한다. 열반 안에는 온갖 파계하는 일을 영원히 여의었기 때문이니 열반으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무루계(無漏戒)를 말씀하셨으므로 성자가 좋아하는 계[聖所愛戒]라 하며 이 계는 능히 이(離)와 파계의 멸(滅)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또한 시애해탈(時愛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니 시기의 좋아함[時愛樂]을 기다려서 열반을 얻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택멸을 또한 가깝다[近]고 하는가?
[답] 성도(聖道)를 얻는 이가 현실에서 증득하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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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하여 열다섯 가지 법[十五法]을 성취하는 이를 배움의 자취[學跡]를 밟고 열반에 가까운 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상속(相續)을 선택하지 않으면서 증득하기 때문에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찰제리(刹帝利)나 바라문(婆羅門) 등도 도를 닦는 이면 모두가 열반을 증하게 된다.
또 처소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증득하기 때문에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성읍(城邑)에 있거나 혹은 아련야(阿練若)에 있거나 간에 성스러운 도를 닦아 익히면 모두가 열반을 얻는다.
또 승해(勝解)를 말미암아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성자로서 멸인(滅忍)ㆍ멸지(滅智)가 앞에 나타날 때에는 승해의 힘을 말미암아 눈앞에서 대하듯이 명료하게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근사(近事)와 같기 때문에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있는 곳마다 모두 증득할 수 있는 것은 마치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먼 법[遠法]인가? 과거와 미래의 법이다. 어떤 것이 가까운 법[近法]인가? 현재의 법과 모든 무위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가까운 득(得)에 의거하기 때문에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현재 세상을 말하여 가깝다 하고 현재 세상에 의거하여 이계득(離繫得)을 일으켜 택멸을 증득하기 때문에 가깝다고 한다.
또 가까운 것을 버리고 들어가기 때문에 택멸을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현재 세상을 말하여 가까운 법[近法]이라 하고 이 가까운 법을 버리고는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때문에 열반을 또한 가깝다고 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도를 부지런히 닦는 이는 곧장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가깝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성도의 소의(所依)에는 각각 차별이 있지만 열반에는 결정됨이 없기 때문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니 도를 닦는 이면 모두가 증득하기 때문이다.
[문] 성도도 묘(妙)하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품류족론』에 “어떤 것이 묘한 법인가? 학(學)과 무학(無學)과 택멸무위(擇滅無爲)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열반만 유독 묘하다고 하는가?
[답] 열반은 묘한 것 중에서도 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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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성도는 비록 묘하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이 섞였거니와 열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독 묘하다고 한다.
또 성도는 비록 묘하다 하더라도 능히 대치하는 것[能對治]이 있어서 선법(善法)조차도 싫어하는 것이니 공공(空空) 등이거니와 열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독 묘하다고 한다.
[문] 성도도 벗어나는[出離] 법이다. 마치 『품류족론』에 “어떤 것이 벗어나는 법인가? 욕계의 착한 계[善戒]와 색계ㆍ무색계의 이생(離生)의 선한 정[善定]과 학ㆍ무학ㆍ택멸무위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열반을 유독 벗어나는 것이라 하는가?
[답] 열반은 벗어나는 것이면서 벗어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벗어나는 것이면서 또한 벗어남을 소유하는 것이니 반열반(般涅槃)할 때에는 그것도 벗어나기 때문이다.4)
또 열반은 진실로 벗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유루의 법에는 두 가지 버리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단사(斷捨)요 둘째는 기사(棄捨)이다5). 무루ㆍ유위에는 비록 단사는 없다 하더라도 기사는 있거니와 오직 택멸에서만은 두 가지의 버리는 것이 모두 없으므로 진실로 벗어난다고 한다.
또 열반은 마지막으로 벗어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색(色)으로써 욕(欲)을 벗어나고 무색(無色)으로써 색을 벗어나며 성도(聖道)로써 무색을 벗어나지만 열반으로써는 온갖 유위의 법을 벗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미 비택멸(非擇滅)의 체성은 계박을 여의는 것[離繫]이 아님을 알았으므로 무엇 때문에 비택멸이라 하는가를 말해야 한다.6)
4) 출리(出離)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도 지양(止揚)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聖道)는 출리를 위한 배나 뗏목과 같은 것인데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는 법이므로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면 그것 자체도 또한 버려야 하는 것이다.
5) 단사라 함은 지혜의 힘에 의하여 다 끊어서 버리는 것을 말하고 기사라 함은 목적을 달성하면 저절로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6) 앞에서 택멸론을 설명하여 마치고는 다시 특히 상세하게 비택멸의 성질과 그것이 일어나게 되는 갖가지의 모양을 밝히려는 것이 이 단의 내용이다. 주된 항목을 들어 보면 ① 비택멸의 명의(名義), ② 비택멸은 미래의 법만이 관계한다는 것, ③ 택멸과 비택멸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에 관하여, ④ 비택멸의 공득(共得)ㆍ불공득(不共得)에 관하여, ⑤ 악취(惡趣)의 비택멸, ⑥ 선취(善趣)의 비택멸, ⑦ 번뇌의 비택멸, ⑧ 성도(聖道)의 비택멸,
⑨ 비택멸의 득(得)과 능득(能得)하는 마음과의 관계, ⑩ 비택멸의 득과 그의 증장(增長), ⑪ 성자(聖者)가 상계(上界) 상지(上地)에 날 때에 얻는 비택멸에 관하여, ⑫ 열반할 때의 전후와 비택멸의 다소(多少)에 관하여, ⑬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과 비택멸의 다소에 관하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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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간택하는 지혜[擇慧]를 말미암지 않고 이 멸(滅)을 얻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하는 것이니 간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 멸은 한결같은 수고[劬勞]와 한결같은 가행(加行)과 한결같은 공용(功用)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간택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한다.
또 이 멸은 반드시 자주자주 고(苦) 등을 결택(決擇)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야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멸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인가?
[답] 연(緣)이 궐(闕)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마치 한쪽[一方]의 대(對)가 되는 다른 쪽에 있는 모든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의 경계가 소멸한 것과 같은 것이어서 그 능연(能緣)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에 대하여 연이 궐하기 때문에 마침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이 생기기 않음을 말미암아 비택멸을 얻는다.
[문] 어느 세상의 모든 법에서 비택멸을 얻게 되는가?
[답] 어떤 이는 “3세(世)의 모든 법에서 모두 비택멸을 얻는 것이니 이것은 유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디서 이 멸을 얻지 못하며 얻는 것과 얻지 못한 것에는 다시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느 다른 논사는 “다만 과거와 미래의 모든 법에서만 비택멸을 얻으며 현재에서는 얻지 못한 것이니 현재의 법은 몸에 있으면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멸은 낱낱의 기억[念]을 얻은 뒤에는 도로 버리고 버린 뒤에는 도로 얻어야만 한다. 미래의 법이 현재로 들어 올 때에는 그 비택멸을 얻고 나서는 도로 버리고 현재의 모든 법이 과거로 들어갈 때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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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택멸은 버리고 나서 도로 얻어야 하지만 비택멸에는 이러한 뜻이 없다.
[답] 혹은 어떤 이는 “오직 미래의 법에서만 비택멸을 얻으며 과거와 현재에는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법은 이미 몸에 있으면서 행했고 현재의 모든 법은 몸에 있으면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멸은 얻고 나서 당연히 버려야 한다. 미래의 법이 현재로 들어올 때에는 그 비택멸을 얻은 뒤에 버렸기 때문이나 비택멸에는 이와 같은 뜻이 없다.
[評] 이 비택멸은 오직 미래의 생기지 않는 법[不生法]에서만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멸은 본래 유위법을 막아 영원히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생기지 않으면 이 득(得)이 곧 일어나는 것은 마치 욕을 주는 법[與欲法]이 그 유정에게 계속(繫屬)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현재에 행하고 있거나 과거에 이미 행하였거나 미래에 장차 행할 것이면 모두가 생긴다[生]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법에서는 이 멸을 얻지 못한다.
[문] 택멸과 비택멸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답] 어떤 이는 “택멸은 많고 비택멸은 적다. 왜냐하면 택멸은 3세법(世法)의 전체를 통하여 얻고 비택멸은 오직 미래의 생기지 않는 법에서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비택멸은 많고 택멸은 적다. 왜냐하면 비택멸은 유루와 무루법의 전체를 통하여 얻고 택멸은 오직 유루의 법에서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다음처럼 말해야 한다.
“비택멸은 많고 택멸은 적다. 왜냐하면 비택멸은 유위법의 수량과 같고 택멸은 다만 유루법의 수량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생길 수 있는 법에서 만일 생기지 않게 되면 당연히 비택멸을 얻지 못해야 한다.
두 가지 멸[二滅]의 자성(自性)의 많고 적음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얻는 것[得]에 의하면 4구(句)를 드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법은 거기에서 택멸은 얻으면서 비택멸은 얻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생길 수 있는 유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거기에서 비택멸은 얻으면서 택멸은 얻지 못한다. 미래의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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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무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거기에서 택멸도 얻고 비택멸도 얻는다. 미래의 생기지 않는 유루의 법이다.
어떤 법은 거기에서 택멸도 얻지 못하고 비택멸도 얻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길 수 있는 무루법이다.”
[문] 모든 유정들은 비택멸을 모두 함께[共] 얻는가, 함께 얻지 못하는가?
[답] 이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함께 소유하는 법에서의 비택멸이면 함께 얻지만 함께 소유하지 않는 법에서의 비택멸이면 저마다 따로따로 얻는다.
모든 이생(異生)들로서 만일 한 갈래[一趣]에 머무른 이면 다른 갈래[餘趣]의 법에 대해 찰나마다 비택멸을 얻는 것이니 빛깔[色] 등의 경계가 생각마다 소멸할 때에 그것을 반연하는 안식(眼識) 등은 끝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한 갈래에서 머무는 이처럼 하나의 세계[界]와 하나의 자리[地]와 하나의 처소[處]에 머무는 이도 그러하다.
[문] 어떤 선법(善法)으로 말미암아 모든 수행하는 이는 모든 악취(惡趣)에 대해 비택멸을 얻는가?
[답] 혹은 보시(布施)로 말미암기도 하고 혹은 지계(持戒)를 말미암기도 하며, 혹은 문혜(聞慧)를 말미암기도 하고 혹은 사혜(思慧)를 말미암기도 하며, 혹은 수혜(修慧)를 말미암아 모든 수행하는 이는 모든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는 것이다.
보시로 말미암는다 함은 어떤 이가 비록 12년 동안 문을 열어 놓고 크게 보시했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은 마치 폐라마(吠邏摩)와 굴로라(屈路羅) 등과 같은 이이니 그들은 생사를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니와 어떤 이는 비록 한번 한 덩이의 밥을 보시하고도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이니 그들은 깊이 생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지계(持戒)로 말미암는다 함은 어떤 이가 비록 목숨이 다하도록 별해탈계(別解脫戒)를 지녔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비록 밤낮 하루 동안의 계율[一晝夜戒]을 지니고도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문혜(聞慧)로 말미암는다 함은 어떤 이가 비록 삼장(三臧)의 글과 뜻을
다 환히 알았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비록 4구로 된 한 게송[一四句頌]를 알았을 뿐이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사혜(思慧)로 말미암는다 함은 어떤 이가 비록 안팎의 서론(書論)을 다 사유(思惟)했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작은 부분의 관법(觀法)을 사유하고도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니, 곧 부정관(不淨觀)ㆍ지식념(持息念) 등과 모든 염주(念住)이다.
수혜로 말미암는다 함은 어떤 이는 8지(地)의 세속 선정[世俗定]을 다 얻었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니 곧 외도 맹희자(猛熹子) 등이다. 어떤 이는 비록 작은 부분의 관문(觀門)을 닦아 익혔으나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은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이다. 곧 난(煖)ㆍ정(頂)ㆍ인(忍)의 극히 근기가 둔한 이도 하품의 인[下品忍]을 얻을 때에는 모든 악취에 대해 모두가 비택멸을 얻는 것이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무루의 지혜[無漏慧]로 연기(緣起)를 깨달아야 비로소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는 것이니 성도(聖道)를 여의고는 모든 악취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보살은 91겁(劫) 동안 악취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무루의 지혜로 연기를 깨달아서이겠는가? “혹은 보시거나 혹은 지계거나 나아가 하인(下忍)은 모두가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3악취의 비택멸은 일시에 얻는가, 따로따로 얻는가?
[답] 어떤 이는 “반드시 일시에 얻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천수(天授:提婆達多)는 어떻게 하여 이미 두 악취의 비택멸은 얻었고 지옥만은 얻지 못한 것인가?
[답] 그는 지옥에서 오직 일생(一生)7)만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생(生)과 두
7) 『증일아함(增一阿含)』 제47권에 “그는 60겁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고 그 뒤에는 천상에 나서 마침내는 벽지불의 위(位)에 이른다”는 것이 부처님의 기별(記別)이므로 그는 지옥의 일생을 제외하면 끝내 3악취에서는 비택멸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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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에서는 모두 단번에 비택멸을 얻은 것이다.
[문] 이미 일생이 제외되었는데 어찌 따로따로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답] 어느 다른 논사는 “보시ㆍ지계ㆍ문혜 등으로 만일 악취에 대해 비택멸을 얻은 것이면 혹은 따로따로이기도 하고 혹은 전체이기도 하지만 순결택분(順決擇分)으로 얻는 것은 반드시 통틀어 얻는다”라고 말한다.
[문] 천수가 어찌 순결택분을 얻지 못했겠는가?
[評] “인위(忍位)에서는 통틀어 얻지만 그 전위(前位)이면 일정하지 않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악취에 대한 비택멸을 얻는 것을 말했으므로 선취(善趣)에서 얻는 비택멸을 말하겠다.
증상인(增上忍)일 때에는 오직 욕계에서의 인간ㆍ천상의 7생(生)과 색계ㆍ무색계의 낱낱 처소에서의 각 일생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생에서 비택멸을 얻는다.
예류자(預流者)가 일래과(一來果)로 나아갈 때에 정(定)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加行道)일 때에 욕계의 6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여섯 번째 무간도[第六無間道]에 이를 때에 욕계의 6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일래자(一來子)가 불환과(不還果)로 나아갈 때에 정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일 때에 욕계의 1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아홉 번째 무간도에 이를 때에 욕계의 1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또 그때에 욕계의 온갖 생에 대하여 택멸을 얻는다.
불퇴법자(不退法者)가 초정려(初靜慮)의 염(染)을 여읠 때에 정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일 때에 초정려의 2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아홉 번째 무간도에 이를 때에 초정려의 2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또 그때에 초정려의 온갖 생에 대하여 모두 택멸을 얻는다.
만일 퇴법자(退法者)가 초정려의 염을 여읠 때이면 정을 일으키거나 일으키지 않거나 간에 모두 아홉 번째 무간도에 이를 때에 초정려의 온갖 생에서 택멸은 얻지만 비택멸은 얻지 못하니 물러날 수 있는 일[可退]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을 여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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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한다.
불퇴법자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을 여읠 때에 정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일 때에 비상비비상처의 1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정을 일으킨 이면 아홉 번째 무간도에 이를 때에 비상비비상처의 1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또 그때에 온갖 생에 대하여 모두 택멸을 얻는다.
만일 퇴법자가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읠 때이면 정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일 때에 8지(地)의 생(生)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아홉 번째 무간도에 이를 때에 8지의 생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또 그때에 온갖 생에 대하여 모두 택멸을 얻는다.
이미 나는 곳[生處]에 대한 비택멸을 얻는 것을 말했으므로 번뇌에서 얻을 비택멸을 말하겠다.
증상인일 때에는 삼계(三界)의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번뇌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견도(見道)에 이르면 무간도(無間道)에 따라 그것의 택멸을 얻는다.
성자(聖者)로서 수도(修道)에서의 불퇴법자(不退法者)가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정(定)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가행도(加行道)일 때에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修所斷] 번뇌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그 여러 무간도에 따라 이르게 될 때에 비택멸을 얻고 또 그때에 그 번뇌의 택멸을 얻는다.
만일 퇴법자(退法者)가 욕염을 여읠 때이면 정을 일으키거나 정을 일으키지 않거나 그 여러 무간도에 따라 이르게 될 때에 그 번뇌의 택멸은 얻지만 그것의 비택멸은 얻지 못한다.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의는 데 있어서도 응한 것에 따라 설명해야 한다.
[문] 모든 퇴법자는 어느 때에 수도에서 끊을 번뇌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가?
[답] 어떤 이는 “신승해(信勝解)의 연근(練根)으로써 견지(見至)를 얻을 때와 시해탈(時解脫)의 연근으로써 부동(不動)을 얻을 때에는 수도에서 끊을 것인 이미 끊는 번뇌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評] “만일 결정(決定)을 얻었다가 다시 물러나지 않으면서 그 번뇌를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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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때에는 그 번뇌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때에 그에 대해 비택멸을 얻으면 또한 그의 택멸도 얻는 것인가?
[답] 4구(句)를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법은 먼저 비택멸을 얻고 뒤에 택멸을 얻는다.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번뇌와 불퇴법자로서 정을 일으키지 않은 이면 삼계의 수도에서 끊을 번뇌를 여의는 것 등이다.
어떤 법은 먼저 택멸을 얻고 뒤에 비택멸을 얻는다. 퇴법자로서 삼계의 수도에서 끊을 번뇌를 여의는 것 등이다.
어떤 법은 같은 때에 비택멸과 택멸을 얻는다. 불퇴법자로서 만일 정을 일으킨 이면 삼계의 수도에서 끊을 번뇌를 여의는 것 등이고, 만일 퇴법자이면 욕계의 앞(前) 8품(品)의 염(染)을 여의는 무간도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마다 그 품(品)의 염오(染汚)의 안식(眼識) 등의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한 법[相應法] 등은 나타나는 소연(所緣)에 대하여 비택멸과 그것의 택멸을 얻고, 욕계의 제9품(品)을 여의는 무간도일 때에는 그 품의 염오와 선(
善)ㆍ무기(無記)의 안식 등의 다섯 가지 식과 상응한 법 등은 나타나는 소연에서 비택멸과 그것의 택멸을 얻는다.
초정려의 앞 8품의 염을 여의는 무간도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마다 그 품의 염오의 안식 등의 세 가지 식[三識:眼ㆍ耳ㆍ身]과 상응한 법 등은 나타나는 소연에 대하여 비택멸과 그것의 택멸을 얻고, 초정려의 제9품을 여의는 무간도일 때에는 그 품의 염오와 선ㆍ무기의 안식 등의 세 가지 식과 상응한 법 등은 나타나는 소연에 대하여 비택멸과 그것의 택멸을 얻는다.
어떤 법은 간혹 두 가지의 멸[二滅]을 다 같이 얻지 못한 것이 있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 등이다.
이미 번뇌에서 비택멸을 얻는 것을 말했으므로 성도(聖道)에서 비택멸을 얻는 것을 말하겠다.
수신행자(隨信行者)는 수법행(隨法行)의 도(道)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수법행자(隨法行者)는 수신행과 신승해(信勝解)와 시해탈(時解脫)의 도(道)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신승해자(信勝解者)는 만일 결정코 신승해의 도에 의하여 무학과(無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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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를 얻을 이면 견지도(見至道)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견지자(見至者)는 신승해와 시해탈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시해탈자(時解脫者)는 만일 결정코 시해탈의 도에 의하여 구경(究竟)을 얻을 이면 불시해탈(不時解脫)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불시해탈자(不時解脫者)는 시해탈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성문 종성(聲聞種性)이 성문의 도에 의하여 결정을 얻을 때에는 부처님과 독각(獨覺)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독각 종성이 독각의 도에 의하여 결정을 얻을 때에는 부처님과 성문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부처님 종성이 부처님의 도에서 결정을 얻을 때에는 독각과 성문의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아라한과(阿羅漢果)에 있는 여섯 가지 종성[六種性]에서는 퇴법(退法) 종성으로서 만일 퇴도(退道)에 의하여 구경에 이른 이면 위의 다섯 가지 도[五道]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사법(思法) 종성으로서 만일 사도(思道)에 의하여 구경에 이른 이면 위의 네 가지 도와 아래의 한 가지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으며, 나아가 감달[堪達] 종성으로서 만일 감달도(堪達道)에 의하여 구경에 이른 이면 위의 한 가지 도와 아래의 네 가지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고, 부동(不動) 종성은 아래의 다섯 가지 도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는다.
[문] 만일 뛰어나게 나아가는[勝進] 때에 비택멸을 얻는다면 이 멸(滅)은 무엇 때문에 도과(道果)는 아닌가?
[답] 이 멸을 위하여 도를 닦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을 위하고 염을 여의기[離染] 위하여 도를 부지런히 닦는다면 도를 닦기 때문에 악취(惡趣) 등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게 되지만 만일 이 멸을 위하여 도를 닦는 이면 악취 등에 대하여 이 멸을 얻지 못한다. 생사에 대하여 깊이 싫어하지 않으면 악취에 대하여 비택멸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택멸을 도과(道果)라고는 하지 않는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 “어떤 것이 과의 법[果法]인가
? 온갖 유위의 법과 택멸이다. 어떤 것이 과가 아닌 법[非果法]인가? 허공(虛空)과 비택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비택멸의 득(得)은 어느 마음의 과(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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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이 멸의 득은 중동분(衆同分)을 이끄는 마음의 과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멸의 득은 속생심(續生心)의 과이다”라고 말한다.
[評] “어느 마음에 따라 머무르면서 비택멸을 얻어도 곧 이 득은 그 마음의 과라고 설명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어떤 법에 비택멸을 얻는 것인가?
[답] 삼계계(三界繫)의 법과 불계(不繫)의 법에서 얻는다. 욕계에 나는 이는 이 네 가지의 법[四法]에서 얻고 색계와 무색계에 나는 이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비택멸의 득(得)8)은 어느 지(地)를 따라 나거나 곧 그 지(地)의 계(繫)로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성품에 속할 뿐이요 오직 등류(等流)일 뿐이니 소의(所依)의 힘에 따라 이 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문] 비택멸의 득은 어느 법 가운데서 점점 더욱 자라게 되는가?
[답] 만일 욕계에 태어나면 욕계계(欲界繫)의 5식신(識身) 등에서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 자라며 또한 의식이 있는 정[有意識定]이 현재를 반연할 적에 이들의 법에서도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욱 자라지만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따로 나타내 보이지는 않는다. 색계계(色界繫)의 3식신(識身) 등과 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등의 법에서도 무색계의 변처의 법 중에서도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욱 자라게 된다.
만일 색계에 나면 욕계계의 5식신 등에서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욱 자라고 색계계의 3식신 등과 무량ㆍ해탈ㆍ승처ㆍ변처 등의 법과 무색계의 변처의 법 중에서도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욱 자라게 된다.
무색계에 나면 욕계계의 5식신 등과 색계계의 3식신 등과 무량ㆍ해탈ㆍ승처ㆍ변처 등의 법과 무색계의 변처의 법 중에서도 비택멸의 득은 점점 더
8) 비택멸의 득(得)은 삼계(三界) 9지(地)의 어느 지에서 얻어도 그 지에 속한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초선(初禪)의 사람이 어떤 법에서 비택멸을 얻을 때에는 그 득은 초선에 속하는 것과 같다. 득을 3성(性)으로 분별하면 무부무기에 속하며 장양ㆍ등류ㆍ이숙의 입장에서 보면 소의(所依)의 몸의 등류일 뿐이어서 이숙성도 아니고 장양성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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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 자라게 된다.
[문] 성자(聖者)로서 색계에 나면 욕계와 색계의 어느 법에서 비택멸을 얻는 것인가?
[답] 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초정려에 나면 욕계에서 상지(上地)에 의하여 일으킨 변화한 심품[變化心品]과 일으킨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의 법과 욕계에 의하여 일으킨 색계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제2 정려에 나면 욕계와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위의 세 가지 정려[上三靜慮]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識身)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의 법과 초정려의 법과 욕계와 초정려에 의하여 색계의 상지법(上地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서 제2 정려에 나면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위의 세 가지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초정려의 법과 초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제3 정려에 나면 욕계와 초ㆍ이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위의 두 가지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와 초ㆍ2정려의 법과 욕계와 초정려ㆍ제2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색계의 상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서 제3 정려에 나면 초정려와 제2 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위의 두 가지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초정려ㆍ제2 정려의 법과 초정려와 제2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2 정려에서 죽어서 제3 정려에 나면 제2 정려에서 상지에 의하여 일으킨 위의 두 가지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제2 정려의 법과 제2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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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제4 정려에 나면 욕계와 처음의 세 가지 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제4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와 처음의 세 가지의 정려의 법과 욕계와 처음의 세 가지의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제4 정려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서 제4 정려에 나면 처음의 세 가지 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제4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과 아울러 초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4식신 등을 제외한 그 밖의 처음의 세 가지 정려의 법과 처음의 세 가지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2 정려에서 죽어서 제4 정려에 나면 제2ㆍ제3 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제4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제2ㆍ제3 정려의 법과 제2ㆍ제3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3 정려에서 죽어서 제4 정려에 나면 제3 정려에서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제4 정려의 과의 변화한 심품과 일으킨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제3 정려의 법과 제3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문] 성자(聖者)로서 무색계에 나면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어느 법에서 비택멸을 얻는가?
[답] 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나면 욕계ㆍ색계의 법과 욕계ㆍ색계에 의하여 일으킨 무색계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서 공무변처에 나면 네 가지 정려[四靜慮]의 법과 네 가지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ㆍ하계(上下界)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2 정려에서 죽어서 공무변처에 나면 뒤의 세 가지 정려의 법과 위의 세 가지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3 정려에서 죽어서 공무변처에 나면 뒤의 두 가지 정려의 법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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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두 가지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제4 정려에서 죽어서 공무변처에 나면 제4 정려의 법과 제4 정려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욕계에서 죽어서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나면 욕계ㆍ색계와 아래의 세 가지 무색[下三無色]의 법과 욕계ㆍ색계와 아래의 세 가지 무색에 의하여 일으킨 유정(有頂)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만일 초정려에서 죽어서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나면 색계와 아래의 세 가지 무색의 법과 색계와 아래의 세 가지 무색에 의하여 일으킨 상지ㆍ하지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나아가 만일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죽어서 비상비비상처에 나면 무소유처의 법과 무소유처에 의하여 일으킨 유정의 법에 대하여 모두 비택멸을 얻는다.
[문] 성자로서 무색계에 난 이면 욕계ㆍ색계의 법의 비택멸을 얻는가?
[답] 얻지 않는다. 이미 먼저 얻었기 때문이다.
[문] 성자로서 무색(無色)의 상지(上地)에 난 이면 하지(下地)의 법의 비택멸을 얻는가?
[답] 얻지 않는다. 이미 먼저 얻었기 때문이다.
[문] 먼저 반열반(般涅槃)하는 이가 비택멸을 얻는 것이 많은가, 나중에 반열반하는 이가 비택멸을 얻는 이가 많은가?
[답] 앞에 반열반하는 이가 비택멸을 얻는 것이 많고 나중에 반열반하는 이는 비택멸을 얻는 것이 적다. 마치 음광불(飮光佛) 때에 반열반한 이는 비택멸을 얻는 것이 많고 능적불(能寂佛) 때에 반열반한 이는 비택멸을 얻는 것이 적으며, 또 능적불 때에 반열반한 이는 비택멸을 얻는 것이 많고 자씨불(慈氏佛) 때에 반열반할 이는 비택멸을 얻는 것이 적은 것과 같다.
[문] 어떠한 아라한이 최후의 마음[最後心]에 머무를 때에 비택멸을 성취하는 것이 욕계에서 가장 많은가, 색계에서 가장 많은가, 무색계에서 가장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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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무색계의 아라한이 최후의 마음에 머무를 때에 비택멸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많으니 온갖 색법(色法)이 현행(現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비록 먼저는 아직 얻지 못하고 지금 비로소 비택멸을 얻는 것은 없다 해도 한량없는 비택멸의 득(得)이 있으면서 오히려 앞에 나타나 있으므로 많이 성취한다고 한다.
어느 다른 이는 이것에 대하여 문답을 만들었다.
“혹시 온(蘊)ㆍ계(界)ㆍ처(處)가 상속하지 않고 영원히 소멸하면 거기서는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이 있는가? 있다. 무색계의 아라한이 최후의 마음에 머무를 때에 비록 한량없는 온ㆍ계ㆍ처가 상속하지 않고 영원히 소멸함이 있다 해도 거기에서는 마침내 비택멸을 얻지 못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온ㆍ계ㆍ처가 상속하지 않고 영원히 소멸하면 거기서는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 무색계의 아라한이 최후의 마음에 머무를 때에 상속하지 않고 영원히 소멸하는 온ㆍ계ㆍ처에서 어찌 비택멸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답] 비록 지금은 얻는 것이 아니라 해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니 먼저 이미 얻었기 때문이다. 무색계의 아라한이 만일 결정코 반열반할 때면 미래 세상에서 막 일어나는 찰나를 제외한 그 밖의 온ㆍ계ㆍ처에서는 모두 비택멸을 얻기 때문이다.
[論] 계경에서 “두 가지 열반계[二涅槃界]가 있다.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槃界)와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9)……(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9) 이상 여러 단에서 부분적인 택멸과 비택멸을 밝히고 더 나아가 전체로서의 열반을 밝히려 하는 것이 여기의 내용이다. 열반을 유여의와 무여의로 분류한 것은 이미 아함(阿含) 성전에서의 일이거니와, 그 의미가 반드시 확정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비달마 논사들 간에 갖가지의 이설(異說)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그 다른 견해들을 비평하면서 그 바른 뜻을 나타내려는 것이니 그 주된 항목은 ① 다른 견해들의 소개, ② 유여의열반의 설명, ③ 무여의열반
의 설명, ④ 여론(餘論)이다.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두 가지 열반계가 있다. 첫째는 유여의열반계요, 둘째는 무여의열반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유여의열반계이고 어떤 것이 무여의열반계인가를 자세히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은 이제 모두 그것을 분별해야 한다.
또 앞에서 “어떤 것이 택멸인가? 모든 멸(滅)이 계박을 여읜 것[離繫]이다”라고 말하셨다. 이 이계(離繫)가 열반이나 열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의(有餘依)요, 둘째는 무여의(無餘依)이다. 이제 이 두 가지의 차별을 분별하려 한 것이다.
또 다른 종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에는 자성(自性)이 있고, 무여의열반계에는 자성이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에는 모두 자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유루(有漏)요, 무여의열반계는 무루(無漏)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무루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유위(有爲)요, 무여의열반계는 무위(無爲)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무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선(善)이요, 무여의열반계는 무기(無記)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선한 성품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도(道)이나 도의 과[道果]는 아니요, 무여의열반계는 도의 과이나 도는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도의 과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도의 과요, 무여의열반계는 도의 과가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도의 과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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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진리[諦]에 속하나 무여의열반계는 진리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진리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유여의열반계는 무학(無學)이요, 무여의열반계는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두 가지 열반계는 모두 비학비무학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말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유여의열반계인가?
[答] 만일 아라한이 모든 번뇌[諸漏]가 영원히 다했으나 수명(壽命)이 아직 존재하며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상속하면서 아직 끊어지지 않고 5근신(根身)에 의하여 마음이 상속하여 구르고 있으면 남은 의지함이 있기[有餘依] 때문이니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촉증(觸證)을 얻은 것을 유여의열반계라 한다.
여기에서 수명이란 명근(命根)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중동분(衆同分)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말해야 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명근과 중동분은 다 같이 이끌어 낸 업과(業果)이나 명근은 한결같이 이숙(異熟)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한쪽만 말한 것이다. 이것에 의하여 남아 있는 색(色)ㆍ심(心) 등이 움직이고 그 가운데서 대종(大種)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말한 것이다. 이 대종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질[色]이 생기고 만들어진 물질에 의하여 심(心)ㆍ심소(心所)가 생기는데 마음은 주(主)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한쪽만 말한 것이다.
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란 통틀어 육신(色身)을 나타내고 5근신에 의하여 마음이 상속한다고 하는 것은 심ㆍ심소를 나타낸다. 또한 생(生)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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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응행(不相應行)도 있지만 분명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요 또 앞의 법[前法]에 속하기 때문에 따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상속하여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나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얻은 것을 유여의열반계라 한다.
어떤 이는 “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란 몸[身]이요 5근이란 감관[根]이며 마음의 상속이란 깨닫는 것[覺]이다. 이 몸과 감관과 깨닫는 것이 상속하며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나 모든 번뇌는 영원히 다한 것을 유여의열반계라 한다. 마치 계경에서 ‘몸과 감관과 깨닫는 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는 것을 유여의열반계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남은 의지함이 있기 때문이다[有餘依故]에서 의(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의(煩惱依)요, 둘째는 생신의(生身依)이다. 이 아라한은 비록 번뇌에 의지함은 없다 하더라도 생신에 의지함은 있다.
또 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오의(染汚依)요, 둘째는 불염오의(不染汚依)이다. 이 아라한은 비록 염오에 의지함은 없다 해도 불염오에 의지함은 있기 때문에 얻은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을 유여의열반계라 한다.
촉증(觸證)10)을 얻었다는 것은 글자는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같이 하나의 뜻을 나타낸다.
[論] 어떤 것이 무여의열반계인가?
[答] 바로 아라한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고 수명이 이미 소멸하였으며 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의 상속이 이미 끊어졌고 5근신에 의하여 마음이 다시는 구르지 않으면 남은 의지함이 없기[無餘依] 때문이니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을 무여의열반계라 한다.
여기에서 수명이 이미 소멸했다고 함은 명근과 중동분이 이미 소멸한 것
10) 촉증이라는 말은 보통 쓰는 말로 표시하면 자각(自覺)이니 체험(體驗)이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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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타낸다. 다 같이 이끌어 낸 업과이기 때문에 우선 명근을 들었지만 중동분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의 상속이 이미 끊어졌다고 함은 통틀어 육신의 상속이 이미 끊어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5근신에 의하여 마음이 다시는 구르지 않는다 함은 심ㆍ심소가 다시는 상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生) 등을 말하지 않는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어떤 이는 “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란 몸을 나타내고 5근신이란 감관을 나타내며 마음의 상속이란 깨닫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육신과 심ㆍ심소의 법인 몸과 감관과 깨닫는 것의 상속이 이미 끊어졌고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을 무여의열반계라 한다.
아라한이 열반에 들려고 할 때면 몸속에서 바람이 일어나 잘 어울리지 않게 하고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속의 불이 열약하게 되며 불이 열약하여지기 때문에 먹는 것이 소화되지 않고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기 때문에 식욕(食欲)이 없어지며 식욕이 없기 때문에 다시 먹거나 마시지 않게 되고 먹거나 마시지 않기 때문에 대종(大種)이 손감되고 대종이 손감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물질인 모든 감관도 따라서 손감되며 모든 감관이 손감되기 때문에 심ㆍ심소의 법이
의지할 데가 없어지며 다시는 상속하지 못하고 심ㆍ심소의 법이 상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명근 등이 끊어지며 명근 등이 끊어지기 때문에 열반에 든다고 한다.
남은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다[無餘依故]에서 두 가지 의[二依]가 없으니, 첫째는 번뇌의가 없고 둘째는 생신의가 없다.
또 첫째는 염오의가 없고 둘째는 불염오의가 없다. 남은 의지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을 무여의열반계라 하는 것이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촉증을 얻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답] 현재의 득(得)에 의하여 얻었다는 말을 하는 것인데 현재의 득이 끊어졌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보특가라에 의지하기 때문에 “촉증을 얻는다”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보특가라는 없고 오직 법성(法性)만이 있을 뿐이므로 말하지 않는다.
[문] 혹시 아라한으로서 유여의열반계에도 무여의열반계에도 머무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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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가 있는가?
[답] 도리에서 보아 비록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말한 것에 의거하면 역시 있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 일[三事]11)을 갖추어 있으면 유여의열반계라 하고 세 가지 일이 모두 없으면 무여의열반계라 하므로 무색계에 난 아라한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유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요 마음의 움직임은 있기 때문에 무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다.
또 유색계(有色界)12)에 난 아라한은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벌써 마음의 움직임은 없기 때문에 유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요, 육신은 있기 때문에 무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며, 욕계에 난 이로서 감관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아라한이면 다섯 가지 감관[五根]이 불구(不具)이기 때문에 유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요, 육신은 있기 때문에 무여의열반계에 머문 이도 아니다.
어떤 이는 “이 글에서는 ‘어떤 것이 유여의열반계인가? 아라한으로서 수명은 아직 있으면서도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다하고 촉증(觸證)을 얻은 이다. 어떤 것이 무여의열반계인가? 곧 아라한으로서 수명이 이미 소멸하였고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다한 이다’라고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評]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삼계에 난 아라한으로서 만일 육신이 있거나 육신이 없거나 마음의 움직임이 있거나 마음의 움직임이 없거나 5근을 갖추었거나 5근을 갖추지 못했거나 간에 다만 수명만이 있는 이면 모두가 유여의열반계에 머무른 이라 하고, 수명이 소멸한 뒤면 모두가 무여의열반계에 머무른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본론을 지은 이가 모든 제자들을 이익되게 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 이생(異生)과 유학(有學)이 얻은 이계(離繫)는 어떠한 열반계에 속하는가?
[답] 그것은 두 가지 열반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생이 얻은 이계는 다만 끊었다[斷]고 하고 여의었다[離]고 하며 없앴다[滅]고 하고 진리[諦]라고 해
11) 세 가지의 일이란 모든 근(根)과 신(身)과 각(覺)이다.
12) 유색계라 함은 욕계와 색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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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하며 변지(遍知)라고 하지도 않고 사문과(沙門果)라고 하지도 않으며 유여의열반계라 하지도 않고 무여의열반계라고 하지도 않는다.
또 모든 유학이 얻은 이계는 끊었다 하고 여의었다 하며 없앴다 하고 진리라고 하지만 어떤 지위에서는 변지라고 하고 어떤 지위에서는 변지라고 하지 않으며, 어떤 지위에서는 사문과라고 하고 어떤 지위에서는 사문과라고 하지 않으며, 유여의열반계라고 하지도 않고 무여의열반계라 하지도 않는다.
만일 모든 무학이 얻은 이계이면 끊었다 하고 여의었다 하며, 없앴다고 하고 진리라고 하며, 변지라고 하고 사문과라고 하며, 어떤 때에는 유여의열반계라 하고 어떤 때에는 무여의열반계라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3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4) 애경납식 ⑤
[論] 열반은 학(學)이라고 해야 하는가, 무학(無學)이라고 해야 하는가,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이라고 해야 하는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두 가지 열반계[二涅槃界]를 말했다 해도 아직 열반이 학인지 무학인지 비학비무학인지를 말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어떤 이는 “열반에는 학이 있고 무학이 있으며 비학비무학이 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자부(犢子部)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열반은 오직 비학비
1) 앞에서 두 가지 열반을 논했고 이어서 그 열반이 본 성품에서는 학의 범위에 속해야 하는가, 무학의 범위에 속해야 하는가, 아니 비학비무학[無學法]의 범위에 속해야 하는가를 판정하려는 것이 이 단의 목적이다. 본론의 입장은 열반의 본성은 비학비무학이어서 유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異生]의 구별은 요는 그 무위 열반의 얻는 방법의 상위(相違)한 데에 있고 열반 그 자체에 구별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독자부(犢子部)나 그 밖의 다
른 데서는 열반 그것에는 이생적ㆍ유학적ㆍ무학적인 세 종류가 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으므로 본론에서는 이들을 통틀어 분별론자(分別論者)라 하여 이들과 문제를 오고 가고 하면서 그 비리(非理)를 적발함과 동시에 자기 종(宗)의 바른 뜻을 밝히려는 것이 여기서의 주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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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 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열반은 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무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비학비무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答] 열반은 비학비무학이라고 말해야 한다.
학이나 무학의 뜻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과[異果]2)를 명료하게 하려고 정진하며 닦으므로 학이라 하고 정진하면서 닦는 것이 만족하여 다시는 더 정진하며 닦을 만한 다른 과가 없으면 이것은 학의 종류이면서도 그것에 즉(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학이라 한다. 그런데 열반에는 이런 두 가지 뜻이 다 같이 없기 때문에 비학비무학이라 하는 것이다.
[論] 어떤 이는 “열반에는 학도 있고 무학도 있으며 비학비무학도 있다”라고 말한다.
마치 독자부에서와 같다. 그들은 “열반의 자성(自性)에는 세 가지 상(相)이 있다. 첫째는 학이요, 둘째는 무학이며, 셋째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학인가? 유학(有學)이 모든 결(結)의 끊어짐[斷]을 얻으면서 촉증(觸證)을 얻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학인가? 무학(無學)이 모든 결의 끊어짐을 얻으면서 촉증을 얻는 것이다. 어떤 것이 비학비무학인가? 유루(有漏)가 모든 결의 끊어짐을 얻으면서 촉증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 다른 과라 함은 열반은 이숙인에 대한 이숙과와도 다르고 등류인에 대한 등류과와도 다르며 다만 이계과(離繫果)일 뿐이어서 원인인 유위의 법과도 다른 무위의 법인 점에서 다른 과라고 한다. 어쨌든 열반은 다른 과 그것이어서 그 다른 과에 대하여 설명하는 학ㆍ무학과 성질을 달리하는 점에서 “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본문의 대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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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설명에는 허물이 있다. 어떻게 하여 열반에 세 가지를 얻는 득(得) 때문에 세 가지 상(相)이 있다는 것인가? 하나의 법에는 세 가지 체(體)가 있지 않아야 하니 상은 곧 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의 학설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한다.
[論] 이 뜻 가운데서 열반은 다만 비학비무학이라 해야 한다.
이 논(論)의 뒤바뀜 없는 뜻 안에서는 다만 “열반은 오직 비학비무학의 성품[性]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상(相)은 항상 머무르면서[常住] 변하거나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이 정도로 하여 그쳐야 한다. 만일 그 밖의 다른 설명을 한다면 그 공(功)을 헛되이 버리게 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그 밖의 다른 설명도 해야 한다. 문답(問答)이 결택(決擇)되면 도리가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니 응리론자(應理論者)가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설명한 것에 허물이 있다고 분별하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분별론자가 설명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3) 첫째는 열반은 먼저 비학비무학이었는데 뒤에 바뀌어져서 학이 되고, 먼저 학이었는데 뒤에 바뀌어져서 무학이 되며, 먼저 무학이었는데 다시
바뀌어져서 학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열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학이면 언제나 그것은 학이요, 무학이면 언제나 그것은 무학이며, 비학비무학이면 언제나 그것은 비학비무학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앞의 설명에 대하여 이 글을 해석한다면
[論] 그대는 열반에 학도 있고 무학도 있으며 비학비무학도 있다는 것인가?
3) 첫째는 열반의 성품은 전변(轉變)하는 것이어서 능히 얻는 이[能得者]에 따라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의 차별이 있으며 게다가 능히 얻는 이의 변함에 따라 열반의 성품 자체도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니 뒤에 나오는 것과 같이 이를 열반전변론(涅槃轉變論)이라 한다. 둘째는 열반의 성품은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에 따라 따로따로라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이를 열반결정론(涅槃決定論)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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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응리론자의 질문이어서 거듭 앞의 종(宗)을 인정하고 있다. 만일 다른 이의 종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허물만을 말하면 도리에 맞지 않아서이다.
[답]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으로 나는 열반은 바뀌어 일정하지 않아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 까닭에 ‘그렇다’고 말한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이로써 먼저 세속의 도[世俗道]로써 욕탐(欲貪)과 진에(瞋恚)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離繫得)을 얻었는데 그는 아직 4제(諦)에 대하여 아직 현관(現觀)을 얻지 못한지라 현관을 닦아 익히고 현관을 얻은 뒤에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하면 바뀌면서 학이 된다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 이생(異生)이었는데 지금은 바뀌어서 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어서 학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분별론자에게 물은 것이다.
[답]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다.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論]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이로서 먼저 세속의 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을 얻은 이가 뒤에 불환과를 증득할 때에는 곧 그 이계(離繫)는 바뀌어서 학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분별론자의 주장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가 도리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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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 대해 억지 말을 할까 하여 다시 도리로써 힐난한다.
[論]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을 이룬다 하면 먼저도 마땅히 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 아직 불환과도 증득하지 못하고 아직 학의 득(得)도 있지 못하면서 벌써 학이라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향(阿羅漢向)의 학이 모든 번뇌가 끊어져서 아라한의 과(果)를 증득하면 그는 바뀌면서 무학이 되는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 그는 학이었다가 바뀌면서 무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면서 무학을 이루는가?”라고 분별론자에게 물은 것이다.
[답]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다.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論]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 향의 학이 모든 번뇌가 끊어져서 아라한의 과를 증득할 때에는 곧 그 번뇌가 끊어지면서 마땅히 바뀌어 무학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분별론자의 주장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억지 말을 할까 하여 다시 도리로써 힐난한다.
[論] 만일 그가 지금 무학이 된다고 하면 먼저도 마땅히 무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 아직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지도 못하고 무학의 득(得)도 없으면서 벌써 무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이 무학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가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그는 바뀌면서 학이 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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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 무학이었다가 지금은 바뀌면서 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면서 학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분별론자에게 묻은 것이다.
[답]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다.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論]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이 무학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가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곧 그 번뇌는 끊어져도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분별론자의 주장을 힐난한 것이다. 그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억지 말을 할까 하여 다시 도리로써 힐난한다.
[論]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이 된다면 먼저도 마땅히 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 아직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학의 득(得)도 없으면서 벌써 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뒤의 설명4)에 의하여 이 글을 해석하면 “그대는 열반에는 학이 있고 무학이 있으며 비학비무학이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는 것은 응리론자의 질문이니 거듭 앞의 주장[宗]을 확정하고 있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허물부터 말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아서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나는 열반의 체는 종류에 차별이 있어 결정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4) 뒤의 설명이란 앞의 분별론자의 설명에 두 가지 설명이 있는 중에서 제2의 “학은 언제나 학이요, 나아가 비학비무학은 언제나 비학비무학”이다 하는 결정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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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이로써 먼저 세속의 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을 얻은 이가 그가 4제에 대하여 아직 현관을 얻지 못한지라 현관을 닦아 익히고 현관을 얻은 뒤에는 바뀌면서 학이 되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는 이생(異生)이었는데 지금은 바뀌어서 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면서 학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이로써 먼저 세속의 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을 얻은 이가 뒤에 불환과를 증득할 때에는 곧 그 이계는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응리론자의 힐난이니 “그대는 열반은 학의 득(得)에 따라 학이 된다고 말했으므로 이제 이미 학의 득이 있으니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이 된다고 하면 먼저부터 마땅히 학이었어야 하니 체(體)는 항상 머무르기[常住] 때문이다”고 한 것은 분별론자가 되받아서 힐난한 것이니 힐난을 회통하며 “나는 열반에서의 학은 언제나 학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아직 불환과를 증득하지 못하고 아직 학의 득(得)도 있지 못하면서 벌써 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은 응리론자가 그의 힐난한 것을 회통하면서 거듭 앞의 힐난을 성립시킨 것이니 “먼저 아직 불환과를 증하지 못할 때에는 아직 학의 득도 있지 못하고 순오하분결(順五下分結)이 끊어졌다 해도 그 번뇌가 끊어진 것으로는 학이라 하지는 못한다. 이제는 이미 학의 득이 있고 그 번뇌도 끊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학이라 하지 않는가? 만일 학의
득이 있는데도 학이라 하지 않는다면 열반은 학의 득에 따라 학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 향(向)의 학이 모든 번뇌가 끊어져서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면 그는 바뀌면서 무학이 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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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 학이었다가 이제 바뀌면서 무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면서 무학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 향의 학이 모든 번뇌가 끊어져서 아라한의 과를 증득할 때에는 곧 번뇌가 끊어지면 마땅히 바뀌면서 무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응리론자의 힐난이니 “그대는 열반은 무학의 득(得)에 따라 무학이 된다고 말했으므로 이제 이미 무학의 득이 있으니 마땅히 바뀌면서 무학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다.
“만일 그가 지금 무학이 된다 하면 먼저부터 무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가 되받아서 힐난한 것이니 힐난을 회통하며 “나는 열반에서의 무학은 언제나 무학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아직 아라한의 과를 증하지도 못하고 무학의 득(得)도 없으면서 벌써 무학이라 한다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가 그의 힐난한 것을 회통하면서 거듭 앞의 힐난을 성립시킨 것이니 “먼저 아직 무학과를 증하지 못했을 때에는 무학의 득이 없고 온갖 번뇌가 끊어졌다 해도 그 번뇌의 끊어진 것으로는 무학이라 하지는 못한다. 이제는 이미 무학의 득이 있고 그 번뇌도 끊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무학이라 하지 않는가? 만일 무학의 득이
있는데도 무학이라 하지 않는다면 열반은 무학의 득에 따라 무학이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이 무학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가 다시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그는 바뀌면서 학이 되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가 “저 수행하는 이는 먼저 무학이었다가 지금은 바뀌면서 학이 되고, 혹은 이계득은 바뀌면서 학을 일으키는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그렇다”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앞에서 질문을 기술한 것이 이치에서 위배됨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이 무학으로서 번뇌가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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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이가 다시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곧 그 번뇌가 끊어져도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힐난이니 “그대는 열반은 학의 득(得)에 따라 학이 된다고 말했으므로 이제 이미 학의 득이 있으니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말이다.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이 된다면 먼저부터 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가 되받아 힐난한 것이니 힐난을 회통하며 “나는 열반의 학은 언제나 학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아직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나지 않고 학의 득(得)도 없으면서 벌써 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가 그의 힐난한 것을 회통하면서 거듭 앞의 힐난을 성립시킨 것이니 “먼저 아직 무학과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때에는 아직 학의 득을 얻지 못하고 견도에서 끊을 것과 수도에서 끊을 일부분의 번뇌를 끊었다 해도 그 번뇌의 끊은 것으로는 학이라고 하지 못한다. 이제는 이미 학의 득의 있고 그 번뇌도 끊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학이라 하지 않는가? 만일 학의 득이 있는 데도 학이라 하지 않는다면 열반은 학의 득에 따라 학이라고 말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어떤 다르게 독송하는 데[別誦]서 “그대는 열반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고 그 밖의 것은 앞에서 독송한 것과 같다. 만일 이 독송에 의거하면 “여기에서는 묻고[問] 대답하며[答] 힐난하고[難] 회통[通]하는 것이 갖춰 있다. 분별론자가 묻고 응리론자가 대답하며 분별론자가 힐난하고 응리론자가 회통한다”라고 해야 한다.
곧 “그대는 열반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거듭 앞에의 주장을 확정한 것이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허물부터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나는 열반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라고 말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고 경을 따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이로서 먼저 세속의 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을 얻었지만 그는 4제에 대하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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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현관을 얻지 못해서 현관을 닦고 현관을 얻은 뒤에 불환과를 증득하면 바뀌면서 학이 되는가?”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뜻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그렇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그 뜻은 앞의 해석과 같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이로서 먼저 세속의 도로써 욕탐과 진에를 영원히 끊고 비학비무학의 이계득을 얻은 이가 뒤에 불환과를 증득할 때에 곧 그 이계는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힐난이니 “마치 유위의 법과 득은 서로 유사한 것 같아서 이미 학의 득이 있으면 그것의 이계를 얻어야 하며 곧 그 이계는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말이다.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이 된다고 하면 먼저부터 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회통이니 “모든 유위의 법은 바뀌고 변하면서 일정하지 않으며 작용(作用)이 있으므로 득(得)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열반은 항상 머무른 것이어서 작용이 없고 득을 따라 변하지도 않는데 만일 지금 학이라면 먼저도 마땅히 학이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억지 말을 할까 하여 곧 다시 도리로써 힐난하
면서 “아직 불환과를 증득하지도 못하고 아직 학의 득이 있지 못하는데도 벌써 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고 한다.
여기의 두 문단[二文]에서 앞은 열반전변자(涅槃轉變者)의 학설을 차단하고 뒤는 열반결정자(涅槃決定者)의 학설을 차단한 것이니 모두 열반의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오직 비학비무학의 성품일 뿐이요 학이라 하지 않아야 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 향(向)의 학으로서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의 과를 증득한 이면 그는 바뀌면서 무학이 되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그 뜻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그렇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그 뜻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 향의 학이 모든 번뇌를 끊고 아라한의 과를 증할 때에는 곧 그 번뇌가 끊어지면 마땅히 바뀌면서 무학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힐난이니 “마치 유위의 법과 득(得)은 서
로가 유사한 것 같아서 이미 무학의 득이 있고 그 번뇌가 끊어졌다면 그 번뇌가 끊어졌으므로 마땅히 바뀌면서 무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지금 무학이 된다면 먼저도 무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회통이니 “모든 유위의 법은 바뀌고 변하면서 일정하지 않고 작용이 있으므로 득(得)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열반은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작용도 없고 득을 따라 변하지도 않는데 만일 지금 무학이라면 먼저도 마땅히 무학이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억지 말을 할까 하여 곧 다시 도리로써 힐난하면서 “아직 아라한의
과를 증득하지도 못하고 무학의 득(得)도 없으면서 벌써 무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의 두 문단[二文]에서 앞은 열반전변자의 학설을 차단하고 뒤는 열반결정자의 학설을 차단한 것이니 모두 열반의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오직 비학비무학의 성품일 뿐이요 무학이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의 무학이 번뇌를 끊었다가 다시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그는 바뀌면서 학이 되는 것인가?”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그 뜻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그렇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그 뜻은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아라한의 무학이 번뇌를 끊었다가 다시 아라한의 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분별론자의 힐난이니 “마치 유위의 법과 득은 서로 유사한 것 같아서 이미 학의 득이 있고 그 번뇌가 끊어졌으면 그 번뇌가 끊어졌으므로 마땅히 바뀌면서 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지금 바뀌면서 학이 된다면 먼저부터 학이었어야 하니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응리론자의 회통이니 “모든 유위의 법은 바뀌고 변하면서 일정하지 않고 작용이 있으므로 득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열반은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작용도 없고 득을 따라 변하지도 않는데 만일 지금 학이라면 먼저도 마땅히 학이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억지로 말할까 하여 곧 다시 도리로써 힐난하여 “아직 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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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과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학의 득도 없으면서 벌써 학이라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의 두 문단에서 앞은 열반전변자의 학설을 차단하고 뒤는 열반결정자의 학설을 차단하는 것이니 모두 열반의 체는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오직 비학비무학의 성품일 뿐이요 학이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論] 또 열반은 먼저 비학비무학이 아니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설명한 뜻을 명료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비록 자세히 분별했다 하더라도 뜻이 아직 심히 명료하지는 못하므로 이제 다른 이의 종(宗)에는 허물이 있고 자기의 종에는 과실이 없다는 것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또 열반은 먼저는 비학비무학이었는데 뒤에 바뀌어서 학이 되고, 먼저는 학이었는데 뒤에 바뀌어서 무학이 되며, 먼저는 무학이었는데 다시 바뀌어서 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열반은 바뀌고 변하면서 일정하지 않아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이5)의 뜻[意]을 차단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열반은 득(得)을 따라 변하고 바뀌면서 무상(無常)해야 하기 때문에 바른 도리에 맞지 않아서다.
[論] 또 열반에는 학도 무학도 비학비무학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열반의 체류(體類)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이6)의 뜻을 차단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열반은 지위의 차별에 따라 뒤섞이고 혼
5) 열반전변론자를 가리킨다.
6) 열반결정론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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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 있기 때문에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 이생위(異生位)에서는 셋을 갖추어 하나를 얻고, 유학위(有學位)에서는 셋을 갖추어 둘을 얻으며, 무학위(無學位)에 이르면 역시 세 가지를 갖추지만 만일 세 가지를 갖추어 얻으면 마땅히 학의 득(得)이 있어야 하고 만일 두 가지만을 얻으면 구족하게 열반을 얻는 이가 아니어야 한다.
만일 무학위에서 무학의 득(得)으로써 통틀어 세 가지를 얻고 유학위 등에서도 마땅히 이와 같다면 학이 얻는 모든 번뇌의 끊어짐을 학이라 하거나 무학이 얻는 모든 번뇌의 끊어짐을 무학이라 하거나 유루(有漏)가 얻는 모든 번뇌의 끊어짐을 비학비무학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모든 위(位)에서 비록 각각 세 가지를 갖춘다 하더라도 득(得)을 따르기 때문에 저마다 하나라고만 하면 이야말로 열반은 득을 따라 바뀌고 변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무상(無常)의 허물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이 말도 도리에 맞지 않다.
[論] 만일 이와 같다면 두 가지 부분[二分]을 이루어 모든 법이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뒤섞이고 혼란이 있다. 이렇다면 모든 법의 성상(性相)의 결정을 시설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통틀어 바른 도리[正理]로써 앞의 두 가지 학설[二說]을 격파하는 것이다. 분별론자는 첫째는 열반은 지위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고 말하고, 둘째는 열반에는 세 가지의 성품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열반의 체에는 상(常)이 있고 무상(無常)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또 그 뒤에 말한 것도 능히 얻는 것[能得]에 따라 바뀌고 변한다는 뜻이 있다. 바뀌고 변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라 한다.
만일 득(得)에 따르면서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열반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의 열반이 득을 따라 바뀌거나 변한다면 온갖 법은 모두가 결정되지 않아야 하고, 만일 결정되지 않는다면 뒤섞이고 혼란이 있어야 하며, 만일 뒤섞이고 혼란이 있게 되면 상(常)ㆍ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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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常) 등 성상의 결정조차 시설하지 말아야 한다.
[論] 부처님도 열반에 학이 있다거나 무학의 성품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통틀어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앞의 두 가지 학설을 타파하는 것이다. 계경에서 일찍이 열반에는 학이 있다거나 무학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은 결정코 도리가 아니며 비록 열반은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경은 없다 해도 학과 무학의 뜻에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결정코 비학비무학의 성품이다.
[論] 열반은 한결같이 비학비무학이므로 모든 법은 결정되어 뒤섞이고 혼란됨은 없으며 한결같이 자성(自性)에 머무르면서 자성을 버리지 않고 열반은 항상 머무르면서 변하거나 바뀜이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다만 비학비무학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다른 이의 종(宗)에는 허물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자신이 종으로 세운 것에는 모든 과실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열반은 오직 한 가지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 법의 성상(性相)은 결정되어서 뒤섞이거나 혼란이 없다는 것과 열반은 항상 머무른 것이어서 변하거나 바뀜이 없다고 하는 그 도리가 잘 성립된다.
이 가운데서의 득(得)의 뜻은 뒤의 정온(定蘊)의 득납식(得納息)에서 자세히 분별하는 것과 같다.
[論] 계경에서 “그는 무학의 계온(戒蘊)ㆍ정온(定蘊)ㆍ혜온(慧蘊)ㆍ해탈온(解脫蘊)ㆍ해탈지견온(解脫智見蘊)을 성취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7)……
7) 앞에서는 열반[無爲解脫]의 본성을 밝힌 데에 대하여 여기서는 유위해탈(有爲解脫) 즉 무학의 특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는 무루의 5온(蘊)을 밝히려는 문단이다. 그 주된 제목은 ① 총론(總論) ② 계론(戒論) ③ 정론(定論) ④ 혜론(慧論) ⑤ 해탈론(解脫論) ⑥ 해탈지견론(解脫智見論) ⑦ 5온 상호간의 구별 ⑧ 5온에 관한 제문분별론(諸門分別論)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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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그는 무학의 계온……(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성취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무학의 계온인지 나아가 해탈지견온인지를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은 이제 모두 분별해야 한다.
또 앞에서는 도의 과[道果]를 말했지만 도(道)는 아직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앞에서는 무위(無爲)의 아라한과(阿羅漢果)8)를 말했지만 아직 유위(有爲)의 아라한과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앞에서는 열반을 말했지만 아직 보리(菩提)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학온(學蘊) 혹은 비학비무학온(非學非無學蘊)을 성취하는 것도 있는데 계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답] 말씀하셔야 하는데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것은 세존께서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것은 세존께서 승(勝)한 데에 나아가 말씀하신 것이니 모든 법 가운데서 무학의 법은 뛰어나고 모든 유정 가운데서 무학의 유정은 뛰어나므로 한쪽만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것은 세존께서 맏아들[長者]을 칭찬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맏아들을 칭찬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간 아들
8) 무위의 아라한과라 함은 택멸열반을 가리키며 유위의 아라한과라 함은 무루지(無漏智)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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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子]을 칭찬하기도 하며 때로는 어린 아들[幼子]를 칭찬하신다.
때로는 맏아들을 칭찬하신다 함은 마치 게송[伽陀]의 말씀과 같다.
아라한은 가장 즐겁나니
영원히 갈애(渴愛)를 끊고
영원히 모든 교만[慢]을 끊었으며
무명의 그물[網]을 찢었기 때문이네.
때로는 중간 아들을 칭찬한다 함은 마치 부처님께서 칠선사취(七善士趣)를 칭찬하시는 것과 같으며 때로는 어린 아들을 칭찬한다 함은 마치 『지유경(池喩經)』에서 예류과(預流果)를 칭찬하신 것과 같다. 지금은 맏아들을 칭찬하기기 때문에 오직 무학만을 말씀하셨다.
또 만일 계온이 나쁜 계[惡戒]에 파괴된 것이 아니고 정온이 산란에 흔들린 것이 아니며 혜온이 나쁜 지혜[惡慧]에 덮인 것이 아니고 해탈온이 번뇌에 어지럽힌 것이 아니며 해탈지견온이 무명에 가린 것이 아니라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온과 비학비무학온에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무학의 계온(戒蘊)인가?
[答] 무학의 신율의(身律儀)와 어율의(語律儀)와 명청정(命淸淨)이다.
계경에서 말한 무학지(無學支)9) 중 바른 행위[正業]가 바로 여기에서의 신율의이고, 바른 말[正語]이 바로 여기에서의 어율의이며, 바른 생활[正命]이 바로 여기에서의 명청정이다. 경에서 “이 세 가지를 통틀어 계온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을 여의고는 따로 바른 생활은 없는데 어떻게 이 가운데 세 가지를 건립하는가?
9) 이 지(支)는 8성도지(聖道支)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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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흑(黑)ㆍ백(白)의 두 가지 법으로 상대하면서 건립하기 때문이다. 앞의 일곱 가지 불선업도[七不善業道] 중에서 진(瞋)ㆍ치(癡)로 일으킨 신업을 삿된 행위[邪業]라 하고, 진ㆍ치로 일으킨 어업을 삿된 말[邪語]이라 하며, 탐(貪)으로 일으킨 신업ㆍ어업을 삿된 생활[邪命]이라 하는 것이니 삿되게 목숨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는 것을 바른 행위ㆍ바른 말ㆍ바른 생활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만일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놀이와 즐기는 일[戲樂事]을 하면서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명(邪命)이라 하고, 만일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하여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업(邪業)ㆍ사어(邪語)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면 정명(正命)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의방(醫方)ㆍ주술(呪術) 등의 일을 하면서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명이라 하고, 만일 그 밖의 일을 위하여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업ㆍ사어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면 정명 등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네 가지 욕망[四種愛]10)으로 말미암아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명이라 하고, 만일 그 밖의 일로 말미암아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업ㆍ사어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면 정명 등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첨(諂)ㆍ광(誑) 등의 다섯 가지로 말미암아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명이라 하고, 만일 그 밖의 일로 말미암아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면 사업ㆍ사어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면 정명 등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차죄(遮罪)의 신업ㆍ어업을 사명이라 하고, 성죄(性罪)의 신업ㆍ어업을 사업ㆍ사어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는 것을 정명 등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가행(加行)11)과 후기(後起)의 착하지 않은 신업ㆍ어업을 사
10) 네 가지 욕망이라 함은, 첫째는 의복애(衣服愛)요, 둘째는 음식애(飮食愛)이며, 셋째는 와구애(臥具愛)요, 넷째는 무유애(無有愛)이다.(『구사론』 제22권 참조)
11) 가행은 어떤 행위에서의 예비적 행동을 말하며 후기는 주된 행위에 대한 끝마무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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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라 하고, 근본업도(根本業道)의 착하지 않는 신업ㆍ어업을 사업ㆍ사어라 하며, 이 세 가지를 멀리 여의는 것을 정명 등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어찌하여 이 온(蘊)을 시라(尸羅)라 하는가?
[답] 시라라 함은 바로 맑고 시원하다[淸凉]는 뜻이니 파계(破戒)하는 열뇌(熱惱)의 일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또 시라란 익히고 배운다[習學]는 뜻이니 3학(學) 가운데서 이것이 처음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지계(持戒) 때문에 뉘우침[悔]이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무학이 상속(相續)하는 동안 무루의 신업ㆍ어업을 무학의 계온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무학의 정온(定蘊)인가?
[答] 무학의 3삼마지(三摩地)이니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문] 선정[定]의 체는 오직 하나일 뿐이어서 심소법(心所法) 중 삼마지를 말하는데 어떻게 세 가지 차별을 건립하는가?
[답] 세 가지의 장애[障]를 근대치(近對治)하기 때문이다. 공 삼마지는 유신견(有身見)을 근대치하고, 무원 삼마지는 계금취(戒禁取)를 근대치하며, 무상 삼마지는 의(疑)를 근대치하기 때문이다.
또 행상(行相)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공 삼마지는 공(空)과 비아(非我)의 두 가지 행상[二行相]을 갖추고 무원 삼마지12)는 열 가지 행상[十行相], 즉 고(苦)와 비상(非常)과 집제(集諦)ㆍ도제(道諦)에서의 각각 네 가지를 갖추며 무상 삼마지는 네 가지 행상[四行相], 즉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네 가지를 갖춘다.
또 세 가지 일[三事] 때문이다. 첫째는 대치(對治) 때문이요, 둘째는 의요
12) 무원 삼마지에 고(苦)ㆍ비상(非常)과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의 6행상 외에 도제 하의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의 4행상이 있는 까닭은 도(道)도 배나 뗏목과 같이 마침내는 버려야 하는 것이어서 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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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樂) 때문이며, 셋째는 소연(所緣) 때문이다.
대치 때문에 공 삼마지를 건립하는 것이니 비아의 행상은 아견(我見)을 대치하고 공의 행상은 아소견(我所見)을 대치한다. 아견과 아소견에서처럼 이견(已見)과 이소견(已所見)과 5아견(我見)13)과 15아소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비아의 행상은 아애(我愛)를 대치하고 공의 행상은 아소애(我所愛)를 대치한다. 아애와 아소애에서처럼 아만(我慢)과 아소만(我所慢)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의요 때문에 무원 삼마지를 건립하는 것이니 모든 성현은 의요로 말미암아 유(有)14)와 성도(聖道)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성현은 의요로 말미암아 유전(流轉)과 온(蘊)과 세고(世苦)를 원치 않기 때문이니 성도는 유전과 온과 세고에 의하는 까닭에 역시 원하지 않는다. 도(道)를 반연하는 행상(行相)은 비록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요 때문에 무원(無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 성자(聖者)는 무엇 때문에 성도(聖道)를 닦는 것인가?
[답] 열반을 위해서이다. 성도를 제외하고는 다시는 열반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닦아 익히는 것이지 본래 의요는 아니다.
소연 때문에 무상 삼마지를 건립하는 것이니 멸제(滅諦) 중에는 열 가지 모양[十相]이 없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 한다. 즉 5진(塵)과 남자[男]와 여인(女人)과 3유위상(有爲相)을 열 가지 모양이라 한다.
또 멸제 중에는 상ㆍ중ㆍ하와 온(蘊)과 세(世)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상이라 하며 멸(滅)의 네 가지 행상[四行相]은 이것의 소연이기 때문에 무상이라 한다.
[論] 어떤 것이 무학의 혜온(慧蘊)인가?
13) 5온(蘊)의 하나하나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을 5아견이라 하고 “색(色)은 나요 나는 색 중에 있으며 색은 나에게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세 가지 소견을 5온의 하나하나에 적용하여 15종(種)이 되는 것을 15아소견이라 한다.
14) 유라 함은 유루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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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무학의 정견지(正見智)이다.
이러한 독송[誦]은 잘한 것이다. 어느 다르게 독송[異誦]한 데서는 “무학의 여덟 가지 지[八智]이니 네 가지 진리에서의 지[四智]와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이다”라고 하는데 그 독송은 너무도 총괄적이니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도 이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어느 별송(別誦)에서는 “무학의 작의(作意)와 상응한 지극히 간택한 법과 가장 지극한 간택[最極簡擇]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비발사나(毘鉢舍那)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독송에서는 “무학의 지(智)ㆍ견(見)ㆍ명(明)ㆍ각(覺)ㆍ현관(現觀)이다”라고 하는데 그것도 너무나 총괄적이니 진지와 무생지도 이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무학의 해탈온(解脫蘊)인가?
[答] 무학의 작의와 상응한 마음으로 이미 뛰어나 이해하였고[已勝解] 지금 뛰어나게 이해하며[今勝解] 장차 뛰어나게 이해하는[當勝解] 것이다.
진지와 무생지와 무학의 정견(正見)과 상응한 승해(勝解)는 이 온에 속하기 때문에 무위의 해탈[無爲解脫]은 아니다. 온갖 법 중에서 두 가지 법을 해탈이라 하는데 첫째는 택멸(擇滅) 즉 무위의 해탈이요, 둘째는 승해 즉 유위의 해탈[有爲解脫]이다. 경계에서 자유자재한 것을 해탈이란 이름을 붙이지만 이계(離繫)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무학의 해탈지견온(解脫智見蘊)인가?
[答]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두 지[二智]를 해탈지견이라 하는가?
[답] 해탈한 몸에는 유독 이것만 있기 때문이요 또 가장 잘 해탈한 일을 살펴 결정[審決]하기 때문이다.
[論] 무학의 혜온과 해탈지견온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무학의 고지(苦智)ㆍ집지(集智)는 무학의 혜온이다.
계박하는 법[繫縛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답] 무학의 멸지(滅智)ㆍ도지(道智)는 무학의 해탈지견온이다.
해탈하는 법[解脫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답] 또 무학의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는 무학의 혜온이다.
이것은 유루(有漏)와 무위의 해탈을 반연하나 해탈을 반연하는 무루지(無漏智)는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 무학의 도지(道智)는 무학의 해탈지견온이다.
이것은 무루(無漏)와 유위의 해탈을 반연하고 또한 해탈을 반연하는 무루지도 반연하기 때문이다.
[답] 또 무학의 고지ㆍ집지ㆍ도지는 무학의 혜온이다.
이계의 법[離繫法]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 무학의 멸지는 무학의 해탈지견온이다.
이계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답]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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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세속(世俗)의 거친 모양[麤相]의 차별을 말한 것이다. 만일 승의(勝義)에서의 진실한 차별로 말하면 마땅히 앞에서와 같이 말해야 하니, 무학의 정견(正見)과 정지(正智)는 무학의 혜온이고 진지와 무생지는 무학의 해탈지견온을 말한다.
또 삿된 지혜[邪慧]를 대치하는 것은 무학의 혜온이고 앎이 없는[無知] 것을 대치하는 것은 무학의 해탈지견온이다.
또 만일 지혜가 사납고 예리[猛利]하면서 추구(推求)하고 찾고[尋覓] 가행(加行)이 쉬지 않는 것은 무학의 혜온이고, 만일 지혜가 사납지도 않고 예리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가행이 그치고 쉰 것은 무학의 해탈지견온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온[五蘊]을 계(界)로 말하면 삼계계(三界繫)가 아니요, 지(地)로 말하면 계온(戒蘊)은 4정려(靜慮)와 미지(未至)와 중간(中間)의 6지에 있으며, 나머지 네 가지의 온은 앞에 6지와 아래의 3무색(無色)의 9지(地)에 있다.
[문]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온에는 상품ㆍ중품ㆍ하품의 차별이 있는가?
[답] 하나의 상속(相續) 가운데는 이런 차별이 없지만 다른 상속에서는 있으니 부처님은 상품이요 독각은 중품이며 성문은 하품이다.
또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는 상품이요, 근기가 중간인 이[中根者]는 중품이며,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는 하품이다.
유위의 공덕에는 비록 한량이 없다고 해도 이 다섯 가지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워서 온(蘊)이라 한다.
[論] 세존께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의 구경(究竟)일 뿐이요 따로의 구경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5)……(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
15) 앞에서는 열반과 그것을 얻게 하는 도(道)를 밝혔고 그들의 도와 열반은 오직 하나뿐인 진실한 도와 오직 하나에만 진실하게 낙착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경에서 말씀한 “하나의 구경”을 빌려 와서 그 구경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위의 뜻을 떨쳐 일으키려는 것이 여기서의 목적이다. 이것에 의하면 근용구경과 사성구경이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수(數)에서 하나만 아니어도 외도 등의 사도(邪道)와 사과(邪果)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진실하다는 것을 표명하
기 위하여 “오직 하나의 구경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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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오직 하나의 구경일 뿐이어서 따로 구경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근용(勤勇)의 구경인지 사성(事成)의 구경인지16)를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구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어찌하여 하나라고 하는가?
[답] 협 존자는 “이 두 가지 구경의 하나하나는 오직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로 설명하니, 오직 하나만의 근용의 구경이 있을 뿐이요 따로 그 밖의 다른 근용의 구경은 없으며, 오직 하나만의 사성의 구경이 있을 뿐이요 따로 그 밖의 다른 사성의 구경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세존께서 ‘오직 하나만의 진리[諦]가 있을 뿐이요 따로 두 번째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그것도 하나하나가 오직 한 가지만 있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씀으로
설하신 것이다. 오직 하나의 고제(苦諦)만 있을 뿐이요 따로 두 번째의 고제가 없으며 나아가 하나의 도제(道諦)만 있을 뿐이요 따로 두 번째의 도제는 없는 것이다.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외도의 삿된 도[邪道]와 삿된 해탈[邪解脫]을 막기 위하여 하나라는 말로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외도는 갖가지의 행(行), 즉 벌거숭이[露形]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굶기도[自餓]하며, 재에 눕기도[臥灰] 하고 기를 마시기도[服氣] 하며, 해를 따라 옮아가기도 하고 혹은 물만을 먹기도 하며, 열매만을 먹기도 하고 똥을 먹기도 하며, 누더기만을 입기도 하고 나무나 조약돌 위에 눕기도 하며, 바위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불에 나아가기도 하
며, 소 등의 행을 행하기도 하는 등의 이런 일을 고집하면서 진실한 도로
16) 근용[發心]구경이란 진실불이(眞實不二)의 수행도(修行道)를 의미하고 사성구경이란 진실불이의 목적지(目的地: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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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는다.
부처님은 그들을 막기 위하여 ‘그것은 삿된 도이고 어리석은 사람이 익히는 것이다. 진실한 도는 하나일 뿐이고 따로 두 번째의 진실한 도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이 근용의 구경이다.
또 모든 외도는 망령되이 갖가지의 무신(無身)ㆍ무변의(無邊意)ㆍ정취세(淨聚世)ㆍ솔도파(窣堵波) 등을 고집하면서 진실한 해탈을 삼으므로 부처님은 그것을 막기 위하여 ‘그것은 생처(生處)이고 진실한 해탈이 아니다. 진실한 해탈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이 사성의 구경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오직 하나뿐인 근용의 구경이 있어서 생사의 인(因)을 끊으며 오직 하나뿐인 사성의 구경이 있어서 생사의 고통을 버리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 두 가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구경은 오직 하나일 뿐이니 사성의 구경을 말한다. 이것을 증득[證]하기 위하여 근용의 구경을 닦기 때문에 구경은 오직 하나일 뿐이요 둘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외도는 각각 자신이 종(宗)으로 하는 곳에 대하여 구경이란 생각을 일으키므로 부처님은 그들을 막기 위하여 ‘나쁜[惡] 설법 안에는 진실한 구경이 없으니 어리석은 사람이 익히는 것이고 탐ㆍ진ㆍ치를 영원히 여읠 수 없기 때문이다. 착한[善] 설법 안에는 진실한 구경이 있으니 지혜 있는 사람이 익히는 것이고 탐ㆍ진ㆍ치를 영원히 벗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은 진실한 구경을 나타내시려고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요, 다만 외도의 허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외도들은 서로가 쟁론(諍論)을 일으키면서 단견(斷見)을 일으킨 이는 없어진다[斷]는 고집으로 구경을 삼고 상견(常見)을 부정하면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며 상견을 일으킨 이는 항상한다[常]는 고집으로 구경을 삼고 단견을 부정하면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이의 허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부처님은 ‘
만일 없어진다는 것이 구경이면 상견은 그릇된 것이어야 하고 만일 항상한다는 것이 구경이면 단견은 그릇된 것이어야 한다. 구경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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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하나일 뿐이요 두 번째가 없기 때문에 고집하는 단견ㆍ상견은 다 같이 구경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論] 이 가운데서 어느 법을 구경이라 하는가?
[答] 세존께서는 때로는 도(道)에 대해 구경이란 말[聲]로 말씀하셨고 때로는 끊는 것[斷]에 대해 구경이란 말로 말씀하셨으니 세간을 벗어나는 인과(因果)는 모두 구경이기 때문이다.
도에 대하여 구경이란 말로 말씀한다 함은 마치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한 무리의 총명한 척하는 교만한 이들은
구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들은 도(道)를 증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복하지 못하면서 죽게 된다.
한 무리[一類]라 함은 외도들을 말하며 그들은 실로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총명하고 슬기롭다고 여기면서 교만을 부리므로 총명한 척하는 교만한 이들이라고 한다.
구경이라 함은 근용(勤勇)의 구경을 말하며 그들은 이 구경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거나 보지 못하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팔지성도(八支聖道)를 도(道)라 하며 그들은 이 도에 대하여 증득할 수 없기 때문에 조복하지 못하면서 죽게 된다고 한다. 번뇌가 있으면서 살다가 번뇌가 있으면서 죽는 것이니 진실한 조복의 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論] 끊는 것에 대하여 구경이란 말로 말씀한다고 함은 마치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미 구경에 이른 이면
두려워함도 없고 의심과 뉘우침도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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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유(有)의 화살을 뽑았기 때문에
그는 맨 끝의 몸에 머무른다.
이것이 맨 마지막[最究竟]이요
위없는 적정(寂靜)의 자취이며
청정하며 죽지 않는 자취인 것이니
모든 모양이 모두 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구경은 사성(事成)의 구경을 말하며 이미 거기에 이르렀으므로 이미 이른 이라 한다.
두려워함이 없다[無怖]고 함은 연기(緣起)의 법을 잘 통달했기 때문에 또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잘 닦아 익혔기 때문에 악취(惡趣)와 생사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의심이 없다고 함은 외도가 악율의(惡律儀)와 삿된 지견[邪智見]에 머무르면서 갖가지 의심의 말을 일으켜 스스로 증득할 것을 의심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말하며 뉘우침이 없다고 함은 이미 계금취(戒禁取)를 끊고 두루 알기 때문에 이미 구경지(究竟智)가 생겼기 때문에 변하거나
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유의 화살[有箭]이라 함은 두 가지 유의 화살이 있다. 첫째는 애의 화살[愛箭]이요, 둘째는 견의 화살[見箭]이다. 성도(聖道)를 잘 닦아 단변지(斷遍知)를 얻어서 버려버리고 변하여 뱉으면서[變吐] 영원히 다시는 구르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뽑혔다고 한다.
최후의 자체(自體)를 맨 끝의 몸[後邊身]이라 하며 영원히 인연을 끊고서 다시는 장차 오는 세상의 생사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맨 끝의 몸에 머무른다고 한다.
이것이 맨 마지막이라 함은 사성의 구경을 말하는 것이니 근용의 구경에 대하여 그것을 초월했기 때문에 최상[最]이라고 한다.
위없는 적정의 자취라 함은 세 가지 불[三火]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이라 하고 지혜가 서는 곳이므로 자취[迹]라 하며 자취 가운데서도 뛰어나기 때문에 위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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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며 죽지 않는 자취라 함은 자취라는 뜻은 앞에서와 같고 모든 번뇌와 수번뇌(隨煩惱)를 여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며 항상 머무르면서[常住] 변함이 없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모양[相]이 다했기 때문이라 함은 열반 가운데에는 번뇌ㆍ업ㆍ고통의 뭇 모양들이 고요히 사라졌다[寂滅]는 것을 말한다.
[論] 또 계경에 “수목련(數目連)이라는 한 범지(梵志)가 부처님께로 와서 부처님께 물었다. ‘교답마(喬答摩)여, 높으신 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시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받은 뒤에 모두가 가장 지극한 열반의 경계[涅槃界]를 증득합니까?’라고 여쭈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일은 일정하지 않아서 한 무리는 증득하고 한 무리는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끊는 것[斷]에 대하여 구경이란 말로 말씀한 것이니 열반은 끊는 것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문] 또 근용(勤勇)이 있고 근용의 구경이 있으며 사성(事成)이 있고 사성의 구경이 있다. 어떤 것이 근용이고 어떤 것이 근용의 구경이며 어떤 것이 사성이고 어떤 것이 사성의 구경인가?
[답] 이생(異生)의 도(道)는 근용이나 근용의 구경은 아니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나 사성의 구경은 아니며 성자(聖者)의 도는 근용이면서 근용의 구경이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면서 사성의 구경이다.
또 유루(有漏)의 도(道)는 근용이나 근용의 구경은 아니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나 사성의 구경이 아니며 무루(無漏)의 도는 근용이면서 근용의 구경이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면서 사성의 구경이다.
또 향의 도[向道]는 근용이나 근용의 구경은 아니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나 사성의 구경이 아니며 과의 도[果道]는 근용이면서 근용의 구경이며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면서 사성의 구경이다.
또 학의 도[學道]는 근용이나 근용의 구경은 아니요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나 사성의 구경은 아니며 무학의 도[無學道]는 근용이면서 근용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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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며 그가 얻는 끊을 것은 사성이면서 사성의 구경이다.
[論] 계경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들이 비록 동일하게 모든 취[諸取]를 끊고 아는 것[斷知]을 시설한다 해도 그들은 빠짐없이 시설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를 끊고 아는 것만을 시설할 뿐이요 아어취(我語取)는 시설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들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자세히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모두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묻는 뜻에는 세 가지 구별이 있다. 첫째는 “외도는 실로 모든 취(取)를 끊는 뜻을 분명히 모르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동일하게 모든 취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요, 둘째는 “외도는 실로 모든 취를 끊고 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3취(取)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며, 셋째는 “외도도 작은 부분의 아어취(我語取)는 끊을 수 있는데
어찌 시설하지 않으면서 다만 3취만을 끊는다고 말씀하셨을 뿐인가?”고 묻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먼저 중간의 질문인 “모든 외도는 실로 모든 취를 끊고 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3취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論]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의 경솔한 설법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존의 설법에는 전혀 까닭이 없거나 혹은 까닭이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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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것은 세존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에 위역(違逆)을 막고 꾸짖으면서 타일러야 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뜻이 없는[無義] 말씀을 영원히 여의셨기 때문이요, 말씀하신 것은 양(量)에 맞고 반드시 이익되기 때문이며, 밭[田]에 의하고 그릇[器]에 의하여 법 비[法雨]를 내리시기 때문이요, 큰 인연이 있어야 비로소 설법하시기 때문이니 이로 말미암아 세존의 모든 말씀은 모두가 유정으로 하여금 큰 이익과 즐거움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것은 세존을 비방한 것이다.
[論] 또 어떤 이는 “이 말씀은 그가 작은 부분만 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생(異生)도 작은 부분의 아어취를 끊을 수 있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것은 바른 도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위역을 막고 꾸짖으며 타일러야 한다. 왜냐하면 마치 이생에도 욕염(欲染)을 여의는 지위에서는 욕취(欲取)을 온전히 끊으며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染)을 여의는 지위에 따라 작은 부분의 견취(見取)와 계취(戒取)도 끊는 이가 있는 것처럼 초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을 여의는 지위에서도 작은 부분의 아어취를 끊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작은 부분을 끊어도 시설한다면 역시 아어취를 끊는
것도 시설해야 되므로 그가 말한 것은 바른 도리에 수순하지 않는다.
[論] 그러나 세존께서는 하늘과 사람 등 한량없는 무리를 위하여 법요(法要)를 자세히 말씀하시어 뒤바뀜 없이 열어 보이고 무리에 따라 이해하게 하신다. 어떤 외도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온(蘊)ㆍ계(界)ㆍ처(處)ㆍ개(蓋)ㆍ염주(念住) 나아가 각지(覺支) 등의 이름을 혹은 구족하게 혹은 구족하지 않게 남몰래 훔쳐 듣는 이들이 있다.
이 외도로서 만일 욕취의 이름을 듣게 된 이면 곧 “나도 욕취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하고, 만일 견취의 이름을 듣게 된 이면 곧 “나도 견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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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하며, 만일 계취의 이름을 듣게 된 이면 곧 “나도 계취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한다.
이것은 논주(論主)가 승의(勝義)에 의거한 대답이므로 도리에 있어서 어긋남이 없는 것이니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가범(薄伽梵)께서 아직 세간에 나오시지 않으셨을 때에는 모든 외도들은 명성과 이익[名利]을 많이 얻고 있었으나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신 뒤에는 모든 외도들을 가려 버린 것이 마치 해가 돋은 뒤에 반딧불이 숨어 없어지듯 명성과 이익과 도중(徒衆)들은 점차로 감소되었으므로 그들은 곧 한 곳에 모여서 같이 의논하였다.
“교답마가 아직 세간에 나오지 않았을 때는 세간의 명성과 이익은 모두가 우리들의 것이었는데 그가 세간에 나온 뒤에는 단번에 모든 사람들이 귀의하고 있다. 교답마의 실제의 덕(德)은 우리들보다 훌륭한 것은 없으나 다만 경론(經論)을 잘하고 형모가 단정 엄숙한 것만은 우리들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 형모는 빼앗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경론만은 몰래 훔치기가 쉽다. 우리들이 만일 그것을 얻게 되면 도로 명리(名利)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함께 의논하였다.
“소시마(蘇尸摩) 등은 총명하고 지혜로워 잘 기억한다. 만일 그를 교답마에게로 보내어 문인(門人)이 되게 하면 그는 반드시 그에게 경론을 자세히 설해 줄 것이다. 그가 들은 뒤에 돌아와서 우리들에게 말해 주게 하자.”
그렇게 의논한 뒤에 같이 소시마에게 가서 위로하고 달래면서 그렇게 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곧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부처님께로 나아가 방편으로써 몰래 법을 훔쳐 들었다.
부처님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로써 대중 가운데서 법요를 자세히 말씀하셨다. 그때 그 외도는 아주 가까이서 거닐며 법을 몰래 들었으므로 그 마음은 쓸데없이 겁을 집어 먹고 구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구족하게 받지 못했으며 혹은 구족하게 받은 것이라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요에는 혹은 구족한 것이 있기도 하고
혹은 구족하지 않은 것이 있기도 하나 행할 일에 있어서는 구족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치 계경에 “만일 모든 유정이 안 몸에 대하여 순신관(循身觀)에 머무르면 마치 손톱 위의 흙과 같지만 만일 모든 유정이 안 몸에 대하여 순신관에 머무르지 않으면 마치 대지(大地)의 흙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행할 일에서는 비록 구족하다 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에 있어서는 구족하지 않다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4념주(念住)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행할 것과 말씀하신 두 가지가 모두 구족한 것이며, 마치 계경에서 “6계(界)ㆍ5개(蓋)ㆍ7각지(覺支) 등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행할 일에서는 비록 구족하다 해도 말씀하신 것에 있어서는 구족하지 않다고 하며, 마치 계경에서 “18계(界)ㆍ10개(蓋)ㆍ14각지(覺支) 등이다”17)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가 다 구족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설법에는 혹은 구족한 것이 있기도 하고 혹은 구족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 외도는 구족하게 받지 못하였으며 혹은 비록 구족하게 받아도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받아 지닌 것마다 곧 망령되이 시설하였다. 이런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한다.
[論]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적에 여러 외도들이 와서 “교답마는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법요를 연설하면서 ‘너희 비구들이여, 5개(蓋)를 끊어야 한다. 이와 같은 5개는 마음을 더럽혀 지혜의 힘을 하열하게 하고 각분(覺分)을 손상시키며 열반을 장애하게 한다. 4념주에 있어서도 마음을 잘 머물
17) 18계는 6근(根)ㆍ6경(境)ㆍ6식(識)을 말한다. 10개는 5개의 하나하나를 각각 둘씩으로 한 것이어서 ① 내탐욕(內貧欲) ② 외탐욕(外貧欲) ③ 진에(瞋恚) ④ 진에상(瞋恚相) ⑤ 수(睡) ⑥ 면(眠) ⑦ 도(掉) ⑧ 회(悔) ⑨ 의선법(疑善法) ⑩ 의불선법(疑不善法)을 말한다. 14각지는 7각지를 각각 둘씩으로 이분(二分)한 것이어서 ① 내법심년주(內法心念住) ② 외법심념주(外法心念住) ③ 택선법(擇善法) ④ 택불선법(擇不善法) ⑤
정진단불선법(精進斷不善法) ⑥ 정진장양선법(精進長養善法) ⑦ 희(喜) ⑧ 희처(喜處) ⑨ 신의식(身猗息) ⑩ 심의식(心猗息) ⑪ 정(定) ⑫ 정상(定相) ⑬ 사선법(捨善法) ⑭ 사불선법(捨不善法)을 말한다.(10개와 14각지에 관해서는 『잡아함(雜阿含)』 제27권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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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야 하며 7각지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이런 법요를 말하고 있으므로 곧 교답마가 말한 법요는 우리와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대들은 유독 그에게만 귀의하고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외도들은 오히려 5개의 명상(名相)조차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4념주에 머무르고 7각지를 닦아서 환히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부처님의 말씀을 몰래 훔쳐다가 짐짓 이렇게 말한 것일 뿐이니 취(取)를 끊는 것을 시설한다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그 외도들은 개(蓋)와 함께 났다가 개와 함께 죽으면서도 개라 하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하물며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염주나 각지를 알 수 있겠는가? 이런 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다시 증거를 인용한다.
[論] 또 외도 마건지가(摩健地伽)는 자기 몸에 뭇 병(病)이 모여 있어서 찰나도 머무르지 않으며 괴롭고[苦]ㆍ공(空)하고ㆍ나가 아니라는 것[非我]도 모르면서 부처님께 와서 배를 두드리며 “나의 이제 이 몸에는 이미 모든 병이 없으니 곧 이것이 구경의 열반인 줄 알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오히려 병이 없다는 명상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구경의 열반을 요달(了達)하겠는가? 그런데도 부처님의 말씀을 몰래 훔쳐다가 짐짓 그렇게 말한 것이니 취(取)를 끊는 것을 시설한다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그 외도는 몸에 몹시 아픈 것만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병이 없다고 하고 좋은 음식을 얻는 것을 고집하면서 열반이라 한 것이니 그는 오히려 4대(大)가 고르고 적합[調適]한 것을 무병(無病)이라 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마음이 고르고 적합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는 것을 요달하겠는가?
또 그는 오히려 무루의 성도(聖道)를 무병이라 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구경의 도과(道果)를 열반이라 하는 것을 요달하겠는가?
다만 부처님 말씀을 훔쳐 가서 망령되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니 취(取)를 끊는 것을 시설한다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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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다음으로 뒤의 질문에 대답한다.
[論] 무슨 연유로 외도는 다만 3취(取)를 끊고 아는 것만을 시설함이 있으면서 아어취는 그렇지 못하는가?
이것은 외도도 작은 부분의 아어취는 끊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시설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답]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진실한 아[眞實我]ㆍ유정(有情)ㆍ명자(命者)ㆍ생자(生者)ㆍ능양육자(能養育者)ㆍ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고 집착하였다. 그들은 이미 진실한 아 등이 있다고 집착하고 있는데 어찌 즐거이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하겠는가?
모든 외도들은 아를 집착하여 종(宗)으로 삼는다. 만일 그들이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한다면 자기의 종을 버리고 다른 이의 견해에 귀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하지 않는다.
또 그 모든 외도들은 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깊은 구덩이에 임(臨)하는 것과도 같다. 이 때문에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하지 않는다.
또 그 모든 외도들은 ‘아가 있기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아가 없다면 명자(命者)가 없기 때문에 살아 있지 못하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하지 않는다.
또 그 모든 외도들은 ‘내가 만일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한다면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이들조차 나를 업신여기고 나를 버리며 도망가겠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업신여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어취를 끊는 것을 시설하지 않는다.
뒤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다음으로 첫 번째의 질문에 대답한다.
[論] 동일하게 모든 취(取)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설하는데 여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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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이 있는가?
여기서 묻는 뜻은 “그 모든 외도는 실로 모든 취를 끊는다는 뜻을 분명히 모르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동일하게 모든 취를 끊고 아는 것을 시설한다고 말씀하셨는가?”라는 말이다.
[답] 이것은 세존께서 그들의 언설(言說)을 따르신 것이다.
그 외도들이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한 것을 세존께서 기술한 것이지 당신의 뜻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경을 인용한다.
[論] 세존께서 “그 모든 외도들은 실제 존재하는[實有] 유정이 끊어지고 파괴된다[斷壞]고 시설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승의(勝義)에 의하면 실로 유정은 없는 것인데도 다만 그들의 말만을 따라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다른 이가 한 말을 기술한다고 해서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4) 애경납식 ⑥
[論] 계경에서 “두 가지 변지[二遍知]가 있으니 지변지(智遍知)와 단변지(斷遍知)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두 가지 변지가 있으니 지변지와 단변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여기서 모두 말해야 한다.
또 앞에서 모든 취(取)를 끊고 아는[斷知] 것을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취를 끊고 아는 뜻을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분별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지변지(智遍知)인가?
[答] 모든 지(智)ㆍ견(見)ㆍ명(明)ㆍ각(覺)ㆍ현관(現觀)이니 이것을 지변지라 한다.
여기에의 모든 이름[名]은 서로가 같은 하나의 뜻을 나타낸다. 본론(本
1) 여기서는 변지의 상(相)을 자세하게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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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을 지은 이는 여러 글자의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을 하는 것이다. 앎이 없음[無知]을 대치(對治)하기 때문에 지(智)라 하고, 나쁜 견해[惡見]를 대치하기 때문에 견(見)이라 하며, 무명(無明)을 대치하기 때문에 명(明)이라 하고, 삿된 깨달음[邪覺]을 대치하기 때문에 각(覺)이라 하며, 삿된 현관[邪現觀]을 대치하기 때문에 현관이라고 한다.
[문] 여기에서는 어떤 지(智) 등을 말하여 지변지라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오직 무루(無漏)만 말할 뿐이니 현관을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속지(世俗智)는 현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유루지와 무루지 등을 통틀어 말하여 지변지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을 두루 아는[遍知] 것을 계경에서는 대부분 세속지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찌 세속지도 현관이라 하겠는가?
[답] 분명하고 똑똑하게 관찰한다는 것이 현관의 뜻이다. 세속지 안에는 분명하고 똑똑하게[明了] 법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역시 현관이라고 하며 오직 무루만이 현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성유경(城喩經)』2)에서 “내가 아직 삼보리(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에 생(生)은 노사(老死)에 연(緣)이 된다는 것을 사실대로 현관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직 삼보리를 증득하지 못했을 적에 벌써 연기(緣起)를 관했지만 진실한 무루지로써 현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세속지도 현관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어떠한 세속지를 역시 지변지라 하는가?
[답] 승해작의(勝解作意)3)와 상응한 세속지를 제외한 그 밖의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한 모든 세속지로서 극히 명료
2) 『성유경』은 중아함(中阿含)에 속한다.
3) 승해작의라 함은 부정관(不淨觀)과 염불관(念佛觀)과 같은 가상적인 관에 수반하여 일으키는 작의(作意)의 심소(心所)이다. 이 작의와 상응한 세속지는 진실한 인식성(認識性)을 띠지 않으므로 변지가 아니며 이에 반하여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세 가지 지혜[三慧]는 대경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한 변지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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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을 역시 현관이라 하며 또한 지변지라고도 할 수 있다.
문소성혜(聞所成慧)라 함은 마치 18계(界)의 자상ㆍ공상 등을 관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사소성혜(思所成慧)라 함은 지식념(持息念)과 4념주(念住) 등과 같은 것을 말하며 수소성혜(修所成慧)라 함은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과 무루의 지혜를 모두 지변지라고 한다.
[論] 어떤 것이 단변지(斷遍知)인가?
[答] 모든 탐(貪)을 영원히 여의고 진(瞋)ㆍ치(癡)를 영원히 여의며 온갖 번뇌를 영원히 끊는 것을 단변지라 한다.
[문] 소연(所緣)의 경계에 대하여 두루 알기 때문에 변지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끊는 것[斷]에는 소연이나 두루 아는 작용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변지라고 하는가?
[답] 끊는 것은 지(智)의 과(果)이기 때문에 역시 변지라 한다. 마치 아라한은 해(解)의 과이기 때문에 역시 해라 하고, 천안(天眼)ㆍ천이(天耳)는 통(通)의 과이기 때문에 역시 통이라 하며, 안의 6처(處) 등은 업(業)의 과이기 때문에 고업(故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러하여 끊는 것은 지의 과이기 때문에 역시 변지라고 한다.
[문]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을 끊는 것은 지의 과이기 때문에 변지라고 말할 수 있으나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을 끊는 것은 이미 인(忍)의 과인데 어떻게 변지라고 하는가?
[답] 승가벌소(僧伽筏蘇) 존자가 “이것은 혜(慧)의 과이기 때문에 변지라 한다. 변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혜(慧)를 성품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지(智)를 성품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계경에서 다만 “두 가지 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변지요, 둘째는 단변지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변지는 지(智)를 자성으로 삼고 단변지는 단(斷)을 자성으로 삼는다. 단(斷)은 지의 과이기 때문에 변지라 하겠지만 일찍이 혜변지(慧遍知)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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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한 곳은 없으니 변지는 지의 작용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협 존자는 “이 끊는 것을 사변지(捨遍知)라고 해야 하니 생사를 버리면서 이 끊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이 끊는 것을 이변지(理遍知)라고 해야 한다. 가장 뛰어난 법의 가장 뛰어난 이치를 보면서 이 마지막의 가장 뛰어난 끊음[斷]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이 두 가지 설명은 모두가 분명한 이치[了義]가 아니니 모두 끊음이 변지라는 것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호(佛護) 존자는 “끊음이 비록 경계에 대하여 두루 아는 작용은 없다 하더라도 모양[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역시 변지라고 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눈은 비록 빛깔은 보지 못한다 해도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역시 눈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고 귀와 나아가 뜻과 모든 심소(心所) 등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끊음은 지(智)의 모양이기 때문에 변지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의 말도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끊는 것에는 언제나 두루 아는 작용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인(忍)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은 세속지의 과이기 때문에 역시 변지라고 한다”4)라고 말한다.
[評] 그의 말도 도리가 아니다.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유정지(有頂地)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을 어떻게 세속지의 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속지는 그에 대하여 영원히 끊는 작용은 없기 때문이다.
또 이생의 지위[異生位]에서는 세속의 도로써 아래 8지(地)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때는 아직 변지라고 하지 못하며 견도의 지위[見道位]에 이르러서 변지를 세울 때에는 세속지가 없는데 어떻게 세속지의 과라고 말하게 되겠는가?
4) 견도에서 끊어야 할 여섯 가지 단변지는 실로 견도의 무루지에 의한 것이 아니며 유루의 6행관(行觀)의 결과이므로 변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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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견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은 무루지(無漏智)의 사용과(士用果)이기 때문에 변지라고도 한다. 무루지가 끊게 되는 것은 욕계의 제6 무간도(無間道)가 일래과(一來果)를 증득할 때이어서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과 욕계의 6품(品)의 수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을 다 같이 얻어서 일래과가 되는 것이요, 무루지로써 끊게 되는 것은 욕계의 제9 무간도가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할 때이어서 삼계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을 얻
고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을 다 함께 얻어서 불환과가 되는 것이며,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삼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것을 끊는 것을 다 함께 얻어서 아라한의 과가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것의 끊는 것도 변지라 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하니 견도의 6변지는 변지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忍)은 지(智)의 권속이요 지의 종족이기 때문에 역시 지라고 하고 끊는 것은 그것의 과(果)이기 때문에 변지라고 하는 것이니 마치 교답마 종족 중에서 난 이를 교답마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하나의 신견(身見)을 끊는 것도 변지라고 해야 하는데 무슨 연유로 모든 탐을 영원히 끊고 내지 온갖 번뇌를 영원히 끊는 것을 단변지라고 말하는가?
[답] 비록 하나의 번뇌[結]가 끊어졌다 해도 역시 변지라고 해야 하나 여기에서는 원만한 변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온갖 번뇌가 모조리 끊어져야 비로소 원만한 단변지라 하기 때문이다.
[論] 또 세존께서는 때로는 지(智)를 변지라는 말[聲]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단(斷)을 변지라는 말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지에 대하여 변지라는 말로 말씀하신다 함은 마치 게송의 말과 같다.
유동(儒童)은 어질면서 고요하여
모든 세간을 이익되게 하는구료.
지혜 있는 이는 탐애(貪愛)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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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고통을 내는 줄 두루 알겠네[遍知].
지혜 있는 이는 말했으면 행해야 하고
행하지 않으려면 말을 하지 않았어야 하네.
지혜 있는 이는 말이 있다 해도
행하는 이가 없다는 것을 두루 알아야 하네.
다구왕(多求王)5)의 인연이 이 게송의 근본이다. 옛날에 다구(多求)라는 왕이 있었다. 품성(禀性)이 사납고 탐하며 구하되 만족할 줄 몰랐으며 나라 사람들의 모든 재보를 강제로 빼앗았으므로 이에 신하들은 의논하여 함께 그를 퇴위시키고 그의 다음 아우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다구왕은 나라의 변방 읍(邑)으로 가서 풀로 신을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아우 왕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형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변방 읍에서 신을 삼아 살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며 ‘형이 그러하고 계시는데 내가 이제 무엇 때문에 왕위에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즉시 형을 불러 와서 하나의 읍을 봉(封)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기며 따랐으나 음식은 올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두 개의 읍ㆍ세 개의 읍 나아가 나라의 반을 그에게 봉해 주자 옛날처럼 만족함이 없다가 드디어 다시 병사를 일으켜 아우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그때 하늘 제석[天帝釋]은 그것을 알고는 ‘지금 이 나쁜 왕은 은혜와 의리를 모르고 있다. 내가 이제 그에게로 가서 속임수로 그를 괴롭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바라문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모자를 쓰고 거적을 입고 단지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서 그 왕에게로 가서 좋은 말로 찬탄하며 주원(呪
5) 『본생경(本生經)』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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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을 한 뒤에 한쪽에 가 서 있자 왕이 말하였다.
“범지(梵志)는 어디서 왔습니까?”
바라문이 말하였다.
“대해(大海) 밖에서 왔습니다.”
“바다 밖에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까?”
“저는 어느 한 국토가 안온하고 풍족하고 안락하며 사람들이 많고 진기한 보배들이 그 국토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의 힘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시기만 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인도해 주겠습니까?”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며칠 후에 길을 떠나시겠습니까?”
“7일 후에 떠나십시다.”
이렇게 말을 마친 뒤에 곧 떠났다. 이때 다구왕은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양식거리를 마련하였으며 7일째가 되자 수레를 차리고 길을 떠나려 하면서 바라문을 찾았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왕은 드디어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그가 만일 오게 되면 장차 큰 이익을 얻을 터인데 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바라던 것을 못 얻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우실(憂室)에 들어가 번민하고 원통하게 여기면서 앉아만 있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으로서도 그의 근심을 풀어 줄 이가 없었다.
그때 석가보살(釋迦菩薩)은 그 나라의 큰 바라문촌(婆羅門村)에 태어났었는데 마침 조그마한 일이 있어서 수도에 갔다가 이러한 일을 듣고 마음에 가엾이 여기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왕의 마음속의 근심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기뻐하면서 왕에게로 인도하자 그는 좋은 말로써 찬탄하고 주원을 한 뒤에 한쪽에 가 서서 왕을 위하여 「의품(義品)」6)의 게송을 연설
6) 「의품」은 구(舊)에는 중의경(衆義經)이라고 되어 있다. 집경(集經)의 「의품(義品)」에 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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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모든 욕심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희망을 일으키어
바라는 것을 이루게 되면
마음에 곧 크게 기뻐한다.
모든 욕심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나 희망을 일으키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화살에 맞은 듯 고뇌한다.
이와 같이 차례대로 왕을 위하여 그 「의품」의 욕심을 꾸짖는 게송을 모조리 말하자 그때 보살도 스스로 욕염(欲染)을 여의게 되었고 왕은 듣고 드디어 마음속의 근심이 풀렸으므로 곧 보살을 위하여 처음의 게송을 말한 것이니 “유동은 어질면서 고요하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이 게송의 뜻은 수고로이 분별할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보살은 왕을 위하여 두 번째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니 “지혜가 있는 이는 말했으면 행해야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이 게송의 전반(前半)은 제석천을 책망한 것이니 “지혜가 있는 이는 다른 이에게 하겠다는 말을 했으면 반드시 했어야 할 것이요, 만일 하지 않으려거든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후반(後半)은 왕을 책망한 것이니 “지혜가 있는 이는 만일 말을 했다 해도 행하지 않는 이면 남을 괴롭히려고 한 것이어서 실제의 일이 없다는 것을 두루 알았어야 하는데도 왕은 어째서 외곬으로 곧장 그의 거짓말을 믿는 것인가? 누가 바다 밖에서 올 수 있으며 그 누가 바다의 저 언덕(彼岸)에 가겠는가? 왕은 분외(分外)의 일을 구하지 마십시오”라는 것이다.
[論] 단(斷)에 대하여 변지라는 말로 말씀하셨다 함은 마치 계경에서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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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을 위하여 변지할 법과 변지의 자성(自性)과 능히 변지하는 이[能遍知者]를 말하리라. 변지할 법이라 함은 5취온(取蘊)을 말하고 변지의 자성이라 함은 탐(貪)이 영원히 끊어지고 진(瞋)ㆍ치(癡)가 영원히 끊어지고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말하며 능히 변지하는 이라 함은 아라한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여래께서 돌아가신 뒤에 계신다는 등의 대답[記]하지 않아야 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변지할 법이라 함은 5취온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문] 어느 변지에 의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지변지(智遍知)인가, 단변지(斷遍知)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지변지에 의하여 말한다면 온갖 법[一切法]은 변지할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5취온만을 말하며, 만일 단변지에 의하여 말한다면 역시 도리에 맞지 않으니 5취온은 두 가지 변지의 변지할 것에 다 통하기 때문에 다만 단변지에 의한다고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답]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다만 지변지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온갖 법은 변지할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5취온만을 말하는가?
[답] 4제(諦) 가운데서 고제(苦諦)만을 변지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를 해석하면 그것은 이것의 인(因)이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에서는 다만 단변지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 5취온은 두 가지 변지의 변지할 것에 다 통하기 때문에 다만 단변지에 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답] 마치 4제 가운데서 멸제(滅諦)만을 증득[作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를 해석하면 그것은 이것의 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하나의 불공인(不共因)이 있으니 단변지는 취온(取蘊)에서만 얻을 수 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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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지의 자성이라 함은 탐이 영원히 끊어지고 진ㆍ치가 영원히 끊어지고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문] 다른 계경에서는 “온갖 행[一切行]이 끊어지고[斷] 여의고[離] 소멸한[滅] 것을 단계(斷界)ㆍ이계(離界)ㆍ멸계(滅界)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온갖 행이란 바로 온갖 유루(有漏)의 법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단변지라 말하는가?
[답] 그 경은 요의(了義)이어서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없지만 여기는 불요의(不了義)이어서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어서이니 세존께서는 번뇌를 우선으로 삼아 모든 유루의 법을 모두 영원히 끊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 모든 번뇌는 끊기도 어렵고 깨뜨리기도 어려우며 초월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모든 번뇌는 모든 과환(過患)이 많고 바른 도리를 미혹되게 하며 열반과 모든 성도(聖道)를 장애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모든 번뇌는 자성(自性)이 끊어지며 끊어진 뒤에는 성취하지 않지만 그 밖의 유루의 법은 자성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끊어진 뒤에도 오히려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모든 번뇌는 바로 성도와는 점차로 어기게 되지만 그 밖의 유루의 선[有漏善]과 무부무기(無覆無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마치 등불은 어둠과는 점차로 어기게 되지만 종지[器]나 기름이나 심지와는 그렇지가 않아서 등불이 켜져 있을 때는 바로 어둠을 깨뜨리면서 또한 종지를 뜨겁게 하고 기름을 닳게 하며 심지를 타게 하는 것처럼 성도는 모든 번뇌와는 서로 어기기 때문에 성도가 앞에 나타나면서 바로 번뇌를 끊고 또한 그
밖의 유루의 법도 끊어지게 한다. 그것은 번뇌와 대치(對治)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능히 변지하는 이라 함은 아라한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다.
[문] 유학(有學)도 능히 변지하는 이인데 무엇 때문에 다만 아라한만을 말하는가?
[답] 뛰어난[勝] 데에 나아가 말하기 때문이다. 무학(無學)의 법은 모든 법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며 무학의 보특가라는 모든 보특가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이이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유학7)은 비록 두루 안다[遍知] 해도 아직 두루 끊지[遍斷]는 못하지만 무학은 두루 알고 또한 두루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여기에서 단변지만을 말하는 것은 무학은 이것에 대하여 원만하고 구경이지만 유학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두루 끊기 때문에 단변지라 하지만 유학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앞에서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단변지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이 변지를 성취한 이를 말한다면 오직 아라한일 뿐이다.
[論] 모든 부처님께 귀의[歸依佛]하는 이는 무엇에 귀의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귀의할 데가 아닌 데에 귀의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이를 위하여 진실로 귀의할 곳을 나타내 보이면서 그것을 버리고 이것에 귀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뭇 사람들 두려움에 핍박 받아
대부분이 모든 산과 동산과
우거진 숲과 외로이 선 나무와
제다(制多) 등에 귀의하네.
7) 유학위에는 앞의 8변지(遍知)는 있지만 최후의 온갖 번뇌가 영원히 끊어진 변지는 없다. 이것이 있는 이는 오직 무학의 아라한만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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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의는 뛰어난 것 아니요
이 귀의는 높은 것이 아니니
이 귀의를 말미암아서는
뭇 괴로움 해탈하지 못하네.
모든 이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法)과 승가[僧]에 귀의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서
항상 지혜[慧]로 관찰하면서
고(苦)를 알고 고의 원인[苦集]을 알며
영원히 뭇 괴로움을 초월할 줄 알고
여덟 가지 거룩한 도[八支聖道]를 알면
편안하고 조용한 열반에 나아가네.
이 귀의가 가장 뛰어나고
이 귀의가 가장 높으니
이 귀의를 말미암아야만
뭇 괴로움 해탈한다네.
또 귀의하는 데에 어리석고 미혹된 이에게 바른 이해를 얻게 하고 망설임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여래의 머리ㆍ정수리ㆍ배ㆍ등과 손발 등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몸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으므로 이제 이 육신은 부모가 낳아 기른 것으로 유루의 법이어서 귀의할 데가 아니며, 귀의할 데는 부처님께서 무학(無學)을 이루신 보리의 법[菩提法]이며 법신(法身)8)이란 것을 나타낸다.
8) 여기의 법신이란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되게 한 정각(正覺)의 내용과 18불공법과 같은 부처님 덕[佛德]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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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법(法)에 귀의한다는 것은 세 가지 진리[三諦]9)에 혹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의 법에 혹은 비구를 위하여 제정한 학처(學處) 즉 이것은 해야 한고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으므로 이제 이런 법은 유위(有爲)요 유루(有漏)이어서 귀의할 데가 아니며, 귀의할 데는 오직 멸제(滅諦) 즉 탐애가 다한[愛盡] 열반이란 것을 나타낸다.
또 어떤 이는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사성(四姓)에서 출가한 승가에게 귀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으므로 이제 이 승가의 위의나 형상은 모두가 유루이어서 귀의할 데가 아니며, 귀의할 데는 승가로서 학(學)과 무학(無學)을 이루는 법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는 이는 무엇에 귀의하는가?
[答]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實有]하고 나타나 있으면서[現有] 생각[想]ㆍ평등한 생각[等想]ㆍ시설(施設)ㆍ언설(言說)이 있는 이를 불타(佛陀)라 하며 그런 분에게 있는 모든 무학(無學)을 이룬 보리의 법에 귀의하는 것을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한다”고 함은 실제로 부처님의 체성이 있고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말은 어떤 이가 부처님은 다만 이름뿐이요 생각일 뿐이며 임시로 시설한 것일 뿐이어서 실체(實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나타나 있다[現有]고 함은 부처님의 체성은 나타난 그대로 실제의 존재요 있은 적이 있다[曾有]는 것 등이 아님을 나타내고, 생각[想]이라 함은 부처님을 반연하는 생각을 나타내며, 평등한 생각[等想]이라 함은 이런 생각이 온갖 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나타내고, 시설이라 함은 생각에 의하여 이름[名]을 시설한 것을 말하며, 언설이라 함은 이름에 의하여 언설이 전개되는
9) 세 가지의 진리는 멸제(滅諦)를 제외한 나머지의 세 가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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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말한다.
[문] 만일 그 무학을 이룬 보리의 법이 진실한 부처님이라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장자(長者)여, 무엇을 부처님이라 하는가? 석씨의 자손[釋子]으로서 수염과 머리칼을 깎아 없애고 가사를 입고 바른 마음으로 출가하여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이를 부처님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소의(所依)의 몸으로써 능의(能依)의 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니 도리에는 어긋남이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나쁜 마음으로써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면 무엇 때문에 그는 무간죄(無間罪)를 얻는 것인가?
[답] 소의의 몸을 파괴하면 능의의 법도 따라서 파괴되기 때문에 무간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그는 무학을 이룬 보리의 법을 반연하면서 나쁜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무간죄를 얻는 것이다. 그는 무학의 법을 증오한 까닭에 부처님 몸을 손상시켜 무간죄를 얻은 것이요, 다만 마음만을 일으켜 몸의 피를 내려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論] 모든 법(法)에 귀의하는 이는 무엇에 귀의하는가?
[答]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하고 나타나 있으면서 생각ㆍ평등한 생각ㆍ시설ㆍ언설이 있는 것을 달마(達磨)라 하며 이와 같이 탐애가 다하고[盡] 여의고[離] 소멸한[滅] 열반에 귀의하는 것을 법에 귀의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한다” 함은 실제로 열반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말은 어떤 이가 “오직 뭇 괴로움[衆苦]이 소멸하는 것을 열반이라 하지만 실제로 체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막고 열반에는 실제로 자체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타나 있다고 함은 열반은 나타난 그대로 실제로 있는 것이요, 임시로 있다[假有]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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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서는 다만 “탐애가 다하고 여의고 소멸한 열반에 귀의하는 것을 법에 귀의한다고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고 현재 있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열반의 체성은 적멸(寂滅)하여 모양을 여읜 것[離相]이어서 생각과 이름과 언설로써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는 없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사견(邪見)은 적멸한 열반은 실제로 얻을 만한 것이 없다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해야만 하는 데도 독송하는 이가 잊고 빠뜨렸을 뿐이다.
[論] 모든 승가[僧]에게 귀의하는 이는 무엇에 귀의하는가?
[答]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하고 나타나 있으면서 생각ㆍ평등한 생각ㆍ시설ㆍ언설이 있는 것을 승가(僧伽)라 하며 그것에 있는 모든 학ㆍ무학을 이룬 승가의 법에 귀의하는 것을 승가에게 귀의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만일 법으로서 실제 존재한다” 함은 승가의 체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 것을 나타낸다. 이 말은 어떤 이가 “승가란 다만 이름뿐이요 생각일 뿐이며 다만 임시로 시설한 것일 뿐이어서 실체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나타나 있다고 함은 승가의 체성은 나타난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며 있은 적이 있다는 것 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문] 어느 것이 귀의할 데[所歸依]이고, 어느 것이 귀의하며[能歸依], 귀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귀의할 데라 함은 멸제(滅諦)의 전부분과 도제(道諦)의 일부분, 즉 보살의 두 가지 무루의 도[無漏道]와 독각의 세 가지 무루의 도를 제외한 그 밖의 도제가 귀의할 데이다.
귀의하는 것[能歸依]이란 어떤 이는 “그것은 이름[名] 등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어업(語業)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이는 “또한 신업(身業)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믿음[信]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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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그것은 신업ㆍ어업과 능히 일으키는 그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모든 따르는 행[隨行]이어서 이와 같은 선(善)의 5온(蘊)을 능히 귀의하는 체(體)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귀의라는 뜻은 구호(救護)한다는 뜻이니 이것이 귀의의 뜻이다.
[문] 만일 구호한다는 뜻이 귀의의 뜻이라면 천수(天授)도 삼보(三寶)에 귀의한 적이 있는데 어찌하여 다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는가?
[답] 모든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귀의한 이가 학처(學處)를 깨뜨리지 않고 율의(律儀)를 범하지 않으며 법칙(法則)을 어기지 않으면 구호 받는 것이요, 그가 학처를 깨뜨리거나 율의를 범하거나 법칙을 어기게 되면 비록 삼보에 귀의했다 하더라도 구호 받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원수를 두려워하여 국왕에게 의지하면서 구호를 청하게 되면 왕은 그에게 “그대가 만일 언제나 나의 법을 어기지 않고 나의 지경[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언제나 그대를 구호할 수 있지만 만일 나의 법을 어기거나 나의 지경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구호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악취와 생사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불ㆍ법ㆍ승에 귀의하는 이가 만일 계율을 범하지 않고 부지런히 도를 수행하면 구호를 받지만 그 밖의 다른 이면 구호 받지 못한다.
또 귀의하는 마음의 상품ㆍ중품ㆍ하품에 따라 도리어 삼보의 그만큼의 구호를 받게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천수는 오직 지옥과 인취(人趣)의 일생(一生)만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악취와 선취(善趣)의 생사에서 비택멸(非擇滅)을 얻은 것이니10) 어찌 삼보가 그를 구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구호한다는 뜻이 귀의의 뜻이다.
[문]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한 분의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인가, 온갖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한 분의 부처님께 귀의한다면 어찌 이것은 일부분의 귀의가 아니겠으며, 만일 온
10) 제바달다(提婆達多)는 인취에 생을 받고 역죄(逆罪)에 의하여 지옥에 떨어졌다가 지옥에서 나온 뒤에는 재차 발심하여 독각이 된다는 설명에 의거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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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 부처님께 귀의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나는 부처님께 귀의한다”고만 말하고 “온갖[一切]”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나는 승관(勝觀) 여래의 제자이다. 나는 정계(頂髻) 여래의 제자이다. 나아가 나는 능적(能寂) 여래의 제자이다1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온갖 항하[殑伽]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나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라고만 말하고 “온갖”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가?
[답] 부처님이라는 말은 온갖 여래를 모두 포섭한다.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로써 말한다.
[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그 경에 “나는 승관 여래의 제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그 부처님을 따라 의지하고 출가하여 진리를 보았으므로 “나는 그 부처님의 제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것은 의지(依止)를 말한 것이지 귀의를 말한 것은 아니다.
[문] 법에 귀의한다 함은 자상속(自相續)의 모든 온(蘊)의 멸(滅)에 귀의하는 것인가? 타상속(他相續)의 모든 온의 멸에 귀의하는 것인가? 무정수(無情數)의 모든 온의 멸에 귀의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자상속만의 모든 온의 멸에 귀의한다면 어찌 이것은 일부분의 귀의가 아니겠으며, 만일 또한 타상속 등의 모든 온의 멸에 귀의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나는 법에 귀의한다”고만 말하면서 “온갖”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가? 또 어떻게 구호한다는 뜻이 귀의의 뜻이라고 말하겠는가? 타상속 등의 모든 온의 멸은 나에 대하여 구호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11) 승관은 비바시불(毘婆尸佛)이요, 정계는 시기불(尸棄佛)이며, 능적(能寂)은 석가모니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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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자상속ㆍ타상속과 무정수의 온갖 온의 멸에 귀의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나는 법에 귀의한다”고만 말하면서 “온갖”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가?
[답] 법이라는 말은 온갖 법의 멸을 모두 포섭한 것이다.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로써 말하는 것이다.
[문] 타상속 등의 모든 온의 멸은 나에 대하여 구호한다는 뜻이 없는데 어째서 귀의가 되겠는가?
[답] 그것은 비록 나에 대하여 구호한다는 뜻은 없다 해도 그것은 다른 이에게는 구호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니 구호하는 모양은 똑같기 때문에 역시 귀의하는 것이다. 또 의지[依]의 득[得]은 만일 자성(自性)에 의하면 유루의 법에 따라 그만큼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 얻게 되는 멸에는 차이가 없으며 나는 온갖 유루의 온(蘊) 가운데서 이계(離繫)를 얻기 때문에 온갖 멸은 나에게 대하여 모두 구호한다는 뜻이 있다.
[문] 승(僧)에게 귀의한다고 함은 한 분의 부처님의 제자에게 귀의하는 것인가? 온갖 부처님의 제자에게 귀의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한 분의 부처님 제자에게만 귀의한다면 어찌 이것은 일부분의 귀의가 아니겠으며, 만일 온갖 부처님의 제자에게 귀의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나는 승에게 귀의한다”고만 말하면서 “온갖”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가?
또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부처님께서 장사꾼에게 말씀하셨다. ‘장차 오는 세상에 승가가 있으리니 너는 역시 귀의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온갖 부처님 제자에게 귀의한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승에게 귀의한다”라고만 말하면서 “온갖”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는가?
[답] 승이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의 제자를 포섭한다.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로써 말하는 것이다.
[문]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부처님께서 장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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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말씀하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과거나 현재에 비록 역시 그 밖의 다른 여래의 제자가 있다고 해도 실제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장차 오는 세상의 승가는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이므로 이쪽에 치우쳐 말하는 것이니 해교진나(解憍陳那) 등을 세간에 실제로 보기 때문이다.
또 승보(僧寶)는 극히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부처님께서 비록 세간에 나오셨다 하더라도 승가는 아직 생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미래 세상의 승가는 목전에서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시어 장사꾼들로 하여금 간절히 우러르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다.
또 현재와 과거에 비록 그 밖의 다른 승가가 있다고 해도 부처님은 미래 세상에 저절로 제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경에서 말씀하신 “또한[亦]”이라는 말은 곧 또한 그 밖의 다른 부처님의 제자들이 있으면서 귀의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니, 그들은 미래에는 승보가 없다고 여길까 두려워하여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또한 귀의하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 어느 갈래[趣]와 어느 처소[處]에서 이런 귀의가 있는가?
[답] 귀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율의(律儀)12)와 함께하는 것이요, 둘째는 율의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율의와 함께한다고 함은 오직 인취(人趣)의 3주(洲)에만 있고 그 밖의 다른 데는 있지 않으며 율의와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그 밖의 다른 갈래와 처소에 다 통한다.
[문] 만일 귀의를 받지 않으면서 율의를 받으면 그는 율의를 얻는가?
[답] 어떤 이는 “얻지 못한다. 율의를 받는 이는 반드시 삼귀(三歸)에 의거
12) 율의와 함께한다고 함은 삼귀(三歸)를 받은 뒤에 곧장 5계(戒)나 8재계(齋戒) 등을 받은 것을 말하고 율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함은 삼귀의만을 받고 그만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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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삼귀로써 문(門)을 삼아 율의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또한 얻는다. 만일 삼귀와 율의 중에 그것을 받는 선후를 몰랐거나 혹은 또 잊고 잘못하였거나 하여 삼귀를 받지 않았으면 율의를 받아 얻은 것이지만 그에게 수여(授與)한 이는 죄를 얻는다. 만일 교만이 있어서 삼귀를 받지 않았다면 다만 율의만을 받았을 뿐 그는 반드시 얻지는 못한다”라고 말한다.
[문] 반드시 자신이 어표(語表)를 일으키어 귀의를 받은 이라야 비로소 귀의를 얻는 것인가, 다른 이의 어표로 귀의를 받게 된 이도 귀의를 얻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자신의 어표로 귀의를 받은 이라야 비로소 귀의를 얻게 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경에 “박가범(薄伽梵)께서 열반하려 하실 때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시성(拘尸城)의 모든 역사(力士)와 그들의 권속들이 있사온데 모두가 같이 불보ㆍ법보ㆍ승보에게 귀의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어떤 이는 “부처님의 신력(神力) 때문에 열반하려 하실 때에 다른 이의 어표에 붙여 삼귀를 받은 이면 역시 귀의를 얻은 것이지만 그 밖의 다른 때는 얻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아난 존자는 먼저 구시성에 들어가 모든 역사들을 위하여 삼귀를 받게 하고 나서 그 뒤에야 부처님께 아뢴 것이니, 세존께서 열반하려 하실 때에도 오히려 한량없는 교화 받은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한 것이지 지금 아난이 부처님께 아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귀의를 얻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다른 이의 어표로 말미암아 삼귀를 받는 이도 귀의를 얻는다. 마치 가시가(迦尸迦) 여인과 그 밖의 벙어리들이 다른 이의 어표에 붙여서 귀의를 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어떤 이는 어머니 태(胎) 안에서 혹은 젖먹이[嬰兒位]로 있을 때에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삼귀와 율의를 받기도 하는데 그는 얻는가?
[답] 그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비록 함께했다 해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마
땅히 받아야 하니 그로 하여금 뒷날에 선(善)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크게 자란 뒤에 만일 삼보를 헐뜯거나 혹은 나쁜 업을 짓게 되면 다른 이가 책망하면서 “그대는 태 안에 있을 적에 혹은 젖먹이로 있을 적에 먼저 이미 삼귀와 율의를 받았는데 어떻게 지금 삼보를 헐뜯으며 모든 나쁜 업을 짓는 것인가?”라고 하면 그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기면서 삼보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모든 나쁜 업을 여의면서 다시금 받아 지니게 된다. 이런 이익이 있기 때문에 먼저 그를 위하여 받아야 한다.
또 천신(天神)으로 하여금 그를 옹호하게 하기 위하여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삼귀와 율의를 받게 하는 것이니, 그를 위하여 받고 나서 삼보를 믿고 공경하면 모든 하늘의 선신(善神)들이 그를 옹호하여 횡사(橫死)하지 않게 하고 병의 환난을 만나지 않게 한다.
[문] 그는 전생(前生)에 어떤 착한 업을 닦았기에 지금 어머니의 배에서 혹은 젖먹이로 있을 때에 다른 이가 그를 위하여 삼귀와 율의를 받게 하는가?
[답] 그는 전생에 항상 삼귀와 청정한 계율을 찬탄하기를 좋아하였고 또한 한량없는 백천의 유정들을 권하면서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청정한 계율을 받게 하였으며 혹은 다시 다른 이에게 삼계와 율의를 받아 지니는 살림의 도구들을 보시했기에 지금의 몸에 와서 이와 같은 좋은 일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치 계경에 “부처님께 귀의하는 이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며 천상과 인간 안에 나서 모든 쾌락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세간에서 실제로 보건대 부처님께 귀의한 이도 악취에 떨어지고 혹은 뭇 고통을 받는 이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인가?
[답] 만일 증상심(增上心)으로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으면서 부처님께 귀의한 이면 이런 좋은 이익을 얻는 것이지 모두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이미 증정(證淨)13)을 얻은 이에 의거하며 말씀
13) 증정은 어불증정(於佛證淨)ㆍ어법증정(於法證淨)ㆍ어승증정(於僧證淨)ㆍ성계증정(聖戒證淨)의 네 가지이니, 무루 지혜로써 여실히 4제의 이치를 증득함에 의하여 불ㆍ법ㆍ승 삼보에 청정한 믿음[信]을 내고 동시에 무루의 청정한 계(戒)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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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것이어서 모두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한다.
[문] 부처님은 법(法)에 의하여 나셨으므로 법이 부처님보다 뛰어난데 무엇 때문에 먼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가?
[답] 부처님은 교주(敎主)이시다. 만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법은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또 마치 어떤 병든 이가 먼저 용한 의사를 찾고 다음에 묘한 약을 구하며 그 뒤에 간병(看病)하는 이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니, 부처님은 용한 의사와 같고 법은 묘한 약과 같으며 승가는 잘 간호하면서 약을 먹여 주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삼귀의는 이와 같은 차례가 된다.
5) 무참괴납식(無慚愧納息) ①
[論] 어떤 것이 무참(無慚)인가, 어떤 것이 무괴(無愧)인가?14)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 뜻[義]은 이미 이해가 갔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무참ㆍ무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무참이고 어떤 것이 무괴인가를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은 이제 그것을 자세히 분별해야 된다.
14) 무참괴(無慚愧)의 장(章)은 무참괴론만을 기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장의 제목은 맨 처음의 논제로써 붙였을 뿐이며 그 중에는 참(慚)ㆍ괴(愧)ㆍ선근(善根) 등에 관한 제목도 있을 뿐더러 꿈[夢]과 책임의 문제도 있고 5개(蓋)에 관한 논구(論究)도 있어서 그 내용은 꽤 복잡하다.(38권의 중간까지 이어진다.) 무참과 무괴는 무릇 불선(不善)의 마음과 상응하면서 함께 일어나는 심소이어서 『구사론』 같은 데서는 이 두 가지만을 대불선지법(大
不善地法)으로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심소의 작용은 극히 유사하여 자칫하면 혼동할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양자의 특질을 밝히고 그 구별을 명백하게 함으로써 참괴심의 양성에 도움이 되게 한다. 그 주된 항목은 ① 서설, ② 무참, ③ 무괴, ④ 양자의 구별, ⑤ 양자에 관한 잡론(雜論)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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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의심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이 두 가지 법은 서로가 유사한 것이어서 세간의 유정들은 무참인 것[無慚者]를 보고 무괴라고 하고, 무괴인 것[無愧者]을 보고 무참이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체(體)가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제 성상(性相)의 차별을 나타내 보여서 그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된 이해를 얻게 하기 위해서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오직 불선(不善)일 뿐이며 또 불선을 시설하는 뛰어난 인(因)이니 마치 “어떤 전(纏)과 상응하는 심품(心品)은 한결같이 불선이니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아 이제 그 모양을 나타내어 속히 싫어하면서 끊게 하는 데에 있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세간을 파괴하는 것이니 마치 세존께서 “두 가지 검은 법[黑法]이 있어서 세간을 파괴하는 것이니 무참과 무괴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제 그 모양을 나타내어 속히 싫어하면서 끊게 하는 데에 있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중생으로 하여금 갖가지의 차별이 있게 한다. 마치 계경에 “세간에 만일 무참과 무괴가 없다면 돼지와 개 등의 갖가지의 차별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제 그 모양을 나타내어 속히 싫어하면서 끊게 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무참(無慚)인가?
[答] 모든 참(慚)이 없고 참하는 것[所慚]이 없고 다른 참[異慚]이 없으며,부끄럼[羞]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것[所羞]이 없고 다른 부끄럼[異羞]이 없으며, 공경[敬]이 없고 공경하는 성품[敬性]이 없으며, 자재(自在)가 없고 자재한 성품[自在性]이 없으며, 자재한 이[自在者]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행동[轉]이 없는 것을 무참이라고 한다.
이 본론(本論)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설명하는 것이니 문자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 해도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문] 여기에서 말한 차별된 명언(名言)은 자상(自相)을 나타내는 것인가,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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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行相)을 나타내는 것인가, 소연(所緣)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무참의 자성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참의 행상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불선(不善)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의 행상처럼 이 행상도 그러하니 왜냐하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문] 무참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4성제(聖諦)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무참의 행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행상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하여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무참이나 무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무참이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무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나 무참은 아니다. 무참과 상응한 법이 무참의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무참이면서 또한 무참의 행상으로 움직인다. 무참이 무참의 행상으로 되어 움직인다.
어떤 것은 무참도 아니면서 또한 무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 종류를 취하면 무참과 상응한 법이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움직이는 것[轉]에 4구가 있는 것처럼 이미 움직였고[已轉] 장차 움직이는 것[當轉]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무참의 행상에 세 번의 4구가 있는 것처럼 그 밖의 행상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참의 자성은 어떤 것인가?
[답] 자체(自體)의 자상(自相)이 곧 그것이 자성이다. 마치 “모든 법의 자성은 곧 모든 법의 자상이며 같은 종류의 성품은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무참의 소연(所緣)은 어떤 것인가?
[답] 4성제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무참의 소연을 나타낸다. 모든 참이 없고 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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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고 다른 참이 없으며 부끄럼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없고 다른 부끄럼이 없다는 것은 고제(苦諦)ㆍ집제(集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며, 공경이 없고 공경하는 성품이 없고 자재가 없고 자재한 성품이 없고 자재한 이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없다는 것은 멸제(滅諦)ㆍ도제(道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과 행상은 모두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무괴(無愧)인가?
[答] 모든 괴(愧)가 없고 괴하는 것[所愧]이 없고 다른 괴[異愧]가 없으며 부끄럼[恥]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것[所恥]이 없고 다른 부끄럼[異恥]이 없으며 모든 죄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두렵게 보지 않는 것을 무괴라고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을 하는 것이니 문자에는 비록 차별이 있더라도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문] 여기에서 말한 차별된 명언(名言)은 자성을 나타내는 것인가, 행상을 나타내는 것인가, 소연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무괴의 자성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괴의 행상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불선(不善)의 심ㆍ심소법의 행상처럼 이것의 행상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문] 무괴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4성제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무괴의 행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행상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하여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무괴이나 무괴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무괴가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무괴의 행상으로 움직이나 무괴가 아니다. 무괴와 상응한 법이 무괴의 행상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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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무괴이면서 또한 무괴의 행상으로 움직인다. 무괴가 무괴의 행상으로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무괴도 아니면서 또한 무괴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 종류를 취한다면 무괴와 상응한 법이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움직이는 것[轉]에 4구가 있는 것처럼 이미 움직였고[已轉] 장차 움직이는 것[當轉]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무괴의 행상에 세 번의 4구가 있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행상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괴의 자성은 어떤 것인가?
[답] 자체(自體)의 자상(自相)이 곧 그것의 자성이다. 마치 “모든 법의 자성은 곧 모든 법의 자상이며 같은 종류의 성품은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무괴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4성제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무괴의 소연을 나타낸다. 모든 괴가 없고 괴하는 것이 없고 다른 괴가 없고 부끄럼이 없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없고 다른 부끄럼이 없다는 것은 멸제ㆍ도제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죄 가운데서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렵게 보지 않는 것을 고제ㆍ집제를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과 행상은 모두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論]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答] 자재한 이[自在者]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없는 것은 무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서[諸罪中] 두렵게 보지 않는 것은 무괴이니 이와 같은 것이 서로 다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이 두 가지 법은 서로 상응하여 그 모양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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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비슷하다”라고 말했으므로 이제 무참과 무괴의 성품[性]과 모양[相]을 분별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자재한 이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없는 것이 무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서 두렵게 보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공경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번뇌를 싫어하거나 천히 여기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나쁜 행을 싫어하거나 천히 여기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나쁜 짓을 하고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나쁜 짓을 하고서도 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나쁜 짓을 하고서 스스로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나쁜 짓을 하고서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나쁜 짓을 하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오만하고 방일하는 것이 무괴이다.
또 자기 혼자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남에게 죄를 짓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적은 사람들에 대하여 죄를 짓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악취의 유정들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선취(善趣)의 유정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어리석은 이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지혜 있는 이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아랫사람에게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윗사람에게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집에 있는 이[在家者]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출가한 이[出家者]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친교(親敎)ㆍ궤범(軌範)이 아닌 이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친교ㆍ궤범에 대하여 죄를 짓고서 부끄러워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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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무괴이다.
또 만일 악(惡)을 지을 때에 하늘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참이고, 악을 지을 때에 사람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괴이다.
또 모든 나쁜 인[惡因]에 대하여 꾸짖고 헐뜯지 못하는 것이 무참이고, 모든 나쁜 과[惡果]에 대하여 싫어하며 두려워하지 못하는 것이 무괴이다.
또 탐욕[貪]의 등류(等流)가 무참이고, 우치[癡]의 등류가 무괴이다.
이것을 무참과 무괴의 차별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오직 욕계계(欲界繫)일 뿐이고 불선(不善)일 뿐이어서 온갖 불선의 심ㆍ심소법과 모두 상응하나 다만 자성만은 제외된다.
[문] 무참과 무괴는 이미 불선이면서 과환(過患)이 깊고 중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수면(隨眠)의 성품 안에 세우지 않는가?
[답] 이 두 가지에는 수면의 모양[相]이 없기 때문이다. 미세한 번뇌는 수면의 모양이지만 이 두 가지는 거칠게 움직이기[麤動] 때문에 수면이 아니다.
또 사납고 날카로운 번뇌는 수면의 모양이지만 이것은 사납고 날카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면이 아니다.
또 자주자주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뒤에는 오랫동안 상속하는 번뇌는 수면의 모양이지만 이 두 가지는 자주자주 일어나고 일어난 뒤에는 오랫동안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수면이 아니다.
또 두껍고 중한 번뇌는 수면의 모양이지만 이 두 가지는 가볍고 얇기 때문에 수면이 아니다.
또 습기(習氣)가 견고하면서 소멸하기 어려운 번뇌는 수면의 모양이니 마치 단단한 숯불이 있는 데는 뜨거운 기운이 식기 어려운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이 두 가지 습기는 속이 텅 비어서 소멸하기 쉽기 때문에 수면이 아니니 마치 풀잎으로 피운 불의 뜨거운 기운은 식기 쉬운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근본번뇌(根本煩惱)는 수면의 모양이지만 이 두 가지는 이미 수번뇌(隨煩惱)에 속하기 때문에 수면이 아니니 이것은 탐(貪)과 무명[無]의 등류과(等流果)이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5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5) 무참괴납식 ②
[論] 어떤 것이 참(慚)인가, 어떤 것이 괴(愧)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참(慚)이 있고 괴(愧)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참이며 어떤 것이 괴인지를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밝히지 않은 것은 이제 그것을 자세히 분별해야 한다.
또 의심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서로가 비슷하므로 세간의 유정들은 참(慚)이 있는 이를 보고 괴(愧)가 있다고 하고 괴가 있는 이를 보고 참이 있다고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체(體)가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지금 성품[性]과 모양[相]의 차별을 나타내 보여 그것을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된 이해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1) 앞의 무참과 무괴의 반대로서 참괴(慚愧)의 덕을 밝히려는 문단이다. 참이라 함은 덕을 중히 여기면서 스스로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리키고, 괴라 함은 죄를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범한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리킨다.(혹은 內慚 外愧라고도 한다.) 온갖 선심과 상응하는 의미에서 대선지법(大善地法) 안에 포섭된다. 여기서의 논구법(論究法)은 전적으로 앞 문단에 준한 것이어서 무참을 참으로 무괴를 괴로 바꾸어 놓은 데에 불과하
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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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앞에서 이미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를 말했다 하더라도 아직 그것의 근대치(近對治)의 법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의 근대치의 법인 참(慚)과 괴(愧)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오직 선성(善性)일 뿐이고 또한 선법(善法)을 시설한 뛰어난 인[勝因]이니 마치 “어떤 법과 상응하는 심품(心品)은 한결같이 선(善)이니 참과 괴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아 그 모양을 나타내어 부지런히 닦아 익히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세간을 수호하는 것이니 마치 세존께서 “두 가지 흰 법[白法]이 있어서 세간을 수호하니 참과 괴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선취(善趣)의 해탈이 없을 것이므로 그 모양을 나타내어 부지런히 닦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유정으로 하여금 갖가지로 차별되게 하니 부모ㆍ형제ㆍ자매ㆍ남녀ㆍ권속ㆍ존비(尊卑)ㆍ장유(長幼)이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없다면 마치 소나 양 따위와 같아서 높은 이나 낮은 이, 어른이나 어린이의 차별이 없을 것이므로 그 모양을 나타내어 부지런히 닦아 익히게 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참인가?
[答] 모든 참(慚)이 있고 참하는 것[所慚]이 있고 다른 참[異慚]이 있으며, 부끄럼[羞]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것[所羞]이 있고 다른 부끄럼[異羞]이 있으며, 공경[敬]이 있고 공경하는 성품[敬性]이 있으며, 자재(自在)가 있고 자재하는 성품[自在性]이 있으며 자재한 이(自在者)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있는 것을 참이라고 한다.
이 본론(本論)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하는 것이니 문자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문] 여기에서 말한 차별된 명언(名言)은 자성(自性)을 나타내는 것인가, 행상(行相)을 나타내는 것인가, 소연(所緣)을 나타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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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이것은 참의 자성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참의 행상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선(善)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의 행상처럼 이것의 행상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문] 참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법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참의 행상을 나타낸다. 이 행상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하여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참이나 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참이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나 참이 아니다. 참과 상응하는 법이 참의 행상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참이면서 또한 참의 행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참이 참의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참도 아니요 또한 참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 종류를 취한다면 참과 상응하는 법이 그 밖의 다른 행상으로 되어서 움직인다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 하면 마땅히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움직이는 것[轉]을 말하는 데에 4구가 있는 것처럼 이미 움직였고[已轉] 장차 움직일 것[當轉]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참의 행상에 세 번의 4구가 있는 것처럼 모든 그 밖의 행상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참의 자성은 어떤 것인가?
[답] 자체(自體)의 자상(自相)이 곧 그것의 자성이다. 마치 “모든 법의 자성은 곧 모든 법의 자상이며 동일 종류의 성품은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참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법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참의 소연을 나타낸다. 모든 참이 있고 참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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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다른 참이 있으며 부끄럼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고 다른 부끄럼이 있다는 것은 고제(苦諦)ㆍ집제(集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며, 공경이 있고 공경하는 성품이 있고 자재가 있고 자재한 성품이 있고 자재한 이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있다고 하는 것은 멸제(滅諦)ㆍ도제(道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과 행상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괴인가?
[答] 모든 괴(愧)가 있고 괴하는 것[所愧]이 있고 다른 괴[異愧]가 있으며, 부끄럼[恥]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것[所恥]이 있고 다른 부끄럼[異恥]이 있으며, 모든 죄(罪) 가운데서 두려워함이 있고 무서워함이 있고 몹시 두렵게 보는 것을 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있어서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을 하는 것이니 문자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문] 여기에서 말한 차별된 명언(名言)은 자성(自性)을 나타내는 것인가, 행상(行相)을 나타내는 것인가, 소연(所緣)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괴의 자성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괴의 행상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선(善)의 심ㆍ심소법의 행상처럼 이것의 행상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문] 괴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법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괴의 행상을 나타낸다. 이 행상은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하여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괴이나 괴의 행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괴가 그 밖의 다른 행상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괴의 행상으로 움직이나 괴가 아니다. 괴와 상응하는 법이 괴의 행상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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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괴이고 또한 괴의 행상으로 움직인다. 괴가 괴의 행상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것은 괴도 아니고 또한 괴의 행상으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만일 이 종류를 취하면 괴와 상응하는 법이 그 밖의 다른 행상이 되어서 움직인다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움직이는[轉] 데에 4구가 있는 것처럼 이미 움직였고[已轉] 장차 움직일 것[當轉]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괴의 행상에 세 번의 4구가 있는 것처럼 모든 그 밖의 행상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괴의 자성은 어떤 것인가?
[답] 자체(自體)의 자상(自相)이 곧 그것의 자성이다. 마치 “모든 법의 자성은 곧 모든 법의 자상이며 동일한 종류의 성품은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괴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법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괴의 소연을 나타낸다. 모든 괴가 있고 괴하는 것이 있고 다른 괴가 있고 부끄럼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고 다른 부끄럼이 있다는 것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죄 가운데서 두려워함이 있고 무서워함이 있고 몹시 두렵게 본다는 것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과 행상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論] 참(慚)과 괴(愧)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자재한 이[自在者]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있는 것은 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서 몹시 두렵게 보는 것은 괴이다. 이와 같은 것은 서로가 다르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 “이 두 가지 법은 서로 상응하여 그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라고 말했으므로 이제 참ㆍ괴의 두 가지 성품[性]과 모양[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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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분별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자재한 이에게 두려워하는 행동이 있는 것이 참이고 모든 죄 가운데서 몹시 두렵게 보는 것이 괴이다.
또 공경할 것이 있는 것이 참이고 두려워할 것이 있는 것이 괴이다. 이와 같은 차례는 앞에서 말한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의 차별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므로 그에 맞추어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다 같이 삼계계(三界繫)와 불계(不繫)이다. 또 이것은 오직 선(善)일 뿐이며 온갖 선심(善心)과 두루 상응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 “일곱 가지 힘[七力]2)은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두 가지는 오직 유루일 뿐이니 참과 괴요, 다섯 가지는 유루와 무루에 다 통하는 것이니 신근(信根) 등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논에서는 “일곱 가지 힘은 모두가 유루ㆍ무루에 다 통한다”라고 말해야 되는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따로 의취(意趣)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力]의 가행(加行)과 근본(根本)을 설명하면서 “가행위(加行位) 중에서는 참ㆍ괴가 더하기 때문에 오직 유루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근본위(根本位) 중에서는 신근 등이 더하기 때문에 두 가지에 다 통한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도(聖道)는 마땅히 참ㆍ괴와 상응하지 않아야 하
니 성자(聖者)에게는 참ㆍ괴가 증상(增上)하지 않아야 한다. 이 때문에 참ㆍ괴는 반드시 무루에도 통한다.
혹은 무참(無慚)인데도 참(慚)과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악(惡)을 지을 때에는 부끄럼이 있는 것이니 마치 시집가고 장가가는[嫁娶] 따위와 같다.
혹은 참인데도 무참과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선(善)을 지을 때에는 부끄럼이 없는 것이니 마치 보시 등을 행하는 것과 같다.
혹은 무참인데도 무참과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악을 지을 때에도 부
2) 5근(根)과 참과 괴를 일곱 가지의 힘이라고 한 까닭은 선업(善業)과 성도(聖道)로 나아가는 근본 원동력이 된다는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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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짐승을 마구 죽이고 사냥하는 따위와 같다.
혹은 참인데도 참과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선을 지을 때에도 부끄럼이 있는 것이니 마치 허물을 뉘우치는 것 등과 같다.
혹은 무괴(無愧)인데도 괴(愧)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악을 지을 때에는 부끄럼이 있는 것이니 시집가고 장가가는 따위와 같다.
혹은 괴인데도 무괴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선을 지을 때에는 부끄럼이 없는 것이니 마치 보시를 행하는 등과 같다.
혹은 무괴인데도 무괴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악을 지을 때에도 부끄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짐승을 마구 죽이고 사냥하는 따위와 같다.
혹은 괴인데 괴와 비슷하게 구르는 것이 있다. 선을 지을 때에도 부끄럼이 있는 것이니 마치 허물을 뉘우치는 것 등과 같다.
[論] 어떤 것이 증상(增上)의 불선근(不善根)인가? 어떤 것이 미구행(微俱行)의 불선근인가?3)……(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밝히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그는 아직도 미구행의 불선근이 끊어지지 않아 이로부터 남아있는 불선근이 생기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장차 물러나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것이 증상의 불선근이고 어떤 것이 미구행의 불선근인지 설명하지도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 밝혀야 하기 때문에 이
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중품(中品)의 불선근을 말하지 않는가?
3) 불선근이란 온갖 불선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니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어느 것이나 다 욕계계(欲界繫)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거칠게 나타나는 맹렬한 것을 증상의 불선근이라고 하며 극히 섬세한 것을 미구행의 불선근이라 한다. 여기서는 위의 증상과 미구행의 불선근을 취급한 문단인데 그 주된 항목은 ① 중품(中品)의 불선근을 말하지 않은 이유, ② 증상의 불선근, ③ 불선근과 사견과의 관계, ④ 미구행의 불선근 등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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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미 처음과 나중을 말하면 벌써 그 중간은 드러난 것이다. 처음과 나중처럼 위와 아래, 나아가 드는 것[趣入]과 이미 나온 것[已出], 가행(加行)과 구경(究竟)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거칠게 나타나서 알기 쉽고 시설하기도 쉬우며 나타내기도 쉽고 설명하기도 쉬운 것이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중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근기가 예리한 이인 지만(指鬘) 등과 같고 근기가 둔한 이인 사노(蛇奴) 등과 같은 이는 거칠게 드러나서 알기 쉽고 시설하기도 쉬우며 나타내기도 쉽고 설명하기 쉬우나 중간 근기[中根]는 그렇지가 않다.
또 중품은 상품과 하품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 것이니, 상품을 말할 때에는 중간은 하품에 있어서 상품보다는 못하기 때문이요, 하품을 말할 때에는 중간은 상품에 있어서 하품보다는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상품과 하품으로 적은 것이어서 세간에서 희기(希奇)하기 때문에 말하지만 중품은 극히 많은 것이어서 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하고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증상(增上)의 불선근인가?
[答] 모든[諸] 불선근으로써 선근(善根)을 끊으며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문] 모든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는 것이면 곧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게 되는 것인가, 그와는 다른 것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그것이라면 어떻게 “그리고[及]”라는 말을 하며 만일 그와는 다른 것이 있다면 선근을 끊는 모든 불선근은 어느 때에 끊게 되는가?
[답] 어떤 이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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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고[及]”라고 말하는가?
[답] 뜻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증상의 불선근은 극히 사납고 날카롭기 때문에 선근을 끊으며 극히 거칠고 중하기[麤重] 때문에 욕염을 여읠 때에는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이다.
또 이 불선근은 두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증상(增上)이라고 한다. 첫째는 모든 선근을 끊어 없애기 때문이요, 둘째는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와는 다른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선근을 끊는 모든 불선근은 어느 때에 끊게 되는가?
[답]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끊게 된다.
[문] 어떻게 다른 것이 있는가?
[답] 많고 적은 것[多少]에 다른 것이 있다. 선근을 끊는 것이 적으나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은 많은 것이니 욕심을 여읠 때의 맨 처음에 버리는 온갖 것은 모두가 선근을 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 사견(邪見)만이 선근을 끊는데 무슨 연유로 이에 불선근을 말하는 것인가?
[답] 비록 근본(根本)일 때에는 사견으로 말미암아 끊어진다 하더라도 가행(加行)일 때에는 불선근을 말미암아서이니 가행일 때에는 세력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선근이 선근을 끊는다”라고 말한다. 염정의 법[染淨法]에서는 모두 가행일 때에 세력의 작용이 뛰어난 것[增上]이요 구경(究竟)일 때에는 그렇지가 못하다.
마치 “보살은 노(老)ㆍ병(病)ㆍ사(死)가 세간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마음속 깊이 싫증내고 여의려고 맨 처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일으켰다.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삼대겁(三大劫) 아승기야(阿僧企耶) 동안에 행하기 어려운 갖가지 고행(苦行)을 닦아 익히면서도 물러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고 한 것과 같다. 진지(盡智)일 때에 미래 세상의 삼계(三界)에 매인 증상의 선근을 닦는 것이 아니기 때
문에 가행일 때에 세력의 작용이 뛰어난 것이다.
어떤 이는 “사견이 선근을 끊는 까닭은 모두 불선근의 힘인 줄 알아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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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선근이 선근을 굴복시켜 점차로 열약하게 하여 세력이 없게 한 뒤에야 사견이 비로소 그것을 끊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사견과 상응하는 치(癡) 불선근으로 선근을 끊는다는 것을 말하며 앞 자리[前位]의 탐(貪) 등을 말하지 않았다. 비록 실로 사견은 선근을 끊는다 하더라도 그때에는 우치가 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마치 염주(念住) 등과 같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에서는 다만 치 불선근을 말할 뿐이니 전(轉)4)과 수전(隨轉)일 때에 다 같이 증상하기 때문이다. 탐ㆍ진은 전일 때에 증상하고 수전일 때에는 그렇지 않으며 사견은 수전일 때에 증상하고 전일 때에는 그렇지 않지만 오직 치만은 언제나 증상할 뿐이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설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이와 같이 말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사견을 세워서 불선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미구행(微俱行)의 불선근인가?
[答] 모든 불선근으로써 욕염을 여읠 때에 최후에 버리는 것이니 그것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욕염을 여읜다고 한다.
욕계 하하품(下下品)의 탐ㆍ진ㆍ치를 미구행의 불선근이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릴 때를 욕염을 여읜다고 하는 것이니 미세(微細)하여서 끊기 어렵기 때문에 최후에 여의는 것이다.
[문] 사견이 선근을 끊을 때에 1품단(品斷)을 짓는 것인가?5) 9품단6)을 짓는
4) 전이라 함은 맨 처음 발동(發動)하는 형태를 말하고 수전이라 함은 그로부터 계속하여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5) 앞에서 설명한 불선근이 맹위를 떨치면서 온갖 선심을 끊어 없애는 것을 단선근(斷善根)이라고 한다. 이 문단에서는 이 단선근에 관한 모든 문제를 갖가지 방면으로부터 논구한다. 불선근론의 계속이지만 본론(本論)에서는 상설하지 않은 것을 바사(婆沙)에서는 자세히 설명하여서 특별히 한 문단을 세운 것이다.(단선근에 관해서는 『구사론』 제17권을 참조할 것.)
6) 9품단이란 사견을 이중으로 상ㆍ중ㆍ하로 나누어 9품으로 만들고 그 9품의 사견이 같이 9품의 선근(善根)도 끊는다는 의미인데 1품단이라는 것은 오직 1품의 사견[上上品의 邪見]이 1품의 선근[下下品의 善根]만을 끊는데도 단선근이 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느냐 하면 만일 1품단을 짓는다 하면 무엇 때문에 앞에서 “모든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는다”고 말하는가? “모든[諸]”이라는 말로 표시한 것은 하나뿐만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 뒤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미구행의 선근인가? 선근을 끊을 때에 최후에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9품단을 짓는다 하면 어째서 앞에서 “모든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고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을 증상의 불선근이라 한다”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1품(品)에서 끊는 사견이 9품의 단선근(斷善根)이 되는가? 어떻게 1품의 사견에서 끊는 사견이 9품에서 끊는 선(善)이라 하는가?
[답] 어떤 이는 “1품단을 짓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앞에서 “모든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는다”라고 말하는가?
[답] 앞의 글은 다만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는다”고 말해야만 하며, “모든[諸]”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모든”이라고 말한 것은 선을 끊는 사견과 상응하는 치(癡) 불선근이 미래의 종류에는 많은 찰나(刹那)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 정작 선을 끊을 때에는 비록 많은 품류[多品]가 없다 하더라도 가행위(加行位)의 품류에는 많이 있는 것이므로 “모든”이라는 한 것은 가행의 복단(伏斷)과 정단(正斷)을 다 나타내어 함께 끊는다[斷]고 하기 때문이다.
[문] 이 뒤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미구행의 선근인가? 선근을 끊을 때에 최후에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현행(現行)의 끊는 것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하하품의 사견이 앞에 나타나서 상상품(上上品)의 선근으로 하여금 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이렇게 하여 나아가 상중품(上中品)의 사견이 앞에 나타나서 하중품(下中品)의 선근으로 하여금 행하지 않게 하며 상상품의 사견이 앞에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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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하품의 선근으로 하여금 행하지 않게 하고 9품(品)으로 하여금 모두 성취하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앞의 8품의 선근은 먼저 현행하지 않게 되고 뒤에는 성취하지 않게 되며 제9품의 선근이 현행하지 않게 되며 제9품의 선근이 현행하지 않게 될 때에는 곧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점차로 현행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뒤에서는 “선근을 끊을 때에 최후에 버리게 되는 것을 미구행의 선근이라 한다”라고 말하며 일시에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는 “욕염을 여읠 때에 최초에 버리는 것을 선을 끊는 증상의 불선근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때문
에 앞뒤의 두 가지 설명은 잘 통하게 된다.
[評] “9품단(品斷)을 짓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앞에서 “모든 불선근으로써 선근을 끊으며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을 증상의 불선근이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하는가?
[답] 많은 종류의 9품(品)이 있다.
현행(現行)의 9품이 있고 이숙(異熟)의 9품이 있으며 대치(對治)의 9품이 있고 단선근(斷善根)의 9품이 있다.
현행의 9품이라 함은 어떤 때는 하하품이 현행하고, 나아가 어떤 때는 상상품이 현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곧 이것을 “인(因)이 되는 9품이다”라고 말한다. 가행득(加行得)의 것에서는 하하품은 9품(品)의 인이 되고 나아가 상중품(上中品)은 이품(二品)의 인이 되며 상상품은 다만 상상품만의 인이 되고 하열[劣]한 것은 뛰어난[勝] 것의 인이 되어도 뛰어난 것은 하열한 것의 인이 아닌 것이 숭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행득이 아닌 것[非加行得]에서는 9품은 차츰차츰 인이 되게 한다.
이숙의 9품이라 함은 상상품의 업은 상상품의 이숙(異熟)을 받고 나아가 하하품의 업은 하하품의 이숙을 받는 것을 말한다.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만일 살생죄(殺生罪)를 지은 이로 상상자(上上者)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나고 상중자(上中者)는 대열(大熱)지옥에 나며 나아가 하하자(下下者)는 방생(傍生)ㆍ귀취(鬼趣)에 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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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대치의 9품이라 함은 하하품의 명(明)은 상상품의 무명(無明)을 끊고 나아가 상상품의 명은 하하품의 무명을 끊는 것을 말한다.
단선근의 9품이라 함은 하하품의 사견(邪見)은 상상품의 선근을 끊고 나아가 상상품의 사견은 하하품의 선근을 끊는 것을 말한다.
만일 단선근의 9품설(品說)에 의하면 그 사견에는 9품이 있지만 만일 대치의 9품설에 의하면 그 사견은 1품일 뿐이다. 대치의 9품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욕염을 여읠 때에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단선근의 9품이기 때문에 뒤에서는 “선근을 끊을 때에 최후에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앞뒤의 두 가지 설명이 다 잘 통한다.
또 끊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9품의 사견을 끊으면서 욕염을 여읠 때에 1품이 단번에 끊어진다. 둘째는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같은 것이니 이 때문에 끊을 9품의 선근이 이 선근을 끊을 때에 9품이 점차로 끊어진다.
[문] 선근을 끊는다[斷善根]7)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마치 세간의 도끼 등으로 나무를 끊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니 사견(邪見)과 선(善)은 서로 접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속(相續) 중에 사견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모든 선근의 성취에는 소멸[滅]을 얻게 하고 불성취(不成就)에는 발생[生]을 얻게 하기 때문에 끊는다[斷]고 한다. 만일 상속 중에 선근의 득(得)이 없으면 그때에는 선근이 이미 끊어졌다[已斷]고 한다.
[문] 이 선근이 끊어지는 자성(自性)은 무엇인가?
[답] 어떤 이는 “믿지 않는 것[不信]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믿기[信] 때문에 선근이 계속[續]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선근이 끊어진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사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사견에 의하여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선을 끊을 때에 모든 번뇌[纏]로써 자성을 삼는다. 그 힘으로
7) 몸과 마음이 상속하는 가운데서 사견의 힘에 의하여 온갖 착한 법의 득(得)을 끊고 반대로 착한 법의 비득(非得:不成就)을 얻는 것을 바로 선근을 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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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암아 선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온갖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선근을 끊는 때에 온갖 법은 모두가 수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비유자(譬喩者)는 “진실한 자성은 없다. 그의 상속에 먼저는 선근이 있었으나 지금은 끊어져 없어졌는데 무슨 자성이 있겠는가? 인용한8) 실제의 비유는 마치 정중설(頂中說)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모든 선근이 끊어지는 것은 불성취(不成就)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것은 무부무기이어서 심불상응행온(心不相應行蘊)에 속한 것이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곧 다시 그 밖의 이러한 종류가 있는 법의 불상응(不相應) 안에 있다고도 말한다.
[문] 어느 세계[界]와 갈래[趣]와 처소[處]에서 선근을 끊게 되는가?
[답] 욕계(欲界)에 있어서요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는 그렇지 않으며, 인취(人趣)에 있어서요 그 밖의 갈래서는 그렇지 않으며, 3주(洲)에서요 북주(北洲)만은 제외된다.
구사벌마(瞿沙伐摩) 존자는 “오직 섬부주(贍部洲)에서 선근을 끊는다. 이 주의 사람은 선악의 업을 짓는 것이 맹렬하고 날카롭지만 그 밖의 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논[本論]의 근온(根蘊)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섬부주 사람은 극히 많으면 19근(根)9)을 성취하고 극히 적으면 8근을 성취한다. 섬부주처럼 동승신주(東勝身洲)와 서우화주(西牛貨洲)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글에서는 “동ㆍ서주 사람은 극히 많으면 19근을 성취하고 극히 적
8) 부자가 빈궁하게 된다는 예(例). 마치 비구가 강도를 만나서 옷과 발우를 모두 빼앗겨 버리는 것과 같다.
9) 19근은 22근 중에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의 세 가지를 제외한 안근(眼根) 나아가 의근(意根)의 6근과 남근ㆍ여근의 2근과 명근(命根)과 우(憂)ㆍ희(喜)ㆍ고(苦)ㆍ락(樂)ㆍ사(捨)의 5수근(受根)과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을 말한다. 8근이란 5수근과 신근(身根)ㆍ명근(命根)ㆍ의근(意根)을 가리키는 것이니 곧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과 남근ㆍ여근 등을 결(缺)한 불구자이므로 위의
온갖 선근을 결한다는 뜻이다.(『구사론』 제3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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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13근10)을 성취한다”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독송한 이의 착오인 줄 알아야 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온갖 독송에서는 모두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요 3주에서 짓는 것은 모두가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니 앞의 설명이 도리로 보아 옳다고 하겠다.
[문] 어떠한 보특가라가 선근을 끊는가?
[답] 견행(見行)인 이는 선근을 끊지만 애행(愛行)인 이는 그렇지 않다. 견행인 이는 의요(意樂)가 견고하여 선악의 업을 짓는 것이 맹렬하고 날카롭지만 애행인 이는 유순하여 염정의 품[染淨品]에 다 같이 맹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견행 중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가 다 같이 선을 끊게 된다.
구사벌마(瞿沙伐摩) 존자는 “오직 남자만이 선근을 끊는 것이니 지성(志性)이 강하기 때문이다.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남자가 짓는 업은 승(勝)하고 여자는 그렇지 않으며 남자의 연근(練根)은 승하고 여자는 그렇지 않으며 남자의 의요는 승하고 여자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여인은 선근을 끊지 못하는 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그렇다면 근온(根蘊)에서 말한 것을 다시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만일 여근(女根)을 성취하면 반드시 8근(根)을 성취하는 것이니 남근(男根)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글에서는 “만일 여근을 성취하면 반드시 13근을 성취하며 만일 남근을 성취하면 반드시 8근을 성취한다”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독송하는 이의 착오인 줄 알아야 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온갖 독송에서는 모두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요 남녀가 짓는 것은 모두가 맹렬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마치 전작가(栴酌迦) 바라문녀(婆羅門女)가 악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비방한 것은 모든 장부(丈夫)들보다 지나친 것과 같으나 『시설론』에서 “남자가 더 뛰어나다”고 말한 것은 대부분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앞에서의 설명이 더 나은 줄 알아야 한다.
10) 13근이라 함은 위의 8근에 신(信) 등의 5근을 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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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선체(扇搋)ㆍ반택가(半擇迦)ㆍ무형(無形)ㆍ이형(二形)은 선근을 끊을 수 있는가?
[답] 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의요가 견고하면서 하는 일이 사납고 날카로운 이가 선근을 끊는다”라고 말했으나 저 선체 등은 의요가 유순하면서 하는 일이 하열하기 때문이다.
또 견행(見行)인 이는 선근을 끊게 되는데 그들은 애행(愛行)이기 때문이다.
또 성을 많이 내는 이[多瞋者]는 선근을 끊게 되지만 그들은 탐욕이 많기 때문이다.
[문] 어떠한 선근을 끊는가? 욕계만의 것인가, 삼계(三界)의 것을 다 끊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욕계만의 것을 끊는다면 『식신론(識身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만일 개미 알을 뭉개고도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사람은 삼계의 선근을 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삼계의 것을 다 끊는다 하면 그 상계(上界)의 선은 먼저 성취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끊는다는 것인가?
[답] 욕계의 선근만을 끊는다고 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식신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그 글에서 “만일 개미 알을 뭉개고서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삼계의 선근을 끊은 것이다”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3수(數)11)를 만족하게 하려는 것이다. 먼저 욕계의 선근은 성취했으면서도 상계의 선근은 이미 성취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욕계의 선근을 끊으면 삼계의 선근을 모두 성취하지 않은 것이니 선을 끊은 자리[斷善位]의 3수가 이에 만족된 까닭에 그 사람은 삼계의 선근을 끊었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삼계의 선근을 다 끊는다”라고 말한다.
[문] 그의 상계의 선근은 먼저도 성취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떻게 끊었다는
11) 3수라 함은 세 가지 자리[三位]라는 뜻이니 ① 상계(上界) 선근의 불성취, ② 욕계의 선(善) 가운데서 상상품 나아가 하중품의 불현행(不現行), ③ 욕계 선의 상하품[微俱行善]이 현행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욕계 선의 불성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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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인가?
[답] 성취하지 않은 가운데서 다시 성취하지 않은 것이라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에 “끊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상계의 선근은 욕계 선근에 의하여 나고 자라고 번성하는 것인데 만일 욕계의 선이 끊어진다면 그것은 바짝 마를 것이므로 “그것을 끊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욕계의 선근은 상계 선을 위하여 문(門)이 되고 가행(加行)이 되고 발을 딛는 곳[足依處]이 되는 것인데 만일 욕계의 선이 끊어지면 거기에는 문 등이 없게 되기 때문에 역시 “끊었다”라고 말한다.
또 만일 욕계의 선근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그 상계의 선이 나고 자라고 모인다는 뜻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욕계의 선이 끊어지기 때문에 그 곳에 선은 나서 자라거나 모일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끊었다”라고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묘음 존자는 “만일 욕계의 선근이 끊어지지 않으면 색계ㆍ무색계의 선근이 나고 자랄 수 있겠지만 이것이 끊어짐을 말미암아 거기에 다시는 나지 못할 것이므로 역시 ‘끊었다’고 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개미 알을 짓뭉개고서 마음에 뉘우침이 없다”는 것만을 말하면서 그 밖의 것은 말하지 않는가?
[답] 그것은 전혀 허물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미 알은 사람에게 허물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인데도 일부러 짓뭉개고서 오히려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허물도 있고 소용도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종류로도 이미 선근을 끊은 것인 줄 알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문] 가행(加行)의 선근을 끊는 것인가, 생득(生得)의 선근을 끊는 것인가?
[답] 오직 생득의 선근만을 끊는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행의 선근은 먼저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가행의 선근도 끊는다”라고 말한다.
[문] 그것은 이미 성취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 끊는다고 하는가?
[답] 성취하지 않은 가운데서 다시금 성취하지 않는 것이니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에 “끊는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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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많은 뜻이 있는 것은 마치 삼계(三界)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지만 여기에 다시 하나의 공통하지 않은[不共] 뜻이 있다. 가행의 선근은 생득의 선[生得善]으로써 인연(因緣)을 삼고 근본(根本)을 삼고 등기(等起)로 삼기 때문에 이것이 끊어질 때에는 역시 그것을 끊었다고 말한다.
[문] 다만 유루의 연[有漏緣]의 사견12)만이 선근을 끊는 것인가? 또한 무루의 연[無漏緣]의 사견도 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오직 유루의 연의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다. 왜냐하면 두 가지 계박[二縛]13)을 갖추어서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무루연의 사견도 선근을 끊는다. 그것에는 비록 소연의 계박[所緣縛]은 없다고 해도 인의 힘[因力]과 장양(長養) 또한 더욱 왕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다만 유위의 연[有爲緣]의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 것인가? 또한 무위의 연[無爲緣]의 사견도 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오직 유위의 연의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 것이니 그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무위연의 사견도 선근을 끊는다”라고 말해야 하며 그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동분(同分) 계지연(界地緣)14)의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 것인가? 또한
12) 유루의 법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을 유루의 연의 사견이라 하며 무루의 법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사견을 무루의 연의 사견이라 한다. 이것을 88사(使)의 수면(隨眠)에 배당하면 멸제(滅諦)ㆍ도제(道諦)하의 사견은 곧 무루의 연의 사견[滅道二諦下의 邪見과 疑와 無明을 합하여 六無漏緣惑이라 한다.]이며 그것에 대하여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사견을 유루의 연이라 한다.
13) 두 가지 계박이라 함은 상응박(相應縛)과 소연박(所緣縛)을 가리킨다.
14) 계는 삼계(三界)요 지는 9지(地)이며 동분의 계지연이란 삼계 9지 중 혹은 지에 또는 계에 속하는 사견이어서 다만 그의 지만을 반연하는 것을 가리키며 부동분의 계지연이란 자계(自界) 자지(自地)와 함께 타계(他界) 타지(他地)도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88사(使)에 나아가서 말하면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11사(使) 즉 고제(苦諦) 하의 5견(見)ㆍ의(疑)ㆍ무명(無明)과 집제(集諦)하의 견취(見取)ㆍ사견ㆍ의ㆍ무명의 11은 두루 자계
지(自界地)의 5부(部)의 변행(遍行)인 점에서 이를 변행혹(遍行惑)이라 한다. 그 변행혹 중에서 고제하의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의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9사(使)는 자계 자지와 동시에 타계 타지도 반연한다는 점에서 상연혹(上緣惑)이라 한다. 지금 사견에 관하여 동분ㆍ부동분이라고 한 것은 곧 위와 같은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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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분(不同分)의 계지연의 사견도 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오직 동분의 계지연의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 것이니 그 뜻은 앞에서 설명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부동분의 계지연의 사견도 선근을 끊는다”라고 말해야 하며 그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동분의 계지연의 방인(謗因) 사견15)만이 선근을 끊는 것인가? 방과(謗果)의 사견도 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오직 방인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다. 만일 개미 알을 짓뭉개고서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으면 마땅히 이 사람은 삼계의 선을 끊었다고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오직 방과 사견만이 선근을 끊는다. 만일 결정코 선업과(善業果)의 이숙도 없고 악(惡)업과의 이숙도 없다고 고집한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삼계의 선을 끊었다고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評] “방인과 방과의 사견은 다 같이 선을 끊는다”고 말해야 한다. 방인사견은 마치 무간도(無間道)와 같고 방과사견은 마치 해탈도(解脫道)와 같다. 원인을 비방한[謗因] 것은 선근의 성취를 위하여 구멸(俱滅)을 얻고 결과를 비방한[謗果] 것은 선근의 불성취(不成就)를 위하여 구생(俱生)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선을 끊는다.
[문] 9품(品)의 선근을 끊을 때에는 끊임없이[不起] 끊는 것인가? 자주 일으키며[數起] 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끊임없이 끊는 것이니 마치 견도(見道)에서와 같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자주 일으키며 끊는 것이니 마치 수도(修道)에서와 같다”라고 말한다.
[評] “일정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혹은 끊임없이 상속하면서 9품을 끊어
15) 방인의 사견이란 원인이 없다고 부정하는 삿된 소견이며 방과의 사견이란 결과가 없다고 부정하는 삿된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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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기도 하고 혹은 1품만을 끊고 일으키는 것이 있고 혹은 2품 혹은 3품 나아가 혹은 8품을 끊고서 그런 뒤에야 비로소 일으키면서 다시 뒤의 품을 끊는 것이 있기도 하다.
[문] 율의(律儀)에 머무르는 이가 선근을 끊을 때에는 먼저 율의를 버린 뒤에 선을 끊는 것인가, 끊을 때에 버리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먼저 율의를 버리고 그런 뒤에야 선을 끊는다. 그의 몸속에서 먼저 한 종류의 사견(邪見)을 일으켜 율의를 버리고 그 뒤에 한 종류의 사견을 일으켜 모든 선근을 끊는 것이니 마치 사나운 바람이 불어 먼저 가지와 잎을 꺾고 그런 뒤에 뿌리를 뽑아내는 것처럼 그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評] “일정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 여러 종류의 마음에 따라 그 여러 율의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 마음을 버릴 때에 그 율의도 따라서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문] 속선근(續善根)16)일 때에 9품(品)이 단번에 계속되는 것인가? 하나하나의 품이 점차로 계속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하나하나의 품이 점차로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만일 지옥에서 죽어 지옥에 날 이면 3품(品)이 계속되고 만일 지옥에서 죽어 방생이나 귀취에 날 이면 6품이 계속되며 만일 지옥에서 죽어 인취(人趣)나 천취(天趣)에 날 이면 9품이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評] “9품이 단번에 계속되면서 점차로 앞에 나타난다. 마치 병이 나은 이가 일시에 병이 낫고서 그 뒤에 점차로 힘이 생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지옥에서 죽어 지옥에 날 이면 3품(品)의 선근을 얻으면서 또한 몸에 있고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 나타나지만 6품의 선근은 얻으면서도
16) 선근을 끊었다 하여 반드시 영원히 이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뒷날 기회를 만나면 다시 이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속선근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갖가지 방면으로 취급한다. 더 나아가 대승(大乘)에서 일천제(一闡提:斷善根者, 無佛性)의 성불ㆍ불성불을 논구하는 것도 계통으로 보면 이런 단선근ㆍ속선근론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구사론』 제17권 참조)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으며, 방생이나 귀취에 날 이면 6품의 선근을 얻으면서 또한 몸에 있고 성취하면서 앞에 나타나지만 3품의 선근은 얻으면서고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지 않으며, 인취나 천취에 날 이면 9품의 선근을 얻으면서 또한 몸에 있고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 나타난다.
[문] 선근은 끊은 것이 많은가, 계속되는 것이 많은가?
[답] 그 만큼의 끊은 것에 따라 도로 그만큼 계속되는 것이니 욕계의 것을 끊어서 욕계의 것이 계속되고 생득(生得)의 것을 끊어서 생득의 것이 계속되며 9품을 끊어서 9품이 계속된다.
[문] 선근을 끊고 나서 현재 법 가운데서 도로 계속되는가?
[답] 우선 『시설론(施設論)』에 의하면 “그는 현재 법 가운데서 선이 계속되지 못하며 결정코 지옥 안에 날 때에나 혹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선이 계속된다”라고 한다. 그 논에서 “만일 개미 알을 짓뭉개고서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삼계의 선을 끊었다고 말해야 하며 그는 현재 법에서는 선근이 계속되지 못하고 결정코 지옥 안에 날 때에나 혹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선이 계속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누가 지옥에 날 때에 선근이 계속되고 누가 지옥에서 죽을 때에 선근이 계속되는가?
[답] 만일 지옥의 중유(中有) 중에서 미처 선근을 끊는[斷善根] 사견(邪見)의 이숙과(異熟果)를 받지 않은 이면 그는 지옥에 날 때에 계속되고 만일 지옥의 중유 중에서 사견의 이숙과를 받은 이면 지옥에서 죽을 때에야 그의 과(果)가 다하기 때문에 선근이 계속된다. 왜냐하면 마치 사견과 선근은 서로가 방해하는 것처럼 그 과와 선근17)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인의 힘[因力]을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지옥에서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연의 힘[緣力]을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지옥에 가 날 때에 계속된다.
17) 단선근에 의하여 일단 지옥의 과를 받을 때에는 그 과는 재차 선근을 일으키는 것을 방해하게 되므로 속선(續善)은 반드시 과를 받기 이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과보가 마지막 다 끝난 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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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자기의 힘[自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남의 힘[他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태어날 때에 계속된다.
또 만일 자성의 힘[自性力]으로 말미암아 끊은 이면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자량의 힘[資糧力]으로 말미암아 끊은 이면 태어날 때에 계속된다.
또 만일 견(見)과 계(戒)가 함께 파괴되었으면서 끊은 이면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견은 파괴되었으면서도 계는 파괴되지 않았으면서 끊은 이면 태어날 때에 계속된다.
또 만일 의요(意樂)와 가행(加行)이 함께 되었으면서 끊은 이면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의요는 파괴되었으면서도 가행은 파괴되지 않았으면서 끊은 이면 태어날 때에 계속된다.
또 만일 상견(常見)이 가행이 되어서 끊은 이면 죽을 때에야 계속되고 만일 단견(斷見)이 가행이 되어서 끊은 이면 태어날 때에 계속된다.
묘음 존자는 “그 선을 끊은 이가 혹은 지옥에 났을 때에 착하지 않은 업의 이숙과(異熟果)의 모양이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곧 ‘나는 먼저 나 자신이 이런 나쁜 업을 지었으므로 이제 이런 뜻대로 되지 않는 과보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이런 믿음을 일으킬 때를 바로 선근이 계속된다고 한다.
혹은 지옥에 난 뒤에 고통의 이숙과를 받으며 ‘나는 먼저 나 자신이 이와 같은 나쁜 업을 지었기에 이제 도로 자신이 이러한 고통의 과보를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이런 믿음을 일으킬 때를 바로 선근이 계속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도리에 의하여 단선근(斷善根)을 말하는 이면 현재 법 안에서도 계속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가 만일 견문이 많은[多聞] 선우(善友)로서 구계(具戒)와 변재(辯才)와 언사(言詞)와 위숙(威肅)이 있는 이를 만나 그에게 법을 말하여 그의 마음을 끌어내며 “그대는 인과(因果)의 바른 도리에 대하여 신해(信解)를 내어야 하며 삿된 비방을 일으키지 말 것이다. 마치 나에게 순량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이로서
존중할 만한 범행(梵行)을 같이하는 이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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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아 그대는 오랜 세월 동안 안온을 얻게 되리라”고 할 적에 그는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면 그는 이미 선근이 계속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근은 현재 법에 있어서도 계속되고 몸을 바꾸어서도 계속된다.
[문] 누가 현재 법에서 계속되며 누가 몸을 바꾸어서 계속되는가?
[답] 만일 선근을 끊은 이로서 무간업(無間業)을 짓지 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선근을 끊었고 또한 무간업을 지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또 만일 연의 힘[緣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인의 힘[因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만일 다른 이의 힘[他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자신의 힘[自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또 만일 자량의 힘[資糧力]으로 말미암아 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자성의 힘[自性力]을 말미암아 끊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또 만일 견(見)은 파괴되었으나 계(戒)는 파괴되지 않으면서 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견과 계가 다 같이 파괴되어서 끊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또 만일 의요(意樂)는 파괴되었으나 가행(加行)은 파괴되지 않으면서 끊은 이면 현재의 법에서 계속되며 만일 의요와 가행이 다 같이 파괴되어서 끊은 이면 몸을 바꾸어야 비로소 계속된다.
[문] 만일 현재 법 안에서도 계속된다면 앞의 『시설론』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거기서 현재 법에서는 계속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말한 선근도 끊었고 또한 무간업도 지은 이요 혹은 인의 힘[因力]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끊은 이 등이다.
[문] 만일 현재 법 안에서 선근이 계속된 이도 그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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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 나는가?
[답] 그는 결정코 지옥에 나지 않는다. 다만 몸을 바꾸어서만이 선근이 계속될 이면 반드시 지옥에 난다.
[문] 어떠한 마음에 머무르면 선근이 계속되게 되는가?
[답] 혹은 의심에 머무르기도 하고 혹은 바른 견해에 머무르기도 한다. 인과(因果)에 대하여 때로는 의심을 내면서 ‘이것은 혹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하며 혹은 바른 견해를 내면서 ‘이것은 결정코 있다’고 하는 것이니 그 때에 선근은 도로 계속하여 일어나게 되고 잘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선근이 계속된다고 한다.
[문] 그 누가 의심에 머무르면서 계속되고 그 누가 바른 견해에 머무르면서 계속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몸을 바꾸어서 머무르는 이면 의심에 머무르면서 계속되고 현재 법에서 계속될 이면 바른 견해에 머무르면서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評] “이것은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선근이 만일 계속되면 곧 나타나며 생기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현재 법에서 계속되는 이면 생기며 눈앞에 나타나지만 몸을 바꾸어서 계속될 이면 다만 그것은 성취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것은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현재 법 중에서 선근이 계속된 이면 그는 현재의 몸으로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 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들 수 없다. 그는 사견으로써 상속(相續)을 파괴했기 때문이니 선근이 열약하여도 순결택분(順決擇分)조차 낼 수 없거늘 하물며 정성이생에 들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는 비록 현재에 정성이생에는 들지 못한다 해도 순결택분은 끌어 일으킨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순결택분도 끌어 일으키고 또한 정성이생에도 들 수 있으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果)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마치 올갈타(嗢羯吒) 바라문 같은 이는 선근을 끊은 뒤에 사리자(舍利子) 존자께서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선근이 계속되게 하자 점차로 진리를 보게 되고 나아가 구경(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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竟)을 얻게 된 것이니 마치 비나야(毘奈耶) 중에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문] 선근을 끊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개미 알을 짓뭉개는 것 중에 어느 죄가 더 중한가?
[답] 우선 『시설론(施設論)』의 말에 의하면 만일 똑같은 전(纏)에 머무르면 그 죄도 똑같은 것이니 받을 이숙(異熟)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전이 똑같지 않으면 죄도 따라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개미 알을 짓뭉개는 것이 더 중하고 선근을 끊은 사람은 중하지 않다. 왜냐하면 개미 알은 모든 선근을 성취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선을 끊은 사람을 살해할 적에 얻는 죄가 더 중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선취(善趣)여서 그를 해치는 것이 더 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만일 벌죄(罰罪)에 의하면 선근을 끊은 사람을 살해하여 죄를 얻는 것이 중하니 변죄(邊罪)를 얻기 때문이며 만일 업도(業道)에 의하면 개미 알을 짓뭉개는 것이 중하니 그것은 모든 착한 법을 성취했기 때문이다”고 말해야 한다.
[문] 모든 선근을 끊은 이면 그는 모두 사성정취(邪性定聚)인가?
[답] 어떤 이는 “모든 선근을 끊은 이면 그는 모두 사성정취이지만 혹은 어떤 이는 사성정취이면서 선근을 끊은 것이 아닌 이도 있다. 마치 미생원왕(未生怨王) 등과 같은 이이니 그는 무간업을 지었으나 선근을 끊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여기에는 4구(句)가 있다.
어떤 이는 선근을 끊었으면서도 사성정취가 아닌 이가 있다. 마치 포랄나(布剌拏) 등과 같은 육사(六師)가 그런 이들이니 그들은 선근을 끊었으면서도 무간업은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사성정취이면서도 선근을 끊은 것은 아닌 이가 있다. 마치 미생원왕 등과 같다.
어떤 이는 선근도 끊고 또한 사성정취이기도 한 이가 있다. 마치 제바달다(提婆達多) 등과 같은 이들이니 그는 선근도 끊고 또한 무간업도 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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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선근을 끊은 것도 아니요 또한 사성정취가 아닌 이도 있다.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이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어느 곳에서 선을 끊은 사견의 이숙과를 받는가?
[답] 무간지옥에서 그 이숙과를 받는다. 마치 아라한은 나아갈 맨 위의 열반에 이르는 것처럼 선근을 끊은 이는 나아갈 맨 아래의 무간지옥에 이르는 것이다.
또 마치 유정정(有頂定)의 사(思)는 유루의 선[有漏善] 중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유정(有頂)의 이숙과를 받는 것처럼 선을 끊은 사견은 악(惡) 중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무간지옥에서 이숙과를 받는다.
[문] 어느 곳에서 무간업(無間業)의 과(果)를 받는가?
[답] 만일 선근을 끊은 이의 모든 무간업과 그 밖의 파화합승(破和合僧)의 것이면 반드시 무간지옥 안에서 받지만 만일 선근을 끊지 않은 이로서의 나머지 무간업이면 혹은 무간지옥에서 혹은 그 밖의 다른 지옥에서 이숙과를 받는다.
[문] 선을 끊는 사견은 중동분(衆同分)에 대하여 다만 원만하게 할 뿐인가? 또한 능히 이끄는[能引] 것인가?
[답] 또한 능히 이끌기도 하고 또한 원만하게도 한다.
어떤 이는 “다만 원만하게 할 뿐이요 이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업(業)은 중동분의 과를 이끌 수 있지만 그것은 업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앞의 설명이 좋으니 사견과 상응하는 사업(思業)이 있기 때문이요 사견은 그것과 동일한 과(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6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5) 무참괴납식 ③
[論] 어떤 것이 욕계의 증상(增上)의 선근(善根)인가? 어떤 것이 미구행(微俱行)의 선근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밝히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그는 미구행의 선근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이로부터 남아있는 선법(善法)이 생길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청정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자세히 분별하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것이 욕계 증상의 선근이며 어떤 것이 미구행의 선근인가?”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을 이제 자세히 분별하려고 이
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중품(中品)의 선근을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1) 이 문단에서는 선근을 증상과 미구행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논구의 항목은 대체로 앞의 불선근의 경우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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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미 처음과 나중을 말했으면 벌써 중간은 드러낸 것이다. 처음과 나중처럼 위와 아래ㆍ나아가 드는 것[趣入]과 이미 나온 것[已出]ㆍ가행(加行)과 구경(究竟)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거칠게[麤] 나타나서 알기 쉽고 시설하기 쉬우며 드러나기 쉽고 말하기 쉬운 것이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중품은 그렇지 않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중품은 상품과 하품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다.
또 상품과 하품은 적은 것이어서 세간에 희기(希奇)한 것이어서 말하지만 중품은 극히 많은 것이어서 희기하지가 않기 때문에 생략하고 말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욕계의 선근만을 말하면서 색계와 무색계의 선근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색계와 무색계의 선근은 욕계의 선근으로써 문(門)을 삼고 가행(加行)을 삼고 나아가 드는 길[趣入路]을 삼는다. 만일 이것을 말하면 또한 이미 그것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되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 여기에서는 다만 근대치(近對治)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불선근[二不善根]의 가까운 대치는 바로 욕계의 두 가지 선근이므로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또 욕계의 증상ㆍ미구행의 선근은 나타내기 쉽고 알기도 쉬우며 시설하기도 쉽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증상의 선근은 비록 나타내기 쉽고 알기도 쉬우며 시설하기도 쉽다고 해도 미구행은 그렇지가 않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곧 위 두 세계에서는 선근을 끊는다는 뜻이 없기 때문에 미세한 선근의 모양은 시설하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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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욕계 증상의 선근인가?
[答] 보살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 때에 얻는 욕계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世俗智)와 여래께서 진지(盡智)를 증득하실 때에 얻는 욕계의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이다. 이와 같은 선근은 욕계계(欲界繫)의 모든 선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증상(增上)이라고 한다.
[論] 어떤 것이 미구행의 선근인가?
[答] 선근을 끊을 때에 맨 나중에 버리는 것이어서 그것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단선근(斷善根)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선근은 욕계계의 생득선(生得善) 중에서 하하품(下下品)에 속하기 때문에 미구행이라 한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진지(盡智) 때에 얻는 선근으로써 현관변의 세속지를 대(對)하여 차별을 분별하는가?
[답]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진지 때에 얻는 선근으로써 현관변의 세속지를 대하여 차별을 분별하지 않았으나 현관변의 세속지로써 현관변의 세속지를 대하여 차별을 분별하였다. 현관변의 세속지는 성문(聲聞)의 것은 하열하고 독각(獨覺)의 것은 중간이고 보살의 것은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진지 때에 얻는 선근으로써는 진지 때에 얻는 선근을 대하여 차별을 분별한다. 진지 때에 얻는 선근은 성문의 것은 하열하고 독각의 것은 중간이고 여래의 것은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에서도 진지 때에 얻는 선근으로써 현관변의 세속지를 대하여 차별을 분별한다. 보살의 현관변의 세속지는 하열하며 진지 때에 얻는 선근은 뛰어나다. 성문과 독각도 그러하다.
또 보살의 현관변의 세속지는 독각이 진지 때에 얻는 선근보다 뛰어나며 독각의 현관변의 세속지는 성문이 진지 때에 얻는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두 가지 차별을 분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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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이 두 가지는 평등하여 차이가 없음을 밝힐 뿐이다. 이것은 모두 유정(有頂)의 득(得)을 초월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현관변의 세속지를 얻으면 견도에서 끊을[見所斷] 유정의 득을 초월하기 때문이요 진지 때에 얻는 선근은 수도에서 끊을[修所斷] 유정의 득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2승(乘)도 그러한데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라고 물으면 ‘그것은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유정의 습기(習氣)를 초월할 수 없으며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두 가지 차별과 두 가지 평등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보살의 욕계의 현관변의 세속지와 여래의 진지 때에 얻은 선근을 말할 뿐이니 이 욕계의 증상의 선근은 2승이 얻는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문이나 독각에게도 어찌 증상의 선근이 없겠는가?’라고 물으면 ‘그들도 차츰차츰 그 밖의 하류(下類)에서 보면 증상이라고 하겠지만 상승(上乘)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현관변의 세속지는 정성이생에 든 뒤에야 비로소 얻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들 때에 얻는다”라고 말하는가?2)
[답] 도리로 보아 “든 뒤에야 비로소 얻는다”고 말해야 되는데도 “들 때에 얻는다”고 말한 것은 이미 든 것을 들 때라고 한 것이어서 가까운[近] 것에 대해 멀다[遠]는 말로 설명했을 뿐이다.
마치 “대왕은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라고 할 때에 이것도 이미 와 있는 것을 “지금 오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즐거운 느낌[樂受]을 느낄 때에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줄 사실대로 안다”고 말할 적에 이것도 이미 느낀 것을 “느낄 때”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괴로움을 끊고 즐거움도 끊어서 제4 정려(靜慮)에 든다”라고 말할 적에 이것도 괴로움을 이미 끊은 것을 “끊는다”라고 하는 것과 같고 “어느 법을 사유(思惟)하여 자등지(慈等至) OM NUM='3)에 든다”
2) 앞에서는 욕계의 증상선근으로서 보살이 얻는 현관변의 세속지와 여래께서 얻는 진지(盡智) 후변(後邊)에서의 모든 선근을 들었고, 이 문단에서는 그것에 관련하여 일반론의 형태에서의 현관변의 지혜를 여러 방면으로 밝히려고 한다.
3) 자등지라 함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자무량(慈無量)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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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할 적에 이것도 이미 들어 간 것을 “든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아라한의 마음은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를 해탈한다”라고 말할 적에 이 욕루에 대하여 또한 이미 해탈한 것을 “해탈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도 그러하여 이미 들어간 것을 “들 때”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바로 보살이 정성이생에 들 때에 현관변의 세속지를 얻는다고 말해야 하니 모든 진리의 초지(初智)4)를 모두 정성이생이라 하며 모든 인(忍)을 들어간다[入]고 하기 때문이다. 고(苦)ㆍ집(集)ㆍ멸(滅)의 유인(類忍)에서 고ㆍ집ㆍ멸의 유지(類智)에 들 때를 현관변의 세속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금강유정(金剛喩定)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를 진지(盡智)를 얻는 때라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라고 말한다
.
[문] 무엇 때문에 이 지(智)를 현관변(現觀邊)이라 하는가?
[답] 고의 변[苦邊]ㆍ집의 변[集邊]ㆍ멸의 변[滅邊]을 현관하여 이 지를 얻기 때문에 현관변이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모든 유가사(瑜伽師)가 성스러운 진리[聖諦]를 관할 때에 곁[傍]에서 닦아 얻기 때문에 현관변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이 지는 현관에 가깝기[近] 때문에 현관변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마을에 가까이 있는 물건을 촌변(村邊)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이 현관변에서 닦는 세속의 착한 법은 4온(蘊)5) 또는 5온을 자성으로 삼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세속지(世俗智)라고만 말하는가?
[답] 지(智)가 더하기[增] 때문에 지라고 한다. 마치 견도(見道)는 5온을 자성으로 삼으면서도 견(見)이 더하기 때문에 견이라 하고 금강유정은 4온 또는 5온을 자성으로 삼으면서도 정(定)이 더하기 때문에 정이라 하며 사종통행(四種通行)은 4온 또는 5온을 자성으로 삼으면서도 통(通)이 더하기 때문
4) 모든 진리의 초지라 함은 예를 들면 고법지(苦法智)ㆍ집법지(集法智)라고 한 것과 같은 사제 하의 처음의 지혜이다.
5) 4온 또는 5온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함은 욕계의 경우에는 색온(色蘊)을 제외한 다른 4온(욕계의 색온에는 智의 권속이라는 뜻이 없다.)이며 색계수(色界修)의 경우에는 정구(定俱)의 무표색(無表色)도 지의 권속이 되므로 5온 전체를 그 지의 자성(自性), 즉 조성(組成) 요소로 삼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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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통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고(苦)의 현관변 중 욕계의 세속지와 색계의 세속지는 어떤 것이 더 수승한가?
[답] 색계의 것이 더 뛰어난 것이니 세계[界]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집(集)ㆍ멸(滅)의 현관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집의 현관변의 욕계의 세속지와 고의 현관변의 색계의 세속지는 어느 것이 더 뛰어난가?
[답] 욕계의 것은 소의(所依)가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고 색계의 것은 세계가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니 멸로써 고ㆍ집을 묻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문] 고의 현관변의 욕계 세속지와 집의 현관변의 색계 세속지는 어느 것이 더 뛰어난가?
[답] 색계는 두 가지 일이 다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니 첫째는 세계가 뛰어나고, 둘째는 소의가 뛰어나서이다. 고로써 멸을 묻거나 집으로써 멸을 묻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문] 고의 현관변의 욕계 세속지와 집의 현관변의 욕계 세속지는 어느 것이 더 뛰어난가?
[답] 집의 현관변이 더 뛰어난 것이니 소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고로써 멸을 묻거나 집으로써 멸을 묻는 것에서도 그러하다. 욕계처럼 색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문] 무엇 때문에 현관변의 세속지는 법지(法智) 때에는 닦지 않는가?
[답] 법지는 그것에 대하여 밭[田]도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이 지는 현관변에서 닦기 때문에 현관변[邊]의 세속지라 하는 것이요, 만일 법지 때에도 닦는다 하면 현관중[中]의 세속지라 해야 하고 현관변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또 먼저 “이 지는 유정(有頂)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초월한다”라고 말하였다. 법지 때에는 유정의 견도에서 끊을 것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를 닦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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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낱낱의 진리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가행(加行)을 쉬었을 때에 이 지를 닦게 되는 것이요 법지에 머무를 때는 할 일이 많이 있고 가행도 아직 쉬지 못한 것이니 법지 때에는 비록 욕계의 고(苦)를 안다 하더라도 아직 색계ㆍ무색계의 고는 알지 못하고 비록 욕계의 집(集)을 끊었다 해도 아직 색계ㆍ무색계의 집은 끊지 못했으며 비록 욕계의 멸(滅)을 증득했다 해도 아직 색계ㆍ무색계의 멸을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지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낱낱의 진리에 대하여 현관을 끝마치고 견(見)을 끊어 이 끊을 것이 다했을 때에 이 지를 닦게 되는 것이요 법지에 머무를 때는 이런 일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닦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도류지(道類智)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가?
[답] 도류지는 이것에 대하여 밭[田]도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이 지6)는 견도(見道)의 권속이어서 견도에 매여 달린 것이지만 도류지는 수도(修道)이기 때문에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이 지는 향도[向道]의 권속이어서 향도에 매여달린 것이지만 도류지는 과의 도[果道]이기 때문에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이 지는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이 상속(相續)하는 동안에 닦는 것이지만 도류지 때에는 신승해(信勝解)와 견지(見至)의 상속 동안이라 하기 때문에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이 지를 현관변이라 함은 세 가지 진리[三諦]에 대하여 변(邊)7)이라는 말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 지를 닦는 것이니 마치 ‘살가야(薩迦耶)의 고의 변[苦邊]이요, 살가야의 집의 변[集邊]이며, 살가야의 멸의 변[滅邊]이다’라
6) 4제(諦) 16심(心) 중에서 앞의 15는 견도(見道)요 제16의 도류지(道類智)는 수도(修道)이다. 앞의 15심은 초과(初果)의 향(向)이요 제16심은 초과이다.
7) 변이라 함은 끝[邊際] 또는 마지막[終極]이라는 뜻이므로 앞의 세 가지 진리에 한하여 적용되는 것이요, 제4제(諦)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유아(有我)의 마지막이요 유아의 인(因)의 마지막이며 유아의 멸(滅)의 마지막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도 “유아의 도(道)의 마지막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대개 도는 무한한 것이므로 비록 부처님이라 해도 그 맨 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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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면서도 ‘살가야의 도의 변[道邊]이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도류지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일으키는구료.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진리에서는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은 있으면서 도제(道諦)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답] 그것은 온갖 고를 알고 온갖 집을 끊으며 온갖 멸을 증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온갖 도를 닦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도에 있어서는 얻어 익히고[得習] 닦아 익히는[修習] 데에 모두 다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은 없다.
또 만일 진리[諦]로서 유루ㆍ무루의 도와 함께하면서 할 일이 있는 것이면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은 있지만 도제는 오직 무루도와 함께하면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은 없다.
유루ㆍ무루의 도처럼 세간(世間)ㆍ출세간의 도[出世間道]와 유미(有味)ㆍ무미의 도[無味道]와 탐기의(耽嗜依)ㆍ출리의의 도[出離依道]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고제(苦諦)는 존재[有]요 존재하는 과[有果]이므로 그것에 대하여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이 있다. 고제ㆍ집제는 존재요 존재하는 과이지만 멸제는 비록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존재하는 과요 도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과도 아니기 때문에 변이라는 말로 전개되는 것이 없다. 도제에서는 변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도류지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알 수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세속의 도[世俗道]는 세 가지 진리에 대하여 일찍이 할 일이 있어 ‘나는 이것이 도(道)이다’라고 여겼지만 이제 도류지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진실한 도[眞道]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곧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닦지 않는다. 마치 촌읍(村邑)에서 만일 아직 우두머리를 세우지 못했을 때에는 스스로 존귀한 척하는 어떤 이가 자칭 우두머리라고 하다가 뒤에 우두머리를 세웠을 때에는 그 자칭 존귀한 척한 이는
부끄러워 도망가 버리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현관변의 세속지는 존재요 존재하는 과(果)이며 고제와 집제도 존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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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과이며 멸제는 비록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존재하는 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볼 때에는 세속지를 닦지만 도제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는 과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볼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고제ㆍ집제에는 끝없는 과환(過患)이 있고 멸제에는 끝없이 뛰어난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볼 때에는 세속의 도를 닦지만 도제에는 끝없는 과한도 없고 또한 끝없이 뛰어난 이익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볼 때에는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끝없는 예부터 세속지는 세 가지 진리에 대하여 이미 공능(功能)이 있으니 끊어 없애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고 구경(究竟)이 아닌 것은 유정(有頂)에 대하여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세 가지 진리에 대하여 현관을 얻을 때에는 구경이 되기 때문에 그는 곧 기뻐하는 것이 마치 여욕법(與欲法)에서와 같이 일어나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닦지만 끝없는 예부터 도에 이르는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에서는 아직 공능이 있지 않으니 아직
닦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도를 보았을 때에 이 지를 닦지 않는다.
또 고ㆍ집ㆍ멸에 대하여 현관을 얻을 때에는 아직 참된 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지는 오히려 스스로 도(道)라고 여겨 이 때문에 닦지만 도에 이르는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현관을 얻을 때에는 참된 도를 보기 때문에 이 세속지는 스스로가 도가 아닌 것을 알므로 다시는 닦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까마귀[烏]와 공작(孔雀)8)에 대한 비유’를 말해야 한다.
또 세 가지 진리를 볼 때에는 여전히 도를 비방하는 사견[諦道邪見]을 영원히 끊지 못하고 도가 아닌 것[非道]을 도라고 여기는 계금취(戒禁取)를 영원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세속지는 오히려 스스로가 도라고 일컬으면서 이 때문에 닦지만 도제를 보고 나면 그것은 모두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에 다시는 이 세속지를 닦지 않는다.
[문] 도류지(道類智)를 얻을 때에는 견도(見道)를 버리는 것처럼 이 현관변
8) 까마귀와 공작에 대한 비유라 함은 비유담(比喩譚)에 있는 것으로 까마귀가 공작의 흉내를 내면서 거들먹거리다가 진짜 공작이 나타나자 부끄러워하면서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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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세속지도 버리는가?
[답]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루와 무루의 도에서는 버리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루의 도는 세 가지 연[三緣] 때문에 버리는 것이니 첫째는 물러나기 때문이요, 둘째는 과를 얻기[得果] 때문이며, 셋째는 연근(練根) 때문이다. 유루의 도에는 네 가지 연[四緣] 때문에 버리는 것이니 첫째는 물러나기 때문이요, 둘째는 계(界)ㆍ지(地)를 초월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선근을 끊기[斷善根] 때문이요, 넷째는 중동분(衆同分)을 버리기 때문이다. 도류
지 때에는 버리는 것에서 유루의 네 가지 연이 모두 없기 때문에 그때에는 이 지를 버리지 않는다.
또 도류지와 견도는 현행(現行)이나 성취(成就)에서 다 같이 서로가 어긋나기 때문에 그때에는 곧 버리지만 현관변의 세속지와는 비록 현행에서는 서로가 어긋난다 하더라도 성취에서는 서로가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그때에는 버리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수도(修道) 가운데서는 이 지가 앞에 나타나지 않는가?
[답] 이 현관변의 세속지는 견도(見道)의 권속이어서 견도에 매여 있기 때문에 수도에서는 반드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 지는 향도(向道)의 권속이어서 향도에 매여 있지만 수도에는 과(果)를 띠기 때문에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 지는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의 상속에 의지하지만 수도 가운데서는 이런 상속이 없기 때문에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 지는 수도와는 비록 성취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행은 서로가 어긋나므로 이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또 이 지와 견도는 소연(所緣)도 행상(行相)도 똑같아서 극히 서로가 유사하기 때문에 수도위에서는 반드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현관변의 세속지를 세계[界]로 말하면 오직 욕계와 색계일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지가 무색계는 아닌가?
[답] 무색계는 이 지에 대하여 밭[田]도 아니고 그릇[器]도 아니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만일 그 세계에 견도가 있다면 그 세계에 이 지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견도가 없기 때문에 이 지도 없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일으키는구료. 무엇 때문에 무색계에는 견도가 없는가?
[답] 무색계는 견도에 대하여 밭도 아니고 그릇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만일 세계에 온갖 법을 반연하는 비아(非我)의 행상이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 비아의 행상이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행제(行諦)9)의 선근이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에는 행제의 선근이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순결택분(順決擇分)이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에는 순결택분이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인(忍)이 있고 지(智)가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지는 있어도 인은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법지(法智)와 유지(類智)가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비록 유지는 있더라도 법지는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지(止)와 관(觀)이 평등하거나 혹은 관이 치우치게 더하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지가 더하고 관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견도가 없다.
또 만일 세계에 변연지(遍緣智)10)가 있다면 그 세계에는 견도가 있겠지만 무색계 안에는 변연지가 없기 때문에 견도가 없으며 견도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는 닦을 세속지도 없다.
또 이 지가 설령 무색계에 있다 해도 닦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곧 소용이 없
9) 행제의 선근이라 함은 4제(諦)를 16행상(行相)으로 나누어 관찰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10) 변연지라 함은 온갖 법을 반연하여 비아(非我)의 행상을 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무색계에는 색법이 없고 또한 관(觀)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변연지는 없다. 이것을 10지(智)의 입장에서 보면 온갖 것을 반연하는 지혜는 세속지(世俗智)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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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때문에 그것이 없는 것이니 이 지를 닦는 것은 반드시 견도에 의거하고 견도는 오직 제 것과 하지(下地)는 닦을 수 있으되 상지(上地)는 닦을 수 없으므로 그것이 설령 있다 해도 닦을 수 없다.
또 무색계에는 견도의 인(因) 가운데서 응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없으므로 곧 이 지의 인도 없다.
지(地)로 말하면 이 지는 7지(地) 중에 있다. 욕계(欲界)와 미지(未至)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근본(根本)의 4정려(靜慮)이다.
만일 미지정에 의하여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면 그것의 1지(地)의 견도와 2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으며 만일 초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의 2지의 견도와 3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다.
만일 정려중간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의 3지의 견도와 4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으며 만일 제2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의 4지의 견도와 5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다.
만일 제3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의 5지의 견도와 6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으며 만일 제4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면 그것의 6지의 견도와 7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를 닦는다.
소의(所依)로 말하면 이 지(智)는 욕계의 몸에 의지하며 색계와 무색계의 몸에 의지하지 않는다.
[문] 이 지는 이생(異生)의 몸에 의지하는 것인가? 성자(聖者)의 몸에 의지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느냐 하면, 만일 이생의 몸에 의지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생의 법[異生法]이라 하지 않는가? 만일 성자 몸에 의지한다면 무엇 때문에 성자에게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 지는 이생의 몸에도 의지하지 않고 성자의 몸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도무지 소의가 없다”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것을 선근(善根)이라 하기에 소의가 없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성자의 몸에 의지한다”고 말해야 하니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의 몸에 의지하면서 닦아 얻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앞에 나타나 있지 않는가?
[답] 이 지는 견도와는 현행(現行)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니 견도위(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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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를 지나서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견도위 가운데서 견도가 잠깐 동안이라도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지는 곧 일어나겠지만 견도는 찰나 동안도 끊어진다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 지는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
[문] 만일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것이 수신행ㆍ수법행의 몸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 그 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견도의 소의요, 둘째는 현관변의 세속지의 소의이다. 견도는 견도의 소의의 몸에서는 얻으면서 또한 몸에도 있고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 나타나 있지만 현관변의 세속지는 그것의 몸에서는 얻으면서도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관변의 세속지는 현관변의 세속지의 소의의 몸에서는 얻으면서 또한 몸에도 있고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도 나타나지만 견도는 그것의 몸에서는 얻으면서도 몸에 있지 않고 성취하면서도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견도위에서 이 세속지의 소의의 몸이 앞에 나타나 있다 하면 이 지는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 나타나 있고 견도는 오직 미래에서만 성취할 뿐이다. 그러나 견도위에서는 반드시 견도의 소의의 몸을 일으키기 때문에 견도는 성취하면서 또한 앞에 나타나 있으며 이 지는 오직 미래에서만 성취할 뿐이다. 만일 견도위에서 견도의 소의의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견도에는 성스러운 진리[聖諦]를 본다는 뜻이 없고 곧 성자가 아닐 것이니 이 때문에 반드시 견도의 소
의의 몸을 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몸은 비택멸(非擇滅)을 얻으며 이 때문에 이 지는 마침내 일어나지 않는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이 지는 통틀어 12행상이 있다. 고(苦)의 현관변에서 닦게 된 이는 고의 4행상을 짓고 집(集)의 현관변에서 닦게 된 이는 집의 4행상을 지으며 멸(滅)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멸의 4행상을 짓는다.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이 지는 삼계(三界)의 세 가지 진리[三諦]를 반연한다. 고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삼계의 고제(苦諦)를 반연하고 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삼계의 집제(集諦)를 반연하며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삼계의 멸제(滅諦)를 반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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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것은 전체[總]를 반연하는 것인가, 따로따로[別] 반연하는 것인가?
[답] 따로따로 반연한다. 욕계의 사람은 응한 것에 따라 욕계의 세 가지 진리를 반연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사람은 응한 것에 따라 색계와 무색계의 세 가지 진리를 반연한다.
어떤 이는 “전체를 반연하는 것이니 욕계의 사람은 응한 것에 따라 삼계의 세 가지 진리를 반연하고 색계의 사람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評] 앞에서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다. 마치 무루지(無漏智)의 법분(法分)11)과 유분(類分)은 저마다 따로따로 반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염주(念住)로 말하면 이 지의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4념주에 모두 통하고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오직 법념주(法念住)12)일 뿐이다.
지(智)로 말하면 이 지는 오직 세속지일 뿐이요, 정(定)으로 말하면 이 지는 정과는 함께하지 않으며,13) 근(根)과 상응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 지는 통틀어 세 가지 근과 상응하는 것이니 낙근(樂根)과 희근(喜根)과 사근(捨根)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로 말하면 이 지는 오직 미래일 뿐이어서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3세(世)를 반연하고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이세(離世)를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이 지는 오직 선일 뿐이어서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가운데 욕계의 사람은 세 가지를 반연하고 색계의 사람은 선과 무기를 반연하며,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오직 선만을 반연한다.
삼계의 계(繫)ㆍ불계(不繫)로 말하면 이 지는 욕계계와 색계계이어서 고
11) 법분이란 법지인(法智忍)과 법지(法智)를 말하며 유분이란 마찬가지로 그의 인(忍)과 지(智)를 가리킨다.
12) 고제ㆍ집제의 두 가지 진리에는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네 가지를 다 갖추지만 멸제(滅諦)에는 신ㆍ수ㆍ심의 세 가지는 없기 때문에 다만 법념주일 뿐이다.
13) 정과는 함께하지 않는다고 함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어느 것과도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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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된 이 중에 욕계의 사람은 욕계계를 반연하고 색계의 사람은 색계계ㆍ무색계계를 반연하며,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불계를 반연한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이 지는 비학비무학이어서 비학비무학을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과 끊을 것이 아닌 것[不斷]으로 말하면 이 지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어서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것을 반연하고,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끊을 것이 아닌 것을 반연한다.
이름[名]을 반연하고 뜻[義]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 지를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이름과 뜻을 다 반연하고,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오직 뜻만을 반연한다.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 지를 고ㆍ집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자상속ㆍ타상속을 반연하고, 멸의 현관변에서 닦게 되는 이는 비상속을 반연한다.
가행득(加行得)ㆍ이염득(離染得)ㆍ생득(生得)으로 말하면 이 지는 오직 가행득일 뿐이다.
문소성(聞所成)ㆍ사소성(思所成)ㆍ수소성(修所成)으로 말하면 이 지로서 욕계의 사람은 사소성이어서 문소성이 아님은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수소성이 아님은 선정[定]이 아니기 때문이며, 색계의 사람은 수소성이어서 문소성이 아님은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사소성이 아님은 그것에는 사혜(思慧)가 없기 때문이니 그것이 만일 사(思)일 때에는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
의지(意地)에 있는가 5식(識)에 있는가에 대해 말하면 이 지는 의지에 있고 5식에 있는 것이 아니니 5식 중에는 가행선(加行善)이 없기 때문이다.
[문] 이 지는 이숙(異熟)이 있는 것인가, 이숙이 없는 것인가?
[답] 이숙이 있다. 선(善)의 유루이기 때문이다.
[문] 이 지는 어느 곳에서 이숙과(異熟果)를 받는가?
[답] 욕계의 사람은 욕계에서, 색계의 사람은 색계에서, 초정려의 사람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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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에서, 나아가 제4 정려의 사람은 제4 정려에서이다.
[문] 성문의 사람이 그러할 수 있음은 그는 색계의 상속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독각은 어떻게 그러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과 독각은 색계의 상속이 있으면서 이 이숙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 그 종성(種性)의 보특가라도 일찍이 색계의 온(蘊)ㆍ계(界)ㆍ처(處)의 상속이 있었고 거기서 차츰차츰 이 이숙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성자(聖者)의 상속 중에 성취한 인(因)이 이생(異生)의 상속 중의 과(果)를 얻는가?
[답] 이와 같은 뜻으로 인과(因果)를 인정한다 해도 허물은 없다. 마치 업온(業蘊)에서 “만일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번뇌[結]의 두 가지 계박을 갖춘 이는 악취(惡趣)에 가야 하며 모든 예류자(預流者)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번뇌의 계박이 있을 뿐이요 견도에서 끊을 번뇌의 계박은 없기 때문에 악취에 가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악취에는 두 가지 인(因)이 있다. 첫째는 견도에서 끊을 번뇌이요, 둘째는 수도에서 끊을 번뇌이다. 모든 예류자가 성취한 수도에서 끊을 번뇌는 이미 악취의 인이거늘 어찌 성자의 상속 동안에 성취한 인이 이생의 상속 동안의 과를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것도 허물이 없다. 여기서는 생기지 않는 인과[不生因果]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되 만일 생길 수 있는 것이면 이러한 일이 없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과 독각도 성문과 같이 색계의 온ㆍ계ㆍ처의 상속이 있어서 거기에서 차츰차츰 이 지(智)의 이숙과를 받는다”라고 말한다.
[評] 그들은 다 같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현관변의 세속지는 유루(有漏)요 유기(有記)이기 때문에 이숙이 있다고 말하지만 일찍이 받았거나 장차 받을 것이라는 뜻이 없기 때문에 이숙의 몸을 받는다고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혹시 두 성자(聖者)가 같이 하나의 지[一地]에 나서 현관변의 세속지에 대하여 한 분은 성취하고 한 분은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한 분은 초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고 한 분은 제2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다가 그들이 목숨을 마친 뒤에 다 같이 제2 정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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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을 적에 초정려에 의했던 이는 이 지(智)를 성취하지 못하니 지(地)를 초월할 때에 버렸기 때문이며 제2 정려에 의했던 이는 이 지를 성취하니 자기 지[自地]에 날 적에는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 혹시 두 아라한이 같이 하나의 지[一地]에 있으면서 현관변의 세속지에 대하여 한 분은 성취하고 한 분은 성취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그들은 먼저 한 분은 초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고 한 분은 제2 정려에 의하여 정성이생에 들었다가 그들은 목숨을 마친 뒤에 다 같이 제2 정려에 날 중유(中有) 중에 머무르면서 아라한의 과를 얻었다면 초정려에 의했던 이는 이 지를 성취하지 못하니 지(地)를 초월하면서 버렸기 때문이며 제2 정려에 의했던 이는 이 지를 성취하니 자기 지에 날 적에는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 성문과 독각과 여래는 진지(盡智)를 얻을 때에 모두가 삼계(三界) 9지(地)의 선근을 닦는데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여래께서 얻은 욕계의 선근만을 말하면서 그 밖의 다른 이는 말하지 않는가?14)
[답] 비록 실은 모두가 얻는다 해도 여기에서는 욕계 증상(增上)의 선근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2승(乘)과 다른 지(地)에서 얻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문] 모든 아라한은 진지를 얻을 때에 모두 삼계 9지의 선근을 닦는가?
[답] 이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만일 욕계에서 나서 진지를 얻을 때에는 미래의 삼계 9지를 닦지만 초정려에 나서 진지를 얻을 때에는 미래의 이계 8지만을 닦는 것이니 위[上]에 나면 아래[下]의 유루는 닦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비상비비상처에 나서 진지를 얻을 때에는 미래의 일계 1지를 닦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선근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하나 실은 4온(蘊)과 5온을 다 닦는다.
[문] 이와 같이 닦는 것은 가행득(加行得)인가, 이염득(離染得)인가, 생득(生得)인가?
[답] 이염득이면서 가행득이니 유정의 염[有頂染]을 여읠 때에 얻기 때문이
14) 앞에서와 같이 특히 진지일 때에 얻는 모든 선근을 일반론의 형식에서 기술하는 문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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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성문이나 독각도 가행이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생득만은 아니니 그것은 수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여기서 닦는 것은 문소성(聞所成)인가, 사소성(思所成)인가, 수소성(修所成)인가?
[답] 세 가지가 모두 있다. 욕계는 문소성ㆍ사소성이요, 색계는 문소성ㆍ수소성이며, 무색계는 오직 수소성일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현관변의 세속지는 문소성이 아닌데 진지일 때 닦는 선근은 문소성이 있는가?
[답] 그것은 견도(見道)의 권속이어서 한결같이 맹렬하고 날카로우면서 속질의 도[速疾道]로 닦을 것이기 때문에 문소성이 아니지만 이것은 진지의 권속이어서 진지는 구하는 것을 쉬고 더딘 것을 용납하는 도[容豫道]이기 때문에 모든 가행선(加行善)을 다 같이 닦는다.
[문] 이와 같은 선근은 의지(意地)에 있는 것인가, 5식(識)에 있는 것인가?
[답] 오직 의지에만 있다. 5식 중에는 가행선은 없고 비록 생득선(生得善)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닦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의지에 있을 뿐이다.
[문] 만일 이 선근이 오직 의지에만 있다면 『시설론(施設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아라한이 진지를 얻은 뒤에는 6항주법(恒住法)15)이 있는가, 없는가? 만일 있다면 어떤 것이 있으며, 만일 없다면 어떤 것이 없는가? 가령 있다 한다면 몇 가지가 과거의 성취이고, 몇 가지가 미래의 성취이며, 몇 가지가 현재의 성취인가? 있다. 아라한은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도 기뻐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마음이 한
결같이 사(捨)에 머무르면서 염(念)과 정지(正知)를 갖추는 것이며 나아가 뜻으로 법을 안 뒤에도 기뻐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마음이 한결같이 사에 머무르면서 염과 정지를 갖추는 것이다.
15) 6항주법이라 함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6경(境)에서 기뻐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면서 항상 정념(正念) 정지(正知)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문제의 소재(所在)는 만일 위의 선근이 의지에만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시설론』에서는 “전 5식(識)에 관한 것도 포함시켜 진지 뒤의 6선근으로 하는가?”라고 하는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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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라한이 진지를 얻은 뒤에 만일 맨 처음에 선(善)의 안식(眼識)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16) 과거의 1과 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한다. 이것이 멸한 뒤에도 버리지 않으면서 만일 선의 이식(耳識)을 일으켜 앞서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의 2와 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한다. 이것이 멸한 뒤에도 버리지 않으면서 나아가 만일 선의 의식(意識)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ㆍ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만일 맨 처음에 선의 안식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는 없고 미래의 6과 현재의 1만을 성취하며 이것이 멸한 뒤에도 버리지 않으면서 만일 선의 이식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의 1과 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하며 이것이 멸한 뒤에도 버리지 않으면서 나아가 만일 다시 선의 의식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의 5와 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하며 이것이 멸한 뒤에도 버리지 않
으면서 만일 다시 선의 의식이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식(識)을 일으켜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그것은 과거ㆍ미래의 6과 현재의 1을 성취한다고”라고 하는데 이와 같이 말한 것들을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답] 이것은 번뇌가 다한 청정한 몸 안에서 일으키고 소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끝없이 나고 죽고 하면서부터 일으키고 소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것은 진지 때에 닦아야 할 선근이 아니므로 서로 어긋나는 허물은 없다.
또 어떤 이는 “6항주법도 의지(意地)일 뿐이니 눈은 빛깔을 본 뒤에 나아가 뜻은 법을 안 뒤에 기뻐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한결같이 사(捨)에 머무르면서 염과 정지를 갖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선의 안식 등이 앞에 나타나 있을 적
16) 과거의 1은 선(善)의 안식(眼識)을 가리키고 현재의 1도 그러하며 미래의 6이란 6식 전체를 가리킨다. 미래의 6을 성취하는 까닭은 현재에 선의 안식을 일으킬 때에는 벌써 이 안에서는 여섯 가지 선한 식(識)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과거를 성취한다고 하는 까닭은 엄격하게 말하면 현재는 한 찰나 동안이라 상식적으로 현재의 선근이라고 말할 때에는 벌써 과거로 사라져 가버린 것도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 기초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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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현재의 1을 성취한다고 말하는가?
[답] 이것은 항주(恒住)의 가행(加行)이지만 항주의 체(體)는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문] 6항주법은 무엇으로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염(念)과 혜(慧)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하면 계경에서 “모든 아라한은 마음이 잘 해탈하여 6항주를 갖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6항주라 하는가 하면 눈이 빛깔을 본 뒤에 나아가 뜻이 법을 본 뒤에 기뻐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한결같이 사(捨)에 머무르면서 염과 정지를 갖추는 것이다. 만일 겸하여 상응(相應)과 구유(俱有)를 취하면 4온(蘊)ㆍ5온으로 자성을 삼는다.
자성을 설명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설명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항주(恒住)라 하며 항주란 무슨 뜻인가?
[답] 모든 아라한은 한결같이[恒] 이것에 머무르면서[住] 일찍이 버리거나 여읜 일이 없기 때문에 항주라고 한다.
[문] 온갖 아라한에게는 모두 이 6항주법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온갖 아라한에게 모두 이 여섯 가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불시해탈(不時解脫)로서 이미 맨 끝의 제4 정려와 원지(願智)를 얻은 이만이 비로소 이 여섯 가지가 있게 된다”라고 말한다.
[評] “온갖 아라한에게는 모두 이 여섯 가지가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아는가 하면 이 6항주는 모두 번뇌가 다한 청정한 몸 안의 염(念)과 혜(慧)를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모든 아라한에게는 이 염과 혜를 성취하지 못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문] 이 6항주는 어느 세계의 지(地)에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 여섯 가지는 욕계와 색계의 2지(地)에 있을 뿐이니 욕계와 초정려이다. 의지(意地)17)에서도 선(善)의 안식 등과 함께 서로 들고 나기
17) 2선(禪) 이상에서는 5식(識)이 모두 없으므로 전 5식과 관계가 있는 이 6항주법(恒住法)은 초선 이하만의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상지(上地)에는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5지(地)에 있으니 욕계와 네 가지 정려[四靜慮]이다. 5지의 의식(意識)은 모두 눈 등의 식(識)과 서로 들고 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통틀어 삼계(三界)의 11지(地)에 있다. 욕계와 미지(未至)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4정려(靜慮)와 4무색(無色)이니 의식의 염과 혜가 모든 지에 두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 6항주법에는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있는가?
[답] 있다. 여래의 것은 상이요, 독각의 것은 중이며, 성문의 것은 하이다.
또 부동법종성(不動法種性)의 것은 상이요, 퇴법종성(退法種性)의 것은 하이며 그 밖의 나머지 4종성의 것은 중이다.
[문] 성문과 독각도 6항주법을 성취하는데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염주[三種念住]18)는 부처님의 불공법(不共法)이라고 말하는가?
[답] 부처님께서 항상 대중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널리 연설하실 적에 이것으로 중생을 거느리시므로 이쪽에 치우쳐 말하지만 성문이나 독각에게는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성문이나 독각에게 비록 일부분은 있다 해도 구경(究竟)이 아니기 때문에 건립하지 않는다.
또 성문과 독각은 비록 탐(貪)ㆍ에(恚)를 끊었다 해도 남아 있는 습기[餘習]가 있기 때문에 만일 도중(徒衆)으로서 거역하거나 순종하는[違順] 일이 있을 때에는 곧 유사한 탐ㆍ에ㆍ우(憂)ㆍ희(喜)를 내기 때문에 세 가지 염주가 있다는 것을 건립하지 않는다.
또 6항주법과 세 가지 염주는 그 건립하는 데에 차이가 있다. 세 가지 염주는 대중[衆]에 의거하여 건립하지만 6항주법은 경계[境]에 의거하여 건립한다. 경계에 대하여 근심이나 기쁨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쉽지만 대중에 대해서는 어렵기 때문에 성문 등에게 6항주는 있어도 세 가지 염주는 없다.
18) 세 가지 염주라 함은 예(例)의 신(信)ㆍ불신(不信)과 신불신에 대하여 사념(捨念)에 머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이 점은 6항주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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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진지를 얻을 때에는 단번에 미래 삼계(三界)의 선근을 닦으면서도 그 밖의 다른 때에는 그렇지 못하는가?
[답] 그때에는 삼계의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면서 다시는 할 일이 없고 오직 세속의 선정[定]의 마음에 들고 나면서 모든 선정만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때에는 삼계의 선근을 닦게 된다.
또 이때에는 옛날 아직 버리지 못했던 번뇌의 무더기를 영원히 버리기 때문이요 맨 처음으로 옛날에는 얻지 못했던 모든 공덕 무더기를 얻기 때문에 단번에 삼계의 선근을 닦게 된다.
또 이때에는 마음에 자재한 왕위(王位)를 얻어서 머리에는 해탈한 길상(吉祥)의 백련(白練)을 매게 되면서 삼계의 연근(練根)이 모두 와서 조공(朝貢)하는 것은 마치 왕위에 올라 머리에 백련을 맬 때에 온갖 국토에서 모두 와서 조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이때에는 옛날 아직 깨뜨리지 못했던 번뇌의 원수를 깨뜨려 삼계의 선근들이 모두 와서 영접하고 경하하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적국의 원수를 깨뜨리고 나서 귀국할 때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와 영접하고 경하하는 것과 같다.
또 이때에는 옛날 아직 굴복시키지 못했던 번뇌의 역사(力士)를 굴복시켜 삼계의 선근이 모두 함께 경하하고 찬탄하는 것은 마치 대중 가운데서 아직 일찍이 항복시키지 못했던 대역사를 항복시킬 때에 대중들이 다 함께 경하하고 찬탄하는 것과 같다.
또 이때에는 해탈이 마침내 원만해지기 때문에 곁들여 삼계의 선근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견도로부터 점차로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해탈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고 다만 일부분만 응한 것에 따라 닦았을 뿐이나 진지를 얻었을 때에는 해탈이 원만해진 까닭에 곁들여 삼계의 선근을 닦아 익히는 것이 마치 사람이 물을 끌어서 밭에다 댈 때에 한 두둑이 다 차고 나면 다시 한 두둑으로 들어가며 나아가 모든 두둑까지 모두 다 찬 뒤에는 그 물이 세차게 넘치
면서 그 밖의 다른 데로 두루 흐르는 것과 같다.
또 이때에 능히 계박하는[能縛] 번뇌가 다하는 까닭에 삼계의 선근이 모두 해탈하게 되면서 그 세력과 작용이 왕성해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단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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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게 된다. 끝없는 예부터 삼계의 착한 법은 한결같이 번뇌에 계박되어 자재를 얻지 못하고 세력과 작용이 없었던 것이니 이 때문에 구족하게 닦아 익히지 못했었다.
만일 수행하는 이가 욕염(欲染)을 여읜 때에는 조금은 해탈하게 되지만 그 밖의 남아있는 계박은 오히려 많으며 나아가 만일 유정(有頂)의 8품(品) 번뇌의 계박을 여읠 때에는 비록 해탈이 많다 해도 오히려 조금의 계박은 있지만 유정의 제9품을 여읠 때에는 삼계 선근의 모든 계박이 모두 끊어져서 자재하게 되기 때문에 온갖 모두를 단번에 닦는다. 마치 비단 따위를 아홉 매듭으로 똑같이 묶었을 적에 만일 한두 매듭이 끊어지고 이에 여덟 매듭까지 끊어져
도 그 잡아맨 묶음은 풀리지 않다가 아홉 번째를 끊었을 때에야 그 묶음은 비로소 풀리며 흩어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끝없는 예부터 삼계에 착한 법은 모두 함께 유정의 번뇌를 싫어하면서 비록 많은 방편을 썼다고 해도 아직 끊지 못하다가 이제야 끊고 다하게 된 것이니 이 때문에 단번에 닦게 된다.
또 금강유정의 세력은 더욱 맹렬해져 온갖 번뇌가 모두 영원히 끊어지며 이끈 진지(盡智)도 온갖 해탈을 온통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지위에서는 삼계의 선근을 통틀어 닦아 익힌다.
시해탈(時解脫)의 아라한은 진지를 얻었을 때에 2지(智)의 30행상을 닦게 되는 것이니 진지에서 공(空)과 비아(非我)를 제외한 14행상과 무학의 정견지(正見智)19)의 16행상이다.
만일 4정려와 미지(未至)와 중간(中間)이면 낱낱이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에서 각각 30행상을 갖추어 닦게 되며 만일 3무색(無色)에서면 오직 유지의 30행상만을 닦는다.
불시해탈(不時解脫)의 아라한은 진지를 얻었을 때에 3지(智)의 44행상을
19) 무학의 정견지라 함은 10지(智) 중에서 타심지(他心智)와 속지(俗智)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의 네 가지를 제외한 이후의 법지(法智)ㆍ유지(類智)와 그리고 고지ㆍ집지ㆍ멸지ㆍ도지 중의 오히려 추탁(推度)하는 성품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부동성(不動性) 이외의 다른 아라한에는 진지의 다음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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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는 것이니 진지와 무생지(無生智)에서 각각 14행상과 무학의 정견지의 16행상이다.
만일 4정려와 미지와 중간이면 낱낱이 법지와 유지에서 각각 44행상을 갖추어 닦게 되며 만일 3무색에서면 오직 유지 44행상만을 닦을 뿐이니 이것을 무루의 선근[無漏善根]을 닦아 익힌다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7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5) 무참괴납식 ④
[論] 모든 마음은 과거(過去)이면 그 마음은 변괴(變壞)한 것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는[實有] 체(體)가 아니며 현재는 무위(無爲)이다”라고 집착하는데 그는 3세(世)에 대하여 어리석고 미혹해서 분명히 알지 못하여 이러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런 이의 집착을 막고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며 현재는 유위법(有爲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외도는 “유위법이 세간에서 행할 때에 물질의 성품[物性]은 서로가 숨는다[相隱]”라고 집착하고 어떤 외도는 “유위법이 세간에서 행할 때에 물질의 성품은 서로가 변한다[相變]”라고 집착하며 어떤 외도는 “유위법이 세간에서 행할 때에 물질의 성품은 서로가 간다[相往]”라고 집착하는데 그런
1) 마음의 변괴란 통틀어 말하면 마음이 변천하면서 동요한 것이라 할 것이요, 따로따로 말하면 이것을 세상의 변괴[世變壞]와 이치의 변괴[理變壞]로 나누게 된다. 세상의 변괴란 3세(世)에 의하여 변이(變移)하는 것을 말하고 이치의 변괴란 번뇌에 의하여 마음이 비리(非理)의 방향으로 동전(動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변괴로 인하여 마음이 변동하는 형상을 밝히려고 하는 문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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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집착을 막고 유위의 법은 앞에서는 소멸하고 뒤에서는 생긴다[前滅後生]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변괴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상의 변괴[世變壞]요, 둘째는 이치의 변괴[理變壞]이다. 세상의 변괴라 함은 과거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니 현재가 변하고 파괴된 것은 과거라 하기 때문이다. 이치의 변괴라 함은 염오법(染汚法)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염오의 법은 이치를 어기기 때문이다.
과거 염오의 마음은 두 가지 변괴를 모두 갖추고 염오되지 않은[不染汚] 마음은 오직 세간의 변괴일 뿐이며 미래ㆍ현재의 염오의 마음은 오직 이치의 변괴일 뿐이고 그 염오되지 않은 마음은 변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이곳에서 약비바사(略毘婆沙)라고 한다.
[論] 모든 마음은 과거이면 그 마음은 변괴한 것인가?
[答] 모든 마음은 과거이면 그 마음은 모두 변괴한 것이다.
염오의 마음은 두 가지 변괴를 모두 갖추기 때문에 변괴하는 마음[變壞心]이라 하고 염오되지 않은 마음은 오직 세간의 변괴 때문에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論] 마음이 변괴한 것이면서 그 마음은 과거가 아닌 것이 있으니 미래와 현재의 탐(貪)ㆍ에(恚)와 상응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다만 이치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한 마음이라 하는 것이니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한다.
[論]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너희 비구들이여, 설령 원적(怨賊)이 너희의 몸이나 모든 팔다리를 톱으로 썬다 해도 너희들은 그것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거나 파괴되지 말라. 또한 입을 수호하여 나쁜 말[惡言]도 내지 말라. 만일 마음이 변하거나 파괴되고 나쁜 말을 내게 되면 스스로 구하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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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장애가 되느니라.”
이것은 진심(瞋心)을 변괴하는 것이라고 증명하신다. 원(怨)이라 함은 원수를 말하고 적(賊)이라 함은 겁탈하는 도둑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몸과 팔다리를 톱으로 썬다는 것만을 말씀하셨는가?
[답] 많은 고통의 인(因)이 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칼이나 창 등으로 몸을 상해할 때에 찌를 때는 괴로우면서 뺄 때는 괴롭지 않은 것이 있고 뺄 때는 괴로우면서 찌를 때는 괴롭지 않은 것이 있지만 만일 톱으로 썰게 되면 들고 나는 것 모두가 괴롭다. 이런 극히 괴로운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성을 내지 않는데 하물며 가벼운 괴로움에 성을 내거나 원망하겠는가?
스스로가 구하는 것이라 함은 선취(善趣)와 열반이다.
[論]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비구들이여, 묘한 욕심(妙欲)의 경계에 대하여 변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이것은 탐심(貪心)을 변괴하는 것이라고 증명하신 것이다. 묘한 욕심의 경계라 함은 다섯 가지 묘한 욕심[五妙欲]2)이며 변괴하는 마음이라 함은 음욕의 마음을 말한다.
[문] 만일 현재가 과거에 이르면 그 과거의 법을 세간의 변괴[世變壞]라고 하는데 미래가 현재에 이를 적에는 무엇 때문에 현재의 법을 세간의 변괴라고 하지 않는가?
[답] 만일 변하거나 파괴된 뒤에는 다시는 변하거나 파괴되지 않는 것을 세간의 변괴라 하는데 현재에 변하고 파괴되는 것은 다시 변하거나 파괴되는 것이므로 세간의 변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만일 세간으로써 세간의 변화와 작용의 파괴가 갖춰져 있다 한다면 세간의 변괴라 하겠지만 현재는 비록 세간의 변화는 있다 해도 작용의 파괴는
2) 다섯 가지 묘한 욕심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다섯 가지 묘한 경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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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며 현재의 법에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세간의 변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세간에서는 이미 사라져 없어진 법[已謝滅法]이면 다 같이 세간의 변괴라고 인정하지만 현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현재는 세간의 변괴는 아니다.
[문] 온갖 번뇌는 이치를 어기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이치의 변괴라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탐심과 진심의 두 가지만을 변괴라고 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지은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도 그 밖의 다른 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을 변괴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논을 지은 이의 뜻을 책망하지 말아야 하니 논을 짓는 이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짓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다만 탐심ㆍ진심과 상응하는 것만을 변괴라고 말하면서 그 밖의 번뇌는 그렇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 논을 지은 이는 우선 그만두고라도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탐심ㆍ진심과 상응하는 것만을 변괴라고 하시면서 그 밖의 다른 것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교화 받는 이가 탐심ㆍ진심과 상응하는 마음을 변괴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잘 깨쳐 알아서 할 일을 이룩하게 될 것을 관(觀)하셨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요,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그렇지 않아서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변괴의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의 경계를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탐심으로 변괴하는 소의라 함은 만일 탐심이 앞에 나타나면 몸이 유연(柔軟)하여지고 경솔하게 행동하게[輕擧] 되며 즐거워지는 것이며 변괴하는 소연이라 함은 만일 탐애하는 경계가 앞에 나타날 때면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이 그것에 흠뻑 물이 들면서 그때의 소의[身]는 텅 비어 마치 무정물(無情物)과 같이 되며 추하고 더러운 경계를 보면서도 깨끗하고 묘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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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게 된다.
진심으로 변괴하는 소의라 함은 만일 성내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몸이 추악해지고 침울해지면서 참담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변괴하는 소연이라 함은 만일 미워하는 경계가 앞에 나타날 때에는 심ㆍ심소의 법이 그것을 증오하면서 얼굴조차 대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를 쳐다보겠는가? 아름답고 묘한 것을 비루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변괴의 빛깔[色]과 형상[形]을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탐심으로 변괴하는 빛깔이라 함은 만일 탐욕이 앞에 나타나면 소의의 몸이 노랑색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말하며 변괴하는 형상이라 함은 증상(增上)의 탐욕이 자주자주 일어나게 되면 남자의 형상이 없어지면서 여인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진심으로 변괴하는 빛깔이라 함은 만일 성내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소의의 몸이 변하여 다른 빛깔이 되게 하는 것이며 변괴하는 형상이라 함은 만일 증상의 진심이 자주자주 나타나면 사람의 형상이 없어지면서 독사의 형상이 생기는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어느 한 이계(離繫)의 외도가 비록 부처님께 의지하여 출가했으면서도 그의 본래의 견문(見聞)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의 법 가운데 갖가지 허물을 말하면 그는 몹시 성을 내었고 성을 내는 까닭
에 변하여 독사가 되었다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변괴의 분위(分位)와 중동분(衆同分)을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탐심으로 변괴하는 분위라 함은 탐애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남녀의 어리고 젊은[幼少] 시절과 중년(中年)과 노년(老年)의 차별을 말씀하신 것이며 변괴하는 중동분이라 함은 마치 세존께서 “희망(戲忘)이라는 욕계의 하늘[欲界天]이 있었다. 그는 놀이와 쾌락에 즐겨 빠져서 몸이 극도로 피로한지라 마음에 곧 기억이 없어져 버렸고 기억이 없어졌기 때문에 곧 죽어 없어졌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진심으로 변괴하는 분위라 함은 성을 내는 힘으로 말미암아 역시 남녀의 어리고 젊은 시절과 중년과 노년에 대한 차별을 말씀하신 것이며 변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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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분이라 함은 마치 세존께서 “의분(意憤)이라는 욕계의 하늘이 있었다. 그는 분해하고 성을 낸 까닭에 눈을 흘기며 남을 보았으며 이렇게 남을 흘겼기 때문에 분을 더욱 더 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변괴의 나와 남의 몸[自他身]과 여러 도구들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더하다는 것을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가 갖가지 어기고 순종하는[違順] 허물을 내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더하다는 것을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가 싸움을 하는 근본이어서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관하셨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세간의 갖가지 깊고 중한 과실은 대부분이 사랑과 미움[愛憎]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두 가지 수면(隨眠)은 두루 6식(識)에 있으면서 모두가 제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두 가지 수면은 모든 기뻐하고[歡] 근심하는[慼] 번뇌의 근본이며 또 모든 몸과 마음에 의하여 갖가지 환난과 많은 고뇌를 생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씀하신 것이다.
[論] 모든 마음은 염착(染著)하면 그 마음은 변괴한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묘한 욕심의 경계의 대하여 탐심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몸과 팔다리를 끊어도 성을 내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여 오직 욕계의 수도에서 끊을 탐심ㆍ진심만을 변괴라 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며 삼계의 탐(貪)3)과 5부(部)의 탐ㆍ진을 모두 변괴라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3) 탐은 삼계와 5부에 모두 통하지만 진(瞋)은 상계(上界)에는 없고 오직 욕계의 5부(四諦와 修道)에만 통하는 것이므로 ‘삼계의 탐과 5부의 탐ㆍ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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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모든 마음은 염착하면 그 마음은 변괴한 것인가?
[答] 모든 마음은 염착하면 그 마음은 모두 변괴한 것이다.
과거이면 세간의 변괴와 이치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하고 미래와 현재이면 다만 이치의 변괴만을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論] 마음이 변하고 파괴되면서도 그 마음은 염착이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의 탐(貪)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이다.
만일 염오(染汚)이면 두 가지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하지만 염오되지 않으면 다만 세간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論] 그리고 미래와 현재의 진(瞋)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만 이치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할 뿐이다.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한다.
[論]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너희 비구들이여, 설령 원적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스스로 구하는 것에서 깊이 장애가 되느니라.”
여기에서는 생략[略]했기 때문에 다만 염착(染著)만을 말하지만 이치로 보아서는 역시 ‘증오하는 마음[憎惡心]도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모든 마음은 증오하면 그 마음은 변괴한 것인가?4)
[답] 모든 마음은 증오하면 그 마음은 모두 변괴한 것이다.
과거이면 두 가지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하며 미래와 현재면 다만 이치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4) 이하의 문장형식은 『발지론』과 같으나 『발지론』에는 들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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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변하고 파괴되나 그 마음은 증오가 아닌 것이 있으니 과거의 진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이다.
만일 염오이면 두 가지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하지만 염오되지 않으면 다만 세간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그리고 미래와 현재의 탐과 상응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다만 도리의 변괴로 말미암아 변괴하는 마음이라 한다.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역시 경을 인용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너희 비구들이여, 묘한 욕심의 경계에 대하여 변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모든 염오의 마음은 모두 변괴한다라고 해도 앞의 설명과 같기 때문에 다만 두 가지만으로 설명할 뿐이다.
[論] 어떤 것이 도거(掉擧)인가?5)……(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존께서는 도거와 악작(惡作)을 합하여 하나의 개[一蓋]로 세웠으므로 혹 어떤 이는 ‘도거를 여의고는 악작이 없고 악작을 여의고는 도거가 없다’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도거를 여의고도 악작이 있고 악작을 여의고도 도거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도거인가?
[答] 모든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그쳐 쉬지 않아서 경솔하고 조급하게 구는
5) 여기서는 탐ㆍ진과 아울러 그것과 관련하는 갖가지 번뇌를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도 도거와 악작을 들면서 그의 특질을 밝힘과 동시에 그것과의 상호관계를 밝힌다. 도거라 함은 마음의 들뜬 상태이며 온갖 번뇌와 융통한다는 점에서 『구사론』에서는 이것을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의 하나로 한다. 그리고 악작은 ‘지었던[作] 것을 미워한다[惡]’는 뜻이어서 요는 후회하는 마음을 가리키는데 『구사론』의 부정지법(不定地法)에 속한다. 이와 같이 도거와는 성질
을 달리하는데 역시 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하여 합하여 한 문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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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도거이며 마음이 들썩거리는 성품[躁動性]을 도거라 한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을 하였으니 글에는 비록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論] 어떤 것이 악작(惡作)인가?
[答] 모든 마음이 애태우고 원통히 여기면서 변하는 것이 악작이며 마음이 뒤에 뉘우치는 성품[追悔性]을 악작이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이름과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論] 모든 마음에 도거가 있으면 그 마음은 악작과 상응하는가?
[答]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가 넓은 뜻[寬義]과 좁은 뜻[狹義]이 있기 때문이다.
[論] 마음에 도거가 있으면서도 악작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악작의 마음은 없고 들썩거리는 성품은 있는 것이다.
곧 색계와 무색계의 5부(部)의 염오의 마음[染汚心]과 욕계의 견도에서 끊어야할[見所斷] 4부의 마음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修所斷] 염오의 5식(識)과 악작과는 상응하지 않는 염오의 의식(意識)이다.
[論] 마음에 악작은 있으면서도 도거와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염오의 마음은 없으면서 뉘우치는 성품은 있는 것이다.
곧 학처(學處)를 지키는 비구들에게 이런 마음이 많이 있다. 마치 침상과 안석[床几] 등의 물건을 거두어 들어야 하는데도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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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닫지 않는 것 등과 같으며 복(福)과 복이 아닌 것[非福]에 의한 것에서도 이런 마음이 있다.
여기에서 악작에는 통틀어 4구가 있다. 첫째 어떤 악작은 착한 것[善]인데 착하지 않은 곳[不善處]에서 일어난다. 둘째는 어떤 악작은 착하지 않은 것인데 착한 곳에서 일어난다. 셋째는 어떤 악작은 착한 것인데 착한 곳에서 일어난다. 넷째는 어떤 악작은 착하지 않은 것인데 착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제1구는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한 뒤에 마음으로 추후에 ‘내가 한 일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착하지 않은 일을 하였을까?’라고 뉘우치는 것과 같다. 마치 학처를 수호한 모든 비구들이 어긴 것이 있을 때에 곧 뉘우치면서 한탄하는 것과 같다.
제2구는 어떤 사람이 착한 일을 한 뒤에 마음으로 추후에 ‘내가 한 일은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무슨 인연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했었을까?’라고 뉘우치는 것과 같다. 마치 승가(勝家) 장자가 독각에게 밥을 보시한 뒤에 마음으로 ‘나는 차라리 이 밥을 노비나 하인에게 주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저 까까머리 사문에게 보시했을까?’라고 뉘우치는 것과 같다.
제3구는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착한 행을 지은 뒤에 마음으로 ‘내가 한 일은 잘한 일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뉘우치는 것과 같다. 마치 무멸(無滅) 존자가 ‘내가 만일 그에게 이런 위덕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다시 더 많은 보시를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리 너무도 적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제4구는 어느 한 사람이 조그마한 악을 지은 뒤에 ‘내가 지었던 것은 잘한 일이 아니다. 어째서 이러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뉘우치는 것과 같다. 마치 망나니 등이 조그마한 악을 짓고 나서 더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을 뉘우치는 것과 같다.
이 4구 중에 제1과 제3은 악작은 있으면서 도거와는 상응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論] 마음에 도거가 있으면서 또한 악작과 상응하는 것도 있다. 염오의 마음
이면서도 추후에 뉘우치는 성품이 있는 것이다.
곧 앞의 4구 중의 제2와 제4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들썩거리는 마음도 있고 추후에 뉘우치는 성품도 있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염오의 마음으로서 추후에 뉘우치는 성품이 있는 것만을 말하는가?
[답] 다만 이 염오의 마음에는 반드시 들썩거림이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립되지만 만일 들썩거리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 ‘염오의 마음에는 들썩거림이 없는가?’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다만 염오의 마음만을 말한다. 곧 이로 말미암아 앞의 제2구에 “염오의 마음은 없으면서 추후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라고 말하면 들썩거림이 없다는 뜻이 역시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립된다. 만일 “들썩거리는 마음이 없으면서 추후에 뉘우치는 성품이 있다”고
말하면 곧 ‘염오의 마음이 없으면서도 혹은 들썩거림이 있는가?’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앞에서는 다만 ‘염오의 마음이 없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論] 마음에 도거도 없고 또한 악작과 상응하는 것도 없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한 것은 모양[相]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다. 만일 법으로서 이미 이름을 붙였고 이미 일컬었거나 설명한 것이면 앞에서의 세 구절[三句]에 해당하며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고 아직 일컬었거나 설명한 것이 아닌 것은 제4구에 해당한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식온(識蘊)에서 이 4구를 만든 것은 초구(初句)는 ‘악작은 없으면서 도거가 있는 마음’을 취하고, 제2구는 ‘도거는 없으면서 악작이 있는 마음’을 취하며, 제3구는 ‘도거도 있고 악작도 있는 마음’을 취하고, 이것을 제외한 그 밖의 ‘도거도 없고 악작도 없는 마음’을 제4구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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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혼침(惛沈)인가6)……(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세존께서 “혼침과 수면(睡眠)을 합하여 하나의 개[一蓋]로 세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 어떤 이는 ‘혼침을 여의고는 수면이 없고 수면을 여의고는 혼침이 없다’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을 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혼침을 여의고도 수면이 있고 수면을 여의고도 혼침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혼침인가?
[答] 모든 몸의 무거운 성품[重性]이고 마음의 무거운 성품이며 몸이 고르면서 부드럽지[調柔] 않고 마음이 고르면서 부드럽지 않으며 몸이 흐리멍덩하고[瞪瞢] 마음이 흐리멍덩하며 몸이 산란하며 답답하고[憒悶] 마음이 산란하며 답답한 것이며 마음이 흐리고 무거운 성품[惛重性]을 혼침이라 한다.
여기에서 논주(論主)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설명을 하는 것이니 글은 비록 서로가 다르다 하더라도 체(體)에는 차이가 없다.
몸의 무거운 성품이라 함은 5식(識)과 상응하는 혼침을 나타내고 마음의 무거운 성품이라 함은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혼침을 나타낸다. 이로 말미암아 그 밖의 나머지 글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흐리면서 무거운 성품이라 함은 이것은 모두가 심소법(心所法)의 성품인 것을 나타낸다.
6) 앞에서는 제4개(蓋)인 도거와 악작을 논한 반면 여기서는 제3개인 혼침과 수면개를 논하면서 혼침과 수면의 동이상(同異相)을 밝힌다. 혼침은 도거의 반대이어서 마음이 무직하면서 활발하지 못한 심리작용이며 『구사』에서는 도거와 같이 대번뇌지법에 포섭시켰고 온갖 염오의 마음에 통한다고 본다. 그리고 수면도 같은 한 가지의 심소이어서 혼침과는 서로가 유사한 것이 있으되 혼침은 깨어 있을 때[覺時]의 작용임에 반하여 수면은 지각(知覺)이 없는 상태
로 사람을 인도하는 작용이다. 『구사』에서는 이것을 부정지법에 포함시켰다. 여기서의 설명 형식도 앞에서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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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수면(睡眠)인가?
[答] 모든 마음이 잠을 자듯 캄캄하고[睡眠] 아스라하게[惛微] 구르는 것이니 마음이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성품[昧略性]을 수면이라 한다.
마음이 잠자듯 캄캄하다 함은 다만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것만을 나타내고 아스라하게 구른다 함은 깨어 있을 때[覺時]와 무심정(無心定)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며 마음이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성품이라 함은 이 자성(自性)은 심소의 법을 드러내는 것이니 자세하지 못하다[略] 함은 곧 5식과는 상응하는 것을 가렸고[簡] 어둡다[昧]고 함은 모든 선정[定]과 분별하는 뜻을 가린 것이다.
[論] 모든 마음에 혼침이 있으면 그 마음은 수면과 상응하는가?
[答]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가 넓은 뜻[寬義]과 좁은 뜻[狹義]이 있기 때문이다.
[論] 마음에 혼침이 있으면서도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수면의 마음은 없고 혼침의 성품만 있는 것이다.
곧 색계와 무색계의 온갖 염오의 마음과 욕계에서 깨어 있을 때의 모든 염오의 마음이다.
[論] 마음에 수면은 있으면서도 혼침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염오의 마음은 없고 수면의 성품만 있는 것이다.
곧 욕계의 선(善)과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수면과 상응하는 의식(意識)이다.
[論] 마음에 혼침이 있으면서 또한 수면과도 상응하는 것이 있다. 염오의 마음이면서 수면의 성품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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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욕계 염오의 수면과 상응하는 의식이다. 여기서의 문답은 앞의 도거(掉擧)와 악작(惡作)에서의 설명과 같다.
[論] 마음에 혼침도 없으면서 또한 수면과 상응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한 것은 모양[相]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만일 법으로서 이미 이름이 붙여졌고 이미 일컬었거나 설명한 것이면 앞의 세 구절[三句]에 해당하는 것이며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고 아직 일컬었거나 설명한 것이 아니면 제4구에 해당되는 것이니 그 때문에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식온(識蘊) 중에서도 이런 4구를 만드는데 초구(初句)에서는 ‘혼침은 있으면서도 수면이 없는 마음’을 취하고 제2구에서는 ‘수면은 있으나 혼침은 없는 마음’을 취하며 제3구에서는 ‘혼침도 있고 수면도 있는 마음’을 취하고 이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혼침도 없고 수면도 없는 마음’을 제4구로 만든다.
[論] 수면은 선(善)이라고 말해야 하는가?7)……(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수면은 마음이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것[昧略]을 성품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아직 이것이 선(善)인지 불선(不善)인지 무기(無記)인지를 말
7) 여기서는 앞에서의 수면론(睡眠論)에 관련하여 수면 안에 있어서 도덕적인 의의를 밝히려고 하는 문단이다. 곧 꿈의 심리작용에도 선ㆍ악ㆍ무기의 3성(性)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또 그것들의 선악은 어떠한 종류의 과보를 이끄는가를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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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수면은 선이라고 해야 하는가, 불선이라 해야 하는가, 무기라고 해야 하는가?
[答] 수면은 혹은 선이기도 하고 혹은 불선이기도 하며 혹은 무기이기도 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수면일 때의 심ㆍ심소법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선인가 하면 선한 마음으로 잠을 잘 때 캄캄하고 아스라하게 굴리는 마음의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성품이다.
그는 깨어 있을 적에 모든 착한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숙히 익힌 까닭에 잠을 자는 꿈속에서도 그것을 따라 구르게 된다. 마치 본유(本有)에 있을 적에 모든 착한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숙히 익혔으면 그것은 사유(死有)에서나 혹은 중유(中有)안에 있을 때에도 그를 따라 구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이 잠을 자는 꿈속에서 일으키는 착한 법은 가행선(加行善)인가, 생득선(生得善)인가?
[답] 오직 생득선일 뿐이니 아스라하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또한 가행선이니 글과 뜻에 대하여 역시 간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論] 어떤 것이 불선인가 하면 불선의 마음으로 잠을 잘 때 캄캄하고 아스라하게 구르는 마음의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성품이다.
그는 깨어 있을 적에 착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숙히 익힌 까닭에 잠을 자는 꿈속에서도 따라 구르는 것이다. 마치 본유에 있을 적에 착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숙히 익혔으면 그것은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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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혹은 중유에서도 따라 구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이 꿈속에서 일으키는 불선은 견도에서 끊을 것인가, 수도에서 끊을 것인가?
[답] 두 가지 끊을 것에 모두 통한다.
[論] 어떤 것이 무기인가 하면 무기의 마음으로 잠을 잘 때 캄캄하고 아스라하게 구르는 마음의 어둡고 자세하지 못한 성품이다.
그는 깨어 있을 때에 무기의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숙히 익혔기 때문에 잠을 자는 꿈속에서도 따라 구르는 것이다. 마치 본유에 있을 때에 무기의 일에 대하여 행하기 좋아하고 익히 익혔으면 그것은 사유에서도 혹은 중유에서도 따라 구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꿈속에서 일으키는 무기는 유부(有覆)인가, 무부(無覆)인가?
[답] 두 가지가 다 있다. 유부무기라 함은 욕계의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의 두 가지 견해와 상응하는 수면이며, 무부무기라 함은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이숙생(異熟生)이요 통과(通果)는 아니다.
위의로라 함은 마치 꿈속에서 스스로가 갔다[行]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요, 공교처라 함은 마치 꿈속에서 스스로가 그림을 그렸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숙생이라 함은 마치 꿈속에서 앞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무기로 구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오직 이숙생일 뿐이다. 이 수면 중의 무부무기는 마음이 흐리고 어두워서 몸[身]과 말[語]은 내지 못하기 때문에 위의와 공교의 성품은 없다”라고 말한다.
[論] 꿈속에서 복(福)이 커지고 자란난다[增長]고 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수면은 선ㆍ불선ㆍ무기에 다 통한다고 말했지만 아직 꿈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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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커지고 자라난다는 것 등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꿈속에서 복이 커지고 자라난다고 해야 하는가, 복이 아닌 것[非福]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해야 하는가, 복도 아니고 복 아님도 아닌 것[非福非非福]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해야 하는가?
[答] 꿈속에서 혹은 복이 커지고 자라나기도 하고, 혹은 복이 아닌 것도 커지고 자라나기도 하며, 혹은 복도 아니고 복이 아님도 아닌 것도 커지고 자라나기도 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얻는 것[得]을 커지고 자라난다[增長]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생기는 것[生]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 얻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하는가? 마치 정온(定蘊)에서 “무엇 때문에 이생(異生)이 물러나는 때에는 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결(結)이 커지고 자라나며 세존의 제자가 물러나는 때에는 오직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결만이 커지고 자라난다고 하는가?”라고 한 것과 같으니 그곳에서는 얻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 생기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하는가?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이생의 욕탐수면(欲貪隨眠)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다섯 가지 법이 생긴다.8) 첫째는 욕탐수면이요, 둘째는 욕탐수면의 증장생(增長生)이며, 셋째는 무명수면이요, 넷째는 무명수면의 증장생이며, 다섯째는 도거(掉擧)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그곳에서는 생기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사랑스런 과[愛果]와 사랑스럽지 못한 과[非愛果] 등을 취하는 사(思)를 커지고 자라난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응하는 대로[如應]의 과를 취하기 때문이다.
8) 첫째는 욕탐수면이라 하고 둘째는 욕탐수면의 증장생이라 하는데, 첫째는 욕탐수면의 득(得)을 의미하고 둘째는 그것의 발생(發生)을 의미하기 위한 것이니, 곧 증장생이라 함은 더욱 자라고 생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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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복이 커지고 자라난다 함은 마치 꿈속에서 보시하여 복을 짓고 재계(齋戒)를 받아 지니거나 혹은 그 밖의 어느 하나의 복이 상속하며 구르는 것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은 어떤 것인가 하면 그것은 깨어 있을 때의 선(善)한 승해(勝解)의 힘에 따라서 꿈속에서도 도로 그런 착한 일과 유사하게 구르기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 같이 사랑스런 과를 취하게 되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만일 깨어 있을 때에 보시하기를 좋아하면서 혹은 음식으로써나 혹은 의복ㆍ침구ㆍ의약ㆍ방사 등의 일로써 남에게 베풀어주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이렇게 하는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만일 깨어 있을 적에 복업(福業) 짓기를 좋아하면서 혹은 불ㆍ법ㆍ승의 일로서 도로ㆍ교량ㆍ동산과 숲ㆍ꽃과 열매ㆍ못ㆍ복사(福舍) 등을 부지런히 수리하거나 혹은 즐거이 병든 이를 돌보며 덕이 있는 이를 공양하면서 시봉하거나 혹은 5년의 대회(大會) 등으로 복된 일을 경영하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이렇게 하는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만일 깨어 있을 적에 팔재계와 모든 금계(禁戒) 즉 비구 등의 칠중율의(七衆律儀)를 받아 지니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이렇게 하는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만일 깨어 있을 때에 독송(讀誦)과 청문(聽聞)과 설수(說授)와 사유(思惟)를 좋아하고 즐기면서 3장(臧)의 글 뜻[文義]을 간택하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이렇게 하는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만일 깨어 있을 때에 부정관(不淨觀) 혹은 지식념(持食念)ㆍ4념주(念住) 등의 모든 관행문(觀行門)을 닦으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이렇게 닦는 것과 유사하게 구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의 복업에 있어서도 커지고 자라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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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복 아닌 것이 커지고 자라난다 함은 마치 꿈속에서 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음욕의 삿된 행을 하거나 짐짓 거짓말을 하거나 모든 술을 마시거나 혹은 그 밖의 어느 하나의 복 아닌 일이 상속하며 구르는 것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은 어떤 것이냐 하면 그것은 깨어 있을 때의 악(惡)한 승해의 힘에 따라서 꿈속에서도 도로 그런 나쁜 일과 유사하게 구르기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 같이 사랑스럽지 못한 과[非愛果]를 취하게 되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만일 깨어 있을 적에 다른 이의 생명을 해치기 좋아하는 것이 마치 양(羊)을 마구 잡아 죽이는 것과 같거나 혹은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 마치 강도와 같거나 혹은 음욕의 삿된 행을 하는 것이 마치 간통하는 이와 같거나 혹은 짐짓 거짓말을 하는 것이 마치 위증(僞證) 등과 같거나 혹은 모든 술을 마시는 것이 마치 술에 즐겨 빠진 사람과 같거나 혹은 그 밖에 회초리로 때리거나 욕설을 하거나 그의 잘못을 헐뜯거나 광대가 되어 노래하고 춤추거나 피
와 고기를 마시고 먹거나 5욕(欲)에 탐착하고 삼보(三寶)를 증오하며 교만ㆍ사견ㆍ질투 등의 일을 지으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그가 한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그 때문에 꿈속에서 모든 복업이 아닌 것도 커지고 자라나게 된다.
[論] 복도 아니고 복이 아님도 아닌 것이 커지고 자라난다 함은 마치 꿈속에서 복도 아니고 복이 아님도 아닌 것이 상속하며 구르는 것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은 어떤 것이냐 하면 그것은 깨어 있을 때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非善非惡] 승해의 힘을 따르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도로 그런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그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 같이 사랑스런 것도 아니고[非愛] 사랑스런 것이 아님도 아닌[非非愛] 과를 취하게 되는 것을 커지고 자라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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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깨어 있을 때에 위의로(威儀路)나 공교처(工巧處)를 짓거나 혹은 농사를 짓고 짐을 지는 일 등을 하면 이런 익숙히 익힌 승해의 힘으로 말미암아 꿈속에서도 도로 그가 하는 일과 유사하게 구르게 된다. 그 때문에 꿈속에서도 복이 아니고 복이 아님도 아닌 업도 커지고 자라나게 된다.
[문] 만일 꿈속에서 복이 커지고 자라난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잠을 잘 때에는 과의 이숙[果異熟]이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마치 사람이 깨어 있을 때에는 갖가지 농사일 등을 할 수 있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깨어 있을 때에는 갖가지 뛰어난 착한 업을 닦을 수 있으니 읽고 외우고 듣고 말하고 글 뜻을 간택하며 부정관ㆍ지식념ㆍ별념주(別念住)ㆍ총념주(總念住)ㆍ순결택분을 닦고 정결정(正決定)에 들어가 예류과(預流果)를 얻으며 나아가 아라한의 과를 얻거나 혹은 다시 인천(人天)의 뛰어난 업을 닦을 수 있다. 잠잘 때에는 이런 것을 모두 이
룰 수 없기 때문에 “잘 때에는 과의 이숙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우 존자는 “잠잘 때에 짓는 복업은 과가 적기 때문에 ‘과가 없다’고 말하기는 하나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꿈속에서도 복 아닌 것이 커지고 자라난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차라리 잠이나 자지 악각(惡覺)은 일으키지 말라”고 말씀하셨겠는가?
[답] 사람이 깨어 있을 때에는 자주자주 갖가지 뛰어난 악각을 일으키지만 잘 때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꿈속에서 온갖 복이 아닌 것이 모두 커지거나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문] 꿈속의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은 중동분(衆同分)을 이끌 수 있는가?9)
[답] 이끌 수 없다. 명료한 업이라야 중동분을 이끌 수 있는데 그것은 어둡고 열약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시 이끌 수 있다. 그것은 굼벵이나 지렁이 등의 어둡고 열약한 중동분을 이끌 수 있으되 그 밖의 다른 뛰어난 것은 이끌지 못한다”라고
9) 중동분을 이끈다 함은 그 업력(業力)에 의하여 인간이거나 방생이거나 나아가 인간에서도 남자나 또는 여인으로서의 일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을 말한다.
말한다.
[評]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하니 앞의 말과 같은 것이 옳다고 하겠다. 잘 때에는 다만 원만한 업[圓滿業]10)만을 지을 수 있으며 견인의 업[牽引業]은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남의 힘에 따라 구르고 성품이 어둡고 열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의 5온(蘊)의 이숙은 얻는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論] 꿈이란 어떤 법을 이름하는가?1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비록 꿈의 작용을 말했다 해도 아직 꿈의 자성(自性)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종(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혹 어떤 이는 “꿈은 실제로 있는[實有]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꿈속에서는 스스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모든 감관이 왕성한 것을 보았었으나 깬 뒤에는 배고프고 목마르며 몸의 기력은 허약하다. 꿈속에서는 스스로 권속들이 에워싸고 오악(五樂)의 음을 연주하며 재미있게 놀면서 쾌락을 받았으나 깨나고 나면 모두가 없고 혼자 있으면서 수심만이 가
득하다. 꿈속에서도 스스로 사병(四兵)에 포위되어 이리저리 도망 다녔으나 깨고 나면 편안하고 조용하다. 이로 말미암아 꿈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 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막고 실제로 꿈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꿈이 진실이 아니라면 계경에 위반된다. 마치 계경에 “나는 보살일 때에 하룻밤 동안에 다섯 가지 큰 꿈[大夢]을 꾸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또 계경에 “승군대왕(勝軍大王)은 하룻밤 동안에 열 가지 큰 꿈을 꾸었다”
10) 원만한 업이란 5취(趣)가 정해지고 남녀가 정해져 있는 그 위에서 다시 미세하게 규정짓는 업을 가리키며 견인의 업은 5취 남녀 등의 일기(一期)의 중동분을 이끄는 업을 말한다.
11) 앞 문단에서 꿈의 도덕적 의의를 밝힌 것에 대하여 이 문단에서는 다시 더 나아가 일반론으로서의 꿈의 본질(本質)과 꿈의 원인과 종류 등을 논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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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씀하셨으며, 비나야(毘奈耶)에 “흘률계왕(訖栗鷄王)은 하룻밤 동안에 열네 가지 꿈을 꾸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 “난지가모(難地迦母)가 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의 남편은 계율을 범하고 이미 죽었는데 밤에 꿈속에서 옛날의 몸을 나타내어 와서 저에게 당신은 나의 아내입니다. 옛날에 하던 일을 하십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에 도무지 다른 생각이 없었으므로 한 생각조차도 그의 마음에 따름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너는 불환과(不還果)의 사람인데 어찌 다시 그런 음욕의 일에 물들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 “너희들은 꿈과 같은 법을 끊어야 한다. 이 법은 무엇인가? 5취온(取蘊)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꿈에 만났던 사람
깬 뒤엔 보지 못하듯
죽은 뒤에는 사랑하던 것
보지 못하는 것도 그러하다.
만일 꿈이 진실이 아니라면 여기서 말씀하신 것 등과는 서로 어긋날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꿈이란 어떤 법을 이름하는가?
[答] 모든 잠을 잘 때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이 소연(所緣)에 대하여 구르는 것이며 그는 깨난 뒤에 그 기억에 따라 다른 이에게 “나는 꿈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꿈이라 한다.
[문] 만일 꿈에서 보았던 것을 깬 뒤에 기억하지 못하거나 설령 기억한다 해도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없으면 그것을 꿈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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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것도 꿈이기는 하되 다만 원만하지 않을 뿐이다. 만일 원만한 것이면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문] 꿈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곧 꿈을 꿀 때의 심ㆍ심소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뜻[意]을 자성으로 삼는다. 뜻의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심소가 구르면서 꿈의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염(念)을 자성으로 삼는다. 염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깬 뒤에 그 기억에 따라 다른 이에게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5취온(取蘊)을 자성으로 삼는다. 꿈을 꿀 때의 모든 온(蘊)이 차츰차츰 서로 도우면서 꿈꾸는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온갖 법으로써 꿈의 자성을 삼는다. 모두가 꿈을 꾸는 마음의 소연(所緣)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와 같은 모든 설명은 비록 저마다 뜻이 있다 하더라도 맨 처음의 설[最初說]이 이치로 보아 옳다 하겠다. 여기에서는 모든 잠을 잘 때의 심ㆍ심소의 법이 소연에 대하여 구른다고 말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잠잘 때에 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소연의 경계에 대하여 명료하게 구르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꿈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꿈은 의지(意地)에 있고 5식신(識身)에 있지 않는데 어떻게 꿈속에서 빛깔 등을 볼 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모든 귀신(鬼神)이 먼저 그 사람에게 길(吉)하고 길하지 않는[不吉] 조짐을 보이는 것이므로 비록 의지에 있다 하더라도 빛깔 등을 반연한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꿈속에서는 법이 으레 그러하여 장차 오는 일이 길하거나 길하지 않은 조짐을 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몽사(夢事)에 통탈하여 몽서(夢書)를 지은 모든 선인(仙人)들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덕(大德)은 “꿈속에서는 비록 눈 등의 다섯 가지 식[五識]이 빛깔 등을 볼 수는 없다고 해도 의지의 잠자는 세력이 쇠약해짐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빛깔 등을 보는 것이 마치 난지가모(難地迦母)가 꿈에서 보았던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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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일을 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게송에서의 말과 같다.
의심하여 염려함[疑慮]12)과 익숙히 익힘[串習]과
분별함[分別]과 일찍이 겪었던 생각[曾更念]과
또한 비인(非人)이 이끈
이 오연(五緣)으로 말미암아 꿈꾸는 줄 알 것이다.
『수폐타서(壽吠陀書)』에서 “일곱 가지 인연[七因緣] 때문에 꿈에서 빛깔 등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 게송에서의 말과 같다.
일찍이 보고 듣고 느낀 것과
희구(希求)하고 또한 분별하는 것과
장차 있을 것과 모든 병(病)의
이 7연(緣)으로 말미암아 꿈인 줄 알 것이다.
[評] 다섯 가지 인연으로 꿈속의 일을 본다고 해야 한다. 첫째는 다른 이의 이끈 것을 말미암아서이니 모든 하늘[天]ㆍ선인[仙]ㆍ귀신ㆍ주술(呪術)ㆍ약초(藥草)와 친한 이가 뛰어나게 염려하는 것[親勝所念]과 모든 성현이 이끈 것 때문에 꿈을 꾼다. 둘째는 일찍이 겪은 일로 말미암아서이니 먼저 이러한 일을 보았거나 들었거나 깨달아 알았거나 혹은 일찍이 갖가지 일로서 익숙히 익혔던 것을 지금 곧 꿈에서 보게 된다. 셋째는 장차 있을 일로 말미암아서이
니 만일 장차 길(吉)하거나 길하지 않는 일이 있으려 하면 으레 꿈속에서 미리 그 조짐을 보게 된다. 넷째는 분별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만일 사유
12) 의려(疑慮)는 ‘이런 것이 아닐까’고 의심하면서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는 것이요, 관습(串習)은 습관으로 되어 있는 것이며, 분별(分別)은 갖가지로 헤아리면서 나누어 가리는 것이요, 증경념(曾更念)은 일찍이 경험했던 일을 생각해 내는 것이며, 비인(非人)의 소인(所引)은 천신이나 귀신의 하는 말에 따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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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惟)하거나 희구하거나 의심하여 염려하면 곧 그것을 꿈에서 보게 된다. 다섯째는 모든 병(病)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모든 대(大)가 균형을 잃을 적에 곧 더하는[增] 것에 따라 꿈에서 그런 종류들을 보게 된다.
[문] 어느 세계[界]와 갈래[趣]와 처소[處]에서 이런 꿈이 있는가?
[답] 욕계에서만 꿈이 있으며 색계와 무색계에는 없으니 거기에는 잠자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욕계에 대하여 어떤 이는 “4취(趣)에는 꿈이 있으나 지옥만 제외된다. 그곳에서는 괴롭히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수면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지옥에도 꿈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등활지옥(等活地獄)안에서는 열(熱)에 못 이겨 뼈와 살이 익어서 문드러질 적에 어느 때에 찬바람이 불어오거나 혹은 옥졸이 ‘살아나라’고 외침으로 인하여 그 몸이 도로 살아나면서 뼈와 살이 다시 생기면 괴로운 느낌[苦受]이 잠깐 동안 멈추면서 조그마한 즐거움이 생긴다. 이로 말미암아 역시 수면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꿈도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
다.
[문] 어떠한 보특가라에게 꿈이 있는가?
[답] 이생이나 성자에게 모두 꿈이 있게 된다. 성자 안에서는 예류의 과로부터 아라한ㆍ독각에 이르기까지도 꿈이 있지만 오직 세존에게만 없다. 왜냐하면 꿈이란 뒤바뀜[顚倒]과 유사한 것인데 부처님은 온갖 뒤바뀐 습기(習氣)에 대해서도 모두 이미 끊어 다하셨기 때문에 꿈이 없으시다. 마치 깨어 있을 때에는 심ㆍ심소의 법이 뒤바뀜 없이 구르는 것처럼 잠을 잘 때에도 그러하다.
[문] 부처님께서도 주무시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계경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계경에 “모든 이계자(離繫者)들이 부처님께로 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답마(喬答摩)시여, 높으신 이께서도 잠을 자는 일이 있으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사화(祠火)들아,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몹시 더울 때에는 식곤증(食困症)을 풀기 위하여 역시 잠깐 동안 잠을 자느니라.’
그들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간에 어느 한 무리의 사문 범지들은 수면이 있는 이는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교답마시여, 높으신 이께서는 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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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없으시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번뇌[漏]의 잡염(雜染)과 후유(後有)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의 과보가 있으나 아직 끊지도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도 못한 이가 잠을 자게 되면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부처님은 모든 번뇌의 잡염과 후유의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의 과보를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으므로 비록 수면이 있다 하더라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모든 수면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염오(染汚)요,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이다. 모든 염오는 부처님과 독각과 아라한 등은 이미 끊었고 두루 알지만 불염오는 몸을 조절하기 위한 까닭이면 나아가 모든 부처님까지도 앞에 나타나는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도 수면이 있는 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수면은 5취(趣)에 모두 있으며 중유(中有)에도 있다. 태(胎)와 알(卵) 속에 있을 때는 모
든 감관과 몸 부분이 이미 만족된 것이면 역시 수면이 있다.
[문] 꿈에서 보게 되는 일은 일찍이 겪었던 일인가? 일찍이 겪지 않은 일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일찍이 겪었던 일이라면 어떻게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겠는가? 어찌 일찍이 어느 때에 사람으로서 뿔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인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마치 그 경에 “보살이 하룻밤 동안에 다섯 가지 큰 꿈을 꾸었다. 첫째는 꿈에 몸은 대지(大地)에 누었고 머리는 묘고산(妙高山)을 베고 있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서쪽의 큰 바다를 휘젓고 왼손으로는 동쪽의 큰 바다를 휘저으며 두 발로는 남쪽의 큰 바다를 휘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째는 꿈에 견고(堅固)라 하는 길상초(吉祥草)가 배꼽 속으로부터 나와 점차로 높아지고 점차로 커지면서 허공을 온통 덮어버리
는 것을 보았다.
셋째는 꿈에 몸은 희고 머리는 검은 여러 벌레와 새들이 있었는데 보살의 발을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다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넷째는 꿈에 네 가지 빛깔을 가진 새들이 사방으로부터 날아와 보살의 곁에 이르면서 모두가 한 빛깔로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다섯째는 꿈에 쓰레기로 된 산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거닐었으나 더러워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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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것과 같다.
보살은 어느 곳에서 이런 일을 겪었었기에 꿈에서 보았는가? 만일 꿈에서 본 일들을 겪었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보살은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답] 어떤 이는 “꿈에서 보게 된 일은 모두 전에 겪었던 일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았는가? 어찌 일찍이 어느 때에 사람으로서 뿔이 있는 것을 보았었는가?
[답] 그것은 깨어 있을 때에 다른 곳에서 사람을 보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뿔을 보았었는데 꿈속에서는 혼란을 일으켜 한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허물은 없다.
또 큰 바다 안에 어떤 짐승이 사람과 비슷한데 그 머리 위에 뿔이 있었으므로 그는 일찍이 그것을 보았는지라 지금 도로 그런 꿈을 꾼 것이다. 큰 바다 안에는 온갖 유정들의 형상과 종류들이 두루 있기 때문에 큰 바다라 하는 것이다.
[문] 보살의 다섯 가지 꿈을 다시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보살은 어찌 이러한 일들을 일찍이 겪은 것인가?
[답] 일찍이 겪었던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찍이 본 것이요, 둘째는 일찍이 들은 것이다. 보살은 옛날에 비록 본 일은 없었다고 해도 일찍이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꿈에서 그런 것을 본 것이다.
[문] 보살은 언제 그러한 일들을 들었었는가?
[답] 일찍이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법 중에서 범행(梵行)을 닦아 익혔었다. 그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꿈에 그런 일을 보시고 그를 위하여 연설하신 것이니 거기서 들었었기 때문에 이제 꿈에서 보게 된 것이다.
어떤 이는 “겁초(劫初) 때의 사람도 꿈에 이러한 일을 본 이가 있었으므로 그 전해 내려오는 말을 보살이 듣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지금 꿈에서 본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꿈에서 본 일이라 하여도 반드시 전에 겪었던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보살은 뒤바뀐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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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것은 위없는 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이루게 되면서 미리 나타나 보이는 조짐이기 때문에 뒤바뀐 성품의 것이 아니다.
[문] 모든 점몽서(占夢書)는 누가 지은 것인가?
[답] 선인(仙人)이 지었다. 그는 숙주수념지(宿主隨念智)의 힘으로 말미암아 지난 세상의 일[本事]들을 기억해 이런 글을 지은 것이다.
[문] 그 지(智)는 미래의 경계를 관할 수 없고 미래의 경계를 관하는 것은 원지(願智)라야 하는데 그에게는 원지가 없거늘 어떻게 미래의 일을 점치면서 모든 몽서를 지었다는 것인가?
[답] 그는 미래의 꿈에서 나타날 일들을 비교하여 추측으로 아는[比知] 것이다. 과거의 이러한 꿈에는 이러한 결과들이 있었고 현재도 그러하니 이로 말미암아 미래의 이러한 꿈에도 당연히 이러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비교하면서 추측하여 알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점몽서(占夢書)를 지은 것이다.
어떤 이는 “모든 선인에게도 묘한 원지를 획득한 이가 있었으므로 이런 글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니 모든 유정들이 위난(危難)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다.
[문] 꿈의 경계와 숙주수념지의 경계는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답] 꿈의 경계가 더 많으며 제4 정려(靜慮)의 숙주수념지의 경계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제4 정려의 숙주수념지는 오직 3무수겁(無數劫) 동안만 기억할 뿐이지만 꿈은 셀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대겁(大劫) 동안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혹시 정려에 들지도 않고 통혜(通慧)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셀 수 없고 셀 수도 없는[無數無數] 대겁 동안의 일을 알 수 있는가? 있다. 꿈이다”라고 말한다.
[문] 세존께서는 “너희들은 꿈과 같은 일을 끊어야 한다. 이 법은 무엇인가? 5취온(取蘊)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5취온을 꿈과 같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찰나(刹那)의 성품이기 때문이요 오래도록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유정들을 속이기 때문이요 소멸하고 파괴되는 법이기 때문이며, 거짓된 성품이기 때문이요 만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꿈과 같다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8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5) 무참괴납식 ⑤
[論] 마치 계경에서 “5개(蓋)가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5개가 모든 개[諸蓋]를 포섭하는가?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는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5개가 있다.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며, 셋째는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요, 넷째는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 어떤 이는 “개(蓋)에는 오직 다섯 가지만이 있고 무명(無明)은 개가 아닌가?”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5개 외에 따로 여섯 번째[第六]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무명개(無明蓋)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5개가 모든 개를 포섭하는가?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는가?
1) 앞에서 탐ㆍ진ㆍ도거악작ㆍ혼침수면 등을 논하였고, 그 방론(傍論)으로 꿈에 관해서도 논했었는데 여기서는 재차 앞의 문제에 되돌아가서 다시 일괄하여 5개와 무명개(無明蓋)를 논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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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모든 개가 5개를 포섭하는 것이요, 5개가 모든 개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포섭하지 않느냐 하면 무명개이다.
모든 개는 많기 때문에 5개를 포섭할 수 있지만 5개는 적기 때문에 모든 개를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니 마치 큰 그릇은 작은 그릇을 덮을 수 있지만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덮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무명수면(無明隨眠)은 비록 또한 개(蓋)라 하더라도 무겁기 때문에 5개 안에 있다고 말하지 않으시고 세존께서 따로 세워서 제6개로 삼으신 것이다. 앞의 5개는 세력이 모두 평등하지만 무명은 치우치게 무거운 것이므로 이 때문에 따로 말씀하셨다.
이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계경을 인용한다.
[論]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명의 개에 가리게[覆] 되고
애(愛)의 결(結)에 계박되어서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간에 다 같이
이러한 식이 있는 몸[有識身]을 얻은 것이다.
[문] 무명은 개(蓋)이면서 또한 결(結)이요 애(愛)는 결이면서 또한 개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무명은 다만 개요 애는 다만 결이라고만 말하는가?
[답] 무명도 마땅히 결이라고 말해야 하고 애도 결이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갖가지 글[文]과 갖가지 말로 나타내려고 한 까닭이다. 만일 갖가지 글과 갖가지 말로써 하면 뜻을 이해하기 쉽고 받아 지니기도 쉽지만 그 밖의 다른 것으로 하면 번거롭고 어지럽게 된다.
또 두 가지 문[二門]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마치 무명을 개라고 말하는 것처럼 애도 그러해야 하고 마치 애를 결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명도 그러해야 하나니, 두 가지 문을 나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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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 때문에 무명은 다만 개라고만 말하고 애는 다만 결이라고만 했다.
또 무명은 개의 뜻이 많고 결의 뜻이 적기 때문에 다만 개라고만 하는 것이요, 애는 결의 뜻이 많고 개의 뜻은 적기 때문에 다만 결이라고 할 뿐이다.
또 무명은 개의 뜻이 무겁고 결의 뜻은 가볍기 때문에 다만 개라고만 하는 것이요, 애는 결의 뜻이 무겁고 개의 뜻은 가볍기 때문에 다만 결이라고 할 뿐이다.
또 부(覆)의 뜻이 개(蓋)의 뜻이니 모든 번뇌 가운데서 다시는 제2의 번뇌로서 유정의 혜안(慧眼)을 가리는 것[覆]은 무명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개라고 말하는 것이며, 계(繫)의 뜻이 결(結)의 뜻이니 모든 번뇌 가운데서 다시는 제2의 번뇌로서 유정을 얽어매어[繫] 오래도록 생사에 있게 하는 것은 탐애(貪愛)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유정들은 무명의 개에 눈이 멀고 애의 결에 얽매인 까닭에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두 명의 도적을 만나 하나는 그의 손발을 묶고 다른 하나는 흙을 눈에다 처넣은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묶인 데다 눈까지 보이지 않아서 도망하여 안온한 곳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무명에 가리고 탐애에 결박되어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여기서 두 명의 도적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겠다. 옛날에 두 명의 도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리(伊利)요, 다른 하나는 사사(捨奢)였다. 항상 같이 돌아다니면서 만일 재물이 있는 이를 만나면 하나는 그의 손발을 묶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눈에다 흙을 처넣고는 재물을 빼앗고 떠나가 버렸다. 그 사람은 묶인 데다 눈까지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서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정도 이와 같아서 무명과 탐애에 가리고 얽매인 까닭에 생사에 빠
져 잠기게 된다.
이 때문에 묘음 존자는 “모든 유정들은 무명에 눈이 멀고 탐애에 얽매여 오래도록 생사에 처하면서 악한 법을 키우고 자라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무명을 치우치게 설명하여 개라 하고 애를 치우치게 설명하여 결이라 하는 그 뜻이 잘 성립된다. 그리고 무명의 개는 세력의 작용이 치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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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무거워서 하나이면서도 앞의 다섯 가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5개 중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이니 5개는 세력이 모두가 균등하기 때문이다.
[論] 모든 개(蓋)는 부(覆)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먼저는 계경의 이치에 의거하여 다만 5개 외에 따로 제6의 무명만을 세워서 개라 했지만 지금은 대법(對法)의 이치에 의거하여 온갖 번뇌는 개 아님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니 가리고 막는다[覆障]는 뜻이 개의 뜻이기 때문이다.
온갖 번뇌는 모두가 성도(聖道)와 성도의 가행(加行)의 선근을 가리고 막기 때문에 모두를 개라 한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개는 부(覆)인가?
[答]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개(蓋)라 함은 성상(性相)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다. 탐욕(貪欲) 등의 다섯 가지는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간에 모두가 여기서 세우는 다섯 가지 가운데 개(蓋)의 성상이 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모두 개라고 한다.
여기에서 부(覆)라 함은 작용(作用)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다. 온갖 번뇌는 현재의 때에 있으면 가리는[覆] 작용이 있기 때문에 부라고 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것에는 가리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부라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가 넓음[寬]과 좁음[狹]이 있기 때문에 4구를 만든다.
[論] 개이면서도 부가 아닌 것이 있다. 과거와 미래의 5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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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에는 개의 성상이 있기 때문에 개라 하는 것이며 부의 작용은 없기 때문에 부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니 과거는 작용이 이미 쉬었고 미래는 작용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문] 과거의 개는 과거의 상속(相續)을 가리고 미래의 개는 미래의 상속을 가리며 현재의 개는 현재의 상속을 가리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과거와 미래는 개이면서도 부는 아니라고 말하는가?
[답] 만일 모든 법의 자성에 의하여 말한다면 부는 3세(世)에 다 통하니 모든 법의 자성은 3세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 만일 보특가라(補特伽羅)에 의하여 말한다면 부는 오직 현재일 뿐이니 보특가라는 오직 현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직 현재의 온(蘊)ㆍ계(界)ㆍ처(處)의 법에서만 보특가라는 성립되는 것이요 과거나 미래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법수(法數)이나 유정이 아닌 것[非有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직 그 보특가라에 의해서만 부의 뜻을 세우기 때문에 오직 현재일 뿐이다. 또 먼저 부는 작용에 의하여 세운다고 말했기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한다.
[論] 부이면서도 개가 아닌 것이 있다. 5개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번뇌로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색계ㆍ무색계의 온갖 번뇌와 욕계의 견(見)과 만(慢)과 무명(無明)과 5개에 포섭되지 않은 모든 전(纏)으로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니 이것을 부이면서도 개가 아니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현재의 번뇌는 부이면서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니라 하는가?
[답] 만일 현재를 말하면 과거와 미래도 말한 줄 알아야 하니 성상(性相)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상에는 부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러 한쪽만 치우치게 설명했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自相續]에 대하여 성도와 성도의 가행 선근을 가리고 막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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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모든 업(業)을 일으키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주지만[與果]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과 이숙인(異熟因)이 되면서 등류과(等流果)와 이숙과(異熟果)를 취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염오(染汚)가 되어 현실에서 꾸짖고 책망하며 진창에 빠뜨려 도리가 아닌 곳[非理處]에 떨어지게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뜨거운 고뇌의[熱惱] 일을 짓고 손해되는 일을 짓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자성(自性)의 어리석음[愚]과 소연(所緣)의 어리석음을 짓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스스로의 상속에 대하여 3세(世)와 이세(離世)의 법에 어리석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또 현재의 번뇌는 소의(所依)와 소연과 행상(行相)을 장애하면서 해탈하지 못하게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오직 현재의 번뇌만을 말하여 부라고 한다.
[論] 개이면서 또한 부인 것이 있다. 5개의 어느 하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이다.
탐욕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면 깨어 있는 자리[覺位]에서는 탐욕(貪欲)ㆍ혼침(惛沈)ㆍ도거(掉擧)의 세 가지 개[三蓋]가 앞에 나타나 있고 잠을 자는 자리[睡位]에서는 앞의 세 가지와 수면(睡眠)의 네 가지 개[四蓋]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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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탐욕개처럼 진에개(瞋恚蓋)와 악작개(惡作蓋)와 의개(疑蓋)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혼침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면 깨어 있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혼침과 도거의 두 가지 개[二蓋]가 앞에 나타나 있고 잠을 자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앞의 두 가지와 수면의 세 가지 개[三蓋]가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혼침개처럼 도거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수면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면 수면ㆍ혼침ㆍ도거의 세 가지 개[三蓋]가 반드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5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를 역시 개라 하는 것은 개의 성상(性相)이 있기 때문이요, 또한 부라 하는 것은 부의 작용[作用]이 있기 때문이다.
[論] 개도 아니고 부도 아닌 것이 있다.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하는 것은 모양[相]이라는 말로 말한다. 만일 법으로서 이미 이름이 붙여졌고 이미 일컬었거나 설명한 것이면 앞의 세 구[三句]에 해당되지만 아직 이름도 붙여지지 않고 아직 일컫거나 설명한 것이 아니면 이 제4구에 해당되기 때문에 “앞의 모양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행온(行蘊) 중에서 4구를 만들 적에는 과거와 미래의 5개가 초구(初句)가 되고 5개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현재의 번뇌가 제2구가 되며 현재의 5개가 제3구가 되고 그 밖의 상응(相應)과 불상응(不相應)의 행온과 4온(蘊)의 전부와 아울러 3무위(無爲)가 제4구가 된다.
[論] 모든 욕계계의 무명수면(無明隨眠)은 모두가 불선(不善)인가?2)……(이
2) 앞에서 제6개(蓋)로 무명개를 인정했고, 그것에 이어 여기서는 특히 무명을 독립적인 과제로 삼아 논구한다. 주된 내용은 삼계계(三界繫)의 무명에는 무기성(無記性)이 있다는 것과 무명과 변행(遍行)ㆍ비변행(非遍行)과의 관계, 그리고 특히 불공무명(不共無明)의 성질에 관한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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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무명도 개의 성품이라는 것을 나타냈지만 아직 불선이라는 것은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지금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종(宗)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혹은 어떤 이는 “온갖 번뇌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온갖 번뇌는 교편(巧便)이 아닌 지혜3)에 섭지(攝持)되기 때문에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시키고 모든 번뇌에는 불선도 있고 무기(無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 온갖 번뇌는 교편이 아닌 지혜에 섭지되는 까닭에 모두 불선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또한 무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사랑스럽지 않은 과[不愛果]를 받기 때문에 불선이라 하는 것이요, 교편이 아닌 지혜에 섭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부무기에도 불선이 있어야 하니 그 성품 안에도 교편이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 어떤 이는 “욕계의 번뇌는 모두 불선이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온갖 번뇌는 모두가 무기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막고 욕계의 신견(身見)과 변견(邊見)과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도 무기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욕계계의 무명수면(無明隨眠)은 모두가 불선인가?
[答] 모든 불선의 무명수면은 모두가 욕계계이나 욕계계의 무명수면에는 불선이 아닌 것이 있다. 욕계계의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신견과 변견과 그것의 상응법(相應法)과 구유법
3) 교편이 아닌 지혜라 함은 사해(邪解)와 사사유(邪思惟)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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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俱有法) 등은 불선이 아닌가?
[답] 만일 법의 체(體)가 무참(無慚) 무괴(無愧)이거나 혹은 그것의 상응이거나 혹은 그것의 구유이거나 혹은 그것에서 나는 것이면 불선이지만 신견 등의 법은 그것과는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불선은 아니다. 그 밖의 자세한 해석은 뒤의 결온(結蘊)의 불선납식(不善納息)에서와 같다.
[論] 모든 색계계ㆍ무색계계의 무명수면은 모두가 무기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무명에는 불선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나타냈으면서도 아직 무기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못했으므로 이제 그것을 나타내려고 다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색계계ㆍ무색계계의 무명수면은 모두가 무기인가?
[答] 모든 색계계ㆍ무색계계의 무명수면은 모두 무기이나 무기의 무명수면에는 색계계ㆍ무색계계가 아닌 것이 있다. 욕계계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문] 무엇 때문에 색계계ㆍ무색계계의 번뇌와 그것의 상응법과 구유법 등은 불선이 아닌가?
[답] 만일 법의 체가 무참 무괴이거나 혹은 그것의 상응이거나 혹은 그것의 구유이거나 혹은 그것에서 나는 것이면 불선이지만 위의 이계계(二界繫)의 번뇌 등의 법은 그것과는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다. 그 밖의 자세한 해석은 뒤의 결온(結蘊)의 불선납식(不善納息)에서와 같다.
[論] 모든 견고(見苦)ㆍ견집(見集)에서 끊을 무명수면은 모두가 변행(遍行)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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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무명은 불선이기도 하고 혹은 무기라는 것은 말했으면서도 아직 그것은 변행인지, 변행이 아닌지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모든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무명수면은 모두가 변행인가?
[答] 모든 변행의 무명수면은 모두가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것이나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무명수면은 변행이 아닌 것도 있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곧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탐(貪)ㆍ진(瞋)ㆍ만(慢)의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論] 모든 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서 끊을 무명수면은 모두가 변행이 아닌가?
[答] 모든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무명수면은 모두 변행이 아니나 변행이 아닌 무명수면은 견멸ㆍ견도에서 끊을 것이 아닌 것이 있다.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변행이 아닌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곧 견고ㆍ견집에서 끊을 탐ㆍ진ㆍ만의 수면과 상응하는 무명이다.
여기서의 변행과 변행이 아닌 것의 뜻은 다른 곳에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나타내 보이지 않겠다.
[論] 어떤 것이 불공무명(不共無明)의 수면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무명은 개의 성품[蓋性]이요 불선이기도 하고 혹은 무기이기도 하며, 변행이요 변행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말했지만 아직 무명은
불공(不共)인지 불공이 아닌지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것을 말하려고 한다.
또 앞에서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相應無明]을 말했지만 아직 번뇌와는 상응하지 않는 무명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불공무명의 수면인가?
[答] 모든 무명이 고(苦)를 환히 알지 못하고 집(集)ㆍ멸(滅)ㆍ도(道)를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히 알지 못한다[不了]고 함은 하려하거나[欲] 참지[忍]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니 무명이 마음을 헷갈리고 가리기[迷覆] 때문에 4성제(聖諦)에 대하여 하려 하지도 않고[不欲] 참아 내지도 않기[不忍] 때문에 환히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요 다만 불명(不明)한 것은 아니다. 마치 가난하고 하천한 사람이 나쁜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비록 좋은 음식을 보더라도 그것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이생도 그러하여 무명이 마음을 가리고
있으면 4성제를 듣고도 알려 하지도 않고 참아내지도 않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사견(邪見)이라 하지 않는가?
[답] 없다[無]고 부정하는 행상(行相)으로 구르는 것을 사견이라 하는데 이것은 오직 하려 하지 않는 것일 뿐이요 없다고 부정하는 행상은 아니기 때문에 사견은 아니다.
또 진실한 물건[實物]을 헐뜯는 것을 사견이라 하는데 이것은 오직 참아내지만 않을 뿐이기 때문에 사견은 아니다.
[문] 여기에서 말한 “환히 알지 못한다[不了]”는 명언(名言)은 자성(自性)을 나타내는 것인가, 행상(行相)을 나타내는 것인가, 소연(所緣)을 나타내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무명의 자성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이와 같은 무명의 행상은 어떤 것인가?
[답] 앎이 없고[無知] 캄캄하고[黑闇] 어리석은[愚癡] 것이 무명의 행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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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와 같은 무명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바로 4성제(聖諦)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무명의 행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무명은 오직 4성제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한 행상으로 구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떻게 불공무명의 수면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는가 하면 앎이 없고 캄캄하고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논(論)에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무명의 행상을 말하여 다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에는 다시 환히 알지 못한다[不了]는 행상이 있다.
어떤 이는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앎이 없고 캄캄하며 어리석은 것이므로 서로 어긋난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와 같은 무명의 자성은 어떤 것인가?
[답] 자체(自體)의 자상(自相)이 곧 자성이다. “모든 법의 자상은 곧 모든 법의 자성이며 같은 종류의 성품[同類性]은 바로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이와 같은 무명의 소연은 어떤 것인가?
[답] 바로 4성제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무명의 소연을 나타내는 것이니 고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고제(苦諦)를 반연한다는 것을 말하고 집ㆍ멸ㆍ도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를 반연한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다.
자성과 행상은 모두 앞의 설명과 같다.
[評] “이와 같은 무명은 4성제에 대하여 한결같이 우둔(愚鈍)하고 한결같이 암매(闇昧)하며 한결같이 명료하지 못하고[不明了] 한결같이 결택하지 못하는 것[不決擇]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자성을 설명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설명하겠다.
[문] 이와 같은 무명을 무엇 때문에 불공(不共)이라 하는가? 불공이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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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인가?
[답] 이와 같은 무명은 제 힘[自力]으로 일어나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수면과 상응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탐(貪) 등과 상응하는 무명이 남의 힘[他力]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명은 다른 수면과 섞여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와 같은 무명은 다른 수면과는 의요(意樂)를 같이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명은 다른 수면이 하는 일과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명은 4성제에 미혹되면서 수면과는 상응하며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명은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오직 이생(異生)만이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이는 “이와 같은 무명은 번뇌를 일으키는 데서 가장 우두머리가 되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불공무명은 다만 견도에서만 끊을 것인가? 5부(部)에 다 통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오직 견도에서만 끊을 것이라 하면 『식신론(識身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그것은 수도에서 끊을 불공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5부에 다 통한다 하면 이 본론(本論)의 글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고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하고 집ㆍ멸ㆍ도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한다”고만 말할 뿐인가?
[답] “이와 같은 무명은 오직 견도에서만이 끊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식신론』의 설명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그 글에서는 “그것은 수도에서 끊을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는 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그것은 수도에서 끊을 불공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다”라고는 말하지 않아야 된다.
[문] ‘불공무명과 상응하는 마음’이라는 것과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는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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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상응하는 마음’이라는 것의 뜻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수도에서 끊을 무명에는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불공(不共)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의 힘[他力]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니 만일 무명이 제 힘[自力]으로 일어나고 다른 수면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면 불공이라 하지만 수도에서 끊어야 할 무명은 비록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다 해도 제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분(忿)ㆍ한(恨) 등의 힘으로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불공이라 하지 않는
다.
어떤 이는 “불공무명은 5부(部)에 모두 있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본론의 글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 여기에서는 다만 견도에서 끊을 불공무명만 말할 뿐이다. 이 무명은 4성제에 미혹하여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수도에서 끊을 것은 비록 수면과 상응하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진리에는 미혹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여기에서는 다만 이생(異生)만이 일으키는 불공무명만을 말하는 것이요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은 성자(聖者)도 일으키는 것이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여기에서는 다만 유루와 무루ㆍ유위와 무위를 다 반연하는 불공무명을 말하는 것이요 수도에서 끊을 것은 다만 유루와 유위만을 반연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여기에서는 다만 제 힘으로 일어나는 불공무명만을 말하는 것이요 수도에서 끊을 것은 남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문] 이 수도에서 끊을 불공무명은 어느 마음[心] 가운데에 있는가?
[답] 만일 욕계이면 10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등과 함께하는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고 초정려(初靜慮)이면 첨(諂)ㆍ광(誑)ㆍ교(憍)와 함께하는 마음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며 제2 정려 이상의 지(地)에서면 오직 교(憍)와 상응하는 마음 가운데서만 얻을 수 있다.
[문] 여기에서 말한 불공무명은 어느 자리[位]에서 나타나고 일어나는가?
[답] 만일 모든 이생(異生)이면 승해(勝解)의 힘으로 말미암아 정견(正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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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거나 혹은 사견(邪見)을 일으키거나 하여 마음이 피로하고 게으름이 날 때에 자주자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4성제에 미혹한 불공무명은 4성제를 반연할 적에 하려 하지도 않고[不欲] 참아 내지도 않고[不忍] 환히 알지도 못하는[不了] 행상(行相)이다.
[문] 온갖 마음 가운데에는 모두 반야(般若)가 있는데 무슨 연유로 이제 불공무명은 진리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답] 지혜[慧]가 무명에 덮이고 가려졌기 때문에 밝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4성제에 대해서도 환히 알지 못한다.
또 여기에서는 다만 불공무명이 진리에 대하여 환히 알지 못하는 것만을 말할 뿐이요 반야를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문] 혹시 수면이면서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곧 앞에서 말한 불공무명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분(忿) 등과 함께 일어나는 무명의 수면이다.
[문] 혹시 수면이면서 수면이 있다[有隨眠]고 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곧 앞에서 말한 불공무명과 수도에서 끊을 분 등과 함께 일어나는 무명의 수면이 그것을 반연할 수면이 이미 끊어져 다한 것이다.
[문] 혹시 수면이면서 모든 수면에 대하여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곧 앞에서 말한 불공무명이 무루(無漏)를 반연하는 것이다.
[문] 혹시 수면이면서 모든 수면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모든 수면으로서 이미 계박을 여읜 것[離繫]이다.
[문] 마치 수면이면서도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혹시 수면이면서도 모든 전(纏)과는 상응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있는가?
[답] 없다. 온갖 수면은 모두가 혼침(昏沈)과 도거(掉擧)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문] 마치 수면이면서도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혹시 전(纏)이면서도 전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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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다. 모든 염오의 마음[染汚心]은 모두가 혼침과 도거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문] 마치 수면이면서도 수면과는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혹시 전이면서도 수면과 상응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가?
[답] 없다. 모든 전은 반드시 무명의 수면과 상응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불공도거(不共掉擧)의 전(纏)인가?
[答] 불공도거의 전은 없다.4)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무명과 도거는 다 함께 삼계(三界) 5부(部) 6식(識)에 통하고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는 두루 온갖 염오의 마음과는 함께하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마치 무명에 불공이 있는 것처럼 도거에도 그러하다”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요, 도거의 전에는 불공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니 도거의 전은 반드시 무명의 수면과 함께하기 때문에 또한 혼침의 전과 상응하기 때문에 불공이라고 하지 않는다.
[문] 혼침과 도거는 모두가 온갖 염오의 마음과 함께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도거만을 말하고 혼침은 말하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혼침도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혼침과 도거는 항상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하나만을 말
4) 앞에서 불공무명을 설명하고 나서 불공도거는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 이 문단의 과제이다. 이것은 불공무명이 있는 이상은 무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번뇌에 두루 통하는 도거나 혼침에도 불공(不共)이 있다고 논하는 일파(一派)에 대한 학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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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이미 나머지를 말한 것이 된다.
또 도거의 전은 방일(放逸)을 수순하는 것이어서 모든 허물이 많고 견고해서 맹렬하지만 혼침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계경은 순상분오결(順上分五結)의 문(門) 가운데서 오직 도거만을 세우고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는 오직 도거만을 말하면서 10번뇌대지법(煩惱大地法) 가운데에 있게 하며 『시설론(施設論)』 중에서는 오직 도거만을 말하면서 다섯 가지 법[五法] 안에 있게 한 것이다.
마치 『시설론』에서 “이생으로서 욕탐(欲貪)의 수면이 일어날 적에는 반드시 다섯 가지 법을 일으킨다. 첫째는 욕탐수면이요, 둘째는 욕탐수면의 증장생(增長生)이며, 셋째는 무명수면이요, 넷째는 무명수면의 증장생이며, 다섯째는 도거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곳 등에서는 모두 도거의 허물이 많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여기에서도 그러하다.
또 도거의 전은 자주자주 현행하면서 사납고 날카로워서 4지(支) 5지의 정려(靜慮)5)를 어지럽히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하지만 혼침은 어리석고 무디면서 등지(等持)에 수순하며 정(定)과 비슷하게 구르고 혼침이 앞에 나타나면 곧 선정에 들면서 허물이 가볍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도거의 전은 선품(善品)을 파괴함으로써 선정의 경계에 오로지 쏟을 수 없게 하지만 혼침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도거의 전은 심품(心品)을 요란하게 하므로 모든 착한 법을 힘써 닦으려 하지 않고 설령 힘써 닦으려 한다 해도 금방 도로 게으름을 피우게 하지
5) 4지 5지의 정려라 함은 4선 중에서 초선(初禪)은 심(尋)ㆍ사(伺)ㆍ희(喜)ㆍ락(樂)ㆍ정(定)의 5지가 있고 제2선(禪)은 내정(內淨)ㆍ희(喜)ㆍ락(樂)ㆍ정(定)의 4지가 있으며 제3선은 사(捨)ㆍ념(念)ㆍ혜(慧)ㆍ락(樂)ㆍ정(定)의 5지가 있고 제4선은 사(捨)ㆍ념(念)ㆍ중수(中受)ㆍ정(定)의 4지가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는 4선 전체의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구사론』 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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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혼침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그 혼침은 무명과 유사하게 구르는 것이어서 앞에서 자세히 말하였고 무명수면은 이미 그것을 말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도거의 전은 사납고 날카롭고 견고하여 모든 허물이 많고 혹 그것은 수면에서와 같고 또한 불공(不共)이 있다고 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불공은 없다고 말한다.
6) 상납식(相納息)6) ①
[論] 색법(色法)의 생(生)ㆍ주(住)ㆍ노(老)ㆍ무상(無常)은 색(色)이라고 해야 하는가, 색이 아니라고[非色]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 뜻은 이미 이해가 되었을 것이므로 다음으로 자세히 풀이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유위는 생기는 것[起]도 분명히 알 수 있고 다하는 것[盡]과 머무르는 것[住]과 달라지는 것[異]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무위는 생기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없고 다하는 것과 머무르는 것과 달라지는 것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논사들을 이런 계경의 뜻에 대하여 사실대로 알지 못하고 갖가지 집착을 일으킨다. 어떤 이는 “모든 유위의 상(相)은 실제로 존재하는[實有] 체
6) 이 상납식에서는 전적으로 유위법의 특상(特相)이라고 일컫는 생ㆍ주ㆍ이ㆍ멸에 관한 모든 문제를 취급하는 부문이다. 이 납식에는 다른 납식의 표명(標名)과는 달라서 문자 그대로 전 납식에 일관하여 4상(相)의 문제를 논구하는 점에서 물론 이 안에는 갖가지 방론(傍論)이 없는 것은 아니나 비교적 정리된 문단이다. 경에서는 세 가지 유위법의 유위의 상으로서 생ㆍ주ㆍ이ㆍ멸을 든 것인데 다시 그 주이를 주와 이로 나누어 유위의 4상으로 삼으면서 불상
응법(不相應法)에 포함하여 일종의 실유법(實有法)으로 한 것은 발달한 유부(有部)의 종의(宗義)이다. 여기서는 이런 주장을 확립시키려고 그와 반대되는 학설과 그와 다른 유위의 상을 평(評)하고 파(破)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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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가 아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모든 유위의 상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속한 것이어서 불상응행온은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에 모든 유위의 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면서 유위의 상은 실로 자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모든 유위의 상은 모두가 무위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들은 “만일 유위의 상의 체가 유위이면 성품이 허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법을 생기게[生] 하고 법을 머무르게[住] 하며 법을 달라지게[異] 하고 법을 소멸하게[滅] 할 수 없어야 하지만 유위의 상의 체는 무위이어서 성품이 강하고 왕성하기 때문에 법을 생기게 하고 나아가 법을 소멸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세 가지 상[三相]은 유위이지만 소멸하는 상[滅相]은 무위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법밀부(法密部)와 같다. 그들은 “만일 무상(無常)의 상의 체가 유위이면 성품이 허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법을 소멸하게 할 수 없지만 이것은 무위이어서 성품이 강하고 왕성하기 때문에 법을 소멸하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유위의 상은 모두가 유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상(相)과 소상(所相)은 온갖 모두가 서로 비슷하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상사상속사문(相似相續沙門)과 같다. 그들은 “색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의 체는 도로 색이며 나아가 식법(識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의 체는 도로 식(識)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유위의 상은 오직 불상응행온에 포함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색 등 5온(蘊)은 태(胎)에서 나올 때를 생(生)이라 하고 상속(相續)할 때를 주(住)라 하며 쇠하면서 변할[衰變] 때를 이(異)라 하고 목숨을 마칠 때를 멸(滅)이라 한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경부사(經部師)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그것은 오직 중동분(衆同分)의 상일 뿐이요 유위의 상은 아니며 유위의 상은 모든 유위법 하나하나의 찰나 동안에 모두가 네 가지 상[四相]을 갖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정온(定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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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과거의 법의 득(得)은 혹은 과거이기도 하고 혹은 미래이기도 하고 혹은 현재이기도 하며 미래와 현재의 법의 득도 그러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혹 어떤 이는 “마치 득과 법이 세상을 같이하는[同世] 것이 있고 세상을 달리하는[異世] 것이 있는 것처럼 상(相)과 소상(所相)에 있어서도 그와 같아야 한다”라고 의심하므로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상(相)과 법(法)은 세상을 달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득(得)과 소득(所得)은 동일한 과[同一果]가 되지도 않고 반드시 함께 행해지지도 않으며 구유인(俱有因)도 아니기 때문에 혹은 세상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상과 소상은 동일한 과요 결정코 함께 행해지며 구유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같이한다.
앞에서 말한 갖가지 달리하는 종(宗)의 주장을 차단하고 의심을 없애 주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색법(色法)의 생(生)ㆍ주(住)ㆍ노(老)ㆍ무상(無常)은 색(色)이라고 해야 하는가, 색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答] 색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색법이라 함은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의 일부분을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색이 아닐 뿐이요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이것은 곧 소상(所相)과 능상(能相)이 종류를 달리한다.
[論] 비색법(非色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색이 아니라고[非色] 해야 하는가, 색이라고 해야 하는가?
[答] 색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비색법이라 함은 의처(意處)와 법처의 일부분을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이것은 곧 소상과 능상이 종류를 같이한다.
[論] 유견법(有見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볼 수 있다[有見]고 해야 하는가,
볼 수 없다[無見]고 해야 하는가?
[答] 볼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견법이라 함은 색처를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볼 수 없을 뿐이요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이것은 곧 소상과 능상이 종류를 달리한다.
[論] 무견법(無見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볼 수 없다고 해야 하는가, 볼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答] 볼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무견법이라 함은 색처를 제외한 11처(處)를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소상과 능상이 종류를 같이한다.
[論] 유대법(有對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대할 수 있다[有對]고 해야 하는가, 대할 수 없다[無對]고 해야 하는가?
[答] 대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대법이라 함은 10색처(色處)를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대할 수 없을 뿐이며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이것은 곧 소상과 능상이 종류를 달리하는 것이다.
[論] 무대법(無對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대할 수 없다고 해야 하는가, 대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가?
[答] 대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무대법이라 함은 의처와 법처를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소상과 능상이 종류를 같이한다.
[論] 유루법(有漏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유루라고 해야 하는가, 무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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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하는가?
[答] 유루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루법이라 함은 10색처와 2처(處)의 일부분을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유루일 뿐이요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이 뒤의 모든 문의 소상과 능상은 모두가 종류를 같이한다.
[論] 무루법(無漏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무루라고 해야 하는가, 유루라고 해야 하는가?
[答] 무루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무루법이라 함은 의처와 법처의 일부분을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무루일 뿐이요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論] 유위법(有爲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유위라고 해야 하는가, 무위라고 해야 하는가?
[答] 유위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위법이라 함은 11처(處)와 법처의 일부분을 말한다. 그 유위의 상은 다만 유위일 뿐이요 오직 법처에 속할 뿐이다.
[論] 무위법(無爲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무위라고 해야 하는가, 유위라고 해야 하는가?
[答] 무위법에는 생ㆍ주ㆍ노ㆍ무상이 없다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무위법이라 함은 법처의 일부분을 말한다. 이것은 무위이기 때문에 유위의 상은 없다.
이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중 두 문[二門]은 소상과 능상이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며 이 뒤에서 말한 다섯 가지 중 세 문[三門]은 소상과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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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모두가 같은 것이니 알맞게 속한 것의 많고 적음과 응하는 것에 따라 앞에서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는 줄 알아야 한다.
소상과 능상과 세상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곧 경부(經部)의 ‘때를 달리한다[異時]는 4상(相)’을 차단하고 색(色) 등의 상은 색이 아닌 것 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상사상속사문(相似相續沙門)의 ‘색 등의 상은 도로 색 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을 차단하며 생(生) 등의 상은 모두 유위라고 말하는 것은 곧 법밀부(法密部)와 분별론자(分別論者)가 ‘생 등의 상은 곧 무위의 법이다’는 것을 차단하고 십문(十門)으로 분별하는 생(生) 등 모든
상의 온갖 것은 모두가 비유자(譬喩者)의 ‘생 등의 모든 상의 체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주장을 차단하는 것이니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법이란 마치 병(甁)ㆍ옷[衣]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자세히 분별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노(老)인가?7)……(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현성(賢聖)의 도리(道理)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有爲相]을 나타낸 뒤에 이제 세속(世俗)의 도리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앞에서 현성의 언설(言說)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세속의 언설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앞에서 승의의 진리[勝義諦]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세속의 진리[世俗諦]에 의거하여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 앞에서 미세한[細]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거친[麤]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앞에서 각혜(覺慧)로 실제로 보는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색근(色根)으로 실제로 보는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앞에서 찰나(刹那)의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상속(相續)의 유위
7) 여기서는 4상에서 이(異)와 멸(滅)을 세정(世情)에 따라 특히 노(老)와 사(死)에 확대하여 설명하는 문단이다. 부론(附論)으로 무상의 힘[無常力]과 성도의 힘[聖道力]의 우열을 논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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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앞에서 연박(連縛)8)의 유위의 상을 나타낸 뒤에 이제 분위(分位)의 유위의 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생(生)은 묻지 않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가 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물어야 하는데도 묻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모든 법을 손멸(損滅)시키고 산괴(散壞)하는 것이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생은 모든 법을 커지고 자라나게 하면서 더욱 왕성하게 하는 것이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모든 법을 쇠퇴하게 하고 이산(離散)시키는 것이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생은 모든 법을 더욱 왕성하게 하고 화합시키는 것이므로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떤 것이 노(老)인가?
[答] 모든 행(行)이 향(向)하고 등지고[背] 완숙[熟]하고 변(變)하는 상을 노라 한다.
계경 중에서 “머리칼이 성기고[髮希] 머리칼이 희어지며[髮白] 피부가 느슨해지고[皮緩] 피부가 쭈그러지며[皮皺] 빛깔이 쇠해지고[色衰] 힘이 손감하며[力損] 몸이 굽고[身曲] 등이 구부러지며[背僂] 숨이 헐떡거리면서 가쁘고 기운이 시들어 빠지며 걸음걸이가 더디고 지팡이를 짚고 오가며 몸에 검버섯이 많아지는 것이 마치 채색을 칠한 그림과 같고 모든 감관이 어둡고 노숙해지며 팔다리가 변괴하고 온몸을 덜덜 떨며 움직이면 신음 소리가 나고 모든 행동을
못쓰게 되는 것을 노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혹은 “온이 완숙해진 것[蘊熟]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
8) 연박이라 함은 한 찰나 동안에 4상이 연관(連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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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 안에서 말한 늙은 상[老相]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행이 향한다[向]고 함은 죽음의 문으로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요, 모든 행이 등진다[背]고 함은 젊고 한창 때를 버리고 등진다는 것이며, 모든 행이 완숙해진다[熟]고 함은 모든 감관이 어두워지고 노숙해진다는 것이요, 모든 행이 변한다[變]고 함은 몸의 힘이 쇠하고 변해진다는 것이다.
세우 존자는 “모든 행이 손상되고 못쓰게 되기 때문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헌 옷[故衣] 등과 같고 모든 행이 망그러지기 때문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부서진 수레 등과 같으며 모든 행이 허약해지기 때문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썩어빠진 집 등과 같고 모든 행이 쇠하고 야위기 때문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시들은 꽃 등과 같으며 모든 행이 완만해지기 때문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악기(樂器) 등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이미 생긴 모든 행이 왕성함을 손감시키고 쇠퇴를 불러오기 때문에 늙었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어떤 것이 사(死)인가?
[答] 저 여러 유정이 저 여러 유정의 중동분(衆同分)으로부터 옮아가면서 파괴되어 없어지고 수(壽)와 난(煖)과 명근(命根)을 버리며 모든 온(蘊)이 사라지고 몸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사라고 한다.
계경에서 말씀하신 사(死)도 이 상과 동일하며 문구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뜻은 차별이 없는 것이니 똑같이 죽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무상(無常)인가?
[答] 모든 행이 흩어지고 무너지며 깨지고 없어지며 망하고 물러나는 것을 무상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문구에는 비록 여러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뜻에는 역시 차별이 없으니 모두 같이 무상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이 무상에서의 모든 행을 흩뜨리고 파괴하는 것[散壞]인가?
[답] 곡식이나 콩 등의 물건을 흩뜨리고 무너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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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다만 모든 행으로 하여금 다시는 작용이 없게 할 뿐이기 때문에 흩뜨리고 파괴한다고 하는 것이니 한 찰나 동안에 할 일을 하여 마치면 제2의 찰나에는 다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論] 사(死)와 무상(無常)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모든 사는 무상이지만 무상에는 사가 아닌 것이 있다. 사를 제외한 그 밖의 행(行)의 소멸[滅]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세간에서는 무상이나 사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사는 오직 안[內]에서 일 뿐이요 유정의 수[有情數]일 뿐이며 감관[根]이 있고 마음[心]이 있는 것에서 말하지만 무상은 안과 밖과 유정수와 무정수와 감관이 있는 것과 감관이 없는 것과 마음이 있는 것과 마음이 없는 것에 다 통하는 것이니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사이면서 무상이며 어떤 것이 무상이나 사는 아닌가?
[답] 최후의 명근이 소멸하는 것을 사이면서 무상이라고 하며 그 밖의 다른 때에 명근이 소멸하는 것을 무상이나 사는 아니라고 한다.
또 최후에 모든 온(蘊)이 소멸하는 것을 사이면서 무상이라고 하며, 그 밖의 다른 때에 모든 온이 소멸하는 것을 무상이나 사는 아니라고 한다.
또 안[內]의 모든 온이 소멸하는 것을 사이면서 무상이라고 하며 밖[外]의 모든 온이 소멸하는 것을 무상이나 사는 아니라고 한다.
안과 밖처럼 유정의 수ㆍ무정의 수와 감관이 있는 것ㆍ감관이 없는 것과 마음이 있는 것ㆍ마음이 없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論] 업의 힘[業力]이 강한가, 무상의 힘[無常力]이 강한가?
[答] 업의 힘이 강하며 무상의 힘은 강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성도(聖道)를 업이라는 말[聲]로 말하고 무상이란 소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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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滅相]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성도를 혹은 수(受)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상(想)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사(思)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의(意)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등(燈)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신(信)ㆍ정진(精進)ㆍ염(念)ㆍ정(定)ㆍ혜(慧)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배와 뗏목[船筏]ㆍ산과 돌[山石]ㆍ물과 꽃[水花]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신다. 이와 같은 하
나하나의 해석은 경에서와 같다.
여기에서는 성도를 업이라고 하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않다.
[論] 어떤 이는 “무상의 힘이 강하고 업의 힘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업도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마치 사람으로서 천 사람의 적(敵)을 살해하는 이면 그 사람을 천 사람의 적보다 낫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무상의 힘이 강하고 업의 힘은 그렇지 않다.
[論] 여기의 뜻에서는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업은 3세(世)의 행(行)을 멸할 수 있지만 무상은 오직 현재의 행만을 멸하기 때문이다.
성도의 힘은 3세의 행을 소멸시키고 그 모든 행을 끊으면서 택멸(擇滅)을 얻기 때문이지만 무상은 오직 현재의 행만을 소멸시키고 그것으로 하여금 다시는 작용이 있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 성도의 업의 힘은 생길 수 있고[可生] 생길 수 없는[不可生] 행을 소멸시키고 택멸을 얻게 하며, 또한 모든 행으로서 미래 세상에 있을 것을 마침내는 생기지 않고 비택멸(非擇滅)을 얻게 하지만 무상은 오직 생길 수 있는 행만을 소멸시키고 생기지 않는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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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 업이란 5취(趣)의 중동분(衆同分)을 이끌 수 있는 업이지만 무상은 소멸하는 상이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의 힘이 강하고 업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업도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의 뜻에서는 업의 힘은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업의 힘은 5취의 중동분을 이끌 수 있지만 무상은 오직 현재의 행만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에서 업은 화합(和合)하는 것을 말하고 무상의 힘이란 별리(別離)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의 힘이 강하고 업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업도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의 뜻에서는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화합하는 일은 어렵고 별리하는 일은 쉽기 때문이니 마치 그릇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릇을 깨뜨리기는 쉬운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다.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 업의 힘은 온갖 종류의 신업(身業)ㆍ어업(語業)ㆍ의업(意業)을 말하지만 무상의 힘이란 무상한 상(相)을 말하기 때문에 업의 힘이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무상의 힘이 강하고 업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업도 무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의 뜻에서는 업의 힘은 강하고 무상의 힘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업의 힘은 온갖 과보의 법을 받게 되지만 무상은 오직 생기는 법만을 소멸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39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6) 상납식 ②
[論] 세존께서는 “세 가지 유위[三有爲]의 유위상(有爲相)이 있다. 유위가 생기는 것[起]도 분명히 알아야 하며 다하고[盡] 머무르며 달라지는 것[住異]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찰나[一刹那] 동안에 어떤 것이 일어나는가?1)
[答] 생(生)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다하는 것인가?
[答] 무상(無常)한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머무르다 달라지는 것인가?
[答] 늙는 것이다.
1)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4상[또는 생(生)ㆍ이(異)ㆍ멸(滅)의 3상(相)]은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적인 작용이 아니요 실은 한 찰나 동안에 두루 갖춘 것으로 바꿔 말하면 본법에서는 4상이 작용하여 미치는 것은 곧 한 찰나 동안에 완성한다는 것이 유부(有部)의 입장이다. 여기서는 그 일을 밝히고 동시에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물건의 천화(遷化) 전변(轉變)의 의의에 관한 문제를 논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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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일어나고 다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머무르며 달라지는 것인지를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그것을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宗)의 학설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어떤 이는 “세 가지 유위의 상[三有爲相]은 한 찰나가 아니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들은 “만일 한 찰나 동안에 세 가지 상이 있다면 하나의 법은 동시에 생기기도 하고 늙기도 하며 소멸하기도 해야 하나 이러한 도리는 없는 것이니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처음 생기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뒤에 다하는 것을 멸(滅)이라 하며 중간에 성숙하는
것을 노(老)라고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한 찰나 동안에서 세 가지 상이 고루 갖추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문] 만일 이와 같다면 하나의 법은 동시에 생기기도 하고 늙기도 하며 소멸하기도 해야만 한다.
[답] 작용하는 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 법이 생할 때에는 생기는 것에 작용이 있고 멸할 때에는 늙고 소멸하는 것에 비로소 작용이 있는 것이니, 체성[體]은 비록 때를 같이한다 하더라도 작용[用]에는 선후가 있게 된다. 하나의 법이 생기고 소멸하는 작용의 마지막을 한 찰나라 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혹은 생기거나 소멸하는 지위는 한 찰나가 아니기는 하나 한 찰나 동안에는 세 가지의 체성이 고루 갖추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은 동일한 찰나라 한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모든 행(行)의 자성(自性)에는 바뀌고 변하는 것[轉變]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바뀌고 변함이 있다 하면 어찌하여 모든 법은 자상(自相)을 버리지 않으며, 만일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면 어찌하여 여기에서 머무르며 달라짐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모든 행의 자성에는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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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머무르며 달라짐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여기에서 머무르며 달라진다는 것은 늙음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요 바뀌거나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생(生)을 일어난다 하고 무상을 다한다 하는 것처럼 늙음을 머무르며 달라진다고 하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뀌고 변함이 있다고 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고 함은 온갖 법은 저마다 자체(自體)ㆍ자아(自我)ㆍ자물(自物)ㆍ자성(自性)ㆍ자상(自相)에 머무르면서 바뀌거나 변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뀌고 변함이 있다 함은 유위의 법은 세(勢)를 얻을 때에 생기고 세를 잃을 때에 소멸하며, 힘[力]을 얻을 때에 생기고 힘을 잃을 때에 소멸하며, 사용(士用)을 얻을 때에 생기고 사용을 잃을 때에 소멸하며, 증상(增上)을 얻을 때에 생기고 증상을 잃을 때에 소멸하며, 공능(功能)을 얻을 때에 생기고 공능을 얻을 때에 소멸하며, 더욱 왕성할 때에 생기고 시들어 다할 때에 소멸하며, 증진(增進)할 때에 생기고 쇠퇴할 때에 소멸
하며, 떨쳐 일으킬 때에 생기고 타락할 때에 소멸하며, 사납고 날카로울 때에 생기고 더디고 무딜 때에 소멸하며, 무성할 때에 생기고 말라 시들 때에 소멸하며, 화합할 때에 생기고 이산할 때에 소멸하는 것이니 때문에 바뀌고 변함이 있다고 한다.
또 바뀌고 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自體)가 바뀌고 변하는 것이요, 둘째는 작용(作用)이 바뀌고 변하는 것이다. 만일 자체가 바뀌고 변한다는 데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行)은 바뀌거나 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하니 그 자체는 고쳐지거나 바뀌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작용이 바뀌고 변한다는 데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도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하니, 법이 미래에는 아직 작용이 있지 못하나 만일 현재에 이
르게 되면 곧 작용이 있는 것이요 만일 과거로 들어가면 작용이 이미 그치기 때문에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있다.
또 바뀌고 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自體)가 바뀌고 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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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요, 둘째는 공능(功能)이 바뀌고 변하는 것이다. 만일 자체가 바뀌고 변한다는 데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에는 바뀌거나 변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해야 하니, 그 자체는 고쳐지거나 바뀌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능이 바뀌고 변한다는 데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도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야 하니, 미래의 세상에는 생(生) 등의 공능이 있고 현재의 세상에는 멸(滅) 등의 공능이 있으며 과거의 세상에는 여과(與果)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있다.
또 바뀌고 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건[物]이 바뀌고 변하는 것이요, 둘째는 세상[世]이 바뀌고 변하는 것이다. 만일 물건이 바뀌고 변한다는 것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은 바뀌거나 변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해야 하니, 물건은 항시 고쳐지거나 바뀌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바뀌고 변하는 것에 의하여 설명하면 “모든 행도 바뀌고 변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해야 하니, 미래와 현재와 과거의 세상은 고쳐지고 바뀌는 일이 있기 때
문이다. 이미 바뀌고 변함이 있는 것이므로 “달라지는 상[異相]이 있다”라고 말하여도 도리에 어긋나거나 허물은 없다.
[문] 모든 유위의 상[有爲相]은 유위의 법에 대하여 자상(自相)이 되는가, 공상(共相)이 되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이것이 자상이라면 어떻게 하나의 법[一法]에 네 가지 상[四相]이 있는가? 만일 이것이 공상이라면 어떻게 온갖 유위의 법에 각각 따로 네 가지 상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자상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의 법에 네 가지 상이 있는가?
[답] 하나의 법에 네 가지 상이 있어도 허물은 없다. 마치 하나의 색법(色法)에는 많은 종류의 상(相)이 있는 것과 같으니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화살과 같으며 나아가 백 사십의 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자상은 4대종(大種)에서의 단단하고[堅] 축축하고[濕] 따뜻하고[煖] 움직이는[動] 상과 같은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하나의 법에는 저마다 따로따로 생ㆍ주ㆍ이ㆍ멸이 있기 때문에 자상이라 할 뿐이다.
또 자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자상(主自相)2)이요, 둘째는 객자상(客自相)이다. 이 유위의 상은 유위의 법의 객자상이며 주자상이 아니기 때
2) 주자상이라 함은 본법 자신의 본질적(本質的) 속성(屬性), 예를 들면 화대(火大)에서의 난(煖)과 같은 것이다. 이것에 상대되는 객자상은 위의 본질적 속성을 다시 규정(規定)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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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하나의 법에 네 가지 상이 있어도 허물은 없다.
또 자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성(本性)의 자상이요, 둘째는 타합(他合)의 자상이다. 이 유위의 상은 유위법의 타합의 자상이며 본성의 자상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법에 네 가지 상이 있어도 허물은 없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공상(共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온갖 유위의 법에는 저마다 따로 네 가지 상이 있는가?
[답] 서로가 비슷하기 때문에 공상이라 한다. 마치 하나의 법 위에 생(生) 등의 네 가지가 있는 것처럼 그 밖의 다른 법도 그러하다. 마치 하나의 실로써 여러 개의 꽃을 꿴 것과 같기 때문에 공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자상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다. 모든 유위의 법에서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이름과 뜻이 동일하기 때문이요, 체성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 등은 법의 표인(標印)이어서 만일 이것이 있으면 유위인 줄 아는 것은 마치 대사의 몸매[大士相]와 같다. 그 대사에 있어서는 자상이라고 하지도 않고 공상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다만 표인일 뿐이니 만일 이것이 있으면 그가 대사임을 아는 것처럼 생 등도 그러하다”라
고 말한다.
[評] “이것은 공상이다. 그러나 공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自體)의 공상이니 하나하나의 유위의 법의 자체에는 각각 생 등의 네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화합(和合)의 공상이니 하나하나의 유위의 법은 저마다 생 등의 네 가지 상과 화합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네 가지는 다만 화합의 공상일 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생(生)의 상(相)에는 다시 그 밖의 다른 생의 상이 있는가?3) 가령 그렇
3) 생ㆍ주ㆍ이ㆍ멸의 4상에 의하여 유위법에는 생ㆍ주ㆍ이ㆍ멸이 있다 한다면 그 생ㆍ주ㆍ이ㆍ멸을 다시 생ㆍ주ㆍ이ㆍ멸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에 대답하는 것이 곧 소상(小相) 또는 수상(隨相)이라는 고찰이어서 생을 생하게 하는 것에는 생생(生生)이 있고 나아가 멸로 하여금 멸하게 하는 것에는 멸멸(滅滅)이 있다고 한다. 대개 본론에서는 아직 발달하지 못한 것인데 바사(婆沙)에 와서 비로소 명백하게
된 이론이다. 여기서는 이것을 논한 문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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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이것에는 다시 그 밖의 다른 것이 있고 그것에도 다시 그 밖의 다른 것이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차츰차츰 한다면 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없다면 누가 이 생을 내면서 다른 것도 내는가?
[답] “생에는 다시 생하게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생상(生相)은 끝이 없어야 된다.
[답] 어떤 이는 “이것이 끝없다고 인정해도 허물은 없는 것이니 3세(世)는 넓고도 넓거늘 어찌 머물 곳이 없겠는가?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사(生死)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렵고 뛰어넘기 어려우며 뭇 괴로움은 나고 자라면서 사슬을 연결하듯 끝이 없는 것이다. 또 동일한 찰나이기 때문에 끝이 없다[無窮] 하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모든 행(行)이 생길 때에는 세 가지 법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니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생(生)이며, 셋째는 생생(生生)이다. 이 가운데서 생은 두 가지 법을 내는 것이니 법과 생생이다. 생생은 오직 하나의 법을 낼 뿐이니 생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끝이 없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생은 두 가지 법을 내는데 생생은 오직 생만을 내는 것인가?
[답] 법성(法性)은 으레 그러하기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모든 여인들은 두 아들을 낳은 이도 있고 한 아들을 낳는 이도 있는 것과 같은 데 어찌 힐난해야 되겠는가?
[評] “모든 행이 생길 때에는 아홉 가지 법[九法]이 함께 일어난다. 첫째는 법(法)이며, 둘째는 생(生)이요, 셋째는 생생(生生)이며, 넷째는 주(住)요, 다섯째는 주주(住住)이며, 여섯째는 이(異)요, 일곱째는 이이(異異)이며, 여덟째는 멸(滅)이요, 아홉째는 멸멸(滅滅)이다. 이 가운데서 생은 여덟 가지 법을 내니 법과 세 가지 상[三相]과 네 가지 수상(隨相)이다. 생생은 오직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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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내니 생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끝이 없다는 허물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생은 여덟 가지 법을 내는데 생생은 오직 생만을 내는가?
[답] 법성은 으레 그러하기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닭과 개 등은 여덟 마리 새끼를 낳는 것도 있고 한 마리 새끼를 낳는 것도 있는 것과 같은 데 어찌 힐난해야 되겠는가? 생과 생생처럼 주(住)와 주주(住住)ㆍ이(異)와 이이(異異)ㆍ멸(滅)과 멸멸(滅滅)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모든 행이 일어날 때는 그 자성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의 법은 모두가 작용이 있으면서 이 법을 내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생만이 이 법을 낼 수 있다 하는가?4)
[답] 모든 행이 일어날 때는 생만이 바로 낼 수 있으며 그 밖의 나머지는 다만 도와주기만 하기 때문에 다만 생만이 이 법을 낼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에 비록 여러 여인이 있다 하더라도 도와주는 이들이요 어머니 되는 이만이 바로 아이를 낳기 때문에 혼자 낳는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세우 존자는 “생(生)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은 날 수 있으며 때문에 생만이 이 법을 낼 수 있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고 또한 그 밖의 다른 연(緣)을 기다려서 이 법이 생기기 때문에 다시 그는 “만일 생이 없으면 이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다만 생만이 이 법을 낼 수 있다고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있으니 만일 그 밖의 다른 연이 없으면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덕(大德)은 “생의 상[生相]이 뛰어나기 때문에 생은 생을 낸다고 말하
4) 이 문단에서는 4상(相) 중에서 특히 생ㆍ주ㆍ이의 3상에 관하여 이것에 관련되어 일어날 수 있는 의혹을 버리고 그 특질을 밝히려고 하는 곳이다. 곧 생(生)에서는 다른 능작인(能作因) 등의 물건의 발생에 관계있는 원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논하고 주(住)에서는 경에서 주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나 주와 찰나멸(刹那滅)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와 같은 문제를 논하며 이(異)에서는 이 이와 수론(數論) 등에서 설명하는 전변설(轉變說)과는 어떻게 다
른가를 밝힌다. 그리고 경에서는 3상이라 한 것을 이 논에서는 4상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의 문제도 함께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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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법이 일어날 때는 비록 그 밖의 다른 연(緣)이 있다 해도 생이 가장 뛰어난 것은 마치 재주를 부리거나 글씨나 그림이나 옷에 물을 들이는 때에는 비록 그 밖의 다른 연이 있다 해도 뛰어난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다만 생만이 이 법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ㆍ이ㆍ멸의 상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모든 유위의 법에는 주상(住相)이 있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유위의 상(相)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마치 세존께서 “세 가지 유위[三有爲]의 유위상이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네 가지가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과 같다. 또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계경에 “비구여, 모든 행은 머무르지[住] 않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없다면 이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색법(色法)의 생ㆍ주ㆍ노ㆍ무상은 색이라고 해야 하는가? 색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그 논에 “어떤 것이 생(生)인가 하면 모든 행이 일어나는 것이요, 어떤 것이 주(住)인가 하면 모든 행이 생긴 뒤에 파괴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이 노(老)인가 하면
모든 행이 성숙[熟]한 것이요, 어떤 것이 무상(無常)인가 하면 모든 생기고 나서 파괴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유위의 법에는 주의 상[住相]이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유위의 상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 계경에서 “네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말씀하셔야 하는데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유위의 법에는 실로 주의 상이 있는데도 마치 무위(無爲)와 비슷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유위의 상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또 만일 법이 모든 행으로 하여금 손해되고 감소되게 한다면 세존께서는 유위의 상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셨겠지만 주의 상은 모든 행으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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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늘어나게 하기 때문에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문] 생(生)도 모든 행으로 하여금 더욱 늘어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생은 최고의 공과 재능이 있어서 모든 행으로 하여금 손해되고 감소되게 하지만 노(老)ㆍ무상(無常)은 그렇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생이 끌어내어 현재에 들게 하지 않는다면 노는 무엇으로 쇠하게 하며 무상은 어떻게 소멸시키겠는가? 생이 행을 끌어내어 현재에 들게 함으로 말미암아 노는 쇠퇴하게 되고 무상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니 때문에 생은 최고의 공적과 재능이 있어 모든 행을 손해하고 감소되게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빽빽한 숲 속에 숨어 있는데 세 사람의 원적(怨敵)이 그를 살해하려고 한 사람은 그 빽빽한 숲 속에서 그를 끌어내었고 한 사람은 그가 힘을 못 쓰게 하였으며 한 사람은 그의 목숨을 끊은 것과 같다. 만일 한 사람이 빽빽한 숲 속에서 끌어내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 그를 살해했겠는가? 세 가지 상[三相]은 행에 대하여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법이 모든 행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고 흩뜨려 무너지게 하는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그것을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생의 상은 모든 행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고, 이ㆍ멸은 모든 행으로 하여금 흩뜨려 무너지게 하지만 주의 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 만일 법이 모든 행으로 하여금 세상을 지내게 한 것[歷世]이라면 세존께서는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겠지만 생의 상은 행으로 하여금 미래 세상으로부터 현재의 세상에 들게 하고, 이ㆍ멸은 행으로 하여금 현재 세상으로부터 과거의 세상에 들게 하지만 주의 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위의 상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 유위를 표시하고 구별하는 것을 유위의 상이라 하는데 주의 상은 무위의 부(部) 안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유위의 상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어떤 이는 “그 경에서도 주의 상을 말씀하셨다. 그 경에 ‘다하고[盡] 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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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달라지는 것[住異]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니 머무르며[住]라고 한 것이 곧 주의 상이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만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머무름[住]과 달라짐[異]을 합쳐서 세우셨기 때문에 다만 세 가지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존께서는 유위의 법을 싫어하고 적멸(寂滅)을 기꺼이 구하게 하려고 그 경에서 머무름과 달라짐을 합쳐서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시실리(示室利)와 흑이(黑耳)5)가 함께하는 것처럼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머무름과 달라짐을 다 같이 버리게 하신 것이다.
[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또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계경에서 “비구여, 모든 행은 머무르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오래도록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요, 찰나 동안도 머무르는 상이 전혀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세우 존자는 이렇게 해석하셨다.
“계경에서는 다만 찰나 뒤의 머무름을 차단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요, 모든 행에 찰나의 머무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전혀 머무름이 없다면 세존께서는 세상[世]이나 찰나를 건립하거나 시설하시지 않으셨어야 한다.”
또 “찰나 동안 주하는 상[住相]은 미세하여 알기도 어렵고 시설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찰나의 양(量)은 부처님만이 아시고 모든 성문이나 독각 등의 경계는 아니다. 마치 신통(神通)을 타고 팔을 굽혔다 펴는 동안에 이곳에서 사라져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중간에는 상속(相續)하지 않으면서 여기에서 거기에 가 닿는다는 뜻은 있을 수 없고 또한 하나의 법이 이전하면서 거기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또 여기에서 뛰어넘어 거기에 이른다는 뜻도 없다. 이 때문에 결정코 찰나마다 생기고 소멸하는 것[生滅]이 상속하면서 여기에서 거기에 이르는 것이며 그 중간에서의 모든 찰나의 양은 지극히 미세하여 오직 부처님만 아
5) 행복을 가져다주는 시실리신(示室利神), 곧 길상천녀(吉祥天女)는 이와 반대로 반드시 불행을 가져다주는 흑이여신(黑耳女神)과 함께 다닌다는 신화적 전설을 가리킨다.
실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모든 행은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해석하셨다.
대덕(大德)은 “모든 행이 생긴 뒤에 비록 잠시 동안은 머무른다 하더라도 늙음[老]과 무상(無常)이 빨리 손상하고 소멸되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유위의 법에는 머무른다[住]는 상(相)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이 앞에서 말한 것을 어떻게 회통하겠는가? 거기서 “색법(色法)의 생(生)ㆍ주(住)ㆍ노(老)ㆍ무상(無常)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이 앞에서는 “색법의 생ㆍ노ㆍ무상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해야 하고 ‘주(住)’는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주’라고 한 것은 이 주는 노(老)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생을 일어난다[起]고 하고 무상을 다한다[盡]고 하며 노를 머무른다[住]고 하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 가지 상[三相] 가운데서 노를 머무르며 달라진다[住異]고 한 것이다.
[문]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또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머무르는[住] 것인가 하면 모든 행이 생긴 뒤에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그 논(論)에서 설명한 것을 나는 회통할 수 없다.
[評] 이미 회통할 수 없다면 머무르는 것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머무른 상[住相]의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행이 생긴 뒤에 스스로 과(果)를 취하고 소연(所緣)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달라지고[異] 소멸하는[滅] 힘으로 말미암아 한 찰나 후에는 다시 작용이 없게 되는 것이므로 만일 머무르는 상이 없다면 모든 행에는 인과(因果)의 상속이 없을 것이요,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에는 마땅히 소연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머무르는 것이 있
다.
[문] 달라지는 상[異相]이라 함은 소멸하며 파괴되는 까닭에 달라지는 상이라 하는 것인가? 바뀌고 변하는 까닭에 달라지는 상이라 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소멸하며 파괴되는[滅壞] 까닭에 달라지는 상이라 하면 유위의 상은 다만 세 가지 상만이 있어야 되니 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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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곧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바뀌고 변하는[轉變] 까닭에 달라지는 상이라 한다면 전변외도(轉變外道)6)가 종(宗)으로 삼은 것과 같을 것이다.
[답] “소멸하고 파괴되기 때문이거나 바뀌고 변하기 때문에 달라지는 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작용이 손상되고 작용이 못쓰게 되며 작용이 허약해지고 작용이 시들어지며 작용이 완만해졌기 때문에 달라지는 상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바뀌고 변하게 된 까닭에 달라지는 상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전변외도가 세운 종(宗)의 뜻과는 동일해야 한다.
[답] 그는 모든 행이 상속하며 구를 때에 앞자리[前位]에서는 멸하지 않으면서 바뀌고 변하여 뒤의 것이 된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마치 땔나무는 재가 되고 우유는 타락[酪] 등이 되는 것과 같다. 지금은 모든 행이 상속하며 구를 때에 앞에서는 소멸하고 뒤에서는 생기면서 바뀌고 변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유위의 법이 생길 때는 기세가 성하고 소멸할 때는 기세가 쇠하며, 생길 때는 힘이 강하고 소멸할 때는 힘이 하열하며, 생길 때는 새 것이라 하고 소멸할 때는 헌 것이라 하며, 생길 때는 무성하고 소멸할 때는 말라빠지며, 생길 때는 화합하고 소멸할 때는 이산(離散)하며, 생길 때는 흥성하고 소멸할 때는 타락하며, 생길 때는 맹렬하며 날카롭고 소멸할 때는 더디고 둔하며, 생길 때는 작용을 얻고 소멸할 때는 작용을 잃으며, 생길 때는 증상(增上)을
얻고 소멸할 때는 증상을 잃으며, 생길 때는 공능(功能)을 얻고 소멸할 때는 공능을 잃으며, 생길 때는 한층 왕성하고 소멸할 때는 시들어 그치며, 생길 때는 증진하고 소멸할 때는 감퇴하며, 생길 때는 사용(士用)을 얻고 소멸할 때는 사용을 잃으며, 생길 때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소멸할 때는 이미 성숙하기 때문에 바뀌고 변한다고 하는 것이니 외도와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문] 모든 유위의 상[有爲相]과 소상(所相)의 법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만일 같다면 어떻게 네 가지[四]
6) 전변외도는 변이론자(變異論者)를 가리키는데 수론(數論)을 그 대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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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한 가지[一]가 되지도 않으며 한 가지가 네 가지가 되지도 않는가? 또 한가지를 취할 때에는 마땅히 네 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다르다면 어떻게 그 밖의 다른 상(相)으로써 상을 삼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상(相)과 소상(所相)은 같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네 가지가 한 가지가 되지도 않고 한 가지가 네 가지가 되지도 않는가? 또 한 가지를 취할 때에는 네 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답] 상에는 비록 네 가지가 있다고 해도 체(體)는 하나이다. 하나의 자체에서 여러 상[多相]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소연에 대하여 네 가지로 이해한다 해도 이치로 보아 역시 어긋남이 없다. 마치 하나의 물건에 대하여 무상 등의 여러 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상과 소상은 다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 밖의 다른 상으로써 상을 삼지 않는가?
[답] 그와 같은 허물은 없다 능상(能相)과 소상(所相)은 끝없는 예로부터 서로서로가 속(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능상과 소상은 끝없는 예로부터 항상 화합한 까닭이요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언제나 서로 따르기 때문이요 서로 뒤섞이어 머무르기 때문이다.
세우 존자는 “상과 소상은 다르나 모든 능상은 소상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마치 연기가 불에 의해 일어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상으로써 상을 삼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능상은 이미 소상의 과환(果患)이니 비록 서로가 여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이 같지 않는 것은 마치 질병이 이미 사람의 과환이어서 비록 서로가 여의지 않는다 해도 상은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만일 질병과 사람의 상이 다르지 않다 하면 그 병이 만일 낫는다면 사람도 없어져야 한다.
대덕(大德)이 “부처님께서 생(生) 등은 유위의 상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서로가 속하지만 상은 같지 않는 줄 알아야 하니 마치 집 등은 사람에게 속하면서도 상에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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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온갖 찰나에 모두가 늙는 상[老相]이 있다면7) 어째서 온갖 때에 머리에 흰 머리칼[白髮]이 생기지 않는가?
[답] 이런 힐난은 도리에 맞지 않다. 늙는 상과 흰머리는 서로 꼭 맞지 않기 때문이다. 흰머리는 형상[色]이요 볼 수 있으며[有見] 대할 수 있는 것[有對]이나 늙는 상은 형상이 아니고[非色] 볼 수도 없으며[無見] 대할 수도 없는 것[無對]이다. 두 가지 체성이 이미 다른데 어떻게 “늙는 상이 있을 때에는 곧 흰머리도 있다”라고 힐난할 수 있겠는가?
또 늙은 것과 젊고 한창인 것[少壯]은 혹은 서로가 어긋나기도 하고 혹은 서로가 어긋나지 않기도 한다. 만일 서로가 어긋난다면 머리에는 흰머리가 나겠지만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면 흰머리는 나지 않는다.
또 만일 대종(大種)을 증익(增益)하는 것이 많고 대종을 손감(損減)하는 것이 적으면 흰머리는 나지 않지만 만일 대종을 손감하는 것이 많고 대종을 증익하는 것이 적으면 머리에 흰 머리가 나는 것이다.
또 기운과 세력이 강한 이면 흰 머리가 나지 않지만 기운과 세력이 약한 이면 흰 머리가 나는 것이다.
또 흰 머리는 늙는 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중동분(衆同分)이 다하려 할 적에 이 이숙(異熟)에 싫어할 만한 형상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니 마치 술이나 기름이 다하려 할 적에는 으레 그 안에서 찌꺼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
[문] 어느 세계[界]와 갈래[趣]와 처소[處]에 흰 머리가 있는가?
[답] 욕계에만 있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없으며 지옥취에는 없고 방생ㆍ귀취에는 있으며 인취의 3주(洲)에는 있고 북구로주(北俱盧洲)만은 제외된다. 거기에는 이러한 싫어할 만한 형상이 없기 때문이니 순정한 업[純淨業]을 타고 거기에 태어나기 때문이요, 잡예의 업[雜穢業]으로 말미암아 흰 머리는 생기기 때문이다.
7) 한 찰나 동안에 노상(老相:異相)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당장에 백발이 될 것이고 또 한 찰나 동안에 무상상(無常相:滅)이 있다면 찰나 찰나마다 죽은 시체로 변할 터인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상식적인 항의에 대한 변해(辯解)이다. 또 이 문제에 관련하여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백발이 없으며 그리고 화생(化生)의 유정은 한 생을 다 마친 뒤에도 죽은 시체가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등의 일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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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와 같은 흰 머리는 어떠한 사람에게 있는가?
[답] 이생(異生)이나 성자(聖者)에게 모두 흰 머리가 있다. 모든 성자 중에서는 예류과(預流果)로부터 독각(獨覺)에 이르기까지 모두 흰 머리가 있지만 오직 세존에게만 없다. 부처님에게는 이러한 등의 싫어할 만한 형상이 없기 때문이요 흰 머리 등은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에게는 모두가 머리가 벗어지거나 머리가 희게 되거나 피부가 느슨해지거나 피부가 쭈그러지거나 음성이 파괴되거나 팔다리 마디가 쑤시는 등의 고통이 없으며, 또한 마음이 혼란해지거나 모든 감관을 점차로 버리는 일이 없고 열반에 드실 때에 모든 감관은 단번에 소멸하게 된다.
[문] 부처님은 어떤 업으로 말미암아 이런 과보를 얻는 것인가?
[답] 먼저 보살이었을 때 3무수겁(無數劫) 동안에 갖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으로 일으킨 착한 업을 닦아 쌓았고 그 뒤의 찰나 찰나마다 더욱 더하고 갈수록 왕성하게 하면서 믿음과 지혜가 견고하고 용맹하였으며 모든 베푸는 것에도 시들하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좋은 업으로 말미암아 상사한 인[相似因]이 되어서 이제 이런 상사한 뛰어난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니 이 때문에 머리가 희거나 얼굴이 쭈그러지는 일이 없으시다.
[문] 만일 온갖 찰나에 모두 무상한 상[無常相]이 있다면 어째서 온갖 때에 모두 시체(尸體)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가?
[답] 만일 감관이 있는 몸[根身]에 소멸이 있으면서도 감관이 있는 몸에 생기는 것이 있다면 시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만일 감관이 있는 몸에 소멸이 있으면서 감관이 있는 몸에 생기는 것이 없으면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만일 마음과 몸이 소멸되면서도 마음과 몸에 생기는 것이 있다면 시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만일 마음과 몸이 소멸되면서 마음과 몸에 생기는 것이 없으면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만일 유정수(有情數)의 몸이 소멸하면서도 유정수의 몸이 생긴다면 시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만일 유정수의 몸이 소멸하면서 무정수(無情數)의 몸이 생긴다면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만일 유집수(有執受)의 몸이 소멸하면서도 유집수의 몸이 생긴다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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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만일 유집수의 몸이 소멸하면서 무집수(無執受)의 몸이 생긴다면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모든 유정들은 업(業)의 증상의 힘[增上力]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친 뒤에는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니, 모든 유정들은 피부ㆍ살ㆍ힘줄ㆍ뼈ㆍ머리칼ㆍ터럭ㆍ손발톱ㆍ이ㆍ발굽과 뿔 등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들은 업의 증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아있을 때에는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하루 동안에는 통틀어 64억 9만9천9백80의 찰나가 있는데 그 사이에 5온(蘊)이 나고 없어지고[生滅] 한다. 만일 낱낱의 찰나마다 모두 시체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한 유정의 시체조차도 이 대지(大地)에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니 이미 파묻지도 못하여 몹시 흉물스러운 것을 모든 유정들은 도피할 방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정의
업이 증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을 때에는 시체의 형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문] 화생(化生)의 유정은 목숨을 마친 뒤에도 무엇 때문에 시체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는가?
[답] 그는 나는[受生] 때와 목숨을 마칠 때에는 감관 있는 몸을 단번에 버리게 되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물속에서 잠깐 나왔다가 잠깐 들어가고 할 때에 그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고 나올 때는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생은 죽은 뒤에 시체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 화생의 유정은 그 몸이 가볍고 묘한 것이 마치 불꽃과 구름과 안개며 번갯불 등과 같은 것이어서 사라지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시체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
또 대종(大種)이 많은 것이면 죽어서 시체가 있게 되나 그것은 만들어진 물질[造色]이 많기 때문에 시체가 없게 된다.
또 근(根)이 많은 것이 아니면 죽어서 시체가 있게 되나 그것은 근의 법[根法]이 많기 때문에 시체가 없게 된다.
또 머리털ㆍ터럭ㆍ손발톱 등 버려야 되는 법이 많으면 죽어서 시체가 있게 되나 화생의 유정은 버려야 하는 법이 적기 때문에 시체가 없게 된다.
또 정혈(精血) 등으로 된 몸이면 죽어서 시체가 있지만 화생은 그렇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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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시체가 없게 된다.
[문] 모든 유위의 법이 생기는 때에 몸[體]은 생기는 법[生法]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생하는 상[生相]과 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몸이 생기는 법이기 때문에 생긴다면 생하는 상은 소용이 없어야 되며 만일 생하는 상과 합하기 때문에 생긴다면 무위의 법은 생하는 상과 합하기 때문에 역시 생길 수 있어야 한다.
[답] “몸은 생기는 법이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생하는 상은 소용이 없어야 된다.
[답] 비록 몸이 생기는 법이라 하더라도 만일 생하는 상의 합함이 없으면 생길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생길 때에는 생하는 상과 합하는 것을 말미암으니 생하는 상은 그것이 생기는 뛰어난 인[勝因]이기 때문이다. 마치 파괴할 수 있는 법의 파괴하는 인(因)은 능히 파괴하는 것[能破]이요, 끊을 수 있는 법의 끊는 인(因)은 능히 끊는 것[能斷]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길 수 있는 법[可生法]의 생하는 상[生相]은 능히 생기게 하는 것[能生]이다.
어떤 이는 “생하는 상과 합하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위(無爲)도 생하는 상과는 합하는 것이므로 역시 생길 수 있어야 한다.
[답] 무위는 생하는 상과 합한다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생길 수는 없다. 마치 허공 등은 파괴하는 인[破因]과는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고 끊는 인[斷因]과는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생하는 상과는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니 생하는 상과 그것은 일찍이 합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위의 머무르고[住] 달라진다[異]고 하는 두 가지 문답에 대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모든 유위의 법이 소멸할[滅] 때에는 몸은 무상한 법[無常法]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인가, 무상한 상[無常相]과 합하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몸이 무상한 법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라면 무상한 상은 소용이 없어야 되며 만일 무상한 상과 합하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라면 무위의 법도 무상과 합하기 때문에 역시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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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어야 한다.
[답] “몸은 무상한 법이기 때문에 소멸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상의 상은 소용이 없어야 한다.
[답] 비록 몸이 무상한 법이라 해도 만일 무상한 상과 합함이 없다면 소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소멸할 때에는 무상한 상과 합함을 말미암아야 하니 무상은 그것이 소멸하는 뛰어난 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생길 수 있는 법이 생기는 인은 능히 내는[能生] 것이듯이 이것도 그와 같다.
어떤 이는 “무상한 상과 합하기 때문에 소멸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위도 무상과는 합하는 것이어서 또한 소멸할 수 있어야 한다.
[답] 무위는 무상과는 합한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소멸할 수가 없다. 마치 허공 등이 생하는 상[生相]과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니 무상은 그것과 일찍이 합한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위의 체성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이다. 만일 네 가지 상[四相]이 없다면 알 수가 없는 것이 마치 캄캄한 가운데서는 병(甁)과 옷[衣] 등이 있어도 만일 등불의 비춤이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유위의 상은 그것의 요인(了因)이다”라고 말한다.
[評] 여기에서는 처음의 설명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마치 유위의 법에는 유위의 상이 있는 것처럼 무위에도 무위의 상[無爲相]이 있는 것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있다 한다면 어떻게 무위를 비취법(非聚法)8)이라 하는가? 만일 없다 하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어떤 것이 나지도 않고[不生] 머무르지도 않고[不住] 멸하지도 않는 법[不滅法]인가? 온갖 무위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모든 무위의 법에는 무위의 상이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8) 비취법이라 함은 분해(分解)할 수 없는 법이라는 뜻[觀念上으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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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품류족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유위와는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유위의 법에는 생ㆍ주ㆍ멸이 있지만 무위는 그것과 다르므로 불생(不生) 등이라고 말한 것이요, 따로 불생의 상(相) 등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마치 계경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나는 것[生]이 있고 늙는 것[老]이 있고 죽는 것[死]이 있고 없어지는 것[沒]이 있고 나오는 것[出]이 있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모든 행은 마치 요술과 같고 아지랑이 등과 같기 때문이
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여기에서 말한 나는 것ㆍ나오는 것과 죽는 것ㆍ없어지는 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차별이 없다. 나는 것은 곧 나오는 것이요 죽는 것은 곧 없어지는 것이니 온갖 모두는 찰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세우 존자는 “어머니의 태(胎)에 들어갈 때를 난다고 하고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를 나온다고 하며 모든 온(蘊)이 성숙한 때를 없어진다고 하고 모든 온을 버릴 때를 죽는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중유(中有)가 모든 온을 얻은 때를 나온다고 하고 버리는 때를 없어진다고 하며 생분(生分)의 모든 온을 얻는 때를 난다고 하고 버리는 때를 죽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태생(胎生)ㆍ난생(卵生)ㆍ습생(濕生)에서는 모든 온이 일어나는 때를 난다고 하는데 모든 감관이 점차로 생기기 때문이요 파괴되는 때를 죽는다고 하는데 남은 시체가 있기 때문이며, 화생(化生)에서는 모든 온이 일어난 때를 나온다고 하는데 모든 감관이 단번에 나오기 때문이요 파괴되는 때를 없어진다고 하는데 남은 시체조차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모든 갈래[趣] 가운데서 처음에 생을 받을[受生] 때를 난다고 하고 명근(命根)이 다하는 때를 죽는다고 하며 중간의 모든 온이 찰나에 생기는 때를 나온다고 하고 찰나에 소멸하는 때를 없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형상이 있는[有色] 유정이 생기는 때를 난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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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때를 죽는다고 하며 형상이 없는[無色] 유정이 생기는 때를 나온다고 하고 죽는 때를 없어진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나는 것[生]ㆍ나오는 것[出]ㆍ죽는 것[死]ㆍ없어지는 것[沒]의 차별이라 한다.
7) 무의납식(無義納息)9) ①
[論]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그 밖의 고행을 닦는 것은
뜻이 없는 것[無義]과 함께한 줄 알지니
그것이 이익과 안락을 얻지 못함은
육지에서 배의 노를 젓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解章] 뜻은 이미 이해가 갔을 것이므로 다음으로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온갖 논(論)은 모두가 경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이 납식(納息)에서는 특히 여러 경의 뜻을 해석한다.
계경에서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오로빈라의 못[鄔盧頻螺池] 가 니란선나의 강[泥爛繕那河] 곁의 보리수(菩提樹) 아래 머물러 계셨는데 성불하신 지 오래지 않아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간략하게 법요(法要)를 베푸시면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뜻이 없는[無義] 고행(苦行)에서 해탈하여 해탈을 얻었노라.
9) 처음에 고행(苦行)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無意義]고 한 것에서 「무의품(無義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데 본장(本章)에서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부정관(不淨觀)으로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진실한 행법(行法)을 기술하고 또한 그 공덕을 들고 있다.(42권 중간까지 계속된다.)
그것이야말로 매우 장한 것[善哉]이었으니 스스로의 바른 원력(願力)으로 속히 위없는 부처님의 보리[無上佛菩提]를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기뻐 뛰며 공경하고 존중하며 마음을 다잡고 귀를 기울여 법요를 들었다.
그때에 악마는 ‘지금 저 사문 교답마(喬答摩)의 종성이 보리수 아래서 여럿을 위하여 설법하는데 그 모든 성문들은 공경하며 듣고 있구나. 내가 지금 가서 그에게 헤살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곧 스스로 마납바(摩納婆)의 몸10)으로 변화하고서 부처님 앞에 나아가 게송[伽陀]으로 말하였다.
어진 이께서는 지금 고행을 버리셨는데
그것은 옛 선인[古仙]의 참되고 청정한 도[眞淨道]입니다.
다시 그 밖의 하찮은 도를 닦는다면
반드시 청정함을 얻지 못하시리다.”
여기에서의 뜻은 저 악마는 모든 하늘의 몸[天身體]을 참되고 청정하다고 생각하면서 옛날 외도들이 닦던 고행에서 참되고 청정한 도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킨 까닭에 부처님께 ‘어진 이께서는 지금 무엇 때문에 옛날 모든 선인이 참되고 청정함을 얻은 고행의 묘한 도를 버리고 그 밖의 다른 자질구레하고 쾌락을 즐겨 멋대로 노는 도를 닦는 것이오? 이것은 반드시 청정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즉시 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를
위하여 게송으로 “모든 그 밖의 고행을 닦는 것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게송의 뜻은 ‘내가 저 외도들의 고행을 닦을 수 없어서 그것을 버린 것이 아니요 다만 이와 같은 고행을 자세히 관찰하건대 마침내 모든 번뇌를 끊으면서 참된 이익[義利]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버리고 다시 진실한 곳 안의 묘한 행[妙行]을 닦은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미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여 중생들의 나고 죽는 극심한 괴로움을 구제하고 있다’는 것
10) 마납바의 몸이란 아이[童儒]의 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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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 게송의 뜻을 말하면 외도가 닦는 갖가지 고행은 바른 법[正法] 밖에 있기 때문에 ‘모든 그 밖의[諸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 ‘낮고 천한 고행[下賤苦行]’이라고 말씀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고행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으뜸가고 뛰어난 것[上勝]이니 8성도(聖道)와 그것의 권속을 말한다. 둘째는 낮고 천한 것[下賤]이니 모든 외도들이 닦는 고행으로 아집(我執)이 뒤섞인 까닭에 낮고 천하다는 이름을 붙였다.
또 그 모든 외도들이 닦는 고행은 세간의 생사의 괴로운 과보[苦果]를 구하기 위한 것이니 그 과보가 하열하기 때문에 낮고 천하다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이는 “ ‘죽지 않음의 고행[不死苦行]’이라고 말씀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죽지 않는다[不死]는 것은 하늘[天]의 별명이다. 곧 하늘 악마[天魔]를 불사(不死)라고 부른다. 악마는 이와 같은 외도의 고행을 숭상하기 때문에 이것을 죽지 않음의 고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모든 외도들은 천상의 모든 묘한 욕락(欲樂)을 바라고 구하면서 이런 고행을 닦기 때문에 죽지 않음의 고행이라 한다.
다음에서 “뜻이 없는 것[無義]과 함께한 줄 알지니”라고 함은 그 고행을 닦게 되면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의 모든 쇠퇴와 손해되는 일[衰損事]을 끌어오므로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 줄 알지니”라고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그것은 이익과 안락을 얻지 못한다”라고 함은 앞에서의 뜻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이(利)는 이익을 말하고 안(安)은 안락을 말한다. 그 모든 고행은 영원히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요 뛰어난 선(善)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에 구경(究竟)의 이익과 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육지에서 배의 노를 젓는 것과 같다”고 함은 헛되이 수고만 할 뿐 끝내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외도의 고행도 그러하여 비록 부지런히 닦아 익힌다 하더라도 이익과 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때 저 하늘 악마는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만일 이런 고행으로 이익과 안락을 얻지 못한다면 부처님은 무슨 도를 닦았기에 참되고 청정함을 얻으셨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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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율[戒]ㆍ선정[定]ㆍ지혜[慧]의
참되고 청정한 도를 닦았기에
구경의 청정한 과(果)와
위없는 보리를 얻었느니라.’”
계경에서는 비록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해도 그 뜻은 분별하지 않았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분별하지 않은 것을 이제 모조리 분별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 밖의 고행을 닦는 것은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答] 그런 고행은 죽음[死]에 나아가고 죽음에 가까우며 죽음에 이르는 것이어서 그와 같은 고행은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은 늙고 죽음[老死]의 바다를 초월하기 위하여 그런 고행을 닦는 것인데 그런 고행은 견의 갈래[見趣]로부터 일어나 갑절 더 늙고 죽음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을 닦는다면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고ㆍ늙고ㆍ죽는 세 가지는 모든 유(有)에 두루 있는 것이로되 늙고 죽는 것은 정작 유정들이 싫어하는 것이요 특히 죽는 것은 싫증을 냄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에 치우쳐 설명한다.
묘음 존자는 “온갖 유전(流轉)을 모두 뜻이 없다[無義]고 하고 온갖 환멸(還滅)을 모두 뜻이 있다[有義]고 한다. 이와 같은 고행은 견(見)의 갈래로부터 일어나서 환멸에 위배되고 유전을 수순하기 때문에 그것을 닦는 것은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3악취(惡趣)의 고통을 모두 뜻이 없다고 하고 선취(善趣)의 해탈을 모두 뜻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행은 삿된 방편으로 일으키는 것이어서 선취 등에 위배하고 악취의 고통을 수순하기 때문에 그것을 닦는 것은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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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 존자는 “이와 같은 고행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에 떨어져 있게 하며 항상 모든 세계[界]와 모든 갈래[趣]와 모든 생(生)과 모든 처소[處]에서의 뭇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닦는 것은 뜻이 없는 것과 함께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또 세존께서 “결가부좌(結加趺坐)하여 몸을 똑바르게 하고 바른 원[正願)으로 대면(對面)의 염(念)에 머무른다”라고 말씀하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마치 계경에서 “어떤 모든 비구들이 아련야(阿練若)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있거나 혹은 고요한 방에 있으면서 결가부좌하여 몸을 똑바르게 하고 바른 원으로 대면의 염에 머무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모든 위의(威儀)에서는 모두 선(善)을 닦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결가부좌만을 말하는가?
[답] 이것은 성현의 통상적인 위의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의 긍가(殑伽)의 모래 수보다 더 많으신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이 위의에 머무르면서 선정[定]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위의는 선품(善品)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만일 가거나[行] 멈추거나[住] 하면 몸이 빨리 피로해지고 만일 기대거나 눕게 되면 혼혼히 잠[睡]이 들게 되지만 오직 가부좌만은 이런 과실이 없기 때문에 뛰어난 선품을 닦아 익힐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위의는 악법(惡法)을 어기기 때문이다. 그 밖의 위의는 음욕(婬欲) 등의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을 좇는 것이지만 오직 결가부좌만은 그런 것과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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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와 같은 위의는 사람[人]ㆍ하늘[天] 등을 이끌어서 바른 법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위의로써는 사람ㆍ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라[阿素洛] 등을 인도하여 부처님의 법에 들게 하는 것이 이 결과부좌의 위의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위의는 사람ㆍ하늘 등의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위의로서는 사람ㆍ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라 등의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결과부좌의 위의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 위의가 악한 심ㆍ사(尋伺)를 낸다 해도 다른 선(善)을 내기 위하여 오히려 그것에 머물러야 하는데 하물며 스스로 뛰어난 선품을 수순하며 내는 것이겠는가?
또 오직 이 위의에 의해서만이 위없는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위의에 의하여도 2승(乘)의 보리는 증득할 수 있지만 부처님의 보리만은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위의에 머무르면 악마의 군사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보리수 아래서 결과부좌하고 계시면서 두 가지 악마 군사를 깨뜨리셨으니 자재천(自在天)과 모든 번뇌이다. 이 때문에 악마들로 하여금 이 위의를 보게 하면 놀라고 두려워하여 대부분이 물러나고 흩어지게 된다.
또 이것은 외도의 법과는 공통하지 않기[不共]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위의는 외도에게도 있지만 오직 결가부좌만은 외도에게 없기 때문이다.
또 결가부좌는 선정을 닦는 데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질구레한 선[散善]은 그 밖의 다른 위의에 머무르면서도 모두 닦을 수 있지만 만일 선정을 닦는 선이면 오직 결가부좌만이 가장 수순하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만 결과부좌만을 말한다.
[문] 결가부좌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이 형상은 둘레가 둥글면서[周圓] 편안하게 앉는다[安坐]는 뜻이다.
성론자(聲論者)는 “두 발의 발등을 두 넓적다리에 올려놓는 것이 용(龍)이 서려 얽혀 있는 듯한 것이니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기 때문에 결가부좌라 한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두 발을 포개되 좌우에 엇갈리게 올려놓고 바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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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관하는 것을 결가부좌라 한다. 오직 이 위의만이 선정을 닦는 데에 수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이것은 성현의 길상한 앉음새[吉祥坐]이기 때문에 결가부좌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몸을 단정하게 한다[端身]는 것은 어떤 뜻인가?
[답] 이것은 몸을 단정하게 하면서 편안히 앉는다는 뜻이다.
[문] 바른 원[正願]이란 무슨 뜻인가?
[답] 이것은 선품(善品)을 좇으면서 온 마음을 그곳에 둔다[注]는 뜻이다.
[문] 대면(對面)의 염(念)에 머무른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답] 면(面)이라 함은 선정의 경계[定境]를 말하고 대(對)라 함은 나타내어 온 정신을 모아서 살피는 것[現矚]을 말한다. 이 염(念)이 마음으로 하여금 선정의 경계를 나타내어 살피면서 뒤바뀜이 없이 명료하게 하는 것을 대면의 염이라 한다.
또 면이라 함은 번뇌(煩惱)를 말하고 대는 대치(對治)를 말한다. 이 염으로 생사의 우두머리가 되는 번뇌를 대치하는 것을 대면의 염이라 한다.
또 면이라 함은 자기의 얼굴[自面]을 말하고 대라 함은 마주 대하여 눈독을 들여 잘 보는 것[對矚]을 말한다. 이 염이 마음으로 하여금 자기의 얼굴을 마주 대하여 온 정신을 모아 살피면서 그 밖의 경계를 관하는 것을 대면의 염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생각을 잡아매어[繫念] 자기의 얼굴에 있게 하는가?
[답] 시작 없는 옛날부터 남자는 여인에게 욕심[色]을 일으키고 여인은 남자에게 욕심을 내는 것이 다분히 그의 얼굴에 의거하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관하면서 모든 번뇌를 조복한다.
또 유정의 탐심(貪心)은 다분히 얼굴에 있는 눈썹ㆍ눈ㆍ입술ㆍ이ㆍ귀ㆍ코 등에 의거하여 내고 그 밖의 다른 몸뚱이는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관하면서 탐욕을 조복하여 없애는 것이다.
또 얼굴에는 일곱 개의 구멍[七孔]이 있어 부정(不淨)한 것이 언제나 흐르므로 싫어하고 여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몸 부분보다 더하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을 관하면서 싫어하며 버리려는 것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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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드물면 탐애를 많이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 잡아맨 생각을 얼굴에다 두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데에 두지 않는 것이니 만일 비추지 않을 때면 스스로 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또 관행(觀行)을 닦는 이는 거의가 12처(處)의 모양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는데 얼굴 위에는 항상 9처(處)11)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관한다.
어떤 이는 또한 “등 쪽[背面]이 염에 머무르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마주 대한다[對]는 것과 등진다[背]는 것의 두 가지 뜻은 다 같이 도리로 보아서 어긋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염하는 힘[念力]으로 말미암아 잡염(雜染)을 버리고 등지면서[棄背] 청정(淸淨)을 마주 보고 향하기[對向] 때문이요, 생사(生死)를 버리고 등지면서 열반을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며, 유전(流轉)을 버리고 등지면서 환멸(還滅)을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며,
5욕(欲)을 버리고 등지면서 선정의 경계[定境]를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며,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버리고 등지면서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며, 아집(我執)을 버리고 등지면서 무아(無我)를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며, 삿된 법[邪法]을 버리고 등지면서 바른 법[正法]을 마주 보고 향하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마주 대하는 것과 등지는 것은 다 같이 도리에서 보아 어긋나는 것이 없다. 이런 염(念)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安
住]을 대면의 염에 머무른다고 한다.
11) 9처라 함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을 말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7) 무의납식 ②
[論] 어떤 것을 대면의 염[對面念]에 머무른다 하는가?1)
[答] 관행(觀行)을 닦는 이가 양미간(兩眉間)에 생각을 잡아매어서 혹은 푸른 어혈이 든 것[靑瘀]2)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띵띵 부풀은 것[膨脹]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고름이 흐르면서 문드러지는 것[膿爛]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깨지고 부서지는 것[破壞]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달라지면서 붉어지는 것[異赤]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뜯어 먹히는 것[被食]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떨어져 나가는 것[分離]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백골(
白骨)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골쇄(骨鎖)를 관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을 대면의 염에 머무른다고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생각을 잡아매어 양미간에 두는 것인가?
[답] 관행을 닦는 이는 먼저 이곳에 의지하여 성현의 즐거움을 내고 그 뒤에 점차로 온몸에 두루 퍼지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는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맨다. 마치 음욕을 느끼는 이는 남근(男根)ㆍ여근(女根)의 곳에 먼저 욕락을 내고 그 뒤에 점차로 온몸에 퍼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1) 결가부좌(結加趺坐)하여 대면의 염에 머무르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 대면념주의 내용으로서 부정관(不淨觀)의 성질ㆍ방법 등에 관하여 논한다.(부정관에 관해서는 『구사론』 제22권 참조)
2) 푸른 어혈 이하는 죽은 시체의 썩어가는 차례이며 또 새 등에 파먹혀 마침내는 흰 뼈가 되기까지의 그 분위(分位)를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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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떤 책[本]에서는 “명(明)의 사이에 생각을 잡아맨다”라고 말한다. 명이란 눈[眼]을 말한 것이어서 곧 생각을 잡아매어 콧날 가운데다 둔다는 것을 말한다.
또 어떤 책에서는 “머리 끝[髮際]에다 생각을 잡아맨다”라고 말하고, 혹은 어떤 책에는 “코 끝[鼻端]에다 생각을 잡아맨다”라고 말한다.
어떤 책에서는 “무탐(無貪)과 함께하는 염(念)에 머무른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사마타(奢摩他)와 함께하는 염에 머무른다는 것을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명(明)과 함께하는 염에 머무른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비발사나(毘鉢舍那)와 함께하는 염에 머무른다는 것을 말한다.
관행을 닦는 이는 이와 같이 생각을 잡아매어 양미간 등에 두어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이 든 모양 등을 관찰하는 것이니 곧 부정관(不淨觀)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대면의 염에 머무른다고 말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만 부정관만을 대면의 염이라 하고 지식념(持息念)과 계차별관(界差別觀)은 말하지 않는가?
[답] 여기에서도 지식념과 계차별관을 대면의 염이라 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어서이다.
또 여기서는 우선 처음의 관[初觀]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부정관은 바로 여러 관 가운데 처음의 관이어서 처음의 것을 말하면 중간과 뒤의 것도 나타내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여기서는 많은 부분의 말[多分說]에 나아가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관을 닦는 이는 대부분 부정관의 문에 의지하여 성도(聖道)에 나아가 들며 지식념과 계차별관으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 것이다.
묘음 존자는 “온갖 여리작의(如理作意)3)로 이끈 염(念)은 모두가 대면의 염이라 하고 부정관뿐만이 아니나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존자는 계경에 수순하면서 우선 부정관을 대면의 염이라 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어떤 모든 비구들이 아련야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있거나 혹은 고요한 방에 있으면서 결가부좌하여 몸을 똑바르게 하고 바른 원으로 대
3) 여리작의라 함은 바른 사념(思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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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염에 머무르는 것은 탐욕을 끊고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이니 때문에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탐욕을 끊기 위함과 같이 진에(瞋恚)ㆍ혼침(惛沈)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악작(惡作)ㆍ의(疑)를 끊기 위한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5개(蓋) 중에서는 탐욕이 가장 중하며 또 맨 처음에 있는 것이므로 이쪽에 치우쳐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가까운[近] 대치(對治)이다. 부정관으로 탐욕이 만일 끊어지면 그 밖의 다른 것도 따라서 끊어지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지 않으며 그것과 가까운 대치의 법을 대면의 염이라 한다.
[문] 관행을 닦는 이가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있는 그때에는 어느 지위[位]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하는가?
[답] 초작의의 지위[超作意位]이다. 그리고 유가사(瑜伽師)가 부정관을 닦은 데에는 통틀어 세 가지 지위[三位]가 있다. 첫째는 초습업의 지위[初習業位]요, 둘째는 이숙수의 지위[已熟修位]이며, 셋째는 초작의의 지위이다.
이 관을 닦는 것에도 다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함[略]을 좋아하는 것이요, 둘째는 자세함[廣]을 좋아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세함과 간략함[廣略]을 다 좋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직 간략함만을 좋아한다 함은 그 수행하는 이가 먼저 무덤 사이로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고 그 모양을 잘 취한 뒤에는 물러나 한 곳에 앉아서 거듭 그 모양을 관찰한다. 만일 마음이 산란하면서 명료하지 않으면 다시 무덤 사이로 가서 앞에서와 같이 관찰하며 그 모양을 잘 취한다. 이와 같이 하여 더 나아가 만일 명료하게 되어 마음이 산란하지 않으면 빨리 자신이 살고 있는 데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자리를 펴서 결가부
좌하고 몸과 마음을 조적(調適)하여 모든 개(蓋)를 여의게 하고는 먼저 취했던 모양을 기억하여 관찰하면서 승해의 힘[勝解力]으로써 자기의 몸으로 옮겨와서 푸른 어혈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골쇄(骨瑣)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골쇄 중에서는 먼저 발뼈[足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복사뼈[踝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종아리뼈[脛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무릎뼈[膝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넓적다리뼈[髀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볼기뼈[臗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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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며 그 다음에는 허리뼈[腰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척추뼈[脊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옆구리뼈[脇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어깨죽지뼈[髆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팔뚝뼈[臂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팔꿈치뼈[肘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팔목뼈[腕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손뼈[手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 어깨뼈[肩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목뼈[項骨]를 관하며 그 다음에는 턱뼈[頷骨]를 관하고 그 다음에는 이뼈[齒骨]를 관하며 맨 나중에는
두개골[髑髏]을 관한다.
그의 승해의 힘으로 이와 같이 부정관을 관찰하고 나서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湛然] 머무른다. 그리고는 다시 이 염을 바꾸어 신념주(身念住)에 들어가고 차츰차츰 나아가 법념주(法念住)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간략함을 좋아함으로 관행을 닦는 이가 부정관을 이룬다고 한다.
오직 자세함만을 좋아한다 함은 그 수행하는 이가 먼저 무덤 사이로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은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에서와 같다. 이렇게 차츰차츰 나아가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시 동안 그쳐 쉬고 나서 다시 이 생각을 바꾸어 먼저 두개골을 관하고 그 다음에는 이뼈를 관하며 차츰차츰 나아가 맨 나중에 발뼈를 관한다.
그의 승해의 힘으로 자신의 뼈를 관하고 나서 다시 바깥의 뼈[外骨]를 관하되 자기의 뼈가 곁에 있어서 점차로 하나의 평상ㆍ하나의 방ㆍ하나의 절ㆍ하나의 동산ㆍ하나의 고을ㆍ하나의 밭ㆍ하나의 시내ㆍ하나의 나라에 두루하게 되며 이렇게 차츰차츰 큰 바다의 맨 끝에 이르고 대지(大地)에까지 두루하면서 마음의 눈[心眼]이 미치는 곳에 골쇄(骨瑣)가 가득히 차게 한다.
그리고는 다시 점차로 그것을 덜어 줄이면서 나아가 오직 자기 몸의 골쇄만을 관하며 그 가운데서 점차로 다시 발뼈[足骨]를 빼 버리며 이렇게 차츰차츰 나아가 맨 뒤에는 두개골을 관한다.
그의 승해의 힘으로 이렇게 부정(不淨)한 모양을 관찰한 뒤에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잔잔히 머무른다. 그리고는 다시 이 생각을 바꾸어 신념주에 들어가고 차츰차츰 나아가 법념주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자세함을 좋아함으로 관행을 닦는 이가 부정관을 이룬다고 한다.
자세함과 간략함을 다 좋아한다 함은 그 수행하는 이가 먼저 무덤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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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은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이렇게 차츰차츰 큰 바다의 맨 끝까지 이르고 대지에 두루하게 되면서 마음의 눈이 미치는 곳까지 골쇄가 두루 가득 차게 한다.
그리고는 다시 점차로 덜어 줄이면서 차츰차츰 나아가 맨 뒤에는 두개골을 관하며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시 동안 그쳐 쉰 뒤에는 자주자주 다시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앞에서와 같이 관찰하되 이렇게 순숙(純熟)하게 된 뒤에는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잔잔히 머무른다. 그리하여 다시 이 생각을 바꾸어서 신념주에 들어가며 차츰차츰 나아가 법념주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자세함과 간략함을 좋아함으로 관행을 닦는 이가 부정관을 이룬다고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부정관을 닦을 때에 자주자주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부정한 경계를 반연하는 것인가?
[답] 관하는 마음이 자재하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니 경계에 대하여 자유자재한 이라야 자주자주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그것을 관할 수 있다. 만일 자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힘이 없게 된다.
또 저 유가사(瑜伽師)는 ‘나는 끝없이 나고 죽고 하면서부터 번뇌와 산란한 마음에 의하여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여겼으므로 이제는 깨끗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사실대로 관찰하여 순숙하게 되려고 자주자주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관하고자 한다’라고 생각한다.
또 선근(善根)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뜻[義]은 ‘나는 조그마한 부정한 모양을 취하여 곧 점차로 넓히면서 대지에 가득 차게 하며 다시 점차로 그것을 줄이면서 오직 일부분을 관할 뿐인데 어찌 경계에 대하여 세력이 크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또 그 유가사는 스스로가 힘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자주 경계에 대하여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관찰하는 것이니 끝없는 옛날부터 욕탐(欲貪)의 힘에 붙잡혔기 때문에 부정한 경계에 대하여 자유자재로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그것을 관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욕탐을 조복하여 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자주자주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부정한 경계를 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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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여기서는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所緣)은 적으나 자재(自在)는 적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 몸에 대해서만 자주자주 부정하다고 관하는 것이다.
어떤 부정관은 자재는 적으나 소연은 적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 대지(大地)에 두루하게 부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서도 자주자주 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도 적고 자재도 적다. 그것은 잠시 동안 자기 몸에 대하여 부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서 자주자주 관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이 적은 것도 아니고 자재가 적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대지에 두루하게 하면서 자주자주 부정하다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4구가 있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은 한량없으나 자재는 한량없는 것이 아니다. 곧 앞의 제2구(句)이다.
어떤 부정관은 자재는 한량없으나 소연은 한량없는 것이 아니다. 곧 앞의 제일구이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도 한량없고 자재도 한량없다. 곧 앞의 제4구이다.
어떤 부정관은 소연이 한량없는 것도 아니고 자재가 한량없는 것도 아니다. 곧 앞의 제삼구이다.
[문] 이 세 가지 부정관을 닦을 적에 어느 한도의 것을 초습업의 지위[初習業位]라 하고 어느 한도의 것을 이숙수의 지위[已熟修位]라 하며 어느 한도의 것은 초작의의 지위[超作意位]라 하는가?
[답] 간략함[略]만을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승해의 힘[勝解力]으로써 자기의 몸으로 옮겨와서 처음 푸른 어혈로부터 시작하여 이에 골쇄(骨瑣)에 이르기까지 그 온갖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하고, 골쇄에 대하여 먼저 발뼈를 관하는 것에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중에 두개골을 관하고 다시 이 가운데서 반(半)을 제외하고는 반만을
관하며 다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부만을 관하는 그 온갖 모두를 이숙수의 지위라 하며, 승해의 힘으로써 이와 같은 부정한 모양을 관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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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잔잔하게 머무르고 다시 이 생각을 바꾸어 신념주에 들어가며 차츰차츰 법념주에 들어가는 그 온갖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
자세함[廣]만을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다시 점차로 그것을 덜어 줄이면서 자기 자신의 골쇄만을 관하기까지 그 온갖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하고, 다시 그 가운데서 발뼈를 빼 버리는 것에서부터 차츰차츰 나아가 맨 나중에 두개골을 관하고 다시 이 가운데서 반을 제외하고는 반만을 관하며 다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오직 일부만을 관하는 그 온갖 모두를
이숙수의 지위라 하며, 승해의 힘으로써 이와 같은 부정한 모양을 관찰한 뒤에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잔잔히 머무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그 온갖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
자세함과 간략함[廣略]을 다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자주자주 다시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앞에서와 같이 관찰하고 그 가운데서 최후에는 다시 그것을 점차로 덜어 줄이면서 나아가 오직 자기 자신의 골쇄만을 관하는 그 온갖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한다. 다시 그 가운데서 발뼈를 빼 버리는 데서부터 점점 더 나아가 맨 나중에는 두개골을 관하며 다시 이
가운데서 반을 제외하고는 반만을 관하고 다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오직 일부만을 관하는 그 온갖 모두를 이숙수의 지위라 하며, 순수하게 성숙한 데에 이르고 나서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 머무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그 온갖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
어떤 이는 “간략함만을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승해의 힘으로써 자기 몸으로 옮겨와서 처음 푸른 어혈부터 시작하여 이에 골쇄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하고, 골쇄에 대하여 먼저 발뼈를 관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맨 나중에 두개골을 관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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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지위라 하며, 승해의 힘으로써 이와 같은 부정한 모양을 관찰한 뒤에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 머무르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와 같은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
자세함만을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깐 동안 그쳐 쉬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하고, 잠깐 그쳐 쉬고 나서 다시 이 생각을 바꾸어 먼저 두개골을 관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맨 뒤에 두개골을 관하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이숙수의 지위라 하며, 승해의 힘으로써 이와 같은 부정한 모양을 관찰하
고 나서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 머무르기까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와 같은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
자세함과 간략함을 다 좋아하는 이에 있어서는 무덤 사이에 가서 죽은 시체의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을 관찰하는 데서부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깐 동안 그쳐 쉬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초습업의 지위라 하고, 잠깐 그쳐 쉬고 나서 자주자주 다시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앞에서와 같이 관찰하면서 이에 순수하게 성숙하기까지 이와 같은 모두를 이숙수의 지위라 하며, 순수하게 성숙한데 이르고 나서 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
잠히 머무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와 같은 모두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로 이 관(觀)을 닦는 이는 무덤 사이에 가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 머무른 데에 이르기까지는 초습업의 지위와 이숙수의 지위에 다 통한다. 차별이 있는 것은 초습업의 지위에서는 그 중간에 마음의 산란이 있는 것이요 이숙수의 지위에서는 그 중간에 마음의 산란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 생각을 바꾸어서 다시 두개골을 관하고 혹은 왼쪽에서 혹은 오른쪽에서 혹은 뒤에서 혹
은 앞에서 부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어 신념주에 들어가고 차츰차츰 나아가 법념주에 들어가는 여기까지를 초작의의 지위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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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간략함[略] 등 세 가지를 좋아하는 이가 무덤 사이에 가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양미간에 생각을 잡아매어 잠잠히 머무르는 데까지는 모두 세 가지 지위[三位]에 다 통한다. 차별이 있다면 초습업의 지위에서는 마음에 산란이 있고 또한 명료하지 못한 것이요 이숙수의 지위에서는 비록 산란하지는 않다 해도 아직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초작의의 지위에서는 마음이 산란하지도 않고 또한 명료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초습업의 지위는 하품(下品)이기 때문에 관행(觀行)이 더디고 무디며 장애가 많이 있고, 이숙수의 지위는 중품(中品)이기 때문에 관행이 조금 예리하나 아직도 장애가 있으며, 초작의의 지위는 상품(上品)이기 때문에 관행이 신속하면서 전혀 장애가 없는 것이니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문] 부정관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무탐(無貪)의 선근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선정을 닦는 이[修定者]는 “지혜[慧]로써 자성을 삼는다. 왜냐하면 경으로 양(量)을 삼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 ‘눈이 빛깔을 보고 나서 그에 따라 부정을 관하면서 이치대로 사유(思惟)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관(觀)은 지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싫증[厭]으로 자성을 삼는다. 왜냐하면 소연(所緣)을 싫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 부정관은 무탐의 선근으로 자성을 삼는 것이요 지혜도 아니며 싫증도 아니다. 왜냐하면 탐심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문] 앞의 계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지혜와 상응하기 때문에 관(觀)이라고 하지만 이 체성은 무탐의 선근이다. 이것은 색(色)을 반연하는 탐심에 가까운 대치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권속들을 함께한다면 4온(蘊)과 5온이 그의 자성이 된다.
이 부정관을 세계[界]로 말하면 오직 욕계와 색계뿐이다. 무색계에는 색법(色法)을 반연하는 부정관이 없기 때문이다.
지(地)로 말하면 10지(地)이니 욕계(欲界)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4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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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靜慮)와 4근분(近分)에 있기 때문이다.
소의(所依)로 말하면 오직 욕계의 몸에 의지할 뿐이니 색계와 무색계의 몸에서는 이런 관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16행상이 아니며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오직 욕계의 색처(色處)만 반연하여 경계를 삼는다.
[문] 이 부정관은 욕계에서의 온갖 색처를 반연하는가, 일부분만을 반연하는가?
[답] 이것은 욕계의 온갖 색처를 반연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경에서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마치 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무멸(無滅) 존자가 어느 숲 속의 나무 아래서 연좌(宴坐)하고 있을 때였다. 초저녁을 지나서 모두 이름이 열의(悅意)라고 하는 단엄하고 아주 예쁜 네 명의 천녀(天女)들이 무멸 존자의 자리 앞에 와서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두 발에 머리 조아리고는 물러나 한쪽에 서서 존자에게 아뢰었다.
‘저희들 네 천녀는 네 가지 것에 변화가 자재합니다. 첫째는 바라는 대로 갖가지 으뜸가는 색신(色身)으로 변화하여 서로 사랑하는 이면 저희들은 모두 재미있게 즐기면서 받들어 섬깁니다. 둘째는 바라는 대로 갖가지 훌륭한 의복을 변화로 만듭니다. 셋째는 바라는 대로 갖가지 으뜸가는 꾸미개[莊嚴具]를 변화로 만듭니다. 넷째는 바라는 대로 갖가지 으뜸가는 꽃과 향과 음식과 진기한 장난감 등의 모든 욕락(欲樂)의 기구들을 변화로 만듭니다. 존자여, 저희
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 때에 존자는 ‘이 네 천녀가 일부러 나타나서 나를 혼란시키고 어지럽게 하는구나. 나는 그들에 대하여 부정관을 일으켜야겠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초정려에 들었으나 그것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렇게 차츰차츰 하여 마침내 제4 정려에 들었지만 역시 일으킬 수 없었으므로 곧 ‘이 네 천녀에게는 갖가지 색깔[色]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부정하다고 관할 수 없구나. 그들이 만일 순수하게 한 가지 색깔이 된다면 나는 반드시 관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하고 드디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누이여, 모두가 나를 위하여 청색(靑色)의 몸을 나타낼 수 있겠는
가?’
그때 천녀들이 청색의 몸을 나타내었으나 존자는 부정하다고 관할 수 없었다. 황색과 적색으로 나타내었어도 여전히 관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만일 백색으로 된다면 해골이란 생각[骸骨想]에 수순한다. 그들이 만일 다시 백색이 되어 준다면 나는 반드시 그들에 대하여 부정함을 관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곧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누이여, 다시 나를 위하여 몸을 백색으로 변해 줄 수 있겠는가?’
곧 그녀들은 변해주었지만 역시 부정하다고 관할 수는 없었으니 천녀들의 형색이 산뜻하여 마치 묘한 광명과 같았으므로 싫증을 일으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문] 무멸 존자는 무엇 때문에 천녀들로 하여금 청ㆍ황ㆍ적ㆍ백의 네 가지 색깔로 바꾸도록 하였는가?
[답] 모든 색의 변하고 파괴되는 형상을 관하려고 한 까닭이며 또 색의 형상을 옮기고 바꾸면 싫증을 일으키기 쉬웠기 때문이다.
또 청색은 청어라는 생각[靑瘀想]에 수순하기 때문이요 황색의 농란이란 생각[膿爛想]에 수순하기 때문이며 적색은 이적4)이란 생각[異赤想]에 수순하기 때문이요 백색은 해골이란 생각[骸骨想]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또 청ㆍ황ㆍ적ㆍ백은 뭇 색깔의 근본이고 또 쟁론(諍論)이 없기 때문에 바뀌고 변하게 되면 자기의 마음에 싫증을 일으킬 수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무멸 존자는 그녀들의 색깔이 미묘하여 아무리 관해도 부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킬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눈을 감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존자에게는 도무지 염심(染心)이 없는 것을 알고는 부끄러워하면서 발에 예배하고 홀연히 없어져 버렸다. 마치 두 역사(力士)가 서로 잡고 씨름을 할 적에 서로 힘이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손을 놓아버리고 물러나는 것처럼 이 천녀와 무멸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이미 그렇다면 어떻게 “부정관은 욕계의 온갖 색을 반연한다”고 말하
4) 이적이라 함은 부패하면서 고름 등으로 불그스럼해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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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인가?
[답] 무멸은 두루 욕계의 온갖 색에 대해서 부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 해도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다. 마치 부처님과 독각과 사리자 등과 근기가 예리한 성문 등은 모두 관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문] 부처님의 색신(色身)을 반연하여 부정관을 일이키는 이도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일으킬 수 있는 이는 없다. 부처님의 색은 미묘하고 지극히 산뜻하여 마치 청정한 광명과 같으므로 싫증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부처님은 스스로는 반연하여 부정관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 밖의 다른 이는 일으킬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부정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을 반연[緣]하여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색의 과환(過患)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것이다. 색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것은 부처님의 몸을 반연할 수 있지만 색의 과환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것은 부처님의 몸을 반연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정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상의 경계[共相境]요, 둘째 자상의 경[自相境]이다. 공상의 경계면 부처님의 몸을 반연할 수 있지만 자상의 경계면 부처님의 몸을 반연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 부정관을 염주(念住)로 말하면 신념주(身念住)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근본의 염주가 아니고 다만 신념주의 가행(加行)이 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지(智)로 말하면 세속지(世俗智)와 함께하고 삼마지(三摩地)로 말하면 삼마지와는 함께하는 것이 아니며 근(根)과 상응하는 것으로 말하면 통틀어 세 가지 근만이 상응한다고 설명할 뿐이니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로 말하면 이것은 3세(世)이어서 과거는 과거를 반연하고 현재는 현재를 반연하며 미래에 생기는 법[生法]에서는 미래를 반연하고 만일 생기지 않는 법[不生法]이면 3세를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이것은 선이면서 세 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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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연하고 계(繫)ㆍ불계(不繫)로 말하면 이것은 욕계계와 색계계이면서 욕계계를 반연하며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이것은 비학비무학이면서 비학비무학을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과 끊어야 할 것이 아닌[不斷]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면서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을 반연한다.
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로 말하면 오직 뜻을 반연할 뿐이며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으로 말하면 자상속ㆍ타상속을 반연한다.
가행득(加行得)ㆍ이염득(離染得)ㆍ생득(生得)으로 말하면 가행득도 있고 이염득도 있으나 생득은 아니다. 이염득이라 함은 염(染)을 여읠 때에 닦아 얻기 때문이요, 가행득이라 함은 가행에 의하여 앞에 나타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가행이 없고 독각은 하품의 가행이며 성문은 혹은 중품의 가행이기도 하고 혹은 상품의 가행이기도 하다. 이생(異生)은 상품의 가행에 의하여 앞에 나타나 있게 된다.
전에 얻은 것인가 전에 얻지 못한 것인가로 말하면 전에 얻은 것과 전에 아직 얻지 못한 것에 다 통한다. 성자(聖者)와 보살로서의 후유(後有)의 이생은 전에 얻은 것과 전에 아직 얻지 못한 것에 다 통하지만 그 밖의 다른 이생은 오직 전에 얻은 것만이다.
문소성(聞所成)ㆍ사소성(思所成)ㆍ수소성(修所成)으로 말하면 세 가지에 다 통하며 의지(意地)와 5식신(識身)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오직 의지에만 있을 뿐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마치 계경에 “눈이 빛깔을 보고 나서 그에 따라 부정(不淨)을 관하면서 이치대로 사유[如理思惟]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5식(識)을 문(門)으로 삼아 의식(意識)을 끌어내어 부정관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지만 부정관은 오직 의식에만 있다. 마치 의근행(意近行)5)은 오직 의지에만 있어서 역시 5식으로 말미암아 끌어내므로 계경에서도 “눈이 빛깔을 본 뒤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뜻[意]이 법을
5) 의근행이라 함은 5수(受) 중 심수(心受)에 속한 희(喜)ㆍ우(憂)ㆍ사(捨)의 세 가지 느낌이 제6 의식의 근연(近緣)이 되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에서 조작[行]하게 하는 것을 의근행이라 하며 따라서 이 의근행은 다만 제6 의식에서만 작용하는 것이나 이 의근행을 일으키는 절차를 말하면 마치 좋아할 만한 빛깔을 보고 안식을 일으키며 이것에 의하여 기뻐하는[喜] 의근행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앞의 5식(識)을 인발연(引發緣)으로 삼는다. 이
와 같이 희ㆍ우ㆍ사의 세 가지는 각각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6경(境)을 반연하여 6의근행을 일으키므로 통틀어 18의근행이 되는 것이니 요는 앞의 5식을 매개(媒介)로 하여 제6 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된다.(『구사론』 제16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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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뒤에 희(喜)ㆍ우(憂)ㆍ사(捨)의 여섯 가지 근행을 일으킨다”라고 한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이 부정관도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반연하는가?
[답] 이것은 오직 색(色)을 반연할 뿐이며 나머지 다섯 가지는 반연하지 않는다.
[문] 만일 그렇다면 경의 말씀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마치 계경에 “눈이 빛깔을 본 뒤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뜻이 법을 안 뒤에 그것에 따라 부정을 관하면서 이치대로 사유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6식(識)의 문으로 말미암아 부정관을 이끌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지만 부정관은 색을 반연하는 것이요, 그 밖의 나머지를 반연하지 않는다.
또 공통한 대치(對治)에 의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부정관은 비록 색만을 반연한다 해도 여섯 가지 경계[六境]를 반연하는 탐(貪)을 대치하는 것이니 마치 색탐(色貪)에 가려진 것은 부정관을 닦아서 그것을 조복하여 없애는 것처럼 성탐(聲貪) 등에 가려진 것도 이 관을 닦아서 그것을 조복하여 없애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 먼저 색처(色處)에 대하여 부정관을 일으켜 모든 색을 싫어하고 그 뒤에 색에 의한 성(聲) 등의 다섯 가지 경계에 대하여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니 성 등을 싫어하는 것이 비록 그 밖의 다른 관이요 부정관은 아니라 해도 부정관으로 끌어낸 것이기 때문에 부정관이라 한다.
또 먼저 색처를 반연하여 부정관을 닦아 순숙(純熟)하게 되고나서 그 뒤에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대하여도 싫어하려 할 적에 만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만일 할 수 없으면 도로 색처를 반연하여 부정관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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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하려 할 적에 먼저 영루(營壘)를 안전하게 해 놓고 그런 뒤에 나가서 싸우다가 만일 이기면 좋지만 이기지 못하면 도로 영루로 철수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부정관은 색을 반연하며 그 밖의 다른 것은 반연하지 않는다.
또 먼저 색처에 대하여 부정관을 일으키고 그 뒤에 성처(聲處) 등에 대하여 그 밖의 싫어하는[厭] 관을 일으키는 것이니 그것과 이 싫어하는 관의 행상은 같기 때문에 역시 그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또 부정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根本)의 것이요 둘째는 등류(等流)의 것이다. 만일 근본이면 오직 색처만 만연할 뿐이나 만일 등류이면 성(聲) 등과 나아가 유루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을 다 반연한다.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오직 근본의 부정관만을 말하기 때문에 “색처를 반연한다”라고 하지만 계경에서는 근본과 등류의 부정관을 다 말하기 때문에 “빛깔을 본 뒤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뜻이 법을 안 뒤에 그에 따라 부정관을 관하면서 이치대로 사유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 누가 이 부정관을 일으키는가?
[답] 성자와 이생이 다 같이 실제로 일으키는 것이다. 성자라 함은 온갖 학위(學位)와 무학위(無學位)에 다 통한다.
[문] 어느 곳에서 이 부정관을 일으키는가?
[답] 오직 인간의 3주(洲)에서만 처음에 일으키는 것이요, 천상에는 푸른 어혈[靑瘀] 등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6욕천(欲天)은 오직 나중에 일으킬 뿐이다.
어떤 이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모두가 인취(人趣)에서일 뿐이요 6욕천 안에서는 푸른 어혈 등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도무지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방(房) 등의 가운데서 뼈 등이 가득 차 있다고 관하는 이런 부정관은 무엇으로 소연(所緣)을 삼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자기 몸의 뼈 등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일찍이 무덤 사이에서 보았던 뼈 등을 반연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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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
어떤 이는 “방 등의 그 안에 있는 모든 공계(空界)의 색을 반연한다”라고 말한다.
[評] “이것은 가상(假想)의 승해작의(勝解作意)와 상응하는 무탐(無貪)인 것이므로 좋아하는 것에 따라 반연해도 모두가 허물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이것은 온갖 골쇄(骨瑣)가 아닌 것 등을 관하면서 골쇄 등으로 삼는데 어찌 뒤바뀐 일[顚倒]이 아니겠는가?
[답] 이것은 선(善)이기 때문이요 여리작의(如理作意)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며, 무탐의 선근으로 자성을 삼기 때문이요 성도(聖道)의 뛰어난 가행을 끌어내기 때문이며, 번뇌를 조복하기 때문이요 사랑스런 과[愛果]를 받기 때문에 비록 사실대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뒤바뀐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부정관도 뒤바뀐 것이라 하는 것이니 부정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관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불선(不善)이 아닌가?
[답] 두 가지 연유로 말미암아 불선이라 한다. 첫째는 소연이 뒤바뀐 것[所緣倒]이요, 둘째는 자성이 뒤바뀐 것[自性倒]이다. 이 부정관은 비록 소연은 뒤바뀐 것일지라도 자성은 뒤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은 아니다.
또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불선이라 한다. 첫째는 소연이 뒤바뀐 것[所緣倒]이요 둘째는 의요가 뒤바뀐 것[意樂倒]이다. 이 부정관은 비록 소연은 뒤바뀐 것일지라도 의요는 뒤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은 아니다.
또 계경에서 “다섯 가지 현견의 등지[五現見等至]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어떤 비구가 자기 몸에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不淨)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머리칼ㆍ터럭ㆍ손톱과 발톱ㆍ이ㆍ먼지ㆍ때[垢]ㆍ피부ㆍ살ㆍ뼈ㆍ골수[髓]ㆍ힘줄ㆍ맥ㆍ간ㆍ허파ㆍ지라ㆍ콩팥ㆍ대장과 소장ㆍ위장ㆍ쓸개ㆍ생장과 숙장[生熟臟]ㆍ가래[痰]ㆍ열(熱)ㆍ심장ㆍ배ㆍ똥ㆍ오줌ㆍ콧물ㆍ침ㆍ땀ㆍ눈물ㆍ고름ㆍ피ㆍ비게ㆍ기름ㆍ뇌ㆍ막(膜) 등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창고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깨ㆍ쌀ㆍ콩 등
갖가지 곡물이 그 안에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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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은 것이니 이것을 첫 번째 현견의 등지라 한다.
또 어떤 비구가 자기 몸에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머리칼ㆍ터럭 등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다시 관하면서 피부ㆍ살ㆍ피 등을 제거하고 오직 해골만을 관하되 식(識)은 그 가운데서 지어갈[行] 뿐이다. 이것을 두 번째 현견의 등지라고 한다.
또 어떤 비구가 자기 몸에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머리칼ㆍ터럭 등 앞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다시 관하면서 피부ㆍ살ㆍ피 등을 제거하고 오직 해골만을 관하되 식은 그 가운데서 지어갈 뿐이며 또한 금세(今世)에도 머무르고6) 또한 후세(後世)에도 머무른다. 이것을 세 번째 현견의 등지라 한다.
또 어떤 비구가 자기 몸에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머리칼 터럭 등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다시 관하면서 피부ㆍ살ㆍ피 등을 제거하고 오직 해골만을 관하되 식은 그 가운데서 지어갈 뿐이며 금세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만 후세에만 머무른다7). 이것을 네 번째 현견의 등지라 한다.
또 어떤 비구가 자기 몸에는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부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관찰하는 것이니 머리칼ㆍ터럭ㆍ등 앞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다시 관하면서 피부ㆍ살ㆍ피 등을 제거하고 오직 해골만을 관하되 식은 그 가운데서 지어갈 뿐이며 금세에도 머무르지 않고 후세에도 머무르지 않는다8). 이것을 다섯 번째 현견의 등지라 한다.
[문]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현견의 등지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6) 또한 금세에도 머무른다고 함은 해골(骸骨)을 관하면서 “이 해골의 주인된 사람은 금세에도 있다. 또는 내세에도 있을 것이다”라고 상정(想定)하는 것을 말한다.
7) 금세에는 머무르지 않고 다만 후세에만 머무른다고 함은 이 해골 주인은 ‘이미 불환과(不還果)를 이룬 이이므로 다시는 이 세상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8) 금세에도 머무르지 않고 후세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함은 “이 분은 이미 해탈하여 마친 이구나”라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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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지혜[慧]로써 자성을 삼는 것이니 사실대로 관찰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삼마지(三摩地)로써 자성을 삼는 것이니 등지(等至)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무탐(無貪)으로 자성을 삼는 것이니 부정을 관찰하면서 탐욕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觀察)과 등지를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것으로부터 생기고 그것을 내기 때문이며 또 선정[定]ㆍ지혜[慧]와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니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현견의 등지라 하는가?
[답] 현견(現見)은 눈[眼]을 말하니 눈이 빛깔을 보고 이것을 끌어내기 때문에 실제로 본다[現見]는 이름을 붙이며 등지(等至)에 의하여 생기고 등지를 내며 혹은 또 이것은 등지와 상응하기 때문에 등지라고 한다.
[문] 다섯 가지 가운데서 뒤의 네 가지도 식(識)에서 관하는데 어떻게 현견은 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가?
[답] 눈으로 모든 부정한 물건을 실제로 보고서 차츰차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현견의 등지를 끌어내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뒤의 네 가지도 식을 반연한다 해도 도리로 보아 어긋나는 것은 없다.
[문] 누구에게 이 다섯 가지 현견의 등지가 있는가?
[답]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생이나 성자에게 모두 있을 수 있고 세 번째는 예류자(預流者)와 일래자(一來者)에게 있게 되며 네 번째는 불환자(不還者)에게 있게 되고 다섯 번째는 아라한에게 있게 된다.
마치 계경에 “사리자가 말하였다. ‘세존께서 일으키는 현견의 등지는 그 밖의 다른 이로서는 통달하여 알 것이 없는 경계이기 때문에 위없다[無上]고 말하는 것이니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 등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얻게 되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부정관을 위없다고 하는 것인가?
[답] 온갖 소연(所緣)의 경계를 조복하기 때문에 위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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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여실한 관[如實觀]이기 때문에 위없다고 한다. 머리칼은 머리칼이라고 관하고 터럭은 터럭이라고 관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다.
[評]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와 같이 말하면 세존께서 관하신 많은 경계의 부정관을 오직 적은 경계만을 관하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실로 머리칼과 터럭 등은 다만 욕계의 일부분의 물질에 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말이 옳다고 해야 한다. 온갖 것을 조복하기 때문에 위없다고 하는 것이며 성문이나 독각은 온갖 색처를 통틀어 조복하면서 모두가 부정한 것이라고 하지 못한다. 무멸(無滅)이 천녀들의 색을 부정한 것이라고
관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부처님 몸의 색을 관하면서 부정하다고 할 이가 없기 때문이다.
[論] 또 세존께서 “대목건련(大目乾連)이여, 저사범천(底沙梵天)은 여섯 번째의 무상(無相)에 머무르는 이를 말하지 않더냐?”라고 말씀하셨다.9)……(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말씀하셨다.
“세존께서 어느 때 실라벌(室羅筏)의 서다림 급고독원(誓多林給孤獨園)에 계셨다. 초저녁을 지날 무렵에 어떤 세범천이 광명을 번쩍거리며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섰다.
이때 한 범천이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선(大仙)이시여, 아셔야 합니다. 사계다국(娑計多國)의 많은 비구니들은 오늘 밤에 목숨을 마칠 것입니다.’
9) 앞에서 설명한 부정관에 이어 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견도(見道)의 공덕을 높이 선양하는 문단이다. 곧 견도위의 사람에 대해서는 수신행자(隨信行者)이거나 수법행자(隨法行者)이거나 간에 범천(梵天)조차도 그 경계를 엿볼 수 없다는 경의 말씀에 의하여 밝히려고 하는 문단이다. 대개 견도는 4제(諦)를 관한 무루의 지혜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여기서 제6 무상주라 한 까닭은 성자(聖者)의 7종 중에서 수신행ㆍ수법행의 두 가지는 이 제6위(六
位)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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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을 하고는 물러나 한쪽에 섰다.
두 번째 범천이 다시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선이시여, 아셔야 합니다. 그 많은 비구니들은 유여의(有餘依)로서 멸도(滅度)할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물러나 한쪽에 섰다.
세 번째 범천이 다시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선이시여, 아셔야 합니다. 그 많은 비구니들은 무여의(無餘依)로서 반열반(般涅槃)할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물러나 한쪽에 섰다.
이때에 세 범천은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두 발에 예배하고는 홀연히 없어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이 되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이 있는 데로 가셔서 자리를 펴고 앉으신 뒤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제 초저녁이 지날 무렵에 어느 세 범천이 광명을 번쩍거리며 나에게 와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홀연히 없어져 버렸느니라.’
그때에 구수(具壽) 대목건련이 그 대중 안에 있다가 ‘어떠한 범천들이기에 이런 지견(智見)이 있어서 유여의ㆍ무여의에 머무르는 이를 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고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 장사가 팔을 굽혔다 펴는 동안에 서다림에서 사라져 범천 세계에 이르러 저사범(底沙梵)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와 삼마지로부터 일어나 의복을 정리하고 저사범이 있는 데로 나가서 물었다.
‘어떠한 범천이기에 이런 지견이 있어서 유여의ㆍ무여의에 머무르는 이를 압니까?’”
[문] 대목건련은 뛰어난 지견이 있어서 저사범보다 여러 구지(俱胝) 배(培)가 더하는데 무엇 때문에 가서 저사범에게 물은 것인가?
[답] 대목건련은 알면서도 일부러 물은 것이니 마치 부처님께서 때로는 아시면서도 일부러 물은 것과 같다.
[문] 그 밖의 다른 범천으로서 저사범보다 나은 이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저사범에게만 물었는가?
[답] 이 범천은 본래 이 대목건련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여서 서로 무간한 사이였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또 그 저사범은 불환과(不還果)에 머무른 이었는데도 다른 범중천(梵衆天)으로서 아직 모르는 이도 있었으므로 그의 덕을 드러내어 다른 범천들이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물은 것이다.
“그때에 저사범은 존자에게 대답하였다.
‘곧 범중천에는 이런 지견이 있어서 유여의와 무여의에 머무르는 이를 압니다.’
대목건련이 또 그에게 물었다.
‘여러 범중천들에게는 모두 이와 같은 뛰어난 지견이 있습니까?’
저사범이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모두 이런 뛰어난 지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범중천으로서 하늘의 장수(長壽)와 묘색(妙色)과 명예(名譽)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해하지 않으면서 뛰어난 벗어남[出離]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면 이런 지견이 없지만 만일 범중천으로서 하늘의 장수와 묘색과 명예에 대하여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면서 또한 뛰어난 벗어남을 사실대로 아는 이면 이런 지견이 있습니다.’
존자가 또 물었다.
‘그 하늘들은 어떻게 유여의와 무여의에 머무르는 이를 압니까?’
저사범이 대답하였다.
‘만일 어떤 비구가 아라한이 되어 그가 구해탈(俱解脫)이면 그 범중천은 ≺지금 이 대덕은 구해탈이다. 나아가 몸이 있으면 사람ㆍ하늘[人天]들이 모두가 뵈옵다가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치면 도무지 뵙는 이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아라한이 되어 구해탈이 아니고 혜해탈(慧解脫)이면 그 범중천은 ≺지금 이 대덕은 혜해탈이다. 나아가 몸이 있으면 사람ㆍ하늘들이 모두 뵈옵다가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치면 도무지 뵙는 이가 없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아라한도 아니고 구해탈도 아니고 혜해탈도 아니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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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身證)이면 그 범중천은 ≺지금 이 대덕은 신증이다. 장차 뛰어난 선근을 닦고 선우(善友)를 친근하겠구나. 만일 수순하는 방사(房舍)와 살림[資具]을 얻으면 반드시 번뇌가 다하고 무루(無漏)의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증득하여 현재 법[現法] 안에서 스스로 통탈하여 증득함[證]이 구족하게 머무를 것이며 또 스스로 나의 생(生)은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다 갖추었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구나≻라고 생
각합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비록 신증은 아니라 하더라도 견지(見至)이면 그 범중천은 ≺지금 이 대덕은 견지이다. 장차 뛰어난 선근을 닦고 선우를 친근하겠구나.……(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비록 견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승해(信勝解)이면 그 범중천은 ≺지금 이 대덕은 신승해이다. 장차 뛰어난 선근을 닦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후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저사범천(底沙梵天)은 이렇게 말을 하고는 잠자코 있었다.”
[문] 저사는 무엇 때문에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은 말하지 않았는가?
[답] 만일 보특가라로서 그가 그 경계이면 그도 말했을 것이나 수신행ㆍ수법행은 저사의 경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타심지(他心智)가 있고 견도(見道)를 아는 이면 결정코 먼저 무루의 법지(法智)를 일으키지만 상계(上界)에 나는 이는 무루의 법지가 반드시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수신행ㆍ수법행은 저사의 경계가 아니다.
또 만일 보특가라로서 범천에 있으면서도 그런 종류가 있으면 그는 말했을 것이나 수신행ㆍ수법행은 범천의 처소에서는 그런 종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대목건련 존자는 저사의 법어(法語)를 들은 뒤에 기뻐 뛰면서 가르쳐 준 것을 드러내고 격려하고 기뻐하고는 은근히 이별하면서 삼마지에 들어가 장사가 팔을 굽혔다 펴는 잠깐 동안에 범천에서 사라져 서다림의 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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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있는 대중 속에 홀연히 나타나 삼마지로부터 일어나서 부처님께로 나아가 두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위의 일들을 자세히 세존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곧 물으셨다.
‘대목건련이여, 저사범천은 여섯 번째의 무상(無相)에 머무르는 이를 말하지 않더냐?’
목련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말을 하고 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금이 바로 적절한 때이옵니다. 대중들을 위하여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를 연설하시어 비구들로 하여 들은 뒤에 받아 지니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지극히 훌륭한 뜻을 지으라.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겠노라. 만일 어떤 비구가 온갖 모양[相]에 대하여 다시는 사유(思惟)하지 않으면서 모양 없는 마음[無相心]의 삼마지를 증득하여 구족하게 머무르면 이것을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 하느니라.”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그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 그 경에 대하여 그 뜻을 분명히 모르고 곧 멸제(滅諦)를 반연하여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든다고 집착하면서 “견도(見道)를 무상주(無相住)라 하기 때문이요, 오직 멸제 중에서만 모든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므로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견도는 다만 멸(滅)만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을 여섯 번째의 무상(無相)에 머무르는 이[無相住者]라 하는가?
[答]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을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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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떻게 수신행ㆍ수법행을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답] 온갖 성자(聖者)에는 통틀어 일곱 가지10)가 있다. 저사범천(底沙梵天)은 이미 다섯 가지는 말했으면서도 아직 수신행ㆍ수법행자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論]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무상(無相)은 여기에 있다거나 저기에 있다고 세울 수도 없고 시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요, 또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또는 도류지인(道類智忍)에서도 이 무상을 여기에 있다거나 저기에 있다고 세울 수도 없고 시설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하여 하나로 세우는 것인가?
[답] 곧 이 글에서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무상이어서 세울 수도 없고 시설할 수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서로 유사하지 않은 마음[不相似心]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요, 이 두 가지에는 다 같이 15심(心)이 있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의 심품(心品)에는 현행(現行)이 똑같기 때문이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재빠른 도[速疾道]이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에는 의요(意樂)가 다 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미세한 도[微細道]이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세우거나 시설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
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깨닫기 어려운 도이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실제로 보지[現見] 못하기 때문이다.
[문] 이 두 가지는 온갖 것에 대하여 모두 실제로 보지 못하는가?
10) 성자의 일곱 가지라 함은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과 신승해(信勝解)와 견지(見至)와 신증(信證)과 혜해탈(慧解脫)과 구해탈(俱解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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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렇지 않다. 성문이나 독각에게서는 실제로 보지 못한다 해도 세존께서는 이것을 실제로 보시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는 지(地)도 같고 도(道)도 같고 품(品)도 같고 염을 여의는 것[離染]도 같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로 세운 것이다.
[문] 앞의 다섯[五]은 이미 무상에 머무르는 것에 속한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것을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른다고 하는가?
[답]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 함은 성자 중에서 여섯 번째의 성자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무상에 머무르는 이라고 한 것이요, 무상에 머무르는 것에 통틀어 여섯 가지가 있어서 이것을 여섯 번째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마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다섯 번째의 호랑이[虎]를 살해한다 할 적에 앞의 넷도 호랑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요, 살해할 법에 통틀어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 다섯 번째를 호랑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하다.
또 마치 다른 곳에서 여섯 번째의 증상왕(增上王)이라고 할 적에 앞의 다섯도 왕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요, 증상(增上)이라는 법에 통틀어 여섯 가지가 있고 증상왕은 여섯 번째인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으니 무상에 머무르는 이는 여섯 번째이지 여섯 모두가 무상에 머물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무상(無相)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설명하는데 혹은 공(空)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모양이 없는 것[無相]을 말하기도 하며 혹은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하기도 한다. 그 까닭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지온(智蘊)에서의 설명과 같다.
여기서의 무상은 바로 견도(見道)의 뜻을 설명한 것이니 앞에서의 해석과 같다.
또 지극히 신속하여 분명히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문의 타심지(他心智)로는 극히 가행(加行)을 베푼다 해도 두 가지 마음[二心]만을 알 뿐이니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와 상응하는 마음이다. 만일 세 번째를 알려고 하면 이에 제1611)을 알게 된다.
만일 독각의 타심지이면 극히 가행을 베푼다 해도 다만 네 가지 마음[四
11) 제16 도류지(道類智)는 수도(修道)에 딸린 초과(初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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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만을 알 뿐이니 처음 두 가지 마음과 멸류지인(滅類智忍)과 멸류지(滅類智)와 상응하는 마음이다.
어떤 이는 “독각은 다만 세 가지 마음[三心]만을 알 뿐이니 처음의 두 가지 마음과 집류지(集類智)와 상응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오직 부처님의 타심지만이 차례로 두루 아시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견도를 무상(無相)이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1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7) 무의납식 ③
[論]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법륜(法輪)을 굴리어 교진나(憍陳那) 등 비구들이 법을 볼 적에 땅의 신[地神] 야차[藥叉]는 큰 소리를 내어 두루 고하였다.
‘세존께서 지금 바라니사(婆羅泥斯) 선인의 녹원(鹿園)에 계시면서 세 번 법륜을 굴리어[三轉法輪] 12행상(行相)을 갖추셨도다.’”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에 땅의 신 야차는 큰 소리를 내어 두루 고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했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지 않았으며 땅 신은 스스로 지견(智見)이 있어서 고한 것인지 다른 이로 인하여 알고 나서 큰 소리를 내어 두루 고한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하지 않은 것은 지금 말해야 한다.
1)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에 다섯 비구를 위하여 맨 처음 법륜을 굴리셨고 이에 의하여 다섯 비구는 법안(法眼)이 청정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지신(地神)이 이를 천하에 선언했다는 것이 경전에 전하는 설명이다.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지신이 이를 천하에 선언했는가의 이유를 밝히려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한 법을 듣고 과(果)를 얻은 공덕이 크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 이 문단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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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경에서 “땅의 신이 큰 소리를 내어 부처님께서 녹원에 계시면서 법륜을 세 번 굴리셨다고 두루 고했다”고 말씀하면 혹 어떤 이는 ‘지신은 스스로 현량(現量)의 지견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아는 것일까?’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는 다만 비량(比量)의 지견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생처득지(生處得智)는 법륜을 굴리는 데에 현경(現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그 땅 신에게 바른 지견[正智見]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고 비구가 법을 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答] 모른다.
이 일은 심히 매우 것이어서 그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그는 어떻게 하여 아는가?
다섯 가지 인연[五緣]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다섯 가지 인연 중 첫 번째이다.
[論] 세존을 믿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세속의 마음[世俗心]으로 ‘내가 법륜을 굴려 비구가 법을 보았다’라고 일으킨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가 안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일 무루의 마음이나 혹은 일찍이 얻지 못한[未曾得] 세속의 마음2)을 일으킨다면 온갖 유정은 알 수 있는 이가 없겠지만 만일 일찍이 얻
2) 일찍이 얻지 못한 세속의 마음이라 함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일찍이 일으켰던 일이 없는 상등(上等)의 세속지(世俗智)를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일으켰던 일이 있는 세속의 지혜를 재차 일으키게 된 것을 일찍이 얻은 세속의 마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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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曾得] 세속의 마음을 일으킬 때에는 모든 유정들은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속의 마음을 일으킬 때에 만일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도 알게 하시려 하면 사노(蛇奴) 등도 환히 알 수 있고, 만일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도 알지 못하게 하시려 하면 사리자 등 맨 끝의 제4 정려에 들어서 묘한 원지(願智)를 일으키는 이도 알 수 없으며, 만일 악취(惡趣)도 알게 하시려 하면 원숭이 등도 환히 알 수 있고, 만일 선취(善趣)도 알지 못하게 하시려 하면 사람ㆍ하늘 등도 아는 이가 없다.
지금 부처님은 땅 신[地神]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일찍이 얻은 세속의 마음을 일으켜 “내가 법륜을 굴려 비구가 법을 보았다”라고 하신 것이니 땅 신이 그것을 알고 나서 큰소리를 내어 두루 고한 것이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이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신 것인가?
[답] 3무수겁(無數劫) 동안 갖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닦고 쌓은 것은 유정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법륜을 굴리시고 비구가 법을 본 것은 곧 옛날의 가행(加行)이 이제야 비로소 그 과(果)를 얻었는지라 몹시 환희심을 내셨으니 이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옛날에 큰 서원을 세운 것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과를 얻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옛날에 큰 서원을 세운 것은 다른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 과를 얻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기대한 승의(勝義)는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일으키신 것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두 번째이다.
[論] 혹은 부처님께서 다른 이에게 “내가 법륜을 굴려 비구가 법을 보았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가 들은 것이다.
만일 마음에서 선교(善巧)를 얻은 이면 부처님께서 마음을 일으키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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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알게 되지만 만약 다만 말에서 선교를 얻은 이면 부처님께서 다른 이에게 말씀하셔야 비로소 환히 알게 된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른 이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시는가?
[답] 세존께서는 잘 설법한 그 안의 말씀은 정성스런 진리[誠諦]이므로 하나같이 보고[一見] 하나같이 즐기면서[一樂] 여러 사람이 모두 서로가 같이 인정함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3무수겁 동안 많은 고행을 닦은 것은 유정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 과(果)를 얻었으므로 몹시 환희심을 내면서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스스로 96종의 모든 도법(道法)3)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서 미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법은 진실로 벗어날[出離] 수 있는 것이요 큰 신통 변화[大神變]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교진나(憍陳那) 등에게 진실한 공덕을 나타내 보이고 또한 세간의 좋은 복전[良福田]이라는 것을 보이시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시는 것이다.
또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에 대하여 깊이 공경하면서 믿게 하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스스로가 법의 간탐[法慳]을 멀리 여의고 희유(希有)한 법에 대하여 스승으로부터 전수[師傳]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이미 대사의 법[大士法]을 소유하셨고 그 밖의 다른 도(道)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스스로가 총명한 상[相]을 소유하셨고 그 밖의 다른 도가
3) 96종의 모든 도법이라 함은 부처님 시대에 있던 외도(外道)의 총계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개개의 명칭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 병사왕(甁沙王)의 아우 가류(迦留)가 해마다 96종의 사문(沙門)을 두루 청했다고 하는 『오분률(五分律)』 제7권의 기사(記事)에 있는 96이라는 수(數)의 이름이 그 기인(起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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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한 것이니 마치 계경에서 “모든 총명한 것에는 세 가지 상[三相]이 있다. 첫째는 사유할 것[所思]을 잘 사유하고, 둘째는 지을 것[所作]을 잘 지으며, 셋째는 말할 것[所說]을 잘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세 번째이다.
[論] 혹은 대덕(大德) 천선(天仙)으로부터 듣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에 다섯 비구[五比丘]는 법을 본 것이다.
[문] 어떠한 이를 대덕 천선이라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정거천(淨居天)이다”라고 말하고 어느 다른 논사는 “욕계천(欲界天)으로서 이미 진리를 본 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어떤 장수천(長壽天)이 일찍이 과거 모든 불ㆍ세존께서 법륜을 굴리는 형상을 보았는데 지금 세존께서 그와 같은 형상이 있는 것을 보고 기뻐 뛰면서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하자 땅 신[地神]이 듣고는 큰 소리를 내어 두루 알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네 번째이다.
[論] 교진나 존자 등이 세속의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어 우리가 법을 보았다”라고 하므로 이로 말미암아 그가 안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세속의 마음을 일으킨 것인가?
[답] 이미 20종의 살가야견(薩迦耶見)을 해쳤기 때문이요, 이미 온갖 악취의 인(因)을 끊었기 때문이며, 끝없는 생사에서 지금 그 끝에 있기 때문이요, 끝없는 고해(苦海)에서 지금 그 끝에 있기 때문이며, 이미 성스러운 진리[聖諦]를 보았기 때문이요, 정정취(正定聚)에 들었기 때문이며, 깊이 환희심을 내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또 옛날에 일으켰던 크게 맹세한 대원(大願)과 모든 고행이 이제야 그 과(果)를 이루었기 때문에 몹시 기뻐하면서 이런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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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다섯 번째이다.
[論] 혹은 그들이 남에게 말하는 것을 땅 신이 들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인가?
[답] 존자는 잘 설법한 그 안의 말씀은 정성스런 진리이므로 하나같이 보고 하나같이 즐기면서 여러 사람이 모두 서로가 같이 인정하게 하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세존은 3무수겁 동안 많은 고행을 닦았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 과를 얻으셨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해서 알게 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법은 96종의 모든 도법(道法)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부처님의 법은 진실로 벗어날 수 있고 큰 신통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공경하고 믿게 하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한량없는 유정들에게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끌어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한량없는 게으른 유정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여래께서는 지극한 고행을 버리고 큰 과[大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또 자기 몸이 부처님 법에 귀의한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이다.
법륜을 굴린다[轉法輪]는 뜻은 뒤에 나오는 정온(定蘊) 가운데 불환납식(不還納息)에서 자세히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다.
[論] 또 계경에서 말씀하셨다.4)
“어떤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을 때는 삼십삼천(三
4) 앞에서도 처음 법륜을 굴렸을 때에 땅 신이 따라 기뻐하면서 천하에 선언한 것을 설명했는데 경전에 따르면 비구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을 때에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모든 하늘들이 한데 모여 그를 널리 선창(宣唱)하면서 따라 기뻐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대체로 앞에서의 설명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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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天)이 자주자주 선법당(善法堂)에 구름처럼 모여서 칭찬한다.
‘아무 곳 아무 존자가 혹은 그 제자가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여 성도(聖道)를 부지런히 닦아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무루의5)마음[心]과 지혜[慧]의 해탈을 증득하고 현법(現法)에서 스스로 통달하고 증득하여 구족하게 머물렀으며 또 스스로 자신의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다 갖추었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원생수경(圓生樹經)』에 “어떤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을 때는 삼십삼천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는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 뜻을 분별하지 않았으며 삼십삼천은 스스로 지견(智見)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로 인하여 알고서 선법당에 모여 그런 일을 칭찬하는 지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
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해야 한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그 하늘들은 스스로 현량(現量)의 지견이 있어서 그와 같은 일을 아는 것일까?’라고 의심하므로 이런 이의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그들에게는 다만 비량(比量)의 지견만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생처득지(生處得智)는 번뇌가 다한 덕(德)에 대해서 현경(現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그 하늘들에게 바른 지견[正智見]이 있어서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어 모
5) 무루지(無漏智)에 의하여 갈애(渴愛)를 여의는 것을 심해(心解)라 하며 무명(無明)을 여의는 것을 혜해(慧解)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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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번뇌가 다했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答] 아니다.
이 일은 심히 깊은 것이어서 그들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그들은 어떻게 하여 아는 것인가?
다섯 가지 인연[五緣]으로 말미암아서다. 다섯 가지 인연 중 첫 번째이다.
[論] 세존을 믿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어 “이 비구들은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구나”라고 하시므로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알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일 무루의 마음이나 혹은 일찍이 얻지 못한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시면 온갖 유정으로서는 알 수 있는 이가 없지만 만일 일찍이 얻었던 세속의 마음을 일으킬 때는 유정들도 아는 이가 있다.
부처님께서 이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실 때에는 마치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나아가 이제 부처님께서는 그 하늘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일찍이 얻었던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시어 “이 비구들은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구나”라고 하셨으므로 그 하늘들은 그것을 알고 나서 선법당에 모여 그런 일을 칭찬한 것이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신 것인가?
[답] 그들이 진실로 부처님의 뜻에 맞기 때문이다. 비구로서 영원히 후유(後有)를 끊어야 진실로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인데 이 비구들은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영원히 후유를 끊었으므로 그 모두가 진실로 부처님의 뜻에 맞기 때문에 세속의 마음을 일으켜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 구름처럼 모여 칭찬하게 하신 것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두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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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혹은 부처님께서 다른 이에게 “이 비구들은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다”라고 하셨으므로 그들이 들은 것이다.
만일 마음에 선교(善巧)를 얻은 이면 부처님께서 마음을 일으키자마자 분명히 알게 되지만 만일 다만 말[言]에서 선교를 얻은 이면 부처님께서 다른 이에게 말씀한 뒤에야 비로소 환히 알게 되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른 이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인가?
[답] 세존께서 잘 설법하신 그 안의 말씀은 정성스런 진리이므로 하나같이 보고 하나같이 즐기면서 여러 사람 모두가 똑같이 인정함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스스로 96종의 모든 도법(道法) 가운데서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서 미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법은 진실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요 큰 신통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그 비구들의 진실한 공덕을 드러내 보이고 또한 세간의 좋은 복전이라는 것을 보이시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하늘과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공경하고 믿게 하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그 밖의 다른 수행자들의 용맹 정진하는 마음을 면려(勉勵)하려고 남에게 말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세 번째이다.
[論] 혹은 대덕(大德) 천선(天仙)으로부터 “그 비구들은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다”라고 듣기도 한다.
[문] 어떠한 이를 대덕 천선이라 하는가?
[답] 하늘들 가운데서 아라한을 증득한 이이다.
[문] 그 온갖 아라한들은 모두 이런 일을 알고서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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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답] 그렇지는 않다. 근기 등이 승(勝)한 이는 알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네 번째이다.
[論] 혹은 그 존자가 세속의 마음을 일으켜 “나는 이미 번뇌가 다해 아라한이 되었다”라고 하므로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알게 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세속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인가?
[답] 그 존자는 끝없는 때로부터 번뇌가 치성하여 몸과 마음을 괴롭히다가 이제야 청량(淸凉)함을 얻었고, 끝없는 때로부터 생사가 상속하다가 이제야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으며, 이미 가슴을 찌듯하는 답답함[鬱蒸]을 버리고 맑고 시원함을 얻었으며, 유애미(有愛味)를 버리고 무애미(無愛味)를 얻었으며, 탐기(耽嗜)를 버리고 출리(出離)를 얻었으며, 염오(染汚)를 버리고 청정(淸淨)을 얻었으므로 몹시 환희심을 내어 이런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인연 중 다섯 번째이다.
[論] 혹은 그가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을 하늘들이 들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존자는 다른 이에게 말하여 알게 하는 것인가?
[답] 존자는 잘 설법한 그 안의 말씀은 정성스런 진리이므로 하나같이 보고 하나같이 즐기면서 여러 사람 모두가 똑같이 인정함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도 응한 것에 따르는 것은 마치 부처님께서 다른 이에게 말씀하는 것과 교진나가 남들에게 말하는 것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먼저 존자에게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을 공급하게 하여 모든 시주(施主)들이 듣고 기뻐하면서 공덕을 더욱 더하게 하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먼저 공경하거나 믿지 않는 이로 하여금 공경하고 믿게 하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또 출가하여 고행을 부지런히 닦는 이에게는 수승한 과(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남에게 말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문] 그 밖의 다른 천신(天神)들도 번뇌가 다한 이[漏盡者]를 칭찬하는 이가 있는가?
[답] 역시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삼십삼천만을 말하는 것인가?
[답] 그 하늘들은 자주자주 구름처럼 모여서 선악(善惡)의 일을 논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그 하늘들은 백월(白月)과 흑월(黑月)에 매양 여덟 번째의 날[八日]과 열네 번째의 날[十四日]과 열다섯 번째의 날[十五日]에는 선법당에 모여서 세간의 선악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게 된다.
또 삼십삼천은 언제나 함께 선악을 짓는 이를 엿보아 살피면서 선을 짓는 이를 보면 옹호하여 주지만 악을 짓는 이를 보면 함께 혐오하므로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삼십삼천은 사람들이 선을 짓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찬탄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삼십삼천에는 원생수(圓生樹)6)가 있어서 아라한에 비유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문] 삼십삼천은 유학자(有學者)도 칭찬하는가?
[답] 유학자도 함께 칭찬한다. 만일 유정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한 이면 그도 오히려 칭찬하는데 하물며 유학자이겠는가?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계경에서는 그들이 아라한을 함께 칭찬하는 것만을 말하는가?
[답] 더 뛰어난 것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무학법(無學法)의 보특가라는 모두 유학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원생수는 번뇌를 다한 이와 다분히 유사하므로 비유를 삼아 이 때문에
6) 원생수는 곧 파리질다수(波利質多樹)를 말한다. 성 밖의 동북쪽에 있으며 모든 하늘들이 그 곳에 가서 마음껏 욕락(欲樂)을 누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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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번뇌를 다한 이는 극히 좋아할 만하기 때문이요 모든 허물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이요 죄구(罪咎)가 없기 때문이며, 지극히 얻기 어렵기 때문이요 혐오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칭찬한 것이다.
또 아라한은 원만하게 해탈해서 공덕이 구족하고 온갖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를 영원히 다했기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칭찬한 것이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천상과 인간은 가득히 차고 악취는 감소하는 것이 마치 덕이 있는 왕[有德王]이 세간에 출현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하늘들은 불어나서 줄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달이 만월일 때에 대해(大海)도 가득히 차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하늘 군사들이 아수라들에게 승리하는 것이 마치 싸울 때에 선용천자(善勇天子)가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뒤에 낳은 천자의 수명과 빛깔과 명예가 앞에 낳은 이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 마치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밥물[飯汁]로써 보시하는 것이 다른 시주(施主)보다 더 뛰어난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적은 물건을 보시해도 큰 과보를 얻는 것이 마치 가섭파(迦葉波)와 무멸(無滅) 존자가 어떤 거친 음식[麤食]을 보시하고서도 인간과 천상을 여러 번 오가면서 뛰어나고 묘한 과보를 받은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보는 이가 조금의 청정한 마음을 내어도 천상에 나서 쾌락을 받게 하는 것이 마치 개[狗]ㆍ두꺼비[蝦蟆]ㆍ기허(氣噓)ㆍ집악(執惡) 등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생사의 굳은 감옥으로부터 많이 풀려나게 되는 것이 마치 왕이 아들을 낳으면 천하에 큰 사면령(赦免令)을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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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선취(善趣)ㆍ악취(惡趣)의 길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해가 돋을 때에 좋은 데나 나쁜 데를 다 비추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하늘들로 하여금 하늘의 지위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마치 제석천왕[天帝釋]의 쇠한 상[衰相]을 없어지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천상의 궁전에 천선(天仙)들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마치 착한 벗에게 거두어져서 공덕이 충만하게 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하늘들로 하여금 5욕(欲)의 즐거움을 싫어하게 하는 것이 마치 제석천 염마륜왕(琰摩輪王)이 묘한 욕심이 앞에 나타나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세간으로 하여금 바른 법을 듣고 보리분(菩提分)의 보배가 모두 다 풍요해지는 것이 마치 해보선(海寶船)이 닿는 곳마다 보물이 풍성해지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아라한이 세간에 출현하면 온갖 유정들은 모두 다 즐거움을 받는 것이 마치 단비가 내려서 곡식이 잘 여물어지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이쪽에 치우쳐 말한다.
이와 같은 등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은 오직 무학(無學)만을 말할 뿐이다.
[문] 삼십삼천(三十三天)은 모든 아라한들을 칭찬하는가? 일부분의 아라한들만을 칭찬하는가?
[답] 어떤 이는 “모든 아라한들을 칭찬한다. 그 하늘들은 남의 덕을 칭찬하기 좋아하는데 아라한들은 할 일을 다 마치고 매우 희유한 이들이기 때문에 모두를 칭찬한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온갖 모두를 칭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 또는 천이나 되는 어떤 아라한들은 산골짝에서 적멸(寂滅)에 들므로 함께 사는 이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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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환히 다 모르는데 하물며 그 밖의 천인(天人)들이 멀리서 함께 칭찬하겠는가?”고 말한다.
[문] 어떠한 아라한을 칭찬하는가?
[답] 이 경에서 칭찬하는 이들과 같다. 아라한으로서 명예로운 업(業)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 이면 그들은 칭찬하겠지만 만일 명예로운 업을 짓지 않는 이거나 설령 다시 짓는다 해도 더욱 자라게 하지 않는 이면 그들은 칭찬하지 않는다.
또 만일 어떤 호귀(豪貴)한 이로서 출가한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하니 마치 석왕(釋王) 등과 같다.
또 만일 어떤 거부(巨富)요 큰 공덕을 지닌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하니 마치 무멸(無滅) 등과 같다.
또 만일 큰 지혜가 있으면서 남을 이롭게 하며 게으름이 없는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하니 마치 사리자(舍利子) 등과 같다.
또 만일 부처님 법을 수호하고 잘 지니는 이로서 대중들이 함께 귀의하는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하니 마치 음광(飮光) 등과 같다.
또 만일 태어날 때에 천지가 진동하고 광명을 나타낸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한다.
또 만일 출가하여 부지런히 고행하고 하기 어려운 일을 하며 부처님 법을 수호하고 잘 지니면서 천상과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이면 그들은 그를 칭찬하지만 그 밖의 다른 아라한은 그들이 칭찬하지 않는다.
[문] 증상만(增上慢)이 있는 이를 하늘들은 아는가?
[답] 어떤 이는 “아는 이도 있고 알지 못하는 이도 있다. 수승한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들은 알지 못하지만 만일 하열한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들은 안다”라고 말한다.
또 만일 미묘한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들은 알지 못하지만 만일 거칠고 얕은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들은 안다.
또 만일 상계(上界)의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들은 알지 못하지만 만일 욕계의 공덕에 의거해서 증상만을 일으키는 이면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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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안다.
어느 다른 논사는 “증상만이 있는 이를 하늘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제석천왕이 세상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 만일 외도가 혼자 조용한 데에 있는 것을 보면 곧 그곳으로 가서 자세히 살피며 예배 공경하면서 그를 여래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제석조차도 그렇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하늘들이겠는가?”라고 말한다.
[문] 계율을 범한 이[犯戒者]를 하늘들은 아는가?
[답] 아는 이도 있고 알지 못하는 이도 있다. 추중한 계[麤重戒]를 범하면 하늘들은 알지만 만일 미세한 계[微細戒]를 범하면 하늘들은 알지 못한다.
[論] 마치 계경에서 “마게타국(摩揭陀國)의 보좌(輔佐)하는 신하들은 혹은 화법조복(化法調伏)이기도 하고 혹은 법수법행(法隨法行)이기도 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승위경(勝威經)』에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지가읍(那地迦邑) 군씨가림(群氏迦林)에 계실 때에 마게타국의 8만 4천의 보좌하는 신하들이 동시에 목숨을 마쳤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유행하는 병 때문에 그들은 죽었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들은 미생원(未生怨)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니 미생원이 부왕(父王)을 시해한 뒤에 보좌하는 이들 8만 4천도 살해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권속들이 아난에게 와서 말하였다.
‘저 여러 나라와 고을[國邑]에 부처님을 믿는 이들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여래께서는 모두 어느 곳에 태어나는지 기별[授記]하셨습니다. 마게타국의 선왕(先王)의 시신(侍臣) 8만 4천도 모두가 부처님을 믿었었고 지금 이미 목숨을 마쳤는데도 아직 세존께서는 그 분들이 태어날 곳에 대한 기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들을 위하여 청하여 주십시오.’
아난은 그것을 허락하고 아침나절에 여래께 가서 두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공경하면서 합장하고 친애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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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으로 청하였다.
‘저 여러 나라나 고을에 부처님을 믿는 이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날 곳을 기별하셨습니다. 마게타국의 영견왕(影堅王)7)의 신하 8만 4천도 모두가 부처님을 믿었고 지금 이미 목숨을 마쳤는데 여래께서 기별을 하시지 않으시니 그 권속들은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그들이 날 곳을 기별하지 않으시면 아마 그 권속들은 원망하는 마음을 낼 것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가엾이 여기셔서 그들
을 위하여 기별하여 주소서.
또 부처님은 이 마게타국에 계시면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으므로 그 땅에는 은혜도 있고 또 영견왕은 깊이 삼보(三寶)를 믿으며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잠시도 빠트린 적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도 세존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기별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잠자코 그것을 허락하시고는 곧 옷과 발우를 가지고 나지가(那地迦)로 들어가 법답게 걸식하여 잡수신 뒤에 다시 나씨가림(那氏迦林)으로 오셔서 옷과 발우를 거두고는 발을 씻은 뒤에 계시던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앉으셔서 몸을 편안히 하고 뜻을 안정시키고는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면서 마게타국의 신하들의 태어난 곳을 관하셨다.”
[문] 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을 내기만 하면 바로 걸림 없는 지견[無碍智見]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무엇 때문에 방에 들어가서 정신을 한데 모아 사유하며 살피셨는가?
[답] 업과(業果)는 지극히 깊숙하다는 것을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이니 가장 미세하기 때문이요 깨달아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밝게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실제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온갖 삼장교(三臧敎)에서 비나야장(毘奈耶臧)을 가장 깊다고 하는 것이니 대개가 업과의 차별된 모양을 밝혔기 때문이다.
모든 계경에서는 업과를 말한 곳이 가장 깊고 12지(支)에서는 행(行)과
7) 영견왕은 빈바사라왕(頻婆沙羅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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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有) 두 가지가 가장 깊으며, 부처님의 10력(力)에서는 자업지력(自業智力)이 가장 깊고 여기의 8온(蘊)에서는 제4 업온(業蘊)이 가장 깊으며, 4난사(難思)8)에서는 유정업과(有情業果)가 가장 깊기 때문에 부처님은 방에 들어가 정신을 한데 모아 사유하면서 살피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마게타 신하들의 몸과 마음의 인과(因果)와 장애의 대치(對治)와 목숨을 마친 뒤에 나는 것[受生] 등 하나하나마다 모두가 갖가지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신 것이니 이 때문에 방에 들어가 정신을 한데 모아 사유하면서 살피신 것이다.
또 교화 받아야 할 이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마치 대용왕(大龍王)의 비는 반드시 두루 적시게 하는 것처럼 교화 받을 한량없는 유정을 기다리기 위하여 일부러 방에 들어가 사유하면서 생각을 잡아맨 것이다.
또 승위천자(勝威天子)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견왕은 아들에게 시해된 뒤에 다문실(多聞室)9)에 나서 이름을 승위라 했다. 그는 여래께서 그 보좌한 신하들이 태어난 곳의 차별을 말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와서 들을 것이므로 그를 기다리기 위하여 잠시 동안 다시 방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또 아난으로 하여금 법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게 하려 한 까닭이다. 만일 그에게 가벼이 법을 말하면 그는 법에 대하여 깊이 공경하거나 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므로 간절히 우러르면서 듣고 반드시 받아 지니면서 이치대로 사유하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널리 말하게 하시려고 잠시 방으로 들어가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신 것이다.
또 어리석은 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을 끊기 위해서이다. 지혜가 없는 이는 실로 아는 것이 없으면서 총명한 척하는 만(慢)을 품고 만일 다른 이가 물으면 깊은 지 얕은 지를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대답한다. 부처님은 그런 교만
8) 4난사는 4불가사의법(不可思議法)을 말한다. 첫째는 세계(世界)의 불가사의요, 둘째는 중생(衆生)의 불가사의며, 셋째는 용(龍)의 불가사의요, 넷째는 불토경계(佛土境界)의 불가사의이다. 여기의 유정업과의 난사는 제2의 불가사의를 가리킨다.
9) 다문실이란 비사문천의 궁전[毘沙門天宮]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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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음을 끊게 하려고 자신은 지견(智見)을 온갖 법에 대하여 마음대로 굴리면서도 만일 다른 이가 묻게 되면 오히려 자세히 사유하면서 찬찬하게 대답하는데 하물며 지혜가 없는 이가 질문을 받아 곧 대답해서 되겠는가를 나타내시고자 한 것이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 선사(善士)의 법임을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선사에게는 세 가지 형상[相]이 있으니 곧 사유할 것[所思]을 잘 사유하는 것 등이기 때문에 물은 뒤에도 가벼이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가 지자(智者)로서의 모습을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지자는 자세히 고찰하고 나서 말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질문을 받고서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부처님은 방에 들어가셔서 정려(靜慮)에 유희하시려고 아난이 청하며 물었는데도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선정[定]에서 일어나 대중에게 나오셔서 평상대로 자리를 펴고 조용히 앉으셨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로 나아가 두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합장하고 공경하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 이제 면목(面目)이 청정하시고 거동이 조용하시며 모든 감관이 적정(寂靜)하심은 반드시 정려에 유희하시어 현법락(現法樂)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청한 것을 말씀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느니라. 자세히 잘 듣고 잘 생각할지어다.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겠노라. 마게타국의 8만 4천 보좌(輔佐)하는 신하들로써 이미 목숨을 마친 이들은 혹은 화법조복(化法調伏)이기도 하고 혹은 법수법행(法隨法行)이기도 하느니라.
모두가 3결(結)을 끊고 예류과(預流果)를 얻어서 다시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보리(菩提)에 나아갈 것이며, 아무리 많더라도 욕계의 인간ㆍ천상 사이에서 일곱 번만 왕래하면서 괴로움의 맨 끝[苦邊際]을 지을 것이니라. 그 한 무리는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에 태어났고 이렇게 하여 나아가 한 무리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중동분(衆同分) 안에 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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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보좌하는 신하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그들은 항상 불보ㆍ법보ㆍ승보를 수호하고 잘 지니면서 손감(損減)이 없게 한 까닭에 보좌(輔佐)라고 한다.
또 그들은 모두가 빈비사라왕(頻毘娑羅王)을 안에서 공대하고 받든 이들이기 때문에 보좌라고 한다.
또 그들은 모두가 빈비사라왕을 도우면서 나라 사람들을 거두어 주고 양육했기 때문에 보좌라고 한다.
또 그들은 전생에 붙여졌던 이름이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는데 7보(寶)를 완전히 갖추었고 4주(洲)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가 보좌하는 8만 4천의 신하들을 데리고 허공을 나르며 유희할 때에 윤보(輪寶) 등이 갑자기 멈추면서 가지 않았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왕위를 잃는 것은 아니겠느냐? 혹은 수명이 다한 것이냐?”
보리수의 신[菩提樹神]이 우러러 왕에게 아뢰었다.
“이 아래 멀지 않은 데에 보리수가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그를 의지하여 등정각을 이루셨으니 그 위의 허공을 타고 가시면 안 됩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빨리 내려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참회하고는 여러 보좌한 이들과 함께 공경하면서 오른편으로 돌고 공양을 베푼 뒤에 다른 길을 따라 떠났다. 그때의 전륜왕은 지금의 영견왕이요 8만 4천의 보좌하는 신하들은 지금의 미생원(未生怨)에게 살해된 이들이다. 이 때문에 보좌는 전생의 이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의 뜻을 분별하지 않았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해야 하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찌하여 그들을 화법조복(化法調伏)이라 하고 어찌하여 그들을 법수법행(法隨法行)이라 하는가?
[答] 만일 천상에 있으면서 법을 보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법을 보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계(戒)를 받아 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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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서 법을 보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계를 받아 지니면서 법을 보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모든 선근을 심어 역시 성숙하게 하고서 그 뒤에 천상에 나서 해탈을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모든 선근을 심어 역시 성숙하게 하고 곧 인간에서 해탈을 얻는 이를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근을 닦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통달을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순결택분의 선근을 닦고 곧 인간에서 통달한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가행도(加行道)를 닦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정성이생에 드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가행도를 닦고 곧 인간에서 정성이생에 드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진리[諦]의 선근을 수행하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제현관(諦現觀)을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진리의 선근을 수행하고 곧 인간에서 제현관을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선근을 닦아 다스리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청정(淸淨)을 보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선근을 닦아 다스리고 곧 인간에서 청정을 보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가명계(假名戒)10)를 받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성소애계(聖所愛戒)를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가명계를 받고 곧 인간에서 성소애계를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별해탈(別解脫)11)과 정려(靜慮)의 율의(律儀)
10) 가명계는 특별히 계를 받는 의식에 의거하지 않고 어떤 계목(戒目)을 받아 그것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곧 보통의 도덕적인 덕목을 따르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11) 별해탈율의라 함은 7중(衆)의 수계(受戒)에 의거하여 율의를 얻는 것이요, 정려율이라 함은 4선(禪)을 닦을 때에 스스로의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에서 생기는 것이며, 무루율의라 함은 무루지를 얻을 때에 스스로의 방비지악의 힘에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제1은 불수심전(不隨心轉)이라 하고 제2와 제3을 수심전(隨心轉)이라고 한다.
를 얻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무루율의(無漏律儀)를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별해탈과 정려의 율의를 얻고 곧 인간에서 무루율의를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작의계(作意戒)12)를 받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법이계(法爾戒)를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작의계를 받고 곧 인간에서 법이계를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서 있으면서 증상계학(增上戒學)과 증상심학(增上心學)을 얻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증상계학과 증상심학을 얻고 곧 인간에서 증상혜학을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예류지(預流支)를 닦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예류과(預流果)를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예류지를 닦고 곧 인간에서 예류과를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세속의 신(信)를 얻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증정(證淨)을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세속의 신을 얻고 곧 인간에서 증정을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또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고 그 뒤에 천상에 나서 구족하게 얻는 이면 화법조복이라 하고 만일 인간에 있으면서 37보리분법을 닦고 곧 인간에서 구족하게 얻는 이면 법수법행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천상에서 법을 보는 이를 화법조복이라 하고 곧 인간에서 법을 보는 이를 법수법행이라 하는가?
[답] 만일 천상에서 법을 보는 이면 가행(加行)을 닦는 것이 적지만 만일 인간에서 법을 보는 이면 가행을 닦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에 있으면서 법을 보는 이면 먼저 부지런히 스승과 벗을 공경하고 공양하면서 소달람(素
12) 작의계라 함은 계를 받고서 또한 그를 지키겠다는 작의(作意)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근주계(近住戒)와 7중계(衆戒)를 가리키며 법이계라 함은 정려(靜慮)와 무루(無漏)의 수심전계(隨心轉戒)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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呾覽)을 외고 비나야(毘奈耶)를 배우고 아비달마(阿毘達磨)를 들어 결택(決擇)하며 온갖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사유하고 관찰하여 순숙(純熟)을 얻은 뒤에는 산 숲에 나아가 조용한 데에 있으면서 초저녁과 새벽에는 잠을 자지 않고 점차로 다시 소대(小大)13)의 7법을 받아 지니어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해가 돋을 때까지 결가부좌하고 정수리가 안정하면서 행(行)을 진정시키며 법장(法杖)을 짚고 정진이 치성하
면서 생각을 잡아매어 사유하여야 비로소 성도(聖道)에 들게 된다. 그는 이와 같은 많은 가행의 법을 말미암기 때문에 법수법행이라 하지만 만일 천상에서 법을 보는 이면 옛날 인간 세계의 문(聞)ㆍ사(思)ㆍ수(修)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제야 저절로 성도가 앞에 나타나게 되며 그는 화생(化生)을 받아 법(法)을 보고서 조복(調伏)하기 때문에 화법조복이라는 별명(別名)이 붙게 된다.
[論] 어떤 것이 욕심이 많은 것[多欲]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 “욕심이 많은 것이 있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不喜足]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에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지금 말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욕심이 많은 것인가?
[答] 모든 욕심과 이미 욕심을 부렸고 장차 욕심을 부리는 것을 욕심이 많은 것이라 한다.
13) 소대의 7법이란 1주간(週間)의 수행을 소(小)라 하고 7주간의 수행을 대(大)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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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론(本論)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욕심이 많은 것을 나타낸 것이니 글에서는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論] 어떤 것이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인가?
[答] 모든 기뻐하지 않고[不喜] 평등하게 기뻐하지 않고[不等喜] 두루 기뻐하지 않고[不遍喜] 이미 기뻐하지 않았고[不已喜] 장차 기뻐하지 않을 것[不當喜]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나타낸 것이니 글에서는 비록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체에는 차별이 없다.
[論] 욕심이 많은 것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욕심 많은 이[多欲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 하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이[不喜足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욕심이 많은 것이라고 한다.
혹은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두 가지는 그 뜻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욕심이 많은 것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答]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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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資具]에 대하여 모든 바라고[希] 구하고[求] 찾고[尋] 뒤지고[索] 그리워하고[思慕] 방편(方便)을 쓰는 것을 욕심이 많은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하여”라 함은 집에 있는 이[在家者]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 등에 대하여 사방에서 추구(追求)하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이는 밭ㆍ동산ㆍ소ㆍ양 등 짐승이나 의복이나 집이나 곡식 등의 모든 살림살이를 추구하는 것이요, 만일 부귀한 이면 훌륭한 지위ㆍ국토ㆍ성읍ㆍ코끼리ㆍ말ㆍ값진 보배 등의 모든 욕락(欲樂) 거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아직 얻지 못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라 함은 출가한 이[出家者]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아직 얻지 못한 옷ㆍ바리ㆍ방사(房舍) 살림살이와 제자 등에 대하여 갖가지로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바라고ㆍ구한다는 것 등은 비록 이름은 다르다 하더라도 체(體)에 차별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욕심이 많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論]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과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리고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 모든 다시 더 바라고[復希] 다시 더 욕심을 부리고[復欲] 다시 더 좋아하고[復樂] 다시 더 구하는 것[復求]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하여”라 함은 집에 있는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 등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시 더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이는 밭과 동산 등에서 하나를 얻으면 둘을 바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만일 부귀한 이면 훌륭한 지위 등에 대하여 하나를 얻으면 둘을 바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미 얻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라 함은 출가한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이미 얻은 의복 등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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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시 더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옷ㆍ바리ㆍ방사ㆍ살림살이와 제자 등에 대하여 하나를 얻으면 둘을 바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모든 다시 더 바란다는 등은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論] 이와 같은 것이 서로 다르다.
욕심이 많기 때문에 바라고, 구하고, 찾고, 뒤지고, 그리워하고, 방편을 쓴다는 것을 나타낸다. 곧 욕심이 많은 것은 바라고 구하는 등의 원인[因]이니 만일 마음에 탐애가 없으면 바라고 구하는 것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다시 더 바라고, 다시 더 욕심을 부리고, 다시 더 좋아하고, 다시 더 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곧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다시 더 바라는 등의 원인이니 만일 마음에 탐애가 없으면 다시는 더 바라는 것 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욕심이 많은 것이나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거나 간에 다 같이 탐(貪)의 불선근(不善根)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하더라도 아직 얻지 못했거나 이미 얻은 경계에 의하여 일으키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이는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원인[因]이요 욕심이 많은 것은 결과[果]이니, 여기서는 인과를 서로 나타내 보인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바라거나 하고 싶어하는 것[希欲]은 욕심이 많은 것이요 한없이 뒤쫓아 구하는 것[追求]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難滿]은 욕심이 많은 것이니 바라고 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공양하기 어려운 것[難養]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기뻐하면서 선택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욕심이 많은 것은 오직 의지(意地)에만 있을 뿐이니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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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6식신(識身)에 다 통하는 것이니 현재를 반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욕계의 온갖 탐(貪)의 불선근이요, 다 같이 6식에 모두 통한다. 그것은 온갖 이미 얻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게 한다는 뜻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 하고, 아직 얻지 못한 색 등의 경계에 대하여 바라고 구하는 것이 많게 한다는 뜻을 욕심이 많은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욕계의 6식에 다 통하며 다 같이 탐의 불선근을 일으킨다”라고 말해야 한다.
[論] 어떤 것이 욕심이 적은 것[少欲]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욕심이 적은 것이 있고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해야 한다.
또 앞에서 욕심이 많은 것[多欲]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不喜足]을 말했으므로 지금은 그것의 가까운 대치의 법[對治法]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욕심이 적은 것인가?
[答] 모든 욕심을 부리지 않고[不欲], 이미 욕심 부리지 않았고[不已欲], 장차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것[不當欲]을 욕심이 적은 것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욕심이 적은 것을 나타낸 것이니 글에서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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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인가?
[答] 모든 기뻐하고[喜], 평등하게 기뻐하고[等喜], 두루 기뻐하고[遍喜], 이미 기뻐하였고[已喜], 장차 기뻐할 것[當喜]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나타낸 것이니 글에서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그 체에는 차별이 없다.
[論] 욕심이 적은 것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욕심이 적은 이[少欲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라 하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이[喜足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욕심이 적은 것이라 한다.
혹은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그렇게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이 두 가지는 그 뜻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욕심이 적은 것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 바라지 않고 구하지 않고 찾지 않고 뒤지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고 방편을 쓰지 않는 것을 욕심이 적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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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하여”라 함은 집에 있는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 등에 대하여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이는 밭과 동산 등에 대하여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며 만일 부귀한 이면 훌륭한 지위 등에 대하여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얻지 못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라 함은 출가한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아직 얻지 못한 옷ㆍ바리ㆍ방사ㆍ살림살이와 제자 등에 대하여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바라지 않는다는 것 등의 이름은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그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욕심이 적다는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욕심이 적은 것[少欲]을 물었는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不欲]으로 대답하는가?
[답] 아직 얻지 못한 좋아할 만한 색 등 살림살이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다. 법다운 것[如法]과 법답지 않은 것[不如法]이다. 법다운 것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법답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받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괴로움[苦]을 그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번뇌를 더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범행(梵行)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탐욕[欲]을 구하고 유(有)를 구하고 삿된 범행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다른 이를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함은 착하지 않은 욕심을 말하고 욕심이 있다고 함은 착한 욕심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論]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과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 다시는 더 바라지 않고, 다시는 더 욕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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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 않고, 다시는 더 좋아하지 않고, 다시는 더 구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이라 한다.
여기에서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하여”라 함은 집에 있는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이미 얻은 좋아할 만한 색 등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이는 밭이나 동산 등에서 넉넉히 얻게 되면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면서 다시는 더 바라거나 구하지 않으며, 만일 부귀한 이면 훌륭한 지위 등에서 이룰 만큼 얻으면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면서 다시는 더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이미 얻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과 그 밖의 살림살이에 대하여”라 함은 출가한 이에 의한 설명이니 그는 이미 얻은 옷 등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더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옷ㆍ발우ㆍ방사ㆍ살림살이와 제자 등에 대하여 이미 얻은 것에 따라 곧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면서 다시는 더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다.
다시는 더 바라지 않는다는 것 등의 이름은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이가 없으니 모두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긴다는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論] 이와 같은 것이 서로 다르다.
욕심이 적기 때문에 바라지 않고 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곧 욕심이 적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등의 원인이니 만일 마음에 탐애가 있으면 바라거나 구하는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곧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는 더 바라지 않는 등의 원인이니 만일 마음에 탐욕이 있으면 다시 더 바라는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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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욕심이 적은 것이나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거나 다 같이 무탐(無貪)의 선근으로 자성을 삼는다 하더라도 아직 얻지 못했거나 이미 얻은 것의 경계에 의하여 일으키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이는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원인이요, 욕심이 적은 것은 결과이니 여기서는 인과를 서로 나타내 보인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바라거나 욕심 부리지 않는 것은 욕심이 적은 것이요, 한없이 뒤쫓아 구하지 않는 것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족시키기 쉬운 것[易滿]은 욕심이 적은 것이니 바라고 구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공양하기 쉬운 것[易養]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니 선택하지를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욕심이 적은 것은 오직 의지(意地)에만 있을 뿐이니 미래를 반연하기 때문이요,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6식신(識身)에 다 통하는 것이니 현재를 반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삼계계(三界繫)와 불계(不繫)이어서 무탐(無貪)의 선근이며 다 같이 6식에 통한다. 그것은 온갖 이미 얻은 온갖 색 등의 경계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한다는 뜻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라 하며, 아직 얻지 못한 색 등의 경계에 대하여 바라고 구하는 것이 적게 한다는 뜻을 욕심이 적은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모두 삼계계와 불계에 다 통하며 6식과 함께 일어나는 무탐의 선근이다”라고 말
해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어떤 것은 욕심이 적은 것인데도 욕심이 많다[多欲]고 하는 것은 마치 한 냥[一兩]의 약을 구하면 충당할 수 있는데도 두 냥 등을 바라는 것과 같고, 어떤 것은 욕심이 많은 것인데도 욕심이 적다[少欲]고 하는 것은 마치 백천의 살림살이를 구해야 충당할 수 있는데 그것 만큼만을 바라고 더 많이는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은 적게 구하는 이[少求者]인데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조금의 물건을 얻으면 충당할 수 있는데도 조금 더 구하는 것과 같고, 어떤 것은 많이 구하는 이[多求者]인데도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적은 물건을 얻으면 전혀 충당하지 못하고 백천
의 공급 거리를 구해야 충족할 수 있는 이가 다만 그것 만큼만을 구할 뿐이요 더 많이는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7) 무의납식 ④
[論] 어떤 것이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難滿]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이 있고 공양하기 어려운 것[難養]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인가?
[答] 모든 거듭 먹고[重食], 거듭 씹으며[重噉], 많이 먹고[多食], 많이 씹으며
1) 앞의 다욕(多欲:욕심이 많고) 불희족(不喜足: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소욕(小欲:욕심이 적고) 희족(喜足:만족해 할 줄 아는 것)과 대략 비슷한 네 가지의 관념(觀念)을 해석하는 문단이다. 난만(難滿:만족시키기 어려운 것)과 난양(難養:공양하기 어려운 것)은 다욕불희족에 상당하며 이만(易滿:쉽게 만족 시킬 것)과 이양(易養:쉽게 공양할 것)은 소욕희족에 상당한다. 어느 것도 모두 확대해석하면 재(財)ㆍ식(食)ㆍ명(名)ㆍ수(睡)에 해당하
겠지만 여기서는 주로 식사(食事)에 관한 선덕(善德)과 악덕(惡德)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하여 설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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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噉], 크게 먹고[大食], 크게 씹으면서[大噉] 조금으로는 그만두는 것이 아닌 것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모든 거듭 먹는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공양하기 어려운 것인가?
[答] 모든 재물을 탐하고[饕]2), 극히 재물을 탐하며[極饕], 음식을 탐하고[餮], 극히 음식을 탐하며[極餮], 즐기고[耽], 극히 즐기고[極耽], 좋아하고[嗜], 극히 좋아하고[極嗜], 씹어먹기 좋아하고[好咀嚼], 훌쩍훌쩍 마시기 좋아하고[好嘗啜], 선택하면서 먹고, 선택하면서 삼키되 많지 않으면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공양하기 어렵다고 한다.
재물을 탐하고, 극히 재물을 탐한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공양하기 어렵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과 공양하기 어려운 것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答] 곧 앞에서 말한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만족시키기 어려운 이[難滿者]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공양하기 어렵다고 하며, 공양하기 어려운 이[難養者]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2) 도(饕)는 통례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말하고, 철(餮)은 통례로 음식을 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 같이 식사에 관한 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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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4 / 1338] 쪽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이 두 가지는 그 뜻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곧 앞에서 말한 “거듭 먹고 거듭 삼킨다”는 등은 적으면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이것은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이요, “재물을 탐하고 극히 재물을 탐한다’는 등은 많지 않으면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이것은 공양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 욕심이 많은 것[多欲]은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이니 많이 먹기를 바라기 때문이요,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不喜足]은 공양하기 어려운 것이니 선택해서 먹기 때문이다.
여기의 글을 대략 음식에만 한정하여 말했으나 의복 등에서도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본론[本]에서는 이 차별에 대한 문답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차별을 묻지 않는가?
[답] 물어야 하는데도 묻지 않는 것은 이 뜻에는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대답이 앞에서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시 묻지 않는 것이니 욕심이 많은 것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의 대답처럼 앞의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만족시키기 쉬운 것[易滿]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만족시키기 쉬운 것이 있고 공양하기 쉬운 것[易養]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해야 한다.
또 앞에서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難滿]과 공양하기 어려운 것[難養]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가까운 대치의 법[對治法]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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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만족시키기 쉬운 것인가?
[答] 모든 거듭 먹지 않고, 거듭 씹지 않으며, 많이 먹지 않고, 많이 씹지 않으며, 크게 먹지 않고, 크게 씹지 않으면서 조금으로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만족시키기 쉬운 것이라 한다.
거듭 먹지 않는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만족시키기 쉽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공양하기 쉬운 것[易養]인가?
[答] 모든 재물을 탐하지 않고, 극히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음식을 탐하지 않고, 극히 음식을 탐하지 않으며, 즐기지 않고, 극히 즐기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고, 극히 좋아하지 않으며, 씹어먹기 좋아하지 않고, 훌쩍훌쩍 마시기 좋아하지 않으며, 선택하지 않고 먹고, 선택하지 않고 삼키며 약간만을 얻어도 그만두는 것을 공양하기 쉬운 것이라 한다.
모든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공양하기 쉽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만족시키기 쉬운 것과 공양하기 쉬운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곧 앞에서 말한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만족시키기 쉬운 이[易滿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공양하기 쉽다고 하며 공양하기 쉬운 이[易養者]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것을 만족시키기 쉽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 두 가지는 그 뜻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곧 앞에서 거듭 먹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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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조금으로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만족시키기 쉬운 것을 말하고, 모든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는 등 얻는 대로 만족한다는 것은 공양하기 쉽다는 것을 말한다.
또 욕심이 적은 것[少欲]은 만족시키기 쉬운 것이니 음식을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요,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은 공양하기 쉬운 것이니 선택하지 않고 먹기 때문이다.
여기의 글에서는 대략 음식에 의해서만 말했으나 옷 등에 있어서도 두 가지의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본론[本]에서는 이 차별에 대한 문답은 없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차별을 묻지 않는가?
[답] 물어야 하는데도 묻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대답이 앞에서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시 묻지 않는 것이니 욕심이 적은 것[少欲]과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의 대답처럼 앞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어떤 것은 적게 먹는 이[少食者]인데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마치 한 덩이를 먹어도 곧 충족할 수 있는 이가 두 덩이를 먹는 것과 같으며, 어떤 것은 많이 먹는 이[多食者]인데도 만족시키기 쉽다고 하는 것은 마치 열 말 밥을 먹어야 충족할 수 있는 이가 그만큼만 먹고 더 많이는 먹지 않는 것과 같다.
옛날에 마도(磨茶)라는 암코끼리가 있었다. 바깥 지방에서 부처님의 타도(馱都)3)를 싣고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으로 들어왔다. 이런 복의 힘[福力]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치고는 이곳에서 장부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출가 수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전생에 익힌 힘 때문에 하루에 열 말 밥을 먹어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열반에 들려 하면서 공양하고 돌봐 준 비구니들을 모아 놓고는 말하였다.
3) 타도(Dhātu)라 함은 계(界)라고 번역하며 요소(要素)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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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을 위하여 나의 뛰어난 법을 말하겠노라.”
비구니들이 꾸짖으면서 말하였다.
“스님은 이미 이만(易滿)이신데 진실로 뛰어난 법이 있었습니다그려.”
아라한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나는 진실로 만족시키기 쉬운 이[易滿]4)였느니라.”
비구니들이 말하였다.
“하루에 열 말 밥을 잡수면서 어떻게 만족시키기 쉬웠다는 것이오?”
아라한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나는 여기에 나기 전에 암코끼리였는데 부처님의 타도를 싣고 이 나라에 들어왔었다. 이 선업(善業)으로 말미암아 지금 사람이 되었고 출가 수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남은 습기(習氣)의 힘 때문에 하루에 밥 열 닷 말씩을 먹어야 했는데도 항상 스스로 분량을 조절하여 열 말씩만을 먹었을 뿐이다. 이렇거늘 이만(易滿)은 내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때에 비구니들은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잘못을 참회하였다.
또 승군왕(勝軍王)5)은 복덕의 힘 때문에 하루에 밥과 사탕수수 즙액[甘蔗漿]을 각각 스무 말씩 먹고 마셔야 했었다. 이 즙액과 밥은 한 줄기의 사탕수수와 한 가지의 벼로 인하여 생겼지만 스스로 분량을 조절하여 각각 열 말씩만을 먹었다.
이러한 것들을 많이 먹는 데도 만족시키기 쉽다고 한다.
어떤 것은 선택하여 먹는데 공양하기 어렵다[難養]고 하는 것은 마치 거
4) 이 아라한의 이름이 이만(易滿)이었던 것 같다. 이만이란 그 뜻은 참으로 수승한 법인데 그는 이름과는 정반대로 대식가(大食家)였으므로 실제는 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빈정거린 말이다.
5) 승군왕은 바사닉왕(波斯匿王)의 역명(譯名)이다. 그는 처음에 스무 말의 밥과 스무 말의 음료를 먹었으므로 몸이 무척 비만했었다. 부처님은 그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마땅히 정념(正念)이 있어야 하고 음식에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고수(苦受)를 느끼지 않고 쉽게 소화시켜야 오래 살게 됩니다”라고 하셨다. 이로부터 왕은 그 절반으로 감하여 각각 열 말씩으로 그쳤다 한다. 그리고 그 스무 말씩의 밥과 음료는 왕의 공덕의 힘에 의
하여 날마다 한 줄기의 사탕수수와 한 포기의 벼에서 나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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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음식[麤食]을 먹어 충족할 수 있는 이인데도 도철(饕餮) 때문에 선택하면서 먹는 이와 같다.
어떤 것은 선택하여 먹는데 공양하기 쉽다[易養]고 하는 것은 마치 추한 음식을 먹으면 몸을 지탱할 수 없고 선택해서 먹어야 충족할 수 있는 이인데도 좋은 음식[美食]에 대하여 마음에 즐기고 거기에 빠지지 않는 이와 같다.
혹은 탐하는 것은 많으면서도 먹는 것이 적은 것은 마치 까마귀와 솔개 따위와 같고, 혹은 먹는 것은 많으면서도 탐하는 것이 적은 것은 마치 코끼리와 말 따위와 같으며, 혹은 탐하는 것과 먹는 것이 다 같이 많은 것은 마치 고양이와 개 따위와 같고, 혹은 탐하는 것과 먹는 것이 다 같이 적은 것은 마치 거북과 게 따위와 같다.
만족시키기 어려운 것과 공양하기 어려운 것은 다 같이 욕계이어서 6식(識)에 다 통하고 탐(貪)의 불선근이며, 만족시키기 쉬운 것과 공양하기 쉬운 것은 다 같이 삼계계(三界繫)와 불계(不繫)이어서 6식에 다 통하고 무탐(無貪)의 선근이다. 마치 계경에서 “네 가지 성종[四聖種]이 있으니 모두가 기뻐하며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네 가지는 정온(定蘊)의 불환납식(不還納息) 중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과 같다.
8) 사납식(思納息) ①
[論] 어떤 것이 사(思)이며, 어떤 것이 여(慮)인가?6)
6) 본장(本章)은 사(思) 내지 사견(邪見)과 상응하는 법 등에 관한 모든 문제를 논구하고 있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처음 제기된 열 가지 대지법(大地法) 등의 심소의 분류도 이 장에서 해설하며 납식의 이름은 맨 처음의 논제(論題)를 따서 붙인 것이니 다른 데서와 같다. 여기서 좀더 자세히 논하면 『발지론(發智論)』 사납식의 첫머리에 “사심도등별(思尋掉等別)/우지교만해(愚知憍慢害)/다행근성사(多行根性邪)/차장원구설(此章願求說)”의 게송
식 4구로 요약한 이 4구는 본장 전체에 걸쳐 논구하는 열한 가지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첫 번째의 사(思)와 두 번째의 심(尋)은 “어떤 것이 사인가, 어떤 것이 심인가?”라고 한 발지 본문의 논제를 보인 것이요, 세 번째의 도(掉)는 도거론(掉擧論)이며 이상 세 가지와 그것과 서로 비슷한 말과의 다른 것을 나타내면서 “등의 별[等別]”이라고 한다. 네 번째의 우지(愚知)는 무명론(無明論)이요, 다섯 번째는 교론(憍論)이며, 여섯 번째는 만론
(慢論)이요, 일곱 번째의 해(害)는 욕(欲)ㆍ에(恚)ㆍ해(害)의 3심론(尋論)이며, 여덟 번째의 다(多)는 지(智)와 경(境)의 다소론(多少論)이요, 아홉 번째의 행(行)은 행원만론(行圓滿論)이며, 열 번째의 근성(根性)은 이생성(異生性)의 문제요, 열한 번째의 사(邪)는 사견과 상응하는 법에 관한 논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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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 뜻은 이미 이해가 갔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사(思)와 여(慮)는 마음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사와 여는 마음의 차별로 다른 체(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사와 여는 심소법(心所法)으로 따로 자체(自體)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또 어떤 이는 “사라는 말[聲]와 여라는 말은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성론자(聲論者)와 같다. 그는 사와 여의 음운(音韻)은 비록 다르다 해도 다른 체는 없다고 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이 두 가지는 자체도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사(思)7)인가?
[答] 모든 사(思)요, 평등한 사[等思]이며, 더한 사[增思]요, 사의 성품[思性]이며, 사의 종류[思類]요, 심행(心行)이며, 의업(意業)이니 이것을 사라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사의 체를 드러내 보인 것이니 글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다.
[문] 여기에서 사(思)는 어떠한 사를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중동분(衆同分)을 끌어당기는 사를 말한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중동분을 원만하게 하는 사를 말한다”라고 말한다.
7) 사(思)라 함은 의업(意業), 즉 의지(意志)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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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여기에서는 통틀어 온갖 의업(意業)을 말한다. 중동분을 끌어당기는 것이거나 중동분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거나 유루의 것이거나 무루의 것이거나 의지(意地)에 있거나 5식(識)에 있거나 간에 모두 사라고 말하는 것이니 온갖 모두는 조작하는 모양[造作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論] 어떤 것이 여(慮)인가?
[答] 모든 여(慮)요, 평등한 여[等慮]이며, 더하는 여[增慮]요, 헤아리며[稱量], 꾀하고[籌度], 관찰[觀察]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라고 한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이름으로 여의 체를 나타낸 것이니 글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에는 차별이 없다.
[문] 여기에서 여(慮)는 어떠한 여를 말하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4성제(聖諦)를 통달하는 여를 말하는 것이니, 견도(見道) 등은 4성제를 사실대로 관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여기에서는 바로 수소성(修所成)의 여를 말하는 것이니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바로 사소성(思所成)8)의 여를 말하는 것이니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持息念) 등 나아가 염주(念住)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는 바로 문소성(聞所成)의 여를 말하는 것이니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벌여 세우며 물체(物體)의 어리석음[愚]과 소연(所緣)의 어리석음을 제거하여 모든 법 가운데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에서는 바로 생소득(生所得)의 여를 말하는 것이니 3장(臧) 12분교(分敎)를 받아 지니고 읽으며 마침내 유포(流布)한다”라고 말
8) 사소성의 사(思)는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앞에서와 같은 의지(意志)의 사는 아니다. 혼동하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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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評] “여기서는 통틀어 온갖 반야(般若)를 말한다. 생소득이거나 문소성이거나 사소성이거나 수소성이거나 진리를 통달하거나 유루의 것이거나 무루의 것이거나 의지(意地)에 있거나 5식(識)에 있거나 모두 여라고 말하는 것이니 온갖 모두는 관찰하는 모양[觀察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論] 사와 여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사가 많은 이[多思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 사람은 여가 많다[多慮]고 말하며, 여가 많은 이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 사람은 사가 많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이들의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 두 가지에는 그 체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사와 여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答] 사(思)는 업(業)이며 여(慮)는 지혜[慧]이니,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또 사는 조작하는 모양[造作相]이요, 여는 관찰하는 모양[觀察相]이다.
또 좋아하는 과[愛果]와 좋아하지 않는 과[非愛果]를 분별하여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게 하는 것은 사의 모양이요,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여 의혹이 없게 하는 것은 여의 모양이다.
[문] 온갖 불선(不善)과 선(善)한 유루법은 모두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이숙과(異熟果)를 받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사(思)만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과를 분별한다 하면서 그 밖의 다른 법은 설명하지 않는가?
[답] 사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사는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과를 받는 세력이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이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하는
것이니 마치 창(倡)과 서(書)와 염(染)9)에는 비록 그 밖의 다른 연(緣)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사람에게 그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문]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분별하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심(心)ㆍ심소(心所)도 이것을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것은 지혜[慧]라고 말하면서 그 밖의 다른 것은 설명하지 않는가?
[답] 지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지혜는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분별하는 것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하는 것이니 비유를 인용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다.
[문] 어떤 지혜가 모든 법의 자상을 분별하고 어떤 지혜가 모든 법의 공상을 분별하는가?
[답] 한 물건[一物]의 모양을 분별하면 자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여러 물건[多物]의 모양을 분별하면 공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하나하나의 온(蘊) 등을 분별하는 것은 자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2온과 3온 등을 분별하는 것은 공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문소성(聞所成)ㆍ사소성(思所成)의 지혜는 대부분 자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수소성(修所成)의 지혜는 대부분 공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16행상(行相)에 포섭되지 않은 지혜는 대부분 자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16행상에 포섭된 지혜는 오직 공상만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진리를 행하는 때의 지혜는 대부분 자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현관(現觀)할 때의 지혜는 오직 공상만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모든 진리를 별관(別觀)하는 지혜는 자상을 분별한다고 하며, 모든 진리를 총관(總觀)하는 지혜는 공상을 분별한다고 한다.
[문] 이 두 가지 지혜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답] 갖가지 물건이 제청보(帝靑寶)10)에 가까이 있으면 제 모양이 나타나지
9) 창은 연극(演劇)이요 서는 서도(書道)이며 염은 회화(繪畵)이다. 이것들의 성립에는 갖가지 조건들이 있겠지만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므로 창ㆍ서ㆍ염에는 각각 배우(俳優)와 서가(書家)와 화가(畵家)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10) 제청보는 착색주(着色珠)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구슬을 가까이 놓고 물건을 볼 때에는 모두가 그 색이 된다는 것을 비유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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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모두가 그 색에 동화되는 것처럼 공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갖가지 물건이 제청보에 멀리 있으면 청색ㆍ황색 등 저마다 따로 나타나는 것처럼 자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해가 돋을 때에 광명이 두루 비추면서 뭇 어둠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처럼 공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해가 나온 뒤에 점차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비추어 담장ㆍ벽ㆍ구멍ㆍ틈ㆍ산ㆍ바위와 깊숙한 숲이 모두 다 드러나는 것처럼 자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처음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단번에 모든 어둠이 파괴되는 것처럼 공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등불이 들어간 뒤에 점차로 병ㆍ옷ㆍ그릇ㆍ상자 등의 모든 물건을 비추는 것처럼 자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거울을 멀리서 비추면 따로따로의 형상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공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거울을 가까이서 비추면 따로따로의 형상이 명료하게 되는 것처럼 자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사람이 멀리서 산과 숲 등의 물건을 보는 것처럼 공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며, 사람이 가까이서 산 숲 등의 물건을 보는 것처럼 자상을 분별하는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여기에서 말한 문소성(聞所成)ㆍ사소성(思所成)ㆍ수소성(修所成)의 지혜는 그 형상[相]이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3장(臧) 12분교(分敎)를 받아 지니고 읽으며 마침내 유포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이것에 의하여 사소성의 지혜가 발생하며 이것에 의하여 수소성의 지혜가 발생하니, 이것이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마치 금광(金鑛)에 의하여 금(金)이 생기고 금에 의하여 금강(金剛)이 생겨서 이것이 산과 돌 등의 물건을 꺾어 부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評] “3장 12분교를 받아 지니고 읽으며 마침내 유포하는 것은 생득(生得)의 지혜이어서 이것에 의하여 문소성의 지혜가 발생하고 이것에 의하여 사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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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혜가 발생하며 이것에 의하여 수소성의 지혜가 발생하여 이것이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마치 종자에 의하여 싹이 생기고 싹에 의하여 줄기가 나며 줄기에 의하여 바뀌면서 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생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견문[聞]에 의하여 생기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사고[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수행[修]에 의하여 생기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 한다.
또 견문으로 이끄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사고로 이끄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수행으로 이끄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고 한다.
또 연의 힘[緣力]으로 일어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인의 힘[因力]으로 일어나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두 가지 힘이 함께[俱力] 일어나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 한다.
또 남의 힘[他力]으로 일어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제 힘[自力]으로 일어나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이 두 가지 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고 한다.
또 자량(資糧)의 힘11)으로 일어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자성(自性)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이 두 가지 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고 한다.
또 바깥[外]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안[內]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 하며, 이 두 가지 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고 한다.
또 가르침[敎]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문소성의 지혜라 하고, 뜻[義]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사소성의 지혜라고 하며, 선정[定]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을 수소성의 지혜라고 한다.
[문]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문소성의 지혜는 온갖 때에 이름[名]에 의하여 뜻[義]을 아는 것이니
11) 자량의 힘이라 함은 지혜를 생기게 하는 외적(外的)인 양식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독서(讀書)나 청강(聽講)과 같은 것이다. 자성의 힘이라 함은 자기 자신이 공부하여 얻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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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달람(素怛覽)ㆍ비나야(毘奈耶)ㆍ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 말한 것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친교(親敎)ㆍ궤범(軌範)과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가 말한 것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그 밖의 모든 논(論) 등에서 말한 것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는 생각하는 것에 따라 모두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사소성의 지혜는 때로는 이름에 의하여 뜻을 알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뜻을 알기도 하며, 수소성의 지혜는 언제나 이름에 의하지 않으면서 뜻을 아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세 사람이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할 적에 한 사람은 아직 물 위에 뜨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또 한 사람은 배우기는 했어도 아직은 잘하지는 못하며 나머지 한 사람은 배워서 아주 잘한다고 하자.
아직 물 위에 뜨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는 언제나 언덕이나 풀 등을 붙잡고 목욕을 하는 것이니 문소성의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배우기는 했어도 아직 잘하지 못한 이는 혹은 붙잡기도 하고 혹은 붙잡지 않기도 하면서 목욕을 하는 것이니 사소성의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배워서 아주 잘하는 이는 언제나 붙잡거나 붙드는 것이 없이 자유자재로 목욕하는 것이니 수소성의 지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문소성의 지혜는 세 가지 지혜의 인(因)이 되며, 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사혜(思慧)의 인일 뿐이고 문혜(聞慧)의 인은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요 수혜(修慧)의 인은 아니니 그것은 경계[界]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지혜는 오직 수혜의 인일 뿐이고 문혜의 인은 아니니 그것은 하열하기 때문이요 사혜의 인은 아니니 그것도 하열하기 때문이며 경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 문소성의 지혜는 오직 문혜의 결과이고 나머지 두 가지 지혜의 결과는 아니니 그것은 뛰어나기 때문이요, 사소성의 지혜는 두 가지 지혜의 결과이나 수혜의 결과는 아니니 그것은 뛰어나기 때문이며 경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수소성의 지혜는 두 가지 지혜의 결과이나 사혜의 결과는 아니니 그것은 경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 문소성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오직 문혜만을 닦을 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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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성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오직 사혜만을 닦을 뿐이며, 수소성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세 가지 지혜를 다 닦는다.
[문] 무엇 때문에 두 가지 지혜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오직 자기 종류만을 닦을 뿐이나 수소성의 지혜는 세 가지를 다 닦는가?
[답] 문ㆍ사의 두 지혜는 선정[定]에 의하여 생기지 않고 세력이 하열하여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오직 자기의 종류만을 닦을 뿐이요, 곧 익히고 닦기[習修] 때문에 닦는다고 하나 미래의 자기 종류[自類]와 남의 종류[他類]를 닦지는 못한다. 수소성의 지혜는 선정에 의하여 생기고 세력이 더욱 왕성해서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자기 종류도 닦게 되고 남의 종류도 닦게 되는 것이다. 자기 종류를 닦는다는 것은 현재도 익히고 닦으며 미래도 얻어 닦는
[得修] 것이요 남의 종류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미래의 닦음[未來修]일 뿐이다.
또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처음 찰나(刹那)에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오직 현재만을 성취하고 두 번째 찰나 이후에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과거와 현재를 성취하며 뒤에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오직 과거만을 성취한다. 수소성의 지혜로서 아직 전에 얻지 못한 것[未曾得]이면 처음 찰나에 앞에 나타나 있을 때는 미래와 현재를 성취하고 두 번째 찰나 이후에는 3세(世)를 성취하며 뒤에 일어나지 않을 때는 오직 과거와 미래만을 성취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문ㆍ사의 두 가지 지혜도 익히 익혀서 뛰어나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또한 미래의 자기 종류의 선법(善法)을 닦는 것이니 그것의 성취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三慧]의 세계[界]를 말하면 욕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문소성의 지혜와 사소성의 지혜요, 색계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문소성의 지혜와 수소성의 지혜이며, 무색계에는 오직 수소성의 지혜만 있을 뿐이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에는 수소성의 지혜가 없는가?
[답] 욕계는 부정계(不定界)이어서 수지(修地)도 아니고 이염지(離染地)도 아니므로 만일 수행[修]하려 할 때에는 사고[思] 가운데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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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는 사소성의 지혜가 없는가?
[답] 색계와 무색계는 정계(定界)ㆍ수지(修地)ㆍ이염지이므로 만일 사고[思]하려 할 때에는 수행[修] 가운데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색계에는 문소성의 지혜가 없는가?
[답] 거기에는 귀[耳根]로 법을 듣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문소성의 지혜는 반드시 귀로 인하여 법을 듣고 나서야 차츰차츰 이끌어서 앞에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욕계에는 세 가지 지혜가 갖춰 있으며, 색계와 무색계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 욕계의 수소성의 지혜란 마치 현관(現觀)변의 세속지(世俗智)가 공공(空空)ㆍ무원무원(無願無願)ㆍ무상무상(無相無相)의 삼마지와 함께하고 진지(盡智)일 때에 닦는 욕계의 선근과 상응하는 것과 같으나 극히 적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욕계와 색계의 두 세계에는 모두 세 가지 지혜를 갖추며 무색계에는 오직 수소성의 지혜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욕계와 색계의 두 세계에는 모두 세 가지 지혜를 갖추며 무색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사소성ㆍ수소성의 지혜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삼계(三界)에는 모두 세 가지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評] 이 가운데서는 맨 처음 설명이 옳은 줄 알아야 한다.
지(地)로 말하면 문소성의 지혜는 5지(地)에 있으니 욕계와 4정려(靜慮)이다.
어떤 이는 “6지(地)에 있으니 앞의 다섯 가지와 정려중간(靜慮中間)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7지에 있으니 앞의 여섯 가지와 미지지(未至地)이다”라고 말한다.
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1지(地)에 있을 뿐이니 욕계이다.
수소성의 지혜로서 유루의 것은 17지에 있으니 4정려(靜慮)와 4근분(近分)과 정려중간과 4무색(無色)과 4근분이며 무루의 것은 9지에 있으니 4정려와 미지와 중간과 하(下)의 3무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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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所依)로 말하면 문소성의 지혜는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고 사소성의 지혜는 욕계의 몸에 의지하며 수소성의 지혜는 삼계의 몸에 의지한다.
행상(行相)으로 말하면 어떤 이는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16행상이 아니니 유루이기 때문이며 수소성의 지혜는 16행상이기도 하고 그 밖의 행상이다”라고 말한다.
[評] “세 가지 지혜는 모두가 16행상과 그 밖의 행상12)에 다 통하니 16행상은 유루와 무루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만일 세 가지 지혜가 모두 16행상과 그 밖의 행상에 다 통한다 하면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앞에서 이미 갖가지로 차별을 설명한 것과 같으나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자기 힘[自力] 때문에 미래수(未來修)가 없고 남의 힘[他力] 때문에 미래수가 있으며 수소성의 지혜는 자기 힘 때문에 미래수가 있다.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소연(所緣)으로 말하면 세 가지 지혜는 모두가 온갖 법을 반연한다.
염주(念住)로 말하면 세 가지 지혜는 모두가 4념주에 통한다.
지(智)로 말하면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세속지(世俗智)일 뿐이지만 수소성혜는 10지에 다 통한다.
근과 상응하는 것[根相應]으로 말하면 문소성ㆍ수소성의 지혜는 3근과 상응하니 낙근(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며, 사소성의 지혜는 2근과 상응하니 희근과 사근이다.
삼마지(三摩地)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하면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삼마지와는 함께하는 것이 아니니 유루이기 때문이며, 수소성의 지혜는 3삼마지와 함께하기도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과거ㆍ미래ㆍ현재로 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는 모두 3세(世)에 떨어지며 3세와 이세(離世)를 반연한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로 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는 모두 선이
12) 그 밖의 행상이라 함은 마치 하지(下地)에서는 조(粗)ㆍ고(苦)ㆍ장(障)이요, 상지(上地)에서는 정(淨)ㆍ묘(妙)ㆍ이(離)라는 6행관(行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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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세 가지를 반연한다.
계(繫)와 불계(不繫)로 말하면 문소성의 지혜는 욕계계와 색계계요, 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욕계계일 뿐이며, 수소성의 지혜는 색계계ㆍ무색계계와 불계이면서 세 가지 지혜는 모두 삼계계와 불계를 반연한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으로 말하면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비학비무학일 뿐이요, 수소성의 지혜는 세 가지에 다 통하며, 세 가지의 지혜는 모두 세 가지를 반연한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과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과 끊어야 할 것이 아닌[不斷] 것으로 말하면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요, 수소성의 지혜는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끊어야 할 것이 아닌 데에 통하며 세 가지의 지혜는 모두 세 가지를 다 반연한다.
이름[名]을 반연하는가, 뜻[義]을 반연하는가로 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는 모두 이름과 뜻을 다 반연한다.
자상속(自相續)ㆍ타상속(他相續)ㆍ비상속(非相續)을 반연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는 모두 세 가지를 반연한다.
의지(意地)에 있는가 5식신(識身)에 있는가로 말하면 오직 의지에만 있을 뿐이니 5식 가운데는 가행선(加行善)이 없기 때문이다.
가행득(加行得)ㆍ이염득(離染得)ㆍ생득(生得)으로 말하면 이 세 가지 지혜는 모두가 가행득ㆍ이염득에 통하고 생득이 아니다. 문소성ㆍ사소성의 지혜에서 이염득이라 함은 유정(有頂)의 염(染)을 여읠 때에 얻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세 가지 지혜는 비록 가행득이라 하더라도 생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상지(上地)에서 죽어 하지(下地)에 태어날 때에는 또한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문소성의 지혜로서 욕계에 있는 것은 오직 가행득뿐이며 색계에 있는 것은 가행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생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가행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함은 욕계에 있으면서 가행으로 문소성의 지혜를 닦아 익히고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찰하여 지극히 순숙(純熟)한 이가 욕계에서 죽어 색계에 날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함은 비록 욕계에 있으면서 가행으로 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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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지혜를 닦아 익히고 모든 법의 자상과 공상을 관찰한다 해도 만일 거기에 태어나지 못하면 얻지 못하며 반드시 색계에 나야 비로소 그것을 얻기 때문이다.
사소성의 지혜는 오직 가행득일 뿐이며 수소성의 지혜는 세 가지 득[三得]에 다 통하니 가행과 이염(離染)이 생길 때에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를 성문이나 독각이나 여래는 몇 가지를 갖추는가?
[답] 여래는 비록 세 가지의 지혜를 갖춘다 해도 수소성의 지혜로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저절로 깨달아서 힘[力]ㆍ무외(無畏)와 대비(大非) 등의 수행의 공덕을 갖추시기 때문이다.
독각은 비록 세 가지 지혜를 갖춘다 해도 사소성의 지혜로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저절로 깨닫기는 하나 힘과 무외 등의 모든 수행의 공덕이 없고 많은 사려(思慮)로 말미암아 도(道)에 들기 때문이다.
성문은 비록 세 가지 지혜를 갖춘다 해도 문소성의 지혜로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법음(法音)을 듣고서 도에 들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는 모두 문소성의 지혜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치 “다문(多聞)으로 법 등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고, 모두 사소성의 지혜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여기에서 “여(慮)는 곧 지혜[慧]이며 여는 사(思)와 유사하기 때문에 또한 사라고도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모두 수소성의 지혜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어떻게 법을 닦아야 하는가 하면 선(善)한 유위의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서 “세 가지 지혜가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언설의 구경혜[言說究竟慧]이니 바로 여기의 문소성의 지혜요, 둘째는 사려의 구경혜[思慮究竟慧]이니 바로 여기의 사소성의 지혜이며, 셋째는 출리의 구경혜[出離究竟慧]이니 바로 여기의 수소성의 지혜이다. 온갖 가행(加行)의 선(善)의 심(心)ㆍ심소(心所)는 모두가 이와 같은 3혜품(慧品)이 속한 데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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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심(尋)인가?13)……(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심(尋)과 사(伺)는 곧 마음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심과 사는 심소법(心所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 또 어떤 이는 “심과 사는 거짓[假]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이 두 가지는 실제 존재하는 법[實有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심(尋)인가?
[答] 모든 마음의 심구(尋求)하고, 변료(辨了)하고, 현시(顯示)하고, 추탁(推度)하고, 구획(搆畫)하며, 분별하는 성품[分別性]이고 분별하는 종류[分別類]이니 이것을 심이라 한다.
모든 마음의 심구하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심의 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사(伺)인가?
[答] 모든 마음의 사찰(伺察)ㆍ수행(隨行)ㆍ수전(隨轉)ㆍ수류(隨流)ㆍ수속(隨屬)이니 이것을 사라고 한다.
13) 심(尋)과 사(伺)는 구역으로는 각(覺)과 관(觀)이다. 심구(尋求)하고 사찰(伺察)하는 심리 작용인데 심은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하는 것이요, 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밀하게 분별하고 고찰하는 작용이다. 이와 같이 심리 작용의 추세(麤細)에 의한 구별이기는 하나 이 심ㆍ사의 유무는 선정을 중심으로 하여 관찰한다면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가장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4선(禪)에 있어서는 심ㆍ사의 유무에 의하여 분류하
게 된다. 여기서는 그 심ㆍ사의 동이(同異)를 밝히고 있는 문단이다.
모든 마음의 사찰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사의 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심과 사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마음의 거친 성품[麤性]을 심이라 하고, 마음의 미세한 성품[細性]을 사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심이 많은 이[多尋者]를 보면 세상 사람은 다 같이 이 사람은 사가 많다고 하며, 사가 많은 이[多伺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 사람은 심이 많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체(體)가 하나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려 하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 자체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 여기에서 말한 마음의 거칠고 세밀한 성품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마음의 거친 성품과 미세한 성품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심과 사는 마땅히 마음으로써 자성을 삼고 또한 상응하지도 않아야 하니, 하나의 물건에는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것은 마음이 거칠 때에는 심의 성품이 있고 마음이 미세할 때에는 사의 성품이 있음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심과 사는 하나의 마음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니, 마음이 거칠 때와 미세할 때의 찰나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評] “여기에서는 곧 한마음 속의 거친 성품을 심이라 하고 미세한 성품을 사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말하면 한마음속에는 심도 있고 사도 있어서 심은 마음을 거칠게 하고 사는 마음을 미세하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 어떻게 하나의 마음에 거칠고 미세한 두 가지 법이 있으면서도 서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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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지를 않는가?
[답] 하는 일[所作]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의 성품은 사납고 예리하며[猛利] 사의 성품은 더디고 무디면서도[遲鈍] 같이 하나의 마음을 돕기 때문에 비록 거칠거나 미세하다 해도 서로가 어기지를 않는다.
[문] 심과 사의 거칠고 미세한 그 모양은 어떠한가?
[답] 바늘과 깃털 촉을 한데 묶어서 몸을 찌르면 느낌[受]에 예리함과 무딤이 생기는 것처럼 심과 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식초[酢]와 물을 똑같이 한데 섞어서 입안에 넣으면 의식[識]에 예리함과 무딤을 느끼는 것처럼 심과 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또 소금과 보릿가루를 똑같이 한데 섞어서 입 속에 넣으면 의식에 예리함과 무딤을 느끼는 것처럼 심과 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종과 방울이나 구리와 쇠 등의 그릇을 두드리면 그 소리의 울림은 먼저는 크다가 뒤에는 가늘어지는 것처럼 심과 사도 그러하다”라고 말하였다.
『법온론(法蘊論)』에서는 “하늘의 우레 소리나 사람이 부는 소라[貝] 등은 처음에는 컸다가 뒤에는 미약해지는 것처럼 심과 사도 그러하다”라고 말하였으며, 또 “새가 허공을 날 때에 날개를 치면서 날아오르되 앞에는 거칠다가 뒤에는 미세한 것처럼 심과 사도 그러하다”라고 말하였다. 거기서의 설명은 모두가 심과 사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작용(作用)이 더할 때에는 앞과 뒤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익은 소[熟酥]를 찬물 위에 놓고 햇빛을 비출 적에 물과 해로 말미암아 녹는 것도 아니고 엉기는 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의 마음에 심도 있고 사도 있어서 두 가지 힘이 유지되어 거친 것도 아니고 미세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과 사는 서로가 상응하게 되면서 심은 마음을 거칠게 하고 사는 마음을 미세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대략 세 가지 분별(分別)이 있다. 첫째는 자성(自性)의 분별이니 심과 사요, 둘째는 수념(隨念)의 분별이니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기억[念]이며, 셋째는 추탁(推度)의 분별이니 의지(意地)가 정(定)에 있지 않은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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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의 5식신(識身)에는 오직 한 가지 자성의 분별만이 있다. 비록 기억이 있다 해도 수념의 분별은 아니니 기억[憶念]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추탁의 분별은 아니니 미루어 헤아릴[推度] 수 없기 때문이다. 욕계의 의지(意地)에는 세 가지 분별을 다 갖춘다.
초정려(初靜慮)의 3식신(識身)14)에는 오직 한 가지 자성의 분별만이 있으며 비록 기억과 지혜가 있다 해도 두 가지 분별이 아니라는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초정려의 의지에는 만일 정(定)에 있지 않으면 세 가지 분별을 갖추지만 만일 정에 있으면 두 가지 분별이 있는 것이니 자성과 수념이요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추탁의 분별은 아니니 만일 미루어 헤아리게 되면 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제2ㆍ제3ㆍ제4 정려의 마음에는 만일 정에 있지 않으면 두 가지 분별이 있으니 수념과 추탁이고 자성이 제외된 것은 거기에는 심과 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정에 있으면 오직 한 가지 수념의 분별만이 있을 뿐이다.
무색계의 마음에는 만일 정에 있지 않으면 자성을 제외한 두 가지 분별이 있지만 만일 정에 있으면 오직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수념의 분별이다.
모든 무루의 마음[無漏心]에는 지(地)에 따라 일정하지가 않다. 어떤 것은 다만 분별만이 있다고 하면 추탁을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요, 어떤 것은 오직 하나의 분별만이 있다고 하면 수념을 말하는 것이니 세 가지를 갖추는 것이 없는 것은 일정하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도거(掉擧)인가?15)……(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의 주장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혹
14) 초정려의 3식신이라 함은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신식(身識)을 말한다.(초정려에는 鼻識과 舌識은 없다.)
15) 앞의 무참괴납식(無慚愧納息)에서도 도거에 관하여 설명했으나 거기서는 5개(蓋)의 하나로서 전적으로 악작(惡作)과 관련하여 설명했을 뿐이며, 여기서는 도거와 심란(心亂)을 관련시켜 그 동이점(同異點)을 밝히려는 것을 종(宗)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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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도거와 심란(心亂)에는 따로 체가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고 이 두 가지는 그 체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도거인가?
[答] 모든 마음이 고요하지[寂靜] 않고 그쳐 쉬지[止息] 않으며 들썩거리고[躁動] 들떠[掉擧] 있으면서 마음의 들썩거리는 성품[躁動性]이니 이것을 도거라고 한다.
고요하지 않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도거의 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심란(心亂)인가?
[答] 모든 마음이 산란하고 만판 놀아나며[流蕩] 머물러 있지 않고[不住] 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 성품[非一境性]이니 이것을 심란이라 한다.
마음이 산란(散亂)하다는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심란의 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도거와 심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答] 고요하지 않은 모양[不寂靜相]을 도거라 하고 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 모양[非一境相]을 심란이라 하니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비슷하여 들떠있는 이[掉擧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 사람은 마음이 산란하다고 하며 마음이 산란한 이[心亂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같이 이 사람은 들떠 있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하나다’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하는 이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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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이 두 가지는 그 체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고요하지 않은 모양[不寂靜相]이라 함은 마음이 들썩거려서 5지(支) 4지의 선정[定]을 장애하게 하기 때문이요, 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 모양[非一境相]이라 함은 마음으로 하여금 바깥의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만판 놀아나게 되기 때문이다.
[문] 도거와 심란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 사람이 평상에 앉아 있을 적에 한번 끌어당겨 일어나게 하는 것처럼 도거도 그러한 것이니 마음을 시끄럽게 움직이기 때문이며 한번 채찍질하여 가게 하는 것처럼 심란도 그러한 것이니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에 대하여 자주자주 옮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또 물이 샘구멍[泉眼]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도거도 그러한 것이니 마음으로 하여금 들썩거리게 하기 때문이며, 물이 나오고 나서 모든 못에 흘러서 차게 되는 것처럼 심란도 그러한 것이니 마음으로 하여금 흘러 흩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문] 심란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염오(染汚)의 삼마지(三摩地)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따로 심소(心所)가 있어서 심란이라 하는 것이요, 삼마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評] “앞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다. 곧 삼마지와 번뇌가 상응하면서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에 대하여 자주자주 이전하게 하는 것을 심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도거와 심란은 비록 항상 상응한다 해도 작용이 우세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마음은 도거는 있어도 심란은 있지 않다고 한다. 한 경계에 대하여 삼마지가 극히 들썩거리는 때이다.
어떤 마음은 심란이 있어도 도거는 있지 않다고 한다. 여러 경계에 대하여 삼마지가 극히 들썩거리지 않는 때이다.
어떤 마음은 도거도 있고 심란도 있다고 한다. 여러 경계에 대하여 삼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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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극히 들썩거리는 때이다.
어떤 마음은 도거도 있지 않고 심란도 있지 않다고 한다. 한 경계에 대하여 삼마지가 극히 들썩거리지 않는 때이다.
대덕(大德)은 “만일 마음에 심란이 있다고 한다면 또한 도거도 있다고 하나 어떤 마음은 도거가 있다고 해서 심란이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의 경계에 대하여 삼마지가 극히 들썩거리는 때로써 마치 한 길을 달려가면서 쉬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여기에서 심소(心所)를 말했으므로 대지법(大地法) 등을 설명하겠다. 대지법(大地法)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受)요, 둘째는 상(想)이며, 셋째는 사(思)요, 넷째는 촉(觸)이며, 다섯째는 욕(欲)이요, 여섯째는 작의(作意)이며, 일곱째는 승해(勝解)요, 여덟째는 염(念)이며, 아홉째는 삼마지(三摩地)요, 열째는 혜(慧)이다.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에도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신(不信)이요, 둘째는 해태(懈怠)이며, 셋째는 방일(放逸)이요, 넷째는 도거(掉擧)이며, 다섯째는 무명(無明)이요, 여섯째는 망념(忘念)이며, 일곱째는 부정지(不正知)요, 여덟째는 심란(心亂)이며, 아홉째는 비리작의(非理作意)요, 열째는 사승해(邪勝解)이다.
이 두 가지 대지법에는 이름은 비록 스무 가지라도 체(體)는 열다섯 가지일 뿐이다. 대지법 중의 수ㆍ상ㆍ사ㆍ촉ㆍ욕은 이름이 다섯 가지이면서 체도 다섯 가지요, 대번뇌지법 중의 불신ㆍ해태ㆍ방일ㆍ도거ㆍ무명도 이름이 다섯 가지이면서 체도 다섯 가지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 열 가지 법은 이름은 비록 열 가지이나 그 체는 다섯 가지일 뿐이다.
대번뇌지법의 망념은 바로 대지법의 염이요 부정지는 바로 대지법의 혜이며, 심란은 바로 대지법의 삼마지요 비리작의는 바로 대지법의 작의이며, 사승해는 바로 대지법의 승해이다. 그러나 대지법은 염오(染汚)와 불염오(不染汚)에 다 통하고 대번뇌지법은 염오일 뿐인데 염(念) 등 다섯 가지 법은 선품(善品)을 쫓는 것이 많아서 건립하여 모든 선품 중에 있게 된다.
혹 어떤 이는 “오직 불염오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의심하며 다시 “번뇌지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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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다섯 가지는 염(染)을 쫒는 것도 뛰어나므로[勝] 거듭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혼침은 정(定)을 쫓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두루 물들지 않기 때문에 이 지법(地法) 안에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는 마땅히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것은 대지법이나 대번뇌지법은 아니니, 수ㆍ상ㆍ사ㆍ촉ㆍ욕이다.
어떤 것은 대번뇌지법이나 대지법은 아니니, 불신ㆍ해태ㆍ방일ㆍ도거ㆍ무명이다.
어떤 것은 대지법이기도 하고 대번뇌지법이기도 하니, 망념ㆍ부정지ㆍ심란ㆍ비리작의ㆍ사승해이다.
어떤 것은 대지법도 아니고 대번뇌지법도 아니니, 앞의 모양[前相]에서 제외된 것이다.
심란으로 하여금 삼마지가 아니게 하려는 이가 있는데, 그는 “이 두 가지 대지법은 이름에는 스무 가지가 있으나 체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다”라고 말한다. 만든 4구에는 앞의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제1구(句)에는 여섯 가지 법이 있는데 바로 앞의 다섯 가지와 삼마지요, 제2구에도 여섯 가지 법이 있는데 앞의 다섯 가지와 심란이며, 제3구에는 네 가지 법이 있는데 앞의 다섯 가지 가운데서 심란이 제외되고, 제4구에서는 앞의 설명과 같다.
[評] 여기에서는 앞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다.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에는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忿)이요, 둘째는 한(恨)이며, 셋째는 부(覆)요, 넷째는 뇌(惱)이며, 다섯째는 첨(諂)이요, 여섯째는 광(誑)이며, 일곱째는 교(憍)요, 여덟째 간(慳)이며, 아홉째는 질(嫉)이요, 열째는 해(害)이다.
대선지법(大善地法)에는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信)이요, 둘째는 정진(精進)이며, 셋째는 참(慚)이요, 넷째는 괴(愧)이며, 다섯째는 무탐(無貪)이요, 여섯째는 무진(無瞋)이며, 일곱째는 경안(輕安)이요, 여덟째는 사(捨)이며, 아홉째는 불방일(不放逸)이요, 열째는 불해(不害)이다.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명(無明)이요, 둘째는 혼침(惛沈)이며, 셋째는 도거(掉擧)요, 넷째는 무참(無慚)이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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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째는 무괴(無愧)이다.
대유부무기지법(大有覆無記地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명(無明)이요, 둘째는 혼침(惛沈)이며, 셋째는 도거(掉擧)이다.
대무부무기지법(大無覆無記地法)에는 열 가지가 있다. 곧 앞의 대지(大地)에서의 수(受) 등 열 가지 법이다.
[문] 대지법 등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만일 법이 온갖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지법이라 한다. 염오ㆍ불염오이거나 유루ㆍ무루이거나 선ㆍ불선ㆍ무기이거나 삼계의 계(繫)ㆍ불계(不繫)이거나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이거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ㆍ끊어야 할 것이 아니거나 의지(意地)에 있거나 5식신(識身)에 있거나 간에 온갖 마음에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지법이라 한다.
만일 법이 온갖 염오의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번뇌지법이라 한다. 불선(不善)이거나 무기(無記)이거나 욕계계(欲界繫)이거나 색계계(色界繫)이거나 무색계계(無色界繫)이거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의지에 있거나 5식신에 있거나 간에 번뇌를 일으킬 때에는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번뇌지법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불신(不信) 등 다섯 가지는 온갖 염오의 마음과 함께하기 때문에 대번뇌지법을 세운 줄 알아야
하고 망념(忘念) 등 다섯 가지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법이 작은 부분의 염오의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소번뇌지법이라 한다. 분(忿) 등 일곱 가지는 오직 불선일 뿐이요 첨ㆍ광ㆍ교는 혹은 불선이기도 하고 혹은 무기이기도 하다. 또 분 등 일곱 가지는 오직 욕계계일 뿐이요 첨ㆍ광은 욕계와 초정려의 계(繫)이며 교는 삼계계이다. 또 이 열 가지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어야 할 것이요 오직 의지에 있을 뿐이다. 만일 한 가지가 일어날 때면 반드시 두 번째 것은 없으니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소번뇌
지법이라 한다.
만일 법이 오직 온갖 착한 마음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선지법이라 한다. 유루이거나 무루이거나 생득선(生得善)이거나 가행선(加行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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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계이거나 불계이거나 학이거나 무학이거나 비학비무학이거나 의지에 있거나 5식신에 있거나 간에 온갖 착한 마음에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선지법이라 한다.
만일 법이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불선지법이라 한다.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견집(見集)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견멸(見滅)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것이거나 의지에 있거나 5식신에 있거나 간에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에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불선지법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오직 착하지 않은 마음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불선지법이라 하고, 혼침과 도거는 번뇌와 전(纏)에 속하면서 통하여 온갖 착하지 않는 마음과 상응하며 또 지(止)ㆍ관(觀)을 장애하는 세력과 작용이 강하기 때문에 다시 세워서 불선지 안에 있고, 무명 한 가지는 수면(隨眠)에 속하면서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과 두루 상응하기 때문에 다시 세워서 불선지 안에 있지만 그 밖의 수면과 수번뇌(隨煩惱)에는 이와
같은 뜻이 없다.
만일 법이 온갖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유부무기지법이라 한다. 욕계의 살가야견(薩迦耶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상응하는 마음이거나 색계ㆍ무색계의 온갖 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이거나 의지에 있거나 5식신에 있거나 간에 온갖 유부무기의 마음에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유부무기지법이라 한다.
여기에는 따로의 심소가 없고 오직 유부무기의 성품에만 속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에는 무명ㆍ혼침ㆍ도거만이 있을 뿐이니 이 번뇌와 전(纏)은 지ㆍ관을 장애하는 것이 뛰어나고 혹 이 수면은 온갖 유부무기의 마음에 두루 있으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유부무기지에 세운다.
만일 법이 온갖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마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대무부무기지법이라 한다. 욕계계이거나 색계계이거나 무색계계이거나 의지에 있거나 5식신에 있거나 이숙생(異熟生)이거나 위의로(威儀路)거나 공교처(工巧處)거나 통과심(通果心)이거나 간에 모두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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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무기지법이라 한다.
여기에는 따로의 심소(心所)가 없고 오직 무부무기의 성품에만 속하는 줄 알아야 하니 곧 수(受) 등 열 가지는 온갖 무부무기의 마음에 두루 있으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무부무기지에 세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3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8) 사납식 ②
이 가운데서는 두 가지 삼마지(三摩地)1)가 있는 줄 알아야 하니 첫째는 염오(染汚)요, 둘째는 불염오(不染汚)이다. 염오인 것은 삼마지라고도 하고 산란(散亂)이라고도 하며, 불염오인 것은 삼마지라 하면서도 산란이라고는 하지 않으므로 삼마지에는 12구(句)가 있다.
첫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一所緣]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두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에서 산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세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행상[一行相]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네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다섯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과 하나의 행상[一所緣一行相]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여섯 번째는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과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일곱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소
연[多所緣]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여덟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소연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아홉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행상[多行相]에
1) 삼마지는 정(定)이라 번역한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신 작용이다. 이것에는 두 계단이 있으니 하나는 보통의 심리 활동에 반드시 수반하는 것으로 이른바 10대지법(大地法)에 속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특수한 수행에 의한 것으로 수행의 덕목으로 삼마지가 이에 속한다. 여기서는 위의 것 중의 둘째의 삼마지이며 이것을 염오와 불염오의 두 가지로 나눈다. 앞의 것을 삼마지라 하면서도 산란(散亂)한 것을 말하고, 뒤의 것을 순수
한 삼마지라 하면서 다시 그것을 소연(所緣:對緣)의 일다(一多)와 행상(行相:認識에 의한 影像)의 일다에 배당하여 열두 가지 경우를 낱낱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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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산란한 것이 있다. 열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열한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소연과 여러 행상[多所緣多行相]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열두 번째는 삼마지가 여러 소연과 여러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어느 한 물건에 대하여 부정(不淨)을 사유(思惟)하여 수행이 아직 순숙(純熟)하지 못한데 다시 곧 이것에 대하여 혹은 푸른 어혈[靑瘀]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부풀어 오른 것[膨脹]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고름이 나고 문드러진 것[濃爛]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파괴된 것[破壞]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달라져서 붉게 된 것[異赤]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파먹히는 것[被食]을 관
하기도 하며, 혹은 떨어져 나가는 것[分離]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흰 뼈[白骨]를 관하기도 하며, 혹은 골쇄(骨瑣)를 관하기도 하여 그 마음이 산란하여 만판 놀아나면서 머무르지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앞의 선정[定]에서는 물러나면서 뒤의 선정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어느 한 물건에 대하여 부정을 사유하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곧 이것에 대하여 혹은 푸른 어혈을 관하기도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혹은 골쇄를 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흐르지 않고 놀아나지 않고 편안히 머무르면서 한 곬을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계기로 앞의 선정은 잃지 않고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비상(非常)을 사유하여 수행이 아직 순숙하지 못한데 다시 곧 이를 계기로 혹은 더하고 덜하는 것[增減]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잠깐 동안인 것을 관하기도 하며, 혹은 바뀌고 변하는 것[轉變]을 관하기도 하고, 혹은 닳아 없어지는 것[磨滅]을 관하기도 하여 그 마음이 산란하여 마음껏 놀아나며 머무르지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앞의 선정에서
는 물러나면서 뒤의 선정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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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비상을 사유하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곧 이를 계기로 혹은 더하고 덜하는 것을 관하기도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혹은 닳아 없어지는 것을 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도 않고 흐르지도 않고 놀아나지도 않고 편안히 머물러 한 곬을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앞의 선정은 잃지 않으며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과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물질[色]의 비상(非常)을 사유하여 수행이 아직 순숙하지 못한데 다시 곧 여기에서 이를 계기로 혹은 더하고 덜하는 것을 관하기도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혹은 닳아 없어지는 것을 관하여 그의 마음이 산란하여 마음대로 놀아나며 머물지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삼아 앞의 선정에서는 물러나면서 뒤의 선정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하나의 소연과 하나의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물질의 비상을 사유하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곧 여기에서 이를 계기로 혹은 더하고 덜하는 것을 관하기도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혹은 닳아 없어지는 것을 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흘러 빠지지 않고 놀아나지 않고 편안히 머물러 한 곬으로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앞의 선정은 잃지 않으면서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
다.
삼마지가 여러 소연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몸에 대한 순신관(循身觀)에 머물러 수행이 아직 순숙하지 못한데 다시 느낌에 대한 순수관(循受觀)에 머무르고 마음에 대한 순심관(循心觀)에 머무르며 법에 대한 순법관(循法觀)에 머물러 그의 마음이 산란하여 만판 놀아나면서 머물지도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앞의 선정에서는 물러나면서 뒤의 선정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여러 소연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몸에 대한 순신관에 머물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느낌에 대한 순수관에 머물고, 나아가 법에 대한 순법관에 머물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흘러 빠지지 않고 편안히 머물러 한 곬을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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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선정은 잃지 않고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여러 행상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비상을 사유하여 수행이 아직 순숙하지 못한데 다시 혹은 고(苦)를 관하고, 혹은 공(空)을 관하며, 혹은 비아(非我)를 관하여 그의 마음이 산란하여 만판 놀면서 머물지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앞의 선정에서는 물러나고 뒤의 선정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여러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비상을 사유하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혹은 고를 관하고, 혹은 공을 관하며, 혹은 비아를 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흐르지 않고 놀아나지 않고 편안히 머물러 한 곬을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로 앞의 선정은 잃지 않고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여러 소연과 여러 행상에서 산란한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몸은 비상(非常)하다고 사유하여 수행이 아직 순숙하지 못한데 다시 느낌은 괴로움이요 마음은 공이며 법은 비아라고 관하여 그의 마음이 산란하여 만판 놀아나고 머물지 않고 한 경계에 외곬으로 쏟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계기삼아 앞의 선정에서 물러나고 뒤의 선정으로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삼마지가 여러 소연과 여러 행상에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함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몸은 비상하다고 사유하여 수행이 이미 순숙해진 뒤에 다시 느낌은 괴로움이요 마음은 공이며 법은 비아라고 관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흐르지 않고 놀아나지 않고 편안히 머물러 한 곬을 지키는 것이니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앞의 선정은 잃지 않고 뒤의 선정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論]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2)……(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2) 무명이나 부정지(不正知)는 바사(婆沙)의 입장에 의하면 다 같이 10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에 속하지만 이 체(體)를 말하면 무명은 독립적인 존재요, 부정지는 비리작의(非理作意) 즉 불선(不善) 또는 유부(有覆)의 작의에 의하여 끌어 일으킨 혜(慧)이어서 십대지법(大地法) 중에 있으므로 양자는 서로가 다르다. 여기서는 이 무명과 부정지의 상위(相違)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부정지에 의하여 끌어 일으키는 망어(妄語) 중에는 역시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하여 분별론자와 문답 왕래하면서 그것을 결정하는 문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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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통달하지 못하고[不達] 이해하지 못하고[不解] 분명히 알지 못하기[不了知] 때문에 무명이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으로 모양[相]을 삼기 때문에 혹 어떤 이는 ‘무명은 바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성품이어서 이 두 가지의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라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고 이 두 가지는
그 체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무명인가?
[答] 삼계(三界)의 무지(無智)이다.
이 말은 이치에 맞으니 삼계계(三界繫)의 무지는 모든 무명을 다 포섭하기 때문이다.
만일 “삼계를 알지 못하는 것[不知]을 무명이라 한다”라고 말한다면 멸제(滅諦)ㆍ도제(道諦)를 반연하는 두 가지 무명은 포섭하지 않아야 하나니 그것은 삼계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인가?
[答] 비리로 이끈[非理所引] 지혜[慧]이다.
[문]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질문은 적은데 대답은 많은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염오(染汚)의 지혜뿐이며, 비리로 이끈 지혜는 염오와 불염오(不染汚)에 모두 통한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업온(業蘊)에서 “모든 뜻의 악행[意惡行]은 모두 비리로 이끈 의업(意業)이지만 비리로 이끈 의업이면서 뜻의 악행이 아닌 것도 있으니 온갖 유부무기의 의업과 일부분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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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무기의 의업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리로 이끈 지혜는 염ㆍ불염에 다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답] 여기에서 비리로 이끈 지혜라 함은 오직 염오의 지혜만 포섭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리로 이끈 것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세속(世俗)이요, 둘째는 승의(勝義)이다.
지금은 승의에서 비리로 이끈 것을 말하기 때문에 오직 모든 염오의 지혜만 포섭하고 오직 염오의 법만 승의에서 비리로 이끈 것이라 한다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무부무기로 다만 세속을 계기삼아 그의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이 뒤에는 응리론자(應理論者)와 분별론자(分別論者)가 상대하여 묻고 대답하고 힐난하고 회통하면서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은 비록 비리로 이끈 지혜에 속한다 해도 바르게 알면서[正知] 거짓말[妄語]을 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論] 그대는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비리로 이끈 지혜이다”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거듭 앞의 주장을 확정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허물만을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答] 그렇다.
이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앞에서 주장한 것이 도리에서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論]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르게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이면 그는 모두 잊고[失念]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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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분별론자의 질문이니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들어서 다시 주장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答] 그렇다.
이것은 응리론자의 대답이니 그가 말한 것이 주장한 것에 걸맞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論] 또 그대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르게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인가?
이것은 분별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주장한 것을 인정한다면 바른 이치에 어긋남을 나타내려고 한다.
[答]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응리론자가 그가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비리로 이끈 지혜라 할지라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뜻도 있다. 이런 뜻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라고 말한다.
[論]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만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비리로 이끈 지혜이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면 그는 모두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은 비리로 이끈 지혜이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면 그는 모두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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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분별론자가 앞뒤의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다. 전관(前關)은 당신의 주장을 따르면 도리[理]에 어긋남을 드러내고 후관(後關)은 도리를 따르면 당신의 주장에 어긋남을 드러낸다. 두 가지가 다 같이 불가(不可)하기 때문에 통틀어 “이와 같이 말한다면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가 힐난하는 뜻은 “만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이 바로 비리로 이끈 지혜[非理所引慧]라면 모든 거짓말은 모두 비리로 이끈 지혜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어서 곧 바르게 알지 못한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한다면 이런 말은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것은 도리에서 어긋나고 뒤의 것은 주장에서 어긋나는 것이니 진퇴(進退)를 미루어 따져보면 두 가지 모두가 나무랄 데가 있다”는 것이다.
응리론자가 뒤의 통석(通釋)하는 뜻은 “모든 거짓말은 비록 모두 바르게 알지 못한 것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해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이는 그 일을 바르게 알면서도 거짓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았던 일들을 바르게 알면서도 거꾸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거짓말을 하는 이는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생각을 하면서 거짓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았던 일들을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생각하면서도 거꾸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거짓말을 하는 이는 바르게 알고 스스로 보았으나 거짓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았던 일들을 바르게 알고 스스로가 보았으나 거꾸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거짓말을 하는 이는 바르게 아는 것을 그대로 말해야 하는데도 거짓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왕과 신하 등의 여러 사람들을 대하여3)
3) 다른 왕과 신하 등에 대하여라 함은 국왕이나 대신들 앞에서 취조를 받을 때에 허위의 진술을 하는 경우를 예상하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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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아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데도 거꾸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비록 모두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해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말이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다만 바르게 알지 못하여 거짓말을 한다고만 하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뿐이면 이런 말은 또한 10대지법(大地法) 등으로부터도 일어나는 것이므로 역시 수(受) 등을 거짓말이라 해야 하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응리론자는 이 뒤에서 도리어 분별론자를 타파하면서 앞의 힐난을 회통하는데 세 가지의 타파하는 것 가운데서 등피파(等彼破)이다. 세 가지로 타파하는 뜻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그리고 수(受) 등 대지법에 대해서는 처음과 나중은 생략하고 다만 중간의 무명(無明)만을 들어서 그를 꾸짖으며 그로써 앞의 힐난을 회통한다.
[論] 그것은 “모든 무명은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과 상응한다”는 말인지 묻겠다.
이것은 응리론자의 질문이니 다른 이의 주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이의 주장을 확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허물만을 말하면 도리에 맞지 않다.
[答]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묻는 도리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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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면 모두가 무명의 갈래[趣]와 무명에 얽히어서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의 물음이니 거짓말이 있는 것을 들어서 거듭 그의 주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答] 그렇다.
이것은 분별론자의 대답이니 여기서 말한 것은 그의 주장에 걸맞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論] 또 그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는 것인가?
이것은 응리론자가 힐난을 설정하여 도리어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바른 도리에는 어긋난다는 것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答]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분별론자가 여기서 묻는 것을 차단하면서 도리에는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모든 무명은 비록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과 상응한다 해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있다. 이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라고 말한다.
[論]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만일 온갖 무명은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과 상응하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모두 무명의 갈래와 무명에 얽히어서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하면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온갖 무명은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과 상응하고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모두 무명의 갈래와 무명에 얽히어서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상응론자(相應論者)4)가 앞뒤의 양관(兩關)을 뒤집어서 힐난을 설정한 것이다. 전관(前關)은 당신의 주장을 따르면 도리에 어긋남을 드러내며 후관(後關)은 도리를 따르면 당신의 주장에 어긋남을 드러낸다. 두 가지가 다 같이 불가(不可)하기 때문에 통틀어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여기서 힐난하는 뜻은 ‘만일 모든 무명이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과 상응하다면 모든 거짓말은 모두 잊고 바르게 알지 못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어서 바로 무명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일을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한다면 이런 말은 모두가 무명에서 일어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것은 도리에 어긋나고 뒤의 것은 주장에 어긋나는 것이니 진퇴(進退)를 미루어 따져 보면 두 가지 모두가 나무랄 데가 있다’는 것이다.
분별론자는 도리에서 보아 “모든 거짓말은 비록 모두가 무명에서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순 있어도 그것이 무명의 거짓말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고 회통해야 한다. 응리론자는 그에게 “나의 주장도 그러하여 모든 거짓말은 비록 모두가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바르게 알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순 있어도 바르게 알지 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힐난할 거리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4) 상응론자라 함은 여기서는 응리론자(應理論者)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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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것이 교(憍)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마음의 교(憍)요, 마음의 만(慢)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는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그 뜻은 분별하지 않았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교인가?
[答] 모든 뽐내면서[憍] 취(醉)하고 극히 취하고[極醉], 어둡고[悶], 극히 어둡고[極悶], 마음에서 잘난 체하고 방자하며[心傲逸],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心自取]이니 이것을 교라 한다.
여기서의 교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두가 교의 자성(自性)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만(慢)인가?
[答] 모든 젠 체하면서[慢] 이미 젠 체하였고[已慢] 장차 젠 체할 것[當慢]이며 마음에서 뽐내고[心擧恃]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이니 이것을 만이라 한다.
여기서의 만 등의 이름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해도 체에는 차별이 없으니 모두가 만의 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論] 교와 만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서로가 유사하여 교가 많은 이[多憍者]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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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이 사람은 오만함이 많다’고 하며, 오만함이 많은 이[多慢者]를 보면 세상 사람은 다 같이 ‘이 사람은 교가 많다’고 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요, 교와 만의 자성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교와 만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答] 만일 다른 이에 견주지 않으면서 자기의 법에 염착(染著)하여 마음에 잘난 체하고 방자하는 근본을 교(憍)라 하며, 만일 다른 이에 견주면서 스스로가 뽐내며 믿는 모양[自擧恃相]을 만(慢)이라 하니 이것이 차별이다.
여기에서 교는 다른 이에 견주지 않으면서 다만 자기만의 종성(種姓)ㆍ형색[色]ㆍ세력[力]ㆍ재산[財]ㆍ지위[位]ㆍ지혜[智] 등에 염착하여 마음에 잘난 체하고 방자하는 모양을 말하고 여기에서 만은 다른 이에 견주면서 종성ㆍ형색ㆍ세력ㆍ재산ㆍ지위ㆍ지혜 등에 스스로가 뽐내며 믿는 모양을 말한다.
[문] 교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어떤 이는 “뜻[意]을 자성으로 삼으니 말타(末陀:憍)5)와 말나(末那:慢)6)는 음[聲]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애(愛)를 자성으로 삼으니 여기에서 자기의 법[自法]에 염착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慢)을 자성으로 삼으니 말타와 마나(磨那:慢)7)는 음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은 다만 만이라고만 하고 다른 이에 의하여 전개되지 않은 것은 만이라 하기도 하고 교라고 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評] “다른 심소(心所)인 애(愛)에 이끌려 일어난 것을 교라고 하는 것이니 오직 의지(意地)에만 있으며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5) 범어로는 mada라고 한다.
6) 범어로는 manas라고 한다.
7) 범어로는 māna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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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와 만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다. 만은 번뇌이지만 교는 번뇌가 아니요, 만(慢)은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지만 교는 결ㆍ박ㆍ수면과 전이 아니고 다만 수번뇌일 뿐이다.
만은 견도ㆍ수도에서 다 끊을 것이지만 교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요, 만은 대지(大地) 등 법에 소속되지 않지만 교는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에 소속된다. 그러나 만과 교는 다 같이 삼계계(三界繫)이다.
[문] 만은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난다 하는데 욕계ㆍ색계 두 세계의 수도에서 끊을 만은 외문(外門)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날 수 있지만 무색계의 만과 견도에서 끊을 만은 내문(內門)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만이라 하는가?
[답] 우선 무색계의 수도에서 끊을 만은 비록 다른 이에 견주지는 않는다 해도 만의 모양[慢相]에 머무르기 때문에 만이라 한다.
또 먼저 하계(下界)에 있을 때에 다른 이에 견주면서 만을 일으켜 자주자주 익힌 힘을 계기로 뒤에 무색계에 나서도 그 만이 현행(現行)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비록 무색계에 나면 만은 현행하지 않는다 해도 하계에 있으면서 역시 그 만을 일으켰던 것이니 두 사람으로서 무색정(無色定)을 증득한 이가 차츰차츰 얻은 선정의 모양[定相]을 문답하면서 이로 인하여 만을 일으켜 ‘내가 얻은 것은 그대의 선정보다 뛰어나다. 나는 빨리 들 수 있지만 그대는 그럴 수 없으며 나는 오래도록 머물 수 있지만 그대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견도에서 끊을 만은 비록 다른 이에 견주지는 않으나 만의 모양에 머무르기 때문에 역시 만이라 한다.
또 수도에서 끊을 만은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나고 그 자주자주 익히는 힘을 계기삼아 견도에서 끊을 만을 이끌어서 또한 현행하게 한다.
어떤 이는 “견도에서 끊을 만도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나는 것이니 마치 아견(我見)을 지닌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서 아(我)와 아견의 모양을 문답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켜 ‘나의 아견이 다른 이의 아견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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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온갖 만은 반드시 다른 이에 견주고야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끝없는 옛날부터 자주자주 익힌 힘 때문에 자상속(自相續)에 의해서도 만 또한 현행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계경에서 “무멸(無滅) 존자가 사리자(舍利者) 존자에게 가서 ‘나에게는 천안(天眼)이 있는데 청정함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천(千) 세계를 볼 적에도 많은 힘을 들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사리자가 ‘이것은 그대의 만(慢)이다’하셨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런 만은 다만 자상속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나 “모든 만은 다른 이에 견주면서 일어난다”고 하는 말을 대부분[多分]을 따르는 말이다. 대부분은 다른 이에 견주면서 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增上慢)을 일으켜 나는 고(苦)를 고라고 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이의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만(慢)에는 소연(所緣)이 없다’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또 어떤 이는 ‘만은 다른 지[地]를 반연한다’8)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또 어떤 이는 ‘만은 무루(無漏)를 반연한다’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또 어떤 이는 ‘만은 무위를 반연한다’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만은 다른 부[他部]를 반연한다’ ='9)라고 집착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편벽된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만에는 모두가 소연이 있으면서 다른 지를 반연하지도 않고 무루를 반연하지도 않으며 무위를 반연하지도 않고 다른 부를 반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것
8) 다른 지를 반연한다고 함은 삼계(三界) 9지(地) 중 혹은 특정한 지에 대해서나 다른 지에 대하여 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유부(有部)에서는 만을 자기의 연[自地緣]이라 한다.
9) 다른 부라 함은 마치 고제(苦諦) 하의 만이 집제(集諦)에도 반연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유부에서는 변행혹(編行惑) 중에 만을 포섭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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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고를 고라고 본다거나 혹은 집(集)을 집이라고 본다거나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所緣)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선사(善士)에 친근하여 바른 법[正法]을 듣고 이치대로 뜻을 짓는 것[如理作意]과 같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제순인(諦順忍)을 얻고 고(苦)의 현관변(現觀邊)인 자(者)는 고에 대하여 이것은 고라 함을 인락현료(忍樂顯了)하며 집(集)의 현관변인 자는 집에 대하여 이것은 집이라고 인락현료한다.
그는 이 인(忍)과 작의(作意)가 유지되기 때문에 혹은 중간의 부작의(不作意) 때문에 견해[見]와 의심[疑]이 현행하지 않는다. 설령 현행한다 하여도 깨닫지 못하고 곧 ‘나는 고에 대하여는 이것이 고라고 보며 혹은 집에 대하여는 이것이 집이라고 본다’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已慢] 장차 젠 체할 것[當慢]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뽐내고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心自取]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은 곧 고를 반
연하기도 하고 혹은 집을 반연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마치 어느 한 무리가라고 함은 순결택분(順決擇分)을 닦는 이들을 말하고 선사에 친근한다 함은 선우(善友)에 친근하는 것을 말한다. 선우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니 착한 법을 닦아서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른 법을 듣는다 함은 유전(流轉)을 헐뜯고 환멸(還滅)을 찬탄하면서 뛰어난 행[勝行]을 이끄는 가르침[敎]을 바른 법이라 하며 그는 귀를 붙이고 뒤바뀜이 없이 듣는 것이요, 이치대로 뜻을 짓는다 함은 유전을 싫어하고 환멸을 좋아하며 들은 것을 바르게 사유하면서 뛰어난 행에 나아가 닦는 것이며, 이런 인연을 말미암는다 함은 앞의 세 가지로 가행(加行)을 삼기 때문이다.
제순인을 얻는다 함은 순결택분의 선근 안의 인(忍)이어서 이 인은 4성제(聖諦)의 도리에 수순하고 혹은 성도(聖道)에 수순하기 때문에 제순(諦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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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다.
고의 현관변인 자가 고에 대하여 이것은 고라고 인락현료한다고 함은 고를 반연하는 제순인이요, 집의 현관변인 자가 집에 대하여 이것은 집이라고 인락현료한다고 함은 집을 반연하는 제순인이다.
인락현료(忍樂顯了)한다는 것은 인(忍)의 다른 이름[異名]이니 모두가 법을 관찰하는 인을 드러낸 것이다.
현관이라 함은 견도(見道)를 말하며 이 인(忍)은 그것에 가깝기 때문에 변(邊)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통틀어 법수법행(法隨法行)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는 네 가지 예류지[四預流支]를 다 드러냈다. 선사(善士)에 친근하는 것에서 나아가 법수법행이니 예류(預流)의 향(向)과 과(果)는 이것을 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인(忍)과 작의(作意)가 유지되기 때문이라 함은 그 유가사(瑜伽師)는 인으로 말미암아 진리[諦]를 관찰하고 경계에 대하여 작의의 선근을 지니기 때문에 견해[見]와 의심[疑]으로 하여금 잠시 동안 현행하지 않게 한다.
혹은 중간의 부작의(不作意) 때문이라 함은 이미 앞의 선정[定]에서 나와서 아직 뒤의 선정에 들지 않았을 때를 중간(中間)이라 하며 도리 아닌[非理] 작의를 부작의라 하고, 혹은 이것은 이치대로의 작의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곧 뒤의 ‘설령 현행한다 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견해와 의심이 현행(現行)하지 않는다고 함은 인과 작의의 선근이 유지되기 때문이니 여기서의 견해란 유신견(有身見)과 계금취(戒禁取)이며 의심이란 의(疑)를 말한다.
어떤 이는 “견해란 유신견과 변견과 계금취를 말하고 오직 사견(邪見)만은 제외되니 인(忍)을 얻으면 4성제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서방(西方)의 논사는 “오직 계금취만 여기서의 견해라 하니 인을 얻은 이면 나[我]를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거기서도 나를 집착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처음의 말[初說]이 옳다 하겠다. 비록 잠시 동안은 나를 집착한다 해도 단(斷)ㆍ상(常)은 집착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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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요, 비록 잠시 동안 정(淨)을 헤아린다 해도 승(勝)함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번뇌는 다섯 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비록 아직 영원히 끊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현행하지는 않는다. 첫째는 사마타(奢摩他)의 힘을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비발사나(毘鉢舍那)의 힘을 말미암아서며, 셋째는 착한 사우(師友)의 힘을 말미암아서요, 넷째는 좋은 데에 사는[好居處] 힘을 말미암아서며, 다섯째 성품이 얇은[性薄] 번뇌의 힘을 말미암아서이다.
여기서는 생략한 까닭에 다만 앞의 두 가지만 들었을 뿐이니 인(忍)은 비발사나를 말하고 작의(作意)는 사마타를 말한다. 두 가지 선근을 맡아 지니기[任持] 때문에 견해와 의심이 현행하지 않으며 설령 현행한다 해도 깨닫지 못한다 함은 번뇌가 미세하기 때문이요 각혜(覺慧)가 하열하기 때문이다.
곧 이렇게 생각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함은 그 유루의 인[有漏忍]은 고제ㆍ집제를 관할 때에 곧 ‘이미 무루의 진실한 견[眞見]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니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고(苦)라고 봄으로 인하여 일으키는 것은 소연(所緣)의 고를 반연하는 것이요, 집(集)이라고 봄으로 인하여 일으키는 것은 소연의 집을 반연하는 것이다.
그 유루의 인이 비록 통틀어[總] 또는 따로따로[別] 고제와 집제를 관한다 하더라도 증상만은 다만 따로따로 반연할 뿐이니 견고(見苦)에서 끊을 것이면 다만 자기 자리[自地]의 견고에서 끊을 법만을 반연하고 나아가 수도에서 끊을 것이면 다만 자기 자리의 수도에서 끊을 법만을 반연한다.
[문] 이 증상만도 고ㆍ집인품(苦集忍品)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을 반연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고ㆍ집만을 반연한다고 말하는가?
[답] 역시 그것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밖의 다른 설명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인품(忍品)을 반연하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요 고ㆍ집을 반연하는 것은 5부(部)의 만(慢)에 다 통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다만 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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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연하는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인(忍)을 반연하는 증상만은 말하지 않는다.
또 유루의 인품도 고ㆍ집에 포섭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고ㆍ집을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고ㆍ집을 반연한다는 말은 이 만(慢)을 헤아리면서 소연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을 차단하고 또한 이 만이 다른 지와 다른 부를 반연한다 하는 집착도 차단하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고ㆍ집을 반연한다는 것은 고ㆍ집인(苦集忍)을 반연하는 것이요, 고ㆍ집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뒤에서 멸(滅)ㆍ도(道)에 의한 증상만 가운데서 곧 “멸 혹은 도를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고와 집을 반연한다고 해도 도리에는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키어 나는 멸(滅)을 멸이라고 본다거나 혹은 도(道)를 도라고 본다거나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所緣)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선사(善士)에 친근하여 바른 법[正法]을 듣고 이치대로 뜻을 짓는 것[如理作意]과 같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제순인(諦順忍)을 얻고 멸의 현관변인 자(者)는 멸에 대하여 이것이 멸이라고 인락현료(忍樂顯了)하고 도의 현관인 이는 도에 대하여 이것이 도라고 인락현료한다.
그는 이 인(忍)과 작의(作意)가 유지되기 때문에 혹은 중간의 부작의 때문에 견해[見]와 의심[疑]이 현행하지 않는다. 설령 현행한다 해도 깨닫지 못하면서 곧 ‘나는 멸에 대하여는 이것이 멸이라고 보며 도에 대하여는 이것이 도라고 본다’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已慢] 장차 젠 체할 것[當慢]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뽐내고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은 곧 그 심ㆍ심소법을 반연한다.
여기의 모든 구절[句]의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이것은 곧 그 심ㆍ심소의 법을 반연한다고 함은 그 유루의 인[有漏忍]이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관하면서 곧 이미 무루의 진실한 견[眞見]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니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을 증상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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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다.
멸이라고 봄으로 인하여 일으키는 것은 멸을 반연하는 유루의 인품(忍品)의 심ㆍ심소법을 반연하는 것이요, 도라고 봄으로 인하여 일으키는 것은 도를 반연하는 유루의 인품의 심ㆍ심소법을 반연하는 것이다. 그 유루의 인은 비록 멸ㆍ도를 반연한다 해도 증상만은 다만 인품의 심ㆍ심소법만을 반연하는 것이니 멸과 도는 고요하여서 만(慢)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心) 등을 반연한다는 말은 이 만을 헤아리면서 소연이 없다고 하는 집착을 차단하고 또한 이 만은 무위와 무루를 반연한다고 하는 집착을 차단하는 것이다.
[문] 이 증상만은 욕계계인가, 색계계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만일 욕계계라면 욕계에는 순결택분의 인(忍)이 없는데 이것은 무엇이 소연이고, 만일 색계계이면 아직 욕염(欲染)을 여의지 못한 보특가라에게는 이런 만이 없어야 한다.
[답] 어떤 이는 “이 만은 색계계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보특가라에게는 이런 만이 없어야 한다.
[답] 여기서는 욕염을 여읜 이를 생략하였다.
어떤 이는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이도 미지지(未至地)의 증상만을 일으킨다”라고 하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하지(下地)의 염(染)을 여의지 못한 이는 반드시 상지(上地)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이 만도 욕계계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욕계에는 순결택분의 인이 없는데 이것은 무엇이 소연인가?
[답] 욕계에는 비록 순결택분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서로 유사한 선근이 있으며 이 증상만은 그것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욕계에는 온갖 공덕과 서로 유사한 법이 모두 갖추어 있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의 생(生)은 이미 다하였다’ 하면……(이하 자
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의 글[前文]에서는 오직 이생(異生)이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이생과 성자(聖者)가 다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생과 성자에서처럼 아직 견제하지 못한 이[未見諦]와 이미 견제한 이[已見諦]ㆍ아직 현관하지 못한 이[未現觀]와 이미 현관한 이[已現觀]ㆍ부정취(不定聚)와 정정취(正定聚)ㆍ성도가 없는 이[無聖道]와 성도가 있는 이[有聖道]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앞의 글에서는 아직 과를 얻지 못한 이[未得果者]의 증상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과를 얻지 못한 이나 이미 과를 얻은 이[已得果者]의 증상만을 다 같이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앞의 글에서는 오직 견도(見道)에 의하여 증상만을 내는 것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견도ㆍ수도(修道)ㆍ무학도(無學道)에 의하여 증상만을 내는 것을 다 같이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앞의 글에서는 오직 학도(學道)에 의하여 증상만을 내는 것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학도ㆍ무학도에 의하여 증상만을 내는 것을 다 같이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앞의 글에서는 오직 욕계와 색계의 증상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삼계(三界)의 증상만을 다 같이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이것은 도(道)요, 이것은 행(行)이다. 나는 이 도와 이 행에 의하여 이미 고(苦)를 두루 알았고 이미 집(集)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滅)을 증득하였고 이미 도(道)를 닦았으므로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켜 마음에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은 곧 생(生)을 반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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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것은 도요 이것은 행이다 함은 어느 곳에서든 도와 행이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요, 이미 고를 두루 알았고 나아가 이미 도를 닦았다고 함은 어느 곳에서든 고ㆍ집ㆍ멸ㆍ도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며,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다고 함은 어느 온(蘊)에서든 생이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요, 이것은 곧 생을 반연한다고 함은 다할 생, 곧 유루의 온[有漏蘊]을 반연하는 것이다.
[문] 이 증상만도 만이 있는 이[慢者]가 집착하는 유루의 도와 행을 반연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다할 생만을 반연한다고 말하는가?
[답] 그것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는 그 밖의 다른 설명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도와 행을 반연하는 것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지만 다할 생을 반연하는 것은 5부(部)의 만(慢)에 다 통하므로 여기서는 다만 두루 반연하는 것만을 말했을 뿐이다.
또 유루의 도와 행도 생에 속하기 때문에 생을 반연한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집착하는 도와 행을 생이라고 하는 것이니 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만은 다만 생을 다하는 도만을 반연하는 것이므로 그의 말은 도리가 아니다. 뒤에서 “범행(梵行)이 이미 섰다”라고 하는 등에 의한 만에서는 “생을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만이 “다할 생을 반연한다”라고 한 것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의 범행은 이미 섰다’고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이것은 도요, 이것은 행이다. 나는 이 도와 이 행에 의하여 이미 고를 두루 알았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증득하였고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나의 범행은 이미 섰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켜 마음에서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은 곧 그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을 반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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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의 모든 구절[句]의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나의 범행은 이미 섰다고 함은 어느 곳에서든 범행이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니 모든 아라한은 학도(學道)에 있어서는 ‘이미 섰다’고 하고 무학도(無學道)에 있어서는 ‘지금 섰다’고 한다.
이것은 곧 그 심ㆍ심소법을 반연한다고 함은 이 증상만은 그가 집착한 유루의 도와 행을 반연하는 것이니 무루의 범행은 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할 일을 다 갖추었다’고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이것은 도요, 이것은 행이다. 나는 이 도와 이 행에 의하여 이미 고를 두루 알았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증득하였고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나는 이미 수면(隨眠)을 끊었고 이미 번뇌를 다 해쳤으며 이미 결(結)을 토(吐)하였고 이미 누(漏)를 다하여 할 일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은 곧 그 심ㆍ심소법을 반연한다.
여기의 모든 구절의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이미 수면을 끊었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미 누를 다했다고 함은 이 본론을 지은 이가 이름을 달리하는 뜻에 대하여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에 갖가지로 말하는 것이니 글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에는 차별이 없고 모두 번뇌가 소멸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끊고 해치고 토하고 다한다는 것은 수면 등에 대하여 서로서로 세우는 뜻이므로 다 같이 어긋나는 것은 없다.
곧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을 할 일[所作]이라 하며 그것을 증득[證]하여 만족시켰기 때문에 다 갖추었다[已辨]고 한다.
이것은 곧 그 심ㆍ심소법을 반연한다고 함은 이 증상만은 그가 고집한 유루의 도와 행을 반연하는 것이니 모든 번뇌가 소멸하는 것은 그의 경계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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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기 때문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라고 하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는 시해탈(時解脫)에 의하여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불시해탈(不時解脫)에 의하여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 앞에서는 진지(盡智)에 의하여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했지만 지금은 무생지(無生智)에 의하여 일으키는 증상만을 말하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만일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무엇이 소연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이것은 도요, 이것은 행이다. 나는 이 도와 이 행에 의하여 이미 고를 두루 알았고 이미 집을 영원히 끊었으며 이미 멸을 증득하였고 이미 도를 닦아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갖추었으므로 후유를 받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증상만이라 한다. 이것
은 곧 유(有)를 반연한다.
여기의 모든 구절의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다시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는 등을 말하는 것은 무생지가 진지에 의하여 일어남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앞의 진지가 도(道)와 행(行)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도와 행을 말하는 것과 같다.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함은 무생지를 얻으면 다시는 물러나거나 후유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유를 반연한다고 함은 이 증상만은 곧 받지 않을 유(有)를 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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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의 문답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하니 유와 생(生)의 뜻은 서로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책[本]에서는 “심ㆍ심소법을 반연한다”고 하는데 후유를 받지 않는 것이 곧 멸ㆍ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 나의 생이 이미 다했는데도 무엇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가?
[답] 그것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데도 다만 교묘하게 꾸미어 하는 설명일 뿐이다.
[문] 누가 몇 가지의 증상만을 일으키는가?
[답] 어떤 이는 “이생은 다섯 가지 증상만을 일으키니 뛰어난 품류[勝品]인 유루의 선근과 예류(預流) 등의 4사문과(沙門果)에서다. 예류는 첫 번째를 제외한 네 가지를 일으키고, 일래(一來)는 앞의 두 가지를 제외한 세 가지를 일으키며, 불환(不還)은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두 가지를 일으키고 모든 아라한은 증상만이 없다”라고 말한다.
[문] 예류 등은 어떻게 하여 자기의 과[自果]에서 만을 일으키는가?
[답] 뛰어난 근성(根性)에 대해서는 증상만을 일으킨다.
어떤 이는 “이생은 아홉 가지 증상만을 일으키니 뛰어난 품류인 유루의 선근에 대해서와 무루의 4향(向)과 4과(果)에 대해서다. 예류과는 앞의 두 가지를 제외한 일곱 가지를 일으키고, 일래향은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여섯 가지를 일으키며 일래과는 앞의 네 가지를 제외한 다섯 가지를 일으키고, 불환향은 앞의 다섯 가지를 제외한 네 가지를 일으키며 불환과는 앞의 여섯 가지를 제외한 세 가지를 일으키고, 아라한향은 앞의 일곱 가지를 제외한 두 가지를
일으키며 아라한과에서는 증상만이 없고 예류향에서는 증상만을 일으킨다는 뜻이 없다”라고 말한다.
[評] 성자도 뛰어난 유루의 선[有漏善]에 대해서는 증상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여섯 성자(聖者)10)는 앞에서와 같이 일으키는 것에 각각 다시 한 가지씩을 더하는 것이다.
10) 예류과(預流果)로부터 아라한향(阿羅漢向)까지의 여섯 지위의 성자(聖者)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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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생이 어떻게 아라한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가?
[답] 이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애행자(愛行者)요, 둘째 견행자(見行者)이다. 만일 애행자가 부정관(不淨觀)을 닦아서 애품(愛品)의 번뇌를 조복하여 현행하지 않게 되면 그 성품은 견품(見品)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곧 스스로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여기게 되며, 만일 견행자가 지식념(持息念)을 닦아서 견품의 번뇌를 조복하여 현행하지 않게 되면 그 성품은 애품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곧 스스로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문] 이 증상만은 다만 유처(有處)11)에 의해서만 일으키는 것인가? 또한 무처(無處)에 의해서도 일으키는 것인가?
[답] 두 가지 처[二處]에 의하여 다 일으킨다. 이생이 유루의 선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은 유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요, 무루의 선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은 무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다.
예류과가 예류과와 유루의 선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은 유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요, 예류향 내지 아라한과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은 무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아라한향이 아라한향과 유루의 선에 대하여 일으키는 증상만은 유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요, 아라한과에 대하여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은 무처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다.
[문] 아직 색계와 무색계의 근본정(根本定)을 얻지 못한 이도 그 증상만을 일으키는가?
[답] 어떤 이는 “일으키지 않는다. 그 번뇌는 그 지(地)의 근본정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일정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전혀 아직 얻지 못한 이면 반드시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 아래의 염[下念]을 여의지 못하면 상지(上地)의 번뇌는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미 증득했으면서 아직 일으키지 못한 이면 그 만(慢)을 일으킬 수
11) 유처라 함은 소연(所緣)의 대상이 현재 실재(實在)하는 것을 말하고, 무처라 함은 추억이나 또는 가상(假想)을 소연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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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니 그의 근분지(近分地)에는 또한 만 등의 모든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자신을 낮다[卑]고 여기면서 만을 일으키는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만(慢)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것은 만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의심한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며 비만(卑慢)은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자신을 낮다고 여기면서 만을 일으키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다른 이가 자기의 종(種)ㆍ성(姓)ㆍ족(族)ㆍ유(類)ㆍ재(財)ㆍ위(位)ㆍ기(伎)ㆍ예(藝)ㆍ전(田)ㆍ택(宅) 등보다 나은 것을 보고 ‘그는 나보다 조금 낫고 나는 그보다 조금 못하다’라고 생각하나 다른 이보다 백 배 천 배 못한 것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자신을 낮다고 여기면서 만을 일으킨다고 한다.
여기에서 종(種)이란 찰제리(刹帝利)나 바라문(婆羅門) 등을 말하고, 성(姓)이란 가섭파(迦葉波)나 교답마(喬答摩) 등을 말하며, 족(族)이란 부족(父族)이나 모족(母族) 등을 말하고, 유(類)는 백색(白色)이나 흑색(黑色) 등을 말하며, 재(財)란 금이나 은 등을 말하고, 위(位)란 왕후(王候) 등을 말하며, 기(伎)란 교묘한 기술[巧術] 등을 말하고, 예(藝)란 서예(書藝)나 산수(算數) 등을 말하며, 전(田)이란 곡식이 생기는 곳을 말하고
, 택(宅)이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하며, 등(等)이란 그 밖의 총명이나 변재 등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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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다른 이가 자기보다 훨씬 나은 것을 보면서도 조금 밖에 낫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만이 성립된다. 만일 그 분량에 맞게 여긴다면 만이라 하지 않는다.
또 만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만(慢)이요, 둘째는 과만(過慢)이며, 셋째는 만과만(慢過慢)이요, 넷째는 아만(我慢)이며, 다섯째는 증상만(增上慢)이요, 여섯째는 비만(卑慢)이며, 일곱째는 사만(邪慢)이다.
만이라 함은 자기보다 못한 이에 대하여는 자기가 낫다고 여기고 혹은 같은 이에 대하여는 자기와 같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젠 체하면서 이미 젠 체하였고 장차 젠 체할 것을 일으키어 마음에서 믿고 뽐내며 마음에서 제 스스로가 취하는 것을 말한다.
과만이라 함은 자기와 같은 이에 대하여는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고 혹은 나은 이에 대하여는 자기와 같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만과만이라 함은 자기보다 나은 이에 대하여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아만이라 함은 5취온(取蘊)에 대하여 나[我]요 내 것[我所]이라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증상만이라 함은 뛰어난 공덕에 대하여 아직 터득하지 못한 것을 터득했다고 여기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며 아직 접촉하지 못한 것을 접촉했다고 여기고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비만이라 함은 다른 이의 훨씬 나은 것에 대하여 자기는 조금 못하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사만이라 함은 실로 자신에게 덕(德)이 없는데도 자기는 덕이 있다고 여기면서 이로 말미암아 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문] 증상만과 사만은 다 같이 아직 얻지 못한 곳에 의하여 일으키는데 어떤 것이 서로 다른가?
[답] 증상만은 유처(有處)와 무처(無處)에 대하여 다 일으키지만 사만은 오직 무처에 대해서만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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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증상만은 이미 얻은 것이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것에 대하여 다 일으키지만 사만은 오직 아직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일으킨다.
또 증상만은 평등한 공덕이거나 혹은 뛰어난 공덕의 것에 대하여 일으키지만 사만은 도무지 공덕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일으킨다.
또 증상만은 유사한 공덕이거나 혹은 진실한 공덕의 것에 대하여 일으키지만 사만은 도무지 공덕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일으킨다.
또 증상만은 내도(內道)ㆍ외도(外道)에서 다 같이 일으키지만 사만은 오직 외도에서만이 일으킨다.
또 증상만은 이생이나 성자가 다 같이 일으키지만 사만은 오직 이생만 일으킨다.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문]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만[七慢]은 몇 가지가 견도에서 끊을 것[見所斷]이고 몇 가지가 수도에서 끊을 것[修所斷]인가?
[답] 어떤 이는 “아만 한 가지는 오직 견도에서 끊을 것이요, 비만 한 가지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며 나머지 다섯 가지는 견도와 수도에서 다 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아만과 사만 이 두 가지는 오직 견도에서 끊을 것이요, 비만 한 가지는 오직 수도에서 끊을 것이며 나머지의 네 가지는 견도와 수도에서 다 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일곱 가지 만은 모두가 견도와 수도에서 다 끊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아만과 사만은 어떻게 수도에서도 끊는다는 것인가?
[답] 유신견(有身見)과 사견(邪見)은 5부(部)의 법에 대하여 나와 내 것을 집착하고 이 뒤[此後]는 없다고 부정하며 혹은 견고(見苦)에서 끊을 법을 반연하여 아만과 사만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내지 수도에서 끊을 법을 반연하여 아만과 사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만은 수도에서 끊을 것에도 통한다.
[문] 어찌하여 비만은 견도에서 끊을 것인가?
[답] 마치 아견(我見)을 가진 이들이 서로 아견의 모양을 문답하고 나서 어떤 이는 곧 다른 이의 아견이 자기 것보다 나은 것을 알면서도 훨씬 나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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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하여 자기는 조금 못하다고 여기면서 드디어 비만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들의 비만은 견도에서 끊을 것이다.
[문]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만은 몇 가지가 어느 세계의 매임[繫]인가?
[답] 어떤 이는 “욕계에는 일곱 가지를 모두 갖추고, 위의 두 세계에는 비만을 제외한 여섯 가지가 있을 뿐이니 거기에는 비교하고 헤아릴 만한 종성(種姓) 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색계와 무색계에서도 일곱 가지의 만[七慢]을 완전히 갖춘다.
[문] 거기에는 비교하고 헤아릴 만한 종성 등의 뜻이 없는데 어찌 비만이 있겠는가?
[답] 거기에는 비록 비교하고 헤아릴 만한 종성은 없을지라도 선정 등의 공덕을 비교하고 헤아리는 것이 있다.
또 먼저 욕계에 있었을 때에 다른 이와 견주면서 일으켰고 자주자주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뒤에 상계(上界)에 나면 그 만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비록 상계에 나면 비만은 일으키지 않는다 해도 욕계에 있었을 때에 그 비만을 일으킨 것이니 마치 상계의 선정을 증득한 두 사람이 얻은 선정의 형상을 차츰차츰 문답할 때에 이로 인하여 비교하고 헤아리면서 비만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라고 말한다.
[評] “비만 등은 반드시 다른 이와 낫고 못함을 헤아리면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옛날부터 자주자주 익힌 힘 때문에 비록 상계에 난다 하더라도 현행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계에는 모두 일곱 가지의 만이 갖춰져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4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8) 사납식 ③
[論] 마치 계경에서 “만일 욕심(欲尋)과 에심(恚尋)과 해심(害尋)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다음처럼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삼보리(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했을 적에 혹은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일으켰었다.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하지 않으면서 ≺만일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키면 혹은 자기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1) 경에서는 갖가지 심(尋)을 설명하고 있다. 3악심(惡尋)으로는 욕심ㆍ에심ㆍ해심을 들고 3선심(善尋)으로는 출리심(出離尋)ㆍ무에심(無恚尋)ㆍ무해심(無害尋)을 든다. 이 문단에서는 이 모든 심의 상(相)과 자성(自性)을 밝히며 겸하여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보살이었을 적에 3악심을 일으켰고 어떻게 하여 그것을 정복했는가? 그리고 성도(成道) 초에 일으킨 안온심(安隱尋)과 원리심(遠離心)이란 어떤 것인가를 논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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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며, 혹은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기도 한다≻라고 생각하였다.’”
계경에서는 비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도 그 뜻을 분별하시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論)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지금 말해야 되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떻게 욕심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貪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몸이 피로하다[身勞] 하는 등은 욕심의 등류과(等流果)를 나타내는 것이니 탐(貪)ㆍ진(瞋)ㆍ치(癡) 등은 몰아쳐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피로하게 하는 것이 마치 훨훨 타는 불과 같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태우고 뜨겁게 하며 그을리게 하는 것이다.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받는다는 등은 욕심의 이숙과를 나타내는 것이니 장차 악취(惡趣) 등의 사랑스런 것이 아닌 과[非愛果]를 받기 때문이다.
[論] 어떻게 욕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纏)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남편이 그것을 보고서 마음에 성을 내고[瞋] 분을 내고[忿] 한을 맺고[結恨]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 남의 아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함은 역시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것은 오직 다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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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을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는 허물은 가벼운 것이요 그의 남편에게도 아직은 실제로 욕(辱)이나 해는 끼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論] 어떻게 욕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탐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남의 아내를 겁탈하면 그의 남편이 안 뒤에는 그의 아내에게나 그 사람에 대하여 때리고 포박하며 목숨을 빼앗거나 혹은 재보(財寶)를 빼앗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문] 그의 남편이 다른 이를 해치면 역시 고통의 과보를 받을 것이므로 세 사람이 다 해가 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와 남의 두 군데라고만 말하는가?
[답] 그 사람은 현세(現世)에서는 죄벌도 받지 않고 도리어 남들의 칭찬을 받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며 또 남편도 다른 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라 한다.
[論] 어떻게 에심(恚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瞋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非愛], 좋은 것이 아니고[非樂], 기쁜 것이 아니고[非喜], 즐거운 것이 아닌[非悅] 모든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論] 어떻게 에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따른 이의 목숨을 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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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 다른 이의 목숨을 끊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둘 다 같이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도둑의 목숨 등을 끊으면 현재에 책망이나 벌도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떻게 에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진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의 목숨을 끊고 해치며 또한 다시 다른 이에게 그의 목숨도 끊어짐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문] 해치는 이를 살해하는 것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세 사람을 해친다고 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두 사람만 해친다고 말하는가?
[답] 다른 이를 살해하는 이를 죽이는 것은 세상이 다 같이 칭찬하게 되고 현재에 죄고를 받는 것도 없기 말하지 않는다.
또 그도 다른 이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論] 어떻게 해심(害尋)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害纏]을 일으킨 까닭에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피로하며 몸이 타고 마음이 타며 몸이 뜨겁고 마음이 뜨거우며 몸이 그을리고 마음이 그을리는 것과 같다. 또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장차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랑스런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아니고, 기쁜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아닌 이숙과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두 가지 과[二果]는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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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떻게 해심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며 포박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다.
[문] 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는 이도 고통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과 남을 다 함께 해친다고 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이만을 해친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나쁜 사람을 때리고 포박하는 것은 세상이 다 함께 칭찬하고 현재에 고통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論] 어떻게 해심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인가?
[答] 마치 어느 한 무리가 해의 전을 일으킨 까닭에 다른 이를 때리고 포박하며 또한 다른 이에게 맞고 포박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답은 앞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 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욕심(欲尋)은 욕계 5부(部)의 6식신(識身)과 함께하는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고 에심(恚尋)도 5부의 6식신과 함께하는 진(瞋)과 상응하는 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해심(害尋)은 어떤 사람이 “곧 진(瞋)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으니 해치는 것은 곧 성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에심과 해심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진(瞋)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요, 둘째는 중생을 때리고 포박하려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恚)라 하고 뒤의 것을 해(害)라고 한다.
또 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땅히 성을 내어야 할 데에 내는 것이요, 둘째는 성을 내지 않아야 할 데에 내는 것이다. 앞의 것을 에라 하고 뒤의 것을 해라고 한다. 그 두 가지와 상응하는 심(尋)을 에심ㆍ해심이라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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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차별이 있다.
어떤 이는 “해심은 무명(無明)의 일부와 상응하는 심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해는 곧 무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어떤 인연 때문에 어리석음[癡]이 더하는가? 해계(害界)ㆍ해상(害想)ㆍ해심(害尋)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아서이다”라고 말한다.
[評] “따로 심소(心所)가 있으면서 해(害)라 하는 것이요, 진에도 아니고 무명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다. 자성(自性)은 진에로 이끈 것이요 진에의 등류(等流)이며 진에에 따라 뒤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번뇌의 때[煩惱垢]라고 한다.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며 의식(意識)과 상응하며 이것과 상응하는 심은 해심의 자성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착하지 않기 때문에 악심(惡尋)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선심(善尋)이 있다. 첫째는 출리심(出離尋)이요, 둘째는 무에심(無恚尋)이며, 셋째는 무해심(無害尋)이다.
[문] 이 세 가지 선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세 가지 악심은 하나하나 따로 일어나고 자성도 각각 다르며 온갖 착하지 않은 마음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세 가지 선심은 따로 자성도 없고 모두 온갖 착한 마음과 상응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세 가지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자성에는 차별이 없어도 뜻에는 차이가 있으니 세 가지 악심의 가까운 대치[近對治]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심은 욕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출리심이라 하고 에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에심이라 하며 해심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무해심이라 한다. 계경에서 “내가 아직 삼보리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에 비록 욕심ㆍ에심ㆍ해심을 일으켰다 해도 방일(放逸)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보살이 그때에 만일 방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히려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 세우 존자는 “보살은 비록 이 세 가지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선(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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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악심을 일으켰다 해도 속히 그것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비록 일으켰다 해도 이내 싫어하여 버리고 뱉어버렸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잠깐 동안 일으켰다 하여도 곧 그것의 대치(對治)를 닦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으킨 뒤에는 곧 인(因)을 끊고 의지[依]를 결(缺)하면서 경계의 허물을 분명하게 알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번뇌가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 첫째는 인(因)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경계(境界)의 힘이며, 셋째는 가행(加行)의 힘이다. 보살은 이 세 가지 나쁜 심[不善尋]을 일으켰으면서도 다만 인의 힘만을 말미암고 다른 두 가지를 조복하는 것이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은 비록 일으켰다 하더라도 빨리 조복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을 뜨거운 쇠[鐵] 위에 떨어뜨린 것과 같았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일으킨 뒤에는 속히 버리는 것이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했으므로 방일하지 않았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보살은 어느 곳에서 세 가지 악심을 일으킨 것인가?
[답] 협 존자는 “인(因)의 힘을 말미암아 처소마다 일으키는 것이므로 수고로이 일으키는 곳이 정해진 것이라고 책망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소경이 넘어지고 어리석은 이가 헷갈리는 것과 같아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거늘 어찌 처소가 정해져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보살은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성(城)을 넘어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無上覺]을 구하실 때에 스승과 벗을 찾아 왕사성(王舍城)에 이르렀다. 아침나절에 성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백천의 중생들이 에워싸고 우러러보며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마음에 만족할 줄 몰랐다. 보살은 그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욕심(欲尋)을 일으켰으나 대중들이 에워싸서 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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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방해가 되어 굶주림의 불에 시달렸으므로 다시 에심(恚尋)을 일으킨 것이며 진심(瞋心)이 잠깐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났으므로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중한 참괴(慚愧)의 마음을 내었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보살이 겁비라성(劫比羅城)을 버리고 고요한 숲에 의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실 때에 부왕은 즉시 석씨 종족 다섯 사람을 보내면서 따라다니며 모시게 했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이는 낙행(樂行)이라야 청정함[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처음에 보살이 고행(苦行)을 닦는 것을 보고 그때에 곧 버리고 떠났으며 다시 어떤 이는 고행이라야 청정함을 얻는다고 집착하다가 뒤에 보살이 고행을 버리는 것을 보고 그 때에도 역시 하직하고 떠났었
다.
이때에 난타(難陀)와 난타발라(難陀跋羅)라는 두 범지 여인[梵志女]이 우유죽을 바쳐 올릴 때에 시자(侍者)가 없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머물러 시중을 들다가 여인의 부드러운 손으로 보살을 어루만졌다. 보살은 거기서 욕심(欲尋)을 일으켜 ‘먼저 나의 좌우(左右)가 나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어찌 여인이 나를 가까이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드디어 좌우에 대하여 에심(恚尋)을 일으켰으며 진심이 점차로 그치면서 해심(害尋)이 다시 일어나자 곧 스
스로 깨달으면서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보살이 아직 출가하지 않으셨을 때에 부왕 정반(淨飯)은 그를 위하여 5백의 옥녀(玉女)들에게 장가들어 비빈(妃嬪)을 삼게 하고서 보살을 즐기도록 하며 출가하지 못하게 했었으나 보살은 그것을 버리고 출가하였으므로 여러 왕(王)들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찾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정반왕이 말하였다.
‘나의 아들이 출가하여 마음이 몹시 괴롭소이다. 그 비빈들을 보는 때만이라도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들을 놓아주어 나라에 돌려보낼 수는 없소.’
여러 왕들은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분해하고 성을 내면서 다 함께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정벌하였으므로 부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어 보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너 때문에 이런 원수들을 맞이하고 있다.’[어떤 이는 천신(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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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이 와서 보살에게 말해 주었다고도 말한다.]
보살은 이 말을 듣고서 부왕에 대하여 먼저 욕심을 일으켰고 5백의 왕들에게는 에심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에는 그 군사들에게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보살이 출가하여 고행을 닦을 때에 옛날에 받았던 5욕(欲)의 즐거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욕심을 일으켰고 뒤에 천수(天授)가 자기 궁실(宮室)을 문란하게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에심을 일으켰으며 거기에 관계한 이들에 대하여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크게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6년 동안 고행을 닦을 때에 악마가 따라다니며 헤살을 부리면서 때로는 사랑할 만한 색상(色像)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욕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워할 만한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에심을 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업신여기면서 조롱하는 색상을 나투어 보였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하여 해심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잠깐 만에 뉘우치고 깊이 참괴를 일으켰었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보살은 먼저 욕계의 문(聞)ㆍ사(思)로 인해 생긴 두 가지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조복하였고 이 지혜를 사랑한 까닭에 욕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이것은 번뇌이어서 악만을 더한다’라고 깨달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에심을 일으켰고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해심을 일으켰으나 그 뒤에 깨달아 알면서 깊이 참괴를 내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보살이 옛날 보리수 아래 있을 때에 초저녁에 악마의 딸이 와서 아양을 부리며 어지럽혔었다. 그때에 보살은 잠시 동안 욕심을 일으켰었고 한밤중에 악마 군사들이 모두 와서 보살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잠시 동안 에심을 일으켰으며 점차로 다시 그치고 엷어지면서 다시 해심을 일으켰으나 잠깐 만에 깨닫고 살피면서 곧 자정(慈定)에 들어가 악마의 병사들을 꺾어 물리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보살은 이 세 가지 악심[三惡尋]을 일으킨 뒤에 곧 스스로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해치고 다른 이를 해치며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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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떻게 보살이 일으킨 욕심ㆍ에심ㆍ해심이 세 군데를 해친다[三害]고 하는 것인가?
[답] 비록 해치는 작용이 없다고 해도 그 모양[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악심은 반드시 세 군데를 해치는 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自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他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俱利] 하는 일이 멀어지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일이 파괴되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둘 다 이롭게 하는 마음이 그쳐 쉬기 때문에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自相續)에 대하여 과를 취하고[取果] 과를 주기[與果]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모든 시주(施主)로 하여금 비록 4사(事)를 베풀게 한다 하더라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에 대하여 자성의 우치[自性愚]와 소연의 우치[所緣愚]를 내기 때문에 자기를 해친다고 하고 다른 시주로 하여금 보시를 하게 하여도 큰 과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타상속(他相續)을 물들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또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성현의 즐거움을 여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여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
세우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이계과(離繫果)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이계과를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자상속으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 하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뛰어난 공덕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로 하여금 빨리 증득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 받을 이로 하여금 빨리 이익을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뜨겁고 괴롭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교화할 이의 이익을 잃게 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악심이 일어나는 때에는 몸과 마음이 쾌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고 하고 천신(天神)이 책망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해친다고 하며 곧 이 두 가지를 통틀어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나는 처음 성불(成佛)하여 두 가지 심[二尋]을 많이 일으켰으니 안온심(安穩尋)과 원리심(遠離尋)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문] 이 두 가지 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안온심은 출리심으로써 자성을 삼고 원리심은 무에(無恚尋)ㆍ무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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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害尋)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욕심(欲尋)을 대치(對治)하고 원리심은 에심(恚尋)ㆍ해심(害尋)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무탐(無貪)의 선근과 상응하고 원리심은 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과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탐(貪)과 상응하는 심(尋)을 대치하고 원리심은 진(瞋)ㆍ치(癡)와 상응하는 심을 대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자(慈)ㆍ비(悲)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희(喜)ㆍ사(捨)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고지(苦智)ㆍ집지(集智)와 상응하고 원리심은 멸지(滅智)ㆍ도지(道智)와 상응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안온심은 공(空)과 고(苦)ㆍ집(集)의 무원(無願) 삼마지(三摩地)2)와 함께하고 원리심은 무상(無相)과 도(道)의 무원 삼마지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묘음 존자는 “유전(流轉)의 허물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尋)을 안온심이라 하고, 환멸(還滅)의 공덕을 보는 마음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환멸의 공덕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유전의 허물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意]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이라 하고,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끝없이 안락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안온심
2) 고ㆍ집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고와 집에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삼매(三昧)를 말하며 도의 무원 삼마지라 함은 도(道)도 마치 배나 뗏목과 같아서 결국에는 버려야 할 것이므로 여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삼매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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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고, 끝없이 이익되게 하는 뜻과 상응하는 심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그지없는 연민(憐愍)의 의요(意樂)로 일으키는 것을 안온심이라 하고, 그지없는 조선(調善)의 의요로 일으키는 것을 원리심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이 두 가지 심(尋)을 일으키셨는가?
[답] 이 두 가지 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앞에 나타나는 행(行)이고 청정한 도[淨道]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궁중에 계실 때 받았던 욕락(欲樂)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고 고행을 닦을 때 이익 없던 고통을 대치하기 위하여 처음 성불하신 뒤에 안온심을 일으키신 것이다.
또 처음 성불하신 뒤에 자신의 덕[自德]을 경하하기 위하여 안온심을 많이 일으키셨고 다른 이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원리심을 많이 일으키신 것이다.
[論] 지혜[智]가 많은가, 경계[境]가 많은가?3)……(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없는 것[無]을 반연하는 지혜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만일 요술로 된 일[幻事]이나 건달바성[建達縛城]이나 횃불을 돌려 생기는 불바퀴[旋火輪]나 녹애(鹿愛:아지랑이) 등을 반연한다면 그 지혜는 모두가 없는 경계[無境]를 반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있는 경계[有境]를 반연한다는 것을 나
타내
3) 지(智)는 인식 판단하는 작용이요, 경(境)은 그 대상이며, 식(識)은 지를 유지하는 주인이다. 여기서는 첫째로 지와 경에 있어서 그 범위는 어느 것이 더 넓은가를 논하고, 둘째로 지와 식에 관해서도 동일한 문제를 논구하려 한다. 갖가지 의론이 있지만 결론은 지보다 경이 더 넓고 지보다 식이 더 넓다고 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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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혜가 경계를 반연하지 않은 것이 있고 경계가 지혜의 연(緣)이 아닌 것도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경계를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온갖 경계는 모두가 지혜의 소연(所緣)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외도(外道)는 뒤바뀜[顚倒]이 있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는 서로 틀리다는 것을 드러내며 내도(內道)는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서로 수순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의 경계[一境] 위에는 많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경계가 많고 지혜는 많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지혜가 많은가 경계가 많은가?
[答] 경계가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도 경계이기 때문이다.
지혜4)는 오직 1계(界)ㆍ1처(處)와 1온(蘊)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경계는 18계ㆍ12처ㆍ5온에 속한다.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하하품(下下品)의 한 찰나의 수(受)는 욕계의 10지(智)로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아홉 가지의 부동분계(不同分界)의 변행수면(遍行隨眠)과 상응하는 품류의 지혜와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마치 욕계의 10지로 아는 것처럼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비상비비상처는 16지(智)로 아는 것이니 열한 가지의 변행수면과 상응하는 지혜와 수도
에 끊을 탐(貪)ㆍ만(慢)ㆍ무명(無明)과 상응하는 지혜와 무부무기와
4) 지(智)는 혜(慧)의 심소(心所)이므로 18계에서 보면 법계(法界)요, 12처에서 보면 법처(法處)이며, 5온에서 보면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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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세속지이다. 이처럼 통틀어 96의 지혜에 무루지(無漏智)를 합하면 97의 지혜가 있어 그 하나의 수(受)를 아는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수와 그 밖의 다른 법에서도 이런 도리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지혜는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그의 그런 설명은 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의 상응법(相應法)ㆍ구유법(俱有法) 등과 지혜의 자성은 모두가 경계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혜가 경계가 아니라 해도 그 경계는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지혜도 경계이거늘 경계가 많지 않겠는가?
[문] 만일 지혜도 경계라면 지혜와 경계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능히 아는 것[能知]은 지혜이고, 알 대상[所知]은 경계이다.
또 지혜는 오직 비색(非色)ㆍ무견(無見)ㆍ무대(無對)ㆍ유위(有爲)ㆍ상응(相應)ㆍ유소의(有所依)ㆍ유소연(有所緣)ㆍ유행상(有行相)이지만 경계는 색(色)과 비색ㆍ유견(有見)과 무견ㆍ유대(有對)와 무대ㆍ유위와 무위(無爲)ㆍ상응과 불상응(不相應)ㆍ유소의와 무소의(無所依)ㆍ유소연과 무소연(無所緣)ㆍ유행상과 무행상(無行相)에 다 통한다.
또 지는 오직 3세(世)와 세 가지 진리[三諦]에 포섭될 뿐이지만 경계는 3세와 비세(非世)에 다 통하고 네 가지 진리[四諦]에 포섭된다. 이런 것 등을 경계와 지혜의 차별이라 한다.
[論] 지혜[智]가 많은가, 식(識)이 많은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식과 지혜의 두 가지 법은 차츰차츰 상응하는 것이니 인(忍)이 곧 지혜이기 때문이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시키고 온갖 지혜는 식과 상응하나 온갖 식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무루의 인[無漏忍]은 지혜의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지혜는 무루일 뿐이요 식은 유루일 뿐이니 서로가 상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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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다 같이 두 가지에 다 통하며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지혜가 곧 식이나 분위(分位)가 차별되기 때문에 지혜와 식은 상응한다는 뜻이 없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식과 지혜는 체(體)와 용(用)이 각각 다르므로 상응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지혜가 많은가 식이 많은가?
[答] 식이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든 지혜는 모두 식과 상응하지만 모든 식은 모두가 지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인(忍)과 상응한 식은 지혜와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모든 무루의 인은 무엇 때문에 지혜가 아닌가?
[답] 보아야 할 대상인 경계에 대하여 아직은 거듭 관(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날부터 4성제(聖諦)에 대하여 아직 무루의 진실한 지혜로써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본다 하더라도 아직 거듭 관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지혜라 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같은 종류의 지혜가 경계에 대하여 거듭 관해야 비로소 지혜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유정(有情)도 온갖 법에 대하여 끝없는 옛날부터 유루의 지혜로써는 자주자주 그것을 관하지 않
는 이가 없기 때문에 유루의 지혜는 모두가 지혜에 포섭된다.
또 인(忍)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미루어 헤아리며 인가(忍可)하면서도 아직 마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또 인은 끊을 대상인 의심[疑]과 함께하게 되기 때문에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다. 설령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의 종류이다. 유루의 무간도(無間道)는 진실한 대치(對治)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의심과 함께하게 된다 하더라도 지혜이나 무루의 인은 지혜에 포섭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식5)은 7계(界)ㆍ1처(處)ㆍ1온(蘊)에 속하지만 지혜는 오직 1계ㆍ1처와 1온의 일부분에 속할 뿐이니 이 때문에 지혜가 적다.
5) 식은 18계에서는 6식(識)과 의근(意根)의 7계요 12처에서는 의처(意處)이며 5온에서는 식온(識蘊)이다. 지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법계(法界)와 법처(法處)와 행온(行蘊)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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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6)……(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부처님의 생신(生身)은 무루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대중부(大衆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실 때에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말미암아 여래의 생신도 무루인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유루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다.
만일 부처님의 생신이 무루라면 부처님의 몸에 대하여 무비(無比) 여인7)은 사랑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지만(指鬘)은 성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며, 오사(傲士)는 만(慢)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하고, 오로빈라(隖盧頻螺)는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았어야 할 것인데 이미 반연하여 사랑ㆍ진심ㆍ만심ㆍ우치를 일으켰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신은 반드시 무루가 아니다.
[문] 만일 그렇다면 그 부(部)에서 인용한 계경의 뜻을 어떻게 회통해야 되는가?
6) 온갖 법을 분류하여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하며 다시 이 유위법은 유루의 행과 무루의 행으로 분류하게 된다. 여기서는 위의 분류를 예상하면서 첫째는 유루와 무루의 두 행 중에서 그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고, 둘째는 유위와 무위의 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많은가를 논하는 문단이다. 결론은 무루의 행보다 유루의 행이 더 많고 무위의 법보다 유위의 법이 더 많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명한 불신유루설(佛身有漏說)을
언급한다.
7) 무비 여인은 부처님께 연모의 정을 일으켰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으며, 오로빈라가섭은 부처님을 옳게 인식하지 못했고, 오사는 부처님을 경멸했다는 것이 여러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뒤에 부처님께 귀의했지만 어쨌든 한 때나마 부처님의 몸을 반연하여 번뇌의 허물을 더하게 했다는 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몸에 관하는 한 유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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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그것은 법신(法身)에 의거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경에서 “여래께서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계신다”고 말한 것은 생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다니시거나 머무르시거나 간에 세간의 법으로는 더럽히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법신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또 수순하지 않는 것에 의거하여 “더럽히지 못한다[不染]”고 말한 것이다. 세간의 8법(法)8)은 세간에 수순하고 모든 유정들도 그것을 순수하기 때문에 더럽힌다[染汚]고 말하지만 세간의 8법은 여래에게 수순하지만 부처님은 그것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또 여래의 생신은 비록 유루라 하더라도 8법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문] 이(利) 등 8법은 여래에게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초월한다 하는가? 이(利)는 용장자(勇長者)를 가엾이 여기신 까닭에 하루 동안에 그에게 3억이나 되는 살림과 옷을 받으신 것이요, 쇠(衰)는 저 대바라문촌(大婆羅門村)에 들어가 걸식하셨으나 얻지 못하고 빈 바리로 돌아오신 것이며, 훼(毁)는 전차바라문녀(戰遮婆羅門女)와 손타리(孫陀利)가 부처님을 비방하는 소리가 열여섯 큰 나라에 두루 퍼진 것이요, 예(譽)는 여래께서 탄생하실 때의 소리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사무치고 성불하실 때의 소리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렀으며 법륜(法輪)을 굴릴 때의 소리는 범세(梵世)까지 이른 것이다.
칭(稱)은 발라타사(跋羅墮闍) 범지가 5백의 게송으로써 앞에 나타나 부처님을 찬탄하고, 논력 외도(論力外道)와 오파리(塢波離) 등의 모든 대논사(大論師)가 백천의 게송으로써 우러러보면서 부처님을 찬탄하며, 구수(具壽) 아난이 합장하고 부처님의 모든 희유한 법을 찬탄하고, 사리자 존자는 공경하면서 부처님의 모든 위없는 법을 찬탄한 이와 같은 온갖 것이다.
기(譏)는 발라사타 범지가 먼저 5백의 게송으로 앞에 나타나 부처님께 욕
8) 8법이란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기(譏)ㆍ고(苦)ㆍ락(樂)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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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한 것이며, 고(苦)는 여래께서 때로는 등이 아프시고 조약돌이나 독가시에 발가락을 상하는 등의 것이요, 낙(樂)은 여래께서의 가뿐하신 쾌락과 생사하는 동안에 가장 뛰어나게 느낀 즐거움도 있으셨거늘 어찌하여 세존은 세간의 8법을 초월하셨다고 하는가?
[답] 여래께서는 비록 이(利)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해도 높은 기쁨이나 사랑을 내지 않으시며 여래께서는 비록 쇠(衰) 등 네 가지 법을 만난다 하더라도 낮은 근심이나 성을 내시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초월하기 때문에 더럽히지 못한다”고 일컫는 것이요 무루라 하여 더럽히지 않는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마치 묘고산(妙高山)이 금륜(金輪)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팔방에서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도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여 청정한 시라(尸羅)에 머물러 계시므로 세간의 8법으로는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른 종(宗)의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유루의 행[有漏行]이 많은가, 무루의 행[無漏行]이 많은가?
[答] 유루의 행이 많으며 무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루의 행은 10처(處)와 2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루의 행은 오직 2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9)
어떤 이는 “무루의 행이 많고 유루의 행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욕계계(欲界繫)의 하하품(下下品)에 속한 한 찰나 동안의 색(色)은 반드시 네 가지 무루의 지혜의 연(緣)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첫째는 고법지인(苦法知忍)이요, 둘째는 고법지(苦法智)이며, 셋째는 집법지인(集法智忍)이요, 넷째는 집법지(集法智)이다. 그 밖의 다른 색과 그 밖의 다른 법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무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무루
9) 5근처(近處)와 5경소(境所)는 모두가 유루요, 의처(意處)와 법처(法處)의 대부분도 유루이다. 이에 반하여 무루는 성자(聖者)의 의처ㆍ법처의 일부를 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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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행이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유루의 행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의 무루행은 네 가지 유루의 연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는 사견(邪見)이요, 둘째는 의(疑)요, 셋째는 무명(無明)이요, 넷째는 선(善)의 세속지(世俗智)이다. 그 밖의 무루의 행도 이런 이치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밖에도 모든 유루의 법이 있기 때문에 유루의 행은 결정코 많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評] “유루ㆍ무루의 행은 비록 모두가 그지없다 해도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우선 처(處)가 속한 곳을 기준으로 하여 유루가 많고 무루의 행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또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모든 법의 다소를 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뜻에서 보아서는 마땅히 있어야 한다.
[문] 유위의 법이 많은가, 무위의 법이 많은가?
[답] 유위의 법이 많고 무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위의 법은 11처(處)와 1처의 일부분에 속하지만 무위의 법은 오직 1처의 일부분에만 속하기 때문이다.
[評] “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유루의 법에 그 만큼의 체(體)가 있음에 따라 택멸무위(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며 무루의 도(道)에 그 만큼의 체가 있음에 따라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의 수량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이 밖에도 유루법의 체의 양(量)이 많고 적음에 따라 모든 비택멸과 허공무위(虛空無爲)가 있기 때문에 무위의 법이 많고 유위의 법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앞의 문[前門]에 준하면서 우선 처(處)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에 무위는 그 수(數)가 적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論] 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行圓滿] 하는가?10)……(이하 자세한 내용은
10) 여기서는 경에 있는 다섯 가지 원만[五圓滿:戒ㆍ定ㆍ慧ㆍ行ㆍ獲의 원만] 중에서 특히 행원만에 관하여 밝히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행원만이란 아라한의 율의(律儀:戒)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행이란 나타낼[所詮] 계율의 이명(異名)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계(戒), 즉 시라(尸羅)의 의의를 예의 속설(俗說) 자원론(資源論)에 의거하여 갖가지로 해석함으로써 시라에 포함된 내용이나 공덕을 높이 선양하려는 것이 이 문단의 주된 내용이다.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계경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니 계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시라(尸羅)가 원만하고 등지(等持)가 원만하며 반야(般若)가 원만하고 행(行)이 원만하며 수호[護]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는 비록 이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어떤 것이 행이나 수호가 원만한 것인가에 대한 뜻은 분별하지 않으셨다.
경은 이 논이 의지하는 근본이므로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행이 원만하다 하는가?
[答] 무학(無學)의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이 청정한 것[命淸淨]이다.
[문] 학(學)과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게도 율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무학만을 말하는가?
[답] 나은 것[勝]에 의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법에 있어서나 보특가라에 있어서나 간에 모두가 무학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또 만일 율의가 있고 불률의(不律儀)에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면 여기에서 말하겠지만 학 등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무학의 신업(身業)을 몸의 율의라 하고, 무학의 어업(語業)을 말의 율의라 하며, 무학의 신업ㆍ어업을 통틀어서 생활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 곧 정업(正業)과 정어(正語)와 정명(正命)이다.
계경에서는 계(戒)를 혹은 시라(尸羅)라 하기도 하고, 혹은 행(行)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발[足]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상자[篋]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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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라는 말은 맑고 시원하다[淸凉]는 뜻이니 악(惡)은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고 괴롭게 하지만 계는 편안하게 하고 쾌적하게 하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악은 악취의 뜨거운 고뇌를 불러오지만 계는 선취(善趣)를 불러오기 때문에 맑고 시원하다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편안히 잠잔다[安眠]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持戒] 이는 안온한 잠을 자면서 언제나 좋은 꿈을 꾸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자주자주 익힌다[數習]는 뜻이니 언제나 착한 법을 익히기 때문에 시라라고 한다.
또 시라라 함은 정을 얻는다[得定]는 뜻이니 계율을 지닌 이는 정을 얻기 쉽기 때문에 시라라 한다.
또 시라라 함은 돌계단[隧蹬:石段]이라는 뜻이니 마치 게송[伽陀]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 법의 못[池]은 맑고 시원하며
시라는 그 돌계단이 되므로
성현이 목욕해도 몸이 젖지 않으며
저 언덕[彼岸]의 공덕에 이르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장엄하는 기구[嚴具]라는 뜻이니 장엄하는 기구는 유년(幼年)에게는 좋지만 장년(壯年)이나 노년(老年)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고, 장엄하는 기구는 장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노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며, 장엄하는 기구는 노년에게는 좋지만 유년과 장년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있지만 시라가 몸을 장엄하는 것은 세 때[三時]에 언제나 좋은 것이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시라는 몸을 장엄하는 기구이어서
유년ㆍ장년ㆍ노년에게 다 함께 마땅하며
믿음[信]에 머무는 지혜[慧]를 진보(珍寶)로 여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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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을 훔칠 수 있는 이는 없다.
또 시라라 함은 밝은 거울[明鏡]이라는 뜻이니 마치 거울이 맑고 깨끗하면 형상이 그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라에 머무르면 무아(無我)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 시라라 함은 섬돌[階陛]이라는 뜻이니 마치 무멸(無滅) 존자가 “나는 시라의 섬돌을 밟고 위없는 지혜의 전각에 오른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시라라 함은 증상(增上)의 뜻이니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에서 위세(威勢)가 있는 것은 모두가 사라의 힘 때문이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무겁구(無怯懼)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독룡(毒龍)이 있었는데 품성이 포악하여 많은 해독을 끼쳤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하라(毘訶羅)11)가 있었다. 자주 그 용이 괴롭혔으므로 절에 있는 5백 대아라한들이 다 같이 의논을 하고서 정(定)에 들어가 그 용을 쫓아버리려고 하여 그들의 신력(神力)을 다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었다.
마침 어떤 아라한이 외방(外方)에서부터 왔으므로 먼저 있던 그 스님들은 그에게 위의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때에 그 외방에서 온 이는 용이 살고 있는 데로 가서 손가락을 튀기면서 “현면(賢面)아, 멀리 떠나가거라”고 하자 용은 그 소리를 듣고 이내 멀리 떠나가 버렸다.
아라한들은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었다.
“당신은 그 용을 쫓아버렸는데 그것은 어느 정(定)의 힘이었습니까?”
그는 대중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정에 들지도 않았고 신통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라를 지킨 까닭에 이런 힘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벼운 죄를 지키는 것이 마치 중금(重禁)을 방호하듯 하기 때문에 악한 용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시라는 증상의 뜻이 있다.
또 시라라 함은 머리[頭首]라는 뜻이니 마치 머리가 있는 이는 곧 빛깔을
11) 비하라는 사원(寺院)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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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소리를 들으며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접촉을 깨닫고 법을 아는 것처럼 시라가 있는 이는 곧 4성제(聖諦)의 빛깔을 보고 전에 없던 명신(名身) 등의 소리를 들으며 37각분(覺分)의 꽃향기를 맡고 출가하여 멀리 여의는 삼보리(三菩提)의 적정(寂靜)한 맛을 맛보며 정려(靜慮)ㆍ해탈(解脫)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의 접촉을 깨닫고 온(蘊)ㆍ처(處)ㆍ계(界)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법을 알기 때문에 시라는 머리라는 뜻이다.
계경에서 “계(戒)를 행(行)이라 한다”고 한 것은 모든 세간에서 계를 행이라 하기 때문이니 모든 세간에서는 계를 지닌 이[持戒者]를 보면 “그는 행이 있다”고 말하고 파계(破戒)한 이를 보면 “그는 행이 없다”고 말한다. 또 청정한 계를 지니는 것은 뭇 행[衆行]의 근본이어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발[足]이라 한다”고 한 것은 선취(善趣)에 나아가고 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마치 발이 있는 이는 험악한 데를 피하면서 안온한 데에 이르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소유한 이는 악취를 초월하고 천상이나 인간에 나기도 하며 혹은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발이라 한다.
계경에서 “계를 상자[篋]라 한다”고 한 것은 온갖 공덕의 법을 맡아 지니기 때문이다. 계를 지닌 이는 공덕을 맡아 지니어 물러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치 상자가 보물을 지니는 것과 같다.
묘음 존자는 “계를 파괴하지 않는 것[不壞]이라 한다. 왜냐하면 발이 파괴되지 않으면 자유자재로 안온한 데로 가는 것처럼 청정한 계를 갖춘 이도 그와 같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무학의 몸과 말의 청정한 계를 행이 원만하다[行圓滿]고 하는 것은 행 가운데서 극치[極]이기 때문이다.
[論] 어떤 것이 수호가 원만하다[護圓滿] 하는가?
[答] 무학의 근의 율의[根律儀]이다.12)
12) 다섯 가지 원만 중에서 특히 호원만(護圓滿)의 의의와 자성(自性)을 밝히는 문단이다. 호원만이란 5근(根)을 막고 수호하는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다는 뜻이어서 본문에 있는 것과 같이 아라한의 근의 율의가 그것이다. 근의 율의의 자성에 관해서는 갖가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그것을 정념(正念)이요 정지(正知)라고 하는 것이 바사(婆沙)에서의 정의의 설[正義說]이다. 여기서는 그 일을 논구하고 특히 정념과 정지와 그것의 반대인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를 갖가지로 나누어서 논구하며 겸하여 이 정념과 정지가 단율의(斷律儀)가 되는 경우에 나아가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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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근(根)은 수호할 것[所護]인 줄 알아야 한다. 염혜(念慧)의 힘으로 말미암아 눈[眼] 등의 감관[根]을 수호하여 경계에 대하여 모든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마치 갈고리로 코끼리를 제어하여 멋대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학의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원만한 수호라고 하니 마치 게송의 말씀과 같다.
세간의 모든 폭류(瀑流)를
바른 기억[正念]은 막고 수호하며
만일 마침내 끊어지게 하면
그 공(功)은 바르게 아는 것[正知]일세.
[문] 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根不律儀]는 저마다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근의 율의는 정념과 정지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실념(失念)과 부정지(不正知)로써 자성을 삼는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天]이 비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스스로 창루(瘡漏)를 열지 않으셔야 합니다.’
비구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것을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다시 말하였다.
‘창루가 작은 것이 아닌데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비구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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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념과 정지로써 덮을 것입니다.’
하늘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근의 율의인 줄 알 수 있다. 덮는다[覆]는 것과 수호한다[護]는 것이 율의이니 뜻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근의 불률의는 앞의 것을 뒤집어서 세웠기 때문에 이것은 잊어버리는 것[失念]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이다.
[문] 만일 정념과 정지가 근의 율의라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서 “염(念)과 혜(慧)가 원만하기 때문에 근의 율의가 원만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찌 자성(自性)이 원만하기 때문에 자성이 원만하다고 말하겠는가?
[답] 염혜(念慧)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인의 성품[因性]이요, 둘째는 결과의 성품[果性]이다. 원인의 성품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결과의 성품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득의 선[生得善]이요, 둘째는 가행의 선[加行善]이다. 생득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가행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의 선[不定善]이요, 둘째는 정의 선[定善]이다. 부정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정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선[世間善]이요, 둘째는 출세간의 선[出世間善]이다. 세간의 선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출세간의 선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학(學)이요, 둘째는 무학(無學)이다. 학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무학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또 염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둔근의 종성[鈍根種性]이요, 둘째는 이근의 종성[利根種性]이다. 둔근의 종성이란 염혜를 이름하고 이근의 종성이란 근의 율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계경과는 서로 어긋나거나 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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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방일하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근의 율의는 6항주법(恒住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이 대치할 것의 모든 번뇌의 업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根)에 대하여 이미 끊고[已斷] 이미 두루 아는[已遍知] 법이 성취하지 않은 성품[不成就性]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對治道]의 성취한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는 법이 성취하는 성품과 그것의 대치하는 도의 성취하지 않은 성품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6근에 대하여 이미 끊고 이미 두루 아는 때에 있게 되는 묘행(妙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6근에 대하여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할 때에 있게 되는 악행(惡行)의 선근이 나고 자라서 광대해지는 것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善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染汚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근의 율의는 온갖 착한 법과 선(善)에 수순하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고 근의 불률의는 온갖 더러운 법과 염(染)에 수순하는 무부무기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다.
옛날 이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에 길상윤(吉祥胤)이라는 비하라(毘訶羅)가 있었다. 거기에는 두 분의 아라한이 머물고 있었는데 모두 3명(明)을 증득하고 8해탈(解脫)을 갖추며 무애해(無礙解)를 얻었다. 그들은 설법하는 법사였고 친형제였으며 아버지 이름은 난제(難提)였고 바라문의 종성이었다. 그들은 다 같이 “근의 율의와 근의 불률의는 모두 무부무기의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의 율의와 불률의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이것이 다 같이 무부무기의 심불상응행온에 속한다면 이 두 가지 자성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염오(染汚)에 수순하는 것을 불률의라 하고 청정(淸淨)에 수순하는 것을 율의라 한다.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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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 이 모든 설명 가운데서는 맨 처음의 설명이 옳다고 하겠으니 경에서 염혜(念慧)는 근을 수호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 곧 이 염혜를 어떤 자리에서는 또한 단율의(斷律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자리[位]의 차별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세우는 것이다.
우선 유루(有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대상인 법은 미지지(未至地)로써 욕계를 여의는 유루의 9무간도(無間道) 안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제2 정려의 근분지(近分地)로써 초정려를 여의는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비상비비상처의 근분지로써 무소유처를 여의는 9무간
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만일 무루(無漏)의 단율의를 말한다면 욕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미지지로써 욕계를 여의는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만일 초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이면 미지(未至)와 정려중간(靜慮中間)과 초정려에 의하여 초정려를 여의는 3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제2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3지와 제2 정려로써 제2 정려를 여의는 4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제3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4지와 제3 정려로써 제3 정려를 여의는 5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제4 정려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과 무색계의 견도ㆍ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5지와 제
4 정려로써 제4 정려 등을 여의는 6지(地) 무루의 모든 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의 법은 앞의 6지와 공무변처로써 공무변처를 여의는 7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고,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인 법은 앞의 7지와 식무변처로써 식무변처를 여의는 8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되며, 무소유처(無
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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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법은 앞의 8지와 무소유처로써 2지(地)를 여의는 9지(地) 무루의 9무간도의 염ㆍ혜의 두 가지 법이 단율의가 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5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8) 사납식 ④
[論] 어떤 것이 이생의 성품[異生性]인가?1)……(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이의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욕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열 가지 수면[十隨眠]은 이생의 성품이다”라고 집착하는데 마치 독자부(犢子部)에서와 같다. 그들은 “이생의 성품은 욕계계요 염오의 성품이며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요 상응행온(相應行蘊)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고 이생의 성품은 삼계계요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며 염오가 아니요 불상응행온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은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에는 진실한 체[實體]가 없다”고 집착하는데
1) 이생의 성품이란 범부로 하여금 범부가 되게 하는 원리를 가리킨다. 그 자성(自性)에 관하여는 갖가지 이론(異論)이 있지만 요는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성품으로 삼는다고 하는 데에 귀결한다. 따라서 그것을 5위(位)의 분류에서 보면 불상응행(不相應行) 중에 포섭되는 비득을 체(體)로 하는 점에서 일종의 실체(實體)이겠지만 성법의 비득 이외에 특수한 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이 곧 이생의 성품을 다루는 방법에 관하여 갖가지 이견(異
見)이 생길 수 있는 주된 이유인데 여기서는 이 문제를 비롯하여 기타 갖가지 방편으로 이생의 성품이란 어떤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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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집착을 차단하면서 이생의 성품의 자체가 실로 존재한다[實有]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런 여러 부(部)의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바른 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이 본론(本論)에서 이생의 성품을 말하지만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는 이생의 법[異生法]을 말하니 마치 “어떤 것이 이생의 법인가? 지옥ㆍ방생ㆍ귀계ㆍ북구로주ㆍ무상천(無想天)에서의 그 업(業)과 그 생(生)을 이생의 법이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본론에서는 이생의 성품은 말하면서 이생의 법은 말하지 않았고 『품류족론』에서는 이생의 법은 말하면서 이생의 성품은 말하지 않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가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했기 때문이다.
또 여기와 거기에는 모두가 그 밖의 다른 설(說)이 있기 때문이다.
또 여기와 거기의 두 논(論)에서는 저마다 한 가지를 말하여 서로서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또 이생의 성품이 더 낫고 이생의 법은 그렇지 못하므로 이 본론에서는 우선 더 나은 것에 나아가 말한 것이며, 이 논에서 이미 이생의 성품을 말했기 때문에 『품류족론』에서는 거듭하여 말하지 않았고, 이 논에서 아직 이생의 법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품류족론』에서는 이생의 법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그 논이 이 논의 뒤에 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이는 “그 논에서 이미 이생의 법을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거듭 말하지 않았으며 그 논에서는 아직 이생의 성품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에서는 그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논이 이것보다 먼저 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하는가?
[답] 세우(世友) 존자는 “유정으로 하여금 다른 종류[異類]의 견해와 다른 종류의 번뇌를 일으키어 다른 종류의 업을 짓고 다른 종류의 과보와 다른 종류의 생(生)을 받게 하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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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정으로 하여금 다른[異] 세계에 떨어지게 하고 다른 갈래에 나아가게 하고 다른 생을 받게 하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
또 유정으로 하여금 다른[異] 스승을 믿게 하고 다른 모양을 짓게 하고 다른 법을 받게 하고 다른 행을 행하게 하고 다른 과보를 구하게 하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
대덕(大德)은 “유정으로 하여금 다른 종류의 세계와 갈래와 생과 유(有)에 의지하여 갖가지 뒤바뀐 번뇌를 일으켜 후유(後有)를 받을 업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하여 생사에 윤회하면서 분한(分限)이 없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달마의 여러 논사들은 “이생의 분(分)이기 때문이요, 이생의 체(體)이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한다.
묘음(妙音) 존자는 “이생의 종류이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이생의 의지[依]이기 때문이요, 성자의 성품[聖性]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는가?
[답] 모든 이생들은 이 법을 가지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한다. 비유하면 세간의 왕의 법[王法]과 신하의 법[臣法]과 같다.
[문] 모든 이생의 법은 성자(聖者)도 가지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이생의 법이라는 이름만을 붙였는가?
[답] 모든 이생의 법은 성자에게는 대부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적으므로 성자의 법[聖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성자는 그것에 대하여 얻으나 몸에는 있지 않고 성취하나 앞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이생만은 그것에 대하여 얻으면서도 몸에 있고 성취하면서도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한다.
또 이생은 그 법을 성취하여 그 법으로 하여금 과를 취하고[取過] 과를 주게[與過] 하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지만 성자는 비록 그 법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자의 법이라 하지 않는다.
또 이생은 그 법을 성취하여 그 법으로 하여금 다른 갈래와 다른 세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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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처소와 다른 생으로 가게 하면서 다른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지만 성자는 비록 그 법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자의 법이라 하지 않는다.
또 이생의 성품은 유루이면서 그 법도 유루이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지만 성자의 성품은 무루이면서 그 법은 무루가 아니기 때문에 성자의 법이라 하지 않는다.
또 이생은 그것에 가려졌기 때문이요 얽매었기 때문이며 미혹되었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지만 성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자의 법이라 하지 않는다.
또 모든 이생의 무리는 그 법에 수순하고 그 법을 생장하게 하기 때문에 이생의 법이라 하지만 성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자의 법이라 하지 않는다.
[문] 이생의 성품과 이생의 법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이생의 성품은 오직 색(色)이 아닐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색과 색이 아닌 것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볼 수 없을[無見]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볼 수 있는 것[有見]과 볼 수 없는 것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대할 수 없을[無對]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대할 수 있는 것[有對]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상응하지 않을[不相應]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상응하는 것[相應]과 상응하지 않는 것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소의(所依)가 없고 소연(所緣)이 없고 행상(行相)이 없을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모두가 두 가지씩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염오하지 않고[不染汚] 죄가 없고[無罪] 이숙이 없을[無異熟]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모두가 두 가지씩에 다 통한다.
또 이생의 성품은 오직 무기일 뿐이지만 이생의 법은 선ㆍ불선ㆍ무기에 다 통하며, 이생의 성품은 삼계계에 다 통하지만 이생의 법은 오직 욕계계와 색계계일 뿐이며, 이생의 성품은 오직 수도에서만 끊을 것이지만 이생의 법은 견도ㆍ수도에서 끊을 것에 다 통한다.
또 이생의 성품은 원인이지만 이생의 법은 결과이다. 원인과 결과처럼 능히 짓고[能作] 지을 바[所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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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생의 성품은 볍계(法界)ㆍ법처(法處)ㆍ행온(行蘊)에 속하지만 이생의 법은 18계ㆍ12처ㆍ5온에 속한다.
또 이생의 성품은 고법지인(苦法智忍)일 때에 버리지만 이생의 법은 그 밖의 다른 때에 버린다.
이와 같은 등의 문(門)을 바로 차별이라 한다.
세존께서 “수신행(隨信行)ㆍ수법행(隨法行)은 이생지(異生地)를 초월하여 아직 예류과(預流果)를 얻지 못했다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이생지라 하는가?
[답] 온갖 성자를 모두 동생(同生)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와 다르기[異] 때문에 이생이라 하며 이생을 받아들이므로 이생지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성자는 이생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생(異生)이라 해야 한다.
[답] 온갖 성자는 똑같이 진리를 깨닫고 같은 견해[同見]요 같은 욕망[同欲]이므로 동생(同生)이라 하지만 이생은 그렇지가 못하여 싫어하고 천히 여길 만하기 때문에 이생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니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
세우(世友) 존자는 “다른 견해와 다른 종류의 번뇌를 일으킴을 용납하고 다른 업을 지음을 용납하며 다른 세계에 떨어지고 다른 갈래에 가서 생(生)을 받음을 용납하기 때문에 이생지라 한다.
또 다른 스승을 믿음을 용납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다른 과보를 구하기 때문에 이생지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바른 법과 비나야(毘奈耶)를 달리하면서 생을 받기 때문에 이생이라 하며, 이 모든 이생이 나고 자라는 의처(依處)를 이생지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論] 어떤 것이 이생의 성품[異生性]인가?
[答] 만일 성법(聖法)ㆍ성난(聖暖)ㆍ성견(聖見)ㆍ성인(聖忍)ㆍ성욕(聖欲)ㆍ성혜(聖慧)에 대하여 모든 비득(非得)이요 이미 몸에서 떼어버렸고[已非得] 장차 몸에서 떼어 버리는 것[當非得]이면 이것을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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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고법지인(苦法智忍)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이생의 성품인가? 온갖 성법(聖法)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이생의 성품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고법지인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이생의 성품이라면 도류지(道類智)가 이미 생겨서 고법지인을 버리는 그때의 고법지인의 비득(非得)은 이생의 성품이어야 하고 이는 곧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에 머무른 이도 이생이라 해야만 한다. 만일 온갖 성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이생의 성품이라면 온갖
유정은 모두가 이생이라 해야 하니 성자라도 온갖 성법을 성취한 이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처님조차도 2승(乘)의 성법과 자기 승[自乘]의 학법(學法)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역시 이생이라고 해야 한다.
[답] 어떤 이는 “고법지인을 얻지 못한 것이 이생의 성품이다”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도류지가 이미 생겨서 고법지인을 버리는 그때의 고법지인의 비득은 이생의 성품이어야 하며 이는 곧 수도와 무학도에 머무른 이도 이생이라고 해야 한다.
[답] 고법지인이 생길 때에 그 비득을 해치고 자기의 상속(相續)에서 영원히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기 때문에 수도와 무학도에 머무른 이는 고법지인을 비록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얻지 못했다고도[不得] 하지 않고 또한 얻었다고도[得] 하지 않는다. 마치 눈[眼根]이 생길 때에는 그것의 비득을 해치고 자기의 상속에서 영원히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므로 눈이 소멸한 뒤에 비록 성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얻지 못했다고도 하지 않고 얻는다고도 하지 않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기 때문에 앞의 허물은 없다.
또 도류지가 이미 생기면 고법지인이 비록 성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의 등류과(等流果)를 성취하기 때문에 이생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온갖 성법을 얻지 못한 것이 이생의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온갖 유정은 모두 이생이라 해야 하니 성자라 해도 온갖 성법은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답] 비록 성자가 온갖 성법을 구족하게 성취함이 없다 하더라도 이생은 아니니 그 비득에는 성자의 득(得)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몸속에 성법의 비득만이 있고 득이 섞여 있지 않다면 이생의 성품이겠지만 성자의 몸속에는 성법의 비득에 성자의 득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이 아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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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7 / 1338] 쪽
득과 비득은 항상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또 그 비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통한 것[共]이요, 둘째는 공통하지 않은 것[不共]이다. 공통하지 않은 것은 이생의 성품이고 공통한 것은 이생의 성품이 아니다. 성자의 몸의 성법의 비득은 한결같이 공통하기 때문에 앞의 허물이 없다.
또 그 비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직 해를 입지 않은 것[未被害]이요, 둘째는 이미 해를 입은 것[已被害]이다. 아직 해를 입지 않은 것은 이생의 성품이지만 이미 해를 입은 것은 이생의 성품이 아니다. 성자의 몸속의 성법의 비득은 모두 이미 해를 입었기 때문에 앞의 허물이 없다.
또 온갖 성법의 비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생의 상속(相續)에 의하여 나타나 생기고, 둘째는 성자의 상속에 의하여 나타나 생긴다. 앞의 것은 이생의 성품이지만 뒤의 것은 이생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성자를 이생이라 한다는 허물은 없다.
[문] 성법ㆍ성난ㆍ성견ㆍ성인ㆍ성욕ㆍ성혜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이 6구(句)는 다 같이 고법지인을 나타내 보인다. 처음 하나[一]는 총괄한 것[總]이요, 뒤의 다섯[五]은 따로따로 구별한 것[別]이다. 처음 하나는 요약한 것이요 뒤의 다섯은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며, 처음 하나는 분별하지 않은 것이요 뒤의 다섯은 분별한 것이다. 고법지인은 온(蘊)의 종자로 하여금 모두 다 시들어지게 하기 때문에 성난(聖暖)이라 하고 진리[諦理]를 추구하기 때문에 성견(聖見)이라 하며, 진리를 인가(忍可)
하기 때문에 성인(聖忍)이라 하고 진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욕(聖欲)이라 하며, 진리를 결택하기 때문에 성혜(聖慧)라고 한다.
또 고법지인은 유(有)의 종자로 하여금 모두 다 시들게 하기 때문에 성난이라 하고 행전(行轉)2)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견이라 하며, 행전을 인가하기 때문에 성인이라 하고 해탈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욕이라 하며, 진리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성혜라 한다.
어떤 이는 “6지(地)3)의 고법지인은 곧 이 안에서의 6구(句)로 나타내는
2) 4제(諦) 16행상(行相)의 회전(回轉)을 가리킨다.
3) 6지라 함은 미지(未至)와 중간(中間)과 4근본정(根本定)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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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6성(姓)4)의 고법지인은 곧 이 안에서의 6구로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안에서의 6구는 다 같이 온갖 성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모든 성법의 뜻에는 총(總)과 별(別)이 있어서 처음 한 가지는 총이요 뒤의 다섯 가지는 별이니 다섯 가지 안에서의 두 가지 해석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6성(姓)의 온갖 성법은 곧 이 안에서 6구로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3승(乘)의 학(學)과 무학(無學)의 법은 곧 이 안에서의 6구로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가운데서는 진실(眞實)과 상사(相似)의 두 가지 성법을 나타내 보인다. 상사한 성법은 곧 난(暖) 등 네 가지 순결택분(順決擇分)이고 성법이란 진실한 성법 즉 무루의 도[無漏道]를 말하며, 성난이란 난법(暖法)을 말하고 성견이란 정법(頂法)을 말하며, 성인이란 하중인법(下中忍法)을 말하고 성욕이란 증상인법(增上忍法)을 말하며, 성혜란 세제일법(世第一法)을 말한다.
만일 아직 난법 등 네 가지를 닦아 얻지 못하면 그는 전부분의 이생이요 만일 난 등을 얻은 이면 역시 성자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만일 난 등 선근을 성취한 이가 있으면 나는 그를 상사한 성자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생의 성품은 오직 진실한 성법의 비득일 뿐이요 그 밖의 것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난(聖暖) 등을 난(暖)ㆍ정(頂)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論] 이 이생의 성품은 선(善)이라 해야 하는가, 불선(不善)이라 해야 하는가,
4) 6성이라 함은 퇴법종성(退法種姓)으로부터 부동종성(不動種姓)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의 기근(機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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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無記)라고 해야 하는가?
[答] 무기라고 말해야 한다.
무부무기이니 비득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온갖 비득은 모두 무부무기의 성품에 속한다.
[문] 이숙생(異熟生) 등 네 가지 무기5) 가운데서 이것은 어느 것에 속하는가?
[답] 네 가지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등류(等流)의 무부무기일 뿐이다.
[문] 이것은 무엇 때문에 유부무기가 아닌가?
[답] 염(染)을 여읠 때에 이 성품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선이 아닌가?
[答] 착한 법은 혹은 가행(加行)으로 말미암아 얻기도 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연[餘緣]으로 말미암아 얻기도 하지만 가행을 베풀면서 이생을 구하거나 짓는 일은 없다. 또 선을 끊을[斷善] 때에는 착한 법을 모두 버리고 모든 착한 법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不成就性]을 얻는 것이니 만일 이생의 성품이 선의 성품[善性]이라면 선근을 끊은 이[斷善根者]는 마땅히 이생이 아니어야 한다.
곧장 말하면 그 뜻이 확고해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문답하면서 선이 아니라는 것 등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착한 법은 혹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선을 나타내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그가 닦을 미래의 모든 선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5) 4무기는 이숙(異熟)과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통과(通果)의 네 가지를 가리킨다. 이숙은 선악의 업 종자를 증상연(增上緣)으로 하여서 얻는 과보요 위의로는 앉고 서고 하는 동작 등을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며 공교처는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물품을 만드는 신공교(身工巧)와 노래를 부르는 등의 어공교(語工巧)를 일으키는 마음의 성질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이요 통과는 선정의 힘으로 사람과 궁전
등을 변화로 만드는 신통의 마음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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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착한 법은 혹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가행득(加行得)의 선을 나타내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이염득(離染得)의 선을 나타낸다.
또 착한 법은 혹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가행득의 선 안의 순승진분(順勝進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을 나타내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가행득의 선 안의 순퇴분(順退分)과 순주분(順住分)을 나타낸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생득의 선[生得善]은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여기서는 다만 얻기 어려운 수승한 선을 말하지만 모든 생득의 선은 얻기 쉬우면서 하열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모든 이생의 성품은 모두 생득(生得)이므로 만일 이 가운데서 생득의 선을 말하면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착한 법은 혹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가행득의 선을 나타내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생득의 선을 나타낸다”라고 말한다.
또 착한 법은 혹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더 나아가는[勝進] 때에 얻게 되는 모든 선을 나타내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것은 물러나는[退] 때 등에 얻게 되는 모든 선을 나타낸다.
이 가운데서는 4구(句)를 만들어 분별해야 한다.
혹은 어떤 착한 법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으나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난(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ㆍ견도(見道)ㆍ현관변의 세속지[現觀邊世俗智]ㆍ도류지(道類智)ㆍ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ㆍ무쟁원지(無諍願智)ㆍ변제정(邊際定) 등과 같다.
혹은 어떤 착한 법은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으나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은 아니다. 마치 생득의 선과 같다.
혹은 어떤 착한 법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기도 하고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기도 한다. 마치 4사문과(沙門果)ㆍ정려(靜慮)ㆍ무색(無色)ㆍ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등과 같다.
혹은 어떤 착한 법은 가행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도 아니고 그 밖의 다른 연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없다.
가행을 베풀어 이생을 구하거나 짓는 일은 없다는 것은 이생의 성품은 가행득의 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반드시 먼저는 이생이 아니었는데도 뒤에 그 하천한 것을 구하여 증득한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니 끝없는 옛날부터 이생이었기 때문이다.
또 선을 끊을 때에는 착한 법을 모두 버린다는 등은 이생의 성품은 생득의 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선을 끊을 때에는 정작 생득을 끊는 것이요 가행을 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선근을 끊어도 이생이 아니라 하면 아주 바른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 극히 악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게 되는 허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생의 성품은 결정코 선이 아니다.
[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불선(不善)이 아닌가?
[答]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불선을 모두 버리면서 불선법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不成就性]을 얻는 것이니 만일 이생의 성품이 불선이라면 모든 이생은 욕염을 여의면 이생이 아니어야 한다.
만일 이생이 아니라 하면 그는 뒤에 도로 욕계에 태어나지 않아야 하니 성자는 욕염을 여의면 반드시 다시는 욕계의 생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일 그렇다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이생이 없어야 한다. 곧 이런 큰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반드시 불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무부무기일 뿐이다.
[論] 이 이생의 성품은 욕계계(欲界繫)라고 해야 하는가, 색계계(色界繫)라고 해야 하는가, 무색계계(無色界繫)라고 해야 하는가?
[答] 혹은 욕계계이기도 하고, 혹은 색계계이기도 하며, 혹은 무색계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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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다고 말해야 한다.
곧장 말하면 그 뜻이 확고해지지 않기 때문에 문답을 거듭하면서 이 뜻을 나타내어야 한다.
[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오직 욕계계만이 아닌가?
[答] 욕계에서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욕계의 법을 모두 버리면서 욕계법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을 얻는 것이니 만일 이생의 성품이 욕계계일 뿐이면 모든 이생이 욕계에서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나면 이생이 아니어야 한다.
만일 이생이 아니라 하면 거기에 나는 이는 물러나 떨어지는[退墮] 일이 없어야 하니 성자는 위에 태어나면 반드시 물러나서 하지(下地)의 생을 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욕계에서 죽어서 색계에 태어난 이도 욕계의 법을 버린다 하더라도 온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니 그는 오히려 욕계의 변화하는 마음[變化心] 등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만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만을 말한다.
[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오직 색계계만이 아닌가?
[答] 색계에서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색계의 법을 모두 버리면서 색계법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을 얻는 것이니 만일 이생의 성품이 오직 색계계일 뿐이면 모든 이생이 색계에서 죽어서 무색계에 태어나면 이생이 아니어야 한다.
만일 이생이 아니라면 맹희자(猛熹子) 등은 아래에서 태어나지 않아야 하니 성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색계에서 죽어서 욕계에 태어난 이도 색계의 법을 버린다 하더라도 온전히 버리는 것은 아니니 그는 오히려 색계의 번뇌 등의 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다만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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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오직 무색계계만이 아닌가?
[答]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 적에는 먼저 욕계의 고(苦)를 현관하고 그 뒤에 합쳐서 색계ㆍ무색계의 고를 현관하며 성도(聖道)가 일어나면 먼저 욕계의 일을 갖추고 그 뒤에 합쳐서 색계ㆍ무색계의 일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생의 성품은 오직 무색계계만이 아니다.
법은 이와 같아야만 한다. 만일 이 지(地)의 이생의 성품을 성취하면 반드시 이 지의 고제(苦諦)를 현관하고 또 성도가 일어날 때에는 먼저 이생의 성품을 대치(對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생의 성품은 욕계계일 뿐이어야 한다.
[답] 오직 욕계계일 뿐이면 앞에서 말한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삼계계(三界繫)에 다 통한다고 말해야 한다.
[論] 이 이생의 성품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이라 해야 하는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修所斷]이라 해야 하는가?
[答]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라 해야 한다.
곧장 말하면 그 뜻이 확고해지지 때문에 문답을 거듭하면서 이 뜻을 나타내어야 한다.
[論]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 아닌가?
[答]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은 모두가 염오(染汚)이지만 이생의 성품은 불염오(不染汚)이기 때문이다.
모든 염오의 법은 부(部)6)에 따르고 품(品)에 따라 점차로 그것을 끊으면서 성취하지 않음[不成就]을 얻게 되지만 모든 이생의 성품은 고법지인일
6) 부라 함은 4제(諦)와 수도(修道)의 5부이며, 품이라 함은 상상품(上上品)에서부터 하하품(下下品)의 9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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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일시에 단번에 버리고 지(地)에 따라 제9 무간도(無間道)의 힘으로 일시에 단번에 끊기 때문에 염오가 아니다.
[論] 또 세제일법(世第一法)이 막 소멸하면서 고법지인이 막 생기는 그때에 삼계(三界)의 이생의 성품을 버리면서 그것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不成就性]을 얻는 것이니 그때에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에 버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생의 성품이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라면 이 지위에서는 아직 그 성품을 버리지 못해야 하고 곧 구박자(具縛者)로서 고법지인에 머무를 때에 이생의 성품을 성취해야 하니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법을 모두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지위에 머무른 이는 성자라고도 하고 이생이라고도 해야 되므로 곧 뒤섞이어 혼란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이생의 성품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은 아니다.
[문] 그때에는 오직 욕계 이생의 성품만을 버려야 하니 위의 두 세계의 이생의 성품은 먼저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떻게 삼계를 버린다고 말하는가?
[답] 그때에는 삼계 중의 어느 하나의 이생의 성품을 버리면서 그것의 성취하지 않는 성품을 얻는다고 말해야 되므로 삼계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고 말하면 셋의 수[三數]를 다 채우게 되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위의 두 세계에 이생의 성품은 먼저 성취하지 않았고 이제 다시 욕계 이생의 성품을 버리면 셋의 수가 곧 다 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위의 두 세계의 이생의 성품을 비록 먼저 성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 다시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버린다고 말한다. 어떤 것이 먼저 성취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성취하지 않는다 하는가?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욕계 이생의 성품은 위의 두 세계의 이생의 성품을 도와주고 이끌면서 그것을 위하여 문(門)이 되고 가행이 되기 때문에 만일 욕계 이생의 성품을 버린다면 그때에도 그것을 버린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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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욕계 이생의 성품을 성취할 때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이생의 성품도 나타나고 생길 여지가 있으니 그것을 위한 의지요 발을 디딜 곳[安足處]이 되기 때문이지만 만일 욕계 이생의 성품을 버릴 때에는 그것이 생기는 길을 끊기 때문에 역시 버린다고 말한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그때에는 삼계의 모든 이생의 성품은 비택멸(非擇滅)을 얻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때에는 단번에 삼계(三界) 9지(地)의 모든 이생의 성품의 비택멸을 얻기 때문이니 이런 이치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문] 혹 어떤 법이 일시에 버리면서 9시(時)에 끊어지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이생의 성품이다. 일시에 버린다고 함은 고법지인이 생길 때를 말하고 9시에 끊어진다고 함은 욕계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염(染)을 여읠 적에 각각 제9 무간도의 시기를 말한다.
[문] 혹시 이생의 성품에 대하여 이미 택멸(擇滅)은 얻었으나 아직 비택멸을 얻지 못한 이가 있는가?
[답] 4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에 대하여 이미 택멸을 얻었으나 비택멸은 아직 얻지 못하였다. 이생으로서 이미 욕계 나아가 무소유처의 염(染)을 여읜 이이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에 대하여 이미 비택멸은 얻었으나 아직 택멸은 얻지 못하였다. 성자로서 아직 욕계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이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에 대하여 이미 택멸과 비택멸을 얻었다. 성자로서 이미 욕계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읜 이이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에 대하여 아직 택멸과 비택멸을 얻지 못하였다. 이생으로서 아직 욕계에 염을 여의지 못한 이이다.
[문] 혹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하면서 성취하지 않은 이도 있는가?
[답] 4구를 만들어야 한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이생으로서 욕계에 나서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8지(地)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이미 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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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의 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제2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7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위의 1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만일 초정려에 난 이로서 아직 제2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7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고, 이미 제2 정려의 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제3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6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위의 1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고 나아가 만일 무소유처에 난 이면 그는 위의 1지의 이
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만일 성자로서 아직 욕계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9지(地)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고 이미 욕계의 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8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의 염은 여의었으나 아직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위의 1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했으면서 성취하지도 않는다.
혹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을 성취했으면서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다. 이생으로서 욕계에 나서 이미 욕계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욕계 이생의 성품을 성취했으면서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며, 나아가 무소유처에 나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무소유처의 이생의 성품을 성취했으면서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다.
혹은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도 못했고 성취하기도 한다. 이생으로서 아직 욕계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욕계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도 못했고 성취하기도 한 것이요, 나아가 무소유처에 나서 아직 무소유처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무소유처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도 못했고 성취하기도 한 것이며, 만일 비상비비상처에 난 이면 그는 비상비비상처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도 못했고 성취하기도 한 것이다.
혹은 어떤 이는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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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이생으로서 욕계에 난 이가 이미 초정려의 염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제2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했으면 그는 초정려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며,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초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이생의 성품을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다.
만일 초정려에 나서 아직 제2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욕계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다. 이미 제2 정려의 염은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제3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욕계와 제2 정려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다.
나아가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욕계와 제2 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며, 나아가 만일 비상비비상처에 난 이면 그는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다.
만일 성자로서 이미 욕계의 염은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욕계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며, 이미 초정려의 염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제2 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한 이면 그는 욕계와 초정려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며, 나아가 이미 비상비비상처의 염을 여읜 이면 그는 삼계 9지의 이생의 성품을 아직 끊지 못한 것도 아니고 성취한 것도 아니다.
[문] 혹은 이생의 성품을 이미 끊었으면서도 성취한 이도 있는가?
[답]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앞의 제2구(句)가 여기서는 초구(初句)가 되고 앞의 초구가 여기서는 제2구가 되며, 앞의 제4구가 여기서는 제3구가 되고 앞의 제3구가 여기서는 제4구가 되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에 준하여 그 모양을 알아야 한다.
[論] 이생의 성품은 어떤 법을 이름하는가?
[答] 삼계(三界) 불염오(不染汚)의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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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다시 이것을 논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앞에서 “성법(聖法)을 얻지 못한 것을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고 말했으므로 어떤 이는 ‘성법을 얻지 못하는 것은 실로 존재하는 체[實有體]가 아니니 마치 아직 재물을 얻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생의 성품은 실로 존재하는 법이요 행온(行蘊)에 포섭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앞에서 비록 이미 이생의 성품의 상(相)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아직 그 체(體)를 분별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앞에서는 비록 이미 이생의 성품의 체를 나타냈다 하더라도 아직 그 상을 분별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그것을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앞에서는 이생의 성품의 대치(對治)를 나타냈으므로 지금은 이생의 성품의 체를 말하려고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이생의 성품이 오직 욕계계일 뿐이라는 것을 차단하고 불염오라 함은 이생의 성품이 염오의 법이라는 것과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차단하며, 심불상응이라 함은 이생의 성품이 심소법(心所法)이라는 것을 차단하고 행(行)이라 함은 이생의 성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차단한다. 가법(假法)은 도리에서 보아 행온(行蘊)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달리하는 집착을 차단하면서 이생의 성품의 체를 나타낸
다.
묘음(妙音) 존자는 “이생의 성품은 곧 중동분(衆同分)이니 마치 소와 양 등의 중동분을 곧 소와 양 등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생의 중동분의 체를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다른 논사는 “따로 하나의 법이 있어서 불염오요 심불상응행온에 포섭된 것이니, 마치 명근(命根) 등과 같은 것을 이생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기 위하여 앞에서 “이생의 성품은 성법(聖法)을 얻지 못한 것이라 하고 얻지 못한 것은 곧 성취하지 못한 성품이다”라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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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문] 어떤 연유로 곧 이생의 중동분과 따로 법이 있어서 이생의 성품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성법을 성취하지 못한 성품이 이생의 성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가?
[답] 이생의 중동분은 친히 성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따로 알 수 없는 하나의 법이 있기 때문이니, 성법을 성취하지 못한 성품은 친히 성법을 어기고 알 수 있는 모양이 있어서 이생의 성품이라고 하는 도리가 잘 성립하는 것과 같지 않다.
[論] 모든 법으로서 사견(邪見)과 상응하면 그 법은 사사유(邪思惟)와 상응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문] 무엇 때문에 이생의 성품 뒤에 사지(邪支)7)를 말하는가?
[답] 이 두 가지는 상호교대로 서로 돕는 것[扶持]이기 때문이니 이생의 성품은 사지를 돕고 이 사지는 다시 이생의 성품을 돕는다.
또 수행하는 이는 이생의 성품과 8사지(邪支)를 싫어하여 성도(聖道)를 닦기 때문에 이생의 성품 뒤에 사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論] 모든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면 그 법은 사사유와 상응하는가?
[答]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견은 온갖 지(地)에는 있으나 온갖 염오의 마음에는 아니니
7) 8성도지(聖道支)의 반대를 8사지라 하며 곧 사견(邪見) 나아가 사정(邪定)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8사지를 그 관계하는 지(地)와 염오(染汚)의 입장에서 보면 그 범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혹은 9지(地)의 모두에 걸치면서도 반드시 염오의 모두에는 걸치지 않는 것이 있고 반대로 온갖 염오에는 다 통하면서도 온갖 지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며 나아가 온갖 지와 온갖 염오에 다 통하면서도 그 세력의 범위는 이리저리 엇갈려 뒤섞인 것이
많다. 여기서는 이러한 8사지의 성질을 밝히고 그것들과 상응하는 심소법(心所法)을 지와 염오에 관련시켜 분별하려는 것이어서 문제의 성질상 모두 4구(句)로 분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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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견(有身見) 등의 무더기에는 없기 때문이며, 사사유는 온갖 염오의 마음에는 있으나 온갖 지에는 아니니 정려중간(靜慮中間) 이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바라보면서 크게 4구를 만든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 상응하나 사사유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사유와 그리고 그 밖의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사견과 상응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사견과 상응하는 사사유라 함은 욕계와 미지정(未至定)과 초정려에서의 사견과 함께하는 심(尋)이다. 그것은 오직 사견과 상응하면서 사사유와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니 자성(自性)은 자성과 세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는 두 가지 사유(思惟)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앞과 뒤의 사유는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법의 자성은 자신을 관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타성(他性)을 상대하는 것이요
자성을 상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밖의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은 사견과 상응하는 법이라 함은 정려중간과 나아가 유정(有頂)의 사견과 상응하는 법이니 곧 9대지법(大地法)8)과 9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과 혼침(惛沈)과 사(伺)와 심(心)이다.
[論] 어떤 법은 사사유와 상응하나 사견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사유와 상응하는 사견과 그리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사사유와 상응하는 사견이라 함은 욕계와 미지정과 초정려에서
8) 사견의 체는 혜(慧)이므로 10대지법(大地法)에 있어서는 이것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아홉 가지[作意ㆍ觸ㆍ受ㆍ想ㆍ思ㆍ欲ㆍ勝解ㆍ念ㆍ定]와 10번뇌지법(煩惱地法)에 있어서는 부정지(不正知)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아홉 가지[不信ㆍ怠ㆍ失念ㆍ心亂ㆍ無明ㆍ非理作意ㆍ邪勝解ㆍ掉ㆍ逸]가 사견과 상응한다. 여기에 유부무기지법(有覆無記地法)의 혼침(惛沈)과 아울러 사(伺)와 심(心)을 가하는데 이 안의 사는 중간정(中間定)에 한하고 유정지(有頂地)까지는 미치
지 않음은 물론이다.
의 사견이다. 그것은 오직 사사유와 상응할 뿐이요 사견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니 자성은 자성과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이라 함은 욕계와 미지정과 초정려의 사견 무더기를 제외한 그 밖의 염오의 무더기 안의 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을 취한다. 곧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ㆍ의(疑)ㆍ탐(貪)ㆍ진(瞋)ㆍ만(慢)ㆍ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하는 무더기 안의 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이니 10대지법 등은 이치대로 알아야 한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도 상응하고 사사유와도 상응한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사유를 제외하고 사사유와 상응하는 사견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사견ㆍ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이다.
욕계와 미지정과 초정려의 사견 무더기 안의 사견ㆍ사사유와 상응하는 법이니 곧 9대지법과 9대번뇌지법과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와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사(伺)와 심(心)이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도 상응하지 않고 사사유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와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사견과 그리고 모든 그 밖의 심법(心法)ㆍ심소법(心所法)과 색(色)과 무위(無爲)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다.
여기에서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사유라 함은 욕계와 미지정과 초정려의 사견 무더기를 제외한 그 밖의 염오 무더기 안의 사사유를 취한다. 그것이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은 그 무더기에는 사견이 없기 때문이요,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사유와 상응하지 않는 사견이라 함은 정려중간 나아가 유정의 사견이니 그것이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은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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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地)에는 사유(思惟)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그 밖의 심ㆍ심소법이라 함은 정려중간 나아가 유정의 사견 무더기를 제외한 그 밖의 염오의 심ㆍ심소법과 아울러 온갖 선(善)과 무부무기를 취한다.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라 함은 온갖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어서 이와 같은 모든 법과 함께하면서 상응하지 않는 것은 그 무더기에는 사견이 없기 때문이요, 그 지(地)에는 사유가 없기 때문이며 불염오이기 때문이요, 상응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모든 법으로서 사견과 상응하면 그 법은 사정진(邪精進)과 상응하는가?
[答]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견은 온갖 지(地)에는 있으나 온갖 염오의 마음에는 아니며, 사정진은 온갖 지와 온갖 염오의 마음에 다 같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가 바라보면서 중간의 4구를 만든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는 상응하나 사정진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이다.
여기에서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이라 함은 사견 무더기의 해태(懈怠)이다. 다만 사견과 상응할 뿐이요 사정진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어떤 법은 사정진과는 상응하나 사견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견과 그리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과 상응한 법이다.
여기에서 사견이라 함은 모든 사견은 모두가 사정진과는 상응하면서 사견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그 무더기에는 반드시 사정진이 있기 때문이요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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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과 상응하는 법이라 함은 온갖 지(地)의 사견 무더기를 제외한 그 밖의 염오 무더기의 사정진과 상응한 법을 취한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도 상응하고 사정진과도 상응한다.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사견과 상응하는 사정진을 제외한다 함은 사정진의 체(體)의 수(數)는 지극히 많으므로 이 가운데서는 다만 사견과 상응하는 것만을 제외하며 그 밖의 것은 넘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 밖의 사견과 상응하는 법이라 함은 사견 무더기의 사정진과 사견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심ㆍ심소법으로서 그것과 함께 상응하는 것을 취한다. 곧 9대지법과 8대번뇌지법과 무참과 무괴와 혼침과 수면과 심(尋)과 사(伺)와 심(心)이다.
[論] 어떤 법은 사견과도 상응하지 않고 사정진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과 그리고 모든 그 밖의 심ㆍ심소법과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다.
여기에서 사견과 상응하지 않는 사정진이라 함은 유신견(有身見) 등과 상응하는 사정진이니 그것이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은 그 무더기에는 사견이 없기 때문이요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그 밖의 심ㆍ심소법이라 함은 온갖 선(善)과 무부무기의 심ㆍ심소법이어서 염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라 함은 온갖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 이와 같은 모든 법과 함께 상응하지 않는 것은 불염오이기 때문이요 상응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 사견으로써 사정진에 대(對)하는 것처럼 사견으로써 사념(邪念)과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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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邪定)에 대하는 것도 그러하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중간의 4구를 만들어야 하니 사념과 사정은 마치 사정진처럼 온갖 지(地)에 두루하고 온갖 염오의 마음[染汚心]에서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論] 사견으로써 사정진ㆍ사념ㆍ사정에 대하는 것처럼 사사유로써 사정진ㆍ사념ㆍ사정에 대하는 것도 그러하다.
여기에서는 세 가지 중간의 4구를 만들어야 하니 사사유가 온갖 지(地)에 두루하지 않는 것은 마치 사견이 온갖 염오의 마음에 두루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論] 모든 법으로서 사정진과 상응하면 그 법은 사념과 상응하는가?
[答] 4구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법은 다 같이 온갖 지에 두루하고 온갖 염오의 마음에 있는 것이므로 이로 말미암아 서로 바라보면서 작은 4구를 만들어야 한다.
[論] 어떤 법은 사정진과는 상응하나 사념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념이다.
여기에서 사념은 반드시 사정진과 상응하면서도 사념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이며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어떤 법은 사념과는 상응하나 사정진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사정진이다.
여기에서 사정진은 반드시 사념과 상응하면서도 사정진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이며 자성은 자성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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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어떤 법은 사정진과도 상응하고 사념과도 상응한다. 사정진과 사념과의 상응하는 법이다.
여기서는 사정진과 사념과의 체를 제외한 그 밖의 염오의 심ㆍ심소법을 취한다. 곧 9대지법과 8대번뇌지법과 10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과 무참과 무괴와 탐ㆍ진ㆍ만ㆍ의와 혼침과 수면과 악작(惡作)과 포(怖)와 심(尋)과 사(伺)와 심(心)이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은 염오이어서 두 가지는 다 같이 상응하면서 항상 함께 있기 때문이다.
[論] 어떤 법은 사정진과도 상응하지 않고 사념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모든 그 밖의 심ㆍ심소법과 색과 무위와 심불상응행이다.
여기에서 모든 그 밖의 심ㆍ심소법이라 함은 온갖 선(善)과 무부무기의 심ㆍ심소법이어서 염오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論] 사정진으로써 사념에 대하는 것처럼 사정진으로써 사정에 대하는 것도 그러하며 사정진으로써 사념과 사정을 대하는 것처럼 사념으로써 사정을 대하는 것도 그러하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작은 4구를 만들어야 하니 모두가 온갖 지에 두루하고 온갖 염오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어(邪語) 등 세 가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상응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이 8사지(邪支)는 몇 가지가 욕계계이고, 몇 가지가 색계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계인가?
[답] 사견ㆍ사정진ㆍ사념ㆍ사정은 삼계계(三界繫)에 다 통하고, 사사유ㆍ사어ㆍ사업(邪業)ㆍ사명(邪命)은 오직 욕계계ㆍ색계계일 뿐이다. 색계에서는 오직 초정려에서만이니 상지(上地)에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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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색계에도 사명이 없다. 거기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신업ㆍ어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評] 이 가운데서는 앞의 말[前說]이 옳다 할 것이다. 그가 탐(貪)으로 일으키는 몸과 말의 두 가지 업을 사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문] 이 8사지는 몇 가지가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고, 몇 가지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인가?
[답] 한 가지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니 사견을 말하고, 세 가지는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니 사어ㆍ사업ㆍ사명을 말하며,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는 견도와 수도에서 다 끊어야 할 것이다.
[문] 이 잡온(雜蘊)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먼저 청정한 법[淸淨法]을 말하고 나중에 잡염의 법[雜染法]을 말하는 것인가?
[답]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용과(士用果)를 나타내 보이려고 한 까닭이다. 세제일법은 견도(見道)를 이끌어서 영원히 사견을 끊게 하므로 이것이 그것의 사용과이다. 청정한 것은 바로 세제일법이 등이고 잡염은 바로 사견 등의 8지(支)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6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불선납식(不善納息) ①
[論] 3결(結) 내지 98수면(隨眠)이다.1)
이와 같은 장(章)과 장을 풀이하는 뜻은 이미 이해했을 것이므로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해석하겠다.
이 3결 등은 모두가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나 오직 5결(結)과 98수면만은 제외되었으므로 이 가운데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논(論)은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갖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모두 계경을 해석하기 위한 것인데 이 두 가지 논은 이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외되어
1) 본장(本章)은 온갖 번뇌의 종류에 대한 해설에서 시작하여 그 명칭과 본질과 아울러 속성(屬性) 등을 논구하며 여기서 특히 불선납식(不善納息)이라 한 까닭은 번뇌에는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두 가지가 있고 그 특색이 되는 것은 불선에 있기 때문이다. 번뇌론(煩惱論)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대상이 되는 번뇌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번뇌라고 일컫는 것 가운데에는 3결(結)ㆍ3불선근(不善根)ㆍ3루(漏)ㆍ4폭류(瀑
流)ㆍ4액(軛)ㆍ4취(取)ㆍ4신계(身繫)ㆍ5개(蓋)ㆍ5결(結)ㆍ5순하분결(順下分結)ㆍ5순상분결(順上分結)ㆍ5견(見)ㆍ6애신(愛身)ㆍ7수면(隨眠)ㆍ9결(結)ㆍ98수면(隨眠)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6결과 98수면은 경전에는 없는 것이므로 경전의 해석을 본의(本義)로 삼는 아비달마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먼저 문제가 되고, 다음에는 장(章)과 문(門)을 건립하는 것의 필요를 논하며, 다시 번뇌를 기술하는 순서에까지 논구하는 것이 여
기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번뇌라 하면 위의 것 외에 10전(纏)과 6구(垢)도 포함시키는데 이것들은 종속적(從屬的)인 번뇌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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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묘음 존자는 “온갖 아비달마는 모두가 경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러이러한 경에 의하여 이러이러한 논을 지은 것이니 경의 말씀이 아니면 모두 제외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 이론은 제외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도 계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에서는 5법(法) 중에서 5결을 말했고 98법 중에서 98수면을 말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모두가 망실되었다. 이 본론을 지은 이는 원지(願智)의 힘으로써 기억하고 관찰하여 여기에서 거듭 서술하며 해석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두 가지는 비록 경의 말씀이 아니라 해도 제외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문] 5결은 이미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제외하지 않는가?
[답] 모든 논(論)은 모두 지은 이의 의요(意樂)에 따른 것이어서 법상(法相)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짓는 이가 뜻에 따라 짓는 것이다. 여기서는 변행(遍行)2)의 결(結)과 비변행(非遍行)의 결과 변행비변행(遍行非遍行)의 결을 말하고 있다. 변행의 결을 말한 것은 3결과 같고, 비변행의 결을 말한 것은 5결과 같으며, 변행비변행의 결을 말한 것은 9결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5결은 비록 경의 말씀이 아니라 해도 제외되지 않
아야 한다.
[문] 98수면은 이미 경의 말씀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제외하지 않는가?
[답] 아비달마는 모두 경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일곱 가지 수면[七種隨
2) 변행이란 고제(苦諦) 아래의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의(疑)ㆍ무명(無明)의 일곱 가지와 집제(集諦) 아래의 사견ㆍ견취견ㆍ의ㆍ무명의 네 가지로 이 열한 가지는 4제 수도의 5부에 두루 걸쳐서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므로 변행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변행의 결과 비변행의 결과 변행비변행의 결이라 함은 유신견ㆍ계금취ㆍ의의 3결은 열한 가지의 변행 중에 있으므로 변행의 결이라 하고 탐(
貪)ㆍ진(瞋)ㆍ만(慢)ㆍ질(嫉)ㆍ간(慳)의 5결은 열한 가지의 변행 중에 있지 않으므로 비변행의 결이라 하며, 9결 중에서 무명ㆍ견ㆍ취ㆍ의의 4결은 열한 가지의 변행 중에 있거니와 그 밖의 애(愛)ㆍ에(恚)ㆍ만ㆍ질ㆍ간의 5결은 열한 가지의 변행 중에 있지 않으므로 변행비변행의 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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眠]은 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이제 논을 짓는 이가 널리 행상(行相)과 계(界)와 부(部)의 차별로써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이론도 제외되지 않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장(章)부터 세웠는가?
[답] 모든 문(門)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만일 장문(章門)을 세우지 않으면 뜻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 마치 그림에 색을 칠하는 이가 허공에다 색을 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이 논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세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 안에는 비록 온(蘊)과 납식(納息)과 장문(章門)을 잘 세웠다 해도 백천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만이 고루 갖추어 외워 지니게 되는데 하물며 장문을 잘 세워 놓지 않으면 그 누가 이렇게 어지러운 문구를 외워 지닐 이가 있겠는가? 외워 지닌 이가 없게 된다면 빨리 없어지게 된다.
또 만일 장을 세우지 않는다면 비어 아무 것도 없으므로 물을 것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의지할 것이 있어야 질문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논자(論者)는 경에 의거하여 장을 세우는가?
[답] 모든 논(論)이 지어진 것은 모두가 경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경의 온갖 비슷하지 않은 뜻을 여기서 해석하면서 세워 잡온(雜蘊)으로 하고, 나아가 견(見)의 뜻을 세우면서 견온(見蘊)으로 한 것이며, 그리고 낱낱의 온에서는 온갖 뜻을 다 갖추었다.
또 계경의 뜻은 한량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마치 외전(外典)에서는 글은 많지만 뜻이 적거나 혹은 전혀 뜻이 없는 그런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마치 라마연나서(邏摩衍拏書)3)에는 1만 2천의 게송이 있지만
3) 라마연나서는 라마(羅摩) 왕자의 사적을 골자로 하여 지어진 인도 최고의 서사시(敍事詩)이다. 이제 그 대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교살라국에 십륜왕이 있었고 그 왕은 세 사람의 비(妃)를 맞아들여 네 왕자를 낳았다. 첫째 왕비의 맏아들 라마는 자나카왕의 딸 사다(私多)에게 장가들었다. 이때에 셋째 왕비는 그의 아들 바라다를 태자로 책립하기 위하여 라마를 14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했다. 라마는 남쪽으로 가서 판차바티에 복거(卜居)하
고 있었는데 그 때에 귀왕(鬼王) 라벌나의 누이동생 수루파나카는 라마에게 연심(戀心)을 품고 그를 가까이 하려 했으나 라마가 들어주지 않자 귀녀(鬼女)는 앙갚음하기 위해 그의 아내 사다에게 엄습했으므로 라마의 아우가 귀녀의 귀와 코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귀왕은 몹시 화를 내어 라마가 없는 틈을 타서 사다를 탈취하여 도망갔으므로 라마는 그를 찾아 능가산(楞伽山)까지 가서 귀왕을 죽이고 사다를 구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크게 덕화를 폈다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사다를 중심으로 한 쟁탈 관계를 기술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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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가지 일만을 밝힌 것과 같은 것이니 첫째는 라벌나(邏伐拏)가 사다(私多)를 폭력으로 데려간 것을 밝히고, 둘째는 라마(邏摩)가 사다(私多)를 데리고 돌아온 것을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은 그렇지 않아서 글이거나 뜻이거나 한량없고[無量] 끝이 없다[無邊]. 한량없다는 것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요, 끝이 없다는 것은 글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큰 바다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한량없다는 것은 깊어서요 끝이 없다는 것은 넓어서이다.
또 계경은 어려운 질문[問難]에도 당해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마치 외전은 어려운 질문이면 당해내지 못하는 것과 같지 않다. 만일 어려운 질문이 있을 때는 갈수록 뜻이 없는 것[無義]을 더하게 되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매질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만일 매질을 하면 곧 똥을 질금거린다.
부처님의 경전은 그렇지 아니하여 어려운 질문에도 당해내며 만일 어려운 질문을 할 때에는 청정한 계율의 색[戒色]과 선근의 묘한 감촉[妙觸]을 내는 것이 마치 바라니사(波羅泥斯)에서 나오는 겹옷은 치고 때려도 견뎌내며 만일 치고 때릴 때에는 산뜻한 빛깔과 뛰어나고 묘한 감촉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또 계경은 펴서 열면 미묘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세 가지 일에는 덮게 되면 미묘하되 펴서 열면 미묘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첫째는 어리석은 사람이요, 둘째는 여인이며, 셋째는 외도의 서론(書論)이다. 다시 세 가지 일에는 펴서 열면 미묘하되 덮게 되면 미묘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첫째는 지혜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해와 달이며, 셋째는 불법의 경론(經論)이다.
또 계경은 사택(思擇)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외전의 사택할 수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사택하는 때에는 유정의 혜안(慧眼)으로 하여금 손상되고 감퇴하게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햇빛을 살펴 볼 때에 눈이 부시는 것과 같지만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아서 사택해 낼 수 있고, 만일 사택하는 때에는 혜안이 더하여 늘게 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달을 살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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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눈이 늘어서 다 자라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장(章)을 세우고 그 뒤에 문(門)을 짓는가?
[답] 집을 짓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집을 지으려 하면 먼저 터[基址]를 고루고 그 뒤에야 얽어 짜서 짓는 것[結構]처럼 이와 같이 존자는 법의 집을 지으려 터를 닦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얽어 짜서 짓는 법처럼 뒤에 문을 지은 것이다.
또 나무를 심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나무를 심으려면 먼저 그 땅을 다스리고 그런 뒤에 심게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존자는 법의 나무를 심으려고 땅을 다스리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심는 법처럼 뒤에 문을 짓는다.
또 꽃다발을 만드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꽃다발을 만들려면 먼저 실을 꼬고 그런 뒤에 꽃을 꿰는 것처럼 이와 같이 존자는 법의 꽃다발을 만들려고 실을 꼬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꽃을 꿰는 법처럼 뒤에 문을 짓는다.
또 그림에 색칠하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에 색칠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모형을 만들고 그 뒤에 여러 색깔을 칠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존자는 법의 형상을 그리려고 모형을 만드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색칠을 하는 법처럼 뒤에 문을 지은 것이다.
또 파서 새기는[刻鏤] 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파서 새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몸통을 만들고 그 뒤에 팔다리를 새기는 것처럼 이와 같이 존자는 법의 형상을 새기려고 몸통을 만드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팔다리를 새기는 법처럼 뒤에 문을 지은 것이다.
또 관행(觀行)하는 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유가사(瑜伽師)는 먼저 대종(大種)과 만들어진 물질[所造色]을 세우고 그 뒤에 극미(極微)와 찰나(刹那)로써 분석하는 것처럼 존자도 그러하여 대종과 만들어진 물질을 세우는 것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극미와 찰나로써 분석하는 것처럼 뒤에 문을 짓는다.
또 부처님의 설법과 같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의 설법은 먼저 표방(標榜)하고 그 뒤에 해석하는 것과 같다. 먼저 표방한다는 말은 “6계(界)와 6촉처(觸處)와 18의근행(意近行)과 4의처(依處)를 유정(有情)이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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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뒤에 다시 해석한다는 말은 “이와 같은 것을 6계라 하고 나아가 이와 같은 것을 4의처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니 존자도 그러하여 먼저 표방하는 법처럼 먼저 장을 세우고 뒤에 해석하는 법처럼 문을 세운다.
또 두 가지 선교(善巧)한 법을 내기 위해서이다. 먼저 장을 세우는 것은 뜻[義]에 대한 선교를 나타내며 뒤에 문을 짓는 것은 글[文]에 대한 선교를 나타낸다.
뜻의 선교와 글의 선교처럼 뜻의 힘[義力]과 글의 힘[文力], 의무애해(義無礙解)와 법무애해(法無礙解), 의무애해의 구경(究竟)과 법무애해의 구경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이미 지견(智見)에 착란(錯亂)이 없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지견에 착란이 있으면 그 짓는 논(論)도 착란하여 온(蘊)과 납식(納息)과 장문(章門)을 세울 수 없겠지만 만일 그 지견에 착란이 없으면 그 짓는 논도 착란하지 않아서 온과 납식과 장문을 잘 세울 것이니 존자는 이미 지견에 착란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먼저 장을 세우고 그런 뒤에 문을 짓는다.
[문] 무엇 때문에 장을 세우면서 먼저 3결(結)에 의거하고 뒤에 나아가 98수면(隨眠)에 의거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가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논을 짓는 이는 자기의 의욕에 따라 이 논을 짓는 것이니 법상(法相)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온갖 모두가 의심을 내어서이다. 만일 먼저 3불선근(不善根)을 말하거나 혹은 먼저 98수면을 말하게 되면 또한 모두가 ‘무슨 연유로 장을 세워서 먼저 그것에 의거할까?’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말한 것이 법상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먼저거나 뒤거나 다 같이 허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아비달마는 상(相)으로써 구해야 하고 그 선후의 차례를 책망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혹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도 조그마한 인연에 따라 그 차례를 해석할 수 있겠으나 아비달마의 뜻과 이치는 깊고 광대하여 만일 다시 이런 것을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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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번거로워지고 받아 지니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가운데서는 점차로 더하는[漸增] 법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먼저 3을 말하고 다음에는 4, 그 다음에는 5, 나아가 최후에는 98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또 번뇌의 나무가 점차 크고 자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니 먼저 3결을 말하고 나아가 뒤에 98수면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그것을 끊고 점차로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3결을 끊고 초과(初果)를 증득하기 때문에 먼저 말하고 3불선근과 욕루(欲漏)를 모두 끊고서 제2과(果)를 얻으며 곧 그것을 모조리 끊고서 제3과를 얻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말하고 나머지 2루(漏)를 끊고서 제4과를 얻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뒤에 말한다.
폭류(瀑流)와 액(扼)과 취(取)와 신계(身繫)와 개(蓋) 등은 따로 끊어서 증득하는 것은 없으되 모두 거듭 3루(漏)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3결을 말하고 나아가 맨 나중에 98수면을 말한다”라고 한다.
[論] 3결이 있으니 유신견의 결[有身見結]과 계금취의 결[戒禁取結]과 의의 결[疑結]이다.
[문] 이 3결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스물한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유신견의 결은 삼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고, 계금취의 결은 삼계의 견고ㆍ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여섯 가지 일이 있으며, 의의 결은 삼계의 견고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열두 가지 일이 있다. 이 스물한 가지의 일은 3결의 자성이요 아물(我物)이며, 상분(相分)이요 자체(自體)이며, 본성(本性)이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결(結)이라 하는가? 결이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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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얽어맨다[繫縛]는 뜻이 결의 뜻이요, 괴로움에 합한다[合苦]는 뜻이 결의 뜻이며, 독이 섞였다[雜毒]는 뜻이 결의 뜻이다.
여기에서 얽어맨다는 뜻이 결이라 함은 맺는다는 것[結]은 곧 잡아매는 것[繫]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하면 계경에서 다음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집대장(執大臧) 존자가 사리자 존자에게로 가서 물었다.
‘대덕이여, 눈이 빛깔을 얽어맵니까? 빛깔이 눈을 얽어맵니까?’
나아가 뜻[意]과 법(法)에 대한 물음에서도 그러했다. 사리자가 말씀하였다.
‘눈이 빛깔을 얽어매는 것도 아니고 빛깔이 눈을 얽어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욕탐(欲貪)을 능히 맺는 것[能結]이라 하며, 나아가 뜻과 법에서도 그와 같습니다. 마치 검은 소와 흰 소가 같은 하나의 가슴걸이[靷]에 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검은 소가 흰 소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흰 소가 검은 소를 얽어매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검은 소가 흰 소를 얽어매지도 않고 흰 소가 검은 소를 얽어매지도 않았으며 여기에 가슴걸이
가 있어서 능히 얽어매는 것[能繫]입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를 말미암아 맺는다는 것이 곧 잡아맨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괴로움에 합한다는 뜻이 결이라는 뜻이다 함은 욕계의 결은 욕계의 유정으로 하여금 욕계의 고통이 합해져서 즐거운 것이 아니게 하고 색계의 결은 색계의 유정으로 하여금 색계의 고통이 합해져서 즐거운 것이 아니게 하며, 무색계의 결은 무색계의 유정으로 하여금 무색계의 고통과 합해져서 즐거운 것이 아니게 한다.
독이 섞였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 함은 승묘한 생[勝妙生]4)과 유루의 정[有漏定]은 마치 무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등과 같이 번뇌가 섞였기 때문에 성자는 싫증내어 여의는 것이 마치 독이 섞인 밥과 같아서 비록 다시 맛있고 묘하다 하더라도 지혜 있는 이는 그것을 멀리
4) 승묘한 생이 비록 뛰어나다 하더라도 태어나는 것[生]인 한 윤회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며, 또 유루의 정은 비록 청정한 등지(等至)이어서 조그마한 청정은 있다고 해도 번뇌가 섞여 있기 때문에 마땅히 싫어하고 여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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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세존께서 “3결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預流果)를 증득하고 떨어지지 않는 법[不墮法]을 얻어서 반드시 보리(菩提)에 나아가 아무리 많더라도 일곱 번만 천상에 태어나고 일곱 번만 인간에 태어나서 왔다 갔다 하고는 고의 맨 끝[苦邊際]5)을 짓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아비달마 같은 데서는 88수면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하고 『지유경(池喩經)』에서는 한량없는 고통이 끊어지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3결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하는가?
[답]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할 대상인 중생들을 위하여 그 밖의 다른 것을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 세존은 교화할 유정들의 의요(意樂)와 수면(隨眠)을 관찰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말씀하신 것이다. 의요라는 것은 선근을 말하고, 수면이라는 것은 번뇌를 말한다. 이와 같은 의요와 수면을 관찰하면서 법요를 간략하게 설명하여 그의 번뇌를 끊게 하되 설명한 것이 분량에 맞아서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하니 적게 설명하면 그 번뇌를 끊을 수가 없고, 많이 설명하면 그것에서 헛되이 버려지게 된다. 비유하면 용한 의사가 병든 이의 병과 병의
원인을 관찰하여 처방과 약을 주되 주는 것의 분량이 알맞아서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것과 같으니 적으면 그 병의 고통을 낫게 할 수 없고, 많으면 그것에서는 헛되이 버려지게 된다.
또 설명한 법요에는 간략한 것[略]이 있고, 자세한 것[廣]이 있다. 간략하다는 것은 3결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요, 자세하다는 것은 88수면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하고 한량없는 고통을 끊으면 예류과를 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처럼 모든 분별하지 않는 설명[不分別說]과 분별하는 설명[分別說]과 통틀어서 하는 설명[總說]과 따로따로
5) 고의 맨 끝이라 함은 오직 이 생(生)에 한해서만이 고통을 받고 미래에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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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설명[別說]과 차이가 없는 설명[無異說]과 차이가 있는 설명[有異說]과 두루하지 않은 설명[不遍說]과 두루한 설명[遍說]과 단번의 설명[頓說]과 점차의 설명[漸說] 등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이근자(利根者)를 위하여는 3결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하고, 둔근자(鈍根者)를 위하여는 88수면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하고, 한량없는 고통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한다.
이근자와 둔근자를 위하여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의 힘[因力]과 연의 힘[緣力]ㆍ안의 힘[內力]과 밖의 힘[外力]ㆍ자신이 사유하는 힘[自思惟力]과 남이 설법하는 힘[他說法力]ㆍ지혜를 여는 이[開智者]와 지혜를 설명하는 이[說智者]를 위하여 말하는 것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교화할 겁약(怯弱)한 유정을 유도하기 위하여 쉬운 행[易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마치 손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것이니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이면 행할 것이 많을 것을 두려워하므로 그를 유인하여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에서도 적은 것만을 말한다.
여기에서 불률씨자(佛栗氏子)가 많은 것에서도 적은 것만을 듣고서 곧 받들어 행했다는 비유를 말하겠다.
불률씨자라는 비구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불법에 출가한 이다. 이 때에 이미 허물을 제지시키는 250의 학처(學處)가 있었다. 보름날 밤에 『별해탈계경(別解脫戒經)』을 말씀하실 때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모든 선남자로 계(戒)를 배우기 좋아하는 이는 이렇게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곧 겁약한 마음을 내면서 ‘누가 이렇게 많은 학처를 완전히 받들어 행한다는 말인가?’라고 하고 곧 부처님께로 나아가 두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세
존께 아뢰었다.
“저는 이제 이렇게 많은 학처를 수호할 수 없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본래 세속의 업을 닦게 하여 주소서.”
세존께서는 가엾이 여기면서 부드러운 말로써 나무라시고 다시 권하고 달래며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불률씨자야. 너는 3학처(學處)를 닦고 배울 수 있겠느
냐?”
3학처는 증상계학(增上戒學)과 증상심학(增上心學)과 증상혜학(增上慧學)을 말한다. 그는 수효가 적은 것을 듣고 기뻐 뛰며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그런 학처는 닦고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배울 때에는 벌써 온갖 학처를 배우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만일 88수면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한량없는 고통을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시면 교화할 대상인 유정은 마음에 겁약을 내면서 ‘그 누가 이 88종의 큰 번뇌의 나무를 뽑을 수 있고 그 누가 이 88종의 큰 번뇌의 강을 건널 수 있으며, 그 누가 이 88종의 큰 번뇌의 바다를 말릴 수 있고 그 누가 이 88종 큰 번뇌의 산을 부술 수 있으며, 그 누가 이 88종의 번뇌의 대치(對治)를 닦
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세존께서 “3결을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말미암아 그는 수효가 적은 것을 듣고 기뻐 뛰며 이내 부지런히 3결의 대치를 닦고 배우는 것이다. 3결을 끊을 때에 모든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 모두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니 동일한 대치이기 때문이다.
또 세존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더 뛰어난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니 견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번뇌 중에서 3결이 가장 뛰어나다. 이 때문에 묘음 존자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번뇌 중에서 3결이 가장 뛰어나며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이것에 속하는 것이니 마치 견해[見]로 인하여 탐(貪)ㆍ진(瞋)ㆍ만(慢) 등을 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세존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우두머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3결은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번뇌에서 우두머리이니 마치 용감하고 씩씩한 장수가 언제나 군사들 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이 3결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견도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생장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뛰어난 공덕과 뛰어난 원적(怨敵)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뛰어난 공덕이란 예류과를 말하고 뛰어난 원적이란 이 3결을 말한다.
또 부처님은 이것에 대하여 세 가지 삼마지(三摩地)의 가까운 장애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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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障法]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유신견은 공(空)의 가까운 장애요, 계금취는 무원(無願)의 가까운 장애이며, 의는 무상(無相)의 가까운 장애이다.
또 이와 같은 3결은 견도에 가까우면서 자주자주 현행(現行)하기 때문이다. 마치 잡온(雜蘊)에서 “인(忍)과 작의(作意)를 지니면 견(見)과 의(疑)가 현행하지 않으며 설령 현행한다 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번뇌가 미세하고 각혜(覺慧)가 하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견이란 유신견과 계금취를 말하고 의란 의심이다.
또 이 3결은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렵고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므로 이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유신견의 결은 62견취(見趣)의 근본이고 모든 견취는 그 밖의 다른 번뇌의 근본이며, 그 밖의 다른 번뇌는 업(業)의 근본이고 모든 업은 곧 이숙과(異熟果)의 근본이며 이숙과에 의하여 온갖 선ㆍ불선ㆍ무기의 법은 모두가 생장하게 된다.
계금취의 결은 갖가지의 뜻이 없는[無疑] 고행(苦行)을 일으키며 의의 결은 유정으로 하여금 전제(前際)를 의심하고 후제(後際)를 의심하고 전후제(前後際)를 의심하게 하면서 속으로는 ‘이것이 무슨 물건일까? 어떤 것이 이 물건일까? 누가 현재에 있고 누가 장차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유정은 어디서부터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망설이게 한다.
또 이와 같은 3결은 이미 끊었고[斷] 이미 두루 알았는데도[遍知] 아라한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서로 유사하게 전개된다. 유신견의 결은 고류지인(苦類智忍)일 때에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는데도 아라한에서도 여전히 서로 비슷하게 전개되어 “나의 발우다, 나의 옷이다, 나와 같이 머무르는 이다, 나의 제자이다. 나의 방사다, 나의 살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무아(無我) 가운데서 유아(有我)를 말하는 것이다.
계금취의 결은 도류지인(道類智忍)일 때에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는데도 아라한에서도 여전히 서로 비슷하게 전개된다. 마치 손발을 씻고 아련야에 머무르며 다만 3의(衣)만을 쌓아 두고 항상 걸식을 하며 나아가 구족하게 12두타(杜多)의 공덕을 받아 지니는 것으로 청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로마상기가(路摩尙祇迦) 존자는 비록 아라한이면서도 날마다 목욕해 청정하게 될 수 있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종류는 지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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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결은 도류지인일 때에 이미 끊었고 이미 두루 알았는데도 아라한에서도 여전히 서로 비슷하게 전개된다. 아라한이 먼 데 서 있는 물건을 보고서 ‘말뚝인가, 사람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라고 망설이기도 하고 만일 두 갈래의 길을 보고서 역시 ‘이것이 바른 길인가, 바른 길이 아닌가?’라고 의혹을 품기도 하며 3의와 발우를 보고서 역시 ‘이것이 나의 소유인가, 다른 이의 소유인가?’라고 망설이는 것 등의 이와 같은 온갖 것이다.
또 모든 유가사(瑜伽師)는 3결을 끊는 것을 그 우두머리로 삼으니 통틀어 온갖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의 모든 택멸(擇滅)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유가사는 3결을 끊는 것을 그 우두머리로 삼으니 통틀어 온갖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의 모든 택멸을 깨닫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3결은 순하분(順下分)이어서 삼계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 탐욕ㆍ진에가 비록 순하분일지라도 삼계에 통하지 않으며 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만(慢)ㆍ무명(無明) 등은 비록 삼계에 통한다 할지라도 순하분은 아니기 때문에 끊는다[斷]는 말은 하지 않는다.
또 7수면(隨眠) 중에서 모든 예류과가 이미 영원히 끊은 것을 이 가운데서 말하기 때문이다. 예류과는 7수면 중에서 이미 두 가지는 영원히 끊었으니 견(見)과 의(疑)이다. 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 지[自地]와 다른 지[他地]를 반연하는 것의 차별이니 그 가운데서는 각각 우두머리 하나만을 말한다.
또 9결(結) 중에서 모든 예류과가 이미 영원히 끊은 것을 이 가운데서 말하기 때문이다. 예류과는 9결 가운데서 이미 3결은 끊었으니 견(見)과 취(取)와 의(疑)이다. 이 때문에 묘음 존자는 “이 경은 3결을 영원히 끊고서 예류과를 증득한 것을 말해야 하니 견과 취와 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10수면(隨眠) 중에서 모든 예류과가 이미 영원히 끊은 것을 이 가운데서 말하기 때문이다. 10수면이란 5견(見)과 의ㆍ탐ㆍ에ㆍ만ㆍ치이다. 예류는 10수면 가운데서 이미 여섯 가지를 영원히 끊었으니 5견과 의이다.
여기에서 오직 3결을 영원히 끊는 것만을 말하고 여섯 가지를 말하지 않은 것은 다만 전(轉)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중에서 유신견은 전이요 변집견은 수전(隨轉)이며, 계금취는 전이요 견취는 수전이며, 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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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요 사견은 수전이다. 이미 전을 말했으므로 수전도 말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다만 3결을 영원히 끊은 것만을 말한다.
또 이 경은 요약하여 문(門)ㆍ사다리[梯]ㆍ층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번뇌 중에서는 오직 1부(部)에만 통하는 것이 있고 2부에만 통하는 것이 있으며 4부에 다 통하는 것이 있다. 만일 유신견을 말하면 통틀어 1부의 것만을 말한 줄 알아야 하고, 만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2부의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하며, 다시 따로 2부의 수면에 통하는 것이 없다 해도 계금취가 2부에 통한다고 하면 혹은 다시 그것의 상응(相應)과
구유(俱有)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의(疑)를 말하면 통틀어 4부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자기 세계[自界]의 변행(遍行)이 있고 다른 세계[他界]의 변행이 있다. 만일 유신견을 말하면 통틀어 자기 세계의 변행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계금취와 의를 말하면 통틀어 다른 세계의 변행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자기 세계의 변행에는 1결만을 말하고 다른 세계의 변행에는 2결을 말하는가?
[답] 다른 세계의 변행은 유루의 연[有漏緣]과 무루의 연[無漏緣]에 다 통하기 때문이다. 만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유루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말하면 통틀어 무루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세계의 변행과 다른 세계의 변행처럼 모든 자기 지[自地]의 변행과 다른 지[他地]의 변행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은 유루의 연과 무루의 연이 있다. 만일 유신견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유루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말하면 통틀어 무루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가지는 유루의 연의 결이라 말하고 무루의 연의 결은 다만 하나라고만 말하는가?
[답] 유루의 연의 결에는 자기 세계와 자기 지[自界自地]의 연이 있고 다른 세계와 다른 지[他界他地]의 연이 있다. 만일 유신견을 말하면 통틀어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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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자기 지의 연의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다른 세계와 다른 지의 연의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유루의 연과 무루의 연처럼 모든 유쟁의 연[有諍緣]6)ㆍ무쟁의 연[無諍緣]과 세간의 연[世間緣]ㆍ출세간의 연[出世間緣]과 유애미의 연[有愛味緣]ㆍ무애미의 연[無愛味緣]과 탐기의의 연[耽嗜依緣]ㆍ출리의의 연[出離依緣]과 타계의 연[墮界緣]ㆍ불타계의 연[不墮界緣]과 순결의 연[順結緣]ㆍ불순결의 연[不順結緣]과 순취의 연[順取緣]ㆍ불순취의 연[不順取緣]과 순전의 연[順纏緣]ㆍ불순전의 연[不順纏緣]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
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유위의 연[有爲緣]과 무위의 연[無爲緣]이 있다. 만일 유신견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유위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말하면 통틀어 무위의 연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유위연의 결에 두 가지를 말하는 까닭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유위의 연과 무위의 연처럼 모든 상연(常緣)ㆍ무상연(無常緣)과 항연(恒緣)ㆍ비항연(非恒緣)과 유변역연(有變易緣)ㆍ무변역연(無變易緣)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견해의 성품[見性]이 있고 견해가 아닌 성품[非見性]이 있다. 만일 유신견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견해의 성품의 결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말하면 통틀어 견해가 아닌 성품의 결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 견해의 성품의 결에 두 가지를 말하는 까닭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견해의 성품과 견해가 아닌 성품처럼 모든 보는 성품[視性]ㆍ보는 것이 아닌 성품[非視性]과 추구하는 성품[推求性]ㆍ추구하는 것이 아닌 성품[非推求性]과 찾기를 좋아하는 성품[樂尋覓性]ㆍ찾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非樂尋覓性]과 회전하기 좋아하는 성품[樂廻轉性]ㆍ회전하기 좋아하지 않는
6) 유쟁의 연의 유쟁(有諍)이란 유루(有漏)의 별명이므로 유루의 연과 동일한 뜻이며, 무쟁의 연은 무루의 연[無漏緣]과 같은 뜻이다. 이하에 갖가지 다른 이름으로 연이어 쓰고 있으나 이것도 모두 대체로 유루의 연과 무루의 연의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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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非樂廻轉性]과 굳게 집착하는 성품[堅執性]ㆍ굳게 집착하지 않는 성품[不堅執性]과 자주 경계를 취하는 성품[數取境性]ㆍ자주 경계를 취하지 않는 성품[不數取境性]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불선(不善)이 있고 무기(無記)도 있다. 만일 계금취와 의를 말하면 통틀어 모든 불선의 결을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유신견을 말하면 통틀어 모든 무기의 결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불선의 결에 두 가지를 말하는 까닭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불선과 무기처럼 이숙이 있는 것[有異熟]ㆍ이숙이 없는 것[無異熟]과 두 가지 과[二果]를 받는 것ㆍ한 가지 과[一果]를 받는 것과 무참(無慚) 무괴(無愧)와 상응하는 것ㆍ무참 무괴와 상응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에는 기뻐하는 행상[歡行相]으로 전개되는 것이 있고 근심하는 행상[慼行相]으로 전개되는 것이 있다. 만일 유신견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의를 말하면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에 두 가지를 말하는 까닭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이와 같은 3결은 세 가지 청정한 온[三淨蘊]을 장애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한쪽만 말한다. 유신견은 정계온(淨戒蘊)을 장애하는데 어떤 이는 “정정온(淨定蘊)을 장애한다”라고 말한다. 계금취는 정정온을 장애하는데 어떤 이는 “정계온을 장애한다”라고 말한다. 의는 정혜온(淨慧蘊)을 장애한다.
3정온을 장애하는 것처럼 3학(學)7)과 3수(修)와 3청정(淸淨)을 장애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이와 같은 3결은 8지성도(支聖道)를 장애하므로 이 때문에 여기에 치
7) 3학은 계(戒)ㆍ정(定)ㆍ혜(慧)를 말하고, 3수는 수계(修戒)ㆍ수정(修定)ㆍ수혜(修慧)이니 모든 착한 계율과 착한 선정과 착한 지혜에 친근히 하면서 끊임없이 힘써 닦는 것을 말하며, 3청정은 몸ㆍ말ㆍ뜻의 세 가지가 청정하다는 것이어서 세 가지의 묘행[三妙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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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쳐 말한다. 유신견은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을 장애하는데 어떤 이는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을 장애한다”라고 말한다. 계금취는 정념과 정정을 장애하는데 어떤 이는 “정어와 정업과 정명을 장애한다”라고 말한다. 의는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와 정정진(正精進)을 장애한다.
또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예류과는 3결을 영원히 끊는다고 말한다. 세간에서는 ‘이미 성자(聖者)가 된 이도 오히려 유아(有我)를 집착하고 오히려 길흉(吉凶)에 집착하여 오히려 의혹을 품는다’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이 세 가지를 영원히 끊으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셨다. 예류과는 첫 성자의 과위[初聖果]이기 때문이다.
[문] 처음에 도를 얻기[得道] 때문에 예류라 하는가, 처음에 과를 얻기[得果] 때문에 예류라 하는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하면 두 가지에는 다 같이 허물이 있다.
만일 처음에 도를 얻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면 제8의 성자도 예류라 해야 한다. 제8의 성자라 함은 수신행(隨信行)ㆍ수법행(隨法行)을 말하는 것이어서 뛰어난 데서부터 헤아려 이것이 여덟 번째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맨 처음에 무루의 도를 얻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에 과를 얻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면 갑절[倍] 욕염(欲染)8)을 여의고 그리고 온전히[全] 욕염을 여읜 이가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가 도류지(道類智)의 지위에 이른 이도 예류라고 해야 한다. 그때에는 4성과(聖果) 중에서 맨 처음에 과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처음에 도를 얻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제8의 성자도 마땅히 예류라 해야 하는가?
[답] 만일 처음에 도를 얻고 도를 반연하는 지혜[緣道智]를 갖추어야 비로소 예류라 한다. 제8의 성자는 비록 처음에 도를 얻는다 해도 아직 도를 반연하는 지혜를 갖추어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예류라 하지 않는다.
또 만일 처음 도를 얻으면 도류지를 얻을 때의 수도(修道)의 과도(果道)
8) 갑절 욕염을 여읜다는 것은 욕계 수혹(修惑)의 6품(品)을 끊은 것이요 온전히 욕염을 여읜다는 것은 9품을 온전히 다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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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포섭된 도이면 예류라 하겠지만 제8은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 도를 얻고 세 가지 연[三緣]을 갖추면 예류라 한다. 첫째는 버린 뒤에 도를 얻고, 둘째는 아직 얻지 못했던 도를 얻으며, 셋째는 결(結)이 끊어진 한 맛[一味]의 득(得)을 얻는 것이다. 버린 뒤에 도를 얻는다고 함은 견도(見道)를 버리는 것을 말하고, 아직 얻지 못했던 도를 얻는다고 함은 수도를 얻는 것을 말하며, 결이 끊어진 한 맛의 득을 얻는다고 함은 삼계의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이 한 맛으로 끊어진 득을 얻는 것을 말한다
. 제8은 그렇지가 않다.
또 처음에 도를 얻고 다섯 가지 연[五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예류라 한다. 첫째는 버린 뒤에 도를 얻고, 둘째는 아직 얻지 못했던 도를 얻으며, 셋째는 결이 끊어진 한 맛의 득을 얻고, 넷째는 단번에 8지(智)를 얻으며, 다섯째는 일시에 16행상을 닦는 것이다. 제8은 그렇지가 않다.
또 처음에 도를 얻고 나서 온갖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과 일이 없는[無事] 번뇌9)와 인(忍)에서 끊어야 할 혹(惑)10)과 견해[見]의 삿된 성품11)을 끊어야 비로소 예류라 하지만 제8은 그렇지가 않다.
또 처음에 도를 얻으면서 상(相)이 있고 시설(施設)이 있으며 함께 담론(談論)할 수 있는 이라야 비로소 예류라 하지만 제8은 그렇지가 않다.
또 처음에 도를 얻어 죽고 날 수 있는 이라야 비로소 예류라 하지만 제8은 그렇지가 않다.
어느 다른 논사는 “처음에 과를 얻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고 말한다.
[문] 갑절 욕염을 여의고 온전히 욕염을 여읜 이로서 정성이생에 들어가 도류지의 지위에 이른 이면 예류라고 해야 하는가?
9) 일이 없는 번뇌라 함은 소연이 되는 일[所緣事], 즉 대상이 없는 번뇌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뒤바뀐[顚倒] 번뇌를 가리키며 그 자체는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견취(見取)의 세 가지의 견해에 따르기 때문에 온갖 뒤바뀐 번뇌의 소멸은 도류지(道類智)의 지위이다.
10) 인에서 끊어야 할 혹이라 함은 88사(使)의 견혹(見惑)이어서 이것은 인(忍)에서 끊게 되기 때문이다.
11) 견해의 삿된 성품이란 사견(邪見)인데 이를 더 자세히 말하면 뒤바뀐 망견(妄見)이기 때문에 4제(諦)에 다 통하는 혹(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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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만일 처음에 과를 얻어서 곧 점차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면 이에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고 처음의 해탈을 증득하고 처음의 득도(得度)이면서 초과(初果)에 머무르면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먼저 아직 세속의 도[世俗道]12)로써 갑절 욕염을 여의거나 온전히 욕염을 여의지 못하고 과를 얻으면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먼저 아직 세속의 도로써 욕계의 법의 6품단(品斷)이거나 9품단을 증득하지 않고 과를 얻으면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이것이 4과(果) 중의 맨 처음의 과이면 이에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이것이 4향(向)ㆍ4과(果) 중에서 최초의 과이면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이것이 4쌍(雙)ㆍ8척(隻)의 보특가라 중의 맨 처음의 과이면 예류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다.
또 만일 처음에 과를 얻으면서 지(地)와 도(道)가 다 같이 정해지면 예류라 한다. 일래과(一來果)는 지(地)가 비록 정해졌다 해도 도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니 유루ㆍ무루의 도를 다 같이 얻게 되기 때문이요, 불환과(不還果)는 지와 도가 다 같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니 6지(地)에 의하여 유루ㆍ무루의 도를 모두 얻게 되기 때문이며, 아라한과의 도는 비록 정해졌다 해도 지는 정해지지 않은 것이니 9지에 의하여 얻게 되기 때문이지만 예류과의 지와 도는
다 같이 정해져서 오직 미지정(未至定)의 무루의 도에 의해서만 얻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처음에 도를 얻기 때문에 예류라 하거나 처음에 과를 얻기
12) 세속의 도라 함은 유루의 6행관(行觀)을 말하는데 하지(下地)를 반연해서는 추(麤)ㆍ고(苦)ㆍ장(障)이라고 관하고, 상지(上地)를 반연해서는 정(靜)ㆍ묘(妙)ㆍ리(離)라고 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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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예류라 하지 않고 예류과를 성취하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 보특가라의 이름이 붙어지는 것이 마치 소유(酥油)의 병(甁)이나 약수(藥水) 등과도 같기 때문이다.
[문] 무슨 뜻 때문에 예류라 하는가?
[답] 유(流)는 성도(聖道)를 말하고 예(預)는 든다[入]는 것을 말하니 그는 성도에 들어가기 때문에 예류라 한다.
[문] 일래와 불환과 아라한도 성도에 들어가므로 예류라 해야 한다.
[답] 만일 이런 뜻에 의한다면 역시 그것을 막지는 않겠으나 예류의 과는 처음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받는 것이요, 그 밖의 나머지는 따로 덕(德)에 의거하여 다시 다른 이름을 붙인다.
[문] 일래와 불환과 아라한도 떨어지지 않는 법[不墮法]을 얻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예류과만이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는다고 하는가?
[답] 그 밖의 나머지에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 경에 그 밖의 다른 말씀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과에는 각각 뛰어난[勝] 뜻과 드러나는[顯] 뜻이 있다. 예류과는 떨어지지 않는 법이 뛰어나고 떨어지지 않는 법이 드러나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래과는 일래(一來)의 법이 뛰어나고 일래의 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래라고 하는 것이니 오직 한번 갔다 왔다[一往來] 하기 때문이요, 불환과는 불환(不還)의 법이 뛰어나고 불환의 법이 드러나기 때문에 불환이라고 하는 것이니 욕계에 돌아오지 않기[不還] 때문이며, 아라한의 과는 무생(無生)의 법이 뛰어나고 무생의 법이 드러나기 때문에 무생이라고 하는 것이니 후생 몸[後有]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류를 유독 떨어지지 않는다[不墮]고 말
하는 것이다.
[문] 이생(易生)도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는 이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이생을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이생은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
는 이도 얻지 못한 이도 있지만 모든 예류는 결정코 떨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한쪽만을 말한다.
결정코라 함은 정성정취(正性定趣)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모든 예류자는 결정코 반열반(般涅槃)하기 때문에 결정코라고 하는 것이니 연(緣)은 이미 변하기 때문이다. 마치 굽지 않은 질그릇을 3층의 누각 위에서 땅에다 던질 적에 아직 땅에 닿기 전에는 비록 아직 깨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반드시 깨질 것이기 때문에 또한 깨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
보리에 나아간다고 함은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를 보리(菩提)라 하며 그가 보리에 대하여 바라고[願樂] 인가(忍可)하며 공경 존중하고 좋아하며 수순하면서 향해 나아가 다다르는 것을 나아간다고[趣] 한다.
극칠반유(極七返有)라 함은 아무리 많더라도 일곱 번의 유[七有]만을 받는다는 말이다.
[문] 14유(有)거나 28유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오직 본유(本有)에 의해서만 말한다면 14유라고 말해야 하니 천상과 인간 세계에 각각 일곱 번씩의 본유가 있기 때문이며, 만일 본유와 중유(中有)에 의하여 말한다면 28유라고 해야 하니 천상과 인간에서 각각 일곱 번의 본유와 일곱 번의 중유의 14씩이 있기 때문인데 무엇 때문에 다만 아무리 많더라도 7유만이라고 말하는가?
[답] 마치 칠엽수(七葉樹)는 일곱 잎[七]을 지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에 아무리 많더라도 7유라고 말하는 것이니 천상과 인간에서 본유와 중유에 각각 일곱 번의 유(有)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경에서 “부처님께서 법륜(法輪)을 굴리시어 4제(諦)에 3전(轉) 12행상(行相)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오직 3전 12행상만이 아니요 12전 48행상이라고 해야 하니 4제에서 각각 3전 12행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낱낱의 진리는 각각 3전 12행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른 경에서는 “7처선(處善)13)과 3의관(義觀)이 있으면 빨리 성법(聖法)
13) 7처선이라 함은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ㆍ애미(愛味)ㆍ과환(過患)ㆍ출리(出離)의 일곱 가지 관점에서 5온(蘊)을 관하는 것을 말하고, 3의관이라 함은 온(蘊)ㆍ처(處)ㆍ계(界)를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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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비나야(毘奈耶) 가운데서 모든 번뇌를 다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7처선만이 있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고 거기서는 35처선이나 무량처선(無量處善)이 있다고 말씀하셔야 하는데도 칠(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5온(蘊)에서나 그 밖의 법의 하나하나에서는 각각 7처선이 있기 때문이니 이것도 그와 같다.
또 그 밖의 경에서는 “비구여, 나는 이제 두 가지 법을 말하려 하니 두 가지란 눈과 빛깔과 나아가 뜻과 법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서는 두 가지라 말씀하시지 않으셔야 하고, 열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셔야 하는데도 두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이라고 하신 것이니 이것도 그와 같다.
[문] 어째서 예류는 7유만을 지나면서 유전(流轉)하며 왕래(往來)하는 것이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가?
[답] 협(脅) 존자(尊者)는 “더하거나 덜하거나 역시 모두 의심을 낼 것이니 7유만을 받는다 해도 법상(法相)에는 어긋나지 않으므로 힐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 이숙인(異熟忍)은 다만 그 만큼의 이숙과(異熟果)를 받는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그 업의 힘[業力] 때문에 7유를 받는 것이요 성도의 힘[聖道力] 때문에 제8에 이르지 않는 것은 마치 칠보(七步) 독사(毒蛇)에게 물린 것과 같은 것이니 대종(大種)의 힘 때문에 일곱 걸음을 갈 수 있으되 독의 세력 때문에 여덟 번째는 걷지 못한다.
또 만일 8유(有)를 받는다면 그는 제8의 생(生)에는 성도가 없어야 하니 성도는 법이 으레 그러하여 욕계 제8의 몸에는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제8의 생에서 만일 성도가 없다면 마땅히 진리를 보고 나서도 도로 진리를 보지 못해야 되고 성과(聖果)를 얻고 나서도 도로 성과를 얻지 못해야 되며 현관(現觀)에 든 뒤에도 도로 현관하지 못해야 되고 성자(聖者)가 된 뒤에도 도로 이생이 되어야 하니 이런 허물이 있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오
직 7유일 뿐이다.
또 만일 8유를 받는다면 3세(世)의 항하 모래 수보다 더한 응정등각(應正等覺)의 법과 비나야를 초월하면서도 여래께는 안의 권속[內眷屬]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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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마치 7족(族)을 지나면 친(親)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증상인(增上忍)일 때에는 이미 욕계의 인간과 천상의 7생(生)과 색계ㆍ무색계에서의 따로의 일생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생에서는 비택멸(非擇滅)을 얻는 것이니 만일 법에 이미 비택멸을 얻었다면 반드시 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7유일 뿐이다.
또 그는 욕계의 위아래의 일곱 군데서 생을 받는다[受生]는 뜻이 있다. 일곱 군데[七處]는 인간과 6욕천(欲天)을 말하며 그 안의 인간ㆍ천상 사이에서 갔다 왔다 하기 때문에 7유를 받는다.
또 욕계 9품(品)의 번뇌의 세력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는 7유를 받는다.
또 그는 7유에서 7각지(覺支)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기 때문에 오직 7유만을 받는다.
또 그는 7유에서 7의정(依定)14)과 7종의 성도15)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기 때문에 오직 7유만을 받는다.
또 그는 7유에서 7수면(隨眠)에 대한 대치의 도[對治道]를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기 때문에 오직 7유만을 받으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것이니 일곱 번 천상에 태어나고 일곱 번 인간에 태어난다는 것은 원만한 예류에 의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ㆍ천상의 유(有)등으로 일곱 번의 생[七生]을 받으면서도 예류로서 인간과 천상의 생에는 차별이 있다. 혹은 천상에서는 일곱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여섯 번이기도 하고, 혹은 인간에서는 일곱 번이면서 천상에서는 여섯 번이기도 하며, 혹은 천상에서는 여섯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다섯 번이기도 하고, 혹은 인간에서는 여섯 번이면서도 천상에서는 다섯 번이기도 하고, 혹은 천상에서는 다섯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네 번이기도 하며, 혹은 인간에서는 다섯 번
이면서도 천상에서는 네 번이기도 하고, 혹은 천상에서
14) 7의정이라 함은 4근본(根本)과 3무색(無色)을 말한다.
15) 7종의 성도라 함은 첫째 4념주(念住)요, 둘째는 4정단(正斷)이며, 셋째는 4신족(神足)이요, 넷째는 5근(根)이며, 다섯째는 5력(力)이요, 여섯째는 7각지(覺支)이며, 일곱째는 18성도(聖道)이니 이른바 37보리분법(菩提分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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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네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세 번이기도 하며, 혹은 인간에서는 네 번이면서도 천상에서는 세 번이기도 하고, 혹은 천상에서는 세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두 번이기도 하며, 혹은 인간에서는 세 번이면서도 천상에서는 두 번이기도 하고, 혹은 천상에서는 두 번이면서도 인간에서는 한 번이기도 하며, 혹은 인간에서는 두 번이면서도 천상에서는 한 번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우선 “생이 아무리 많더라도”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예류는 인간과 천상에서
각각 일곱 번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원만하게 되는 예류는 어느 곳에서 일곱 번을 다 채우는 것인가? 천상에 있어서인가? 인간에 있으면서 제7유를 받고 반열반에 드는 것인가?
[답] 이 가운데서 어떤 이는 “만일 이 생[此生]에 의하여 예류과를 얻으면 이 생이 7유의 수효에 든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만일 인간에서 과를 얻으면 천상에서 7유를 채우고 반열반하며 만일 천상에서 과를 얻으면 인간에서 7유를 채우고 반열반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생(生)에 의하여 예류과를 얻으면 이 생은 7유의 수에 든다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만일 인간에서 과를 얻으면 도로 인간에서 7유를 채워 반열반하고 만일 천상에서 과를 얻으면 도로 천상에서 7유를 채워 반열반한다”라고 말한다.
[評] 이 가운데서 처음의 설명은 도리가 아닌 줄 알아야 한다. 과를 얻은 생(生) 안의 유(有)는 완전히 이생에 속하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예류는 오직 27유를 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예류자는 28유를 유전하고 왕래하면서 고(苦)의 맨 끝[邊際]을 짓는다”고 말한 까닭에 처음에 과를 얻은 생은 7유의 수에 든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문] 7유를 받는 이는 앞의 6생(生) 중에서 성도(聖道)가 일어나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일어나야 한다면 반열반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역시 일어나나 업력(業力)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반열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7유가 다 찼는데도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면 그는 집에 있으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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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어떤 이는 “되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출가하여 그 밖의 법복(法服)을 받아야 아라한이 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는 집에 있으면서 아라한이 되고나서 그 뒤에 반드시 출가하여 그 밖의 법복을 받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如是論者]도 있다.
“그는 법이 으레 그러하여 부처님 제자의 형상을 이루어야 극과(極果)를 얻는다. 마치 5백 선인(仙人)들이 이사가(伊師迦) 산중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는 본시 그들은 성문(聲聞)으로서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 나온 것인데 원숭이가 그들을 위하여 부처님 제자의 형상을 나타내었으므로 그들은 모두가 그것을 배우고 독각(獨覺)의 과를 증득한 것과 같다. 무학(無學)은 외도의 형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流轉)하면서 왕래(往來)한다고 함은 천상의 수명이 다하면 인간에 태어나고 인간의 수명이 다하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니 마치 부귀(富貴)한 이가 숲과 동산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니는 것과 같다. 유(流)는 중유(中有)를 말하고 전(轉)은 본유(本有)를 말한다.
고의 변제[苦邊際]를 짓는다고 함은 괴로움의 맨 끝을 증득한다는 뜻이다.
[문] 이 고의 맨 끝은 괴로운[苦] 것의 안에 있는 것인가, 괴로운 것의 바깥에 있는 것인가? 만일 괴로운 것 안에 있다 한다면 맨 끝[邊際]이 아니어야 하고, 만일 괴로운 것의 바깥에 있다면 세간에서의 현실의 비유[現喩]를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마치 세간의 금 산가지[金籌]는 처음이나 중간이나 뒷날에도 금이 아님이 없듯이 괴로움의 맨 끝도 괴로움이어야 한다.
[답] 어떤 이는 “괴로움의 맨 끝은 괴로운 것 안에 있는 것이니 곧 아라한의 최후의 모든 온(蘊)의 몸은 비록 괴로운 것이라도 뒤에는 괴로움의 인(因)이 아니고 뒤의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며 뒤의 괴로움이 계속되지 않으므로 괴로움의 맨 끝이라 한다”고 말한다.
어느 다른 논사는 “괴로움의 맨 끝이란 괴로운 것의 바깥에 있는 것이니 곧 그것은 열반이어서 영원히 괴로운데서 벗어나기 때문에 괴로움의 맨 끝이라 한다. 세간에서 현실의 비유는 반드시 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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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臧)에 속한 것이 아니어서 해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법과 성자의 법은 도리[理]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7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2) 불선납식 ②
[論] 3불선근(不善根)이 있다. 탐(貪)의 불선근과 진(瞋)의 불선근과 치(癡)의 불선근이다.1)
[문] 이 3불선근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열다섯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탐과 진의 불선근은 각각 욕계의 5부(部)에서 열 가지의 일을 삼고 치의 불선근은 욕계의 4부(部)와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일부분에서 다섯 가지의 일을 삼는 것이니 욕계계의 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치는 완전히 불선(不善)이므로 불선근을 세운다.
견고에서 끊어야 할 치에는 열 가지가 있다. 곧 5견(見)과 의(疑)와 탐(貪)ㆍ진(瞋)ㆍ만(慢)과 함께하는 무명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열 번째가 된다. 그 중에서 여덟 가지는 불선이기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고 신견(身見)
1) 전권(前卷)에서는 3결(結)을 설명했고, 여기부터는 3불선근을 밝히려는 문단이다. 이 3불선근은 온갖 번뇌의 근본 원인임과 동시에 또한 그로 하여금 끊어 다하게 하지 못하게도 한다. 내용은 첫째 불선근의 자성(自性)이요, 둘째 의의(意義)이요, 셋째 세 가지에 한정하는 까닭이요, 넷째 불선근의 다섯 가지 조건[五條件]이요, 다섯째 사견을 불선근으로 하지 않는 이유이요, 여섯째 불선근의 다섯 가지 조건과 불선(不善)의 5온과의 관계이요, 일
곱째 특히 탐ㆍ진ㆍ치를 불선근으로 세운 까닭이요, 여덟째 10악업도(惡業道)와 10악처(惡處)와 불선근과의 관계 등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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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변견(邊見)의 두 견해와 상응하는 무명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불선근이 아니다.
[문] 근(根)은 인(因)이라는 뜻이다. 신견ㆍ변견의 두 견해와 상응하는 무명은 이미 온갖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의 인이거늘 무엇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 않는가?
[답] 만일 법의 체(體)는 불선이면 온갖 착하지 않은 법의 인이 되는 것은 불선근으로 세우겠지만 신견ㆍ변견의 두 견해와 상응하는 무명은 비록 온갖 착하지 않은 법의 인이라 해도 체는 무기이기 때문에 불선근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3불선근은 열다섯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불선근이라 하며 불선근이란 무슨 뜻인가?
[답]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을 내고 기르고 더하고 늘리고 끌어당기고 지니고 더욱 자라게 한다는 뜻이니 이것이 불선근의 뜻이다.
세우 존자는 “모든 착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 인(因)이 되고 종자(種子)가 되며, 전(轉)이 되고 수전(隨轉)이 되며, 등기(等起)가 되고 섭익(攝益)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이 불선근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대덕은 “모든 착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 본(本)이 되고 능식(能植)이 되며, 전(轉)이 되고 수전(隨轉)이 되며, 섭익(攝益)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이 불선근의 뜻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불선의 인이라는 뜻이 불선근의 뜻이라면 전생(前生)의 불선의 5온(蘊)2)은 후생(後生)과 미래 생[未生]의 불선의 5온을 위한 인이 되고 전생의 10불선업도(不善業道)는 후생과 미래 생의 10불선업도를 위한 인이 되며, 전생의 불선의 34수면(隨眠)3)은 후생과 미래 생의 불선의 34수면을 위한 인이 된다. 이와 같은 등의 착하지 않은 법은 모두 불선근으로 세워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3불선근만 말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할 이가 마땅히 들어야 할 법을 관
2) 불선의 5온이란 선근이 끊어진 이[斷善根者]의 5온과 같은 것을 말한다.
3) 불선의 34수면이란 욕계의 36수면 중에서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의 두 견해를 제외한 34수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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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하셨기 때문이니 그 밖의 법은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은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지만 그 밖의 다른 이는 알지 못한다. 만일 법으로써 불선근으로 세워야 할 것이면 세우신 것이니 힐책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대사(大師)께서는 이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는 모든 불선의 인이 되어서 세력의 작용이 치우치게 무겁고 치우치게 가깝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세워서 근(根)을 삼으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착하지 않은 법 가운데 이 세 가지는 가장 뛰어나서 이름[名]과 뜻[義]이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근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 착하지 않은 법 가운데서 이 세 가지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려우며 초월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근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 착하지 않은 법 가운데서 이 세 가지는 허물이 중하고 허물이 많으며 허물이 왕성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근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 이 세 가지는 가까이서 세 가지 선근[三種善根]4)을 장애하며 이 세 가지 선근은 으뜸가는[增上] 원수요 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워서 불선근이라 하신 것이다.
또 욕염(欲染)을 여읠 때에 이 세 가지는 극히 헤살을 부리고 장애하는 것이 마치 감옥을 지키는 옥졸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워서 불선근이라 한다.
또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은 이것으로 우두머리를 삼으니 마치 용맹스런 장수가 군사들보다 앞서 돌진하는 것과 같다. 이 세력으로 말미암아 그 밖의 모든 불선이 생장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근(根)으로 내세운다.
또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은 이 세 가지가 인(因)이 되고 뿌리가 되며, 길잡이가 되고 쌓임[集]이 되며, 연(緣)이 되고 등기(等起)가 되며, 능작(能作)이 되고 주장[主]이 되며, 근본[本]이 되기 때문에 세워서 근을 삼는다.
4) 세 가지 선근이란 순복분(順福分)과 순해탈분(順解脫分)과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세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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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란 마치 종자와 같기 때문이요 뿌리[根]란 견고하고 단단하기 때문이며, 길잡이[導]란 이끌기 때문이요 쌓임이란 내기 때문이며, 연이란 도와주기 때문이요 등기란 발생시키기 때문이요 능작이란 키우고 기르기 때문이며, 주장이란 섭수(攝受)하기 때문이요 근본이란 의지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또 이 세 가지 법은 다섯 가지 뜻[五義]을 갖추기 때문에 불선근으로 세우지만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 이 세 가지 법은 5부(部)에 통하고 6식(識)에 두루하며 수면의 성품(隨眠性)이요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며 선근을 끊을 때에 강한 가행(加行)이 된다.
5부에 통한다 함은 견고와 나아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에 다 통하는 것이니 이것은 5견(見)과 의(疑)를 가려낸 것이다. 6식에 두루한다 함은 안식(眼識)과 나아가 의식(意識)에 상응한 것이니 이것은 만(慢)을 가려낸 것이다.
이 수면의 성품이라 함은 탐의 불선근을 말하니 욕탐(欲貪) 수면의 성품이요 진의 불선근은 진에(瞋恚) 수면의 성품이며 치의 불선근은 무명(無明) 수면의 성품이니 이것은 모든 전(纏)과 번뇌의 때[煩惱垢] 등을 가려낸 것이다.
추악(麤惡)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고 함은 마치 계경에서 “탐ㆍ진ㆍ치는 온갖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낸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선근을 끊을[斷善根] 때에 강한 가행이 된다고 함은 마치 『시설론(施設論)』에서 “모든 선근을 끊는 것은 어떻게 해서 끊으며 어떠한 모양으로 끊는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이는 극히 맹렬하고 날카로운 탐ㆍ진ㆍ치의 무리이어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문] 증상(增上)의 사견(邪見)은 선근을 끊는데 무엇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 않는가?
[답] 선(善)을 끊는 가행과 정작 끊을 때에 이 세 가지는 모두가 뛰어난 것이므로 세워서 근(根)을 삼지만 사견은 오직 선을 끊을 때에만 뛰어나고 가행의 지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근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안팎의 염ㆍ정[染淨]의 일은 가행 때에는 어렵고 끝낼 때에는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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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모든 보살이 노(老)ㆍ병(病)ㆍ사(死)가 세간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처음에 위없는 정등각(正等覺)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3무수겁(無數劫) 동안 백천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아 익히는데도 장애가 됨이 없이 언제나 물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처음 보리의 마음을 내기는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이요, 뒤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일 때에 닦을 것인 미래 삼계의 착한 법은 그렇지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견은 불선근이 아니다. 또 선근을 끊을 때에 이 세 가지는 전(轉)이 되고 또한 수전(隨轉)이 되기 때문에 세워서 근으로 삼지만 사견은 전도 아니고 수전도 아니기 때문에 근으로 세우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선근을 끊을 때에 탐과 진은 다만 전이 되고 치도 수전이 될 뿐이기 때문에 세워서 근으로 삼지만 사견은 다만 수전이 될 뿐이요 전은 아니니 마지막[究竟]일 때에는 쉽기 때문에 근으로 세우지 않는다.
또 사견이 선근을 끊게 되는 까닭은 모두가 탐ㆍ진ㆍ치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인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다만 탐 등만을 세워 근으로 삼는다. 불선근이 선근을 꺾어 누르면서 세력이 없고 미약하며 쇠퇴하고 손해나게 한 뒤에야 사견은 선근을 끊게 된다.
또 먼저 “다섯 가지 뜻[五義]을 갖추면 불선근을 세운다”고 말했지만 사견은 그렇지가 않다. 오직 4부(部)일 뿐 의식과 상응하며 비록 수면의 성품이라 해도 추악한 신업ㆍ어업은 일으킬 수 없고 견도에서 끊을 마음은 신업과 어업에서 가까운 인의 등기[因等起]5)와 찰나의 등기[刹那等起]가 아니기 때문이며 선을 끊을 때에 강한 가행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사견은 불선근이 아니다.
앞의 다섯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통틀어 모든 그 밖의 불선의 5온(蘊)을 가려낸다. 불선의 색온(色蘊)에는 다섯 가지 뜻이 없고 불선의 수(受)ㆍ상(想)ㆍ식온(識蘊)과 수면이 아닌 전(纏)과 구(垢)와 상응하는 행온(行蘊)은 비록 5부에 통하고 6식에 두루하면서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 해도
5) 인의 등기라 함은 끌어 일으키는[引起] 원인을 가리키고 찰나의 등기라 함은 그 원인과 동시에 옮아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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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두 가지 뜻[二義]이 빠지며 불선의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은 비록 5부에는 통한다 해도 나머지 네 가지 뜻이 빠진다.
모든 수면 중의 5견(見)과 의(疑)는 비록 수면의 성품이라 해도 나머지 네 가지 뜻이 빠지고 만(慢)은 비록 5부에 통하고 수면의 성품이면서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 해도 나머지 두 가지 뜻이 빠진다.
10전(纏) 중의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는 비록 5부에 통하고 6식에 두루하며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 해도 나머지 두 가지 뜻이 빠지고, 수면(睡眠)은 비록 5부에 통한다 해도 나머지 네 가지 뜻이 빠지며, 분(忿)ㆍ부(覆)ㆍ악작(惡作)ㆍ질(嫉)ㆍ간(慳)은 비록 또한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 해도 나머지 네 가지 뜻이 빠진다.
첨(諂)ㆍ광(誑)ㆍ교(憍)ㆍ해(害)ㆍ한(恨)ㆍ뇌(惱)는 번뇌의 등류(等流)이기 때문에 번뇌의 구(垢)라 하며 비록 또한 추악한 신업ㆍ어업을 일으킨다 해도 나머지 네 가지 뜻이 빠지기 때문에 모두 불선으로 세우지 않는다.
또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는 업증상(業增上)의 근본이 되는 원인[集]이기 때문에 불선근을 세운다. 마치 계경에 “가라마(迦邏摩)여,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는 업의 근본 원인인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경은 증상(增上)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줄 알아야 하고, 그 밖의 나머지지는 증상이 아니기 때문에 근으로 세우지 않는다.
또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가 다하기 때문에 업도 다한다. 그러므로 세워서 근(根)을 삼는다. 마치 계경에 “탐ㆍ진ㆍ치가 다하기 때문에 모든 업도 따라서 다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경도 증상의 뜻에 의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또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는 상호교대로 서로 이끌고 상호교대로 서로 돕기 때문에 세워서 근으로 삼는다. 마치 계경에 “탐은 진을 일으키고 진은 탐을 일으키며 무명은 두 가지를 돕는 것이니 또한 탐ㆍ진으로부터 일으키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이는 세 가지 느낌[三受]에 대하여 많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隨增] 하기 때문에 불선근으로 세우지만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 마치 “낙수(樂受)에는 탐이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하고, 고수(苦受)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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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瞋)이 따라다니고 허물을 더하게 하며,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에는 치가 따라다니면서 허물을 더하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하나하나 느낌에서는 온갖 것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이와 같이 말하는가?
[답] 많은 부분[多分]을 쫓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 낙수에는 탐이 많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고, 고수에는 진이 많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며, 불고불락수에는 치가 많이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또 탐은 낙수에 의거하여 일으키며 낙수로써 근본을 삼아 많은 악행(惡行)을 짓고 많은 고통의 과보[苦果]를 이끄는 것이요, 진은 고수에 의거하여 일어나며 고수로써 근본을 삼아 많은 악행을 짓고 많은 고통의 과보를 이끄는 것이며, 치는 불고불락수에 의거하여 일어나며 불고불락수로써 근본을 삼아 많은 악행을 짓고 많은 고통의 과보를 이끄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세 가지는 부처님께서 “이것은 위순(違順)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불선근을 세우지만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 계경에서 “모든 유정들은 위순의 힘으로 말미암아 싸움을 많이 일으킨다. 마치 모든 하늘들과 아수라[阿素洛]가 위순의 힘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싸움을 일으킨 것과 같고 또한 라마(邏摩)와 라벌나(邏伐拏) 등이 사다(私多) 등 때문에 모든 싸움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유정을 살해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위순의 힘으로 말미암아서인 줄 알아야 한다. 위(違)는 진을 말하고 탐을 순(順)한다고 한다.
[문]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치(癡)는 말하지 않는가?
[답] 치는 곧 이 두 부분 가운데 속해 있으므로 이미 위순을 말했으므로 이미 치를 말한 것이 된다. 만일 모든 유정이 어리석지 않은 이면 천상의 묘한 경계[妙境]를 위해서도 오히려 악(惡)을 짓지 않거늘 하물며 인간과 악취의 경계를 위하여 싸움을 일으켜 모든 악업을 짓고 이로 인하여 유전하면서 끝없는 고통을 받겠는가?
또 간략히 번뇌의 사다리ㆍ층계ㆍ문을 나타내기 위하여 “불선근은 오직 세 가지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3품(品)에 포섭되니 탐품(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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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과 진품(瞋品)과 치품(癡品)의 세 가지이다. 마치 계경6)에서 “부처님께서 범지(梵志)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유정이 스물한 가지 번뇌에 마음이 더렵혀진 이면 비록 스스로가 진실하고 청정한 법이 있어서 필경정(畢竟淨)을 얻었다고 고집해도 악취에 떨어져 하천한 몸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덕 법구(法救)는 그 경 가운데 모든 번뇌를 포섭하여 모두 3품(品)에 넣는다. 탐ㆍ진ㆍ치의 3품이니 차별하여 그 하나를 말하면 그 품의 일체(一切)를 말하는 것이 된다.
탐품ㆍ진품ㆍ치품처럼 친품(親品)ㆍ원품(怨品)ㆍ중품(中品)과 유은품(有恩品)ㆍ유원품(有怨品)ㆍ무이품(無二品)과 적의품(適意品)ㆍ부적의품(不適意品)ㆍ비이품(非二品)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3불선근으로 말미암아 10악업도(惡業道)를 일으켜 10악처(惡處)에 떨어지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어떻게 3불선근이 10악업도를 일으키는가? 마치 계경에서 “살생(殺生)에는 세 가지가 있다. 탐ㆍ진ㆍ치로 내는 것이니 나아가 사견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시설론(施設論)』에도 “3불선근은 10악업도가 생장하는 원인이요 근본이다”라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것을 말미암아 10악처에 떨어지는가? 마치 계경에서 “살생의 업도(業道)는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중생으로 하여금 지옥ㆍ방생ㆍ귀계에 떨어지게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사견도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시설론』에도 “살생의 업도를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제일 무거운 살생은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지며, 그보다 조금 가벼운 살생은 대염열(大炎熱)지옥에 떨어지고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염열
(炎熱)지옥에 떨어지며,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대호규
6) 이 계경은 『중아함(中阿含)』 제23권에 「수정범지경(水淨梵志經)」을 말하며 21의 번뇌라 함은 사견(邪見)ㆍ비법욕(非法欲)ㆍ악탐(惡貪)ㆍ사법(邪法)ㆍ탐(貪)ㆍ에(恚)ㆍ수면(睡眠)ㆍ조회(調悔)ㆍ의혹(疑惑)ㆍ진전(瞋纏)ㆍ불어결(不語結)ㆍ간(慳)ㆍ질(嫉)ㆍ기광(欺誑)ㆍ유첨(諛諂)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만(慢)ㆍ대만(大慢)ㆍ만오(慢傲)ㆍ방일(放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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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號叫)지옥에 떨어지고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호규(號叫)지옥에 떨어지며,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중합(衆合)지옥에 떨어지고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흑승(黑繩)지옥에 떨어지며,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등활(等活)지옥에 떨어지고 그보다 조금 더 가벼운 살생은 방생취(傍生趣)에 떨어지며, 가장 가볍고 하열한 살생은 아귀취(餓鬼趣)에 떨어진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사견에서도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또 만일 세존께서 안의 때[內垢]라고 말씀하신 것이면 불선근을 세웠으나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아니하다. 마치 계경에서 “안의 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ㆍ진ㆍ치이다. 안의 때처럼 안의 원수[內怨]와 안의 혐오자[內嫌]와 안의 도둑[內賊]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만일 세존께서 더하거나 덜함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면 불선근을 세웠으나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아니하다. 마치 계경에서 “어떤 것이 탐이 더하고 진이 더하며 치가 더하는 것이냐? 어떤 것이 탐이 덜하고 진이 덜하며 치가 덜하는 것이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그 밖의 다른 번뇌에서는 더하거나 덜함은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세우지도 않고 불선근으로 삼지도 않는다.
또 뛰어나게 물러나는[退] 인연을 말씀하신 것이면 불선근을 세웠으나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아니하다. 마치 “비구ㆍ비구니 등이 만일 스스로가 탐ㆍ진ㆍ치가 더하는 것을 살펴본 이면 스스로가 모든 착한 법에서 물러나는 것인 줄 분명히 알지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만일 부처님께서 번뇌장(煩惱障)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면 불선근을 세웠으나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가 않다. 마치 “어떤 것을 번뇌장이라 하는가? 어느 한 사람이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가 자주자주 현행하고 뛰어나게 맹렬한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만일 세존께서 그것을 진(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면 불선근을 세웠으나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가 않다. 마치 계경에서 “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ㆍ진ㆍ치이다. 진(塵)에서 말한 것처럼 근재(根栽)와 더러운 찌끼[垢穢]와 뜨거운 고뇌[熱惱]와 독화살[毒箭]과 불[火]과 가시나무[刺]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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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刀]과 독(毒)과 종기[癰]와 병(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때문에 3불선근을 세우는 것이다.
[문] 3불선근은 어떻게 나타나고 일어나는가?
[답] 만일 마음에 탐을 일으키면 진은 일어나지 않고 만일 마음에 진을 일으키면 탐은 일어나지 않되 이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나면 결정코 치가 있다. 왜냐하면 탐ㆍ진의 행상(行相)은 서로서로 어긋나지만 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니 탐의 행상은 기뻐하는 것이요 진의 행상은 근심하는 것인데 무명의 행상은 다 같이 서로 어기지 않는다.
또 탐이 일어나고 나타날 때에는 몸으로 하여금 더하여 늘게 하는 것이니 몸을 거두어 지니기 때문이요, 진이 나타나 일어날 때에는 몸으로 하여금 해치며 줄게 하는 것이니 몸을 헐어 깨뜨리기 때문이며, 치는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다 같이 어기지 않는다.
또 탐이 일어나면 몸으로 하여금 부드럽고 알맞게 하여 소연(所緣)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니 만일 앞의 경계를 좋아하면 밤낮으로 살펴보며 만족해함이 없기 때문이요, 진이 일어나면 몸으로 하여금 껄끄럽고 억세게 하여 소연을 미워하고 등지는 것이니 만일 앞의 경계를 미워하면 나아가 눈을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며, 치는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다 같이 어기지 않는다.
3불선근은 모두 5부(部)에 통하고 6식(識)에 두루하다. 왜냐하면 만일 불선근을 견도에서만 끊어야 할 것이면 수도에서 끊어야 할 불선(不善)은 근(根)이 없으면서 생겨야 하고, 만일 불선근을 수도에서만 끊어야 할 것이면 견도에서 끊어야 할 불선은 근이 없이 생겨야 하기 때문에 불선근은 반드시 5부에 통한다.
만일 불선근이 의지(意地)에만 있다면 5식(識) 중의 불선은 근이 없이 생겨야 하고, 만일 불선근이 5식에만 있다면 의지의 불선은 근이 없이 생겨야 하기 때문에 불선근은 반드시 6식에 다 두루하다.
만일 탐이 모든 불선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면 두 가지 근[二根]을 말미암아 근이 있다[有根]고 하는 것이니 탐과 그것에 상응하는 무명이다. 만일 진이 모든 불선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면 두 가지 근으로 말미암아 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진과 그것에 상응하는 무명이다. 그 밖의 혹(惑)이 모든 불선의 마음과 함께 일어나면 한 가지 근[一根]으로 말미암아 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오직 무명만이다.
[문] 여러 곳에서 근(根)을 말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유신견(有身見)을 근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세존(世尊)을 근이라 말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욕망[欲]을 근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방일하지 않은 것[不放逸]을 근이라 말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자성(自性)을 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모든 근의 이름과 뜻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유신견을 근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견해의 갈래[見趣]에 의거한 것이니 나[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기 때문에 62견해의 갈래가 생장하게 된다.
세존을 근이라고 말한 것은 말씀하신 법[所說法]에 의거한 것이니 오직 부처님만이 잡염(雜染)과 청정(淸淨)과 계박(繫縛)과 해탈(解脫)과 유전(流轉)과 환멸(還滅) 등의 모든 미묘한 법문을 말씀하실 수 있다.
욕망을 근이라고 말한 것은 착한 법을 쌓는 데에 의거한 것이니 반드시 욕망이 있어야 모든 선(善)을 쌓을 수 있게 된다.
방일하지 않은 것을 근이라고 한 것은 착한 법을 수호하는 데에 의거한 것이니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선을 수호할 수 있다. 모든 방일한 이는 비록 착한 법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물러나 파괴하게 된다.
자성을 근이라고 한 것은 자체(自體)를 버리지 않는 데에 의거한 것이니 온갖 법은 자성으로 근본을 삼아 자체를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위의 법[無爲法]도 근이 있다고 해야 한다.
[답] 만일 이런 뜻에 의거하여 모든 무위의 법에도 근이 있다고 해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떤 곳에서는 자성을 근이라 한 것은 동류인(同類因)에 의거한 것이니 동류인은 후생(後生)과 미래 생[未生]에서의 자성의 종류의 법을 위해여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 고법지인(苦法智忍)과 함께 일어나는 법은 근이 없다[無根]고 해야 한다.
[답] 이것에는 비록 동류인이 없다 해도 다른 것의 동류인이 되지만 모든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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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법은 그와 같지가 않다.
어떤 이는 “고법지인과 함께 일어나는 법에는 비록 동류인이 없다 해도 상응인(相應因)과 구유인(俱有因)이 있기 때문에 근이 없는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評] “여기서는 자체를 자성이라 하나 인(因)을 자성이라 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論] 3루(漏)가 있다.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문] 이 3루는 무엇으로 자성을 삼는가?
[답] 백여덟 가지의 일로 자성을 삼는다. 욕루는 욕계의 마흔한 가지 일로 자성을 삼는 것이니, 곧 탐(貪)에서의 다섯 가지와 진(瞋)에서의 다섯 가지와 만(慢)에서의 다섯 가지와 견(見)에서의 열두 가지와 의(疑)에서의 네 가지와 전(纏)에서의 열 가지이다.
유루는 색계와 무색계의 쉰 두 가지 일로 자성을 삼는다. 곧 탐에서의 열 가지와 만에서 열 가지와 견에서 스물네 가지와 의에서 여덟 가지이다.
무명루는 삼계(三界)의 열다섯 가지 일로 자성을 삼는다. 곧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각각 5부(部)의 무명(無明)이다. 이로 말미암아 3루는 백여덟 가지의 일로 자성을 삼는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는 “어떤 것이 욕루인가? 욕계의 무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결(結)과 박(縛)과 수면(隨眠)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이니 이것을 욕루라 한다. 어떤 것이 유루인가? 색계ㆍ무색계의 무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결과 박과 수면과 수번뇌와 전이니 이것을 유루라 한다. 어떤 것이 무명루인가? 삼계의 무지(無知)니 이것을 무명루라 한다”라고 말하였다.
[評] 이 말은 도리에 맞는다. 만일 “삼계를 반연하는 무지를 무명이라 한다”라고 말한다면 무루연(無漏緣)의 무명을 포섭하지 못한다.
[문] 몸[身]과 말[語]의 악행(惡行)은 수번뇌(隨煩惱)인가, 수번뇌가 아닌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수번뇌이면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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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는가? 만일 수번뇌가 아니라면 『식신족론(識身足論)』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서 “몸과 말의 악행은 불선(不善)이나 결도 아니고 박도 아니고 수면도 아니다. 이것은 수번뇌이나 전도 아니다. 마땅히 버려야 하고 마땅히 내던져야 하며, 마땅히 끊어야 하고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하니 뒤에 오는 괴로움의 이숙(異熟)을 낸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어떤 이는 “몸과 말의 악행은 수번뇌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법이 수번뇌요 또한 전(纏)이라면 여기에서 말했겠지만 몸과 말의 악행은 비록 수번뇌라 해도 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몸과 말의 악행은 수번뇌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문] 『식신족론』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식신족론』에서는 “몸과 말의 악행은 불선이나 결도 아니고 박도 아니며 수면도 아니고 수번뇌도 아니며 전도 아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어야 하는데도 그 논에서 “이것은 수번뇌다”라고 말한 것은 몸과 말의 악행은 수번뇌에서 시달리기 때문에 역시 수번뇌라고 한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결(結)에 얽매이고 나아가 전(纏)에 얽혀 있으므로 또한 결이라 해야 하고 나아가 전이라고도 해야 한다.
[답] 도리로 보아서는 그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거기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논은 들은 것[聞]이 다르고 설명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설명이 다르기 때문에 뜻에서는 이해하기 쉽다.
또 그 논에서는 두 개의 문[二門]ㆍ두 개의 길[二路]ㆍ두 개의 섬돌[二階]ㆍ두 개의 층계[二蹬]ㆍ두 개의 횃불[二矩]ㆍ두 개의 광명[二明]ㆍ두 개의 무늬[二文]ㆍ두 개의 그림자[二影]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이 문 등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뜻이 모두 통한다. 마치 그 자성은 결(結) 등이 아니기 때문에 결 등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또한 수번뇌의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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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번뇌가 아니라고 해야 하며, 마치 그것이 수번뇌에서 시달리기 때문에 수번뇌라고 하는 것처럼 또한 결에 얽매이고 나아가 전에 얽히기 때문에 결이라 하고 나아가 전이라고 해야 한다. 거기서는 다만 두 개의 문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각각 하나의 설[一說]만을 드러내면서도 두 가지 뜻에 모두 통한다. 이 때문에 3루는 백여덟 가지의 일로 그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누(漏)라고 하며 누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머무른다[留住]는 뜻이요 담아 놓는다[淹貯]는 뜻이며, 갈라져 흐른다[流派]는 뜻이요 금하여 지닌다[禁持]는 뜻이며, 홀린다[魅惑]는 뜻이요 취하여 어지럽다[醉亂]는 뜻이니 이러한 것이 누의 뜻이다.
머무른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오직 유정으로 하여금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모든 누이다.
담아 놓는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마치 습기가 있는 그릇 안에다 종자를 담아 두면 싹이 생기는 것처럼 유정으로 하여금 번뇌의 그릇 안에 업의 종자를 담아두면 후유(後有)가 생기는 것과 같다.
갈라져 흐른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마치 샘에서 물이 나오고 유방에서 젖이 나오는 것처럼 유정은 6처(處)의 문으로부터 여러 새는 것[漏]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금하여 지닌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마치 사람이 다른 이에게 금제되고 잡혀있기 때문에 뜻대로 사방으로 놀러 갈 수 없는 것처럼 유정도 모든 번뇌에 얽매이고 묶여 있기 때문에 모든 세계와 모든 갈래와 모든 생(生)을 돌면서 자유자재로 열반의 경계에 나아갈 수가 없다.
홀린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마치 사람이 귀신에 홀려서 말하지 않아야 할 것도 말하고 하지 않아야 할 행위도 하며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도 생각하는 것처럼, 유정도 모든 번뇌에 홀린 까닭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을 일으키게 되는 것과 같다.
취하여 어지럽다는 뜻이 누의 뜻이라 함은 마치 사람이 많은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 등으로 만든 술을 마시면 취하여 어지러워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며 참도 없고[無慚] 괴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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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愧] 뒤바뀌고 방일하는 것처럼, 유정도 번뇌라는 술을 마시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며 참도 없고 괴도 없고 뒤바뀌고 방일하게 됨과 같다.
성론자(聲論者)는 “아살랍박(阿薩臘縛)7)의 살랍박(薩臘縛)은 흐른다[流]는 뜻이요 아(阿)는 분제(分齊)라는 뜻이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아파타리(阿波吒利)8)에 내리고 혹은 재물과 음식을 아전다라(阿旃茶羅)9)에 베푼다’고 하는 것처럼, 아(阿)라는 말은 ‘여기서 저기까지’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와 같아서 번뇌는 유정이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누(漏)
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 만일 머무른다[留住]는 뜻이 누의 뜻이라면 모든 업에도 머무른다는 공능(功能)이 있다. 마치 계경에서 “두 가지 인(因)과 두 가지 연(緣)은 모든 유정을 오래도록 생사(生死)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번뇌와 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번뇌와 업은 종자가 되기 때문에 생사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려우며 없애기도 어렵다. 어떤 사람이 8세 혹은 10세 때에 번뇌를 끊고 다하여 아라한이 되었는데도 다만 업의 힘만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생사에 머무르면서 혹은 90세요 백 세까지도 사는 이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오직 번뇌만을 누라 하면서 업은 말하지 않는가?
[답] 말해야 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업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어떤 업은 모든 유정을 오래도록 생사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업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생사를 다스리게 하기도 하나 번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독 누라고 한다.
또 업은 번뇌로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반드시 번뇌를 끊지 않고서 모든 업을 버리는 일은 없기 때문에 오직 번뇌만을 누라고 한다.
또 업은 번뇌의 세력을 이끌어오기 때문에 번뇌만을 누라고 말하지만 업은 그렇지 않으니 번뇌는 다했으면서도 살아있는 이는 역시 번뇌의 남은 세
7) 범어 āsrava의 음역어이다. 한역으로는 누(漏)라고 한다.
8) 파타리(Pāṭalā, 나무의 일종)까지라는 뜻이다.
9) 전다라까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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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때문이다. 마치 진흙덩이를 벽에다 던지면 비록 말라 있다 해도 떨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축축할 때의 남은 세력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번뇌가 다하기 때문에 반열반하는 것이요 업이 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업은 누가 아니다. 모든 아라한은 업이 쌓인 것이 마치 산과 같은데 뒤의 온(蘊)이 계속되지 않음은 반열반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욕계의 모든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한 욕루를 세우고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는 무명을 제외한 유루를 세우며 삼계의 무명을 무명루로 세우는가?
[답] 먼저 “머무른다[留住]는 뜻이 누의 뜻이다”라고 말했다. 욕계 유정이 욕계에 머무르는 까닭은 그가 욕(欲)에 대하여 바라는 마음이 있으며, 욕에 대하여 기뻐하고 좋아하며, 욕에 대하여 부러워하며 욕에 대하여 얻고자 희망하며, 욕에 대하여 생각하고 구하며, 욕에 대하여 찾아보며 욕에 대하여 즐겨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계의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하고서 욕루를 세운다.
색계ㆍ무색계의 유정이 색계ㆍ무색계에 머무르는 까닭은 그가 유(有)에 대하여 바라는 마음이 있으며, 유에 대하여 기뻐하고 좋아하며, 유에 대하여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며, 유에 대하여 얻고자 희망하며 유에 대하여 생각하고 구하며, 유에 대하여 찾으며 유에 대하여 즐겨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는 무명을 제외하고서 유루를 세운다.
삼계의 유정들이 욕(欲)과 유(有)에 바라는 마음이 있고 나아가 욕과 유에 즐겨 빠지면서 삼계에 머무르는 까닭은 모두가 무지(無知)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의 무명을 무명루로 세운다.
또 욕계의 유정은 비록 유(有)를 구한다고 해도 욕(欲)을 구하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욕계의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하고서 욕루를 세운다. 색계와 무색계의 유정은 전혀 욕은 구하지 않고 유만을 구할 뿐이다. 어떤 이는 “비록 또한 욕을 구한다고 해도 유를 구하는 것이 많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무명을 제외하고서 유루를 세운다. 삼계의 유정들이 많은 욕과 유를 구하는 까닭은 무지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의
무명을 무명루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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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일 세계에 성립이 있고 파괴가 있다면 이 세계에서 생기는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한 욕루를 세우고 만일 세계에 성립은 있고 파괴가 없다면 이 세계에 생기는 번뇌는 무명을 제외한 유루를 세우는 것이다. 세 가지 정려지[三靜慮地]에는 역시 성립이 있고 파괴가 있다 해도 제4 정려와 무색계에는 성립만이 있고 파괴는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좇아서 말하는 것이다.
만일 세계에 성립이 있고 파괴가 있거나 성립은 있으면서 파괴는 없는 것에 불구하고 유정이 머무른다면 무지의 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의 무명을 무명루로 세운다.
어떤 이는 나머지 유루를 세우는 인(因)만을 해석하면서 “이곳에 머무르면 그곳의 유(有)를 구하는 것이 있으나 그곳에 머무르면 이곳의 유를 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번뇌는 무명을 제외하고서 유루를 세운다”라고 한다.
비유론사(譬喩論師)는 다만 두 가지 누[二漏]만을 세울 뿐이니 무명루(無明漏)와 유애루(有愛漏)이다. 이제연기(二際緣起)10)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니 무명은 전제(前際) 연기의 근본이요 유(有)ㆍ애(愛)는 후제(後際) 연기의 근본이다.
[문] 그는 어떻게 경(經)의 3루를 해석하고 있는가?
[답] 그는 유ㆍ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불선(不善)이 있고 무기(無記)가 있으며, 이숙(異熟)이 있는 것이 있고 이숙이 없는 것이 있으며, 두 가지 과[二果]를 느끼는 것이 있고 한 가지 과[一果]를 느끼는 것이 있으면서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와 상응하는 것으로 욕류를 세운다. 이 애(愛)로 말미암아 욕계 밖의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하고서 또한 욕루라고 한다.
모든 무기이고 이숙이 없으며 한 가지 과를 느끼면서 무참ㆍ무괴와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루를 세우며 이 애를 말미암아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는 무명을 제외하고서 역시 유루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애(愛)로 말미암아 그 밖의 번뇌 등은 무명을 제외하고서
10) 이제연기라 함은 12인연(因緣)을 나누어 둘로 하여 무명(無明)으로부터 수(受)까지를 전제(前際)라 하고, 애(愛)로부터 노사(老死)에 이르기까지를 후제(後際)라 한다. 이 두 가지로 나눈 인연을 이제연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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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루와 유루라 하는가?
[답] 애는 끊기 어렵고 깨뜨리기 어렵고 초월하기도 어려우며 허물이 무겁고 허물이 많고 허물이 왕성하므로 계(界)가 다르고 지(地)가 다르고 부(部)가 다르게 하는 것이요, 애의 세력을 말미암아 모든 번뇌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애의 과환(過患)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로 말미암아 그 밖의 번뇌 등은 두 가지 누(漏)의 이름을 붙이게 된다.
[문] 무엇 때문에 삼계의 무명을 따로 무명루라고 세우는 것인가?
[답]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셔서 착오가 없으시다. 만일 법으로서 홀로 누(漏)를 세울 수 있는 것이면 홀로 누를 세우시고 만일 홀로 누를 세울 수 없는 것이면 함께 누를 세우셨기 때문에 책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앞에서 이미 누는 머무른다[留住]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그 밖의 번뇌가 유정을 오래도록 생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무명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홀로 누라고 세우는 것이다.
묘음 존자가 “부처님께서는 무명이 모든 유정을 오래도록 생사에 머무르게 하면서 세력이 빠르고 더욱 중하게 하고 친근하게 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홀로 누를 세우셨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무명으로 인하여 알 경계에 대하여 탐애[愛]ㆍ진에[恚]ㆍ우치[癡]가 있기 때문에 누를 홀로 세우셨다.
또 무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전제(前際)를 알지 못하고 후제(後際)를 알지 못하고 전후제(前後際)를 알지 못하게 하며, 안[內]을 알지 못하고 밖[外]을 알지 못하고 안팎을 알지 못하게 하며, 업(業)을 알지 못하고 과(果)를 알지 못하고 업과를 알지 못하게 하며, 선행을 알지 못하고 악행을 알지 못하게 하며, 인(因)을 알지 못하고 인으로부터 생기는 법을 알지 못하게 하며, 불보ㆍ법보ㆍ승보를 알지 못하게 하고 고ㆍ집ㆍ멸ㆍ도를 알
지 못하게 하며, 착한 법과 착하지 못한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며,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낫고 못한 것을 알지 못하게 하며, 희고 검은 것을 알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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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총별(總別)의 연기(緣起)와 연생(緣生)의 모든 법과 6촉처(觸處)에 대하여 진실한 지견(智見)이 없으면서 캄캄하고 어리석음이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무명을 세워서 누를 삼는다.
또 무명은 여의기 어렵고 큰 과환이 있기 때문에 홀로 누를 세운다. 탐은 비록 여의기 어렵다 해도 큰 과환은 없고 진은 비록 큰 과환은 있다 해도 여의기 어려운 것은 아니며 만(慢) 등은 두 가지가 다 같이 없기 때문에 함께 누를 세운다.
또 경에서 “무명은 모든 악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홀로 누를 세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마치 “무명을 우두머리로 하여 전상(前相)을 삼기 때문에 한량없는 종류의 나쁜 법[惡不善法]을 내며 다시 그 안에는 참(慚)도 없고 괴(愧)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무명은 자체(自體)가 더욱 중하고 그 짓는 업이 한층 중하기 때문에 홀로 누를 세운다. 자체가 더욱 중하다고 함은 온갖 번뇌와 상응하고 또한 같이하지 않은 것[不共]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짓는 업이 한층 중하다고 함은 같이[共] 온갖 번뇌와 업을 짓고 또한 혼자 업을 짓는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 밖의 다른 번뇌 등은 그렇지가 않다.
또 경에서 “무명은 악취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유독 누라고 세운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마치 게송에서의 말과 같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악취에 추락[顚墜]시키는 것은
모두 무명이 그 근본이 되고
또한 탐욕이 그 원인이 된다.
또 경에서 무명을 낭기(浪耆)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독 누라고 세운다. 마치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진실로 낭기는 무명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낭기라 하는 독벌레가 있다. 제 몸도 눈먼 소경이요 낳은 새끼도 눈이 멀었는데, 그가 만일 다른 것을 물면 그 다른 것도 눈이 멀게 된다. 무명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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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하여 자체가 이미 눈이 멀고 상응하는 법도 눈멀게 만드는 것이므로 만일 유정이 상속(相續)하는 동안에 일으키면 역시 눈이 멀어 어둡게 한다.
또 무명은 삼계에 있어서 한 세계를 반연하며 어리석음[愚]을 내니 무색계의 4온(蘊)이요, 9지(地)에 있어서 한 지[一地]를 반연하면서 어리석음을 내니 비상비비상처의 4온이며, 9품(品)에 있어서는 한 품[一品]을 반연하면서 어리석음을 내니 비상비비상처의 하하품(下下品)의 4온이다. 그러므로 유독 누라고 세운다.
[문] 그 밖의 다른 계ㆍ지[他界地]의 변행수면은 무명처럼 저마다 유독 누라고 세워야 한다.
[답] 무명은 치우치게 많기 때문에 유독 누라고 세운다. 9종의 다른 계ㆍ지ㆍ연[緣]의 변행 무명으로서 곧 사견 등 일곱 가지 상응하는 것과 두 가지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으니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의(疑)는 다만 두 가지 색만이 있지만 계취(戒取)는 오직 하나일 뿐이니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
또 무명은 모든 번뇌의 우두머리요 두루하고 변행(遍行)이기 때문에 유독 누라고 세운다.
우두머리라 함은 무명이 가리기 때문에 4성제(聖諦)에 대하여 좋아하지도 않고 인득(忍得)하지도 않으며 혼미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굶주렸던 사람이 먼저 거친 음식을 만나 탐을 내어 배불리 먹고 난 뒤에 비록 갖가지 맛있는 다른 음식을 만난다 해도 달게 여기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처럼, 유정은 무명의 거친 음식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쌓고 있어서 뒷날 4성제의 좋은 음식을 만난다 하더라도 달게 여기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곧 망설임[猶豫]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고(苦)인가, 고가 아닌가? 나아가 이것은 도(道)인가, 도가 아닌가?’라고 한다. 이와 같이 무명은 망설임을 끌어 일으킨다.
온갖 망설임은 결정(決定)을 끌어 온다. 만일 바른 설[正說]을 만나면 바른 결정을 얻어 곧 ‘고가 있고 나아가 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만일 삿된 학설을 만나면 삿된 결정을 얻어 곧 ‘고가 없고 나아가 도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와 같이 망설임은 사견(邪見)을 끌어 일으킨다.
그는 ‘만일 네 가지 진리가 없다면 결정코 내[我]가 있고 아소(我所)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사견은 신견(身見)을 끌어 일으킨다.
또 ‘이 나와 아소는 소멸하는 것[斷]인가, 항상한 것[常]인가?’라고 생각한다. 만일 집착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게 상속하는 것을 보면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이니 곧 이것이 상견(常見)이며, 만일 집착하는 것이 변하여 파괴되어서 상속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소멸한다고 여기는 것이니 곧 이것이 단견(斷見)이다. 이와 같이 신견은 변견(邊見)을 끌어 일으킨다.
그는 세 가지 견해[三見]에 대하여 어느 한 가지가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고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헤아리면 곧 이것이 계취(戒取)이다. 이와 같이 변견은 계취를 끌어 일으킨다.
또 ‘이와 같은 세 가지 견해는 이미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고 벗어나게 하는 것이므로 곧 가장 뛰어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곧 이것이 견취(見取)이다. 이와 같이 계취는 견취를 끌어 일으킨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좋아하면서 다른 이의 견해를 미워하고 자기와 남의 견해를 헤아리면서 만(慢)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이 무명은 수면(隨眠)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서 가장 우두머리가 된다.
수면으로 말미암아 10전(纏)을 끌어 일으킨다. 분(忿)과 질(嫉)의 전은 진(瞋)의 등류(等流)요, 부(覆)의 전은 어떤 이는 “탐(貪)의 등류이다”라고 말하고 어느 다른 논사는 “치(癡)의 등류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두 가지 등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혹은 이름과 이익을 탐하여 자기 죄를 감추기도 하고 혹은 무지(無知)를 말미암아 죄를 감추기도 하기 때문이다.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무괴(無愧)의 전은 치의 등류요, 도거(掉擧)와 간(慳)과 무참(無慚)의 전은 탐의 등류이며, 악작(惡作)의 전은 의(疑)의 등류이다.
수면은 또한 여섯 가지 번뇌의 구(垢)를 끌어온다. 해(害)와 한(恨)의 구는 진(瞋)의 등류요, 뇌(惱)의 구는 견취의 등류이며, 광(誑)과 교(憍)의 구는 탐의 등류요, 첨(諂)의 구는 5견(見)의 등류이다.
이와 같이 무명은 다시 우두머리가 되어 전(纏)과 구(垢)를 끌어 일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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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두루하다[周普]고 함은 무간(無間)지옥으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또 이생위(異生位)와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도 모두 성취하기 때문이며, 또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하여 모두 미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변행(遍行)이라 함은 무명이 한 찰나 동안에 일어나 5부(部)를 반연하고 5부의 인(因)이 되며 5부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隨增]을 변행이라 한 것이 아니요, 다만 무명이 온갖 것의 같은 종류에 두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변행이라고 할 뿐이니 변행수면과 함께 일어나면 곧 변행이라 하고 불변행(不遍行) 수면과 함께 일어나면 불변행이라 한다.
자계(自界)ㆍ타계(他界)와 자지(自地)ㆍ타지(他地)와 유루연(有漏緣)ㆍ무루연(無漏緣)과 유위연(有爲緣)ㆍ무위연(無爲緣)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설명한다. 모든 번뇌와 함께 일어나면서 화동하여 합하는[和合] 것은 마치 뭉치[團] 속의 비계와 같고 삼씨[麻] 속의 기름과 같기 때문에 변행이라 한다.
이 무명은 위의 세 가지 뜻[三義]을 갖추었기 때문에 독립시켜 누라고 한다.
계경에서 “그는 도리 아닌[非理] 작의(作意)를 일으키는 까닭에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라 하며 아직 생기지 못한 것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갑절 더 광대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그 만큼의 번뇌가 생기면 도로 그 만큼의 번뇌가 소멸하는 것이니 한 찰나 뒤에는 반드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데도 3루는 생긴 뒤에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하ㆍ중ㆍ상으로 점차 더한다는 데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까닭이다. 하품(下品)이 생긴 뒤에는 중품(中品)의 연(緣)이 되고 중품이 생긴 뒤에는 상품(上品)의 연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등무간연(等無間緣)에 의거하여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품의 번뇌가 생기고 나면 중품을 위한 등무간연이 되고, 중품의 번뇌가 생기고 나면 상품을 위한 등무간연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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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에 의거하여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품의 번뇌가 생기고 나면 중품을 위한 두 가지 인[二因]이 되고 중품의 번뇌가 생기고 나면 상품을 위한 두 가지 인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에 의거하여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품의 번뇌는 생기고 나서 중품의 과(果)를 능히 취하고 능히 주며 중품의 번뇌는 생기고 나서 상품의 과를 능히 취하고 능히 주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번뇌가 많아져서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것이 생기고 나면 다시는 도로 아직 생기지 않은 지위[未生位]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생긴 뒤에는 다시는 도로 미래 세상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자주자주 생긴다는 데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하나의 번뇌가 생긴 뒤에 다시 도리 아닌 작의를 일으켜서 대치(對治)에 의하지 않으므로 곧 제2를 내게 되고 다시 제3 나아가 백천을 내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점차로 사납고 날카로워지는 데에 의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하품의 번뇌가 생긴 뒤에 다시 도리 아닌 작의를 일으키면서 대치에 의하지 않으므로 곧 중품을 내게 되고 다시 상품을 내면서 갈수록 증가하고 왕성해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경계에 따르면서 구르는 것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하나의 빛깔[色] 등의 경계에 따라 번뇌가 생긴 뒤에 그로 말미암아 다시 도리 아닌 작의를 일으키면서 대치에 의하지 않으므로 다시 소리[聲] 등을 반연하면서 모든 번뇌를 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덕(大德)은 “하나의 유(有) 중에 전(纏)이 많이 행하는 데에 의거하는 까닭에 갑절 더 광대하게 된다고 한다. 구박자(具縛者)가 무간 지옥으로부터 유정(有頂)에 이르기까지의 번뇌는 모두가 자기 지[自地]의 번뇌와 같아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행(現行)하는 것과 현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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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이 있어서 만일 도리 아닌 작의를 일으켜 대치에 의하지 않는 것은 곧 자주자주 현행하며 만일 이치대로[如理] 작의를 일으켜 대치에 의하는 것은 곧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씀했다.
계경에서 “루(漏)에는 일곱 가지가 있어서 해치고 뜨겁게 하고 괴롭게 한다. 혹은 누는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見所斷]이 있기도 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승의(勝義)의 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류와 유루와 무명루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7루(漏)라 말하는가?
[답] 여기서는 누가 될 만한 거리[具]면 또한 누라는 말로 말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경 가운데서 그 여러 가지 거리에 대하여는 또한 그 여러 가지를 말하는 것이니 앞에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은 설법하신 뒤에도 어떤 다른 교화 받을 이들이 모임 안에 오게 되면 여래는 가엾이 여기면서 다른 문구로써 다시 7루를 말씀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처님께서 3루를 말씀하시면 근기가 예리한 이는 이미 이해하였을 것이나 근기가 둔한 이를 위하여 다시 7루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근(利根)과 둔근(鈍根)에서처럼 인의 힘[因力]과 연의 힘[緣力]과 안으로 사유하는 힘[內思惟力]과 밖으로 법을 듣는 힘[外聞法力]과 개지(開智)와 설지(說智)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망만(望滿) 존자는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두 가지 승의의 누[勝義漏]를 말씀하신 것이니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수도에서 끊을 것이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누는 제 이름[自名]으로 말씀하고 수도에서 끊어야 할 누는 대치(對治)에 의하여 말씀하셨다. 그 대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복대치(伏對治)와 단대치(斷對治)이다. 이 가운데서 앞의 다섯 가지는 복대치에 의거하고 최후의 한 가지는 단대치에 의하기 때문에 7루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하셨다.
계경에서 “정지견(正知見)이 있으니 그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때에 욕루ㆍ무명루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게 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문] 욕계의 염(染)을 여읠 때에 욕루로부터 마음은 해탈하게 되고 유정(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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頂)의 염을 여읠 때에 유루와 무명루로부터 마음은 해탈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정지견이 있으니 그가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때에 욕 등의 3루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여기서는 이미 해탈한 것에 대하여도 지금에 해탈한다는 말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가까운 것[近]에 대하여 멀다[遠]는 말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마치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라고 말한 것과 같으며, 또 그 밖의 곳에서 이미 끊은 것을 ‘끊는다’고 하고 이미 들어갔던 것을 ‘들어간다’라고 하며 이미 느꼈던 것을 ‘느낀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욕루와 유루가 다 함께 마치고 소멸된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3루는 한 맛으로 끊은 득(得)을 증득한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또 집루(集漏)11)가 끊어진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멸(滅)을 증득한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마치 “아라한의 과위를 얻을 때에 98수면의 멸을 증득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무학은 그 법을 다스리는 지혜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무학은 그 얽매임을 여의는 성품을 얻는 것에 의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또 상속(相續)이 끊어지는 것에 의거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끝없는 옛날부터 자주 욕루는 끊었으면서도 두 가지 누는 계속 일어난 것인데 이제는 두 가지 누를 끊어서 다시는 상속함이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의 연(緣)을 끊는 것에 의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끝없는 옛날부터 두 가지 누는 그것[彼]을 위하여 세 가지 연[三種緣]12)을 지었으나 이제는 두 가지 누를 끊었으므로 그 연은 영원히 끊어진 것이다.
또 염대치(厭對治)에 의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니 그는 제4과(果)를 증득할 때에 통틀어 3루를 싫어하면서 ‘나는 끝없는 옛날부터 그에게
11) 집루가 끊어진 것에 의거한다고 함은 곧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욕(欲)을 여의는 때에 3루(漏)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데 통증(通證)이라고도 한다.
12) 세 가지 연이라 함은 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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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미혹되어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해탈하게 되었구나’라고 하며 깊이 싫증을 내어 여의는 것이다.
[문] 그때에 5온(蘊)은 모두 해탈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마음만의 해탈을 말씀하셨는가?
[답] 마음은 5온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만일 뛰어난 것을 말하면 그 밖의 나머지도 이미 말하게 된 것은 마치 왕이 탈주하게 되었으면 그의 권속도 그러한 것과 같다.
또 마음으로써 우두머리를 삼는 것이라 통틀어 5온은 모두 해탈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 마음에 의지하는 까닭에 심소법(心所法)이라 하며 마음이 크기[大] 때문에 대지법(大地法)이라 한다. 그러므로 다만 마음만을 말한다.
또 타심지(他心智)를 닦은 무간도(無間道)일 때에는 다만 마음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마음에 뛰어난 모든 일은 다른 데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8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불선납식 ③
[論] 4폭류(瀑流)가 있다. 욕폭류(欲瀑流)ㆍ유폭류(有瀑流)ㆍ견폭류(見瀑流)ㆍ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1)
[문] 이 4폭류는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백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욕폭류에서는 욕계의 스물아홉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탐(貪)에서의 다섯 가지와 진(瞋)에서의 다섯 가지와 만(慢)에서의 다섯 가지와 의(疑)에서의 네 가지와 전(纏)에서의 열 가지이다.
유폭류는 색계ㆍ무색계의 스물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탐에서의 열 가지와 만에서의 열 가지와 의에서의 여덟 가지이다. 견폭류는 삼계의 서른여섯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각각 열두 가지의 견해[見]이다. 무명폭류에서는 삼계의 열다섯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각각 5부(部)의 무명이 있다. 이를 말미암아 4폭류는 백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1) 앞에서 3루(漏)를 기술하고 이어서 4폭류와 4액(軛)을 밝히는 문단이다. 4액은 4폭류와 자성(自性)을 같이하며 그 뜻만 달리할 뿐이므로 항상 4폭류와 병기(並記)하는 것이 통례이다. 주된 내용은 자성과 정의(定義)로부터 시작하여 갖가지로 그 성질들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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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폭류라 하는가? 폭류란 무슨 뜻인가?
[답] 세차게 떠내려간다[漂激]는 뜻이요 솟구쳐 오른다[騰注]는 뜻이며 추락하여 빠진다[墜溺]는 뜻이니 이것이 폭류의 뜻이다.
세차게 떠내려간다는 뜻이 폭류의 뜻이라 함은 모든 번뇌 등이 유정을 세차게 떠내려 보내면서 모든 세계[界]와 모든 갈래[趣]와 모든 생(生)의 생사에 유전하게 한다는 것이요, 솟구쳐 오른다는 뜻이 폭류의 뜻이라 함은 모든 번뇌 등이 유정을 솟구쳐 올리어 모든 세계와 모든 갈래와 모든 생의 생사에 유전하게 한다는 것이며, 추락하여 빠진다는 뜻이 폭류의 뜻이라 함은 모든 번뇌 등이 유정을 추락시켜 빠지게 하여 모든 세계와 모든 갈래와 모든 생의 생
사에 유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 만일 추락하여 빠진다는 뜻이 폭류의 뜻이라 하면 순상분결(順上分結)은 폭류가 아니어야 하니 그것은 유정으로 하여금 위에 가 나게[上生] 하기 때문이다.
[답] 순상분의 뜻은 폭류의 뜻과 다르다. 계(界)ㆍ지(地)에 의하여 순상분결을 세우는 것이니 그것은 유정으로 하여금 위의 계와 지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며 해탈도(解脫道)에 의하여 폭류를 세우는 것이니 비록 유정(有頂)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유정으로 하여금 생사에 침몰해서 해탈과 성도(聖道)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묘음 존자도 “비록 오래도록 위에나 있다 해도 폭류에 빠져 떠내려가면서 선품(善品)을 물리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좌수(左受) 존자는 “이 가운데서 왕성하고 자주자주 행하는 번뇌는 난폭하게 흐르는 물과 같기 때문에 폭류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따로 견(見)을 세워 폭류ㆍ액(軛)ㆍ취(取)라 하면서도 따로 견루(見漏)라고 세우지 않았는가?
[답] 협(脅) 존자(尊者)가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만일 법이 따로 건립할 수 있는 것이면 따로 세우시고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면 통틀어 건립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모든 견해는 방정맞아서 행상(行相)이 사납고 예리하여 머무른다[留住]는 뜻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느리고 무딘 번뇌와 한데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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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욕루와 유루를 세우지만 세차게 떠내려간다는 뜻과는 서로 수순하기 때문에 견폭류ㆍ견액ㆍ견취를 세우는 것이니 마치 하나의 수레에 두 마리의 소를 같이 끌게 할 적에 두 마리 소의 성질이 모두 조급하게 되면 수레는 반드시 파괴되지만 한 마리는 느리고 한 마리는 빠르면서 서로서로 제어(制御)하면 파괴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따로 견을 세워 견루(見漏)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견은 성품이 들썩거리어 염을 여의는 법[離染法]은 수순하면서도 머무르는 것에는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느리고 무딘 번뇌와는 한 데 합쳐 누(漏)를 세우지만 세차게 표류한다는 등의 뜻에서는 서로 수순하기 때문에 따로 폭류ㆍ액ㆍ취에서는 세우게 된다.
[문] 만일 견이 들썩거리어 염을 여의는 법에 수순한다면 폭류ㆍ액ㆍ취에서는 세우지 않아야 하니, 폭류 등은 깊이 빠지는[沈溺] 등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답] 외도(外道)가 모든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꾸짖기 위하여 따로 모든 견 등을 세워 폭류 등을 삼은 것이니, 모든 외도는 견해의 갈래[見趣]를 일으켜 삿된 경계를 추구(推求)함에 따라 곧 생사에 유전하며 다시 깊이 빠져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늙은 코끼리가 진창에 빠져서 그 몸을 움직일수록 더욱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다.
분별론자(分別論者)는 4루(漏)가 있다고 하는데 욕루ㆍ유루ㆍ견루(見漏)ㆍ무명루이다. 그가 논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문답할 필요가 없다.
[論] 4액(軛)이 있다. 욕액(欲軛)ㆍ유액(有軛)ㆍ견액(見軛)ㆍ무명액(無明軛)이다.
이 액의 자성은 폭류에서의 설명과 같지만 뜻에서는 차이가 있다. 표류하고 빠진다[漂溺]는 뜻은 폭류의 뜻이요, 화동하여 합한다[和合]는 뜻은 액의 뜻이다. 모든 유정들은 4폭류에 표류하고 빠진 뒤에는 다시 4액에 화합하여 얽매이고 막혀서 곧 생사의 무거운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다. 마치 소를 끌 적에 끌채와 멍에[轅軛]를 걸고 가슴걸이를 매어 무겁게 짐을 실어 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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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온갖 곳에서는 폭류를 말한 뒤에 곧 액을 말하는 것이니 뜻이 서로 이웃하기 때문이다.
[論] 4취(取)가 있다.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2)
[문] 이 4취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백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욕취는 욕계의 마흔네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탐(貪)에서의 다섯 가지와 진(瞋)에서의 다섯 가지와 만(慢)에서의 다섯 가지와 무명(無明)에서의 다섯 가지와 의(疑)에서의 네 가지와 전(纏)에서의 열 가지이다.
견취는 삼계의 서른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견(見)에 각각 10종씩이 있다. 계금취는 삼계 여섯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계금취에 각각 두 가지씩이 있다. 아어취는 색계와 무색계 서른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으니 곧 탐에서의 열 가지와 만에서의 열 가지와 무명에서의 열 가지와 의에서의 여덟 가지이다. 이로 말미암아 4취는 백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취(取)라고 하는가?
[답] 세 가지 일 때문에 취라고 한다. 첫째는 집착하여 가지기[執持] 때문이요, 둘째는 거두어 채취하기[收採] 때문이며, 셋째는 골라 가리기[選擇] 때문이다.
또 두 가지 일 때문에 취라고 한다. 첫째는 업(業)을 불길같이 타게[熾然] 하고, 둘째는 행상(行相)이 사납고 날카로워서다. 업을 불길같이 타게 한다
2) 취(取)는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과 함께 수면(隨眠)의 이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잇달아 논하고 있는데 4취와 4액은 그 분류법에 있어서는 다소의 상위(相違)가 있다. 곧 욕취(欲取)는 욕액(欲軛)의 29에 욕계의 다섯 가지 무명을 더한 34를 자성으로 삼고, 아어취(我語取)는 유액(有軛)의 28에 10의 무명을 합친 38을 자성으로 삼으며, 다시 견액(見軛)은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로 나눈 점이다.(我語取에 관해서는
『구사론』 제9권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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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함은 취는 다섯 갈래 유정의 업의 불로 하여금 항상 불길같이 타게 하기 때문이요, 행상이 사납고 날카롭다고 함은 모든 취의 행상은 극히 용감하고 민첩하기 때문이다.
[문] 취는 무슨 뜻인가?
[답] 땔나무[薪]라는 뜻이 취의 뜻이다. 마치 땔나무를 반연하여 불이 훨훨 타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번뇌를 반연하면 업은 불길처럼 왕성하게 된다.
또 얽어 싼다[纏裹]는 뜻이 취라는 뜻이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지어 제 몸을 얽어 스스로 싸고 나아가 그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취하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켜 제 몸을 얽어 스스로 싸고서 그 속에서 혜명(慧命)을 상실하고 차츰차츰 더 나아가 모든 악취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상하고 해친다[傷害]는 뜻이 취의 뜻이다. 마치 날카로운 독가시로 자주 그 몸을 찌르면 몸은 곧 손상하여 파괴되는 것처럼 유정도 그러하여 번뇌의 독가시로 자주 법신(法身)을 찌르면 법신은 곧 파괴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무명은 따로 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에는 세우면서도 따로 취(取)에서는 세우지 않는가?
[답]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만일 이 가운데서 세울 수 있는 것이면 따로 세우시지만 만일 그렇지 못한 것이면 통틀어 건립하셨기 때문에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앞에서 세 가지 일 때문에 취라고 한다 하였으니 집착하여 가지고, 거두어 채취하며, 골라 가린다는 것이다. 무명에는 비록 앞의 두 가지는 있다고 해도 세 번째가 없기 때문에 따로 취라고 세우지 않는다. 무명은 어리석고 어두워서 법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앞의 두 가지 일 때문에 취라고 한다 하였으니 업을 불길같이 훨훨 타게 하고 행상이 사납고 날카로워서이다. 무명은 비록 업을 불길같이 타게 한다 하더라도 행상은 맹렬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취라고 세우지 않는다. 무명은 더디고 무디면서 법을 결단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5견(見) 중에서 네 가지 견해를 합하여 견취(見取)로 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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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한 가지 견해는 따로 계금취로 세우는가?
[답]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만일 견해 가운데서 따로 세울 수 있는 것이면 따로 세우시지만 만일 그렇지 못한 것이면 통틀어 건립하셨기 때문에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앞에서 두 가지의 일 때문에 취라 한다고 하였으니 업을 불길같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과 행상이 맹렬하고 날카로운 것이다. 5취(趣)의 유정은 계금취로 말미암아 모든 업을 불길같이 훨훨 일어나게 하는 것이 나머지 네 가지 견해와 동등하기 때문에 따로 취라고 세운 것이다.
묘음 존자는 “5취의 유정은 계금취로 말미암아 모든 업을 불길같이 훨훨 일어나게 하되 세력의 작용이 빠르면서도 더욱 중하고 친근하게 하는 것이 나머지 네 가지 견해보다 더하기 때문에 따로 취라고 세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계금취는 성도(聖道)에 거스르고 해탈을 멀리 하게 하기 때문에 따로 취를 세우는 것이다. 성도에 거스른다고 함은 계금취로 말미암아 진실한 성도를 버리면서 갖가지 도리 아닌[非理] 고행으로써 청정하게 된다고 망령되이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음식을 끊고 재 위에 누우며 방아공이에 눕고 얼굴은 해를 따라 움직이며 공기를 먹고 물만을 마시며 혹은 열매만을 먹기도 하고 혹은 채소만을 먹기도 하며, 혹은 해진 옷을 입기도 하고 혹은 온전히 몸을 벌거숭
이가 되게도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청정하게 된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해탈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여여(如如)하게 고행으로 삿된 도를 수행하면 그와 같이 해탈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다.
또 계금취는 안과 밖의 두 가지 도[二道]를 속이기 때문에 따로 취를 세운다. 내도(內道)를 속인다고 함은 씻고 깨끗하게 하는 것과 12두타(杜多)를 받아 지니는 공덕으로써 청정한 것을 증득한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며 외도(外道)를 속인다고 함은 곧 앞에서 설명한 갖가지의 도리 아닌 고행으로써 청정하게 된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묘음 존자도 “이 계금취는 현실에서 보건대 고통을 내는 것은 마치 불길이 훨훨 이는 것과 같고 두 가지 도(道)를 속이는 것은 마치 젖먹이를 미혹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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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같기 때문에 따로 취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엇 때문에 아어취(我語取)라 하는가? 행상(行相)으로써 그런 것인가? 소연(所緣)으로써 그런 것인가? 만일 행상으로써라면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아어취라고 해야 하니 아(我)의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만일 소연으로써라면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아어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 행상으로써 아어취라 하지도 않고 소연으로써 아어취라고도 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의 번뇌는 견(見)을 제외하고 욕취(欲取)를 세우며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는 견을 제외하고 아어취를 세운다.
[문]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답] 욕계의 번뇌는 음욕에 의하여 전개되고 경계에 의하여 전개되며 뭇 기구[衆具]에 의하여 전개되고 다른 이의 몸에 의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욕취를 세우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그것과는 서로 어긋나서 안[內] 몸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를 세운다.
또 욕계의 번뇌는 안 몸을 받을 때에 음욕을 필요로 하고 경계를 필요로 하며 뭇 기구를 필요로 하고 제이(第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욕취를 세우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안 몸을 받을 때에 그것과는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아어취를 세운다.
또 욕계의 번뇌는 안 몸을 받을 때에 오직 선정이 아닌 것에 의하고 거의가 바깥 문[外門]과 바깥 일[外事]을 인연하기 때문에 욕취를 세우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자기 몸을 받을 때에 오직 선정에 의하고 거의가 안 문[內門]과 안 일[內事]을 인연하기 때문에 아어취를 세운다.
또 욕계의 번뇌는 광대한 몸의 형상과 오래 사는 수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욕취를 세우지만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마치 색구경천(色究竟天)의 키가 1만 6천 유선나(踰繕那)와 같은 광대한 몸의 형상을 얻고 또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수명이 8만 대겁(大劫)과 같이 오래 사는 수명을 얻기 때문에 그 번뇌에서는 아어취를 세운다.
[문] 무엇 때문에 욕루와 욕폭류와 욕액과 욕취는 또한 모든 전(纏)을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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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유루 등에서는 전혀 그것을 포섭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유루와 나아가 아어취 중에서도 모든 전을 포섭한다.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 ‘어떤 것이 유루인가? 색계와 무색계의 무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결(結)과 박(縛)과 수면(隨眠)과 수번뇌(隨煩惱)와 전(纏)을 유루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유폭류와 유액과 아어취에 있어서도 전을 포섭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評] “상계(上界)의 전은 적으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루와 나아가 아어취라고 말하지 않으며, 욕계의 전은 비록 많다 해도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이 구족하지 않고 자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만 통틀어 10전(纏)만을 말하고 따로 5부(部)를 말하지 않는다”라고 해야 한다.
[문] 모든 번뇌의 구(垢)는 무엇 때문에 누(漏)라고는 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그것도 욕루(欲漏) 등 안에 있다고 한다. 『품류족론』에서 ‘어떤 것이 욕류인가? 욕계의 무명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결과 박과 수면과 수번뇌와 전을 욕루라고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는데 수번뇌가 곧 번뇌의 구이다”라고 말한다.
[評] “번뇌의 구는 거칠면서 굳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누(漏)라고 말하지 않으며 불신(不信)과 해태(懈怠)와 방일(放逸)도 허물이 경미하기 때문에 누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계경에서 “이와 같은 4취(取)는 무명이 인(因)이 되고 무명이 집(集)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명의 종류이어서 무명으로부터 생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다른 경에서는 모두가 애(愛)는 취(取)의 연(緣)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경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답] 가까운 인[近因]에 의하기 때문에 애는 취의 연이라고 하고, 먼 인[遠因]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은 취의 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까운 인과 먼 인처럼 여기에 있고[在此] 저기에 있는 것[在彼]ㆍ앞에 나타나고[現前]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不現前]ㆍ이 중동분[此衆同分]과 다른 중동분[餘衆同分]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동류인(同類因)에 의하기 때문에 애는 취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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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류인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은 취의 인 등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외도는 비록 살던 집을 버리고서 취하는 것도 없고 쌓는 것도 없이 부지런히 고행을 닦는다 해도 지혜가 없고 모든 견해의 갈래[見趣]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험악한 길[惡道]에 떨어져서 벗어날 기약이 없기 때문에 무명은 취의 인 등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문] 애(愛)는 곧 욕취(欲取) 등 안에 포섭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애는 취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곧 탐의 수면[貪隨眠]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애라 하고, 그 뒤에 더하는 것을 취라 하기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
또 곧 탐의 수면의 하품(下品)을 애라 하고, 중ㆍ상품을 취라고 하기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
[論] 4신계(身繫)가 있다. 탐욕신계(貪欲身繫)ㆍ진에신계(瞋恚身繫)ㆍ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ㆍ차실집신계(此實執身繫)이다.3)
[문] 이 4신계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스물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탐욕과 진에의 신계에서는 각각 욕계의 5부(部)로 열 가지의 일을 삼고, 계금취신계에서는 삼계의 각각 2부로 여섯 가지의 일을 삼으며, 차실집신계에서는 삼계의 각각 4부로 열두 가지의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4신계는 스물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니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신계(身繫)라 하는가? 신계란 무슨 뜻인가?
3) 신계는 몸을 계박하고[縛身] 생을 받는다[結生]는 뜻이어서 여기서는 탐욕과 진에와 계금취와 차실집의 네 가지 신계를 논한다. 이것은 『구사론』에서는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가운데서 차실집의 신계란 ‘나와 세간은 항상한다[常].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고집하기도 하고 혹은 ‘나와 세간은 무상하다, 끝[邊]이 있다, 끝이 없다’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도 계신다, 안 계신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어리석고 허망한 것이다’라고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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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몸을 속박한다[縛身]는 뜻이요 생을 받는다[結生]는 뜻이니 이것이 신계의 뜻이다.
몸을 속박한다는 뜻이 신계의 뜻이라 함은 이 네 가지는 생사하는 가운데서 유정의 몸을 속박하고 평등하게 속박[等縛]하며 두루 속박[遍縛]하는 것이다. 마치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에서 “탐욕의 신계를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몸과 여러 형상과 여러 얻을 것에서 자체(自體)가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며 속박이 되고 평등한 속박이 되며 두루한 속박이 되고 결(結)이 되어서 상속한다. 마치 꽃다발을 만드는 이나 그
의 제자가 갖가지 꽃을 가져다 한 곳에 모아두고 끈으로 꿰어서 갖가지 꽃다발을 만들 때에 끈은 꽃다발을 위하여 인이 되고 연이 되며 속박이 되고 평등한 속박이 되며 두루한 속박이 되고 맺는 것이 되어서 상속하는 것과 같다. 나머지 세 가지 신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그러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생을 받는다[結生]는 뜻이 신계의 뜻이라 함은 마치 계경에서 “세 가지 일이 합하는 까닭에 어머니의 태 속에 들게 된다. 첫째는 부모가 함께 염심(染心)이 있고, 둘째는 그 어머니에게 병이 없이 만나는 때며, 셋째는 건달바[建達縛]가 지금 막 그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때에 건달바의 애(愛)와 에(恚)의 두 마음이 서로 교대로 그 앞에 나타나 있어야 비로소 생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 생을 받는다는 뜻이 신계의 뜻이
다.
[문] 만일 몸을 속박한다는 뜻이 신계의 뜻이라면 그 밖의 다른 번뇌 등도 이런 뜻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신계라고 세우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 받을 이를 관하시면서 나머지를 생략한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만일 법이 신계로 세울 수 있으면 그것을 세우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건립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가 유정의 몸을 속박하고 평등하게 속박하며 두루 속박해서 세력과 작용이 빠르고 더욱 중하며 친근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우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의 두 가지 신계는 집에 있는 이[在家者]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며 뒤의 두 가지 신계는 출가한 이[出家者]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다.
집에 있는 이와 출가한 이처럼 집이 있고 집이 없는 이ㆍ거두어들이는[攝受] 것이 있고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는 이ㆍ쌓아 모으는[積聚] 것이 있고 쌓아 모으는 것이 없는 이ㆍ권속이 있고 권속이 없는 이ㆍ멀리 여의는 것이 있고 멀리 여의는 것이 없는 이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4신계가 삼계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운다. 처음 두 가지 신계는 욕계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고 뒤의 두 가지 신계는 색계와 무색계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다.
또 이 4신계는 두 가지 쟁근[二諍根]4)을 일으키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도 더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운다. 처음 두 가지 신계는 애쟁근(愛諍根)을 일으키고, 뒤의 두 가지 신계는 견쟁근(見諍根)을 일으킨다.
마치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집병지장 범지[執甁持杖梵志]가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에게 나아가서 물었다.
‘무슨 인(因)과 무슨 연(緣)으로 찰제리(刹帝利)는 찰제리와 다투고 바라문(婆羅門)은 바라문과 다투며, 폐사(吠舍)는 폐사와 다투고 수달라(戍達羅)는 수달라와 다툽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그들은 탐과 진의 애쟁근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다툼을 일으킵니다.’
4) 두 가지 쟁근은 5욕(欲)의 경계에 탐착하는 것과 모든 허망한 견해에 집착하는 것과 구별에서 온 애장근과 견쟁근의 두 가지를 가리킨다. 앞의 것은 수(受)의 심소(心所)가 있어서 5욕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하고 뒤의 것은 상(想)의 심소가 있어서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사에 헤매는 과(果)를 끌어 일으키는 가장 뛰어난 인(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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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지가 다시 말하였다.
‘무슨 인과 무슨 연으로 모든 출가한 이는 집과 거두어들이는 것과 쌓아 모으는 것이 없으면서도 서로가 싸우는 것입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그는 계금취와 차실집(此實執)의 견쟁근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싸움을 일으킵니다.’”
두 가지의 쟁근처럼 두 가지의 변견[二邊]5)과 두 가지의 화살[二箭]과 두 가지의 희론[二戱論]과 두 가지의 아집[二我執]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는 문(門)을 나타내고 길[略]을 나타내며 들어가는 것[入]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만 네 가지만을 말할 뿐이다. 모든 번뇌는 혹은 견도에서만 끊는 것이 있고 혹은 견도ㆍ수도에서 모두 끊는 것이 있다. 만일 뒤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견도에서만 끊어야 할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처음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견도ㆍ수도에서 모두 끊어야 할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혹 변행(遍行)이기도 하고 혹 변행이 아니기도[非遍行] 하다. 만일 뒤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이것은 통틀어 변행의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처음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변행이 아닌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혹 견해의 성품[見性]이기도 하고 혹은 견해의 성품이 아니기도[非見性] 하다. 만일 뒤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그것은 통틀어 견해의 성품을 말한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처음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견해의 성품이 아닌 것을 말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혹 이생(異生)에게만 현행(現行)하기도 하고 혹 이생과 성자(聖者)에게 모두 현행하기도 한다. 만일 뒤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이생에게만 현행한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처음 두 가지 신
5) 두 가지 변견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요 두 가지 화살이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이며, 두 가지 희론이란 애론(愛論)과 견론(見論)이요 두 가지 아집이란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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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말하면 통틀어 이생과 성자에게 모두 현행한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혹 기뻐하는 행상[歡行相]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혹은 근심하는 행상[行相]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만일 진에(瞋恚)의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나머지 세 가지의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혹 오직 욕계계이기도 하고 혹은 삼계계에 다 통하기도 한다. 만일 처음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욕계계의 것만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뒤의 두 가지 신계를 말하면 통틀어 삼계계에 모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을 나타내고 길을 나타내며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계경에서는 다만 4신계만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論] 5개(蓋)가 있다. 탐욕개(貪欲蓋)ㆍ진에개(瞋恚蓋)ㆍ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ㆍ도거악작개(悼擧惡作蓋)ㆍ의개(疑蓋)이다.6)
[문] 이 5개는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욕계의 서른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탐욕과 진에에서는 각각 욕계의 5부(部)로 열 가지 일을 삼고, 혼침과 도거에서는 각각 삼계의 5부로 불선ㆍ무기에 모두 통하나 오직 불선에서만 개(蓋)를 세우면서 열 가지의 일을 삼으며, 수면에서는 욕계의 5부로 선ㆍ불선ㆍ무기에 다 통하나 오직 불선에서만 개를 세우면서 다섯 가지 일을 삼고 악작에서는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선ㆍ불선에 모두 통하나 오직 불선에서만 개를 세우면서 한 가지의 일을
삼으며 의에서는 삼계의 4부에 통하고 불선과 무기에 통하나 오직 불선에
6) 먼저는 4폭류(瀑流)와 액(軛)과 신계(身繫)를 밝히고, 이어서 다섯 가지를 밝히는 문단이다. 예에 의하여 다섯 가지 개의 자성과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다섯 가지 개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며, 혹은 또 다른 번뇌와 다섯 가지 개를 비교하면서 갖가지의 방면으로 소극적으로 다섯 가지 개의 성질을 논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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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 개를 세우면서 네 가지의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5개는 욕계의 서른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문] 개에는 어떠한 상(相)이 있는가?
[답] 세우 존자는 “자성이 곧 상이요 상이 곧 자성이니 온갖 법의 자성과 상은 서로가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모든 탐욕을 지나치게 즐겨 구하는 것은 탐욕의 상(相)이요 유정을 미워하여 성을 내는 것은 진에의 상이며, 몸과 마음이 빠져 잠기는 것은 혼침의 상이요 몸과 마음이 들썩거리는 것은 도거의 상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어둡고 생략하게 하는 것은 수면의 상이요 마음으로 하여금 변하면서 뉘우치게 하는 것은 악작의 상이며, 마음의 행상으로 하여금 망설이면서 결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의의 상이다.
이미 개의 자성과 상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개(蓋)라고 하는가? 개란 무슨 뜻인가?
[답] 막는다[障]는 뜻이요 가린다[覆]는 뜻이며, 깨진다[破]는 뜻이요 무너진다[壞]는 뜻이며, 떨어진다[墮]는 뜻이요 눕는다[臥]는 뜻이니 이것이 개의 뜻이다.
여기에서 막는다는 뜻이 개의 뜻이라 함은 성도(聖道)를 막으며 성도의 가행(加行)의 선근을 막기 때문에 개라고 한다.
가린다는 뜻과 나아가 눕는다는 뜻이 개의 뜻이라 함은 마치 계경에서 “다섯 그루의 큰 나무가 있다. 종자는 비록 작다 해도 가지와 몸은 커서 그 밖의 다른 작은 나무를 가리며 그 가지와 몸 등을 깨지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떨어지게 하고 눕게 해서 꽃과 열매를 생기지 못하게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그루의 큰 나무인가? 첫째는 건절나(建折那)라 하고, 둘째는 겁비달라(劫臂怛羅)라 하며, 셋째는 아습박건타(阿濕縛健陀)라 하고, 넷째는 오담발라(鄔曇跋
羅)라 하며, 다섯째는 낙구타(諾瞿陀)라 한다. 이와 같아서 유정들이 사는 욕계의 마음 나무는 이 다섯 가지의 개에 가려지는 까닭에 깨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누우면서 7각지(覺支)의 꽃과 4사문(沙門)의 열매를 생장할 수 없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린다는 등의 뜻이 개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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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성도를 막으며 성도의 가행 선근을 막는 것이 개의 뜻이라면 그 밖의 다른 번뇌 등에서도 이런 뜻이 있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 받을 이들을 위하여 나머지를 생략한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개(蓋)의 형상이 있는 것은 개로 세우셨지만 개의 형상이 없는 것은 세우지 않으신 것이니 때문에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이 5개가 성도를 막고 성도의 가행 선근을 막아 세력과 작용이 민첩하고 빠르며 더욱 중하고 친근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법보다 더하는 것임을 아시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개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이와 같은 5개는 원인일 때나 결과일 때에 다 같이 막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개를 세우셨다. 원인일 때에 막는다고 함은 이 다섯 가지 중의 어느 하나라도 앞에 나타날 때에는 마음은 오히려 유루의 선[有漏善]과 무기(無記)조차도 일으키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도이겠는가? 결과일 때에 막는다고 함은 이 5개로 말미암아 곧 악취에 떨어져서 온갖 공덕을 통틀어 장애하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5개는 욕계의 유정에게 많이 자주 나타나고 일어나며 그 행상(行相)은 미세하다. 그 밖의 다른 번뇌 등은 그와 같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개를 세운다. 만(慢)ㆍ견(見) 등은 욕계의 유정이 일으키는 것이 매우 적다. 지옥 등과 같은 데서는 어찌 만을 일으켜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은 다른 이보다 더 뛰어나다’라고 생각하겠는가? 방생취(傍生聚) 중의 두꺼비 같은 것들도 어리석고 둔하며 하열하니 어찌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見聚]
를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묘음 존자는 “모든 그 밖의 번뇌가 비록 성도를 장애한다 해도 이 다섯 가지는 자주자주 현행하고 행상이 미세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웠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 다섯 가지는 선정을 장애하며 선정의 결과를 장애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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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다섯 가지는 삼계의 이염(離染)과 9변지도(遍知道)7)와 4사문과를 장애하는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개를 세운다.
또 탐욕은 모든 욕(欲)을 여의는 법을 멀어지게 하고 진에는 모든 악(惡)을 여의는 법을 멀어지게 하며, 혼침과 수면은 비발사나(毘鉢舍那)를 멀어지게 하고 도거와 악작은 사마타(奢摩他)를 멀어지게 한다. 그것이 이 모든 욕ㆍ악을 여의는 법과 비발사나ㆍ사마타를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곧 의심의 화살이 되어 그 마음을 괴롭히고 파괴하여 ‘모든 악한 업[惡不善業]의 과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 악한 업
을 짓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세워서 개를 삼는다.
또 탐욕과 진에는 계온(戒蘊)을 파괴하고, 혼침과 수면은 혜온(慧蘊)을 파괴하고, 도거와 악작은 정온(定蘊)을 파괴한다. 그것이 이 세 가지 온을 파괴하기 때문에 곧 의심의 화살이 되어 그 마음을 괴롭히고 파괴하여 ‘모든 악한 업의 과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 악한 업을 짓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세워서 개를 삼는다.
또 탐욕과 진에는 계온을 장애하고 혼침과 수면은 혜온을 장애하며 도거와 악작은 정온을 장애한다. 그것이 세 가지 온을 장애하기 때문에 곧 의심의 화살이 되어 그 마음을 괴롭히고 파괴하여 ‘모든 악한 업의 과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갖가지 악한 업을 짓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세워서 개를 삼는다.
3온을 파괴하고 장애하는 것처럼 3학(學)과 3수(修)와 3정(淨)을 파괴하고 장애하는 데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는 문을 나타내고 길을 나타내며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만 이 다섯 가지만을 개로 세운다”라고 말한다. 번뇌 등은 혹 일부(一部)뿐이기도 하고, 혹 4부에 다 통하기도 하며, 혹은 5부에 다 통하
7) 9변지라 함은 삼계의 견혹(見惑)을 끊는데서 6변지를 세우고 그 수혹(修惑)을 끊는 데서 3변지를 세워 합쳐서 아홉 가지로 한다. 그리고 5개는 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에 모두 통하므로 9변지를 장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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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한다. 만일 악작을 말하면 통틀어 오직 일부만의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의개(疑蓋)를 말하면 통틀어 4부에 다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며, 만일 그 밖의 나머지 개를 말하면 통틀어 5부에 다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 중에 어떤 번뇌는 견도에서만 끊게 되고 어떤 번뇌는 수도에서 끊게 되고 어떤 것은 견도와 수도에서 끊게 된다. 만일 의개를 말하면 통틀어 견도에서만 끊을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악작을 말하면 통틀어 수도에서만 끊을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며, 만일 그 밖의 나머지 개를 말하면 통틀어 견도ㆍ수도에서 다 끊을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수면(隨眠)이기도 하고 혹 수면이 아니기도 하다. 만일 탐욕ㆍ진에ㆍ의의 개를 말하면 통틀어 수면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혼침수면ㆍ도거악작을 말하면 통틀어 수면이 아닌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변행(遍行)이기도 하고, 혹 변행이 아니기도 하며, 혹 두 가지에 모두 통하기도 한다. 만일 의개를 말하면 통틀어 변행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탐욕과 진에와 악작을 말하면 통틀어 변행이 아닌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며, 만일 혼침과 도거와 수면을 말하면 통틀어 두 가지를 모두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이생(異生)에게만 현행하기도 하고 혹 이생과 성자(聖者)에게 모두 현행하기도 한다. 만일 의와 악작의 개를 말하면 통틀어 이생에게 현행하는 것만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그 밖의 나머지 개를 말하면 통틀어 이생과 성자에게 모두 현행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모든 번뇌는 기뻐하는 행상[歡行相]으로 전개되기도 하고, 혹 근심하는 행상[行相]으로 전개되기도 하며, 혹 두 가지에 모두 통하기도 한다. 만일 탐욕을 말하면 통틀어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진에와 악작과 의의 개를 말하면 통틀어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며, 만일 혼침과 수면과 도거를 말하면 통틀어 두 가지 모두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을 나타내고 길을 나타내며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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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경은 다만 이 다섯 가지만을 세워서 개로 삼았다.
[문] 개의 이름[名]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체(體)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답] 체에 일곱 가지가 있다. 탐욕개는 이름과 체에 다 같이 하나이고, 진에개와 의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혼침수면개는 이름은 하나이면서 체에는 둘이니 도거악작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이름을 체에 대하는 것처럼 이름의 시설(施設)을 체의 시설에 대하는 것ㆍ이름의 다른 형상[異相]을 체의 다른 형상에 대하는 것ㆍ이름의 다른 성품[異性]을 체의 다른 성품에 대하는 것ㆍ이름의 분별을 체의 분별에 대하는 것ㆍ이름의 각혜(覺慧)를 체의 각혜에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탐욕과 진에와 의에서는 낱낱이 따로 개를 세우고 혼침수면과 도거악작에서는 두 가지씩을 합쳐서 개를 세웠는가?
[답]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만일 법이 따로 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면 따로 세우셨고, 만일 그렇지 못한 것이면 함께 개를 세우신 것이니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만일 수면(隨眠)이면서 전(纏)의 성품이면 저마다 따로 개를 세우고, 만일 전의 성품이나 수면이 아니면 두 가지를 합쳐서 개를 세운다.
또 만일 원만한 번뇌의 성품인 것이면 저마다 따로 개를 세우고, 만일 원만하지 않은 번뇌의 성품이면 두 가지를 합쳐서 개를 세운다.
결(結)․박(縛)․수면(隨眠)․수번뇌(隨煩惱)․전(纏)의 다섯 가지 뜻을 완전히 갖춘 것을 원만한 번뇌라 한다.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저마다 별도로 또는 함께 개를 세우니, 하나의 음식[一食]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대치(對治)이기 때문이며 같이 짐을 지기[等荷擔]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음식과 하나의 대치라 함은 탐욕개는 청정하고 묘한[淨妙] 상(相)으로써 음식을 삼고 부정관(不淨觀)을 대치로 삼는 것이니, 이 하나의 음식과 하나의 대치로 말미암아 따로 하나의 개[一蓋]를 삼는다.
진에개는 미워할 만한[可憎] 상으로써 음식을 삼고 자관(慈觀)을 대치로 삼는 것이니 이 하나의 음식과 하나의 대치로 말미암아 따로 하나의 개를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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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의개는 3세(世)의 상으로써 음식을 삼고 연기관(緣起觀)을 대치로 삼는 것이니, 이 하나의 음식과 하나의 대치로 말미암아 따로 하나의 개를 삼는다.
혼침수면개는 첫째 멍한 것[瞢憒]과, 둘째 즐겁지 않은 것[不樂]과, 셋째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는 것[頻欠]과, 넷째 먹은 것이 편하지 못한 성품[食不平性]과, 다섯째 마음이 열약해진 성품[心羸劣性]의 다섯 가지 법으로써 음식을 삼고 비발사나(毘鉢舍那)로써 대치를 삼는 것이니 이 음식을 같이하고 대치를 같이하기 때문에 합쳐서 하나의 개를 삼는다.
도거악작개는 첫째 친리심(親里尋)8)과, 둘째 국토심(國土尋)과, 셋째 불사심(不死尋)과, 넷째 염석락사(念昔樂事)의 이 네 가지 법으로써 음식을 삼고 사마타(奢摩他)로써 대치를 삼는 것이니 이 음식을 같이하고 대치를 같이하기 때문에 합쳐서 하나의 개를 삼는다.
같이 짐을 진다[等荷擔]고 함은 탐욕과 진과 의는 하나하나가 하나의 개의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에 따로따로 개를 세우고 혼침수면은 두 가지씩으로 하나의 개의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에 같이[共] 개를 세운다. 마치 성읍(城邑) 안의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을 하여 마치면 따로 마치게 된 것이나 만일 두 사람이 한 가지의 일을 하여 마치면 같이 마쳤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또 서까래나 들보가 강한 것이면 하나로 사용하겠지만 약한 것이면 두 개를 사
용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도 그와 같다.
[문] 무슨 연유로 5개의 차례가 이와 같은가?
[답] 이와 같은 차례는 문자에 있어서나 설명에 있어서 다 같이 수순하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차례는 주는 이[授者]나 받는 이[受者]가 다 같이 수순하기 때문이다.
8) 친리심이란 친족에 관한 일을 심사(尋思)하는 것이요 국토심이란 고향 등 사랑하는 국토에 관한 일을 심사하는 것이며 불사심이란 ‘만일 내가 죽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라고 심사하는 것이요 염석락사라 함은 옛날에 있었던 갖가지 기뻤던 일과 즐거웠던 일 들을 기억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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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개는 이와 같은 차례로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이와 같은 차례로 말씀하셨으므로 세우 존자는 “좋아할 만한 경계를 만나면 탐욕(貪欲)을 내고, 좋아할 만한 경계를 잃으면 그 다음에는 진에(瞋恚)를 내며, 이런 경계를 잃고 나면 마음이 곧 열약해지면서 그 다음에는 혼침(惛沈)이 생기고, 혼침을 말미암아 마음이 곧 답답해지면 그 다음에는 수면(睡眠)이 생기며, 그로부터 깨어난 뒤에는 도거(掉擧)를 내고 이미 들뜨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악
작(惡作)을 내며 뉘우치고 나서부터는 다시 의(疑)를 끌어 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5개가 차례대로 되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부처님께서는 5개의 차별에는 열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째서 다섯을 나누어서 10개(蓋)로 하셨는가?
[답] 세 가지 일 때문에 다섯을 나누어서 열 가지로 나누신 것이니 첫째는 내외(內外) 때문이요, 둘째는 자체(自體) 때문이며, 셋째는 선악(善惡) 때문이다.
내외 때문이라 함은 어떤 탐욕개는 안[內]을 반연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탐욕개는 밖[外]을 반연해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두 가지 개[二蓋]를 이루며, 어떤 진에개는 성을 내는 자체이기도 하고, 어떤 진에개는 성을 내는 인연(因緣)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가지 개를 이룬다.
자체 때문이라 함은 혼침개와 수면개와 도거개와 악작개로 둘씩 나누어서 네 가지를 이룬다.
선악 때문이라 함은 의개는 선ㆍ악으로 나누어서 두 가지 개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일을 말미암아 다섯 가지를 나누어서 열 가지로 한다.
이 열 가지는 하나하나가 지혜[慧]와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모두 장애하기 때문에 개(蓋)라고 한다.
[문] 7수면(隨眠) 중 만(慢)과 무명(無明)과 견(見)을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으셨는가?
[답] 만(慢)이 개가 아닌 것은 마음을 숨겨 가리기[隱覆] 때문에 개라 하는데 만은 마음을 다잡고 마음으로 하여금 뽐내게 하기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는 것이요, 무명(無明)을 개로 세우지 않는 까닭은 같이 짐을 지기[等荷擔] 때문에 개라고 하는데 무명은 숨겨 가리는 행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짐을
지는 것이 치우치게 무거워서 같다는 뜻[等義]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개의 종류 안에 세우지 않으며, 견(見)이 개가 아니라 함은 지혜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개라고 하는데 견은 곧 지혜이어서 제 성품은 도로 제 성품을 소멸시킬 수 없기 때문에 지혜는 개가 아니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료. 개는 통틀어 유위의 착한 법을 소멸시키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개는 지혜를 소멸시킨다고만 말하는가?
[답] 지혜는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지혜를 소멸시킨다고만 말하는 것이니 곧 통틀어 말하면 유위의 착한 법도 소멸시킨다. 뛰어난 것조차도 오히려 소멸시키는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하열한 것이겠는가? 마치 사람이 천 사람의 적(敵)을 조복할 수 있는 이면 모든 그 밖의 하열한 이들을 어찌 조복하지 못하겠는가?
[문] 색계ㆍ무색계의 모든 번뇌 등은 무엇 때문에 개가 아닌가?
[답] 거기에는 개의 상(相)이 없기 때문에 개를 세우지 않는다.
또 개는 삼계의 이염(離染)과 4사문과(沙門果)와 9변지도(遍知道)를 장애하는 것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 등에는 그와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개를 세우지 않는다.
또 개는 선정[定]과 선정의 결과를 장애하는 것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 등에는 이와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개를 세우지 않는다.
또 개는 3도(道)와 3근(根)과 3종율의(種律儀)와 3종보리(種菩提)와 3혜(慧)와 3온(蘊)과 3학(學)과 3수(修)와 3정(淨)을 장애하는 것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 등에는 이와 같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개를 세우지 않는다.
3도라 함은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를 말하고, 3근이라 함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과 이지근(已知根)과 구지근(具知根)을 말하며, 3종율의라 함은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와 정려율의(靜慮律儀)와 무루율의(無漏律儀)이다.
3종보리라 함은 성문(聲聞)의 보리와 독각(獨覺)의 보리와 무상(無上)의 보리를 말하고, 3혜라고 함은 문소성혜(聞所成慧)와 사소성혜(思所成慧)와 수소성혜(修所成慧)를 말하며, 3온이라 함은 계온(戒蘊)과 정온(定蘊)과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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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慧蘊)을 말한다. 3학과 3수와 3정도 그러하다.
또 개는 오직 불선(不善)일 뿐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 등은 모두가 무기이기 때문에 개를 세우지 않는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료. 무엇 때문에 오직 불선인 것만을 개로 세우면서 무기는 세우지 않는가?
[답] 착한 법의 무더기[善法聚]를 장애하기 때문에 개라 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으면 개는 오직 불선일 뿐이다. 마치 계경에서 “착한 법의 무더기란 4념주(念住)를 말하고 가까이서 이것을 장애한다고 함은 나쁜 법의 무더기[惡法聚]를 말한다. 나쁜 법의 무더기는 5개(蓋)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묘음 존자도 “모든 번뇌가 성도(聖道)를 장애하기 때문에 모두 개라고 해야 하나 유정들이 몹시 싫어하며 여의기 때문에 오직 불선이라고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오직 불선일 뿐이면서 온갖 불선의 마음과 두루 함께하는데 무엇 때문에 개가 아닌가?
[답]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 받을 이를 위하여 나머지를 생략한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만일 법이 개로 세울 수 있는 것이면 세우셨고, 만일 그렇지 못한 것이면 개로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무참과 무괴는 비록 온갖 불선의 마음과 함께하면서 불선일 뿐이라 해도 악(惡)을 지을 때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이 짓는 악에 대하여 모든 교묘한 방편을 많이 쓰므로 막아 가린다[障覆]는 뜻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도 “무참과 무괴는 비록 짓는 대상인 착하지 않은 업 가운데서 세력과 작용이 뛰어나다 해도 막아 가린다는 뜻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무참과 무괴가 비록 계온(戒蘊)을 장애한다 해도 그 세력과 작용은 탐ㆍ진에는 미치지 못하고, 비록 정온(定蘊)을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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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해도 그 세력과 작용은 도거와 악작에는 미치지 못하며, 비록 혜온(慧蘊)을 장애한다 해도 그 세력과 작용은 혼침과 수면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질(嫉)과 간(慳)의 두 가지 결[二結]은 무엇 때문에 개가 아닌가?
[답] 역시 개라고 해야 하는데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 받을 이를 위하여 간단하고도 소략하게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개로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면 개로 세우지 않으신 것이니 그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질ㆍ간의 두 가지는 두 갈래[二趣]9)와 출가(出家)ㆍ재가(在家)의 이중(二衆)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기 때문에 세워서 결(結)이라 하면서도 막아 가린다[障覆]는 뜻에는 더욱 강하지 않기 때문에 개로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도 “질ㆍ간의 두 결은 개의 뜻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질ㆍ간의 두 결은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장애하는 세력과 작용이 탐욕개 등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분(忿)과 부(覆)의 두 가지 전[二纏]은 무엇 때문에 개가 아닌가?
[답] 역시 개라고 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들을 위해서 간단하고도 소략하게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개로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세울 만한 것이 아니면 개로 세우지 않은 것이니 그
9) 두 갈래라 함은 천취(天趣)와 인취(人趣)의 두 갈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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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분ㆍ부의 두 가지 전은 마음을 막고 가리는[障覆] 데서 뜻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도 “분ㆍ부의 두 가지 전은 막고 가린다는 뜻에서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분ㆍ부의 두 가지 전은 계온(戒蘊) 등을 장애하는 세력과 작용이 탐욕개 등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서방(西方)의 모든 논사10)는 “분ㆍ부의 두 가지는 별도의 체(體)가 없기 때문에 특별히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문] 6번뇌구(煩惱垢)는 무엇 때문에 개가 아닌가?
[답] 또한 개라고 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들을 위해서 간단하고 소략하게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개로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세울 만한 것이 아니면 세우지 않은 것이니 그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6번뇌구의 행상은 거칠게 움직이는 것[麤動]이어서 개의 뜻에는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도 “6번뇌구는 개의 상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 것이니 미세하면서 자주자주 행하는 것이 개의 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6번뇌구가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장애하는 세력과 작용이 탐욕개 등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개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계경에서 “무명(無明)의 개(蓋)에 가리고 애결(愛結)에 계박(繫縛)
10) 서방의 모든 논사라고 함은 건타라(健馱羅)의 유부(有部)의 모든 논사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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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가 다 같이 식이 있는 몸[有識身]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무명은 가리면서도 계박하고 애결도 계박하면서도 가리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무명은 가리고 애결은 계박한다는 것만을 말하는가?
[답] 다 같이 두 가지를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말하려는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갖가지 언어와 갖가지 문자로써 말하는 것이다.
또 그 경에서는 두 가지 문[二門]ㆍ두 가지 길[二略]ㆍ두 가지의 섬돌[二階]ㆍ두 가지의 층계[二蹬]ㆍ두 가지의 광명[二明]ㆍ두 가지의 횃불[二炬]ㆍ두 가지의 무늬[二文]ㆍ두 가지의 그림자[二影]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무명에 가리고 애결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애결에 계박되고 무명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문과 나아가 두 가지의 그림자를 나타내면서 서로서로 환히 비추려고 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한다.
또 먼저 “가린다[覆]는 뜻이 개(蓋)의 뜻이어서 그 밖의 다른 번뇌로서는 혜안(慧眼)을 막고 가리는 것이 무명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만 무명에 가린다고만 말하며, “얽어맨다[縛]는 뜻이 결(結)의 뜻이어서 그 밖의 다른 번뇌로서는 유정을 계박하여 생사에 헤매게 하는 것이 애결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만 애결에 계박된다고만 말할 뿐이다. 모든 유정들은 무명에 눈이 멀고 애결에 얽매여서 구경의 열반에 나아가 들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미친 도둑[二狂賊]의 비유를 말하겠다. 옛날 두 사람의 도둑이 있었다. 그들은 험한 길목에 있다가 만일 사람을 붙잡게 되면 하나는 그의 눈에다 먼지를 뿌리고 하나는 손발을 묶었었다. 그 사람은 눈을 뜰 수 없는데다 다시 계박된지라 도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정도 그러하여 무명에 눈이 멀고 애결에 계박되어 구경의 열반에 나아가 들지 못하고 생사에 유전하며 한결같이 고뇌를 받는 것이다.
묘음 존자도 “무명에 눈이 멀고 애결에 계박되어서 곧 악한 업[惡不善業]을 짓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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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뛰어난[增上] 뜻에 의거한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무명을 가린다[覆]는 작용이 뛰어나며 애결은 얽어맨다[縛]는 작용이 뛰어난 것이다.
또 부분이 많은[多分] 뜻에 의거한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무명은 가린다는 부분이 많고 애결은 얽어맨다는 부분이 많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49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불선납식 ④
[論] 5결(結)이 있다. 탐결(貪結)ㆍ진결(瞋結)ㆍ만결(慢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1)
[문] 이 5결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서른일곱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탐결과 만결에서는 각각 삼계 5부(部)에서 서른 가지의 일을 삼고 진결에서는 욕계 5부에서 다섯 가지의 일을 삼으며 질결과 간결에서 각각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두 가지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5결은 서른일곱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해야겠다.
[문] 무엇 때문에 결(結)이라 하는가? 결이란 무슨 뜻인가?
[답] 얽어맨다[繫縛]는 뜻이요 고통에 합한다[合苦]는 뜻이며, 독이 섞였다[雜毒]는 뜻이니 이것이 결의 뜻이다. 이것은 위의 3결(結)에서 자세히 설명
1) 여기서는 5결을 논구하는 문단이다. 앞의 3결이 오직 이(理)만의 공상(共相)에 미혹하는 번뇌이어서 낙수(樂受)나 고수(苦受) 등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이지적(理智的)인 혹(惑), 즉 미리(迷理)의 혹인 것에 반하여 여기서는 사(事)만의 자상(自相)에 미혹하는 번뇌이어서 정의적(情意的:事) 방면의 혹, 즉 미사(迷事)의 혹이 해당한다. 예를 들면 탐(貪)ㆍ진(瞋)ㆍ만(慢)이 사의 자상에 미혹하는 번뇌인 것은 그 대상이 일정하기 때문이니, 탐
은 뜻에 맞는 경계에 일으키고 뜻에 맞지 않는 데서는 일으키지 않으며, 진은 뜻에 맞지 않는 데서 일으키고, 뜻에 맞는 데서는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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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만을 세워 결이라 하는가?
[답] 역시 그 밖의 다른 것도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할 이들을 위해서 간단하고 소략하게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결로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세울 만한 것이 아니면 세우지 않으신 것이니 그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우 존자는 “여기서는 다만 색(色) 등의 사(事)의 자상(自相)에 미혹된 번뇌가 마음을 얽매는 것만을 결이라 한다. 탐ㆍ진ㆍ만의 세 가지는 오직 사의 자상에 미혹된 번뇌이기 때문에 결로 세웠지만 5견(見)과 의(疑)는 오직 이(理)의 공상(共相)에 미혹된 번뇌이다. 질ㆍ간의 두 전[二纏]도 사(事)에 미혹되어 2부(部)2)와 2취(趣)를 괴롭히고 어지럽히기 때문에 과환(過患)이 많기 때문에 또한 세워서 결이라 하지만 그
밖의 전과 구(垢)에는 이와 같은 사가 없기 때문에 결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도 “이 다섯 가지는 사(事)에 대하여 마음을 결박[結]하는 허물이 중하기 때문에 세워서 결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 존자는 “이 다섯 가지는 사에 대하여 자주자주 현행하여 자기와 남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며 과환이 더욱 중하기 때문에 세워서 결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번뇌 등에는 이와 같은 사가 없기 때문에 결로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5순하분결(順下分結)이 있다. 탐욕(貪欲)의 순하분결ㆍ진에(瞋恚)의 순하분결ㆍ유신견(有身見)의 순하분결ㆍ계금취(戒禁取)의 순하분결ㆍ의(疑)의 순하분결이다.
2) 2부는 출가(出家)와 재가(在家)를 말하고, 2취는 인취(人趣)와 천취(天趣)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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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5순하분결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서른한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탐욕과 진에의 순하분결에서는 각각 욕계 5부(部)에서 열 가지 일을 삼고, 유신견의 순하분결에서는 삼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세 가지 일을 삼으며, 계금취의 순하분결에서는 삼계의 각각 견고ㆍ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여섯 가지의 일을 삼고, 의의 순하분결에서는 삼계의 각각 4부에서 열두 가지의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이 5순하분결은 서른한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순하분결이라 하는가, 순하분결이란 무슨 뜻인가?
[답]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결은 하계(下界)에서 현행하고 하계에서 끊을 것이며 하계에서 생을 받고[結生] 하계의 등류(等流)와 이숙(異熟)의 과(果)3)를 취하기 때문에 순하분결이라 한다. 하계라 함은 욕계(欲界)를 말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온갖 번뇌는 모두 하계에서 현행(現行)하는 것이니 몸이 욕계에 있으면서 온갖 번뇌를 모두 일으키기 때문이요, 64수면(隨眠)은 하계에서 끊어야 할 것이니 욕계의 36과 비상비비상처의 28은 오직 욕계에서만 비로소 끊게 되기 때문이며, 36수면은 하계에서 생을 받는 것이니 욕계의 36수면은 하나하나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모두가 욕계의 생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34수면은 하계의 등류와 이숙의 과를 취하는 것이니 욕계의 34수면은 불선(不善)이어서 이숙인(異熟因)이 되기 때문이요, 두 가지 수면은 오직 하계의 등류과를 취할 뿐이며, 욕계의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이숙과를 취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온갖 번뇌는 모두 순하분결이라고 해야 되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오직 이 다섯 가지만을 순하분결이라 하고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3) 등류과라 함은 원인[因]의 성질과 결과[果]의 성질이 서로 유사한 때의 그 결과를 등류과라 하는데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은 제 것과 서로 유사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그 과는 등류과라고 한다. 이숙과는 원인이 선악인 것에 반하여 그 결과는 언제나 무기성(無記性)이어서 원인과는 다른 종류로 성숙한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니 이숙인(異熟因)의 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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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역시 그 밖의 다른 것도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할 이들을 위하여 간단하고 소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협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ㆍ상ㆍ세용을 아시므로 만일 법이 순하분결을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만일 세울 수 없는 것이면 세우지 않으신 것이니 그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부처님께서는 이 다섯 가지가 하계에서 현행하고 하계에서 끊어야 할 것이며 하계에서 생을 받고 하계에 과(果)를 취하고 그 세력과 작용이 민첩하며 빨라서 더욱 중하고 친근한 것이 그 밖의 다른 번뇌보다 지나가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순하분결을 세우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下)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계의 하[界下]와 유정의 하[有情下]이다. 세계의 하는 욕계를 말하고, 유정의 하는 이생(異生)을 말한다. 처음의 2결4)은 과환이 중하기 때문에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고 뒤의 3결은 과환이 중하기 때문에 이생을 초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만을 세워서 순하분결로 삼는다.
또 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지(地)의 하와 유정의 하이다. 지의 하는 욕계를 말하고, 유정의 하는 이생을 말한다. 처음의 2결은 과환이 중하기 때문에 하의 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뒤의 3결은 과환이 중하기 때문에 하의 유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만 이 다섯 가지만을 순하분결이라 한다.
또 이 다섯 가지가 저 욕계의 유정에 대하여 마치 옥졸(獄卒)과 순라군[防邏者]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세워서 순하분결로 삼는다. 처음의 2결은 옥졸과 같고 뒤의 3결은 순라군과 같다.
마치 어떤 죄인이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옥졸 두 사람이 늘 지키면서 잠깐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다시 어떤 세 사람의 순라군이 항상 감시하고 있
4) 처음의 2결이란 탐욕(貪欲)과 진에(瞋恚)를 말하고, 뒤의 3결이란 유신견(有身見)ㆍ계금취(戒禁取)ㆍ의(疑)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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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므로 그 사람이 설령 친우의 재력(財力)으로 옥졸을 해치고 멀리 도망쳤다 해도 세 사람의 순라군은 도로 붙잡아 데리고 와서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감옥은 욕계를 비유하고 죄인은 어리석은 이생을 비유하며 옥졸 두 사람은 처음의 2결을 비유하고 순라군 세 사람은 뒤의 3결을 비유한다.
설령 어떤 이생이 부정관(不淨觀)으로써 탐욕을 해치고 다시 자관(慈觀)으로써 진에를 해치고 욕계 나아가 무소유처를 여의고 초정려 나아가 유정(有頂)에 태어난다 해도 그 유신견(有身見)과 계금취(戒禁取)와 의(疑)는 도로 붙잡아 데리고 와서 욕계에 놓아둔다.
묘음 존자도 “2결을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3결을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두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로 욕계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순하분결이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좌수(左受) 존자도 “두 가지에 속박되기 때문에 욕계를 초월하지 못하고 세 가지를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에 도로 욕계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를 세워 순하분결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여기서는 문(門)을 나타내고 길[略]을 나타내며 들어가는 것[入]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순하분결이라 한다. 모든 번뇌에는 혹은 1부(部)일 뿐이기도 하고 혹은 2부에 통하기도 하며, 혹은 4부에 통하기도 하고 5부에 모두 통하기도 한다.
만일 유신견을 말하면 통틀어 오직 1부의 것만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계금취를 말하면 통틀어 2부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며, 만일 의를 말하면 통틀어 4부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하고, 만일 탐욕과 진에를 말하면 통틀어 5부에 통하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아서 오직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과 견도ㆍ수도에서 모두 끊어야 할 것과 변행과 변행이 아닌 것5)과 오직 이생에서 현행하는 것6)과 기뻐하는
5) 변행인 것은 뒤의 3결[身見ㆍ戒禁取ㆍ疑]이요, 변행이 아닌 것은 앞의 2결[貪ㆍ瞋]이다.
6) 이생(異生)에게만이 현행한다는 것은 뒤의 3결(結)을 말하고, 이생과 성자(聖者)에게 모두 현행한다는 것은 앞의 2결(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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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으로 전개되는 것7)과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되는 것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견도ㆍ수도에서 모두 끊어야 할 모든 번뇌에는 오직 탐ㆍ진만이 있으면서 독립하여 6식(識)에 두루하고 오직 견도에서 끊어야 할 모든 번뇌에는 오직 신견(身見) 등 세 가지만이 전(轉)이 되고 상수(上首)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이 다섯 가지를 세워 순하분결로 삼는다.
또 만일 “무엇 때문에 처음의 2결을 순하분(順下分)으로 세우는가?”라고 물으면 불선근(不善根) 중에서 자세히 대답한 것과 같아야 하며, 만일 “무엇 때문에 뒤의 3결을 순하분으로 세우는가?”라고 물으면 3결(結) 중에서 자세히 대답한 것과 같아야 하니 이 두 가지의 문답을 말미암아 통틀어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차단한다.
[문] 무엇 때문에 수번뇌(隨煩惱)는 순하분결이 아닌가?
[답] 그것도 순하분결이라 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존께서 교화할 이를 위해서 간략하고 소략하게 하신 말씀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만일 하(下)의 세계와 하의 유정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는 것이면 순하분으로 세우지만 모든 수번뇌는 생을 받을[結生] 수가 없기 때문에 순하분결로 세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마치 계경에서 다음처럼 말씀하신 것과 같다.
“ ‘너희들은 내가 먼저 나타낸 순하분결을 받아 지녀야 한다.’
그때 모임에 있던 마락가자(摩洛迦子)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박가범(薄伽梵)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합장하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세존께서 말씀하신 5순하분결을 받아 지녔습니다.’
7) 기뻐하는 행상으로 전개된다고 함은 진(瞋)과 의(疑)를 제외한 그 밖의 3결을 가리키고, 근심하는 행상으로 전개된다고 함은 진ㆍ의의 2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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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받아 지녔느냐?’
그가 말하였다.
‘탐욕은 바로 욕탐수면(欲貪隨眠)이어서 마음을 동여매니 이것이 순하분이며 세존께서 이미 나타내셨으므로 저는 이미 받아 지녔습니다.(나아가 의결(疑結)의 자세한 설명도 그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외도와 이학(異學)이 네가 한 말을 들으면 너를 힐책하리라. 예컨대 병든 젖먹이가 평상 위에 누워 있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색(色) 등의 욕진(欲塵)조차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탐욕을 나타내고 일으키면서 마음을 동여매겠느냐? 그러나 그에게는 오히려 욕탐수면은 있느니라.(나아가 의결의 자세한 설명도 그러하셨다.)’”
[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5순하분결을 그는 빠짐없이 받아 지녔는데 어째서 꾸지람을 받았는가?
[답] 취한 뜻을 나무란 것이요 취한 이름을 나무란 것이 아니며, 이해한 뜻을 나무란 것이요 이해한 이름을 나무란 것이 아니며, 말한 뜻을 차단한 것이요 그 이름을 차단한 것이 아니다. 그 구수(具壽)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순하분결이라 하고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번뇌가 만일 아직 끊어지지 못한 때이면 순하분결이라 하고 반드시 현재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번뇌는 반드시 현행하는8) 때라야 순하분결이라 한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성취하는 것도 순하분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번뇌는 반드시 현재의 때라야 순하분결이라 한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3세(世)는 모두 순하분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번뇌는 반드시 마음을 동여 맬 때라야 순하분결이라 한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전(纏)의 자리이거나 수면(隨眠)의 자리이거나 모두 순하
8) 현행(現行)한다고 함은 지금 현재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며, 성취(成就)한다고 함은 현재화(現在化)하고 나서 아직은 끊지 못하고 있는 동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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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치 탐욕의 전과 수면으로서 잘 끊지 못할 때를 순하분결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결에 이르기까지의 자세한 설명도 그러하다.
[論] 5순상분결(順上分結)이 있다. 색탐(色貪)의 순상분결ㆍ무색탐(無色貪)의 순상분결ㆍ도거(掉擧)의 순상분결ㆍ만(慢)의 순상분결ㆍ무명(無明)의 순상분결이다.
[문] 이 5순상분결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색탐에서는 곧 색계(色界)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애(愛)에서 한 가지 일을 삼고, 무색탐에서는 곧 무색계(無色界)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애에서 한 가지 일을 삼으며, 도거와 만과 무명에서는 곧 색계와 무색계에서 각각 수도에서 끊어야 할 도거와 만과 무명에서 여섯 가지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5순상분결은 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는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순상분결(順上分結)이라 하는가? 순상분결이란 무슨 뜻인가?
[답] 위로 나아가게 한다[趣上]는 뜻이요 위를 향하게 한다[向上]는 뜻이며 위에 나서 상속하게 한다[上生相續]는 뜻이니 이것이 순상분결의 뜻이다.
[문] 만일 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등의 뜻이 순상분결의 뜻이라면 순상분결은 폭류(瀑流)가 아니어야 하니 떨어져 빠진다[墜溺]는 등이 폭류의 뜻이기 때문이다.
[답] 폭류의 뜻은 순상분(順上分)의 뜻과는 다르다. 계(界)ㆍ지(地)에 의거하여 순상분을 세우는 것이니 그것은 유정으로 하여금 상생(上生)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며, 해탈도(解脫道)에 의거하여 폭류를 세우는 것이니 비록 유정(有頂)에 난다 해도 유정으로 하여금 생사에 침몰하게 하고 해탈과 성도(聖道)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의 탐은 각각 따로따로 순상분결을 세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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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나머지 세 가지는 두 세계를 합쳐서 하나로 세우는가?
[답] 나머지 세 가지도 세계에 의거하여 따로 세워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은 것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말한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 말과 갖가지 문자로써 말하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는 두 가지 문[二門]과 두 가지 길[二略]과 두 가지 섬돌[二階]과 두 가지 층계[二蹬]와 두 가지 광명[二明]과 두 가지 횃불[二炬]과 두 가지 무늬[二文]와 두 가지 그림자[二影]를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마치 애(愛)를 따로 2결(結)을 세우는 것처럼 도거와 만과 무명도 각각 두 가지로 세워야 하며 마치 도거 등은 두 세계를 합쳐서 세우는 것처럼 애도 그러해야 한다. 이와 같이 곧 순상분결은 여덟 가지가 되기도 하고, 혹은
네 가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두 가지 문과 나아가 두 가지 그림자를 나타내기 위하여 서로서로 밝게 비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또 애(愛)는 계별(界別)ㆍ지별(地別)ㆍ부별(部別)의 애로 하여금 온갖 번뇌를 키우고 자라게 하며 애는 애처(愛處)에서 말한 많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세계에 의하여 따로 2결을 세우지만 도거 등 세 가지에는 이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위의 두 세계를 합쳐서 하나로 세운다.
[문] 무엇 때문에 오직 수도에서만 끊어야 할 것으로 순상분결을 세우는가?
[답] 상생(上生)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순상분이라 하고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結)은 아래로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순상분결을 세우지 않는다.
또 상인(上人)이 행할 것을 순상분이라 한다. 상인이란 성자로 모든 이생이 아니다. 견도에서 끊어야 할 결은 오직 이생만이 일으키기 때문에 순상분결을 세우지 않으며 성자 중에서는 오직 불환자(不還者)가 일으키는 모든 결만을 순상분으로 세우는 것이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료. 무엇 때문에 예류(預流)와 일래(一來)가 일으키는 모든 결은 순상분이 아닌가?
[답] 순상분이란 상생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지만 예류와 일래가 일으키는 모든 결은 또한 아래에 태어나게 하기 때문에 순상분결을 세우지 않는다.
또 만일 세계를 초월하고 또한 과(果)를 얻는다면 그가 일으키는 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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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 / 1338] 쪽
순상분으로 세우겠지만 예류와 일래는 비록 과는 얻는다 해도 세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 아니다.
또 만일 세계를 초월하고 또한 불선(不善)의 번뇌를 끊어 다한 이면 일으키는 모든 결은 순상분으로 세우겠지만 예류와 일래는 두 가지 일을 다 같이 궐(闕)하기 때문에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 아니다.
또 만일 세계를 초월하고 순하분결(順下分結)도 끊고 다한 이면 그가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라 하겠지만 예류와 일래에는 두 가지 일이 다 같이 궐하기 때문에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 아니다.
또 순상분결과 순하분결은 소의(所依)가 각각 다르다. 만일 몸속에서 순상분결을 일으키면 그는 반드시 순하분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만일 몸속에서 순하분결을 일으키면 그는 반드시 순상분결을 일으키지 않는데 예류와 일래의 몸속에서는 순하분결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순상분결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 만일 다시 이생(異生)과 유사한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가 일으킨 결은 순상분으로 세우지만 예류와 일래는 오히려 다시 이생과 유사한 업을 나타내고 일으키기 때문에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 아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생과 유사한 업을 일으키는가? 여러 가지 색채를 즐겨 집착하고 향과 꽃을 바르고 장식하며, 금ㆍ은을 받아 저장하고 보물을 진귀하게 여기며 하인을 몰아 부리며 오히려 때리고 벌을 준다. 또한 남녀가 하나의 평상에 같이 있으면서 신체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고 매끄럽다[細滑]는 생각을 내고 또 부끄러워함이 없이 범행(梵行)이 아닌 일을 한다. 이런 것들을 이생과 유사한 업이라 한다.
또 만일 다시 정혈(精血:血適)에서 생겨 갈타사(羯吒私)9)를 더하고 어머니 태(胎)에 들어가 생장(生臧)ㆍ숙장(熟臧)10)의 두 중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이면 그가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라 하지만 예류와 일래에는 이런 일
9) 갈타사는 탐애(貪愛) 또는 혈관(血鑵)으로 번역한다.
10) 생장ㆍ숙장의 두 중간이라 함은 생장(生臧:胃)과 숙장(熟臧:大腸)의 중간이니 자궁(子宮)을 말한다. 곧 불환(不還)은 욕탐(欲貪)과 진에(瞋恚)를 끊었기 때문에 태 속에서 나는[胎生] 일이 없다.
을 용납함이 있기 때문에 일으킨 결은 순상분이 아니다.
마치 저 계경에서 “질달라(質怛羅) 거사(居士)가 모든 친우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아셔야 합니다. 나는 반드시 다시는 정혈에서 생겨 갈타사를 더하고 모태(母胎)에 들어가 생장ㆍ숙장의 두 중간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며 나는 이미 5순하분결을 영원히 끊었으므로 다시는 도로 물러나서 욕계의 생(生)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묘음 존자도 “탐욕과 진에의 결을 해탈한 이면 나는 모태에 드는 일을 해탈했다고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문] 순상분 중에서 도거의 자성은 결(結)인가? 가령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만일 결이라 한다면 『품류족론(品類足論)』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거기에 “어떤 것이 결의 법인가? 9결이다. 어떤 것이 결의 법이 아닌가? 9결을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법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결이 아니라 하면 이 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이 경에서 “어떤 것이 5순상분결인가? 색탐과 무색탐과 도거와 만과 무명이다”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결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 『품류족론』의 말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외국(外國)의 논사들이 독송[誦]하고 있는 것은 이것과 다르다. 그들은 “어떤 것이 결의 법인가? 9결과 순상분결 중의 도거이다. 어떤 것이 결의 법이 아닌가? 9결과 순상분결 중의 도거를 제외한 모든 그 밖의 법이다”라고 독송한다.
[문]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들은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독송하지 않는가?
[답] 여기서도 그와 같이 독송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독송하지 않는 것은 따로 의취(意趣)가 있어서이니 저 도거가 결인지 결이 아닌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거 성품의 일부분은 곧 결이니 위의 두 세계의 것이며 일부분은 결이 아니니 곧 욕계의 것이다. 혹 어떤 것은 결이며 곧 성자가 일으키는 것이요 혹 어떤 것은 결이 아니며 곧 이생이 일으키는 것이며 어떤 지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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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며 곧 이미 욕염(欲染)을 여읜 성자가 일으키는 것이요, 어떤 지위에서는 결이 아니며 곧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성자가 일으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도거는 위의 두 세계에서는 결인데 욕계에서는 결이 아닌가?
[답] 욕계는 정계(定界)가 아니고 수지(修地)가 아니며 이염지(離染地)가 아니어서 수승한 정혜(定慧)로 도거가 요란(擾亂)시키는 일이 됨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지만 색계와 무색계는 정계요 수지이며 이염지이여서 수승한 정혜로 도거가 요란시키는 일을 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결을 세운다. 마치 촌읍(村邑) 가까운 데서 비록 큰 소리를 지른다 해도 역시 탓할 거리가 되지 않지만 아련야 처소에서는 비록 작은 소리를 낸다 해도
탓할 거리가 되는 것과 같다.
또 욕계에서는 많은 그릇된 법의 번뇌로서 분(忿)ㆍ한(恨) 등과 같은 것이 있어서 도거를 막고 가리어 명료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지만 색계와 무색계에는 많은 이와 같은 그릇된 법의 번뇌로서 도거를 막고 가리는 것이 없어 명료하기 때문에 결을 세운다. 마치 촌읍 근처에서 악행을 하는 비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나 아련야 처소에서는 하는 악행이 비록 적다하더라도 쉬이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문] 혼침과 도거는 다 같이 삼계(三界)에 통하고 다 같이 6식(識)에 두루하며 다 같이 5부(部)에 통하고 아울러 온갖 염오의 마음[染汚心]과 함께하는데 무슨 연유로 도거는 순상분을 세우면서 혼침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답] 그 도거는 허물이 사납고 허물이 중하고 허물이 많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세워 순상분결을 삼으신 것이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10번뇌대지법(煩惱大地法) 가운데 두었고 또 이로 말미암아 외국(外國)에서 독송하고 있는 『품류족론』에서 “어떤 것이 결의 법인가? 9결과 순상분결 중의 도거이다”라고 말한 것이며 또 이로 말미암아 잡온(雜蘊)에서 이미 “어떤 것이 불공무명(不共無明)의 수면인가? 어떤 것이 불공도거(不共掉擧)의 전(纏)인가?”라고 물
은 것이다.
또 이로 말미암아 『시설론(施設論)』에서 “이생이 욕탐수면(欲貪隨眠)을 일으킬 때에는 다섯 가지 법이 일어난다. 첫째는 욕탐수면이요, 둘째는 욕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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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에 따라 나는 것[隨生]이며,[어떤 송에서는 욕탐수면의 증익(增益)이라고 한다.] 셋째는 무명수면(無明隨眠)이요, 넷째는 무명수면에 따라 나는 것이며,[어떤 송에서는 무명수면의 증익이라고 한다.] 다섯째는 도거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지만 혼침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순상분결로 세우지 않는다.
또 도거 전(纏)의 행상(行相)은 분명하고 예리하면서 짓는 것이 민첩하고 빠르며 5지(支) 4지(支)의 정혜(定慧)를 요란시키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순상분결을 세우셨다. 혼침의 행상은 어둡고 더디고 무뎌서 선정과 비슷하고 선정을 수순하기 때문에 혼침한 이는 빨리 선정을 일으키기 때문에 순상분결로 세우지 않는다.
또 혼침은 이미 무명의 등류(等流)이며 무명은 또 순상분결이어서 혼침을 막고 가리어 명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혼침은 순상분이 아니다.
[문] 상계(上界)에도 첨(諂)과 광(誑)과 교(憍)의 세 가지가 있는데 어째서 순상분결로 세우지 않는가?
[답] 모든 번뇌구(煩惱垢)는 거칠게 움직이면서 그치기가 쉽고 계박의 작용이 하열하기 때문에 모든 결 무더기[結聚] 안에 세우지 않는다.
곧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협(脅) 존자(尊者)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의 성(性)ㆍ상(相)ㆍ세용(勢用)을 아시므로 결을 세울 만한 것이면 세우셨고,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면 세우지 않으신 것이니 그러므로 책하지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묘음 존자는 “첨ㆍ광ㆍ교 등은 거칠게 움직이면서 그치기가 쉽고 결의 뜻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는 것이며 온갖 수면ㆍ전 중에서 일부분의 세울 수 있는 것으로 결을 삼았다”라고 말씀하셨다.
[論] 5견(見)이 있다.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이다.11)
11) 이 단(段)에서는 앞의 5순상분결(順上分結)이 순전히 정의적(情意的) 혹(惑)인 것에 반하여 혜(慧)를 자성으로 하는 순전히 지적(智的)인 혹은 5견을 밝힌다. 여기서 유신견이란 유루의 5온을 집착하면서 내가 실로 있다고 집착하는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을 말하고, 변집견이란 나라는 집착을 일으킨 위에 내가 죽은 뒤에는 길이 계속한다[常見]거나 아주 없어진다[斷見]거나 하는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말하며, 사견이란 도덕상의 인과(因
果)를 부정하여 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악의 두려움도 돌아보지 않는 잘못된 견해를 말하고, 견취란 졸렬한 지견(知見)이나 졸렬한 일을 취하여 스스로 훌륭한 견해라고 여기는 견해를 말하며, 계금취란 삿된 도를 고집해서 그것이 천상에 가 나는 인(因)이 되고 열반의 인이 된다고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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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5견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서른여섯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유신견과 변집견은 각각 삼계의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여섯 가지 일을 삼고 사견과 견취는 삼계의 4부에서 스물네 가지 일을 삼으며 계금취는 삼계에서 각각 견고와 견도(見道)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여섯 가지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5견은 서른여섯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견(見)이라 하는가, 견이란 무슨 뜻인가?
[답] 네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한다. 첫째는 철저히 보기[徹視] 때문이요, 둘째는 미루어 헤아리기[推度] 때문이며, 셋째는 굳게 붙잡기[堅執] 때문이요, 넷째는 깊이 소연(所緣)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철저히 보기 때문이라 함은 철저히 볼 수 있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문] 이 견은 이미 삿된 것이요 또 뒤바뀐 것인데 어떻게 본다[視]고 하는가?
[답] 비록 삿되고 뒤바뀌었다 해도 성품은 지혜[慧]이어서 소연(所緣)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본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경계를 볼 적에 밝거나 어둡거나 다 같이 본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미루어 헤아리기 때문이라 함은 사리를 미루어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문] 한 찰나 동안에 어떻게 미루어 헤아리는 것인가?
[답] 성품은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굳게 붙잡기 때문이라고 함은 견고하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이 견은 경계에 대하여 편벽되게 고집하면서 견고하므로 성스러운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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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칼이 아니면 버리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니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성스러운 지혜의 칼을 잡고 그 견해의 어금니[牙]를 끊어야 비로소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실수마라(室首魔羅)라는 바다의 짐승이 있는데 그가 깨문 것은 칼이 아니고서는 풀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가 만일 모든 초목을 물게 되면 반드시 그의 어금니를 끊어야 비로소 놓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게송에서의 말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이 받아 지니는 것은
철갑상어가 문 물건이요,
실수마라가 깨문 것이니
칼이 아니면 풀지 못한다.
깊이 소연에 들기 때문이라고 함은 성품이 맹렬하고 예리하여 깊이 소연에 드는 것이 마치 바늘이 진창에 떨어진 것과 같기 때문에 견이라 한다.
또 두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한다. 첫째는 자세히 살피면서 보기[觀視] 때문이요, 둘째는 결정해서 헤아리기[決度] 때문이다.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한다. 첫째는 모양을 보는[見相] 것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할 일[所作]을 이룩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경계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한다. 첫째는 의요(意樂) 때문이요, 둘째는 집착(執着) 때문이며, 셋째는 추구(推究) 때문이다.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한다. 첫째는 의요(意樂) 때문이요, 둘째는 가행(加行) 때문이며, 셋째는 무지(無知) 때문이다. 의요 때문이라고 함은 의요가 파괴되는 것을 말하고, 가행 때문이라고 함은 가행이 파괴되는 것을 말하며, 무지 때문이라고 함은 위의 두 가지가 다 같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또 의요 때문이라고 함은 삿되게 선정을 닦는 것을 말하고 가행 때문이라고 함은 삿되게 추구(推求)하는 것을 말하며 무지 때문이라고 함은 삿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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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듣는 것을 말한다.
이미 모든 견에 대한 전체의 뜻[總義]을 해설하였으므로 따로 하나하나의 뜻을 이제 해설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는가?
[답] 이 견해는 몸이 있는 것[有身]에 대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한다.
[문] 그 밖의 다른 견해도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는 것이 있으므로 그것도 유신견이라고 해야겠구료.
[답] 이 견해는 제 몸[自身]에 대하여 전개되고 남의 몸[他身]에 대하여 전개되는 것이 아니며,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고 몸이 없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나 그 밖의 다른 견해는 제 몸에 대하여 전개되기도 하고 혹은 남의 몸에 대하여 전개되기도 하며,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기도 하고 혹은 몸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전개되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제 몸에 대하여 전개된다고 함은 자계지의 연[自界地緣]12)을 말하고, 남의 몸에 대하여 전개된다고 함은 타계지의 연[他界地緣]을 말하며,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함은 유루의 연[有漏緣]13)이나 혹은 유위의 연[有爲緣]을 말하고, 몸이 없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함은 무루의 연[無漏緣]이나 혹은 무위의 연[無爲緣]을 말한다.
[문] 변집견도 제 몸에 대하여 전개되고 남의 몸에 대하여 전개되는 것이 아니며,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고 몸이 없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도 유신견이라고 해야겠구료.
[답] 뜻에는 비록 다 같이 있다 해도 처음에는 이름을 얻고 뒤에 붙인 이름
12) 자계지의 연이라 함은 십일(十一)의 변행혹(遍行惑) 중에서 구상연혹(九上緣惑)을 제외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遍執見)이 자기의 계(界)ㆍ지(地)를 두루 반연하는 것을 말하고, 타계지의 연이라 함은 구상연의 혹이 자타(自他)의 계ㆍ지를 두루 반연하는 것을 말한다.
13) 유루의 연이라 함은 유루의 법[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말하고, 무루의 연이라 함은 무루의 법[無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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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다시 그 밖의 다른 뜻을 따른다. 그것은 별도로 단(斷)과 상(常)의 한편에 치우쳐 고집하기 때문에 이런 뜻에 따라 변집견이라 한다.
또 이 견해는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면서도 아(我)와 아소(我所)를 고집하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비록 또한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해도 아와 아소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이 견해는 몸에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면서도 아와 아소의 행상을 짓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비록 또한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해도 아와 아소의 행상을 짓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 않는다.
또 이 견해는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면서도 ‘나는 짓고 나는 받는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비록 또한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해도 ‘나는 짓고 나는 받는다’라고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이 견해는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면서도 보시[施]ㆍ지계[戒]ㆍ수행[修]에 따르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비록 또한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해도 보시ㆍ지계ㆍ수행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이 견해는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되면서도 업과[業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유신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비록 또한 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전개된다 해도 업과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우 존자는 “이 견해는 다만 자기 몸에 대해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이니 곧 5취온(取蘊)을 자기의 몸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무슨 연유로 취온(取蘊)을 자기의 몸이라 하는가?
[답] 자기 인연의 힘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이요 자기의 업번뇌(業煩惱)로 얻는 과(果)이기 때문이다.
변집견(邊執見)에 대한 문답은 앞에서와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변집견이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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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 견해는 한편에 치우쳐[二邊] 고집하기 때문에 변집견이라고 한다. 단멸한다거나[斷] 항상하다거나[常] 하는 두 편에서 구르기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가다연나(迦多衍那)여, 만일 바른 지혜로써 세간의 집(集)을 사실대로 알고 보는 이면 세간에 대하여 없는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니 없다고 고집하는 것이 곧 단견(斷見)이다. 그가 만일 후생 몸이 생기는 것을 볼 때에는 ‘이와 같이 유정은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 가서 나는 것이므로 반드시 단멸하는 것이 아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바른 지혜로써 세간의 멸(滅)을 사실대로 알고 보는 이면 있는 것[有]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니 있다고 고집하는 것이 곧 상견(常見)이다. 그가 만일 모든 온(蘊)ㆍ계(界)ㆍ처(處)가 따로따로 상속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이 유정에게는 생기는 것이 있고 멸하는 것이 있으므로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또 이 견해가 고집하는 것이 극히 치우치고 비루하기 때문에 변집견이라 한다. 모든 외도는 실아(實我)가 있다고 고집하므로 이미 어리석고 야비하거늘 하물며 다시 아(我)를 고집하면서 단멸한다거나 항상한다고 하는데도 치우치고 비루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 견해가 고집하는 것이 극히 치우치며 멀기 때문에 변집견이라 한다. 모든 외도는 실아가 있다고 고집하므로 무아(無我)의 도리에서 이미 멀거늘 하물며 다시 아를 고집하며 단멸하다거나 항상한다고 하는데도 치우치며 먼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한편에 치우쳐서 고집하는 행상(行相)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변집견이라 한다. 단견ㆍ상견을 고집하는 두 가지 행상으로 구르는 것이다.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데도 세간은 나와 다투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이 경에서 하신 말씀의 뜻은 어떤 것인가?
[답] 세우 존자는 “세존께서는 결정코 인과(因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까닭이다. 부처님께서는 만일 상견외도(常見外道)로서 그가 ‘모든 법에는 결과[果]는 있되 원인[因]은 없으며, 원인이 없기 때문에 자성(自性)은 항상 있다[常有]’라고 하는 이를 만나면 세존께서는 ‘그대는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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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결과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대의 원인이 없다고 하는 말은 어리석은 이론이다’라고 하신다.
세존께서는 만일 단견외도(斷見外道)로서 그가 ‘모든 법에는 원인은 있으되 결과는 없으며, 결과가 없기 때문에 장차 오는 세상에 단멸(斷滅)한다’고 하는 이를 만나면 세존께서는 ‘그대는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데 나도 원인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대의 결과가 없다고 하는 말은 어리석은 이론이다’라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이론에 대하여 각기 한쪽은 인정하되 단견도 여의고 상견도 여의면서 중도(中道)를 말하시므로 “나는 세간과 다투지 않는데도 세간을 나와 다투는구나”라고 하신 것이다.
또 세존은 여법론자(如法論者)요 모든 외도들은 비법론자(非法論者)이다. 법답게[如法] 논하는 이면 법이 으레 그러하여 다툼이 없지만 그릇된 법[非法]으로 논하는 이면 으레 그러하여 다툼이 있다.
또 부처님께서는 세속(世俗)에 대하여 세간을 수순하지만 그들은 승의(勝義)에 대하여 부처님을 수순하지 않는다.
또 세존께서는 두 가지 쟁근[二諍根]을 잘 끊으셨기 때문이니 두 가지 쟁근이란 애(愛)와 견(見)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영원히 끊으셨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고 말하지만 세간은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에 다툼이 있다고 말한다.
대덕(大德)은 “세존은 여리론자(如理論者)요 모든 외도들은 비리론자(非理論者)이다. 도리답게[如理] 논하는 이면 법이 으레 그러하여 다툼이 없지만 그릇된 도리[非理]로 논하는 이면 법이 으레 그러하여 다툼이 있는 것이니 마치 말이 험한 길을 갈 적에는 걸음이 들쭉날쭉하지만 만일 평탄한 길이면 가는 것이 고르고 편안한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처님께서는 뜻[義]을 보고 법(法)을 보며 선(善)을 보고 조유(調柔)를 보시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고 말하지만 세간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다툼이 있다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사견(邪見)이라 하는가?
[답] 삿되게 헤아리기[推度] 때문에 사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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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만일 그렇다면 5견(見)은 모두 삿되게 헤아리는 것인데 어찌 유독 이것만을 사견이라 하는가?
[답] 별도의 행상(行相)에 의거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별도의 행상이란 ‘없다[無]’고 하는 행상을 말한다. 만일 이것에 의거하여 붙인 이름이 아니라면 다섯 가지도 모두 사견이라 할 것이니 5견은 모두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다고 하는 행상은 허물이 너무도 중하기 때문에 오직 이것에 의거해서만 사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며 또한 일[事]도 파괴하면 사견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네 가지 견해는 비록 삿되게 미루어 헤아린다 해도 일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인과(因果)을 비방하면 사견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네 가지 견해는 삿되게 미루어 헤아린다 해도 인과를 비방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보시[施]ㆍ지계[戒]ㆍ수행[修]과 지극히 서로 어긋나면 사견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견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와 정등보리(正等菩提)와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비방하면 사견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견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두 가지 은혜[二恩]를 파괴하면 사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견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두 가지 은혜라 함은 법은(法恩)과 생은(生恩)을 말한다. 법은을 파괴한다 함은 “베풀어 줄 것[施與]도 없고 좋아할 것[愛樂]도 없으며 제사 지낼 것[祠祀]도 없고 묘한 행[妙行]도 없으며 나쁜 행[惡行]도 없고 묘한 행이거나 나쁜 행의 업과(業果)의 이숙(異熟)도 없으며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생은을 파괴한다고 함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화생(化生)하는 유정도 없고 세간에는 참된 아라한과 정지(正至)와
정행(正行)도 없다.14)……(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는 것이
14) 정지는 열반(涅槃)을 말하고 정행은 고지통행(苦遲通行)ㆍ고속통행(苦速通行)ㆍ낙지통행(樂遲通行)ㆍ낙속통행(樂速通行)의 4종통행을 말한다.
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두 가지 원한[二怨]을 일으키면 사견이라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견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두 가지 원한을 일으킨다고 함은 첫째는 법원(法怨)을 일으키고, 둘째는 생원(生怨)을 일으키는 것이다. 법원을 일으킨다고 함은 “베풀어 줄 것도 없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는 것이요, 생원을 일으킨다고 함은 “부모도 없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만일 삿되게 미루어 헤아리면서 현량(現量)을 파괴하면 사견이라고 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견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훨훨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세간을 속이기 위하여 “나는 쾌락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견을 지닌 유정도 그와 같아서 갖가지 고통의 온(蘊)ㆍ계(界)ㆍ처(處) 안에 있으면서 사견에 마음이 얽혔으나 “나에게는 고통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현량을 파괴한다고 한다.
또 만일 삿되게 헤아리면서 포악(暴惡)하다고 하면 사견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모든 사견을 지닌 이는 그 견해의 힘에 따라 있는 모든 신업과 어업과 생각해서 구하는 원행(願行)과 그런 종류의 온갖 것은 사랑할 수 없고[不可愛] 기뻐할 수 없으며[不可熹] 좋아할 수 없고[不可愛] 뜻에 맞지 않은[不可意] 과(果)를 불러오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견은 포악한 견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 견해는 삿되게 미루어 헤아린다 해도 포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로 이름을 붙인다.
[문] 무엇 때문에 견취(見取)라 하는가?
[답] 이것은 모든 견해를 취(取)하기 때문에 견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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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것은 5취온(取蘊)을 모두 다 취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견취라고만 하는가?
[답] 이것은 모든 견해로 인하여 5온을 모두 취하기 때문에 다만 견취라고 할 뿐이다.
또 어떤 모양[相] 때문에 견취라는 이름을 세우는가 하면 만일 견해를 취하거나 그 밖의 다른 온(蘊)을 취하면서 가장 뛰어나다고 집착하면 견취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이것은 견등(見等)을 취한다고 해야 하는데 등(等)이라는 말은 생략하고서 다만 견취라고만 한다.
또 이것은 견해를 취함이 많기 때문에 견취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계금취(戒禁取)라 하는가?
[답] 이것은 모든 계금(戒禁)을 취하기 때문에 계금취라 한다.
[문] 이것은 5취온을 모두 다 취하는데 무엇 때문에 계금취라고만 하는가?
[답] 이것은 계금으로 인하여 5온을 모두 다 취하기 때문에 다만 계금취라고만 한다.
또 행상(行相)으로써 계금취라고 한다. 계금을 취하거나 그 밖의 다른 온(蘊)을 취하면서 ‘청정하게 한다’고 고집하는 것을 계금취라고 한다.
또 이 견해는 계금 등의 취[戒禁等取]라고 해야 하는데 등(等)이라는 말은 생략한 까닭에 다만 계금취라고만 한다.
또 이것은 계금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계금취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두 가지 견해는 다 같이 취(取)라고 한 것인가?
[답] 이 두 가지 견해로 말미암아 취의 행상[行相]이 전개되기 때문에 다 같이 취라고 한다. 유신견은 아와 아소를 고집하고 변집견은 단ㆍ상을 고집하며 사견은 없다고 고집하는데 이런 모든 견해를 취하면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하기 때문에 견취라 하는 것이요 모든 계금은 청정하게 된다는 것을 취하기 때문에 계금취라고 한다.
또 앞의 세 가지 견해는 소연(所緣)을 미루어 헤아리는 세력과 작용이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견(見)이라 하고 뒤의 두 가지 견해는 능연(能緣)을 집수(執受)하는 세력과 작용이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취(取)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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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論] 6애신(愛身)이 있다. 눈의 접촉으로 생긴[眼觸所生] 애신(愛身)과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과 뜻[意]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이다.15)
이와 같은 애신은 한 가지[一種]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9결(結) 중에서 삼계의 모든 애(愛)를 통틀어서 애결(愛結)이라고 세운 것과 같다.
혹은 두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7수면(隨眠) 중에서 욕계의 애를 욕탐(欲貪)의 수면으로 세우고 색계ㆍ무색계의 애를 유탐(有貪)의 수면으로 세운 것과 같다.
혹은 세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계경에서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3애하(愛河)라 함은 곧 삼계의 애(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은 네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계경에서 “어떤 비구와 비구니들은 의복(衣服)으로 인하고 음식(飮食)으로 인하며 침구[臥具]로 인하고 있는 것[有]ㆍ없는 것[無有]으로 인하여 애(愛)가 생기는 때에 생기고 머무르는 때에 머무르며 집착하는 때에 집착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혹은 다섯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견고(見苦)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 끊어야 할 애이다.
혹은 아홉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상상품(上上品) 나아가 하하품(下下品)의 애이다.
혹은 열여덟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18애행(愛行)16)과 같고 혹은 서
15) 여기서는 애(愛)를 인식기관(認識器官)에 배분하여 애의 성질과 특징을 밝히는 문단이다. 곧 인식기관인 6근(根)이 그 대상이 되는 6경(境)을 반연하여 6식(識)을 내고 이 세 가지[三:根ㆍ境ㆍ識]가 화합하여 감촉[觸]을 내며 감촉이 있기 때문에 느낌[受]을 내고 느낌이 연(緣)이 되어 탐애[愛]가 생기기 때문에 접촉으로 생긴 애[觸所生愛]라고 한다. 이 애가 한 찰나의 것만이 아니고 많은 찰나에 걸쳐 쌓이고 모이는 때를 애신(愛身)이라
한다.
16) 18애행이라 함은 광기(光記)에 의하면 6경(境)을 반연하여 일으키는 애(愛)의 행(行)을 각각 과거[曾]ㆍ미래[當]ㆍ현재[現]의 3세(世)에 배대하면 18이 된다고 한다. 36애행은 위의 18애행을 욕계와 상이계(上二界)에 분별하여 36의 애행을 얻으며 다시 이것을 3세에 배당하면 108의 애행이 된다고 한다.(36애행과 108애행의 분류 방법에는 좀 불분명한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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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여섯 가지라고 해야 하니, 마치 36애행과 같으면 혹은 백여덟 가지라고 말해야 하니 마치 108애행과 같다. 만일 몸에 있는 찰나(刹那)로써 분별하면 한량없는 애가 있다.
[문]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한 종류의 애(愛) 등보다는 광대하고 한량없는 애 등보다는 간략한 6애신(愛身)을 말씀하시는가?
[답] 소의(所依)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애로부터 한량없는 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6근(根)ㆍ6문(門)ㆍ6계(階)ㆍ6등(蹬)ㆍ6적(跡)ㆍ6로(路)ㆍ6중(衆)에 의하여 나오고 6식(識)과 상응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다만 6애신만을 말한다.
[문] 진에와 무명도 6근에 의하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6식과 상응하는데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6애신을 말씀하셨으나 6진(瞋)과 6무명의 신(身)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말씀하셔야 하는데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이 뜻에는 그 밖의 다른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이미 애신(愛身)을 말씀하셨으므로 진에와 무명의 신도 말씀하신 줄 알아야 하니 소의가 같기 때문이다.
또 애는 삼계에 다 통하고 홀로 행하면서 6식에 두루하기 때문에 신(身)이라고 말하지만 진에는 비록 또한 홀로 행하면서 6식에는 두루하다 해도 삼계에는 통하지 않고 무명은 비록 또한 삼계에는 통한다 해도 홀로 행하며 6식에는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 애는 삼계에 다 통하고 홀로 행하면서 6식에 두루하여 이생과 성자에 다 같이 현행하게 되기 때문에 신이라고 말하지만 진에는 비록 또한 홀로 행하면서 6식에 두루하여 이생과 성자에 다 같이 현행하게 된다 해도 삼계에는 통하지 않으며 무명은 비록 또한 삼계에 통하여 이생과 성자에 다 같이 현행하게 된다 해도 홀로 행하면서 6식에는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 애는 모든 세계[界]와 모든 지(地)와 모든 부(部)를 분별하면서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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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번뇌를 생장시키기 때문에 신을 세우지만 진에와 무명에는 이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 무엇 때문에 신(身)이라 하는가?
[답] 많은 애가 쌓여 모였기[積集] 때문에 신이라 한다. 한 찰나 동안의 눈의 접촉으로 생긴[眼觸所生] 애를 눈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愛身)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여러 찰나 동안의 눈의 접촉으로 생긴 애라야 비로소 눈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이라고 한다. 나아가 뜻[意]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마치 하나뿐인 코끼리는 상군(象軍)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여러 마리 코끼리가 모여야 비로소 상군이라 하는 것과 같으며 마군(馬
軍)과 보군(步軍)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 때문에 많은 애[多愛]를 비로소 애신이라 한다.
[문] 유신견(有身見) 등도 많이 쌓여 모인 것이므로 신이라고 해야 하는데 어째서 유독 애만을 신이라 하는가?
[답] 유신견 등에서도 신이라고 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것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유신견 등은 오직 의지(意地)에만 있고 5식(識)에는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문]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와 혼침(惛沈)과 도거(掉擧)도 6식에 다 통하는데 무엇 때문에 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역시 신이라고 해야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은 여기에는 그 밖의 다른 말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앞에서 “삼계에 통하고 홀로 행하면서 6식에 두루한 것을 신(身)이라고 한다”고 말했는데 혼침과 도거는 비록 삼계에는 통한다 해도 홀로 행하면서 6식에는 두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라고 할 수 없으며 무참과 무괴에서는 두 가지 뜻이 모두 궐(闕)하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수면(隨眠)은 미세하고 세력과 작용이 더욱 강한 것이므로 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전(纏)과 구(垢)는 거칠게 움직이며 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앞에서 “애는 모든 세계와 모든 지와 모든 부를 분별하기 때문에 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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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다”고 말했는데 유신견 등에서도 이와 같은 뜻이 없으므로 오히려 신이라 하지 않거늘 하물며 전과 구에 있어서이겠는가?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5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 불선납식 ⑤
[論] 7수면(隨眠)이 있다. 욕탐(欲貪)수면ㆍ진에(瞋恚)수면ㆍ유탐(有貪)수면ㆍ만(慢)수면ㆍ무명(無明)수면ㆍ견(見)수면ㆍ의(疑)수면이다.
[문] 이 7수면은 무엇으로써 자성(自性)을 삼는가?
[답] 아흔여덟 가지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욕탐과 진에의 수면은 각각 욕계의 5부(部)에서 열 가지의 일을 삼고, 유탐의 수면은 색계와 무색계의 각각 5부에서 열 가지의 일을 삼으며, 만과 무명의 수면은 각각 삼계의 5부에서 서른 가지의 일을 삼고, 견의 수면은 삼계에서 각각 열두 가지씩 서른여섯 가지의 일을 삼으며, 의의 수면은 삼계의 각각 4부에서 열두 가지의 일을 삼는다. 이로 말미암아 이 7수면은 아흔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이제 그 까닭을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수면(隨眠)이라 하는가? 수면이란 무슨 뜻인가?
[답] 미세하다[微細]는 뜻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隨增]는 뜻이며, 따라다니며 속박한다[隨縛]는 뜻이니 이것이 수면의 뜻이다.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탐 등 일곱 가지가 행상(行相)이 미세하여 마치 7극미(極微)로 1세색(細色)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탐 등 일곱 가지가 두루 온갖 미세한 유루(有漏)에 모두 다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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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1극미 혹 1찰나 동안에 욕탐 등의 일곱 가지는 모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마치 허공을 다니는 것[空行]의 그림자를 물에서 다니는 것[水行]이 따라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허공을 다니는 것이란 새를 말하고 물에서 다니는 것이란 고기를 말한다. 새가 날개의 힘으로 큰 바다를 건너려 할 적에 물속에서는 어떤 고기가 그 형상을 잘 취하면서 ‘날아다니는 새로서 날쌔고 빠른 묘시조왕(妙
翅鳥王)을 제외하고는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곧 그 그림자를 좇아가다가 새가 물에 떨어지면 고기는 덥석 잡아 삼키는 것이니 이와 같아서 수면은 온갖 자리에서 한결같이 득(得)을 나타내고 일으키어 도리 아닌[非理] 작의(作意)가 앞에 나타날 때에는 곧 등류과(等流過)나 혹은 이숙과(異熟過)를 받게 된다.
또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자성(自性)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작용(作用)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며,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그 득(得)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자성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상속(相續)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며,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습기(習氣)의 견고함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과거의 수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현재의 수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며,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미래의 수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행상(行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소연박(所緣縛)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며,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상응박(相應縛)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또 미세하다는 뜻과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상응하는 수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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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뜻이라 함은 상응하지 않는 수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문] 수면은 모두 마음[心] 등과 상응하는데 어떻게 상응하지 않은 것에 의거하여 말한다고 하는가?
[답] 여기서는 득(得)에 대하여 수면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수면을 얻었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말한다.
외국(外國)의 논사들은 “네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수면이라 한다. 미세하다[微細]는 뜻이요 따라다니며 들어간다[隨入]는 뜻이며,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隨增]는 뜻이요 따라다니며 속박한다[隨縛]는 뜻이니 이것이 수면의 뜻이다.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탐 등의 자성과 행상이 다 같이 극히 미세하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다니며 들어간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탐 등이 따라다니며 들어가 상속하면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마치 기름이 깨[麻]에 있고 비계가 고기덩이 속에 있어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며,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탐 등이 상속하는 동안에 상호교대로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는 것은 마치
아이와 유모(乳母)와 같다는 말이요,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마치 허공에 다니는 것[空行]의 그림자를 물에 다니는 것[水行]이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또 미세하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자성(自性)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들어간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상응(相應)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며,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행상(行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요, 따라다니며 속박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그것의 득(得)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 가지 일로써 모든 수면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自性) 때문이요, 둘째는 과보[果] 때문이며, 셋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 때문이다.
자성 때문이라 함은 욕탐수면은 마치 흥거(興蕖)를 먹는 것과 같고 진에수면은 마치 매운 것[辛辣]을 먹은 것과 같으며, 유애수면은 마치 유모(乳母)의 옷과 같고 만수면은 마치 교만한 사람과 같으며, 무명수면은 마치 눈먼 장님과 같고 견수면은 마치 길을 잃은 이와 같으며, 의수면은 마치 갈림길[岐路]에 이른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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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 때문이라 함은 욕탐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비둘기ㆍ참새ㆍ원앙새 등의 무리에 나고, 진에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벌ㆍ전갈ㆍ독사의 무리에 나며, 유탐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색계와 무색계에 나고, 만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낮고 천한 종족(種族)에 태어나며, 무명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어리석고 장님의 종족에
나고, 견의 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외도(外道)의 종족에 태어나며, 의수면을 만일 익히거나 닦거나 짓는 것이 많으면 장차 변방의 비루한 종족에 태어난다.
보특가라 때문이라 함은 욕탐수면은 마치 난타(難陀)1) 등과 같고 진에수면은 마치 기허(氣噓)와 지만(指鬘) 등과 같으며, 유탐수면은 마치 알새다(遏璽多)와 아라도(阿邏荼)와 올달락가(嗢達洛迦) 등과 같고 만수면은 마치 오사(傲士) 등과 같으며, 무명수면은 마치 오로빈라바가섭파(鄔盧頻螺婆迦葉波) 등과 같고 견수면은 마치 선성(善星) 등과 같으며, 의수면은 마치 마
1) 난타는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의 약칭이다. 그는 그의 아내에게 빠져서 출가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부처님은 방편을 써서 그를 교화하여 아라한의 과를 얻게 했다. 기허는 누구인가가 분명하지 않다. 지만[央崛摩羅]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사위성(舍衛城)에 살면서 진에(瞋恚)의 마음을 일으켜 999인을 살해한 뒤에 그 손가락을 끊어서 다발을 만들어 목에다 걸고는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여 천 사람을 채우려 할 적에 부처님을 만나 교화된 이
다. 아사다(阿私多)는 석존께서 탄생하실 적에 점을 쳐 준 사람으로서 그때 나이 120살이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죽어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났다.(『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아라도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수행하실 적에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을, 올달락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아사다와 함께 이 세 사람을 유탐수면의 예로 인용한 것이다. 오사[摩那答陀]는 아주 몹시 교만을 부린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는데 부처님께서 그를 교화시켰다. 오로빈라바가섭파는 삼가섭파(三迦葉波)의 한 사람으로서 아주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이었는데 부처님께서 교화하셨다. 선성은 출가하여 12부경(部經)을 독송하여 욕계의 번뇌를 끊고 제4 선정을 얻었다가 악한 친구와 사귀어 퇴실하고 인과를 부정하는 사견을 일으켜 부처님께 나쁜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한다.(『열반경(涅槃經)』 33권) 마락가자[鬘童子]는 부처님께 대하여 “세간은
항상 있는 것입니까, 무상한 것입니까?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 계시는 것입니까,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의심을 낸 사람이다.(『중아함경(中阿含經)』 제60권, 『전유경(箭喩經)』 제10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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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가자(摩洛迦子) 등과 같다.
[문] 질(嫉)과 간(慳)은 무엇 때문에 수면으로 세우지 않는가?
[답] 그 두 가지는 수면에는 상(相)이 없기 때문이요 또 수면은 미세하지만 그 두 가지는 거칠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 수면은 경미(輕微)하지만 그 두 가지는 너무도 중하기 때문이며 또 수면은 사납고 예리하지만 그 두 가지는 자주자주 행하기 때문이다.
또 수면은 근본번뇌(根本煩惱)이지만 그 두 가지는 번뇌의 등류(等流)이다. 질은 진(瞋)의 등류요 간은 욕탐(欲貪)의 등류이다.
또 수면은 습기(習氣)가 견고한 것이 마치 이 땅에서 담산목(擔山木)을 태우면 불이 꺼진 지 오래라 하더라도 그 땅이 여전히 더운 것과 같지만 그 두 가지는 견고하지 않은 것이 마치 이 땅에서 풀이나 벚나무 껍질을 태우면 불이 꺼지자마자 그 땅이 이내 식어 버린 것과 같다.
또 수면은 조복하기 어렵지만 그 두 가지는 조복하기 쉽기 때문에 그 두 가지는 수면으로 세우지 않는다.
그 밖의 나머지 전(纏)과 구(垢)는 이 두 가지에 준(准)하여 말해야 한다.
[論] 9결(結)이 있다.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무명결(無明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의결(疑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
[문] 이 9결은 무엇으로써 자성을 삼는가?
[답] 백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애결ㆍ만결ㆍ무명결은 각각 삼계(三界)의 5부(部)에서 마흔다섯 가지의 일을 삼고 에결은 오직 욕계의 5부에서만 다섯 가지의 일을 삼으며, 견결은 열여덟 가지의 일이 있으니 유신견과 변집견은 각각 삼계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여섯 가지의 일을 삼고 사견(邪見)은 삼계의 각각 4부에서 열두 가지의 일을 삼는다.
취결은 열여덟 가지의 일이 있으니 견취는 삼계의 각각 4부에서 열두 가지의 일을 삼고 계금취는 삼계의 각각 견고ㆍ견도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여섯 가지의 일을 삼는다. 의결은 삼계의 각각 4부에서 열두 가지의 일을 삼으며 질결ㆍ간결은 각각 욕계의 수도에서 끊어야 할 것에서 두 가지의 일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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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이로 말미암아 9결은 백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미 자성을 말했으므로 그 까닭을 이제 말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결(結)이라 하는가? 결이란 무슨 뜻인가?
[답] 얽어맨다[繫縛]는 뜻이요 고통이 합한다[合苦]는 뜻이며 독이 섞였다[雜毒]는 뜻이니 이것이 결의 뜻이다. 그 밖의 자세한 해석은 3결(結)에서 이미 모든 결의 전체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으며 하나하나의 자성에 대해서는 이제 자세히 말하겠다.
어떤 것이 애결(愛結)인가 하면 삼계의 탐(貪)이다. 삼계의 탐은 9결에서는 통틀어 애결을 세웠고 7수면에서는 두 가지 수면을 세웠으니 욕계의 탐을 욕탐수면이라 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탐을 유탐수면이라 하며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3애(愛)를 세웠으니 욕애(欲愛)와 색애(色愛)와 무색애(無色愛)이다.
[문] 이 세 가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답] 세존께서는 교화할 이의 근기[根]에는 세 가지가 있으므로 근기가 예리한 이[利根者]를 위해서는 하나의 애결을 말씀하셨고, 근기가 중간인 이[中根者]를 위해서는 두 가지 수면을 말씀하셨으며, 근기가 둔한 이[鈍根者]를 위해서는 삼계의 애를 말씀하셨다.
또 세존께서는 교화할 이의 수행[修]에 세 가지가 있으므로 처음 업을 닦는 이[初習業者]에게는 하나의 애결을 말씀하셨고, 이미 수행이 완숙한 이[已熟修者]에게는 두 가지의 수면을 말씀하셨으며, 작의가 뛰어난 이[超作意者]에게는 삼계의 애를 말씀하셨다.
또 세존께서는 교화할 이의 좋아하는[樂] 데에 세 가지가 있으므로 간략함[略]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하나의 애결을 말씀하셨고, 자세함[廣]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삼계의 애를 말씀하셨으며, 간략함과 자세함을 다 좋아하는 이에게는 두 가지의 수면을 말씀하셨다.
또 고통이 합한다는 뜻이 결의 뜻이라 함은 삼계의 탐은 다 같이 유정으로 하여금 고통이 합해져서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애결을 세우신 것이요,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한다는 뜻이 수면의 뜻이라 함은 욕계의 탐은 바깥 문[外門]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고 색계ㆍ무색계의 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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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문[內門]에 따라다니며 허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에 두 가지 수면을 세우신 것이며, 경계에 물든다[染境]는 뜻이 애(愛)의 뜻이라 함은 염착(染著)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경계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삼계의 애를 세우신 것이다.
어떤 것이 에결(恚結)인가 하면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이다.
[문] 가령 유정이 아닌 것[非情]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는 것도 진에(瞋恚)인데 무엇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는가?
[답] 많은 것을 좇아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에결은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는 것이 많고 유정이 아닌 것에서는 적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 중한 것을 좇아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유정에게 손해를 끼치려는 것은 그 죄가 심히 중하지만 유정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 근본을 쫓아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에결은 반드시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 한 뒤에야 비로소 유정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생각에 의거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유정이 아닌 것에 대하여 만일 에결을 일으킨다면 또한 그것에 대해서 유정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유정에 대하여 일으킨다고 말씀하실 뿐이다.
어떤 것이 만결(慢結)인가 하면 7만(慢)이다. 첫째는 만(慢)이요, 둘째는 과만(過慢)이며, 셋째는 만과만(慢過慢)이요, 넷째는 아만(我慢)이며, 다섯째는 증상만(增上慢)이요, 여섯째는 비만(卑慢)이며, 일곱째는 사만(邪慢)이다.
만이라 함은 자기보다 못한 이에 대하여는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여기고 같은 이에 대하여는 자기와 같다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요, 과만이라 함은 자기와 같은 이에 대하여는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여기고 자기보다 훌륭한 이에 대하여는 자기와 같다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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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과만이라 함은 자기보다 훌륭한 이에 대하여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요, 아만이라 함은 5취온(取蘊)에 대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며, 증상만이라 함은 아직 뛰어난 덕[勝德]을 얻지 못했는데도 자기는 이미 얻었다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다.
비만이라 함은 자기보다 훨씬 훌륭한 다른 이에 대하여 자기가 조금 못하다고 여기면서 높은 체하며 뽐내는 것이요, 사만이라 함은 실로 전혀 덕이 없으면서도 자기는 덕이 있는 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와 같은 7만을 통틀어 만결이라 한다.
어떤 것이 무명결(無明結)인가 하면 삼계의 무지(無知)이니 이 말이 옳다 할 것이다. 만일 “삼계를 반연하는 무지이다”라고 말한다면 무루의 연[無漏緣]의 무명은 속하지 못한다.
어떤 것이 견결(見結)인가 하면 3견(見)이니 유신견과 변집견과 사견을 통틀어 견결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취결(取結)인가 하면 2취(取)이니 견취와 계금취를 통틀어 취결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5견(見) 중에서는 3견은 견결을 세우고 2견은 취결을 세우는가?
[답] 고통이 합하여질[合苦] 때에 이름[名]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앞의 3견은 똑같이 여성 명사[女名]요 뒤의 2견은 똑같이 남성 명사[男名]이니 견(見)은 여성형의 음[女聲]2)요 취(取)는 남성형의 음[男聲]3)이기 때문이다.
또 고통이 합하여질 때에 일[事]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견결과 취결에서는 저마다 열여덟 가지씩의 일[十八事]을 포섭하게 된다.
또 수면을 포섭하는 데서도 동등하기 때문이다. 견결과 취결은 98수면 가운데서 저마다 열여덟 가지씩을 포섭하게 된다.
또 앞의 3견은 미루어 헤아려도[推度] 집수(執受)가 아니기 때문에 합하여 견결을 세우고, 뒤의 2견은 미루어 헤아리면서 또한 집수이기 때문에 합
2) 견(見)의 원어(原語)인 dṛṣṭi는 여성명사임을 말한다.
3) 취(取)의 원어인 parāmarśa는 남성명사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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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취결로 세운다.
또 앞의 3견은 다 같이 경계[境]를 미루어 헤아리기 때문에 합하여 견결을 세우고, 뒤의 2견은 다 같이 견해[見]를 미루어 헤아리기 때문에 합하여 취결을 세운다.
어떤 것이 의결(疑結)인가 하면 진리[諦]에 대하여 망설이는 것[猶豫]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진리에 대하여 망설이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데 서 있는 물건을 보고 곧 망설이면서 ‘말뚝인가, 사람인가? 만일 그것이 사람이라면 남자인가, 여인인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두 개의 길을 보고 망설이면서 ‘이것은 가야 될 길인가, 가서는 안 될 길인가?’라고 하기도 하며 두 개의 의발(衣鉢)을 보고 또한 망설이면서 ‘이것이 내 것인가, 다른 이의 것인가?’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이런 것들이 진실한 의결(疑
結)인가?’라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심으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요 지금의 이런 의심은 다만 욕계 무부무기의 삿된 지혜[邪智]만을 체(體)로 삼은 것이라 진실한 의결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진실한 의결이란 고(苦) 등의 4제(諦)에 대해 망설임을 말한다.
어떤 것이 질결(嫉結)인가 하면 마음의 시샘[妬忌]이다.
어떤 것이 간결(慳結)인가 하면 마음의 인색[悋護]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 모양의 차별을 말하는가?
[답] 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간 사람들은 질투하는 것을 간탐이라 여기고 간탐하는 것을 질투라고 여긴다.
질투하는 것을 간탐이라 여긴다고 함은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이가 얻은 좋은 일을 보고 마음에 시샘을 내면 ‘간탐을 부린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은 시샘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질투이지 간탐이 아니다.
간탐하는 것을 질투라고 여긴다 함은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이가 아내 등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을 보면 ‘질투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은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니 이것은 간탐이지 질투가 아니다. 그런 의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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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질과 간의 두 모양의 차별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10전(纏) 중에서는 오직 간과 질만을 세우면서 결(結)을 삼는가?
[답] 오직 이 두 가지의 전(纏)만 결의 상(相)이 있고 그 밖의 나머지는 결의 상이 없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는다.
또 뒤의 것으로 처음의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다만 두 가지만을 말한다. 10전 중에서 질과 간이 맨 뒤에 있으므로 뒤의 것을 말하면서 결을 삼으면 이미 처음의 것이 드러나게 된다.
또 질과 간은 홀로 서면서[獨立] 두 가지를 여의기 때문에 세워 결로 삼지만 나머지의 전은 그렇지 못하다. 홀로 선다고 함은 제 힘으로 현행(現行)하는 것을 말하고 두 가지를 여읜다고 함은 한결같이 불선(不善)인 것을 말한다.
분(忿)과 부(覆) 두 가지 전은 비록 홀로 서면서 또 두 가지를 여읜다 해도 수면(隨眠)과 비슷하여 수면의 상(相)에 압도되어서 그 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는 것이니 이런 이치 때문에 외국(外國)의 논사들은 이 두 가지를 곧 ‘수면의 성품’이라고 말한다.
혼침(惛沈)과 도거(掉擧)는 홀로 설 수도 없고 남의 힘으로 일어나기 때문이요 또한 두 가지를 여의지 못하여 혹은 불선이기도 하고 혹은 무기(無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면(睡眠)과 악작(惡作)은 비록 또한 홀로 선다 해도 둘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니 수면은 선ㆍ불선ㆍ무기에 다 통하고 악작은 선ㆍ불선의 성품에 모두 통하기 때문이다.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비록 두 가지를 여읜다 해도 홀로 서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질과 간만은 홀로 서고 두 가지를 여의면서 수면의 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세워서 결을 삼는다.
또 질과 간은 가장 비루하고 하천하여 깊이 싫어하면서 헐뜯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세워서 결로 삼는다.
또 질과 간은 심히 잡되고 못되어서 바른 도리에 위배되기 때문에 결로 세우는 것이니 남의 번영과 훌륭한 일이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가 없는데 무슨
유로 남에게 멋대로 샘을 내는 것이며 또 비록 백천의 재보가 쌓여 있다 해도 끝내 일전도 저 세상으로는 가져가지 못하는데 무슨 연유로 악착스레 아끼면서 남에게 보시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또 두 가지의 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생사 안에서 많은 훼방과 욕[毁辱]을 받게 한다. 첫째는 위덕(威德)이 없는 것이요, 둘째는 극히 빈궁한 것이다. 위덕이 없는 이는 많은 질투로 말미암아서요, 극히 빈궁한 이는 많은 간탐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만일 위덕도 없으면서 극히 빈궁하면 부모ㆍ형제ㆍ처자와 아이종조차도 그를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친족이 아닌 이겠는가? 그러므로 10전 중에서 이 두 가지를 세워 결을 삼는다.
또 질과 간은 저 욕계 유정에게는 마치 옥졸과 경비원[防捍者]과 같다. 마치 어떤 죄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두 옥졸이 지키면서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고 또 어떤 깨끗하게 장엄한 동산 숲[園林]에 두 사람의 경비가 있으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감옥은 악취(惡聚)에 비유하고 동산 숲은 인간ㆍ천상에 비유하며 옥졸과 경비원은 질과 간에 비유한 것이니 욕계의 유정을 악취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다시 인간ㆍ천상의
동산에 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질과 간의 두 결[二結]의 장애 때문이다.
마치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때에 하늘 제석[天帝釋]이 부처님께로 나아가 물었다.
‘어떤 결(結)로 말미암아 사람ㆍ하늘과 용ㆍ아수라 등은 자주자주 싸움을 일으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질(嫉)과 간(慳)으로 말미암아서니라.’”
[문] 모든 유정들은 혹 9결(結)을 다 갖추기도 하고 혹은 6결이 있기도 하며 혹은 3결이 있기도 하고 혹은 전혀 결이 없기도 하다.
9결을 다 갖춘 이란 구박(具縛)의 이생(異生)을 말하고 6결이 있는 이란 이미 욕염(欲染)을 여읜 이생과 아직 욕염을 여의지 못한 성자(聖者)를 말하며 3결이 있는 이란 이미 욕염을 여읜 성자를 말하고 전혀 결이 없는 이란 아라한으로서 2결과 1결조차도 이룸이 없는 이를 말하는데 부처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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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질과 간으로 말미암아 사람ㆍ하늘ㆍ용 등이 자주자주 싸움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그 경에서는 다만 모든 부하고 귀한 이[富貴者]에게 자주자주 현행하는 결만을 말씀하신 것이요, 성취(成就)하는 결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늘 제석은 두 하늘[二天] 중에서 높은 이인데도 질과 간으로 말미암아 비천(非天)들과 자주자주 전투를 하기 때문에 다만 2결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하늘 제석을 꾸짖기 위하여 그 계경에서는 2결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하늘에는 소타(蘇陀)의 맛[味]이 있는데 아수라들의 것보다 뛰어나고 아수라 궁전에는 예쁜 여인들이 있는데 그 여러 하늘보다 뛰어나다. 하늘들은 자신들의 맛은 아끼고 남의 미녀들은 시새워하며, 하늘이 아닌 이들[非天]은 여인들은 아끼고 남의 좋은 맛은 시새워한다. 하늘들은 미녀들 때문에 하늘이 아닌 이의 처소로 가고 하늘이 아닌 이들은 맛 때문에 천궁으로 가기
때문에 하늘들과 아수라는 질과 간의 결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때에 하늘 제석은 아수라와 막 싸움을 하고 나서 마음이 오히려 두려웠으므로 부처님께로 와서 “어떤 결로 말미암아 사람ㆍ하늘ㆍ용ㆍ아수라 등은 자주자주 전투를 일으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그가 물은 뜻은 ‘어떤 결로 말미암아 하늘과 비천들은 자주자주 싸우게 되는 것입니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질과 간으로 말미암아서다”라고 하신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한 뜻은 ‘너희 하늘들과 아수라들은 질투와 간탐의 결로 말미암아 자주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질투와 간탐은 너희들의 근심거리요 또한 무거운 짐이며 너희들을 상하고 해치는 것이니 빨리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문] 6번뇌구(煩惱垢)는 무엇 때문에 결이 아닌가?
[답] 상(相)이 거칠게 움직이기[麤動] 때문이다. 만일 상이 미세하고 계박하는 것이 견고하다면 세워 결을 삼을 수 있지만 구(垢)는 상이 거칠게 움직이면서 계박의 뜻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결을 세우지 않는다.
[論] 98수면(隨眠)이 있다. 욕계계의 36수면과 색계계ㆍ무색계계의 각각 31수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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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곧 아흔여덟 가지의 일로써 자성을 삼으며 수면의 이름[名]과 뜻[義]은 앞에서 이미 해석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여기서는 98수면을 말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본론을 지은 이는 하고 싶은 대로 논을 지었지만 법상(法相)에는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책하지 말아야 한다.
또 문자에 집착하는 사문(沙門)의 뜻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문으로서 문자에 집착하는 이는 경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면 끝내 감히 말하지 않으면서 그는 “그 누가 부처님보다 뛰어난 지혜가 있는 이인가? 부처님은 오직 7수면만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억지로 불려서 98이라 하는가?”라고 하므로 그런 이의 뜻을 차단시키기 위해서이다.
7수면을 넓혀서 98이 된 것은 행상(行相)과 계(界)와 부(部)의 구별에 의하기 때문이다. 7수면 중에서 욕탐수면은 부의 구별 때문에 5가 되고 진에수면도 그러하다. 유탐수면은 계의 구별 때문에 2가 되고 부의 구별 때문에 5가 되는 것이니 계와 부의 구별 때문에 10이 된다.
만수면은 계의 구별 때문에 3이 되고 부의 구별 때문에 5가 되는 것이니 계와 부의 구별 때문에 15가 되며 무명의 수면도 그러하다. 견수면은 계의 구별 때문에 3이 되고 행상의 구별 때문에 5가 되며 부의 구별 때문에 12가 되는 것이니 행상과 계와 부의 구별 때문에 36이 된다. 의수면은 계의 구별 때문에 3이 되고 부의 구별 때문에 4가 되는 것이니 계와 부의 구별 때문에 12가 된다.
그러므로 7수면은 행상과 계와 부의 구별에 의하는 까닭에 98수면이 되는 것이니 자세함과 간략한 데에는 비록 다르다 해도 체(體)에는 차별이 없다.
[論] 3결(結) 나아가 98수면은 몇 가지가 불선(不善)이고, 몇 가지가 무기(無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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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온갖 번뇌는 모두가 불선이니 선교하지 않은 방편[不巧便]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면서 모든 번뇌는 불선인 것도 있고 무기인 것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만일 모든 번뇌가 선교하지 않은 방편에 속하기 때문에 불선이라면 이 선교하지 않은 방편은 불선이 아니어야 하니 선교하지 않은 방편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하지 않은 방편이라 함은 곧 무지(無知)요, 속한다는 것은 상응(相應)하다는 뜻이다. 자체는 자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하지 않은 방편은 불선이 아니어야 한다.
또 욕계의 번뇌는 모두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온갖 번뇌는 모두 무기라고 하는 이가 있으므로 그런 이의 뜻을 차단하고 욕계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도 무기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는 “문(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 먼저 장(章)을 세우는가?’라고 말한 것은 모든 문의 뜻을 나타내 보이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장의 문[章門]을 세우지 않으면 뜻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 마치 그림에 색칠을 하는 이는 허공에다 색칠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미 장을 세운 뒤에는 문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論] 3결 중에서 한 가지는 무기이다.
유신견을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유신견이 무기인가?
[답] 만일 법이 무참무괴(無慚無愧)의 자성이거나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이거나 무참무괴의 등기(等起)요 등류과(等流果)이면 불선이지만 유신견은 무참무괴의 자성도 아니고 무참무괴와 상응하지도 않으며 무참무괴의 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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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등류과도 아니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이 유신견은 한결같이 의요(意樂)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며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한결같이 의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또 이 견해는 보시와 지계와 수행과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를 집착하는 이는 “보시로 말미암아 나는 장차 부락(富樂)이 있고 지계로 말미암아 나는 장차 천상에 태어나며 정(定)을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장차 해탈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이 유신견은 오직 자체에만 헷갈리는 것이요 다른 이를 핍박하거나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아를 집착하는 이는 눈으로 빛깔을 볼 때에 “아(我)가 빛깔을 보니 빛깔은 곧 아소(我所)이다”라고 말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뜻으로 법을 알 때에 “아가 법을 아니 법은 곧 아소이다”라고 하면서 비록 자체에 대하여 이런 뒤바뀐 집착이 있다고 해도 다른 이를 괴롭히지는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이 유신견에는 이숙과(異熟果)가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
세우 존자는 “이 유신견은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불선의 번뇌에 역시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무기이어야 하겠다.
[답]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은 만일 더욱 왕성할 때면 반드시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키게 되나 이 유신견은 설령 더욱 왕성할 때라 해도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이 유신견은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악취에 떨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문] 불선의 번뇌에 역시 악취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있으면 무기이어야 하겠다.
[답] 불선의 번뇌는 만일 더욱 왕성할 때이면 반드시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악취에 떨어지게 하나 이 유신견은 설령 더욱 왕성할 때라 해도 마침내 모든 악취에는 떨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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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견해는 사랑스럽지 않은 과[非愛果]를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기이다.
[문] 이 견해는 이미 후유(後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한다. 후유는 곧 사랑스럽지 않은 과에 속하는데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얻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나는 끝내 후유를 일으키는 이를 칭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후유를 한 찰나라도 일으키면 고통을 더하게 되기 때문이니 고통이란 곧 사랑스럽지 않은 과에 속한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답] 여기에서 말한 사랑스럽지 않은 과는 고고(苦苦)의 종류이며 계경에서 말씀하신 사랑스럽지 않은 과는 3고(苦)에 모두 통한다. 이 유신견은 유(有)를 상속하게 하나 고고의 종류는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또 이 유신견은 비록 후유를 일으키고 고고의 근본이 되어 고통을 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을 위한 이숙인(異熟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대덕(大德)은 “이 유신견은 뒤바뀐 집착이요 안온하지 않으며 어리석음의 종류이기 때문에 불선이다. 만일 유신견이 불선이 아니라면 어떤 법이 있어서 불선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 ‘나아가 어리석은 것은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이숙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유신견이 모두 불선이면 색계와 무색계에 고고가 있어야 하나 세존께서 “나아가 어리석은 것은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교방편[巧便]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이라 하신 것이요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받는다는 말씀은 아니기 때문이다.
[論]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하니, 계금취결과 의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다.
[문] 분별해야 한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답] 분석(分析)해야 하기 때문에 분별해야 한다고 한다. 뒤의 2결(結)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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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은 불선이요 일부분은 무기이기 때문에 분별해야 한다.
분별론자(分別論者)는 “질문한 2결은 분별해서 대답[記]해야 하고 한결같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 2결 중에서이다.
[論] 욕계의 것은 불선이며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문] 무엇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무기인가?
[답] 만일 법이 무참무괴의 자성이거나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이거나 무참무괴의 등기(等起)요 등류과(等流果)이면 불선이나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는 한결같이 의요(意樂)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니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한결같이 의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또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에는 이숙과(異熟果)가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
[문] 논(論)으로 인하여 논을 내는구료. 무엇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에는 이숙과가 없는가?
[답] 4지(支) 5지(支)의 선정[定]에 조복되기 때문이니 마치 독사 등이 주술(呪術)에 조복되어 해치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상계(上界)에는 저 이숙(異熟)의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의 번뇌에 이숙이 있다면 고수(苦受)이어야 한다. 고수는 반드시 욕계에 매인 것인데 상계 번뇌의 이숙이 욕계계는 아니기 때문에 거기의 번뇌는 반드시 이숙이 없다.
또 거기의 사견 등은 극히 뒤바뀐 것이 아니니 일부분 유사한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이요 남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무기일 뿐이다. 거기의 사견은 ‘고통이 없다’고 비방하나 위의 두 세계에는 서로 유사한 즐거움이 있고, 상계의 견취는 그 모든 온(蘊)을 집착하면서 제일로 여기나 거기에도 서로 유사한 제일의 것이 있으며, 거기의 계금취는 그 모든 온을 집착하면서 청정하게 한다고 여기나 거기에도 서로 유사한 청정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색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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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욕계를 청정하게 하고 무색계의 도는 색계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거기의 번뇌는 반드시 불선이 아니다.
세우 존자는 “상계의 번뇌는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불선의 번뇌에 역시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무기이어야 하겠다.
[답] 불선의 번뇌는 만일 더욱 왕성할 때에는 반드시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키나 상계의 번뇌는 설령 더욱 왕성할 때라 해도 거친 신업ㆍ어업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상계의 번뇌는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악취에 떨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문] 불선의 번뇌에 역시 악취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있으면 무기이어야 하겠다.
[답] 불선의 번뇌는 만일 더욱 왕성할 때에는 반드시 유정으로 하여금 모든 악취에 떨어지게 하나 상계의 번뇌는 설령 더욱 왕성한 때라 해도 끝내 모든 악취에 떨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이다.
또 거기의 혹(惑)은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얻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기이다.
[문] 거기의 혹은 이미 후유로 하여금 상속하게 한다. 후유는 곧 사랑스럽지 않은 과에 속하는데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은 과를 얻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마치 계경에서 “비구여, 알아야 한다. 나는 끝내 후유를 일으키는 이를 칭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후유를 한 찰나라도 일으키면 고통을 더하기 때문이니 고통은 곧 사랑스럽지 않은 과에 속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답] 여기에서 말한 사랑스럽지 않은 과는 고고(苦苦)의 종류이며 계경에서 말씀하신 사랑스럽지 않은 과는 3고(苦)의 종류에 다 통한다. 상계의 번뇌가 유(有)로 하여금 상속하게 한다 해도 고고의 종류는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는 않는다.
대덕은 “상계의 번뇌가 만일 무기라면 다시 어떤 법을 불선이라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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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는가? 세존께서는 ‘만일 모든 번뇌가 업을 일으키면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評]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일 거기의 번뇌가 불선이라 하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고고가 있어야 하나 세존께서 “만일 모든 번뇌가 업을 일으키면 모두가 불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악업(惡業)에 의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
[論] 3불선근(不善根)은 오직 불선일 뿐이다.
그 자성은 불선이며 또 온갖 불선의 법을 위한 인(因)이 되고 근본[本]이 되며 길[道路]이 되고 유서(由序)가 되며 능히 짓는 것[能作]이 되고 생(生)이 되며 연(緣)이 되고 유(有)가 되며 집(集)이 되고 등기(等起)가 되기 때문이다.
[論] 3루(漏) 중에서 한 가지는 무기이다.
유루(有漏)를 말한다. 위에서 말한 모든 인연으로 말미암아 색계와 무색계의 온갖 번뇌는 모두가 무기이다.
[論]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욕루(欲漏)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그것과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라 함은 그의 자성은 오직 불선일 뿐임을 나타내고 그것과 상응하는 것은 욕루 중의 34사(事)4)와 세 가지의 일부분도 불선임을 나타낸다.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 함은 그것과 상응하는 혼침ㆍ수면ㆍ도거의 일부분이다.
4) 34사라 함은 탐(貪)의 다섯ㆍ진(瞋)의 다섯ㆍ만(慢)의 다섯ㆍ견(見)의 열(12견 중 身見과 邊見이 제외됨)과 의(疑)의 넷과 질(嫉)ㆍ간(慳)ㆍ회(悔)ㆍ분(忿)ㆍ부(覆)의 34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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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루 중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세 가지의 일부분은 모두가 무기이다.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 함은 유신견과 변집견과 상응하는 혼침과 수면과 도거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은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불선이 아니다.
[문] 무참은 무참과 상응하지 않고 무괴는 무괴와 상응하지 않는데 어찌 이것이 무기이겠는가?
[답] 무참은 비록 무참과는 상응하지 않더라도 무괴와는 상응하며 무괴는 비록 무괴와는 상응하지 않더라도 무참과 상응하는 것이니 다 같이 상응하지 않은 것이라야 비로소 무기이기 때문이다.
[論] 무명루(無明漏)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욕계의 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무명은 오직 불선일 뿐이며 견고에서 끊어야 할 3견(見)5)과 의ㆍ만ㆍ탐ㆍ진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무명(不共無明)도 불선이다.
[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계의 2견(見)과 상응하는 무명과 색계ㆍ무색계의 온갖 무명은 무참무괴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무기이다.
[문] 무엇 때문에 10전(纏) 중에서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만을 말하는가?
[답] 이것은 논을 짓는 이[作論者]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논을 짓는 이가 마음대로 논을 지었지만 법상(法相)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책하지 말아
5) 3견이란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의 세 가지 견해를 가리킨다.
야 한다.
또 이 두 가지는 오직 불선일 뿐이고 온갖 불선의 마음에 두루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말한다. 분(忿)ㆍ부(覆)ㆍ질(嫉)ㆍ간(慳)은 비록 불선일 뿐이라 해도 온갖 불선의 마음과는 두루 상응하지 않고 혼침(惛沈)과 도거(掉擧)는 비록 온갖 불선의 마음과 두루 상응한다 해도 오직 불선만이 아니며 수면(睡眠)과 악작(惡作)에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수면(隨眠)과 구(垢)에서도 이것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
무참무괴에는 두 가지 뜻이 다 있어서 불선의 뜻과 많고 적은 분량이 같은 것이 마치 상자[函]와 뚜껑이 서로 맞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 치우쳐 상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論] 4폭류(瀑流) 중에서 한 가지는 무기이다.
유폭류(有瀑流)를 말하니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論] 세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욕폭류(欲瀑流)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그것과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라 함은 그것의 자성은 오직 불선일 뿐임을 나타내며 그것과 상응하는 것이란 욕폭류 중의 24사(事)6)와 세 가지의 일부분도 불선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 함은 그것과 상응하는 혼침ㆍ수면ㆍ도거의 일부분이다.
[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폭류 중의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는 혼침과 수면과 도거의 일부분은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무기이다.
6) 24사라 함은 욕계의 탐(貪)의 다섯ㆍ진(瞋)의 다섯ㆍ만(慢)의 다섯ㆍ의(疑)의 넷과 질(嫉)ㆍ간(慳)ㆍ회(悔)ㆍ분(忿)ㆍ부(覆)의 24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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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견폭류(見瀑流)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3견(見)은 불선이다.
사견과 견취와 계금취는 무참무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論] 욕계의 2견과 색계ㆍ무색계의 5견은 무기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무명폭류(無明瀑流)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욕계의 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무명은 오직 불선일 뿐이며 견고에서 끊어야 할 3견과 의ㆍ만ㆍ탐ㆍ진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무명도 불선이다.
[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계의 2견과 상응하는 무명과 색계ㆍ무색계의 온갖 무명은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무기이다.
[論] 4폭류처럼 4액(軛)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폭류와 액은 이름이나 체(體)가 같기 때문이다.
[論] 4취(取) 중에서 한 가지는 무기이다.
아어취(我語取)를 말하니 뜻은 앞의 설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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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세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욕취(欲取)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그것과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라 함은 그것의 자성은 오직 불선일 뿐임을 나타내고 그것과 상응하는 것은 욕취 중의 28사(事)7)와 네 가지 일부분도 불선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네 가지의 일부분이라 함은 그것과 상응하는 혼침ㆍ수면ㆍ도거ㆍ무명의 일부분이다.
[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취 중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는 혼침ㆍ수면ㆍ도거ㆍ무명의 일부분은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무기이다.
[論] 견취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2견은 불선이다.
사견과 견취를 말한다.
[論] 욕계의 2견과 색계ㆍ무색계의 4견은 무기이다.
욕계의 2견이라 함은 유신견과 변집견을 말하고 색계ㆍ무색계의 4견이란 5견 중에서 계금취를 제외한다.
[論] 계금취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7) 28사라 함은 욕계 탐(貪)의 다섯ㆍ진(瞋)의 다섯ㆍ만(慢)의 다섯ㆍ무명(無明)의 넷(見苦所斷의 無明은 제외됨)과 의(疑)의 넷과 질(嫉)ㆍ간(慳)ㆍ회(悔)ㆍ분(忿)ㆍ부(覆)의 28이다. 곧 여기서 ‘견고에서 끊어야 할 무명을 제외한다’는 것은 이 안의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상응하는 무명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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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색계ㆍ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4신계(身繫) 중에서 두 가지 불선이다.
탐욕과 진에를 말한다.
[論]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계금취(戒禁取)와 차실집(此實執)의 신계의 욕계의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論] 색계ㆍ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5개(蓋)는 오직 불선일 뿐이다.
모두가 무참무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論] 5결(結) 중에서 세 가지는 불선이다.
진결(瞋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을 말한다.
[論]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탐(貪)과 만(慢)의 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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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색계ㆍ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5순하분결(順下分結) 중에서 두 가지는 불선이다.
탐욕과 진에를 말한다.
[論] 한 가지는 무기이다.
유신견을 말한다.
[論] 두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계금취와 의의 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5순상분결(順上分結)은 오직 무기일 뿐이다.
무참무괴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 5견(見) 중에서 두 가지는 무기이다.
유신견과 변집견을 말한다.
[論] 세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는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6애신(愛身) 중에서 두 가지는 불선이다.
코[鼻]와 혀[舌]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을 말한다.
[論] 네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눈[眼]ㆍ귀[耳]ㆍ몸[身]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범세(梵世)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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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무기이다. 뜻[意]의 접촉으로 생긴 애신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7수면(隨眠) 중에서 두 가지는 불선이다.
욕탐과 진에의 수면을 말한다.
[論] 한 가지는 무기이다.
유탐(有貪) 수면을 말한다.
[論] 네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만(慢)과 의(疑)의 수면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무명(無明)의 수면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욕계의 견집ㆍ견멸ㆍ견도와 수도에서 끊어야 할 무명과 견고에서 끊어야 할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지 않은 무명이다.
[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욕계의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과 색계와 무색계의 온갖 무명이다.
[論] 견(見)의 수면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3견은 불선이다.
사견과 견취와 계금취를 말한다.
[論] 욕계의 2견과 색계ㆍ무색계의 5견은 무기이다.
9결(結) 중에서 세 가지는 불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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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결ㆍ질결ㆍ간결을 말한다.
[論] 여섯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애(愛)ㆍ만(慢)ㆍ취(取)ㆍ의(疑)의 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것은 불선이고 색계와 무색계의 것은 무기이다. 무명(無明)의 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고 그 밖의 나머지는 무기이다.
뜻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論] 견(見)의 결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욕계의 1견은 불선이다.
사견을 말한다.
[論] 욕계의 2견과
유신견과 변집견을 말한다.
[論] 색계와 무색계의 3견은 무기이다.
98수면(隨眠) 중에서 338)은 불선이요 64는 무기이며 한 가지는 분별해야 한다. 욕계의 견고에서 끊어야 할 무명수면은 불선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하니, 무참무괴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다.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지 않은 무명이다.
8) 33이란 욕계의 36수면(隨眠)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견고(見苦)에서 끊어야 할 무명(無明)을 제외한 서른세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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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나머지 것은 무기이다.
유신견ㆍ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