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밀적[ 金剛密迹 ]
범어로는 바즈라파니(Vajra-pani) 바즈라다라(Vajra-dhara)이며 집금강보살 비밀주보살이라고도 한다. 보통 금강저를 쥐고 있는 보살을 가리키며 혹은 특별히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를 지칭하기도 한다.
증일아함 제22권 <수타품(須陀品)>에 "밀적금강역사는 여래 뒤에 위치하며 손에 금강저를 잡는다"라 하고, <대일경> 제1 〈입진언문주심품(入眞言門住心品)>에 "어느 때 바가범께서 여래가지광대금강법계중에 머무시니 일체 금강저를 지닌 자가 모두 모여들었다"고 하며 19명의 집금강(執金剛)을 열거하고 있다.
태장만계다라 금강수원(金剛手院)의 제존을 통칭 금강수라고 하는데 이는 금강수가 개별적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통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금강수보살에게는 깊은 뜻과 얕은 뜻이 있는데, 얕은 뜻으로는 비밀주는 야차왕 (夜叉王)을 가리키며, 이는 야차왕이 금강저를 잡고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호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강수보살이라 한다. 그러나 깊은 뜻으로 본다면 야차왕은 곧 여래의 삼밀(三密)이다. 이 삼밀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서로 알 뿐 설사 미륵보살이라도 오히려 비밀신통에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비밀 가운데 가장 비밀하여 소위 심밀(心密)의 으뜸이 되기 때문에 비밀주보살이라 하고 능히 이 인(印)을 갖고 있으므로 집금강이라 한다고 <대일경소> 제1에는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취석(理趣釋)> 상권에서는 "금강수보살마하살이란 이 보살은 본래 보현보살이다. 비로자나불로부터 친히 오지금강저(五智金剛杵)를 받았고 금강관정을 받았으므로 금강수라 한다"라고 하여 보현보살과 같다고 하였다.
<보리장장엄다라니경>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 문수보살을 안치하고, 갖가지 영락으로 장엄하며 연꽃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발우를 받들어 부처님께 올리는 모습을 짓게 하고, 부처님의 오른쪽에는 금강수보살을 그리되 일체 보배로써 몸을 장엄한다.
얼굴 모양은 분노로 성내는 형상이고, 손에 금강저를 잡고 빙빙 돌리는 형태를 짓는다. 그러면서 연꽃위에 두 무릎을 꿇고 여래를 우러러 뵙는다"라고 하여 문수보살과 동격에 놓고 있다.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지니고 부처를 보호한다는 신(神). 항상 부처 곁에서 그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들으려고 하므로 밀적(密迹)이라 함.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이었다. 그때도 수문장 역할을 했고 불교의 신을 자리매김하고 나서도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장(神將)이 되었다. 다만 역사(力士)와 천왕(天王)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천왕보다는 위계가 낮다. 그래서 더 멀리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수문장의 역할을 하다 보니 금강역사의 쓰임은 많다. 석탑과 부도에도 새겨지고 신중탱화 등에도 자주 보인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는 금강역사가 있다.
금강역사의 다양한 명칭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神將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눈에 익은 것이 사천왕四天王과 금강역사金剛力士이다. 금강역사는 산스크리트로는 '번갯불을 가지고 다니는 자'를 의미하며 반신半身은 사람이고 반신은 뱀인 용신龍神을 보호하는 자로, 전설적으로 금강역사의 적이라고 알려진 매 모습을 한 가루다Garuḍa(힌두 신화에 나오는 새로 비슈누 신神의 탈것vāhana)를 속이기 위하여 새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 믿어지기도 한다.
보통 사찰 출입구(금강문)의 오른쪽에 아형阿形 금강역사, 왼쪽에는 훔형沔形 금강역사가 배치되어 사찰을 수호하고 있는데, 아형 금경역사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으로, 훔형 금강역사는 밀적금강密赤金剛으로 각각 부르기도 한다.
아형 금강역사는 '아'하고 입을 벌린 채 공격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음형 금강역사는 '훔'하고 입을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때의 '아A'는 산스크리트 알파벳의 첫글자이며 '훔M'은 그 끝 글자로, 바로 알파와 오메가를 일컫는 것이다.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과 밀적금강密赤金剛, 다른 말로 해서 '아 금강역사'와 '훔 금강역사'는 인왕仁王으로도 불려진다. 특히 사찰 문에 배치될 때 인왕 또는 이왕二王이라 하여 좌우 이존二尊으로서 밀적과 금강 또는 금강과 역사로도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입을 연 자를 금강金剛이라 하고 입을 다문 자를 역사力士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경전에는 금강역사는 두 명 뿐만이 아니라 500, 8만 등 무수하다고 전한다.
금강역사의 수효에 대해서 왜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가. 하나에서 다多로 증식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가장 타당한 해석은 본래 한 분이었던 금강역사가 점차 석가모니 외에 제불보살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수호 영역을 확대한 결과이다. 여기서 본래 하나였던 금강역사가 그 자재한 동적 작용으로 인하여 수를 증식하여 아형과 음형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금강과 역사,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라는 각각 다른 인물로 묘사될 수 있었다는 개연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섭무애경攝無碍經>에서는 금강역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신체의 모습은 적육색赤肉色이다. 분노를 머금은 모습으로 마귀의 무리를 항복시킨다. 머리의 육계는 불꽃이 타오르는 듯하는 관을 쓰고 있다. 왼손은 주먹을 쥔 채 허리에 대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다. 금강보金剛寶의 보석 구슬에, 천의天衣는 맹수 가죽으로 만든 옷, 신체를 묘보색妙寶色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금강역사상의 적나라한 모습은 석굴암石窟庵의 금강역사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 거기 석굴암 전실을 지나 주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금강역사가 1구씩 양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금강저를 들고 있지는 않지만, 상의를 벗어버리고 하의만 입은 채, '아'하고 입을 벌린 공격형의 자세와 '음'하고 입을 다문 방어형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격노하는 모습, 근육의 긴장과 자태의 약동에 의한 힘의 표현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으로 넘쳐흐른다.
근육이 툭툭 불거져 나와 울퉁불퉁한 데다 왕방울만한 눈을 부라리며 서 있는 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서 검은 무리들을 가로 막을 자세이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불보살 및 일반 성중聖衆을 수호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수문신守門神 기능을 맡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사찰로 들어서는 금강문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지만, 사찰의 출입문뿐만 아니라 경내의 전각, 특히 명부전 출입구라든가 탑신이며 불감佛鑒의 문비 등 여러 불교 조형물의 출입구에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분황사 전탑塼塔을 비롯해서 안동 동부동 전탑, 조탑동 전탑의 탑신부에도 그 감실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에 금강역사가 굳건히 서서 탑과 그 탑의 생명인 사리를 수호하고 있는데, 이러한 금강역사의 사리 수호 기능은 월성 장항리 5층 석탑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황룡사지 9층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기에 새겨진 금강역사상도 사리 수호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