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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wowinchon 2017. 12. 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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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당 삼장법사 현장봉소역(唐 三藏法師 玄奘奉詔譯)

 

오온(五蘊)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처(六處) .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

            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

12연기 무명(無明) (行) (識) 명색(名色)

         6입(六入) (觸) (受) (愛)

         취(取) (有) .(生) .노사(老死)

                  노사우비고뇌 (老死憂悲苦惱)

 

사제(四諦) : 고(苦)·집(集)·멸(滅道) 팔고(八苦) 

         팔고(八苦)

        생·노·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

 

(集)[삼독 三毒] :

      (貪)·(瞋)·(癡)

 

팔정도(八正道=멸도 滅度]

정견[正見]정사[正思惟][혜학:慧學]

정어[正語] [正業]정명[正命][계학:戒學]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정정[正定][정학:定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帝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娑婆訶

 

自燈明法燈明 자등명법등명

自歸依法歸依 자귀의법귀의
 
   

팔 정 도

팔정도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모든 실천을 포함하고 있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여기서 ‘정’ 이란 바르다는 뜻으로 '중'(中)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도(正道)는 중도(中道), 즉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아니한 중도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망령됨이 없어야 하며, 전도(顚倒)됨이 없어야 하며, 그리고 극단을 떠나야 하는 것을 말한다.

 

1) 정견(正見)

팔정도 중 해탈의 길에 첫 관문인 정견은 중생들에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 마치 건축물의 기초석과도 같은 것이며,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정견이란 '바르게 본다'는 뜻인데,

 

그보다도 정견의 깊은 뜻은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견의 진정한 의미는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진리를 바로 보라는 것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볼 때 비로소 본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보이지 않는 열반의 세계가 보일 때 비로소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고 말하며, 이런 자들을 가리켜 관자재 보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무명 중생들은 보이지 않는 것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보이는 것조차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모든 대상들이라도 분명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라는 것이다.

 

모든 문제와 사고들은 언제나 대상을 불확실하게 혹은 잘못 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진리를 잘못 보고 바로 찾아가지 못한다면 평생을 수행하더라도 해탈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모든 대상을 바른 눈으로 볼 수 없는가?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른 마음, 즉 바른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사심과 욕심이 없을 때에만 모든 대상과 진리를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고, 그 배후에 숨겨진 비밀까지도 볼 수 있다. 결국 정견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른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하며, 바로 이러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로 보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란 올바르게 보고 난 후에 그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떠한 문제나 사건들을 아무리 올바르게 직시하였다 해도 잘못된 생각이나 욕심을 가지고 한 생각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견에 못지 않게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면 오로지 자신만의 실리(實利)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갖가지 문제와 더불어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반대로 중생들이 언제나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으로 욕심없는 바른 판단을 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부처님과 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변화될 것이며, 반드시 해탈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생각 대신 올바른 생각을 배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자주 인용되지만 늘 새로운 『담마파다』(Dhammapada)의 게송은 우리에게 생각의 중요성과 의미를 말해 준다.

모든 심리 상태는 마음을 따른다.

마음이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오염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심리 상태는 마음을 따른다.

마음이 그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듯이......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무상하고 헛된 이 세상에 의하여 듣고 보고 깨달은 것들을 뇌리속에 입력시켜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어릴 때부터 고(苦)의 존재인 탐·진·치 삼독으로 형성되어 이 세상의 삶을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의 뜻은 생각 자체만을 가지고 행동하지 말고, 선한 양심에 따라 진실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선한 양심의 기준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마음은 진리를 통해서 우리 중생들에게 잘 나타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진리를 뇌리 속에 주야로 묵상하며 진리를 따라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집(集) ―고(苦의) 원인 ―의 소멸과 함께 정사유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3) 정어(正語)

바른 말은 바로 보지 못하거나 바른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바른 말, 즉 진실한 말은 반드시 바르게 보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소위 옛말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른 말을 하라.'는 얘기가 있다. 말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기쁘게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한마디 말로 인하여 죽을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천수경에서 거짓말[망어: 妄語], 이간질시키는 말[양설: 兩舌], 욕하는 말[악구: 惡口], 그리고 꾸며서 남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게 하는 말[기어: 綺語]을 입으로 저지르는 악업이라 하여 이를 참회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말 중에서 가장 귀하고 보배롭고 중요한 말은 도담(道談)이라 하는데, 이것은 깨달은 부처님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우리 중생들이 꼭 듣고 알아야 하는 말이 곧 도담이다.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감로수(甘露水)와 같은 말씀을 날마다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해탈에 이를 것이다.

 

4) 정업(正業)

정견, 정사유, 정어에 이어지는 말씀이 정업인데, 이것은 사람의 '올바른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말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 주고 보시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들이 말은 진실한 척 그럴 듯하게 하는데 실제 행동은 전혀 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들의 모든 화복(禍福)은 이 업(業)인 사람의 행위에 의해 나타난다. 선업(善業)은 복으로 나타나며, 반대로 악업(惡業)은 화, 즉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행위는 삶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듯 우리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이 업은 이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까지 이어진다. 즉, 이생의 삶의 결과가 내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혹은 각 종교나 종파마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 가고 더욱 부패하고 있는 이유가 뭐일까?

 

그 이유는 첫째, 진리 자체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요, 둘째는 인간들이 본래적 욕심에 따라 욕심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삶의 가치를 자신에게 또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두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고, 더욱이 진리를 따라 진실 되게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자들의 삶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따라 생활하여야 하며 '계(戒)·정(定)·혜(慧)' 삼학을 잘 닦아서 모두 해탈에 이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렇게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올바른 뜻과 진리를 따라 정진 수행하여 모두 열반에 이르라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정업을 말씀하신 것이다.

 

5) 정명(正命)

정명이란 바른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직업은 정명의 기본이 된다. 사기나 도박과 같은 것을 직업으로 삼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생활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명에는 바른 직업 윤리도 포함된다. 임금을 착취하거나 오염 물질을 방출하는 것은 정명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 이것은 규칙적인 생활, 바른 생활도 요구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 수면, 업무 등 건전한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정정진이라 함은 정진 수행을 바르게, 그리고 머무름이 없이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수행은 두말할 나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일순간의 쉼도 없이 인내와 지구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정진 수행을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틀에 박힌 불교 교리에 의한 수행이나 자신의 생각, 즉 전도된 몽상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면 해탈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오로지 부처님의 오류없는 진리의 말씀만이 무지한 중생들을 깨닫게 하며, 해탈에 이르게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올바른 수행 방법이나 올바른 해탈의 길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직 행심 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직 반야를 믿고 반야만을 의지하면서 반야의 뜻대로 정진 수행을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해탈하여 관자재 보살(觀自在菩薩)이 될 것이다.

 

7) 정념(正念)

정념이란 깨달음에 이르려면 언제나 바른 생각을 하면서 진리에 따라 살라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세상의 번뇌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과 염불에 착념(着念)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에 착념하면서 정진 수행을 계속하면서 살아가는 수행자들에게는 세상을 돌아보거나 세상 생각을 할 여념 자체가 없다. 그런데 세상 생각을 버리고 진리만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8) 정정(正定)

정정이라 함은 안정되고 언제나 편안한 마음을 말한다. 즉, 정정은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청정심은 중생들이 탐진치로 인한 번뇌 망상의 고통과 불안정한 마음의 상태를 부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모두 벗어나서 열반에 이르게 되면 청정심이 되어 언제나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이 계속된다. 즉, 중생들의 마음이 해탈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속을 진리의 거울에 비춰 본다면 모두가 탐진치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욕심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이생의 욕심은 다시 내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사주팔자나 운명은 전생에 의하여 이생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며, 내생의 사주팔자는 이생의 삶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인데,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곧 사주팔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은 설령 해탈이 안 된다 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결국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내생의 보다 나은 삶을 준비한다는 말이다.

 

결국 정견에서 정념에 이르기까지 일곱 가지 덕목은 바로 정정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몇 억겁년 동안 더러워지고 추한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반야에 의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뜻과 그 가르침에 따라서 정진 수행을 해야 한다.

 

*** 팔정도의 세 가지 측면 ***

열반에 즈음하여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설하고 정해 놓은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이것으로 볼 때 부처님의 생활 방식과 종교 체계는 법과 계율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계율은 몸과 입으로 행하는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삼가는 도덕적 실천으로 수행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토양과 씨앗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선행의 훈련 또는 도덕적인 훈련을 의미하는 계(戒)라고 알려져 있다. 법(法)은 마음을 길들이는 인간의 정신적 훈련을 다룬다. 이것은 명상, 즉 선정(禪定)과 지혜의 수행이다.

 

정(定)은 주의력을 모아 자신의 정신 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정하고 정화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각성(覺醒)의 훈련으로 수행의 본질이자 농사를 짓는 과정이라 하겠다. 혜(慧)는 각자가 자신의 본래 성품을 꿰뚫어 보는 순수한 통찰의 발전된 형태로 수행과정에서 드러나는 수행자의 올곧은 모습이자 곡식을 수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계를 지키고, 선정에 드는 것은 곧 지혜의 단계에 이르러 우리의 본 성품을 올바르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즉 계율[계: 戒]·선정[정: 定]·지혜[혜: 慧]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시대 부처님들의 분명한 가르침 속에 구체화되어 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팔정도라고 하는 덕목들은 모두 이 계(戒)·정(定)·혜(慧)의 세 부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삼학(三學)이라 한다. 특히 이 팔정도는 불교에만 있는 고유한 것으로써 불교와 다른 종교,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계율 부문[계학: 戒學]

3. 올바른 말 [정어: 正語]

4. 올바른 행위[정업: 正業]

5. 올바른 생활[정명: 正命]

 

선정 부문[정학: 定學]

6. 올바른 노력[정정진: 正精進

7. 올바른 주시[정념: 正念]

8. 올바른 집중[정정: 正定]

 

지혜부문[혜학: 慧學]

1. 올바른 견해[정견: 正見]

2. 올바른 생각[정사유: 正思惟]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팔정도의 실천이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을 계·정·혜 삼학의 마음으로 바꿔 나가는 실천의 과정인 것이다.

 

모든 진언의 기본음은 옴아훔 이 세 가지입니다.

 

옴(唵)의 뜻은 영원히 항상 머물러 있음,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음,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음,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음, 법계에 두루 가득함의 의미입니다.

 

아(阿)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음, 끝없고 다함이 없음, 끊임없이 이어짐, 광명을 열어 발함입니다.

 

훔(吽)은 끝없는 위신력과 공덕, 무루과(無漏果)가 원만함, 최고의 성취, 빠른 성취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