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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라선경 [達摩多羅禪經]

wowinchon 2018. 2. 5. 16:10


달마다라선경.hwp

달마다라선경[]

 

달마다라선경 상권

동진(東晉) 천축(天竺)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한역

홍승균 번역


무릇 3업(業)은 선(禪)과 지(智)로써 일어남을 그 종지[宗]로 삼는다. 비록 그것이 정밀[精]하고 거침에 따라 달리 나뉜다고 하지만 계적(階籍)은 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길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더라도 그 발길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으며, 세속을 혁신함에 있어서 힘쓰는 공(功)을 기다리지 않고도 고요함이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를 경유하게 되면 깊숙한 경지에 나아가 은미(隱微)함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깊고 넓어서 궁구(窮究)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이치가 망령되거나 어두운 것이 아니므로 종지(宗旨)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이를 간략하게 본다면, 선(禪)은 지(智)가 아니므로 적(寂)의 끝을 말할 수가 없고, 또 지는 선이 아니므로 조(照)의 깊이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禪)과 지(智)의 종요(宗要)는 곧 조(照)와 적(寂)을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곧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곧 조는 적을 떠나지 않고 적은 조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응하면 함께 노닐고 호응하면 같이 지향하는데, 그 공(功)이 쓰임에 있어서 현묘하여 서로 더불어서 저 만법(萬法)을 기르는 것으로서 실로 이것은 그 묘물(妙物)인 것이다.

그래서 군동(群動)을 운전하여 일(一)에 이르되 유(有)가 아니고, 저 대상(大像)은 아직 그것이 형상을 이루기 전에 확연하되 무(無)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함이 없고 작위함이 없으나 작위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씻어서 마음의 혼란함을 진정하는 자는 이를 통하여 그 생각함을 연마하고, 깨달아서 그 미묘함에 들어간 자는 이를 통해서 그 신통함을 끝까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장차 그 문(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 근기가 섭회(攝會)에 있다. 그 이치가 현묘(玄妙)하고 그 헤아림이 광대하여 도(道)가 문장[文]에 숨어 버릴 경우, 이것은 곧 아난(阿難)이 곡진히 받는 저 음조(音詔)로서 적절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를 영부(靈符:마음의 집)에 감추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마음이란 원래 일정한 법도가 없고 그 변화가 다양하며, 그리고 수(數)란 정해진 형상이 없고 그 느낌을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축(天竺)을 교화하여 행함에 있어서 장(匠)이 있음을 봉함(封緘)하여 유심(幽深)한 관문을 열 수가 없으므로 공연히 그 뜰만 엿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따라서 본다면 이치는 행(行)하고 장(藏)함이 있고 도(道)는 헛되이 전수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이 참으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여래니(如來泥)께서 말씀하셨다.

“오래지 않아 아난(阿難)이 그 공행(共行)을 제자인 말전지(末田地)에게 전할 것이며, 말전지는 이를 사나바사(舍那婆斯)에게 전할 것이다. 이들 세 응진(應眞:아라한)은 다들 지극한 원(願)을 타고 그윽한 가운데서 옛날에 계합(契合)하니, 그 공(功)이 말[言] 밖에 있다. 그리하여 저 경(經)이 변론하여 밝히지 않은 것은 반드시 어두운 길처럼 그 장(匠)이 없을 것이며 잔약(孱弱)하여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우바굴(優波崛)이 있어서 약하면서도 뛰어나고 현명하여 그 지혜가 세상의 모범을 잇고 그 재주가 벼슬을 받는 것보다도 높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치에 접촉해서 간략함을 따라서 8만의 법장(法藏)을 보존하여 간직함에 오직 요령이 있을 것이니, 5부(部)의 나뉨이 여기서부터 비로소 시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인하여 추론해 보면 형운(形運)을 따라 폐하고 흥하되 스스로 조짐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용(神用)으로 말하면 걸음이 그윽하여 자취가 없고 오묘한 움직임을 찾기가 어려워서 추솔(麤率)함을 집적거려서 이상(異常)만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로부터 사변(事變)에 감응하여 구전(舊典)을 생각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런 자들이 저들 5부(部)의 학(學)에 모두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대법(大法)이 장차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고 이치가 심오함을 개탄하면서 드디어 각각 선경(禪經)을 술찬(述讚)하여 성대한 사업을 융숭(隆崇)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에 있어서 무수한 방편을 사용해서 적연(寂然)함을 구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고요하고 고요하기만 해서 그 원리는 역시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가지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구하는 자는 많겠지만 그 근본을 통섭(統攝)하여 지말(枝末)을 운용하는 자는 적을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장차 가다가도 이르지 못하고 더러는 그 방법만을 지키어 변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경(經)을 만원(滿願)의 덕(德)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모든 일[事]의 바람이라고 높일 것이다. 그런데 그 성지(聖旨)를 탐구하여 본다면 다만 장점만을 온전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 또한 이를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 5부의 업(業)이 서로 달라서 각각 그에 따른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사람이란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도가 혹 융성하기도 하고 혹 쇠퇴하기도 할 것이며, 그것이 각각 흥하고 패하는 때를 따라 서로가 바뀌어 가며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어느 것이 크다거나 적다거나 하여 붙이는 명목이 고정된 것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절(節)에 달하여 변(變)을 잘하면 출처(出處)하는 바가 경계가 없어서 그 이름을 감추어 버리고 자취를 지워버린다면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자는 다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저 부(部)로 나눈 것 또한 그 이름이 아닌 것으로서 이처럼 부로 나눈 것이고, 또한 그 밖에 따로 어떤 종문(宗門)을 벗어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매양 저 큰 가르침(불교)이 동쪽으로 전파됨에 있어서 선(禪)의 수가 더욱더 적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를 개탄하여 왔다. 3업(業)이 통서(統緖)가 없어서 그 도가 거의 패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구마기바(鳩摩耆婆:구마라집)가 마명(馬鳴)이 지은 것을 선양하여 드디어 이 업(業)이 있게 되었다. 비록 그 도가 아직 무르익지는 못하였지만 무릇 이것이 바로 저 산을 만들고자 지금 한 소쿠리의 흙을 담아다 부은 격이라 하겠으니, 그렇다면 장차 그 때가 올 것이라 이것이 기뻐 그 기취(奇趣)가 감격스럽다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승(制勝)의 의론을 버리고 불언(不言)의 변(辯)을 따랐다. 그리하여 드디어 승나(僧那:사홍서원)의 지적(至寂)을 입을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기로 맹세하고 그 덕을 생각하여 이를 잊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저 유훈(遺訓)이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요지를 말한다면 아직 어떤 상(象)이 나타나기 전에 크게 이루기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미언(微言)을 열어서 본체(本體)를 높인 것이다. 그리하여 색(色)에 미혹하여 덕에 어긋남을 깨달아서 6문(門)을 막아 환란(患亂)을 잠재웠으며, 성냄이 본성을 해친다는 것에 통달하여 나와 남을 동일시해서 이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족(異族)이 동기(同氣)로 그 형상을 바꾸고 자취를 만들었으며, 깊이 연기(緣起)에 들어가서 생사의 경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곧 9관(關)을 용진(龍津)에다 열어서 3인(忍)을 뛰어넘어 지위가 올라갔으며, 번뇌의 습기(習氣)가 무생(無生)에 엉기고 육체적인 고통들이 신화(神化)에서 그 종결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아무것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무엇이든 생기지 않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들이 생기면서도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번역하는 것은 달마다라(達摩多羅)불대선(佛大先)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은 서역(西域)의 뛰어난 분들로서 바로 선훈(禪訓)의 종장(宗匠)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경요(經要)를 수집해서 대승을 발하기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홍교(弘敎)가 서로 같지가 않기 때문에 서로들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달마다라가 모든 편장(篇章)들을 모아서 이를 같은 도(道)로 만들어서 항하사와 같은 다양한 것들을 한 가지 빛깔로 열어 놓았다.

그런데 그가 본 관점은 곧 일어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가고 오는 것이 아무리 한정된 경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찍이 진여(眞如)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색(色)이 진여를 떠난 적이 없고 진여가 색을 떠난 적이 없으니, 색이 곧 진여이며 진여가 곧 색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불대선께서 그 근원을 맑게 하여 흐름을 이끌어 놓았으므로 그것이 차츰 흘러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두 가지 도로부터 감로의 문을 열어 놓았으니, 곧 4의(義)를 풀이하여 미망(迷妄)으로부터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돌아올 길을 열어 주어서 이를 영회(領會)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음계(陰界)를 분별하여 이를 바른 관점으로 이끌어 주었으며, 연기(緣起)에 대하여 이를 시원스럽게 흩어버려서 스스로 우열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근원을 추구하여 그 종말에 돌아옴으로써 종극(終極)의 오묘함을 찾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극이란 그것이 다하는 것이 아니니, 또한 다하게 되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을 일러 무진(無盡)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의 무진법문(無盡法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 도(道)가 3승(乘)을 통괄하고 그 지혜가 10지(地)를 통달하지 않고서야 누가 능히 그 현근(玄根)을 법신(法身)에다 통개(洞開)할 수 있고, 그 종일(宗一)을 무상(無相)에다 귀숙(歸宿)시킬 수가 있겠으며, 그리하여 정(靜)이 비추어 주지 않는 곳이 없고 동(動)이 적(寂)을 떠나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1. 수행방편도안나반나념퇴분(修行方便道安那般那念退分) 

 

석가모니 세존께 예배를 올리니

타오르던 번뇌가 사라지는구나.

유전(流轉)하여 퇴주(退住)하는 자를

승진(升進)의 도로써 제도하네.


저 미묘한 법을 수행하여

퇴주의 허물에서 벗어나고

모든 악을 멸하여

모든 공덕들을 이루어 내리라.


부처님 세존께서는 법상(法相)을 잘 아시고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어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하시고 뜨거운 불구덩이로부터 벗어나 바라밀의 배를 타고 한량이 없는 고해(苦海)를 건너셨다. 그리고 본원(本願)의 큰 자비의 힘을 행하셨으므로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모든 수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일찍이 없던 법을 설하시어 모든 제도 받지 못한 자들을 제도해서 그 안온(安隱)함을 얻도록 하셨다.

이를 일러서 두 가지의 감로문(甘露門)이라고 하는데, 각각 그 두 가지의 길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방편도(方便道)이고, 둘째는 승도(勝道)이다. 이것은 청정함을 구족해서 심심(甚深)하고 미묘하여 능히 모든 수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3퇴(退)의 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주박(住縛)을 멀리 여의고 승진(升進)을 증익하도록 하며, 결정(決定)을 성취해서 생사의 고통을 끝내고 구경 해탈하도록 하는 동시에 중생들의 오랜 어리석음[癡冥]을 제거하여 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존자 대가섭(大迦葉)과 존자 아난(阿難)과 존자 말전지(末田地)와 존자 사나바사(舍那婆斯)와 존자 우바굴(優波崛)과 존자 바수밀(婆須蜜)과 존자 승가라차(僧伽羅叉)와 존자 달마다라(達摩多羅) 내지 존자 불야밀다라(不若蜜多羅) 등 모든 법을 간직한 자들이 이와 같은 지혜의 등불을 차례로 전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그 들은 바를 따라서 이에 관한 뜻을 설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들은 바대로

수행의 경지를 풀어 설하노니

방편과 승구경(勝究竟)이

수행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선법(善法)을 수행하는 데에는

먼저 네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퇴감(退減)과 주(住)와 승진(昇進)과

모든 공덕(功德)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수행이 퇴감할 때에

주법(住法)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해도

역시 승진은 불가능한 것이니

마땅히 이것을 지금 대강 설하리라.


우선 평등한 마음을 일으킨 다음

자비로운 마음의 관(觀)을 익히고 행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성냄[瞋恚]의 마음을 그치고

잠시 중지하여 행해지지 않도록 한다.


번뇌가 잠깐 멈추면

다음에 시라(尸羅:戒)를 깨끗이 하고

시라가 이미 깨끗해지면

삼매(三昧)가 그 가운데에서 일어나리라.


삼매를 이미 닦아서 일으켰으면

응하고 불응함을 관찰하고

응하고 불응함을 잘 안다면

응하여 짓는 바를 향해 닦아야 한다.


이미 응하여 짓는 바를 수행하되

마음을 매어 전념하라.

이미 그곳을 즐길 수 있으면

올바르게 관찰하여 풍상(風相)에 의지하라.


올바르게 관찰하여 풍상에 의지할 때에

아직도 마음이 어지러이 치달으면

마음을 그치게 하여 호흡에 드는 것을[안반(安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견(見)이고, 둘째는 둔근(鈍根)에 접촉되는 불견(不見)이다.]

말을 길들여서 매어둠과 같이 한다.


마음을 그치게 하여 쉬게 되었다면

바르게 사유하여

차가움과 따뜻함, 가벼움과 무거움

유연함과 거침, 껄끄러움과 매끄러움 등을 관찰한다.


수행하여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서

이를 따라서 잘 조적(調適)해야 한다.

그런데 접촉하여 깨닫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하나를 세면서 둘이라 하고

둘을 세면서 하나라고 하고

아홉에 이르러서도 혼란이 생긴다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만약에 이처럼 수행퇴를 하다가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하여

열까지 세어서 만족하면

모든 허물의 행을 멀리 여의게 된다.


닦지 않거나 지나치게 닦는다면

다른 수행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같이 여러 잘못이 생기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수행함에 만약 수식(數息)을 함께하면

마음에 혹란(惑亂)이 생기기도 한다.

그 혹란이 증장한다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기식(氣息)이 통하여 흐르지 못해서

얼굴과 콧등에 충격이 오면

머리와 이마가 모두 괴롭고

속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기도 한다.


호흡이 흩어져 정도(正道)를 잃었는데

그래도 이를 고칠 줄을 모른다면

몸에서 심한 번열(煩熱)이 치솟아서

마음이 사뭇 혼란하여진다. 

 

네 종류가 이미 착란을 일으키면

바람에 의지함이 어그러져 다투리라.

수행하여 수식을 하려고 해도

좋은 방편이 되지는 못한다.


이것을 대치(對治)하는 방법을 모르면

반드시 빠르게 퇴감하게 되리라.

들숨을 인연하여 수행하려 해도

도리어 날숨을 인연하게 된다.


날숨을 인연하여 수행하려 해도

도리어 들숨을 인연하게 된다.

두 가지에 마음이 깨끗해지면

이것이 마땅히 수행의 과보이리라.


고요하게 머물러 정의(定意)가 생기면

다시금 새로이 수식을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잘못들이 있음을

모두 수행퇴라 한다.


급하게 헐떡이며 수식관을 한다면

이는 곧 생각을 흩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흩어진 생각으로

수행하면 마음에 광증(狂症)을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마음이 광증을 일으켜

응하고 불응함을 알지 못하고

두 가지에 분별이 없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수행하여 수식[數]이 이뤄지면

호흡이 가는 대로 따라서[隨] 가게 된다.

가는 곳을 따라 곳곳에 머물고

저 머문 곳에서 잘 관찰해야 한다.


관찰이 이뤄지면 호흡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나면, 청정(淸淨)이 일어나게 된다.

이 여섯 가지를 잘 알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호흡의 길고 짧음을 모두 분별하니

몸이 두루하여 모조리 깨달아 알고

몸을 관찰하는 수행이 차츰 쉬게 되면

일체에 응하여 깨닫게 된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하면

이것을 곧 수행퇴라 한다.[신념처(身念處)의 4승(勝)을 마친다.]

기쁨을 알고 또한 즐거움을 알아서

방편의 뜻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마땅히 다시 심행(心行)을 제어하여

요동함에 이르지 않게 한다.[수념처(受念處)의 4승을 마친다.]

다음으로 분별하여 마음을 알아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또 기쁜 마음을 일으키면

되돌려 다시 섭수하여 정(定)에 들어가야 하니

이것은 부정(不定)의 마음이 아니고

이미 마음이 정에 들면 해탈하게 된다.[심념처(心念處)의 4승을 마친다.]


해탈을 잘 수행하는 자는

마음을 퇴몰(退沒)시키지 않으니

만약 퇴감(退減)의 분에 든다면

해탈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리라.


무상(無常)과 단(斷)과

이욕(離欲)과 멸진(滅盡)을 관찰하여

날숨과 들숨이 멸하면

이를 수행승(修行勝)이라 이름한다.[이 4상(相)은 법념처(法念處)와 비슷하다.]


이와 같은 열여섯 가지의 행이

자재로이 마음을 회전하면

각(覺)과 촉(觸)을 얻으리니

견(見)을 얻음도 역시 그러하리라.


만약 견(見)과 촉(觸)에 대하여

그 분제(分際)를 잘 알지 못한다면

이 과실을 반드시 알아서

지혜를 닦아 후퇴함이 없게 해야 한다.


수행하여 위로 증진하면

마땅히 아래에 인연하지 않으니

아래에 인연함도 이와 같아서

위로의 증진에 응하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의 증진을 보면

마음이 굳게 머물러서 평등하게 관찰하게 된다.

여기 마음이 머물면 스스로 이루어

다시 수행하던 곳으로 돌아오리라.


2. 수행승도퇴분(修行勝道退分) 

 

뛰어난 염(念)을 성취했더라도

게으르면 결국 침몰하리라.

이것이 곧 퇴상(退像)이니

구하는 바를 감내하지 못한다.


불염오(不染汚)와 무기(無記)의

모든 번뇌의 퇴전(退轉)을 일으켜

번뇌의 더러움과 열기(熱氣)가 생기니

이로부터 정견(正見)을 잃게 된다.


요동하거나 아니면 빗장을 잠가

들뜨고 휘날리고 거칠고 껄끄럽고 미끄러지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퇴감(退減)의 모습을

수행하여 마땅히 분별해야 하리라.


멀리 보아도 바라는 바가 끊어졌고

보이던 것도 이미 추락을 하여

돌아보면 깊고 험한 것들만 보이니

이런 것이 모두 퇴감의 모양이다.


긴 병에 외우는 것을 그치고 다투니

업(業)이 많아서 멀리 돌아다니는구나.

그때에 해탈의 종자가

바로 다섯 가지 퇴감의 인(因)이다.


신(信)․계(戒)․문(聞)․사(捨)․혜(慧)

이것에서 점점 쇠퇴하네.

몸이 무겁고 혼미하고 둔하고

잠에 빠지고 침몰하는


이 다섯 가지가 수행에서의 퇴전의 모양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겁나고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놀랍고 두려워 기쁘지가 않으며


욕망을 여의는 데 게으르면

수행으로 회향하지 못한다.

익히지 않거나 지나치게 익히는 것

이 두 가지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때에는 해탈의 종자이던 것이

지금은 수행의 퇴전이다.

상(相)을 여읜 삼매의 즐거움과

이염(爾炎)이 모두 소진하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의 종자가

되돌아와 몸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흔들려 정념(正念)을 잃으면

이로부터 마음이 혼란스러워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지 못하니

이것은 수행으로부터 생긴다.

모든 상서로운 모양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 관상을 수행한다면

보고자 해도 매우 어려우리라.

모든 근(根)이 모두 내달려

욕망을 따라서 인연함을 향하니


삿된 마음이 널리 유산(流散)하여

모든 경계에 즐겨 달라붙는다.

형체가 사라지고 마음이 슬프며 참담하니

그 몸이 모조리 불타오른다.


이와 같이 불길이 타오르면

이것을 우퇴(憂退)라고 한다.

그 방편을 정근(精勤)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회한이 생기리라.


응한 바를 따라 성취했음을 듣고

나아가려 해도 열악하여 할 수 없다.

기쁜 승처(勝處)로 나아가지 않고

승처를 보고도 이를 취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지혜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스스로 계율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여

의심하고 뉘우치고 모든 깨달음에 이르는 데


뜻이 없어 자미(滋味)가 없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모든 허물로 정의(定意)가 약하니

삼매가 점점 소멸하고 

 

마음이 흩어져 번뇌에 덮이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마음의 거조(擧調)와 순사(順捨)

시(時)․비시(非時)를 관하지 않고


머물고 일어남과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가 없으므로 수행이 퇴전한다.

여섯 때[六時]의 행(行)을 알지 못하고

6계(界)도 또한 잘 알지 못하여


6교(巧)의 방편에 또한 어리석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탐욕과 성냄의 깨달음과

10상(想)의 선교방편과


여러 선지(禪地)로 향하는 것을 얻음과

법심(法心)이 미망을 이해함

이런 모든 것을 차례로 건너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이 퇴전한다.


처(處)와 비처(非處)와

업보(業報)와 정수(正受)를 관하지 않고

선정(禪定)의 모든 해탈과

정미(淨味)를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모든 근(根)이 이르는 곳의 길을

성(性)이 이를 분별하지 않고

마음이 뭇 잡스런 모양들을 따르면

이것이 모두 무지(無知)의 퇴전이다.


고락(苦樂)의 빠른 길에서

그 마음이 취향(趣向)하지 않고

이처럼 그 마음이 미혹하면

필시 퇴전의 곳으로 향하리라.


기(起)와 주(住)와 기연(起緣)과

입(入)과 출(出)과 방편

이 6법(法)을 이루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법을 알고 또한 의(義)를 알고

때를 알고 또한 양(量)을 알고

자신을 알고 무리들을 알고

그리고 복가라(福伽羅)를 아는 것 등


저 일곱 가지를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갖가지 악한 법을 일어나게 하고

낮고 천한 업(業)을 익혀 행하고


선하지 못한 벗을 가까이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응할 바를 잘못 설하고

사랑하는 것에만 즐겨 마음이 향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수행이 퇴전하리란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머무는 장소와 사람과

침상과 침구 등 온갖 도구들


이들은 모두 즐길 것이 못되니

가까이하면 수행을 퇴전시킨다.

기쁘게 모든 잡스런 모양을 따라

닦는 바의 지혜를 감손(減損)시키면


인연이 있는 곳을 버려서

마음의 진실을 얻지 못한다.

수행할 때 본래의 모양을 버리고

마음이 흩어져 외연(外緣)을 따른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해도

끝내 마음이 즐겁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그 기르는 양분(養分)을 잃고

그 마음이 하나로 정해지지 못해서


몸이 다시는 윤택하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 또한 생기지 않으리라.

의지한 곳이 즐길 수가 없으니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어지럽고


삼매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영원히 머물지를 못한다.

이같이 머물지 못하는 마음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애(愛)와 견(見)과 만(慢)과 선(禪)을 증가시키는

인연에 마음이 맛들여 집착하여

이처럼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그리하여 마치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하고

혹은 심히 떨리는 듯하고

온몸이 모두 번뇌로 왕성해지니

뱀의 독이 전신에 퍼진 듯하리라.


이 같은 세 가지의 과악(過惡)이 있다면

반드시 그 수행이 퇴전하리라.

얻지 못할 것을 얻은 듯 수행하면

다른 일들로 마음이 한가롭지 못하리라.


저 3퇴(退)의 법을 익혀 가까이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업(業)과 번뇌와 과보

이것을 세 가지 장애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해탈장(解脫障)이 있으니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방편상(方便想)의 악행(惡行)과

삼마제(三摩提)의 행지(行地)


이런 것을 관찰하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방편상(方便想)의 여러 지위와

삼매행(三昧行)과 그 밖의 것을


들은 대로 따라서 이를 희망한다면

곧 취(趣)를 일으켜 퇴전한다.

생할 때 멸한다는 생각을 하고

멸할 때 생한다는 생각을 하면


두 생각이 모두 타당성을 잃어서

이것이 곧 수행을 퇴전케 한다.

만일 법에 머무는 가운데

생멸한다는 생각을 하니


이러한 전도(顚倒)를 일으키면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들[入] 때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나갈 때 든다는 생각을 하니


이 두 생각에 머물러 생각하면

이것을 전도(顚倒)라 말한다.

번뇌의 결박을 끊어버리고

바른 방편을 수행하면


그에 연유하여 힘을 얻으므로

비슷한 모양의 모든 상이 나온다.

비슷한 모양이 이미 생기면

수행하는 마음이 그를 따라 구르리라.


그리하여 곧장 번뇌가 일어나리니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퇴과(退過)의 세찬 물결들이

수행하는 자를 떠돌아다니게 하니


나의 능력에 따라서

법해(法海)를 조금만 퇴전하게 하리라.

한량이 없는 그 밖의 퇴과(退過)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으니


지혜가 밝아 깊은 자들은

마땅히 스스로 널리 일컬어 설하리라.


3. 수행방편도안반념주분(修行方便道安般念住分)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퇴과(退過)를 설했노라.

이젠 주과(住過)를 설할 테니

수행하는 자는 잘 들으라.


만약에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에

보는 것이 없고 깨달음도 없어서

방편의 구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초문주(初門住)니라.


이미 저 문혜(聞慧)가 생기면

마땅히 사혜(思慧)의 염을 일으켜야 한다.

차례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어 주(住)에 속박될 것이다.


만약 세는[數] 것을 성취했다면

숨이 가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주(修行住)라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물었다.

누가 안반념(安般念)을 익혔는가?

어떤 비구가 대답하였다.

제가 그 염(念)을 닦아 익혔습니다.


네가 안반념을 닦아 익혔다면

너는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고 다시 승묘(勝妙)가 있으니

마땅히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방편도인 안반을 닦아야 한다.


4. 수행승도주분(修行勝道住分) 

 

뛰어난 도는 바른 관찰로 닦아

상행(相行)의 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승진(升進)의 법을 잘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주(住)에 속박되는 것이다.


소연(所緣)의 경계에 애착을 가지고

업에 나아가면 마음이 게을러진다.

이로부터 속박에 묶여

뛰어난 곳에 능히 이르지 못하리라.


혹은 움직일 수가 없음이 있으니

연함도 아니고 견고함도 아니다.

혹은 강하고 지극히 탄탄하니

또한 금강상(金剛像)과도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으면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한다.

이것은 곧 주에 속박된 모양이니

도에 승진함을 멀리 여의게 한다.


어지러운 빛이나 검은 암흑이

차마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니

탁한 기름을 태우는 빛과 같아서

보는 눈을 역시 가린다.


광명이 나타나 발하지를 못하니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배반해 버린다.

숨에 고요하게 머물러 즐거움이 분명하면

저들은 끝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마치 견실한 물건이

유연한 모습을 나타냄과 같으니

이따금 수행하는 자들이

상(相)에 머무름 역시 그러하다.


상은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 않으면서

하고자 함에 따라 생각[想]을 일으킨다.

비록 마음을 따르고자 하나

끝내 즐거워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다.


상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를 강제로 지니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어그러진 생각은

곧 주(住)에 속박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루었다면

강제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하리라.

저들 가고 머무는 모양에 맡겨 둔다면

가장 뛰어난 곳에 능히 이르리라.


떠오르는 것을 가라앉히려 하고

떠오르는 것을 낮추려 하고

가는 것을 오게 하려 하고

머물러 있는 것을 머물지 않게 하려 하고


멸할 때에 멸하지 않게 하려 한다면

하고자 하는 것에 여여하지 못하니

수행을 생멸에 맡긴다면

행하는 바가 항상 전진(轉進)하리라.


모든 법의 모양이 이미 이루어지며

끝내 자상(自相)을 버리지 않는다.

만약 자상을 버리지 않으면

자상이 곧 그 현현(顯現)하리라.


얇은 껍질로 부정(不淨)을 덮어 가리어

몸의 더러움을 감추려고 하듯이

겉모양과 온갖 도구들과

이락(利樂)을 가지고 몸의 고통을 가린다.


비슷한 모양이 차례로 생겨나서

빈틈없이 앞뒤로 이어졌다.

항상하지 않은 모양에 가려지고 숨겨져

몸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한다.


베풀어 짓고 수(受)를 사용함에

나라는 아상(我相)을 섭지(攝持)한다.

능히 본사(本事)를 억념하여서

감춰진 몸이 내가 아님을 관한다.


이들 모든 비슷한 모양들을

수행하여 분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애락(愛樂)을 일으켜서

공덕의 상(相)을 일으킨다.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여 망상이 생기면

승진하기를 다시 즐거워하지 않으니

뛰어난 법에 나아가지 못해

주과(住過)가 날로 증장하리라.


비아(非我)․상사상(相似相)

이들이 회전(廻轉)하지 않고

이와 같이 회전하지 않으면

수행자의 어리석음과 미혹함이 생긴다.


지혜가 없으니 번뇌에 머물러

그곳에 매달려 집착하니

집착하길 좋아하면 모든 허물이 생긴다.

이런 모양을 지금 설하리라.


이염(爾炎)이 차츰 손괴(損壞)하여

나뉘고 서로 혼란하고

파산(破散)하여 화합이 어려우면

이것이 곧 주에 속박된 모습이다.


몸으로 방편을 하지 않고

스스로 분리(分離)의 생각을 만들고

교란하거나 티끌처럼 부서지면

이것이 주(住)에 속박된 것이다.


상(常)을 지켜 이상(異想)이 없어지고

뭇 색(色)이 차례로 생기지 않는다.

갖가지 중묘(衆妙)의 생각들이

또한 차례로 일어나지 않는다.

 

흘러나가서 머물지 않으니

그 몸이 점차 소멸하리라.

모양이 미혹되어 다시 오가면

수행이 증장하지 못하리라.


고요하게 머묾이 이미 생기지 못하면

그 몸이 장양(長養)함이 없어서

마음이 열락(悅樂)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를 말하여 청정하지 못한 사(捨)라 한다.


저 청정하지 못한 사(捨)는

그 소견이 깨끗하지 못하다.

또한 승진을 하지 못하고

그리고 다시 퇴전하지도 않는다.

사문(沙門)의 상(像)을 희롱하듯이

젊을 때에 열락이 생기는 것도

비유하면 옷을 빌려 입은 것과 같고

또한 꿈에 본 것과도 같다.


명(命)을 청정하지 않음이라 하고

첨곡(諂曲)과 여악(餘惡)

취락(聚落)의 지식(知識)의 곳에서

스스로 그 공덕을 나타낸다.


모든 과악(過惡)을 가리어 감추어서

죄를 범하여 드러내지 않고

그 밖의 모든 계박(繫縛)이

수행하는 자를 더럽히고 물들인다.


사상(事相)이 있는 것과 방불하니

곧 실재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익지 않은 것을 익었다고 하고

멸하지 않은 것을 멸했다고 생각한다.


평등하여 만족하지 않은데

승진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삭을 벤 싹을 쪼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주(住)에 계박된 것이다.


업(業)이 당초부터 방편이 없고

상현(相現)하여 굳게 수지(守持)하고

과진(過進)하여 마음이 자긍(自矜)하니

이러한 것이 주에 계박된 것이다.


그런데 혹 수행을 하는 자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일으키면

이런 소견이 마음을 산란케 해서

곧장 계박된다. 

 

혹 수행을 하는 자가

몸과 몸을 자세[細微]하게 본다면

그것이 주에 계박되어서

염심(厭心)이 증장하지 않는다.


염심이 증진하지 못하면

탐욕을 여읠 수가 없으니

탐욕을 여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탈을 얻겠는가?


해탈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번뇌를 다할 수 없고

모든 번뇌를 끊지 못하면

진실한 지혜가 없다.


저 신념처(身念處)에서

주상(住相)이 이미 분별되었으니

수(受)․심(心)․법(法)의 염처도

마땅히 이와 같이 자세히 설하리라.


수행하되 마음이 즐겁지 않고

그 기쁨 또한 생기지 않고

몸에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이 없으면

그것이 곧 주상(住相)임을 알아야 한다.


수행하여 수호할 때의

신(信)․계(戒)․문(聞)․사(捨)․혜(慧)는

항상 적은 분량을 지키면

이것이 곧 주상(住相)이 된다.


주(住)에 매인 어떤 비구가

아난(阿難)이 있는 곳에 도달한다 해도

그가 머문 바 주상(住相)에 미혹하리니

이를 지금 대강 설하리라.


무상삼매(無相三昧)를 얻어서

6년을 주(住)에 결박되어

즐겨 설하는 바를 듣고 싶다면

언제나 아난을 따라다녀야 하리.

 

소업(所業)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퇴전(退轉)하지도 못하고

주의 경계에서 머물러만 있다면

해탈의 도리를 얻지 못한다.


오지도 않고 또 가지도 않고

이미 해탈하여 머무르고

머물러 다시 해탈하고

해탈하여 다시 속박된다.


혹시 어떤 수행을 하는 자가

퇴전하지 않는 곳에 머물렀으나

미세한 번뇌가 일어남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니


번뇌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뛰어난 곳에 이르지 못한다.

지위에 대하여 분별이 없으면

또한 그 퇴과(退過)도 없다.


지위의 모든 허물이 일지 않으니

이와 같이 그 주(住)에 머문다.

그러다 혹 주분(住分) 중에서

중묘(衆妙)의 모양을 잃어버린다.


중묘의 모양이 비록 멸해도

마음은 여전히 그 지위에 따른다.

마음이 그 지위에 따를 때

여분(餘分)의 낙상(樂相)이 생긴다.


이미 적은 낙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게 머묾에 의지하여 머문다.

그 고요하게 머무는 마음을 인(因)으로 하는 것을

짓는 것이 이미 지어졌다고 말한다.


고요하게 머묾에 안주함이 구족하지 못하면

구족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무지(無智)가 마음과 눈을 가렸는데도

지혜롭다고 스스로 말하니


무지장(無智障)을 수행하여

응용할 바를 깨닫지 못한다.

응용할 바를 깨닫는 자는

능히 구경지(究竟地)에 머물리라.


저들 공지(共地)에 머무는 자는

여러 가지 번뇌에 오염된다.

만약 수행하는 자로 하여금

불공지(不共地)를 이루게 하여


이와 같이 과환(過患)을 알면

끝내 그는 계박되지 않으리라.

그러나 번뇌의 과실을 모르고

어리석어 실지(實智)가 없으면


선(禪)으로써 길안(吉安)을 깨달음이

마치 코끼리가 나무에 매인 것 같으리라.

수행하여 이염(爾炎)을 관하되

그 일어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의지하여 나오는 곳을 따르면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솟아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으니

모양이 일어남을 보지 못하고


또한 멸하는 곳을 알지 못하면

과(過) 또한 과라 할 것이 없다.

설하는 바 모든 장애는

모두가 견고한 주상(住相)이다.


그로 해서 머문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은 명지(明智)의 설이 아니다.

지어서 일어나는 모든 과환이

얼마간 인연의 계박이라 해도


능히 모든 대치(對治)를 사용한다면

중묘(衆妙)를 다시 드러내어 설하리라.

높일 자를 공경하지 않고

또한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허물을 덮어 가리고

밝은 자를 향해서 설하지 않는다.

나의 나이가 벌써 쇠하여 늙었으니

이미 사람들이 버리는 바가 되었다.


더러 이양(利養)을 잃기도 해서

나로 하여금 고뇌가 일게 한다.

마음이 언제나 두렵고 근심스러우니

깊은 생각을 하며 길이 탄식하노라.


내가 나중에 죽게 될 때에

장차 무슨 계책을 세울 것인가?

허물을 숨기면 마음이 근심스럽고

미혹되면 번뇌에 머물게 되니


스스로를 거슬러 죄를 저질러 몸을 더럽히면

큰 공덕의 바다를 잃는다.

현재의 법락(法樂)에 맛을 붙여서

음식을 탐하며 간사해 지혜가 없다.


후세의 과보를 내던져 버리고는

이 같은 과악(過惡)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든 주에 속박됨에

그 일어남도 각각 다르다.


수행을 함에 비겁하거나 용렬하지 않으면

능히 응하여 대치할 바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겁하거나 용렬하여 방편이 없이

승진할 길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려우리니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코끼리와 같다.

이처럼 빠져나오기 매우 어려우니

게으른 마음에 속임을 당하게 된다.


긴긴 밤을 진창에 빠져 꼼짝을 못하고

열화가 치받아서 죽음으로 내달으리라.

업행과 번뇌와 과보

이것이 세 가지 장애가 되어 가린다.


지혜가 없고 일어날 기세가 없으면

영원히 머묾에 빠져버리게 되리라.

오랜 세월 어리석음을 쌓아

업행과 모든 번뇌들


이 같은 것들에 얽매이고

미혹하고 어지러워 자재하지 못하다.

모든 과악들을 익혀 가까이하면

선한 공덕을 멀리 여의게 되어


그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니

마치 허공을 맴도는 화살과 같다.

뱀의 독이 성하여 가득하고

전갈과 악룡(惡龍)이 득실거리며


깊은 바다가 밑바닥이 없고

물도 없는 불구덩이인 이런 곳을

소경이 헤맨다고 한다면

눈이 안 보이니 보지를 못하리라.


수행하는 자가 머문 곳에 얽매임도

그 잘못됨이 역시 이와 같다.

주과(住過)가 한량없이 많으니

승진의 덕도 역시 그러하여


바다와 같이 그 끝과 바닥이 없으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세간에 지혜의 장애가 없으니

진실의 지혜가 등불이 된다.


등불을 들고 방일하지 않으면

그 밝음이 꺼지는 일이 없으리라.

주분(住分)의 허물은

모든 간힐(奸黠) 없는 자를 속박함을 설하고


지혜를 결정하는 경계는

그 구경(究竟)이 비아분(非我分)이라.

갖가지 허물에 얽매인 것들이

그 얽매임이 한 모양이 아니니


마땅히 업의 뭇 연(緣)을 안다면

불성(佛性)을 능히 깨달으리라.


5. 수행방편도승진분(修行方便道升進分) 

 

비구여, 안반념(安般念)의

공덕주(功德住)와 승진(升進)은

능히 지혜를 더하게 하니

내가 지금 차례대로 설하리라.


공덕에 이미 머물렀으면

더욱 나아가 공덕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공덕에 머무르는 것과 올라가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수행을 설하리라.


수행은 코끝에

마음을 묶어 굳게 머물러 있게 하고

생각을 오로지 전념하여 분명하게 하며

올바르게 관하여 풍상(風相)에 의지한다.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매어 굳게 머물게 하여

생각을 이어 나가서 잊지 않는다면

이것이 공덕에 머무는 첫 단계이다.


이런 공덕에 머문 다음에

다시 방편을 일으켜

공덕을 더 얻으려고 할 때에

거기 머무르면 더욱 올라감이 있게 된다.


더욱 진전이 있을 때에는

또한 공덕에 머무르는 것이 생긴다.

이것에 머무르면 곧 더욱 진전이 있게 되고

이미 나아가면 다시 공덕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안반(安般)의 모양인

공덕과 모든 허물

호흡의 가벼움과 무거움, 차가움과 더움

부드러움과 거침, 껄끄러움과 매끄러움을 잘 알아야 한다.


들숨과 날숨을 섭수하여

이것을 모든 근(根)에 받아들여

그 소연(所緣)의 경계에서도

이것을 섭수하여 고요하게 머물게 된다.


수식법[數法]으로 밖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되돌려 섭수하는 뜻도 또한 그러하다.

바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아나(阿那)라고 한다.


마음이 소연을 따라 구르면

그치게 하여 다시는 구르지 않게 하고

마음이 소연을 따라 일어나면

이를 다시 제어하여 멸하게 한다.


수행하여 관(觀)이 증진하면

이를 제어하여 지(止)에 따르게 한다.

수행하여 만약 지가 증진하면

이를 일으켜 관(觀)에 따르게 한다.


견(見)이 증하면 촉(觸)으로 하고

촉이 증하면 견으로 한다.

득증(得證)과 지증(智證)

이 두 증이 함께 서로 섭지(攝持)한다.


수행하는 데 고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머물러 섭수하면

몸에서 청량함이 일어나서

모든 열뇌(熱惱)를 멸하여 없앤다.


요동하여 고요하지 않은 마음을

붙잡아서 고요하게 머물게 한다.

방편에 힘써 회전하면

그 몸이 모두 충만하게 된다.


4대종(大種)을 장양(長養)함은

호흡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 종류가 다시 증익하면

수행하는 사람은 4대에 집착한다.


들숨[阿那]의 힘은 능히

고요히 머물게 하며 선법(善法)을 일으키고

내가 소유한 큰 악도

없애 나가게 한다.


호흡이 짧아지면 차츰 멸하여

수행자는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므로 부처님 세존께서는

이를 말하여 아나(阿那)라 하셨다.


다시 반나(般那)의 모습

이것을 지금 대강 설명한다면

털구멍의 모든 구멍과

호흡의 길을 먼저 깨끗이 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반나라고 하니

바야흐로 들어오는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날숨을 수행할 때에

모든 근(根)이 소연을 따르고


마음과 심법(心法)이 그에 따르는 것을

또한 반나라고 한다.

날숨이 사라지고 나면

드디어 근본지(根本地)에 들어간다.


정수(正受)를 그치면

이것이 사(捨)를 거쳐 숨을 내쉰다.

수행하여 날숨이 멸하면

다음으로 들숨[阿那]이 생긴다.


멸진하여 삼마제(三摩提)에 드니

제4선(禪)이 또한 그러하다.

날숨[般那]이 이미 멸하고 나면

다음으로 들숨이 생긴다.


들숨을 쉴 때 희망하는 것을

아세바사(阿世婆娑)라고 말한다.

내가 죽은 자를 살펴보니

분명 이와 같은 모습이 없다.


그런데 호흡이 다시 생긴 자는

살펴보니 이러한 모습이 있다.

독기 서린 진창의 화사(火蛇)의 모습과

그 경계가 비슷하다.


날숨으로 능히 마음을 섭수하여

소연을 따르지 않게 함이

마치 코끼리를 제어하는 갈고리와 같은 것을

파세바사(波世婆娑)라고 한다.[날숨은 섭심(攝心)의 뜻이 있다.]


전도된 생각을 제거하여 버리고

진실한 생각을 성취하여

자재(自在)와 향상함을 여의고

오직 공행(空行)의 모임[聚]만을 행하라.


본래 온 곳이 없고

가도 이를 곳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으니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


지혜로운 자가 이것을 분명히 본다면

모든 짓고 아는 것을 여읜다.

날숨은 만드는 것이 없다고

본다면 전도(顚倒)에 떨어지리라.


날숨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

그것은 볼 수가 없다.

목숨이 끊어지면 모든 호흡이 멈추듯

과거란 것 역시 그러하다.


안반의 모든 공덕들과

날숨과 들숨과

온갖 사물 그리고 문자의 뜻을

내가 이미 대강 설하여 마쳤노라.


이런 것들은 고설(故說)을 보탠 것이니

일찍이 서로 분리해 써서는 안 되리라.

만약 깨닫는 생각이 흩어지면

마땅히 안반념(安般念)을 익혀라.


이미 수식(數息)에 응하게 되면

곧 내부의 탐착을 제거한다.

만약 수식에 순응해 따른다면

곧 따르지 않는 것을 여의게 된다.


뜻이 흩어짐이 없는 경지에서

능히 흩어진 모든 생각을 포섭하라.

먼저 수를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열에 이른다.


수행하여 이 수에 따르면

곧 공덕에 머묾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공덕에 머묾을 얻고 나면

곧 더욱 나아가게 되기를 구한다.


일체 산란함을 없애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더욱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수문(數門)을 마친다.]


수는 능히 일체를 멸한다.

깨닫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멸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체가 사(死)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나아가기 때문이다.


안과 밖으로 들고 나는 호흡이

가는 대로 마음의 그림자가 따라

결정(決定)을 하여 잘 관찰해서

따르면 이것이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을 수행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이르러[날숨과 들숨이 일어나는 곳은 다 같이 배꼽에 있다.]

이와 같이 승진할 줄을 안다면

바깥의 탐착을 능히 여읜다.[수문(隨門)을 마친다.]

 

극풍(極風)의 처소에 편안히 머무르면[상하 극처(極處)의 풍제(風際)이다.]

삼마제(三摩提) 등이 일어난다.

삼매가 이미 일어나면

곧 공덕에 머묾을 얻는다.[지문(止門)을 마친다.]


수행하여 정(正)에 머물면

여러 풍(風)을 관찰하여

먼저 본처(本處)를 관하라.

이른바 풍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곳은 나(那)라고 하는데

하나가 되는가, 둘이 되는가?

서늘함과 따뜻함을 모두 관찰하면

여덟 가지가 앞에 설한 것과 같다.


제대(諸大)를 모두 관찰하면

오직 일종(一種)만 있을 것인가?

볼 때엔 모든 것이 갖추어 있으니

하나로써 증상(增上)하여 설하리라.


수행하여 풍대(風大)를 관하면

조색(造色)이 그것으로부터 생긴다.

오직 마음과 심법(心法)과

조색에 따라 일어난다.


조색이 아니고서야

다시 종대(種大)가 있을 것인가?

모든 유(有)의 들숨과 날숨의

이 바람을 의종(依種)이라 한다.


그리고 보풍(報風)과 장양(長養)

이를 세 종류의 바람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들숨이 앞에 있고

날숨이 뒤에 있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날숨이 앞에 있고

들숨이 뒤에 있다고 한다.

모두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한다.


그 진실된 의미를

지혜로운 자는 곧 결정한다.

배꼽 있는 곳에서 일어나서

털구멍의 길을 깨끗이 다스린다.[이것은 보풍(報風)이 털구멍을 열기 때문에 출(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풍의 뜻에 연유하기 때문에

그들이 날숨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털구멍이 이미 열려 깨끗하면

들숨이 이미 앞에 있게 되니


마치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에

들숨에 들기 때문에 일어남과 같다.

호흡의 바람[息風]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래서 파나(波那)라고 말한다.[이것이 진실의 뜻이다.]


호흡의 바람의 모든 종대(種大)는

끊어버려도 고(苦)가 생기지 않는다.

저것이 수(受)가 아님을 알아야 하리라.

수라고 한다면 그러하지 않으니


저 수행하는 자들은

모든 단핍(斷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은

몸으로 다시 받지 않으면


만약 식명(識命)을 끊을 때에는

호흡이 곧 회전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중생의 수식이니

반드시 명근(命根)을 연유해 일어난다.


호흡이란 곧 신행(身行)이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이다.

또한 근본의(根本依)라 이름하니

중생이 말미암아 구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호흡이 멸하여 없어지면

목숨이 의지할 만한 곳이 없다.

능히 그 명근(命根)을 간직하기 때문에

중생의 수식이라고 한다.


아나(阿那)와 반나(般那)의 염(念)은

바람을 인연하여 경계를 삼는다.

비록 말하여 바른 사유라고 해도

그러나 진실한 행은 아니다.


모든 수행하는 바의 관은

모두 바람을 인연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관함에 차별이 있으니

이것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아나와 반나의 염에는

분별하여 세 종류가 있다.

이른바 들음(聞慧)을 따라 일어나는 것과

사혜(思慧)와 수혜(修慧)이다.


이 안반념으로 해서

비구의 문혜(聞慧)가 생기니

모든 때에 받아들이는

명자(名字)를 경계라 한다.


들고 나는 호흡을 경계로 하여

정념(正念)하면 사혜(思慧)가 생긴다.

그것이 이름에 인연할 때

때로는 다시 뜻에 인연한다.


아나와 반나의 염이

일어나는 곳에서 선혜(禪慧)를 닦으면

모든 것을 버림은 관(觀)이라 하니

오직 모든 법의(法義)만을 인연한다.


마땅히 경계가 가까워

갖가지 다름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지는 인연도 또한 없으니

이를 등지(等智)의 행(行)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러 안반념은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의 성품이라 한다.

또한 사성(捨性)이라 이름하는

이것은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이니


마땅히 이 지혜의 성품은

근(根)을 버림과 함께 생기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그런데 만약 이 성품을 버려

나머지가 더불어 일어나게 된다면


욕색(欲色) 두 가지의 번뇌를 갖게 되는데

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무색(無色)이 된다.

그 같은 최후의 선(禪)이 아니고

몸이 밀(密)하여 호흡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근본지(根本地)라 하는 것

또한 이들 권속(眷屬)이다.

오직 권속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은 근본지가 아니다.


저 성품을 버려

근본지에 있게 하고자 하면

아나와 반나의 염은

마땅히 8지(地)에 있어야 한다.


오직 권속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근을 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저 안반념을 알면

오직 5지(地)에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정(定)은 5지에 있게 되고

이곳을 의지하여 회전하게 된다.

욕(欲)과 중간(中間)과 미지(未至)와

그리고 그 뒤의 두 권속이 된다.


가장 상정(上頂)인 4선(禪)에는

거기에 비록 근을 버림이 있더라도

그 몸을 버림은 있지 않으니

털구멍의 길로 청정하게 다스린다.


제4와 권속은

그 중에서 두 종류를 설하니

보생(報生)과 장양(長養)으로

오직 바람에 의지함에 있지 않다.


날숨과 들숨은

이 바람을 의지한다.

몸이 지극히 후밀(厚密)하기 때문에

의지함이 없음을 두 종류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날숨과 들숨을

제4선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바늘[刺]이라고 설하시고

또 인후(咽喉)가 있는 곳이라고

설하신 바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라.


이것은 저것의 방편이기 때문에

또한 선(禪)의 뜻을 섭수한다.

날숨과 들숨

그곳에는 정(定)이 없다.


수행하여 날숨을 관하면

위로 제4선에 이른다.

바람의 경계를 지극히 하고 나서

그것을 바르게 억념(憶念)하라.


어째서 나의 이와 같은 마음이

구경(究竟)의 인연이 아니라 하는가?

혹은 다시 그 위에서

조금 나아가 거듭 관찰하라.


혹은 곧 그곳에서 머물러

나머지 방편을 짓지 말라.

이와 같이 관(觀)하여 수행하면

곧 의혹을 제거할 수 있다.


수행하여 풍제(風際)를 지극히 하고

이곳을 잘 관찰하라.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곧 의관(疑觀)을 제거한다고 함을 알라.[관문(觀門)을 마친다.]


위를 관찰하고 난 뒤에

바람에 의지하여 다시 그치어 머문다.

응하는 바를 관찰하여

다시 나머지 닦을 바를 일으킨다.


만약 저 풍을 관찰하는 마음을

돌이켜 흔들림 없이 잘 결정하면

이것을 말하여 수행을 하는 자가

교묘한 방편을 회전한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마을에 놀러 갔다가

하던 것을 마치고 나면 돌아가듯이

이와 같이 관(觀)을 수행하면

희락(喜樂)이 드디어 증장하리라.


숨을 들이쉰다는 생각을 버리고

날숨의 연(緣)에 편안히 처(處)하라.

그리고 다시 숨을 내쉰다는 생각을 버리고

들숨의 연에 편안히 처하라.


수(數)에 대하여 구경에 이르고 나서

호흡이 가면 또한 이를 따라가라.

이와 같은 모든 종류를

또한 회전이라 이름한다.


응하는 바의 상을 관찰하는데

모양 모양이 회전하고

갖가지 일을 관함도

차례로 회전함 역시 그러하다.


회전을 잘하는 자에게도

이 회전의 뜻을 설해야 한다.

마땅히 이 회전이

지혜를 수행하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저 방편이 일어나는 것에 따라

뛰어난 도가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문혜(聞慧)를 염하여 제도하면

차례로 사혜(思慧)가 생긴다.


그리하여 욕계의 행을 버린 다음

수혜(修慧)에 들어가는 것을

모두 회전이라 이름하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이다.


저들 이르지 못한 곳으로부터

차례로 초선(初禪)에 들어가

제3선에 이르게 되니

그 회전 역시 이와 같다.


그리고 제4선의 권속

만일 그곳에 저 바람이 있다면

이 또한 회전에 응하여

그 근본지에 들어간다.


그것에 따라 교묘한 방편을 일으켜

차례로 일어나는 연에 머문다.

들고 남과 우파(優波)

이 여섯이 모두 회전한다.


공방편지(共方便地)를 버리면

공지(共地)가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공방편지를 버리면

불공(不共)이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불공방편(不共方便)을 버리면

불공이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상방편지(相方便地)를 인연해서

구경지(究竟地)로 전전(展轉)한다.


이것을 상회전(上廻轉)이라 하니

밝은 지혜로 일컬어 설하는 바이다.[성인과 범부가 함께 가진 법을 이름하여 공지(共地)라 하며, 연(緣)을 따라 연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제상(諸相)을 회전한다고 하는 바, 모든 방편에 대해 여러 지(地)가 차례로 회전함 또한 이와 같다.]

내가 지혜의 방편으로

이미 회전의 뜻으로 말하였으니


무구한 청정의 염(念)을

마땅히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수행하여

잠시 동안 억눌러 번뇌를 그치게 한다면


이것을 곧 청정이라 하니

부정(不淨)이 응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미 수식(數息)을 성취하면

내부의 탐착을 능히 버린다.


이러한 뜻은 마땅히

지혜로운 자의 관이 청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순응해 따르는 것이 성취되면

능히 외부의 탐착을 버린다.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면

지혜로운 자의 염(念)이 청정해진다.

비구의 마음에 이미 머물면

혼란함에 어지럽혀지지 않는데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관찰하여

수행하면 지혜가 청정하리라.

 

그런데 만약 이미 풍제(風際)에서

관찰하여 의혹을 여의고

다시는 호흡을 구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함이다.


염지(念地)를 이미 모두 마치고

의지했던 모든 과악(過惡)들을

하지 않으면 청정한 것이다.


이것을 잠깐 사이에

아나와 반나의 염(念)의

방편도(方便道)를 섭수한 것이라고 한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升進)

이 뜻을 내가 이미 설했노라.


6. 수행승도승진분(修行勝道升進分) 

 

공덕에 머묾과 승진

그리고 나머지 방편이란

수행의 일체지(一切地)인

공지(共地)와 불공지(不共地)를 섭수하는 것이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

그것은 뛰어난 도에 의지해 일어난다.

갖가지 상행(相行)의 뜻에 대해

지금 설할 테니 잘 들으라.


제체(梯揥)가 이미 일어나면[심주처(心住處)의 이름이다.]

마음의 애락을 수행하라.

이와 같은 애락의 마음이

선교방편의 공덕주(功德住)가 된다.


지혜로운 자는 방편을 잘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열심히 수행한다.

이와 같이 그 공덕주는

곧 선교방편이다.


장차 미묘한 경계에 들어갈 때에

유주(流注)의 생각에 따르지 말라.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섭수해 머물고

마땅히 머무는 바의 미묘한 공덕을


받아들여 지님과 같이

청정하게 하여 번뇌의 탁함을 없애고

구족하여 감소함이 없고

청정하여 안온함에 머물게 된다.


순일하여 두루 선명하게

정(定)에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느낌에 연유하여 있으니

때가 지나면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색상(色相)이 차례로 일어나면

갖가지로 여러 모양이 생기니

수행하여 바르게 사유하면

몸과 마음에 희락(喜樂)이 생긴다.


이 공덕주에서

구족하여 지관(止觀)을 섭수하면

이미 능히 몸의 즐거움을 일으키고

마음 또한 바르게 안온해진다.


자지(自地)와 타지(他地)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

이것을 지금 대강 설하노라.

수행을 널리 분별하여


수행의 삼마제와

선교방편으로 수순하여 집중하면

지혜로운 자는 혜안을 여니

이를 공덕이라 한다.


마음이 만족한 곳에 안립함을

공덕에 머묾이라 하고

성도(聖道)의 대치(對治)를 수행함을

공덕에 오르는 것이라 한다.


대치의 모든 성행(聖行)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은

경지에 따라 과악(過惡)의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능히 모두 제거한다.


수행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공덕의 이익이 증광(增廣)한다.

신(信)․계(戒)․문(聞)․사(捨)․혜(慧)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근(根)이 없음과


욕(慾)과 정진(精進)과 참괴(摲傀)와

제(除)와 희(喜)와 방일(放逸)하지 않음과

열락(悅樂)과 염(念)과 정(定)과 사(捨)와

정지(正智)와 여타의 선법(善法)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자지(自地)의 모든 번뇌를 여읜다.

그 공덕에 머물러 서면

곧 지위를 따라 대치한다.


이것이 정진의 힘에 연유하여

선을 도와서 마음을 장양(長養)한다.

어찌 저 지위의 가운데에

종수(種數)를 섭수하지 않으리오.


공덕에 머묾과 승진의

자지(自地)를 자세히 설했노라.

자지(自地)의 선근의 힘으로

타지(他地)에 공덕이 생긴다.


가장 뛰어난 의리를 수행함에 대해

이 모양을 지금 대강 설하리라.

자지가 이미 증상하면

나머지 뛰어난 청정한 법이 생긴다.


마땅히 이 공덕은

타지로서 승진하고

한량이 없는 방편을 행하며

모든 도탈의 법[度法]을 알아야 하며


갖가지의 대치의 모양으로 하여

타지의 공덕이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

이를 저 초념처(初念處)에서

3념(念)을 겸하여 수행한다고 한다.


난래(煖來)와 정(頂)과 인(忍)과

세간의 제일법(第一法)과

견도(見道)와 사유도(思惟道)와

무학도(無學道)를 또한 수행하라.


모든 선(禪)과 신통(神通)과

무량과 무색정(無色定)과

바른 법의 도품분(道品分)과

구경(究竟)의 누진(漏盡) 지혜와


배사(背捨)와 일체입(一切入)과

묘원(妙願)의 지혜와 청정(淸淨)과

신념(身念)의 선근력(善根力)이

이와 같은 제법(諸法)을 일으킨다.


미묘한 공덕의 모양은

모두 순서에 따라서 생기고

만약에 계심처(繫心處)에 머물면

이것이 곧 자지(自地)의 모양이다.


그 모양이 일어남이 몸에 있으니

또한 나타나고 또한 촉(觸)한다.

때로는 과(果)에 가깝다고 설하고

때로는 가깝지 않다고 설한다.


혹은 다시 과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공(空)으로서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이른바 과에 가깝다고 하는 것은

이 모양의 주변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저 과에 가깝지 않다면

이 모양이 먼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드러나서 닿게 한다면

이것이 곧 과와 함께한 모습이 된다.


비록 드러나도 불촉(不觸)한다면

공상(空相)이어서 공덕이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무과수(無果樹)가

꽃이 화려해도 열매가 없음과 같다.


마치 사람이 몹시 춥거나 목마를 때에

먼 곳에 불이나 물이 보인다고 해도

끝내 그곳에 닿을 수가 없으니

그저 보기만 하는 모양이 역시 그러한 것과 같다.


공하므로 공덕이 없으니

몸에 쾌락이 없다.

희열(喜悅)이 끝까지 증장하여

식락(息樂)과 적지(寂止)와


몸과 마음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받는다.

이를 말하여 과(果)와 함께한 모습이라 한다.

공덕과 그리고 나머지 법의

자지(自地)와 타지(他地)와의


승진상(升進相)에 회전을 하니

4종(種)이 모두 역시 그러하다.

모든 승진의 모양들과

수용하고 묘한 갖가지 인(印)과


연화(蓮花)와 뭇 보배 나무와

화려한 모든 그릇과 의복들이란

광염(光炎)이 지극히 찬란하니

한량없는 장엄 도구들이다.


지혜로운 자는 뛰어난 도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을 설한다.

일어나는 모든 묘상(妙相)들을

내 지금 이를 갖추어서 설하리라.


수행하는 자들은 잘 들으라.

이 위의 만다라(曼茶邏)에서

순일하게 온갖 상(相)을 일으키고

유광(流光)이 참연(參然)히 내려오고


청정하기가 마치 파리(頗梨) 보배와 같으니

그 빛이 4체(體)에 충만하다.

몸을 지극히 유연하게 하고

다시 몸으로부터 나와


점점 아래로 흘러내려서

그 선근의 힘을 따라

멀고 가까움에 일정한 모양이 없고

그것이 저 만다라(曼荼邏)를 이루어

형세가 다하면 본처(本處)로 돌아온다.


근본 종성(種性) 가운데에

그 모양이 세 단계로 일어나니

공덕주(功德住)의 다섯 모양과

공덕진(功德進)의 다섯 모양인데


불괴(不壞) 공덕이 둘이요

반괴(半壞) 공덕이 둘이요

진괴(盡壞) 공덕이 하나이다.

다시 계심처(繫心處)에 돌아와서


본래의 종성(種性)에 머물러

시방에 두루 유산(流散)해서[10상(相)이 생긴다.]

그 공덕이 10상(相)의 위에[10상이 각각 10상을 낳는다.]

다시 각각 1상(相)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유산(流散)의 곁에서

모든 심묘상(深妙相)을 일으키고

저 심묘(深妙)한 경계에서

다시 심묘상을 일으킨다.


위아래로 여러 윤상(輪相)이

다시 이같이 나타나니

저 3계(階)의 처소에서

갖가지 모양들이 생긴다.


자상(自相)은 이미 각각 멸하여

오직 저 총상(摠相)에만 머문다.

모든 잡상(雜相)들은 이미 없어서

적정(寂靜)의 행(行)에 회전한다.


이들 세 가지 만다라는

경계가 나뉘어도 옮기지 않고

근본의 공덕주에 순응하니

자체(自體)가 앞의 말과 같다.


들숨의 삼마제가

하방(下方)에 두루 충만하고

날숨의 삼마제가

상방(上方)에 두루 충만하여


두 가지가 함께 시방에 가득하니

묘한 심심(甚深)을 바르게 받는다.

이와 같이 마음에 따르면

이를 일러 법자재(法自在)라 한다.


청정한 계심처(繫心處)를

법이 없으니 구하지 않는다.

이미 생긴 것을 장양하여

모든 공덕을 성취하니


하늘의 만다수(曼陀樹)처럼

만다지(曼陀池)에서 나서 자란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과

갖가지의 묘상(妙相)들


이 뜻을 내가 이미 설했으니

이를 수행하여 잘 지켜 가져라.


7. 수행방편도안반념결정분(修行方便道安般念決定分) 

 

승진의 법이 섭지[攝]하는

여러 공덕들을 이미 설했으니

수행의 결정분(決定分)에 대해

이제 이를 차례로 설하리라.


날숨의 염(念)을 잘하면

들숨 또한 그러하다.

출입을 자세히 사유하고

분별하여 갖춤에 명료하면


이것이 곧 결정분이니

세존께서 설하신 것이다.

일체의 선근(善根)은

각각 그 자상(自相)을 다하고


가장 뛰어난 무상(無上)의 지혜를

그 이름을 말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이 결정분에 안주해야 하며


날숨과 들숨 때에

무상(無常)한 모양을 바르게 관찰하라.

호흡법이 차례로 일어나고

전전(展轉)하여 다시 서로 인연이 되며


나아가 뭇 인연이 합하여

일어나는 때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화합의 법은

그 성질이 신속히 쇠하여 멸함을 알아야 한다.

법은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성(性)은 약하므로 무상하다. 

 

모든 인연의 힘으로

이 법이 생기게 된다.

허망하여 견고함이 없으니

신속히 일어났다가 신속히 멸한다.


비상(非常)의 독(毒)에 해침을 받아

그 성(性)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 같은 관법을 수행한다면

이것이 곧 결정념이다.


저 운행하는 하늘에 비유컨대

호흡의 변화가 그보다 더욱 빠르다.

무상상(無常想)을 결정하고

수행하여 열반으로 나아간다.


날숨이 아직 멸하지 않으므로

들숨이 생기지 않고

들숨이 아직 멸하지 않으므로

날숨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수행의 결정분이다.

거칠고 껄끄럽고 날카로운 가시가 생기고

갖가지로 괴롭고 핍박하는 모양은


이른바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때에 줄어들고 끊어진다.

호흡에서 능히 깨달아 알아라.

모든 괴로움의 모양이 구족함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진리의 사유를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자상(自相)은 견고함이 없고

적멸하고 공하고 무아로서


인연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멸하는 것이다.

아상(我相)이 있음을 여의면

항상 머물러서 변역(變易)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전도의 행(行)을

일체 모두 멀리 여의고

오직 진실하게 관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내가 없음으로써 견고함이 없고

또한 자재함이 없는 것이다.

저 들고 나는 호흡에는

일찍이 각지상(覺知相)이 없다.


내가 없음을 자세히 아는 것을

결정이라 한다.

이 지혜의 모양이

성행(聖行)의 이름에 비슷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방편인 것이니

저 진실의 행이 아니다.

비구여, 안반념(安般念)은

잡된 생각들로 깨달음이


이미 어지럽혀져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마땅히 수(數)를 따라 일으킨다.

혹은 들숨을 따라 수를 헤아리고

혹은 날숨을 따라 수를 헤아린다.


생각의 어지러움과 각관(覺觀)의 상(想)은

이로 인해 구경(究竟)하여 여읜다.

지혜로운 자는 들숨에 있어서

마음을 묶어 수식을 행할 때에


한 번 들어오는 것을 세어서 하나로 하고

나가는 숨을 섞어서 헤아리지 말며

전념하여 수를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같이 하여 열에 이르고

그 열에 날숨을 버리면

이로부터 결정을 얻는다.

이것이 곧 구족된

근본수(根本數)를 성취한 것이다.


다시 나머지 수법(數法)이 있으므로

방편을 일으켜 수행한다.

만일 근본수법을

결정할 수 없으면


숨을 촉급하게 하여 깨닫기 쉽게 하고

방편으로 마음을 생하게 한다.

마땅히 두 번의 나가는 숨을 버리고

하나의 들어오는 숨을 세어야 한다.


마음이 안정된 것이 흩어지지 않으면

둘의 수를 센다.

만약에 두 번의 방편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열의 나가는 숨을 넘은 뒤에

들어오는 숨의 하나를 헤아린다.

바르게 생각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으며

차례로 구족하게 되는 것을


수행자의

열 가지 수(數)의 성취라고 한다.

위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은

곧 수의 구경이다.


더 이상은 다시 버려야 한다.

수를 더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이와 같이 수를 수행하면

이것이 곧 수법(數法)을 이룬 것이다.


이룬 뒤에는 마땅히 이를 버리고

다시 나머지 방편에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수법을 수행하여

만약 다시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마땅히 다시 앞에서 설한 것처럼

처음의 수로 돌아가서 시작해야 한다.

방편을 써서 수법을 이루면

곧 결정분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수법을 성취하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에 수순하는 것은

수행의 바른 방편을 설한 것과 같다.


이 같은 여섯 가지를 수행하면

신속히 염리상(厭離想)이 일어나

생사에 집착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힘써 근심과 번뇌를 끊고


수행하여 마음속에

일체 유위법(有爲法)을 멀리 여의어라.

욕망을 여읨이

청정(淸淨)한 결정분(決定分)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긺이 앞에 있다고 말하고

혹은 짧음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그 결정의 뜻에 대하여

지금 이를 차례로 설하리라.


날숨이 일어날 때를 일러

짧음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응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고

형세가 차츰 증진하기 때문에


호흡이 감으로써 점점 멀어지고

나아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소진하는 이것이 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짧은 것은 그러하지 않다.


날숨이 차츰 증장하더라도

구경처에 이르지 못하면

이 가운데서 관찰하는 바를

이름하여 긴 가운데 짧음이라 한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방편을 정진하여

전념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증장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긴 가운데 긺이라 한다.


이미 관함에 바람이 회전하고

나머지 구상(求想)을 버린

다음에 결정을 얻으면

이것이 곧 짧은 가운데 긺이다.


들숨이 극도로 짧을 때에는

돌아와 일어난 곳에 이르는데

그 관찰하는 바를

이름하여 짧은 가운데 짧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고

수행하여 매우 명료하면

이미 결정분을 얻게 된다.

다시 나머지 방편에 나아가


몸 가득 널리 출입하는

신행(身行)의 호흡을 깨달아 알라.

이와 같은 각(覺)을 수행하면

이것을 곧 결정분이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세차게 타는 불길의

그 광염(光炎)이 길고 먼 것과 같다.

섶이 다하면 불도 꺼지나니

불꽃이 다시 차츰 짧아진다.


그러나 다시 섶을 다 지핀다면

불꽃이 두루 널리 비추고

세력이 다하면 드디어 꺼지나니

저 네 종류의 바람도 역시 그러하여


혹은 길고 짧음의 내외에서

교호(交互)하여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혹은 둘을 함께 장단(長短)으로 말하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설명한다.


마치 저 깊은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릴 때

두레박이 내려갈수록 점점 멀어지다가

다시 이를 끌어올려

끝에 이르면 그것이 짧아지는 것과 같다.


마치 허공에 활을 쏨에 있어서

날아가는 화살이 거침없이

점점 높이 올라가지만

힘이 다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과 같다.


수행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풍상(風相)에 의지하여 관찰하면

처음에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니

장단의 뜻도 역시 그러하다.


마치 저 끌고 돌아가는 바퀴가

굽혔다 폈다 하며 서로 왕래할 때

멀리 갔을 때는 길다고 하고

가까이 돌아오면 짧다고 하는 것과 같다.


호흡의 바람이 번갈아 들고 나니

길고 짧음이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저 진제(眞諦)를 관찰해 보면

먼저는 고(苦)인데 나중엔 집(集)인 것과 같다.


호흡의 관함 또한 이와 같아서

먼저는 길고 다음엔 짧다.

만약 초선의 호흡이 짧고

제2선의 호흡이 길다고 하더라도


정수(正受)의 뜻에 거스른다는

이러한 말은 그러하지 않다.

그와 같은 초선 중에서

호흡의 바람의 세력이 지극히 멀고


제2선의 호흡이 짧아서

정수가 차츰 차별된다.

몸에 가득 두루 각지(覺知)를 함은

곧 제3선에 의지한 것이다.


최후에 몸으로 하는 호흡은

털구멍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삼매가

공덕의 상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여 거기에 안주하면

깨닫는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된다.

그런데 왜 초선을 하는 중에

긴 것만 말하고 짧음은 없는가?


모든 의지하는 것을 버리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호흡이 길다.

그것은 깨닫는 생각의 힘으로써

호흡을 하여 가고 길어진다.


두 번째는 모든 의지하는 바를 버리므로

세력이 약하기에 호흡이 짧다.

깊고 깊은 수다라(修多羅)에서

부처님께서는 산정(山頂)의 샘은


흐르는 세력이 멀리 미치지 않으니

여타의 곳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하셨다.

그와 같은 산정의 비유처럼

두 번째의 의지하는 바도 역시 그러하여


단지 그곳을 좇아 일어나니

이것이 끝내 멀지 않다.

건장한 사나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산을 오르며


있는 힘을 다해 기운을 쓰니

그 호흡의 바람이 급하게 회전한다.

그러다가 편안한 곳에 이르면

그 호흡이 고르게 되니


이러한 비유는 저 호흡이

먼저는 짧고 나중은 길다는 말이다.

저 건장한 사나이가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도


신력(身力)의 방편을 쓰면

그로 해서 호흡을 길게 한다.

그러나 만약 방편이 나빠서

자기 힘으로 짐을 지지 못하면


힘이 없는 방편이기에

호흡이 약하므로 멀리 가지 못한다.

비유컨대 남자가 활을 쏠 때

화살을 멀리 가게 함과 같아서


힘이 약해 방편이 없으면

세력이 약해서 가까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비유는

장단의 뜻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미(細微)한 깨달음을 수행하여

모든 진리에 이와 같이

16분(分)을 명료히 하면

모두 이름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방편 승진(升進)의 이와 같은

공덕에 머묾을 분별하여

안반념을 결정함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설했노라.


그런데 저들 설하지 않은 것의

나머지 모든 공덕에 머묾을

마땅히 내가 설하리라.

그 결정분에 대한 것처럼


바람이 일어나는 바

근본의 청정함을 지극히 관찰하고

미묘한 모양을 수행하면

곧 이곳에서 

 

저 구경처에

마니 보배의 삼매를 나타낸다.

이 공덕으로부터

방편과 근본이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미묘한 방편의

근본 결정분을 이미 설했노라.

나머지 깊은 정수(正受)의 모양은

모두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8. 수행방편승도결정분(修行方便勝道決定分) 

 

이미 방편도를

섭수한 결정분을 설했으니

승도(勝道)의 결정상(決定相)에 대하여

이제 이를 내가 설하리라.


수행하여 잘 결정해서

계심처(繫心處)가 견고해지면[이염(爾炎)을 이른다.]

신수(身受)와 심법(心法)

이것에서 바르게 관찰한다.


여섯 가지 인(因)이 있어서

이것이 과(果)를 성취한다고 한다.

성(成)과 괴(壞)가 각각 세 종류이니[성숙(成熟)의 숙도 역시 괴(壞)이다.]

수행의 결정상이다. 

 

이 같은 여섯 가지의 인(因)에서

방편으로 잘 관찰하면

능히 다음 차례에

모든 번뇌를 신속히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 인이 있으니

갖가지 허물고 이루는 일이

이와 같이 많아서 한량이 없으니

내가 지금 이를 대강 설하리라.


어떤 것들이 수행이 되는가?

물의 종류의 허물어진 모양은

이레 동안이면 죽은 시체가

헐어 변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된다.


저들 모든 죽은 시체들은

검고 푸르게 썩어서 문드러진다.

이미 썩어서 피고름이 흐르니

고약한 즙이 흘러서 퍼진다.


허물어져 흐르고 문드러지고

온갖 지독한 냄새가 풍긴다.

이것이 모두 물이 허물어진 것이니

내신(內身)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저 오랜 겁 동안의 성패(成敗)는

물의 큰 힘에 연유한다.

물결이 크게 끓어 솟구치면

대지가 모두 침수되어 무너진다.


저 3선(禪)의 경계로부터

물이 두루 휘돌아서 내려오고

마구 쏟아짐이 극히 표탕(漂蕩)하여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소진한다.


모든 정식(情識)의 종류들과

백곡(百穀)과 총림(叢林)들과

흙이나 흙에서 나는 것들이

모조리 물에 의해 허물어진다.


중생들이 물로 해서 허물어짐은

이것이 모두 숙업(宿業)에 의함이다.

이상과 같은 수재(水災)의 모양이

무구(無垢)한 결정설(決定說)이다.


이와 같은 모든 종류들이

모두가 삼매지(三昧地)의

수행의 과(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 결정이란


수행하여 마음을 잘 묶어서

삼마제에 안주하고

소연(所緣)에서 능히 밝게

그 종상(種相)을 보는 것임을 마땅히 알라.


이 땅이 익을 때에 익으리.[그 뜻이 또한 괴(壞)를 말하는 것인데, 이 땅이 번뇌를 허물어뜨릴 때에 괴상(壞相)을 보는 것이다.]

경계의 바다에 충만하리라.

수행하여 보는 바의 허물어짐은

수대(水大)의 결정상(決定相)이다.


저 화대(火大)의 소괴상(所壞相)을

지금 설할 테니 잘 들으라.

식류(識流)와 식류 아닌 것들이

또한 위에 설한 것과 같다.


불이 일어나 타기 시작하고부터

모든 것들이 다 소진한다.

나아가 겁 동안의 성패(成敗)는

세계가 모조리 재가 되어 멸하고


저 불기둥이 치솟는 곳에서

이글거리는 큰 불꽃이 일어난다.

또한 2선(禪)의 경계로부터

가득 차게 모두 불을 비처럼 내리고


성한 불길이 두루 널리 변만해서

세계가 모두 퀭하니 뚫린다.

저 삼매의 경지에서

바른 관찰의 사유가 일어나고


수행하여 이런 변화를 보는 것이

불이 무너지는 결정의 모양이다.

저 풍대(風大)의 소괴상(所壞相)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이와 같은 여러 종류가

모두가 다 풍대의 허물어진 모습이라.

대지와 수미산이

분산하여 분진(粉塵)처럼


모두 소진하고 마멸(磨滅)하니

이것이 모두 바람의 큰 힘이다.

위의 저곳은 제4선이요

아래는 지극한 풍륜(風輪)의 세계이다.


재풍(災風)이 저곳에서 일어나서

그곳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다.

모든 것이 바람에 의해 무너진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진실로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여

바람이 무너뜨린 결정상을 보리라.

저들이 어떻게 수행을 한다 하는가?

언제나 깊은 근심과 싫어함[憂厭]을 일으켜 

 

앞에서 저 고법(苦法)을 보고는

이를 따라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

여덟 곳의 괴로운 큰 지옥이

각각 16분(分)을 증장하고


그것들 뭇 괴로움의 종류들의

가없고 한량없는 지옥이 있다.

중생들이 그곳에 태어나고

행함을 따라 온갖 고통을 받는다.


나는 이 악도(惡道)에서

아직 못 여의고 끌려오기도 했다.

마치 여덟 곳의 큰 지옥과 같아

누가 이를 다 일컬어 말하리오.


그 속의 한량이 없는 고통

그 끝을 얻기 어렵다.

가령 사람의 머리가 백 개가 있어

머리마다 백 개의 혀가 있다고 해도


지옥의 고통을 말하고자 한다면

겁이 다해도 다 말하지 못하리라.

어리석음과 간힐(奸黠)의 지경(地經)을

오직 부처님만이 이를 잘 분별하신다.


나는 모조리 구경할 수 있지만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자가 없다.

고독(苦毒)의 바다를 윤회하면서

무량한 겁을 오고 가고 하였으니


전도(顚倒)되어 선행(善行)하지 않으면

이러한 큰 고통의 과보에 이르게 된다.

자기 숙명(宿命)을 스스로 본다면

이런 고통은 다들 일찍 겪었다.


수행하여 본래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열반을 따름을 곧 얻으리라.

어두운 마음은

축생의 부정한 업을 증상시키니


어리석음의 불애(不愛)의 과보와

갖가지 괴로움의 과보의 몸을 받는다.

9만 9천 종류의

그 형태가 각각 서로 달라


공중을 다니는 것과 수륙(水陸)의 성질들이 있으며

기어 다니고 꿈틀거리는 무리들이

각각 그 업을 따라 삶을 받았으니

이러한 극적인 곳을 구른다.


일체의 저 축생들은

돌아가며[展轉] 서로 잔인하게 먹으니

내가 본래 어리석었으므로

일찍이 이런 괴로움을 모두 받는 것이다.


이것을 돌아보니 두려워져서

마음은 염환(厭患)을 수행하여

깊이 근심하고 싫어하면

곧 고결정(苦決定)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방편으로 염리(厭離)를 일으킨다.

다시 또 스스로

아귀의 무량한 고통을 기억해 보면


바늘구멍처럼 목구멍은 가는데

거대한 몸은 옥초산(沃焦山) 같다.

이와 같이 무수한 겁 동안을

주리고 목마르고 너무 괴로워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보고

마시려고 하니 불덩이로 변한다.

저 4대(大)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끝도 바닥도 없는 것 같으나


마시려면 없어지고 마니

주리고 목마름을 그칠 수가 없다.

발가벗은 몸에 장발을 늘어뜨린 모습이

타다 남은 다라수(多羅樹) 모양이니


이런 곳에서 한없이 오래 살면서

이 같은 갖가지 고통들을 받는다.

업풍(業風)이 사방으로 몰아치면서

몸을 휘날려 부러뜨려 버리니


마치 저 광풍이 일어나서

마른 나무를 부러뜨림 같아라.

내가 간탐(慳貪)의 행을 쌓아서

혜시(惠施)의 업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아귀에 태어나서

이 같은 온갖 고통들을 받는 것이다.

삼매의 경지에서

수행하여 사유가 일어나니


갖가지로 구별해 관찰하여

곧 방일하지 않으면

비록 번뇌는 끊지 못해도

이 같은 고통들의 핍박과 초독(楚毒)을 보아


매우 근심스럽고 두려워

생사의 고통을 지극히 싫어하게 된다.

이미 싫어하면 능히 욕망을 여의니

손바닥의 보배를 보는 것 같다.


탐욕을 이미 여의면

신속히 저 해탈을 얻게 되리라.

비유컨대 마치 향기로운 음식

그 속에 고독(蠱毒)이 있음과 같으니


갖가지 종류의 생사의 맛의

각종 괴로움이 역시 그러하다.

마치 상자에 뱀을 담아

이것을 짊어지고 갈 때


만약 그것을 깨달아 벗어던지면

뱀에게 물리지 않음과 같다.

우리 몸이 또한 이것과 같아서

4대(大)가 곧 독사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떼어버려

그로부터 해를 입지 않으리라.

아둔한 자가 횃불을 잡는데

급히 잡다보면 자기 몸을 데이니


밝은 사람은 버릴 때를 알아서

불에 데는 일이 결코 없는 것과 같다.

죽고 사는 일에 즐겨 집착하는 자는

재염(災炎)이 항상 치열하리라.


그러나 만일 깨달아 버린다면

불에 데는 일은 있지 않으리라.

비유컨대 모든 두려운 곳들도

역시 저 불타는 집과 같으니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곳보다도

생사의 두려움이 더 무서워라.

비유컨대 마치 신기루와 같고

그리고 빈 그릇과도 같다.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으니

진실된 성품 역시 그러하다.

 

이 같은 세 가지 악도(惡道)에서는

이처럼 고통이 한량이 없다.

하늘에 비록 희락(喜樂)이 있지만

이것 또한 커다란 고통이다.


비유컨대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탐애의 불길도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천상에 있으면

항상 욕화(欲火)의 불길에 탄다.


도리천(忉利天)에 있을 때에

선법(善法)에 편히 처해 앉아서

천녀(天女)가 공손히 시중을 들어 공양하고

지극한 쾌락이 한량없었음을 기억한다.


사방의 동산에 늘어선 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미묘하고 장엄하다.

뜻에 따라서 다섯 곳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일찍이 모조리 받았노라.


그때 백룡(白龍)과 코끼리를 타고

여러 욕지(浴池)들을 두루 노닐고

숲 속의 개울에서 마음껏 놀았는데

돌아보니 아직도 석양이로구나.


먹는 것은 모두 감로(甘露)의 맛이요

마시는 것들은 감만다(甘曼陀)로구나.

충실(充實)하여 의혹과 근심이 없으니

받는 즐거움이 저 큰 바다와 같아라.


또 내승당(內勝堂)에 거처하며

천녀가 아름다운 음악을 울리니

지극히 어여쁘고 아름다워

그 고운 자태가 눈이 부시어라. 

 

6만 가지 목소리가 아름다우니

연하고 고운 소리를 항상 들어

눈과 귀가 조용할 때가 없으니

나의 마음을 취하여 어둡게 한다.


여러 하늘들이 노래를 부르니

소리가 악기들과 어우러진다.

벌렁 드러누워 음악을 들으니

자나 깨나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


모든 근에 감겨드는 5욕(欲)이

마치 불바퀴가 휘도는 것 같으며

수미산왕(須彌山王)의 정상에서

편히 처하면 유쾌하여 자재롭다.


101가지 각종의 여러 보배들이

사이사이 뒤섞이어 땅을 장엄하고

여러 하늘들과 함께 노닥거리며

지나온 세월이 매우 장구(長久)하다.


저 다섯 경계에 접촉하니

다섯 가지 정근(情根)을 발동(發動)해

모든 것이 모조리 기특(奇特)하니

모든 것들이 쾌락의 인(因)이다.


모든 하늘은 한 그릇의 식사를 해도

복에 따라서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은 이색(異色)을 볼 때에

마음에는 근심과 고뇌가 생긴다.


이와 같이 슬프고 참혹하니

오히려 지옥의 고통과 같다.

이와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숙이니 마음이 부끄럽다.


회책(悔責)하노니 본래의 숙업(宿業)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이다.

여러 하늘들과 아수라가

스스로 지키며 저 이익을 탐하고


이로부터 다툼과 분노를 일으켜

죽음을 크게 두려워한다.

혹은 하늘에게 부림을 당하고

혹은 또 지극히 가난하니


내 비록 하늘에 태어났지만

악도(惡道)의 고통과 다름이 없다.

저 항상 즐거운 곳에

쇠하고 죽는 열 가지 모습이 있다.


이런 모양과 목숨이 다하는

이때가 가장 큰 고통이다.

바야흐로 마음껏 즐기려고 할 때

홀연히 그만 다섯 가지 쇠함이 오니


이 같은 모양을 보았을 때에

근심과 공포로 편안하지 못하다.

천안(天眼)이 마침내 곧 깜박거리고

목욕을 하고 나면 물이 몸에 묻으며


모든 것들이 미묘한 경계에서도

그 마음이 즐겁고 기쁘지가 않으며

천 가지 음악과

자연의 가릉빈가(加陵頻伽)새의 소리도


지금은 적적하여 소리가 없으면

마땅히 이레 만에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옥녀(玉女)들이 다들 버리고 떠났으니

그 밖의 천(天)이 함께 종사하고


보고 나면 열뇌(熱惱)가 생겨서

목숨이 끝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현성(賢聖)한 사람은

무상한 변화를 깨달아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한다.

범부(凡夫)는 타오를 때

겨드랑이 밑에서 땀이 배어나

의복이 마침내 때가 묻는 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니

이것이 정업(淨業)이 다함이다.

화관(華冠)으로 곱게 장엄했는데

지금은 홀연히 병들고 풀이 죽었으며

몸은 본래 윤택하여 빛이 났으나


하루아침에 시들어서 쭈그러져 버렸다.

언제나 사랑하여 즐겁던 자리가

지금은 나빠져서 즐겁지 않아라.

이 다섯 가지 나쁜 조짐이 나타나면


마땅히 죽을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하리라.

그런데 저 진리를 본 자만이

이와 같은 나쁜 모양이 없어라.

내 지금 비구들에게 설하리니


여기서 염환(厭患)이 증장하리라.[범본(梵本)에는 이 게송 하나가 없다.]

여러 하늘과 하늘의 곳이

쇠하고 변하여 오래 가지 못하노니

밝은 지혜로 수행하는 자는


이 같은 무상한 변화를 보아야 한다.

4보(寶)의 수미왕(須彌王)을

진금산(眞金山)이 둘러싸 있으나

수행하여 혜안이 청정해지면


이것이 모두 녹아 흐르게 됨을 보리라.

그리고 여러 대철위산(大鐵圍山)이

사천하(四天下)를 둘러싸고 있으나

녹아 허물어지는 비상(非常)의 모양을


수행하는 자는 명료하게 보리라.

수행을 하여 천상에서

이와 같이 관찰하고

다시 인도(人道)에서


생각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혹 때로 저 왕법(王法)을 범하여

손발을 더러 잘리기도 했으며

고문 받는 고통이 지극히 괴로운 것을


나는 이를 모두 경험했노라.

친척을 길이 이별하니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흐른다.


가령 한 곳에 집착을 한다면

4대해(大海)를 초과하리라.

내가 본래 온 곳을 생각해 보니

사람 속에서 생을 받았는데


그 백골들을 모두 쌓아보면

수미산처럼 높고 넓으리라.

3악도를 흘러 돌면서

그 초독(楚毒)을 초월할 수 없으니


사람과 하늘이 받는 고통

또한 한량이 없이 많다.

이것을 자세히 분별해 말하려면

겁이 다해도 다하지를 못하지만


저 삼매의 경계에서

태어난 과보를

잘 관찰하여 명료(明了)하면

수행을 하여 깊이 근심을 가라앉히리라.


내가 비록 가업(家業)은 버렸으나

능히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하면

스스로는 집을 나왔다고 하지만

생사의 지옥은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비록 은애(恩愛)를 버리고

소생(所生)을 버렸다고 이름해도

치애업(癡愛業)의 부모를

여의어 면할 수는 없다.


사람의 자식만 되었을 뿐이지

불법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성인(聖人)의 법의(法衣)를 입었으나

안으로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여의지 못했다.


저 5욕(欲)의 이익을 버리고

출가(出家)의 업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저 불법 가운데서

적은 공덕도 얻지 못했으며


비록 안의 탐착은 버렸다고 해도

저 출요(出要)는 얻지 못한 것이다.

4념(念)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니

어디로부터 심락(心樂)을 얻을까?


머리를 깎고 형호(形好)를 헐었으나

교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욕미(欲味)의 기쁨만 그냥 잃었을 뿐

선열(禪悅)의 즐거움은 얻지 못했으니


5무간업(無間業)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비유컨대 마치 배나 다리도 없이

깊은 물을 건너려는 것과 같아


결정취(決定聚)에 들지 못하고

다시 하늘에 태어나는 업도 없다.

무명(無明)이 심안(心眼)을 가리었으니

영원히 생사의 심연(深淵)에 빠진다.


마땅히 업의 힘쓸 바에 정진을 해야

과(果)를 짓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

짓는 자는 끝내 잃지 않으리니

수행을 하여 잘 생각해야 하리라.


언제나 사람들의 신시(信施)를 받아서

저 몸속으로 침투하리라.

나에게 공덕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비어서 실(實)이 없구나.


이 기른 이양(利養)의 마음으로 해서

나의 선한 공덕을 가려버린다.

뼈를 깎는 고통을 깊이 생각하면

당장에 곧 염리(厭離)가 일어난다.


모든 악취(惡趣)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도(顚倒)된 소견에 속박되어

평등의 길인 석가모니의

1승(乘)의 도를 향하지 못한다.


얻기 어려운 세계에 태어나니

모든 근(根)이 다 구족한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신 때를 만나

또 그 바른 법을 얻어 들을 수 있으나


괴로움의 그릇[苦器]을 버리지 못했으며

탐욕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칼을 뽑아서 다섯 악적(惡賊)을

또한 꺾어 멸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바르게 볼 때에

그 수행이 해탈을 향하게 되며

이러한 우염상(憂厭相)을 지으면

곧 저 결정(決定)을 일으킨다.


몸은 부정(不淨)의 그릇이니

36물(物)이 가득하다.

비유컨대 마치 저 대지가

온갖 것들을 생육(生育)함과 같다.


몸은 숨겨지고 가려진 덩어리이며

또한 언제나 조욕(澡浴)과

취말(聚沫)과 촬마법(撮摩法)을 빌리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멸한다.


비유컨대 독사의 상자와 같이

4대(大)의 상자 역시 그러하다.

8만 가지 생물이 사는 집이라

언제나 서로 다투며 잡아먹는다.


이 몸이 곧 재앙의 집이니

404가지의 질병과 번민과

갖가지 고통과 부정(不淨)

온갖 것이 안에 가득하다.


비유컨대 마치 낡은 빈 집 같고

또한 무덤들의 언덕 같아서

굽지 않은 토기처럼 견고하지 못하니

몸도 말하자면 역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뭇 악의 모임[惡聚]은

허망하여 진실이 아닌데

전도되어 탐착을 일으키니

긴긴 밤을 초독(楚毒)으로 지새운다.


그리고 또 임신을 하게 되면

출산의 고통을 수없이 받으니

진실의 법을 보지를 못하면

생사의 바퀴만이 항상 돌아간다.


처음에는 가라라(迦羅邏)를 받고

다음에는 포육단(泡肉段)이 생기고

점점 자라서 지절(肢節)을 이루니

다섯 가지 임신의 고통이다.

 

날이 없는 지옥[無日獄]에 유폐되어서

생숙장(生熟藏)이 핍박을 받는다.

행측(行廁)에서 길러져 자라고

부정고(不淨苦)에 취하여 혼미해서 

 

태(胎)에서 나와 삶의 고통을 받아

늙고 병이 들어 죽음으로 굴러간다.

모든 음(陰)이 일어나고

3상(相)에 박절(迫切)된다.

색(色)은 거품[聚沫]과 같고


수(受)는 물 위의 거품 같고

상(想)은 봄철의 아지랑이와 같으며

뭇 행(行)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고

식(識)의 종자는 마치 허깨비와 같음을 보니


허망하여 진실함이 없다.

핍박이 바로 고상(苦相)이고

인연이 바로 집상(集相)이며

적정(寂靜)이 멸진상(滅盡相)이고

출요(出要)가 곧 도상(道相)이다.


이 4성제(聖諦)를

수행하여 차차 관찰하고

16행(行)을 사유하면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하리라.


간략하게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설했으니,

결정의(決定義)를 분명하게 알고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수행하여 지혜의 등불을 태워서

네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면

능히 악취분(惡趣分)을 끊어

모든 수태(受胎)의 고통을 여의고


다시 즐거움을 몸에 받아서

세상의 고뇌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양(利養)의 행을 없애 버리고

홀로 지내면서 멀리 여읨[遠離]을 닦는다.


이미 능히 염리(厭離)를 닦으면

하늘에 태어나는 즐거움에 맛들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더구나 인간에 탐착하여

온갖 고통들을 차마 받을 것인가?


종(種)이 독사와 같음을 관하고

5음(陰)을 다섯 원적(怨賊)으로 하고

탐욕의 환란이

긴긴 밤에 은밀히 침해함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6근(根)이 마치 공취(空聚)와 같으니

진적(塵賊)이 다투어 와서 모인 것이다.

이런 것이 안팎으로 들어오지만

진실관(眞實觀)을 수행하면


견애(見愛)는 대하(大河)와 같고

열반이 마치 피안과 같다.

수행하여 혜안(慧眼)이 청정해지면

법이 공하여 무아(無我)임을 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진실을 알면

3유(有)에 처함이 즐겁지 않다.

모든 법을 분명히 보는 자에게

3성(成)의 상(相)을 대략 설했노라.


앞에서 3괴(壞)를 설하였지만

방편과 부지런히 닦아 익힘의

상행(相行)의 뜻을

이제 차례로 다시 설하리라.


하나의 색(色)을 갖가지로 관찰하면

하나하나가 네 종류의 인(因)이다.

결정코 인과를 알고

신념처(身念處)를 구경(究竟)하라.


받음과 마음이 서로 응해서

볼 때는 오직 그 자체이다.

인연의 과보가 한량이 없으니

그 모양은 같은 종류의 성품이다.


수행하여 사유가 일어남은

모두가 소의(所依)에 의해 나타난다.

마음은 마치 훈련되지 않은 말과 같아서

허깨비와 같고 원숭이와 같다.


한량없는 인연의 모양이

모두 소의에 나타난다.

두 음(陰)은 공하여 무아이다.

다음에 상(想)과 색(色)을 합하여 관해야 한다.


상(想)과 수(受)와 식(識)과 합하고

행의 둘도 역시 그러하다.

차례로 상과 색과 수와 그리고

상과 색과 식도 역시 그러하다.


상과 수와 식을 분별하니

행의 셋도 상(想)의 설함과 같다.

사(四)와 오(五)가 점차 화합하여

사유해서 자상(自相)을 허물고


통틀어 5성음(盛陰)을 인연하니

칠처삼종관(七處三種觀)과

열락(悅樂)의 넓은 경계가

다시 멸하여 생멸을 관한다.


일념(一念)으로 진실을 보아서

법념처(法念處)를 구족하라.

음종(陰種)의 모양을 바르게 관찰하면

변화[化]와 꿈과 물에 비친 달과 같다.


정혜(定慧)가 굴러서 증광(增廣)하면

거기서 난법(煖法)이 생긴다.

그 마음이 지극히 적정하여

5음의 모양을 통틀어 본다.


즉 자신의 욕망의 불길을 끄고

삼계(三界)의 불길이 치솟음을 보아

모든 모양의 3삼매(三昧)에서

바르게 해탈의 문으로 향하라.


처음에 4성제의

진실의 16행(行)을 관하여

난법을 성취하고 나서

진실한 관(觀)을 증진하여


부처님의 몸의 상호(相好)와

여러 공덕이 한량없음을 보라.

제일의 적멸법(寂滅法)은

청정하여 번뇌를 여의고


성중(聖衆)의 공덕의 바다는

깊고 깊어 바닥이 없다.

갖가지 미묘한 모양과

몸과 경계를 드러내니


보고 나면 마음이 즐겁다.

정법(頂法)에서 상(相)을 구족하고

증진하여 법인(法忍)이 생긴다.

5취(趣)에 경계를 나타내고


악도(惡道)의 불길이 멸하여

청량한 곳에 놀면서 쉰다.

중간에 머물며 생사를 겪어도

최상은 오직 일심(一心)이다.


먼저 한량없는 고통을 보고

다음에 괴로움의 종자[苦種]가 생김을 본다.

괴로움의 종자가 바뀌어 더욱 광대하여

차츰 고집(苦集)의 멸(滅)을 본다.


멸하고 난 다음에

8성(聖)의 평등의 길을 관한다.

변하고 멸함은 무상(無常)의 모양이요

거칢[麤澁]과 핍박은 고통이다. 

 

공적(空寂)하여 중생이 없고

자재하지 않는 것이 무아이다.

괴로움의 종자는 이 인(因)이 자라나

뭇 연과 합하여 집(集)이 된다.


종(種)이 생기므로 기(起)라 말하고

과(果)를 일으킴을 연(緣)이라 한다.

고와 집이 다하므로 멸하니

멸하여 고요함을 적지(寂止)라 설한다.


청정은 3유(有)를 여의니

각(覺)을 설해 묘출(妙出)이라 한다.

지름길이 곧 도상(道相)이며

평직(平直)을 정의(正義)라 설한다.


나아감[進向]을 일러 취(趣)라 하고

타고 나가기[乘出] 때문에 승(乘)이라 설한다.

4제(諦) 16행(行)을

구족하면 진실한 기쁨이다.


인법(忍法)은 점차

세간의 제일법(第一法)을 만들고

성행(聖行)의 정수지(正受地)에

이 세 결정(決定)을 얻어


견도(見道)와 사유도(思惟道)는

차례로 점차 구경(究竟)에 이른다.

모든 미묘한 모양은

각각 지대(地大)를 따라 일어나고 

 

진실의 지혜를 성취하여

모든 공덕을 구족한다.

앞에서 말한

수행의 결정분(決定分)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밝은 지혜를 가진 자들은

마땅히 바른 방편을 지어야 한다.

믿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항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모든 범행(梵行)을 닦는 자들을

항상 사랑하여 공경해야 한다.

스스로를 지켜서 청정한 계율을 닦아

위의(威儀)로써 진리에 편안히 있게 한다.


설령 이양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욕망을 줄여 만족할 줄 알면

만족이 쉬워서 기르기도 쉬우니

몸에 알맞은 식사를 헤아릴 줄을 안다.


또한 수레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 맛을 탐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하는 생은

모조리 근심[過患]임을 깨달아


사유하여 잘 관찰하라.

3유(有)는 타는 불길과 같다.

마치 저 중병 든 사람이

의원의 치료를 믿고 받아들임 같으니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듣고

관찰하여 자세히 사유하고

언제나 청정한 마음으로

몸을 단속하여 방일하지 말라.


조용히 침묵하여 말을 적게 하고

연좌(宴座)하여 실의(實義)를 생각해라.

들판 언덕배기 수풀 사이에서

한가히 지내면서 멀리 여읨[遠離]을 닦아라.


아무 일이 없이 산과 바위를 즐기며

동굴 속의 노지(露地)에 앉아

나무 그늘에서 풀잎을 깔고는

이와 같이 청정하게 머물러라.


수행하여 안으로 사유하고

열심히 익혀 쉬거나 게으름 없이

오로지 정밀히 자신의 이익을 구하고

물러나 머무는[退住] 허물을 멀리 여의어라.


반드시 승진(升進)을 한다면

결정코 공덕분(功德分)을 얻으리라.

부지런히 방편을 수행하면

모든 선근(善根)을 구족하리라.


내가 적은 지혜의 힘을 가지고

여러 법성(法性)을 대강 설했노라.

그 구경(究竟)의 뜻으로 말하면

10력(力) 지혜의 경계이다.     

    

 

달마다라선경 하권

동진 천축 불타발타라 한역

홍승균 번역 

  

9. 수행방편도부정관퇴분(修行方便道不淨觀退分

 

내 능력이 가능한 대로

이미 안반념(安般念)을 설했으니

부정관(不淨觀)의 수행에 대해

차례로 분별하리라.


부정(不淨)의 방편관(方便觀)과

사유념(思惟念)의 물러나 줄어듦과

밝은 지혜를 아는 모양을

지금 내가 설하리라.


처음 방편을 수행할 때에

몸의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라.

이 깨끗함의 뒤에 있는 가죽과 살을 열어

그 일어나는 모양을 관하라.


비록 잠시 가죽과 살을 허물었다 하더라도

방편을 힘쓰지 않으면

정상(淨想)이 다시 생기리니

이름하여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응하는 바를 일으키지 못하고

거듭 가죽과 살을 허문다 하더라도

정상(淨想)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또한 이름하여 수행퇴라 한다.


수행에 애욕(愛欲)이 늘어나면

마땅히 무덤 사이를 찾아가서

저 부정상(不淨相)을 취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서 앉아라.


눈으로 본 온갖 시체들처럼

내 몸 또한 그런 것이니

일심(一心)으로 속을 관찰하면

저 무덤에서 본 모양과 같다.


저것이 나의 증거가 되니

이로 해서 진실을 얻게 된다.

이미 진실한 모양을 얻으면

다시는 삿된 생각[邪想]이 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방편으로 수행을 해도

혜안(慧眼)이 오히려 청정해지지 않으면

이것이 전도(顚倒)와

무지(無智)와 어리석음[癡冥]의 취(聚)임을 알아야 하리라.


만약에 발가락을 인연해서

혼란하여 마음이 머물지 못하면

마땅히 위에다 마음을 묶어 두고

관찰을 하여 승진(升進)을 구해야 한다.


위의 괴색처(壞色處)에 대해서도

마음이 다시 어지럽게 달리면

마땅히 힘써 정진하고

방편으로 퇴과(退過)를 여의어


저 번뇌에 염착(染着)이 되어서

해탈에 이르지 못하게 하지 말라.

스스로 방편에 열심히 정진하면

신속히 열반에 이르게 되리라.


몸의 괴상(壞相)에서

마음을 묶어 흩어짐이 없게 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아 익혀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수행에 의한 미묘한 생각은

세존께서 이를 설하신 바이다.

언제나 그 생각을 수호한다면

이것이 끝내 퇴하여 줄어들지 않으리라.


내신(內身)을 관찰함이 구족하면

그 생각이 이미 견고하리라.

다음에는 마땅히 외연(外緣)을 관해서

차츰 익혀서 증광(增廣)토록 하라.


외연에 대하여 이미 두루 충실하면

견고한 삼마제(三摩提)가 되리라.

오래지 않아

차례로 모든 번뇌가 멸진됨을 알아야 하리라.


만약 임금에게 기갑(器甲)이 없다면

그 안족(安足)함에 있어서 견고하지 않고

원수의 적을 막으려 한다 해도

반드시 그로부터 해를 입고 말리라.


자신의 몸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리석어 결정하지 못하고

그 외연(外緣)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수행에서 퇴전하리라.


내 이미 비구가

영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의 후퇴함을 설했노라.

그런데 그 외에도 퇴과(退過)가 있으니

지금 설하는 것을 잘 들어라.


수행의 후퇴는

어리석음[癡冥]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성한 번뇌의 업행(業行)으로

막히고 가려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색욕(色欲)으로 인해

번뇌를 일으켜서 후퇴하니

저 곱고 예쁜 자색으로 해서

어리석음과 애욕이 정념(正念)을 가리는 것이다.


무늬가 광택을 발하는

갖가지 좋은 의복들과

영락으로 장엄(莊嚴)된 도구들과

금은 등 갖가지 미묘한 보물


전에 속세에서 즐기던 이런 것들이

수행을 하면서도 생각이 나

이것으로 인해 욕상(欲想)이 동하면

반드시 물러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형상(形相)의 단엄(端嚴)함을 헤아려

곳곳에서 모습이 훌륭한

모든 몸의 지절(肢節)에 탐착하고

망상(妄想)으로 탐욕을 일으킨다.


신체의 여러 지절들이

가늘고 매끄러우며 부드러운 촉감 등

전에 경험한 이들을 생각하니

욕망의 불길이 다시 일어난다.


울기도 하고 웃으면서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눈을 흘기고

화려한 의복은 구슬들로 치장했고

비단 꽃무늬 꾸미개로 꾸미니


눈앞에 알랑거리는 고운 자태가

수행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와 같은 모습들을 떠올린다면

욕망이 일어서 퇴전시킨다.


어떤 사람이 그 정욕(情欲)이 깊어서

오로지 4종(種)에만 있지 않고

어리석어 번뇌를 증상하니

형체를 보게 되면 음란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극히 악한 욕망이니

급히 수행을 퇴전시킨다.

이런 모든 애욕들 때문에

미혹되고 산란하여 정념(正念)을 잃게 된다.


모양과 생각이 명료하면

끝내 퇴전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 안을 자세히 관하고

다음에 바깥을 잘 관찰하라.


넓은 경계가 차서 가득한데

주위를 둘러 험한 기슭을 본다.

그 구경처(究竟處)를 알지 못하면

수행이 급히 퇴몰(退沒)한다.


몸에 대해 깊이 애착하면

두렵고 이상해서 나아가지 못한다.

수행에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면

반드시 급하게 퇴감(退減)하리라.


의심과 공포를 여의고자 한다면

몸에 대해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마음이 아직도 어지럽게 달리면


수행하는 자가

반드시 다시 퇴전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여러 수행들의

부정방편(不淨方便)의 퇴전을 이미 말했다.


그런데 승도(勝道)에 있어서도

퇴전함이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10. 수행방편부정관주분(修行方便不淨觀住分) 

 

내가 이미 부정퇴감분(不淨退減分)을

대략 분별했노라.

지금 저 주과상(住過相)에 대해

이를 마땅히 차례로 말하리라.


수행을 해도 번뇌의 업은

증장하여 안에 충만하고

지혜의 도법(度法)을 깨치지 못하면

어리석음[愚癡]에 얽혀 머물게 된다.


스스로 몸의 작은 부분에 대해

청정의 배후에 있는 가죽과 살을 허물었으나

승진(升進)의 법을 알지 못하면

번뇌가 증장하기 때문에 머물게 된다.


혹은 차츰차츰 승진하여

온몸의 괴상(壞相)을 본다고 해도

능히 외연(外緣)을 구하지 않으면

즐겨 내신(內身)을 관찰함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만약 밖의 경계에 대해

수행하여 마음이 승진을 즐기고

가고자 하면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방편에 머물지 않도록 하라.


아직 구경처를 보지 못하고

중도에서 문득 중지하고 만다면

어리석음[癡冥]에 머물러 얽매이리니

마치 나무에 매인 코끼리와 같다.


골상(骨想)이 견고한 모습[堅相]이 있어서

그 몸이 조밀하여 틈이 없다.

다음에 중상(衆想)을 행하지 않고

또한 승진도 구하지 않으며


그리고 염리심(厭離心)이 없으면

또한 능히 결정하지 못한다.

수행하여 부정(不淨)의 기특한 도를

성취한다 해도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몸을 유연하게 하지 못한다.

몸을 유연하게 하지 못한다면

유각(流覺)이 생기지 않으리니


유각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를 수행주(修行住)라 말한다.


11. 수행방편도부정관승진분(修行方便道不淨觀升進分) 

 

부정관(不淨觀)의

방편도의 주과(住過)를 이미 설했다.

그런데 승도(勝道)에서

머무름[住]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정관의 승진법(升進法)을

지금 차례로 말하리라.

먼저 총상(總相)을 생각하고

부정의 연(緣)에 생각을 묶어라.


다음으로 몸의 작은 부분에 머물러서

자상(自相)을 바르게 관찰하라.

자재와 외연의

두 가지로 한량없음을 설하노라.


수행자는 내신(內身)의

삼마제(三摩提)에 자재하여

바른 방편을 열심히 익히고

구경처에 두루 가득하면


외연의 한량없는 것의

경계에 널리 두루하리라.

그런데 저 정수(正受)에 대해

수(數)가 자재하지 못하고


스스로 내신을 관하여

이 또한 한량이 없다고 설하고

자신이 처한 곳에 대해서

갖가지로 색(色)들이 많다고 한다.


근련(筋連)과 육단(肉段)이

그 수가 각각 5백이고

제뢰(提賴)와 건대(揵大)

이들이 모두 여섯 가지가 있다.[제뢰는 과일과 같고, 건대는 종기와 같은데 모두 뱃속에 있다.]


36가지 종류의 물체와

320개의 뼈가 있으며

관절을 분해하면 9백이 된다.

9만[十千] 종류의 맥(脈)은


기운을 베풀어 여러 맛을

3만 6천 갈래 길로 통하게 한다.

몸에 있는 모든 모공(毛孔)들은

그 수가 99만 개이다.


몸 안에 침식하여 살아가는 벌레의

지게문은 8만[十千]이 있다.

안의 혈과 밖의 정기

이 둘은 함께 화합하여


먼저 가라라(迦羅邏)를 얻으니

신근(身根)과 명근(明根)이다.

이 몸에서 부정이 일어나는 것은

가라라로부터 나온다.

 

번뇌가 업을 일으키니

우혹(愚惑)이 낙착(樂着)을 낳고

두 가지의 무거운 번뇌인

갈애(渴愛)와 성냄[瞋恚]의 어리석은 마음[癡冥心] 때문에


이른바 처음에 생명을 받을 때는

전도된 두 생각을 일으켜

안으로는 애(愛)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성냄을 일으킨다.


남자는 이와 같은 생각이 있고

여자는 위의 것을 어긴다.

청정하지 못함을 가라라라 하니

가라라가 포(泡)를 일으키고


포를 따라 육단(肉段)이 생기고

차츰 자라서 지절(支節)을 이룬다.

태(胎)에서 나오면 영아(嬰兒)라 하니

차츰 변하여 동자(童子)가 된다.


이처럼 자꾸 증장하여

장성하면 중년(中年)이라고 한다.

해가 가면 얼굴이 마르고 여위어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서 쇠하고


의식이 멸하여 목숨이 끝이 나서

몸이 허물어지고 백골(白骨)이 나타난다.

퍼렇고 허물어지며 마디마디 떨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져서 모두 마멸한다.


이와 같이 열다섯 가지를

수행하여 자상(自相)을 관하라.

처음에는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쇠하고 늙어서 죽으니


이레가 지나면 점차 헐어 변해서

드디어 재처럼 다해서 없어진다.

일찍이 숙세(宿世)의 수행이

먼저 가라라로부터 시작한다.


출생해서 늙어가고 죽는 것을

차례로 자세히 관찰하라.

백골의 푸르고 붉은 모습과

지절(肢節)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백골이 부서지고 마르며

썩어 문드러져 모두 마멸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부정념(不淨念)을 사유함에 있어서


인(因)에 따라 관찰하기도 하고

과(果)의 방편으로 배우기도 한다.

깊고 묘한 지혜를 성취하여

이 모양의 뜻을 요달해야 한다.


가라라에서부터

나아가 모든 부분과

4대(大)를 이루는 5정근(情根)을 관찰하면

한량없는 극미한 종(種)의


모든 것들이 이로부터 일어난다.

마땅히 다시 죽은 뒤의 모습을 차례차례

관찰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자꾸 변하면서


이레가 되는 날에 이르면

다시는 오고 가는 일도 없고

웃음도 말도 보는 것도 없다.

얼굴 모습이 모두 없어지니


위의의 자태를 버리고 떠난다.

죽은 시체가 점점 변하여

색깔이 날로 허물어간다.

푸르죽죽한 여러 부정한 것들이


이와 같이 차례로 나타난다.

부풀어 오르고 고름이 짓물러서

넘쳐흐르는 냄새가 지독하여

갖가지 벌레들이 우글거리니


보기만 해도 색욕(色欲)이 떨어진다.

본래 집착하던 것을 관찰하니

이미 허물어져 먹음이 다함없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니


전구(全具)의 욕망을 능히 멸한다.[위에 말한 단정(端正)이 그 근본이 아니므로 또한 당연히 전구(全具)라고 말해야 한다.]

말라서 썩어빠진 뼈를 보니

다시는 윤기 나는 모습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칠어지니

곱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욕망을 여의게 된다.


흙먼지처럼 썩어서 부서지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모양을 성취하면

유형(有形)의 욕망을 멀리 여의게 된다.[유형(有形)이 굳이 이 중생(衆生)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5욕(欲)과 5괴(壞)를

병에 따라서 대처하라.

진실의 모양을 서로 대하여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색(色)이 변하거나 흩어져서

위의(威儀)와 모습이 소멸해 버리고

여위어 썩고 부서져 마멸하니

이를 이름하여 다섯 가지 괴(壞)라 한다.


이것은 곧 자신 중에 있다.

한량없는 모든 경계는

수행하여 바르게 생각하면

모두 자재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한량없는 두 가지를 이미 설했고,

자재(自在)와 경계,

수행하여 자재하지 않음도

또한 이미 분별해 설했노라.


이와 같은 부정념에서

문(聞)․사(思)․수(修)의 지혜를

바르게 관찰하여 혜안(慧眼)을 여니

이것을 설하여 세 가지가 있다 한다.


생각을 지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때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며 머물고

개해(開解)와 사유(思惟)를 함께하되

혹 때로는 개해를 하지 않는다.[해(解)는 곧 개(開)이다.]


셋째는 성(性)은 번뇌[垢]가 없어

번뇌를 여읜 청정함에 머무름은

생각하지 않고 개해(開解)하지 않음이니

이 지혜로부터 수선(修禪)을 일으키고


몸에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을 일으킨다.

나머지 둘은 불가능하다.

마음 또한 적정(寂靜)하여 즐거우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혜(修慧)라 한다.


몸을 윤택하게 하여 유연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적정의 모양이니

둘이 모두 유연하지 않으면

적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저 둘이 적정하지 않고

하나는 곧 안온함에 머물면

이를 말하여 색유(色有) 가운데서

수선하여 일으킨 지혜라 한다.


부정관(不淨觀)의 한 가지 지혜는

10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근본과 그리고 이르지 못함과

욕(欲)과 중간(中間)을 또한 설하노라.


한 계(界)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몸은

욕(欲)과 색(色)에 경계(境界)하여

화생(化生)은 목숨을 마치고 나면

즉시 멸하여 부정함이 없다.


몸이 청정하여 남은 더러움이 없으니

염환(厭患)을 능히 일으키지 않고

다만 저들의 생멸하고

바뀌는 무상한 모양을 관찰할 뿐이다.


그러나 포태(胞胎)하여 태어난 몸은

죽은 시체의 형체가 있으니

몸에 대하여 깨끗한 상(想)이 일어나면

부정관(不淨觀)을 대치한다.


구하지 않으면 탐욕을 그치어서

사유하여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또 정대치(淨對治)가 있으니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다.


방편으로 청정한 해탈을 해서

지혜로운 자는 혜안을 연다.

이른바 부정(不淨)한 인연에서

백골의 유광(流光)이 나온다고 한다.


이로부터 차례로

푸른색의 미묘한 보배 나무를 일으킨다.

붉고 누르고 선명하게 흰

가지와 잎과 꽃이 또 그러하다.


훌륭한 옷에는 갖가지 미묘한 색깔의

구슬과 영락(瓔珞)이 있다.

이를 이름하여 곧

수행정해방편상(修行淨解方便相)이라 한다.


저들 부정한 몸

곳곳에서 장엄함이 드러나고

계급을 차례로 올라가니

삼매는 지혜의 등(燈)을 태우고


저 한 몸으로부터 나와서

전체에 높이 널리 두루해진다.

모든 나머지 몸에서 일어나는

장엄함 역시 이와 같다.


이는 곧 청정한 해탈이니

방편의 부정관(不淨觀)이다.

만일 이렇게 잠깐 사이에

이 뛰어난 관(觀)을 닦아 익히면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름이니

모든 보시를 받을 만하다.

세존께서 칭찬하고 찬탄하신 바이니

삼계의 좋은 복전(福田)이 되리라.


나머지 모든 모양을 설하면

공덕이 또한 그러하여라.

백골과 푸르게 어혈되었다는 상을

성취하면 마음이 번뇌를 떠난다.


이 같은 부정념으로 인하여

방편으로 모든 지위를 뛰어넘는다.

이른바 저 몸의 염지(念止)와

수념처(受念處)와 심념처(心念處)와 법념처(法念處)는


난래(煖來)와 정인(頂忍)과

세간의 제일법(第一法)과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나아가 누진(漏盡)의 지혜가 된다.


이런 방편으로 인해

모든 공덕의 지위를 뛰어넘는다.

처음의 신념관(身念觀)으로부터

나아가 구경처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정념(不淨念)은

일체의 모든 종자라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저 탐욕은

이입(利入)이 깊어서 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정수(正受)는 대치(對治)의 약이니

마땅히 염리상(厭離想)을 닦는다면

모든 나머지의 번뇌는

당장 모두 다스릴 수 있다.


내가 이미 부정(不淨) 방편의

승진법을 설했노라.

나머지 승도(勝道)의 승진이 있음도

모양과 수행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12. 수행방편도부정결정분(修行方便道不淨決定分) 

 

부정념의 승진분의

모양과 뜻을 내가 이미 설했노라.

이제는 마땅히 부정념의 결정분을

수행하는 것을 설하리라.


악계(惡戒)에 묶이지 않고

또한 업(業)의 번뇌도 없어서

마음은 해탈을 등지지 않고

기뻐서 마음이 항상 즐거우리라.


이와 같이 수순하여 살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멸한다.

유연하고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삼매가 일어나리라.


정(定)으로부터 지혜가 생겨나

수행하여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다.

싫어하는 생각으로 이미 수행하면

즉시 유애(有愛)를 여읠 수 있게 된다.


사유하여 유애를 여의면

해탈의 진실한 지혜[實智]가 생기니

해탈의 지혜가 이미 생기면

계박(繫縛)에서 해탈한다.


이로부터 무위(無爲)를 얻으면

마침내 3유(有)를 여읜다.

이를 수행해서

결정분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


천왕(天王)에 다섯 위상(威相)이 있으니

상을 관하여 번뇌를 허물고

번뇌의 허물이 차츰 쇠해 엷어지고

이로 하여 멸(滅)을 구경(究竟)한다.


인왕(人王)에 다섯 모양이 있으니

수왕(獸王)의 모양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지위의 모양이 명료한 것을

이름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몸을 움직여 사방을 돌아보며

위엄을 돋우어 큰소리를 지르고

마음대로 혼자서 누비고 있음이

사자왕의 위엄 있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열다섯 모양에서

수행하여 결정을 일으키고

능히 저 지위 가운데의

모든 번뇌를 멸하게 한다.

 

삼마제에 생각을 매어 두면

모든 번뇌의 결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로(惡露)와 같은 부정의 생각은

염리(厭離)의 마음을 능히 일어나게 한다.


푸르게 어혈된 여러 모습들을

수행해서 잘 결정하라.

다시 나머지 세 가지 상(想)이 있으니

명상(明想)과 관상(觀想),

세 번째는 공상(空想)이라 한다.


적멸(寂滅)의 지혜를 닦고 익혀

색(色)과 자신을 깨끗이 하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바르게 관찰함에 따라서 멸하게 된다.


이 같은 하나하나의 생각들은

각각 세 가지 상의 권속들로 하여

능히 탐욕 등과 결박과

사(使)와 뇌전(惱纏)을 제거한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들을

분명히 살펴서 잘 관찰하면

이를 이름하여 수행하는 자가

부정상(不淨想)을 결정한다고 한다.


세월이 오래 흘러 썩은 백골에는

거칠고 여윈 모습이 나타나고

흙먼지처럼 부서져 버리니

모든 것들이 마멸해 버린다.


아래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

방편을 가지고 소의(所依)를 허물고

청정한 지혜가 설하는 바가

수행의 결정상이다.


한량없는 깊고 묘한 종(種)이

모두가 널리 두루하고

저 결정(決定)의 진실이

금시조(金翅鳥)처럼 생겨난다.


다음에 청정한 지위를 일으키어

평탄(平坦)하고 지극하게 장엄한다.

저 용맹한 보배의 사자(師子)와

우왕(牛王)과 용상(龍象)


이런 모든 일찍이 없던 부류가

곳곳에서 결정상(決定相)을 이룬다.

처음에 부정을 인하여 생기고

또한 부정에 따라서 자라니


처음에 가라라(迦羅邏)로부터 일어나서

부정한 가운데에 머문다.

저 이레 동안의 머무는 것을 관찰하여

생각을 잠시도 멈추지 말고


수행하여 잘 명료해지면

이를 곧 결정이라 한다.

이 같은 모든 부분들의

모양과 뜻을 모두 능히 알고


저 진실을 분명히 본다면

생각생각에 나고 멸함이 있으며

모든 골상(骨想)을 익힘으로써

수행의 각의(覺意)가 생기리라.


능히 각지(覺支)의 생각을 일으킴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말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생각을 분별함에 세 종류가 있다.


처음으로 익혀 행하는 자도 있고

이미 조금 익혀 행한 자도 있으며

오랫동안 수습한 자도 있으니

이들은 모두 결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저들 지혜의 힘에 따라서

그 취향(趣向)함에 차별이 있다.

초업(初業)이 처음으로 일어나고

적게 익히는 마음이 머물고 나서


오래 배우면 능히 인연을 일으키니

이를 말하여 세 가지 수행이라 한다.

초업을 이름하여 시종(始種)이라 하고

두 번째는 장양(長養)이라고 하며


마지막은 사리(捨離)라고 하니

이를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부정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공(共)이거나 비공(非共)이다.


저 앞의 세 권속들과 같이

이것은 모두 부정(不淨)을 여읜다.

문(聞)․사(思)․수(修) 지혜의

세 가지 종류의 부정념(不淨念)은


이와 같은 모든 종류에서

수행을 하여 아주 명료하게

잘 분별해서 욕망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13. 수행관계(修行觀界) 

 

안반(安般)과 부정념의

물러나고 머무름과 승진(升進)과

결정의 진실한 모양을

이미 모두 분별해 설했다.


계방편(界方便)을 수행하는

넓고 개략적인 차별된 모양의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먼저 안반과 부정념을

닦아 익히고

그런 뒤에 모든 계(界)를 관찰하면

안락하여 속히 구경에 이르게 된다.


스스로 방편으로 뛰어넘어

이것을 성취하기 어려워 고통스러우면

이마 위와 두 눈썹 사이에

생각을 묶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라.


적지(寂止)에서 윤택이 생기니

삼마제가 증장하며

의지하는 바가 이미 유연하니

삼매에 안착하여 움직이지 않게 된다.


흩어진 부정심을

지혜로운 자는 모두 조복시켜야 한다.

이미 마음을 조복시키고 나면

수행하는 곳에 편안히 머물러라.


이곳에서 밝은 상(想)을 일으키면

모든 몸이 나뉘어 나타난다.

처음 털 하나로부터 시작하되

그 모양을 집중하여 관찰하라.


털 하나에서 자상(自相)을 보고

그런 다음에 모든 털들을 보라.

다음의 36물(物)의

자상 역시 모두 그렇게 하라.


부처님께서는 36물

각각에 머물러 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때로 저 모든 계(界)의

모이고 합친 것을 안으로 관찰하되


마치 저 눈 밝은 사람이

곳간을 열고 오곡을 보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가끔 다시 역(逆)과 순(順)과

초월(超越)과 차제(次第)로 관한다.


일계(一界)가 그 밑에 깔려 있고

나머지 종류는 모두 그 위에 있다.

차례로 서로 이어 연결이 되었으니

하나하나 그 모양들을 보라.


잡색(雜色)이나 잡색이 아니거나

전체를 두루 관찰하여

마음이 머물러 한 곳에 있으면

그 경계가 시방에 두루하여


곳곳마다 편안히 있게 되니

이를 의지하여 열심히 닦아 익혀라.

하나의 털을 백으로 나누어서

사유하여 바르게 생각하라.


그리고 다시 그 하나 중에서

다섯 가지 경계를 분별하라.

다음에 저 공계(空界) 위의

식상(識相)에서 분별하여 관찰하고


수행을 하여 번뇌가 없음을 보면

청정한 묘상(妙相)이 생기리라.

비유컨대 마치 물 위의 거품이

가림 없이 투명한 것과 같아


이곳에서 모든 경계를 관찰하면

각각 그 자상(自相)을 보리라.

물은 습(濕)하고 땅은 견고하고 강하며

바람은 움직이고 불은 뜨겁게 타오르며


허공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곧 식상(識相)이다.

청색․황색․적색․백색․녹색과

파리(頗梨)보배의 색깔 등


이와 같은 여러 색깔들에서

수행을 구족하여 관찰하라.

허공의 견고한 모양은

너무나 넓어서 두루 변만하고


저지하기 어려움이 금강과 같으니

금강의 지혜가 능히 허물어뜨린다.


저 위의 만다라(曼茶羅)에서

숙상(熟相)이 있어 나타나니

비유컨대 마치 치성한 불길이

저 견고함을 허무는 것과 같다.


혹 관찰함에 의심하고 괴이하다고 여겨

그 마음이 크게 두려워진다.

밝은 자는 능히 결정하나니

모든 공덕을 증익하리라.


허공계(虛空界)가 허물어지고 나면

승진의 모양을 능히 일으켜야 한다.

흘러내리듯 녹고 허물어지고

다시 흙먼지처럼 부서져 버리니


수행하여 진실을 보면

해탈의 모양이 생기리라.

허공계가 이미 허물어지면

위의 모든 경계 역시 그러하다.


이는 곧 괴상(壞相) 위에서

나머지 괴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다시 나머지 한 종(種)도

위에서 모든 경계를 본다면


차례로 널리 두루 변만하리니

함께 허물어지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서른여섯[六六] 종(種)과

십팔(六三)과 여덟(四二),


이와 같은 62가지를 관찰하라.

세존께서 대략 계(界)를 설하셨다.

색(色)을 허무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찰나와 세(世)와 극미(極微)이다.


무색(無色)은 두 가지뿐이니

무위(無爲)에는 괴상(壞相)이 없다.

계부정념(界不淨念)을 수행하면

능히 탐욕을 버리게 된다.


계방편관(界方便觀)에 따르는 것이

나의 교만을 다스리는 약이다.

계사무량(界四無量)을 관찰하면

성냄의 독을 없애게 된다.[무상(無常)하여 잠시인 것을 찰나(刹那)라 한다.]


아난(阿難)이 말하기를

마땅히 5념처(念處)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제6념(念)이 있느니라.


털과 머리털, 손톱․발톱과 이와 뼈와

근육과 두껍고 얇은 피부와

지방과 골수와 뇌(腦)와 막(膜)과

비장과 콩팥, 심장과 폐와 간과


자궁(胞)․위(胃)․대장․소장과

똥․오줌․고름․콧물․침과

때 묻고 더러운 모든 피와 눈물과

누렇고 흰 가래침 등


서른여섯의 부정한 것들에서

3종계(種界)를 관찰하라.

이 가운데 습한 모양은 물이고

불은 뜨겁고 땅은 견고하고 강하다.


모든 형색이 있는 곳에

안팎으로 나부끼어 움직이는 모양이 있다.

들숨과 날숨, 그리고 언어의

통리(通利) 등은 회전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하면 다섯이니

이 모양을 이름하여 풍계(風界)라 한다.

눈․귀․코․혀․몸과

모공(毛孔)과 인후(咽喉)가 공하며


산골, 바위, 집 가운데

안팎이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이와 같은 모든 종류를

이름하여 공계(空界)라 한다.


저 모든 여섯 가지 근에서

생기는 모든 식(識)의 종류는

이와 같이 많아서 한량이 없으니

모두 이름하여 식계(識界)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6계(界)에

내[我]가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음계(陰界)의 모양을 관찰하지 않으면

나[我]와 내 것[我所]을 헤아리게 된다.


모든 안팎의 경계는

이곳에서 뜻이 회전한다.

이 뜻이 행하는 곳에 따라

3수(受)와 18종(種)과


6촉(觸)과 4처(處)는

세존께서 이를 설하셨다.

애욕과 교만의 모든 번뇌는

 

모두 이 가운데서 일어난다.

이 몸은 여러 미세함이 합해진 것이니

허망하고 비어서 주인이 없으며

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데


미혹해서 진실이라 생각한다.

부처님께서 라후라(羅睺羅)에게

계(界)가 모두 무상하다고 관하면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계는


6처(處)를 좇아 일어나니

여섯 교묘한 방편을 수습하여

여섯 때[時]에 각각 하나를 관하라고 설하셨다.


색처(色處)는 모두 구족하지만

무색(無色)은 단지 식계(識界)뿐이다.

저 종류가 의지하는 곳과

상행지(相行地)의 경계


대치(對治)와 소치(所治)와

여실한 분(分)과 수(數)를 알라.

몸 안에 있는 모든 계의 종류는

다시 스스로 고뇌를 일으킨다.


비유컨대 마치 독사를 길러

끝내 그것으로부터 해를 입는 것과 같다.

4대(大)가 물질을 만들어 내어

곧 만들어진 물질과 함께 머물고


화합하여 서로 섞이니

도리어 4대가 허물어진다.

부정의 방편의 관찰은

먼저 만들어진 물질에서 일어나며


안반(安般)의 방편념(方便念)은

마땅히 4대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저 수행하는 자가

두 가지 방편을 증광하고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을

화합하여 동등하게 관찰하면

비로소 근본처(根本處)에 들어가게 되리니

그것이 먼저 만들어진 물질을 허물고


들어간 다음에

인(因)하는 4대의 허물어짐을 관찰하면

정혜(定慧)가 점차 늘어나고

염처(念處)를 갖추어 성취하게 된다.


화합하여 전부 관찰하면

모두가 다 적멸(寂滅)이다.

저 36물(物)의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허물어져 마멸한다.


이 3상(想)과 10상(想)을

수행하여 염리(厭離)를 증장하라.

부처님께서는 이 근본이

능히 모든 악에 미친다고 말씀하셨다.


49종(種)의 법이

삼매 가운데서 일어난다.

수행하여 자세히 관찰하면

자신과 욕계(欲界)가


한량없는 부정(不淨)의 종류로서

악하고 더러움이 모두 가득 차 있다.

온갖 고통에 핍박받아서

성대한 불길이 몹시 심하다.


덧없는 변괴(變壞)의 모양을

보고 나니 염리가 생긴다.

색계의 서로 비슷한 종류의

미묘한 모양이 나타나니


깊이 즐겨서 출리(出離)를 구하여

번뇌를 싫어하는 생각을 증진하면

깨달음이 있고 또한 관이 있어

욕망을 여의고 즐거움이 생기니


적연하게 초선(初禪)에 들어가면

안팎이 모두 청정하다.

소의(所依)와 경계(境界)가

단련된 진금(眞金)의 모양 같으며


스스로 몸이 범세계(梵世界)에 처해서

그 속에서 지극히 기쁘고 즐겁다.

또한 5지상(支相)의

몸과 경계가 나타남을 본다.


제2선에서는 각관(覺觀)을 멸한다.

안이 청정하여 마음은 한 곳에 있게 되고

정(定)에 따라 즐거움이 생기니

4지(支)가 몸 안에 나타난다.


소의(所依)와 경계가

비유컨대 진짜 산호(珊瑚)와 같다.

제3선에서는 기쁨을 여의니

평정[行捨]과 염(念)과 혜제(慧除)와


몸에 즐거움을 받음과 삼매의

5지(支)의 모양이 명료하다.

의지하는 바의 푸른 유리(琉璃)보배는

청정하고 매우 미묘하며


소신(少身)을 연(緣)함이 한량없고

모든 근(根)이 차례로 일어난다.

제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으니

근심과 기쁨이 이미 먼저 멸한다.


불고불락(不苦不樂)과 사(捨)와

염정(念淨)과 삼마제의

이와 같은 4지(支)의 모양은

몸과 경계를 나타낸다.


날숨과 들숨이 멸하여

의지함이 지극히 순백하다.

색(色)을 지나서 유대(有對)를 멸하면

이를 말하여 공처(空處)에 든다 한다.


공상(空相)을 지나면 식(識)이 정(定)하고

식(識)을 지나면 무소유(無所有)이다.

이 무소유를 지나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다.


모든 계상(界相)을 잘 알면

맛 들지 않고 매이지도 않으며

청정한 네 가지 범행(梵行)이

높고 넓어서 한량이 없다.


자비가 널리 두루 편만하니

희사(喜捨)가 또한 그러하다.

근본 네 가지 선(禪) 중에서

다섯 신통(神通)을 닦아 일으켜라.


삼매가 현재 눈앞에 있을 때

마음을 묶어서 자신을 관한다.

가볍고 연한 생각을 지어서

점차 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경계가 눈앞에 있으니

땅을 여읨이 호마(胡麻)와 같다.

차츰 나아감이 보리[大麥]와 같으니

다음 차례는 높아져 4지(指)와 같다.


이 상(床)에서 저 상에 이르기까지

차츰 능히 뜻대로 할 수 있다.

날아다니고 변화를 부리는 것이

자재로워서 장애가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수행하는 자의

미묘한 신통력이라고 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외부의 음성을 자세히 취하면

진실한 그대로를 모두 듣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관하면

일심(一心)으로 모두 다 알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스스로 이 삶의

태(胎)에서부터 중음(中陰)에까지 관하고

차츰 전신(前身)의 일을 보면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모든 바뀌어 온 과정들을

여실하게 생각하여 알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중생 종류의

생사와 형색(形色)을 관찰하라.

그 업과 과보와

중음(中陰)과 5도(道)의 생(生)에 따라


수행하면 천안(天眼)이 깨끗하여

모든 것이 여실하게 보이리라.

근본의 여러 지위들 중에서

남은 공덕이 한량없다.


수행하여 마음이 자재로우면

모든 것이 다 구족되리니

이른바 여덟 가지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일체의 입(入)이다.


배사의 모양에 다섯이 있으니

부정상(不淨相)과 정상(淨相)과

색상(色相)과 번뇌, 그리고 식(識)으로

이 다섯 가지 모양을 대강 설하리라.


승처(勝處)는 먼저 자신부터이니

내색(內色)과 외소색(外少色)의

좋은 것이든 추한 것이든 하나이니

밖으로 많은 둘이 또한 그러하다.


안으로는 색상(色想)이 있지 않은데

밖으로 적고 많은 색을 보게 되니

두 가지는 모두 좋고 추함이다.


이것이 앞의 4승처(勝處)이다.

뒤의 네 가지는 안은 무색(無色)이요

밖은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다.

모든 입(入)은 4대(大)와


4색(色)과 공(空)과 식(識)이다.

외부와 내신(內身)을 관하면

하나의 모양으로 차별이 없다.

모든 변(辯)의 미묘한 원지(願智)와


무쟁(無諍)삼마제와

역(逆)과 순(順) 그리고 초월의

한량없는 삼매의 문(門)을

밝은 지혜로 결정하여 관하고

다섯 가지의 충만함을 구족한다.


첫째는 몸으로, 둘째는 경계로 해서

정상(定相)이 널리 두루하다.

셋째는 억념(憶念)이 가득하여

즐겨 염사(厭捨)를 수행한다.


넷째는 여러 지(地)가 가득하니

10처(處)의 모양이 명료하다.

3승(乘)의 근(根)이 구족한 것을

다섯째 만(滿)이라 말한다.


계방편(界方便)을 성취하여

오래된 어리석음[癡冥]을 멸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허공과 같이 때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

모든 것을 다 구경(究竟)하리라.


14. 수행사무량삼매(修行四無量三昧)

수행을 하는 자가 만약 널리 자심(慈心)을 닦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그 마음을 소연(所緣)에 묶고 이를 점차 익혀 한량없는 과악(過惡)을 없애서 마음이 다투는 바 없고 또한 원한으로 맺음이 없으며 성냄이 없고 청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친(親)․중(中)․원(怨)의 3종(種) 9품(品)의 한량없는 무수한 중생들이 시방이 다하도록 그 3분(分)의 경계에 편안하게 머무름에 있어서 순일하게 행함을 즐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국토(國土) 세계만 제외하고 저 중생들의 세계에서 이를 두루하여 전체가 인연이 된다면 성취하여 노닐 것이다.

그리고 수행하는 자가 자심(慈心)의 방편을 닦고자 한다면 먼저 이를 평등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모든 중생들을 인연하여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해서 성냄을 멸하여 없애고 자심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총관자무량삼매(總觀慈無量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총관(總觀)으로도 오히려 성냄에 얽매인다고 한다면, 그런 자는 마땅히 그 상친(上親)에 대하여 별상(別相)의 자심을 닦고 다음으로 중친(中親)․하친(下親)․중인(中人) 및 원가(怨家)에 대하여 차례로 9품의 자심을 닦아 익혀 차츰 성냄의 마음을 여의고 애념(愛念)을 일으켜 갖가지 낙구(樂具)로 더불어 이를 함께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즐거움을 함께한 다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법의 요익(饒益)한 마음을 일으켜 광대자(廣大慈)․극원자(極遠慈)․무량자(無量慈)의 세 가지 자심을 닦아야 한다. 성냄을 없애 인애(仁愛)의 마음에 머물게 하고, 그 상응하는 공덕과 선근에 따라 모든 불법을 허여(許與)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법락(法樂)과 더불어 갖가지 자심을 닦게 하는 것이다. 먼저 출가의 즐거움을 주고, 다음으로 선정(禪定)과 정수(正受)의 즐거움을 주며, 다음으로 보리의 즐거움을 주고, 다음으로 적멸의 즐거움을 준다. 저 수행하는 자가 본래 일찍이 고친 것이거나 아직 고치지 않은 것과 갖가지 낙구(樂具), 자득(自得)과 타득(他得)의 청정한 선근, 나아가 위없는 적멸(寂滅) 구경의 무위(無爲)에 이르기까지 그 수행하는 자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한량없는 법락(法樂) 등을 앞에 있는 중생에게 준다.

그리고 이처럼 즐거운 생각[樂想]이 일어난 다음 하나하나 관찰하여 이들이 서로 스스로 깨달아 곧 결정(決定)을 얻는다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상(像)을 따라서 이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자삼매(慈三昧)의 거울 또한 즐거운 일로 인해 갖가지 즐거운 모양을 모두 앞에 나타내어 보일 것이다.

혹시 그 수행이 성냄으로 하여 교란을 당할 경우 이와 같이 생각하라.

‘내가 본래 이와 같은 성냄으로 해서 많은 살해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죄역(罪逆)을 일으켜서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큰 지옥에서 다시 고통의 독을 받고, 혹은 벌․전갈․지네․독사․악룡(惡龍)․해귀(害鬼)․나찰(羅刹)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갖가지 독과 해(害)의 종류를 만들었으니, 지금 이를 제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또다시 그와 같은 고통들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이 능히 저 성냄을 중지시킬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라.

‘욕을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너와 나를 구별할 것 없이 다 같이 덧없는 것들이어서 잠시 잠깐도 머물러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이 모두 지나가 버리어서 그 악성(惡聲) 또한 이미 사라져 버렸거늘 나중에 일어난 두 사람이 까닭 없이 서로 다툰다. 그러나 지금 이들 두 사람 또한 순간순간 사라져 버려서 허망하여 아무런 실상이 없는데, 대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욕을 먹는단 말이며 왜 이처럼 거꾸로 되어있단 말인가? 이는 마치 허공과 더불어 서로 싸우면서 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근(耳根)이 허망으로부터 전도(顚倒)되어서 번뇌의 업이 일어난 것이며, 저 사람의 설근(舌根) 또한 이와 같다. 모두가 인연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인데, 대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이를 듣는단 말인가.’

수행하여 이와 같이 사유할 때 성냄의 결박이 풀어져 능히 자심을 닦아서 번뇌의 때를 여의고 청정해질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심을 닦는 자가 4념처(念處)에서 능히 결정을 얻어서 닦아 익혀서 증광하며, 한량없는 법문의 뛰어나고 묘한 도과(道果)를 성취하면 다시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의 방편 대자(大慈)이다. 만약 이미 욕망을 여의었으면 다시 정묘(淨妙)하게 욕망을 여읜 자심을 닦아야 한다. 깊은 마음의 요익함이 증광하고 한량없는 진실한 과보를 얻을 것이다. 이 공덕으로 인해 원하는 구경열반(究竟涅槃)을 구족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자심은 두려움이 없으며, 자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며, 자심은 모든 공덕의 부싯돌이며, 자심은 능히 모든 흉폭한 악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수행하여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욕망을 여읜 대자(大慈)를 닦아야 한다. 비심(悲心)이 한량없으니, 마치 자심의 경계가 원가(怨家)․친인(親人)․중인(中人)인 것처럼 비심 또한 이와 같이 차례로 익혀서 닦는 것이다.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을 자심(慈心)이라 하고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을 비심(悲心)이라 한다”고 하셨다. 만약 먼저 중생에게 요익의 마음을 일으켜 갖가지 낙구(樂具)를 가지고 이를 모두 그들에게 베풀어 준 다음에 중생들을 본다면 오직 그 즐거움을 받는 것만을 볼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자심이라 한다.

만약 먼저 중생들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할 마음을 일으킨 다음에 중생들이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을 본다. 이들이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나서 갖가지 낙(樂)이 아닌 것과 낙을 받는 것을 이름하여 비심이라 한다. 정상(淨相)을 보는 것이 자심이고 허공상(虛空想)을 보는 것이 비심이며, 낙행(樂行)이 자심이고 고행(苦行)이 비심이니, 이것이 곧 그 차별이다.

수행을 하는 자가 여러 중생들이 흉포하여 성내고 다투어 해치고 죽이면서 서로 핍박을 하는데도 이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면, 비심이 일어나서 이를 도와주고 보호하여 줄 것이다. 또 중생들이 그들의 몸․목․귀․코 등이 잘려 그 지체(肢體)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데도 이를 능히 구해주는 자가 없는 것을 본다면 수행하는 자는 그 비심(悲心)이 일어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비심에 머무를 때에 5취(趣)의 중생들이 그 고통이 치열하여 한량없는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깊이 비심이 일어나서 이를 구호하여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비심을 수행하여 한량없는 선근(善根)이 생길 때에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이와 같은 중생들이 이처럼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도 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극히 악독하여 전혀 선근이 없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큰 비심[大悲]은 본래 모든 부처님께서 익혀서 닦은 것으로서 이를 말미암아서 모든 지혜의 바다를 그 궁극까지 관철하는 것이다. 만약 수행을 하는 자가 이를 능히 구족하게 익혀서 닦는다면 오래지 않아서 기필코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리란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희무량(喜無量)이란 자심의 경계에서 수행함으로써 여섯 사념(思念) 등의 모든 선한 공덕과 한량없는 불법과 자신이 성취한 지계(持戒)․선정(禪定)․지혜(智慧) 등 모든 공덕으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여 자락(自樂)과 타락(他樂)을 다하여 모두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이 저 법락(法樂)을 얻는 것을 보면 마음에 환희를 느낀다. 마음이 환희를 느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고,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면 한결같이 기뻐하게 되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즐겁구나, 영원히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하리라.’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기뻐할 때에 그 낙상(樂相)을 보고 미묘하여 밝고 깨끗해진다. 이와 같은 모양을 성취하는 것을 희무량삼매(喜無量三昧)라고 이름한다. 부처님께서는 희(喜) 등, 나아가 식처(識處)를 닦아 모은다고 말씀하셨다.

사무량(捨無量)이란 원수나 친한 이를 버려 동등하게 중품을 인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중생들에 대하여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심과 비심, 기쁨 등을 여의고 오직 중생행(衆生行)만을 지어서 경계에 가깝고 모양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세존께서 사(捨)를 설함에 있어서 갖가지의 사(捨)가 각자 그 모양이 있으니, 사무량은 그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평등하고 청정하여 고락상(苦樂相)을 여읜 것을 일러 사상(捨相)과 비슷한 상(相)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사무량삼매(捨無量三昧)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사무량과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수행에 대하여 설하셨다. 이미 네 가지 무량한 모양들에 대하여 이를 대강 설하였으니, 여타의 갖가지 깊고 깊은 모양들에 대해서는 수행하는 자가 마땅히 이를 차례로 닦아서 익혀야 한다.


15. 수행관음(修行觀陰)

만약 수행을 하는 자가 오랫동안 공덕을 쌓아서 일찍이 선정을 익히면 열어 보임을 들어서 그 본연(本緣)을 일으키고, 곧 능히 사유하여 5음을 관찰해서 깊은 법을 요달할 것이다. 생사를 멸하여 없앰이 마치 저 대풍(大風)이 두꺼운 구름을 흩어서 날려버리는 것과 같으며, 또한 모든 마(魔)가 즐기는 법을 끊어서 5음의 뜻을 관찰할 것이다.

이제 이를 설하겠다. 수행을 하는 자가 안으로 스스로 사유하여 번뇌의 바다를 도탈하고자 이욕(離欲)을 일으키면 윤택함이 생겨서 자신이 쾌락해지고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를 멸하고 수순한 4대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산란한 뜻을 섭수하여 능히 구경(究竟)에 이르러 지혜를 성취할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관하는 곳이 견고하고 밝고 맑으면 능히 삼매를 일으켜서 모든 흩어진 생각들을 여의고 번뇌를 멸하여 없앨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미묘한 모양들이 모두 나타날 것이니, 마치 청정하고 미묘한 유리와도 같고 깨끗한 물의 포말과도 같을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가 이와 같이 밝고 맑으며 티 없는 모양을 보면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이를 지켜 지니어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처럼 방일하지 않으면 숙상(熟相)이 일어날 것이다. 숙상이 일어나면 괴상(壞相)이 나타나고, 괴상이 나타나면 오직 법상(法想)만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적멸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상을 수행하여 이를 구족하게 성취하면 증상된 염리(厭離)를 얻게 된다. 마음이 견고하고 정진하여서 움직이지 않으며, 심심삼매(甚深三昧)와 견고삼매(堅固三昧)와 부동삼매(不動三昧)를 얻게 된다. 수행하여 이들 삼매에 머물면 능히 다섯 가지의 밝고 깨끗한 삼매를 일으켜서 다섯 세계[道]를 두루 비출 것이니, 월광삼매(月光三昧)․일광삼매(日光三昧)․정유리삼매(淨琉璃三昧)․연금광삼매(鍊金光三昧)․무구파리삼매(無垢頗璃三昧)이다. 이 다섯 가지 밝고 깨끗한 삼매로 인하여 다시 광요삼매(光耀三昧)․변광요삼매(遍光耀三昧)․무량광요삼매(無量光耀三昧)가 생겨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다섯 가지의 괴상(壞相)으로 인하여 능히 모든 연(緣)을 허무니, 첫째는 천(穿)이고, 둘째는 박(剝)이며, 셋째는 열(裂)이고, 넷째는 괴(壞)이며, 다섯째는 멸(滅)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괴상으로 해서 모든 법을 허문다. 다섯 가지의 삼매를 수행하여 경계를 멸하고 모두 청정해지면 차례로 다시 다섯 가지의 삼매의 모습이 생기니, 사자왕삼매(師子王三昧)․용왕삼매(龍王三昧)․금시조왕삼매(金翅鳥王三昧)․우왕삼매(牛王三昧)․상왕삼매(象王三昧)이다. 마음에 방일함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웅장한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하여 이러한 수왕삼매(獸王三昧)에 머물면 각각 그 종류에 따라서 모두를 섭수하게 된다.

또 삼매의 힘으로 남녀의 10상(相)을 일으켜 종류에 따라 모든 중생을 섭수하고 여기에 모두 나타난다. 만약 능히 이런 모든 삼매의 모양을 분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곧 이름하여 모든 법에 자재한 공덕이라고 한다.

또한 수행을 하는 자가 밝고 깨끗한 경계에서 음류(陰流)를 관찰한다면 그것이 한 곳으로부터 나와서 나뉘어져 둘로 갈라질 것이며,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 하나하나의 흐름 가운데서 다시 다섯 가지의 모양이 보이는데, 그 모양마다 각각 서로 달라서 경계가 벌려지고 이처럼 경계가 벌려진 다음에는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 색(色)은 취말(聚沫)과 같고, 수(受)는 수포(水泡)와 같고, 상(想)은 불꽃과 같다고 관하고, 행(行)은 파초(芭蕉)와 같고, 식(識)은 허깨비[幻]과 같다고 관한다. 이것이 다섯 가지의 허망하고 속이는 모양인 것이다. 수행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면 그 몸이 안온하여 유연하고 쾌락할 것이다.

다시 그 흐름이 일어나는 곳을 관하면 무구상(無垢相)이 나타나서 마치 물의 깨끗한 포말과 같으니, 이것이 점점 증장하여 그 몸에 가득 찬다. 그리하여 수행하는 마음이 방일하지 않고 전념(專念)하여 받아 지닐 것이다. 이처럼 받아 지니고 나면 깨끗한 모양이 증광하여 두루 온몸을 가리어 덮을 것이니, 그것이 마치 투명하고 청정한 포말과 같아서 모든 허물과 악(惡)을 여의고 다시 뛰어나고 묘한 지혜가 생겨서 드디어 이 모양을 허물 것이다.

이 모양이 이미 허물어지면 그 흐름이 아래로 흘러서 한량없이 멀리 흘러갈 것이니, 그것이 마치 저 청정한 파리(頗梨)와 같아서 경계를 매우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지극히 잘 알고 나면 그것을 따라 섭환(攝還)하여 만다라(曼茶羅)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상(異相)이 있어서 그 본처(本處)에 가득 찬 다음에 이것이 흘러서 저 한량없는 시방세계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하여 시방세계에 이른 다음에 각각 자상(自相)에 머물 것이다.

이때에 수행하여 저 한량없는 색종(色種)을 분명히 보는데, 마치 저 산과 물의 떠다니며 쌓여 모인 물거품과 같으며, 모든 수상(受相)이 큰 비의 빗방울과 같고, 갖가지 모든 상(想)이 마치 봄철의 아지랑이와 같고 행은 파초와 같아서 견실함이 없으며, 6식(識)의 종(種)을 관찰하면 마치 환화(幻化)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갖가지의 허망함은 다만 어리석은 사람을 속일 뿐인 것이니, 이것을 수행하여 음(陰)의 자상(自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처럼 음의 자상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그 지혜로써 스스로 자신을 비추어서 전념하여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그 주위를 두루 둘러 치성한 상[熾然相]이 일어나며 몸은 그 안에 처하여 갖가지 꽃들과 깨끗하고 묘한 보물들이 두루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면 온갖 보물들의 여러 공덕의 모양들이 미묘하고 장엄할 것이다.

수행하여 이와 같은 여러 모양들을 보고 나면 그 혜안이 널리 열려서 스스로 그 몸을 돌아보면서 두루 관찰할 것이다. 이처럼 관찰을 하고 나서 다시 밖으로 음상(陰相)을 관하여 성대한 불길이 치열하여 곧 염심(厭心)이 생겨서 용맹하게 정진하여 저 끝없는 생사의 고해(苦海)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5음의 치성한 상이 싫어지고 나면 이욕상(離欲相)․해탈상(解脫相)․열반상(涅槃相) 등 모든 공덕의 모양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나타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는 7처(處)의 관(觀)을 갖추어서 5음(陰)의 고(苦)․집(集)․멸(滅)․도(道)를 본다. 다시 갈애[愛]로 인하여 생기는 5음을 관하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를 여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진제(眞諦) 중에서 방편으로써 종자의 지혜를 일으킨다. 7처(處)에서 세 가지 관(觀)의 이치를 잘 닦아 자상관(自相觀)을 이루어서 결정의 견고함을 이룰 것이며, 그런 다음에 번뇌 없는 식지(息止)의 수혜(修慧)를 얻을 것이다. 이 지혜가 일어나면 경계가 평정(平正)하고 순일해서 잡스러움이 없을 것이다.

또 뛰어나고 묘하며 번뇌 없는 사혜(思慧)를 얻고 결정(決定)하여 5음의 흥하고 쇠함과 생각마다 마멸(磨滅)함을 관하면 진실상(眞實相)을 볼 것이니, 비유컨대 마치 독이 든 밥을 먹은 자가 반드시 죽는 것과 같아서 수행하여 5음의 3상(相)이 서로 섞인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한 생각이 생기면 한 생각이 괴로운 것이다. 곧 한 생각을 할 때에 또한 생기고 또한 머물고 또한 멸하는 것이니, 저 생각이 생길 때에 곧 저 괴로움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이 곧 허물어지는 것이다. 수행하여 5음의 이와 같은 생멸을 관하면 허위이며 무상한 과악(過惡)을 파괴할 것이다. 곧 무상행(無常行)․고행(苦行)․공적행(空寂行)․무아행(無我行)을 일으키는 것은 천루법(穿漏法)․부실법(不實法)․속후법(速朽法)․파괴법(破壞法)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무상(無常)의 뜻이다. 마치 수다라(修多羅)와 같아서 자세한 설명은 1백 구(句)에까지 이를 것이다.

수행을 다하고 이와 같은 여러 모양들을 행하여 모든 법의 진실을 알면 곧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성현 지위의 삼매의 상행(想行)으로써 이와 같은 비상(非常)의 모양을 관하면 곧 깊은 우염(憂厭)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유위(有爲)의 과환(過患)을 보고 3유(有)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또 수행하는 자가 만약 생기면 멸하지 않는다고 보고, 만약 멸하면 생기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와 같은 경우에는 성행(聖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그 일심(一心)이나 일상(一相)이 바르게 해탈을 지향한 다음이라야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행을 결정한다. 성행이 이미 일어나면 일체법의 상(相)이 적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 어리석음과 갈애와 번뇌 그리고 모든 죄구(罪垢)는 전(轉)하니, 그 고음(苦陰)이 모두 제거되어 멸한다. 이처럼 제거되어 멸하고 나면 그 마음이 조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5음을 보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다.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통해서 고음(苦陰)을 관찰하며, 고음을 관찰하면 8고(苦)에 핍박이 있으며, 8고의 모양에서 8행(行)을 성취한다. 이른바 병(病)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찌르는 것과 같고 죽이는 것과 같으며,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다. 이 중 네 가지는 성행(聖行)이고 네 가지는 성행이 아니다. 고음에서 결정하여 진실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4제(諦), 16성행(聖行) 이것이 곧 난법(煖法)을 수행하는 처음 모양이며, 진제(眞諦)의 경지에서 진실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고음(苦陰)을 관찰하면 마치 철환(鐵丸)을 녹이는 것과 같아서 역시 아무런 견고함이 없다. 그러므로 열반을 지향하여 생사를 등지는 것이니, 유(有)가 귀함이 없고 생(生)이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인 짐승들이 그 두려움이 급박해서 용감하게 내달리어 그 포위망을 탈출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생사의 뜨거운 불길이 크게 고통스럽게 포위하여 핍박하는 것을 보고는 염지(厭智)의 힘을 통해서 아무런 장애 없이 이를 뛰어넘는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사혜(思慧)가 생길 때에 난법(煖法)의 종(種)이 일어나며, 식지(息止)의 수혜가 생길 때에 난종(煖種)이 증장하는데, 난종의 자지(自地)에 이르러서 난상(煖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지의 수혜(修慧)가 생길 때에 정법(頂法)의 종이 일어나고, 난법이 생길 때에 정종(頂種)이 증장하며, 정종의 자지에 이르러서 정상(頂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난법이 생길 때에 인법(忍法)의 종이 일어나고, 정법이 생길 때에 인종(忍種)이 증장하며, 인종의 자지(自地)에 이르러서 인상(忍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또 5음에서 기뻐하는 것을 난법이라고 한다. 난법으로 5음을 관하고, 3보(寶)에서 기뻐하는 것을 정법(頂法)이라고 한다. 정법으로 18계(界)를 관하고, 4제(諦)에서 기뻐하는 것을 인법(忍法)이라고 이름하며, 인법에서 12입(入)을 관한다. 세 가지를 관할 때 저 선근을 따라서 한 차례 증상(增上)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다하고 진제를 관하는데, 다만 인(忍)만이 진실에서 관하여 증상하며, 난법은 상(想)이 증상하며, 정법은 신(信)․관(觀)․희(喜)가 증상하며, 인법은 지혜가 증상한다.

또 수행에는 세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상하와 모든 방위의 세 가지 선근을 말하는데, 이 세 가지의 인연은 각각 한 차례 증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열(悅)을 가본(可本)에는 설(設)이라 하였다.]

또 세 가지의 수행이 있다. 난(煖)은 염리에 의지하고 정(頂)은 관희(觀喜)에 의지하고 인(忍)은 평등사(平等捨)에 의지하는데, 역시 저 선근에 의하여 한 차례 증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한 가지를 수행하여 이를 다하면 세 법을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저 다섯 사람의 원적(怨賊)이 칼을 뽑아들고 항상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해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후의 5음(陰)이 서로 돌아가면서 삶아대고 핍박하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아비삼마야(阿鼻三磨耶)[이는 곧 견도(見道)를 일컬는다.]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달마마나사가라(達磨摩那斯伽羅)를 지어서 언제나 진실한 이치를 관해서 성행(聖行)의 칼로써 음(陰)의 적(賊)을 끊어 제거하여야 한다. 용렬한 사나이처럼 몽둥이도 잡아보지 못한 채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바른 관찰을 열심히 닦아야 할 것이다.”

법의 즐거움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며, 후세를 위하여 큰 밝음을 지으려는 까닭이며, 모든 괴로움의 근본을 잘라버리려는 까닭이며, 중생들을 요익하려는 까닭이다. 하물며 범부가 공(空)하여 아무런 소득이 없으면서 스스로 방일(放逸)하여 열심히 닦아 익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음(陰)을 관하는 것을 마친다. 달마마나사가라의 달마는 법이요, 세간의 제일법(第一法)을 이르는 말이며, 마나사가라는 일경심(一經心)을 이르는 말이니, 역자(譯者)가 그 뜻을 사유하여 말한 것이다.


16. 수행관입(修行觀入)

6입(入)이 각각 경계에서 지혜가 없는 중생을 속박하고, 탐욕의 마음 때문에 언제나 정상(淨想)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모든 근(根)의 경계에서 법이 아닌 것을 방제(防制)하고 마음의 소연(所緣)을 거두어들여 이를 계박해서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6입을 바르게 관찰하면, 비유컨대 이는 마치 빈 마을과 같아서 나와 나의 것을 여읠 것이다. 부정(不定)의 뜻이 곧 입처(入處)의 뜻이고 견하(牽下)의 뜻이 곧 입처의 뜻이니, 장차 중생을 데리고 악도(惡道)에 들 것이다. 또 내입(內入)의 모양이 마치 철장(鐵鏘)을 태우는 것과 같고, 매우 날카로운 검(劍)과 같고 예리한 칼과 같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이 모양을 본다면 능히 이를 버리고 여의어라.”

또 밖에서 나쁜 도둑들이 들어와서 좋은 보물들을 겁탈하는 것을 본다고 할 때 이는 마치 수행하는 자가 정념(正念)을 버리고 모든 들어오는 문들을 개방해서 6경(境)이 마음대로 횡행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6경의 악한 도둑들이 정계(淨戒)를 겁탈하여 모든 공(功)을 잃게 함은 마치 새들이 양쪽 날개가 없이 허공을 날려고 하는 것과 같고, 사람이 두 발이 없으면서도 먼 길을 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저 정계의 공덕을 허물기 때문에 지(止)와 관(觀)의 두 날갯죽지가 영원히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생사를 벗어나려고 하여도 이것이 끝내 불가능하니, 마치 깨진 병에 물을 담으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이 계율을 깨뜨린 비구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아서 삼매의 법수(法水)가 잠시 잠깐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마치 천신의 덕병(德甁)을 잘 보호해서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언제나 원하는 대로 다함이 없이 진보(珍寶)가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이, 수행을 하는 일도 또한 이와 같아서 그 정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언제나 성스러운 공덕의 보배를 만들어 내지만, 조금이라도 그 덕병을 깨뜨리면 진보가 곧 소멸하여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계병(戒甁)을 깨뜨리면 법보(法寶)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니, 이는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그 코를 잘라버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즐거울 수 없는 것처럼, 파계를 한 비구도 역시 이와 같아서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면 그 마음이 스스로 즐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백곡(百穀)과 약목(藥木)들이 땅을 의지하여 자라는 것처럼 모든 선한 공덕들도 모두 정계를 의지하여 생긴다. 마치 전단(栴檀)을 몸에 바르면 열뇌(熱惱)를 제거하듯이, 정계가 청량(淸凉)하여 능히 욕화(欲火)를 중지시킨다. 마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닿는 곳마다 뜨거운데도 이를 식히듯이 정계 또한 이와 같아서 번뇌의 불길 속에서 그 뜨거움을 식히는 것이다.

계율을 범한 비구는 스스로 생각할 때 그 죄가 깊어서 몸이 다하고 그 목숨이 끝나면 마침내 악도(惡道)에 들게 되어 그 마음이 항상 근심스럽고 후회를 하면서 죽음의 공포에서 떨지만, 정계를 지킨 사람은 마음이 언제나 기뻐서 살아서는 근심 걱정이 없고 죽어서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정계가 사다리가 되어서 능히 깨달음의 경지[慧堂]에 오를 수 있으며, 정계가 장엄 도구가 되어 또한 잘 지키는 것이다. 계(界)가 사람을 이끌고 열반에 이르게 하며, 좋은 땅이 되어서 열 가지의 좋은 종자를 낳아서 기른다. 그리하여 교계사(敎誡師)가 때에 따라서 물을 대어주면 그 신근(信根)이 뿌리를 내려서 무루(無漏)의 음(陰)이 줄기가 되고, 4여의(如意)가 싹이 되고, 자심(慈心)이 나뭇가지가 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아는 것이 그 가지와 잎이 되고, 7각의(覺意)가 꽃이 되고, 해탈의 지혜가 열매가 되고, 적멸의 법이 감로가 될 것이다.

계(戒)의 향기가 흘러나오면 모든 것이 두루 그 훈기를 쐬게 될 것이며, 성현(聖賢)의 조왕(鳥王)이 그 사이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비심(悲心)이 중음(重陰)이 되어서 청량한 그늘이 널리 덮을 것이며, 변재(辯才)를 가진 법사가 꿀벌왕[蜜蜂王]이 되어서 소리를 조화롭게 하며 서로 돌아보면서 일찍이 그 정미(精味)를 채취할 것이다. 그 나무가 곧고 길며 견고하고 정실(貞實)해서 허위와 첨곡(諂曲)과 부병(腐病)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공덕대수(功德大樹)라고 한다. 만약 모든 수행을 하는 자들이 열반을 추구하고 삼세의 고통을 멀리하여 해탈의 성(城)을 지향할 때에 점차로 모든 공덕을 일으켜 행하여 저 나무 아래에 쉬면서 법의 감로를 마시고 세 가지 갈애의 환란을 그치게 한다면, 그 몸이 안온하여져서 능히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 계(戒)에는 많은 숫자가 있으니, 혹은 1․2․3․4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7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12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21의 계가 있기도 하다. 순간순간 잠시 잠깐의 사이로 말하면 한량없는 계의 종류들이 있는데, 도공(道共)․정공(定共)․구생계(俱生戒)․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 및 심회전(心廻轉) 등이 있다. 이 모든 계를 보면 그 모양이 각각 서로 다르니, 혹은 순수하고 청정하여 때가 없기도 하고 혹은 가볍고 엷어서 밝고 깨끗하기도 하다.

이와 같이 무구(無垢)한 계상(戒相)의 경계가 나타나면 수행하여 의(依)․연(緣)․염(念)의 3처(處)에서 계상을 관찰해야 한다. 만약 도향(塗香)․유연(柔軟)․진구(塵垢)를 여의어 기쁘고 즐거우며 밝고 맑고 깨끗해지면 그것이 의지한 바의 모양이다. 그 땅처럼 넓고 평탄하여 묘화(妙華)와 보배의 그릇과 장엄한 장식구 등 여러 보배들이 매끄럽고 윤택할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을 하는 경계 중의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저 검정소[犛牛:야아크]가 그 꼬리를 보호함에 있어서 털끝 하나라도 나무에 붙어버리면 그 나무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그 털을 끊지 않듯이, 비구가 계를 보호함이 또한 이와 같아서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계라고 하더라도 이를 죽음으로써 지켜서 범하지 않으면 묘상(妙相)의 장엄한 몸이 모든 상호가 구족하여 마치 저 밝은 가을달이 허공에서 비추는 것과 같다.

삼매를 수행하여 이와 같은 청정한 모양을 보고 나면 그 뒤 목숨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어떤 근심 걱정이나 후회가 없으며, 또한 그 열뇌(熱惱)가 없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열(安悅)과 환희가 용약(踊躍)하여 증장하고 적지(寂止)의 즐거움이 생기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소멸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이름하여 억념(憶念)을 수행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중에 다시 잡상(雜相)이 있어서 이것이 교란시켜서 장애를 일으켜 실념(失念)토록 하여 마음이 머물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악업을 뉘우쳐서 죽더라도 범하지 않으니, 행여 꿈속에서라도 이를 범하는 일이 없이 계를 지키는 일을 증익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는 꽃다발[花鬘]이며 바르는 향[塗香]이며 몸을 장엄하는 온갖 장신구이다.”

향기로운 바람이 한쪽 방향에서 오면 이는 세계의 향기요, 여러 방향에서 오면 계덕(戒德)의 향기인 것이다. 혹은 몸에 수족과 눈과 귀와 코와 혀가 없어서 모든 지절(肢節)을 온전하게 갖추어 있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몸이 진애(塵埃)에 매몰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관찰하여 모든 진구(塵垢)를 여의고 목욕을 한 다음 몸에 향을 바르고 그 위에 이름 있는 좋은 옷을 입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의(依)․연(緣)․억념(憶念)을 수행하여 시라(尸羅)의 갖가지 여러 상[雜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威儀)․정공(定共)․도공(道共)의 세 가지 계를 모두 이미 이 가운데서 설하였으니, 이 세 가지의 계는 다시 거기에 한량없는 여러 가지 깊고 묘한 모양들이 있다. 지혜가 밝은 자는 마땅히 이를 널리 풀어서 설하여야 할 것이다.

수행하여 이미 정계(淨戒)를 본 다음 여러 들어가는 산을 깨뜨리고자 할 경우 마땅히 두 가지의 법을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른바 지(止)와 관(觀)이다. 먼저 악을 여읜 기쁨과 즐거움이 그 몸에 충만한 것을 관한다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멸하고 유순(柔順)한 4대가 생겨서 적지(寂止)의 즐거움을 일으켜 일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스스로 그 몸 안에서 마음을 들어가는 모양에다 묶어 두게 될 것이니, 마땅히 저 들어가는 모양이 일어나는 곳을 잘 수호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찰할 때에 희고 깨끗한 모양이 일어나면 비구가 이 모양을 보아 이를 잘 수호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새끼를 품는 닭이 그 알을 잘 보호하여 반드시 이를 성취시키는 것과 같다. 비구의 수행 또한 이와 같이 오로지 정밀하게 수호하면 성취를 얻을 것이니, 열두 가지 수과상(修果相)의 나타남이 분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잘 수호할 때에 모든 방일함을 여의고 수과(修果)를 성취한다면 경계가 정묘(淨妙)해서 모든 번뇌의 염오를 여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밝음이 보주(寶珠)와 같고 또한 현수(懸水)와 같을 것이니, 경계가 광만(廣滿)한데 몸은 적은 부분에 처하여 두루 멀리 흐르다가 그런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온 뒤에는 일상(一相)이 나타났다가 이것이 다시 나뉘어서 두 부분이 되고, 이것이 또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만다라(曼茶羅)의 경계를 이루어서 평정(平正)에 편안하게 머물러 두루 여러 모양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이 마치 뭇 별들이 빛을 발산하면서 포열하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에 허물어지고, 허물어진 다음에 각각 흘러나왔다가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다시 두루 멀리 흘러나와 제방(諸方)을 충만하고, 제방을 충만한 다음에는 다시 돌아와서 안온하게 굳게 머무른다. 이처럼 굳게 머무른 다음에는 숙상(熟相)이 나타나고, 숙상이 나타난 뒤에는 갖가지 여러 모양들이 두루 널리 넓어져 미묘한 기복(器服) 등 모든 기이하고 특이한 모양들이 모두 그 경계에 나타난다. 안으로는 공취(空聚)에 들고 밖으로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과 3세의 세 가지 법인 선(善)․불선(不善)․무기(無記) 등 모든 것이 나타나서 그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또 외육입(外六入)은 도적과 같고 내육입(內六入)은 공취(空聚)와 같은데, 이들 내입과 외입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12입(入)의 여러 승묘(勝妙)한 모양들의 넓음이 한량없으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다라 중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한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는 이 경계에서 숙상(熟相)이 일어나며,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허물어지는데, 그 사이에 단리상(斷離相)이 있고, 그 단리상이 매우 먼 곳에 흘러 한 곳에 머물게 된다. 마치 보병(寶甁)에 물을 담는 것과 같아서 물을 담은 뒤에 다시 이를 열면 점점 그것이 적멸(寂滅)하는 것을 보게 되며, 그것이 적멸한 다음에는 다시 여러 나머지의 일체 공덕의 모양들이 생기게 된다. 제입(諸入)의 문 중에는 언제나 여러 모양이 흘러나오며, 그것이 각각에서 흘러나온 뒤에는 다시 한 곳에서 만다라를 이루는데, 만다라 위에서는 다시 자상(自相)이 일어나고, 자상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이 익으며, 익고 나면 오래지 않아서 적멸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수행을 다시 한결같고 순수하게 하기를 더하면 곧 거기서 청정하고 미묘한 선상(禪相)이 일어나며, 이처럼 선상이 일어나면 전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적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입(諸入)의 가운데서 수행할 때에 다시 갖가지 묘상(妙相)이 있어서, 그 마음을 묶어 둔 곳에서 결정상(決定相)이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계(髻) 가운데의 명주(明珠)라고 하는데, 삼매를 비유하는 것이다. 수행하여 스스로 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여러 보장(寶藏) 위에 보련화(寶蓮花)가 있음을 보며, 수행하여 스스로 그 몸이 연화(蓮花) 위에 있어 온갖 보물과 미묘한 꽃들이 장엄하고 꾸며서 둘러싸고 있음을 본다.

또 세존께서 수다라에서 여섯 중생을 비유하여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는 자가 여기서 구족하게 관찰한다면, 이른바 눈은 개가 되어서 오색촌(五色村)을 뛰어다니고, 귀는 새가 되어서 허공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오고, 코는 독사가 되어서 향기의 구멍을 찾고, 혀는 야간(夜干)이 되어서 죽은 시체의 다섯 가지 맛을 탐하고, 몸은 수수마라(輸收磨羅)가 되어서 언제나 촉해(觸海)에 들기를 즐기고, 마음은 원숭이가 되어서 언제나 3세의 법림(法林)에서 제멋대로 놀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여섯 가지의 중생들을 한 곳에다 묶어 두어서 각기 즐거운 곳을 자재로이 놀 수 없게 하듯이, 저 수행을 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삼매의 정념으로 6근을 묶어 두어서 그 인연하는 바를 따라 자유로이 방종할 수 없도록 한 다음에야, 청정한 지혜로써 법의 진실을 볼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6경 가운데 탐착하여 한량없는 악법(惡法)을 희망한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의 경계에 낙착(樂着)해서 스스로 장애를 일으켜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모두 제거하여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하여 그 생사를 깨뜨리고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모든 근(根)을 항복시켜 멀리 경계를 여의어야 할 것이다.


17. 수행관십이인연(修行觀十二因緣)

이미 모든 대치(對治)와 소치(所治)를 설하였으므로 우치(愚癡)의 대치에 대하여 이를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모든 부처님들께서 연기(緣起)를 설하셨는데 그 어리석음[癡冥]을 멸하여 없애면 여실한 지혜가 생겨서 매우 깊고 미묘하여 수순한 공덕이 있을 것이니, 이를 지금 대강 설하여 모든 수행하는 공덕으로 하여금 이를 증익하도록 하겠다.

우치(愚癡)를 멸하여 없애고 연기를 관찰한다면 단(斷)과 상(常), 양편에 대한 모든 생각을 멀리 여의고, 인연이 화합해서 유위법(有爲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미혹하고 헤매는 외도에게 항복받아 제일(第一)의 공법(空法)에 수순하여 혜안(慧眼)이 밝고 맑아지면 무명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수행하여 연기를 보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연박(連縛)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유주(流注)라 이름하며, 셋째는 분단(分段)이라 이름하고, 넷째는 찰나(刹那)라고 이름한다. 또한 연박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生)이고, 둘째는 분(分)이며, 셋째는 취(聚)이고, 넷째는 생문(生門)이며, 다섯째는 찰나(刹那)이고, 여섯째는 성괴(成壞)이다.

생(生)이란 것은 사음(死陰)을 따라서 다음에 중음(中陰)이 일어나는 것이니, 중음 다음에 생음(生陰)이 일어난다. 그런데 중음의 중생들은 무명과 혼란과 어리석음으로 눈멀게 되어 업을 짓는 것이다. 중음의 중생들은 남녀가 화합하는 것을 본다. 무명을 증익시키기 때문에 전도된 생각이 생기게 되며, 혹은 해상(害想)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애상(愛想)이 생기기도 한다. 여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는 해심(害心)이 생기는데, 그런 다음에야 그와 화합함을 스스로 보게 된다.

이때에 욕심(欲心)이 미혹하여 헤매는 것을 이름하여 갈애[愛]가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화합하는 부정(不淨)을 기유(己有)라고 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만(慢)이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인하여 증장함을 얻어서 몸으로 하여금 펴고 일어나도록 하면 이를 이름하여 먹는 것[食]이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4대(大)는 가라라(迦羅邏)와 함께 생겨 보신(報身)을 얻으니, 이를 이름하여 4대가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결업(結業)과 방편으로 하여 2지(支)가 이미 경과하고 차례로 식종(識種)이 생기면 이를 이름하여 종자식(種子識)이라 한다. 처음에 가라라에 있을 때에 그 마음이 침몰하여 아는 바가 적어서 의식이 명리(明利)하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한다. 가라라를 얻어 이미 명리를 알기 때문에 이름하여 식(識)이라 하고, 이를 이름하여 생(生)의 연박(連縛)이라 한다.

분단(分段)이란 것은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포(皰)가 일어나고 육단(肉段)이 일어나며, 그 지절(肢節)이 두텁고 견고해져서 어린아이가 되고 동자가 되고 장성한 뒤 쇠퇴하여 늙어가는 일이 차례로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분(分)의 연박이라 한다. 취(趣)라는 것은 두루 모든 취에 이르는 것으로 수행하여 이들 모든 취의 모양을 보게 되는 것을 이름하여 취(趣)의 연박이라 한다. 생문(生門)이란 4생(生)이 서로 연속하여 윤회를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인데, 이를 이름하여 생문의 연박이라 한다. 찰나(刹那)란 5음을 관찰하여 그것이 순간마다 서로 이어져서 그 생멸함이 끊어짐이 없음을 보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찰나의 연박이라 한다. 성괴(成壞)란 모든 경계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겁수(劫數)의 시종(始終)인데, 이를 수행을 통해 관찰을 해서 그 일어나고 허물어지는 것이 서로 이어짐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성괴의 연박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주(流注)란 수행하여 찰나가 흘러서 달찰나(怛刹那)에 이르고 나아가 라바마후로투(羅婆摩候路妬)에 이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유주라고 한다. 가라라분의 유주는 7일이다. 그 포(皰)와 육단(肉段)이 견고하고 두터워지며, 나아가 노쇠해져서 늙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기분(起分)․주분(住分)․기연분(起緣分)․입분(入分)․출분(出分)․방편분(方便分)과 모든 정수(正受)는 선교방편[巧便]으로 유주하여 차례로 일어나고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모든 취(趣)의 회전이 화륜(火輪)처럼 선회하는 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한량없는 유주는 곧 수행하면 그 연기의 유주를 보는 것이다.

분단(分段)이라는 것은 수행해서 분(分)으로부터 분에 이르기까지 관찰을 하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말하는데,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연기(緣起)에서 이를 성취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이 증상하면 이는 마치 소경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대흑명(大黑冥)이 그 광명을 멀리 여읜 것과 같다. 그리하여 혹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혹 뒤를 보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는 편맹(偏盲)이며, 만일 앞과 뒤를 모두 보지 못한다면 이는 이구맹(二俱盲)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의 소경을 여읜다면 저 어리석음[癡冥]을 버리고 밝고 깨끗한 혜안(慧眼)을 얻는데, 이와 같은 고(苦)․집(集)․멸(滅)․도(道)와 불(佛)․법(法)․승(僧)의 3보를 모를 경우 이를 이름하여 열 가지의 어리석음[癡]이라 한다. 이 같은 열 가지의 어리석음을 멸하면 이를 이름하여 열 가지의 지혜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명이 첫 인(因)이 되어서 세 가지의 업을 심는다.”

만약 수행하면서 무명에 대한 과환(過患)을 모른다면 곧 세 가지의 업을 심는 것이다. 업이 일어나고 나서 이를 따라서 식(識)이 생기는데, 모든 식이 마치 저 허깨비[幻]와 같아서 갖가지의 종류를 모두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으로부터 상속되어 명색(名色)이 일어나는데, 저 하나의 몸에서 두 가지의 모양이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속이 비고 연약하며 습하고 문드러지는 물건과 같아서 그 안에 온갖 벌레들이 있어서 그 외부를 동요를 일으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산누에와 같아서 그것이 처음에 고치의 막(膜)을 얽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명색(名色)의 두 가지의 모양도 또한 이와 같다. 나아가 모든 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말하여 명색의 두 가지 모양이라고 한다.

모든 근이 이미 열린 것을 6입(入)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근이 처음 열린 때에는 아직 아무것도 짓는 것이 없는데, 촉(觸)에서 어리석게 되어 그 적절하고 적절하지 않음을 알지 못함이 마치 빗방울이 몸에 떨어져서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저 정진(情塵)에 그 촉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외부의 가시가 자극하면 그것을 따라서 촉감이 일어나는데, 이는 또한 등잔불이 기름과 심지로 이루어진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해서 이염촉상(爾炎觸相)을 관찰한다고 한다.

촉상(觸相)이 일어나고 나면 차례로 다시 수(受)가 생기는데, 비유컨대 마치 저 물의 거품에서 세 가지의 모양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만약 모든 근을 분별한다면 여기에는 다섯 가지의 수(受)가 있다.

수가 일어나고 나면 다음에는 갈애(渴愛)가 생기는데, 비유컨대 이는 마치 혓바닥으로 저 꿀을 발라놓은 칼날을 핥는 것과 같다. 갈애의 모든 번뇌를 증상하는 것을 이름하여 취(取)라 하며, 취가 생긴 다음에는 유(有)가 생기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의 업(業)이 있다. 업은 미래의 과를 일으키므로 이를 이름하여 유(有)라 한다. 이미 생(生)을 심었는데 아직 받지 않은 것을 미래의 생이라고 하며, 이미 생(生)하고 나면 이것이 익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노사(老死)라고 하며 2지(支)라 한다. 미래의 생을 설할 때에 생상(生相)이 증상한다.

부처님께서 식분(識分)을 설하셨으니, 미래식(未來識)이 생길 때를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하며, 명색(名色)․6입(入)․촉(觸)․수(受)를 이름하여 노사(老死)라 하고, 전세(前世)의 애(愛)․취(取)․유(有)는 능히 지금의 유를 모으기 때문에 이 생에서 과거가 되며, 애(愛)와 취(取)는 곧 번뇌의 분(分)이므로 이를 설하여 무명이라고 하였다. 유는 곧 행(行)인 것이다. 현재의 3지(支)가 내생(來生)과 과거의 2지(支)를 심는 생사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저 중생들의 바퀴가 회전하는 것은 무명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여덟은 현재, 둘은 과거, 둘은 미래의 세계로 차별되므로 이와 같이 분별을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회전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열둘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그 외에 여분(餘分)의 인연이 있는데 지금 이를 설하겠다. 처음에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포와 육단이 생기고 그 지절이 단단하고 두터워진 다음 어린아이가 되고 소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쇠분(衰分)에 접어들어서 늙어 죽게 되는 이들 열 가지의 부분에서 그 연기를 관찰을 하는 것이다.

또 기(起)․주(住)․기연(起緣)․입(入)․출(出)․방편분(方便分), 나아가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연기를 본다. 또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니, 저 안색(眼色)이 안식(眼識)을 일으킴을 말한다. 3사(事)가 화합하여 촉이 있으니 수(受)․상(想)․사(思)를 일으키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하여 다른 종류의 연기를 관찰한다고 한다.

또 수행하여 방편으로 제입(諸入)의 연기를 관하여 저 밝고 맑은 경계로써 스스로 향하여 제입문(諸入門)을 보는데, 이와 같이 보고 나면 각자 자상(自相)을 관하는 곳에서 모든 들고 나는 한량없는 적취(積聚)를 깨뜨리고 숙상(熟相)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방에 유주하면 지극한 지혜의 경계는 관찰함에 도달한다. 밝은 지혜로 승진하는 자는 수행하여 선교방편에 머문다. 이때에 문(聞)․사(思)․수(修)의 지혜와 숙상과 괴상(壞相)이 차례로 일어나는데, 나머지 모든 승진의 이치는 앞의 입처(入處)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수행을 하는 자가 먼저 내신(內身)을 허물면 다음에 외색(外色)을 봄을 이르는 것이니, 이는 마치 저 거울에다 비추어 보면 그 물상(物像)으로 인하여 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소의상(所依相)이 일어나면 또한 그 외상(外相)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부정(不淨)에서 연기를 관한다. 먼저 방편처(方便處)에서 그 생각을 묶어 둠이 견고해진 다음에 그 지절(肢節)에서 분해하여 연기를 보는 것이다. 명상(明相)이 일어나면 무명상(無明相)이 허물어지며 각골(脚骨)에 의하여 박골(骨)․비골(髀骨)․과골(跨骨)․견골(肩骨)․경골(頸骨)․두골(頭骨)이 있어서 시방세계에 충만하니, 유루업상(有漏業相)이 그 밑에서 두루 나타나 여러 가지 부정상(不淨相)이 계급에 따라서 차례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네 가지 인(因)이 모든 고통을 일으킴을 관하니, 전전인(展轉因)과 인근인(隣近因)과 주보인(周普因)과 불공인(不共因)이다.

또 수행하여 과(果)는 생(生)의 인에 따르고, 생은 유(有)의 인에 따르고, 유는 취(取)의 인에 따르는 것을 관하니, 이와 같이 나아가 행(行)은 무명(無明)의 인에 따른다. 행(行)이 곧 과(果)이며, 또한 곧 인(因)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인을 따라서 그 과를 미루어 가면 다시 노사(老死)에 이르게 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무명에서 인을 구한다고 한다면 필시 크게 두려워져서 단견(斷見)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지혜가 없어 어둡고 여명(餘明)이 매우 희미하여 마치 반딧불과 같다. 그런데도 오히려 인을 다시 구하여 자신의 견(見)을 그치지 않는다면 오직 대흑암(大黑闇)과 함께할 뿐일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정사유(正思惟)하지 않음을 연유로 중생이 만약 이와 함께한다면 곧 생사를 굴러다니게 될 것이니, 저 무명이 얽어 묶고 있기 때문에 바퀴가 있어서 항상 굴러다닐 것이다. 그리하여 무명이 근본이 되고 그 나머지 지(支)들이 짓는 바에 의하여 각각의 유상(有相)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유지(有支)가 무명을 굴림[轉]이 가장 자재하고, 자재력(自在力)의 구르는 것은 마치 주인에게 소속된 종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짓지 않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구르지 않는 것이니 그 밖의 여지(餘支)도 모두 이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점점사(漸漸死)와 돈사(頓死)와 행진사(行盡死)와 찰나사(刹那死)이다.”

또 세 가지의 무상(無常)을 설하였는데, 첫째는 찰나(刹那) 무상이고, 둘째는 분단(分段) 무상이고, 셋째는 종류(種類) 무상이다. 수행하여 이 무상을 요해한다면 네 가지 마(魔)를 멀리 여의고 무명을 깨뜨려 버릴 것이다. 밝은 상(相)이 나타나서 마치 밝고 맑은 등불처럼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다. 나아가 노사(老死)가 멸하여 밝은 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무명의 모든 적취(積聚)를 파괴하고 나면 일상(一相)의 정묘(淨妙)한 경계를 성취해서 수행하는 자의 신체가 유연하고 광택이 날 것이다. 이처럼 광택이 나게 되면 몸이 매우 밝고 맑아져서 마치 거울의 영상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相)이 나타나서 그 밝고 맑음을 보고 나면 몸 안에 있는 온갖 물건들의 각각의 자상(自相)이 남김없이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성취를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계(界)에서 득도(得度)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의 어리석음과 다섯 가지의 대치상(對治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계(界)이고, 둘째는 입(入)이며, 셋째는 음(陰)이고, 넷째는 비천(卑賤)이며, 다섯째는 구오(垢汚)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의 어리석음이라

한다. 혹은 계(界)를 관하여 득도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음(陰)을 관하며 입(入)을 관하고 저 증가되는 공덕을 관하고 제일의(第一義)를 관하여 이로써 득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의 대치라고 한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쾌정유리삼매(快淨琉璃三昧)에 들어서 밝고 맑은 경계에서 연기지(緣起支)를 관한다. 이처럼 연기지를 관할 때에 곧 이견상(易見想)이 생기는데 그 설이 다음과 같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연기(緣起)는 보기가 쉽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12연기는 깊고 깊어서 그 밑이 없어 이를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그런데 지금 네가 나의 저 3아승기겁의 깊고 미묘하여 얻기 어려운 과보를 허물어서 깨뜨리려고 하니, 어찌하여 기뻐서 이와 같은 말을 하느냐? 이 심묘관(深妙觀)에 대하여 내가 지금 너를 제도하리니,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서 부처님의 경계를 보도록 하라. 부처님의 경계의 바다는 외도(外道)가 이리저리 흘러서 지혜가 없이 어둡고 음침해 양쪽이 어리석어 이염(爾炎)의 경계를 여의어서 능히 들어갈 수 없으니,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이 비록 조금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밑바닥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때에 세존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 즉시 저 깊고 미묘한 이염(爾炎)에 들어가 삼매의 자재한 정수(正受)에 머무르셨다. 그 정수의 경계에 세 사자왕(師子王)이 있는데,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7보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큰 광명을 방출하여 성문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성문에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發心)으로부터 그 최후의 몸에 이르기까지 심은 모든 선근(善根)과 모든 연기(緣起)가 빠짐없이 모두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세 사자왕이 일어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7보의 연꽃 위에는 각각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큰 광명을 방출하여 벽지불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벽지불에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으로부터 나아가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심은 선근과 모든 연기가 빠짐없이 모두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한량없는 수의 사자왕이 일어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널리 광명을 방출하여 보살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보살들에게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으로부터 금강좌(金剛座)에 이르기까지 닦은 선근과 모든 공덕과 업(業)과 과(果)와 모든 연기가 다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한량없는 사자왕이 나타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부처님이 큰 광명을 방출하여 널리 불법을 비추어서 깊고 깊은 연기가 모두 나타났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 신력(神力)으로 아난에게 부처님의 경계를 보이시고 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염 중에도 또 다시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의 경계가 있는데, 부처님의 지혜가 행하는 바가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한 경계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뻐서 보기가 쉽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너의 지혜가 얕아서 아직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기가 쉽다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염 경계에는 한량없는 모든 법들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허물어져서 모든 것이 공(空)하여져 청정하게 적멸(寂滅)한다.

적멸하고 나면 다시 뛰어나고 묘한 이염을 관하되 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일으켜서 그것이 점점 광대하여져서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 찬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법보(法寶)․법신(法身)에 충만하고 법신의 광명이 변제(邊際)가 없으니, 이것이 불공(不共) 지혜가 행하는 경계인데 모든 불법의 깊고 깊은 연기가 모두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허물어져서 모든 것이 공하여 청정하게 적멸해서 아무런 처소도 없게 되는데, 마치 허공이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을 이름하여 보물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그 과보를 닦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이를 이름하여 결정상(決定相)이라고 한다.

아난이여, 여래의 경계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니, 지금 내가 너를 위하여 조금만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러자 아난은 부처님의 경계를 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깊고 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이염의 경계는 실로 그 밑바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만일 부처님의 경계가 이와 같이 깊고 묘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저의 몸을 참깨[胡麻]처럼 부수어서 마땅히 먼저 불법의 피안(彼岸)을 구경(究竟)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것을 이름하여 수행을 해서 연기의 분단(分段)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이다.

찰나라고 하는 것은 3세(世)가 한 찰나요, 한 찰나가 3세인 것이다. 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일어난 때를 현재라고 하며, 일어난 뒤에는 과거라고 한다. 한 찰나가 일어나면 곧 한 찰나가 고(苦)가 되니, 무상(無常)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중행(衆行)은 찰나가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시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도 없고 어디를 따라서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 이르는 곳도 없고 비록 옮겨 간다고 해도 역시 아무 데도 가는 곳이 없고 가도 역시 모이고 쌓이는 것도 없다.

한 찰나가 일어나면 한 찰나가 멸한다. 찰나는 일념(一念)과 같고 일념은 찰나와 같다. 앞의 찰나가 모이면 이미 멸하고, 멸할 때에 그 뒤가 더불어 일어나는데, 수순하여 네 연(緣)이 구족하여 뒤의 찰나가 일어나는 것이다. 경계를 수행하면 한 찰나 사이에 한량없는 미진(微塵)이 있고, 한량없는 미진은 하나하나의 찰나마다 차례로 서로 이어져서 마치 구슬이 이어져 있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활을 잘 쏘는 네 명의 사람이 함께 화살을 쏘았다고 할 때, 어떤 걸음이 빠른 자가 그 화살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를 쫓아가서 아직 공중에 있는 그 화살을 낚아채어서 이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신(地神)으로 말하면 그 빠르기가 이 사람보다도 더하고, 허공(虛空)의 신은 이 지신보다도 더 빠르며, 일월천(日月天)은 이 허공천보다도 더 빠르다. 이와 같이 건행천(健行天)은 그 빠르기가 저 일월보다도 배나 더한 것이다. 제행(諸行)의 무상함은 그 빠르기가 이들보다도 더해서 이를 도무지 비유할 수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수행하여 가라라의 이레 동안의 주분(住分)에 한량없는 찰나가 있음을 관하는 것과 같이 여타의 모든 부분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을 하고 나면 모든 어리석음을 여의고 밝은 지혜가 증익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음을 이름하여 수행하여 연기의 찰나를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처음에 정수(正受)에 들어가는 것을 연박(連縛)이라 하고, 경계가 증장하는 것을 유주방편(流注方便)이라 하고, 경계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을 분단(分段)이라 하며, 경계가 점점 멸하는 것을 찰나라 한다.

또 이미 네 가지의 차별상에서 연기를 관하는 것을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연기(緣起)를 설하셨으니, 지금 마땅히 2지(支)는 종(種), 2지는 숙(熟), 2지는 기(起), 2지는 견소종(牽所種), 2지는 생장(生長), 2지는 성취(成就), 2지는 수(受), 2지는 작인(作人), 2지는 전(田), 2지는 기자(寄者), 2지는 소기(所寄), 2지는 수기자(受寄者)임을 설하겠다. 이를 이름하여 유지(有支)라 한다.

그런데 수행하여 연기를 관하면 5음(陰)이기도 하고 4음(陰)이기도 한데, 5음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이고 4음은 무색계(無色界)이다. 무상(無常)과 공(空) 등의 제행(諸行)은 이 음에서 진실을 결정하고, 이처럼 진실을 이미 결정하면 그 결정상(決定相)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며, 이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짓지 않는다. 비유컨대 부시와 부싯돌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이것으로 방편을 쓰면 연기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섶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이다. 또한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있고, 태양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있으면 불꽃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이 그 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無明)은 내가 능히 행(行)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으며, 행 또한 내가 무명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유지(有支)가 모두 이와 같이 곧 공법(空法)이고 적멸법(寂滅法)이며 무소유법(無所有法)으로서 짓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무명과 제행(諸行)이 화합하여 유루법(有漏法)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수(受)가 축(軸)이 되어서 유지의 바퀴를 굴려서 여러 결박(結縛)을 낳는데, 모든 결박 가운데서 애지(愛支)가 증상하고, 모든 결박 가운데서 취지(取支)가 증상하고, 모든 사(使) 가운데서 식지(識支)가 증상하고, 모든 전(纏) 가운데서 무명이 증상한다. 생(生)으로 향하면 결(結)이 증상하고, 생을 받으면 박(縛)이 증상하고, 모든 식이 표류하면 이사(利使)가 증상하고, 경계에서는 어리석음과 번뇌가 증상한다.

이와 같이 번뇌의 업의 박(縛)이 굴러서 과(果)를 낳는데, 바퀴가 있어 항상 굴러서 지혜가 없는 중생을 표류시킨다. 뜻을 따라 증상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고, 모든 분(分)에 결(結)․박(縛)․사(使)․전(纏)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행하여 여섯 종류에서 12연기를 관한다. 12지(支)에서 이를 뜻에 수순하여 설하면 이른바 안반념(安般念)은 업지(業支)와 유지(有支)를 관하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으로 하는 것이 곧 신행(身行)이며, 각관(覺觀)이 곧 구행(口行)이며, 상사(想思)가 곧 의행(意行)이다. 그러므로 안반념이 곧 저 대치(對治)인 것이다.

그리고 계방편관(界方便觀)은 식지(識支)와 생지(生支)를 관하는 것이다. 식(識)이 증상하기 때문에 태(胎)에 처하는데, 식이 모든 계에서 증상하는 것을 7식계(識界)라 한다. 그러므로 계방편관은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음방편관(陰方便觀)은 명색지(名色支)와 노사지(老死支)를 관하므로 음방편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모든 날숨과 들숨을 깨뜨리는 방편관은 6입지(入支)와 촉지(觸支)를 관하므로 입방편관(入方便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연기방편관(緣起方便觀)은 무명지(無明支)와 애지(愛支)를 관하므로 연기방편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受)와 무명은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기 때문에 지혜가 곧 저 대치인 것이며, 애(愛)와 취(取)의 2지는 청정에 염착(染着)하였기 때문에 부정(不淨)이 곧 대치인 것이다.

또 수행하여 12인연을 관함에 있어서 혹은 인(因)을 따라 도탈하기도 하고 혹은 과(果)를 따라 도탈하기도 하며, 혹은 무명과 행(行) 나아가 노사를 따르기도 하고, 혹은 식(識) 나아가 노사를 관하기도 한다. 혹은 3사(事)가 화합하여 촉(觸)이 생기는데, 촉은 수(受)를 생하고, 수는 애(愛)를 생하고 애는 취(取)를 생하고 나아가 노사에 이른다. 혹은 애와 취와 유로부터 노사를 생하고, 혹은 노사로부터 나아가 무명에 이르고, 혹은 노사 나아가 식에 이름을 관하는데, 『불성유경(佛城喩經)』에 설한 것과 같다.

또 수행하여 4념처(念處)에서 12지를 관하여 증상하니, 신념처(身念處)에서 6입지(入支)를 관하고, 수념처(受念處)에서 수지(受支)를 관하며, 심념처(心念處)에서 식지(識支)와 명색지(名色支)를 관하며, 법념처(法念處)에서 나머지의 지(支)를 통틀어서 본다. 이와 같은 뜻을 설하여 마쳤으니,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이를 찬탄한다.


방편 치지(治地)의 행으로

드디어 구경처(究竟處)에 이르고

위없는 법을 베푸는 주인

이를 설해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노라.


내가 그 뛰어난 들음에 따라

깊고 묘한 뜻을 엮어서 설하였노라.

구절들을 장엄하여 모아서

법이 오래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노라.


부처님의 법이 깊어 바닥이 없으니

수행을 해도 그 끝이 없어라.

나의 적은 지혜의 힘을 가지고

한량없는 법을 선양하노라.


이것이 깊어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치 모기가 바닷물을 마심과 같아라.

오직 저 이미 도탈을 한 자만이

그런 다음에야 구경에 이르러라.

62계(界)의 6종(種)이란 6정(情)․6진(塵)․6식(識)․6계(界)․6각(覺)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일러 세 부정각(不淨覺)이라 하는데, 이것이 도리어 세 정각(淨覺)이다. 고(苦)․낙(樂)․불고불락(不苦不樂)․우(憂)․희(喜)․사(捨)가 여섯이다.

셋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이며, 또 색계․무색계․멸계(滅界)이다. 셋은 세법(世法)․연중상법(軟中上法)․선불선무기법(善不善無記法)이다. 학(學)․무학(無學)․비학(非學)․비무학(非無學)은 넷이다.둘은 식(食)과 비식(非食), 누(漏)와 무루(無漏)이며, 의욕(依欲)과 의출요(依出要),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이다.

서른여섯의 부정(不淨)을 차례로 말하면, 털과 머리털, 손톱과 발톱, 이빨, 얇은 살갗과 두꺼운 살갗, 힘줄과 살, 뼈와 골수, 비장, 신장, 심장, 간과 폐, 소장과 대장, 위(胃)와 포(胞), 오줌과 똥, 때와 오물, 눈물과 콧물, 침과 고름, 피, 누렇고 흰 가래와 피멍, 지방(脂肪)과 뇌(腦)와 막(膜)이다.

찰나의 수에 대하여 말하면, 120찰나를 1달찰나(怛刹那)라 하고, 60달찰나를 1라바(羅婆)라 하며, 30라바를 1마후로투(摩睺路妬)라 하고, 30마후로투를 1일(日) 1야(夜)라 한다. 그리고 한 해 중에 오직 2시(時) 2일(日)과 30마후로투의 밤과 낮이 같다. 8월 달을 이름하여 갈제(羯提)라 하고, 후반월(後半月)을 이름하여 백분(百分)이라 하는데, 갈제월(羯提月)의 백분(白分)의 8일과 폐사거월(陛舍佉月)의 백분의 8일이다. 2월을 이름하여 폐사거라 하고, 후반월을 이름하여 백분이라 한다. 이것이 곧 2시 2일인데 그 밤과 낮이 각각 15마후로투이다. 이로부터 그 이후로는 저 라바가 흘러서 혹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도 하고, 혹은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흐른다고 하는데 그 밤과 낮이 같아서 각각 30마후로투이다.[갈제월(羯提月)의 백분(百分)의 8일과 폐사거월(陛舍佉月)의 백분의 8일인데, 갈제월이란 7월 16일에서 8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이 8월을 이름하여 후반월(後半月)이라 하고 이름하여 백분이라 하며, 폐사거월이란 1월 16일에서 2월 15일까지를 말하는데, 이 2월을 이름하여 후반월이라 하고 이름하여 백분이라 한다. 이것이 곧 2시(時) 2일(日)로서 그 밤과 낮이 각각 30마후로투인 것이다. 이로부터 그 이후로 라바가 흐른다고 하였는데, 혹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도 하고, 혹은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흐른다≺流≻고 한 것이다.]

 


달마다라선경.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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