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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wowinchon 2018. 2. 1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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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등집중덕삼매경 상권

 

서진(西晉) 월지(月氏) 축법호(竺法護) 한역

 

최봉수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유야리(維耶離)의 큰 나무가 있는 중각정사(重閣精舍)에서 큰 비구중과 함께 계셨다. 비구 1만 명은 모두 계율을 배워 구족하였고 밝게 깨달아 알고 거룩하게 통달한 이들이었다.

보살 2만 명은 모두 불퇴전(不退轉) 보살이었고 여러 가지 총지(摠持)를 체득하였고 변재에 걸림이 없었으며 빠짐없이 신통을 얻어 분별하여 이해함이 분명하였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안정되었고 심성은 삼매에 나아가 매우 굳세고 강하며 마음속에 지혜가 풍부하여 선권방편을 잘하여 피안에 건너 간 자들이었으니, 그 이름은 의행(意行)보살∙길의(吉意)보살∙상의(上意)보살∙지의(持意)보살∙증의(增意)보살∙금강의(金剛意)보살∙무한의(無限意)보살∙법의(法意)보살∙자씨(慈氏)보살∙박수(溥首)보살∙구쇄(鉤瑣)보살 등이었다. 그리고 제석천과 범왕과 사천왕과 여러 천자를 비롯하여 1만 4천 사람이 모두 와서 모였다.

그때 세존께서 무앙수(無央數)의 백천 대중의 권속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을 위하여 경(經)을 설하고 계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몸과 목숨을 놓아 버리시고자 스스로 기약하기를 3개월 뒤에 마땅히 멸도를 취하려 하셨다.

이에 구쇄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다시 정돈한 다음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한 뒤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너무하십니다, 여래께서는 목숨을 버리시고자 3개월이 지난 뒤에 마땅히 반열반하시려고 하시다니. 세존이시여, 여러 보살이 보호할 것과 보살이 구제하고 섭수할 것과 보살이 설할 것, 보살이 드러낼 것, 보살이 심어야 할 여러 덕의 근본에 대하여 설해 주십시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단절되지 않게 하시고 법의 눈으로 은혜를 베푸시어 성스런 대중을 제도하시고 뭇 중생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들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시어 무위도(無爲道)를 넘어서게 하십시오. 여래께서 멸하신 뒤에도 법의 윤택함이 널리 보살 대사에게 입혀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가 폐쇄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않고 경을 듣고 승단을 공양하여 요긴한 뜻을 세우게 하십시오. 마음의 뜻을 견고하게 하고 법을 준수하게 하고 마땅함을 따르게 하십시오. 그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에 있어 깨닫고 도달하지 못한 바가 없도록 하십시오. 몸으로 요해하여 그 귀의한 바에 수승하고 월등한 것이 많도록 하십시오. 항상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품고 스스로 정화하여 범하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개탄스럽고 슬프게 생각한 것이 위의를 구족하도록 하십시오. 건립한 것이 용맹스러워 힘듦과 더러움을 항복받고 제압하도록 하십시오. 여러 애욕의 때를 조복하여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도록 하십시오. 대중의 모임에서 노닐더라도 어려운 것을 기피하지 않으며 놀라지 않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天中天]이시여, 어떻게 해야 보살 대사는 온갖 덕을 점점 늘려가며 지혜에 있어 결핍되지 않으며 선정을 어기지 않게 됩니까? 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결핍되거나 폐쇄되지 않습니까? 안의 성품에서 크고 굳세게 벗을 맺어 궁극적으로 멸도에 이르게 됩니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서로 도와 부처님 법을 준수하되 삿되거나 허위인 것이 없겠습니까?

항상 바른 계율을 수호하며 듣는 바에 미혹되지 않겠습니까? 청정한 세 가지 금기를 거두어 항상 인욕할 수 있겠습니까? 매번 행동마다 마음을 평등이 하여 거칠거나 교만함이 없고 중생에게로 향할 수 있습니까? 정진을 잘 닦아서 마음에 나태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마땅히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성취해 마치겠습니까?

한 마음으로 선정을 행하되 그 마음이 안온하고 길상스럽겠습니까? 일체의 여쭈어 볼 바에 대해 통효하고 요달하고 바르게 수용하겠습니까? 뜻이 강건하고 지혜와 사견과 예순두 가지 의혹을 떠나겠습니까? 가르침을 주는 모든 경전에 대해 밝게 단련하고 통달하게 되겠습니까?

마땅히 구제하고 용납할 바에 대해 네 가지 은혜를 행하겠습니까? 천상과 세간에 대해 널리 제도하고 많이 수호하겠습니까? 애락을 멀리 떠나고 항상 무상함을 생각하겠습니까? 마음을 문지방처럼 보호하여 여러 신통과 지혜에 머물겠습니까? 뜻이 성문과 연각을 그리워하는 데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법의 가르침을 널리 천명하여 악마와 원수 및 여러 외도들을 항복시키고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면 마땅히 법왕께서 강설하고 교화하신 바를 베풀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교법과 교훈을 숭상하고 그것에 순응하며 천신과 인간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법으로써 업을 삼겠습니까? 의복과 음식을 탐하지 않아 애욕이 없도록 하겠습니까? 일체를 널리 제도하여 진에와 원한을 제거하겠습니까? 군생들을 불쌍히 여겨 어리석음을 소멸시키겠습니까? 모든 악마의 티끌과 때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권화와 방편을 행하여 가없는 지혜로 부분적으로, 또는 두루 권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나라연(那羅延)[진(晋)나라 말로 구쇄 역사(鉤鎖力士)이다]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다. 불쌍히 생각한 것이 많고 안온하게 하는 바가 많고 여러 천신과 세간의 인민을 슬프게 여겨 여래에게 마땅히 질문할 만한 이러한 것들을 묻는구나. 잘 듣고 잘 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보살은 그 행하는 바가 뛰어나고 특이하며 한량없는 덕을 갖추었다.”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구쇄보살과 모인 대중들은 가르침을 받아 청취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삼매가 있으니 그 이름이 등집중덕(等集衆德)이다. 만일 보살로서 이 정(定)에 이른 자는 온갖 덕이 점점 늘어나고 지혜가 결핍되지 않고 선정을 어기지 않는다.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찍이 막히거나 폐쇄된 적이 없고 마음의 성품이 크고 굳세어 일찍이 부처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리고 항상 경전의 법을 듣고 성스런 대중을 공양하여 네 가지 은혜를 행한다. 그는 그렇게 한 뒤에 군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때 세존은 등집중덕삼매에 대해 찬탄하시고 그 이름을 선양하신 뒤에 침묵하시고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유야리(維耶離)의 큰 성에 한 대역사(大力士)가 있었는데 이름을 유마라체이(維摩羅嚔移)[진나라 말로 이구위(離垢威)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역사이다. 이 천하에서 힘과 세력이 강성하여 필적할 자가 없다. 그런데 일찍이 듣건대 사문 구담이 용맹한 세력이 한량없고 그 힘이 우뚝 솟아 있는데 총괄하여 요약하면 열 가지라고 한다. 몸과 여러 뼈가 마치 구쇄(鉤鎖:那羅延)와 같고 자재함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가서 그 도를 시험하고 관찰하여 나와 비교해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뒤에 유야리성을 나섰다. 그는 큰 숲속에 2층으로 되어있는 정사(精舍)를 찾아 가서 세존을 뵙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래께서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 권속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위하여 경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 큰 모임을 비추며 임하고 계신 것이 마치 수미산이 대해를 뚫고 드러나 있는 것과 같았고 위엄을 갖춘 용모와 신비한 광채가 휘황찬란함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마음에 뛰어오를 듯한 기쁨을 품게 되어 스스로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부처님은 그 역사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교만과 잘난 체하는 그의 허물을 치료하고 제거하시고자 하여 현자 대목건련(大目乾連)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과거 보살일 때에 형제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 화살이 이른 곳에 가서 지금 그것을 가지고 오너라. 석가족의 여인 구이(瞿夷)가 쓰는 곳에 충당하고자 한다.”

목련이 대답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그때에 화살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이에 부처님은 오른쪽 손바닥에서 빛을 방사하여 그 빛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셨다. 그런데 그 부처님 국토에 진산(鎭山)인 철산(鐵山)과 대철위산(大鐵圍山)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화살이 뚫고 들어가 있었다. 목련은 빛을 따라 찾다가 마침내 화살이 있는 곳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정녕 화살을 보는가?”

“이미 보았습니다.”

“가서 가지고 오너라.”

그때 목건련은 스스로 신족(神足)을 드러내었으니 일체 중생 가운데서 보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용맹한 장부가 팔을 굽혔다 펴는 것같이 짧은 시간에 대철위산에 이르러 부처님의 화살을 뽑고자 하였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진동하였지만 화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일체의 천신∙용∙귀신∙제석천∙범왕으로서 숙연해지지 않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아난이 의복을 정돈하고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까닭에 땅이 흔들립니까? 온 세상이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에 화살을 쏘아 화살이 철산을 뚫고 들어가 있는 것을 기억해서 이다. 목련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가 신력을 다하였건만 화살은 뽑히지 않아, 삼천대천세계가 그 때문에 흔들리지만 얻지 못한 것이다.”

아난이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즉시에 허락하시어 도의 힘으로 그것을 돕게 하셨다. 그러자 곧 성스런 뜻을 받들어 뽑아내어 화살을 가지고 되돌아와 부처님께 바쳤다.

목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이셨을 때 화살을 쏘아 철위산을 뚫고 들어가게 하셨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을 쓰신 것입니까? 신족(神足)의 힘을 쓰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이지 신족의 힘이 아니다. 만일 신족의 힘을 사용했더라면 그 화살은 마땅히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했을 것이다.”

목련이 다시 말씀드렸다.

“어떻습니까? 보살은 부모로부터 받은 힘으로도 화살을 쏘아 철위대산을 뚫고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력의 공덕이 도와서 섭수하고 취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열 마리의 평범한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바른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바른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용같은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용같은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의 힘이 하나의 요술을 부리는[術事]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술사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푸른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열 마리의 푸른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보묘(普妙)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마리의 보묘 코끼리의 힘이 한 마리의 대신(大臣) 코끼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마리의 대신 코끼리의 힘이 한 명의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대(大)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대역사의 힘이 한 명의 상(上)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상역사의 힘이 반(半) 구쇄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반 구쇄 역사의 힘이 한 명의 구족한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구족한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대(大)구쇄 역사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대구쇄 역사의 힘이 한 명의 법인(法忍) 보살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법인 보살의 힘이 한 명의 구경(究竟) 보살의 힘보다 못하다. 백 명의 구경 보살의 힘이 한 명의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의 공덕의 힘보다 못하다. 그는 태어나 땅에 떨어지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방향의 세계에도 현재 여러 부처님이 건립한 국토가 있으니 그곳은 구경 보살이 노니는 장소이다. 그는 땅에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는다. 그 땅 아래로 6백 80만 유연(由延:유순)에 이르러서 그 아래를 다하여 수계(水界)를 얻는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이 각각 수레의 바퀴통쇠 정도의 크기라는 것을 분별한다. 또한 그는 위로는 범천에 이르는데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 그 세계는 손상되는 일이 없고 괴롭혀지거나 피해를 입는 일도 없다. 구경 보살의 위신력과 세력이 우뚝 솟은 것이 그와 같다.

그런데 열 명의 구경 보살의 힘이 한 여래∙지진∙등정각의 힘보다 못하다. 이것을 이름하여 세존의 부모로부터 받은 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여러 보살이 숙명에 지은 덕으로써 본래 수기를 받는 것도 신족과 도력의 변화는 아니다. 만일 보살이 신변과 공덕의 힘을 드러내어 보인다면 도량으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신족의 힘에 의해 한 발가락으로 항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의 세계를 들어 올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신족의 힘을 사용하여 수승하고 특이한 한량없고 가없는 여러 부처님 국토를 내려놓고 그러면서도 여러 중생에게 괴롭힘이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신덕변화(神德變化)에 의한 한 발가락의 힘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래의 신족 변화의 힘은 이것을 넘어서니 한량없고 끝없고 불가사의하다. 만일 여래가 신변과 부처님의 위엄을 두루 갖추어 시현한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보고서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외도의 술법을 쓰는 대중이나 사악한 이학(異學)들은 어떻겠느냐?

또한 목건련아, 보살이 불수(佛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네 가지 대종(大種)을 포섭하여 한 가지 대종으로 세운다. 이렇게 한 가지 대종으로 세운 뒤에도 세계에는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없다.

그때 폐마(弊魔:악마 파순)가 도량에 이르렀는데, 셀 수 없는 억백천의 흉악하고 패악무도하여 당하기 어려운 관속(官屬)들과 함께 왔다. 그러나 여래는 그 모두를 절복시켰으니, 무엇으로 그렇게 했는가? 평등의 힘이다.

또한 열 가지 힘이 있어 항상 큰 자애와 슬퍼하는 마음을 더하여 중생들이 훼손되고 저촉되는 바가 없게 한다. 어떤 것들이 열 가지 힘인가? 첫째, 경우 아닌 것과 경우인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둘째, 과거∙현재∙미래를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셋째, 한마음과 해탈문과 정의(定意:三昧)와 정수(正受:入定)를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넷째, 여러 사람의 감관에 갖가지 차별과 차이가 있음을 보고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다섯째, 다른 군생(群生)들이 마음과 뜻으로 사념하는 바를 보고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여섯째, 갖가지 몸이 있고 셀 수 없는 형체가 있는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일곱째, 온갖 무리들의 이런 저런 소행들이 좋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여 동일하지 않는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여덟째, 도의 눈이 철저하여 윤회하는 거취를 본다. 곧 여기서 죽어서 저기서 태어나고 저기서 죽어서 여기에 태어나며 이름은 무엇이고 성씨는 무엇이고 부모 형제는 어떠한가를 안다. 그리고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악을 저지르고 성인과 현자를 비방하고 사견으로 전도되어 마침내 악취(惡趣)에 떨어지거나 또는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성인과 현자를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받들고 순응하여 마침내 선한 곳에 떨어지니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아홉째, 도의 귀가 뚫려 천상과 세간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고 지옥과 아귀와 날짐승과 길짐승과 기어 다니는 무리의 숨소리도 듣는다. 또한 시방의 여러 부처님 세계에 이러한 소리가 있든 이러한 소리가 없든 집착함이 없으니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열째, 마음으로 다섯 거취와 일체의 본래 궁극을 본다. 여러 누(漏)가 모두 다하여 티끌과 때가 없다. 윤회를 빠짐없이 단절하였으니 신비하고 진실하고 성스럽게 도달하고 명색의 근원을 요해한다. 이러한 것을 살핀 대로 빠짐없이 안다. 이것이 바로 열 가지 힘이다.

그런데 여래의 힘은 다시 이것을 넘어가 불가사의하니, 시방에 대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이 통하고 꿰뚫는 것이다.

이에 이구위(離垢威) 역사는 부처님 세존으로부터 이러한 보살의 부모에게서 받은 여러 힘에 관해서 듣고 그 괴이하고 일찍이 없었던 일에 대하여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선한 마음이 생겨나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걸친 뒤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금 저는 세존께서 보살일 때 부모에게서 받은 힘 및 열 가지의 힘에 대해서 설하신 것을 듣고 잘난 체 하는 것과 교만과 스스로 크게 여기는 것을 제거하였습니다. 저는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하며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큰 위안을 획득하게 하십시오. 불쌍히 여기시어 저에게 열 가지 힘을 얻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구족하신 것과 다름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그때 모인 대중들은 그 역사가 넓고 크게 서원하는 것을 듣고, 가득 찬 일만의 사람들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소리를 내어 노래하며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도의 힘을 얻게 하시고

또한 여래와 같은

진실한 등정각에 이르게 하소서.

 

이에 구쇄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지금 대성(大聖)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등집중덕삼매를 칭찬하고 찬탄하신 뒤 침묵하셨습니까? 여래께서는 등집중덕정의(等集衆德定意)를 분별하고 강연해 주십시오. 그리고 보살 대사의 여러 가지 행(行)을 밝히시어 뜻을 일으킨 자로 하여금 이 정(定)에 이르게 하십시오.”

부처님께서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초발의(初發意) 보살로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이르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존귀한 정(定)을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발의가 존귀한 정을 지니면 빠짐없이 두루 일체의 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역사야, 냇물의 흐름과 샘의 근원과 강과 하천의 거대한 흐름은 모두 바다로 돌아간다. 그와 같이 심은 공덕으로서의 보시와 지계 또는 닦은 평등과 사유도의 지혜 또는 유루와 무루 또는 세속의 업과 출세간의 것 또는 천상과 인간에서 세운 복덕들이 모두 초발의 보살의 행으로 돌아가고 흘러간다.

그러므로 족성자(族姓子)나 족성녀(族姓女)가 온갖 복을 거두어들이고자 한다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땅히 뜻을 일으키도록 하라. 비유하면 수미대산∙철위산∙설산∙흑산 그리고 여러 약초와 나무 및 여러 총림∙고을 지역∙큰 지방∙군국(郡國)의 현과 읍 그리고 사천하와 해와 달의 운행과 비추임 등이 모두 삼천대천세계 속에 포섭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역사야, 범부이든 서민이든 이적(履跡:유학)이든 무착(無著:무학)이든 연각이든 중생을 돕는 보살이든 여래든 처음으로 뜻을 일으켜 보살이 된 자는 이러한 성대(聖大)한 복덕 속에 빠짐없이 통하여 들어간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만일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킨다면 곧 빠짐없이 여러 덕을 포용하고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네 가지 지역의 군생들의 무리에서 전륜성왕이 높은 자리에 거하여 공과 복이 수승하여 사천하의 온갖 보통 백성들이 복을 누리게 하며, 전륜성왕의 덕이 동등하여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 복덕을 합하면 우뚝 솟은 덕이 한 전륜성왕의 덕인 것이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덕이 각각 모두 전륜성왕과 같고 그러한 한 명 한 명의 성왕을 다시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의 수로 배가하여 그러한 여러 복덕을 모두 모아 한 사람의 덕으로 삼는다.

또한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에 있는 백성들이 각각 지은 덕을 그 한 사람과 같게 하여 모두 모은다면, 구쇄야, 네 뜻에는 어떠하냐? 정녕 그 복덕을 측량할 수 있겠느냐?”

구쇄가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성왕의 덕을 헤아리는 것도 불가사의합니다. 하물며 일체가 전륜의 덕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한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중생들의 한량없는 복덕을 합하여도 한 명의 초발의 보살에게 비하면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첫 번째로 초발의 보살이 등집중덕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범천은 1천 세계에서 항상 자애를 즐거이 행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1천 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일곱 보배로써 보시한다고 하자. 이것을 범천이 1천 세계에서 자애를 행한 것에 비유한다면 그 자애를 행한 것의 복덕이 수승하다.

또한 3천 세계 또는 5천 세계 또는 1만 세계 또는 10만 세계에 이르도록 범천은 두루 그 자애를 행한다. 그리고 10만 세계를 주위에 두루 충만시킬 만한 일곱 보배를 가지고 보시하여 심은 복덕이 있다고 하자. 이것으로 범천이 10만 세계에 자애를 행한 것과 비교하면 자애를 행한 복이 많아 측량하거나 한계를 지을 수 없다.

또한 만일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무리들이 각각 그 복덕을 범천이 10만 세계에서 자애를 행한 것과 같게 하여 자애의 마음을 행하는 것이 두루 군맹(群萌)에게 미친다고 하자. 그때의 복덕을 계산하여 초발의 행자가 존귀한 자애의 복을 짓는 것에 비교하면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도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초발의 보살의 뜻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있으면 그 덕은 가히 한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보고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큰 도에 뜻을 일으킨다면 일체의 덕을 구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족성자 또는 족성녀가 두루 충만한 한량없는 복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역사야, 이것이 두 번째로 등집중덕정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동방의 세계가 허공에 덮여 있다. 그 허공의 멀고 가까움을 한계 짓고 측량할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한계 지을 수 없고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으니 그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 비유를 인용하여 지자로 하여금 이해하고 나아가게 하려 한다. 시방세계를 덮고 있는 허공은 그 궁극을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등집중덕정의의 복덕과 공덕도 마치 그와 같으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한량없이 점점 더해져서야 구족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여러 도덕으로써 그 마음을 장차 보호하고 큰 정진으로써 행하는 바를 충분히 성취한다.

곧 아래로 물의 끝에 이르고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는 삼천대천세계에 그곳을 가득 채우는 겨자씨가 있다. 어떤 사람이 한 개 한 개의 겨자씨를 한 부처님 국토로 삼아 동방으로 지나가며 만나는 수많은 부처님 국토에 대해 각각 한 개의 겨자씨를 놓는다고 하자. 그렇게 한 개씩 한 개씩 하여 겨자씨를 다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도 동방 세계의 궁극적인 끝을 얻을 수 없다.

또한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세계를 가득 채우는 겨자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겨자씨들을 모두 취하여 하나하나 부수어서 그 각각을 다시 항하의 모래알 수를 한계로 하여 만든다.

구쇄야, 네 뜻에는 어떠하냐? 정녕 어떤 사람이 그 부서진 겨자씨의 수를 셈하고 헤아리고 분별하여 알 수 있겠느냐?”

구쇄가 답하였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한 겨자씨가 부서져 나누어진 것을 한계로 하여도, 비록 사리불 같은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 천하의 염부제를 두루 가득 채울 만큼 있다고 해도, 그리고 한 겁에 걸쳐서 그것을 셈하고 그것을 헤아려도 겨자씨의 수를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항하의 모래알 수와 같은 세계의 겨자씨를 부순 것의 수효에 대해서는 어찌 알기를 바라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 겨자씨를 가지고 부처님 국토 마다 하나씩 놓고 지나가고 그러한 비유로 부서진 겨자씨를 모두 다하여 남는 것이 없게 하여도 동방의 세계는 궁극에 이를 수 없으며 그 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남방도 그러하고 서방도 그러하고 북방도 그러하고 동남방도 그러하고 서남방도 그러하고 서북방도 그러하고 동북방도 그러하고 윗방향과 아랫방향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하다, 구쇄야. 시방세계에 있는 허공과 같이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모두 일곱 보배로 두루 그 가운데에 보시하되 빠짐없이 충만 시키고 다하게 하여 보시한다면 얻는 공덕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한량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 초발의 보살이 자애를 행한 덕은 이 보시를 넘어선다. 동방의 한계 지을 수 없는 세계를 가득 채우는 일곱 보배의 복을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 헤아려도 공허한 것일 뿐 비유로 미치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 건너가 그 궁극적인 끝을 얻을 자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보살의 자애는 허공과 같아 덮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보살이 그렇게 행한 큰 자애를 덮는 것이라면 그것도 끝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중생이 형태를 받아 몸을 세워서 두루 다닌 부처님 국토와 머무른 세계가 아주 많은 것과 같으니 보살은 자애를 행하여 이 군맹으로 하여금 모두 전륜왕을 성취하게 한다. 또한 제석천과 범왕의 복과 같은 수의 공덕을 구족하게 하고 실천하게 한다.

또한 보살 대사가 건립한 정화된 성품과 솔직함과 사특하지 않음을 헤아리고 중생을 건지기 위해 큰 슬픔에 머물고 항상 일곱 걸음을 갈 때마다 자애와 슬픔을 행한다.

이와 같이 섭수하고 취한 공훈은 여러 군생과 종족들이 제석이 되고 범왕이 되고 전륜왕이 되어 얻은 복과 경사를 넘어선다.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헤아려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세 번째로 등집중덕정의에 들어간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세계 일체 중생의 위신과 공덕을 모두 전륜왕 또는 제석천 또는 범왕의 경사스러운 공덕과 같이 우뚝 솟게 한다고 해도 초발의 보살의 자애에 비교할 수는 없다.

시방에 있는 일체의 중생들을 모두 제석천 또는 범왕 또는 전륜성왕이 되게 하고 그것을 백천만 배 한다고 해도 보살이 큰 자애와 슬픔을 행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다.

또한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의 범주에 드는 일체를 모두 청신사가 소유한 공덕과 같게 만들어도 사리불의 복과 밝은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해도 상응하지 못하고 미칠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모두 사리불의 지혜 및 공덕과 동등하게 하여 다르지 않게 하여도, 이쪽을 연각의 지혜 및 공덕에 비교하면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하여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다시 삼천대천세계에서 노닐고 거주하는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연각의 덕과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하여 동등하게 해서 차이나거나 특이한 것이 없게 하여도, 5겁을 생하여 행한 보살에 비하고자 하여 백 배∙천 배∙만 배∙억 배∙수억만 배를 하여도 공허하게 헤아린 것일 뿐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

이것이 곧 네 번째로 등집중덕삼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경을 설할 때에 2만 2천 사람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고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다. 그 큰 광명이 두루 억백천 나유타의 세간을 비추었고 여러 천상의 기악(伎樂)이 연주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울었다. 그리고 천상의 꽃을 내려 도량을 두루 덮었는데 부처님 위로 분분히 내리면서 모인 대중들의 주위에 두루하여 무릎까지 쌓였다. 제석천∙범왕∙사천왕∙용∙귀신들이 모두 노래하고 찬탄하며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족성자 또는 족성녀로서 마음에 지극한 정성을 품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고 대성께서 강설한 대로 향하는 자는 저희들이 가서 여쭙고 의논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큰 도에 뜻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마침내 등집중덕정의삼매를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한량없는 일체의 공덕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때 이구위 역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해야 등집중덕정의를 성취하고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한 법을 닦는다면 이 정에 이르게 된다. 어떤 것이 한 가지 법인가? 마음을 일으켜 여러 신통의 지혜를 익히는 것이니 이것이 이 정을 체득하는 한 가지 법이다.

다시 두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법인가? 법을 듣고 그것에 대해 여쭙고 의논하되 싫어하지 않는 것과 들은 대로 그 도리를 수용하고 사유하고 살핀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죄악을 소멸시키는 것과 선한 업을 권하고 모으는 것, 그리고 온갖 덕의 근본을 심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금기와 계율의 청정함, 보는 바의 청정함, 그 마음의 청정함, 지혜의 청정함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다섯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말하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러운 것, 뜻의 성품이 견고한 것, 그 뜻이 솔직하여 속이거나 아첨하지 않는 것, 그 마음이 청정하여 차별 없음을 건립하는 것,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것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다시 여섯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착한 벗을 따르고 악한 벗을 멀리하는 것, 온갖 모임을 버리고 폐쇄하는 것, 고요하고 편안히 명상을 익히는 것, 큰 자애를 따르고 행하는 것,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이다.

다시 일곱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고요히 분별하는 것을 건립하는 것, 상응하는 과보를 사유하고 관찰하고 제거하는 것, 연기에 입각하여 견해를 구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 죄와 복이 모두 서로 관계된 것에 말미암는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것, 이익으로 맺히고 막힌 데서 이끌어 평등한 것에 이르게 하는 것, 도의 법을 사용하는 까닭에 도리를 갖춘 도에 들어가는 것, 화나게 하고 꾸짖는 것을 참아서 마음에 한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일곱 가지이다.

다시 여덟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몸의 행이 담백한 것, 입의 말이 정숙하고 침묵하는 것, 마음의 사유가 고요한 것, 느낌[痛痒]을 관찰하고 여러 법을 살피는 것, 악의 뿌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상념하지 않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악의 뿌리가 치성하게 일어났으면 염에 따라 제거하는 것, 선의 뿌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따를 것을 사유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 선의 뿌리가 넓고 성하게 일어났으면 장차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이다.

다시 아홉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아홉 가지인가? 과거의 법을 관찰하되 무상함을 아는 것, 미래의 법을 관찰하되 생한 바가 없음을 아는 것, 지금 현재의 법을 관찰하되 두 가지가 아님을 아는 것, 삼세에 이르러 들어가 모두 평등함을 아는 것, 모든 법이 마치 법인(法忍)과 같음을 아는 것, 공성에 집착하지 않는 것, 무상(無相)을 분별하는 것, 원하는 것을 떠나는 것, 생한 것이 있다면 구호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홉 가지이다.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으면 이 정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무아에서 벗어나는 것, 목숨이 없음을 인지(忍知)하는 것, 사람이 없다는 것과 무상하다는 구절의 자취를 요지하는 것, 일체의 생겨난 것이 모두 괴로움이며 근심임을 요지하는 것, 무위의 고요함이 곧 구호되는 것임을 요지하는 것, 전도를 떠나는 것, 중생을 건지는 것, 경전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 법을 들은 대로 찾고 받들고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이 행해야 하는 열 가지 법이다. 이것으로 등집중덕삼매의 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 대사가 공덕과 효험을 누적하여 끝없는 큰 덕을 이루고 또한 이 정의를 얻고 듣습니다. 여러 덕과 바르고 진실한 행을 결정지으려면 마땅히 이 정을 들어야 합니다. 불가사의한 공덕의 복을 획득하고 창달하려면 마땅히 이 정을 들어야 합니다. 큰 보배가 다하거나 소모되지 않게 하려면 마땅히 이 정을 배워야 합니다.”

이구위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 대사는 무엇으로써 큰 바다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습니까? 그리고 불가사의한 경사[慶]를 얻고 폐쇄할 수 없는 공덕을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세 가지 일이 있으니 큰 바다와 같이 다함이 없는 복덕을 얻게 하고 생각하기 어려운 경사와 폐하지 못하는 공덕에 이르게 한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보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금기와 계율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널리 들으며 권태로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족성자야, 무엇을 일컬어 보살이 보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마땅히 재물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재물로써 유혹하여 정진하고 교화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려 하지 않는다면 받을 자는 그 물건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받는 자가 취한 것을 버리지 않으면 그의 권속들에게 결코 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일 구걸하는 자가 구하고 찾는 바가 있다 해도 받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국왕의 재물이든 보배든 경영하는 산업이든 주택이든 집이든 권해서는 안 되니 만일 구걸하는 자가 구하고 찾는 바가 있다면 그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어야 한다.

또한 족성자야, 보살 대사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몸과 목숨을 은혜롭게 보시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코끼리∙마차∙의복∙머리∙눈∙골수∙뇌∙눈∙귀∙코∙입∙팔∙다리∙손∙발∙살∙머리털∙살점∙피 등을 그 요구하는 대로 각각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한을 품지 않을 것이며 인욕하며 베풀 것이다. 그리고 이미 보시한 일이 있어도 그 보답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은혜로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탐착하거나 사모하는 일이 없이 중생에게 공급할 것이다. 중생도 은혜를 획득하여 결핍된 것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서도 군맹의 무리들의 욕구를 섭수하고 취할 것이다. 부처님의 도를 얻었을 때는 경의 법을 설하여 속히 해탈을 얻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아 그 몸이 다하더라도 온갖 악을 범하지 않는다. 생명을 해쳐 자신의 몸을 양육하지 않는다. 목숨 때문에 선하지 않은 일을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물과 사업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훼손을 입히지 않는다. 권속 때문에 원한 맺고 소송하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치성하게 하지 않는다. 처와 자식을 양육하느라고 다른 아이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기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하지 않는다. 만족하여 멈추어야 할 것임을 알고 나서 곧 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 뜻으로 여러 불선한 일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런 저런 선하지 않은 것을 다시 범하겠는가?

그리고 탐욕과 질투를 제거하여 여러 악을 버린다. 항상 만족하여 멈추는 것을 알기에 바르고 진실한 것을 행한다. 다른 마음이 없으므로 곧 평등함에 이른다. 평등함에 이르렀으므로 온갖 사악함이 없고 곧 자애의 마음을 획득한다. 자애의 마음을 익혔으므로 곧 착한 벗을 만난다. 이미 착한 벗을 얻었으므로 곧 고요함의 법을 얻어 듣게 된다. 이미 고요함에 대해 들었으므로 곧 행을 건립하게 된다. 행을 건립한 뒤에 곧 중생들을 교화한다. 이미 중생을 교화했으므로 곧 고요함과 도리를 강설하고 건립한다.

그런데 만일 보살이 중생을 위하지 않고 고요함을 닦지 않으면 미묘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미묘하지 않다면 도의 눈을 얻지 못한다. 도의 눈을 얻지 못하면 권화방편을 잘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그리하여 일체 중생의 근본이 나아가는 곳을 보지 못한다.

족성자야, 이것이 보살이 보시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성이 널리 들리는 것을 얻게 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니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족성자야, 안과 밖의 법을 관찰하되 그것이 하나로 동일하다고 염(念)해야 한다. 안의 지대(地大)를 살피고 밖의 지대를 살펴서 둘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초목이나 기와나 돌의 무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 상념도 있을 것이 없다. 4대(大)로 합성되었으니 견고한 것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끊고 자르고 부수고 깨뜨리고 주워서 취하고 가지고 간다 해도 자재를 얻을 수 없으니 그러한 상념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해 탐욕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 수명을 아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분노의 뜻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서 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중생에게 더욱더 자애로 대하고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비유하면 족성자야, 큰 약초 나무는 그 뿌리∙줄기∙마디∙가지∙잎∙꽃∙열매를 가져가도 그 나무는 ‘누가 나의 뿌리∙줄기∙가지∙잎∙꽃∙열매를 가지고 가는가’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나의 뿌리∙줄기∙가지∙잎∙꽃∙열매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약초 나무는 전혀 생각하는 것도 표상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온갖 사람들에 대해 분노나 한(恨)을 지니지 않는다. 질병에 걸린 자는 그 약을 먹고 즉시에 쾌유될 뿐이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몸은 4대가 모여 이루어진 집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마치 약초 나무와 같이 어떤 중생이 나의 몸에서 머리∙눈∙몸체∙팔∙다리∙어깨∙손∙발∙골수∙두뇌∙피∙살점 등을 가져가려 한다면 뜻대로 그것을 주어야 한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이 보시를 통해 얻은 덕은 다함이 없다. 그렇게 보시를 한 다음에 인색하고 탐욕 있는 자로 하여금 은혜롭게 베풀 수 있도록 하려는 까닭에 그에게 권하고 돕는 것이다. 그리고 빈궁한 자는 교화하여 큰 재물을 볼 수 있게 하고 복이 적은 자는 교화하여 덕을 구족하게 한다.

그리고 아직 도에 뜻을 일으키지 않은 자는 보살을 행하게 하니 착한 일의 근본을 권하고 가르쳐서 청정하게 만들고자 해야 한다. 일체의 복과 경사로써 중생을 권하고 교화해야 하며 청정함으로써 인도하고 보시로써 인도하여 빨리 도에 다다르게 하고 다함이 없는 것을 얻고 그것에 이르게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보시가 다했다고 하는가? 보살의 보시에 네 가지 다하는 일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권하고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법을 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비천한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 악한 벗을 가까이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행이 있다. 그것으로 보살의 보시를 빠르게 도에 접근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권하고 돕는 바가 많은 것, 권화와 방편을 행하는 것, 법을 건립하는 것, 선한 벗을 늘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법이 있어 보살의 보시를 허망하지 않게 한다. 어떤 것들이 세 가지인가? 보살의 뜻을 일으킨 자가 애민하는 것이 많은 것, 일체 중생의 무리를 섭수하고 보호하는 것, 여래의 가르침과 명령을 잘 받들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고자 할 때는 마땅히 세 가지 법을 건립해야 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부처님 법에 머물러 세우는 것, 정성들여 중생에게 강설하고 권하는 것, 중생을 크게 안온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허망하지 않게 성실히 살펴서 보시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큰 자애와 큰 슬픔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를 거두는 일이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아끼고 탐내는 것과 질투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에 돌아갈 바가 있게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지혜의 구족과 성스런 통달이 주위에 충만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가지이다.

다시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시에 나아가는 것이 있게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다함이 없는 혜(慧)에 이르는 것과 일어남이 없는 혜로 나아가는 것이다.1) 이것이 두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에는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넷인가? 보시를 동등하게 주되 보답을 생각하지 않는 것, 선정을 조절하여 안온하고 고요한 것, 보시한 바가 구족되는 것, 그 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보살이 보시하는 것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다함이 없는 덕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와 같은 모습의 보시에서 정진하고 행해야 한다.”

이구위 역사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1) 『구마라집』 본에는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로 되어 있다. 특히 진지 부분을 비교할 것.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여래께서 분별하시고 강설하신 대로 여러 보살의 법과 여러 부처님의 경전을 간직하고 보호하는 것을 보살 대사가 그와 같이 행한다면 마침내 바르게 통달한 지혜와 복덕을 훼손하거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보시한다면 그의 공덕의 복이 구족되고 성취되고 충만하는 것도 역시 마땅히 그와 같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그러하다. 과연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뜻을 일으킨 자가 그와 같이 보시를 행한다면 다함이 없는 덕의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빈궁하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업에서 큰 재물을 얻을 것이니 이들 부류는 법의 재물을 구족할 것이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니 일곱 가지 보배의 무궁한 덕을 구족하고 몸을 장엄하는 백 가지 상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여러 군맹을 위하여 복덕과 경사의 밭이 되고 그것으로 중생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구위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일컬어 보살의 계율과 금기의 덕이라고 하는가? 계율과 금기를 지키니 일찍이 위배하거나 버리는 일이 없다. 계율을 범하는 자를 보면 슬픔을 일으킨다. 금기를 받드는 자를 보면 견고하게 준수하고 행한다.

그리고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을 정화하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을 보호하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을 정화한다. 이 열 가지 선한 일을 마땅히 순응하고 받들어 행한다. 이 계율의 법으로써 다른 사람을 개도하고 교화한다.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는다. 금기와 계율로써 스스로를 포상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또한 계율 때문에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다.

항상 금기와 계율로써 스스로 선정을 조절한다. 절도와 한계를 풀어놓지 않으니 만족하여 멈출 줄 안다. 현자와 성인들 가운데 머물러 그 마음을 스스로 보호한다. 나태하여 못쓰게 된 자를 보아도 그 틈을 살피지 않는다. 수고스럽게 찾아온 병든 자에게 하는 보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희망하는 바가 없으니 그것으로 구경(究竟)을 삼지 않는 것이다.

말한 바대로 행하여 침범하는 바가 없다. 여러 가지 행하는 바에 있어서 생사의 일이 몹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바가 없고 구하고 희망하는 것도 없앤다.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하며 자애의 마음을 준수한다. 자애를 행하는 자든 자애가 없는 자든 두루 동등하게 구제하고 보호하니 그 마음을 잃지 않는다.

계율의 품목에서 차이를 내지 않고 다른 승(乘)에 뜻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도와 승으로써 다른 사람을 권하고 일으킨다. 안온하지 않은 바가 없고 하늘을 섬기지 않는다. 여러 가지 계율과 금기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흔들려 불안한 자를 권하고 위로하여 안온하게 한다. 고립된 의혹을 치료하고 제거하여 한을 품지 못하게 한다. 태어난 곳에서 자재함을 얻어 몹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바가 없다. 노닐고 이르는 곳에서 모자라거나 줄어든 바가 없다. 가령 생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싫어하지 않는다. 마음을 닦고 건립하고 정진하고 섭수하고 스스로 검토한다. 행한 바가 어지럽지 않으며 즐거운 바도 없고 무서워하는 바도 없음을 배운다.

족성자야, 보살이 행하는 계품(戒品)의 업은 비록 몸과 목숨이 위험하다 하더라도 마침내 계율을 훼손하지 않는다. 나라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제석천과 범천 등 천상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재물과 이익과 보답을 경험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권속∙부귀∙안색∙용모∙포상∙찬탄∙명예∙칭찬을 위한 것도 아니다. 또한 세력과 침상과 긴 걸상과 좌구와 질병에 필요한 의약품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탐내어 기대는 것도 아니다. 안과 밖에 의지하여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그리워해서도 아니다. 후세를 기대해서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집착해서도 아니다.

또한 색(色)∙통양(痛痒:受)∙사상(思想:想)∙생사(生死:行)∙식(識)에 탐욕을 내어서도 아니다. 또한 눈∙귀∙코∙입∙몸∙마음을 믿어서도 아니다. 또한 음(陰)과 종(種:界)과 여러 입처(入處)에 의지해서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지옥을 두려워하여 제도받고 보호받기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축생을 꺼려해서도 아니고 아귀를 두려워해서도 아니고 귀신을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궁핍하고 위험하고 가진 것이 없는 까닭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 뜻은 오직 부처님 도를 건립하는 데 있다. 만일 법을 들은 자로서 받들고 행하기를 생각하고 욕구하면 이미 성스런 온갖 덕을 본받아 건립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태어남∙늙음∙죽음∙근심∙병∙고뇌∙힘듦∙괴로움의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고 해탈하고 제거하게 하고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재물과 사업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군맹을 안온하게 하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뭇 사람들을 제도하고 이런 저런 무리들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부처님 법을 즐거워하여 차이나고 특이한 것에 이르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그리고 법륜을 굴리는 것을 사모하고 성스런 무리들을 장차 양육하고자 하여 그렇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끊어지지 않게 하고 법과 교훈이 폐기되지 않게 하고 온갖 의론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금기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戒]∙삼매[定]∙지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의 품목들 때문에 금기와 계율을 지킨다. 응당 여섯 신통을 찾아 그것에 도달하려는 까닭에 그렇게 한다. 준수해야 할 계율은 범하지 말아야 하고 결핍되지 않게 해야 하고 훼손되지 않게 하며 사악한 업이 없도록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응하여 잃는 바가 없다. 그리하여 마땅히 평등하게 삼매에 순응하며 행한다. 지자(智者)가 찬탄하고 부처님이 찬탄한 것을 배반하거나 위배하는 바가 없다.

교화하는 법을 따라서 받들고 행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 사람이 그와 같이 계율의 품목을 항상 준수하며 빠짐없이 구족하면 그러한 보살은 열 가지 법의 일을 잃지 않는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 그런 뒤에 마땅히 전륜성왕의 지위를 얻으니 끝내 성왕의 가르침에 대해서 차이내거나 착오를 일으키지 않고 수행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도를 받들고 선양하며 방일하지 않는다.

둘째, 제석천으로 임하게 되면 그 지위를 맞이한 다음에는 잃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부처님의 도를 받아들여 방일하지 않는다. 셋째, 범천으로 올라가 태어나면 속이거나 다르게 하는 것이 없다. 범천에 있으면서 부처님 친견하기를 원하니 차질이 없다. 항상 세존을 만나 마음에 기쁨과 흐뭇함을 품는다.

넷째, 들은 경전을 일찍이 단절한 적이 없게 된다. 다섯째, 듣고 수용한 부처님 법을 일찍이 잊어버린 적이 없게 된다. 그리고 들은 대로 즉시 받들고 행한다. 여섯째, 보살과 성스런 대중의 지혜를 인식하고 생각하여 잃는 바가 없게 된다. 일곱째, 말솜씨가 한량없어 부족한 적이 없게 된다.

여덟째, 보살이 본래 서원하던 바가 있으니 건립한 일을 얻으면 항상 여러 부처님과 바른 장부들을 위하여 보답한다. 아홉째, 그 부처님과 제자들이 인도하는 바를 보고 허물지 않는다. 열째, 신통을 재빨리 획득하고 여러 민첩한 지혜를 구족한다.

계율과 금기를 지키되 그와 같다면 이것을 보살의 열 가지 법의 행이라고 한다. 보살 대사가 이러한 계율의 품목에서 퇴전하지 않고 지키면 여러 천신과 용신이 함께 호위한다. 그리고 장차 이 금기와 계율을 지키고 노래하고 찬탄하고 지키는 자는 여러 귀신 대중이 모두 귀의하여 받들고 섬기고 용신이 모두 공경한다. 그리고 세간의 백성들도 공양하고 순응한다. 여러 부처님 세존들이 항상 그를 만나고자 하며 여러 밝은 지자(智者)들이 함께 으뜸으로 여기고 숭앙한다.

그는 세간을 불쌍히 여겨 자애의 마음을 행한다. 그렇게 중생을 위하여 이 금기와 계율을 지킨다. 그리하여 이 보살은 네 가지 거취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한가하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부처님이 안 계신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사악한 견해를 일으켜 어둡고 막힌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또한 일체의 악한 거취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계의 품목을 지키면 이러한 덕을 체득하게 된다.

다시 네 가지 잊지 않는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부처님의 도를 잊지 않는 것, 마음으로 부처님을 버리지 않는 것, 법을 들은 대로 마침내 잃어버리지 않는 것, 선정을 잃지 않으니, 뜻으로써 셀 수 없고 한량없는 여러 겁을 염하는 것이다. 보살이 만일 이 계율의 품목을 지키게 되면 이러한 덕을 체득하게 된다.

다시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 빛과 같이 관찰하는 것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즉시 밝은 법을 관찰하는 것을 얻는 것, 독과 칼과 공포와 두려움과 질병에 대하여 밝은 사람을 얻는 것, 캄캄하고 어두운 생각을 빠짐없이 제거하는 것, 그의 여러 공덕을 혼란하게 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만일 보살이 금기와 계율을 지키고 이러한 가르침에 순응한다면 열 가지 두려움을 초월하고 건너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지옥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축생∙아귀∙빈궁한 자∙칭명할 수 없는 세계∙악마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성문∙연각이 나아가는 적멸의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여러 천신과 인간의 태를 받아 태어나는 두려움을 멀리 떠나는 것, 용신∙귀신∙건달바∙아수라∙긴나라∙마후라가 등의 여러 가지 두렵고 어려운 것을 멀리 떠나는 것, 독∙칼∙매∙불∙뱀∙사자∙호랑이∙이리 등의 여러 어려운 것들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사견을 제거하고 계율의 품목을 지켜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의 법이니 이 열 가지를 어려움을 면하고 넘어서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족성자야, 계율이 부처님의 법에 확립되면 그것으로써 광명을 삼게 된다. 부처님의 법은 곧 계율에서 보살의 도를 확립한다. 만일 계율을 받든다면 정의(定意)의 연(緣)에 가깝게 된다. 그리고 금기와 계율로부터 지혜∙해탈∙해탈지견의 일을 얻는 데에 이른다.

무엇을 일컬어 계율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에서 모두 영원히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라고 하는가? 죄와 복에 연결된 것이다. 삼계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티끌에 시달리는 일인데, 마땅히 무엇으로 이 여러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건널 수 있는가? 염하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고 사의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행하는 바도 없고 일으키고 세우는 바도 없고 역시 사유하는 바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일체법에서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여러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 대사가 티끌에 시달리는 일을 아직 멀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청정한 계율의 품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천에 가서 이르게 하는 것도 스스로의 애욕의 티끌에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더라도 역시 애욕의 티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곧 삼계에 거처하는 자에게는 청정한 계율의 품목이란 없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삼계에 있는 것이 모두 티끌에 시달리는 것이어서 세존께서 청정한 계율의 품목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보살이 애욕의 티끌을 떠나 청정한 계율을 체득할 수 있겠으며, 삼계에 머무르면서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아는가? 보살이 되는 자는 몸이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또한 계율을 훼손하는 일도 없고 또한 머무는 바도 없다. 단지 온갖 사람들이 삼계에 집착하는 까닭에 계율을 범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두 가지 일로써 선한 일을 행하고 교법을 권한다. 삼계의 때를 제거하고자 하는 까닭에 삼계에 처하여 훌륭한 권화와 방편을 베푼다. 보살 대사에게는 스스로는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삼계에 지금 존재하면서 그것으로 군맹의 무리들을 개도하고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구위야, 비유하면 어떤 선남자가 허공에 그림을 그리거나 문자로 쓰되 그것을 모두 드러낸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일으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 자신은 티끌에 시달리는 일이 없으면서도 삼계에 나타나 중생을 개도하고 교화하는 것이다.”

그때 이구위는 게송으로 찬탄하며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보살이 일으키고 구족하는 것은

그 궁극의 끝이 없으니

대비(大悲)를 행합니다.

 

이미 해탈의 문을 드러내어

온갖 성곽 등으로

다시 돌아 들어가서

의혹의 그물에 걸려 있는

중생들을 가르칩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몸에 질병이 일어나면

그 위험과 해악을 치료하고 제거하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과 동등하여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세존이시여

오늘 해악을 제거하고

세간에 접근하여 도를 청정히 하니

보살은 이 해탈에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과 여러 이학(異學)을 권화하고

그 방편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구제합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보살 대사만이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니

성문과 연각이 미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문과 연각에는

대비가 없으며

권화와 방편을 구족한

그러한 행도 없기 때문입니다.  

  

 

등집중덕삼매경 중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최봉수 번역

 

그때 세존이 다시 이구위 역사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보살은 이와 같은 행적에 대해 듣는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받들고 행해야 한다. 어떻게 존귀한 어른으로부터 들을 것을 구하고 들을 것을 여쭈어야 하는가? 항상 공경하고 교만함을 없애버려야 한다. 언어가 부드럽고 화평하며 마음이 인자하고 조절되어 있어야 한다.

법에 대해서는 의약(醫藥)과 같다고 관찰하고 생각해야 한다. 스승과 화상에 대해서는 세존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스스로 그 몸을 관찰하되 법의 약을 사유하고 선택하여 의왕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여러 중생들에 대해서는 질병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하고 법을 구하는 데 열심히 할 뿐, 마땅히 몸에 대해 애착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탐하지 않고 수명에 기대지 않는다. 착용할 의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경전을 좋아하고 법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고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법의 도리를 이익할 것을 지향하고 재물의 이익은 경시하여 내다 버려야 한다. 장차 법의 보배를 보호하고 세속의 진귀한 것을 떠나야 한다. 법을 이익 되게 하려는 까닭에 일체 세간의 재물을 멸진하고 제거해야 한다. 법의 보배로써 이익을 삼고 평범한 세속에서 그리워하는 진귀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

중생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과 애욕과 일체의 하자를 제거하고자 하여 항상 마땅히 바른 법의 경전을 그리워하고 구해야 한다. 일체 중생의 무리들을 건지어 모두 멸도에 이르게 하고자 하여 바른 법으로써 마땅히 보호하고 간직하고 인도해야 한다. 바른 법의 경전으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자는 일체의 행해야 할 덕의 근본을 두루 획득하고 장차 키워야 한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도를 구하고자 하거나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르러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법의 기둥을 굳게 세우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널리 배워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족성자야, 산 중의 왕인 수미산(須彌山)은 천상의 큰 기둥이다. 만약 천상의 높은 기둥이면 우뚝 솟아 덮고 가리는 바가 많고 도리천까지 솟아 있어 도리천에 의해 장엄히 장식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보살 대사는 널리 보고 널리 듣는 것으로 지혜의 기둥을 삼는다. 노닐고 거주하는 곳이 천상이든 세간이든 그 빛이 웅장하게 비춘다. 만일 족성자야, 어떤 보살이 부처님 도를 뜻하고 원하여 ‘나는 마땅히 성불하겠다’고 하면 권화와 방편을 깨달아 널리 듣고 항상 정진을 닦아 익혀야 한다. 일체의 중생이 사악한 앎에 머물고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지혜의 등불을 설치해야 한다.

만일 보살이 널리 듣는 수행에 들어갔을 때에 아울러 정진하여 지혜를 구한다면 중생에 대한 앎을 구족하게 되어 할 바를 다해 마치게 된다.”

그때 여러 천신들이 그 사람을 위하여 소리를 높여 찬탄하였다.

“환희롭고 선한 마음이 생하였다. 지금 이 바른 장부는 이와 같이 도리의 모습을 보이었다. 그는 널리 듣는 것의 힘으로 열 가지 힘에 이를 것이다.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르러 여러 감관이 밝게 통달할 것이다. 그와 같은 도리의 이익으로 보살행을 위할 것이다. 지혜의 칼을 잡아 티끌에 시달리는 우리의 일체의 애욕을 끊을 것이다.

만일 보살에게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이 있고 또한 밝은 지혜로 경전에 설해진 법을 감히 당해낸다면 중생의 티끌에 시달리는 일과 위험과 액난을 제거할 것이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을 지닌다면 법을 설하여 애욕을 멸진하고 제거할 것이다.

그와 같이 이 보살은 예전의 세존께서 노닐고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가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도리의 모습이 있다면 악마와 그 관리 권속을 항복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감당하여 열두 가지 일[事:行相]을 갖춘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이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보살 대사는 널리 듣는 것에서 정진하여 성스런 통달을 확립한다. 그리고 그때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온갖 악마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가능한 것들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지금 이 보살은 우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본래 마음을 위배한다. 우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족성자야, 듣는 것으로부터 앎을 획득하니 앎은 티끌에 시달리는 무리에 있어서 최상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에게는 애욕의 티끌이 없으니 악마가 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만일 보살이 널리 듣는 것을 열어서 그곳에 들어가며 경전을 분별하고 법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그것으로부터 이미 가르쳐 줄 수 있는 궁극에까지 간 것이 된다. 그리하여 온갖 악마를 항복받고 제압하니 곧 애욕의 티끌이라는 악마와 음의 덮개라는 악마와 일어나고 멸함의 악마와 천마와 그 권속의 악마이다. 이것이 네 가지 악마인데 자연히 절복된다.

또한 족성자야, 옛날의 여러 보살들조차 널리 듣는 것에 들어가서 법의 도리를 분별하고 경전을 좋아하고 즐거워했으니, 지금 대강을 들어서 핵심 되는 것을 간략히 설하겠다.

아주 오래 전 먼 과거세의 시절이 있었으니 헤아릴 수 없는 겁 이전이며 측량이고 한계 지을 수가 없으며 널리 두루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이전이었다. 그때의 겁 가운데 한 선인이 있었으니 이름이 울달(鬱怛)1)이었다.

그는 나무 수풀 속에 거주하면서 다섯 신통을 얻었다.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고 자애와 슬픔과 기쁨과 평정을 행하였다. 그윽한 숲 속에서 노닐고 거처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자애의 마음을 행하니 그 몸이 부드럽고 항상 희열에 젖어 있고 안

 

1) 원어가 ‘uttara’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구마라집 본에는 ‘최승(最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온하다. 그러나 자애로써 중생의 자재한 애욕을 멸진하고 제거할 수는 없다. 티끌에 시달리는 일인 애욕을 끊고 멀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자애만으로 성인과 현자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도 없고 복덕에 이를 수도 없고 현자 및 현자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도 없고 복덕에 이를 수도 없고 현자 및 성인과 동등한 관점에 이르러 성취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스스로 생각하였다.

‘항상 두 가지 일로써 의존해야 현자와 성인의 바른 견해에 이를 수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다른 자의 소리를 듣고 성찰하는 인연과 그것을 사유하고 고요하게 뜻을 두는 행이다.’

곧 환희하여 큰 정진을 일으켰다. 그리고 법으로 들어가서 생각하였다.

‘나는 어디에서 이 교설을 들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법 때문에 경전을 욕구하여 고을과 나라와 현과 읍과 마을과 촌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경전을 욕구하였으나 오래도록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천마가 그 장소에 와서 말하였다.

‘족성자여, 나는 부처님께서 받들고 보호하는 독송(讀誦)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족성자여,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핍박하여 한낮의 폭염 속에 드러내고 그 귀로 스스로 받들고 음성을 듣고 나서 그 뒤에 그와 같은 여러 게송을 글로 쓸 수 있다면 그대는 이 네 구절로 끊어지는 게송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족성자야, 울달 선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셀 수 없고 한계 지을 수 없는 겁 이래로 이 몸을 포기하고 잃어가면서 감옥과 매질과 채찍질과 날카로운 칼의 괴로움도 즐거워하였다. 마디마디 몸이 잘리어 형체가 제 모습을 잃어가고 흩어졌으니 피부와 살점이 잘리고 끊어졌다. 그러면서도 애욕 때문에 결박에 묶이는 경우에 이르렀다. 그와 같은 환난을 만난 것이 셀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몸이 쓰이지 못했으니 위태로운 느낌이란 쓸 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몸으로 일체에 이익 되는 것을 더한 적이 없었다. 만일 이미 군생(群生)을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이 견고하지 못한 몸으로써 경전을 구하여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이익을 획득하여 마음으로 희열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땅히 그 천인을 따른다면 일찍이 만나지 못했던 경전의 뜻을 듣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간에서 제일가는 존귀한 마음을 일으키고 공경하고 삼가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그 몸을 잘랐다. 그리고 해 아래에 스스로 드러내어 친히 가르침을 받아[親炙] 귀로 소리를 듣고자 하여 천인에게 말하였다.

‘원하건대 천인이여, 부처님께서 받들고 보호하는 독송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연설해 주십시오. 나는 법을 공경하는 까닭에 몸을 던지고 버리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인연으로 들은 것을 함께 모으고자 합니다.’

그때 족성자야, 울달 선인이 법을 공경하고 삼가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와 같이 우뚝 솟은 것을 보고는 그 천인은 안색이 참담하고 초췌해졌다. 그 공덕을 보기 어려워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울달 선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장차 시련이 없이 어찌 내가 이 게송을 듣겠는가? 법을 공경하고 받들며 그것에 순응하는 까닭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경전을 합치고 모으고 공경하면서 심은 덕의 근본은 그 공을 잃지 않을 것이며 속임수와 미혹함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령 내 몸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허망하지 않다면 그리고 솔직하고 아첨하지 않고 중생을 불쌍히 여긴다면 그리고 몸과 목숨에 탐착하지 않고 그 육체적인 수명을 버린다면 그 성실한 진실로 말미암아 이 법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현세에 다른 방위의 부처님 국토 가운데 법을 받들고 닦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면전에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를 보고 경의 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원을 세운 뒤에 입으로 다시 말하였다.

마침 그때 아래 방향으로 부처님의 국토를 서른두 번 지나 간 뒤에 한 세계가 있었는데 이름을 보등이구(普等離垢)라고 하였다. 그곳의 부처님의 명호는 무구칭왕(無垢稱王) 여래∙지진∙등정각이었으니 지금 현재에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그때 그 부처님께서 울달 선인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셨고 또한 염부제의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비유하면 용감한 장부가 팔을 굽혔다가 펴는 것처럼 짧은 시간에 그 부처님 세계로부터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리고 울달 선인의 앞에 멈추어 서셨다.

그리고 5백 보살과 함께 그 여래는 세간에 나타나셔서 자연스럽게 큰 광명으로 두루 비추셨다. 천상의 꽃을 취하였고 백 천의 기악이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울렸다. 그리고 여러 보살도 그 숲 속에 모였다.

그때 장엄한 나무의 모든 뿌리와 밑둥과 줄기와 마디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법의 소리를 내었다. 울달2) 선인은 그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듣고 그 형상을 보면서도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몸이 즉시에 이전과 같이 회복되어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이에 울달 선인은 무구칭왕 여래∙지진∙등정각을 친견하고 그 상호가 우뚝 솟은 것이 수미산과 같음을 보았다. 그 위신력의 광명이 해와 달을 넘어가며 신비하고 미묘하게 통달하여 천신과 인간 가운데서 존귀하신 것을 보았다. 여러 감관이 고요하고 안정된 것이 허공과 같아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뛸듯이 기뻐하며 선한 마음이 드러나고 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복을 정돈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뒤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의 세존이시여, 안주하시는 대성이시여, 저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교법에 귀의하고 성스런 승단에 귀의합니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법을 설해주십시오. 경을 듣는다면 건립하고 받들어 행할 것이며 중생의 탐착하고 취착하는 행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견해를 일으키어 경전을 설할 것입니다.’

그때 족성자야, 그 무구칭왕 여래∙지진∙정등각은 선인을 인연으로 하여 여러 천자와 여러 보살을 위하여 이 등집중덕삼매의 정(定)을 분별하여 설하셨다. 그러자 모인 대중 가운데서 이미 과거에 도리와 이치에 입각해 짓고

 

2) 원문에는 ‘상승(上勝)’으로 되어 있으나 원어는 같다고 봐서 울달로 옮겨 통일하였다. 이하도 그러하다.

 

행하고 닦고 다스린 8천의 천자가 곧 법인(法忍)을 체득하였다.

울달 선인은 이 삼매에 관해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고 환희하며 미묘한 가운데에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다함이 없는 변재를 얻었다. 그때 그 여래는 여덟 문장의 구절을 설하시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다시 포섭하고 취하셨다.

어떤 것들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본래 청정하니 생각과 집착으로부터 근원에 이르면 자연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법은 무루(無漏)이니 일체의 여러 누(漏)가 모두 다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제법에는 집착함이 없으니 모두가 일체의 집착할 바를 건넜기 때문이다. 넷째, 제법은 허망하지 않고 또한 나와 남이 뚜렷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여러 법문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법은 어떠한 문(門)이라도 되니 일체의 여러 법문은 두루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섯째, 제법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니 제법은 오는 것을 부수고 또한 일체의 거취를 단멸하고 제거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제법은 평등하니 삼세라고 해도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덟째, 그리하여 두 가지란 없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문장의 구절을 설한 것이니 일체를 계몽하고 제도하고 싫어하게 하여 온갖 환난을 없앤다.’

부처님께서 울달 선인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여덟 문의 구절이 있으니 둘이 없음에 이른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제법은 임시로 호칭되는 것이니 이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법은 모양과 색을 지니는 것이니 이름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셋째, 제법은 합해지고 모여진 것이니 문자에 의지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넷째, 제법은 스스로를 식별하는 것이니 자의적인 데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법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무명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제법에는 다함이 있으니 익히고 행한 것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일곱째, 제법에는 문을 건립할 처소가 없으니 머무는 것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제법은 평등하니 문을 향하여 하나로 정진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구절의 문이니 본래 둘이 없으면서도 둘에 이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울달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여덟 정진의 구절이 있으니 다함이 없는 것에 이르게 하여 자재로움을 얻게 한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없다[無]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수습하는 일로서 권하고 돕고 주문을 외우고 서원하여 수습해야 할 경전이 본래 없었던 곳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저것[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행하는 구절로서 궁극적인 법의 도리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아니다[不]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준수하는 구절로서 명색을 제거하기 위하여 법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경전에서 설한 법은 모두 버릴 것을 명한다. 넷째, 남이다[他]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받들어서 고요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섯째, 여섯[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에 뜻을 두어 경의 법을 강설하여 일체의 여러 가지 막히고 걸리는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여섯째, 본래 없다[無本]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을 염하는 구절로서 여래의 본래 없는 법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일곱째, 원인[因]이라는 것이다. 정진하여 일체의 연고가 되는 법을 드러내어 죄와 복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덟째, 동등하다[等]는 것이다. 이것은 정진의 삼매로서 제법의 분별과 거취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정진의 구절이니 변재가 다함이 없다.’

부처님께서 울달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미묘한 법의 구절을 이루는 여덟 가지 법이 있으니 제법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요달한다. 어떤 것들이 여덟인가? 첫째, 공성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의지하는 바가 없이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무상(無相)이라는 인(印)의 구절이니, 건립하는 바가 없이 경전을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무원(無願)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의지하지 않고 기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구하지 않으면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넷째, 궁극적인 끝이라는 인의 구절이다. 이것은 본래 공성이라는 구절이니 동등하게 제어하면서 경전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섯째, 법계라는 인의 구절이니, 제법을 동등하게 제어하면서도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섯째, 본래 없다는 인의 구절이니, 이것은 제법에 현재 들어가는 것이다. 일곱째, 여(如)와 같다는 인의 구절이니, 과거∙미래∙현재를 제거하면서 본래의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덟째, 멸진(滅盡)이라는 인의 구절이니, 궁극적인 멸진과 제법의 영원한 제거에 의해 본래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울달이여, 이것이 여덟 인의 구절이니 모두 빠짐없이 제법을 평등하게 분별하여 성취할 수 있게 한다.

울달이여, 그러므로 자재의 구절과 문의 구절과 정진의 구절과 여러 인(印)의 구절에 대해 항상 안온하고 상세하게 그 구절을 행하고 정진하며 배워야 한다.’

그와 같이 족성자야, 그 무구칭왕은 질문한 바를 분별하고 이러한 앎을 남긴 뒤 그 세계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른 보살 곧 오천억 백천해 나유타 보살도 그 잠깐 사이에 스스로 뜻을 일으키고 나서 짧은 시간에 자신들의 부처님의 국토로 돌아갔다. 그러나 비록 돌아갔다 하더라도 감도 없고 옴도 없으니 그 국토의 인민들은 여래가 가고 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족성자야, 울달 선인은 다함이 없는 변재를 얻어 그 뜻이 의혹하거나 망령되지 않고 또한 잃는 바도 없었다. 또한 여러 천신이 옹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천신을 구호하고 온갖 악마를 항복시키고 외도와 이학(異學)들도 항복시켰다. 지방과 나라와 현과 읍과 고을과 성과 큰 지방으로 들어가 일체의 사람들을 위하여 경의 법을 강설하였다.

곧 이 등집중덕삼매를 분별하고 연설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천 년이 가득 차도록 이 경전을 선양하고 드러내어 8만 4천의 군맹의 무리들을 개화시켜 성문으로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8만 4천의 보통 존재들을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8만 4천의 보통 사람들을 권하고 도와서 뒤에 모두 전륜성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8만 4천의 중생으로 하여금 제석천이 되게 하고 범천이 되게 하고 자애를 닦게 하고 슬픔을 닦게 하고 기쁨을 닦게 하고 평정을 닦게 하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얻었다.

울달 선인은 뒤에 선인으로서 죽게 되자 무구칭왕 여래∙지진∙등정각국토에 태어났다. 그리고 1만 4천 천자와 함께 보등무구 세계에서 머물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그때의 울달 선인이 다른 사람이라고 알려고 하는가? 그렇게 보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극한 정성으로 올바른 서원을 건립하자 아래 방향의 세계에 계시던 무구칭왕 여래나에게 와서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법을 즐거워하는 보살에게는 여래가 일찍이 멸도를 취하는 일이 없다. 바른 법의 가르침도 멸진하지 않는다. 그 법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보살이 되면 다른 방위의 세계에 있는 부처님 세존이 곧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만일 바위 위에 있든지 나무 밑에 있든지 한가한 곳에 혼자 거주하든지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든지 즉시에 총지문(總持門:다라니문)을 얻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손바닥 위에 놓이기도 하고 어깨에 걸친 천조각 위에 나타나기도 한다. 머리 위에 있기도 하고 정수리 위에 있기도 하니, 가까이 있어 멀지 않다.

법을 즐거워하는 보살은 이미 일찍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을 보았던 자이다. 그리고 천인들이 그 변재를 일으키니 그는 또한 변재의 지혜를 따르고 받아들이려 한다.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이 경전에 있어 궁극에 이르도록 다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여러 부처님 세존 및 여러 천인들이 그 서원을 빼앗지 않으며 도에서 건립한 바는 자재를 얻은 것과 같아,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백 세이든 천 세이든 일 겁이든 일 겁이 지나든 자신의 욕구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늙음과 병과 죽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 그 뜻이 머무는 바는 견고하고 강건하고 오래되고 굳은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변재의 지혜를 제어한다. 또한 법을 좋아하는 보살은 일찍이 타인을 범하려는 뜻을 일으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구위야, 이 널리 듣는 것이 쌓게 되는 행에 대하여 들었다면 준수하고 받들고 정진하여 이러한 이름의 덕을 잡고 획득해야 한다. 또한 이것을 더 넘어가서 셀 수 없이 배가해야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두루한 복덕의 곳간을 얻으려 하고 그것에 이르려 욕구한다면 그는 경사[慶]가 끝이 없고 기존의 복록이 무궁하게 되고 보살의 두터운 공덕은 한량없고 측량하거나 한계를 지을 수 없고 그 궁극이나 그 끝을 다할 수 없다.

이구위야, 큰 바다의 물은 그 물방울을 셀 수 있고 그 한량을 측정해 알아서 그 바닥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일으키는 세 가지 일인 계율을 지키는 것과 널리 듣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는 그보다 더 수승할 수 없고 그 끝을 결코 한계 지을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는 오히려 측량하여 그 무게를 알 수 있고 아울러 그 끝을 다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일으키는 세 가지 일인 계율을 지키는 것과 널리 듣는 것과 보시의 도는 한계를 지을 수 없고 양을 잴 수 없다.

족성자야, 이것이 세 가지 일을 행하는 품이다. 그런데 세 가지 일 가운데 널리 듣는 것이 존귀하다. 수승하고 장대하고 필적할 만한 범주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그것은 수미산왕과 같으니 계율을 지키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는 수미산 곁에 있는 겨자와 같다. 그러므로 널리 듣는 것은 수미산의 왕과 같다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새가 허공에 높이 날아올라 그림자로 가리는 것이 어찌 허공과 같을 수 있겠는가? 계율을 지키는 것과 은혜로운 보시라는 것은 그와 같다. 또한 비유하면 허공이 크고 넓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널리 듣는 것의 덕도 그와 같다.

왜냐하면 족성자야, 보시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빈궁함을 떠나는 것과 거대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계율에도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악취(惡趣)에서 제도되는 것과 천상으로 올라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널리 듣는 것에도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성스러운 지혜를 얻는 것과 사악한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라는 것은 여러 누(漏)와 받는 바 음(陰)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계율을 간직한다는 것도 받는 바 음 역시 누와 함께 한다. 그러나 널리 듣는다는 것은 여러 누도 없고 또한 음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구위야, 이것을 일컬어 보살은 응당 널리 듣는 것에 상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시와 계율과 널리 듣는 것에 대하여 설하셨을 때 3만 2천의 군생들이 본래 심었던 온갖 덕으로 말미암아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5백 비구가 누를 다하고 마음이 해탈하여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그때 이구위 역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은 몇 가지 법을 행하면 빨리 생겨남이 없는 법인[不起法忍:無生法忍]을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의 행이 있어 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몸을 그림자와 같다고 관찰하여 해탈을 얻는다. 둘째, 모든 법에 대해 메아리와 같다고 관찰한다. 셋째, 그 마음이 환화(幻化)와 같다고 밝게 아는 것이다. 넷째, 온갖 법이 모두 멸진으로 돌아간다고 관찰한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 재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 자애를 널리 닦고 크게 하여 여러 중생에게 더한다. 그리하여 설령 유학(有學)인 자가 사람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깨달아 이해하도록 권한다. 둘째, 일체의 제법에 다함이 없음을 기필코 알고 어떤 일도 조작하지 않는다. 셋째, 여러 부처님의 법을 모두 다 두루 보되 육안(肉眼)에 의하지도 않고 천안(天眼)도 아니고 또한 법안(法眼)에 의해서도 아니니 의지하거나 기대는 바가 없다. 넷째, 마음이 들어가는 바를 분명히 깨닫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을 보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인연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되 아까워하지 않는 것, 사견을 포기하여 버리는 것, 청정한 금기를 받는 것, 고요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인욕을 준수하는 힘으로 모든 법에 들어가는 것, 모두 알며 다하도록 찾는 것, 정진을 숭상하는 것, 담백한 법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선정을 체득하여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 지혜를 관찰하니 가볍게 희론하지 않는 것, 권화 방편을 섭수하여 중생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 행할 바를 모두 갖추니 동등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항상 큰 자애를 행하여 중생을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하는 것, 큰 슬픔을 구족하여 윤회를 싫어하지 않는 것, 큰 기쁨을 행하여 법을 흔연히 즐거워하는 것, 큰 평정을 행하여 여러 가지 기댈 만한 집착을 제거한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세 가지 해탈문을 부분마다 증명하는 것, 과거∙미래∙현재의 삼세를 제거하는 것, 삼계를 넘어서는 것, 일체법이 본래 청정하여 더러운 것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구위야, 이것이 네 가지 법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 대사는 빨리 불기법인을 얻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설하실 때 이구위보살이 불기법인을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환희하고 기뻐서 허공으로 뛰어올랐으니 땅에서 넉 장 아홉 척을 나아갔다. 그리고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고 큰 광명이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천상의 꽃이 내리고 백천 가지의 기악이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울렸다.

그때 세존은 이구위보살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는 때마침 흔연히 미소를 지으시니 오색의 광명이 입에서 나왔다. 그것은 시방의 셀 수 없는 부처님 국토를 비추고 다시 돌아와 세 번 돌고는 정수리로 들어갔다. 이에 현자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복을 정돈한 뒤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 뒤에 합장한 채 부처님께 게송으로 찬탄하며 말씀드렸다.

 

존귀하고 청정한 지혜를 얻으시어

그 눈은 깨끗하고 밝고 훌륭합니다.

여러 감관은 고요하고 안정되며

담백하시어 피안으로 건넜습니다.

 

광명이 일곱 척을 비추이고

금색의 얼굴이 신비하고 우뚝 솟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원하건대 분별해 주소서.

 

여러 천신과 인간의 행을 아시고

그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바를 아시니

삼세에 걸쳐 청정하게

그 모습과 종류에 대해 보십니다.

 

그 지혜는 항상 통달하여

막히거나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셨는지

달과 같은 자비로써 설해 주소서.

 

과거세의 하늘 중의 하늘

미래세의 세존

지금 현재의 시방의 부처님은

지혜가 통달하여 끝이 없습니다.

 

수행하신 바는 모두 청정하고 순백하니

온갖 병을 치유하십니다.

일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니

원하건대 분별하여 설하소서.

 

이 여러 부처님의 국토에 있어

그 몸이 두루 주위에 가득하니

셀 수 없는 국토에 있어

음성이 빠짐없이 이릅니다.

 

마음으로 일체의 사람을 향하되

항상 큰 자애를 크게 드리웁니다.

가장 수승하신 슬픔으로써 설해 주소서.

그 미소의 뜻을 부연하십시오.

 

궁구하시고 단련하신 법이 있으니

고요하여 달처럼 노니십니다.

달리 비유가 없으니 환상의 화작과 같으며

자연히 꿈과 같습니다.

 

획득하고 도달한 이익이라는 것은

항상 비에 피어오르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이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다른 사자란 없는 유일한 사자시여.

 

공성을 알아 생각이 없으시며

원(願)과 해탈의 문을 넘어서 건너셨으며

제법은 자연스럽게

궁극적인 도리를 명료히 드러냅니다.

 

고요하고 침묵하며 항상 조화롭고 안정되니

노닐듯이 거닐되 허공과 같습니다.

원하건대 부처님은 그 뜻을 분별하소서.

무엇을 치료하고자 느끼셨기에 지금 웃으십니까?

 

누가 미묘한 마음을 일으켜

그 뜻으로 존귀한 깨달음의 지혜를 원합니까?

누가 지금 힘으로 악마를 제거하며

응당 나무의 왕 아래에 앉겠습니까?

 

누가 오늘 가장 수승한 자로서

옹호를 받게 되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흔연히 미소를 드러내십니까?

큰 영웅이시여, 말씀을 일으키어 남기소서.

 

여러 성문의 무리는

능히 이 땅을 밟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연각도

이 길을 감히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 부처님의 경계이어서

그 덕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무엇을 느끼셨기에 혼연히 미소를 지었습니까?

수승한 분이시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그것을 설하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정녕 땅에서 솟아올라 넉 장 아홉 척을 떠나 허공에 머물러 있는 이구위를 보는가?”

이에 대해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미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구위 역사 보살은 삼백의 헤아릴 수 없는 나유타의 겁을 지나서 마땅히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체득할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그 명호를 역엄정왕(力嚴淨王) 여래(如來)∙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명행성위(明行成爲)∙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도법어(道法御)∙천인사위(天人師爲)∙불중우(佛衆祐)라고 할 것이다.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하는 동방의 세계에 머물 것이며 겁의 이름은 정탄(淨歎)이라고 할 것이다.

역엄정왕 여래의 청정한 세계는 부유함과 즐거움이 치성하며 인민은 안온하고 쌀과 곡식은 흔하게 널려 있다. 그 쾌락은 미치기 어렵고 여러 천신과 인민이 셀 수 없이 늘어간다. 그 국토의 백성이 입는 의복과 먹는 음식과 거주하는 집은 비유하면 욕계의 네 번째 하늘인 도솔천(兜率天)과 같다.

그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되 기이하고 특별한 다른 종류의 말씀은 없다. 오직 대승장경[菩薩篋藏]뿐이다. 그 부처님 국토에는 성문과 연각이란 이름조차 없으니 모두 순수한 보살로서 법인을 체득한 자들이다. 그 여러 보살의 무리는 매우 많아서 끝이 없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으니 그 국토에는 여덟 가지 곤란한 것이 없다. 온갖 악마를 항복받고 원수의 적들을 억제한다. 그리고 사악한 여러 외도와 이학(異學)의 무리들이 없다. 그 부처님 세계의 땅은 감색의 유리로 되어 있고 자마(紫磨) 황금이 그 사이에 나뉘어져 섞여 있다.”

그때 이구위보살은 허공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절하고는 세존께 귀의하였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출가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말씀드렸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괴이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대성께서 경전을 강설하시는 것에 맞추어 허공에 있는 저 여러 천신들로서 명성과 덕망이 높고 미묘한 자들은 모두 여래께 왔습니다. 그리고 여래를 친견한 뒤 즉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과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세존께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던지며 스스로 귀의하고 있습니다.

대성이시여, 이 이구위 역사의 스스로 위대하다고 여기는 교만마저도 교화 하셔서 그로 하여금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위대한 법을 체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중생의 무리들을 위하여 경의 법을 연설하시어 교만과 방자함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구위보살 대사는 몇 분의 부처님 여래∙지진∙등정각에게서 온갖 덕의 근본을 심었기에 빨리 이와 같은 신통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이구위 역사 보살은 일찍이 62억의 여러 부처님 대성을 만나 공양하였고 온갖 덕의 근본을 심었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건립하였다. 다시 셀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을 항상 받들어 섬기고 범행을 청정히 닦았던 것이다.”

다시 구쇄가 아뢰었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구위 역사는 어느 곳에서 덕이 없는 근본을 심어서 도에의 뜻을 잊었기에 마음으로 교만과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성품을 품고 세존이 계신 곳으로 와서 시험해보려고 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일의 법이 있다. 그것이 보살이 행할 때 도에의 뜻을 잊게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마음으로 교만을 품는 것, 법을 공경하지 않는 것, 훌륭한 스승을 가볍고 쉽게 여기는 것, 뒤에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성문의 승(乘)을 다시 익히고 즐거워하며 그들과 함께 돌아가는 것, 하천하게 제도하는 것에 뜻을 두어 즐거워하는 것, 보살을 비방하는 것, 법을 가르친 스승의 은혜를 잊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아첨하는 것, 법을 업신여기는 것, 두 가지 일로 스스로 생활하는 것, 이양을 추구하여 받들고 모셔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악마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것, 죄에 덮여 있는 것, 법을 가리고 덮는 것, 뜻과 성품이 겁 많고 약한 것이다. 구쇄야, 이 네 가지 법이 보살로 하여금 도에의 뜻을 잃어버리게 한다.

구쇄야, 또 이구위는 무엇 때문에 보살로서 행하다가 도에의 뜻을 잃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듣도록 해라.

옛날 과거세에 이 현겁 가운데에 최초로 한 부처님이 계셨다. 명호는 구루진(拘婁秦) 여래∙지진∙등정각이었다. 그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였을 그때 재물이 많고 세력이 크고 성이 귀하고 지극히 부유한 바라문이 있었다. 그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악마에 의해 미혹당하여 스스로 높다고 여겼다.

그는 여래께서 긴 밤 동안 이익이 되는 법을 설하시는데도 찾아가 뵈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여러 장자들과 함께 싸우고 다투고 욕하며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또한 법을 보지 못하였으며 법을 설하는 스승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그 가르침을 공경하거나 계승하거나 순응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는 현세에서 다섯 가지 법을 어긴 것이다. 어떤 것들이 다섯 가지인가? 부처님을 떠나서 다시 친견하지 못하고 법을 듣지 않는 것, 다시는 보살의 업을 건립하지 않고 다시 자문하지도 않는 것, 마땅히 행할 것인데도 다시 온갖 덕의 근본을 망실하는 것, 도의 마음에 대하여 견고한 뜻이 없는 것, 선하지 못한 것을 섭취하여 즉시 도를 행하려는 마음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다섯 가지 법에서 행하는 것을 떠났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그때 유명하고 훌륭하고 재물 많고 세력이 크고 성(姓)이 귀한 그 바라문의 아들이 누군지 너는 알고자 하는가? 어찌 그가 다른 사람이었겠는가? 너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의 이구위보살이 그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 있을 때에 자신이 위대하다고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도를 닦으려는 뜻을 망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시 과거의 삶에서 덕의 근본과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을 보호하였고 다른 복이 있어 다시는 여러 신통한 지혜를 비방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되고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성스런 취지를 계승하여 온갖 악을 짓지 않았다. 부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문득 스스로 일어나 와서 자기의 힘을 여래와 비교하려 한 것이다.

또한 세존이 보살의 힘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 곧 스스로를 높이는 것과 교만함과 방자함을 버렸다. 그리고 과거 세상에서 심어 왔던 온갖 선한 일의 근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 법인(法忍)에 문득 이르렀다. 그리고 위신력과 신통한 지혜를 갖추었으면서 상념하는 바는 없는 것이다.”

그때 역사 구쇄보살이 이구위에게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어떤 법을 일으켰기에 법인에 이르렀습니까?”

“일체의 범부의 법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일으켰습니까?”

“일으킨 것은 후에 궁극에 이른다 하더라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으킨 것은 항상 의지하고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할 수 없고 또한 증득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범부의 법과 부처님의 법에는 어디에 차이가 있습니까? 정녕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임시로 호칭하여 이름한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리3)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범부의 법은 무엇으로 그 도리를 이해해야 합니까?”

“상주하는 것이란 없으며 상념도 없습니다. 전도된 것도 없으니 그것이 도리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이른바 도리라고 하는 것은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구쇄여, 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또한 범부의 법을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부처님 도의 법을 획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무엇을 법의 도리라고 합니까?”

“둘이 없다는 도리가 모든 법의 도리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바른 견해란 두 가지 인연에 말미암습니다. 하나는 타인에게서 듣는 것이고 둘은 사유하는 것이니, 그 행동은 거기에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이구위가 질문하였다.

“구쇄여, 여래께서는 단지 핵심이 되는 도리에 귀의하시는 까닭에 도리가 곧 핵심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인연으로 핵심이 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3) 『구마라집』 본에는 ‘의미[義]’로 되어 있다. 아마 원어 ‘artha’의 번역인 듯하다.  

 

“미사여구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에게 질문하였다.

“가르침은 단지 핵심의 도리만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침내 보살의 미사여구를 훼손하거나 부수어 버리는 것 아닙니까?”

“잃어버린다든지 스스로 훼손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비록 미사여구의 도리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가 체득한 것에는 획득한 바가 없습니다. 그 보살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법에는 획득한 바가 없습니다. 그 보살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법의 도리를 설한 것입니다. 총기 있고 명철한 까닭입니다.

그는 체득하지도 않고 도리의 보답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에 자재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존귀하고 훌륭하니 동등하거나 필적할 만한 자는 없습니다. 분별할 수 있는 한계까지 분별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소멸하고 멸도합니다. 과거와 미래에 영원히 고요하니 이것이 모습의 도리입니다. 세존께서 설한 것에 입각한 까닭입니다.

구쇄여, 그 도리에 귀의한다는 것은 곧 법을 제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한 것도 없고 제어한 것도 없다는 것은 버리지도 않고 제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생각한 바가 없다는 것이 곧 견고한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견고한 것을 일컬어 도리라고 합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족성자여, 그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 그 방향을 계교할 수 있습니까?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은 곧 핵심되는 일체법에 돌아가는 것입니까?”

“족성자여, 있습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인연으로 합니까?”

“모든 법은 본래 없는 것이고 일체는 모두 공이며 모든 법은 담백한 것입니다. 만일 공의 도리에 입각해 핵심에 돌아간다면 핵심도 담백한 것이고 도리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성자여,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법에 돌아가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하였다.

“족성자여,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다고 말씀하시거나 요지하신 것 아닙니까?”

답하였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에서 본래 도리의 근원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핵심에 돌아가게 되면 그것이 궁극적인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문(門)은 제일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한 대로 마땅히 그대로의 것과 장소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법은 없으며 또한 법이 아닌 것도 없습니다. 또한 일어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 현자와 성인의 도에는 두 가지 도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짓는 바도 없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만드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이 하면 보살의 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에는 만드는 바가 없고 도리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또한 옳은 것은 착란되지 않습니다.”

이구위가 이러한 이야기를 설할 때에 5백 비구와 8백 천자가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이구위보살이 구쇄에게 말하였다.

“족성자여, 여래께서 설하신 바는 핵심의 도리에 돌아가는 것이니 미사여구를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도리를 헤아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행이 없습니다. 그 도리의 궁극에 이른 자에게는 또한 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이 도리를 설하신 것입니다.

단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갈 뿐 미사여구를 취하지 않습니다. 핵심의 도리에 돌아간 것이 아울러 미사여구일 뿐입니다. 본래 청정하고 평등하니 뜻의 성품은 자연스러워 초월하는 것마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단지 핵심의 도리에 돌아갈 뿐 미사여구를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족성자여, 여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 일에 의하여 바른 견해를 일으키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살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성찰한 것에 입각해 사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교법과 계율에 대해 널리 듣지 못한 자는 비록 삼매에 순응한다 하더라도 윤회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높이 여기는 교만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법과 계율을 듣고 살펴라. 그리고 널리 듣고 많이 권하고 돕도록 하라. 경의 법을 들은 것을 빠짐없이 받들고 행하여라. 치료해야 할 자를 정화하여 현자와 성인의 도에 이르게 하라.’”

다시 질문하였다.

“비구는 어떻게 치료하는 행위를 사유합니까?”

“법으로써 치료하고 행하지만 또한 행한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핵심되는 일을 사유하는 것이니 여기에 치료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족성자여, 이것이 치료하는 행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다시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치료하고 행한다면 음성을 일으키지도 않아야 하고 나의 자아라는 것을 일으키지도 않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행하게 되는 거처에 대해 강설합니다만 가는 자라고 설하든 돌아오는 자라고 설하든 일체는 모두 가는 일도 없고 얻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과거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을 닦았다는 것도 없고 미래에 그러할 것이라는 것도 없고 현재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을 닦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일컬어 핵심을 사유하는 자는 그것으로써 치료하고 행한다고 합니다.

만일 모든 법을 보되 일체가 자연히 빠짐없이 돌아가 멸진하는 것을 본다면, 또는 그렇게 모든 법을 수용한다면 핵심을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이 있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고 동일한 모습이었음을 살피고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자연히 본래부터 청정하게 일어난 것임을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만일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게 멸도된 것이라고 관찰하고 본다면 이 또한 핵심을 보는 것이 정화된 것입니다.

또한 고요하지도 않고 관찰한 바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관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관찰한 바라고 하지만 관찰한 바도 없고 또한 본 바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보는 것이 없고 관찰한 바도 없다면 본 바도 그와 같아 역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세존이 이구위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족성자야. 설한 바가 있다면 마땅히 네가 설한 것과 같아야 한다.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법에 있어 허망하지 않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법에 있어 음(陰)과 덮개[蓋]가 없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이 법이라는 것도 없고 해탈문도 역시 없다.

그 핵심을 사유하는 것에 있어 정화된 보살은 행한 법이 있다 해도 제거하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 또한 행한 바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다. 이것이 곧 동등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인 것이다. 일체법을 평등하게 보는 까닭에 평등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보이는 바와 같이 분명하다.”

다시 여쭈었다.

“어찌하여 일체의 모든 법이 평등하지 않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과 같다. 또한 족성자야, 이 모든 법이라는 것에는 흔쾌히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다. 과거 또는 미래에 있어 평등하니 또한 생하는 바도 없다.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또한 생하는 바도 없고 존재하는 바도 없다. 보는 바를 넘어서지도 않고 고요함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한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바도 없다. 또한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말한 바라고 하는 것은 또한 말하고 행한 바도 없고 생하는 바도 없다. 또한 보는 것도 없고 또한 넘어서는 것도 없어 평등하고 고요하다. 이것을 일컬어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평등한 것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다시 여쭈었다.

“무엇 때문에 고요함에 평등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름합니까?”

답하셨다.

“나의 자아에 대해서도 평등하고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하다. 일체의 모든 법은 형상이 없고 또한 훼손되는 바도 없다. 이것을 일컬어 고요함에 평등히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것에 이르렀으며 고요함에 바르게 들어갔습니다. 모습으로 말미암은 것은 본래 깨끗이 멸도된 것입니다. 보살은 모두 그와 같이 모든 법을 압니다. 만일 이것을 듣고 믿고 이해하는 자는 어디에서 노닐고 거주한다 해도 중도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보살은 훌륭한 권화와 방편으로 즐거움을 삼아야 한다. 권화와 방편을 닦고 구족하고 행해야 한다. 일체의 마음을 일으켜 노닐고 거처할 네 가지 법에 돌아가야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큰 자애를 행하고, 끝없는 슬픔을 지니고, 여러 신통한 지혜를 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절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만일 이 법을 받들고 선양하고 닦는다면 고요함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거취의 모습은 일체가 본래 청정하여 빠짐없이 멸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써 여러 법의 행을 고요하게 하는데 이르니 이것을 듣고서 믿고 즐거워하면 어디에서 노닐고 거주한다 해도 중도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근원을 분별하니 그는 곧 적막하지만 담백한 것조차 없으며 또한 타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의 중생을 포기하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구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어디에서 보살은 순수하고 정숙합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고요함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만일 보살에게 여러 견해가 없고 또한 상념도 없다면 이것이 순수하고 정숙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성문과 일체의 중생은 평등을 닦지 않으며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떠난다. 또한 대승의 행을 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러 신통한 지혜를 의심하고 무원(無願)을 떠난다. 또한 고요한 경지로 멸도에 들어가지 않는다. 곧 그 가운데서 보살의 마음을 증득하려 하면서도 뜻은 성문과 연각에 있어서 멸도에 들어간다.

또한 족성자야, 보살이 만일 고요한 모습에 들어간다면 모두 일체의 제법을 분별한다. 발흥하는 것이 있다면 일체가 모두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신통한 지혜를 일으키고 그것에 거주하기 위하여 대승을 준수하고 수습한다. 일체의 군맹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긴다. 두루 일체를 보아 뜻과 함께 원을 갖춘다. 일찍이 타인이 바라는 바를 단절케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족성자야,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곧 보살을 헤아려 보면 모두 고요함에서 순수하고 정숙하게 노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구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보살의 행은 차이나고 특별합니다. 모두가 성문 및 연각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금 박수(溥首) 동진(童眞)이 모임 가운데에 있는데 조용히 앉아 있을 뿐 이 삼매에 대하여 강설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문수사리가 마음속에서 사념하는 바를 살피시어 마음으로 박수 동진에게 요청하면서 관찰해 주십시오.”

그러자 박수 동진이 구쇄보살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행할 때는 공덕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양(利養) 때문도 아니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 때문도 아닙니다. 재산과 사업 때문도 아니고 명성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덕을 찬탄 받고 그 공적을 선양받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의복∙음식∙걸상∙잠자리∙병에 필요한 의약품 때문도 아닙니다. 생활을 위한 업 때문도 아니고 국왕과 대신의 상과 하사물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쇄가 다시 물었다.

“박수보살이여, 어떤 이유 때문에 보살도를 행합니까?”

박수가 답하여 말하였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법의 도리로써 군중을 개화하는 것입니다. 대승을 뜻하는 까닭에 허망한 여러 가지 힘들고 애쓰는 환난을 제거합니다.

고요함을 일으키는 까닭에 애쓰고 괴로운 바를 참습니다. 그리고 중생이 편안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욕구합니다. 의심이 없으며 희망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집착하는 바도 없고 의지하는 바도 없고 수용하는 바도 없고 오로지 거처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좋다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나의 자아라는 사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퇴전하지도 않고 다시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만일 모든 법에 흔들리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면 가만히 있지도 진동하지도 않으며 장차 간다는 것도 없습니다. 위험과 해로움도 없고 환희하는 것도 없습니다. 수척하지도 않고 자기 홀로 용맹하지도 않습니다. 승리하는 자도 없고 굴복하는 자도 없습니다. 넘어가는 것도 없고 초췌하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바가 없으며 무서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습니다. 졸속하지도 않고 조폭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위대하다는 것도 없습니다.

또한 마음과 뜻이 없으면서 항상 적막한 곳에 거처합니다. 항상 무념으로 머물면서 동일한 도리와 일승과 하나의 가르침과 동일한 형상으로 항상 동등한 행을 실천합니다. 빠짐없이 중생을 구호하고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박수가 말하였다.

“족성자여, 보살의 소행은 그와 같이 비교할 만합니다. 그런 까닭에 행을 세우는 것입니다.”

구쇄가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어디에 보시하는 것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그 보살이 멸진을 행하지 않는다 해도 일어나는 것도 없고 또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여러 가지가 멸진하게 되니 그것은 마땅히 멸진할 것으로서 멸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과거와 미래를 염(念)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생하는 바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또한 총명하게 행을 세운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여, 보살 대사는 과거의 뜻을 멸진하려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미래의 뜻을 일으키고 행하는 바도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뜻에서 머무는 바도 없고 행하는 바도 없습니다. 마음이 또한 과거∙미래∙현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여, 보시가 바로 도의 마음이니 중생과 여래에는 둘이 없습니다. 계율을 간직하는 것과 인욕과 정진과 한 마음과 지혜가 바로 도이니 중생과 여래에게는 둘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항상 이 여섯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을 준수하여 그것에서 행한 바가 있다면 그 행의 모습에서는 윤회를 근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등집중덕삼매경 하권

 

서진 월지 축법호 한역

 

최봉수 번역

 

“다시 구쇄여, 보살이 준수해야 할 것은 색이 공하다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색은 자체가 공하기 때문입니다. 또 통양(痛痒:受)과 사상(思想:想)과 생사(生死:行)와 식(識)이 공하다고 보지 말아야 하니, 식은 자연히 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색이 공하다고 보지 않게 해야 하니 색은 바로 공하기 때문입니다. 근본과 지말이 다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통양∙사상∙생사∙식이 또한 공이 됩니다. 다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과 지말이 다 공해집니다. 그러므로 식은 공이고 또한 자연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미 다 소진했다면 일체의 모든 법도 또한 다시 마땅히 소진합니다. 만일 모든 법이 소진하면 색도 또한 마땅히 소진합니다. 통양∙사상∙생사∙식도 그러하니 식도 곧 소진합니다.

만일 일체의 여러 색이 소진한다면 또한 일체의 모든 법도 또한 마땅히 소진합니다. 만일 모든 법이 소진한다면 식도 또한 마땅히 소진할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한다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구쇄보살이여, 보살이 행하는 것에 입각하면 범부의 법을 단절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면서 행합니다. 부처님 법에 이르기까지 역시 그러하니 힘써 생사에서 제도하지 않으면서 행합니다. 또한 멸도하는 일을 구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하지 않은 법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도 않으며 여러 선한 법의 유래도 관찰하지 않습니다. 지혜에 입각하지 않는 까닭에 식별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식별을 사용하지 않는 까닭에 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법계(法界)를 파괴하지 않으며 행합니다. 그리하여 믿고 기뻐하는 바가 있어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족성자여, 만일 보살 대사가 실천하고 실행하되 법계가 한량없고 인계(人界)가 무한하다면 법계와 혜계(慧界)와 인계(人界)가 무한하다는 것을 모두 믿고 이해하여 빠짐없이 소진해야 합니다. 법계에서 행하든 인계에서 행하든 그것에는 둘이 없습니다.

법계에 입각하면 손실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소진되는 것도 없습니다. 모습도 그와 같으며 인계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런데 인계는 모습이 있는데 법계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계와 더불어 이 모습이라는 것도 곧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일체법이 모두 모습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인계를 소진하지 않지만 행하는데 늘어나는 바도 없습니다. 핵심되는 사상(思想)은 없으면 없을수록 흥기하고 발흥합니다. 전도된 일과 속여서 미혹하게 만든 모습이 그 가운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행하는 자는 애욕이 소진된 것을 제거하지도 않으며 생하는 것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명성을 듣지도 않고 상주하는 것을 헤아리지도 않고 또한 무너뜨리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자아와 인간과 목숨을 멸진하거나 제거하지 않습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이러한 보살의 행에 관한 품을 설하였을 때 백천(百千) 천자가 법인을 얻었다. 그때 이구위보살은 찾고 아뢰고 받아들인 뒤 큰 음성을 내어 찬탄하고 노래하며 말씀드렸다.

“일체의 인간과 군맹의 무리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고 그 이익과 도리를 두루 획득하되 부처님 세존과 같도록 하려면 모두 이 삼매의 정을 믿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때 마왕 파순이 박수 동진에게 말하였다.

“나도 보살이 행하는 대로의 보살도에 대해 감히 찬탄할 수 있겠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악마가 말하였다.

“일체 인간들의 행이 곧 보살행입니다. 여러 성문과 보살의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아래로 집에 거주하는 자들이 익히고 있는 일체의 음습한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일체 악마의 행도 곧 보살행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모두 그 가운데서 함께 거처하기에 일체가 모두 그 보살이 배울 바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에 구쇄보살이 악마가 있는 곳에 가서 말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빠짐없이 두루 배워야 합니까?”

악마가 답하였다.

“8만 4천 종류의 중생의 행이 있습니다. 그 중 2만 1천은 탐욕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성냄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어리석음에 속한 행이고 2만 1천은 등분(等分)에 속한 행입니다. 이들 종류가 모두 빠짐없이 보살의 행에 두루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탐욕의 행을 행할 때 탐욕을 떠나면서 행해야 하고 성냄의 행을 행할 때 성냄을 떠나야 하고 어리석음의 행을 행할 때 어리석음을 떠나야 하고 등분의 행을 행할 때 등분을 떠나면서 다만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두루 일체 중생의 행을 준수한다면 곧 군맹의 행을 관찰할 수 있고 일체 중생들을 개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보살이 그와 같이 수행하면 그것이 보살행이며 또한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악마에게 질문하였다.

“어째서 일체 악마의 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보살은 모두가 여러 악마의 마음의 흐름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으킨 것으로 일으킨 것을 삼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일이 가르친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악마의 행을 깨닫고 요지하면서 중생의 행을 교화하는 것이고 그 행을 보면서도 그 행을 닦지는 않는 것이며, 홀로 악마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악마의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을 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악마를 다스리고 교화할 방법을 마땅히 닦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마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악마의 사건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다시 악마에게 질문하였다.

“어째서 일체 성문과 연각의 행을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여러 성문과 연각을 위하여 경의 법을 강설하고 소원을 구족시켜 주며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 정진의 행을 준수하고 숭상하고 길게 하고 늘린다면 마땅히 그러한 은혜를 구하는 것이지만 그 승(乘)을 사유하여 멸도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족성자여, 일체의 여러 행은 모두 자연히 그 행이 담백합니다. 보살이 마땅히 믿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을 행한다면 그러한 행은 이미 일체의 행한 바를 넘어선 것이니 진리를 살피는 행과 같습니다.

일체 여러 행에는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또한 일체 여러 행은 무위의 행입니다. 또한 합하고 모인 것이 없으며 일어나는 행도 없고 머무는 행도 없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그와 같은 행을 숭상해야 합니다.”

마왕이 또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그대는 두터운 은혜를 내리어 다시 이 여러 행에 대해 설해 줄 수 있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변재(辯才)가 일체를 모두 제도할 수 있다면 모든 경계가 다 보살행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하는 자는 안계(眼界)와 함께하거나 합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색계(色界)와 합치고 모이는 것이 아니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법과 의계와 합하고 모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왕이여, 마땅히 이렇게 봐야 합니다. 곧 여러 경계를 건넌다면 이름하여 바른 장부[正士]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천자여, 보살이 만일 그와 같이 행한다면 여러 부처님 세존을 속이거나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고 마땅한 도의 행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박수여, 어째서 보살이 행하는 바가 여러 부처님 세존 및 일체법을 속이거나 미혹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박수보살이 답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참된 진리는 모든 법이 공임을 요해하고 있습니다. 일체에는 모두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이른 것이 없습니다. 만일 보살이 견해의 몸과 여러 부처님 법에 의지하고 기댄다면 아울러 열반을 본다고 한다면 이것이 여러 여래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자여, 여래의 행을 알고자 하는 자는 일체법에서 생각과 집착이 없어야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보살이 일체법에서 생각하는 바가 있고 생각과 더불어 노닐고 거주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곧 여래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자여, 여래의 자세하고 사실이고 성스러운 진리에는 좇아서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생하는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는 모습도 없고 온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습니다. 본성이 청정하며 본성이 밝게 통달한 것이며 본래 청정한 멸도인 것입니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 형태와 모양이 없습니다. 일체법 또한 모두 그와 같다고 요해해야 하니 내지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만일 보살이 모든 법에 대하여 감도 있고 옴도 있고 들어감도 있고 나옴도 있다거나 혹은 일어날 것이 홀연히 나타났을 때 어떤 존재에서 나왔다거나 어떤 모습에 의지한다고 여기거나 혹은 가고 되돌아옴이 있다거나 혹은 세울 바가 있어서 청정함이 없다거나 혹은 티끌에 시달리는 무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윤회하면서 색의 영역을 획득하여 방일한다거나 이런 사념을 하는 이는 곧 여래를 속이는 것입니다.

만일 천자여, 어떤 보살이 공을 동등하게 제어하고 이해하여 일체법을 요해한다면 여러 견해에 대해 사상(思想)이 없게 됩니다. 행할 바를 동등하게 제어하여 일체법을 이해한다면 여러 생각을 빠짐없이 제거합니다. 무원(無願)을 동등하게 제어하여 제법을 분별한다면 삼계를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공과 같다라고 동등하게 제어하여 일체법을 이해한다면 본래 청정한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준수하고 수행하여 보살이 된 자는 부처님 세존을 속이거나 미혹하지 않게 합니다.”

그때 대성께서 박수를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동진이여, 착하고 착하다.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만일 보살이 행하는 바가 그와 같다면 빨리 수기를 얻게 된다.”

부처님께서 박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과거 정광(錠光) 부처님 시절을 기억하는데 나는 몸소 청정하고 순백한 법을 권하고 돕고 행하였다. 그때 행하는 바에 행이란 없었고 또한 고요함에 들지 않아 수기를 얻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행에 처하는 것을 이름하여 나타난 빛[所現光]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본 뒤에 다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때 색을 차지하는 것이 뜻을 날카롭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더니 바로 정광 여래 대성으로부터 수기를 받고 본래 청정한 것을 요지하였다. 그러자 즉시에 일체의 모든 법에 결코 일어나는 것이 없음을 두루 요해하였다. 그 뒤에 나에게 수기의 내용을 보이셨다.

‘그대는 미래세에 부처를 이룰 것이니 그 명호를 능인(能仁) 여래∙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명행성위(明行成爲)∙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도법어(道法御)∙천인사(天人師)∙불중우(佛衆祐)라고 할 것이다.’

그 세계에서 바로 그때 나는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찾아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수야, 만일 보살이 재빨리 불기법인을 얻고자 욕구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행을 닦아 여러 가지 퇴전하는 것을 구제해야 한다.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하고 이익 되는 업 때문에 정진해서는 아니 된다. 법을 행하여도 처소가 없고 제도하고 해탈하여도 처소가 없고 건너도 처소가 없으니 그렇게 건너고 내지 해탈을 얻는 것이다.”

박수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그런데 법인을 얻을 때 어느 곳에서 얻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색을 얻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얻는 바가 없기에 법인에 이른다. 음(陰)과 종(種:界)과 여러 입처를 얻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상주[常]와 공(空)과 청정(淸淨)과 안온(安穩)과 아울러 자아와 몸을 얻거나 헤아리지 않기에 법인에 이른다. 다시 일체 제법을 얻지 못하는 것을 영원히 보기에 법인에 이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박수야, 모든 법은 모두 소진하는 까닭에 얻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박수야, 법인은 이르는 것이 없는 것이고 또한 얻는 바도 없다. 세속의 행을 따르고 익히는 까닭에 이름하여 얻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범부의 법도 아니고 유학의 법도 아니고 무학의 법도 아니다. 또한 연각의 법도 아니고 보살의 법도 아니고 부처님의 법에서 행하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법에서 도무지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얻는다고 말한다.

일체의 제법은 또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얻는다고 말한다. 만일 법인이 공(空)이고 무소유(無所有)라면 일체의 생각에서 여러 가지 행한 바가 있다 해도 두려움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법인을 모두 모색하고 얻는다고 말한다.

그 법인에는 눈이 없고 또한 안식(眼識)이 없다. 귀가 없고 또한 이식(耳識)이 없다. 코가 없고 또한 비식(鼻識)이 없다. 혀가 없고 또한 설식(舌識)이 없다. 몸이 없고 또한 신식(身識)이 없다. 뜻이 없고 또한 의식(意識)이 없다. 여러 경계에 다함이 없는 까닭에 법인이라고 이름한다. 무위계를 일컬어 법인이라고 한다. 의계가 없으며 내지 그것을 일컬어 법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 빠짐없이 소진하고 모색하니 내지 법인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 법인 및 제법의 소진과 모색에 대하여 설할 때 5백 보살이 불기법인을 얻어 동일한 소리를 내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저희들은 마땅히 등집중덕삼매를 구족하겠습니다. 또한 마땅히 일체법을 두루 준비하여 일어남이 없는 것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심오하고 미묘한 법을 보살은 마땅히 계승하고 순응하며 배워야 합니다. 만일 들은 바가 있는 자라면 마땅히 기뻐하고 믿고 수용하고 간직하고 독송하되 법대로 받들고 행해야 합니다.”

그때 구쇄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 바를 다 갖추고 온갖 일을 다 성취합니까? 보살은 마땅히 몇 가지 법에서 실천해야 할 온갖 일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다 갖춥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만일 보살이 일체법이란 실천할 것이 없다고 안다면 그와 같은 보살은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일체의 제법이 모두 무소유이고 또한 행하는 바가 없으니 제법에 대해 통효하되 그와 같이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앎도 없고 둘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실천을 떠나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해야 될 것이 있을 때 선양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은혜를 얻은 자가 얻은 은혜에 보답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반복이 없는 경지를 만나 더욱 반복해 공부하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마땅히 공양하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겸손하고 자신을 굽히고 보시하는 예를 올린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반복에 대해 알기에 반복을 떠난다면 또한 일을 다 갖추어 일을 다 갖추지 않는 것을 떠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나를 가볍고 손쉽게 여기는 자로부터 업신여김과 손상됨을 당하고도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린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무엇인가를 실천한 자가 실천한 법으로 이루어진 행에 집착하지 않거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의 허물됨을 보지 않으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만일 보시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시켜서 도에 들어가게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보시를 얻지 못하고 도도 얻지 못하고 자아도 얻지 못하고 사람도 얻지 못하고 또한 타인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또한 금기∙계율∙인욕∙정진∙한마음∙지혜를 보호하지 않고 또한 보호하고 권하고 시켜서 도로 나아가게 하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보시하여 베풀고 계율을 간직하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한마음이고 지혜를 갖추고 도에 들어가도록 권하고 시킨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앎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고 자아도 없고 남도 없고 또한 얻는 바도 없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 됩니다.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염하되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고 이 일을 분별하며 또한 몸∙입∙뜻으로 행한 온갖 선이 있다 해도 역시 얻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상견정진(常堅精進)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저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추고 궁극적으로 성취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마땅히 설하여도 되겠습니까?”

박수가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렇게 하십시오.”

박수에게 말하였다.

“만일 한 사람에게라도 권하여 도(道)의 소리를 듣게 하였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며 대승경전[大乘嚴藏]에 때때로 스스로가 익히고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소리와 교법의 소리와 성스런 대중의 소리를 얻게 한 뒤에 관찰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됩니다.

만일 한 중생을 교화하여 계율과 금기를 수용하도록 시키고 부처님과 교법과 성스런 승단에 귀의하게 하여 뜻을 삼보에 두게 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되고 보살이 경전을 구족하고 또한 공양한 것이 됩니다.

만일 노닐고 거주하는 곳에서 보시하는 자 또는 받는 자에게 권하고 도와서 이 두 가지 일에 입각하여 뜻을 도에 두게 한다면 이것이 곧 보살의 청정한 중우(衆祐)입니다. 만일 보시하는 자 또는 받는 자로서 이미 이 법을 행하였고 또한 이 두 가지 일을 권하여 교화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모두 보살의 청정한 중우입니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을 사유하고 염하며 또한 경의 법과 성스런 승단과 보살과 중생을 사유하고 염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되며 대승경전에 입각하여 공양을 받은 것이 됩니다.

만일 보살이 자애의 마음과 슬픔의 마음과 기쁨의 마음과 평정의 마음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한 사람의 하열하고 빈궁한 도적을 만났는데 그가 회를 치고 욕을 하고 거침없이 말하더라도 그것을 인내하고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자애의 마음을 계속 행하며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모시고 이익 되는 도리를 늘려 주고자 해서 정진을 더한다면, 이것이 실천해야 할 바를 다 갖춘 것이 됩니다.

만일 백 가지 이익 또는 천 가지 이익 또는 백천 가지 이익 또는 억백천 가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다 해도 또한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한 진기한 보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 보배 때문에 일찍이 험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지혜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는 정녕 몸과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뒤에서 나쁜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법을 잊지도 않고 법 아닌 것을 계승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구족하고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박수여, 보살이 만일 칠 일 동안 공양이 끊기어 음식을 얻지 못했는데 음식을 받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온다 해도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에 허망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고자 하며군맹의 무리를 구제하고자 하고 염하니 이것을 보살이 실천해야 할 바를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천하에 물이 두루하고 가득차서 그 땅을 주위로 둘러싸고 있다 해도 마땅히 이것을 넘고 건너서 법을 구하고 청하러 갑니다. 또한 만일 불이 두루 가득하다 하더라도 마땅히 넘고 건너서 법을 구하고 들으러 갑니다.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목숨을 탐내지 않고 수명에 애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陰)과 종(種)과 여러 입처(入處)는 쉽고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여러 부처님 세존을 만나 뵙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경법(經法)을 듣기도 어려우며 법을 아끼고 공경하는 자를 만나기도 역시 어렵다’라고 봅니다. 만일 이러한 관점에 자주 들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입니다.

다시 또 보살이 이 네 구절로 된 게송을 듣고서 환희하고 기뻐서 뛰어오르되 전륜성왕이 되는 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정녕 이 네 구절로 된 게송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하고 기쁘고 즐겁게 만들되 제석천의 지위를 즐거워하지만 않습니다. 정녕 온갖 보시를 건립하여 개와 같은 짐승과 용신 등도 유도하고 교화하지만 범천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을 흔연히 즐거워하되 삼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일곱 보배를 탐내지는 않습니다. 기뻐하고 뛰며 한 가지 덕의 근본을 심고자 원하고 뜻하면서 일체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공양하는 이익을 얻습니다. 보살이 그와 같이 행하고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상견정진보살이 다시 박수에게 말하였다.

“만일 보살로서 항상 견고하게 정진하고 항상 널리 듣기를 구한다면 마음으로 마땅히 이렇게 염해야 합니다. 곧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몸을 조각조각 마디마디 나눈다 해도 오히려 환희하고 스스로 힘써야 한다’고 염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세속의 법에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부처님 도에 뜻을 두고 수행해야 합니다. 정녕 몸과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마침내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 대승을 버리지 않고 어리석은 마음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악한 힘을 일으키지 않고 인욕의 힘을 이루어야 입으로 하는 말이 거칠지 않게 되며 모두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끝내 나태 하는 일이 없이 정근의 행을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고 정화하며 중생을 구제하여 법 아닌 것을 실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체의 여러 도무극(度無極:바라밀다)을 두루 구해야 하며 반당(伴黨:朋黨)을 구하거나 중생을 희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혜에 굳게 머물러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끊어지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뜻의 성품이 강건하고 용맹스러워 일체의 실천해야 할 바로서 성취되지 않았거나 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 뜻은 어질고 온화하며 아첨하는 것을 버리며 탐착하고 그리워하는 바가 없으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편의(便宜)한 것을 통효하고 단련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서 있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청정한 계율을 받드는데 귀의하게 해야 합니다.

어른이 질문하면 답하는 말이 부드럽고 사용하는 말에 꾸미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비유하면 땅과 같이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구하는 바도 없고 묶고 기대는 바도 없이 그 성품이 순수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답하는 바가 안온하고 설하는 바가 항상 쾌활하고 공경하고 수용하고 잘 단련해야 합니다. 교만함을 버리어 항상 그 뜻을 겸손히 하고 낮추어야 합니다.

말하는 바는 지극히 정성스러워야 하니 화내거나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설한 바는 있는 그대로여야 하니 헐뜯거나 아첨하는 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은 상응해야 하니 평등한 마음을 준수하고 숭상해야 합니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군맹을 향하고 뜻을 큰 슬픔에 두어야 합니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체의 온갖 덕의 근본을 건립하고 그것에 대해 흔쾌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일체의 소유물을 보시하되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평정을 행함으로써 욕심에서 구제해야 합니다. 재물과 사업을 획득하되 마땅히 안온하게 행해야 합니다. 일체의 여러 가지 탐착과 애욕을 내다버려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어야 하며 소유물에 기대어서도 아니 됩니다. 끝내 자기를 위대하다고 해서는 아니 되니 세 가지 때를 제거해야 합니다. 해탈을 뜻하고 구해야 하며 상념을 떠나야 합니다. 사유하는 바와 집착하는 바가 있어 여러 견해에 떨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62견(見)이 없어야 하며 항상 널리 듣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일곱 가지 재물을 구족하고 그 마음을 항상 강건하고 용맹하게 해야 합니다.

들은 것을 밝게 알아야 하고 일찍이 그것을 싫어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마땅히 지혜를 배워 그것에서 건립된 바가 있어야 합니다. 용맹한 데서 머물러 번뇌를 항복시켜야 합니다. 애욕의 때를 떠나고 일체 중생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항상 중우가 되어야 하니 일찍이 버리고 떠나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 신통한 지혜의 마음으로 복의 밭을 성취해야 합니다.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빠짐없이 은혜를 입도록 해야 합니다.

연꽃처럼 행하여 여러 세속에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뱃사공처럼 여러 군생에게 네 가지 병의 환난을 건너게 해야 합니다. 뜻을 왕의 도로와 같이하여 귀하거나 비천하거나 중간의 사람을 경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땅히 샘의 근원이 하천과 강으로 흘러가듯이 설해진 경전이 소진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큰 바다와 같이 행하여, 들어서 얻은 지혜가 포섭한 것에 바닥이 없어야 합니다. 한량없는 덕이 쌓이고 모여야 합니다. 성품이 수미산과 같이 초월하고 드러나서 세간에서 우뚝 솟아 지극히 높아야 합니다.

항상 정진을 즐거워하고 뜻의 성품은 강개(慷愷)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겁이 없고 열등하지 않아야 하며 마음은 문지방과 같아야 합니다. 뜻으로 견고하게 원해야 하니 그 뜻은 학의 털과 같아야 합니다. 그 성품은 조화롭고 항상 존귀한 마음을 행해야 합니다. 중생을 제도하고 인도하며 자재를 닦아야 합니다. 그 의지가 기특하고 품위 있는 곳에 머물도록 권하고 도와야 합니다.

미묘하게 해탈하되 제석천과 같이 행해야 합니다. 중생을 품고 오게 하되 범천과 같이 준수해야 합니다. 권위 있고 청정한 행을 분별해야 합니다. 일체법에서 자재를 얻어야 합니다. 마땅히 항상 자애를 행하여 궁극적으로 멸도해야 하니 행하는 것은 끝내 없어지는 것입니다.

건드리고 범하는 자가 지은 것이나 짓지 않은 것이나 모두 인욕해야 합니다. 엄한 아버지를 대하듯이 마음으로는 수용한 것을 지극히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도반의 무리들과 같이 여러 덕의 근본에 뜻을 두어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뜻으로는 여러 경계에 기대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위험과 해로움이 없이 행하고 자애와 인자함을 닦아 머무는 곳이 상서롭습니다. 태어난 곳에서 또한 장부에게 보시하니 법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여러 선하지 않은 법을 단절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일체의 온갖 선한 법을 받들고 행해야 합니다. 방일하지 않은 것을 준수하고 스스로 방자하고 교만한 일을 제거해야 합니다. 계율을 배우고 정진하되 행하는 바가 견고하고 강건해야 합니다. 방일하지

않고 보살행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이르고 획득하여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세존께서 상견정진(常堅精進)보살을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착하고 착하다. 시원하게 보살행을 설하였고 그와 같이 온갖 덕을 건립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체득하려고 욕구한다면 두루 일체의 공덕을 분별하고 여러 죄와 허물을 떠나야 한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보살이 이 등집중덕삼매를 얻는 경우 그 공덕과 서응(瑞應)을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부처님께서 구쇄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이 등집중덕삼매를 보살 대사가 획득한다면 악취의 땅을 멀리 떠나게 되며 여덟 가지 액난이 활거하는 곳이 그에게는 없다. 빈궁하고 가난한 것을 제거하고 단절하게 되어 풍요롭고 기름진 것을 공양받으니 자연히 즐거워한다. 여러 감관이 구족되고 서른두 가지 위대한 사람의 특징을 성취하게 된다.

법은 무궁무진하고 변재를 얻으며 총지를 획득하여 항상 뜻을 잃지 않고 일체의 복덕에서 자재한다. 바퀴를 굴리어 기대는 것이나 막히는 것이 없게 한다. 온갖 중생들이 그를 받들고 섬기게 된다. 제석천이 그에게 여쭙는 것을 보게 된다. 범천이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게 된다. 신통을 획득하여 밝게 도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본래의 서원을 얻어 태어나는 것에 자재하다.

권화와 방편과 나아가고 물러서는 지혜를 행하여 선(禪)의 가르침과 지혜를 준수하고 닦는 것을 따르지 않아 일체의 견해를 떠났기에 지극히 존귀하고 특히 귀중하여 성문과 연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여러 공포와 두려움 및 성문과 연각의 지혜를 떠났다. 중생의 여러 근기를 분별해서 중생의 오락하는 여러 견해를 요달하고는 한마음의 해탈문에 속하는 일에 뜻을 둔다. 머물되 처소가 없이 항상 보시한 바에 순응한다. 계율을 건립하여 세 가지 청정함을 지킨다. 인욕을 분별하며 궁극에는 형태란 없으며 아첨 또는 허위의 생각을 떠난다. 강설하고 정진해도 그 뜻에 나태함과 권태로움이란 없다. 선정을

해설하여 항상 고요함을 건넌다. 지혜를 널리 펴고 눈으로 항상 직접 보며 빠짐없이 분별한다.

눈으로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항상 집착한 것을 내다 버린다. 여섯 경로를 제거하여 일찍이 위배되거나 멀어진 적이 없게 된다. 항상 여러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성스런 승단을 받들고 섬기며 힘써 수행한다. 공(空)∙무상(無想)∙무원(無願)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들은 경전에 입각하여 일체의 여러 부처님의 공덕을 게송으로 노래하고 찬송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수용하니 곧 여쭙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여 그것을 잘 분별하고 설해준다. 도솔천에 있으면서도 불퇴전(不退轉)의 법을 버리고 떠난 적이 없다. 일체의 부처님의 국토를 유행하고자 욕구한다면 막히거나 걸리는 것이 없으니 두루 여러 부처님을 뵙게 된다.

악마와 원수를 항복받으니 네 가지 악마가 없다. 심오한 법인을 보며 불퇴전의 법에 거처한다. 신통을 밝히는 일은 도업에 있으니 법은 넓지 않는 것이 없다. 품고 간직해온 것은 적연하고 청백하다. 행한 바에 부처님 법이 구족되어 있음을 보니 불퇴전행(不退轉行)의 나아갈 바를 나타낸다.

막고 걸리는 일체의 집착을 제거한다. 나의 자아의 색이 환상의 현현과 같음을 본다. 일체의 몸을 모두 관찰하니 이길 자가 없고 모든 외도들에게 간직하고 지켜야 할 바른 법과 여러 부처님의 존귀한 경전을 말해준다.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하는 바에서 열심히 하여 바른 도리를 간직하고 받든다.

부처님의 경계를 드러내어 영원히 단절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한다. 이미 열반에 들었지만 멸도(滅度)하지 않는다. 무소외(無所畏)를 얻었기에 모인 대중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총명하고 밝게 통달하여 실천할 바를 따르고 제거할 것을 잘 제거한다. 일체의 교만과 스스로 위대하게 여기는 것을 제거한다. 환(幻)의 삼매로써 위대한 장엄을 닦으니 감동하는 바가 있다.

만일 광명을 방출한다면 모든 해와 달과 별의 밝음과 불타는 번개를 덮고 가리니 견고하고 강력한 힘을 얻어 그 몸은 구쇄와 같고 그 행은 금강과 같다. 일체의 여러 가지 악하고 결핍된 것을 모두 제도한다. 두루 도량에서 깨끗하게 노니니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부처님이 건립한 몸∙입∙뜻의 청정함으로 악마의 병사를 항복받는다. 신족의 변화로 무극으로 건너간다.

일체 여러 부처님 국토를 진동시킨다. 총명한 지혜를 얻어 법의 도리의 뜻을 분별한다. 변재가 구족되고 지혜에 막히거나 걸리는 것이 없다. 여러 중생을 위하여 정진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부처님 일을 일으키고 드러내는 데 방일(放逸)한 적이 없다. 여러 신통한 지혜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드러낸다.

그와 같이 구쇄야, 보살이 이 등집중덕삼매를 얻는다면 이 여러 보살의 서응(瑞應)을 인연으로 나타난 위의의 모습이 그와 같고 온갖 덕과 명예로운 일이 우뚝 솟은 것이 그와 같다.”

구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모든 일체 중생의 무리들이 함께 다 같이 이 등집중덕삼매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만일 이 정을 얻는 자라면 온갖 덕과 명예가 당당한 것이 그와 같으니 이것은 성문과 연각이 미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에 대해 듣고서 믿지 않는다면 악마에 의해 괴롭혀져 굳어진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구쇄야,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를 믿는다면 그 명성과 덕의 공훈이란 불가사의하다. 그는 부처님의 가호를 받게 된다.”

그러자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얻고자 의욕을 낸다면 마땅히 어떤 법을 행해야 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만일 보살이 등집중덕삼매를 얻으려고 의욕을 낸다면 일찍이 범부의 법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일이 없는 그러한 행을 행해야 합니다. 부처님 도의 법에서 실천하고 실행하는 자는 얻는 바가 없습니다. 만일 행하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이러한 행을 실천해야 하니 곧 법도 없고 봄도 없고 또한 근심하는 바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이 시종 찬탄하는 이러한 정을 얻고자 한다면 생사에 더럽혀지지 않고 무위를 얻어야 하며 성문 또는 연각의 승에서 멸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구쇄여,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온갖 덕을 구족해야 하고 배워야 할 금기와 계율에 대해서 마땅히 배워야 합니다. 또한 유루의 복을 상념해서도 안 되고 무루의 복을 상념해서도 안 됩니다. 죄 없는 것을 상념해서도 안 되고 죄를 상념해서도 안 됩니다. 있는 것도 안 되고 없는 것도 안 되며 집착도 안 되고 멀리하는 것도 안 되며 가는 것도 안 되고 오는 것도 안 되며 세간도 안 되고 출세간도 안 되니 일찍이 그러한 여러 상념을 품었던 적이 없어야 합니다.

법계를 동등하게 제어해야 하며 온갖 덕을 믿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복이 있든 복이 없든 상주하든 무상하든 염이 있든 염이 없든 시종 집착하고 있는 모습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일체의 사람들이 온갖 덕 속으로 노닐고 들어가도록 해야 하지, 단 한 사람이 행복 속에 노닐고 거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덕이 중생의 처소로 두루 들어가야 합니다. 유루의 복이든 무루의 복이든 분별하지 말아야 하니 분별로써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일체 부처님의 덕이 곧 한 부처님의 덕입니다.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곧 교화받을 자에게 여러 부처님 법을 설함에 차이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이것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곧 유학의 복이든 무학의 복이든 연각의 복이든 보살의 복이든 여래의 복이든 이것은 곧 상주하는 것이 못 되고 형태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일체의 복덕이 흘러 모이는 곳을 즐겁게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여러 형색이 있으니 모두 4대(大)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 보살의 법도 역시 그와 같으니 모두가 중생을 건져서 해탈문에 이르게 하고 동등한 복을 받들고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행하는 자든 흥기하여 번성하는 자든 모두 무상하고 소진하는 법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라면 네 가지 한량없는 것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인계(人界)가 한량없는 것, 부처님의 국토가 무한한 것, 부처님의 지혜가 끝이 없는 것, 중생의 행에 바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정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라면 네 가지 불가사의한 것을 권하고 도와야 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죄와 복에 상응하는 댓가가 불가사의한 것, 중생의 행이 불가사의하되 나아가는 길에 차별이나 특이한 것이 없는 것, 여러 보살의 지혜가 불가사의하니 신족(神足)과 세력과 해탈문이 그것이요, 모든 보살이 나아가는 길은 불가사의하니 생하는 바가 청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만일 보살로서 이 삼매에서 소진함이 없는 것을 보는 자라면 마땅히 네 가지 법을 행해야 합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보살의 복을 건립한 곳에 머무르니 소진할 수 없는 것, 온갖 행을 구족하니 역시 소진할 수 없는 것, 변재가 걸림 없으니 또한 소진할 수 없는 것, 지혜로 도달한 바가 또한 소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열심히 법에서 정진하니 온갖 덕의 근본을 쌓는 데에 있어서 결코 싫어하는 일이 없는 것, 마땅히 부지런히 행할 것을 생각하여 들음에 싫어함이 없는데 들어가고 또 그렇게 경전을 설해야 하는 것, 마땅히 부지런히 행할 것을 생각하여 다함이 없는 온갖 선한 덕을 권하고 도와야 하는 것, 여러 부처님 국토를 관찰하여 그 장엄한 것을 보고 그것으로 자기의 국토에 들어가 청정함을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구쇄보살이 박수에게 말하였다.

“비유하면 유리명월(琉璃明月)이라는 보배 구슬이 그릇에 담겨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금 그릇이든 은 그릇이든 수정 그릇이든 자거 그릇이든 유리명월이라는 보배 구슬은 그릇의 위덕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박수여,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물면 집에 머물러 있는 자이든 출가하여 사문이 되어 머무는 자이든 법계에서 헤아리면 자연의 행에는 두 가지 해탈문이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박수여, 보살은 어떤 행에서 준수하고 수행해야 합니까? 그리하여 삼매를 잃지 않으며 소진함이 없는 복덕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보살이 마땅히 행해야 할 네 가지 일을 알고자 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몸과 수명을 아끼지 않으며 모든 공양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 공∙무상∙무원을 행하고 성문승과 연각승에 뜻을 두지 않으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그 행을 사유하는 것, 상응하는 것이든 상응하지 않는 것이든 사유한 것과 생각한 것을 여러 신통한 지혜에 입각하여 내다 버리는 것, 일체 중생이 동등하게 들어가서 자아와 사람과 수명에서 건너게 해야 하니 그것들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이 삼매는 나중에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리고 보살이 이 경권을 취하여 몸에 간직하고 품으며 또한 인욕을 일으킨다면 집에 거주하는 자이든 출가한 자이든 배움을 인연으로 하는 것이며 배우며 행하는 것이 됩니까?”

박수가 구쇄에게 답하였다.

“나중에 이 삼매를 얻는 자는 그 이름을 들었다 해도 곧 집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니 출가를 인연으로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쇄여, 그러므로 만일 보살이 삼매에 머문다면 곧 존재하는 두 가지 생각을 떠나서 노닐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목숨과 지혜에 소진함이 없으니 궁극에 이르도록 잃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생을 개도하고 교화하되 싫어함이 없으며 보살의 형태와 유형을 스스로 시현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흘러 모이는 곳에서 머물되 그렇게 머문 모든 것에 끝이란 없으며 또한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해와 달이 노니는 곳은 그 모두가 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은 그와 같이 관찰하여 기대어 행하는 것이란 없으니 만일 집의 땅에 머물러 집을 따라 의지하고 기대어 출가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출가한 것입니다. 다시 출가의 덕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행하니 이 두 가지 일에서 또한 그리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내놓는 것은 모두가 집착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구쇄여, 얻는 것이 없는 자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일이 있어 행하니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존귀한 자를 위하고 연장자를 위하는 것, 최승(最勝)자를 위하는 것, 일체의 여러 가지 견해의 일을 버리고 제거하는 것, 그리고 일체의 여러 가지 부처님의 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보살은 어떻게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합니까?”

박수가 답하였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일이 있어 행합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자애∙슬픔∙기쁨∙평정[護]이니,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그는 이 네 가지 범행을 받들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이라고 일컫습니다.

다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유행하고 거처하는 곳이 취락인 경우, 집이나 방이 유행하고 거처하는 곳인 경우, 다시 한가한 곳에서 거처하고 유행하는 경우, 선반 같은 누각과 여러 층이 있는 집에서 행을 실천하니 그것을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하는 것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다시 박수가 구쇄에게 말하였다.

“이 네 가지 범행을 받들고 수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나는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러 천신과 인간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는 네 가지 범행이야말로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범행은 곧 그 정상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은 청정하게 행하니 유행하고 거처할 만한 곳에 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토에서 자신의 몫과 호위와 음식을 받는데 그 위신력이 정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네 가지 범행을 보지 못하는 자는 곧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의 행을 멀리 떠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다시 청정한 범행을 닦는다면 모두 빠짐없이 네 가지 범행을 원인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현자와 성인의 지혜를 일으키고 얻게 됩니다. 세간에서 스스로 신견(身見)을 이루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자라면 사람이라는 생각을 제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구쇄가 박수에게 질문하였다.

“어떻게 보살은 자애의 마음을 받들어 행해야 합니까? 무엇을 일컬어 슬픔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컬어 기쁨이라고 하며 무엇을 일컬어 평정이라고 합니까?”

박수가 답하여 말하였다.

“환사(幻事)로써 일체 중생의 무리를 구호하는 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군맹을 안온하게 하는 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환사로써 여러 중생에게 멸도를 얻게 하는 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중생계가 공임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법계와 중생계가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님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 군맹의 계에 집착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요지하는 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계에 왔다고 하나 온 것이 없음을 믿고 이해하고 요지하는 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일체의 중생에게 나의 자아가 없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자애를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중생이 빠짐없이 담백하다 해도 무서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슬픔을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여러 법과 법계가 평등하다고 해도 두려움을 품지 않으니 이것이 기쁨을 행하는 것입니다. 일체 부처님의 국토가 소진됨이 없는 국토임을 믿고 이해하고 분별하니 이것이 평정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쇄여, 위험과 해로움의 모습이 없는 것을 자애라고 합니다. 동등하거나 필적할 만한 모습이 없는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 모습이 없는 것을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름도 없고 집착하는 모습도 없는 것을 평정이라고 합니다.

다시 구쇄여, 자애지만 큰 자애가 아닌 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슬픔이지만 큰 슬픔이 아닌 것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그 무엇을 큰 자애가 아니라고 합니까? 비유하면 성문이 곧 ‘여러 중생에게 모두 안온함을 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문의 자애는 큰 자애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큰 자애라고 합니까? 만일 군맹의 무리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지니고 그것으로 온갖 고뇌와 환난을 모두 제도하고 해탈시킨다면 이것이 큰 자애입니다.

그 무엇을 큰 슬픔이 아닌 슬픔이라고 합니까? 보통 존재들의 무리는 5취(趣)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불쌍하고 슬프게 여기면서 생사하는 가운데서 꺼내어 구제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큰 슬픔이 아닌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큰 슬픔이라고 합니까? 만일 5취에 생사하는 중생들을 본다면 그 태어난 곳에 가서 슬퍼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스스로 몸의 편안함을 버리고 5취에서 구호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큰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마땅히 이렇게 봐야 합니다. 곧 성문에게 자애가 있다 해도 큰 자애가 아니며 또한 슬픔이 있다 해도 큰 슬픔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쇄여, 보살이라면 마땅히 큰 자애와 큰 슬픔을 구족하고 행해야 합니다.”

박수가 이러한 이야기를 설하였을 때 8천의 천인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켰다. 그리고 함께 찬탄하며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들은 마땅히 저 박수가 설한 대로 이행을 받들고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10만 천인들이 이 삼매를 얻었고 8천 보살이 불기법인을 얻었다.

그때 구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설해 주십시오. 백 가지 복을 지닌 상호가 있으니 어떤 공덕을 지었기에 부처님 세존께서는 그러한 상호를 성취하셨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쇄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에 가득 찬 중생에게 구족된 공덕이 있는데, 그것을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전륜성왕 한 몸의 덕이다. 이 여러 중생이 소유한 공덕을 모두 전륜성왕과 같게 하여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제석천 한 몸의 복이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일체 중생들은 복덕이 구족하여 성취된 것이 제석천과 같은데, 제석천의 복과 같은 이 중생들의 복을 빠짐없이 모두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한 범천의 복에 미친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중생의 무리들이 지닌 복덕은 각각 범천과 같고 동등한데, 그 복을 합하고 모으면 그것이 한 성문의 복을 이룬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중생의 무리들이 지닌 공덕은 각각 성문과 같은데, 그 복을 빠짐없이 합하여 구족하고 갖추게 한다면 그것이 합해졌을 때 한 연각의 복이 된다.

다시 별도로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가 있다. 그곳에 있는 일체 중생들이 지닌 복덕을 각각 연각과 같게 하여 빠짐없이 갖추고 구족하게 한 다음 합한다면 그것이 한 보살의 복을 이룬다. 그러나 보살의 복은 오히려 이것을 넘어서니 측량할 수 없고 한계 지을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등집중덕삼매의 정을 체득한 자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우는 중생들을 모두 역시 등집중덕삼매의 정을 얻게 하여 이 중생들이 지닌 삼매의 덕을 합하고 모은다면 그것으로써 하나의 막히지도 걸리지도 않는 사사(祠祀)를 이루며 하자가 없는 지혜를 이루며 생각과 집착이 없는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쇄야, 이렇게 비교된 지혜가 가히 사사를 이루게 된 것인데 그것을 모두 빠짐없이 합하고 모은 것이 법사(法祠)를 이룬다. 그리고 그 복을 선택하여 합한 것이 여래의 대인상(大人相)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서른두 가지 상호는 그와 같이 비교하고 유추해야 하는 것이니, 각각이 그와 같이 이루어져 여래의 몸의 상호가 구족된 것이다. 그것은 일체 중생이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래의 몸에 있는 백 가지 복의 상호는 불가사의하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백 가지 복과 공덕을 지닌 대인상에 대해서 설하실 때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종류로 진동하였다. 그 큰 광명이 두루 세계를 비추었고 천상의 꽃을 내렸다. 그리고 여러 천상의 기악(妓樂)이 연주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울었다.

그러자 여러 천신과 세간의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에 괴이해 하면서도 기뻐 뛰어오르며 환희하였다. 그리하여 각자 합장한 채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소리 높여 찬탄하며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일 족성자 또는 족성녀가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뜻을 일으켜 선한 이익을 갖춘 끝없는 경사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와 같이 비교되는 백 가지 복을 지닌 상호를 얻어 빠짐없이 구족하고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곧 제석천과 범천과 사왕천 및 일체의 성문과 여러 연각들을 넘어서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그가 이 등집중덕삼매를 듣는다면 통쾌하고 통쾌한 일이니 보살의 이익을 얻은 것이 됩니다. 만일 그 이름을 들었다고 해도 그 덕에 미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그 사람이 듣고 믿고 즐거워하고 받들고 행한다면 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를 구족하여 유행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그 땅의 중생을 옹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 경전이 유행되는 것이 있다면 그 땅은 부처님께서 건립한 곳이라고 헤아려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항하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여러 부처님 세계를 가득 채운 불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그 가운데를 통과하여 이 법을 듣고자 하고 이 경을 듣고자 한다면 큰 안온함에 돌아갈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다, 천자여. 너희가 말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매에 대해서 듣고도 즐거이 믿지 않고 들은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마에 의해 괴롭혀져 굳어진 것이다.

그리고 보살로서 이 삼매를 듣는 것에 이르지 못했고 또한 수용하지도 간직하지도 읊지도 독송하지도 설하지도 않는 자라면, 나는 그를 들은 것이 많은 지혜로운 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천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세존이시여, 여래의 성스런 취지로 이 법을 건립하셨습니다. 후세에도 두루 얻게 되고 선포되도록 하십시오.”

그때 세존은 미간의 상호와 육계의 상호[髻相]에서 빛을 방사하셨고 그 빛은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이어서 그 빛은 자연히 소리를 내며 찬탄하고 노래하였다.

“여래께서는 이미 이러한 법을 건립하셨다.”

그때 세존께서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반열반에 들 텐데 석 달 남짓 남았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권하고 돕고자 하였기에 나는 너에게 이 경전을 부촉한다. 너는 마땅히 수용하고 간직해야 하며 모이는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널리 분별하여 설해주어라. 만일 사람이든 보살이든 이 삼매를 배우고 간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멸도하지 않으며 법이 멸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난아, 그 법을 수용하여 행하는 사람은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 되고 만일 모이는 대중을 위하여 강론하고 강설하는 자라면 이것은 법을 보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현자 아난이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일 겁 또는 일 겁 이상을 더 머무십시오. 천상과 세간을 많이 불쌍히 여기시고 많이 슬프게 여기시고 많이 안온하게 해 주십시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근심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너에게 내가 설하지 않았느냐? 이법을 구족한 자에게는 부처님이 영원히 머무시는 것이다. 또한 여러 부처님 세존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으로써 마땅히 여래를 볼 수는 없으며 상호로써도 아니니 바로 이 법을 볼 때에야 부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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