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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률삼매경

wowinchon 2018. 2. 14. 12:41


불설법률삼매경.hwp

불설법률삼매경

오(吳) 월지국(月支國) 지겸(支謙) 한역

김철수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는 마갈제국(磨竭提國)에서 대비구(大比丘)들과 함께 계셨는데, 더불어 많은 보살들과 네 부류의 제자들과 천상과 인간, 그리고 용과 신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법률삼매(法律三昧)가 있으니, 보살로서 수학하는 이들은 마땅히 그 성정(性情)을 조화롭고 순조롭게 하여 미묘한 법문에 깊이 깨달아 들어가되 가볍게 보거나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깊이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3학(學)의 공덕에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방자한 마음으로 인해 그 본래의 의도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은 이 무리에게는 열두 가지의 그릇됨이 있어서 스스로 큰 죄에 떨어져도 끝내 뉘우치지 않느니라. 무엇이 그 열두 가지이겠느냐?

어떤 사람이 도를 배울 때 스승의 견해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높이고 본래의 의취(意趣)보다는 명자(名字)만을 구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법을 비방하여 가볍게 여기고 요망스럽게도 크게 비웃으며 말하기를, ‘우리 스승은 나를 실추시켰고[墮] 또한 다른 사람들도 실추시켰다’고 하니, 이는 원숭이가 독이 든 과일과 야채로 만든 수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해치고자 하면 또한 자신을 죽이는 결과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모르니, 이것이 첫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보살의 법장(法藏)을 공부할 때 경전의 내용은 깊이 들었으나 스승에게 의문나는 것을 질문하지 않아 그 의취(義趣)를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여 보살도를 이루는 것을 경시하니, 이것이 두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미 경전을 깊이 배웠어도 중도에 다시 성문 제자의 배움[學]으로 떨어져 대도(大道)를 훼손하고 비웃으며 멀어지니, 이것이 세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부하되 깊이 깨달아 들어가지 않은 채 단지 도를 의지하여 그 목숨을 온전하게 보전하려고만 하여 그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깊이 있는 경전 내용과 훌륭한 대법(大法)을 비방하고 비웃나니, 이것이 네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공부는 하였어도 본의(本意)에 이르지 못하여 단지 얼굴과 몸을 허위로 꾸미고 스스로 적합하다고 여기며, 경전의 좋은 말을 얻어도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 않아 전도된 견해를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아첨할 생각을 내게 해 비위를 맞추게 하고 또한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급히 몸을 추스려 장단점을 지어내어 비방하고 그 자신의 명예를 바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완고하고 어두워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고, 항상 독한 마음을 품은 채 법을 강의하는 사람을 향하며, 도덕을 생각지 않고 단지 이로움만을 구하니, 이것이 여섯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배움에 들어 현명한 스승으로부터 결정적인 법문을 듣고서도 스승의 은덕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공력만을 내세우며 ‘내가 스스로 알았다’고 말하며,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한 스승에게 경전의 내용을 묻거나 하는 일이 없어 그 죄가 가볍지 않나니, 이것이 일곱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만약 보살의 마음[意]을 낸 다음 불경(佛經)의 도를 배우려고 하나 스승을 따라 배움이 오래가지 못하고 예절이 보잘것없어 성문(聲聞)이 말하기를 ‘권방편(權方便)이 있어도 그 의취(意趣)에 도달하지 못하나니, 허망되이 꾸민 헛된 말과 법답지 못한 것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또한 보잘것없이 미미한 생각[意]으로 스승이 행한 것을 쳐다보면서 스스로 생각한 것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선교방편의 지혜를 잃어버리고 악마의 그물에 들어가니, 이것이 여덟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반기(畔棄)를 배우는 데 있어, 반기란 무엇이냐 하면 현명한 스승으로부터 선권방편의 지혜를 이해하는 것을 일컫는데, 깊이 깨달아 들어간 사람을 보고도 자주 묻지 않고 중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다시 나쁜 마음을 품어 스승의 단점을 생각하고 비법(非法)에 떨어지고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며 도를 거스르고 지혜를 잃고서도 그것을 반기라고 말하니, 이것이 아홉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미묘한 선권방편의 지혜를 환히 알았으니 다시 경전을 공경하지 않고 가벼이 여기는 죄를 짓고 가지[枝]는 숨긴 채 은밀한 처소에서 몰래 말하기를, ‘스승은 아는 바가 없다. 내가 이미 학습한 것에 따르면 그 말은 다 옳지 않다’고 하며 스스로 배움을 포기하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니, 이는 그 자신이 독을 마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독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열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도를 배울 때 현명한 스승으로부터 깊이 있게 경전을 배워 보살의 지극한 심행(心行)에 대해 믿더라도 그로부터 학문을 구하려고 하는 생각을 단절하여 마음을 내지 않으면 현명하다 할 수 없고 단지 성문일 뿐이어서 일찍이 제대로 경전을 보지도 못하며 믿음이나 계율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나니, 이 사람이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오히려 속어나 비유로 그것을 이해하는 수준이어서 점차적으로 속임수를 가르치게 되고 진실한 도를 엷고 묽게 만들게 되어 스스로 큰 죄를 취하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오도하게 되니, 이것이 열한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배우더라도 믿음에 이르지 못하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모르고 죄 짓는 일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모르며 권세 있고 강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춰 아첨하고 도를 이해할 줄 모르며 불법을 훼손하고 비구승을 비방하면, 이 무리는 이미 스스로 여덟 가지 액난에 떨어지고 또한 다른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두 번째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이러한 열두 가지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죄를 뉘우쳐 없앨 수 없으니, 3악도(惡道)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더라도 제도하여 해탈시키기가 매우 어려우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런 까닭에 이 법률삼매를 설하나니, 그대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땅히 진실을 이해시켜 그들의 의행(意行)을 보호하고 작은 복을 짓지 않게 하라. 털끝만큼이라도 범한다면 큰 죄가 수미산과 같아 영원히 삼보(三寶)를 잃고 악도로 떨어져 그 끝이 없고 다만 탐애에 잠시만 머물러 앉아도 극도의 고통에 이르니, 이는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우니라.”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은 다 제6 도지(道地)에 들어갔다.

모인 대중들이 모두 일어나 같은 소리를 찬탄하여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과 후학들을 위하여 크게 밝음을 여시어 지혜의 눈을 얻게 하셨으니, 모두 함께 앞으로 나아가 머리 숙여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말씀을 정수리로 받아 지니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아주 오래고 먼 과거세에 유도지(有道志)라는 이름의 보살이 14만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위라제불(違羅提佛)로부터 보살의 마음[意]을 냈느니라. 또한 그 무리 가운데는 가장 재주 있는 현행(賢行)이라는 사람이 있어 유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그는 여러 겁을 따라다니면서 그 마음을 잃지 않고 굳게 정진하였는데 훗날 성불하였으니 그 이름이 세두포(世頭胞)였다. 그는 유도지를 따라다니다 결정적인 법을 받았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다 퇴전하여 제자행(弟子行:성문행)에 떨어져 지금까지 5도(道)1)에 머물면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였느니라.”

 

1) 5취(趣)라고도 하며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의 세계를 말한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부처님을 뵌 이후로 다시금 심오한 경전을 얻지 못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얻었으나 다만 힘써 학습하지 않았고 의문이 생겨도 묻지 않아 지혜를 얻지 못했으며, 또한 스승을 공경하여 계승하지 않았고 사람과 법을 경시하였느니라.”

아난이 다시 물었다.

“이미 큰마음을 냈는데 어떻게 퇴전(退轉)하여 떨어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일 때문이니, 첫째는 근본적인 것을 배우더라도 선권방편을 알지 못하고 스승과 벗을 경시하며 한 마음으로 전심하지 못하여 그 마음[意]을 자주 바꾸는 일이고, 둘째는 공부하되 정진하지 않아 도력(道力)이 없고 단지 명예만을 탐하여 다른 사람들의 공경을 기대하는 일이며, 셋째는 스승을 섬기고 배우면서도 부지런히 닦을 것을 생각하지 않아 허위와 가식을 성취하게 되고 자신을 높여 지극한 마음이 없는 일이며, 넷째는 외도의 학문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릇된 견해를 익히는 사람이 오히려 신이한 잡술을 지니고서 부처님의 심오한 경전과 비교하면서 도(道)가 동등하다고 말하는 일이니라. 그 당시에 14만 명이 다 이런 마음을 냈기 때문에 후세에 대도(大道)로부터 점차 멀리 떨어졌으나 오직 유도지(有道志)만이 뜻이 크고 마음이 강하였기에 현행(賢行)이 그를 따라 섬겼고 수기를 받아 불과(佛果)를 증득할 수 있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 천상과 인간 백십만 명이 모두 보살의 마음을 냈다.

현자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배우고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기 멋대로 대도(大道)의 본원을 저버린다면 어찌 신중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지금 새로이 배워 법에 들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고 훌륭한 스승과 벗을 잃지 않아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극히 적다. 많은 이들이 본래 자신의 생각을 따르므로 교화되지 않을 것이니라.”

아난이 다시 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서로들 악한 것에 대해 말하는데 어떻게 스스로의 악에 대해 알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단지 다른 사람의 악만 보고 자신의 악은 알지 못하며, 단지 자신의 선한 점만을 보고 다른 사람의 선한 점은 보지 못한다.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 칭하지만 모두 다 지혜 있는 이가 아니며,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처하지만 그들은 미혹이 심하느니라.

자신이 경전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미혹된 것이고, 대법(大法)을 안다고 하면서 스승을 섬기지 않으니 이 또한 믿을 수 없느니라.

부처님의 지혜는 광대하여 헤아리기 어려운데도 견문이 보잘것없이 적은 이들이 스스로를 만족하게 여기어 높이니 어찌 지혜 있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지극한 학문에 뜻을 두고 깊이 들어간 수행자나 훌륭한 스승을 가까이하는 사람만이 현명하고 지혜 있다 할 수 있느니라.

어리석은 자가 어찌 세간에 있는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모두 알아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무릇 어리석은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이 높다고 여기고 자신이 높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는 훌륭한 일에 관하여 더불어 말할 수 있으나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람과는 더불어 함께 논의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어떤 것이나 자신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과는 더불어 도를 논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단지 그 교만만을 증대시킬 뿐이다.

스스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욕(忍辱)하는 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며 이해하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도의 의미를 겸허하게 잘 이해하는 사람과는 함께 깊이 있는 경전의 요점을 강의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앎을 속박해 버린다.

미묘하게 깊이 깨달아 들어간 사람과는 함께 실마리가 없는 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의혹을 일으킨다. 자신이 보살법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탐착에 걸려 있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깨끗함에 들어갔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더러움에 물든 것을 알지 못한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악마의 일에 관해서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마라(魔羅)의 그물에 걸린 것을 알지 못하니, 마치 누에가 고치집을 지어 스스로를 안에 묶는 것과 같으니라.

안과 밖이나 깊고 얕은 의미를 깨달아 분별하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오랫동안 배워 성취한 보살에게 물어야 한다.

훌륭한 스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악마의 일을 잘 헤아려 알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진실함을 배워야 하며 반드시 수호함을 행해야 하느니라.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비법(非法)에 떨어지면 자기 멋대로 행하게 되니, 그릇된 마음에 떨어지기 때문에 온갖 하지 말아야 할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큰 허물을 가볍게 범하고 악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어서 법령(法令)을 계승하지 않고 악마에 의해 사로잡히니, 그 죄가 작지 않느니라.”

이때 현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새로이 마음을 낸 사람[新發意者]은 진실로 마땅히 자신을 잘 수호해야 합니다. 자그마한 생각에 안주하는 사람은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 과거세에 저도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었습니다. 후회해 보아도 다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면 모두가 다 이러하느니라.”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사람의 근본입니까? 5음(陰)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6입(入)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12연기(緣起)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96가지 도(道)의 근본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4제(諦)의 근본과 제자(즉성문)의 근본과 스스로 불법(佛法)을 배우는 이(즉 벽지불)의 근본과 여래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일찍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 그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여 소승의 도에 떨어졌습니다. 원하옵건대 새로 배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을 분별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묻는 바가 아주 시원스럽고 많은 것을 환기시켜 주는구나. 듣고자 하는 이들은 듣도록 하라.”

이때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뢰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근본은 어디로부터 나온 바도 없고 받을 바도 없으며 지은 자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색(色)도 없고 식(識)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느니라. 이와 같아야 근본을 아는 것이니 이를 잃어버리면 근본을 떠나는 것이다.

5음의 근본이란 머무는 처소가 없는 것이니, 집착하는 바를 따르면 음(陰)이니라. 성취와 성취하지 못함이 허깨비와 같아 모든 것은 강건한 것이 따로 없으니, 이와 같이 아는 사람은 음을 헤아려 집착하지 않는다.

6입의 근본이란 마치 빈 들판과 같으니라. 더욱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일컬어 입(入)이라 한다. 허공에는 쌓이는 것이 없으니,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입에 대해서 헛되이 헤아리지 않느니라.

12연기의 근본이란 본래 실마리가 없어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어느 곳으로 가는 바도 없으며 어디에 이르는 바도 없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반연[緣]하는 바가 끝이 없어 늙어 죽을 때까지 이르러서도 꿈과 같아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법이 일어나는 바가 없다는 법인(法忍)을 아는 것이 그 근본을 아는 것이다.

96가지 도(道)의 근본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탐욕으로부터 비롯되는 62가지 견해를 안과 밖으로 취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안과 밖으로 취하는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몸이 갖가지로 변하고 온갖 것이 헛되어 진실하지 않은데도 온갖 것을 탐하고 버리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지키려 하지만 무너져 생사가 끊임이 없는 것이다. 4제의 근본 또한 뿌리나 줄기가 없다. 고(苦)․습(習)․진(盡)․도(道) 모두가 관찰과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공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4제의 근본을 안다고 볼 수 있느니라.

성문 제자의 근본이란 처음에는 세간의 존재를 관찰하되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 못하지만,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마음을 거두어 법을 관조하고 5음을 끊어버리며 공(空)을 수호하고 청정함을 행하여 생각[想]이 멸하고 번뇌가 다하면 해탈을 얻게 되니, 이것이 아라한의 근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스스로 불법을 배우는 이의 근본이란 수학하여 공덕을 짓되 여실히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고, 또한 부처님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존귀한 호칭을 얻고 싶어하나 대비(大悲)의 마음이 없고 선권방편을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몸이 부처님으로 불리워지고 그렇게 보여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깨끗함을 좋아하고 도를 수호하지만 훌륭한 도반[善友]을 친근하지 않으니, 비록 공덕을 항하의 모래만큼이나 많이 쌓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어 선권방편의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여 이로움과 상호(相好)를 닦지 못하고 절반 정도만 행하여 완전하게 갖추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인연을 깨닫게 되면 곧 성불하게 되니, 이것이 스스로 불법을 배우는 이의 근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여래의 근본이란 마음을 낸 이래 몸이 다 공하고 모든 법이 청정하다는 것을 알아 중생의 근본이 은혜와 덕임을 여실히 깨달아 음입(陰入)의 종류에 들어가되 일체가 다 본래 없다는 생각을 지니며 모든 공덕이 이루어질 때 여래의 근본에 들 것이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열반에 있지도 않고 본무(本無)를 떠나지도 않아 마치 허공 등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여래의 근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사리불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생각[意]은 실로 오묘하여 아라한들의 경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아시는 것에 대해 저희 초학자들은 모두 얽매여 있고 뜻한 바가 미미하고 배움이 천박하여서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아 생사의 괴로움을 건너려는 마음의 근본이 이미 멸하였으니, 비록 대도(大道)를 듣더라도 다시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이 천자(天子)의 일을 듣고서 잠시 그 귀를 기분 좋게 하지만 끝내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오랫동안 3악도(惡道)에 처해 있었어도 이로부터 벗어나 대도를 배우면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라한이라면 다시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만 보살인 경우에는 성실하고 흔쾌함이 한량없어 이미 큰 뜻을 발하여 깊이 들어가고 폭넓게 견문을 넓혀 가면서 마땅히 정진하여 진실로 잘 수호하며 행할 뿐입니다.”

이때 용성(勇聲)이라는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도는 아주 오묘하여 세간의 재주 있는 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오로지 깊이 깨달아 들어간 사람만이 그 오묘함을 통달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3학(學)과 새로이 마음을 일으킨 보살[新發意菩薩] 및 성문 제자와 스스로 불법(佛法)을 행하는 이들이 몽매하여 깨닫지 못함으로써, 깊고 얕음을 구별하지 못하여 견문이 적고 작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며 쟁론이나 송사에서 이기려고 하여 더욱 서로를 미혹하게 할까 염려되오니, 오직 부처님께서 대비의 마음을 베푸시어 커다란 의혹을 해결해 주십니다. 배우는 자들이 모두 선(禪)을 행하는데도 도를 얻은 것이 각기 다르니, 어떻게 개별적인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성문 제자와 스스로 불법을 닦는 대승 보살 및 여러 외도, 그리고 5신통을 지닌 선인(仙人)의 선(禪)은 그 의미상 차이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보살 대사여, 모든 중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로구나.

성문 제자들은 4선(禪)2)을 들을 수 있느니라. 간략히 바로 마음이 도를

 

2) 초선(初禪)의 상태에서는 모든 욕구를 벗어나고, 모든 불선(不善)의 법을 벗어나면 심(尋:거시적 관찰)이 가능하고 사(伺:미시적 관찰)가 가능하며 이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구족되어 안주한다. 제2선의 상태에서는 심과 사가 정지하고 마음이 청정해져 마음이 통일되면 심도 없고 사도 없다. 다만 정(定)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구족하여 안주한다. 제3선의 상태에서는 기쁨을 떠나 사(捨:평등심)에 안주하고 일심으로 바른 지혜가 있으며 몸의 즐거움을 받아 사(평등심)와 염(통일)과 즐거움이 있는 상태를 구족하여 안주한다. 제4선의 상태에서는 즐거움과 고통을 끊어 이미 기쁨과 근심을 멸하였으므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없는 평등한 마음에 의해 생각이 청정해져 안주한다.

 

얻을 수 있으나 그 밖의 심묘한 대법(大法)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고 생사의 몸을 싫어해 일심으로 사유하여 스스로 고해(苦海)를 건너려고 하지만 중생을 생각지 않고 멸도의 행만을 지키려고 하니, 어떻게 제대로 멸할 수 있겠는가? 복덕을 보시하고 계를 간직하고 정진하여 열반을 바라지만 부처님의 대자비와 열반이 들고 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열반에 한 번 이르면 4선(禪)에 통하고, 3활(活)을 얻어 생사가 끊어지면 윤회의 세계를 건널 수 있다’고 말하니, 이것이 아라한이 선에 들어가는 경지이다.

스스로 불법을 배우는 이는 발심한 이래로 훌륭한 도반[善友]을 벗하지 않고 ‘세간 사람들의 행에는 항상 집착이 있다’고 말한다. 그 집착이란 무엇이냐 하면 공덕을 지어 성불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르길 ‘선도(禪道)는 그 밖의 다른 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이들도 부처님의 선(禪)의 취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여래의 선이란 마음의 의도도 없고 생각도 없고 인식함도 없고 얻는 바도 없어 일부러 짓지 않아도 그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의미를 여실히 알며, 청정함을 수호하여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또한 선권방편의 지혜로 법의 의미를 여실히 깨달아 알지 않고서도 선의 경지를 얻고, 공한 인연을 잘 깨달아 도를 얻으니, 그 밝음이 아라한의 경지를 넘어선다. 이 아라한의 경지는 부처님의 열 가지 힘[力]과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無所畏]과 열여덟 가지 이승범부(二乘凡夫)가 함께할 수 없는 법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를 부처님이 선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보살의 선이란 발심한 이래 현명한 스승을 떠나지 않고 폭넓게 배우고 깊이 있게 알아 선의 근본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어떻게 근본을 깨달아 아느냐 하면 마음과 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도(道)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으니, 집착도 없고 얽매임도 없고 풀어짐도 없고 행함도 없고 나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취할 바도 없으며, 대지혜의 선교방편[善權]의 행을 나타내어 덕의 바탕과 대비의 마음을 끊지 않고 상호(相好)를 닦으며 불국토를 장엄하고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이승범부가 함께할 수 없는 법을 갖추어 일체를 두루 보고 일체를 다 알아 깨닫지 않은 바가 없기에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부처님은 세간 사람들이 탐욕이 많고 산란한 마음에 물들어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보리수 아래에서 눈을 감고 앉으신 채 선법(禪法)을 나타내 보여 이해하도록 하셨으니, 도로써 마음을 묶고 또한 따라 즐기도록 하여 각기 그 마땅한 바를 얻도록 하셨다. 이것이 여래의 근본에 들어가는 선이니라.

외도소학(外道小學)으로서 다섯 가지 신통력이 있는 이들의 선은 무위(無爲)를 귀중하게 여기며 배우지만 지극한 요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피해 편안함을 도모하고, 오직 하나만을 지키려는[守一]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고, 창고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신이한 도(道)와 기(氣)를 보존하고, 성품을 길러 위로 오르는 것을 구하며, 악은 소멸시키고 복은 흥성케 하며, 생각이 다섯 가지 신통력에 이르고 수명이 장구하니, 이를 선인(仙人)이라 한다. 이를 지극하게 행하여도 열반을 알지 못하고 이후에 복이 다하면 생사의 흐름이 끊이지 않으니, 이를 외도 5신통의 선정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컨대 성문 제자나 스스로 홀로 불법을 닦는 이들은 비록 열반을 얻더라도 그 근본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근본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세속의 일만 존재하고 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5음을 무너뜨리고 멸도(滅度)를 취한다.

오직 여래만이 열반의 근본을 아느니라. 왜냐하면 세속과 도(道)를 잘 알고 모든 법이 본래 공하여 머무는 바도 없고 생겨남도 멸함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이 열반이니라. 부처님의 마음[意]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이에 대해 성문 제자나 스스로 불법을 수학하는 이들은 멸진(滅盡)이라 한다.

보살은 마땅히 심묘한 대법(大法)을 잘 이해하고 현명하게 진실로 받아들여서 비록 현명한 스승을 떠나더라도 마음이 마땅히 청정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이때 용성(勇聲)이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을 만나 뵙기는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대성(大聖)의 대자대비가 끝없이 이르니, 지금 부처님의 은혜를 입어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 현명하지 못한 행을 하여 악마가 그 편의를 도모하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끝내 다름[異]이 없으면 천마(天魔)나 그 권속이 청정한 행을 하는 사람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앞으로 나가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숙였다.

이때 천상과 인간 210만 명이 모두 어디로부터 생겨남이 없는 법인[無所從生法忍]을 즐거이 세우기를 원하였다.

현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법률’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도의 의미를 분석해 그 근본적인 지혜와 덕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며 깨달아 들어가도록 분별해 준다.

성문 제자와 스스로 불법을 닦는 이와 보살이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그 대요(大要)를 밝힌 것을 일컬어 ‘법률삼매’라 하느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경법을 신해(信解)하는 사람은 모두 시방의 부처님 처소에서 선교방편을 들은 이들이다.”

부처님께서 경을 설해 마치시자, 모여 들었던 이들이 모두 기뻐하며 각기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


불설법률삼매경.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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