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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홍도광현삼매경(佛說弘道廣顯三昧經)

wowinchon 2018. 2. 14. 12:51

불설홍도광현삼매경(佛說弘道廣顯三昧經) 해제


이 경은 4권으로 되어 있으며, 4세기 초에 월지국 출신의 학승 축법호(竺法護)가 한역한 것인데, 따로 ?입금강문정의경(入金剛門定意經)?이라고도 부른다.

이 경의 이름은 부처님께서 모든 생명을 구제하는 큰 길이 넓게 나타나는 명상에 대하여 설하신 경이라는 뜻이다. 이 경에서는 용왕과 같은 것도 부처님의 교리를 믿고 깨달음을 이룩하기 위하여 명상에 잠겨 불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이 경은 12개의 품으로 되어 있다.

[제1권]

이 권에는 세 개의 품이 있다.

「득보지심품(得普智心品)」:득보지심이란 부처님의 넓은 지혜를 지향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마음을 닦는 법을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취봉산에 계셨을 때 아누달이라는 용왕이 부처님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얻자면 어떻게 도를 닦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방법에 서른두 가지, 열여섯 가지, 스물두 가지 등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넓은 지혜를 가지려면 깨달음을 이룩하려는 뜻과 자비로운 마음을 굳게 가지며 조용한 곳에 앉아 마음을 안정하여 번뇌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남에게 재물을 베풀어주기 좋아하고 계율을 잘 지키며 참는 힘을 키우고 정신을 집중하여 도를 닦는 데 힘쓰며, 행동과 언어, 마음에서 착한 일을 하며, 남을 욕하거나 탐욕을 내지 말며, 악인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따라야 하며, 자신을 비롯하여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을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라는 것 등을 들고 있다.

「청정도품(淸淨道品)」:청정도란 깨끗한 불도라는 뜻이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용왕의 요청에 따라 보살의 마음을 깨끗이 닦기 위한 방법으로서 여덟 가지를 들고 이 여덟 가지 법을 그대로 닦아 나가면 마음의 번뇌가 없어지고 이 세상에 대하여 애착이나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됨으로써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고 온갖 구속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도무습품(道無習品)」:도무습이란 불도에는 따로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는 견지에서 불도를 배워야 깨달음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자면 밝은 달처럼 마음이 깨끗하여 불도를 배워도 배운다는 생각이나 배울 것이 있다, 없다고 하는 일체의 잡념과 애착심을 버리고 불도를 배위야 한다는 것을 설하셨다.

[제2권]

이 권에는 두 개의 품이 있다

「청여래품(請如來品)」:청여래란 부처님을 초청한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용왕의 초청을 받고 무열이라는 큰 못 속에 있는 용궁에 가서 보름 동안 용왕의 후한 대접을 받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무욕행품(無欲行品)」:무욕행이란 욕심이 없이 도를 닦는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일체 욕심을 버려야만 깨달음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용왕에게 번뇌와 나고 죽는 고통에서 벗어나자면 불도를 닦아서 일체의 욕심을 없애야 하는데, 욕심을 없앤다는 것은 곧 나와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볼 것도 들을 것도,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무엇에 대하여서나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욕심을 없애는 것이 곧 불도를 닦는 것이며, 욕심이 없는 깨끗한 마음을 지니면 곧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불도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서른일곱 가지 방도도 결국은 욕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제3권]

이 권에는 세 개의 품이 있다.

「신치법품(信値法品)」:신치법이란 교리를 믿으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용왕에게 교리를 믿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이치를 확고히 믿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서 그 참뜻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전법륜품(轉法輪品)」:전법륜이란 교리를 설한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는 교리의 뜻과 설법자의 보람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먼저 부처님께서는 용왕에게 부처님의 교리는 대상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 없다는 두 편견을 초월한 것이며, 과거․현재․미래도 없고,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보는 교리라고 하셨다. 계속하여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교리를 설하는 자를 공경하고, 요구하는 옷과 음식을 바쳐야 하며, 설교를 잘 듣고 찬탄하고 널리 퍼뜨려야 하며, 들은 교리에 따라 정성을 기울여 불법을 닦으라고 하셨다. 그래야 부처님의 교리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결제의난품(決諸疑難品)」:결제의난이란 여러 가지 의문나는 문제를 풀어 준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는 용궁의 설법 장소에 갑자기 나타난 문수보살이 용왕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용왕의 물음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여서 견줄 사람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세상 만물이 허무하다는 불변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 바로 부처이므로 부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도를 닦아서 그 이치를 깨닫게 될 때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제4권]

이 권에는 네 개의 품이 있다.

「불기법인품(不起法忍品)」:불기법인이란 ‘세상에는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현상이 없다’는 이치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 문수보살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은 보살은 부처님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설하였다.

「중요법품(衆要法品)」:중요법이란 교리의 요점이란 뜻이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용왕의 아들에게 탐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이 불교의 요점이라고 말하였다.

「수봉배품(受封拜品)」:수봉배란 왕으로부터 벼슬이나 영지를 받는다는 뜻으로서 여기에서는 부처님께서 주시는 예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품에서는 용왕이 부처님의 예언을 받는 정경을 보여 주고 있다.

용왕은 설교를 듣고 나서 부처님을 섬기려고 자기 용궁을 그에게 바쳤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용왕을 칭찬하여 주고 먼 훗날에 가서 아누달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용왕의 아들에게도 역시 먼 훗날에 부처가 되어 이 불경을 설하고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언을 마친 부처님께서는 용왕이 마련한 수레를 타고 취봉산으로 돌아갔다.

「촉루법장품(囑累法藏品)」:촉루법장이란 불경을 부탁한다는 뜻이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보살과 비구들, 그리고 아사세왕의 왕비까지 모이게 한 후 이 경을 받들고 도를 닦는 보람은 한없이 크다고 말씀하시고, 후세에 이 경을 널리 유포시키라고 당부하셨다.

이상과 같이 이 경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불교의 이치만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하였다.

 

 

불설홍도광현삼매경 제1권

- 일명(一名) 입금강문정의경(入金剛問定意經) -

축법호(竺法護) 한역

이미령 번역


1. 득보지심품(得普智心品)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 취산(鷲山) 정상에서 큰 비구 무리 1,250명과 여러 보살 8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이때 세존께서는 무수한 백천 무리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법을 자세히 말씀하셨다.

이때 아뇩달(阿耨達)[중국(西晉) 말로는 무열(無熱)이다.]이라는 용왕이 있었는데, 과거 세상에 덕의 근본을 짓고 보살을 따라 수행하였고, 대승에 견고하게 머물러 6도무극(度無極)을 행하여, 원만한 상호를 갖추어 부지런히 중생을 구제함으로써 교화하는 것이 한량없었다. 그리고 일찍이 96억의 모든 부처님들을 섬겨 공덕을 쌓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권방편(權方便)으로 널리 5도(道)에 나타나서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과 어둠을 없애 보살의 무욕행(無慾行)을 닦게 하였고, 자심(慈心) 등 4등심(等心)을 품고 모든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였다. 죄지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용으로 몸을 나타내어 수억 마리의 용을 교화하고, 재앙의 행을 벗어나게 하려고 스스로 그 못에 머물면서 모든 권속 8천만 무리를 이끌었으며 또한 채녀(采女) 14만 명을 거느렸다. 그를 에워싸고 앞뒤로 수행하며 창기(倡妓)를 이루어 연주하였는데, 그 소리는 온화하여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감동하였다.

위덕을 알맞게 품고 신통의 변화가 자유로운 그들은 온갖 꽃들과 가장 미묘한 향을 바치고, 깃발과 일산을 높이 받쳐 들고서 세존에게 나아가 곧 머리 숙여 경배하고 여래께 문안드렸다.

이어서 향과 꽃과 온갖 보배와 고운 빛깔의 비단 깃발을 가지고 거듭 음악을 연주하며 마음으로 공경하였으며, 대중 권속과 여러 채녀들도 모두 나아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곧 앞에서 길게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합장한 채로 부처님을 향하여 말씀드렸다.

여래․무착(無著)․평등(平等)․최정각(最正覺)께 여쭙고자 합니다.

보살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道)는 어떤 것입니까?

오직 저희는 가르침을 받고 싶어 이에 감히 여쭙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의심나는 대로 묻어 의심하지 말며 하고 싶은 것을 어려워하지 말라.

여래․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은 마땅히 그에 응하여 널리 펼쳐서 그대의 마음을 풀어 줄 것이니라.”

이때 아뇩달용왕은 부처님께서 질문을 허락하심을 얻고 마음으로 더욱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하늘의 스승이시고 가장 존귀하시며 인간세상 가운데에서 성스러운 인도자이시며, 용맹하기가 사자와 같아서 감화와 변화가 한량없으신 여래께 저는 여쭙니다.

널리 중생에게 영향을 미치시고 또한 보살대사를 위하는 까닭에 세상의 스승이 되시며, 속세의 법을 없애시고 지행(志行)이 청정하여 인연을 밝혀 없어지게 하시고, 뭇 중생을 제도하여 청하지 않아도 벗이 되시며, 마음은 두루 평안하시어 이들을 구제하고 이끌고 기르시며, 두려움 없는 열 가지 힘을 집지(執持)하시고, 나아가 뭇 마귀를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무릎 꿇게 하시며, 마음에는 더러운 행이 없고 굳게 금강대덕(金剛大德)의 갑옷을 입으시고 뜻은 권태로움이 없으며, 덕을 쌓은 인연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보시와 계율과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는 이미 갖추셨으며, 마음은 일체에 동등하게 잡상(雜相)을 제거하고, 두 가지 견해를 없애며, 지혜가 바라밀을 넣음으로써 인연법을 이해하고, 이미 깊고 깊어 다하기 어려운[難極] 법요(法要)에 들었으며, 성문과 연일각(緣一覺)의 생각을 떠나고 대승의 일체지심(一切智心)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의행(意行)이 견고하고 강하며 언제나 자재로움을 얻으셨습니다.

몸은 깨끗하고 티끌이 없어 찬란하게 빛나고 맑고 투명하며, 뜻은 허공과 같았으며, 무수한 겁 동안 마음은 권태를 느끼지 않아 총지(總持)를 빨리 얻었으며, 탐욕의 티끌과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조복하여 제거했습니다.

이처럼 여서(如逝:여래)께서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으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아지랑이․물속의 달에 머무르는 것을 넘음으로써, 이러한 여러 법에 대해서 동등하게 이해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삼보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고 받들고 공경하며, 그 법륜을 굴리되 걸림이 없으며 기쁘게 믿고 좋아하여 모두 스스로 이것을 얻었으니, 우담화(優曇花)가 억만 세월 동안 희유하게 피는 것과 같습니다.

뜻은 고요하게 홀로 편안하나 널리 상(相)을 갖추었고 과거에 공경함을 심은 보살대사[大士]는 상의법(上義法)을 존중하며 닦아 머무는 것이 이와 같사오니, 그 보살[正士]를 위하는 까닭에 여래께 여쭙습니다.

오직 여래․지진등정각께서는 보살대사가 행할 바를 해설해 주십시오.

법문에 노닐며 금강의 덕(德)에 들고, 과보가 매우 미묘함에 도달하게 되어 그 수행으로써 응당 총지(總持)의 장(場)을 얻게 하며, 4성제(聖諦)의 행으로써 성문을 잘 교화하고, 진리의 요체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뭇 연각들을 이끌어 인연을 고요히 일으킴을 권장하여, 일심으로써 정각과 같게 하십니다. 모든 법에 통달하여 마땅히 대승에 들어가며, 대승을 깨쳐서 들어가 능히 마장(魔場)을 항복시키고, 의심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죄의 번뇌를 건너게 하고자 하시며, 널리 중생을 알고 말솜씨를 잘 쌓아서 모든 법을 널리 펼치며, 모든 원(願)에 따라서 바라는 바를 화시(化示)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무착․평등정각께서는 널리 현명한 대사들을 위하는 까닭에 두루 널리 법을 펼치시니,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의 힘을 이룰 수 있게 하시며, 스스로의 교만함을 다스려 법의 상력(上力)을 얻어서 재앙의 행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짓는 바가 있지 않게 하십니다.

보시의 힘을 얻게 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게 하십니다.

지계의 힘을 얻게 하여 동등하게 뭇 죄를 없애서 모든 원(願)을 넘어서게 하십니다.

인욕의 힘을 얻게 하셔서 모든 괴로운 법에 의해 생(生)을 받는 장소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정진의 힘을 얻어서 뭇 덕의 근본을 쌓고 뜻은 언제나 권태롭지 않게 하십니다.

선정의 힘을 얻게 하셔서 적정함으로써 고요함에 머물며 선정의 요행(要行)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지혜의 힘을 얻게 하셔서 삿된 견해와 의심과 어둠의 애매함을 넘어서 권도(權道) 방편을 깨치게 하고, 중생을 제도함에 분명히 알아서 권하고 도우며, 함께 다섯 가지 신통 즉 천안(天眼)이 무한하며 천이통(天耳通)과 타심통(他心通)과 신족통(神足通)과 숙명통(宿命通)에 통달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과보에 즐겁게 노닐며 위대한 말솜씨로써 변재구의(辯才句義)가 다함이 없고 끊임이 없게 하십니다.

곧 총지를 얻어서 뜻에 황홀함이 없고 해인삼매의 바른 선정에 이르게 하며, 널리 지혜를 따라 나아가니 과보가 동일한 한맛이며, 부처님의 지정(志定)을 얻어서 통행(通行)을 즐겨 익히며, 영원히 부처님을 항상 받들고 따라서 장애나 폐단이 없기에 빨리 법의 지정(志定)에 이르고 정의(定意)에 힘써 나아가며, 오래도록 법을 듣되 도무지 제한이나 장애가 없고, 뭇 지정(志定)을 숭상하고 널리 일체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는 대중을 받들며, 보시의 지정을 얻어서 세속에서 재물과 법시를 베풀어 아까워하지 않고, 계행(戒行)과 염정정(念靜定)을 구족해서 빨리 부처님을 얻되 마음으로 잊지 않아 지정에 승천(昇天)하고, 언제나 도솔천의 일생보처(一生補處)를 생각하고 보살의 깨끗하고 고매한 행을 생각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이때 용왕은 질문을 마치고 나서 마음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거듭 게송으로 찬탄하여 세존께 여쭈었다.


대인(大仁)이시여, 현세의 뜻을 설하소서.

보살의 덕행이 응당 들어가야 할 곳,

내성(內性)의 지조(志操)가 응당 닦아야 할 바,

어떤 도에 마음을 내어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사랑으로 잘 이끌고 비심(悲心)으로 실천해 들어가며

중생을 제도하고 보호하며 구제해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선정과 지혜로 널리 교화하고 청정하게 하면 되는지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드리우셔서 널리 설하소서.


지의(志意)와 의단(意斷)으로 중생을 이끌고

근(根)과 역(力)과 신족행(神足行)으로도 이와 같이 하며

도(道)의 7각(覺)을 펼치셔서 중생에게 나타내 보이시어

받들어야 할 그 덕을 설하소서.


보시를 살피고 계를 검사하는 덕을 갖추시고

인욕의 힘을 널리 행하고 정진하시며

혜지(慧志)의 인연이 구르는 것이 한량없으십니다.

어찌해야 그 어리석음을 제도하는지 말씀해 주소서.


말재주에 통달하고 어리석음을 벗어나셨으며

지행(志行)을 자세히 살피며 언제나 청정하고

모든 일어나는 것을 곧 깨달아 아십니다.

오직 모든 보살을 위하여 설해주소서.


기뻐하는 공덕에서 큰 환희심을 이루며

성종(聖種)1) 7재(財)2)는 바로 행의 가장 으뜸가는 것이며,

즐겁게 노닐고, 고요한 곳에 머물며 그리고 정려를 닦는 것을

오직 자존(慈尊)께서는 널리 설법을 펴시어 제도하소서.


변재의 행을 어떻게 모두 갖추며 

 

1) 성자(聖者)의 종성(種性)이란 뜻. 불도에 들어가 계․정․혜의 3학(學)을 닦는 이, 또는 성자가 되는 행법으로서 현재의 의복과 음식과 와구에 만족하여 악을 끊고 선을 닦기를 좋아하는 이를 가리킨다.

2) 7성재(聖財)․7덕재(德財)라고 하며, 성과(聖果)를 얻기 위한 일곱 가지 법재(法財)를 말한다. 신재(信財)․계재(戒財)․참재(慚財)․괴재(愧財)․문재(聞財)․사재(捨財)․혜재(慧財)이다.

 

깊이 총지를 이루어 영원히 안주하고,

법요(法要)를 널리 설하시되 언제나 끊임이 없고

잠시 들은 것도 받들어 행하되 끝내 잊지 않고 

 

적멸청정하게 관(觀)을 행하고,

깨달은 뜻이 매우 깊고 지(智)가 두루 넓으며

그 지혜는 궁구하기 어렵고 덕은 치우침이 없는

해행(解行) 가운데 어느 것이 보살에게 마땅한 것입니까?


악마의 힘과 분노의 마음을 제지(制持)하고

외도와 뭇 삿된 부류를 부수고 무너뜨리며

용맹한 덕은 움직이기 어려움이 마치 태산과 같음을

밝은 달이 노닐 듯이 널리 설해주소서.


환히 공(空)과 무상(無想)의 성품의 존재에 비추어

아지랑이나 환법(幻法)을 깨치고

몽상(夢想)의 체상(體像)을 헤아림이 없는 것에 대해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오니 가리켜 보이시고 말씀해 주옵소서.


그러자 세존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장하구나.

참으로 비할 데가 없구나.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여래에게 의심을 물었구나.

지금의 네 물음은 과거세의 공덕을 이어 대비(大悲)를 드러내어 중생들의 지우(志友)가 되었으며, 생사에 피로하지 않고 삼보를 끊지 않았기 때문이니, 왕이 질의하는 것은 바로 이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실로 잘 듣고 받아서 사유하라. 나는 마땅히 보살대사가 응당 닦아야 할 행에 피차에 한량없는 과보인 최법요(最法要)를 널리 말해 주리라.”

용왕이 말하였다.

대선(大善) 세존 이시여, 저는 기꺼이 사유하고 듣고 빨리 받아서 행하기를 원하오며, 시방에 널리 퍼뜨리며 정진하기를 권하되 싫증을 내지 않겠습니다.”

이때 세존께서 용왕에게 답하셨다.

“하나의 법행(法行)이 있으니, 응당 보살이라면 이로써 상호를 원만히 갖추고 모든 불법을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을 하나라고 하느냐?

도의 뜻을 짓고 일으키며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 모든 불법을 이루는 하나의 행이라고 한다.

또다시 서른두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普智心)을 얻게 하니, 마땅히 부지런히 즐겨 행하고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지키고 익혀야 한다.

무엇을 서른두 가지라고 하는가?

내성(內性)을 길들이고 닦으며, 가장 으뜸가는 뜻을 지니고, 대자(大慈)를 승행(昇行)하고, 대비(大悲)가 견고하며, 뜻을 우러러 받들되 싫증내는 일이 없고, 정진을 일으키고, 모든 힘은 용맹정진을 모두 갖추고, 그러면서 강력함을 얻고, 또한 높이 뛰어오르는 세력이 있고, 편안하고 고요하여 번거로움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인욕에 머물고, 착한 벗을 자주 가까이하며, 오로지 법사(法事)를 행하고, 권화(權化)를 지니고 다스리며, 두루 베풀고, 인욕을 행하고, 검계(撿戒)를 즐기며, 아첨하는 생각이 이미 없고, 거짓을 멸하여 끊었으며, 말과 행동이 상응하고, 뜻은 반복(反復)함을 살피고, 언제나 부끄러워하는 안색을 지니고, 안으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이미 기뻐함을 다스리고, 근행(根行)이 지신(至信)하고, 뜻하되 제어하며, 공덕을 쌓아 갖고, 뜻이 좁은 길을 멀리하고, 대승의 행을 즐겨 퍼뜨리며, 모든 삼보의 일을 관찰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용왕이여, 이것을 이른바 32법이라고 하니, 보살은 이에 응하여서 보지심(普智心)을 이룬다.

또다시 용왕이여,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보지(普智)를 더욱 증장시키고 힘을 나타내 널리 집행[弘軏]한다.

어떤 것이 보지로 나아가는 열여섯 가지인가?

보시를 행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계를 구족하되 결여되는 것이 없고, 인욕하되 응당 조인(調忍)하고, 과보를 향해 정진하되, 정(定)과 모든 행이 일치하고, 지혜를 이미 구족하며, 믿음과 행이 모두 충족되고, 여래를 받들어 섬기며,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즐겨 유행(遊行)하고, 6견법(堅法)3)을 갖추고, 최십선(最十善)을 갖추며, 몸과 입과 뜻을 장엄하고, 행동함에 덕을 갖추며, 

 

3) 『본업경』에 있는 여섯 가지 견법(堅法), 즉 신견(信堅)․법견(法堅)․수견(修堅)․덕견(德堅)․정견(頂堅)․각견(覺堅)을 말한다.

 

만족함을 알아서 고요함을 즐기고, 몸의 세 가지 업을 그들에게 권하며, 승정관(勝定觀)을 닦고, 모든 덕을 갖추는 것이니, 이것을 열여섯 가지 행법의 일이라고 한다.

보살은 이것을 통해 상(相)이 길상하고 복스러워지며, 대지심(大智心)을 펼쳐서 불세(佛世)에 지니어 자유롭게 교화하느니라.

또다시 용왕이여, 그 보지심은 스물두 가지 일로써 삿된 길을 없애며 그 대승의 뜻으로써 보지를 닦는다.

어떤 것이 스물두 가지인가?

행동은 성문과 연일각(緣一覺)의 뜻을 완전히 넘어서고, 교만함을 낮추어 자신의 거만을 없애며, 아첨하는 일을 버리고, 속세의 잡된 말을 억누르며, 계 아닌 것을 멀리 버리며, 성냄의 뿌리를 뽑으며, 악마의 일을 벗어나 물리치며, 장애를 제거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며, 죄를 멸해 없애며, 자기를 반성하길 몹시 간절히 하며, 상대의 그릇됨을 논하지 않고, 능히 나쁜 벗 떠나며, 선량함을 거스르는 것을 멀리하며, 6바라밀 아닌 것을 떠나고, 또한 탐착하고 인색함을 버리며, 계(戒)를 청정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언쟁을 완전히 버리며, 게으름을 떠나고, 미혹함에 대해 스스로 올바르게 분별하며, 모든 무지(無知)를 버리며, 방편 없음을 끊어버리고, 악행을 떠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보살의 보지로써 스물두 가지 삿된 집착을 없앴다고 하는 것이다. 속히 권혜(權慧)에 응하면 영원히 게으르거나 물러서지 않느니라.

또다시 용왕이여, 스물두 가지 용사(踊事)가 있으니, 이로써 수순행(隨順行)에 나아가 보지심을 얻어, 대적할 수 없는 모든 악마 파순 및 악마 궁전의 권속과 외도를 항복시켜 이를 물리친다.

무엇을 스물두 가지라고 하는가?

계사(戒事)를 지나 정(定)에 높이 뛰어 오르는 것이고, 또한 지(智)를 높이 뛰어올라서 혜행(慧行)을 넘는 것이다. 권화(權化)를 높이 뛰어오르고, 또한 대자(大慈)를 높이 뛰어오르며, 대비(大悲)를 높이 뛰어오르는 것이다. 말을 간추려 이르면, 공(空)과 상(相)과 원(願)․아(我)․인(人)․수(壽)․명(命)을 뛰어넘는 것이다. 뭇 견해와 인연이 일어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고, 마음이 저절로 깨끗하여 신성(神聖)을 승각(承覺)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고, 식념(識念)에 대해서 견해에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고, 대금강견고(大金剛堅固)의 행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것을 용왕이여, 이른바 보살이 행하는 스물두 가지 뛰어오르는 법으로써 보지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니, 이로써 모든 뭇 악마와 그 악마의 몸과 삿된 외도들이 자재로움을 얻지 못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항복시켜 다스린다.

또다시 용왕이여, 그 보지심은 두 가지 수행처[行處]에 의지하여 보지심을 이룬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그 말한 바대로 닦아 상응하는 수행처이고, 둘째는 모든 공덕의 근본인 도(道)를 관하는 수행처이니, 이것이 두 가지 보지(普智)의 수행처라고 한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어서 그 보지심을 훼손할 수 없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 일인가?

중생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늘리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재앙의 행에 대하여 대비(大悲)로써 제도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두 가지 일로써 보지(普智)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그 보지심에 두 가지 무거운 법이 있어서 넘어서는 자가 없고, 생사의 무리들과 뭇 성문과 모든 연각이 능히 뛰어넘지 못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권도(權道) 방편을 유지하는 것이고, 깊이 지혜를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거운 두 가지 보지법이라고 한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을 쉬게 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일에 처하여 의심하거나 머뭇거리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있는 곳마다 속세의 탐욕의 모든 즐거움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보지심을 쉬게 하는 두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지심을 보호하니 어떤 것이 둘인가?

성문과 연각의 행지(行地)를 뜻에 두지 않고, 대승의 지극히 아름다운 덕을 바라보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보지심을 보호하는 두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지심을 방해하니 어떤 것이 둘인가?

뜻이 언제나 아첨하기를 좋아하고, 내성(內性)에 아첨을 품는 것이니, 이것이 곧 보지심을 방해하는 두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어 보지를 방해하지 않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오로지 바른 믿음을 닦으며, 아첨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보지를 방해하지 않는 두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네 가지 일이 있어 보지심을 덮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자주 정법을 어지럽히고, 모든 보살과 현명한 달사(達士)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며, 항상 (보살을) 공경하지 않고, 악마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보지심을 덮는 네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네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을 덮지 못하게 하니, 어떤 것이 넷인가?

정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며, 겸손히 공경하여 법문을 받들어 지니는 것이고, 보살을 존중하여 세존인 것처럼 보는 것이며, 언제나 악마의 일을 깨닫는 것이니, 이것이 보지심을 덮지 않는 네 가지 일이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 보지심을 이루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행하는 것이 생사의 번뇌를 바라는 일이 없고, 계덕(戒德)을 사용하는 까닭이며, 일체를 버리지 않나니 대비(大悲) 때문이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니 몸과 목숨을 베풀기 때문이며, 재산과 이익을 두루 베풀어 법을 공양하고 받드는 것이니, 이것이 보지를 이룰 수 있는 다섯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에 나아가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생사를 싫어하지 않으며, 뜻은 무익함을 멀리하고, 제때가 아닌 마음[非時心]을 떠나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니, 이것이 보지심에 나아가는 다섯 가지 일이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에 있게 하니, 모든 성문과 연일각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성문의 해탈을 넘는 것이고, 연각의 해탈을 넘는 것이며, 중지심(衆智心)을 넘는 것이고, 모든 나[吾我]를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번뇌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니, 이것을 모든 행법을 넘어서는 다섯 가지 일이라고 한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에 대해서 기쁨을 갖게 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악도를 넘어선 것을 기뻐하는 것이고, 보지를 살피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고, 각혜(覺慧)를 갖추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고, 계(戒)에 대해서 싫증내지 않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고, 뭇 행을 이해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의 보지(普智)의 기쁨이라고 한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을 발하게 하며, 다섯 가지 힘의 도움을 얻어서 생사에 빠지지 않게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으니 인욕의 힘 때문이며, 능히 모든 서원을 만족시키니 덕의 힘 때문이며, 자기에 대한 교만함을 항복받으니 지혜의 힘 때문이며, 부지런히 널리 듣는 것을 익히니 혜(慧)의 힘 때문이며, 뭇 두려움과 겁을 넘어서니 두려움 없는 힘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도움의 힘을 이루는 다섯 가지 일이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에서 다섯 가지의 청정함을 얻게 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뭇 더러운 행을 떠나기에 모든 타락한 자를 청정하게 하며, 인연의 모든 근에 미혹이 없기에 이것을 청정하게 하며, 일체를 때[時]에 따라 하기에 이것을 청정하게 관하며, 평등하게 권도(權道)에 따라 행하여 다스리기에 이것을 청정하게 하며, 일체 모든 법을 가르쳐 교화하므로 이것을 청정하게 하나니, 이것이 다섯 가지의 보지청정이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의 밝음을 얻는 것이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해(解)의 탐욕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나와 남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고, 5구(句)를 밝히는 것이고, 혜행(慧行)에 통달함을 밝히는 것이고, 눈에 장애 없음을 밝히는 것이니, 이것이 보지의 밝음에 이르는 다섯 가지 일이다.

또다시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보지심을 넓게 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다섯 가지 씨앗과 다섯 가지 뿌리와 다섯 가지 줄기와 다섯 가지 가지[枝]와 다섯 가지 잎과 다섯 가지 꽃과 다섯 가지 열매이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씨앗인가?

날마다 수행하고 수행하기를 뜻에 두며, 그리고 내성(內性)을 맑게 하고, 사람과 사물을 동등하게 관하고, 해탈행을 구하여 익히며, 권변(權變)을 넓히는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씨앗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뿌리인가?

대자비로써 덕의 근본에 싫증내지 않고, 중생을 권하여 나아가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승에서 벗어나게 하며, 다른 도에 마음을 두게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뿌리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줄기인가?

권방편(權方便)을 깨닫고, 지혜바라밀이 끝이 없으며, 사람들을 인도하고, 정법을 지키고, 기쁨과 분노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줄기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가지[枝]인가?

보시바라밀이 무극하고, 지계바라밀이 무극하고, 인욕바라밀이 무극하고, 정진바라밀이 무극하고, 선정바라밀이 무극한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의 가지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잎인가?

계를 듣기를 즐기며 정진하고, 공적(空寂)한 곳에 처하기를 구하며, 언제나 출가하기를 뜻하며, 마음은 부처님의 종자에 편히 두고, 노니는 곳에 걸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잎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꽃인가?

문상(文相)을 고루 모두 갖추어 덕을 가득 쌓기 때문이며, 뭇 좋은 비단을 갖춰서 갖가지로 베풀기 때문이며, 7각재(覺財)를 갖추어 마음이 잡되지 않기 때문이며, 언변에 통달하여 법을 가로막지 않기 때문이며, 총지(總持)에 깊이 통달하여 듣고는 잊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꽃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열매인가?

 계과(戒果)에 올라 이르는 것이고, 도과(度果)를 이미 얻는 것이며, 연각과에 도달하는 것이고, 또한 보살의 불퇴전과를 얻는 것이며, 불법과(佛法果)를 얻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 열매이다.

용왕이여, 이것이 이른바 보살의 일곱 가지가 각각 다섯 가지로 있는 서른다섯 가지의 일이니, 이로써 보지수도보행(普智樹道寶行)을 넓히는 것이다. 이에 응하여 닦는 자는 어렵지 않게 부처를 이룰 것이다.”

부처님께서 용왕에게 이르셨다.

“어떤 보살이 이 보지심수(普智心樹)를 받아 지니어 깊고 미묘하게 중요한 행구(行句)를 밝히고자 한다면, 마땅히 더욱 부지런히 보지보수(普智寶樹)를 익혀야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나는 일체 모든 법의 공덕을 보았는데, 이 보배나무의 깊은 뜻에서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위없는 정진도의(正眞道意)를 발하는 것도 모두가 이 보지보수로 인하여 중요한 구절에 도달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용왕이여, 나무의 씨앗을 가려 심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매우 무성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그 보지심의 씨앗을 능히 받는 자로서 이와 같은 것을 이루고 나면 모든 부처님과 현성의 가장 으뜸이 되는 혜법(慧法)의 37품(品)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용왕이여, 보지의 소행공덕(所行功德)에 들어가고자 하고 법륜을 굴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것을 수지하여 정진하고 독송하며 전일한 마음으로 행을 닦아 널리 일체를 위하여 두루 전하고 펼쳐야 한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부지런히 이것을 배우고 익혀야 하느니라.”

장차 부처님께서 이런 보지심품의 법어를 말씀하실 때에 모든 용의 무리 가운데 7만 2천이 모두가 위없는 정진도의 뜻을 일으켰다.

용왕의 태자와 모든 채녀 1만 4천 명도 모두가 다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속히 얻었으며, 5천 보살은 과거세의 덕의 근본을 이어서 법인(法忍)을 모두 얻었다.

이때 아뇩달과 다른 용왕과 모든 권속들이 각자 신통력을 부려 허공으로 날아올라가서 향(香)의 구름을 일으켜 갑자기 두루 퍼뜨리자, 향긋한 향기와 가루전단이 잘 어울려 여래와 대중들의 모임 위에 가늘게 뿌려졌다.

또한 기묘한 보배가 서로 이어져 덮개가 이루어 왕사성 나라 전체를 두루 덮으니, 모두가 환희하면서 그 위에서 노래하기를, 지진․여래께서 복을 쌓으신 것이 태산 같으며 성스러운 덕이 무량한 것을 찬양하였다.

구름과 해가 죽 벌려져 머물며 각각 반신(半身)의 빛을 허공에 그리니, 모든 대중들 가운데 보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2. 청정도품(淸淨道品)

이때 용왕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희유하고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널리 중생을 위하여 도속(道俗)의 마음과 보지심행(普智心行)의 덕이 응하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또한 세존이시여, 여래․무착․평등․정각께서는 보살의 행수(行修)가 청순(淸純)에 응하며 명현(明賢)이 말미암는 바를 널리 펼쳐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도(道)의 청정함을 얻어서 그로 하여금 끝내 오래도록 티끌이 없고 그 속에서 게으르지 않으며 권태롭거나 물러서지 않고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를 얻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두루 갖출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께서 아뇩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기특하구나.

용왕이여, 부지런히 생각하고 기억하고 행하라.

나는 보살대사의 청정도품(淸淨道品)을 자세하게 말해 주리라.”

아뇩달이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다행히도 가르침을 입게 되었사오니 오직 원하건대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성존(聖尊)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셨다.

“보살행에는 여덟 가지 곧고 바른 길이 있으니 부지런히 받들고 지녀야 한다.

여덟 가지란 어떤 것인가? 6도무극도(度無極道), 은행(恩行)의 도(道), 다섯 가지 신통을 얻는 도, 네 가지 평등함을 행하는 도(道), 그리고 8정도(正道),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는 도[心等諸衆生道], 세 가지 해탈문의 도[三脫門道], 법인(法忍)에 들어가는 도이다. 용왕이여,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여덟 가지 바르게 행하는 도이다.

무엇을 보살의 도무극도(度無極道)라고 하는가?

도무극도라는 것은 모든 보시하는 대상에게 그 보지(普智)를 권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보시를 권하지 않고는 보지를 이루지 못하며, 그러한 행은 덕의 근본을 행하고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도무극(施度無極)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또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 보지심을 권하고 도움으로써 혜도무극(慧度無極)이라는 이름 등을 얻게 되니, 이것을 보살의 도무극도(度無極道)라고 한다.

은행도(恩行道)란 중생을 포용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보살이 법도(法度)를 널리 펼쳐 보임으로써 보살의 행은(行恩) 일체를 포용하고, 네 가지 은혜로써 덮고 널리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순조롭게 계(戒)의 교화를 받아들이게 하나니, 이것이 네 가지 은혜의 도[恩道]이다.

신족도(神足道)란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관하되 천안(天眼)으로 꿰뚫어보고 뭇 일체의 산 자와 죽은 자를 보며, 또한 시방의 모든 불세존께서 제자에게 둘러싸이신 것을 보니, 모두 보는 것을 이와 같이 하여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그 천안으로써 응당 채집해야 할 것을 채집하여 받는다.

또한 천이(天耳)로써 모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오로지 받아 행하며, 중생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있으나 모두 환히 깨달아 알고 완전히 알고 나서 그들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며, 숙명(宿命)을 알고 지난 세상에 지은 공덕을 잊지 않는다.

또한 신족통을 갖추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넘나들면서 응당 신족으로써 장차 제도함을 얻게 되는 자는 오로지 신족을 널리 펼쳐서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니, 이것이 신족응도(神足應道)이다.

또 무엇을 네 가지 평등한 행의 도(道)라고 하는가?

청정하게 수행하는 범지(梵志)와 여러 색상(色像)의 천자(天子)들이 그 뜻을 알아 행하고 그것에 따라 교화하며, 곧 자비로써 바로 기꺼이 보호하고 도를 건립하여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평등한 행의 도이다.

그 8정도(正道)는 두루 모두가 이것을 행하니, 성문이 말미암는 바이고 연각이 의지하는 바탕이며, 대승 또한 그러하다.

이것을 현성의 여덟 가지 곧고 바른 길이라고 한다.

무엇을 마음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도[心等諸衆生道]라고 하는가?

마땅히 행이 평등한 보살은 ‘이것을 위해서 일으키고 이것을 위해서 일으키지 않으며, 이것을 위해서 설해야만 하고 이것을 위해서는 응당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은 어질고 덕이 있으며 이것은 복인(福人)이 아니며, 이것은 다 상응하며 이것은 다시 상응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런 뜻을 다 없애니, 이것을 마음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도라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세 가지 해탈문도[三脫門道]라고 하는가?

공(空)으로써 모든 망견(妄見)을 끊게 되며, 무상(無相)으로써 뭇 염상(念想)의 상응과 불응(不應)을 없애고, 그 무원(無願)으로써 영원히 삼계를 여읠 수 있게 되니,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세 가지 해탈문도라고 한다.

무엇을 법인(法忍)의 도에 이른다고 하는가?

보살에게 절을 해서 보살의 자각행(自覺行)이 인(忍)에 응하고 모든 불세존으로부터 기별을 받은 자는 위없는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얻는다.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불기인도(不起忍道)라고 한다.

보살은 이 여덟 가지 곧고 바른 길을 이루어서 널리 교화하고 유포하여 권하고 이끄는 데 장애가 없느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이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모두 말씀하시자, 2만 4천의 하늘과 용과 사람이 모두 이 8도행(道行)에 곧 상응하였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보살은 이 여덟 가지 곧고 바른 도로써 평등하게 한 곳으로 돌아가니, 동등함이 없기 때문에 보살에 비할 자가 없다.

또한 그 짝이 없이 홀로 삼계를 걸어가 고요한 한 마음으로 혜행(慧行)을 이루게 되니, 마땅히 얻어진 것은 자기의 과보를 이루어 모든 법에 밝게 통달하나, 이는 본래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이른바 여래(如來)라고 한다.

용왕이여, 그리고 이것을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고 하니, 저 일체 모든 중생의 행할 바를 위하여 갖가지 설법을 하나, 이 중요한 설법은 동등하고 한결같아서 망령된 설법이 아닌 까닭에 미처 말로는 이룰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무엇을 도청정(道淸淨)이라 하는가?

도(道)에 티끌이 없고 먼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도는 허물이 없으니 본래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도는 어둠이 없으니 혜(慧)가 밝게 비추기 때문이다. 이 도는 집착함이 없으니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 도는 언제나 발생이 없으니 소멸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도는 영원히 근본이 없는 것과 같으니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는 번뇌와 더러움이 없으니 삼계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도는 적연(寂然)하니 범부의 행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는 이를 수 없으니 감[去]이 없기 때문이다.

도는 오는 곳이 없으니 어디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언제나 머묾이 없으니 모든 탐욕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는 처하는 곳이 없으니 뭇 소견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는 그것을 이기는 자가 없으니 모든 마(魔)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는 널리 두루 덮으니 외도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는 영원히 망령됨을 여의었으니 스스로 큰 것[大者]이기 때문이다.

도는 수용하는 바가 없으니 닦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도는 지극히 원대한 것이니 희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는 영원히 떠난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의 행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도

는 이루어낼 수 있으니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도는 순조롭고 쉬우니 수행하는 데 방해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도는 걸림이 없으니 평등하고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이다.

이 도는 티끌이 없으니 3독(毒)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 도는 청정하나니 끝내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서 보살도의 청정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보살이 청정한 도로 힘써 나아가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또한 응당 행한다면, 그는 법의 성품에서 이미 모두 청정해질 것이고, 나[我]의 성품이 청정해질 것이며, 또한 이것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법의 성품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곧 수(數)의 성품이 청정하다.

수의 성품이 청정한 까닭에 무수(無數)의 성품이 청정하며, 무수가 청정한 까닭에 삼계가 청정해진다.

삼계가 청정한 까닭에 눈의 인식[眼識]의 성품이 청정하고, 눈의 인식이 청정한 까닭에 뜻의 인식[意識]의 성품이 청정하다.

뜻의 식별이 청정한 까닭에 공의 성품[空性]이 청정해진다.

공의 성품이 청정한 까닭에 모든 법의 성품이 청정하다.

이 청정함으로써 곧 모든 법 등이 평등하고 청정한 것이 마치 허공과 같으니, 공이 평등하고 청정한 까닭에 중생이 청정해진다.

모든 청정함으로써 곧 둘이라는 분별도 없고 또한 둘에 집착하지도 않으니, 둘이 없이 청정한 까닭에 곧 도가 청정하다.

이로써 그것을 말하여 청정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뭇 생각도 생각 아님도 없는 도이니, 모든 생각이 전부 청정하여 열반과 같다.

그 영원히 없는 것을 일러서 생각 없음[無念]이라고 하니, 도(道)를 생각한 바도 없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또한 식념(識念)도 없다.

이 도는 도무지 심(心)ㆍ의(意)ㆍ식(識)의 행이 없으니 이를 일러서 청정도라고 하느니라.”

이 청정도품법을 말씀하셨을 때에 2만의 천인(天人)이 모두 법인(法忍)을 얻었다.

이때 아뇩달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세존이시여, 보살대사가 이 청정함을 닦아서 응당 도(道)로 향해야 합니까?”

성스런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용왕이여, 보살대사가 이 청정도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정행(淨行)을 환히 깨쳐야 한다.

또한 그 몸과 입과 뜻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몸의 청정함이라고 하는가?

나의 몸이 이미 공함으로써 모든 몸의 공함을 깨닫고, 몸의 고요함으로써 모든 몸의 고요함을 깨닫고, 몸의 완전한 벗어났음으로써 모든 몸의 벗어남을 깨닫고, 몸의 게으름으로써 모든 몸의 게으름을 깨닫고, 몸이 그림자와 같음을 깨달아 모든 몸의 그림자를 깨닫는다. 이것을 보살의 청정도라고 하느니라.”

또 말씀하셨다.

“몸이 청정하면 몸의 행은 생겨남이 없다.

그 나고 죽음이 있되, 생함이 없음을 관하면 그 생겨남이 없으므로 나고 죽음이 동등하다.

그리하여 그 몸을 알면 또한 몸의 행을 깨닫는 것이다.

무엇을 몸의 행이라고 하는가?

거래생법(去來生法)은 무진법(無盡法)에서 오고, 현재경법(現在景法)이 끝내 다함이 없는 법[終無盡法]이니, 그 다함이 없는 것을 곧 몸의 행이라고 한다.

또한 다시 몸의 법은 인연이 합한 것이니, 그 인연이란 것은 곧 공(空)․무상(無想)이며 담연(淡然)하고 무념(無念)하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이 상법(像法)을 관하면 이것을 몸의 청정함이라고 한다.

또 여래 몸의 무루(無漏)는 삼계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 몸의 무루를 관하면 여여(如如)하여 본래 없는 것과 같다.

이 무루의 몸은 삼계에 떨어지지 않으니, 그 무루의 몸은 능히 생사에 들어간다.

그 무루제(無漏際)는 권태롭거나 버리거나 물러나지 않으니, 무루의 몸으로써 색신을 나타내 보인다.

이와 같이 나타낸 뒤에 또한 멸신(滅身)의 법본(法本)을 생각하지 않는다.

여래의 몸이 청정한 것처럼 중생의 몸도 청정하고 나의 몸 또한 청정하고 동등하니, 본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행이 응당 청정해야 한다고 한다.

무엇을 말과 입이 응당 청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전부 청정하다. 왜냐하면 등상(等相)이기 때문이다.

범부와 저열한 사람들은 음성에 집착한다.

혹은 진리 아닌 것을 믿으며 근심하고 기뻐하며 덧없고 뒤바뀐 생각을 즐거워한다.

중생을 관찰함에 근본이 없고,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탐욕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문자와 주장과 소리는 모두 청정함에서 나오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고 또한 그것에 집착함도 없다.

이로써 일체의 말은 청정하다고 한다.

말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무엇을 말하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말하는가?

모든 티끌을 말하는가?

말이란 무착(無著)이다.

눈․귀․코․입․몸․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음색[風像]과 음향[風動]과 발성[聲出]은 인연이 모여서 소리를 있게 할 뿐이다.

말이 된 것은 메아리와 같으니 현명하거나 어리석은 이들의 말이 된 것은 모두 똑같이 메아리와 같다.

가히 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안에 머물지 않고 또한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그 중간에서 또한 가히 얻을 수 없어, 본래의 소념(所念) 및 소행(所行)에 머무르나, 말을 벗어난 자는 염상(念想)하는 바에 머무름도 없고 생각함도 없다.

용왕이여, 이것을 일러서 여래의 말의 내용과 중생의 모든 음성은 모두가 공하고 진실하지 않으며, 그 법을 버려야만 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용왕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하신 말씀도 이렇듯 진리가 아닙니까[不諦]?”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용왕이여, 여래는 심제(審諦)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진리이기 때문이니, 모든 법이 진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고 알고 이해한다. 또 용왕이여, 여래가 말한 글자와 음성은 모두가 중생의 모든 음성에 답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 또한 법륜을 굴려도 법의 뜻과 순서를 알지 못하나, 이 보응(報應)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이것을 행하게 한다.

이와 같이 뭇 괴로운 일이 멸함에 따라서 모든 법을 환히 깨쳐 이와 같이 그 행을 마치면, 중생의 음성은 더 이상 머무는 곳이 없이 모든 번뇌 속에서 언제나 한가롭고 고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집착과 무집착에 대해 말을 현출(現出)하고자 하여도 발성과 말의 내용과 강론(講論)과 담어(談語)가 법과 같으므로 어긋나거나 잘못되는 일이 없다.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입과 말이 청정하다고 한다.

무엇을 보살의 마음이 청정하다고 하는가?

그 마음의 근본은 더러움에 물들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저 객욕(客欲)과 구폐(垢蔽)를 깨닫는다고 말할지라도 보살은 그에 있어서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심권(心權)이 본래 스스로 깨끗한 것임을 밝게 안다.

또 그 마음의 행은 덕의 근본을 가리지 않으며, 저 덕의 근본은 마음의 근본을 환히 안다.

이 마음의 행으로써 자애로움이 중생에게 미치며, 저 공무아(空無我)의 사람을 환히 알아서, 그 마음의 덕의 근본은 도(道)를 관하는 것을 도와 그 도와 동등함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관하면, 이것을 마음의 청정함이라고 한다.

이 청정한 마음이 모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행하는 자와 함께 해도 영원히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태도와 행실을 함께 해도 모든 더러움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몸의 세 가지 청정함이라고 하느니라.”

이 청정도품의 법을 말씀하셨을 때에 3만의 보살은 보생처(補生處)에 빨리 올랐다.


3. 도무습품(道無習品)

“또다시 용왕이여, 그 보살은 이러한 청정한 마음에 올라타 욕계(欲界)에 태어나 형계(形界)에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하늘과 함께 뭇 범중(梵中)에 머물면서 상서롭고 평안하며 고요하여, 그 속에 있으면서 나아가거나 멈추는 데에 있어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없게 된다. 또 이 보살은 능히 모든 하늘을 항복시키고 권도방편으로써 교화한다. 혹은 형계에 태어나도 욕계에 머물면서 재가인과 같은 모습을 나타내며, 모든 중생과 함께 행동하고 앉거나 일어서며 피로해하지 않고 중생들에게 자만하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 모든 정(定)과 정수(正受)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두루 스스로 정(定)을 이루며, 정정(正定)을 따르기에 발생하는 것이 없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저 보살이 권도방편[權方便]을 가짐으로써 마음이 청정함에 상응하는 까닭이다.

만약 이와 같이 보살이 청정행을 깨달아 이해하려면 마땅히 청정을 닦은 후에 도를 익혀야 한다. 용왕이여,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익히지 않음으로써 도(道)의 익힘을 구하며, 습(習)․무습(無習)하지 않음으로써 도의 익힘을 생각하며, 또한 도를 바라는 익힘을 익히지 않는다. 또한 익힘을 구하지 않아 도의 익힘을 이해하여 깨쳐도 발생하는 것을 익히지 않고 도습을 바라며, 행멸(行滅)을 익히지 않고 도의 익힘을 이루며, 또한 익히기를 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의 익힘을 이루며, 습․무습하지 않고 도의 익힘을 이루며, 집사(執捨)를 익히지 않음으로써 도의 익힘을 익히며, 아(我)와 인(人)과 수명(壽命)이 없고, 몸이 무상(無常)하지 않으며, 몸의 성품이 괴롭지 않고, 몸에 아(我)가 있지 않고, 몸은 꿈이나 환(幻)․아지랑이․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지 않고, 또한 몸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이 아니며, 몸은 무욕법(無欲法)을 행하지 않고, 도를 익힌다.

요컨대 취지를 말하자면, 신성제정(身性諸情)은 일어날 때에 12인연(因緣)과 나아가 노사(老死)의 무욕의 법이 없다. 수(數)와 무수(無數)의 도(道)가 아닌 무이(無二)를 익히며, 속(俗)과 무속(無俗)이 아니고, 누(漏)와 무루(無漏)가 아니며, 범(犯)과 무범(無犯)이 아닌 불이(不二)의 익힘으로써 도습(道習)을 구한다. 또한 다시 모든 법의 무습(無習)의 익힘은 바로 도의 무습이며, 이것을 도의 습․불습의 익힘이라고 이름한다. 공과 같이 무습은 또한 무습이 아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익혀야만 하나니, 이 도는 무습(無習)․무상(無相)․무원(無願)이다. 그 익힘은 익힘을 짓지 않고 또한 무습이 아니다. 마땅히 이와 같은 습을 지어야만 하니, 짝[偶]과 짝 아님이 없고 모든 법은 무주(無住)인 것이다. 부지런히 익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곧 도습(道習)에 응할 것이니라.”

불세존께서 이러한 청정행의 무소습도품(無所習道品)을 말씀하시자, 그때 3만 2천의 하늘 및 세간 사람들이 모두 다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이 생한 법의 즐거움의 인(忍)을 재빨리 얻었다. 또 5만의 천인(天人) 가운데 지난 세상에 보살에 대해서 마음을 내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위없는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일으켰고, 7만의 보살들은 법인(法忍)을 빨리 얻었다.

이때 모든 이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곳에 있는 족성자(族姓子)와 족성녀(族姓女)로서 이 청정도품무습(淸淨道品無習)의 법을 설하신 것을 빨리 듣는 자나, 그것을 듣고 나서 마음에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고 버리거나 물러서지 않는 자는, 모두가 바로 여래의 위없는 정진도의 뜻을 받아 익히고 모든 부처님께서 굴리시는 법륜을 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이들 보살은 모두가 위없는 정진도의 뜻을 얻어서 한량없는 사람을 위해 이 법을 널리 펼칩니다. 또한 다시 장차 사자좌에 앉아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의 인간들 중에서 지극히 사자후하는 것이 지금 여래의 사자후와 같이 모든 마의 무리를 항복시키고 외도를 꿇어 엎드리게 하며, 법의 깃발을 높이 꽂고 법의 불빛을 번쩍이며, 우레와 같은 법의 북을 울린 뒤에 능히 법의 비를 내리게 하소서.”

그러자 세존께서는 모든 하늘과 용의 신 무리와 사람과 비인(非人)과 네 가지 무리들이 그 지극한 설법을 듣고서 기쁨에 젖어들지 않는 이가 없음을 보시고, 이에 여래께서는 아뇩달을 위하여 거듭 다시 널리 게송으로 설하셨다.


도(道)는 익혀도 얻을 수 없고

곧 익힌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니

그 도의 행은 이와 같아서

습념(習念)의 행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습도(習道)를 구하기를 바라지 말며

모든 다른 생각도 전부 없애야 한다.

그 도는 도무지 익힐 것이 없으니

청정하기가 밝은 달과 유사하다.


만일 익히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익힌 곳이 없으니 또한 익힘이 없다.

이미 익히는 곳이 없음을 넘어선 뒤에는

가장 으뜸인 도를 이룰 수 있다.


도는 무아(無我)의 생각이며

또한 공습(空習)과 함께 하지 않으며

이 도는 둘이 있지 않아서

안락하고 명쾌하면서 위없으니 

 

명(命)과 수(壽) 또한 이와 같아서

인(人)과 말이 없고

그 도는 인(人)이 없고

명(命)도 없으며 또한 머묾도 없다.


모든 도를 익히는 자는

공(空)에 머물고자 하지만

이것은 성스러운 도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며

이것은 도습(道習)에 상응하지 않는다.


도에는 또한 공이 있지 않으며

유습(有習)을 버리는 까닭에

본래와 같이 동일한 상(相)으로써

영원히 공은 공에 대해 공하다.


도는 무기상(無起相)이며

또한 멸상(滅相)이 있지 않고

생기가 없고 또한 멸함도 없어

그것은 모두 도습(道習)이다.


나의 음성은 허깨비와 같으니

해상(解想)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며

생각을 갖는 것은 익힐 것을 행한다.


도는 마땅히 어느 곳으로부터 생하였으며

도는 다 세속을 넘어선 것인가?

거기에 신습(身習)이 있지 않으며,

또한 멸신행(滅身行)이 없고,

가히 습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신근(身根)의 집이니

본래 없어 널리 펼치는 바가 없으며

그것은 다른 구함이 있지 않으니

본래 얻을 수 없는 것도 없다.


그 익힘은 도이니

마땅히 여여하며 본래 없어야 한다.

여래께서는 본래 근본이 없음을 아시니

이것을 도습에 응한다고 말한다.


모든 법은 본래 없어

허깨비와 같음을 깨달아

해행(解行)하여 이것에 이르러

곧 도습에 응한다.


만일 그 도에 이르지 못하면

짓는 바는 부주(不住)와 같이

능히 그 행을 멈추지 못하고

불법(佛法)은 도에 말미암지 않는다.


익히는 바의 도와

무습이 같다면,

펼치는 바가 이와 같고

이로써 본래 없음에 머무는 것이 된다.


제한이 있는 다른 도는

낮은 승(乘)이 의지하는 바이나

이것은 위없는 도이므로

본승(本乘)이 말미암는 바이다.


이 도를 일으키는 모든 자는

이로써 이루되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곧 행덕(行德)을 나타내며

응당 도를 수습할 만하다.


도는 바르며 험난하지 않고

단정하고 곧으며 평탄하니

부지런히 이 도를 가까이하고 행하면

영원히 온갖 삿된 적(迹)을 떠난다.


마치 그대 용왕이

스스로 그 궁전에 머물면서

머무는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비를 내려 큰 바다를 채우는 것처럼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도를 수습함은 행하는 바와 같아

법신(法身)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능히 지혜의 바다를 채운다.


또 그대 용왕이

대지에 있으면서

비로써 두루 충족시키지만

그 몸은 젖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덕도 이와 같아서

이러한 익히는 바를 향하며

법으로써 중생을 만족시켜도

그 안에서는 집착하는 바가 없다.


마치 아뇩달용왕이

크게 신통력이 있으며

뛰어난 도의 덕도 그와 같아서

두루 시방이 감동하는 것처럼


중생이 삿된 길에 떨어져

온갖 집착의 견해에 빠지고 받아들이나

그러한 이 도에 머무는 자는

장차 수순하여 무위(無爲)로 건너게 될 것이며,


이 도에 이미 머무르면

보살은 커다란 칭호를 이루니

능히 악마 파순과

삿된 외도행자의 항복을 받게 된다.


도를 이루는 것이 그 여여함과 같고

여도(女道)는 능히 움직일 수 없으며

모든 속법(俗法)을 뛰어넘으니

그 행은 연꽃에 비유된다.


도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없으니

이러한 행으로 머물며

수천의 모든 중생은

도(道)로써 교화하여 제도하니


이 도에 언제나 머묾으로써

5순(旬)을 이룰 수 있다.

신족(神足)은 모두를 감동시키고

중생을 위하여 널리 법을 설하며


모든 일이 전부 청정해지며

몸과 입과 뜻이

마땅히 현성(賢聖)의 도를 원해야 한다.


인성(人性)은 인식할 수 없으니

인행(忍行)은 집착함이 없으며

가서 도달할 곳이니

이곳이 여래가 있는 곳이다.


모든 중생을 이끌며,

생사(生死)도 지귀(至歸)함에서 생사하니

이곳이 바로 여래이다.

그 가는 것이 이루는 것과 비슷하지만

이것은 이를 바가 없는 것이다.


중생이 가히 이를 수 있는 곳은

마땅히 그 위의 곳을 생각해야 하고

으뜸가는 부처의 도를 배우고

환법(幻法)으로써 노닐고 즐겨야 한다.


이러한 이 습도(習道)를 짓는 것은

홍도(弘道)의 소습(所習)이다.

저 뭇 덕의(德儀)의 행은

모든 부처가 찬탄하는 바이다.


그 덕은 끝이 없어

끝내 지극히 다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도를 익힌다면

익히지 않음 또한 머묾이 없고


그곳은 악마의 증오가 없고

무리는 모두 집착 없는 행을 한다.

이렇게 이 도를 따른다면

일어나지 않고 또한 소멸하지 않으며



이미 뜻을 얻어서 행할 것을 뜻한다면

널리 많이 말하여 총체적으로 지니며

자혜로운 보시와 지계와 인욕이

마침내 바다와 같이 불어날 것이다.


몸과 입의 티끌이 없고

마음이 순결하고 청정하며

티끌을 없애고 영원히 허물없다.


이러한 도를 닦는 자는

지달(知達)에 오르는 것과 같고

행하고 익히는 바가 깊고 미묘하며,

움직이기 어려운 지혜[惠]는 무즉(無卽)하니,

이 도를 지키고 익혀야 한다


그것은 모든 최정각(最正覺)으로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 또한 이와 같이

도를 이루어 세간의 귀의처가 될 것이다.


그가 이미 온갖 어려움을 여읜 뒤에는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만나도

영원히 모두 불자가 될 것이다.


이 법을 듣는 자여,

장하구나, 모든 중생은

지극한 선으로써 이 법을 듣고

진실로 여래를 받들어야 하니


이 경을 즐기는 자

이 도를 깨우친 자는

능히 모든 유정의 습관을 끊으며

덕을 이어서 뭇 상(相)을 보고

 

불설홍도광현삼매경 제2권

축법호 한역

이미령 번역


4. 청여래품(請如來品)

그러자 아뇩달은 자신의 모든 대중 권속과 함께 세존께 머리 숙여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절을 올린 뒤에 부처님께 여쭈었다.

“청하오니, 천존(天尊)께서는 신광(神光)을 두루 드리우셔서 무열(無熱)의 큰 연못 속으로 왕림해 주소서. 저희는 석 달 동안 내내 즐겁게 성존(聖尊)과 모든 신통의 과보를 이루신 보살과 뛰어난 불제자께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이 청(請)을 받아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들이 지진․정각 을 모시고 공양 올리는 것이 여래의(如來儀)에 응하는 것이 아님이 없으나, 바라건대 빨리 듣고 적정상화(寂靜上化)를 입는 길은 오직 이 법으로 공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이와 같이 상법(像法)을 듣고, 언제나 환희하고 기뻐하는 것을 원하여, 이에 곧 삼보를 받들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다시 두 달의 기간 동안 공양하기를 청하였으나 여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다시 한 달을 머물러 주시도록 청하였으나 세존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고, 보름을 청하자 세존께서는 묵묵히 받아들이셨다. 이에 용왕은 자신의 모든 권속들과 함께 세존께서 청을 받아들이신 것을 알고 기쁨에 겨워하면서 마침내 선심(善心)을 발하였다. 그리고는 부처님을 에워싸고 세 번을 돌고 난 뒤에 우레와 구름을 일으켜 가는 비를 내려 두루 천하를 적시고 홀연히 궁중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아뇩달이 정전(正殿)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나서 모든 5백 명의 장자를 순식간에 불러 모았는데, 그 이름은 선아(善牙)․선시(善施)․선의(善意)․선명(善明)․능멸(能滅)․적상(寂相)․감동(感動)․대위(大威)․감위(甘威)․감권(甘權)․감덕(甘德)․보칭(普稱)․위용(威勇)․지밀(持蜜)․인력(忍力)․행상(行祥) 등이었다. 이와 같은 5백 명의 장자들은 지난 세상에 위없는 정진도(正眞道)를 심은 자들이었다. 왕이 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장자들이여, 나는 지금 여래․무착․평등․정각 과 보살대중과 여러 제자들 모두에게 보름 동안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였는데, 세존 정각께서 대자비를 내리시어 널리 가련하게 여기셔서 그 청을 받아주셨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함께 그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서로 격려하고 부지런히 하여서 세존․지진․여래께 경의를 더욱 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무상(無常)을 생각하고 마땅히 각각 고요함에 머물며 겸손하고 삼가며 공손하고 정숙하게 머물면서 여래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 위의(威儀)는 마땅히 음심이나 탐욕의 뜻과 희롱거리 등을 버리며, 탐욕과 성냄을 버리고, 색․소리․냄새․맛․촉감에 물드는 것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탐욕이 없으시며 그러면서도 두루 평안하시며, 인자하고 우아하며 진리를 환히 깨치셨으며, 평안하고 고요하시며, 모든 덕을 고루 나타내시며 시종들이 에워싸고 있어 그 의용(儀容)이 한량없으시니, 이 모두가 부처님들의 참되고 바른 요계(要戒)를 이으신 까닭이다. 그대들은 보름 동안 궁 안에 들어올 수 없으며 마땅히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 또한 다시 여래께서 널리 법을 강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곳의 신통력 있는 보살과 제석천․범(梵)․지세(持世)․숙정(宿淨) 천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생각하여 널리 미묘한 보배를 베풀고 빛을 내고 화려하게 장식하되 삼가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그리하여 모든 회중(會衆)들로 하여금 변화된 모습을 보고서 기쁨에 겹게 하라. 이것은 곧 진실로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되느니라.”

이렇게 아뇩달은 모두에게 약속과 명을 내린 뒤에 순식간에 여래를 위하여 설산 아래 무열지(無熱池) 속에 세존을 위하여 티끌 없이 깨끗한 유리로 만든 자리를 만들어내 7백 유순에 이르도록 특이하고 기묘하게 두루 자리 잡도록 하였으며, 8만 4천의 온갖 보배나무를 두루 심고 뭇 진귀한 보배를 드리워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빛나는 꽃이 우거졌으며 화려한 백 가지 색깔이 눈부시고 그 속에서는 아름다운 향이 풍겨났다. 온갖 나무 사이에는 8만 4천의 7보당(寶堂)을 만들어 내었는데, 뭇 진귀한 보배에서 뿜어내는 광채는 너무나 훌륭하여 비할 데가 없었다. 10만이나 되는 교로(交露)1)의 아름다운 장막을 드리웠으며, 나아가 기이하고 미묘한 붉은 진주를 위에서 아래까지 꿰었다. 모든 집 위에는 사자좌가 있었는데, 8만 4천 개는 모두 크고 높고 넓었으며, 값을 알 수 없는 미묘하고 훌륭한 솜을 상과 자리에 깔았고, 보분(寶分)은 온갖 교로를 드리웠으며 온갖 보배로 장식하였다. 집 위에는 용의 채녀가 각각 2천 명 있었는데, 그 미모가 아름다웠고 자태가 아름답기 한량없었다. 얼굴은 아름다웠으며 입에서는 훈향(熏香)이 풍겼다. 손에는 온갖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을 갖고 있었으며, 기악을 연주하면서 부처님의 덕을 노래하여 회중에게 기쁨을 주었다. 위로 허공에서 커다란 보배 덮개를 만들었는데, 천 유순을 두루 하여 모임을 덮었으며, 진기한 수술이 달린 보배 덮개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빛깔이 있었다. 고운 비단 깃발을 매달았는데 비단 깃발 사이마다 온갖 보배 구슬이 매달려서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으니, 그 소리는 온갖 악기로는 미칠 수 없었다.

맛난 음식을 베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이런 신통변화를 다 끝낸 뒤에 그 권속들과 함께 공손하게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세존을 우러러 뵈면서 그 청하는 뜻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혜(慧)를 간직하시고 지(知)는 풍부하시며 변덕(辯德)을 쌓으셨으며

혜에 통달하시어 집착이 없으시며 밝게 중생을 인도하시며

혜가 널리 두루 미침에 장애가 없고

혜가 으뜸가며 가장 위력 있으시어 신광(神光)을 내리시네. 

 

1) 구슬을 서로 엇갈리게 하여 만든 장막으로 그 모양이 이슬이 드리워진 것처럼 된 것을 말한다.


혜해심(慧解心)으로 행하시는 유일한 대인(大仁)이시여,

마땅히 시방 중생들을 관찰하시매

가장 으뜸가는 신존(神尊)께서는 저의 청을 받아주시어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소서.


만족함을 알고 탐욕이 없으며 이양(易養)하시고

상서롭고 복되며 진리를 깊이 깨치신 성스러운 도사(導師)시여,

선을 행하고 믿음이 질박한 대중의 뜻을 아시어

시절이 이르렀으니 세존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그 덕(德)이 두루 알려졌으며 행(行)은 왕과 동등하며

청하지 않아도 벗이 되어 두루 생각을 일으키시며

지극히 인자하고 청정하시니 허공보다 더한 분이시여,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끝내었으니 신존(神尊)께서는 임하여 주소서.


위력은 시방을 다스리고 용맹하게 세상을 지니시며

불사(佛事)의 열여덟 가지는 고루 갖추고 계시며

제일 우두머리가 되어 중생을 비용(悲踊)의 행으로 제도하시는 분이시여.

저 무리들과 함께 이곳으로 이르러 주소서.


몸은 미묘하고 단정하며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고

신기하고 훌륭한 갖가지 꽃수가 놓여있으며

그 뜻은 즐겁고 기쁨에 차서 은혜롭게 법을 베푸시는

대인(大仁)이시여, 위로 이끌어 주실 때가 되었음을 살피옵소서.


범성(梵聲)은 청정하여 우레처럼 진동하고

난새와 봉황처럼 구슬프며 사자처럼 걸으시며

갖추신 미묘한 음성으로 모든 국토를 기쁘게 하시어

중생들의 마음이 기쁨에 넘쳐나길 바라나니 때를 돌아보소서.


불국토 삼천대천세계는 견줄 것이 없으니

누가 능히 여래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오.

성존(聖尊)께서 밝게 중생의 행을 관하시어

닦는 바가 항상 응하시나니 이곳으로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때를 아시어 널리 응하시되 권화(權化)를 품으시고

중생에게 성스러운 맹세가 있음을 환히 아시며

상심(詳審)의 행목(行目)은 밝고 좋으며

위신(威神) 있고 검족(撿足)하시니, 원하옵건대 광명을 되돌리소서.


중생은 간절히 두루 부처님을 우러르고 있나니

10력(力)의 위세를 지니셔도 교만하지 않으시며

대인(大仁)의 덕은 높고 용맹하시니 과보가

성성(聖性)에 두루 미치어 이곳에 유행(遊行)하소서.


부끄러움과 길상함과 족함을 갖추시어 덕이 가장 으뜸가시니

구제하여 길러내심이 두루 하여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시며

스승과 벗은 비할 바가 없으며 대중을 끌어안으시며

용 수억 마리를 교화하여 대비를 일으키셨습니다.


위력과 용맹으로 세상을 두루 자비롭게 구제하시니

온갖 행에 통달하여 아시어 응당 뜻과 같으시며

두루 펼치고 나타내 보이시는 유일한 천존(天尊)이시여.

신령스런 발을 가볍게 드시어 지금 이곳에 이르소서.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뇩달이 청한 시기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아시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옷을 입고 발우를 들어라. 그리고 절을 지킬 사람을 선출하여라. 무열(無熱)용왕이 멀리서 꿇어 앉아 때를 알리고 있다. 응당 보름 동안 공양을 받을 것이니. 이제 그곳으로 나아가리라.”

이때 8만 4천의 보살은 모두가 큰 신통력의 덕을 고루 갖추었고 제자들 2천 명 또한 신족통의 우두머리였는데, 그들은 세존을 앞뒤로 에워싸고 지진(至眞)․여래(如來) 를 인도하였다. 영취산으로부터 문득 허공을 날아올라 신통력으로 나아갔는데, 그 색상(色像)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천 가지의 광명을 놓는 것처럼 삼천대천의 경계를 고루 비추어 두루 널리 빛을 발하였다. 모든 욕계와 색계의 하늘들이 모두 세존을 뵙고 무수하게 빛을 놓으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서로 말하였다.

“신존(神尊)께서 저 무열용왕의 처소에 이르셔서 장차 법의 교화를 일으키셔서 한없이 지극하게 법을 연설하려고 하신다. 그리고 여래께서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이셔서 보름 동안 많은 하늘의 수백천의 무리들이 세존을 뵙고 법을 들을 수 있게 하려 하신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시 무열용왕이 마련한 곳의 장식들과 신통변화를 두루 살피고 세존께서 그곳에 이르러 머무시도록 하였다. 그러자 천자들이 각기 여래를 공양하고자 마음을 내었는데, 어떤 이는 소원하며 꽃을 흩뿌리고 어떤 이는 빼어난 향을 뿌렸으며 어떤 이는 하늘의 음악으로 부처님의 덕을 노래하였다. 또 어떤 이는 깃발과 일산과 비단 우산을 내걸고 여래를 따르고자 하였다. 세존의 몸빛은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났으니, 그 밝기란 해와 달이나 별 또는 정색정(淨色淨)과 모든 하늘의 빛을 뛰어넘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위력은 한량없이 신령스럽게 빛났으며, 근정(根定)은 고요하고 행(行)은 상서롭고 편안하게 노니셨다. 제석과 범천과 사천왕(四天王)이 갖가지 변화로 감응하여 여래를 받들어 공경하며 뒤를 따르면서 모셨다. 그런데 성존(聖尊)께서는 설산(雪山) 아래에 도착하시자 오른쪽에서 멈추신 뒤에 현자 대목련(大目連)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무열용왕의 궁전에 가서 여래가 이미 도착하여 장차 들어가고자 한다고 알려라.”

그러자 현자 대목건련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홀연히 무열대지(無熱大池)로 가서 땅에서 일곱 길[丈]의 높은 허공에 모습을 나타내었는데, 그의 형상은 금시조왕(金翅鳥王)과 같았다. 그는 아뇩달 용왕의 궁전 위에 서서 왕에게 말하였다.

“여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에 저 모든 용의 무리와 채녀들은 놀라서 아연해하며 겁에 질려 옷의 털이 곧추서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그들은 네 곳의 창고로 숨어들면서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연못에는 지금까지 금시조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이곳에 왔을까?”

그러자 아뇩달이 모든 궁궐의 사람과 태자와 권속들에게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너희들은 안심하라.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금시조는 현자 대목련이시다. 여래의 심부름을 받고 신통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현자 목련은 그들에게 알리고 나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아뇩달은 곧 모든 자식들과 신하와 백성과 부인과 채녀 등, 궁궐의 모든 자들과 함께 그들에게 둘러 싸여서 각기 빼어난 꽃과 아름다운 가루향과 온갖 바르는 향과 깃발과 일산과 비단 일산을 바치고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세존을 맞이하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과 제자들과 하늘과 용에게 에워싸여서 모두 함께 앞으로 나아가 무열용왕이 마련해 놓은 높고 넓은 자리에 이르렀다. 여래께서 도착하신 뒤에 곧 높게 마련된 사자좌에 나아가시자 보살이 그 뒤를 이었고, 그런 연후에 제자와 모든 무리들이 다 앉았다. 그러자 용왕은 세존과 모든 보살과 제자 대중들이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나서 마음에 한량없는 큰 기쁨을 일으켰다. 곧이어 그 무리들이 손으로 어림잡아 헤아리니 마련된 찬거리들은 세간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감미롭고 기름진 것이었고, 널리 하늘의 맛과 갖가지 반찬을 두루 갖춘 것이었다. 그것을 불보살과 제자와 모든 대중들에게 공양하자, 그들은 모두 만족하게 여겼다. 세존과 보살과 모든 제자들이 공양을 마치고서 각자 발우를 씻고 나자 대중들이 모두 마쳤음을 살폈다.

이때 아뇩달이 곧 여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정오가 지난 뒤에 곧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단정하게 앉으셔서 설법하셨다.

모든 모여든 무리들은 천 유순에 가득 찼으니, 다른 곳으로부터 지상에 이르도록 그 중간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하늘과 응과 귀신과 인비인(人非人)들은 모두 지진․정각을 에워쌌으며, 모든 모여든 자는 각기 마음에 큰 기쁨을 품었다.


5. 무욕행품(無欲行品)

이때 용왕이 기쁜 얼굴로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오직 원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곳에 모인 무리들을 위하여 응당 법을 설해주소서. 그리하여 저 모든 이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나고 여의게 하시며, 영원히 5음(陰)의 모든 괴로움과 더러움과 티끌과 어둠과 세속의 일에 시달리는 행을 없애게 하시며, 영원히 3독(毒)과 의결(意結)의 어둠을 없애게 하시며, 나아가 용의 무리들이 삿된 어둠을 버리고 그 마음과 뜻을 다스려 제어할 수 있게 되어 널리 지극한 선을 이루고 기쁨에 넘치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깊이 보살을 행한 후에 여래와 같이 현재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언제나 저희들로 하여금 머물고 있는 나라나 고을에서 바른 법을 수호하여 지니게 하소서.”

그러자 세존께서 용왕을 찬탄하셨다.

“참으로 장하구나. 아뇩달왕이여, 그 뜻을 잘 듣고 부지런히 생각하며 널리 퍼뜨려라. 나는 마땅히 널리 설하여 이 모인 대중으로 하여금 죄의 통근(痛根)을 멀리 벗어나게 하고, 잡상(雜想)의 의식과 뜻의 의심을 뽑아내게 하여 보지(普智)를 깨달아 삼계(三界)를 벗어나 노닐게 하리라.”

이때 용왕이 말하였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널리 설하시는 것을 즐겨 듣고서 마땅히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그러자 성존(聖尊)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법으로써 보살을 응당 행하는 자는 하늘과 세상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경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하나인가? 뜻을 두어 깊은 법을 수행함으로써 무욕(無欲)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깊은 법을 행하되 무욕을 행한다고 하는 것인가? 용왕이여, 이와 같이 보살이 인연의 없음[無]에 의지하면 따라서 두 가지 견해의 경계를 떠난다. 있고 없음을 아는 자는 바로 모든 법을 본다. 인연에 집착함으로써 연생(緣生)에 말미암지 않는 법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인연에 의지한다. 이것은 연에 의지하지 않는다. 저것은 마(魔)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 연에 의지한다면 그것을 나[吾]라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아(我)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 연에 의지하는 중에는 나와 나의 것이 없나니, 연에 의지하면 주재(主宰)함도 없고 또한 집착하여 지키는 것도 없다. 그 연(緣)에 의지하여 기생(起生)을 요해(了解)하여 재빨리 네 가지 의지하는 생각을 쉽게 이룰 수 있게 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지극한 뜻[至義]에 의지하며 문장의 수식에 의지하지 않고, 혜행(慧行)에 의지하며 식념(識念)에 의지하지 않으며, 의경(義經)에 의지하고 반연(攀緣)에 의지하지 않으며, 법을 생각함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뜻[義]이라 하고 혜(慧)라 하는가? 어떤 것이 순의(順義)이며 어떤 것이 법을 생각하는 것인가? 뜻이란, 공의 뜻(空義)은 허망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무상(無相)의 뜻은 염식(念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무원(無願)의 뜻은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무수(無數)의 뜻은 수(數)에 집작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뜻이란, 법(法)과 비법(非法)에 있어서 둘이 없는 것이다. 음성은 얻을 수 없고, 염상(念想)에는 기억이 없으며, 법처(法處)는 머묾이 없다. 인(人)이 없기 때문에 명(命)과 수(壽)와 말과 소리가 거짓이며 있지 않다.

또다시 뜻이란, 그 법의 뜻은 무욕(無欲)의 뜻이다. 무엇을 일러서 보살의 법의 뜻이라고 하는가? 눈과 색이 없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의 뜻이 없는 것이다. 색의 뜻이 생하지 않고 색의 뜻이 멸하지 않으며, 수․상․행․식의 뜻이 없고, 또한 식행(識行)의 뜻이 생멸(生滅)하지 않고, 또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뜻이 아니며, 또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뜻이 생멸하지 않고, 또한 아(我)의 뜻이 없고, 또한 아견에 집착하여 들어가는 뜻이 없고, 인(人)의 뜻이 없으며, 또한 인견(人見)에 집착하여 들어간다는 뜻이 없고, 또한 유불신(有佛身)에 집착하여 들어가는 뜻이 없고, 또한 법과 문자에 집착하여 들어간다는 뜻이 없고, 수(數)와 계회(計會)에 집착하여 들어간다는 뜻이 없고, 또다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에 집착한다는 뜻이 없으며, 일체 모든 법의 뜻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살이 법의 뜻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 뜻에 따른다면 물러남이 없으며, 이것을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혜[慧]라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고(苦)가 발생하지 않는 지혜, 무념(無念)을 배우는 지혜, 진력하여 모두 다하는 지혜, 도(道)에 뜻이 없는 지혜, 음(陰)과 환법(幻法)의 모든 성품 속에서 법성이 훼손되지 않는 지혜, 모든 유정[情]에 대하여 공한 지혜, 모든 법을 깨달아 들어가며 중생의 근기에 밝아서 두루 만족시키는 지혜이니, 뜻을 두어도 망령됨이 없고 여러 정의(正意)와 불의(不意)에 대해 생각이 없으며, 모든 단(斷)에 있어서는 마음[意]이 선(善)이나 불선(不善)에서 동등하며, 그 신족(神足)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지혜를 세운다. 또한 모든 근(根)에 있어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아는 지혜, 모든 각의(覺意)에 대해서 모든 법을 깨닫는 지혜, 그리고 모든 역(力)에 있어서 이미 항조(降調)하는 지혜, 도(道)가 무수히 적멸하는 지혜, 법을 관별(觀別)하는 지혜, 비롯하지만 생하지 않는 지혜, 오지만 이르지 않는 지혜, 중간에 머물지 않는 지혜, 몸에 있어서 상(像)인 지혜, 메아리로써 말하는 지혜, 심법(心法)이 환(幻)인 지혜이니, 이것을 보살의 지혜를 밝혀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무엇을 순도의경(順導義經)이라고 하는가? 이러한 인연에 따라서 일어나면 그런 것은 어리석음을 멸하고, 늙음과 죽음과 무아를 멸하여, 아(我)와 인(人)과 명(命)과 수(壽)가 없는 속에서 모든 중생을 깊이 깨달으니, 만일 여래아(如來我)가 모두 참다운 법이 아니면 3해탈문(解脫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3세(世)에서 3무착(無著)을 구하니, 이른바 모든 법에서 전혀 생함이 없다는 것을 보고 나서, 이미 아는 자는 마찬가지로 세속의 정태(情態)를 멸하고 벗어남을 얻는다. 보살은 지혜도무극(智慧度無極)에 이르러서 모든 의념(意念)에 의혹이 없어지며 응당 이러한 행에 들어가니, 이것을 순의(順義)라고 한다. 또한 가고 이르는 바가 없으며 또한 따라서 옴이 없고 열반무위(涅槃無爲)는 가서 이름이 없으니, 이것을 순의(順義)라고 한다.

무엇을 여법(如法)이라고 하는가? 만일 모든 여래께서는 세상에 나거나 나지 않거나 법신(法身)은 항상 머무니, 이것을 여래라고 한다. 여여(如如)하여 본래 없어 불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둘이 아니고 둘이 없어서 진제법성(眞際法性)이니, 이것을 여법이라고 한다. 또한 행보(行報)를 훼손하지 않고 보법(報法)을 행하지 않으니, 이것을 여법이라고 한다. 대승은 6도무극(度無極)에서 연유한 것이다. 연각승[緣一覺乘]은 인연에 따라서 벗어나며, 성문승은 음성(音聲)에 의하여 벗어나니, 이것을 여법이라고 한다. 보시는 큰 복을 이루고, 지계는 생천(生天)을 얻으며, 널리 들은 것과 크게 지혜로움과 정념(定念)은 해탈을 이루니, 이것을 여법이라고 한다. 행을 따라서 닦지 않는 자는 나고 죽음을 일으키며, 행이 순수함에 도달하여 무위(無爲)를 세우면 여법이라고 한다. 어리석음은 욕력(欲力) 때문이며 지(智)는 혜력(慧力)이니, 이것을 여법이라고 한다.

저 일체법은 모두가 법성에 의지하니, 용왕이여, 이와 같이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자는 곧 응당 네 가지 의지하는 생각을 얻을 것이다. 인연에 의지하면 그는 곧 모든 것을 끊어 유무(有無)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리켜서 인연을 보고 일으키는 자는 바로 모든 법을 본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을 보는 자는 바로 여래를 본다. 그 까닭은 무슨 인연인가? 용왕이여, 일어남[起]과 일어나지 않음[無起]에 대해 동등하면, 법과 비법(非法)에 있어서 동등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또 여래는 또한 인연의 일어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또한 일으킴의 법이 있지 않아서 가히 얻을 수 없으니, 그 법을 깨닫는 자는 바로 여래이다. 인연의 일으킴을 혜안(慧眼)으로써 보니, 혜안으로 보는 것은 곧 모든 법이요, 모든 법을 보는 자는 바로 여래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인연의 일으킴을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그 법을 보는 자는 바로 여래를 본다’고 한다. 또한 여래는 법으로써 법을 본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만일 이 법행(法行)으로써 해탈에 상응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무욕(無欲)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용왕이여, 무욕보살은 욕습(欲習)을 짓지 않는다. 현성(賢聖)을 기뻐하고 즐기며 현성이 아닌 것은 버린다. 현성의 종자를 부지런히 사모하고 일으키며 보호하니, 모든 혜를 널리 모아서 법을 보호하며 널리 들음을 닦고 뜻을 심어서 잊지 않는다. 계(戒)의 몸을 버리지 않고 지(智)의 몸을 치우치지 않으며 정(定)의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그 혜(慧)의 몸에 있어서 능히 견고하게 머물게 되며 혜견(慧見)을 벗어나는 몸은 굳고 견고하며 굴리기 어렵나니, 혜견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무욕보살은 무수한 부처님의 정법도의(正法度義)를 얻고 또한 무수한 모든 부처님의 요혜(要慧)를 갖추고 또한 과보로서 다함없는 모든 부처님의 말솜씨를 이루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신족통을 얻고, 셀 수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의 권해(權解)를 이룸으로써 널리 무량한 중생의 행에 들어가며, 무수한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벗어나고 노닐며, 백천 여래를 봄으로써 무수한 모든 법을 들을 수 있게 되며, 무수한 의(義)를 얻고 무수한 지혜를 얻으며 무수한 행을 밝히며, 무수한 중생을 제도한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무욕보살은 언제나 청정에 상응하여 온갖 더러움을 털어 없애며, 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삼계에 자유로우며 집착하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무욕은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생기며 세 가지 일은 마음으로부터 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탐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또한 갈애[愛]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또한 일으킴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또다시 세 가지 발생이 있으니, 기생(起生)을 관하며, 또 행하는 바를 관하며, 마음에 처함이 없음[無處]을 관하는 것이다.

또한 다시 세 가지 발생이 있다. 적멸하여 오로지하며, 관(觀)을 밝게 깨달으며, 여법하게 행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 발생이 있다. 덕을 갖추고 인자하게 다스림으로써 고요함을 이루어 부지런히 행함으로부터 생하는 것이다. 또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행을 따라서 곧고 아첨하지 않으며, 어질고 자애로우며, 조인(調忍)하는 것이다. 또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침체되거나 신음하거나 의심이 없고, 선함을 따르기에 거칠지 않으며 뜻이 충분하여 공양한다. 또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그 공(空)을 따라서 생하며, 또한 무상(無想)을 따라서 생하며, 또 무원(無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또다시 세가지 일이 있으니, 마음으로 생하는 모든 법은 무상하니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괴로움은 또한 마음으로부터 생하며, 모든 법이 무아인 것 역시 마음으로부터 생하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 일이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생하니, 모든 법이 무상한 것과 일체 법이 무아인 것과 멸진무위(滅盡無爲)는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보살의 등멸(等滅) 또한 마음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보지심(普智心)을 버리지 않고서 행으로써 일체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니, 이는 대비(大悲) 때문이다.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은 대자심(大悲心) 때문이며, 나고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대희(大喜) 때문이다. 평등하게 기쁨과 분노를 여의는 것은 대호(大護) 때문이며, 가진 지혜를 베푸는 것은 과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온갖 계학(戒學)을 행하는 것은 덕의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안으로 자신의 허물을 벗고 다른 이의 단점을 논하지 않는다. 능히 중생의 모든 불선행(不善行)을 견디며, 그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굳게 금강과 같아지기를 바라고, 온갖 선과 덕의 근본을 모아서 몸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일체에 이를 수 있게 되고, 모든 선정을 마음으로 닦되 피로함을 내지 않고 선정으로써 닦아도 생하는 바가 있지 않다.

효지(曉智)는 권도방편으로써 중생에게 수순하며, 그 제혜(諦慧)로써 모든 해탈을 바라는 자를 제도한다. 성문과 연각승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자는 불법을 염하여 모든 부처의 법을 구하는 것을 나타낸다. 마음으로 능히 괴로움을 참고 널리 법을 펼치는 까닭이다. 온갖 이익과 공경과 공양을 가볍게 여기고 이것을 버리며, 모든 상과 덕행을 갖추고자 하며 싫증을 내지 않고 지혜가 충만하고 많이 듣는 것에 부지런하다. 착한 벗을 가까이하고 선지식을 만나나니 겸손하고 공경하기 때문이다. 겸행(謙行)에 응하는 것을 얻는 것은 자신의 교만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 자신의 교만을 항복받음으로써 지행(志行)을 갖추기 때문이다. 의행(意行)을 두루 만족하는 것은 아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첨을 떠나는 것은 말과 행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 거짓됨이 없음은 성실한 믿음을 닦기 때문이다. 신의(信義) 있는 말에 머무는 것은 온갖 거짓을 떠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멸하고 없애는 것은 성실한 믿음을 낳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마음을 항복시키니, 이와 같이 용왕이여, 이것을 보살이 그 마음을 생한다고 한다. 이것을 무욕(無欲)이라고 한다.

또다시 용왕이여, 무욕보살은 마(魔)가 능히 그 한편을 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저 보살은 응당 한정(限定)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유한(有限)의 법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러서 유한의 법이라고 하는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유한이니, 보살은 이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이로써 무한(無限)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문과 연각승은 유한이니, 보살이 보지심에 머무른다면 악마가 그 한편(限便)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유념무념(有念無念)의 염상(念想)은 유한이며, 보살은 온갖 염의 상응함을 떠났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보살은 악마가 능히 그 한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두 가지 악마의 일[魔事]이 있는데, 보살은 마땅히 깊이 이것을 깨달아서 또한 마땅히 멀리 여의어야 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일인가? 스승과 벗에 대해서 공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 크게 교만을 떨며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가지 일이다. 또 두 가지 악마의 일이 있으니 보살이 6도무극장(度無極藏)을 버리는 것이고, 마음으로 도리어 성문과 연각의 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가까이 행하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지혜가 없으면서 권(權)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고, 모든 집착과 망견(妄見)의 중생들과 서로 사귀면서 즐겨 익히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들은 것이 거의 없고 지혜가 적으면서 스스로 지혜에 도달하였다고 하며, 비록 널리 지혜가 있더라도 그 가운데 빠져 스스로를 높이 자랑하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덕이 참으로 적은데 망령되게 존귀함을 일으키는 것이며, 만일 덕행을 닦더라도 소승을 즐기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정법을 수호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뜻으로는 모든 보살의 행을 익히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온갖 지혜에 통달해 있고 밝은 지혜를 갖춘 자와 함께 있어도 오로지 청정하고 고결한 보살을 비방하는 일만 하며 주로 법사(法師)를 위해서 자주자주 폐해를 일으키며,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장애하고 많은 아첨을 하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악마의 일이 있으니, 모든 덕의 근본을 버리는 것과 마음이 부덕(不德)함에 있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비록 한가롭게 있더라도 3독(毒)의 생각을 품어서 뜻이 언제나 어지러운 것이며, 만일 나라나 도읍에 노닐면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사람들을 위하여 깊은 법의 요체를 설하지 않고, 응당 설해야 하는 것을 도리어 설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악마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보지(普智)에서 멀리 떠나 마음이 자주 뒤바뀌고 어지러운 것이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바로 악마의 일의 모습들이 이와 같으니, 무욕보살은 영원히 이것을 갖고 있지 않다.

또다시 용왕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청정행을 행하면서 응당 무욕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보살의 열여섯 가지 큰 힘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힘에서 자신의 뜻을 조복시킴으로써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어떤 것이 보살의 열여섯 가지 힘이라고 하는가? 지력(志力)․의력(意力)․행력(行力)․참력(慚力)․강력(强力)․지력(持力)․혜력(慧力)․덕력(德力)․변력(辯力)․색력(色力)․신력(身力)․재력(財力)․심력(心力)․신력(神力)․홍법력(弘法力)․복제마력(伏諸魔力)이다. 무욕보살은 이 보살의 열여섯 가지 큰 힘을 얻는다.

어떤 것을 보살의 지력(志力)이라고 하는가? 이와 같이 용왕이여, 보살의 지력(志力)은 능히 모든 부처님을 뵙고 설하신 모든 말씀을 모두 지니니, 이것을 지력이라고 한다. 이 보살의 뜻은 모든 부처님의 행에 응하며 모든 중생에 대해서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의력(意力)이다. 능히 모든 음성에 통달하여 설하신 모든 뜻을 환히 이해하니, 이것을 행력(行力)이라고 한다. 모든 죄의 행을 여의고 뭇 덕의 법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참력(慚力)이다. 모든 온갖 어려움에서 그릇된 행을 행하지 않으니, 이것이 강력(强力)이다. 수천억의 악마의 병사들이 능히 감당해내지 못하니, 이것이 지력(智力)이다. 법을 지니는 것에 통달하여 널리 퍼뜨리고 고루 배워서 잊어버리지 않으니, 이것이 지력(持力)이다. 집착하지 않고 잊지 않으며 백천 겁 동안에 그 설해진 바를 장애 없고 끊임이 없이 모든 법을 따라서 이해하니, 이것이 변력(辯力)이다. 만일 모든 제석이나 범(梵) 및 사천왕이 모든 보살에게 가서 침묵하고 색(色)이 없다면, 이것이 단정력(端正力)이다. 그 보배로운 머리로 염원해야 할 바가 뜻에 응하여 곧 이르면, 이것을 재력(財力)이라고 한다. 모든 외도를 뛰어넘어서 그 속에서 홀로 존귀하니, 이것이 신력(神力)이다. 중생의 마음은 능히 그 마음을 하나로 하고 중생의 마음을 알아서 그에 따라서 교화의 행을 하면, 이것이 심력(心力)이다. 중생 가운데 응당 신족통으로 제도해야 할 자는 신변(神變)을 나타내어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니, 이것이 신족력(神足力)이다. 만일 설해진 법을 중생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는데, 중간에 끊지 않고 중생이 받아 지녀 따라서 행하여 동등하게 괴로움을 모두 다하여 없앤다면, 이것이 홍법력(弘法力)이다. 만일 그 선정과 삼매[正受] 때 부처님의 뜻과 현성의 행법을 이어받으면, 이것이 항마력(降魔力)이다.

이것을 보살의 열여섯 가지 큰 힘이라고 하니, 어떤 행하는 자가 있어서 뜻으로 이 열여섯 가지 힘을 사모하여 원하며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무욕을 닦아라. 비유하면 용왕이여, 모든 강물의 흐름이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도법(道法)의 모든 행과 37품(品)은 모두 무욕으로 돌아간다. 또한 용왕이여, 마치 모든 약과 풀과 나무는 대지에 의지하는 것처럼 모든 선행의 법은 모두가 무욕으로 말미암는다. 비유하면 용왕이여, 전륜성왕은 중생이 즐거워하는 것처럼 만일 이것을 무욕보살이 갖춘다면 곧 모든 하늘과 용과 귀신과 세간의 사람들의 사랑과 즐거움을 받게 될 것이니라.”

이때 세존께서 아뇩달과 여러 태자를 위하여 게송을 설하셨다.


혜(慧)보살이 되고자 원하고,

불도에 뜻 있는 자는

마땅히 더러운 법을 여의어야만 하니

언제나 부지런히 무욕(無欲)을 행하여야 한다.


지혜로써 인연법을 밝게 이해하며,

보이는 경계에 의지하지 말며,

인연으로써 법을 관해야 하나니,

연이 없으면 법이 없다.


연생(緣生)인 그것은 무생(無生)이니

이것은 자체로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연(緣)에 집착하는 것, 이 또한 공하니

공을 알면 그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연에 집착하더라도 무상(無相)이요,

벗어나기를 원하여 고요하고 또한 고요하다.

담박한 모습은 큰 어리석음이고,

악마는 그곳을 깨닫지 못한다.


법을 보지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나[吾]와 아(我)가 없고,

그에게 아(我)와 인(人)이 있지 않나니

이것을 안다면 곧 욕심이 없는 것이다.


주(主)가 없기에 지키거나 보호함도 없고

얻음도 없고 또한 버림도 없다.

본래부터 해탈이어서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탐욕을 떠나서 언제나 법을 깨친다.


뜻을 보되 가식을 하지 않으며

지혜를 행하되 언제나 분별을 벗어나고

순의경(順義經)을 밝게 깨우치고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공의 뜻은 바로 불법(佛法)이며,

그리고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해탈하여

견념(見念)을 의지하거나 짓지 않나니,

이 뜻이 바로 무욕이다.


법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지 않으며,

음성은 얻을 만한 것이 없고,

법에 처하되 가히 흔들리기 어렵고

입(入:12入)의 뜻이 아닌 것이 무욕이다.


법의 뜻은 욕아(欲我)가 없고,

눈과 귀는 색과 소리 없고

코와 입은 냄새와 맛을 떠났으며

몸과 마음은 촉감과 법이 없다.


색은 생멸의 뜻이 아니고

또한 통상(痛想)을 떠나지 않으며,

또한 식(識)의 아(我)에 머물지 않나니

이것에 도달하면 법의(法義)에 응한다.


삼계의 뜻에 머물지 않고

또한 나[吾]와 아(我)의 뜻이 없다.

세존께는 색신이 없고,

문자로써 법을 말씀하시는 뜻이 없다.


계수(計數)는 법의 의미가 아니며,

요체에 이를 수 없으니 보시가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니

아세존(我世尊:如來我)이 없다.


모든 법을 무(無)의 뜻으로 이해하니

이것을 법요(法要)라고 부르며,

법의 의미에는 영원히 뜻이 없으니,

무욕은 곧 불법이다.


생함 없음을 깨닫는 것은 혜(慧)와 같고

생기하지 않는 것은 소멸함도 없다.

또한 마지막도 없으니,

이와 같이 세존의 배움에 상응한다.


5음(陰)은 환(幻)과 같음을 깨닫고,

그것이 법성과 같다고 알아서

안으로는 공의 무더기와 같음을 깨달으니,

이것을 밝게 아는 것을 무욕이라고 한다.


법을 알고 나아가 회향하면

중생의 정(情)에 밝게 도달하니

바른 뜻으로써 생각을 끊고

무욕이면 이 혜(慧)를 얻는다.


의단(意斷:正斷)에 둘이 없고,

신족(神足)의 마음이 가볍게 날아오르며

힘[力]을 갖추었으나 교만함이 없고,

모든 근(根)이 절제와 만족을 알며,


지(智)로써 각정(覺定:覺支)을 깨달으며,

여덟 가지 곧은 길[八道]을 밝게 이해하니

혜(慧)는 멸행(滅行)을 관하고,

법이 돌아갈 곳을 이해한다.


본래의 법은 발생이 있지 않고

미래의 법에도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현재에는 머무는 법이 없으니

탐욕이 없는 것을 이와 같이 안다.


신상(身像)은 견고하지 않고

말[語]은 공하니 비유하면 메아리와 같으며

마음의 환(幻)은 바람과 같으니,

탐욕이 없는 것을 이와 같이 깨닫는다.


순의경(順義經)을 설함을 알아서

인연을 통달하여 알며,

본래의 어리석음과 나고 죽음이 소멸하니

무욕이 바로 혜의(慧義)이다.


아(我)와 인(人)과 명(命)과 수(壽)가 없고,

법과 비법(非法)을 밝게 이해하며

이로써 세 가지 문을 해탈하나니

공(空)이라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무생(無生)으로써 멸도(滅度)를 보고

속세의 행과 같이 혜(慧)를 익히면

마음과 뜻이 따라서 생하지 않으니

무욕으로써 행을 깨닫는다.


법성이 언제나 머무는 것처럼,

부처님이 아시거나 멸도하여도 여여하게 머물며

각과 불각(不覺)은 둘이 없으니

무욕하면 이 법을 안다.


그 쌓임은 본제(本際)와 같아,

그 쌓임은 다 모든 법이니

공의 쌓임[空積]과 인제(人際)에

무욕하면 이 지(智)에 통달한다.


법성은 항상하여

깨달음이 일어나거나 멸도하여도 항상 머무는데

그 둘을 식별하여 알지 못하나니

무욕의 법은 이와 같다.


선(善)과 불선(不善)에 재앙이 없나니

법에는 죄의 갚음이 없는 것을 안다.

불법은 다른 것을 따르지 않고

도무극(度無極)을 따라서 행한다


인연을 여읨은 연각(緣覺)이요,

소리로써 해탈함은 성문의 행이다.

지혜로운 보시는 큰 부(富)를 이루고

지계(持戒)로써 하늘에 나는 것을 본다.


널리 듣고 지혜를 얻으며,

뜻을 지키고 중생을 교화하니

지성(至聖)은 모두 뜻을 지킨다.

무욕의 법은 이와 같다.


힘은 언제나 모든 탐욕을 굴리고

지혜의 뜻은 법을 있게 하고

이 모든 법을 동등하게 생각함에

법성은 언제나 무득(無得)이다.


인연의 일어남을 식별하여 알아서

네 가지 덕의 행을 이루며,

의미와 법을 알고,

의미를 수순하여 무욕을 안다.


연(緣)을 관하는 그는 법을 보고

법으로써 세존을 본다.

생하고 멸하는 법에 동등하며

무욕(無欲)이면 최상의 가르침[尊法]을 깨우치게 된다.


인연의 자취는 얻을 수 없으며

음성의 법은 문자가 아나니

이와 같이 법의 본래 없음을 얻으면

이 성스러움을 일컬어 여래라고 한다.


혜(慧)로써 인연을 보니

견(見)과 불견(不見)의 법이 없다.

밝은 혜[明慧]는 인연을 환히 아니

이것을 세존을 본다고 한다.


그가 무욕행을 구하며

열성(悅性)의 모든 현성(賢聖)은

법성(法性)이 무너져도 버리지 않으며

현성의 종자를 보호한다.


언제나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호하고

탐욕이 없으며 법을 듣고도 잊지 않는다.

계의 근(根)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며

정(定)에 도달하여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신혜(身慧)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서,

언제나 해탈신[脫身]과 해탈혜[脫慧]에 머무니,

보는 것에 욕심 없으면

언제나 편안히 머문다.


모든 부처님의 법과

무량한 뭇 성도(聖道)를 깨우쳐 들어가면

부처님의 신족통을 갖추게 되고

일체 행에 환히 통달하게 된다.


중생들의 마음이 행하는 것을 알아서

홀연히 모든 국토에서 노닐며

모든 여래를 뵙고

그분들의 설법을 듣게 되며


듣고 지키며 뜻을 이해하고 통달하며

무량한 사람들에게 널리 베푼다.

그는 수억(數億)의 행을 알며,

뜻하여 무수하게 향함을 얻고


무욕은 응당 자재하니

마음을 항복시켜 공덕에 들어가며

뜻을 항복시켜 탐욕을 없애면

끝내 이 세상에서 옮겨가지 않는다.


모든 음(陰)과 마음은 이미 해탈하며,

일어나고 멸하는 곳을 환히 알아서

멸함에 있는 바가 없음을 관하면

익히는 바는 이로써 멸하게 된다.


음성은 본래 마음이 행하는 바라

아첨함이 없고 언제나 단정하고 진실하며

간사하지 않고 어질고 선하니

무욕의 덕은 이와 같다.


공(空)과 무상(無想)과 무원(無願)의 해탈로써

괴로움을 알고, 나고 죽음을 알면

무아(無我)의 법은 항상 고요하니

무욕은 마음을 따라서 행한다.


보지심(普知心)은 동등하게 자애롭고

비(悲)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기뻐하여 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고

행으로써 지키기에 치우침이 있지 않으며,


보시한 것에 과보를 바라지 않고

자기를 살펴서 모든 행을 세우며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것을 참고 견디며

저 중생을 해탈케 하고자 생각한다.


부지런히 정진하고 굳세게 덕을 닦으며

몸과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차례로 모든 선정을 알지만

또한 선정에 떨어지지 않으며


지혜와 선정에 크게 정진하고

수(數)에 있되 수에 떨어지지 않으며

진리로써 성문을 교화하고

지(智)로써 멸도를 바라지 않는다.


무욕하면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며

거기에 이 모든 법을 갖고 있지만

악마는 그 행을 알지 못하니

법에 안주하여 그것을 안다.


무욕은 한(限)이 없으니

이러한 탐구한(貪垢限)2)을 깨우쳐야 하니

탐욕을 여의어서 무상(無想)이면

악마도 그곳을 알지 못한다.


그 상(想)이 나[吾]와 아(我)에 응하면

거기서 스스로 악마의 일이 일어나나

이렇게 모든 행(行)을 제도(濟度)하면

뭇 악마도 당해내지 못한다.


무욕을 향하되 이를 잊지 않으면

행하는 바는 언제나 청정해지니

무욕은 참행(慚行)을 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훼손하지 않는다.


무욕을 들어서

지혜를 기뻐하고 여래를 공경하여

그 머묾은 법주(法住)와 같으니

그는 응당 세존과 같다.


모든 부처님의 10력(力)을

보살이 받들고 모시고자 한다면

이러한 무주행을 듣고

부지런히 뜻을 내고 받아 지녀야 한다.


이러한 무욕을 들은 자는


2) 고려대장경에는 ‘탐여근(貪茹根)’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는 모두 ‘탐구한(貪垢限)’으로 되어 있고, 후자가 의미상 본의에 가까워 이를 따라 번역한다.


기뻐하고 믿으며 널리 받들어 행해야 하니

그는 언제나 무욕을 이루어

오래지 않아 부처를 이루리라.


무욕은 성현이 말미암는 바이며

이로써 가장 청정하게 되니

무욕하면 부처를 이루게 되어

이로써 치우침 없이 교화하게 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이

모든 상호를 얻은 것은

모두가 이러한 무욕을 따라

이 법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때에 세존께서 이러한 무욕법품을 설하셨을 때, 모여 있던 모든 대중 4만 2천의 하늘과 용과 귀신과 인비인(人非人)이 모두 위없는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일으켰다. 1만 2천 명은 불기인(不起忍)을 얻었으며, 또 8천 명은 유순인(柔順忍)을 빨리 얻었고, 3만 2천의 천자와 신과 용은 번뇌를 여의어 모두 법안(法眼)을 얻었다. 또 8천 명은 탐욕의 행을 여의었고, 8천비구들은 번뇌가 모두 다하여 남음이 없었다.


 

불설홍도광현삼매경 제3권

축법호 한역

이미령 번역


6. 신치법품(信値法品)

이때 아뇩달용왕이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였으며 또한 용왕의 5백 명의 태자에 이르기까지 이미 위없는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내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이것을 살펴 곧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었으며, 마음으로 한량없이 기뻐하며 각각 즐거이 여래께 공양을 올렸다. 그리하여 아름답게 꾸며진 보배 덮개를 세존께 올리고 동시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성사(聖師) 여래․지진․정각 께서는 저희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로 하여금 두루 신도품(信道品)을 듣게 하시며, 이것을 듣고 난 뒤에는 뜻에 피로함이 없고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있지 않으며, 또한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고 듣기를 더욱 더하며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익히고 행하며 즐겨 듣되, 이러한 상법(像法)에 대해서 싫증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리 하셨으니, 다시금 바라옵니다. 보살은 어떻게 모든 불세존을 만날 수 있게 되는지를 여래께서 해설하여 주시옵소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현자들은 부지런히 생각하고 받아서 들어라. 나는 이제 자세하게 설하리라.”

그러자 태자들이 말씀드렸다.

“예, 즐겨 듣겠습니다. 저 모든 보살들도 세존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자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을 심는 현자들은 부처님이 계신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니,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가? 믿음이란 이른바 보살이 모든 밝은 법을 수행함에 있어 이것을 받들어 으뜸으로 삼는 것이다. 무엇을 밝은 법이라고 하는가? 행에 의지하여 응당 덕의 근본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익히고 구하며 어짊을 좋아하고, 성스러운 무리들을 사모하고 따르며, 부지런히 마음으로 믿음의 뜻을 심되 뜻이 피로하지 않으며, 법을 듣기를 바라고 구하며, 장애를 뽑아 버리며, 도(道)를 따르고 익히며 법의 이양(利養)을 얻는 것이다. 또한 보시로써 널리 베풀고, 계(戒)와 불계(不戒)에 평등하게 대하고 구제하며, 온갖 분노에 있어서도 언제나 기쁨을 지니며, 보지(普智)를 권하고 좋아하며, 마음이 게으르거나 물러나지 않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쉬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법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성스러운 무리들에 대하여 마음으로 기뻐하며, 도(道)에 뜻을 두어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정진(正眞)을 기뻐하고 좋아하며, 그러면서도 교만함을 떠나 대중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며, 언제나 마음을 모든 곳에 동등하게 하여 집착하지 않으며, 끝내 목숨을 마치더라도 악행을 짓지 않으며, 순박한 믿음을 닦아 세우고 말과 행이 상응하며, 평등하게 집착함을 넘어서며, 마음에 티끌과 때가 없고 몸과 입과 뜻의 행(行)은 성인(聖人)의 교화에 따르며, 모든 일에 명료하며 청정함을 얻고 만족할 줄을 알고 탐욕이 없으며, 행하는 바는 깨끗함에 응하며, 지환(智幻)을 환히 깨달아 들어가서 혜근(慧根)을 구하고 익히며, 7재(財)에 의순(依順)하고 진실한 믿음을 닦고 기억하며, 근력을 이미 갖추어 정견(正見)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화를 주는 스승과 벗에게는 겸손하고 공손하며, 예경하고 편안하고 만족하여 쉽게 공양하고 자주자주 법회에 나아가며, 마음이 물러서거나 싫증내지 않고 나고 죽음을 근심거리로 여기며, 무위의 덕을 보이고 부지런히 마음으로 정진하며, 나아가 보지(普智)를 구하고 널리 도로써 교화하는 것이다. 또한 여래법에 대하여 출가하기를 좋아하며, 모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범청정행(梵淸淨行)을 닦으며 자비를 짓고 세우며, 저 중생을 구제함에 뜻을 반복(反復)에 두고, 그 은혜를 갚는 자나 갚지 않는 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마음을 기울이거나 기울이지 않는 일이 없으며,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그들의 공경을 기뻐하며, 인조(忍調)의 행은 이미 모두 갖추어 악하지 않음을 보고, 돌아서서 사람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안의 성품이 이미 고요하고 뜻이 한가함에 눈으로 머물고 마음이 언제나 고요함을 즐기며, 법을 익힐 것을 오로지 생각하며, 말싸움이나 소송을 일으키지 않고 나와 남의 허물에 평등하며, 계(戒)를 모두 갖추기를 구하고 정행(定行)을 쌓고 모으며, 도에 공손히 하고 부지런히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서 현자의 행이 속신(俗信)에 응하는 것이라고 하니, 믿음을 심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한다. 이것을 일러서 부처님 세상을 만나는 자라고 한다.

또다시 현자들이여, 세속에 대하여 믿음을 짓고 잊지 않으니, 이것을 믿음을 일으켜서 부처님 세상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현자들이여, 어떤 것을 속신(俗信)이라고 하는가? 저 믿음이 있는 자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허망한 견해를 떠나, 모든 법이 전부 다 무원(無願)이어서 오고 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믿고 알며, 모든 법이 무식무념(無識無念)이어서 몸과 입과 뜻이 고요하고 식(識)이 있지 않음을 믿고 알며, 모든 법이 탐욕을 떠남으로써 아(我)와 인(人)과 수(壽)와 명(命)이 없다는 것을 믿고 알며, 모든 법이 본래 오고 감이 없고 자연(自然)이라는 것을 믿고 알며, 모든 법이 법성에 의지하고 있음을 믿고 알며, 모든 법이 3세(世)를 초월하였음을 믿고 알고, 모든 법은 진제(眞際)이고 자취가 없는 것이 마치 본래 자취가 없는 것과 같다고 믿고 알며, 일체 법은 본래 모두 자연과 같아서 마치 허공의 자취와 같다고 믿고 알며, 모든 법은 욕처(欲處)와 삿된 견해가 모두 다하였음을 믿고 알며, 법은 집착함이 없으니 본래 어리석음을 떠났고 본래 청정함이 없다고 믿으며, 모든 법의 마음이 언제나 청정하며 또한 객욕(客欲)의 때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믿고 알며, 모든 법은 보는 바가 없다고 믿고 알며, 모든 법을 보호하여 평등하게 뭇 행을 끊음을 믿으며, 법은 무아(無我)이어서 기쁨과 분노를 넘어서는 것을 믿으며, 모든 법이 마음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붙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믿으며, 모든 법이 거짓인 것이 마치 빈주먹을 쥐고 아이를 어르는 것과 같다고 믿으며, 법이 거짓 없으며 위아래가 없고 버려두는[捨置] 바가 없다고 믿으며, 모든 법이 텅 빈 것이 마치 파초나무와 같다고 믿으며, 법이 자유로운 것이 언제나 고요한 것과 같다고 믿으며, 법은 살필 것이 없어 3처(處)에 머물지 않는다고 믿으며, 법은 영원히 없어서 생겨나는 바가 있지 않다고 믿으며, 법은 허공과 같아서 평등하기가 헤아릴 수 없다고 믿으며, 모든 법은 마치 열반과 같아서 언제나 스스로 고요하다고 믿고 안다. 이와 같이 현자들이여, 세속에 대해서 이러한 믿음을 일으키면, 이것을 믿음을 짓는다고 하며 불법을 만난다고 한다.

또다시 현자들이여, 믿음이 있어서 불법의 이름을 만나는 것, 이것을 바로 모든 법이 전혀 일어남이 없다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색(色)이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이 아니면 변화하고 바뀌는 훈습이 없고, 통(痛:受)․상(想)․행(行)․식(識)이 아니면 이미 식의 일어남이 없다. 눈․귀․코․혀․몸․뜻이 아니면, 그 전습(轉習)의 일어남이 없어서 몸의 일어남과 변함이 없고 있음과 없음에 어리석지 않으며 생하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음이라, 이는 일어남 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는 것과 같다. 발생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소멸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소멸이 없는 것을 익히지도 않아서, 이에 바른 뜻으로 익히는 것에 뜻을 두지 않음이 없어야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틀어 말하면, 역시 37도품법(道品法)으로써 생기(生起)와 무기(無起)를 익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도로써 무생(無生)을 익히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지혜를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혜와 무혜(無慧)의 무이(無二)의 익힘이 아니니, 마치 부처님의 세상을 만나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믿음으로써 부처님을 만나는 품을 말씀하셨을 때에 무열용왕의 5백 태자는 모두가 재빨리 유순법인을 얻었다. 이에 세존께서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처님 세상 만날 것에 대해 믿음 일으켜서

불생(不生)을 배워야 하니

이렇게 과거에 믿지 않던 자는

부처님의 세상을 만날 수 없네.


믿음을 닦는 것이 가장 으뜸이어서

청정한 법을 이를 수 있으니

행이 질박하면 응당 과보가 있으며,

닦는 바가 어긋나거나 모자라지 없네.


모든 성현(聖賢)을 믿고 배우며

가까이 모시고 언제나 경배하되

마음에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믿음의 행이라고 하네.


부지런히 행하고 법을 청해 들으면

장애가 능히 동요시킬 수 없으니

그리하여 믿음은 도를 이룰 수 있게 되고

행은 유순법인(柔順法忍) 재빨리 얻네.


법으로써 얻은 재물

돌려서 자혜롭게 널리 베풀고

계를 보호하거나 계를 훼손한 자에게

믿음을 행하여 동등하게 베풀고


능히 모든 성내는 자들도 기쁘게 하며

도심(道心)에서 게으르거나 싫증내지 않아서

부지런히 대승법을 구하고

믿음을 갖고 기쁘게 대중을 향하며


커다란 교만을 영원히 떠나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며

머무는 곳에서 집착하지 않으니

믿음을 세우는 모습이 이와 같도다.


믿으려는 뜻을 내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결코 악행을 짓지 않고

선을 지키며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말과 행동이 언제나 상응하네.


계(界)를 뛰어넘는 것을 기쁘게 믿어서

무심(無心)을 즐겁게 행하고

몸과 입과 뜻을 청정히 하며

성현의 보호받는 바를 익히고 따르네.


믿음을 갖고 안으로 청정함을 행하고

언제나 지혜의 이끌림을 받아서

몸의 요본(要本)을 알고,

법을 묻고 구하며 들은 것을 널리 펼치네.


동등하게 7재(財) 생각하고

힘[力]과 근(根)으로써 만족함을 얻으며

오래도록 뭇 삿된 견해를 떠나고

뜻하여 언제나 평등한 행을 익히네.


예의 바르고 삼가며 기뻐하는 마음을 두고

마치 스승을 대하듯 공경하고 섬겨

마음은 일찍이 매우 경건하며

만족을 알아서 남는 바가 없네.


그 마음은 언제나 무념하되

뜻하는 것은 오직 도법(道法)뿐이라

생사를 싫어하는 자가 있으면

무위(無爲)의 덕으로 이끌어 보여주네.


이것을 벗어나려 마땅히 행해야 할 바

오직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구해야 하여

이 세상을 빨리 여의고

범행(梵行)을 닦되 싫증내지 않네.


모든 중생을 거두어 들여서

그들을 구제하되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마땅히 이미 받은 은혜를 갚으려할 뿐

기뻐하고 믿으며 마땅히 부지런히 구해야 할 것이네.


자신의 이익을 기뻐하지 않고

또한 다른 이의 공양을 질투하지 않으며

어질고 인내함을 언제나 갖추고

아첨하지 않고 질박함과 정직을 살피며


믿어서 눈으로 보는 바를 행하고,

돌아서서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며

감각기관은 고요하고 성품은 편안하고 섬세하며

뜻은 한가하게 머물기를 좋아하여


그 마음은 어지럽지 않았으며

스스로 힘껏 은행(恩行)을 갖춰

먼저 수순하여 다툼을 벌이지 않고

안으로 성찰하여 자신의 허물을 능히 이겨내네.


부지런히 계행(戒行)을 구하고 갖춰

전일(專一)하게 선정의 도를 익히고

믿음을 기뻐하고, 행하기를 즐겨하여 사모하니

믿는 자의 모습이 이와 같네.


그 욕신(欲信)을 뛰어넘는 자는

행하는 대로 깨닫고

법과 다툼을 벌이지 않아서

깊고 미묘한 부처님의 설법을


진실로 믿고 공(空)을 믿어서

거기에 뭇 견해가 전혀 없으며

모든 법은 상(想)이 있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서 뭇 생각[衆念]을 떠나네.


마땅히 모든 생각을 끊어 없애야만

오고 가는 일을 환히 깨달으니

법을 구하되 집착하거나 지음이 없고

몸과 마음에 두지 않네.


믿음은 탐욕 없는 법이라

아(我)와 인(人)과 수(壽)와 명(命)을 여의어

믿는 자 본래 없음을 깨달아

불이처(不二處)에 이르게 되네.


그 근본은 쌓임이 없고

체(體)가 없는 것이 허공과 같아

모든 법의 믿음 또한 그러하니

곧 법의 성품과 같네.


동등하게 3세(世)를 뛰어넘어서

모든 법에는 번뇌[漏]와

욕처(欲處)와 탐욕이 있지 않아서

믿음을 좋아하여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네.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고

그 근본은 밝고 청정하여

객욕(客欲)이 능히 덮을 수 없고

마음이 실재로서 머무는 곳이 없네.


모든 법은 가히 볼 수 없고

인연으로써 일어남이 없으니.

언제나 고행(高行)을 관찰하여

머무는 곳의 단점을 받아들이지 않네.


합하지 않아 여읨이 있지 않고

해탈하는 자는 합동(合同)이 없어

공법(空法)을 믿고 기뻐하며

어리석은 자가 미혹할 만하니


드맑은 뜻이 일어나지 않고

거짓인 것이 마치 파초와 같아

입으로 말하되 저절로 그러하며

가는 것이 없고 또한 있지 않네.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으며

보이는 바는 모두 요체(要體)가 아니니

이 법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연(緣)을 동등하게 하여 셀 수 없네.


모든 법은 마치 열반과도 같아

본래 없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믿고 기뻐하여 이것을 행하고

몸이 텅 비고 공함을 환히 깨쳐서


그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지니니

보살과 범부들,

그들은 곧 부처님을 받들 수 있게 되어

머무는 곳에 악함이 있지 않고


색행(色行)을 짓지 않아서

부처님 세상을 응당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네.

색이 없어 12처(處)가 있지 않아

옴이 없고 또한 감도 없으며


색에는 발생이 있지 않아

소멸도 없고 또한 머묾도 없어

장차 이를 곳도 없어서

부처님께서 널리 법을 설하시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네.


5음(陰) 또한 이와 같이

변화․훈습․전이함이 본래 생겨남 없으니

부처를 만나서 널리 설법 하게 될 것이네.

지혜에 통달한 모든 보살들의


그 몸과 모든 정(情)

또한 훈습되기에 무생(無生)이네.

부처님께서 나심도 무생으로써,

언제나 모든 타생(墮生)을 구제하시네.


어리석음은 본래 발생이 있지 않으니

나고 죽음 또한 이와 같아

이러한 연(緣)은 본래 없는 것과 같아서

법을 따라서 부처가 있네.

 

일어남이 없고 발생이 있지 않으며

소멸하지 않아 머묾이 있지 않으니

이 까닭으로 12처(處)가 없음을 알고

12처 역시 가히 볼 수 없네.


이것 역시 스스로 발생하지 않으니

부처님이 나시고 널리 법을 설하심도

뜻함이 없으면 머무는 것도 없고

이 또한 부처님께서 법을 굴리시는 바이네.


모든 종자도 또한 이와 같아

불종자(佛種子)는 여법하게 따르니

이러한 유(類)는 역시 일어남이 없고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함께 하네.


그 행이 이와 같으면

부처님의 나심도 이와 같음을 위하신 것이니

이러한 4대․12처를 기뻐하고 믿으면

그 제한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네.


7. 전법륜품(轉法輪品)

이때 세존께서 태자들과 또 여러 현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전법륜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널리 펼쳐 있는 이와 같은 상법(像法)시대에 경구(經句)의 뜻을 즐겨 외고 받아 지니고 잊지 않으며, 이를 닦아서 행하며, 저 대비(大悲)의 뜻을 내지 않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보지를 일으켜 중생들의 소원을 따라서, 말을 널리 설하고 나타내며 뜻에 싫증을 내지 않고 이익을 홀연히 버리며, 권하고 생각하며 때에 따라서 수지하고 보호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마땅히 법륜을 굴리는 것이라고 한다.

또 여래도 법륜을 굴리는데, 그 법륜은 상(像)을 행하여 덕(德)에 들어가 정확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명백하게 설하니, 기법(起法)으로써가 아니며 멸법(滅法)으로써도 아니고 범부의 하열한 행법(行法)으로써가 아니며, 또한 다시 현성의 법으로써가 아니면서 법륜을 굴린다. 또 그 법륜은 중간에서 단절되지 않고 동등하게 선악을 판가름하니, 그것은 이런 까닭에 무단륜(無斷輪)이라고 한다. 또한 그 법륜은 인연의 일어남이나 일어나지 않음이 일어나지 않으면서 그것을 굴리니, 이런 까닭에 무기륜(無起輪)이라고 한다. 또 그 법륜은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법의 모든 정(情)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서 구르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무이륜(無二輪)이라고 한다. 만일 둘이 있다면, 법륜이 아니다. 또한 그 법륜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구르니, 이것은 무착륜(無著輪)이다. 또 그 법륜은 아(我)가 있다는 견해로써 구르지 않으며 인(人)․명(命)․수(壽)가 머무는 바가 없으면서 구르니, 이것을 공륜(空輪)이라고 한다. 또한 그 법륜은 의도․인상․망각․기억 따위를 분별하지 않고 돌아가니, 이것이 무상륜(無想輪)이다. 또 그 법륜은 욕계(欲界)와 색계[形界]와 무색계[無形界]를 바라지 않으면서 구르니, 이것은 무원륜(無願輪)이다. 또 그 법륜은 중생에게 차별이 있다고 헤아리지 않으면서 구르고, 두 법(法) 즉 이것은 범부의 법이고, 이것은 성현의 계법(戒法)이고, 이것은 성문의 법이고 이것은 연각의 법이고, 이것은 보살의 법이고 이것은 불법이라는 분별에 머물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무이륜(無異輪)이라고 한다. 또 그 법륜은 머묾이 있는 법륜이 아니면서 구르니, 이런 까닭에 무주륜(無住輪)이라고 한다.

모든 현자들이여, 법륜이라는 이름은 진제정륜(真諦正輪)이니, 언제나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의륜(要義輪)이니 3세에 동등하기 때문이다. 무처륜(無處輪)이니 모든 훈습과 견처(見處)를 동등하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적막정륜(寂寞靜輪)이니 몸과 마음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견륜(不可見輪)이니 의식(意識)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무소륜(無樔輪)이니 5도(道)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심제륜(審諦輪)이니 진리[諦]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행신륜(行信輪)이니 동등하게 중생을 교화하되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진륜(不可盡輪)이니 글자에는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법성륜(法性輪)이니 그 모든 법이 법성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본적제륜(本積諦輪)이니 본래 쌓임이 없기 때문이다. 본무륜(本無輪)이니 여여(如如)하여 본래 없기 때문이다. 무소조륜(無所造輪)이니 망념의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무수륜(無數輪)이니 지극한 성(聖)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공륜(如空輪)이니 밝게 안을 보기 때문이다. 무상륜(無想輪)이니 바깥 경계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원륜(無願輪)이니 주관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불가득륜(不可得輪)이니 과도(過度)를 닦기 때문이다.

또한 현자들이여, 여래는 이 법륜으로써 중생의 모든 뜻과 행에 굴리니, 이에는 그 구름과 구르지 않음조차 없어서 버리는 법이 없느니라.”

이렇게 세존께서 이 전법륜품을 설하셨을 때에 하늘과 용과 귀신과 인간과 온갖 종류의 신들이 기쁜 마음에 뛰어오르면서 빛을 발하여 여래의 이 법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이 만나기 매우 어려운 법륜을 굴리시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을 듣는 자는 받들어 행하여 곧 법륜에 응할 것입니다. 이 법은 전공허륜(轉空虛輪)이라고 이름하니, 모든 과거의 부처나 미래의 부처 그리고 모든 현재의 부처님은 모두가 이 법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을 지닌 자는 곧 이미 제도되었으며 모두 이 법을 행할 것이니, 세존이시여, 저희는 권도방편을 빌려 저 모든 중생을 돕겠습니다. 저들 가운데 이런 마음을 일으켜서 언제나 이 법륜품을 듣고자 하는 자는 듣고 나서 마땅히 이 도요행(道要行)을 일으켜 구하며, 또한 그는 오래지 않아서 전법륜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무리 가운데 이 설법을 들은 1만 명의 하늘과 사람들은 모두가 위없는 정진도(正眞道)의 뜻을 일으켰고, 5천 명의 보살은 속히 법인(法忍)을 얻었다.

이때 세존께서 여러 현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또한 정사(正士)들이여, 바른 법을 보호하며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 바른 법을 영위하고 보호해야 하니, 이것을 법을 보호한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소멸함이 없이 이런 행을 하는 자는 하늘과 세상 사람들이 결코 당해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우(無憂)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정사(正士)들은 이와 같은 법으로써 으뜸가는 깨달음을 얻어, 그 본래 없는 곳에서 미혹함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상법에서 모든 정사들은 마땅히 함께 옹호해야만 합니다. 보호하는 까닭은 모든 정사로 하여금 속히 이 대승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행하고 난 뒤에 전법륜을 얻으며, 또한 능히 식법(識法)의 큰 지혜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이러한 가르침과 요법(要法)의 바른 보호로써 대승을 일으키게 하시어, 법사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구제하며 예경하고 잘 들으며 금계(禁戒)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세존께서 무우(無憂) 용왕자(龍王子)를 찬탄하셨다.

“참으로 장하구나. 무우 정사(正士)여, 대승을 일으키는 것은 법사를 위해서이니 편안하게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을 호법(護法)이라 한다. 여러 법사를 위하여 정법을 보호하여 관리하고, 정법을 굳게 지닌다.

또다시 무우 정사여, 바른 법을 보호하는 자는 열 가지 공덕을 얻으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자기를 높이고 남을 얕보는 교만심이 없어지고, 또 공경을 행하며, 또한 아첨하는 행을 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법을 즐겨 생각하고, 뜻은 법을 사모하고 익히며, 오로지 법을 따르기를 뜻하고, 행으로 법을 관하고, 기꺼이 법을 널리 설하고, 기꺼이 법을 익히고 행하며, 뜻하는 바의 승(乘)을 따라서 이것을 설한다. 이것이 열 가지 행이니, 이로써 바른 법을 보호하느니라.

또다시 무우여, 열 가지 일이 있어서 이것을 행하면 바른 법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만일 족성자와 족성녀가 법사의 설법을 듣고, 멀리서 그곳을 향하여 예를 올리며, 즐겨 생각하고 받들며, 그가 오면 즉시 경배하고, 필요한 옷이나 음식을 공급하고, 여러 가지 일로 보호하며, 나아가서 찬탄하고 공경하고, 설하는 바를 순청(順聽)하여 이로써 동학(同學)에게 말하고, 잘못을 말하는 것을 덮고, 언제나 즐겨 칭탄하며, 좋은 명성을 널리 퍼지게 한다. 이것이 열 가지 일이니, 이로써 바른 법을 보호하느니라.

또한 다시 무우여, 네 가지 보시행이 있으면 바른 법을 보호할 수 있게 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붓과 먹과 흰 천을 보시하여 법사에게 공급하며, 옷과 음식과 침구(寢具)와 의약품을 대중의 처소에 공양하며, 만일 법사로부터 법을 듣는다면 아첨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것을 찬양하고, 들은 것을 받아 지니고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 보시니, 이로써 바른 법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무우여, 네 가지 정진이 있어서 바른 법을 지닐 수 있게 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법을 구하는 데에 정진하며, 부지런히 널리 법을 설하며, 법사를 공경하고, 만일 법을 훼손하는 사람이 있으면 올바른 법으로써 이를 항복시키고 또한 정진으로써 하니, 이것이 네 가지 정진으로써 바른 법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때 아뇩달의 5백 명의 태자들은 부처님의 이러한 설법을 듣고 나서 기쁨에 젖고 환희하며 한량없이 즐거워하였다. 그리하여 한결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해 주신 법은 참으로 좋아 비할 바가 없으니, 모든 의심과 망설임을 풀어주셨다. 각자 궁실(宮室)과 그 관속(官屬)으로써 부처님께 받들어 응당한 바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공경하고 따르는 마음으로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세존이시여, 마땅히 부지런히 교화를 받아들여서 영원히 언제나 피로함을 내지 않겠습니다. 여래께서 무위(無爲)하신 뒤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상보법(像寶法)을 마땅히 함께 공경하고 받들겠으며, 이 경(經)의 요품(要品)에 통달하도록 부지런히 정진하고 수행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곧 저희들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또한 만일 여래께서 무위(無爲)하신 후 저희들은 성존(聖尊)께서 머무셨던 나라나 마을에는 마땅히 함께 한마음으로 사리를 공양하고 보호하고 받들며 예경해야 하나 현재 이르러 소멸하였습니다.”

이때에 현자(賢者) 장로[耆年] 가섭이 그 태자들에게 말하였다.

“하지만 현자들이여, 그대들의 말과 같이 장차 완전하게 여래의 신신사리(神身舍利)를 공양하고자 한다는 그대들의 이 말은 중생의 모든 덕의 근본을 많이 끊는 것이고, 밝고 맑은 것을 덮고 가리는 것이니, 도(道)의 교화에 이르는 것에 티끌이 끼어서 이런 말을 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가 본시(本始)의 소원을 지은 것은 사리를 남기고 두루 퍼뜨려서 겨자씨와 같이 많게 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大悲)를 내리기 위함인데, 어찌 전적으로 완전함을 얻어서 홀로 공양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 정사들이 현자 대가섭에게 말하였다.

“옳습니다. 가섭이시여, 성문의 모든 지혜의 한계로써 여래의 깊고 그윽하며 끝이 없는 명달(明達)의 지혜를 분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여래는 보지심을 가지고 모든 견처(見處)에 신족통으로써 감동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일으켜서 능히 삼천대천세계의 하늘과 용과 귀신들로 하여금 각각 궁전에서 널리 완전하게 사리를 안치하게 하며, 각각 생각하기를 ‘오직 나만이 여래의 사리를 공양하며 다른 이는 그러하지 못하다’고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가섭이여, 이와 같이 세존께서 무위열반에 드신 후에는 중생심을 따라서 응당 사리를 안치해야만 합니다. 또한 가섭이여, 여래의 덕은 아가니타천(阿迦膩吒天) 위에 이르도록 겨자씨와 같이 많은 사리를 두어서 능히 널리 밝게 하나의 천지(天地) 안을 비춥니다. 이것이 불세존의 신위변화(神威變化)의 감동의 힘입니다.”


8. 결제의난품(決諸疑難品)

이때 현자 수보리가 말하였다.

“여러 족성자들이여, 여래는 멸도합니까?”

수보리에게 답하였다.

“일어나고 생하는 곳은 마땅히 그 멸함이 있습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여러 족성자들이여, 여래는 생함이 있습니까?”

답하였다.

“여래란 그 본래 없는 것과 같아서 생함이 없이 생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만일 본래 없는 것과 같아 생하거나 생하지 않음이 없다면 그는 전혀 생함이 없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곧 부처님의 생한 바는 본래 없는 것과 같아 생함이 있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부처님의 생함이 이와 같다면 소멸은 또한 어떻습니까?”

답하였다.

“이 역시 본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생함이 없음을 생하나니 무위멸(無爲滅)도 또한 그러하여 본래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시여, 일으키려 하지 않고도 생하나니 멸도(滅度)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그 소멸 또한 본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였을 때에 무열(無熱) 연못에서 커다란 연꽃이 나타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수레바퀴와 같았다. 늪에는 한량없는 갖가지 색의 연꽃이 생겼는데, 광채가 나는 빼어난 온갖 보배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꽃 사이마다 커다란 연꽃이 피었는데, 그 빛깔은 찬란하고 선명하였으며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양을 자아내면서 두드러지게 높이 솟았다. 현자 아난이 무열 큰 연못 속에 있다가 이와 같이 그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세존께 여쭈었다.

“지금의 이런 변화는 어떤 상서로운 감응이기에 그 감동이 이와 같은 것입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잠시 기다려라. 아난이여, 스스로 이것을 보고 말해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문득 아래로부터 곧 보영(寶英)여래의 불국토인 보식세계(寶飾世界)에서 6만 명의 보살이 유수(濡首) 동자와 함께 홀연히 솟아올랐다. 그리하여 능인(能仁)세계로 옮겨오더니 무열 큰 연못 속에서 올라왔는데, 각각 미묘하고 커다란 연화좌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유수 동자가 곧 연꽃으로 만들어진 높고 넓은 현좌(顯座)로 나아가니, 이때 무리들이 모두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때 아뇩달과 보살들과 석범지세(釋梵持世)의 모여든 모든 무리들은 각각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공경하고 유수 동자에게 절을 올리고 나서 허공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함께 보배진주로 짠 덮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자 유수와 여러 보살들은 함께 연화좌를 가지런히 하고서 또한 지상으로부터 아주 높은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일찍이 보지 못하였던 가장 미묘한 연꽃을 위에서 비 내리듯 뿌리면서 여래를 공양하였다. 그런데 꽃들 속에서 어떤 소리가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영여래는 세존께 안부를 여쭙니다. 기거하심에 한량없고 몸은 강건하시며 신력(神力)은 편안하십니까?”

그 소리는 또다시 말하였다.

“유수 동자와 모든 보살 6만 명은 함께 인토(忍土)로 와서 무열용왕의 연못에 이르렀다가 그 감변(感變)을 보았습니다. 또한 용왕이 여쭈었던 장식도품(莊飾道品)으로써 법요설(法要說)에 드는 것을 즐겨 들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널리 법의 말씀을 권하여 또다시 환희하게 하여 주소서.”

이때 유수와 보살들은 허공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와 정각(正覺)께 나아가 여래께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엄숙하고 공손히 세존의 앞에 섰다. 이때 천사(天師)가 유수에게 말하였다.

“동자가 왔느냐? 어떤 뜻으로 모든 보살들과 함께 이곳에 이르렀느냐?”

유수 동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회들은 저 보영여래의 불국토인 보식세계에 살고 있는데, 지진(至眞)․능인(能仁)․여래께서 시방에 자비를 드리우셔서 이와 같은 요체를 널리 설하여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설법을 듣기 위하여 그 불국토로부터 날아와서 이곳에 이르러 천사(天師)께 예를 받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여래께서 강(講)하시는 법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자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영불국토인 보식세계는 이곳으로부터 가까이 있어서 저 모든 대사들이 홀연히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까?”

유수가 답하였다.

“마치 가섭께서 한때 선정에 앉았을 때, 그 신족(神足)으로 온 힘을 다해 날아 그 수명이 다하도록 간다고 해도 오히려 그 국토에 능히 도달할 수는 없으니, 그 나라의 경계가 아득하기가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곳에서부터 6십 항하사 불찰(佛刹)을 지나야만 보영여래의 불국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라.”

그러자 말하였다.

“그렇게 먼 곳으로부터 이곳에 온 것입니까?”

동자가 답하였다.

“아주 먼 곳을 지나야 하니, 장로[耆年]여, 번뇌가 다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대가섭이 말하였다.

“참으로 드문 일이며 훌륭합니다, 유수여. 이 모든 정사(正士)들의 신족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유수가 또 말하였다.

“장로여, 번뇌가 다하여 깨달음을 얻는 데 오래 걸리겠습니까?”

대가섭이 답하였다.

“생각을 바꾸는 순간과 같이 짧습니다.”

또 말하였다.

“장로여 이제 알겠습니까?”

답하였다.

“이제 모두 알았습니다.”

유수가 다시 말하였다.

“어떻게 결박된 마음을 풀 수 있겠습니까?”

대가섭이 답하였다.

“유수여, 마음의 결박을 풀어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이 벗어나면, 혜견(慧見)을 이루는 것입니다.”

말하였다.

“예. 가섭이여, 그 묶이지 않은 마음이 무엇으로써 풀린다는 것입니까?”

가섭이 답하였다.

“마음이 본래 묶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곧 풀리는 것입니다.”

말하였다.

“그렇다면 가섭이여, 어떤 마음으로써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과거의 앎입니까, 미래나 현재의 앎입니까? 과거의 것이라면 이미 멸하였고 미래의 것이라면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물러 있지 않는데, 어떤 마음으로써 그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까?”

대가섭이 말하였다.

“유수여, 마음이 이미 멸하였다면 곧 몸과 마음의 헤아림[計數]이 없어진 것입니다.”

동자가 말하였다.

“현자여, 당신의 마음은 그 소멸을 압니까?”

말하였다.

“마음의 소멸함을 가히 알 수 없습니다.”

동자가 말하였다.

“그 완전히 멸한 마음을 이룰 수 있다면, 거기에는 영원히 신식(身識)을 얻음이 없을 것입니다.”

말하였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유수 동자여, 우리들은 미약하고 저열한데, 어찌 능히 뛰어난 말씀에 상응할 수 있겠습니까?”

유수가 다시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가섭이여, 메아리에는 분별함이 있습니까?”

답하였다.

“없습니다. 유수 동자여,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입니다.”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대가섭이여, 모든 음성은 메아리와 같습니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유수가 다시 말하였다.

“메아리와 말[辯]의 상응함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하였다.

“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였다.

“이와 같이 대가섭이여, 보살이 품고 있는 권변(權辯)의 재능은 불가사의하며 또한 그것은 끊임이 없습니다. 마치 장로의 물음과 같아서 한 겁으로부터 한 겁에 이르도록 보살의 기변(機辯)은 다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다시 유수에게 권하셔서 이 대중들을 위하여 널리 법을 강설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면 저 모인 대중들은 오랜 밤 동안 안락함을 이룰 것이니, 널리 일체로 하여금 법요(法要)의 밝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이때 대중 가운데 대보살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지적(智積)이라고 하였다. 그가 유수에게 물었다.

“동자시여, 어찌하여 장로 가섭은 나이 들고 아주 오래 되었는데, 말하는 바가 겁약하고 미열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무슨 까닭에 장로[耆年]라고 이름합니까?”

유수가 답하였다.

“이는 성문일 뿐이므로 변재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지적이 다시 말하였다.

“무릇 대승의 뜻을 내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말하였다.

“영원히 알지 못합니다. 오직 성문승(聲聞乘)의 해탈 경지만을 알 뿐입니다.”

또다시 말하였다.

“유수여, 어찌하여 성문승이라고 이름합니까?”

유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세존께서는 능히 어짊으로써 모든 중생을 따라서 3승의 가르침을 일으켜 이로써 널리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문승과 연일각승(緣一覺乘)과 대승행(大乘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중생들의 뜻은 탐욕을 많이 품고 있으며, 뜻이 저열하고 겁약하기 때문에 세 가지 행을 설하신 것일 뿐입니다.”

지적이 다시 말하였다.

“유수여, 어떻습니까? 공(空)과 상(想)과 원(願)에는 그 제한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제한하여 3승(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말하였다.

“족성자여, 무릇 모든 여래의 집권(執權)의 행(行)인 공․무상(無想)․무원(無願)은 그 제한이 있지 않습니다. 온갖 집착으로 제한되어 모든 제한이 있는 것이나, 실제는 제한 없는 행[無限行]에 제한은 결코 있지 않습니다.”

또 말하였다.

“유수여, 우리들은 곧 퇴전(退轉)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다시는 뜻이 저열한 중생과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유수가 답하였다.

“족성자여, 인내하여 마땅히 무열용왕으로부터 그 지혜로운 말솜씨와 한량없는 법을 들어야 합니다.”

장로 가섭이 지적에게 말하였다.

“어째서 정사(正士)가 저 보영(寶英)여래의 불국토와 같다고 합니까? 무엇을 설법하시는 것입니까?”

지적이 답하였다.

“오직 하나의 법의 맛이니, 그 하나의 법으로부터 한량없는 법의(法義)의 소리가 펼쳐 나오는 것이며, 오직 보살의 불퇴전법을 설할 뿐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깊숙이 감추어진 비밀스런 요행(要行)의 논은 취탈(取脫)을 따르거나 뭇 잡스러움에 연유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지(普智)에 의할 뿐 결코 다른 해탈은 없으며, 언제나 보살의 맑고 순수한 법을 강설하니, 그 국토는 도무지 겁약한 행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아뇩달이 유수에게 물었다.

“인존(仁尊) 유수께서 오셔서 여래를 뵈었는데, 어떤 상(像)으로써 여래를 관하였습니까? 색(色)으로써 관하였습니까, 통(痛:受)․상(想)․행(行)․식(識)으로써 여래를 관하였습니까?”

답하였다.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색고(色苦)로써 관하였습니까, 통․상․행․식의 고(苦)로써 관하였습니까? 색․통․상․행․식의 멸함으로써 관하였습니까, 공․무상․무원의 행으로써 여래를 관하였습니까?”

답하였다.

“아닙니다.”

또 물었다.

“그렇다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 상호의 육안(肉眼)과 천안(天眼)과 혜안(慧眼)으로써 여래를 관하였습니까?”

답하였다.

“아닙니다.”

유수여, 어떻습니까? 어떠한 상(相)으로써 여래를 관하였습니까?”

답하였다.

“용왕이여, 여래를 관하되 마땅히 여래와 같이 해야만 합니다.”

또 말하였다.

“연수(軟首)여, 여래는 무엇입니까?”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동등함이 없는 동등함이며, 동등하여 가히 볼 수 없으며, 이로써 짝할 이가 없는 까닭에 미묘한 것입니다. 용왕이여, 여래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여 무우(無偶)․무쌍(無雙)․무비(無比)․무유(無喩)․무주(無儔)․무등(無等)․무필(無疋)․무륜(無倫)하며, 또한 색상(色相)도 없으며, 여래께서는 무상(無像)․무형(無形)․무영(無影)․무명(無名)․무자(無字)․무설(誣說)․무수(無受)입니다. 용왕이여, 여래께서는 이와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관(觀)을 짓는 것이 여래를 관하는 것입니다.

또한 육안이나 천안이나 혜안으로써 여래를 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안은 밝음을 보는 것이지만, 여래와 같은 것은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천안이란 지음이 있는 상[有作相]인데 여래는 평등하게 초월하여 머묾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안으로써 관할 수 없습니다. 또 그 혜안은 본래 무상(無相)을 아는 것인데, 여래는 모두 영원히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혜안으로써 관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연수여, 그 여래를 관하여 청정을 이를 수 있습니까?”

말하였다.

“용왕이여, 만일 안식심(眼識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또한 색식심(色識心)이 일어남과 소멸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이와 같은 관을 지어서 여래를 관한다면 응당 청정해질 것입니다.”

이때 그 보영여래의 보식불국토에서 온 보살들은 모두가 일찍이 없었던 바를 얻어, 모두가 찬탄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명쾌하고 미묘합니다. 이 모든 중생들은 능히 여래를 만나서 이와 같이 용왕이 물은 결호의품(決狐疑品)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듣고 나서는 기쁘게 믿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괴이하게 여기거나 놀라지 않고, 나아가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널리 퍼뜨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사(正士)는 응당 혜서(慧署)에 있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이곳에 온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무극(無極)한 상법(像法)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이 그 어떤 마을이나 나라에 이르게 되더라도 그곳은 여래께서 항상 머물며 끝내 멸도하지 않는 곳이며, 바른 법이 훼손되지 않고 도의 교화가 치성하게 번성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법품(法品)으로써 능히 마장(魔場)을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뇩달이 연수에겐 말하였다.

“연수여, 행을 잘 닦은 자로서 이와 같은 보살은 이 벌을 듣고서 어렵지 않게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 정진하고 사람에게 권하며 부지런히 도를 닦되 싫증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응당 행을 잘 닦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연수가 답하였다.

“이와 같으니 용왕이여, 마치 탐행(貪行)이 공한 것처럼 보시행 역시 공한 것이니, 이것에 대하여 동등하게 이해하면 이것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요약하여 말하면 계를 지니지 않는 것과 계를 지니는 것, 성냄을 품는 것과 인내하는 것, 게을러서 퇴전하는 것과 정진하는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과 전일(專一)한 마음이니, 이와 같이 어리석음이 공하고 지혜 역시 공합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평등하게 행하면 이것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용왕이여, 이와 같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공하며, 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 역시 공합니다. 또한 산란한 행이 공하고, 무잡(無雜) 역시 공합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평등하게 행하면, 이것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이와 같은 8만 4천 가지의 공이 공하며, 현성의 바른 해탈 또한 모두가 공합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평등하게 행하면, 이것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만일 밝고 어진 이가 있어서 보살행을 행하는 데 행함도 없고 행하지 않음도 없으며, 또한 행을 보는 것도 없으며, 의혹이 있는 행도 없으며, 또한 염행(念行)도 없고, 또 행을 앎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평등하게 행하면, 이것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열용왕이 연수에게 말하였다.

“어떻습니까? 동자여, 보살은 행하는 바 없는 것을 행합니까?”

답하였다.

“용왕이여, 만일 처음 뜻을 내어서 보살도를 행하고 부처님 자리에 이르도록 행한 공덕은 모두가 처음의 행에 말미암으니, 처음의 행이란 받는 곳이 없는 행, 얻거나 버림이 없는 행, 간격이 없는 행이고, 또한 집착이 없는 행이고 또 진리가 없는 행이며, 제한이 없는 행이고 또한 의혹이 없는 행이며, 또 음욕이 없는 행이고 지은 바가 없는 행이며, 또한 지님이 없는 행이고 살핌이 없는 행이며, 또한 바닥이 없는 행이니,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행함이 없는 행이라고 합니다. 만일 보살이 남[生]이 없는 행으로써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 없고 37품을 얻되 짓는 바가 없으며, 혜(慧)로써 해탈하되 해탈에서 영원히 해탈하며, 2제(際)를 뛰어넘지 않고서 본제(本際)를 환히 깨치되 증득함을 취하지 않으면, 보살이 이렇게 짓는 이것을 일러서 보살이 불기인(不起忍)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행을 일러서 잘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설홍도광현삼매경 제4권

 

축법호 한역

이미령 번역


9. 불기법인품(不起法忍品)

이때 아뇩달이 연수에게 말하였다.

“불기법인(不起法忍)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연수가 답하였다.

“색(色)․통(痛)․상(想)․행(行)․식(識)이 생하지 않음을 이겨내면 이것을 일러서 보살이 불기인(不起忍)을 얻었다고 합니다. 또한 용왕이여, 보살이 얻은 불기법인은 동등하게 중생을 보며 이로써 이 인(忍)을 이루며, 저 중생이 그 생한 바대로 동등하게 대하여 동등하게 중생을 보고 또한 생함이 있지 않으며, 동등하게 중생을 보기에 자연과 같이 동등하게 일체를 봅니다. 마치 그 상(相)대로 또한 동등함과 함께 해도 그 동등함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의 등견인공(等見忍空)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공인가 하면, 안색식(眼色識)․이성식(耳聲識)․비향식(鼻香識)․구미식(口味識)․신갱식(身更識)․법을 받아들이는 의식[心受法識]입니다. 모든 정(情)이 공한 것과 같이, 그 인(忍)도 역시 공합니다. 과거의 인도 공하고 현재의 인 또한 공하며, 이와 같이 인이 공하므로 중생 또한 공합니다. 무엇으로써 공이라고 하는가 하면, 탐욕이 공하다 하며 성냄과 어리석음이 공하다 합니다. 만일 중생이 공하다면 뒤바뀐 견해 또한 공하며, 탐욕과 때[垢]의 일어나고 멸함 또한 공합니다. 이러한 지행(智行)을 짓는 것을 일러서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불기법인에 응하는 자로서 저들 중생은 이미 해탈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곧 이와 같은가 하면, 또한 저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이미 공하다면 나의 때[垢]와 모든 중생은 공하여 있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제어하여 이와 같다면 이 탐욕은 이미 해탈하였고 본래에 있어서 저절로 모든 중생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내로써 탐욕에 대해 자재하여 이런 탐욕의 근본을 해탈하고 고요하고 처함이 없고 영원히 멸하지 않으며, 해탈하거나 해탈하지 않음이 없고 또한 해탈에 도달한 자도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영원히 해탈한다면 곧 그는 이런 까닭에 주처(住處)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또한 용왕이여, 만일 보살의 행이 인(忍)에 응한다면 일체를 구제하고 건져내어도 그 피로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도무지 묶이지 않았으며 본래 스스로 해탈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이 모든 중생은 모두 하나의 탐욕에 집착해 있다. 행하는 자는 집착하지 않고 본래의 법을 벗어나 있지만, 모든 중생은 그 진리가 아닌 망상의 생각에 집착하고 있다. 보살은 이것을 환히 알아서 시종 집착하지 않고 이미 법의 근본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불기법인을 얻은 보살이 비록 아직 부처의 요행처(要行處)를 얻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보살은 범부의 학처(學處)와 불학처(不學處)에 머물지 않으며, 널리 모든 처(處)에 들어가고 익히고 제도하는 것에 피로하지 않으며, 욕망이 있는 곳에 그 음욕의 행이 있지 않고, 성냄이 있는 곳에도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있는 곳에서도 어리석음이 있지 않습니다. 탐욕에 머물지 않음으로써 온갖 탐욕의 경계를 여의었으며, 모든 종성(種姓)을 길들이고 지니며 중생을 교화하여 인도하고, 스스로는 탐욕과 때와 탐착의 더러운 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마의 경계와 부처의 경계에서 나란히 자연의 상(相)이어서 의혹이 없고, 또한 그 법성처(法性處)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루 저 중생계에 나타나며 모든 처의 법과 법 아닌 처를 환히 알며, 행처(行處)를 깨달아 들어가서 혜(慧)로써 행처와 생사처(生死處)를 관하고, 또한 생사 아닌 것으로써 생사에 따라 들어가 머무는 모든 곳마다 덕의 근본을 짓고, 고요함을 지키고 피로하지 않으며 생사를 깨달아 압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가 없으면 현성(賢聖)이 수행을 하여도 해탈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아뇩달이 연수에게 말하였다.

“그대 연수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면, 보살은 닦고 응함으로써 해탈로 향하지 못하고, 그것을 깨닫고 배운다면 이것을 곧 보살이 닦고 상응하여 해탈로 향하는 것[修應向脫]이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가리켜 보살의 수응향탈이라고 합니까?”

연수가 답하였다.

“불퇴전을 얻으면 이것을 일러서 보살의 수응향탈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보살은 생각이 있으면 아직 해탈한 것이 아니라고 깨달아 압니다. 모든 수념(隨念)으로 중생이 평등하기 때문에 정진을 세우고 무념(無念)으로 교화하여, 아(我)가 있어서 아직 해탈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시 용왕이여, 저 보살은 이미 나의 아(我)가 없는데, 모든 집착에 묶인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대비심을 일으켜서 이들을 건네줍니다. 보살은 생사에는 전혀 생사가 없음을 보지만, 모든 생겨난 것들은 그 무생(無生)에 의해 발생하고 중생은 무생(無生)이기에 모두가 동등하다고 봅니다. 저 모든 집착에 묶인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몸을 받아 현생(現生)하나, 영원히 그 생함이 없고 또한 마침도 없습니다. 이 지혜를 가진 보살[慧菩薩]의 수행에 응하여 해탈로 향하나 방편[權]을 취하여서 거듭 환생하여 생사에 머무르며 태어나고, 몸을 받는 곳에 지금 머물러 있으면서 어리석고 우매한 이들을 제도하고 교화하며 지혜로써 인도하여 죄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줍니다. 보살은 공(空)함으로써 적정에 상응하여 해탈로 향하나 방편으로써 환생하여 다시 생사에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대비를 일으킵니다. 보살은 무상(無相)으로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하나 방편을 펼침으로써 거듭 환생하여 생사에 노닙니다. 모든 수념중생(隨念衆生)에게 회향하는 까닭에 대비를 일으킵니다. 보살은 무원(無願)으로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했으나 방편을 취함으로써 거듭 환생하여 생사에 머뭅니다. 모든 수원중생(隨願衆生)을 위하여 대비심을 향하고 일으켜서 무원의 해탈을 행합니다.

용왕이여, 보살은 무소유법을 깨달아 들어가며 중생을 버리지 않고 아(我)․인(人)․명(命)․수(壽)에 들어가지만 도량을 잊지 않고 한량없는 과보를 깨달아 들어가며, 대인(大人)의 32상(相)을 이루고 마침내 적정하고 적막하여, 적정도 적정하지 않음도 없습니다. 또한 그 산란함이 없고, 평등하게 모든 행을 뛰어넘으며, 심(心)ㆍ의(意)ㆍ식(識)이 없어서 본원(本願)을 거스르지 않으며, 보지심(普智心)에 올라서 평등하게 뭇 생각을 여읩니다. 중생의 갖가지 의행(意行)을 방편으로 일깨워서 현성(賢聖)이나 현성이 아닌 자에게 정진을 꾸준히 하여 바르고 성스러운 법을 내세워 방탕한 행이 없이 뜻을 세워서 버리지 않게 합니다. 적정도 적정하지 않음도 평등하게 모두 다 제도하여 염(念)과 불념(不念)이 없습니다. 그 가지런하지 않는 자가 불국토를 장엄하고 정돈하여 이를 세워서 세속을 뛰어넘어 해탈로 향하지만 해탈은 본래 세속을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왕이여, 지혜와 방편[智權]을 지님으로써 현성의 선정이 있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이 닦고 상응하여 해탈로 향한다[修應向脫]고 하는 것입니다.

용왕이여, 비유하면 마치 성문의 행을 닦고 상응하여 해탈로 향한다면 왕환(往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그 도를 이루어서는 능히 앞으로 나아가 위없이 대비(大悲)를 세워서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 또한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하되 또한 동요되지 않고 불퇴전을 이루나 다시 환생합니다. 용왕이여,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하는 것은 의심 없이 이해하여 마땅히 도과(道果)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보살이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하는 것은 모든 성문의 과보를 잊지 않고 보살의 도를 받습니다. 성문이 닦고 응하여 해탈로 향하는 것은 그 제한이 있는 것이지만, 보살은 영원히 그 제한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용왕이여, 두 사람의 필부(疋夫)가 험한 산 정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고자 한다고 할 때, 그 중 한 사람은 힘이 세고 날쌔고 사나우며, 책략이 뛰어나고 기민하며, 지난 세상에서부터 익혀서 시기를 잘 맞추며, 온갖 기이한 일[變]을 환히 알아서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험준한 산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뒤에 홀연히 다시 돌아와서 그 산 정상에 머물렀는데, 그 용감한 기세와 날쌔고 강건하며 용맹스럽고 달통함으로 말미암아 힘껏 몸이 위로 올라가게 되니, 가뿐하고 거침없으며 재빠릅니다. 굳세고 용감하게 이루었으며 그리하여 떨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머무는 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은 의지가 겁약하고 또한 꾀도 낼 줄 몰랐으므로 그 산 위에서 능히 스스로 몸을 던지지 못하였습니다.

용왕이여, 이처럼 그 보살은 공과 무상과 무원에서 모든 법을 관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으며, 이와 같이 관하고 난 뒤에 또다시 능히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써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보지심에 머뭅니다. 그 험준한 산이란 바로 무수(無數)이며, 저 지혜에 두루 통달하여 큰 힘을 나타낸 자는 방편과 지혜[權慧]를 지니고 보살을 행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방편과 지혜를 닦아서 보살행을 하는 자는 생사에 처하지 않고 무위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보살이 보지(普智)의 갑옷을 입은 것이라고 하니, 마치 생사에 들어가서 중생을 건져 내어 보살의 대승행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겁약하고 열등한 자는 그 산 위에 머물면서 능히 돌아오지 못하니, 비유하면 성문이 생사에 들어가지 못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왕이여, 이와 같이 저 보살 가운데 이러한 탈혜요행품(脫慧要行品)을 듣는 자가 있다면, 세존께서는 그러한 무리들이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正眞道]의 뜻을 견고하게 얻게 하시며, 재빨리 부처님의 자리에 다가가게 하시어 삼계를 제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법을 설하였을 때에 모임 중에 있던 보살 7천 명은 불퇴전을 얻었다.


10. 중요법품(衆要法品)

이때 아뇩달용왕에게 감동(感動)이라는 이름의 태자가 있었는데, 그가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저희들은 탐욕 없는 마음으로 스스로 3존(尊)께 귀의하나이다. 이 경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게 하여 주시어 정법을 보호하게 해주십시오. 세존이시여, 그리하여 저희는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어, 이러한 행을 지어서 기꺼이 이것을 통달하여 마음의 근본을 깨우치며, 도의 근본과 모든 법의 근본을 밝게 깨우쳐 스스로 성불최정각(成佛最正覺)을 이루며, 널리 도를 퍼뜨려서 중생을 교화할 것입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그러나 무릇 모든 보살들이 이 청정한 대도법품(大道法品)을 듣고서도 믿고 좋아하지 않으며 받들어 행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보살 부류들은 악마가 쓰인 것이며, 또한 보지심의 행에 빨리 다가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존의 법품요의(法品要義)로부터 태어나는 보살은 저절로 성불을 이루게 되며, 악마와 외도를 항복시키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정각이 모두 이 법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때 현자(賢者) 수보리(須菩提)가 태자 감동에게 말하였다.

“그대 현자의 말과 같이 마음의 근본을 환히 깨우치면 도의 근본과 모든 법의 근본을 환히 다한다[盡]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러한 모든 법의 깨우침을 얻으려면 어떤 마음의 근본을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말하였다.

“그 근본이란 수보리여, 이 근본이라는 것은 마음으로 근본을 삼습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마음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답하였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말하였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무엇으로 인해 생깁니까?”

답하였다.

“염무념(念無念)으로 인해 생깁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현자시여, 어떻게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무념으로부터 일어나 생한다고 하십니까?”

답하였다.

“수보리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본래 염(念)․무념(無念)으로 인해 생겨하지 않으니,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불기(不起)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또한 수보리여, 이것은 어떤 마음의 근본이가 하는 물음에 답할 만한 것이니, 마음의 근본이 되는 것은 그 본래 청정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마음의 근본이라고 하니, 만일 본래 청정하다면 실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는 없습니다.”

말하였다.

“족성자여, 그렇다면 탐욕이 생겨나는 것은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나 항상 생하며, 생하되 어떻게 끊임이 없는 것입니까?”

말하였다.

“수보리시여, 저 탐욕은 생겨나고자 하는 집착에서 이미 생겨났고 생하는 것이니, 마음의 근본에서는 본래 집착하여 생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수보리여, 만일 그 마음의 근본에 그 집착이 있다면 곧 끝내 청정함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마음의 근본은 도무지 집착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탐욕도 또한 청정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족성자여, 어떻게 하면 탐욕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말하였다.

“인연의 생겨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인연이 없으면 발생이 있지 않습니다. 수보리여, 정념(淨念)을 수행하면 탐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또 족성자여, 어떻게 보살은 마땅히 정념을 수행하여야 합니까?”

말하였다.

“수보리여, 보살이 행에 있어서 모든 행을 수행하는 것을 일러서 보살이 정행(淨行)을 닦는다고 합니다. 수보리여, 무릇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위하여 대덕(大德)의 갑옷을 입고 교화하여 열반에 이르며, 중생 모두가 본래부터 열반과 같아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것이 곧 보살이 정념의 행을 닦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보살이란 모든 성문과 연각을 위하여 그들에 상응하여 설법을 하지만, 그 교화하고 있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일러서 보살이 정념의 행을 수행한다고 히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또한 저 보살은 스스로 그 탐욕을 가라앉히고 중생의 탐욕을 고요하게 하니, 이것을 보살이 정행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란 정념에서 닦지 않는 것을 보며, 또한 부정한 것 속에서 깨끗한 것을 수행하는 것을 보니, 이것을 보살이 정행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왕태자 감동에게 말하였다.

“또한 족성자여, 어떤 것을 보살이 깨끗한 것 속에서 깨끗함을 닦지 않는 것을 보며, 그 닦지 않는 것 속에서 정념을 수행하는 것을 본다고 합니까?”

말하였다.

“수보리여, 정념을 닦는다는 것은 이른바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받아들이는 법[所受法]의 견해를 닦는 것과 모든 것을 닦지 않는 법성무이(法性無二)를 일러서 닦는다 하며,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러서 보살의 머묾이라고 하니 좋은 방편에 머무는 것을 일러서 수념(修念)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이런 행을 하는 것을 곧 일러서 정념의 행을 닦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세존께서 태자를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정사(正士) 감동이 말한 바와 같아서 이와 같이 깨끗함을 닦아야 하니, 이것을 일러 보살이 응당 정행을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의 설한 바는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것이니, 저 보살은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곧 대승의 행을 흥기하는 것이며 이 무리들은 보지(普智)가 견고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 태자 감동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이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써 응당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까?”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법에는 아(我)․인(人)․수(壽)가 없으며 색(色)도 없고 상(想)도 없으며 또한 법상(法相)도 없는 것임을 알아서, 법성에서 여래를 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보살은 마땅히 탐욕이 없으면서 스스로 부처께 귀명한다고 한다. 여래법과 같은 그것은 곧 법성이며, 그 법성과 같이 널리 이르는 바가 된다. 이러한 법성의 법을 이루는 것을 얻는다면 곧 모든 법을 아는 것이며, 이것을 보살이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써 스스로 법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법성이란 것은 수습(數習)이 없는 것이니 무수(無數)란 곧 성문이다. 또 보살과 같은 이는 동등하게 무수(無數)를 보며 그 무수에는 수(數)가 있지 않으며 또한 불이(不二)이니, 이것을 보살이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응당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존께서 말씀하실 때에 태자 감동은 유순인(柔順忍)을 얻었고, 모임에 와 있던 색계와 욕계의 모든 하늘과 용과 인간들로서 이 법품(法品)을 들은 2만 명의 무리들은 모두가 위없는 정진도의 뜻을 일으켰다.


11. 수봉배품(受封拜品)

이때 용왕 아뇩달은 궁의 부인과 태자 권속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스스로 3존께 귀의하였으며, 가지고 있던 궁실과 연못들을 모두 다 세존과 비구승에게 받들어 공양하여 정사(精舍)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제 이러한 서원을 내세웠으니, 이 커다란 연못으로부터 네 개의 강이 흘러나와 네 개의 바다를 채우며, 저 세존으로부터 나온 네 강의 흐름들을 만약 용이나 귀신이나 인간이나 날짐승이나 들짐승과 두 발이나 네 발을 지닌 모든 목숨을 가진 중생들이 이 강물을 마신다면, 저 일체가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일으키며, 오랜 동안 일으키지 않은 자라도 이 물을 마신 뒤에는 그 행을 속히 이루어서 빨리 부처님 자리에 머물 것이며, 악마의 무리를 항복시켜 물리치고 모든 외도들을 항복시켜 다스릴 것입니다.”

이때 세존께서 웃으시니, 모든 부처님의 웃음의 법에는 입으로부터 5색 빛이 흘러나오는데, 기운에 넘치고 찬란하게 눈부신 빛이 나며 그 빛줄기는 헤아릴 수 없었다. 시방의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를 환히 비추니 그 밝기는 해와 달보다 뛰어나며, 수미산의 보배구슬이나 모든 하늘과 악마의 궁전 및 제석과 범천의 궁전 등의 모든 하늘의 광명이 모두 무명(無明)을 덮었다. 이때 헤아릴 수 없는 천억의 하늘 무리들 가운데 기쁨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성각(聖覺)께 원을 발하니 그 빛은 아비지옥과 같은 모든 큰 지옥을 꿰뚫어, 그 광명을 입은 자는 모두가 뭇 괴로움을 벗어나서 한결같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었다. 그리고 나서 그 빛은 세존께로 다시 돌아와서 이내 헤아릴 수 없이 돌다가 홀연히 정수리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피기(披耆)[중국 말로는 변사(辯辭)라고 한다.]라고 하는 이름의 현자가 있었는데, 그 광명을 보고 나서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가지런지 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세존을 찬송하며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 색이 한량없어 보는 자가 기뻐하나이다.

사람들 중에 영웅이시며 가장 지극하시고 홀로이신 세존이시여.

뭇 어둠 멸해 없애시고 커다란 광명 내어주시며

위신(威神)을 지니신 이여, 웃는 뜻을 말씀하소서.


백 가지 복이 노래하는 바, 덕의 일곱 원만으로

지광명(智光明)을 얻으시고 혜행(慧行)을 펼치시며

법의 우두머리이신 법왕(法王)께서는 오직 말씀하여 주소서.


세존께서 지금 웃으시는 것은 어떤 상서로운 감응이십니까?

참다운 진리론 빠짐없이 보고서 항상 기꺼이 믿으며

근(根)과 정(定)이 고요해 무리들은 오직 경배합니다.


일체를 교화하시며 적연(寂然)하시니

덕이 무극(無極)을 초월하여 미소를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범성(梵聲)은 청정하고 투명하며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고

메아리 소리는 힘이 있고 맑으니 온갖 악기를 뛰어넘습니다.


뭇 소리들을 고루 갖추시어 빠진 것이 없으시니

웃음을 풀이하여 널리 나타내주소서.

지탈(智脫)의 광명은 지혜바라밀에 응하며,

행은 언제나 맑고 깨끗하며 즐겁고 담연(淡然)하시고,


뭇 행을 방편으로 일깨우고 보지를 구족하셨으니

어질고 성스러운 도왕(導王)이시여, 웃음의 뜻을 설해주소서.

지(智)와 말솜씨에 통달하시고 혜(慧)는 끝없으시며

한량없는 힘을 나타내시어 신족(神足)을 고루 갖추셨으며 

 

열 가지 힘을 이미 갖추시고 널리 감동케 하시는

하늘의 스승이시여, 어찌하여 웃음을 나타내셨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몸의 빛은 깊은 어둠을 비추시니

대천세계의 온갖 광명도 능히 가릴 수 없으며 

 

해와 달과 진주와 불빛을 뛰어넘으셨으며

위성(威聖)의 광명은 동등하게 짝할 이가 없습니다.

공덕을 가득 채우신 것은 바다와 같으시며

보살을 지혜의 광명으로 순화(順化)하시고,

한량없는 혜(慧)를 품으시고서 뭇 의심을 풀어주십니다. 

 

무엇을 일으켜 내시고자 웃음을 웃으셨습니까?

세존께서는 한량없이 삼계를 제도하시며

방편으로 중생을 이끌어 온갖 더러움을 없애 주시며

능히 탐욕의 때를 맑게 하고 남김없이 교화하십니다.


하늘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신 것은 무엇을 일으키시고자 함입니까?

여래께서 말미암는 바는 두루 감동케 하시며

하늘과 용과 온갖 귀신들을 진동시킵니다.  

머리 조아려 왕께 예를 올리니

웃음의 뜻 설하여 뭇 의심 해결해 주소서.


이때 부처님께서 장로 변사(辯辭) 현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아뇩달이 여래를 공양하고자 이런 장엄한 장식을 꾸민 것을 보았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 용왕은 이미 96억의 부처님들에게 덕의 근본을 베풀고 심어 지금의 봉배(封拜)를 받았다. 내가 지난 세상에 정광(定光)불세존 께 기별을 받은 것처럼 그대도 미래의 세상에 부처가 될 것이니, 그 호는 능인(能仁)․여래(如來)․무착(無着)․평등정각(平等正覺)․통행비족(通行備足)․위최중우(爲最衆祐)․무상(無上)․법어(法御)․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라고 할 것이다.

이때 용왕은 그 이름을 비수타래(比守陀來)[래(來)는 거란본에는 미(未)로 되어 있다. 중국 말로는 정의(淨意)라고 한다.]라고 하는 장자(長者)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수기 받는 것을 듣고서 더욱더 원을 내어 ‘나로 하여금 내세(來世)에 그 배서(拜署)를 얻게 할지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범지(梵志)는 바로 정광불이 수기하신 바이다. 이때 정의(淨意) 장자의 아들이 바로 아뇩달이다.

또한 이 용왕은 현겁(賢劫) 가운데 이 연못 속에 있으면서 갖가지 고운 무늬의 뭇 보배로 장식하니, 마치 하늘의 궁실과 같은데, 이것을 장차 모두 현겁의 천불(千佛)께 받들어 올리리니, 이 모든 여래들은 모두 왕의 뜻을 알아서 그 모두를 이끌고 이 청정법품(淸淨法品)을 설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니, 마치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앞의 구루진불(拘樓秦佛)1)․문니(文尼)2)․가섭(迦葉)3)처럼 한결같이 이 사자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 마지막인 누지(樓至)4)여래에도 또한 이 법품요의(法品要義)를 굴릴 것이다. 무열용왕은 마땅히 현겁의 천불을 공양하고 그들로부터 이 법을 듣게 될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법회의 무리들도 모두가 지금과 같을 것이다. 이 아뇩달은 후에 헤아릴 수 없는 세상에서 모든 여래를 받들고 뭇 정각들을 섬길 것이며, 범정행(梵淨行)을 닦고서 언제나


1) 현재현겁의 1천 불 가운데 가장 높은 우두머리이다.

2) 구나함문니불(拘那含文尼佛)로서 구루진불(拘樓秦佛) 다음에 출세한다.

3) 구루함문니불 다음에 출세하는 부처로서 이 부처 다음에 석가모니불이 출세한다.

4) 현겁 1천 불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출세하는 부처이다.

바른 법을 보호하고 보살을 권하여 정진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7백 무수겁이 지난 뒤에 마땅히 부처를 이룰 것이니, 그 이름을 아뇩달여래․무착․평등정각․통행비족․무상법어․천인지사․불세존이라 할 것이다.

현자여, 이와 같이 무열여래가 부처를 이룰 때에 그 국토의 백성들은 모두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전혀 없을 것이며, 영원히 서로 해치거나 서로의 단점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생들은 뜻과 행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현자여, 이와 같이 아뇩달불과 지진여래는 그리하여 마땅히 그 수명이 80억년에 이를 것이며 제자 무리 또한 80억이요, 그 처음 모임이 청정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지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은 무리들의 수는 백천 가지 모임이 될 것이며, 마땅히 통변수결(通辯受決)보살이 있을 것이다. 4천억 명이 모두가 모임에 모여들 것이며 또한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이가 보살행에 뜻을 낼 것이다.

무열여래가 부처가 될 때에 그 국토는 청정하며 감유리(紺琉璃)가 땅이 되며, 하늘에 금분(金分)으로 무늬 놓인 것은 모두 온갖 보배로써 장식되어 있을 것이다. 온갖 밝은 구슬로써 누각과 경행지(經行地)를 만들고, 그 국토의 중생이 만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이내 온갖 진미(珍味)가 나타나서 그것을 먹으면 모두 5통(通)을 얻게 될 것이다. 그 국토에 살고 있는 백성의 생활은 오직 진귀한 보배로써 옷을 입으며, 음식이나 오락은 자유로워 모두가 네 번째의 도술천상(兜述天上)과 같으며, 그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없다. 또한 탐욕이나 음행의 마음이 없고, 그러면서도 모든 중생은 법의 즐거움으로 스스로 기뻐하며, 그 국토의 백성은 탐욕의 때가 전혀 없다. 만일 저 여래가 두루 법을 설할 때에도 피로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통변화로써 널리 교화를 펼치며, 경법(經法)을 널리 설할 때에도 전혀 어려워함이 없으며, 바야흐로 조금만 법을 설하여도 중생은 바로 제도된다. 왜냐하면 저 모든 이들의 뜻이 잘 성숙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여래는 삼천대천세계에서 오직 홀로 법의 교화를 하여 달리 삿된 무리들이 있지 않다. 또한 만일 여래가 대중을 모이게 하고자 할 때면 홀연히 몸에서 빛을 놓는데, 그것이 세계를 모조리 비추면 그 국토의 백성들은 곧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세존성각(世尊聖覺)께서 장차 법의 교화를 펼치시려고 빛을 놓으시는구나’

그리하여 각자 부처님의 성스러운 신족통을 입고서 날아서 모여들어 부처님께 나아가 법을 듣게 될 것이다. 또한 저 여래는 끝내 확실치 않은 것이 없으며, 대성(大聖)의 신통력을 타고서 홀연히 지상으로부터 일곱 길[丈] 높이의 공중으로 날아올라 자연의 사자좌로 나아가셔서 두루 대중들의 모임을 위해서 설법을 하신다. 비유하면 저 해와 달의 궁전이 광명으로 가득 찼을 때를 보는 것과 같다. 중생이 덕을 심는 까닭에 그 국토에 태어나게 되며, 그 국토의 백성들은 세존의 사자좌가 허공에 걸려 있지만 묶인 곳이 없음을 보고서 나아가 모든 법 또한 공하고 집착함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 그러할 때에 모두가 법인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여래는 다만 금강정입(金剛定入)에 들어가는 문만을 설할 뿐이며, 성문이나 연각의 잡된 말은 하지 않는다. 오직 금강정만을 연설하는 이유는 마치 금강은 어떤 곳에 닿더라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인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저 여래께서 설하신 법 또한 금강과 같아서 의심을 품거나 온갖 견해에 집작하여 머무는 것을 뚫고 부순다.

현자여, 이와 같이 아뇩달부처가 만일 멸도를 나타내려 할 때 그 세계에는 지원(持願)이라고 이름하는 존귀한 보살이 있을 것이며, 마땅히 그에게 수기를 준 연후에 멸도를 보일 것이니, 그 부처가 막 멸도에 들면 지원보살이 곧 위없는 최고로 바른 깨달음을 얻고 머지않아서 보불(補佛)에 처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호(號)를 등세(等世)․ 여래․무착․평등정각 이라고 할 것이며, 그 국토의 모든 신통력이 있는 보살과 뛰어난 제자 무리들의 수는 아뇩달과 같을 것이다.”

이때 아뇩달왕의 태자 가운데 당신(當信)[당(當)은 거란본에 상(常)으로 되어 있다.]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공경하는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서 보배로운 밝은 구슬의 교로(交露)로 꾸며진 덮개를 여래께 바치면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누가 장차 지원보살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세존께서 왕태자 당신(當信)의 뜻을 알고 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그때의 지원보살대사로서 장차 보불이 될 자는 지금의 용의 왕자인 당신(當信)이다. 아뇩달여래가 막 멸도할 때에 지원보살은 불좌(佛座)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그 등세(等世)․ 여래․무착․평등정각이 막 부처를 이루려 할 때에 또한 다시 이 법품정요(法品正要)를 굴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막 이 봉배품(封拜品)을 설하셨을 때에 4만의 보살이 무종생인(無從生忍)을 얻었으며, 시방세계에서 모여온 보살․제석․범천․지세(持世)․하늘․용․귀신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봉배법을 들은 뒤에 모두가 기쁨에 넘쳤으며, 환희하는 마음에 뛰어오르며 믿고 즐거워함이 마침내 생겨나, 오체(五體)와 머리를 조아린 뒤에 각자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뇩달왕은 여러 태자와 권속들에 둘러싸인 채 이라만(伊羅蠻) 용상왕(龍象王)에게 칙명을 내렸다.

“여래를 위하여 교로와 진귀한 보배 수레를 만들어라. 그것은 매우 크고 넓어야 하며 특수하고 미묘하기가 더할 나위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땅히 그것을 지진․정각께 바치고서 응당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금세 여래를 위하여 지극히 높고 크고 넓었고 더할 나위 없이 장식된 7보 구슬의 교로수레를 만들었다. 세존과 보살과 모든 제자들이 모두 다 수레에 나아가 앉자 무열용왕과 태자와 권속들은 마음으로 공경심을 품고 손수 그 수레를 끌고서 그곳으로부터 큰 연못으로 나왔으며, 그리하여 여래의 신지(神旨)는 갑자기 영취산으로 날아갔다. 

   

12. 촉루법장품(囑累法藏品)

이때 세존께서 영취산에 도착하신 뒤에 곧 자씨(慈氏)보살과 연수 동자 및 모든 대중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족성자들이여, 아뇩달이 물은 도품(道品)을 널리 거듭 설하고 퍼뜨려서 아직 듣지 못한 자로 하여금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여라.”

자씨와 연수가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여래시여, 자비를 드리우셔서 설해주소서.”

그러자 세존께서 문득 빛을 놓으시니 그 빛의 색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천지가 여섯 번 진동하였고, 찬란하게 빛나는 광명은 시방세계를 환히 비추었다. 그러자 시방의 불국토와 모든 존귀한 보살로서 신통력을 지닌 자는 광명을 따라 날아와서 머리를 숙인 뒤에 각각 나아가 자리를 잡았다. 아사세왕과 그 부인과 채녀와 태자와 권속들과 그 나라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과 장자와 거사와 범지와 학자들도 이 광명을 보았고, 또한 여래께서 무열연못으로부터 돌아오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각각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가 영취산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세존 앞에 다다른 뒤에 숙연하고 더욱더 공경심을 내면서 합장을 하고 절을 올리며 여래의 경복(景福)이 무량한지를 여쭈었다. 그리고 나서 곧 물러나 자리로 돌아와서 부처님을 바라보는 데 싫증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래의 몸의 광명은 무극세계에 두루 이르렀으며, 모든 큰 지옥과 온갖 그윽하고 깊은 곳[窈冥處]에 이르기까지 환히 내비추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 광명을 입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또한 그 광명에서 소리가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능인여래께서 무열연못에서 청정도품의 요법을 널리 설하신 뒤에 이제 영취산으로 돌아와서 거듭 교화를 펼치고자 하신다.”

또한 그 음성이 모든 지옥에 울려 퍼지자 시방의 지옥중생들로서 고통을 받고 있던 자들은 곧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모두가 멀리서 부처님과 모든 대중들의 법회를 보았다. 그리하여 모두다 스스로 한탄하였다.

“오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지옥의 괴로움인 여섯 개의 불에 에워싸이고 태워지고 구워지며, 고통과 비참함과 봉창만단(鋒瘡萬端)과 끓는 가마의 고난을 받고 있으며, 온갖 재앙이 번갈아가면서 몰려들어 이러한 뭇 괴로움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참으로 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여, 여래를 만나서 받들고 부처님의 도의 교화를 받아서 세 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상에 비록 모든 부처님들을 만났지만 법의 교화를 받지 않아서 온갖 고통을 입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여래께서 설하신 법품에 의지하여 모든 재앙과 죄가 문득 가벼워질지어다.”

바로 이때 시방 지옥의 모든 중생들은 수천억만의 위없는 정진도의를 발하게 되었으며, 멀리서 부처님을 뵙고서 한결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일체 고통은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그 근본을 안다면 곧 뒤바뀜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헛되게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 온갖 지옥의 괴로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제 저희 모두가 속히 올바름과 참됨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이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과 연수 동자와 아난에게 이르셨다.

“모든 족성자들이여, 마땅히 이 경의 요설을 부지런히 지니고 외고 독송하며 널리 퍼뜨려라. 널리 배우려는 자를 위하여 이 법을 설하며, 모든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더욱더 마음을 기울여 익히게 하여라. 이것은 혜요행적변구의(慧要行積辯句義)이니, 만일 족성자와 족성녀가 마음을 내어서 기쁘게 이 경을 기꺼이 향한다면, 마땅히 이 무리들을 위하여 이 그윽하고 깊은 모든 뜻을 풀이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도(道)의 원부(元府)이며 뭇 경들이 돌아갈 바이며 모든 부처님의 적요(積要)로서 미묘하고 한량없다. 만일 이 경을 받는 자는 마땅히 자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여 불리거나 줄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모든 족성자들이여, 어진 남자와 여자들이 과거 항하사와 같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공덕을 짓고 갖가지 보시행을 지었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받아 지니고서 하나하나를 정성껏 익히고 부지런히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으며, 이에 다시 보시와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이러한 6도무극을 행하였으며, 수억백천 겁 동안 이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을 받들고 의복과 음식과 와구와 의약품과 향과 꽃과 기악 등 모든 필요한 것을 받들어 올렸으며, 또한 정사와 경행할 땅을 만들어서 이와 같이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모든 세존께서 반열반에 이르신 뒤에 모든 여래를 위하여 7보의 탑을 세우고 하나하나의 모든 여래의 탑을 공양하기를 향과 꽃과 기악과 비단과 일산으로 하고 향기로운 등불을 바치고, 또한 야광명월(夜光明月)의 온갖 보배를 내걸어서 공양하기가 이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많은데, 그 행한 덕을 모두 모아 헤아려보아도, 이 모든 것은 족성 남녀가 이 아뇩달 용왕이 물어서 모든 의혹을 없앤 법품(法品)의 뜻을 한 번 듣고서 얻은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나아가 경권을 받들어 지니고 독송하여 의심이 없는 마음으로 심묘함을 체득하고, 또한 들은 것을 널리 유포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공덕이랴.”

이때 자씨와 연수 동자와 현자 아난은 함께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만일 여래께서 모든 중생에게 대자대비를 내리신다면, 시방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보살을 행하는 자와 하늘과 용과 귀신과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법의 무극청정도품(無極淸淨道品)의 뜻을 널리 설하여 주십시오. 또한 다시 세존이시여, 어떤 족성자나 족성녀가 아뇩달용왕이 물은 의심을 없애는 경을 듣고서 받아 지니거나 기꺼이 익히고 독송하지 않으며, 또한 널리 퍼뜨리고 나타내 보이거나 배우지 않으며, 또한 마음으로 권하고 돕지 않는다면, 이러한 족성남녀들은 온갖 악마와 악마의 관리와 권속들 및 삿된 외도의 부림을 받게 될 것이며, 언제나 번뇌와 의심의 그물에 놓여 있게 됨을 알아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찬탄하셨다.

“그대들의 말이 참으로 장하구나. 일체 중생들이 정진하도록 권하여서 이 법을 익히게 하고 이것에 응하여 행하게 해야 한다.”

여래께서 또다시 말씀하셨다.

“장차 이 경을 자주 사부대중을 위하여 널리 그리고 자세하게 설하여라.”

이때 자씨와 연수보살과 현자 아난이 함께 부처님께 여쭈었다.

“예, 세존이시여, 이제 이 법을 받아 지니고 널리 퍼뜨리겠습니다. 또한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며 어떻게 받들어야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들이여, 이것은 ‘아뇩달용왕소문결제호의청정법룸(阿耨達龍王所問決諸狐疑淸淨法品)’이라고 이름할 것이며 , 또한 ‘홍도광현정의(弘道廣顯定意)’라고 이름하리니, 마땅히 이 경의 요체를 받아 지녀야 한다. 또한 족성자들이여, 이 도품은 모든 법경(法經)의 연해(淵海)를 소중하게 보호한다.”

자씨보살과 연수 동자와 모여든 모든 신통보살과 제석․범천․지세․하늘․용․귀신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여래께서는 이 법을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어떤 마을이나 나라나 현이나 읍에 머물더라도 이 법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친히 그들을 보호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법을 듣는 자가 삿된 무리들의 부림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또한 저희는 마땅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그것을 널리 퍼뜨릴 것이며, 항상하여서 단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자씨보살과 연수 동자와 보살대중들을 찬탄하면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장하구나. 족성자들이여, 그대들이 말한 권하고 즐기게 함은 장차 보살행을 배울 모든 이에게 매우 명쾌함이 이와 같구나.”